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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 *

다음 날, 베르덴이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니, 날이 밝은 걸 보아 하루를 내리 잠든 모양이었다. 방에 붙어 있는 화장실에서 씻은 베르덴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어제 느꼈던 나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개운함만이 느껴졌다.

'마력도 상당히 회복했고.'

컨디션은 상당히 좋다.

그대로 문밖으로 나서자 팔에 부목을 댄 백결 기사가 보였다. 지나쳐 가려고 하자 백결 기사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애셔 님."

"예...? 아, 예."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뭐지? 왜 갑자기 인사를....'

멀어져 가는 기사의 등을 보며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 마주치는 사람마다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심지어 성기사까지.

그렇게 나아가던 끝에 조종실 문을 두들겼다.

"애셔인가? 들어와라."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섰다.

조종실에는 칼리아뿐만이 아니라 베스파도 있었다.

"크흠, 좋은 아침이다."

베스파가 말했다.

이 사람도 뭔가 호의적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베르덴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칼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다른 기사들에게도 비슷한 인사를 받았나 보군. 어떤가? 준귀족들에게 존대를 받는 건."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너에겐 갑작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딱히 이상할 건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생명의 은인인데. 나와 베스파 그리고 백결 기사단 전체와 성기사단을 포함해서 말이야."

...음,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군.

'인정을 받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입으로 꺼내자니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았다. 대충 납득한 베르덴이 화제를 돌렸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단은 교구로 갈 생각이다. 지금쯤이면 교구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 퍼졌을 테니까. 왕국에 남아 있는 성직자, 성기사 그리고 주교가 돌아왔을 테니, 부상자들을 돌보기에는 적합한 환경이겠지. 그리고 테리트 영지에 들러 비행정을 반납하면 끝. 간단하지 않나?"

...간단하지 않을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은 주검의 영광에 대해 모르고, 칼리아가 비행정을 훔친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 갑자기 바깥에서 기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카, 칼리아 님!"

갑판 쪽이다.

서로 눈을 마주친 세 사람이 당장 바깥으로 나갔다. 모두가 하나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고개를 들자 칼리아가 크게 눈을 떴다.

"저건...!"

비행정 벨로스를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

하늘을 점거하고 있는 대규모 비행정 한 대와 그 양옆을 호위하고 있는 소규모 비행정 둘. 그들에게는 각기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본대(本隊).

그때, 중앙 비행정에서 누군가 날아왔다.

후작가의 상징이 새겨진 로브를 두른,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녹색 금속 스태프를 든 마법사가 벨로스의 갑판에 내려섰다.

"오랜만입니다, 칼리아 아가씨."

에드몬 로드리너.

'역풍(逆風)'이란 이명을 소유하고 있는,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수호하는 마도사.

"에드몬 할아범...!"

"네, 접니다."

에드몬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아 아가씨가 사고뭉치인 건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설마 테리트 백작 각하에게서 비행정을 훔치실 줄이야. 이 늙은이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적잖게 놀랐답니다. 그리고...."

에드몬의 눈이 부상당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허허, 이번에는 아주 대형 사고를 치신 모양입니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 근데...."

칼리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화가 많이 나셨나?"

"허허허허허!"

에드몬이 껄껄 웃었다.

어느 순간 뚝 웃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엄청요."

172화 후폭풍 (2)

비행정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전략 병기로 취급된다.

소규모 비행정이라고 해도 외부 충격을 막아 내는 방어용 마법진의 성능은 뛰어난 편이며, 수십 명의 기사들과 그들이 약 1개월간 먹고 마실 물자들도 어렵지 않게 수송할 수 있다.

엔진 역할을 하는 마석은 한번 완충되면 조종사의 능력 여하에 따라 3개월은 운항이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비행정의 기본 성능.

여기서 천문학적인 개조를 받거나 수송 인원에 따라 그 성능은 감히 비교할 수도 높아진다.

공격용 마법진 혹은 마법사들을 이용한 마법 폭격.

좌표를 지정해 먼 거리를 한순간에 뛰어넘는 공간 이동.

고도의 투명화를 사용해 적들의 후위를 궤멸해 버리는 기습. 그와 더해 엔진 마석을 폭주시킨 뒤, 비행정째로 들이받아 도시의 기능을 마비시킬 위력의 자폭까지.

"하나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아가씨?"

에드몬의 잔소리에, 병상에 누운 칼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번이고 비슷한 훈계를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주검의 영광을 토벌하기 위해서라곤 하나 비행정을 훔친 건 훔친 거였으니까.

이건 칼리아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

'그래도 1시간 내내 잔소리를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안 그래도 부상 때문에 힘든데.

칼리아가 괴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에드몬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런, 제 잔소리가 너무 길어졌군요. 안 그래도 몸이 아프실 텐데."

"...개의치 마라."

"아 그렇다고 개의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가씨의 선생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잔소리 좀 했다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는 한참이나 지났지요. 하물며 비행정을 훔친 분에게는요. 안 그렇습니까? 허허허!"

에드몬이 껄껄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자하면서도 단호한 웃음소리였다.

"그나저나 아가씨와 베스파 단장을 포함해 많은 분이 다치셨더군요. 솔직히 말해 사망자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벨로스에 탑승한 백결 기사단와 교구의 성기사단 그리고 베르덴까지.

그들은 전원 에드몬이 타고 온 대규모 비행정 '솔리드렌'으로 거처를 옮겼다. 후작가의 병력들 수백 명의 감시하에 말이다.

...그런데 사실 말이 감시였지 실상은 구호 활동이었다.

구속을 하려 해도 죄다 환자들뿐이었으니까.

갑옷과 방패 그리고 검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로난데르트 주교와 성기사들 덕분이지. 그들이 사망자가 생기지 않도록 신성력을 한계까지 쏟아부어 즉사만큼은 면하게 했으니까."

"그렇군요. 주교가 기절하고, 성기사단장은 한쪽 팔이 잘릴 정도라... 평소의 범죄자 소탕과는 수준이 다른 전투가 벌어졌겠습니다."

칼리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려 하자, 에드몬이 제지했다.

"사건의 모든 전말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건 에스퍼렌사 후작 각하입니다. 그러니 제게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몰라도 도울 거니까요."

"그래도...."

"뭐,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아가씨를 추적하면서 교구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까요."

피와 시체로 가득한 교구.

그 끔찍한 광경은 에드몬조차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듣자 하니 흑마도사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가씨께선 분명 그 흉수를 추적하기 위해 비행정을 훔치신 거겠죠."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아가씨께서 최선이라 생각하셨으니 분명 그렇겠죠. 으음, 그렇긴 하지만 아가씨의 행동력은 참 무섭습니다. 작위를 물려받기 전, 그 거침없었던 후작 각하께서도 비행정에는 감히 손도 못 대셨는데."

"글쎄, 아버지께서 나와 같은 상황이셨다면 비행정을 모조리 훔치셨을지도 모르지."

"허허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데...."

에드몬이 정갈한 수염을 어루만졌다.

"어떻게 그 흑마도사를 토벌하실 수 있었던 겁니까? 이거 하나는 몹시 궁금하군요."

흑마법은 마법 특성상 신성력에 취약하다.

그런데 그런 불리함 속에서 주교가 지키고 있는 교구를 반파시켰다. 칼리아가 강하다고 하나 그만한 강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내가 토벌하지 않았으니까."

"오, 그렇다는 건 그 애셔라는 마법사가 토벌했겠군요."

"알고 있었나?"

"그야 물론이죠. 그중에서 제가 실력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마법사 하나뿐이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상처 하나 없는 것도 굉장히 눈에 띄고. 더군다나...."

에드몬이 자신의 목 부근을 톡톡 두들겼다.

"후작가의 징표를 받은 사내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아가씨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실력자라는 건 자명하겠죠. 그래도 설마 다이나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걸 허락하실지는 몰랐습니다. 무려 25억 엘크나. 제가 분명 함부로 보증 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수에 대한 대가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에게나 보증을 설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야."

"그럼 그 마법사가 아가씨의 신뢰를 받을 정도로 믿을 만한 자라는 겁니까?"

"이미 목숨을 두 번이나 빚졌다. 그만하면 믿을 만하지 않나?"

칼리아의 눈빛은 올곧았다.

목소리에서는 마법사에 대한 호의가 넘쳤다.

"오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4위계 전격 마법사라고 알려진 젊은 마법사가 어떻게 흑마도사를 토벌할 수 있었을까.

소문과의 괴리.

고위 속성을 깨우친 미지의 마법사.

에드몬에게서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평소의 인자함과 거리가 멀었다. 호승심이 깃든 역전의 마법사의 그것이었다.

칼리아가 말했다.

"에드몬 할아범, 마음은 이해하지만 애셔를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허허허! 아가씨의 사람이라 챙기시는 겁니까? 걱정 마시길. 절대로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

"그 반대다."

"...네?"

당황한 에드몬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5위계의 상위에 다다른 마법사이며 숱한 전장 속에서 살아남은 '역풍'의 마도사다.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흑마도사를 토벌했다고 한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에드몬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반대라니?

"진심이십니까?"

칼리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 나는 충고했다."

칼리아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부상 탓에 피곤했는지 뭐라 할 새도 없이 잠에 들었다.

에드몬이 멍하니 칼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히려 내가 다칠 거라고?'

장난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진의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아픈 환자를 깨우면서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물어봤자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칼리아 아가씨.'

애셔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 와라.

이건 다름 아닌 에스퍼렌사 후작이 직접 명령한 것이니. 호기심을 억누른다고 해도 그를 시험하는 건 확정이었다.

'물론 각하께서 직접 주문하지 않으셔도 내가 알아봤겠지만.'

과연 언제 대면하는 게 좋을까.

당장 만나 보고 싶지만 비행정 위에서 일을 벌이는 건 위험하다. 얘기만 나눈다 해도 도중에 호승심을 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까.

에드몬은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래, 그때가 좋겠군."

에드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을 나섰다.

* * *

유일하게 상처 하나 없던 베르덴은 홀로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최고급 여관에 버금가는 인테리어가 갖춰져 있었다.

'소규모 비행정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군.'

솔리드렌이라 했던가.

도중에 보니 공국의 비행정 '리시드'보다는 느리긴 했지만, 그 크기만큼은 눈대중으로 비교해 봐도 리시드의 세 배를 가뿐히 넘어섰다.

그야말로 대규모 비행정이란 범주에 적합했다.

'마음 같아선 어떤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지, 동력 구조가 어떤지 알아보고 싶지만....'

베르덴은 현재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비행정을 탈취한 공범 중 하나인 건 분명했으니까.

물론 진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저기 헤집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확인할 것도 있고.'

생각을 전환한 베르덴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공간가방에서 검게 그을린 가방 하나를 꺼냈다. 백골의 비올라가 가지고 있던 공간가방이었다.

과연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주검의 영광과 관련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마도사였던 만큼 희귀한 마법 물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기대감을 품은 채 공간가방을 개방했다.

"...!"

가장 먼저 나온 건 불길함이 느껴지는 검은 책이었다.

물질 계열 흑마법서.

'역시 가지고 있었군.'

마법서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마법 물품. 그 강화 효과는 관련 마도에까지 미친다.

물론 마탑의 마도사라고 해도 마법서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긴 하나, 주검의 영광이라는 미지의 조직에 몸담고 있었으니 구하지 못할 건 아니었을 것이다.

듣자 하니 외견과 달리 상당히 나이도 많은 것 같았고.

'내가 쓸 수 없는 건 아깝지만... 주인을 찾으면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겠지.'

미리 개방되어 있긴 하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 가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어 베르덴이 다음 물건을 꺼냈다.

이번에도 책이었다.

그런데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생전 처음 보는 문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고대 언어인 건가?'

베르덴은 고대 역사에 깊은 지식은 없다.

그래도 살면서 상당한 수의 책을 읽어 온 만큼. 모르는 분야라고 해도 약간의 지식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글자의 출처가 무엇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거기다 본 적이 없는 종이 재질이었으며, 각 페이지마다 세월의 풍파가 여실히 느껴졌다. 어쩌면 이 문자는 고대에서조차 잊혔을 정도로 오래된 것일지도 몰랐다.

'뭐, 결국은 골동품이군.'

기대감이 하락했다.

뭔가 이대로 가도 직접 쓸 만한 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이내 베르덴이 공간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하나하나 확인하며 실망할 바에는, 크게 한번 실망하는 게 나을 테니까.

툭. 투둑.

꾸겨진 돈다발 몇 개와 굳은 피로 더렵혀진 장신구들이 떨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마법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쯧. 베르덴이 혀를 찼다.

그러던 순간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침대 위에 떨어졌다.

"...뼈?"

그것도 황금으로 이뤄진 사람의 뼈였다.

구조나 크기로 보아 대퇴골 같은데, 아주 희미하게 마력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법 물품의 일종인 모양.

하지만 그냥 물건은 아니었다.

'마법진이 아닌, 사령의 기운 자체로 봉인된 황금 뼈라.'

딱히 저주나 이런 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손을 대도 무방했지만 느낌상 그림 리퍼에 버금가는 불길함이었다.

대체 마법 물품으로 보이는 이 황금뼈가 뭐길래 이렇게 봉인되어 있는 걸까.

마법사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엔 충분했지만 베르덴의 마법과 지식으로는 봉인을 해제하는 게 불가능했다.

'적어도 대주교급의 신성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풀 수 없겠지.'

지금으로서는 봉인을 푸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그 후 비올라의 공간가방에서 더 나온 건 없었다.

결국 얻은 건.

흑마법서.

그을린 공간가방.

읽을 수 없는 고서.

봉인된 황금의 대퇴골.

그리고 수백만 엘크와 더러운 장신구 몇 개.

이게 전부였다.

'보수가 아닌 전리품이긴 하지만... 좀 아쉽군.'

공간가방 외에는 죄다 베르덴이 쓸 수 없는 거였으니.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흑마법서 하나 얻은 걸로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고서나 대퇴골을 어떻게 할지는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고.

뭐, 일단 돌아간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신경을 끈 베르덴은 못다 한 휴식을 취하는 데 전념했다.

그리고 그 후 며칠이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 * *

비행정은 교구가 아닌, 대도시 라인즈에 도착했다.

교구의 소식을 접한 에스퍼렌사 후작이 생존자들의 신병을 확보해 안전하게 라인즈로 이송했기 때문이었다.

끔찍한 현장이 남아 있는 교구보다는 라인즈가 더 안전하고 부상을 치료하기 쉬울 테니까.

총 네 대의 비행정이 라인즈 근처에 착륙했다.

에드몬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라인즈에 입성했다.

칼리아가 베르덴에게 말했다.

"나는 곧장 아버지를 뵙고 오겠다. 애셔, 너는 당분간 내 자택에 머물러라. 뭐, 갑갑하다면 라인즈를 떠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활동해도 좋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돌아와 줬으면 좋겠군. "

하긴 아직 비행점 탈취범이라는 꼬리표를 뗀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칼리아에게서 보수를 받아야 하기에 그 전까지는 라인즈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보도록 하지."

칼리아가 베스파와 기사들과 함께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베르덴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방향은 칼리아의 자택이 아닌 라인즈 외곽으로 향해 있었다.

'에이든, 샤를로트, 샘웰.'

마침 라인즈에 온 김에 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었다.

거기다 큰 의뢰를 끝낸 지금, 샘웰이 만든 특제 칵테일이 당기기도 했고. 술집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지금의 베르덴은 그 정도 여유를 부려도 별 지장은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베르덴의 앞길을 막아섰다.

"애셔, 잠깐 나와 얘기 좀 하지 않겠나?"

에드몬 로드리너.

그가 스태프를 쥔 채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173화 어?

에드몬의 제안은 갑작스러웠지만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비행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에드몬은 종종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베르덴을 몇 번이나 흘겨보곤 했으니까.

이건 그 연장선이겠지.

"용건이 무엇입니까?"

"오, 차분하군. 다른 마법사들은 내 얼굴만 봐도 긴장해서 덜덜 떠는데 말이야. 크흠, 그럼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에드몬이 스태프로 베르덴을 가리켰다.

"에스퍼렌사 후작 각하께서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하셨네. 굳이 말하자면 뒷조사라고도 할 수 있지."

뒷조사라.

"그런 건 몰래 하는 거 아닙니까?"

"본래는 그렇지만, 다른 건 차치하고 자네는 칼리아 아가씨의 은인이지 않나? 당연히 몰래 뒤를 캘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소문이란 게 실제와 딱딱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꽤 있잖나? 사람이란 건 매 순간순간마다 변화하는 존재이니까. 하물며 앞으로 정진해 나가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사람 좋은 미소가 베르덴을 직시했다.

"4위계로 알려진 자네가 흑마도사를 토벌한 것도 그 훌륭한 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이렇게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겠나?"

그래서 직접 찾아왔다는 건가.

뭐, 솔직히 말해 몰래 뒷조사를 당하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낫긴 했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캐는 건 몹시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보실 생각입니까? 질문에 대답해 주면 되는 겁니까?"

"허허허허! 당연히 아니지. 그야 우리는 마법사가 아닌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마법을 보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지."

베르덴이 에드몬과 마주했다.

노인의 눈동자에는 평화로운 외면과는 달리 마법사로서의 탐구심과 호기심이 들끓고 있었다.

"마법을 본다라. 그렇다는 건 마법전을 벌이자는 겁니까?"

"그와 비슷하네. 물론 어디까지나 제안이니 받지 않아도 상관없네. 나는 마도사고 자네는 마법사니까. 겁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암."

에드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도 뻔한 도발이다.

머리가 고블린 수준이 아니라면 도저히 걸려들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와 별개로 베르덴이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에드몬 로드리너.

그는 흑마도사가 아닌, 원소 계열 마도를 개척한 마도사였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베르덴의 흥미를 자극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리고 마법전과 비슷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때, 에드몬이 말을 이었다.

"뭐, 이렇게 말했다만 솔직히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러니 애셔, 자네에게 동기를 하나 부여하겠네. 나와 내기를 하는 게 어떻겠나? 마법전에서 이기면 보상을 주도록 하지."

내기?

"어떤 보상입니까?"

"음? 내기 내용이 아니라 뭘 걸지가 더 중요하다는 건가? 아니면 마법전이 무엇이든 간에 이길 수 있다는 건가? 허허허! 뭐가 됐든 훌륭한 자신감이군."

에드몬이 수염을 쓸었다.

"나는 몇 번이나 이 내기를 해 오며 갖가지 보상을 내걸었다네. 한 번은 매직 아이템을 걸어 보기도 하고, 또 한 번은 반짝거리는 보석이나 액세서리를 걸어 본 적도 있었지. 혹시 마법사들이 뭘 가장 좋아했는지 아나?"

"돈입니까?"

에드몬이 감탄했다.

"오오, 자네는 벌써 진리를 깨닫고 있었군. 맞네, 바로 돈일세. 매직 아이템은 효과에 따라 유용해지거나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고, 보석과 액세서리는 결국 가치로 귀결되니까. 그러니 그 가치를 나타내는 돈이 가장 명확하면서도 쓰기 편리한 것이지."

에드몬이 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고는, 염력을 이용해 앞으로 날려 보냈다.

베르덴이 수표를 잡았다.

"다이나 은행에서 쓸 수 있는 1억 엘크 수표일세. 내기에서 이기면 군말 없이 주도록 하지."

1억 엘크.

내기치고는 상당한 액수다.

'후작가의 마도사에게는 그리 큰돈이 아닐 테지만.'

"내기에서 지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준 1억 엘크를 돌려주기만 하면 될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좋네. 애초에 자네에게 불리한 조건이 아닌가?"

에드몬이 내기 내용을 정한 데다가, 마법사로서의 경지 또한 베르덴보다 높다.

그런 격차가 있는데 내기로 무언가를 뜯는다니. 마도사로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에드몬은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눈앞의 잿빛 마법사가 어떤 마법사인지 말이다.

베르덴은 길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어떠한 리스크도 없는 내기였으니까. 이참에 후작가의 마도사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볼 기회였다.

'샘웰을 만나는 건 조금 미뤄 둘까.'

베르덴이 수표를 공간가방에 집어넣었다.

"그 내기. 수락하겠습니다."

"오오,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대답이군. 좋아, 그럼 날 따라오게."

* * *

라인즈의 중앙 광장.

그 북동쪽에 있는, 후작가 명의로 된 고층 건물로 칼리아가 발을 디뎠다. 건물 안에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문장을 짊어진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의 직속 기사, '붉은 신념'.

물 샐 틈 없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기사 중 하나가 칼리아에게 다가왔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아가 기사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응접실 앞에 다다른 그녀가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직접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라.

중후하고 익숙한 목소리다.

허가를 받은 칼리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앞머리를 뒤로 넘긴, 검붉은 머리칼.

잘 정돈된 짧은, 붉은 수염과 옷 위로도 느껴지는 강인한 체격.

루벤 드 에스퍼렌사.

칼리아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에스퍼렌사 후작이었다.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루벤 드 에스퍼렌사 후작 각하를...."

"격식 차리지 말고 와서 앉아라."

"아, 네."

칼리아가 냉큼 소파에 앉았다.

후작의 눈동자가 칼리아를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붕대가 감기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목발을 사용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할 정도. 그야말로 성한 데가 없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회복된 거처럼 보이긴 하지만... 부상을 입었을 당시를 생각해 보면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왔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이다.

조용히 칼리아를 응시하던 후작이 말했다.

"...얼마 전, 왕국 남부에서 벌어진 언데드 사태로 인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곡창지대의 상당 부분이 언데드에게 짓밟혔고 피난민들로 인해 각 도시는 비상이 걸렸지. 현재 모험가 길드와 영주들이 공조하여 언데드를 토벌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교구는 정체 모를 흑마도사의 습격으로 인해 궤멸되었다. 생존자의 증언과 현장을 확인한바, 주교 두 명을 포함해 다수의 신자들이 사망했더군."

하나같이 왕국 전역을 뒤흔들 정도의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네가 백결 기사단을 이끌고 남부로 향했으며 그 후 성기사단과 함께 교구로 향했지. 그러고는 비행정을 훔치고 어딘가로 향한 뒤 이렇게 중상을 입고 내 앞으로 오기까지...."

후작이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라, 칼리아."

"...네, 아버지."

칼리아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흑마법사 워렌스를 구출한 것부터 시작해,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이다.

설명을 듣던 후작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뭐? 3왕자가 그 주검의 영광이란 흑마법사 단체와 손을 잡았단 말이냐?"

"정황상 분명합니다."

"...증거는?"

"물증은 없으나, 교구를 습격한 흑마도사가 조합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했다더군요."

후작의 얼굴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주검의 영광.

후작으로서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흑마법사 집단이었다.

'하지만 칼리아의 말에 따르면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건 분명하다.'

교구를 반파시킨 흑마도사.

왕국 남부에 언데드를 푼 것이 놈들 짓인 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칼리아 말대로 정황상 앞뒤가 들어맞았으니까.

'그렇다는 건 3왕자의 지시일 가능성이 높겠군.'

곡창지대가 무너지면 왕국 전역이 휘청거리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왕국 남부에지지 기반을 갖춘 1왕자와 2왕자의 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해 이만한 사태를 벌이다니.

그야말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지만, 평소 3왕자의 탐욕스러운 행실로 보면 납득이 갔다.

"이 버러지 같은 왕가가...!"

후작의 분노에 칼리아가 움찔했다.

이마에 도드라진 핏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겨우 화를 삭인 후작이 칼리아에게서 설명을 이어 들었다.

그렇게 왕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끝났는지 알 수 있었다.

후작이 생각에 잠겼다.

응접실에 걸린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칼리아가 힐끗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중, 에스퍼렌사 후작이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겠다. 고생했다, 칼리아. 너는 이만 자택으로 돌아가 쉬거라."

"어... 네?"

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평소였다면 비행정을 훔치는 대형 사고라 역정을 내시든 중징계를 내리시든 하셨을 텐데 말이다. 그녀가 당황하고 있자, 후작이 말을 이었다.

"네가 유례없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치겠다."

언데드 사태와 교구에서 일어났던 일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벌어졌다.

칼리아가 진즉에 주검의 영광에 대해 보고했더라고 해도 대처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보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잘 해결하기도 했으니.

그리고 지금 칼리아는 중상자다.

아무리 후작이라고 하더라도 아픈 딸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한 달쯤은 정양해야 할 것 같구나. 그러니 자택으로 돌아가서 회복하는 데 전념하거라."

"...네, 아버지."

인사를 한 칼리아가 목발을 짚고 밖으로 나섰다.

징계를 받지 않은 사실이 너무나 의외였고 기뻤는지, 발소리가 한결 가벼워진 게 들릴 정도였다.

'언제 철이 들는지.'

후작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에 선 그가 칼리아과 백결 기사단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애셔라.'

주검의 영광 토벌. 그 대다수의 지분을 차지한 잿빛 머리의 마법사.

교구에서 놈들을 추적하는 것도, 영묘에서 칼리아 일행의 목숨을 구해 준 것도, 왕국의 금지에서 사령의 보주를 가져온 것도 그 사내였다.

'대체 그 마법사는 누구인가.'

젊은 나이에 5위계.

그에 그치지 않고 교구를 궤멸시킨 흑마도사와 칼리아를 손쉽게 압도한 언데드마저 단신으로 토벌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대단한 걸 넘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에드몬에게 말했다.

그 마법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 오라고.

'지금쯤이면 또 그 마법전을 벌이고 있겠군.'

에드몬은 호기심 가득한 마법사였으니까.

분명 비행정에서 내리자마자 직접 대면했을 것이다. 평소대로 내기도 했을 거고.

'어쨌든 곧 결과를 가져오겠지.'

에스퍼렌사 후작은 라인즈의 거리를 바라보며 에드몬을 기다렸다.

* * *

에드몬이 안내한 장소는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이었다.

베르덴이 칼리아와 처음 만난 장소이기도 했다. 에드몬이 아무도 없는 빈 연무장 중심에 섰다.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전의 무대로는 협소하지 않습니까?"

3위계 마법사에게라면 적합하겠지만, 4위계를 넘어 두 5위계에 다다른 마법사가 힘을 쓰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조금만 엇나가도 마법이 연무장을 부술 것이며 그 바깥에 있는 거리에 큰 피해를 입힐 테니까.

"그래서 말하지 않았나. 마법전과 비슷한 걸 하자고 말이야. 바로 마력 위압으로 말이지."

마력 위압.

물론 이것만으로는 전체적인 수준을 알아내긴 부족했지만, 마법사로서 어느 정도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는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거라면 여기라도 상관없겠군.'

마력만으로 연무장이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까.

"이해했습니다."

"오,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걸 보면 자신이 있나 보군. 좋아, 그럼 승패 조건은 두 가지일세. 하나는 상대방의 무릎이나 손이 바닥에 닿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입에서 포기 선언이 나오는 것일세. 동의하겠나?"

"동의하겠습니다."

"그럼 선수는 양보하겠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했다.

상대는 역전의 마도사다. 힘 조절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베르덴의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쳤다. 농밀하게 집중된 마력이 강한 물리력을 띠기 시작했다.

마력의 파도가 삽시간의 에드몬을 덮쳤다.

"어?"

174화 어??

심장에 담겨 있는 마력.

그 마력이 오가는 통로인 마력회로는 마법사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마탑주에 버금가는 지식을 쌓았다고 한들.

마력과 마력회로가 2위계의 기준점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코 2위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마력 위압은 그 두 가지 요소만으로 구현되는 기초 마법이다.

다시 말해 마법 하나로도 마법사로서 근본적인 재능이 어떠한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지를 쌓아 올렸는지 얼추 파악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마법사 간의 격차가 클 때의 얘기.

에드몬은 자신에게 뻗어 오는 마력을 보며 생각했다.

'위험하다.'

느긋하게 있다간 당한다.

곧장 웃음기를 지우고 마력을 방출했다.

───!

서로 다른 마력이 상호 간에 충돌했다.

그 여파에 지면이 얕게 갈라지며 대기가 일그러졌다.

에드몬은 본능적으로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했다.

마력회로의 격은 확실히 에드몬이 베르덴보다 우위. 그 출력의 차이 탓에 마력이 부딪친 순간 베르덴이 밀리긴 했지만 잠깐에 불과했다.

'내, 내가 밀린다고?'

점차 가까워지는 위압감.

에드몬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베르덴과 에드몬은 5위계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그 격차는 확연하다.

에드몬은 마도사 이전에, 5위계 끝자락에 닿은, 자신의 한계 위계에 도달한 마법사였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마력 위압에서 밀리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어린 마법사에게.

'대체 이 마력량은 뭐냔 말인가...!'

베르덴에게서 일고 있는 마력이 섬뜩할 정도로 깊고 방대하다.

그야말로 에드몬을 압도하는 수준.

그리고 그 마력량이 비상식적인 상황을 가능케 한다.

아마 태생부터 막대한 마력을 타고난 모양.

여기에 고위 속성까지 다룰 줄 안다는 건가? 상대적인 재능만 따지면 에드몬이 봐 왔던 마법사들 중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에드몬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선수를 양보하는 게 아니었나?'

"으윽...!"

한층 더 마력이 밀리며 에드몬이 휘청거렸다.

그에 반해 베르덴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마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소모하고 있음에도 여력이 있다는 뜻.

숨겨 둔 수가 한둘이 아니다.

어떻게 흑마도사를 상대로 이겼는지 이해할 만한 대목이었다.

"오오, 차, 참으로 대단한 재능이군...! 나와의 격차를 무지막지한 마력량으로 상쇄할 뿐만 아니라 넘어서기까지 하다니."

"항복하시겠습니까?"

"항복? 허허허허! 그럴 리가!"

에드몬이 웃으며 스태프를 꽉 쥐었다.

마력 위압에서 밀릴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에게도 한 수는 있었다.

"아무래도 진심을 다해야 할 것 같군."

그 순간.

에드몬의 기세가 일변했다.

마도 <기해氣海>

에드몬의 마력에 바람이 스며들었다.

속성과 마력이 결합하며, 마력이 가지고 있는 기본 성질이 변화했다.

녹색으로 물든 마력.

그걸 본 베르덴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

베르덴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느껴졌던 저항감이 비교도 할 수 없이 커졌다. 마력량으로 찍어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베르덴의 턱 끝에 맺혔다.

"...마도입니까?"

"그렇네. 물론 규칙을 벗어난 마법을 사용한 건 아닐세. 내 마도로 마력을 물들여 새로운 마력을 탄생시켰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것 또한 마력 위압이라고도 할 수 있지."

물론.

"자네에게는 많이 다르겠지만."

에드몬이 녹색의 마력으로 물든 안광을 번뜩였다.

화아아아아악!

거세게 휘몰아친 녹색의 마력이 베르덴의 마력을 집어삼켰다.

마도사다운 위압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정도로 베르덴의 견고한 정신을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다. 하물며 에드몬 이상의 마력을 품고 있기도 했으니까.

항복할 이유도, 무릎이 무너질 이유도 없었다.

"잘 버티는군.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그때, 에드몬이 손아귀를 쥐었다.

녹색의 마력이 베르덴의 주위로 집중했다.

밀도가 높아지며 생겨난 압력이 전방위에서 베르덴을 압박했다.

"큭...."

마치 폭풍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

베르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력이 닿은 대기를 뜻대로 조종하는 것. 그게 내 마도일세. 뭐, 솔직히 말해 초기에는 그리 위력적인 마도는 아니었네. 용도가 다양해 편리하긴 해도, 위력만 따지면 위계에 있는 마법이 더욱 강했으니까."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마법사는 늙을수록 강해지지. 나는 그 시간 동안 마도를 개량했네. 이건 그 결과물 중 하나일세."

에드몬이 손가락을 튕겼다.

녹색의 마력이 파도치자 작은 바람이 일었다.

"마력으로 대기를 움직이는 게 아닌, 마력과 대기를 결합시킨 성질 변화. 즉, 내 마력이 곧 바람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지. 지금 이곳은 나의 '영역'일세. 어떤가, 많이 놀랐나?"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해 내 마도를 드러낼 생각은 전혀 없었네. 설마 순수한 마력 위압으로 밀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그만큼 자네의 힘이 뛰어나다는 뜻이지. 하지만 내기가 걸려 있는데 허무하게 질 순 없지 않은가? 반칙은 아니니 이해해 주길 바라네."

에드몬이 수염을 쓸었다.

"그나저나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 그만 항복하는 게 어떻겠나?"

"...."

베르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력을 유지한 채 전신을 옥죄는 녹색 마력에 저항했다. 그의 벽안에는 부러지지 않는 의기가 담겨 있었다.

"허허허! 요즘 시대에 보기 어려운, 참으로 훌륭한 마법사로군. 재능과 끈기. 젊은 자네는 언젠가 나를 뛰어넘을 수 있겠지.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저항을 뚫고 베르덴의 숨통을 서서히 틀어막기 시작했다.

"자네의 의지를 존중하네. 그러니 조금 고통스러워도 참게나. 금방 끝날 터이니."

시간이 갈수록 베르덴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집중된 마력이 흔들리며 저항력이 약해졌고, 노련한 에드몬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고통이 점점 강해지며 승패는 더욱 짙어져 갔다.

'...마법을 쓰면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마력 위압으로 펼치는 마법전이다.

마도를 쓸 줄은 몰랐지만 에드몬은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베르덴 또한 규칙을 어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베르덴은 에드몬이 펼친 성질 변화한 마력을 관찰했다.

'마력 자체의 성질을 속성으로 변화시킨다라. 색다른 발상이군.'

에드몬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것이다.

발상부터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저런 식으로 마도를 응용하기 위해선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지배할 정도의 조작 능력이 필요시되니까.

아무리 그와 비슷한 마도를 개척했다고 해도 따라 하기는 결코 쉽지 않겠지.

하지만.

'보인다.'

베르덴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 셀 수 없는 마법 이론이 뒤엉켰다.

에드몬이 이뤄 낸 결과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원리를 꿰뚫었다. 마법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 그건 베르덴이 역천을 이루기 전에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재능이었다.

'나는 마도사가 아니지만....'

마도를 흉내 낼 수는 있다.

삼원색의 중심.

각 원소 마법의 특징을 추출해 새로운 마법을 구현하는 아티팩트. 그와 더불어, 마탑주의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 갈고닦은, 완벽에 가까운 마력 조작 능력까지.

'실패할 이유는 없다.'

베르덴이 중력 마법의 특징을 추출했다.

그러고는 에드몬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마력과 결합시켰다.

───!

상당한 반발력이 일었다.

그러나 베르덴이 갖가지 특징을 결합시켜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베르덴의 주위로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뭔지 모를 감각에 에드몬에게서 의문이 떠올랐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상황을 역전하려 합니다."

"뭐?"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베르덴이 마력이 암자색으로 변화했다. 그러자 베르덴을 둘러싼 압박감이 사라졌고, 암자색의 마력이 녹색 마력을 단번에 짓밟았다.

"...?!"

에드몬이 눈을 부릅뜨며 저항했다.

그런데 무게감이 달랐다.

바람의 마력은 밀도를 집중시켜 압력을 높일 수 있지만, 중력은 그 자체로 무게이며 힘이었으니까. 짙은 마력이 에드몬을 에워쌌다.

베르덴이 검지손가락으로 에드몬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육중한 무게감이 에드몬에게 엄습했다. 이어 베르덴이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중압>

쿠웅───쩌저적!

중력의 마력에 짓밟힌 대지가 일부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중심.

에드몬이 무릎을 꿇으며 손을 땅에 짚었다.

"어??"

에드몬이 멍하니 목소리를 흘렸다.

그런 그에게 베르덴이 말했다.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

* * *

에드몬이 지면을 바라봤다.

잠시 이게 꿈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흙의 질감은 너무도 명확했다. 지면과 맞닿은 무릎이 욱신거리는 것도 말이다.

'뭐가 일어난 거지?'

압력이 느껴지더니 어느샌가 바닥과 가까워졌다.

중력 자체가 강화된 듯한 착각. 마치 이건... 에드몬이 시전했던, 마도를 이용한 마력 위압과 흡사했다. 아니, 속성만 다르지 아예 똑같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중력 속성이라니.'

분명 전격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었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전격과 중력, 두 가지 고위 속성에 적성이 있다는 건가?

갖가지 의문이 미친 듯이 솟아 나왔다.

에드몬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내가 졌다고...?"

에드몬이 당장 일어섰다.

퍼뜩 고개를 든 그가 베르덴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 도대체 어떻게...! 애셔, 자네 마도사였나?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자네에게서 마도사다운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렇다면 아티팩트? 방금의 중력 속성은 또 뭐냐? 아니, 그것보다 내 마력 위압을 어떻게 따라 할 수 있었던 거지?!"

에드몬이 다급하게 물었다.

물론 베르덴은 그에 걸맞은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마법사가 우쭐대며 자신의 수를 드러내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이건 에드몬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한 수 배웠습니다, 에드몬 로드리너. 그리고 돈은 잘 쓰겠습니다."

베르덴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 후 발걸음을 돌려 연무장 바깥으로 향했다.

"자, 잠깐만! 지금 어디 가는 겐가!"

"죄송하지만 돌아갈 시간입니다."

이미 하늘에는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까지 칼리아의 자택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지금 가도 촉박했다.

'술은 내일 마시는 게 좋겠군.'

샘웰의 술집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운좋게 금방 발견한다고 해도 간단히 술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애셔! 애셔! 잠깐만, 얘기를...!"

베르덴이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에드몬이 그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봤다.

이내 해가 모습을 감추며 밤그늘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서 있던 에드몬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 이런 천재를 보았나...."

상대적인 재능만 따지면, 지금까지 봐 왔던 마법사들 중 한 손에 꼽을 정도라고?

에드몬은 곧장 베르덴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그는 자신이 봐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재능만 믿고 날뛰지 않는다.'

그의 눈빛은 견고했으며 온종일 침착했다.

재능 못지않게 경험까지 쌓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노력가, 즉 괴물.

에드몬은 베르덴을 그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런데.

"...이걸 각하에게 어떻게 보고하지?"

베르덴이 어떤 마법사인지는 얼추 파악했다.

하지만 그 결과 밑천이 털리고, 1억 엘크까지 뜯겼다.

경악스러운 것과 별개로... 솔직히 말해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나서 놓고 한참이나 어린 마법사에게 제대로 당한 거였으니까. 이런 일은 에드몬에게 있어 난생처음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창피를 덜 수 있을까.

에드몬은 오랜만에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 * *

칼리아의 자택.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에는 칼리아가, 그 옆에는 베르덴이 자리를 잡았다. 둘은 장비가 아닌, 간단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렇게 고급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산미가 약간 높은 커피로 후식을 즐겼다.

그때, 칼리아가 개인 백지 수표 하나를 건넸다. 그 위에는 정확한 액수가 기입되어 있었다.

"먼저 약속했던 의뢰 보수다. 기본 4억에 추가 보수까지 합해 총 8억 엘크지."

"감사합니다."

베르덴이 수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외의 보수는 아직 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는 네가 이뤄 낸 결과에 어울릴 만한 게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가문에 직접 요청할 생각이다. 한 이틀 내지 사흘 정도면 정해질 텐데 기다릴 수 있겠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시간은 예상 범주였다.

"물론입니다."

"다행이군. 그럼 그동안은 여기서 지내도록. 머무는 동안은 제집처럼 사용해도 좋다."

"마당에서 훈련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식탁에 팔을 올린 칼리아가 턱을 괴었다.

"애셔, 너는 마법산데도 몸을 단련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군. 그렇다고 마법이 부족한 것도 절대 아니고. 나도 단련하는 걸 좋아하지만 너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겠어. 그런데 혹시 다른 취미는 없나?"

취미라....

굳이 꼽자면 마법 연구가 있긴 하나 이것도 결국 강해지기 위함이기도 하고. 단련의 범주를 벗어나는 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딱히 취미라고 할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인즈에 머무는 동안 계속 단련을 하며 지낼 생각인가?"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지인을 만날 생각입니다."

칼리아가 관심을 보였다.

"지인? 이곳에 아는 사람이 있었나?"

"조금 인연이 닿았습니다. 라인즈의 외곽에서 주점을 연다고 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 내일 찾아볼 생각입니다."

"호오, 주점이라. 이름을 물어봐도 괜찮겠나?"

"샘웰의 주점이라고 합니다"

도중에 바꿨을지는 모르겠지만.

"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 그나저나 일일이 확인하며 찾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필요하다면 내가 찾아봐 줄 수도 있다."

라인즈는 대도시다.

비행을 써 가며 확인한다면 모를까, 혼자 걸어서 가게를 찾는 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운이 좋지 않다면 도중에 지나칠 수도 있었고.

'그래서 수소문해 가며 찾을 생각이었는데.'

칼리아가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 정도야 쉬운 일이니. 그래서...."

식탁에서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아침이 밝아 왔다.

175화 샘웰의 주점 (1)

손상된 <유자의 로브>와 마흐바트의 가죽 장비를 칼리아의 집사에게 전달했다.

칼리아가 후작가 내에서 수리를 해 준다고 한 덕에, 따로 대장장이를 찾아갈 필요도, 돈이 나갈 이유도 없었다.

베르덴은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칼리아의 저택 마당.

가벼운 옷차림을 한 베르덴이 힘껏 내달렸다.

마법사가 육체를 단련한다 해도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부여 마법을 통한 강화가 아니라면, 기를 깨우친 자의 근력이나 속도 그리고 기민함 등을 따라잡는 건 역부족이다.

이것이 마력과 기의 차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력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체력이란 곧 전투의 지속 능력이며, 급박한 상황에서 판단력을 유지하는 힘이니까. 아무리 마력량이 많다고 한들 호흡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버리면 치명적이다.

"후우."

베르덴이 속도를 줄이며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몸을 푼 그가 자리를 옮겼다. 체력 훈련을 끝냈으니 다음으로 마력을 단련할 차례였다.

'이쯤이면 되겠군.'

정원의 구석에 있는 작은 공터.

그 중심에 선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가볍게 활성화했다. 전신에 흐르던 마력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거기서 일전의 감각을 떠올리며 마력의 성질을 차츰 변화시켰다.

에드몬 로드리너의 방식을 모방한 새로운 마법.

화륵.

허공 위에 작은 불꽃이 생겨났다.

어제와 달리 중력 속성이 아닌, 화염 속성으로 마력 성질을 변화시킨 결과물.

베르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얼음, 대지, 바람, 전격 등 여러 가지의 속성을 다루며 성질 변화를 시험했다.

베르덴의 뜻대로 움직이는 원소.

위계의 틀에서 벗어난 움직임은 확실히 다채로웠다.

다만 베르덴의 표정은 미묘했다.

'용도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직접 실전에서 활용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군.'

에드몬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켰다.

범위 내에 있는 존재들을 바람의 칼날로 난도질할 수도 있고, 베르덴이 당했던 것처럼 바람의 밀도를 높여 상대를 구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베르덴에겐 그런 활용법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복잡할 것 없이 이유는 간단했다.

베르덴은 마도사가 아니었으니까.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구현한 마도는 마력회로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이제야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과도하게 남발하면 위험하다.

그럴진대 혼돈으로 성질 변화를 한 마력을 상시 유지하는 건 제 살을 깎아 먹게 되겠지. 더군다나 그러한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부담감을 더욱 가중할 테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성질 변화를 유지하는 동안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력 위압을 사용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점을 무시할 정도로 큰 장점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베르덴이 내면을 관조했다.

간단하게 여러 속성을 변질시킨 정도로 마력회로가 뻐근해졌다.

'이래서야 메리트가 없지. 마력 위압만큼 비효율적이야.'

물론 실력이 낮은 상대를 제압하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른 실력자들에겐 거의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덴에게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상대에게는 역으로 빈틈을 드러내게 되겠지.

그럴 바에 마법 하나라도 더 날리는 것이 훨씬 유용할 것이다.

뭐, 나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점이 너무 크다.

즉, 전력 변화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로서 전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총 세 가지.

'첫째는 마도의 개척.'

명확하지만 가장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마도는 곧 깨달음.

이건 마법사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기에, 다른 마도사에게 조언을 구해도 쓸모가 없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더라면 세상에는 마도사가 더 많았겠지.

세상은 마법사와 마도사를 서로 구분 짓는다.

누군가는 금방 깨달음을 얻고 누군가는 평생 깨닫지 못하니까. 그리고 그 숫자는 후자가 훨씬 많았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벽은 억지로 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마도를 개척하는 건 기약할 수가 없다.

첫 번째 방법은 당장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 다음으로.

'둘째는 위계 자체를 높이는 것.'

현재 베르덴의 경지는 5위계 하위.

다음 단계인 중위에 올라서려면 마력회로를 더욱 확장해야 한다. 마력량은 이미 충분하고도 넘쳤으니.

물론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성장은 하루아침에 달성할 게 아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기물(奇物)이 필요하다.

과거 3위계에 머물러 있던 베르덴을 단숨에 4위계 중위로 끌어올려 준.

블랙 아워의 창시자 중 1인인, 현인 하르칸 다제스트가 성신 마법과 함께 주었던 포션이나 마핵과 비슷한 것이 없다면 말이다.

외적인 도움이 없다면 꾸준히 마력회로를 확장해야 한다.

베르덴이 단련을 하고 생사를 다투는 전투를 벌인다 한들 단번에 경지를 껑충 뛰어오르는 건 무리다.

거기다 애초에 5위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건 기약할 수는 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

두 번째 방법 또한 현재로서 전력 강화를 이루기엔 부족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강력한 마법 물품이나 아티팩트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주목하는 건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와 마도왕의 무덤이다.

하나는 마탑의 보물들을 사용해 새로운 스태프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도왕의 유물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이건 다른 방법들에 비해 현재에 가까웠으며 실시간으로 단서를 찾고 있는 중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

'기대되는군.'

베르덴은 다시금 목적을 상기했다.

그가 이토록 정진하는 동안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는 무너진 마탑을 재건하고 블랙 아워와 전쟁을 치르느라 정체되어 있을 것이다.

마탑주 자신이 쌓아 올린 걸 전부 무너뜨리려 하는 마법사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베르덴은 너무도 궁금했다.

언젠가 마탑주가 베르덴을 다시 봤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리고 그토록 하찮게 보던 실험체에게 짓밟히는 놈의 심정이 어떨지 말이다.

터벅. 터벅.

공터를 뒤로한 베르덴이 칼리아의 자택으로 향했다.

이것으로 오늘의 단련은 끝.

이제 로아프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만날 차례였다.

* * *

칼리아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샘웰의 주점이란 이름은 라인즈의 상회에 등록이 되어 있긴 하나, 아직 개점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기야 라인즈에 온 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으니, 그동안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겠지.

주거 문제나 음식점 임대부터 시작해, 식재료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거래처를 구하는 등 말이다.

'이 근처일 텐데.'

라인즈의 외곽.

인적이 별로 많지 않은 거리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샘웰의 주점'이라는 간판이 건물 벽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건물 자체는 평범한 크기다.

외관만을 봤을 때, 주점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직 준비 중이니. 바깥에 야외 테이블을 마련하거나 하면 한결 나아지긴 하겠지.

베르덴이 문 앞에 다가섰다.

가볍게 문고리를 당기자 도어 벨이 울렸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나쁘지 않군.'

테이블의 숫자가 적당하면서도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되어 있었다. 카운터에는 개인이 앉기에 적합한 바(bar)가 만들어져 있었고.

넓지 않은 공간을 잘 활용했다.

'생각해 보니 로아프라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인테리어인 것 같은데.'

베르덴이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인기척을 내 봤지만 주방으로 보이는 방에서조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을 걸 보면, 잠깐 자리를 비운 건가?

구석에 자리를 잡은 베르덴.

잠시 기다리자,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으. 샘웰 형, 이거 장식물치고는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괜찮아, 괜찮아. 내 생각대로라면 분명 손님들에게 먹힐 테니까.

───으음... 일단 알겠어요. 이상하다 싶으면 제 방에다 걸죠, 뭐.

샘웰과 에이든.

이내 도어 벨이 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샘웰은 유리로 감싼 마석등부터 시작해 각종 장식물이 담긴 바구니를 안고 있었고, 에이든은 한 손에 두꺼운 책을 든 채 다른 손엔 장식물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양이 많은 탓에 둘은 거의 앞조차 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주점 안으로 들어오던 그때, 샘웰이 실수로 발을 헛디뎠다.

"아, 안 돼!"

샘웰에게서 벗어난 바구니들.

깨지기 쉬운 장식물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샘웰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무리였다.

<염력>

에이든이 곧장 마력을 일으켜 1위계 마법, 염력을 시전했다.

하지만 연산도 느린 데다가 숙련도까지 미숙한 터라 마석등 하나를 붙잡는 게 전부였다.

곧 대참사다.

에이든과 샘웰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기다려 봐도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 샘웰이 놓쳤던 모든 것이 전부 허공에 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둥둥 떠다니던 장식물들이 바구니에 담겼다.

그리고 그 바구니들은 주점 한곳에 천천히 안착했다.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샘웰과 에이든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아직 개점하려면 며칠 기다려야 한다. 당연히 손님이 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둑이나 강도인 건가? 암흑가 로아프라에서 살아온 샘웰이 꿀꺽 침을 삼켰다.

하지만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그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에 봤던 장비 대신 고급 의복을 입고 있었으나.

잿빛 머리와 특유의 벽안. 그 특별한 외모와 강렬했던 마법의 인상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애, 애셔 님?"

"애셔 님이요?"

샘웰의 말에 에이든이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베르덴임을 알아본 에이든이 후다닥 달려왔다.

"오, 오, 오랜만이에요, 애셔 님!"

에이든의 반응은 격했다.

사실 당연하긴 했다. 로아프라에서 불법 노예가 되었던 그를 해방시켜 주고, 안전한 로아프라에 데려다줬을 뿐만 아니라 특이 형질을 숨기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으니까.

그야말로 평생의 은인이었다.

"그래."

베르덴이 답했다.

뒤이어 샘웰이 다가왔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애셔 님. 순간 강도인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고 찾아 주실 건 알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라인즈에 올 일이 생겨서 들렀다. 그런데 개점 준비로 바빠...."

"아이고, 아닙니다. 아직 개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거의 막바지거든요. 인테리어만 하면 됩니다. 애셔 님 한 분 대접해 드릴 준비는 충분하고도 넘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군. 그런데 샤를로트는?"

에이든이 답했다.

"누나도 곧 돌아올 거예요. 두 시간 전에 교회에 들렀다가 장을 보고 돌아온다고 했었거든요."

에이든의 표정은 밝았다.

샤를로트의 목이 정상적으로 치료되고 있는 듯했다.

샘웰이 테이블의 의자를 당겼다.

"여기 앉으시죠. 제가 금방 대접을... 아, 지금 음주 가능하십니까?"

베르덴이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좋은 걸로 부탁하지."

"하하, 물론입니다. 제가 숨겨 둔 레시피 중 하나를 보여 드리도록 하죠. 에이든, 잠깐 도와줘."

"알았어요, 형!"

"아, 그런데 안주는 조금 이따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술은 제가 잘 만들지만, 요리는 저보다 샤를로트가 아주 잘해서 말입니다."

시간은 있다.

그 정도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깨까지 내려앉은 갈색 머리칼.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자, 샤를로트가 교회로 향했다.

라인즈에 이주한 뒤로부터 치료를 이어 나간 덕분에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혹시 모를 후유증을 대비해 지속적인 검사가 필요한 터라 주에 1번은 담당 성직자를 만나야만 했다.

그런데 교회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주하다고 할까, 어수선하다고 할까. 이제까지 봐 왔던 교회와 사뭇 달랐다.

샤를로트가 담당 성직자와 만났다.

"어서 오세요, 샤를로트 님."

성직자 카를로.

그가 지친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카를로 성직자님. 저,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중한 환자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밤낮 구분 없이 교대로 치료를 하느라 교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중한 환자라니?

근처에 무슨 사고라도 터진 건가?

"혹시 언데드 사태와 교구 습격 사건에 대해서 아십니까?"

샤를로트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두 사건은 현재 왕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날마다 신문에 상황이 게재되고 모든 도시 곳곳에 소문이 쫙 퍼졌다.

한적한 시골에서 살면 모를까, 도시에서 산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로난데르크 주교님과 교구의 성기사단 그리고 칼리아 영애가 이끄는 백결 기사단이 주범을 처단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중상자가 많이 발생한 터라 현재 라인즈에서 치료 중에 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

샤를로트는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한 사태를 일으킨 자들을 처단한 강함.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용기. 남동생 하나 지키지 못한 그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노예에서 벗어난 샤를로트는 언제나 품속에 작은 단검을 지니고 있다.

혹여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무력하게 당할 바에 조금이라도 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시골에서 살아온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많지가 않았다.

상념에서 깨어난 샤를로트가 다급하게 일어섰다.

"아, 바쁘실 텐데 제가 실례를 끼쳤네요. 검사는 다음에...."

"아닙니다.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제 신성력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금방 봐드리겠습니다."

카를로의 손끝에 노란빛이 흘렀다.

이어 샤를로트의 목을 살며시 누르며 그 내부를 찬찬히 확인했다.

카를로가 미소 지었다.

"거의 완치에 가깝군요. 이제 한두 번만 더 보면 더 찾아오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성직자님 덕분이에요."

'그리고....'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을 떠올렸다.

애셔와 갈리아크.

다친 목을 치료할 수 있는 헌금은 그 둘이 코스타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 속으로나마 다시금 감사를 전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해 주시니 보람이 있군요."

그 순간, 카를로의 배가 울렸다.

고된 치료 활동으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괜찮으시다면 저희 주점에 오셔서 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으실래요?"

"아, 크흠흠, 염치없치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카를로는 전에도 샤를로트에게 몇 번 대접받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요리 실력은 웬만한 음식점에 비해서도 월등했다. 특히나 야채볶음은 채식을 선호하는 카를로에게 있어서 별미였다.

샤를로트와 카를로가 활기찬 대로를 걸었다.

그녀가 간단히 장을 보는 동안, 배고픈 성직자는 대도시의 정경을 바라봤다.

'처음이야 갑작스러웠지만... 확실히 살기 좋은 도시야.'

카를로는 마을에서 라인즈로 강제 이송을 당했다.

그리고 라인즈의 교회에서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으로 라인즈에 파견되었고, 그가 있던 마을에는 다른 성직자가 가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건 아쉽다.

그래도 이것 또한 루아스 신의 뜻이리라. 카를로는 빛의 신에게 기도했다.

그렇게 장 보기를 마친 두 사람이 샘웰의 주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어...."

툭.

샤를로트가 장바구니를 떨어뜨렸다.

왜냐하면 샘웰과 에이든 옆에, 그렇게나 무서웠던 코스타를 단번에 처리한 마법사가 있었으니까.

"애셔 님...!"

목소리를 되찾고 만나는 건 처음이다.

이미 감사는 글귀를 적어 전했지만, 그럼에도 직접 목소리를 내어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샤를로트가 당장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베르덴을 알아본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저, 저, 저 사람은...!'

성직자 카를로는 과거를 떠올렸다.

라인즈에 오기 전, 그 추운 날.

마을의 교회에서 웬 마스크를 쓴 사내에게 납치를 당했고.

그렇게 타게 된 마차에서 중상을 입고 저주에 걸린 한 사내를 치료했으며.

그 옆에서 시도 때도 없이 기절한 사람을 구타하는 한 마법사를 봤던 그때를.

당시 베르덴은 치료에 방해가 될까 봐 흑랑 토렐드를 기절시키고 있었다.

라인즈에 도착한 이후에 그 오해를 풀긴 했지만... 다른 사람을 때려 본 적조차 없는 카를로는 잊을 수가 없었다.

스태프로 사람 머리를 후려갈기는, 그 무감정한 얼굴을. 붉은 피를 보고도 변하지 않던 그 차가운 눈빛을.

이윽고 카를로가 베르덴과 마주쳤다.

순간 목을 움찔거린 그가 성직자다운 미소를 지었다.

"하하, 설마 샤를로트 님이 저분과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카를로 님도 애셔 님과 아는 사이셨나요?"

"전에 조금 인연이 있었습니다."

무슨 인연일까.

궁금해진 샤를로트가 물어볼 찰나, 카를로가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저 무서운 사람과 함께 밥 먹다간 체할라.'

정확히 주점 바깥으로 나간 성직자가 말했다.

"아, 저는 갑자기 바쁜 일이 떠올라서 이만."

"네? 무슨...."

"그럼 루아스 신의 빛 아래, 좋은 식사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카를로는 도망쳤다.

176화 샘웰의 주점 (2)

샤를로트가 멍하니 카를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그 시선을 베르덴에게로 향했다.

"카를로 님하고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베르덴이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왜 성직자가 도망쳤는지 대강 짐작은 가나 설명하기엔 너무 길었다. 베르덴이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목은 다 나은 모양이군."

"아, 네!"

샤를로트가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영영 목소리를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부를 뚫고 성대를 난도질하는 그 고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루아스교의 기적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았다.

시간을 들인 치료 끝에 성대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기 흉한 흉터마저 사라졌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애셔 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신경 쓰지 마라."

에이든과 샘웰을 포함해, 감사 인사만 벌써 십수 번째다. 이제는 반응하기도 지칠 정도였다.

'마치 콘라드와 얘기하는 것 같군.'

상인 콘라드의 입담을 떠올리며, 샘웰이 만든 칵테일을 들이켰다.

여러 과일의 달콤한 과즙과 럼주를 섞은 뒤, 레몬과 설탕을 추가해 단맛과 신맛을 끌어올린 술이었다.

샘웰이 이름 짓길, 일명 '럼 에피타이'.

맛도 맛이지만, 자극적인 게 입맛을 돋우기에는 훌륭했다.

그때, 테이블을 본 샤를로트가 깜짝 놀랐다.

"어? 안주가 없네요?"

"그게, 네 요리를 대접해 드리려고...."

"그건 진작 말했어야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 샤를로트가 당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샘웰이 요리를 돕기 위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식재료를 꺼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그렇게 베르덴과 에이든만이 자리에 남았다.

술잔을 비운 베르덴이 에이든에게 고개를 향했다.

주점에 들어올 때부터 들고 있던 책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그 책은 마법 기초 도서 중 하나군."

"네! 그동안 바빠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요."

에이든이 책을 보였다.

[오늘부터 너도 마법사]라는 제목.

마법학의 각종 기초 이론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는, 가성비를 중점으로 한 마법사 입문 도서였다.

물론 양만 많은 탓에 깊이가 깊지 않다.

베르덴처럼 마법 이론의 뿌리를 꿰뚫어 볼 줄 모른다면, 기껏해야 겉핥기식의 이론만을 배우는 게 전부겠지.

그렇다 해도 마법이 생소한 이들에겐 나름대로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너는 마법사가 될 생각인가?"

에이든은 마력을 다룰 줄 안다.

한참 미숙하지만 염력도 사용할 줄 알고. 엄연히 마법사의 범주에 들어간다.

당연하게도 베르덴이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마법사로서 살아갈 거냐는 뜻.

에이든이 책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지?"

"애셔 님 같은 마법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에이든은 줄곧 고민했다.

지금처럼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아니면 마법사의 길을 걸을지.

하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다.

특이 형질을 가진 에이든이었기에, 후자를 선택했다가 코스타와 같은 악인의 손에 걸려들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쉽게 마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암흑가 로아프라.

에이든은 그곳에서 절망을 깨달았다.

고통이 무엇인지.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죽이고 싶다는 게 뭔지.

죽고 싶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리고 그날, 에이든은 보고 말았다.

잔인한 코스타와 그 부하들을 상처 하나 없이 몰살해 버리는 압도적인 마법을.

코스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빈테르트의 간부들을 대면하면서 물러서지 않던 그 강함을 말이다.

'나도 강해지고 싶어.'

에이든은 베르덴을 동경했다.

물론 스스로도 그만큼 강해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꿈은 꿀 수 있지 않은가.

에이든은 언젠가 같은 상황이 왔을 때, 제 손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

베르덴은 조용히 에이든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잘게 떨렸지만 한없이 진지했다.

'지키기 위해 마법의 길을 걷고 싶다라.'

베르덴이 추구하는 바와 다르다.

그래도 썩 훌륭한 목표다.

동 등급 모험가 이리스.

미스릴 등급 파티의 겔톤.

특이 형질을 보유한 에이든.

베르덴은 이처럼 정석적인 배움을 바라는 마법사를 싫어하지 않았다. 몇 가지 조언을 해 주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다.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많다. 너에게 가장 가까운 건 바로 모험가 양성소겠지."

모험가는 범죄 경력이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지만 당연하게도 사망자가 많은 편이다. 그런 이유로 모험가 길드는 양성소를 설립했다.

보다 전문적인 모험가 교육을 통해, 사망자를 줄이고 베테랑 모험가를 키우기 위해서.

"그 대신 양성소에 들어가면 15년간 모험가로서 실적을 내야 한다. 즉, 투자를 받는 대신 강제성이 생기는 거지. 계약을 어기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위약금이요?"

베르덴이 액수를 말했다.

말 그대로 막대한 금액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비슷한 예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도 있다."

다만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중앙 대륙에 있는 아카데미로 가는 동안 많은 여비도 필요한 데다가 등록금까지 마련해야 한다. 입학시험에서 장학금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만 보고 도전하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돈이 없다면 귀족에게 후원을 받는 것도 방법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마법사의 제자로 들어가거나."

물론 마탑의 일꾼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당연하게도 베르덴은 절대로 추천하지 않기에 굳이 말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 방법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그들이 눈여겨볼 만한 재능을 증명하면 되는 거지."

에이든은 마력을 깨우쳤다.

남은 건 한계 위계를 확인하는 것뿐.

물론 검사 비용은 매우 비싸다.

거기다 아무나 해 주는 것도 아니기에 간단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 결과에서 한계 위계가 높게 나와야 한다.

5위계 이상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나처럼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건 드물다 못해 유일한 업적이었으니.

에이든은 물론이고, 베르덴을 제외한 모든 마법사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재능... 제 특이 형질도 그런 재능이 될 수 있을까요?"

"너도 알다시피 위험한 재능이다. 특이 형질을 보유한 마법사를 노리는 자들은 많으니까. 가능하면 특이 형질을 제외한 재능을 인정받는 게 최선이겠지."

으음....

입술을 달싹이던 에이든이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내가 말해 줄 게 아닌 것 같군."

샘웰, 에이든, 샤를로트.

라인즈에 도착한 후, 코스타의 재산을 나누어 치료를 포함한 자립 비용을 준 데다가, 안전하게 정착했는지 이렇게 확인까지 했으니.

베르덴은 책임을 졌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에이든, 네가 선택할 차례다."

기회가 왔을 때 붙잡아 불확실한 미래로 향할지.

그게 아니면 지금의 삶을 영위하며 보다 안전한 삶을 살아갈지 말이다.

뭐, 애초에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에이든이 선택하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타인에게 간섭당하기만 하면 결국 자립심을 잃어버리고 꼭두각시가 되어 버릴 테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에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게 맞겠지. 선택과 책임의 무게는 쉽게 입에 담을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에.

"자, 요리 완성되었습니다!"

그때, 샤를로트와 샘웰이 요리를 들고 나왔다.

샘웰이 미리 만들어 놨던 수제 소시지 구이와, 특제 양념을 바른 닭 오븐 구이. 그리고 곁들여 먹을 샤를로트의 야채볶음까지.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칵테일까지 나왔다.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시죠."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간단히 맛을 봤다.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운 그에게도 먹을 만한 정도였다.

"맛은 어떠신가요?"

"괜찮군."

"아, 다행이다...."

샤를로트가 안도했다.

혹시나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음식과 술 그리고 음료가 준비가 된 테이블.

네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았고, 샘웰이 분위기를 주도하며 갖가지 이야기를 재밌게 풀었다. 로아프라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에이든과 샤를로트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로아프라에 대한 트라우마는 없는 모양. 베르덴은 이따금씩 대화에 참석하며 술자리를 보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었다.

술잔과 접시가 완전히 비었다. 그제야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가시는 건가요?"

"그래야지."

세 사람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베르덴이 돈을 꺼냈다.

"아, 안 주셔도 됩니다! 제가 대접해 드린 거니까요."

"어차피 공돈이니 사양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마침 어제 1억 엘크가 우연찮게 들어왔으니까.

베르덴은 억지로 값을 지불했다.

대충 봐도 음식값을 넘는 액수. 지폐를 손에 든 샘웰이 조심스레 물었다.

"라인즈는 언제쯤 떠나십니까?"

"글세...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떠날 것 같은데."

"그렇군요. 그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상으로, 제대로 대접을 해 드리겠습니다."

베르덴은 알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잘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몇 번이고 찾아올 생각은 없었으니까. 샘웰의 칵테일과 샤를로트의 요리가 그립다면 또 모르겠지만.

"약속은 못 하겠군."

"하하, 그럼 나중이라도 괜찮습니다. 애셔 님에게 이곳은 항상 열려 있으니, 편하실 때 언제든 방문해 주시길."

"나중에 꼭 들러 주세요!"

그렇게 베르덴은 세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샘웰의 주점을 떠났다.

* * *

라인즈에 온 지 어느덧 나흘 가까이 지났다.

여전히 중상을 입은 자들은 요양을 하며 부상을 회복하는 데 전념했다.

먼저 로난데르크 주교.

신성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그는, 의식이 잠깐 돌아오긴 했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잃었다. 상태를 보아 더욱 깊은 휴식이 필요했다.

단검에 등을 꿰뚫린 바이델르 주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글로스 단장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난동을 일으켰다.

하기야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의 기억은 그림 리퍼를 상대하던 도중에 멈춰 있었으니까.

직후 상황을 전달받고는 안정을 되찾은 글로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잘린 건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루아스교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신체 결손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흑마법사 워렌스.

베르덴 덕분에 저주에서 벗어났지만, 정신이 너무도 망가져 있어 자연적으로 회복하긴 무리였다.

다른 도시에 파견되어 있던 데헤른 말다니아 주교가 면밀하게 치료를 진행했지만 차도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소견이었다.

그동안 베르덴은 칼리아의 저택에서 지냈다.

정해진 루틴을 반복하며 나날을 보내던 중,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애셔, 너에게 줄 새로운 보수가 준비되었다. 가문 내부에서 길게 회의를 하느라 많이 늦었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고맙군. 그런데 하나 문제가 있는데... 내가 직접 너에게 보수를 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보수가 큰 만큼 나보다 권한이 높은, 가문 내의 다른 사람이 나서게 되었지."

"그렇다면...."

"그래."

칼리아가 말했다.

"아버지가 널 직접 보자고 하시는군."

* * *

남색의 하늘이 비치는 초저녁.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계절의 바람이 선선하게 흘렀다.

베르덴이 바깥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안내해 줄 사람이 찾아왔다.

"허허허, 며칠 만이군. 애셔."

에드몬 로드리너.

그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에드몬 님."

"아니, 안녕하지 못했네. 자네에게 밑천을 털리고, 1억 엘크까지 뜯긴 터라 마음이 너무 아팠거든. 그런 와중에 각하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지 아나?"

에드몬이 우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그 말과 반대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신비한 무언가를 발견한 마법사처럼 말이다.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잡담은 나중에 해도 되니 당장 날 따라오도록 하게. 각하께서 기다리시니까 말이야. 허허허!"

에드몬이 웃으며 앞으로 향했다.

베르덴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고, 잠시 후 고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주변으로 시선을 향하자 후작가의 문장을 짊어진 기사들이 미동도 없이 도열해 있었다.

'후작 직속의 기사단인가.'

상당한 기세다.

칼리아의 백결 기사단보다도 한층 더.

"후작가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인 '붉은 신념'일세. 왕국에서 서열을 따지면, 왕가의 근위 기사단하고 비슷한데, 특히 단장은 나라고 해도 느슨하게 대했다가 큰코다칠 정도지. 자, 들어가세."

베르덴과 에드몬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거닐던 끝에 정교한 장식이 가미된 문이 나타났다. 에드몬은 노크를 하지도 않고 곧장 문고리를 잡아 앞으로 밀었다.

기다란 식탁이 있는 걸 보아, 식당인 모양.

고개를 앞으로 향하자 식탁 반대편에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칼리아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외모.

당대의 에스퍼렌사 후작.

그에 대한 베르덴의 첫인상은 한마디였다.

'강하다.'

귀족에는 총 세 부류가 있다.

권력자이자 위정자로서만 살아가는 귀족.

가문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스스로의 강함을 단련하는 귀족.

아니면 둘 모두에 해당하는 귀족까지.

에스퍼렌사 후작은 세 번째임이 분명했다.

단순히 느껴지는 분위기만 따지면, 진심을 드러낸 마도사 에드몬과 우열을 가릴 수 정도.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드높은 권위가 담겨 있었다.

후작의 눈동자가 베르덴을 훑었다.

이내 눈썹을 씰룩인 그가 가볍게 턱짓했다.

"맞은편에 앉도록 하게."

에드몬의 말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 뒤에 후작이 입을 열었다.

"칼리아가 너에게 꽤나 신세를 졌더군. 먼저 그에 대해 감사를 전하지."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 자기소개는 필요 없다.

후작은 바로 본론을 원했고, 베르덴은 이에 응했다.

"의뢰의 일환이었습니다."

"네가 한 일은 의뢰를 넘어선, 정확히 의뢰자인 칼리아가 바랐던 결과 이상을 냈다. 그러니 보수 또한 약속된 것을 넘어선 것을 주는 게 도리겠지."

베르덴과 후작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마법사 애셔, 에스퍼렌사 후작가에서 너에게 세 가지 보수를 하사하겠다. 이건 그중 첫 번째다."

후작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에드몬이 자신의 공간가방에서 기다란 금속 상자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

에드몬이 손끝에 마력을 흘려 입구에 갖다 대었다.

아티슨 마탑에서 제작한, 특수한 마법진에 개인의 마력을 등록하여 사용하는 고도의 보안 장치. 이내 마법진이 기동하며 굳게 닫혀 있던 상자가 열렸다.

'저건....'

에스퍼렌사 후작가에 보관되었던 마법 물품.

'기묘한 장식이 새겨진 회색의 가죽 방어구'가 베르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77화 보수 그리고 의뢰

상‧하의로 나뉜 회색 가죽 방어구.

에드몬이 방어구를 잡은 쪽을 보자, 얇고 부드러우면서 질긴 듯한 질감이 눈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중심을 기점으로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문양과 장식. 결코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디자인 자체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마법 물품.

그것도 양산품 수준이 아니다.

리비안트 공왕에게 받은 <유자의 로브>와 같이 고유한 마법 물품임이 분명했다. 실험체로서 수많은 마법 물품을 감정해 온 베르덴의 눈썰미는 날카로웠다.

크흠.

목을 가다듬은 에드몬이 말했다.

"이건 '마법사의 회한(悔恨)'이란 이름을 가진 매직 아이템일세. 보다시피 평범한 물건은 아니지. 마법사라면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내력을 가지고 있네."

마법사는 강력한 존재다.

하나 무방비 상태에서의 대처 능력은 전사에 비해 떨어지기에, 기습에 매우 취약하다. 사실 마법사라면 응당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아주 흔하디흔한 약점이다.

그래서 각종 마법 물품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고.

"물론 자네도 알다시피 입맛에 맞는 성능 좋은 매직 아이템을 구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런 이유로 장인들을 찾아가 자신이 원하는 매직 아이템을 주문 제작 하는 것이고. 옛날, 어떤 부여 마법사도 그중 하나였네."

부여 마법사는 망설이고 또 고민한 끝에 전 재산을 투입해 방어구를 주문했다, 마법사가 가진 근본적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직접 재료를 구하기도 하고, 장인의 설계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갖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 부여 마법사는 자신의 눈으로 완성품을 볼 수가 없었네. 방어구가 완성되기 전날, 암습을 당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지.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것 쏟아부었는데, 결국 그 약점 때문에 죽었다니 말일세. 그리고 부여 마법사가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더군."

───하루만 덜 망설였다면....

"후회와 한탄. 마법사가 남긴 건 그게 전부였네. 그 후, 그와 제작을 함께했던 장인은 마법사의 죽음을 기리며 방어구에 그러한 이름을 붙였고, 여기저기 떠돌던 끝에 이 자리에 오게 되었지. 참으로 재미있는 내력이지 않은가?"

에드몬이 마법사의 회한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애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남긴 유언대로 하루 일찍 결정을 내렸더라면...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갑작스러운 질문.

에드몬과 후작의 시선이 베르덴에게로 향했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덴이 곧 대답했다.

"언제 결정을 내렸든 간에 부여 마법사는 죽었을 겁니다."

"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어차피 범인은 같기 때문입니다."

"범인이라면... 장인을 말하는 것이겠군."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구가 완성되기 전날에 죽임을 당한 부여 마법사.

아주 공교롭긴 하지만... 단서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다른 흉수가 손을 썼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베르덴이 주목한 건 그게 아니다.

바로 마법사가 남긴 유언.

그렇게 이야기를 갖게 된 방어구의 가치는 당연하게도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 제작 비용은 부여 마법사가 대부분 부담한 상황.

장인의 입장으로 생각해 봤을 때.

마법사를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그가 죽으면, 제작자인 장인에게 방어구의 소유권이 이전될 테니까.

단 한 번의 살해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스퍼렌사 후작이 물었다.

"애초에 그 장인을 선택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건가?"

"정보가 더 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납득이 가지 않은 건 아니다만... 장인이 단순히 이득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건 비약적이지 않나? 자칫하면 지금까지 일궈 온 모든 걸 잃을 텐데 말이야."

"그만큼 탐이 났다는 걸 겁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장인이 마법사의 유언을 지어냈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작이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너는... 인간을 믿지 않는군."

"믿되 신뢰하지 않을 뿐입니다."

베르덴은 단언했다.

그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담겨 있었다, 마치 과거에 배신이라도 당한 듯.

정적이 내려앉았다.

에드몬은 헛기침을 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허허... 망설임이 아닌, 장인을 신뢰했던 것에 대한 한탄이라. 자네는 확실히 다르구만그래. 다른 사람들은 보통 '나는 망설이지 말아야지.'라며 교훈을 얻는데 말일세.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었네. 그럼 이제 성능에 대해 말해 줄 차례로군. 어디 보자, 감정서가...."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직접 감정해 봐도 되겠습니까?"

직접?

"아니, 자네 감정도 할 줄 아나? 그건 재능이 아니라 아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 법인데... 대체 그 나이에 무슨 삶을 살아왔던 건가?"

"스승님이 가르쳐 줬습니다."

"오오, 스승이라. 역시 그랬나. 하기야 독학일 리가 없지. 그나저나 자네와 같은 마법사를 키우다니, 아주 고명한 분이겠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엄하기도 할 테고. 한번 만나 보고 싶구만."

물론 에드몬의 바람이 이뤄질 일은 없다.

스승이란 존재는 그저 애셔의 배경 설정이었을 뿐이었으니까.

"좋다. 직접 감정해 보도록."

에스퍼렌사 후작이 허락했다.

마법사의 회한을 건네받은 베르덴이 자그마한 마력을 일으켰다.

<감정>

◇ 마법사의 회한

⦁ 물리 저항(중상).

⦁ 자동 강화 마력 방벽 활성화.

⦁ 부여 마법 등록 (0/3).

'...!'

성능을 확인한 베르덴이 내심 감탄했다.

먼저 중상급에 달하는 물리 저항력.

현재 착용하고 있는 마흐바트의 가죽 장비를 월등히 넘어선다.

그리고 자동 강화 마력 방벽.

감정을 해 본 결과, 작년 글러트니의 송곳니에게 부서진 보호의 목걸이보다 성능이 배 이상 뛰어나다.

평상시에 마력으로 이뤄진 벽을 두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부여 마법 등록.

말 그대로 최대 세 가지의, 시전자를 강화하는 부여 마법을 사전에 등록해 놓고, 원하는 때에 마력을 소비해 동시에 적용하는 기능.

마법사의 부여 마법 역량이 중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주 보기 드문 성능이다. 어째서 장인이 탐을 냈는지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속성 저항이 없는 건 아쉽긴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훌륭하다.

베르덴이 만족할 정도로 말이다.

"자네가 부여 마법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고 하기에 준비한 물건이네. 그 외의 성능 면에서, 평소 자네가 입고 다니는 가죽 방어구보다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것이지.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듭니다."

"허허허! 당연히 그래야지! 마법사라면 당연히 욕심이 나는 매직 아이템이긴 하지만, 나는 부여 마법에 그리 조예가 깊지 않아서 말이야. 나에게는 과한 물건이지. 자네가 부러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아, 예. 각하."

웃음기를 지운 에드몬이 두 번째 보수를 꺼냈다.

직전과 마찬가지로, 아티슨 마탑의 보안 상자가 나왔다. 대신 그 크기는 기껏해야 사람의 머리 정도.

이내 상자가 열리자,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마석 두 개가 나타났다.

정밀하게 세공된 마석.

그 수준은 베르덴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하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기 마석 위에 새겨진 두 개의 문자. 베르덴에게도 익숙한 형태의 것이었다.

'룬 문자...?'

후작이 내놓은 두 번째 보수는 바로 룬 문자.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 * *

두 개의 룬 문자는 전체적인 외형은 흡사하면서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엑시드와 오큘러스.

베르덴은 두 개의 고등 룬 장비를 다루고 있지만, 룬에 대한 지식은 얕은 편이었다.

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할 수도, 어떤 기능을 하는지도 읽어 낼 수도 없는 데다가 룬을 깨우는 방법 또한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게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설마... 룬 세트입니까?"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지식이 상당하군."

후작이 대답은 곧 긍정이었다.

그 사실에 베르덴의 눈썹이 작게 떨렸다. 그건 바로 경악이었다.

룬은 보통 단일로서 성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두 가지 존재한다.

룬 장인이 서로 다른 룬 문자를 연결해 성능을 합성시키는 것.

그리고 룬 문자 자체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자체로 성능을 발휘하는 것. 위 두 가지다.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고등'으로 분류된 룬 문자 세트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집중'과 '방출'의 성능을 지니고 있지. 조사 결과, 자신이 가진 기, 마력 혹은 신성력을 집중시킨 뒤 방출하여 강력한 파괴력을 낸다고 하더군. 대신 그만큼 다루기가 매우 까다롭지."

룬 문자는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반드시 그에 걸맞은 밑바탕, 즉 장비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룬 문자 세트는 단일로서는 무용지물.

성능을 발휘하려면 한 장비에 순서와 간격을 정확히 지켜 이식해야 하는데, 당연하게도 그걸 해낼 수 있는 룬 장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시대에 룬 장비를 제작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을 찾아야 되겠지."

"드워프 말입니까?"

"그래. 대륙의 서남쪽에서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하는데, 왕국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접하기가 쉽지 않지. 설령 만난다고 해도 타 종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니 응해 줄지도 의문이고."

거기다 룬 문자 세트의 힘을 견딜 만한 장비가 필요하다.

적어도 최상위 금속이 태반 이상 함유되어 있지 않는다면 부서질 가능성이 높다. 설령 버틴다고 해도 내구도가 급격하게 닳을 것이고.

자칫하면 룬 문자 세트와 장비를 둘 다 잃어버리게 되는 대참사가 날 수도 있다.

"한마디로 무기화하기에는 리스크가 매우 크다. 그러니 룬 문자 세트는 후작가에 있어서 아주 값비싼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셈이지."

그래서 보수로 내놓았다는 건가.

하지만.

"제게 주는 것보단 판매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왜. 보수로서 너무 과하기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마법사의 회한.

그리고 룬 문자 세트.

베르덴은 둘 중 하나만 줬어도 납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자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마다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다른 법이지. 특히나 내게 있어서 칼리아의 목숨값은 결코 적지 않다. 저 갑옷과 룬 문자 따위보다도. 이제 이해가 되겠나?"

진중한 음성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베르덴은 어렴풋이 에스퍼렌사 후작이 어떤 인물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르덴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허, 예의도 바르군. 그럼 이제 마지막 보수만이 남았...."

"잠깐."

후작이 에드몬을 제지하고는, 톡톡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들겼다.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모습.

곧 판단을 내렸는지 손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에드몬, 마지막 보수를 변경한다."

"네? 각하, 그 뜻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작.

그가 정확히 베르덴의 눈을 응시했다.

"사족은 떼어 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애셔,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의뢰가 하나 있다."

...갑자기 의뢰라.

상황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나, 베르덴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무슨 의뢰인지 들어 볼 수 있습니까?"

"한번 들으면 돌이킬 수 없는 사안이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네가 칼리아에게서 받았던 의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물론 거절을 한다고 해도 원래 정해져 있던 세 번째 보수는 당장 주도록 하겠다. 또한 그 외 어떠한 간섭도 없을 거라고 약속하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베르덴은 신중히 생각했다.

후작의 의뢰를 받을지 말지.

판단은 곧 내려졌다.

"듣겠습니다."

안 그래도 너무도 과한 보수를 받은 상황.

상대가 먼저 호의를 보여 준 이상, 베르덴도 그에 맞춰서 대할 뿐이다.

물론 의뢰 내용을 납득할 수 없다면, 설령 협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거절할 생각이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

'상대는 칼리아의 아버지인, 에스퍼렌사 후작이니까.'

"시원스러운 대답이군. 나쁘지 않아. 칼리아가 왜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이해가 가."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식사부터 하도록 하지. 왕가와 관련된 사안이라 얘기가 꽤나 길어질 테니."

178화 떠나기 전날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코스 요리를 차례로 선보였다.

맛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건 적절한 시간에 맞춰 다음 요리가 준비되는 것이었다.

개개인마다 음식을 소비하는 속도가 다른데도, 모두에게 거슬리지 않는 시간 간격.

요리와 서빙.

둘 다 전문적인 걸 넘어서 최고의 영역이었다.

"...."

후작, 에드몬, 베르덴.

위 세 사람은 식사 도중에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는 식사에만 집중하는 것.

칼리아를 떠올려 봤을 때, 에스퍼렌사 후작가는 귀족의 정통 식사 예절을 고수하고 있는 듯했다. 베르덴은 익숙하다는 듯 그 분위기를 따랐다.

이어지는 조용한 식사.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정적 속에서 베르덴은 곰곰이 생각했다.

'왜 에스퍼렌사 후작은 마지막에 보수를 변경한 걸까.'

에드몬의 반응으로 보아, 미리 정해진 각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는 건 도중에 후작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한 기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마법사의 회한에 담긴 이야기.

그것을 듣고 베르덴이 의견을 내비치자 가장 먼저 후작이 반응했다.

그렇다는 건.

'내 생각을 물어본 것 자체가 하나의 시험이었나.'

이유야 간단했다.

바로 성향이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서겠지.

후작은 베르덴의 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인간인지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야기를 통해 심리를 직접 알아본 것일 터.

베르덴은 의도하지 않게 그 기준점을 넘어선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의뢰이길래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왕가란 단어가 나온 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사안임은 분명한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있자, 어느새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직후 사용인들이 찾아와 빈 그릇을 회수하고는 후식 메뉴에 대한 목록을 가져다주었다.

케이크나 커피.

그 평범한 이름들 사이에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술...?"

그 반응에 후작이 답했다.

"나는 식사 뒤, 입안을 개운하게 하는 술을 즐기는 편이다. 그건 칼리아도 마찬가지지. 추천은 하지만 익숙하지 않다면 다른 걸 골라도 좋다."

"각하, 저는 술을 마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메뉴를 골랐다.

무언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저도 같은 걸 고르겠습니다."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곧 사용인이 세 개의 유리잔과 한 병의 술을 가져왔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병.

마개를 개봉하자 달짝지근한 향취가 식당 안에 감돌았다.

사용인이 물러가고, 에드몬이 염동력으로 병을 들어 올렸다.

"이건 이형종 '그린 호넷'이라는 벌의 둥지에서 채취한 꿀과 최고급 위스키 원액을 혼합한, '롱 워튼'이라는 술일세. 워낙 만들기가 어려워, 이 한 병에 무려 5억 엘크가 왔다 갔다 하지. 각하, 한잔 받으시죠. 자네도 한잔 받게."

"감사합니다."

유리잔의 밑잔을 채운 위스키.

후작과 에드몬이 먼저 마시는 걸 확인한 뒤, 베르덴도 그 뒤를 따랐다.

'...!'

꿀이 들어가서 그런지 약간 걸쭉한 느낌.

처음으로 느껴진 맛은 혼탁했으나, 쓴맛이 사라지자 은은한 단맛이 퍼지며 미각을 휘감았다. 이내 목 뒤로 넘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사라졌다.

오히려 개운함이 느껴졌다.

'놀랍군.'

마탑에 있던 시절에도 이런 술을 접한 적은 없었다.

이형종에게서 채취한 소재로 만든 술이라... 누군가에는 꺼림칙함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이 맛과 향은 진짜였다.

술 한 병에 5억 엘크를 줘도 이해할 만큼.

"허허허, 표정을 보니 술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래도 한 잔으로 참아 주게. 이건 각하께서도 아주 아끼시는 술이라 중요한 때가 아니면...."

"에드몬."

후작의 눈빛에 에드몬이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럼 후식까지 마쳤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먼저 물어보겠는데, 자네는 왕가의 파벌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알고 있나?"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대충이라. 그렇다면 내가 쉽고 간략하게 설명해 주겠네."

아아. 에드몬이 목을 풀었다.

롱 워튼에 섞인 꿀 덕분에 목소리가 한층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가 세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지금 차기 왕위에 가장 가까운 건 바로 세 명의 왕자들일세. 그들이 가진 세력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되지."

1왕자, 발르그나 베인 디 에스티리아.

주요 지지 세력, 암흑가 로아프라의 빈테르트.

2왕자, 로트닐 렌버 디 에스티리아.

주요 지지 세력,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들.

3왕자, 에버스 브륀 디 에스티리아.

주요 지지 세력, 조합.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흑마법사 집단, 주검의 영광.

"얼마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왕위를 노리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에 아주 개판이 나 버렸지."

왕국 남부에서 일어난 언데드 사태.

사망자 수는 이미 네 자릿수에 들어선 지 오래며 피난민은 수만에 육박한다. 그 피해자는 대부분 농민들이다.

하물며 왕국의 밥줄인, 곡창지대에 대한 피해가 매우 컸다.

언데드가 내뿜는 사기로 인해 죽어 버린 농작물과 땅.

그 피해를 회복하려면, 왕국만으로는 부족하고 루아스교의 힘을 빌려 최소 몇 년간은 정화에 힘써야 한다.

"왕국 남부는 비옥한 땅이었네. 그래서 1왕자와 2왕자가 기반으로 삼은 지 오래였지. 본래라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했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오히려 악재가 되었다는 겁니까."

"그렇지. 이건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걸세. 뭐가 됐든 영지가 피해를 입는다면 필연적으로 영주의 약화로 이어지니까."

"거기다 시민들을 버리고 도망친 귀족이 꽤나 많다고 보고되었다. 이후의 정쟁에서 그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지. 물론───"

후작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 사태를 일으킨, 빌어먹을 3왕자 또한."

"그래도 그 빌어먹... 아니, 3왕자는 지금 상황이 매우 안 좋네. 바로 자네와 칼리아 아가씨 때문에 말이야. 조합은 여기저기서 물어뜯겨 분해가 되었고, 그 주검의 영광이란 흑마법사 집단까지 사라지게 되었으니, 그 약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걸세."

그러니까, 즉.

"세 왕자가 전부 큰 타격을 받게 된 셈이지. 그럼 자네에게 묻겠네. 과연 이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본 자가 누구일까?"

베르덴이 왕가의 가계를 떠올렸다.

세 왕자 말고도 직계 혈족인 왕녀가 유력하긴 하지만... 아마 그녀는 아닐 것이다. 예전에 이지를 상실해 인형 왕녀로 불리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그럼 왕가의 친척들이겠군요."

"그렇지! 그들도 서열은 낮긴 하지만 왕위 계승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은 있네. 뭐, 워낙 세력 차이가 커서 아직도 눈치를 보는 판국이지만,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지. 여기까지가 지금의 판도일세. 겉으로는."

...겉으로는?

베르덴이 의문을 표하자 후작이 답했다.

"고위 귀족뿐만 아니라 다른 왕자들까지, 현재 왕위 다툼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지."

"그 말씀은... 이미 차기 왕위가 정해졌다는 겁니까?"

"그와 비슷하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가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

* * *

1왕자, 발르그나는 암흑가를 배후에 두고 있다.

권력을 위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며 세력을 일구었다. 그 기반은 다름 아닌 왕국 남부였는데, 이번 사태로 인해 세력이 일시적으로 붕괴가 되었다.

에스퍼렌사 후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곧장 암암리에 직속 기사들을 파견해 놈들의 흔적을 쫓았다.

그 결과, 그 세력의 간부 격 되는 인물을 아무도 몰래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작가의 가보인 '진실의 천칭'을 사용해 정보를 뽑아내는 데 성공하기까지.

"그러던 중 에스티리아 왕과 1왕자가 비공식적으로 몇 번이나 만남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1왕자에게 전달했다는 것까지. 그 정황만으로도 1왕자가 남다른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건 유력하지. 그러니...."

후작이 눈짓했다.

그러자 에드몬이 백색 가면을 꺼냈다.

이것이 세 번째 보수, '기만의 얼굴'.

착용한 순간, 다른 얼굴로 위장하는 것이 가능하며, 일정 이하의 마력을 은폐할 수 있는 희귀한 마법 물품.

"이 소유권을 너에게 양도하마. 그걸로 1왕자의 성에 잠입해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 알아 오는 게, 내가 너에게 요청하는 의뢰다."

의뢰 배경은 이해했다.

하지만 의문인 점이 있었다.

"그 가면을 통해 잠입하는 게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잠입하는 건 그렇겠지. 그러나 그 내부가 문제다."

1왕자는 과거의 수도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말해 왕국의 옛 왕성을 거처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왕성의 은밀한 장소는 고도의 마법진과 마법 물품으로 보호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후작가 내의 인물들 중에는 그러한 마법진을 파훼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의식장. 그 입구에 있던 고대의 마법진을 파훼한 너라면 다르겠지. 안 그런가?"

베르덴은 부정하지 않았다.

왕성의 마법진을 부수는 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의 장애물은 될 수 없을 테니까. 이건 자만이 아닌, 그저 사실이었다.

"보수는 무엇입니까?"

후작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가볍게 던졌다.

정확히 베르덴의 앞에 멈춘 것은, 고대에 사용하던 동전이었다.

"후작가의 힘이 필요하다면 그걸 보여라. 그럼 줄 것이다. 그게 돈이든 무엇이든."

보수는 선불.

무엇을 받을지는 직접 정하라는 건가.

참으로 귀족다운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궁금한 게 있었다.

"실례지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어째서 왕자들을 견제하시는 겁니까?"

"어째서냐라... 실로 간단한 이유지."

후작이 단언했다.

"지금의 왕자들은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1왕자는 오만하기 짝이 없고

2왕자는 성욕에 미쳐 있으며.

3왕자는 탐욕이 끝도 없다.

전부 제 능력보다 욕망을 우선시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왕국의 근간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후작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왕가의 친척들 또한 나은 인물은 없지만... 누가 왕위를 받든 간에 왕권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게 선결이다. 에스티리아 왕국이 국가로서 존속하려면."

"그렇다면 왕은 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피를 이어받은 것이 아닌, 보다 적합한 자가 왕위를 이어받아야겠지. 그나저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검붉은 시선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그에 답했다.

"수락하겠습니다."

베르덴은 망설임 없이 동전을 챙겼다.

의뢰를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왕가와 직접 관련되어 있긴 하나, 그 사실은 베르덴에게 어떠한 부담도 줄 수 없었다.

"좋아. 그럼 세부 계획은 너의 정보상을 통해 전달하겠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세른에서 대기하도록."

그렇게 후작과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 * *

"허허허. 조심히 가게나, 애셔. 다음에 보도록 하세."

에드몬의 배웅을 받은 베르덴이 건물을 나섰다.

잠시 돌이켜 보니 하나같이 생각을 벗어난 일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왕가와 직접 관련된 의뢰를 받은 것도 말이다.

'뭐, 나야 좋은 일밖에 없군.'

마법사의 회한, 룬 문자 세트, 기만의 얼굴.

당장 전부 쓸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베르덴의 전력이 더욱 높아지게 된 셈이다. 후작이 준 동전을 제외한다 해도.

베르덴의 발걸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그때, 마차 한 대가 옆에 멈춰 섰다.

자그마한 창틀에서 칼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와 얘기는 잘 끝났나 보군. 보수는 잘 받았나?"

"덕분입니다. 그런데 칼리아 님이 왜 여기에...?"

"너는 내일 아침 라인즈를 떠날 테니까."

확실히 베르덴은 라인즈에 더 볼일이 없었다.

보수와 의뢰를 받은 데다가 장비마저 수리를 마쳤으니. 이른 아침에 아세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한동안 부상을 회복하고, 너는 앞으로도 바쁠 테지. 그러니 당분간 못 보게 될 텐데, 이참에 송별회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송별회라.

"뭐, 싫다면 어쩔 수...."

"가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저녁은 할 일이 없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바쁘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문이 닫힌 지금, 오늘 밤까지는 칼리아의 자택에 머물러야 했으니까.

베르덴이 마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워낙 넓은 도시니 갈 데야 많지만... 네가 뭘 좋아할지 모르겠군. 아, 혹시 자네 지인이 하는 주점은 어떤가?"

"흐음...."

베르덴이 고민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되는지.

'아니, 상관없나?'

샘웰은 인테리아 작업을 제외하면 개점할 준비가 끝났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라인즈를 떠나기 전에 한번 방문해 달라고 하기도 했고.

오히려 샘웰에겐 좋을 기회가 될 것이다.

그가 만든 칵테일은 칼리아의 마음에도 들 테니. 홍보 효과로는 더할 나위 없겠지.

'에이든이 직접 드러내지 않는 한, 특이 형질이 발각될 일도 없을 테고.'

베르덴은 결정했다.

"아직 개점을 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인원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술맛은 어떻지?"

"헛걸음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호오, 그런가. 그거참 잘됐군. 베슬리, 샘웰의 주점 앞으로 부탁하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가씨."

칼리아의 마차가 움직였다.

그렇게 외곽에 도착하자, 어두운 거리에서 샘웰의 주점이란 간판이 마석등으로 은은하게 빛났으며, 문 옆에는 며칠 전에 보지 못한, 야외 테이블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 샘웰.

이내 마차가 멈춰 서고 베르덴이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애셔 님?"

"떠나기 전에 오라고 해서 왔는데, 괜찮은 건가?"

샘웰이 화색을 띠었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안 그래도 왠지 오실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차를 타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엔 동행이 있거든."

"동행이요?"

베르덴의 뒤로, 마차에서 한 사람이 더 내렸다.

검붉은 머리칼과 아름다운 외모.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잠깐, 설마....'

라인즈는 샘웰이 살아갈 도시.

암흑가에서 지내 왔던 버릇대로 정보를 수집했고, 저 여성의 저 인상착의 또한 들어가 있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귀족 중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

그 정체를 눈치챈 샘웰이 즉각 허리를 숙였다.

"샘웰이 에스퍼렌사의 고귀한 영애를 뵙습니다!"

그 인사에 칼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귀하다니. 오랜만에 들어 보는 거창한 인사군. 고개를 들어라."

"넵!"

샘웰이 곧바로 허리를 폈다.

"아직 개점을 안 했다고 들었는데, 찾아와서 미안하군. 그런데 애셔가 추천을 해 줘서 말이야. 나도 같이 들어가도 되겠나?"

생각은 짧았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샘웰이 바닥을 박차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 형? 무슨 일이에요?

───귀한 손님이 오셨다! 그러니 당장 널려 있는 거 치워, 에이든!

───손님이요? 혹시 애셔 님이 오셨나요?

───샤를로트, 질문은 나중에 하고 일단 불부터! 빨리!

건물 안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창문 너머로 보자 세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칼리아가 피식 웃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지인이군."

179화 비밀 사교장 (1)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이른 아침.

베르덴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마법사의 회한. 그리고 유자의 로브.

회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색감은 차가운 듯한 인상을 주면서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금속을 보는 것처럼.

'나쁘지 않군.'

베르덴이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착용감도 상당히 괜찮았다. 마흐바트의 가죽 장비를 입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내 채비를 갖춘 베르덴이 칼리아의 자택을 나섰다.

어제 샘웰의 주점에서 송별회를 했기에 작별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소란스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경비병의 안내를 따라, 베르덴이 성문을 통과했다.

어느 정도 라인즈와 멀어진 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향을 확인한 후, 구름 위까지 고도를 높이고는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비행주파>

베르덴이 하늘을 질주했다.

휴식은 취할 만큼 취했기에 컨디션은 최상.

전력으로 속도를 높인 베르덴은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세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문이 닫히기 전에 말이다.

베르덴이 아세른의 거리를 거닐었다.

'...뭔가 생소한 기분인데.'

하긴 이곳을 떠난 지 약 한 달 정도가 지났으니.

이번 흑마법사에 대한 토벌은, 베르덴이 해 왔던 일들 중에 가장 긴 의뢰였다. 물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페르네의 주점에 들어섰다.

사람이 없는 걸 보아 오늘은 쉬는 날인 모양.

베르덴이 인기척을 내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정령 블루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블루가 미약하게 반짝였다.

두려운 듯하면서도, 뭔지 모를 반가운 듯한 감정이 느껴지는 불빛이었다.

'...뭐지?'

두려운 건 이해하지만 반갑다니.

베르덴을 죽이려고 했던 정령을 되살려 주긴 했지만... 안전과 페르네의 경호를 위해 강제 마법진 콜젼(Coercion)으로 행동을 일부 제약했는데.

어째서 저런 긍정적인 감정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마력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건가?'

정령 블루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건 베르덴의 순수한 마력.

어쩌면 그 영향이 깊을지도 모르겠다. 아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윽고 연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여성이 나왔다.

페르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무사하셨네요."

"오랜만이군."

"...그리고 태연하신 것도 여전하시고요."

베르덴이 의자에 앉았다.

바(Bar)를 사이에 두고 페르네와 블루와 마주했다.

음료가 담긴 컵이 둥실 떠올라 베르덴 앞에 안착했다.

정령으로 서빙을 한다라. 그런 주점은 아마 이곳이 유일하겠지.

음료로 목을 축인 베르덴이 물었다.

"겔톤은 어디에 있지?"

"그 모험가는 아세른을 떠났어요. 왕국 남부에서 일어난 언데드 사태 때문에 모험가 길드에서 지원 요청 떨어졌거든요."

특히나 겔톤은 미스릴 모험가 파티의 일원.

그런 귀중한 전력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론 강의를 미루는 건 불가피했다. 본인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현재 남부 상황은?"

"수백이 뭉친 언데드 무리를 몇 개나 격파하면서, 언데드 군세는 와해를 시키긴 했는데. 그 탓에 언데드가 사방팔방 흩어져서 곤란해진 모양이에요. 뭐, 그래도 토벌이 귀찮아질 뿐이지, 언데드의 숫자가 줄어서 사상자가 확 급증할 일은 없을 거라네요."

이어 페르네가 서류를 하나 건넸다.

"그리고 이건 유물 탐사단이 보낸 탐사 보고서예요. 일자별로 정리해 뒀으니 보기 편하실 거예요."

"고맙군."

베르덴이 보고서를 훑었다.

현재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의 위치는 아르에곤산맥. 실종된 탐사단이 남긴 흔적 덕분에 일찌감치 테인체 구릉 탐색이 끝났는데, 산맥에서도 탐색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아르에곤산맥의 지형은 유적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다라....'

마도왕의 무덤이 과연 지형에 좌우될지는 의문이지만.

베르덴보다 전문적인 그들의 의견이 더 정답에 가깝겠지.

그런 이유로 탐색자들은 산맥을 통과해 마지막 탐색 장소이자, 왕국의 2대 금지 중 하나인 '동부 늪지대'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크게 단축됐다.

잘만 한다면 보다 이른 시기에 마도왕의 무덤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보고서의 내용이 만족스러웠다.

"그것 말고도 외수의 추적도 착착 진행되고 있어요. 진행 속도를 이대로 유지하면, 늦어도 두 달 이내에는 원하시는 정보를 손에 넣게 되실 것으로 보여요."

"그거 잘됐군."

소식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이었다.

"그럼 알려 드릴 건 다 알려 드렸으니... 저도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페르네가 몸을 기울였다.

"왕국 남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 *

베르덴이 주검의 영광과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언데드 군세를 푼 것과 교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흑마도사 등 경청하고 있던 페르네의 얼굴에서 어느새 표정이 사라졌다.

"그 흑마법사 집단이... 그렇게 강했다고요?"

페르네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3왕자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정도라니. 조합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놈들을 토벌했다니.'

베르덴이 강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이 마도사에게 통용될 정도라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마법사가 이례적인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페르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 그런데 주검의 영광이란 자들이 보복하러 오지는 않을까요?"

"그러진 않을 거다. 주검의 영광은 이미 왕국에서 어떤 목적을 이룬 듯했으니 이후로 왕국에 다시 발을 들이지는 않겠지. 적어도 당분간은."

그 목적이란 게 뭔지 거슬리긴 하지만.

알아낼 수 없는 지금은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였다.

"그럼 다행인데...."

베르덴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페르네가 안도했다. 이내 긴장을 떨쳐 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애셔 님이 로브 안에 입고 있는 방어구, 전에 못 보던 거네요? 새로 장만하신 건가요? 아니면───"

"보수로 받았다. 칼리아 개인이 아닌, 가문에서 직접 주더군."

후작가에서 하사하는 보수.

그렇다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터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건 아니었다.

칼리아의 목숨을 구해 준 걸 포함해, 주검의 영광을 토벌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베르덴 덕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후작 본인에게서 의뢰를 받았다."

"...네?"

페르네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에스퍼렌사 후작이 의뢰를 했다고? 장담하건대 예삿일은 절대로 아닐 터.

"대, 대체 무슨 의뢰를요...?!"

페르네는 베르덴의 정보상.

게다가 칼리아의 비호를 받고 있기에 배신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베르덴만큼이나. 그렇기에 후작 또한 기밀 정보를 페르네를 통해 준다고 했던 거겠지.

즉, 페르네는 의뢰의 내용을 들을 자격이 있다.

다만 무슨 의뢰인지를 베르덴이 직접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자세한 건 듣지 못했다. 그래도 곧 세부 내용이 너에게 전달될 테니,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다."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들어가지."

베르덴에겐 할 일이 있었다.

마법사의 회한에 어떤 부여 마법을 등록할지 고민해 봐야 했으니까. 주점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페르네가 눈을 깜빡이며 바라봤다.

그러고는 짝!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래,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야? 당황할 필요는 없어. 안 그래, 블루?"

블루가 은은하게 명멸했다.

페르네는 이미 지금의 삶에 익숙해졌다.

이제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점이 통째로 날아간다고 할지언정 담담하게 바라볼 자신이 있었다.

무슨 의뢰든지 상관없다.

그저 정보상으로서 할 일을 다할 뿐이다. 페르네는 내심 결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옛 왕성 잠입...?"

후작이 보내온 의뢰서는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