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6

* * *

블랙 아워의 나침반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자침의 방향을 다시금 확인한 베르덴이 칼리아에게 말했다.

"이 부근인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비행정의 고도를 점차 낮췄다.

후우우우욱.

드높은 상공에서 두꺼운 구름 막을 통과하자, 깊은 산 너머에 숨겨져 있던 거대하고 깊은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국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꿈에도 몰랐군."

협곡의 폭이 상당히 넓다.

비행정 하나가 들어간다 해도 문제없을 만큼.

칼리아가 비행정을 운전해 협곡으로 진입했다.

비교적 방해물이 적은 곳을 찾아, 착륙장치를 가동하여 조심스레 비행정을 안착시켰다. 이내 동력원 역할을 하는 마석에서 빛이 사라졌다.

주변에 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난 후 모두가 비행정에서 하차했다.

베르덴이 앞장섰다.

"이쪽입니다."

나침반의 자침을 따라가며 협곡의 바닥을 탐색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벽면에서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회색의 석재로 만들어진 문. 그 옆에는 무너진 기둥들이 남아 있었다

세월의 풍파에 손상된 외형을 상상으로 복원해 봤을 때, 신전이라고 할 법했으나 세간에 알려진 신전의 외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백결 기사단의 마법사, 그라넨.

고대 역사의 지식에 일가견이 있는 그가 입구를 살폈다.

"연식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문입니다. 아마 고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그라넨이 문에 남아 있는 문자를 조심스레 읽었다.

"의식장... 의식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슨 의식장인지는 적혀 있지 않은 건가?"

"앞에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진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입구를 열 수 있나?"

고개를 저은 그라넨이 문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기하와 문자가 복잡하게 얽힌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입구 자체가 모종의 마법진으로 봉인 상태에 있습니다. 거기가 마법진으로 인해 입구를 구성하는 물질이 강화된 터라 어지간한 금속보다도 훨씬 단단합니다."

"물리적으로 부수는 건 무리라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마법진은 파훼하면 열릴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다.

마법진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학문.

마법진을 파훼하는 건,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엄청나게 높아야 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험까지 쌓아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한들, 노력이 부족하면 경지에 오르기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애셔에게 물어봐야겠군.'

그는 워렌스의 마법진을 없앤 적이 있었으니까.

직접 그 과정을 보지 못하긴 했으나, 밝히길 꺼리는 걸 보면 분명 아티팩트에 버금가는 마법 물품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칼리아가 고개를 돌린 순간.

쩌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그그그극. 기괴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먼지가 가득한 어둠이 시야에 비쳤다.

고대의 마법진.

너무 오래되어 속이 멀쩡하지 않은 봉인진이 베르덴의 파훼술을 조금이나마 견디는 건 불가능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오큘러스를 든 베르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식장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 모습에 칼리아가 목소리를 흘렸다.

"...다재다능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어이가 없군.

모두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 * *

"...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비올라가 벌떡 일어났다.

의식을 진행하고 있던 노사.

그의 검은 눈동자가 비올라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지?"

"어, 그러니까... 입구에 있던 마법진이 갑자기 박살 났는데?"

"뭐라?"

의식장 입구의 마법진은 고대에 새겨진 것이다.

특수한 암호를 말하지 않는다면 절대 열리지 않는 봉인진. 비올라는 그 마법진을 자신과 연동했다. 혹여 침입자가 발생했을 때 곧장 알아차리기 위해서.

아무리 비올라가 마법진의 전문가라고 해도 상당히 귀찮은 작업이었다. 소유자와 마법서를 상시 연결하는 것만큼이나 까다롭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녀로서는 너무도 하기 싫었지만 노사가 강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연동을 해 놓았다.

그런데 방금 박살 났다.

"그냥 망가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나!"

노사가 격분했다.

"침입자다!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널 추적한 걸 테지.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 비올라!"

"아, 소리 지르지 마! 내가 아니라 널 쫓아온 걸 수도 있잖아!"

"...."

뿌드득.

어금니를 깨문 노사의 얼굴에 핏대가 불거졌다. 그 모습에 비올라가 냉큼 물러섰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반드시 그래야 할 거다."

노사는 현재 의식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다.

막대한 집중력을 요하는 만큼, 도중에 의식을 멈추지 않는 한 직접 나설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현재 다른 부하들은 리마넨을 따라 왕국을 벗어나는 중이다.

침입자를 상대할 흑마법사는 비올라 하나뿐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비올라가 히죽였다.

"뭘 그리 걱정해? 나 혼자서도 충분하긴 할 테지만, 여기에는 네가 데리고 있는 언데드도 있는데."

쿠웅... 쿠웅....

의식장의 어둠 속에서 언데드가 나타났다.

죽음의 기사, 데스 나이트.

그리고 그를 필두로 언데드 수호자, 데스 가더를 비롯한 중위 언데드 다수가 존재했다. 노사가 직접 사역하고 있는 강대한 언데드 집단이었다.

비올라가 소름 끼치는 살기를 드러냈다.

"성기사든 뭐든 간에 가볍게 쓸어버리고 선물로 시체나 가져올게. 그러니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이곳 의식장으로 통하는 입구는 총 두 개.

각기 하나씩을 맡은 언데드 집단과 비올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64화 백골의 비올라 (2)

고대 의식장의 입구를 통과하자 소리가 사라졌다.

차가운 어둠과 오래된 먼지만이 떠다니는 적막함. 분명히 언데드나 흑마법사가 이곳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예상과 달리 아무도 없었다.

쥐의 울음소리라도 들려오긴커녕 그 흔한 벌레들조차 일절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난 이끼는 검게 죽어 있었다.

그래도 경계심을 낮추는 일은 없었다.

칼리아가 이끄는 백결 기사단.

글로스의 성기사단과 로난데르크 주교.

그리고 베르덴까지.

주검의 영광 토벌대는 방심하지 않고 더욱 어둠 속을 나아갔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악!

"...!"

미증유의 파동이 삽시간에 의식장 전체를 휩쓸었다.

불길한 감각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에겐 익숙한 느낌이다. 사령의 보주를 코앞에서 목도했을 때와 같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로난데르크 주교가 인상을 구겼다.

"우리가 정화를 시도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이오. 어떻게 며칠 사이에 저런 변화를... 저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도저히 모르겠구려."

"그래도 이 의식장에 사령의 보주가 있는 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는 건 주검의 영광이 이곳에 있다는 뜻이다. 교구를 반파시킨 흑마도사 또한.

주교가 석장을 높이 들었다.

<빛의 축복>

<성의>

루아스교의 기적이 토벌대 전원에게 깃들었다.

따스한 빛은 정신을 보호해 스스로의 의지를 지켜 줄 것이며, 그들을 감싸고 사라진 빛은 사악한 기운이 침투하는 걸 차단할 것이다.

사용 가능 횟수는 하루에 한 번. 제한 시간은 약 두 시간 남짓.

하나 제약이 있는 만큼 기적의 효과는 강력하다. 칼리아를 비롯한 백결 기사단원들이 감탄하며 온기가 가득 들어찬 자신의 육체를 어루만졌다.

베르덴도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뭔가 이상하다.

기적은 제대로 전해졌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평소 상태와 아예 똑같았다. 과거 성직자에게서 축복을 받았을 때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효과가 약했다.

'분명 더 강한 기적인데 이럴 수가 있나?'

그것도 주교의 기적이.

마력으로 신성력을 차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 루아스교의 기적이 인간에게 작용하지 못했다는 건, 베르덴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

하지만 강한 의문이 들기 이전에 토벌대가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지금 중요한 건 주검의 영광을 토벌하는 것.

베르덴은 상념을 지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렇게 토벌대의 대열을 유지한 채 나아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인위적인 조형물이 가득한 장소. 느낌상 의식장의 중앙으로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둥 하나는 무너져 내렸고, 남은 세 개의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금이 가 있었다.

붕괴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는 눈앞의 상황이 더욱 곤란했다.

"길이 갈라졌다라...."

지하로 나아가는 계단이 양옆으로 두 개가 있었다.

마력감지를 사용해 통로의 구조라도 파악하려 했지만, 직전의 파동 때문인지 의식장 내부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1위계 마력감지로는 코앞조차 판단이 불가했다.

각 통로가 어디로 나아가는지, 저 밑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으음...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칼리아의 물음에 글로스가 턱을 쓸었다.

전력을 분산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통로 하나를 정해 함께 나아가야 할까.

둘 다 장점과 단점이 명확했다.

전자를 택하면 놈들을 더욱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가 있었다. 교구를 반파시킨 강자가 있는데 전력을 나누는 건 여러모로 꺼려졌다.

후자를 택하면 앞의 단점을 상쇄할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길을 잘못 골랐다고 가정했을 때 상대가 도망칠 시간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두 통로가 전부 한 장소로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칼리아와 글로스.

서로 수년간 기사단을 운용한 뛰어난 지휘관이나, 이래저래 고민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베르덴이 선언했다.

"오른쪽 통로는 제가 맡겠습니다."

"...?!"

깜짝 놀란 로난데르크 주교와 글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혼자 가겠다니... 그대도 교구를 그 지경으로 만든 흑마법사에 대해서 알지 않소? 그대의 능력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건 인정하나 그렇다 해도 오만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구려."

"그 말이 맞습니다. 이 상황에 단신으로 움직이는 건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전력을 반으로 나누겠다면 모를까 혼자라니.

이해해 보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무모한 판단이었다.

"...."

그러나 그들과 달리 칼리아와 베스파 그리고 백결 기사단은 침묵했다.

이미 영묘에서 강력한 마법과 말도 안 되는 마력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저 태도가 무조건적으로 허세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리아가 물었다.

"괜찮겠나?"

"뭣...!"

"칼리아 영애?"

로난데르크 주교는 말문이 막혔고 글로스는 당황했다.

칼리아는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베르덴을 직시했다. 마력으로 빛나는 벽안에 그녀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문제없습니다."

"알겠다. 그럼 오른쪽 통로는 너에게 맡기겠다. 무운을 빌겠다, 애셔."

칼리아의 허락이 떨어졌다.

작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한 베르덴이 오른쪽 통로로 발을 디뎠다.

계단 아래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

이내 작게 들려오던 발소리마저 아득히 멀어졌다.

* * *

"허...."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본 로난데르크 주교가 고개를 저었다. 글로스도 칼리아의 판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애셔는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대한 마법사니까요."

"그래도 혼자 보내는 건 말이 안 되오. 상대에는 교구를 반파시킨, 마도에 이르렀음이 분명한 흑마법사도 있단 말이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곁을 지켜 줄 기사들을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둘의 생각은 타당했다.

너무 합리적이라 반박할 거리도 없었다.

하지만 칼리아의 생각으로는.

"...그랬다가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네? 방해라니요?"

"아닙니다. 어쨌든 애셔도 떠났으니 저희도 이만 출발하도록 하죠.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나중에 해도 될 테니."

칼리아가 왼쪽 통로로 다가섰다.

결국 설득에 실패한 로난데르크 주교와 글로스는 그녀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계단을 내려가자 다시금 통로가 나타났다.

하나 위층과는 다르게 걸음을 재촉할수록 사악한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감각을 곤두세운 토벌대에게서는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감이 가득한 통로의 끝에 도착하자 작은 홀(Hall)이 나타났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사령의 보주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입구가 하나 있었다.

아마 저기가 주검의 영광이 숨어 있는 장소와 연결되어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아래로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언데드...."

홀 전체에 무장을 갖춘 언데드 집단이 있었다.

하나같이 철제 갑옷으로 골격을 보호하고 있으며.

창, 양손검, 한손검, 활, 방패 그리고 스태프와 완드까지. 각자 자신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하위 언데드를 벗어나 중위 언데드에 속한 이형종.

놈들은 마치 군대처럼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 숫자는 대략 70마리.

그에 반해 백결 기사와 성기사의 숫자는 20명 남짓이었다.

무려 세 배 이상의 차이.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존재였다.

쿠웅... 쿠웅....

언데드 사이에서 거대한 기사가 나타났다.

등이 굽어 있음에도 무려 3미터에 달하는 거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두른 단단한 판금 갑옷. 놈의 한 손에는 사람 키를 아득히 넘는 기괴한 츠바이헨더가 들려 있었다.

로난데르크 주교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마도사에 이어서 저런 괴물까지 사역하고 있을 줄이야."

보는 이는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산 자로 하여금 죽음을 흩뿌리는 상위 언데드. 죽음의 기사(Death Knight).

투구 사이에서 두 개의 푸른 불꽃이 명멸했다.

백결 기사단장 베스파가 검을 다잡았다.

"제 살아생전에 죽음의 기사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그렇다."

애초에 자연 발생 되는 언데드는 드물다.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양지를 주거 환경으로 삼는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언데드를 목격하지 않을 때도 많았다.

하위 언데드는 물론이고 중위 언데드 또한 마찬가지.

그럴진대 위험도가 미스릴 등급에 달하는 엘더 리치, 죽음의 기사와 같은 상위 언데드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설령 만났다고 해도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그만큼 죽음의 기사는 위협적인 이형종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기사만 있는 게 아니다.

어둠의 천적, 빛의 대리인을 자처한 자들이 이곳에 있다.

"빛의 전사여! 우리의 앞에 도사린 어둠을 물리쳐 주소서!"

로난데르크 주교가 가진 석장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홀리 워리어>

어둠을 밝히는 빛.

그 안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빛의 전사가 나타났다. 홀리 워리어가 치켜든 황금의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자, 전열에 있던 언데드가 주춤거렸다.

"고귀한 광명으로."

기도를 한 글로스와 성기사들이 앞장섰다.

신성력으로 신체와 정신을 무장한 그들에게는 두려움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화아아악!

그 순간, 앞서 느꼈던 불길한 파동이 다시금 의식장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자 죽음의 기사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양손으로 츠바이헨더를 쥐었다.

쿵! 쿵! 쿵! 쿵!

죽음의 기사가 맹렬한 사기를 내뿜으며 돌진했다. 그 뒤로는 언데드 집단이 따라붙었다.

"언데드를 멸하라!"

함성을 지른 성기사단도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로 도약한 빛의 전사가 언데드 무리에 낙하했고, 성기사단을 따라 백결 기사단도 전의를 한껏 불태웠다.

전력으로 신체 강화를 한 칼리아.

어느새 글로스의 옆에 서게 된 그녀가 뛰어올라 백색의 검을 쳐들었다. 동시에 그 밑에서는 글로스가 검을 아래에서 위로 힘껏 휘둘렀다.

콰아아앙!

죽음의 기사의 대검과 강하게 부딪친 두 개의 검.

그것이 토벌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 * *

베르덴이 홀로 어둠 속을 거닐었다.

무너진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자 불길한 기운은 더욱 거세졌다.

사령의 보주는 이 밑에 있다.

베르덴은 확신했다.

이윽고 통로를 빠져나오자 광활한 공간이 나타났다.

어둠이 만연한 폐허.

벽에는 다리밖에 없는 조각상의 잔해가 남아 있었고, 곳곳에 녹이 슬어 깨져 버린 철창들이 널려 있었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건 하나다. 폐허의 끝에 있는, 지하로 나아가는 통로. 저 아래에서 사령의 보주가 가진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아, 베르덴이 택한 오른쪽 통로가 정답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두 통로 전부 다 같은 장소로 향해 있거나.'

어쨌든 저 계단을 내려가면 사령의 보주가 있는 장소가 나오겠지.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베르덴이 다른 누구도 없이 혼자 이곳에 온 이유.

시선을 돌려 조용히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확인했다.

이전보다도 더욱 자침이 맹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정확히 홀 중심을 향해. 이윽고 천장에서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소리 없이 홀에 착지한 인형(人形).

어두운 회색의 단발 머리칼을 한 여인이 베르덴을 직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너 혼자야?"

165화 백골의 비올라 (3)

"침입자라고 하면 교구밖에 없을 텐데 주교는커녕 성기사도 아니고, 새파란 애 한 명이라니. 위선자들은 반대쪽으로 간 건가? 무슨 전력을 이따위로 나눠?"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린 여자.

그녀는 단순한 망토가 아니라, 몸에 적합하게 맞춰진 개량형 흑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새하얀 피부 위로 목걸이나 반지 같은, 액세서리형 마법 물품으로 추정되는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었으나, 스태프나 지팡이를 들고 있지는 않다.

외모로 추정했을 때는 베르덴과 비슷한 나이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여유로움과 오만함이 가득한 눈빛은, 나침반이 없었다고 한들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네가 교구를 습격한 흑마도사군."

"어머, 교구에서 내 본모습을 드러낸 기억은 없는데 바로 알아차렸네. 눈치가 꽤 빠른가 봐?"

여성, 비올라가 양팔을 활짝 폈다.

"그래, 내가 그랬어. 나 '백골의 비올라' 정도가 아니라면 교구에서 주교들을 암살하고 정보 교란까지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이건 특별히 말해 주는 건데, 나도 눈치가 꽤 빠른 편이거든."

비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애셔 맞지? 귀족 영애하고 손잡고, 내가 애써서 만든 조합을 망가뜨리는 데 한몫했다고 한 마법사."

교구를 반파시킨 흑마도사가 조합을 만든 장본인이라.

'이해가 되는군.'

남몰래 타인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 있다면 사람들을 규합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거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주교의 감각을 속일 정도라면 더더욱.

비올라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교구에서 의뢰를 했다고 하기엔 너무 빠른데... 아니,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교구에 추적에 관련된 물건이 있다고는 전혀 못 들었는데. 입구에 있는 고대 마법진은 또 어떻게 부쉈고?"

생각할수록 솟아오르는 의문.

어느 것 하나 이해가 되지 않은 터라 비올라는 상당히 궁금한 눈치였다.

"...."

당연하게도 베르덴은 답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대가 마도사인 걸 확인했으니 대화는 필요 없다.

정보를 캐내려고 한들 호락호락하게 말해 줄 리도 없고.

화아아악!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곧장 마력을 감지한 비올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질문에 답해 주지 않는 건 그렇다 치는데, 설마 나랑 마법전을 벌일 생각이야? 내가 마도사인 걸 알면서도?"

비올라는 베르덴의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4위계 전격 마법사. 그뿐만 아니라 다른 원소 마법들도 수준급으로 다룬다고 말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무리 고위 속성 마법을 익혔다고 한들 위계의 차이는 명확하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전면에서 마법전을 벌인다면 승산은 당연히 위계가 높은 마법사가 높다.

더군다나 비올라는 스스로의 마도를 개척해, 위계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흑마도사.

세간의 기준으로 베르덴의 승산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르덴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다.

4위계 마법사 또한.

"무슨 자신감인진 모르겠는데 너같이... 응?"

유형화된 마력이 베르덴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예상했던 것 이상의 마력량에 비올라의 눈이 커졌다. 그 찰나의 순간에 베르덴의 마력이 한곳에 집약되었고 마법 연산 또한 끝마쳤다.

오큘러스의 끝에 붉은 화염이 맺혔다.

<프로미넌스>

터져 나온 홍염의 불길이 비올라를 덮쳤다.

* * *

베르덴을 제외한 토벌대가 향한 왼쪽 통로.

그 아래 작은 홀(Hall)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콰앙! 카가가가각!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고, 마법이 착탄한 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크윽?!"

눈먼 얼음 구체에 직격당한 백결 기사 헤딘이 나동그라졌다.

원소 저항력을 갖춘 갑옷이라고 해도 한기를 막아 줄 수 있을 뿐, 충격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아아아!]

쓰러진 그의 위에서 스렐레톤 병사가 칼끝을 내뻗었다.

투구와 갑옷 사이에 있는 연약한 살가죽을 뚫기 전, 헤딘이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다.

콰직!

스치듯 땅에 꽂힌 언데드의 검.

그 틈에 헤딘이 금속으로 덮인 팔아래로 놈의 검날을 꽉 끌어안았다. 이어 허리를 튕겨 상체를 올리더니, 머리로 언데드를 힘껏 들이받았다.

스켈레톤 병사가 주춤거리는 사이 헤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다잡은 그가, 앞에서 날아오는 언데드의 검격을 흘리고는 남은 손으로 언데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묵직한 일격에 놈의 투구가 일부 손상되었으나 두개골을 부수긴 어려웠다.

그러자 언데드의 뒤에서 빛의 검이 나타났다.

성기사의 일격이었다. 콰앙! 손상된 투구가 깨지고 두개골마저 단번에 꿰뚫렸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언데드를 양단한 성기사가 헤딘과 마주했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각자 다른 언데드를 향해 돌진했다.

중위 언데드 집단은 강하다.

숫자도 숫자지만, 이형종답지 않게 진형을 갖추고 있었기에 그러했다.

그래도 시간만 충분하다면, 난전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언데드를 토벌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전장의 중심.

그 안에서는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후웅───카앙!

거대한 츠바이헨더에 칼리아가 튕겨져 나갔다.

분명 검으로 막았음에도 충격을 거의 흘려 보낼 수 없었다. 그만큼 힘의 차이가 크다는 뜻. 바닥을 구른 칼리아가 검을 지면에 박아 제동을 걸었다.

그러는 사이 글로스와 베스파가 죽음의 기사를 상대했다.

"하아아아압!"

둘의 검격이 난무했다.

죽음의 기사의 검에 끼어들어 궤도를 비틀거나 놈의 갑주에 흠집을 새겼다. 죽음의 기사가 가진 <공포의 오라>가 엄습했으나 이들에게는 빛의 기적이 있었다.

정신이 무너질 일은 없다. 다만 죽음의 기사는 강대했다.

"커억!"

죽음의 기사가 휘두른 팔에 베스파가 나가떨어졌다.

직후 위에서 떨어진 츠바이헨더가 글로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겨우 검으로 막아 냈으나 견디기가 어려웠다.

"끄으으으윽...!"

카가가가각.

칼날이 맞물리며 서로 비명을 질렀다.

결국 힘에 밀린 글로스의 무릎이 지면에 닿았고, 날카로운 검날이 그의 얼굴에 점차 가까워졌다.

"감히 어딜!"

달려온 칼리아가 검면을 발로 차 떨어뜨렸다.

뒤이어 어느새 다가온 베스파가 뛰어올라 죽음의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렇게 생긴 틈.

동시에 움직인 칼리아와 글로스가 전력으로 죽음의 기사를 베었다. 어깨와 다리. 놈의 갑옷 위로 큰 흠집이 생겼다.

하지만 강대한 언더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칼리아와 글로스가 숨을 돌렸다.

"역시 쉽지가 않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쪽에선 한 번이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중상 혹은 즉사다.

그에 반해 죽음의 기사는 두꺼운 갑옷으로 철저하게 급소를 지키고 있다. 틈새가 너무 작은 터라 무조건적으로 노리기도 어렵다.

그러니 충격을 착실하게 입혀 갑옷을 깨부수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상황 자체는 나쁘지가 않아.'

백결 기사단과 성기사단의 합은 썩 잘 맞았으며 홀리 워리어가 언데드 집단의 일각을 맡고 있다. 거기다 부상자가 생길 때마다 로난데르크 주교가 나서서 치유의 기적을 발휘하고 있다.

놈들의 숫자는 착실하게 줄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수인 죽음의 기사는 칼리아, 베스파 그리고 글로스가 붙잡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승산은 확실했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악!

불길한 파동이 다시금 의식장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보다 더 주기가 짧아졌다.'

게다가 느껴지는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의식장. 그래, 이 장소의 이름을 생각해 봤을 때 사령의 보주로 어떤 사악한 의식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뭔진 몰라도 칼리아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정도.

'여기 있는 의식이 끝날 때까지 언데드들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나...!'

지금 상황에 시간제한이 생긴 셈이나 다름없었다.

'애셔가 먼저 내려갔으면 좋겠다만... 무리겠지.'

반대쪽 통로도 언데드 집단 혹은 그 이상의 위험이 있을 게 분명하다.

그에게 의존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어떻게든 나라도 내려가서 놈들의 계획을 차단해야 한다.'

그런데 죽음의 기사가 철통같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언데드를 토벌하고 가면 늦을 게 분명할 터.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내팽개치고 갈 수도 없었다.

죽음의 기사를 상대한다면 사상자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도 있기에.

그때였다.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죽음의 기사를 홀리 워리어가 들이받았다.

뒤에서 로난데르크 주교가 소리쳤다.

"칼리아 영애! 글로스 단장!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둘은 어서 내려가시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도 반드시 사전에 막아야 하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러자 주교가 알고 있다는 듯 소리쳤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도 죽지 않게 하겠소! 그리고 그대 둘이 아니라면 안심하고 맡길 수가 없소!"

의식장은 텅 비어 있지 않을 거다.

분명 지키는 언데드가 따로 있겠지. 그러한 경우를 따져 봤을 때 적합한 건 칼리아와 글로스가 직접 나서는 게 확실했다.

개개인의 무력으로 따졌을 때, 둘이 여기서 가장 강하니까.

가능하면 인원을 더 보내고 싶지만 죽음의 기사 때문에 여기도 벅차다.

게다가 단장급 실력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도중에 발목을 붙잡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콰직!

각자 언데드를 부순 베스파와 성기사 겔시아가 말했다.

"죽음의 기사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길."

이들의 각오에 결국 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로난데르크 주교가 신성력을 방출했다.

석장과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노란빛.

주교가 석장을 높이 들어 올렸다.

"루아스시여, 저들에게 신성한 빛을!"

번쩍!

주교에게서 막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에게는 눈부심조차 일게 하지 않는 따스한 빛. 그에 닿은 언데드과 괴로워하며 주춤거렸다. 그건 죽음의 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순간 언데드를 혼란에 빠뜨린 때가 적기였다.

"가시오!"

그 신호에 칼리아와 글로스가 뛰쳐나갔다.

[아아아아아아!]

"어딜!"

죽음의 기사가 방해하려 검을 휘둘렀으나 닿기 전에 홀리 워리어, 겔시아 그리고 베스파가 막아 냈다. 다른 언데드가 모이는 건 기사단과 성기사단이 철저하게 막아 주었다.

그렇게 칼리아와 글로스는 무사히 통로를 지나 의식장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콰아앙! 콰아아아앙!

강력한 마법들이 오가며 폐허를 뒤흔들었다.

다리만 남아 있던 조각상은 폭발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녹슨 철창은 얼어붙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폐허의 허공 위, 두 마법사가 고속으로 비행하며 서로를 겨냥했다.

벼락의 창과 부정 광선이 충돌했다.

허공을 집어삼킨 뒤엉킨 폭발. 시야가 가려진 사이 베르덴이 마력을 비틀었다.

<볼텍스>

중력 소용돌이에 비올라가 휩쓸렸다.

아래로 곤두박질친 그녀가 마력을 조작하더니 이내 능숙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하늘에 떠 있는 베르덴과 지면에 착지한 비올라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거... 놀랍네."

비올라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4위계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5위계 마법사였다니. 게다가 전격 계열을 포함한 원소 마법뿐만 아니라 중력 계열까지 5위계 수준으로 다룰 줄이야."

그녀가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체취나 골격으로 보았을 때, 나이가 서른을 넘지 않은 건 분명한데... 혼자 독학했을 리는 당연히 없을 테고. 재능은 차치하고 대체 스승이 누구야? 무슨 마탑주라도 되니?"

비올라는 진심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강함이었으니까. 설마 자신의 4분의 1조차 살아오지 않은 마법사와 호각의 마법전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

베르덴은 비올라의 질문을 무시했다.

대신 속으로 방금의 마법전으로 확인한 비올라의 힘을 가늠했다.

'5위계 수준의 흑마법과 빙결 마법 보유. 그리고 상당한 전투 경험까지.'

마탑을 나온 이후, 마도사를 마주한 적은 이번이 두 번째다.

공국의 주석 궁정 마법사 페르드가 마도사였다. 그렇다는 건 마도사는 건국되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국가나 소국에서는 최고위 귀족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으며 군림할 수 있다는 뜻.

백골의 비올라라고 했던가.

그녀는 베르덴이 역천을 이룬 이래로 적대했던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마법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베르덴이 가진 전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듯.

비올라 또한 자신의 마도를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언제쯤 마도를 보여 줄 생각이지?"

"글쎄? 내가 그럴 생각이 들면?"

그럴 생각이 들면이라.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오큘러스에 벼락이 맺혔다.

구현된 번개의 창에 화염이 깃들자 맹렬한 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5위계 합성 마법을 완성한 베르덴이 차갑게 속삭였다.

"살고 싶다면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다."

비올라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웃기 시작했다. 아주 소름 끼치는 소리로.

"아하하하하! 나한테 협박이라니... 대체 이게 몇십 년 만에 들어 보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는 비올라의 시선은 베르덴을 훑고 있었다.

화염과 전격의 합성 마법.

그리고 저 비정상적인 연산 속도는 확실히 마법사로서 위험한 재능이다. 더군다나 마법전에 있어서는.

"건방지긴."

뚝.

웃음을 그친 비올라에게서 섬뜩한 마력이 감돌았다.

"좋아.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널 죽이기 전에 내 마도를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뚜둑. 뚜두두둑.

비올라의 골격이 크게 뒤틀렸다.

이내 그녀의 발밑에서 날카로운, 거대한 뼈의 기둥 다섯 개가 솟아올라 왔다. 그와 동시에 베일 듯한 죽음의 기운과 살기가 폐허를 잠식했다.

마도 <백색 죽음>.

"말해 봐. 너는 어떻게 죽여 줄까?"

비올라가 베르덴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166화 백골의 비올라 (4)

'저게 마도인가.'

베르덴이 비올라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주위로 뻗어 나온 다섯 개의 뼈의 기둥. 뼈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고유의 마도를 가지고 있는 건 로난데르크 주교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정확한 특징은 모른다.

그러니 확인할 수밖에.

베르덴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비올라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염폭뢰>

열뢰의 창이 쇄도했다.

시야를 훤히 비추는 빛이 비올라가 있던 장소에 착탄하자, 벼락과 화염이 명멸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폐허의 일부를 무너뜨릴 정도의 화력.

하나 불길 속에 있는 마력 반응은 여전히 건재했다.

다섯 개의 뼈가 서로 뒤엉킨, 나선 형태의 돔.

베르덴의 마법에 직격당했음에도 고작 그을린 게 전부였다. 물리 저항력과 화염 저항력이 상당하다는 뜻.

곧 틈새가 벌어지며 비올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합성 마법이라 그런지 화력이 엄청나긴 하네. 물질계를 다루는 나한테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못하긴 하지만 말이야. 뭐, 어쨌든 그것보다...."

비올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만 내려다보고 좀 내려오지?"

비올라가 방대한 마력을 일으키며 손을 쳐올렸다.

다섯 개의 기둥 중 세 개의 기둥이 지면에서 벗어나 급격하게 베르덴에게 육박했다.

정면에서 맞서는 건 하책.

베르덴이 곡예비행을 펼치며 가볍게 기둥들을 피해 냈다. 그러던 중 하늘 높이 떠오른 뼈의 기둥에 균열이 생겼다.

콰자자자작!

기둥이 폭발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뼛조각이 사방에 뻗어 나갔다.

베르덴은 즉각적으로 고도를 낮추며 가까스로 범위 내에서 벗어났다. 지면에 착지한 베르덴이 방금까지 있었던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폐허의 천장과 벽면에 박힌 뼛조각들이 자라더니 서로 연결되었다.

페허의 태반 이상을 잠식한 백골의 줄기들.

그 모습은 마치 뼈로 이뤄진 거미줄과도 같았다.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안으로 돌진하면 몸이 조각나겠군. 그렇다는 건....'

"비행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날파리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걸 쫓아다니는 건 여러모로 짜증 나거든."

그리고.

"이게 나한테 더 유리하니까."

비올라가 남은 두 개의 기둥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뼈의 기둥들이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한 차례 손목을 돌린 비올라가 가볍게 손을 뻗었다.

마력이 느껴진 순간, 백골의 창이 쇄도했다.

연산을 거치지 않는 시전 속도다.

'뼈의 기둥을 몸 안으로 흡수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건가.'

베르덴은 그것이 비올라의 마도가 가진 능력 중 하나라는 걸 뇌리에 각인하고는, 그에 맞서 오큘러스를 휘둘렀다.

<데몰리션>

───콰앙!

중력의 구체에 적중당한 창의 궤도가 비틀리더니, 베르덴에게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처박혔다.

지면에서 살짝 떠오른 비올라가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이리저리 방향을 비틀며 또다시 뼈의 가시들을 흩뿌리기 시작하자 거리가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

베르덴의 벽안이 상대의 움직임을 읽었다.

이동 경로를 파악한 그가 <뇌천>을 쏘아 보냈다.

정확히 가슴 정중앙을 겨냥한 푸른 광선.

그러나 비올라의 몸에서 솟아난 뼈의 방패가 여지없이 마법을 막아 냈다.

<염폭뢰>를 막았던 뼈와 거의 비슷한 원소 저항력.

원소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성가신 마도였다.

그렇다면 이쪽도 근접전이다.

곧바로 5위계 부여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한 뒤, 오큘러스에 마력을 집중하며 중력 속성을 부여했다. 이윽고 지척에 도달한 비올라와 베르덴이 격돌했다.

카각... 카가가각...!

비올라의 팔뚝에서 솟아난 뼈의 칼날과 오큘러스가 맞물렸다. 예상을 벗어난 전개에 비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사가 근접전도 할 줄 알아?"

그건 피차일반이겠지.

속으로 답한 베르덴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사이에 오큘러스를 한 바퀴 회전시키며 충격파를 터뜨렸다. 완전히 충격을 막아 낼 수는 없었는지 공중에 뜬 비올라와 거리가 벌어졌다.

잠깐의 소강상태.

마법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끄어어어어...."

털썩.

의식장의 경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노사의 마도로 축적해 놓은 죽음의 기운이 대부분 뽑히는 바람에 반언데드 상태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된 탓이었다.

의식의 끝이 다가오는 걸 느낀 노사가 제단 위에 있는 시체의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3왕자의 피와 살점을 조심스레 입안에 담았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의식은 완성이다.'

곧 상위 언데드를 넘어선 이형종, 죽음의 수확자가 소환될 것이고 3왕자와 계약을 맺게 될 것이다.

물론 강대한 힘을 3왕자 따위에게 쥐여 주는 건 아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죽음의 수확자의 힘을 다루는 순간 그에 버금가는 대가 또한 따를 테니까. 특히나 그 대가는 노사와 같은 존재에겐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작용한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의식장이 기동하는지 확인하는 것. 그 외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침입자다.'

노사가 사역하는 언데드 집단과 비올라가 나섰다.

분명 그들이라면 교구에서 성기사단을 보냈다 한들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의식장으로 향하는 통로는 총 두 곳.

아마 상대는 전력을 분산시키겠지. 아니면 운을 믿고 통로 하나를 선택해 전력을 집중시킬지도 모른다.

하나 둘 중 뭐가 됐든 간에 상관은 없었다.

전력이 분산되면 각개격파 하면 될 것이고, 전력을 집중시킨다 해도 다른 통로에 있는 비올라나 언데드들이 곧장 지원을 해 줄 테니.

'변수는 없다.'

노사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통로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찾았군."

귓가를 스치는 낯선 목소리.

칼리아와 글로스가 의식장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칼리아를 알아본 노사가 눈을 부릅떴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저자가 어떻게...!'

영묘의 생매장은 노사가 직접 설계한 함정.

칼리아가 이끄는 백결 기사단이 움직였다고 보고받은 순간 노사는 그들의 죽음을 확신했다.

본래라면 지금쯤 영묘 아래에서 썩어 가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설마 실패한 건가.'

노사는 칼리아의 생사에 대해 보고받지 않았다.

솔직히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날뛴다고 한들 실질적인 계획 자체는 크게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저 단순히 주검의 영광을 방해했기에 보복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함정으로 보낸 이후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실수였나.

노사의 짜증 서린 표정에 칼리아가 이죽거렸다.

"왜. 내가 살아 있어서 못마땅한가?"

"놀랐을 뿐이다. 한낱 범죄자들만 쫓아다니는 귀족 영애 따위가 내가 만든 함정에서 빠져나왔다는 게.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아니, 그것보다 대체 이곳을 어떻게 알아냈고? 교구에서 무슨 단서를 찾았길래?"

노사가 질문을 쏟아 냈다.

물론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건 시간을 끌려는 목적임이 분명했으니. 신체 능력을 전력으로 강화한 두 사람이 지면을 내달렸다.

'제길, 역시 안 통하는군.'

노사의 눈가가 작게 떨렸다.

앞으로 조금만 더 있으면 '계획대로' 의식을 완성할 수 있는데. 그야말로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장담하더니 비올라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까드득.

분노를 삼킨 노사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지면을 뚫고 나타난 언데드, 시체 탐식자.

피부가 없이 붉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노사의 호위를 맡은 두 마리의 괴물이 생기를 인식했다.

그러자 2.5미터의 거체를 가진 놈들이 가슴팍에 있는 갈비뼈들을 활짝 열고 칼리아와 글로스에게 돌진했다.

"놈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파앗!

글로스가 내뿜은 빛이 시체 탐식자들을 교란했다.

뒤에 있던 칼리아가 연이어 글로스의 어깨와 언데드의 머리를 밟고 도약했다. 방해물은 없다. 지면에 착지한 그녀가 다시금 내달렸다.

"칫!"

노사가 다급하게 마력을 조작했다.

경계선에 쓰러진 기괴한 인간들의 시체가 크게 부풀더니 이내 폭발했다. 저주가 담긴 살점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칼리아가 속도를 유지한 채 기를 끌어모았다.

에스퍼렌사 혈통만이 습득할 수 있는 기예.

백영白影.

백색의 기운으로 물든 칼리아의 몸이 흐려졌다.

시체 파편들이 그녀가 만들어 낸 잔상을 통과해 지나쳤고, 칼리아는 어느새 노사의 지척에 닿아 있었다.

목전에 다가온 백색의 칼날.

노사의 신체 능력으로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체념했다.

"어쩔 수 없군."

푸욱.

검끝이 노사의 폐와 심장을 관통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목을 비틀어 내부를 헤집었다.

쿨럭!

노사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치명상과 출혈량. 칼리아는 그가 죽었음을 확신했다.

그런데 노사의 눈이 빙글 돌아가더니 정확히 칼리아를 노려봤다.

"변수가 생긴 이상 계획을 수정하는 수밖에."

"무슨...?!"

콰아아아아!

갑자기 사령의 보주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신을 밀어내는 막대한 압력.

어떻게든 견뎌 내려 했지만 칼리아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큭!"

보랏빛 파동에 나가떨어진 칼리아가 지면을 굴렀다.

작게 기침하며 호흡을 되찾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시체가...."

제단 위에 있던 시체가 검은 연기로 화했다.

그러고는 연기가 노사를 감싸는 듯하더니 허공으로 솟구치며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검은색 누더기를 눌러쓴 존재.

누더기 안에는 <암시>를 부여한 마법 물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심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더기 바깥으로 나온 삐쩍 마른 두 개의 팔, 그 손에는 거대한 낫이 쥐여 있었다.

죽음의 수확자, 그림 리퍼(Grim Reaper).

계약을 마친 고위 언데드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가능하면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노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치명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노사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선고했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원망하지 말고 죽도록."

공동 전체에 내려앉은 사기.

그림 리퍼가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 * *

베르덴과 비올라가 일순간 교차했다.

근접 거리에서 서로를 겨냥한 마법들이 비껴 나갔고, 그 마법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마법이 구현되었다.

<락 페이탈>

비올라가 고개를 젖혔다.

그 위로 음속을 넘어선 대지의 파편이 지나쳤다. 직후 몸을 회전하며 팔꿈치에서 솟아난 뼈로 베르덴의 목덜미를 노렸다.

사아아악!

허공을 베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순간에 안쪽으로 파고든 베르덴이 손을 뻗었다. 거센 불길이 작렬하며 비올라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스 클로>

이어 대지의 갈퀴가 비올라에게 육박했다.

마찬가지로 손톱에서 뼈의 칼날을 뻗어 맞부딪쳤다. 이내 박살 난 뼛조각과 돌조각이 그녀의 코앞에서 터져 나갔다.

"윽...!"

곧장 뼈의 갑주를 둘렀으나 전부 막아 내는 건 무리였다.

파편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고, 시야가 가려진 사이에 또다시 베르덴의 마법이 작렬했다.

<열뢰>

콰과과과!

지면에 떨어진 붉은 번개.

원형으로 퍼져 나간 전류를 본 비올라가 다급하게 뒤로 후퇴했다.

그렇게 서로를 주시하고 있자 비올라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리 봐도 큰 부상은 아니다. 최하급 포션을 발라도 금방 나을 만한, 단순한 생채기일 뿐.

반면 베르덴의 몰골도 그리 좋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은 스치듯 흘려 보낸 결과, 얼마 전에 정비를 맡긴 장비 곳곳이 찢겨서 너덜거렸다.

조금 깊게 베인 곳은 출혈이 일기도 했고.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별다른 마법 효과는 없으나, 사각에서 날아오는 뼈는 관통력과 내구력이 상상 이상이다. 하나라도 적중한다면 그대로 몸이 꿰뚫릴 정도.

베르덴이 입고 있는 장비는 방어구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비올라의 마도, 그로부터 파생되는 마법들과 그녀의 움직임에 거의 익숙해지는 데 성공했으니.

아직 숨겨 둔 수는 있어 보이지만 상관없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시금 한 발짝 내디딘 베르덴.

그는 분명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뭐야, 이게.'

비올라는 당황스러웠다.

167화 백골의 비올라 (5)

백골에 본인의 마력을 침투시켜 조종할 수 있는, 비올라의 마도 <백색 죽음>.

처음으로 마도를 개척했을 당시에는 별 특색이 없었다.

기껏해야 뼈의 창과 칼날을 날리는 정도인 데다가 그 백골마저 다른 사체에서 뽑아내 모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세월이 흘러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파생된 마도의 능력은 총 두 가지.

첫째, 백골 강화.

비올라의 마력이 깃든 뼈의 경도와 강도는 제련된 강철 무기를 웃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손짓 한 번에 무장된 병사 수십 명은 간단히 절명시킬 수 있는 살상력과 힘을 집중시키면 성문조차 꿰뚫을 정도의 파괴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시체 동화.

시체의 골격과 동화된 비올라는 마력 없이도 인위적으로 시체 조종이 가능하다.

인간의 시체를 조종했을 때, 생전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육체에 새겨진 말투와 버릇까지 온전히 재현이 가능하다.

기억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 단점은 비올라의 연기력으로 극복했다.

네비론 주교를 암살한 뒤 그 껍질을 뒤집어써서 다른 주교들을 속여 넘긴 것이 그녀의 능력을 증명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비올라의 마도는 암살이나 교란에 적합하다.

실제로 그녀가 주검의 영광에 몸담기 전에는 여러 나라를 거쳐 암살 의뢰를 행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올라가 마법전에 취약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고위 저주로 젊은 육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8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동안 그녀의 손에 죽은 인간만 네 자릿수를 가뿐히 넘으며,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은 마법사로서도 드높다.

단언컨대 비올라는 명백한 강자.

5위계 중위 마법사인 데다가 마도를 걷는 마도사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기껏 5위계 하위에 다다른 마법사를 죽이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다.

그래, 그랬어야 했는데.

"...."

비올라가 자신의 목을 손등으로 훑었다.

찔끔 묻어난 피가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마도사와 마법사의 마법전.

하물며 비올라가 자신 있어 하는, 통상의 마법사에게 취약한 근접전이다. 비올라가 압승하는 게 당연한 격차였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상처라니.

무엇 하나 불리할 게 없고 유리한 것투성인데 호각...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비올라가 조금씩 밀리고 있다. 그것도 근접전에서 말이다.

마치 자신의 수가 하나하나 다 읽히는 듯한 기분.

'게다가 저 위력은 또 뭐고.'

비올라의 백골과 엇비슷한 위력의 대지 마법.

저건 기존 위계에서 나올 만한 수준이 절대로 아니다.

마법서로 마법을 강화한 게 분명하다.

그것도 본인이 개방한 마법서를 갖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상대는 마법서가 아닌 스태프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커넥션(Connection).

마법진을 이용해 마법서와 본인을 상시 연결하고 있다는 뜻

'그 정도로 고난이도인 마법진을 쓸 수 있다고? 그럼 설마 입구에 있는 마법진을 파훼한 것도....'

...말도 안 돼.

두 개의 고위 속성을 포함한 다양한 속성.

마법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감각과 반사 신경.

합성 마법을 비롯한, 마력 소모가 높은 마법들을 쏟아 냈음에도 바닥을 보이지 않는 마력량. 하물며 마법진까지.

그야말로 인간을 벗어난 재능이다.

순간 비올라의 뇌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주검의 영광의 '하인'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비올라를 압도했던 초월자의 존재감.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압박감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때, 베르덴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 모습에 비올라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본 비올라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가... 겁먹었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그만한 세월의 격차를 압도하는 재능이라니.

"인정 못 해...!"

비올라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몸 안에 내재되어 있던 뼈들이 등 뒤로 뻗어 나왔다.

<백익>

백골의 날개.

이내 장장 수 미터에 이르는 날개가 펼쳐지더니, 골격에 붙어 있는 뼈의 깃털들이 곧게 세워졌다.

쇄애애액!

수십 개의 가시가 전면을 향해 쇄도했다.

거의 무차별적인 범위는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갈 틈이 없었다.

'어차피 피할 생각은 없지만.'

이미 비올라와 근접전을 벌이며 마도에 대해 분석했으니.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비올라에게 겨냥했다.

마력이 집약되며 거센 열기가 대기를 달구었다.

<크리메이트>

붉은 광선이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그 파괴력에 뼈의 깃털들이 튕겨 나가거나 형체도 없이 녹아 버렸다.

정면으로는 막을 수 없다.

위험을 직감한 비올라가 곧장 지면을 찼다.

콰아아아앙!

비올라가 있던 장소를 불태운 화염 광선이 벽에 부딪쳤다. 거센 폭발이 일며 의식장의 폐허가 크게 뒤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미끼일 뿐.

<역뢰>

"꺄아아아아악?!"

석재 바닥에서 솟아난 벼락이 비올라에게 적중했다.

기본적인 마력 저항력이 출중한 터라 남들처럼 즉사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충격이 컸다. 바닥에 손을 짚은 비올라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땅에서 번개가...."

설마 마도인 건가? 아니면 아티팩트?

그러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락 블래스터>

거대한 암석이 날아왔다.

감전으로 인해 몸이 일부 마비된 상황.

비올라가 곧장 백익으로 자신을 감쌌다.

암석과 백골의 날개가 부딪쳤다.

굉음이 일며 뼈와 암석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

직후 전격을 머금은 바람의 칼날이 눈앞에 비쳤다.

암석 뒤에 마법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 비올라는 뼈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나, 몸 밖으로 뼈를 내보내려면 약간의 딜레이가 존재한다.

짧은 시간 동안 베르덴은 정확히 그 점을 잡아냈다.

촤아아악!

허벅지에서 작열감이 느껴진다. 육체 내부에 있던 뼈 덕분에 절단되지는 않았지만 근육과 신경이 끊어지며 불타 버렸다.

고통에 신음하며 무릎을 꿇은 비올라. 그녀와 베르덴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푸른 심연이 담긴 눈동자.

마치 비올라의 꼴을 비웃는 듯했다.

"감히...."

으드득.

"감히 날 그딴 눈으로 쳐다봐?!"

비올라의 마력회로가 맹렬하게 기동했다.

폐허에 널린 그녀의 뼛조각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날카로운 파편으로 재구성되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베르덴에게 날아갔다.

콰가가가가가가각!

수천 개의 가시가 베르덴이 있던 장소에 착탄했다. 살벌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가득 피어올랐다.

비올라의 비장의 수단 중 하나.

이걸 맞고도 멀쩡한 인간은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거라면 죽었을 거야.'

마력을 대거 소모한 비올라.

그녀가 숨을 가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연기가 걷히며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난도질당해 형체조차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주 멀쩡하게.

비올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왜 안 죽어?"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내가 더 강하니까."

* * *

직전에 펼쳐진 비올라의 마법은 상당했다.

하지만 베르덴을 죽이기에는 부족했다.

<볼텍스>와 <선풍의 장막>의 조합.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바람의 보호막은 뼈 가시들의 궤도를 아래로 비틀었다.

워낙 격렬한 탓에 마법을 수 초간 지속하는 것도 버겁고, 마법 특성상 반복 사용 할 수 없기에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야 했지만.

베르덴에게 있어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강하다고...? 네가? 나보다?"

비올라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 들어찼다.

"이 건방진 애새끼가!"

화아아악!

비올라가 한계까지 마력을 일으켰다.

유형화된 마력이 물리적 형상을 띠었고 그에 따라 비올라가 서 있던 대지가 일부 갈라졌다.

그녀의 손에서 솟아난 뼈의 칼날이 베르덴에게 날아갔다.

"네가 태어났을 땐 나는 이미 마도사였어!"

백골의 창.

"네 부모가 태어나기도 전에 마법의 길에 들어섰다고!"

백골의 화살.

"그런데 고작 5위계에 갓 들어선 마법사 따위가!"

백골의 가시.

"감히 누구한테!"

비올라가 격분하며 마법을 쏟아 냈다.

베르덴이 철저하게 대응하며 막아 내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참이나 어린 마법사한테 이런 치욕이라니.

평생에 있어 이렇게나 극심한 모멸감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죽여야 돼.'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처참하게, 잔혹하게.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으니까.

비올라가 액세서리에 깃든 저주를 발동했다.

그리고 옛날에 손에 넣은, 2세대 덱사르의 보석에 새겨 두었던 흑마법진까지.

<절규>

<망자의 아우성>

<고통의 비명>

<정신 착란>

각종 정신계 저주가 쏟아졌다.

이어 비올라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력회로가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으나 멈추지 않았다.

폐허의 허공을 잠식하고 있던 백골의 거미줄이 진동한다.

지면에 있던 뼛조각들이 재구성되며 예기를 띠더니 다시금 베르덴을 겨냥했다. 준비를 마친 비올라가 양팔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죽어어어어어!"

<백색 무덤>

비올라의 마지막 수단.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한 그녀의 의지에 따라, 지배하에 있던 모든 백골이 베르덴에게 쏟아졌다.

쿠구구구구구!

거대한 거미줄이 떨어지며 공동이 크게 울렸다. 금이 간 천장에서 암석들이 떨어졌고, 벽면에 새겨진 수십 개의 금은 붕괴의 징조를 띠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시야 전체에 가득 들어찬 백골이 보였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분명 비올라의 마지막 발악이자 전력일 테지.

확실히 마도사에 어울리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성신 마법이 아니라면 대응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베르덴에겐 아니었다.

고된 훈련 끝에 얻어 낸 혼돈 마법, 새로운 비장의 수단.

베르덴이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의 오른쪽 눈동자에 역천의 마법진이 드러났다.

<뇌황>의 파동.

<라그나크>의 초열.

<중력 붕괴>의 물리력.

각각 5위계 집중 마법에 해당하는 마법.

베르덴은 삼원색의 중심으로 그 정수를 뽑아내어 하나의 마법을 창조했다.

마안을 발동해 연산을 생략하자, 베르덴의 주위로 전격과 열기가 뻗치더니 암청색의 막이 형성되었다.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백골의 무덤.

눈동자 앞까지 다가온 뼈의 가시들을 보며 마법을 시전했다.

<혼명混明>

파동이 맥동했다.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파괴의 확산. 베르덴을 중심으로 지면이 움푹 파이면서 사방에서 쇄도하던 비올라의 백골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비올라.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암청의 빛이 폐허를 집어삼켰다.

* * *

...빛이 사라진 자리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의식장의 폐허를 가득 울리던 소리도, 사방에 가득했던 살기도, 폐허를 하얗게 물들였던 백골의 무덤도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베르덴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폐허의 바닥에 작은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강력한 마법이었으나 정확히 마법 범위만을 제외하고 그 바깥으로는 어떠한 피해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공간이 무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베르덴이 시선을 돌렸다.

크레이터의 끝에서 비올라가 기어 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끄으윽...!"

비올라의 몰골은 참혹했다.

오른팔은 팔뚝 아래로 불타 버렸고, 두 다리는 무릎 아래로 사라져 있었다. 혼명의 범위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대가였다.

"내, 내가 왜 이런 꼴을...!"

비올라가 한쪽 팔로 바닥을 기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스스로의 길을 깨달아 마도사가 되었다. 그녀는 삶의 대부분을 강자로 살아왔다.

그렇기에 이토록 압도적인 힘에 무참하게 짓밟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감히...!"

그그그.

비올라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팔다리가 대부분 날아간 데다가 마력까지 거의 다 소모한 상황. 노사의 도움이 절실했다. 비올라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향해 기었다.

그 순간 기척이 느껴졌다.

비올라의 눈동자가 기울자, 하늘에 떠 있는 베르덴이 보였다.

잿빛 머리의 마법사.

비올라를 사지로 몰아넣은 괴물.

"꺼져...! 저리 꺼지라고!"

비올라가 남아 있는 뼛조각을 날려 보냈다.

하나 닿지 않았다.

마력이 충분치 않아 위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비올라는 발버둥 쳤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내가... 내가 회복만 하면...!"

파지지지직!

비올라의 발악에 대답하듯, 베르덴의 손에 벼락이 맺혔다.

중력의 무게를 품은 암청색의 벼락. 지금의 비올라로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죽음이 다가온다.

순간 노사가 한 말이 뇌리에 스쳤다.

───그렇게 안일하게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다, 비올라. 그게 세상이니.

그제서야 비올라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었다.

"주, 죽기 싫어...."

중력의 벼락이 비올라를 겨냥했다.

"죽기 싫다고!"

하나 그녀의 외침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뇌명과 함께 수직으로 떨어진 벼락.

일순간 격통을 느낌과 동시에, 오랜 세월 학살자로서 살아온 비올라의 세상이 암전했다.

168화 그림 리퍼 (1)

치이이익....

단말마의 비명이 사라진 자리에는 식지 않은 열기와 검게 탄 잿더미만이 남았다.

백골의 비올라.

교구에서 학살을 벌였던 흑마도사의 최후였다. 그녀의 마력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베르덴이 지면으로 내려갔다.

"후우."

베르덴이 작게 숨을 털었다.

마법전의 시작과 끝.

시종일관 베르덴이 근소하게 우위를 점했으며, 장비 파손이나 작은 찰과상 외에는 이렇다 할 피해도 입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게 여유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가진 방대한 마력량.

아직도 마력은 충분히 남아 있지만, 베르덴의 기준에서도 상당한 마력을 소모했다.

그와 더해 수십 개의 마법을 연산한 탓에 머리가 뜨거웠다. 근접전 도중 <육체증폭>을 사용하기도 한 터라 몸에 부담이 쌓이기도 했고.

'그리고 상대는 마도사였다.'

법칙에서 일부 벗어난 마도.

그리고 그러한 마도에서 탄생한 고유 마법은 통상의 위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베르덴은 차분히 비올라의 마도를 분석했다.

고유 마법을 가진 마도사에게 섣불리 전력을 드러내는 건 하책이었으니까.

비장의 수단이란 상대가 만전의 상태일 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대응할 수 없음을 확신할 때나 쓰는 거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베르덴에겐 그러했다.

이렇듯 난생처음으로 벌인, 마도사와의 마법전.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를 느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하나였다.

'내가 이겼다.'

베르덴의 마법이 마도를 무너뜨렸다.

물론 마도는 사람마다 가지각색이기에, 같은 마도사라고 해도 천차만별이기는 하나, 뭐가 됐든 간에 비올라는 마도사였다.

즉, 베르덴의 전력은 마법사가 아닌 마도사에 비견된다는 뜻.

'만약 지금 상태에서 마도를 개척한다면 어떻게 될까.'

가히 상상히 가지 않는다.

어떤 마도를 개척할지도, 그 힘이 얼마나 강할지도.

뒤늦은 승리의 고양감과 훗날의 기대감이 베르덴의 가슴속을 채웠다.

"...?"

그때, 베르덴의 시야에 뭔가 비쳤다.

앞으로 걸어가자 비올라의 잿더미 안에서 검게 그을린 가방이 보였다. 베르덴이 가진 가방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걸 보아 공간가방의 일종일 터.

아무래도 비올라가 방패가 되어 준 덕분에 운 좋게 재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안에 뭔가 들어 있을까.

당장 확인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베르덴이 시선을 돌려 통로로 향했다.

전부터 연이어 느껴졌던 불길한 파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상으로 짙은 죽음의 기운이 감지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맞닥뜨린 엘더 리치를 훨씬 웃도는 수준.

비올라의 공간가방을 챙긴 베르덴.

그가 망설임 없이 지하 아래로 향했다.

* * *

시체 탐식자 두 마리가 지면에 쓰러져 있다.

글로스와 칼리아에게 중위 언데드를 토벌하는 건 약간의 시간이 들 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허억, 허억...."

한쪽 어깨를 축 늘어뜨린 글로스가 가파른 호흡을 내쉬었다.

견갑이 박살 나 시퍼렇게 멍이 든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뼈가 부러진 터라 치유의 기적으로는 곧장 치료가 불가능한 부상이었다.

그런 글로스의 앞에는 칼리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 또한 글로스 못지않게 처참했다.

무지막지한 충격에 진탕된 내장. 크게 우그러진 갑옷이 복부를 억누르고 있던 탓에 고통이 신경을 억눌렀다.

이를 단단히 깨문 칼리아가 손으로 갑옷의 틈새를 움켜잡았다.

"흐으읍...!"

───콰지지직!

부서진 갑옷 조각이 저 멀리 바닥을 굴렀다.

조금이나마 호흡이 수월해진 칼리아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앞을 바라봤다.

"나와 계약한 그림 리퍼를 상대로 조금이나마 버티다니.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실력이 뛰어나군."

짝. 짝. 짝.

노사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그런 그의 앞에는 거대한 사신이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칼리아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세상에 저런 언데드가 존재하다니...!'

그림 리퍼.

놈이 들고 있는, 대략 3미터에 육박하는 낫에는 둘을 압도하는 힘이 담겨 있었으며 저 언데드의 근처에 다가간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정신을 보호해 주는 기적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통하지가 않았다.

고작 두 번의 공방.

그것만으로도 칼리아와 글로스가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저건 상위 언데드인 죽음의 기사를 넘어선 존재라는 것을.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왜 이렇게 얼굴이 굳었나? 방금 전까지 보여 줬던 기개는 어디로 가고."

"...."

"쯧쯧, 이제 와서 후회가 좀 되나 보군. 그러게 조용히 지내지 그랬나.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이미 왕국을 떠났을 텐데. 대체 왜 끼어들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 이 말이야."

노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비아냥에도 둘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호흡을 고르며 그림 리퍼를 토벌할 방법을 떠올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글로스 단장."

칼리아가 글로스를 불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둘이 동시에 검을 들었다.

누가 신호를 보낼 필요도 없이, 동시에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에 자진하는 불나방과 같은 꼴에 노사가 비웃었다.

"죽여라."

그림 리퍼가 낫을 당겼다.

질척거리는 사령의 기운이 칼날에 모였고, 이내 휘두르자 생기를 앗아 가는 죽음의 참격이 무수히 쏟아졌다.

누군가 막아야 한다.

칼리아가 앞장서서 참격을 튕겨 내려고 하자, 빛에 휩싸인 글로스가 칼리아의 앞을 가렸다.

"하아아아압!"

전력을 개방한 글로스가 참격을 베어 갈랐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 셋에서 넷... 미처 막지 못한 사령의 칼날이 글로스를 베어 갈랐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내 그림 리퍼의 참격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글로스가 도약했다.

"루아스시여!"

화아아아악!

가지고 있는 신성력을 모조리 긁어모아 검에 집중시켰다. 언데드를 멸하는 빛의 힘. 글로스가 신성을 빛내며 힘껏 검을 내뻗었다.

그 순간, 그림 리퍼가 흐릿해졌다.

"뭣?!"

<아스트랄화>.

글로스가 미처 알지 못한 그림 리퍼의 능력.

비물질계로 들어선 그림 리퍼에겐 어떠한 물질적 작용도 해를 끼칠 수가 없다. 아무리 화력이 강한 마법도, 아무리 강력한 검기라고 해도 말이다.

달리 말해 무적에 가까운 상태.

글로스가 놈의 몸을 통과했다.

모든 여력을 끌어낸 일격이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갔다. 바닥을 낙하한 그에게 거대한 낫이 날아왔다.

촤아악!

흩어지는 선혈.

검을 든 한쪽 팔이 허공에 떠올랐고 충격을 견디지 못한 글로스가 수차례 지면을 굴렀다.

"크으윽...."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잘린 팔에서 피가 새어 나올수록 정신이 점차 흐릿해졌다. 글로스의 검이 피 웅덩이에 잠겼다. 반면에 그림 리퍼는 아주 멀쩡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글로스의 희생은 의미 없지 않았다.

'부디....'

서서히 닫혀 가는 시야.

그 안에는 그림 리퍼를 넘어 노사에게 육박하는 칼리아가 비쳤으니까.

* * *

백영白影.

잔상을 남긴 칼리아가 최고 속도로 노사에게 쇄도했다.

그림 리퍼를 상대할 수 없으면, 놈을 불러낸 자를 처리한다.

그게 칼리아와 글로스가 생각한 유일한 해답이었다. 성기사단장 글로스가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생겨난 기회.

'절대로 놓칠 수 없다.'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질주하는 속도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회전력이 검로에 담기며 위력을 증폭한다. 순식간에 노사의 지척에 닿은 칼리아가 백색의 기를 방출했다.

백일경白一景.

칼리아가 가진 최강의 기예.

모든 기운을 쏟아부은 마지막 일격. 그 속도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촤아아악!

한 줄기 백색의 검기가 노사를 수평으로 양단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왼쪽에 있던 칼리아의 검이 오른쪽에 멈춰 섰다. 칼날에는 피조차 묻지 않았다. 오로지 검기의 잔상이 남아 노사를 베었음을 증명했다.

'잡았다.'

칼리아는 확신했다.

이어 절단된 노사의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계약자를 죽였으니 그림 리퍼 또한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할 터.

"하지만 네 생각은 틀렸다."

"...?!"

바닥에 널브러진 노사의 머리가 말했다.

당혹에 물든 칼리아가 주춤거리자 노사가 히죽 웃었다.

"그림 리퍼의 계약자는 그림 리퍼의 일부가 된다. 애석하게도 나는 본체가 아니라는 뜻이지."

노사의 몸이 검은 연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림 리퍼의 그림자에서 다시 태어났다. 상처 하나 없이.

"본체는 그림 리퍼다. 그러니 그림 리퍼가 소멸하지 않는 이상 나는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 불사의 몸을 갖게 되는 셈이지."

그림 리퍼를 불러내기 전.

칼리아는 확실하게 노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림 리퍼가 나타난 뒤 치명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고.

'설마 그게 영구적인 것이었단 말인가...!'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 불사라니. 그런 건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낱 귀족의 여식이 가진 지식 따위야 보잘것없는 게 당연하니까. 그러니 겁도 없이 여길 찾아왔겠지. 그리고 내 언데드들을 지나쳐 온 걸 보면 네가 아끼는 백결 기사단과 성기사들까지 대동했을 테고."

백결 기사단.

그 단어에 칼리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너희 둘을 죽이고 나면 다음으로 네 부하들 차례다.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난도질을 한 뒤 구울들에게 먹이면 꽤 좋은 그림이 될 테지. 안 그런가?"

"네놈...!"

"화가 나나?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지.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여길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 기대되는군. 죽음을 앞에 둔 기사들은 대체 뭐라고 하며 널 원망할까."

저건 도발이다.

뻔하고 저열한 속삭임.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칼리아의 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림 리퍼가 가진 힘은 위에 있는 토벌대를 전멸시키고도 남았으니까.

결국 칼리아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닥쳐라!"

칼리아가 백색의 검을 번뜩였다.

그림 리퍼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아스트랄화>를 사용한 그림 리퍼에게는 무의미했다.

이내 다시 실체를 가진 그림 리퍼.

놈이 낫을 휘드르자 칼날이 아닌 막대 부분이 칼리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콰앙!

"커억?!"

나가떨어진 칼리아가 벽에 부딪혔다.

손에서 떨어진 검이 지면을 굴렀다. 어떻게든 다시 검을 잡으려 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게 전부일 뿐.

"끝났군."

손쉽게 무력화된 칼리아와 글로스.

이제 더 이상 변수는 없다.

그 사실에 노사는 속이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짜증이 치솟았다.

'그림 리퍼와 계약한 게 3왕자가 아니라 내가 되다니. 빌어먹을.'

그림 리퍼는 계약자에게 강대한 힘을 쥐여 준다.

하지만 그 힘에는 두 가지 대가가 따른다.

첫째, 영혼 갈취.

그림 리퍼의 힘을 빌릴수록 계약자는 영혼을 서서히 빼앗긴다.

육체 자체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지만 그렇기에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져갔는지 느낄 수가 없었다. 언제 돌연사할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둘째, 봉인.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계약자가 가지고 있는 힘은 봉인된다. 노사가 배워 온 마법도, 그가 개척한 마도까지 말이다.

그렇다고 만들어 낸 사역된 언데드가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으나, 지배권을 사용할 수 없는 바람에 언데드를 뜻대로 다룰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노사가 가진 힘은 불사를 제외하면 그저 일반인 수준.

다른 건 몰라도 평생을 일궈 온 마법을 쓸 수 없다는 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불쾌했다.

"후우...."

노사가 한숨을 쉬며 화를 삭였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의식을 아예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인 데다가 변수에 대응하려면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여기가 그림 리퍼의 의식장만 아니었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다른 고위 언데드였다면 마을 사람 하나를 잡아다 강제로 계약시켰을 것이다. 계약이 된 걸 확인한 후에 바로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림 리퍼의 계약자는 불사를 갖게 된다.

그림 리퍼를 소멸시키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는 뜻. 만약 그 마을 사람이 그림 리퍼의 힘으로 이리저리 날뛰면 매우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참자. 마법이 영원히 봉인되는 것도 아니니까.'

'세 번째 하인'의 힘을 빌리면 그림 리퍼와의 계약을 해지할 수 있을 테니. 부탁을 들어주실지 의문이기는 하다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겨우 작금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의식장이 잘 가동되는지 확인은 마쳤다.

맡은 임무를 전부 마쳤으니 귀환할 시간.

노사가 마무리를 하기 위해 그림 리퍼를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파지지지직!

"음?!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세 개의 번개의 창.

화들짝 놀란 노사가 주춤한 사이 전격의 폭발이 노사와 그림 리퍼를 집어삼켰다.

'설마.'

의식장 내부에서 전격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

칼리아가 힘겹게 목소리를 흘렸다.

"애... 셔...!"

베르덴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의식장의 최심부로 들어선 베르덴이 재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한쪽 팔린 잘린 채 쓰러진 글로스와 벽에 기대어 있는 칼리아. 둘 다 부상이 심하긴 했으나 아직 생기가 느껴졌다.

베르덴이 의식이 남아 있는 칼리아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보다... 시피...."

칼리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때, 그녀가 베르덴의 손목을 잡고는 작게 속삭였다.

"애셔... 저건 위험하다...."

계약자인 노사는 몸을 두 동강 내도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이며, 강대한 언데드인 그림 리퍼는 공격할 때를 제외하고 비실체화로 모든 공격을 흘려 보낸다.

특히나 마법사에겐 어려운 난적이다.

놈에게 다가가지 않는 이상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당장 도망쳐라.

늦기 전에 위에 있는 토벌대들을 데리고 어서.

칼리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 모습에 베르덴이 가늘게 눈을 떴다.

그 칼리아에게 두려움을 심을 정도의 언데드라.

아무래도 엘더 리치나 죽음의 기사와 같은 상위 언데드는 아닌 듯했다.

"네놈은 또 뭐냐."

의식장의 중심.

폭발이 가라앉으며 노사와 그림 리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5위계 전격 마법을 맞았음에도 상처 하나 없었다.

불사.

그 단어가 뇌리에 스쳤다.

"애셔...?"

베르덴이 근처에 있는 글로스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최상급 포션을 뿌려 출혈을 멈추게 한 뒤, 목덜미를 잡아 칼리아 옆으로 옮겼다.

칼리아가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뭘...."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베르덴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 칼리아가 뭐라고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내 베르덴이 의식장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림 리퍼의 곁에 있던 노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뭘 하는가 봤더니... 이거 참 어이가 없군. 난데없이 나타나서 구원자 행세라니. 허세를 부리는 것도 때와 장소를 구분해야 하는 법 아닌가?"

베르덴이 노사를 바라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오만함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불사에 대한 믿음과 저 낫을 든 언데드 때문이겠지.

"웃기는군."

글러트니의 송곳니, 루펠.

과거에 베르덴은 불사를 가진 존재와 싸웠다. 글러트니의 위장이란 공간에서 놈은 저 노인과 비슷한 눈을 가졌었다. 불사이자 불멸이며 신이라고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리고 베르덴에게 죽었다.

마지막에는 삶을 갈구하면서.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활성화된 마력회로.

베르덴의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쳤다.

169화 그림 리퍼 (2)

노사는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봉인되어 마력을 감지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도 보일 정도의, 높은 밀도를 가진 마력의 소용돌이가 잿빛 머리의 마법사의 주위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억으로 판단했을 때 최소 5위계 이상의 출력.

그리고 직전의 전격 마법과 더불어 약관(弱冠)을 조금 넘어선 젊은 외모. 칼리아가 부른 '애셔'라는 이름까지.

'칼리아 밑에서 일한다던 그 마법사인가.'

노사는 그 정체를 곧바로 간파했다.

분명 소문에 의하면 4위계라고 들었었는데... 의도적으로 경지를 숨기고 있었던 건가?

'저 나이에 5위계라니. 아주 대단한 재능이군.'

하나 노사의 반응은 비교적 담담했다.

이 드넓은 세상에는,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초월자가 버젓이 세상에 군림하고 있는 마당에 저 정도야 놀랍기만 할 뿐, 경악할 거리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4위계든 5위계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노사와 계약을 맺은 고위 언데드, 그림 리퍼에게는 거기서 거기였으니.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가축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 의문이 있었다.

저 잿빛 머리의 마법사가 나타난 통로는 분명 비올라가 지키고 있었다.

그 성격 파탄자가 곱상한 외모에 홀려 그냥 보내 줄 리는 없다. 깔끔하게 급소를 찔러 죽인 뒤, 골격을 벗겨 시체 껍질을 보관한다면 또 모를까.

그렇다는 건....

어?

'비올라가 당했다?'

순간 화들짝 놀란 노사가 고개를 들자, 거대한 암석창이 날아왔다.

신형이 흐릿해지며 실체를 숨긴 그림 리퍼.

그 탓에 무방비한 상태인 노사에게 마법이 직격했다.

찢겨 나가는 상체.

의식장 위로 피와 살점이 흩뿌려졌다. 인간이라면 여지없이 즉사였다. 그러자 시체가 연기로 변하더니 본래의 몸을 되찾았다.

노사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네놈, 비올라는 어디에 있지?"

콰아아앙!

이번엔 화염구가 날아와 폭발했다.

전신을 휘감은 불길.

살과 근육이 타오르고 피가 끓었다.

'어른이 묻는데 대답 대신 마법을 날리다니. 버릇이 없군.'

노사가 다시금 몸을 수복했다.

그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얼룩졌을 뿐,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계약이 유지되는 한, 노사는 불사이며 고통 또한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내 노사가 베르덴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기저기 찢긴 로브.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려 나간, 눈에 익은 흔적이었다.

'비올라와 마법전을 벌인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비올라는 사람을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살인자다.

특히나 높은 살상력을 지닌 그녀의 마도 <백색 죽음>은 상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상대가 전사라면 거리를 유지한 채 멀리서 백골을 쏘아 보내고, 상대가 마법사라면 근접전을 유도하니까.

그리고 그 힘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백골의 거미줄을 형성하여 위를 장악하고 아래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전투 방식. 그건 노사 본인이라고 할지언정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비올라를 큰 상처도 없이 죽이고 내려왔다라....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겠지.

희귀한 마법 물품이나 아티팩트로 비올라를 무력화했거나. 순수한 실력으로 마법전에서 비올라를 찍어 눌렀거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가능성이 있는 건 전자밖에 없었다.

'아무리 재능이 높다고 해도, 실질적인 경지는 비올라가 더 높았으니까.'

더군다나 살아온 세월이 차원이 다르기에 마법전의 경험은 비교조차 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비올라는 마도사.

그런 그녀가 마법사에게 실력으로 패배한 것보다는, 모종의 수단에 의해 허를 찔렸다는 가정이 훨씬 설득력이 높았다.

'쯧, 그러게 안일하게 살지 말라니깐.'

노사가 혀를 차며 비올라의 한심함에 한탄했다.

뭐, 그래도 무슨 수단을 썼던 간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비실체화를 사용하는 그림 리퍼는 거의 무적이었으며, 그 힘은 비올라와 노사를 합친 것보다 더욱 강하니.

변수는 없다.

노사가 명령했다.

"그림 리퍼여, 저 마법사의 영혼을 수확해라."

* * *

베르덴은 가볍게 날린 마법을 통해 노사를 관찰했다.

박살이 난 육신이 연기로 변하고, 그림 리퍼를 통해 부활하는 광경.

'재생 계열은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분신의 일종인가.'

본체는 그림 리퍼... 정확히 말하자면 사령의 보주가 근원으로 보인다.

놈의 몸이 연기로 변할 때마다 그림 리퍼가 두른 누더기, 그 안의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사령의 보주가 가진 빛이 명멸했으니까.

즉, 불사를 적용하는 주체는 그림 리퍼.

그렇기에 노사라고 불린 흑마법사의 불사를 막고 죽인다고 해도 저 언데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했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죽여 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군.'

노사는 베르덴의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불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반응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이다. 어쩌면 그림 리퍼를 불러내며 자신이 가진 힘을 희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중요한 건 그림 리퍼다.

놈을 토벌하는 것이 곧 결착으로 이어질 터. 베르덴은 확신했다.

그때, 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 리퍼여, 저 마법사의 영혼을 수확해라."

그림 리퍼가 낫을 높이 들어 올렸다.

불길한 기운이 집약된 칼날. 이내 아래로 휘두르자 수십 개의 죽음의 칼날이 쇄도했다.

<중력 장막>

암자색의 장막이 베르덴을 보호했다.

십수 개의 칼날을 튕겨 낸 장막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호오, 중력 마법이라. 전격 계열과 더불어 고위 속성을 두 가지나 다룰 줄이야. 재능 하나는 끝내주는군."

하나 이거라면 어떨까.

죽음의 칼날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림 리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햇빛에 비친 그림자처럼 쭈욱 뻗어 나간 그림 리퍼가 낫을 다잡고는 크게 휘둘렀다.

사아아아아악!

대기가 갈라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막기에는 애매하군.'

<육체증폭>

<비행>

콰앙!

베르덴이 바닥을 차 하늘로 솟았다.

물론 마냥 도망친 건 아니었다. 허공을 베어 가른 그림 리퍼, 그 아래에 있던 지면에서 마법이 쇄도했다.

<어스본>

콰자자작.

대지의 가시가 그림 리퍼의 품을 파고들었다.

칼리아가 말한 대로 공격 도중에는 비실체화를 사용할 수 없는 모양.

베르덴이 그림 리퍼를 주시했다.

그러자 놈이 낫을 휘둘러 가시들을 부숴 버렸다. 3위계 대지 마법으로는 적중해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는다는 뜻.

노사가 박수를 쳤다.

"대단해. 그 찰나의 틈에 반격할 줄이야. 자칫하면 몸이 그대로 두 동강 날 텐데 아주 강심장이로군."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과 동시에 그림 리퍼가 베르덴을 추격했다.

3미터나 되는 거대한 낫이 휘둘러지며 죽음의 칼날들이 그의 목숨을 노렸다.

베르덴이 곡예를 펼치며 피해 냈다.

그러곤 순간적으로 방향을 반대로 바꾸며 그림 리퍼에게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지나치는 칼날.

베르덴이 마력을 방출했다.

<염열파동>

화염의 파동이 그림 리퍼를 덮쳤다.

이어 트리플 캐스팅을 펼쳐 얼음과 번개 그리고 중력 마법으로 실체를 타격했다. 놈에게서 벗어난 베르덴이 그림 리퍼를 주시했다.

[....]

당연하게도 이 정도 마법으로 그림 리퍼가 소멸하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반응이 있다.'

물리적인 충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 대신 화염과 전격 마법에 맞은 부위가 약간 흐릿해지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열이 약점인가 보군.'

기본적인 언데드의 특성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마법을 버틸 수 있는 한계치가 엘더 리치보다 아득히 높다는 게 문제.

지금처럼 실체화되기를 기다리며 약점을 노릴 수는 있으나, 베르덴은 전투를 그렇게까지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노사도 마찬가지겠지.'

어떠한 대가도 없이 저런 언데드를 다룰 리는 없을 테니까.

베르덴이 노사의 표정을 슬쩍 봤다.

놈은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열심히 그림 리퍼를 좇고 있었다.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베르덴은 그림 리퍼의 능력을 얼추 파악했다.

방금의 반응으로 놈을 토벌할 계책까지 완성됐다.

이제 남은 건 기회뿐.

그리고 그 기회는 베르덴이 아닌, 노사가 직접 만들 것이다.

* * *

마법사의 기본은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눈앞에서 날붙이가 휘둘러지는 걸 경험한 마법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기에 단련되지 않은 반사 신경과 미숙한 대처 능력에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런데 저놈은 기이하다.

아슬아슬하게 그림 리퍼의 공격을 피해 내는 움직임.

실체화를 할 때마다 틈틈이 마법을 때려 박는 끈질김까지.

게다가 그림 리퍼의 <절망의 오라>에도 칼리아나 글로스처럼 공포에 질리는 기색도 없었다.

의도한 건지, 아니면 방법이 없어서 발버둥을 치는 건지는 모르겠다.

비올라를 무력화한 수단도 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쓰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나 뭐가 됐든 노사의 심사를 뒤틀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감히 잔재주를...!'

예상대로라면 진즉에 끝났어야 했는데.

노사는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베르덴의 예상대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림 리퍼의 힘을 다룰 때마다 갈취당하는 영혼.

계약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돌연사할 리는 없을 테지만, 그렇다 해도 소모가 너무 극심했으니까.

'어떻게 하지?'

조금 더 힘을 끌어내야 할까. 아니면 저놈의 마력이 떨어지길 기다려야 할까.

뭐가 더 효율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 베르덴이 지면에 착지했다.

노사를 바라보는 눈동자.

뭔지 모를 여유가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노사가 작게 볼 안쪽을 씹었다.

'어쩔 수 없나.'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간 오히려 손해가 더 클 수도 있다.

그림 리퍼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져갈지 모르겠지만... 감수하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노사가 베르덴을 보며 말했다.

"...상당한 비행 실력이군. 아주 하늘을 나는 쥐새끼를 보는 것 같아."

"방금까지는 용감하다고 하지 않았나?"

"닥쳐라! 그 지루한 재롱도, 시건방진 시간 끌기도 여기까지다!"

그림 리퍼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한차례 호흡을 내쉰 노사가 속삭였다.

"그림 리퍼, 놈의 정신과 육신을 정지시켜라."

그 순간, 그림 리퍼의 누더기에서 푸른 불꽃의 눈이 타올랐다.

죽음의 수확자의 눈.

그와 마주하면 정신계가 마비된다.

푸른 불꽃과 마주한 베르덴의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

순간 베르덴의 몸이 움찔거렸다.

뒤이어 그림 리퍼의 낫에 죽음의 기운이 명멸했다. 하지만 죽음이 코앞에 있음에도 베르덴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그 모습에 노사가 히죽였다.

"진즉에 쓸 걸 그랬군."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낫이 휘둘러졌다.

거대한 죽음의 참격.

이것으로 죽음은 확정이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어...?"

베르덴의 주위로 마력이 일었다.

지금까지 봐 왔던 것보다 더욱 농밀하고 방대한 마력이.

그 광경에 노사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정신과 몸이 마비되었는데 마력을... 아니, 애초에 이만한 마력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었다.

'눈에 마법진이라고...?'

베르덴의 오른쪽 눈에 떠오른 역천의 마법진.

이내 마안이 발동되며 그의 손에 맺힌 회색의 마력이 별자리를 그렸다.

자그만한 빛들이 수놓인 어둠의 구체.

노사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 그림 리퍼! 당장 <아스트랄화>를 써라!"

노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혜성, 라레니아(Rarenia).

휘몰아치는 마력.

은하수의 격류가 참격을 찢어발겼다.

170화 결착

그림 리퍼가 실체화되어 있는 때는 한순간.

베르덴은 그 순간을 조금이나마 더 늘리기 위해, 놈이 강력한 기술을 쓸 때까지 기다렸다. 보다 확실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게 정신계 저주인지는 몰랐지만.'

지금의 저주는 회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나 애초에 그건 고려하지 않았다. 언데드가 일으키는 저주 따위에 정신이 흐트러질 정도로 평온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이건 예견된 결말이다.

혜성, 라레니아(Rarenia).

성신 마법.

그 두 번째 별이 죽음의 참격을 흔적도 없이 분쇄했다.

[...?!]

그림 리퍼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피하기엔 늦었다.

이윽고 밤하늘의 혜성이 그림 리퍼를 집어삼키며 일직선을 관통했다.

────콰아아아아앙!

의식장을 뒤흔드는 막대한 충격.

벽에 새겨진 크레이터를 기점으로, 몇 줄기 금이 위로 뻗어 나갔다. 이내 천장까지 갈라지며 그 파편 일부가 낙하하더니 노사 앞에 떨어졌다.

"헉!"

깜짝 놀란 노사가 주저앉았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베르덴에게 향해 있었다.

"무, 무엇이냐. 방금 그 마법은?"

원소 마법도, 부여 마법도, 흑마법도 뭣도 아니다.

8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음에도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라니. 거기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는 듯한 마력까지.

"설마 마도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 마법사에게서 마도사 특유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리 마력이 봉인당했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노사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 설령 마도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순간 느낀 불길함 탓에 평정심을 잃은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직전의 광경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 은하수와 같은 마법은 물리력만을 띠고 있었다.

그림 리퍼는 물리 저항력이 매우 높다.

<아스트랄화>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피해는 있을지언정 큰 문제는 없을 터....

[카아아아아아아악!]

"윽?!"

그림 리퍼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이 긁었다.

충격이 상당했는지 누더기 안쪽에 있는 어둠이 크게 흔들렸지만, 노사의 시선을 빼앗은 건 그게 아니었다.

'은하수?'

그림 리퍼의 육체에 어두운 별무리가 아른거리고 있다.

아무리 낫을 휘두르며 저항을 해 봐도 떨어지긴커녕 꿈적도 하지 않았다.

별의 잔흔.

혜성의 격류는 흐름을 거스른다. 별무리가 남아 있는 동안 그림 리퍼는 절대로 실체를 숨기지 못한다.

물론 노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 그림 리퍼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까부터 시끄럽군."

<인페르노>

화아아아악!

초고온의 불길이 노사를 불태우고 그림 리퍼를 덮쳤다.

실체를 숨기지 못하는 게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는지 놈이 불길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화염 폭격이 이어졌다.

<격변>

<용암격창>

<화염 폭풍>

갈라진 대지에서는 솟구친 용암이 누더기를 태웠고, 화염을 품은 대지의 창이 놈의 어둠을 꿰뚫었으며 불길의 소용돌이가 그림 리퍼의 전신을 휘감았다.

몸부림치던 그림 리퍼가 수직으로 낫을 휘둘렀다.

화아아아악! 그대로 갈라진 폭풍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불길을 흩뿌렸다.

'이 정도로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부족한 건가.'

그렇다면.

<적광赤光>

오큘러스에서 홍염의 구체가 사출되었다.

그림 리퍼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마법. 이내 놈의 내부에서 거센 화염이 분출했다. 그렇게 누더기의 대부분이 불에 타 버리자 안에 숨겨져 있던 그림 리퍼의 정체가 드러났다.

[카아... 악....]

듬성등섬한 머리.

피골이 상접한 몸체.

기괴하게 자라난 팔과 다리.

그 추레한 몰골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림 리퍼라는 이름에 비해 꽤나 별 볼 일 없군."

베르덴이 비웃었다.

그를 본 그림 리퍼가 전신을 비틀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림 리퍼의 절규가 대기를 뒤흔들었다.

신체를 넘어 영혼을 압박하는 사악한 기운의 파동. 낫을 대각선 아래로 내린 그림 리퍼가 푸른 불꽃의 눈을 번뜩였다.

어느새 몸을 되찾은 노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돼! 나는 허락하지 않았단 말이다!"

노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림 리퍼는 힘을 끌어모았다.

말릴 새도 없이 영혼 전체를 갈취당한 노사. 순식간에 몸이 바짝 마르더니, 눈앞이 아득해지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계약자가 쓰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 리퍼는 힘을 한곳에 집중했다.

낫에 '죽음'이 담겼다.

심상치 않은 위압감이다.

베르덴은 이것이 그림 리퍼의 마지막 수라는 걸 직감했다.

'그건 나도 바라는 바다.'

지치기도 지쳤지만 영묘에서부터 시작된 이 싸움이 지루해질 참이었으니까.

더블 캐스팅.

<활염>

불길을 조종해 주위에 만연한 화염을 허공 위로 끌어모았다.

본래의 위력을 최대로 강화하기 위한 밑준비. 그리고 베르덴의 마안이 발동되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화염이 수십 개의 창을 형성했다.

"불타 죽어라."

초열의 비.

<라그나크>

허공을 가득 채운 불지옥이 떨어진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림 리퍼는 그에 지지 않고 낫을 휘둘렀다.

<멸혼>

영혼을 베어 버리는 참격.

'존재의 격'이 낮은 생명체에게 무조건적인 죽음을 선사하는 최악의 '저주'로, 그에 베인 영혼은 어떤 빛에도 구원받지 못하고 영멸한다.

그 대가는 계약자의 영혼이다.

보이지 않는 참격이 화염을 통과했다.

그것은 어떠한 물리력도 갖지 않는, 그저 확정된 저주일 뿐. 베르덴조차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그림 리퍼의 마지막 저주가 그에게 닿았다.

감히 자신에게 거역한 인간을 멸한다.

그 사실에 그림 리퍼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저주가 전해졌음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영혼이 멸하기는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

의문을 느낄 찰나 그림 리퍼는 보고 말았다.

인간의 내면 속, 푸른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미증유의 존재감을.

저건 하등한 인간 따위가 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림 리퍼가 가진 존재의 격을 넘어서는, 고위 언데드라고 해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무언가.

그렇게 최악의 저주는 실패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실패한 저주는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

<멸혼>이 그림 리퍼의 영혼을 찢어발겼다.

전신의 모든 구멍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고,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그림 리퍼가 거대한 낫을 바닥에 떨구었다.

영혼이 소멸하기 시작한 그림 리퍼가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점차 다가오는 뜨거운 열기.

죽음을 수확하는 언데드, 그림 리퍼는 스스로의 죽음을 확신했다.

콰과과과과과광!

* * *

의식장 중심이 연기와 탄내로 가득했다.

콜록! 콜록!

노사가 기침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떻게 된... 아!"

깜짝 놀란 노사가 서둘러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살아 있다.'

그림 리퍼에게 영혼을 전부 갈취당했을 터인 자신이 살아 있었다.

다만 완전히 멀쩡해진 건 아니었다. 영혼의 일부만이 돌아온 건지 바싹 마른 피부는 여전했다.

'그래도 산 건 다행인데... 어째서 영혼이 돌아온 거지?'

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연기가 조금 걷히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사령의 보주가 보였다.

그리고.

쩌적────!

"뭣...."

사령의 보주가 산산조각이 났다.

주검의 영광의 설계도로 만든 사령의 보주는 마력과 사기가 뭉쳐지며 만들어진 것.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는 파괴가 불가능하다.

그런 보주가 손상되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첫째, 안에 담겨 있는 기운을 기준 이하로 소모했을 때.

둘째, 계약이 파기되었을 때다.

완성된 사령의 보주는 반영구적인 동력을 띤다. 그러니 첫 번째의 경우를 배제한다면....

"그림 리퍼가 소멸했다고...?"

노사는 당혹감에 빠졌다.

설마 그림 리퍼가 당하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듯 봉인된 마력이 돌아왔다.

그때였다.

가까이서 감지된 마력.

노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자 연기 속에서 수많은 얼음 송곳이 일제히 쏟아졌다. 그야말로 불의의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연약한 육체에 혹한이 파고들었다.

이어 뇌격이 쇄도했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직격당한 노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커, 커헉...!"

'제길. 몸이...!'

마력 저항력이 높아 죽음은 면했다.

하지만 한기와 감전에 의해 팔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력회로 또한 마찬가지.

거센 바람이 불었다.

연기가 전부 걷히자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신으로 그림 리퍼를 소멸시킨 마법사.

"아...!"

끝에서야 노사는 깨닫고 말았다.

마일드륀으로 보낸 흑마법사의 실종.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조합 습격과 사령의 보주를 회수하러 간 쿤엘의 죽음. 영묘에서 죽었어야 할 칼리아의 생존과 험지에 숨어 있는 의식장의 추적.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비올라의 죽음과 그림 리퍼의 소멸까지.

'생각해 보면 놈이 왕국에 나타난 시기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 변수는 칼리아 따위가 아니었다.

"네놈이... 네놈이 변수였구나...!"

"나에게 변수는 네놈들이었다."

덕분에 조합에서 시작된 것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래도 딱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보수뿐만 아니라 5위계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 힘이 마도사에게 통용되는지도 확인을 할 수 있었으니까.

'뭐, 당연히 본인들이 의도한 건 아니겠다만.'

어쨌든.

"주검의 영광, 너희들의 목적은 뭐지?"

"네, 네놈... 그걸 묻기 위해 날 살려 둔 건가?"

"얼마 전까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흑마법사들의 자멸.

왕국 남부에 풀린 언데드 군세.

마도사와 강대한 언데드.

그렇게나 정보를 숨기고, 그렇게나 강대한 힘을 가진 조직이 뭘 숨기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다면 마법사가 아니었다.

노사가 피를 토하며 웃었다.

"크크큭, 내가 말해 줄 것으로 보이나? 그렇게 가볍게 입을 놀렸을 거라면 흑마법사들에게 저주를 새기지도 않을 텐데. 그리고 그 저주는 나에게도 새겨졌다."

"하긴 그렇겠지."

"하지만... 쿨럭, 쿨럭! 크흐... 특별히 저주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이것 하나는 말해 주마."

노사가 이를 드러냈다.

붉게 물든 치아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위대한 주검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그날, 불멸의 세상이 찾아올 것이다."

"불멸의 세상?"

"오로지 죽음만이 있기에 생명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쿨럭, 쿨럭! 너희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도시도, 왕국도, 제국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루아스, 그 거짓된 신까지!"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베르덴을 직시했다.

"이건 너희들의 미래에 내리는 저주다. 크크큭! 어디 한번 힘껏 발버둥 쳐 보거라. 어떠한 생명도 피할 수 없는 죽음에게서...!"

이윽고 노사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우리는... 그날이 오기를 죽음 속에서 기다리리라."

툭.

노사의 손이 떨어지며 스스로의 사망을 선고했다.

퍼엉! 다른 흑마법사들처럼 시체가 폭발하며 핏물 외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줄기처럼 흘러 내려온 피가 베르덴의 발치에 닿았다.

피 웅덩이에 베르덴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불멸의 세상이라. 또 거창한 게 나왔군.'

글러트니는 구인류의 종말을.

주검의 영광은 불멸의 세상을.

하나같이 세계를 뒤집는 게 목적이다.

대체 이처럼 정신 나간 집단이 얼마나 더 있을까.

베르덴은 세상이 넓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어쨌든 이걸로 놈들은 전부 처리했다.'

베르덴이 할 일은 다했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린 그가 칼리아에게 다가섰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다행히도 글로스는 아직 살아 있었고 호흡도 전보다 안정적이었다. 상태로 보아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칼리아가 물었다.

"애셔, 너는... 아니, 당신은 누구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171화 후폭풍 (1)

칼리아는 계속해서 베르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돕고 싶어도 부상이 너무 심해 검을 들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볼 수 있었다.

그림 리퍼가 소멸하는 광경.

전력을 낸 칼리아와 글로스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강대한 언데드를.

설령 백결 기사단과 성기사단이 전부 힘을 합친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한 마법사가 단신으로 토벌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게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영묘에서 느꼈던 그 이상의 마력량.

그림 리퍼를 단숨에 집어삼킨 은하수의 격류와 화염 마법으로 만들어 낸 초열의 지옥.

어느 것 하나 감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칼리아가 고용했던 마법사가 보란 듯이 승리를 쟁취했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가 범상치 않은 마법사인 건 알고 있었다.

적어도 백결 기사단 내에 있는 마법사들은 감히 상대도 못 할 만큼이란 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이 정도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이건 선을 넘었다.'

칼리아가 눈으로 경험한 강함.

그 힘은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수호하는 마도사를 웃돈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왕국의 정점에 비견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만한 존재가 그레이에서 의뢰를 받고 있는 거지?

어디에 속하건 간에 마법을 증명하기만 하면 평생을 풍족하게 살 돈도, 드높은 권력도, 사후에도 전해질 영광마저 거머쥘 수 있을 텐데.

의중을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미지는 곧 두려움으로 찾아왔다.

혹시라도 저 힘이 후작가로,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향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렇기에 칼리아는 물어야만 했다.

너는 누구냐고.

'음, 너무 본질적인 질문인데.'

베르덴이 턱을 쓸었다.

잠시 생각해 봤지만 스스로를 말로써 정의하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베르덴은 말 몇 마디로 표현될 만한 느긋한 일생을 살아오지 않았다. 복수자, 실험체, 연구자 등 갖가지 삶이 겹쳤으니.

'하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생각을 끝낸 베르덴이 답했다.

"저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라니.

분명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칼리아는 순간 조롱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베르덴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장난이 아닌 진심. 칼리아는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전신을 옥죄고 있던 긴장감이 녹아내렸다.

"그래, 당신은 마법사였... 죠. 아주 특별한. 본의 아니게 실례를───"

"존대는 그만두시죠."

칼리아가 반색했다.

"아, 그래도 되나? 내가 봐도 많이 어색했는데 고맙군. 그럼 그러도록 하지."

작게 헛기침을 한 칼리아가 말했다.

"크흠, 어쨌든 구해 줘서 고맙다, 애셔. 정말로. 영묘에 이어 목숨을 구원받은지가 벌써 두 번째군"

"의뢰의 일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다. 추후 보수뿐만 아니라 사례도 톡톡히 치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래. 기대해도 좋을 거야."

칼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칼리아 님!"

"글로스 단장님!"

백결 기사단장 베스파와 성기사 켈시아.

통로에서 나타난 둘이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팔 한쪽이 축 늘어져 있거나 다리를 절뚝거리는 게, 그들도 상당히 엉망진창이었지만 죽음의 기사에게서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칼리아는 머리를 벽에 기대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떠날 시간인가.'

쿠구구...!

그 순간 천장에서 돌조각과 먼지가 떨어졌다.

미약하게 떨리는 진동은 영묘에서 느꼈던 불안감과 거의 흡사했다.

"...아무래도 더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은데."

"동감입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원, 서둘러 탑승하라!"

주검의 영광 토벌대가 전부 비행선 벨로스에 올라탔다.

부상자들까지 전부 실은 걸 확인하고는 칼리아가 비행선의 시동을 켰다. 동력을 담당하는 마석에 마력이 명멸하며 비행선이 부유했다.

그렇게 협곡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쿠구구구구구!

탑승자들이 뒤를 바라봤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방금까지 있었던 협곡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절벽에서 분리되어 낙하하는 거대한 암석을 본 토벌대원들이 중얼거렸다.

"저기에 맞았으면 비행선째로 추락했겠는데."

"하마터면 언데드하고 같이 묻힐 뻔했어."

이윽고 의식장이 있었던 협곡이 완전히 무너졌다.

비행선의 고도가 높아지며 안정권에 다다랐다.

그렇게 생매장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토벌대원들이 하나둘씩 기절하기 시작했다. 고된 전투로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환자는 이쪽으로!"

성기사들은 제 몸도 멀쩡하지 않았음에도 위급한 부상자들을 우선시했다.

비행정 내부.

칼리아는 중상자로서 최우선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치유의 기적을 받아 상처를 일부 회복하고, 비행선에 있는 응급 도구로 전신에 붕대를 둘렀다. 그리고 오른쪽 골반 끝에 금이 간 터라 묵발을 써야만 불편하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지금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저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들을 부탁합니다."

성기사의 제지에도 칼리아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다.

글로스, 베스파, 겔시아 등 곯아떨어진 토벌대원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신성력의 힘에 기댄다고 해도 최소 2주에서 길게 한 달간은 정양해야 할 수준의 부상들.

그러나 다행히도 사망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로난데르크 주교.

그가 장담했듯이 언데드 집단에게서 토벌대원들을 지켜 낸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주교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신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부상자들 틈에서 의식을 잃고 있었다. 듣자 하니 며칠은 깨어나기 힘들 거라고.

'나중에 루아스교에 크게 헌금을 해야겠군."

칼리아가 부상자들을 일별하고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가로질러 비행정의 조종실로 들어서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베르덴.

그가 칼리아에게 고개를 향했다.

"벌써 움직이셔도 되는 겁니까?"

"혹시 몰라 너에게 비상 착륙 방법은 간단하게 알려 주긴 했지만 제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잠을 자도 조종실에서 자야지. 그런데 너는 따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건가?"

"저는 문제없습니다."

베르덴은 거의 찰과상밖에 입지 않았다.

그마저도 리커버리 팔찌로 전부 치유했기에 딱히 신성력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기적으로 치유가 될지도 의문이지만.'

주교의 기적이 통하지 않는 걸 확인했기에, 성기사의 치유 또한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으나 나중에 알아봐도 될 일이다.

베르덴도 상당히 피곤했기에 지금으로선 괜히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 그만한 적들을 상대했음에도 이렇다 할 상처 하나 없다니. 내 꼴이 한심해질 지경이로군. 뭐, 어쨌든. 애셔,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칼리아는 조종실에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너와 그 늙은 흑마법사의 얘기를 들었다. 불멸의 세상이라... 듣자 하니 국가 단위를 넘어 세계 단위로 암약하는 조직인 것 같은데. 교구를 반파시킨 흑마도사나 강대한 언데드와 계약한 늙은 흑마법사. 이 둘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것 같나?"

"기껏해야 간부 격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은 분명 강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불멸의 세상'이라는 말을 거론하기에는 부족하다. 세상에 군림하는 강자들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으니까.

역시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늙은 흑마법사가 그러더군.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이미 왕국을 떠났을 거라고. 거기다 언데드 외에 다른 흑마법사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는 건...."

"이미 왕국에서 어떤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겠군요."

"그게 정론이겠지. 그리고 그건 더 이상 왕국에 볼일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풀썩. 칼리아가 침상에 몸을 누였다.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이고 싶어 하는 흑마법사 집단이라. 일개 후작가 자식이 감당할 스케일이 아닌 것 같은데... 과연 우리가 한 일이 의미가 있었을까? 결국 놈들은 목표를 달성했는데?"

"적어도 흑마도사와 그림 리퍼는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마저 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지. 애초에 교구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못했을 거고."

"절 고용한 건 칼리아 님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칼리아의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슬슬 잠이 오는군. 하긴 영묘부터 시작해 주검의 영광만 상대한 지 거의 20일이나 흘렀으니 당연한 건가.... 너나 나나 당분간은 푹 쉬어... 야...."

칼리아의 의식이 단번에 떨어졌다.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베르덴이 가볍게 염력을 펼쳤다. 근처에 있던 담요가 칼리아 위에 내려앉았다.

'나도 잠 좀 잘까.'

베르덴이 눈가를 어루만졌다.

상처만 없다 뿐이지 지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나른한 몸을 이끌고 조종실을 나선 그가 빈방에 자리를 잡았다. 곧장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베르덴은 오랜만에 깊은 수면을 취했다.

* * *

에스티리아 왕국 국경.

흑마법사 리마넨은 절벽 위에 서서 왕국을 바라봤다. 하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바뀌는 건 없었다.

노사와 비올라.

둘 다 소식이 없었다.

"리마넨 님, 지금이라도 의식장을 확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두 분은 이미 죽었을 테니."

사인(死因)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림 리퍼 의식이 끝났음이 분명한 시간에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추적대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누가 그 둘을 죽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다.

리마넨에겐 사명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이대로 복귀한다."

위대한 주검.

그 첫 번째 신체를 마침내 손에 넣었으니. 도중에 죽는다고 해도, 언데드로 되살아나 그 신체를 '첫 번째 하인'에게 전달해야 한다.

오랜 세월 꿈꿔 온 숙원을 위해서.

리마넨과 흑마법사들이 왕국을 뒤로했다.

지난 2~3년간 지내 왔고, 비올라와 노사를 포함한 다수의 흑마법사가 사망했지만 미련은 없었다.

의식장이 제대로 가동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들로서는 왕국에 돌아올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주검'이 부활하시는 날.

그때가 되면 다시 이 땅을 밟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새로운 세상을 선사하리라.

죽음만이 존재하는 불멸의 세상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