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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빈테르트 (2)

콰직! 우지끈!

건물 내에서 살벌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훼월을 쥔 갈리아크.

벌써 익숙해진 무게감에 그가 신이 난 듯 웃었다.

"하하! 11억 엘크짜리라 그런지 손맛이 죽이는군. 이거라면 어지간한 갑옷쯤은 으깨 버릴 수 있겠어. 왕국에 온 보람이 있구만!"

"앞이나 봐라."

베르덴의 말에 갈리아크가 앞으로 고개를 향했다.

코스타의 잔당들이 무기를 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시체 조각과 피에 잠깐 멈칫했으나 살의를 거두지는 않았다.

코스타의 지배력.

그의 공포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필사적으로 막을 리 없었다.

'코스타는 이미 죽었지만.'

갈리아크가 숨을 들이마셨다.

양손으로 훼월을 붙잡은 그가 바닥을 부수며 돌진했다.

거리가 있음에도 중압감이 느껴지는 맹진.

마치 폭주하는 마차를 맞닥뜨린 듯한 기세에 잔당들이 압도당했다.

양팔을 뒤로 당겼다.

직후 이뤄진 허리의 회전, 그로부터 폭발적인 힘이 촉발되었다. 이어 근력과 탄력이 더해진 훼월의 날이 대각선의 궤적을 그렸다.

콰자자자자작!

박살 난 검, 갈라진 갑옷. 살과 근육이 찢겨지고 뼈는 으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네 명이 절단되어 날아갔다.

이어 훼월을 던져 두 명을 죽이고 맨몸으로 전투를 이어 갔다.

"크하하하하하하!"

흥분에 찬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주먹 한 방에 얼굴이 으깨졌고 앞차기에 장기가 터져 나간다.

좁은 복도에서 수십 명을 상대함에도 도살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이었던 것들과 폐허가 된 복도만이 남았다.

"뭐야, 이게 끝이야? 좀 싱거운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낸 갈리아크가 훼월을 집어 들었다.

가볍게 휘둘러 묻어 있던 피와 기름을 단번에 떨쳐 내었다. 그런 그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와...."

"...!"

"저, 저게 사람이야...?"

베르덴과는 다른 종류의 풍경이다.

보다 잔혹하고 원초적인 힘에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눈을 빛냈다. 샘웰은 무서워했고.

그사이 베르덴이 시체를 불살라 잿더미로 만들고는 마력감지를 펼쳤다. 베르덴 일행 외에 생명 반응은 없었다.

"잔당은 전부 처리한 것 같군."

이제 코스타의 방을 찾을 때.

바로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나설 차례였다.

"이쪽이에요!"

"아으...!"

남매는 열성적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지난 몇 주간 코스타와 그 부하들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녔기에 자택 내부는 훤히 꿰고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그렇게나 무서웠던 코스타는 별게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압도적인 존재가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두 사람은 세상을 배웠다.

복잡한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섰다.

그렇게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력감지를 시전하자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방이 감지되었다.

"함정은 없다."

"으라차!"

갈리아크의 발차기에 방문이 활짝 열렸다.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감각에 잡히는 건 없다. 안전을 확인한 베르덴이 마력으로 방 전체를 장악했다.

<염동력>

일제히 가구가 들썩이며 안에 있던 물건들을 토해 냈다.

벽에 진열되어 있던 코스타의 장신구와 장식용 무기들뿐만 아니라 바닥 틈새에 감춰져 있던 금고까지 말이다.

"오, 꽤 큰데. 안에 뭐가 있을지 기대되는구만."

갈리아크가 금고 손잡이를 잡았다.

열쇠나 비밀번호 따위는 필요 없었다.

힘줄이 불거지자 콰득! 금고 문이 뜯겨져 나갔다.

그 안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상자와 값비싼 장신구 그리고 100만 엘크짜리 현금 다발들과 몇 개의 장부가 보였다.

베르덴과 갈리아크가 장부를 훑었다.

마약 및 노예 매매에 대한 게 적혀 있었다. 쓸모없다.

"내다 팔면 돈이야 꽤 되겠지만... 로아프라의 권력자라는 놈이면 막 10억, 20억씩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이게 맞아?"

"코, 코스타는 작은 권력자입니다. 그리고 로아프라에서 권력이란 사업권을 뜻합니다. 현금이나 보석이 아닌,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권한이 제일의 자산입니다."

쯧. 갈리아크가 혀를 찼다.

"쓰레기가 따로 없군."

"이거라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베르덴이 금고 안의 내용물을 전부 공간가방에 챙겨 넣었다.

갈리아크의 의견대로 코스타의 영역을 차지했다. 그리고 코스타가 남긴 유산마저 챙겼다.

마지막으로 빈테르트와 담판을 지으면 로아프라의 일은 끝이다.

방 중심에 있는 탁상과 주변을 둘러싼 소파들.

베르덴이 상석에 앉고 갈리아크가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셈웰과 에이든 그리고 샤를로트는 눈치를 보다가 남은 자리를 차지했다.

...정적이 흘렀다.

어색한 기류 속,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남매.

성대가 잘린 샤를로트를 대신해 에이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으...."

상황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 바람에 이제서야 감사를 전했다.

두 사람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베르덴이 답했다.

"그래."

그게 끝이었다.

그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의 안전을 지켜 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남매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시금 조용해졌다.

은인이 저렇게 말하는데 에이든과 샤를로트는 뭘 어떻게 더 감사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두 사람은 보답조차 할 수 없었다.

흐름이 끊기는 바람에 공기가 더욱 어색해졌다.

그 사이에 낀 샘웰은 특히나 그랬다.

빈테르트가 언제 올지 몰라도 이 공간에서 오래 버티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손이 흔들리다 탁상 아래에 부딪쳤다.

'아!'

실수였다.

탁.

그러자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주워 보니 카지노에서 쓰는 카드 뭉치였다. 고요함을 깨는 소리에 주위의 시선들이 한데 모였다.

사고를 가속한 샘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 카드 게임이라도 하시겠습니까?"

* * *

코스타의 영역.

빈테르트의 정보망을 따라 베르덴 일행의 흔적을 쫓자 입구가 파괴된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코스타의 자택으로 가는 통로 중 하나.

안으로 들어가 복도에 들어서자 벽 곳곳이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탄내가 코끝을 강하게 스쳤다.

술병을 든 드레이큰의 눈가가 씰룩였다.

"냄새가 고약하군. 시체는 지웠지만 흔적으로 봤을 때 이곳에서 사망한 자가 최소 30명은 넘는 것 같다."

"아예 전멸시켰나 보네요."

시체를 태운 건 마법이다.

하나 시체를 만든 건 마법사가 아니다. 물리적인 흔적이 역력했으니까. 카지노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거한이 한 짓임이 틀림없다.

"실력은 어때 보이나요?"

드레이큰이 눈을 감았다.

날려 버린 철문과 발길질로 인해 부서진 바닥 그리고 복도에 남아 있는 여러 잔흔을 면밀하게 연결해 살핀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상당하군."

"기준점을 정한다면요?"

"모험가 등급을 말하는 건가?"

로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이큰의 목에 걸린 미스릴 플레이트.

전직 미스릴 등급 모험가였던 그는 로아프라에 흘러들어 와 빈테르트의 경비 계열 수장을 맡게 된 강자였다.

타락한 모험가.

그것이 드레이큰의 이명이었다.

"백금 등급에서도 중상위권 이상으로 보인다."

"최소로요?"

"최대로 치면... 미스릴 등급의 경계선에 설 정도는 되겠군."

그레이에서 명성을 떨치는 4위계 전격 마법사와 미스릴 등급에 준하는 전사라. 꽤나 위험한 조합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애초에 그들이 적대심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 이상으로 큰 마찰이 생길지도 몰랐다.

"지원이 필요할까요?"

"전혀."

주저없이 답한 드레이큰이 술을 들이켰다.

독한 술이라고 해도 고작 알코올 따위가 그의 신체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안에 마약을 집어넣었다.

신체의 근력을 강화하고 감각을 돋우며 고통조차 둔하게 만드는 약.

금단 증상이 강하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항상 술과 함께 복용하면 그런 증상을 느낄 새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모험가 시절보다도 더욱 강해져 있었다.

드레이큰이 팔뚝으로 입가를 훔쳤다.

오른손엔 술병이 들려 있고, 왼손은 허리춤에 찬 검 위에 얹은 특유의 자세. 무방비한 상태로 보이나 그에게 빈틈은 없었다.

"그런가요.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드레이큰과 로베르트가 앞으로 나아갔다.

피와 재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 앞에 다가섰다.

드레이큰이 문을 열자.

"으...!!"

"어? 누나가 이겼어요!"

"또? 이런 X발!"

다섯 사람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철컥.

드레이큰이 다시 문을 닫았다.

"...내가 잘못 들어왔나?"

"...."

빈테르트의 두 수장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 * *

로아프라의 지배 세력, 빈테르트가 찾아왔다.

곧장 자리를 비킨 샘웰이 에이든과 샤를로트를 데리고 코스타의 책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샘웰이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소리 내면 안 된다. 궁금하다고 봐서도 안 돼. 알겠지?"

남매가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에게 주의를 준 샘웰이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도저히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야 방의 중심에는 빈테르트, 그것도 각 계열의 수장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까. 코스타와 같은 작은 권력자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 또한 샘웰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강자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방해해선 안 된다.'

샘웰은 전력을 다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필요하다면 기절하기 직전까지 숨을 참을 각오였다.

그런 샘웰의 뒤에서는 담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석에 앉은 베르덴이 로베르트와 마주했고.

둘의 옆에서는 드레이큰과 카드 게임에서 내리 8연패를 당한 갈리아크가 탁상을 가운데 둔 채 서로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로베르트였다.

"설마 태연하게 카드 게임을 하고 있을 줄이야. 예상 이상으로 강심장이시네요. 애초에 그러지 않았다면 저희가 직접 찾아올 리도 없었을 테지만."

로베르트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먼저 제 소개부터 하죠. 제 이름은 로베르트. 빈테르트 내에서 도박 및 투자 계열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사람은 드레이큰으로...."

"어이."

갑자기 갈리아크가 대화를 끊었다.

그의 시선은 드레이큰의 플레이트에 향해 있었다.

"너 모험가냐? 그것도 미스릴 등급?"

"전직이다."

"전직? 그런데 왜 플레이트를 갖고 있지?"

모험가 외의 플레이트 소지는 중범죄다.

길드의 탈퇴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미스릴 등급이라고 할지라도.

드레이큰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내 거다. 내 걸 왜 돌려줘야 하지?"

"그래, 스스로 돌려줄 필욘 없지."

핏빛검과 달리 눈앞에 있는 놈은 폭넓게 모험가 동료로 엮여 있지 않다.

거기다 무단으로 플레이트를 걸고 있다. 모험가 길드의 규칙으로 따지면 제압 및 회수 대상이었다.

명분은 충분하다.

작은 계기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주저 없이 도끼를 휘두를 것이다.

갈리아크가 강자에 대한 투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주인은 베르덴이었다.

"그만."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깨졌다.

시선을 돌린 베르덴이 소개를 이어 나갔다.

"애셔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럼 간단히 소개도 마쳤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로베르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뤼잉 코스타에게 저희 빈테르트와의 연줄이 있다는 건 알고 계셨나요?"

"그래."

"그렇다면 그를 죽였을 때의 리스크를 감수한 행동이었다는 뜻이겠군요. 바깥에서 명성을 날린 마법사로서의 자신감 혹은 그저 빈테르트를 우습게 본 것이거나.... 그래도 일을 벌여 놓고 당장 로아프라에서 도망치지 않은 걸 보면 후자는 아닌 것 같은데. 만약 저희가 무시하고 당신에 대한 척살 명령을 내렸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죠?"

"그럴 생각인가?"

"아뇨. 그랬다면 제가 직접 찾아오지도 않았을 테죠."

로베르트가 말을 이었다.

"코스타는 로아프라에서도 악취미로 유명하지만 마약 사업에 대해선 꽤 유능한 편이었어요. 지난 몇 년간 빈테르트에 적지 않은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죠. 본래라면 코스타의 살해에 가담한 당신들을 본보기로 죽여야 마땅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죠."

"...."

"빈테르트, 특히 자금을 관리하는 제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건 손익이에요. 감정에 따른 손해뿐인 복수 따위가 아니라."

"그 말은 코스타의 죽음에 대해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세상은 온갖 문제로 가득하죠. 거기에 죽은 사람에 대한 문제까지 신경 쓴다면 지극히 비효율적인 낭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코스타의 살해 자체는 불문에 부치도록 할게요. 인력과 돈 그리고 시간까지 들여 당신 둘을 죽이는 건 여러모로 손해가 클 것 같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계산할 게 없는 건 아니죠."

코스타는 대외적으로 빈테르트의 관련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보란 듯이 로아프라 내에서 살해당했다. 당연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본보기를 보여 손상된 빈테르트의 위신을 살려야 하니까.

"원하는 게 뭐지?"

"빈테르트에선 당신들에게 두 가지 대가를 요구하겠어요."

로베르트가 검지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첫 번째는 코스타의 영역. 정확히 말하면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과 사업권이죠."

빈테르트라고 해서 로아프라의 전 지역을 관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운영 방식은 봉건국가와도 같다. 아무리 왕이 존재한다고 한들 각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있으며 왕이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영지를 빼앗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예외적이다.

외부인에게 빼앗긴 영역을 빈테르트가 돌려받는 형식이니까. 다른 권력자들을 이해시킬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때,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재산이란 게 뭘 말하는 거지?"

"말 그대로 코스타가 남긴 유산이죠. 그가 남긴 보석 상자나 값비싼 장식품들을 포함해... 당연히 저 책상 아래에 숨어 있는 두 노예까지 말이죠."

덜컥.

책상이 흔들렸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놀랐는지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몸을 떠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저 둘이 너희들에게 필요한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에요. 젊은 노예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으니까요. 코스타와 비슷한 결의 주인을 찾으면 상당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텐데, 제가 굳이 버릴 이유는 없죠."

로베르트가 자신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애셔, 당신이 코스타를 죽인 건 저 노예들과 관계가 있겠죠.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저 둘을 구하는 대신 빈테르트와 적대하는 것과 저 둘을 놓고 안전하게 로아프라를 나가는 것. 무엇이 손해고 이득인지는 뻔하지 않나요?"

생면부지의 노예 둘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한다.

백이면 백,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선인에게도 위선자에게도 죽음의 공포는 똑같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빈테르트의 표적이 된다는 건 곧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의미했다.

로베르트는 눈앞의 마법사 또한 그럴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거절하지."

베르덴이 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148화 빈테르트 (3)

빈테르트와의 문제.

베르덴이 떠올린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빈테르트와 담판을 지어 문제를 끝맺는 것.

물론 저쪽에게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면 불가능한 방법이나, 이렇게 간부 격 인물들이 직접 찾아왔다.

아마 거래를 제시하거나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겠지. 그런 베르덴의 예상은 보란 듯이 적중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대화가 틀어진다면.'

그렇게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된다면.

남은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빈테르트를 궤멸시킨다.'

아예 뒤탈이 없을 정도로.

일개 개인이 왕국의 어둠을 지배하는 세력을 무너뜨린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해결책이었으나 베르덴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현재 그가 가진 전력은 아직 본인조차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암흑가의 왕이니 뭐니 해도 결국 로아프라 내에서의 이야기다.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 지하에 틀어박혀 왕 놀이나 하는 놈들 따위에게 위축될 베르덴이 아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긋이 베르덴을 쳐다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유는요?"

"말해야 하나?"

"궁금해서요. 저 노예 둘이 당신 둘에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대체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길래 감히 빈테르트와 적대하려 드는지 말이죠."

이득이라.

로베르테의 말 속에서 베르덴은 하나를 눈치챘다.

'빈테르트는 에이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에 특이 형질을 타고난 인간은 극소수.

기존의 마법 체계에서 벗어난, 기형적인 마력과 마력회로를 가진 그들의 가치는 가늠할 수 없다.

존재만으로 마법사의 탐구심을 자극할뿐더러 잘만 키운다면 경우에 따라 타인과 궤를 달리하는 특별한 마법사가 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특히나 마탑이라면 막대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데려가려고 하겠지.'

물론 코스타 따위가 어쭙잖게 접근했다간 곧장 척살당할 것이다. 그래서 굳이 베르덴에게 소유권을 주며 끌어들이려고 한 것일 테고.

만약 이 사실을 빈테르트가 알고 있었다면 손익에 대해 묻지 않았을 것이다.

빈테르트 정도의 체급을 가지고 있다면 마탑과 암암리에 거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하지만 베르덴이 남매를 도와준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특이 형질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절망을 깨달았던 과거를 떠올리고 에이든이 내민 손을 맞잡았을 뿐이다. 마탑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로베르트의 물음에 베르덴이 침묵으로 답했다.

대화는 결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리 해결책을 전해 들었던 갈리아크가 드레이큰을 노려봤다.

어느새 기운을 끌어모은 둘은 각자의 무기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툭 건들기만 해도 서로의 목을 노리고 무기를 휘두를 것이다.

누가 먼저 팽팽해진 긴장감을 끊어 버릴지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좋아요. 특별히 코스타의 재산은 양보해 드리도록 하죠."

갑자기 로베르트가 수긍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베르덴과 갈리아크가 내심 당황했다.

베르덴은 로베르트의 시선과 마주했다.

일말의 변화조차 없는 표정. 그녀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생각 전환이 빠르군."

"코스타가 남긴 유산은 코스타의 죽음보다도 가치가 높죠. 죽은 자에게서 더 이상 창출할 수 있는 이득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재산권 하나를 두고 당신 둘을 상대하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 같네요."

로베르트가 재차 물었다.

"그럼 재산권을 제외한다면 첫 번째 대가는 수락하실 건가요?"

뭔가 꺼림칙하다.

하나 그렇다고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코스타의 장부들을 꺼냈다.

이건 코스타의 재산이 아닌 사업권과 관련이 깊었으니까. 그녀가 요구한 대가를 수락한다는 의미였다.

"고마워요."

로베르트가 장부를 챙겼다.

"두 번째 대가는 뭐지?"

"간단한 거예요. 달리 뭔가를 지불하라는 건 아니니."

로베르트가 단호히 말했다.

"애셔, 갈리아크. 위 두 명은 로아프라에서 퇴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영원히."

이후로 다시는 로아프라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다시 말해 입국 금지와도 같았다.

내년에 열릴 경매를 생각한다면 모를까.

이미 올해의 경매에 참가한 데다가 로아프라에 정착할 계획이 전혀 없는 둘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요구였다.

애초에 내년까지 왕국에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뭐야, 별것도 아니군."

갈리아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당신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 모두 저희가 제시한 대가를 수락했으니, 코스타에 대한 문제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퇴거 기한은 오늘까지. 이후로 다시는 로아프라에서 보는 일은 없길 바랄게요."

그 말을 남기고 빈테르트의 두 수장이 자리를 떴다.

로아프라의 지배 세력과의 담판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 * *

빈테르트가 떠난 자리.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갈리아크가 와락 표정을 찡그렸다.

"저 새끼들 뭔가 수상한데."

"일부러 우리를 놓아주려는 것처럼 보이더군."

빈테르트가 제시한 대가가 너무 가볍다. 심지어 코스타의 재산을 양보하기까지 했다.

물론 코스타의 영역과 사업권을 주긴 했지만 베르덴에게 있어서는 애물단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차피 버릴 거라 굳이 대가로 요구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로베르트는 손익의 문제라며 그럴듯하게 이유를 포장했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게 못 되었다.

'대체 목적이 뭐지?'

이건 일종의 호의라고 해도 무방했다.

베르덴은 빈테르트와 로아프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기억에서 끄집어낸 뒤, 나름대로 결부해 보았으나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설마 코스타처럼 회유하려 드는 것도 아닐 테고.

생각에 잠겨 있자 갈리아크가 탁상 위에 다리를 올렸다.

"뭘 생각해. 저 새끼들이 그냥 보내 준다는데 그럼 가야지, 뭐. 아님 쳐들어가서 목숨 줄 잡고 이유라도 물어볼 거야?"

"그건 아니지."

빈테르트가 적대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기 위해, 빈테르트에 쳐들어가야 한다니.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지금은 넘어갈 수밖에 없나.'

이렇다 할 정보가 없으니 더 생각해 봤자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베르덴이 고개를 돌렸다.

책상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는데, 에이든과 샤를로트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샘웰이 말했다.

"그게... 애셔 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한 모양입니다."

빈테르트와 대립하면서까지 남매를 버리지 않았다.

외부인인 샘웰조차 울컥할 정도인데 당사자인 에이든과 샤를로트는 어떻겠는가.

물론 베르덴으로선 전혀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일단 앉아라, 할 얘기가 있으니."

세 명이 당장 소파에 착석했다.

그러자 베르덴이 바닥에 마법진을 새겼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되자 방 전체가 마력으로 밀폐되었다. 이걸로 바깥에서는 내부의 기척은 물론이고 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아니, 이 새끼, 마법진은 또 언제 배웠어?"

"기본이지."

"그게 기본이면 고드는 머저리냐? 진짜 미친놈이네, 이거."

갈리아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할 말이 뭐야? 빌어먹을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까지 새긴 거면 중요한 거 같은데."

"처우에 대한 거다. 하지만 그 전에 에이든에 대한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지."

"훌쩍, 어... 저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진 특이 형질은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특이 형질을 가진 마법사는 마탑에서 주목한다.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니까. 더군다나 한계 위계마저 높다면 마탑주의 직속 제자가 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하나 그런 밝은 미래만이 있는 게 아니다.

자칫하면 베르덴과 비슷한 과거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마탑은 총 10개.

그중에 비공식 실험을 하는 마탑이 보헤미른 마탑 하나만 있을 리는 없다. 어쩌면 모든 마탑이 각자의 이면에서 마법의 광기를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한 에이든의 내력은 알려져서는 안 된다.

다행히 그걸 아는 사람은 본인을 포함한 여기 다섯 사람뿐. 코스타 일당이 전멸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갈리아크, 샘웰, 샤를로트. 너희도 마찬가지다."

"난 또 뭐라고. 내 입이 네 몸뚱이보다 무거우니까 걱정은 마라."

"저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말할 사람도 없지만요."

끄덕끄덕.

모두가 수긍했다.

그럼 다음이다.

"잠시 실례하지."

"으...!"

베르덴이 샤를로트의 목에 손을 갖다 대었다.

섬세한 촉각이 그 내부를 살폈다. 날카롭게 손상된 성대가 오래 방치된 채 굳어 있긴 하나....

"고칠 수 있겠군."

그 말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인가요?!"

"포션으로는 무리지만 교회라면 가능할 거다. 시간과 헌금이 좀 필요하긴 할 테지만."

어떤 대가가 필요하든 에이든은 상관없었다.

눈앞에서 사라졌던 누나의 목소리가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다.

"우으...."

베르덴이 손을 떼곤 남매를 바라봤다.

"가족은 있나?"

"아, 아뇨. 누나가 전부예요."

끄덕.

"돌아갈 곳은?"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고아일 수도 있고, 노예 사냥으로 인해 터전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본래 둘이 살던 마을로 보내 줄 생각이었다. 코스타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치료도 하고.

그런데 돌아갈 곳이 없다니.

당연히 대충 아무 마을이나 도시에 버려 두고 갈 순 없는데... 고민해 봤지만 확실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베르덴이 샘웰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럼 먼저 묻지. 샘웰,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저, 저 말씀입니까?"

"너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샘웰은 대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 지금과 같이 로아프라를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안내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코스타의 살해 등 위험한 일에 휘말려 버렸으니까.

만약 코스타와 친분이 깊은 자가 있다면 아무런 힘도 없는 샘웰은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코스타의 재산을 나눠 줄 테니 돈은 충분할 거다. 그리고 정착하고 싶은 도시나 마을까지 직접 호위도 해 주지. 물론 가고 싶지 않다면 존중하겠다만."

샘웰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도 생각이 복잡한 모양이다. 주먹을 꽉 쥔 채 신음했다. 곧 결정을 내렸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라인즈로 가도 되겠습니까?"

"라인즈?"

"그게... 사실 번듯한 가게 하나 갖는 게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러려고 돈도 모으고 있었는데, 이왕이면 제일 살기 좋은 도시에서 여는 게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샘웰은 여전히 바깥이 두려웠다.

하나 눈앞의 마법사가 지켜 준다면 얘기가 다르다. 어릴 적에 들은 이형종과 아인종 따윈 감히 이빨도 들이밀지 못할 테니까.

안심하고 도시를 이동할 수 있다.

"라인즈에서 가게를 연다라. 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들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마침 목돈이 생겨서...."

샘웰이 갈리아크를 슬쩍 쳐다봤다.

"이 자식, 100만 엘크로 뻐기다가 막판에 룰렛 한 판 돌리더니 대박이 터졌어. 그 자리에서 8천만 엘크를 땄으니."

"아무래도 로아프라를 떠나라는 계시였나 봅니다, 하하. 그러니까 그래서 말인데...."

샘웰이 남매에게 고개를 향했다.

"혹시 나랑 같이 갈 생각은 없니?"

"네?"

"...!"

남매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샘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 이상한 뜻은 아니고, 나도 혼자 외딴 도시로 가는 건 외롭고 너희들도 갈 곳이 없으니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샘웰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로아프라 태생이라기엔 너무도 순수한 인물이었다. 겁이 많은 성격이기에 온갖 더러움을 피해 다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베르덴이 생각했다.

'확실히 나쁘진 않군.'

생활 여건이 매우 좋다.

다른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규모도 커서 샤를로트의 목을 치료하기도 적합하니.

갈 곳 없는 남매가 살아가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갈리아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입이 한 명에서 세 명으로 늘면 감당할 수 있겠냐? 그러다 가게 망하면 어쩌려고?"

"그, 그건...."

"에이든과 샤를로트에게도 코스타의 재산을 나눠 줄 생각이다. 자립하기 전까지의 생활비로는 충분하겠지."

베르덴의 말에 남매가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베르덴과 갈리아크를 흘긋흘긋 보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샘웰과 마주했다.

"...정말로 따라가도 될까요?"

"그, 그럼, 물론이지!"

샘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리아크가 베르덴을 보며 히죽거렸다.

"올, 이 새끼, 꽤 하는데. 아주 성인이 납셨군."

"...."

베르덴은 무시로 답했다.

이렇게 세 명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로아프라를 떠날....

"잠깐, 왜 나한테는 안 물어보냐?"

"내가 왜?

"나도 너 때문에 휘말렸잖아. 그럼 책임은 져야 하는 거 아니냐?"

책임이라.

"내가 원인인 건 인정하지. 그런데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도끼로 코스타의 영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해결책으로 빈테르트를 궤멸시키자고 하니 좋다고 웃은 건 누구였지? 이걸 휘말렸다고 말해야 하나?"

"...이 X새끼,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리고 네가 따라와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페일과 다르게 왕국의 정보상은 나한테 귀속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너에게 줄 의뢰도, 팔 정보도 없────"

"그래, 알았다, 알았어! 어차피 나도 의뢰가 기다리고 있는 몸이라고. 그냥 뭔가 X같아서 말한 거니까 이제 그만!"

싸가지 없는 새끼.

그렇게 툴툴댄 갈리아크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먼저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뭐, 어쨌든 이걸로 더 이상 로아프라에 볼일은 없다.

이제 진정으로 왕국의 암흑가를 떠날 시간이었다.

* * *

로아프라의 회색 왕성.

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알현실엔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방금 로아프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가일의 음성이 알현실에 감돌았다.

빈 왕좌로 이어지는 회색 카펫. 그 양옆에는 로베르트, 드레이큰 그리고 암살 계열의 수장인 슬레이가 도열해 있었다.

여러 수장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이들이었다.

"빈테르트에 해를 끼친 자들을 너무 쉽게 보낸 것 아닌가?"

슬레이.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익숙하지 않는 이들에겐 듣기조차 거북한 목소리였다.

로베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 이유는 당신도 잘 알 텐데요. 애셔는 '특별한 마법사'임이 분명하니."

"그럼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놈이 가져간 노예들은 돌려받았어야지."

"폐하께서 허락하신 제 재량에 따른 결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의 참견을 받을 이유가 있나요?"

"너의 독단이 빈테르트의 명성에 흠집을 냈으니 당연하지."

슬레이가 백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드레이큰에게 향했다.

"그리고 너희 간부가 경매장에서 애셔란 자에게 물품들을 빼앗겼더군.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사로잡은 뒤에 물건을 빼앗고 구속하는 게 너에게 있어 더 나은 판단이 아니었나?"

"내게 결정권은 없다."

"결정권이 없다라... 그게 단가?"

"그렇다면?"

슬레이가 눈가를 씰룩였다.

"충성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군. 너희 둘은 항상 그랬다. 네년은 빈테르트에마저 손익을 따지고, 네놈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지."

색을 잃은 손가락이 드레이큰을 가리켰다.

"특히 드레이큰 네놈은 시키는 일만 하고 스스로 나설 생각 따위는 하지 않지. 뭐,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 네놈은 세상이 무서워 어둠 속에 틀어박힌 '타락한 모험가'니까 말이야."

조롱 섞인 이명에 드레이큰의 이마에 핏대가 불거졌다.

"죽고 싶다는 말을 돌려 하는군."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둘이 살기를 드러내며 대립했다.

그러던 순간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가일을 포함한 네 사람이 그 즉시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명의 호위를 대동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하게 정리된, 빛 하나 반사되지 않는 어두운 금발.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가에는 탁한 금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마주한 이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회색의 왕관이 올려져 있았다.

로아프라의 정점.

빈테르트의 지배자.

암흑가의 왕, 그론드 베일 디 발리다스.

과거, 빈테트르의 수장을 직접 끌어내린 찬탈자이며.

직접 만든 왕위에 오르고 스스로의 이름을 에스티리아 왕가의 것으로 개명한, 교만과 탐욕으로 가득 찬 존재.

그의 발걸음 한 번에 알현실이 울렸다.

계단을 오른 그가 빈 왕좌에 몸을 뉘고는 턱을 괴었다. 그론드가 양팔에 착용하고 있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건틀릿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일어서라."

그론드의 한마디에 모두가 일제히 일어섰다.

왕의 시선이 슬레이에게 향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나 보군."

"죄송합니다."

쿵!

슬레이가 힘껏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론드가 고개를 돌렸다.

"로베르트 그리고 드레이큰, 그 애셔란 마법사는 어땠지?"

"일반적인 마법사와 다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로베르트가 애셔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말했다. 그게 상당히 흥미로웠는지 그론드가 흥미를 보였다.

"하, 감히 나의 빈테르트와 적대하려 하다니. 확실히 다르긴 하군."

"하나 특이 형질인 건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드레이큰의 첨언을 그론드가 일축했다.

"아니, 놈은 특이 형질이 맞을 거다."

그론드가 손을 까딱이자, 그와 같이 있던 호위들이 종이 뭉치를 각자에게 전달했다.

내용을 읽어 보니 공국의 신문이었는데, 그 안에는 애셔란 이름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이건...."

"4위계로 그만한 업적이다. 아무리 고위 속성에 적성이 있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남들과 다른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론드가 웃었다.

탐욕에 찌든 사악한 미소였다.

"오랜만에 나타난 특이 형질을 가진 마법사다. '에스티리아 왕가'가 마법사의 신변을 우리에게 의뢰를 할 때까지 풀어 주어, 놈 스스로 몸값을 더욱 올리는 걸 기다리는 게 옳다."

그래야 아주 비싼 값에 팔아 치울 수 있을 테니.

"그때가 되면 슬레이, 너에게 권한을 일임하겠다. 그러니 더 이상 불만을 거론하지 말도록."

"뜻을 받들겠습니다."

슬레이가 다시금 머리를 부딪쳤다.

고개를 앞으로 향한 그론드.

왕의 눈동자는 알현실의 창을 넘어, 지상으로 향하는 마력 승강기에 닿아 있었다.

149화 가르침 (1)

마력 승강기를 타고 아우로플로 올라왔다.

지상에 내리쬐고 있는 화창한 햇빛.

몇 주 만에 보는 태양 빛에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샘웰 또한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아프라에서 지냈던 며칠은 정말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따로 옮길 물건은 있나?"

"아뇨, 없습니다. 보증금 없는 월세에다가 가구도 죄다 싸구려거든요. 돈이야 충분하니 자리를 잡으면 이참에 싹 다 새로 장만할 생각입니다."

샘웰은 아우로플의 성벽을 넘어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을 간질이는 기대와 낯선 불안에 두근거리는 가슴. 그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출발 그 자체였다.

베르덴 일행이 성문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마차를 빌려 아세른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마구간에서 가장 큰 말 한 필을 빌린 갈리아크가 훌쩍 올라탔다.

작별의 시간이었다.

샘웰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갈리아크 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샘웰을 따라 에이든과 샤를로트도 감사를 전했다.

이들에게도 갈리아크가 은인이긴 했다. 샘웰을 카지노에 데려가 대박을 맛보게 했으며, 코스타의 잔당들을 무식하게 큰 도끼로 찢어발겼고, 빈테르트와 대적하려고도 했으니.

갈리아크가 입가를 비틀었다.

"어이, 애셔. 너는 이 어르신한테 뭐 할 말 없냐?"

"볼일 없으면 가라."

"나보다 10살은 어린 게 말하는 본새 봐라. 어이, 꼬맹이들. 너희들은 저렇게 되지 마라."

"...."

남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갈리아크가 은인이라면 베르덴은 구원자나 다름없었으니까. 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갈리아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농담했다고 째려보는 거 봐라. 이건 뭐, 광신자도 아니고. 어이 샘웰, 너는 그 돈 쓸 때마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절해라. 내가 카지노 데려가 준 덕분에 80배나 땄으니까."

"하하, 맞습니다. 전부 갈리아크 님 덕분입니다."

"그럼, 그래야지."

갈리아크가 고삐를 쥐었다.

"가는 도중에 객사하지들 말라고."

도살자가 가볍게 말에 박차를 가했다.

검문을 통과한 그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스타의 재산 분배를 아직 안 했는데?'

베르덴이 갈리아크를 바라봤다.

서서히 멀어지며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도살자. 그가 왼팔을 높이 들어 올려 중지를 세웠다.

푼돈으로 꼬맹이들 밥이나 사 줘라.

변함없이 거칠고 투박한 인사였다.

'미친놈답군.'

베르덴은 편의성에 치중된 마차를 한 대 빌렸다.

마부석에는 샘웰이 앉았다.

그는 안내인으로서 로아프라에서 귀족의 마차도 몬 경험이 있는 나름의 베테랑이었다. 물론 길도 모르고 거친 도로도 익숙지 않은 터라 베르덴이 옆에서 봐주기로 했다.

에이든과 샤를로트는 마차에 올라타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을 열고 베르덴과 샘웰 사이로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성문을 통과한 마차.

샘웰이 고삐를 내리치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겨울과 봄의 경계를 지나는 계졀.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적셨다.

* * *

그렇게 며칠 뒤 아세른에 도착했다.

베르덴이 주점에 들어섰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멀쩡한 옷차림을 본 페르네가 화색을 띠며 반겨 왔다.

"애셔 님! 어서 오세요! 조금 늦...."

페르네가 우뚝 발을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베르덴의 뒤로 향했다. 서로 외모가 닮은 남녀와 평범하디평범한 사내가 서 있었다.

한 명이 갔는데 네 명으로 불어난 상황.

페르네의 직감이 반응했다.

"...설마 빈테르트와 마찰이 생기신 건 아니죠?"

"어쩔 수 없었다."

털썩.

페르네가 주저앉았다.

* * *

남매는 샘웰과 함께 주점 구석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서로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걸 보아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베르덴은 페르네와 둘이 대화를 나눴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페르네가 화들짝 놀랐다.

"베, 베켄에게 사생아가 있었어요?! 분명 애처가로 알고 있었는데...!"

이마를 짚은 페르네가 곧장 사죄했다.

"죄송해요, 애셔 님. 이건 제 불찰이에요."

"신경 쓰지 마라."

아무리 페르네라고 해도 남의 가정사까지 꿰차는 건 어렵다.

더군다나 정보망을 재건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간 내에 말이다. 데릭이 말했던 인과. 이건 예상치 못한 변수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베르덴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본격적으로 빈테르트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자 페르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로, 로베르트와 드레이큰이라면...."

페르네는 빈테르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로아프라에 정보원을 심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빈테르트의 지배 구역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극도로 위험하다.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칼끝이 페르네에게까지 닿을 수도 있었다. 베켄의 사생아에 대해 아예 눈치 못 챈 것도 그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페르네는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검은손 로베르트.'

빈테르트의 자금을 관리하는 관리자. 그녀가 수장 자리에 오른 뒤로 빈테르트의 자산이 몇 배로 불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하나만으로 그녀의 수완이 얼마나 궤를 달리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타락한 모험가 드레이큰.'

한때 미스릴 등급 모험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어떤 이유로 길드를 버린 뒤, 로아프라에 들어가 단 한 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빈테르트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로아프라의 최강자 중 하나.

'암흑가의 왕을 제외하면, 빈테르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들.'

그런 그들과 만나다니, 그것도 빈테르트의 관계자를 죽이는 바람에.

페르네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전처럼 호들갑을 떨진 않았다.

지난 수 개월간 베르덴을 보면서 여러모로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빈테르트에게서 면죄부를 받았으니까.

로아프라에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는 걸 대가로 내건 걸 보면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 더 이상 빈테르트와 마찰이 생길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나저나 이런 면도 있으셨네.'

노예 남매의 도와 달라는 말 한 마디로 작은 권력자의 세력을 쓸어버리다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빈테르트와 대립하면서까지 둘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치료에 더해 살던 도시로 돌려보내 주기까지 하다니.

그들이 내민 손을 잡은 것에 그치지 않고 일으켜 세워 주겠다는 말과 같았다.

'응?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건가?'

페르네도 당시엔 그의 로브 자락을 움켜쥐고 도와 달라고 빌었으니. 물론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결과가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로아프라에서의 일은 이해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저 사람들을 곧바로 라인즈로 보내지 않으신 거죠?"

라인즈와 아세른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굳이 페르네의 주점까지 데려올 필요가 없었다.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가르칠 게 있거든."

* * *

에이든은 마력 자체에 치유 능력이 더해진 특이 형질 보유자.

아세른으로 오는 길에 물어보았더니, 살면서 몇 번 이상한 걸 느끼긴 했지만 평생 크게 다쳐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 특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노예사냥을 당하기 전까지 평온하게 살 수 있었던 거겠지.

'뭐, 어쨌든.'

자연스레 마력을 깨우쳤다는 건 마법사로서 재능은 있다는 뜻.

하지만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과 경험이 전무하기에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운이 좋다면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얼마 안 가 발각될 터.

최소한의 마력 조작 능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또다시 로아프라에서의 일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부터 네가 마력회로를 자각하게 할 거다."

"마력회로요?"

"마력을 깨우친 마법사에게 생겨나는, 일종의 혈관이라고 보면 된다. 마력이 그 통로를 지나며 회로를 활성화하고, 각 마법에 해당하는 연산과 마력 조작 등 여러 과정을 통해 마법이란 기적을 발현할 수 있지."

"아...."

에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기야 10대 후반에 다다를 때까지 농촌에서 지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장 억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곧 경험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베르덴은 에이든을 데리고 주점 지하로 내려갔다.

"여기 서라."

"아, 네!"

에이든을 중심에 세웠다.

그 뒤에 자리를 잡은 베르덴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부터 마력회로를 강제로 활성화할 거다. 저항해도 좋고 순응해도 좋으니 최대한 이질감에 집중해라."

이질감?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릴 찰나,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화아아악!

유형화된 마력이 작게 휘몰아치더니 서서히 에이든의 마력회로에 흘러 들어갔다. 본래 이렇게 타인에게 마력을 전가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저항력 탓에 곧장 바깥으로 흩어져 버리니까.

그러나 베르덴의 마력은 한없이 순수하다.

그렇기에 잠시나마 타인의 마력회로에 머무는 게 가능하다. 특히나 아직 마법조차 배우지 않은 에이든에겐 더더욱.

베르덴의 마력이 에이든의 마력회로를 질주했다.

그렇게 마력회로를 강제로 활성화하며 바깥으로 빠져나갔고, 그보다 더욱 많은 양의 마력을 밀어 넣어 상태를 유지했다.

전신의 감각이 찌릿거렸다.

생소하고 어색하긴 했으나 에이든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충만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 지속되자 베르덴이 말했던 이질감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으으...!"

몸이 불편하면서 간질거린다.

마치 새로운 신체 기관이 하나 더 생긴 듯한 기분. 뭔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뜻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에이든의 마력이 작게 맥동했다.

'생각보다 빨리 자각했군.'

오늘은 이쯤이면 충분하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진도를 나가는 건 좋지 않으니.

베르덴이 곧바로 마력을 거두었다.

"윽?!"

마력회로가 텅 비어 버린 에이든이 탈력감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직전에 네가 움직이려 한 게 마력회로다. 지금의 감각을 기억하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의식하려고 노력해라. 그렇게만 하면 금방 마력을 움직이는 게 가능해질 거다."

물론 가진 마력을 전부 통제하에 두는 건 무리다.

그건 마법사로서 적지 않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가능한 경지니. 에이든에겐 마력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걸 방지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혹시라도 막히는 부분이 생긴다면 말해라. 도와줄 테니."

"허억, 허억...."

에이든이 호흡을 골랐다.

겨우 어지러움이 사라진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애셔 님,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죠?"

어째서일까.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래도 그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실험체가 되길 바라지 않으니까."

"네?"

"개인적인 이유다.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마력을 제어하는 데 집중해라."

베르덴이 발걸음을 돌렸다.

지하실을 나가려고 하자 에이든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저는 애셔 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도요?"

"내가 대가를 요구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렇기에 에이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베르덴은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샤를로트가 그를 보더니 냉큼 달려왔다.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종이 두 장.

그 위에는 투박한 필체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에이든과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를로트가 종이를 넘겼다.

──애셔 님께 은혜를 갚고 싶어요.

...남매 아니랄까 봐 생각도 비슷하다.

속으로 한숨을 쉰 베르덴이 지하실을 가리켰다.

"은헤 갚으라고 구해 준 게 아니다. 그러니 나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동생부터 챙겨라. 많이 지친 것 같으니."

베르덴에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더 이상 발목 잡히며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할 말을 마친 베르덴은 그녀를 지나쳐 주점 바깥으로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던 샤를로트가 이내 주점 지하로 내려갔다.

* * *

에이든에게 마력회로를 자각시켰다. 이후는 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보아하니 재능은 있어 보인다. 늦어도 2주 내에는 최소한의 마력 조작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겠지.

라인즈로 출발하는 건 그때가 될 것이다.

아세른의 여관에 돌아온 베르덴.

간단히 여독을 풀고 책상 앞에 앉아 공간가방을 열었다.

중력 마법 서적 세트.

무려 27억 3천만 엘크를 주고 낙찰받은 이것은 상권과 하권, 총 두 권으로 나뉘어 있다.

각각 중력 마법의 이론과 실질적인 중력 마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히 이론서는 약 700페이지를 넘어가 상당한 두께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한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글자가 들어차 있으며, 알아보기도 어려운 그림과 마법사의 전문용어가 즐비했다. 내용은 난해하고 시각적으로도 난잡했다.

마탑에서 종사했던 마법사라고 해도 이해는커녕 한 번 완독하는 것조차 어려운 수준.

'확실히 고위 마법에 걸맞은 구성이군.'

하지만 문제는 없다.

아무리 어렵다 한들 그 주제를 관통하는 개념들을 이해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오는 법이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법의 이해력.

힘을 타고나지 못한 재능 탓에 실험체가 되어야만 했고, 그렇기에 절망 속에서 나올 수 있었던 베르덴의 가장 큰 무기.

그에게 있어서 마법 이론이란 상식과도 같았다.

베르덴이 상권의 책장을 열었다.

첫 문장에 닿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고 잠시 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사라락... 사라락....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빛과 어둠이 번갈아 가며 서로를 집어삼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종이를 넘어가는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해가 따라가지 않아 내용을 되돌아보는 일도, 읽었던 문장을 다시 반복하는 일도 없었다.

수만 개로 나뉜 퍼즐 조각이 저절로 자리를 찾아 그림을 완성했으니까.

중력 마법.

베르덴의 무한한 가능성에 새로운 속성이 깃들고 있었다.

* * *

한 도시의 고급 여관.

그 꼭대기 층에 위치한 방은 눈살이 찌푸릴 정도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한 마법사가 방 중심에 쭈그려 앉아 울부짖었다.

"윈드! 토벽! 화염 화살! 돌풍!"

마법명을 직접 입으로 내뱉었다.

당연하게도 마법이 발현되는 일은 없었다. 그의 마력회로에 깃들지 않은 속성이었으니까.

"왜!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도대체, 왜!"

힘껏 소리를 쳐 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법사는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벽을 넘어서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

새로운 원소 속성을 깨우치기 위해서 수많은 마법 이론서를 뒤적였다. 그럼에도 결과는 없었다.

이정표는 있었다.

하나 성공에 다다르는 건 많지 않다. 그건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게 자신이 되니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애초에 출발선에도 서지 못했다. 그 이정표를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정말 나는 안 되는 것인가...?"

마법사는 한탄했다.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한다는 건 칼로 배 속을 저미는 것보다 고통스러웠다. 앞으로도 벽을 넘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아 다시는 깨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러던 그때, 한 이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료들이 극찬을 했던 마법사.

4위계 전격 마법사이면서도 각종 원소 속성에도 일가견이 있는 재능의 소유자. 어쩌면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줄지도 모르는 그 이름.

"애셔."

그 이름을 내뱉은 마법사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걸이에 걸린 로브를 뒤집어쓰며 채비를 갖춘 그가 곧장 여관을 나섰다. 절박할 대로 절박해진 그에게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150화 가르침 (2)

아세른의 모험가 길드 연무장.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선 베르덴은 자신이 이해하고 정리한 중력 속성에 대해 떠올렸다.

중력은 질량에서 비롯되는 힘이며 마력을 질량 자체로 변환해 형상과 상태를 구성하는 것이 중력 마법이다.

원리는 밀도를 높인 마력이 물리력을 갖는 것과 같고 그 과정 자체는 지금까지의 원소 마법과 동일하다.

'그러니 실패할 이유는 없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전신에 가득 들어찬 마력의 성질을 바꾸기 시작하자 중력 속성 특유의, 흑색에 가까운 보라색, 암자색(暗紫色)의 빛이 옅게 흘러나왔다.

이어 베르덴이 변환시킨 질량을 한순간에 방출했다.

<중력파>

거센 파동이 주위를 휩쓸었다.

흔들리는 대기. 연무장 위에 있던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렸다. 베르덴은 멈추지 않고 연이어 마법을 시전했다.

<석벽>

<데몰리션>

솟아오른 벽에 암자색의 구체가 쇄도했다.

그리고 닿는 순간 2위계의 벽을 단숨에 날려 버리며 구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규모가 작긴 하나 상당한 파괴력이다.

간단히 공격 마법으로써의 성능을 확인했으니 다음은 방어 마법 차례.

마안을 발동해 원거리에서 마법을 발동했다.

<거암강타>. 그 궤도의 중심에는 정확히 베르덴이 있었다. 마법서로 강화된 암석이 날아오는 걸 보며 베르덴이 손을 내밀었다.

<중력 장막>

짙은 보락색의 막이 베르덴을 감쌌다.

그 직후 암석과 충돌하며 굉음이 들려왔다. 먼지가 가라앉자 장막은 박살 나지 않은 채 여전히 베르덴을 지키고 있었다.

물리 저항에 특화된 방어 마법이라 그런지 상당한 성능이었다.

'그래도 의존하는 건 피해야겠군.'

장막에 미세한 금이 가 있는 걸 보며 마력을 거두었다.

이렇게 간단히 중력 마법에 대한 실험은 끝.

베르덴은 자신이 체감한 성능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각각 2위계, 3위계 그리고 4위계 마법이었으나 효과는 그야말로 고위 속성다웠다. 특히나 물리적인 영향력은 다른 동 위계 원소 마법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격 계열이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파괴력을 자랑한다면, 중력 계열은 실체를 가진 모든 것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한다고 볼 수 있었다.

하나, 단점은 명확했다.

'마법사가 주력으로 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군.'

중력 마법은 질량과 연관된 특성상 장거리의 적을 상대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통상적으로 근접전에 취약한 마법사에겐 결코 장점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제때 연산에만 성공한다면 접근한 상대를 효과적으로 떨쳐 버릴 수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낭비겠지.'

고위 속성을 상대를 밀어내는 용도로만 쓰다니.

마법을 깨우치는 난이도를 고려해 본다면 효율은 최악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서적을 구할 돈으로 전열을 지켜 줄 호위나 동료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근접전 또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은 마법사에겐 예외였다.

부여 마법을 통한 신체 강화와 혼돈을 이용한 마법의 재조합.

그로 인해 탄생하는 여러 마법과 다양한 전투 방식이 베르덴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생각만 해도 기대감이 차오르는 듯했다.

'······그래도 뭔가 난잡하긴 하군.'

5위계에 다다르면서 마법의 가짓수가 너무도 많아졌다.

그러니 전력을 한번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기반이 불안정하면 언젠가 무너져 버리고 말 테니까.

시기는... 그래, 에이든 일행을 라인즈로 데려다주고 난 뒤면 좋겠지.

5위계 부여 마법과 달리, 중력 마법은 원소 마법처럼 이론과 연산으로 이뤄져 있으니까.

신체나 사물에 영향을 끼치는 계열이 아니니, 자신에게 허락된 5위계 중력 마법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로 완전히 숙달하는 건 무리겠지만 말이다.

베르덴이 생각을 마쳤다.

그는 길드와 약속한 대여 시간이 끝날 때까지 연무장에서 날뛰었다.

* * *

베르덴은 의뢰를 받지 않고 마법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에 관심을 끊은 건 아니었다. 에이든의 일을 제외하고도 그 외에 중요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페르네가 베르덴 앞에 두꺼운 봉투 하나와 서류 하나를 들고 왔다.

"코스타가 남긴 보석 상자하고 여러 귀중품은 전부 처분했어요. 요즘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는 보석이 있어서 값은 충분히 받아 냈죠."

"고맙군."

"그리고 이건 탐색자들이 보낸 탐사 보고서예요."

베르덴이 유적 탐사를 의뢰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라이반은 약속한 대로 15일 주기의 탐사 보고서를 전달했고, 이번이 그 두 번째였다. 첫 번째야 딱히 주목할 게 없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테인체 구릉 탐사가 끝나고 아르에곤 산맥으로 넘어갔다라....'

예상 시간은 본래 2개월이었다.

그것보다도 거의 배에 가까운 속도였다. 보고서를 보면 실종된 탐사단이 철수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째서 탐사단은 마도왕의 유적을 찾다가 사라졌을까.

궁금하긴 했으나 알아내기엔 아직 일렀다. 뭐, 탐사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좋은 일이니, 굳이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 보고서를 챙겼다.

그러자 그 앞에 마주 앉아 있던 페르네가 말했다.

"그리고 애셔 님이 하신 의뢰인, 외수의 행방에 대해서 말인데요...."

"찾은 건가?"

"아뇨.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가 실종된 지 약 7년이 지나서 실종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었어요. 각 위치별 시간대를 정확히 몰라서 정보가 혼재될 가능성도 높고요.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어요."

페르네가 왕국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왕국 최북돤에 있는 도시를 손으로 짚었다. 10년 전 외수가 왕국에 입국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장소였다.

"10년이라.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흔적은 남아 있었나?"

"외팔이 혼자 여행을 다니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니까요. 외수는 장인이니, 여관이나 대장간을 중점으로 알아보니까 작은 목격담 하나씩은 접할 수 있었어요."

사실 과거의 페르네로선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라고 해도 왕국 전역에 정보망을 둔 건 아니었으니까.

정보상에겐 각자의 영역이란 게 있고, 영역 밖에 대한 정보에 취약하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어떤 유능한 정보상이라고 한들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페르네가 조합의 빈자리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손도 못 댔던 북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르덴으로 인해 시작된 변화로 생겨난 결과였다. 그에게 있어 아주 좋은 의미로.

"그렇다면 단서를 쫓는 데 얼마나 걸리지?"

"크게 돌아가는 방법이라서 수개월은 걸릴 거예요. 대신에 가장 확실하기도 하죠."

"돈이 꽤 들 텐데?"

"저야 애셔 님이 의뢰를 해결하실수록 의뢰주에게 따로 의뢰 수수료를 받으니까요. 그리고 애셔 님이 저번에 고액 의뢰를 거의 날마다 해결하셨으니... 솔직히 제 자금 사정은 좋은 편이에요."

굉장히.

페르네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문을 열자 샤를로트가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다.

"잘 마시지."

"고마워, 샤를로트."

샤를로트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닫혀 가는 문틈 사이로 곧장 청소 도구를 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나저나 네가 샘웰하고 샤를로트를 고용할 줄은 몰랐는데. 주점은 혼자서 충분한 거 아니었나?"

"일하고 싶다는데 다른 곳을 추천해 줄 순 없잖아요. 아세른의 치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샤를로트와 샘웰은 페르네의 주점에서 일하고 있다.

샤를로트는 주로 청소나 서빙을 맡았으며, 샘웰은 임시 바텐더로 고용되었다.

로아프라의 안내인으로서 살아오며 얻은 지식이 많은지, 평범한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칵테일을 제조해 손님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었다.

"그 사람 라인즈에서 가게를 연다고 했었죠? 제가 볼 때 주점을 열면 무조건 성공할 거예요."

"그 정도인가?"

"애셔 님도 드셔 보시면 알 거예요.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준비해 드릴 수 있는데."

"아니, 다음에 부탁하지."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딱히 칵테일이 당기지 않았다.

"그보다 에이든은 어떻지?"

"식사는 챙겨 주고 있는데 주점 지하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던데요? 저녁때나 돼서 나오는데 매일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요."

제대로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당연하겠지. 특이 형질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샤를로트의 생명마저 위협할지도 모르니까.

그들이 귀족 태생이었다면 축복이었겠으나, 아무런 배경이 없는 약자이기에 그러했다.

만약 에이든이 마법사의 길을 걷는다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니 말릴 생각은 없었으나 분명히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들을 이해해 주고 보살펴 줄 권력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그때, 페르네가 말했다.

"아, 그리고 애셔 님 앞으로 지명 의뢰가 하나 왔어요. 말씀하신 대로 거절하려고 했는데 내용을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의뢰서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겔톤이라면...."

미스릴 모험가 파티 만하의 마법사.

과거 베르덴은 그를 대신해 토벌에 참가했고 정령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베르덴이 시선을 돌렸다. 구석에서 반짝이고 있던 정령 블루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모험가가 날 왜 찾는 거지?'

접점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의뢰 내용은 뭐지?"

"그러니까...."

앞장을 넘긴 페르네가 의뢰에 대한 내용을 가리켰다.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던데요?"

"...마법?"

갑자기 무슨 마법?

"거기까지는 적혀 있지 않고 일단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고 해요. 보수도 그때 논의하고 싶다고. 백금 등급 모험가니 신분은 확실한데 의뢰가 전체적으로 두루뭉술하긴 하네요. 거절할까요?"

백금 등급의 마법사면 4위계임이 분명하다.

그런 자가 갑자기 베르덴에게 배움을 청하다니. 대외적으로 베르덴 또한 4위계 마법사로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꺼림직함보단 궁금증이 앞섰다.

어차피 아세른에서 약속 장소를 잡을 테니 베르덴의 마법 훈련에 방해가 되지 않을 터. 의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거절하면 그만이다.

베르덴은 결정을 내렸다.

"아니, 일단 만나 보도록 하지."

* * *

겔톤 로드니.

미스릴 모험가 파티 만하의 마법사이자 백금 등급 모험가.

그는 젠티르 마탑 출신의, 물과 얼음의 4위계 마법사로서.

평소에는 얌전하고 제 역할도 충실히 잘하지만 마법과 관련해서는 고집스럽고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사내였다.

오죽하면 토벌 계획이 잡혀 있는데도 도중에 나가 방에 틀어박힐 정도니. 만약 다른 파티였다면 진즉에 내쫓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 겔톤이 베르덴을 찾아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오직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페르네의 주점에서 베르덴과 마주 앉은 겔톤.

정리되지 낳은 난발의, 짙은 남색 머리칼. 파란색 로브를 두른 그의 외모는 폭력성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학자다운 생김새였다.

눈가가 퀭한 게 많이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저 나이에 나같이 어린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라.'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베르덴은 조용히 겔톤이 먼저 말하길 기다렸다.

이윽고 침묵 끝에 겔톤이 입을 열었다.

"동료들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고위 속성인 전격 계열 마법사, 거기다 다른 속성들까지 자유롭게 다루며, 4위계 마법사임에도 숲의 정령을 토벌하셨다고. 먼저, 동료들을 구해 주신 행동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겔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고 겸손한 태도. 예상과 달리 마탑 출신 특유의 오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베르덴이 말했다.

"저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한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의문입니다. 4위계 마법사에다가 마탑 출신이라면 배울 만한 게 거의 없으실 텐데."

베르덴도 마탑 출신이기에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배우는 마법학이 얼마나 깊고 방대한지.

"음, 그렇긴 합니다. 어린 나이에 마법에 입문해 많은 걸 보고 듣고 또 배웠죠. 솔직히 말해 마법 지식은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거라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얼음과 물 계열의 원소 마법뿐입니다."

겔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 한계 위계는 5위계. 하지만 저는 4위계임에도 너무 큰 벽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 넘을 수 없을 것 같아, 무리하게 마탑을 나오고 모험가로 나섰습니다."

그가 과거를 회상했다.

"많은 불편함이 있긴 했으나, 동료와 함께 사선을 넘는 건...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즐겁고 치열했죠. 하나 그렇다고 벽을 넘을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법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기만 하더군요."

끝없는 정체.

이건 누구에게나 큰 난관이다.

"그래서 저는 다른 속성의 마법에 대해 배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른 분야에 있는 마법에 대해 깊이 공부하다 보면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죠."

겔톤이 자신의 공간가방에서 여러 서적을 꺼냈다.

원소 마법에 대한 이론서. 베르덴이 어릴 적에 완벽하게 이해를 마친 것들이었다.

"지난 5년간, 저는 관련 이론서들을 정독하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도중에 뭔가 떠오르면 방 안에 틀어박히기 일쑤였지요. 저번 토벌에 제가 빠진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겔톤이 분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왜 이런 마법적 작용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이론서는 이해가 되는데 오직 하나가, 하나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겔톤이 책 하나를 책상 위에 강하게 올려놨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페이지가 넝마처럼 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애셔 님을 찾아왔습니다. 다양한 원소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라면 제게 이 이론을 이해시켜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혹시 이 이론에 대해 아신다면, 부디 제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겔톤이 도움을 청했다.

초면인 베르덴에게 한계 위계까지 밝힌 걸 보면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베르덴이 책의 제목에 시선을 향했다.

[다중 연속성 이론]

'이거 내 거잖아.'

겔톤이 가르침을 청한 이론.

8년 전, 베르덴이 만들었으며, 빼앗겼던 이론이었다.

151화 가르침 (3)

다중 연속성 이론.

베르덴이 마탑에서 배우고 스스로 독학하며 얻은, 깨달음의 집약체.

창시자인 그 스스로도 자부심이 가득한 결과물이었고, 실제로 이론이 공개되었을 때는 전 마탑을 넘어 전 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그 주인공은 베르덴이 아니었다.

루커드 매니악스.

베르덴의 이론을 처음으로 증명해 준 마법사였으며, 그의 이론을 강탈해 베르덴이 받았어야 할 모든 영광을 가져간 도둑이자, 현 보헤미른 마탑주의 세 번째 제자가 된 사내.

사실상 베르덴이 겪었던 불행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베르덴이 나락으로 떨어질수록, 루커드는 이론을 발판 삼아 높이 올라갔다.

과거의 베르덴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없이 무력한 약자에겐 진실을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베르덴에게 루커드 따위를 죽이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다. 놈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마법사였으니.

마법사로서 더없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들 루커드에겐 그 기회를 붙잡을 재능도, 노력도 없다. 적어도 베르덴의 기준으론 그러했다.

루커드는 결코 베르덴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

놈이 가진 가치는 발로크 베시아스의 제자라는 것뿐. 그렇기에 훗날 보헤미른 마탑주를 상대하기 전에 루커드를 먼저 처리할 생각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제자라고 해도 놈의 죽음은 마탑주의 자존심에 상처 입히기 쉬울 테니.

베르덴이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중, 겔톤이 이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다중 연속성 이론은 원소 마법사가 반드시 학습해야 할 이론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극히 드물게 한 속성에만 적성이 있던 마법사가 무려 세 가지 속성을 다루게 된 적도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다만...."

겔톤이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론이 너무 난해하더군요. 더군다나 일부 마법사들은 이론을 실천하던 중 마력회로에 큰 고통이 찾아와서 기절한 적도 있다고도... 대체 어떻게 이런 이론을 만들었는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론의 창시자인 보헤미른 마탑주의 제자는 3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고 이전까지는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버러지 따위를...."

베르덴이 곧바로 입을 닫았다.

눈앞에서 쓰레기를 찬양하는 걸 들었더니 반사적으로 하게 된 말실수였다.

겔톤이 잘못 들었나 싶은지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은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제가 그... 이론에 대해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데."

"애셔 님이 최소 4개의 속성을 다룬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재능의 영역이겠지만, 그렇기에 제가 찾지 못하는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다양한 원소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신다고 했으니 배움 또한 깊을 터. 어쩌면 다중 연속성 이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겔톤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 생각이 맞았던 모양입니다. 만약 정말로 이론에 대해 알지 못하셨다면 거절하셨을지언정, '알지 못할 가능성'이라고 되묻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정답이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베르덴보다 다중 연속성 이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역천을 이루어 얻어 낸 새로운 육체.

모든 원소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마력회로 덕분에 그 이론을 본인에게 적용할 기회가 없기는 했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마법사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건 처음이다.

자존심 같은 건 진즉에 버렸다는 뜻. 더군다나 마탑 출신이,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건 이 바닥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덴이 물었다.

"만약 의뢰를 수락한다면 제게 뭘 줄 수 있습니까?"

탁.

겔톤이 푸른 액체가 담긴, 작은 플라스크를 꺼냈다.

"마력 포션. 아시다시피 마탑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마법사의 생명 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이것과 같은 크기의 마력 포션을 8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력 포션은 이미 상용화를 마친 일반적인 포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진귀하다.

구하기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마법사를 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만한 크기와 품질을 보면 최상급 포션보다 3배 이상은 비쌀 터.

하지만.

"다른 건 없습니까?"

"다, 다른 거 말입니까?"

베르덴의 강점 중 하나는 방대한 마력량이다.

과거에도 그랬으나 5위계에 오른 지금은 더더욱. 마력 포션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 마력량은 그에게 있어 한 줌 정도였으며, 애초에 필요한 경우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으음...!"

당황한 겔톤이 신음했다.

큰마음 먹고 소지품을 털었는데 단박에 거절당할 줄이야.

'그만큼 부유하다는 건가? 아니, 그건 당연한 거겠지.'

고위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이니.

돈이 부족할 리 없으니 마력 포션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덴은 현재 수십억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겔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고민이 길어지며 미간이 깊게 파였다.

'돈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안 된다면... 남은 건 매직 아이템인가.'

마침 적합한 게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겔톤이 포션을 집어넣더니 품속에서 더 작은 걸 내놓았다.

짙은 녹색 빛을 띠고 있는 보석이었다. 그걸 본 베르덴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건······."

"덱사르의 보석입니다."

* * *

덱사르의 보석(Dexar's Jewel).

말 그대로 덱사르라는 장인이 자신만의 세공술로 가공한 보석으로, 마법사가 자신의 마법을 담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희귀 마법 물품이다.

"보아하니 2세대 시리즈인 거 같은데, 맞습니까?"

"오, 마법 물품 지식에 대해 해박하시군요. 그렇습니다. 이건 덱사르의 2대 제자들이 만든 보석으로, 제가 젤디른 마탑에 있을 시절에 얻은 마법 물품입니다. 운이 좋았지만... 횟수를 많이 소모하여 가치 자체는 직전에 제시한 포션들과 비슷할 겁니다."

2세대 덱사르의 보석이 담을 수 있는 건 최대 5위계 마법까지.

물론 영구적인 건 아니고 사용 횟수가 제한되어 있는 소모품이다. 겔톤이 가진 보석의 품질을 보면 남은 횟수는 5번 남짓.

그렇다 해도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베르덴이 주목한 건 그게 아니었다.

'덱사르의 보석엔 마법진을 새겨 넣을 수 있다.'

마법진의 악명은 바로 높은 난이도에 있다.

지식을 쌓는 것도 그렇지만, 마법진을 작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실전에서 활용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었다.

덱사르의 보석이 있다면 그러한 시간을 생략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단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마법진을 완성하면 수정할 수 없다.

보석 자체에 새기는 거라 되살리는 건 덱사르 본인이 온다고 한들 불가능하다. 용도가 한정된다는 의미.

이어 두 번째, 마법진을 사용하면 보석은 소멸된다.

남은 사용 횟수와는 무관하다.

마법진을 새기는 즉시 일회용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물론 효율 좋게 사용 횟수가 한 번 남았을 때, 마법진을 새기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건 앞뒤가 맞지 않다.

아끼고 아끼느라 마법진을 새기는 걸 늦춘다면 언제고 필요할 때에 즉시 사용하지 못할 테니까. 본래 있던 마법진의 단점을 되살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보석에는 공통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마법을 담은 혹은 마법진을 새긴 마법사 본인밖에 쓰지 못한다는 것. 마력과 관계가 깊기에 타인이 간섭하는 게 불가능하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법이나 마법진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더 난장판이 됐을 거고.

"흐음...."

베르덴은 이런저런 장점과 단점을 고려했다.

과연 덱스터의 보석이, 그에게 있어 유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판단은 곧 내려졌다.

'괜찮은데.'

마법진의 효과가 강력할수록 작성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한 시간을 아예 없앨 수 있다는 건 큰 메리트였다. 마법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정점에 달해 있는 베르덴에겐, 마력 포션 따위보단 덱사르의 보석이 압도적으로 더 매력적이었다.

즉, 보수로써 합당했다.

이유는 더 있었다.

'의뢰 여건도 더할 나위가 없다.'

여타 의뢰들처럼 하나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아세른에 머물면서, 하루에 조금씩 시간을 내어 겔톤을 가르치면 그만이니. 베르덴이 중력 마법을 훈련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설마 내가 만든 이론을 깨우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걸 직접 볼 줄이야.'

뭔가 형용하기 어려웠지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베르덴도 결국 마법사란 거겠지.

겔톤의 의뢰는 수락한다.

베르덴은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 전에 약속을 하나 받아야 했다.

"겔톤 로드니, 제가 의뢰를 수락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까?"

겔톤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르쳐 드리죠."

다른 누구도 아닌, 이론 창시자의 특강.

베르덴이 미소 지었다. 겔톤도 따라 웃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겔톤이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마법사는 나이가 들수록 강해진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지식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연구하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대신 머리가 서서히 굳어 간다.

자신의 배움에 신념을 가진 마법사는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몹시 어려워한다. 되레 그건 틀렸다고 우기기 마련이다.

그런 마법사를 상대로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

겔톤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자신의 배움과 다른 것들을 배척하지는 않았으니까. 단지 머리가 딱딱해서 다른 이론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이걸 스스로 해결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이 믿었던 지식에 의심이 생기는 순간, 나머지 지식 또한 의심하게 될 테니.

몇몇 마법사는 여기에서 무너지며, 극소수는 그대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마법사에겐 지식이란 목숨 혹은 그 이상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해결책은 있다.

바로 자신보다 월등한 마법사를 지도자로 두는 것.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할 수 없다.

마법사의 일생을 자극하는 것이기에, 감정이 격해지는 게 당연했다.

"이이... 익...!"

부들거리던 겔톤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저는 그런 이론 같은 거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카데미에서도 그리고 마탑에서도!"

겔톤은 마탑 출신답게 지식은 많았고, 백금 등급 모험가답게 경험도 많았다.

미스릴 모험가 파티 만하에서 그의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유능했다.

마법에 대한 집착과 충동이 강하긴 하지만 이건 마법사로서 흔한 편.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이론을 위해 노력하는 겔톤의 모습은 마법사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가 분노했다.

연 단위로 모험을 함께한 동료들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제 말이 틀렸다는 겁니까?"

"그야 말이 되지 않...."

"'원소의 근원'의 목차 385번과 '발바의 균형'의 목차 229번 그리고 '고유 마력회로'의 목차 63번을 참고한 뒤, 그 관점에 입각해서 보시면 다를 겁니다."

베르덴이 언급한 건 하나같이 난해한 이론들.

겔톤도 위 세 가지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누군가에게 창피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소지품에는 위 이론들에 대한 책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겔톤이 당장에 두꺼운 책들을 꺼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 가며 베르덴이 말한 목차의 내용을 훑었고, 그 뒤에 논쟁을 벌였던 다중 연속성 이론의 문구를 봤다.

"어...."

이해가, 된다.

당장 뭐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에 담겨져 있던 개념과는 분명 상이했다.

겔톤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베르덴이 손가락으로 겔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겔톤 로드니."

겔톤이 베르덴을 찾아온 건 우연에 가까웠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건 곧 최선의 결과로 나아가는 길이다.

굳은 관념을 깨부수는 것.

스스로 역천을 이뤄 낸 베르덴은 그야말로 최고의 적임자였다.

152화 재정비 (1)

베르덴의 가르침은 효과적이었다.

겔톤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법 이론은 너무도 새로웠다. 마치 처음으로 마법 이론을 공부했을 때와 같은 기분.

그렇게 하루가 지날수록 그의 머릿속에 담긴 지식의 탑들은 무너지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은 분명 겔톤이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와 마탑 그리고 지금에 이르며 쌓아 온 지식들.

그것들이 그야말로 무참하게 논파당할 때마다 수십 년간의 일생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반론을 제기해 본들 단 한 번도 겔톤이 이기는 일은 없었다.

'같은 마법사인데 이렇게까지 보는 시야가 다르다니.'

겔톤이 나뭇잎을 볼 때, 자신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고 있는 마법사는 나무의 뿌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대한 지식이 서로 뒤엉키는 일 없게 깔끔히 이해하기까지.

마치 다중 연속성 이론을 자신이 만든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그에 반해 겔톤은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고집마저 힘없이 꺾여 버리고 마는 그런 마법사.

이토록 천재적인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이와 같은 마법사가 존재하는 것에 절망해야 할까.

너무도 생각하는 관점이 달랐기에, 다행히도 추하디추한 질투심 따윈 들지 않았지만,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새로 이해한 마법적 지식에 기뻐하고, 혼자서 해낼 수 없었음에 비관했다.

그렇게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 몇 번이나 오가는데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결국 겔톤은 우울증에 걸렸다.

* * *

페르네의 주점.

구석에 자리 잡은 겔톤은 칵테일을 들이켰다.

달콤한 과즙이 혀를 자극하며 뒤이어 독한 술의 쓴맛이 밀려왔다.

벌겋게 물든 얼굴. 이미 주량은 허용량을 넘어섰으나 겔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에 힘이 풀린 겔톤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한 잔 더...!"

페르네를 대신해 임시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샘웰.

그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결국 술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겔톤을 언제든 손님으로 대하라 했고, 손님의 주문을 막을 권한은 샘웰에게 없었으니까.

대신 알코올 농도를 최대한 줄인 레시피를 준비했다.

로아프라에서 배운 걸 토대로, 샘웰이 새로 만들어 낸 특제 과일 칵테일. 이거라면 만취한 손님에게도 무리가 없으리라.

"샤를로트, 이걸 손님에게 갖다주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인 샤를로트가 칵테일을 서빙했다.

그렇게 겔톤이 잔을 잡으려던 순간.

털썩.

순간 정신을 놓은 겔톤이 힘없이 식탁 위에 엎어졌다.

대낮부터 술에 잔뜩 취한 채 잠에 든 그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이게 며칠째인지.'

샘웰은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마력 상태를 봐준 베르덴이 지하에서 올라왔다. 그가 잠든 겔톤을 바라보자 샘웰이 슬쩍 다가가 물었다.

"저, 애셔 님. 말씀하신 대로 영업시간과 관계없이 저분을 손님으로 대하곤 있습니다만... 저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을까요?"

겔톤이 술에 기대기 시작하고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가는 그의 모습은 로아프라의 폐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술을 도피처로 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저러다 깊게 중독이라도 되면 여러모로 벗어나기 어려울 게 분명해 보였다.

그에 베르덴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저 정도로 힘들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곤란하지."

"네?"

겔톤은 자신만의 틀을 갖추고 있다.

틀이란 마법사로서 응당 가져야 할 확신이기도 하나 그것은 가능성의 배제이기도 하다.

검은색이 하얗다는 관념이 생기면 그 관념을 스스로 깨부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특히 마법사란 족속은 말이다.

베르덴은 그 틀에 금이 가게 했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관념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다.

겔톤으로선 일생에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과도기일 테니, 당연히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을 테지. 틀을 부순다는 건 지금까지의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도 같았으니.

'하지만 타인이 강제로 틀을 부숴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겔톤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베르덴이 할 일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겔톤 본인이 가진 확신에 의심이 깃들게 하는 것 그리고 겔톤에겐 필요한 건 그 관점을 온전히 이해하여 새로운 확신을 갖는 과정이다.

이건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견뎌야 할 문제.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깨달음이란 개개인마다 다르게 오는 법이니. 하지만 확신하건대 역경을 극복하게 된다면 머지않아 다중 연속성 이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고작 술 따위에 무너진다면 무리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길이니 신경 쓸 건 없다."

"아, 넵."

베르덴이 간단히 설명했으나, 당연하게도 샘웰은 그 반의반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으니까. 어차피 또 들어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베르덴이 과일 칵테일을 가리켰다.

아직 겔톤이 입에 대지 않은 새 음료였다.

"그런데 이건 네가 만든 건가?"

"제가 직접 만든 레시핀데, 페르네 님에게 허락을 맡아 여기서 팔아 보니 반응이 아주 좋더군요. 이름은 아직 고민 중에 있습니다."

페르네가 극찬했던 음료 중 하난가.

베르덴은 맛이 어떨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차피 아침 훈련도 끝난 참이니.

"겔톤의 술값은 내가 지불하지."

그렇게 말하고 베르덴이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으깨진 딸기의 식감 등 과일의 비중이 상당했으나, 그와 함께 조화롭게 섞인 술의 맛은 예상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맛이 좋군. 확실히 팔리긴 팔리겠어."

"가, 감사합니다."

베르덴의 칭찬에 샘웰이 쑥스러운 듯 볼을 긁었다.

"아, 그런데 혹시 라인즈로는 언제쯤 갈 수 있습니까?"

재촉하는 건 아니다.

에이든의 상태가 어떤지 크게 돌려 말한 것이다. 특이 형질에 대해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기에 샘웰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근처에 있던 샤를로트가 귀를 쫑긋거렸다.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신 베르덴이 답했다.

"내일."

"아, 내일...."

샘웰이 눈을 깜빡였다.

"예? 내일이요?"

* * *

에이든에게는 마법적 재능도 있었지만, 혹독한 경험을 겪었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나름의 끈기와 고집도 가지고 있었다.

마력회로가 멋대로 활성화되지 않게 하는 것.

에이든이 이러한 마법사의 기본을 갖추는 데 오래 걸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부족한 점은 있지만.'

감정이 격해지거나 빈사 상태에 이른다면,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마력이 제어를 벗어날 수도 있다.

가진 마력을 완전히 통제하는 수준은 오랜 시간 마력을 다뤄야만 이룰 수 있었으니까. 마력회로를 자각한 지 고작 2주도 되지 않은 에이든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래도 에이든은 당초의 목적이었던 최소 수준의 마력 조작 능력은 갖춘 상태.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더 이상 아세른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다음 날, 페르네의 주점 앞에 마차가 한 대가 준비되었다.

"덕분에 가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잘 배웠습니다, 페르네 님. 이건 약소하지만...."

샘웰이 페르네에게 쪽지를 건넸다.

슬쩍 열어 보자 베르덴이 맛있다고 말했던 특제 과일 칵테일의 레시피가 담겨 있었다.

"이걸 줘도 괜찮은 거예요? 내가 상품으로 쓸지도 모르는데."

"물론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제 레시피가 몇 개 더 있기도 하고, 저와 페르네 님의 장사가 서로 겹칠 일은 없으니까요. 그, 애셔 님도 마음에 드신 것 같고."

"그렇다면 사양하진 않을게요.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인 샘웰이 마부석에 올라탔다.

뒤이어 떠날 채비를 갖춘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꾸벅.

두 사람의 작별 인사에 페르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남매까지 마차에 올라타고 난 후, 베르덴이 샘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베르덴이 페르네에게 말했다.

"그럼 다녀오지."

"잘 다녀오세요, 애셔 님."

페르네에겐 에이든 일행을 데려다준 후, 잠시 들를 곳이 있다고 말해 뒀다.

짧으면 7일, 길면 20일.

그 정도 시간이면 베르덴의 목적을 이루기엔 충분할 것이다. 대신 정확히 시간을 특정하기 어려워, 페르네에게 미리 그레이의 의뢰를 수배해 달라고는 할 순 없었지만.

'시간은 내 편이니까.'

당분간 크게 이자 붙을 일도 없으니, 대부업자 바르톨과 다이나 은행에서 빌린 총 27억 2천만 엘크를 급하게 갚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다 언제나 중요시할 건 베르덴 자신의 강함이었으니.

그리고 겔톤에게도 언질은 해 뒀다.

뭐, 지금 상태로 이론 강의를 받는 건 무리이기도 하고, 스스로 극복하기 전까지는 강제 휴강이기도 하니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가능하면 빨리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만.

"이랴!"

샘웰이 고삐를 내리치자 마차가 출발했다.

아세른의 성문을 지나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녹색 초원. 그 하늘은 더없이 깨끗했다.

* * *

라인즈로 가는 여정은 조용하기도 했고 시끄럽기도 했다.

특히 남매는 아세른에서 충분히 휴식한 덕분인지, 로아프라에서 봤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마차의 속도는 빨랐으나, 심적으로 느긋한 여행길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가 그 라인즈...."

세 명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베르덴에게 있어 아우로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도시였으나 이들에게는 달랐다. 그야 왕국에서도 가장 안전한 도시로 정평이 난 곳이니까.

어렵지 않게 성문을 통과한 뒤, 빌린 마차를 반납했다.

베르덴이 세 명에게 봉투를 하나씩 건넸다.

"전에 약속했던 코스타의 재산이다."

갈리아크가 돈을 가져가지 않은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액수가 많았다.

"감사합니다!"

샘웰이 힘차게 고개를 숙이며 봉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애셔 님."

꾸벅.

샘웰은 그렇다 치고 에이든과 샤를로트는 염치가 없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의 생계에 있어 이 돈은 꼭 필요했으니까.

언젠가 꼭 갚겠다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때, 샤를로트가 주머니에서 작디작은 부적 하나를 꺼내 베르덴에게 건넸다.

──선물이에요.

페르네의 주점에서 일하고 받은 돈.

그걸로 아세른의 시장에서 부적을 사 온 것이다. 물론 베르덴에게서 받은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행운을 바라는 것, 그것이 샤를로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시골 소녀다운 순박함이었다.

"고맙게 받지."

베르덴이 부적을 받자 샤를로트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샘웰이 허허 웃었다.

"나중에 라인즈에 방문하게 되시면 꼭 제 가게에 와 주십시오.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가게 이름은 뭘로 지을 거지?"

"아, 그게... 제 이름을 넣어서 만들까 합니다. 샘웰의 주점 같은 식으로."

가게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것은 샘웰의 로망 중 하나였다.

"기회가 되면 들르도록 하지."

"하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샘웰과 샤를로트는 저마다 하나씩 보답을 했다, 약소할지라도. 그에 반해 에이든은 가장 많은 걸 받았음에도 뭔가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에이든이 소리쳤다.

"저, 저도 나중에 은혜를 꼭 갚을게요!"

에이든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재능을 살려 마법사가 될 수도 있고, 도시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특이 형질을 더욱 발전시켜 역사에 이름을 남길지도 모르고.

어쩌면 훗날 에이든이 베르덴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이미 갚을 필요 없다고 했지만 지금의 에이든은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또 말해 봤자 입만 아프겠지. 베르덴은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로아프라에서 라인즈까지 이어진 인연.

작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 *

에이든 일행을 라인즈에 데려다준 베르덴이 허공을 비행했다.

쟈이안 숲.

금지 중 하나인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 존재하는 숲에 도착했다. 마력감지로 파악한바 이 주변에 사람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공중에 멈춰 선 베르덴이 눈을 감았다.

'마탑을 떠난 지 이제 1년인가.'

마도 축제는 4년 주기로 개최되기에 아예 같은 날은 아니었지만.

날짜로 치면 마탑에서 역천을 이루고 탈출해 공국에 도착한 때가 바로 오늘이었다.

작년 이맘때쯤의 기억이 떠오른다.

상인 콘라드를 위기에서 구하고 파이테 영지에서 광대 오크를 토벌. 그리고 나아가 글러트니의 박사와 적대하게 되었고 강력한 언데드와 맞섰다.

후에 페일에게 의뢰를 받기도 했고, 성신 마법을 전해 주며 4위계로 오르도록 도와준 블랙 아워의 창설자 하르칸과 만나기도 했었다.

고작 1년이란 시간에 불과했으나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

아마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겠지.

베르덴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사고를 전환했다. 굳이 인적이 없는 이 숲까지 온 것은 단 하나, 현재 가지고 있는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함이다.

급한 일을 끝낸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자신의 강함을 직접 확인할 때가 말이다.

153화 재정비 (2)

성신 마법은 하르칸의 마도로 태어난 새로운 속성이며 마법이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첫 번째 별, 유성(流星).

흐름을 거스르는 은하수의 격류. 두 번째 별, 혜성 라레니아(Rarenia).

아직 세 번째 별은 깨닫지 못했지만.

일반적인 마법과 궤를 달리하는 양의 마력을 소모하는 만큼, 비장의 수단이라고 할 만한 '마법'은 위 두 가지가 베르덴에게 있어 전부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5위계에 다다랐기에 가능해진 것.

그건 그저 마법사가 가진 마력으로만 이뤄지는 마법이 아니다.

베르덴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기압 지대인 이곳은 하강기류가 형성되어 날씨가 맑았다. 새로운 마법을 시험하기엔 최적의 환경.

화아아아아악!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했다.

4위계였던 자신을 압도하는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쳤고, 밀도가 높아지며 마력이 물리력을 갖기 시작하자 주위의 대기가 크게 흔들렸다.

오른쪽 눈에 떠오른 역천의 마법진.

거대한 마력의 형상을 두른 베르덴의 모습은 마력의 화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한 차례 호흡을 내쉰 베르덴이 마력을 강하게 비틀었다.

<볼텍스>

암자색의 폭풍이 대기를 집어삼켰다.

중력의 힘을 두르고 있는 터라 그 무게 탓에 <폭풍>과 달리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으나, 단점을 아우르는 강력한 압력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하늘에 떠 있던 구름이 끌려오더니 이내 하늘로 솟구쳤다.

쟈이안 숲 중심에 생긴 거대한 소용돌이.

갑작스레 생겨난 상승기류가 본래 지역에 위치하던 하강기류와 부딪쳤다.

불안정해진 대기 속에 갇힌 방대한 양의 수분.

이내 시간이 다해 회오리가 사라지자, 회색의 먹구름 아래로 굵은 비가 떨어지며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르릉───콰앙!

한순간 번쩍인 빛과 함께 자색의 벼락이 지면을 강타했다. 그에 직격당한 나무가 불에 휩싸이며 반으로 쪼개졌다.

마력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천연의 벼락이었다.

어느새 맑은 풍경은 사라지고 악천후가 자리를 잡았다.

그 중심에서 베르덴이 마안을 번뜩였다.

<뇌령>

베르덴의 마력이 뇌운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먹구름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벼락을 베르덴의 마력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연산량과 섬세한 제어 능력에 마력회로에 부담이 찾아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었고 식은땀이 흘러 턱 끝에 맺혔다.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육체.

그 압박감은 마치 거대한 산이 전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견딜 수 있다.

베르덴이 마력으로 장악한 벼락들을 허공에 집약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벼락이 한데 모인 거대한 광원체. 단순히 마력으로 구현해 냈을 번개와는 비교도 안 되는 뇌기가 시선 끝에서 번뜩였다.

마법으로 기후를 자극해 변화시키고, 그 기후를 이용하여 부족한 마법의 위력을 충족한다.

자연을 이용해 원소 마법을 한층 더 강화하는 건 5위계 이상의 원소 마법사에게 허락된 드높은 경지 중 하나.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 뇌구를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다.'

베르덴은 마력 제어에 집중력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자칫 신경이 분산되었다간 광원체가 폭발하며 무차별적으로 벼락들을 흩뿌릴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마법임은 틀림없겠지.

그러나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범위는 국지적이어야 하며.

위력은 한데 집중시켜야 한다.

지금으로선 베르덴의 심상에 떠오른 마법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상황.

다만 여기서 다른 마법을 합성해 변화를 줄 수는 없다. 뇌기가 너무도 강하기에 다른 마법이 버티지 못하고 집어삼켜질 테니까.

'그렇다면.'

삼원색의 중심, 혼돈.

위계에 존재하지 않는 마법, 즉 마도를 흉내 낼 수밖에.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은 베르덴이 다시 한번 마력을 일으켰다.

조금 남아 있던 여력을 전부 끌어모았다. 실핏줄이 터지며 눈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고, 숨은 목젖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사력을 다한 베르덴이 광원체에 하나의 속성을 부여했다.

중력이 가진 무게.

고위 속성인 전격 계열과 중력 계열로 이루어 낸 혼돈 마법.

광원체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밝은 어둠이 명멸했다. 이것이 원소 마법사로서의 베르덴이 가진 전력.

그가 제어를 풀며 광원체를 끌어 내렸다.

<루인Ruin>

정적이 내려앉은 일대.

중력에 이끌린 광원체가 대기를 뚫고 아래로 낙하했다.

그렇게 지면에 착탄한 순간.

────!

푸른 섬광이 소리 없이 번쩍이며 공간을 집어삼켰다.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파괴. 이내 광원체와 맞닿은 지면을 중심으로 거대한 푸른 기둥이 치솟아 구름을 관통했다.

마치 하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광경.

이윽고 기둥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베르덴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반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숲의 일부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침묵의 대지. 초고온의 열과 빛에 아예 검게 물들어 잿더미조차 남지 않은 공간에서는 어떠한 생명체조차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게 1년의 결과물인가....'

압도적이다.

5위계의 기준을 아득히 넘어선 위력에 베르덴이 전율했다.

그렇기에 베르덴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강하게 지끈거리는 머리.

전신의 마력회로는 너덜거렸고 몸은 욱신거렸다.

베르덴은 지면으로 내려갔다.

비틀거리다 이내 무릎을 꿇으며 손으로 땅을 짚었다.

'역시 무리였나.'

지식으로 판단하건대, 직전의 마법은 6위계 최상위 혹은 7위계에 비견될 만한 위력을 품고 있다.

5위계 마법사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수준. 그걸 아티팩트와 스스로의 제어 능력을 통해 억지로 만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가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베르덴은 생각을 정리했다.

직전의 마법에 소모한 총 마력은 유성, 혜성과 엇비슷한 정도. 마력 면에서는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성신 마법은 하르칸의 마도로 정의된 것.

그에 반해 베르덴의 마법은 여러 마법을 복합적으로 결합하고 자연의 원소조차 끌어내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체계화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연산량의 차이는 굳이 비교할 것 없이 후자가 압도적이었다. 마력 제어에 따른 마력회로의 부담이 극심한 편이고.

'그렇기에 명심해야 한다.'

지금의 마법은 베르덴이 언제든 펼칠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환경이 받쳐 주어야 하며, 유리한 기후를 형성하고 또 마력을 제어할 시간까지 소모하고 나서야 비로소 구현할 수 있다.

어지간히 멍청한 상대가 아니고서야, 그렇게나 긴 시전 시간을 기다려 줄 리는 없을 테니.

이 마법을 단신으로 이뤄 내려면 7위계에 올라서야 하겠지. 아니면 특별한 마도를 이루거나.

둘 다 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경지였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곤 목적을 상기했다.

새로운 마법을 만들고, 그 마법을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구상하는 등 5위계 원소 마법사로 체계화된 전투 방식을 갖추는 것이 최우선 목표.

그렇기에 베르덴은 이 숲에 찾아왔다.

쟈이얀 숲.

인적이 없는 이곳은 마법을 실험할 최적의 장소였으며.

빛이 들지 않는 동굴.

괴물들로 가득한 왕국의 금지는 실전을 경험할 수 있는 사냥터였으니.

'내 전력을 분명히 확인했으니.'

이제 재정비에 들어갈 차례다.

생각을 마친 베르덴.

그의 벽안이 강하게 명멸했다.

* * *

어둠이 만연한 지하.

머나먼 과거에 버려진 폐허 속에는 거대한 원형으로 이뤄진, 기이한 형태의 의식장이 존재했다.

의식장 중심에는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제단이 있었고, 바깥의 경계에는 지면에 새겨진 경로를 따라 일자형의 기다란 등잔대가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한 노인이 제단의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있었다.

흑색 로브를 두른 흑마법사가 다가왔다.

"노사, 의식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주검의 영광, 노사.

그가 눈을 뜨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인가."

2년이 넘는 왕국에서의 시간은 길고도 지루했다.

어린애 싸움과 다를 바 없는 왕위 다툼에서 3왕자를 지원하는 건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해야만 했다.

에스리티아 왕성 아래에 잠든 '그것'을 얻으려면 절대적으로 왕가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거래는 필요 불가결했다.

노사가 물었다.

"비올라는 잘 대기하고 있나?"

"예. 하지만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건 여러모로 비올라와 맞지 않는 일이었으니. 도중에 날뛰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지."

교구에 잠입한 비올라는 주기적으로 연락을 보냈다.

지루하다, 그만하면 안 되냐, 위선자들을 모조리 찢어 죽이고 싶다 등 잡설이 많긴 했지만 착실하게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했다.

듣자 하니 4인의 주교가 힘을 모아 사령의 보주를 정화하는 중이라고.

'위선자들이 발악을 하는군.'

사령의 보주는 주교 따위의 신성력으로는 정화되지 않는다.

최소 대주교나 추기경 또는 성녀급이 아니라면 그 사기를 지워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왕국에 그 정도의 성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노사는 사령의 보주를 미리 확보하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방해도 없이 의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식의 준비가 끝난 지금, 놈들이 훔쳐 간 사령의 보주를 회수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비올라라고 해도 홀로 교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어렵다.

주교와 성직자의 지원을 받는 성기사단은 특히나 흑마법사에게 까다롭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러니 시선을 돌려야겠지."

노사가 품속에서 잘 말린 가죽을 하나 꺼냈다.

스크롤(Scroll).

고대에 실전된 마법의 기록서로, 마법을 담아내어 누구라도 마법을 사용케 하는 일회용 아티팩트. 드래곤의 외피로 만들어진 스크롤 안에는 고위계의 마법이 담겨 있다.

무려 7위계에 위치하는 흑마법이.

왕국에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윗분'들에게 하사받은 물건이다.

이거라면 교구의 시선을 돌리고, 3왕자의 거래를 이행하기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또한 이참에.

"쿤엘을 죽이고 사령의 보주를 훔쳐 간 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도 좋겠지."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그녀를 떠올린 노사가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리마넨."

"예, 노사."

노사가 리마넨에게 스크롤을 건넸다.

"망자의 행진을 거행하라."

* * *

새로운 혼돈 마법을 만드는 데 4일.

너무도 다양해져 이제는 난잡해진 모든 것을 재정립하는 데 4일.

그리고 체계화한 마법과 전투 방식을 실전에서 실험하는 데 또 4일이 걸렸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

베르덴이 전에 까마득한 구렁으로 이어진 통로에 살던 이형종과 아인종 무리를 토벌한 적이 있었으나, 짧은 시간 동안 그 빈자리를 새로운 괴물들이 다시 차지하고 있었다.

전보다도 더욱 위험한 이형종이 기괴한 눈알을 번뜩였다.

오히려 좋다.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콰앙! 콰과광!

실전에 투입된 베르덴은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통로에 있는 놈들을 몰살한 뒤에는 반대쪽에 있는 동굴 미로까지 정리했다.

5위계에 이르며 더욱 방대한 마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마력량을 대거 소모했을 정도의 극한의 시간.

이후 3일 동안은 지친 체력과 소모한 마력을 자연적으로 회복하는 데 전념했다.

그렇게 베르덴이 재정비에 들어간 지 약 15일가량이 흘렀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을 비췄다.

휴식을 취한 덕에 얼굴에 피곤한 기색은 없었지만, 유자의 로브를 포함한 옷 곳곳에 이형종의 체액이 묻어 있었다.

"엉망이군."

다행히도 냄새는 덜했으나 미관상으로는 최악이었다.

게다가 물로 지워지지도 않았다. 이대로 아세른으로 가야 한다라....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무방비하게 장비를 벗을 수는 없으니.

아세른 성문 근처에 도착하고 난 뒤에 옷을 갈아입으면 되겠지.

찝찝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지금 베르덴의 기분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홀가분했으니까.

자신의 전력을 다시금 가다듬은 결과.

마력량이나 마력회로에 거의 변화는 없었으나.

베르덴은 마법사로서의 역량이 한층 더 높아졌음을 실감했다.

두 가지 고위 속성과 다양한 원소 마법, 심지어 부여 마법까지.

그야말로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다 해도 초월자인 마탑주에게 닿으려면 멀었지만....'

베르덴의 성장 속도는 압도적이다.

과거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만 나아가자.

베르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굳게 다짐했다.

* * *

<비행주파>를 사용한 베르덴이 아세른에 당도했다.

근처에 있는 슬론 숲에서 의복을 갈아입었다. 작년에 상인 콘라드가 파이테 영지에서 준 고급스러운 짙은 파란색의 의복이었다.

그간 혹독하게 단련된 베르덴의 육체 탓에 약간 갑갑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겉으로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뭐, 나쁘지 않군.'

장비를 공간가방에 수납한 베르덴이 성문을 통과해 페르네에게 향했다.

최우선의 일을 끝냈으니 의뢰를 수행할 차례다.

먼저 페르네에게 의뢰의 선별을 부탁한 뒤, 장비의 세탁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편이 더 효율적일 테니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주점의 문을 열었다.

"애셔 님!"

베르덴을 본 페르네가 황급하게 달려왔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칼리아 님에게서 지명 의뢰가 왔어요."

칼리아?

'주검의 영광에 대한 단서라도 얻은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저번 의뢰로 사령의 보주를 받은 뒤, 칼리아는 흑마법사 집단의 흔적을 쫓는다고 한 적이 있었으니.

자세한 내용을 묻자 페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적혀 있지 않아서 모르지만 상당히 급하신가 봐요. 다름이 아니라 직접 아세른에 찾아오신다고 했으니...."

직접 찾아온다라.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언제 온다고 하지?"

"예, 그러니까...."

그때, 주점의 문이 열렸다.

평범한 단색 로브를 눌러쓴 한 사람이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고개를 들자 검붉은 눈동자가 베르덴과 마주쳤다.

"잘 지냈나, 애셔?"

백강 칼리아.

그 모습에 페르네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오늘이요."

154화 망자의 행진 (1)

칼리아의 백결 기사단이 인파 속에 숨어 페르네의 주점을 호위했다.

주점 안에는 칼리아와 베르덴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페르네가 따뜻한 커피를 가져와 차례대로 대령했다.

"잘 마시지. 그나저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군, 페르네."

"죄송합니다, 칼리아 님. 미리 찾아뵀어야...."

"괜찮다. 내가 한 의뢰를 통해 애셔를 보낸 것만으로도 인사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칼리아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했다.

하나 당연하게도 페르네는 편하지 않았다.

작위를 수여받지 않았을지라도 칼리아는 이미 스스로의 입지를 다진 귀족. 썩어 빠지고 무능한 왕국 귀족의 자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레이에서 오래 활동한 페르네라고 해도 긴장해야 할 상대였다.

"감사합니다, 칼리아 님."

페르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의뢰길래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아, 그건...."

칼리아가 페르네에게 시선을 보냈다.

민감한 사안이니 잠시 자리를 피해 달라는 뜻이었다.

페르네가 냉큼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주점에 둘만 남게 되자 칼리아가 입을 열었다.

"네비론 주교를 통해 사령의 보주를 교구로 운송한 이후, 나는 조합의 운영자와 주검의 영광을 추적하는 데 주력했다. 근신이 끝나고 난 뒤에는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움직이기도 했지."

"성과는 있었습니까?"

칼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베켄이 잡히고 난 이후 다른 조합의 운영자 두 명은 곧장 종적을 감췄다. 그에 더해서 주검의 영광은커녕 흑마법사 하나조차 찾지 못했지. 결국 성과는 없었다."

가문의 힘을 빌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놈들의 뒤에 있는 3왕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위세가 대단하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가의 피를 이은 자와 대놓고 칼을 맞대긴 어려웠다.

1왕자나 2왕자가 도와준다면 가능은 하겠지.

하지만 왕자들은 서로를 왕위의 경쟁자라고 여기면서도 왕가의 절대적인 권위를 중시하는 자들이다.

본인들의 손에 피를 묻힐지언정, 정적을 없애기 위해 감히 귀족들이 왕가에 이빨을 들이대는 걸 좌시할 리가 없었다.

"페르네와 네가 준 명분으로 조합과 몇몇 귀족을 크게 압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위에 있는 3왕자, 공작, 후작급의 존재들은 건들지도 못했지. 저마다 가차 없이 꼬리를 잘라, 우리 후작가가 개입할 명분을 없애 버리니까."

칼리아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쓴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 정치란 필수적인 요소지. 그건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 정치가 치부와 탐욕을 숨기는 데 사용되니... 왕국의 정치에 환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더군. 차라리 홀로 군대를 상대하는 게 나을 정도야."

뭐, 어쨌든.

"그런 짜증 나는 나날들을 보내던 중 교구에서 연락이 왔다. 그에 대해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어 보고 싶나?"

"나쁜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그게 더 궁금하니까.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쁜 소식이다. 교구에서 사령의 보주를 정화하는 데 실패했다."

* * *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주교가 직접 나섰는데도 말입니까?"

"교구에 모인 4명의 주교가 직접 정화를 시도했지만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는군. 네비론 주교가 직접 편지를 보낸 것이니 사실임이 분명하겠지."

네비론 주교의 편지에 적혀 있길.

사령의 보주는 단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외적인 무언가를 근간으로 삼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대주교 이상의 신성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단번에 완전 정화가 가능할 터지만, 주교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대주교 정도 되는 존재를 왕국으로 불러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니 수개월은 걸리겠지. 그렇다고 해외로 보내자니, 주검의 영광이 급습할 위험이 크고. 그렇기에 신성력으로 억지로 정화하는 건 무리라는 것이 교구의 판단이다."

신성력으로는 무리라는 건....

"그 말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게 바로 좋은 소식이지. 다행히 그 근간들을 찾아낼 수단을 확보했다고 하더군."

네비론 주교가 편지와 함께 보낸 목걸이.

언데드나 흑마법과 같은 사기(死氣)에 반응하는 물건인데, 사령의 보주에 오염된 신성력을 활용하여, 특정 사기에 반응하도록 개량했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반응이 강해지는 구조였다.

"근간으로 특정된 것은 총 세 개. 그중 하나는 내가 맡고, 나머지 두 곳은 교구의 성기사단이 처리하기로 결정됐다. 이미 베스파에게 목걸이를 전달해, 근간이 위치한 장소를 특정하고 있지."

올빼미와 같은 외부인을 쓸 수는 없었다.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는 그야말로 극비였으니까.

"세 곳이라. 성기사의 숫자는 충분한 겁니까?"

"당연히 부족하지."

루아스교는 세계 종교다.

그 영향력은 동대륙, 서대륙, 중앙 대륙 할 것 없이 강력하다.

왕권을 중요시하는 에스티리아 왕가로서 달가울 리가 없었다.

여러모로 내정에 간섭할지도 몰랐으니까. 왕족이나 귀족이나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다.

그 결과물이 루아스교에 대한 헌금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국가와 달리 교구가 수도 멀리에 지어지기도 했고, 헌금이 적은 만큼 루아스교가 할애하는 성직자나 성기사의 숫자 또한 최소화되었다.

"이것 또한 정치적인 이유지. 그래도 각 교회에서 신성 장비를 빌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으니 불만은 없다. 솔직히 말해 신성력만 제외한다면, 내 기사단으로도 성기사의 빈자리는 채우고도 남을 테니."

그리고.

"애셔, 너도 있지 않나?"

왕국의 금지에서 사령의 보주를 회수한 마법사.

그 강함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칼리아는 그를 단신으로 미스릴 등급에 준하는 실력자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자들을 구할 바에 이 잿빛 머리의 마법사 하나를 고용하는 게 훨씬 더 나을 터.

"보수는 기본 4억 엘크. 그리고 활약에 따라 추가금으로 최대 4억 엘크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

"상당한 액수군요."

"주검의 영광이 가진 저력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럴진대, 너와 같은 마법사를 고용하는 데 가성비를 따지는 건 멍청한 판단이지. 그래서 대답은?"

의뢰를 수락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언제쯤 출발할 예정입니까?"

"6일 뒤에 도시 카베른에서 베스파 일행과 합류할 생각이다. 그러니 늦어도 이틀 내로는 출발하는 게 좋겠지. 달리 바쁜 일이라도 있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겔톤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잠시 장비를 맡겨야 합니다."

"장비?"

그러자 칼리아가 베르덴의 옷을 바라봤다.

"확실히 전에 본 적 없는 옷이로군. 장비가 손상이라도 된 건가?"

"그게 아니라 너무 더러워져서 말입니다."

"갑옷이나 무기가 더러워지는 건 항상 있는 일이지. 그런데 대체 얼마나 더럽길래?"

말하는 것보단 보여 주는 게 빠르겠지.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장비들을 꺼냈다. 이형종의 체액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엉망인 상태에 칼리아가 재빠르게 상체를 뒤로 당겼다.

그녀가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애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지?"

뭐, 이것저것?

* * *

카베른으로 출발하기 전날, 베르덴은 겔톤을 찾아갔다.

베르덴이 아세른을 떠나 있는 동안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술에 찌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으니.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겔톤의 상태는 베르덴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후욱! 후욱!"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을 달리고 있는 겔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체력 단련에 집중하고 있는 충실한 모험가가 되어 있었다.

연무장을 한 바퀴 돌던 겔톤이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아, 애셔 님!"

겔톤이 곧장 다가왔다.

그 활기 넘치는 모습에 베르덴이 물었다.

"술은 이제 안 드시는 겁니까?"

"그게... 숙취를 몇 번 겪었더니 도저히 술이 넘어가지 않아서 말입니다."

겔톤이 멋쩍게 웃었다.

주점에도 가지 않게 된 그는 며칠 동안 멍하니 방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술도 끊었겠다, 당장 마법 이론을 공부하려 했지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러다 마법이라도 연습할까 해서 연무장으로 나왔습니다. 근데 머리가 멍하니 마법 연산이 잘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대충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린 모험가들이 들어왔습니다."

등급이 가장 낮은 백결 등급 모험가들.

고블린도 사냥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새파랗게 어린 그들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기초 체력은 모험가의 기본 중 기본이었으니까.

겔톤은 멍하니 모험가들의 훈련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들을 따라 가볍게 뜀걸음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찌뿌둥한 몸을 푸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몸을 격하게 움직이다 보니 상당히 힘이 들었다. 호흡을 조절하는 것조차 벅찰 정도였으니.

마법사의 체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겔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를 혹사하면 상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때부터 그냥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근육통이 심하긴 했지만 오히려 마법 생각도 안 나고 잠도 잘 오더군요."

몸이 건강해지자 정신도 다시 건강해졌다. 처음의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아직도 베르덴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지긴 했지만... 전과 달리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여력은 있었다.

베르덴이 생각했다.

'설마 운동으로 우울증을 극복할 줄이야.'

마탑 출신 마법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저 술에 기대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베르덴이 간략히 답했다.

급한 의뢰가 생기는 바람에 이론 강의를 더 미뤄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겔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솔직히 지금은...."

한차례 망설인 겔톤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준비가 되면 애셔 님께 직접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겔톤은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전에 봤을 때와는 현격하게 달라졌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

겔톤이 스스로 틀을 부수는 데 말이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겔톤의 말을 존중했다.

* * *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 그리고 베르덴이 왕국 남쪽으로 남하했다.

목적지는 도시 카베른.

잘 훈련된 군마를 이용한 터라 이동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합류하기로 한 당일 새벽에 도착하여, 성벽 근처에서 야영을 한 뒤 아침에 돼서야 카베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규모는 작은데 성벽은 상당하군.'

거기다 도시 곳곳에 작은 요새들이 세워져 있었다.

성벽 바깥에 논밭이 있는 걸 보아, 전시 상황에 다수의 농민과 곡식들을 지키기 위한 요충지인 모양이었다.

"이쪽이다."

베르덴이 칼리아와 기사단을 따라 외곽으로 향했다.

인적이 없는 골목길.

낡은 건물에 들어가자 한 나무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칼리아가 문을 정확히 네 번 두들겼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며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아 님."

베스파와 그 수색대들이 칼리아를 맞이했다.

"다행히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나 보군."

"말씀하신 대로 위치만 파악한 뒤 바로 후퇴했습니다."

"잘했다."

주검의 영광에 소속된 흑마법사는 위험하다.

아무리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섣불리 정보를 캐내려다가 발각되어 죽거나 부상을 입는다면 크나큰 손실이었다. 기습의 기회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할 바에 차라리 일찌감치 물러서는 게 나은 판단이었다.

칼리아가 낡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놈들은 어디에 숨어 있지?"

베스파가 지도를 가져와 책상 위에 펼쳤다.

카베른의 주변 지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베스파가 지도 오른쪽 구석에 있는 무덤 그림을 가리켰다.

"이곳, 에스티리아 왕국 국립묘지입니다."

155화 망자의 행진 (2)

왕국 국립묘지.

주로 시민들의 시신을 안치하는 거대한 안치소다.

특성상 언데드의 자연 발생 확률이 높은 편.

물론 시체를 화장한다면 그 확률을 대폭 낮출 수 있긴 했으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화형이란 대역죄인, 이단자 혹은 악마에게나 할 법한 처형 방식이었으니까. 아무리 시체라고 한들 가족의 시신을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건 정서적인 거부감이 컸다.

그리고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자들의 반대 또한 격렬했다.

가문의 일원, 그들의 시신은 가문에게 있어 강력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니까.

뼛가루로 만들어 유골함에 넣는 것보단, 가문의 무덤에 온전히 안치하여 안식을 바라는 것이 여러모로 마땅했다.

하물며 비용 문제까지.

땅 아래에 묻는 것보단 화장터를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 당연히 비용이 클 터.

하루하루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빈곤한 사람들에겐 그조차 부담이다. 분명 누군가는 몰래 시신들을 인적이 드문 땅에 매장하겠지.

그럴 경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언데드가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한곳에 모아 관리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탄생한 게 국립묘지의 존재다.

칼리아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립묘지라... 확실히 주검의 영광이 숨어 있을 법하군."

묘지에는 흑마법의 재료가 될 것이 많으니까.

사악한 흑마법사들이 은신처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뻔해서 의심조차 들 정도였다.

하지만 국립묘지에는 관리자들이 있다.

국가에서 자격을 허가받은 흑마법사들. 그뿐만 아니라 이상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주기적으로 주변 도시에서 병사를 파견해 꼼꼼히 순찰도 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관리자들이 이미 당했다는 뜻이다.

'아니면 주검의 영광에 가담했거나.'

칼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베스파, 국립묘지의 내부 설계도는 확보했나?"

"물론입니다."

베스파가 낡은 설계도를 책상 위에 펼쳐 고정했다.

칼리아가 설계도를 면밀하게 바라봤다.

묘지에는 여러 건축물이 많긴 했지만, 그녀의 이목을 끈 건 단 하나뿐이었다.

묘지 중심에 세워진 거대한 영묘.

그 아래에는 총 2개 층으로 이루어진, 넓은 지하 안치소가 존재했는데, 설계도로 보아 주검의 영광이 은신처로 삼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그리고 영묘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 그 외 출구는 없었다.

급습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지만 달리 말하자면 놈들이 도망칠 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을 마친 칼리아가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계획을 하달하겠다."

그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 하나의 기사단을 이끌며 강함을 세간에 인정받은 후작가의 장녀. 귀족들조차 상대하기 꺼린다는 그녀가 과연 어떤 계획을 구상했을까.

베르덴은 내심 기대하며 칼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칼리아가 선언했다.

"정면 돌파로 간다."

"...."

칼리아는 베르덴의 예상 이상으로 저돌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