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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의뢰 달성

올빼미가 이끄는 마차가 에스티리아 왕국을 질주했다.

말이 지친 기색이 보이면 곧장 마을이나 도시에서 말을 교체했고, 끼니 또한 육포와 같은 간단한 보존 식품으로 마차 위에서 때웠다.

베르덴이야 익숙했지만 난데없이 올빼미에게 납치당한 성직자가 견디기에는 힘든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성직자는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그는 참혹한 상태의 마법사를 보더니 곧장 치료에 들어갔다. 감염과 염증 증상을 일부 완화하고 저주로 인해 육신이 썩어 가는 속도를 줄이는 등. 다 끊겨 가는 생명을 약간이나마 연장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지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대단한 성직자군.'

마차의 흔들림에 힘들어하면서도 꿋꿋하게 치료를 이어 나가고 있다. 마법사를 살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기라도 한 듯.

신성력의 강함과 별개로 이 성직자는 타인의 존경을 받기에 마땅했다.

"으음...."

그때, 토렐드가 신음했다.

얼굴이 씰룩거리는 게 곧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일어나면 시끄러워지겠지.'

퍼억!

베르덴이 오큘러스로 토렐드의 머리를 가격했다.

꿈틀거리던 토렐드가 다시금 잠잠해졌다. 확실히 이렇게 기절해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성직자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을 테고.

그 이후로 토렐드가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베르덴이 가볍게 제압했다. 머리에 멍이 들고 약간 코피가 흐르긴 했으나 그 외엔 상처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타인이 보기엔 영 아니었다.

마법사를 치료하고 있는 성직자.

치유의 기적을 유지하느라 뭐라 반응을 할 틈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리는 들리고 곁눈질로 주변을 볼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기절한 사람을 구타하는 베르덴의 모습을 말이다. 물론 이유가 있었지만 상황을 모르는 성직자에겐 마냥 그렇게만 보였다.

'오... 루아스시여.'

성직자는 속으로 덜덜 떨었다.

그는 난데없이 자신을 납치한 올빼미보단 베르덴이 더 무서웠다. 언제 저 스태프가 자신의 머리를 가격할지 몰랐으니까.

살 떨리는 여로(旅路).

그런 성직자의 오해가 풀리는 건 라인즈에 도착한 이후에서였다.

* * *

무사히 라인즈에 도착한 올빼미와 베르덴은 교회로 향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은 루아스교가 그리 크게 자리를 잡지 못한 나라이긴 했으나 라인즈와 같은 대도시에는 주교급 인사가 머물고 있으니.

마법사의 상태를 본 주교는 당장 치료에 들어갔고, 진이 다 빠져 있던 성직자는 그대로 졸도해 같이 교회에 이송되었다.

"다행히 늦지 않은 모양이군."

비행 금지령의 마법사는 아마 살 것이다.

언제 정신을 차릴지는 미지수지만 최선은 다했다.

이제 토렐드를 칼리아에게 인계할 차례.

며칠 동안 이어진 강행군에 마차의 바퀴가 너덜거렸으나 다행히 도중에 폭삭 주저앉는 일은 없었다.

기사에게 토렐드를 넘기고 칼리아의 호출을 기다리는 동안, 베르덴과 올빼미는 잠시 미루었던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바로 토렐드의 마법 물품을 분배하는 것.

이미 오는 도중에 감정을 끝마쳤다.

토렐드가 가지고 있던 건 대부분 신체 능력을 강화해 주는 물건들이었는데, 부여 마법으로 인한 강화와 중복되지 않아 베르덴에겐 거추장스러울 뿐, 딱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수요는 충분히 있다.'

대체로 가치는 비슷하니 절반씩 가져가면 간단하다.

중요한 건 그 예외에 속하는 것들이다.

칼날에 베인 상처에 감염을 일으키는 [리자드 소드].

착용자에게 비행 마법을 부여하는 날개 목걸이, [윙 네클리스].

근육에 마비를 일으키는 독을 품은 [포이즌 클로].

일시적으로 착용자의 무게를 증감하는 [중량화 부츠].

마지막으로 하루에 한 번, 일정 이하의 마력을 흩어 버리는 [마력 무효화의 팔찌]까지.

위 다섯 가지의 장비가 분배의 쟁점이었지만,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올빼미가 흔쾌히 선택권을 양보했다.

"내가 놈의 기동성을 빼앗았지만, 결론적으로 흑랑을 제압하는 데 네 마법진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나는 이런 희귀한 팔찌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

자칫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올빼미보단 베르덴의 비중이 더 높았다. 그러니 약속대로 장비를 분배하는 수밖에.

"사양하진 않겠다."

선택할 수 있는 건 최대 두 가지.

베르덴은 먼저 [중량화 부츠]를 선택했다. 가치가 그리 높은 건 아니었으나 그나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부츠를 착용하고 효과를 확인했다.

'적절하게 쓰면 쓸 만하겠군.'

무게의 변화는 곧 변칙이기도 하니까.

더군다나 내구성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포레스트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부츠보다도 뛰어났다.

'그럼 다음은....'

베르덴은 이어 팔찌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용도를 떠나 여기서 가장 비쌌으니까. 약 두 달 뒤 열릴 암흑가의 경매장에 대비해 돈을 최대한 모아 둘 필요가 있었다.

다음으로 올빼미의 순서였다.

그는 날개 목걸이 하나를 골랐다.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곧장 목에 차고는 간단하게 시험을 마쳤다.

"비행 조작이 조금 어렵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었을 것 같군. 나는 이거면 됐으니 나머지는 다른 장비들과 함께 처분하도록 하지. 대신 나는 하나만 선택한 만큼 정산 비율을 7 대 3으로."

"처분은 네가 맡을 건가?"

"그래. 이후에 정산서를 주도록 하지. 깔끔하게."

베르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율이 적다 해도, 팔찌 하나만으로 베르덴이 조금 더 이득이었으니까.

그렇게 분배가 끝난 직후에 칼리아의 기사가 찾아왔다.

"마법사 애셔, 칼리아 님께서 부르신다."

* * *

올빼미는 칼리아의 수하다.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는 결이 다르기에, 굳이 의뢰 보수를 정산하는 자리에 같이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베르덴 혼자 칼리아와 마주했다.

"의뢰 내용대로 토렐드를 사지 멀쩡히 데려왔더군. 수고했다, 애셔."

칼리아가 베르덴을 치하했다.

물론 말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특이한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건 지폐 자체에 내 이름이 기입되어 있는 개인 백지수표다. 어지간한 귀족이라고 해도 신용이 확실하지 않으면 발급 자체가 불가능한 귀한 거지."

칼리아가 빈칸에 2억 엘크를 적어 베르덴에게 직접 건넸다.

"다이나 은행에 가면 곧바로 현금으로 바꿔 줄 거다. 뭐, 따로 현금이나 계좌 입금으로도 줄 수 있지만 나는 이 편을 선호하니 불만 없이 받아 줬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그럼 보수도 줬으니 다음 얘기로 넘어가지."

칼리아가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라인즈에 들어오자마자 교회로 향했다고 들었다. 보아하니 너희들은 부상은커녕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것 같은데...."

칼리아가 설명을 요구했다.

베르덴은 조곤조곤 상황을 설명했다.

성 지하에 잡혀 있던, 비행 금지령의 마법사와 그를 고문하고 있던 흑마법사.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사령의 보주와 배신자라는 대화 내용까지.

물론 마일드륀에서 흑마법사와 조우했다는 사족은 곁들이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증거도 없고.'

정확히 의뢰 과정에서 보고 겪었던 것만 얘기했다.

그 편이 칼리아가 이해하기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호오."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는 흑마법사의 등장에 칼리아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흑마법사라. 왕국 귀족 중에 흑마법사를 직접 휘하에 둔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비공식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군."

흑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에스티리아 왕국이 세워진 서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건 맞지만 찾아보면 없지는 않으니까. 실제로 에스티리아 왕국 국립묘지를 관리하는 것이 흑마법사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거다.

베르덴의 보고는 세간에 알려진 비행 금지령의 내용과는 상이하다는 것.

"어떤 마법사가 플리쉬르 백작의 자제를 살해하려다가 중상을 입히는 것에 그치고 도주했다는 이유로, 3왕자의 입김을 거쳐 이 말도 안 되는 금지령이 내려졌었지. 그런데 그 마법사는 정체 모를 흑마법사 집단의 배신자였고, 다른 흑마법사에게 고문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흑마법사는 사령의 보주라는 불길한 이름의 물건을 찾고 있었고?"

수상하다.

어떤 내막이 있는 게 분명하다.

"흐음...."

잠시 생각에 잠긴 칼리아.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베르덴을 직시했다.

"일단 알겠다. 기사들을 보내 마법사를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하지. 혹여 정보가 새어 나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입단속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토렐드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를 뽑아내는 대로 나도 움직이도록 하지. 놈이 가진 정보가 없다면 약속은 당연히 물거품이 되겠지만... 뭐,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칼리아도 짐작하고 있다.

토렐드의 속을 뒤집어 까면 그녀가 원하는 게 나올 거라고. 그녀의 직감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리아의 반응에 베르덴이 내심 웃었다.

'최선의 결과군.'

칼리아가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조합과 귀족을 포함해 알아서 놈들을 견제해 줄 터. 이걸로 상정했던 목적은 전부 달성한 셈이었다.

베르덴은 가벼운 마음으로 칼리아의 저택을 떠났다.

* * *

유리창 너머로 베르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아가 말했다.

"저 애셔란 사내는 어땠지?"

올빼미가 답했다.

"저번에 보고드렸다시피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판이합니다. 원거리뿐 아니라 근거리 전투에도 익숙한 듯 보였으며 즉석에서 마법진을 만들어 흑랑 토렐드를 제압하기까지 했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아직도 숨겨진 수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마법진이라... 그 어려운 걸 잘도 실전에서 써먹을 정도라니. 머리가 비상한 자로군."

칼리아가 시선을 옆으로 향했다.

"베스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기사단장 베스파.

그는 베르덴이 올빼미와 토렐드를 잡으러 간 사이 베르덴의 행적을 조사했다. 딱히 깊게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왕국의 그레이에서 이미 그 이름이 퍼지고 있었으니까.

"4위계 전격 마법사. 그 외의 원소 마법도 다룰 줄 안다고 하는 걸 보아,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미스릴 등급 파티인 만하와 토벌을 함께했을 정도면, 모험가 등급을 기준으로 백금 등급 중상위에 비견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건 최소 기준입니다. 그의 전력을 본 적이 없으니 확답을 드릴 순 없습니다만, 어쩌면 단신으로 미스릴 등급에 준할지도 모릅니다."

"미스릴이라...."

칼리아는 베르덴을 유심히 살폈다.

눈길을 끄는 잿빛 머리와 마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벽안. 어느 모로 보나 2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많아 봤자 30살을 갓 넘어선 정도일 터.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지?'

특히나 마법사다.

나이가 들수록 강해지는 게 기본적인 상식.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마법사는 그리 많지 않으며, 그런 자들은 수재, 영재 그리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어 보다 전문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20대와 30대 일생을 안전하게 길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실력이든 담대함이든 또래와는 비견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칼리아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지켜볼 가치가 있겠어.'

천재 마법사.

칼리아는 베르덴을 그렇게 기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

"토렐드가 가진 정보를 전부 확인했습니다, 칼리아 님."

"결과는?"

기사단장 베스파가 자료를 넘겼다.

쭈욱 훑어본 칼리아가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대박이로군.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큼지막한 월척이야."

칼리아는 자료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무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가보, '진실의 천칭'을 사용했으니. 사용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1년에 많아야 두 번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 천칭 앞에는 거짓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사용하려면 후작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칼리아는 보란 듯이 생략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까.

'자고로 허락보다는 용서받는 게 더 쉬운 법이니.'

칼리아는 곧바로 기사단을 소집했다.

아버지인 에스퍼렌사 후작에게 지휘 권한을 받은 백결 기사단. 언제나 칼리아와 함께 범죄자들을 쓸어버리는 이들은 칼리아의 두 번째 검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상에 선 칼리아가 말했다.

"제군."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플리쉬르 백작의 부정이 확인됐다. 마약, 밀수품은 물론이고 선량한 국민들을 잡아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군. 노예제가 폐지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노예 타령이라니. 어떻게 생각하나, 베스파?"

"그야말로 왕국을 더럽히는 주범입니다."

백결 기사단의 단장, 베스파가 답했다.

"그렇지. 정확히 에스퍼렌사의 가훈에 반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처벌해 왔던 범죄자들과는 규모가 다르다. 플리쉬르 백작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까지 줄줄이 엮여 있다. 자칫하면 왕국에 큰 소란이 일겠지."

칼리아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썩은 상처는 도려내는 게 마땅한 법이지."

기사단에게 칼리아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후광 때문이 아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수십 번이나 칼리아와 함께 악을 척결한 칼리아의 기사들이었다.

칼리아가 시선을 뒤로 향했다.

"베니엔, 로하스, 카드록스."

"부르셨습니까, 칼리아 님."

"너희들은 우리보다 먼저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에 잠입해라. 그리고 증거를 확보하면 신호를 보내도록."

셋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칼리아의 명을 받았다.

"그럼 범죄자들의 토벌을 시작한다."

칼리아와 백결 기사단은 마차에 식량과 같은 필요한 물자들을 싣고 곧장 라인즈를 떠났다.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어둠이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토렐드가 라인즈에 잡혀 온 지 고작 5시간 만에 기사단이 움직였다.

백강 칼리아.

확신을 가진 그녀에겐 주저함이라곤 없었다.

121화 유물 탐사단 (1)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은 이십 년이 넘게 운영되어 왔다.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한차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았다. 공급이 어려워진 만큼 불법 노예에 대한 수요가 폭등했으니까.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인당 수백만에서 수천만 엘크의 가치로 바뀌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당연하게도 그런 플리쉬르 백작 별장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평범한 병사로 위장한 용병들이 철저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때때로 조합 소속 상회들의 마차들이 오갔다.

이곳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는 건 백작의 보좌관, 멜베스 자작.

그는 조합의 운영자, 땅거미 상회의 베켄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애셔라는 놈을 처리하지 못했다고?"

베켄이 침을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올랜드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올랜드는 이미 페르네에게 붙었다.

그 사실을 조합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정보 교란의 무서움이었다.

"하아...."

자작이 미간을 문질렀다.

"지금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 알고는 있겠지? 안 그래도 3왕자께서 자금을 마련하라고 하셔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사소한 일로 왜 계속 내 신경을 긁는 거지?"

"빠른 시일 내에 조치를...."

"뭐?"

자작이 책상 밑으로 베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빠른 시일? 지금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당장 코앞에 암흑가와의 거래가 예정되어 있어서 바빠 죽겠는데 나보고 또 신경을 쓰라고? 요즘 들어 배가 부르더니 행동이 굼떠졌군, 베켄."

베켄이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조합의 운영자라고 하지만 귀족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한바탕 화를 토해 낸 자작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흘. 어떻게 해서든 나흘 안에 처리해라. 죽이든 회유하든."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페르네란 정보상도 근시일 내에 조합에 편입시켜라. 잡아서 굶주린 노예들에게 던져 주거나 고문을 해서라도 말이야. 알겠나?"

베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자작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만 나가서 판매할 노예들이나 정리하도록."

베켄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작이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다가섰다.

'그간의 정을 봐서 조합의 운영자로 앉혀 놨더니 일 처리를 그따위로....'

쯧, 아무래도 조만간 운영자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최근 몇 상회가 이런저런 선물들을 보내 줬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되겠지.

자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그때, 별장의 정문에 인파가 몰려 있는 걸 목격했다. 눈을 가늘게 떠서 유심히 살펴봤다.

'기사? 아니, 저 문양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생각이 날 듯 말 듯.

그러다 이내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병사들이 미처 보고하기도 전에, 자작이 먼저 저택 밖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정문에 도착하자 검붉은 머리칼의 여기사가 자작을 말 위에서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멜베스 자작."

백강 칼리아.

현 시점에서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인물이 찾아왔다.

'이런 X발...!'

자작이 목젖까지 치솟은 욕을 겨우 삼키며 표정을 관리했다.

"아, 아니,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영애께서 여긴 어쩐 일로...."

"실례했습니다. 이곳 플리쉬르 백작령에 도적단이 출몰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도적단?

자작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칼리아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상당히 악랄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어찌나 각종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자작께서도 알다시피 수년 전에 노예제가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무리는 겁도 없이 불법 노예를 매매한다더군요."

자작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반응에 칼리아가 미소를 지었고, 그와 동시에 별장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래, 그것이 신호였다.

칼리아가 검을 뽑자 그녀에 뒤에 있던 백결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멜베스 자작을 겨냥한 새하얀 도신의 검 끝. 이내 서늘한 목소리가 자작의 숨통을 옥죄었다.

"할 말은 있는가, 멜베스 자작?"

백강 칼리아.

그녀에게는 회유도 뭣도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토록 적의를 드러내며 칼을 겨냥한다는 건 이미 확신을 하고 있다는 뜻.

그렇다고 죽여서 입을 닫을 수도 없다. 백결 기사단과 칼리아의 실력은 별장에 있는 자들로는 감당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퇴로가 없다.

자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백강 칼리아,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에서 불법 노예 등 다수의 중범죄 정황 확인]

[인권이 유린된 잔혹한 현장. 라인즈 교회의 데헤른 말다니아 주교, 플리쉬르 백작 규탄.]

[보좌관 멜베른 및 조합의 땅거미 상회주 신변 확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조합의 상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과의 연관성이────]

오늘 아침, 아세른에 발간된 신문 내용에 페르네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백강이란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네요."

"그렇군."

별장에 들이닥친 다음 날, 근처 도시에 소문이 쫙 퍼졌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아세른까지 닿기까지. 이건 움직임과 동시에 신문사에 손을 썼다는 뜻으로, 조합뿐만 아니라 그에 관련된 귀족들에게 직격타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마침 조합의 운영자 중 한 명까지 별장에 있었을 줄은... 너무 운이 좋은데?'

페르네? 애셔?

조합은 더 이상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쯤 상황을 수습할 길을 모색하고 있겠지. 꼬리를 어디까지 자를지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합의 세력이 일부 와해될 터.

계획한 것 이상의 결과.

페르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설마 이렇게 보기 좋게 상황이 역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전적으로 베르덴 덕분이었다.

의뢰부터 시작해 칼리아의 설득까지. 그는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페르네도 성과를 보여 줄 때.

얼마 전 얻어 낸 정보들을 추려서, 보기 좋게 만든 서류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저번에 말씀드렸던 유물 탐사단에 대한 정보예요. 타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 조금 어렵긴 했지만 겨우 구할 수 있었죠."

베르덴이 즉시 서류를 펼쳤다.

페르네가 찾은 유물 탐사단의 이름은 '탐색자들'.

그들의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보던 베르덴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구성원이 화려하군."

"그렇죠? 라이반 크루소라는 사람이 리더인데 10개의 마탑 중 하나인 헬리온 마탑, 인챈트리 학파의 부여 마법을 전공한 5위계 마법사라고 해요. 2인자로는 한스 데이켈이라는 4위계 마법사가 있고요. 탐사단 전체적으로 마법사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요."

3위계와 4위계는 그렇게까지 드문 편은 아니다.

왜냐하면 범위가 워낙 넓으니까. 숱한 마법사가 3위계 내지 4위계 하위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통계학적인 근거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5위계는 다르다.

그들은 벽을 넘어선 존재들로, 베르덴도 마탑을 나선 이후로 공국의 마도사, 페르드라 불리는 주석 궁정 마법사 외에는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드물었다.

그때, 페르네가 말을 이었다.

"서류에 적힌 내력을 보면 아시겠지만 다른 나라에서 귀족은 물론이고 황족이나 왕족 그리고 마탑에서도 의뢰를 받아 성공적으로 완수한 탐사단이에요. 당연히 이쪽 업계에서는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만큼 신뢰성이 높다는 뜻이니 뒤통수를 칠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만약 의뢰자를 배신하고 유물을 갖고 도망쳤다간 탐사단은 그대로 끝장이다. 5위계든 뭐든 한번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그러니 페르네 말대로 뒤통수를 맞을 걱정은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유물이었다면 말이다.

'마도왕,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마법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최초이자 최후의 9위계 초월자다. 그런 존재인 만큼 세상에는 마도왕과 관련된 유물들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고대 아티팩트가 포함되어 있다.

보헤미른 마탑주의 다서 번째 컬렉션 [두 번째 회로].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만든 인공적으로 만든 아티팩트로, 지금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성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그 위상 정도는 되어야 일반적인 고대 아티팩트와 견줄 정도다.

베르덴도 아티팩트 [삼원색의 중심]과 인공 아티팩트인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소유하고 있지만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도왕의 유물은 그야말로 격이 다르다.'

고대 아티팩트 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성능을 지녔다.

베르덴은 옛날, 마탑에서 마도왕의 지팡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마도의 징표]

마도왕의 고유 마법이 각인된 것으로, 기동하는 순간 대도시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직접 본 적도 없고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지만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지.

'마법사에게 마도왕이란 그런 존재니까.'

베르덴은 마도왕을 딱히 숭배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마법의 역사는 인정한다. 세상의 어느 누가 그러지 않겠냐만.

어쨌든 그런 존재의 무덤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마도왕의 유물을 손에 넣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고대 아티팩트일 가능성을 배제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세상에 나타난 적 없는 마도왕의 유산.

과연 유물의 정체를 알고도 유물 탐사단이 순순히 의뢰를 진행할까? 천만에.

베르덴은 마법사라는 족속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탑 출신이라면 말이다.

그들은 이득이 손해를 앞서는 순간, 보란 듯이 손바닥을 뒤집을 자들이었다.

'유명세 따윈 알 바 아니다.'

페르네가 말하길, 그들은 베르덴이 가진 유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

그게 마도왕과 관련되었다는 걸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됐든 경계를 늦출 생각은 없었다.

빼앗으려 하면 죽인다.

속으로 살벌한 원칙을 세운 베르덴이 페르네에 물었다.

"언제 온다고 하지?"

"내일 모레요."

그렇게 날짜가 바뀌며 유물 탐사단이 아세른에 찾아왔다.

* * *

유물 탐사단.

세계 각지에 잠들어 있는 유적을 발굴하는 집단. 이름만 들으면 단순한 역사학자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는 다르다.

그들은 차라리 도굴꾼에 가깝다.

옛 유적을 파헤쳐 유물들을 발견해 파는 것이 주 수입이다. 특히 희귀한 마법 물품이나 아티팩트, 심지어 고대 아티팩트까지 발굴하기도 하니.

그리고 직업 특성상 위험한 험지를 다니는 건 물론이고, 유물들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기에 구성원은 마탑 출신 마법사, 고위 등급 모험가, 명성 높은 용병 등 각 분야의 엘리트로 이루어져 있다.

탐색자들의 리더 라이반은 한스 데이켈과 함께 아세른에 입성했다.

주위를 둘러본 한스가 표정을 찡그렸다.

"역시 에스티리아 왕국 아니랄까 봐, 도시가 상당히 저급하군요."

도시 바깥 마을의 건축 형태는 국제법에 맞지 않으며, 도시 내부 또한 난잡하기 그지없다. 크기만 크면 뭐 하나. 이렇게나 시민들의 경제나 의식 수준이 낮은데.

특히나 골목 주변에서 껄렁대고 다니는 불량배 같은 몰골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스는 선민의식이 강한, 전형적인 마법사였다.

"한스, 전부터 그랬지만 너의 행동을 억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속으로 하도록. 그보다는 우릴 찾은 고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바람직하겠군."

"아, 그 유물에 대해서 말이군요."

"정말로 본 적이 있는 물건인 건 확실하겠지?"

한스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확실합니다. 몇 년 전에 다른 유물 탐사단에 있던 지인이 그 유물과 거의 똑같은 그림을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가 유물에 관련된 유적을 찾는 그 한 건에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자랑하고 다녔으니까. 그때는 배가 아파서 무시했는데, 훗날 지인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몸담고 있던 탐사단이 실종되었다고. 그것도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말이다.

"왕국의 치안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탐사단이 전부 살해당했을 리도 없으니 분명 유적을 찾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유적에 엄청난 것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로군."

대부분, 아니 모든 경우에 그러했다.

위험하고 험한 지형에 있는 유적일수록, 함정이 많은 곳일수록 대단한 것이 잠들어 있다. 중요한 것일수록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철저히 지키는 것이 상식이니까.

라이반과 한스는 기대감을 품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운영되고 있지 않은 페르네의 주점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그들을 알아본 보랏빛 머리칼의 여성, 페르네가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탐색자들의 리더 라이반 크루소 님. 그리고 한스 데이켈 님."

"음, 그대가 페르네인가? 알아봐 주니 고맙군."

"당연히 그래야죠. 저를 따라오세요. 바로 의뢰자에게 안내해 드릴게요."

둘은 페르네를 따라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베르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22화 유물 탐사단 (2)

라이반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훨씬 어린 의뢰자로군.'

많아 봤자 20대 후반인가?

외견으로만 판단하자면 범상치 않아 보인다.

'피부가 희고 고운 걸 보니 검사는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마법사 또한 아니다.

기색을 살짝 가늠해 봤음에도 마력이 파악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둘 중 하나겠지.

일반인 중에서도 극히 적은 마력을 타고났거나 라이반과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마법사거나.

당연히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

라이반조차 평생에 걸친 노력 끝에 다다른 경지인데, 새파랗게 어린 자가 그와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설마 마탑주 수준의 재능이 아니고서야.

귀족이나 돈 많은 어딘가의 자식.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부류의 고객일 것이다.

라이반은 베르덴을 그렇게 판단했다.

"나는 라이반 크루소라고 하네. 과분하게도 탐색자들의 리더를 맡고 있지. 그리고 이쪽은 한스 데이켈일세."

"한스 데이켈이요."

베르덴도 자신을 소개했다.

"애셔라고 합니다."

"반갑네, 애셔."

셋은 한 테이블에 앉았다.

페르네는 슬쩍 음료를 가져다주곤 방해가 되지 않게 방을 나섰다.

간단히 목을 축인 라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유물 탐사단의 방식에 대해 설명해 주도록 하겠네. 법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유물 탐사라는 게 워낙 오해가 벌어지기 쉬운 일이니 말이야."

"그러시죠."

"한스, 부탁하지."

한스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흠흠, 대개 상식이 부족한 자들은 유적 탐색을 단순한 운과 노동이라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인적이 없는 장소를 뒤지면 뭐라도 나오는 줄 아는 멍청이...."

"사족은 빼게."

"아, 예. 어쨌든 그건 당연하게도 틀린 생각입니다. 유적과 유물이란 건 과거의 산물 그 자체니까요."

기본적으로 가치가 있을 법한 유물과 유적은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것은 곧 과거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가 소실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서 비롯된 건 언제나 기록이 남아 있는 법.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자 생물의 본능이었다.

"우리 탐색단 정도 되는 유물 탐사단은 대륙 위치에 상관없이 방대한 역사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유물과 유적을 둘러싸고 있는 패턴 또한 마찬가지죠."

패턴.

'탐색자들'은 특정 유물의 형태로부터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물과 관련된 유적을 발견하는 것 또한.

세계에 존재하는 유적들에 대한 특성을 전부 꿴 그들은 지형과 지물 심지어 관련 역사의 문화적 특색으로도 위치를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단축되는 시간은 다른 유물 탐사단과 비교할 수가 없다.

라이반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페르네가 그렸던 유물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패턴으로 봤을 때, 이 유물은 열쇠나 신호기 혹은 무언가를 봉인하는 용도로 사용된 듯싶네. 실물을 보기 전까지 뭐라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간 쌓아 온 지식과 경험으로는 위 세 가지 중 하나가 분명하네."

라이반이 그림을 슬쩍 베르덴에게 밀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했으니 이제 유물을 보여 달라는 뜻이었다.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저번에 연락을 받은바, 탐색자들이 이 유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물을 보여 드리기 전에 그 얘기부터 듣고 싶군요."

라이반이 눈짓했다.

코를 씰룩인 한스가 팔짱을 끼고는 입을 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물 자체의 내력은 모릅니다. 대신 과거 그 유물에 대한 의뢰를 받은 유물 탐사단에 대해 알고 있죠."

과거?

문득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방주의 후보자가 관련된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방주가 친절하게 위치까지 안내해 주지는 않았을 테니. 마도왕의 무덤을 찾을 수 있는 유물을 쥐여 주고 찾으라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또한 시련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베르덴과 마찬가지로 유물 탐사단을 통해 의뢰를 했을 터.

"그 탐사단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바로 이번 탐사의 핵심이지. 당연하게도 알려 줄 수는 없네.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말일세."

핵심이라.

섣불리 말하지 않는 걸 보아 유물 탐사단의 소재만 파악하면 유물과 관련된 유적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

설령 전문적인 유물 탐사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럼 이제 유물을 봐도 되겠나?"

"좋습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가방에서 마도왕의 유물을 꺼내 라이반에게 보였다. 한스가 일어서서 라이반과 함께 유물을 관찰했다.

"타원형의 푸른 사파이어. 그리고 황동생의 금속이 그 중심을 고리처럼 감싸고 있는데... 아주 특이한 형태야. 금속에 미세한 문자가 새겨져 있긴 한데 난생처음 보는 것이군."

"세공 수준도 굉장히 뛰어납니다. 안이 투명한 걸 보니 무언가를 봉인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마법진이나 룬은커녕 사파이어 자체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으니, 유적 근처에 다가가면 반응하는 신호기일 가능성도 적은 것 같고요."

"그렇다면 유적을 여는 열쇠일지도 모르겠군."

라이반과 한스가 가열하게 대화를 나눴다.

베르덴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행히 못 알아보는군.'

오히려 좋다.

베르덴은 눈앞에 있는 유물 탐사단을 믿지 않는다.

만약 이 유물이 마도왕과 관련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관련 유적 탐사단의 행적만 알 뿐.

유물의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는 상황은, 베르덴에게 있어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한동안 유물을 관찰하던 두 사람.

이내 결론을 내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략적으로 해석해 본 결과, 이건 열쇠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 그리고 과거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특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걸 보아, 어떤 개인이 만들어 낸 게 분명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네."

그렇겠지.

다름 아닌 마도왕의 유물이니까.

라이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금속 고리의 문자는 그 위치를 말하는 듯 싶네. 이걸 해석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군."

"얼마나 걸립니까?"

"운이 좋다면 1년. 평균적으로는 3년 정도가 걸릴 걸세. 처음 보는 문자다 보니 해석을 하려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돼서 말이네."

해석만으로 그 정도라.

"그렇다면 유물 탐사단의 행적을 따라가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 물음에 라이반이 미소 지었다.

"그 반의반도 걸리지 않겠지. 본래 소비해야 할 노력과 돈을 엄청나게 아낄 수 있다는 건 덤이고."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 담긴 말투.

잠시 라이반과 시선을 마주하던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계약서 좀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한스가 냉큼 계약서와 필기도구를 꺼내 베르덴 앞에 놓았다.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표준 계약서일세. 왕족도 귀족도 전부 그와 같은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니 그렇게 거부감이 드는 항목은 없을 걸세."

베르덴이 계약서를 주욱 훑어봤다.

그러던 중 우뚝 시선을 멈췄다. 그가 일곱 번째 항목을 가리켰다.

"계약 기간 동안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에게 유물의 권한을 이양한다.... 제가 이해한 그대로가 맞습니까?"

"응? 그렇네. 탐사 진행 속도를 높이려면 유물을 곁에 두는 건 당연한 거니까. 잠시 동안 빌려준다고 생각하면 되네. 아,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이해하네. 유물을 훔치고 도망갈 경우를 생각하는 거겠지."

라이반이 턱을 쓸었다.

"우리 탐색자들은 도둑놈도 양아치도 아니네. 내 마법사로서의 신념에 맹세하건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이제 믿음이 좀 가나? 그렇다면 어서 서명을 해 주시게."

믿음이라.

베르덴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거절합니다."

* * *

유물을 빌려 달라고?

'웃기는 소리.'

상대가 유명한 유물 탐사단이든 뭐든 상관없다. 타인에게는 유명세가 곧 신뢰의 지표겠지만 베르덴에겐 아니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에 순간 라이반의 말문이 막혔다.

"...우릴 믿지 못하는 건가?"

"믿어야 합니까?"

탐색자들.

그들의 업적은 다른 탐사단과 비교해도 독보적이다. 그야말로 검증된 사람들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단호하게 싫다고 할 줄이야.

이런 경우는 너무도 오랜만이라 잠깐 멍해졌다.

한스가 눈을 부라렸다.

"유물을 해석해 달라면서 유물을 넘기기 싫단 말입니까? 지금 장난하자는...."

"잠깐, 한스. 괜찮네. 내가 이야기하지."

크흠.

라이반이 헛기침을 해 주위를 환기했다.

"뭐, 이쪽 업계에 대해 자세히 모르면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네. 유물이 어떤 가치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선뜻 타인에게 넘기기는 어렵겠지."

다만.

"우리 탐색자들은 창설 이래로 의뢰를 어긴 적이 없네. 의뢰자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저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말이지. 좀만 알아보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걸세. 그러니 우리를 믿고 유물을 빌려주는 게 어떠한가? 무의미한 결과를 내지는 않을 거라고 장담하겠네."

그러나 베르덴의 답은 마찬가지였다.

"거절합니다."

"감히...!"

쾅!

반복된 거절에 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욕을 받은 듯한 기분이다.

나름대로 점잖게 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무례한 답을 들을 줄이야. 잠시 버르장머리를 고쳐 줄 생각으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한스의 마력이 주위를 장악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베르덴을 위압할 순 없었다.

그걸 목격한 라이반이 눈을 부릅떴다.

'한스의 마력을 무시한다고?'

한스가 어금니를 깨물며 서서히 위압의 강도를 높였으나 베르덴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마력 따위는 신경 쓸 거리조차 되지 못한다는 듯 말이다.

'설마 마법사...?'

그것도 한스의 수준을 넘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라이반이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와 비슷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라이반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베르덴이 차가운 벽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조항을 받을 순 없지.'

마도왕의 유물.

만약 유물의 정체를 라이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는 5위계 마법사. 더군다나 마탑 출신이다.

과거에 쌓은 탐사단의 신뢰를 싹 무시하고 갖고 도주할 수도 있다. 아니, 분명 도망치겠지. 그런 일을 당할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그나저나....'

되도 않는 마력 위압을 시전하고 있는 한스.

슬슬 거슬린다.

화아악!

베르덴이 잠시 한스에게 마력을 집중했다. 순식간에 한스의 마력이 흩어졌고 적지 않은 충격이 그에게 가해졌다.

"헉!"

화들짝 놀란 한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잠깐이었던 터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한 멍한 얼굴.

침묵하고 있던 라이반이 입을 열었다.

"...이거 실례했네. 내가 고명한 마법사를 몰라봤군."

세상에는 외모를 숨길 수 있는 마법 물품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이를 먹지 않게 하는 아티팩트도 실존하며 흑마법 중에도 그것과 비슷한 마법이 있다.

드물긴 해도 겉모습을 숨긴 강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저 애셔란 자는 그런 자들 중의 한 명일 터.'

라이반은 확신했다.

물론 베르덴은 외모 그대로의 나이였으나 굳이 오해를 정정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협상에 편리해질 것 같으니 이용하는 게 옳은 선택이겠지.

"부디 넓은 아량으로 한스를 용서해 주시게. 아직 미숙한 마법사이니."

"개의치 않습니다. 그보다 계약 조건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본래의 라이반이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예외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그 소문이 퍼지면 이후의 계약 협상이 매우 번거로워지니까.

하지만 이미 주도권은 빼앗겼다.

난생처음 보는 유물의 존재. 그로 인해 계약은 필수적인 상황이다.

가능하면 탐색자들에게 유리하게 계약을 체결해야 하지만... 상대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강력한 마법사. 결코 느슨하게 대할 자가 아니라고 라이반은 직감했다.

라이반이 침을 삼켰다.

그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한번 말해 보시게."

123화 유물 탐사단 (3)

베르덴이 요구한 조건은 총 세 가지였다.

하나는 유물 권한 이양에 대한 항목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

이유는 당연히 신뢰의 문제였다.

무시를 받았다고 생각한 한스가 주먹을 쥔 채 손을 부들거렸으나 방금처럼 날뛰지는 못했다.

방금 전 갑작스러운 충격도 그렇지만, 다름 아닌 탐색자들의 리더인 라이반의 얼굴이 한없이 진지했으니까.

숙고하던 라이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번만은 예외로 받아들이지. 대신 이 사실은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군. 계약에 예외를 허락했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곤란해져서 말이야."

그거야 쉬운 일이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으니까. 달리 말할 상대가 없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고맙네. 그리고 다른 건 또 뭔가?"

베르덴이 계약서의 마지막 항목을 가리켰다.

"보수 비율의 조정입니다."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은 의뢰 보수에다가 유적에서 발견한 유물 또는 보물의 2할을 받는다.

하지만 베르덴으로선 꺼려지는 조건이다.

마도왕의 유물을 넘기기 싫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이 항목 또한 삭제하고 싶었지만 라이반이 거절하겠지. 저쪽에서 첫 번째 조건을 받아들인 상황에 계약이 불발되는 건 베르덴도 원치 않았다.

그러니 비율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라이반이 말했다.

"그렇게 되면 현금 비율이 높아질 텐데 괜찮겠나? 계약금으로 4억 엘크에다가 활동비로 매달 3천만 엘크. 거기다 의뢰 완료 시 추가로 7억 엘크를 지불해야 한다만...."

"상관없습니다."

재산을 탈탈 털면 지불은 가능하다.

암흑가의 경매장도 있고, 외수를 찾으면 스태프 제작도 의뢰해야 하긴 하지만... 이건 달리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었다.

'마도왕의 유산은 내가 가진 모든 것,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거기다 아직 시간은 있다.

부족한 돈은 악착같이 벌면 그만이다.

베르덴의 대답에 라이반은 선뜻 조건을 받아들였다.

유적에서 값비싼 유물이 발견되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허탕을 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라이반 입장에서 봤을 때, 안정성을 따지면 오히려 수정된 조건이 더 이득이었다.

이제 마지막 요구만이 남았다.

"이번에는 조건의 수정이 아니라, 계약서에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조건?"

"유적 탐사에 직접 참가하고 싶습니다."

라이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런 요구는 몇 번이고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특히 신분이 높은데 젊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그러했다.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나 유적 탐사를 성공했다는 업적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철부지 귀족이 아닌 마법사의 동행.

잠시 생각을 정리한 라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만, 우리 탐사단의 선발대가 안전을 확보하고 난 후에만 합류를 허락하겠네. 아무리 자네가 고명한 마법사라고 해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삐끗하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테니. 그렇게 되면 우리도 위험해질 수도 있고 말이야."

"물론입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반이 말한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수정된 요구가 전부 반영되자 라이반이 직접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수정했다.

다시금 꼼꼼하게 수정본을 확인한 베르덴이 유려한 필체로 서명을 마쳤다. 라이반도 탐색자들의 리더로서 그 옆에 이름을 적었다.

그렇게 두 부의 계약서를 만들고는 돌돌 말아 각자 챙겨 넣었다.

"그럼 계약이 체결되었으니 다시 묻겠습니다. 그 유물 탐사단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라이반이 한스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가 입을 달싹이다가 정보를 내뱉었다.

"...이곳 에스티리아 왕국을 마지막으로 실종됐습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이야기죠. 어디 가서 객사할 정도로 약한 자들이 아니었으니 유물을 해석해 유적을 쫓다가 죽은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탐색자들은 그들의 지난 행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어디에서 실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팀을 나누어서 유적을 탐색하다가, 유적이 발견되면 비밀리에 모여 탐사를 하곤 했으니까요. 대신 그들이 탐색을 진행했던 지역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아르에곤 산맥.

테인체 구릉.

동부 늪지대.

"위 세 지역 중 하나가 정답일 텐데, 우선 테인체 구릉을 따라 탐색하다가 아르게온 산맥으로 넘어갈 계획입니다. 에스티리아 왕국의 2대 금지(禁地) 중 하나인 동부 늪지대는 너무 넓고 위험해서 마지막으로 찾아볼 생각이죠."

"대략적으로 얼마나 걸립니까?"

이번엔 라이반이 답했다.

"만약 테인체 구릉에 있다고 하면 2개월 정도. 아르에곤 산맥으로 넘어가면 5개월까지. 그런데도 발견하지 못하면... 늪지대까지 포함해 거의 1년은 걸리겠군."

편차가 심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운이 엄청나게 나쁘지 않은 이상, 리스너가 말했던 시간 내에 찾아낼 수 있겠지.

대화가 조금 길긴 했으나 베르덴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계약이었다.

"알겠습니다.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내 드리도록 하죠."

"그럼 우리도 오늘부터 바로 탐사에 들어가도록 하겠네. 그리고 계약대로 기록을 작성한 뒤, 15일 기준으로 탐사 진행도를 자네에게 전달하지. 활동비도 그때쯤에 보내 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이반과 베르덴이 악수를 나눴다.

마도왕의 무덤을 찾기 위한 탐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 * *

유물 탐사단이 떠나고 난 후, 페르네의 주점에는 평안이 찾아왔다.

언제 다시 깨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큼은 좋게 흘러갔다. 페르네는 오랜만에 걱정 없이 늦잠을 자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정령 블루가 반짝였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흐아아암."

기지개를 켠 페르네.

이번에는 핫초코가 아닌 설탕이 가득 든 커피로 졸음을 깨웠다. 봉인을 풀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아, 다른 나라들 신문이었네."

페르네는 정보망을 재건하면서 해외까지 시선을 뻗었다.

주기적으로 국제 정세를 살피는 건 중요했다. 뭐, 다른 정보상은 아닐지 몰라도 페르네에게는 그러했다.

조합의 압박이 들어온 이후로,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 한동안 쳐다도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베르덴과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도움으로 정보상을 거의 재건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페르네가 느긋하게 신문을 살폈다.

그런데 첫 장부터 문구가 이상했다.

[도시 연합 국가, 카일리언스와 미들로스 자치령 외교 단절]

동대륙 북쪽의 소식.

전쟁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자세히 내용을 읽어 보니, 갑자기 자치령과 카일리언스 중간에 아인종이 들끓으면서 교류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 전선에는 아인종의 피와 사체가 가득하다고 하며 모험가 길드가 토벌을 주도하고 있다곤 하는데 회복될 전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게재되어 있다.

페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난데없는 아인종의 출몰이라니.

"어휴, 세상이 말세네, 말세야. 안 그래, 블루?"

블루가 반짝였다.

페르네는 신문을 접고 다른 신문을 확인했다.

방금 전의 소식보다는 덜했지만 다른 곳도 아주 만만치 않았다.

[동대륙 남쪽 분쟁 지대 확산, 수인과 인간의 풀리지 않는 갈등]

[기승하는 악마 숭배자, 움직이는 루아스교의 성기사]

죄다 안 좋은 얘기들뿐이다.

정보상인 페르네조차 우울감을 느낄 정도.

세상에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긴 하나 신문사들은 하나같이 이런 부정적인 기사만을 중점으로 싣는다.

그래야 화제가 되고 돈이 되니까.

물론 사실을 전달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정보를 다루는 만큼 그 파장에 대해 생각하길 바랄 뿐이다. 신문 전체를 훑어보니 아무래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만.

'이래서야 악질 정보상이랑 뭐가 다른 건지.'

페르네가 마지막 신문을 들었다.

옆 나라인 리비안트 공국의 신문이었는데, 이건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유통이 금지된 것이었다. 잡히면 곧장 징역일 정도로 형량이 강한데, 페르네도 그녀 자신의 독자적인 정보망이 아니었다면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통제가 심했다.

원인은 과거 전쟁으로 인한 정보 교류의 제한.

리비안트 공국은 반란을 통해 세워진 국가이기에 그 사상적인 면에서 왕국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에스티리아 왕가의 입장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교역은 한다는 거지만.'

간단한 이유다.

돈은 벌어야 하니까.

국가가 직접 나서서 교역을 감시하는데 당연하게도 물밑에서 오가는 돈이 상당하다. 그야말로 국가를 위해서가 아닌, 왕가와 귀족들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서 교역을 튼 것이다.

다른 나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규모.

썩을 대로 썩은 그들이 가진 이기적인 탐욕은 말 그대로 끝이 없었다. 에스티리아 왕국이 개판인 건 지금의 왕가와 귀족들 때문이었다.

'정상으로 돌아가려면 머리가 바뀌어야 할 텐데.'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

누가 반란이라도 일으켜서 왕가를 직접 몰락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왕가의 어둠에 대항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페르네가 신문의 첫 장을 넘겼다.

오랜만에 보는 공국의 신문.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 소울 트리 출몰]

[가드란 후작가의 어두운 그림자]

"와, 여기도 미쳤네."

내용을 보니 작년에 일어난 모양.

설마 그사이에 이런 큰 사건이 터졌을 줄은 몰랐다. 가드란 후작가는 공국의 탄생을 주도한 가문 중 하나인데 이런 짓을 벌이다니.

그런데 자세히 읽어 보니 거의 피해 없이 해결한 모양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의뢰를 받으러 온 베르덴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애셔 님! 이것만 읽고 갈게요!"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자리에 앉았다.

페르네는 다시금 신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이 사건들을 어떻게 처리한 건지 궁금했다.

핏빛검 레이라, 소울 트리 토벌.

가드란 후작가의 부정을 밝힌 라비슈른 후작가.

'아하, 이 사람들이면 납득이 가지.'

둘의 이름과 명성은 페르네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들이라면 위 사건에 거의 완벽하게 대응하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응?"

그런데 그들 이름 옆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페르네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신문을 접고 다시 펴고는, 글귀를 하나하나 해석하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연하게도 내용은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여전히 똑같았다.

"어... 어...."

페르네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피가 빠르게 돌며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그렇게 신문을 정확히 세 번 정도 정독했을 때, 그녀의 경직된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페르네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뭐, 뭐야, 이게."

소울 트리 토벌자. 또는 공국에서 주관한 대행사 시합의 우승자.

그리고 라비슈른 후작가를 도와 가드란 후작가를 토벌한 마법사.

애셔.

지금 페르네의 주점에 앉아 있는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124화 암상인 (1)

정보 조작?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으니까. 대체 누가 신문에 실린 내용을 임의로 조작하겠는가.

'그렇다는 건....'

페르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분명하게 신문에 실려 있는 이름의 장본인은, 태연하게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평소에도 저렇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비했다.

외모, 힘, 성격 등 뭐 하나 평범하지 않은 게 없었다. 페르네와 만난 이후, 짧은 시간 동안 남긴 행적 또한 마찬가지다.

'정말로 이게 사실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정보의 출처도 그렇지만 페르네가 그간 봐 왔던 그의 모습과 행동이 신빙성을 높이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심증에 불과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있다.

바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

그게 가장 빠르고 쉬운 해답이었다.

꿀꺽.

페르네가 침을 삼키고는 이내 결심을 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이내 떨리는 손으로 공국의 신문을 식탁 위에 올렸다.

"저...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베르덴이 눈을 떴다.

청명한 벽안이 페르네를 직시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슬쩍 베르덴을 향해 밀었다.

"호, 혹시 이게 애셔 님이 맞으신가요?"

무슨 소리지?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전체적인 형태를 보니 어딘가 익숙한데....

'아, 리비안트 공국에서 온 건가?'

신문사를 확인해 보니 로리엔, 베르덴이 소울 트리를 토벌했던 도시에서 발간된 모양.

한 면 한 면 작은 글귀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는데, 자세히 읽어 보니 소울 트리나 공국의 대행사 그리고 가드란 후작가 등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 시야에 비쳤다.

'뭔가 했더니 이거였나.'

페르네는 베르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저런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확실히 베르덴 자신이 공국에서 해결했던 사건은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베르덴에겐 예외였다.

누구도 하지 못한, 아무도 가능하다고 생각조차 못 했던 마탑의 동력원을 붕괴시킨 정도라면 모를까, 이런 건 업적이라고 내세울 수도 없었다. 적어도 베르덴에게는.

그리고 베르덴은 애초부터 이런 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정도로 입이 가볍지 않았고 스스로의 얼굴에 분칠을 할 성격도 아니었다.

강대한 마법사로서의 증명.

그건 애써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세상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으로.

그게 베르덴의 가치관이었다.

신문을 내려놨다.

숨 죽이고 답을 기다리고 있는 페르네. 딱히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야말로 확답이나 다름없는 고갯짓에 페르네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페일 당신, 나한테 누굴 보낸 거야?!'

베르덴이 남다른 마법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의 거물일 줄이야.

딸꾹.

마음속으로 각오는 했지만 새삼 진실을 깨닫자,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입가를 막고는 숨을 멈춰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억눌렀다.

그와 동시에 페르네가 베르덴에 대해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의뢰했던 정보들에게 대해서.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의 행방.

미지의 유물 해석.

암흑가 경매장 초청권.

그 교집합은 무엇인가.

페르네는 베르덴의 정보상이다. 그렇게 약속했고 확실히 받은 만큼 책임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야 했다.

잠시 후, 딸꾹질이 멈췄다.

이어 깊게 심호흡을 한 페르네가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애셔 님의 목적은 무엇이죠?"

지극히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단순한 보수 같은 것이 아닌, 왕국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힘."

단 한 마디.

하지만 페르네가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그저 고객에게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상이 아닌, 오로지 한 명을 위한 정보상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 * *

마법사가 한층 더 강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렇게 묻는다면 마법사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지식과 장비 그리고 훈련이라고.

"훈련이야 애셔 님이 알아서 하실 테고 지식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남은 건 장비뿐이다.

페르네는 그러한 관점에서, 베르덴이 의뢰한 정보들과 그를 둘러싼 상황을 보기 좋게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다.

우선 첫 번째, 암흑가 경매장의 초청권.

푸른 구름 상단의 일로, 마일드륀에서 조합의 흑마법사와 마찰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두 번째, 유물 해석.

며칠 전 그가 직접 유물 탐사단 탐색자들과 만나 계약을 체결했다. 유물과 관련된 유적을 찾는다고 듣긴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당장 신경 쓸 게 아니다.

세 번째, 외수의 소재 파악.

노력은 하고 있으나 아직 자그마한 정보조차 얻지 못했다. 그러니 이것도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뢰.

현재 그는 보다 많은 의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돈이 필요하다는 뜻일 텐데.

이렇게 나열해 보니, 페르네는 베르덴이 필요로 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위 네 가지는 돈과 장비에 직결되어 있다. 유물은 좀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내가 직접 도울 수 있는 건 첫 번째와 네 번째인 건가?"

암흑가 경매장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으려면 당연하게도 거액의 현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는 유물 탐사단을 고용하느라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했을 터.

페르네가 해야 할 건 고액 의뢰의 주선이다.

그에 더해서 추가로 도움이 될 게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문득 페르네의 머릿속에 적합한 의뢰주가 떠올랐다.

"...그래, 그 사람이면 되겠어."

생각을 끝낸 페르네는 곧바로 정보망을 전력으로 가동했다.

평소의 몇 배나 되는 돈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그녀 스스로가 번 것이 아니라 베르덴이 쥐여 준 것이니까.

더군다나 페르네에게 있어 베르덴은 구원의 동아줄 그 자체.

그러나 이제는 잡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아줄 타고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렇기에 정보든 돈이든 뭐든 아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 * *

페르네가 베르덴에게 서류를 하나 가져왔다.

"이게 뭐지?"

"애셔 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정보요. 혹시 왕국 그레이 정보상의 종류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모른다.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정보상은 저처럼 정보를 취급하고 판매하거나, 의뢰의 중개상 역할을 해요. 하지만 어딜 가나 특이한 사람은 있죠. 정보상도 마찬가지예요."

페르네가 서류를 펼쳤다.

안에는 단 한 장의 종이만이 있었는데 어떤 인물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암상인 '클란드'. 표면적으로는 정보뿐만 아니라 갖가지 물건도 취급하는 사람인데, 뒤에서는 정보를 은폐하는 일도 해요. 발이 좀 넓은 사람이죠. 그리고 본인 스스로 고액의 의뢰를 내걸기도 하고요."

"의뢰를 중개하는 게 아니라 직접?"

"네, 클란드는 기존의 정보상들과는 달리 의뢰 중개를 전혀 하지 않아요. 워낙 자기주도적인 사람이라, 중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확실히 특이하긴 하다.

의뢰를 중개함으로써 얻는 수익이 결코 적지 않을 텐데 그걸 포기할 줄이야.

베르덴이 경험해 보지 못한 부류의 정보상이었다.

페르네가 말했다.

"의뢰 내용은 간단해요. 주로 희귀한 마법 물품처럼, 가치가 높은 물건들에 대한 정보를 주고 찾아오라고 하는 게 전부죠. 그 특성상 평소에는 의뢰가 거의 없긴 한데... 아시다시피 지금 상황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조합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 뒤를 봐주던 귀족들까지 말이다.

어떻게 꼬리를 자르려 하고는 있지만, 충성심 높은 고귀한 기사도 아니고 당연히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낌새를 눈치챈 자들은 죄다 짐을 챙기고 다른 국가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상황.

즉, 클란드의 의뢰는 놈들이 가진 재물을 빼앗는 것이 되겠다.

"거기다 망명자들 중에는 상회 간부도 있어서 클란드가 특히나 눈독 들이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애셔 님이 원하신다면 의뢰을 주선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할 상황에서는 더더욱.

"부탁하지."

"맡겨 주세요."

페르네가 미소 지었다.

"아, 그리고 제가 클란드를 추천한 건 달리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

"클란드는 왕국의 암흑가하고도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암흑가 경매장을 운영하는 관련자 중 하나로, 경매장에 무엇이 올라올지 아는 사람이기도 하죠."

경매장의 출품 목록.

그걸 알고 있다면 유리하게 경매를 진행할 수 있다. 불필요한 지출은 아예 없애고 확실히 원하는 물건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니까.

'즉, 클란드에게서 목록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한다.

암흑가 경매장에는 아티팩트가 나오기도 하니까.

다만 베르덴은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보를 쉽게 팔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자칫하면 암흑가에서 직접 주관하는 경매장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릴 테니까.

"물론 그렇죠. 입을 잘못 놀렸다간 암흑가의 암살자들에게 목이 잘릴 테니까요. 하지만 클란드도 결국은 정보상. 목숨값 이상의 가치가 담긴 정보를 거래로 내놓으면 차마 거절하지는 못할걸요?"

페르네가 다른 서류를 가져왔다.

다른 것과 달리 아주 중요한 듯 입구 중심만이 아닌, 전체에 걸쳐 봉인이 되어 있었다.

"그게 그 목숨값인가?"

"적어도 클란드에게는요."

그녀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옛날부터 클란드가 미친 듯이 찾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인데, 얼마 전 아주 운 좋게 손에 넣을 수 있었어요. 아마 암흑가와 관련된 것 같은데... 자세한 내막은 저도 모르지만, 이 서류를 가져다주면 분명 애셔 님이 원하는 걸 뱉어 낼 거예요."

페르네가 장담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들어 뭔가 바뀐 느낌인데.'

달리 말한 적도 없는데 페르네 스스로 찾아온 정보.

눈가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걸 보니 꽤나 노력을 들인 모양이다. 뭔지는 몰라도 베르덴으로선 전혀 나쁠 게 없었다.

곧바로 서류를 받아 공간가방에 챙겨 넣었다.

"고맙게 받지."

"아... 천만에요!"

쑥스러운 듯 페르네가 어색하게 답했다.

"그런데 암상인하고는 언제 만날 수 있지?"

"내일 이곳 아세른에서요. 클란드가 아세른 시장하고 만날 예정이라고 들었거든요. 미리 연락을 해 놓을 테니 가볍게 걸어갔다 오시면 될 거예요."

도시를 벗어날 필요가 없다라.

'생각해 보니 이런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어쨌든 귀찮은 일을 덜었으니 좋을 뿐이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시금 해가 떠올랐다.

125화 암상인 (2)

아세른의 시장이자 영주인 도호네크 백작.

세간에 그는 거만한 귀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누구에게나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가 두툼하게 올라온 볼살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 이보게, 클란드.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잘못하면 내 목도 날아갈 수가 있단 말이네."

"죄송하지만 저 또한 사정이 있는 터라...."

중절모를 쓰고 턱 하관에 화상 흉터가 있는 사내, 클란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백작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럼에도 백작은 뭐라 윽박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클란드였으니까.

"저도 마음 같아서는 백작 각하를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현재 칼리아로 인해 이 바닥이 얼마나 어지러워졌는지. 어설프게 손을 거들었다간 저도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도호네크 백작은 조합의 뒤를 봐주던 귀족은 아니었다. 3왕자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 또한 에스티리아 왕국의 귀족이다. 평균적으로 적당히 썩어 빠진.

불법 노예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해도, 탈세는 기본으로 제 배를 채우기 위한 각종 범법 행위를 수도 없이 저질렀다.

그런 와중에 백강 칼리아가 일을 터뜨렸다.

갑자기 플리쉬르 백작 별장을 급습하면서 불법 노예를 확인한 것이다. 밀수도 마약도 마찬가지.

다른 건 몰라도 국민을 납치해 불법 노예로 만든 것은, 그 올곧은 에스퍼렌사 후작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제 발로 조합을 탈탈 터는 데 일조했고, 3왕자와 경쟁 관계인 2왕자와 1왕자마저 보란 듯이 그들을 물어뜯고 있다.

거기다 루아스교까지 격분해 돕고 있는 상황.

'재수 없으면 나도 쓸려 나간다.'

흔적을 지우고,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죽여야 한다.

그렇기에 클란드가 필요하다. 도호네크 백작의 불안감을 씻어 줄 수 있는 건 눈앞의 암상인밖에 없었다.

백작이 자신의 무릎을 꽉 잡았다.

차마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습은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자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만 워낙 위험한 터라... 흐음. 본래라면 거절해야 하는데 백작 각하와 알고 지낸 시간이 있어 단호히 말씀드리기가 영 어렵군요."

"그렇다면...."

백작의 얼굴이 화색이 피었다.

저건 결코 거절의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그때, 클란드가 네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단가의 네 배. 그 정도는 받아야 수지 타산이 맞을 것 같습니다."

"네, 네 배?"

터무니없는 액수다.

저걸 지불하려면 백작 또한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그건 싫었다.

어떻게든 금액을 줄이기 위해 백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단 한 푼도 깎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목숨을 걸고 제안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의견이 맞지 않으니...."

클란드가 운을 띄웠다.

조건을 받지 않는다면 당장 자리를 떠나겠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를 보는 건 백작뿐이었으니.

"...아, 알겠네."

결국 도호네크 백작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현금을 지불했다.

돈을 챙기고 유유히 백작의 자택을 빠져나가는 클란드. 그의 얼굴에는 조소가 머물러 있었다.

'백작이라는 자가 저리도 강단이 없어서야.'

그렇게 불안해할 거라면 애초에 책잡힐 일은 하지 않으면 되었을 텐데.

소시민이 귀족 위를 세습받는다면 저렇게 되는 거겠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세른의 가도를 거닐던 클란드가 낡은 상점에 들어갔다.

이곳은 각 도시마다 있는 클란드의 거래소. 중절모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자, 상점의 주인이 다가왔다.

"클란드 씨, 손님이 왔습니다."

클란드는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클란드를 찾아왔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자거나 또는 이미 약속을 잡은 사람뿐.

그런 그에게는 최근 약속을 잡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페르네.

클란드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테이블에 놓인 고급 카스테라와 따뜻한 블랙커피. 그 앞에는 벽안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를 본 클란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유명인이 찾아오셨군."

* * *

왼쪽 턱과 목에 걸친 화상 흉터.

회색 머리카락이 사이사이 자리 잡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중년의 사내, 암상인 클란드.

페르네가 귀띔해 주었던 외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유명인?"

"그래, 유명인."

클란드가 베르덴 앞에 마주 앉았다.

"조합과 척을 지고 몰락하기 직전이었던 정보상 페르네의 구세주. 그리고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독녀, 백강 칼리아를 이 바닥에 끌어들여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 중 하나."

아직 끝이 아니다.

"그 외에도 고위 속성을 다루는 4위계 마법사 등등. 이렇게 눈길을 끌 만한 소문이 많은데 이게 유명인이 아니고 뭐겠나? 아, 고맙네."

상점 주인이 다과를 가져왔다.

클란드가 밀크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거기다 외모까지 좋다고 들었지. 이거야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니 그러려니 했는데... 확실히 그런 소문이 돌 정도긴 하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나?"

"말해야 합니까?"

"아니. 이 바닥만큼 나이가 상관없는 곳이 어디 있다고? 그냥 초면이니 분위기를 풀어 볼 겸 물어본 걸세."

클란드의 말투는 유창했다.

순식간에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 나가는 것만 봐도 노련한 사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클란드가 포크로 카스텔라를 자르곤 콕 찍었다.

"그럼 적당히 어색한 것도 풀린 거 같으니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 볼까? 안 그래도 누가 흙탕물이었던 이 바닥을 아예 구정물 수준으로 어지럽혀 준 덕분에 내가 많이 바빠져서 말이야."

"그러시죠."

"좋네. 그럼 경매장 건부터 시작하지."

그가 카스텔라를 쏙 입에 넣었다.

적당히 단맛을 즐기고 목 뒤로 넘겼다.

"사실 페르네에게 암흑가 경매장 목록을 거래하자고 연락을 받았을 땐 정신이 나가 버린 건 줄 알았네. 나보고 죽고 싶냐고 물어본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거래로 제시했더군. 아주 페르네다웠어. 내가 비밀리에 찾고 있던 걸 아무렇지 않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먼저 정보를 손에 넣다니.... 솔직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클란드가 포크를 내려놓고, 베르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실물을 접하기 전까지는 믿을 순 없지. 그러니 먼저 봐도 되겠나?"

"경매장 목록은...."

"내가 찾는 정보가 맞다면 주도록 하겠네, 반드시."

이 거래의 행방은 클란드의 의향에 달려 있다. 어차피 보여 줄 생각이었으니 괜히 힘을 뺄 이유는 없다.

베르덴이 봉인된 서류 봉투를 건넸다.

클란드가 곧장 입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총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종이 뭉치.

클란드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마치 슬픈 듯 기쁜 듯.

"그래... 그랬군. 머리가 반쯤 태워진 채 빈민가에 버려졌었나. 그래서 내가 그토록 애를 써도 찾지 못했던 거야. 애초에 내가 기억하는 외모와 전혀 다를 테니까.... 잘도, 잘도 살아 있었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껄껄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확실히 진짜로군. 역시 페르네야. 아니, 거의 죽다 살아나더니 더 대단해진 모양이군. 그래, 이거라면 충분히 거래가 가능하지."

클란드가 서류를 품속에 보관했다. 아주 소중하게.

"며칠 뒤에 경매장 목록을 준비해 두겠네. 작성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말이야. 그때까지는 아세른에 머물 생각이니까, 먹고 도망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접어 둬도 좋을 걸세. 뭐, 어차피 도주해 봤자 페르네의 정보망에 걸릴 테지만 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이제 의뢰만 남았군. 마침 애셔, 자네에게 어울릴 만한 고액의 의뢰가 있네."

베르덴이 물었다.

"보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내용 말고 보수부터 물어보는 건가? 대단한 자신감이군."

클란드가 네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수는 4억 엘크. 의뢰 내용은 물건 세 개를 가져오는 것인데 자네하고도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지. 조합과 관련된 거거든."

첫 번째, [광석 탐지기(강철)].

이름 그대로 광석을 탐지하는 마법 물품 시리즈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강철 광석만을 탐지하는 희귀한 물건이다.

일정 길이 이상의 갱도에 하루 동안 넣어 두면 주변 지형을 자동으로 분석해 강철 광석의 전체적인 분포도를 보여 준다.

즉, 갱도의 가치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플리쉬르 백작 별장에서 조합의 운영자 중 하나이자, 땅거미 상회의 주인인 베켄이 검거되었다는 건 들었겠지? 그로 인해 상회가 풍비박산이 났지. 상회의 간부들도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다니고 있고. 광석 탐지기는 바로 그 간부 중 하나가 가지고 있네."

그리고 두 번째, [블루 다이아몬드 네클리스].

단순한 장식품이지만 최근 블루 다이아몬드에 대한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지금 상황에 구매자만 잘 찾는다면 평소의 배 이상은 받을 수 있을 터.

"이건 나폴드 남작의 가보로, 수십 년간 플리쉬르 백작의 봉신 가문으로 있으면서 받은 보석 목걸인데, 이번 사태로 인해 플리쉬르 백작과 관련된 귀족이 싸그리 박살이 나고 있네. 워낙 더러운 귀족들이라 수사망을 벗어날 껀덕지도 없지."

귀족과 상회의 몰락.

베르덴은 칼리아가 가진 영향력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가 손을 씀으로써, 정확히는 베르덴과 페르네가 그녀를 끌어들이면서 왕국이 밑바닥부터 뒤집히고 있는 셈이었지 않은가.

'마치 순식간에 커져 나가는 눈덩이를 보는 것 같군.'

뭐, 환영할 만한 일이다.

눈덩이가 얼마나 커지든 얻어맞는 건 베르덴이 아니라, 그에게 방해가 될 자들이었으니까.

"그 목걸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남작 휘하에 있던 기사 하나가 가지고 튀었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물건인데, 방금 말했던 기사의 검을 가져오는 걸세."

"검? 마법 물품입니까?"

"다마스 강철이 2할 정도 첨가된 검이네. 다른 두 개에 비해 귀한 건 절대 아니지. 사실 내가 그놈에게 빚진 게 있거든."

빚이라.

"지금이야 기사로 있지만, 놈은 몇 년 전까지 암흑가에서 놀던 쓰레기일세. 나에게서 물건을 도둑질하려고 수를 쓴 놈들 중의 하나지. 물론 실패했지만."

클란드가 코웃음을 쳤다.

"딱히 죽일 필요는 없네. 그놈이 애지중지하는 검 하나면 충분해. 목걸이를 회수할 겸 가져와 줬으면 좋겠군."

물건 세 개를 가져오는 데 4억 엘크.

두 사람만 찾으면 끝나는 간단한 의뢰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란 건 자명하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주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클란드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마침 한자리에 모였으니."

"...?"

"밀매상 패드렐드라고, 그자를 거쳐 간 불법 이민자의 숫자만 네 자릿수에 달하는데, 마침 위에 언급한 두 사람이 패드렐드를 통해 왕국을 벗어나려 한다는군."

정보의 출처는 바로 패드렐드 본인.

뒷돈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끈 떨어진 연 신세인 상회의 간부와 남작의 기사에 대한 정보는 더더욱.

"그럼 여기서 자네는 의문을 갖겠지. 위치도 알고 있는데 왜 4억 엘크나 되는 보수가 붙었나? 간단한 이유일세. 패드렐드가 정보를 판 건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거든."

조합의 가세가 기울며 사방에 피와 살점을 뚝뚝 흘리니 당연히 물어뜯으려는 짐승이 몰리는 법.

조합에 원한을 가진 자들은 한둘이 아닌 데다가, 놈들은 온갖 귀중품을 가지고 도주할 테니 그야말로 맛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그럼 저는 밀수꾼들과 그 짐승들을 뚫고 물건을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그렇네. 숫자만 따지면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자네가 소문대로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비교적 쉬운 의뢰가 될 수도 있을 걸세.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이 이 바닥의 생리이니까."

클란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때, 받을 건가? 자네가 돌아올 때쯤엔, 나도 보수와 경매장 목록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 서로 교환을 하면 깔끔할 것 같은데."

고민할 것도 없었다.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스리티아 왕국의 국경 근처.

말을 타고 절벽 위에 올라서 있던 베르덴이 저 멀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룬의 반지, 엑시드로 강화되어 있는 시야에, 산맥 사이에 가려져 있는 협곡이 보였다.

두꺼운 가죽 털옷을 입은 자들이 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저자들이 패드렐드의 밀수꾼들인가.'

잠시 후, 여러 대의 마차가 접근하더니 안에서 무장을 한 인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밀수꾼들과 잠시 이야기를 하더니 협곡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분명 클란드가 말한 짐승들일 터.

'여유를 부렸다간 늦을지도 모르겠군.'

베르덴이 말에서 내렸다.

지형을 조작해 만든 돌기둥에 고삐를 단단히 묶었다.

<투명화>

희미해지는 기척과 모습.

이내 하늘로 날아오른 베르덴이 밀수꾼의 협곡으로 향했다.

126화 환영합니다

왕국 북쪽 미들로스 자치령과의 국경에 위치한 밀수꾼의 협곡.

안으로 들어갈수록 길이 좁아지는 형태로, 그 끝에는 절벽에 난 작은 틈새가 자리 잡고 있다.

횃불을 든 밀수꾼이 손님들을 이끌고 틈새로 들어갔다.

투명화를 쓴 베르덴도 뒤따라 들어가자 넓은 공동이 나왔다.

구름다리로 연결된 바위 기둥들. 그 옆에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슬쩍 아래를 보니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밀수꾼들이 보였다.

'절벽 안에 이런 공간이 있었군.'

미약하게 바람이 통하는 걸 보니 입구 말고 다른 통로가 있다는 뜻. 아마 이곳을 통해 국경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손님들을 쫓아 협곡 지하에 도착했다.

그러자 여러 갈래로 나뉜 통로 중 하나에서, 갈색 가죽 장갑을 낀 사내가 무장을 한 밀수꾼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저자가 밀매상 패드렐드인가.'

확실히 다른 밀수꾼과 다르긴 하다.

어쨌든 밀매상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클란드의 의뢰를 달성할 수 있겠지.

베르덴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