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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망자의 행진 (2)

왕국 국립묘지.

주로 시민들의 시신을 안치하는 거대한 안치소다.

특성상 언데드의 자연 발생 확률이 높은 편.

물론 시체를 화장한다면 그 확률을 대폭 낮출 수 있긴 했으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형이란 대역죄인, 이단자 혹은 악마에게나 할 법한 처형 방식이었으니까. 아무리 시체라고 한들 가족의 시신을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건 정서적인 거부감이 컸다.

그리고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자들의 반대 또한 격렬했다.

가문의 일원, 그들의 시신은 가문에게 있어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니까.

뼛가루로 만들어 유골함에 넣는 것보단, 가문의 무덤에 온전히 안치하여 안식을 바라는 것이 여러모로 마땅했다.

하물며 비용 문제까지.

땅 아래에 묻는 것보단 화장터를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 당연히 비용이 클 터.

하루하루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빈곤한 사람들에겐 그조차 부담이다. 분명 누군가는 몰래 시신들을 인적이 드문 땅에 매장하겠지.

그럴 경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언데드가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한곳에 모아 관리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탄생한 게 국립묘지의 존재다.

칼리아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립묘지라... 확실히 주검의 영광이 숨어 있을 법하군."

묘지에는 흑마법의 재료가 될 것이 많으니까.

사악한 흑마법사들이 은신처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뻔해서 의심조차 들 정도였다.

하지만 국립묘지에는 관리자들이 있다.

국가에서 자격을 허가받은 흑마법사들. 그뿐만 아니라 이상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주기적으로 주변 도시에서 병사를 파견해 꼼꼼히 순찰도 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관리자들이 이미 당했다는 뜻이다.

'아니면 주검의 영광에 가담했거나.'

칼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베스파, 국립묘지의 내부 설계도는 확보했나?"

"물론입니다."

베스파가 낡은 설계도를 책상 위에 펼쳐 고정했다.

칼리아가 설계도를 면밀하게 바라봤다.

묘지에는 여러 건축물이 많긴 했지만, 그녀의 이목을 끈 건 단 하나뿐이었다.

묘지 중심에 세워진 거대한 영묘.

그 아래에는 총 2개 층으로 이루어진, 넓은 지하 안치소가 존재했는데, 설계도로 보아 주검의 영광이 은신처로 삼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그리고 영묘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 그 외 출구는 없었다.

급습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지만 달리 말하자면 놈들이 도망칠 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을 마친 칼리아가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계획을 하달하겠다."

그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 하나의 기사단을 이끌며 강함을 세간에 인정받은 후작가의 장녀. 귀족들조차 상대하기 꺼린다는 그녀가 과연 어떤 계획을 구상했을까.

베르덴은 내심 기대하며 칼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칼리아가 선언했다.

"정면 돌파로 간다."

"...."

칼리아는 베르덴의 예상 이상으로 저돌적이었다.

* * *

쿠웅.

백결 기사단의 기사가 책상 위에 큰 가방들을 올려 뒀다. 그 안에는 루아스교의 교회에서 빌려온 신성 장비가 가득했다.

무구에 신성 효과를 부여하는 무색의 기름.

그리고 한 번 복용하는 것으로 일정 시간 동안 언데드의 사악한 기운과 저주 마법을 완화해 주는 성수 등 흑마법사에게 효과적인 수단들이 기사단에게 갖춰졌다.

칼리아가 자신에게 할당된 기름과 성수를 조심히 챙겨 넣었다.

마지막으로는 루아스교의 상징인, 정십자가가 매달린 목걸이를 착용했다.

일명 [홀리 네클리스].

하루에 2번, 4위계 이하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으며, 상시적으로 정신을 보호해 주는 신성 장비다. 흑마법으로 인해 정신이 오염될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귀한 물건인 만큼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칼리아는 베스파와 기사단의 마법사들에게 목걸이를 전달했다.

그녀를 대신할 지휘관이나 주요 화력을 담당하는 마법사의 존재는 무척이나 중요하니까. 특히나 마법사에게 정신 착란이 와서 아군에게 마법을 남발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할 테니.

물론 전격 계열 마법사인 베르덴은 당연히 포함되었다.

"애셔, 너도 착용하도록."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목걸이를 건네받았다.

솔직히 말해 베르덴에게 정신 보호는 소용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울 트리부터 시작해 4위계 정신계 마법사, 레드햇, 엘더 리치 등 정신에 간섭하는 저주나 마법은 단 한 번도 통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에게 있어 이러한 신성 장비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순 없겠지.'

베르덴이 말한다고 한들 여기 있는 모두가 곧이곧대로 신뢰할 리가 없었다. 다수의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경계를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신경을 분산할 바에 말없이 착용하는 편이 간단했다.

홀리 네클리스를 착용했다. 정십자가가 옷 위로 부딪쳤다.

그때, 칼리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의뢰만 했지, 같이 움직였던 적은 없군. 손발을 맞춰 볼 정도로 느긋한 상황은 아니지만 너에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겠지."

미스릴 등급 파티에게 의뢰를 받아 토벌을 함께한 전적이 있으니까.

적어도 집단적인 움직임에 대한 기본을 갖추고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혹시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도록. 이번 주검의 영광 토벌에 대한 거라면 될 수 있으면 뭐든지 답해 주지."

궁금한 거라....

"왜 칼리아 님께서 최전열에 서신 겁니까?"

칼리아는 이 토벌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녀가 죽는다면 기사단이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 굳이 앞에 서서 지휘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 칼리아가 답했다.

"뭐, 여러 이유가 있다. 뒤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건 내 성격상 맞지 않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려면 지휘관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가 베르덴과 마주했다.

"내가 기사단 중에서 제일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지휘만 하는 건 전력적인 측면에서 아까운 손실이지."

뒤에서 지휘만 하며 지켜질 바에, 앞장서서 지휘와 전투를 동시에 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효율이 좋기도 하고.

칼리아 본인의 능력과 그 능력을 믿기에 가능한 것.

베스파를 포함한 기사단의 사람들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양인지 별말이 없었다.

베르덴이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리아가 전력을 중시한다면 그도 할 말이 있었다.

"칼리아 님,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

고개를 갸웃거리는 칼리아.

그런 그녀에게 베르덴이 말했다.

"저도 전열에 서고 싶습니다."

* * *

도시 카베른에서 국립묘지까지는 말로 약 삼 일 거리.

칼리아를 필두로 베르덴과 백결 기사단이 목적지로 향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에서 훈련된 군마는 전력으로 몇 시간을 내달릴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그 근력에서 터져 나오는 뒤차기는 인간의 두개골쯤은 쉽게 으깰 정도.

당연히 속도는 일반적인 말을 쉽게 압도한다.

군마의 발굽이 지면에 닿는 순간 주위의 풍경이 움직인다.

그렇게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나아간 결과, 고작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국립묘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네비론 주교가 준 목걸이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다행히 그동안 위치가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이후 무구에 기름을 바르고 성수를 복용했다. 신성한 빛이 토벌대의 몸에 깃들었다.

모두가 준비를 끝마쳤음을 확인한 칼리아가 명령했다.

"전원, 돌입한다."

칼리아의 계획은 정면 돌파.

굳이 뜸 들이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말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겁이 없고 주인의 뜻에 복종하는 군마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무기였으니까.

그대로 묘지로 돌진하며 각자 무기를 빼 들었다.

칼리아가 신호했다.

"하일레, 그라넨! 문을 부숴라!"

"맡겨만 주세요, 칼리아 님!"

"명령대로!"

두 마법사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붉은 화염이 휩싸인 지팡이를 앞으로 내뻗었다.

<화염구>

<암석강타>

콰아아아앙!

암석이 철문을 크게 손상하고 이어진 폭발이 입구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렇게 기사단에 묘지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자 스산한 안개가 그들을 맞이했다.

묘지 아니랄까 봐 섬뜩한 풍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고 꺼림칙한 기운이 사방에 만연했다.

잠시 멈춰 선 칼리아와 기사단.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살기를 드러냈다.

"...역시 선객이 있었군."

───그어어어어...!

안개 속에서 언데드가 대량으로 나타났다.

좀비, 스켈레톤 등 종류가 다양했다. 수십 구의 시체로 이뤄진 시체 더미 그리고 활과 검 심지어 마법을 다루는 스켈레톤 메이지까지 발생한 상황.

그 숫자에 모두가 확신했다.

이곳 국립묘지에 주검의 영광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이제 해야 될 건 토벌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데드 하나하나 전부 없애는 건 비효율적이다. 말을 탄 상태에서 난전을 벌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령의 보주의 근간을 부수는 것.

그 외의 나머지는 차순위다. 그러니 당장 저 언데드 무리를 뚫고 영묘의 입구를 확보하는 게 먼저였다.

"애셔, 부탁하지."

베르덴이 앞으로 나섰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후열에서 화력을 담당하는 것이 상식이다. 비교적 육체와 감각이 단련되어 있지 않기에, 눈먼 화살이나 칼에 맞아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으니까.

근접전이나 방어에 능숙한 사람을 앞세워 몸을 지키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전열에 서고 싶다니.'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하물며 그는 다이나 은행에서 무려 25억 엘크를 현금으로 대출하면서 암흑가의 경매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예의상 뭘 낙찰받았는지는 묻지 않았으나, 분명 마법적으로 도움이 되는 장비들을 구한 게 틀림없겠지.

칼리아가 본 베르덴은 귀족들처럼 쓸모없고 사치스러운 것에 거액의 돈을 낭비할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과연 어떤 마법을 보여 줄까.'

칼리아는 내심 기대했다.

베르덴의 실력이 어떨지 너무도 궁금했으니까.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베르덴을 흘긋거렸다.

"...."

그런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충만한 마력이 몸속에 들어차며, 그의 손에 들린 오큘러스에 마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언데드 무리에 피해를 줘 빈틈을 만드는 것이 베르덴이 맡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없다.'

저 언데드 무리를 뚫고 단번에 영묘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든다. 지금의 베르덴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하고도 넘쳐흘렀다.

4위계 마법 <플레어>.

그 화염 광선을 5위계 마법 <프로미넌스>로 한층 더 위력을 강화하고 <활염>을 통한 화염 조작으로 그 범위를 강제적으로 넓혔다.

오큘러스를 휘감은 다섯 줄기의 불길이 서로 뒤엉키며 강하게 명멸했다.

"...!"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열기와 감각을 자극하는 위압감에 베르덴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저 멀리서 스켈레톤 하나가 화살을 쏘아 보냈지만 미처 닿기도 전에 불타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마법의 연산이 끝이 났다.

파괴의 열선.

<크리메이트>

뒤엉킨 불길이 폭발하며 거대한 화염 광선이 언데드 무리를 관통했다.

범위 내에 있던 언데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멀리서 다가오던 무덤파수꾼조차 저항할 새도 없이 일순간에 집어삼켜졌다.

망자의 묘비는 휩쓸려 사라지거나 여파에 녹아내려 무덤 위로 흘러내렸다.

파괴의 마법이 지나간 자리, 그 위에 멀쩡히 서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사단이 지나갈 수 있는 길만이 남아 있을 뿐. 단 한 번의 마법에 언데드 무리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와해되어 흩어졌다.

정적이 내려앉은 국립묘지.

백결 기사단의 화염 마법사 하일레가 멍하니 목소리를 흘렸다.

"헐."

그녀의 한마디가 모두의 반응을 대신했다.

156화 망자의 행진 (3)

에스퍼렌사 후작가에는 5위계 마법사가 원로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후작가의 차남이 4위계 마법사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여러 마법을 접해 왔던 칼리아는 고위계의 마법에 대해 그리 생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범위에 닿은 언데드들을 그대로 소멸시킨 화염 광선. 4위계 원소 마법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력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설마.

'4위계 마법사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의 경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뭐가 됐든 지금의 마법은 결코 4위계 수준이 아니었다.

합성 마법이든 집중 마법이든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런 4위계였다면 마법사란 존재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을 지녔을 테니.

칼리아가 슬쩍 뒤로 시선을 보냈다.

4위계 중위의 화염 마법사, 백결 기사단의 하일레.

높은 파괴력으로 기사단의 화력을 담당하는 기사 중 하나. 자신의 스태프를 양손으로 꼭 쥔 그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크, 크, <크리메이트>라니...."

트리플 캐스팅이 가능한 마법사만 시전할 수 있는 화염의 합성 마법.

4위계와 5위계 하위 마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연산량은 엄청나다. 어지간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조차 최소 분 단위는 집중해야 겨우 구현할 수 있는 난이도 높은 마법이다.

그런데 저걸 고작 십수 초 만에 시전하다니.

상식을 벗어난 연산력이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하일레가 겁먹은 듯 떨고 있다.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기사들은 멍하니 마법의 위력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고, 그 외의 마법사들은 당혹감이 서린 시선들을 베르덴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를 봐도 직전의 화염 마법은 결코 예사 수준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배르덴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길이 열렸습니다."

"아, 그... 고, 고생했다."

칼리아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그의 마법이 예상을 뛰어넘긴 했지만... 당장 여기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떠오르는 의문은 나중에 해결해도 될 일.

다시금 기세를 가다듬은 칼리아가 백색의 검을 앞으로 향했다. 술렁거리던 기사들이 곧장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갖췄다.

"돌격하라!"

칼리아의 신호에 군마가 발굽을 내디뎠다.

가속하는 속도. 잔잔했던 바람이 거칠게 다가왔다.

언데드 무리가 가까워지자 하얀 투구가 칼리아의 머리를 감쌌다. 그녀가 가진 갑옷의 효과 중 하나였다.

두두두두두!

베르덴이 만든 길을 칼리아의 기사단이 질주했다. 겨우 여파에서 비껴 나간 언데드들이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서걱! 콰직!

백결 기사단이라는 이름답게 하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단은 강했다.

기껏 힘들게 몰려온 언데드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한 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머리가 잘려 나갔고, 앞을 가로막은 언데드는 군마에 짓밟혀 곤죽이 되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거대한 회색 덩어리가 나타났다.

시체 골렘의 아종 '해골 골렘'.

부패하고 있는 시체들로 구성된 시체 골렘과 달리 수백 구의 뼛조각으로 이뤄진 언데드다. 움직일 때마다 달그락거리던 놈이 기사단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는 해골마를 탄 언데드 기수 세 마리가 맹렬하게 달려왔다.

베르덴이 마법을 날리려 하자, 칼리아가 제지했다.

"강력한 마법을 썼으니 무리하지 마라. 놈들의 처리는 우리에게 맡기도록."

"...알겠습니다."

베르덴은 잠시 고민한 뒤 답했다.

물론 전혀 지치지 않았지만, 집단으로 움직이는 만큼 지휘관의 통솔은 중요했다. 멋대로 움직이는 건 옳지 않기도 했지만.

'칼리아와 기사단의 실력이 어떤지 보고 싶기도 하니.'

베르덴은 순순히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칼리아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베스파, 해골 골렘을 처리해라."

"예, 칼리아 님."

명령을 내린 칼리아가 가속했다. 그리고 거대한 방패를 든 베스파와 다른 기사 하나가 뒤를 따랐다.

그게 신호였는지 하일레가 마법을 연산했다. 이윽고 그녀의 금속 지팡이에서 붉은 창이 쏘아졌다.

<파이어 자벨린>

콰과광!

화염이 폭발하며 해골 골렘이 휘청거렸다.

약점 속성인 탓에 충격이 컸는지 맞닿은 부분 말고도 몸 일부에 금이 가 있었다. 기를 끌어올린 베스파와 기사가 방패를 날카롭게 세우며 돌진했고, 골렘의 양쪽 다리를 일격에 부숴 버렸다.

이어 마법사들의 마법이 날아가 골렘을 완전히 침묵시켰다.

한편, 칼리아는 홀로 언데드 기수 세 마리와 대적했다.

그녀가 기를 끌어모으자 백색의 기운이 검에 맺혔고 언데드 기수가 낡은 창을 세웠다.

그리고 교차했다.

한 번의 번쩍임. 왼쪽에 있던 칼리아의 검이 오른쪽에 멈춰 서자, 언데드 기수 세 마리의 몸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심지어 해골마의 머리까지.

단번에 방해물을 제거한 칼리아 그리고 베스파 일행이 속도를 조절하며 대열에 합류했다.

'강하군.'

칼리아가 자신할 만하다.

이런 언데드 무리로는 기사단의 진격을 조금도 늦출 수 없었다. 베르덴의 지원이 있든 없든 간에 말이다.

국립묘지에 내려앉은 자욱한 안개.

칼리아과 백결 기사단의 활약에 의해 조금의 피해도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언데드 무리에서 벗어나자.

중심부의 영묘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중앙 영묘에 도착했다.

오랜 기간 합을 맞춰 온 기사단에게는 별다른 신호도 필요 없었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석벽>

기사단의 마법사가 벽을 세워 시야를 차단했다. 후에 성수를 뿌려 미약한 신성력이 깃들게 했다. 언데드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해물이었다.

척후를 맡은 기사 두 명이 재빨리 말에서 내리곤 입구에 발을 디뎠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기감을 넓혀 안쪽의 기색을 살폈다.

지하 계층으로 통하는 입구는 이곳 단 하나. 함정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있군.'

기사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시각적으로 잘 보이지는 않아도 무언가 있는 게 느껴졌다.

은폐 능력을 가진 언데드 '헌커(Hunker)'가 분명할 터.

놈은 정해진 영역 내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지만 경계를 넘는 순간 몸속에 있는 뼈바늘을 넓게 흩뿌린다.

뼈 자체에 마비독이 깃들어 있어 함정에 걸리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두 기사가 활을 들었다.

각각 세 개의 화살을 시위에 얹고 힘껏 뒤로 당겼다.

───파악!

총합 여섯 개의 화살이 넓게 퍼져 나갔다.

정확히 두개골이 꿰뚫린 헌커들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낙하 충격에 놈들의 몸체가 박살 났다.

기사는 놈들의 사체를 밟고 넘어섰다.

다시금 조심스레 영묘 입구를 면밀하게 확인했다. 더 이상 함정은 없었다.

척후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섰다.

"정리됐습니다, 칼리아 님."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손을 저었다.

베르덴과 기사단이 군마를 이끌고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석벽>을 시전해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 횃불이 없어 어두웠으나, 진즉에 암시 마법이 부여된 마법 물품을 착용하고 있던 기사단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마치 기계와 같이 정밀하고 체계적인 움직임.

베르덴은 로든마이어 백작의 로드론 기사단과 함께 자작 구출 작전을 펼치고 같이 훈련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백결 기사단의 전체적인 수준은 로드론 기사단보다 적어도 한 수는 앞섰다.

모두가 군마에서 내렸다.

칼리아가 지시한 대로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여 분대별로 모였다.

1계층으로 통하는 입구는 총 세 개.

거기다 영묘 입구와 군마를 지킬 병력도 필요하기에 총 4분대로 기사단이 재편성되었다.

칼리아가 속한 1분대는 본인까지 더해 총 다섯.

베르덴을 포함한 마법사 두 명과 방패 기사 하나 그리고 척후 역할을 하는 기사 하나로 구성되었다.

칼리아가 자신의 분대, 정확히는 베르덴을 슬쩍 보며 물었다.

"직전의 마법으로 상당한 마력을 소비했을 텐데, 마력 포션을 복용하지 않아도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음... 그렇군."

칼리아는 별말 없이 수긍했다.

그야 처음 대면했을 때, 마력 위압으로 4위계 마법사를 찍어 누른 적이 있었으니까. 다른 건 정확히 몰라도 남다른 마력량을 지닌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그런 마법을 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린 칼리아가 베르덴 옆에 있는 마법사를 호명했다.

"토렌, 너는 3분대를 지원하도록."

"예, 칼리아 님."

토렌이 1분대를 떠났다.

결과 칼리아의 분대는 총 4명.

다른 분대보다 적은 숫자였으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녀가 목격한 베르덴의 마법은 너무도 위력적이었고, 그에 뒷받침되는 마력량까지 품고 있었으니까.

이 와중에 다른 마법사를 데려가는 건 전력 과잉이었다.

칼리아가 가장 앞에 서서 기사단을 바라봤다.

"임무는 충분히 숙지했을 테니 더 말하진 않겠다. 하나, 이거 하나는 명심하도록."

그녀의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마라. 이상이다."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세웠다.

마찬가지로 검을 세운 칼리아가 검붉은 눈동자를 빛냈다.

"그럼 이제부터 영묘를 수색한다. 입구를 지킬 4분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2계층 중심부에서 보도록 하지. 흩어져라."

* * *

저녁노을이 내려앉은 초원의 언덕.

한가운데 선 리마넨은 눈을 감은 채 자연의 향취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곧 시들어 버릴 생명의 흔적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 한 흑마법사가 다가왔다.

"리마넨 님, 칼리아가 기사단을 이끌고 국립묘지로 향했다고 합니다."

"예정보다 빠르군."

리마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백강 칼리아.

그녀는 감히 주검의 영광과 대적했다. 일개 왕국의 후작, 그것도 자식 따위가.

물론 훌륭하긴 했다.

순조롭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던 자신들의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붙잡는 데 성공했으니. 백강이라는 이명답게 판단력과 행동력은 유능함 그 자체였다.

하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방구석에 처박혀 잠을 자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저항해 본들 어차피 같은데. 죽음이라는 결과는 어차피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정말로 덧없구나."

한탄을 내뱉은 리마넨이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끈을 풀고 스크롤을 양손으로 펼치자, 안에 있는 마법의 문자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흑마법사가 감탄했다.

"그, 그것이 7위계의...!"

"위대한 주검을 모시는 '첫 번째 하인'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지."

흑마법사는 절로 몸을 떨며 허리를 숙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외감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리마넨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스크롤에 내재된 문자들을 읽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기류가 뒤틀리며 거센 풍압이 초원을 덮쳤다.

소름 끼치는 기운이 주위를 억압하며 노을에 비치는 초원의 풀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불청객이 찾아왔다.

"거기 두 사람!"

왕국 갑옷을 입은 병사 두 명.

정기적으로 주변을 순찰하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언덕 아래에서 다시금 소리쳤다.

"곧 해가 집니다! 바람도 차고 곧 통금 시간이니 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필요하시다면 뒤에 태워 드릴게요!"

흑마법사가 죽이려 했지만 리마넨의 눈이 말했다. 어차피 무의미하니 상관하지 말라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병사 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안 들리나?"

"그런가 봐. 어후, 그나저나 갑자기 바람이 왜 이래? 뭔가 으스스하네."

병사가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쓸었다.

경사진 언덕 위라 인상착의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 있던 병사가 별수 없다는 듯 창을 챙기고 말에서 내렸다.

"뭐야, 올라가려고?"

"그래야지. 저대로 내버려 뒀다가 고블린이나 오크한테 죽는다고 생각하니 찜찜하잖아."

"음... 그렇긴 하네. 제길, 좀 낮은 언덕에 있지, 왜 높은 곳에 있어서 말을 못 타게 하냐고."

뒤에 있던 병사도 투덜대면서 바닥에 내려갔다.

대충 말뚝을 지면에 박아 말들을 묶어 놓은 뒤, 두 병사가 언덕 위로 향했다. 흙이 미끄러워서 바닥에 손까지 짚고 나서야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휴우."

한숨을 쉰 병사가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뭔가 기이한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수상하기 짝이 없고 다른 하나는 웬 종이를 들고 중얼거리고 있으니.

아무리 봐도 산적은 아닌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시간에 언덕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병사가 걸어가며 말했다.

"저기,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근처 마을에 데려다...."

"아니, 늦었다."

"...네?"

후우우욱.

해가 사라지며 밤이 찾아왔다. 붉은 노을이 가득했던 풍경이 어둠에 휩싸였고 으스스한 분위기가 한층 더 깊어졌다.

"어, 어?"

"왜 갑자기 손이...."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몸이 떨려 왔다.

공포.

이성이 깨닫는 것보다 빠르게 본능이 죽음을 감지한 것이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리마넨이 마법을 발동했다.

7위계 흑마법.

<망자의 행진>

사아아아아악!

짙푸른 초원 전체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색이 사라진 듯한 풍경.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고 직감한 병사 하나가 뒷걸음치다 발을 헛디뎌,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어이! 괜찮아!"

"으윽...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그때였다.

콰득.

땅속에서 새하얀 뼈가 튀어나와 병사의 얼굴을 잡았다.

"어?"

그러곤 지면 아래로 끌어당겼다.

단말마의 비명도 없이 사라진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검붉은 피 분수가 솟구쳤다.

"히, 히익!"

그 광경을 목격한 병사가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말이 있는 장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초원의 대지에서 솟아난 언데드들이 말들을 조각내고 있었으니까.

"죽음의 기운이 넘치는군."

"어?"

리마넨이 다가와 병사를 밀어 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악!"

언덕 아래로 떨어진 병사를 스켈레톤들이 잡아챘고 그대로 찢어발겼다. 산 자의 피가 죽음의 대지를 적셨다.

상위종과 하위종이 어우러진, 수천의 언데드 군세.

그 압도적인 위용에 리마넨과 흑마법사는 전율했다. 그 행복감을 만끽한 리마넨이 망자들에게 명령했다.

"가거라. 생명의 대지를 죽음으로 물들여라."

위대한 주검을 위해서.

────아아아아아아악!

사자(死者)의 외침.

왕국 남쪽에서 탄생한 무수한 언데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157화 망자의 행진 (4)

영묘의 지하 1계층은 여러 부분으로 분류되어 있다.

대량의 시신이 안치된 1계층-1의 일자형 복도를 지나면 1계층-2로 나아가는 통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통로의 바닥에는 양옆으로 계단이 있었으며 중앙에는 비스름한 경사면이 있었다. 쉽게 관을 옮기기 위한 구조였다.

그리고 벽면에 난 틈새에는 석재로 된 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좁은 통로.

칼리아의 1분대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척후를 맡은 기사가 슬쩍 벽 너머를 확인하더니 검을 들었다.

적이 있다는 뜻.

이어 수신호를 보냈다.

흑마법사 두 명.

스켈레톤 계열 언데드 여덟.

물론 생포는 없다.

주검의 영광에 속한 흑마법사는 의식을 잃거나 임의로 자멸이 가능하니까. 그건 베르덴의 증언과 베스파가 놈들의 은신처를 토벌하면서 미리 확인한 바였다.

이곳에 있는 흑마법사는 다를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불확실한 확률에 기대어 손대중을 할 여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임무의 목적은 사령의 보주의 근간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니.

터벅.

선두는 베르덴이 맡았다.

통로로 몸을 드러냄과 동시에 마력을 일으켰다.

흑마법사들이 마력의 기색을 느끼고 곧장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마법은 시전되었다.

더블 캐스팅.

<락 페이탈>

콰직! 콰직!

"끄어어...."

"끅!"

음속을 넘어선 석편에 폐가 관통당했다.

숨을 껄떡인 두 흑마법사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사역하던 언데드가 녹슨 무기들을 휘두르며 다가왔고, 전면에 방패를 세운 기사가 돌진했다.

콰앙!

타격에 약한 스켈레톤들이 그대로 박살 나 흩어졌다.

직후, 기사 뒤에 붙어 있던 척후와 칼리아가 거의 동시에 흑마법사의 목을 베었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벌써 이렇게 적을 마주하고 처리하기를 다섯 번째. 그 과정에서 1분대의 어느 누구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임무의 진행 상황은 너무도 순조로웠다.

'그래도 불편하긴 하군.'

물론 칼리아의 방식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만큼 무작정 돌파했다가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니. 변수에 맞서 조용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란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베르덴 혼자였다면 이미 2계층에 도착했을 것이다.

어떤 위험이든 함정이든 압도할 수 있는 실력과 자신감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파티의 마법사 중 한 명으로서 움직이면 여러모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지만....'

경계를 서고 있는 흑마법사와 언데드.

그 숫자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세 개의 통로 중 하나만 해도 이 정도니, 전체를 다 합치면 규모는 놈들의 은거지라고 해도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

하나 그렇기에 의심스럽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종합했을 때, 주검의 영광은 결코 평범한 집단이 아니었으니까. 주교들조차 정화하지 못하는 사령의 보주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럴진대 보주의 근간이 있는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틀에 맞춘 듯 예상 범위 내였다.

즉.

'너무 평범하다.'

오히려 이상함이 느껴질 정도로.

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 낸 칼리아.

그녀가 베르덴의 얼굴을 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애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도 없고 결론도 없다.

'어쩌면 2계층에 놈들의 주 병력이 포진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1계층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니,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아직 일렀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눈치 보지 말고 바로 말하도록. 내버려 뒀다간 자칫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질지도 모르니."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1분대를 바라봤다.

"이제 곧 2계층에 진입할 예정이다. 격전이 예상되니 긴장을 풀지 말도록."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수색을 계속하지."

* * *

2계층의 풍경은 1계층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통로가 더욱 넓어졌으며 보관되어 있는 관의 숫자가 많은 정도.

그런데 묘하게 고요했다.

비교적 작은 1계층보다도 흑마법사나 언데드의 숫자가 많아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평범한 스켈레톤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내 기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르덴이 주변을 살폈다.

룬의 반지로 강화된 감각으로도, 마법사로서도 마법적인 함정이 있다든지 언데드가 숨어 있다든지 하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저었다.

하나 당연히 방심해서는 안 된다.

조용하다는 건 전보다 더 교묘하고 위험한 함정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칼리아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대신 더욱 사주경계에 힘썼다.

기이한 정적은 중심부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

아직 다른 분대는 도착하지 않았는지 아무도 없었다.

묘지에 사용되는, 석재로 조각된 루아스교의 장식물들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2분대와 3분대를 기다렸다.

물론 경계는 세운 채로.

칼리아는 묘한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당장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탐색을 전부 마친 게 아니니까. 섣부른 판단은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릴 뿐이다.

그때,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척이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왼쪽 통로에서 베스파가 있는 2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마찬가지다, 베스파."

이후 오른쪽 통로에서 3분대가 나타났다.

전부 전투의 흔적은 있었으나 눈에 띄는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간략하게 보고를 받으니 별 특이 사항도 없었고.

전력은 온전하다.

꽤나 지하 깊이 내려오긴 했지만 고작 이 정도로 지칠 기사들이 아니었다. 칼리아의 지휘 아래 마법사 또한 필수적으로 체력 훈련을 하기도 했으니.

'이제 남은 건 2계층의 가장 깊은 방인가.'

오로지 중심부에서만 갈 수 있는 방.

영묘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최심부다.

어딘가 숨겨져 있는 곳이 없다면.

사령의 보주의 근간은 최심부에 보관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칼리아가 베르덴과 백결 기사단을 이끌고 마지막 통로로 향했다. 여전히 기분 나쁜 고요함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m가량 높이의 철문이 나타났다. 손댄 흔적은 없이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있군."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숨길 생각이 없는지 호흡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숫자는 하나.

백색의 기운을 끌어모은 칼리아가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문 가운데의 틈새를 가로지른 칼날이 잠금장치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 단면은 거칠기는커녕 아주 매끄러웠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영묘의 최심부.

그 중심에는 흑마법사 하나가 서 있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가 칼리아를 바라보곤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오호호홋. 손님들이 오셨군요."

* * *

'...손님?'

칼리아는 사령의 보주를 없애기 위해 영묘를 급습한 상황. 그런데 흑마법사는 당황하기는커녕 어서 오라며 환영하기까지 했다.

저게 허세인지 아니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베르덴이 멋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지휘관은 어디까지나 칼리아였으니까.

'게다가 사령의 보주의 근간으로 보이는 것도 없다.'

여기에 있는 건 오로지 저 괴악한 웃음소리를 내는 흑마법사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대상은 저 흑마법사뿐. 섣불리 무력화했다가 자폭한다면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칼리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는지, 주위를 살펴보던 그녀가 흑마법사에게 물었다.

"사령의 보주의 근간은 어디에 있지?"

"오호홋. 그러시겠죠. 그게 궁금하시겠죠. 다짜고짜 검과 마법을 들이미는 것보다는 그게 상황에 적절한 질문이겠죠."

흑마법사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칼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놈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죽일 듯이 쳐다보지 마시죠. 안 그래도 말해 드리려던 참이니까요.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문제?"

"그럼요. 아주 중요한 문제죠. 안타깝게도 저는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쿤엘 님처럼 사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이 형질은 타고나지 못했답니다."

그러니까, 즉.

"곧 죽을 당신들에게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럼으로 결렬.

그 순간 영묘의 바닥이 일렁이더니 다수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떠한 기척도, 마력 반응도 없이 말이다. 기사들이 당황하고 있자 흑마법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오호호홋! 저리 다급한 꼴이란! 흑마법의 본질도 모르니 그런 꼴을 당하는...."

"애셔!"

칼리아의 신호에 베르덴이 마력을 방출했다.

<뇌천>

한 줄기 전격이 흑마법사의 다리로 향했다. 일단은 제압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바닥에서 불쑥 솟아난, 푸른빛의 좀비가 마법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본래라면 꿰뚫었어야 정상이나 언데드는 마법에 직격당했음에도 비교적 멀쩡했다.

뒤이어 붉은 화염에 휩싸이거나, 몸체가 단단하거나, 서늘한 냉기를 뿜어 대는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좀비들이 튀어나왔다.

"엘레멘탈 가스트(Elemental Ghast). 제각기 원소 면역을 가진 언데드죠. 아무리 원소 마법사가 화력이 좋다 한들 이들을 몰살할 수는 없을걸요? 오호홋."

"네놈...."

"그토록 원하시는 사령의 보주의 근간은 언데드가 되어서 찾으시는 게 좋겠군요. 그럼 안녕히."

흑마법사가 언데드가 나왔던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아무래도 어딘가의 통로로 이어져 있는 모양. 당장 쫓으려 했지만 좀비의 숫자가 너무 많다.

하나하나 베었다간 흑마법사를 놓칠 게 분명할 터.

'어떻게 하면...."

칼리아가 고민하고 있자 베르덴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뭐?"

베르덴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마력.

이내 스태프를 휘둘러 마력을 비틀었다. 물론 영묘가 무너지지 않도록 위력은 조절했다.

<볼텍스>

작은 중력의 소용돌이가 앞선 언데드 무리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아무리 원소에 면역이 있다 한들 물리력에도 완전 내성이 있는 건 아닐 테니.

그렇게 길을 만든 베르덴이 비행을 쓰고는 단숨에 구덩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광경에 칼리아가 검을 강하게 쥐었다.

"무모해...! 베스파, 너는 대형을 지켜 언데드를 상대해라! 나는 애셔를 따라가겠다!"

"위험합니다, 칼리아 님!"

베스파가 만류했지만 칼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앞의 좀비들을 베어 넘긴 그녀가 뒤이어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 * *

"오호호호홋!"

흑마법사가 비행을 쓴 채, 스켈레톤들이 잔뜩 서성거리는 어두운 통로 안을 날아갔다.

'노사께서 계획하신 대로 됐어!'

예상보다 저들의 도착 시간이 빠르긴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저들은 언데드 무리에 파묻힐 것이다.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통로를 빠져나가 바깥으로 도달한 순간이 계획의 마지막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마법사... 애셔라고 했었나?'

칼리아를 도와 조합을 엉망으로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던 마법사. 그자까지 이곳에 온다고는 듣지 못했지만....

'변수는 없겠지.'

전격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다고는 들었지만 어차피 원소 마법이었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무려 세 자릿수가 넘는 엘레멘탈 가스트에게 덮쳐져 씹어 먹힐 운명인 것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흑마법사가 고개를 돌리자.

콰앙! 콰아앙!

잿빛 머리의 마법사가 스태프로 스켈레톤을 박살 내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뭣?!"

흑마법사가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베르덴의 속도는 그 이상.

어느새 흑마법사의 뒤를 잡은 베르덴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어억!"

등을 강타당한 흑마법사가 지면에 부딪혔다.

비행의 속도 탓에 한참을 바닥에 굴렀다. 밑에 있는 작은 돌조각들로 인해 몸 곳곳이 찢어지고 부러져 피가 흘러내렸다.

"끄으윽... 이, 이게 대체 뭔...."

흑마법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능숙한 기동으로 방향을 역으로 뒤바꾼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흑마법에게 겨냥했다.

트리플 캐스팅.

<다중 빙결 화살>

15발의 냉기 화살이 흑마법사를 덮쳤다.

곧장 마력방벽을 펼쳤으나, 베르덴에게 있어서는 두부보다 못한 방어력이었다.

"...!"

여지없이 방벽이 깨지며 마력회로가 과부화됐고, 뒤이은 화살이 흑마법사의 사지를 꿰뚫었다. 혹한의 반지로 강화된 냉기가 팔과 다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중심을 잃은 흑마법사가 기우뚱하다 바닥에 쓰러졌다.

즉각 다가온 베르덴이 오큘러스로 놈의 목을 짓눌렀다.

서서히 틀어막히는 숨통.

흑마법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끄윽... 끅...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근간은 어디에 있지?"

힘을 실었다.

흑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고통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역시 놈은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말하면 죽기라도 하는 것인지 삶을 갈망하는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비웃음이 느껴졌다.

'대체 뭐지?'

뭔가 놓친 게 있다.

교구에서 온 정보.

사령의 보주의 근간.

교회에서 빌린 신성 장비.

그리고 영묘를 지키고 있는 흑마법사와 언데드의 숫자.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흑마법사의 태도.

마지막으로 사령의 보주를 이루는 근간의 부재.

온갖 정보가 복잡하게 얽혔다.

대체 숨겨져 있는 게 무엇인가.

베르덴이 흑마법사를 제압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칼리아가 스켈레톤을 베어 넘기며 통로에서 나타났다.

"애셔, 무사했군!"

그와 동시에 흑마법사의 시선이 칼리아에게 향했다. 본능적인 움직임.

그걸 본 순간 베르덴은 직감했다.

<분쇄>

흑마법사의 목에 침투한 대지의 파편.

곧 폭발하며 놈의 머리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칼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뭐 하는...."

"칼리아 님."

베르덴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이건 함정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가득한 스켈레톤의 사체에서 미증유의 마력이 부풀었다. 영묘의 최심부에서 엘레멘탈 가스트들이 나타났을 때와 같이 갑작스럽게.

어떻게 전조도 없이 흑마법을 구현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저 마법이 뭔지는 알고 있다.

즉시 기동한 베르덴이 칼리아를 감싼 순간.

<대규모 시체 폭발>

콰아아아아앙!

저주가 담긴 폭발이 통로 전체를 집어삼켰다.

158화 망자의 행진 (5)

통로 안에 있던 언데드와 시체들이 부풀어 올랐다.

바닥에 널려 있는 언데드의 뼛조각뿐만 아니라 머리 없는 흑마법사의 몸뚱이까지 전부.

"...!"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칼리아의 반응이 늦었다.

아니, 즉시 감지했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피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시체에서 새어 나온 붉은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됐다.

그 순간 베르덴이 달려들더니 그녀를 감쌌다.

직후 <대규모 시체 폭발>이 발동됐다.

지속되는 화상, 격통의 저주가 담긴 검붉은 화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앙! 콰과광!

연쇄적으로 들려오는 폭음.

저주의 불길과 매캐한 연기가 삽시간에 시야를 가득 메웠다. 청각으로 느껴지는 그 압력은 원소 저항력이 높은 갑옷이라고 해도 견딜 수 없을 정도.

솔직히 말해 칼리아는 죽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폭발 소리가 그쳤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운 좋게 비껴 나가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통로 전체를 아우르는 폭발은 사각지대가 없었으니까. 적어도 칼리아의 주변은 그러했다.

아무리 완전 무장을 갖춘 그녀라고 해도 이런 폐쇄적인 공간에서 온전히 충격을 견디는 건 역부족이다.

구사일생으로 즉사는 면했다고 해도, 사지 한두 개쯤은 날아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칼리아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베르덴이 스태프를 뻗은 채 멀쩡히 서 있었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반투명한, 어두운 자줏빛의 장막이 둘을 감싸고 있었다. 그만한 폭발에도 멀쩡한 걸 보아 물리 저항력에 특화된 것이 분명할 터.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속성은 칼리아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었다.

'중력 마법...?'

칼리아가 생각하던 도중 베르덴이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옆으로 보이는 베르덴의 얼굴에는 어떠한 당황조차 없었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 정도로는 감히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듯.

칼리아가 멍하니 베르덴의 얼굴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괜찮다. 다행히 어디 날아간 곳은 없는 모양이야."

휴우.

칼리아가 내심 안도하곤 말을 이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애셔. 이 빚은 보수와 별개로 반드시 갚겠──"

그 순간.

───쿠구구궁.

통로 저편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둘이 있는 장소를 포함해, 통로 전체에 금이 가더니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무너져 내릴 거라는 징조였다.

"...아무래도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군."

칼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리서부터 통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퇴로는 영묘의 최심부로 이어진 길 하나뿐.

하나 통로의 기반이 무너진 지금 붕괴에는 순서가 없었다. 충격에 견디지 못한 지반이 무너지며 퇴로에 바윗덩이들이 낙하했다.

저기에 깔리기라도 한다면 여지없이 매장당하겠지.

칼리아는 주저 없이 검을 세웠다.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라, 애셔."

발 앞꿈치에 힘을 준 그녀가 힘껏 내달렸다.

백색의 검기를 날려 앞을 가로막는 파편들을 모조리 베어 갈랐다. 베르덴이 비행으로 따라오기 쉽도록 일직선으로 안전한 길을 만든 것이다.

물론 베르덴은 가만히 뒤따르기만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무너지고 있는 통로를 바라봤다. 둘의 속도보다도 붕괴되는 과정이 빨랐다. 이대로 가다간 구덩이에 도착하기 전에 매장될지도 모른다.

'<지형조작>을 사용할 순 없다.'

마법 특성상 위력에 한계는 없지만 결국 3위계 마법이다.

마력 소모가 심하다는 것 외에도 범위를 넓힐수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공동이라면 모를까, 이만한 붕괴를 막기엔 역부족.

시간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해결책이 될 마법이 아니었다.

<석벽>

베르덴이 마안을 발동해, 반복적으로 뒤에 벽을 세워 통로를 지탱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붕괴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 터.

콰과과과과과!

...해일과 같은 토사가 거의 등 뒤에 다다랐다.

그때쯤 통로의 끝에서 구덩이가 보였다. 근처에 있던 언데드의 폭발에 의해 엉망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은 것 같다.

콰앙!

마지막으로 떨어진 거대한 암석을 부숴 버린 칼리아. 더 이상 방해물은 없다.

"애셔!"

칼리아가 베르덴이 서로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구덩이 위로 향하자마자, 쏟아져 내린 토사와 암석이 그들이 지나온 통로를 가득 메워 버렸다.

* * *

베르덴과 칼리아가 2계층 최심부로 돌아왔다.

구덩이에서 둘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단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베스파가 칼리아의 손을 잡아 끌어 올렸다.

"무사하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칼리아 님. 애셔, 너도 무사했군."

"하마터면 그대로 압사당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칼리아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과 달리 완전히 엉망이 된 폐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베르덴이 조용히 상황을 파악했다.

'<대규모 시체 폭발>은 통로뿐만 아니라 최심부에 있는 언데드와 시체까지 대상이었던 건가.'

시신들이 보관되어 있던 관은 멀쩡한 게 없었고, 기사단을 위협하던 엘레멘탈 가스트들마저 시체 하나 없이 사라져 있었다.

폭발의 제물이 많았던 만큼 충격이 상당했을 터.

"베스파, 현재 상황은 어떻지?"

"언데드와 시체가 폭발하며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성수 덕분에 저주의 효과를 약화할 수 있었다. 비교적 저주가 깊게 스며든 기사들은 홀리 네클리스를 사용해 멀끔히 저주를 해주했고.

포션으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은 몇몇 기사가 있긴 했지만, 당장 목숨에 직결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출구가 막혔습니다."

영묘에 갇혀 버렸다.

확실히 기사단이 있는 장소 외에는, 천장과 벽에서 낙하한 잔해들로 가득했다.

"기사들이 잔해를 쳐내는 동안 팔로스가 <지형조작>과 <석벽>으로 안전지대를 만들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저희 기사단은 이미 매장당했을 겁니다."

"팔로스가...."

그의 이름을 되뇐 칼리아가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진 대지 마법사 팔로스.

그는 마력 포션으로 병나발을 불면서 어마어마한 마력을 소모했다. 과다 복용으로 중독 현상이 일어났으나 이 악물고 참아 냈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었으니까.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칼리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고생했다, 팔로스. 덕분에 누구 하나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제, 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팔로스의 호흡은 불규칙적이었다.

마력을 거의 다 소모하여 마력 고갈 증상이 일어난 터라 너무도 지쳐 있었다. 여기서 한 번이라도 마법을 시전했다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잠시... 잠시만 쉬겠습니다...."

"푹 쉬어라."

칼리아의 허락에 팔로스가 기절했다.

"그런데 흑마법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흑마법사...."

칼리아가 뒤를 돌아봤다.

"애셔, 아까 함정이라고 그랬었지. 근거를 말해 줄 수 있겠나?"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확실히 의문이 드는 요소들은 칼리아과 베스파 그리고 기사단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의 전제가 문제였다.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건 네비론 주교다. 필체도 본인이 분명했고 그가 보낸 교구의 증표 덕분에 신성 장비도 빌릴 수 있었지. 정황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설마 주검의 영광이 교구에 침투해서 주교를 감화하거나 조종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직접 교구에 확인할 수밖에.

"그래, 그게 유일한 해답인 것 같군.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나갈 셈이지?"

팔로스 덕분에 사망자는 없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여기서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식량과 식수에 한계가 있기도 했지만, 구출대가 오지 않을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실종 기간이 길어지면 후작가에서 칼리아의 흔적을 쫓아오겠지.

그렇다 해도 잔해를 넘어 2계층 최심부까지 내려오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두 굶어 죽고 없겠지.

지금은 바깥보다는 생존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자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바닥에 박았다.

"그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뭐?"

화아아아아악!

베르덴이 전력으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밀도가 높아진 순수한 마력이 물리력을 갖기 시작했다. 이내 마력의 폭풍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대기가 진동했다.

마력위압이 아님에도 압박감이 들 정도의 힘.

하일레를 포함한 마법사들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경악을 넘어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베르덴을 직시했다.

숨이 막힐 듯한 압력에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잘게 떨리는 시선들이 한데 모였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묘에 마력을 침투시키는 데 집중력을 다했다. 이어 마력감지를 펼쳐 폭발이 어디까지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했다.

계층의 중심부를 확인하자 루아스교의 장식물들이 부서져 생긴 파편이나 여러 잔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멀쩡했다.

1계층으로 향하는 통로는 멀쩡하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는 건 <대규모 시체 폭발>의 범위는 통로, 최심부와 그 부근에 한정되었단 건가.'

물론 이것만으로도 넓은 범위이긴 하다.

안전지대를 만들었던 팔로스 혼자서 탈출구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베르덴에겐 아니었다.

최심부와 그 부근을 마력으로 장악한 그가 머릿속으로 설계도를 구상했다.

지금 필요한 건 중심부로 이어지는 통로.

더욱 마력을 쏟아부어 억지로 길을 열 수는 있으나 지금 상황에 바람직하지는 않았다.

저 멀리 장악되지 않는 돌과 흙의 무게를 밀어내야 하기에 섬세하게 조작할 수 없다. 더군다나 지반이 약해진 터라 자칫 중심부마저 무너질 수도 있으니.

이내 생각을 마친 베르덴이 벽안을 번뜩였다.

<지형조작>

쿠구구구구구...!

잔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잔해로 기둥들을 만들어 무게를 떠받쳤다.

그리고 잔해 사이의 빈 공간을 최대한 없애서 통로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공간을 확보했다.

폐허가 된 공간이 한 마법사의 뜻대로 재구성되는 광경.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련의 과정에 모두는 의식을 빼앗겼다.

쿠웅!

이윽고 2계층 중심부로 향하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작은 크기였으나 튼튼하기에 무너질 일은 없었다.

"후우."

베르덴이 숨을 털어 냈다.

지금까지 해 온 <지형조작> 중에서도 마력 소모가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연산량도 방대했다. 지치는 건 당연했다.

하나 그뿐이다.

손등으로 가볍게 땀을 훔친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들었다.

"가시죠."

* * *

아무도 상정하지 못한 베르덴의 마법.

그 덕분에 모두가 무사히 2계층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뒤에서 하일레라는 마법사가 베르덴을 흘끔거렸다.

거슬리긴 했지만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상으로 향하는 동안 누구도 섣불리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게 1계층의 계단을 지나 드디어 영묘 입구에 도착했다.

교전이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입구를 지키고 있는 4분대의 기사들의 갑옷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들이 부상당한 기사들을 받아 상처를 살폈다.

이렇듯 탈출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사령의 보주의 근간을 없애지 못했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베스파의 지휘 아래 기사단이 재정비를 하는 사이, 베르덴이 칼리아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 말대로 네비론 주교가 원흉이라면... 교구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정보가 부족한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자칫하면 백결 기사단이 모조리 몰살될 뻔했음에 칼리아는 상당히 분노한 듯 보였다. 이내 심호흡을 하며 잠시 화를 삭인 그녀가 말했다.

"애셔, 너에겐 큰 빚을 졌다. 나뿐만 아니라 기사단의 목숨마저 구해 주었으니."

"의뢰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다. 주검의 영광에 대한 문제가 끝나면 반드시 보상을 주마. 뭘 줄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혹시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도록. 내 힘이 닿는 한에서 뭐든지 줄 용의가 있으니까."

칼리아가 베르덴의 벽안을 마주했다.

전격 계열뿐만 아니라 중력 계열 마법까지 습득한, 고위 속성 두 개를 보유한 마법사.

거기다 다른 원소 마법에도 능통하며 그 모든 마법을 아우르는, 가늠할 수 없는 마력량까지 지니고 있다. 심지어 머리도 좋고 외모까지 뛰어나다.

그야말로 재능으로 가득한 천재 마법사.

다른 기사들은 그에게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칼리아에게는 긍정적인 감정이 앞서 느껴졌다.

'나중에 페르네한테 따로 선물이라도 보내야겠군.'

그와 인연을 맺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미소를 지은 칼리아가 자신의 군마에 올라탔다.

"그럼 돌아간다."

일행은 칼리아를 필두로 대형을 이루었다.

언데드가 묘지를 서성거리긴 했으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부상당한 기사들을 도시에 놔두면서 모험가 길드와 교회에게 말해 토벌하면 될 터.

평소라면 칼리아 본인이 처리하겠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급한 일이 있었다.

스산한 안개를 통과하여 국립묘지를 빠져나갔다. 망가진 철문은 석벽으로 대신했다.

아직 어두운 새벽.

초원에 도착한 뒤 가장 가까운 도시 카베른으로 말 머리를 돌리려던 순간.

"저건...."

작은 마을 하나가 화재에 뒤덮여 있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함께.

159화 침묵의 교구 (1)

에스티리아 왕국 남쪽에는 곡창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넓고 비옥한 토지인 만큼 다양한 식량 작물이 재배되고 있는 이 일대에는 언제나 자연의 생기가 넘쳐 흘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서 이쪽으로!"

은 등급 모험가 제리가 농민들을 피신시켰다.

건물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가 횃불을 마른 짚 위에 던지곤 사람들의 뒤를 쫓아 마을 회관에 도착했다. 그 앞에는 동료가 세운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돌아왔군, 제리!"

같은 은 등급 모험가 바게스가 제리를 반겼다.

마을 이곳저곳을 누비느라 체력이 한계였던 제리가 숨을 헐떡였다.

바게스가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꿀꺽꿀꺽.

"하아, 이제야 살겠네."

"누가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마시라고.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은 이걸로 다 대피시킨 건가?"

"아마도. 어디 숨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럴 거야."

제리와 바게스가 대화를 나누며 주변을 바라봤다.

고블린조차 잘 나타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은 더 이상 없었다. 농민들의 삶이 묻어 있는 목조 건물들은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 불을 낸 건 제리 본인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언데드의 침입을 막으려면 말이다.

바게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데드 사태라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군."

언데드 사태가 처음으로 보고된 지 벌써 4일째.

그 짧은 시간 동안 왕국 남쪽 일대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속도는 느리지만 체력에 한계가 없는 무수한 언데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니 대처는 불가능. 피해 규모는 날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갔다.

도대체 놈들이 어디서 나타났을까.

아직 밝혀진 건 없었다.

애초에 자연적인지 인위적인지도 모른다.

하나 모험가가 해야 할 건 분명했다.

강한 힘을 가진 고위 모험가들은 언데드 토벌에 나서고, 약한 모험가들은 언데드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성벽이 높은 도시로 피난하도록 권고를 내리는 것이다.

제리와 바게스도 모험가 길드의 의뢰로, 마을 사람들을 피난시키러 이렇게 찾아왔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고립될 줄이야."

"누가 아니래."

마을 바깥으로 나가면 바로 언데드투성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사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하급 언데드 몇 정도야 은 등급 모험가인 그들로서도 충분히 토벌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숫자는 최소 100마리는 넘을 터. 게다가 언데드 기수와 같은 강한 언데드까지 있다.

기껏 타고 온 말은 언데드나 날아온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저 힘껏 달리는 것으로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마을 사람까지 데리고 간다면 말이다.

"하아...."

"후우...."

둘은 자신들의 처지에 한숨을 내쉬었다.

모험가가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니 무서웠다. 너무도.

그래도 비관하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있었으니까.

교구의 성기사들.

의뢰에 나서기 직전, 언데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 그들이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이 시각.

불타는 마을은 멀리서도 훤히 잘 보인다.

운이 좋다면 교구의 성기사들이 구원하러 올 것이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마을을 불태워 언데드의 침입을 막고, 어떻게든 재료를 긁어모아 바리케이드까지 세웠으니. 둘에게 믿을 구석은 성기사의 도움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오긴 올까?"

"...."

모른다.

제리는 말없이 물을 들이켰다.

그러던 중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둘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같은 방향으로 틀었다.

화르르륵.

불타고 있는 건물들 사이에서 인간의 형체가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두른 언데드.

"리, 리치...?!"

불길을 아랑곳하지 않는 걸 보아, 스스로의 마법으로 화염 저항을 두른 모양. 리치가 바게스와 제리를 보더니 손을 길게 뻗었다.

노리는 것은 바리케이드.

이윽고 마력이 모이며 원소로 변환되었다.

<화염구>

"엎드려어어!"

제리와 바게스가 각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앙!

화염구가 폭발하며 바리케이드를 단숨에 부숴 버렸다.

그 충격에 날아간 파편이 회관의 벽을 일부 훼손했다. 산 자의 대한 증오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리치의 시선이 마을 사람들에게 닿았다.

"꺄, 꺄아아아악!"

"엄마! 엄마아아아!"

생생한 비명 소리다.

리치는 그에 화답하듯 다시금 마력을 일으켰다. 손끝에 불덩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젠장...!"

바게스가 재를 털고 무기를 빼 들었다.

하지만 제리는 일어나지 못했다. 날카로운 나무 파편이 그의 왼쪽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제리, 괜찮나?!"

"크윽... 일어설 수가...!"

제리는 전투 불능.

리치를 상대할 사람은 바게스밖에 없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둘이 동시에 덤벼도 순살당할 정도로 리치의 강함은 너무도 현격했다.

바게스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살기 위해 피하면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할 것이고, 막아 내자니 죽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고민이 깊어졌다.

물론 리치는 기다리지 않았다.

거의 완성 직전인 <화염구>.

눈을 부릅뜬 바게스가 다급하게 남은 바리케이드 잔해를 들어 방패로 삼았다. 당연히 화염구를 막아 낼 수는 없지만 그 외에 방법은 없다. 이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때였다.

───콰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암석이 리치를 뭉개 버렸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는지 앞으로 내민 한쪽 팔뼈 이외에 나머지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어...?"

바게스가 눈을 깜빡였다.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제리조차 아픔을 잊고 리치의 사체를 바라봤다. 당황해하는 그들의 귓가에 여성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데드를 남김없이 토벌해라!

말을 탄 백색의 기사들이 마을을 둘러싼 언데드 무리를 급습했다.

둘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언데드들이 속수무책으로 썰려 나가며 토벌당했다. 죽음의 기병인 언데드 기수조차 창 한 번 뻗지 못하고 백색의 검에 두개골이 박살 났다.

바게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떴다.

"저, 저 사람들은...."

"누, 누군지 알아?"

알다마다.

한 도시에서만 살아온 제리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여러 도시를 여행해 본 적이 있는 바게스는 갖은 소문에 능했다.

하얀 갑옷을 착용하고 왕국의 범죄자를 척결하는 존재들.

'백강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

어째서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관계없는 이곳에 그들이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하나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아무래도 하늘이 우릴 버리진 않은 모양이야."

콰아아앙!

그에 대답하듯 하늘에서 날아온 화염구가 언데드 무리에 떨어졌다.

* * *

결과적으로 마을은 궤멸했다.

언데드가 내뿜는 죽음의 기운으로 인해 밭은 검게 죽어 버렸고, 화재로 인해 마을의 절반가량이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죽어 버린 땅은 오랜 시간이 지나거나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회복될 것이며, 무너진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건 하나밖에 없는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수십 명의 마을 사람이 두 명의 모험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칼리아와 베르덴의 구원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전부 죽었겠지만, 구원받을 시간을 번 것만으로도 둘은 최선을 다한 셈이다.

마을 회관에서 나온 농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우리 마을이...."

절망과 안도가 뒤섞인 목소리들.

그래도 대놓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말로만 듣던 언데드가 얼마나 위험한지 어렴풋이 깨달았으니까.

게다가 준귀족인 기사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자살 희망자가 아니고서야 불만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으으...."

부상당한 제리는 멀쩡한 건물로 옮겨졌다.

영묘에서 시체 폭발에 화상을 입은 기사들과 함께 말이다.

"나, 살아남은 건가...."

다시금 현실을 자각한 바게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긴장했더니 다리에서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바게스가 고개를 들었다.

칼리아를 필두로 베르덴 그리고 기사단장 베스파가 서 있었다.

그걸 인지한 바게스가 곧장 확 허리를 굽히며 소리쳤다.

"은 등급 모험가 바게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님을 뵙습니다!"

"호, 나를 아는가?"

"물론입니다!"

상대는 후작가의 독녀.

그녀의 명성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았다.

그야말로 바게스와는 격이 다른 존재.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동료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다 해도 함부로 대할 귀족이 아니었다.

"칼리아라고 불러라. 그만 고개를 들도록."

"넵, 칼리아 님!"

바게스가 냉큼 기립했다.

검붉은 눈동자가 그를 주시했다.

칼리아의 외모는 여느 귀족 영애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바게스는 그 미모를 보고 쉬이 감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묻겠다, 바게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는 걸 빠짐없이 말하도록."

칼리아 본인이 가진 특유의 위압감.

덜덜 떨며 한 차례 침을 삼킨 바게스가 지난 며칠 사이 일어났던 모든 것에 대해 설명했다.

* * *

마을의 빈집.

바게스로부터 언데드 사태에 들은 칼리아의 표정은 심각했다.

"...."

왕국 남쪽에서 발호한 언데드 군세.

두서없이 뻗어 나가는 놈들의 행진에 이미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마을이 괴멸되었고, 각 도시는 피난민들로 북적거리고 있다고 한다. 이미 사상자는 수백을 가뿐히 넘은 상황.

"분명 주검의 영광이 벌인 짓이겠지."

지금 이 상황에서 언데드를 다룰 수 있는 조직은 놈들밖에 없었으니까.

'수천의 언데드라.'

베르덴도 칼리아 못지않게 심각했다.

언데드 군세를 왕국에 온 뒤로부터 쭉 준비해 왔던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흑마법으로 일으킨 현상인지 알 수 없었다. 전자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후자라면 굉장히 위험하다.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이라면 6위계 혹은 7위계에 근접할 테니까.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베르덴이 글러트니를 떠올렸다.

섭식을 통해 인간의 진화를 꾀하며, 구인류라고 칭한 현재의 인류를 멸절시키고 신인류를 탄생시키겠다는 집단.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이었지만 그래도 목적 하나는 분명했다.

'그에 반해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다.'

흑마법사로 이루어진 집단이란 것도 알겠고, 예상 이상의 전력을 감추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당최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정보를 캐낼 것도 없이 무력화하면 죄다 자멸했으니까.

그렇기에 경각심은 더욱 컸다.

놈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이 불가능했으니까.

베스파가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놈들은 이만한 숫자의 언데드를 왕국에 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또한 의문이다. 눈엣가시인 나를 산 채로 매장하려 한 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어째서 이런 테러를 일으켰는지는 도저히 모르겠군."

칼리아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하다못해 영묘에서 있었던 일과 어떻게든 엮어 보려 했지만 확 와닿는 게 없는데. 애셔, 너는 어떻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열쇠는 교구의 네비론 주교가 쥐고 있다.

교구에 가야 내막의 편린이라도 알아낼 수 있지만... 그저 심증일 뿐,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루아스교와의 마찰을 감수하고 무작정 교구로 가서 네비론 주교를 찾아내는 게 계획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다행인 건 교구의 성기사단장이 직접 성기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남하했다는 거다."

네비론 주교의 편지에 쓰여 있길.

나머지 사령의 보주의 근간 두 곳을 교구에서 전담한다고 했다. 당연히 성기사단장 또한 나섰을 터.

그를 만난다면 정보의 진실, 즉 근거를 얻을 수있다.

그리고 만약 성기사단장이 그 정보를 부정한다면... 네비론 주교는 명확히 주검의 영광에 가담했다는 뜻이 된다.

"솔직히 말해 내가 아는 네비론 주교는 그런 악한 인물이 아니었다. 약자에게 선하고 언제나 정의로웠지. 물론 그게 가면일 수도 있겠지만.... 후우, 어쨌든 확실한 건 성기사단장을 만나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칼리아가 베르덴과 베스파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러니 남쪽에 파견된 성기사단을 찾는 게 우선이다. 그가 있다면 교구에도 쉽게 진입할 수 있을 테니. 바게스가 말하길,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도시 웰스리에서 봤다고 했으니 잘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애셔는 하늘에서, 베스파는 지상에서 수색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예, 칼리아 님."

결정을 내린 그들이 바깥으로 나섰다.

그때, 백결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칼리아 님, 동쪽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흙먼지?"

칼리아 일행이 기사가 말한 장소에 시선을 던졌다.

동이 트기 시작하며 내리쬐는 햇빛.

언덕 너머로 흙먼지가 올라오는 게 훤히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백색 갑옷, 그 중심에 박힌 금색의 정십자가.

교구의 성기사단.

그들이 정확히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다.

칼리아가 피식 웃었다.

"마침 직접 찾아와 주다니. 이거 참 운이 좋군."

160화 침묵의 교구 (2)

"에스티리아 왕국의 성기사단장 글로스 가르시아여, 남쪽으로 내려가 죽음에서 비롯한 사악을 빛으로 멸하라."

"고귀한 광명으로."

네비론 주교에게 경례를 한 글로스가 성기사단을 이끌고 남하했다.

왕국 역사상 유례없는 언데드 사태.

보고된 바로는 숫자는 최소 수천에 육박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언데드에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사기에 오염되면 새로운 언데드의 탄생을 야기할 터.

손 놓고 좌시하다간 죽음이 만연해질 것이다.

루아스교의 교리와 신명에 따라, 빛을 부정하는 사악한 이형종을 멸하기 위해 성기사들은 기꺼이 검을 들었다.

콰자작! 콰자자자작!

신체와 정신이 신성력으로 강화된 그들은 악마와 언데드의 천적.

앞길을 막아선 수백의 언데드 무리는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빛에 의해 소멸했다. 어둠에 대항하는 성기사단의 진군은 세상을 비추는 태양 빛처럼 거침이 없었다.

도시 웰스리에서 재정비를 한 이들은 다시금 언데드 토벌을 위해 초원을 누볐다.

"글로스 단장, 저기 연기가 보입니다."

성기사 겔시아의 시선을 따라갔다.

언덕 너머로 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규모로 보아 꽤나 큰 화재다.

그리고 불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 경험상 언데드에 습격당한 마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시야에 보이지 않아 생존자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직접 찾아볼 수밖에.

초원을 질주해 큰 언덕을 올랐다.

언덕 아래로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과 그 사이에서 보호받고 있는 시민들이 보였다.

'저건....'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소문으로는 몇 번이나 들어 본, 백색 갑옷을 두른 기사들. 더욱 속도를 높인 성기사들이 곧 마을에 당도했다.

글로스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그런 그의 앞에 검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기사가 서 있었다.

글로스가 말 위에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영애."

글로스가 자신의 갑옷에 새겨진 정십자가에 주먹을 갖다 대었다.

"에스티리아 왕국 성기사단장, 글로스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 * *

네비론 주교가 의심스럽다.

그럴진대 성기사단장마저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이 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루아스교의 성기사라며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니 여기서 진위를 파악한다.

주검의 영광의 손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말이다.

칼리아가 정중히 대화를 요청했다.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마을 회관에서 칼리아와 글로스가 대면했다.

각자의 뒤에는 베르덴과 베스파 그리고 부관인 겔시아가 자리를 잡았다.

글로스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우리는 갈 길이 바쁩니다. 그러니 되도록 용건을 간단히 해 줬으면 좋겠군요."

오면서 많은 언데드를 토벌했지만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더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놈들을 끊어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도 무엇보다 글로스는 루아스교에 생을 바친 독실한 신자다.

상대가 드높은 위명을 지닌 후작가의 자식이든, 왕가의 혈통이든 하물며 황제든 간에 무엇보다 교회의 명을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의 눈에는 눈앞의 칼리아 일행이 아닌 어딘가 있을 언데드가 담겨 있었다. 막대한 부도, 찬란한 여인도, 막강한 권력도 글로스의 심지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녀가 글로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사령의 보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음? 그야 물론입니다. 에스퍼렌사 영애께서 주검의 영광에게서 확보한 것이니. 그런 영애의 노고와 희생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높게 사고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현재 사령의 보주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야 주교들께서 힙을 합쳐 차츰 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정보가 엇갈렸다.

"그런가요? 저는 사령의 보주를 정화하는 일에 진척이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글로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신체 반응으로 보아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의 안색을 잠시 살피던 칼리아가 네비론 주교가 보낸 서신을 건넸다.

"네비론 주교께서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죠."

글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신을 받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펼쳐 문장을 읽어 내렸다. 글귀를 바라보던 글로스의 표정이 점차 복잡하게 변했다.

"이, 이건...."

사령의 보주에 대한 정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주교급 신성력으로도 정화할 수 없는, 복잡하게 얽힌 죽음의 기운. 모종의 이유로 힘을 소모한 것인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인지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은 불길하고 거칠었다.

대체 흑마법사들은 이걸로 무슨 짓을 벌이려 했던 걸까.

뭐가 됐든 빛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건 자명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숨겼다.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아예 알려지지 않는 게 최선이니까. 설령 사령의 보주를 건넨 칼리아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사령의 보주에 대한 위치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네 명의 주교 그리고 성기사단장인 글로스 외에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기밀을 발설하다니?'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네비론 주교가 말이다.

그는 자상하고 정의로웠으나 악에 있어 원칙을 고수했으니, 글로스가 알기로 네비론 주교는 원칙을 벗어난 타협을 행한 적이 없었다.

"뭔가 잘못됐습니까?"

칼리아의 물음에 글로스가 답했다.

"이 서신의 글귀는... 네비론 주교의 필체는 맞지만 이상합니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기밀을 누설할 분이 아니신데...."

그렇다면 사령의 보주 정화에 실패한 건 진짜라는 뜻.

하지만 아직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사령의 보주의 근간. 그건 실존하는 겁니까?"

글로스가 서신을 마지막까지 읽었다.

이내 편지에서 눈을 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 * *

"근간을 없애라는 임무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겁니까?"

"임무는커녕 근간이라는 것도 생소합니다. 애초에 저를 비롯한 성기사들은 언데드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 교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따로 차출된 성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이걸로 확정 났다.

네비론 주교는 배신자다.

대체 언제부터 놈들에게 가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칼리아를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란 건 분명했다.

그러자 글로스와 겔시아가 당황했다.

"에, 에스퍼렌사 영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주교께서 배신자라니?"

칼리아가 영묘에서의 일을 요약해 글로스에게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첫 번째 의문, 네비론 주교의 거짓 서신.

그에 대한 베르덴의 감상은 간단했다.

'너무 허술하다.'

네비론 주교의 서신은 교구의 성기사에게만 보여 줘도 금방 탄로 날 것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교차 검증을 통해 즉시 드러났으니까.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속임수라고 하기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주검의 영광은 어째서 이런 같잖은 거짓을 꾸민 걸까.

...아니, 잠깐.

'애초에 완벽하게 속일 필요가 없었다.'

이미 거짓 서신으로 인해 칼리아와 그녀의 기사단은 영묘에서 함정에 빠졌다.

허술하다 해도 제 역할을 한 셈이다. 만약 베르덴이라는 변수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살아남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곧장 매장을 면했다고 하더라도 2계층 최심부에서 아사했겠지.

'서신의 용도가 칼리아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해가 된다.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

다음으로 두 번째 의문, 언데드 사태다.

현재 왕국 남쪽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언데드 군세.

귀족이나 모험가 등 너 나 할 것 없이 어떻게든 대처에 힘쓰고 있다. 교구에서 성기사단을 파견할 정도니 왕국의 시선이 여기에 몰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그 순간, 한 생각이 베르덴의 뇌리를 스쳤다.

"잠시 시선을 끄는 게 목적이다...?"

"...시선이라고?"

베르덴의 혼잣말에 모두의 눈동자가 한데 모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정적에 베르덴이 글로스에게 고개를 향했다.

"혹시 지금 교구에 남은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저 말고도 다른 성기사와 성직자들은 각자 파티를 이루어 남쪽 전역에 파견되었습니다. 언데드의 피해가 너무 광범위하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교구의 방위가 가장 약화되었다는 뜻이군요."

베르덴은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애셔, 그 말은 설마...."

칼리아를 시작으로, 베르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지나친 결론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즉.

"주검의 영광의 목적은 사령의 보주의 회수입니다."

칼리아를 함정에 빠뜨린 건 단순한 보복이다.

하나 언데드 군세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 탓에 왕국의 모든 신경이 남쪽으로 몰려 있었으니까. 아까도 말했듯 언데드를 토벌하기 위해 교구의 전력이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약화된 방어 체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마법사가 감히 교구를 습격할 수 있을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러지 못하겠지.

루아스교의 기적은 흑마법에 있어 치명적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주검의 영광은 상식 내에 있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진즉에 보주를 회수하려 했다면 교구로 이송하는 중에 탈취하는 게 나았던 것 아닌가?"

사령의 보주가 교구로 이송된 지 2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주를 회수하려 하다니.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면서까지 중요한 물건을, 루아스교의 교구로 가는 걸 방관했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단순히 사령의 보주에 대한 행방을 뒤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렇가면 이제 와 움직인 이유는 두 가지다.

사령의 보주를 쓰기 위해 모종의 준비를 갖출 시간이 필요했다거나.

사령의 보주를 회수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이 중에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나 뭐가 됐든 이거 하나만은 분명했다.

"교구가 위험합니다."

* * *

칼리아는 부상당한 기사 및 그들을 돌봐 주거나 피난민을 보호할 기사들을 내버려 둔 채 최정예만을 선별하여 교구로 향했다.

글로스도 베르덴의 생각에 설득되었는지, 심각함을 느끼고 언데드 토벌 전력을 제외한 인원을 선별했다.

직후 지휘관 자리를 다른 성기사에게 넘기고 교구로 가는 길에 합류했다.

며칠간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한 결과 5일이 채 지나지 않아 교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특수한 훈련을 거친 강인한 군마조차 숨을 헐떡이며 지면에 다리를 꿇었다.

"고생했다."

푸르륵.

칼리아의 손길에 군마가 울음소리를 냈다.

이내 말에서 내린 모두가 교구의 성벽에 다가섰다.

글로스가 성문을 일부 살피더니 화색을 띠었다.

"...다행히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고 있는 신성력은 멀쩡합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강제적인 침입이 없었다는 뜻.

그러나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성문을 지키는 경비는 대체 어디에 있지?"

성문 앞에 도달했음에도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 고요하고 불길한 정적만이 흘렀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잠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베르덴이 하늘로 솟구쳤다.

신성 장막으로 온종일 보호되고 있는 교구 내부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장막을 부수는 수밖에.

<어스 자벨린>

콰앙! 콰아앙!

관통력이 높은 마법으로 장막 한곳에 충격을 집중했다.

확실히 교구를 지키는 보호막답게 단단하긴 하지만, 마법서로 강화된 마법에 같은 곳을 적중당하고도 몇 번이나 버텨 내는 건 어렵다.

정확히 7번째.

대지의 창이 꽂힌 장막에 미세한 금이 새겨졌다.

'지금이다.'

거대한 대지의 창.

그 후면에 압축된 바람을 터뜨렸다.

콰지지직!

맹렬하게 쏘아져 나간 마법이 결국 신성 장막을 관통했다. 보호막 일부가 무너지며 드디어 감춰져 있던 내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베르덴의 시야에 담긴 침묵의 교구.

그 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양의 피와 시체로 얼룩져 있었다.

161화 침묵의 교구 (3)

"흐흐흠."

주검의 영광, 백골의 비올라.

투명화를 쓴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비행했다. 시선을 살짝 아래로 향하자 검게 죽어 버린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7위계 마법 <망자의 행진>으로 탄생한 언데드들이 만든 악몽이었다.

비올라가 히죽 웃었다.

"예쁘네."

생명은 온데간데없이 죽음만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죽음의 기사나 엘더 리치와 같은 강력한 언데드는 없고, 하위종 언데드가 대부분이라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사망자 2~3천 명 언저리 정도가 최선이겠지.

뭐, 한꺼번에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 군세를 탄생시킨 것만으로도 7위계 마법다운 압도적인 위력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 그나저나 짜증 나네. 교구에 있는 위선자들을 죄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비올라는 지난 2개월간 교구에 잠입해 있던 터라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성직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빛의 신 루아스한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배신자 워렌스를 가지고 놀며 짜증을 풀긴 했으나 며칠 반복하니 질릴 대로 질렸다.

그렇게 한계점에 다다르던 중 지시가 떨어졌다.

대규모 언데드 출몰로 인해 교구에서는 대부분의 병력을 왕국 남쪽으로 파견했다.

노사의 계획대로 교구의 방위가 가장 약해진 상황. 여기서 비올라가 주교 하나를 암살하고 그 탈을 뒤집어쓴 뒤, 사령의 보주를 탈취하면 끝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최소한의 보상은 받아야지?'

그래서 비올라는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

떠나기 전에 교구에 남아 있는 위선자들을 죄다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주교 하나가 목숨까지 내걸고 발악하는 탓에 그 계획은 절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면에서 다수의 주교를 상대하는 건 상처 하나 없이는 불가능했으니까. 자칫하면 사령의 보주 운반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고.

비올라는 주검의 영광을 위해 쾌락을 포기했다.

그래도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앞에서 학살자를 놓쳤다는 것에 위선자들은 더욱 분노할 테니까.

"아, 그래도 성기사들 반응 못 보고 가는 건 좀 아쉽긴 하네."

열심히 언데드를 토벌하고 교구로 돌아갔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절망하거나 분노하겠지.

웃기는 일이다.

루아스교의 경전에 적혀 있길, 삶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과정이라고 적혀 있다.

더러움을 씻어 내지 못하고 악에 물들어 타락한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깨끗해진 자는 빛의 신 루아스의 곁으로 간다고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차피 죽어서 만날 테니 왜 그리 삶에 집착할까. 죄다 죽어서 그 잘난 루아스 곁으로 가면 될 텐데.

참으로 모순된 자들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피로 물든 위선자들을 루아스가 깨끗하다며 받아 줄지 말이야."

깔깔깔.

비올라는 루아스교를 비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사령의 보주를 챙기고, 노사와 약속한 장소로 향해서.

* * *

에스티리아 왕국에 세워진 교구는 작은 성채 도시와 같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루아스교의 성직자, 성기사 그리고 견습 신자들뿐. 일반 시민은 주거가 허락되지 않아 인구수는 고작해야 세 자릿수를 조금 넘어설 정도다.

하나 그렇다 해도 이곳을 함락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신성 보호막이 상시적으로 교구 전체를 지키고 있으며 고도로 훈련된 성기사는 일반적인 기사보다도 실력이 뛰어났으니까.

게다가 루아스교는 세계 종교다.

설령 다른 국가와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교구에 해가 되는 일은 없다. 뇌에 상식이 박힌 인간이라면 세계 종교와 적대하겠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교구에 일어난 참사는 도저히 믿기가 어려웠다.

"교, 교구가...."

글로스가 멍하니 거리를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기와 신실함이 가득했던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미소 띤 신자들 대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저마다 작은 피 웅덩이에 잠긴 그들에게서는 조금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 글로스가 무릎을 꿇더니, 엎어져 있는 시신 하나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견습 성직자, 벨.

약 13일 전 교구에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던 사내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글로스가 교구에 파견되고 난 후 몇 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침음에 잠긴 글로스가 사망자들의 안식을 기원했다.

"...루아스의 빛이 그대들에게 닿기를."

그러곤 손을 뻗어 빛을 잃은 벨의 눈을 조용히 감겼다.

성기사들은 이를 악다문 채 글로스의 작은 기도를 다시금 가슴속으로 되뇌며 빌었다.

그러는 동안 베르덴과 칼리아 일행은 말없이 시신들의 상태를 살폈다. 혹시 모를 생존자가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주변에 숨이 붙어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거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루아스교의 신자들은 전부 과다 출혈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 외상이 일절 없었다. 전투는커녕 어떤 날붙이에 베여 옷이 찢어진 흔적조차도.

'겉은 멀쩡한데 출혈이 심하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걸 보면 독에 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음?'

베르덴의 시선이 늙은 성직자의 시체에 멈춰 섰다.

그의 배에서 기이한, 하얀 무언가가 솟아올라 있었고 상처 주위가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몸속에서 외부로 관통한 흔적. 정황상 이게 직접적인 사인이 된 건 분명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자, 성직자의 뱃가죽을 뚫고 나온 건 다름 아닌 새하얀 뼈였다.

흑마법에는 시체, 즉 골격과 관련된 마법도 있다.

그러니 이것 또한 흑마법이 분명할 터.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몸속에 뼈를 심어 동시다발적으로 학살을 일으키는 마법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설마 마도사인가?'

타당한 추측이었다.

아니면 베르덴이 잘 알지 못하는 5위계 이상의 흑마법 중에 이러한 종류의 마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든가.

뭐가 됐든 위험한 건 매한가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교구의 성직자들에게 몰래 흑마법을 심어 내부에서 터뜨렸다는 뜻이니.

그때, 글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 앞에 놓인 벨의 시신을 잠시 바라본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말하면 믿지 않았습니다."

그 네비론 주교가 사악한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니. 무리한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정황 증거가 있긴 해도 마찬가지였다.

서신의 필체는 누군가 위조했으며 주교들과 자신만이 아는 기밀도 모종의 이유로 새어 나간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교구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직자와 성기사단 등 주력 부대가 교구를 떠난 시점에서, 외부 침입의 흔적 없이 내부에서 시작된 학살. 이건 주교급 인사가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교차점에는 네비론 주교가 있다.

흉수가 네비론 주교든 뭐든.

글로스는 과거의 기억들을 잠시 버려 둔 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스르릉.

검을 든 글로스가 전열에 나섰다.

목적지는 교구의 중심에 있는 성채 교회.

다름 아닌 사령의 보주가 정화되고 있는 장소다.

모두가 조용히 글로스를 뒤따르며 침묵의 교구를 거닐었다.

* * *

교구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시체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이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각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성채 교회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마침내 교회가 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

여기는 지금까지와의 풍경과 달랐다.

광장 중심에 놓인, 정십자가 동상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지면은 크게 손상되어 금이 가 있었고, 건물 중 일부는 층 자체가 날아가 주저앉아 있었다. 분명한 전투의 흔적.

심지어 성채 교회의 문마저 거의 반파되어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과 같은 폐허.

구름이 햇빛을 가리자, 그림자가 드리운 교구의 정경은 그야말로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희망은 남아 있었다.

성채 교회의 정상.

그 위에 떠 있는 빛의 형상이 그림자를 걷어 냈다.

따스한 빛이 피부를 다독였다.

고개를 든 글로스와 성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저 존재는...!"

스턴 가디언(Stern Guardian).

상위 주교 이상의 존재만이 소환할 수 있는, 몰려드는 어둠을 가로막는 루아스의 하인. 강력한 전투력과 더불어 일정 범위 내에 치유의 기적을 상시적으로 일으키고, 저주와 죽음의 기운을 차츰 약화시키고 지우는 빛의 수호자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저 존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건 소환자가 살아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스턴 가디언이 일행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빛이 흩어지며 가디언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당장 모두가 성채 교회 안으로 향했다.

대리석 바닥을 지나 교회의 본당으로 들어서자 따스한 광채가 그들을 반겼다.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내리쬔 햇빛이 천장의 유리를 관통했다.

벽을 장식한 거대한 정십자가가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 빛이 바로 아래 있는 루아스의 조각상을 비추었다.

로브로 얼굴을 포함한 전신을 가린 석재 조형물.

남자인지 여자인지, 하다못해 어떻게 생겼는지 외모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고대에서부터 여신으로 여겨졌으며, 유일하게 로브 바깥으로 드러난 두 개의 가녀린 팔이 뒷받침하는 것이 근거였다.

찬란한 태양 아래에 서 있는 조각상.

유일하게 루아스교를 신앙하지 않은 베르덴을 제외하고,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경건함과 신실함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런 루아스 조각상 앞에 수십 명의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루아스교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가슴이 주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아 교구의 생존자들임이 분명했다.

그중에는 조각상에 기대어 햇빛을 맞고 있는 한 노인도 있었다.

스턴 가디언을 소환한 장본인.

노인을 본 글로스가 소리쳤다.

"로난데르크 주교!"

그 목소리에 그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글로스... 예정보다 일찍 오셔서 기쁘구려."

그것이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듯.

로난데르크의 주교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 * *

신성력을 품은 존재는 기본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성기사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쓰러져 있는 생존자들의 안위를 살피며 상태를 파악했고, 백결 기사들은 성기사들을 도와 구호에 힘썼다.

칼리아, 베스파, 베르덴.

그리고 로난데르크 주교, 글로스, 켈시아 위 여섯은 본당 안에 있는 작은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로난데르크 주교, 교구에서 대체 무슨 일어난 겁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냐라... 의문에 답하기 전에 하나 묻겠네. 언데드 사태는 어떻게 되었소?"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칼리아가 나서서 지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비론 주교의 거짓 서신.

영묘의 함정.

그리고 교구에 찾아오기까지.

설명을 들은 로난데르크 주교가 신음했다.

"네비론 주교, 역시 그자가 이 사태의 원인으로 보이오."

"그렇다는 건 교구에서의 일도...."

"하지만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은 우리가 알던 네비론 주교가 아닌 게 분명하오."

"네? 그게 무슨 뜻이죠?"

모두의 의문에 주교가 교구에서 일어났던 참사에 대해 말했다.

"왕국 남쪽에 병력을 파견한 뒤, 우리 4인의 주교는 사령의 보주를 정화할 방책을 모색 중이었소. 이미 우리들의 힘으로서는 무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 네비론 주교가 의견을 제시했소. 다크워튼의 흑마법사 워렌스의 지식을 이용해, 사령의 보주를 재해석해 보자고 말이오."

흑마법사와 성직자의 합작이라.

뭔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해 보지 못한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안 그래도 워렌스의 건강 상태가 많이 회복되기도 했고 말이다.

어차피 실패해도 본전이니 한번 실험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주교 모두가 동의했다.

"네비론 주교가 낸 의견이니, 정화 과정은 네비론 주교에게 주도권을 일임했소."

성채 교회의 비밀 장소.

먼저 그의 지시에 따라 사령의 보주를 둘러싼 뒤, 각자의 신성력으로 사기를 최대한 억눌렀다.

그러곤 네비론 주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기 위해 신경이 팔린 순간, 주교들은 일제히 마력을 느꼈다.

흑마법사 워렌스가 아니라 네비론 주교에게서.

"그러자 워렌스가 갑자기 품에서 단검을 꺼내 바이델르 주교의 등에 꽂아 넣더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교들이 당황했다.

네비론 주교에게서 느낀 마력이 아닌 바이델르 주교의 몸에 박힌 단검에 순간 신경이 쏠리고 말았다.

아차.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버렸다.

푸욱.

네비론 주교의 손에서 뻗어 나온 뼈바늘이 정확히 펠다른 주교의 미간을 관통했다. 아무리 고위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 주교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생각할 것도 없는 즉사였다.

───계획성공이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린 로난데르크 주교가 덜덜 떨었다.

"네비론 주교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소. 그걸 듣는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소. 저건 네비론 주교의 껍질을 뒤집어쓴 흑마법사라고."

'여성?'

베르덴의 뇌리에 기억이 하나 스쳤다.

워렌스가 말하길, 주검의 영광의 수뇌부에는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노인이 있다고 했다.

교구에 잠입해 주교의 껍질을 뒤집어쓰는 등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을 쓰는 걸 보아 그 수뇌부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숨을 삼킨 로난데르크 주교가 이내 말을 이었다.

"직후 전투가 벌어졌고 멀쩡한 나와 부상을 당한 바이델르 주교가 힘을 합쳐 대항했소. 하지만 여자는 강했으며 단순히 주교들만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소. 혹시 바깥에 있는 신자들을 확인해 보셨소?"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위장 부근에서 솟아난 뼈가 장기를 관통한 걸 봤습니다."

"그 흉수가 직접 말하더군. 자신의 뼛가루를 식사 시간마다 들키지 않게 조금씩 집어넣었다고. 그와 동시에 불길한 마력이 퍼져 나가면서 교구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소."

장기에 붙어 있던 뼛가루가 뭉쳐 내부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건 다름 아닌 주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복부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이 신경을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흉수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뼈는 저주의 일종으로 취급되는 탓에 신성력으로 억누르거나 제거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은 로난데르크 주교는 바이델르 주교에게 시간 벌이를 부탁한 뒤 스턴 가디언을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불리함을 깨달았는지 그자는 도망쳤소. 무리하게 움직인 바이델르 주교는 중상을 입어 쓰러졌고, 나는 언제 다시 그자가 습격해 올까 두려워 몇 날 며칠을 깨어 있었소. 하나 다행히도 먼저 나타난 건 글로스, 자네들이더군."

허탈한 웃음을 지은 주교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안하오. 사령의 보주는커녕 교구의 모두를 지키지 못해서."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니, 내 잘못이오. 흉수를 잡았다면 적어도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막아 낼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없소."

주교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령의 보주는 탈취당했고.

주검의 영광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으며.

교구와 왕국 남부가 입은 피해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놈들을 찾고 싶어도 단서조차 없다.

주검의 영광이 사령의 보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는 수밖에....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워렌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워렌스는...."

눈물을 훔친 로난데르크 주교가 문밖을 가리켰다.

"저 구석에 있소. 하지만 상태가 매우 심각하오. 내가 소환한 스턴 가디언의 능력으로도 회복시키는 게 불가능했을 정도로. 어떻게 손을 써도 우리로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베르덴이 밖으로 나서 웨렌스를 찾았다.

바닥에 누워서 멍하니 눈을 뜬 채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영혼마저 사라진 듯했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을 살폈다.

심장 부근이나 머리 쪽을 말이다.

'...역시.'

이내 베르덴이 워렌스의 머리칼 사이로 새겨진 마력을 찾아냈다.

정신을 조작하는 흑마법진.

흉수의 마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단서를 말이다.

162화 준비 완료

인간이 가진 세 가지 힘.

그중에서도 마법은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와 신성력과 달리 인간의 생활 수준을 아득히 높였으니까.

과거 오물과 쓰레기로 얼룩진, 비위생적인 도시의 거리는 현대의 빈민간에서조차 보기 힘들 정도다.

마법은 시대를 변화시키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건 우연으로 생겨난 산물 따위가 아니다.

마법은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물.

때때로 마법사 본인조차도 실험 중에 예상 못 한 결과를 맞닥뜨리는 경우는 있으나 그것 또한 필연이다. 그저 미리 알아채지 못했을 뿐.

한마디로 인과관계가 없는 마법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흑마법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로난데르크 주교의 증언에 의문이 생겼다.

'주교가 반응하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흑마법을 구현하고 워렌스를 조종해 주교의 등에 칼을 꽂아 넣었다고?'

주교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막강한 신성력을 갖춘 그들은 성기사만큼이나 민감하다. 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니고 흑마법이 코앞에서 발현되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진즉에 정신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건 논외다.

흑마법이 지속되는 동안 마력은 계속 이어져야 하니까. 그랬다면 진즉에 주교에게 발각되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시전 속도.

그게 걸맞은 수단은 하나뿐이다.

'마법진.'

미리 워렌스의 몸에 마법진을 새겨 넣는다면 가능하다.

연산 과정 없이, 마력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마법진이 기동할 테니까. 그 증명으로 워렌스의 머리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베르덴이 즉각 마법진을 해석했다.

흑마법에 그리 깊은 지식은 없으나 대강 어떤 마법진인지는 파악이 가능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정신착란과 화상을 입은 듯한 고통을 주는 격화의 저주를 부여하는 마법진까지, 무려 세 개나 되는 마법진이 합쳐져 있었다.

복합 마법진.

흉수는 흑마도사일 뿐만 아니라 마법진에도 조예가 깊다는 뜻이었다.

분명 워렌스는 버티기 어려운 고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자는 왜 이런 흑마법진을 새겼을까.

'아니, 당연한 건가.'

워렌스는 주검의 영광에게 있어서 배신자나 다름없다.

사령의 보주만 탈취하면 될 걸, 굳이 나서서 교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성격을 보면 배신자를 가만히 놔둘 리 없을 터.

이건 당연한 보복이었다.

덕분에 제 발로 단서를 남긴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워렌스를 다시 눕힌 베르덴이 방으로 돌아갔다.

칼리아가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설마 놈들을 쫓을 단서라도 찾은 건가?"

"찾았습니다."

"...!"

베르덴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서가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블랙 아워의 나침반.

마력 추적 기능이 있는 인공 아티팩트로 마법진의 마력을 추적하면 된다. 물론 베르덴이 이 같은 사실을 훤히 밝히진 않았다.

혹여 정보라도 퍼지면 블랙 아워가 움직일 테니까.

왕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지금, 블랙 아워와 직접 적대할 때가 아니었다.

"자세한 건 설명드릴 수 없지만 저에겐 주검의 영광을 추적할 수단이 있습니다. 다만 제약이 있어 명확한 위치가 아닌, 특정 범위만을 알아내는 게 전부입니다."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닌가?"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검의 영광은 언데드로 세간의 시선을 돌리고 사령의 보주를 탈취했다. 거기다 왕국만이 아니라 교구까지 반파시켰다.

고작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대놓고 루아스교를 건드려 놓고 놈들이 느긋하게 움직일 리가 없다. 게다가 사령의 보주를 회수했다고 왕국에서 도망치지도 않겠지.

그랬다면 도둑질당하기 전에 왕국을 나갔을 테니까.

놈들은 근시일에 사령의 보주로 사건을 터뜨릴 것이다. 그게 뭔지 파악은 불가능하나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겠지.

그럴진대 단체로 말을 타고 움직이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 혼자 움직인다.'

베르덴의 <비행주파>는 군마보다도 훨씬 빨랐으니까.

그리고 주검의 영광을 상대할 전력도, 자신감도 갖추고 있었다. 홀로 교구를 엉망으로 만든 흑마도사가 있다고 한들 베르덴이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베르덴이 말하기 전에 칼리아가 선수를 쳤다.

"시간이 없다라. 그렇다면 비행정을 쓰는 수밖에 없겠군."

"아니, 칼리아 님, 설마...."

"어쩔 수 없다, 베스파. 상황이 심각하니까."

"당장 운용 가능한 비행정이 있는 겁니까?"

글로스의 물음에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테리트 백작의 영지가 있습니다. 제 작은아버지 되시는 분으로, 그분께서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비행정 정박장 하나를 영지 내에서 직접 관리하고 계시죠. 거기서 비행정을 얻어 움직이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칼리아 님의 권한으로는 비행정을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작은아버지도 워낙 고지식하시기에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할 테고. 그러니...."

칼리아가 보란 듯이 선언했다.

"비행정을 탈취한다."

"본인 가문의 비행정을?"

로난데르크 주교가 난색을 표했다.

"미친 생각인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의 인원이 지형지물에 제약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건 비행정밖에 없으니. 그리고 자고로 허락보단 용서받기가 더 쉬운 법입니다."

칼리아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비행정을 동원한다면 분명 제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이거라면 되지 않겠나?"

으음... 베르덴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행정을 쓸 수 있다면 베르덴이 혼자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혼자 간다고 해도 칼리아가 들어 먹을 리도 없을 테고.

어쨌든 이동 수단은 갖춘 셈.

이제 베르덴의 차례였다.

"준비를 할 테니,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 * *

워렌스에게 새겨진 마법진을 파훼하는 건 간단하다.

세 개의 마법진이 얽힌 복합 마법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보헤미른 마탑의 보물고에 있던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난이도였다.

'하지만 단순히 파훼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목표는 이 흑마법진을 작성한 자의 마력이다.

그러니까 마력이 거의 없는, 비어 있는 마석에 흑마법진을 이식하면 되는 일. 확실히 섬세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패할 이유는 없다.

이미 이보다도 어려운 작업을 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글러트니의 조각.

베르덴은 세 개의 마법진을 연계하여 조각에 있던 이질적인 기운을 떼어 내 마석에 결합했다. 그에 비하면 마법진을 이식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다.

베르덴이 워렌스를 방으로 데려와 바닥에 눕혔다.

그의 머리맡에 앉아 손가락 끝에서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직후 마법진에 실을 침투시켰다.

쩌적... 쩌저적....

오래 지나지 않아 바깥과 중간에 있는 마법진의 요추가 박살 났다.

이제 남은 건 정신을 조작하는 마법진 하나뿐. 이걸 그대로 빈 마석에 이식하면 끝이다.

베르덴이 마력의 실로 마법진과 워렌스가 붙어 있는 부분을 사각사삭 긁어 내었다.

"으으...."

고통스러운지 워렌스가 신음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내 끝에 다다라 분리되기 직전인 걸 확인한 베르덴이 왼손으로 다른 마법진을 구축했다.

결합의 마법진(The Combination).

연금술 전용 고난이도의 마법진 중 하나. 이건 그 응용이었다.

화아아악!

베르덴이 흑마법진을 분리한 순간에 다른 마법진을 기동했다. 마력의 빛이 방 전체를 비추며 흑마법진이 빈 마석에 강제로 결합되었다.

'성공이군.'

마석 위에 새겨진 흑마법진이 작게 빛났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이 마법진을 휴대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진 자체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기껏해야 빈 마석이 마법진의 마력으로 물든 게 전부다.

솔직히 말해 이것 자체로는 세간에서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베르덴에겐 인공 아티팩트가 있다.

블랙 아워의 나침반.

마력을 추적해 마법사를 쫓는 기물.

거리에 한계가 있긴 하나 왕국 끝자락이나 왕국을 벗어난 게 아니라면 주검의 영광은 베르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베르덴이 망설임 없이 나침반 안에 마석을 넣고 기동했다.

그러자 빙글 돌아가는 자침이 멈춰 섰다.

자침의 끝이 가리킨 건 왕국의 북서쪽.

글러트니 때와는 다르게 자침은 정확히 한 방향만을 향하고 있었다.

* * *

한 도시 어딘가에 있는 응접실.

그 안에 세 사람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부신 황금빛 정장을 입은, 갈색 머리의 사내가 최고급 차를 즐기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검은 로브를 두른 노인, 노사가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의 사내.

에스티리아 왕가의 3왕자, '에버스 브륀 디 에스티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왕국 남쪽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거래를 지켰을 뿐입니다, 3왕자 전하."

"뭐,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천의 언데드 군세로 풍족한 대지를 싹 쓸어버리다니. 너무도 예상 범위 밖이라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이거 참, 도저히 미소가 숨겨지지가 않는군."

에버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웃었다.

7위계 마법 <망자의 행진>.

굳이 구하기 극히 어려운 스크롤까지 사용한 건 단순히 교구의 시선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3왕자와의 거래가 있었다.

에버스가 남색 눈동자를 빛냈다.

"이 정도 피해라면 형님들도 그냥은 넘어가지 못하겠지."

언데드로 인해 왕국 곡창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주로 곡창지대의 영지를 다스리는 건 1왕자와 2왕자를 추종하는 귀족들. 그들의 존재는 차기 왕위 계승 경쟁이 있어서 3왕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부숴 버렸다.

그 탓에 내년에는 식량난이 찾아오긴 하겠지만 3왕자는 알 바가 아니었다. 왕국민이 굶어 죽든 말든 본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었으니까.

곡창지대에 언데드를 푼 건 순전히 다른 경쟁자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에버스의 탐욕에는 평민들의 목숨은커녕 왕국의 미래 또한 안중에도 없었다.

"아, 그리고 칼리아 그년은 어떻게 됐지?"

에버스가 주검의 영광의 힘을 빌려 만든 조합과 귀족들의 지지.

거기에 칼리아가 찬물... 아니, 아예 얼음물을 들이부었다. 덕분에 조합은 반파되었고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까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안 그래도 세력이 부족해서 걱정인데.

에버스의 분노에 노사가 응했다.

"지금쯤이면 지하 밑바닥에 매장되었을 겁니다. 루아스의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말입니다."

"흐음, 가능하면 그 목을 내가 베거나, 성욕에 미친 내 작은 형님에게 던져 버리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죽었으니 기분이 좋긴 좋군."

"그럼 이제 전하께서도 대가를 지불하실 때입니다."

"아직 마지막 거래를 이행하지 않았다만?

"지난 2~3년간 보여 주었던 저희의 성의라면 선수금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노사의 진지한 음성에 에버스가 킥킥거렸다.

"장난친 거니 너무 진지해지지는 말라고. 확실히 가져왔으니까."

에버스가 손짓했다.

그의 뒤에 있던 사내가 직사각형의 기다란 나무 상자를 탁상 위에 올렸다. 노사가 눈을 빛내는 걸 본 3왕자 에버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너희가 말한 대로 왕성의 지하에 묻혀 있던 걸 발견한 거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서. 그래서 묻겠는데, 이건 대체 뭐지? 왕가의 기록물을 뒤져 봐도 이와 같은 건 적혀 기록되어 있지 않던데 말이야."

"그건 거래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듯.

괘씸하긴 하지만 에버스는 이들을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주검의 영광이 가진 힘은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기 충분했으니까.

'거기다 이 상자에서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든다.'

감히 열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에스티리아의 왕좌였으니까.

에버스가 상자에 관심을 끊고 품속에서 시험관을 노사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3왕자 에버스 본인의 피와 작은 살점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 거래를 위해, 네가 필요하다고 했던 내 피와 살점이다. 엄청나게 아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존경심이라곤 일절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쯧.

혀를 찬 에버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가 할 건 더 없으니, 왕성으로 돌아가 그 '의식'이 끝나길 기다리겠다. 주인의 명에 따라 죽음을 내리는 강대한 언데드의 힘. 기대하고 있겠다."

에버스가 호위와 함께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비올라가 나타났다.

"이제 밥맛 떨어지는 왕자님도 안녕이네. 흠, 거래도 끝났는데 이참에 콱 죽여 버릴까?"

* * *

"그만둬라, 비올라. 지금은 저 철딱서니 없는 왕자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그보다 사령의 보주는 가지고 왔나?"

"그야 물론이지."

비올라가 사령의 보주를 꺼냈다.

전에 봤던 거에 비해 마력과 사기가 소모되어 있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다시 채우면 그만이니까.

노사가 사령의 보주를 받아 챙겼다.

"교구에서의 일은 조용히 끝냈겠지?"

"조용히... 는 아니고. 좀 날뛰긴 했지."

"...."

노사의 살벌한 눈빛에 비올라가 손을 저었다.

"걱정하지 마. 단서가 될 만한 건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아니, 애초에 우리를 추적할 단서 같은 게 존재할 리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거 모르나?"

"모르면 어때. 진짜 기적적으로 걔들이 우리를 추적하면 뭐 어쩔 건데? 그 자리에서 싹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인데. 안 그래?"

"너는...."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데 정신 팔지 말고 상자나 확인하자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비올라가 냉큼 노사의 곁에 앉았다.

노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비친 나무 상자.

이 안에 있는 것이 노사와 비올라가 3왕자와 거래를 한 이유 그 자체였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내 둘이 숨을 삼키고는 같이 나무 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위대한 주검에 무한한 영광을.>

정확히 한 문장을 동시에 외자 나무 상자가 반응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틈새가 생기더니 쩍 벌어졌다. 노사가 아주 조심스레 틈새를 손가락으로 비집고는 힘을 실었다.

이윽고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사람의 다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비올라가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이게 위대한 주검의 신체야? 뭔가 되게 평범하네. 이거 진짜 맞아?"

"말조심해라."

비올라에게 경고한 노사가 다리를 살폈다.

언뜻 보면 평범하나 그에게는 느껴졌다. 5위계 흑마도사인 둘조차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죽음의 기운이 말이다.

그 사실에 노사가 환희에 젖었다.

"아아...."

노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온 주검의 영광.

강대한 흑마법사를 이끄는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진 위대한 주검의 신체 조각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을 거닐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이제 에스티리아 왕국을 시작으로 남은 신체 조각마저 찾아 위대한 주검을 부활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생명의 개념이 사라지고 죽음만이 남아 있는 새로운 세상이 찾아올 터.

불멸의 세상.

그것이 주검의 영광의 종착지였다.

상자를 닫은 노사가 리마넨을 호출했다.

"너는 이 상자를 갖고, 다른 이들과 함께 당장 본거지로 향해라."

"두 분께서는 가지 않으십니까?"

"우린 의식장이 제대로 가동되는지 확인한 뒤에 출발할 것이다."

3왕자와의 약속 따위는 사실 알 바가 아니었다.

주검의 영광이 온 목적 중 하나에 의식의 가동을 확인하는 것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3왕자가 과연 강대한 언데드를 가지고 무슨 짓을 벌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예, 노사."

고개를 숙인 리마넨이 상자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노사와 비올라가 협곡에 숨겨져 있는 고대 의식장으로 향했다.

거대한 원형의 의식장.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고, 의식장 경계에 있는 등잔대들 옆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전신의 푸른 핏줄이 불거지고 피부가 일부 녹아내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자들.

노사가 의식장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럼 이제부터 '그림 리퍼' 의식을 거행하겠다. 그러니 주변을 잘 지키도록."

"여기에 대체 누가 온다고. 알았으니까 빨리 시작해."

비올라의 투정을 무시한 노사가 사령의 보주를 제단 위에 있는 시체의 가슴에 올렸다. 그러곤 죽은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높게 쳐들었다.

마도 <죽음축적>

───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방대한 마력이 퍼져 나가며 경계에 있는 인간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노사의 마도는 다수의 죽음을 산 자에 몸에 가두는 것.

그렇게 하여 모아 둔 죽음의 기운과 사령들을 임의로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거창한 마도는 아니었으나 강대한 언데드를 탄생시키는 데는 강력한 마도였다.

산 자 안에 쌓아 둔 죽음이 빠져나오며 사령의 보주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어 완전해진 사령의 보주를 이용해, 죽음의 수확자 '그림 리퍼'를 만들어 내어, 3왕자의 피와 살점으로 계약해 의식을 완성하면 끝.

노사가 서 있는 의식장은 바로 이런 용도를 위해 고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에스티리아 왕국을 떠나는 날이 코앞까지 찾아왔다.

* * *

테리트 백작 영지에 있는 정박장.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총 3척의 소규모 비행정을 관리하는 장소였다. 비행정은 이동 수단을 넘어 전략적 자산이기에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기사 웨이튼은 수년째 정박장의 경비를 맡아 왔다.

지루하기는 했지만 봉급도 많고 자기 개발에 힘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은 터라 딱히 불만은 없었다. 사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그가 비행정의 경비를 담당하는 당직.

웨이트는 밤새 마실 커피와 재밌는 소설책 하나를 들고 당직을 섰다.

이따금씩 순찰을 돌며 각 담당자가 잘 있는지 확인하면 그뿐. 사실상 깨어 있기만 하면 되는 터라 새벽의 여가를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흐흐흐, 아주 좋아.'

밤샘 준비는 완벽하다.

웨이튼은 웃음을 삼키며 자리에 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벽.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

스르릉!

기사답게 즉각 반응한 웨이튼이 검을 든 채 뒤로 돌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기사.

"어? 칼리아 님?"

"오랜만이군, 웨이튼."

태연히 인사를 주고받은 그녀의 모습에 웨이튼은 혼란스러웠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영애가 왜 여기에? 아, 백작 각하의 영지에 잠시 방문하신 건가? 아니, 그런데 이 시간에 정박장에는 왜 오셨지?"

갖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하지만 미처 궁금증이 해소되기 전에 칼리아가 미안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작은아버지께 잘 전해 주게. 비행정은 잘 쓰고 돌려주겠다고."

"네?"

그 순간 칼리아의 뒤에서 베스파와 글로스가 튀어나와 웨이튼을 제압했다. 사지를 포박하고 확실하게 목을 조여 단숨에 의식을 빼앗았다.

웨이튼은 실력을 갖춘 기사.

교전이 벌어지면 조용히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칼리아가 미끼로 나선 것이다.

어쨌든 이걸로 비행정 주변의 병력을 전부 제압한 상황.

칼리아가 명령했다.

"오른쪽 비행정 '벨로스'에 탑승하라. 운전은 내가 직접 하지."

근처에 잠입해 있던 모두가 우르르 비행정에 탑승했다.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본 베르덴은 생각했다.

'...이게 맞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곧이어 중심의 마석이 기동하며 비행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테리트 백작 영지에 비상이 걸렸다.

163화 백골의 비올라 (1)

로난데르크 주교의 노력 덕분에 교구의 생존자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중상을 입은 바이델르 주교 또한 마찬가지.

그에 더해 마법진이 사라진 탓인지 워렌스의 상태가 더 악화되지도 않았다.

아직 정신을 차린 사람은 없었지만 상황은 그나마 호전된 상태.

글로스는 자신이 데려온 성기사를 일부 차출해 교구의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로난데르크 주교가 대신했다.

강력한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주교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까.

스르륵.

로난데르크 주교가 침상에서 눈을 떴다.

며칠이나 긴장 속에서 신성력을 끌어낸 탓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가 극에 달했었다. 그렇게 만 하루를 꼬박 잔 주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방을 나섰다.

낯선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나가니, 평화로운 교구의 거리가 아닌 드넓은 상공이 펼쳐져 있었다.

비행정 벨로스의 갑판 위.

로난데르크 주교가 지난 일을 되돌아봤다.

'루아스교의 주교인 내가 도둑질에 가담하다니.'

사악한 흑마법사를 쫓으려면 반드시 비행정이 필요했다.

그 외에 방법은 없었고, 루아스교를 위해... 더 나아가 세상을 위해 이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루아스께서도 분명 용서해 주시겠지.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속이 불편했다.

길거리에서 딱딱한 빵 하나 훔친 것도 아니고, 다름 아닌 전략 자산인 비행정을 탈취한 극악한 중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허허... 내가 비행정 도난범이라니...."

로난데르크 주교는 실없이 웃으며 멍하니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는 한편, 베르덴은 칼리아와 조타실에 있었다.

능숙하게 비행정을 운용하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덴이 내심 감탄했다. 비행정 운전은 마차를 끄는 것보다 수십 배는 어렵다고 들었었는데.

베르덴의 시선에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귀족 영애가 비행정을 운전하는 게 그리 신기한가?"

"확실히 신기하긴 합니다."

"하긴 그렇겠지. 왕국의 귀족들을 통틀어, 비행정을 직접 다룰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 손에 꼽을 테니까."

"비행정 운전은 가문에서 배우신 겁니까?"

"자랑할 생각은 아니지만 우리 에스퍼렌사 가문은 총합 다섯 척의 비행정을 보유하고 있다. 테리트 영지에 소규모 비행정 세 척 그리고 라인즈 부근에 남은 두 척이 숨겨져 있지. 왕국 귀족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행정을 보유하고 있던 터라 어릴 적부터 비행정을 타 볼 기회가 많았다."

물론 칼리아는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지 않았다.

"슬슬 비행이 익숙해지니까 나도 한번 운전해 보고 싶더군. 그래서 조타수에게 몰래 부탁해 하나씩 기능을 배워 나갔지. 아버지 몰래 운전수에게 부탁해 몇 번이나 조타를 잡아 이착륙을 해 보기도 하고. 실수로 몇 번 부딪히는 바람에 식겁하기도 했었지."

칼리아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며 가볍게 추억을 웃어넘겼다.

저번에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근신 처분을 받은 것도 그렇고, 비행정을 훔친 것도 그렇고. 확실히 그녀의 행동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보다 꽤 이동한 것 같은데, 거리는 얼마나 남았지?"

베르덴이 슬쩍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확인했다.

자침의 방향은 여전히 같았으며 반응은 조금 더 강해졌다.

"이 속도라면 2일 내지 3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 그렇군."

칼리아가 풍경을 바라보는 척, 슬쩍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애셔... 내 생각보다도 비밀이 많은 사내로군.'

강력한 마법.

흑마법사의 추적 수단.

워렌스에게서 마법진을 제거하기까지.

칼리아는 특유의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대체 어떻게 살면 저 나이에 저만한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확실히 압도적인 마법적 재능이긴 하나, 그저 단순히 재능만으로 치부할 건 아닌 것 같았다.

칼리아는 베르덴이 궁금해졌다.

헛기침을 한 그녀가 물었다.

"크흠, 그러고 보니 사령의 보주의 근간을 제거하는 게 전부였을 의뢰가 상당히 복잡해졌군. 영묘에 이어 언데드 사태, 거기다 교구까지...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에 감사하지."

"의뢰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지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도망치는 게 답이지.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목숨은 하나뿐이다.

그건 베르덴에게만 통용되는 게 아니었다.

"칼리아 님은 왜 도망치지 않으신 겁니까?"

칼리아는 베르덴처럼 실질적인 보수를 보장받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덴을 고용하면서 금전적으로는 이득은커녕 손해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는가.

그에 칼리아가 답했다.

"굳이 말하자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칼리아는 귀족이니까.

귀족은 다스리는 자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영지와 영지민을, 더 넓게는 국가를 지킬 의무가 있다.

주검의 영광은 명확히 영지와 시민을 해하고 국가를 해하는 집단. 당연히 배제할 수밖에. 그런 귀족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것은 칼리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둘째는.

"세상이 조금 더 깨끗해지길 바라니까."

"...세상 말입니까?"

"뭐, 솔직히 말해 그저 거창한 목표일 뿐이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왕국 내의 범죄자를 척결하는 게 전부니까."

하지만.

"그것이 내가 정한, 나만의 정도(正道)다. 목적지가 너무 멀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길을 걷지 못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 단언컨대 내 행동의 결과는 무의미하지 않을 테니까. 이게 내 대답이다."

...세상이라.

칼리아의 말대로 거창한 목표다.

왕국에서 수천 명의 범죄자를 처단하고 무고한 수만 명을 구했다고 할지언정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할 테니.

반면 베르덴의 목표는 개인적인 복수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보헤미른 마탑주, 초월자 발로크 베시아스가 쌓은 모든 것을 무너뜨려 그 고고하고 오만한 무릎을 꿇게 하는 것.

하나 그에 따른 파장은 세상을 크게 진동시킬 것이다.

그러나 베르덴을 판단할 수 없었다.

이상(理想)과 원한(怨恨).

칼리아의 목표와 베르덴의 목표 중 무엇이 더 크고 작을까.

베르덴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다만 끝내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