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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길드의 요청 (1)

마르테스에 온 지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베르덴은 이리스를 데리고 도시 밖에 나와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홀로 돌아다니고 있는 오크가 보였다.

"마법사가 저걸 때려잡겠다고요? 원소 마법 없이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권의 책을 읽고도 모자라, 이론을 강의해 주는 대가로 이리스에게 직접 2위계의 부여 마법까지 배운 지금. 종합적으로 어느 수준까지 올라왔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근력 강화>

<반응속도 강화>

<지각 강화>

<보호막 부여>

<마력집중>

부여 계열 마법은 고위계로 갈수록 피시전자가 느끼는 부담을 덜어 준다.

갑자기 근력이 강해지고, 시력이 좋아진다고 해도 곧바로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법이 끝나고 났을 때의 상실감도 확연히 줄어든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꽉 쥐었다.

2위계에 불과한 터라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오크를 상대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면을 박차고 오크에게 육박했다.

쩌억! 일격에 무릎을 박살 냈다.

그어어어어어!

허리를 숙여 오크의 손을 피하고, 스태프를 강하게 올려쳤다. 아래턱이 쪼개지자 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어 스태프로 오크의 몸을 젖힌 다음, 힘껏 뒤통수를 때려 부쉈다.

쿠웅.

마법사가 육탄전으로 오크를 죽이기까지 단 13초.

이 정도면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모험가로 치면 은 등급에 준하는 실력이었다.

이리스가 작게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어떻게 사람이 못 하는 게 없지?'

부여 계열은 나름대로 난이도가 있는 마법인데 알려 주는 대로 족족 쓰지 않나. 그걸 며칠 연습도 하지 않고 실전에서 써먹질 않나. 마법산데 근접전도 잘하지 않나.

이건 뭐 숫제 괴물이다.

그리고 마법 이론은 또 어떻고.

그녀가 평생 동안 배운 걸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완전히 정립해 준 것도 모자라, 이후의 방향성까지 제시해 주었다.

아카데미의 인기 교수조차도 이렇게 해 주진 못했는데.

'거기다 인물까지 좋으니....'

저 사람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면 어땠을까? 분명 여러 국가에서 러브 콜이 쏟아지고, 아카데미 역사상 유일무이한 천재 마법사로 등극했을 것이다.

여자들도 줄줄이 달고 다녔겠지.

'아니, 그건 아닌가?'

이리스, 그녀도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안할 만큼 베르덴은 무관심했다.

원래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설마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닌데."

베르덴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를 지나쳐 갔다.

실전 연습도 끝났으니 마르테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잇던 이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저기, 선배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리스의 변명은 성문을 지나가기 전까지 이어졌다.

* * *

베르덴의 일과는 언제나 비슷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몸을 풀고, 식사를 마친 뒤 마법진에 집중한다.

그 후 점심이 지나면 회로를 활성화하고 마법의 숙련도를 쌓는다.

강의 시간이 되면 이리스에게 이론을 가르쳐 주거나, 약속이 없는 날엔 홀로 숲으로 가서 아인종을 상대로 마법을 연습하기도 한다.

하루 온종일 자기 개발에 몰두하는 베르덴의 삶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방으로 돌아가자, 한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혹시 시간 되나?"

모험가 길드장, 오스카.

그가 베르덴을 찾아왔다.

* * *

베르덴이 오스카에게 차를 내줬다.

한 모금 홀짝인 그가 눈을 부릅떴다. 기본적인 맛은 같아도 느껴지는 풍미는 전혀 다르다.

하긴 당연했다. 차를 타는 것도 마탑에서의 옛 일과 중 하나였으니.

오죽하면 베르덴을 무시하던 마탑의 마법사마저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마법사는 나한테 머리가 터져 죽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오스카 앞에 마주 앉았다.

"차 맛이 좋군. 마법사가 되기 전에 카페에서 일이라도 했나?"

"뭐, 비슷합니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음. 그러니까 그게...."

오스카가 말하기를 주저하며 이마를 긁었다.

"혹시 언데드에 대해 알고 있나?"

언데드, 죽음을 거역한 부정한 존재.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사기(死氣)는 산 자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하며, 새로운 언데드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인간에겐 타협이 없는 악. 숫자가 늘기 전에 최우선적으로 토벌해야 하는 대상이다.

세간에선 이런 언데드나 뱀파이어, 슬라임, 악마 등 스스로 죽지 않는 존재를 일컬어 '이형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갑자기 언데드는 왜...?

베르덴의 물음에 오스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 비르온 영지에 있는 갱도에서 언데드가 출몰했다더군. 겨우 살아남은 광부가 재빨리 신고를 했지만, 어찌나 숫자가 많은지 전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라는 모양이야."

해골 형태의 언데드는 화살이나 검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망치 같은 둔기류가 제격인데, 병사들의 기본 장비가 아닌 만큼 수급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모험가는 없습니까?"

"그쪽 영지에도 있기야 하지만, 실력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딱히 돈이 되는 아인종이나 마수가 나오는 곳이 아니니까. 그래도 금 등급이라든가, 영지의 기사단 덕에 버티곤 있지만.... 사실 다음에 할 말이 자네를 찾아온 용건이기도 하지."

모험가들은 목숨을 거는 일이 다반사지만, 그렇기에 소문이나 징크스에 매우 민감하다.

제대로 된 실력도 보이지 못하고 어이없게 죽는 일은 그들이 극도로 기피하는 죽음이었다.

언데드는 불길한 존재다. 그건 자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언데드에 닿으면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더라, 죽은 자의 원한이 평생을 따라다녀 불행을 내린다더라 하는 근거도 없는 소문들이 모험가를 위축시킨다는 것이었다.

그게 현재 비르온 영지에서 언데드를 막을 수 없는 이유였다.

진원지인 갱도로 들어가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언데드를 몰살해야 하는데, 가기 싫다고 발을 내빼 버리니.

기사단을 보내고 싶어도, 혹여 모두 죽기라도 할까 봐 영주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각 영지에 지원을 요청했다.

돈을 달라는 대로 줄 테니, 제발 저 언데드를 좀 처리해 달라고.

"그런데 마르테스 모험가들이 가지 않겠다고 한 겁니까?"

"그렇지. 정확히 말하자면 있기야 있었지만 숫자가 턱없이 적어서 말이야. 지원을 보내는데 달랑 네 명은 좀 그렇지 않나? 마르테스의 체면도 있고...."

"제가 간다고 해도 고작 다섯 명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자넨 다르지. 자네는 마르테스를 구한 천재 마법사가 아닌가."

나이 지긋한 사내의 아부에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이걸 받아야 되나?'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외부인에게 길드장이 직접 찾아오다니.

당장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베르덴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언데드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흥미가 있었다. 언데드라는 게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죽음의 기운이 만연한 환경을 만드는 건 마탑에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성공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지탄받을 게 분명했다. 특히 빛의 신을 믿는 루아스 교회에서.

죽음을 연구한다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베르덴의 시선이 길드장을 향했다.

오스카가 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언데드가 출몰했으니 루아스교에서도 움직일 텐데, 그쪽에서의 연락은 없었습니까?"

"안 그래도 말하려던 참이었지. 교회에서도 정식 성직자를 몇 명 파견한다더군."

성직자가 가진 신성력은 언데드에게 치명적이다.

즉사에 가까운 상처를 입지 않는 이상, 부상마저 치유해 줄 터.

'뭐,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긴 했지.'

언데드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베르덴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르덴이 마법사로서 활약할 기회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모험가 길드장이 직접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돈도 벌고.'

베르덴은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바, 받아 주는 건가?"

"예. 출발은 언제쯤 하면 되겠습니까?"

"이틀, 아니 삼 일 뒤에 출발하면 딱 맞을 거야. 애셔, 자네야 비행으로 날아가면 된다고 하지만 그런 수고를 하게 할 수야 없지.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비싼 마차를 수배해 주지."

오스카가 웃으며 베르덴을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길드장이 직접 대접해 준 식사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 * *

시간이 지나, 출발 당일.

베르덴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성문으로 향했다. 다른 영지에 가는 김에 마흐바트의 가죽이나 녹슨 반지도 챙겼다.

바빠서 가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한꺼번에 맡길 생각이었다.

'어쩌다 보니 짐을 전부 가져왔군.'

딱히 짐이랄 게 없기도 했지만, 마탑에서 가져온 보물들을 몸에서 떼어 낼 순 없었으니까.

베르덴이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상인 콘라드가 몰고 다니던 짐마차와 달리, 오로지 사람을 태우기 위한 마차가 두 대 서 있었다. 그 앞에 사람이 몰려 있었다.

'길드장이 말한 모험가 팀인가.'

마차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누군지 보였다.

"아! 선배님!"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지?"

"왜긴요. 저희도 의뢰를 받았으니까죠. 정확히는 짐꾼 겸 보조 역할이지만."

이리스, 그녀가 리더로 있는 모험가 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도시 바깥에서 한 번, 그리고 감사 인사를 전하러 한 번 그리고 지금 만난 것까지 합치면 벌써 세 번째니까.

베르덴이 그들을 둘러봤다.

로크와 마일드는 긴장한 탓에 몸이 굳었고, 미르나는 이리스의 뒤로 몸을 숨겼다. 베르덴의 실력을 눈앞에서 봤기에, 해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의뢴지 알고는 있지?"

"예? 그야 당연하죠."

"언데드가 무섭지 않은 건가?"

"이래 봬도 아카데미 출신이에요. 언데드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유언비어라는 건 다 알고 있죠. 그래도 꺼림칙하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저희가 가진 전력으로 언데드 몇 마리 정도는 토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다.

베르덴이 봤을 때, 이리스들은 아직 어려도 기본기 하나는 탄탄해 보였으니까. 오크보다 약한 스켈레톤 몇쯤은 상대도 안 될 거다.

"그리고 저희가 맡은 건 다른 모험가들을 보조해 주는 거예요. 갱도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만 해도 돈도 주고, 승급에 가산점도 준다니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저는 무릇 모험가라면 쓸데없는 소문에 겁먹지 않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용은 아니고?"

"...두 단어를 헷갈릴 나이는 이미 지났어요."

이리스가 마차에 훌쩍 올라탔다. 다른 세 명도 그녀를 뒤따랐다.

베르덴과 눈을 마주친 다른 모험가 팀은 간단히 눈인사만 한 뒤, 앞에 있는 마차에 탑승했다. 이리스가 베르덴에게 손을 뻗었다.

"안 갈 거예요, 선배님?"

"...가야지."

작게 한숨을 쉰 베르덴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이번 의뢰가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심심한 의뢰는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27화 길드의 요청 (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마부들은 평소 야영하는 장소를 찾아 마차를 세웠다.

그러곤 순식간에 불을 피우고 스튜를 끓이며, 텐트를 쳤다. 전문적으로 운송업을 하는 이들이라 그런지 움직임 하나하나가 서로 척척 맞아떨어졌다.

그사이 모험가 일행은 밖으로 나와 시간을 보냈다.

미르나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울상을 지었다.

'답답해서 숨도 못 쉬겠어.'

베르덴은 그저 창문 밖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르나는 무서웠다. 얼굴만 보면, 사람의 머리를 주저 없이 날려 버리는 동굴 속 광경이 떠올랐다.

로크와 마일드도 마찬가지였는지 몸이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이리스가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살인을 목격한 것이니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미숙한 모험가들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흔히 넘는 벽이기도 하고.

"식사하세요, 모험가님들!"

마부들이 정성스레 스튜를 담아 한 명씩 건네줬다. 소고기 육수가 제대로 우러난 비프 스튜를 든 모험가들이 각자 팀대로 모였다.

혼자 느긋이 스튜를 맛보려 했던 베르덴을 이리스가 붙잡았다.

"혼자 어디 가요? 그냥 여기서 먹어요."

"...."

할 수 없이 베르덴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을 불편해하는 게 훤히 보였으니까. 마탑에서 눈치만 보던 시간만 한 세월이다.

이리스가 팀원들에게 뭐라 말을 하더니, 베르덴 옆에 앉았다.

"...저쪽에서 먹지?"

"그러고 싶은데 선배님이 자꾸 떨어지려 하잖아요. 모처럼 저희 팀원하고 친해질 기회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그, 애들이 선배님을 좀 과하게 무서워하는 것 같긴 하지만요."

"신경 안 써."

이리스는 그 말을 아예 관심조차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녀가 본 베르덴은 남들과 쉽게 친분을 맺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오직 흥미만으로 움직이며, 관심이 없는 것엔 일절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나저나 그 답답한 마차를 며칠 동안 타야 되는 건가?'

어색함에 숨 막혀 죽을 정도의 분위기.

이리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스튜를 한입 먹었다. 기분과는 다르게 맛은 좋았다.

그때, 베르덴이 작게 말했다.

"이리스, 저 모험가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네? 아 저분들이요?"

서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스튜를 먹고 있는 네 명의 모험가. 이리스가 하나씩 가리켜 가며 소개했다.

은 등급, 메아린과 록스.

동 등급, 발터와 디클린.

모험가 길드를 들락날락하다 보니 이리스와 면식은 있었지만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대개 모험가가 그렇듯 돈을 좇는 사람들이고, 최소 1년 이상을 마르테스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뿐.

'갑자기 칼을 빼 들진 않겠군.'

암살을 당할 뻔했던 베르덴이기에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 록스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를 긁은 그가 스프를 들고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합석해도 되나?"

"마음대로."

록스가 맞은편에 앉았다.

스튜를 우물거리며 베르덴을 힐끗 훔쳐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이... 신문에 나온 그 마법사가 맞나?"

"신문?"

록스가 얇은 신문을 건넸다.

마르테스에 있는 신문사가 발간한 것이었다. 주욱 읽자 한 면에 로릭스 여관 폭발 테러 사건이라고 큼지막하게 글이 실려 있었다.

"맞나 보군."

록스가 품을 뒤적거렸다.

칼인가? 아니면 독? 뭐든 상관없다.

베르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푸른 눈동자가 빛나며 마력이 흘러넘쳤다.

심상치 않은 마력을 느낀 이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스튜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록스가 꺼낸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인 좀 부탁해도 되나?"

...사인?

* * *

베르덴은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사실 마르테스에서 그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오갔다.

마르테스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외모를 가진 마법사. 신문엔 신원 불명의 마법사라고밖에 게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모험가를 비롯한 알 만한 사람들은 그 마법사가 애셔임을 눈치챘다.

"저 사람이 그 미친 마법사라고? 저 얼굴로?"

"그렇다던데.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든가."

하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오직 자신에게 몰두하는 베르덴의 분위기는 도저히 말을 걸 게 못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덴은 마르테스의 모험가들 사이에서 유명해져 갔다.

잘생겼는데 미친 마법사, 마법사인데 육체를 단련하는 이상한 마법사로 말이다.

그러던 중 모험가들은 그와 의뢰를 같이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 이왕 동행하게 된 거 말이나 걸어 보자! 남들한테 자랑도 하게 사인도 받고!

그렇게 내기에서 진 록스가 앞장서서 베르덴에게 오게 된 것이었다.

"도시에 그런 얘기가 있었나?"

"글쎄요...."

이리스가 눈을 피했다.

베르덴을 두고 어떤 말이 오가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에게 말은 안 했다. 그야 강의를 받을 시간이 줄어들지도 모르니까.

마법사는 자신의 이익에 민감하다.

록스가 손짓하자 다른 모험가들이 모였다.

그렇게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아홉 명의 사람들이 빙 둘러앉았다. 곳곳에서 베르덴을 향해 시답잖은 질문들이 들려왔다.

'아직 잘 시간은 아니니.'

대충 대답하며 시간을 때우자, 메아린이라는 여성 모험가가 물었다.

"저기, 두 사람은 무슨 관계야? 되게 친해 보이던데."

"네? 저요?"

이리스가 눈을 깜빡이다, 베르덴 대신 답을 했다.

"...선후배?"

"뭐야,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야?"

"아뇨, 그건 아닌데... 선생님이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좀. 그래서 일단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모험가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그는 그저 침묵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대화가 오고 가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마부들은 계약했던 대로 불침번에서 제외되었다. 최연장자인 록스가 어떻게 서야 할지 의견을 모으려던 중,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침번은 내가 알아서 하지."

스태프로 야영지 주변에 기하학적인 원을 그렸다. 선을 따라 마력을 흘려보내자 야영지 주변으로 돔 형태의 마력이 펼쳐졌고, 곧 사라졌다.

경계형 마법진 중 하나로, 누군가 여기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커다란 경종이 울린다.

"마, 마법진도 그릴 줄 알아요?"

"당연하지."

마법진은 원소 계열 다음가는 베르덴의 전공이다.

놀라는 것도 계속하다 보면 지친다는 걸 깨달은 이리스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사람만 다른 거라고.

"그런데 이것만 있어도 되나? 누가 뚫기라도 하면?"

"글쎄. 아마 그럴 일은 없을걸."

설치한 건 마법진 하나만이 아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다소 위험한 마법진을 두 개나 깔아 두었다.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그대로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만약 누군가 이 삼중 마법진을 베르덴이 눈치채기도 전에 뚫고 들어온다면....

'전부 죽겠지.'

설령 맞선다고 해도 말이다.

베르덴은 그만큼 자신의 마법진에 자신이 있었고, 그걸 척도로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밤이 깊었다.

베르덴이 먼저 눕자, 모험가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잠에 들었다.

마법진이 반응하는 일은 없었다.

* * *

마차를 탄 지 그새 며칠이 지났다.

모험가들도 갑갑함에 지쳐 가기 시작했다. 록스는 몸이 찌뿌둥하다며 마차에서 내려 내리 한 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냄새난다며 마차 천장 위로 쫓겨났다.

베르덴도 온종일 마차에 앉아 있는 건 좋아하지 않았기에 밖으로 나가 하늘을 날았다. 시원한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곧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염력으로 지도를 꺼내 눈앞에 펼쳤다.

지리로 봤을 때, 한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러던 그때, 저 멀리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귀를 기울이니 비명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지각 강화>

감각을 높였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비척거리며 달려오는 언데드들과 도망치는 사람들. 아직 해가 떠 있는데 언데드가 나타나다니. 상황이 꽤 심각했다.

베르덴이 고도를 낮추었다.

"록스, 언데드다."

"언데드...?"

'이런 대낮에?'라고 되묻진 않았다.

록스가 마차를 두들겨 모험가들을 불렀다. 할 말을 마친 베르덴이 저 앞으로 향했다. 수가 많은 만큼 단번에 잡을 수 있는 광역 마법이 필요했다.

'잘됐군.'

며칠 전에 겨우 커넥션을 완성했는데.

지금이 바로 마법서의 힘을 시험할 절호의 기회였다. 마력을 끌어모은 베르덴이 눈을 번뜩였다.

<지형조작>

쿠구구구구!

거대한 지진.

지형이 물결치더니 이내 솟아오르며 언데드와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베르덴이 손을 쥐자, 흙색 파도가 그대로 언데드들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끈질기다.

이대로 방치하면 다시 기어 나올 게 분명했다.

억지로 땅을 열었다.

마력이 홍수처럼 빠져나갔지만, 베르덴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간 해 온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에어 레일>

땅의 입구로 이어지는 바람의 길. 그 위에 새빨간 불덩이를 연신 쏟아 냈다.

수직 낙하한 파괴 마법이 지하를 한껏 불태웠다. 뼈가 타다 못해 재가 되어 흙 속으로 사라졌다.

'이 정도면 다 죽었겠지.'

베르덴은 지상으로 내려갔다.

흡사 자연재해를 목격한 듯한 시선들이 그에게 꽂혔다. 그 안에는 방금 막 도착한 모험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수십 미터 반경을 아우르는 거대한 흔적.

순식간에 언데드의 화장터를 만들어 버린 베르덴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선배님은 4위계 마법사야. 그것도 누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3위계와 4위계의 벽.

그 벽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에 따라 차원이 달라진다. 4위계는 광범위한 마법이 주를 이루기에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만큼 소모되는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니까.

'그런데 이건....'

이리스가 흙을 쥐었다.

대체 한 번에 얼마나 되는 지형을 움직인 거지? 언데드가 얼마나 깊은 곳에 묻혀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쏘아진 불덩이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런 광경을 펼쳐 놓고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다니.

이리스는 평소에 베르덴의 천재적인 재능에 대한 질투도 있고, 선배로서의 존경심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저 나이에 이 정도에 이르렀는데.

언제가 시간이 흘러.

베르덴의 마법 한 번에 한 나라가 송두리째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절대적인 권위자인 10명의 마탑주도 감당하지 못하는 마법사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그러나 도저히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 사실에 식은땀이 흘러 그녀의 턱 끝에 맺혔다.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격이 다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품는 게 인간이란 종이었으니까.

탁. 그때 근처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리스가 퍼뜩 고개를 들자 새하얀 백골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여기 언데드가 또...!"

퍼어억!

그런데 그녀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언데드가 산산조각 났다.

뭐지...?

옆으로 고개를 향하자, 거대한 도끼가 나무에 깊게 박혀 있었다.

"뭐야. 언데드가 다 어디 갔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근육질의 거한.

그의 목에는 모험가의 상징인 플레이트가 백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28화 백금 등급 모험가

우지직!

한 손으로 도끼를 뽑아낸 거한, 갈리아크가 성큼 다가왔다. 그 뒤로 금색 플레이트를 목에 맨 주근깨 여자와 안경 쓴 남자가 따라왔다.

이리스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이, 여자."

"네, 네?"

"여기로 언데드가 왔을 텐데, 어디로 갔는지 아나?"

듣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인 음성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이리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 다 죽었는데요."

"뭐? 다 죽어?"

강한 개체는 없어도 숫자는 꽤 많았을 텐데 그걸 한순간에?

갈리아크가 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이 푸른 머리 여자가 한 짓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다른 모험가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목에 걸려 있는 플레이트엔 금 등급조차 없다. 그 많은 걸 잠깐 사이에 다 없애 버리는 건 자신도 불가능한데, 은 등급 이하 따위가 해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베르덴을 봤다.

'저놈인가?'

나 혼자 특별한 놈이요 하는 외모에 갈리아크가 히죽 웃었다. 이리스를 제치고 베르덴에게 향했다. 느릿한 발걸음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오크보다 커다란 덩치에 모험가들이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백금 등급 모험가, 갈리아크가 베르덴과 마주했다.

"야, 잿빛 머리. 이쪽으로 온 언데드, 네가 다 죽였냐?"

베르덴의 청안에 갈리아크가 비쳤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게 지금 할 말은 아닐 텐데. 그건 우리들이 쫓고 있던 사냥감이다. 그런데 그 따위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 엄연히 새치긴데."

베르덴은 모험가의 규칙을 모른다.

그 순간 록스가 앞으로 달려나가 갈리아크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갈리아크 님."

"응? 날 아나?"

"예전에 다른 도시에 계셨을 때, 멀리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도살자(Butcher) 갈리아크.

그 위명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도적이든 아인종이든 거대한 도끼로 절단해 버리는 그 무지막지한 근력.

수년 전, 술 먹고 행패를 부리다, 자신을 막아서는 기사를 맨주먹으로 박살 낸 사건도 그의 악명을 퍼뜨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기사를 반죽음을 냈어도 길드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너무 강했으니까. 길드에 필요했으니까. 백금 등급 이상의 인재란 평등한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런데 그 괴물이 왜 여기에....'

록스가 마른 침을 삼키곤 말을 이었다.

"그, 제가 설명하자면... 언데드가 사람들을 쫓고 있었고, 상황도 급박한 마당이었던 터라. 전혀 새치기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받은 의뢰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

"...."

"그건 아니지. 보아하니 너희도 비르온 영주에게 고용된 모험가들 같아 보이는데...."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뒤에 서 있던 안경 쓴 마법사, 고드가 비르온 영주의 표식이 새겨진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갈리아크가 직접 록스의 눈앞에 펼쳤다.

"이건...."

"비르온 영주가 언데드를 '직접' 토벌할 시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준다는 내용이지. 이제 내 말이 이해가 되나? 우리가 쫓고 있던 걸 너희가 직접 처리했으니, 규칙상 보수는 몽땅 너희에게 가게 되는 거다. 설령 몰랐다고 해도 말이다."

갈리아크가 록스의 어깨를 잡았다.

"너도 모험가니 잘 알 거다. 모험가는 제 밥그릇에 예민하다는 거. 나는 특히 내 밥을 탐내는 놈들을 혐오하지. 그리고...."

"크윽...!"

꾸구국.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록스가 신음을 흘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을 견디는 것뿐.

금 등급을 넘어선 백금 등급의 모험가의 힘은 일개 모험가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갈리아크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서늘한 목소리가 록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은 등급 버러지 따위가 감히 어딜 끼어들어. 이대로 짓이겨져서 죽기 싫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알겠나?"

끄덕끄덕. 록스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갈리아크가 가볍게 손을 내치자 록스가 나가떨어졌다. 이어서 주변을 짓누르는 갈리아크의 기운.

마치 천적을 마주한 것처럼, 모두가 몸을 벌벌 떨었다.

베르덴을 제외하고.

"너 이름이 뭐냐?"

"애셔."

"애셔? 그래, 애셔. 플레이트가 없는 걸 보니, 모험가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상관없지. 아까 얘기한 걸 들었겠지만 우리는 너희한테 보수를 빼앗긴 거다. 먹잇감을 몰아준 셈이지. 그러니 적당한 수고비를 받는 게 도리가 아니겠나?"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비볐다.

"절반. 너희가 받을 보수의 절반을 선금으로 내놔라. 이 정도면 나름 배려 넘치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

갈리아크는 덩치는 컸지만 그렇다고 무식하지는 않았다.

육체적인 재능을 발판 삼아 모험가 중 3번째로 높은 등급의 백금에 올라섰다. 힘으로 짓누르거나, 말로 회유하거나. 사람 하나 다루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빼앗고 싶지만.'

그래서는 반발이 생기겠지. 그럼 귀찮아진다.

지금의 혜택을 유지하려면 싫더라도 모험가의 규칙 내에서 움직여야 했다.

어차피 다 받아도 갈리아크에겐 푼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양보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왕 움직였는데 하루 치 술값 정도는 가져가야지. 사실 이 편이 갈리아크에게 더 나았다. 정식으로 보수를 받으면 세금이다 뭐다 해서 길드에서 또 지랄 염병을 할 테니.

갈리아크가 손을 내밀었다.

칼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었다.

"설마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

베르덴을 억누르려 하는 강압적인 태도.

괜한 마찰을 빚지 않으려면 여기서 물러서는 게 상책일 것이다. 눈앞에 있는 도살자란 존재는 강했으니까. 백금의 플레이트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지금의 베르덴 또한 이 중에선 강자였다.

베르덴이 품속에서 돈을 꺼냈다. 달랑 1,000엘크짜리 지폐 한 장을.

손을 놓자 지폐가 갈리아크의 손을 지나쳐 바닥에 떨어졌다.

"수고했다."

뿌득. 갈리아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 * *

베르덴이 한 행동에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갈리아크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살자를 도발한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대부분 도끼에 반으로 갈라져 죽거나 반병신이 되어 살아간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갈리아크와 베르덴. 어느 누구도 시선을 굽히지 않았다.

뚜둑. 목을 푼 도살자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죽고 싶은 거냐?"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힘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힘으로 맞설 뿐이다.

'이 새끼....'

베르덴에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갈리아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자신을 무시하다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야 속이 좀 풀릴 것 같다.

갈리아크의 어깨가 꿈틀거리자, 베르덴이 곧장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음? 갈리아크가 미간을 좁히곤 이번엔 한 발짝 다가갔다. 베르덴이 네 발자국 멀어졌다.

"하. 지금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거냐? 당장 내 앞으로 오면 용서해 주마. 이리 와."

그런데 또 베르덴이 멀어졌다.

이 십새끼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맞붙자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갈리아크의 눈이 순간 진지해졌다. 등에 스태프를 매고 있으니 마법사임이 분명하다.

마법사가 전투에 있어서 근접전을 피하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지금 베르덴과 갈리아크의 사이는 마법사에게 더 유리한 거리였다.

'설마 진짜로 해볼 생각인가?'

도살자라 불리는 자신하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 그의 동료인 고드가 앞으로 나섰다.

"갈리아크 씨, 여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가?"

"예. 보아하니 주제도 모르는 마법사 같은데, 같은 마법사인 제가 충고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히 죽였다간 귀찮아질 테니, 선심으로 목숨 하나 살린 셈 치지요."

갈리아크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 베르덴이란 놈은 미친놈인 것 같아 죽이기엔 뭔가 찜찜했다.

"당신, 애셔라고 했죠? 보아하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주제는 모르는 것 같군요. 제가 특별히 당신의 주제를 알려 드리죠."

고드가 안경을 벗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이 주위에 퍼졌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몇 명은 헛구역질을 해 댔다. 베르덴은 가만히 고드를 쳐다봤다.

'3위계 정도인가?'

굳이 비교하자면 빌셴이란 도적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다지 경계할 실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마력위압'이라.

생각해 보니 베르덴은 시도해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력과 마력회로의 가동률을 크게 낭비할 바에, 하나라도 마법을 시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마력으로 얼마나 상대를 위압할 수 있을지 보여 줄, 제대로 된 실험체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바깥으로 터져 나간 거대한 마력의 해일이, 정확히 고드만을 덮쳤다.

* * *

고드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망망대해에 빠진 것처럼 몸이 무겁고 숨이 막혔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 바다는, 너무나 깊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짙은 푸른색을 넘어 공허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서서히 몸이 끌려들어 간다. 빛이 점점 멀어지고, 어둠이 서서히 고드를 집어삼켰다. 위로 뻗은 손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암전했다.

"...!"

털썩. 고드가 쓰러졌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침을 질질 흘렸다. 닫히지 않은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졌다. 주근깨 여자, 네리엔이 다가와 몸을 살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뭐야,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베르덴의 마력은 고드만을 향했다. 그렇기에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갈리아크만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내가 긴장했다고?'

믿기진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나마 압도당하는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손을 문질러 땀을 지워 냈다.

갈리아크가 입꼬리를 올리며 이를 드러냈다.

"재밌군."

갈리아크가 고드를 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애셔라. 그 이름 기억해 두지."

그 말과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갈리아크가 떠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모험가들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 살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고, 하나같이 베르덴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당연히 베르덴은 신경도 안 썼다.

다시 영지로 출발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갈리아크와의 마찰과 구해 낸 사람들을 호위하는 바람에 도착이 예정보다 많이 늦었다.

모험가임을 입증해 겨우 밤의 성문을 통과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영지의 분위기는 굉장히 어두웠다.

이곳에 오는 길만 해도 주위에 피가 고인 흔적이 가득했고, 두 번이나 언데드가 출몰했다.

베르덴에게만 맡길 수 없어, 이리스 팀과 록스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직접 처리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현재 언데드 토벌 지휘소를 맡고 있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풀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병사들에게 보고는 받았다. 사람들을 호위하느라 많이 늦으셨다고. 고생했군."

그런 하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는 귀족의 반열이니까.

록스가 나서서 대화를 나눴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토벌 계획은 정해졌습니까?"

"그럼. 빠른 시일 내에 토벌해야 하는 만큼 기간은 2~3일로 예상하고 있다. 내일 전선을 갱도 앞까지 밀어낸 다음, 자네들 모험가와 성직자가 안으로 들어가 토벌을 마치면 되는 것이지."

"...그 시간 내에 가능하겠습니까?"

"그래, 이번에 백금 등급 모험가가 토벌에 합류했으니까. 도살자라고 들어 봤나? 감히 기사를 건드리는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고 하니, 자네들은 최대한 도살자를 조력하는 방향으로 하는 게 좋겠군. 뭐, 마음에 안 들면 콱 찔러 버려도 좋고."

물론 농담이지만.

"일단 가서 눈 좀 붙이게. 내일 아침에 깨워 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도살자와 함께하는 언데드 토벌이라니. 혹시 베르덴과 또 마찰이 생길까 무서웠다.

여관으로 가 베르덴에게 부탁했다. 제발 도살자하고 대립하지 말아 달라고.

"그러지."

참으로 신뢰가 들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날, 모험가들은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29화 언데드 (1)

동이 트고 노란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시간.

성문 앞에 집결한 모험가들과 병사들 앞에 비르온 영주가 서 있었다.

"...사악한 언데드가 영지를 위협한 지 3주나 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발생한 사상자는 세 자릿수에 이르렀지.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영주가 옆을 가리켰다.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새하얀 의복을 갖춘 성직자들. 이번 언데드 토벌의 주역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분위기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리고 사람만 한 도끼를 어깨에 멘 갈리아크가 뒤를 이었다.

험상궂은 얼굴은 오우거를 방불케 했다. 그가 베르덴을 보곤 히죽 웃었다.

"선배님, 진짜 싸우시면 안 돼요...!"

"...."

베르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사람을 뭘로 보고 있는지. 저쪽에서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딱히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 저 갈리아크란 자는 공국에서 만난 이들 중 가장 강한 인간이었으니까.

맞붙는다면 아마 베르덴도 목숨을 걸어야겠지.

'그래도 질 생각은 없지만.'

육체를 재구성했을 때, 베르덴은 이미 한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참고 견디는 비굴한 삶은 마탑에 두고 왔다. 역천을 이루고 얻어 낸 재능을 펼치는 것이 다시 태어난 그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되 내던져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들은 숱한 강자를 발판 삼아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니까. 꿈을 이루려면 베르덴도 같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

도살자 갈리아크. 놈은 강하지만 결국 발판이다.

서로 생사를 두고 싸우든, 아니면 아무 일 없이 지나치든 상관없다.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경험이 베르덴의 피와 살이 될 테니까.

생각을 마치자 어느새 영주의 연설이 끝나 있었다.

분위기는 긴장되어 있었지만, 성직자와 갈리아크의 존재 덕분에 안심하는 듯한 기색도 보였다.

그때, 호위 기사를 옆에 둔 영주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자네가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를 요청했다던 마법사로군."

"애셔라고 합니다."

"파르나드 반 비르온 남작일세. 뭐, 토벌에 나서기 전에 인사나 나눌까 해서 말이지."

모험가 길드에서 소개했다는 건 어느 정도 검증된 인물이라는 거다.

모험가도 용병도 아니면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 소속이 없다는 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영입을 제안할 수 있다는 뜻. 이러한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참, 틈이 안 보이는군.'

비르온 영주는 남작에 불과했지만 투자에 밝았다.

가진 재산만 따지면 공국의 남작들 중엔 으뜸이었다. 이번 갱도에 대한 건은 생각지도 못한 언데드 탓에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영주는 베르덴을 보자마자 영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직감했다.

특출난 마법사를 담기에는 남작령은 너무 초라했으니. 거기다 젊은 나이니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할 터. 훗날 나이가 들어 은퇴할 때가 되면 모를까, 당장 무엇을 제안하든 단칼에 거절할 게 분명했다.

"흠흠. 인사도 끝났으니 가 봐야겠군. 이번 토벌 잘 부탁하네."

영주가 병사들 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 토벌에 참전하되 최후미에서 총괄 지휘를 맡았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영주가 갱도를 개발하는 도중 발생한 사고였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어필하는 것이다.

'결국 겉치레에 불과하지만.'

베르덴도 자신의 위치로 이동했다.

병사들이 최전선에서 진형을 잡고, 모험가들은 그에 대한 보조를 맡는다. 갱도에 들어가기 전에 힘을 낭비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정오가 다가왔다.

* * *

언데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죽인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평원은 검게 물들었다. 그런 죽음 앞에서 지휘관이 소리를 질렀다.

"전군! 돌겨어어어억!"

백 명이 넘어가는 병사가 일제히 전진했다. 각자의 손엔 창이 아닌 철퇴와 방패가 들려 있었다. 영주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구해 온 언데드 전용 무기들이었다.

스켈레톤의 뼈는 둔기에 무력화되었다.

점차 사기가 오르고,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그때, 멀리서 거대한 핏덩이가 나타났다.

희생자들의 육체로 이뤄진 시체 골렘. 무려 4미터가 넘는 크기에 병사들이 압도되었다.

"저, 저걸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난 절대 못 해!"

이런 작은 철퇴로 뭘 어쩌라고.

공포가 전염되자 진열이 흐트러졌다. 누구 하나가 도망치기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다.

"시체 골렘이라. 이거 오랜만인데."

갈리아크가 혼자 나섰다. 도끼를 등에 짊어진 채, 느긋이 걷던 그가 시체 골렘 앞에 다가서자, 골렘 안에 박혀 있던 시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산 자를 저주하는 끔찍한 목소리. 붉은색의 팔뚝이 갈리아크에게 육박했다.

후웅. 슬쩍 허리를 숙여 일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기민한 움직임으로 안을 파고들었다. 이어 그가 주먹을 내지르자 뻐엉! 무릎이 터져 나가며 시체 골렘이 주저앉았다.

이어 놈의 목을 잡아 뜯어 버렸다. 수십 명의 원한으로 이뤄진 몸뚱이는 압도적인 힘 앞에 무의미했다.

"흐음."

골렘의 머리를 든 갈리아크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덴을 본 그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팔을 뒤로 당겼다.

"도살자 놈, 대체 뭘... 어?!"

도살자가 머리를 던졌다. 그것도 아군 진영이 있는 방향으로.

화들짝 놀란 기사들이 검을 뽑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게 직격하면 최소 10명은 죽어 나갈 것이다.

콰아앙!

기사들이 제시간에 닿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다치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를 감싼 마력의 벽에 피가 번졌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내가 먼저 나섰으니 너도 실력을 보여 줘야지. 나와라, 애셔."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베르덴의 표정이 너무 차가웠다. 허공으로 떠오른 베르덴이 갈리아크를 내려다봤다.

'보고 싶다면 보여 주지.'

베르덴이 같은 위계의 마법사와 격을 달리하는 능력을 꼽자면 총 네 가지.

첫째,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역천으로 재구성된 마력회로.

둘째, 마법뿐만이 아닌, 단련을 거듭한 육체.

셋째, 천재적인 마법 이해력.

그리고 마지막 넷째. 동급의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량이다. 그런 점에서 베르덴의 마법은 위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효율이 좋지 않은 마법이라 할지라도 압도적인 마력량으로 완전히 뒤집어 버리니.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면이 들썩이다 위로 솟구쳤다.

범위 안에 있던 갈리아크가 이리저리 흙을 피해 뛰어다니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얼굴은 곱상한 놈이 성깔 하나는 더럽군!"

"누가 누구보고...."

쯧. 혀를 찬 베르덴이 꿈틀거리는 땅을 앞으로 밀어냈다.

흙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사방을 덮쳤다. 스켈레톤, 좀비, 시체 골렘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휩쓸렸고, 그렇게 한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화염구>

콰아앙! 불길이 언데드 무리를 휘감았다.

썩고 문드러진 육체는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스러졌다. 갈리아크와 베르덴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확실히 고드보단 훨씬 낫군. 근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갱도에 들어가서 빌빌대면 언데드 먹이로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먹이로는 네가 더 나을 텐데."

어느새 초원은 두 사람의 전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말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으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각자 제 위치에서 살아남은 언데드를 토벌했다.

그렇게 예정보다 훨씬 빨리 갱도 앞에 도달했다. 피해는 영주가 절로 박수를 칠 정도로 경미했다.

* * *

다음 날 아침. 언데드 토벌대가 한곳에 모였다.

세 명의 성직자와 18명의 모험가, 그리고 한 명의 마법사.

무려 이십 명이 넘는 대인원이었으나, 최소 수백 마리의 언데드를 발생시킨 죽음의 근원까지 닿으려면 납득할 만한 숫자였다.

언데드가 갱도 일부를 무너뜨린 탓에 통로는 모두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짐꾼 역할을 맡은 파티는 이리스를 포함해 총 세 팀이었다.

호흡이 힘들어질 수 있으니 공기를 생성하는 소모형 마법 물품과 3일 치 식량 그리고 비상용 횃불과 포션까지. 값비싼 포션은 영주가 지원한 것이 두 개였고, 나머지는 갈리아크 파티의 것이었다.

"그럼 축복을 내리겠습니다."

성직자 하나가 토벌대 앞에 서서 기도문을 외웠다.

<성스러운 축복>

따뜻한 빛이 몸에 스며들었다.

루아스교의 축복은 죽음의 기운을 물리쳐 공포로 인한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효과가 있다. 이어 베르덴과 이리스 그리고 비르온 영지의 마법사 모험가가 부여 마법을 시전했다.

"나한테는 안 써 주나?"

"굳이 필요한가?"

"싫어? 왜, 마력을 다 써 버리기라도 한 거냐?"

갈리아크가 킬킬대며 사사건건 베르덴의 심기를 건드렸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몰랐지만 모험가들은 불안해했다. 만약 둘이 갱도 내에서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그냥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흥. 갈리아크 씨는 저놈이 뭐가 좋다고.'

고드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베르덴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사실 그는 어제의 기억이 없었다. 뭔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은 있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료인 네리엔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갈리아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은 안 해 주니 알 길이 없었다.

'어린놈이 재능 좀 있다고 유세 떨기는.'

베르덴의 마법은 고드가 입을 떡 벌리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드의 마음속에 열등감과 질투가 피어올랐다.

누구는 노력에 노력을 더해 겨우 3위계에 올랐는데.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려 보이는 저 베르덴이란 마법사는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게다가 더욱 짜증 나는 건 잘생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나도 마력만 있으면 저 정도는... 아니, 내가 훨씬 더 강할 텐데.'

베르덴이 지금까지 보여 준 건 막대한 마력량을 토대로 한 마법. 단지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고드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질투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무사히 다녀오게."

영주의 인사를 받은 토벌대가 갱도 앞에 섰다.

어제 병사들이 만든 벽이 갱도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자물쇠를 풀고 한 명씩 천천히 입장했다. 안은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스러운 빛>

성직자의 빛이 갱도를 밝혔다.

암시를 써도 되지만, 토벌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에. 갑자기 지속 시간이 끝나 버리면 몰살당할 가능성이 컸다.

"네리엔, 앞에 서라."

"내가? 그래, 알겠어."

갈리아크의 명령에 네리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허리춤에 쌍단검을 맨 그녀는 남들보다 청각과 촉각이 예민했다. 척후로서 뛰어난 재능이었다.

다시 한번 갱도의 지도를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비르온 영지 마석 갱도. 본격적인 언데드 토벌이 시작되었다.

30화 언데드 (2)

네리엔은 금 등급답게 실력도 출중했다.

먼저 언데드를 발견하고 누가 손쓸 틈도 없이 발차기로 몸체를 박살 냈다. 굳이 단검을 쓸 필요도 없었다. 기를 깨우친 전사에겐 강함에 있어 성별의 차이 따윈 무색했다.

그녀를 필두로, 썩은 육신을 이끌고 있는 광부들과 스켈레톤을 처리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갱도의 끝에 도달했다.

바닥에 쏟아진 마석들. 주위엔 피비린내가 가득했고, 곡괭이들이 널브러져 있다.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으로 한 발짝 내딛고, 차례차례 몸을 들이밀었다.

한층 더 무거운 중압감과 죽음의 기운이 피부를 스쳤다. 성스러운 축복에 의해 공포에 질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성직자 마로스가 기도하며 더 환하게 주위를 밝혔다.

"두려움에 떨지 마십시오. 빛의 신 루아스 앞에 어둠 따위는 한낱 나약한 악일 뿐이니. 찰나의 공포에 압도되어 무너져선 안 됩니다."

마로스의 말에 모험가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그러나 정작 베르덴과 갈리아크 두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리스가 슬쩍 다가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선배님, 왜 그러-"

"쉿."

그녀를 제지한 베르덴이 어둠을 응시했다.

마력감지를 펼쳐서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혹여 저 안에 마법을 사용하는 언데드, 리치(Lich)가 있으면 발각될 테니.

'혼자였으면 문제없을 텐데.'

인원수가 너무 많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외길 통로에서 기습을 받는 건 가능한 피해야 했다.

현재 마력을 쓰지 않은 베르덴이 느낄 수 있는 건 퀴퀴한 냄새와 습기가 가득한 공기뿐.

하지만 그래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 동굴에 가득 차 있는 불길함과 죽음을 말이다.

"호오, 너도 느꼈나? 이 강렬한 죽음의 냄새를."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갈리아크가 등에 멘 도끼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흉기를 어깨에 옮겨 메곤 베르덴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뭐가 웃긴 거지?"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나. 심심풀이로 온 이곳에 내 흥미를 끄는 게 있다니 말이야. 그것도 두 개나."

그가 어둠과 베르덴을 번갈아 봤다.

졸지에 근육질 거한의 관심 대상이 된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리곤 고개를 틀었다.

"이리스, 전투가 벌어지면 내 뒤로 와라. 동료들한테도 섣불리 근접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고."

"아,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저곳에 뭐가 있길래 그러는 거예요?"

"몰라. 아직은."

그러나 위험하다는 건 안다.

악명 높은 도살자 갈리아크의 흥미를 끄는, 베르덴에게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저 어둠 어딘가에 숨어 있다.

* * *

언제부턴가 언데드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토벌대의 발소리만이 동굴에 울려 퍼졌다. 기이할 정도의 고요함은 불안을 가속시켰으나, 한편으론 혹시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자리했다.

그러던 중, 무언가가 모험가의 발에 차였다.

"뭐지?"

손으로 들어 올리려 하자, 성직자 마로스가 막아섰다.

"멈추세요! 언데드와 관계된 물건은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그럼 손만 대지 않으면 되는 건가?"

말릴 틈도 없이 베르덴이 염력으로 바닥을 파헤쳤다.

그러자 흙으로 더렵혀진, 삭을 대로 삭은 깃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이 문양,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긴 한데."

"자, 잠깐. 이거... 에스티리아 왕국 국기 아니야?"

이곳 리비안트 공국은 한때 에스티리아 왕국의 영토였다.

왕국의 흔적이 발견되는 건 종종 있는 일이고 문제 되는 일도 아니다. 하나의 국가로서 자리를 잡은들 뿌리는 어디 가지 않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 국기가 있는 거지? 상태로 보아 수십 년은 되어 보였다.

"혹시 여기가 왕국의 묘지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아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이리스의 의문에 고드가 답했다.

여러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검지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비르온 영지에 기록된 역사 중, 이 주변에 무덤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영주님에게 허락을 받아 직접 확인하기도 했고요."

"정보를 숨겼을 가능성은?"

"숨길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만약 여기가 진짜 왕국의 무덤이라고 한다면 그 증거들이 사방에 널려 있을 텐데. 토벌대인 저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 비르온 영주님에게 메리트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모험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드가 베르덴을 흘끗 쳐다봤다. 너같이 재능만 믿고 마력을 쏟아붓기만 할 줄 아는 마법사와 다르다는 듯 우쭐했다.

물론 베르덴은 고드의 그런 시선에 관심도 갖지 않았다.

갈리아크와 베르덴의 신경은 여전히 어둠으로 향해 있었고 경계 또한 늦추지 않고 있었다.

마로스가 신성한 빛으로 깃발을 감싼 뒤, 고이 접어 품속에 넣었다.

"이건 제가 챙기도록 하죠. 그리고 다음부터 이런 걸 발견했을 때는 저희 루아스교에게 맡기세요. 절대로 만지지 마시고. 마법을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마로스가 찌릿 베르덴을 쏘아봤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옆에 있던 이리스가 대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토벌대의 발걸음은 다시 어둠 속으로 향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살펴보니 6시간 정도가 흐른 듯하다.

느껴지는 감각으로 이 통로는 굽이굽이 지하 어딘가로 뻗어 있었다. 마법 물품 덕에 숨 쉬는 건 편했지만, 갈수록 지상과 멀어지는 탓인지 심리적으로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지? 끝이 있기는 한 걸까?

이 빌어먹을 언데드는 왜 나타나지 않는 거야?!

답답하다. 불쾌하다.

은 등급 모험가도 지쳐 가기 시작하는데 동급 이하의 모험가들은 어떨까.

어린 모험가들은 후회했다. 오지 말걸.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다고 소리라도 질러 보고 싶었다. 방금 먹은 음식이 역류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덴과 갈리아크 그리고 다른 금 등급 모험가들이 있었으니까. 되지도 않는 투정을 부렸다간 당장이라도 버릴 게 분명하다.

볼 안쪽을 씹으며 눈물을 삼켰다. 두려움이 정신을 잠식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나는 모험가니까.

이리스는 그렇게 되뇌며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러던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여기 지하 아닌가?"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길은 하나뿐이다.

각자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꺼내 들고 촉각을 곤두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나긴 통로를 지나고 나타난 거대한 공동.

천장에 난 틈새에서 한 줄기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이 깊은 지하까지 빛이 닿는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공동 안이 훤히 보였다.

공동 전체에 새하얀 백골이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수백? 수천? 도저히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유골이 가득했다. 허연 뼈가 환하게 빛났다.

그런 백골 무더기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의 언데드.

검을 양손으로 잡은 채, 백골 위에 꽂아 넣고는 자신의 두개골을 손잡이에 대고 있었다. 불길함을 넘어 역설적으로 신성한 듯이 보였다.

베르덴은 언데드의 옷차림을 봤다.

직전에 발견한 왕국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갑옷. 녹슬고 거칠었으며 새빨간 망토는 곳곳이 닳아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네리엔이 고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왕국 무덤 아니라며?"

"그, 그럴 리가.... 정말로 기록에는 없었단 말입니다!"

"뭐, 상관없어. 뭐가 됐든 간에 저 언데드만 처리하면 토벌이 끝나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기록이든 뭐든 언데드는 박멸해야만 하는 존재니까요."

마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일렬로 도열한 세 명의 성직자가 신에게 기도했다. 신께서 주신, 거룩한 죽음을 거부한 저 악을 파멸시킬 빛을 바랐다.

"크흠, 갈리아크 씨.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네가?"

"제 차례에서 끝내겠습니다. 언데드 정도야 별것도 아닌 사냥감이니까요."

제지할 틈도 없이 고드가 앞으로 나섰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하며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성직자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사방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정화>

어둠의 대척점, 빛.

주변에 가득했던 죽음의 기운이 사라지며 이내 언데드에게 닿았다. 치지지직. 백골에서 회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악이 차츰 정화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암석강타>

고드가 만들어 낸 거대한 바위가 언데드에게 쏘아졌다.

직격하는 순간, 정화에 의해 약해진 뼈는 산산조각 나겠지. 성직자도 고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언데드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눈 속에서 피어오른 붉은빛.

그 순간 쩍, 바위가 세로로 갈라져 언데드를 비껴 나갔다. 신의 정화는 더욱 깊은 악에 의해 묻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

그렇게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고드의 목 앞에 날카로운 뼈가 쇄도했다.

* * *

고드는 피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콱.

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죽었어? 내가 이런 데서 죽었다고?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갈리아크가 눈앞에서 스켈레톤의 뼈를 움켜잡고 있었다.

"아이, 깜짝이야."

콰직. 악력으로 뼈를 부수고, 고드를 노렸던 스켈레톤을 밟아 부쉈다.

콧김을 내뿜은 그가 도끼를 붕붕 휘두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갑옷을 입은 언데드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붉은색이라. 리치는 아닌 것 같은데... 그, 뭐였더라. 기억이 날 듯 말 듯...."

"기, 기사!"

소리친 건 마로스였다. 몇 분 전까지 당당한 태도를 보였던 때와 달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기사? 무슨 기사?"

"통곡의 기사, 웨일링 나이트 말입니다! 모르십니까! 저 언데드가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불러왔는지!"

통곡의 기사(Whailing Knight).

수많은 원한이 쌓이고 또 쌓여 악으로 타락해야 발생하는 언데드로, 산전수전 다 겪은 모험가라 할지라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너무도 개체 수가 적었으니까.

"그런데 왜, 왜 여기에...!"

"진정하고. 저 언데드가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죽음의 기사 같은 건가?"

베르덴의 물음에 마로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시선은 계속 통곡의 기사에게 고정된 채로.

"죽음의 기사보다는 약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단일 개체를 비교했을 때의 얘기. 놈이 위험시되는 이유는 바로...!"

툭. 툭. 투둑.

뼈 무더기에서 해골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토벌대의 발치에 멈춘 두개골. 이윽고 두 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그때, 통곡의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입을 쩍 벌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름 끼치는 비명.

그것이 시작이었다. 무더기가 들썩이며 언데드로 변하기 시작했다.

뼈들이 뭉쳐 생겨난 거체의 언데드, 무덤 파수꾼(Grave Guard).

마법을 다루는 언데드, 리치.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스켈레톤.

"...다른 언데드를 통솔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마로스의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내려 갔다. 공동을 가득 메우는 압도적인 숫자에 토벌대가 눈을 부릅떴다.

저 숫자로 덤벼들면 어떻게 될까. 베르덴이나 갈리아크는 몰라도 나머지는 전부 죽을 것이다. 죽어서 저 언데드의 군세에 합류하겠지.

그런 끔찍한 미래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그때.

"...선배님?"

이리스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덴은 태연한 모습으로 갈리아크보다 한 발짝 앞에 섰다.

"응? 뭐 어쩌려고?"

"어쩌긴. 토벌해야지."

"저 숫자를? 뭐, 나야 가능하긴 하지만 뒤에 있는 놈들은 싹 다 죽을 텐데?"

"어차피 도망가도 죽어."

언데드는 지치지 않는다. 이대로 뒤돌아 도망쳐 봤자 먼저 지친 토벌대원들이 하나씩 잡아먹히겠지.

그리고 터져 나온 언데드들이 영지를 집어삼킬 것이다.

베르덴은 언데드를 토벌하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러니 토벌을 행할 뿐.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리자,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흐른 마력이 육안으로 보였다. 넘실거리는 푸른 기류에 갈리아크가 눈을 깜빡였다.

"그걸로 뭘 하려... 설마 여길 무너뜨리기라도 할 생각이냐?"

"아니."

자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일면식도 없는 영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도 없고.

단지 이 지형은 토벌대에게 불리하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러니 바꿔야지."

그 순간, 언데드가 일제히 움직였다.

파도처럼 쇄도하는 사자(死者)들. 베르덴은 물러서지 않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지형조작>

그리고 세상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31화 언데드 (3)

거체의 언데드인 무덤 파수꾼이 다섯, 리치가 셋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통곡의 기사. 하나같이 쉽게 볼 수 없는 언데드들이다. 거기다 수백이 넘는 스켈레톤 군세까지.

정면으로 맞붙었다간 대응할 새도 없이 휩쓸릴 것이다.

그러니까.

'가둬 버린다.'

쩌저저적.

주변이 흔들리며 이내 공동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지하 깊이 묻혀 있는 작은 세상이 한 사람의 뜻대로 움직였다.

"말도 안 돼...."

토벌대는 베르덴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갈리아크와 서로 경쟁하며 언데드를 사냥하는 광경을 봐 왔으니까. 이리스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시시각각 뒤바뀌는 공간. 단순히 공동을 힘으로 엎어 버리는 게 아니었다.

휩쓸린 스켈레톤들은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갇혀 버렸고, 벽을 부술 수 있는 리치와 무덤 파수꾼 그리고 통곡의 기사를 뭉치지 못하게 떨어뜨렸다.

숫자의 폭력을 단숨에 무력화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베르덴의 계산 아래에 있다는 사실에 마법사들은 전율했다.

"어, 바닥이...!"

토벌대들이 서 있던 지면 또한 갈라졌다.

어떻게 대처할 방법도 없이 토벌대들이 세 집단으로 나뉘었다.

이리스가 멀어져 가는 베르덴을 보며 소리쳤다.

"선배님!"

"도착하면 리치가 있을 거다. 각자 알아서 처리해. 통곡의 기사는 내가 맡는다."

마력에 실린 목소리가 퍼져 나가 토벌대들에게 들려왔다.

그제서야 베르덴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토벌하려는 거다. 이 수많은 언데드를.

미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그들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토벌대들은 베르덴이 지정한 각자의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갈리아크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이것 참, 놀랍기는 한데... 저놈을 네가 상대한다고? 저건 이미 내 사냥감으로 정해 뒀다."

"네 건 따로 있다."

"응? 그게 뭔 헛소...?!"

베르덴이 손짓하자 갈리아크의 바닥이 지하로 꺼졌다.

뭐라 말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인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한 성직자와 다섯 마리의 무덤 파수꾼이 있는 방에 도착해 있었다.

갈리아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나한테 짬 처리를 시켜?'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은 처음이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쾌했다. 그가 강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제일 맛있는 걸 가져간 건 용서 못 하지.'

도끼를 쥔 갈리아크가 무덤 파수꾼을 바라봤다.

백금 등급 모험가라 할지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할 언데드는 아니지만, 갈리아크는 베르덴과 싸우고 있을 통곡의 기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나 즐거울까.

"어이, 믿음쟁이."

"저, 저요?"

"불 꺼지지 않게 잘 봐라."

아, 성직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의 공포에 압도되면 안 된다느니 지껄여 놓고 저렇게 겁에 질린 모습이라니. 역시 말뿐인 놈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갈리아크가 고함을 내지르며 무덤 파수꾼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베르덴이 구성한 공간 중 최하층.

강대한 언데드와 도살자의 전투, 그 여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 * *

이리스 팀에겐 네리엔과 마로스를, 록스 팀에겐 고드를 그리고 나머지 비르온 영지의 모험가들에겐 성직자를 배정했다.

금 등급 모험가가 있으니 상대가 리치라고 해도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토벌이 가능할 것이다. 베르덴이 더 해 줄 건 없었다.

'...좀 지치는군.'

마력회로의 과부하. 이렇게나 대규모적으로 섬세하게 마력을 조작하는 건 역시 3위계의 회로로는 무리였다.

마법서를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공간 지각 능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더라면 불가능했을 기예.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댄 베르덴이 숨을 깊게 토했다.

저 앞에 있는 통곡의 기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붉은빛이 고요히 그를 보고 있었다.

'공격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건가?'

그럼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회로를 진정시키고 있자, 통곡의 기사가 턱을 달싹거렸다.

그 이름답게 또다시 비명이라도 지르는가 싶었으나 마치 혼잣말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는 모습이었다. 베르덴이 귀를 기울였다.

[돌아... 가야....]

'목소리?'

어눌해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의미를 담은 소리였다.

그것에 의문을 느끼기도 잠시, 언데드가 베르덴을 향해 검을 곧게 세웠다. 눈 안에 있는 불꽃이 거세게 불타오르며 끈적한 증오를 내뿜었다.

'온다.'

쿠웅!

통곡의 기사가 지면을 부수며 달려들었다. 자세도 뭣도 없이 살기를 흩뿌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흉포함 그 자체.

고통을 억누른 베르덴이 날아올랐다.

<다중 화염 화살>

불꽃이 폭발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통곡의 기사를 덮쳤다.

당연히 이걸로 죽을 리는 없었지만, 언데드인 이상 화염에 면역이 없을 터.

불길 속에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체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유의미한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더 강하게.'

화염과 바람. 두 원소를 합쳤다.

<폭염의 화살>

굉음이 터지며 뜨거운 열기가 공간에 휘몰아쳤다.

통곡의 기사. 어느 정도의 강함을 보유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마법사인 베르덴이 어쭙잖게 근접전을 벌였다간 단칼에 목이 날아갈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최선은 원거리에서 펼치는 마법 폭격으로 그대로 소멸해 버리는 것.

콰아앙! 콰앙! 콰아앙!

멈추면 안 된다. 놈이 견디지 못하고 반응할 때가 기회다.

이렇다 할 대응도 없이, 연이은 마법에 직격당한 통곡의 기사의 다리가 순간 비틀거렸다.

'지금!'

<파이어 스피어>

불꽃의 창이 몸체를 꿰뚫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놈이 입고 있던 갑옷 중앙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러자 주춤거리던 통곡의 기사가 허리를 젖히더니, 들고 있던 검을 베르덴을 향해 내던졌다.

피하기엔 너무 빠르다. 그러나 마력방벽을 펼쳐선 안 된다.

검을 던진 통곡의 기사가 지금도 베르덴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력방벽이 깨져 버리면 회로에 크게 무리가 올 터.

그 빈틈을 잡힌다면 베르덴의 승산은 희박하다.

'어쩔 수 없다.'

카가가각! 스태프로 검을 비스듬히 막아 냈다. 막대한 충격에 장기가 뒤흔들리고, 팔이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목을 향해 날아오는 언데드의 손아귀를, 가까스로 허리를 숙여 피해 냈다. 일부 잘려 나간 잿빛 머리칼이 휘날렸다.

<충격파>

콰앙! 멀리 날아간 통곡의 기사가 벽에 처박혔다.

그런데도 놈은 움직였다. 주요 부위를 부수면 죽는 기존의 언데드와 달리, 육체를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는 이상, 저 증오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해 주지."

급격한 마력 소모와 회로의 과부하로 인한 두통. 팔뼈는 부러졌는지 시큰거린다. 그러나 여력은 충분하다.

사선을 넘어 역천을 이룬 베르덴에겐 고통 따위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파도>

거친 물결이 사방을 덮쳤다. 수중에 갇힌 통곡의 기사가 분노한 듯 이리저리 검을 휘둘렀다. 파도가 갈라지고 다시금 합쳐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베르덴이 마력을 전개했다.

<겨울 돌풍>

더블 캐스팅. 양옆에서 휘몰아친 혹한의 바람이 파도를 얼렸다. 그렇게 얼음 속에 갇혀서야 겨우 언데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제 남은 건 베르덴이 가진 마법 중 최강의 일격을 쏟아 내는 것뿐.

'하지만 뇌격은 안 돼.'

얼음에도 전기는 통하긴 하나, 방해가 되는 요소가 더 크다. 언데드는 생명체가 아니니 효과도 적고.

지금 필요한 건 관통력이다. 얼음과 언데드를 동시에 꿰뚫을 창.

<어스 스피어>

<어스 스피어>

<어스 스피어>

세 개의 마법에 이은 마력집중.

바위의 창이 견딜 수 있는 한계점까지 마력을 집어넣었다. 사거리는 짧아지나 위력은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

쩌적. 얼음에 균열이 생기며 통곡의 기사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베르덴이 눈을 번뜩였다.

두개골, 갈비뼈, 골반. 언데드를 이루는 골격 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노리고 강력한 마법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두 번째 죽음.

언데드의 눈구멍에 있는 두 불꽃이 흔들렸다.

* * *

그는 왕국의 군인이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백인장까지 오른 그의 원동력은 하나뿐이었다.

오직 가족.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살아남았다. 전쟁에서 버티고 또 버텨 동료들과, 부하들과 함께 다 같이 돌아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전쟁 도중, 우연히 왕국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왜 리비안트 공작이 왕국에서 독립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끔찍한 비밀을.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와 부하들은 왕의 직속 기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숨이 붙어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전부 생매장되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쌓여 가는 흙을 바라보며 증오를 불태웠다. 가족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언데드로서.

흙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조금씩 흙을 파냈다. 1년이 흐르고 또 2년이 흐르자 다른 언데드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마침내 지상까지 닿았다.

드디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원한과 증오를 되갚을 때가 왔는데.

'나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남아 있는 인간이었던 시절의 그 감정과 기억의 편린이 언데드의 몸을 움직였다.

'돌아가야 해.'

그는 죽을 수 없었다, 또다시.

* * *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망자의 울음소리가 공간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여파에 얼음이 깨지고, 창의 궤도가 틀어졌다.

콰자자작!

얼굴의 반이 날아가고, 다리가 너덜거렸으며 박살 난 왼쪽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통곡의 기사는 전보다 더욱 진한 살기와 증오를 내뿜고 있었다.

"그림자가...."

주위의 어둠이 놈에게 끌려들어 가 형체를 이루었다.

흑색 기사.

어둠을 두른 언데드는 한층 더 커졌고, 되찾은 검 또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한쪽 팔은 없어진 채 그대로였다. 검은색 일색인 놈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검을 질질 끌며 한 발자국씩 천천히 다가오는 그 압박감에, 베르덴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지끈.

베르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신을 갉아먹는 격통 속에서 저 언데드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순간,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진동은 멈추지 않고 베르덴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콰아아앙! 벽을 부수고 날아온 도끼가 통곡의 기사에게 쇄도했다. 직격당한 언데드가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 충격에 가슴을 감싸고 있던 어둠의 일부가 깨어져 떨어졌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특히 내 밥을 탐내는 놈들을 혐오한다고."

"...갈리아크?"

온몸이 잔상처로 가득해 피투성이가 된 도살자.

그가 벽을 부수고 베르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아아아아....

머리가 떨어져 나간 리치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네리엔은 그 잔해마저 발로 짓밟아 부쉈다.

"끄, 끝난 건가요?"

"그래, 끝났어."

"예, 확실히 죽었습니다."

그 대답에 이리스와 그녀의 동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치의 토벌 위험도는 최소 금 등급 이상. 이리스와 동료들의 실력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언데드였다. 만약 네리엔과 마로스가 없었다면 리치에게 꼼짝없이 죽었겠지.

눈앞의 위험이 사라지자, 이리스는 베르덴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글쎄.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았을 수도 있지. 그리고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야."

베르덴이 만든 공간은 꽤나 컸지만 나갈 출구가 없었다.

갈리아크나 고드가 있으면 부숴 보기라도 해 봤을 테지만 이들에게 그런 화력은 없었다. 최악을 생각하자면 이대로 질식해 죽거나,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

'선배님....'

이리스는 왠지 짐이 된 것 같아 울적해졌다.

솔직히 열심히 싸웠지만 도움보단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이 컸다. 아무리 짐꾼 역할로선 최선을 다했을지라도.

만약 따라오지 않았다면 베르덴이 홀로 통곡의 기사를 상대하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를 텐데.

의미 없는 결과론적 이야기다.

그러던 도중, 천장에서 큰 진동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네리엔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벽에 붙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주위 모든 것이 뒤흔들렸고, 이내 천장이 무너졌다.

"꺄아아아악!"

"뭐, 뭡니까?!"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그 안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먼지가 걷히자 두 명의 음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피투성이가 된 갈리아크와 통곡의 기사. 둘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일격을 주고받았다. 도끼와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지만, 이리스만은 그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선배님은 어딨지?'

설마 죽은 건...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렇게 확신할 때, 무너진 천장 사이에서 마법이 날아왔다.

까앙! 언데드의 다리를 강타한 바위의 창. 어둠으로 이뤄진 갑옷은 뚫지 못했지만 무릎을 꿇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이어 도살자의 발길질에 통곡의 기사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천장에서 내려온 베르덴이 바닥에 착지했다.

"뭐야, 위에서 자고 있는 것 아니었나? 응?"

"앞이나 봐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누군가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 묻어난 통곡 또는 비명.

비틀거리며 일어선 언데드에게서 서늘한 죽음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허억, 허억...."

"루아스시여, 루아스시여...!"

머리털이 쭈뼛 서고 호흡까지 흐트러지는 기분. 모험가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얼어붙었고, 성직자는 자신들이 신앙하는 빛의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해 주는 건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크하하하. 한낱 시체 따위에게서 이런 즐거움이라니. 어이, 애셔. 이 몸이 앞장설 테니까 뒤에서 그 잘난 마법이나 잘 써 봐. 내 뒤통수 맞히지 말고 말이야, 응?"

"노력은 해 보지."

언데드와 도살자 그리고 마법사.

이 셋의 전투는 끝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32화 언데드 (4)

콰앙!

앞으로 쏘아져 나간 갈리아크가 통곡의 기사와 격전을 벌였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 한 팔이 없는 언데드는 대부분의 공격을 허용했으나, 오로지 죽지 않는 육체로 버텨 내며 갈리아크의 숨통을 노려 왔다.

베르덴이 구성한 공간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일부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다른 토벌대가 있는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지쳐 보였고,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뒈져라!"

파쇄破碎.

수직으로 내리찍은 도끼가 언데드에게 쇄도했다. 검으로 막았으나 충격은 피할 수 없었다.

통곡의 기사의 다리가 바닥에 파묻혔고, 갈리아크가 한 손으로 도끼를 짓누르며 다른 손으로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쩌어엉!

죽음의 기사가 밀려나며 지면에 상흔을 남겼다. 가슴 쪽에 나 있던 틈새가 조금 더 벌어졌다.

"칫. 더럽게 단단하군."

손맛이 개운치 않다. 충격을 흡수하는 건가?

저 빌어먹을 까만 갑옷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사지를 잘라 죽였을 텐데. 갈리아크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통곡의 기사를 쳐다봤다.

그 순간, 놈의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깊은 살기.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었지만 반응이 약간 늦었다. 악의의 칼날이 갈리아크의 척추를 향했다.

<마력폭발>

그러나 베르덴의 마법 덕분에 옆구리를 스치는 데 그쳤다.

"감히...!"

고작 언데드 따위가 기이한 기술을 쓰다니.

분노에 찬 갈리아크가 도끼를 던지곤 언데드의 몸을 콱 끌어안았다.

"하아아압!"

콰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힘에 통곡의 기사가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지진과 함께 지면의 일부가 솟아올랐다. 느낌은 있었지만 이걸로 죽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비켜."

"잠- 이런 시발!"

갈리아크가 재빨리 바닥을 구르며 벗어났다.

그리고 날아온 베르덴의 화염구.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출력으로 연속해서 마법을 날렸다. 연기와 함께 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베르덴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자, 연기에 비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무슨 시체 새끼가 이리 끈질...?!"

화악! 언데드가 던진 검이 연기를 날려 버리고 갈리아크에게 향했다.

반사적으로 무릎과 팔꿈치로 검날을 잡았지만 부족했다. 복부에 검이 꽂힌 그가 벽에 처박혔다.

어느새 언데드가 베르덴의 지척에 다가왔다.

스태프에 회전력을 담아, 전력을 다해 두개골을 타격했지만 갈리아크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놈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젠장."

터엉! 베르덴이 주먹을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목걸이의 자동 방벽 덕분에 치명상은 면했다. 일부가 깨지는 바람에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과부하가 없어서 다행이군.'

목걸이의 효과는 직접 펼치는 마력방벽과 별개의 것이다.

설령 완전히 박살 나더라도 수복되는 데 시간이 걸릴 뿐, 직접적으로 회로에 부담은 찾아오지 않는다.

"크윽...."

베르덴이 스태프를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탈골된 어깨와 마력 결핍 현상. 순간 앞이 흐릿해져 바닥에 손을 짚었다.

'저 갑옷이 문제야.'

어떻게든 저 새까만 갑주를 뚫어야 한다.

하지만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움직임 탓에 위력이 강한 마법을 직격할 수가 없다.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주르륵, 이마에서 피가 흐르며 시야가 붉어졌다. 그 속에서 언데드가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그때, 번쩍이는 세 줄기의 빛이 언데드를 옭아맸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토벌대들이 일제히 통곡의 기사를 겨냥했다. 여러 마법과 화살이 빗발쳤다. 그러나 검은 갑주에는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대체 저 검은 갑옷은 뭐야?!"

"끄으읍! 교회에도 기록되지 않은 능력이라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통곡의 기사와 다른 언데드 개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로스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이를 악물며 빛의 밧줄을 잡아당겼다.

통곡의 기사가 신성력에서 벗어나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어둠에 잠식당한 신성력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쩌적. 언데드의 가슴에 나 있는 금이 조금 더 커졌다.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약했지만 베르덴에겐 커다란 구멍처럼 보였다. 눈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갈리아크를 향해 소리쳤다.

"갈리아크!"

"나도 알아!"

상처에 흙을 쑤셔 넣어 출혈을 막은 갈리아크가 벽 뒤에서 나타났다.

속박을 풀어 낸 통곡의 기사가 역으로 줄을 당겼다. 허공에 붕 뜬 성직자의 시선에 날카로운 손아귀가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시, 신이시여!"

"어딜!"

콰앙!

곧장 갈리아크가 달려가 놈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날아간 성직자를 모험가들이 겨우 받아 냈다.

"이제 아무도 끼어들지 마라! 그러다 죽는다!"

힘겨루기. 소리친 갈리아크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고, 통곡의 기사가 미친 듯이 발광했다.

그런 그들 뒤에서 고드가 침을 삼키며 지팡이를 겨냥했다.

'저 괴물의 약점은 나도 알아!'

가슴에 난 틈새. 거기에 어스 스피어를 적중하면 이길 수 있다.

오만인지 용기인지 질투인지 모르지만, 고드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뻐억! 통곡의 기사가 갈리아크를 밀어 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스 스피어>

고드의 마법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잘못됐다.

베르덴은 3위계 마법사지만 종합적인 능력을 따지면 그 위계를 아득히 벗어난다. 이리스와 고드가 그를 4위계,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라고 오해할 만큼.

그에 반해 고드는 평범했다.

베르덴과 같은 마법을 사용한들, 그 안에 담겨 있는 마력에 차이가 있으니 속도와 위력이 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마법서의 유무까지.

콰직! 통곡의 기사가 바위의 창을 박살 냈다.

"아...!"

뒷목을 스치는 살기. 언데드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뭔가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 줄기 핏빛 선이 목에 그어졌다.

목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고드가 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그를 짓밟으려 하는 언데드를 갈리아크가 쳐냈다.

"포션 가져와! 당장!"

"네, 네!"

미르나가 달려와 포션을 고드에게 들이부었고, 성직자들이 신성력으로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

혀를 찬 갈리아크가 베르덴을 흘겼다. 그는 휴식을 취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갈리아크가 만들 절호의 기회를.

'그래, 그 기회. 제대로 만들어 주지.'

콰앙! 쾅! 쾅!

서로 무기 없이 벌이는 육탄전. 갈리아크가 맨주먹으로 통곡의 기사를 두들겼다. 그러다 복부에 반격을 허용해 순간 숨이 멈췄지만, 도살자는 멈추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언데드를 지면에 처박았다.

쩌엉! 수직으로 가슴을 내리찍은 팔꿈치.

이내 검은 갑옷이 깨어지며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새가 만들어졌다.

"됐...."

우지직. 갈리아크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진 그에게 더 이상 움직임은 없었다. 녹슨 검을 다시 손에 쥔 통곡의 기사.

카각. 마력 화살이 갑옷을 스쳤다.

"네 상대는 나다."

베르덴의 도발이 성공했는지 붉은빛이 흔들렸다.

차츰 형체가 흐릿해지기 시작하며 뒤에서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걸렸다.'

놈이 근접해 오는 그때가 기회였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재빠르게 몸을 틀어 틈새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 순간 허공을 가르던 검의 궤도가 비틀리더니, 그 끝이 베르덴의 머리를 향했다. 누가 먼저 닿을지는 명확했다.

하지만 베르덴은 혼자가 아니었다.

<얼음 화살>

이리스가 쥐어짜 낸 마력.

베르덴에게서 속성으로 배운 1위계의 얼음 마법이 언데드의 손등을 가격했다.

아주 미약한 충격.

그러나 결정적이다.

카가가각! 자동 방벽에 스친 검이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베르덴의 손이 언데드의 가슴팍을 관통했다.

어둠 갑옷 내부에서 붉은 열기가 흘러나왔다.

"그만 죽어라."

<플레임>

화아악! 안에서 터져 나온 불길이 베르덴과 통곡의 기사를 집어삼켰다.

* * *

...스르륵.

베르덴이 눈을 뜨자 노란빛이 보였다. 신성력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마로스가 제지했다.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이제 겨우 화상을 치료했으니까요."

"맞아요, 선배님. 잠시 누워 계세요."

포션을 사용한 직후에는 크게 움직이면 안 된다.

효과가 떨어질뿐더러, 자칫 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치유 덕분에 상처는 겨우 회복했지만 아직 시기상조였다.

베르덴이 주변을 둘러봤다.

갈리아크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목이 베인 고드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가슴이 움직이는 게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만.

"다행히 목의 절단면이 깨끗해 살릴 수 있었대요.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지만요."

"언데드는 어떻게 됐지?"

이리스가 고개를 옆으로 향했다.

온몸이 거의 붕괴된 통곡의 기사가 널브러져 있었다. 베르덴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놈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기다려."

섣불리 다가가 끝을 내지 않은 건 잘했다. 저 괴물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으니.

마무리를 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서서히 꺼져 가고 있는 언데드의 불꽃이 베르덴을 주시하더니 미약하게 흔들렸다.

[잠... 깐....]

작지만 분명한 언데드의 음성.

토벌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 언데드가 말을?"

"이럴 수가.... 이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지성을 가진 언데드라니! 애셔 님, 거기서 물러나십시오! 당장 정화를...!"

주위가 소란스러워졌지만 베르덴의 신경은 오로지 언데드에 향하고 있었다.

통곡의 기사가 손을 덜덜 떨며 갑옷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녹슬고 그을린 낡은 목걸이. 뼈만 남은 손가락이 펜던트를 누르자 그 안에서 작은 그림이 나타났다.

화목하게 앉아 있는 한 가족.

오래되어 삭았기에 부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 앉아 있는 금색 머리칼과 녹색 눈을 가진 남자아이만은 깨끗했다.

'받으라는 건가?'

베르덴은 잠시 고민하다 손을 내밀었다.

만약 상대가 인간이었으면 팔이라도 잘라서 가져갔겠지.

하지만 직전까지 증오와 살기를 내뿜고 있던 이 언데드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공허했다.

"잠깐! 언데드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면-"

촤르륵. 흘러내린 목걸이가 베르덴의 손 위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통곡의 기사의 육체가 가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소멸. 다시는 그가 죽음에서 깨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윽...?!"

그 순간, 두통과 함께 전혀 모르는 기억들이 흘러들어 왔다.

착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찰나에 불과했지만, 베르덴의 기억력은 몇 가지 장면을 잡아냈다.

에스티리아 왕국의 국기, 생매장 그리고 그림 속 남자아이의 이름.

"...로리안."

"괜찮으십니까?!"

마로스가 달려와 베르덴의 안색을 살폈다.

베르덴의 눈은 여전히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휴우, 다행입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언데드와 관련된 물건을 만진 사람 중에 발광하거나 이지를 상실한 경우가 있어서... 애셔 님은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그래서 전부터 만지지 말라고 했던 건데.

물론 마로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언데드를 통솔하는 그 특성 탓에, 교단에서도 위험시하는 통곡의 기사. 아니, 검은 갑주를 보면 다른 언데드 개체일지도 모르겠지만 죽을 뻔했다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치운 마법사이자 은인.

만약 그와 도살자가 아니었다면 자신 또한 신께 버려져 죽음 속을 방황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된 거지, 암.'

굳이 불평을 말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지성을 가진 언데드도 죽었고.

마로스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제가 보관을...."

"이건 제가 챙기겠습니다."

토벌의 전리품. 단호한 말투에 마로스가 입을 다물었다.

팬던트를 품에 넣은 베르덴이 가루가 된 통곡의 기사를 보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비르온 영지 언데드 토벌.

예상치 못한 위험이 있었고, 통곡의 기사가 남긴 유산 탓에 찜찜한 기분이 남아 있었지만. 의뢰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제 돌아갈 때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남아 있는 놈들이 있었지.'

마력회로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마력도 약간이나마 회복했다.

베르덴이 몰래 지형을 조작해 수백 마리의 언데드가 갇혀 있는 지하를 무너뜨렸다.

그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언데드는 아무도 없었다.

33화 작별

비르온 영지로 돌아온 토벌대는 각자 치료를 받았다.

그사이 마로스가 통곡의 기사라는 언데드에 대해 영주에게 얘기하자 영지가 발칵 뒤집어졌다. 언데드를 통솔하는 위험성. 자칫 바깥으로 나왔다간 영지 전체가 무덤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 탓에 소란이 일고 주변 곳곳이 시끄러웠지만 베르덴이 신경 쓸 건 아니었다.

이른 새벽.

성벽 바깥으로 나와 숲에 도착한 베르덴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적셨다.

'에스티리아 왕국이라.'

몇몇 장면밖에 얻어 낼 수 없었지만 이 기억이 사실이라면, 왕국은 세계적으로 지탄받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자국의 군인을 학살하고 생매장해 버리다니. 흙 속에 파묻혀 죽어 가는 군인의 증오심은 기억을 넘어 베르덴에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치워 냈다.

지금 신경 쓸 건 언데드의 기억 따위가 아니었다.

베르덴이 자신의 마력회로를 관조했다. 통곡의 기사를 토벌한 전후가 달랐다.

회로는 조금 더 확장되어 있었고, 마력을 회복하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강해졌다.'

생각했던 대로 목숨이 오가는 실전은 마법사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같은 3위계 마법사 고드와 비교하자면, 베르덴의 마법은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특히 마법서로 강화된 마법의 위력은 4위계 중위 이상의 마법과도 맞먹을 정도. 그리고 심장에 담긴 마력량은 그 이상이다. 더해서 전 속성 마력회로까지.

단순히 마법적인 능력만을 따졌을 때, 베르덴이 알기로, 이와 비슷한 스펙을 가진 3위계 마법사는 그 자신이 유일했다. 역사를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부족해."

힘이란 객관적인 것이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3위계로서의 기준일 뿐. 5위계 이상의 마법사와 맞붙는다면 승산은 한없이 낮아진다. 시전 가능한 마법의 가짓수나 마법의 위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릴 테니까.

'거기다 마도사라면 생각할 것도 없다.'

마도사.

5위계 이상에 이른 마법사가 깨달음을 얻어서 도달하는 경지이며, 절대적인 마법의 법칙을 일부 벗어나 자신만의 마도를 걷는 존재.

마법의 틀에 갇혀 있는 마법사는 감히 대적할 수도 없다.

그럴진대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는 7위계의 마도사이며 만능이라 불리는 초월자.

그에 비하면 베르덴의 강함은 달 아래에 있는 반딧불과도 같다. 지금으로선 무슨 짓을 해도 마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베르덴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걷히며 만월의 달빛이 그에게 쏟아졌다.

힘이 필요하다.

지식이 필요하다.

장비가 필요하다.

보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언제든 죽음의 기로에 설 각오는 되어 있다.

염원하는 복수를 이루기 전에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테니까. 그를 위해 이뤄 낸 역천이다.

어떤 마법사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게 욕심이란 거겠지.

"...."

만월을 바라보고 있던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닿을 리가 없었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저 달과 같았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포기하는 그런 것.

하지만.

베르덴이 조금 더 길게 팔을 뻗었다.

마찬가지로 닿지 않았지만,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분명한 차이였다. 직전의 자신보다 더 목표에 가까워진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면 언젠가 닿는다.

그 사실만이 베르덴에게 중요했다.

* * *

비르온 영지를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토벌대를 이루었던 모험가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고, 성직자들은 영지에 남아 갱도의 상황을 지켜본다고 한다.

마차가 준비되길 기다리고 있는데, 갈리아크가 다가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죽었을 정도의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는 멀쩡했다.

'하긴. 통곡의 기사와 맨손으로 맞붙을 정도로 무식한 놈이니 당연한 건가.'

"어이, 애셔. 너희도 오늘 떠나냐?"

"무슨 볼일이지? 수고비라도 받으러 왔나?"

"수고비? 아, 그거?"

갈리아크가 록스를 흘끗 쳐다봤다.

록스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자, 갈리아크가 킬킬거리곤 베르덴에게 말했다.

"거, 까칠하긴. 우리 같이 목숨 걸고 싸운 사이 아니었나? 내 덕분에 겨우 쓰러뜨려 놓고 그런 태도는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내 덕분에 이긴 거지. 너는 도중에 기절하지 않았나?"

"이 십새끼. 한마디를 안 지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이리도 싸가지가 없는 건지.

하지만 그 험한 입과 달리 갈리아크는 베르덴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백금 등급 모험가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그는 특히나 강자를 좋아했으니까.

그만큼 베르덴이 보여 준 마법은 인상적이었다.

"그나저나, 애셔. 너 모험가 할 생각은 없냐? 그 정도면 백금까지는 금방 오를 텐데."

"안 해."

집단에 속해 명령받고 제한받는 건 질색이다.

길드 쪽에서 여러 혜택을 주면서 모셔가면 모를까. 그런 대답에 갈리아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주 자존감이 넘치는구만. 저기 안경 쓴 고드 놈은 죽을 뻔했다고 아주 난리법석을 떨어 대던데. 뭐, 싫으면 됐다. 그나저나 모험가는 싫다고 하니, 용병 길드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 그레이(Grey) 쪽에라도 갈 생각이냐?"

"그레이?"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것도 몰라? 그럼 대체 돈을 어떻게 벌려고 했지? 설마 유명해지면 알아서 찾아 주겠거니 하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럼 안 되나?"

"크하하! 이거 세상 물정 모르는 마법사였구만. 그래서야 휘둘리는 것밖에 더 되겠냐? 자고로 배를 채우려면 입만 벌리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먹잇감을 제 발로 직접 찾아다녀야 하는 법인데 말이야."

"...대체 그레이가 뭔데 그러지?"

갈리아크가 이죽거리며 작게 말했다.

"'그레이'란 사회의 이면에 자리 잡은 정보상들을 통틀어 말하는 거다. 신용이 보장된 사람에게 정보를 사거나 파는 곳이지. 정보상마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니 개개인마다 불법이나 합법을 오가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다. 정보상인 동시에 의뢰를 주선하는 의뢰 창구라는 거."

"의뢰?"

"모험가 길드와 용병 길드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놈이 너 하나뿐인 줄 알았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돈과 명성 아니면 그 외 뭔가를 위해 움직이는 놈들은 언제나 많았다. 그레이는 그런 놈들이 모이는 곳이고. 나도 가끔씩 거기서 의뢰를 받기도 하지. 강한 놈들을 사냥하는 데 모험가 길드의 의뢰만으론 성에 차지 않거든."

베르덴의 일생은 마탑에서 지낸 게 태반이다.

당연하게도 세상을 잘 모를 수밖에. 마법적인 지식은 누구보다 풍부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경험은 눈앞의 도살자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얕다.

'그레이라.'

베르덴은 그레이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했다.

우선 정보.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 등 마탑에서 가져온 보물들을 사용하려면 특수한 재료들과 뛰어난 전문가가 필요한데, 베르덴 혼자서 전부 찾아내려면 적잖은 시간이 소모될 것이다.

그걸 돈으로 상쇄할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을 터.

'그리고 그 돈은 의뢰를 해결해서 마련하고.'

더군다나 강한 놈들을 마주할 기회도 있다고 했으니.

돈, 명성 그리고 실전 등을 통한 성장.

도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르덴에게 있어 매력적인 곳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주는 거지?"

"그야 즐거울 테니까."

갈리아크가 이를 드러냈다.

이 잿빛 머리는 자신이 본 마법사 중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인간. 놈은 자신과 동류다.

누구보다 힘을 갈구하는 욕망, 차분한 외모 아래 숨겨진 투쟁심 같은 강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즉, 갈리아크가 호의를 품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쳤다.

베르덴은 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언질은 해 둘 테니, 생각이 있으면 '코헨'의 빈민가로 가서 '페일의 화살촉'을 찾아라. 어디 숨어 있지는 않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싫으면 길에서 깡통 하나 들고 의뢰 구걸이나 하든가. 그것도 즐겁긴 하겠지만. 뭐가 됐든 재미없게 뒈지진 말라고."

거칠고 투박한 작별 인사.

비릿한 미소를 지은 갈리아크가 그대로 마차를 타고 떠났다.

'미친놈.'

행동에 두서가 없다.

도살자란 이름이 어울리는 사내였다.

다음은 이리스들의 차례.

모험가들이 하나둘씩 올라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에 마차에 오른 이리스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선배님, 안 타세요?"

"그래."

"설마 날아가시려고요? 부상도 나은 지 얼마 안 됐...."

아. 이리스가 말을 멈추고 베르덴의 얼굴을 봤다.

그가 갑자기 마르테스에 찾아왔던 그때처럼, 어느 날 훌쩍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직감했다. 나중이 될 거라고 생각한 작별의 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이리스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왜, 왜요...?"

"갈 곳이 있다."

안 그래도 마르테스에 더 이상 볼일은 없다.

더군다나 도살자에게서 얻은 정보 덕에 행선지가 정해졌다.

"부여 마법 배우고 싶다면서요...."

"책은 다 읽었다. 너한테 배운 것도 다 체득했고."

"그럼, 그럼 의뢰비는요?"

"알아서 계좌에 넣어 주겠지."

"그럼...."

이리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처음은 분명 갑작스러웠지만 그 만남은 이리스에게 운명과도 같았다. 몇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았고 아카데미에서도 이해하지 못한 어려운 이론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원소 마법까지.

마법사로서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나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붙잡고 싶다.

그러나 베르덴에겐 나아가야 할 자신만의 길이 있다. 그를 잡는 건 욕심이자 민폐였다.

홀가분하게 놓아 주는 것이 당연했다.

"...."

문득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지만, 과연 베르덴은 자신을 후배라고 생각할까? 어쩌면 귀찮은 사람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부여 마법을 가르쳐 주긴 했지만, 굳이 자신이 없었더라도 관련 서적만 있었으면 그 스스로 터득했을 테니. 그녀가 한 건 그저 시간을 약간 앞당긴 것뿐이다.

그에 비하면 그녀가 받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이리스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그때, 베르덴이 손을 들어 이리스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 보자."

그 한마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다.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고, 푸른 머리가 바람에 가볍게 휘날렸다. 이리스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다음에 봐요."

둘은 그렇게 기약 없는 재회를 약속했다.

* * *

붉은 머리칼의 마법사, 로벨린.

그녀의 뒤로 여러 마법사의 시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마력이 일렁이자 공기가 달아오르며 폐를 깊숙한 곳부터 서서히 태우기 시작했다.

"대답해. 왜 블랙 아워가 보헤미른 마탑을 노린 거지?"

"끄윽... 저, 정말로 모르는 일... 끄어어어어억!"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주변 공기의 온도를 높여 장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폐 깊숙한 곳부터 익어 가는,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몇 번이나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적인 심문에도 로벨린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털썩. 죽음에 이른 마법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불꽃을 흩뿌려 그대로 태워 버렸다.

죽음의 마법사 집단, 블래 아워의 지부 토벌. 이걸로 벌써 네 번째다.

그런데 어딜 가나 모른다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무려 마탑을 부수는 일이니 말단까지 정보가 퍼지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마음 같아선 상위 지부를 찾는 일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그녀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베르덴....'

제 손으로 복수를 이루기엔 로벨린은 너무도 약했다.

<이그니션>

화아아악!

숲속에 숨겨져 있던 블래 아워의 지부. 지하와 더불어 건물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휘황찬란한 로브를 두른 한 마법사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단한데. 고작 2위계 마법이 이 정도 위력이라니. 역시 특이 형질 보유자인가 봐."

"...여긴 제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을 텐데요, 매니악스."

"그렇다고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장차 스승님의 네 번째 제자가 될지도 모르는데. 혹여 실수라도 해서 죽어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보헤미른 마탑주의 세 번째 제자, 루커드 매니악스.

순진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매니악스의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한 목소리에, 로벨린이 미간을 좁히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쓸데없는 생각은 거두고 논문이나 신경 쓰시죠. 안 그래도 마법 학회에서 지켜보고 있던데요."

"하하, 네가 내 논문을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물론 순조롭게-"

"관심이 없을 리가요. 그 유명한 '다중 연속성 이론' 이후에, 무려 7년 만에 발표하는 논문인데.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었을지 궁금한 건 당연한 생각이 아닐까요?"

로벨린의 붉은 눈동자가 루커드를 주시했다.

그 시선은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로벨린?"

"다중 연속성 이론, 정말로 당신이 만든 게 맞나요?"

루커드의 얼굴이 미약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듣기에 따라 오해할 여지가 있는 발언인데?"

"7년 전에 소문이 하나 돌았었죠. 그 이론을 대놓고 도둑질하려던 사람이 있었다고. 저는 그때 바깥에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 탓에 마탑이 잠깐 시끄러웠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별것도 아닌 해프닝으로 끝났지. 스승님께도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아, 혹시 질투하는 거야?"

"질투라기 보단 의문이죠. 그렇게 대단한 이론을 만들어 세계에서 인정을 받은 마법사가, 무려 7년 동안 변변찮은 결과물도 없이 시간을 보내 왔다는 게. 이룬 거라곤 3위계 중위에서 4위계 상위에 오른 것밖에 없다는 게 말이죠. 그것도 마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잠깐의 침묵.

시선을 거둔 로벨린이 마력을 일으켰다.

"먼저 돌아가죠."

그녀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소를 유지한 채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루커드. 이내 그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저 시발 년이."

평소에도 거슬리는 시선을 보내더니, 이번엔 진즉에 끝난 이야기로 시비를 건다.

아무리 화염 속성에 특화된 특이 형질을 보유한 마법사라지만, 고작해야 3위계 따위가 건방져도 너무 건방졌다.

마음 같아선 저 콧대를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럴 순 없지.'

어떻게 올라온 자린데.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마탑주의 눈밖에 날 수는 없다.

아, 그나저나 그 빌어먹을 마탑만 멀쩡했으면 이런 귀찮은 일 대신 논문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지.'

루커드가 이죽거렸다.

베르덴의 죽음. 마탑주가 알아서 잘 처리했다고 했지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어디 가서 콱 죽어 버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뒈져 버릴 줄이야.

'이걸로 내가 논문을 훔친 사실은 영영 사라지겠지.'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제 앞길만 신경 쓰면 된다.

명성을 유지할 논문을 만들고, 5위계에 올라 마도에 이르는 것. 측정된 한계가 5위계인 터라 마탑주의 자리까지 오르진 못하겠지만, 마탑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기엔 충분하다.

거슬리게 하는 건 그때 치우면 될 터.

"시간은 내 편이다."

루커드는 자신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마탑으로 돌아갔다.

34화 정보상 페일

베르덴은 곧장 코헨(Cohen)으로 향했다.

같이 움직여야 할 일행이 없으니 거리낌 없이 최대로 속도를 높였다. 몇 시간이나 비행을 유지하는 건 꽤나 피로가 쌓이는 일이었으나, 그 만큼 이동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사람을 고용해 편하게 야영을 하는 것보단 하루빨리 도시에 가서 여독을 푸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3일 정도가 지났다.

마력으로 만들어 낸 물로 몸을 씻고, 육포와 물로 끼니를 때우던 그의 앞에 마침내 도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 간단한 검문을 받고 도시에 입성했다.

'마르테스보다 규모가 크군.'

코헨은 일종의 공업 도시로, 특히 제조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생필품을 만드는 건 반복적이고 복잡하지 않는 일감. 결코 수입이 많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위험에 처할 일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인종이나 도적의 습격이 없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사람들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빈부 격차 또한 마찬가지.

몰려드는 인구 탓에 코헨의 빈민가는 공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넓고 열악하다.

좋은 주거 환경은 한정되어 있기에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이 모여 만든 빈민가. 많은 인구수에 비해 치안이 여러모로 부족했기에, 누군가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베르덴은 거기서 '페일의 화살촉'이라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우선 자리부터 잡을까. 공방에 볼일도 있고.'

코헨의 삭막한 거리를 지나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여관에 들렀다.

"어서 오...."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다운 차림새에 신비로운 외모. 예사 손님이 아니다. 눈을 깜빡이고 있던 점원 대신 여관 주인이 잽싸게 다가가 그를 응대했다.

"꿀벌의 쉼터에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여관의 주인인 파브르라고 합니다. 원하신다면 안내를 도와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베르덴이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은은하게 풍기는 달짝지근한 냄새와 밝은 색조의 인테리어.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의 얼굴은,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과는 달리 활기차 보였다.

굳이 다른 여관을 찾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꼭대기 층에 빈자리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여관에서 특실로 분류되는 곳으로, 도시의 여관 중 유일하게 코헨의 정경을 즐길 수 있는 방이지요. 더불어 마력 승강기도 있기에 이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1박에 4만 엘크로, 삼시 세끼 갓 만든 식사를 포함하면 5만 3천 엘크입니다."

"특실로 2주 빌리겠습니다. 식사는 방 앞에 놔 두시면 됩니다."

코헨에서 보기 드문 통이 큰 손님. 매출이 훌쩍 뛰는 소리가 들린다.

베르덴이 카드를 내밀자, 파브르가 넙죽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았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 * *

날이 저물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베르덴은 마흐바트의 가죽과 녹슨 반지를 챙기고 공방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생소한 도시지만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니 지도까지 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첫 번째 대장간이 보였다.

땅! 땅!

분주하게 움직이며 철을 두드리는 대장장이들. 많이 바쁜지 주문을 받기도 어려워 보였다. 저런 곳에 맡겼다간 품질은 차치하고 차례가 한 달 넘게 밀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손님이 많아 보이는 대장간은 지나쳤다.

"...음?"

구석에 자리 잡은 한 대장간.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성이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꽤나 한가로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바깥에 전시된 검과 갑옷을 유심히 쳐다봤다.

'괜찮아 보이는데.'

전문가가 아니라 정확하겐 몰라도, 겉으로 보기에 다른 대장간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왜 손님이 없는지 의문이었다.

그때, 대장장이의 고개가 덜컥 내려갔다.

"어우 씨, 목이야...."

목을 가볍게 주무른 뒤, 기지개를 켜던 그가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이것 참, 손님이 와 있었구만. 크흠, 뭐, 찾는 거라도 있으쇼?"

"주문 제작을 맡기러 왔습니다."

그러자 대장장이가 미간을 좁혔다.

"상회에서 나오셨나? 미안한데 다른 대장간으로 가 보슈. 나는 양산형 제품 같은 건 안 만드니까. 철제 식기나 훈련용 검은 저쪽에 있는 대장간이 잘하니까 생각 있으면 가 보시고. 그럼 잘 가슈."

대장장이가 팔짱을 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뭔가 오해한 모양이다. 베르덴은 몇 마디 말 대신 뒤에 메고 있던 짐을 풀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대장장이가 눈을 뜨자, 짙은 녹색빛의 가죽이 보였다.

이게 뭐지... 하며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눈을 부릅떴다.

"어? 마흐바트?"

냉큼 가죽을 잡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억센 질감과 야생의 향취. 어느 모로 보나 진품이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상하의로 맞춰 제작할 생각입니다. 가능하십니까?"

"물론 가능하지!"

즉답한 대장장이가 가죽을 내려놓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거 미안하오. 내가 제대로 된 손님을 못 알아봤군. 코헨에서 주문 제작이라고 하면 양산품을 만드는 일이라서 오해를 해 버렸어. 그러니까 이해 좀 해 주슈."

대장장이가 빈 책상에 가죽을 펼쳤다.

가볍게 훑어본 그가 턱을 쓸었다.

"상의를 조끼로 만들어도 살짝 아슬아슬한데... 두께를 얇게 해도 되겠소?"

"방어구로서의 역할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이걸 참고하면 됩니다."

베르덴이 제작 방향에 대한 쪽지를 건넸다.

대강 읽어 본 대장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가닥이 잡히는군. 그런데 가죽 특성상 손이 많이 가서 비용이 좀 들 텐데 괜찮겠소?"

"선불로 지불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 됐소. 돈을 먼저 받으면 아무래도 의욕이 떨어져서. 그리고 손님 얼굴을 보니 사기꾼 관상하곤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고. 필요한 재료는 다 있으니 한 6일 정도면 될 거요. 따로 더 필요한 건 없소?"

"하나 더 있습니다."

베르덴이 녹슨 반지를 꺼냈다.

대장장이가 전용 돋보기를 꺼내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음, 딱 보니 삼십 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군. 대체 어디서 이런 골동품을 구했는지, 원."

"복원 가능합니까?"

"그 정도야 쉬운 일이지. 서비스로 해 줄 테니까, 나중에 올 때까지 준비해 두겠소."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손님 덕분에 오랜만에 대장장이다운 일을 하게 됐는데. 그럼 조심히 가쇼."

이걸로 대장간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빈민가에 있는 페일의 화살촉을 찾을 차례. 숨겨져 있지 않다고 했으니 현지인에게 물어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대장장이에게 배웅을 받던 베르덴이 고개를 돌리곤 물었다.

"혹시 페일의 화살촉이란 곳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 * *

코헨의 빈민가.

중심부와 달리 낡고 지저분한 집들이 가득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한층 더 어두워졌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인지 곳곳에서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래도 악취는 안 나네.'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청결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빈민가치고는.

지금까지 방문했던 여타 도시들과 비교하자면 압도적으로 열악한 환경이다.

베르덴은 그중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페일의 화살촉'이라는 간판을 단 상점.

유리창 너머로 보니 다양한 활과 화살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기가 정보상이 있는 곳인가.'

겉으로 봐선 평범하다. 갈리아크가 언질을 해 두겠다고 했으니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건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담뱃대를 입에 문, 동그란 안경을 쓴 노인이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은 주문 제작 안 받으니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고르게. 가격은 밑에 적혀 있네."

"다른 일로 왔습니다."

"다른 일?"

그제서야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몇 초간의 침묵이 지나고서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잿빛 머리에 푸른 눈동자... 확인차 묻겠는데 이름이?"

"애셔라고 합니다."

"애셔. 들은 대로군."

노인이 안쪽 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들어가서 지하로 내려가면 안내해 줄 사람이 있을 걸세. 도살자의 신용이 있으니 절차는 생략할 테지만...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피차 피곤해지고 싶지 않다면."

노인의 작은 경고.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구석에 있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오래된 창고가 나타났다.

잠시 기다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 전체에 붕대를 두르고, 그 위에 낡은 천 옷을 입은 사내였다.

"이쪽. 으로. 오십. 시오. 애셔. 님."

쩍쩍 갈라진 목소리.

베르덴은 말없이 사내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마력을 끌어모으며 감각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아직 신뢰를 쌓지 않는 장소에서 최소한의 경계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붕대 사내가 벽에 손을 대니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마법적인 반응은 전혀 없는 걸 보니, 기계적인 장치인 모양. 그를 따라 더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자 복도가 나타났다.

그 길을 쭉 따라가니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주점?'

카운터에서 컵을 닦고 있는 바텐더.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들. 베르덴이 그들의 복장을 빠르게 관찰했다.

'마법사 하나, 검사 둘, 궁수 하나, 확인 불가가 하나.'

이곳을 지키는 자들일까, 자신과 같이 의뢰를 하러 온 자들일까. 분위기를 보니 평범한 인물들은 아닌 듯한데.

뭐가 됐든 이곳이 갈리아크가 말한 그레이임은 분명해졌다. 붕대 사내가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안내. 는.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은. 여기로. 내려. 가시면. 됩니다."

붕대 사내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왔던 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베르덴이 곧 문에 손을 대었다.

끼이익.

녹슨 문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 뒤에 있는 건, 주위를 둘러싼 철창과 유리 그리고 가운데에 의자가 하나 있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이내 유리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애셔 님. 리비안트 공국 남부 그레이의 정보상, 페일이라고 합니다."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마른 체형. 그에 반해 목소리엔 힘이 담겨 있다.

"애셔라고 합니다."

"예, 연락책을 통해 갈리아크 님께 얘기는 들었습니다. 들었던 대로 확실히 특출난 외모시군요. 덕분에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페일이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으시지요. 그리고 말씀 편히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지."

"좋습니다."

베르덴이 의자에 앉았다.

페일이 종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파이테 영지에서 전직 모험가인 도적과 금 등급 모험가를 죽인 아인종을 토벌. 그리고 마르테스로 향하는 길에 모험가들을 구했으며 도시 내에서 암살자와 전투. 마지막으로 비르온 영지에서 도살자와 함께 통곡의 기사라 불리는 언데드를 토벌. 짧은 시간 동안 화려한 전적이시군요."

"뒷조사를 한 건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정보상인 만큼 제가 소문에 민감하기도 하고요. 그럼 우선 묻겠습니다. 애셔 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저희 정보상을 찾으셨습니까? 의뢰? 아니면 정보?"

베르덴은 답했다.

"둘 다 필요한데."

"둘 다라. 애셔 님께서는 실적이 있으시니 의뢰를 연결해 드릴 순 있지만, 보수가 높은 의뢰나 정보는 저희가 분류한 등급에 따라 제한되어 있습니다."

"등급?"

"정보의 가치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 아무에게나 정보를 팔아넘긴다면, 그 결과로 인한 책임은 당연하게도 정보상에게까지 미치죠. 옛날에 귀족 간의 분쟁에서 어떤 정보상이 한쪽 귀족에게 정보를 팔아넘겼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된 것처럼요. 의뢰도 마찬가지입니다."

페일이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주제를 알라. 그레이의 정보상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잊지 말아야 할 문장입니다. 이 등급에 대해선 무슨 일이 있어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것이 이 바닥의 규칙입니다."

그 목소리는,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호했다.

물론 그런 협박을 할 생각은 베르덴에겐 조금도 없었다.

"등급은 어떻게 올릴 수 있지?"

"간단히 말하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힘과 신용입니다. 아무리 신용이 높다고 한들 약자에게 정보를 넘겼다간 빼앗길 수 있고,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신용이 없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니."

"힘과 신용...."

'당장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군.'

원소의 숨결과 마력 크리스탈 등.

마탑의 보물들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분명 상위 등급에 있을 터. 물어보지 않아도 확신에 가까웠다.

그래도 딱히 지장은 없다. 등급도 등급이지만, 현재로선 정보를 살 돈도 없는 데다가 그 정보를 쓸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등급을 올리며 동시에 준비를 갖추면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페일의 의뢰를 맡을 필요가 있다.

"의뢰는 내가 고를 수 있는 건가?"

"몇 가지 후보를 선정해 선택권을 드리는 방식입니다. 의뢰를 받기 전에, 먼지 이 설문지에 답을 기입해 주시죠."

페일이 종이와 펜을 유리 반대편으로 밀어 넣었다.

염력으로 끌어와 내용을 들여다봤다. 살인에 거부감이 있는가, 약간의 불법을 저지를 수 있는가 등. 베르덴의 성향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이걸로 내게 주선할 의뢰를 선별하는 건가.'

간략히 답을 써서 건넸다.

페일은 말없이 읽어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보단 모험가적인 성향이 강하시군요. 다행히 저희하고 잘 맞을 것 같습니다. 마침 애셔 님에게 어울리는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

딱.

페일이 손을 튕기자 뒤쪽에서 파일이 날아왔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베르덴의 감각으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파일을 받은 페일.

그가 책갈피를 훑더니 중간 부분을 잡아 열었다.

"이 의뢰는 애셔 님이 해 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생명을 토벌하는, 아주 간단명료한 일이죠. 이거라면 애셔 님을 증명하는 데 충분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아인종이라도 토벌하는 건가?"

"아인종에 대한 의뢰도 들어오긴 하나, 이번에는 아닙니다."

페일이 조심스레 파일에서 종이 하나를 빼냈다.

그러곤 반대로 돌려 베르덴에게 보였다. 그 상단에는 '마수'란 단어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로어 울프(Roar Wolf). 라드란 백작 영지에 숨어 있는 마수를 토벌하는 일입니다."

35화 로어 울프 토벌

마수를 토벌해 본 경험은 없었으나, 사실 과정 자체는 아인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추적해 죽이는 것, 그게 전부다. 소재가 쓸 만하면 채취하기도 하나 그건 부가적인 목표일 뿐이다. 그러니까 페일이 보여 준 건 지극히 평범한 모험가 길드의 의뢰였다.

베르덴이 물었다.

"마수 토벌은 모험가 길드에서 전담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여기에 의뢰한 거지?"

"지극히 정상적인 의문입니다. 사실 이런 덴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주로 돈 문제지요."

모험가 길드는 국가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그들이 없다면 여기저기서 들끓는 아인종, 이형종 그리고 마수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가 없다. 외곽 지역에선 의뢰를 받아 줄 사람 하나 구하는 것조차 힘들겠지.

물론 아예 막을 수 없다는 건 아니다.

휘하의 기사와 돈을 주고 고용한 사병 등 피해가 더 클지라도 영주가 직접 대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토벌 개체에서 얻은 소재를 온전히 영주가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만약 영주가 사병을 움직여 돈이 되는 마수와 아인종을 사냥한다면, 그 지역에 있는 모험가 길드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고블린이나 코볼트의 수가 불어나 작은 마을들을 습격하겠지. 어지간히 사병이 많지 않는 이상 영주 홀로 대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즉,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에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관련 법이 제정되었다.

위급 상황을 제외하고, 모험가 길드의 토벌 권리를 우선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영주의 반발이라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으니까.

"지금 시대에, 예를 들어 영지에 마수가 출현하면 영주는 모험가 길드에게 의뢰해야 합니다. 그러니 토벌 보수를 지급해야 하죠. 하지만 그 비용에 마수의 사체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수의 사체에 대한 권리는 모험가 길드로 넘어간다.

그리고 여러 가공 단계를 거치고 경매를 통해 상인들에게 넘어가는데, 만약 영주가 소재를 원한다면 경매에서 선순위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유통 과정을 거쳤기에 소재 비용 이상의 값을 치러야 한다.

영주 입장에선 짜증 나는 일이다.

옛날보다 돈과 시간이 훨씬 더 소모되어 버리는 거니까. 그렇다고 대놓고 법을 어겼다간 소재 압수와 더불어 적지 않은 과징금까지 지불해야 한다.

영지의 평가가 낮아지는 건 덤이고.

"그래서 몇몇 영주들은 아인종이나 마수가 확인되면 길드에 알리기 전에 가능한 먼저 토벌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값이 훨씬 더 싸게 먹힐 테니까. 사병을 이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긴 하나, 웬만해선 그레이를 이용하는 편입니다. 자칫 사병이 죽기라도 했다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요."

"귀족의 불법에 관여하는 건데 문제는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 의뢰는 불법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약해서 말이죠. 모험가 길드하고 친분이 있는 귀족의 경우엔 들키더라도 눈 감아 주는 일도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페일은 귀족들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나름의 신용을 쌓아 올렸습니다. 이런 의뢰쯤이야 흔한 축에 속하죠. 공국은 나날이 발전해 가는 나라인 만큼,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의뢰들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언젠가 애셔 님께서도 하게 될 일일지도 모르죠. 뭐, 어쨌든."

페일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번 의뢰. 받으시겠습니까?"

베르덴은 이미 선택을 마쳤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받지."

* * *

로어 울프.

놈의 성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효는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 비교적 연약한 내부 장기를 터뜨려 사냥하는 것이 특기. 평범한 사람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잡아먹힌다.

모험가 길드가 책정한 위험도는 금 등급 이상. 성대를 먼저 끊어 버리는 것이 기본적인 공략 방법이다.

'남은 기한은 약 38시간.'

라드란 백작이 요구한 시간이다. 그 안에 토벌을 마치지 못하면 의뢰는 실패다.

사전 조사를 마친 베르덴은 바로 움직였다.

이런 간단한 의뢰조차 실패할 수는 없다. 페일에게서 의뢰를 받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베르덴이 가진 마법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코헨에서 라드란 영지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이틀 거리. 비행으로 주파해 해가 기울기도 전에 도착했다.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화창한 숲.

그러나 아주 고요했다. 그 흔한 새가 지저귀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다.

조사에 따르면, 로어 울프는 자신보다 약한 늑대들을 부하로 삼아 무리를 이룬다.

그리고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먹잇감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아인종이고 짐승이고 말이다.

즉, 이 구역은 놈들의 사냥터 중 하나라는 뜻.

<마력감지>

베르덴이 마력을 수평으로 퍼뜨렸다.

앞으로 걸어 나가며 시시각각 범위를 조정하자,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이 감지되었다.

멀지 않은 위치에 널브러진 사슴의 사체. 여기저기 물어뜯겼으며 곤죽이 된 내장이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로어 울프의 흔적이군.'

보아하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추적을 이어 나갔다.

곳곳에서 감지되는 뼈와 썩은 고기. 개중에는 반쯤 남은 오크의 사체 또한 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하며 밤이 찾아왔다.

피부를 스치는 스산함. 베르덴이 퍼뜨린 마력에 수십 개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앞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안광이 베르덴을 향해 번뜩였다.

* * *

"음...."

사냥감을 보는 듯한 시선에 베르덴이 볼을 긁적였다.

분명 추적하는 건 자신이었는데, 역으로 놈들이 찾아와 버렸다. 아마 자신을 사냥감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어쨌든 찾는 수고를 던 셈이니.

베르덴의 주위를 둘러싼 늑대의 수는 총 22마리. 로어 울프로 보이는 개체는 감지되지 않는다. 아마 사방에 퍼진 마력을 눈치채고 숨어 있는 거겠지.

감각이 예민한 마수는 마력을 느끼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하니까.

하지만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숨어 있는 장소는 마력감지 범위 바깥이면서 기습을 하기 용이한 위치.

<윈드 사이클>

날카롭게 회전하는 바람의 원반이 주위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 갈랐다.

열 그루가 넘는 나무가 중력에 이끌려 쓰러지기 시작하자,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낙하했다.

[크르르르....]

몸 길이만 4m를 넘는 체구. 일반적인 늑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들킨 게 꽤나 신경질이 났는지, 로어 울프는 베르덴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며 발톱으로 연신 바닥을 긁었다.

'저 덩치로 나무를 오른 건가? 생각보다 날렵한데.'

<암시>

시야가 밝아진다.

마력감지를 해제하고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주위에 퍼져 있던 마력이 사라지는 것을 위협이라고 판단했는지, 털을 곤두세운 로어 울프가 포효를 내질렀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

정면으로 쏘아져 나가는 충격파.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정면으로 막는 건 하책이다.

<석벽>

베르덴의 발밑에서 벽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비행을 써서 자리를 벗어났다. 포효에 적중당한 석벽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리 2위계 마법이라지만 마법서로 강화한 마법인데....'

상당한 파괴력이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석벽은 되어야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왜 성대부터 끊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의뢰의 주 목표는 토벌이며 부가 목표는 소재다.

깨끗하게 잡을수록 베르덴이 받는 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로어 울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재 중, 가장 비싼 것이 바로 성대.

화염 마법이나 얼음 마법을 광범위하게 터뜨려 손쉽게 목 안쪽에 손상을 입힐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도 소재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건 너무 아까웠다.

굳이 약점을 공략하지 않아도 토벌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베르덴이 지면으로 내려갔다.

로어 울프의 포효를 들은 늑대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충격파>

<어스본>

콰드드득!

충격에 주춤거리던 순간, 지면에서 솟아오른 송곳이 늑대들을 관통했다. 뒤이어 돌진해 오는 놈들은 베르덴이 스태프에 마력을 집중해 때려잡았다.

한 방에 한 놈씩.

캐개갱!

캐앵!

순식간에 줄어드는 숫자. 아직 살아남은 늑대들이 있으나 이미 겁에 질린 상태다.

이에 분노한 로어 울프가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그 경로에 있던 늑대들이 발톱에 찢기거나 튕겨져 나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수답네."

<석벽>

트리플 캐스팅.

콰아아앙!

로어 울프의 몸이 벽과 충돌했다. 두 개의 석벽이 박살 났으나 놈도 충격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비틀거리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베르덴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캐앵!]

로어 울프의 가슴을 강타한 암석.

뒤로 나가떨어진 놈이 뒤늦게 중심을 잡더니, 다시 한번 포효를 내질렀다. 인간에 비해, 공격 패턴이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에어 레일>

포효는 소리의 일종이기에 공기를 통해 움직인다. 마법으로 공기의 방향을 유도해 궤도를 비트는 건 간단한 일.

퍼어억! 퍼억! 마수가 내지른 충격파가 늑대들을 덮쳤다.

이걸로 남은 건 로어 울프 하나뿐.

베르덴의 마력에 따라 지면이 융기했다. 근처에 있던 나무들이 뿌리째 드러났다.

움직이는 로어 울프를, 최대한 소재에 손상이 가지 않게 토벌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바로 때려잡는 것.

허공에 뿌리 뽑힌 나무들이 떠올랐다.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기자, 로어 울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앙! 콰앙! 콰앙!

놈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피해 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길어야 한 시간.'

토벌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 * *

베르덴은 토벌한 로어 울프를 약속한 위치에 갖다 두었다.

이후 페일의 부하들 감독하에 라드란 백작가가 사체를 가져가는 걸 확인했다. 이제 돈만 받으면 의뢰는 성공적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라드란 백작이 보낸 보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고가에 거래되는 로어 울프의 성대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평범한 3위계 마법사는 아닌 모양이군요."

로어 울프는 비교적 마법사에게 쉬운 상대다.

하지만 성대를 노리지 않고 싸운다면 꽤나 까다로워진다.

페일이 잿빛 머리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 도살자가 손수 추천을 했으니, 외모만큼이나 특별한 구석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예상이 적중한 모양이다. 페일에게 좋은 방향으로.

의뢰인의 니즈(Needs)를 생각하는 태도는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좋은 화살이 생겼습니다."

이곳은 페일의 화살촉.

쓸 만한 화살촉을 구해 화살대를 끼우고 시위를 당겨 표적을 겨냥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리고 표적에게 박힐지 말지는 화살촉에 달려 있다.

얼마나 날카롭게 갈려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테니.

페일의 기준에서 애셔란 이름의 화살촉은 꽤 날카로웠다.

노릴 수 있는 표적이 한정되긴 하나, 잘만 다듬는다면 덩치 큰 표적조차도 노릴 수 있으리라.

아무래도 길게 인연을 이어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페일은 그렇게 판단했다.

36화 새로운 의뢰 (1)

토벌을 끝낸 후, 베르덴은 언제나 해 왔던 훈련을 하며 느긋이 시간을 보냈다.

아직 페일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기에 보수는 받지 못했다. 딱히 불안하거나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로어 울프를 아주 깔끔하게 잡아 냈으니.

페일이 말한 증명에 충분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코헨에 온 지 6일이 지났다.

베르덴은 대장장이에게 향했다. 곧 손에 들어올 마흐바트의 가죽 장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법사에게 새롭고 귀중한 장비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자, 대장장이가 우걱우걱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베르덴을 본 그가 앞치마로 입가를 닦아 냈다.

"딱 좋은 때에 오셨군. 마침 밥도 다 먹었는데. 이쪽으로 오슈."

대장장이를 뒤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사가 입을 법한 풀 플레이트를 비롯한 방어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대장장이가 그중 한 전시대를 가리켰다.

남색의 더블 브레스트 조끼와 가죽 바지. 베르덴이 요구한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다 보니 힘깨나 썼소. 가죽이긴 하나 나름대로 신축성이 뛰어나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거요. 두께가 얇은 게 약간 흠이긴 하지만...."

대장장이가 근처에서 검을 하나 주워 들었다.

그러곤 조끼를 향해 힘껏 내질렀다. 하지만 관통하기는커녕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이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 있지. 완충제 역할도 톡톡히 하고. 마법이 아니고서야, 웬만해선 손상되지 않을 거요. 물에 젖었을 때 잘 말려 주기만 하면 자식이나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암."

확실히 대장장이 스스로 자랑할 만한 결과물이다.

소재도 소재긴 하지만, 전문가의 솜씨가 장점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거라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베르덴은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 다행히 제가 사람을 제대로 고른 모양이군요."

"아하하, 거 낯부끄럽게. 아, 그런데 반지 쪽에 문제가 좀 있소."

문제?

"여기. 작은 홈 보이시오? 이 안쪽에도 녹이 심하게 생겨서 벗겨 내는데, 자세히 보니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소. 뭐, 그냥 디자인이 그런 걸지도 모르는데, 내 경험상 마법 물품의 일종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 일단 손님한테 물어보려고 기다렸소."

베르덴이 반지를 건네받았다.

시각을 강화해서 보니 일부가 떨어져 나간, 별 모양의 문양이 보였다.

<감정>

반지의 구조가 읽혔다.

익숙한 패턴이 언뜻 보이는 걸 보아 마법 물품임은 확실해 보였으나,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상된 곳이 너무 많았다.

'흥미가 생기는데.'

그냥 오래된 반지인 줄 알았는데 마법 물품이라니.

"이 반지, 수리할 수 있겠습니까?"

"음, 내가 마법 물품 쪽은 잘 모르긴 하지만... 거기 문양이나 겉모습 같은 건 어떻게 복원은 할 수 있을 거요. 크기가 워낙 작으니 손이 좀 많이 가긴 하겠지만."

"그럼 그렇게 해 주시죠. 비용은 전부 지불하겠습니다."

마법 물품은 완전히 박살 나지 않는 이상, 흔적을 품고 있다.

그 조각난 흔적을 잇다 보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드물게 제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었다.

물론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알겠소.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넉넉잡아 2주 뒤에나 한번 들르는 게 좋겠소. 아예 완성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

"알겠습니다."

다시 반지를 맡긴 뒤, 베르덴은 값을 지불하고 마흐바트의 가죽옷을 챙겼다.

입어 보니 무게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여러모로 편한 느낌이 들었다. 거울을 보니 짙은 남색의 로브와도 꽤 잘 어울렸다.

평소에 입고 다녀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괜찮군."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여관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바깥에 볼일은 없으니, 나머지는 마력회로를 확장하기 위한 훈련을 할 생각이었다. 마법사에게 꾸준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한 발 내디딘 순간.

"앗!"

갑자기 안쪽에서 어린 소녀가 나오더니 베르덴과 부딪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방금 막 입은 마흐바트의 가죽옷을 향해 떨어졌다.

베르덴이 재빠르게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염력으로 아이스크림을 띄우고, 넘어지려던 소녀를 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아주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내려와 다시 소녀에 손에 쥐였다. 옆에 있던 한 노인이 베르덴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제 손녀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이샤, 어서 마법사님께 사과드리렴."

"네, 할머니. 아이스크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어허, 부딪힌 것부터 사과드려야지."

천진난만한 소녀와 낡고 해진 로브를 두른 노인. 코헨의 삭막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꽤나 특이한 조합이었다.

아마 도시 밖에서 온 외부인인 것 같은데, 베르덴이 관심 가질 일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베르덴은 짧게 대답하곤 승강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 * *

페일에게서 보수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빈민가 아래에 있는 지하 주점으로 향했다.

"여기 로어 울프 토벌에 대한 보수입니다."

철창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

유리 반대편에서 페일이 거액의 현금을 베르덴에게 전달했다.

의뢰 주선비 등 이것저것 뗄 것 다 떼서 약 2,278만 엘크. 본래 토벌 보수인 780만 엘크의 3배나 되는 금액이었는데, 로어 울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소재를 전부 좋은 품질로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라드란 백작이 굉장히 흡족해하더군요. 잘하셨습니다, 애셔 님."

페일이 극찬했다.

즉, 그가 운영하는 그레이와 협력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 베르덴은 곧바로 의뢰를 이어 나갔다.

"애셔 님의 등급에서 적당한 걸 고르자면... 이게 좋겠군요."

페일이 보여 준 건 현상 수배서였다.

"현상금도 여기서 처리하는 건가?"

"시대의 흐름이죠. 도시가 비대화하면서 자연스레 인구가 증가하고 그와 동시에 범죄자도 늘어나게 되는 법이니. 국가에서 추적하기엔 수가 많고 도시 바깥엔 여러 위험들이 있기에, 그레이에서 의뢰를 통해 처리하기도 한답니다. 공국에서 허락받은 사항이죠."

도시 바깥으로 도망간 범죄자를 쫓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보 하나 없는 상태에선 더더욱.

그렇기에 정보상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마다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국가에서 추적하는 것보단 이렇게 일을 맡기는 게 효율이 훨씬 더 좋았다.

특히나 페일의 정보망은 독보적이다.

공국 일대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그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속도는 군마나 3위계 마법사를 앞지를 정도.

이 방면에서 페일을 따라올 정보상은 공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생사는 상관없나?"

"가급적 생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편이 귀족들이 더 좋아하는 편이라. 대신 귀찮게 끌고 올 필요 없이 사람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현상범의 위치 정보도 제공해 드리고요."

그러니까 베르덴은 가서 잡기만 하면 되는 일. 물론 약간의 추적이 필요하긴 할 테지만, 베르덴에겐 문제없었다. 웬만하면 마력감지로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이미 몇 번이나 해 온 일이다.

의뢰를 수락하자 페일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그렇게 로어 울프 토벌 이후, 세 번의 일을 끝냈다.

페일이 정확한 위치 정보를 주기도 했고, 딱히 이렇다 할 실력을 가진 놈들이 아니었기에 손쉬운 일이었다. 보수는 크지 않았으나, 신용을 쌓아 올리는 데는 적당한 일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의뢰?"

베르덴의 물음에 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셔 님의 일 처리를 검토한 바, 등급을 한 단계 올려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하 5등급에서 4등급으로 오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나야 좋지만... 너무 이른 게 아닌가?"

겨우 네 개의 의뢰를 해결했을 뿐인데.

그러자 페일이 고개를 저었다.

"의뢰 수도 고려 사항이긴 하나, 그보다 중요한 건 일을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그만큼 애셔 님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죠. 특히 로어 울프 건이 컸습니다. 그리고 애셔 님과 같은 마법사에게 또다시 5등급 의뢰를 맡기기 아깝기도 하고요.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베르덴에게 좋은 일이다.

애써 의문을 더 제기할 이유는 없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그래서 그 새로운 의뢰는?"

"말씀드리기 이전에, 보안이 필요한 안건이라 한번 듣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손을 대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가.

보수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페일이 금액을 써서 베르덴에게 보였다.

"...!"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어떤 의뢰지?"

"좋습니다. 이 자료를 보시죠."

페일이 건넨 자료를 허공에 띄워 보기 좋게 나열했다.

유심히 내용을 들여다보는데 대부분 '코호트 상회'에 대한 정보였다.

"코호트 상회는 주로 향신료를 취급하는 무역 상회입니다. 리비안트 공국과 에스테리아 왕국을 오가며 이윤을 추구하고 있죠. 사업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고 경쟁력도 딱히 좋은 게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법한 중소 상회라는 것이 제가 내린 평가입니다."

그런데.

"코호트 상회가 노예 매매에 가담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한때 노예제는 세계적으로 당연한 제도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빛의 신을 신앙하는 루아스교가 세계 종교에 오르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모독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강경하게 노예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외교적인 부분에 부딪혀 폐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고작 8년 전의 일이라, 아직까지도 에스티리아 왕국에선 불법 노예 매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코호트 상회는 여기저기서 확보한 인간을 왕국에 노예로 내다 팔고 있었고.

베르덴이 말했다.

"일개 상회가 노예를? 루아스교에서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거기다 리비안트 공왕도 노예 제도를 극도로 혐오하죠.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한 이유 중에 하나가 노예제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 뭐가 됐든 이게 높으신 분들의 귀에 들어가면 그냥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주도 문책을 받게 될 테고요."

"그렇다면... 의뢰자는 영주 본인이겠군."

"맞습니다. 의뢰주는 로든마이어 백작. 의뢰 내용은 코호트 상회의 주인인 '루튼 코호트'의 생포입니다."

노예가 운반되는 루트까지 확인된 상황.

백작가는 코호트 상회에 뇌물을 받은 자들을 찾아 비밀리에 구속에 나섰고, 추적을 붙이고 국경에 덫을 놓는 등 노예 마차들을 붙잡기 위해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어디까지나 보안을 지키는 것이 관건.

루튼 코호트가 낌새를 느끼기도 전에 그 목줄을 잡아 끊어 버리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노예를 실은 마차는 한둘이 아닌 데다가, 서로 따로 움직이고 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무리하게 병력을 운용해 혼자서 해결하는 것보단, 다른 용병들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전부 놓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엔 애셔 님 혼자가 아닌, '로윈 용병단'과 함께 일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근처에는 백작가의 기사가 이끄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예정이죠."

"기사까지? 아무리 노예 상인을 잡는 거라지만 전력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그 배경에는 총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가 바로 화제성(話題性)입니다."

정보가 퍼지기 시작한 이상 얼마 안 가 공왕의 귀에 닿을 것이다.

그러니 백작은 보다 요란스럽게 놈들을 처리해서, 본보기 겸 노예 매매를 완전히 근절하는 모습을 공왕에게 어필할 심산이겠지.

로든마이어 백작. 노예를 해방하고, 노예 상인을 처단하다.

그 문장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오르게 하는 것이 백작의 의도. 정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루튼 코호트가 수년 전에 타국에서 데려온 용병단입니다. 특히 '스윈들'이라는 용병단장은 상급 용병 출신인데, 적대하는 용병단을 여럿 몰살한 전적이 있더군요. 같은 상급 용병 또한. 만약 노예 운송에 나서지 않았다면, 상회주 근처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페일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로든마이어 백작은 실리주의자입니다. 루튼 코호트를 생포하라고 의뢰를 하긴 했지만, 진짜 목적은 상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뒤, 혼란을 틈타 자신의 병사들로 제압하는 걸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더 피해가 적고 싸게 먹힐 테니까.

만약 페일이 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의뢰서에 명시된 보수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맞습니다. 백작이 요구한 건 애셔 님이 루튼 코호트를 생포하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트집 잡을 게 보이면 보수를 낮추려고 할 겁니다. 참 능구렁이 같은 귀족이죠."

결국 백작은 베르덴을 값싼 방패막이로 고용하겠다는 뜻이다.

'어쩐지 제시한 보수가 많더라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을 경우에 해당하는 얘기.

베르덴이 페일에게 물었다.

"내가 직접 생포해도 문제는 없겠지?"

"예. 제가 장담하건대 의뢰 내용만 지켜 주신다면 어떤 문제도, 압박도 없을 겁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이죠."

상대는 경험 많은 상급 용병 출신.

아무리 도살자가 추천한 3위계 마법사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임은 분명하다. 페일의 판단은 그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베르덴의 생각은 달랐다.

"위치가 어디지?"

37화 새로운 의뢰 (2)

루튼 코호트는 자신의 호화로운 개인 별장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뭉텅이로 썰어 먹으며 고급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이 사치스러운 기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뒤, 그는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해."

불법 노예 매매.

벌써 3년 가까이 해 오던 일인데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불안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칫 꼬리라도 밟혔다간 그대로 사형일 테니까.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매번 그 소리군. 이제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전직 용병단장, '스윈들'이 혀를 찼다.

"루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나. 지금까지 하던 대로, 내가 알려 준 대로 하면 절대 걸릴 일 없다고."

"으음, 그래도 만에 하나란 말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사업 규모를 더 늘리는 건 무리 아닌가?"

"그 정도 모험은 당연히 감수해야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할 것 아닌가."

에스티리아 왕국의 귀족들은 노예를 원한다.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그때의 취미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귀족들의 장난감으로 여겨지다 버려지는 불쌍한 사람들. 약간 죄책감이 들락 말락 했지만 돈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뭐, 우리만 잘못한 것도 아니고.'

자고로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거니까. 타국에서 용병단을 운용하며 몰래 인신매매를 해 왔던 스윈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은 루튼에게도 점점 영향을 주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으으음...."

루튼이 생각이 잠긴 채 대답을 하지 않자, 스윈들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사업 늘려서 돈을 확 끌어모은 다음에 공국을 뜨는 걸로. 돈만 있으면 어디든 살기 좋은 법 아니겠나? 아니면 왕국으로 가서 귀족들 밑에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 제대로 된 권력도 한번 누려 봐야지. 그렇지 않나, 응?"

스윈들이 뱀처럼 속삭였다.

그에게 루튼은 꽤 좋은 사업 파트너였다. 덕분에 코호트 상회를 내세워 노예 매매를 철저하게 숨길 수 있었으니. 당장 돈 좀 벌었다고 버리기엔 아까웠다.

나중에 걸렸을 때를 대비한 바람막이로 곁에 두는 게 좋겠지.

그런 스윈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튼은 머릿속으로 제안에 대해 저울질을 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대신 반드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돼."

"걱정도 태산이군. 이제까지 잘해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겠나?"

그리고 몇 달 후.

귀족에게 고용된 용병단과 함께 한 마법사가 찾아왔다.

* * *

부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루튼 코호트의 개인 별장.

그 주위로 여러 건물이 둘러싸여 있었고 일정 간격으로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담벼락과 여러 마법 보안 장치까지. 곳곳에서 상회의 경비들이 경계를 서거나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아주 돈을 덕지덕지 쏟아부었구만. 역시 정면을 뚫고 들어가는 게 좋겠어. 자신은 있겠지, 베뎃?"

"물론이죠, 로윈 단장. 제가 화염구로 아예 박살을 내 놓겠습니다."

"좋아. 입구를 부순 다음에 재빠르게 제압해서 끝내 버린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귀티 나는 놈 보이면 그 상회주라는 놈일지도 모르니까 실수로라도 죽이지 말라고. 모두 알겠나?"

"예, 단장."

로윈의 명령에 용병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때, 마법사 베뎃이 말했다.

"그나저나 백작이 따로 불렀다는 마법사는 아직 안 온 모양이네요."

"아, 그... 애셔라고 했었나? 시간 되면 알아서 오겠지. 뭐, 애초에 나설 기회조차 없겠지만."

이번 의뢰만 잘 끝내면 돈은 물론이고 백작의 눈에도 들 수 있을 터. 그 기회를 넘겨주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로윈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마법사가 나타났다.

잿빛 머리에 청안. 그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용병단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단장으로 보이는 로윈에게 다가갔다.

"로윈 용병단의 단장, 로윈이 맞습니까? 마법사 애셔라고 합니다."

"아, 어... 크흠. 딱 시간 맞춰 오셨군. 만나서 반갑소, 애셔. 로윈이라고 부르시오."

로윈이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심상찮은 느낌이 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파이를 같이 나눠 먹을 수는 없다. 전력은 자신들 쪽이 훨씬 위니까.

침을 삼킨 그가 베르덴에게 말했다.

"오자마자 이런 말 해서 뭐하긴 하나, 이미 계획은 준비되었소. 우리 쪽 마법사가 입구를 뚫고 신속하게 저 별장을 장악할 예정이지. 솔직히 말해 그쪽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

그 말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페일의 정보에 따르면 스윈들이란 자는 꽤 강하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용병단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설마 모르는 건가?'

생각해 보니 그럴지도.

백작이 원하는 건 생포가 아닌 상대의 전력을 줄이는 것. 로윈 용병단은 베르덴처럼 정보상을 통해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그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베르덴이 별말을 하지 않자, 자신의 기세에 밀렸다고 생각한 로윈이 당당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방해가 되지 않게 후방에서 지원해 주시오. 자칫 계획이 틀어지면 우리 둘 다 손해니까. 이해해 주면 고맙겠군."

베르덴이 잠시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단 로윈이 바라는 대로 뒤에서 지켜보기로. 페일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로윈의 계획이 틀어지는 건 자명한 사실이니.

그때 나서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하하하! 말이 통해서 좋군! 나중에 일 끝나고 술이나 한잔 살 테니 이번만 양보 좀 해 주시오!"

로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별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