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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금기시된 실험 (1)

보헤미른 마탑 붕괴.

그 소식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마법계만이 아니라 주변 나라까지 널리 퍼져 나갔다.

마탑의 동력원이 폭주하면서 수십 명의 마법사가 증발하고, 마탑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것은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다른 9개의 마탑이 동력원의 긴급 점검에 들어갔으며, 그로 인해 마탑 생산품들의 품귀 현상까지 일어났다. 마탑주들이 직접 원인을 파악하고 있으나 아직은 밝혀진 게 없다고.

각 나라의 신문에 보도된 건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타면서 갖가지 의혹이 생겨났다.

신의 처벌이 내려졌다든가, 테러가 일어났다든가, 정체불명의 실험 때문이라든가... 하나같이 불온한 소문이 거리에 가득했다.

마법의 도시 비렌테까지 닿을 정도로.

"자, 줄 서세요! 줄!"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단번에 이동할 수 있는 비렌테의 공간 이동진. 그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안내를 받고 있다.

고작 한 번 이동하는 데만 총 비용이 수천만 엘크나 하는 탓에 주 고객층은 갑부나 사회적으로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부유한 상인이 시계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오래 걸리는군.'

시간은 돈이다.

일이 바쁜데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몹시 불쾌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앞지르고 싶지만, 체면이 있는데 그럴 수야 없다. 안내원에게 돈을 먹여도 씨알도 안 먹힐 테고. 되레 비렌테의 블랙리스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참고 있는데...!'

웬 붉은 머리칼을 한 여성이 줄도 서지 않고 자신을 지나치는 게 아닌가.

안내원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관계자가 아닌 게 분명하다.

'저런 몰상식한 자가 있다니.'

문득 상인은 잘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저런 새치기범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 하면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갈 것 같았다.

상인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쯧쯧,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새치기를 하면 되나? 남들 다 참고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이면 마땅히 갖춰야 할 최소한의 상식도 없... 는...."

상인의 얼굴이 점차 굳었다.

피부를 찌르는 짙은 마력의 살기.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꺼져."

"넵."

상인이 당장 뒤돌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상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불청객을 쫓아낸 여성, 로벨린이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보헤미른 마탑 소속이니 당장 제 자리를 확보해 주세요."

"그 사, 사정도 알겠고 위에서 보헤미른 소속 마법사를 최우선적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오긴 했는데요. 일단 신원을 확인해야...."

"당장."

"넵."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로벨린의 기세에 눈물을 찔끔 쏟은 안내원이 앞장섰다.

소속된 마탑이 망했는데 그걸 막아섰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살벌한 표정에 관리소장도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로벨린의 자리를 확보했다.

[처음 이용하시는 고객께서는 구토 증세나 어지럼증이 일어날 수 있으니, 위급 상황 시 안내원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키이잉─!

보라색 빛이 점멸한다. 방대한 양의 마력이 휘몰아치며 고객들을 집어삼켰다.

다시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목적지인 아르나크 제국의 도시. 안전장치를 해제한 로벨린이 곧바로 하늘에 떠올랐다.

전력을 다한 속도에 뒤에서 소리치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마력이 한계까지 떨어지면 값비싼 마력 포션을 입에 들이부었다. 중독 현상이 일어났으나 무시하고 속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비행을 유지한 지 몇 시간이 돼서야, 보헤미른 마탑이 보였다.

듣던 것과는 달리 외관은 멀쩡했다. 하지만 마탑주가 작성한 보안 마법진이 사라진 것이 훤히 보였다.

지면에 착지해 주위를 둘러봤다.

마탑의 하위 마법사들과 일꾼들이 여러 장비를 마탑에서 빼 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베르덴도 살아 있다는 거겠지?'

베르덴의 위치는 하위 중의 하위였다. 그와 엇비슷한 위치의 마법사 중에는 희생자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당연히 그도 무사하겠지.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쉰 로벨린이 안면이 있는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아, 로벨린 님 오셨습니까?"

"방금요. 그런데 베르덴은 어디 있나요?"

"베, 베르덴이요?"

연구원이 머뭇거리다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 끝에는 커다란 게시판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마력으로 적힌 글자가 반짝거렸다.

[실종자 명단]

설마.

로벨린이 다급하게 명단을 쭉 훑었다. 개중에는 얼굴을 아는 이도 있었다. 물론 친분은 하나도 없었다.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우뚝.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실종자 번호 32, 베르덴.

동력실에서 당직자의 보조 근무를 하다 동력원의 마력에 노출된 것으로 여겨짐. 시신 확인 불가.

"아...!"

다시 봐도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뜬들 글자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그녀는 차갑게 타오르는 불이었다. 눈물보다는 분노가, 슬픔보다는 복수의 감정을 느꼈다.

누가, 어째서, 도대체, 왜.

대답 없는 질문에 로벨린 특유의 붉은 마력이 들끓었다. 마치 뜨거운 바늘에 찔리는 듯한 감각에 주위에서 기겁하고 거리를 벌렸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만둬라. 다른 이들에게 화풀이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

"...마탑주님."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

그가 가볍게 로벨린의 마력을 억눌렀다.

"마력이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군. 평범한 인간은 견디기 힘들겠어."

"대체 마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보는 대로다. 동력원이 폭주하면서 관리관 등을 포함한 중심부에 있던 마법사가 모조리 소멸되었지. 그뿐만 아니라 중요한 자료들과 기록이 전부 말소되었고 보물고에 있던 마법진마저 손상되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마탑주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그야 당연했다.

자신의 컬렉션 중 하나인 '두 번째 회로'에다가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마법서' 그리고 '원소의 숨결', '마력 크리스탈', '룬의 반지'까지 한순간에 잃었으니.

그것들에 들인 돈이 얼만데 이렇게 어이없게 잃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다 77번 실험체까지.'

77번 실험체, 베르덴.

하다못해 녀석의 머리만 남아 있었다면 기억을 끄집어내어 소실된 기록들과 성과들을 어느 정도는 복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나하나가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 마탑주의 머리에는 누군가 마법진을 부수고 보물들을 꺼내 갔다는 가정은 없었다.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마법진에 대해선 발로크 베시아스가 절대적인 권위자였기에.

초월자의 자신감이자 오만이었다.

마탑주가 분노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동력원에 폭주를 일으킨 놈은 아깝게 놓쳐 버리고 말았지만, 숨어 있던 쥐새끼를 찾아냈으니."

뭐?

로벨린이 뒤를 돌아봤다.

"그게 무슨 소리죠?"

"마도축제 당일에 동력실의 조장을 맡았던 4위계 마법사 호레스. 놈이 사라졌더군. 동력원이 폭주하기 불과 3시간 전에 말이야."

그러곤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발로크는 다른 마탑의 힘을 빌려서까지 그의 행방과 과거를 추적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주목할 만한 것이 나왔다.

발로크가 품속에서 작은 표식을 꺼냈다.

"이건...."

역삼각형과 그 안에 담긴 섬뜩한 시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죽음의 마법사 집단, 블랙 아워(Black Hour)의 상징이었다.

"어떻게 마탑에 침투하고 동력원을 폭주시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놈들과 관련이 있겠지."

우지직. 표식이 일그러졌다.

단서를 잡은 이상, 보헤미른 마탑은 가진 전력을 범인을 찾는 데 집중할 것이다. 설령 마탑의 복구가 한없이 늦어진다 할지라도.

마탑의 붕괴와 관련된 자들의 섬멸.

뿌리째 뽑아 놈들이 존재했던 흔적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 발로크, 보헤미른 마탑의 새로운 목표였다.

"그래서 내 직속, 블랙 아워의 섬멸 부대를 새로이 조직할 생각이다. 구성원은 대충 생각해 두었지. 그 안에는 말단이지만 로벨린 너도 포함되어 있는데... 따라올 테냐?"

"네."

복수.

그녀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연락을 받은 베르덴이 파이테 영지의 모험가 길드에 방문했다.

모험가에게 입지가 좋은 곳은 아니라 규모가 작은 편에 속했는데, 며칠 전에 귀중한 모험가가 대거 사망한 터라 길드는 여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안내를 받고 길드장실로 향하자, 다소 어수룩해 보이는 남성이 나타났다.

"애셔... 님 맞으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듣긴 했는데 제가 상상하던 외모와는 많이 다르셔서.... 무, 물론 긍정적인 부분에서요. 자, 여기 앉으시죠."

베르덴과 길드장이 책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과하게 긴장한 모습이 한 길드의 장이라고 하기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워낙 작은 곳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기침을 한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우, 우선 이번 일에 대해 사과의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그 오크에 대한 위험도를 가능한 높게 설정하고, 길드에서 가장 높은 금 등급 모험가를 보냈는데 이 사달이 날 줄이야...."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니."

정말로 괜찮았다.

베르덴이 입은 피해는 없을뿐더러, 얼마 안 되는 보상금을 뜯어내려고 반쯤 망한 길드에 책임을 물을 성격도 아니었다.

어차피 받을 돈이 있으니까.

"그래서. 길드에서 책정한 포상금은 얼마나 됩니까?"

"아, 예. 그게 얼마냐면... 여기 정산서입니다."

모험가들에게 지급될 예정이었던 총 토벌 비용으로 600만 엘크.

하지만 광대 오크는 길드에서 책정한 위험도를 상회했기에 비용이 더 추가되었다. 거기다 여태껏 발견되지 않았던 아인종의 사체를 받았으니 그에 걸맞은 포상금까지.

총합 2,400만 엘크.

그러나 베르덴에게 정산된 건 1,200만 엘크였다. 세금 문제였다.

"그... 아실지 모르겠지만 모험가가 아닌 외부인에게는 무조건 50%의 세금이 부과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이게 법으로 제정된 거라 책정된 금액을 넘어가면 횡령으로 잡혀서 말이죠. 그래도 이 무지막지한 과세를 피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모험가가 되라는 겁니까?"

"아!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저희 길드는 등급이 오를수록 세금이 줄어드는데, 은 등급 이하의 모험가에게는 20%를, 금 등급 모험가에겐 15%를 과세하고 있습니다. 등급이 더 오르면 최대 5%까지 줄어들지요. 보통 가장 낮은 백결 등급부터 시작하는 것이 원칙인데, 애셔 님의 경우에는 특별 케이스라 은 등급부터 시작하는데 또 특별히 세금을 15%만...."

방금 전까지의 긴장된 모습은 어디 갔는지, 길드장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내뱉었다. 누가 보면 상인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나를 영입하는 게 목적이었나. 어쩐지 너무 저자세로 나온다 싶었는데.'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길드 입장에서 이번 손해를 메울 게 필요했을 테니. 마침 베르덴이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걸 알게 된 것이고.

돈으로 금 등급 이상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를 품을 수 있다면 길드로선 그야말로 최선이겠지.

이해는 한다.

하지만 베르덴이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이대로 정산해 주시죠."

"예... 예? 하지만 세금이...."

"상관없습니다."

모험가든, 용병이든.

당장 조직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마탑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눈앞의 이득을 위해 스스로 목줄을 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자유는 온전히 베르덴의 것이다.

"...알겠습니다."

길드장은 대놓고 실망한 기색으로 돈을 가져왔다.

베르덴은 눈대중으로 액수를 가늠한 뒤, 두툼한 돈다발을 품속에 넣었다.

이제 마지막 용건만 남았다.

"미리 전달드렸던 건에 대해선 어떻게 됐습니까?"

"오크의 사체 말이군요. 부패하지 않도록 창고에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내일 다른 지부의 해체 전문가가 와서 처리할 예정이죠. 그런데 대체 그건 어디다 쓰시려고...? 혹시나 말하는데 절대로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계약서상 염연히 길드의 물건이니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

길드장은 베르덴에게 선을 그었다.

제안을 거절당했으니 공손히 대할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콧대 높은 마탑의 마법사들과 비슷한 태도다. 높은 사람에겐 굽신거리고 낮은 사람에겐 한없이 오만한 유연한 성격. 너무도 익숙했기에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잠깐 확인만 하면 끝나는 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3화 금기시된 실험 (2)

서서히 깎여 나가는 수명과 일말의 저항조차 못 하는 무력감.

보헤미른 마탑에서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어온 발자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마법사다.'

마법이란 신비를 탐구하는 족속.

그리고 마법에 국한되지 않는, 베일에 싸인 미지를 추구하는 연구자이기도 했다. 그것이 베르덴이 타고났으며 갈고닦은 본질이었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여태껏 보고되지 않은 특성을 지닌 오크.

포상금도 중요했지만 연구자로서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위험했다면 주저하지 않고 지워 버릴 생각이었으나 결과는 보다시피.

사체는 깨끗하게 확보했다.

끼이익.

녹슨 문이 열리며 베르덴이 안으로 들어섰다.

모험가 길드의 부산물 보관 창고.

본래는 길드 직원이 함께해야 하나, 파이테 영주에게 신분을 보장받은 베르덴이었기에 혼자 들어올 수 있었다.

'냄새가 별로 좋지는 않군.'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한쪽 구석에 무언가가 커다란 천에 감싸져 있다. 곳곳에 얼룩이 묻어 있었는데 손을 대기엔 영 찝찝해서 마법으로 천을 거뒀다.

한쪽 손목이 잘린 광대 오크.

얼어 있던 몸은 녹아 있었으나 온도는 차갑게 유지되고 있었다.

'천 자체가 마법 물품이었나.'

워낙 더러워서 몰랐다. 대체 얼마나 오래 쓴 건지.

어쨌든 길드장이 말한 대로 부패한 흔적은 없었다. 곧바로 광대 오크의 시체를 허공에 띄우고는 유심히 살펴봤다.

"눈동자 색깔이나 외형 자체는 별로 특이한 게 없는데... 차이점은 이 입하고 거대한 체격인가."

오크 워리어나 오크 로드 등.

광대 오크의 특징은 그런 상위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성 자체도 떨어지는 편이었고.

통상적인 진화 과정을 벗어난 변종(變種)이라 보는 게 맞겠지.

"흐음...."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보통 이러한 케이스를 특수 개체라고 분류하는데, 그런 존재들은 하나같이 개체를 아득히 벗어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영지쯤은 순식간에 멸망시킬 정도의.

그에 비해서 광대 오크가 가진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섭식을 통한 능력이었으니... 해부를 해 봐야 알려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그런 쪽은 베르덴의 전공이 아니었다. 배울 생각도 기회도 없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취향 문제가 컸다.

관찰을 이어 나가던 베르덴.

과도하게 발달한 이빨과 유연한 식도 등 그 특징들을 기억했다. 세상으로 나온 이상, 아인종에 대한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던 중.

"...흉터?"

오크의 정수리.

하마터면 지나칠 뻔할 정도로 아주 작은 흉터.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봤다. 마치 칼에 베인 듯 일직선으로 나 있는 게 정교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왜 이건 회복하지 못했지?'

베르덴은 재생의 본질을 떠올렸다.

재생력이란 이전 시점의 상태로 수복하는 힘. 절단된 신체마저 회복할 정도인데 이렇게 작은 흉터가 남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

그렇다는 건....

'이 흉터가 생기고 난 후에 재생력이 생겼다?'

그게 가능한가?

하지만 눈앞에 있다.

베르덴은 유연하게 사고했다.

여러 가능성을 가정하고 흉터가 난 부위와 연결했다. 떠오르는 생각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했다.

왜 여기에 흉터나 남았을까. 흉터가 생긴 이후에 재생력이 생겼으니까.

왜 정수리인가.

모른다. 하지만 흉터로 봤을 때, 절개의 흔적.

진화를 거치지 않은 아인종이 후천적으로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확인된 바론 불가능하다.

그렇게 답을 종합해 본 결과 유력한 가설 하나만이 남았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변종을 만들어 냈다라...."

이것이 베르덴이 내린 결론이었다.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마탑에 종사했거나 과거 역사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으로 접해 본 실험의 한 종류였으니까.

다만 문제는, 그로 인해 수천 명이 사망하여 영원히 금기시되었다는 거지만.

'보헤미른 마탑에서도 하지 않았던 실험인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덴이 광대 오크를 제자리로 옮겼다.

뭐라 할 단서도 없는데 더 이상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리고 베르덴의 생각에 신빙성은 있어도 무조건 정답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정말 우연히, 태어나면서부터 칼자국 같은 흉터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굳이 길드에 알릴 필요는 없겠지.'

확신이 서지 않은 걸 호들갑 떨며 말할 수야 없다.

정 문제가 된다면, 그걸 알아내는 건 모험가 길드에서 파견된 사람의 몫이다. 베르덴이 생각한 걸 전문가가 간과할 리는 없을 테니.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말이다.

베르덴은 영주 성으로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도 길드는 잠잠했다.

* * *

짧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베르덴은 마법에 집중했다.

위계가 오른 만큼 그에 걸맞은 새로운 전법이 필요했으니까. 필수적인 절차였다.

그리고 영지를 떠나는 당일.

◇ 순환의 반지

⦁ 마력량 증가(극소)

⦁ 마력 회복 속도 증가(소)

"...너무 많이 받았는데."

베르덴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각종 장비를 바라봤다.

마법 물품인 반지와 지팡이에다가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로브까지. 전부 빌셴이란 도적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로브는 크게 훼손이 되었었지만, 파이테 영주가 베르덴의 몸에 맞게 수선해 주었다. 나름대로 값이 나가는 것들인데 전혀 욕심도 내지 않고.

'그리고 300만 엘크의 보수와 광대 오크의 현상금 200만 엘크, 거기다 도적에게 걸려 있던 현상금까지 준다고 했었지.'

그 둘을 방치했을 때, 예상되는 영지의 피해액보단 당연히 적긴 했지만 한 명에게 너무 몰아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사와 병사들을 구해 준 보답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인가.'

본디 귀족이란 손익 계산에 민감한 존재들이었으니까. 베푸는 호의에도 철저한 계산이 들어가 있다.

베르덴은 거절하지 않고 호의를 받기로 했다.

준비를 갖추고 거울을 봤다.

콘라드가 선물해 준 옷과 도적의 로브를 입고 허리춤에 지팡이까지 끼워 넣으니 퍽 마법사다워 보였다.

이른 아침에 방을 나선 베르덴이 성문으로 향했다.

기사 에녹과 콘라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기까지 나와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아닙니다,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저는 마중 겸 확인차 나왔습니다. 그거, 잘 챙기셨죠?"

에녹이 말한 그것이란, 도적 토벌 증명서를 의미했다.

이것만 있으면 굳이 수급이 없어도 현상금을 받아 낼 수 있다. 파이테 영주의 직인이 찍혀 있어서 분실하기라도 하면 위험했다.

위조가 쉽지는 않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영주의 위신이 말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죽지 않는 이상, 분실할 위험은 없을 겁니다."

"...목숨까지 걸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쨌든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셋은 간단한 잡담과 함께, 어제 했던 인사를 다시 한번 나눴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베르덴의 뒷모습을 향해 콘라드가 소리쳤다.

"애셔 님! 나중에 콘 상회에 방문할 일이 생기시면 꼭! 제 이름을 말하세요!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베르덴은 뒤로 손을 흔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 * *

<비행>

하늘에 떠오른 베르덴이 직선으로 나아갔다. 3위계에 다다른 덕에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긴 하지만.'

장시간 운용하기 힘들어도 직선 경로로만 움직인다면 효율 좋게 움직일 수 있다. 물론 방대한 마력 덕분에 굳이 아끼지 않아도 남들 이상으로 오래 기동할 수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혼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도시까지 마차 타고 5일 정도 걸린다 했었지.'

지금 속도면 3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베르덴은 주로 낮에 이동하며 밤에는 나무 위에 자리 잡아 수면을 취했다. 주위에 깔아 둔 마법진 덕에 불침번도 필요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밤, 도시와 남작령 사이에 있는 유일한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하룻밤 쉬고, 다음 날에 도시로 갈 예정이다.

도중에 마땅히 씻을 곳이 없어 상당히 찝찝한 터였기에 마을에 들어가 여관을 잡았다. 여행객이 흔한지 베르덴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건 못 먹겠군.'

조리를 어떻게 한 건지, 닭고기가 뻑뻑하다 못해 나무껍질을 씹는 기분이다. 그릇에 뱉고 에일로 입가심을 했다.

영주 성에서 받은 육포로 저녁을 때우며 주위를 둘러봤다.

몇몇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무슨 일이지?'

한적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그중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속삭이는 바람>

소리는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전달된다. 그걸 이용한다면 먼 거리서 나누고 있는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다.

베르덴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씨발, 고블린 새끼들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가축까지 털린 데다 비싼 돈까지 들여 모험가까지 고용하다니. 우리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했는데도 말이야."

"그러다 다치면 손해야, 손해. 이장님이 평소에 말하지 않았나. 모든 사람에겐 각자에게 맞는 전문 분야가 있다고. 고블린을 토벌하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 일이 아니라, 모험가의 일이야. 내일 아침만 지나면 다 끝날 테니 불평 좀 그만하게."

"흥. 아까운 건 아까운 거지."

고블린은 해충이다.

작게는 도둑질부터 시작해 크게는 사람들을 습격해 물건을 빼앗고 잡아먹는다. 한둘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나, 수십 단위가 되면 위험해진다.

더군다나 어디서 단검 같은 무기라도 훔쳐 오면 사람 몇쯤은 순식간에 난도질당한다.

피해가 발견되는 즉시, 모험가를 통해 처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처법이다.

'흔한 일이군.'

흥미가 사라졌다.

그런데 베르덴이 마법을 해제하기 직전, 두 남자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그 소문이 사실이야? 그 사냥꾼이 숲속에서 괴물을 봤다는 거 말이야."

"쉿, 쉿! 이장님이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그랬잖은가...!"

"거참, 누가 듣는다고. 어차피 멀어서 들리지도 않아. 궁금해서 그러니까 살짝 귀띔만 좀 해 봐 봐. 자네 사냥꾼하고 친하잖아."

한숨을 쉰 사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사냥꾼이 토끼를 잡다가 우연히 사람보다 큰 괴물을 봤는데 말이야. 겁이 나 나무 뒤에 숨어서 살짝 훔쳐보는데, 입이 길게 찢어진 게 아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더군."

"이, 입이 찢어져? 그게 뭔... 오크를 잘못 본 게 아니고?"

"나도 그렇게 물어봤는데 절대 아니래. 덩치는 오크만 한데 얼굴이 고블린 같았다나 뭐라나. 다행히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보아하니 한동안 숲에는 못 올라갈 모양이야. 어쨌든 이건 비밀이니 입조심하게. 잘못하면 모험가에게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이장님이 그러셨으니까."

'입이 찢어져?'

얼마 전에 죽인 광대 오크가 떠올랐다.

모험가 길드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길래, 내심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게 아닐까 여기고 있었는데.

여기서 비슷한 것이 또 발견된 거라면....

'...내일 아침이라 그랬지?'

가정의 입증.

그건 연구자의 본능이었다.

14화 도움 (1)

'저게 의뢰를 받은 모험가들인가?'

전위가 둘, 궁수가 하나 그리고 마법사가 하나. 밸런스가 좋은 구성이다.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갓 성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저런 조합이면 고블린에게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가시화>

베르덴의 형체가 투명해졌다.

고작 모습만을 감추게 하는 마법이지만, 저 어린 모험가들이 알아챌 일은 없겠지. 누군가 하늘에서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못 할 테니.

자, 쫓아가 볼까.

베르덴이 이제 막 마을을 나서는 모험가들을 뒤따랐다.

* * *

쉬익──푹!

고블린의 미간에 정확히 화살이 박혔다.

모험가 중 가장 낮은 계위인 백결 등급, 궁수 미르나가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때, 많이 늘었지?"

"코앞에서 쏜 거 가지고 무슨...."

"너는 코가 30미터나 되니? 부러뜨려 줘?"

그녀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자, 전사 로크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둘은 소꿉친구라 평소에도 티격태격대는 게 흔한 일이긴 하지만 의뢰에 와서도 저러다니. 고블린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마법사 이리스가 보다 못해 나섰다.

"장난은 그쯤 해. 의뢰 중인 거 잊었니?"

"죄송해요, 언니...."

"조용히 할게요."

"그럼 됐어. 마일드, 고블린 흔적은 발견했어?"

마일드가 나무 밑동을 가리켰다. 고블린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로크가 앞장서고, 그 뒤를 다른 동료들이 따랐다. 도중에 홀로 무리에서 떨어진 고블린들을 사냥하며 숲을 지나자, 구석에 숨어 있는 동굴 하나가 보였다.

입구에 세워진, 동물의 해골로 만들어진 토템. 홉고블린의 상징이다.

"예상대로네. 동굴 지형만 조심한다면 위험한 일은 없겠어."

홉고블린은 고블린의 진화종이다. 고작해야 덩치와 힘이 좀 셀 뿐인.

마일드가 토템을 밟아 부러뜨렸다. 이리스가 자신을 포함한 다른 동료 한 명 한 명에게 각각 마법을 시전했다.

<암시 부여>

동굴 내부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횃불이 있으면 들킬 가능성이 높으며, 자칫 꺼졌다간 그대로 덮쳐져 전멸할 수도 있다. 마법사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파티의 생존율은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작은 물소리와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발견하는 즉시, 미르나가 기습으로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었다. 화살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블린 토벌은 아주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동굴 깊숙한 곳에서 낮고 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홉고블린인가? 정찰을 나선 미르나가 슬쩍 고개를 빼, 내부를 둘러봤다.

'저게 뭐야...?'

오크만 한 덩치에, 얼굴은 고블린인 괴물. 입이 귀까지 찢어진 놈이 고블린들을 둘러보더니, 한 마리를 덥썩 잡아 한 입 물었다.

으적으적. 빠드득. 빠득. 불쾌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에 미르나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그래?"

"그게 그러니까...."

미르나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아카데미 졸업생 출신인 이리스가 괴물을 확인했다.

동족을 포식하는 거대한 고블린. 비슷한 예로는 고블린 챔피언이라는 진화 개체가 있지만, 그렇게 강력한 아인종이 이런 동굴에 있을 리 없다.

'그럼 특수 개체...?'

곧바로 이리스가 머리를 저었다.

만약 그랬다면 마을은 이미 사라졌겠지. 이리스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괴물을 관찰하고 결론을 내렸다.

덩치는 크지만, 동족 포식 외에 특별한 것은 없다.

즉, 토벌 가능.

이리스의 결정에 다른 동료들은 겁을 먹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도 죽여 본 경험이 있었으니, 저런 고블린쯤이야 문제없이 토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모험가들이 대열을 이루었다.

<근력 강화>

<보호막 부여>

<진정>

두려움이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온다.

서포트를 끝낸 이리스가, 미르나와 함께 기습을 가했다. 얼굴에 화살이 꽂히고 마력폭발에 의해 충격을 받은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전투가 시작됐다.

* * *

'이게 모험가가 사냥하는 방식인가.'

베르덴은 동굴 내부 공동 위쪽에 자리 잡아 느긋하게 전투를 관람했다.

물론, 저 고블린 괴물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것까지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위험하다 싶으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설명하려면 좀 귀찮기는 할 테지만.

'다행히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고블린 괴물... 광대 고블린이라 하자.

광대 고블린은 광대 오크와 비슷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사람을 단번에 찢어 죽일 힘도 없고, 고블린을 먹는다고 해서 일시적으로 강해진다거나 상처를 회복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조금 크고 기괴하게 생긴 고블린이었다.

'그리고 저 마법사....'

2위계의 인챈트 계열을 다루는, 이리스라고 불린 여자 마법사.

상황 판단이 제법 빠르다. 1위계에 불과한 마력 화살과 마력폭발을 적절히 사용해 가며 동료들을 보조해 주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그런 그녀를 필사적으로 지키며 싸우고 있었고.

그야말로 정석적인 전술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예외적인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키아아아아악!]

광대 고블린의 얼굴에 칼이 스쳐 지나갔다. 흘러내린 피에 시야가 사라지자 놈이 힘껏 날뛰었다. 다른 고블린도 몇 안 남았으니, 이대로 체력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다.

그때, 광대 고블린이 고블린을 잡아 이리저리 휘둘렀다.

콰앙! 쾅! 지면에 피가 튀었다. 이내 무기로 사용된 고블린이 곤죽이 되어 멀리 날아갔다.

이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언니, 피해요!"

단련되지 않은 마법사에겐 피하기 어려운 속도.

당황한 그녀의 눈동자에 망가진 고블린의 얼굴이 보였다.

<에어 레일>

보이지 않는 바람의 길. 그것에 휘말린 고블린이 나아가는 궤도가 비틀려 이리스를 스쳐 지나갔다.

푸른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

"어? 어... 응. 괜찮아, 미르나."

머리카락만 스쳤을 뿐, 몸에 닿지는 않았다.

이리스가 축축해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아찔했던 순간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을 뻔했어....'

그대로 부딪혔다면 그녀의 머리가 으깨졌을 것이다.

겨우 살아남더라도 더 이상 모험가 생활은 못 했겠지. 아카데미에 다니던 때부터 키워 온 꿈이 한순간에 끝이 나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피했지?'

고블린이 날아온 방향.

운이라 생각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궤적이었는데, 코앞에서 갑자기 뒤바뀌었다. 마치 무언가에 휩쓸린 것처럼.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토벌이 우선이다.

정신을 차린 이리스가 가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대 고블린의 눈에 화살이 꽂히고 놈의 목이 베였다. 도망치는 고블린마저 처리한 그들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로크가 미안한 얼굴로 이리스에게 다가왔다.

"그... 죄송해요. 제가 놓치는 바람에 리더가...."

"아냐, 너는 잘했어. 책임지고 저 괴물의 신경을 끌어 줬으니까. 멀리 있다고 방심한 내 잘못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현실은 가변적이다.

일어난 일에 하나하나 책임을 묻는다면 그 파티는 절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진 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베르덴이 보고 있었다.

'결국 별거 없었군.'

모험가의 전투를 볼 수 있어 나쁘지 않은 시간이긴 했지만, 정작 광대 고블린에게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그냥 우연의 일치인 걸까? 무언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있었는데, 생김새 외엔 그 무엇도 비슷하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베르덴이 갈 채비를 했다.

그때, 공동 입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내가 없는 사이 불청객이 찾아왔군요."

저건 또 뭐지?

* * *

검은색으로 통일된 복장, 허리에 찬 세검. 걸어오고 있음에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말끔한 얼굴을 한 남자였는데, 이유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모험가들이 대열을 갖췄다. 스태프를 든 이리스가 남자에게 물었다.

"누, 누구시죠?"

"주인입니다, 당신들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저 가련한 실험체의."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광대 고블린이 있었다.

"쯧. 분명히 활동을 제한했는데 그사이에 토템을 만들 줄이야. 아무리 뇌를 건드려도 자연 상태에서까지 본능을 억누르는 건 무리인가....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고블린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든가, 그런."

"...."

이리스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저 남자는 수상할뿐더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온 것 같지 않아 보였으니까. 침묵으로 일관하자 남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없었나 보군요. 이런... 별로 건진 것도 없이 실험이 끝나 버린 걸 '박사'가 알면 길길이 날뛸 텐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일어난 일이니 당장 폐기하고 서둘러 다음 실험을 준비해야겠죠. 음, 그게 옳은 판단일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죠?"

"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말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혼잣말이든 뭐든. 그나저나 죽기 전에 할 말은 없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을 죽이겠다는 소리에 이리스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도 리더였기에, 이리스는 눈짓으로 동료들에게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준비할 시간을 끌기 위해 남자에게 물었다.

"왜, 왜 저희를 죽이시려는 거죠?"

"여러 가지가 있죠. 실험을 방해했으니까, 이쪽의 소유물을 죽였으니까, 도시로 돌아가면 모험가 길드에 보고할 테니까."

"...말하지 않는다면요?"

그러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지만, 우습군요. 인간의 입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 건데. 그리고 설령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살인이 취미라서 그럽니다."

남자가 세검을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발산된 기운이 공동 내부에 퍼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이 이리스 파티의 숨통을 죄었다.

'기운을 깨우쳤다면 최소 금 등급 이상...!'

고작 동급 이하로 구성된 이리스 파티가 감당할 존재가 아니다. 로크의 방패가 잘게 떨렸고, 미르나는 시위를 제대로 당기지도 못했다. 언제나 든든했던 마일드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문 이리스가 동료들에게 마법을 부여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죽음이 다가왔다.

"자, 죽기 전에 압도적인 힘의 격차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드리죠."

"별로 압도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말해 두지만 저는 그런 같잖은 허세를 싫어하는... 어?"

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지근거리에서 콰앙! 마력이 폭발했다. 남자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혔다. 어둠 속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비가시화를 해제한 베르덴이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지면에 내려왔다.

15화 도움 (2)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베르덴이 정체불명의 남자의 말에서 주요 키워드를 잡았다.

'실험체 그리고 박사.'

베르덴의 생각이 맞았다.

광대 오크는 인위적으로 변이된 것이었다.

대체 무엇이 목적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대화를 엿듣는 건 어려워 보였다.

남자가 기운을 내뿜으며 모험가들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나설 생각인데, 모험가들이 살해당하기 전에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렇다 할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베르덴이 은근슬쩍 남자가 하는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어?"

그렇게 생긴 찰나의 틈. 가장 캐스팅이 빠른 마력폭발로 남자를 날려 버렸다.

'먹히진 않은 모양이지만.'

"이런. 불청객이 하나 더 있었군요. 실험체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툭툭. 남자가 먼지를 털며 세검을 어깨에 올렸다. 낙법으로 충격을 흡수했는지 먼지만 좀 묻었을 뿐, 이렇다 할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마법사."

"...마법을 사용하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제 말뜻은 당신의 이름을 물어본 겁니다."

"빌."

베르덴이 즉답했다.

금기시된 실험에 관련된 데다가, 살인이 취미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간에게 본명도, 가명도 말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너무나도 성의 없는 대답에 남자가 관자놀이를 씰룩였다.

"제 이름은 세르겐입니다만... 하, 대화가 재미없군요. 당신이 말한 이름도 가명일 테고. 뭐, 좋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난 후, 재미없는 마법사라고 기억해 두지요."

세르겐이 지면을 박찼다.

화염의 화살이 그를 노렸지만 마치 뱀 같은 기민한 움직임에 제대로 맞히기 어려웠다.

베르덴은 당장 판단을 바꿨다.

카앙! 마력방벽에 세검이 부딪쳤다.

일반적인 검과 달리, 세검은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기에 힘을 일점에 집중하는 게 가능했다. 강력한 충격에 방벽에 살짝 금이 갔다.

<충격파>

마력의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세르겐은 애써 저항하지 않고, 힘에 이끌리는 대로 뒤로 물러섰다.

"...."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다.

영주 성에서 봤던 기사 에녹의 기세보다는 가벼웠지만, 그 이상으로 빨랐다. 마법사를 상대한 경험 또한 많아 보였다.

'그렇다면 내 식대로 하는 수밖에.'

베르덴이 마력을 풀어헤쳤다.

어떤 마법이든 즉각적으로 시전할 수 있도록 모든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서 마력이 흘러넘쳤다.

"단기 결전입니까? 마법사답지 않으시군요."

마법사는 대부분 오만하다.

검사가 자신의 검을 믿듯, 그들은 몸에 내제된 마력을 믿는다. 그렇기에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자들을 얕보며 무시한다.

세르겐은 그런 마법사들의 방심을 이끌어 내어 방벽과 함께 목을 꿰뚫어 왔다.

'이거 옷이 더렵혀질 각오는 해야겠군요.'

방심하지 않은 마법사. 다가가려면 정면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피해 내야 한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세르겐은 여유로웠다. 언제나 그랬듯 전부 피해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세르겐이 세검을 곧게 세웠다. 검 끝이 베르덴의 목을 가리켰다. 곧 이 차가운 금속이 당신의 목을 파고들어 갈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그리고 세르겐의 발끝이 움찔거린 순간, 베르덴의 지팡이에서 빛이 점멸했다.

<겨울 돌풍>

혹한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세르겐이 다급히 옆으로 굴러 직격을 피해 냈다. 미소가 사라진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2속성? 그것도 하필 얼음이라니.'

한기는 까다롭다. 서서히 근육과 관절이 얼어붙는 기분은 결코 좋지 않았다.

세르겐이 과거에 얻은 경험으로 판단을 내렸다. 저렇게 광범위한 마법은 마력 소모가 상당하다.

그러니 다음에 올 건, 비교적 효율이 좋은 투사체 형태의 마법.

<아이시클>

파가각! 허공을 가른 고드름이 벽면에 부딪쳤다.

허리를 젖힌 세르겐이 반동을 주어 앞으로 튀어나갔다. 기운을 집중한 속도에 주변 시야가 급격하게 변했다.

연이어 날아오는 얼음 조각을 피하고, 때려 부쉈다. 그 얼음 조각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세르겐이 베르덴의 지척에 도달했다.

"흐읍!"

쉬이익! 섬전 같은 일격.

...하지만 무엇도 닿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력방벽은 없었으니까.

고개를 숙여 피해 낸 베르덴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3속성?!'

"이런...!"

<이그니션>

콰아아아! 불꽃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코앞에서 열기에 휩싸인 세르겐이 겨우 얼굴을 가린 채, 후퇴했다.

화끈거리는 손등과 그을린 옷. 불길을 털어 낸 세르겐이 낮게 웃었다.

"하하... 마력방벽을 거두고, 신체 능력만으로 제 공격을 피할 줄이야.... 서쪽 제국에 마법과 무술을 같이 다루는 워 메이지(War Mage)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쪽에서 오셨습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미친 게 분명할 겁니다."

"...."

미친놈한테 미쳤다는 소릴 들어 봤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 정도. 하지만 아직 세르겐이란 남자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길게 갈 필요도 없다.

상대의 생각을 뒤집을 만한 마법이면 충분하다.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기자, 모험가들이 서 있던 지면이 꿈틀거렸다.

"꺄아아악!"

"뭐, 뭐야?!"

쿠구구구! 돌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한순간에 지면에서 멀어진 그들이 놀란 얼굴로 아래를 흘겼다. 낮지 않은 높이에 미르나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세르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안전 확보."

베르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닿지 않는 거리에서 마법을 쏟아 내는 건, 공통적인 마법사의 전투 방식이었다.

"우습군요. 비행을 쓰면 제 검이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밖이라면 모를까, 이런 동굴 안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저 높이 이상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벽을 활용한다면 더 간단하다. 방금 전엔 한 방 먹긴 했지만, 아직도 마법사를 살해하는 방식은 많이 남아 있었다.

베르덴의 차가운 시선이 세르겐에 향했다.

"바닥이 꽤 축축하던데."

"예?"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 순간, 베르덴의 손에서 빛이 튀었다. 암시 마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동굴 내부가 훤히 밝아졌다.

치지지직──! 동굴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격렬하게 날뛰는 푸른 빛줄기에 집중되었다.

"...번개?"

고위 속성 중,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마법.

세르겐이 아차 하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부서진 얼음 조각이 열기에 녹은 탓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걸?'

당했다.

그걸 깨닫자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세르겐은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구로 달렸다. 웅덩이에서 물이 튀어 옷이 더러워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구를 코앞에 둔 그때, 동굴의 빛이 사라졌다.

<뇌격>

번쩍! 한 줄기 번개가 세르겐에게 닥쳐 왔다.

"크읍?!"

우두둑.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비튼 탓에 발목이 부러졌다.

그렇게 겨우 직격을 면했지만, 아직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 내리꽂힌 번개가 물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세르겐의 발밑까지.

파지지직!

"끄그그그그그극!"

감전당한 전신의 근육이 경련한다.

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괴상한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피가 끓는 감각은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르겐은 이 정도로 죽지 않았다. 그가 어금니를 깨물고 뒤를 돌아봤다.

전격 계열은 그 위력만큼이나, 마력 소모가 엄청나다. 거기다 그 전에는 광범위한 마법을 연이어 쏟아 냈으니, 분명 저 정체불명의 마법사도 지쳤을 것이다.

'회복하는 데 약 2분.'

그 시간만 버티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시선의 끝에는 그의 예상과 한참이나 벗어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돌풍>

<다중 대지 화살>

<다중 빙결 화살>

더블을 넘어선 트리플 캐스팅.

노력과 재능이 합쳐진, 소수의 마법사에게만 허락된 전유물. 강력한 바람을 탄 10개의 속성 화살이 세르겐에 육박했다.

파바바바박!

전신에 화살이 스치고, 박혔다. 검을 버리고 팔을 들어 올려 급소는 막아 냈지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

베르덴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끝낸다.'

기를 깨우친 자에겐 저런 부상에도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까.

<암석강타>

사람만 한 거대한 바위가 날아갔다.

때마침 세르겐이 몸을 덜덜 떨며 천천히 팔을 내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바위를 본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말도 안 돼."

────콰아앙! 바위와 함께 세르겐이 벽에 틀어박혔다.

전신의 뼈가 모조리 부서지다 못해 으스러졌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이유는, 비교적 멀쩡한 머리와 체내에 남아 있는 기 덕분이었다.

그래 봤자 곧 죽겠지만.

베르덴이 세르겐 앞에 내려갔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쿨럭, 쿨럭! 하핫...! 사람을 이 꼴로 만들고 말입니까?"

"파이테 남작령에 저것과 비슷한 오크가 있던데, 그 박사란 자의 작품인가?"

세르겐이 피를 토하며 작게 웃었다.

"아,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당신이 죽이셨군요? 혹시 '방주(方舟)'에서 오셨습니까?"

"방주?"

그게 뭐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베르덴의 반응에 세르겐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하, 우연이라. 제가 우연히 죽을 줄이야.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쿨럭, 쿨럭!

쏟아지는 검붉은 피. 시간이 얼마 없다.

베르덴은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박사란 자는 어디에 있지?"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실험에 흥미가 있어서."

"그렇군요. 그 무지막지한 마법으로 모조리 죽일 생각이십니까? 하핫.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봐 왔지만 당신처럼 가차 없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베르덴의 성격은 10년을 아득히 넘는 마탑의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어두운 감정을 쌓고 또 쌓은 끝에 이뤄 낸 역천. 사방이 적인데 빈틈을 보일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예예. 말해 드리죠. 마지막 가는 길이니 못 할 것도 없으니까요."

세르겐이 입을 오물거렸다.

퉷. 베르덴의 눈에 날아온 작은 바늘이 마력방벽에 가로막혔다. 세르겐의 마지막 일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역시, 당신은 가차 없는 인간입니다."

<어스 쉐러>

퍼억! 세르겐의 머리가 분쇄됐다.

역시 육체를 단련해 기를 깨우친 자에겐 방심해선 안 된다. 확실히 목숨을 끊어 내고, 시체를 확인했다. 피에 얼룩진 금색 목걸이가 보였다.

'암시 마법이 부여된 건가?'

그래서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었군. 비싼 물건이니 잘 감싸 챙겨 넣었다.

뭐가 더 없을까? 하던 그때, 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모험가들이 냉큼 고개를 뒤로 빼냈다.

'...모험가들이 남아 있었지.'

연구원 출신이다 보니 하나에 몰두하면 중요하지 않은 걸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좀 고쳐야 할 텐데.

베르덴이 손짓해, 솟아오른 돌기둥을 천천히 내렸다.

16화 도움 (3)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돌기둥 위에 주저앉은 로크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나타난 불길한 남자가 자신들을 죽이려 하더니 또 모르는 사내가 나타나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러다 잿빛의 사내가 손짓했고 땅이 치솟아 돌기둥 위에 있게 되었다. 마치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우린 그저 고블린 토벌을 하러 왔을 뿐인데....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던 도중, 정신을 차린 이리스가 돌기둥을 어루만졌다.

'이건... 지형조작인가? 대체 어떻게 이 정도의 규모를....'

그녀가 알고 있는 위력을 아득히 벗어났다. 한순간에 이렇게 커다란 돌기둥을 만들려면 연산 능력이 4위계 이상인 마법사 정도는 돼야 할 것이다. 거기다 같은 3위계의 마법보다 몇 배나 되는 마력을 쏟아부어야겠지.

어느 것 하나 이리스의 수준으로 가늠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짝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을 세르겐이라 말한 남자와 공중에 떠오른 잿빛의 사내가 서로 대치하고 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광경이 펼쳐졌다.

전격 계열.

그 속성을 다룰 수 있는 건, 아카데미에서도 교수를 포함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듣도 보도 못한 마법사의 손에서 펼쳐지다니.

더군다나 아카데미에서 봤던 전격 마법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굉장해....'

상황을 떠나서, 순수히 마법사로서 감탄했다.

다음에 보게 된 마법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트리플 캐스팅...?!"

그것도 전혀 다른 세 개의 속성의.

이리스는 저 기술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어지간히 이름을 날린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그녀는 두려움조차 잊은 채, 멍하니 잿빛의 남자를 바라봤다.

다른 모험가들도 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가차 없는 마법의 폭격을 보고 숨을 삼켰다.

퍼억!

싸움은 마법사가 남자의 머리를 부수며 끝이 났다. 뭔가 찾을 게 있는지 시체를 뒤적거리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냉큼 숨었지만, 이미 들켜 버렸다.

쿠구구구.

서서히 돌기둥이 내려앉았다.

* * *

베르덴은 몸을 움츠리고 있는 모험가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보니 목숨을 구해 준 꼴이 되긴 했는데, 왜 자신이 여기에 있었는지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굳이 설명해야 되나?'

그럴 필요 없다. 원하는 정보도 얻었고, 값비싼 마법 물품까지 챙겼다.

모험가들에게 딱히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니, 서로 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이리스를 흘긴 베르덴이 등을 돌렸다. 시체에서도 더 이상 챙길 게 없어 보였다.

말없이 동굴 밖으로 나서려 한 발짝 옮기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가,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일까. 목숨을 구해 준 선의에 대한 대가겠지.

베르덴의 태도를 보고 자신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도 미약하게 남아 있는 경계심과 두려움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지만.

'...분명 마르테스의 모험가겠지.'

도시 마르테스. 베르덴의 목적지였다.

사전 조사를 했음에도 거대한 도서관이 있다는 것 외에는 마르테스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남작령에서 정보를 얻을 기회는 있었지만, 그보다 위계를 높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공국은 평화로운 나라였으니,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안내역도 있으면 더 좋겠지.'

생각이 바뀌었다.

베르덴이 다시 몸을 돌려 모험가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감사를 전한 이리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혹시 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고블린 토벌 의뢰를 받으셨습니까?"

"네? 아, 네. 맞아요. 고블린이 축사에 피해를 준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고블린 말고 이상한 괴물이 보였는데 돈이 아까워 길드에 말을 안 했다고."

"...?"

"모험가 쪽은 잘 모르지만 분명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이리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모험가 길드에게 의뢰 시, 정보를 숨기는 건 중죄에 해당한다.

목숨을 담보로 활동하는 모험가들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었는데, 사실 그 기준이 애매했다. 몰랐었다고 잡아떼면 되니까.

어쨌든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 의뢰자는 추가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원만히 합의했을 경우지, 마음먹고 모른다고 잡아떼면 모험가 길드에서도 골치가 아파진다. 물질적인 증거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러나 증언을 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타당하고 신빙성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실이라고 판명 나는 순간, 길드는 모험가의 목숨값을 책정하고 의뢰자는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돈이 부족하면 강제 집행을 통해 재산을 압류한다. 그래도 안 되면 체포한 뒤, 강제 노역을 보내 버린다.

입증이 힘든 만큼 처벌 수위는 굉장히 높다. 모험가 길드의 소중한 재산이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걸까?

이리스의 의문이 담긴 시선에 베르덴이 세르겐의 시체를 살짝 흘겼다.

"저한테 감사하다고 하셨죠?"

"...네."

고개를 주억거린 이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빚을 졌으면, 그것도 목숨을 빚졌으면 갚는 게 도리라곤 하지만, 대체 뭘 요구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설마... 이상한 걸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이리스와 동료들이 불안해하는 끝에, 베르덴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감사는 돈으로 받겠습니다."

실리(實利).

떠돌이 마법사는 돈을 원했다.

* * *

토벌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이리스 파티는 곧장 이장에게 향했다.

심각한 표정과 싸늘한 어조에 이장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아. 모른다고 잡아떼면 돼.'

마을 사람들의 입단속은 확실히 해 두었다. 자기들 주머니 사정과 관련되어 있으니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것이다.

모험가들과 마주 앉은 이장이 태연히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험가님들 덕분에 고블린에게서 벗어나게 됐군요. 여기 약속한 의뢰비입니다."

꼬깃꼬깃한 지폐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리더인 이리스는 물끄러미 돈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침묵에 이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뭔가 문제라도...?"

"부족한데요?"

"예?"

눈썹을 치켜뜬 이장이 냉큼 돈을 집었다. 다시 세어 봤지만 액수는 정확했다.

보란 듯이 지폐를 보여 줬지만, 이리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계약서에 적힌 금액과 같은데 뭐가 부족하다는...."

"사냥꾼."

어? 그 한 마디에 이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냥꾼이 목격한 정체 모를 괴물에 대해서 기재하지 않으셨던데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발뺌하셔도 소용없어요. 이미 증언은 확보했으니까요. 원하신다면 길드에 통보할까요? 수사관이 오면 그렇게 모른 척하시는 것도 못 하실 텐데."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이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무서웠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돈 몇 푼 좀 아끼려고 했다가, 이 나이에 범죄자가 된다니. 죽어도 싫었다.

'대체 누가....'

이장은 곧 체념했다. 그래도 아직 살아날 방법은 있었다.

처벌이 목적이었다면, 눈앞의 모험가들은 의뢰비를 받고 도시로 가 신고를 했을 테니.

"워, 원하는 게 뭡니까?"

이리스는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돈이요."

* * *

이장의 곳간을 털어 낸 이리스들은 도시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도중에 베르덴을 만나 무려 120만 엘크나 되는 현금을 건넸다. 아깝지는 않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정보를 숨겼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베르덴은 그중 일부를 나눠 이리스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그냥 주는 건 아닙니다."

일종의 의뢰비였다.

우연히 목숨을 구해 줬다곤 하지만 무일푼으로 이리저리 부려 먹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도시를 안내해 주는 것치곤 엄청나게 많은 돈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이리스는 조심스레 돈을 받았다.

그렇게 어색한 동행이 이어졌다. 자연스레 베르덴과 거리를 벌린 모험가들이 쑥덕거렸다.

"언니, 그래서 이 돈은 뭐야?"

"그러니까... 이거 받고 도시를 안내해 달라고 해서...."

"뭐? 그런데 이렇게 많이 준다고? 난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미르나의 말에 로크도 마일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베르덴은 은인이긴 했지만 수상쩍은 사람이기도 했다.

왜 그때 그 동굴에 있었을까? 죽은 남자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알 수 없었다. 밝혀지지 않은 게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가차 없이 마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란... 꿈에 나올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아직 모험가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에겐 그랬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세계의 인재들이 한데 모인 아카데미에서도 보지 못한, 으뜸가는 재능을 가진 잘생긴 마법사.

이리스가 베르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마음을 다졌다.

"잠깐 갔다 올게."

"어, 언니?"

성큼성큼 걸어간 이리스가 앞서 걷는 베르덴의 옆으로 향했다. 마치 마력처럼 푸른 눈동자가 그녀와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주먹을 움켜잡았다.

"마법 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

황당한 부탁에 베르덴이 말을 잃었다.

* * *

'난 또 뭐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 자체를 알려 달라는 건 아니었고, 마법 이론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냐는 뜻이었다.

하긴, 몇 달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걷는 도중에 마법을 배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베르덴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하기도 했고, 다른 건 몰라도 마법 이론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으니까. 특히 그가 전공한 원소 계열에 대해서라면 어지간한 교수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허락을 받자, 이리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평소에 공부하던 각종 이론들에 대해 물어봤다.

별로 난해한 건 없었다. 마탑에 들어가기 위해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기초적인 이론들이었다.

베르덴과 이리스.

만난 지 얼마 안 된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에 그녀의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이리스의 표정이 밝아 보였기에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어느새 도시 마르테스에 도착했다.

우선 이리스 파티는 길드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동굴 안에 있던 광대 고블린과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세르겐이란 남자에 대해 보고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럼 내일 오후쯤에 만나도록 하죠."

베르덴은 도시에서 제일 비싼 여관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돈도 충분하긴 했지만, 이전 마을에서 맛본 닭고기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런 걸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았다.

이리스에게 여관의 이름과 위치를 듣고, 그녀의 파티와 헤어졌다.

베르덴은 대로를 걸으며 도시를 둘러봤다. 듣던 것보다 규모가 꽤 컸다.

'이 정도면 은행이 있겠는데.'

현상금까지 합치면 수천만이 넘는 현금.

그걸 품에 넣고 다니는 건 여러모로 불안했는데 마침 잘됐다.

마법에는 돈이 든다.

거기다 베르덴은 돈을 물 쓰듯 쓰는 마탑 출신이기에 돈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상금 그리고 은행 계좌 개설.

여관에 들르기 전에 베르덴이 해야 할 일이었다.

17화 도시 마르테스

현상금 수여는 도시의 행정을 관할하는 시청에서 주관한다.

우선 도시 내 병사들에게 알리면 해당 지역에 조사단을 파견하거나 현상범을 죽였을 시, 시체를 확인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현상금 지급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가장 흔한 방법은 수급을 잘라 전달하는 것인데, 웬만한 전문적인 장비 없이는 썩지 않게 보관하는 것도 고역이다.

'마법으로 얼려도 되긴 하지만.'

들고 다니기 꺼림직하다.

베르덴은 귀찮은 일을 덜게 해 준 파이테 영주에게 감사했다.

도시 중심에 있는 시청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막아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베르덴이 현상금 증명서를 꺼냈다.

현재 베르덴은 어떠한 신분도 없었지만, 영주의 직인이 찍힌 종이가 신분증을 대신했다. 귀족의 문양을 알아본 병사가 퍼뜩 자세를 잡았다.

"시, 실례했습니다. 관련 부서는 2층 오른쪽 복도 끝입니다."

뒤이어 안내해 주겠다는 말은 거절했다.

한창 마탑에서 일꾼으로 지내고 있을 때, 잔심부름 겸 몇 번이고 시청을 들락날락했다. 물리적인 구조는 달라도, 대충 훑어보면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갔다.

관련 부서에 찾아가자 커다란 게시판에 각종 현상범에 대한 수배서가 가득했다.

빌셴과 바르자. 둘의 얼굴도 있었다.

수배서를 떼어 직원에게 건넸다.

"파이테 남작령에서 영주님의 기사와 함께 토벌을 마쳤습니다. 여기 증명섭니다."

직인을 본 직원이 혹여 뜯길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 정확한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최대한 서두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나 귀족의 눈 밖에 날까 봐서인지 직원의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쉴 자리를 안내받았다. 다른 직원이 서둘러 다가와 따뜻한 녹차 한 잔을 건넸다.

후릅.

'맛없군.'

그래도 뱉는 건 좀 그랬다. 단번에 들이켜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베르덴의 인생 대부분은 마법으로 물들어져 있다. 쉬는 동안에도 마법을 이용한 이런저런 전투법을 구상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베르덴이 눈을 떴다.

직원이 아닌, 처음 보는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소. 마르테스의 시장인 겔린 워하드요."

...시장? 갑자기?

난데없는 고위급 인사에 베르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잠시, 곧바로 이성을 되찾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애셔라고 합니다."

"하하, 예의가 밝으신 마법사분이시군.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바쁘지 않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소?"

도시의 우두머리가 직접 찾아왔는데 내쫓을 사람이 있을까?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들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편히 쉴 생각이었으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이 앉은 다음,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별건 아니오. 우연히 입게 된 은혜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지."

시장이 현상금 천만 엘크와 함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공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는 걸로 보아 정식 통행증인 것 같다.

왜 이걸 주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베르덴의 반응에 시장이 옅게 웃었다.

"파이테 남작령은 내 고향이오. 어렸을 땐 지금의 영주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었지. 놀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사경을 헤맬 때, 직접 교회에 연락해 치료를 해 주신 기억은 아직도 눈앞에 선할 정도로. 아, 고맙네."

직원이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녹차가 아닌 고급스러운 찻잎으로.

목을 축인 시장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살면서 전쟁도 겪고 이리저리 치여 살다 보니 이 자리에 있더군. 기왕 출세도 했으니 다른 가족들을 이곳에서 풍족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지만, 영 고지식한 사람들이라 영지에 남겠다고 했지. 이제 내가 말한 은혜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시오, 마법사 양반?"

도적들에게서 영지를 구해 줬다.

과장이 없잖아 있었지만, 가족들에게서 위협을 없애 준 건 틀림없었다.

시장의 호의 넘치는 시선에 베르덴이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그리고 영주님께서 따로 신경 써 달라고도 해서 이걸 준비해 봤소. 경비병에게 들어 보니 마땅한 신분증이 없는 것 같다고 했으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 귀한 건 아니지만 베르덴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저쪽에서 영주의 증명서를 가져가면 새로운 신분을 만들기 위해 모험가나 용병 쪽에 소속되어야 했으니까.

베르덴은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현재로선 말이다.

"괜찮은 선물이 된 것 같아 다행이오. 그럼 나는 공무가 바빠서 이만....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말을 깜빡했군."

문손잡이를 잡은 시장이 뒤를 돌아봤다.

"어서 오시오, 우리 마르테스에."

* * *

예정에 없던 시장과의 면담을 끝내고, 마그누스 은행으로 향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탑에서 사용하던 계좌를 떠올렸다.

'죽었다고 여길 테니, 마탑에서 전부 회수했겠지.'

힘들게 번 돈이 마탑주의 주머니에 들어간다니 배가 아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탑에서 사고가 터지기 직전에 예금한 돈을 전부 빼내고, 살림살이까지 전부 정리했다면 의심의 싹이 텄을 것이다.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는 그런 성격이니까.

새로운 계좌를 만들고 가진 돈의 대부분을 넣었다.

마그누스의 상호가 그려진 카드도 받았다. 뒷면엔 사회의 변혁에 앞장선 마법사들이 고안한, 고도의 술식이 새겨져 있다. 이걸로 결제하면 자동으로 계좌에서 그만큼의 금액이 차감된다.

다만, 기술적인 한계로 은행에서 전용 단말기를 지급받은 상점 외엔 쓸 수 없다.

당연히 도시 밖을 나가면 뭘 해도 쓸 수 없으니 한낱 잡동사니에 불과해진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술이었다.

방금 발급받은 카드로 여관의 꼭대기 층을 대여한 베르덴이 창문을 내려다봤다.

도시의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일찍 저녁을 먹은 그가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신분증이 생겨서 편하군.'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베르덴은 그렇게 얻은 시간을 마법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원소 계열과 계열을 따지지 않는 공통 마법. 지금까지는 회로가 허락하는 내에서, 머릿속으로 익힌 마법들을 구현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다면 다른 계열도 가능할까?

역천으로 얻은 재능이 어디까지 닿을지 궁금했다. 이리스의 부여 마법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이게 인생이지."

사사건건 방해하며 간섭하는 놈들이 없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 속에서 베르덴이 잠에 들었다.

* * *

"...죽었다고?"

박사가 무슨 소릴 하냐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고를 마친 흑색의 사내는 여전히 침묵했다.

"원인은?"

"동굴 내부에 마법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살해당한 것 같─"

쨍강!

유리 파편이 사내의 머리로 쏟아졌다. 플라스크를 던진 박사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사내를 노려봤다.

"말뜻 모르나? 세르겐을 죽인 자가 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을에서 의뢰를 받은 모험가 파티가 실험체가 있던 동굴로 향했다는 정황은 파악했습니다."

그나마 쓸 만한 정보였다.

또다시 던지려 했던 플라스크를 내려놓은 박사가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고블린 토벌을 맡은 모험가 파티가 그놈을 죽였을 리는 없을 테고.'

무언가 있다. 있는데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박사는 연구자답게 여기저기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을 긁어모았다. 최근 수개월 동안 일어난 일들 중 확인되지 않은 건 총 두 가지였다.

첫째, 파이테 남작령에 심어 둔 실험체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다.

둘째, 갑작스러운 세르겐의 죽음.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시간의 간격이 매우 짧다.

거기서 얻어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실험체를 처리하고, 세르겐마저 죽였다?'

박사의 뇌리에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집단이 떠올랐다.

방주. 그들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과 박사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이념은 상극이나 마찬가지. 서로의 뿌리는 같으나 더 이상 공존할 수가 없는 게 현 상태였다.

"하,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잘도 찾아냈군. 이렇게 되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방주가 보낸 마법사가 이곳 연구실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하기야, 세르겐의 입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기도 했으니까. 더 이상 써먹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발목을 붙잡지 않은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테온."

"예, 박사."

"오늘 내에 세르겐을 죽인 인물을 찾아낼 수 있나?"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괜찮군. 그럼 찾아내."

언제 적이 찾아올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생각은 없다.

방주에서 먼저 한 방 먹였으니, 이쪽에서도 되갚아 주는 게 도리다.

"그리고 죽여라."

그렇다 하더라도 방주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인간을 투입하겠지. 그게 목적이다.

그때쯤이면 연구에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 도시 마르테스를 무대로 한 실험의 향연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박사가 자신의 손 안에 새겨진 표식을 바라봤다.

날카롭고 가지런한 붉은 이빨, 글러트니(Gulttony).

우린 인류에 있어 선구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 * *

다음 날, 여관에서 이리스와 베르덴이 만났다.

다른 동료들이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이리스는 거절했다.

아카데미를 장학생으로 지내다 졸업하고, 무려 부여 마법은 2위계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녀였지만 막상 꿈에 그리던 모험가가 되니, 돈과 승급에 급급한 모험가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어느 정도 맞는 동료들을 영입해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러던 그때, 베르덴이라는 남자가 나타났다.

마법 실력은 압도적이며, 어떤 이론을 물어본들 모르는 게 없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 자리에서 논리정연하게 풀어 이해시켜 주었다.

그녀에게 베르덴이란, 그야말로 이상적인 마법사였고, 모험가 생활에서 쌓인 염증을 풀어 줄 존재였다.

'놓칠 수 없어.'

이리스의 마음속에서 마법에 대한 학구열이 오랜만에 불타올랐다.

"여기가 도서관이에요. 마르테스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책도 다양해서 저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죠. 일반 시민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회원 등록을 안 하면 대여할 때 돈을 지불해야 돼요. 그리고 회원이 되려면 최소 일주일은 출석해야 하고요."

"부여 마법에 대한 책도 있습니까?"

"부여 마법이요? 있긴 하지만 마법사님이 만족하실 정도의 책은 없을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기초 지식이 담긴 책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요. 누가 빌려 가지만 않았다면 전부 찾아낼 수 있어요."

이리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책까지 찾아 준다니... 역시 안내역으로 고용한 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말씀을 좀 낮춰 주실 수 없을까요? 제가 나이도 어리고, 마법사로서도 후밴데...."

"그럼 이리스라고 부르지."

베르덴은 곧바로 말을 놨다.

어차피 호칭이나 높임말이나 겉치레에 불과했으니까.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갑자기 말을 놓을 줄이야.... 눈을 깜빡이고 있던 이리스가 베르덴을 따라 도서관에 들어갔다.

"저기, 그럼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부르고 싶은 대로."

그게 제일 어려운데.

이리스가 골똘히 생각했다. 뭐라고 부르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까?

'애셔 님? 아니면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애셔 오빠는... 이건 절대 아니고.'

그러다 적당한 호칭이 떠올랐다.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베르덴을 앞질러 가며 말했다.

"제가 찾아올 테니까, 선배님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선배님? 처음 듣는 호칭이라 다소 어색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잠시 기다리니 이리스가 열 권이 넘는 책을 가져왔다.

"이 정도면 될까요?"

"더 있으면 좋겠는데."

도시에 어느 정도 머물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모으고 모으다 보니 어느새 베르덴의 주변에 책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도서관장이 다가왔다.

"저기 여기는 책으로 탑을 쌓는 데가...."

"이게 전부지?"

"헤엑, 헤엑. 네, 전부예요."

이리스가 기진맥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서관장에게 시선을 향한 베르덴이 카드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로릭스 여관 꼭대기 층으로."

그날 도서관의 매출은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

18화 암살자 (1)

수십 권이 넘는 책을 대여한 베르덴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돈도 벌었겠다, 설탕을 잔뜩 넣은 달달한 커피를 홀짝인 이리스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그 많은 책을 다 어쩌시려고요?"

"뭐 하긴. 읽어야지."

"...그걸 다요? 기한을 넘기면 연체료가 장난이 아닐 텐데요. 아마 빌렸던 것보다 몇 배는 나올걸요?"

"충분해."

책이야 질리도록 읽어 봤다. 그것도 대부분 마법 이론에 대한 것들로.

당연히 한 권당 2회독, 3회독 이상으로, 많으면 10번 이상을 정독할 정도로 완전히 이해가 될 때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은 속독술은 범인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다.

베르덴의 짧은 대답에 이리스는 생각했다.

'물어보는 족족 대답도 다 해 주고, 말도 놨는데 더 차가워진 거 같아.'

마치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는 것만 같다.

사실 당연했다.

인격 형성이 진행되는 시기에 베르덴은 마탑에서 일꾼이 되었으며 성인이 돼선 마탑의 실험체로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감정은 생기지 않았으니 그나마 나은 거겠지.

어쨌든 17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친분이 있는 상대는 오직 로벨린뿐이었다.

그런 베르덴에게 말의 높임은 하등 관계가 없었다.

만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사람과 터놓고 대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럴 만한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었고.

풍경을 바라보던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모험가 길드에선 별말 없었나?"

"있었죠. 덕분에 마스터하고 면담까지 했어요. 어찌나 떨리던지... 아무튼 조사단을 파견해 세르겐이라는 남자에 대해 알아본다고 해요. 그리고 그 고블린도요."

"나에 대한 얘기는?"

"우연히 길 가다 도와준 거라고 얼버무리긴 했는데, 그...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아니길 바라지만, 상황에 따라서 길드에서 부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갑자기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

아마?

'이해는 하겠지만, 갑자기 들이닥치는 건 불쾌한데.'

베르덴의 조용한 시선에 이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사전에 연락을 보냈으면 좋겠는데."

"...길드에 전달할게요. 그런데 하나 궁금하게 있는데... 왜 선배님이 그 동굴 안에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궁금하면 알고 싶은 게 사람이고.

애초에 호기심이란 마법사의 근간이자 습성이다.

'뭐라고 말하지?'

너를 미행했다고 할 수도 없고.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차피 길드가 찾아오게 되면 마땅한 이유를 대야 하니까,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였다.

잠시 생각하던 베르덴이 짧게 대답했다.

"그 남자를 쫓고 있었지."

이렇게 말하면 알아서 맞지도 않는 퍼즐을 맞추겠지.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라고 해도 침묵하면 그만이다. 베르덴은 모험가를 구해 준 은인이지, 추궁을 받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리스는 그런 베르덴의 예상을 정확히 따라갔다.

"...쫓아요?"

베르덴이 말없이 잔에 입을 대었다.

멍하니 있던 이리스의 머릿속에 박사와 실험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체 모를 마법사와 그가 추적하는 정체불명의 집단... 마치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일이 아닌가.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물어볼 수 없었다.

대답해 주지도 않을 것 같고... 그녀가 서둘러 따라붙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대장간."

둘의 동행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 * *

"3일 뒤에 오슈."

도적에게서 얻은 지팡이를 대장간에 맡겼다.

짧은 지팡이보단 기다란 스태프가 베르덴의 손에 더 익었다. 마탑에서 몰래 훈련을 할 때도 스태프를 사용했고, 비슷한 크기의 빗자루를 매일같이 다루었으니까.

곧바로 실전에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차근차근 익혀 가면 된다.

숙달만 된다면 단순히 마법을 난사하는 것보단 다양한 전투법이 파생되겠지. 베르덴은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단검을 하나 사 허리에 차고, 제작 기간 동안 사용할 강철 스태프를 대여했다.

어떠한 기능도 없는 막대기였지만, 대충 감을 익히는 데는 충분했다.

등에 강철 스태프를 매고 로릭스 여관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비추는 어스름한 달빛. 배달한 책들이 문 옆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제목들을 훑어보다 그중 '부여 마법 1부터 100까지'라는 이름의 책을 집어 들었다.

'부여 마법이란, 타인의 마력 간섭, 실패하는 이유....'

이미 이해하고 있는 목차는 가볍게 넘기고, 후반부로 갔다.

기본이 되는 1위계 부여 마법 몇 개가 실려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적혀 있는 대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되긴 하는데 좀 어색하군.'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지긴 할 테지만, 원래 마법이란 게 그렇다.

쓰면 쓸수록 원활해지고, 쓰지 않으면 점점 불편해진다. 뭔들 그러지 않겠다만.

베르덴이 자신을 향해 마법을 발동했다.

<고양이의 눈>

시력 강화.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레 많아진 정보량에 눈이 지끈거렸다.

'이래서 쓰지 말라는 건가.'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주의 사항.

'여기 적혀 있는 마법은 이해를 위한 것으로서, 실전에서 활용하기엔 부적절하다. 특히 청각을 강화하는 <고양이의 귀>는 조용한 곳에서 사용하길 바란다.'

아마 적응의 문제겠지.

전혀 다른 감각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불가능하니까.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익숙해질 필요는 없겠지.'

부작용은 견딜 만했지만 베르덴에게 딱히 이점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력감지가 훨씬 더 정확하고 빨랐으니까. 물론 기초 마법 중 하나인 만큼 허점이 많긴 하지만, 1위계 부여 마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범용성이 뛰어났다.

부여 마법을 해제하고는, 좀 더 마력을 소모해 마력감지를 세밀하게 시전했다.

마력을 매개체로, 먼지 한 톨마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역시 3위계 이상의 부여 마법이 아니면, 이 이상은 불가능....

'...?'

우뚝. 움직임을 멈춘 베르덴이 침대로 시선을 향했다.

분명 방 전체에 마력을 펼쳤는데, 침대 아래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없다고 우기는 것처럼.

뭔가 있다.

그렇게 판단한 베르덴이 재빨리 마력을 움직였다.

<어스본>

* * *

마르테스에 깔린 정보망은 테온의 자신작이었다.

세르겐을 죽인 마법사를 찾는 건 매우 쉬웠다.

그때 의뢰를 나섰던 모험가 파티를 찾아낸 뒤, 그들이 성문을 통과했던 날의 기록을 손에 넣으니 곧바로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애셔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길한 이름이다.

어쨌든 이름과 외모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니 수색망을 펼치면 될 터. 그렇게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목표물을 찾아냈다.

방주의 마법사는 고생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모험가 파티의 여성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누구는 플라스크에 맞아 가며 개같이 일만 하고 있는데.

살의가 커졌다. 테온은 글러트니에서 암살을 해 오던 만큼 홀로 목표물을 추적했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전문적인 솜씨였다.

목표물이 여자와 헤어지고 여관으로 향한다. 주변에 사람이 있어서 각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미리 방에 잠입한 뒤, 침대 밑에 숨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방심하면 쉽게 죽일 수 있다. 잠든 직후는 인간의 의식이 가장 깊게 떨어지는 시간이니.

벌컥. 베르덴이 들어왔다.

그는 장비를 풀지도 않고 책 더미를 물끄러미 보더니, 한 권을 잡아 읽기 시작했다.

'역시 마법사란 족속들은....'

당장 죽일 순 있지만, 성공 가능성이 아주 약간 떨어진다.

암살자는 언제나 최선을 노려야 하는 법. 테온은 호흡조차 죽인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던 그때, 베르덴의 움직임이 멈췄다.

테온은 그런 그의 다리를 보고 있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제기랄!'

당장 침대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콰가가각! 그가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날카로운 가시들이 솟아 나와 침대를 꿰뚫었다.

조금만 판단이 늦었으면 자신도 같은 꼴이 되었을 거라는 사실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베르덴이 강철 스태프를 손에 들었다.

저 얼굴까지 가린 암살자는 누구일까. 뻔했다.

베르덴과 관련 있는 인물 중에 그와 적대적인 관계라고 할 사람은 보헤미른 마탑 관련자나, 박사뿐이다.

전자는 당연히 아닐 테니, 답은 후자였다.

"박사가 보냈나?"

"...."

테온은 대답 대신 양손에 단검을 쥐곤 내던졌다.

카앙! 방벽에 맞은 비수가 베르덴의 등 뒤로 떨어졌다.

뒤이어 테온이 달려들었다.

발꿈치에서 솟아 나온 날붙이가 방벽에 내려 찍혔다. 꽤나 묵직한 일격이었다.

<어스본>

바닥에서 가시가 솟아나 테온을 추적했다.

놈은 천장과 벽을 이용해 곡예와 같은 몸놀림으로 피해 냈다. 그러면서도 투척용 단검을 여러 개 꺼내어 베르덴에게 날렸다.

'...뭐지?'

스치지도 못하고 벽에 박힌 단검들.

방금 보였던 움직임에 비해 어이가 없을 정도의 정밀도였다.

그러던 그때, 테온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양팔을 뒤로 당겼다. 촤악! 그가 날렸던 모든 비수가 역으로 날아왔다.

곧바로 마법을 중단하고 마력방벽을 펼쳤다. 미처 막지 못한 칼날이 베르덴의 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 나갔다.

"아깝군. 한 치만 더 옆으로 갔으면 죽었을 텐데."

마법사의 약점 중 하나.

마력방벽과 마법을 동시에 구현할 수 없다.

베르덴이 목을 손으로 훑었다.

상처 하나 없었지만 서늘한 감각이 남아 있다. 암살자의 말대로 조금만 옆으로 갔더라면 경동맥이 잘려 나갔겠지.

'기사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다.'

눈앞에 있는 암살자는 변칙적이고 빠르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베르덴이 쉽게 읽어 낼 수 없는 움직임. 힘을 조절하며 상대할 실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절대적으로 마법사가 불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는 건 스스로 목을 옥죄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무대를 바꾸는 수밖에.'

아주 확실하게 말이다.

마침 꼭대기 층의 투숙객은 베르덴이 유일했다.

<화염구>

<화염구>

<화염구>

동일한 마법의 트리플 캐스팅.

베르덴을 죽이기 위해 빈틈을 노리고 있던 테온이 세 개의 불덩이를 보곤 눈을 부릅떴다. 마법을 동시에 세 개나 쓰는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저 마법의 위력은 결코 이런 좁은 곳에서 쓸 법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테온이 베르덴의 얼굴을 봤다.

차갑고 푸른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베르덴은 진심이었다.

"이런 미친놈이!"

테온이 당장 창문으로 달려 나갔다.

와장창! 유리를 깨고 바깥으로 나가자 시원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흩날리는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고개를 뒤로 돌리자,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베르덴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화염구가 날아왔다.

콰과과광!

커다란 폭발이 마르테스의 밤을 산산이 부쉈다.

19화 암살자 (2)

마르테스 상공에 폭발이 일어났다.

굉음과 불빛에 시민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는, 도시에서 가장 비싼 로릭스 여관의 천장이 송두리째 들어가 있었다.

"부, 불이야!"

"어서 병사들 불러! 빨리!"

사람들이 분주해졌지만 너무 높았기에 불을 끌 방법이 없었다.

어느새 여관 앞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 소란을 틈타 테온이 은밀하게 몸을 숨겼다.

'뭐 이런 무식한 마법사가 다 있지?'

3위계 마법을 동시에 세 개나 시전하다니.

그것도 놀라운데 그 마법을 좁은 방에서 터뜨렸다는 게 경악스러웠다. 자칫하면 본인도 죽을 수가 있는데....

"크읍...!"

테온이 얼굴을 찌푸렸다. 마수 가죽으로 만든 옷 덕분에 화상은 피했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장기가 울려 속이 메스껍다. 귀가 먹먹하기도 하고.

신음하며 고개를 들자 불길 속에서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거 사람 아니야?"

"마법사 같은데?"

허공에 떠 있는 베르덴을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더럽게 멀쩡하구만.'

테온은 혀를 차며 일단 후퇴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도망치지?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때,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목을 가다듬은 테온이 변조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방화범이다! 저 미친 마법사가 방화범이야! 모두 타 죽기 싫으면 도망쳐!"

뭐라고?

공포가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명을 지른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테온은 그 인파 속에 숨어 자리를 벗어났다.

'하늘에 떠 있으면 어쩔 방법이 없으니까.'

테온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박사가 명령한 암살에 실패하고 말았다. 독을 발랐으면 몰랐겠지만, 그런 건 테온의 취향이 아니었다. 평생을 갈고닦은 살인 기교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저 미친 마법사가 감이 좋지만 않았어도, 분명 암살은 성공했을 것이다.

'박사가 또 지랄하겠군.'

이번엔 뭘 던지려나? 설마 실험체들을 던지진 않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렇게 거리를 벗어나 어두운 골목에 들어간 순간, 뒷목에 소름이 끼쳤다.

불길한 감각에 하늘로 고개를 향하니, 베르덴이 테온을 주시한 채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력 화살>

"흐억?!"

쉬익! 푸른 화살이 테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지만 도시에서 대놓고 마법을 쓰다니... 마법에 미쳐 정신이 이상해진 마법사가 어딘가 있다고 들었는데, 분명 저놈은 그런 미친놈들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문득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대체 방주에선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마법사를...!'

쿠구궁! 테온의 앞에 석벽이 솟아올랐다.

속도를 가속하여 벽을 박차 뒤로 넘어갔다. 고비는 넘겼으나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쉬익! 쉬이익! 카가각!

연이어 쏟아지는 마법의 화살.

테온은 온 힘을 다해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며 화살을 쳐 냈다.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 퇴로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어떻게 움직이든 하늘에 떠 있는 마법사의 시야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러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

급격하게 방향을 튼 테온이 단검을 휘둘렀다.

콰앙!

벽을 부순 테온이 오래된 상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지하에 통로가 하나 있는데 주로 거지들이나, 범죄자들이 거처로 삼는 곳이었다.

지상으로 내려간 베르덴도 그를 따라 곧바로 지하로 향했다.

곳곳에 노숙자들이 누워 있다. 마력을 펼쳤지만 암살자의 장비가 특별한 건지 정확하게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남자가 베르덴에게 말을 걸었다.

"딸꾹. 거 오늘은 못 보던 얼굴이 많구만."

암살자를 본 건가.

"방금 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글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이거라면 갑자기 떠오를지도."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 남자가 킬킬대며 웃었다.

시간 낭비라 생각해 지나치려 했는데, 남자가 성큼 길을 막아섰다.

"안 되지, 안 돼. 여긴 내 구역이니까 지나가려면 돈을 내야지. 죽기 싫어도 돈을 내야겠지만."

남자가 녹슨 칼을 빙빙 돌리며 다가왔다.

그 순간, 남자의 복부 쪽에서 단검이 솟아 나왔다. 베르덴의 얼굴에 피가 팍 튀었다.

'확실히 까다로워.'

사람을 눈속임으로 쓸 줄이야.

칼날을 막은 스태프. 베르덴이 남자의 몸을 밀어내며 마력을 발산했다.

<충격파>

콰앙! 시체와 함께 테온이 날아갔다.

단검을 바닥에 꽂아 속도를 줄인 그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로가 상대의 눈을 마주했다. 대화는 없었다. 미끄러지듯 쏘아져 나간 테온은 아래에서 위로 단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마력방벽을 펼치면 연막을 터뜨린다.'

다른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때가 도망칠 기회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테온의 일격은 허공을 갈랐다. 허리를 비튼 베르덴이 스태프를 회전시켰다.

<마력집중>

"뭣...?!"

마력을 담은 일격이 푸른 궤적을 그렸다.

터엉! 예상치 못한 충격에 테온의 몸이 붕 떴다. 연이어 자신을 겨냥한 베르덴의 손아귀에 테온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스 스피어>

그와 동시에 연막이 터졌다. 바위의 창이 검은 연기를 관통했다.

돌풍으로 재빨리 연막을 들췄지만 이미 암살자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마르지 않은 핏방울들이 떨어져 있었다.

'치명상은 피했나.'

마력감지로 잡히지 않는 데다가 저 앞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 베르덴은 당장 쫓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미 추적은 현재 진행형에 있었으니까. 상대 쪽에 마법사가 없는 이상 놈은 결코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대충 피를 닦아 낸 베르덴이 지상으로 올라갔다.

"꼬, 꼼짝 마!"

근처에서 순찰을 하던 병사들이 창을 겨눈 채, 베르덴을 에워싸고 있었다.

* *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시장 겔린 워하드가 무심코 이마를 짚었다.

한밤중에 도시에서 폭발 테러라니. 아니, 사상자는 없었으니 테러는 아니었지만 도시가 생긴 이래 역대급 사건인 건 분명했다.

그것도 어제 직접 통행증을 준 마법사와 관련이 있다는 게 충격이 컸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오시오."

"예, 시장님."

마르테스 모험가 길드장, 오스카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로 마주 앉은 그들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사건의 경과 파악은 어떻소."

"어느 정도 진행은 되었습니다만... 애셔라는 자가 핵심인 건 분명한 듯싶습니다."

모험가 길드는 특성상 국가와 공식적으로 서로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가진 수색 능력과 힘은 병사 수백 명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었으니까.

거기다 이번 일은 모험가 길드에서 조사하는 사건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 있었다. 길드장인 오스카가 총괄을 맡는 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경우였다.

"그 말은 그가... 테러를 계획했다는 말이오?"

"그 반대입니다. 정황상 마법사는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더군요. 본인 주장도 그렇고요."

오스카가 심문 과정이 적힌 문서를 건넸다.

눈을 가늘게 뜬 시장이 철자 하나하나 놓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읽어 내려 갔다.

베르덴에게서 얻어낸 증언. 어젯밤 일어난 사건의 발단은 그랬다.

동 등급 모험가 이리스에게 도시 안내를 받은 베르덴은 늦은 밤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암살자를 발견하고는 전투를 벌였고, 마법에 밀린 암살자가 폭탄으로 층을 날려 버렸다라....

"그럼 한밤중에 목격된 마법은 뭔가?"

"암살자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데, 인적이 없는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마법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시민은 없습니다. 확인해 본바 파손된 기물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도시에서 마법을 사용한 것 자체가 큰 문제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상자는 한 명입니다. 그마저도 강도질로 수배가 내려진 범죄자였고요."

"음, 그나마 다행이군. 누가 그를 죽이려 한 건지는 알아보셨소?"

"...추측이지만 이틀 전, 모험가를 죽이려 했다던 자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조사단의 말로는 동굴에 아무것도 없었다더군요."

작은 동물의 흔적조차도.

숲에 동굴이 있는데 생물이 기어들어 가지 않았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베르덴이 죽인 괴한의 시체와 돌연변이 고블린에 손을 댔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나아가 그 누군가가 베르덴마저 죽이려 한 것까지 말이다.

입술을 매만진 시장이 길드장을 바라봤다.

"그럼 그 누군가가 또 암살을 벌일 가능성이 있겠군. 애셔만이 아니라, 그 모험가 파티마저 말이오."

"혹시 몰라 경호를 붙여 놓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애셔의 경호를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말입니다."

베르덴의 소문은 알게 모르게 도시에 퍼졌다. 여관에 방화를 저지르는 미친 마법사라고.

사실과 달라 수습에 들어가긴 했지만, 소문이란 게 원래 융통성이 없는 법 아닌가.

귀가 민감한 용병들이나 모험가들은 경호 의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인종보다도 무서운 게 미친 마법사라고 할 정도였으니.

목숨 걸고 의뢰를 수행하면서도 목숨을 가장 아끼는 게 그들이었다.

"끄응. 기사단 쪽에서 구해 봐야겠군. 그 일은 내게 맡기시오. 대신 최대한 빠르게 도시를 불안하게 만드는 자를 찾아내야만 하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시장님."

그렇게 베르덴의 경호 겸 감시를 맡을 사람이 결정됐다.

* * *

도시의 치안은 병사들이 책임지지만, 무력의 상징은 그들이 아니었다.

시장의 직속 부대로, 국가에서 공인한 기사들로 이뤄진 기사단이 도시의 실질적인 힘이었다. 그렇다고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상부의 명령에 거역할 수는 없었다. 설령 하기 싫은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미친 마법사의 호위라니. 왜 하필 나야?"

차석 기사 제이슨이 투덜거렸다.

부하가 그렇게 많은데, 기사단에서 둘째가는 자신이 호위역이라니. 기사단에 마법사도 있는데 왜 마법사, 그것도 남자 옆을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자면 또 모를까.

경비 막사에 도착하니 병사들이 경례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이슨 님."

"요인은 안에 있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병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요인이 있는 방 앞에서 제이슨이 물었다.

"근데 마법사 이름이 그... 뭐였더라?"

"...애셔라고 합니다."

호위를 할 사람 이름도 모르다니....

헛기침을 한 병사는 경례를 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문을 두들긴 제이슨이 안으로 들어서자, 잿빛의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듣던 것보다 젊잖아?'

3위계 마법사라고 하던데 저 나이에? 말로만 듣던 천재 같은 건가?

신기한 생물을 보듯, 제이슨이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마르테스의 차석 기사, 제이슨이라고 합니다. 이후부터 안전을 확보할 때까지, 어딜 가든 제가 동행할 겁니다. 따로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이제 밖으로 나가도 되는 겁니까?"

"예, 그러셔도 좋습니다. 다만, 제 눈에서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제이슨이 그를 뒤따랐다.

'갑자기 어딜 가는 거지?'

도심을 벗어나자 사람이 점점 줄었다.

어느새 도시 외곽까지 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베르덴은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결국 보다 못한 제이슨이 그를 막아섰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눈 밖에 나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목적을 말해 주지 않으면 이 이상은 안 됩니다."

뭐, 이유를 말해 주는 거야 간단했다. 어차피 기사의 힘을 빌릴 생각도 있었고.

낡은 건물 앞에 선 베르덴이 그에게 말했다.

"여깁니다."

"...여기요? 여기 뭐가 있는데요?"

"어제 저를 죽이려 했던 암살자가 있겠죠."

뭐? 기사가 아차 하는 사이 베르덴의 눈이 번뜩였다.

콰앙! 마법에 의해 건물 입구가 송두리째 뜯겨 나갔다.

20화 박사 (1)

마력은 개인의 역량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법의 형태를 빌리지 않더라도, 단순히 압도적인 마력량을 내뿜어 상대방을 위압할 수도 있고, 마력을 퍼뜨려 주위를 감지할 수도 있다.

더해서 마력 조작이 일정 경지 이상에 다다르면, 별다른 도구 없이도 마법진을 형성할 수 있다.

추적용 마법진, 트레이스(Trace).

급조한 것이긴 하지만, 어지간히 예민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쉽게 눈치챌 수 없다. 그리고 놈들에겐 그런 마법사가 없다.

암살자를 스태프로 가격했을 때 겉옷에 몰래 새겨 넣은 마법진. 아직까지 효과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입구를 부순 베르덴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에 비친 먼지가 떠다닌다. 마력을 펼쳐 건물 내부의 구조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제이슨이 다급하게 뒤따라 들어왔다.

"가,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미친 마법사라더니 진짜로─"

"저쪽입니다."

제이슨의 말을 무시하고, 벽면에 있는 작은 창고로 들어갔다.

오래된 가구와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염력을 써 몽땅 바깥으로 날려 버리자 낡은 바닥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숨겼는지 손길이 닿은 흔적은 없었지만, 마법진의 잔향은 분명히 이 아래로 향해 있다.

베르덴이 제이슨에게 말했다.

"아래에 지하 통로가 있습니다. 방향과 규모를 보아 도시 바깥까지 연결된 것 같은데,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전혀요."

도시 밖으로 연결된 통로라니.

작은 통로에 불과하지만 이건 치안에 큰 구멍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고블린 같은 아인종이 이 길을 통해 도시 내에 숨어든다면....

제이슨이 검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당장 폐쇄해야 합니다."

"그 전에 암살자를 쫓는 게 우선입니다."

통로를 따라가면 놈들이 뭘 노리는지, 왜 이 길을 만들었는지도 알 수 있겠지.

베르덴이 스태프를 손에 쥐었다.

임시로 빌린 강철 스태프가 아닌, 주문 제작한 스태프였다.

일이 밀려 있어 본래 이틀 뒤에 완성 예정이었지만, 조사를 받던 베르덴이 꼭 필요하다고 조사관에게 요청한 바람에 대장장이가 부랴부랴 만들어 낸 것이다.

덕분에 차례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적당히 묵직한 게 마음에 들어.'

스태프를 가볍게 돌린 베르덴에게 제이슨이 말했다.

"지금 저희 둘만으로 쫓자는 겁니까? 연락을 해서 기사단을...."

"오지 않을 거라면 혼자 가겠습니다."

콰지직! 바닥문을 뜯어 낸 베르덴이 주저 없이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너무도 제멋대로인 행동에 제이슨은 머리가 아파 왔다.

"제기랄, 이래서 마법사는...."

한숨을 쉰 그가 검을 뽑았다. 아무리 그래도 호위 대상을 홀로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기사였으니까.

제이슨이 베르덴을 따라 어둠 속으로 향했다.

* * *

간신히 도주한 테온은 은신처에서 밤을 보냈다.

옆구리가 크게 베여 나간 탓에, 곧장 실험실로 갔다간 흔적이 남을 게 분명했으니까. 직접 상처를 꿰매고 비상용으로 구비해 둔 포션을 사용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서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다.'

암살에 실패한 데다가 연락까지 두절됐다?

돌아가면 진짜로 박사가 실험체를 던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을 실험체로 삼을 수도 있고.

'그냥 도망칠까.'

아니, 안 된다. 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도망쳐 봤자 글러트니의 이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릴 때부터 잡혀 와 암살자로서 길러진 그였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숨겨 둔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먼지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은폐 능력은 전문가 이상이었다.

어둠이 깊었지만 길은 하나뿐이라 문제없다. 끝에 도착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제기랄.'

...실험실 곳곳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

발소리를 없애고 조심히 움직이자, 두 눈이 충혈된 채 앉아 있는 박사가 보였다. 인기척을 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왔나?"

"...."

"늦었군. 아주 늦었어. 죽었나 싶어 알아보니 어느새 유명 인사가 되어 있더군. 암살하러 다닌다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는 건가, 지금?"

박사는 극심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한 실험이 실패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부하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 주지 않으면 부아가 치민다.

박사가 실험체에게 던진 부하들만 두 손을 아득히 넘어간다. 실험실에 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설명해라, 간단명료하게."

테온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박사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지만, 글러트니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홧김에 박사를 죽였다간 테온의 목숨도 날아가는 것이다.

설명, 아니 변명을 듣고 있던 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 미친 마법사가 너를 그냥 놔줬다고?"

"놔준 게 아니라 도망친 겁니다."

쨍강! 플라스크를 던진 박사가 생각에 잠겼다.

건물 꼭대기를 날려 버리고 도시 한가운데에서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가 고작 연막 따위에, 병사들이 온 탓에 추적을 포기했다? 조심성이 많은 박사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설마...!'

눈을 부릅뜬 박사가 테온에게 소리쳤다.

"옷을 벗어라! 당장!"

"예? 그게 무슨...."

"닥치고 어서!"

테온의 옷을 잡아챈 박사가 곧장 불길에 던져 넣었다. 희귀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라 한두 푼 하는 게 아닌데....

잠시 후, 옷에서 푸른 마력이 흩어지는 게 보였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박사가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었다.

'위치가 들켰다.'

그렇다는 건 방주에게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얼마 안 가 이 실험실에 놈들이 들이닥치겠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적들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젠장, 박사는 선택해야만 했다.

"당장 여기를 뜬다. 실험체는 내가 챙길 테니, 너는 이 실험실을 완전히 폐쇄해라.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예, 알겠습니다."

"책임은 그 후에 묻겠다."

...쿠웅!

그때, 진동이 울렸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인지 지면이 조금씩 흔들린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플라스크가 떨어져 박살이 났다.

진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리며 진원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평범한 신체 능력을 가진 박사에게조차도.

이건 지진 따위가 아니었다.

"...설마 벌써?"

콰아앙! 박사의 목소리가 폭발음에 묻혔다.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눈을 뜨니 비밀 통로가 연결되어 있던 방이 박살 나 있었고, 그 잔해 속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 * *

흑발의 사내. 얼굴은 처음 보지만 어제 본 암살자가 분명했다. 그럼 그 옆에 있는 남자는 박사겠지.

굳이 정황을 따지지 않아도, 흰 가운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척 봐도 연구자 같았다.

베르덴을 본 박사가 미간을 좁혔다.

"네놈이 그 미친 마법사인가? 감히 내 실험을 두 번이나 방해하고 세르겐을 죽인 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그것도 덜떨어져 보이는 기사 하나만 데리고. 아무리 방주에서 나왔다지만 오만하기 짝이 없군."

"뭐? 누가 덜떨어져?"

제이슨이 발끈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르덴은 고블린의 동굴에서 들었던 방주란 단어에 집중했다.

이제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박사는 방주라는 집단과 적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베르덴을 방주에서 나온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용해 볼 가치는 있겠어.'

그게 더 정보를 얻어 내기 쉬울 테니.

베르덴은 박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대화는 놈들을 제압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 대신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스 스피어>

바위의 창이 박사의 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물어볼 게 있는 이상, 간단히 죽일 생각은 없다. 박사를 막아선 테온이 단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쩌엉! 궤도가 비틀린 마법이 벽을 관통했다. 묵직한 충격에 울리는 단검. 태연하게 옷을 툭툭 털어 낸 박사가 테온을 째려봤다.

"테온, 네놈 때문에 전부 엉망이 됐군."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앞당길 수밖에. 책임지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박사가 실험실 안쪽으로 향했다.

베르덴이 놈의 다리를 노리고 다시 한번 마법을 날렸지만 테온이 빈틈없이 가로막았다.

위력이 높은 마법을 사용했다간 자칫 박사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방해되는 것부터 치우는 게 우선.

베르덴이 전신의 회로를 활성화했다. 푸른 눈동자에 마력이 넘실거렸다.

그때, 검을 든 제이슨이 앞으로 나섰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먼저 간 놈을 쫓으시죠."

"알겠습니다."

비행을 쓴 베르덴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너무도 사양 없는 대답에 멍해 있던 제이슨이 쩝 입맛을 다시며 검을 세웠다.

'그러고 보니 실전은 오랜만인데.'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왜냐하면 마르테스의 차석 기사이자, 한때 아카데미에서 장학금까지 받은 우등생이기도 했으니까. 고작 1학기에 불과하긴 해도.

기를 활성화한 제이슨이 바닥을 박찼다.

카아앙!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튄다.

그때를 틈타 베르덴이 박사를 쫓았고, 테온은 그를 막을 생각도 없이 눈앞의 기사에게 집중했다.

* * *

길이 하나밖에 없었기에 박사를 쫓는 건 간단했다.

꽤나 어질러져 있는 장소를 지나자, 복도 끝에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수상하군.'

하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문을 지나자 표정이 순간 일그러질 정도로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암시를 사용한 베르덴의 시야에 박사가 보였다.

"하, 역시 예상대로군.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그럼 그렇지. 그래서 어떤가, 마법사? 내 작품들에 대한 소감은?"

박사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양옆으로 설치된 철창 안에는 다양한 아인종이 가득했다. 그것도 죄다 입이 찢어진 게, 광대 오크와 고블린하고 판박이였다.

"이건 뭐지?"

"내 방식대로 진화를 시킨 아인종들이지. 물론 이런저런 하자가 있어 폐기 처분 할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쓸 만해. 특히 침입자를 처리하는 데 말이야."

철컹! 모든 철창이 동시에 열렸다.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광대들이 서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박사의 앞에 투명한 벽이 솟아올랐다.

"부디 내 작품들을 느긋하게 즐겼으면 좋겠군.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미친 마법사."

오크, 고블린, 코볼트 거기다 트롤까지. 이 정도면 저 어린 마법사를 죽이는 데 충분하고도 넘칠 터. 혹여 살아남는다 해도 마력을 바닥까지 소모할 테니 추적을 이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어찌 됐든 더 이상 저 마법사와 만날 일은 없다.

입가에 미소를 띤 박사가 유유히 모습을 감췄다.

[그어어어어!]

[키르르륵!]

박사가 사라지자 아인종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고 짓밟아 터뜨렸다.

그중 인간의 냄새를 맡은 몇몇 놈이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하나씩 처리하면 밤새겠군.'

어림잡아도 50마리가 넘는다. 실험체라고 했으니, 고기를 먹고 상처 회복을 하는 놈들도 분명 있을 터.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

<파도>

거대한 물결이 쇄도해 주위를 집어삼켰다.

휩쓸려 나간 아인종들이 바닥을 굴렀고, 온 사방이 물에 젖었다. 분노에 찬 놈들이 베르덴에게 흉폭한 시선을 던졌다.

철벅거리는 수많은 발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치직──!

베르덴의 마력이 변환되며 푸른 번개가 메아리친다. 그 여파로 달려오던 고블린 하나가 타 죽었다. 이윽고 사방을 가득 메운 푸른빛이 강하게 점멸했다.

베르덴의 손끝이 놈들의 중심을 향했다.

<뇌격>

한 줄기 전격이 터지며 일직선상에 있는 아인종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21화 박사 (2)

퍼억─! 퍼어억─!

뇌격에 직격당한 고블린과 코볼트가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순식간에 방 전체에 퍼져 나간 전류. 회복할 겨를도 없이 광대 오크의 몸 전체가 검게 타올랐다.

모래알같이 많은 마법사 중에서도 한 줌만이 다룰 수 있는 고위 속성.

뇌격은 전격 계열 중에서도 가장 하위의 마법이었지만, 위력만큼은 3위계 속성 마법 중 상위에 속했다.

상위종도 아닌, 일개 광대들이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

그런데 전부 죽지 않았다.

오크보다 한층 더 큰 체격을 가진 트롤 두 마리. 녀석들이 바싹 탄 사체를 입에 넣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상처를 회복했다.

아무리 재생에 특화된 아인종이라지만 이건 너무도 빨랐다.

<화염구>

이번엔 불에 태웠다.

정통으로 맞은 트롤이 주춤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불길 속을 걸어 나왔다. 광기에 물든 트롤의 노란 눈동자.

────콰앙!

베르덴의 옆으로 날아온 사체가 박살 났다.

'3위계로는 안 되겠어.'

뇌격과 화염구를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하다니. 내구력과 재생력이 통상을 벗어났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널려 있는 시체를 아예 잿더미로 만든 다음 서서히 몰아넣으면 무난히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렇다면.

콰앙! 현란하게 휘둘러진 스태프가 트롤의 주먹을 흘렸다.

마력을 집중하여 못생긴 턱을 강하게 후려친 뒤, 그 뒤로 달려오고 있는 트롤에게 스태프를 겨냥했다.

<어스본>

트롤의 복부를 관통한 날카로운 기둥. 꼬챙이처럼 꿰여 버린 녀석이 발버둥 쳤다. 무지막지한 힘에 기둥에 금이 갔다.

'일단 한 놈.'

쩌어엉! 스태프에 맞았던 트롤이 정신을 차리곤 마력방벽을 후려쳤다.

놈의 움직임은 좋게 말해도 빠르지 않았다. 애초에 재생 능력을 제외하면 오크와 비슷한 수준의 아인종이었다.

무릎, 얼굴 그리고 목. 베르덴의 삼연격에 트롤이 신음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을 느끼지 못해도 숨을 쉬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어 충격파로 나가떨어진 녀석이 뒤에 있던 트롤과 부딪쳤고, 기둥이 부러지며 두 놈이 뒤엉켰다.

'지금!'

<칼날 폭풍>

5개의 칼바람. 그리고 트리플 캐스팅.

총합 15개의 칼날이 폭풍처럼 트롤들에게 날아갔다. 피부가 찢겨 나가고, 관절 부근이 잘려 나간다. 시체를 먹지 않는 이상, 자체적인 재생 능력만으로는 그 많은 상처를 당장 회복할 수가 없었다.

<석벽>

<지형조작>

쿠구구구...! 단단한 파도가 트롤을 집어삼키며 둥그런 돔을 만들어 냈다.

베르덴이 손을 꽉 쥐었다. 돔이 서서히 압축되며 일부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새에서 트롤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걸로 놈들은 죽지 않는다. 얼마 안 가 부상을 회복하고 벽을 부수고 나오겠지.

어차피 이건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적지 않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트롤의 처형대였다.

마력을 한데 모아 속성으로 변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바위가 허공에 떠올랐다.

베르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력집중>

흩어지는 속도 이상으로 쏟아부은 마력.

허용량을 넘어 한계에 다다르자 바위에 한 줄기 금이 갔다. 이내 덜덜 떨리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불안정한 상태에 도달했다.

<암석강타>

후웅────허공을 격하고 쏘아져 나간 바위.

그리고 트롤을 가둔 벽에 도달할 때쯤, 한 줄기에 불과했던 금이 수십 개로 늘어났다. 그와 동시에 바위가 수천 개의 파편으로 터져 나갔다.

콰과과과!

엄청난 충격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베르덴이 재빨리 마력방벽으로 여파를 막아 냈다. 중심에 떠오른 흙먼지들이 걷히자, 그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은 없었다.

남은 거라곤 돌조각에 파묻힌 트롤의 다리뿐. 재생을 시도하지도 못한 채, 파편에 상반신이 쓸려 나간 것이었다.

베르덴이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전격 계열은 그 위렵답게 마력 소모가 극심하고, 지형조작부터 암석강타를 이용한 폭발까지 연이어 쏟아 냈으니. 아무리 방대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피로를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시간은 벌었다.'

고작 10분 남짓. 그 안에 박사가 모든 흔적을 지우고 도망쳤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 답은 뻔했다.

베르덴은 마탑에서 살아왔기에 알 수 있었다.

연구자가 목숨보다 중요시 여기는 건 실험의 결과물.

분명 이곳 어딘가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자료들을 가지러 갔을 것이다.

투명한 벽을 부수고 박사가 사라진 통로로 향했다.

암살자를 보내 자신을 죽이려 했으니 그 대가는 톡톡히 갚아 줘야겠지. 어디 있든 간에 놈은 결코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 * *

박사가 실험실의 최심부에 도착했다. 이곳만큼은 다른 곳과 달리 아주 깨끗했다.

그가 수십 년간 연구에 실험을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만든 최대의 역작이 있었으니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으나, 이걸 글러트니로 가져가면 분명 자신은 다른 놈들을 제치고 '다섯 개의 이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박사는 그렇게 확신했다.

"크크큭, 그 낡아 빠진 이빨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쓸모없는 부하들 때문에 막판에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르테스의 인간들을 제물로 삼지 못하는 것뿐이니. 다른 곳으로 가서 천천히 완성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박사가 숨겨진 버튼을 눌렀다. 바닥이 열리며 거대한 시험관이 나타났다.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인간. 특별하고 선구적인 나의 귀한 자식. 박사는 애정 어린 손길로 시험관을 어루만지곤 문을 열었다.

촤아악! 양수가 쏟아지듯, 안에 담겨 있던 액체가 쏟아졌다.

그와 함께 밖으로 나온 인간이 바닥에 쓰러졌다. 박사가 다가가 품속에서 주사 하나를 꺼냈다.

"일어날 시간이다, 아이야."

푹. 바늘이 척수에 꽂혔다.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지그시 눌러 가며 각성제를 천천히 투입하던 그때, 선혈과 함께 박사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크아아아아아악?!"

"도망친 게 고작 여긴가?"

베르덴이 스태프를 박사에게 겨냥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박사가 서둘러 가운으로 출혈을 막았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그가 고통에 신음했다.

"크읍... 어, 어떻게 여길...! 아니, 그 전에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박사의 실패작 중에서도 트롤은 독보적이었다.

기존의 재생 능력에 더해, 섭취를 통한 회복이 합쳐지니 웬만해선 죽일 수 없는 괴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가진 힘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능력 하나만으로도 살려 둘 가치가 있었다.

'설마... 3위계가 아니었단 말인가?'

테온에게 보고를 받은 박사는 베르덴을 3위계로 확신했다.

마법사의 위계가 아무리 재능에 좌우된다지만, 나이와도 관련이 깊었으니까. 마법은 하나의 학문으로,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게 상식이었다.

박사가 힘겹게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가 만든 트롤을 3위계 마법으로 처리하는 건 통상적인 3위계 마법사의 마력량으로는 불가능하다. 박사는 여러 실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런 트롤 두 마리를 포함해 다른 실패작들을 모조리 죽인 데다가, 이렇게나 빨리 따라붙다니.

'저 나이에 4위계에 올랐다고?'

그것도 완숙한 4위계.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어떻게 방주가 이런 재능을 지닌 마법사를 그토록 철저하게 숨길 수 있었는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박사에게 베르덴이 물었다.

"옆에 있는 건 뭐지?"

"끄으윽...! 이건, 내 평생의 역작이자 자식이지. 이걸 만들려고 수년 동안 내가 쌓아 온 모든 걸 바쳤다면 믿겠나?"

박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왜. 죽일 생각인가? 안 되지... 절대 안 돼. 이걸 죽이는 건 우리 글러트니의 이념을 넘어 세상의 이상(理想)과 반대되는 행위니까. 느껴지지 않나? 이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인류의 미래를."

박사의 말에 베르덴은 침묵했다.

딱히 아는 게 없었으니까. 글러트니나 이념이나 당최 유추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요 키워드에 집중하며 박사를 살짝 떠보았다.

"...그게 인류의 미래라고?"

"그렇지. 다른 종족들과 달리 나약한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 낸 진화체. 생명체의 근본인 섭취를 통해 변화하는 인류의 새로운 형태다. 그야말로 우리의 이상(理想)이지 않나?"

진화, 섭취, 이상.

베르덴은 그 단어들을 떠올리며 박사가 한 실험에 대해 생각했다. 차차 박사가 한 실험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쯤, 바닥에 쓰러진 인간이 꿈틀 움직였다.

순간 스태프가 놈에게 향했고, 그 틈에 박사가 몸을 내던지며 주사기를 힘껏 눌렀다.

촤아악! 뒤늦게 날아간 마법이 박사의 나머지 팔을 잘라 냈다.

하지만 박사는 비명을 지르긴커녕 웃고 있었다.

"크흡! 하하하핫! 이 미친 마법사야, 네놈의 그 마력. 산 채로 내 자식의 양분이 되어라!"

번쩍. 눈을 뜬 인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신체 어느 곳에도 털 하나 자라 있지 않았다. 인체의 모형처럼 인간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인간이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러곤 활짝 웃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가지런한 건치가 하얗게 빛났다.

"밥."

* * *

"...밥?"

난데없는 단어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인간이 움직였다. 뛰는 자세가 엉성했지만 상당히 빨랐다.

죽일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제대로 알아낸 게 없었으니까.

박사의 역작... 인간이라고 부르자. 어쨌든 그것에 흥미가 갔다. 연구자로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베르덴의 스태프에 빛이 맺혔다.

<마력폭발>

먼 거리에서 폭발한 푸른 마력.

마력폭발은 위력이 낮지만 빠르다. 머리에 제대로 충격만 준다면 제압 마법으로썬 꽤나 쓸 만했다.

그런데....

'피해?'

폭발 직전에 기괴하게 몸을 비튼 인간이 베르덴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맥동하더니 붉은 기운에 휩싸였다.

신체 강화.

기를 깨우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

남작령의 기사도, 전직 모험가였던 도적도, 세르겐과 암살자도 사용했었다.

쿠웅! 바닥이 깨졌다. 기운을 다루기 시작한 인간의 속도는 베르덴이 공국에 온 이후로 만난 누구보다도 빨랐고 그리고 무거웠다.

쩌어어엉!

급하게 만든 마력방벽이 낮게 울렸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계속해서 방벽을 유지했다.

시시각각 깎여 나가는 마력. 베르덴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으며 빈틈이 생기길 기다렸다.

그러던 중, 목소리가 들렸다.

"밥. 약해."

킥킥킥. 추악한 비웃음.

그 순간, 베르덴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웃어?"

베르덴은 감성보단 이성을 우선시했다. 마탑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했으니까. 매 순간마다 들끓는 분노와 증오를 속에 꼭꼭 담아 두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변화가 찾아왔다.

속이 뜨겁게 불타오를수록 차가워지는 머리. 서로가 상반되는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이 복잡해질수록 머리가 맑아졌다.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

어느 하나에 과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물을 관찰하는 데 있어 그야말로 최고의 무기.

베르덴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적들을 척도로, 눈앞의 인간이 가진 능력을 가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악이 끝났다.

강화된 신체 능력은 광대 오크에 비견되며 재생력 또한 마찬가지. 비정상적인 탄력과 유연성 또한 통상적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하지만 그게 전부.'

훈련된 기사에 비해 기교가 턱없이 모자라며 모든 움직임이 본능에 치중되어 있다. 마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나 페인트 하나 구별하지 못한다.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을 상대하는 것 같다.

즉, 종합하자면.

"내 상대는 아니다."

마력방벽이 사라지고 주먹이 빗나갔다.

무게중심을 잃은 인간이 순간 휘청거렸다.

────쩌억! 스태프에 강타당한 인간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손등에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스태프를 쥔 베르덴이 인간에게 그 끝을 향했다.

22화 박사 (3)

박사는 완벽한 인간을 꿈꿨다.

인간이란 종족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히 성장해 가는 인류를 바랐다.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식욕. 그것을 기반으로 한 박사의 역작은 생명체를 섭취함으로써 주요한 특성을 흡수한다. 아인종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박사는 기를 깨우친 자를 잡아 먹이고, 트롤의 고기를 매일같이 먹였다. 필요하다면 부하조차도 죽여 먹이로 주었다. 물론 마법사도 주었다. 마력이 있어도 마법을 쓰는 법을 이해하지 못해 무용지물이긴 했지만.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의 실험과 수많은 희생 끝에 한 인간이 만들어졌다.

단련하지 않았음에도 기를 깨우치고, 본래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가진 신인류가. 머지않아 구 인류를 멸망시키고, 어떤 종족도 넘볼 수 없는 새로운 인간의 시대를 만들 존재가.

이제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오직 시간뿐이었다.

그랬는데.

"커어억...!"

가슴이 움푹 들어간 인간이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사방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잔해의 중심에 서 있던 베르덴이 손아귀를 쥐자, 지면이 솟아나 인간의 팔과 다리를 관통하며 단단히 구속했다.

양팔이 사라진 박사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마력이냐...!'

아무리 4위계라고 한들 그 많은 실패작들을 단시간에 처리한 데다가 방금 전에 수십 개의 마법을 쏟아 내기까지 했으니, 마력 고갈이 일어나거나 최소한 지친 기색을 보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을 뿐 멀쩡했다.

이건 박사의 계산을 넘어, 세상의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이게 끝인가?"

"크윽...."

신음을 흘린 박사가 인간에게 시선을 향했다.

아무리 재생 능력이 있다고 한들 체력까지 회복되는 건 아니다. 거기다 시험관에서 나와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저 구속을 부수기 위해서는 영양분이 될 것이 필요했다.

잘려 나간 박사 자신의 팔... 마침 바닥에 그것들이 놓여 있었다.

기회, 단 한 번의 기회만 있다면. 저 마법사를 죽이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주변을 가볍게 훑어본 베르덴이 박사에게 물었다.

"실험 일지는 어디에 있지?"

"...."

콰드드득. 구속이 강해지자 인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박사가 어금니를 깨물며 책상을 향해 턱짓했다.

"저, 저 아래 금고에 있다."

"직접 가져와."

...양팔의 출혈을 막기에도 급급한데 금고를 열라는 건가?

그러나 박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책상으로 향해야만 했다. 저 미친 마법사의 눈.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자신의 역작을 산산조각 낼 생각이다.

하긴. 글러트니와 적대하는 방주의 이념으론, 절대 존재해선 안 되는 생명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아직까지 살려 두고 있는 거지? 실험 일지를 원하는 걸 보면 정보를 원하는 건가? 그 고지식한 방주도 많이 변했군.'

옛날 같았으면 진즉에 몰살했을 텐데.

박사는 과거를 떠올리며 힘겹게 금고를 열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발로 걷어차 베르덴에게 전달했다.

그와 동시에 박사의 몸이 마법으로 구속되었다.

"크윽... 양팔까지 잘라 놓고 이러긴가? 아무리 적대적인 관계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암살자를 보낸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군.

기력이 쇠약해진 박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축 처진 게 체념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아래 가려진 두 눈은 바닥에 널브러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저걸 본 이상 절대 날 죽이지 못한다.'

마법사인 이상, 바보가 아니라면 저 지고한 연구의 가치를 알아챌 터. 그래, 관심을 보인 이상 방주라고 해도 쉬이 버릴 순 없을 것이다.

창조자인 자신에게서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회유를 하든, 고문을 하든 갖은 수단을 다 쓰겠지.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회는 온다.

그것이 박사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 * *

사락. 사라락.

베르덴의 눈이 재빠르게 실험 일지를 훑었다. 마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단어나 개념들이 즐비했지만, 박사가 하는 실험이 대충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미친놈이었군.'

인위적으로 신체 구조를 뒤바꾼다니.

특히 다른 생명체를 섭취함으로써 그 특성을 흡수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이 한 손에 들린 종이 뭉치에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간 걸까.

베르덴이 인간에게 시선을 향했다.

상처를 회복하고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곤 있지만 확실히 처음보단 약해졌다.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인간이라.'

실험 일지 가장 앞에 적힌 단어, 신인류.

대체 방주는 무엇이고, 박사가 속한 글러트니는 무엇이며, 왜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려는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박사가 벌인 끔찍한 실험의 자세한 과정이 적혀 있는 이 일지가 바깥으로 나간다면 작은 소란으론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서로 잡아먹으며 진화하는 인간이라.... 베르덴은 생각을 마쳤다.

박사와 인간을 한군데 모이게 한 다음, 그들 사이에 실험 일지를 집어던졌다. 박사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베르덴을 쳐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여기 있는 건 세상에 나가서는 안 된다. 만약 권력자에 손에 들어간다면 아득한 단위의 인간이 실험체로서 다뤄질지도 모른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와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박사의 실험이 베르덴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 굳이 손에 넣어야 할 이유도 없고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방주나 글러트니란 단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는 싶었으나, 지금 이곳으로 누군가 오고 있었다. 아마 같이 온 기사일 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폐기 처분 할 때다.

"자, 잠깐. 설마 나를 죽일 생각이냐? 내가 남긴 연구들과 같이? 너는... 너는 이걸 읽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단 말이냐?!"

"참신하긴 했지."

마탑보다 높은 수준의 인체 실험. 그리고 신인류란 존재의 탄생.

잔혹한 실험 과정으로 윤리적으로 질타받을지언정, 생물학적 연구의 가치로선 세계적으로 봐도 견줄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조금이라도 연구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이 나겠지.

하지만 베르덴은 아니었다.

그는 수년간 인체 실험의 희생양으로 살아온 마법사였으니까.

최소 수백 명이 넘는 인간의 몸을 산 채로 뜯어 재료로 삼은 실험. 그런 박사의 연구가 어떤 가치를 품고 있든 간에 상관없었다.

스태프가 박사에게 향했다.

"아, 안 돼! 그만! 그만 둬라아!"

실험 일지와 인간을 향한 박사의 절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베르덴의 얼굴엔 극도의 혐오감만이 남아 있었다.

"사라져라."

솟구치는 화염. 그 속에서 박사와 인간이 남긴 비명마저 타올랐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베르덴이 방주의 일원이 아닌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착각 속에서 사라졌다.

* * *

"제기랄, 그 암살자 놈...."

차석 기사 제이슨이 벽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팔과 다리에 생겨난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중 왼쪽 복부 자상에서의 출혈이 심했다. 뚫린 갑옷의 틈새에 찢은 옷조각을 쑤셔 넣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이런 일도 겪어 보네.'

이래서 미친 마법사하곤 연관되지 말라는 건가?

그러나 지금 제이슨에겐 그 마법사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이대로 골골대다 죽지는 않겠다만 여기서 도시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 그 시간을 고통 속에서 견디는 건 너무 싫었다.

편히 몸을 쉬려면 마법사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데 죽은 건 아니겠지?"

제이슨이 실패작들이 갇혀 있던 방에 도착했다. 곳곳에 검게 타 죽은 아인종의 사체가 가득했고, 돌무더기 아래엔 트롤의 다리 같은 게 있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마법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는 걸 보아 살아서 나간 것 같긴 한데.... 제이슨은 조금 더 힘을 내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가 보자 베르덴이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사하셨군요."

"예. 그런데 그 상처는...."

"아, 그게 좀... 크흠, 그래도 저도 옆구리 쪽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줬습니다. 마르테스의 차석 기사인 제가 이 정도로 다쳤으니 놈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놓쳤다는 말을 돌려 하는군.

잡았으면 좋았겠지만, 가장 중요한 박사를 처리했으니 그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과연 우연으로 맺게 된 이 악연이 여기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베르덴은 처분하기 직전 몰래 뜯어 낸 실험일지의 뒷부분을 꺼냈다.

여기엔 마르테스에 대규모 참사를 일으킬 박사의 계획이 실려 있다.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부분을 적당히 수정한 뒤, 시장에게 넘기면 어떻게 될까.

과정이 어쨌든, 도시가 반파될 뻔한 걸 막아 줬으니 분명 보상을 줄 것이다.

툭.

그때, 계획서 사이에서 접힌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

조심스레 펼쳐 보니 특정 지역이 축소된 지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 끝자락에 파이테 영지로 추측되는 장소가 있는 걸 보니 이곳 마르테스 주변 일대를 그린 것 같은데,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숲에 붉은색으로 된 체크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생각할까.'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까.

광대 오크부터 시작되어, 동굴에서 모험가를 구하고 여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꽤나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베르덴은 나른한 몸을 이끌고 제이슨과 함께 도시로 돌아갔다.

* * *

며칠이 지나, 마르테스에 일어났던 소란의 여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물론 시장을 비롯한 도시의 상층부는 아니었다.

도시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와 지하에 숨겨진 정체불명의 공간 탓에 비상이 걸렸다. 기사와 병사들을 소집해 수색을 실시했고, 지하 통로 또한 입구에 기사를 세워 철저하게 관리했다.

수색이 끝난 후에 통째로 매몰해 버릴 계획이라던데, 어떻게 처리하든 베르덴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새로 빌린 여관의 방.

그 중심에서 마력이 소리 없이 휘몰아쳤다.

"후우...."

베르덴이 깊게 호흡을 내쉬자, 회로에 가득 찬 마력이 흩어졌다. 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 낸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순조로워.'

원소 계열 3위계 중위. 현 베르덴의 수준이다.

마력회로 확장제 덕에 연 단위나 걸릴 성장이 고작 몇 주로 단축되었다. 그 대가로 고문에 가까운 통증을 온전히 견뎌야 했지만 베르덴의 의지가 꺾이는 일은 없었다.

가슴속에 성취감이 가득 들어찼다.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남아 있던 마력회로 확장제가 용기째로 불에 타올랐다.

재료가 재료다 보니 아깝긴 했으나 이 약물로 넓힐 수 있는 마력회로는 3위계 중위가 한계다. 이 이상은 리터째로 복용해도 효과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렇다고 팔아 버리는 건 논외고.'

이건 애초에 시중에 나오지 않은 물건이었으니까.

보헤미른 마탑의 임상 실험 단계에서 지원한 마법사들이 죄다 거품 물고 기절하는 탓에 상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탓이었다. 소모되는 재룟값 또한 마탑으로서도 아찔할 정도였고.

그뿐만 아니라 효과가 3위계 마력회로까지가 한계인 걸 알고서는 개량마저 포기하고 아예 폐기해 버렸다.

그런 물건을 무턱대고 풀어 버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나 다름없다. 마탑과 거리가 먼 공국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이걸로 첫 단추는 잘 꿰었어.'

3위계 중위의 원소 마법, 방대한 마력량 그리고 전투 경험까지.

마법사로서의 베르덴은 틀림없이 강해졌다. 아주 이례적인 속도로. 그러나 이 폭발적인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탑의 보물고에서 가져온 것들은 아직 쓰지도 않았으니까.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긴 하지만 돈은 어느 정도 있다. 다음 단계를 밟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전에...."

베르덴의 시선이 박사에게서 빼앗은 지도로 향했다.

23화 지하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공간, 그 중심.

오래되어 낡은 왕좌에 앉은 흑발의 사내가 와인잔을 들고 있다. 그 앞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박사가 죽었다라.... 시체는 확인했나?"

"불에 타 죽었기에 확인할 순 없었지만, 정황상 죽었다고 판단됩니다. 그가 가진 연구 자료 또한 전부 소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 잘됐군. 귀찮은 일을 덜었어."

와인을 머금고 잔을 빙빙 돌렸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박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사내에게 있어 최고의 안주였으니까.

"진즉에 처리해야 했었는데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는 통에 찾지 못했었지. 추적을 시작한 지 벌써 20년인가? 그동안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것이라곤 이 소식 하나뿐이군."

그조차 운이 좋았다.

리비안트 공국에 구축한 정보망, 그중 도시 마르테스에 펼쳐 놓은 그물에 우연찮게 정체불명의 지하 시설이 걸려들었고, 비밀리에 조사한 결과 자신들이 쫓고 있던 박사의 비밀 연구소라는 것이 판명 났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였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그런 건 불찰이 아니라 무능이라 하지. 그래도 탓하진 않겠다. 본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

사내가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지성을 가진 어떤 종족보다도 많은 수를 자랑하지만, 평균적인 힘은 최약체에 불과하다. 먼 옛날, 인간은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약소 종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특이성은, 모든 생명체 중 가장 우월했다.

수천 명 중, 수만 명 중, 10년에 한 번, 100년에 한 번. 궤를 달리하는 인간이 계속해서 탄생했고 그들이 이끄는 인류를 막아서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더 이상 인간은 다른 종족의 먹이나 노예 따위가 아니었다.

선장이 지휘하고, 선원은 따른다.

그것이 인류의 행보였고, 한 사내는 그걸 이름 지어 '방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그중 하나가 '글러트니'였다.

한때 방주의 손에 토벌당했던 '세상을 집어삼키는 괴물'을 선망하며.

섭취하는 음식에 따라, 다르게 적응해 가는 인간의 본능에서 태어난 그들의 이념.

탁. 와인잔을 비운 사내가 비웃듯이 말했다.

"참으로 구시대적인 발상이야. 먹어서 인류를 발전시키겠다니, 무슨 돼지 새끼도 아니고. 슬슬 정신을 차릴 법도 한데, 갈수록 미쳐 가기까지 하니... 더군다나 인류를 구분해 구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헛소리까지. 같은 뿌리로서 창피할 지경이군."

사내가 와인잔을 손가락으로 톡 두들겼다.

그러자 유리가 쩍 갈라지더니 비스듬히 떨어졌다. 그 단면은 마치 칼로 베기라도 한 듯 깨끗했다.

"그러니 이제 정리할 때가 됐지."

사내가 왕좌에서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그의 손짓에 닫혀 있던 커튼과 문이 활짝 열렸다. 따스한 햇빛과 차가운 기류. 구름이 펼쳐진 하얀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혹여 박사가 죽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되면 글러트니가 미쳐 날뛸 거다. 마르테스란 도시는 송두리째 사라지겠지. 그러지 못하도록 가능한 소문이 퍼지는 걸 막아라."

"예. 놈들을 보이는 족족 섬멸해 양지로 나오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번엔 유능했으면 좋겠군. 언제까지고 무능한 인간은 도태되기 마련이니까. 아, 그런데...."

사내가 고개를 뒤로 향했다.

"박사를 죽인 마법사의 이름이 뭐지?"

"애셔라고 합니다."

"애셔라...."

좋은 울림이군.

그의 이름을 되뇐 사내가 옅게 웃었다.

* * *

마르테스 동쪽에 있는 숲.

도보로 움직이면 며칠 정도 걸리나, 비행을 쓸 수 있는 베르덴에겐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속력을 최대로 높이면 두 번도 가능하겠지.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

햇살이 내리쬐는 정오.

지도를 펼친 베르덴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까지 오긴 했는데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육안으로 판단하기에도 딱히 의심스러울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마력감지>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력을 넓게 펼쳤다.

벌레, 나무, 풀, 짐승, 아인종 등. 마력을 통해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이걸 전부 읽어 내는 건 불가능하며 비효율적이다.

베르덴은 대부분의 정보를 흘려보내고 지형 자체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동굴의 입구 같은.

하지만 딱히 잡히는 건 없었다.

이 이상 범위를 넓히면 마력이 감당하지 못한다. 마력을 고정한 뒤 받아들이는 정보량을 늘렸다.

지형에서 지물로. 땅에서 나무로.

'...찾았다.'

나무 아래에 숨겨져 있는 인공물.

곧장 지상으로 내려간 베르덴이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고 오래된 문 하나가 나타났다.

혹여 함정 같은 것이 있을지 모르기에 거리를 두고 염력을 사용했다. 이내 잠금장치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활짝 열렸다.

마력을 퍼뜨려 내부의 구조를 파악했다.

'꽤 깊군. 먼지가 쌓인 걸 보면 오랜 시간 방치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다.

기사 제이슨이 놓쳤던 암살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마르테스에 어떤 흔적도 없이 지하 통로로 들어간 걸 보면 가능성이 다분했다.

<암시>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베르덴이 지하로 향했다.

* * *

먼지가 떠다니고 곳곳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공간.

신경을 곤두세운 베르덴은 바닥에서 살짝 몸을 띄운 채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환기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내부의 공기는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혼탁했다.

그리고 복도에 있는 작은 방들 안에는 간혹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 보면 오싹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으나, 베르덴은 오히려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박사가 있던 연구실하고 비슷한 구조인데... 과거에 쓰던 실험실 같은 건가?'

아니면 감옥일지도.

그 정도로 이곳은 전체적으로 열악하고 갑갑해 보였다.

그렇게 20개가 넘는 방을 지나 마침내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다른 방들과 달리 금속으로 된 육중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염력으로 손잡이를 돌리자 녹슨 탓인지 맥없이 부러져 버렸다.

'문을 통째로 부수는 건... 안 되겠어.'

오래도록 방치된 터라 구조물 전체가 약해져 있다.

강제로 이 무거운 문을 뜯어내려 했다간 자칫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결코 죽지는 않겠지만 문 뒤에 있는 것들은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염력 계열은 제외한다. 원소 계열도 마찬가지.

지금 필요한 건 문을 부술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으면서 그것을 일정 범위 내에 한정하는 마법이다.

'그렇다면.'

베르덴의 손가락 끝에 마력이 맺혔다.

허공에 마법진의 기반이 되는 원을 그리고는 가장자리에 복잡한 형태의 문자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원의 중심에 다시 원을 만들어 다른 형태의 문자를 새겼다.

범위를 제한하는 마법진 컨파인(Confine)과 화염구의 마법식.

이런 복합적인 마법진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불발되거나 오작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눈앞에서 폭발하는 일이 없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과 경험을 겸비해야 한다.

물론 베르덴은 두 조건에 전부 부합하는 마법사였다.

손을 펼치자 마법진이 앞으로 날아가 문의 중심에 안착했다.

이어 두 개의 원이 서로 역방향으로 돌아가더니 이내 멈추고는 폭발했다. 그 충격에 잠금장치가 있던 부분만이 뻥 뚫렸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역시 아무도 없다.

직접 눈으로 봐도, 마력감지를 사용해도 감지되는 건 벌레나 작은 동물뿐. 마법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이곳에 있는 지성체는 베르덴이 유일했다.

긴장을 늦추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 안에는 낡은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있는 걸 하나 주웠다.

"오크 실험체 132번 육체의 과부하로 인한 사망, 인간 292번 정신 붕괴, 코볼트 408번 착란이 일어난 뒤 광기가 일어나 폐기 처분...."

박사와 함께 불태웠던 실험 일지와 비슷한 내용들이다.

휘갈겨 쓴 필체를 보니 제대로 기록하기 전에 잠깐 메모해 둔 것 같은데... 박사의 일지를 보지 않았더라면 이것만으로는 어떤 실험에 대한 것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염력>

자료들을 한데 모아 책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서랍을 열자 웬 마수의 가죽과 함께 봉인이 되어 있는 봉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을 살펴보던 베르덴이 눈을 부릅떴다.

"이거... 설마 마흐바트의 가죽인가?"

짙은 녹색 빛이 감도는 걸 보면 확실하다.

굴강한 육체로 들이받아 사냥감을 말 그대로 박살 내 버리는 마수, 마흐바트. 그 가죽은 특히나 물리 저항력이 높아 여러 곳에서 인기가 많다. 마탑에서도 종종 보이는 소재다.

"이 정도 양이면 옷 하나 만들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탐난다.

일단 가죽은 내버려 두고 봉투를 집었다.

안에는 이빨을 형상화한 붉은 표식이 들어 있었다.

'실험 일지에서 본 것과 비슷한데... 조금 더 색이 짙군.'

무슨 신분증 같은 건가? 아니면 그냥 상징?

뭔지는 몰라도 예사롭지 않은 게 중요한 물건 같은데, 왜 박사는 이걸 두고 간 거지? 지도를 가지고 있는 걸 봐선 나중에 챙기려고 했던 건가?

박사가 죽은 이상 질문의 답은 알 수가 없다.

베르덴은 잠시 고민하다 일단 챙기기로 했다.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마법 물품이 아닌, 어떤 효과도 없는 단순한 표식일 뿐이니까. 나중에 처분해도 늦지 않다.

<화염기류>

화르륵. 뻗어 나온 불길이 자료들을 불태웠다.

바깥으론 나간 뒤에는 지형조작으로 지하 내부와 입구를 아예 메워 버렸다. 어느 누구도 흙과 잿더미 속에서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흔적을 지우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래로 향한 베르덴의 시선.

마흐바트의 가죽을 본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만 해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군.'

비싼 소재긴 하지만 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출처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 베르덴의 전 재산에 버금가는 값의 소재가 통째로 베르덴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글러트니가 뭐 하는 집단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다른 도시에서 가공을 하는 게 안전하겠지. 그 정도 수고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제 처리할 건 박사의 계획서밖에 없다.

이미 실험에 대한 특정 부분은 지운 상태. 이제 내용이 앞뒤가 맞도록 수정하면 본래의 것과 다른 가짜 계획서 하나가 만들어진다.

시장을 속이는 일이었지만 베르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르테스에 일어날 참사를 막은 건 사실이니까."

이건 정당한 대가였다.

* * *

이른 아침, 마르테스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

훈련을 하러 온 몇몇 모험가가 한 마법사, 베르덴을 흘끗 쳐다봤다.

후우웅. 후웅.

스태프가 바람을 가르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실전에서 어떨지는 몰라도 그 퍼포먼스 하나만큼은 눈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체력 단련을 마친 베르덴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여기요."

몰래 구경하고 있던 이리스가 수건을 건넸다.

"여긴 무슨 일이지?"

"모험가가 모험가 길드 연무장에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선배님?"

그건 그렇지.

베르덴이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땀을 닦아 내고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였다.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이리스가 물었다.

"그런데 그 봉술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소리가 진짜 장난이 아니던데. 혹시 마법사가 되기 전에 기사 지망생이셨나요?"

"기사는 무슨. 빗자루질만 하면 할 수 있는 정도지."

8살 때부터 시작한 잡일. 어린 베르덴은 호기심이 많고 활발했다.

빗자루를 쥐여 주면 먼지를 쓸다가도, 심심하면 이리저리 휘두르기 십상이었다. 그런 나날을 수천 번이나 반복하고, 홀로 단련까지 했으니.

이런 스태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오히려 이상했다.

"빗자루...?"

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물어볼 게 산더미같이 많다. 그날 밤 로릭스 여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해야 마법사로서 성장할 수 있는지 등 말이다.

"저기...."

그녀가 입을 열려는 도중, 누군가 찾아왔다.

공국의 상징이 새겨진 갑옷과 검.

마르테스의 시장, 겔린 워하드의 직속 기사단 소속이었다.

"마법사 애셔 님, 맞으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시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올 것이 왔다.

박사의 가짜 계획서를 넘겨준 뒤 약속받았던 노력의 대가가.

24화 보수

기사가 다시 온 건 점심이 지난 후였다.

몸을 씻고, 배를 채운 베르덴은 시장의 자택으로 향했다. 박사를 죽인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도시의 경계는 삼엄했다.

철저한 신분 검사를 통과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애셔."

시장의 얼굴은 며칠 사이 수척해져 있었다.

하마터면 도시에서 학살이 일어날 뻔했으니 편안하게 보낼 수야 없었겠지. 베르덴이 시장의 손을 맞잡아 악수를 했다.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잔당을 몇 잡았지. 도시에서 도망치려던 녀석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소. 뭐, 사실은 그냥 돈에 눈이 먼 작자들이라 전혀 아는 게 없었지만 말이오."

결국 왜 마르테스에 학살을 일으키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베르덴이 준 계획서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장은 이번 일을 묻기로 결정했다. 잘못하면 시민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도 있었으니까. 이것이 상책이었다.

"애셔, 그대에겐 미안하게 됐소. 덕분에 마르테스가 위기를 넘겼는데...."

"저번에도 말했지만 괜찮습니다. 명성보단 도시의 안전이 더 중요하니까요."

베르덴이 옅게 웃었다.

마탑에서 터득한 가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명성은 중요하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닌 베르덴이 돈을 벌고 경험을 쌓으려면 이름값을 높여야 한다. 파이테 영지에서 도적 토벌을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베르덴이 마르테스를 구한 마법사로 알려지면 그런 기회가 더 많아지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시장이 내건, 입막음에 대한 보수가 더 크니까.'

명성을 올릴 기회는 많지만, 귀한 마법 물품을 구할 기회는 흔치 않다.

베르덴은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택했다.

시장을 따라 자택의 지하로 내려갔다.

곳곳에 마법진이 숨어 있는 게, 보안이 상당했다.

"시청의 예산으로 구입하거나, 범죄자들에게서 빼앗은 귀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바로 이곳이오. 기사단이 직접 경비를 맡고 있는 시장의 자택은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니까."

걸리는 순간 경보가 울리는 마법진이 대부분이다.

잘못 건드리면 수십 명의 기사가 추격하게 되겠지. 도둑에겐 다시없을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마법진을 통과한 뒤, 시장이 열쇠를 꺼냈다.

잠금장치를 열자, 철컥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돈을 무지막지하게 들였군.'

엄청나게 두꺼운 게, 베르덴의 마법이라도 뚫는 건 역부족일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법 물품을 비롯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베르덴의 시선이 옅은 청록색을 띄고 있는 검에 멈췄다.

"이거 설마... 미스릴입니까?"

미스릴은 금속 중에서도 수용성이 가장 높다.

마력이든, 기든 거의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위력 또한 강해진다.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랄 만한 물건인 것이다.

"5년 전쯤인가, 악명 높은 범죄자에게서 빼앗았소. 그놈 탓에 기사 세 명이 은퇴하고 말았지."

어쨌든.

"모두가 그 미스릴 검만큼은 아니지만, 대부분 가치도 높고 쓸 만한 물건들이지. 도시를 구해 준 은인에게 걸맞은 정도로. 애셔, 이 중 원하는 걸 하나 고르시오. 그게 내가 약속한 보상이오."

그건 즉 당장 미스릴 검을 가져가도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난 검을 다룰 줄 모르니.'

베르덴은 간신히 충동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봤다. 미스릴에 준하진 않으나 마법사에게 필요한 마법 물품도 있었다.

"감정해 봐도 되겠습니까?"

"감정...? 감정사도 아닌데 어떻게... 허, 허, 이것 참 어린 나이에 다재다능한 마법사셨군. 물론이오. 얼마든지 사용하시오."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하나 잡았다.

감정을 쓰자 스태프에 새겨진 구조가 읽히기 시작했다.

◇ 새플링 스태프

⦁ 마법 시전 속도 증가(소)

⦁ 땅 계열 마법 마력 소모량 감소(극소)

마력 소모량 감소라.

캐스팅 속도를 좌우하는 마력 전달률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게 베르덴에게 훨씬 좋다.

◇ 매직 케이프

⦁ 참격 내성(소)

⦁ 화염 저항(소)

◇ 리커버리 링

⦁ 상처 재생(소)

⦁ 체력 재생(극소)

저항력이 있는 로브. 마력을 소모해 상처와 체력을 재생해 주는 반지.

적당히 쓸 만해 보이긴 하나 효율은 별로 좋지 않다. 많이 번거로워도 미스릴 검을 팔아 버리고 다른 걸 구하는 게 나을 정도.

그렇게 하나하나 신중히 확인하는 도중, 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녹슬고 낡은 반지.

감정에 반응하지 않은 걸 보아 마법 물품은 아니다. 어떠한 가치도 없어 보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눈이 갔다.

"그건... 음, 잘 기억이 안 나는군. 내가 시장이긴 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물건의 출처를 아는 것은 아니니.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닐 거요."

베르덴은 반지를 한동안 유심히 살펴보다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렸다. 30분이 흐르고, 1시간이 흐르자 기다리던 시장이 먼저 지쳐 버렸다.

"...슬슬 고르지 않겠소?"

"아, 죄송합니다."

마침내 베르덴은 목걸이를 하나 선택했다.

◇ 보호의 목걸이

⦁ 자동 마력방벽

청금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

자동으로 외부 공격에 대해 마력방벽을 펼쳐 주는 기능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효용성이 높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공격을 막아 주는 것이니.

대신 단점이 크다.

마력방벽 자체의 내구도도 그리 높지 않은 데다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마력이 소모된다. 일반적인 마법사에겐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베르덴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었지만.

"보호의 목걸이라. 괜찮은 물건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쓰기 번거로울 텐데... 정말 그걸로 괜찮겠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은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쓸었다.

보호의 목걸이도 나름 희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가치만 따지자면 목걸이보다 비싼 것이 창고에 열 개는 넘을 텐데... 도시를 구해 준 보답치곤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고민하던 시장이 녹슨 반지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아까 보니 이 반지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원한다면 가져가시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약속과 다르긴 하지만 그 녹슨 반지를 하나로 칠 수는 없지 않겠소. 도시에 필요 없는 물건이니 가져가셔도 좋소. 세공은 나쁘지 않아 보이니, 녹 좀 없애면 적당히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 감사는 이쪽이 해야지."

그렇게 시장에게서 보수를 받았다.

예상한 것 이상의 수확이었다.

보호의 목걸이는 베르덴이 반응하지 못한 일격을 막아 줄 터. 마력 소모는 전혀 리스크가 되지 않는다. 여분의 목숨이라 봐도 무방했다.

물론 직접 펼치는 마력방벽보단 강도가 떨어지기에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베르덴은 당분간 마르테스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3위계 중위. 마탑에서 가져온 보물인 '마법서'를 쓸 수 있는 최소 위계에 도달했으니까, 필요한 재료들을 도시에서 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배울 마법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은 여관으로 돌아갔다.

* * *

기회가 찾아와도 움직이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마법사 이리스는 그렇게 배워 왔다.

그런 그녀에게 베르덴이란 존재는 기회 그 자체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압도적인 마법을 보인 천재 마법사.

이른 아침마다 연무장에 찾아가는 건 조금이라도 베르덴의 관심을 끌려는 이유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혹시 시간이 되면 식사라도 같이하지."

베르덴이 말했다.

이리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식사? 이렇게 갑자기?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모르겠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베르덴이 여관에 돌아간 사이 이리스는 머리를 빗고 단정한 마법사다운 옷차림을 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거울을 본 이리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섰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도착한 레스토랑.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는 점원들과 은은하게 코끝을 스치는 고기의 향기까지. 이런 식당에 제 발로 온 건 처음이다.

그녀는 가난한 서민 출신이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선 장학금을 타 부족한 생활비를 메꿨지만, 모험가 생활은 수입이 들쭉날쭉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고급 스테이크 대신 값싼 야채 스프를 먹는 게 당연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그게, 아마 애셔라는 이름으로... 아! 저분이요!"

이리스가 구석에 앉아 있는 베르덴을 가리켰다.

점원의 안내를 받은 그녀는 조심스레 의자를 당기고 베르덴과 마주 앉았다.

베르덴이 들고 있던 책자를 건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아무거나 골라."

"아, 네."

이리스가 책자를 펼쳤다.

'...?'

그런데 가격대가 이상했다.

파스타와 같이 익숙한 음식도 있었는데, 그녀가 알고 있는 가격과는 자릿수가 달랐다. 게다가 스테이크 200g이 30만 엘크나 한다고? 대체 식사 한 끼에 얼마나 많은 고블린을 잡아야 하는 거지? 정신이 혼미했다.

"저... 선배님? 갑자기 밥은 왜 사 주려고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너무 비싼 게...."

"괜찮아."

베르덴이 계좌에 넣은 금액은 3,000만 엘크가 넘는다.

그리고 시장은 준 보수는 녹슨 반지와 보호의 목걸이가 끝이 아니다. 별개로 보상금 또한 약속되어 있다.

거기다 로릭스 여관의 수리비와 불타 버린 도서관의 책값마저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하니,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사 주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부탁할 게 있는 상대에게는.'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주문해. 나중에 갚으라고 안 할 테니까."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알겠어요."

이리스는 마지못해 베르덴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코스 요리.

새콤한 채소 에피타이저로 시작해, 통치즈의 중심을 녹여 버무린 파스타, 입안에서 녹는 스테이크. 그야말로 맛의 향연이었다. 동료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먹은 게 죄책감이 들 정도로.

"하아...."

후식으론 달콤한 케이크와 씁쓸한 커피가 나왔다.

전신을 감도는 깊은 여운에 이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헤실거렸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군."

"이렇게 맛있는 걸 먹는 건 아카데미 나온 후로 처음이라... 장학생에겐 복지가 꽤 좋았거든요. 졸업한 후에 모험가를 하겠다고 하니 교수님들이 말렸었는데."

잠시 과거가 떠올랐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리스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그런데 선배님? 갑자기 이렇게 비싼 식사를 대접해 주신 건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을까요?"

"맞아.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거든."

"부탁이요?"

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낱 모험가인 자신에게 부탁이라니, 그게 무엇인지 당최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베르덴에게 줄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체 뭐지?'

말 한마디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입안에 감도는 커피의 향이 쓰게 느껴졌다.

심란해하는 이리스에게 베르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에게 부여 마법을 가르쳐 줘."

25화 마법서

부여 마법.

마력을 소모해 술자 본인이나 타인에게 강화 효과를 부여하는 마법으로, 무엇보다 높은 이해력을 필요로 하는 계열이다.

베르덴이 도서관에서 수십 권의 책을 빌린 건 그런 이해도를 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여관의 꼭대기 층이 날아가면서 책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래도 1위계 부여 마법을 곧바로 사용할 정도의 기초 지식은 있었고, 도서관에 여분의 책이 남아 있어 이론을 쌓는 건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실질적인 마법에 대한 서적이 없다.'

베르덴이라고 해도 모르는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다.

아무리 특별한 마력회로를 지녔을지라도, 엄청난 마력량을 가졌을지라도 이건 어떻게 극복할 수가 없었다.

방법은 2위계 이상의 부여 마법이 담긴 서적을 구하거나 지도를 해 줄 마법사를 구하는 것이다.

그 마법사가 바로 이리스였다.

물론 식사 한 끼 따위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은 아니다.

"전에 보니 마법 이론에 대해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부여 마법을 알려 준다면 네가 궁금해하는 이론에 대한 건 전부 가르쳐 줄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서로에게 괜찮은 제안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그게...."

이리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전에 베르덴에게 몇몇 이론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핵심을 막힘없이 알려 준 적이 있었으니.

다양한 속성 마법에 트리플 캐스팅까지 구사하는 천재 마법사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는 건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런데 내가 잘 알려 줄 수 있을까?'

이리스는 언제나 학생이었지 교수가 아니었다.

당연히 타인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적은 거의 없었다. 만약 미숙하게 가르쳐 줬다가, 베르덴이 부여 마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민폐가 따로 없겠지.

그런 이리스의 생각을 읽었는지, 베르덴이 말했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못 배운다고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네가 아는 2위계 이상의 부여 마법에 대해서만 알려 주면 돼."

"으음,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르쳐 드릴 수 있는데요...."

한차례 호흡을 내쉰 이리스가 물었다.

"정말로 어떤 이론이든 상관없나요? '순수 마력'이나 '고대의 마법 체계' 같은 어려운 것도요?"

"그래."

"...'마력의 변질'과 '원소의 근원'도요?"

"원소 마법에도 관심이 있었나? 그쪽은 오히려 내 전문 분야지. 원한다면 체질에 맞는 속성 마법을 알려 줄 수도 있는데."

베르덴이 가진 지식은 방대하다.

그저 외우기만 한 게 아닌 이해까지 마친 영역이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조차도 어려워하는 각종 이론의 해석. 거기다 원소 마법까지 알려 준다? 이리스의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싫으면 말고."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이리스의 목소리가 레스토랑에 울려 퍼졌다.

* * *

마법서(魔法書).

펼치는 것만으로도 술자가 등록한 마법의 위력을 강화해 주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마법 물품이다.

제작은 오로지 아티슨 마탑에서만 가능하며, 소재가 말도 안 되게 귀하기에 양산 자체가 불가능한 물건이다. 베르덴이 챙겨 온 것 중 세 번째로 비싼 마탑의 보물이었다.

우선 마법서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개방된 것과 개방되지 않은 것.

전자의 경우 마법서를 개방한 본인이 아닌, 다른 마법사가 사용하면 본래의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거기다 등록한 마법 계열도 바꿀 수 없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사겠다는 사람은 널렸지만.

시중에 풀린 마법서는 대부분 개방을 마친 것이다.

하지만 베르덴이 가진 것은 후자였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오로지 베르덴만을 위한 마법서. 이를 사용하기 위해선 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는 마력.

마법서에 마력을 등록하려면 최소 3위계 이상의 출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가 마석이다.

그것도 순도 80% 이상인 중상급에 해당하는 품질로. 시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베르덴이 모아 온 재산을 탈탈 털어야 겨우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운이 없군.'

현재 중상급 마석의 가격은 2,800만 엘크.

그런데 정작 마르테스에 물량이 없었다. 상인이 말하길, 새로운 마석이 들어오려면 약 한 달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는데 그마저도 예약이 되어 있어서 더 늦을 수도 있다고.

'어쩔 수 없다.'

생각을 바꾼 베르덴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향한 곳은 모험가 길드.

모험가는 생산자다.

아인종이나 마수를 토벌하거나 해서 얻은 소재들을 시중에 내놓는 직업. 복잡한 유통 과정을 생략하고 원하는 소재를 얻으려면 모험가 길드와 직접 거래를 해야 한다.

그러한 권한을 가진 자가 바로 길드장이다.

베르덴과 마주 앉은 길드장 오스카.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한해서 특별히 거래하도록 하지. 자네에게는 빚이 있으니."

마르테스 참사, 그 내막을 알고 있는 건 시장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오스카였다. 더해서 베르덴은 길드에 소속된 모험가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공짜로 마석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이런 부탁쯤이야 들어줄 이유는 충분했다.

베르덴은 그 자리에서 2,800만 엘크를 지불하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주머니를 열자, 사람 머리 크기의 마석이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확실한 진품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마력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마법진으로 방 전체를 밀폐했다.

그리고 마법서를 꺼냈다. 마법적인 문양으로 뒤덮인 책자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마력을 흘려보냈다.

시간이 흐르자 마법서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베르덴은 더욱더 마력을 밀어 넣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그러다 마력회로와 마법서가 서로 연결되는, 마치 육체의 일부가 새롭게 생겨나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 스쳐 지나간 순간.

화아악!

마법서가 개방되었다.

터져 나오는 찬란한 빛과 날뛰는 마력.

서서히 빛이 가라앉자, 굳게 닫혀 있던 마법서가 열려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는 새하얀 책장이 보였다.

이렇게 새로운 원소의 마법서가 탄생했다.

'이제 속성을 정할 차례.'

원소의 마법서는 하나의 원소밖에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원소를 다룰 수 있는 베르덴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

선택한 건 땅 속성.

그중 <지형조작>은 베르덴이 가진 장점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마법이다. 아무리 다른 속성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 마법 하나만 보고도 마법서를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한쪽 손으로 마법서를 잡고, 나머지 손은 마석에 갖다 대었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뒤 마법을 하나씩 시전했다.

'석벽, 어스 쉐러, 어스 스피어, 지형조작, 어스본....'

마석의 빛이 옅어져 가고, 비어 있던 마법서가 채워져 간다.

중상급 마석으로 등록할 수 있는 건 8개가 한계. 보다 높은 위계의 마법을 새기는 게 유리하나, 베르덴은 자주 사용하고 당장 쓸 수 있는 마법을 택했다.

이내 마력을 전부 토해 낸 마석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회색빛이었던 마법서가 흙빛으로 변했다.

마법서 개방은 아주 순조롭게 끝이 났다.

"나도 이제 마법서의 소유자인 건가...."

수백 개의 마법서 중 하나의 주인.

자신이 직접 등록한 마법서를 지닌 사람은 일 할이 채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3위계 마법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만약 욕심 많은 자가 이를 알게 된다면 베르덴을 죽이고 마법서를 빼앗으려 들겠지.

'그런 귀찮은 일은 사절이다.'

이제 마지막이다.

마법진을 이용해 마법서와 베르덴 자신을 상시 연결하는 것. 그렇게 하면 마법서를 펼치지 않아도 강화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타인에게 마법서를 보일 일도 없게 되고, 스태프를 활용한 전투 방식을 바꾸지 않아도 될 터. 누가 뭐래도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마법진에 대해선 보헤미른 마탑주에 버금가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베르덴이라도 심혈을 기울어야 하는 고난이도의 마법진, 커넥션(Connection).

별도의 재료는 필요 없다. 다만, 하루에 8시간은 집중하며 최소 3주는 지속해야 하고, 도중에 삐끗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일 할까."

집중력도 떨어졌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

마법서에서 손을 뗀 베르덴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정신이 피로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의식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늦잠을 잔 베르덴은 아침 훈련을 나가지 못했다.

* * *

까앙-! 까앙-!

갱도 안에서 광부들이 곡괭이질을 하고 있다. 마감 시간이 가까워진 만큼, 마석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돌을 내리쳤다.

그래야만이 거하게 한몫 챙길 수 있었으니까. 마석을 캐는 광부는 힘든 일이지만,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일당을 받는 직업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안 나와?! 30분째 흙만 캐는 게 말이 돼! 이거 고갈된 거 아니야?"

"갱도가 열린 지 얼마나 됐다고 고갈은 무슨 고갈. 주머니 빵빵하게 채우고 싶으면 닥치고 곡괭이나 휘두르슈."

"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입을 다문 광부가 곡괭이를 휘둘렀다. 불만은 많았지만 이 일을 몇 년 한 덕에 나름대로 요령이 있었다.

그렇게 파고 또 파자, 웬 하얀 돌조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응? 뭐야, 이거?"

"뭔데 그래?"

"아니, 갑자기 처음 보는 게 나와서... 이거 혹시 비싼 거 아닐까?"

"광석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더 파 보지 그래?"

마석보다 비싼 무언가가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조심스레 곡괭이로 툭툭 두들겼다. 혹시나 망가지면 안 되니까.

잠시 후, 하얀 돌조각이 나타났다. 이번엔 몇 배나 커다란 돌이었다.

광부가 얼른 뽑아내어 손에 들었다. 그제서야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해골.

오래된 인간의 백골이었다.

"흐아아아악?!"

"뭐... 해, 해골?"

"사람 뼈가 왜 여기에...?"

광부들이 소란을 일으키자 작업반장이 나타났다.

"아니, 일들 안 하고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게, 여기 해골이...."

"해골? 나 참, 그게 뭔 대수라고. 원래 땅 파다 보면 시체도 보는 법이야.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잖아. 여기 무덤이 있다곤 못 들었으니, 먼 옛적에 묻힌 사람인가 보지. 어서 치우고 일이나 해!"

뻐엉! 작업반장이 해골을 걷어찼다.

사실 그도 약간 겁먹긴 했으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명색이 반장인데.

등을 돌려 인부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뭔가 이상했다.

"내 말 못 들었어! 당장 일하러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뒤, 뒤, 뒤에...!"

뒤?

작업반장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그가 발로 찬 해골이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그러더니 금이 간 두 눈덩이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죽음의 기운이 주위를 옭아맸다.

"어, 어, 언데드...?!"

죽음에서 되살아난 이형종.

작업반장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흙이 무너지며 수십이 넘는 언데드가 광부들을 덮쳤다.

갱도에서 살아서 나간 사람은 단 세 명뿐.

언데드의 출몰에 영지에 비상이 걸렸다.

26화 길드의 요청 (1)

마르테스에 온 지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베르덴은 이리스를 데리고 도시 밖에 나와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홀로 돌아다니고 있는 오크가 보였다.

"마법사가 저걸 때려잡겠다고요? 원소 마법 없이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권의 책을 읽고도 모자라, 이론을 강의해 주는 대가로 이리스에게 직접 2위계의 부여 마법까지 배운 지금. 종합적으로 어느 수준까지 올라왔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근력 강화>

<반응속도 강화>

<지각 강화>

<보호막 부여>

<마력집중>

부여 계열 마법은 고위계로 갈수록 피시전자가 느끼는 부담을 덜어 준다.

갑자기 근력이 강해지고, 시력이 좋아진다고 해도 곧바로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법이 끝나고 났을 때의 상실감도 확연히 줄어든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꽉 쥐었다.

2위계에 불과한 터라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오크를 상대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면을 박차고 오크에게 육박했다.

쩌억! 일격에 무릎을 박살 냈다.

그어어어어어!

허리를 숙여 오크의 손을 피하고, 스태프를 강하게 올려쳤다. 아래턱이 쪼개지자 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어 스태프로 오크의 몸을 젖힌 다음, 힘껏 뒤통수를 때려 부쉈다.

쿠웅.

마법사가 육탄전으로 오크를 죽이기까지 단 13초.

이 정도면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모험가로 치면 은 등급에 준하는 실력이었다.

이리스가 작게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어떻게 사람이 못 하는 게 없지?'

부여 계열은 나름대로 난이도가 있는 마법인데 알려 주는 대로 족족 쓰지 않나. 그걸 며칠 연습도 하지 않고 실전에서 써먹질 않나. 마법산데 근접전도 잘하지 않나.

이건 뭐 숫제 괴물이다.

그리고 마법 이론은 또 어떻고.

그녀가 평생 동안 배운 걸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완전히 정립해 준 것도 모자라, 이후의 방향성까지 제시해 주었다.

아카데미의 인기 교수조차도 이렇게 해 주진 못했는데.

'거기다 인물까지 좋으니....'

저 사람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면 어땠을까? 분명 여러 국가에서 러브 콜이 쏟아지고, 아카데미 역사상 유일무이한 천재 마법사로 등극했을 것이다.

여자들도 줄줄이 달고 다녔겠지.

'아니, 그건 아닌가?'

이리스, 그녀도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안할 만큼 베르덴은 무관심했다.

원래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설마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닌데."

베르덴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를 지나쳐 갔다.

실전 연습도 끝났으니 마르테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잇던 이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저기, 선배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리스의 변명은 성문을 지나가기 전까지 이어졌다.

* * *

베르덴의 일과는 언제나 비슷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몸을 풀고, 식사를 마친 뒤 마법진에 집중한다.

그 후 점심이 지나면 회로를 활성화하고 마법의 숙련도를 쌓는다.

강의 시간이 되면 이리스에게 이론을 가르쳐 주거나, 약속이 없는 날엔 홀로 숲으로 가서 아인종을 상대로 마법을 연습하기도 한다.

하루 온종일 자기 개발에 몰두하는 베르덴의 삶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방으로 돌아가자, 한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혹시 시간 되나?"

모험가 길드장, 오스카.

그가 베르덴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