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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

'저게 실종된 기사라고?'

베르덴이 대답 없이 우뚝 서 있는 브레넌을 바라봤다.

곳곳에 흠집이 난 갑옷, 핏기가 가신 하얀 피부와 혼탁한 백색으로 물든 눈동자. 무기는 어디다 두고 왔는지 검집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브레넌에게서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아니, 저건 인간보단 언데드에 더 가까웠다. 저런 종류의 언데드가 있다고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보통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브레넌,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

"대답해라, 브레넌!"

상관의 명령에도 브레넌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발칸이 직접 브레넌에게 다가가자, 그제서야 반응을 보였다.

"브레넌, 어서 상황을...."

후웅!

브레넌이 발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주먹을 붙잡은 발칸이 그대로 브레넌을 끌어당겼다.

콰앙!

턱을 후려친 팔꿈치. 이어서 뒷목을 잡아 복부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옷이 일그러졌고, 그대로 짓눌러 지면에 처박았다.

브레넌을 제압한 발칸이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대었다.

"...맥박이 있는 걸 보니 언데드는 아닌 것 같은데,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클라크, 혹시 아는 게 있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백작가에 연락을...."

"발칸 경."

베르덴이 주위에 시선을 향했다.

사사삭. 사삭. 풀에 스치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온다. 하나가 아닌, 집단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이 주위에 모여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브레넌과 같은, 백색의 눈동자를 한 아인종, 마수, 짐승, 인간 등이 서서히 다가왔다.

발칸은 고심했다.

이 자리에서 상황을 정리할지, 아니면 잠시 후퇴할지.

결국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실종자들이 브레넌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구해 낼 방법을 찾는 게 최우선이니. 저항하는 브레넌의 팔과 다리를 재빨리 묶고는, 어깨에 둘러메었다.

"전원 후퇴한다! 교전을 피하고 퇴로를 확보하는 걸 우선해라!"

"제가 뚫겠습니다!"

<파도>

클라크의 마법에 전면에 있던 놈들이 양옆으로 휩쓸려 나가떨어졌다.

기사들은 인간을 제외한 적들을 베어 넘기며 이동했고, 베르덴은 후열에서 추적자들의 접근을 마법으로 차단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쩌어엉!

"큭...!"

멀리서 화살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발칸이 검면으로 막아 내긴 했으나, 그 충격을 흘리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곧이어 흉수가 나타났다.

더러워진 백금의 플레이트를 목에 걸고 있는 궁수였다.

"모험가까지 당한 건가...!"

"단장님! 저기 앞에!"

쿵. 쿵. 쿵.

거체의 오우거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다 놈의 어깨에는 지팡이를 든 인간 마법사까지 있었는데, 베일론 자작의 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퇴로가 막혔다.'

이걸 뚫고 나가려면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터. 거기다 이어지는 추적을 따돌리지 못한다면 근처에 있는 마을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몇 초간 대치하며 발칸이 판단을 내리려던 순간.

<스톤 크랙>

집채만 한, 날카로운 암석들이 오우거에게 쇄도했다.

자작의 수행원이 얼음 구체로 막아 내려 했으나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그어어어어어억!]

────콰과과광!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린 오우거. 그 질긴 가죽에도 불구하고, 신체의 태반 이상이 날아가 버린 놈이 기우뚱 중심을 잃으며 지면에 쓰러졌다.

그 여파로 자작의 수행원이 튕겨져 나갔다.

백금 등급 모험가가 베르덴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활을 쏘기도 전에, 지면에서 거대한 벽이 솟아올라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마법...?"

클라크는 아니다. 수색대의 시선이 자연스레 뒤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게 스태프를 어깨에 올린 베르덴이 말했다.

"가시죠."

49화 백작의 의뢰 (2)

'저게 3위계라고?'

그럴 리가 없다.

오우거를 처리한 마법은 무려 4위계 중위에 있는 마법. 지형을 조작해 벽을 만들어 낸 것 또한 3위계의 마력량으론 턱도 없다. 마력감지를 그렇게 넓게 펼쳤는데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그렇다는 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의미다.

어째서 백작 각하를 속였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로메오! 프렌! 길을 뚫어라!"

발칸의 지휘 아래, 수색대가 약해진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쉽사리 추적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시야에 보이진 않지만 놈들이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숲을 탈출할 수가 없다. 그러다 피해가 확산되기 시작하면,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될 테니.

어쩔 수 없다.

"클라크! 그걸 준비해라!"

"아, 예! 단장님!"

"애셔! 혹시 마력감지로 공터 같은 장소를 찾아 줄 수 있겠나?"

"해 보겠습니다."

베르덴은 곧바로 적합한 위치를 물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진 오두막이 세워져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방향을 틀어 오두막에 도착한 수색대. 클라크가 품속에서 마법 물품을 꺼냈다.

'휴대용 마법진?'

마석을 활용한 일회용 마법 물품.

아티슨 마탑에서 특별 제작 되는 것으로 개인 간의 사적 거래가 불가능한 물건이다.

클라크가 스위치를 누르곤, 휴대용 마법진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주위에 마력의 원이 생기더니 마법적인 문자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폐와 보호의 마법진인가.'

지금 상황에 적합한 마법진이다.

다만, 베르덴의 기준에선 마법진의 성능이 부족해 보였다.

"이걸로 됐... 자, 잠깐!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설명할 시간이 없다.

클라크를 무시한 베르덴은 마력의 실을 뽑아 마법진에 침투시켰다. 막혀 있는 벽을 뚫어 경로를 더 단순화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문자를 따로 추가로 새겨 넣었다. 효율성과 성능을 동시에 높인 것이다.

본래라면 이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엑시드를 착용한 베르덴에겐 이 정도 멀티태스킹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어?"

클라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구축되고 있는 마법진을 도중에 수정하는 게 가능하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마법사의 관점에서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됐다.

반투명한 돔이 오두막과 그 주위를 감쌌다. 후에 수색대를 쫓고 있던, 백금 등급 모험가를 비롯한 몇몇 놈이 어슬렁거리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제서야 수색대는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발칸이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야. 그런데 아까 같은 행동을 하기 전에는 귀띔부터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앞으론 그러겠습니다."

"...좋아. 그럼 일단 휴식을 취하며 계획을 세우도록 하지. 이 숲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도 하고."

발칸이 사로잡은 브레넌을 끌고 오두막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황했다.

"바, 발칸 단장?"

"베일론 자작님?"

실종되었던 1차 수색대와 베일론 자작.

그들이 오두막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 *

'이래서 마력감지에 잡히지 않았던 건가.'

베르덴이 바닥을 둘러봤다.

오두막 안에 새겨져 있던 은폐와 보호 마법진. 1차 수색대가 지니고 있던 휴대용 마법진 덕분에 자작 일행은 겨우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베일론 자작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로든마이어 백작님께서 단장을 보낼 주실 줄이야.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군. 겨우 빠져나갈 수 있겠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발칸의 물음에 자작이 답했다.

"...카제르단 능선에 있는 마을을 떠나 백작가에 돌아가려던 중, 숲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비명 소리 말입니까?"

"그래서 구하러 갔지. 영주민을 보호하는 건 귀족의 의무이지 않나. 여기가 백작령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런 생각도 있긴 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자작에겐 수행원들이 있었으니까. 몇 번이나 타 영지에 방문하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자신을 지켜 준.

그런데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우리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어. 시끄럽게 들리던 비명마저도 갑자기 사라졌지. 그리고 거기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나무...?"

"그래, 불길한 느낌이 드는 회색 나무였다. 나는 수행원들에게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 보라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오싹한 기운이 뒷목을 스치더군."

자작 일행들은 위험을 직감했다.

안전을 위해 서둘러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나무로 위장하고 있던 트런트들이 길목을 막기 시작했고, 백색 눈동자를 한 놈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분투했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발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으신 겁니까?"

"놈들은 우리들을 죽이지 않고, 회색 나무 앞에 던져 버리더군. 그러자 회색 뿌리가 움직이더니 우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건... 뭐랄까.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게, 생명력 자체를 흡수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

몸을 옭아맨 뿌리는 너무도 단단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생명력이 다한 수행원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죽음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차 수색대가 나타나 그들을 구출했다.

옆에 있던 로드론 기사단의 부단장이 설명을 보충했다.

"그렇게 추적 끝에 자작님과 수행원 둘을 구할 수 있었지만... 도저히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트런트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백색 눈동자 중에 강한 놈들이 많더군요."

"백금 등급 모험가까지 있는 것 같던데."

"예, 그 외에도 오우거나 리프쿼치 같은 위험한 아인종이나 마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브레넌, 케한, 세르간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멸했을 겁니다."

"뭐?"

발칸이 브레넌을 가리켰다.

"브레넌이 죽었다면... 여기 있는 브레넌은 뭐지?"

"그 회색 나무는 죽은 자들을 부릴 수 있는 걸로 보인다. 생명력이 전부 빨아먹힌 내 수행원들도 백색 눈동자가 되어 우리를 공격했지. 그리고 놈들을 죽이면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군."

"그렇다면 되살릴 방법은...."

"없다. 이미 죽었으니까. 저건 그 나무가 조종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해."

으득. 발칸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부하의, 기사의 고결한 희생을 이딴 식으로 더럽히다니...!

"분노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앞을 생각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다.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지?"

자작의 물음에 발칸이 답했다.

"본래 실종자들을 구하는 대로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잡음 없이 이 숲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됩니다. 죽은 사람을 조종한다니, 자칫 피해가 어떻게 확산될지도 감히 예측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

"여기서 섬멸하겠습니다."

콰득! 발칸이 브레넌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하얀 무언가가 빠져나가더니, 육체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졌다.

백색 눈동자를 한 인간. 어쩌면 되살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기에 힘을 조절했지만, 죽은 자라면 망설임은 없다.

로드론 기사단장, 부단장 그리고 휘하 기사들과 베일론 자작 및 그 수행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데 질문이 좀 늦었다만, 저자는 대체 누군가?"

자작이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상대는 귀족. 베르덴은 예를 갖춰 대답했다.

"애셔라고 합니다."

"로든마이어 백작 각하께서 고용하신 마법사입니다. 이 친구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호오, 그거 놀랍군."

마지막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힘을 숨기고 있던 마법사까지. 전력은 충분하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검을 쥔 발칸이 수색대... 아니, 토벌대에게 말했다.

"목표는 회색 나무. 방해물들은 백작 각하의 영토에서 모조리 지워 버린다. 페리스와 고븐 그리고 수행원들은 자작님 곁을 지키고."

"예, 단장님!"

다음으로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애셔, 자네는 독단적으로 움직여도 좋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발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우거가 한 방에 쓰러지던 광경을 떠올렸다.

"자네가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쉽게 당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우리와 손발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 따로 움직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지. 그러니 우리가 시선을 끄는 동안, 자네는 그 회색 나무의 위치를 찾아내어 이 신호탄을 터뜨려 주게. 그럼 곧바로 달려가겠네. 하지만 도중에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합류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토벌을 시작한다.

* * *

로든마이어 백작가는 검술의 명가로 유명하다.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세대가 지날수록 발전을 거듭한 고유의 검술. 공국의 검사 중 서열을 따지자면, 현 로든마이어 백작은 겉모습과 달리 상위에 해당하는 강자였다.

중년에 나이에 이르러 육체가 약해졌다고 한들, 그 노련함은 젊었을 적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 백작의 직속 기사단인 로드론이 강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백작가에서 고유 검술의 일부를 물려받았으며, 충성심 또한 가슴속에 충만했으니. 그중 기사단장 발칸은 다른 기사들과는 격이 달랐다.

서걱! 촤아아악!

발칸의 검이 번쩍이며 적들을 베어 갈랐다. 목이 떨어진 백색 눈동자들의 시체가 사라졌다.

벌써 그 혼자 처리한 숫자만 삼십이 넘어갔다.

<워터 자벨린>

클라크의 마법. 거대한 물의 창이 적들을 휩쓸었다.

무지막지한 수압으로 인해 놈들의 육체가 터져 나갔고, 그 근처에선 부단장의 창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마수와 고블린들을 꿰뚫었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순조롭군.'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회전한 발칸이 머리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왔나."

백금 등급 모험가.

자신의 부하들이 맞서기엔 버거운 상대다. 그러니 단장인 자신이 직접 처리할 수밖에. 놈을 죽이면 회색 나무가 가진 전력이 크게 떨어질 터.

카앙!

발칸의 검과 모험가의 화살이 격돌했다

* * *

홀로 떨어진 베르덴은 하늘에서 숲을 바라봤다.

회색 나무가 과연 어디에 숨어 있을까. 뿌리를 움직였다고 하니, 트런트라는 이형종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게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더 찾기 어려울 터.

'그렇다면.'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처음으로 펼치는 전력을 다한 마력감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었지만, 이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강화된 감각이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인지했다.

'찾았다.'

베르덴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지면으로 낙하하는 그가 스태프를 뻗었다.

<어스 자벨린>

거대한 바위의 창.

그 엄청난 파괴력에 숲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바람을 움직여 자욱해진 흙먼지를 치워 버리자, 베일론 자작이 말했던 회색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불길한 느낌이 드는군.'

다른 나무들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기이하게 느껴진다.

베르덴은 지면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숨어 있던 백색 눈동자들이 하나둘씩 회색 나무를 감싸듯 나타났다. 그중엔 오우거의 어깨에 있던 마법사도 있었다.

발칸이 준 신호탄을 쏘아 올릴 때.

하지만 베르덴은 그러지 않았다. 여기서 토벌대까지의 거리가 꽤 있기도 하고, 급하게 이동을 강행하다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 처리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파지지직!

베르덴의 스태프에서 푸른 전류가 메아리쳤다.

50화 악마의 숲 (1)

베르덴은 시간을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대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전신에 가득 찬 마력은 베르덴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으며 법칙에 따라 마법을 구성했다.

<연쇄번개>

스태프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 번개가 백색 눈동자들을 덮쳤다.

놈들은 죽은 자였기에 생기가 없었으나, 육체 자체는 살아 있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히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파괴력을 보이는 전격 계열 마법이 효과적일 터.

콰아아아!

직격당한 마법사는 반응할 새도 없이, 몸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 두 갈래로 갈라진 번개가 사방으로 퍼졌다. 위력은 처음보다 약해졌어도 놈들이 버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걸로 멀쩡한 건 회색 나무뿐.

놈이 당황했는지 다급하게 뿌리를 길게 뻗어 베르덴에게 휘둘렀다.

'전부 읽힌다.'

마법을 쓸 필요도 없이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냈다.

그러곤 충전된 마력을 방출해, 마력집중을 부여한 스태프로 뿌리를 힘껏 후려쳤다. 나무인데도 꽤 고통스러웠는지 회색 나무가 가지를 움찔거렸다.

'죽은 자들을 조종하는 것 외에는 트런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나무껍질이 단단하긴 하지만 그뿐.

뭐, 어차피 나무인 이상 약점은 분명하다.

<플레어>

<플레어>

<플레어>

트리플 캐스팅.

스태프에서 방출된 세 개의 광선들이 회색 나무에게 향했다. 놈이 뿌리를 들어 벽을 만들어 냈지만 고작 그걸로 4위계 화염 마법을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콰아아아아!

뿌리를 태워 버린 열기가 그 본체를 집어삼켰다.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 전부 불탔으며, 회색 나무의 표면은 숯처럼 검게 그을렸다.

그리고 이내 크게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살아 있던 백색 눈동자들의 몸이 사라졌다.

뭐랄까.

일어난 사태에 비해 싱거운 결말이었다.

피융!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걸로 이번 의뢰는 마무리... 음?"

그러던 그때, 회색 나무의 잔해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백색 눈동자들이 죽었을 때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저건 사라지지 않고 숲 안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꽤 빠르게.

'저게 대체 뭐지?'

설마 다른 나무에 기생하는 이형종 같은 건가?

그렇다면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우선 베르덴이 그 뒤를 쫓았다.

숲이 점점 깊어지면서 내리쬐는 햇살이 줄어들었다. 얼마 안 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밤이 찾아왔다. 아무리 깊은 숲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어두울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둠이 가득했다.

그렇게 하얀 연기를 거의 따라잡을 때쯤, 베르덴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멈춰야만 했다.

"이게 대체...."

회색 나무를 마주했을 때의 불길한 느낌.

그 수십 배를 아득히 넘는 오싹한 기운.

베르덴의 감각이 소리쳤다. 더 이상 이 앞으로 가지 말라고.

마력감지를 사용해 봤지만 어떤 것도 식별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숲 전체가 마력을 거부하는 느낌이다.

'설마... 여기가 그 악마의 숲?'

공국과 모험가 길드에서 접근을 금한 지역.

그때, 베르덴의 뇌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리스너가 말한 한 달과 악마의 숲.

회색 나무에서 나온 연기.

햇빛을 싫어하는 트런트가 악마의 숲 바깥으로 나온 이상 현상.

'우연인가?'

그럴 수도 있다.

적어도 방주의 리스너와 이 일을 연관 짓는 건 과한 추측이었다.

그런데 왜 직감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걸까.

'...일단 돌아간다.'

이 숲은 위험하다. 이미 하얀 연기를 놓쳐 버리기도 했고.

몸을 돌린 베르덴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토벌대에게 향했다.

* * *

베르덴이 회색 나무를 상대하는 동안, 토벌대가 처리한 백색 눈동자의 숫자는 무려 수백. 그러나 부상자는 있을지언정 죽은 사람은 없었다.

발칸이 시선을 끌어 백금 등급 모험가를 비롯한 다수의 강적을 상대하기도 했고, 중반부터 숫자에 밀리긴 했지만 타이밍 좋게 베르덴이 회색 나무를 토벌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팔과 다리 그리고 복부에 화살을 맞은 발칸.

로든마이어 백작이 온몸에 붕대를 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사단장 체면이 말이 아니군."

"면목 없습니다, 각하."

"됐다. 그래도 시킨 일은 잘해 냈으니. 피해가 안타깝기는 하나 이 정도에서 그친 걸로 만족해야지."

하마터면 더 큰 피해가 일어날 뻔했으니.

로든마이어 백작은 한동안 카제르단 능선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혹시 모를 후속 조치였다.

"네가 큰 활약을 했다더군, 애셔. 듣기론 4위계 마법사라고 하던데."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상관없다. 오히려 나야 좋지. 룬의 반지를 소유한 4위계 마법사를 비교적 싼값에 부려 먹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다음에도 잘 부탁하지."

고등으로 분류된 룬 문자 배열.

그 룬의 반지에 욕심이 조금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베르덴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걸 택했다.

'이런 인재는 꽤나 찾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쉽게 넘겨줄 것 같지도 않고.'

뭐, 연줄을 붙여 놓는 편이 이래저래 얻을 게 많다고, 로든마이어 백작은 판단했다.

의뢰를 마친 베르덴은 백작가에서 상당한 액수의 보수를 받았다.

하긴, 베일론 자작을 무사히 구출한 것에 대한 지분은 누가 뭐래도 그가 제일 컸으니. 줄곧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 오던 클라크도 입을 꾹 다물곤 자리를 피했다.

이후 베르덴은 페일에게서 마법서에 사용할 중상급 마석을 구매했다.

그렇게 강화할 마법을 등록한 베르덴은 의뢰를 받지 않고 여행을 나설 채비를 마쳤다.

'리스너를 만나야겠어.'

그가 말한 한 달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본래 무시할 생각이었다. 정체 모를 집단의 권유를 애써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나 악마의 숲에서 느낀 그 불길함은 도저히 가볍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베르덴은 연구자.

설령 관련이 없더라도 직접 확인해서 의문을 풀어내야만 이 찝찝한 기분을 지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덴의 다음 목적지는 로리엔.

'악마의 숲'이란 금지된 장소와 가까이 있는, 모험가들이 거점으로 삼는 도시였다.

* * *

아인종, 마수 그리고 이형종 등.

모험가들은 인류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을 토벌하는 걸 업으로 삼는다.

그리고 때론 매직 아이템이나 여러 물건에 사용되는 부산물을 채취해 돈을 벌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싸운 보람이 있을 정도의 큰 금액을.

모험가는 기회의 직업이다.

승급을 위해선 최소한의 인성을 갖춰야 하긴 하지만, 결국 그 이상의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 출세할 수 있었다.

가끔 백금 등급 이상의 모험가들이 국가의 권유에 따라 귀족이 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고, 아니면 값비싼 임금을 받으며 귀족의 경호를 맡을 수도 있었으니.

그런데도 모험가에 입문하기 위한 장벽은 매우 얇은 편이었다.

그래서 모험가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부푼 꿈을 안고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며 무기를 쥔 사람들.

그러나 대부분 각자의 이유로 좌절한다.

무서워서, 재능에 한계를 느껴서 또는 부상으로 인해. 어리숙한 모험가들의 결말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길드는 심각성을 느끼고 모험가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마탑에 조사를 의뢰했다.

모험가들은 왜 사상자가 많을까.

마탑에서 세계적으로 그 원인들에 대한 표본을 수집해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 1순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려서'

* * *

"루커스! 그쪽으로 간다!"

"맡겨 둬!"

성난 콧김을 뿜어대며 마수 '보어크'가 뿔을 앞세우고 돌진했다.

모험가 루커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는 검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서로 부딪치기 직전, 옆으로 몸을 던지며 검을 휘둘렀다.

뀌에에엑!

목이 베인 보어크가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모험가들은 거리를 두고 조심히 지켜봤다. 그러다 힘이 빠져 비틀거릴 때쯤, 강철 해머가 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두개골이 박살 난 보어크가 덜덜 떨며 축 늘어졌다.

"잡았다!"

"잘했어, 딘!"

"오늘 대박인데? 벌써 세 마리째야."

"수입 미쳤다!"

보어크의 가죽은 튼튼하되 가공이 쉬워 나름 짭짤한 값에 팔아넘길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세 장이나 되다니.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운이 좋은 날이다. 모험가들은 기뻐하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가죽을 손질했다.

거의 흠집이 나지 않은 가죽을 돌돌 말아 짐 가방에 단단히 매었다.

"그나저나 요즘 마수가 잘 보이네. 전에 찾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뭐, 어때. 지금이 중요한 거지. 그런데 아직 날이 밝은데 어떻게 할 거야, 루커스?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한 마리 더 잡을까?"

"에이, 벌써 돌아간다고? 더 잡자!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으니까."

"나도 동의해. 이렇게 운이 좋은 날은 흔치 않으니까."

"음,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루커스는 잠시 고민했다.

동료들의 체력은 충분히 있어 보이고,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조금 더 보어크를 찾아봐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동료들의 의견도 그렇고.

"좋아. 한 마리 더 찾아보자. 올리, 지도 좀 줄래?"

루커스가 지도를 받아 바닥에 펼쳤다.

로리엔의 서쪽에 있는 초록색 숲. 그리고 그 너머에는 우중충한 색깔의 숲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악마의 숲까지는 거리가 좀 있으니까, 이쪽 근방을 좀 돌아보는 게 어때?"

"좀 더 가까이 가자. 악마의 숲 근처에 마수가 많이 서식한다는 소문도 있잖아. 아니면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도 좋고. 솔직히 악마의 숲이라곤 하지만 위험하다는 말만 많지, 실제로 들어가 본 사람은 거의 없잖아?"

숲 너머의 숲, 악마의 숲.

그곳의 환경은 평범한 자연과 달랐다.

나무는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져 있으며, 낮에도 빛이 거의 닿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에다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비명 소리까지.

기록에 따르면, 옛날 그곳으로 향한 모험가들이 대거 실종되어 조사대를 파견했지만 한 명도 찾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실종자가 발생했다고도.

결국 모험가 길드와 공국은 그 숲을 악마의 숲이라고 명명하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칙을 만들었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난 얘기였다.

루커스는 로버드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그렇게 안일하게 굴다가 죽는 모험가 얘기 못 들었어? 이유가 있으니 그런 소문이 난 거겠지."

"아, 알았어. 농담이니까 그렇게 정색하지 말라고, 루커스.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럼 됐어. 자, 출발하자."

루커스와 그 일행은 깊은 숲으로 향했다.

하지만 금방 마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고블린 한 마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뭔가 기분 탓인지 숲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풀숲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굳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흔적이었다.

"마수의 피인가? 다른 모험가들이 벌써 왔다 갔나 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없을 리가 있겠어?"

분명 위험을 느낀 마수들이 도망친 것이리라.

아마 이 근방에서 찾는 건 무리겠지. 멀리까지 움직이기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루커스는 입맛을 다시며 동료들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지. 이만 돌아가자. 가는 길에 운 좋게 찾을 수도 있으니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루커스를 필두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중에 나뭇가지를 꺾어 놓거나 나무에 칼집을 내는 등 표시를 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그래, 없어야 했다.

"...어?"

"왜 그래, 루커스?"

"아니, 갑자기 흔적이 안 보여서."

분명 스무 걸음마다 흔적을 남겨 놨는데.

주변을 둘러봤지만 꺾여 있는 나뭇가지도, 칼집을 낸 흔적도 없었다.

"혹시 착각한 것 아니야? 아니면 실수했거나."

"그런가?"

루커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곤 다시 앞으로 걸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실수했다고 해도 이렇게나 많이 했을 리는 없는데.

'다른 모험가가 남긴 흔적하고 헷갈렸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게 판단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분명 근처에 남겨 놨던 흔적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동료들까지도.

"...얘들아?"

목소리가 숲을 맴돌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 그걸 직감하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루커스는 온 힘을 다해 달리며 동료들을 찾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해가 졌다.

어둠에 갇힌 루커스가 재빨리 횃불을 켜고 검을 빼 들었다.

"시발, 어딨어! 어딨냐고!"

불안은 극에 달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몸이 떨려 오는 그 순간, 나무 사이에서 익숙한 옷자락이 보였다. 올리가 입었던 로브가 분명했다.

"오, 올리!"

반가운 마음에 잽싸게 달려갔다.

그런데... 올리의 발이 허공에 떠 있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나무줄기에 목이 묶인 올리가 죽은 눈으로 루커스를 바라봤다.

"으아아아악!"

다리에 힘이 빠지며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친 그는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시야에 비친 나무들이 전부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아, 악마의 숲?'

"나는 분명...."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루커스의 몸이 공포에 질려 제멋대로 움직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횃불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 아... 아아...!"

루커스를 바라보고 있는 수백 개의 백색 눈동자. 죽어 있던 올리마저 그런 눈으로 루커스를 바라봤다.

그러곤 그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

뚝. 루커스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한 적막 속에서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롭게 생겨난 백색 눈동자와 함께.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는, 도시 로리엔이 있었다.

* * *

'거의 도착했군.'

베르덴은 저 멀리 도시가 있는 걸 보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마법사라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였다. 자칫 경비병들이 오해를 하고 경계할 수도 있으니까.

성문에서 신분 확인을 하고 있던 중, 도시 안에서 모험가 무리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중 맨 앞에 서 있는 인물은 백금으로 만들어진 플레이트를 목에 걸고 있었는데, 그를 포함해 그가 이끄는 모험가들은 죄다 완전무장을 하고, 얼굴도 심각해 보였다.

'어디서 위험한 아인종이라도 나타났나?'

설마 악마의 숲 때문에?

아니,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 지금은 리스너가 먼저였다.

그들을 지나친 베르덴은 일단 여관을 잡았다.

기한 내에 오긴 했지만 어디서 만나자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만나러 올 터.

그렇게 생각하고 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렀다. 책자를 훑어본 베르덴이 종업원을 호출했다.

"서로인 스테이크 하나와 로리엔 특산 포도주 하나."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여성 종업원이 카트에 음식들을 실어 와 베르덴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방금 구운 빵과 포도주의 향기 그리고 고기가 익은 정도는 딱히 문제가 되는 건 없었다.

하지만 베르덴은 식기를 들지 않고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손님?"

"왜 여기서 서빙을 하고 있는 거지, 리스너?"

여성적인 얼굴에 가느다란 목소리.

어느 모로 보아도 여성이었으나, 단순한 변장과 목소리의 변조로는 베르덴의 감각을 피해 낼 수 없으며, 마력의 본질까지 숨길 수 없었다.

베르덴의 시선에 종업원이 미소 지었다.

"이런, 들켰군요."

예쁘장한 외모에서 흘러나온 굵직한 목소리.

그 기괴함에 베르덴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51화 악마의 숲 (2)

"하하, 외형적으로 완벽하게 변장을 했는데 어떻게 저인 줄 아시고 마력감지를 쓰셨는지.... 마법사이신데 굉장히 감이 좋으시군요."

리스너가 베르덴의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그 순간에 종업원의 복장이 아닌 다른 옷으로 바뀌었는데, 거기에 카트 밑에서 음식을 꺼내 식탁 위에 차려 놓으니 영락없는 손님이 되어 있었다.

'마법 물품의 일종인가?'

아니면 아티팩트일지도.

외형을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니 꽤나 활용성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안 바꾸는 건가?"

"왜 브리엔테에서 본 얼굴을 제 본모습이라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뭐, 그쪽이 취향이시라면 남자로 바꿔 드릴 수는 있지만-."

"...."

"농담입니다. 분위기 좀 풀어 보려고 그런 거니 마력은 좀 거두어 주시죠."

리스너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크흠, 일단 제 외모 얘기는 나중에 하고 식사부터 하시죠. 여기 주방장이 꽤 솜씨가 있습니다."

리스너가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고있던 베르덴은 작게 한숨을 쉬며 식기를 들었다. 맛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후식으로 나온 차와 케이크를 앞에 두고, 리스너가 작은 장치를 식탁 위에 올렸다.

"...아티슨 마탑의 마법 물품인가?"

"잘 아시는군요. 이건 아티슨 마탑에서 고가에 판매하고 있는 '노이즈(Noise)'라는 아이템입니다. 가격만큼이나 성능 또한 뛰어나죠."

보헤미른 마탑이 원소 계열에 특화된 곳이라면, 아티슨 마탑은 각종 마법 물품, 매직 아이템 제작에 전문화된 곳이다.

노이즈를 작동하자 흘러나온 마력이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이걸로 베르덴과 리스너의 대화는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리스너가 손에 깍지를 끼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먼저,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군요. 솔직히 말해 애셔 님이 로리엔에 오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방주에 신입을 모집하는 제 관점에서 애셔 님은 적합한... 아니, 뛰어난 인재시니까요."

적합하다.

그것이 불과 한 달 전에 방주에서 내린, 리스너가 보는 베르덴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나 브리엔테에서 베르덴과 만난 리스너는 곧바로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압한 그 방대하고 깊은 마력... 물론, 그 정도의 마력량을 가진 존재는 세상 곳곳에 널려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강대한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 자들이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잿빛 마법사는, 적어도 마력량만큼은 그들과 비견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

정확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나이에 있을 수 없는 재능인 건 확실하다. 이후의 성장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가 방주에 들어올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터. 이 자리는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포석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어떤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방주의 기원? 아니면 방주의 목적? 장황해서 싫으시다면 질문답 형식도 좋습니다. 애셔 님이 여기에 오셨다는 건 방주에 대해 알고 싶은 점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반드시 방주에 대한 질문이어야 하나?"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물론 너무 많은 질문에는 전부 대답할 수 없다는 점,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방주에 대한 정보를 제외하면, 그가 하려던 질문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묻지."

베르덴이 차로 목을 축이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악마의 숲, 거기에 대체 뭐가 있지?"

햇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암흑의 숲.

그곳에서 느낀 불길함은 간단히 무시하고 지나칠 만한 게 아니었다. 물증이 없기에 그저 기분 탓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회색 나무.

분명 그와 관련된, 지금의 베르덴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가 악마의 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로든마이어 백작과 페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정보는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뭔가 알고 있었더라면 자작이 실종되는 일조차 없었을 테니까. 현재로서 베르덴에게 단서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리스너가 유일했다.

질문을 받은 리스너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작은 감탄을 내뱉으며 더욱 짙게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숲이라... 어째서 그걸 저에게 물어보시는 거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으니까."

"단순히 감입니까? 애셔 님은 증거주의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다고 직감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

거기다 질문하는 데 어떤 비용이 소모되는 것도 아니고.

"대답은?"

"하하, 아까도 말했지만 애셔 님은 감이 굉장히 좋으시군요. 네, 대답해 드리도록 하죠. 어차피 애셔 님과 여기 로리엔에서 만난 건 그 악마의 숲과 깊은 관련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방주의 이념과 목적에 대해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념과 목적?"

리스너가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저번에 말했다시피 방주의 이념은 '인간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라고 했었죠. 하지만 그 시련이란 건 결코 간단한 게 아닙니다. 작게는 본인의 목숨, 크게는 도시나 한 국가, 더 크게는 세계와도 연관되어 있죠."

"...."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면 필연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되는 거지요. 훗날 인류를 이끌 '선장'에 걸맞은 존재가 말입니다."

리스너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힘이 실려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베르덴이 느낀 바는 달랐다.

"...그 말은 악마의 숲에 있는 것도 시련의 한 종류라는 건가?"

"정답입니다."

"만약 시련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듯이, 성공이 있으면 실패도 있다.

베르덴의 물음에 리스너가 찻잔을 내려놨다.

"죽을 겁니다. 때론 마을이 몰살하고, 도시가 무너지며, 한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겠죠. 어쩌면 세계까지."

"그게 방주가 말하는 이념인가?"

"애셔 님,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인류라는 나약한 '종'을 위한 집단이지, 모든 인간의 수호자가 아닙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후보를 찾아 시련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보다 뛰어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 결코 방패막이가 되어 인간을 평화 속에서 도태시키는 게 아닙니다."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원인 모를 한기를 느낄 만큼.

베르덴이 리스너의 눈을 바라봤다.

"수많은 인간이 죽는다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방주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련은 저희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위험이죠. 방주는 그러한 위험들을 분석하고 예측해서 어디에서 뭐가 일어날지 특정한 뒤, 그곳으로 방주의 후보들을 이끌 뿐입니다."

베르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 말은 방주의 정보망이 세계 전역에 펼쳐져 있다는 뜻과 같았으니까. 그만한 세력을 가지고도 여태껏 세상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에 한층 더 경계심을 높였다.

'어쩌면 블랙 아워보다 위험할지도.'

당장 베르덴은 지금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무조건적으로 적대하지 않으면서 일정 이상 거리를 두기로. 정체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저쪽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그래서, 그 시련이 뭐지?"

"그건 답할 수 없습니다. 방주가 원하는 선장은 갑작스러운 시련조차 극복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후보들에게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미처 싹이 자라기도 전에 짓밟혀서야 본말전도니까요."

틈틈이 후식을 먹어 치운 리스너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애셔 님은 주로 의뢰를 통해 보수를 받아 자기 개발에 힘쓰시더군요. 아, 이건 브리엔테에서 애셔 님을 만나기 전에 수집한 정보이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속한 대로 그 이후로 애셔 님의 뒤를 캐는 일은 전혀 없었으니.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제안이라기보단 일종의 의뢰라고 볼 수 있지요."

리스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애셔 님, 이번 시련에 도전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시련은 방주가 정한 후보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요. 저희의 목적은 인류를 이끌 구원자의 육성이지, 방주의 세력을 키우는 것 따위가 결코 아니니까요. 설령 방주의 후보가 아니라고 해도 시련에 도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드리는 제안은 아닙니다."

"기존에 있던 후보는?"

"본래 이번 악마의 숲에 있는 건 '그녀'를 위해 준비된 시련. 그러나 사람 한 명이 더 추가되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시련이라고 해서 홀로 극복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본디 인간이란 협력과 상생을 원동력으로 삼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녀?'

그리고 그다음 말에 베르덴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의뢰를 받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군."

"하하, 글쎄요. 저는 제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먼저 이걸 보시죠."

리스너가 작은 가방과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약병을 책상 위에 올렸다.

"애셔 님에게 드릴 보수는 보다시피 총 두 개. '공간가방'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만드레이크 추출액'입니다."

공간가방은 공간 확장이 부여된 가방 형태의 마법 물품이다.

공간 계열은 전격 계열과 마찬가지로 상위 속성에 위치한 마법. 공간의 크기나 무계 한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최소 억 단위의 가치를 품고 있다.

딱히 큰 짐이 없는 베르덴은 최하급에 해당하는 것일지라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

"잠깐. 방금 뭐라 그랬지? 만드레이크라고?"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건 그 만드레이크에서 뽑아낸,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도 100%의 추출액이죠."

"...확인해 봐도 되나?"

"그럼요. 얼마든지."

베르덴은 약병의 마개를 열었다.

삽시간에 퍼져 나가는, 상쾌하면서도 쓰디쓴 냄새. 그저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량감이 가슴 속에 퍼져 나갔다.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진품.

'어떻게 이걸....'

마탑에서 독점하고 있는 물건이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그렇기에 베르덴은 리스너의 다음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원하신다면 이 두 개의 보수를 선불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

베르덴이 말없이 마개를 닫았다.

톡톡톡톡.

책상을 손가락으로 빠르게 두들기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공간가방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만드레이크 추출액을 보수로 내걸 뿐만 아니라 선불로 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군. 대체 무슨 속셈이지?"

"부족한 신용을 쌓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 주셨으면 좋겠군요. 저희 방주는 애셔 님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나 애셔 님은 그런 저희를 의심하고 계시니, 무릇 아쉬운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보수를 갖고 시련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걸 감안하고 드리는 겁니다."

리스너와 베르덴의 시선이 교차했다.

"저희는 인도할 뿐,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보수를 갖고 시련에서 도망치시든 어떻든 간에 선택은 오롯이 애셔 님의 자유입니다.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공간가방과 만드레이크 추출액은 잘못된 투자를 한 셈 치지요."

하지만.

"힘을 추구하는 자에겐 더한 강함을, 믿음을 가진 자에겐 더한 신념을. 시련을 극복한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전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애셔 님이 무엇을 꿈꾸고 계시는지는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만, 단언하건대 시련은 그를 위한 계단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낭떠러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시련이다.

인간은 도전하고 극복함으로써 스스로 진화한다. 그 과정에서 위험이 따르는 건 당연하며 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건 고작 한 줌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겐 기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그저 도태될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기에 자신들을 이끌어 줄 '선장'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방주가 탄생한 이유다.

리스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리엔에서 기다리시다 보면 곧 시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알고 싶지 않아도 말이죠. 그러니 거절하실 생각이라면 곧장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좋으실 겁니다. 분명 휘말리게 되실 테니."

"...."

베르덴은 침묵으로 답했다.

히죽 웃은 리스너가 손을 가볍게 휘젓더니 브리엔테에서 봤던 남성의 외모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력의 본질이 흐트러지다 이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했다. 외형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럼 안녕히."

베르덴은 떠나가는 리스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리스너가 보여 준 기예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으나, 지금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베르덴이 앞에 있는 작은 약병을 응시했다.

'만드레이크 추출액.'

타고난 재능에 따라 흡수율이 다르며 복용하면 할수록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지지만, 단순히 마시는 것만으로도 마력량이 증가하며 마력회로가 확장된다.

어떠한 노력이나 부작용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고위 영약 중 하나인 '마핵(魔核)'의 핵심 재료.'

어느 모로 보나 '성장'을 원하는 마법사에겐 보물 그 자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효과만큼이나 입수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완전히 자란 만드레이크가 아니면 아차 하는 순간에 시들어 버리니, 인공 재배라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품종이다.

그렇게 한 해 자연에서 발견되는 만드레이크의 수는 세계적으로 평균 14개.

열 개의 마탑에서 하나씩 독점하며 나머지가 겨우 시중에 풀리는데, 그마저도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평생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헤미른 마탑에선 최상층에 보관했던 터라 베르덴조차 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쌓아 온 지식으로 만드레이크의 특징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걸 선불이라며 어떠한 담보도 없이 자신에게 넘기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군.'

리스너가 말한 방주의 이념과 목적 그리고 의의.

어렴풋이나마 방주란 조직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대체 그들이 인류를 구원함으로써 무엇을 얻게 되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베르덴이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선택이라."

보수를 갖고 냉큼 도망치든가, 아니면 시련에 도전하든가.

전자를 고르면 어떠한 손해도 없이 이 귀한 보수들을 얻게 된다.

대신 방주와의 관계도 끊기게 되겠지. 기껏 보인 호의가 완전히 무시당한 것이니. 손익만 따진다면 베르덴으로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먼저 방주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

만드레이크 추출액 이상의 것을 줄 수 있다는 리스너의 말에 상당히 흥미가 생겼다. 그만큼 방주에서 보인 호의가 그에게 있어 매력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자존심.'

보수만 갖고 시련이 무서워 도시에서 도망친다니, 얼마나 추한 모습일까.

베르덴은 자신의 마법사 인생에 그런 오점 따위 결코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그 길을 걷는 순간 언젠가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또다시 같은 길을 가게 될 뿐이니.

그래서 선택했다.

보다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선택지를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내 성장을 위해서.'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얼마 후, 시련이 다가왔다.

* * *

투사(鬪士) 바르델.

그는 백금 등급의 모험가로 숱한 격전을 겪어 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지금의 상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이형종이라니...!"

"줄기! 줄기부터 잘라!"

"루드니아! 뭐 해! 빨리 몽땅 불태워 버려!"

숲 전체가 트런트의 소굴이다.

모험가들이 각기 뭉쳐 대응하고 있긴 했지만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나무들이 꿈틀거리며 나무줄기를 뻗어 왔다.

그걸 잡아챈 바르델이 역으로 나무를 당긴 다음, 단칼에 양단해 버렸다.

"발밑을 주의해라! 수가 좀 많긴 하지만, 기습만 주의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

본래 실종된 모험가들을 찾으러 나선 거지만, 이 숫자로는 화력이 부족하다.

로리엔으로 돌아가 대책을 세우고 모험가뿐만 아니라, 용병을 포함해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끌어모아야 한다.

특히 마법사를.

사아아....

그러던 그때, 숲 깊숙한 곳에서 짙은 귀기가 느껴졌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주변의 트런트를 몰살한 바르델이 침을 삼키고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이번엔 또 뭐냐...!'

그리고 나타났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기어오는 회색의 뿌리들. 그런데 그 끝에 무언가 감겨 있었다.

"저, 저거, 사라진 모험가들 아니야?"

"올리? 쟤 올리잖아!"

뿌리 끝에 실종된 모험가들이 감겨 있었다.

순간 살아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들 전부가 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으며 하나같이 눈동자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으니.

'잠깐, 죽은 시체를 다루는 뿌리라면...?'

생각났다.

눈을 부릅뜬 바르델이 곧장 소리쳤다.

"소울 트리(Soul Tree)다! 절대 시체들과 마주치지 마라! 마법사들은 당장 퇴로를 만들고, 다른 놈들은 마법사 지켜! 누구든 좋으니 당장 도시로 가서 지금 상황을 전해라!"

소울 트리.

생명체를 붙잡고 그 생명력을 양분 삼아 자라는 이형종. 막 태어났을 때의 위험도는 트런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모험가 길드가 책정한 종합적인 위험도는 무려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

'이렇게나 많은 시체라니, 설마 그동안 실종된 모험가를 전부 잡아먹은 건가!'

기를 집중한 바르델의 눈엔 정확히 보였다.

일반적인 트런트의 세 배쯤 되는 크기에, 각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수많은 시체가. 만약 정신이 약한 자가 다가간다면 죽은 자들이 지르는 비명에 일순간에 정신이 파괴될 것이다.

저게 도시로 가면 어떻게 될까.

분명 참극이 일어난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바르델 혼자서 이 전부를 죽일 순 없다.

하지만 모험가들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그는 살아남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검날에 맺히기 시작했다.

'버틴다.'

도시에 모험가들이 도착하고, 구원군이 올 때까지.

설령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르델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모험가였으니까.

바르델에게 다가온 수십 마리의 트런트와 회색 뿌리에서 내려오는 백색 눈동자들.

이윽고 놈들의 입이 열리더니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52화 소울 트리 (1)

로리엔의 성벽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언제나 그랬듯 저 멀리 있는 숲을 바라봤다.

초록색이 가득한 울창한 풍경이었지만, 최근 들어 뭔지 모를 꺼림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요즘따라 숲이 뭔가 어둡지 않아? 모험가들이 실종됐다더니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네."

"뭐, 별문제야 있겠어? 바르델 씨가 갔는데 금방 정리되겠지. 실종된 사람들도 찾고 말이야."

"그렇겠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건만."

경비병이라는 게 그렇다.

매월 봉급을 받는 직업으로, 별문제가 없으면 경력이 쌓일수록 수입도 늘어난다. 거기다 퇴직금까지 챙겨 주니, 이보다 안정적인 직장은 흔치 않다.

그렇기에 이들은 누구보다 평화로운 나날을 바랐다.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중, 해 질 녘 아래의 숲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어? 저거 사람... 아닌가?"

"사람? 어디?"

숲에서 다급하게 빠져나온 여러 사람.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쳐다보니, 입고 있는 장비와 생김새가 영락없는 모험가들이었다.

"저거... 오늘 아침에 나갔던 모험가들 아닌가?"

그래, 투사 바르델이 이끄는 수색대가 분명했다.

그런데 어딜 봐도 바르델이 보이지 않았다. 모험가들의 행색도 갈 때와 달리 아주 엉망이었고.

의문과 불길함이 동시에 찾아올 때쯤, 코앞까지 다가온 모험가가 소리를 질렀다.

"비상이다! 당장 문 열어!"

"비상이라는데?"

"뭔가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대장님에게 다녀오지."

잠시 후,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로리엔으로 들어선 모험가들은 각자 나뉘어 모험가 길드와 시청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댕-! 댕-! 댕-!

이십 년이 넘도록 울리지 않던 종소리가 로리엔에 울려 퍼졌다.

* * *

로리엔 시장, 모험가 길드장 그리고 경비대장 등.

기사와 금 등급 이상의 상위 모험가들을 비롯한, 도시 방위의 주축들이 급하게 만들어진 회의실에 모여 보고를 듣고 있었다.

시장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볼 안쪽을 잘근 씹었다.

"트런트는 본래 악마의 숲에만 서식하는 게 아니었나? 이제까지 경계를 넘었던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가?"

트런트라는 나무 형태를 띤 이형종은 보통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어둡고 깊은 숲에서 나타난다. 악마의 숲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빛을 싫어해 바깥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때, 보고를 하던 모험가가 말을 이었다.

"그, 저희 대부분은 보지 못했지만, 바르델 씨가 분명 소울 트리라고...."

"소, 소울 트리?!"

길드장이 경악했다.

몇몇 모험가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정체를 모르는 기사들과 시장은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울 트리? 그게 대체 뭔가?"

"아, 예, 시장님. 소울 트리란-."

소울 트리는 생명을 죽이며 성장하는 나무.

필연적으로 모험가들에게 발각되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발견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대부분 비교적 발생 초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과거에 몇 번이고 모험가들에게 토벌된 이형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볍게 생각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 놈은 개체마다 가진 힘의 편차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극심했으니까.

모험가 길드에서 그 위험도를 최대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고 기록했을 만큼.

특수 개체란 단어에 시장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그럼 지금 저 숲에 트, 특수 개체가 있다는 말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특수 개체는 아닙니다만... 만약, 악마의 숲이라고 지정된 이유였던 사람들의 원인 모를 실종과 이번에 나타난 소울 트리가 관계가 있다면, 자칫 도시가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폐허가 되는 수준이 아니다.

도시 사람들은 전부 소울 트리의 양분이 될 것이고, 시체는 가지에 걸려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 마치 전염병처럼.

소울 트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모르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존재해 왔다면 비상 상태다.

여기서 막지 못하고 다른 도시마저 집어삼킨다면 공국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어서 다른 도시에... 아니, 수도에 연락을...!"

"믿을 수 있는 기사에게 연락을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희생자를 막기 위해 도시를 폐쇄하고, 모험가만이 아닌 용병을 비롯한,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다음 지원을 보내고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는 게-."

"자, 잠시만요, 길드장님! 그럼 바르델 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런 모험가의 물음에 다른 모험가가 답했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전력을 분산했다간 다 죽을 수도 있잖아? 지금 숲이 얼마나 위험한진 너도 잘 알 테고. 그 투사니까 운이 좋다면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

"뭐? 그럼 시발, 그냥 두고만 보자는 거야? 바르델 씨가 우릴 도시로 보내려고 목숨을 걸었는데!"

"모험가는 제 목숨 자기가 챙겨야 하는 것 몰라? 투사가 선택한 길인데 왜 나보고 지랄이야?"

"이 개새끼가-."

"제가 가도록 하죠."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모험가가 앞으로 나섰다.

흑색 망토 안에 감춰진,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전신 갑옷과 머리 전체를 감싼 적흑(赤黑)의 투구.

그 체형과 바깥으로 드러난 금색 머릿결이 여성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허리에 찬 붉은 검이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고 있었다.

현재 미스릴 등급에 가장 가까운 백금 등급의 모험가.

핏빛검, 레이라.

현재 여기 모인 자들 중에선 최강의 전력이었다.

"바르델 씨를 구출할 겸 소울 트리도 토벌하겠습니다."

"레, 레이라?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무리라고 보는데.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길드장님."

"하다못해 날이 밝으면-."

"길드장님."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주변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본인이 모험가를 구하러 간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명분으로도 안 되는데, 더군다나 이들 전부가 막아선다 할지라도 레이라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길드장이나 기사라고 할지라도.

시장과 시선을 나눈 길드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혼자 보낼 수는 없네. 지원자를 모집하지. 자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를 붙일 테니, 거절하지는 말게."

"그건... 알겠습니다."

서로 느긋이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다.

레이라에게서 달갑지 않은 기색이 보였지만 긴급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밤이 찾아왔지만 마음 편히 잠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경비병들과 모험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성벽 밖을 감시하는 병사들이 많아졌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의 의혹을 가지고 수군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야? 아까 그 종소리는 또 뭐고?"

"누가 그러던데 도시가 위험할 때 울리는 종이라던데요?"

"뭐? 그럼 무슨 전쟁이라도 터진 거야? 갑자기?"

"내가 뭐랬나! 그 간악한 에스티리아 왕국이 언제고 다시 공국을 넘볼 거라고 누누이 얘기했잖은가!"

전쟁이라는 말에 소란이 더 커졌다.

당연히 다른 도시에 자주 방문하며 소문에 능한 상인 같은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로리엔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때, 단상 위로 기사가 올라갔다.

"자, 모두 진정들 좀 하세요! 그리고 거기! 전쟁 같은 것 아니니까 근거도 없는 소문 퍼뜨리지 마시고!"

겨우 광장의 소란을 잠재운 기사가 목을 가다듬곤 위에서 내려온 포고문을 읽어 내렸다.

숲에 나타난 위험한 괴물, 토벌에 나선 모험가들, 위험에 대비해 방위망을 구축하는 것.

이번 사태에 대한 개요에 대해서만 간단히 요약해 전달했다.

소울 트리라든지, 특수 개체라든지 하는 자세한 설명은 배제했다.

지금 상황에 시민들의 혼란까지 잠재울 여력은 없었으니까. 몇몇 사람들에 의한 선동에 휘말려 폭동까지 일어나는 사태는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모험가들이 토벌에 나섰다고 하니 안심하고 있는 분위기다.

사실 토벌이 아닌, 바르델을 구하기 위한 수색대에 가까웠으나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포고문을 접은 기사가 게시판에 지원서라고 적힌 종이를 붙이곤 마지막으로 전달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니 모험가나 용병뿐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분이라면 저희에게 찾아와 주십시오. 보수는 아래에 적혀 있습니다."

기사가 떠나고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원만 해도 돈을 준다는 소리에 힘에 자신이 있는 남자들이 신청했다. 거리에서 상점을 하고 있는 나이 든 마법사까지.

그러던 중, 잿빛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신비한 외모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끌렸다.

스태프를 등에 맨 베르덴이 기사에게 다가갔다.

"토벌대 지원도 가능합니까?"

"토벌대...? 그건 모험가들의 영역이라 잘은-."

화르륵!

베르덴의 손바닥 위에 불꽃의 구체가 생겨났다.

피부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기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염구라면 분명 3위계... 그렇다면 이 남자가 금 등급에 필적하는 마법사란 말인가?'

많아 봤자 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나이로 보이는데.

마력을 거둔 베르덴이 다시 기사에게 물었다.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되는데, 안 되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시죠."

기사가 막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모험가들에게 향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투구를 쓰고 있는 한 모험가와 대화를 나눴는데, 표정을 보니 영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허락하든 말든 베르덴은 숲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그 위험한 괴물이 리스너가 말한 시련이 분명했으니까. 단지 숲에서 모험가들과 마찰이 일어날 걸 방지하기 위해서 동행을 지원했을 뿐이었다.

리스너가 말한 한 달이라는 시간에 비해 사태가 일찍 일어난 감이 있긴 하지만, 그 외에 별다른 사태는 없어 보였으니 갈 수밖에.

잠시 기다리자 백금의 플레이트를 목에 맨 모험가가 다가왔다.

체형이나 머리카락을 보아 여성인 것 같은데....

'리스너가 말한 그녀인가?'

그런 의문을 머리 한편에 담고 모험가 앞에 마주 섰다.

이내 차갑고 날 선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토벌대에 지원하고 싶다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본인 몸은 스스로 지키시길. 뒤처지더라도 챙겨 줄 생각이나 여력 따윈 없으니까요. 그리고 방해가 된다면 강제로 배제하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말을 내뱉은 그녀가 홱 하고 돌아서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베르덴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볍게 손을 풀었다.

'방해라.'

방해가 될지 안 될지는 곧 알게 되겠지.

맨 뒤에 선 베르덴에게 흘끗 시선을 던진 모험가들이 일제히 성문을 빠져나갔다.

부여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 베르덴은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며, 다른 마법사 모험가들과 함께 하늘에서 그 뒤를 따랐다.

* * *

얼마 안 가 숲에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음산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레이라를 필두로 안쪽으로 들어서자, 곧 저 먼 어둠 속에서 나무들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언뜻 봐도 상당한 숫자의 트런트였다.

"허... 이거, 듣던 것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일단 마법으로 제압을...."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레이라가 검을 빼 들었다.

어찌나 예리한지 칼날에 닿은 풀이 쩍 갈라졌다. 이어 주위를 압박하는, 살기에 가까운 날카로운 기세. 그녀가 칼을 몸 쪽으로 당기며 체중을 앞발에 실었다.

고요한 긴장 속에서 모험가들이 침을 삼키던 그때.

갑자기 베르덴이 모험가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검로가 막힌 탓에 레이라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방해한다면 배제한다고 했을 텐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더 빠를 것 같아서."

"그게 무슨...."

그 순간,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베르덴에게서 푸른 마력이 피어올랐다.

눈에 보일 정도의 거대한 마력량. 마력 감지를 펼쳐 범위 내에 살아 있는 인간이 없다는 걸 확인한 베르덴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더블 캐스팅.

<플레어>

콰아아아!

두 개의 붉은 광선이 숲을 관통했다.

휩쓸린 대지는 붉게 타올랐고 트런트와 나무는 구분 없이 재로 변해 버렸다. 마법이 끝나고 난 뒤, 남은 건 잿더미와 지글거리는 대지뿐.

이걸로 길은 만들어졌다.

베르덴이 경악에 빠져 있는 모험가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 갈 겁니까?"

뒤처진다고 해도 신경 쓸 생각은 없는데.

53화 소울 트리 (2)

투둑.

불에 탄 나뭇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며 가루가 되었다.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냄새. 모험가들은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주시했다.

그중 마법사들은 베르덴에게 시선이 멈춰 있었다.

'4위계...?'

방금 전 마법은 범위로 보나 파괴력으로 보나 4위계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것도 마법의 한계치까지 마력을 담은.

그리고 시각적으로 드러날 정도로 거대한 마력량과 일순간 스쳐 지나간 마력의 파동까지.

'설마 이 일대에 마력 감지를 펼친 건가?'

구해야 할 모험가가 있다는 건 이미 전달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광범위한 마법을 썼다는 건 이미 범위에 대한 계산을 마쳤다는 뜻. 마법사들은 4위계라는 힘보단, 그 연산력과 그걸 가능케 한 방대한 마력량에 경악했다.

모험가나, 용병은커녕 작은 소문조차 듣지 못했던 잿빛의 젊은 마법사. 어디서 이런 존재가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라는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는 방주의 후보 중 하나로서, 저런 마법사가 있다는 건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설마 다른 후보?'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눈앞에 닥친 시련을 이겨 내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안 갈 겁니까?"

그런 베르덴의 말에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곤 모험가들에게 말했다.

"서두르죠."

잠깐 멈추었던 토벌이 다시금 진행됐다.

* * *

플레어에 닿은 숲엔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었다.

트런트도 이형종이라지만 나무는 나무였기에 선뜻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 덕에 토벌대는 보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속도였다.

'이, 이게 차기 미스릴 등급의...!'

레이라를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오른다.

마치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듯한 움직임. 이것도 그녀 나름대로 조절하고 있는 거지만 금 등급 모험가들에겐 벅찼다. 그런 레이라와 나란히 있는 건 오직 한 명, 베르덴이었다.

그 둘은 서로 간에 일체의 대화도 없이 숲 안쪽을 향했고, 잿더미가 가득했던 길의 끝에 도착했다.

그렇게 어두운 숲에 발을 디디던 순간, 숨어 있던 트렌트들이 양옆에서 둘을 덮쳤다.

'확실히 숫자가 많긴 하군.'

숲 전체가 트런트의 소굴이다.

동물들은 죄다 잡아먹었는지 작은 새 한 마리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가볍게 뿌리를 피해 낸 베르덴의 손에 작은 불꽃이 명멸했다.

<번플레어>

화아아악!

앞에 있던 트런트를 불태워 버린 마법이 뒤에 있는 놈들에게 쏘아졌다. 불쏘시개를 찾아 스스로 움직이는 화염. 연쇄적으로 근처에 있던 이형종들을 없애 버리고서야 사라졌다.

베르덴이 슬쩍 옆으로 고개를 향했다.

트런트들의 몸에 새겨진 한 줄기 붉은 선. 검에 베인 흔적인가? 몸체가 부서진 것도 아니고, 양단된 것도 아닌데 미동조차 없다. 전부 죽은 것이다.

시선을 받은 레이라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트런트의 몸 안엔 핵이 있습니다. 그것만 부수면 쉽게 죽일 수 있죠. 모르는 걸 보니 모험가라든가 그런 건 아닌 것 같군요."

"...."

"당신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제 '시련'을 방해하지는 마시길."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베르덴은 그걸로 모험가 여자가 방주의 후보임을 확신했고, 레이라는 시련이라는 단어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마법사를 같은 후보라고 단정했다.

레이라가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덴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뒤따랐다.

둘의 관심사는 오직 숲속에 숨어 있는 시련에 있었기에, 뒤처지는 모험가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걸 어떻게 따라가?"

"못 가지. 무리하다가 지친 상태로 트런트한테 둘러싸이면 답도 없어."

"솔직히 소울 트리란 걸 상대하는 것도 좀 자신 없고."

졸지에 남겨진 모험가들은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바로, 근처에 있는 트런트를 처리하는 것. 안전하게 퇴로를 확보하는 게 최선이었다.

소울 트리.

아무리 그 괴물의 위험도가 최대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 할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일 뿐, 그 아래의 수준이라면 그 둘이 충분히 토벌할 수 있을 것이다.

대륙에 얼마 없는, 미스릴 등급을 앞에 둔 모험가가 있었으니.

'저 마법사도 굉장히 강해 보이고.'

거기다 투사 바르델까지 힘을 합친다면 승산은 분명하다.

물론 살아 있을 경우에 말이지만... 어쨌든, 자신들이 걱정할 만한 존재들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모험가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좇아야 한다.

그래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우리들 목숨이나 신경 쓰자고."

동족들의 사체를 넘어 다가오는 트런트들.

모험가들은 원형으로 서로의 등을 지키며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 * *

피핏.

붉은색의 검광의 번뜩이자 레이라를 둘러싼 트런트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좇다웬만해선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검속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도는 그녀가 자랑하는 무기였다.

'강하다.'

같은 등급인 도살자와 전혀 다른 전투 방식. 결코 간격을 허락하지 않는 레이라의 검술은 예리하고 섬뜩했다.

이게 방주가 택한 후보 중 하나라니. 어쩌면 방주는 베르덴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대한 집단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시야에 비친 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나무들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트런트지만.

모험가들이 말한 소울 트리... 아마 의뢰 중에 마주한 회색 나무를 일컫는 말이겠지. 그로 의심되는 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바르델이라는 백금 등급 모험가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냥 음산하고 어두운 숲이었다.

'조금 더 마력을 펼쳐 볼까.'

주변 일대에서 숲의 중심부로.

푸른 마력이 확 퍼져 나가더니 베르덴의 감각에 수많은 것이 잡혔다. 방대한 정보에 압도되지 않고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그러던 그때, 무언가가 잡혔다.

아니, 악마의 숲의 경계가 있는 숲의 북쪽 부근이 일체 감지가 되지 않았다. 일전에 악마의 숲에서 보인 반응과 같았다.

"저쪽인가."

확신한 베르덴이 북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어딜 가냐는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설명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의심스러우면 알아서 쫓아오겠지.

서서히 지면에 가까워지자 숲속에서 날카로운 가지들이 뻗어 나왔다.

<화염 장막>

베르덴을 둘러싼 붉은 화염. 가지들은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검게 바스러졌다.

바닥에 착지한 베르덴이 스태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이그니션>

화아아악!

불꽃의 파동이 숲에 퍼져 나갔다. 나무는커녕 나뭇잎을 겨우 태울 정도의 화력이었지만 트런트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발버둥을 쳐 댔다.

'마력감지가 안 되니 직접 찾는 건 불가능해.'

물론 방법은 있다.

숲 일대를 전부 불태워 버리면 계속해서 숨어 있지는 못할 터. 그렇게 생각한 베르덴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베르덴의 연산 능력으로도 10초나 정신과 마력을 집중해 캐스팅한 마법.

'타깃은 트런트에 한정한다.'

스태프에 맺힌 다섯 줄기의 화염이 서로 뒤엉키며 명멸했다.

<화염 역병>

화아아아아악!

사방으로 뻗어 나간 화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근접해 있던 트런트들이 일체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 나가며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 이름대로 화염으로 이루어진 역병이 트런트 사이에서 확산했다.

'확실히 반응은 있군.'

기세를 모아 더욱 마법을 난사했다.

그렇게 인근 숲에 숨어 있는 트런트를 거의 멸종 직전까지 몰아세우고 나서야 숨어 있던 한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트런트와 달리 회색을 띠고 있는 나무. 전에 봤던 것보다 세 배 이상 거대한 크기였다. 그리고 피부를 스치는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까지.

'그런데 지난번에 느꼈던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 '

전에 마주했던 백색 눈동자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심이 드는 와중, 나무 아래에서 한 모험가가 뿌리에 감긴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그 특징으로 보아, 모험가들이 말한 백금 등급 모험가 투사 바르델이 분명해 보인다.

일단 그를 구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소울 트리.

베르덴이 곧장 스태프를 뻗었다.

* * *

바르델 혼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트런트 무리와 백색 눈동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죽은 자의 비명 소리에 정신이 순간마다 번쩍였다. 그렇게 육체보다 먼저 정신이 무너져 사로잡히고 말았다.

'젠장, 힘이...!'

완력엔 자신이 있었지만, 기운을 집중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뿌리에 묶이고 나서 체력보다 더 본질에 근접한,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잡힌 이상, 바르델은 소울 트리에게 맛 좋은 영양분에 불과했다.

소울 트리도 이렇게나 강력한 생명체를 잡은 건 오랜만이었던 터라, 순간을 즐기며 먹잇감을 산 채로 두고 남김없이 빨아들일 생각이었다.

남은 시체는 다른 희생자들을 부르는 데 쓰고.

뿌리를 압박하자 바르델의 폐에서 숨이 빠져나왔다.

투사라 불리던 모험가는 그렇게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본인조차 죽음을 직감하고 포기하려던 그때.

<윈드 사이클>

사아아악!

날카로운 바람이 뿌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절단되지는 않았지만 그 탓에 압박이 약간 풀렸다. 그 틈을 타 바르델이 있는 힘껏 감겨 있는 뿌리를 밀어냈다.

겨우 탈출한 바르델이 소울 트리에게서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휴우, 겨우 살았....'

"백금 등급 모험가, 투사 바르델이 맞습니까?"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마법사 같은데, 도시에서 온 구원병인가?

바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군.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은혜를 갚고 싶긴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지면에서도 미약한 진동이 울린다.

사냥을 방해받은 것이 화가 났는지 소울 트리에게서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바르델이 곧바로 자세를 잡았으나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가쁘게 쉬는 걸 보니 상당히 지친 듯 보였다.

거기다 무기를 잃어버렸으니 여기 있어 봤자 큰 전력은 되지 못할 터.

'오히려 방해만 돼.'

베르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뒤쪽으로 가면 모험가들이 있을 겁니다. 먼저 가서 합류하시죠."

"...설마 혼자 할 생각인가?"

"원래 그러려고 왔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바르델이 옅게 웃었다.

"젊어 보이는데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런데 정말로 혼자 오지는 않았겠지? 혹시 레이라는 왔나?"

아마 레이라라면 트런트를 몰살하며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그제서야 바르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로 다행이야. 레이라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그녀는 내가 아는 모험가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니. 그리고 이건 자네한테도 말하는 거지만, 만약 레이라를 만난다면 이 말 좀 전해 주게, 저 소울 트리는 가짜고 본체는 지하에 숨어 있다고. 그 빌어먹을 하얀 눈동자들까지 말이야."

'지하?'

콰가각! 지면에서 회색의 뿌리들이 솟구쳤다.

베르덴이 도울 필요도 없이, 비틀거리며 뿌리들을 피해 낸 바르델이 바닥을 힘껏 박차며 보다 멀리 거리를 벌렸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다. 그러니까 레이라가 올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해. 그럼 부탁하지."

그 말을 남긴 바르델이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시간을 끌라니,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는 건가?'

뭐, 어쨌든 이걸로 마법의 위력을 조절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력을 끌어모은 베르덴이 바닥에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어스퀘이크>

쿠구구구구!

지축이 흔들리며 땅이 갈라졌다. 범위에 있던 트런트들이 틈새로 빨려 들어가며 형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데 소울 트리의 주위는 갈라지기만 했을 뿐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뿌리로 땅을 잡고 있는 건지 몰라도 마법서로 강화된 어스퀘이크의 파괴력을 버틸 정도라니.

'지하에 본체가 있다라.'

베르덴이 틈새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암시로 본 베르덴의 시야의 끝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어둠이 가득한 공동.

그 중심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회색 나무가 있었고, 가지에는 수백 구가 훌쩍 넘는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아마 저것이 바르델이 말한 소울 트리의 본체.

'엄청난 크기다. 바깥에 있던 나무는 수많은 가지 중의 일부분이었나.'

이런 게 도시로 가면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분명 저것이 리스너가 언급했던 진짜 시련일 터.

베르덴은 솟구치는 뿌리들을 피해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곤 생각했다.

'땅에 숨어 있으니 아무래도 공격이 제한되는군. 어스퀘이크도 통하지 않고.'

결정했다.

땅을 방패로 삼는데 억지로 두들겨 부술 필요는 없다. 더 강한 힘으로 방패 자체를 빼앗은 뒤, 놈을 자신에게 유리한 무대로 끌어오면 될 일.

쉽진 않겠지만 베르덴은 자신이 있었다.

그럴 만한 힘이 지금의 베르덴에게 있었으니까.

<지형조작>

4위계에 오른 뒤, 처음으로 전력으로 펼친 대규모 마법.

그 순간, 숲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54화 소울 트리 (3)

"하아압!"

서걱.

트런트의 몸체를 반절 베어 내자 검붉은 핵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이어 마법사가 날린 마법의 화살이 핵을 깨부쉈다. 한바탕 트런트를 사냥한 모험가들이 땀을 잔뜩 흘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허억, 허억. 다 죽인 건가?"

"이 근방은 그런 것 같아."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트런트의 무리는 상당히 위험했다.

몸통을 박살 내거나 하지 않는 이상 잘 죽지도 않기에, 힘을 아끼려면 핵만을 노려야 했다. 그 때문에 모험가들의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다시금 주변을 둘러봤다.

쌓이고 쌓인 트런트의 사체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아무래도 더 올 기미는 없어 보였다. 겨우 한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려던 중, 엄청난 진동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가, 갑자기 뭐야?!"

"요즘 트런트는 지진도 일으키나? 시발, 숲이 뭐 이따위야!"

다시 일어서서 힘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트런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사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반사적으로 모험가들이 고개를 위로 올리자,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가린 거목, 가지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시체.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불길한 나무의 그림자가 숲 전체를 덮고 있었으니까.

"저게 소울 트리...?"

"야야야야, 저렇게 크단 말은 없었잖아! 시발, 저걸 어떻게 토벌해?! 저기다 검 휘둘러 봤자 이쑤시개밖에 더 되겠냐고!"

이들 중에 사선을 넘지 않은 모험가는 없었으나, 소울 트리의 거대함은 그 자체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전력을 다해 봤자 뿌리 몇 개나 벨 수 있을까.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헛웃음만 짓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그때, 난데없이 노랗고 불그스름한 기류가 휘몰아쳤다.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화염의 폭풍. 그 열기는 한참이나 멀리 있는 모험가들의 피부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주변 숲을 불사지른 그것이 이내 소울 트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오, 맙소사...."

모험가들은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 * *

소울 트리는 오래전부터 지하에 몸을 숨기며 먹잇감들을 사냥했다.

모험가 길드가 여러 차례 수색대를 보냈음에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무리 샅샅이 뒤진들 땅 아래까지 살피는 건 무리였으니까.

그렇게 소울 트리는 살아남았고, 지하에서 뿌리를 뻗어 숲 일대를 점점 장악하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

악마의 숲이라고 명명된 뒤엔, 인간을 먹이로 삼는 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여러 아인종이나 짐승을 양분 삼아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성장했다.

그리고 현재.

수십 년간 여러 차례 성장을 거친 소울 트리는 마지막 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그를 넘기 위해선 수천을 아득히 넘는 생명체가 필요했다.

[부족하다.]

그래서 소울 트리는 악마의 숲 바깥에 분신체를 보냈다. 보다 많은 양분을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트런트와 백색 눈동자를 이끌고 영역을 확장하며, 생명체가 많이 살고 있는 장소로 나아가고 또 나아간 끝에 도시 로리엔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 완전한 성장이 머지않았다.

[...?]

그렇기에 소울 트리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하에 있던 본체가 왜 바깥으로 끌려 나오게 됐는지. 그것도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던 지면과 함께 말이다.

* * *

지형조작으로 광활한 지하 공동을 통째로 바깥으로 뽑아 버리고, 마지막으로 소울 트리가 심겨 있는 거대한 흙기둥을 단단히 고착시켰다.

이걸로 방패는 빼앗았다.

'무게가 무게다 보니 마력이 좀 들었군.'

전신을 휩싸는 탈력감.

베르덴이 숨을 내쉬며 피로를 털어 냈다. 물론 그 시간을 소울 트리가 기다려 주지는 않았다.

끼기기기긱.

소울 트리의 가지가 풀어지며 백색 눈동자들이 움직였다.

포레스트 와이번 그리고 트윈 헤드 오우거와 같은 마수와 상위 아인종. 거기다 개중에는 베일론 자작을 구하러 갔을 때 봤던 백금 등급 모험가인 궁수와 자작의 수행원들까지 있었다.

분신체에서 다루던 백색 눈동자들을 본체가 회수한 모양.

피융! 화살이 베르덴이 있던 허공을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다섯 마리의 포레스트 와이번이 날아올라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거기다 소울 트리가 내뻗은 수십 개의 가지까지.

수적으로 완전한 열세다.

그러나 베르덴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확실히 이제까지 상대해 왔던 것과 차원이 다른 크기지만 그것뿐이니. 이미 백색 눈동자를 포함한 소울 트리의 공략의 계산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베르덴의 눈에 푸른빛이 명멸했다.

<폭풍>

휘몰아치는 대기.

가지에 매달린 시체들이 요동치며 날아오던 포레스트 와이번이 그대로 휩쓸렸다. 물론 소울 트리 자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인페르노>

붉은색을 넘어선, 초고온의 노란 화염의 벽이 허공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폭풍에 휘말렸고, 꺼지지 않는 불은 산소를 더욱 불태워 역으로 바람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4위계 합성 마법, 화염폭풍.

화아아아아악!

어두운 밤하늘이 훤히 드러나며 그 여파에 주변 숲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소울 트리가 방패로 삼을 트런트를 불러들였으나 기둥을 오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화염의 기류가 호흡기로 파고들어 백색 눈동자들은 그대로 전신이 불타 소멸했다.

위력이 위력이니만큼 적지 않은 마력이 소모되긴 했으나, 한순간에 소울 트리가 갖고 있던 수적 우위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끄떡없군.'

그에 반해 소울 트리는 거의 멀쩡했다.

속성 자체에 내성이 있는지 불에 그슬리기만 할 뿐, 눈에 띄는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때, 소울 트리의 몸체가 벌어졌다.

마치 인간의 입처럼.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원한이 가득 담긴 망자의 절규가 화염폭풍을 흩어 버렸다.

순간 느낀 통증에 베르덴이 귀를 잡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베르덴 자신의 목소리였다.

[왜 굳이 증명하려고 하는 거야? 다른 마법사들을 죽이고 얻은 힘 따위를.]

[포기해. 포기하고 편하게 살아.]

[그냥 도망쳐. 네가 저걸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환청인가?"

마력으로 청각을 닫아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들려왔다.

분명 소울 트리가 내뱉은 비명 소리와 관련이 있겠지. 거슬리긴 했지만 이런 것 따위에 흔들릴 베르덴이 아니었다.

<거암강타>

────콰아아아앙!

막대한 질량과 중력으로 가속화된 속도.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막아 낸 뿌리가 부러졌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통하는 건가. 터무니없는 내구성이지만 상황은 확실히 베르덴이 우세했다.

왜냐하면 소울 트리는 정신 계열을 다루는 이형종이었으니까.

일반인 만 명은 망자의 절규로 단번에 정신을 파괴할 수 있었지만, 정신력이 강한 강자 한 명을 상대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 줄 트런트와 백색 눈동자마저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이니.

결국 당장 소울 트리가 할 수 있는 건 견고한 본체로 상대가 힘이 빠질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것뿐.

그러나 베르덴의 마력은 너무도 깊고 방대했다.

게다가 소울 트리의 적은 베르덴만이 아니었다.

마법 폭격이 일어나고 있는 전투 그 아래, 재빠른 움직임으로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핏빛검, 레이라. 그녀가 피처럼 붉은 기운을 뿜어 대며 하늘로 도약했다. 검 끝에 모인 기운이 실처럼 흐트러지며 내려가 소울 트리에 닿았다.

그토록 단단했던 껍질이 쩍 하고 갈라졌다.

베르덴이 염력으로 흙더미를 띄우자 레이라가 그곳에 안착했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경쟁자니까요."

"경쟁자?"

"이건 제가 극복해야 할 시련입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은 없으니 단념하시길."

레이라가 다시금 소울 트리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녀에 비해 둔하기 짝이 없는 뿌리들은 갑옷을 스치지도 못했다. 남아 있던 몇몇 시체가 주변에서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음에도 레이라의 움직임은 느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군.'

리스너가 분명 시련이라고 해서 홀로 극복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했었는데.

뭐, 그렇게 나온다면 베르덴도 마음대로 할 뿐이다. 보아하니 눈먼 마법에 휩쓸려 죽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 * *

두꺼운 나무껍질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울 트리라고 할지라도, 위험도가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고 할지라도 이 개체는 아직 성장을 마치지 않았다. 거기다 앞에 있는 두 인간과는 상성조차 맞지 않았다.

트런트를 불러 방패로 삼을 수도 없고, 양분을 소모해 백색 눈동자를 만들어도 곧바로 죽는다.

여태껏 잘 숨어 있던 본체는 완전히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놈들의 정신을 흔들어도 미동조차 없다.

[위험하다.]

나무껍질을 재생하고 있긴 하나, 이대로 가다간 안쪽에 숨겨 둔 핵마저 파괴될 거라고 소울 트리는 직감했다.

생명이 가진 본능은 생존.

소울 트리는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내기로 했다. 설령 다시금 힘을 쌓는 데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수백 개의 가지 끝에서 시체들이 자라난다.

이윽고 그 시체의 눈과 입이 열림과 동시에 소울 트리가 다시 한번 본체를 움직였다.

무자비한 마법과 붉은 검이 방해를 해 왔지만, 소울 트리는 필사적으로 평생 동안 쌓아 온 모든 양분을 소모해 망자의 절규를 토해 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숲 전체에 메아리처럼 비명이 울려 퍼졌다.

베르덴도, 레이라도, 바르델과 다른 모험가들도, 성벽에 서 있던 경비병들과 로리엔에 있던 모든 시민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소울 트리가 만들어 낸, 절망이 가득한 악몽에 빠진 것이다.

이걸로 대부분의 양분을 소모해 소울 트리 본체는 움직일 수 없었지만 시체들은 달랐다.

백색 눈동자를 번뜩인 놈들이 느릿느릿 악몽에 빠진 그들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 * *

어느 순간, 베르덴은 눈을 떴다.

활활 타오르고 엉망이 된 공간이 시야에 비쳤다. 그런 그의 앞엔 보헤미른의 마탑주가 압도적인 위압감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1위계 따위가 한계를 벗어나다니. 확실히 놀랍긴 하지만 결국 거기까지겠지."

그때, 베르덴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마탑을 희생양 삼아 역천을 이루고, 숱한 전투와 위험을 넘고 넘어 마법사로서 아득히 성장한 자신이 마탑주와 맞닥뜨리고 결국 정면에서 패배한 기억이.

그러자 신체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전신의 마력회로는 산산이 찢겨 나갔으며 심장마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설령 기적처럼 살아난다고 해도 마법사로서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마탑주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그 사실은 가히 절망 그 자체였다.

"베르덴, 네놈은 한계를 넘어선 한계조차 벌레와 다를 바가 없다. 너 같은 버러지 따위에게 마탑이 입은 손실만──."

"이건 꿈이군."

"뭐?"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망이었던 몰골이 어느새 깨끗함을 되찾았다. 그가 당황하고 있는 마탑주의 앞에 다가섰다.

"1위계 따위가... 정신에 착란이라도 온 건가?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도 나에게 발끝도 미치지 못한 게 믿기지가 않는가 보지?"

"믿을 수가 없지."

콱!

베르덴이 오른손으로 마탑주의 얼굴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살에 손톱이 파고들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미래의 내가 너한테 진다는 게."

"끄으윽... 네, 네놈이 감히이!"

콰아아아아!

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마탑주의 머리를 그대로 불태웠다. 후련하긴 했지만 어차피 가짜는 가짜. 손을 털어 내며 마탑주의 남은 몸뚱이를 쳐다봤다.

"기다리고 있어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 채 블랙 아워와 서로 전력을 낭비하면서, 만능이란 이명에 얽매여 언제까지고 오만하게 말이다.

물론 현실의 마탑주에게 들릴 일은 없겠지만.

가짜 시체를 일별하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있던 공간이 저 멀리 사라지고 어둠이 다가왔다. 그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자, 베르덴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시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깜짝이야."

콰지직!

스태프가 시체를 박살 냈다. 그 너머에 있는 소울 트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까 전과 달리 눈에 띄게 뿌리의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방금 전 악몽이 마지막 수단이었나.'

레이라를 보니 아직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것인지 생각보다 강력한 정신 계열의 능력인 것 같다. 하긴 악몽에서 느꼈던 그 감정과 기억 그리고 고통은 전부 현실처럼 느껴졌으니.

물론 베르덴에겐 일절 통하지 않았지만.

베르덴이 스태프를 겨냥했다.

거의 힘을 다한 소울 트리는 미약하게 흔들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여전히 두꺼운 나무껍질은 굳건했다. 단순한 마법으로 저걸 뚫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르칸이 남긴 마법, 유성을 쓸 수는 없다.

근처에 있는 레이라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휩쓸릴 뿐만 아니라, 그 숨길 수 없는 흔적에 블랙 아워가 추적을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니.

'그러니.'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 방대했던 마력이 일부 바닥을 드러내며 한 줄기 벼락이 날아가 구름에 스며들었다.

쿠르릉.

뇌운(雷雲).

번개를 품은 구름이 낮게 울부짖었다.

베르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그래도 부족해.'

더욱 마력을 끌어모았다.

한계까지 확장된 마력회로에서 통증이 일며, 주체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이 제어를 벗어나려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러던 순간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파지직!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번개가 구름에 스며들었다.

생명체에 한해, 현재 베르덴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이며 낼 수 있는 출력의 한계.

짙은 청색의 구름에서 수천 개의 번개가 요동쳤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스태프를 들어 정확히 소울 트리의 몸체를 겨냥했다. 억지로 닫아 놨던 문을 열어젖히며 마법을 풀어 헤쳤다.

세 개의 낙뢰가 합쳐진 푸른 빛줄기.

<삼뢰적멸三雷寂滅>

번쩍!

소리보다 빠르게 빛이 추락했다.

콰과과과과과!

엄청난 열과 빛이 사방에 퍼졌다.

뇌격보다 방대한 에너지를 담은 번개가 소울 트리의 그 단단한 몸체를 서서히 파괴했다. 까맣게 그을린 나무껍질과 뿌리 그리고 가지와 시체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윽고 직격당한 몸체 중앙이 허물어졌다. 그렇게 생긴 틈새 아래에서 보라색 빛이 흘러나왔다.

'저 안에 핵이 있나 보군.'

확인할 필요도 없다.

베르덴이 손을 튕기자 한 줄기 불꽃이 점멸하며 구멍 안쪽으로 사라졌다.

<호염>

내부에서 빛이 번쩍였다.

55화 소울 트리 (4)

사방은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팔과 다리에 묻은 피가 질척거렸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레이라는 그때와 같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싸늘하게 식은 부모님과 남동생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어둠이 꿈틀거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날카롭고 섬뜩한 손. 그것이 레이라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저항하려 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과거와 같이 두려움에 떠는 게 전부였다.

치이이익-!

이내 타들어 가는 격통이 얼굴에 느껴졌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레이라의 귓가에 인간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주 속에서 한껏 발버둥 쳐 보거라.'

악마.

평범했던 레이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박살 낸 존재였다.

* * *

파직.

세상에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곧바로 의식을 되찾은 레이라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에 타고 있는 소울 트리를 발견했다.

놈이 발산하던 불길한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늦었나.'

방금 본 기억은 소울 트리가 보여 준 과거의 악몽이겠지.

고작 환상 따위에 당했다는 생각에 레이라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팔짱을 낀 채 소울 트리를 바라보고 있는 베르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또한 악몽을 봤을 텐데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혹시 정신을 보호하는 매직 아이템이나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악몽에서 탈출한 거죠, 그렇게나 빨리?"

소울 트리의 악몽은 대상에게 절망적인 미래나 과거를 보여 줌으로써 정신을 뒤흔든다.

거기에 집어삼켜지면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되며, 그 상태로 양분이 되어 서서히 생명력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물론 베르덴에겐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두려움을 품을 이유 따위는 없으니까."

당장 마탑주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자신은 가능하다. 이건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확신이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결코 바라지 않는 절망을 보여 주는 악몽 따위는 베르덴의 정신을 조금도 흔들지 못한 것이다.

"대답이 됐습니까?"

"...예, 조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가 소울 트리를 올려다봤다.

활활 타오르는 거목의 일부가 쩍 갈라지더니 하얀 무언가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아, 뭔가 떠오른 듯한 레이라가 검을 당기며 자세를 잡았다.

혈섬(血閃).

거대한 붉은 검기가 거목을 향해 날아갔다. 핵이 부서진 소울 트리의 껍질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에,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양단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틈새에서 방금 전 보았던 하얀 것이 무더기로 솟구쳐 올랐다.

"저건...."

"기록에 적혀 있길, 소울 트리는 죽으면 양분 삼은 생명의 영혼을 뱉는다더군요. 그렇게 빠져나간 영혼들은 자유를 되찾고 성불한다고도."

물론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울 트리에서 벗어난 무수한 그것이 하늘로 사라지며 새하얀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걸 보면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투두둑! 투둑!

약해진 거목의 뿌리가 본체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지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고착화된 흙기둥에 약한 충격을 보내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기우뚱 기울어진 거목은 결국 바닥으로 추락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나라를 절망으로 물들이는 나무, 소울 트리(Soul Tree).

토벌 성공.

* * *

우두머리를 잃은 트런트들은 본능에 따라 악마의 숲 깊숙한 곳으로 되돌아갔다.

수백 마리를 죽였음에도 아직 숫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언제고 토벌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휴식을 취할 차례였다.

지친 모험가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숲을 빠져나갔다.

그 옆엔 바르델도 있었다. 무기도 없고 지친 상태라곤 하지만 백금 등급 모험가답게 도중에 트런트에게 죽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레이라와 베르덴.

그 둘은 다른 이들과 조금 떨어진 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시련은 이걸로 끝인 겁니까?"

"아마 그렇겠죠. 시련이 두 번 연속으로 일어났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시련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을 많이 소모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상처 하나 입지도 않았고.

하지만 만약 베르덴과 같은 마법사가 없었다면.

레이라 혼자서는 소울 트리를 토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하에 숨어 있는 놈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리고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소울 트리는 분명 도시 하나는 쉽게 절멸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하긴, 원래 나를 위해 준비된 시련이 아니라고 했으니.'

상대적인 거겠지.

그때, 레이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그쪽 이름을 모르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드러웠다.

후보로서 같이 시련을 극복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레이라는 베르덴을 경쟁자로서 보고 있었으니.

'아마 시련이 끝났기 때문이겠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사람처럼 목소리가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베르덴이 레이라의 투구를 바라봤다.

"마법사 애셔입니다."

"애셔... 들어 본 적이 없는 걸 보니 최근에 방주의 후보가 되셨나 보네요."

리스너의 제안을 받지 않았으니 후보가 아니다. 물론 굳이 그 사실을 레이라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베르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후보들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저와 당신을 포함해 이곳 리비안트 공국에서 활동하는 후보는 4명이에요. 규칙상 누군지 발설할 수는 없지만요. 애초에 모르기도 하고요."

'이 나라에 후보가 두 명이나 더 있는 건가.'

이번 소울 트리 토벌에는 베르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터라, 레이라가 가진 실력을 전부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움직임이나 검기를 보면 도살자 갈리아크보다도 훨씬 강한 건 분명했다.

과연 다른 후보들도 이 정도 실력을 갖고 있는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전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레이라의 태도에 베르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일행들은 겨우 숲을 빠져나갔다.

저 멀리 하늘에서, 어둠이 점차 걷히며 동이 트기 시작했다. 꼬박 새벽을 내리 전투를 벌인 것이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모험가들이 숨을 내쉬었다.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는 도시의 경비병, 기사와 모험가들이 성벽에서 그들을 보며 환호했다.

"바르델 씨다! 투사가 살아 있어!"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부상자가 있는 것 같으니 빨리!"

소울 트리의 크기는 도시에서도 보일 정도였기에,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소울 트리가 마지막에 내지른 망자의 절규에 전부 악몽에 빠지긴 했지만, 다행히 정신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의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불에 탄 거목에서 빠져나온 하얀 영혼들이 하늘을 훤히 밝히는 것을.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 참... 우린 별로 한 게 없는데."

"그냥 있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반은 간다니깐."

소울 트리는커녕 트런트만 잡아 댄 모험가들은 낯간지러웠지만, 그냥 환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토벌대에 참가하긴 한 거니까.

가서 받을 보수만 생각하기로 하며 도시를 향해 다가갔다.

* * *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리스너가 시계를 봤다.

본래 방주에서 예상하고 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때에 시련이 끝나 버렸다. 그것도 도중에 어떠한 희생자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이거... 아무래도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 같군요."

리스너의 말투는 여전히 여유로웠으나, 사실 내심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소울 트리는 정신계를 다루는 이형종.

그러나 강철 이상의 경도를 지닌 나무껍질과 수많은 트런트 그리고 양분 삼은 생명체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기에 특히나 까다로운 상대다.

설령 그것들을 뚫는다 할지라도, 소울 트리의 악몽은 어지간해서 벗어날 수 없다.

현 방주의 후보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레이라조차 자칫하면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었으니. 아무리 강인한 육체와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정신 그 자체를 단련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그러했다.

만약 방주가 없었더라면 소울 트리는 로리엔을 집어삼키고 완전한 성장을 이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최소 도시 4개 정도는 전멸했겠지. 희생자는 최대 43만. 그 절반이라 할지라도 공국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의 피해다.

괜히 모험가 길드에서 위험도를 특수 개체에 버금간다고 기록한 게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봤을 때, 아무리 완전한 성장을 이루지 않은 개체라곤 하나, 악마의 숲에 있던 소울 트리는 이렇게나 쉽게 토벌당할 정도로 약한 위협이 아니었다.

물론 수많은 인간이 목숨을 구원받은 건 박수 쳐야 마땅할 일이다.

다만, 여태껏 시련이 이 정도로 간단히 끝난 적은 없었기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이것이 고작 한 마법사에게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에 더더욱.

'4위계 마법사, 애셔.'

그가 다루는, 여태까지 확인된 원소만 총 6개.

하물며 부여 마법까지 다룰 줄 알며 근접전 또한 여타 마법사와 달리 뛰어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모든 장점의 기반이 되는 방대한 마력까지.

리스너는 확신했다.

자신이 아는 세계의 인재들, 저 나이대의 마법사 중에 감히 애셔과 견줄 실력자는 없다고.

과거를 전혀 알 수 없는, 스승조차 불분명한,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천재 마법사라.

"애셔...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리스너의 물음은 조용히 허공에 흩어졌다.

* * *

소울 트리가 토벌된 후, 로리엔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까스로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혹시 모를 위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에, 체력을 회복한 투사 바르델을 필두로 여러 모험가와 로리엔의 기사단이 악마의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에서 직접 소울 트리의 잔해를 수습하는 데 나섰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산산이 박살 나긴 했지만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이기에 쓸 만한 소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몫은 소울 트리를 직접 상대한 베르덴과 레이라의 것이었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적어도 며칠은 지나야 확인이 가능할 터.

소울 트리의 토벌 보수를 받아야 하는 베르덴은 어쩔 수 없이 로리엔에 남아야 했다. 그는 소모한 마력을 회복하는 데 전념하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하르칸이 남긴 마법을 연구하거나, 리스너가 준 만드레이크 추출액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을 기점으로, 베르덴을 대하는 시민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음식값은 안 받겠습니다! 도시를 구해 준 은인에게 식사 정도는 대접해 드려야죠!"

"...."

"갓 구운 빵입니다! 한번 드셔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다음에 오실 때 또 챙겨 드리겠습니다!"

"...."

"방금 만든 레몬에이드예요! 저기 엄마가 갖다 주래요!"

"...."

그저 식사거리를 포장하러 나왔을 뿐인데, 어느새 양손에 음식이 가득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물어보니, 로리엔의 신문에 도시를 구한 사람들이라며 레이라와 애셔의 이름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베르덴의 외모가 눈에 띄는 터라 금방 특정된 것이라고.

딱히 불쾌해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베르덴이 강대한 마법사임을 증명한다면 그 이름이 세계 전역에 퍼질 테니까. 이 정도야 거쳐 가는 길이었다.

'그보다 이 많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하지.'

먹어 치우는 건 불가능하다.

베르덴은 소식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식가도 아니었으니. 아마 이걸 혼자 먹는다면 음식 절반은 식어서 맛이 없어질 게 뻔했다.

'그럼 나눠 주면 되겠군.'

베르덴은 고민하다 이내 숙소로 가던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교회. 언제나 기부를 환영하는 곳이니 처치 곤란한 음식 기부도 받아 줄 게 분명했다.

56화 레이라

새하얀 방.

벽에는 루아스교의 상징인, 빛을 형상화한 장식물이 걸려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흘러들어 온 따스한 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신성이 가득한 이곳에는 어떠한 어둠도 없었다.

...스르륵.

조용히 눈을 뜬 레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멍하니 빛을 응시하다가 침대에서 내려갔다.

탁자 위에 놓인 새하얀 가면.

일상생활에서 그녀의 얼굴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도시 안에서 하루 종일 전신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다니는 건 여러모로 시선을 끌었으니.

뭐, 이쪽도 눈길을 끄는 건 마찬가지긴 하지만 주목도가 떨어지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편하기도 하고.'

레이라가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귀족이 입을 법한, 흰색을 기조로 한 옷을 입고는 방을 나섰다.

이곳은 로리엔의 교회.

복도를 지나며 다른 방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엔 며칠 전 악마의 숲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했던 투사 바르델이 기분 좋게 잠을 자는 방도 있었다.

소울 트리에게 생명력을 꽤나 빼앗긴 터라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걸 이유 삼아 이참에 제대로 쉴 생각인 모양이다.

교회에 있는 동안은 의식주를 알아서 해결해 주니. 레이라와 마찬가지로 바르델 또한 교회에 적지 않는 돈을 헌금해 왔기에 딱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는 견습 성직자, 뷔나와 마주쳤다.

"아, 레이라 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아니, 점심이에요!"

"좋은 점심이에요, 뷔나."

레이라가 로리엔에 머문 지 벌써 수개월이다.

그동안 교회에서 생활한 터라 교회 사람들하고는 안면을 튼 상태.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는 레이라였기에 대부분 그녀를 어려워했으나 뷔나는 달랐다.

어린 성직자는 누구에게나 순수하고 천진난만했다.

둘은 자연스레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오늘 점심은 생선구이래요! 저는 가시 때문에 싫은데, 사제님이 먹고 싶은 것만 먹고 편한 것만 찾다 보면 엄청 게을러진다고 그랬어요. 그럼 훌륭한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그래서, 불편해도 참고 먹으려고요! 그렇게 하면 루아스 님도 좋아하시겠죠?"

"분명 그러시겠죠."

레이라가 뷔나의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순수함 그리고 꿈. 레이라는 어린 성직자를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기에, 결코 되찾지 못할 그 행복한 순간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뷔나가 밖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레이라 님, 저분은 누굴까요?"

레이라도 뷔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은....'

베르덴.

소울 트리를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마법사.

창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간편한 복장을 하고 양손 가득 음식을 포장해 왔는데, 아무리 봐도 혼자 먹을 양으로 보이진 않았다. 시선을 느낀 베르덴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

가면을 쓴 레이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 * *

베르덴은 시민들에게서 받은 음식을 대부분 교회에 기부했다.

루아스교의 교리에는 딱히 금기시되는 음식은 없었기에 성직자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 식사 준비를 하려던 참이였다고.

물론 외부인이 주는 음식을 무턱대고 신뢰할 순 없었기에, 베르덴에게 허락을 구하고 간단히 독이나 신선도 검사를 마쳤다.

'그나저나....'

베르덴이 스테이크를 자르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레이라가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교회에서 감사하다며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유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직자들 틈에서 홀로 고급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레이라와 베르덴, 둘이 같은 방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레이라가 파스타를 돌돌 말아, 가면을 살짝 들춰 입에 넣었다.

문득 시선을 느낀 그녀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포크를 내려놓고 나지막이 말했다.

"...음식값은 나중에 드리죠."

"필요 없습니다. 돈 주고 사온 건 아니니."

"그럼 왜 그러시죠?"

"가면이 불편해 보여서 그럽니다."

익숙한 반응이다.

레이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조금 불편하긴 하죠.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걸 벗으면 여러모로 시선이 끌리거든요."

"시선?"

"제가 너무 예뻐서요."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한층 차가워지자 레이라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농담이에요."

"그렇군요."

"분위기가 어색해서 한번 해 본 건데, 아무래도 역효과였나 보네요."

확실히.

솔직히 뭐라고 반응해야 될지 몰라서 난감했다.

분위기가 더 악화되기 전에 레이라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시련을 극복한 게 이번이 처음인가요?"

"예."

"그런가요. 드문 일이네요. 보통 첫 시련은 비교적 쉬운 편인데 시작부터 소울 트리라니...."

레이라가 베르덴을 유심히 쳐다봤다.

방주의 후보 중 하나라는 것부터 특별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지만 눈앞의 마법사는 뭔가 다르다.

외모로 보이는 나이에 맞지 않는 방대한 마력과 강력한 마법 그리고 소울 트리의 정신 파괴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까지.

'그런데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어.'

하다못해 저 외모에 대한 특징조차도.

최소한 공국 주변에서 활동하던 건 아닐 것이다.

아마 멀리 있는 타국에서 리스너가 영입해 온 마법사란 거겠지.

'어쩌면....'

"애셔,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그러시죠."

"당신은 어째서 방주에 들어왔죠?"

레이라의 물음에 베르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방주에 들어간 적은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방주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야 리스너의 의뢰로 소울 트리라는 시련에 도전하기도 했고, 방주와 적대하는 글러트니와 대립하기도 했었으니.

그러한 시각에서 보면 베르덴이 방주의 후보라고 오해할 법했다.

'...뭐, 상관없나.'

애초에 레이라와 시련을 함께한 이상, 그런 오해를 살 거라는 건 리스너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거슬렸다면 경고라도 했겠지. 그러나 그러긴커녕 어떠한 언급도 없었으니 암묵적으로 방주와 연관되는 걸 용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리스너가 말한 호의의 일부일지도.

어쨌든 굳이 직접 오해를 풀 이유는 없다.

자칫 속았다고 생각한 레이라가 적대적으로 돌변할 위험이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내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다.

베르덴이 간단히 답했다.

"내게 도움이 되니까."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리스너가 준 만드레이크 추출액은 성장에 있어 큰 도움이 될 테니.

"이거면 대답이 됐습니까?"

"네, 충분히."

레이라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예요. 방주가 추구하는 이상과 이념, 그런 거창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죠. 제가 원하는 건 바로 이 가면 뒤에 있는... '저주'를 없애 버릴 방법이에요."

저주(詛呪).

그것은 총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흑마법으로 분류된, 사령 계열 마법의 한 종류.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정신을 흩트려 놓거나 육체 능력 또는 감각 기능을 저하시키는 등 디버프적인 마법이 대다수인데, 부여 마법과 반대되는 효과를 지닌 마법이 많다.

그리고 둘째는 이형종의 하나인 '악마'의 저주다.

이건 루아스교의 축복과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영구적으로 서서히 육체를 썩게 만들거나 생명력을 앗아 가는 등 강력한 악마일수록 위험한 저주를 품고 있다.

레이라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런데 루아스교의 추기경까지 찾아가 봤지만 지금으로선 해주할 방법이 없다더군요. 주기적으로 교회에서 축복을 받아 저주의 효과를 억누르는 게 전부라고. 제가 교회에 머물고 있는 게 바로 그 이유죠."

"그래서 방주의 후보가 된 겁니까? 저주를 풀기 위해서?"

"당신도 알다시피 방주란 집단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집단이에요, 가늠할 수 없는 힘과 정보력을 가진. 그래서 후보 제의가 왔을 때, 방주를 통해 제 가족을... 죽이고 저에게 저주를 남긴 악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렇게 물으니 리스너가 그러더군요. 주어진 시련을 넘고 또 넘다 보면 제게 걸린 저주를 해주할 수 있을 거라고."

"리스너가?"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주를 완전히 믿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의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여러 시련을 이겨 냈기 때문이었으니까.

방주의 인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방주에 들어가도 상관없는 건가.'

방주의 목적은 인류를 이끌 '선장'을 키우는 것.

다만, 레이라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베르덴은 그들이 말하는 선장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가는 듯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거지?'

같이 소울 트리를 토벌하긴 했다만 사적인 얘기까지 할 정도로 친분을 나눈 기억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레이라가 말했다.

"제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동정 따위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아직 찾지 못한 악마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죠."

먼 타국에서 온 마법사, 애셔.

어쩌면 그는 레이라가 원하는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애셔, 당신이 알고 있는 지식 중에 악마에 대한 것이 있나요?"

"사령계 쪽은 조금 알지만... 솔직히 말해 악마는 잘 모릅니다. 제가 공부하던 분야와 전혀 관계가 없는 거라서."

악마가 가진 힘은 명확히 마법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마탑에서 연구를 진행하긴 했으나 쓸 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루아스교에서 악마에 대한 지식을 쌓는 걸 몹시 언짢아했기 때문.

무시하고 진행했다간 악마 숭배자라고 오해받으면 상당히 피곤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런가요...."

레이라의 목소리가 실망으로 물들었다.

조금이나마 기대했지만 역시나였다. 하긴 그토록 찾던 것이 형편 좋게 손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차선책이다.

"애셔, 저랑 거래 안 할래요?"

"거래 말입니까?"

"가능성은 적겠지만... 혹시 악마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 모험가 길드를 통해 보내 주세요. 세간에 퍼져 있는 게 아니라면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돈이든 뭐든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죠."

그 또한 레이라와 마찬가지로 긴 여행을 다닐 터.

그저 한 줌이라도 단서를 얻을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베르덴이 생각했다.

'나쁠 건 없어 보이는데.'

당장 찾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보를 얻게 되면 알려 달라는 거니까.

손익을 가늠한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저로선 손해 보는 일은 없으니."

"좋아요. 정보의 가치는 제가 판단하지만, 그렇다고 가격을 후려치는 일은 없을 테니 그 부분에선 걱정 안 하셔도 좋을 거예요."

이걸로 용건은 끝났다.

그리고 마침 식사도 마쳤다.

"식기는 사용인이 와서 정리할 테니 그대로 두면 될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죠.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애셔."

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중, 베르덴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가기 전에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떤 거죠?"

"다음 시련은 언제 오는 겁니까?"

"아, 처음이라 모르셨군요. 정해진 시간 같은 건 없어요. 언제나처럼 갑자기 찾아와 시련에 대해 말하죠. 도전할 거냐, 아니면 포기할 거냐. 방주는 그게 무엇이든 절대 강요하지 않아요. 선택은 항상 저희의 몫이죠, 그 결과까지도."

대답을 한 레이라가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직전, 그녀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식사 즐거웠어요."

탁.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렇게 베르덴과 레이라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모험가 길드에서 소울 트리 토벌에 대한 보수 산정을 끝마쳤다.

57화 막대한 보수

모험가 길드 로리엔 지부.

로리엔 주변 숲에는 돈이 되는 마수와 아인종이 자주 출몰하기에 항상 모험가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보다 배는 사람이 몰렸다.

소울 트리.

그 말도 안 되는 크기의 거목을 핏빛검 레이라와 함께 토벌한 젊은 마법사.

베르덴은 주로 그레이에서 활동했던 터라 몇몇 귀족이나 관련자들 사이에서 서서히 이름이 퍼지고 있는 중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닌,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존재,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강자.

질투와 선망, 호기심, 술자리에서 쓰기 위한 안줏거리 등.

모험가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소문의 마법사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낯선 외형의 사내가 길드 안으로 들어섰다.

"저게 예의 그 마법사인가...."

잿빛 머리, 푸른 눈동자... 확실히 평범한 외모는 아니다.

일부 모험가들은 베르덴을 관찰하며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그의 실력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듣던 대로 어린데. 저 나이에 그렇게 거대한 화염폭풍을 만들어 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못 믿겠군."

"뭐,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 그 핏빛검도 20대라고 하던데. 맨 얼굴은 본 적도 없지만."

"그 둘을 같은 기준에서 볼 수는 없지. 육체의 전성기는 젊은 때에 오지만 마법사의 전성기는 늦게 오니까. 물론 재능에 따라 다르긴 해도, 저 나이에 그 마법은 확실히 규격 외야."

"동안일 가능성은? 나이는 많은데 외모만 젊은 걸 수도 있잖아?"

"낸들 알겠냐? 정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든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수십 개의 시선.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룬의 반지로 감각이 강화된 탓에 좀 거슬리긴 했지만,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베르덴을 길드의 꼭대기 층, 길드장실로 안내했다.

남색 코트를 입은 중년의 사내와 대면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만나서 반갑네. 로리엔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페이발츠라고 하네."

"애셔라고 합니다."

"물론 알고 있지, 로리엔을 구해 준 장본인이니. 그럼 사족은 떼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괜찮겠나?"

"그러시죠."

"고맙군."

페이발츠는 베르덴에게 지급될 보수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소울 트리 토벌에 대한 보수일세. 결론부터 말하자면 액수는 총 4억 8천만 엘크. 길드에서 소울 트리의 위험도를 책정하고, 시와 협의를 통해 예상되는 피해액을 산출하여 계산했지. 그 외에 여기 있는 바르델을 구출한 등에 대한 추가 보수까지 전부 합친 금액이네."

...4억?

베르덴이 말없이 눈을 깜빡이자, 페이발츠가 말을 더했다.

"기록과 비교했을 때, 자네가 토벌한 소울 트리는 완전한 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네. 그러니까 위험도가 특수 개체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지. 하지만 자칫 로리엔이 끝장날 뻔한 건 사실이니 세금을 면제하고, 시에서 예산을 뜯어... 아니, 받아서 추가 보수를 더 늘렸지."

여기에서 투사 바르델이 한몫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보답이라며, 시장을 설득해 예산을 토해 내게 만든 것이다. 로리엔에 있어 바르델은 꽤나 영향력이 큰 인물이기에 시장이라 해도 쉽사리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예상한 것보다 금액이 적을 순 있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계산한 액수네.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세부 사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아뇨, 괜찮습니다."

베르덴이 주저없이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아 봤자 3억 엘크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울 트리가 위험한 이형종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으나, 토벌 자체는 순조롭게 끝났으니까. 그런데 보수를 더 얹어 줄 뿐만 아니라 세금까지 면제해 준다니.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우선이라는 건... 다른 보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렇네. 이건 말로 하기보다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나을 테지."

페이발츠가 책상 아래에서 커다란 목함을 꺼냈다.

잠금장치를 풀자, 그 안에서 녹색의 나무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잔해 속에서 이것들만 멀쩡하더군. 근처에 산산조각 난 핵의 흔적이 있는 걸 보아 핵을 지탱하고 있던 줄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보수를 산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소재로서 가치가 있는가.

과거에 발견된 적이 없던 터라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는 꽤 놀라웠다.

"내구성은 어지간한 금속 이상인 데다가, 자체적인 수복 기능을 갖추고 미스릴보다 높은 수용성과 전도율을 갖추고 있는 걸로 확인이 됐네. 한마디로 상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희귀한 소재라고 볼 수 있지."

발견된 소울 트리의 줄기는 총 4개.

모험가 길드는 토벌의 공헌도에 따라 소재를 분배했다. 근거로 백금 등급 모험가이자, 베르덴과 함께 소울 트리를 토벌한 레이라의 의견을 참고했다.

"그녀가 말하길, 큰 피해 없이 토벌을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애셔, 자네의 힘이 컸다고 하더군. 그래서 가장 공헌도가 높은 자네에게 2개, 레이라에게 1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길드에서 매입한 뒤, 수익의 일부를 자네들의 보수에 추가하기로 결정했네."

결과, 개인적으로 베르덴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총 5억 7천만 엘크. 그리고 소울 트리의 줄기 두 개.

만약 소재를 판매한다고 치고, 총 가치로 환산한다면 무려 13억 엘크에 달한다. 그만큼 소재의 가치가 상당하다는 뜻. 예상했던 것 이상의 어마어마한 보수에 베르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납득한다면 여기에 서명을...."

휘리릭.

베르덴이 곧바로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물론 애셔라는 가명으로.

"...좋아. 그럼 이것으로 보수에 대한 확인은 끝났네. 늦어도 5일 안에는 계좌에 돈을 입금해 주지. 소재는 이 상자 그대로 가져가면 되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이쪽이 해야지."

베르덴이 조심스레 소재를 챙겼다.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그 모습을 페이발츠가 유심히 바라봤다.

'마흐바트의 가죽으로 만든 장비라. 아무래도 그레이 쪽에서 활동하는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저런 비싼 장비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니.

귀족이나 갑부에게 고용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공국에서 그 정도의 수입을 벌 수 있는 건 모험가 길드나 그레이밖에 없다.

'이제 와서 모험가를 할 생각은 없겠지.'

하긴,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모험가 길드에서 활약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 어차피 영입해 봤자 바르델처럼 로리엔에 눌러앉아 실적을 내 줄 리가 없을 테니 굳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페이발츠는 깔끔하게 베르덴의 영입을 포기했다.

"그럼 잘 가게."

* * *

보수를 받은 이상, 더 이상 베르덴이 로리엔에 머물 이유는 없다. 듣기로는 레이라 또한 보수를 받은 대로 로리엔을 떠났다는 모양이다.

여관으로 돌아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나열했다.

원소의 숨결.

마력 크리스탈.

소울 트리의 줄기.

만드레이크 추출액.

이 네 개는 단일로 사용이 불가능한 소재.

여기서 베르덴은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먼저 선택해야 앞으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지 말이다. 물론 파는 건 논외다.

'무기를 먼저 바꿔야 할까.'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로 만든 오브(Orb).

확신할 수는 없으나 소울 트리의 줄기라면, 오브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스태프의 뼈대로 사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 외에 필요한 재료들이 있긴 하나, 가장 중요한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 셈이다.

'문제는 스태프를 제작해 줄 사람인데.'

페일을 이용하면 뛰어난 마법 물품 제작사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긴 하겠지.

하지만 지금 가진 재산으로는 부차적인 재룟값와 제작 비용을 내기에 턱없이 모자라다. 대충 가늠해 봐도 최소 십수억 엘크는 필요할 테니.

괜히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이 마탑의 보물고에 보관되어 있던 게 아니다.

'그렇다면....'

베르덴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만드레이크 추출액, 마핵의 핵심 재료.

작년 시세로 계산한다면, 나머지 재료들의 값은 약 4억 가까이 육박한다. 적지 않은 액수긴 하나, 이번에 받은 보수로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다.

그리고 제작 난이도 또한 마핵이 더 낮은 편이다.

"그럼 정해졌군."

악착같이 돈을 모아 강력한 무기를 마련하는 대신 마법적인 능력을 더욱 강화한다. 그것이 옳은 판단이다.

'괜히 아끼다가 제때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여건이 되는 대로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한다.

지금까지 베르덴은 그렇게 성장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 성장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계가 없는 까마득한 하늘.

지금도 베르덴은 위를 향해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내딛고 있었다.

* * *

코헨의 빈민가.

열악한 거리를 지나 페일의 화살촉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신문을 보고 있던 노인이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런데 그 반응이 전과 달랐다.

"어서 오시오."

항상 무시로 일관했던 노인이 건넨 인사.

초면에 경고하듯 쏘아붙였던 말투 또한 점잖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반응의 변화에 베르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자 예전에 봤던 붕대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 시오. 애셔. 님. 안내해. 드리겠. 습니다."

달라진 노인의 반응과 붕대 남자의 등장.

페일에게서 의뢰를 받기 위해 몇 번이고 이 길을 다녔지만 붕대 사내가 길을 안내해 주는 건, 첫날을 제외하고 이번이 처음이다.

'...무슨 일이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베르덴은 보다 날카로워진 감각을 곤두세우고 붕대 사내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는 주점이 있는 층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계단을 찾아 더욱더 지하로 내려갔다.

"평소와는 다르군."

"죄송. 합니다. 페일 님의. 명령. 이기에....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붕대 사내가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목소리나 태도에서 미약한 적의조차 느껴지지도 않고.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베르덴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끝에 도달했다.

빛을 밝혀 주는 마법 물품이 일정 거리마다 설치된 복도. 벽면에는 그림과 장식물이,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골동품 같은 것이 질서정연하게 복도 전체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함정까지.'

마법진은 아니다.

일부 벽면과 복도 가장자리에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틈새. 크기로 보아 화살이나 작은 창이 나올 법한 크기다.

구시대적인 함정이지만 방심한 사람의 의표를 찌르기엔 충분하다. 감각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베르덴 또한 쉽게 눈치채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마력감지를 사용했을 테지만.'

그때, 발걸음을 멈춘 붕대 남자가 복도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페일 님. 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안내가 끝났는지, 붕대 남자는 베르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베르덴이 문을 향해 다가섰다. 손잡이를 당기자 방 안에서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애셔 님."

남부 그레이의 정보상 페일.

그가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베르덴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58화 샐러맨더의 심장 (1)

페일은 정보를 판매하거나 의뢰를 주선할 때, 주로 철창과 유리 뒤에서 상대를 맞이한다.

상당한 거금을 들여 만들어 낸,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 간혹 감옥 같은 분위기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손님들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은 그레이. 언제나 예의를 갖춘 손님이 찾아오진 않는다.

과거 페일의 정보상이 본궤도에 올라갔을 때쯤엔, 도중에 대화가 틀어져 페일이 가진 정보를 강탈하려 하는 경우도, 정보를 없애려 페일을 암살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이 시대에 정보상으로 살아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귀족조차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위상이 오르면 얘기는 달라진다.

정보상을 죽이려고 했던 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다. 때론 자신들의 치부가 세간에 드러날까 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자칫 적대하면 둘 다 죽게 될 수도 있기에 암묵적으로 손을 잡는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칼이 되고 방패가 되는 무형의 힘. 정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페일의 삶이 안전해졌다는 건 아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는 순간 사방에서 그를 물어뜯으려 들 테니. 그런 페일이 어떤 철창이나 유리 없이 타인과 직접 만나는 경우는 총 세 종류에 한정된다.

신뢰하는 자.

유리와 철창 따위론 막을 수 없는 자.

아니면 둘 모두에 해당하는 자.

페일은 언제나 이 규칙을 고수해 왔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내가 그 조건에 부합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페일의 영향권은 그레이 남부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가 가진 정보망은 공국 전체에 고루 퍼져 있다. 어지간한 소식은 놓치는 법이 없었고, 그 정보의 신뢰도 또한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르덴을 잘못 평가하고 말았다.

도살자에게 소개받았을 때는 분명 3위계였는데, 불과 몇 개월 후, 자작을 수색하는 의뢰에서 4위계의 마법을 보란 듯이 드러냈다.

대체 뭐지?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건가? 왜? 아니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성장이라도 했다는 건가?

뭐가 됐든 전력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다.

언제나 사람을 쓸 땐 신중하게 정보를 수집해 상대를 파악해 왔고, 그 판단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는데.... 하나, 정보의 주체가 로든마이어 백작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백작이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없었다.

페일은 주관적인 생각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정보에만 집중했다.

애셔는 3위계가 아닌 4위계 마법사이며, 적절히 거리만 조절한다면 분명 서로 간에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까진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또다시 뒤집어졌다.

'이, 이럴 수가....'

소울 트리.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을 쓰러뜨린 두 주역 중 하나. 이 정보를 접했을 땐 페일조차 당황하며 몇 번이고 정보의 진의를 확인할 정도였다.

물론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미 로리엔에선 신문에 애셔의 이름이 올라 명성이 퍼지고 있으며, 그 소식을 들은 권력자들이 잿빛 마법사에게 시선을 모으고 있다.

그가 만들어 낸 거대한 화염폭풍을 목격한 사람 또한 한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애셔는 차기 미스릴 등급 모험가로 예상되는 핏빛검 레이라와 동급. 최소라고 해도 그에 준하는, 통상적인 4위계 마법사와 비교도 되지 않는 마법적 재능을 가진 실력자임이 확인된 것이다.

거기다 한계 위계는 최소 5위계 이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그만한 대우를 하는 건 당연한 수순.'

페일이 정한 신용 등급의 역할은 거름망.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외부인을 걸러 내기 위한 용도다. 부여받은 등급 이상의 의뢰를 주선하거나 정보를 판매하는 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허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임의로 등급을 올리는 건 가능하다.

페일이 가진 정보력.

그것을 먼저 제시하여 역으로 상대방의 신용을 끌어내는 것. 눈앞의 잿빛 마법사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차고도 넘쳤다.

"그런 이유로, 저는 애셔 님의 등급을 4등급에서 2등급으로 상향 조정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곧바로 최고 등급을 부여하지 않은 건 실력이 아닌, '신뢰'의 문제.

1등급의 정보와 의뢰는 페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베르덴이 얻을 메리트다. 페일은 바로 그런 점을 강조했다.

베르덴은 생각했다.

'나야 좋은 일이군.'

알아서 대우해 주겠다는데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가라고 해 봤자 페일이 주선하는 의뢰를 처리하는 정도려나.

'아니, 어차피 보수를 안 받는 것도 아니고, 의뢰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으니 대가라고 할 수도 없지.'

이건 거래다.

서로가 손해를 보지 않는 상부상조의 관계.

"그럼 고맙게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말이 끝났다.

대화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 * *

"그나저나 의뢰를 받으려 하셨으면 제가 알려 드린 연락망을 이용하셨을 텐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걸 보니 다른 용건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정보가 필요해서."

베르덴이 종이 한 장을 꺼내 페일에게 건넸다.

적혀 있는 것은 각종 고가의 연금술 재료. 개중에는 하나만으로도 억을 넘는 희귀한 식물 또한 실려 있었다.

"하나같이 동네 상점에선 보기 어려운 것들이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못한다는 건 아닙니다. 시간만 주신다면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죠."

"구매를 대행해 주는 것도 가능하나?"

"3등급 이상에 오른 분들에게만 가능한 혜택입니다. 애셔 님은 마침 2등급이 되셨으니 가능하시겠군요. 물론 공짜는 아니고 약 6%의 수수료가 부과됩니다."

그 정도 비용은 예상한 바다.

돈 아끼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지.

"부탁하지. 그리고 하나 더 살 게 있는데."

"무엇입니까?"

"뛰어난 연금술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가능하면 소개하는 방식으로."

어중이떠중이는 안 된다.

마핵의 제작 난이도가 낮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오브를 재료로 한 스태프에 비해서다. 재료가 재료인 만큼 실패할 가능성을 한없이 낮춰야 한다. 돈이 좀 들더라도 말이다.

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군요. 다행히 저의 정보상과 연줄을 맺고 있는 연금술사가 몇 명 있습니다. 주로 자신들이 만든 포션이나 물건들을 판매하기 위함이죠. 후보를 한... 3명 정도 정해서 연금술 재료들과 함께 건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총비용은...."

계산기를 두들겨 액수를 베르덴에게 보였다.

연금술사에게 마핵의 제작비까지 지불해야 할 걸 감안해도 베르덴이 가진 예산 내에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빈털터리가 되겠어.'

재료와 정보가 준비되는 시간.

그동안 개인적인 연구를 이어 가는 것보단 돈을 버는 편이 낫겠지. 지금의 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베르덴이 미리 은행에서 인출한 현금을 꺼냈다.

100만 엘크짜리와 10만 엘크짜리 지폐 수백 장. 기계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페일이 재빠른 손놀림으로 액수를 확인했다.

"얼추 맞군요. 잔금은 나가실 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달리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의뢰를 하나 할 생각인데."

그러자 페일이 잘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페일이 서류 하나를 가져왔다.

그 안에서 꺼낸 의뢰서의 상단에는 '로커스'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로커스가 뭐지?'

"북부 그레이에서 활동하는 정보상입니다. 제가 있는 남부와는 겹치는 일도 없고, 경쟁자라고 할 것도 없지만... 저와 달리 합법보다는 불법적인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이 바닥을 한층 더 더럽게 만드는 미꾸라지 같은 자라고 해도 될 겁니다."

"그렇군. 그래서 이 의뢰는?"

페일이 의뢰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했다.

"로커스의 운영 방식에는 하도 불법이 많다 보니, 각종 범죄자나 위험한 자가 많이 모입니다. 그만큼 돈은 벌긴 하겠지만 여러 적을 만들게 되는 셈이죠. 그러다 최근 어디 벌집을 건드린 모양인지 크게 마찰이 생긴 듯합니다. 정보상이 아주 궤멸 직전까지 몰렸더군요."

"궤멸?"

"바로 이 물건 때문입니다. 자료를 보시죠."

페일이 보여 준 자료에는 마치 불꽃을 형상화한 듯한 심장이 그려져 있었다.

"희귀 마수 샐러맨더의 심장입니다. 마법적인 처리를 통해 금속에 녹여 무기를 만들면, 뜨거운 열기를 품은 마법 물품이 만들어지게 되죠. 그리고 심장을 뽑아내고도 약 한 달간은 살아 움직일 정도로 생명력이 강력한 탓에 여러 포션이나 특수한 활력제로도 사용됩니다. 여러모로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이죠."

"그런 걸 일개 정보상이 가지고 있었다고?"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국경 너머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가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창고에 고이 모셔 둔 거겠죠. 이제까지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 쪽이 그리 호락호락한 자는 아닌 모양이다. 로커스의 정보상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그 심장이라도 가져오라는 건가?"

"그럼 좋겠지만 자칫하단 괜히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물건을 되찾은 범인과 물건을 빼앗은 로커스가 서로 자멸하지 않는 이상은.... 아니, 그래도 오랜 시간 장물로 보관해야 하니, 굳이 위험부담을 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게 좋은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필요한 건 완전히 다른 겁니다, 바로 정보죠."

현재 로커스는 잠적했다.

본진이 털렸으니 당연히 샐러맨더의 심장뿐만 아니라, 그가 평생 동안 쌓아 둔 기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할 터. 이미 여러 정보상이 그걸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경쟁이 치열하니 아주 난장판이 될 겁니다. 그레이에서 활동하는 실력자들이 추적을 할 테니까요."

"쉽지는 않겠군."

"그래서 2등급 의뢰죠. 대신 보수 또한 이제까지완 다를 겁니다."

페일이 계산기를 통해 금액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다르군,'

지금까지 페일에게서 받은 보수를 전부 합친 것 이상.

이 의뢰 하나만 해낸다면 마핵을 제작하고도 돈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