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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

패드렐드가 환영했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손님들. 많이 조급하셨나 봅니다?"

밀수꾼의 협곡을 관리하는 주인이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손님 중 애꾸눈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자들은 어디에 있소?"

"당연히 잡아 놓았죠. 하지만 워낙 저항이 거셌던 터라 저희 쪽도 세 명이 죽고 다섯 명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위로금 명목으로 홀로든의 소지품과 마차는 제가 챙겼는데, 괜찮으시겠죠?"

순간 주위가 싸늘해졌다.

양날 검을 지닌 남자, 케딘이 눈을 부라렸다.

"그런 건 거래 내용에 없었을 텐데?"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었죠."

"...지금 말장난하자는 건가?"

"장난?"

패드렐드가 장갑을 당겼다.

장갑의 가죽이 손에 밀착되었다.

"저는 두 사람의 위치 정보와 신변을 판매했지, 재물의 소유권까지 거래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다 가져가도 상관없지만 업계의 도리로 특별히 메랄드의 것은 건들지 않았습니다."

"...."

"뭐, 일종의 양보죠. 그런데 감사하다고 하지는 못할지언정.... 이거 참,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고개를 기울인 패드렐드.

그의 곁에 있던 밀수꾼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긴장감. 몇몇 손님들이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값비싼 광석 탐지기는 제가 챙겼는데, 괜찮으시겠죠?"

반발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가 볼까요? 안 그래도 요즘 불법 이민을 희망하시는 고객이 많은 터라 바빠서 말입니다."

애꾸눈과 케딘을 포함한 손님들이 패드렐드를 따라 어떤 동굴로 들어갔다.

벽 한가운데에는 녹슨 철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끼기기긱. 잠금장치를 풀고, 문고리를 당기자 고약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패드렐드가 안으로 횃불을 휙 던졌다.

그 불빛에 피투성이로 속박당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폴드 남자의 기사, 메랄드.

땅거미 상회의 간부, 홀로든.

둘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얼굴 곳곳이 부어올랐으며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벽과 연결되어 있는 쇠사슬이 팔목과 발목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패드렐드가 턱짓했다.

밀수꾼이 메랄드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앉았군요. 잠자리가 많이 불편하셨나 봅니다?"

"이... X새... 끼...."

메랄드가 침을 뱉었다.

그러나 힘이 없었던 터라 메랄드에게 닿기는커녕 제 바지에 떨어졌다.

낄낄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방 안에 감돌았다.

그 소란에 기절해 있던 홀로든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살기 어린 시선들이 그에게 모였다.

홀로든이 신음하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미, 밀매상이... 고객을 팔아넘겨? 그렇게 되면 앞으로 장사는 못 할 텐데...!"

"이런, 그런 몰골임에도 저를 걱정해 주실 줄이야."

패드렐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렇습니다. 고객을 제멋대로 팔아넘기는, 신뢰라곤 쥐뿔도 없는 밀매상을 누가 찾겠습니까? 그런데 저 암흑가 출신 기사는 몰라도, 상회의 간부쯤 되면 이유를 잘 아실 텐데요?"

조합은 한마디로 외래종이다.

왕국에 구축된 뭍밑 생태계를 뒤엎은 천적.

주도면밀한 세력 확장에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간판이 사라진 상회가 한둘이 아니다.

그 외는 더더욱 많고.

원한은 점차 커지고 있었으나 조합의 힘이 강했기에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급습에 플리쉬르 백작의 부정이 밝혀지면서 판이 뒤집힌 것이다.

조합과 그에 관련된 귀족은 3왕자의 세력.

그의 경쟁자인 2왕자와 1왕자까지 편승해 조합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일개 개인들이 조합에게 거역할 정도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 살아남자고 조합에서 도망친 자들은 아니었다.

손을 댄다고 해도 제지할 사람도, 놈들을 지켜 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패드렐드가 양 검지손가락으로 둘을 가리켰다.

"땅거미 상회의 간부, 홀로든. 그리고 나폴드 남작의 기사, 메랄드. 둘 다 이제는 도망자 신세이니 전 간부나 전 기사라고 불러야 되겠죠. 뭐, 어쨌든 그런 이유로 당신들은 예외입니다."

패드렐드가 손님들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럼 일 보시죠. 저는 구경만 하겠습니다."

"메랄드의 소지품은 건들지 않았겠지?"

"검만 압수했습니다."

"정말로?"

"아까 했던 말 또 해 드립니까?"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패드렐드가 밀수꾼들과 함께 구석으로 비켜서자, 케딘이 홀로든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 좋구만, 홀로든. 바닥에 엎드려서 네놈에게 머리를 짓밟힌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때는 그렇게 커 보였는데 이제 보니 그냥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상인이었군."

"케, 케딘... 잠깐...."

복부를 후려친 주먹.

쇠사슬이 철렁이며 홀로든의 고개가 앞으로 기울었고, 케딘이 그의 무릎을 지그시 밟았다.

"이런 기분이었군. 아주 좋아."

"끄으으으윽...!"

고통스러운 신음.

홀로든이 숨을 토해 내며 소리쳤다.

"살려... 살려 주게...! 워, 원하는 만큼 돈을 줄 테니, 제발!"

"상회에서 도망쳐 놓고 돈은 무슨."

케딘이 뒤를 향해 눈짓했다.

조합 또는 홀로든에게 갚을 게 있는, 그리고 재미 삼아 나선 손님들이 홀로든을 둘러쌌다.

무자비한 폭력.

이미 패드렐드에게 털리고 몸밖에 남지 않은 홀로든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온몸이 터지고 뼈가 조각난 시체 하나가 완성되었다.

다음은 메랄드 차례였다.

쌍단검을 쥔 애꾸눈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오랜만이다, 메랄드. 기사치곤 예나 지금이나 볼품없는 건 여전하군."

"네놈은...."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나? 5년 전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네가 파 버린 건데 말이야."

그가 굳게 닫혀 있는 왼쪽 눈을 가리켰다.

"그건 그렇고. 요즘 소문을 들어 보니 웬 기사 하나가 남작의 가보를 훔쳐 도주했다고 하던데."

"...."

"허 참, 누가 암흑가 출신 아니랄까 봐 지가 모시던 주인에게까지 손버릇이 나빠서야."

애꾸눈이 단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래서 그 목걸이는 어디에 있지, 메랄드?"

"혼자서는 덤비지도 못하는 버러지 새끼가...!"

메랄드의 욕설에도 애꾸눈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여기서 누가 죽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군."

고문에 가까운 심문이 이어졌다.

얼마 안 가 메랄드의 입이 열렸고, 애꾸눈은 그의 품속에서 목걸이를 발견했다.

"영롱해...!"

눈에 비친 푸른빛.

이거 하나만으로도 수억대 돈을 쥘 수 있다.

물론 방해자들은 있다.

케딘을 비롯한 손님들이다.

'패드렐드와 그 밀수꾼들은 관여하지 않을 테니... 놈들만 처리하면 온전히 가질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는 순간.

"...?"

갑자기 목걸이가 떠오르더니 빠르게 움직였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연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 * *

여기는 협곡의 가장 깊은 곳.

워낙 폐쇄적인 장소인 데다가 도처에 밀수꾼들이 깔려 있기에 침입자가 들어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투명화를 해제한 베르덴.

그가 손에 놓은 목걸이를 훑듯이 바라봤다.

'이게 그 가보군.'

블루 다이아몬드 네클리스.

목걸이의 황금 체인에는 남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확실한 진품.

이걸로 의뢰의 3분의 1은 달성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밀매상이 가지고 있겠고.'

이야기는 전부 엿들었다.

베르덴이 패드렐드를 직시했다.

"홀로든의 소지품은 어디에 있지?"

태연한 물음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뭐가 어째?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줄곧 여유로웠던 패드렐드의 얼굴도 어느샌가 굳어 있었다.

눈앞에서 목걸이를 빼앗긴 애꾸눈.

그가 단검 손잡이로 이마를 벅벅 긁으며 핏대를 세웠다.

"소지품이고 뭐고 당장 그 목걸이...."

"자, 잠깐."

케딘이 말을 막았다.

그의 얼굴은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언뜻 패드렐드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애꾸눈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녹색 로브에 그 스태프... 설마...."

끝말은 패드렐드가 대신했다.

"애셔?"

애셔.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이름.

떠도는 소문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데다가, 칼리아를 끌어들인 장본인. 지금 이 자리를 만든 것 또한 그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매우 컸다.

"애셔? 그게 누군데?"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물론 아직 모두가 알 정도는 아니었다.

정보에 민감한 자라면 들었을 법한 정도. 그 소란 속에서 패드렐드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애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허락도 없이 제 협곡에 무슨 볼일이신지?"

"찾고 있는 물건이 있다."

"물건이라...."

패드렐드가 턱을 쓸었다.

그가 손에 넣은 남작의 목걸이, 찾고 있는 홀로든의 소지품... 아마 광석 탐지기를 말하는 거겠지.

그 교차점에 위치한 건 한 명밖에 없었다.

'암상인.'

낭패다.

설마 그자가 정보를 손에 넣었을 줄이야.

'빌어먹을 그레이의 정보상들.'

귀가 수백 개는 있는 건가?

조심한다고 했는데 대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저 불청객을 죽여야 할까 아니면 협조해야 할까.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무턱대고 건드렸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 깊이 고민하고 있자 손님들이 움직였다.

"X발, 애셔고 나발이고 저 새끼가 뭔데 목걸이를 가져가? 안 그래?"

"됐고. 그냥 죽이고 가져오면 되는 거 아냐? 보아하니 손님도 아니고, 밀매상 몰래 들어온 거 같은데."

들리게 말했음에도 패드렐드는 별말이 없었다. 암묵적인 허락.

누군가는 검과 도끼를 들었고, 누군가는 마력을 일으켰다.

애꾸눈도 눈치를 보다 단검을 세웠다. 뭔가 꺼림칙하긴 한데 눈앞의 목걸이를 허무하게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케딘을 제외한 손님들이 탐욕스러운 살기를 드러내며 베르덴에게 육박했다.

'총 일곱인가.'

그의 손에 마력이 집결했다.

한 줄기 푸른 전류가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확 퍼지며 공간을 휘감았다.

제각기 마법을 형성하고 있던 2위계 그리고 3위계 하위 마법사가 눈을 부릅떴다.

"여, 열뢰?!"

합성 마법.

숙련된 마법사라고 해도 연산에 최소 분 단위는 걸리며 머리가 비상한 자라고 해도 수십 초는 걸린다.

하물며 저건 전격 계열과 화염 계열의 4위계 마법으로 합성된 고난도 마법이다.

그런데 그걸 몇 초 만에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다니.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직감했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으나 이미 늦었다.

지면에 내리꽂힌 벼락.

붉은 번개 줄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오며 적을 불태웠다.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을 시간도 없었다.

애초에 이렇다 할 실력자도 아닌 그들은 저항조차 못 하고 산화했다.

물론 베르덴은 열뢰의 범위를 정확히 조절했다.

그 결과 생존자는 패드렐드과 그 밀수꾼들 그리고 케딘뿐이었다.

단 한 번의 마법.

그러나 이 공간을 장악하기엔 충분했다.

"...."

패드렐드는 볼 안쪽을 짓씹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따위에게 거래를 방해당한 것도 모자라, 제집에서 목숨의 위협까지 받다니.

그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주먹을 쥔 패드렐드가 앞으로 나섰다.

설마 그 마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건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케딘과 밀수꾼들이 감탄했다.

태연히 몸에 묻은 재를 턴 패드렐드.

잠시 베르덴과 눈을 마주한 그가 이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제 협곡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애셔 님."

불청객이 거슬리면 환영하면 그만.

패드렐드가 활짝 웃으며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다.

127화 경매장 목록

베르덴이 패드렐드를 따라 그의 창고로 향했다.

도중에 수십 명의 밀수꾼을 지나쳤으나 함정이나 습격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는 느껴졌지만 밀매상이 같이 있는 걸 보더니 전부 제 갈 길을 갔다.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이윽고 반원 형태의 문 앞에 도착했다.

"찾으시는 물건은 여기에 있습니다."

패드렐드가 네 개의 열쇠를 꺼내더니, 순서대로 열쇠 구멍에 꽂아 넣었다.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하는 잠금 장치. 별다른 마법적 보호를 받는 건 아닌 모양이나, 강철보다 단단한 금속에다가 두께가 상당한 게 물리적으론 파괴하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대규모로 지형 조작이 가능한 베르덴에겐 아니었지만.

패드렐드를 따라 창고로 들어섰다.

주위에 산적한 잡동사니들. 그 중심에 먼지가 거의 쌓여 있지 않은 마차가 있었다.

"이게 홀로든의 마차인가?"

"그렇습니다. 대충 확인만 하고 내용물은 아직 옮기지 않았죠. 그리고 광석 탐지기는 마차 뒤에 있는 궤짝에 들어 있습니다."

패드렐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밀매상답게 눈치가 빨랐다.

마력감지를 펼쳐서 확인해 보니 마차 주변에 별다른 함정은 없었다.

"메랄드의 검은 어디에 있지?"

"검이요? 그거야 저기 안쪽에 던져 놨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베르덴은 패드렐드의 손님. 당연히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잠시 기다리시죠.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밀매상이 창고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동안 베르덴은 궤짝을 확인했다.

입방체 형태의 광석 탐지기.

'나름 유명한 마법 물품이라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가볍게 버튼을 누르자 입방체에서 미세한 마력의 광선이 주변을 조사(照射)했다.

이런 식으로 주변 지형을 분석해 광석의 분포도를 확인하는 모양.

'그나저나, 공간가방에 들어갈 크기는 아니군.'

말에 실을 무게도 아니다.

지형을 띄워 옮길 수는 있지만... 상당히 번거롭겠지.

쉽게 가려면 마차가 필요하다.

그리고 마침 홀로든의 마차가 눈앞에 있었다. 그 안에는 밀봉된 나무 상자가 가득했는데, 끝자락에 있는 상자가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밀수꾼이 확인한 건가?'

슬쩍 확인해 보자, 새하얀 가루가 담긴 봉지들이 보였다.

"이건...."

"여기 가져왔습니다."

패드렐드가 메랄드의 검을 가져왔다. 베르덴이 상자에서 시선을 떼었다.

검을 받고 날을 확인했다. 사실 눈으로 봐선 이게 다마스 강철이 2할가량 들어간, 메랄드의 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피 냄새는 남아 있다.

메랄드를 제압하는 도중에 패드렐드의 부하가 죽거나 다쳤다고 했으니 그때 묻은 거겠지.

더군다나 가짜 검을 내줄 이유도 없으니 진짜일 터.

베르덴이 검을 공간가방에 수납했다.

"이제 용건은 다...."

"저 상자 안에 있는 것, 혹시 마약인가?"

"아, 예. 맞습니다. 홀로든이 가져온 건데, 몸을 나른하게 해 주는 효과로, 주로 진통제로 쓰이는 겁니다."

망명하는데 굳이 마약을 챙긴다고?

그렇게 묻자 패드렐드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현재 미들로스 자치령에 아인종이 들끓고 있어서, 교회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상자가 많다더군요. 그래서 요즘 자치령에서 저 마약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당연히 값도 올라갔다.

"홀로든은 자치령에서 마약 장사를 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도망가는 도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상회 출신답긴 하군요. 뭐, 지금은 죽었지만."

패드렐드가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용건이 없으시다면 바깥으로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저도 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이 마차, 내가 가져가도 되나?"

마약은 필요 없다.

베르덴은 도적이 아닌 데다가 마약상도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런 잡범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차만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부하들을 불러 짐을 내려 드리죠."

"그건 내가 하지."

<염동력>

베르덴이 손짓하자 마약이 담긴 상자들이 바깥으로 차곡차곡 옮겨졌다.

순식간에 마차 안이 텅 비어 버렸다.

이제 아세른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패드렐드는 베르덴이 떠난다는 사실에 아주 기뻐....

"그리고 말 한 필도 줬으면 좋겠는데."

마차가 꽤 커서 최소 두 마리는 필요해 보이니까.

베르덴의 요구에 패드렐드가 미소 지었다. 등 뒤로 숨긴 주먹을 꽉 쥐면서.

"바로 준비해 드리죠."

손놈, 아니 손님.

* * *

베르덴이 무사히 의뢰 품목들을 전달했다.

클란드는 그 자리에서 목걸이와 탐지기가 진품인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메랄드의 검은 슬쩍 보고는 구석에 던졌고.

이내 클란드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네, 애셔. 아주 제대로 가져왔군."

"보수는 어디 있습니까?"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다 준비해 두었네."

클란드가 보수를 건넸다.

하나는 4억 엘크 상당의 현금 다발이 담긴 가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봉투 안에 담긴 경매장의 목록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 줄 테니 경매장의 목록은 여기서 확인해 주게. 혹여 다른 자들의 귀에 들어가면 매우 매우 곤란해지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좋아. 다 보고 나면 문을 두들겨 주게."

클란드가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베르덴이 봉투를 집었다.

'암흑가 경매장에는 어떤 물건들이 나올까.'

내심 기대감을 품으며 천천히 봉투의 봉인을 뜯어 냈다.

* * *

암흑가 경매장에 올라오는 상품들의 가치는 평균 억 단위.

운 좋게 초청권을 구한다 해도 원하는 물건을 구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돈이 많다고 해도 다른 참가자들과 경쟁을 해서 이겨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잘못하면 본래 기댓값보다도 훨씬 비싸게 물건을 사게 되는 일도 허다하다.

클란드가 준 목록에는 각종 상품들과 그 내력 그리고 상품의 시작가와 기댓값에 대해 적혀 있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군.'

마탑의 마법사라 해도 눈독을 들일 정도로 희귀한 마법 물품이 다수 존재한다.

당연히 일반적인 것들과는 자릿수가 다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아티팩트 [마녀의 가시 왕관].

오로지 여성만 착용이 가능하며, 착용 시 마력이 변질되어 일시적으로 특수한 마력 형질을 갖게 된다.

효과는 마법사별로 천차만별.

다만 부작용도 존재한다.

장시간 착용 시 서서히 이지(理智)를 상실하며 변질된 마력회로가 뒤틀려 끝내 폭주해 사망한다. 남자가 착용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라고 적혀 있다.

'상당히 위험한 아티팩트군.'

어쨌든 아티팩트는 아티팩트다.

시작가는 무려 45억 엘크, 기댓값은 78억 엘크로 경매장 내 최고가.

최고위 귀족이거나 왕족 수준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가격이었다.

'내가 살 건 아니니 알 바는 아니지만.'

다시 목록을 읽어 내려갔다.

기준은 어디까지나 베르덴에게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

유혹을 견뎌 내고 추리고 추렸다.

"...이 정도면 되겠군."

고민 끝에 선택한 건 총 세 가지.

첫째, [메이벨의 귀걸이].

효과는 원소 마법 범위 향상(중상) 그리고 일체화로, 총 두 가지다.

한마디로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마법 물품이라는 뜻이다.

'심플한 효과지만 그렇기에 강력하다.'

중상급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등급이다.

더군다나 범위가 확장된다는 건 광범위한 마법에 특화, 즉 베르덴의 장점을 더 강화할 수 있다는 뜻.

마력 소비량이 더 늘긴 하겠으나 신경 쓸 거리도 되지 못했다.

시작가는 5억 엘크, 기댓값은 8억 엘크.

그리고 두 번째, [뇌익의 아뮬렛].

전격 계열 마법을 전반적으로 강화하는 부적. 다른 액세서리에 장착하는 것으로 활성화된다.

당연히 마법서 수준만큼은 아니나 고위 속성과 연관된 마법 물품이기에 가치가 상당하다.

시작가는 8억 엘크, 기댓값은 12억 엘크.

마지막으로 세 번째.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중력 마법 서적 세트].

상권과 하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자에는 이론, 후자에는 실질적인 위계 마법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전격 계열이 생명체에게 절대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고위 속성이라면, 중력 계열은 물리력에 특화된 고위 속성.

원소 마법이 주류인 보헤미른 마탑과 별로 연관이 있는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그 범용성은 전격 계열 마법 이상이니까.'

다만 문제는 이거다.

중력 계열 마법을 깨우칠 수 있을지, 없을지.

고위 속성에 적합한 마력회로를 가진 자도 드문데, 고위 속성 두 가지를 다룬다는 건 당연하게도 그 이상이다.

그러나 베르덴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상식적인 한계는 어디까지나 다른 마법사에게나 통용될 뿐.

역천을 이룬 베르덴에게 한계란 없었다.

베르덴이 [중력 마법 서적 세트]의 가격을 봤다.

시작가는 12억 엘크, 기댓값은 18억 엘크.

생각보다 가격이 높지는 않은데 이건 이유가 있었다.

고위 속성이라고 해도 배울 수 있는 자가 소수니 쓸데가 별로 없는 게 이유.

기껏해야 수집품이나 관상용으로 끝나겠지. 그래서 천문학적으로 가격이 높지 않은 것이다.

거기다 세상에 중력 마법 서적이 저것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위 세 가지 물건을 손에 넣으려면 최소 25억 엘크.'

기댓값으로 치면 38억 엘크는 있어야 한다.

아주 안전하게 입찰을 하려면 45억 엘크 정도는 필요하겠지.

그런데 돈이 부족하다.

유물 탐사단에게 줄 보수를 제외한다면, 당장 가용할 수 있는 현금은 약 8억 엘크. 최대한 끌어모은다 해도 역부족이다.

'다른 건 몰라도 중력 마법 서적은 손에 넣어야 하는데.'

경매장까지 남은 기간은 약 50일 정도.

그 안에 최대한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적어도 18억... 아니, 20억 엘크는.

똑똑.

베르덴이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클란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 예상보다 일찍 불렀군. 고민하느라 날밤을 샐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뭘 노릴지 정한 모양이군."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클란드에게 경매장 목록을 건넸다.

"이 자리에서 태워 주게. 그게 가장 확실하니까 말이야."

"그러죠."

화르륵.

손끝에서 흘러나온 불꽃이 목록을 완전히 태워 버렸다. 어차피 목록 안에 있는 건 전부 외웠으니 상관없었다.

"그럼 잘 가게. 부디 원하는 걸 얻었으면 좋겠군."

클란드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을 나섰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베르덴은 어두워진 밤거리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여유만 있다면 언젠간 필요한 돈을 전부 마련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쉬운 일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도 어렵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손 놓을 생각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곧 목표로 나아가는 길이니까.

결심한 베르덴.

그의 눈빛에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 * *

베르덴은 악착같이 움직였다.

지난 시간 동안 처리한 의뢰만 십수 개. 벌어들인 수익도 시간 대비 압도적이었다. 그가 이룬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피곤이 몰려옴에도 훈련을 게을리하긴커녕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다.

성장에 있어서 아주 미세한 발걸음.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언젠가 중요한 한 걸음이 되는 법이다.

베르덴은 그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 감각은....'

마력회로를 관조했다.

마탑의 동력원 앞에서 잠시나마 경험한 5위계의 격.

지금 그때의 감각이 어렴풋이 느껴지고 있었다. 완전하지 않으나 흐릿하게 보이던 벽이 분명하게 보였다.

이제 고작 한 걸음.

지금까지처럼 훈련을 지속한다면 아무리 늦어도 두 달 이내에 다다를 수 있다. 아니면 그에 필적하는 어떠한 계기가 있거나.

뭐가 됐든 머지않아 4위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베르덴은 확신했다.

너무도 순조롭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페르네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의, 의뢰가 없는데요...?"

...의뢰가 부족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잘한 의뢰는 충분히 있지만 베르덴의 구미가 당길 정도인, 고액의 의뢰는 거의 씨가 말랐다.

베르덴의 의뢰 수행 능력에 공급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페르네도 최선을 다하긴 했으나 그의 상황에 딱 알맞은 의뢰를 몇 번이나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거 곤란한데.'

경매의 시작까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돈이 부족하다.

이래서야 암흑가 경매장에서 허탕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한 결말을 베르덴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희소식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어? 애셔 님, 칼리아 님이 서둘러 라인즈로 와 달라고 하시는데요?"

128화 사령의 보주 (1)

칼리아에게 용건이 있다는 건 아마 의뢰겠지.

서둘러 와 달라고 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고액의 의뢰라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베르덴은 곧장 채비를 마쳤다.

장소는 칼리아의 저택이 아닌 라인즈의 교회.

신분 검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 칼리아를 찾았다. 기사단장 베스페와 함께 있던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았을 텐데 벌써 왔나?"

"그리 먼 거리는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이틀 만에 올 거리는 아닌데.

연락이 닿자마자 출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 그래. 다른 게 아니라 너와 올빼미가 데려온 그 마법사에 대한 얘기다. 며칠 전 그자가 깨어났거든."

루아스교의 주교와 여러 성직자가 갖은 노력을 한 끝에 겨우 살려 냈다.

감염이나 염증은 쉽게 치료할 수 있었지만 몸을 썩게 하는 저주를 풀어 내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마저도 완전히 해주하지 못하고 신성력으로 저주의 증상을 완화했을 뿐이었다.

"그 탓에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더군.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픽 기절해 버리니."

그래도 시간을 들인 결과, 중요한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저번에 네가 그랬었지, 저 마법사는 뭔지 모를 흑마법사 집단의 배신자라고. 그런데 배신자 같은 게 아니었더군."

칼리아가 베르덴의 눈을 바라봤다.

"마법사. 아니, 저 흑마법사는 마탑의 일원이다. 다크워튼에서 파견된 사람이지."

다크워튼, 흑마법사의 마탑.

그걸 듣는 순간 베르덴이 정보를 조합했다.

다크워튼과 조합의 흑마법사와의 관계.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흑마법사가 마탑의 첩자라는 뜻입니까?"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그의 이름은 워렌스.

3위계 하위의 흑마법사로, 그가 맡은 임무는 각종 범죄에 가담하는 흑마법사에 대한 조사.

그 후 마탑에 보고하여 그들을 처단토록 하는 것이다.

'들어 본 적이 있다.'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은 옛날보다 나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긍정으로 돌아선 건 아니다.

흑마법 특성도 그렇지만 조합의 흑마법사만 봐도 그들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다수 산재해 있었으니까.

그걸 없애기 위해 다크워튼에서 직접 사악한 흑마법사들을 색출해 토벌한다고.

"거짓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당장 마탑에 직접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정황상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내게 준 정보가 꽤나 신빙성이 있었거든."

워렌스는 며칠에 걸쳐 칼리아에게 조합, 정확히 3왕자와 손을 잡은 흑마법사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집단의 이름까지도.

"이름?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렇다더군. 확실히 흑마법사 모임 같은 건 아닌 모양이야. 워렌스가 말하길, 스스로를 '주검의 영광'이라 부른다고 하던데.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나?"

주검의 영광.

베르덴의 뇌리에 한 기억이 스쳤다.

──위대한 주검에 무한한 영광을!

마일드륀의 흑마법사가 죽기 직전 외쳤던 문장. 여기서 곁가지를 떼 내면 주검의 영광이 된다.

당연히 우연일 리가 없다.

다만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정체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었으니까.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입니다."

"나도 그렇다. 어쩌면 해외에서 기어 들어온 놈들일지도 모르지. 뭐, 어쨌든."

칼리아가 가볍게 손을 풀었다.

"중요한 건 이거다. 워렌스를 통해, 주검의 영광이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를 알아냈다는 것."

은신처?

"네가 말했던 사령의 보주가 만들어진 장소라더군. 그래서 나는 놈들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너를 부른 이유가 바로 그거지."

"토벌대에 합류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나는 돈이 아깝다고 쓸 수 있는 전력을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거든."

명확한 의뢰다.

보수가 상당하겠지. 칼리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전에 궁금한 게 있었다.

주검의 영광이 가진 목적.

사령의 보주의 정체 그리고 위치까지.

그런 베르덴의 물음에 칼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모른다. 아직 묻지 못했으니까."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칼리아 님, 그자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마침 시간이 맞았군.

미소를 지은 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따라와라, 애셔."

* * *

새하얀 침상에 누워 있는 흑마법사, 워렌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손목과 발목이 신성력이 깃든 족쇄로 묶여 있었는데, 그의 두 눈은 초점이 맞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본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가 가능한 겁니까?"

"아직은. 기상 직후에는 항상 이렇거든. 조금 있으면 말이 통할 정도로 정신을 차릴 거다."

그만큼 저주가 강력했다는 뜻이다.

육신이 썩어 가는 건 막았어도 그 반작용으로 반시체가 되니.

대체 누가 저주를 걸었길래 주교급 인사가 해주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저주가 모종의 마법 물품이 아닌, 흑마법사로부터 기인했다면 절대 얕볼 상대는 아니라는 것.

잠시 후, 칼리아의 말대로 워렌스의 눈빛이 선명해졌다.

얕은 기침을 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베르덴과 시선을 마주치자, 워렌스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모, 못 보던 분이시군요."

"마법사 애셔. 너를 구해 교회에 데려다준 장본인이지. 말 그대로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겠군."

아, 워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좋지 않다.

침에 뒤섞인 핏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워렌스가 수건으로 간신히 입가를 닦아 냈다.

상체를 일으킨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혈기가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저주로 인해 장기 일부가 손상되어 이렇습니다. 다행히 제 목숨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요."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이제 정상적으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칼리아가 저번에 다 하지 못한 질문을 연장해서 물었다.

그러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바라 본론으로 들어가지. 저번에 했던 대화에 대해 기억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니까요."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묻겠다. 주검의 영광의 목적은 뭐지?"

워렌스가 작게 신음했다.

"저도 약 2년간 그들 사이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말단으로서 지냈을 뿐이라 수뇌부조차 아주 멀찍이서 본 게 전부입니다."

"수뇌부?"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인과 노인이라.

"이름이나 생김새는 모르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터라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왕국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마 사령의 보주와 관계가 있겠지?"

칼리아의 말에 워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의 보주.

그것은 사기(死氣)와 마력의 덩어리며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방을 죽음의 땅으로 만드는 아주 위험한 물건이다.

거기다 그 위에는 강력한 저주까지 덧씌워져 있었다. 3위계 흑마법사가 손을 댔다간 그대로 즉사할 정도.

다만 워렌스는 마탑의 마법 물품으로 저주를 해제했으며 사령의 보주가 가진 기운을 일부 무력화할 수 있었기에 살 수 있었다.

그래도 죽을 뻔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들이 사령의 보주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강력한 언데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죠."

"어떤 언데드를 말하는 거지?"

"모릅니다. 다만 저 따위가 감히 가늠할 게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시킨 언데드의 지휘권을 3왕자에게 넘길 거라고 합니다."

바로 왕위 계승을 위해서.

칼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권력을 위해서 언데드를 왕국에 들이려 하다니. 그것도 왕가에 속한 작자가.

그녀는 표정으로 3왕자에 대한 혐오를 보란 듯이 드러냈다.

"...그 사령의 보주는 어디에 있지?"

"본래 마탑으로 가져갈 생각이었으나 비행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에 끈질긴 추적까지 붙은 탓에...."

워렌스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쟈이언 숲 중심부에 있는,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던져 버렸습니다."

"뭐?"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왕국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장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령의 보주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땅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는 건 왕국에 언데드가...."

"무책임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일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쿨럭, 쿨럭!

피를 토해 낸 워렌스가 침대에 쓰러졌다. 시간이 된 것이다.

서서히 감기기 시작하는 눈. 그가 의식을 부여잡으며 힘겹게 말했다.

"만약, 만약 사령의 보주가 사용되면 왕국에 먹구름이 드리울 겁니다...!"

그게 워렌스가 마탑이 아닌 칼리아에게 주저 없이 정보를 준 이유였다.

그는 칼리아를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유명했으니까. 특히나 왕국에 만연한 악인들을 처단하는 올곧은 귀족으로서.

그렇기에 숨기지 않았다.

사악한 흑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 물건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니. 워렌스는 지푸라기도 잡는 듯한 심정이었다.

사령의 보주.

주검의 영광이 다시 손에 넣기 전에 반드시 정화해야 한다.

반드시.

그가 거친 숨을 헐떡였다.

"반드시... 막아야...."

워렌스는 그 말을 남기고 정신을 잃었다.

* * *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칼리아는 기절한 워렌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있던 기사단장 베스파가 단호히 말했다.

"칼리아 님, 안 됩니다."

"...뭐가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향하시게 둘 수는 없습니다. 그 위험성에 대해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도 알고 있다, 베스파. 그리고 애초에 나는 라인즈를 벗어나지 못해. 아버지에게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건 너도 알지 않나."

칼리아의 행동은 옳았다.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을 급슴함으로써 그들의 부정을 밝혔고, 노예로 팔릴 사람들을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독단적이기도 했다.

칼리아는 멋대로 후작가의 가보를 훔쳐 사용했으니까. 그로 인해 두 달 정도 근신 처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던 터라 칼리아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와중에 베르덴이 물었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 뭡니까?"

"응? 그 유명한 장소를 모르나? 아, 하긴. 타국에서 왔다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군.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은 에스티리아 왕국의 2대 금지 중 하나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A Cave Without Light).

동부 늪지대와 같은 반열에 있는 금지(禁地)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동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동굴들이겠지.

"수백 개의 동굴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 기이한 장소다. 통로도 무수하고 규모가 엄청난 만큼... 깊게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지."

동굴 속에 서식하는 괴이한 이형종들.

빛 한 점 닿지 않는 지하는 그야말로 공포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특이한 소재를 좋아하는 모험가들조차 극도로 기피하는 장소일 정도.

"이거 참, 어렵게 됐군."

칼리아가 턱을 짚었다.

"그 동굴의 입구들은 대부분 경사가 져서 보주 같은 건 어딘가로 굴러 떨어졌을 거다. 위험을 각오하고 기사단을 투입해 수색을 해봤자 별 성과는 없겠지."

뭐,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칼리아는 기사들을 끔찍이 아낀다.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기사단만을 사지로 내모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만약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언데드가 들끓게 된다면.

그 수많은 통로에서 사체들이 터져 나온다면 걷잡을 수 없다.

적어도 그 주변에 있는 도시나 마을은 끝장일 테니.

'어떻게 한다.'

칼리아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적합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단순히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칼리아의 명령이라도 다짜고짜 사지로 들어가서, 손대는 것조차 위험한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면 누가 가겠는가.

기사단 외,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칼리아에게 충성하는 자는 없었다.

그때였다.

"사령의 보주는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난데없이 베르덴이 선언했다.

129화 사령의 보주 (2)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감 넘치는 반응에 칼리아가 고민했다.

'금지가 어떤 장소인지 몰라서 그런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무지(無知)란 때론 만용이며 오만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문득 칼리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앞의 마법사는 그러한 허세를 부릴 법한 자인가... 하고. 답을 고민해 봤지만 긍정할 수는 없었다.

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보잘것없는 무용을 대단한 듯 뽐내거나 스스로를 과대 포장 하는 등.

어떻게든 칼리아의 눈에 띄기 위해 멧돼지처럼 멍청한 용맹을 부리는 자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이내 생각을 마친 칼리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베르덴은 칼리아에게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을 보일 이유가 없다.

그건 칼리아 또한 알고 있다. 그랬다면 진즉에 허리를 굽신거리며 그녀의 발밑에서 비위나 맞추고 있었을 테니까.

다시금 찾아온 정적.

그러나 길지 않았다. 이미 원하는 건 생각해 둔 바가 있었으니까.

지금의 고민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것.

"칼리아 님의 신용을 받고 싶습니다."

"신용?"

그건 추상적인 것이 아닐 터.

확신하건대 물질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세간에서 가장 흔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설마 내 명의로 뭘 빌릴 셈인가?"

다른 의미로는 보증을 서 달라.

베르덴은 부정하지 않았다.

"허...."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스파의 표정이 멍해졌다.

살다 살다 귀족에게 보증을 요구하다니. 아니, 찾아보면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결코 흔한 건 아니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던 터라 화낼 틈도 없었다.

칼리아도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였다.

베르덴이 말을 덧붙였다.

"암흑가의 경매장에서 쓸 자금이 필요합니다."

굳이 이유를 감출 필요는 없다.

어차피 밝혀야 했으니까. 경매에 참가하는 게 죄도 아니고.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의뢰가 부족한 터라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당장 칼리아에게 10억이 넘는 보수를 달라고 할 수도 없다. 당연히 거절할 테니까.

남은 건 대출뿐이다.

하지만 마그누스 은행이나 다이나 은행은 신용이 확실하지 않으면 한 푼도 빌려주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일하는 모험가나 용병 계열은 더더욱.

억대의 돈을 빌리려면 사회에 증명된 인물이 아니라면 무리다.

'그렇기에 칼리아의 신용이 필요하다.'

은행의 관심은 오로지 원금과 이자의 회수. 그걸 확실하게 대신할 사람만 있다면 대출이 가능하니까.

'대부업자 바르톨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최솟값이 아닌 기댓값.

그 이상의 자금을 마련하려면 말이다.

베르덴은 목적을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경매장이라... 벌써 그럴 시기인가. 내 신용을 빌려 달라는 것도 납득이 가는군. 그렇다고 이렇게 면전에서 갑작스레 요구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실례했습니다."

"실례는 무슨. 생각해 보면 그리 말이 안 되는 보수도 아니거늘."

"가능한 겁니까?"

"안 될 건 없지."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사령의 보주를 찾아오는 것.

그건 간단한 게 아니다. 패기 있게 들어간 사람들 중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즉, 이번 의뢰의 보수는 목숨값이나 다름없다.

"내 신용은 곧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신용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목숨을 바친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은 매우 특수하다."

주검의 영광, 사령의 보주, 3왕자.

이들이 왕국에 가져올 암운이 얼마나 거대할지 알 수 없다. 다만 사전에 막는 게 최우선이라는 건 분명할 터.

"그러니 사령의 보주를 내게 가져오면 원하는 걸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확답은 받았다.

"그런데 내 신용까지 빌려야 할 정도라니. 경매에 원하는 게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그건 모르지만 여유 자금이 많다면 구할 확률이 더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경매장의 목록.

베르덴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건 그렇지. 뭐, 네가 뭘 구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 애초에 나는 암흑가 근처에 발을 디딘 적이 없기도 하고."

암흑가에 가 본 적이 없다고?

경매장의 존재만 해도 귀족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을 텐데.

그런 의문에 칼리아가 답했다.

"간단한 이유다. 우리 에스퍼렌사 후작가와 암흑가 로아프라... 정확히 그 지배 세력인 '빈테르트'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이지."

뭐,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아까 말했다시피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의 입구는 무수히 많다. 크기부터 위치까지 제각각이지. 다만 워렌스가 말했던 쟈이언 숲 중심부에 있는 건 정보가 있다. 모험가가 탐사했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거든."

칼리아가 손을 까딱이자 베스파가 깨끗한 편지지를 준비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가볍게 글자를 끄적이곤, 반지 인장을 찍어 베르덴에게 넘겼다.

"모험가 길드에게 보여 주면 정보를 열람할 수 있을 거다.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가는 것보단 나을 테지."

"잘 쓰겠습니다."

"그래. 미리 보수를 준비해 둘 테니 부디 무사히 의뢰를 완수하고 오도록."

당연히 그럴 거다.

지금으로서 아주 핵심적인 의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실패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죽는 건 논외고.

"그리고 가기 전에."

칼리아가 공고문을 하나 베르덴에게 던졌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상당히 뻣뻣했다.

"플리쉬르 백작이 왕가에 구금되었다. 그로 인해 백작이 내걸었던 비행 금지령이 해제됐지. 시기는 바로 지금부터다."

비행 사용 가능.

그로 인해 더 이상 말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귀찮게 가도를 따라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며칠 더 생긴 셈인가.'

좋은 상황이다.

베르덴이 칼리아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베르덴이 드높은 상공을 비행하며 아래를 굽어봤다.

울창한 삼림이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광활한 생명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중심부가 이쯤일 텐데.'

고도를 낮추며 마력감지를 펼쳤다.

셀 수 없는 동식물의 존재 그리고 지형지물이 감각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마력을 퍼뜨리며 움직이자 곧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중에 나타난 작은 절벽.

동굴은 그 아래에 숨어 있었다.

쟈이안 숲 중심부에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 외엔 보주가 들어갈 만한 틈새조차 없다. 그러니 여기가 워렌스가 보주를 던진 장소가 맞을 터.

지면에 착지한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어지간한 건물 한 채보다 거대한 입구가 그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칼리아의 말대로 입구부터 경사가 상당하군.'

발을 헛디딘다면 바로 굴러떨어질 정도.

마력을 넓게 퍼뜨려 봐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도중에 여러 갈래로 길이 갈라지기도 하고.'

잘못하면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니 한가롭게 동굴을 구경할 여유는 없다.

부여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한 베르덴.

한 손에 오큘러스를 든 그가 동굴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사령의 보주, 수색 시작.

* * *

베르덴이 수색을 시작한 그 시각.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의 다른 입구 앞에 세 명의 흑마법사가 모여 있었다.

주검의 영광, 노사의 추적대.

그 책임자를 맡은 못생긴 쿤엘이 지면을 살폈다. 눈을 감고 사령의 목소리에 집중한 그가 눈가를 씰룩였다.

"...그래, 이곳이군. 이곳이 분명해."

쿤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옆에 있던 흑마법사, 다니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쿤엘 님. 여기는 배신자가 지나온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주변에 인적이 전혀 없다.

적어도 연 단위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들이 쫓고 있던 배신자 워렌스도 마찬가지.

그러자 쿤엘이 눈을 번뜩였다.

"우리의 목적이 뭐지?"

"배신자를 추적해 사령의 보주를...."

"그래, 맞다! 우린 배신자를 처단하는 게 아니라 사령의 보주를 찾는 게 목적이지! 그것이 노사의 명이시기도 하고!"

쿤엘의 손에 흙이 가득했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무수한 죽음. 그 사체는 자연스레 땅에 잠기는 법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다. 사령이 내지르는 가열찬 비명 소리가 말이다.

"사령들이 온몸을 비틀며 말한다. 이 동굴 아래에 아주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다고. 그리고...."

쿤엘이 코를 씰룩였다.

"느껴지지 않나? 영혼을 자극하는 사기가 동굴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으음!"

"...."

"...."

다니엘과 카르잔은 침묵으로 답했다.

흑마법사 쿤엘은 사령과 관계가 깊은 특이 형질 보유자. 통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다.

그러니 따를 수밖에. 여기서 부정적인 대답을 했다간 저 광기가 그들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해야 했다.

"하지만 노사께서 보주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면 비올라 님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가 독단으로 움직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올라?"

죽음의 향취를 맡던 쿤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년의 도움은 필요 없다. 나처럼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강하기만 한 여자 따위가 대체 뭐라고!"

쿤엘이 짙은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가 비올라를 혐오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언제나 쿤엘을 못생겼다며 무시하고 비웃었으니까.

"내 경지는 비올라에 미치지 못하지만 마법전은 내가 이긴다. 흑마법의 이해도가 다르니 당연하지! 암! 그렇지!"

그렇게 제멋대로 확신했으나 다른 둘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비올라 님에게 압살당할 것 같은데.'

'생채기 하나라도 내면 선방한 것 아닌가?'

그게 제삼자가 봤을 때의 생각이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적어도 이 둘은 눈앞의 광기 넘치는 흑마법사를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쿤엘이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우린 시급하게 움직여야 한다. 주검의 영광을 위해서, 노사를 위해서이기도 하나... 그것이 가져올 위험은 쉬이 가늠할 수 없으니."

죽음과 마력의 집합체.

생기 넘치는 지면에 박으면 며칠 내에 죽음의 땅으로 변모시키며, 지니는 것만으로도 산 자를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는 기물이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이거였다.

"그게 자칫 상위 언데드의 손에 들어간다면, 노사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큰 출혈을 감당해야 한다."

만약 죽음의 기사가 사령의 보주를 줍는다면 더욱 강대해진다.

그걸 토벌하거나 뜻대로 조종하는 건, 흑마법로서 자부심이 가득한 쿤엘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 그 전에 사령의 보주를 회수해야 한다. 더 이유가 필요한가?"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쿤엘이 해골이 걸린 스태프를 두들기며 빛이 들지 않는 동굴로 들어갔다.

그 뒤를 카르잔과 다니엘이 따랐다.

이윽고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동굴 아래에 있는 잿빛 마법사.

그들과 같은 목적을 가진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말이다.

* * *

사령의 보주.

그것이 주변에 죽음을 흩뿌리며 굴러떨어졌다.

급격한 경사를 넘어 비스듬하게 기운 지면에 다다랐다.

그 소리와 기운에 이끌린 동굴의 거주민들이 손을 내밀었으나 누구도 이를 견디는 존재는 없었다.

죽거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로 변모했다.

그렇게 튕겨 나간 보주는 통로를 벗어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수한 벌레 무리를 넘어 어둠 속에 떨어졌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의 손이 닿을 장소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다시금 굴러간 사령의 보주가 마침내 멈춰 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나지막이 비추는 보라색 빛.

그 앞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사령의 보주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다.

이미 죽어 있으니까.

전신을 휩싸는 죽음의 기운.

텅 빈 두개골 안에서 보라색 빛이 명멸했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티... 리아... 왕국....]

그 음성에는 짙은 증오심이 가득했다.

130화 사령의 보주 (3)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이 장소를 탐험했던 모험가의 기록에 의하면, 베르덴이 들어온 입구에 존재하는 지하 통로는 총 두 개.

막다른 길은 없이 각각 특수한 장소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

하나는 까마득한 구렁, 다른 하나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통로로 가득한 천연 미로가 말이다.

'가능하면 구렁 쪽으로 흔적이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더 찾기 쉬울 테니까.

대규모 지형조작으로 통로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도 할 수 있지만 그건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사령의 보주가 어딘가로 튕겨져 나갈지도 모르는 데다가, 혹여 남아 있을지 모르는 흔적이 지워질지도 모르니까.

베르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령의 보주였다.

경사진 입구를 따라 내려가자 어느새 빛이 사라졌다.

암시를 시전 중인 베르덴의 시야에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모험가의 기록에 있던 통로가 분명했다.

마력을 퍼뜨려 주변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게 물들어 있는 동굴 바닥의 이끼. 그것은 깊은 어둠 속을 향해, 일자로 이어져 있었다.

분명 워렌스가 던진 사령의 보주가 굴러떨어진 흔적일 터.

'잠깐 닿는 것만으로도 썩을 정도라는 건가.'

베르덴이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썩은 이끼의 흔적은 정확히 첫 번째 통로로 향하고 있다.

까마득한 구렁으로 이어지는 통로 말이다.

외길이라고 하니 따라 내려가면 사령의 보주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위험이 없다는 건 아니다.

까마득한 구렁으로 가는 기다란 통로에는 무수한 아인종과 이형종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간단한 일이군.'

베르덴은 주력은 원소 마법.

그 파괴력은 전투에 더없이 적합하다. 지금까지 해 온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화아악.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한 베르덴이 첫 번째 통로로 들어갔다.

* * *

"그곳은 그야말로 괴물의 소굴이었다. 우리는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

────백금 등급 모험가, 할파론.

* * *

통로의 끝에 도달할 때쯤 경사가 거의 사라졌다.

다만 보주가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바닥은 비스듬했다.

이윽고 통로를 넘어서자 고요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을 넘어가면 구렁이 나온다고 했었지.'

기록에 따르면 구렁까지는 약 나흘 거리.

물론 도중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걸리는 시간이다.

"...."

베르덴이 조용히 공동을 응시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기어다니는 벌레, 몸을 숨기고 있는 짐승.

으레 동굴이라면 들릴 법한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룬의 반지로 강화된 감각에도 마찬가지.

그야말로 적막한 어둠이었다.

하지만 베르덴은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다.

공국에서 연금술사 리토 바르슬란과 이동 중.

거미 숲에서 만났던, 기척 자체를 지우는 게 가능한 거미들을 말이다.

분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당시의 경험이 말하고 있다.

도처에 동굴 속 사냥꾼이 깔려 있다고.

놈들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베르덴이 자신들의 둥지 안으로 들어오기를.

투명화를 사용하면 전투를 피할 수 있다.

그동안 최대한 거리를 나아가고, 지형조작으로 벽 안에 숨거나 마법진으로 몸을 지킨다면 더욱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시간 낭비, 돈 낭비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암흑.

기척을 감춘 채 이빨을 감추고 있는 괴이한 적들.

그따위가 뭐라고 신경 써야 하나.

장애물이 앞길을 막아선다면 부수고 지나갈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베르덴이 마력을 퍼뜨렸다.

공동 내부에 가득 들어찬 마력.

무수한 생명체가 감지되면서, 마력에 반응한 괴물들이 꿈틀거렸다.

[카아아....]

눈과 코는 없이.

오직 귀와 입만이 남아 있는 기괴한 외형을 가진 이형종, 블라인더.

코볼트 정도의 크기를 가진 수십 마리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왔다.

이게 시작이다.

그 뒤로는 더욱 강하고, 더욱 많은 괴물이 눈을 번뜩이고 있다.

베르덴이 벽안을 빛냈다.

막는 적은 전부 죽인다.

짙은 살기를 띤 그의 스태프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트리플 캐스팅.

<연쇄번개>

* * *

쿠구구구구...!

진동이 울리며 천장에서 후두둑 먼지가 떨어졌다.

벌써 이게 여섯 번째 지진이었다.

"...동굴이 많이 소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쿤엘 님."

다니엘의 말에 쿤엘이 별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곳은 금지 중 하나인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장소지."

듣기로는 거대한 땅굴 벌레, 스톤 이터도 서식한다고 한다.

크기가 거의 고층 여관에 필적하다고 하니 움직일 때마다 흔들림을 동반하는 건 당연하겠지.

거기다가 동굴 오우거나 거대 거미도 서식한다고 하니.

'그래도 너무 잦긴 하군.'

약간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쿤엘은 곧 관심을 거두었다.

본인도 말했다시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지금은 사령의 보주에 집중할 때였다.

쿤엘이 발걸음을 멈췄다.

정신을 집중하자 사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서 죽어 간 자들의 음성이다. 그들이 비명으로 속삭이고 있다.

죽음이 만연해 있는 장소.

사령의 보주의 위치에 대해서 말이다.

이렇게 훌륭한 안내자가 있으니 움직임에 있어 망설이거나 고민할 이유가 없다.

쿤엘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응?"

그때, 쿤엘 일행 앞으로 이형종이 나타났다.

맹독을 품은 지네. 그리고 그 등에 올라탄 블라인더.

놈들이 흑마법사들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감히 겁도 없이."

쿤엘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고통의 절규>

지팡이의 해골이 달그락거렸다.

터져 나온 흑색 파동이 전면을 휩쓸었다.

[키에에에에에엑!]

저주에 노출된 이형종이 몸부림쳤다.

온몸을 비틀며 바닥에 쓰러진 괴물들을 향해 다니엘과 카르잔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쿤엘의 저주가 강화되었다.

퍼버벅! 퍼벅!

지네와 블라인더가 고통에 못 이겨 폭사했다.

악취에 가까운 체액의 향기. 쿤엘은 적들의 죽음을 느끼며 마력을 일으켰다.

<크럼블러>

산산조각 난 파편과 흩뿌려진 체액이 모이며 기괴한 형상을 갖췄다.

크럼블러.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저열한 종. 다만 잔챙이를 사냥하기엔 더없이 쓸 만하다.

쿤엘이 턱을 까딱이자 크럼블러들이 동굴을 질주했다.

잠시 후, 동굴 서식자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쿤엘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시 가도록 하지."

쿤엘 일행은 최단 루트로 사령의 보주가 있는 깊은 지하로 향했다.

* * *

수십 갈래로 갈라진 벼락이 암흑 속에서 명멸했다.

신체 내부가 불탄 사체들이 쓰러졌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이형종들이 채웠다.

시시각각 모여드는 무리.

그 속에서 붉은 번개가 내리쳤고 뒤이은 냉기와 화염이 길을 막고 있던 블라인더들을 몰살했다.

'이제 길이 보이는군.'

비행을 쓴 베르덴이 지하 깊은 곳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카가가가각!]

[키가가가각!]

베르덴만 한 몸집을 가진 흡혈 박쥐 무리가 덮쳐 왔다.

즉시 기동하여 어렵지 않게 아래로 피해 냈다.

쿠구구구...!

그때, 지면 아래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위험을 느낀 베르덴이 곧장 옆으로 이동했다.

이내 바닥에 금이 가더니 크고 작은 바위 파편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시시시시식.]

스톤 이터 성체.

단단한 돌마저도 간단히 씹어 부수는 거대 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먹잇감을 놓쳤다고 판단한 놈이 곧장 땅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깊고 빠르게 이동했는지 순식간에 마력감지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확실히 경고할 만하군."

사방이 막힌 갑갑한 공간.

지면, 지상, 지하에서 들이닥치는 놈들의 습격을 며칠이나 견뎌 내며 앞으로 이동해야 하니.

확실히 베테랑 모험가들이라도 고전할 만하다.

통상적인 마법사가 단신으로 왔다면 도중에 마력 고갈이 일어나, 이도 저도 못 하고 이미 잡아먹혔겠지.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염열파동>

화아아아악!

거센 열기에 다시금 날아오던 흡혈 박쥐의 일부가 소거됐고.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마력을 집중했다.

<인페르노>

초고온의 불길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 직후 급격하게 고도를 낮춰 지면에 착지했다.

아래에서 흔들림이 느껴졌다. 스톤 이터가 돌진해 오고 있다는 뜻.

베르덴이 그에 맞춰 스태프를 바닥에 대었다.

서로 반대되는 대지 계열과 전격 계열의 특성을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그의 손끝에서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 탄생했다.

대지 속의 번개.

<역뢰>

혼돈의 벼락이 동굴 바닥 밑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멀리서 큰 진동과 함께 바위와 흙이 솟구쳤다.

[...!]

낙뢰의 위력에 그대로 직격당한 스톤 이터.

단단한 갑각 아래에 있는 속살이 터져 곳곳에서 보라색 피가 흘러내렸다.

이러한 고통에 내성이 없는지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부림쳤다.

베르덴이 주저 없이 마안을 번뜩였다.

<용암격창>

콰드드득!

스톤 이터의 배를 관통한 창.

용암이 들끓으며 내부를 진창 녹였고, 과열된 열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쿠우웅!

육체가 두 동강이 난 스톤 이터가 작게 울다가 축 늘어졌다.

베르덴이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이걸로 이 주변의 터줏대감 중 남은 건 하나뿐인가.

베르덴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소란을 듣고 온 모양인지 거체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력감지로 보아 오우거... 정확히는 눈이 퇴화된 동굴 오우거임이 분명했다.

'머리가 두 개이니 상위종.'

전에 토벌했던 트윈 헤드 오우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처리하는 건 문제없다.

"...?"

그런데 놈의 모습이 이상했다.

[그어어어어....]

썩어 있는 우측 반신.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동굴 오우거의 상태는 처참했다.

반쯤 죽어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왜 저렇게 변했는지는 자명했다.

'사령의 보주를 건드린 건가?'

그 이유밖에 없겠지.

자연적으로 절반만 언데드 상태에 있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사령의 보주가 저 안쪽에 있다는 뜻.'

거기다 전과 달리, 아주 흐릿하게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공국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

사령의 보주의 존재가 보다 확실해진 것이다.

오큘러스에 집중되는 마력.

완충되자 이내 스태프의 머리에서 빛이 명멸했다.

베르덴이 단숨에 오우거에게 육박했다. 놈이 느릿하게 뻗은 손을 가볍게 피해 내고, 그 가슴을 향해 오큘러스를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앙!

굉음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썩을 대로 썩어 버린 오우거의 반신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등 뒤로 쓰러진 오우거의 사체.

베르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

* * *

미리 챙겨온 육포와 물로 허기를 달래며 움직였다.

피곤할 땐 중상급 마석을 제물로 삼아 방위 마법진을 설치했다.

중급 마석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확실한 게 좋으니.

몇 억도 아니고 몇 푼 아끼자고 필요 없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언데드나 이형종 등 방해물을 제거하며, 체감상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여기가 까마득한 구렁인가."

말 그대로 공허한 공간.

암시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원형의 절벽이 길을 막아섰다.

가볍게 작은 돌을 하나 던져 봤다.

시간이 지나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깊이.

여기가 모험가들이 기록한 마지막 장소였다.

일부 마법사들이 내려가 보긴 했으나 바닥을 찾긴커녕 도중에 습격을 받아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는 된다.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깊은 암흑.

저 아래로 떨어진다면 지상과 얼마나 멀어질 것인가. 그리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등.

단순한 모험심으로 도전하기에는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덴은 그들처럼 발걸음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저 아래에서 불길한 사기(死氣)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베르덴은 구렁 아래로 몸을 던졌다.

131화 사령의 보주 (4)

"그건 어둠이 아니었다. 벌레의 갑각이었다. 나는 내 동료의 몸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뒤덮여 사라지는 걸 보고도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금 등급 모험가, 체켈린

* * *

베르덴이 중력에 이끌리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추가로 비행 마법을 사용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양옆으로 보이는 절벽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만약 이대로 지면에 부딪혔다간 형체조차 찾지 못할 게 분명했으나 베르덴은 자신 있었다.

섬세한 조작 능력은 그의 특기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전속력으로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그때, 귓가에 사사삭──거리는 소리가 스치듯 들려왔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벽면의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게 그거군.'

모험가들의 기록에 적혀 있던 이형종 '블랙로치'.

평소에는 동굴 벽에 붙어 종일 수면을 취하다가, 먹잇감이 찾아오거나 배가 고프면 무리를 이루어 사냥을 하는 육식 벌레다.

하나하나 크기는 사람 머리만 한데, 보통 무리당 수백 마리 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색적 능력이 뛰어나 영역 내의 침입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다.

설령 투명화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상대하기가 워낙 귀찮은 터라 모험가들도 기피하는 이형종이다.

그런데 까마득한 구렁에 있는 블랙로치는 그야말로 자릿수가 달랐다.

'마력감지로 파악한바 최소 만 단위.'

천적이 없는 모양인지 미친 숫자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도시 하나를 괴멸하고도 남겠지.

어느새 베르덴이 블랙로치의 영역의 중심에 들어갔다.

긴가민가하던 놈들이 침입자를 완전히 인식했다.

역겨운 날갯짓을 하며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말 그대로 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우우우우웅!

바람을 자극하는 소리.

곧 블랙로치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저 무리에 맨몸으로 노출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뼈조차 남지 않을 터.

<화염장막>

베르덴이 전신에 불길을 둘렀다.

무지성으로 돌격하던 블랙로치의 전열이 소각되었다.

하지만 그건 고작 일부일 뿐.

블랙로치 무리는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타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다닥!

반복해서 죽고 또 죽어 간다.

구역질 나는 탄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렇게 수백 마리가 죽었을 때쯤이었다.

[키리릭.]

블랙 로치 한 마리가 손상된 장막 일부를 뚫고 머리를 내밀었다.

벌레 특유의 검은 눈. 네 갈래로 갈라진 턱이 꿈틀거렸다.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징그럽군."

진심으로 역겹기 짝이 없었다.

<선풍의 장막>

원형으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변에 몰려 있던 블랙로치 무리가 휩쓸리더니 이내 소용돌이가 검게 물들었다.

충격에 벽에 부딪힌 블랙로치들.

그러나 놈들의 갑각은 그 정도로 부서지지 않았다.

다시 베르덴을 향해 돌진했다.

'상당히 끈질긴 놈들이군.'

영역을 중시하는 이형종은 대개 영역을 벗어나면 추적을 포기한다.

다만 이곳에 모인 블랙로치에겐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전멸시킬 수밖에.'

당연히 베르덴에게 방법이 있었다. 모험가들의 기록을 통해 미리 정보를 접했으니까.

삼원색의 중심을 이용한 혼돈 마법.

지난 시간 동안 훈련을 하며 몇 개 구상한 마법들 중 적합한 게 있다.

'그러니 놈들을 한곳에 모으는 게 우선.'

생각을 끝낸 베르덴이 선풍의 장막을 해제했다.

<아웃버스트>

압축된 바람이 폭발하며 포위망에 틈이 생겼다.

이어 신발에 내재된 마법 <중량화>를 사용한 베르덴이 재빠르게 그 틈새를 통과했다.

그러곤 곧장 회피 기동을 펼치며 추적을 피해 냈다.

블랙로치가 전혀 스치지도 못하는 정교한 움직임.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식인 벌레들에게 닿는 건 생리적으로 무리였다.

화아아아악!

허공을 질주하듯 어둠 속을 낙하했다.

슬쩍 뒤를 바라보자, 까마득한 구렁을 바글바글한 블랙로치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금이 적기였다.

베르덴이 오큘러스의 끝부분에 마력을 집중했다.

'내게 필요한 건 연쇄적이고 광범위한 파괴력.'

그의 오른쪽 눈에 역천의 문양이 떠올랐다.

<연쇄번개>의 전도.

<화염역병>의 전염.

그 위로 바람을 둘러 마법 자체를 강하게 압축했다.

전부 4위계에 위치한, 마법과 집중 마법의 분해와 재조립.

본래라면 베르덴에게도 수십 초의 연산 시간이 필요하나 마안이 그를 대신했다.

베르덴에게도 버거울 정도로 강력한 반발력.

다른 사람이었다면 마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멸했을 것이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베르덴이 쌓아 올린 노력이었다.

준비를 끝낸 베르덴이 등을 돌리고 오큘러스를 내뻗었다.

<군뢰>

자그마한 남색의 구체가 블랙로치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콰과과과과과과광!

압축된 염화가 폭발하며 수백 갈래의 벼락이 공간을 집어삼켰다.

그에 닿은 블랙로치가 삽시간에 폭사했고, 마치 전염병이 퍼지듯 죽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나 서로서로가 몸을 붙이듯 가까이하고 있는 벌레 무리에겐 치명적인 마법.

눈 깜짝할 사이에 벼락 줄기가 시전자인 베르덴에게까지 뻗어 왔다.

베르덴이 구렁의 벽에 붙었다.

<지형조작>

낙하하며 지형을 조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안의 시야에 닿은 다른 벽면에도 마력을 침투시켰다.

트리플 캐스팅을 통한 지형조작이었다.

오큘러스로 긁듯이 허공을 올려 치고 지형이 한데 모이자, 베르덴 위에 천장이 만들어졌다.

마법의 전염병이 퍼져 나가고 있는 블랙로치 무리와 베르덴의 사이.

까마득한 구렁의 공간이 분단된 것이다.

쿠구구구구구궁!

벽 너머로 들려온다.

고통에 찬 블랙로치가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와 그들 사이에서 이어져 나가고 있는 전염병 같은 폭발 소리를.

금이 가기 시작한 천장.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화염과 전격의 전염병에 블랙로치가 전멸한 것이다.

아니면 그에 필적할 만큼 무리가 궤멸되었거나.

'뭐가 됐든 더 쫓아오지는 못하겠지.'

마안을 연이어 사용했더니 반동이 찾아왔다.

머리와 마력회로도 마찬가지. 그만큼 직전에 사용한 마법의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베르덴이 피로를 털어 내며 아래로 향하자, 마침내 끝이 다가왔다.

지면에 착지한 베르덴이 두리번거렸다.

'엄청난 크기군.'

지금까지의 풍경과는 달리, 암시를 사용하고 있어도 크기를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공동이 시야에 비쳤다.

침묵의 어둠.

고운 입자의 모래가 바닥에 얕게 깔려 있었다.

아무런 습격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감각을 자극하는 죽음의 기운만이 느껴질 뿐.

베르덴이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사령의 보주.

자색의 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그것이 거대한 모래 산 위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어떻게 저기에 올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뢰를 달성하기까지 코앞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노력한 보람이 있군.'

이제 저걸 챙기고 보수를 받아, 경매장에서 원하는 걸 구입하면 된다.

그리고 5위계에 오르는 것까지.

보헤미른 마탑주.

절대적인 7위계의 초월자를 향해 몇 발자국이나 다가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수에 더 가까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덴이 보주에 다가간 순간.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사령의 보주! 드디어 찾았구나!"

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

조용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 로브를 두른 세 명의 인간.

그 중심에 있는, 마치 구울이 생기를 가지면 저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못생긴 사내.

그 앞에는 뭉개진 고기 조각으로 이루어진 언데드 다섯 마리가 있었다.

'...크럼블러?'

보아하니 자연적으로 발생한 개체는 아닌 것 같다.

아마 흑마법의 소환 계열 마법으로 소환된 것일 터.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찾아온 흑마법사 무리라.'

베르덴이 알기로, 그나마 여기에 찾아올 흑마법사 집단은 하나뿐이다.

주검의 영광.

베르덴이 할 일은 정해졌다.

<플레어>

화염 광선이 쿤엘에게 육박했다.

* * *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을 탐사한 베르덴.

그와 달리 쿤엘 일행의 여정은 아주 평화로웠다.

사령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쿤엘의 특이 형질 덕분이었다.

수백 개의 통로가 눈앞에 있음에도 길을 잃지도 않았고, 상대하기 귀찮은 이형종이 있으면 가볍게 우회했다.

세 명이기에 짧은 수면을 취하면서 죽을까 봐 걱정할 일도 없었고.

물론 며칠 동안 까마득한 지하로 향하는 건 갑갑하고 고된 일이긴 했으나.

결국 상처 하나 없이, 마력을 소모하는 일도 거의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아아. 느껴진다, 사령의 보주의 기운이!"

쿤엘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갑작스레 발생한 배신자에게 전혀 예상치 못하게 보주를 도둑맞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거라면 그가 존경하며 믿고 따르는 노사가 흡족해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검의 영광의 목적을 향해 거대한 한 발자국을 남기는 셈.

그 주역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쿤엘은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어둠을 거닐던 중 마침내 발견했다.

모래 산 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사령의 보주가.

"사령의 보주! 드디어 찾았구나!"

톤이 높은 비명을 지르며 쿤엘이 성큼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시야 끝자락에 낯선 인영이 보였다.

븐명 사람이었다.

'어? 왜 여기에 사람이...?'

비정상적이다.

그를 따르던 카르잔과 다니엘마저 당혹스러워했다.

솔직히 소름 끼쳤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장소에 있는 사람이라니.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흑마법사가 아닌, 인간 본연의 감정이었다.

그때였다.

화염 광선이 날아왔다.

"엇?!"

눈을 부릅뜬 쿤엘.

그가 크럼블러들을 방패막이로 세우고는 <영혼 장막>을 둘렀다.

콰아아아아!

잠시도 막아 내지 못하고 불길에 녹아내린 언데드들.

더군다나 영혼 장막의 일부마저 손상되었다.

'마법의 한계치까지 마력을 집중시킨 건가...!?'

무식한 위력이다.

쿤엘이 혀를 차며 지면에서 해골 벽을 넓게 솟아오르게 했다.

그렇게 몸을 지킬 수단을 만들며 마력을 갈무리할 시간을 벌었다.

그걸 본 베르덴이 생각했다.

'상황 판단이 빠르군.'

기습에 대처하는 걸 보니 전투에 익숙해 보인다.

하지만 이거라면 어떨까.

<지형조작>

지형이 물결치더니 이내 거대한 해일이 되어 해골 벽을 덮쳤다.

그 막대한 질량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벽이 무너졌다.

그 뒤에는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쿤엘도 그리 호락호락한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대지의 죽음>

그가 스태프를 바닥에 찍었다.

해골이 달그락거리며 뻗어 내려가는 저주.

옆에서 카르잔과 다니엘이 보조하여 저주의 위력과 범위를 최대한 강화했다.

대지가 죽으면서 지형의 개념에서 벗어났다.

베르덴의 마력이 흘어지며, 통제에서 벗어난 모래 해일이 주위를 덮쳤다.

쿤엘 일행이 그에 휩쓸려 나가떨어졌다.

본래 단숨에 압사할 생각이었던 베르덴의 뜻과는 벗어난 결과였다.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이 침투해도 움직이지 않는군. 이래서야 지형조작을 더 사용하지 못하겠어.'

정확히 지형조작에 대응하는 저주 마법.

베르덴이 상대의 수준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올렸다.

"쿨럭, 쿨럭!"

머리에서 모래를 떨어뜨리며 일어난 쿤엘.

그가 기침을 하며 베르덴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네놈은 대체 누구지? 누군데 감히 우릴 공격하는 것이냐!"

대답할 생각은 없다.

베르덴이 마안을 발동했다.

이곳은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동. 베르덴의 능력이 노출될 위험은 없다.

그와 더해서 베르덴 이외의 생존자를 바깥으로 내보낼 생각 또한 없었다.

세 명의 흑마법사.

그들 발아래의 모래가 꿈틀거렸다.

"음?!"

눈치챈 쿤엘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으나 나머지 둘은 아니었다.

콰직!

"끄아아아아악?!"

바닥에서 솟구친 대지의 창이 다니엘의 등 뒤를 관통했다.

대처할 새도 없이 심장이 파괴된 그는 곧 절명했다.

카르잔은 무릎이 망가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쿤엘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어스 스피어? 그런데 어떻게 원거리에서 마법을...?'

이상하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도 없고, 들어 본 적도 현상이다.

'설마 저 습격자 또한 특이 형질이라는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쿤엘은 사령의 보주를 도둑맞았을 때 이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틈에 베르덴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르잔에게 육박했다.

그가 필사적으로 흑마법을 연사했으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스톤 크랙>

집채만 한 암석 파편이 카르잔의 팔을 앗아 갔고, 지척에 다가간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휘둘렀다.

집중된 마력이 충격파로 변환되며 카르잔의 상체가 손쓸 새도 없이 분쇄됐다.

'이걸로 남은 건 하나뿐.'

한순간에 부하 둘을 잃어버린 쿤엘이 격분하며 소리쳤다.

"대체 왜 공격하는 거냔 말이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이유가 뭐냔 말이다!"

"...."

"말 좀 하라고! 제발!"

쿤엘로선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렵사리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을 내려왔더니만, 연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에게 공격받고 있으니.

게다가 수준이 장난 아니다.

자칫하면 쿤엘 또한 죽을지도 몰랐다. 영문도 모른 채로.

뭐, 베르덴이 알 바는 아니었다.

'끝내고 돌아가자.'

오큘러스에서 푸른 전류가 번쩍거렸다.

그러던 순간.

[에스티리아... 왕국....]

공동 전체에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32화 엘더 리치

사르륵.

모래 알갱이가 하나둘씩 굴러떨어지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모래 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래로 천천히 굴러떨어지는 사령의 보주.

이윽고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형상을 가진 것이 보주를 한 손에 쥐었다.

'저건....'

어떤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칠흑의 로브.

그 테두리에는, 인간의 언어로 읽을 수 없는 금색의 문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러한 로브를 두른 건 가슴 부근에 붉은 핵을 지닌 회색의 해골이었다.

세간에서 이러한 존재를 명명하길.

"에, 에, 엘더 리치...."

쿤엘의 목소리가 겁에 질린 듯 흔들렸다.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엘더 리치(Elder Lich).

3위계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 리치의 상위종.

양눈에 담긴 푸른색의 불꽃을 빛내며, 무려 5위계 마법을 다루는 강대한 언데드로 알려져 있다.

모험가 길드가 책정한 엘더 리치의 위험도는 '최소' 미스릴 등급.

'그런데 듣던 것과는 다르군.'

저 엘더 리치의 두개골 안에는 자색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

신체 또한 리치보다 더욱 거대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더 리치가 말했다.'

정확히 사람의 언어로.

어눌하긴 했으나 과거에 본 통곡의 기사보다는 유창했다.

어쩌면 사령의 보주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베르덴이 경계를 극도로 높였다.

상대는 5위계 마법사이기도 하며.

사령의 보주를 지닌, 일반적인 엘더 리치와 달리 지성을 갖춘 특이종이다.

저 언데드가 가진 힘을 모르는 상황에, 섣불리 기습을 하려 움직였다간 불리해질 수도 있다.

'지금은 판단이 아닌 관찰이 필요할 때.'

베르덴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봤다.

그때, 엘더 리치가 다시 턱뼈를 달싹였다.

[너희는...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왔나?]

소름이 끼치는 무거운 음성.

언데드의 목소리에는 명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흑마법사였다.

"아아... 아...!"

쿤엘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가 느끼고 있는 사령의 기운은 여태껏 겪어 본 것, 그 이상.

이건 비올라... 아니, 노사에 필적하는 압박감이었다.

'사령의 보주를 든 게 하필이면 엘더 리치라니...!'

최악이다, 최악이야.

죽음의 기사보다도 훨씬 강력한 언데드가, 사령의 보주를 손에 넣고 어떠한 진화를 거친 게 분명하다.

흑마법사이기에 알 수 있다.

저 엘더 리치는 세간에 익히 알려진 개체하고는 다르다는 걸.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뿐이었다.

<비행>

화아악.

머리로 결정하는 것보다 빠르게 쿤엘이 날아오르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지금 사령의 보주가 문제가 아니다.'

저건 회수가 불가능하다.

노사가 직접 나서야만 해결 가능한 커다란 문제다.

그러나 엘더 리치는 쿤엘의 도주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에스티리아아...!]

엘더 리치가 손에 쥔 사령의 보주에서 빛이 명멸했다.

허공에 나타난 어둠의 형상.

그것이 순식간에 쿤엘을 따라잡더니 단숨에 그의 육신을 움켜잡았다.

우직. 우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악!"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한순간에 잡혀 온 쿤엘이 엘더 리치의 발 앞에 떨어졌다.

"이익...!"

어금니를 깨문 쿤엘이 스태프를 다잡았다.

아무리 두려움에 질렸어도 궁지에 몰린 이상 저항할 기력은 있었다.

<고통의 사슬>

<고통의 절규>

<본 자벨린>

<어둠 채찍>

본능적으로 떠올린 흑마법을 여지없이 쏟아 냈다.

싱글, 더블 캐스팅.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며 마력회로에 부하가 쌓인다.

점차 숨이 차올랐으나 쿤엘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만 갔다.

5위계 흑마법 <불사자의 장막>.

사령의 보주로 한층 강화된, 엘더 리치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자색의 보호막에는 일절 흠집도 나지 않았다.

특히나 저주에 특화된 쿤엘과는 상성이 맞지 않은 것이다.

언데드에게 저주가 통할 리가 없으니까.

"허억, 허억...."

이내 마력이 고갈된 쿤엘이 숨을 토해 내며 무릎을 꿇었다.

마력회로에 과부하까지 찾아왔는지 얼굴과 목 부근의 핏줄이 한층 더 도드라졌다.

가느다란 손가락뼈가 쿤엘을 가리켰다.

콰지지지직.

지면 아래에서 솟아난 날카로운 뼈들이 일제히 쿤엘을 관통했다. 부위는 구별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같았으니까.

이어 뼈가 벌어지며 쿤엘의 시체를 아홉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그를 본 엘더 리치가 삐딱하게 턱을 저었다.

[너는... 에스티리아가... 아니다....]

엘더 리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이번엔 베르덴과 시선을 마주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어디에 있지?]

무거운 살의가 공간을 잠식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이란 개념이 연상될 정도로 짙고 강렬한 기운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에스티리아 왕국에 원한이 많은 모양이군.'

어쨌든.

화아아악.

베르덴의 전신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태연하게 언데드의 살기를 받아 낸 그의 벽안이 푸른색으로 명멸했다.

'5위계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강적.

결코 안일하게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감각이 소리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없다.

아무리 위계 차이가 있다고 한들, 사체 따위에게 겁먹을 정도로 베르덴은 나약하지 않았다.

쿠웅!

베르덴의 마력과 엘더 리치의 마력이 충돌했다.

모래가 휘몰아치고 중압감이 강하게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엘더 리치였다.

[에스티리아느은! 어디에 있나아!]

증오의 절규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것이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콰아아아아앙!

번쩍이는 섬광.

막대한 충격이 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흑마법사 집단.

주검의 영광 은신처의 토벌.

본래라면 칼리아 본인이 나서야 했었으나 가주에게 근신 처분을 받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직속 기사단도 마찬가지.

그래서 단장 베스파가 비밀리에 뛰어난 기사 몇 명을 데리고 토벌대를 이끌었다.

가문에 반하는 행동이었으나 그들이 충성하는 건 어디까지나 칼리아뿐.

그녀의 명령이라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그것이 기사였으니까.

베스파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잘 따라 주는군.'

토벌대의 구성원은 칼리아가 합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고용한 자들이었다.

최소한 검증되기는 한 자들이라 그런지 통솔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루아스교에서 파견된 성기사와 성직자도 그렇고.'

지금까지는 순조롭다.

그렇게 기민하게 산맥을 질주하던 그때였다.

"저기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빛으로 물든 성기사의 시야에 아주 미약하게 보였다.

산 꼭대기를 감싸고 있는 불투명한 무언가가 말이다.

성직자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추측상 흑마법을 사용한 마법진으로 은폐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군요."

마법진에 해박한 마법사나, 신성력이 높은 교인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만약 성기사 또한 사전에 흑마법사의 은신처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

"정지."

베스파가 손을 들자, 토벌대가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미 오면서 토벌 계획은 전달했다.

말없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토벌대가 세 분대로 나뉘었다.

각자 워렌스가 말해 준 은신처의 통로를 점거하고 일제히 포위하여 토벌을 개시할 심산이었다.

정면을 맡은 베스파와 성기사. 그리고 소수의 토벌대원들.

각자 기운과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토벌, 시작.

쿠웅!

지시할 필요도 없이 단숨에 흑마법진을 돌파했다.

절벽 위에서 반응한 흑마법사들이 급하게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느껴진다.

하나 그보다도 빠르게 토벌대가 산 정상에 도착했다.

촤아아악!

허공에 잔상을 남긴 베스파의 검기가 흑마법사들을 베어 갈랐다.

사방에서 저주가 날아왔으나 성기사가 방패를 들고 빛의 막을 둘렀으며, 후방에 있던 마법사들이 마법을 쏘아 내 놈들의 빈틈을 타격했다.

'이걸로 바깥에 있던 흑마법사는 전멸.'

베스파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섬뜩한 동굴.

3왕자와 손을 잡은, 사악한 흑마법사의 은신처가 앞에 있었다.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부디 별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건만....

'그나저나 그 마법사는 살아 있나 모르겠군.'

베스파가 베르덴을 떠올렸다.

사령의 보주를 찾으러 홀로 금지로 향한 마법사.

덕분에 흑마법사의 토벌에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으나....

'솔직히 말해 칼리아 님이 그의 요구를 수락하신 건 도박수에 가까웠다.'

사령의 보주.

회수하러 가자니 전멸의 위험이 컸고, 포기하자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령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한들, 그렇구나 하며 가문의 힘을 빌려줄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왕국의 금지였으니까.

만약 기사들이 몰살당하면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책임 또한.

그렇기에 감히 보주의 수색을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애셔가 나섰다.'

칼리아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령 실패할 가능성이 아득히 높을지라도. 더군다나 본인이 나선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운이 좋아 무사히 보주를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런 마찰도 없이.

물론 그럴 확률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베스파는 그저 칼리아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스파는 토벌대와 함께 은신처 안으로 들어갔다.

* * *

콰아아아앙!

화염 광선과 부정(不淨) 광선이 충돌했다.

중심에서 일어난 작은 폭발에 휘몰아치는 대기. 베르덴이 마력을 강하게 비틀어 앞으로 내던졌다.

<화염폭풍>

바람의 해일이 불길을 휘감았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흑마법사들의 사체를 소멸시킨 폭풍이 엘더 리치를 집어삼켰다.

언데드의 약점 중 하나인 화염.

과거에 만난, 어둠을 두른 통곡의 기사라고 해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다.

그러나 놈은 달랐다.

불길 사이에서 명멸하는 자색의 빛. 이내 폭풍 자체가 얼어붙으며 산산조각이 났다.

엘더 리치가 손아귀를 뻗었다.

<크라이오>

엘더 리치를 중심으로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공동에 떠다니던 공기, 모래, 먼지까지 전부 얼어붙으며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5위계 마법이라고 하나, 베르덴이 알고 있는 기존의 위력보다 높다.

분명 사령의 보주가 엘더 리치 자체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본래라면 마법의 시전자 또한 죽었을 위력이었으나, 언데드인 엘더 리치는 당연히 논외였다. 냉기에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베르덴에겐 치명적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군.'

그러나 무식한 마법이라면 베르덴도 일가견이 있다.

쿵!

오큘러스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지면 아래로 광활하게 퍼져 나가는 마력.

이번에는 베르덴을 중심으로 공동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붉은 열기가 지면의 틈새를 타고 올라와 어둠을 밝혔다.

<격변>

마치 화산의 폭발.

치솟은 불기둥이 한기를 대번에 뒤엎으며 마법을 완전히 상쇄했다.

얼음과 용암이 부딪치며 수증기를 자아내는 지대, 그 사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엘더 리치가 보였다.

'확실히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법사와는 다르다.'

사령의 보주로 강화된 엘더 리치의 마법과 저주는 위력적이다.

과거의 기억으로 가늠해 봤을 때 보헤미른 마탑의 5위계 마법사보다도 더욱.

합성 마법과 혼돈 마법이 있다 해도 마법전 자체는 베르덴이 밀리는 게 당연했다.

'비장의 수단이 있긴 하지만....'

성신 마법.

유성과 혜성 중 하나만 사용한다고 해도 전황을 단숨에 압도할 수 있다.

'이번엔 쓰지 않는다.'

간단한 이유다.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으니까.

5위계를 코앞에 둔 베르덴.

벽을 넘어서려는 그에게, 저 엘더 리치는 성장의 제물로 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런데도 하르칸의 마도에 의존하기만 한다면, 베르덴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엘더 리치는 결국 발판일 뿐.

'그러니 짓밟고 올라선다.'

순수한 마법사로서.

두근.

베르덴의 심장과 마력회로가 맥동했다.

133화 5위계

누구에게나 초행길은 어려운 법이다.

낯선 풍경,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 미혹, 그 두려움.

언제 목적지에 다다를지 알 수 없는. 그리고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미지.

누군가는 도중에 무너져 주저앉으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 이는 망설이고, 준비되지 않은 자는 포기와 함께 스스로 길을 되돌아간다.

가본 적 없는 길이란 그런 것이다.

단 한 걸음을 내딛는 데 많은 용기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과정을 견디는 자만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을 이미 걸었던 자라면 어떨까.

한순간에 불과할지라도 목적지에 도달했다면?

그리고 그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될 만한 역경과 고난을 견딘 자라면? 완벽을 넘어 완전하게 준비를 갖춘 사람이라면?

두려움이 생길 이유가 없고, 굳이 용기를 가질 이유도 없다.

그저 움직이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자연스레 길을 인도할 테니.

────쉬이익!

녹색의 구체가 스치듯 옆을 지나쳤다.

끝자락이 부식되어 손상된 유자의 로브. 만약 신체에 직격당한다면 즉사 혹은 그 부위를 절단해야 할 터.

즉각적으로 회피 기동을 펼친 베르덴이 오큘러스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등 뒤로 위력적인 흑마법과 저주가 쏘아졌다.

이내 머리로 뻗어 오는 사슬을 피해 낸 베르덴이 역으로 엘더 리치를 향해 육박했다.

<어스 크랙>

마안을 이용한 트리플 캐스팅.

총 세 방향에서 날아온 거대한 암석 파편들이 엘더 리치를 덮쳤다.

놈은 항상 그랬듯 <불사자의 장막>으로 마법을 막아 냈으나, 베르덴의 대지 마법은 마법서로 강화된 위력을 품고 있다.

쩌적.

성벽과 다름없는 장벽에 미세한 금이 생겼다.

그것을 본 베르덴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허공에 흩날린 수많은 파편이 날카로운 가시로 변화되어 다시금 장막을 타격했다.

'장막을 유지하는 동안 엘더 리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 명확한 빈틈을 노린 베르덴이 지척에 다가갔다.

전력으로 휘두른 오큘러스.

충격파에 직격당한 장막에서 소리가 나더니 이내 수백 갈래로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필요한 건 관통력.

거대한 암석의 창에 불길을 심었다. 그리고 후면에 압축된 공기를 폭발시켜 위력을 극대화했다.

쩌어어엉!

불사자의 장막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덴의 마법은 엘더 리치의 왼쪽 갈비뼈 두 개를 앗아 갔다.

엘더 리치의 급소는 다름 아닌 가슴 안에 숨겨진 붉은 핵.

급소에 스치듯 비껴 나간 충격에 주춤거린 엘더 리치, 놈의 두개골 안에 있는 자색 불꽃이 강하게 흔들렸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격분한 엘더 리치의 손에서 사령의 보주가 명멸했다.

<부정폭발>

콰아아아앙!

부정한 폭발이 베르덴을 덮쳤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다. 순간 뇌진탕이 일며 시야가 흔들릴 정도의 위력.

콰드드드드득.

멀리 나가떨어진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땅에 박아 제동을 걸었다.

숨을 토하며 충격을 버텨 낸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조금 더.'

시전 속도를 극적으로 단축하고 마법을 합성했다.

마안에서 통증이 느껴졌으나 여력은 충분하다.

글러트니의 송곳니, 루펠을 상대했을 때에 비하면 부담이라고 할 것도 없다.

<용암격창>

시뻘건 용암의 창이 엘더 리치의 몸통을 노렸다.

그러자 엘더 리치가 손을 휘저었다.

사방에 칠흑의 안개가 내려앉더니 그에 휩싸인 용암의 창이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 안개 속에서 나타난 합성 마법이 시전자인 베르덴을 향해 쏘아졌다.

'설마 공간 마법인가?'

...자세히 보니 아니다.

저건 마법에 내재된 마력을 혼동시켜 의도적으로 방향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도 어려운 마법이나, 고위 속성 중에서도 최고위에 속하는 공간 마법에 비할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혹한의 반지(모조품)를 전력으로 활성화하여 빙결의 뇌격을 던졌다.

자욱해진 수중기.

정확히 서로의 위력만을 상쇄한 마법이 그대로 조각나 사라졌다.

그때, 베르덴의 주위에서 스켈레톤들이 솟아올랐다.

흑마법사 쿤엘에 의해 저주를 받은 땅.

지형조작이 불가능한 지면을 엘더 리치가 불사자의 영역으로 만든 것이다.

모래 더미에서 솟아난 수십 마리의 언데드가 턱뼈를 딱딱거리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열뢰>

베르덴이 붉은 번개를 내리꽂았다.

저급한 언데드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잿더미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더 리치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불사의 화염>

검붉은 불길이 스켈레톤 무리를 휘감았다.

일시적으로 화염에 면역을 갖춘 놈들이 다시금 앞길을 막아섰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저 묵묵히 마력을 전개한 베르덴이 작게 호흡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오큘러스에 화염을 부여한 베르덴이 원소 마법과 함께 전장을 휩쓸었다.

격전에 다다른 마법전. 같은 언데드의 안위를 도외시한 엘더 리치의 흑마법이 연이어 빈틈을 노렸으나, 그럴수록 베르덴은 고양감이 치솟았다.

두근.

혈류가 가속화되며 심장이 뛴다.

대량의 마력을 소모했음에도 아직도 가득 들어찬 마력이 마력회로를 맥동시킨다.

원소 마법사의 본의는 파괴.

어느 순간 잡념은 지워지고 그러한 일념으로 좁혀진다.

과거에 경험했던 그 감각이 더욱 명확해졌다.

흐릿하게 보이던 벽이 분명히 보였으며 어느새 그 너머에 가까워지고 있다.

[...!]

줄곤 살의와 증오에 휩싸여 있던 엘더 리치가 멈칫거렸다.

언데드는 죽음에서 태어난 이형종.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베르덴의 모습에 위협을 느낀 엘더 리치가 본능적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자신의 마력과 사령의 보주에 담긴 마력을 대거 소모했다.

엘더 리치의 눈이 베르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베르덴이 멈춰 섰다. 엘더 리치에게 점지된 것이다.

일순간 충돌한 서로의 마력.

이어진 정신계에 두 존재만이 남았다.

이곳은 시전자인 엘더 리치가 곧 주인. 피시전자인 베르덴보다 수십 배 거대해진 엘더 리치가 손을 뻗었다.

뼈의 손아귀로 베르덴을 강하게 움켜쥔 엘더 리치가 저주를 펼쳤다.

<정신파괴>

쩌저저적.

손안에서 영혼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저주에 당한 자는 정신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흑마법 중에서도 현격하게 위험한, 사령의 보주가 없었다면 엘더 리치라고 해도 펼칠 수 없는 고난도의 저주였다.

엘더 리치가 주먹을 꿈틀거렸다.

잘게 짓이겨진 영혼의 잔재가 느껴진다. 산 자의 죽음을 갈망하는 언데드의 본능이 기분 좋게 자극되었다.

그때였다.

[...!]

정신계 안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엘더 리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끝을 모를 바다가 존재했다. 깊이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푸른 어둠.

이내 심연의 해일이 엘더 리치를 잠식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했다.

인간을 벗어난,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마력을.

그 순간.

화아아아악!

정신계에서 엘더 리치가 추방되었다. 완전히 폐허가 된 공동으로 돌아온 그의 두개골에 커다란 금이 갔다.

스스로 내건 저주가 실패하며 시전자에게 돌아온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악...!]

막대한 격통이 영혼까지 전해졌다.

절규하며 머리를 부여잡은 엘더 리치가 주춤거리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정신적 시체가 되어 있어야 할 마법사가 있었다.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넘어섰군."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는 벽안.

푸른 심연을 담은 시선이 엘더 리치를 향했다.

* * *

역천을 이루어 1위계에서 2위계.

마력회로 확장제와 마법전을 계기로 2위계에서 3위계.

하르칸이 마도로 빚어낸 포션을 복용하고 3위계에서 4위계.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과 지금의 계기로 4위계에서 마침내 5위계까지.

보헤미른 마탑을 벗어난 지 328일 18시간 32분 19초가 지난 시점.

베르덴은 단언하건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성장 속도로 5위계에 도달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군.'

동력원의 마력을 견뎌 내기 위해 억지로 육체를 부숴 가며 올라섰던 5위계.

당시와 비슷한 감각이긴 했으나 실제로는 확연히 달랐다.

베르덴은 스스로를 관조했다.

그의 육체는 어떠한 무리도 없이 5위계의 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위계를 아득히 벗어나 있던 마력량이 더욱 깊고 방대해지며 전신에 충만감이 감돌았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건....'

마력의 근원이 담긴 심장.

그 안에 미지의 마력이 잠들어 있는 게 느껴진다. 베르덴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다.

이건... 그래, 마치 마탑의 동력원을 마주한 듯한 기분과 흡사했다.

'역천을 이루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긴 건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나 이게 역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위계가 성장할수록 심장 안에 담겨 있는 마력이 해금된다고 볼 수 있었다.

마치 베르덴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마력량만큼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이 비정상적인 마력량 또한 이해가 가는데....'

역천의 이론을 창시한 베르덴조차 원인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뭐, 어쨌든.

그건 나중에 알아낼 일이고.

'사령의 보주부터 회수한다.'

엘더 리치는 현재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지금의 베르덴이라면 토벌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덕분에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5위계에 올랐으니....

'한 번에 보내 주는 게 좋겠군.'

베르덴이 마력을 일으켰다.

그에 반응한 엘더 리치가 다시 사령의 보주를 이용해 마법을 구현했으나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속성으로 변환되는 마력.

오큘러스를 중심으로 마법의 화염의 고리를 형성했다. 그 여파만으로도 근처에 있는 대지가 녹아내렸다.

'3위계 마법은 계열의 바탕이 되며, 4위계 마법은 다양성을 가진다.'

그리고 5위계 마법은 분명하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거나 광범위하지 않더라도 보다 마법의 계열에 특화되어 그 성질을 오롯이 드러낸다.

원소 마법의 본의는 파괴.

베르덴이 구현하고 있는 마법은 정확히 단일 개체만을 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미넌스>

<활염>

<스파이럴>

세 가지의 마법이 조화를 이룬다.

5위계 합성 마법은커녕 5위계 마법조차 다뤄 본 적이 없었으나 베르덴의 마력은 일절 흔들리지 않았다.

이론은 옛적부터 완전했으니까.

화염의 고리가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나선 형태로 풀어헤쳐진 그것들이 다시금 모여 주먹만 한 홍염의 구체를 만들었다.

일반적인 화염구보다도 작아 보이나, 그 안에 담긴 마력은 가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엘더 리치가 필사적으로 마법을 쏘아 냈다.

그러나 전과 달리 위력적이지 않다.

아무리 언데드라고 할지언정 정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이상, 제대로 된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와 더해서 베르덴의 마법은 이미 완성되었다.

현재 그가 구현할 수 있는 원소 마법 중에서도, 가장 범위가 국한되어 있으나 또한 가장 위력적인 마법.

쿠웅!

반작용으로 인해 베르덴의 몸이 뒤로 밀리며, 홍염의 구체가 사출되었다.

앞길을 막는 빙결 마법을 단번에 지워 버린 마법.

음속을 넘어선 그 속도는 느릿한 언데드가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엘더 리치가 마력방벽을 둘렀으나 당연하게도 막아 낼 리가 없었다.

콰직.

일직선으로 마력방벽을 꿰뚫고 엘더 리치에게 도달했다.

정확히 놈의 급소인 새빨간 핵에 착탄한 마법. 이윽고 쩌저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5위계 합성 마법.

<적광赤光>

내부에서 터져 나온 폭발이 오직 엘더 리치만을 집어삼켰다.

134화 다녀왔습니다

그는 에스티리아 왕가에 충성하는 궁정 마법사였다.

왕가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일이었다.

공화국과의 전쟁 도중 반란 혐의를 받고 있는 자국의 병사들을 생매장하는 일이든.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구한 마을 사람들을 구속해 신임 재상에게 인계하는 것이든.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고이든 간에 그저 충성심 하나로 견뎌 왔다.

왕국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불순분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실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인체 실험.

왕가의 명으로 행해진 끔찍한 결과물이,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잔혹한 끝을 맞이한, 저주받은 장소를 목격했다.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병사들이 매장되었어야 했는지, 끌려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또한.

이건 왕가의 이면에 숨겨진 끔찍한 그림자였다.

그 직후 한 사내가 찾아왔다.

궁정 마법사의 정점이자 위인으로서 존경해 마지않던 마도사.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네한테서 배반 혐의가 의심되네.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리비안트 공작과 내통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연히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공작은커녕 공작의 영지조차 가 본 적 없는데 어찌 첩자질을 할 수 있겠는가.

이건 단순한 입막음일 뿐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왕가의 명을 받아 수많은 사람을 해친 것과 같은.

[에스... 티리... 아....]

저항은 했으나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5위계, 그것도 마도를 깨달은 마도사는 너무도 강대했다.

함께 왕가의 임무를 행하던 동료들의 목숨을 방패 삼아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망쳤으나,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래서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죽었다.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고통.

필사적으로 동굴 내부를 뚫었으나, 까마득한 구렁 아래로 떨어진 건 두개골 하나와 뼛조각 몇 개뿐이었다.

[에스티리... 아...!]

하지만 언데드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운 좋게 엘더 리치가 된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어둠 속을 방황했다.

그 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사령의 보주를 얻어 과거의 기억과 지성을 서서히 되찾았다.

이윽고 새로운 목적마저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개처럼 충성하던 자신을 죽인, 왕가에 대한 복수를.

그랬어야 했는데.

[왕가는... 어디에....]

엘더 리치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핵 내부부터 완전히 파괴된 터라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

손끝부터 시작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푸스스스스.

잿더미로 화하기 시작하는 엘더 리치의 육신.

허공에 녹아내린 검은 로브마저 자취를 감추고 난 자리에는, 오직 사령의 보주만이 남아 있었다.

* * *

"끝났군."

엘더 리치는 완전히 소멸했다.

후우. 베르덴이 무릎에 손을 얹었다.

전투의 흥분을 서서히 가라앉히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야 당연했다.

며칠 동안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수많은 이형종과 아인종을 상대했으니까.

스스로 치열한 나날을 보내 왔다고 자부하긴 하나, 그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전투 밀도가 높았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개운했다.

역천을 이룬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5위계에 올라섰으니.

그야말로 베르덴이 살아온 일생이기에 기적적으로 이룩하게 된 성장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경험했던 경지였으니까.

설령 마력조차 움직일 수 없었던, 그저 마력회로만을 5위계의 격으로 억지로 상승시킨 것이나 그럼에도 길은 길이다.

이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고, 베르덴의 육체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들과 다르게 별다른 장애물 없이 5위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니 애써 전율할 필요도, 감탄할 필요도 없다.

그저 기뻐해라.

마침내 초월자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섰음을.

저벅.

베르덴은 발걸음을 옮겼다.

모래 더미 위에 놓인 사령의 보주. 처음 봤을 때보다 빛이 더욱 약해져 있었다.

엘더 리치로 인해 상당한 양의 마력과 사기를 소모한 모양이다.

베르덴이 팔을 뻗었다.

흑마법사 워렌스가 결코 손을 대면 안 된다고 경고했으나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이내 보주에 닿자 손끝을 타고 죽음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같잖군.'

화아아악.

베르덴의 마력이 사령의 보주를 억눌렀다.

부정한 기운이 날뛰며 반발했으나 5위계에 오른 그에게는 하찮은 반항이었다.

억지로 힘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하자 곧 잠잠해졌다.

"...!"

그때였다.

사령의 보주 내부에서 사념이 느껴졌다.

익숙한 감각. 이건 다름 아닌 엘더 리치가 남긴 증오의 기억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 놀랄 것도 없지.'

통곡의 기사의 기억.

정령의 기억.

그리고 엘더 리치의 기억까지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베르덴이 마력을 억누르며 기억의 전송을 받아들였다.

언데드의 분노에 집어삼켜지거나 정신적 충격이 발생할 일은 없다.

이건 확신이었다.

얼마 안 가 누군가의 죽음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통곡의 기사 때와는 다르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에 전보다 많은 기억의 장면들을 잡아낼 수 있었다.

베르덴이 언데드의 기억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생전에 궁정 마법사로 지내 온 엘더 리치.

왕가의 명령을 받고 국민들을 숙청하거나 조달하던 중 인체 실험에 대해 깨닫고 입막음을 당하다, 정도인가?

'사연 있는 결말이군.'

물론 베르덴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엘더 리치가 겪은 배신감 따위야 전혀 알 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주목할 건 있다.'

첫째, 인체 실험.

이걸 보는 순간 누가 벌인 짓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분명 과거의 글러트니가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리스너가 말하길, 신임 재상뿐만이 아니라 그가 데려온 마법사들이 글러트니의 일원이었다고 했었지.'

그리고 왕가의 허락하에 대규모의 인체 실험을 벌여 만 단위의 희생자를 냈으며.

결국 방주에서 직접 나서서 재상을 포함한 글러트니를 전멸하고 실험체까지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즉, 이 기억은 약 30년 전의 것이라는 뜻이군.'

대충 배경은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였다.

생전에 엘더 리치가 몸담고 있던 집단을 결과적으로 혼자서 몰살한 마도사.

그 얼굴을 베르덴이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간접적으로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숲의 정령과 함께 있던 엘프를 납치한 중년의 사내.'

세월이 다른 탓에 젊어 보이긴 했으나 동일인이 틀림없었다.

'저 마도사가 왕가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물인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어째서 엘프를 데려간 거지?

글리트니와 관련된 건가? 방주에게 척살당하지 않은 걸 보면 직접적으로 연결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다만 에스티리아 왕가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사실 베르덴도 왕가와 관계가 있긴 하다.

주검의 영광을 포함해 조합의 일각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즉, 현재 3왕자와 대립하고 있다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러다가 왕가 전체와 적대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뭐, 설마 그런 일까지 벌어지지는 않겠지.'

한 나라의 왕가와 적대하면 곧 반란이자 반역이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왕가에서 베르덴을 죽이려고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지금 상황에서는 쓸데없는 상상일 뿐이다.

'그보다는 사령의 보주를 칼리아에게 전달하는 게 최우선이다.'

등을 돌린 베르덴.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