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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

"커어어억!"

칼끝이 흑마법사의 복부를 관통했다.

칼날을 비튼 뒤 옆으로 긁어 내듯 휘두르자 흑마법사는 즉시 절명했다.

토벌대원이 가쁜 호흡을 내쉬며 바닥에 무릎 꿇었다.

마비의 저주에 적중당해 호흡이 너무도 힘겨웠다.

그러자 뒤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주를 완화했습니다. 완전히 해주하긴 어려우나 당장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토벌대원을 향해 성직자가 빙긋 웃었다.

지금까지 사악한 흑마법사의 토벌은 별탈 없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성직자들에게 지원을 받는 토벌대는 흑마법사에게 있어 천적 그 자체.

도중에 은신처에 잡혀 있던 여성 또한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성직자가 어깨에 걸친 로브를 벗어 여성에게 건넸다.

"보온 효과를 지닌 것이니 추위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고, 고맙습니다, 성직자님...!"

여성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위험에 빠진 어린양을 구하는 건 그의 보람이었다.

"그, 근데 성직자님. 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야 물론입니다. 루아스 신의 맹세하건대 반드시 안전히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먼저 도시 라인즈에서 건강을 되찾으신 뒤 말이죠."

성직자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라인즈라면... 그 훌륭하신 에스퍼렌사 후작 각하께서 다스리는 대도시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왕국의 평화를 위해 진심을 다하는 분들이지요. 당신을 구해 낸 것에도 그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 모든 게 루아스 신의 인도겠지요."

"아하... 그분들이...."

여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성직자의 등 뒤로 한 발자국 다가서더니 작게 속삭였다.

"감히 누가 여길 쳐들어왔나 했더니 에스퍼렌사였구나? 배신자의 행방을 놓쳤다고 들었는데, 그쪽으로 간 건가?"

"네? 지금 무슨...."

"알려 줘서 고마워. 그럼 잘 가."

핏.

바늘보다 얇은 뼈의 가시가 성직자의 척수와 뇌를 관통했다.

일격에 성직자를 즉사시킨 여성, 비올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사, 걔도 참 깐깐한 척은 다 하더니 기껏 만든 은신처까지 털렸네? 뭐, 어차피 여기 남은 건 잔챙이뿐이었지만."

배신자가 생긴 시점에서 은신처를 옮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

그나저나.

"배신자가 에스퍼렌사 쪽에 붙었다면... 사령의 보주도 거기 있으려나?"

잠시 고민한 비올라가 결단을 내렸다.

왕국에서 이미 질릴 만큼 시간을 보낸 그녀는 하루빨리 3왕자와의 거래를 끝내고 싶었다.

비올라의 시선이 시체가 된 성직자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인형극이나 해 볼까?"

* * *

...시간이 지나 세 개로 나뉘었던 토벌대가 한곳에 모였다.

부상자는 있었으나 성직자들 덕분에 희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더군다나 은신처 내부에 잡혀 있던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몸 안에 새겨진 저주 탓에 포로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흑마법사의 진상에 더 가까워지면 될 터.

"다행히 도망친 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남은 잔당이 없는지 철저하게 확인한 성기사가 말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결과였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흑마법사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칼리아 님이 기뻐하시겠군.'

베스파가 내심 웃으며 토벌대의 귀환을 이끌었다.

그러나 성기사도 성직자도 그 어떤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성직자 한 명이 죽었으며.

그 껍질을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남아 있다는 것을.

* * *

"고생했다, 베스파."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칼리아 님."

칼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충실한 기사단장에게 실망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칼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애셔는 무사한지 모르겠군."

그동안 칼리아는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아무리 그가 스스로 나서겠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사지로 보낸 셈이니까.

무거운 짐을 떠넘긴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 간단히 당할 사내는 아니었으니 걱정 마시지요. 그리고 아직 돌아오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릴 테니, 그를 믿고 소식을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긍정보다는 부정이 앞선다.

칼리아가 달콤한 차를 마시며 씁쓸한 입맛을 달랬다.

그러던 그때, 사용인이 문을 두들겼다. 손님이 왔다는 뜻이었다.

'아마 네비론 주교겠지.'

며칠 전, 워렌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의논할 게 있다고 했었으니까.

뭐라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칼리아가 손을 저었다. 직접 배웅을 나선 베스파가 잠시 후 돌아왔다.

칼리아가 손님을 반기려던 찰나.

"어...?"

"다녀왔습니다."

주교가 아니라 베르덴.

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채로 나타났다.

135화 은행 대출

쟈이안 숲과 대도시 라인즈의 거리는 일반적으로 약 13일.

거의 쉬지 않고 말을 갈아타며 이동하면 7일, 끊임없이 비행을 쓴다면 3~4일 정도의 거리다.

일절 잠을 안 자고 최대한 빨리 움직인다 해도 왕복에 6일에서 8일은 걸린다는 뜻.

그리고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여긴 목숨 자체가 위험한 금지이기에 함부로 기간을 예측할 수는 없다. 대신 늦어도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으면 죽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갑갑한 어둠 속에서 그 이상으로, 더군다나 혼자서 살아남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고작 13일이라고?'

운 좋게 사령의 보주가 동굴 입구에 걸려 있기라도 했던 건가? 아니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다.

베르덴과 칼리아가 마주 앉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먼저, 무사히 와서 기쁘다.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그런데 우리가 예상한 시간과 차이가 크군."

돌려 말하긴 했으나 뜻은 같았다.

정말로 사령의 보주를 가져왔냐는 의미일 터. 확실히 베르덴이 생각해도 너무 빨리 오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해 가며 움직일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사령의 보주를 꺼냈다.

희미한 자색의 빛이 칼리아와 베스파의 시야에 비쳤다.

"그건...."

"사령의 보주입니다."

베르덴이 마력으로 보주를 자극해 억압된 기운을 끌어내자, 죽음의 기운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엘더 리치가 사용한 이후로 상당히 약해진 상태이긴 했으나, 진짜임을 증명하기엔 충분하다.

마력을 거두자 기운이 사라졌다.

내려앉은 침묵.

칼리아와 베르덴의 시선이 교차했다.

"의뢰는 어땠지?"

"쉽지는 않았습니다."

"쉽지는 않았다라."

칼리아가 입가를 비틀었다.

'내 생각이 틀렸군.'

눈앞의 마법사는 운이 좋은 게 아니었다.

단순히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을 돌파하여 사령의 보주를 회수한 것이다.

이제 보니 그의 로브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로브 끝자락이 부식되어 있는 등 마법의 흔적까지도.

"방해가 있었나 보군. 주검의 영광인가?"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마주쳤습니다."

"설마 금지까지 쫓아올 정도라니. 이 보주가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의미겠지. 그나저나 네 모습을 보니 상당히 강한 흑마법사였나 본데."

강하긴 했다.

물론 흑마법사가 아니라 엘더 리치를 말하는 거지만.

베르덴은 의뢰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노력에 금칠을 해 봤자 보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힘든 척하며 추가 보수를 요구할 수도 있긴 하지만 베르덴은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의뢰의 보수인 칼리아의 신용.

엘더 리치를 상대한 걸 감안한다 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적어도 베르덴에겐 그러했다.

"아주 고생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군. 놈들의 은신처까지 토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그렇습니까?"

"뭐, 워렌스가 말했던 노인과 여성이 없는 걸 보아, 배신자가 생긴 시점에서 은신처를 옮긴 것 같긴 하다만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되려던 사람들은 구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과지."

그리고.

"비밀리에 관련자들을 추적해 주검의 영광의 흔적을 쫓고 있다. 그리고 놈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사령의 보주를 빼앗는 데도 성공했으니, 잘하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칼리아는 왕국을 위할 뿐, 왕가에 충성하지 않는다.

3왕자와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왕국을 위협한다면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보상에 대해 논하는 게 먼저겠지."

칼리아가 붉은 주머니를 건넸다.

"열어 보도록."

그러자 에스퍼렌사의 상징이 새겨진 검붉은 인장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원하던 내 신용이다. 그걸 보여 준다면 에스티리아 왕국 어디를 가도 귀족에 필적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신용이 필요한 문제에선 더더욱.

하지만 그렇기에 조심해야 한다.

귀족의 신용, 특히나 에스퍼렌사의 명성을 더럽히는 파렴치한 짓을 벌인다면 가문에서 신용을 회수하러 올 것이다.

당연히 대가는 죽음으로.

"물론 너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위력으로 약자에게 기생한다든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그 빚을 내게 떠넘긴다든가 말이야."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마법사로서 부끄러운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칼리아의 신용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니.

베르덴이 단언하자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그리고 암흑가의 경매장에서 필요한 자금을 구한다고 했었지? 그 인장으로는 최대 25억 엘크까지 빌릴 수 있다."

귀족은 사회에서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그건 은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칼리아의 명의를 빌렸기에 무려 반년간 이자는 면제된다.

그 이후 연 1.8%로 금리가 고정된다. 일반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조건이었다.

"의뢰 보수로 내 신용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도 그렇지만 네가 목숨을 걸고 금지에서 사령의 보주를 찾아왔기에 흔쾌히 준 것이지. 그래도 노파심에 한 번만 더 말하겠다."

칼리아가 검붉은 눈빛을 번뜩였다.

"내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선에서 목걸이는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하지만 만약 돈을 빌리고 도망친다면...."

그 정도 금액은 후작가의 독녀인 칼리아에게도 아찔한 정도다.

당연히 가세가 기울 정도는 결코 아니나, 그녀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증을 섰다가 덤터기 쓴 귀족이라고.

백강이라 불리는 칼리아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자 모욕이었다.

"그러니 꼭 갚아라."

"알겠습니다."

"죽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반드시."

알겠다고.

베르덴은 속으로 답했다.

* * *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베르덴은 당장 라인즈를 떠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바로 경매장에서 사용할 현금이다.

그야 대외적으로 열리는 합법적인 것이 아니기에 계좌 이체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수십억에 달하는 현금을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그누스 은행이든 다이나 은행이든.

어떤 지점에 가든 25억 엘크를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절반만 있어도 다행이지.

그래서 각 지점들이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럴 만한 권한을 가진 자는 대개 대도시의 은행을 담당하는 지점장이고.'

여기 라인즈 말이다.

베르덴이 가진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

더군다나 에스퍼렌사 후작가가 직접 다스리는 라인즈이기에 힘들게 설득하지 않아도 지점장은 도와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고위 귀족의 신용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라인즈의 다이나 은행 지점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마법이다.

'5위계에 도달한 지금, 그에 걸맞은 마법을 익혀야 하는 법이니.'

엘리먼 학파의 보헤미른 마탑.

베르덴은 약 10년 전, 마탑의 연구원으로서 그에게 열람이 허가된 수많은 서적을 섭렵했다.

그것뿐만이 아닌, 마탑의 비공식 실험체로 살아오기까지 했다.

너무도 증오스러운 과거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지식이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베르덴이기에 5위계 원소 마법은 머릿속에 담겨져 있다.

당장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5위계 부여 마법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다.'

그렇기에 수도나 그에 필적하는 도시에 위치한 대도서관에 방문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여러 마탑에서 발행한 다양한 마법 서적이 있었으니까.

국가 차원에서 해마다 마탑들에게 일정 금액을 주고 유치한 것인데, 단순히 그들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계 개선이나 유지에 돈은 최고의 수단 중 하나였으니까.

그 외의 실용적인 가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귀족이 아닌 이상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깊은 지식이 없으면 문장 하나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마법 서적들을 누가 찾겠는가.

대중들에겐 그저 값비싼 관상용 예술품 취급일 뿐이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5위계 부여 마법 서적을 찾을 생각이었다.

대출만 성공적으로 한다면 필요한 자금은 전부 준비되는 셈이니, 투자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일단 다이나 은행부터 간다.'

그게 먼저였다.

우선순위를 정한 베르덴이 라인즈의 거리에 발을 디뎠다.

* * *

다이나 은행.

대도시 라인즈 지점.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지점장님!"

은행의 지점장을 맡고 있는 드렐프가 부하 직원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날마다 같은 하루 일과의 시작.

인자한 인상을 가진 드렐프가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가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누였다.

사라락. 사락.

그 후 어제 직원들이 올린 투자 보고서를 쭈욱 읽어 봤다. 달리 트집 잡을 것도 없었다. 드렐프가 주도했던 투자 사업은 명확히 상승 곡선을 보였다.

"으하하하하. 역시 내 안목은 아주 탁월해. 음!"

드렐프는 오랫동안 중립적인 상회들에게 투자를 감행했다.

지인들이 조합에 투자하라며 꼬드겼고, 조합으로 인해 손해를 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돈을 거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합의 어둠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몰라도 이 바닥에서 소문이 좋지 않은 귀족들은 죄다 조합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왕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라인즈에서 살아온 드렐프는 조합을 가까이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라인즈를 다스리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드렐프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거절했다.

당장 이득이 눈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불안하고 더러운 투자처에 손대는 건 질 게 뻔한 도박이나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걸!'

조합의 부정이 드러나며 다른 상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렐프의 이익도 마찬가지.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올해 왕국 지점장 중에서 실적이 가장 높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잘하면 은행 본점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드렐프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히죽거렸다.

그러던 때였다.

"지, 지점장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직원이 조심스레 양손을 폈다.

드렐프의 시야에 비친 검붉은 인장 목걸이. 바로 후작가의 독녀, 백강 칼리아의 표식이었다.

눈을 부릅뜬 드렐프가 벌떡 일어섰다.

"서, 서둘러 안내를... 아니, 당장 여기로 모시세요! 오면서 차하고 과자도 내오고! 최고급으로!"

"네, 네!"

직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베르덴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저는 이곳의 지점장을 맡고 있는 드렐프 컬리엔. 귀하신 분께서 다이나 은행 라인즈 지점에 방문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자 자, 여기 앉으시지요."

드렐프가 아주 공손하게 안내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내줬다.

이윽고 다과가 준비되었다.

능숙하게 귀족에게나 할 법한 거창한 환영을 마친 드렐프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 다이나 은행엔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대출을 받으러 왔습니다. 현금으로."

"아, 그러시군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희 지점은 다른 지점보다도 현금 보유량이 많아 이용하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혹시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7억? 8억?

드렐프는 경험상 그렇게 예상했다.

"25억 엘크."

"...네?"

드렐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25억 엘크라고?

잠시 기다려 봤으나 대답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진짜?'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라면 최대 대출 한도가 25억 엘크라는 건 알고 있다.

물론 저 이상의 금액을 대출하는 고위 귀족도 있긴 했지만... 결코 흔하지는 않았다.

귀족은 자신의 재산 사정에 대해 타인이 알게 되는 걸 굉장히 꺼렸으니까.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대출을 이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편이었다.

'현금은 더더욱.'

어쨌든 이 지점만으로는 현금이 부족하다.

다이나 은행은 보통 예금액의 태반 이상을 투자에 사용하고 있으니까.

억지로 현금을 만들려면 투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드렐프 혼자서는 무리다.

최소 네 개의 지점이 협조해야 넉넉하게 마련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번거로워진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일이 많아진다.

'일단 고객의 마음을 돌리는 게 우선이야...!'

다이나 은행의 지점장으로서.

드렐프가 화려한 언변으로 크게 돌려 말하며, 어떻게든 베르덴의 마음을 바꾸려 애를 쓰고 또 애를 썼다.

턱을 비롯한 얼굴 근육이 뻐근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통할 리가 없었다.

"25억 엘크. 현금으로 부탁합니다."

"...."

일말의 여지도 없는 단호함.

이미 결정을 마친 베르덴에겐 협상 따위 통하지 않았다.

136화 각오

"...말씀하신 현금은 일주일 내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드렐프의 우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베르덴이 다이나 은행을 나섰다.

당장 현금을 받아 챙긴 건 아니다.

지점장이 말하길, 다이나 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비행정으로 각 지점의 현금을 싣고 아세른으로 운송해 준다고.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준비해 준다니.'

어지간한 귀족에게조차 해 줄까 말까 한 대우다. 이게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힘이란 거겠지.

신분이란 겉치레에 욕심은 없었지만 그 편리성에 대해서 베르덴은 실감하고 있었다.

'이걸로 하나는 해결했다.'

다음으로 대도서관으로 향할 차례다.

목적은 5위계 부여 마법이 실린 서적.

근처 서점에서 구입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위계가 높은 마법 서적은 마탑의 이름으로 엄격하게 유통이 금지되어 있다.

딱히 마법이 유출될까 봐 그런 건 아니다.

설령 5위계 마법이 담긴 서적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누가 뭐 어쩌겠는가.

그 계열을 심도 있게 전공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보기 좋은 관상용 책이나 불쏘시개 따위에 불과할 텐데.

마탑이 유통을 금지한 이유는 하나다.

'그저 고위계의 마법이 시장 바닥에 나도는 게 극도로 싫으니까.'

마법사란 족속 중에는 그런 쓸데없는 자존심을 가진 자가 많았다.

특히나 수준이 높은 마법사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7위계 마도사인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만 봐도 알 수 있지.'

인간을 물건처럼 여기며 쓰고 버리는 미친 인간.

그와 함께 마탑의 비공식 연구에 손을 댔던 자들도 마찬가지다.

베르덴은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마법사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라인즈의 대도서관에 도착한 베르덴.

책임자인 도서관장에게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를 보여 주자, 어렵지 않게 출입 금지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각종 마법 물품으로 보호받고 있는, 값비싸고 귀하며 난해한 서적들이 보관된 장소.

'...저깄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베르덴의 시야에, 두 개의 나선과 그 중심을 관통하는 하나의 직선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보였다.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의 리더, 라이반 크루소.

그의 출신인, 인챈트리 학파를 상징하는 헬리온 마탑의 표식이었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책장 앞에 다가섰다.

'양이 상당한데.'

다양한 부여 마법 서적.

상당히 흥미가 가는 제목의, 정신계 마법 서적도 있었으나 굳이 손을 대지 않았다.

베르덴의 주력은 룬의 반지로 강화된 감각과 부여 마법으로 강화된 신체를 이용한 근접전 그리고 원소 마법이다.

'기초적인 정신계 이론은 알고 있으나, 깊이 있게 공부한 적은 없다.'

보헤미른 마탑은 부여 마법을 일절 다루지 않으니까.

다른 마탑처럼 원소 한두 개도 아니고, 모든 원소를 다루는데 다른 계열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 필요한 건 깊이다.'

단순히 알고 있는 마법이 많으면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겉핥기식으로 마법을 익히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물론 베르덴에게 한계란 없다. 하고자 한다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건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이론을 이해하며 지식을 쌓고, 시행착오를 통해 마법을 익히고.

베르덴이 이룩한 역천의 육체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지, 모든 분야에 천재적인 성장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가진 능력을 더욱 개발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 외적인 요소는 먼 세월 뒤로 미루는 것이 베르덴에 있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책장을 오가던 베르덴이 손이 멈췄다.

"찾았다."

[5위계-리인포스 1편]

베르덴이 서적을 꺼냈다.

마탑에서 취급하는 물건을 바깥으로 가져가는 건 명확한 범법 행위다.

애초에 대여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렇다고 몇 번이고 상주하며 들락날락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여기서 끝낸다.'

베르덴이 도서관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서적을 들여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글자 하나하나까지 다 머릿속에 담는 단순 암기가 아니다.

서적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그가 이해한 부여 계열의 뿌리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5위계 마법의 구성 방식을 해석하는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베르덴의 한계 위계는 1위계였다.

마법사로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최악의 재능이었다.

하지만 마법에 대한 이해력은 감히 베르덴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 증오스런 마탑주조차 천재라고 판단해, 무려 7년간 실험체로 삼아 마탑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용했었으니.

사라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고요히 귓가를 스쳤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다.

대도서관은 하루 종일 운영된다.

고급 마석등이 불을 밝혀 주기에 낮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난 사건 또한 벌어지지 않는다. 마탑이 직접적으로 관여한 도서관은 요새와 다름없었다.

거기에 베르덴이 있었다.

앉은 자세도 호흡도 이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바뀐 건 오로지 책뿐.

식음을 전폐하고 인간의 생리 작용조차 억제하는 그 집중력은 베르덴이 평생을 걸쳐 완성한 것이다.

사라락.

다시금 넘어가는 책장.

그럴수록 베르덴 또한 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도서관에서 3일을 지새웠다.

새로운 마법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이며 막대한 이해력을 쏟았다.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머리가 뜨거웠고, 식사를 하지 않아서인지 몸에 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라인즈에 하루 머물며 허기를 채우고 수면을 취했다.

그렇게 베르덴이 라인즈에 방문한 지 4일째가 되는 날에서야 다시 성문을 나설 수가 있엇다.

인적이 없는 장소로 온 그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대기를 뚫고 구름 위에 도달한 베르덴이 더욱 강하게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의 신형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비행주파>

5위계 기초 마법.

기존의 비행과 달리 방향을 틀거나 역동적인 움직임은 취하지 못하나, 일직선 거리라면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쟈이안 숲에서 라인즈까지 예정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마법 덕분이었다.

육체에 상당히 부담이 가는 고속 비행이긴 하나 베르덴에겐 상관없었다.

경지에 오른 조작 능력으로 주위의 대기를 조작해, 그 반동으로부터 철저하게 호흡과 몸을 보호했으니까.

햇빛이 비치는 풍경이 보다 빠르게 지나쳐 간다.

원할한 비행을 즐기던 베르덴은 지금까지 모아 온 자금에 대해 떠올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과 페르네에게서 받은 의뢰를 해결해 받은 보수.

그리고 칼리아 덕분에 은행에서 대출한 25억 엘크.

'이게 끝이 아니다.'

페르네에게 처분을 맡긴 물건들과 올빼미가 처분한 흑랑 토렐드의 마법 물품을 판매한 값까지 있다.

이걸 전부 합하면 기댓값 38억은 가뿐히 넘어 안전하게 입찰이 가능한 45억까지 넘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대부업자 바르톨에게까지 돈을 빌리면 다른 것도 노려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반인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빚이나 베르덴은 전혀 걱정이 없었다.

돈은 결국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니. 거기다 갚을 능력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당연히 도망갈 생각도 없다.

베르덴이 도달한 5위계.

그것은 하나의 기준점이다.

마법사로서 깨달음을 얻어 마도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경지.

진정으로 복수에 대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주저하지 않는다.'

동력원의 관리실.

최초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의 그 각오와 살의를 그는 잊지 않았다.

조합.

주검의 영광.

에스티리아 왕가의 3왕자.

하나같이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베르덴과 대립하게 된 자들이다.

일개 개인이 맞서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상관없다.'

목적에 방해된다면, 날파리처럼 몇 번이고 눈에 거슬린다면 공국의 글러트니 때와 같이 직접 지워 버릴 뿐이다.

전보다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진 베르덴에겐 망설임은 없었다.

대기를 주파하는 베르덴.

그 끝에는 도시 아세른이 있었다.

* * *

그 시각, 루아스교의 마차들이 라인즈의 성문을 떠났다.

네비론 주교를 필두로, 칼리아의 기사들과 성기사 그리고 성직자.

그들에 의해 안전하게 호위를 받고 있는 마차 안에는 워렌스와 사령의 보주가 각각 따로 실려 있었다.

사령의 보주를 완벽하게 정화하려면 일개 교회에서는 안 된다.

왕국에 존재하는 루아스교의 교구, 그 고귀한 성전(聖殿)에서 고위 성직자들이 공을 들여 오랜 시간 정화를 해야 했다.

그것이 네비론 주교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워렌스.

생명이 위독한 건 아니었으나 몸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령의 보주를 옮길 겸 교구로 가서 보다 수준 높은 치료를 받기로 결정되었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있는 워렌스.

몸은 고통으로 괴로웠으나 그럼에도 마음은 홀가분했다.

'칼리아 님에게 협조를 구해서 정말 다행이야.'

주검의 영광의 은신처를 토벌했다.

노인과 여성은 없었지만 그래도 붙잡혀 있던 불쌍한 사람들은 구했다.

거기다 사령의 보주를 회수하기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놈들의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다름 아닌 금지에 힘껏 내던졌으니까.

이후 몸이 회복된다면 자신이 직접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할지언정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로 인해 동굴에서 언데드가 출몰해 피해가 속출했다면, 워렌스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것이다.

'애셔 님이라고 했었지.'

사령의 보주를 회수한 장본인.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마법사.

그야말로 워렌스에게 있어 평생의 은인이었다. 마음속으로나마 깊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던 중 마차가 멈췄다.

아무래도 휴식 시간이 된 모양이다.

성직자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몸을 살펴 드리겠습니다, 워렌스 님."

"감사합니다, 성직자님."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는 검사였다.

이렇게나 자신을 보살펴 주는 그들에게 워렌스는 몇 번이고 감사를 전했다.

평소 때와 같이 성직자가 워렌스의 팔목을 잡았다.

그 순간.

"배신자가 여기 있었네?"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 워렌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 앞에서 성직자가 빙글 돌았다.

있을 리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앞에 있었다.

과거 멀찍이서 봐 온 그 뒷모습의 여성이.

"다, 다, 당신은... 읍!"

비올라가 워렌스의 입술을 꼬집었다.

"쉿. 그러다 걸리면 내가 애써 여기 잠입한 보람이 없잖아?"

입안으로 날카로운 저주가 흘러들어 온다.

발버둥 쳤으나 워렌스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여기 있는 애들 싹 다 죽이고 사령의 보주만 회수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노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의식이 완성될 때까지 교구에 잠입해 있으라 하더라고."

비올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그러다 사령의 보주가 정화되면 어쩌냐니까 그건 알아서 하겠다네? 이렇게 어려 보이긴 하지만 나도 5위계 흑마법산데, 정말 취급이 너무하지 않아?"

"...!"

"음, 루아스교에게 붙은 배신자한테 할 말은 아닌가? 아니, 들어 보니 배신자가 아니라 다크 워튼의 흑마법사라고 했었지? 뭐, 어쨌든."

씨익.

비올라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한 2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그동안 네가 내 장난감 노릇 좀 해 줬으면 좋겠어. 너 때문에 빌어먹게 귀찮아진 거니까 사양은 하지 마. 알겠지?"

가녀린 손가락이 워렌스의 이마를 튕겼다.

털썩.

의식을 잃고 눈이 뒤집힌 워렌스. 비올라의 강력한 저주가 성공적으로 안착된 것이다.

이제 그는 지금의 대화를 기억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비올라를 볼 때마다 경악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이겠지.

그의 몸속 깊이 새겨진 저주 마법진은 설령 주교가 와서 살펴본다고 해도 알아차릴 수 없다.

백골(白骨)의 비올라.

이것이 그녀였다.

비올라는 저 장난감을 어떻게 갖고 놀아야, 이 지루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마차 밖으로 나섰다.

물론 다른 성직자들이 알아차리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는 성직자의 껍데기에 현혹된 것이다.

루아스교의 빛.

그 사이에 사악한 어둠이 숨어들었다.

137화 암흑가 로아프라 (1)

라인즈에서 출발한 지 고작 반나절 만에 아세른에 도착했다.

익숙한 성문과 거리를 지나 페르네의 주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령 블루와 함께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페르네가 보였다.

인기척을 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 어서 오세요, 애셔 님! 칼리아 님과의 일은 잘 끝내셨나요?"

"그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게 표정이 좋아 보이는 걸 보면 어떠한 수확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

베르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페르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아뇨, 그게... 뭔가 달라진 것 같으셔서요."

베르덴의 마력 조작 능력은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것이 5위계에 도달하면서 더욱 깊어졌고.

그를 토대로 마력을 갈무리하고 있는 베르덴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마법사라고 눈치채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페르네가 괴리감을 느낀 걸지도 몰랐다.

단순히 익숙함의 차이였다.

그에 비해 블루는 베르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베르덴의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덜덜덜.

블루가 미약하게 떨었다. 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푸른 마력의 심연으로 인해 공포에 질린 것이다.

아마 익숙해지려면 한동안 시간이 걸리겠지.

그런 정령과 페르네의 반응을 본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분 탓이겠지."

"그런가요?"

"그보다 내가 말했던 건 다 준비된 건가?"

베르덴이 화제를 돌렸다.

입 아프게 5위계에 올랐다고 페르네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따위 자랑질보단 경매장이 우선이었다.

페르네가 당당하게 답했다.

"말씀하셨던 현금은 전부 지하실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어요. 바로 확인시켜 드릴까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페르네를 따라 주점 지하로 향했다.

중심에 놓인 기다란 책상.

그 옆에는 커다란 포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틈새로 보니 전부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금괴, 다마스 강철, 미스릴 주괴들은 시세대로 받았고, 의뢰 보수를 포함해 전부 현금화했어요."

여기에는 바르톨의 도움이 컸다.

대부업자로 활동하는 만큼 현금 마련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르톨에게 2억 2천만 엘크의 현금을 빌렸는데, 기한 넉넉히 주고 이자도 적게 책정할 테니까 무조건 갚아 달라고, 애셔 님께 전해 달래요."

"빚지고 도망갈 생각은 없다고 전해. 그나저나 올빼미한테서 온 건 없었나?"

"그건 이틀 전에 왔어요. 여기 정산서요."

흑랑 토렐드의 마법 물품들.

올빼미에게 처리를 맡긴 것들도 전부 정산이 끝나 현금으로 옮겨졌다.

베르덴이 정산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도중에 빼먹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세했으며 충분히 납득할 만한 금액이었다.

베르덴이 질문을 이었다.

"경매장 초청권은?"

페르네가 왼쪽 아래에 깔려 있는 포대를 가리켰다.

"5일 전에 정확히 2억 8,390만 엘크에 팔았어요. 역대 최고가인 3억 엘크를 갱신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비싸게 받은 편이죠. 마침 암흑가에서 정보를 하나 풀었거든요."

"정보라면...."

"이번에 아티팩트 하나가 출품된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애셔 님께선 이미 알고 계신 사실이겠지만요."

그렇긴 하다.

그래서 아티팩트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이 많아지든 뭘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다.

[마녀의 가시왕관]

애초에 쓸 수 없는 아티팩트를 구매할 생각도, 그럴 만한 예산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초청권을 비싸게 팔았으니 오히려 좋은 건가.'

다만 정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력무효화의 팔찌는 어떻게 됐지?"

베르덴도 쓸 수 있는 물건이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의 가치였다.

마법진의 마력조차 흩어 버릴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유용했으나, 마법진의 파훼는 베르덴에게 일도 아니었으니.

지금같이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파는 게 이득이었다.

"가격대가 있어서 구매자를 찾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팔렸어요. 모험가 길드를 거쳐서 판매한 터라 구매자가 모험가라는 것 외에는 모르지만...."

페르네가 가장 큰 포대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불명의 모험가가 보낸 막대한 현금이 들어 있었다.

"엄청 필요했던 모양인지, 협상할 필요도 없이 시세보다도 높게 받았어요."

"그거 잘됐군."

"그렇죠?"

결과적으로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자금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애셔 님이 목표로 하는 금액에 미치진 못해요. 그래서 의뢰를 찾아봤는데 억대가 넘는 의뢰는 전혀...."

"당장 의뢰는 필요 없다. 자금 문제는 이미 해결됐으니까."

"네?"

베르덴이 칼리아의 인장 목걸이를 건넸다.

정교하게 세공된 에스퍼렌사의 표식. 눈동자에 붉은빛이 반사되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기겁하며 고개를 멀찍이 뒤로 보냈다.

"이, 이, 이건...!"

"그걸로 다이나 은행에서 25억 엘크를 현금으로 대출했다. 비행정까지 동원했으니 늦어도 3일 안에는 아세른으로 옮겨질 예정이라더군."

꿀꺽.

페르네가 침을 삼켰다.

대체 어떤 의뢰를 했길래 그 칼리아의 신용을 받아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위험한 의뢰였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하나 그녀가 경악한 건 베르덴이 말한 액수였다.

'아무리 그래도 25억이라니....'

과거 그녀가 허덕이던 빚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누가 들으면 기절할 정도의 금액이다.

그만한 빚을 졌음에도 베르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갚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분명히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 합치면....'

약 51억 엘크.

부유한 상인도, 유서 깊은 귀족 가문도 아닌 개인에게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액수였다.

페르네는 후보로 생각해 놨던 의뢰들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제 암흑가 경매장에 참가하면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말해야 할 게 있었다.

"애셔 님, 혹시 빈테르트라는 조직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 * *

빈테르트.

칼리아에게 들은 이름이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집단 말인가?"

"맞아요. 후작가가 섣불리 칼을 들이밀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조직적이며 강력한 세력이죠."

마약, 살인, 매춘, 밀매, 경비, 불법 노예, 투자, 도박 등 각종 중범죄를 주 수입원으로 삼는 암흑가 로아프라의 지배 세력 빈테르트.

특히 경비나 암살 계통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파티가 아닌 단신으로 미스릴 등급까지 도달했던 전직 모험가 출신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 말에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방주의 후보인 핏빛검 레이라가 차기 미스릴 등급으로 여겨졌는데... 그와 버금가거나 더 강하다는 뜻인가?

"미스릴 등급 정도의 실력자가 암흑가 따위에 있다니. 믿기 힘든데."

"그게 다른 나라의 암흑가와 로아프라의 차이죠. 동대륙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니까요. 그리고 모든 계통의 정점이자, '암흑가의 왕'이라 불리는 빈테르트의 수장은 그 이상의 괴물이라고 하고요."

에스티리아 왕가는 양지를 지배하고.

빈테르트는 왕국의 음지를 지배한다.

그야말로 조합과는 결이 다른 세력이다.

귀족처럼 명분이든 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 1왕자의 절대적인 지지 세력이기까지 하니.

그들을 적대한다는 건 하나의 왕가를 상대한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페르네가 나지막이 말했다.

"물론 애셔 님이 알아서 잘하실 테지만... 로아프라는 엄청 넓은 데다가 그만큼 범죄자들이 많아요. 자칫하면 사건에 휘말리기 십상이죠."

그러니까.

"전문 안내인을 고용하시는 게 좋을까 싶은데... 어떠세요?"

페르네가 돌려 말하긴 했으나 그 뜻을 알아차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빈테르트와 대립하지 말라는 거겠지.'

안내인을 앞세워 가능한 마찰 없이 다녀오라는 뜻이리라.

확실히 미스릴 등급에 준하는 실력자가 다수 존재한다면, 적대했다간 상당히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다만 페르네는 모르고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베르덴의 강함은 그저 편린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굳이 적을 만들 생각은 없다.'

물론 저쪽에서 먼저 적의를 드러내거나 사사건건 앞길을 막아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베르덴은 그런 속내를 감추며 답했다.

"안내인이라. 확실히 길을 안내해 줄 사람이 있으면 편하긴 하겠군."

그러자 페르네가 화색을 띠었다.

"아! 그럼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볼게요!"

"부탁하지."

용건을 마친 그는 곧바로 주점을 나섰다.

페르네가 베르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확실히 애셔 님과 빈테르트가 서로 마찰을 빚을 만한 일은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뭔가 크게 엮일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게 자의로든 타의로든... 마치 마일드륀에서 조합의 흑마법사와 적대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에이, 설마...."

페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불안감을 애써 떨쳐 내었다.

* * *

다이나 은행에서 현금이 조달되는 동안 여유가 생긴 베르덴은 마법서에 새로운 5위계 대지 마법을 등록했다.

4위계 이하는 중상급 마석을 소모하나, 5위계 마법은 상급 마석을 재료로 사용해야 하며 등록 가능한 마법도 1개로 축소된다.

재룟값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마일드륀 광산에서 마석들을 가져오길 잘했군.'

덕분에 돈 한 푼 안 들이고 마법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대지 마법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희귀 금속으로 제련된 갑옷이라도 손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후 베르덴은 스스로의 경지에 대해 파악하며 새로운 마법을 터득하는 데 진력을 했다.

라인즈에서 이해하고 해석한 고위계 부여 마법의 구성 방식.

그것을 토대로 베르덴은 새로운 5위계 마법을 깨우치려 했으나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이론과 연산에서 끝나는 원소 마법과 달리, 부여 마법은 육체 또는 사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실제로 마법을 다뤄 가며 그 감각을 온전히 체득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실전에서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4위계 마법 엘레멘탈 인챈트 또한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서야 성공적으로 시전할 수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5위계 부여 마법을 익히려면 더욱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든다.

슬론 숲 중심에 선 베르덴.

그가 까마득한 허공 위로 마력을 집중해 푸른 구체를 형성했다.

이어 한쪽 눈을 감으며 마법을 발동했다.

<마력의 눈>

베르덴의 시야 절반이 구체에 옮겨졌다.

푸른 구체를 천천히 움직이자 그에 따라 시야가 움직였다.

순간 미미한 흔들림은 있었으나 도중에 마력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다.

'...성공이군.'

마력에 시야를 부여한다.

이처럼 5위계 마법은 4위계 마법보다 위력이 떨어지고 화려하지 않더라도, 더욱 실용적이며 각 계열에 특화된 마법이 산재해 있다.

하나 그만큼 깊기에 마법을 터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르덴조차 이 마법 하나를 배우는 데만 며칠이 걸렸으니.

물론 다른 이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속도였으나, 그의 잣대는 어디까지나 상대성이 아니라 절대성이다.

누구보다 뛰어나다, 누구보다 성의를 다했다 등 그러한 재능과 노력 자체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그것들로부터 발현되는 압도적인 강함만이 베르덴에겐 중요했다.

세상은 약자에게 더없이 잔혹하니까.

"후우...."

마법을 해제한 베르덴이 바닥에 앉아 나무를 등받이로 삼았다.

수십, 수백 번에 다다른 시행착오에 눈가가 뻐근했다.

그래도 성과를 얻었으니 괜찮다.

이후로도 시간을 들여 더욱 강력한 부여 마법을 깨우친다면 그의 강함은 현격하게 상승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마도에 이른다면.'

...어쩌면 마탑주를 대면할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은 휴식을 즐겼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베르덴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정확히 심장 부근을 향해.

'그나저나 이건 도저히 알 수가 없군.'

베르덴의 심장엔 마치 마탑의 동력원을 보듯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마력이 담겨 있다.

부여 마법을 터득하면서 스스로 신체 내부를 몇 번이고 관조했으나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다.

역천을 이루면서 갑작스레 바뀐 벽안과 잿빛 머리칼...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 다 이유를 모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러니 베르덴이 취할 태도는 하나뿐이었다.

'당장 이렇다 할 문제도, 해결책도 보이지 않으니 내버려 둘 수밖에.'

단서도 없는데 억지로 짜 맞추며 현상을 이해하려 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렇게 연이어 날짜가 지났다.

경매가 열리기까지 남은 9일.

로아프라로 향할 시간이었다.

* * *

베르덴이 짐을 정리했다.

소울 트리의 줄기, 원소의 숨결, 마력 크리스털, 마법서 등 중요한 물건들을 최우선으로 담고.

그 뒤로 수십 억에 달하는 현금과 포션 그리고 물과 식량을 챙겨 넣었다.

용량이 거의 한계에 다다른 공간가방을 허리춤에 차며 채비를 갖췄다.

옆에서 페르네가 말했다.

"이름은 '샘웰'. 주로 암흑가에 방문한 귀족들을 상대하는 전문 안내인이에요. 남쪽 성문에서 눈에 띄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페르네에게 배웅을 받으며 아세른을 떠났다.

<비행주파>

점차 겨울이 지나 봄이 시작되는 계절.

태양이 높이 떠 있는 푸른 하늘길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윽고 석양이 내려앉으며 밤이 찾아왔다.

그때가 되면 베르덴은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얕은 숙면을 취했다.

물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마법진을 깔아 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더없이 자유로운 여행길이었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도시 아우로플(Auroffle).

거대한 성벽과 높게 세워진 건물들. 겉으로 보이는 규모는 라인즈와 필적한다.

'저 도시 지하에 저것보다 더 거대한 암흑가, 로아프라가 숨어 있다는 건가.'

건축 쪽에는 조예가 없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었겠지.

일반인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조차 힘든 마법 기술 또한 가미되었을 것이다.

만약 도중에 균열이라도 생겼다간 지상의 도시와 지하의 암흑가가 눈 깜짝할 사이에 궤멸해 버릴 테니까.

베르덴이 지상으로 내려갔다.

페르네가 말했던 대로 남쪽 성문을 통과했다. 검문 도중에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샘웰이라는 안내인을 찾아 옆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환영합니다, 고객님!]

그런 문장이 쓰여 있는 팻말.

그 옆에서는 인상 좋은 사내가 작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138화 암흑가 로아프라 (2)

샘웰은 로아프라의 토박이다.

지하의 암흑가에서 태어난 그는 지상에 있는 아우로플을 몇 번이고 넘나들었지만, 단 한 번도 도시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아인종과 이형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겁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이 바닥에선 재능이었다.

샘웰은 암흑가의 어디가 위험하고 안전한지 스스로 공부했고, 그렇게 무려 수십 년간 암흑가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남았다. 거대하고 복잡한 로아프라를 눈 감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해진 건 덤이고.

그는 오랜 기간 쌓아 온 지식과 경험을 그대로 자신의 사업에 접목했다.

안전한 암흑가 관광!

뭔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으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비스에 만족한 고객들에 의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심지어 암흑가의 경매장을 이용하고자 하는 부자나 귀족에게까지 고용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안내 도중에 불상사가 일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사고(無事故).

샘웰의 모토이자 자랑이었다.

"흐흐흠. 흐흠."

샘웰이 콧노래를 부르며 성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고객이 언제 올지는 정확히 모른다. 상황은 언제나 가변적이라 딱딱 시간에 맞춰 계획이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으레 있는 일이다.

'그래도 경매장을 찾으신다고 했으니 늦지 않게 오시겠지.'

이번 고객 또한 결코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수억이 간단히 오가는 경매장에 어떤 일반인이 참가하겠는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샘웰은 고객에 대해 이름도 신분도 모른다. 아는 거라곤 고객임을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상착의가 전부다. 이건 그의 철칙이었다.

'섣불리 궁금증을 내보이려 했다간 죽기 십상이니까.'

로아프라에서는 상식이다.

그러니 언제나 그랬듯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면 그뿐이다.

샘웰은 아침과 낮에는 의자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고객을 기다렸으며, 밤에는 근처 값싼 여관에서 잠을 잤다.

이미 선금은 받았기에 마음은 아주 느긋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연녹색 로브를 두른 외부인이 성문을 통과했다.

'오, 저분인가?'

미리 전달받았던 외견과 흡사하다.

더군다나 멀리서 봐도 평범함과 멀리 떨어진 외모다. 마침 그는 거기다 누굴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샘웰은 경험적으로 그가 고객임을 직감했다.

곧장 팻말을 세우고 그를 향해 작은 깃발을 흔들었다.

그걸 목격한 외부인이 샘웰에게 걸어왔다. 역시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외부인, 베르덴이 물었다.

"당신이 샘웰인가?"

외모대로 젊은 나이대의 목소리.

하나 명확한 힘이 실려 있다. 귀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샘웰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암흑가 로아프라의 안내를 맡게 된 샘웰이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개를 든 그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 * *

샘웰의 안내 코스는 아우로플과 로아프라로 나뉘어 있다.

베르덴은 둘 중 로아프라만을 택했다.

슬쩍 주위를 보니 아우로플은 라인즈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의 목적지는 어디까지나 로아프라의 경매장뿐이었다.

고객의 요청에 샘웰이 정중히 안내를 시작했다.

"아우로플과 로아프라 사이에는 하나의 지하도가 존재합니다. 고객님께서는 거기서 고속 마력 승강기에 탑승해 로아프라로 입장하시게 될 겁니다."

"상당히 깊은가 보군."

"그렇습니다. 사이의 대지가 얇을수록 대참사가 일어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니까요. 최소 수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특히나 안전에 신경 써서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이어 샘웰이 로아프라에 대한 설명을 더했다.

"이렇듯 지상에 있는 아우로플과 지하에 있는 로아프라는 서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것 또한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국가의 규칙 같은 게 말입니다."

"규칙이라면... 법이 다르다는 건가?"

샘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아프라는 말 그대로 치외법권의 영역입니다. 에스티리아의 왕가가 아닌,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빈테르트에 의해서 새로운 법이 자행되고 있죠."

도둑질을 해도, 폭력을 행사해도, 살인을 해도 처벌은 없다.

범죄에 대한 공권력의 규제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거참.

"상당히 난장판이겠군."

"하하, 대개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죽일 수 있다는 건 자신 또한 이유 없이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건 상대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 사실은 상당한 억제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불안감을 이용해 발달한 것이 경비 사업이다.

돈으로 고용된 자들이 무분별한 폭력으로부터 가게를 보호해 주거나 요인을 지켜 주며 때로는 보복을 대신 해 주기도 한다.

원초적인 힘.

그게 암흑가의 질서다.

베르덴은 눈을 가늘게 떴다.

"힘만 있으면 뭐든 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게 암흑가입니다. 반면에 약자는 언제나 짓밟히며 살아갑니다. 약자니까요. 힘이 없으면 인맥이든 돈이든 뭐든 동원해서 살아남아야 하죠."

야생적인 환경이다.

하나 바깥의 현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세상은 언제나 강자만의 것이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베르덴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주의 사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가능한 제 안내에 따라 주실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대 로아프라에서 빈테르트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않을 것. 고객님께서는 위 두 가지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이름까지?

베르덴의 의문에 샘웰이 답했다.

"암흑가에는 다양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지배자가 빈테르트라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죠."

곳곳에 빈테르트의 눈과 귀가 숨어 있다.

잘못 입을 놀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

허세 부리듯 빈테르트를 모욕했다가 뒷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람들을, 샘웰은 몇 번이나 보며 살아왔다.

로아프라는 혼란이 집약된 장소다.

위험한 거리를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안전한 거리를 걸어도 갑자기 칼부림이 나서 죽을 수도 있는 곳이 암흑가다.

그때, 샘웰이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고객님들께 피해를 준 적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제 루트는 안전을 중점으로 두고 있습니다. 돈값 이상으로 해낼 테니 부디 믿고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내인 샘웰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아부에 능숙한 안내인이군.'

베르덴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목적지에 다다랐다.

지하도로 향하는 입구. 샘웰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 넓은 복도가 나타났고, 각 출입소별로 줄을 선 인파가 보였다.

아우로플의 병사들이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저곳은 주로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통로입니다. 검문을 하긴 하지만 별로 빡빡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암흑가에서 마약을 가져와 바깥에 퍼뜨렸다간 즉결 처형이지만요."

샘웰이 구석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는 VIP 전용 통로입니다. 주로 암흑가에서 내로라하는 분들만 이용하고 계시죠. 고객님께선 이 두 개의 통로 사이에 있는 중앙 승강기를 이용하시게 될 겁니다."

중앙 계단 아래에 있는 세 개의 마력 승강기.

관계자에게만 허락된 통로였는데, 관리자에게 허락만 받으면 얼마든지 이용이 가능하다. 인맥이 있으면 남들처럼 힘들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강철 흉갑을 입은 콧수염 사내가 다가왔다.

샘웰이 상체를 굽신거렸다.

"아이고, 고생 많으십니다, 달리시안 소장님."

"샘웰이군. 오늘도 일인가? 이야, 꽤나 잘나가는구만 그래."

"다 소장님의 은혜 덕분이지요. 나중에 꼭 한번 모시겠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조금이라도 갚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흠흠, 그게 맞긴 하지."

소장이 헛기침을 하며 히죽 웃었다.

술과 고기로 기름칠을 할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편의를 봐주며 간간이 받는 성의는 꽤나 쏠쏠했다.

소장이 고개를 돌렸다.

베르덴을 본 그가 콧수염을 어루만졌다.

"음, 이번에는 참 특이한 고객을 데려왔군. 그 얼굴로 로아프라 따위에 가는 건 많이 아까운 거 같은데.... 뭐, 남의 사정 따위야 내 알 바는 아니지."

소장이 길을 비키며 턱짓했다.

지나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검문은 물론 생략이었다.

"감사합니다, 소장님.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기대하고 있을 테니 나중에 보자고."

샘웰이 몇 번이고 인사하며 베르덴과 고속 마력 승강기에 탑승했다. 문이 닫히며 승강기가 지하 아래로 향했다.

승강기가 잘 운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던 병사가 소장에게 말했다.

"와, 살면서 저렇게 불공평하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귀족일까요?"

"내가 아는 왕국 귀족들 중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없다. 타국의 귀족일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야 내가 상관할 건 아닌데...."

소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색 머리칼에 벽안이라."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인상이었다.

기억을 끄집어내 봤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현상 수배범이 아닌 건 분명한데....

'그래도 보고는 해 둘까.'

* * *

우우웅.

미약한 소음이 들려오며 승강기가 하강했다.

사방이 강화된 유리로 되어 있어 외부가 훤히 보였다. 이내 바깥으로 지하의 정경이 시야에 비쳤다.

베르덴이 놀란 듯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대도시 두 개쯤은 가뿐히 집어삼킬 정도의 거대한 공동.

마력으로 보호되고 있는 금속 기둥들이 아득히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으며, 천장 곳곳에 박힌 거대한 마석등이 로아프라 전체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베르덴이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암흑가를 넘어 저 멀리, 지하 호수를 둘러싼, 벽면에 기대어 만들어진 회색빛의 왕성이 보인다. 저 안에 누가 있을지는 너무도 뻔했다.

'빈테르트의 수장, 암흑가의 왕이 거주하고 있는 건가.'

확실히 저 정도면 왕이라 불릴 만하다.

어지간한 왕성에 필적하는 성을 가지고 있으니. 마치 지하에 세워진 작은 국가의 수도를 보는 듯했다.

옆에 있던 샘웰이 첨언했다.

"옛날 빈테르트의 초대 수장이 노예들을 이용해 지은 성입니다. 저 호수 아래에는 그때 혹사당하거나 추락해서 죽었던 노예들의 유골이 잠겨 있다고 합니다. 아주 끔찍한 역사죠. 지금이야 겨우 노예제가 폐지되긴 했지만요."

"암흑가엔 불법 노예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맞습니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얼마 전 플리쉬르 백작이 구금된 이후로 그쪽 사업이 휘청거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공급처가 거기 하나만은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빈테르트에서 원하는 한 로아프라에서 노예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죠."

이 거대한 지하 암흑가가 한 조직의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건가.

'엄청난 권력이군.'

베르덴이 시선을 돌려 다시 거리를 바라봤다.

마치 왕조처럼 오래도록 암흑가의 통치를 이어 가는 조직, 빈테르트.

안내인의 반응, 페르네의 정보, 칼리아의 언급을 돌이켜 보니 그들이 로아프라에서 얼마나 거대하고 대단한 집단인지 간접적으로 잘 느껴졌다.

뭐, 어디까지나 그뿐이었지만.

...쿵.

지하에 다다랐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샘웰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치안이 괜찮은 것인지, 암흑가라고 하기보단 대도시의 밤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지상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안으로 조금이라도 깊게 발을 디딘 순간 진정한 암흑가가 펼쳐지지요. 그러니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딱히 물리적인 구분이 되어 있지 않아 외부인은 깨닫기 어렵다.

빈테르트의 통치 아래, 물밑에서 작은 세력들이 전쟁을 벌이며 그러한 영역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샘웰에겐 전혀 문제없다.

괜히 무사고를 모토로 하는 안내인이 아니었다.

마력 승강기에서 내린 두 사람이 로아프라에 발을 디뎠다.

* * *

로아프라는 향락의 도시다.

다른 도시에서 느껴 보지 못하는 쾌락이 집대성한 거리. 처음으로 암흑가에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갈 곳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바로.

"카지노입니다."

"도박장 말인가?"

"맞습니다. 로아프라의 주력 사업 중 하나로, 외부인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장소입니다. 아직 경매가 열리기까지 충분히 시간이 남아 즐기셔도 좋으나... 취향이 아니시라면 바로 다른 장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베르덴은 평생 도박을 접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딱히 관심도 없었다. 그런 시답잖은 짓으로 시간을 낭비할 바에 로아프라의 지리에 대해 익히는 게 훨씬 더 유익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알겠습니다."

수긍한 샘웰이 앞으로 나섰다.

순간 베르덴의 감각에 무언가 스쳤다. 곧장 팔을 뻗어 샘웰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콰아아아앙!

카지노의 벽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반쯤 작살 난 사람 몸뚱이가 샘웰이 서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쳤다. 자칫하면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샘웰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베르덴의 시선이 카지노로 향했다.

걸걸한 목소리가 건물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런 같잖은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수작질이야? 콱 죽여 버릴라."

'이 목소리는....'

상당히 익숙하다.

이내 카지노의 벽을 부순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의 짧은 머리칼과 턱수염을 가진 근육질의 거한.

허리춤에 날카롭게 벼려진 거대한 도끼를 차고 있으며, 성깔이 굉장히 더러울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목과 가슴 언저리에 본 적 없는 큰 흉터가 새겨져 있었으나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거한이 바깥으로 걸어 나오며 어깨를 풀었다.

"안 그래도 X같은 패만 나와서 짜증 났는데 마침 잘됐다. 아주 반병신을...."

베르덴과 거한이 눈을 마주쳤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둘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도살자?"

"애셔?"

도살자 갈리아크.

과거 베르덴과 함께 통곡의 기사를 토벌했던 백금 등급 모험가였다.

139화 예상치 못한 재회

예상치 못한 재회였다.

왜 도살자 갈리아크가 로아프라에 있는 걸까. 어쩌면 베르덴과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백금 등급 모험가 정도면 암흑가 경매장에 관심을 가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갈리아크는 모험가면서 그레이에서 의뢰를 받아 활동하기도 하니.'

애초에 베르덴에게 페일을 소개해 준 것도 도살자였다. 낭비벽이 심한 게 아니라면 최소 수억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갈리아크가 성큼 다가왔다.

"이야, 갑자기 아는 얼굴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갈리아크가 흘끗 샘웰을 바라봤다.

섬뜩한 시선에 샘웰이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딸꾹질을 했다.

"안내인인가? 보아하니 방금 전에 로아프라에 온 거 같은데, 너도 경매장에 참가하러 온 거냐?"

"너도 마찬가지인가 보군."

"그 싸가지 없는 말투는 여전하구만. 그나저나 네 소식은 들었다. 공국에서나 왕국에서나 한창 날뛰고 있다던데.... 흠, 확실히 전과 달라지기는 했군."

갈리아크는 통곡의 기사를 토벌한 이후에 여기저기 쏘다니며 많은 전투를 벌였다.

도중에 강대한 이형종을 만나 치명상을 입기도 했으나 결국 승리한 건 갈리아크의 파티였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전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새로운 기예를 익히기도 했고.

그런데.

'...이 새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갈리아크는 겉으로는 태연했으나 속은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앞에 있는 잿빛 마법사는 통곡의 기사를 상대로 격전을 벌였던 그놈이 아니었다. 뭘 잘못 처먹기라도 했는지 수준이 가늠되지 않았다.

'소울 트리니, 후작가니 뭐니 소문은 들었는데.'

하기야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무리 여타 3위계 마법사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한들 결국 3위계다. 그 정도로는 위 소문에 해당하는 사건들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건 4위계...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만 5위계일 가능성도 있다.

'근데 그게 말이 되나?'

고작 1년도 안 지났는데.

그것도 다름 아닌 마법사가 이 정도의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건 갈리아크의 기준에서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갈리아크가 물었다, 아주 직설적으로.

"너 지금 몇 위계냐?"

베르덴이 미친놈 쳐다보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에게 위계를 묻는 건 실례인 걸 모르나?"

"그건 그렇지. 안 알려 줄 거면 됐다."

갈리아크가 흉악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암흑가의 시선이 한데 모여 있었다. 방금 전에 날려 버린 사기꾼은 잔해 더미에 묻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충 힘 조절을 했기에 죽진 않았겠지만.

"...흥이 깨졌군. 야, 애셔. 밥은 먹었냐?"

"그건 왜 묻지?"

"왜 묻긴. 밥 처먹으려고 묻지. 네가 밥 사라."

베르덴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긴 했지만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심지어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갑자기 밥을 사 달라는 요구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갈리아크가 핏대를 세우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이... 내가 너한테 페일 소개해 준 거 기억 안 나? 내가 X발, 네가 그레이에서 얼마를 벌었는지 대충 아는데. 그런데도 밥 한 번 안 사겠다고? 양심은 있냐?"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베르덴은 갈리아크에게 빚진 게 있었다.

만약 페일을 소개받지 않았더라면 여러모로 번거로웠을 것이다. 성장도 더뎠을 것이고. 거창하게 은혜라고 할 건 아니었지만 도움을 받은 건 분명했다.

소개비로 밥 한 끼 사 주는 건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오히려 값싼 대가였다.

'어차피 곧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생각을 마친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인정은 하네. 그럼 따라와라. 괜찮은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지."

갈리아크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카지노를 지키는 경비들이 무기를 든 채 길목을 막고 있었다. 도살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죄송하지만 손님, 수리비는 지불하고 가셔야 합니다."

경비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코등이가 없는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나름대로 자세가 잡혀 있는 걸 보아 대인전에 익숙해 보였다.

갈리아크가 기절한 사기꾼을 가리켰다.

"그딴 건 저 사기꾼한테 받아. 애새끼들 손 하나 관리 못 하는 새끼들이 뭐가 당당하다고. 뒈지기 싫으면 닥치고 비켜."

"손님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나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갈리아크가 손가락을 접으며 팔을 휘둘렀다.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였다. 쾅! 속절없이 광대에 주먹이 꽂힌 책임자가 벽을 부수고 카지노 안쪽으로 사라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아 그대로 기절한 게 분명했다.

갈리아크가 남은 경비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안 꺼져?"

"시, 실례했습니다."

경비들이 길을 텄다.

바닥에 침을 뱉은 갈리아크가 발걸음을 옮겼고 베르덴이 그 뒤를 따랐다. 안내인 샘웰은 어쩌다 보니 그 둘 사이에 끼어서 식사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그들 일행이 떠나자 곧 소란이 가라앉았다.

익숙한 듯 구경꾼들이 흩어지고 카지노 경비들이 수습에 나섰다. 먼저 기절한 사기꾼을 끌고 카지노 안으로 들였다.

경비 책임자를 단숨에 날려 버린 갈리아크를 대신해 수리비를 받아 낼 셈이었다.

힘이 곧 규칙이다.

이곳은 로아프라였다.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구경꾼 중 하나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애셔... 애셔라면 설마...."

그 이름을 되뇐 구경꾼이 서둘러 어딘가로 사라졌다.

* * *

은은한 어둠이 만연한 레스토랑에서 갈리아크, 베르덴 그리고 샘웰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내가 왜 여깄지?'

분명 고객을 안내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샘웰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둘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야금야금 맛 좋은 음식을 썰어 먹었다.

벌컥벌컥.

갈리아크가 머리통만 한 나무 잔에 위스키 한 통을 때려 붓고는 단번에 들이켰다.

시원하게 목을 축인 그가 스테이크를 반쯤 잘라 통째로 입에 넣고 씹어 넘겼다. 그렇게 요리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야 좀 간에 기별이 가는군."

"...."

베르덴은 아직 식기조차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식사 예절을 보니 입맛이 별로 없었다. 와인으로 간단히 목을 축인 그가 갈리아크의 목 부근을 바라봤다.

모험가 플레이트는 없고 웬 큰 흉터만이 남아 있었다.

"모험가는 그만둔 건가?"

"응? 아, 이거. 그만둔 건 아니고 징계 좀 먹었다. 일 년간 모험가 자격을 박탈당했지."

백금 등급의 실력자가 그 정도의 징계를 받는 건 흔치 않다.

그리고 도살자는 준귀족인 기사를 흠씬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도 구두 경고만 받은 일화가 있었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박탈당했다니.

"귀족이라도 건드렸나 보군."

"그건 아니지만 대체적인 내용은 비슷하지. 근데 처맞은 건 나지만."

"...뭐?"

"핏빛검 레이라라고 잘 알고 있을 거다. 듣자 하니 너하고 소울 트리란 이형종을 토벌했다고 하던데."

갈리아크가 술을 더 주문하고는 말을 이었다.

"작년 겨울 중순쯤에 모험가 길드에서 우연히 핏빛검하고 마주쳤지. 미스릴 등급으로 승급한다고, 해외에 있는 모험가 길드 본부로 향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말했지. 나랑 한판 붙자고."

갈리아크는 강자다.

그의 가장 큰 욕망은 힘 그 자체이며, 그 근간은 열성적인 투쟁심이다. 강자를 짓밟고 위로 올라서고자 하는 걸 즐기는 존재다.

그런 갈리아크이기에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백금 등급 모험가인 그와 미스릴 등급 모험가의 간극이 얼마나 되는지 말이다.

"그런데 뭐라고 했는지 아냐? 시간 낭비라며 거절하더군.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물러설 수가 있나. 곧장 도끼 들고 핏빛검한테 달려들었지."

"길드 내부에서?"

"바깥보다 안이 더 낫지. 주위에 모험가밖에 없으니 칼부림하기 딱인데. 뭐, 그랬더니 핏빛검이란 이명과 어울리는 붉은 검으로 대응하더군."

갈리아크가 목덜미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당신의 전투를 떠올렸다.

핏빛검 레이라와 도살자 갈리아크는 체구가 달랐다. 적어도 근력 하나만큼은 갈리아크가 확실히 우위였다.

그러나 그녀는 갈리아크의 도끼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검으로 흘려 냈다.

흘려 나간 도끼의 날이 모험가 길드의 바닥과 벽 그리고 탁상을 부숴 버렸다. 마치 물을 베는 듯한 감각이었다.

기대 이상의 검술과 검속에 갈리아크가 히죽 웃으며 주저 없이 기예를 사용했다.

파쇄破碎.

수직으로 내리찍은 도끼가 레이라의 정수리를 노렸다.

거대한 암석마저 단번에 쪼개 버릴 듯한 기세와 예리함이 담긴 일격이었다.

그러자 레이라가 작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핏빛의 기운을 드러냈다.

레이라의 검끝에서 붉은 실이 흩날리더니, 미세한 바람과 함께 어느새 그녀가 갈리아크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갈리아크의 동체 시력으로도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목표물을 잃은 도끼가 바닥에 처박혔다. 큰 진동과 함께 길드의 바닥 전체가 두 동강이 났으며 천장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붉은 실이 갈리아크의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혈사血絲.

촤아아아악!

백금의 플레이트가 잘려 나가며 혈흔이 흩뿌려졌다. 충격에 한쪽 무릎을 꿇은 갈리아크가 곧장 손으로 쥐어짜듯 상처를 막아 지혈했다.

갈리아크는 백금 등급 모험가 중에서도 실력만 따지면 상위에 속했다.

상대는 차기... 아니, 미스릴 등급 이상의 강자. 지금의 충돌로 세간의 위명에 걸맞는 실력자임이 분명해졌다.

다만 갈리아크는 아직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즐거운 듯 웃은 그가 투쟁심을 불태우며 도끼를 쥐고 일어섰다.

"그렇게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 모험가 길드장이 나서서 전투를 중단시켰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징계를 받았다. X발, 제대로 싸워 보긴커녕 한 대 때리지도 못하고 일 년간 모험가 자격 박탈이라니."

자업자득이긴 하나 갈리아크만 맞고 끝나 버렸다.

더군다나 레이라의 핏빛 기운에는 살기가 가득해 어지간한 신성력으로는 상처가 회복될지언정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다.

상당히 아쉬웠던 건지 갈리아크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모험가 습격에, 길드 기물 파손까지. 완전히 미친놈이군. 모험가 자격을 아예 박탈당하지 않은 게 신기한데."

"닥쳐. 그래서 내 파티는 잠시 해산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빡빡하게 사냥을 해 가지고 네리엔과 고드에게 불만이 좀 있었거든. 이참에 휴가를 보내 버렸지. 그리고 무직이 된 나는 그레이에 의뢰를 받으러 갔는데... 문제가 생겼더군."

"문제?"

베르덴의 물음에 갈리아크가 눈을 희번득 떴다.

"어떤 새끼가 라비슈른 후작가하고 어깨동무하고 가드란인지 뭔지 하는 후작가를 멸문시켰거든. 그 탓에 공국이 발칵 뒤집혔고 그레이도 난장판이 됐지, 의뢰도 싹 사라졌고. 거기다 그 와중에 페일 그놈은 이참에 영역 좀 넓히겠다고 잠적하기까지."

"...."

"대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베르덴이 말없이 와인을 머금었다.

한바탕 불만을 쏟아 낸 갈리아크가 혀를 차며 등받이에 몸을 누였다.

"뭐,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넘어왔다. 여긴 일거리가 넘치니까. 그런데 여기서도 네 이름이 들려오대? 어디 후작 자식 끌어들여서 조합하고 한바탕 했다며? 3왕자가 조합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냐?"

"...."

"이 새끼, 알고도 저질렀구만. 왕가하고도 대립하는 놈이 누구보고 미친놈이라는 건지...."

물론 이유가 있었지만 결과만 보면 사실이었다.

베르덴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이곤 대충 흘려 넘겼다.

그때였다.

콰앙!

레스토랑 문이 거칠게 열렸다. 통일된 무장을 갖춘 자들이 대거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장악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손님과 직원들이 패닉에 빠졌다.

그들의 시선들이 베르덴이 있는 테이블에 향했다.

갈리아크가 이를 드러냈다.

"하, 카지논지 그 사기꾼인지 모르겠는데, 보복이라도 하러 온 모양인가? 식사 도중에 간단한 몸풀기로는 딱이겠어."

남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갈리아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울어진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가볍게 목 근육을 당긴 갈리아크가 손을 이리저리 풀었다.

딱히 도끼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맨주먹으로 상대할 모양인 것 같았다.

'알아서 하겠지.'

어디까지나 갈리아크의 일이다.

베르덴은 식기를 들고 스테이크를 잘랐다. 옆에 있던 샘웰은 식탁 아래로 몸을 낮추고 상황을 지켜봤다. 침착한 상황 판단은 겁 많은 안내인의 덕목이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었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걸어 나오더니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 애셔라는 자가 누구인가?"

140화 인과

"...?"

베르덴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노인과 눈을 마주쳤는데,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자신을 찾고 있는지 생각하던 도중, 샘웰이 식탁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저 사람은...."

"아는 사람인가?"

"데릭 켄드스라고, 최근에 로아프라에 유입된 사업가입니다. 문어발식으로 다양한 업종에 손을 대고 있다고 하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근에 조합을 탈퇴했다더군요."

샘웰은 도시 바깥의 소식은 잘 모른다.

그러나 암흑가에 떠도는 소문엔 나름 귀가 밝았다. 주워듣는 수준이라 별 깊이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눈치껏 행동할 정도는 되었다.

'조합이라.'

베르덴의 벽안이 차갑게 빛났다.

조합이 큰 타격을 받은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밖에 없는데....

'뭔가 이상하군.'

적의나 살의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데릭이라 불린 노인의 얼굴에서 작은 호의가 보이는 듯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탁. 탁.

데릭이 지팡이를 짚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뒤에서 호위들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그는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어 길을 막아서고 있던 갈리아크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잠시 비켜 줄 수 있겠나?"

"...칫, 카지노 놈들이 아니었군."

아쉽다는 듯 갈리아크가 근질거리는 손을 털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곤 샘웰이 마시려고 했던 술을 빼앗아 들이켰다.

데릭이 홀로 베르덴과 마주했다.

"자네가 애셔인가 보군."

"...."

베르덴이 침묵으로 답했다.

그것은 긍정이기도 했지만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말하라는 독촉이기도 했다. 그를 이해한 데릭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이런저런 잡다한 사업을 하고 있는 데릭 켄드스라고 하네."

데릭이 지팡이로 샘웰을 가리켰다.

"저 친구 말대로 문어발식 사업을 해서 재산을 불리고 있지."

"드, 들으셨...."

"내가 늙긴 했지만 귀가 좀 좋은 편이네. 뭐, 그렇다고 뭔가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겁먹지는 말게. 자네가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니. 내가 조합에서 탈퇴했다는 것 또한 말일세. 다만 중요한 내용 하나가 빠졌군."

데릭이 베르덴을 응시했다.

"나는 아주 '자발적으로' 조합을 탈퇴했네. 애초부터 조합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터라 좋은 감정이 있을 턱이 없지. 당연히 조합의 복수다 뭐다 하며 자네에게 해코지를 할 이유도 없고."

조합은 여러 세력을 집어삼키며 세력을 키웠다.

베르덴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데릭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정말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짓말을 해서 그가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겠나?"

"용건이 무엇입니까?"

"거창한 건 아니네. 말하자면... 그래, 단순한 빚 갚기라고 할 수 있겠지."

빚?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염동력>

근처에 있던 의자가 두둥실 떠올라 데릭 뒤에 놓였다.

"오, 배려 고맙네."

데릭이 베르덴과 비스듬하게 마주 앉았다.

레스토랑 내부는 베르덴 일행, 데릭과 그 호위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봐 손님이고 직원이고 죄다 도망친 것이다.

적막 속에서 데릭이 드디어 용건을 꺼냈다.

"혹시 땅거미 상회라고 기억하고 있나?"

* * *

땅거미 상회.

조합을 운영하는 세 개의 상회 중 하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였다.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에서 멜베스 자작과 함께 상회주 베켄이 붙잡혔으니까.

그때의 일로 땅거미 상회는 에스퍼렌사 후작가에게 찍혀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더 이상 상회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베르덴이 직접 관여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베르덴의 의문에 데릭이 답했다.

"땅거미 상회는 망한 것이나 진배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산하에 있던 자들까지 모조리 잡혔다는 뜻은 아니네. 겨우 후작가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온 극히 일부가 몰래 로아프라에 숨어들었지. 여긴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유일한 장소니까."

데릭이 목을 가다듬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도망친 자들 중에는 베켄의 사생아도 있었네."

...사생아?

"베켄이 아내 몰래 숨겨 둔 애인의 자식이지. 뒤끝이 워낙 강한 걸로 상회 내부에서 유명했네. 심지어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으니."

어쨌든.

"그놈은 자네와 칼리아로 인해 베켄이 붙잡힌 걸 깨닫자마자 가진 재산을 몽땅 들고 로아프라로 도주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뤼잉 코스타의 밑으로 들어갔다는군."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갈리아크도 마찬가지였는지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식사를 이어 갔다. 그에 반응한 건 샘웰이 유일했다.

"자네는 알고 있나 보군. 목이 아파서 그런데 나 대신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아...."

시선이 한데 모였다.

겁이 많은 샘웰이었지만 이 분위기 속에서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침을 삼키고 그들 앞에 섰다.

"그, 그러니까 뤼잉 코스타는 로아프라의 서쪽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작은 권력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암흑가에서 잔혹한 인성파탄자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뤼잉 코스타는 자신보다 아랫사람을 암수로 구별하는 등 짐승으로 취급한다.

기분이 조금이라도 잡치면 노예들의 살을 산 채로 발라 죽이는 건 암흑가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노예들에겐 공포 그 자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그래서, 베켄의 사생아가 뤼잉 코스타의 힘을 빌려 저에게 복수라도 한다는 겁니까?"

"원래라면 불가능했지. 놈들은 로아프라 밖에서의 영향력이 전무하니까. 그런데 자네 스스로 로아프라에 왔으니, 단언하건대 사생아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걸세. 왜냐하면 놈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자를 용서하지 않으니까. 뭐, 성격상의 문제지."

"일이 터지자마자 도망친 주제에 복수라니. 아주 우습기 짝이 없구만."

갈리아크가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방 쪽으로 향했다. 종업원이 몽땅 도망치는 바람에 직접 술을 가지러 간 모양이었다.

'복수라.'

베르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데릭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하고 있다. 그는 베르덴에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당신이 저에게 호의를 베풀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데릭이 대답했다.

"세상은 인과(因果)로 이루어져 있지."

하나의 변화는 여러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예상했든 예상하지 못했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나는 조합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피해자 중 하나였네."

저항해 봤지만 고작 1년 만에 사업체의 절반이 날아갔다. 사방에서 귀족들에게 압박도 들어왔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땅거미 상회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데릭이 자조했다.

"뭐, 말이야 산하지 그냥 돈줄이었지만. 그래도 무작정 당하기만은 하지 않았네."

조합을 어떻게 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베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몰래 놈의 약점을 캐냈다.

"그 과정 속에서 아무도 몰랐던 베켄의 사생아에 대해 알게 되었지. 잘하면 놈의 가정을 파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때를 엿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상황이 바뀌더군."

베켄이 잡히고 땅거미 상회가 망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현실이었다. 그걸 기회로 데릭은 에스퍼렌사 후작가에 자진 출두 했다. 그는 위력에 의해 자금을 조달하긴 했으나, 직접적으로 조합의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겨우 면죄부를 받아 조합에서 탈퇴할 수 있었다.

데릭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자네의 행동으로 인해 사생아가 복수심을 품게 되었듯, 나는 호의를 품게 되었지. 이게 인과로 엮인 게 아니면 뭐겠나?"

"그래서 빚이라고 한 겁니까?"

"솔직히 말해 딱히 갚을 생각은 없었네. 당사자가 모르는 빚이니까. 그런데 마침 로아프라의 카지노 앞에 자네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

며칠도 아니고 몇 발자국 거리다.

그냥 무시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약간의 수고를 들여 베켄의 사생아에 대한 경고를 하러 온 것이다.

"그나저나 자네는 경매장 때문에 로아프라에 온 거겠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경매가 끝나고 난 후에 코스타가 손을 쓸 걸세."

"이유가 있습니까?"

"그때가 바로 적기거든."

데릭이 샘웰에게 시선을 던졌다.

목이 아프니 설명을 대신 해 달라는 뜻이었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샘웰이 말했다.

"암흑가의 경매에 참가하려면 늦어도 이틀 전에는 초청권을 들고 방문해야 합니다."

거기서 이름을 등록하고 경매에 쓸 자금을 맡긴다. 현물이나 수표는 절대로 받지 않으며 오로지 현금만 취급한다.

후에 경매장에서 물건을 낙찰받으면 그 자금에서 액수만큼 차감하고, 남는 돈은 경매장이 끝난 직후에 낙찰받은 물건과 함께 돌려받는 방식이다.

"경매장의 주최자이자 총관리자는 빈테르트입니다. 그 이름이 걸려 있는 이상, 경매 전이나 직후에 감히 참가자들을 습격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 규칙은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것이지. 그리고 뤼잉 코스타는 빈테르트에 연줄이 있네. 마음만 먹는다면 손을 쓸 수가 있지. 물론 빈테르트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선에서 말일세."

경매장에서 입찰한 물건을 받고, 자금 또한 소지하고 있는 시점.

만약 뤼잉 코스타가 사생아의 부탁을 받아 베르덴을 죽일 생각이라면 그때 습격할 것이다. 그래야 얻는 게 더 많을 테니까.

"자네가 나름대로 강한 마법사인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로아프라는 바깥세상과 달라. 사람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악인들이 가득한 장소지. 여기엔 정정당당이라고는 없네. 그러니 가능하면 떠나기를 권고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네의 선택에 달려 있지. 이런, 시간이 됐군."

손목시계를 본 데릭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내 빚은 자네에게 그런 선택지를 준 것으로 갚았다고 여기겠네. 아, 그리고."

데릭이 지갑에서 100만 엘크 지폐 한 장을 꺼내 샘웰에게 건넸다.

"말을 보충해 줘서 고맙네. 설명 잘하더군. 이건 수고비일세."

"아... 아, 넵!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네. 부디 무사히 로아프라를 나가길 바라지."

인사를 건넨 데릭이 레스토랑 밖으로 나섰다.

* * *

데릭과 그 호위들이 떠나자 레스토랑 내부가 휑해졌다.

안쪽에 있는 주방을 턴 갈리아크가 값비싼 위스키 한 병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입으로 병마개를 딴 그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인과인지 뭔지 몰라도 로아프라에 오자마자 찍힌 모양이군."

"듣고 있었나?"

"데릭이라는 노친네보단 내가 더 귀가 밝거든. 레스토랑 안에 있는 소리는 다 들리지. 거리가 얼마나 멀다고. 그래서 어떻게 하게. 도망칠 거냐?"

베르덴이 코웃음 쳤다.

"웃기는 소릴 하는군."

베르덴은 경매장 때문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모았다.

로아프라의 권력자다.

잔악한 성정을 지녔다.

빈테르트와 연줄이 있다

뭐든 상관없다. 방해하면 지울 뿐이다.

그로 인해 빈테르트와 적대한다고 해도 감수할 것이다. 베르덴은 그런 마법사였다.

"이 새끼, 얼굴과 다르게 화끈한 건 여전하구만."

갈리아크가 낄낄거리며 병나발을 불었다.

베르덴이 샘웰에게 물었다.

"경매장에 등록하는 시간이 따로 있나?"

"하루 종일 등록이 가능합니다. 경매장이 열리려면 아직 4일가량이 남았으니, 이틀 안에 원하시는 때에 가면 됩니다."

"그럼 지금 가도록 하지."

굳이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갈 이유는 없다.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갈리아크도 덩달아 일어섰다.

"...뭐지?"

"나도 아직 등록 안 했거든."

지금까지 등록을 안 했다고?

베르덴의 시선에 갈리아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자마자 카지노에 틀어박혔거든. 돈은 다른 곳에 보관했고.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자고."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같이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거절해도 따라오겠지.'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베르덴이 식탁 위에 음식값을 올려놨다.

그러곤 샘웰을 앞세워 레스토랑 밖으로 나섰고 갈리아크가 그 뒤를 따랐다.

* * *

"그러니까 아버지의 복수를 해 달라고?"

"그렇습니다, 코스타 님."

베켄의 사생아, 다이엘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앞에는 호화로운 의자에 앉은 사내가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색의 단발 머리칼. 오른쪽 귀에는 순금의 링 귀걸이가, 왼쪽 귀에는 은색의 일자 침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얼굴에는 화장한 티가 가득했다.

뤼잉 코스타가 입술을 매만졌다.

"뭐, 달리시안 소장이 눈에 띄는 애가 한 명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게 그 애셔란 말이지? 칼리아 그년 밑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불가침조약.

그걸 무시하고 온 걸 보면 단순히 의뢰 관계로 엮인 걸지도 몰랐다.

"하기야 그레이에서 이름을 날린 마법사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로아프라에 온 걸 보면 경매에 참가하러 왔을 테고. 돈은 많이 가지고 왔으려나?"

"적어도 수억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귀한 매직 아이템도 말입니다."

"매직 아이템이라. 그건 좀 끌리네. 그런데 걔 죽여 주면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다이엘이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귀한 보석과 장신구가 가득했다. 코스타가 입맛을 다시며 발끝으로 상자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사람 하나 죽이는 것치곤 괜찮네. 뭐, 4위계 전격 마법사라고 하지만 마법사 하나 죽이는 거야 일도 아니고."

마법사는 확실히 위험하지만 거기서 거기다.

몰래 독을 타서 죽여도 되고, 방심한 사이에 목을 잘라도 된다. 죽일 방법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

"좋아, 받아 줄게."

"아...! 감사합니다, 코스타 님! 그런데 시기는 언제쯤...."

"경매가 끝나고 난 후에 처리해 줄게. 알겠으면 이만 나가 봐."

다이엘이 연신 감사를 전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코스타는 상자 안에 든 보석을 세어 보고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살기 좋은 암흑가, 로아프라가 보였다.

"흐음, 애셔라."

평소라면 그냥 암살자를 보내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들은 것이 있었다. 애셔란 마법사의 힘과 외모. 코스타는 흥미가 있었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죽이는 건 너무도 아까웠다.

"...내 간판으로 쓰면 딱 좋겠는데."

다이엘이 대가를 지불하고 복수를 부탁했지만 코스타는 이미 잊었다.

이미 회유하기로 결정하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대가로 뭘 주면 받아 줄까 생각하다가 이내 손뼉을 쳤다.

"그래! 그게 좋겠어."

마침 좋은 물건들이 있다.

그거라면 선물로써 더할 나위가 없었다. 코스타의 가치관으론 분명 그러했다. 중성적인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141화 경매장 (1)

'도망치고 싶다.'

샘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안내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데릭과 베르덴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객이 누군지 몰랐다. 애셔란 이름도 처음 들어 봤다. 샘웰은 암흑가 바깥의 소문에는 굉장히 취약했다.

하지만 대화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칼리아가 플리쉬르 백작을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니.'

즉, 조합이 큰 타격을 받게 된 윈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사실은 샘웰에게 크게 상관은 없었다. 빈테르트는 1왕자를 지지하며, 조합은 3왕자를 지지하니까.

로아프라와 조합의 연관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뤼잉 코스타의 이름이 나왔다.

조합의 사생안지 뭔지가 그의 힘을 빌려 자신의 고객에게 복수한다고 한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 나한테까지 책임을 묻는다면....'

어쩌면 노예가 되어 코스타의 장난감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고객을 안내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호소해도 그가 들어 줄 리 없었다. 여긴 로아프라였으니까.

가능하다면 당장 아우로플로 올라가 잠적하고 싶다.

모아 둔 돈이 있으니 그래도 1년 정도는 숨어 있을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자신 따위는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샘웰의 뒤에 있는 두 명.

한 명은 목숨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마법사이며, 다른 하나는 카지노의 경비 책임자를 주먹 한 방에 잠재운 괴물이다.

그들은 뤼잉 코스타에 대해 신경 쓰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몰라서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만약 둘이 그만큼 위험한 사람들이라면, 안내를 내팽개치고 도주했다가 노예가 되기는커녕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겁 많은 샘웰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베르덴과 갈리아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애셔."

"...?"

"너 돈은 어디다 뒀냐? 따로 운송이라도 해 놓은 거냐?"

"아니."

베르덴이 자신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물끄러미 보고 있던 갈리아크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거 공간가방이었냐?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머리부터 발끝까지 때깔이 이렇게 달라져?"

"살다 보니."

"살다 보니? 그럼 누군 안 살았냐?"

갈리아크의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 있었다. 경매장에서 쓸 현금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그에 반해 베르덴은 고작해야 허리춤에 찬 가방이 전부. 다름 아닌 장비의 수준 차이에 갈리아크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재수 없는 놈."

베르덴은 깔끔히 무시했다.

샘웰의 안내에 따라 로아프라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거대한 사각형의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거리의 한 블록을 통째로 집어삼킬 정도의 크기였다.

"여기가 경매장인가?"

아, 정신을 차린 샘웰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초청권이 있으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베르덴과 갈리아크가 경매장 초청권을 꺼내 경비에게 보였다.

그러곤 샘웰이 안내인임을 고용주인 베르덴이 확인해 주고 난 후에야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비가 삼엄한 복도를 지나 세 사람이 등록 창구에 도착했다.

"제가 대필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안내인의 역할 중 하나였다.

베르덴이 해야 할 이런저런 귀찮은 서류를 샘웰이 대신 작성했고, 갈리아크는 그 옆에서 흘금거리며 글자를 끄적였다.

"이렇게 적는 게 맞는 거냐?"

"예, 그렇게 쓰시면 됩니다."

그렇게 서류를 작성하고 나서 본인임을 확인하여 등록 수속을 마쳤다.

암흑가의 경매장이라고 하기엔 투박하거나 그런 게 없이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다음으로는 경매장에 쓸 현금을 보관할 차례.

이건 돈을 맡기는 당사자가 아니면 관여할 수 없다. 샘웰을 두고 경비를 따라 지하의 어떤 방으로 들어가자 금속 벽 한가운데에 작은 카운터가 하나 있었다.

이 위에 현금을 놓고 벽 너머로 밀어 넣으면 자금 관리자가 그 액수를 기록하고 보관을 해 준다고 한다. 찾아갈 때는 그 반대고.

경비가 말했다.

"그럼 보안을 위해 순서대로 진행할 테니 다른 분은 잠시...."

"그딴 건 상관없으니까 빨리 처리해."

쿵!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갈리아크가 카운터 위에 묵직한 가방을 올려놨다.

잠금장치를 풀자 힘으로 압축되어 있던 현금 다발들이 튕겨져 나왔다. 보안을 지켜야 했지만 본인이 상관없다고 하니 경비들은 어쩔 수 없었다.

지폐들을 탑처럼 쌓아 밀어 넣자 잠시 후 벽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 11억 3,400만 엘크입니다. 맞습니까?"

"그래, 맞다."

백금 등급 모험가라고 해도 모으기 쉽지 않은 액수.

모험가로서 토벌을 하고 그레이에서 의뢰를 해결하며 모은 돈이었다.

갈리아크가 히죽 웃으며 베르덴을 쳐다봤다.

"네 차례다. 뭐, 나랑 비교되는 게 껄끄럽다면 자리를 비켜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해 줄까?"

베르덴이 상관없다는 듯 공간가방을 열었다.

100만 엘크짜리 지폐로 묶인 현금 다발들부터 꺼내 차곡차곡 탑을 쌓았다.

'호오, 제법 모았는데.'

갈리아크가 내심 감탄했다.

장비까지 바꾼 걸 보면 돈이 들었을 테니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5억 엘크를 훌쩍 넘었다.

그래도 자신만큼은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X발, 이게 뭐야."

뭐긴 뭐야.

현금 51억 엘크지.

* * *

경매장에서 참가자 등록과 자금 보관을 마쳤다.

베르덴 일행이 건물 밖으로 나가자마자 갈리아크가 따지듯이 물었다.

"야, 신고 안 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 봐. 너 은행 현금 수송선이라도 털었지? 그치?"

"내가 도적으로 보이나?"

"그럼 뭐 공국에서 후작가 털고 100억 엘크 정도 받았냐? 그게 아니면 1년도 안 된 사이에 장비 싹 바꾸고, 마법 위계도 올라간 데다가 수십 억까지 벌었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위계가 올라갔다고 한 적은 없는데."

"네가 지금 3위계냐? X발, 아니잖아. 그런데 이게 말이 되냐고?"

갈리아크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작년에 그레이조차 모르는 마법사에게 적선이라도 하듯 정보상을 소개해 줬는데, 불과 1년도 안 된 사이에 갈리아크의 수입을 따라잡는 걸 넘어 한참을 추월했다.

갈리아크는 강자를 선호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충 그렇구나 하고 넘기고 싶어도 상식을 뒤집어엎는 수준이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양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갈리아크가 고개를 들었다.

"아, 모르겠다."

갈리아크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사이 샘웰이 베르덴에게 말했다.

"경매장 등록은 이걸로 끝났습니다. 당일에 경매장을 찾으시면 안내가 있을 겁니다. 혹시 달리 로아프라에 대한 안내가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아니면 관광이라도 좋습니다."

관광이라.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유흥을 즐기면 모르겠지만 그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보다 괜찮은 여관을 소개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여관이요? 그거야 간단한 일이죠."

샘웰이 여관들의 위치까지 자세하게 가리키며 그 특징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베르덴은 그중에서 쓸 만한 여관을 선택했다.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아 혼자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자 샘웰이 내심 화색을 띠었다.

"그러십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 봐도...."

그때, 갈리아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야, 애셔. 너 나랑 카지노에 갈 생각 없냐? 잘하면 한탕...."

"흥미 없다."

"에라이, 그럴 줄 알았다. 재미없는 새끼. 음, 그렇다면."

갈리아크가 샘웰을 지긋이 쳐다봤다.

"방금 안내인 필요 없다고 했지? 그럼 얘 내가 데려가도 되냐?"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어이, 너 이름이 뭐야."

"새, 샘웰입니다."

"샘웰? 그래, 샘웰. 할 일 없으면 나랑 카지노나 가자. 너 아까 그 노친네한테 돈도 받았잖아? 그거 공돈 아니야? 그걸로 인생 역전하고 싶지 않냐? 응?"

갈리아크가 샘웰의 어깨를 잡았다.

제 딴에는 힘을 뺀 거지만 그럼에도 무지막지한 근력이었다. 샘웰이 조금 구겨졌다.

'망했다.'

샘웰은 도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갈리아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이대로 팔뚝에 짓이겨져서 고기완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거기다 갈리아크의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겁 많은 샘웰은 스스로의 의견을 속으로 삭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좋아! 너 카지노 경험은 있냐?"

"없습...."

"없어? 그럼 내가 잘 알려 줄게. 원래 도박이란 말이야. 돈을 딱 쓸 만큼 가져가야 패가망신을 안 당하는...."

갈리아크가 샘웰을 데리고 카지노로 양했다.

남겨진 베르덴은 그들의 등을 바라보다가 샘웰이 말해 준 여관으로 향했다.

* * *

"후우...."

깊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가벼운 차림을 한 베르덴이 넓은 여관의 방 중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얼굴과 목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화아아아악.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그와 동시에 육체에 마력을 침투시켰다. 기분 나쁜 저항감에 살짝 표정이 흔들렸으나 이 정도야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베르덴이 마법을 시전했다.

<육체증폭>

대량의 마력을 소모해 전반적인 신체 능력을 증폭하는 5위계 부여 마법. 그 효과는 지금까지 사용하던 강화 마법과는 말 그대로 위계가 다르다.

심장이 강하게 진동하며 몸 전체에 고양감이 깃든다.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세를 잡아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작년에 로든마이어 백작가의 로드론 기사단의 훈련에 참가했을 때 익힌 동작이었다.

재빠르게 주먹을 내뻗고 재빠르게 회수했다. 그와 동시에 체중의 이동을 의식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날카로운 발차기가 허공을 갈랐다.

위력적이다.

같이 대련을 했던 로드론 기사와 비교했을 때 육탄전을 벌여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마법에는 단점이 존재한다.

마법이 지속되는 동안 육체에 부담이 겹겹이 쌓인다. 마법 숙련도가 떨어진다면 더더욱.

"아."

쿠웅!

제어를 벗어난 베르덴의 주먹이 벽에 흠집을 냈다.

물론 다치지는 않았다. 마수 카멜리오스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항시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지속 가능 시간은 약 30초 정도인가.'

마력은 차고 넘치지만 숙련도가 턱없이 부족해 지속이 불안정하다. 그로 인해 육체에 부담이 상당했다.

그래도 며칠 만에 익힌 5위계 마법치고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숙련도를 쌓으면 1~2분 정도까지는 가능하겠어.'

베르덴이 마법을 해제했다.

반동은 거의 없었다. 부여 마법은 위계가 높아질수록 마법을 시전하기 전과 후의 괴리감이 현격하게 줄어든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며 창틀에 슬쩍 다가갔다.

"...."

주위에 베르덴의 방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다.

본인들 기준으로는 잘 숨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베르덴의 감각을 피해 가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베르덴이 한쪽 눈을 감았다.

<마력의 눈>

여관 지붕 위에 마력의 눈이 형성되었다.

방에 머무는 동안 관찰한 결과, 여관 주위를 온종일 배회하는 자들은 총 7명이었다. 뤼잉 코스타가 보낸 자들임이 분명했다.

당장 내일이 경매일인데 딱히 습격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데릭이 말했던 대로 경매가 끝난 이후에 접근할 생각인 것 같았다.

'기왕이면 제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은 5위계에 오른 이후로 엘더 리치 외에 전투를 벌인 적이 없다.

지금의 전력을 보다 정확히 가늠하려면 무엇보다 실전이 중요했다. 실력자를 상대로 말이다.

전투력 측정기.

그가 생각하는 뤼잉 코스타의 용도는 딱 그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경매 당일이 되었다.

* * *

로아프라의 경매는 익명으로 진행된다.

경매장 내에서 신원을 확인한 뒤, 무작위로 표를 뽑아 번호를 배정받는다.

그러고는 각 번호에 맞는 방을 부여받는다. 개방되어 있지 않는, 오로지 중앙에 있는 경매 물품만을 볼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공간이다.

굳이 번거롭게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위력이나 신분에 의해 경쟁이 소심하게 진행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로아프라는 힘이 곧 질서다.

그러나 경매장에서는 돈이 곧 힘이었다.

적어도 경매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얼마나 강하든, 신분이 얼마나 높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로지 돈의 싸움이었다.

베르덴이 경매장에 도착했다.

주저 없이 입구로 들어갈 찰나에 아는 얼굴들과 마주쳤다.

도살자 갈리아크.

길게 하품을 하고 있는 그의 옆에는 샘웰이 있었다. 우중충한 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한 몰골이었다.

설마.

"그동안 카지노에 있었던 거냐?"

"거긴 카지노가 아니다. 천국이지. 안 그러냐, 샘웰?"

"맞습니다, 갈리아크 님. 히히히...."

고작 4일 만에 샘웰은 도박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표정이 좋은 걸 보니 돈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다. 뭐가 됐든 갈리아크와 샘웰의 꼴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갈리아크 님!"

샘웰은 뤼잉 코스타가 자신마저 잡으려 할지도 몰라 경매장 내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라면 경매가 진행되는 동안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할 테니.

갈리아크에게 잡히는 바람에 도망갈 기회를 잃은 그는 역으로 그에게 붙어 안전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눈치 빠른 안내인의 처세술이었다.

그런 샘웰을 뒤로하고 베르덴과 갈리아크가 건물 중심으로 들어섰다.

참가자임을 확인한 후 번호표를 뽑자 43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안내에 따라 흩어진 둘은 비공개로 각자 배정받은 방 안에 들어갔다.

43번 방.

어둠이 내려앉은 아늑한 공간.

중심에는 고급 의자가 있었고, 그 앞에 놓인 책상 위에는 마이크가 있었다. 마력으로 증폭되는 마법 물품으로, 자세히 보니 음성 변조 기능이 가미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사회자가 무대 중심에 올라섰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한 몸에 받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전달된 진동이 마력으로 인해 증폭되며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신사! 숙녀! 여러분! 위대한 빈테르트에서 주최하는, 올해 로아프라의 경매에 참가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든 객석을 채워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며! 이제부터 경매를 시자아아아아아악!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딱 끊기자마자 무대의 중심이 움직였다.

아래에서 유리 상자가 솟아오르며 안에 보관되어 있는 액세서리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첫 번째로 소개드릴 물건은 바로 '메이벨의 귀걸이'입니다! 그 성능은 무려 중상급에 해당하는 원소 마법 범위 향상이며, 외적으로 착용 유무를 감출 수 있는 일체화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원소 마법사에겐 아주 유용한 물건이죠! 시작가는 5억! 최소 단위는 1,000만 엘크입니다!"

베르덴이 목표로 하는 물건 중 하나.

'시작부터 놓칠 생각은 없다.'

버튼을 눌러 마이크를 활성화했다.

[5억 1,000만 엘크.]

[43번! 5억 1,000만 엘크 나왔습니다!]

경쟁 입찰이 시작되었다.

142화 경매장 (2)

메이벨의 귀걸이의 기댓값은 8억 엘크.

시작가가 5억이니, 베르덴은 그 절반쯤 되는 6~7억 사이에서 낙찰받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예상보다도 훨씬 치열했다.

[22번, 5억 4천만! 54번, 5억 5천만! 14번, 6억! 순식간에 6억 엘크를 돌파합니다! 그리고 43번! 6억 1천만 엘크!]

경쟁자들이 따라붙었다.

초반에야 대충 간을 본 입찰자가 많아 숫자는 금방 줄어들긴 했다. 메이벨의 귀걸이의 용도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장식품으로 삼기에는 디자인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하나 그럼에도 분명하게 따라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14번.'

상대의 경쟁심을 아예 찍어 누르려는 듯, 한 번에 3~5천만 엘크씩 가격을 올리고 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낙찰가를 높이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그건 아니겠지.

바람잡이였다면 살살 긁듯이 가격을 올렸을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변조된 목소리에서 열망이 느껴졌다.

'원소 마법사인가?'

가능성이 높다.

광범위한 원소 마법을 다룬다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건 베르덴도 마찬가지였다.

[6억 4천.]

[6억 5천.]

[6억 8천.]

[6억 9천.]

[7억 3천.]

마이크에서 입을 떼지 않고 최소 단위로 가격을 올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높아지긴 했으나 이런 상황을 대비해 51억 엘크나 되는 자금을 마련해 두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다.'

[7억 4천.]

[7억... 6천.]

상대의 마이크 너머로 짜증이 느껴진다. 호가 단위도 줄었고.

이 이상의 자금을 쓰기엔 사정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었다.

베르덴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7억 7천.]

[43번! 7억 7천만 엘크! 7억 7천만 엘크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14번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책상을 내리친 듯한 타격음이 스치듯 들려온 게 전부였다. 카운트가 지나도 입찰자가 없자 사회자가 소리쳤다.

[7억 7천만 엘크! 낙찰입니다! 43번! 43번! 축하드립니다!]

경매장 내부를 지키고 있는 경비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에 따라서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경매 시작부터 거의 기댓값에 근접한 가격이 나와 버린 터라 사회자도 흥분한 목소리로 경매를 진행했다.

"후우."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한 베르덴이 의자에 몸을 누였다.

경매에 참가하는 건 물론이고 보는 것조차 처음이라 어색한 느낌이 있었지만, 낙찰에 성공했을 때의 쾌감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영혼까지 돈을 끌어모은 보람이 있다.'

다음 목표인 뇌익의 아뮬렛까지 아직 차례가 남아 있다.

베르덴은 느긋하게 경매를 관람했다.

올해 경매가 유별나게 치열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것인지 변질된 목소리가 끊임없이 경매장에 감돌았다.

말 한마디에 억 단위의 가격이 올랐으며, 심지어 물건의 기댓값을 넘어 낙찰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자산가들이 많은가 보군.'

하기야 리비안트 공왕 또한 어릴 적 방문했던 경매장에서 아티팩트 삼원색의 중심을 구했다고 했으니. 익명이라 누군진 몰라도 고위 귀족의 관련자가 참가자 중에 있겠지.

베르덴이 가진 자금이라면 나름 경쟁해 볼 만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굳이 그들을 상대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거대한 양손 도끼가 출품되었다.

2미터가 넘어가는 길이와 사람의 몸통보다 더욱 큰, 양옆에 달린 두 개의 칼날. 어지간한 전사들도 드는 것조차 버거울 것 같은 무게감이 눈으로 느껴졌다.

[이 도끼는 '훼월(毀鉞)'이라 불리는 무기입니다! 별다른 마법 효과는 없으나 몸체와 칼날이 다마스강과 레어 메탈 그리고 플랙드 합금 기반으로 제련되었으며, 칼날 부분에는 상위 금속인 솔리다이트가 미약하게 첨가되어 있습니다! 수백 명을 벤다고 할지라도 날이 상하지 않는, 아주 내구성이 뛰어난 도끼죠! 시작가는 9억 엘크입니다!]

입찰이 시작되었으나 선뜻 나서는 자는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저걸 직접 쓰자니 너무 무거운 데다가, 크기도 커서 차고 다니기도 번거롭기 짝이 없었으니까.

집에 장식하기에도 미관상 좋지 않았다. 저건 너무 투박하면서 거칠었다.

그때, 마이크에 불이 들어왔다.

[11억 3,400만!]

우람찬 목소리에 사회자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프로 정신이었다.

[37번 11억! 11억 3,400만이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3... 2... 1...! 11억 3,400만 엘크! 낙찰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34번!]

[크하하하하! 아주 좋아!]

정확히 11억 3,400만 엘크라는 돈, 저 웃음소리와 말투. 37번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익명이 무색하군.'

베르덴이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세웠다.

느긋하게 쉬는 건 여기까지였다. 왜냐하면 다음으로 출품될 물건이 그의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

무대 중심에 나타난 직사각형의 작은 부적.

뇌익의 아뮬렛. 그 연한 남색의 빛이 유리 너머로 반사되었다.

* * *

로아프라 경매장 14번 방.

그 안에는 두 명의 사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빼빼 마른 몸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근육질의 거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판이하게 체형이 달랐으나 얼굴의 특징 자체는 아예 동일했다.

쌍둥이 마법사, 로바트와 록키.

빈테르트 경비 계열의 간부로서 로아프라에 악명을 떨치는 형제들이었다.

허약한 형 로바트가 경매장을 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43번... 저놈 대체 누구야...!"

로바트는 전격 계열을 다루는, 고위 속성을 보유한 원소 마법사였다.

그런 로바트의 목적은 총 세 가지. 그중 두 개가 메이벨의 귀걸이와 뇌익의 아뮬렛이었다.

그도 빈테르트의 일원이기에 미리 정보를 받았고, 그에 걸맞은 돈도 준비해왔다. 위 두 가지 물건은 용도가 극히 한정되어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메이벨의 귀걸이를 빼앗겼다.

짜증이 나긴 했지만 참을 순 있었다. 다른 두 가지에 비하면 귀걸이야 없으면 아쉬운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분을 삭이고는 뇌익의 아뮬렛이 나오자마자 입찰했다.

[10억 엘크.]

시작가 8억에서 2억이 추가되었다. 최소 단위인 2천만 엘크의 10배인 금액이다. 다른 놈들에게 감히 경쟁할 생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으름장이었다.

하지만.

[10억 2천만.]

43번이 끼어들었다. 메이벨의 귀걸이를 가져간 번호였다.

얼굴 근육이 순간 움찔거린 로바트가 다시금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11억.]

[11억 2천만.]

[...12억.]

[12억 2천만.]

가격을 올릴 때마다 최소 단위로 따라붙는다.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듯.

얼굴이 벌게진 로바트가 이마를 문지르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옆에 있던 동생 록키가 말했다.

"형, 저거 계속 따라올 것 같은데?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

"더 할 거야? 내 생일 선물은?"

그래, 맞다.

로바트의 목적 중 마지막. 그건 동생인 록키에게 선물을 사 주기 위함이었다. 록키가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하길래 돈을 보태 주기로 약속했다.

더 낭비할 돈은 없었다. 잠시 숙고하던 로바트가 말했다.

"한 번만 더 해 보마, 동생아. 그래도 네 선물을 구하는 데는 이변이 없을 테니."

"뭐, 그렇다면 상관없는데...."

동생이 어깨를 으쓱였다.

허락을 받은 형이 이를 악물고 가격을 높였다.

[1... 13억...!]

이게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로바트는 제발 43번이 따라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나 세상은 종종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오늘의 로바트에겐 그러했다.

[13억 2천만.]

"저런 빌어먹을 새끼가...!"

욕을 내뱉은 로바트가 신경질적으로 마이크를 내던졌다.

포기 선언이다. 대답이 없자 사회자가 낙찰이라고 소리쳤고, 메이벨의 귀걸이와 함께 뇌익의 아뮬렛이 전부 43번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침울해진 로바트를 록키가 위로했다.

"좀 참아, 형. 뭣하면 나중에 찾아가서 빼앗으면 되잖아?"

"빈테르트 간부가 빈테르트에서 주최한 경매장의 참가자를 약탈하라고? 규칙 위반이다. 그러다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란다."

경매에 출품되는 물건의 주인은 빈테르트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로바트와 록키는 경매에 참가할 일도 없이 원하는 물건들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빈테르트는 어디까지나 경매의 주최자일 뿐.

경매장을 부흥시켜 거액의 수수료를 받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그럴진대 다름 아닌 간부가 욕심 때문에 경매장의 명성에 흠집을 낸다면, 자칫 암흑가의 왕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몰랐다.

록키가 말했다.

"누가 로아프라에서 하재? 누군지만 알아냈다가 나중에 바깥에서 잡으면 되잖아. 아니면 다른 놈에게 청부를 해도 되고."

"그러다가 43번이 왕국을 떠나면? 그리고 청부했다고 그분이 모르실 것 같으냐?"

"어... 그런가? 그렇겠지?"

록키가 머리를 긁적였다.

큰 체격만큼이나 동생의 머리는 그리 좋지 않았다. 로바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염동력에 끌려온 마이크가 책상 위로 돌아왔다.

'아까워서 미쳐 버릴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로바트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동생을 위해 선물은 해 줄 수 있을 테니 가슴 한편은 편했다.

로바트는 경매 입찰보다도 동생이 더욱 중요했다.

재미 삼아 사람을 터뜨려 죽이는 이들일지라도 형제애 하나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돈독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록키의 목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력 마법 서적 세트]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고위 마법의 이론을 익힐 수 있는 서적이다.

록키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자기도 고위 마법을 배워 보겠다고, 무조건 갖고 싶다며 난리를 쳤었다.

'그 머리로 배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여 마법을 이해하긴 했으니 혹시 모른다. 어쩌면 그 방면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지. 로바트는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대신 동생의 가능성을 믿었다. 그게 형이었으니까.

서적의 경매 시작가는 15억. 기댓값은 18억이다.

로바트가 물건을 하나도 입찰하지 못한 터라 동생이 가진 돈과 합치면 충분히 사고도 넘는다. 전에 있던 감정은 털어 버리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이크를 활성화했다.

[18억.]

[1... 14번! 18억! 18억 엘크가 나왔습니다!]

시작하자마자 기댓값까지 올렸다. 이건 반드시 갖겠다는 선포이자 형으로서 동생에게 보여 줄 마음이기도 했다.

동생이 해맑은 표정으로 낙찰 선언을 기다렸다. 살벌한 근육질과는 다르게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18억 3천만.]

[43번! 18억 3천만 엘크!]

"...아?"

한 명이 따라붙었다.

* * *

'처음부터 기댓값까지 올릴 줄이야.'

중력 마법 서적 세트가 비싸도 가장 구하기 쉬울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되다니. 미간을 찌푸린 베르덴이 곧바로 경쟁에 돌입했다.

18억 3천.

19억.

19억 3천.

20억.

미친 듯이 숫자가 올라갔다.

중력 마법 서적 세트는 소장품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그게 20억이 넘냐고 하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걸 보면... 단순히 서재를 장식할 게 아닌, 직접 중력 마법을 배우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14번하고 마주치는 건 벌써 세 번째인가.'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는 베르덴이 이겼다.

돈의 거의 절반가량을 소모한 그와 다르게 14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자금을 보유하고 있을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생각은 없다.

남은 돈은 약 30억 남짓.

그 안에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14번과 43번 방의 마이크 소리만이 경매장에 맴돌았다.

어찌나 치열한지 사회자가 감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게 기댓값을 한참이나 돌파했음에도 누구도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22억이 넘었을 때였다.

[27억...!]

14번의 마이크에서 토해 내듯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작가 15억짜리가 무려 27억. 설령 낙찰받는다고 해도 가치만 따지면 확실한 손해였다. 그럼에도 저런 금액을 제시한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것이다. 마이크로 변질된 목소리에서도 그러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베르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27억 3천만.]

또다시 최소 단위의 금액 상승.

베르덴의 입찰 방법은 상대로 하여금 약 올리는 듯한, 머리를 들끓게 하는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경매에 생소한 그로서는 단지 가장 싸게 구입하려고 했던 거였지만.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직후.

콰아아앙!

굉음이 터져 나오며 14번의 방이 무너졌다. 녹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43번! 너 뭐 하는 새끼야! 네놈이 감히 내 동생의 생일 선물을...!"

"형, 형! 참아! 형! 경매 망치면 그분께 죽는다고!"

동생이라 불린 거한이 형을 끌어당겨 안쪽으로 사라졌다.

산산조각 난 타일 조각 하나가 무대 위로 굴러떨어졌다. 슬쩍 발로 잔해를 치운 사회자가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럼 다시금 경매를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43번! 27억 3천만! 3... 2... 1...! 낙찰되었습니다! 43번! 축하드립니다!]

사회자의 낙찰 선언으로 베르덴의 목적은 전부 달성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사용한 금액만 무려 48억 2천만 엘크. 경매장이 보관하는 자금엔 고작 2억 8천만 엘크밖에 남지 않았다.

안일하게 기댓값만 충족해서 돈을 준비했더라면 이렇게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로 다행이군.'

베르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5위계 부여 마법에 더해 중력 마법까지 익혀야 하기에 바쁜 나날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문제는 없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베르덴의 편이었으니까.

천천히 위로 향하는 발걸음.

이런 식으로 나아가 훗날 왕국에서의 일이 끝난다면 베르덴은 지금과 또다시 달라져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확신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마지막 차례가 다가왔다.

[마녀의 가시왕관]

경매장에 출품된 유일한 아티팩트. 시작가는 45억이며 기댓값은 78억이다.

기다리고 있던 참가자들이 눈에 불을 켜는 게 느껴진다. 마음이 급한지 마이크 버튼이 켜졌다 꺼지며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회자가 마녀의 가시왕관에 대해 설명했다.

베르덴은 경매장에 감도는 기묘한 긴장감을 지켜봤다.

'과연 아티팩트가 누구의 손에 들어갈까.'

정확히는 아티팩트가 얼마에 팔릴까.

경매를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냈다.

베르덴도 흥미 깊은 시선으로 경매가 시작되길 기다렸고 이내 사회자가 소리침과 동시에 입찰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

[100억 엘크.]

...이제까지와 단위가 다른 금액이 입찰되었다. 경매장 내부가 경악에 휩싸였다. 그건 베르덴도 마찬가지였다.

'100억 엘크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과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저 금액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100억 엘크의 현금을 도대체 어떻게 마련했을까.

그리고 저 돈을 아직 경쟁도 붙지 않는 물건에 때려 박다니. 아티팩트가 귀중하다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비싼 건 아니었다.

'게다가 마녀의 가시왕관은 사용하기 난해한 아티팩트다.'

명확한 효과도 없으며 여성밖에 착용하지 못하는 데다가, 오래 착용했다간 착용자가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하니까.

베르덴의 관점에서는 납득할 수가 없는 금액이었다.

대체 누가.

대체 어떻게.

대체 무슨 이유로.

경매에 참가한 모두가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물론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옆을 흘긋 쳐다봤다.

관계자가 고개를 저었다. 저 금액은 착오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침을 삼킨 사회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4... 4번, 100억 엘크... 더, 더 없으십니까?]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티팩트의 가치를 훌쩍 넘어 굳이 100억 엘크를 내건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이건 자신의 것이니 감히 대적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매장 내에서든 혹은 밖에서든 말이다. 이 상황에서 익명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경매장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어야 할 아티팩트의 출품.

빈테르트를 포함해 모두가 정열적인 경쟁을 예상했으나, 현실은 차가운 경악 속에 묻혀 폐막식을 알렸다.

143화 역린 (1)

"여기, 잔금과 낙찰받으신 물건들입니다."

경매장의 지하에서 베르덴이 돈과 물품을 수령했다.

메이벨의 귀걸이, 뇌익의 아뮬렛, 중력 마법 서적 세트. 도중에 바꿔 치는 일은 없었는지 확실한 진품이었다.

'뭐, 당연하겠지만.'

베르덴은 주저 없이 귀걸이를 착용했다.

탈부착 형식이라 따로 귀를 뚫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양쪽 귀에 마법 물품을 착용하자 내재되어 있는 기능, 일체화가 작동했다.

완전히 피부와 동화된 귀걸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외견을 감추는 게 전부이나, 솔직히 말해 베르덴은 외모를 치장하는 취미도 없고 귀걸이의 디자인도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기에 그로서는 나쁘지 않은 기능이었다.

다음은 아뮬렛의 차례였다.

목걸이인 삼원색의 중심에 부적을 매다는 순간 미약한 스파크가 튀더니 이내 베르덴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귀걸이는 원소 마법 범위의 확대.

아뮬렛은 전격 계열 마법의 강화.

지금 이 자리에서 효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하나 베르덴의 감각은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마법 물품이 마법사로서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말이다.

'로아프라에 온 보람이 있군.'

베르덴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공간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중력 마법 서적과 함께 3억 좀 안 되는 돈을 안에 보관했다. 경매장에서의 볼일을 마친 그가 곧장 밖으로 나섰다.

로아프라의 여전한 밤거리가 보였다.

풍경의 변화가 없는 탓인지 시각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야 나왔구만."

"안녕하십니까, 애셔 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갈리아크가 샘웰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베르덴이 도살자의 등에 매어 있는 거대한 양날 도끼에 시선을 던졌다.

"역시 훼월을 입찰한 게 너였군."

"아, 이거? 어때, 때깔 좋지? 이야, 사실 별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게 나올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운이 좋다니까."

갈리아크가 훼월을 꺼내더니 가볍게 휘둘렀다.

그것만으로도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며 작게 바람이 일었다. 이렇게 보니 체격이나 근력이나 갈리아크에게 어울리는 무기긴 했다.

가볍게 몸을 푼 갈리아크가 훼월을 어깨에 메며 물었다.

"그런데 넌 뭘 구했지? 표정이 좋은 걸 보니 쓸 만한 거 좀 건진 것 같은데."

"글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하긴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돈이 그렇게 많았는데 낙찰은 받았겠지. 머저리가 아니면 말이야."

베르덴은 무시로 답했다.

마법사 자신이 어떤 장비를 갖추고 있는지 떠드는 건 위계와 속성을 제 입으로 밝히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너 기다렸는데?"

"이유는."

베르덴이 갈리아크와 만난 건 우연이다.

계획에도 없던 동행을 계속할 예정은 전혀 없었다.

"거 있잖아. 뤼잉 코스타인지 파스타인지 하는 놈. 너야 당연하겠지만 나한테도 감시가 붙었거든."

"감시?"

"카지노에 있을 때부터 시작해 경매장에 오는 길까지 붙었으니 확실해. 아마 네 일행으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겠지."

샘웰이야 로아프라에서 오랜 기간 안내인을 했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살자는 다르다.

갈리아크가 로아프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베르덴이 로아프라에 발을 들인 시점에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확실히 오판할 만하군."

"뭐, 착각이든 뭐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감히 신경 거슬리게 날 미행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처맞을 이유는 충분하지. 겸사겸사 새로 구한 내 무기도 시험해 보고."

후자가 주목적인 것 같은데... 아무튼.

'상관없겠지.'

베르덴도 마법을 시험할 생각이었다.

따로 의뢰라든가 뭐가 있는 게 아니었으니 한 명이 더 늘어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갈리아크 정도 되면 방해가 될 일도 없을 테고.

그렇게 생각을 마친 때였다.

경매장의 번잡함이 가라앉기 시작할 때쯤 멀리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한쪽 눈에 안대를 찬 사내였는데 걸음걸이만 봐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베르덴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암살자를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내는 혼자였다.

더군다나 살기는커녕 적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베켄의 사생아로부터 부탁을 받아 베르덴을 죽이러 온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이윽고 사내가 다가왔다.

남아 있는 검은 눈동자로 베르덴을 바라봤다.

"애셔, 갈리아크, 샘웰."

세 명을 호명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뤼잉 코스타 님께서 부르신다."

암살이 아닌 초대.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다름 아닌 샘웰이었다.

"...예? 저도요?"

* * *

뤼잉 코스타가 만남을 요청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베르덴 일행을 함정으로 끌어들이려는 게 목적이겠지.

'하지만 그건 아니다.'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저었다.

뤼잉 코스타는 서쪽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작은 권력자라며 샘웰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코스타의 부하가 안내하고 있는 장소는 나흘 전 데릭과 만났던 레스토랑. 로아프라의 서쪽이 아닌 동쪽이었다.

왜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나와 베르덴을 만나려고 하는 걸까.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으나 확실하진 않다.

하나 그게 대화가 필요한 용건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러니 알아봐야겠지.'

어차피 대화를 거절한다면 암살자가 올 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직접 찾아가 한꺼번에 처리하는 편이 훨씬 간단했다. 베르덴에게는 전혀 무모하지 않은, 오히려 효율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건 갈리아크도 같았다.

외눈 사내를 따라 레스토랑 앞에 도착한 베르덴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부터 시작해 직원 하나 존재하지 않는, 완전 무장을 한 십수 명의 인간이 장악한 중앙 홀(Hall).

그 중심에 기다란 테이블 하나가 놓여 있었으며, 왼쪽 끝에 의자 세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홀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금색 단발을 한 남자가 보였다.

과도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피부가 하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진한 화장을 한 특이한 외모였다.

"말씀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코스타 님."

"잘했어, 모크넌."

와인으로 입가심을 한 뤼잉 코스타.

그는 베르덴을 목격하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머, 듣던 것보다 훨씬 괜찮잖아? 좋아, 좋아. 그래, 이 정도라면 내가 직접 찾은 보람이 있지."

코스타가 손바닥을 식탁 반대편으로 향했다. 앉으라는 의미였다.

세 의자 중 중심에는 베르덴이.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갈리아크가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며 대충 걸터앉았고, 샘웰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심스레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맞은편에 위치한 베르덴과 코스타의 시선이 교차했다.

"나는 뤼잉 코스타야. 너는 애셔...."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지?"

코스타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인사도 안 했는데 말을 끊어? 원래는 건방지다고 죽여 버려야 하지만... 넌 용서해 줄게. 로아프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잘생기기도 했고."

어쨌든.

"생각보다 성격이 급한 것 같은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니?"

* * *

난데없는 제안이었다.

미간을 좁힌 베르덴이 물었다.

"베켄의 사생아에게 복수를 부탁받은 게 아니었나?"

"오, 거기까지 알고 있다니 생각보다 정보가 빠르네? 뭐, 그 말이 맞아. 걔한테 애셔, 널 죽여 달라고 보석 상자를 받았지. 근데 한번 거울을 좀 봐 봐. 네가 봐도 그냥 시체로 썩어 가기에는 엄청 아깝지 않아? 그래서 마음을 바꿨지."

코스타가 양 손바닥으로 베르덴을 가리켰다.

"그 외모에 뛰어난 4위계 전격 마법사. 간판으로 쓰기에는 너만 한 인재는 로아프라는커녕 왕국을 통틀어도 없어. 그런데 죽이라고? 천만에!"

"보수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지. 이미 보석 상자를 받았는데 약속을 지킨다고 보석 상자를 또 주는 건 아니잖아?"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었으나 코스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투에는 로아프라의 권력자 중 하나다운 오만함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리고 너에게는 그딴 보석 상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치가 있어. 그러니까...."

"코스타 님!"

그때, 레스토랑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중에 말이 끊긴 코스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한 사내가 레스토랑 입구를 박차며 바닥을 굴렀다.

"코스타 님...!"

코스타를 부른 사내가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복수심이 가득한 눈으로 어금니를 깨문 그, 베켄의 사생아가 바닥을 기며 코스타에게 소리쳤다.

"뤼잉 코스타 님! 분명 제 복수를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베르덴으로 인해 본인의 위치를 잃어버린 사생아.

그는 베켄을 등에 업고 타인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지만 본인이 당한 것은, 손해를 당한 것은 결코 용납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막대한 재산을 코스타에게 바쳤고 보석 상자까지 주며 부탁했는데, 정작 코스타는 사생아를 무너뜨린 자와 사이좋게 한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코스타가 눈을 찡그렸다.

"어후, 시끄러워. 그래, 약속했지."

"그런데 왜...."

"약속했다고 지켜야 하는 건 아니잖아?"

"네...?"

"내 말이 틀렸니?"

코스타의 눈동자에 사생아가 담겼다.

그 안에는 감정이라곤 없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하찮은 짐승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얘기 하는데 누가 끼어들래? 너 따위가?"

"아, 아니, 코스타 님. 지금껏 제가 바친 재산만 얼만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준 거면 준 거지, 왜 이렇게 질척거려? 야, 모크넌."

"네, 코스타 님."

"죽여 버려. 이제 쓸데도 없는 거."

"...어?"

차가운 음성에 사생아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것보다 빠르게 모크넌이 팔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금속 채찍이 사생아의 목을 휘감았다.

"코, 코스으윽... 타아악...!"

가시들이 살갗을 갈가리 찢었고, 엄청난 압력이 사생아의 목을 짓눌렀다.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내 모크넌이 허리를 비틀며 팔을 당기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사생아의 머리가 뽑히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

너무도 잔혹한 살인에 샘웰이 고개를 숙였다.

베르덴과 갈리아크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금의 광경을 지켜봤다.

말 한마디로 베켄의 사생아를 죽인 코스타.

그가 가학적인 미소와 함께 베르덴에게 말했다.

"베켄의 사생아가 죽었으니 이제 그 부탁도 없어졌네?"

"오, X발. 미친놈이군."

갈리아크가 질색했다.

코스타가 그를 째려보고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다시 말할게. 내 밑으로 들어와, 애셔. 그럼 네가 원하는 걸 줄게. 로아프라에서 누릴 수 있는 건 뭐든지 말이야. 아, 이렇게 말하면 와닿지 않으려나? 예를 들자면...."

잠시 생각을 정리한 코스타가 말을 이었다.

"돈하고 권력은 당연하고 여자까지.... 음, 오히려 여자들이 너에게 안기고 싶어 하려나? 뭐, 취향이 있다면 남자도 얼마든지 가능해. 원한다면 재미 삼아 죽여도 되고."

인간 위의 인간.

말 그대로 암흑가의 귀족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엔 윤리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로아프라였다.

"아무리 선인이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저마다의 악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세상의 시선 때문에 대부분 속에 감춰 두고 있고. 하지만 여긴 아니야. 타인의 눈치 따위 볼 것 없지. 오로지 중요한 건 힘이니까."

코스타가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오면 너도 그런 로아프라의 권력자 중 하나로서 군림할 수 있어. 물론 빈테르트의 암묵적 규칙 내에서 움직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바깥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자유롭지.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거절하지."

베르덴이 즉답했다.

애초에 뭘 제시하든 간에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세상의 기준은 힘이다.

'그래, 알고 있다.'

베르덴은 이러한 진리를 진즉에 깨닫고 있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약자로서 억압당하고 희생당하며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속박에서 벗어나 복수를 위해 힘을 쌓아 가고 있다.

자유(自由).

베르덴을 이루는 근간 중 하나로서, 이건 코스타가 말하는 자유와는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코스타의 제안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역겹기 짝이 없었으니까.

단호한 거절.

하지만 코스타는 그게 단순히 대가가 부족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곤 예상했다는 듯 턱을 매만지며 입가를 비틀었다.

"그래? 뭐, 사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말했던 건 지극히 평범한 거니까. 그래서 다른 걸 준비해 봤어."

코스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명령을 받은 호위 4명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널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야. 특히나 마법사라면 만족하지 않을 수 없을걸? 이건 내가 장담할게."

마법 물품이나 아티팩트를 말하는 건가?

잠시 후, 코스타의 부하들이 수레에 커다란 나무 상자 두 개를 싣고 왔다. 틈새에 칼을 비집어서 콱 비틀자 상자 한쪽 면이 떨어졌다.

짝!

코스타가 손뼉을 쳤다.

"자, 나오렴. 에이든, 샤를로트."

쩔그럭쩔그럭.

상자 안에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144화 역린 (2)

갈색 머리칼을 가진 두 남녀.

하나는 순진한 얼굴의 남자였으며 다른 하나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자였다. 전체적인 외모로 보아 남매인 모양이었다.

영양실조인지 비쩍 말라 있어 정확한 나이를 판단하기는 어려웠으나, 남자는 10대 후반, 여자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노예인가?"

베르덴이 유년기를 보냈던 고아원. 이후의 삶을 보냈던 보헤미른 마탑은 전부 서대륙에 위치해 있다.

다름 아닌 루아스 교국이 존재하는 대륙이었기에 노예제 폐지가 가장 먼저 시행되었고, 그런 탓에 노예 제도가 사라진 건 베르덴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에 비해 이곳 동대륙은 늦은 편이었다.

특히나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인간이 물건으로서 취급되는 것.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국 곳곳에서 당연시되었던 모습이었다. 온갖 범죄가 만연한 로아프라에서는 더더욱.

그렇기에 이러한 광경은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코스타가 남매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남동생은 에이든. 저기 누나는 샤를로트라고 해. 얼마 전에 내가 장난감으로 쓰던 애들이 죽어서 이번에 새로 구한 애들인데... 적당히 길 좀 들이려고 교육을 하던 도중에 되게 신기한 걸 발견했지 뭐야?"

코스타가 검지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외눈 사내, 모크넌이 남매에게 다가갔다.

샤를로트가 곧장 눈을 치켜뜨고 그를 막아서려 했으나 쇠사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사적으로 그녀가 이를 드러냈으나 숨소리만 거칠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 성대를 끊었거든. 그것보다 잘 봐 봐."

모크넌이 누나를 지나쳐 남동생의 앞에 다다랐다.

에이든의 손목을 잡아 단검으로 팔뚝을 주욱 그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단순한 노예 학대라고 볼 수 있었으나, 그 직후.

"...!"

에이든의 몸속에서 마력이 들끓었다.

이내 바깥으로 흘러나온 마력이 상처에 집결되더니 직전에 생긴 자상이 저절로 회복되었다. 마치 신성력을 통한 회복과도 같다.

이건 통상적인 마력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즉, 경우의수는 하나밖에 없었다.

'마력의 특이 형질.'

오로지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재능으로, 로벨린과 같은 극소수의 마법사만이 보유하고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노예 조달하는 애들은 몰랐나 보더라고. 가능한 상품에 상처가 나지 않는 게 원칙이긴 하니까. 뭐, 그 덕분에 저런 희귀한 걸 아주 싸게 살 수 있었으니... 아주 운이 좋았지."

코스타가 자랑이라도 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쪽에 매달린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그래서 내 아래에 있는 마법사들한테 조사를 맡겨 봤는데, 마력으로 신성력의 회복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하더라고. 특히 재생력만 따지면 신성력 이상이라나 봐.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래, 고기 인형이라고 할까? 내가 대충 실험해 보니까 어지간한 치명상이 아니라면 자체적으로 회복이 가능한 것 같아."

코스타가 와인을 머금었다.

기분 좋게 목을 축인 그가 말을 이었다.

"들어 보니 마법사들은 저런 걸 엄청 좋아한다며? 웬만해서는 망가지지도 않고 연구할 가치도 높은 실험체 말이야. 맞지, 볼드런?"

"물론입니다, 코스타 님."

볼드런이 대답하며 슬쩍 에이든을 흘겨봤다.

그 눈빛에는 탐구욕이 가득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욕구였다. 정말로 갖고 싶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를 비롯한 주변에 있는, 뤼잉 코스타 휘하에 있는 마법사 전부가 같은 생각이었다.

이번엔 코스타가 샤를로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쟤는 별다른 마법사적 재능은 없어. 그래도 저 귀여운 남동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정이 깊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물어뜯으려고도 했다니깐? 내가 가볍게 손짓만 해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말이야. 안 그러니, 샤를로트?"

"...!"

샤를로트의 눈에는 깊은 살의와 증오심이 가득했다.

코스타는 애완동물의 재롱 따위를 보는 것 같은 미소로 그러한 감정들을 가볍게 흘려 버렸다. 그러곤 베르덴을 바라봤다.

"내 아래에 들어오면 쟤들 소유권을 너한테 줄게. 아직 제대로 된 기초 교육도 마치지 않아서 성깔이 사납기는 한데... 대신 아주 깨끗하긴 하니까 달리 거부감은 없을 거야. 원한다면 교육을 대신 해 줄 수도 있고."

코스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물론 아까 말했던 돈하고 권력 등등도 얹어 줄게. 나도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제안을 한 건 난생처음인데, 그만큼 널 높게 사고 있다고 봐 줬으면 좋겠어. 아, 그리고!"

손뼉을 친 그가 갈리아크와 샘웰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너희 둘도 받아 줄게. 덩치는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거 같으니 후하게 대접해 줄 수 있고, 저 안내인은 음, 특별히 내 전용 심부름꾼으로 써 줄게. 돈이야 부족하지 않게 벌 수 있는데, 어때?"

"...."

"아, 저 그게...."

갈리아크는 팔짱을 낀 채 무시했고, 샘웰은 안절부절못하며 말끝을 흐렸다.

생각 외로 시원찮은 반응이었으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코스타에게 중요한 건 바로 애셔라는, 그의 간판이 되어 줄 마법사였으니까.

"내가 제시할 건 이게 전부야. 이 정도면 대가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갈리아크가 슬쩍 베르덴에게 눈동자를 향했다.

뒤에 있어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침묵이 아니었다. 아주 무거운 정적과도 같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되는 그런 것.

하지만 코스타의 생각은 달랐다.

'거의 넘어왔네.'

입을 닫고 있는 베르덴.

그 모습은 코스타의 제안에 깊게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관점이 다른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한 생각 차이였다.

로아프라에서는 약자에게 주장할 권리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 코스타는 13년 가까이 권력자로서 군림해 왔다. 게다가 그는 타인의 고통을 쾌락으로 삼는 뒤틀린 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코스타에게 있어서 방금 말했던 모든 것은 그냥 당연했다.

비인(非人).

코스타와 같은 로아프라의 권력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인간성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은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이해함에도 따르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베르덴이 암흑가에서 봤던 건 바깥으로 드러난 일부일 뿐.

로아프라(Loafra).

그 실상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코스타가 노예 남매에게 턱짓했다.

"너희도 말 좀 해 보렴. 곧 주인이 될 사람한테 뭐 할 말 없니? 어필할 거 없어? 만약 거절당하면 고문 방에 처넣는다?"

고문 방.

그 단어에 샤를로트가 움찔 떨었다. 성대가 손상되어 뭐라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주먹을 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의식을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 그리고 남동생을 지키지 못하는 비애가 가득 담긴 눈물이었다.

남동생 에이든이 샤를로트를 바라봤다.

팔뚝을 칼로 그었을 때도 반응하지 않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줄곧 죽어 있던 눈동자에 자그마한 빛이 돌아왔다.

에이든의 흑안이 베르덴의 벽안과 마주했다.

그는 누나와 함께 불법 노예 사냥으로 로아프라에 팔려 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에스티리아 왕국의 암흑가가 얼마나 잔혹한 장소인지 말이다.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구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행인과 눈을 마주쳤다. 비명을 질렀다. 행인은 못 본 척하며 지나쳐 갔다.

에이든이 희망을 바랄수록 절망만이 찾아왔다.

곁에서 누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잃고 난 후에는 채찍의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코스타는 에이든이 저항할 때마다 보란 듯이 샤를로트에게 대가를 가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에이든이 고통에 겨워 하는 모습을 샤를토르에게 보였다.

코스타의 잔혹함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짙어 가는 피 냄새가 견디기가 어려웠다.

특히 그게 가족의 피라는 사실에 더욱 그러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갈수록 꺾여만 가던 마음은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

누구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도 여기를 벗어날 수 없다.

에이든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의 두 눈에 가득했던 절박함은 가뭄처럼 말랐으며 희망은 이미 내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와주세요...!"

에이든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약자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하."

그러자 코스타가 피식 웃더니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모크넌, 내 귀염둥이 좀 줘 봐."

"네, 코스타 님."

모크넌이 갈색 채찍을 건넸다.

마수의 고급 가죽으로 만들어진,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아주 가벼운 채찍이었다. 그렇기에 뼈를 부수는 등 무기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피부 위에 아픈 상처를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근력이 부족한 코스타에게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고문 도구 중 하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코스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쪽팔리게 진짜. 미안해, 애셔. 확실히 기초 교육을 마치지 않았더니 노예답지가 않네. 아예 밑바닥부터 굴릴 걸 그랬나.... 잠깐만 기다려. 쓸데없는 말 못 하게 교육 좀 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팍! 팍!

코스타가 채찍을 당겨 몸을 풀었다.

"이번엔 손님이 있으니까 누나가 아니라 너한테 해 줄게. 흠집이 나면 보기 싫어지니까 말이야."

그렇게 가볍게 준비를 마친 그가 팔을 뒤로 당기더니, 섬뜩한 미소와 함께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쇄에액!

채찍 끝이 허공을 가르며 남동생에게 날아갔다.

정확히 얼굴을 향한 채찍에 에이든은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고, 샤를로트가 발버둥을 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이 터져 나가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뭔가가 달랐다.

에이든이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잿빛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서 있었다.

어느새 다가와 손으로 채찍을 잡아챈 그의 푸른 눈동자는, 로아프라에서 감히 볼 수 없는 밝고 투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홀리기라도 한 듯 에이든이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 와서 또 구원을 바라는 건 분명 멍청한 짓이었다. 그게 더한 고통으로 찾아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도와...."

메말라 있던 눈가에서 작은 희망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이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도와주세요...!"

본래라면 대답 대신 조롱이 들려왔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래."

그렇게 답한 베르덴이 팔을 당겼다.

"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코스타가 그대로 끌려왔다.

활성화된 마력회로를 따라 집약된 마력. 이내 베르덴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대지의 갈퀴가 코스타를 베어 갈랐다.

145화 역린 (3)

보헤미른 마탑의 비공식 실험실.

이상의 마법사를 꿈꾸던 18살의 베르덴은 거기에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마력회로 활성제와 기억 확장제.

혈관 속을 파고든 두 개의 약물이 정신과 마력을 강제로 일깨운다.

시야를 가득 메운 조명.

살과 근육을 관통한 주삿바늘.

머릿속으로 욱여넣어진 마법적 지식 등.

그 모든 순간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눈을 감고 싶어도 차가운 금속 집게가 눈꺼풀을 잡아당기고 있었고, 온몸을 비틀고 싶어도 단단히 채워진 구속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정제의 지속성은 베르덴에게 있어 잠깐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마저도 곧 면역 반응이 일어났다.

────그만! 그마아아아아안!

비명을 질렀다.

목이 찢어져 피비린내가 가득한 목소리로 자비를 구걸했다.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외쳤다.

수십 개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당연하다는 듯 누구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냉소를 머금은 마법사들은 호기심을 갖고 실험에 참가하거나, 바라보거나 혹은 그저 자신이 할 일에 몰두했다. 마탑주의 강제 마법진으로 베르덴이 그러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된 이후, 시끄럽지 않아서 좋다며 홀가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들에게 있어 베르덴은 인간이 아니라 77번 실험체에 불과했다.

거기서 베르덴은 절망을 배웠다.

그러나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

어느 날, 로벨린이 물었다.

비공식 실험에 대해 물은 건 아닐 터다. 강제 마법진으로 철저하게 보안이 지켜지고 있으니까. 아마 베르덴이 다중 연속성 이론을 도둑질하려 했다는 소문에 대한 것이겠지.

로벨린은 보헤미른의 마탑의 유망주 중 하나.

각종 다양한 교육을 받느라 마탑 밖에서 지내는 나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베르덴과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건 일 년에 고작 몇 번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의 귀에 스쳤을 정도라면 소문이 상당히 퍼졌다는 뜻이리라.

베르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는 소문을 부정했다.

마법진의 강제력 때문이기도 했으나, 애초에 말할 생각조차 없었다.

극히 낮은 확률을 뚫고 강제력에서 벗어나 로벨린에게 진실을 알려 준다....

그렇게 되면 로벨린은 이론에 대한 진실 규명에 힘을 써 줄 것이다. 베르덴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마탑의 비공식 실험 자체를 없애려고도 할 것이다.

로벨린은 베르덴과 마탑의 동료이기 이전에,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한들 바뀌는 건 없다.

마탑주에 비하면 로벨린은 약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녀 혼자 마탑을 뒤집어엎을 가능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녀 또한 비공식 실험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아니면 강제력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겠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베르덴은 혼자만 당하는 건 억울하다며 자신의 불행에 로벨린을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베르덴의 대답에 로벨린은 더 묻지 않았다.

계속해서 추궁한다고 한들 소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둘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간단한 게 아니다.

도움이 필요해 타인에게 손을 내민다는 건 자신의 불행을 공유하는 것이며, 그 손을 잡는다는 건 그 불행을 같이 짊어지는 것이다.

무턱대고 잡은 손으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고아원에 곡식을 기부했다가 고아가 생기는 걸 조장한다며 마을 사람에게 핍박을 받은 농부도 있었다.

만약 당사자가 귀족이었다면 어땠을까. 강력한 마법사였다면 어땠을까.

분명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 오히려 박수를 치며 그 선의를 찬양하느라 입을 바쁘게 놀렸을 것이다.

이렇듯 이 세상에선 선의를 베푸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하다.

그 불행을 전부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압도적인 힘.

세상의 기준은 언제나 같았다.

* * *

<어스 클로>

베르덴의 손에서 뻗어 나온 대지의 갈퀴가 코스타를 향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눈을 부릅뜬 모크넌이 다급하게 코스타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촤아아악!

얼굴과 가슴에 난 세 줄기의 상흔.

신체를 찢어발기기엔 약간 부족했으나 깊이는 충분했다. 분수처럼 확 핏물이 뿜어져 나오며 화장으로 얼룩진 얼굴을 적셨다.

"코, 코스타 님?!"

"포션! 당장 포션 가져와! 최상급으로!"

코스타의 호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곧장 응급처치를 받은 코스타였으나 떨어진 손이 다시 들리는 일은 없었다.

여지없는 즉사.

모크넌과 볼드런을 비롯한 호위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볼드런이 지팡이를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코스타 님께서 호의를 베푸셨는데 어째서!"

호의라.

로아프라의 상식으론 그랬겠지.

그러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에이든.

그리고 코스타의 마법 실험체 언급.

더군다나 코스타의 마법사들이 가진 욕망이 가득한 시선까지. 이들 하나하나가 베르덴의 과거를 자극하는 역린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친히 그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은 없다.

그런 호의를 베풀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오큘러스를 꺼내 들었다.

그때, 갈리아크가 말했다.

"어이 애셔, 도와줄까?"

"아니."

베르덴의 시선이 에이든과 샤를로트에 잠시 머물렀다.

"대신 셋을 부탁하지."

"좋아. 대신 보수로 나중에 밥 한번 사라."

갈리아크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당장 훼월을 시험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 이상으로 베르덴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분위기도 그렇고.'

갈리아크는 덩치에 맞지 않게 눈치가 매우 빨랐다.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이어 전신에서 흘러넘친 마력이 유형화되며 주위를 장악했다. 그와 동시에 레스토랑의 모든 문이 일시에 닫혔다.

누구도 허락 없이 나갈 수 없다는 뜻. 그 의미에 모크넌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너 설마 우리를...!"

대화는 없다.

<연쇄번개>

천둥이 메아리쳤다.

* * *

화염 마법사 볼드런 그리고 스커지(Scourge) 모크넌.

둘은 수년간 코스타의 무력을 담당하던 자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모크넌은 나름 악명을 떨치던 왕국의 도적이었다.

결국 에스퍼렌사 후작가에게 덜미를 잡혀 부하들을 전부 잃고 로아프라로 도주했으나 이게 웬걸, 그야말로 모크넌에게 걸맞은 화려한 지하 도시가 있었다.

바깥에서의 악명은 로아프라에선 명성.

그렇게 코스타의 제의를 받고 로아프라의 권력자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약자를 마음대로 범하고 괴롭히고 죽이는 나날은 어떤 마약보다도 중독적이었다.

물론 로아프라의 작은 영역 싸움에 손을 거들어야 하는 터라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없었다.

모크넌의 금속 가시 채찍은 스친다 해도 곧 큰 출혈로 이어진다. 때로는 마비독이나 뱀독을 곁들여 맹독 채찍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적대자들은 선뜻 칼날을 들이밀지 못했었다.

지금까지는.

"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전열의 호위를 불태운 번개가 연쇄적으로 달려 나온다.

맨몸으로 막아 낼 수 없는 마법이다. 판단을 내린 모크넌이 곧장 마법사들의 뒤로 내달렸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쳐 쫓아오는 번개를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석벽>

전격 계열과 반대되는 대지의 벽이 연달아 솟아올랐다.

이거라면 비교적 물리력이 약한 전격 계열은 능히 막을 수가 있을 터. 그 틈에 다른 마법을 준비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란 듯이 어긋났다.

콰아아아앙!

번개에 부딪친 석벽들이 단숨에 박살 났다.

메이벨의 귀걸이와 뇌익의 아뮬렛으로 강화된 위력과 범위. 여러 겹으로 중첩되었다고 할지언정 2위계의 마법 따위로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벽을 부순 번개가 마법사들에게 향했다.

곧장 마력방벽을 펼쳐 추가타를 막아 냈다. 다행히 위력이 약해져 있는 터라 죽는 일은 없었으나 마력방벽이 깨지고 말았다.

"크윽...!"

곧바로 찾아오는 마력회로의 부담에 마법사들이 경직되었다.

베르덴은 가볍게 오큘러스를 휘둘렀다.

벼락을 머금은 바람의 칼날들이 쏘아졌다.

부담을 이겨 내지 못한 마법사들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마법이 몸을 관통하자 그대로 몸이 두 동강 나 버렸다.

단면이 열에 타 버린 터라 장기와 피로 바닥을 흠뻑 적시는 일은 없었다.

스치듯 허리를 숙여 마법을 피해 낸 모크넌.

그 뒤에 멀찍이 자리 잡은 볼드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간, 시간을 벌어라, 모크넌!"

말을 마치자마자 볼드런이 마법을 준비했다.

대놓고 희생을 강요하다니. 모크넌은 어금니를 깨물었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달려들어라! 당장!"

"하, 하지만...."

"저희로선 도저히 다가갈 수가────"

퍼억!

모크넌의 채찍이 호위 한 명의 뒤통수를 터뜨렸다. 살기를 드러낸 모크넌이 다시금 소리쳤다.

"당장 뛰어!"

"예, 예!"

코스타의 호위들이 일제히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암석 파편, 시퍼런 벼락, 바람의 칼날에 시체가 양산되었다. 볼드런의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도왔으나 하나도 먹혀들지 않았다.

마치 괴물을 상대하는 듯한 기분.

'그래도 저놈 또한 인간이다...!'

저렇게 마법을 난발하다간 곧 지칠 터.

어째서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지 몰랐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호위들의 죽음을 방패로 삼으며 거리를 좁힌 모크넌이 기회를 엿보다 이내 힘껏 바닥을 박찼다.

그러곤 허공에서 팔을 휘둘렀다. 금속 채찍이 베르덴의 머리를 노리다 확 아래로 꺼지며 다리로 향했다.

'마법사의 인지 능력으로는 피하지 못할 게...?!'

베르덴이 가볍게 다리를 치워 채찍을 피해 냈다.

마치 궤도를 정확히 간파했다는 듯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속도였다.

바닥에 착지한 모크넌이 곧장 고개를 들어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파직.

모크넌과 베르덴 사이에 작은 번갯불이 튀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했으나 직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팔에 따끔한 감각이 들자마자 오른팔 전체에 푸른 전류가 번쩍였다.

"크윽?!"

채찍이 떨어졌다.

그을린 연기가 솟아오른 오른팔에 전혀 감각이 없었다. 아무리 마법의 숫자가 방대하다지만 전혀 들어 본 적도 없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즉결되지는 않는다.

모크넌이 남은 왼팔로 기다란 송곳을 꺼내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팔을 하나 잃었지만 거리는 충분히 좁혀졌다.

원거리에서 상대가 안 된다면 근접전으로 나가면 될 터.

모크넌이 기운을 송곳 끝에 집중했다.

<육체증폭>

"어?"

베르덴과 모크넌이 교차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오큘러스가 모크넌의 옆구리를 스쳤다. 손쉽게 그의 등 뒤로 이동한 베르덴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갑작스러운 무시에 모크넌이 눈썹을 씰룩였다.

"지금 무슨...."

쿵.

강력한 진동. 외부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느껴진 것이었다. 모크넌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방금 전 지팡이가 닿았던 부분에 뭔가 스며든 게 느껴졌다.

"아."

<분쇄>

퍼엉!

내부에 파고든 대지의 파편이 폭발했다.

간신히 형체만 남은 하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코스타의 호위.

태반 이상이 전멸당하고 남은 건 볼드런과 마법사들뿐이었다.

"하하하하하! 시간 잘 끌었다, 모크넌!"

볼드런이 웃었다.

그의 지팡이가 화염을 머금고 있었다.

"네놈을 코스타 님과 모크넌의 저승길 동무로 삼아 주마! 불타 죽어라!"

4위계 집중 마법.

<화염역──>

<뇌천>

볼드런의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

한 줄기 광선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정확히 타격 지점만을 불태우는 전격 마법.

마법사에게 있어 동력원이나 다름없는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볼드런이 무릎을 꿇었다.

"볼드런 님!"

"컥, 커억...!"

"마법사가 마법이 완성되기도 전에 부산하게 굴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베르덴의 냉소에도 볼드런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끌어모으긴커녕 숨쉬기조차 버거웠으니까. 맥없이 볼드런이 무력화당하자 남은 마법사들은 곧장 전의를 잃었다.

누군가는 뒷걸음질 쳤고, 누군가는 도망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으며, 누군가는 베르덴에게 목숨을 구걸하려 했다.

볼드런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도, 도대체 우리가 네놈에게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냐? 도대체 왜...?"

그걸 모르니까 죽는 거다.

속으로 대답한 베르덴이 순식간에 연산을 끝냈다.

오큘러스에 맺힌 벼락의 줄기가 날뛰며 창의 형상을 띠었다.

<단폭뢰>

번개의 창이 무리의 중심에 있는 볼드런에게 쏘아졌다.

천둥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푸른빛. 그 광활한 전격의 폭발이 레스토랑 내부를 집어삼켰다.

146화 빈테르트 (1)

섬광이 잦아든 자리.

벼락의 폭발에 휩쓸린 자들 중에 생존자는 없었다.

뤼잉 코스타.

얼굴과 가슴에 치명상을 입고 즉사.

스커지 모크넌.

내부에서 폭발한 대지 마법에 폭사.

화염 마법사 볼드런.

심장에 치명상을 입고 이어진 벼락의 폭발에 직격당해 감전사.

그 외의 코스타의 호위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전부 사망했다.

로아프라의 서쪽에서 군림하던 작은 권력자.

지금까지 수백 명의 노예를 여흥 삼아 죽이던 뤼잉 코스타가 단 한 마법사에 의해 인생의 막을 내렸다. 그것도 주력 호위들을 동반한 상태로 말이다.

"그, 그 코스타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코스타가 죽었고, 빛이 몇 번 번쩍이자 코스타의 호위들이 전멸했다.

일련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머리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샘웰은 그저 입을 뻐끔거리며 작금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에이든과 샤를로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도와 달라고 외쳤을 뿐이다. 비참하게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에이든이 내민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있었고, 그것으로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던 코스타가 죽었다. 남매가 당했던 것처럼 한없이 무력하게.

둘은 눈물 자국을 지울 여유도 없었다.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선망과 존경 그리고 감사 등 갖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눈빛. 그 시선의 끝에는 오직 잿빛 머리의 마법사만이 담겨 있었다.

저벅.

그러던 중 한 그림자가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도살자 갈리아크.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레스토랑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다.

기껏해야 바닥이 조금 부서지고 그을린 자국만 꽤 남아 있는 정도. 마법이 가진 위력을 생각해 보면 괴리가 있는 광경이었다.

'설마....'

사람들은 마법 위계가 상승할수록 더욱 화려할 거라고 생각한다.

마법사 대부분이 분포하고 있는 1위계부터 4위계까지는 그러한 양상을 띠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상식이다.

원소 마법은 볼거리 따위가 아니다.

그 본질은 파괴에 있다. 불필요한 파괴를 축소하고 살상력, 그러니까 마법사의 목적성에 치중되었다는 건, 보다 본질에 더욱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힘의 집중.

일격에 건물을 부수는 검사가 그 위력을 한 점에 담는 것과 결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즉.

"이 새끼, 5위계였군."

베르덴은 부정하지 않았다.

"허."

긍정이 담긴 침묵에 갈리아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이 새끼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5위계란 재능 있는 마법사들이 수십 년을 노력해야 다다르는 경지다.

그런데 그걸 저 나이에 이룩하다니. 놀라운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타 마법사와 달리 한 원소에 치중된 게 아니라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속성이 5위계에 다다른 게 분명했다.

심지어 모크넌과 근접했을 때의 움직임은 마법사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부여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했을 터. 그것도 3위계 수준의 강화가 아니었으니... 부여 마법 또한 4위계 혹은 5위계에 다다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모험가로 치면 미스릴 등급 마법사에 위치한 강자.

'아니, 그 이상.'

말 그대로 미친놈이다.

만약 저 성장 속도가 계속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세상의 판도가 흔들릴 것이다. 절대적인 강자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은 갈리아크가 목표로 하는 강함이기도 했다.

'그레이에 대해 알려 주길 잘했군.'

갈리아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동반자 혹은 이정표가 될 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말이다.

뭐, 생각은 이쯤 하고.

"어이, 천재 마법사.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코스타는 죽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놈은 빈테르트와 연줄이 있었으니까.

'로아프라의 지배 세력이 좌시할 일은 아마 없겠지.'

베르덴은 여기에서의 일을 로아프라 바깥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내고 간다."

"어떤 식으로?"

이미 생각해 둔 바는 있었다.

베르덴이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갈리아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해결책이냐? X발, 너는 앞으로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하지 마라."

"그래서. 반대인 건가?"

갈리아크가 씨익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오히려 기대가 되는데. 뭐, 그건 그렇고. 쟤들은 어쩔 거지?"

갈리아크가 뒤를 가리켰다.

아직도 베르덴을 바라보고 있는 에이든과 샤를로트가 있었다.

"데려가야지."

그들이 내민 손을 베르덴이 잡았다.

단순한 연민은 아니었다. 그저 불쌍하다고 도와야 한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돕는 게 마땅하다. 그건 신조차 불가능한 오만하고 뒤틀린 선심(善心)이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베르덴은 선인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과거와 겹쳐 보였기에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

'하지만 이대로 로아프라에 버리고 갈 생각은 없다.'

대가 없는 선의에도 책임은 있다.

잡은 손을 뿌리치는 건 저 둘에게 더욱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절망을 이해하는 베르덴이기에 짐작할 수 있는 미래였다.

"흠, 그렇다면...."

갈리아크가 턱을 쓸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지 사악하게 웃었다.

"야, 빈테르트한테 직접 찾아갈 건 아니지?"

"가지 않아도 저쪽에서 오겠지."

빈테르트의 눈과 귀는 로아프라 곳곳에 있다고 하니.

코스타가 죽었다는 소식은 곧 놈들의 귀에 들어갈 거다.

"그럼 우리가 코스타의 영역을 먹자."

"...?"

"레스토랑에서 죽치고 기다릴 순 없잖냐. 걔들이 찾아오기 쉽게 위치라도 알려 줘야지. 겸사겸사 너나 나나 경매장에서 쓴 돈도 보충하고."

갈리아크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지금의 상황은 베르덴이 저지른 결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더 일을 크게 벌이는 건....

'나쁜 생각은 아니군.'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코스타의 영역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냐는 게 문제인데.

"아."

베르덴이 고개를 돌렸다.

안내인 샘웰.

로아프라에 빠삭한 그가 딸꾹질을 했다.

* * *

모크넌의 창고.

코스타의 자택과 이어진 장소 중 하나인 이곳에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땄다! 내가 땄다아아아!"

코스타의 부하들이 원형 테이블에 모여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승패에 따라 구겨진 지폐들이 이리저리 옮겨 갔다. 방금 한 판으로 가져온 돈을 몽땅 잃은 오릭이 신경질적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X발, 이게 뭔... 야! 너 카드 몰래 숨겨 놓고 있던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10판을 내리 질 수가 있냐고!"

"운이 안 좋은 거 아니야? 뭣하면 네가 섞든가. 아, 물론 그 전에 돈을 더 가져온다면 말이지."

낄낄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작게 입술을 짓씹은 오릭이 술을 통째로 들이켰다. 이거라도 마셔야 조금이나마 손해를 메꿀 수 있을 테니까.

쿵쿵.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응? 누구지?"

"모크넌 님이 돌아오신 거 아니야? 아까 보니까 노예 남매 데리고 어디 가시던데. 부하들 시켜서 노예를 다시 보관하러 오신 거겠지."

"아, 몇 주 전에 사 온 거? 멀리서 보니까 여자는 꽤 봐 줄 만하던데. 우리한테 언제쯤 던져 주시려나."

"너는 좀 닥치고. 야, 우리 노느라 바쁘니까 네가 나가 봐. 혹시 모크넌 님이면 신호 보내고."

도박 판에서 탈락한 건 오릭뿐.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출입구에 다가가다가 바닥에 떨어진 지폐 한 장을 봤다. 아마 게임 도중에 바람에 날려 간 게 분명했다.

"오."

지폐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하고 약 냄새로 진동하는구만. 야, 샘웰하고 꼬맹이. 여기가 확실하지?"

"네, 네, 그렇습니다."

"맞아요!"

"그래, 그럼...."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콰아아앙!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입구가 폭발했다. 반쯤 구겨진 육중한 철문이 도박 테이블을 덮쳤다.

예기치 않는 사고에 그대로 휩쓸린 부하들은 죄다 신체 일부가 꺾인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 창고.

고개를 뒤로 향한 채 눈을 깜빡이던 오릭이 앞을 바라봤다.

철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도끼를 든 거한이 있었다.

오릭이 목소리를 흘렸다.

"누구...?"

"누군진 알 거 없고."

콱.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이 오릭의 목을 움켜잡았다.

"전리품 가지러 왔다."

콰직.

* * *

빈테르트에서 도박 및 투자 계열을 전담하는 수장, 로베르트.

어깨까지 내려온 흑발, 새하얀 얼굴.

암흑가와 어울리지 않게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자리에서 빈테르트의 자금을 관리했다.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손에 익힌 특유의 필체로만 문서들을 작성했다.

그만큼 일의 부담이 가중되나 신뢰성은 아득하게 높아진다.

로베르트가 수장의 자리에 올라선 뒤로 그녀의 권위는 약해지긴커녕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막대한 성과에 따른 보상.

로베르트는 암흑가의 왕에게 다른 계열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빈테르트 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철컥.

누군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 상태가 몇 초간 지속되자 입구에 도사리고 있던 함정들이 자연스레 해제되었다. 조직 내에서도 일부만이 알고 있는 로베르트의 규칙이었다.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발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경매는 잘 끝났나요, 가일?"

"그렇습니다만, 도중에 소란이 있긴 했습니다."

"어떤 소란이죠?"

로베르트가 물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알아야 한다. 그 하나가 투자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기에.

"경비 계열의 간부, 록키와 로바트가 방을 부쉈습니다."

"이유는요?"

"낙찰에 연달아 실패하는 바람에 록키에게 줄 생일 선물을 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거 안타깝네요."

로베르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가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녀는 할 일을 이어 가며 말했다.

"다음 회의에 그 두 명의 징계에 대한 안건도 넣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경매장의 장부입니다."

가일이 품속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그 안에는 경매의 모든 진행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곧장 책장을 연 로베르트의 손과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고, 그에 따라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로베르트의 회색 눈동자가 어떤 지점에 멈춰 섰다.

"...예상보다 액수가 많네요."

"경쟁이 치열해 물건의 기댓값을 넘은 게 평소보다 많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출품된 아티팩트는 시작가의 두 배가 넘는 100억 엘크에 낙찰되었습니다."

장부에는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경쟁 입찰도 없이 바로 100억이라... 신원은 파악했나요?"

"죄송합니다."

빈테르트는 경매의 주최자.

익명 여부와 무관하게 누가 돈을 맡기고 구입했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니.

'어쩌면 해외의 권력자가 참가한 걸지도 모르겠네.'

뭐, 로베르트로서는 이익이 극대화되었으니 좋은 일이다.

아티팩트가 어디에 사용되건 그녀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다시금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경매장 외로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거죠?"

"뤼잉 코스타가 사망했습니다."

우뚝.

로베르트가 손을 멈췄다.

"영역 싸움이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요."

"영역과 관련된 게 아닙니다. 흉수는 경매장에 참가했던 외부인, 현재 바깥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인 애셔라고 합니다."

"애셔라면...."

최근 이름을 날리고 있는 4위계 전격 마법사.

로베르트가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베켄의 사생아 다이엘과 관련된 건가요?"

"그렇긴 하지만 코스타의 행적을 보면 사생아의 복수가 아니라 역으로 애셔를 회유하려 한 것 같습니다. 주력 호위들을 대동하고 영역 바깥까지 나온 걸 보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화 도중 결렬. 애셔가 코스타 일당을 전멸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현재 그의 위치는요?"

"코스타의 영역으로 향했습니다. 거기다 셋 이외에 일행에 두 명이 합류했는데, 코스타가 최근 매입한 노예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예 관련해서 마찰을 빚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예로 인한 마찰.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로아프라에 좀만 더 깊게 들어가면 노예는 여전히 존재하니까. 노예제가 폐지된 바깥과 괴리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혹자는 정의감을 불태워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한 일도 있었다.

물론 죄다 음식에 섞인 독을 먹고 죽거나 숫자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 뒷골목에서 쓸쓸히 죽어 갔지만.

어쩌면 애셔라는 마법사는 그런 부류의, 정의로운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로아프라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코스타의 영역으로 찾아갔다라.'

로베르트는 그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접촉하길 기다리는 거네요. 로아프라 내의 문제를 바깥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거겠죠."

응하지 않을 이윤 없다.

왜냐하면 애셔는 현재 빈테르트, 정확히 말해 로아프라의 정점이 관심을 두고 있는 '특별한 마법사'였으니까.

"당연히 폐하께 보고는 하셨겠죠?"

폐하.

그건 에스티리아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가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암흑가의 왕께서 말씀하시길, 평소대로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평소대로라...."

간단한 일이다.

로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비 계열 수장, 드레이큰(Draken)을 호출하세요. 제가 직접 만나러 갈 테니."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147화 빈테르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