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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

연락책은 순순히 협조했다.

물론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십 가지의 질문을 연이어 물어본 뒤 역으로 다시 물어보며 답이 달라지지 않는지 확인했고, 페르네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와도 비교했다.

그러한 페르네의 정보 처리 능력은 물 흐르듯 깔끔했다.

'확실히 실력은 있어.'

페일이 자신 있게 추천해 줄 만한 정보상이다.

쓸모를 다한 연락책은 바르톨에 넘겨 가두었다.

그렇게 정보를 취합하고 나서 바르톨, 페르네 그리고 베르덴이 한자리에 모였다.

"예상했다시피 연락책 같은 말단에게 조합의 기밀 정보 같은 건 없었어요. 하지만 조합에 붙은 정보상 중 하나가 누군지는 알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죠."

바르톨이 물었다.

"그게 누구지?"

"외딴 여관의 '올랜드'요."

올랜드.

그는 페르네와는 달리 도시가 아닌 얕은 숲속에서 홀로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올랜드의 정보상이었다.

그레이의 용병들은 그 여관에서 의뢰를 받거나 정보를 구입한다. 더해서 식당이나 숙박 시설을 겸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왕국 그레이만의 여관이나 다름없었다.

바르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조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올랜드를 잡아야 한다는 건가? 다른 건 없어?"

"이것뿐이에요. 연락책은 올랜드와 조합 사이에서 연락을 담당하는 자들 중의 한 명이었거든요."

"초장부터 일이 틀어졌구만."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지?"

"올랜드의 여관에는 그레이의 실력자들이 득실거린다. 올랜드가 순순히 따라올 리는 없을 테니 억지로 끌고 와야 하는데 그놈들을 다 뚫어야 돼. 말 그대로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게다가 아시다시피 조합에서 애셔 님을 노리고 있어요. 올랜드를 통해 사람을 고용할 예정이겠죠. 만약 이미 움직였다면... 그 여관에서 십수 명이 넘는 사람을 상대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전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바제스에 비견되거나 그 이상인 자들도 있을 테니까. 정면으로 나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설령 바르톨이 휘하의 부하들을 몽땅 투입해도 반조차 죽이지 못하고 몰살당할 것이다.

"어이, 페르네. 그럴듯한 계획 같은 건 없나? 올랜드만을 유인할 미끼 같은 것 말이야."

"글쎄요. 워낙 조심성이 많은 남자라. 그래도 저희 셋이서 머리를 맞대 보면...."

"위치가 어디지?"

베르덴이 물었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지도. 바르톨이 작은 길목 근처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을 테니 아마 여기에 있을 거다. 그런데 그건 왜?"

"애셔 님, 설마 또...."

"내가 데려오지."

베르덴이 단언했다.

바르톨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 발로 죽으러 가겠다고? 뭐 이런... 실패하고 말고를 떠나서, 만약 산 채로 잡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마, 맞아요! 이번에는 바제스와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둘이 다급하게 만류했다.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베르덴이 지도에 그려진, 올랜드의 여관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을 가리켰다.

"여기에 마차를 보내 놔. 올랜드를 아세른으로 옮겨야 할 테니."

그 말을 남기고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문고리를 잡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발소리. 남겨진 페르네와 바르톨이 멍하니 문 쪽을 바라봤다.

"...이게 맞아?"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세요."

둘이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 * *

조합이란 여러 상회들과 정보상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을 이끄는 자들이 존재한다.

곤 상회의 고곤.

땅거미 상회의 베켄.

엔글로 상회의 레골로.

위 세 명의 상회주야말로 조합의 운영자들이며 귀족들이 내세운 꼭두각시였다. 그런 그들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들어 보니 페르네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 실패한 모양이더군. 애셔라고 했나? 한 마법사를 등에 업고는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고 하던데."

고곤의 말에 베켄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작 마법사 하나 따위에 이게 뭡니까? 바르톨, 그 친구 소문을 들어 보니 꽤 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일 처리가 영 시원치가 않군요."

"응? 우리가 바르톨과 약속한 건 페르네가 빚을 갚지 못했을 때, 그 채권을 넘기는 게 아니었나? 정확히 말하자면 일 처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오만."

"그게 문제인 겁니다, 엔글로 상회주. 눈치껏 행동하는 것도 일입니다, 일. 우리가 페르네를 고립시키는 데 투자한 돈이 대체 얼마입니까? 페르네의 정보망을 허무는 데 들인 노력이 얼마냔 말입니까? 그걸 바르톨도 모를 리가 없는데!"

베켄이 혀를 찼다.

"쯧, 이래서 밑바닥 버러지 출신이란. 시키는 것만 할 줄 알지 주도성이 없습니다, 주도성이. 역시 제 말대로 페르네를 죽이는 게 가장 깔끔했을 겁니다."

"페르네의 능력은 모두 잘 알 텐데? 귀찮다고 죽이는 건 아깝기 그지없지. 이미 모두 동의한 바가 아닌가?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해결책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게 낫겠지만... 사실 이건 너무나 간단한 게 아닌가?"

고곤이 손을 모았다.

"결국 마법사만 처리하면 되는 거다. 일단 잡아 놓고 죽이든 회유하든 해서 다시 페르네를 고립시키면 끝이지. 이미 올랜드를 통해 적임자를 모으고 있으니, 늦어도 2주 뒤면 끝날 일이야."

"음, 올랜드라면 괜찮겠군요. 그와 함께 일하는 자들 중엔 유명한 자들도 많으니. 멋모르고 날뛰는 마법사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겠죠."

그건 확신이었다.

설마설마하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다 죽어 가는 페르네에 붙은 마법사는 너무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결정됐으니 페르네에 대한 얘기는 이걸로 끝내겠소. 그럼 다음 안건이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3왕자께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시오. 귀족들께서 가능한 서두르라고 하시더군."

"3왕자께서 말입니까? 안 그래도 암흑가와의 거래를 통해 겨우 세력을 넓히고 있는데... 여기서 또 규모를 넓히면 위험합니다."

"그래도 거절할 수가 있소? 얼마 전, 푸른 구름 상단에서 일어난 사고 때문에 3왕자께서 주문하신 마석조차 제대로 수급을 하지 못한 마당에?"

베켄이 침묵했다.

자의든 타의든 실수가 계속되었다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일단 헐값에 인수한 푸른 구름 상단을 매각해야 하오. 투자할 여력이 되지 않으니 말이오."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장물의 규모를...."

"그리고 불법 노예의 숫자를 더...."

"아니면 다른 상회를 희생양 삼아...."

세 명의 대화는 더욱 깊어졌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마법사 애셔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베르덴은 올랜드가 있는 장소로 곧장 향했다.

적당히 수면을 취하고는, 말을 갈아타며 이동한 탓에 금방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상대가 될 만한 자들이 있으면 좋겠는데.'

페르네와 바르톨이 경고한 그레이의 실력자들.

공국에서도 그런 자들을 마주하긴 했지만 베르덴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않는 자들이었다.

왕국 그레이는 규모가 다르다니 조금은 기대해 봐도 될 터.

숫자든 뭐든 경험으로 삼을 정도만 되어도 만족이었다. 물론 목적은 정보상 올랜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잔챙이만을 상대하는 건 지겨웠다. 영양가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이 말을 박찼다.

눈밭을 헤치고 숲으로 들어갔다. 발자국이 남아 있는 산길을 따라가자, 눈이 내리는 풍경 속 큼지막한 2층 여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112화 올랜드

올랜드의 여관.

근처에 인가라곤 하나도 없이 나무만 가득했다. 어둠과 함께 눈이 내려앉은 숲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여관 안에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매부리코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이봐, 올랜드! 그 마법사의 목에 얼마라고?!"

"산 채로 잡으면 8억 엘크, 죽이면 3억 엘크라고 했네."

"8억!"

상당한 액수에 그레이의 용병들이 눈을 빛냈다.

"바제스의 용병단을 쓸어버린 놈이라고 했지? 4위계 전격 마법사라고 했었나?"

"나이가 X나게 어리다고 들었는데 마탑 출신일지도 모르겠군. 어찌 됐건 조합에서 그만한 액수를 내건 걸 보면, 그 자신들 품 안에 끌어들이려는 거겠지."

"헤헷, 마탑 출신 범생이 따위야 일도 아니지. 사람들 틈에 숨어서 발목을 잘라 버리면 울면서 드러누울걸?"

십수 명의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이들은 올랜드에게서 대박 의뢰가 있다는 걸 듣고 모였는데, 하나같이 손에 피가 묻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그래서 의뢰는 누가 받을 거지?"

순식간에 여관이 조용해졌다.

서로 눈치를 보더니 몇몇이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간단명료한 의뢰에 무려 8억이라는 보수가 걸렸는데 쉽사리 포기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선 정보상이 나설 차례다.

보다 의뢰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 게 올랜드의 일이었다. 그가 목을 가다듬고는 중재를 하려던 찰나.

쾅!

정적이 깨졌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여관의 입구로 향했다.

연녹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스태프를 든 사내가 서있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더니 올랜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카운터의 앞에 앉아서 뒤집어쓴 로브를 젖혔다.

회색의 머리.

청명한 푸른 눈동자.

범상치 않은 외모.

올랜드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왔군."

"네가 올랜드인가?"

"맞네, 내가 올랜드일세. 그리고 자네는 마법사 애셔로군."

애셔.

그 이름에 용병들이 반응했다. 8억짜리의 먹잇감이 눈앞에 찾아온 것이다. 일부가 입맛을 다시며 스리슬쩍 자신의 무기에 손을 얹었다.

베르덴이 반응하지 않자, 올랜드가 턱을 쓸며 말했다.

"이 시점에 여기를 제 발로 찾아왔다는 건... 그래, 바르톨이 페르네에게 붙은 모양이군. 그렇게 사로잡은 연락책을 통해 내가 조합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테고. 즉, 페르네가 조합과 완전히 대립하겠다고 결정한 거라 생각되는데, 나를 데려가 조합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라도 할 셈인가?"

정보상 아니랄까 봐 상황 파악이 빨랐다.

"그렇다면?"

"하하하, 걸작이군, 걸작이야. 여기가 어딘지 페르네가 말해 주지 않았나? 이거 참, 사슴이 늑대 무리에게 달려든 꼴이로군."

사슴과 늑대라.

비슷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반대인 것만 빼면.

베르덴이 몸을 돌렸다.

올랜드가 불러 모은 그레이의 용병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월하게 올랜드를 데려가려면 이들을 처리해야 한다.

추적조차 하지 못하게 철저히.

하지만 베르덴은 그리 융통성이 없지 않았다.

이들은 올랜드의 의뢰를 아직 수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한 번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베르덴이 선언했다.

"나가는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

* * *

난데없는 으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누군가 웃음을 떠뜨렸다. 그 수는 하나둘씩 늘어났고 이내 여관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크하하하하! 저 새끼가 방금 뭐라고 했지? 나가는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고? 무슨 정신병자라도 되는 건가?"

"어이 친구! 머리가 아주 제대로 돌아 버린 것 같은데! 신관이라도 불러 줄까!"

"크크큭, 이렇게나 어이없는 말은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여관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베르덴을 비웃었다.

그야 당연했다. 수는 물론이고 그들 하나하나가 왕국 그레이에서 몇 년 이상 살아남은 자들이며 살인의 달인. 절대로 얕보일 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을 전부 몰살하려고 한다면 귀족가의 정예 기사단은 불러서 기습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더라도 기사단이 적잖은 피해를 입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 집단을 혼자서 상대하려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고위 속성인 전격 계열을 다룬다고 해도 4위계 마법사 정도의 실력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베르덴은 가만히 앉아 비웃음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한바탕 달아오른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갔다. 웃음기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센 투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쌍검의 골브'가 올랜드에게 물었다.

"올랜드, 의뢰는 누구한테 가는 거지?"

"그를 결정적으로 무력화한 자에게 보수를 주도록 하겠네. 물론 죽이면 3억뿐이네."

"그렇다면 산 채로 잡으면 8억이라는 뜻이군. 우리가 좀 갖고 놀다가 줘도 상관없는 거겠지?"

"목숨하고 사지 중 세 개만 붙어 있다면."

그레이의 용병들이 씨익 웃었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올랜드가 베르덴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 있다간 자칫 휘말릴 수도 있었으니.

그는 여관 뒤쪽에 있는 술 창고로 들어갔다.

스르릉.

그제서야 곳곳에서 무기를 꺼내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이의 용병들은 누가 먼저 나설지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들은 동업자였지 동료가 아니었다.

설령 마법사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해도 실수인 척 등 뒤를 찔러 죽일 놈들이었다. 양심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8억 엘크의 가치를 품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던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갈색 머리의 사내. 그가 녹색 사냥꾼 모자를 쓰고는 짐을 챙겼다.

"어이 올빼미, 지금 어딜 가는 거지?"

"큰 의뢰라고 하도 호들갑을 떨길래 뭔지 궁금해서 와 봤을 뿐이지, 이런 쟁탈전에 끼어들 계획은 없었다. 애초에 따로 모시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고. 그리고...."

올빼미가 슬쩍 베르덴을 쳐다봤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8억이든 뭐든 너희끼리 알아서 하고, 나는 바쁘니 이만 떠나도록 하지."

올빼미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여관을 나섰다.

베르덴을 제외한 나머지 시선들이 그를 바라봤다. 올빼미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그레이의 추적꾼으로 명성을 잇는 강자가 이렇게 꽁무니를 뺄 줄이야.

회색뱀 쟈켄이 빈정대듯 침을 뱉었다.

"뭘 모신다고? 하, 그 올빼미도 이제는 한물 갔나 보군.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면서 헐레벌떡 도망을 칠 줄이야. 그리고 다른 놈들은 눈치 보느라 바쁜 모양이고. 에라이, 병신들."

쟈켄이 일어섰다.

펄션을 손에 든 그가 당당히 베르덴에게 다가갔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쟈켄이 칼 끝을 베르덴에게 향했다.

"무슨 배짱으로 여길 쳐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특별히 그 몸에다 직접 교훈을 새겨 주지. 깝치다가 뒈지면 X나게 고통스럽다고 말이야."

쟈켄이 낄낄거리며 펄션의 날을 혀로 핥았다.

가늘게 찢어진 눈만큼이나 뱀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다리가 기묘하게 비틀리며 그의 신형이 고무줄처럼 쏘아져 날아왔다.

이후 대화는 일을 끝낸 후에 해도 늦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마침 베르덴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물론 시체와 대화할 생각 따윈 없지만.'

쟈켄이 움직임과 동시에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둘러진 오큘러스.

이윽고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 * *

────콰아아앙!

폭음이 들려왔다.

여관이 흔들리며 천장의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올랜드는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도수가 낮은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금방 처리하면 될 걸, 질질 끄는군. 시끄럽게.'

상대는 4위계 마법사 하나다.

멀리서 마법을 난사하면 위협적이겠지만 그는 여관 안에 있다. 위에 모인 실력자들이라면 마법을 시전하기도 전에 능히 무력화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쌍검의 골브.

회색뱀 쟈켄.

올빼미.

무식한 딜렌드.

하나같이 왕국 그레이의 이명 소유자.

물론 이명이 있다고 해서 강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두각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그게 실력이든 잔인함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런 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드는데 끽해야 30살이 이르지 않은 마법사가 어찌할 수가 없다.

설령 5위계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저 거리에서는 우위를 점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제압하지 않는 걸 보면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하겠지.'

그중엔 실력뿐만이 아니라 성격이 여러모로 악랄한 자들도 있었으니까. 곧 있으면 여관 내부가 마법사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래야 했다.

'근데 왜 아직도 소란스럽지?'

시간이 좀 지났음에도 여관이 아직 흔들리고 있다.

간간이 비명 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열한 전투가 연상되는 소음이었다.

'본래 지금쯤 상황이 끝났어야 정상일 텐데....'

올랜드가 미간을 찌푸리던 그 순간.

콰아아아앙!

벽이 박살 나며 사람 하나가 올랜드 앞에 떨어졌다.

놀라긴 했으나 그것이 목표물인 마법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잠시 후 완전히 깨져 버렸다.

"딜렌드?"

무식한 딜렌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거리가 있음에도 그의 몸에서 짙은 한기가 느껴졌다. 얼굴 표정이 꿈쩍하지 않는 걸 보아 얼어 죽은 모양이었다.

"...설마?"

올랜드의 고개가 옆으로 향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려, 바깥의 추위가 들어오고 있는 여관 내부.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끄아아아아아아악!"

쟈켄이 비명을 질렀다.

<전격>에 감전당해 전신에서 전류가 번쩍였다. 피가 끓는 고통에 결국 무릎을 꿇었고, 이어 날아온 둥그런 칼바람들이 그의 목과 가슴 그리고 허리를 가로질렀다.

회색뱀 쟈켄은 그렇게 절명했다.

마지막 생존자.

쌍검의 골브가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어, 어째서 이런 괴물이...."

초 단위로 행해지는 마법 시전 속도.

등 뒤의 칼날마저 피해 버리는 마법사의 반응 속도와 감각.

도저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마력량과 대처가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속성 마법까지.

골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숫자로도 마법사에게 치명상은커녕 얕은 찰과상조차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은 쏟아지는 마법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눈앞의 잿빛 마법사는, 그가 알고 있던 마법사들과는 격이 달랐다.

골브는 직감했다.

'잘못 건드렸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그래야 한다. 승산이 없다.

결심한 골브가 쌍검을 베르덴에게 내던지고 뒤로 돌았다. 여관의 틈새로 몸을 던지고는 눈밭을 달렸다.

그 속도는 말보다도 빨랐다.

하지만 마법을 피할 수 없었다.

<아이스 필러>

베르덴의 마안이 발동했다.

갑작스레 골브의 발 앞에서 얼음 기둥이 솟아났다. 복부에 적중당한 마법에 그가 숨을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혹한의 한기가 장기를 파고들었다.

숨을 토해 낸 골브의 눈앞에 한 줄기 화염이 쏘아졌다.

<플레어>

"시, 시바아아아아아알!"

콰아아아아아!

화염 광선이 골브를 집어삼켰다.

마법이 사라진 후에 남은 건 검게 그을린 무언가뿐. 입안을 넘어 장기까지 파고든 열기에 골브의 시체는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베르덴을 잡기 위해 모였던 그레이의 용병들. 그들은 변변찮은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전멸했다.

베르덴이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결국 이 정도인가.'

실망이다.

개개인으로는 나름 강자라고 할 법한 자들이었으나 서로 손발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차라리 한 명씩 상대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다수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자기들끼리 경로가 뒤엉켜 피할 수 있는 마법에 정통으로 맞거나, 빗나간 검격이 옆에 있는 동업자의 살을 가른 경우도 있었다.

한심하다.

기대감이 있었던 만큼 더욱.

'뭐, 어쨌든.'

베르덴이 발걸음을 옆으로 향했다.

올랜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그가 뒷걸음질을 쳤으나 벽이 가로막았다. 한 발짝씩 다가오는 베르덴에게 올랜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오해가...."

퍼억!

오큘러스가 올랜드의 관자놀이를 타격했다.

올랜드는 전사가 아니었다.

머리가 부어오른 그는 곧장 정신을 잃었다.

'이걸로 정보상 올랜드는 확보했고.'

하지만 아직 이곳에 볼일이 남아 있었다.

정보상이라면 페일이나 페르네처럼 정보들을 모은 서류들이 있을 테니까.

...이윽고 베르덴에게 탈탈 털린 여관.

그 건물은 안에 있는 시체들과 함께 활활 불에 타올랐다.

* * *

쿵!

기절한 올랜드가 주점 바닥에 널브러졌다.

페르네와 바르톨이 헛것을 보기라고 한 듯 눈을 비비고는 입을 열었다.

"진짜 데려왔네?"

113화 칼리아 (1)

"심문은 맡기지."

올랜드를 데려왔고 그가 가진 정보 서류들도 챙겨 왔다.

베르덴은 자신이 맡은 일을 확실히 끝냈다. 심문 과정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정보상인 만큼 가진 정보가 많을 테니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 테니.

'페르네가 알아서 하겠지.'

베르덴은 여독을 풀기 위해 여관으로 향했다.

주점 지하에는 바르톨과 페르네 그리고 단단히 구속된 올랜드만이 남았다.

바르톨이 물었다.

"저거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뭔 전직 미스릴 등급 모험가라도 돼? 어떻게 사지 멀쩡하게 올랜드를 데려올 수가 있지?"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바르톨이 눈썹을 씰룩였다.

"어떻게 정보상이 그걸... 잠깐 설마, 네가 데려온 마법사가 아니었나?"

"...."

페르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페르네가 데려온 게 아니다.

베르덴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애초에 이런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있다면 조합이 손 쓰기도 전에 불렀을 것이다.

지금 오히려 당혹스러운 건 페르네였다.

도저히 그의 실력이 짐작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대충 가늠은 했었는데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제는 거의 하루가 다르게 평가가 수정되고 있었다.

'새삼 생각해 보니 애셔 님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네.'

페일에게 소개를 받아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한번 알아봐야 하나?'

다름 아닌 최대 고객에 대한 정보의 오류는 치명적이다. 하루빨리 애셔란 마법사에 대해 알아야 자신도 그에 맞춰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니야. 그냥 내버려 두자.'

자칫 그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은 무조건 피해야 하고 감히 상상해서도 안 된다. 몸이 간지럽다고 동아줄을 놓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다.

판단을 내린 페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조합에 대한 정보예요. 그러니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저희가 맡은 일만 하자고요. 알겠어요, 바르톨?"

"제길, 뭔지도 모르는 놈하고 일을 하게 되다니...."

바르톨이 궁시렁거리며 팔을 걷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실 식겁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지 뻔했기 때문이다.

'역시 인생은 모른다더니.'

솔직히 말해 뒈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란 듯이 정보상을 데려왔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당연히 올랜드가 순순히 따라올 리가 없으니 전투가 벌어졌을 텐데... 그건 즉, 방해물들을 처리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처리가 뭐야. 그냥 압살한 거지.'

그게 아니라면 엄청난 언변으로 놈들과 올랜드를 설득했다거나.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저 잿빛 머리의 마법사.

그의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진짜 X될 뻔했군.'

소갈비 뜯어 먹다가 그대로 개죽음당할 뻔했다.

뭐, 지금도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별수 없었다.

이미 손은 잡았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까. 바르톨은 자신의 직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주먹을 쥔 바르톨이 기절한 올랜드에게 다가갔다.

* * *

"살려 주게."

깨어난 올랜드는 곧바로 항복했다.

가진 정보를 대부분 빼앗긴 데다가 심지어 의뢰를 할 용병들마저 싹다 죽어 버렸다. 이 악물고 버텨 봤자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페르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긴 한데 포기하는 게 너무 빠른 것 아니야?"

"애초에 조합은 이익집단이지 기사단 같은 게 아니네. 내 가장 소중한 재산인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있지도 않은 충성심으로 보안을 지킨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조합이 날 구하러 올 것도 아닌데. 저항해 봤자 얻는 거라곤 바르톨의 주먹세례뿐이겠지."

올랜드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진 인간이었다.

가까이 두기에는 꺼려지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그가 순순히 입을 연다면 일이 한층 더 수월해질 테니.

"전적으로 협조할 테니 자네도 약속하게, 날 죽이지 않겠다고."

"정보에 따라 생각해 볼게."

"그 말만으로도 기쁘군."

그 이후는 간단했다.

올랜드가 가진 서류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그의 발언과 대조했다. 양이 상당하긴 했지만 다행히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끝낼 수 있었다.

정보 수집을 마친 페르네가 베르덴에게 연락을 보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베르덴이 계단을 타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기절하기 직전에 본 것과 같은 차가운 시선에 올랜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

베르덴이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끝냈군."

"딱히 심문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성과는 확실히 있었어요."

페르네가 올랜드의 어깨를 툭 쳤다.

침을 삼켜 겨우 가슴을 진정시킨 올랜드가 입술을 떼었다.

"호, 혹시 '플리쉬르 백작'에 대해 알고 있나?"

"플리쉬르 백작이라면...."

들어 본 적 있다.

왕국에 비행 금지령을 내리게 한 귀족의 이름이었다.

"그 백작은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이자 그의 귀중한 자금책이네. 왕국 전체에 비행 금지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왕자의 입김이 매우 컸지. 페르네, 잠시 지도 좀 주겠나?"

페르네가 왕국 지도를 펼쳤다.

올랜드가 플리쉬르 백작령의 서쪽 부근을 가리켰다.

"여기에 백작의 사유지가 있네. 겉으로는 별장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사실 불법적인 자금이 오가는 곳이지."

"예를 들자면?"

"매매가 금지된 마약이나 해외에서 몰래 들여온 밀수품. 그리고 불법 노예도 취급되고 있네. 운영이 된 지 십 년은 넘은 터라 규모가 상당하지."

주 고객은 왕국 암흑가의 인간들.

국제법 따위는 대놓고 무시하며, 인간을 돈으로밖에 보지 않는 자들이었다.

"꽤나 자세히 알고 있군."

"그야 나도 거래한 적이 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간접적으로만 접촉하게 된 거지만 몇 년간 시장의 흐름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지. 만약 이 사실을 조합이나 백작에게 들키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

그러니까 몰래 알아낸 정보라는 뜻이었다.

상대를 신뢰하지 못해 나름 한 수를 숨긴 것이겠지. 이런 건 왕국 그레이나 공국 그레이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페일하고 페르네와 일하게 된 건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하나.'

둘은 적어도 책임감과 믿음은 있었으니까.

적어도 쉽게 뒤통수를 칠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입증할 증거는 있나?"

"곧장 파기했으니 있을 수가 없지. 하지만 그 불법 자금에 직접 관계하고 있는 자에 대해 알고 있네. 이것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는 극비 정보긴 하지만... 당장 내 목숨이 중요한 법이니."

지도에 닿아 있던 올랜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흑랑(黑狼) 토렐드. 왕국 최대 암흑가인 로아프라 출신으로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대고 있는 자일세. 별장의 귀중한 고객들 중 하나이기도 하지.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고, 워낙 뒤가 켕기는 인간이라 따로 자리를 잡은 적은 없었지만 최근에는 애용하는 장소가 있다고 하더군."

"그게 어디지?"

올랜드의 손이 멈췄다.

"이곳. 버려진 옛 성터일세."

* * *

바르톨의 부하들이 올랜드를 데리고 갔다.

살려는 줘도 풀어 줄 수는 없으니 그를 가둬 놓고 감시할 예정이었다. 조합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야 했으니까. 그 외 쓸모도 아직 남아 있기도 했고.

주점의 지하.

베르덴이 페르네에게 물었다.

"흑마법사에 대한 건 나왔나?"

페르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정보를 전부 뒤져 봤는데도 흑마법의 흑 자도 나오지 않았어요. 딱히 올랜드가 뭔가를 숨기는 기색도 없었고요. 아마 3왕자와 그 측근들만 알고 있는 기밀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칼리아에게 증명하긴 어렵겠군."

정체불명의 흑마법사들.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으니 칼리아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겠지.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메인은 흑마법사가 아닌, 조합과 귀족의 부정이니까.

이제 정해야 될 차례다.

지금 가진 정보를 가지고 칼리아를 먼저 만날지, 아니면 토렐드에게서 명확한 정보를 얻은 뒤에 찾아갈지.

페르네는 전자를 추천했다.

"칼리아가 가진 그 특유의 행동력은 귀족보다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용병 무리에 가까워요. 몇몇 귀족들은 그런 그녀를 우직하다고 폄하하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반대예요."

칼리아는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자가 가져온 정보가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이 칼리아의 무서움이었다.

"그래서 칼리아와 만나 먼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보다 확실하게 움직일 테니까요. 그리고 애셔 님 혼자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크고요."

상대는 조합을 조종하는 귀족 중 하나이며 3왕자까지 관련되어 있으니. 아무리 베르덴이 강하다고 해도 힘으로 헤집으려 했다간 되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심하면 자칫 왕가를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베르덴이면 모를까.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 죽는 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를 들자면 페르네 말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독녀, 칼리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귀족은 귀족이 상대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 후작가의 위세를 얻을 수 있다면 명분은 이쪽에 있다.

불법 노예와 마약만 확인되면 조합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빼앗아 페르네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을 거고.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칼리아는 어떻게 만날 수 있지?"

올랜드에게서 얻은 정보들.

그걸 칼리아에게 보여 주는 게 우선이나, 그 전에 접근할 방법이 필요하다. 후작가의 독녀를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서 만나 줄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페르네는 이미 밑바탕을 그려 둔 상태였다.

그녀가 메모장 한 장을 추가로 건넸다.

"칼리아의 인적 사항을 기록해 뒀어요. 후작령이 그리 먼 곳도 아니고, 저번에 말씀드렸듯 칼리아는 공명심이 높아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 정도 정보쯤이야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죠."

페르네가 싱긋 웃었다.

"이걸 참고하신다면 접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문제는 설득인데... 이건 애셔 님의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준비는 도왔지만 결국 실행자는 베르덴이다.

아무리 페르네라고 해도 완벽한 매뉴얼을 짜 낼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페르네의 본업은 정보상.

베르덴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정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건 별개의 이야긴데, 애셔 님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요."

"좋은 소식?"

"저번에 보여 주셨던 유물 있잖아요? 그 유물을 해석해 줄 탐사단을 찾았어요."

"...!"

베르덴이 귀를 기울였다.

"규모는 적지만 소수 정예로, 유적 발굴 쪽에서 유명한 탐사단이에요. 얼마 전 왕국에 입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접근해 봤는데 애셔 님이 가지고 있는 유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고요."

'마도왕의 유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이건 예상외였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마도왕의 무덤을 발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훨씬 단축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그 탐사단은 어디에 있지?"

"2주 내로 아세른으로 오기로 했어요. 그쪽에서도 강력하게 애셔 님을 만나길 희망하던걸요. 도중에 만남이 불발될 일은 없을 거예요."

2주라. 나쁘지 않다.

할 일을 끝내고 나면 여유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되는군.'

그렇게 베르덴은 에스퍼렌사 후작이 직접 다스리는 동쪽 변방의 대도시, '라인스(Rines)'로 향했다.

그리고 밤이 지나 낮이 찾아오며, 새해가 밝아 왔다.

114화 칼리아 (2)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검붉은 머리칼을 가진 후작 영애.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가전 검술을 전수받은 존재 중 하나로, 무술의 재능은 뛰어나나 다른 재능은 타 형제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이 있다.

그래서인지 공명심이 무척이나 강하다.

주로 직속 기사단과 함께 도적 및 범죄자뿐만 아니라 모험가 길드에게 동의를 받고 아인종이나 이형종까지 토벌하고 다닌다.

그 위명과 영향은 영지 바깥 멀리까지 뻗어 있다.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백색 검.

그리고 휘어지지도 않고 부러지지도 않는 미친 듯한 행동력에, 그녀에겐 '백강(白剛)'이라는 이명이 붙어 있었다.

다만 너무도 성격이 완강한 터라, 그녀를 비판하는 측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방자한 귀족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칼리아의 진면목은 바로 '신중함'이다.

직접 얻어 낸 정보를 토대로 확신을 갖고 움직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내지 않았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칼리아의 취미는 인재를 찾는 것이다.

판단 기준은 주로 힘과 인성.

주기적으로 작은 대회를 개최하여 좋은 성적을 보이는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포상을 내리거나, 마음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있으면 영입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후작가의 위상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또한 그녀는 언제나 같은 식당에서 그녀만의 코스 요리를 즐기며 주요 동선은....

'상당히 자세하군.'

페르네가 건네준 메모장.

칼리아가 뭘 선호하며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칼리아란 귀족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해돋이 광경이 시야를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새해인가.'

현재 베르덴의 나이는 26살.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만큼 바쁜 나날들을 보내 왔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다른 이들처럼 새해를 즐길 여유도 생각도 없다. 잠시 태양을 보는 정도면 충분하다.

베르덴이 다시금 목적을 상기했다.

칼리아가 새해를 기념할 목적으로 개최하는, 모험가 길드 연무장을 무대로 하는 작은 대회.

토너먼트 형식이 아니라, 칼리아의 기사가 참가자들을 상대하는 방식이니 당연히 칼리아 또한 참석할 터.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자연스레 접근하는 건 그 대회를 이용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일단 보고 나서 판단할까.'

그게 먼저였다.

그 후 이튿날, 저 멀리 거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대도시 라인즈(Rines).

왕국 동쪽에서 가장 큰 대도시로 변방을 수호하는 철벽의 요새이기도 했다. 성문을 통과한 베르덴의 시야에는 겨울임에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인파가 가득했다.

새해라 그런지 거의 축제나 다름없는 분위기.

'다행히 시간 맞춰 왔군.'

페르네의 메모장에 따르면 대회는 오늘이 셋째 날이다.

정오보다 이른 시간이니 지금쯤 한창 대회가 진행되고 있겠지.

베르덴이 라인즈의 중심 광장에 도착했다.

거기에 있는 도시 지도를 보고 모험가 길드의 위치를 확인했다. 목적지는 도시의 북서쪽.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장에 도착했다.

안에서는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본 연무장 중에 가장 큰 것 같은데.'

대도시답게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 또한 규모가 컸다.

마치 작은 투기장처럼 구경꾼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베르덴이 빈자리에 앉았다.

연무장의 중심에서는 두 사람이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베르덴의 관심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저 사람이 칼리아인가.'

관객석 최상단의 상석에 앉아 있는 여성.

페르네가 준 정보가 정확히 들어맞는 외견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완전 무장을 한 기사단이 철통같이 호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접근할까.

아니, 어떻게 칼리아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대회에 참가해 두각을 드러내는 것. 그것만이 지금으로써 가장 확실했다.

그때, 한 시합이 끝났다.

명백한 기사의 승리였다. 심판을 맡고 있던 기사가 소리쳤다.

"다음 참가자는 없는가!"

그 목소리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몇몇 사람들이 나설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기사가 보여 준 수준을 상대로 선전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기다릴 필요는 없겠군.'

베르덴이 나섰다.

연녹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허공을 날아 연무장에 안착했다. 그 등장이 꽤나 이목을 끌었는지 관객석이 잠잠해졌다.

기사가 다가왔다.

"마법사군. 혹시 규칙은 숙지하고 있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은 3위계 하위까지 그리고 살생 금지로 규칙은 총 두 가지였다.

"음, 잘 알고 있군. 그럼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하지."

기사가 물러서고 고급 스태프를 든 마법사가 나섰다.

그 또한 칼리아의 기사 중 하나. 마력을 갈무리해 감추고 있는 걸 보아, 최소 4위계임은 분명해 보인다.

마법사가 말했다.

"따로 들고 온 장비는 없는 건가?"

"이대로 하겠습니다."

마법사가 스태프도 지팡이도 들지 않는다라.

무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마법사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내색하기는커녕 작게 웃었다.

"손속에 사정은 두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가 깃발을 들어 올렸다.

연무장 전체가 조용해지는 순간, 깃발이 내려가며 시합이 시작됐다.

마법사는 곧장 마력을 끌어모아 마법을 형성했다.

그에 반해 베르덴은 그저 마법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마법을 쓸 생각도 없었으니까.

마력 위압.

베르덴의 푸른 마력이 무대를 장악했다.

* * *

왼손으로 턱을 괸 칼리아가 조용히 대회를 관전했다.

마지막 날을 앞둔 셋째 날, 수십 번의 대련을 지켜보며 그녀가 느낀 기분은 하나뿐이었다.

'따분하군.'

칼리아의 기사단에서 차출한 기사들이 참가자를 상대하는 시합 방식.

상대가 전사면 기사.

상대가 마법사면 마법사.

안전을 위해 날이 없는 철검을 사용했으며, 사용 가능한 마법 위계도 3위계 하위로 제한했다.

그래서인지 시합 수준은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수로 누가 죽기라도 했다간 칼리아의 명예에 흠집이 날 테니. 그리고 그게 아버지인 후작의 귀에 들어갔다간 다시는 이런 대회를 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올해는 너무하는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새해.

칼리아는 기대를 갖고 대회를 주최했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에 들어맞는 인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그런 건 없었다.

나름 봐 줄 만한 실력자들이 있긴 했으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대부분 대회의 보상을 노린 모험가들이었으니까.

아무리 칼리아라고 해도 대놓고 길드의 모험가를 빼앗을 정도로 막 나가진 않았다. 그런데 모험가들을 제외하면, 기사와 검을 맞댄 정도로 자부심을 갖는 어중이떠중이밖에 없으니....

'이래서야 내일도 허탕이겠어.'

칼리아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당장 대회를 끝내고 집에 가서 잠이라도 자는 게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연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날아와 연무장에 착지했다.

꽤나 이목을 끄는 등장이다.

칼리아는 흥미가 생겼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과연 시합마저 등장만큼이나 신박할지 궁금해졌다.

물론 기대는 안 했지만.

그 순간.

"...!"

심상치 않은 마력량이 휘몰아쳤다.

'마력 위압?'

마력으로 상대의 기세를 제압하는 기술로, 그 위력은 시전자의 마력회로의 완성도와 마력량에 비례한다.

칼리아 또한 숱한 범죄 마법사를 토벌하면서 몇 번이나 겪어 본 적이 있는 감각이다.

그런데 지금의 마력 위압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끄으윽...!"

그를 상대하던 마법사의 다리가 무너졌다.

4위계 마법사가 저리 힘들어할 정도라니.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대회를 관전하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일절 영향이 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저 표정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마력 위압은 오로지 마법사와 칼리아의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마력 조작 능력이군.'

근데 왜 나까지 겨냥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모른다.

하지만 덕분에 지루함이 사라졌다.

이윽고 전신을 압박하던 마력이 사라졌다.

남은 건 식은땀을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은 칼리아의 마법사와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서 있는 연녹색 로브의 마법사뿐.

그때, 로브 안에 감춰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칼리아와 마주쳤다.

"하."

칼리아는 확신했다.

분명 저 마법사는 남다른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존재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용건이 있는 것이라고.

"베스파 단장."

"예, 칼리아 님."

칼리아를 호위하고 있던 백결 기사단장 베스파.

그는 정중히 대답하면서도 낯선 마법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또한 위압적인 마력을 느꼈기에.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더 볼 것도 없어 보이니."

칼리아의 검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 * *

예정보다도 일찍 대회가 끝났다.

관객들은 아쉬워하긴 했지만 곧장 안내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귀족은 말 그대로 평민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기에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내일도 있으니 괜찮았다.

그리고 칼리아가 개최하는 대회는 종종 구경할 기회가 있기도 했으니.

그렇게 사람들이 전부 나간 후, 기사단과 함께 칼리아가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베르덴을 마주한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볼거리론 부족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시합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얼굴을 보였으면 좋겠는데."

"실례했습니다."

베르덴이 로브를 젖히며 답했다.

그 외모는 후작가의 자식인 칼리아조차도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호오, 귀족 출신 마법사인가? 왕국에서 보지 못한 걸 보니 타국에서 왔나 보군."

"죄송하지만 평민입니다."

"아, 이거 미안하군. 그럼 마탑 출신인가?"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말에 칼리아의 흥미가 더 깊어졌다.

확실히 플레이트를 차고 있지 않은 걸 보면 모험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용병 길드 소속 용병이라기엔 외모도 마력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일개 용병으로 살아갈 인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레이에서 활동하는 마법사인가?'

하지만 이런 얼굴을 가진 마법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최근에 나타난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왕국은 넓으니 언제 어디서 강자가 나타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칼리아의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더.

마법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육체. 로브로 가려져 있지만 그녀의 눈을 속이진 못했다.

'무슨 마검사라도 되는 건가? 뭔지는 몰라도 참으로 희한한 마법사로군.'

어떤 목적으로 칼리아의 관심을 끈 것일까.

그녀는 너무도 궁금해서 참기가 어려웠다. 낯선 상대를 가까이하는 건 위험한 일이나, 적어도 대화를 해 보지 않으면 이 갈증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이 뭐지?"

"애셔입니다."

"애셔라. 머리 색에 어울리는 이름이군."

칼리아가 등을 돌렸다.

"나는 칼리아 드 에스퍼렌사.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 흥미를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히 뜻대로 어울려 주지.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식사라도 하면서 말이야."

칼리아가 기사들과 함께 연무장을 나섰다.

듣던 대로 행동력 하나는 강한 모양이다. 베르덴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걸 알면서도 선뜻 식사에 초대하다니.

아마 칼리아 자신의 강함과 기사단의 무력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설령 암살자라고 해도 능히 대처할 수 있다는.

'어쨌든 운이 좋군.'

이걸로 첫 번째 매듭은 푼 셈이다.

115화 칼리아 (3)

레스토랑 말레나.

이곳은 칼리아가 자주 애용하는 장소로, 그녀가 예약한 날은 건물을 통째로 빌려서 이용하고 있다.

혹여 독살이나 암살을 하려 할 수도 있기에 기사들이 식당 전체를 점거하고 음식의 재료들을 전부 확인한다.

레스토랑 주인 입장으로는 너무도 번거로운 일이긴 했으나 상대는 후작가의 독녀다. 감히 불만을 제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본래의 가격보다 더 많은 대금을 지불하니, 주인은 웃으며 칼리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아와 베르덴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녀의 곁을 베스파 단장이 지켰다. 타인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베르덴은 전혀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귀족과의 식사가 익숙한 모양이군. 대부분은 긴장해서 덜덜 떠는데 말이야."

"운이 좋아 몇 번 기회가 있었습니다."

칼리아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라. 평민이라더니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 그나저나 먹지 못하는 음식이 따로 있나?"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최근에 내가 먹기 위해 직접 짠 코스 요리가 있어서 말이야. 내 기사들이야 훌륭하다고 해 주긴 하지만 외부인의 감상도 듣고 싶어서 말이지. 간단히 부탁해도 되겠나?"

그 정도야 문제없다.

베르덴도 음식을 먹는 것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칼리아가 손짓했다.

기사들이 직접 요리들을 서빙했다.

전채로는 에스카르고, 달팽이 요리가 나왔다.

잘 구워진 빵과 맑은 국물의, 콩소메 수프가 곁들여졌다. 후에 오븐에 노릇노릇 익힌 바다 생선이 차려졌다.

그다음은 에피타이저로 입안을 청결하게 하고 메인 요리의 차례였다.

돼지 목살 스테이크 다음에 레어(Rare)로 익혀진 안심 스테이크. 옆에는 신선한 샐러드가 함게했다.

마지막 디저트로는 최고급 초코 케이크와 커피가 나왔다.

베르덴과 칼리아.

서로는 식사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많이 식사 예절이 자유로워졌지만, 이것이 정통적인 귀족의 식사법이었다.

베르덴은 섣불리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식사에 대해 평해 달라고 했으니 거기에 집중했다. 그런 작은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는다면 베르덴과 대화를 제대로 할 리가 만무했으니까.

디저트를 즐길 때쯤에야 대화가 다시금 이어졌다.

"어떤가? 표정을 보니 나쁘지 않은 듯한데."

"훌륭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기도 하고, 특히 달팽이가 거부감 없이 잘 넘어가더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아쉬웠습니다."

첫 번째는 생선 요리였다.

적당히 기름지고 맛 또한 상당했지만, 코스 전체로 보면 식감이 많이 부족했다. 오븐 구이보다는 생선 튀김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칼리아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금 생각해 보니 튀김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뭐지?"

"이건 아쉽기보다는 의문입니다. 어째서 육류에 돼지와 소를 같이 넣으신 겁니까?"

코스에 두 가지 종류의 메인 요리는 과하다.

당연한 의문에 칼리아가 팔짱을 끼며 답했다.

"그건 내 취향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취향은 존중해야 하니까. 애초에 이건 칼리아가 자신을 위해 짠 코스였으니, 그걸 가지고 타인이 왈가왈부할 건 아니었다.

그러자 칼리아가 작게 웃었다.

"장난삼아 요청한 건데 진지하게 받아 줄 줄이야. 그런데 식사 예절을 봐도 어지간한 귀족 자제는 상대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평민이라, 참 재미있는 사내로군. 대화를 할수록 궁금증이 더 깊어져만 가. 그러니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지."

칼리아의 눈동자가 베르덴을 향했다.

"애셔,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 * *

칼리아와 기사들의 시선이 베르덴에게 멈췄다.

그 적막 속에서 베르덴이 페르네가 준 서류들을 꺼냈다. 단장이 종이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 칼리아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플리쉬르 백작이 가진 불법 자금원에 대한 정보입니다."

"...!"

칼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곧바로 서류들을 넘기며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 마약, 밀수품 심지어 불법 노예만이 아니라 조합과 3왕자에 대한 연관성까지 상세히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서 이걸 손에 넣은 거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위험한 정보들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

그러나 칼리아에겐 유례없는 기회였다.

이걸 잘 이용한다면 칼리아 일생에 전무후무한 공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맹독이 가득한 벌집을 건드는 것만큼이나 큰 파장이 일겠으나, 벌집을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 더 큰 위험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에스퍼렌사 후작가의 가훈은 정도(正道).

설령 이번 일로 왕국에 큰 혼란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특히나 노예 제도를 혐오하는 그녀의 아버지라면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칼리아를 도울 것이 분명했다. 그건 다른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칼리아가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내가 이걸 어떻게 믿지?"

정보 규합성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위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건 칼리아의 신중함을 떠나, 보다 확실하지 않으면 후작가가 정치적 피해를 입을 만큼 엄중한 사안이었으니.

"별장을 이용하는 고객 중 한 명의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고객? 그게 누구지?"

"그건 제 용건을 들어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르릉!

말이 끝나자마자 베스파 단장이 검을 뽑았다. 은색의 칼날이 베르덴의 목을 향했다.

"마법사 나부랭이가 겁도 없이 칼리아 님에게 거래를 운운하다니. 감히 에스퍼렌사 후작가를 우롱하는가?"

그에게서 거센 기운이 흘러나왔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

그런 무언의 압박감이 베르덴을 억눌렀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칼날을 앞에 두고도 태연히 칼리아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칼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참으로 대범하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아주 신선해. 요람 속에서 자란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돈만 밝히는 용병들과는 그야말로 인종이 달라."

칼리아가 등받이에 몸을 누이자 베스파 단장이 검을 회수했다.

"좋아. 얘기는 들어 주지.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거래를 요구했다간 베스파 단장이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모르니,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도록."

이미 무엇을 거래할지는 정해졌다.

베르덴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조합과 적대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걸 간략하게 설명했다. 흑마법사에 대한 건 일단 제외했다.

명확한 정황 증거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섣불리 그녀를 납득시키려고 했다간 역효과일 게 분명했다.

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정보로 조합과 놈들이 등에 업은 귀족들을 상대해 달라는 뜻이군. 그사이에 너희 정보상은 조합에 대항할 세력을 키우고... 내가 얻는 건 에스퍼렌사 후작의 일원으로서 얻을 막대한 공훈이로군. 나로선 나쁘지 않은 거래야."

하지만.

"전제되는 조건이 부족해. 만약 그 고객이라는 자에게서 확실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물거품이나 다름없지."

칼리아도 왕국의 어둠은 잘 알고 있었다. 조합의 뒤가 구리다는 것 또한.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모든 걸 척결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나라를 송두리째 들어내지 않는 한.

단순히 의심이 간다고 해서 다른 귀족이나 왕가의 뒤를 캐내려고 했다간 칼리아뿐만 아니라 최악으로 에스퍼렌사 후작가 전체가 매장당할 수도 있다.

고위 계급에 위치한 범죄자들을 처벌하려면 확실한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는 또 분명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명분을 위한 또 다른 명분이 필요하고.

돌고 도는 모순적인 현실.

그게 귀족들의 싸움이고 곧 정치적인 전쟁이다.

칼리아가 생각하다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최근 내 밑에 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그와 함께 그 고객을 '살려서' 나에게 데려오도록. 음, 굳이 말하자면 의뢰를 하는 거라고 볼 수 있겠군."

함부로 기사단을 움직였다간 세간의 주목을 받을 터.

그렇기에 그 역할을 의뢰 형식으로 넘기는 것이다. 베르덴이 공국 그레이에서 해 왔던 의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만약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따로 보수를 챙겨 주도록 하지. 그리고 고객에게서,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정황이 확인되면 얼마든지 조력자가 되어 줄 생각이고. 이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귀족이 이름을 걸었다.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물론 의뢰는 완벽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 혹여 도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나는 가차 없이 너희를 버릴 것이다. 그래도 수락하겠나?"

당연히.

"수락하겠습니다."

"좋아. 그래서 그 고객이 대체 누구지?"

베르덴이 말했다.

"흑랑 토렐드라고 합니다."

* * *

마일드륀에서 마석 보급을 담당했던 흑마법사 체드.

그는 다른 두 흑마법사와 함께 실종되었다.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마일드륀에서 떠나는 걸 봤다는 증언 외에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뭐, 마석쯤이야 다른 곳에서 구하면 된다.

당연히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약간 심기에 거슬리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난 노인, 그가 분노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사령의 보주'를 훔쳐 간 '배신자'가 어디에 있다고?"

"죄, 죄송합니다, 노사(老士). 저희가 행적을 파악했을 즈음에 수배령 전단지를 본 암흑가의 인간이 그 마법사를...."

그 순간, 노사가 마력을 번뜩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흑마법사를 구속했다.

"그 도둑놈을 찾기 위해, 3왕자에게 말해 왕국 전역에 비행 금지령을 내린 데다가 조합의 금전과 인력까지 지원해 줬다. 그런데 그걸 외부인에게 빼앗겼다? 죽고 싶다고 돌려 말하는 건가, 지금?"

"끄으윽... 아아아아악...!"

꾸드드드득.

노사가 손을 움켜쥐자 흑마법사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관절의 역방향으로 천천히 꺾이며 인대와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 채로 팔꿈치 하나를 접어 버리고 나서야 노사가 흑마법을 풀었다.

털썩 주저앉은 흑마법사가 곧장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사죄의 의미였다. 피가 흘렀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묻지. 배신자를 데리고 있는 자가 누구지?"

"토, 토렐드라고, 플리쉬르 백작의 고객 중 하나인데, 수배된 마법사를 데리고 있으니 거래를 하고 싶다고 백작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사령의 보주는?"

흑마법사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는 건 배신자가 사령의 보주를 어딘가에 감췄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로군."

노사가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쓸었다.

"백작에겐 내가 이야기할 테니 네가 직접 놈과 거래해라. 그리고 배신자에게서 사령의 보주에 대한 행적을 반드시 얻어 내라."

희멀건한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만약 실패했다간 30일에 걸쳐 네놈의 육신을 손끝부터 천천히 짓이겨 줄 것이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노사."

허리를 숙인 흑마법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사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핏대를 가라앉혔다. 그 옆,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성이 다리를 흔들며 히죽였다.

"왜 그렇게 열을 내?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시끄럽다. 애초에 네가 보주를 부주의하게 도둑질당하지만 않았으면...."

"나라고 배신자가 나올 줄 알았나? 잃어버릴까 봐 보주에 저주 마법진까지 새겨 놨는데 그대로 도망칠 줄은. 아, 대체 어떻게 했나 몰라? 내 저주로 흑마법도 봉인당하고 서서히 몸도 썩어 가고 있을 텐데. 몰래 희귀한 마법 물품이라도 숨기고 있었나? 실력을 감추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여성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야, 그냥 안전하게 다시 만드는 건 어때? 조합하고 귀족들, 돈이든 뭐든 쥐어짜 내면 보주 하나쯤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기존의 보주로 의식이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있지 않나? 이제 와서 새로운 보주를 완성하고, 그 마력에 맞춰 조율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노사가 한 차례 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이 모든 건 3왕자와의 거래를 위한 거다. 그럴진대 3왕자가 자신의 세력을 깎는 일을 허락할 것 같나? 잘못하면 왕국에 할애한 2년이 성과 없이 끝날 수도 있다. 그건 절대로 피해야 될 일이지."

"눈치 보는 거야? 그 병신 같은 3왕자 따위에게?"

"시끄럽다. 그리고 따로 배신자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노사의 말에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로? 아, 어쩐지 그 못생긴 쿤엘 녀석이 네 곁에 없다 싶더라니. 그럼 배신자 찾으러 보낸 건 뭐야?"

"그 쉬운 일도 실패한 자다. 믿지 않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배신자는 사령의 보주를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거다. 네 저주를 무력화했더라도, 보주가 가진 죽음의 기운은 같잖은 흑마법사 따위가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니."

노사가 눈을 빛냈다.

"그러니 보주의 행방이 밝혀지면 네가 직접 회수하도록."

여성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내가? 음... 기왕 찾는 김에 쿤엘보고 가져오라고 하면 안 되나?"

"미리 준비하고 있으면 걱정이 줄어드는 법이다. 그리고 마일드륀에서 한 차례 방해를 받았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배신자가 발설한 내용이 아닌 건 분명하니...."

그러자 여성이 코웃음 쳤다.

"왜. 우리들을 쫓고 있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을 하려고? 생각이 너무 지나친 것 같은데? 그냥 우연이니까 신경 꺼. 애초에 그런 놈들이 있었으면 마일드륀 따위가 아니라 다른 곳을 쳤겠지. 안 그래?"

"우연은 곧 필연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하나 충고하마."

노사의 검은 눈동자가 여자에게 향했다.

"그렇게 안일하게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다, 비올라. 그게 세상이니."

여성, 비올라가 같잖다는 듯 입가를 비틀었다.

"나보다 고작 3년 더 살았으면서 뭐래? 알겠으니까 새해부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보주의 위치가 파악되면 연락해. 네 말대로 내가 직접 찾으러 갈 테니까."

비올라가 소파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사는 그녀가 사라진 장소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어둠과 동화되었다.

116화 뜻밖의 (1)

흑랑 토렐드.

한때 암흑가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잔인하게 사냥함으로써 흉악한 악명을 날렸던 자다... 라고 페르네에게 들었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나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터라 최근에는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그리 가볍게 상대할 만한 자는 아닌 모양이다.

그 이름을 들은 칼리아가 흥미를 내비치며 즉시 2억 엘크의 보수를 내걸었으니.

'바제스와 8천만 엘크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금액과 강함이 비례하지는 않겠지.'

어디까지나 바제스는 여러 피해자가 재산을 모아 의뢰를 한 것이니까.

흑랑이란 이름만 들어 봤을 뿐, 놈에게 일절 피해를 입은 적이 없는 칼리아가 그 정도의 보수를 제시했다는 건, 바제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걸 뜻했다.

'올랜드의 여관에 있던 놈들보다 강했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의 감흥은 그게 전부였다.

새벽에 라인즈를 떠난 베르덴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숲 안쪽에 있는 길목에서 만나, 저쪽에서 준비한 말을 타고 토렐드가 있는 버려진 옛 성터로 향할 계획이었다.

누가 오는지는 듣지 못했다. 들어 봤자 알 리도 없었고.

그래도 단순한 들러리는 아닐 것이다. 칼리아는 베르덴의 실력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베르덴이 아니더라도 혼자 토렐드를 잡을 수 있는 실력자를 보냈을 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나무에 묶인,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말 두 필이 투레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위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인영이 떨어졌다.

"시간 맞춰 왔군. 만나서 반갑다."

얼굴 절반을 가린 마스크.

갈색 머리칼을 가린 녹색 사냥꾼 모자.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바로 올랜드의 여관 안에서.

"얼굴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올빼미.

그가 베르덴 앞에 나타났다.

* * *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 푸른 전류가 번쩍였다.

"조합의 끄나풀이 아니었나?"

올빼미가 단호히 손을 들었다.

"나는 올랜드가 말하기 전에 어떤 의뢰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단지 큰 의뢰라고 소문이 돌았기에 궁금해서 들렀던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련 없이 여관을 떠나지 않았을 거다."

"그럼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오해지. 혹시 기억 안 나나? 내가 여관을 떠났을 때를 말이야."

베르덴은 여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올랜드가 불러들인 그레이의 용병들 중에서 유일하게 베르덴과 적대하지 않고 훌훌 여관을 떠났던 사내, 올빼미.

'그러고 보니 따로 모시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 같은데.'

그게 칼리아였나?

베르덴의 물음에 올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공교로운 우연이군."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지."

올빼미가 은화를 꺼내 건넸다.

베르덴이 오래된 동전을 유심히 살펴봤다. 옛 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걸 보아 지폐가 생기기 이전의 고대 화폐.

그것은 칼리아가 보낸 사람임을 증명했다.

확인을 마치고서야 마력을 가라앉혔다.

베르덴이 다시 은화를 올빼미에게 넘겼다.

"진품이군."

"물론이지. 그나저나 그 여관에서 운명을 달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토록 멀쩡하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 칼리아 님에게 네 이름을 들었을 땐 꽤나 놀라웠지."

올빼미는 당시 올랜드의 여관을 뒤로하고 지역을 떠났다.

아예 관여할 생각이 없었기에 멀리서 지켜보지도 않았고, 그 이후로도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관에서 말했듯 정말로 귀족, 칼리아 밑에서 일하게 되었으니까.

"당시에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문보다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군. 설마 그 거리에서 놈들을 단신으로 처리했을 줄이야."

그날 올랜드의 여관에 모인 자들은 나름대로 강단이 있는 놈들이었다.

어두운 숲에서 기습한다면 올빼미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긴 하지만, 정면으로는 승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그걸 마법사 혼자 해냈으니....

'여관에 남아 있지 않길 잘했군.'

올빼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쁘군. 그럼 시간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니,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일단 출발하는 게 어떤가?"

이의는 없다.

뭐가 됐든 그는 칼리아가 보낸 사람이 확실했으니.

곧장 말에 올라탄 올빼미.

이어 베르덴도 남은 말에 승마했다.

* * *

하얗게 내린 눈밭.

베르덴과 올빼미는 그 위를 나란히 질주했다.

"혹시 흑랑에 대해 알고 있나?"

"대충은. 암흑가에서 유명한 노예 사냥꾼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정확히 알고 있군."

올빼미가 과거를 떠올렸다.

"거의 8년. 아니, 해가 넘어갔으니 9년 전 얘긴가. 나는 그놈을 로아프라에서 한 번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꽤 첫인상이 강했었지. 피로 물든, 각종 매직 아이템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니까."

매직 아이템.

현대에서 쓰는 마법 물품의 명칭이다.

"어떤 마법 물품이지?"

"마법 물품?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옛날 단어를 쓰는군. 음, 너무 많아서 딱히 뭐라고 특정할 수가 없지만, 전부 자신의 사냥감에게서 얻은 전리품이었지."

토렐드는 언제나 빼앗는 걸 선호한다.

음식이 필요할 땐 칼을 들이밀고, 돈이 없을 땐 그럴듯한 먹잇감을 찾아 죽여서 빼앗는다.

갖고 싶은 마법 물품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다.

"놈은 고블린을 의인화한 것처럼 약탈에 목을 맨다. 그리고 마치 늑대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이용한 사족 보행으로 적을 사냥하는데, 그 때문에 흑랑이라는 이명이 붙었지. 그 암흑가에서 오랜 세월 살아남은 걸 보면 실력이 좋은 것뿐만이 아니라 눈치도 빠르다는 뜻이고."

쉽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다.

만약 자취를 감추고 있던 시간 동안 몰래 귀족과 거래하며 살아왔다면 그때보다도 강력한 마법 물품들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생포하려면 가능한 한 기습으로 단번에 제압해야 한다.

날뛰기 시작하면 사로잡기는커녕 되레 당할지도 모른다. 올빼미는 자신이 봤던 토렐드에 대해 말하며 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베르덴의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놈이 가지고 있는 마법 물품이나 재산에 대한 분배는 어떻게 하지?"

"...?"

올빼미가 베르덴을 쳐다봤다.

"지금 궁금한 게 그거라고?"

그야 당연하다.

어차피 흑랑이든 뭐든 제압되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이건 오만이 아니라, 베르덴이 지난 1년 가까이 쌓아 올린 자신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올빼미가 입을 열었다.

"칼리아 님이 흑랑 생포 외에는 알아서 하라고 하셨으니... 으음, 좀 어렵군. 어떤 게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애매하긴 하다.

각자 필요한 걸 챙긴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가치가 천지차이니까.

베르덴이 말했다.

"그럼 일단 재산은 5 대 5로 나누고 나머지는 그때 가서 정하도록 하지. 어차피 서로 뒤통수칠 것도 아니고."

"그야 당연하지. 만약 내가 그런 짓을 했다간 칼리아 님에게 목이 베일 테니까. 그래, 그 안이 가장 합리적인 것 같군."

서로 합의는 끝났다.

이제 흑랑 토렐드를 잡는 일만이 남았다.

베르덴과 올빼미가 발을 박차며 말을 재촉했다.

* * *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가득한 옛 터전.

곳곳에서 빛나는 마석등. 그리고 여러 마법 물품들로 보호되고 있는, 버려진 성에는 삼엄한 경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두 사람이 흙탕물 같은 차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흑랑 토렐드.

그가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거 플리쉬르 백작에게 연락했는데 아리따운 메이드가 아니라, 웬 기분이 더럽게 나빠 보이는 친구가 왔군. 표정도 안 좋고. 내가 준 차가 그렇게 맛이 없었나?"

"마법사는 어디에 있지?"

흑마법사의 싸늘한 시선이 토렐드를 직시했다.

"거, 성격 급하기는. 그렇게 진득하게 쳐다보기 전에 이것부터 보여줘야지?"

토렐드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흑마법사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거액의 현금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냉큼 지폐 뭉치를 집어 든 토렐드가 눈대중으로 살펴봤다.

대충 봐도 수배서에 적혀 있던 포상금보다도 훨씬 많아 보였다.

토렐드가 히죽였다.

"크히히, 보기와는 달리 아주 말이 제대로 통하는 사람이었군. 초면에 기분이 나빴다면 내 사과하지. 차 한잔 더 내줄까?"

"마법사는?"

토렐드가 발로 지면을 툭툭 찼다.

"이 아래에 있는 지하 감옥에 잘 모셔 놨지. 아, 근데 좀 하자가 있어."

"하자?"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도 이 악물고 도망다녀서 말이야. 날파리 같은 게 너무 거슬리더라고? 그러다 보니 왼쪽 무릎하고 오른쪽 어깨를 좀 깊게 베었는데... 아, 하필이면 내가 리자드 소드(Lizard Sword)를 들어서 참...."

리자드 소드.

이 무기에 베이면 상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포션의 효능도 떨어지고, 상처를 완전히 소독하지 않는 이상 높은 확률로 감염 증상이 일어난다.

흑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숨은 붙어 있나?"

"붙어 있긴 하지. 백작령으로 옮기는 도중에 뒈지긴 할 테지만 어쨌든. 사실 이게 치료하려면 수고가 많이 들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돈을 좀 더 얹어 주면 우리가...."

"살아 있다면 상관없다."

"어?"

흑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곧 죽는다니까? 설마... 백작령으로 데려가지 않을 셈인가?"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툭.

흑마법사가 돈뭉치 하나를 토렐드에게 던졌다.

"지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접근하지 마라. 알겠나?"

그 말을 남기고 흑마법사가 방에서 나갔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고 있던 토렐드가 돈뭉치를 어루만지며 낄낄거렸다.

"암, 손님이 그러신다면 얼마든지. 어이. 저 친구한테 지하 감옥 안내나 해 줘라."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서서히 발소리가 멀어지자, 토렐드가 다른 부하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성의 지하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감시하라는 뜻이었다.

아까 했던 말과 다르지만... 뭐 어쩌라고?

'약속이란 건 어기라고 있는 건데.'

토렐드가 소파에 등을 뉘었다.

고작 사람 하나 잡고 이만한 돈을 벌게 되다니. 마치 옛날 노예를 사냥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주 좋아."

그 향취에 몸을 맡긴 토렐드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 *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직전에 들른 마을에서 말을 팔고 온 베르덴과 올빼미는 눈길을 헤치고 산을 올랐다. 날씨가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일정 고도를 넘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보라가 그쳤다.

"도착했군."

산 중턱에 가려져 있는, 폐허가 된 성터.

예전에 왕국과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처참하게 짓밟혔던 요새 중 하나였다.

올빼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의 흐름을 유심히 살핀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정확히 우리를 향해 불고 있군. 여긴 잔잔하지만 요새에 가까이 갈수록 세기가 강해지고 있어. 냄새를 숨기기엔 적합해 보인다."

즉, 잠입하기엔 좋은 환경.

올빼미가 마수의 뼈로 만든 듯한 활을 꺼내 들었고, 베르덴도 오큘러스를 손에 쥐었다.

"부여 마법이 필요한가?"

"아니, 나는 됐다. 활시위를 당기기에는 더 수월해지긴 할 테지만, 감각이 달라지면 정확도가 떨어지니."

궁수에게는 정교함이 생명이다.

익숙하지 않은 신체 강화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자신에게 부여 마법을 사용했다. 전신에 충만한 힘이 감돌았다.

준비를 갖춘 둘이 은밀하게 성에 접근했다.

117화 뜻밖의 (2)

깎아지른 절벽 위에 새워진 요새.

전쟁과 세월의 풍파로 곳곳이 붕괴되어 있었지만 아직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올빼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나 다를까 성벽 위에는 무장을 한 자들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주변에 인적이 전혀 없음에도 꽤나 삼엄한 걸 보아 토렐드가 안에 있는 모양.

"그런데 어떻게 들어갈지가 문제군."

올빼미가 성 주변을 살폈다.

정상적인 통로는 성문과 지면을 연결하는 다리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베르덴이 성문을 향해 턱짓했다.

"정면을 뚫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가장 간단하니까.

하지만 올빼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목적은 생포다. 흑랑만을 제압해 납치하는 게 베스트지."

그런데 만약 놈이 매직 아이템을 쓰면서 날뛰면 번거로워진다.

"그러니 일단 잠입한 뒤 몰래 제압을 시도하는 게 최선책이다. 그게 불가능해지면 어쩔 수 없이 맞붙어야겠지만... 다른 수단이 있는 지금으로서 정면 돌파는 하책이라고 생각되는군."

"그럼 어떻게 잠입할 생각이지?"

올빼미가 성을 가리켰다.

"직접 성벽을 오르거나, 아니면 저기 절벽 중간에 있는 수로를 통과하거나."

각자 루트를 선택해야 한다.

같이 움직이는 건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니.

먼저 말을 꺼낸 건 올빼미였다.

"나는 그레이에서 주로 잠입이나 암살에 대한 의뢰를 맡았었다. 몰래 감시를 뚫고 침입하는 건 일도 아니지. 그러니 내가 성벽을 오르는 게 더 적합하다고 본다만."

베르덴에게도 <투명화>가 있긴 하다.

하지만 횟수에 제한이 있으며, 일정 기준 이상의 마법을 쓰거나 충격을 받는 순간 투명화가 풀려 버린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경험이 많은 올빼미의 의견에 따르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토렐드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성안에 있을 확률이 높지만, 지하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좋아. 그럼 내가 수로로 가지."

올빼미는 성벽에서 성안으로.

베르덴은 수로에서 지하로.

결정을 했으니 움직일 차례다.

올빼미는 곧장 요새 밑 절벽을 향해 로프를 묶은 화살을 쏘아 보냈다. 줄을 당겨 단단히 박힌 걸 확인한 그가 이내 허공에 몸을 날렸다.

부드럽게 절벽 위에 안착한 올빼미는 빠른 속도로 요새를 향해 올라갔다.

베르덴은 그 반대편으로 향했다.

성벽 위에 있는 감시병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비행을 써서 절벽 아래로 낙하한 뒤, 요새가 세워진 절벽에 가까이 붙어 고도를 높였다.

들키는 일 없이 수로에 도착했다.

'버려진 성이라 그런지 오래도록 물이 흐른 흔적이 없군.'

오물이나 악취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녹슨 철창 앞에 선 베르덴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염 장막>

불길이 베르덴을 조용히 휘감았다.

그 범위 안에 있던 철창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완전히 붉게 변한 걸 확인하고 나서 오큘러스를 갖다 대었다.

<동결>

쩌엉!

급격한 온도 변화에 철창이 깨져 버렸다.

그 뒤에 있는 건 빛줄기 하나 없는 지하 수로.

암시를 쓴 베르덴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바닥엔 생쥐가, 천장엔 박쥐가.

낯선 인기척에 울음소리를 내며 수로를 돌아다녔다. 이곳은 아예 경계조차 하지 않는 모양인지 함정도 경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덴은 수로를 거닐며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씩이지만 위쪽으로 향하고 있군.'

수로는 비스듬하게 경사가 있었다.

구조적으로 기다란 통로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고, 벽면에 일정 간격마다 다른 통로들이 있었는데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길을 쭉 따라가면 성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나올 터.

베르덴은 속도를 올렸다.

비행을 써서 수로를 질주하자 몇 분도 안 되어 계단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오래도록 열린 적 없어 보이는 철문이 있었다.

따로 잠겨 있지는 않은 모양인지 살짝 힘을 줘서 밀자 문이 열렸다.

'여기가 성의 지하인가.'

낡은 화톳불에 불이 붙어 있다.

사람이 있다는 증거였다.

<투명화>

유자의 로브로 모습과 기척을 감췄다.

지하라 어느 정도 소란을 일으켜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굳이 잠입까지 한 상황에 토렐드의 부하들까지 전부 쓸어버릴 메리트가 없었다.

천장 가까이 몸을 띄운 뒤 빠르게 탐색을 시작했다. 지하에 토렐드가 없다면 당장 지상으로 나가 찾아야 할 테니까.

투명화의 지속 시간이 좀 길긴 하지만 느긋하게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베르덴은 이상함을 느꼈다.

'왜 아무도 없지?'

말 그대로다.

거리를 꽤 이동했는데 마주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화톳불에 장작이 쌓여 있는 걸 보면 분명 관리는 하고 있다는 뜻인데....

────!

그러던 그때, 베르덴의 감각에 미약한 울림이 느껴졌다.

약간 끝이 갈라지는 듯한 게....

'비명 소리?'

선이 굵은 걸 보아 남자의 목소리다. 어쩌면 그곳에 토렐드가 있을지도 모른다.

소리를 따라가자, 복도 끝에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협소한 계단이 나타났다.

'여기가 최하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층이 더 있었나?'

시각와 청각 그리고 촉각 등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피비린내가 강하게 풍겨 왔다.

마침내 그 끝에 도달하자 피가 사방에 가득했다.

기이하게도 시체는 없었는데, 고개를 앞으로 향하자 바닥에는 무언가에 시체가 끌려간 듯한 혈흔이 남아 있었다.

'피가 마르지 않은 걸 보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끄아아아아아악!

다시금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가깝다.'

시체가 끌려간 어둠 속.

베르덴은 피 웅덩이를 뒤로하고 앞으로 향했다.

성의 지하 감옥인지 복도 양옆에 철창이 가득했고, 그 안에는 오랜 기간 방치된 유골이 남아 있기도 했다.

가장 안쪽에 있는 커다란 감옥.

시체가 끌린 흔적이 그곳으로 향해 있었고, 그 중심에 비명 소리의 진원지가 있었다.

'저건....'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에 혈흔이 가득한 남자.

얼굴이 피와 멍으로 가득했지만 베르덴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도시 곳곳에 널려 있는 수배지에 그려져 있던 얼굴이었으니까.

'비행 금지령의 원인이 된 마법사가 왜 여기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더 궁금증을 자아내는 건 마법사의 옆에 있는 검은 로브를 두른 사내와 주변에 널린 시체들이었다.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해라. 사령의 보주는 어디에 있지?"

"나, 나는...."

남자가 말하길 주저하자 사내가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휘저었다.

마력이 일며 생겨난 나선 형태의 검은 줄기. 그것이 시체에 닿는 순간 남자에게서 터져 나온 비명 소리가 감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시체를 매개로 일어나는 마법적 작용.

어느 모로 보나 흑마법의 일종인 게 분명했다.

베르덴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 더 떠올랐다.

'흑마법사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조합, 플리쉬르 백작, 3왕자, 흑마법사 등.

뭔가의 교집합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있다.'

비행 금지령 공고문에 적혀 있는 문구.

[마법사가 백작의 자제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망갔다.]

이건 거짓인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장소에서 흑마법사가 마법사를 고문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 대신 흑마법사가 언급한 '사령의 보주'란 것과 관련이 깊다고 추측된다.

과연 뭐가 숨겨져 있는 걸까.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이다.

베르덴이 오큘러스를 흑마법사에게 겨냥했다.

* * *

사령의 보주에 대한 행방을 알아내라.

노사의 명령을 받은 흑마법사는 배신자의 정신을 고문했다.

고통스런 저주를 가해 정신을 이리저리 비틀어, 훔쳐 간 보주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배신자의 정신은 상당히 강인했다.

그는 죽기 직전임에도, 비명을 지르느라 목에서 피가 번져 나왔음에도, 몸속에서 들끓는 열에 숨조차 쉬기 어려움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일반적인 저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약속을 어기고, 몰래 흑마법사를 감시하러 온 인간을 잡아 죽이고는 그 시체를 사용해 더욱 강력한 저주를 배신자에게 가했다.

"아아아... 아아아아...!"

갈가리 찢겨 나가는 정신.

배신자는 도중에 몇 번이고 기절을 하면서 고통이 영혼까지 각인되었는지, 침을 뚝뚝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아프다고.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그렇게 판단한 흑마법사는 곧장 성의 지하에 있는 토렐드의 부하들을 죽여 부족한 시체를 수급했다.

이 사실을 토렐드에게 들킨다면 성가신 일이 벌어지겠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흑마법사의 뇌리에는 오로지 노사의 명령만이 최우선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쓸모를 다한 시체가 늘어날수록, 배신자의 입에서 더 많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아파.

살려 줘.

그만해.

배신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의 잘린 단면에는 리자드 소드의 효과로 인해 감염이 일어났다.

거기다 치료는커녕 대충 붕대로 출혈만을 막은 터라 염증이 전신에 퍼졌다. 몸은 뜨거웠고 상처에는 고름이 가득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고, 감염 증상이 심장까지 퍼졌기에 1위계 마법조차 제대로 시전할 수 없었다.

불규칙적으로 변한 호흡.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물론 흑마법사는 배신자의 목숨 따위 상관없었다.

최우선은 보주의 행방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타인의 정신과 육체는 기꺼이 갈아 마실 수 있었다.

"아아...."

배신자의 입에서 힘없는 탄식이 들려온다.

동공이 풀리고, 입을 벌린 채 피가 섞인 타액을 흘리고 있는 그의 몰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 정도면 됐겠군.'

흑마법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배신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묻겠다, 배신자. 사령의 보주는 어디에 있지?"

초점이 흔들린 눈동자가 이리저리 뒹굴거리다, 흑마법사와 마주쳤다.

아주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린 배신자. 직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그의 눈에는 강렬한 의기가 담겨 있었다.

"꺼져... 라... 이... 흑마법... 사의... 수치...."

쿠웅.

바닥에 쓰러진 배신자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저주 그리고 흑마법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흑마법사가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냐...!'

배신자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

이미 사람 열 명쯤의 정신을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로 저주를 가했는데도 아직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버티는지, 무슨 목적으로 배신을 했는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짓이겨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숨통을 틀어막는 듯한 답답함에 흑마법사가 신경질적으로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실패했다간 여기 널린 시체 더미와 다름없는 신세가 될 테니까.

흑마법사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시체와 마법사를 연결하고, 다시금 저주를 행하려 하는 순간.

퍼억!

"...아?"

어디선가 날아온 석편에 흑마법사의 오른손이 분쇄됐다.

118화 뜻밖의 (3)

재빠르게 성벽을 오른 올빼미는 소리 없이 성벽을 넘었다.

경비를 맡고 있는 토렐드의 부하들과 경보음을 내는 마법진 그리고 감춰진 함정들이 앞길을 막았지만 들키는 일은 없었다.

'쉽군.'

올빼미의 희미한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자는 없었고, 함정 또한 이미 간파한 뒤였다. 모종의 마법 물품으로 형성된 마법진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 마법진은 1위계 마법인 마력감지를 사용한 흔한 종류였는데, 올빼미는 마력의 감지를 왜곡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렇게 무사히 성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한 그는 신속하게 수색을 시작했다.

사각이 없는 장소가 있긴 했으나 파훼는 간단했다.

허벅지에 감춰 둔 단검으로 경비들을 암살했다.

시체는커녕 피조차 남기지 않고 치워 버렸다. 그런 식으로 깊은 곳으로 향하자 호화롭게 장식된 문을 찾아냈다.

작은 거울을 비스듬하게 문 아래로 집어넣어 안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흑랑 토렐드가 있었다.

그는 보란 듯이 소파에 뻗어 있었다.

'자고 있는 건가. 그런데 확실히 옛날과는 다르군.'

토렐드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

귀걸이, 갑옷, 부츠, 허리띠 등 뭐 하나 값비싸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그리고 양 팔뚝에 붙어 접혀 있는 두 개의 클로와 허리춤에 있는 쌍검까지.

언제 어디서나 무장을 하고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그러니 머리를 노려야 한다.'

올빼미가 손목에 찬 소형 크로스보우를 기동했다.

마법이 첨가된 볼트(Bolt)를 장전했다. 이단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첫 번째는 관통 그리고 두 번째는 전격을 일으키는 마법 물품.

고위 속성이 들어간 것이라 상당한 값어치를 지녔다.

올빼미가 문을 겨냥했다.

그 너머에는 잠들어 있는 토렐드의 머리가 있었다.

미세한 오차조차 없다.

확신을 가진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콰직!

문을 관통한 볼트.

분리된 촉이 토렐드의 머리로 향했다. 직격해도 머리가 뚫리는 일은 없다. 닿자마자 번개를 내뿜으며 작은 폭발을 일으킬 테니.

좀 다치긴 하겠지만 제압용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는 물건이었다.

이내 익숙한 손맛이 느껴지며 푸른빛이 번쩍였다.

'제대로 맞았군.'

올빼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을린 흔적으로 엉망이 된 방 안.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할 토렐드가 사라져 있었다. 직후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새끼가 내 머리통을 노렸나 했는데. 너였냐, 올빼미?"

토렐드는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그의 목에서 깃털 모양의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비행> 마법이 부여된 매직 아이템을 갖고 있었나? 그 귀한 걸 잘도 구했군."

"암흑가에서 구했지. 충전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유용하다고. 뭐, 그건 그렇고."

토렐드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에겐 무슨 볼일이지? 분명 내 목에 현상금 같은 건 걸리지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애초에 지난 몇 년간 대놓고 활동한 적도 없다고."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군."

올빼미가 활을 쥐었다.

어느새 다른 손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쥐여 있었다.

"언제부터 이 바닥에서 이유를 설명했지?"

토렐드가 웃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접혀 있던 클로가 펴졌다. 칼날에서 녹색 빛, 마비독이 흘러나왔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서로의 시선이 교차한 순간.

올빼미와 흑랑 토렐드가 살기를 드러내며 바닥을 박찼다.

* * *

지하 감옥에 있던 흑마법사.

뭔가를 느낄 새도 없이 그의 오른손이 산산조각 났다. 피와 육편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흑마법사가 멍하니 팔목을 바라봤다.

갑자기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상황을 인지하는 것보다 빠르게, 신경을 찢어발기는 듯한 격통이 뇌를 강타했다.

"───아아아아아아악!"

흑마법사가 팔목을 부여잡았다.

연이어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양의 피에 전신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절규하는 사이, 투명화가 풀린 베르덴이 움직였다.

그의 노림수는 하나였다.

'우선 기절부터 시킨다.'

마일드륀의 흑마법사는 스스로 자폭했다.

눈앞의 흑마법사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의식부터 빼앗을 생각이었다.

후에 자결하지 못하게끔 만든 뒤에 정보를 캐는 게 맞는 선택일 터.

<아이시클>

혹한의 고드름이 흑마법사의 왼팔에 박혔다.

마법사에게 손은 기본적인 마법의 시전체. 그런데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이 얼어붙었으니 쉽사리 흑마법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이어 흑마법사에게 육박한 베르덴이 오큘러스로 그의 무릎을 후려쳤다.

우지직!

그대로 털썩 주저앉은 흑마법사.

스태프를 회전시킨 베르덴이 놈의 목을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꺼억... 꺽...!"

오큘러스에 강하게 짓눌려진 목.

기도가 틀어막히자 꺽꺽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이 붉게 충혈된 흑마법사의 표정은 당혹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베르덴의 얼굴을 미처 보기도 전에 의식이 흐려졌고, 결국 흑마법사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간단하...."

그 순간 흑마법사의 마력이 부풀었다.

본 적 있는 현상이다.

베르덴은 곧장 흑마법사를 내던지고 지형을 조작해 돔 안에 가두었다.

퍼어억!

안에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 마법을 해제하자 검붉은 핏물만이 남아 있었다. 마일드륀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체는 남지 않았다.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기절시켰는데도 폭발할 줄이야.'

자의적인 건 아니다.

흑마법사가 정신을 잃자마자 몸 안에 있던 어떠한 마법적 작용이 일어난 것이 느껴졌다. 아마 저주 마법의 일종일 것이다.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막음을 하기 위해선가.'

쯧. 베르덴이 혀를 차며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마법사가 있었다.

'상처가 심각한데.'

수배자의 전신은 만신창이였다.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할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그 자리에서 즉사할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

포션의 치유력을 감당하는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버텨 줘야 하니까. 상처에 가득한 고름, 전신에 퍼진 염증. 자세히 보니 몸 아래로는 육신이 썩어 가고 있기까지 했다.

'저주인가?'

어쨌든 저만한 부상을 회복하려면 고위 성직자가 와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그때,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흑... 마법... 막아야...."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느릿해진 심장박동. 아무리 좋게 봐도 마법사는 삼 일을 넘기 힘들 것 같았다.

베르덴이 그를 보며 생각했다.

비행 금지령이 내려진 원인인 마법사.

그리고 그를 고문하고 있던 흑마법사.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단서는 있다.'

사령의 보주.

뭔진 몰라도 흑마법사는 그걸 찾고 있다. 그리고 흑마법사가 마법사를 향해 배신자라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 마법사도 흑마법사라는 뜻인가?

'역시 조합의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분열이라도 일어난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아낸다면 흑마법사들이 왕국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마법사를 데려가야 한다.

잘하면 칼리아에게 흑마법사를 입증할 증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그녀는 더욱 강하게 조합과 귀족을 압박할 것이고, 페르네는 더욱 거리낌 없이 조합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

'그러니 가능하면 살려야겠지만... 안 되면 시체라도 가져가야 한다.'

흑마법사와 별개로 비행 금지령의 해제를 위함이었다.

마법사 시신을 칼리아에게 보인다면 곧 왕국의 수배령이 풀릴 것이다. 아무리 왕가의 입김이 있다고 해도 본인이 죽은 이상 더 이상 금지령을 유지할 명분이 없을 테니까.

───쿠구구궁!

그때, 진동이 울렸다.

천장에서 들리는 걸 보아 지진은 아니다. 더군다나 주기 또한 불규칙적이다. 경험상 전투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제압에 실패한 모양이군."

그토록 자신만만하더니.

빠르게 토렐드를 제압하고, 마법사를 치료한다.

목적을 명확히 한 베르덴이 곧장 지상으로 향했다.

* * *

올빼미는 민첩하게 거리를 벌리며 화살을 쏘아 댔고, 토렐드는 그 화살들을 피하거나 베어 내며 올빼미에게 접근했다.

바닥, 벽, 천장을 구별하지 않는 전투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였다.

클로의 검기가 돌기둥을 두부처럼 베어 버렸다.

떨어지는 파편.

가까스로 일격을 피한 올빼미가 후퇴하며 혀를 찼다.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장비로 도배를 했군.'

어쩐지 기습을 피했더라니.

근력, 속도, 감각.

뭐 하나 예전에 봤던 토렐드와는 다르다. 한층 더 강화된, 양팔과 양다리를 이용한, 짐승 같은 사족 보행의 움직임은 올빼미로서도 곧장 반응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방어력도 막강하고.'

움직임을 예측해 화살을 맞히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고작해야 흉갑에 흠집을 낸 정도였다. 다른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약한 관절 사이를 노리려고 했으나 토렐드는 허용하지 않았다.

"크히히히히! 올빼미!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도망만 칠 거냐!"

토렐드가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상당히 짜증 나는 목소리였으나 올빼미는 뭐라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저 앞에 소란을 듣고 몽땅 몰려온 토렐드의 부하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야! 이 새끼 못 가게 막아!"

부하들이 무기를 들었다.

흑랑의 클로를 피하면서 무사히 저 숫자를 뚫긴 어렵다.

'성가신 놈들.'

올빼미가 세 개의 화살을 꺼냈다.

기운을 전력으로 활성화한 뒤, 연속으로 천장, 바닥 그리고 벽면을 향해 쏘아 보냈다. 화살이 폭발하며 안에 있던 강철 파편이 쏟아졌다.

"케엑!"

"컥!"

튕겨져 나간 날카로운 파편에 무차별적으로 적들이 죽어 나갔다.

"이 새끼...!"

다가오는 몇 개의 파편.

토렐드가 팔을 들어 머리를 지켰다.

그사이 포위를 돌파한 올빼미가 복도 끝에 도달했다.

주저 없이 창문을 향해 몸을 던진 그가 낙법을 이용해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은은한 금빛이 반사되는 화살을 준비했다.

'이걸로 끝낸다.'

다마스 강철로 제련된 화살.

이걸로 다리 한쪽을 꿰뚫고 출혈을 유도한다. 그렇게 기동력을 빼앗고 시간을 끌면 제압할 수 있다. 아직 토렐드의 부하들이 남았지만 놈들이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

올빼미가 곧장 몸을 돌리며 화살을 겨냥했다.

'뭣...?!'

그런데 하늘에는 토렐드가 아닌,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이내 검의 궤도가 비틀리더니 올빼미를 향해 날아왔다.

'매직 아이템인가!'

바닥을 박차고 뒤로 후퇴했다.

순간, 섬뜩한 기세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비행>을 사용한 토렐드가 올빼미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중량화>

토렐드가 착용하고 있는 부츠가 기동했다.

잠시 동안 착용자의 무게를 늘리는 마법 물품이었는데, 그로 인해 높아진 가속도가 돌진에 더해졌다.

촤아아악!

클로가 올빼미의 옆구리를 스쳤다. 직전에 몸을 비튼 터라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올빼미가 근육의 탄력을 이용해 멀찍이 떨어졌다.

토렐드가 이죽거렸다.

"아, 아깝구만. 조금만 더 빨랐으면 그걸로 끝나는 건데."

그가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검이 토렐드의 손에 돌아왔다.

"어때, 염동력이 부여된 검인데 쓸 만하지? 이 반지하고 연동되는 건데, 꽤 조작하는 게 어렵더라고. 이거 하나만으로도 그런데, 염동 계열 마법사들은 어떻게 여러 개를 다루는지 모르겠어. 안 그래?"

"...."

"아, 말할 여유가 없나? 뭐, 좋아. 일단 잡고 나서 누가 보냈는지 물어볼 테니까 말 많이 아껴 두라고."

토렐드가 다시금 검을 움직였다.

허공을 나는 검과 흑랑 토렐드 그리고 뒤이어 쫓아올 놈의 부하들까지. 올빼미는 어떻게 토렐드를 죽이지 않고 제압할지 계산했다.

그러던 그때, 잘 날아가던 검이 허공에 멈췄다.

"응? 뭐야?"

토렐드가 연신 손을 움직였지만 검은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돌 더미에 박힌 것 같은 감각. 이를 악물고 조작해도 마찬가지였다.

콰직!

토렐드의 반지가 깨져 버렸다. 억지로 사용하다가 내구성이 견디지 못하고 아예 박살이 난 것이다. 주도권을 잃은 검이 성 쪽으로 날아갔다.

거기에는 베르덴이 있었다.

올빼미가 말했다.

"제 때 왔군."

처음 보는 얼굴에 토렐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행이 있었어? 올빼미, 너는 혼자 일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이, 로브 뒤집어쓴 놈! 너는 또 뭐지?"

토렐드가 말했지만 베르덴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토렐드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을 보고는,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부수입으론 괜찮겠군."

"부수입? 뭐라는───"

<뇌격>

벼락이 토렐드에게 쏘아졌다.

119화 뜻밖의 (4)

염력을 통해 움직이는 사물.

그 주도권을 빼앗는 건 마력 조작 능력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토렐드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저 마법 물품의 효과로 마법을 재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토록 무력하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건 비정상이었다.

상대가 염동 계열에 특화된 마법사가 아니라면.

'그런데 원소 마법이라고?'

토렐드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던졌다.

아무리 마법 저항력이 깃든 장비를 착용하고 있어도 고위 속성에 정통으로 맞았다간 자칫 저승길 직행이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번개가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 의식을 베르덴에게 빼앗긴 상황.

어느새 성벽 위에 올라서 있던 올빼미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안력을 돋우어 토렐드의 움직임을 예측해 시위를 놓았다.

───콰득!

"윽!?"

금빛 빛줄기가 토렐드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다마스 강으로 이뤄진 화살이 금속 각반을 손쉽게 관통했다. 올빼미가 저 멀리서 토렐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 이 올빼미 새끼가!"

그런 토렐드에게 검이 날아갔다.

방금 전까지 애용하던 무기가 역으로 주인을 노린 것이다. 곧장 비행을 쓴 토렐드가 허공으로 도주했으나, 거기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잠...!"

터엉!

오큘러스의 충격파에 토렐드가 추락했다.

능숙한 마법사라면 빠르게 중심을 회복했겠지만, 토렐드는 목걸이의 힘을 빌린 것이다. 당연히 비행 능력이 형편없을 수밖에.

무너진 성벽에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졌다.

고개를 든 토렐드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뒤이어 날아온 화살. 토렐드가 지면을 구르며 간신히 피해 내자, 그의 눈앞에 뭔가가 떨어졌다.

"...마석?"

구속 마법진, 디테인(Detain).

마력으로 이뤄진 사슬이 토렐드를 옭아맸다.

이를 악물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꿈쩍하지 않는 게 도저히 힘으로는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다가오는 베르덴과 올빼미를 보며 토렐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핫, 이 새끼들 아주 제대로 작정하고 찾아왔군. 이런 것까지 준비할 줄이야. 대체 이런 마법진은 어디서 구한 거야? 마탑에서 사 오기라도 한 거냐?"

마법진은 베르덴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올빼미는 슬쩍 베르덴을 보고는 단검을 꺼내 토렐드에게 다가갔다. 화살로는 손대중이 어려우니 손잡이로 놈의 턱을 후려쳐 기절시킬 심산이었다.

토렐드가 생각했다.

'역시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군.'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마법진까지 사용하지 않았겠지.

더군다나 올빼미의 화살은 집요하게 팔과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즉, 무력화를 한 뒤 생포하겠다는 뜻.

'왜지? 설마 귀족하고 연관이 있는 건가?'

암흑가를 떠난 토렐드는 왕국의 귀족들에게 의뢰를 받아 더러운 일을 도맡았다.

당연하게도 물밑에서 다른 귀족들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그리고 귀족들의 치부를 알고 있기에 언제나 입막음을 당할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

정확히는 몰라도 잡혔다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토렐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소매에 숨겨져 있는 액세서리, 그 이름 [마력 무효화의 팔찌].

이걸 사용한다면 이 정도의 마력으로 이뤄진 사슬 따위 쉽게 풀어 헤칠 수 있다. 그 후에 허리춤에 찬 리자드 소드로 놈들을 베고 도망치면 끝이다.

'지하 감옥에 손님이 있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이미 마법사의 신변은 넘겼으니.

토렐드는 속으로 미소를 숨긴 채 올빼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항복하겠다는 듯 힘을 완전히 풀고는 방심을 이끌어 냈다.

그렇게 올빼미가 범위 내에 들어온 순간 곧장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따아악!

<스톤 볼트>가 정확히 토렐드의 미간을 강타했다.

"아?"

흘러내린 피. 양옆으로 벌어진 눈동자.

예상치 못한 충격에 토렐드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올빼미가 뒤를 돌아봤다.

"...뭐지?"

"이게 안전하니까."

방심.

베르덴의 사전에 그런 단어는 없었다.

* * *

올빼미가 토렐드의 상처를 살폈다.

혹처럼 튀어오른 미간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멀쩡했다. 뼈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걸 보아 뇌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은 것 같고.

'마력 조작 능력이 수준급이다.'

정밀한 위력 조절이었다.

올빼미는 내심 감탄하며 곧장 토렐드의 장비를 착용 해제했다.

어느새 천 옷밖에 남지 않은 토렐드의 몸뚱이를 질긴 밧줄로 묶은 뒤에 손과 발에 구속구를 채웠다. 만에 하나라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일을 처리한 올빼미가 어깨를 풀었다.

"이걸로 토렐드는 확보했군. 하지만 놈의 부하들은 아직 남아...."

"그건 처리했다."

지상으로 올라오던 도중, 성안에서 올빼미를 쫓던 토렐드의 부하들과 마주쳤다.

무기를 들고 달려들길래 전격 계열 마법으로 쓸어버렸다. 마력감지로 확인한바 성안에 위협이 될 생명체는 더 이상 없었다.

올빼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이상 변수는 없는 거군."

이제 칼리아에게 토렐드의 신병을 인계하면 의뢰는 끝이다. 물론 먼저 토렐드의 장비들을 분배해야겠지.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할 일?"

지하 감옥.

베르덴은 거기에 있는 마법사를 올빼미에게 보였다.

"이건... 수배서에서 보던 얼굴인데. 상당히 끔찍한 몰골이군. 왜 이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글쎄, 아마 플리쉬르 백작에게 명령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토렐드는 플리쉬르 백작의 별장과 관계가 깊다.

그러니 백작이 3왕자의 힘으로 비행 금지령까지 동원하며 수배를 때린 마법사를 쫓고 있다고 하면 말이 된다. 그리고 잡아서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문했고.

표면적인 이유로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베르덴이 여기에 다른 정보를 곁들였다.

"그런데 고문하고 있던 자가 흑마법사더군."

"뭐?"

베르덴이 마법사의 몸을 들췄다.

저주로 썩어 가고 있는 몸뚱이가 드러났다. 사실 이건 다른 흑마법사가 저지른 것 같지만 지금 상황에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흑마법사와 비행 금지령의 마법사가 실제로 관련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칼리아에게 자연스레 정보를 쥐여 주기 위해서.

"확실히 저주 마법이군. 플리쉬르 백작과 흑마법사가 관련이 있다는 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그 흑마법사는 어디에 있지?"

베르덴이 옆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피 웅덩이가 놓여 있었다.

"...시체도 남기지 않다니. 생각보다 가차 없는 마법사였군."

"죽인 게 아니라 자살이다. 그리고 대화는 이쯤 하지. 지금은 마법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어쩌면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그렇게 설득하자 올빼미가 마법사의 상태를 면밀하게 확인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의학적 지식이 있었다.

감염 증상과 염증 그리고 고열과 저주.

이내 올빼미가 결론을 내렸다.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죽어 버리겠군. 이래서야 응급처치는 역효과겠어. 명줄은 길어야 이틀이다. 그 안에 당장 라인즈로 가서 고위 성직자를 구해야 해. 그리고 도중에 목숨 줄을 붙잡아 줄 성직자까지."

"전에 들른 마을에 교회가 있으니 거기서 찾으면 되겠군."

둘은 조심히 마법사를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성안 마구간에서 토렐드가 사용하던 말과 마차를 찾았다.

베르덴이 마차 안에 토렐드와 그의 장비들 그리고 마법사를 싣고 그 옆에 앉았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마부석에 올라탄 올빼미.

그는 곧바로 고삐를 내리치며 근처 마을을 향해 마차를 출발시켰다.

* * *

"후우, 날이 추울 땐 역시 따뜻한 차가 제일이지."

작은 마을의 성직자는 담요를 두른 채, 교회 밖 의자에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긴장을 풀면 몸이 오슬오슬 떨려 왔으나, 손안에 그리고 몸 안에 들어찬 차의 열기가 성직자의 영혼마저 데워 주었다.

스스로 추위를 견디며 온기를 찾다니.

모순적인 행동이었으나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된 기분. 성직자의 얼굴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한가롭다, 한가로워."

세상은 어지럽다.

마수, 아인종, 이형종 등 갖가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성직자가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죽어 간다. 그리고 죽는다.

하지만 그러한 불행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성직자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오래된 경전에서도 그리 말했다. 모두가 전부 행복할 수는 없다고.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빛의 신 루아스께서는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슬픔, 고통, 불만족, 만족, 행복. 그러한 수많은 감정을 아예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는 똑같이 만들어 낸 인형과도 같아지겠지.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죄를 지었음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랑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수명이 다해 스러져 가는 삶이.

다시 경전에 실려 있길.

세상은 인간 스스로가 가진 더러움을 털어 내는 곳이라고 한다. 각자마다 묻어 있는 더러움이 다르기에 삶 또한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더러움은 어디서 왔는가.

그건 타고나면서 부여받은 인간의 업이다. 아주 당연한 것이다. 빛이 있기에 어둠이 존재한다는 개념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이치.

즉, 삶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사람의 끝이 달라진다. 더러움을 씻어 내지 못하고 악에 물들어 타락한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깨끗해진 자는 빛의 신 루아스의 곁으로 가는 것이다.

삶 자체가 신에게 부여받은 시련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는 스스로에게, 둘째는 루아스께.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 신에게 인정을 받아야지만 시련을 넘어 빛의 곁으로 갈 수 있다.

그게 경전의 교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성직자는 충실했다.

전쟁터에 나가 닥치는 대로 부상자를 치유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니다. 이 작은 마을에도 위급한 환자는 생기는 법이며 길 잃은 양 또한 존재하는 법.

그들을 치유하고 이끄는 것이 성직자가 선택한 삶이었다.

성직자는 자신했다.

아무리 작디작은 교회의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누구 못지않게 빛의 신을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음?"

그때, 먼발치에서 거센 울림이 들려왔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니 말발굽 소리. 작은 마을에서는 흔치 않은 다급함이 느껴졌다.

이내 다가온 마차가 교회 앞에 멈춰 섰다.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린, 녹색 사냥꾼 모자를 쓴 사내가 마부석에서 내리더니 어느샌가 성직자 앞에 다가왔다.

그가 물었다.

"성직자이신가?"

"그, 그렇소만...."

"이 마을에 성직자는 몇 명이나 되지?"

"나를 포함해 총 5명인데... 그건 대체 왜...?"

올빼미가 성직자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적당히 나이가 든 얼굴. 두 눈에는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서려 있으나 올곧았다.

"위중한 환자가 있다. 치료가 가능한가?"

환자라는 단어에 성직자가 당장 몸을 일으켰다.

"내세우긴 부끄러우나 이 마을에서는 내가 가장 실력이 좋소."

"그거 잘됐군."

올빼미가 성직자를 들어 올렸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가는 길이 급하다. 나중에 헌금을 할 테니 동행을 부탁하지."

"동행? 잠깐 설명을... 억!"

올빼미가 눈 깜짝할 사이에 성직자를 마차에 실었다.

곧장 출발한 마차가 다시금 가도를 내달렸다. 뒤늦게 몸을 일으킨 성직자가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마을의 모습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흘렸다.

"...납치?"

성직자는 납치당했다.

120화 의뢰 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