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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

실종자들의 소재는 찾았지만 생존자는 없었다.

원인은 알고 있긴 하나 그렇다고 글러트니에 대한 것을 외부인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글러트니가 누구이며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니까.

로커스처럼 이식자가 습격해 와 페일의 정보상이 초토화되면 극심한 손해였다.

결국 베르덴이 선택한 건 침묵이었다.

다만 이대로 의뢰를 실패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과 마주 앉은 페일이 턱을 쓸며 물었다.

"...시간이 더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베르덴이 지난 며칠간 알아낸 걸 말했다.

물론 각색이 들어갔다. 글러트니에 대한 정보는 일체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진실에 거짓을 첨가해 적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마르테스의 시장에게도 했던 방법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거짓으로 보수를 취하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기반은 진실. 그리고 그 끝 또한 진실이다. 그것을 페일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 거짓일 뿐이다.

페일이 고민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최소 수백 명이 실종되고 일부가 몰살당했다니, 상당히 조직적이군요. 아마 범인은 인간 또는 지능이 높은 이형종으로 보이는데... 확실히 며칠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애셔 님의 말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의뢰주는 어디까지나 로든마이어 백작입니다. 그가 의뢰를 철회한다면 이번 일은 그대로 끝나는 겁니다. 설령 범인을 잡는다고 해도 원래 약속했던 보수는 받지 못하게 되겠죠."

"설득은 맡기지."

베르덴의 한마디.

잠시 눈을 크게 뜬 페일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의뢰를 주선하는 것이 제 일이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고맙군. 그럼 다음으로 이것도 부탁하지."

베르덴이 돈이 든 봉투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쪽지에는 플라스크나 약초나 미스릴 가루 등 갖가지 재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번처럼 희귀한 재료는 거의 없군요.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러한 실험에 조예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뭐, 살다 보니."

실험의 목적은 묻지 않았다. 그것이 고객에 대한 예의니까.

페일이 쪽지를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내일까지 준비해 놓겠습니다."

* * *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베르덴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주 방문하는 카페에 들렀다. 3층 테라스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거리를 바라봤다.

삭막한 도시라고는 해도 회색의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끔씩은 새벽 공기처럼 어두우면서도 상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마력이 베르덴의 주변을 감쌌다.

위험한 건 아니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마법 물품 노이즈(Noise)의 효과였다.

베르덴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의 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정장 차림의 사내에게 물었다.

"내가 미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

"하하, 미행이라뇨. 애셔 님께서 일부러 제가 찾아오게끔 하셔 놓고."

얼굴도, 몸짓도, 목소리도, 마력도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베르덴은 이미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애셔 님."

정장의 사내, 리스너가 슬쩍 뒤를 보며 베르덴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72화 붉은 조각 (3)

베르덴은 리스너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알고 있었다. 아니, 유도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그와 마주친 글러트니는 테온을 제외하고 전부 죽었고 테온은 로크에게 끌려갔다. 거기다 글러트니에게서 얻은 붉은 조각을 멋대로 가져오기까지 했으니.

방주에서 베르덴을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리스너가 신문을 고이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뜨거운 커피를 음미했다. 그러곤 베르덴에게 물었다.

"애셔 님,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만, 저희 방주에 합류할 생각이십니까?"

"아니."

베르덴이 즉답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더 이상 글러트니와 관계되는 건 멈추십시오."

"이유는?"

"아시다시피 놈들은 시련과는 별개의 위험입니다. 애셔 님이 박사를 처리한 것, 이식자를 처리한 것, 샐러맨더의 심장을 훔친 것 등 지금까진 전부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죠. 다행히 그 예측 불가능한 변수 탓에 글러트니는 아직 애셔 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멈춰야 한다.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베르덴은 글러트니의 표적이 될 테니까.

"애셔 님이 특별한 마법사라는 건 인정합니다. 소울 트리 토벌에 이어 다수의 이식자까지 단신으로 처리하는 그 실력. 위계를 넘어선 힘이 있으니, 확실히 마법사로서 자신감을 가질 만하죠.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아직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감당 못 할 적을 만드는 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몸을 사리란 뜻인가?"

"의미론적으론 그렇습니다. 용기와 만용은 다르니까요."

용기와 만용은 다르다.

베르덴이 이리스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덴에게 그러한 조언 따위는 필요 없었다.

"거절하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굳이 글러트니와 적대하는가.

베르덴에겐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첫째, 거슬린다.

박사, 샐러맨더의 심장, 실종자. 한 번이나 두 번이면 모를까 벌써 우연으로 세 번째다. 그렇다는 건 네 번이나 다섯 번 이상 마주칠 가능성도 높다는 뜻.

당장 공국을 떠날 생각이 없는 지금.

또다시 예상 못 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건 여러모로 거슬린다. 그리고 우연히 글러트니 쪽에서 베르덴의 존재를 눈치채고 습격하는 것도 말이다.

놈들을 피해 도망치듯 공국을 떠나는 것은 당연히 논외다.

그리고 둘째, 불쾌하다.

글러트니에게 희생당하여 물건 쌓듯 쌓여 있던 무수한 시체. 그건 그저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베르덴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고, 지금과는 다른 절망적인 미래를 보여 주기도 했다.

보헤미른 마탑주와 마법사들과 같은, 인간을 단순한 재료로써 취급하는 그 시선.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릴 이유는 차고 넘쳤다.

마지막으로 셋째, 글러트니는 강하다.

확실히 이식자들은 전에 보지 못한 전투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룬의 반지가 없었더라면 꽤나 고전했을 정도.

그 사실만은 마음에 들었다.

4위계 상위에 올라 5위계를 앞에 두었다.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다수든 소수든 상대하는 건 당장엔 큰 경험치가 되지 못했다. 지금 베르덴에겐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는 치열함이 필요했다.

글러트니가 위험하다면 그것 그대로 이용할 뿐.

베르덴은 자신의 마력과 마법 그리고 지식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른 이러한 이유를 하나하나 리스너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뭐, 그러니까 굳이 요약하자면.'

"마음에 안 들어서. 그거면 이유가 되나?"

"마음에 안 들어서라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리스너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다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감정적이시군요."

"감정이 없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이성은 중요하다.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보다 합리적이고 필요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니.

하지만 베르덴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감정이었다.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속은 언제나 분노, 증오심 등으로 차갑게 들끓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

그렇기에 베르덴은 더할 나위 없이 인간다웠다.

그런 베르덴의 선택을 리스너는 존중했다.

방주는 강요하지 않으며 언제나 주체자의 선택을 중요시하니까.

"알겠습니다. 애셔 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더 이상 만류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글러트니를 찾아낼 생각이십니까?"

"그 전에 방주에서 파악한 글러트니의 정보를 먼저 듣고 싶은데."

리스너는 잠시 고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리비안트 공국 건에 대해서만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해."

다른 나라에 대한 건 필요 없다.

지금 베르덴이 있는 곳은 어디까지나 리비안트 공국이니까.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아무래도 글러트니의 이빨 중 하나가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공국의 상층부에."

상층부?

"귀족하고 관련이 있다는 건가?"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러트니가 점점 움직임을 드러내는 것을 봤을 때, 조만간 큰일을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주시하고는 있지만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귀족에 숨어든 이빨을 찾아내지 않는 한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그 전조 증상이라는 건가.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로크가 데려간 테온, 놈은 어떻게 됐지?"

"심문 중에 있습니다만, 글러트니의 조각에 감염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이러한 특이 케이스가 있었거든요. 그때와 거의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글러트니 내부에서 입지가 약했던 터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크게 없어 보입니다. 박사의 밑에서 움직였던 건 큰 건이지만 박사는 이미 죽었으니...."

정보가 없으면 됐다.

어차피 부가적인 것일 뿐이니.

이어 붉은 조각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하지만 방주에서도 아직 그 용도를 밝혀내지 못한 모양이다. 굳이 말하자면 글러트니의 특징은 섭식과도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 것 외에는 말이다.

베르덴이 예상한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글러트니는 방주에 대해 어디까지 알지?"

방주의 시련.

그건 규모에 따라 세간의 이목을 끈다.

만약 글러트니가 시련에 대해 알고 있다면, 때에 따라 방주의 후보를 특정하는 것도 가능할 터.

소울 트리를 토벌한 베르덴과 레이라를 의심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한 물음에 리스너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시련이 탄생한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데다가, 시련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더해서 방주의 활동 범위는 글러트니를 아득히 넘죠. 숨어 다니기 급급한 글러트니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미미합니다."

"저번에 보니 이식자가 로크에 대해 알고 있던데."

"아, 로크 님은 예외입니다. 시련보다는 글러트니나 범죄자와 같은 악을 토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분이시라, 정보가 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죠. 그 때문에 죽을 뻔하신 적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정한 정의를 꺾은 적은 없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아주 훌륭한 분이시죠."

로크를 칭찬하는 리스너의 목소리엔 존경이 담겨 있었다.

뭐,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글러트니에서 베르덴을 특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소 조건은 맞췄군.'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박사의 징표를 꺼내 리스너에게 건넸다.

붉은 이빨을 본 리스너에게서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건... 글러트니의 징표군요. 송곳니도 어금니도 아닌 앞니. 설마 박사에게서 빼앗으신 겁니까?"

"박사가 숨겨 둔 지하실에서 발견했지."

"왜 진즉에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묻지도 않은 것에 대답하는 것.

그건 대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쓸 용도가 생겼다.

"듣기로는 그 이빨이 일종의 신분증이라고 들었는데."

"일단은 그렇습니다. 무언가에 사용되기보다는 글러트니 그 자체의 상징성을 띠고 있지요. 저는 총 일곱 개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끼로 적당하겠군."

글러트니는 박사의 소재를 모른다.

그러니까 테온을 잡아 박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 한 거겠지. 그렇기에 이 징표는 놈들이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가 될 수 있다.

리스너가 작게 감탄했다.

"미끼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군요. 아니, 분명 통할 겁니다. 글러트니에게 박사는 귀중한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글러트니가 미끼를 물어도 글러트니의 이빨이 그림자에 숨어 있는다면 끝입니다. 낌새를 느끼는 순간 꼬리를 잘라 버릴 테니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

베르덴이 방주에게 원하는 건 자신의 계획을 실현 가능케 하는 '인력'뿐이다.

일시적으로 방주의 주도권을 달라는 말에 리스너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사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베르덴이 공국 내에서 글러트니를 몰아넣은 지분은 매우 매우 높았으니까. 그는 방주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자격은 충분했다.

'그리고 저희에게도 무척이나 좋은 일이니.'

글러트니를 처리함과 더불어,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 올릴 수 있는 기회.

당장 방주에 영입하는 건 무리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꾸준히 노력을 들여 그와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베르덴은 방주가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인재였으니까.

리스너 본인은 그렇게 판단했고, 그렇기에 베르덴의 요구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다른 분들을 설득해 보죠.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 *

페일에게 요청한 재료들을 받은 베르덴.

그는 책상 위에 재료들을 나열한 뒤, 붉은 조각을 그 중심에 두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사르륵.

상급 마석의 가루를 바닥에 뿌려 마법진의 기초를 구성했다. 그리고 그 위에 복잡한 구성의 마법진을 차례로 그리기 시작했다.

세 개의 마법진.

문자와 기하 등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엮였고, 그 교차점을 독자적으로 수정하여 하나로 연동시켰다.

이어 마력을 불어 넣자 마법진들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소비한 시간은 3시간.

집중력을 상당히 소모한 터라 일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베르덴이 깊게 숨을 뱉으며 피로를 털어 내고는, 마법진을 면밀하게 검사했다.

"다행히 오차가 일어난 부분은 없군."

그럼 다음 차례.

'안드라의 피'라는 붉은 식물을 으깨어 뽑아낸 즙을 마력수에 넣은 뒤 가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수가 전부 증발하고 붉은 즙이 아닌 푸른 액체만이 남았다.

안드라의 피.

이것은 접촉한 물질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고체가 액체에 가깝게 되고, 금속에 묻으면 부식되며, 피부에 묻으면 마치 맹독처럼 녹아 버린다.

이렇듯 위험하긴 하나, 연금술에서 종종 쓰는 재료 중 하나다. 안정된 물질은 재료로 쓰긴 어렵지만 불안정한 재료는 배합하기 쉬운 법이니.

베르덴은 이 불안정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푸른 액체에 붉은 조각을 담았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집게로 붉은 조각을 꺼내자 전과 달리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그걸 세 개의 마법진 중 첫 번째에 올려놨다.

분리의 마법진(The Divide).

결합의 마법진(The Combination).

안정의 마법진(The Stability).

연금술 전용으로 만들어진 고난이도의 마법진.

붉은 조각에 있던, 마력과 동화되어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서서히 분리되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다른 마석을 중심에 올리자 그 기운이 새로운 마석에 결합했다.

반발이 심했으나 마법진을 이용해 강제로 억눌렀다.

크게 진동하던 마석이 점차 안정을 찾았다.

그 결과 듣도 보도 못한, 검은색 색채를 띠고 있는 마석이 만들어졌다.

"...성공했군."

혹시 몰라 기다려 봤으나 이미 그 자체로 안정되어 있었다.

붉은 조각에서 뽑아낸 이질적인 기운이 마석에 있는 마력에 잘 동화된 모양.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꺼냈다.

마석에 담긴 마력을 증폭해 그 주인을 찾는 인공 아티팩트. 거리가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공국 내에서라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조심스레 마석을 나침반 안에 집어넣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자침.

이내 그 끝이 북쪽을 가리켰다.

* * *

성벽에 둘러싸인 넓은 부지, 그 중심에 있는 호화로운 저택.

전문가가 설계하고 관리하는 정원은 화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것만으로 주인의 고귀한 품위를 엿볼 수 있었다.

그에 더해서 각종 마법 물품과 마법진 그리고 사병으로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었다.

그런 저택 안에서 한 부자가 기다란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련된 손놀림으로 귀족답게 천천히 식사를 했다.

아버지가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들에게 말했다.

"대행사의 날짜가 잡혔다."

"올해는 많이 늦었군요."

"공왕 전하께서 원래는 좀 더 일찍 개최할 생각이셨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셨지. 너도 들어 본 적이 있을 거다, 로리엔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다.

지금 귀족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제였으니까.

"분명... 소울 트리라고 했었나요?"

"듣기로는 특수 개체에 버금갈 정도였다는데, 그런 괴물을 차기 미스릴 등급 모험가인 핏빛검과 어떤 마법사가 토벌했다고 하더구나. 분명 어느 정도 과장이 된 것이겠지."

특수 개체는 나라를 뒤흔드는 강대한 존재.

그보다 못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고작 둘이서 해결했다는 건 특수 개체보다 훨씬 못한 적을 상대했다는 것이 맞을 터.

아들이 가지런한 건치를 하얗게 빛내며 미소 지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피해가 없다니 다행이군요. 무의미한 희생을 당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이지."

둘은 식사를 이어 나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들은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자르며 조각조각 그 맛을 음미했다.

그의 옆에는 벌써 몇 개나 되는 접시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아무리 대식가라도 비정상적인 식사량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개의치 않았다.

많이 먹는 게 대수인가. 사람답지 않은 것이 대수인가.

뭐든 상관없다.

아들로서 건강하기만 한다면.

아들로서 남아 주기만 한다면.

아버지는 뭐든 상관없었다.

73화 초대 (1)

"...고장 난 건가?"

베르덴이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바라봤다.

분명 처음에는 정확히 한 방향을 가리키더니, 자침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멈췄다 움직이기를 반복하며 빙글빙글 돌기까지 한다.

'구조적으로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베르덴의 마력을 넣은 마석으로 교환해 보니 정상 작동이 되었다.

"마석이 문제군."

하긴 이 검은 마석은 기존의 마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니,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면 이질적인 기운은 가진 존재는 하나가 아니다. 공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글러트니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기운을 품고 있을 테니까.

즉, 이질적인 기운을 가진 놈이 많기에, 어느 하나로 특정할 수 없다는 뜻.

이건 실험이 필요했다.

시작부터 계획이 순조롭게 나아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나침반은 결국 부가적인 도구니까. 어디까지나 메인은 박사의 징표를 미끼로 이용하는 것이다.

수백 명을 희생해서 만든 붉은 조각을 도중에 강탈당했으니 이후에 어떠한 반응을 보일 터.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야말로 놈들을 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이제 베르덴이 할 일은 글러트니가 다시 움직이는 걸 기다리는 것뿐.

그러던 중, 페일에게서 연락이 왔다.

의뢰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떤 일인지는 가 보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글러트니인가? 아니, 설마 벌써 움직일 리는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페일의 화살촉에 방문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페일의 말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대? 로든마이어 백작이?"

"그렇습니다. 백작의 가신이 저에게 직접 전달했으니 뭔가의 착오는 아닐 겁니다."

갑자기 저택으로 초대했다니.

혹시 저번 실종 조사 의뢰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보수를 깎으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용건은 페일에게 전달해도 충분했을 터.

굳이 베르덴을 저택으로 불러들일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초대라는 단어를 쓴 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언제까지 가면 되지?"

"정확히 기한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적당히 빨리 오라고 하더군요. 이런 적은 없었던 터라 의뢰를 요청하는 건 아닐 텐데.... 한 가지 가능성이 높은 거면 그거군요, 공국의 대행사."

"...?"

"소울 트리에 대한 소식은 이미 공국 수뇌부에게도 전해졌을 겁니다. 국가 단위의 위험을 배제한 셈이니, 애셔 님을 대행사에 초청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죠. 어쩌면 공왕이 직접 애셔 님을 치하할지도 모르고요."

페일의 말을 들어 보면 납득은 간다.

그런 이유라면 베르덴을 부를 이유가 있으니까.

"왜 굳이 지금이지?"

"대행사를 보다 부흥할 생각인 것이겠죠. 애셔 님의 이름은 귀족계에서도 주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리비안트 공왕은... 여러모로 자유롭습니다. 호쾌하다고 할까요. 만나 보시면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직 정해진 건 없다. 단순한 추측일 뿐.

정확한 내용에 대한 건 로든마이어 백작을 직접 만나 보면 될 것이다.

* * *

베르덴이 로든마이어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이 베르덴의 신원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였다. 안내인은 저번과 달리 정원이 아니라 직접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저택의 응접실에서 베르덴과 로든마이어 백작이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군, 애셔."

"오랜만입니다, 백작 각하."

로든마이어 백작이 베르덴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기도가 달라졌군. 꽤나 바쁘게 살았나 보지?"

"나름대로는 그렇습니다."

"그렇겠지, 로리엔에서 활약한 걸 보면 말이야. 내가 예상한 것보다 실력을 더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더군."

백작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서로 인사도 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애셔, 너의 이름이 공국에서 거론되었다."

"대행사 때문입니까?"

"페일이 귀띔해 줬나? 정보상 아니랄까 봐 눈치는 빠르군. 그래, 맞다. 소울 트리를 토벌한 마법사로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지.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애셔란 이름은 꽤나 유명해졌다. 당연히 귀족들의 귀에도, 공왕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로든마이어 백작이 베르덴과 시선을 마주했다.

"공국의 대행사는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날이다. 백작 이상의 귀족들이 공왕 전하께 영지에 대한 보고를 올린 뒤, 나흘간 연회를 열지. 당연히 여러모로 볼 것도 먹을 것도 많다. 더해서 수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바뀌면서 경제 또한 활발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연회의 사흘과 나흘째에 있는 시합이다.

"시합... 말입니까?"

"귀족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실력자들을 데려와서 벌이는 일종의 대련이지. 노래니 연극이니 뭐니 해도 최대 볼거리는 바로 싸움 구경이 아니겠나?"

새로운 강자들이 저마다 쌓아 올린 실력을 서로 맞부딪치는 광경은 예나 지금이나 뜨거운 관심을 끈다.

하지만 매해마다 같은 사람이 나오면 재미가 없는 법.

그래서 대행사의 시합에는 참가한 적이 없는 사람들만 나가도록 되어 있다. 애셔는 그 자격 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그러니까 그 시합에 저를 참가시키겠단 겁니까? 백작 각하의 이름으로?"

"방금 말했다시피 너는 지금 인기인이다. 공국 상층부의 관심이 쏠려 있지. 그 마법사는 누굴까, 어떤 인간일까 하는 궁금증 말이야. 그리고 수뇌부에서 너의 이름이 나왔다는 건 이미 대행사에 부를 생각이 다분하다는 거다. 그러니 누가 선수 치기 전에 내가 잡아야 하지 않겠나?"

베르덴이 뭐라 말하려고 하자, 백작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거절하겠다는 말은 마라. 공국의 대행사는 단순한 동네잔치가 아니야."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거절하고 싶군요."

백작이 압박했지만 베르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와서 누군가에게 행동을 강제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괜히 마탑을 부숴 버리고 나온 게 아니다.

그런 베르덴의 반항심 어린 눈빛에 백작이 인상을 쓰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순순히 말을 들을 생각은 없나 보군. 하긴 그 실력에 길드에 들어가지 않은 걸 보면, 뭐.... 하지만 아직 이야기 안 끝났다. 시합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말이야. 혹시 혹한의 반지라고 들어 봤나?"

"혹한의 반지라면...."

액세서리의 형태를 한 아티팩트 중 하나다.

소문에 의하면 마법사가 보유하고 있는 원소 속성 그 자체를 변질시키는 아티팩트로,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얼려 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설마 시합 보상으로 아티팩트를 준다고?'

그럴 리가.

베르덴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혹한의 반지는 유일하다.

그리고 그 소유자가 버젓이 살아 있다. 설령 죽었다고 해도 혹한의 반지가 공국까지 흘러들어 올 일은 전혀 없다.

이런 식으로 상품으로 내걸릴 일도 없고.

그렇다는 건.

"모조품을 말하는 겁니까?"

"단순히 형태만을 본뜬 것이 아닌, 일부 효과까지 모방한 모조품이지. 올해 시합에서 1위를 한 사람에게 하사하신다더군. 그리고 내가 볼 때 너는 꽤 유력한 우승 후보고. 거기다 수도에 가면 공왕 전하께서 소울 트리 토벌에 대한 치하를 해 주실 터. 이 정도라면 구미가 당길 텐데?"

혹한의 반지라.

모조품이라고 해도 흥미가 가긴 한다. 원본이 가진 힘의 일 할만 재현할 수 있다고 해도 어지간한 마법 물품보단 유용할 테니.

베르덴과 같은 원소 마법사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보수 하나가 빠졌다.

"제가 시합에서 이기면 백작 각하는 뭘 받습니까?"

"...이것저것."

"그럼 로든마이어 백작 각하에게도 따로 보수를 받아야겠군요."

로든마이어 백작이 혀를 찼다.

"이래서 눈치 빠른 족속들은... 하나 정당하지. 좋다. 그에 대한 보수도 지불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무조건 시합에서 1위를 해야 하고, 보수는 후불로 지불한다. 이것까지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후불이라.

백작의 신용이 확실하니 못 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상황적으로도 괜찮아.'

리스너의 말에 의하면 글러트니의 이빨은 귀족. 어쩌면 공국의 대행사에 참가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를 틈타 다른 장소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단, 보수도 챙기면서 대행사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 훨씬 나을 터.

베르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됐군. 계약서는 이따가 쓰도록 하지. 그리고 공국 수도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라. 방을 하나 비워 줄 테니 거길 쓰도록."

그렇게 베르덴은 한동안 로든마이어 백작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 * *

소울 트리의 습격 당시, 로리엔에서 빠져나온 기사는 곧장 인근의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도시의 시장과 그 도시의 모험가 길드장에게 로리엔 시장의 인장이 찍혀 있는 보고서를 전달했다.

당연히 큰 소란이 일었고 곧장 지원을 해야 한다와 다른 도시들과 함께 협력해서 전력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두 가지 의견으로 갈렸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전자는 자칫 지원대마저 몰살당할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후자 또한 지원이 늦으면 로리엔이 멸망할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소울 트리가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뭐? 잡았다고? 진짜로?"

"예, 그렇다고 합니다."

아까까지 불타오르듯 했던 회의장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긴장이 풀리며 일부 사람들은 전서를 받고도 로리엔에 사람을 보내 사실을 확인했다.

그 결과 핏빛검 레이라와 정체불명의 마법사 둘이서 토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화제는 여러 사람의 입소문을 타고 삽시간에 퍼졌고, 이윽고 수도까지 닿았다. 후에 로리엔 시장이 소울 트리에 대한 보고서를 수도에 전달하며 진의 또한 명확해졌다.

공왕과 귀족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알현실의 왕좌에 앉은 공왕.

그가 자신의 앞에, 양옆으로 도열한 귀족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특수 개체에 버금갔다는 이형종이 나타났는데 이렇게나 적은 피해라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프하르딘 백작이 답했다.

공왕이 자신 앞에 놓인 종이 뭉치를 톡톡 두들겼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가 거짓이라고?"

"어떻게 감히 공왕 전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거짓은 아닐 거라 사료됩니다. 다만 어떠한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겠지요."

"근거는?"

"예, 그 소울 트리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니 저마다 위험도가 다르다고 합니다. 옛 기록에만 의존해서, 정확한 위험도를 측정하는 건 여러모로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말이지요."

백작의 말에 몇몇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나서서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분들 중에, 핏빛검에 대해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작년 공국의 대행사에서 개최한 시합에서 압도적인 1위를 쟁취한 모험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실력은 이미 미스릴 등급에 다다랐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의견에 대해서 대부분이 동의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주변은 침묵으로 동조했다.

한 시합에 검을 세 번 이상 휘두른 적이 없는 고속의 검술가. 붉은 검기. 귀족들이 데려온 자들로는 일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녀를 가신 또는 가문의 일원으로 삼기 위해 물밑에서 다수의 귀족이 움직이기도 했었다. 물론 전부 거절당했지만.

"그런데 보고서를 읽어 보면 핏빛검이 아닌, 출신이 불분명한 애셔라는 마법사가 토벌을 주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 마법사가 그녀에 준하는 혹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일 텐데, 솔직히 말해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공왕이 입술을 매만지다 다른 귀족들에게 물었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알아보니 애셔란 마법사는 나름 경력이 있었습니다. 파이테 영지에선 전직 금 등급 모험가인 도적들을 해치우고, 비르온 영지에서 백금 등급 모험가 도살자와 함께 통곡의 기사를 토벌했으며, 그 후에는 페일이라는 정보상 밑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로든마이어 백작의 보좌관인 베일론 자작을 구출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최근 그레이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해도, 그보다 몇 배는 더 경력을 쌓는다 해도 핏빛검에 비할 바가 전혀 못 되지요."

"그건 그렇지만...."

"거기다 4위계 이상에다가 네 속성이 넘는 원소 마법을 구사한다던데, 그런 재능을 가진 마법사가 갑자기 영웅처럼 나타나 로리엔을 구하다니요.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설도 아니고.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프하르딘 백작이 그렇게 말하자 귀족들이 술렁였다.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가드란 후작'이 입을 열었다.

"공왕 전하, 그렇다면 그 마법사를 대행사에 불러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에 하나 소울 트리를 토벌한 것이 사실이라면 치하해야 마땅할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핏빛검은 작년에 대행사에 참가한 터라 올해는 참가할 수 없으니, 모험가 길드를 통해 상을 내리시면 좋을 듯싶습니다."

그야말로 형식적인 대화.

어느새 모두가 애셔란 이름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건 공왕의 뜻이었다.

대행사를 보다 부흥하려면 그에 걸맞은 화제가 필요한 법이니. 말주변이 좋은 백작 하나를 바람잡이로 삼아 이렇게 분위기를 이끌면 간단하다.

저 귀족들의 눈을 봐라.

마법사에 대해 짙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눈빛이다.

공왕이 물었다.

"모두 후작의 말에 동의하는가?"

"예, 전하!"

알현실에 있는 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반응으로 보아 작년에 이어 즐거운 대행사가 될 조짐이 보인다.

"오랜만의 만장일치군. 가드란 후작."

"부르셨나이까."

"비행정을 기동하라."

공국에 큰 도움을 준 자를 달랑 편지 하나로 부를 수는 없는 법. 기왕 이렇게 된 것, 크게 일을 벌일 생각이다.

그것이 공왕의 노림수였다.

그렇게 베르덴이 로든마이어 백작의 저택에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공국의 국기가 그려진 거대한 배 한 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공국의 수도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베르덴은 로든마이어 백작의 저택에 머물렀다.

지극히 고급스럽고 취향을 타는 식사. 베르덴은 귀족이 아님에도 백작과 겸상할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기에 식사 때마다 백작과 함께했다.

서로 입맛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기에 불만은커녕 꽤나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베르덴은 남은 시간 동안 뭘 할지 고민했다.

여기까지 와서 페일에게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건 다소 번거로웠다.

그래서 베르덴은 기사단장 발칸을 찾아갔다.

"우리와 훈련을 같이 하겠다고?"

"안 됩니까?"

"아니, 뭐, 안 될 건 없지만...."

마법사가 기사의 훈련을 따라올 수 있을까.

어지간하면 무리다. 체력을 기를 시간에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힘들게 달리는 것보단 비행을 쓰는 것이 마법사니까.

발칸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에 한 명이 더해져 봤자 별문제는 없었으니. 뭣보다 도중에 열외할 게 뻔하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리 특출난 마법사라고 해도 결국 마법사니까.

그러나 발칸의 예상과는 달랐다.

베르덴은 기사보다 속도는 떨어져도 체력 훈련을 끝까지 따라왔다.

거기다 훈련용 무기 중에서 창을 하나 꺼내 들더니 연습 대련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마법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체술로 말이다.

마치 창술이 아닌 봉술을 다루는 듯해 기술적으로는 부족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감각이 뛰어났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기사조차도 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수십 합을 나누고 나서야 겨우 제압할 수 있을 정도.

마법사라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반응속도와 육체였다.

발칸이 옆에 있는 클라크에게 말했다.

"요즘 마법사는 저렇게 싸우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마법사만 이상한 겁니다."

마법진, 원소 마법, 체술, 부여 마법 등 갖가지 수준급 이상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 발칸은 한때 그 재능을 질투했으나 지금에 와선 아니었다.

저건 아예 별개의 천재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그렇게 몇 주간의 시간이 흘렀다.

보다 체술에 능숙해진 베르덴은 그걸 그대로 전투 방식에 접목했다. 스태프를 들고 실전에 가까운 근접전을 반복하며 기사들과 대련을 벌였고, 이윽고 로드론 기사단의 베테랑 기사와도 보기 좋게 접전을 벌일 수 있게 될 정도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마법 훈련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자기 개발에 미친 놈.

같이 훈련을 받은 기사들은 하나같이 베르덴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하얀 구름 사이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리고 이내 고도를 낮추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공국의 국기를 단 한 척의 배.

리비안트 공국 왕실이 보유하고 있는 다섯 개의 비행정 중 하나.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로든마이어 백작이 작게 미소 지었다.

"크게 왔군."

74화 초대 (2)

공국의 비행정이 로든마이어 저택과 일정 거리를 두고 착륙했다.

백작은 외부인인 베르덴을 저택으로 보낸 다음, 단장인 발칸을 포함해 로드론 기사단에게 직접 마중을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베일론 자작이 백작에게 물었다.

"과연 누가 왔을까요?"

"모르지. 하지만 평범한 귀족은 아닐 거다."

양옆으로 도열한 백작가의 사람들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야, 상대가 공국의 왕실이니까. 그것도 공왕의 명령으로 무려 비행정을 끌고 온!

그만큼 이번 사안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뜻이 된다.

그럴진대 저 안에 누가 타 있는지는 몰라도, 감히 느슨하게 대할 인물은 절대 아닐 것이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나 거리가 있는데도 미약하게 진동이 느껴질 정도면 군마 중에서도 상위의 품종. 이윽고 병사들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문을 열었다.

앞서 통과한 기사단장 발칸.

그 뒤로는 완전무장을 한 새로운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 갑옷.

왼쪽 가슴에 새겨진 방패의 표식.

공왕 직속의 바스티오 기사단.

근위 기사단이 내부에서 왕족을 지킨다면, 이 기사단은 외부에서 활동하는 왕족과 고위 귀족의 호위를 담당한다.

즉, 공국에 존재하는 여러 기사단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무력 집단이라는 것이다.

놀랍기는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선두에 서 있는 한 기사의 모습에 백작조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등에 매고 있는 회색의 방패. 진귀한 금속인 오리칼큠과 흑요석을 섞어 만든 공국의 비보 중 하나.

저걸 공왕에게 하사받은 인물은 그가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바스티오 기사단의 단장이자 공국 최강의 방패.

레이크 바실리온.

그가 칠흑의 말에서 내리고는 투구를 벗었다.

짧게 자른 자주색의 머리칼과 짙은 녹안. 그리고 오른쪽 턱에 칼에 베인 흉터가 있는 중년의 사내. 레이크가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성큼 다가갔다.

"오랜만이군, 로든마이어 백작."

레이크 단장의 계급은 백작과 동급이다.

물론 위치가 위치이고 무력이 무력이니만큼 어지간한 백작은 편히 말조차 놓기 어렵다. 그러나 로든마이어 백작은 그 예외에 속했다.

"매년 열리는 대행사 때마다 보는데, 오랜만이라는 말은 과하군."

"하하, 성격은 여전하군. 그래도 백작가에 직접 온 건 거의 십 년 만인데, 거 기분 좋게 인사 한번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어쩌겠나, 그게 내 성격인 것을. 그보다 서 있지 말고 들어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용건은 내가 아니라 저택 안에 있는 마법사에게 있을 테니."

"허, 멀리서 왔는데 먼저 식사라도 권하는 게 주인으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묻고 싶은데."

"흥. 식사는 무슨."

비행선 안에는 웬만한 고급 여관보다도 나은 설비가 갖춰져 있다.

공국에서 엄선한 요리사가 최고급의 식재료를 다루며 매 끼니마다 만찬을 차리니 배를 곯기는커녕 이곳에 오는 동안 잠깐의 허기조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가하게 식사나 할 정도로 시간이 많은 게 아닐 텐데?"

"음, 그건 그렇지. 알다시피 공왕 전하께서 성격이 꽤 급하시잖나? 전하께서는 그 '애셔'라는 마법사를 데리고 수도로 복귀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있는 로든마이어 백작, 자네까지."

리비안트 공왕은 뛰어난 지배자다.

전쟁 중에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해, 엉망이었던 나라를 수십 년 만에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으니. 다만 참을성이 많이 부족한 게 흠이었다.

마차로 데려와도 될 것을, 중요한 전략 병기 중 하나인 비행정까지 동원할 정도로 말이다.

"...전하도 여전하시군."

"빠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점심 전에는 출발할 예정이야. 촉박하긴 하다만 로든마이어 백작가에서 식사 대접을 받을 시간은 충분하지."

생각했던 것보다 애셔에 대한 공왕의 호기심이 큰 모양.

오히려 로든마이어 백작은 좋았다.

그런 마법사를 자신의 이름으로 대행사의 시합에 내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사실 백작은 대행사의 시합에서 애셔가 승리를 쟁취할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금색 눈동자를 빛냈다.

"좋다. 신경 써서 대접해 주지."

* * *

로든마이어 백작은 자신의 정원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넓고 깨끗한 정원은 보는 이에 따라 황량하다고 볼 수 있긴 했지만 대신 초원에 있는 듯한 상쾌함을 느끼게 한다.

거기다 지형 특성상 언제나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겨울이 늦게 오는 지역이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리 춥지 않았다. 심기에 거슬리는 벌레 또한 없다.

호화로운 식사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는 뜻이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르덴이 식사 초대를 받고 바깥으로 나갔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초저녁. 백작가의 사용인을 따라가니, 정원 중심에는 둥그런 식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로든마이어 백작과 처음 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

그러던 중 옆쪽에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그쪽으로 향하니 은빛 갑옷을 입고 고급스런 스태프를 등에 찬 한 여성이 베르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따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처음 보는 마법산데.'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식탁 근처에 다가서자 로든마이어 백작이 손짓했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세 명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자 백작이 입을 열었다.

"먼저 소개부터 하지. 이쪽은 바스티오 기사단의 단장, 레이크 바실리온. 공왕 전하의 명으로 너를 데리러 온 사람이다. 무려 비행정을 타고 말이야. 일단 자네를 수도로 데려가기 전에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고 하는군. 겸해서 식사도 하고."

'공왕 직속의 기사단장이라, 거물이군.'

여태껏 만난 기사와는 다른 위압감이 느껴진다.

베르덴이 고개를 숙였다.

"애셔라고 합니다."

"레이크 바실리온일세. 듣긴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젊군."

베르덴과 레이크가 서로 눈을 마주했다.

서로를 강자라고 인식한 것인지,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가볍게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럼 자기 소개는 끝났으니 식사부터 하도록 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로든마이어 백작이 작은 종을 울리자 준비된 식사가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애피타이저로는 자른 토마토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올리고 싱싱한 야채와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이어 브로콜리 수프와 갓 만든 빵이 나왔다.

그리고 셔벗으로 입안에 남은 맛을 깔끔하게 지우자, 숙성시킨 샤또브리앙 안심 부위가 메인 요리로 차려졌다.

음료로는 무려 60년을 숙성시킨 레드와인 도르네티가 준비되었다.

이 한 끼의 가치는 무려 수천만 엘크.

그러나 이중에서 그 가치에 지레 겁먹은 사람은 없었다.

두 명은 귀족이고, 한 명은 한때 마탑에 종사하던 일원이었으니.

훌륭한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로 블랙 커피를 음미하던 레이크가 베르덴을 슬쩍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는군.'

육체는 갈수록 정점을 지나 약해지기 마련이지만, 마법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저 애셔라는 사내, 이건 젊은 게 아니라 그냥 어린 게 아닌가.

저 나이에 소울 트리를 토벌했다는 위업을 세운 건 동화나 역사서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다.

하물며 아카데미에서 천재 중 천재 소리를 들으며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면 모를까.

소리 소문도 없이 갑자기 공국에 나타나 여러 사건을 해결한 마법사라니. 아무리 레이크의 머리가 유연하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교육을 받았던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귀족에 버금가는 식사 예절만 봐도 알 수 있다. 태생은 몰라도 결코 평민 수준의 집안은 아닐 것이다. 레이크는 그렇게 단정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할 수 없이 베르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에게 용건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레이크 단장님."

"음? 아, 미안하군. 핏빛검과 함께 소울 트리를 토벌했다고 하길래 대화라도 나눠 볼까 했는데... 솔직히 믿기가 어렵군."

"제 나이 때문에 그런 겁니까?"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지. 그러니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걸로는 안 되겠어."

레이크가 진지한 눈으로 베르덴을 주시했다.

"보고된 바로는 화염, 바람, 땅, 거기다 고위 속성인 전격 계열 등 여러 속성을 다룬다고 하던데."

그가 언급한 건 정확히 베르덴이 소울 트리 토벌에서 사용한 계열들이다.

원소 계열이라면 전 속성을 다룰 수 있지만, 굳이 베르덴이 나서서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단순히 다양한 속성을 다루기만 하는 건 의미가 없네. 내가 그리고 공왕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자네가 그러한 괴물을 죽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냐, 없냐에 대한 증명이지."

공국 최강의 방패로서 정체가 불분명한 마법사의 힘을 시험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라.

이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레이크가 이곳에 직접 찾아온 이유였다.

물론 서로 목숨을 걸고 치고받으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확실한 증명을 통해 이 마법사의 전력을 파악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공국의 대행사를 흥행시킬 정도가 되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공국이 품에 안을 가치가 있는지, 하다못해 굳이 적대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는지 말이다.

"증명을 하지 못하면 자네의 실력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게 공국의 대답일세."

으름장을 내놓은 레이크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이제껏 수많은 마법을 봐 왔고 방패 하나로 막아 냈다. 마법사가 행하는 마법의 시전 속도나 규모만 봐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베르덴이 물었다.

"마법으로 증명해야 합니까?"

"뭐든지 상관없지만 여기서 마법을 쓰면 정원이 크게 손상되겠지. 로든마이어 백작이 화를 내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군. 그러니까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나? 그리고 원한다면 내가 직접 마법의 표적이 되어 주지."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증명하죠."

"...음?"

대답에 의문을 느낀 레이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베르덴의 몸에서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굳이 마법을 보여 줄 필요는 없지.'

전신의 마력회로가 활성화된다.

넘쳐흐른 마력이 바깥으로 나가며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마치 화염처럼 베르덴을 감싼 마력이 활활 타올랐고, 물리력을 가진 마력이 주변을 억눌렀다.

쩌적.

찻잔에 금이 간 걸 본 레이크가 눈을 부릅떴다.

'마력이 물리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라고?'

3위계 이상만 되어도 마력을 유형화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마력 자체만으로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마법사는 소수다. 방대한 마력뿐만 아니라, 그 마력을 집약할 수 있는 섬세한 마력 조작 능력까지 갖춰야 하니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베르덴은 달랐다.

저렇게나 많은 마력을 방출하면서도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당연한 듯이.

'이 정도라면.'

마력량만 따졌을 때, 공국의 왕실 마법사들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소울 트리의 토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 납득할 정도다.

"호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로든마이어 백작이 감탄했다.

레이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마력만으로 그가 세운 기준점을 넘어 버린 셈이니. 마법이 어느 정도 인지 궁금하긴 하나 증명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베르덴의 생각은 달랐다.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가 청명하게 빛나는 눈으로 레이크를 바라봤다.

"...?"

그제서야 레이크는 짐작했다.

베르덴의 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마력 위압.

바다와 같은 마력이 레이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75화 초대 (3)

기, 마력, 신성력.

이 세 가지에서 파생되는 위압감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저 존재감으로 상대의 정신을 억누르고 육체마저 짓누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이 나약한 자를 제압하기엔 충분하나, 수준에 오른 강자를 위압하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다.

레이크는 그런 강자 중 하나로서, 지금까지 숱한 강자를 상대해 왔다.

그중엔 마도에 이른 마도사도, 손끝에서 피워 낸 기운만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양단하는 검사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지 못해 절망하는 벽. 그러한 벽을 넘어선 자들은 하나같이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나, 결국 승리한 건 레이크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냐, 이 감각은.'

마치 바다와 같다.

전신을 휩싸는 마력의 압박감은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다. 그런데 마력 위압을 통해, 한순간 느껴졌던 깊이가 너무도 이상했다.

레이크조차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라니.

'...그릇이 다르다.'

어쩌면 그가 만난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잠재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레이크라고 해도 실수를 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애셔란 마법사는, 적어도 세상에 널리고 널린 천재와는 다른 존재임이 분명했다.

숨을 삼킨 레이크가 옅게 웃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증명이군.'

뭘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공왕 전하께서 품에 안으려고 하실지, 우호적인 관계만을 맺으실지, 아니면 싹이 자라기 전에 잘라 버리려 하실지는 잘 모르겠으나 생각지도 못한 수확인 건 분명했다.

이걸로 레이크가 할 일은 끝났다.

공왕 전하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으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증명은 여기까지다.

레이크가 서서히 기를 끌어올렸다.

고요한 마력의 바다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그를 위압하던 마력이 사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 *

성질이 다른 두 개의 힘이 서로 충돌했다.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며 이내 식탁과 찻잔이 박살 나거나, 정원의 잔디가 흩어지는 등 물리적인 영향이 가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레이크를 주시했다.

'마력 위압이 전혀 안 통하는군.'

휴양 도시에서 리스너를 위압했을 때보다 수준이 한 단계 높이 올랐는데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위압하고 있는 마력을 역으로 밀어냈다.

이게 공왕 직속 기사단의 단장인가.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표정이 약간 흔들리는 게 다라니.

역시 웬만큼 격차가 벌어지지 않은 이상, 단순히 마력량으로 찍어 누르는 건 마력 낭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나저나.

"이걸로 증명은 된 겁니까?"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 마법까지 쓸 필요는 없어진 것 같다.

베르덴과 레이크가 동시에 마력과 기를 줄이자 중압감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던 그때, 공중에서 날아온 누군가가 정원에 난입했다.

"단장님! 괜찮으세요?!"

저택을 나섰을 때, 베르덴을 노려보던, 은빛 갑옷을 입은 여자 마법사.

그녀가 심상찮은 힘의 충돌을 느끼고 급하게 비행을 써서 날아온 모양이다. 이어 뒤따라온 바스티오의 기사들과 로드론의 기사들이 각자가 모시는 단장과 백작의 안위를 살폈다.

그중 바스티오 기사들은 무기에 손을 올려 두고 있었는데, 명확하게 베르덴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레이크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니 진정해라, 카이네.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

"...알겠습니다."

카이네라 불린 여성 마법사가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동시에 기사들도 각자 무기에서 손을 떼었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네, 로든마이어 백작. 그리고 애셔. 그래도 다행히 필요한 대화는 거의 다 한 것 같군. 그럼 둘 다 언제쯤 수도로 출발하고 싶나? 가능하면 오늘 밤 늦게나 내일 일찍이면 좋겠는데."

그러자 백작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내일 출발하자는 무언의 시선이 전해졌다.

"...내일로 하죠."

"좋네. 그럼 내일 출발하는 걸로 하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식사 시간은 끝이 났다. 레이크와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무표정한 얼굴로 기사들을 지나치고는 저택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든마이어 백작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식탁은 박살 났고, 방금까지 쥐고 있던 찻잔은 손잡이만 남아 있었다. 베르덴과 레이크의 힘이 서로 충돌한 결과였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백작이 손잡이를 집어 던졌고, 레이크가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미안하군.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쳤어. 추후에 배상을...."

"쟤는 내가 잡았다."

"...응?"

"이번 대행사의 시합은 내가 1등이다."

이미 레이크의 말은 백작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 로든마이어 백작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레이크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저렇게 좋은 건가. 하긴 저 정도면 핏빛검 같은 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1위는 따 놓은 당상일 테니."

"저 남자가 정말로 소울 트리를 토벌한 게 맞을까요? 아무리 봐도 믿기지가 않는데요."

옆에 있던 카이네가 물었다.

레이크는 이해가 된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좀 어려 보이긴 하지?"

"전부 다요."

액면 그대로의 나이라면 한창 마법을 체득하고는 서서히 실전에 적용하고 있어야 할 시긴데. 벌써 그 단계를 아득히 넘어서,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괴물을 토벌하는 경지라니.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그래서 보다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고요."

카이네가 주먹을 쥐었다.

명령만 내린다면 당장 베르덴과 마법전을 벌이기라도 할 것처럼. 부하들을 둘러본 레이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대였다.

"이해는 하지만 안 된다, 우리는 저 마법사를 무사히 데리고 오라는 전하의 명을 받았으니. 어떠한 마찰도 허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검증은 충분히 마쳤다."

"네?"

"그러니 괜한 걱정 말고 내일 당장 떠날 채비를 하라. 혹시나 부족한 물자 있으면 백작가에 말해 미리미리 챙기고. 이만 해산."

단장의 명령에 기사들은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베르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로서 용납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레이크는 생각했다.

카이네는 강하다.

땅과 물. 두 속성을 5위계까지 깨우쳤으니. 측정된 한계 위계에 다다랐지만 아직 성장할 여지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여러 실전과 훈련을 통해 경험을 쌓았기에, 같은 수준의 원소 마법사보다도 훨씬 강했다.

'하지만 애셔를 이길 수 있을까?'

그가 알기로, 애셔의 위계는 4위계.

무려 1위계나 차이가 났지만 섣불리 누가 승리할지 단정할 수 없었다. 그가 통상적인 4위계 마법사를 아득히 벗어난 건 확실하니까.

거기다 변수라는 게 존재하기에, 상상만으로는 승패를 쉬이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레이크가 가진 직감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끝 모를 잠재력을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는데도 강자의 반열에 오른 애셔에게 말이다. 카이네가 이걸 듣는다면 분명 자신이 이긴다고 화를 냈겠지.

'부하들이 이렇게 믿지 못하는데 과연 귀족들은 어떨까.'

안 봐도 뻔하다.

애셔는 주목받을 것이고 의심받을 것이다.

호기심을 느낀 귀족들이 그를 시험하려 들겠지. 어리고 잘생긴 외모에 속아 그 안에 숨겨진 깊이를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분명 대행사에 큰 소란이 일리라.

'전하께서 좋아하시겠군.'

* * *

다음 날 아침.

떠날 채비를 마친 베르덴은 로든마이어 백작 그리고 로드론 기사들과 함께 레이크를 따라 저택을 떠났다.

베르덴은 바스티오 기사단의 말을 얻어 탔는데, 상위 품종인 데다가 특수한 훈련까지 마친 군마의 속도는 비행에 버금갈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정이 정박되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엄청난 크기군.'

수백 명은 거뜬히 실을 정도.

곳곳에 새겨진 방위 마법진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비행정의 중심에서는 거대한 마력 반응이 느껴진다.

분명 동력 역할을 하는 마석이겠지.

마탑도 비행정을 보유하고 있지만 선착장은 따로 있었기에 말단인 베르덴은 가까이 갈 기회조차 없었다.

평생 동안 하늘에 떠 있는 비행정만 봐 왔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눈을 빛내고 있는 베르덴에게 레이크가 다가갔다.

"이 배의 이름은 '리시드(Recede)'라고 하네. 공국이 보유하고 있는 비행정 중 가장 빠르기에 붙여진 이름이지."

"그래서 충격을 보호하는 마법진이 많은 거군요."

"허, 마법진도 볼 줄 아나? 이거 참 다재다능한 마법사군. 보아하니 비행정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원한다면 안내해 주지. 옆에 있는 카이네가."

"...네? 저요?"

옆에 있던 카이네가 눈을 깜빡였다.

"단장인 내가 할까?"

"그건... 아니죠."

"그럼 됐군. 출발하면 베르덴을 친절히 안내해 주게. 제군들, 전부 승선하라!"

승무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비행정에 싣고 사람들이 갑판 위로 올라갔다. 베르덴과 로든마이어 백작을 비롯한 전원이 탑승하자 집채만 한 크기의 마석이 기동했다.

엔진 역할을 하는 마법진에 마력이 흘러들어 가면서 리시드가 서서히 부상했다.

후우웅.

어느새 구름 위로 올라갔다. 이어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구름을 빠르게 지나쳐 갔으나 마법진 덕분에 비행정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거센 바람은커녕 어떤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로든마이어 백작이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러고는 벽 한가운데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리시드를 타는 건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군. 아마 내가 이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반대편에 있었지. 자네는 엉망인 몰골로 검을 잡은 채 벽에 멍하니 기대어 있었고. 왜, 갑자기 그때가 그립나?"

"하, 그립긴 무슨. 리시드의 태반이 박살 난 터라, 하마터면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칠 뻔했는데. 솔직히 말해 생각조차도 하기 싫군."

"그때 리시드에 타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지.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고. 뭐, 그렇다 해도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지만."

로든마이어 백작과 레이크가 서로 대화를 나눴다.

맥락으로 보아 22년 전 리비안트 공국이 독립했을 때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베르덴은 물론이고 카이네조차 잘 모르는 과거였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레이크가 고개를 뒤로 향했다.

"나는 백작과 잠시 얘기 좀 더 나누도록 하지. 카이네?"

"...네, 단장님."

레이크와 백작이 떠나자, 카이네와 베르덴 둘이 갑판 구석에 남았다.

어색한 기류 속에서 카이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76화 수도 리드론

비행정에서 보낸 시간은 평온했다.

이따금씩 의심이 깃든 시선을 보내던, 카이네라는 마법사가 내부를 안내해 준 뒤로는 로든마이어 저택에서 보내던 시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식사는 요리사들이 알아서 차려 주는 데다가, 비행정 내부에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니까.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덕분인지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 벽의 일부가 파손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수복되었다.

이 비행정 자체가 하나의 마법 물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후우."

간단히 몸을 푼 베르덴이 옆으로 시선을 향했다.

두 기사단이 훈련용 무기를 들고 차례대로 서로 간단한 대련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육체적으로 보나 기술적으로 보나 바스티오 기사단 쪽이 로드론 기사단보다 평균적으로 한 단계 이상 앞섰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방어에 치중된 검술이다. 내 무기술로는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하겠어.'

물론 마법을 사용하면 다르겠지만.

베르덴은 대련을 유심히 관찰했다.

단순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배울 게 하나둘씩 보였다. 이런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바스티오의 기사와 시선을 마주쳤다.

적대감... 은 아니고 의심을 하는 듯한,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날이 바짝 서 있군.'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닌, 출신이 불분명한 마법사인 베르덴. 설령 로리엔에서 온 보고가 사실이라 한들 제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게 사람이니까.

'어쩌면 진실이라고 믿기에 그러는 걸지도.'

무엇보다 이들은 기사였으니.

베르덴이 공국에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더욱 경계심을 세우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뭐, 애초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괜한 걱정이지만.

베르덴은 시선을 무시하고 자기 개발에 치중했다.

거기다 기존에 하던 훈련에 더해, 레이크 단장에게 직접 허락을 받아 느긋하게 비행정의 내부를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성은 대충 이 정도인가."

마력으로 그려 낸 비행정의 마법진.

수십 개의 마법진이 서로 연결되고 연계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동력실의 것은 볼 수 없었으나 대략적으로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 시간을 투자한 결과였다.

언제 다시 이런 전략용 비행정에 탑승할 수 있을지 몰랐기에, 연구자로서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로든마이어 백작의 제안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당장 어딘가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지.'

지식과 경험은 삶의 연속이다.

끊임없이 쌓고 또 쌓다 보면 언젠가 하늘에 닿는 법. 베르덴은 그러한 이치를 이미 깨우친 지 오래였다.

이내 날이 저물고 베르덴이 침대에 누워 잠을 정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승무원이 문을 두들겼다.

"애셔 님, 곧 수도 리드론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벌써 도착인가.

공국에서 가장 빠른 비행정이라고 자신할 만하군.

베르덴이 갑판으로 올라갔다.

서서히 고도가 내려가며 구름을 빠져나오자, 저 멀리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도시가 빛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레이크가 물었다.

"어떤가, 공국의 수도는. 아름답지 않나?"

"다른 도시들과는 확연하게 다르군요."

베르덴은 단 한 번도 한 나라의 수도에 방문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다른 도시나 영지와의 차이를 보다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옛날에 막 독립했을 때는 저것의 반조차 되지 않았네.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활기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지. 이렇게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워."

레이크의 시선이 드높은 왕성으로 향했다.

그의 두 눈에는 존경과 숭상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곧 착륙장에 도착할 걸세. 정박 직전에는 보호용 마법진을 꺼 두니, 넘어지지 않도록 충격에 대비하게."

"알겠습니다."

* * *

착륙장의 경비는 삼엄했다.

바스티오 기사단과 로드론 기사단 그리고 승무원도 예외는 없이, 철저한 신분 조사를 마치고서야 비행정에서 내릴 수 있었다.

실었던 물자와 군마까지도 남김없이 검수를 진행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레이크 단장님."

"수고하게."

"특이 사항 없습니다. 수도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로든마이어 백작 각하."

"음."

각자 경비를 거치고 출구로 나왔다.

그 앞에는 검은색 말이 이끄는 호화로운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마차를 타고 이동할 걸세. 수도에 있는 백작의 별장으로 갈 예정인데, 착륙장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좀 있으니 화장실이 급하면 미리 갔다 오는 게 좋을 거야."

"저는 괜찮습니다."

"백작, 자네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묻지 마라."

"그럼 됐군. 바로 출발하면 되겠어."

레이크와 베르덴이 마차에 탑승하자 마부가 고삐를 내리쳤다.

흑마(黑馬)가 발굽을 지면에 내리찍자 바깥의 풍경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그런 마차의 주위를 바스티오 기사단은 무리 없이 호위하고 있었다.

베르덴이 마차의 벽면을 톡톡 두들겼다.

'이렇게나 빠른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니. 비행정과 마찬가지로 마차 자체가 하나의 매직 아이템인가.'

부품 하나하나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그게 전부 합쳐진 이 마차의 값은 수십억은 가볍게 호가하겠지.

베르덴이 진지한 눈으로 마차를 관찰하고 있자, 레이크가 말했다.

"마법사답게 매직 아이템에도 관심이 많은가 보군. 이 마차는 아티슨 마탑에 주문 제작 한 걸로, 공국에도 보유하고 있는 귀족은 거의 없네.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다고 해도 주문을 받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상품을 보다 비싸게 만드는 건 희귀성.

물건을 한정된 숫자만 만들어 경매를 통해 더욱 가치를 올리는 것이야말로 아티슨 마탑이 마케팅을 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천문학적으로 비싸긴 했으나 그 이상으로 성능이 뛰어나며,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명성이 올라갈 정도라 구매자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아티슨이 내놓은 상품은 하나같이 부유한 권력자들의 입맛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말했다.

"지금 충분히 만끽하는 게 좋을 거다. 공국의 귀족 중에도 이 마차를 타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공왕 전하의 성격이 아니었다면 구경조차 하지 못했겠지."

"성격...?"

"하하, 그렇긴 하지. 몰래 하는 말이지만 공왕 전하께서는 성격이 급하… 크흠. 참을성이 좀 부족한 편이시지, 호기심도 강하시고. 그걸 모르는 귀족은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내지는 말고 일단은 혼자만 알아 두게."

참을성이 없다라.

베르덴은 그 충고를 머리 한편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리드론의 성문에 도착했다.

멀리서 마차와 바스티오 기사단의 문장을 확인한 병사들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대로 수도에 입성하고부터 마차의 속도를 최대한 낮추었다.

베르덴이 창문 너머로 수도의 풍경을 바라봤다.

공국의 대행사가 가까워지는 탓인지, 물건을 옮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관광을 하러 온 여행객들로 거리가 북적거렸다.

거리 곳곳에는 노점상이 열려, 시민들이 저마다 먹거리를 하나씩 들고 다니고 있었다.

'이게 수도인가.'

코헨과는 정반대로 활기가 넘친다.

휴양도시 브리엔테와 비슷한 분위기였으나 인구수는 이곳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거리를 구경하고 있자 마차는 상점가로 들어섰다.

무기와 방어구부터 시작해 마법 물품, 연금술, 액세서리 등 갖은 종류의 상점이 가득했다. 베르덴으로선 꽤나 관심이 가는 거리였다.

그때, 로든마이어 백작이 말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녁 전까지면 상관없다. 레이크, 잠시 마차를 멈춰도 괜찮겠지?"

"이 마차를 반환하기까지 시간은 넉넉하니까...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거리로 내려선 베르덴이 슬쩍 백작에게 시선을 향했다.

'오늘따라 상당히 호의적이군.'

며칠간 봐 온, 백작의 무심한 성격과는 딴판이다.

아마 대행사의 시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베르덴은 백작에게 있어 상품을 안겨 줄 귀한 인재니까. 이해득실을 따졌을 때, 적당히 호의를 베푸는 것이 얻을 게 많다는 판단일 터.

'뭐, 나야 좋은 일이지.'

베르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례차례 상점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 * *

무기 중에 베르덴이 원하는 물건은 없었다.

애초에 도검류는 사용할 일이 없는 데다가, 스태프 쪽에는 좋은 게 있긴 했지만 가성비가 매우 떨어졌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블루 미스릴 스태프와 비교했을 때, 가격은 3배 가까이 비싸면서 성능은 티끌만큼 높은 정도.

이런 걸 돈 주고 사는 건 호구 잡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액세서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방어구에선 수확이 있었다.

포레스트 와이번의 가죽으로 만든 부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발에 딱 맞는 데다가 신축성까지 좋다. 준수한 물리 저항력과 속성 저항력은 덤이다.

마법 물품은 아니라 마법적인 효과는 없었으나, 움직임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다.

가격은 6,700만 엘크.

그리 비싸지도 않고 싸지도 않은 적당한 액수였다. 곧바로 카드를 긁어 지불했다.

그렇게 볼일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타 목적지로 향했다.

수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깔끔한 저택.

로든마이어 백작이 거주하고 있는 자택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방에 들어갔다.

그러곤 공국의 대행사에 대해 생각했다.

'9일 뒤에 대행사가 열린다고 했으니, 연회는 12일 후인가.'

귀족들이 공왕에게 3일간 보고를 하고, 그다음 날 바로 연회가 개최된다.

베르덴이 참가하는 건 연회의 셋째 날부터. 대행사의 시합이 시작되는 날, 화제의 인물인 자신을 극적으로 등장시킬 생각인 것 같다.

기본적인 예절은 마탑에서 배워 대충 알긴 하지만, 약간의 긴장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직접 한 국가의 왕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고, 연회 자체에 참석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최근 들어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군.'

그만큼 마탑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는 뜻인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염력으로 문을 열자, 경직된 얼굴을 한 백작가의 하인이 나타났다.

"배, 배, 백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자, 잘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과하게 떨린다.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지만, 뭘 물어봐도 하인은 모른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뭔가 위험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할 수 없이 베르덴은 하인의 뒤를 따라 3층 구석에 있는 방 앞에 섰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인이 재빠르게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베르덴이 이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제야 왔나? 기다리다 돌아가시겠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과 허리춤에 검 한 자루를 찬 채 그 곁을 지키고 있는 호위. 두 명 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베르덴을 불렀다던 로든마이어 백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적대적인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베르덴이 조심히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긴, 이 나라의 주인이지."

주인?

그 순간, 베르덴의 뇌리에 레이크의 충고가 스쳤다.

리비안트 공왕 특(特), 참을성이 없다.

77화 리비안트 공왕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저 노인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을 터였다. 왕을 사칭하는 건 어느 나라나 중죄 중의 중죄에 속하니까. 수도 리드론에선 더더욱.

베르덴이 무릎을 꿇으려 몸을 숙이자 권위적인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그만. 겉치레에 불과한 예의는 필요 없으니 어서 앉도록."

"...예."

근처에 있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 공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공왕이 턱을 쓸며 베르덴을 유심히 살펴봤다.

"분명 애셔라고 했었지. 혹시 마탑 출신인가?"

아카데미와 마탑.

마법사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은 이 두 곳이 전부다.

아카데미는 주로 성년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이다.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그 재능과 본인의 의향에 따라 진로를 정하게 된다.

마르테스에서 만난 이리스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에 반해 마탑은 나이에 관계없이 재능만 있다면 들어갈 수 있다.

실질적인 전문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장소로, 제각기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이 득실거린다. 그만큼 인재가 많다는 뜻이다.

거기서 두각을 드러내면 마탑주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내 이론을 훔쳐 간 마탑주의 세 번째 제자, 루커드 매니악스처럼.'

순간 격해진 감정을 차분히 억누르고, 공왕의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베르덴이 마탑 출신이란 걸 알 리가 없을 테니 그냥 찔러본 것일 터.

역천을 이룬 베르덴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다면 진즉에 이름을 날렸을 테니까. 소거법으로 남은 건 마탑뿐이다.

베르덴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흠, 아카데미 출신도 아닐 테고. 이거 참 궁금해지는군."

공왕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깃들었다.

"자네가 공국에서 해낸 일들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업적은 아니지. 물론 전부 자네 혼자 이룬 것은 아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데 아카데미도 마탑 출신도 아니다라...."

말을 멈추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소리 없이 침대를 톡톡 두들기던 손가락이 멈춰 섰다.

"혹시 출신이 어디인가?"

가벼운 질문이었으나 분위기는 급변했다.

실재하는 힘이 아닌 공왕의 존재 자체가 발산하는 위세. 베르덴은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한 나라의 왕.'

단순히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와는 다르다.

이건 수백만 명을 이끄는 지배자로서의 품격이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억지로 무릎 꿇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 굴종하게 만드는 존재감.

심약한 사람은 공왕 앞에서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아니었다.

상식에 맞는,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긴 하겠지만 마탑주도 왕도 황제도, 그 어떤 존재이든 간에 감히 그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왕의 위세에 당당히 맞서며 공왕에게 답했다.

"저는 줄곧 산속에서 스승님과 함께 지내 왔습니다."

고아 출신으로 스승님에게 주워져 제자로서, 자식으로서 자라 왔다는 이야기. 베르덴이 만들어 낸 거짓된 과거였다.

이게 타인이 가장 납득할 만한 배경이었으니까. 독학했다고 하면 믿기는커녕 더욱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낼 테니.

그러자 공왕이 물었다.

"스승이라...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간혹 스승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반'이라고 부르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반 스승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게 본명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스승님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리셨습니다."

공왕이 호위를 맡고 있는 노인, 엔드릭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재야에 숨은 마법사라. 그럴듯한 이야기야.'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베르덴의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었지만 신빙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었다. 실제로 고명한 스승에게 교육을 받고 세상으로 나오는 제자들이 있었으니.

제대로 된 이름이나 이명이라도 알면 좋겠지만 제자조차 들은 적이 없다니 어떻게 알아볼 수도 없고.

물론 캐내 봤자 나오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그야 베르덴도 모르니까.

공왕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자네 같은 마법사를 길렀으니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겠어."

그것을 끝으로 공왕은 집요하게 베르덴의 출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애초에 심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어떤 인물인지 정말로 궁금했기에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다만 대화를 나누면서 그 호기심이 더 깊어진 게 문제긴 하지만.

공왕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음, 시간이 별로 없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 말입니까?"

그럼 지금까지 한 대화는 뭐였지?

"바스티오의 단장에게 이미 들었겠지만, 비행정까지 움직이며 자네를 수도로 불러들인 이유는 이번 시합의 흥행과 소울 트리 토벌에 대한 치하를 위해서다."

물론 공왕 본인의 호기심이 가장 컸다.

며칠 더 기다릴 수 있는 참을성이 부족했으니까. 그 덕에 자신의 오랜 친우이자 호위인 엔드릭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서 이런 성격을 고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이 리드론엔 꽤나 많은 귀족이 모인 상태다. 내게 영지에 대한 보고를 올린 후, 즐겁게 연회를 즐길 예정이지. 거기다 이번 연회에 애셔라는 화제의 인물이 나온다고 알고 있는 터라 무척이나 기대감을 품고 있다."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젊은 마법사.

누구라도 흥미가 가지 않을 리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흥미보단 의심이 더 크겠지만.

정치에 뼛속까지 물든 귀족들은 베르덴을 검증하려 들 것이다.

단순히 미지의 강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다름 아닌 공국의 재산을 사용해 치하를 내리는 것이니 철저하게 확인하려고 하겠지.

마땅히 귀족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였고 베르덴으로선 당연히 거쳐야 할 절차였다.

"자네의 입장에선 별로 좋지 않겠지. 귀족이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하나 다 대응하자니 귀찮아 죽겠고."

"...."

"하하, 표정을 보니 아주 질색인가 보군. 그래서 생각했지. 그럴 바에 차라리 크게 한판 벌이는 게 어떤가 하고 말이야."

대행사의 시합.

거기서 베르덴은 귀족들이 데려온 자들과 맞붙고, 모두 앞에서 그 힘을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미 로든마이어 백작이 손을 쓴 모양이더군. 그 친구도 참 눈치 하나는 빨라 가지고... 뭐, 힘들게 자네를 설득하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이래저래 김이 빠져.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게 하나 제안을 하고 싶은데."

"어떤 제안입니까?"

"대행사의 시합에 참가하는 인원은 총 16명. 형식은 토너먼트로, 이틀에 걸쳐 진행이 된다.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시합 방식이지. 하지만 그러다 보니 명확한 단점이 하나 생기더군."

순서가 무작위인 터라 결선에서 접전을 펼쳐야 할 강자들이 1차 또는 2차 시합에서 맞붙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야 후반부에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더 큰 자극이 앞설수록 그보다 약한 자극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공왕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본인이 직접 정하는 게 어떤가 하고 말이다.

눈치 볼 것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 국가의 왕이었으니까.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시합 순서를 내 임의대로 몰래 정할 생각이다. 최대한 점진적인 자극을 위해서 말이야."

"...그래도 되는 겁니까?"

"들키면 귀족들에게 불평 좀 듣겠지만,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서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베르덴이 엔드릭에게 슬쩍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공왕이 마음먹은 이상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지. 이렇게 되면 자네는 시합에서 강자들과 연이어 맞붙게 되는 거니까. 거절해도 충분히 이해는 해. 물론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공왕이 은근히 베르덴을 도발했다.

베르덴은 딱히 아무런 생각도 들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공왕의 제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시합에서 1위를 할 생각으로 온 거니까.

아직 글러트니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지금, 베르덴은 보다 큰 보수를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오, 정말인가? 하하, 이거 참 말이 통하는 친구라 아주 기쁘군. 꽤나...."

"전하, 이제 왕성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엔드릭의 말에 공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공왕이 베르덴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약 전부를 납득시킬 만한 힘을 보여 준다면, 특별한 상을 내리도록 하지. 그러니 부디 좋은 모습을 보여 줬으면 좋겠군, 애셔여."

그 말을 남기고 공왕과 엔드릭이 저택에서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로든마이어 백작 방으로 들어왔다.

"무사히 대화를 끝낸 모양이군."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갑자기 전하께서 찾아오실 줄은 몰랐으니까. 이렇게 예측이 불가능하게 움직이시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작게 헛기침을 한 백작이 베르덴에게 공왕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슬쩍 물었다.

사족은 치우고 공왕의 제안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자, 백작이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네가 시합에서 1위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군."

...대체 뭘 받길래 저리도 집착하는 건지, 원.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를 않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9일이 지났다.

* * *

왕성의 회의실에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중심에 앉아 있는 리비안트 공왕과 그의 양옆을 차지하고 있는 네 명의 행정가. 이들 모두가 각 영지에 대한 실적을 확인하고, 직접 영주의 평가를 내리는 심사관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공왕이 대행사의 시작을 알린 순간.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한 귀족이 걸어 들어왔다. 동남쪽에 있는 영지를 다스리는 리딜리안 백작, 그의 보좌관인 필베인 자작이었다.

자작이 공왕에게 예를 갖추고는 의자에 앉았다.

귀족이라고 해도 견디기 어려운 압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공왕의 목소리가 회의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필베인 자작, 겨울 산불로 인해 바쁜 리딜리안 백작을 대신해 왔군."

"그, 그렇습니다. 전하."

"영주로서 책무를 다하는 건 훌륭한 일이지."

공왕의 칭찬에 자작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심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그런데 대응이 많이 늦었군. 고지대에 위치한 리딜리안 영지의 특성상, 산불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무려 4일이 지나서야 움직였다니.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 그게...."

"그리고 모험가 길드와 아인종 토벌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고, 작년에 비해 농업 생산량이 15% 가까이 떨어졌군. 영지 내에 있는 도시의 성장률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낮고. 뭐, 전자는 흔한 일이니 넘어가겠지만 나머지는 큰 문젠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필베인 자작?"

대행사는 단순히 보고서를 읽는 게 다가 아니다.

보다 면밀하게 영지를 파악하여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공작위에 있을 시절, 가장 거대한 영지를 다스렸던 리비안트 공왕. 어지간해서 그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얼마 후, 필베인 자작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아주 탈탈 털린 모양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귀족들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윽고 다른 귀족들도 공왕에게 직접 심사를 받았다.

몇몇은 잘 넘겼는지 싱글벙글했지만 대부분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그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저었다.

'귀족으로 사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군.'

이어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회의실로 들어와 자리에 착석하자 공왕이 작게 감탄하며 백작을 바라봤다.

"영지 상태가 훌륭하군. 예상했던 것보다 전체적으로 앞서 있어. 범죄율도 해가 지날수록 감소하는 추세고. 이런 지표는 꽤나 오랜만이군."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대규모 실종 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군."

예상했던 지적이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러 영지를 거쳐 수백 명이 실종된 사건으로,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짧은 시간에 원인을 규명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그걸 해내는 게 영주의 책무가 아닌가?"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다른 영지와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고, 사라진 실종자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시간만 주신다면 분명 누가 벌인 짓인지 확실하게 원인을 규명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백작이 자신 있게 답했다.

턱을 쓸며 고민하던 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로든마이어 백작의 심사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가 경험한 역대 대행사 중에서도 가장 좋은 평가였다. 충분히 영지 평가 1위를 노려 볼 만한 정도.

'거기다 대행사의 시합에서 애셔가 1등을 한다면....'

1위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시합의 결과 또한 평가에 일부분 들어가니까.

백작이 내심 미소를 지으며 몰래 주먹을 콱 움켜잡았다.

그런 와중에 심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 그렇게 대행사의 첫날이 저물었다.

78화 대행사 (1)

연회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베르덴은 공국의 수도 리드론을 관광했다.

한 나라의 수도인 만큼 다른 도시보다 월등히 큰 시장 규모. 어쩌면 유용한 물건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점가부터 시작해 구석에 있는 골동품점까지 천천히 구경했다.

하지만 베르덴의 마음에 드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희귀한 재료로 만든 검과 갑옷 같은 비싼 장비들은 많은데, 베르덴 수준의 마법사가 유용하게 쓸 만한 건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마법사 장비는 수도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더 좋은 장비로 바꾸려면 제작을 맡기거나 어디 경매장에서 구할 수밖에 없겠군.'

다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준 신분 보증서 덕분에 가치가 높은 서적들을 무료로 대여할 수 있었다.

베르덴은 부여 계열 마법에 대한 책을 몇 권 빌려서 저택으로 가져왔다.

책상 앞에 진득히 앉아 빠르게 책장을 훑었다. 정신 보호, 저항 강화 등 갖은 종류의 부여 마법이 실려 있었으나, 베르덴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찾았다.'

부여 계열의 4위계 마법, 엘레멘탈 인챈트(Elemental Enchant).

사물에 원소 효과를 부여하는 것으로, 원소 마법이 4위계 상위에 오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다.

마법 자체가 그리 희귀한 건 아니었기에 조만간 서적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이참에 독학할 생각이었다.

책을 세 번 정독한 베르덴이 스태프를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 해 보는 마법이다 보니 곧바로 성공할 수는 없었지만 마력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며 아홉 번째 시도에 돌입한 순간.

<번개 속성 부여>

파지지직!

스태프의 보석에 전류가 발광했다.

궤도를 따라 잔상을 남기는 푸른 빛줄기. 이 부여 마법은 로드론 기사단과 훈련을 하며 갈고닦은 무기술과 함께 큰 시너지를 일으킬 것이다.

화려한 마법 이펙트에 베르덴이 작게 미소 지었다.

"효과도 효과지만 대행사의 시합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엔 딱이겠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마법에 적응하면 끝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연회의 날이 다가왔다.

* * *

호화로운 왕성의 연회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맛좋고 신선한 음식들이 주기적으로 교체되었고, 최고급 와인의 향기가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대화를 나누는 고위 귀족들.

곳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결코 시끄럽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귀족이 아닌 자들은 분위기를 망칠라 조용히 구석에서 음식을 즐겼다.

오늘은 연회가 열린 지 바로 3일째가 되는 날.

이미 유명한 가수와 배우가 함께 공연을 하여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심야 무도회를 통해 연회를 즐겼다.

지금까지의 연회는 귀족들의 사교 활동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대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시합이 있었으니까.

마침내, 연회의 주최자가 등장했다.

"리비안트 공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리비안트 공왕과 그의 아내.

그리고 자식인 1왕자가 또한 그 뒤를 따랐다.

"2왕자께선 안 보이시는군."

"원래 사교 활동을 싫어하시는 분이시잖나. 일찌감치 왕위 상속권을 포기하고 정무에만 매달리시니."

이윽고 공왕이 발걸음을 멈췄다.

왕가의 등장에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공왕이 손짓하자 고위 귀족부터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계단 위에서 공왕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얼굴을 보니 연회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모두 잔을 들게."

연회는 회의와 같은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겉치레는 짧게 하고 본론을 중시하는 것이 공왕의 성격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한 공왕이 잔을 높이 들었다.

"공국을 위해."

───공국을 위해.

진정한 연회의 시작.

각자의 입맛에 맞는 술 한 잔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렇게 서서히 분위기가 오르고 모두의 이목이 빠짐없이 집중되었을 때, 공왕이 말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도시 로리엔에 소울 트리라는 이형종이 나타났다. 위험도는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괴물로, 자칫하면 로리엔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까지 멸망할 수도 있었지. 하나 피해는 매우 경미했다. 바로 그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한 마법사가 있었지."

모두가 공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흉악한 언데드인 통곡의 기사를 토벌했으며, 실종된 귀족의 목숨을 구한 데다가, 로리엔에서 소울 트리를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젊은 마법사."

그때, 정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의 머리를 하고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한 사내. 그 신비스러운 외모에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누군가는 감탄하고 또 누군가는 경악했다.

그런 베르덴을 공왕이 직접 가리키며 소개했다.

"마법사 애셔. 이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별이다."

* * *

'소개가 좀 거창한데.'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지만 뭐랄까, 얼굴에 금칠을 한 기분이다.

특히 새로운 별이라는 대목이 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주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공왕의 목소리 덕분인지 아니면 분위기 덕인지 모르겠으나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귀족이기에 이런 표현에 익숙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베르덴이 붉은색 융단 위를 거닐었다.

수십 개의 시선 속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공왕 앞, 계단 아래에 도착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익숙지 않은 인사법이었으나 타인의 눈에 거슬릴 정도로 어색하진 않았다.

주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자가 특수 개체를 토벌했다고?"

"정확히 하게. 특수 개체가 아니라,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이야."

"...그게 그거 아닌가?"

"허, 분명 4위계에 이르렀다고 들었는데 어려도 너무 어리군."

"역시 보고에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설마. 그런 걸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전하께 고했을 리가...."

호기심에서 짙은 의심으로 뒤바뀐다.

작은 불씨가 장작을 타고 활활 타오른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의 상황에 공왕은 내심 흡족해하고는 모른 척하곤 귀족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걱정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애셔를 대행사의 시합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지. 물론 본인의 동의는 받았다. 안 그런가, 로든마이어 백작?"

"그렇습니다, 전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향했다.

언제 손을 쓴 거냐고 따지는 듯한 따가운 눈초리를, 백작은 태연하게 무시했다.

"그럼 애셔에 대한 소개도 끝났으니 다음 차례로 넘어가도록 하지."

공왕이 손을 튕기자 연회장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온몸이 흉터 투성이인 사내를 필두로, 귀족과 비슷한 몸가짐을 한 남자와 표독스러운 눈빛을 한 여성 등.

이들 모두가 귀족에게 고용된 시합의 참가자였다. 베르덴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이 일제히 공왕에게 예를 갖췄다.

"작년보다 의기가 대단해 보이는데. 그럼 한 명씩 차례대로 자기소개 좀 부탁하지. 그리고 시합에 대한 각자의 포부도 말해 줬으면 좋겠군."

공왕이 어느 한 명을 가리켰다.

그러자 참가자는 당당하게 자신의 내력을 밝혔고 그렇게 하나둘씩 소개가 이어졌다. 베르덴이 참가자들의 얼굴을 조용히 살폈다.

'경력이 화려하군.'

모험가, 용병, 아카데미의 선생 등 하나같이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던 자들이다.

특히 단안경을 쓴 전직 아카데미의 선생 그리고 공화국에서 활동했다는 흉터 투성이 용병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둘이 시합의 마지막을 장식할 베르덴의 상대가 될 것 같았다.

이윽고 베르덴의 차례가 왔다.

"마지막으로 애셔, 자네만이 남았군. 소개는 아까 전에 끝냈으니 포부라도 말해 주는 게 어떻겠나?"

"알겠습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딱히 심사숙고하며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확실하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여기 있는 모두에게 보이면 그뿐이다.

베르덴이 고개를 들고는 청명한 눈으로 공왕을 직시했다. 그리고 단언했다.

"적당히 끝내겠습니다."

그 순간 연회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 * *

"오만한...!"

한 백작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귀족이 손수 고용한 자는 그의 얼굴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존심이고 곧 자랑이었다. 전적이 화려한 호위일수록 그렇다.

이 정도 되는 인물을 품에 넣고 있다고, 다른 귀족에게 부러움을 받으며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대행사의 시합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면 실질적인 가문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르덴의 발언은 귀족들의 심기를 긁기 충분했다.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적당히 하겠다니! 그것은 참가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귀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 자신감인지 자만감인지 구분이 안 되는군."

"자기 혼자서 소울 트리를 토벌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분명 핏빛검이 아니었다면 이도 저도 못 하고 죽었을 것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저자 혼자 해낸 건 없지 않은가? 비르온에선 도살자가, 로리엔에선 핏빛검이 함께했으니. 이거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군."

"실제로 타인에게 빌붙어 명성을 높이려는 자도 있으니...."

연회장의 분위기가 들끓었다.

귀족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프라이드에 도전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왕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자신에게만 보일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 저 미소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누가 오든 간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훌륭하다.'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이렇게까지 고조하다니.

몇몇 귀족은 화난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짙은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게 보인다. 흥행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공왕은 베르덴을 보며 내심 침음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태생적으로 반골의 기질이 있다. 품에 넣긴 글렀군.'

그의 행적을 살펴봤을 때,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모험가 길드가 아닌, 그레이에서만 활동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어딘가에 소속되어 행동이나 규율을 강제당하는 것을 싫어할 터.

억지로 손에 넣으려 하면 분명 도망칠 것이다. 아니, 도망치면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특출난 마법사란 존재는 재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대개 상식을 벗어났으니. 본인이 바라지 않는 이상 결코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왕으로서의 직감으론, 베르덴이란 마법사는 군림하되 지배받지 않는 자로 보였다.

'물론 시합에서 지면 끝이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이곳에서는 더더욱.

만약 애셔가 진다면 허세 가득한 마법사로 여겨질 것이다. 그가 해 왔던 모든 일들이 폄하되고, 이뤄 낼 모든 것들이 거짓으로 치부되겠지.

과연 어떨까.

"페르드."

"부르셨습니까, 전하."

마도에 이른 5위계 마법사이자 공국의 주석 궁정 마법사, 페르드 다니안스.

"무대를 만들어라."

전에 말했던 것보다 더 크게.

79화 대행사 (2)

쿠구구구구...!

연회장 바깥에 있는 넓은 정원이 서서히 움직였다.

두 개의 화려한 분수대는 일체 손상도 없이 양옆으로 옮겨졌고 잔디 또한 어느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어느새, 정원 중간에 갈색 흙으로 이뤄진 거대한 공터가 생겨났다. 그 조작 능력에 베르덴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베르덴이 즐겨 쓰는 지형조작과 달리, 이 마법은 훨씬 더 효율이 좋았으며 섬세했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건 기존 위계에 없는 마법이다. 그렇다는 건 법칙에서 벗어났다는 뜻.

페르드라 불린 주석 궁정 마법사는 땅과 관련된 스스로의 마도를 개척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마법전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마법사와 마도사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는 간극.

베르덴이 위계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다양한 원소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가능한 것이지, 어느 한 속성에 국한되면 전력은 절반 이하로 내려갈 것이다.

베르덴의 능력은 넓고 방대했으나, 마도사가 마도를 이룬 분야와 비교한다면 그 깊이는 턱없이 얕다.

물론 그렇다고 맥없이 압도당할 리는 없을 테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최소한 5위계에 오르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베르덴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무대가 완성됐다.

다른 궁정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새기고 마력을 불어넣자 반투명한 돔이 공터 전체를 감쌌다.

내부의 충격이 외부로 전해지는 걸 막기 위한 용도였다.

그리고 기사 한 명이 다가가 참가자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주었다.

베르덴의 번호는 16번, 끝자리였다.

"오늘은 1차전과 2차전을 치르고, 내일 준결승과 결승을 치른다. 중간에 휴식과 부상을 회복할 시간은 주어지지만 되도록 체력 분배를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바스티오의 단장, 레이크가 시합의 일정을 설명했다.

베르덴은 시선을 돌려 다른 참가자의 번호를 확인했다.

흉터 투성이 사내는 1번.

그리고 전직 아카데미 교수는 13번이다.

'13번은 2차전에서, 1번은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건가.'

베르덴의 예상이 얼추 맞은 모양이다.

"1번과 2번! 호명된 참가자는 무대 앞에 서라!"

곧이어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 * *

묵직한 중검을 든 흉터의 사내, 잭.

그 상대는 두 개의 소검을 든 표독스러운 눈빛의 여자, 르위엔.

육체적으로 차이가 컸지만 르위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순한 근력 따위야, 보다 빠른 속도에 맥을 못 추는 법이니까.

그렇게 자신한 그녀가 소검을 빙글 돌리며 히죽 웃었다.

"몸에 그림이 많네? 그럼 몇 개 더 그어도 괜찮겠지, 응?"

"...."

"뭐야, 과묵한 콘셉트야? 재미없게."

르위엔의 말에도 잭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심리전이 통하지 않는 건 좀 짜증이 났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뿐이었다.

이윽고 공국의 궁정 마법사가 시작 신호를 울렸다.

기를 활성화해 신체를 강화했다.

바닥을 박찬 그녀가 잭에게 육박하며 몸을 회전했다. 무릎과 어깨를 동시에 노리는 칼끝.

제자리에 서 있던 잭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무거운 충격에 르위엔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지면에 무사히 착지하기는 했으나 손목이 저릿했다.

'힘이 무지막지하네. 최대한 가깝게 붙어야겠어.'

검의 길이상, 지근거리에선 그녀가 유리하다.

바닥을 차올려 잭의 얼굴에 흙을 뿌리고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접근했다. 그리고 옆구리를 향해 힘껏 소검을 내질렀다.

"느리군."

"어?"

콱!

강철 건틀릿으로 검날을 움켜쥔 잭이 르위엔을 멀리 집어 던졌다.

겨우 낙법으로 충격을 완화했지만,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는 것보다 잭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어느새 다가온 잭이 르위엔의 목을 잡고는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꺄악!"

구경하고 있던 귀족 영애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다행히 힘 조절은 했는지 얼굴이 뭉개지지 않고 가벼운 타박상으로 그쳤다. 기절한 르위엔을 바닥에 둔 잭이 마법진 밖으로 나왔다.

치열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인 시합.

몇몇 귀족은 꽤나 인상이 깊었는지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눴다.

"흉터가 가득한 역전의 전사라. 겉모습은 그럴듯하군."

"검술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근력 하나는 뛰어난 모양일세."

"그리고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제압하지 않는 걸 보아 신사적이기도 하고. 난 이 친구의 우승에 걸도록 하지."

베르덴이 슬쩍 이야기를 엿들었다.

아무래도 1차전으로 참가자들의 실력을 대충 파악한 뒤, 참가자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내기하는 모양이다.

귀족 아니랄까 봐 오가는 액수가 한두 푼이 아니었다.

시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잭처럼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귀족이 데려온 자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수준이 높았다.

저마다의 기술과 마법으로 서로 맞부딪치는 광경은 꽤나 재미있었다. 극적으로 역전승을 한 참가자는 귀족들에게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잠시 후, 13번과 14번의 시합이 진행되었다.

가느다란 지팡이를 손에 든 남자, 루크넌. 그가 단안경을 추켜올리며 상대에게 말했다.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추태를 보이기 싫으면 기권하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코웃음을 친 전사가 침을 바닥에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아카데미 샌님 출신 아니랄까 봐, 원. 내가 그런다고 쫄 것 같냐?"

"당신을 생각해서 한 제안이었는데요. 감사를 하진 못할망정, 품위가 없으시군요."

"품위는 개뿔. 그게 뭐 밥 먹여 줘?"

후웅!

전사가 손도끼를 휘둘렀다.

"여기선 이기는 게 품위야. 우승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너 같은 재수 없는 놈에게 질 수는 없지."

"쯧쯧. 멍청하기는."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다.

무대의 양 끝에 선 둘. 시작 신호가 울림과 동시에 전사가 뒤로 힘껏 팔을 당겼다. 근육이 융기하며 체중이 한쪽으로 치우쳐졌다.

투척술.

전력을 다한 도끼에 맞으면 저렇게 얇은 팔다리 하나쯤은 쉽게 날아갈 터. 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기엔 딱이었다.

"맞고 뒈져───."

<일루전>

갑자기 전사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표적을 놓친 도끼는 루크넌을 스치기는커녕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기묘한 감각에 전사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더 볼 것도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끝내도록 하죠."

루크넌의 지팡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마치 연주를 지휘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악몽의 절규>

마법이 발동한 순간, 비명을 지른 전사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발광하기 시작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내 전사가 거품을 문 채 의식을 잃었고, 시합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마법진 바깥으로 나온 루크넌.

그가 베르덴을 향해 과시하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정신 계열이라. 아카데미 교수 출신이라더니 정말인가 보군.'

부여 계열의 하나인 정신 계열.

말 그대로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으로, 습득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거기다 4위계 이상의 정신 계열 마법은 범죄에 악용되면 정말로 위험하기에, 별개의 자격증이 없으면 배우는 걸 금한다.

방금 전 루크넌이 보여 준 마법은 4위계.

정신력이 약하면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던 중 문득 옆에서 시선을 느꼈다.

멀리서 로든마이어 백작이 베르덴을 노려보고 있었다. 연회에서 말했던 한마디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만약 베르덴이 패배하거나 힘겹게 이기면 꽤나 꼴사납겠지.

그렇게 되면 그를 시합에 내세운 로든마이어 백작도 창피를 당할 것이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다.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된다. 다음 시합에서 보란 듯이 실력을 증명할 생각이니.

"15번과 16번 앞으로!"

마침내 베르덴의 차례가 왔다.

* * *

베르덴과 한 마법사가 무대 앞에 섰다.

미리 맡겼던 스태프를 기사들이 가져와 베르덴에게 건넸다.

심판을 맡은 바스티오 단장, 레이크가 말했다.

"승패는 상대방의 기절 혹은 항복으로 정하며 고의적으로 죽음에 가까운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엄벌에 처한다. 사망 또한 마찬가지. 이것은 사투가 아니라 대련이란 걸 명심해라, 애셔 그리고 로빈. 둘 다 이해했나?"

"예."

"물론입니다, 바실리온 기사단장님."

"그럼 정해진 위치에서 대기하라."

동시에 무대 안으로 들어섰다.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 로빈이 베르덴의 얼굴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시발, 저렇게 생긴 놈이 소울 트리란 걸 토벌했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로빈은 4위계의 마법사였다.

나름대로 온갖 경험을 통해 악착같이 위로 올라왔다. 한계 위계가 4위계에 불과했지만, 그 실력은 같은 위계에서도 뛰어나 주변에 이름을 알릴 정도.

이번 시합에 참가한 것과 더불어 휘에 백작가의 가신으로 들어가게 될 예정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당연히 베르덴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나이는 한참이나 어린데 로빈과 같은 4위계에 다다른 데다가, 외모는 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러웠다.

이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불공평했다.

'저놈은 사기꾼이 분명해.'

로빈, 그의 마음속에서 열등감과 질투심이란 것이 폭발했다.

제 손으로 직접 저 마법사의 민낯을 까발리고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다. 그다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이 자리에서 보여 줄 것이다.

위계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평소보다 감정이 과하게 과열되었지만, 로빈의 신경은 오로지 베르덴에게 향해 있었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시작 신호가 들리길 기다렸다.

───시작!

<워터 스피어>

물로 이뤄진 창이 베르덴의 가슴을 노렸다.

적중한다면 연약한 인간의 몸은 손쉽게 뚫릴 것이다. 누가 봐도 상대방의 죽음을 노리고 날린 마법이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닿을 리가 없었다.

촤악!

순식간에 시전된 어스 스피어가 로빈의 마법을 정면에서 부쉈다.

눈을 부릅뜬 로빈이 다급하게 비행을 써서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가 있던 자리의 조금 옆을 지나친 바위의 창이 마법진에 부딪히며 부서졌다.

'이게 무슨....'

시전 속도가 말도 안 된다.

거기다 자신의 마법이 저항도 제대로 못 해 보고 그대로 박살 나다니. 애써 당황을 억누르고 고개를 돌렸는데, 베르덴이 사라져 있었다.

'뒤인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 곧바로 마력방벽을 펼쳤다.

하늘에서 쇄도한 스태프와 부딪치며 굉음이 터졌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쩌적.

"뭣...!"

방벽에 새겨진 한 줄기 금.

고작 마법사가 휘두른 일격에 방벽이 손상되다니. 숨을 삼킨 로빈이 서둘러 마력을 거두고 뒤로 후퇴했다.

'원소 계열이 아니었나?!'

모르겠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서 재정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베르덴에 의해 멱살을 잡혔다. 마법사가 아까와 같은 위력과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게 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바로 부여 계열 마법.

후웅-!

베르덴이 지상으로 낙하하며 로빈을 휘둘렀다.

저항하려 했지만 부여 마법으로 강화된 근력에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공허한 하늘이었다.

콰앙! 그렇게 등부터 지면에 처박혔다.

"허어억!"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신경을 강타했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던 로빈이 이내 축 늘어졌다. 당연히 죽은 게 아니라 기절이었다. 자연히 정신을 차리려면 좀 오래 걸리겠지만.

그렇게 이름난 4위계 마법사가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전혀 원소 계열 마법사답지 않은 전투 방식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베르덴이 가볍게 스태프를 털고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 만에 마법진 바깥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80화 대행사 (3)

마법사는 근접전에 취약하다.

당연한 말이었다. 마력회로를 확장하고 이론과 마법을 배우는 것만 해도 벅찬데, 그 와중에 무기술이나 체술을 단련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거기다 애초에 마법이 있는데 굳이 위험하게 붙어서 싸울 일이 거의 없다.

특히 파괴에 특화된 원소 계열 마법사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베르덴을 보는 시선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원소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었나?"

"부여 마법에다가 그런 움직임이라니. 허허, 이거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

문득 서쪽 제국의 워 메이지가 떠올랐다.

워낙 먼 나라기에 공국과 인연이 없었지만, 마법과 체술을 합하여 특이한 전투법을 구사하는 강대한 마법사 부대를 육성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거뒀다.

극소수지만 마법에 의존하지 않는 마법사는 있다. 근접전에 능숙한 마법사라고 해서 그를 타국의 병사로 여기는 건 누가 생각해도 과한 억측이었다.

애초에 서쪽 제국에서 공국에 신경 쓸 이유도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았겠지.

가만히 베르덴을 주시하던 귀족들.

작년에는 핏빛검의 독무대였으나 올해는 무려 우승 후보가 세 명이나 있다.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합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연회장의 정원이 여느 때보다 술렁거렸고, 아직 내기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이 베르덴에게 돈을 걸었다.

1차전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었다.

왕성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음식을 옮겼다.

베르덴이 샴페인을 하나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어떤 규칙이 있는 모양인지 시합 얘기가 한창임에도 귀족들과 참가자들이 따로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기에 참가자가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덴을 본 참가자들이 눈을 흘겼다. 방금 전의 시합을 보고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잭이 다가왔다.

"당신, 강하더군."

갑작스러운 말에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결승을 기대하지."

그 말을 남기고 잭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다 도중에 루크넌을 마주쳤는데, 베르덴을 대할 때와는 달리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그대로 지나쳐 갔다.

"...야만인 같은 것이."

무시를 받았다고 생각한 루크넌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여유롭게 샴페인 잔을 돌리며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비르크 백작님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루크넌이라 합니다."

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마치 귀족 흉내를 내는 것 같은 몸가짐이었으나 굳이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애셔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 전의 시합은 확실히 인상적이었거든요. 마법사가 근접 전투를 벌이다니, 아주 보기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루크넌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명백히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뭐, 사람이 저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이해합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그 마법사답지 않은 움직임이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를 상대로 마법전을 피하다니. 솔직히 말해 아쉬웠습니다."

마법전을 회피하는 건 마법에 자신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

강함과 별개로 마법사로서 수치였다. 적어도 루크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이상적인 마법사란 그야말로 예술가였다.

마법으로 보다 아름답고, 보다 부드럽게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베르덴의 전투 방식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당신에게 제안하겠습니다. 2차전은 포기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최소한의 자존심은 챙겨 갈 수 있습니다."

루크넌 교수.

전직 아카데미 교수로 4위계 상위의 정신 계열 마법을 구사하는 실력자.

거기다 기본적인 원소 마법도 사용할 줄 알기에, 상대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육체를 제압하는 것이 특기였다.

눈앞에 있는 어린 마법사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건 지극히 간단한 일이었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루크넌에게 말했다.

"대답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느새 말투에서 존대는 사라졌다.

루크넌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무엇입니까?"

"상대의 시합에 개입하는 것도 아름다운 건가?"

순간 루크넌의 표정이 굳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죠?"

"굳이 말로 해야 하나?"

공왕과 귀족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베르덴의 1차전 상대인 로빈은 살기를 드러냈다.

분노와 증오 같은 것이 일부 표정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무슨 원수라면 모를까, 일면식도 없는 베르덴에게 품을 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에게서 아주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지금 앞에 있는 루크넌의 마력과 동일한 것이 말이다.

'뭐, 시합이라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붙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

그래서 굳이 제재하지 않은 거겠지.

어쩌면 그의 고용인인 다비르크 백작이란 귀족이 주문했을지도 모른다. 시건방진 마법사를 참교육해 달라는 이유로.

아니면 베르덴의 발언에 심기가 거슬린 루크넌이 몰래 수작을 부린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베르덴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루크넌은 그야말로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음흉한, 마탑의 마법사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으니.

잠시 침묵하던 루크넌이 피식 웃었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많이 지치셨군요. 증명도 하지 못할 말은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래도 2차전은 제가 특별히 배려해서 곧바로 끝내 드리는 게 당신이나 나에게 있어 좋겠군요."

몸을 휙 돌린 루크넌이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베르덴이 흘겨봤다.

아카데미에 가 본 적도 없고 가서 뭘 배우는지 관심도 없었지만, 저런 교수 밑에서 배우면 제대로 된 마법사는 되지 못할 거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샴페인 한 잔 더."

"여기 있습니다."

베르덴은 맛 좋은 샴페인을 마시며 왕성의 풍경을 즐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2차전이 시작되었다.

* * *

"역시 저자가 결승에 오르겠군."

귀족들의 시선이 잭에게 향했다.

그는 1차전에서는 남다른 신체 능력을. 그리고 2차전에서는 강력한 검술을 선보였다. 줄곧 검격을 흘려 내던 상대방의 무기가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날 정도.

고속의 검술을 구사하는 핏빛검과는 정반대로 힘을 적극 활용하는 검술이었다.

2차전에서 승리한 참가자들도 괜찮은 시합을 선보였으나, 잭에 비해서는 여러모로 주목도가 떨어졌다.

이윽고 오늘의 마지막 시합이 다가왔다.

베르덴과 루크넌. 둘이 무대 위에서 각자의 스태프와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루크넌이 베르덴을 마주하며 이죽거렸다.

자신을 비롯한 참가자들을 2분 내에 쓰러뜨리겠다니. 기왕이면 1차전에서 사고로 죽거나 처참하게 패배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저항할 틈도 없이 끝내 주도록 하죠.'

루크넌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4위계 상위 마법사에다가 무려 교수 출신. 관객들의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그렇게 레이크가 시작 신호를 보낸 순간.

<강대한 공포>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 * *

<강대한 공포>는 피시전자가 생각하는 가장 강한 존재를 불러 내고 시전자가 그 껍질을 뒤집어쓰는 마법이다. 정신계에 들어온 상대방은 루크넌에게서 그러한 존재에 대한 환영을 보는 것이다.

'무력함은 곧 공포로 이어지는 법.'

사람들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강대한 힘 앞에 무릎 꿇는다. 그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본능이었으니까.

이 마법은 루크넌이 배운 정신계 마법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봤다.

'정신계 안이군. 확실히 성공했다.'

마법사로서 격의 차이가 있으면 성공 확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선천적으로 정신계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매우 드물지만 있긴 했고. 하나 애셔라는 시건방진 마법사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야 일부러 걸리진 않았을 테니까.

루크넌이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베르덴이 나타났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응?"

그런데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베르덴의 표정엔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미묘한 짜증만이 드러났다. 눈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을 보며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또 마탑주야?'

정신계 마법의 사용자는 드물다.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신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경험하기 위해 애써 저항하지 않았다. 당연히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다. 레이라를 포함해 수만 명을 악몽에 빠뜨린 소울 트리조차 베르덴의 정신을 조금도 흔들지 못했으니.

'그런데 이건....'

너무 기대 이하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소울 트리가 펼친 악몽이 최소 세 단계쯤은 위였다. 여기서 배울 만한 건 딱히 없었다.

흥미가 식은 베르덴이 스태프로 바닥을 가볍게 두들겼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루크넌이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플레임 스트라이크>

지면에서 솟아 나온 불기둥이 루크넌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 * *

"흐아아아아아아악!"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루크넌이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마치 몸에 불이 붙기라도 한 듯 땅을 구르고 손을 휘저어 자신의 몸을 때렸다.

이것이 타인의 정신계에 들어간 부작용이다.

멋모르고 시전자보다 정신이 훨씬 강력한 사람에게 사용했다간 이처럼 몇 배나 되는 반작용을 돌려받을 수도 있었다.

"흐아아아아악!"

"뭐 하나, 빨리 데려가지 않고!"

"예, 예!"

병사들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패닉에 빠진 루크넌을 데려갔다.

비명 소리가 차츰 멀어질 때쯤, 베르덴이 바깥으로 나왔다. 시합이 시작된 지 고작 10초가 채 흐르지 않았다.

그를 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또다시 다양하게 바뀌어 있었다.

"이러다 정말로 한 시합당 2분 내에 끝내 버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베르덴이 승리한 1차전과 2차전의 시간을 합쳐도 1분이 채 흐르지 않았으니.

그때, 공왕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재미있는 시합이었다. 매해마다 새로운 실력자들을 참가시키는 데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아. 기대 이상이었다. 모두들 안 그런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하."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른 귀족들도 공왕을 따라 손뼉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박수갈채를 받은 참가자들은 말없이 예를 취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 오늘 연회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시합의 참가자들은 내일 있을 마지막 연회에 참가할 자격이 생기니 생각이 있으면 와도 좋다. 되도록 준결승에 진출한 자들은 빠짐없이 왔으면 좋겠군."

공왕이 베르덴에게 시선을 멈췄다.

내일 있을 시합도 기대하겠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왕성으로 돌아갔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베르덴에게 다가섰다.

"확실히 공왕 전하 앞에서 자신감을 내비칠 실력은 되는군. 너무 빨리 끝나서 크게 볼거리는 없었지만 말이야. 특히 2차전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로든마이어 백작은 아쉬워하긴커녕 오히려 흡족해했다.

어디까지나 그의 우선순위는 치열한 볼거리가 아닌 시합의 1위였으니. 어떻게 하든 정당하게 이기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가자마자 가능한 일찍 잠드는 게 좋을 거다. 내일 있을 연회에 시달리면 무지하게 피곤할 테니까."

"귀족들의 관심 때문입니까?"

"관심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자칫하면 슬하에 여식을 둔 귀족들이 너와 혼인으로 연을 맺으려고 할 수도 있다. 출신이 불확실해도 마법사로서 특출난 재능을 가졌으니까. 그리고 외적으로도 그렇고."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지금까지 연인이란 걸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기에 특히 그러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막아 주시길 바랍니다."

"하는 걸 봐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

81화 결승 (1)

대행사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연회는 전날보다 더욱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고위 귀족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 자제들까지도.

북적거리는 연회장 속, 왕성의 하인들이 음식과 술을 옮기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2층 발코니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

그중 하나가 연회장을 향해 다가오는 마차들을 바라봤다.

"왔나 봅니다."

첫 번째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문을 열자 잭이 성큼 발을 디뎠다. 어제와 다름없는 회색 갑옷과 검은색 망토. 연회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눈길이 끌렸다. 그런 잭의 뒤로 볼디아느 백작이 고개를 치켜들며 앞으로 나섰다.

"아주 의기양양하군요. 뭐, 시합의 유력한 우승 후보를 데려왔으니 누구든 안 그렇겠냐마는...."

"솔직히 저 안목이 부럽습니다. 작년에는 모험가 길드와 친한 체르베논 백작이 핏빛검을 데려와서 우승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준우승을 거머쥐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3년 전에는 우승까지 했지요."

대행사의 시합에서 우승을 한다는 건 큰 영예이기도 하나, 영지 평가에 가점이 붙는다.

그 덕에 다소 척박한 영지를 다스리던 볼디아느 백작이 포상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 몇 년 사이에 영지를 급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귀족으로서 부럽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우승이 확정된 건 아니잖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죠."

우승 후보는 한 명만이 아니니까.

귀족들이 다음으로 오는 마차에 시선을 향했다.

두 번째 이어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줄줄이 뒤늦게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마차였다. 그중에는 오늘 시합의 참가자들도 있었고, 어제 시합에서 떨어진 자들도 있었다.

루크넌은 오지 않았다.

하기야 공국 역사상 최단 시간 내에 패배했으니 창피해서 오지 못했겠지.

그러던 중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마차가 도착했다.

금색 테두리의 고급 마차.

옆면에 새겨진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표식.

이윽고 문이 열리며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회색 로브가 아닌, 로든마이어 백작이 준비해 준 짙은 푸른색의 연회복.

잿빛 머리 그리고 푸른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색감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시선에 베르덴이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로든마이어 백작이 주변을 스윽 훑어봤다.

"너를 상당히 귀찮게 할 것 같은 시선들이군. 복장이 꽤 잘 어울리는 모양이야."

"굳이 이런 옷을 입어야 했습니까?"

"오늘까지는 네가 백작가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럴진대 모험가에게나 어울릴 법한 모습으로 나서게 할 수는 없지. 적어도 연회장에서만큼은."

장소에 어울리는 의복은 사교계의 기본이다.

어차피 시합에 나설 때는 원래의 복장으로 갈아입으면 될 뿐이니, 길어야 두 시간 정도일 뿐이다. 베르덴은 공국의 사교계에 일절 관심조차 없었지만 순순히 로든마이어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편리한 조건을 하나 받아 냈다.

"그럼 들어가지."

로든마이어 백작 그리고 베르덴.

둘이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연회장에 들어선 로든마이어 백작은 곧장 다른 귀족들을 찾아갔다.

자작뿐만 아니라 같은 계층인 백작 위에 있는 자들이 미소 지으며 그를 환대했다. 그것만 봐도 로든마이어 백작의 위치가 상당히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홀로 남은 베르덴은 잠시 연회장 전체를 주시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면서도 베르덴을 향해 힐끗거리는 눈빛들. 아무래도 서로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대부분 백작급에 위치한 귀족으로서, 평민에게 먼저 다가가는 건 여러모로 좋은 모습은 아닐 테니.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라. 로든마이어 백작의 말대로야.'

베르덴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고 중앙에 있는 식탁에 다가갔다.

그 위에 차려진 고급 음식들. 수도 리드론은 해안가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신선한 해산물이 손질된 채로 얼음 더미 위에 놓여 있었다.

'왕성에서 주최하는 연회 아니랄까 봐, 하나하나가 귀한 재료들이군.'

껍질에 황금빛이 감도는 굴.

따로 장갑을 착용할 필요 없이 가볍게 염력을 일으켜 들어 올렸다. 레몬즙을 뿌리고 굴을 한입에 삼켰는데 해산물 특유의 비린 맛이 전혀 없었다.

씹을수록 단맛이 올라와 미각을 자극했다.

꽤나 마음에 드는 시작이었다.

이어서 공국 왕성의 요리사가 선보인 요리들을 죽 훑어봤다. 죄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번거로운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먹기 쉽게 숟가락 위에 세팅되어 있거나 작은 스틱이 꽂혀 있었다.

하인이 서빙해 준 샴페인과 함께 요리들을 하나씩 맛봤다.

연회는 사교계의 전장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사교계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주변에 널린 요리들을 즐기는 수밖에. 안 그래도 고급 요리에 관심이 많은 베르덴이었기에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것이 베르덴이 연회를 즐기는 방법이었다.

"흠흠."

그때, 한 젊은 귀족 무리가 다가왔다.

나이로 보아 연회에 모인 귀족들의 자제일 터. 아마 귀족들 자신이 직접 찾아오는 대신 자식들을 보낸 거겠지.

'...?'

그런데 그들 뒤에서 풍채 좋은 귀족이 나타났다.

"비켜라."

"아...! 실례했습니다, 다비르크 백작님."

루크넌의 고용주, 다비르크 백작.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귀족 자제들이 물러났다. 뚱뚱한 몸체에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온 다비르크 백작이 와인으로 가득 찬 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나는 다비르크 백작이다. 백작 중에서도 풍요로운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가문이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자기소개였다.

물론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기에 형식상의 예의를 취했다.

"애셔입니다."

"어제 펼쳤던 시합을 보니 소문대로 상당한 마법 실력을 가졌더군. 돈이고 뭐고 원하는 대로 줄 테니 내 밑에서 일해라."

상당히 거창한 제안이었다.

베르덴이 잠시 고민하는 척하고는 되물었다.

"무엇이든 말입니까?"

"그래, 무엇이든지."

다비르크 백작이 자신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건 우리 다비르크 가문의 가보로, 늑대인간의 심장을 가공해 만든 매직 아이템이다. 착용자의 활력을 증강해, 잔병에 면역이 되고 건강히 오래 살 수 있도록 해 주지. 설령 왕족이라 할지라도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아주 귀한 물건이다. 이것만 봐도 우리 가문의 재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을 터."

그리고.

"내 밑에 들어온다면 평민 이상의 삶을 누리게 해 주마. 그리고 원한다면 내 가신의 여식과 혼인을 맺게 하여 공국의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도록 하겠다."

지극히 권위적이고 오만한 말투.

사실 이게 귀족의 평균이었다. 신분보단 능력을 우선시하는 로든마이어 백작이 예외였다.

거절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 다비르크 백작의 자신감 가득한 시선.

당연히 베르덴에게는 제안을 받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완곡한 거절도 딱히 필요 없었다. 그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로든마이어 백작께 여쭤보겠습니다."

"뭐? 로, 로든?"

다비르크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분명 어제까지 수집한 정보로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고 들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고용된 것은 단순히 그레이에서부터 연이 닿았기 때문이라고.

'설마 내가 잘못 안 건가? 아니면... 로든마이어 백작, 그놈이 미리 손을 써 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위세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백작 본인은 타인이 자신의 것에 손대는 걸 굉장히 싫어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의 가문에 들어간 마법사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게 알려지면 로든마이어 백작의 심기가 크게 불편할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로든마이어."

들릴 듯 말 듯 욕을 뱉은 다비르크 백작이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곤 불쾌함을 훤히 드러내며 휙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베르덴이 샴페인을 머금었다.

'역시 편리하군.'

잠자코 연회에 참석하는 대신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받은 조건, 바로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제안을 하든, 단 한마디로 거절할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 예상대로 귀찮은 일을 방지하는 역할로는 아주 쓸 만했다.

잠시 후, 다른 귀족 자제들이 찾아왔다.

로든마이어 백작의 이름을 말하니 도망치듯 떠나갔다.

이번엔 귀족 영애가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로든마이어 백작의 이름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가 된 베르덴은 느긋하게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긴 했으나 더 이상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시선들 중에는 베르덴의 감각을 거슬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슬쩍 시선만을 돌리자, 저 멀리서 검은 머리 사이사이에 흰머리가 나있는 한 귀족이 베르덴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시선에서 적의... 는 아니지만 못마땅해하는 듯한 감정이 느껴진다.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귀족이기에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누군가가 등 뒤에서 다가왔다.

"정말로 무섭게 노려보시는군. 그렇지 않나?"

옷 아래로 근육질의 체격이 훤히 드러나는 사내.

그의 옆에 있는 책상 위에는 스무 개가 넘는 숟가락과 여덟 개나 되는 잔이 비어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듀켈이네. 저 멀리서 자네를 보고 있는 라비슈른 후작 각하의 장남이지."

공국의 두 개의 기둥 중 하나, 라비슈른 후작 가문.

듀켈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베르덴이 마주 잡았다.

"애셔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네, 애셔. 범상치 않은 자라고 들었는데... 연회장에 오길 잘했군."

듀켈이 한 입 크기로 잘린, 치즈 랍스터가 담긴 숟가락을 들었다.

"자네 이거 먹어 봤나? 어떤가?"

"맛이 좋더군요. 특히 재료가 신선했습니다."

"그렇겠지, 막대한 양의 돈을 쏟아부어 만든 요리니. 연회란 건 가문의 재력과 인맥을 표방하거든. 그런데 내가 워낙 먹성이 좋아서 연회만 열렸다 하면 모두가 내 눈치를 보기 바쁘지. 재작년에는 연회 내내 왕성의 주방을 털다 공왕 전하께 한 소리 들었다면 믿겠나?"

듀켈이 웃으며 요리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걸론 부족했는지 다른 요리도 같이 입에 털어 넣고는 와인을 물이라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도 품위가 있는 걸 보아 뼛속까지 귀족인 건 분명해 보였다.

"음, 맛있군. 그런데 자네에게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아버지께서 자네를 그리 보고 있었던 거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짚이는 바는 없었다.

애초에 초면이니.

듀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그거 특이하군. 내 아버지는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아닌데. 아, 혹시 다비르크 백작 때문인가?"

"백작 각하 말입니까?"

"다비르크 백작은 허영심이 많은 귀족이지. 가문의 위상으로 개인의 무능을 가리는 귀족. 몇 년 전 가주가 바뀐 뒤로 영지의 평가는 나락으로 치달아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근데 그만큼 겁도 많아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족속인,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지. 내 아버지는 그런 부류를 굉장히 싫어하고."

겸손을 모르는 자를 싫어한다라.

어쩌면 어제 베르덴이 한 발언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신경 쓸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 와서 발언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이 라비슈른 후작에게 잘 보일 이유는 없었으니.

이어 듀켈은 몇몇 시답잖은 질문들을 하고는 다른 요리를 찾아 자리를 떠났다. 후작가라 그런지 확실히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준결승이 다가왔다.

* * *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베르덴과 잭이 준결승 상대를 가볍게 눌렀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 3위와 4위가 결정된 후에 결승이 시작되었다. 마법진 안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잭이 나지막이 물었다.

"결승도 적당히 할 생각인가?"

"시간을 끌 생각은 없습니다."

베르덴이 당당히 답했다.

잭이 지금까지와의 시합 상대와는 다르다고 해도 자신 있었다.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하지."

순간 잭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살기가 아닌, 가진 힘을 다하겠다는 전력이 느껴졌다. 가볍게 볼 상대는 아니다. 베르덴도 그에 대답하듯 마력을 끌어 올렸다.

달라진 기류.

관객들이 숨을 죽였고, 레이크가 시작 신호를 울렸다.

───콰앙!

직전 시합들과는 다르게 먼저 돌진한 잭.

멀리서도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의 육중한 움직임이었다. 베르덴은 스태프에 번개를 부여함과 동시에 스태프에 저장된 마력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잭의 검과 부딪칠 시점, 마력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아아!

마법진이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 푸른빛이 번쩍이며 잭이 몇 발자국 뒤로 밀려났지만, 상처는커녕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역시 근접전으로 상대하는 건 무린가.'

베르덴이 최대한으로 위력을 끌어 올린 근접 일격으로도 고작 이 정도.

역시나 적당히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었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잔류 번개가 낮게 뇌명을 지르며 궤적을 따라 잔상을 남겼다.

시작과 동시에 벌어진 예상외의 충돌.

그 화려한 개전(開戰)에 귀족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82화 결승 (2)

결승 시합은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달랐다.

잭이 검을 휘두르면 거센 바람이 일며 검기가 날아갔고, 베르덴은 이제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다양한 원소 마법으로 대응했다.

화려하고 위력적인 광경.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격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법과 검술이 서로 부딪치는 그 모습에 너 나 할 것 없이 몰입했다.

각자 응원하는 참가자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시합 자체를 즐겼다. 내기가 걸려 있는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기도 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공왕이 페르드에게 말했다.

"어떤가. 자네가 보는 애셔의 실력은."

"...상당하군요. 숨겨 둔 수가 있어 보이는데도 저 정도일 줄은. 소울 트리를 토벌했다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차후 어떤 마법사가 될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군요."

마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하게 정진하는 마법사.

아카데미다 마탑이다 하는, 출신을 중요시하는 요즘 세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뭘 이루고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권력과 부를 위해서 쌓은 실력은 아닌 듯싶은데.... 마치 옛날의 마법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저렇게 고리타분한 마법사가 많았다.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하나하나 탑을 쌓아 가는 자들이 말이다. 그렇기에 페르드는 애셔란 마법사의 미래에, 마법사로서 기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한계 위계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위치가 정해지기에, 꿈을 좇는 자들이 턱없이 부족해진 세상이라서 더욱 그러했다.

"저도 한때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이룰 수 없었죠. 그게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니."

"그래서 원망스러운가? 작금의 시대가?"

"옛날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여기서 전하를 모시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페르드의 한계 위계는 5위계.

한때는 그 틀을 벗어나고 싶어 피나도록 노력했다. 강제적으로 수면을 중단하고 2주 가까이 밤을 새우다 졸도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무리한 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한계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각자의 그릇. 5위계 마도사라는 위치는, 페르드가 하늘에게 부여받은 한계였다.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러나 마법사로서의 삶까지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페르드는 고개를 내리고 자신이 있을 만한 위치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막 독립을 마친 리비안트 공국이었다.

"그래, 자네 덕분에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광경을 기억하는 자들은 마법사만 보면 숨도 못 쉬고 있다던데."

"그때는 제가 좀 과하긴 했죠."

휴양도시 브리엔테, 거기서 페르드는 아주 대단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뒷골목에 자리 잡아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쓰레기들을 단신으로 쓸어버렸으니.

그 탓에 더러운 피가 많이 묻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무구한 피를 살릴 수 있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뿌듯했다.

뒷골목 대부분이 피바다가 되어 여러모로 안 좋은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공국이 만들어졌다.

보다 이상적이고 보다 평화롭게.

리비안트 공왕이 공국의 귀족들을 바라봤다.

예전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이 활기가 가득한 모습. 에스티리아 왕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얼굴들이었다.

공국을 위해.

막 독립을 했을 당시의 다짐은 22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란다.

* * *

시합은 잠시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가팔라진 잭의 호흡. 그 상대인 베르덴 또한 마찬가지였다.

잭이 베르덴을 주시했다.

비행을 쓰면서 그렇게나 과격하게 움직였음에도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다. 마법사임에도 이 정도로 육체적인 단련을 거듭했다니,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는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고 있다.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을 토벌할 정도의 마법은 아직 보여 주지 않았으니.

더해서 이 마법진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접전을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시합이란 규칙과 공간은 잭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전력을 펼쳤는데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 치명상을 입힐 정도의 살수(殺手)를 배제하긴 했으나 그건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지금까지 봐 온 4위계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노력과 재능. 무엇 하나 그에게 필적하는 마법사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대로 시합을 이끌어 나가는 건 소용없다.

시합 자체는 화려할지언정 잭은 서서히 밀리다가 서서히 패배할 것이다. 용병으로서 숱한 전장을 겪었으나 그런 볼품없는 마무리는 잭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잭이 검을 날카롭게 세웠다.

이게 최후라는 듯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도신에 명확한 형체가 없는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무색의 기.

일반적으로 붉은색을 띠는 기운과는 달랐다.

베르덴이 가늘게 눈을 떴다.

'한 방으로 끝낼 생각인가.'

바라는 바다.

베르덴도 마찬가지로 방대한 마력을 스태프에 집중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푸른 기류. 그와 동시에 부서진 지면의 일부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하나로 뭉쳤다.

화염역병 이상으로, 베르덴이 정신을 한데 집중해야 쓸 수 있는 마법 중 하나.

화아아아악!

화염과 대지, 거대한 암석의 창이 붉게 달아오르며 그 열기가 대기를 타고 퍼져 나간다. 안팎을 차단하고 있던 마법진조차 감당하지 못한 열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피부가 화끈거리는 걸 느낀 귀족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

"...."

베르덴과 잭.

둘이 서로를 마주봤다.

먼저 선수를 취한 건 베르덴이었다.

<용암격창>

마법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정면에서 닥쳐 오는 그 열기와 압력을 견뎌 내고 있던 잭이 눈을 번뜩였다.

무섬無閃

콰아아앙!

무형의 검기와 마법이 충돌했다. 그 여파에 돌풍이 일며 한계에 다다른 마법진에 금이 갔다.

"...당장 마법진을 보수해라!"

페르드의 명령에 왕성의 마법사들이 달려들었다.

자칫하면 귀족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 다급하게 새로운 마법진을 만들어 부서진 마법진의 외벽을 보호했다.

귀족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시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용암으로 이뤄진 창과 검기가 마찰을 일으키는 광경.

대체 어디 가서 이런 걸 볼 수 있을까. 모든 순간 하나하나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때, 검기가 베르덴이 만든 용암의 창을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박살 날 듯한 베르덴의 마법. 이걸로 승패가 갈렸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이내 검기를 집어삼킨 용암 창이 잭에게 육박했다.

"...!"

피할 수 없다.

잭이 가까스로 지면에 검을 박아 검 면으로 몸을 가렸다.

콰드드드드득!

용암 창이 부딪치며 그대로 잭이 휩쓸려 나갔다. 간신히 버티고 있는 다리가 지면에 상처를 남겼고, 이어 마법진까지 박살 내고 나서야 마법이 사라졌다.

지글거리는 대지.

순간 귀족들은 잭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흙먼지가 가라앉자 잭은 여전히 검 면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강력한 신체 능력으로 그 마법을 정면에서 견뎌 낸 것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검.

가만히 있던 잭이 고개를 들고 검을 들었다. 전보다도 위압적인 기세. 그러나 베르덴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딘 순간, 그의 신형이 무너졌다.

곧바로 레이크가 생사를 확인했다.

다행히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고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치명상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방금의 충격에 잠시 기절한 것일 뿐이었다.

이것으로 승패는 결정되었다.

"승자! 애셔!"

레이크가 결승이 끝났음을 알리자, 귀족들의 중심에 있던 로든마이어 백작이 기립해 박수를 쳤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진심으로 기쁜 듯한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이다.

이어서 베르덴에게 돈을 건 귀족들이 갈채했다. 그리고 내기에서 진 귀족들도.

정원에 애셔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우승을 거머쥔 베르덴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계산이 빗나가지는 않았군.'

마법서로 강화된 땅 속성의 마법. 기존의 마법보다도 훨씬 위력이 컸기에 부득이하게 화염 쪽의 위력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상대가 적이었다면, 베르덴이 전력을 내보였다면, 잭은 즉사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 열기에 치명상을 입었겠지.

그걸 이렇게나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으니, 베르덴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결과였다.

레이크가 다가가 베르덴의 팔목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이번 대행사의 승자는 애셔라고 세상에 확인시키듯.

이렇게 올해의 대행사는 막을 내렸다.

* * *

"더할 나위 없는 결과였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으나 목소리에는 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활기가 가득했다.

백작은 대행사가 끝난 이후로, 베르덴에게 대행사의 연회에 버금가는 최고급 식사와 더불어 각종 대우를 해 주었다.

바깥으로 나갈 필요도 없이 말만 하면 사용인들이 뭐든지 베르덴의 방으로 갖다주었다.

'대체 뭘 받길래 그러는 건지, 원.'

뭐, 곧 알 수 있게 되겠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 왕성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대행사의 포상을 공왕에게 직접 하사받으라는 내용이었다. 베르덴은 로든마이어 백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향했다.

왕성의 정문에 도착하자 시합에서 2위를 한 잭과 그를 데려온 볼디아느 백작도 있었다. 이하 3위도 마찬가지.

그리고 시합과 관련이 없는 백작이 한 명 있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말했다.

"공왕 전하께서 준비하신 포상은 총 여섯인데, 포상을 받는 귀족은 넷뿐인가. 그렇다는 건 여기 셋 중에 시합의 포상과 더불어 영지 평가에 대한 포상을 같이 받는 자가 두 명이 있다는 뜻이군. 잘하면 시합과 영지 평가의 1위가 같을지도 모르겠어."

"흥. 설마 그럴 리가. 공국 개국 이래로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적당히 시합에서 1위를 한 것에 만족하게. 이번 영지 평가의 1위는 나일 테니까 말이야. 괜한 기대심은 접어 두는 게 몸에 이롭네."

볼디아느 백작이 단언했다.

시합의 우승을 놓친 건 뼈아픈 일이지만, 영지에 대한 평가는 그걸 만회할 정도라고 확신했기에. 그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로든마이어 백작이 작게 비웃었다.

"그거 하나로는 부족하지."

"...쯧."

기분 나쁜 웃음에 볼디아느 백작이 혀를 찼다.

그 로든마이어가 이렇게나 대놓고 속내를 드러낼 정도면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다는 뜻일 터.

더군다나 올해 걸린 포상이 역대급으로 크다는 정보를 왕성 내부에서 입수했기에, 볼디아느 백작은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 귀족의 신경전에 다른 귀족들은 모른 척 무시했다.

끼어들었다가 괜히 불똥만 튈 뿐이었다.

잠시 후, 왕성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왕성에서 근무하는 행정관이 직접 찾아왔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소. 그럼 따라오시오."

83화 포상

수도 리드론의 왕성, 리 엔테(Re Ante).

행정관을 따라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백색의 복도를 지났다. 일정 구간마다 공국 기사들이 철저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그 약간의 빈틈마저 놓치지 않는 마법 장치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한 국가의 정점이 거주하는 성에 걸맞은 엄중한 경비였다.

'이보다 더 큰 나라는 어떤지 궁금하군.'

베르덴은 행정관의 속도를 따라, 왕성 내부를 구경했다. 신분상 평민이 이런 왕성에 올 기회는 흔치 않으니.

그러다 보니 어느새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출입 허가가 떨어지자 마법 장치가 연쇄적으로 작동하며 거대한 문이 열렸다.

입구에서 왕좌까지 깔린 푸른 융단.

왕좌에는 리비안트 공왕이 위엄 있게 앉아 있었으며, 엔드릭이 그의 곁을 홀로 지키고 있았다.

로든마이어 백작을 필두로 앞으로 걸어나가, 차례로 예를 취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얼굴을 보니 제대로 휴식을 취한 모양이야."

"전하의 은총 덕분입니다."

"은총은 무슨. 그런 시답잖은 예의는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다른 귀족들도 없지 않나. 어차피 자네들의 머릿속도 포상에 대한 걸로 꽉 차 있을 테고."

"저희는...."

공왕은 반론은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튕겼다.

알현실 밖에서 행정관들이 차례로 상자들을 들고 왔다. 동, 은, 금으로 장식된 상자들이었다.

공왕 앞에 놓인 기다란 책상.

그 위에 도합 여섯 개의 상자가 일렬로 놓였다.

"그럼 시합에 대한 포상부터 시작하지. 세론, 앞으로 나와라."

호명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준결승에서 잭에게 패배하고 시합에서 3위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공왕이 동으로 된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3위를 한 세론에겐 이 '미스릴 단검'을 하사한다. 유용하게 쓰도록."

"감사합니다! 전하!"

별다른 마법 효과는 없는 미스릴 단검.

색깔로 보아 결코 많지 않은 양의 미스릴이 첨가된 듯 보이나 디자인이 매우 뛰어났다. 경매에 올리면 돈깨나 받겠지.

"다음은 잭."

이번엔 2위였다.

공왕이 은 상자에서 금속 허리띠를 꺼냈다.

"2위를 한 잭에게는 '강완의 허리띠'를... 음, 자네처럼 근력이 강한 전사에게 큰 도움은 되지 않겠군.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잭이 허리띠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고작 순위 하나 차이지만, 미스릴 단검보다 훨씬 값어치 높은 상품에 세론이 부럽다는 듯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다.

이윽고 공왕이 금 상자 앞에 다가섰다.

"그럼 마지막이군. 애셔, 앞으로."

대망의 1위.

금 상자를 열자, 짙은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반지 하나가 나왔다.

"1위를 한 애셔에게는 '혹한의 반지'를 하사한다. 알다시피 모조품에 불과하지만 원본 성능의 8%, 전력으로 시동하면 최대 13%까지 끌어낼 수 있지. 물론 내구도가 많이 소모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원소 마법사인 자네에게 큰 힘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혹한의 반지를 착용했다.

그러자 체내의 마력이 일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말로만 듣던 속성의 변질 현상이었다.

'고작 1할조차 되지 않지만... 기대되긴 하네.'

혹한의 얼음이라.

하루빨리 실전에서 마법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베르덴이 물러가고, 귀족들의 차례가 다가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장 가치가 낮은 상자부터 시작했다.

동 상자에서 나온 포상에는 한 해 영지세를 일부 감면한다는 문서가 들어 있었다.

이제 금 상자와 은 상자가 남았다. 즉, 1위와 2위 결정전이었다.

귀족은 3명이 남아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유력한 후보는 로든마이어 백작과 볼디아느 백작 두 명이었다.

세론을 데려왔던 백작은 아쉬움에 몰래 한숨을 쉬었다.

알현실에 흐르는 긴장감.

이내 공왕이 은 상자를 열며 호명했다.

"볼디아느 백작, 앞으로."

순간 두 백작의 희비가 교차했다.

이걸로 로든마이어 백작이 1위로 확정된 셈. 볼디아느 백작은 공국 최외곽에 있는 개척지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상당히 큰 포상이었으나 백작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윽고 로든마이어 백작의 이름이 불렸다.

"시합 1위와 영지 평가 1위라. 이거 참, 공국이 탄생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군. 아무래도 이번 대행사의 주인공은 자네인 모양이야."

"영광입니다, 전하."

공왕이 금 상자에서 총 두 개의 문서를 꺼냈다.

하나는 카제르단 능선에서 발견된 은광 채굴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작년 부도당한 상회에서 압류한 마석 갱도에 대한 채굴권이었다. 스케일이 다른 포상에 베르덴이 아연실색했다.

'미쳤군.'

아무리 대행사라고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있는 영지 평가에 대한 포상으로는 과했다. 정상적으로 마석 갱도와 은광이 운영되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테니.

물론 공왕 나름대로의 계산하에 내린 판단이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막대한 포상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로든마이어 백작.

그가 베르덴과 눈을 마주치자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오히려 베르덴에게 나쁘지 않았다.

그 포상에 걸맞은 보수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백작은 성격상 그럴듯한 트집을 잡고 보수를 깎을지언정, 막무가내로 터무니없이 낮은 보수를 책정할, 몰염치한 귀족은 아니었다.

"이걸로 올해 대행사는 끝이 났군. 모두 수고했다. 이만 자택으로 돌아가도록."

"예, 전하."

시합과 영지에 대한 포상을 전부 하사했다. 그러나 베르덴은 아직 받을 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애셔, 자네는 남아라."

* * *

베르덴이 공왕과 엔드릭을 따라 왕성의 중심으로 향했다.

공왕 본인임에도 근위 기사들은 철저하게 절차를 밟았다. 베르덴 또한 공간가방을 기사들에게 잠시 맡겨야 했다.

"여기가 왕성의 창고, 리 에론테(Re Eronte)다."

알현실보다 더욱 견고하고 거대한 문이 눈앞에 있다.

공왕이 손을 대자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방에 가득한, 다양한 마법 물품이 보관되어 있는 유리 상자들.

전체적으로 보면 마탑의 보물고에 비해 확실히 규모는 작다.

손만 대도 침입자를 죽여 버리는 위험한 마법진도 없었다. 여기 있는 걸 전부 합쳐도 마탑주가 애지중지하는 컬렉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공국은 건국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역사가 짧지. 그래서 창고 규모가 작긴 하지만, 내 나름대로 알차게 모은 것들이다. 어떤가?"

"대단하군요."

빈말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베르덴의 눈길을 끌 만한, 가치 높은 것들도 있었으니. 22년밖에 되지 않은 나라치고는 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저건?'

창고를 구경하고 있던 베르덴이 홀린 듯 앞으로 걸어갔다.

유리 반대편으로 보이는, 검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에 반사된 빛이 무지개 모양을 띠고 있었다.

공왕이 다가왔다.

"마법사 아니랄까 봐 좋은 건 알아보는군. 이 목걸이의 이름은 '삼원색의 중심'. 세 개의 원소를 합성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설령 서로가 정반대에 있는 속성이라도 상관없이."

두 개의 속성을 합치는 원소의 합성 마법은 고난이도의 기술이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마법이 폭주해 마법사 본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실제로도 이따금씩 일어나는 사례였다.

'그런데 세 개의 속성을 합칠 뿐만 아니라 대척점에 있는 속성까지 합칠 수 있다고?'

전자는 불가능에 가깝고 후자는 마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치를 벗어난 효과.

"...아티팩트입니까?"

"그래.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아티팩트지. 이걸 사용한 원소 마법사 중 멀쩡히 살아남은 자가 없으니. 죄다 마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사하거나 주변 일대와 함께 휩쓸려 나갔다. 아티팩트라고 해도 쓰질 못하니 애물단지처럼 여기에 모셔 놨지."

그러자 베르덴이 눈을 빛냈다.

애물단지라는 뜻은 사용할 만한 자가 없다는 뜻. 한 명의 마법사로서 당연히 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험하면 어떤가.

베르덴은 그걸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설마 이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원하면 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지. 소울 트리 토벌에 대한 치하와 나와 한 약속의 대가로 아티팩트는 너무 과해. 더군다나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 착용자 중엔 원소 계열의 마도사도 있었으나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리고 보상은 이미 정해 놨다. 엔드릭."

엔드릭이 로브가 장식되어 있는 유리에 다가갔다.

잠금장치를 풀고 로브를 꺼내 공왕에게 전했다. 짙은 녹색을 띠고 있는 로브였다.

"이 로브의 이름은 '유자(遊子)의 로브'. 한 나그네가 이걸 입고 대륙의 절반을 횡단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지.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효과도 가지고 있다."

"감정해 봐도 되겠습니까?"

"음? 감정도 할 줄 아나? 그래, 한번 해 봐라."

로브를 건네받은 베르덴이 감정을 사용했다.

◇ 유자(遊子)의 로브

⦁ 상태 보존

⦁ 체온 유지

⦁ 물리 저항(중)

⦁ 전 속성 저항(중)

⦁ 하루에 한 번 투명화 사용 가능

⦁ 하루에 한 번 선풍의 장막 사용 가능

'평범한 마법 물품이 아니군.'

지금 착용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효과를 지닌 로브였다.

전 속성 저항과 더불어 별개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니. 거기다 투명화와 선풍의 장막은 5위계의 마법. 횟수가 제한되어 있으나 이런 능력을 지닌 로브는 결코 흔치 않았다.

"자네의 장비 중 로브가 제일 빈약해 보이기에 준비했지. 이거라면 보수로는 충분하다고 보는데?"

"감사히 받겠습니다."

충분하고말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수확이다.

왕성 창고에서의 용건은 이걸로 끝.

셋은 창고를 뒤로하고 문으로 향했다. 베르덴이 슬쩍 삼원색의 중심을 바라봤지만, 공왕은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깝군.'

베르덴은 아쉬움과 만족감을 가슴에 담고 왕성에서 나왔다.

정문을 나서고 천천히 수도를 거닐며 백작의 자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레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잭?'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잭.

베르덴에게 다가온 그가 난데없이 물었다.

"애셔, 혹시 벨디른 공화국에 갈 생각 없나?"

"없습니다."

어째서 잭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베르덴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망설임 없는 즉답에 잭이 눈을 깜빡였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조금 실망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실례했다."

그 말을 남기고 잭은 발걸음을 돌렸다.

...저 말 한마디 하려고 이제까지 기다린 건가? 뭐, 이미 가 버렸으니 깊이 생각할 건 아니었다.

잭에게서 관심을 끊은 베르덴이 사고를 전환했다.

'그보다 글러트니가 나타나지 않는군.'

귀족들이 수도에 모인 대행사 중에 뭔가 움직임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잠적할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너무도 조용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일을 벌여 놓고 이제 와서 숨을 리가 없다. 분명 곧 무슨 일이 일어날 터. 그게 뭐든 간에 평범한 사건은 아닐 것이다.

베르덴은 확신했다.

* * *

날이 저물어 어두운 가도에서 세 대의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비르크 백작 각하, 밤이 깊었는데 일단 야영을 하시는 것이...."

"멈추지 말고 자택으로 가라."

"하지만 위험...."

"위험은 무슨! 매직 아이템으로 밤길도 훤히 볼 수 있는데! 그런 말 할 시간에 제대로 말이나 몰아!"

대답 대신 고삐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질을 낸 다비르크 백작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빌어먹을 로든마이어!'

다비르크 백작은 평소에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외모나 가문이나 무력이나 지력이나 뭐 하나 그를 이기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데려온 마법사가 무참하게 박살 났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찾아가 제안을 했음에도 애셔라는 발칙한 마법사는 찾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화가 나겠지.

"...."

반대편에 앉아 있던 루크넌이 슬쩍 백작을 흘겼다.

아카데미 교수라고 치켜세울 땐 언제고, 전과 달리 찬밥 신세였다. 아마 2차전에서 무참히 패배했기 때문이겠지.

'제기랄!'

루크넌은 애셔에게 분노했다.

이 정도의 치욕을 느껴 본 것은 난생처음. 언제고 이 수모는 갚아 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화를 삭였다.

덜컹!

그 순간, 마차가 급정지했다.

마차가 흔들리자 백작이 벽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무슨 마차를 이따위로 몰아! 죽고 싶나!"

...대답이 없다.

자세히 들어 보니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 같다. 그제서야 이상함을 느낀 백작과 루크넌이 바깥으로 나갔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다비르크 백작가의 기사들이 마차 주변을 지키며 기형적인 생김새를 가진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이형종? 이형종이 갑자기 여기 왜...."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여기는 저런 이형종이 나오는 곳이 아니다. 애초에 공국에 저런 이형종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사들이 분투했지만 사망자가 발생했다. 머리가 뜯긴 기사의 시체를 본 백작이 다급하게 마차에 몸을 숨겼다.

"루, 루크넌! 어떻게든 해라! 내 기사들이 더 죽기 전에 빨리!"

기사들의 목숨을 아까워하는 게 아니다.

가문의 기사가 가진 가치, 그 자체를 아까워하는 것이다.

'마침 잘됐어.'

루크넌이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뭐가 됐든 일단 이 소란을 정리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입지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그때, 검붉은 이형종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섬뜩함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루크넌은 보란 듯이 웃어넘겼다.

'고작 이형종 따위가.'

지팡이 끝에 모인 마력.

루크넌이 마법을 발동했다.

84화 방해 (1)

베르덴은 로든마이어 백작과 함께 수도를 떠났다.

당연히 왔을 때처럼 비행정 같은 전략 병기를 이용하는 일은 없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베르덴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백작에게 말했다.

"은광과 마석의 채굴권이라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더군요."

"채굴권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갱도를 만들려면 투자금이 많이 필요한 데다가 은이 얼마나 축적되어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 최악으로라도 손해는 안 보겠다만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3년은 족히 걸릴 거다."

"마석 갱도는 뭡니까?"

"어떤 상회에서 채굴하던 거다. 그런데 도중에 투자를 잘못하는 바람에 부도가 났고 마그누스 은행으로 넘어갔지. 그걸 공국 왕성이 인수했다. 매장량이 절반가량 줄긴 했지만, 폐쇄만 되어 있을 뿐이니 다시 활성화하는 건 어렵진 않다. 생각 이상으로 크게 벌지는 못하겠지만."

로든마이어 백작은 어느 정도 사전 조사를 한 모양. 이미 대략적인 수익을 가늠한 것 같다.

보수를 깎으려고 은근슬쩍 수익을 낮춰서 말하는 것 같은데 아마 착각이겠지.

"그래도 1년에 한 번 있는 대행사의 포상으로는 과한 것 아닙니까?"

"과하긴 하지. 실제로 역대 대행사 중에서 가장 큰 포상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로든마이어 가문만 이득을 보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은광이든 마석 갱도든 귀족 중 누군가가 권리를 가지고 채굴을 해야 했다. 단순히 공왕은 그걸 대행사의 상품으로써 걸었을 뿐이다.

애초에 이러한 사업들은 공왕이 직접 진행하지 않는다.

왕성이 아닌 영지로 이익을 돌리는 것. 채굴권을 쥐여 주는 과정에서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음에도 대행사의 포상으로 내건 걸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공왕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를 발전시키는 걸 우선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왕이 손해를 보는 건 전혀 아니었다.

광물하고 마석.

이것들은 특히나 세율이 높다.

즉, 로든마이어 백작이 버는 만큼이나 왕성의 국고가 풍족해진다는 얘기다.

"영지에 대한 평가가 좋다고 그 막대한 돈을 쥐여 줄 리가 없지 않나. 공왕 전하는 성격이 쾌활하시긴 하나, 너도 알다시피 성격이 급하시지.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계산을 마치신다. 지금의 상황은 공국 전체에 이득이 될 거라고 판단한 후 결정하신 게 자명할 터."

로든마이어 백작은 오랫동안 공왕을 봐 왔다.

그의 평가가 정확할 것이다. 베르덴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제 보수는 뭡니까?"

베르덴은 시합에서 우승했다.

그것이 로든마이어 백작에 대한 평가에 일조한 것은 분명했다.

백작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4억 7600만 엘크. 현찰은 2억, 나머지는 현물로 주지."

소울 트리 토벌 보수보다는 낮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 온 의뢰 중 가장 큰 액수였다.

"그런데 현물이라면...?"

"금괴로 주도록 하지. 원한다면 보석도 가능하다."

현금이 더 편리한데.

고민하고 있자 백작이 말을 이었다.

"보석이 가진 가치는 안정적이다. 대신 투자 가치는 낮은 편이지. 하나 금은 그 반대다. 변동성이 꽤나 높은 데다가, 최근 들어 금값이 오를 기미가 보이더군. 어느 정도 손에 쥐고 있는 편도 나쁘지 않을 거다."

그래,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가방이 있으니 휴대하는 데 불편하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굳이 금괴를 받아야 하나 싶었다.

베르덴은 투자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여차하면 의뢰를 통해 돈을 벌면 그만이었다. 대답이 없자 백작이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 솔직히 말하지. 마석 갱도와 은광 때문에 가용할 현금이 부족하니 그냥 받아라. 너도 대행사에서 로브와 반지를 얻었잖나. 그리고 실종자 의뢰 건에 대한 것도 기한을 미루어 주었고. 웬만하면 그냥 받지?"

그건 그랬다.

베르덴도 대행사를 통해 얻은 것이 많았으니.

그렇다고 로든마이어 백작이 보수를 안 주는 것도 아니고, 현금을 달라고 떼를 쓰는 건 솔직히 말해 염치가 없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양보할 만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보수는 페일을 통해 전달해 주마."

그렇게 마차는 앞으로 나아갔고, 시간이 지나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베르덴은 곧장 도시 코헨으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작이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그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대행사가 끝났으니 자신과 가문에 신경 쓸 차례. 마석 갱도와 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앞으로 태산이다.

영지 운영은 보좌관인 베일론 자작에게 맡기면 될 터. 백작은 며칠간 휴식을 취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누가 죽었다고?"

"다비르크 백작이 피살당했습니다."

사건이 터졌다.

* * *

귀족의 죽음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현 백작 위에 있는 귀족이라면 더욱, 피살당했다면 더더욱. 게다가 공국의 대행사가 끝나고 난 후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 사망한 터라, 왕성 내부가 더없이 시끄러워졌다.

베르덴을 찾아온 리스너.

그가 말했다.

"공국 왕성에서는 정보를 통제하고 제3중앙기사단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원 병력은 주변 영지에 있는 영주들에게 협조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다비르크 백작의 죽음은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당연하게도 사건을 확실히 해결하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는 게 좋다. 그런 와중에 베르덴은 생각했다.

'방주의 정보망은 왕성 내부에까지 퍼져 있던 건가.'

공국에서 기밀로 취급하는 정보를 이리 쉽게 얻다니.

어쩌면 방주의 일원이 공국의 상층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이 말이다.

"그런데 중앙기사단이라고?"

"왕성 직속 기사단 중 하나입니다. 전부 장교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수 정예로 상당한 실력자들입니다. 그리고 두 후작가의 자식이 각각 단장과 부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후작가의 입김이 아닌, 순수한 실력으로 말이죠."

단장.

가드란 후작가의 독자, 루펠 레인스 디 가드란.

부단장.

라비슈른 후작가의 장남, 듀켈 베일 디 라비슈른.

'듀켈이라.'

전자는 모르나 후자는 알고 있다.

연회에서 요리들을 쉴 새 없이 먹어 치우던 그 근육질의 귀족이었다.

중앙기사단에 대한 정보는 이쯤이면 충분했다. 별 쓸모도 없고.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글러트니는 움직인 건가?"

리스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다비르크 백작을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꼬리는 잡았습니다. 하지만 글러트니에서 소모품에 불과한 자들로, 언제든지 잘라 버릴 수 있는 수많은 꼬리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상관없다. 애초에 자를 생각도 없었으니까."

던진 미끼에 반응할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대로 된다면 놈들이 감추고 있는 머리를 드러낼 것이다.

베르덴이 박사의 징표, 글러트니의 앞니를 건넸다.

"그럼 미리 얘기했던 대로 부탁하지."

"예... 그런데 정말로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로크 님이라도 같이...."

"아니,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

로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강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베르덴에겐 걸림돌이다. 글러트니가 숨겨 둔 전력과 맞붙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타인의 목숨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리스너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품속에서 작은 수정을 하나 꺼내 건넸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지?"

"일종의 송신기입니다. 이 수정을 깨뜨리면 특정 마력 파장이 터져 나오면서 그 위치가 방주에게 전달되지요. 그게 '어디든 간에'. 용도가 용도인 만큼 방주에서도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지급되고 있습니다."

위치가 송신되면 방주가 움직인다.

그래서 위험하다. 만약 글러트니와 같은 놈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악용될 여지가 다분하니. 그렇기에 이걸 외부인에게 준 역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건 제 독단입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주저 없이 깨뜨리십시오."

리스너의 호의였다.

그만큼 그가 베르덴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

그렇다고 방주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의 불쾌한 감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베르덴이 수정을 받아 공간가방에 넣었다.

공국에서 암약하고 있는 글러트니.

그 송곳니를 뽑을 차례였다.

* * *

다비르크의 이웃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

한 도시에 모인 그들이 무거운 분위기로 회의를 진행했다.

"대행사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이...!"

한 백작이 분개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다비르크 백작과 깊은 친분을 나눈 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공국 귀족의 일원으로서는 인정하고 있었다.

설령 악연이라도 해도, 백작의 죽음에 분노를 느끼는 건 당연한 감정이었다.

"이런 일은 공국이 탄생한 이래로 처음이 아닌가? 이따금 만용을 부린 귀족들이 부상을 입거나 죽은 적은 있어도, 백작이 이토록 무참하게 살해당하다니."

"단순히 살해당한 것만이 아니다."

로든마이어 백작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비르크 백작가의 기사들이 다비르크 백작을 호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키지 못했지. 지키기는커녕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했다. 뭔지는 몰라도 이 주변에 그만한 위험이 숨어 있다는 거겠지."

"그의 말이 옳다. 당장 원인을 규명하는 게 우선이다. 현장의 흔적으로 봤을 때 이형종이나 아인종일 가능성이 높지만... 인간의 소행일 수도 있지. 흔적을 조작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는 건 누군가 공국의 귀족을 노린다는 소리요?"

"나야 모르지. 어쩌면 다비르크 백작에게 복수심을 품은 자일 수도. 당신들도 알다시피 다비르크 백작은 그리 좋은 성정을 지니지 못했으니까."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사업이든 뭐든 다비르크 백작이 손을 대서 성공한 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속출하기도 하여 몇 번 소란이 일기도 했고.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귀족을 살해한다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어쨌든 왕성에서 오늘 중으로 제3중앙기사단이 올 거요. 그렇게 되면 금방 진상을 파악할 수 있겠지."

일반적인 사건이었다면 영주가 기사를 보내 처리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레이에 의뢰해 믿을 만한 자를 고용하여 처리하든가.

하지만 이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정보를 제한해야 할 상황에서 섣불리 외부인을 끌어들였다간 흉수로 의심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한 국가의 백작이 살해당하는 건 그만한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귀족이 탐탁지 않게 보는 귀족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때, 회의장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낯선 인물들이 들어왔다. 남색을 기조로 한 제복과 갑옷. 리비안트 공국 왕성에서 찾아온 제3중앙기사단이었다.

영주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중 한 백작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잘 오셨소, 루펠 단장. 그리고 듀켈 부단장."

공국을 떠받치고 있는 두 후작가의 자식들.

루펠이 목례했다.

"제3중앙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루펠 레인스 디 가드란입니다. 한 분 한 분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싶지만, 시급한 상황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야 물론이지. 필요한 병력들은 차출했으니 어서 현장으로 가 보시게. 혹시 인력이 부족하다면 우리 가문에서도 힘을 보태지."

상대는 기사이기 이전에 후작가의 자식이다.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게 당연했다. 몇몇 영주도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하자 루펠이 미소 지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펠.

소문대로 성정이 바른 사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무에 열성적이라는 것까지. 곧바로 도시를 떠난 중앙기사단과 도시에서 차출된 수십 명의 병사와 기사가 말을 타고 현장으로 떠났다.

그 모습을 베르덴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야 출발했나."

베르덴이 들고 있는 블랙 아워의 나침반. 그 자침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글러트니에게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목표가 다수이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는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당장 글러트니를 식별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베르덴은 짐작하고 있었다.

글러트니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말이다.

베르덴이 구름 위로 향했다.

서서히 공기가 희박해지고, 마력 소모량이 증가했다. 까마득한 높이는 심리적으로 압박감까지 들 정도. 일반적인 마법사였다면 겁이 나서 엄두조차 내지 못할 고도였다.

극히 드문 일이긴 하나, 실제로 자신의 역량을 착각한 마법사가 호흡곤란이나 마력 결핍으로 인해 추락사한 사례도 있었다.

물론 베르덴은 달랐다.

주위 공기의 밀도를 높여 호흡을 유지하고, 로브로 체온을 보호하며 보다 정교한 비행을 구사한다. 무리는 없다. 그 기반이 되는 신체, 마력량, 마력 조작 능력 등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었으니.

어느새 구름보다 높게 올라간 베르덴.

아래로 보이는 중앙기사단을 따라 현장으로 향했다.

85화 방해 (2)

글러트니는 어째서 다비르크 백작을 습격하고 그 흔적을 그대로 남겨 놓았을까. 하려고 했다면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놈들은 그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간단했다. 글러트니의 지난 행적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납치해, 그 생명력으로 붉은 조각을 만든 것.

그와 마찬가지로 레드헷을 토벌하기 위한 병력들을 재료로 삼기 위한 것이겠지. 그래서 굳이 죽이지 않고 기절시킨 거고.

일반 시민과 달리 단련된 인간들이기에 더욱 많은 생명력을 뽑을 수 있을 터. 이미 놈들은 저번부터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충분히 납득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이곳에도 글러트니가 숨어 있을 터.'

그래서 베르덴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글러트니를 처리하기로 결단한 이상, 놈들이 자유로이 움직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게 돌고 돌아 언젠가 베르덴의 앞길을 막게 될 테니까.

이미 글러트니는 그런 식으로 베르덴을 방해한 적이 있었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중앙기사단을 따라 4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기사들과 병사들이 물 샐 틈 없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어쭙잖게 다가갔다간 발각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룬의 반지 덕에 감각이 강화되긴 했지만 이 거리에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섣불리 마법을 쓰는 건 논외다.

'그렇다면 직접 접근하는 수밖에.'

베르덴이 유자의 로브에 내재된 마법을 발동했다.

<투명화>

투명화는 5위계에 위치한 부여 마법.

기초 마법인 <비가시화>처럼 단순히 모습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전자의 기척마저 흐릿해진다.

투명화를 사용한 베르덴이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이미 경계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덴이 소리 없이 중앙기사단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