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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마법이 상용화된 지 15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계는 변혁의 시대를 받아들였다.

하늘을 나는 비공정과 대륙을 넘나드는 공간 이동 마법진. 건물 양식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인류의 생활 전반은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의 주축에는 마탑들이 있었다.

한때 오직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졌던 마탑은, 현대에 이르러선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자들을 일꾼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 중 간혹 마법적인 재능을 타고난 자들이 보이면 마법사로 키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아무래도 이 마을은 그른 것 같군."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 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게시판에 공고문을 올린 지 3일이나 지났음에도 일꾼에 지원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 보니 마탑과의 거리가 워낙 먼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잘못하면 아이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었으니까.

"여기가 마지막 마을인데 지원자가 한 명도 없을 줄이야. 오랜만에 나들이 나와 좋았다만 마탑에서 크게 한 소리 듣겠어."

"포기하긴 이르네. 아직 갈 곳이 하나 남았잖은가."

"고아원 말인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허탕을 칠 게 분명할 텐데... 그래도 가 보긴 해야겠지."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 시대에 고아원에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데려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에게 기부를 받아 공개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으며, 자칫하다간 인신매매로 보일 여지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마탑에 지원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어야 했다.

'그게 가장 어렵지.'

아이는 호기심이 많지만 그만큼 겁도 많다.

둥지를 튼 장소에 애착이 강한 경향이 있기에 설득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고아원장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아원에 방문한 두 마법사.

원장을 겨우 설득해, 우선 간단히 검사만 해 보기로 했다. 마력을 깨우칠 가능성만을 확인하는 것. 일꾼으로 쓸 아이를 구한다고 하면 거절할 게 뻔하니 장차 마법사가 될 재목을 구한다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안 간다고 하면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오, 결과는 지금까지 중 최상이군."

"여섯 명이라. 이 중에 한 명이라도 지원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예상대로 선뜻 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고아원장도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고.

결국 두 마법사는 실망한 기색으로 자신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때, '베르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아이가 마법사가 두고 간 공고문을 집어 들었다.

[마탑에서 일할 13세 이하의 아이들을 모집한다. 힘든 일이지만 마탑을 위해 공헌해 준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원한다면 마탑의 일원으로서 받아 줄 수도 있다.]

대가는 4백만 엘크. 촌사람이 몇 개월은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지원하는 아이에겐 따로 봉급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삼시 세끼 숙식을 제공한다고 한다.

'좋은데?'

안 그래도 요즘 기근이라 형편이 어렵다. 4백만 엘크가 들어옴과 더불어 베르덴이 빠진다면 분명 고아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기특한 마음도 있긴 했지만, 사실 베르덴은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전직 종군 마법사였던 이웃 할아버지가 손에서 피워 낸 작은 불꽃, 마법.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에 불과했지만 베르덴에게는 달랐다.

마력을 통해 구현되는, 마법이라는 기적.

마치 영혼이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 본 갈망, 그 욕심. 아이의 얕은 어휘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강렬한 감정이 들끓었고, 이윽고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갖고 싶다.'

이건 타고난 본능에 가까웠다. 그때부터 베르덴은 마법에 집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떼를 쓰고, 애를 써도 이웃 할아버지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마법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고개 한번 끄덕여 주지 않는지.

저녁을 먹은 베르덴은 몰래 고아원에서 빠져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원장님이 알았다간 반대하실 게 뻔했으니까.

갑작스런 방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마법사들. 이내 진심으로 기뻐하며 베르덴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신청서를 작성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베르덴."

"로벨린?"

로벨린.

베르덴과 같은 고아원에 살고 있는 또래의 여자아이.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떠나려고?"

"...응. 난 마법사가 되고 싶으니까."

"그럼 나도 같이 갈래."

베르덴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로벨린은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신청서를 작성하고 나온 그녀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겠지.'

그녀를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혼자 가는 것보단 둘이 가는 게 훨씬 낫겠지. 원장님이 많이 아쉬워하겠지만 말이다.

고아원으로 돌아온 둘은 입 밖으로 마탑의 마 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후 며칠이 지나 이른 새벽, 베르덴과 로벨린은 각자의 침대 위에 지폐 뭉치와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마탑으로 향하는 마차에 탑승했다.

마을에서 멀어지며 보게 된 일출(日出).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탑은 어떤 곳일까?"

"글쎄? 마을하고 많이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8살의 베르덴과 로벨린은 마탑의 일꾼이 되었다.

1화 역천 (1)

보헤미른 마탑은 원소 마법을 주류로 다루는 엘리먼 학파 소속으로, 최근 눈에 띄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 마탑이다.

특히 7년 전, 보헤미른 마탑의 한 마법사가 발표한 한 논문 덕분이었다.

한 속성에 고착화된 마력회로를 친화적인 속성을 통해 좀 더 유연하게 만들고, 반대되는 속성을 역이용해 다른 속성에 대한 가능성을 여는 다중 연속성 이론.

그 파장은 전 마탑을 강타했다.

논문을 발표한 마법사는 즉시 마탑주의 직속 제자가 되었고, 여러 마탑이나 아카데미에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강연을 해 달라며 러브 콜이 쏟아졌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가능성을 열어 준 그에게 감사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길, 노력만 한다면 두 속성의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특히나 재능 없는 원소 계열의 마법사들이 열광했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

탁.

베르덴이 빗자루를 청소 도구함에 집어넣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거닐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마법사 둘이 그를 보고 비웃고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력폭발>

퍼엉! 베르덴의 눈앞에서 자그만 폭발이 일어났다.

위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통증이 일었다. 시큰거리는 코를 부여잡은 베르덴이 마법사를 바라봤다.

"뭘 봐? 쓰레기가."

"...."

베르덴은 말없이 일어나 제 갈 길을 걸었다. 등 뒤로 저열한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베르덴의 현 위치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다중 연속성 이론. 베르덴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논문을, 믿었던 사람에게 도둑맞아서일까, 아니면 도둑맞은 데다가 되레 파렴치한 도둑으로 몰려서일까.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강대한 힘 앞에 작은 진실 따위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베르덴이 겪은 고통 중 일부에 불과했다.

저녁이 되어, 마탑의 중상층으로 올라갔다.

숨겨진 보안을 통과하자 각종 기이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연구실이 나타났다. 결코 앞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등에 새겨진 마법진이 강제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배정된 침대에 눕자 늙은 마법사가 다가왔다.

"준비됐나, 베르덴?"

"...예."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가 연구원에게 손짓했다.

"그럼 시작하지. 실험 번호 874번. 마력회로 활성제 MCB-1374 투약."

"투약했습니다."

"반응은... 좋군. 이어서 기억 확장제 M-34 투약."

혈관에 꽂힌 주삿바늘을 통해 불투명한 액체가 들어온다.

피가 들끓고 역류하는 감각이 엄습했다.

"...!"

베르덴이 입을 쩍 벌린 채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통제를 벗어난 눈꺼풀. 강제로 기억이 확장되며 언제나 그랬듯 지난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 * *

8살에 마탑에 들어간 베르덴은 로벨린과 함께 고된 노동을 하며 마탑에 이바지했다.

둘은 어떻게든 마법사의 눈에 뜨여 마법을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때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그리고 13살. 마탑에서 진행하는 적성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베르덴의 성장 한계는 1위계. 1-9위계까지 존재하는 마법 체계 중 가장 최하위의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반인보다도 성장 가능성이 없었다.

검사를 진행하던 마법사가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1위계라니. 다른 의미로 대단하군."

마탑에 있어 베르덴은 일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투자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배움의 기회만 제공하고 잡일꾼으로 써먹었다.

그에 반해 로벨린은 마탑의 예비 마법사로 발탁되었다.

한계 위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으나 베르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건 분명했다. 소문을 들어 보니 특수한 형질의 마력회로 또한 타고났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로벨린과 베르덴은 강제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베르덴은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1위계 마법을 배운 그는 마법사들의 어질러진 방을 정리해 주며 책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렇게 조금씩 부족한 지식을 채워 나갔다.

남들에겐 턱없이 부족한 시간과 얕은 이론들이었으나 베르덴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생된 마법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마법 계열의 뿌리만 알면 어렵지 않아.'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닌 순수한 마법의 원리 자체를 이해했으니.

마치 조각난 퍼즐을 끼워 맞추기라도 하듯 머릿속에 자리 잡은 마법 체계. 이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베르덴은 주저 없이 진로를 결정했다.

'마탑으로.'

보다 많은 마법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기 위해.

15살이 되던 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일꾼에서 마탑의 말단 연구원으로 승진했다.

마법사들의 연구를 보조해 주거나 물품들을 정리하는 일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베르덴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론적으로 나날이 성장해 갔다.

새롭게 마주한 이론과 연구는 10일이 채 지나지 않아 베르덴의 것이 되었다. 그 집념과 뛰어난 이해력 앞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연구실에 들어간 지 고작 3년 만에 일반 연구원에게 열람이 허가된, 마탑 도서관에 존재하는 수많은 서적의 핵심을 모조리 터득했다.

이러한 사실은 마탑의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친한 로벨린조차 알지 못했다.

베르덴이 알리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말해 준다고 해도 쉽게 믿어 주지도 않을 테니. 훗날 모두가 경악할 성과를 발표해 자신의 능력을 보란 듯이 증명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론만큼은 다른 마법사에 비교해도 독보적이라고 자부할 때쯤.

베르덴은 진정으로 마법사로서 인정받기 위해, 자신만의 이론을 담은 논문을 써 내려 갔다.

하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1위계의 능력으론 이론을 증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로벨린에겐 부탁할 수 없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특별한 존재였기에 베르덴의 이론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가까이 지내던 마법사에게 증명을 부탁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이론을...!"

경악한 마법사는 그 자리에 서서 베르덴의 이론을 완전히 정독했다.

눈을 부릅뜬 마법사가 이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베르덴을 향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덴, 너는 천재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 이건 기존의 원소 마법 체계를 뒤엎을...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거라면, 이거라면 분명히 모든 마탑에서 인정받을 거다. 그 마탑주께서도 인정하실 정도로! 어쩌면 제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베르덴의 이론에 감탄했고, 베르덴은 인정을 받아 좋았다.

'그런데 거기서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지.'

발표 전날, 논문이 사라졌다.

그리고 증명을 맡겼던 마법사가 자기가 새롭게 정립한 이론이라며 냉큼 논문을 발표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당장 마탑 중심부에 달려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고작 1위계 마법사의 말 따위 들어 줄 곳이 아니었다.

마침 측근들과 함께 지나가던 마탑주를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그래서 네가 그 다중 연속성 이론의 저자라는 건가?"

"네, 네! 마탑주 님. 허락해 주신다면 처음부터 전부 설명을...."

그때, 옆에 있던 마법사가 마탑주에게 말을 전했다.

베르덴이 1위계 마법사라는 걸 들은 마탑주의 시선에 순간 경멸이 서렸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마탑주가 물었다.

"다중 연속성 이론은 수백 년 전에 주장되었던 원소의 근원 이론으로부터 기인했더군. 정말로 네가 그 이론을 만든 장본인이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그 핵심을 500자 이내로 설명할 수 있겠지?"

무려 수천 페이지에 이르는 이론을 그렇게나 줄이라니. 그것도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불가능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마탑주 역시 그러했다. 자신들 또한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베르덴은 달랐다.

'반드시 설득해야 해.'

마탑주에게 직접 자신의 능력을 보이는 것.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마탑주가 원하는 것, 그 이상의 답변을 내놓았다.

수백 번이나 정독했으며 그때마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백지에 완벽히 서술할 정도로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마탑주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베르덴에게 말했다.

"이틀 뒤 밤에, 32층에 있는 연구실로 오너라."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마탑주님!"

고개를 바닥까지 숙인 베르덴이 환하게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탑주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기에.

재능이 없더라도 노력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실현했으니까.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적인 연구실.

이곳엔 어떠한 윤리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마탑의 발전을 위해 희생될 뿐.

마탑주가 마법진으로 온몸이 속박되어 있는 베르덴을 바라봤다.

"결과는 어떤가?"

"한계 위계는 최악입니다만, 마법적인 지식은 굉장히 뛰어납니다. 연산 능력이나 기타적인 부분도 그렇고요.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재능이란 하늘이 내려 준 불가침의 영역이니. 그래도 나의 마탑을 위해 일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겠지."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저 능력으로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다 죽을 바엔, 마탑에 도움이 되고 죽는 것이 훨씬 보람찬 일이지요."

"자네도 참 당연한 소릴 하는군."

미소를 지은 마탑주가 손짓했다.

"시작하라."

마력회로 활성제와 기억 확장제.

몸속으로 들어간 약물이 베르덴의 기억력과 전신의 마력회로를 강제로 활성화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상태에서 베르덴은 온갖 지식을 강제로 주입받았다.

마법진, 마법에 대한 논문, 마법 물품 등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글자와 그림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저주처럼.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끄럽군. 안정제 투입."

"그만! 그마아아아아안!"

"음, 벌써 면역 반응이 일어나는 건가. 어쩔 수 없군. 강제 마법진, 콜젼(Coercion) 활성화."

[침묵하라]

"...!"

머릿속에 떠오른 명령. 반항이라도 하는 순간, 마치 영혼이 부서지기라도 할 듯 상상도 못 할 격통이 엄습했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마법진을 만들어라]

[논문의 이론을 검증하라]

[마법 물품을 감정하라]

[혈관에 약물을 주입하고 스스로 반응을 관찰하라]

[새로운 포션을 창조하라]

[마탑을 위해 생명을 바쳐라]

베르덴이 쌓아 온 지식과 생명력, 그 전부가 마탑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

마탑주가 직접 작성한, 베르덴의 등 한가운데 새겨진 마법진의 강제력 탓에 일말의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덕에 마탑은 예상보다도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아주 좋군. 1위계에 불과한 쓰레기치곤 아주 쓸 만해. 이론만 본다면 천재, 그 이상의 반열이군."

"하지만 마탑주님, 이대로 가단 약물의 부작용으로 생명력이 고갈되어 곧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그건 안 되지. 아직은 안 돼. 지금의 상태만 유지한다면 보헤미른 마탑의 순위를 한층 더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 당장 이 좋은 물건을 망가뜨릴 수야 없지. 실험은 7일에 한 번으로 줄이는 게 좋겠군."

"평소에는 어떻게 할까요?"

"원래 하던 일을 하게 해라. 모든 행동에 강제력을 일으켰다간 자아 자체가 상실되어 능률이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까. 어차피 내가 새긴 마법진 탓에 입도 뻥긋 못 할 테니 문제는 없다. 물론 자해를 하는 것도, 도망을 치는 것도 말이야."

베르덴은 이들에게 소모품에 불과했다. 오래도록 쓰다 단물이 다 빠지면 버려지는 그런 것.

연구에 참가한 어느 누구도 베르덴이란 물건을 걱정하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고통과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 베르덴은 절망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그저 마법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모두에게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고통과 무력감. 그 혼란 속에서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어느 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 단순히 재능이,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걸 깨달은 순간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베르덴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분노로 뒤덮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논문을 도둑질해 간 놈.

내 재능을 비웃고 이용하는 마탑의 마법사들.

마지막으로 나를 이 지옥으로 밀어 넣은 마탑주까지.

한 명의 마법사로서.

놈들이 쌓아 온 걸 전부 무너뜨리고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리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베르덴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했다.

이 빌어먹을 마탑에게 복수하려면 누구도 넘보지 못할 힘과 재능이 필요하다. 피폐해진 정신에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계획이 필요하다."

지금 베르덴의 기억 속엔 방대한 양의 마법적 지식이 담겨 있다.

노력으로 쌓은 것과 놈들이 강제로 욱여넣은 것들까지. 그 전부를 이용해야 한다.

제정신을 되찾은 베르덴은 숱한 실험 속에서 마탑주가 기대한 만큼만 보여 주고, 그 이상의 능력은 철저히 숨기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강제력이 일부 반발하긴 했으나 머릿속이 짓이겨지는 고통 따위로는 그를 강제할 수 없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증오심이 그걸 가능케 했다.

그렇게 7년간 버티고 또 버티면서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이론을 새로이 창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역천의 이론이.

'때는 멀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베르덴.

그의 눈이 마법사들을 향해 조용히 번뜩였다.

* * *

평소의 베르덴은 언제나와 같이 마법사들이 어지럽힌 실험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시약들을 전용 용기에 담고, 비커를 깨끗이 닦았다. 익숙한 손놀림에 물기 하나 남지 않았다.

묵묵히 일하고 있던 중, 벌컥 문이 열렸다.

"베르덴."

붉은 머리칼과 수려한 외모를 가진 여성, 로벨린.

베르덴과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3위계에 도달한 천재 마법사다. 유일하게 마탑에서 베르덴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가 다가와 당당하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게 뭐지?"

"보면 몰라? 나, 이번에 마법도시 비렌테로 유학 가게 됐어. 마탑에서 오직 5명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지. 너도 알겠지만 내가 좀 대단하잖아?"

로벨린이 팔짱을 끼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작 자랑질을 하러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다.

"대단하네. 그래서 용건은?"

"칫, 싱겁긴.... 유학 기간이 최소 육 개월인데 동행하는 마법사들은 죄다 밥맛없는 놈들밖에 없어. 너도 알잖아? 권위에 찌든 머저리들이 어떤지.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로벨린이 머뭇거리며 베르덴의 얼굴을 흘겼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뭐?"

베르덴의 물음에 로벨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수행원으로서 고용하는 거니까. 나는 같이 말동무할 사람 생겨서 좋고, 너는 마법도시로 가서 뭔가를 배울 기회도 생기고... 어때? 생각 있어?"

무릇 마법사는 별종투성이지만, 그중에서도 로벨린은 또 달랐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다른 마법사들이 베르덴을 손가락질하든 어떻든 간에 어렸을 때처럼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로벨린은 마탑에 하나밖에 없는 베르덴의 친구이며 유일하게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이었다. 1위계에 불과한 베르덴을 마법사라고 여겨 주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의 차가운 외모 속에 숨겨진 상냥함은 따뜻했다.

'하지만 너는 몰라.'

이 마탑에 감춰진 어둠 속에서 베르덴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었는지.

약물에 의해 수명이 깎여 가며 원치도 않는 일을 강제당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지난 7년간 그가 무슨 계획을 생각해 냈는지.

로벨린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법진의 강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그녀에게 알려 줄 생각조차 없었으니까. 휘말리면 그녀 또한 위험해질 테니.

베르덴이 로벨린에게 미소 지었다.

"미안. 거절할게."

"역시 받... 뭐?"

"나는 여기가 어울려."

어질러진 실험실에서 말하는 베르덴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결코 웃는 게 아니었다.

단호한 거절.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입을 뻐끔거리던 로벨린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베르덴을 잘 알았으니까.

"...알았어."

다음 날, 로벨린은 마차를 타고 떠났다.

마중도 나가지 않은 베르덴은 창문 밖으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봤다.

'계획은 순조롭다.'

로벨린이 떠남으로써 걸림돌은 사라졌다. 그녀만큼은 결코 복수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로벨린이 없는 마탑에 어떠한 미련도 없다.

누가 죽든, 무엇이 무너지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갔다.

베르덴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비좁은 창고 안에 있는 작은 벽. 손가락으로 그 위에 복잡한 암호문을 새기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기동하며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탑주의 절대적인 마법진으로 보호받고 있는 마탑의 벽. 이곳은 그 '틈새'.

마탑의 주인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베르덴의 유일한 안식처다. 겨우 20평 남짓한 이 공간에는 그가 지난 7년간 쌓아 온 노력의 집대성이 놓여 있었다.

벽을 가둔 메운 기하학적인 마법진과 메모들. 바닥은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중심에 선 베르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곧 시작이다."

실행 날짜는 마탑주가 마탑을 비우는 축제 날.

남은 시간은 6일. 그 안에 모든 방해물을 배제하고 완전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축제 당일이 되었다.

2화 역천 (2)

최초로 건설된 마탑을 기념하고 마법의 부흥을 기원하는 '마도축제'.

세계에서 유명한 기념일 중 하나로, 마탑들이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날이기도 하다.

마탑의 주인을 포함해 고위 마법사들이 대도시로 나가 자신이 소속된 마탑을 홍보하며 솜씨를 뽐낸다. 각기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이 화려한 마법으로 경쟁하며 볼거리를 만드니 너 나 할 거 없이 축제로 모여든다.

마탑에 남는 건 대부분 하위 마법사들뿐.

위험한 마법진들로 경비는 삼엄했으며 경보가 울리면 마탑주는 무슨 일이 생겨도 5분 내로 돌아올 수 있으니, 굳이 고위 마법사가 남을 필요가 없었다.

외부 침입에 대한 대비는 확실했다.

하지만 내부는 어떨까.

'출발했군.'

베르덴은 입구 근처 연구실에서 청소를 하는 척, 떠나가는 마법사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계획에 큰 방해가 될 존재들은 확실히 사라졌다. 특히 마탑주.

여유는 있지만 느긋하게 있을 이유는 없다.

베르덴은 즉시 청소 도구를 집어 던지고, 상층부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 경멸이 담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관리관의 방문을 두들겼다.

"베르덴입니다."

3초의 침묵. 문을 열자 관리관은 방금 일어난 듯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은 없는데."

"죄송합니다. 마탑주께서 점심시간 전에 보물고를 청소하라고 하셔서...."

"마탑주께서? 아니, 그렇다고 허락을 구할 잠깐의 시간도 없나? 쯧, 어째 갈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군. 이런 한심한 놈."

베르덴은 관리관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놈은 강자한테는 비굴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강한 쓰레기. 통통하게 올라온 볼살만큼이나 심성이 고약했다.

'그리고 뒷면에선 비공식 실험 재료의 총괄 관리를 맡고 있고.'

그 목록 안에는 베르덴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이렇듯 마탑 중층 이상의 마법사 대부분은 비공식 실험에 가담하고 있다. 전부 최소 3위계 이상으로, 각자 고향에선 나름 천재 소리를 듣는 자들이었으니.

그러나 아무리 수가 많아도 바깥으로 이야기가 새는 경우는 없었다.

마탑주의 최측근을 제외한 마법사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침묵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기밀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강제력인 것이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관리관이 금고에서 특별하게 세공된 열쇠를 가져왔다.

"항상 말하지만 절대 흠집 내지도, 분실하지도 마라. 뭐, 굳이 말 안 해도 마탑에 손해를 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는 있겠지만."

"네, 관리관님."

출입 대장에 서명을 한 뒤, 열쇠를 받고 방을 나섰다.

향하는 곳은 마탑 깊숙이 숨겨진 보물고. 엄중한 보안을 통과한 베르덴이 힘껏 거대한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갖가지 마법 물품. 그야말로 보물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굉장하군.'

가장 말단에 있는 물건조차 베르덴이 쳐다도 볼 수 없는 값어치를 지녔다.

그것보다 귀한 것이 수백 개. 중상위권에 위치한 마탑이 이럴진대 상위의 마탑은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베르덴은 무심코 내민 손을 거두었다. 보관된 물건이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면 즉살(卽殺)이다. 허락된 건 어디까지나 바닥에 널린 잡스러운 것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을 위해 평생 쌓아 온 지식을 7년간 갈고닦았으니까.

베르덴은 어질러진 바닥에서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걸었다. 애초부터 청소를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마탑주가 청소를 시켰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그의 목표는 마법진으로 봉인되어 감춰진 진짜들. 그중 우측에 진열된 스태프 앞에 다가섰다.

마탑주가 애지중지하는 컬렉션.

그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이 스태프는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만들어 낸 인공 아티팩트(Artifact)의 일종으로, '두 번째 회로'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마법사는 저걸 잡는 순간, 위계가 달라진다.'

오른쪽 아래엔, 세계적인 감정사인 '레논 버나드'의 친필 사인과 함께 상세한 정보가 담긴 문서가 놓여 있었다.

★ 두 번째 회로.

최고위의 재료로 만들어진, 보헤미른 마탑이 발명한 인공 아티팩트. 원소 계열 마법사에 특화된 스태프로 재능 자체를 유형화한 물건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다. 어떤 마법사든 간에 동시에 세 개의 마법을 다룰 수 있게 해 주며 본인이 가진 재능 이상을 한시적으로 개화시키니, 그 위상은 고대 아티팩트와도 견줄 만하다.

⦁ 한계 위계 돌파

⦁ 트리플 캐스팅

⦁ 마법 시전 속도 증가(특)

⦁ 마력 한계 돌파

⦁ 원소 마법 위력 향상(특)

⦁ 원소 마법 범위 향상(특)

⦁ 크기 조절

⦁ 고위 은폐

⦁ 공간 수납

.

.

.

자체적으로 새겨진 마력회로가 부족한 재능을 받쳐 준다. 시전 속도도 빨라질 뿐만 아니라, 정해진 마법에 한계 이상의 마력을 담아낼 수 있다.

전반적인 원소 마법의 강화. 자유자재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으며 은폐 또한 뛰어난 건 덤이고 더해서 수납까지.

저게 1위계 마법사인 베르덴의 손에 들어온다면, 단번에 3위계로 껑충 뛰어오른다. 마력량 자체는 변하지 않을지라도 계획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먼저 마법진을 완벽하게 파훼해야 한다. 무려 7위계에 다다른 마탑주의 자신작을.

'삐끗하면 그대로 죽는다.'

베르덴은 식은땀을 닦아 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목숨이 걸렸다. 그렇지만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토록 자랑하던 마법진. 내가 박살 내 주지."

이미 이론과 실험은 끝났다. 남은 건 실전뿐.

"후우."

한차례 숨을 내쉰 베르덴이 눈을 감고 손끝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모든 감각을 실 끝에 집중하고 천천히 마법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구 다음은 좌측.'

좌. 좌. 직진. 우. 직진. 좌────

7년간 마법진을 틈틈이 관찰하고 몰래 견본까지 만들어 파훼법을 연구했다.

해석하는 데 4년, 파훼하는 데 2년. 나머지 1년 동안은 그 결과물을 수천 번이나 떠올리며 영혼에 각인했다.

어디로 가야 하며 무얼 해야 할지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정도다.

오랜 시간 마력의 실을 유지하며 움직이는 일은 쉽진 않았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해 이 분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극한의 효율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설령 상대가 마탑주라고 해도 자신 있을 정도로.

순조롭게 통로를 지나던 실이 첫 관문을 마주했다.

<마력폭발>

기초 마법 중 하나. 실 끝에서 자그만 마력이 폭발해 관문을 두드렸다. 치지직! 스파크가 일어나며 마법진이 맥동하다 이내 잠들었다.

직전의 충격으로 인해 관문의 일부가 손상되었다. 베르덴은 그 틈새를 파고들었고 관문을 천천히 갉아 냈다. 섬세한 움직임에 마법진이 발동할 듯 말 듯 요동쳤다.

사각사각──쩌적.

끝내 실이 관문을 관통했다.

후우웅....

요추 중 하나가 파훼되자 마법진의 빛이 한층 옅어졌다.

'두 번만 더 하면 돼.'

그러나 안심해선 안 된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린 순간 마법진이 발동되어 베르덴을 지워 버릴 테니까.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다. 어금니를 깨문 베르덴이 가파른 호흡을 억누르고 집중에 집중을 더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렀다.

'이걸로 마지막!'

쿠웅!

마침내. 마법진이 무너졌다. 학회에서 극찬을 받았던 마탑주의 자랑이 유리처럼 박살 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것도 그가 물건 보듯 했던 1위계 마법사에 의해서.

"허억. 허억...."

바닥에 고인 땀. 아찔해진 정신을 겨우 붙잡고 스태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화아악! 스태프의 회로가 베르덴의 마력회로와 이어지며 전신을 휩싸는 전능감이 느껴졌다.

"이게 3위계...."

높다. 도저히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게 로벨린의 눈높이인가. 과거와 현재의 베르덴에겐 절망스러운 격차가 느껴졌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이론이 성공한다면 나도 얻을 수 있다.'

재능을 그리고 힘을.

지쳐 있던 베르덴의 눈빛이 다시금 살아났다.

* * *

핵심 아티팩트를 챙긴 베르덴이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렸다.

저마다 다른 패턴의 마법진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나, 미리 선별해 두었던 보물들의 것은 완전한 해석을 끝낸 상태.

서둘러 봉인을 풀고 스태프의 수납 능력을 이용해 몰래 챙겨 넣었다.

이어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흔적을 지운 베르덴은 축소한 스태프를 숨기고 보물고를 빠져나갔다.

그토록 철저한 보안도 스태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열쇠를 반납한 베르덴은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작은 주머니를 챙긴 뒤, 보물고에서 가져온 것들을 정해진 위치에 숨겨 두었다.

그러곤 배불리 점심식사를 마쳤다.

너무나도 태연한 행동에 그 어떤 누구도 베르덴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이따가 올 때, 볼만한 책 좀 가져와 봐라."

"알겠습니다."

다음 일과는 경비를 맡은 마법사의 보조. 그러니까 시중이다.

마탑의 중심으로, 마탑 전체를 활성화하고 있는 동력원의 관리실은 3위계 이상의 마법사 셋이 조를 짜서 하루를 담당한다.

거기선 마법이 엄금이라 제대로 된 연구도 못 하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담당을 제외한 시중 역을 한 명 뽑아 이런저런 심부름을 맡긴다.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이지만 오늘은 아니지.'

왜냐하면 다음 일과가 마지막이 될 테니까.

열 권이 넘는 책을 가져온 베르덴이 동력원의 관리실로 들어갔다.

본래 세 명이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 조장을 맡은 마법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조원을 맡은 두 마법사는 베르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신세를 한탄했다.

"누구는 축제에 가는데 우리는 이런 곳에서 시간만 축내니 원...."

"어쩔 수 없지. 제비뽑기에서 졌으니까."

"그래서 잠자코 있는 것 아닌가. 마법으로 붙었으면 당연히 내가 뽑혔을 것을.... 에잇, 차가 식었군."

촤아악. 식은 찻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치우는 건 언제나 시중의 몫. 이런 만행은 익숙하다.

번지지 않게 수건으로 덮은 베르덴이 재빨리 뜨거운 차를 우려냈다. 평소에 넣지 않던 것을 하나 추가해서.

정성스레 차를 따라 주자 마법사는 좋아라 하고 차를 입에 머금었다.

"음. 전보다 꽤 맛이 좋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놈은 연구원이 아니라 바리스타 같은 게 어울려. 자네도 마셔 볼 텐가?"

"아니. 나는 2위계 이하가 끓인 차는 마시지 않네."

"하하하! 거, 평생 차 마실 일은 없겠군."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내가 마탑주가 되어서 너에게 차를 내오라고 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뭐? 마탑주? 하하. 그래, 자네가 마탑주가 되면 평생 동안 옆에서 차를 끓여 주지."

"그 말 잊지 말게."

'말투 참 꼴 보기 싫군.'

아직 40대에 들지도 않은 놈들이 늙은이 같은 고상한 말투라니. 베르덴과 로벨린은 특히 저런 부류를 혐오했다.

대부분 실력보다 겉멋이 더 우선인 놈들이었으니까.

그리고 마탑주?

우습다. 자신의 앞길을 한 치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허황된 미래를 꿈꾸는 게 말이다.

"...."

베르덴은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차를 마신 마법사가 꾸벅꾸벅 졸았다. 다른 하나는 책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도 베르덴을 경계하지 않았다.

'때가 됐다.'

축소한 스태프를 다시금 원래대로 되돌렸다.

눈높이까지 올라온 '두 번째 회로'를 양손으로 붙잡은 뒤, 졸고 있는 마법사 뒤에 거리를 두고 섰다.

<마력집중>

총 세 번. 연달아 같은 마법을 발동해 모은 마력을 스태프 끝에 집중한다.

그러곤 힘껏 등 뒤로 당겼다.

꾸구국.

베르덴의 몸은 연구에만 몰두하는 일반 마법사와는 달랐다.

온갖 잡일로 단련이 되어 있으며 빗자루질엔 도가 텄다. 복수를 꿈꾼 이후부터 어쭙잖게나마 육체 또한 단련했다.

그런 베르덴에겐, 가만히 있는 호박을 때려 부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주저하지 않는다.'

눈에 깃든 살의.

마음을 다잡은 베르덴이 전력으로 스태프를 휘둘렀다.

뻐억!

졸고 있던 마법사의 뒤통수에서 끈적한 피가 터져 나왔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 준비하지 않으면 3위계 마법사라고 해도 일격에 골로 갈 수 있다. 지금처럼.

"어억?! 이, 이게 뭐야?"

쿵! 머리가 반절 날아간 마법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난데없이 튄 피에 당황하고 있던 동료 마법사가 베르덴과 시체를 번갈아 봤다.

"미친놈이!"

마법사답게 상황 판단이 빠르다.

베르덴에게 책을 집어 던진 마법사가 단숨에 마법을 발동했다.

<파도>

관리실의 천장까지 닿은 3위계의 물결이 베르덴을 향해 덮쳐 왔다.

저기에 휩쓸린다면 익사하거나 연이은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

그러나 이 상황은 이미 예상한 바다.

계획 내에 있는 마법사들의 성향은 전부 조사를 마쳤다. 어떤 속성을 다루며 그 마법을 다루는 전법까지도.

'저놈은 파도로 덮친 뒤, 상대를 얼려 제압하는 게 특기.'

그렇다면 덮쳐지기 전에 끝내면 될 뿐이다.

마력이 회로를 따라 스태프에 맺혔다. 난생처음 쓰는 3위계의 마법이지만 이론은 완벽을 넘어 완전하다. 실패할 이유는 없다.

<어스 스피어>

날카로운 거대한 암석의 파편.

아티팩트로 강화된 그 관통력은 파도의 얇은 두께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방심한 술사까지도.

'장점을 이용해 약점을 파훼하는 건 마법전의 기본.'

그걸 잊은 마법사는,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어?"

콰직! 파도를 관통한 암석 창이 마법사의 가슴을 뚫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특수 합금으로 이뤄진 벽에 큰 흠집을 내었다.

힘을 잃은 파도가 베르덴의 가슴께를 적시곤 사라졌다.

뒷걸음질 치다 이내 벽에 부딪힌 마법사는 얼빠진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게... 이런...."

"그러게 사람을 적당히 가지고 놀았어야지. 너나, 마탑이나."

베르덴이 마법사의 머리에 스태프를 겨누었다.

<어스 쉐러>

퍼버벅! 주먹만 한 암석 조각들이 마법사의 머리를 분쇄했다.

사방으로 튄 피. 베르덴이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와 땀을 훔쳐 바닥에 털어 냈다.

"후우...."

1위계의 마력량으로 연달아 3위계와 2위계의 마법을 사용한 터라 부담은 컸지만, 예상한 것 이상으로 좋은 결과다. 홀로 3위계의 마법사 두 명을 죽였으니.

'살인이라....'

손이 떨렸지만 딱히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이 두 놈은 지난 몇 년간 자신에게 인체 실험을 감행한 놈들 중 하나였으니까. 오히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마탑의 동력원.

계획의 목적지가 코앞이다.

3화 역천 (3)

동력실로 향하는 통로는 삼중 보안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날 당직을 맡은 조장과 두 명의 조원. 그들의 마력을 장치에 인식하는 것이 열쇠다. 마탑주가 직접 설계한 터라 베르덴이 직접 수동으로 열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서두르자.'

시체에 아직 마력이 잔존해 있다.

베르덴은 두 마법사의 시체를 잡아끈 뒤, 각기 다른 인식표에 손을 올려 고정했다.

후우웅.

장치에 불이 들어오고 약 1분. 당직자의 마력을 인식한 보안 문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인지, 수십 년 전에 새겨졌었던 보안 마법진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쿵! 통로엔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숨을 삼킨 베르덴이 조심히 발을 내디뎠다.

'예상대로 아무것도 없다.'

동력원이 발산하는 마력은 그야말로 바다. 거대한 돌을 내던지든 물을 훔치든 바다에 어떤 영향도 갈 리 없다. 그것이 가진 완전함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마탑의 심장.

세계에 고작 10개밖에 없는 인류의 업적.

함정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누가 침입하든 간에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마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그 자체로 안전한 것이 바로 동력원이다.

'하지만 이론이 성공한다면....'

절대적인 명제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베르덴이 마지막 관문에 다가섰다. 아쉽게도 조장의 마력은 구할 수 없었다. 4위계 마법사는 마탑주의 컬렉션이 있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래도 괜찮다. 이 문에 새겨진 마법진은 보물고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마탑주가 자신하는 마법진의 일종이었으니까.

가느다란 마력의 실을 뽑아낸 베르덴이 다시 눈을 감았다.

'...찾았다.'

입구를 관통한 뒤, 조심스레 마법진을 관찰했다.

생소한 경로였으나 역시나 마탑주의 성향이 짙게 묻어 있다.

거만하면서 불안해하고, 위를 갈구하면서 누가 쫓아올까 아래를 내려다보는. 오만하고 질투심이 많은 성격.

마탑주가 쓴 논문과 연구 그리고 실생활을 관찰한 베르덴에겐 마탑주가 마법진의 약점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거기다 오래돼서 그런지 보물고에 있던 것보다 허술해.'

그러니 좀 더 과감하게 해도 좋겠지.

쿵... 쿵....

차츰 속도가 붙는다. 주저 없이 약한 벽을 차례차례 부수며 나아갈 때마다, 마법진이 점차 빛을 잃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마법진은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요추를 박살 낸 순간, 마법진이 깨지고 곧 육중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크읍?!"

틈새로 마력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순간 호흡이 멎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베르덴이 겨우 적응을 해내고 힘겹게 고개를 들자.

마탑의 지고한 심장이, 눈앞에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오는 데 7년. 그동안 뚜렷한 결과는 없이 오직 과정만을 되풀이하고 보완했다. 맨땅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으나, 결국 성공했다.

사느냐, 죽느냐.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

베르덴은 한 발짝씩 동력원을 향해 다가갔다.

마법 이론에 대한 이해엔 자신이 있던 그였지만, 동력원의 기술력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필요한 부분만을 해석하고 이론을 창조해 냈다.

그렇기에 감히 성공의 유무를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툭. 옷을 벗었다. 몸 곳곳에 베르덴이 창조하고 직접 칼로 새겨 넣은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탑주가 새긴 마법진의 강제력이 발동하는 일은 없었다.

이건 자해가 아니라 오히려 살기 위해 한 행동이었으니. 마탑주가 간과한 것 중 하나다.

"후우...."

베르덴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바다와 같은 동력원의 마력을 견뎌 내려면, 최소한 바닷물이 들어올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베르덴이 명치 부근에 새겨진 마법진을 향해 양 손바닥을 가리켰다.

"개신(開身)."

쩌적... 쩌저적...!

발광하는 마법진에 따라 마력회로가 맥동한다. 강제적인 회로의 확장. 스태프의 도움 없이도 한계를 넘어 2위계 그리고 3위계의 하위에 다다랐다.

'한계를 넘은 게 이건가.'

마력회로를 인위적으로 손대는 건 일종의 금기였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마법사로서의 파멸을 의미했으니까.

베르덴이 창조한 마법진, '역천(逆天)'.

역천의 지속 시간은 고작 10분.

10분 뒤에 마력회로는 파괴되어 마법을 다룰 수 없게 된다. 더해서 수명이 줄어들고 육체는 극단적으로 무너진다.

영영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잠시나마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3위계.'

모든 걸 바쳐도 방금 전에 죽인 두 마법사에 준하는 힘밖에 얻지 못했다. 그것도 영구적인 것이 아닌 10분이라는 찰나의 시간밖에 쓸 수 없는.

베르덴은 자신의 재능을 비웃으며 두 번째 회로를 손에 쥐었다.

"허억...!"

역천과 스태프의 회로가 공명한다.

확장되어 있던 마력회로가 다시 한번 꿈틀거리며 한계의 한계를 벗어났다. 쩌저적. 전신의 피부가 버티지 못하고 갈라졌다. 틈새에서 푸른 마력의 빛이 새어 나왔다.

5위계.

마법의 법칙을 일부 벗어나, 깨달음을 통해 마도(魔道)의 길을 걷는 단계.

마법을 사용한 순간 흔적도 없이 터져 버리겠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회로의 격은 분명 5위계의 것이었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베르덴은 극심한 고통을 인내하며 동력원에 연결된 선들을 바라봤다. 그중 최하층부로 마력을 보내는 선을 찾아 힘껏 뽑아냈다.

쿠구구구구!

길을 잃은 방대한 마력이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그 힘에 압도되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야만 했다.

눈을 꽉 감은 베르덴이 이내 망설임 없이 선의 연결부를 자신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마력의 해일이 거칠게 전신을 헤집는다. 연이어 확장했던 마력회로로도 감당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틈새가 벌어지며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어서... 어서 쏟아 내야 돼!'

베르덴의 역할은 '다리'다. 스태프와 동력원을 연결해 주는 다리.

전신의 회로를 비틀어 마력을 스태프로 향하게 하자, 순수한 마력이 스태프 끝에 모여들었다.

퍼어엉! 그리고 터져 나왔다.

콰과과광! 순수한 마력의 격류가 동력원을 감싼 벽을 강타했다.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방벽이었으나 동력원이 내뿜는 무한한 마력을 견뎌 내는 건 불가능했다.

쩌적. 방벽에 한 줄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무너지면 안 돼.'

으득. 어금니를 깨문 베르덴이 스태프를 움직였다.

마력의 격류가 뒤늦게 따라왔지만, 결국 시간문제였다. 내구도가 한계에 다다르자 방벽에 수십 개의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이쯤 되면 마탑에서도 눈치챘겠지. 그렇다는 건 마탑주도 온다는 뜻이고.

어쩔 수 없다.

지금 베르덴의 마력회로는 동력원의 마력을 감당하고 있다. 터지지 않은 걸 보면 어느 정도 적응은 했다는 뜻. 속단이었으나 시간이 없다.

다리(Bridge)가 이어졌으면 다음은 순환(Circulation). 그로써 베르덴 자신이 동력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쿠구구궁! 동력실이 무너진다. 옆으로 거대한 돌덩이가 내리꽂혔다. 베르덴은 서둘러 나머지 한 손으로 동력원의 선을 하나 붙잡았다.

'이걸 스태프로 연결해야 한다.'

다시 말해 마력의 격류를 잠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버틸 수 있을까? 모른다. 자신을 믿고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숨을 들이켠 베르덴이 스태프의 마력회로를 억지로 닫았다.

"커억?!"

퍼억! 퍼억! 피가 터졌다. 한쪽 눈과 고막이 일순간에 폭발했고, 박살 난 장기의 조각이 목까지 치솟아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육체의 반 이상이 붕괴하면서 정신은 진즉에 날아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르덴의 몸은 움직였다.

철컥!

동력원과 연결된 스태프. 동력원의 일부가 된 베르덴.

...무너진 잔해 속에서 고요함이 흘렀다.

역천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본래라면 확장된 마력회로가 줄어들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르덴의 몸에 흐르고 있는 무한한 마력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

잠시 후, 베르덴이 눈을 떴다. 남은 눈조차 실명된 것에 가까웠지만... 보이고 느껴졌다.

마치 신이 된 것과 같은 충만함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무한한 마력의 빛이, 위계를 벗어난 압도적인 경지가.

동력원은 자아가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마탑의 심장은 베르덴 자체였다.

남아 있는 두 손가락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육체는 너덜거렸지만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란 종을 초월한 것 같은 기분.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었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베르덴이 손짓하자 동력원의 마력이 따라 움직였다.

베르덴의 자아가 유일한 이상, 의지가 없는 무한의 마력은 베르덴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극히 한정되어 있지만.'

상관없다.

베르덴이 히죽 웃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역천. 그건 고작 마력회로를 확장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육체의 변화, 즉 '육체의 재구성'이다.

본래라면 불가능하지만, 그걸 뒤집을 마력이 베르덴에게 있다.

베르덴이 다시 한번 양 손바닥을 명치 부근에 향하게 했다. 전신에 새긴 모든 마법진이 발동되며 곧 육체 전체가 마력으로 뒤덮였다.

'누군가 그랬지. 재능이란 건 하늘에 의해 정해진다고.'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노력한다고 해도 재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또 믿었으니까. 그게 순리였으니까.

"하지만 난 아니야."

화아악! 동력원의 마력이 활성화된다. 주위는 푸른빛으로 물들었고 방벽의 잔해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압력이 휘몰아쳤다.

그 중심에 푸른색의 태양이 있었다.

결코 자연적으로 생길 수 없는 순수한 마력의 집합체. 한 인간이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하늘에 대해 거역한 것을 의미하는 상징.

베르덴이 원하는 건 오직 하나다.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

"역천(逆天)."

번쩍! 태양이 폭발하며 마탑의 중심부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 * *

마탑에서 경보가 울렸다. 반응을 보니 허락받지 않은 손님임이 분명했다.

오작동? 그럴 리가. 마법진 자체가 파괴될 정도의 마력에 노출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겁도 없이 내 마탑을 침범하다니."

보헤미른 마탑의 주인, '발로크 베시아스'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한창 축제를 즐기며 자신의 마탑에 대한 위대함을 설파할 순간이었는데....

"감히."

이 세계에 몇 없는 7위계의 종주. 그에게서 흘러넘치는 마력의 기세에 주위 마법사들이 숨을 삼켰다.

"벼, 별일 없을 겁니다, 마탑주님. 그러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맞습니다. 어느 누가 마탑주님의 마법진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지금쯤 잿더미가 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아부였지만 진실이기도 했다. 발로크의 마법진은 세계에서 인정받을 정도였으니까.

발로크가 코웃음을 한번 치곤 마법을 전개했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달라붙어야 겨우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중에서도 여러 명을 단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다중 공간 이동.

그걸 고작 몇 분의 연산과 혼자만의 마력으로 펼치는 모습은 한 마탑의 주인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보라색 빛이 번쩍이자 발로크와 그의 측근들이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 보헤미른 마탑의 지척....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이렇게나 거대한 마력이라니...."

5위계 마법사조차 피부가 저릿하고 숨이 막힐 정도의 마력량이 마탑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발로크조차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멈춰 서 있었다.

'내 마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곧바로 원인을 추적했다. 자신의 마법진 탓에 내부를 꿰뚫어 볼 수는 없어도, 마탑의 구조는 구석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

천천히 마력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중심지를 파악했다.

"...동력원?"

설마. 말도 안 된다.

완전한 동력원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어떤 역사에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 이 정도의 마력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동력원이 유일했으니.

'서둘러 잠재워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길지는 그조차 알 수가 없었다. 미지에 대한 공포. 자칫하면 마탑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한 발을 내디딘 순간.

"아."

화아아아악! 마탑의 중심부에서 터져 나온 마력의 해일이 주변 일대를 집어삼켰다.

4화 역천 (4)

기, 마력, 신성력.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힘. 그중 마력은 가장 보편적인 힘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다. 현재 세상을 발전시키는 건 누가 뭐래도 마력을 다루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이 좋은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건 아니다. 미지에 대한 진보엔 미처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법.

마탑의 동력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하나 이를 설계하고 발명했으며 연구한 마법사들조차 겨우 한 사람, 그것도 가장 미천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에 의해 붕괴될 거라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마탑이 침묵했다.

중심부 어느 곳에서도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주인을 잃은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한입 베어 문 샌드위치가 그릇에 덩그러니 남았다. 마치 사람이 증발이라도 한 듯, 인기척이 사라졌다.

오직 한 곳을 제외하고.

"쿨럭, 쿨럭!"

베르덴이 기침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금이 간 마탑주의 스태프가 형태를 잃고 바스러졌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눈을 껌뻑인 그가 몸을 더듬었다. 아주 천천히.

역천의 마법진은 그대로 새겨져 있었으나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넝마 같던 육체는 어디 갔는지, 새것처럼 탄탄하고 매끈했다.

약물로 인해 줄어들었던 생명력이 넘치는 게 느껴진다. 그 안에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이 가득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했던 마탑주의 마법진이 소멸했다.

역천은, 성공했다.

"1위계를 넘었다...."

개신(開身)을 하지 않고 스태프도 쥐지 않은, 현 베르덴의 경지는 2위계. 고작이지만 한계를 초월했다.

역천의 마법진으로 인해 망가졌어야 할 모든 것이 멀쩡했다. 아니, 재구성된 육체는 완전히 새로웠다.

더 높은 위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즉 재능이 생겼다.

잠시나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경지를 경험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마도사, 아니 그 이상에 오를 수 있는 미래를.

콱! 주먹을 움켜쥔 베르덴이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그런데 대체 이 마력량은 뭐지?"

2위계라고 하기엔 너무도 방대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동력원과 하나가 되었던 탓일까?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좋다. 과하기는 하다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암시>

2위계의 마법. 본래라면 발동 자체가 불발되었겠지만 수월하게 발동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다른 2위계 마법도 전부 사용이 가능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다.

계획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성공하는 거니까.

두리번거리던 베르덴이 잔해 속에서 출구를 찾았다. 완력과 <염력>으로 무너진 방벽을 치워 내고 복도를 내달렸다.

관리실로 돌아가자 두 마법사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력이 깃든 종이나 마법 물품까지도.

'동력원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나.'

예상한 바다. 동력원이 내뿜은 마력은 생물 개개인의 한계를 한참이나 넘어섰으니.

아마 중심부 부근에 있던 마법사들은 죄다 죽었을 것이다. 그 밖에 있던 나머지는 기절했을 것이고.

동정할 생각은 없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이건 복수이기도 했으니까.

옷걸이에 걸려 있던 로브를 뒤집어쓴 베르덴은 앞으로 나아갔다. 곳곳에 널브러진 인간의 흔적들이 발에 챘다. 도중에 쓸 만한 것들이 보이긴 했지만 욕심 때문에 변수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복도 구석에 있는 청소 도구실. 문을 열자 먼지가 휘날렸다.

서둘러 잡동사니를 치우고 낡은 옷장을 옆으로 밀자, 복잡한 술식으로 구성된 마법진이 하나 나타났다.

'다행히 왜곡된 곳은 없다.'

수년간 마탑이 보유하고 있는 재료들을 긁어모아 만든 탈출구.

과연 정해진 좌표로 무사히 전송될지.... 워낙 고난이도의 마법진이라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땅속에 묻히거나 깊은 바다에 수장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잠깐 주춤하던 순간.

쿠웅!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이윽고 확장된 기감에 거대한 마력이 잡혔고, 시시각각 가까워지며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다.

보헤미른 마탑의 주인, 발로크 베시아스.

그가 정확히 이곳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설마 내가 쓴 마법을 감지한 건가...!"

마탑주에 비하면 한 방울조차 되지 않는 마력일 텐데, 생각 이상으로 터무니없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다. 잡혀서 갈기갈기 찢겨 죽거나, 공간을 이동하거나.

보물고에 있던 물건들 그리고 각종 연금술 재료 등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키이잉──보라색 빛이 점멸하며 몸이 끌려가는 게 느껴진다.

목적지는 마탑주의 눈이 닿지 않은 머나먼 좌표. 빛이 번쩍이자 베르덴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콰앙!

그 직후, 벽이 폭발하며 중년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의 눈동자에 잔해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마법진이 비쳤다.

"공간 이동...!"

으드득. 분노에 찬 발로크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서둘러 추적을 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마법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상 어떤 마법사가 온들 어찌할 방법이 없다.

놓쳤다.

그 사실에 발로크의 눈동자에 한가득 핏발이 섰다.

"감히!"

감히 내 마탑을 엉망으로 만든 데다가 멀쩡히 도망가기까지 해? 만능(萬能)의 마도사라 불리는 자신의 앞에서?

용납할 수 없다.

마탑의 주인으로서도, 마법의 종주로서도.

'동력원의 폭주와 공간 이동. 절대 혼자서 벌인 것이 아닐 테지!'

아마 다른 마탑은 아닐 터다. 아무리 경쟁 관계라 해도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그렇다는 건 보헤미른 마탑과 적대적이며 마탑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진 자들이 분명하다. 그의 뇌리 속엔 그 후보들이 몇 존재했다.

쿠구구구...!

거칠게 날뛰는 마력이 마탑을 뒤흔들었다.

"누구든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산산조각 내 죽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일국의 황제라고 할지라도, 덜 자란 아이라고 할지라도.

살아 있음을 후회할 정도로 잔혹하고 잔인하며 고통스럽게.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 이상으로 놈들이 가진 것을 전부 무너뜨릴 것이다.

감히 보헤미른 마탑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리라.

그리고 발로크라는 존재가 누군지 뼈와 영혼에 손수 새겨 줄 것이다.

"반드시! 내가 반드시 찾아내 모조리 죽여 주마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분노에 가득 찬 비명.

콰과과광! 마탑을 휩싼 암운(暗雲)에서 시퍼런 번개가 내리쳤다.

* * *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깊은 숲. 마탑의 눈이 닿지 않는 이곳에 생소한 빛이 터져 나오며 사람 하나가 나타나 흙바닥을 굴렀다.

"크윽...."

쿨럭! 쿨럭!

공간 이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속이 뒤엉킨다더니, 꽤나 불쾌한 기분이다.

연신 기침을 하며 겨우 속을 가라앉힌 베르덴이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숲인데...."

8살 이후로 줄곧 마탑에서 생활한 터라 익숙한 장소가 있을 턱이 없지만, 지금 보고 있는 숲의 환경은 보헤미른 마탑 주변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거의 대륙 절반 단위의 공간 이동이 성공했다는 뜻. 역천에 이어 사지 멀쩡히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추적이 붙을 수가 없다. 흔적은 전부 지웠으며, 베르덴이란 1위계 마법사의 존재는 동력원의 폭주로 인해 소멸되었다고 여겨질 게 분명했으니까. 마탑에서 사용하는 마력이 깃든 문서들 또한 마찬가지.

로벨린과 고아원의 원장님에겐 비보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최선의 결과였다.

"하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계획을 예상 이상으로 성공시키고 안전까지 확보한 지금, 베르덴의 웃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웃어 본 적은 난생처음이다.

마탑주는 대체 어떤 심정일까? 머리끝까지 화가 났겠지? 어쩌면 애꿎은 마탑을 부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그 제자들이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어떤 식으로 허망한 표정을 지을지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하아...."

그러나 마탑은 이 정도로 몰락하지 않는다.

동력원의 폭발로 중심부 근처에 있던 마법사가 다수 죽었겠지만, 마탑 전체로 보면 적은 손실이다. 축제 날인 탓에 자리가 많이 비워져 있었으니까.

'동력원이 소실되었더라도 마탑주라면 대책을 내놓겠지.'

발로크 베시아스란 마법사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능'의 이명은 결코 허세가 아니다.

확신하건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보헤미른 마탑을 재건할 것이다.

"그걸로 충분해."

그가 마탑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동안, 자신은 새롭게 얻은 재능으로 힘을 쌓는다.

적어도 정면으로 발로크를 상대할 정도까지.

때가 되면 직접 찾아가 놈의 고고한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다.

그가 쌓아 온 것을 눈앞에서 무너뜨리면서 동시에 베르덴이란 마법사를 세상에 각인할 것이다.

복수와 마법사의 증명.

그것들만이 베르덴의 유일한 과제였다.

"1위계였던 마법사가 마탑주를 이긴다라...."

어딘가의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썩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주인공이 베르덴 자신이었으니. 피식 웃은 베르덴이 챙겨 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좌표를 정할 때, 머나먼 공국의 영토로 설정했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할지라도 외딴곳에서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래서 넉넉한 돈과 더불어 옷과 식수 그리고 다량의 건조식품 등을 챙겨 왔다. 근처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깨끗한 옷을 입고 그 위에 로브를 둘렀다. 내려다보니 퍽 마법사다운 복장이었다.

만족스러운 모습에 작은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비췄다.

"...응?"

뭐야 이건.

머리가... 사라졌다. 아니, 대머리가 됐다는 얘기가 아니라 갈색 머리칼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거기다 눈은 또 어떤가. 검은 눈동자가 사라지고 깨끗한 청안(靑眼)이 자리하고 있다.

"육체를 재구성할 때 문제가 있었나?"

재빨리 확인해 봤지만 머리와 눈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똑같았다.

통상 위계를 벗어난 마력량도 그렇고,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었지만 눈에 띄는 부작용은 없었다.

뭐, 이론이란 게 원래 그렇다.

머릿속으로 상상도 못 했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건 마법사업계에서 별로 드문 일도 아니지.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근데 머리하고 눈 색깔만 바뀌었는데 꽤 괜찮다. 뭐랄까. 신비를 품은 마법사처럼 보인다고 할까. 얼굴은 그대론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우연히 로벨린을 만나도 그녀가 모르고 지나쳐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가 빠지거나 시력이 점차 상실되는 것만 아니라면 반겨 줄 만한 부작용이었다.

'어차피 당장 이렇다 할 대책도 없으니까 내버려 두는 수밖에.'

거울을 집어넣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질겅질겅 육포를 씹어 삼켜 적당히 배를 채운 뒤, 준비해 둔 지도를 펼쳤다.

좌표가 맞다면 북쪽에 사람들이 사는 영지가 있을 터.

일단 안전한 거처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마탑에서 가져온 것들을 쓰는 건 그다음이다.

"그럼 가 볼까."

베르덴이 숲속으로 발을 디뎠다.

스치는 풀잎과 나무의 냄새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증오스러운 마탑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떠돌이 마법사의 삶.

그것은 어릴 적 마탑으로 향하는 마차에 탄 것 이상으로 가슴 뛰는 일이었다.

5화 첫 전투 (1)

리비안트 공국.

22년 전, 전쟁 막바지에 왕국의 리비안트 공작이 독립을 선언해 탄생한 국가다.

반란과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에스티리아 왕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족의 이름으로 공국의 탄생을 축하했다.

많은 의혹이 생겨났으나 사람들은 마냥 좋아했다. 뭐든 간에 전쟁보단 평화가 더 좋았으니까.

벨디른 공화국과 에스티리아 왕국 사이에 자리한 공국.

그 중심인 리비안트 공왕은 적절한 중립 외교를 펼치며 국가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충분한 나라지.'

지리적으로도 좋다.

보헤미른 마탑과 멀면서도, 꿈을 가진 인재들이 모이는 장소. 1위계를 벗어나 2위계에 닿아 있는 베르덴이 성장하기엔 더할 나위가 없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실질적인 힘, 즉 실전.

재구성한 육체에 적응하고 전투 자체에 익숙해져야 하는 게 우선이다.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든, 그걸로 세상에 인정을 받든, 보다 강한 힘 앞에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마탑의 정점이란 천재성과 노력이 합쳐진 강대한 힘의 상징.

그런 괴물을 상대하려면 자신 또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함을 쌓아 올려야 한다.

그것만이 마탑주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뚜둑!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근처 풀숲에서 소리가 들렸다.

"...."

한적한 길을 걷던 베르덴이 다리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작은 고블린 하나가 돌멩이를 쥔 채,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숨었다고 하기엔 조잡하지만.'

굳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다 보였다. 손을 내밀어 마법을 발동했다.

<윈드 커터>

쉬익! 불투명한 칼날이 날아갔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고블린의 목이 풀과 함께 잘려 나갔다. 뼈까지 절단할 위력은 아니었으나 치명적이었다.

"끼륵...!"

왈칵. 피가 뿜어져 나오며 쓰러졌다.

부들부들 떠는 고블린을 일별한 베르덴이 제 갈 길을 갔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니, 굳이 사체를 멀리 치울 필요는 없었다.

'고블린이 대놓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마을이 좀 머나 본데.'

어렵게 지도를 구하기는 했으나 상세적인 지리는 모른다.

공간 이동의 좌표가 틀어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위계 마법사라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수준으로 산속에 오래 머무는 건 가급적 피해야 했다.

'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작게 한숨을 쉰 베르덴이 속도를 높였다.

허약한 마법사와 달리 단련한 육체, 거기에 재구성까지 더한 몸이니 체력은 충분했다. 분배만 잘한다면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겠지.

"...음?"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바닥에 나 있는 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거기다 크게 흠집이 난 나무뿌리까지.

상태로 보건대 최근에 생긴 흔적이다.

<마력감지>

곧바로 마력을 펼쳐 주변을 확인했다.

범위를 넓힐수록 마력 소모가 급증하지만 베르덴에겐 문제 될 게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생명체의 반응이 느껴지는 장소를 찾아냈다.

'커다란 마차에 사람 하나. 나머지는 고블린과 오크인가.'

움직이는 걸 보니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

마침 길을 자세히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현지인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주변에 위험한 아인종도 없으니 구할 이유는 충분했다.

늦기 전에 서두르자.

발끝에 힘을 실은 베르덴이 마차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이런 시벌...."

상인 콘라드는 마차를 둘러싼 도적들 탓에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대화라도 통하면 적당히 통행료라도 쥐여 주겠건만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다. 대장으로 보이는 거한의 탐욕스러운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도적 토벌을 했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그런데 이십 명 가까이 되는 도적이 대낮에 활보하고 있다니!

용병을 고용했으나 수적으로 많이 밀린다. 그렇다고 마차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목숨도 중요하지만 이 마차에 파이테 영주가 주문한 물건이 가득 실려 있었으니까.

상인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입술을 깨문 콘라드가 거한에게 말했다.

"크흠. 대체 무슨 일로 저희 앞길을 막으시는지...."

"보면 모르나? 당연히 도적질하려고 그런 거지."

거한에 말에 도적들이 웃었다.

당장이라도 저 더러운 입들을 막고 싶지만, 상인의 덕목에는 인내심이란 게 있다.

콘라드가 품에서 적지 않은 돈을 꺼내 보였다.

"...지금 이 마차엔 여기 남작령을 다스리는 파이테 영주님의 물건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걸 가져가신다면 영주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실 겁니다. 그러니 이걸 받고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인으로서 귀족들을 몇 번이나 상대해 봤다. 한낱 도적놈들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쯤은 손쉬운 일이다.

'돌아가면 당장 영주에게 말해 토벌해 주마.'

인맥과 돈. 그것이 상인의 힘이다.

콘라드는 애써 두려움을 숨기는 척 연기를 했다, 상대가 더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게끔. 협상을 할 때, 종종 써먹는 기법이다.

거한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정말이십니까?"

"당연히 아니지. 대체 왜 내가 그런 아량을 베풀어야 하지? 그냥 다 죽이고 빼앗으면 쉬운 일인데."

퉤! 손바닥에 침을 뱉은 거한이 커다란 벌목용 도끼를 잡았다. 다른 도적들도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행태. 그리고 저급한 조롱에 성질이 뻗친 콘라드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뭐?"

"여기 남작령이야! 내가 파이테 영주랑 밥도 먹고, 목욕도 같이하는 사이라고! 그런데 그런 나를 털어먹으려 해! 정직하게 살지 못할망정! 이 개새끼들이, 모조리 참수해 줄까!"

이 세상에서 상인 노릇을 하려면 배짱 하나는 있어야 한다.

갑작스러운 으름장에 도적들이 벙쪄 있는 동안 콘라드가 마차에 가까이 붙어 섰다. 마차는 무겁지만, 놈들에겐 말이 없으니 고용한 용병들이 시간만 끌어 준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보다 빠르게 용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까지는.

"어, 어디 가는 겁니까!"

"미안하오! 수가 적당히 많아야지! 돈 몇 푼에 목숨을 버릴 순 없잖소!"

도적들을 제친 용병들.

싼값에 구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틈이 생겼다.

콘라드가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 말고삐를 세게 말아 쥐었다.

그 순간.

퍼억!

파육음과 함께 곤죽이 된 용병 하나가 날아왔다.

콘라드도, 도망치던 용병들도, 도적들도.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시체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어어어어어어!]

오크.

그것도 입가가 귀까지 찢어진 소름 끼치는 오크.

그를 필두로 수십 마리의 고블린과 몇 오크가 나타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습격에 어느 누구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거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대체 뭐야?"

이 근방에 자리 잡은 지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저렇게 이상한 오크는 본 적이 없다. 수십 마리나 되는 아인종이 집단을 이룬 것도 그렇고.

하지만 뭐가 됐든 저 값비싼 물건을 실은 마차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저번에 토벌당한 도적의 수를 보충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도망쳤다가 두목에게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 힘 좀 쓰는 수밖에. 고블린이야 뭐 숫자가 좀 많긴 해도 심심찮게 죽여 왔고, 오크 또한 덩치만 큰 굼벵이에 불과하다.

후딱 고블린을 처리하고 부하들과 함께 오크를 하나씩 사냥하면 되는 일이다.

"어, 어떻게 하죠?"

"마차나 못 가게 잡아. 되도록 오크는 피하고 고블린만 처리해."

그렇게 말한 거한이 달려오는 고블린을 도륙하며 괴이한 오크에게 다가갔다.

"개씨발, 한탕 하는데 아인종 놈들이 방해나 하고."

도끼를 옆으로 잡아당겨 오크의 머리를 겨냥했다.

아예 머리통을 부숴 버린다는 생각으로 힘껏 도끼를 올려쳤다. 팍! 육중한 손맛과 함께 피가 튀었다.

"어?"

막혔다. 아니, 잡혔다.

손아귀가 반으로 쩍 갈라졌지만 오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끼를 잡아당겼다. 커다란 입이 거한의 어깨를 물었다.

까드득.

"으아! 으아아아아아아악!"

도끼를 놓고 주먹으로 오크의 얼굴을 연신 후려쳤다.

그런데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내 거한의 머리를 잡아당겨 목을 부러뜨린 오크가 입을 쩍 벌렸다. 뭉개진 고기와 피가 목 안으로 가득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갈라진 손이 제 모습을 되찾으며 한층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아인종 대부분 식인을 하나, 이런 식으로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는 오크는 없다.

그렇다는 건.

"트, 특수 개체...?"

일반적인 종의 진화에서 벗어난 특별한 존재.

통상적인 개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지녔으며 국가에서 우선적으로 토벌할 위험 인자다. 가방끈이 짧은 도적들조차 알 정도로.

거한의 죽음을 목격한 도적들이 삽시간에 자리를 벗어났다. 주변에 있던 오크와 고블린들이 놈들을 쫓았다.

마차는 자유로워졌다.

"이, 이랴!"

고삐를 내려쳐 말을 재촉했다. 도적에 이어 오크의 특수 개체라니. 그것도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는!

이토록 운이 없는 날이 또 있을까. 다음부터는 돈 아끼지 말고, 신용이 있는 용병을 고용하겠노라고 콘라드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디까지나 살아남는다면.

덜컥.

"아!"

마차 바퀴에 시체가 걸렸다. 중심을 잃은 마차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그러나 콘라드는 마차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능숙하게 말을 움직여 가까스로 넘어지는 걸 피해 냈다.

속도가 붙자 쫓아오는 아인종들이 급속히 멀어졌다.

완전히 추적을 따돌린 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발, 살았다!"

상행을 다니며 위험했던 적은 많았지만, 방금처럼 죽기 직전까지 몰린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임기응변에 감탄하며 깊이 안도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 용병 새끼들. 영지에 도착하면 고발해 주마!'

빚을 잊지 않고 갚는 것 또한 상인의 덕목 중 하나.

아주 용병 자격을 박탈해 거리에 나앉게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아직 다른 생각을 하기엔 이르다.

지금 그가 마차를 몰고 있는 길은 지형이 평탄하지 않은 비포장도로였으니까.

그 사실을 콘라드는 잠시 간과했다.

콰직!

"아?"

중간에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바퀴 축이 틀어졌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옆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아아악!"

풀썩. 다행히 풀숲에 떨어져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이곳은 야생.

아까와는 다른 오크와 고블린 무리가 큰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콘라드를 둘러싼 놈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시시각각 다가왔다.

'아니, 마을하고 거리가 얼마나 멀다고 아인종이 이렇게 많은 거야?!'

빌어먹을 모험가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다급하게 무기를 빼 들었지만, 가진 거라곤 고작 호신용 단검이 전부. 끔찍한 죽음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내 마지막이 아인종한테 뒈지는 거라니."

헛웃음을 흘린 콘라드가 눈을 감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고블린의 울음소리에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공포에 질리며 죽음을 기다리던 그때, 잿빛의 남자가 나타났다.

<토벽>

흙으로 이뤄진 벽이 콘라드를 둥글게 감쌌다.

오크의 힘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지는 않으나 이후의 여파를 막기엔 충분하다.

'숨구멍도 뚫어 놨으니 질식하지는 않겠지.'

후우. 심호흡을 한 베르덴이 아인종 무리를 바라봤다.

열다섯 마리가 넘는 고블린과 네 마리의 오크. 수많은 눈동자가 하나같이 베르덴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잡은 고블린을 빼면 이게 첫 실전인가.'

문제는 없다. 새로 얻은 재능을 시험하기에 딱 적당한 숫자다.

베르덴이 회로에 마력을 전개했다.

경로를 따라 흐른 마력이 오른손 끝에 집중되었다.

<다중 화염 화살>

쏘아져 나간 다섯 개의 불꽃이 고블린들 사이에서 폭발했다.

6화 첫 전투 (2)

베르덴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마법적 지식이 잠들어 있다.

하지만 보헤미른 마탑 소속답게, 어디까지나 주류는 원소 계열이었다.

남들처럼 높은 위계를 다룰 수도 없었기에, 마력회로는 어느 한쪽 속성으로 치우치는 일도 없었다.

그와 더해서 역천. 한계가 사라진 육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태생적인 위계의 한계와 속성의 제한은 더 이상 베르덴을 구속할 수 없다.

활활 타오르는 숲. 고블린과 오크의 고성이 귓가를 울렸다.

<윈드 커터>

고블린의 다리가 잘려 나갔다. 넘어진 녀석은 뒤이어 달려오는 오크에게 밟혀 죽었다.

사방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아인종들을 보며 베르덴은 침착하게 사고했다.

오크는 사람 하나쯤은 쉽게 곤죽을 만들 수 있지만, 둔하고 무모하다. 고블린은 수에 의존하는 겁쟁이고. 그런데 놈들에게선 광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군.'

그러나 결코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충격파>

마력의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지척에 있던 고블린들은 눈과 고막이 터지며 아우성쳤고 오크들은 비틀거렸다.

<다중 마력 화살>

쏟아 넣는 마력은 최대로.

여덟 개의 푸른 화살이 빗발치며 오크들의 몸체에 박혔다. 가죽이 두꺼워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지만 꽤나 화가 났겠지.

이빨을 드러낸 놈들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역시 단순해.'

<토벽>

퍼억! 광대 오크의 주먹이 흙벽에 처박혔다.

고함을 지른 녀석이 힘으로 벽을 무너뜨렸지만, 그 뒤에 있어야 할 베르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두꺼운 벽 위에 올라서 있던 베르덴.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인종들을 보며 마력을 전개했다.

<다중 화염 화살>

<돌풍>

더블 캐스팅(Double Casting).

시전하는 마법을 완전히 이해하고 터득한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는 노력의 산물.

원소를 이해하고 마력을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다면, 두 가지 속성 이상을 하나로 합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화력은, 기존의 위계를 넘어선다.

원소 계열 합성 마법.

<폭염의 화살>

공기를 불태운 폭염의 화살들이 일제히 지면을 강타했다.

콰광! 콰과광! 폭발에 집어삼켜진 고블린들은 바싹 타 버렸고,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오크들은 목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고열에 호흡기가 타 버린 것이다. 꺽꺽대며 격통 속에서 하나둘씩 움직임을 멈췄다.

<어스 쉐러>

쏘아져 나간 바위의 파편이 쓰러진 오크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변수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한 확인 사살이었다.

그런 다음에서야 베르덴이 지면으로 내려왔다. 매캐한 연기와 역겨운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위에서 느껴진 것과 달리, 가까이서 보니 꽤나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걸 내가 한 건가."

베르덴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작게 웃었다.

불과 며칠 전의 그였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화력과 마력이 부족해 고작 오크 하나를 상대하는 데 사력을 다했겠지.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그는 마법사다운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주 여유롭게 수십 마리의 아인종을 불태워 버렸다. 설령 이 두 배가 있었어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력량이 심장 속에서 고요히 술렁였다.

당장이 이럴진대, 앞으로 얼마나 강해질지 기대가 부풀었다.

'적은 더 없는 것 같은데.'

안전은 확보했다.

방금 전 사람을 가뒀던 토벽을 해제하자, 숨구멍으로 전투의 광경을 지켜보던 콘라드가 눈을 껌벅였다.

베르덴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 베르덴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 * *

베르덴은 잡일에 능숙했다.

간단한 일부터 시작해 궂은일까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벨린과 함께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마법사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거기엔 마차의 수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 도적에게 둘러싸이더니 용병은 도망치고 이상한 오크가 오지 않나. 거기서 겨우 빠져나오니 마차는 또 뒤집히고 다른 아인종들이 덮쳐 오지 않나.... 정말로 마법사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오크와 고블린의 한 끼 식사가 되었을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콘라드가 말고삐를 쥔 채 또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 줬을 뿐만 아니라, 마차의 수리까지 해 준 은인에게 내세울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감사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전해졌음 하는 바람이었다.

"...괜찮으니 앞이나 좀 보시죠."

다소 퉁명스러운 대답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

'벌써 감사하다는 말만 일곱 번째야.'

처음에야 좋았지만 계속 들으니 고문이 따로 없다.

상인은 입담으로 먹고 산다는데. 그래서 지치지도 않는 걸까? 대답하는 베르덴의 얼굴이 점차 굳어져만 갔다.

또 말할라,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 근방엔 도적이 자주 출몰하는 편입니까? 그런 것치곤 아인종 숫자가 예사롭지 않던데."

"아뇨, 몇 번이나 이 길을 다녔지만 오늘과 같은 일은 난생처음입니다. 도적 떼에 아인종 무리라니. 분명 파이테 영주님... 아, 길을 잃었다고 하셨죠. 파이테 영주님은 여기 남작령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제가 그분과 친분이 좀 있어 이런저런 편지를 주고받는데 분명 도적 토벌을 마쳤다고, 조심히 오라고 연락을 받았지 뭡니까? 그래서 이참에 돈 좀 아낄까 싶어 값싼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역시 말이 많다.

그보다 이곳이 파이테 영지라면 설정해 둔 공간 좌표가 맞다는 뜻.

'다행이군.'

베르덴은 주요 키워드만 머릿속에 남겨 두고 사족은 한 귀로 흘렸다. 한바탕 울분을 쏟아 낸 콘라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마법사님?"

"애셔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떠돌이 마법사, 애셔.

변해 버린 잿빛 머리를 보고 생각해 낸 베르덴의 가명이다.

육체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외모까지 바뀌었으니 그에 걸맞은 이름이 필요한 법.

힘을 쌓기 전에는 애셔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생각이다. 혹시 모를 추적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서.

'애초에 단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워낙 멀기도 하니 절대로 찾지 못할 것이다.

보헤미른 마탑에서 공국까지는 말이 대륙 절반이지,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국가가 멸망했다는 정도의 소식이 아니면 전해지지도 않는 거리다.

아무리 마법의 발달로 정보의 공유가 수월해졌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했다.

모든 나라는 저마다의 폐쇄성을 지니고 있었으니.

솔직히 말하면 베르덴은 계획을 짜기 전까지, 공국의 존재조차 몰랐었다. 그 정도로 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정보를 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들기도 했고.

그렇기에 본명으로 활동해도 그의 이름이 닿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주의에 주의를 더할 필요가 있다.

보다 완전한 성장을 위해서.

'베르덴이란 이름을 쓰는 건, 보헤미른 마탑주와 그 측근들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있을 때.'

그때까진 철저히 자신을 숨길 생각이다.

이미 가명에 어울리는 배경도 설정해 두었다.

고아 출신으로, 고명한 스승님에게 주워져 제자로서 그리고 자식으로 산속에서 자라 왔다는 이야기.

베르덴이 만들어 낸 거짓된 과거였다. 이게 타인이 가장 납득할 만한 배경이었으니까. 의심해 봤자 꼬리 잡힐 것도 하나 없었고.

콘라드가 애셔란 이름을 몇 번 속으로 되뇌곤, 그에게 물었다.

"아, 예. 애셔 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저와 함께 영주님을 뵈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영주님과 나름 깊은 친분이 있습니다. 그런 제 목숨을 구해 주신 데다가 영주님이 주문하신 물건들까지 지켜 주셨으니 분명 사례를 해 주실 겁니다. 물론 제가 적극적으로 증언을 할 생각이기도 하고요."

'돈 받을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준다고 하면 굳이 거절할 생각도 없다.

베르덴은 잠시 고민했다.

2위계에 불과한 지금, 귀족과 안면을 트는 건 이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몰랐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파이테 영주는 꽤 인망이 두텁다고 했었지.'

어떻게 할까.

부족한 위계. 더해서 공국의 정치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에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귀찮은 정쟁에 말려들 수가 있다.

'하지만 좋은 기회이기도 해.'

검사에게 검이 중요하듯, 마법사에겐 마법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마법을 강화해 줄 수 있는 게 마법 물품이다. 지극히 극단적인 예로, 마탑주의 컬렉션을 든 베르덴이 기습으로 3위계 마법사 두 명을 죽였을 정도니.

당연하게도 마법이 부여된 물건들은 비싸다.

그중 높은 성능을 지닌 것은 돈이 있어도 인맥이 없으면 볼 수도 없는 게 태반이다.

그러니 적절한 거리만 유지한다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외지에서 평판 높은 귀족과 인연을 맺는 건 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옆에 있는 말 많은 상인과도 그렇고.

'어차피 곧 3위계에 이를 계획이기도 하니.'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콘라드에게 베르덴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방문이라 영주님께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

"실례라뇨! 저 콘라드가 장담하는데 분명 환영하실 겁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 편히 지내시면 됩니다. 파이테 영주님은 아주 온화하시고 의리 넘치는 분이니까요.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예, 분명."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태생부터 상인 집안인 콘라드가의 가훈이다.

그 속에는 은혜 또한 포함되어 있다. 하나뿐인 귀중한 목숨을 구해 줬으니 그에 걸맞은 값을 지불하는 것이 도리.

하나,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떠돌이 마법사라니! 이건 잡아야 돼!'

작금의 시대에 마법사에 대한 정보는 기본이다.

그렇기에 콘라드는 솟아 나오는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일반적인 마법사는 3위계, 높아도 4위계 초급에서 여생을 끝마친다.

설령 적성 검사에서 한계가 5위계라고 나온들, 그것이 성장이 빠르다는 것을 그리고 반드시 그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본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였다. 어지간한 재능이 아니고서야, 그 이상의 노력이 없으면 한계에 닿지 못하는 게 상식이다.

콘라드가 베르덴의 외모를 슬쩍 봤다.

'아무리 많이 쳐도 20대 중반....'

그렇게나 젊은데.

불, 공기, 땅의 세 속성을 다룰뿐더러 마법의 위력조차 예사롭지 않다. 엄청난 화력으로 아인종 놈들을 단번에 불태워 버린 걸 보면... 잘 모르긴 해도 최소 3위계가 아닐까? 여유로운 태도를 보면 4위계일 수도 있고.

그렇다는 건 어느 고명한 마법사의 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초신성.

'연줄을 만들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지!'

이런 인재를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난 건 운명임이 틀림없다.

어서, 어서 영주에게 가자.

이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콘라드가 바쁘게 말을 몰았다.

7화 파이테 영지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 숲을 빠져나왔다.

밭을 갈고 있던 농민들이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고, 그 주위를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이따금씩 곡식을 훔쳐 가는 고블린을 막기 위함이겠지.

'내가 살던 마을에서도 저랬는데.'

베르덴은 추억을 떠올리며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목책으로 촘촘하게 둘러싸인 마을과 중심에 자리 잡은 작은 성. 오래되어 보였으나 관리를 잘했는지 나름대로 깔끔했다.

마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관광이라도 하듯 마을을 구경했다.

술에 취해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람,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부모님을 돕고 있는 어린아이... 모두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 마을은."

"...평화롭군요."

철저한 개인주의인 마탑에서 느낄 수 없는 분위기다.

"하하, 그렇죠? 그래서 저는 이 마을을 좋아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니까요."

비대해진 도시들과 날이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의 영지들.

이대로 가다가는 농업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얘기가 오갔지만, 의견을 낸 본인조차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인종과 마수의 위협에서 안전한 삶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특히 수도가 그렇다.

태어나 중년에 이르기까지 수도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을 정도니. 그렇게 밀집된 인구 속에서 평생 경쟁하며 살아가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휴가차 오기 좋은 곳입니다. 아니면 어디 한적한 바닷가에서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원하시면 제가 잘 아는 가게들을 소개... 아, 도착했군요."

성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침 앞에 나와 있던 경비대장이 병사 두 명을 이끌고 다가왔다.

"이거, 콘라드 씨가 아니십니까? 얘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하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요."

"예? 그게 무슨...."

마차 곳곳에 나 있는 긁힌 자국, 흙으로 더럽혀진 콘라드의 옷. 누가 봐도 습격을 당한 몰골이었다.

말에서 내린 콘라드가 경비대장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도적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괴상한 오크가 아인종 무리를 데리고 나타난 게 아니겠습니까?"

"도, 도적? 오크?"

"예, 예. 기껏 고용한 용병들은 먼저 도망친 데다가 도적들도 냅다 흩어졌죠. 어떻게든 도망은 쳤는데 마차는 뒤집히고 고블린과 오크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때마침 옆에 계신 마법사님이 나타나 삽시간에 아인종들을 쓸어버리셨는데, 저분이 아니셨다면 영주님께서 주문하신 물건은커녕 제 목숨도 챙기지 못했을 겁니다."

경비대장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약간 어두운 회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푸른 눈동자.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내심 감탄을 흘렸다.

시선을 받은 베르덴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애셔라고 합니다."

"여, 영주 성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마르소라고 합니다. 그... 젊어 보이시는데 대단하시군요."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처음 보는 마법사를 조심하라고.

워낙 괴팍한 마법사가 많은 세상이기에 섣불리 대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귀족과 다툰 어떤 마법사가 저택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사건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경비대장의 태도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그나저나 또 도적이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있긴 한데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런데 저분은...."

경비대장으로서 신원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마법사를 성안으로 들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콘라드의 은인을 문전박대 하자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말끝을 흐리자 콘라드가 냉큼 입을 열었다.

"애셔 님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직접 오크 무리를 토벌하신 분이니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으음, 그래도...."

"일단 성 외곽에 모셨다가, 제가 직접 영주님에게 허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콘라드는 일개 상인이지만, 파이테 남작의 오랜 친우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런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데 어쩔 수야 있나.

무슨 일이 일어나 불똥이 튀지 않는 걸 바라는 수밖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마르소가 위로 손을 흔들었다.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며, 베르덴을 태운 콘라드의 마차가 입성했다.

* * *

"거의 1년 만이군. 못 본 사이 살이 좀 빠진 듯싶은데?"

"말도 마십쇼. 오크에게 뜯길 뻔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릅니다."

콘라드가 이마를 닦는 시늉을 하자, 파이테 영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 나름 잘 관리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게 어디 영주님의 잘못이겠습니까. 후안무치한 도적 놈들과 짐승 같은 아인종들 탓이지요."

"말이라도 고맙네."

뽕! 영주가 직접 와인의 마개를 비틀어 뽑았다.

은은하게 풍겨 오는 달짝지근한 냄새. 고급스러운 와인은 아니나 특유의 향이 있다. 산화되기 쉬워 도시에서 먼 이곳에서는 맛볼 수가 없는 음료다.

이렇게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운송할 수 있는 건, 그의 인맥에선 콘라드를 제외하곤 없다.

애초에 그 가격에 이런 의뢰를 받아 줄 만한 상인도 없고.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지.'

물론 이쪽에서도 여러 편의를 봐주고 있긴 하지만.

짠. 서로 잔을 마주치고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새콤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후. 좋군. 영지를 경영하는 것도 이 와인처럼 술술 넘어가면 좋을 텐데."

"도적 말씀이십니까?"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벌써 두 차례나 대대적으로 도적을 소탕했다. 평균적으로 1년에 두어 번 정도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고작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또 도적이 들끓는 건 심각한 일이었다.

"며칠 전에 남쪽 숲속에서 목이 걸린 시체들이 발견됐네. 조사해 보니 근처 촌락 사람들이었더군. 촌락은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고. 수색을 해 봤지만 건진 건 하나도 없었네."

"음, 혹시 도적이 아닌 게 아닐까요?"

도적은 보통 길 가는 사람을 습격한다.

아무리 작은 촌락이라 해도 쳐들어가 학살한 뒤, 대놓고 나무에 시체들을 내걸다니. 도적의 탈을 쓰고 그렇게까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가 있을 리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자네가 습격받았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뭔가 목적을 지녔다고 하기엔 행동 하나하나에 두서가 없어. 영지에 막심한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 나 같은 하급 귀족을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딨나? 다른 귀족과 마찰을 일으킨 적도 없는데."

"하긴. 이곳이 탐날 만한 정도는 아니죠."

"그러니까 남작령이 아니겠나."

껄껄 웃은 남작이 남은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마늘 향이 가미된 고기를 씹어 삼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런데 자네와 같이 온 마법사 말인데, 어떤 사람인가?"

"만난 지 얼마 안 돼 잘은 모르지만... 신비한 사람입니다."

특출난 외모를 빼더라도, 사람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서서히 압도되는 느낌이랄까. 특히 마법을 시전했을 때가 그러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준 미지의 마법사라... 혹여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닌가? 예를 들자면 도적 집단에 가담했다거나. 그래서 수색을 해도 마법적인 무언가에 의해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예? 에이, 설마요. 영주님께서 아직 못 보셔서 그렇지, 장담컨대 절대 도적질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말로 먹고 사는 상인이지만, 보는 눈도 좀 있지 않습니까?"

콘라드의 말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만난 타인에게 보일 만한 믿음이 아니었다.

'어떤 인물인지 보고 싶군.'

보는 것만으로도 신뢰가 갈 정도로 잘생긴 건가?

대개 그런 자들은 여자들이나 등쳐 먹고 사는 법인데.... 거기다 마법사라는 감투까지 썼으니 말솜씨가 없더라도, 사람 몇 명쯤은 가볍게 속여 먹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손님으로 들인 이상, 대접해 주는 것이 집주인으로서의 도리다.

하지만 그는 남작. 공국의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로 현재 공무가 밀려 있다... 라고 핑계를 대면 당장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그동안 하인들을 통해 마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 될 터.

생각을 마친 영주는 콘라드와 잔을 마주치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취기에 몸을 맡겼다.

* * *

별채에 방을 얻게 된 베르덴은 따끈한 고기 수프와 빵을 저녁으로 대접받았다.

이거 소고기인가? 낮은 온도로 오랜 시간 조리했는지 꽤나 부드럽다. 마탑의 고급스러운 음식에 입맛이 맞춰져 있던 그에게도 납득될 만한 맛이었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얕게 퍼뜨린 마력. 그만큼 효력은 떨어지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숫자가 늘었다. 아마 감시역이겠지.

도적과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 갑자기 찾아온 외부인을 경계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헛수고겠지만."

자신은 도적이 아니니까.

그저 콘라드가 약속한 보수를 받을 겸 귀족과의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선량한 마법사다.

그래도 나쁜 건 아니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맛 좋은 식사를 매일같이 대접받는 데다가 병사들이 감시 겸 호위를 해 주니 안전하기도 하다. 조용히 마법을 단련하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파이테 영주가 당장 공무가 바쁘다며 하인을 통해 전언을 보냈으니,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빈 그릇을 바깥에 내놓고, 손가락 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문 한가운데 새긴 마법진. 이걸로 도중에 방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마탑에서 가져온 물건들.

대부분 베르덴의 성장을 위한 것들이었다.

재능은 갖췄으니 개화할 시간이 필요할 터.

지금 만들 약물은 그 시간을 압도적으로 단축해 줄 것이다.

'루트밀의 손, 바르단 허브, 마력꽃의 뿌리. 케트마의 눈물....'

하나같이 베르덴은 꿈도 꾸지 못할 값비싼 연금술 재료들이다.

이걸 수년간 몰래 긁어모으고, 상하지 않게 보관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막자사발에 넣어 잘게 갈았다.

그리고 미리 끓여 놓은 고농도의 마력수에 털어 넣었다.

1분이 지나고 2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꺼내어 마법으로 차갑게 식혔다. 짙은 녹색빛과 함께 신경이 번쩍 자극되는 냄새.

[MCE-03]

다시 말하면, 마력회로 확장제.

'3위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력으로 회로를 자극해 넓히는 것.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을 회로에 담아낼 수 있으면 성공이다.

같은 2위계 마법사를 기준으로, 베르덴의 마력은 방대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력을 발산하는 심장에 한해서였다. 동력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힘을 받아 낼 회로가 제한된 상황.

우물에 물이 가득 차 있더라도 양동이 이상의 물을 퍼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출력을 높이려면 양동이, 즉 마력회로를 넓혀야 한다.

이 약물은 그 회로를 일시적으로 넓혀 줄 것이다.

그 안에 빈틈없이 마력을 담아, 마력회로가 확장된 상태를 일정 시간 유지하면 된다.

'인체 실험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지만.'

마탑의 강제력이 있긴 했으나, 이 약물과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베르덴에게서 비롯된 것.

어차피 지금 하는 짓은 베르덴 외에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주 치명적인 부작용이 존재했으니까.

벌컥.

베르덴이 주저 없이 약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5분이 지났을까, 점차 체온이 오르고 전신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마력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확장된 회로에 마력이 가득 들어찬다. 푸른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현재의 활성화 상태를 유지하는 건 상당한 집중력과 마력이 소모되는 일.

부작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커윽...!"

베르덴이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

견디기 어려운 격통이 육체를 쥐어짰다.

이것이 마탑에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였다. 위계의 성취를 빠르게 앞당길 수 있어도, 산 채로 불에 타는 것 이상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마법사가 없었으니까.

우드득.

어금니를 깨문 베르덴에게서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한 얼굴이었으나, 마력이 흩어지기는커녕 넘쳐흐른 마력이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자신이 가진 강점, 이 방대한 마력을 조금이라도 더 활용하려면 3위계는 되어야 한다.

그래, 조급하다고 볼 수 있다. 2위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하지만 눈앞에 당장 위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기다려야 하지?

이런 아픔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각오는 이미 7년 전에 마쳤다.

그그그극!

베르덴의 손이 바닥을 끌었다. 살갗이 까지며 손끝에 피가 배어 나왔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그 감각에 베르덴의 정신이 보다 뚜렷해지며 한층 더 마력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베르덴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길어도 일주일.'

그 안에 3위계에 도달하겠다.

8화 도적 토벌 (1)

4일이 지났다.

베르덴은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별채에서만 생활했다.

도저히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감시라고 할 게 없었다. 하인들이 말하길 흡사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식사를 주는 기분이라고.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의미가 없다.

할 수 없이 파이테 영주는 오늘 저녁 식사에 베르덴을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주게."

문이 열리고 베르덴이 들어왔다. 그의 외모에 영주의 눈에 감탄이 비쳤다.

은은한 빛이 반사되는 회색 머리칼과 총명한 청안(靑眼).

평민이 입을 법한 옷을 둘렀으나 본연의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어릴 적 상상으로 떠올린 마법사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왜 콘라드가 그런 말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군.'

저런 얼굴로 도적질이나 한다면 그보다 더한 낭비가 없을 테니.

베르덴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주님. 떠돌이 마법사인 애셔라고 합니다."

"이곳 남작령을 다스리는 파이테 헨로드일세. 손님으로 맞이했는데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군. 자, 어서 앉도록 하게."

베르덴이 의자에 앉자마자 하인이 서빙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야채를 갈아 만든 에피타이저. 아삭한 식감과 곁들여진 새콤한 소스가 혀를 감았다.

"어떤가, 우리 주방장이 자신하는 에피타이저는."

"과하지 않고 절제된 맛이 일품이군요. 입맛을 돋우기 위한 음식으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세계에 10개밖에 없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엘리트임을 입증한다.

베르덴의 경우에는 마법사다운 재능은 없어도 연구 능력이 뛰어나고, 일꾼으로서 그 쓸모를 다년간 마탑에 증명했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는 일은 고작해야 귀찮은 일을 대신 떠맡는 일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마탑에 살면서 온갖 음식을 경험했다.

아무리 못해도 귀족의 식사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식사들. 돈이 썩어 넘치는 마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탑은 쓰레기지만 그 맛을 부정할 순 없지.'

이미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베르덴의 혀.

입맛은 웬만한 미식가에 버금갈 정도다.

파이테 영주는 지극히 귀족스러운 베르덴의 예절을 보며 그의 출신을 짐작했다.

역시 단순한 떠돌이 마법사는 아닌 모양이다. 재야에 숨은 고명한 마법사의 제자거나 마탑 출신일 확률이 높다. 특히 후자가.

'드문 일은 아니지.'

마탑에서 나와 스스로 자립하는 마법사는 더러 있다.

마탑 출신이란 건 일종의 자격증과도 같으니 어디든 갈 수 있겠지. 파이테 영주도 그런 마법사를 바랐다. 이런 시골에 올 리가 없긴 하겠지만.

어쨌든 저 애셔라는 남자는 도적과 관련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파이테 영주는 경계심을 늦추었다. 메인 식사로 나온 스테이크를 즐긴 뒤, 후식을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 갔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나 보군. 주방장에게 힘 좀 쓰라고 한 보람이 있어."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지.

영주가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가 현금 다발을 공손히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500만 엘크. 내 친우인 콘라드를 구해 준 보답일세."

"감사히 받겠습니다."

베르덴이 돈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오크와 고블린 무리를 토벌한 것치곤 막대한 금액. 그만큼 콘라드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때, 영주가 말했다.

"그런데 떠돌이 마법사라 했었나? 혹시 괜찮으면 일 하나 맡아 볼 생각 없는가? 보수는 괜찮게 쳐주지."

내용은 도적 토벌. 영주가 최근 몇 달 동안 있었던 사건들에 대해 말해 줬다.

경청하고 있던 베르덴이 말했다.

"그러니까 도적들 중에 마법사가 있다는 얘기십니까?"

"추측이지. 반쯤 확신한 거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는데 찾지 못할 리가 없지 않겠나."

휘하의 기사들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이니.

그렇다고 따로 부탁할 사람도 없다. 문화가 풍부한 도시를 내버려 두고, 이런 한적한 촌에 자리 잡을 마법사는 없었으니까. 특히 지금의 시대에선.

"토벌은 언제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이네. 괜히 늦췄다간 애먼 피해자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내일이라.

조금만 있으면 3위계에 도달할 것 같은데....

하지만 영주의 부탁을 단호히 외면하기도 어렵다. 500만 엘크에다가 며칠간 좋은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받았으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받아들일 이유가 하나 있었다.

'도적 무리에 가담한 마법사.'

도적질이나 하는 걸 보면 실력이 그리 높지는 않겠지.

기습으로 죽인 마탑의 두 마법사를 제외하고, 첫 마법전의 제물로는 딱 알맞은 상대였다. 더해서 돈도 벌고.

자신은 있다.

고민하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받도록 하죠."

"고맙네. 그럼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지. 기사 셋과 병사들을 붙여 줄 테니 가능한 도망치는 도적들이 없었으면 좋겠군."

영지 내의 사람이 피해를 입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베르덴은 영주와 손을 마주 잡고 악수한 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단련을 끝내고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잠에 들었다.

* * *

이른 아침에 일어난 베르덴은 깔끔히 복장을 갖추었다.

정신은 개운하고, 마력도 충만하다. 당장 전투에 나서도 충분한 컨디션이었다.

하인을 따라 성문 앞으로 나가자 갑옷을 입은 기사 셋과 창을 든 병사 열다섯 명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피아테 남작님의 기사이자 이번 도적 토벌의 지휘를 맡은 에녹입니다. 이쪽은 헤레스, 패릭입니다."

"애셔입니다."

중년 기사의 태도는 정중했다.

대체로 3위계에 도달한, 특히 파괴적인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는 세간에서 평기사와 맞먹는 위치에 있다. 콘라드로 인해 이들은 베르덴을 3위계 이상의 마법사라고 여기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내일 오를 경지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일단 도적이 있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을 파악했습니다. 조금 먼 거리기에 도중까지 말을 타고 갈 생각인데 혹시 승마 경험이 있으십니까?"

마탑에 마구간은 없다.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타시지요. 아니면 따로 마차를...."

"같이 타겠습니다."

무슨 귀족도 아니고, 한 명을 위해 마차까지 동원하는 건 선 넘었다.

에녹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라탔다. 다른 기사와 병사도 자신의 말에 올라타 명령을 기다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탁! 발을 차자 말이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마을의 풍경이 보기 좋게 지나갔는데, 문득 입구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저건...?"

"모험가입니다. 저도 제대로 들은 이야긴 아니지만 기이한 오크가 발견되었다는 얘기가 있어서 토벌하러 가는 걸 겁니다. 위험하고 생소한 괴물은 큰돈이 되니까요. 영주님께서 따로 현상금을 걸기도 하셨고요. 금 등급 모험가도 있는 걸 보니 보수가 꽤 크게 걸린 것 같습니다."

무리의 맨 앞에 선 중년의 검사.

그의 목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플레이트가 걸려 있었다.

'금 등급 정도면 기사 수준이라고 했던가.'

객관적으로 누가 강하다 할 수는 없지만, 저 모험가가 나름대로 베테랑이란 건 알겠다.

베르덴은 곧 관심을 거두었다. 모험가 무리를 지나치며 마을을 벗어났다.

다시 한번 발을 차자 말이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기사가 다루는 군마라 그런가,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안장이 있는지 없는지 하체 쪽에 상당한 충격이 연이어 느껴졌다.

"익숙지 않으면 많이 아플 겁니다. 그래도 잠시만 참으면 되니 조금만 견디시지요."

"...얼마나 걸립니까?"

"한 1시간 정도?"

1시간? 이런 시발.

베르덴은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3위계에 도달했다면 말에 타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루... 아니, 반나절만 미뤄 달라고 할 걸 그랬다고, 후회 아닌 후회가 들었다.

* * *

기사가 되려면 필수적인 조건 중 하나가 기(氣)를 깨우치는 것이다.

신체를 강화하고 더 나아가 들고 있는 무기를 더욱 예리하게 만들어 주는 힘.

제국의 검성이라 불리는 존재는 단칼에 태산마저 가른다는 소문까지 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무(武)에 대한 재능만 어느 정도 갖췄다면 기를 깨우칠 수 있으며, 단지 깨우친 것은 마법사로 치면 2위계 마법에 도달한 정도다.

거기서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야 도달하는 것이 기사의 조건이었다.

누군가 말하길, 기사는 살인에 특화된 병기라 칭한다.

도적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기사 하나면 모조리 참수할 수 있다. 그러나 마법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애셔 님, 혹여 상대 쪽에 마법사가 있다면, 상대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법사가 원거리에서 마법을 쏟아 내면 병사들은 살아날 방도가 없다. 검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기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러니 마법사의 이목을 완전히 끌 만한 자론 같은 마법사인 베르덴이 적격이었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를 제압하는 데 우선하도록 하죠. 생포할 필요가 있습니까?"

"영주님께선 도적단의 절멸을 명하셨습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일행들은 숲 속에 말을 묶고 경비를 세웠다.

예상지점에 가까워지자 미리 얘기한 대로 베르덴이 마력을 넓게 펼쳤다.

'...딱히 잡히는 건 없는데.'

여긴 아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젓자 당장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엉덩이에 멍이 든 것처럼 아팠지만 마법사 체면이 있는데 내색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노을 질 때쯤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다.

"동부의 마지막입니다. 여기에도 없다면 하루 쉬고, 서부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는 건 말을 더 오래 타야 된다는 뜻. 베르덴은 제발 이곳에 도적이 있기를 바라며 마력을 펼쳤다.

그러던 순간, 무언가 잡혔다. 이질적인 감각으로 보아, 마법진의 일종이 분명했다.

마력이 오래 닿으면 들킬 것이다. 재빨리 마력을 거둬들인 베르덴이 방향을 가리켰다.

"저곳에 마법진이 있습니다."

찾았다.

말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만 두고,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덴이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더니, 나뭇가지를 들어 경계를 그었다.

"여기에서 한 발짝만 더 넘어가면 마법진이 반응할 겁니다."

"흐음... 어떻게 하면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베르덴이 손짓하자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드러났다.

"영지에 이런 게 있었다니...."

숲 일대를 크게 아우른 거대한 돔. 일종의 경보에 가까운 것으로, 마탑에 있었던 것처럼 닿는 순간 상대를 멸살하는 고도의 마법진은 아니었다.

즉, 마탑주의 마법진을 공략한 베르덴을 막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가느다란 마력의 실을 뽑아낸 뒤, 마법진의 틈을 찾아 욱여넣었다. 그 후 20초도 안 되어, 마법진의 일부가 깨어지더니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이 만들어졌다.

"자, 가시죠."

"...."

마법진이란 게 이렇게 쉽게 파훼되는 거였나? 아니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가물거리는 기억을 치운 에녹이 조심스레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갔다.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차례대로 일행들이 들어갔고, 곳곳에 다분한 인적을 따라가자 수십 명의 인간이 조잡한 촌락을 지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두 명의 사내.

안면에 큰 흉터가 있는, 쌍검을 찬 전사와 로브를 두르고 작은 지팡이를 허리띠에 찬 마법사가 도적들을 가리키고 뭐라 지시를 하고 있었다.

척 봐도 평범한 도적들과는 결이 다르다. 분명 두목이겠지.

기습하기 위해, 에녹이 소리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잠시, 에녹 경. 상대 마법사의 경지를 모르는 지금, 무턱대고 기습하는 건 악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마탑의 동력원에 닿기 위해 마법사의 전술마저 자세히 연구했다.

기습에 당한 마법사가 취할 마법은 '마력방벽'. 마법사의 방패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기습을 막아 내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하지.'

베르덴은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기사 일행에게 말했다.

9화 도적 토벌 (2)

모험가란, 사람에게 위협이 되는 아인종과 마수를 사냥하며 때론 미지를 탐구하는 자다.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해마다 길드에 가입하려는 발길은 끊이질 않는다. 실력만 있다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세상이 모험가를 필요로 하니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문제는 존재했다.

아인종과 마수를 상대하며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과 힘을 갖춘 강인한 모험가가 범죄에 발을 디딘다면, 그 칼끝이 죄 없는 사람에게 향한다면 어떻게 될까.

전직 금 등급 모험가, 바르자와 빌셴.

이 둘이 바로 대표적인 예였다.

"기사한테 걸려 토벌당하지 않나, 한 놈 잘 가르쳐 놨더니 웬 오크한테 잡아먹히지를 않나. 여기가 터가 안 좋나?"

바르자가 얼굴의 흉터를 긁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활동 지역을 넓히기 위해, 부하들을 보내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었더니 냉큼 걸려 깡그리 죽어 버렸고.

기껏 촌락을 습격하면서, 말 안 듣는 놈 죽이고 쓸 만한 녀석들을 데려왔는데 또다시 줄어 버렸다.

남은 부하는 고작 40명.

그중 제대로 도적질을 할 줄 아는 놈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빌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작을 너무 우습게 봤다. 도적 잡자고 그렇게 길길이 날뛸 줄 누가 알았겠나."

"쯧. 내가 있었다면 기사 놈을 산 채로 나무에 매달아 놓았을 텐데."

문득 모험가 생활이 그리워진다.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켜도 금 등급이라 길드에서 웬만하면 수습해 줬었는데. 하필 다른 모험가를 죽인 걸 길드장에게 들키는 바람에 쫄딱 망해 버렸다.

현상 수배범이 되어, 왕국에서 도망치듯 나오고 도적질을 하기 시작한 지 벌써 2년.

남은 거라곤 장비들과 식량만 축내는 부하들밖에 없다. 처량한 신세에 바르자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빌셴, 어차피 뜰 거 한탕 더 하고 가는 게 어때? 적당히 큰 마을 하나 뒤집어 까면 부족한 자금도 메우고 남작 배알도 좀 꼴리지 않을까?"

"안 돼. 저번에 네가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바람에 남작의 신경이 곤두섰어. 내 마법진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들켰을 거다."

"흥. 들키든 말든, 모조리 죽이면 되지."

반은 허세였다.

아무리 금 등급 출신이라도 기사 한 명이라면 모를까, 대인전에서 기사 둘 이상을 상대하는 건 꽤나 어려웠다. 그래도 바르자는 자신이 있었지만.

빌셴이 째려보자 바르자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한편에서 놀고먹고 있는 부하들을 향해 손짓하며 짐을 챙기라고 명령했다.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나.

'빌셴이 알아서 하겠지.'

머리 쓰는 건 항상 녀석이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때,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가 스쳤다. 빌셴도 마찬가지였는지 동시에 숲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다섯 개의 불화살이 날아왔다.

"뭐, 뭐야?!"

바르자가 경악하고, 빌셴이 마력방벽을 잽싸게 둘렀다.

콰과광! 연이어 폭발이 일어나며 순간적으로 화염이 시야를 가렸다.

그때였다.

붉은 기운을 두른 기사 셋이 쏜살같이 숲에서 튀어나왔다.

강화된 각력에 발자국이 새겨진 지면. 롱소드를 양손으로 말아 쥔 두 기사가 동시에 방벽을 두들겼다.

쩌적!

순식간에 방벽 전체에 금이 갔다.

빌셴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에녹이 섬전 같은 참격을 쏘아 냈다.

쩍, 갈라진 마력의 벽.

그와 동시에 빌셴의 마력회로에 반동이 찾아왔다.

"커억?!"

이것이 마력방벽의 단점.

빠르게 형성할 수 있으나, 버틸 수 있는 충격량이 그리 크지 않으며 마력을 거두기도 전에 박살이 나면 회로에 타격을 받는다.

베르덴이 병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에녹과 눈을 맞춘 그는 계획한 대로 빌셴과 마주 섰고, 곧 마법전이 펼쳐졌다.

에녹이 헤레스에게 말했다.

"저 흉터 난 도적은 내가 맡겠다. 아무도 죽지 않게 병사들의 통솔을 부탁하지."

"괜찮겠습니까? 나이도 있는데 무리하지 마시지."

걱정 아닌 걱정에 에녹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검을 나눠 볼 만한 자인데 양보할 수야 없지. 그래도 내가 죽을 것 같으면 도와주러 왔으면 좋겠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또 모르니까.

뚜둑. 가볍게 목을 푼 에녹이 검날을 곧게 세우고 쌍검을 든 바르자에게 다가갔다. 도적과 한가롭게 나눌 대화 따위는 없다.

챙! 검과 검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 * *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으로 위계를 판단하는 건, 어지간한 차이가 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도적 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베르덴이 가볍게 마법을 날렸다.

<다중 화염 화살>

다시금 날아드는 불화살. 고통에 겨워하고 있으면 그대로 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빌셴은 과거에 마력방벽이 깨졌던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금세 정신을 차렸다.

<다중 빙결 화살>

콰과광! 콰광!

불과 얼음이 부딪치며 수증기가 자욱하게 펴져 나갔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자, 차가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겨울 돌풍>

3위계 빙결 마법. 수증기가 날아가고 주변 일대가 얼음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베르덴이 서둘러 방벽을 둘러 한기를 막아 냈다. 마력의 벽에 서리가 맺혔다.

"쿨럭! 쿨럭! 흐으... 남작 휘하에 마법사가 있다는 건 듣지 못했는데. 방심하다 한 방 먹었군."

호흡을 가다듬은 빌셴의 손에는 어느새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회로에 적지 않은 부담이 일었을 텐데도 여유가 있는 걸 보면, 생각 이상으로 경험이 많은 마법사인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본 빌셴이 웃음을 흘렸다.

"도적질도 여기까지인가. 기사가 세 명이나 온 걸 보면 바르자도 살아남기 어려워 보이고.... 뭐, 혼자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보내 준다고 한 적 없는데."

베르덴의 말에 빌셴이 히죽 웃었다.

"어린 나이에 2위계라. 아카데미 출신인가? 척 봐도 재능만 믿고 살아온 것 같은데, 마법사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해 주지. 너 같은 놈들은 이 세상에 발에 챌 정도로 많고, 나는─"

<어스 쉐러>

날카로운 암석 파편.

말이 도중에 잘린 게 불쾌했는지 빌셴이 미간을 찌푸리고 대응했다.

<아이시클>. 베르덴이 시전한 마법과 속성만 다른 마법이다. 고드름과 돌조각이 부딪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맨몸인 베르덴과 달리, 빌셴은 모험가 시절에 사용했던 장비를 그대로 쓰고 있다. 캐스팅 속도에서 베르덴이 밀리는 건 당연했다.

곧바로 빌셴이 만들어 낸 커다란 얼음 구체가 맹렬한 속도로 베르덴에게 향했다.

'화력에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렇다면 방대한 마력량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수밖에.

회로 속의 마력이 베르덴의 양손에 집중되며 불꽃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폭염을 담은 화살이 구체와 함께 산화했다.

"불과 땅, 거기다 바람까지.... 허, 그 나이에 3속성을 전부 2위계까지 다룰 줄 알다니 대단하군. 아카데미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었겠어. 분명 미래엔 이름 높은 마법사가 되겠지."

그래서 즐겁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를 죽이는 건, 그야말로 쾌감 그 자체였으니까.

저 회색 머리의 마법사는 지금까지 죽여 왔던 인간들보다 뛰어난 천재. 울면서 구걸할까, 분노하면서 저주를 내뱉을까.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거슬리는군.'

부하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이미 무기를 놓고 항복하는 놈들도 더러 보인다. 그렇게 자신 있다던 바르자는 고작 기사 하나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다른 기사 둘이 합세한다면 자칫 도망칠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 다시금 베르덴의 마법을 막아 낸 빌셴이 정신을 집중했다.

<비행>

몸이 두둥실 떠오른다.

허공에서 마법 화살들을 피해 낸 빌셴이 베르덴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쫓아올 테면 쫓아와 봐라.

그런 의미를 남기고 빌셴이 깊은 숲속을 향해 날아갔다. 도적의 머리를 베어 낸 기사가 소리쳤다.

"여긴 문제없으니 걱정 마시고 쫓아가십쇼!"

'나는 날 수가 없는데.'

비행은 3위계에 이른 마법사의 전유물이다. 2위계의 끝자락에 닿아 있다고 한들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도발하며 속도까지 조절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베르덴이 아니었다.

토벽을 일으켜 가파른 언덕을 만들었다. 그 위를 달려 뛰어내린 뒤, 전력을 다해 돌풍을 시전했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묵직한 충격. 하늘 높이 솟아오른 베르덴의 눈에 빌셴이 비쳤다.

"잡았다."

<돌풍>

"어억?!"

언제 쫓아오나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빌셴이 거센 바람에 휘말렸다.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친 그는 임기응변으로 가까스로 땅에 처박히는 건 피해 냈다.

마법으로 낙하 속도를 줄여 착지한 베르덴. 빌셴이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요즘 아카데미에선 마법을 그렇게 가르치나? 무슨 마법을 그렇게 무식하게─"

<스톤 볼트>

"이런 미친놈이!"

타앙! 사람 머리만 한 바위가 빌셴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쳤다.

벌써 두 번째. 대답 대신에 마법을 날리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예의란 말인가.

이제 봐줄 생각은 없다.

입을 꾹 닫은 빌셴이 본격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콰과광! 쿠궁!

...주변 숲이 무너지고, 불타며 얼음에 뒤덮였다.

단 한 수에 끝날 수도 있는 것이 마법전이었으나, 베르덴과 빌셴의 실력 차는 엇비슷했다. 아니, 빌셴이 위계상 좀 더 앞섰으나 베르덴은 그 격차를 마력량으로 메우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전투의 피로감에 베르덴의 턱 끝에 땀방울이 맺혔다.

"얼굴이 굳었군. 슬슬 한계인가?"

빌셴이 이죽거렸지만 사실 그 또한 여유는 없었다. 마력이 부족해지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고 모험가 생활을 통해 3위계에 이른 지 수년이 지난 지금. 한낱 2위계의 애송이와 호각을 이룰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마력량이지?'

진즉에 마력이 고갈되었어야 정상이거늘.

어쩌면 자신보다도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 하지만 이제 아무 상관 없다. 곧 놈은 죽을 테니까.

"...."

베르덴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로브 끝에는 서리가 맺혔으며,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앞으로 향하고 있던 손이 이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에 빌셴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아이스 스피어>

극도의 한기를 담은 얼음의 송곳.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베르덴에게서 움직임은 없었다.

이겼다.

빌셴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그 순간, 고개를 든 베르덴의 눈이 퍼렇게 빛났다.

<어스 스피어>

쨍강! 마법이 박살 났다. 노을에 반사된 얼음 조각이 하얗게 빛났다. 눈을 부릅뜬 빌셴이 반사적으로 얼음의 벽을 세웠다.

────카앙!

벽을 관통한 날카로운 첨단이 빌셴의 코앞에 멈춰 섰다. 동시에 그의 사고도 정지했다.

'3위계...?'

놈은 분명 2위계일 텐데?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였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머리가 터져 죽었을 거라는 사실 또한 빌셴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때, 그의 발밑이 꿈틀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날아오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어스본>

지면에서 솟아난 가시들이 빌셴의 다리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아악!"

뼈가 부러지고 살이 뜯겨 나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구축하고 있던 마력이 중심을 잃으며 얼음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 너머에 있는 베르덴. 그의 손에는 빌셴과 같은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툭. 지팡이가 핏물 위에 떨어졌다. 빌셴이 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3위계에다가 4속성이라고...? 설마 처음부터 나를 속여─"

역시, 대답은 같았다.

<아이스 스피어>

콰직! 냉혹한 한기가 빌셴의 심장을 관통했다.

10화 광대 오크

어떤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지에 따라, 마법사의 성장 방향은 크게 달라진다.

베르덴이 전공한 원소 계열은 주로 전투에 적합한 마법이 주류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상황에 따라 회로에 흐르는 마력을 급격하게 뒤바꾸고, 하나만이 아닌 다양한 원소를 다루는 것 모두가 성장의 거름이 된다.

그리고 그 약간의 경험이 베르덴을 한층 위로 올라서게 만들었다.

'마법사의 전술이라. 생각보다 배울 게 많았어.'

베르덴이 손등으로 땀을 훔쳤다.

이미 도중에 3위계에 오르긴 했지만,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어 확실하게 승기를 잡는 걸 택했다. 면밀히 상대의 마법을 관찰해 어떤 식으로 대응하며 싸우는지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베르덴에겐 유익한 시간이었다.

'예상보다 도적이 강하긴 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자신의 힘은 동급 위계의 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2위계인 상태에서도 3위계인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으니까. 물론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자칫 부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그것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리라.

베르덴이 앞으로 걸어가 마법사의 시체를 확인했다.

하반신은 어스본에 꿰뚫려 본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고, 심장을 관통한 얼음의 창에 몸 전체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손을 뻗어 마법사의 머리를 향했다.

"...머리까지 날려 버릴 필요는 없겠지."

확인 사살까지 하는 게 안전하긴 하지만, 시체를 온전히 영주에게 확인시켜 주는 게 신뢰를 형성하기 쉬울 것이다. 시체에 남아 있는 흔적들로 실력의 편린을 보여 줄 수도 있고.

손을 거둔 베르덴이 차가운 핏물에 담겨 있는 지팡이를 주웠다.

'마법 물품이군.'

<감정>

이 마법은 물건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습득 난이도는 1위계로 낮은 편에 속하나, 중요한 건 그 구조가 어떤 마법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는지 읽어 내는 것.

그 지식이 너무 방대하기에 감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공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베르덴은 그 예외에 속했다.

◇ 마석 지팡이

⦁ 마법 시전 속도 증가(소)

⦁ 얼음 계열 마법 위력 향상(소)

'쓸 만한데?'

양산형 제품이긴 하나 캐스팅을 보조해 준다. 비유하자면 한 손톱 두 개만큼 정도?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에 목숨이 오가니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한정된 속성이나마 마법의 위력이 향상된다는 것도.

마력으로 만들어 낸 물로 깨끗이 닦아 낸 뒤, 허리춤에 챙겼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어 낸 물건이라 그런지 베르덴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때, 기사 패릭이 나타났다.

"애셔 님! 무사하셨군요!"

'아, 도적 토벌 중이었지.'

마법 물품에 눈이 돌아가 잠깐 잊어버렸다.

표정을 되돌린 베르덴이 이마를 닦는 시늉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예. 꽤 실력이 있는 마법사였던 터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아, 확실히...."

주변이 엉망진창이다. 과정을 보지 않았지만 어떤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지 상상이 된다.

그런데도 신체의 태반이 박살 난 도적 마법사와 달리, 몸에 생채기 하나 없는 베르덴의 모습에 패릭이 내심 감탄했다.

"패릭 경, 그럼 도적 토벌은 끝난 겁니까?"

"아직 두목이 날뛰고 있지만 그 외의 도적들은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사실상 시간문제나 다름없죠. 돌아가면 거의 끝나 있을 겁니다."

젊은 기사 패릭의 얼굴은 핏방울로 얼룩져 있었으나 밝았다. 다행히 병사들의 피해는 전무한 것 같다.

"그럼 시체를 챙겨서 돌아가도록 하죠."

"...그런데 이 도적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의 처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물론, 소유권은 애셔 님에게 있습니다. 영주님께서 말하시길, 애셔 님께서 도적의 소유물을 원한다고 한다면 가능한 들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영주님이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패릭을 따라 도적단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곳곳에 도적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항복한 도적들은 병사들의 창날 앞에 덜덜 떨고 있었다.

기사 에녹과 맞서던 바르자가 만신창이로 돌아온 빌셴을 목격했다.

'빌셴이 죽었어...?'

낭패다. 빌셴이 없다면 이 포위망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동요를 숨기지 못한 바르자의 얼굴에 미약한 공포가 서렸다. 결코 느끼고 싶지 않았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쌍검을 꽉 쥔 바르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내가 이런 촌구석에서 죽는다고? 그럴 리가!'

아직 못 해 본 것이 너무 많다. 자신의 자유를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

어떻게든 탈출해야 한다. 그 방법은 하나뿐. 상대하던 기사를 단칼에 죽인 뒤, 놈들이 숨긴 말을 찾아 도망치는 것밖에 답이 없다.

각오를 다진 바르자에게서 뜨거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쿵! 바닥을 박차자 에녹 또한 기를 움직여 검에 담았다.

바르자가 의도한 대로. 그가 노리는 건 두 번째 일격.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왼손의 검이 기사의 목을 베어 낼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검이 닿기 직전, 에녹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을 회수했다.

"어?"

카앙. 기세와 달리 미약한 소리. 에녹이 충격과 함께 검을 놓아 버렸다. 그 탓에 체중이 한쪽에 쏠린 바르자가 크게 중심을 잃었다.

"걸렸군."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든 에녹이 바르자의 목과 팔을 감싼 뒤, 땅으로 몸을 내던졌다. 기운으로 강화된 근력에 순식간에 바르자가 끌려 내려갔다.

서로가 뒤엉켜 땅을 굴렀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에녹이 양발로 바르자의 팔과 다리를 제압했다.

그러곤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칼끝이 닿자 바르자의 목에 피가 흘렀다.

"잠깐! 기, 기사란 자가 검을 버리고 싸워도 되는 거냐?! 그러고도 기사란 말이냐!"

"허,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푸욱.

"이게 실전이다, 도적 놈."

끄륵. 끄르륵. 피거품을 문 바르자의 몸이 벌벌 떨리다 축 늘어졌다. 단검을 비틀어 확실하게 끝낸 에녹이 시체를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던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흠흠. 젊어서 그런지 체력이 남아돌더군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정면에서 목을 베었을 텐데...."

에녹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의 체면이란 게 있는데 외지인 앞에서 검을 버리고 흙투성이로 승리를 거머쥔 건, 조금 부끄러웠다.

정작 베르덴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런데 저 도적들은 뭡니까? 전멸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본래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병사들이 도적들 중에 아는 얼굴이 있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번에 촌락을 습격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세력으로 흡수한 것 같은데, 일단 성으로 데려가 진위 여부를 확인한 뒤, 처형하거나 구제할 예정입니다."

기사 헤레스의 말에 무릎 꿇은 도적 몇몇이 흠칫 몸을 떨었다.

살아남은 도적들인가? 영주 성에 가면 이도 저도 못 하고 처형당할 게 뻔하니 도축장에 가는 기분이겠지. 뭐, 자업자득이다.

그렇게 병사들이 도적들을 강제로 일으키던 도중, 구석에 있던 도적 하나가 병사를 세게 밀치곤 숲으로 몸을 날렸다.

"흐아아아악!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헤레스의 말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는 걸 보아하니 습격당한 촌락의 주민이 아닌 게 확실하다. 그렇다면 사로잡는 것보다 본보기로 즉결 처형하는 것이 나을 터.

그런데 놈을 쫓으려는 순간, 숲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진 숲. 불길함을 느낌과 동시에 금속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피 냄새...?"

주변엔 도적들의 피가 가득했으나 지금 느껴지는 건 그보다 훨씬 짙었다.

베르덴이 곧바로 마력을 펼쳤다. 숲속에서 수십 개의 생명 반응이 감지되었다.

이건....

"아인종?"

"아인종이라면... 고블린이나 오크 말입니까?"

에녹의 말에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마리가 넘는 오크와 수십 마리가 넘는 고블린. 아인종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숫자가 꽤 많긴 하지만 베르덴 혼자 상처 없이 토벌이 가능한 수준.

그러나 쉽사리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대체 저건 뭐지?'

최전선에 선 오크.

마력감지로 봤을 때 기존의 오크보다 거대한 체격을 지녔다. 오크의 진화종이라도 되는 건가? 뭐가 됐든 놈이 아인종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쿵. 쿵. 쿵.

서서히 커져 가는 발걸음 소리.

이윽고 숲속에서 뭔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헤레스가 곧장 반응하며 검을 휘두르자, 방금 도망쳤던 도적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그리고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옆으로 찢어진 입과 2미터를 훌쩍 넘는 거체. 베르덴과 기사 그리고 병사와 붙잡힌 도적들을 죽 둘러본 괴상한 오크가 입을 쩍 벌렸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

숲을 뒤흔드는 괴성.

몸을 들썩이는 놈의 목에선 피로 물든 금색 플레이트가 짤랑거렸다.

* * *

'저건 분명....'

찌그러지긴 했지만, 아침에 봤었던 금 등급 모험가의 목에 걸려 있던 것과 같았다. 그리고 왼손에 들고 있는 검까지.

그걸 본 기사들의 눈빛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아무래도 모험가들이 토벌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아인종의 처리는 모험가 길드의 몫이지만, 정황상 토벌에 나선 금 등급 모험가를 비롯한 다른 모험가까지 몰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상위종도 아닌 오크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마주한 이상 전투는 피할 수 없다.

꽈드득.

에녹이 검 손잡이를 강하게 말아 쥐었다.

그러자 괴상한 오크가 돌진하며 숲속에 숨어 있던 아인종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전원 방어 대형! 오크와의 교전은 피하고 고블린을 우선으로 처리하라! 저 괴물은 우리들이 맡겠다!"

콰앙!

오크의 검과 에녹의 검이 부딪치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예상을 넘어선 무지막지한 근력에, 에녹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크읍...!"

바닥을 뒹군 에녹이 신음했다.

성큼 다가온 괴물이 머리를 짓밟으려 하자, 기사 패릭과 헤레스가 서로의 검을 교차하며 놈의 앞꿈치를 절단했다.

그 뒤에서 베르덴이 오크에게 지팡이를 겨냥했다.

<아이스 스피어>

콰직!

어깨를 관통한 빙결의 창.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어 근육과 신경을 마비시켰다.

기우뚱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는 오크. 그 틈을 노린 에녹이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압!"

촤아악! 검을 비틀며 뽑아내자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다고 해도 저 정도의 치명상을 입고 살아남을 순 없었다.

그런데 오크는 보란 듯이 그 기대를 배신했다.

덥썩.

[키에에엑?!]

오크가 근처에 있던 고블린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집어삼켰다.

피와 고기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상처를 입었던 부위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한층 더 근육이 융기했다.

어깨에 꽂힌 얼음을 뽑아 부순 놈이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던졌다.

"뭣?!"

눈을 부릅뜬 헤레스가 급히 검을 들었다.

쩌어엉!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난 검. 그 조각이 비산하며 헤레스의 전신에 박혔다.

"아아아아악!"

"헤레스!"

"조심해라, 패릭!"

오크가 달려와 패릭에게 팔을 휘둘렀다.

기를 활성화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이전과 달리 절단은커녕 근육에 틀어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패릭에게 닿기 직전.

<어스 쉐러>

수십 개의 돌조각이 오크의 머리를 두들겼다.

피와 부러진 이빨이 후두둑 떨어졌으나 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패릭에게 손을 뻗었다.

다행히 닿기 전에 뒤로 후퇴했으나 상황이 더 나아진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지.

패릭이 마치 바위를 때린 듯한 감각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대체 어떻게 상위종도 아닌 오크가 이런 힘을... 설마 이게 그 특수 개체라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세계의 역사에 기록되어 왔던 그 특수 개체 중 하나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파이테 영지민까지 전부 몰살당할 것이다. 과한 생각이긴 했으나, 저 소름 끼치는 입을 보니 도저히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어, 어째섭니까?"

"간단한 이유입니다."

저 광대 같은 오크는 확실히 강하다.

섭식을 통한 뛰어난 재생력과 기사마저 압도하는 근력. 거기다 휘하의 아인종에게 광기를 일으켜 움직이기까지. 말 그대로 일반적인 오크와는 격이 다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너무 약하니까요."

결코 베르덴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이미 머릿속에 놈을 죽일 방법이 수십 가지가 떠올랐으니까.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피해가 적겠지.'

저 기분 나쁜 광대 오크만이 아니라 병사들과 맞서고 있는 아인종 무리까지.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한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지형조작>

11화 연회

일반적인 마법에는 각자 정해진 한계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2위계 <다중 화염 화살>. 최소 2개에서 최대 5개의 불화살을 쏘아 내는 이 마법은, 아무리 마력을 불어넣는다 한들 5개 이상의 화살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다 한계를 넘어서면 마법 자체가 소멸된다.

그것이 마법의 법칙이었다.

그 부분에서 봤을 때, 3위계 <지형조작>은 특별한 마법이라고 볼 수 있다.

정해진 한계가 존재하지 않아, 이론적으로 마력만 있다면 거대한 산마저 움직일 수 있다고 마탑에서 발표하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이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 마법사는 없다.

이유는 효율이었다. 이걸 사용할 바에 한 단계 낮은 2위계 마법을 쓰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위력에 비해 마력 소모가 매우 극심했다.

거기서 베르덴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효율을 무시할 정도로 방대한 마력만 있다면 3위계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건가?'

역발상.

이것이 그 생각의 결과였다.

쿠구구구구...!

서서히 땅이 진동하며 주변의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렸다. 휘청거리던 병사들이 간신히 땅에 창을 꽂아 중심을 유지했다.

"가, 갑자기 뭐야?! 지진인가!"

"도망쳐야 되는 거 아니야?"

"애셔 님의 마법이다! 동요하지 말고 제자리를 유지해라!"

에녹이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그도 내심 당황하긴 마찬가지.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기에 베르덴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순간.

쩌저적!

흙이 튀며 지면에 원 모양의 금이 생겨났다.

정확히 병사들의 발 앞에 난 틈새. 그 바깥에 있는, 아인종이 서 있는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고블린 몇 마리가 오크에게 깔려 압사했고, 사방에 흩어져 있던 놈들이 순식간에 광대 오크가 있는 위치로 모이게 되었다.

'마력 소모량은 이 정도인가. 확실히 효율 자체는 별로군.'

하지만 문제없다.

방대한 마력이 베르덴의 심장에서 맥동하고 있었으니. 마력회로를 질주한 마력이 속성으로 변질되었다.

<화염구>

콰과광!

타오르는 구체가 폭발하며 광대 오크의 주변을 집어삼켰다. 베르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연이어 불덩이를 날렸다.

[그아아아아!]

[키에에에에에엑!]

수십 개의 형체가 불길 속에서 스러졌다.

이걸로 대부분의 아인종은 잿더미로 변했으나 예상대로 광대 오크를 죽일 수는 없었다. 놈이 주위에 있던 사체를 씹어 먹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딴 것으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듯, 히죽 웃으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그것이 베르덴의 노림수인지도 모른 채.

[그어어어어어어어!]

지면을 울리며 놈이 돌진했다.

멀리서도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베르덴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파도>

거센 물결이 화염을 가라앉히고 광대 오크를 휩쓸었다.

수증기가 시야를 가리며 놈과 그 주변이 축축하게 젖었다. 속성 연계를 하기엔 최적의 환경.

지팡이 끝에 서늘한 한기가 맺혔다.

<다중 빙결 화살>

<겨울 돌풍>

겨우 살아남았던 아인종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앞에서 돌진해 오던 광대 오크의 몸 또한 마찬가지.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상으로 인한 기능의 상실은 피할 수 없다. 몸이 둔해지는 걸 느낀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베르덴에게 팔을 뻗었다.

가까스로 닿을 거리였다.

"애셔 님!"

그러나 에녹의 걱정이 무색하게, 베르덴의 움직임은 평범한 마법사답지 않았다.

역으로 팔 안쪽을 파고들어 광대 오크의 뒤를 잡은 뒤, 땅을 박차며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놈의 등 뒤에 서리의 구체를 남긴 채.

<프로즌 오브>

빙결 계열의 지속형 범위 마법.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주변에 휘몰아쳤다.

[그... 어...!]

마법에 그대로 노출된 광대 오크의 피부가 퍼렇게 질렸다.

서서히 굳어 가는 육체. 여전히 고통은 없었으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다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바닥에서 흙이 솟구쳤다.

<지형조작>

콰과과과!

거대한 돔이 일대를 감쌌다. 통상적인 3위계 마법사는 엄두도 못 낼 마력이 소모되었지만 베르덴에겐 충분한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때, 돔의 일부가 무너지더니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

광대 오크였다.

방금까지 보였던 웃음기는 사라진 지 오래. 호흡기가 얼어붙어 제대로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스스로 얼어붙은 몸을 깨부수고 재생하려 했으나, 바싹 타 버린 아인종의 사체를 먹어도 충분한 영양을 얻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나가야 한다.

생존을 갈망하며 광대 오크는 희망을 갈구했다. 틈새를 비집고 나온 머리가 베르덴과 마주쳤다.

"아직 덜 얼었나."

그럼 다시 들어가야지.

다시 한번 솟구쳐 오른 흙이 돔을 크게 덮었다.

쿵! 쿵! 안쪽에서 느껴지는 진동. 작게 난 틈새에서 놈의 손가락이 삐져나왔다. 기사들이 곧바로 검 끝을 향했으나, 광대 오크의 움직임은 거기까지였다.

...적막이 흐른다.

에녹이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베르덴에게 물었다.

"죽은... 겁니까?"

"죽었습니다."

확신이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흙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숨결마저 얼어붙어 있는 광대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군요."

베르덴의 동의하에, 에녹이 광대 오크의 손목을 베어 갈랐다.

절단된 부위가 산산조각이 났다. 붉은 단면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여전히 반응이 전혀 없는 걸 보아 죽은 게 확실했다.

상황 종료.

에녹이 검을 거두자 주변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 * *

도적의 마차를 이용해 부상자들을 실었다.

헤레스의 부상이 가장 심하긴 했으나 중요한 혈관이나 신경은 무사했기에 목숨에 큰 지장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는 전무했다.

"기사들도 고전한 오크를 그렇게 쉽게 죽이다니. 애셔라고 했나? 저런 사람을 보고 천재라고 하는 거겠지?"

"그렇겠지. 저렇게 어린 나이에 천재 마법사라. 게다가 얼굴까지... 아니 시발, 이게 나라냐? 뭐 이리 불공평해?"

"병신아! 목소리 낮춰! 마법사 잘못 건드렸다가 뒈진 사람 얘기 못 들어 봤어?"

경악, 두려움, 질투, 감탄 등.

베르덴에게 익숙지 않은 시선들이 집중되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전부가 마탑의 밑바닥에 있을 땐 느껴 보지 못한 감정들이었으니까.

에녹이 다가와 베르덴에게 감사를 전했다.

"애셔 님이 아니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뢰받은 내용의 연장선이니."

딱히 위험하지도, 힘겹지도 않았다. 적어도 베르덴에게 그랬다.

광대 오크와의 상성은 베르덴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목숨을 빚진 건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영주님께 애셔 님의 활약을 잘 말씀드려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부족하다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안 그런가, 패릭?"

"부족하지 않게 어떻게든 영주님을 설득해야겠군요."

농담을 주고받으며 전투의 여운을 가라앉혔다.

그동안 병사들이 도적단의 두목으로 추정되는 두 구의 시체를 말에 실었다. 살아남은 도적들은 줄줄이 밧줄에 손이 묶인 채, 말에 이끌렸다.

아무리 촌락민이 있다는 얘길 들었어도, 사실 관계가 파악되기 전까진 죄인으로 취급할 생각인 것 같다.

아인종이 노획했던 모험가들의 유품도 챙겼으니 주변에 있는 시체들만 처리하면 끝이다.

이건 베르덴이 직접 나섰다.

마법으로 도적단의 거점을 완전히 허물고, 지형까지 조작해 시체와 흔적을 지면 아래로 옮기니 깨끗한 공터가 만들어졌다.

'아니, 무덤인가?'

어쨌든.

무덤 위에는 얼어붙은 광대 오크의 사체만이 남게 되었다.

모험가들을 학살한, 일반적인 개체가 아닌 이 괴물을 모험가 길드에 가져가면 막대한 포상금을 받을 수 있기에 남겨 둔 것이었다.

'그와 별개로 궁금한 게 있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얼려 죽인 것이다.

<염력>

광대 오크가 두둥실 떠올랐다.

에녹이 깜짝 놀라 물었다.

"저걸 가져가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아침에 병사들을 통해 가져오는 게...."

"괜찮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요."

"허...."

그 정도의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마력이 남아 있단 말인가.

마법사에 대해 잘은 몰라도 베르덴이 평범함을 아득히 벗어났다는 것은 분명했다.

노을이 거의 저물고 밤이 찾아온다.

횃불 대신 주변을 환하게 비춘 마법의 촛불. 한밤이 되어서야 영주 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베르덴의 첫 도적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 * *

호흡을 내쉰 베르덴이 정신을 집중했다.

며칠 전까지와는 격이 다른 양의 마력이 회로를 타고 흐른다.

수많은 마법사가 도달하지만 끝내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3위계. 고작 25살의 나이에 이뤘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재(英才)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베르덴의 육체는 특별하다.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임에도 속성에 제한받지 않는 마력회로. 이러한 회로를 타고난 존재는 이 세계에도 거의 없다.

손바닥 위에 넘실거리는 마력. 베르덴이 그럴 생각만 있다면 어떤 속성으로든 변화가 가능했다.

'다행히 내가 기억하는 마법 중에 틀린 부분은 없어.'

3위계에 해당하는 마법의 숫자는 방대하다.

원소 계열만 따지더라도, 자잘한 것부터 시작하면 세 자리 수는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다. 베르덴의 머릿속엔 그것들이 통째로 새겨져 있었다. 마탑의 실험으로 인한 여파이기도 했다.

회로에 가득 찬 마력을 천천히 회수했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애셔 님! 저 콘라드입니다. 연회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곧 나가겠습니다."

옷장을 열어 꽤나 고급스러운 옷을 꺼냈다.

오늘 아침, 콘라드가 하인을 통해 보내 준 선물이었다. 짙은 푸른색이 베르덴의 눈 색깔과 잘 어울렸다.

콘라드와 함께 연회장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즐겁게 잔치를 열고 있었다. 기사와 마주하고 있던 파이테 영주가 이쪽에 시선을 향했다.

"아! 어서 오게, 애셔. 자, 여기 앉아서 와인부터 들게. 도수가 높지 않으니 입맛을 돋우기엔 딱 알맞을 걸세."

영주의 손에 잡힌 베르덴이 영문도 모른 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새콤하네. 도수도 높지 않고.'

그런데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지?

어제 갑자기 연회를 열겠다는 것도 그렇고. 살짝 취기가 돈 영주는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흘 전에 토벌한 도적단 말일세. 도적치곤 상당히 강하지 않았던가?"

"...제가 아는 도적하고는 많이 다르더군요."

사회에서 대우받는 3위계 마법사와 기사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쌍검사.

그 정도 실력을 가졌다면 굳이 도적질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영주가 품에서 낡은 종이 두 장을 꺼내 베르덴에게 보였다.

현상 수배서. 일전에 봤던 두 도적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바르자 그리고 빌셴.

사망이나 생포 시 현상금은 1,000만 엘크.

"1년인가 2년쯤 전에 들어온 건데, 이 두 녀석은 모험가 출신이라더군. 그것도 금 등급에 해당하는 모험가. 동료 모험가를 죽이고 도주했다는데 왕국의 국경을 넘고 행방이 묘해졌다더니, 도적단을 만들고 다니다 여기 남작령에 기어들어 온 모양이야."

금(金). 모험가 여덟 등급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많은 실적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신분이다.

그런 자가 범죄자가 되어 날뛰었으니 무려 1,000만 엘크나 되는 현상금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영주의 표정이 밝았었나?'

만약 마법진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극단적으로, 마법사가 마을에 마법을 난사하기라도 하면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그걸 미연에 방지했으니 영주 입장에서는 좋을 수밖에 없겠지.

"후우, 자네를 고용하길 잘했어. 도적만이 아니라 모험가들을 몰살한 아인종들마저 처리해 줬으니. 모험가 길드에서도 감사하다고 곧 연락을 준다더군. 영지 전체가 자네에게 빚을 진 것이나 다름이 없어."

'아니,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너무 과하다.

베르덴이 부정했으나 술에 취한 영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잡혀 온 도적들 중에서 촌락민을 풀어 주고 나머지 도적들은 며칠 뒤에 처형할 생각이네. 덕분에 무사히 끝났어. 놈들에게 당한 영지민들이 있긴 하지만 장례를 잘 치러 줬으니.... 아,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졌군. 크흠, 자! 모두 잔을 들게!"

영주가 소리치자 병사들이 한데 모여 잔을 들었다.

죽은 촌락민들을 애도하고, 도적 토벌에 가장 공을 쓴 기사와 베르덴을 간단히 소개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평화를 위하여!"

──위하여!

다 함께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마탑과 전혀 다른 분위기라 그런지 너무 생소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제서야 베르덴도 연회를 즐겼다. 영주나, 콘라드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까지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감정을 공유했다.

도중에 음식을 나르던 하녀가 베르덴에게 슬쩍 호감을 비친 것 또한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연회는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