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 * *

'...여기가 맞는 건가?'

베르덴은 낡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와 케케묵은 냄새. 그 안에서는 한 여성이 훌쩍거리며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베르덴이 페일이 준 정보를 다시 떠올리고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페르페르 주점'.

뭔가 어린아이가 지은 것 같은 이름이지만 페일에게 들었던 간판의 이름과 같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연보랏빛 머리색을 가진 여성이 물었다.

"누구세요?"

"저는...."

"아, 설마 손님?! 잠깐만요! 의자 좀 가져 올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페르네는 헐레벌떡 움직였다.

다급하게 자리를 준비한 그녀가 베르덴과 마주 앉았다.

"지금은 의뢰는 안 되고 정보만을 팔고 있어요! 어떤 정보를 원하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싸게 드릴게요!"

정보가 필요한 건 맞는데....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페일의 소개장을 꺼내 건넸다.

"소개를 받았습니다."

"소개...? 그럼 손님이 아니야...?"

쿵.

페르네가 책상 위에 쓰러졌다.

삽시간에 울상이 된 그녀가 건네받은 소개장을 바라봤다.

대체 갑자기 뭔 소개장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최 짚이는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위에는 익숙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페일?"

페르네가 곧바로 소개장을 열어 내용을 봤다.

거기에는 단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2등급. 극진히 대할 것.]

에? 이게 뭐야?

페르네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베르덴이 로브를 젖혔다.

"어...."

약간 어두운 회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푸른 눈동자.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비범함 그 자체였다

순간 페르네가 멍해지면서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페일에게 2등급 고객이라는 건 거물이라는 소리!'

그리고 소개장을 받았다는 건 의뢰를 주선해 줄 정보상, 자신을 찾아왔다는 뜻이리라.

페르네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베르덴의 옆에 무릎을 꿇은 그녀가 그의 로브 자락을 움켜잡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베르덴이 눈을 깜빡였고 페르네가 소리쳤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뭐야 이건.

98화 간단한 의뢰 (1)

베르덴은 조용히 페르네의 얘기를 들었다.

작금의 정보상의 상황이나 무리하게 운영하다 빚더미에 앉은 것. 의뢰든 뭐든 다 빼앗겨 할 수 있는 일거리가 거의 없는 것까지.

그리니까 종합하자면.

"정보상이 망했다는 겁니까?"

"말씀 놓으세요! 그리고 망한 건 아니고 망하기 거의 직전... 이죠. 하하...."

페르네가 눈을 아래로 깔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핼쑥한 얼굴. 코헨의 지하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던 페일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 그래도 금방 재건할 수 있어요! 기회만 있다면 제 정보망도 다시 구축할 수 있고, 돈 많은 의뢰주도 구할 수 있어요!"

"그 기회는 어디서?"

"당연히 애셔 님이죠...."

페르네가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베르덴이 턱을 쓸었다.

'이걸 믿어야 되나?'

베르덴은 페르네란 정보상에게 회의적이었다.

망해 놓고 실력이 있다니. 뭐, 페일의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니 실력은 있겠다만... 솔직히 말해 여기가 재건되길 기다리는 것보다 다른 정보상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베르덴이 말이 없자, 페르네가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저는 정보상으로서 실력이 있다고 자부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정보상은 실력만 있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죠, 더군다나 왕국에선. 귀족이든, 거상이든, 부유층이든 후원자를 두고 정보상을 하니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아예 정보상들을 영입해서 조합을 만들었다니까요?"

"왜 조합에 안 들어간 거지?"

"저는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저를 괴롭힐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다시 정보상을 일으켜 세우는 데 성공한다면 다시는 그런 수모를 겪지 않을 거예요."

정보상으로서의 자부심이라는 건가.

베르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굳이 페르네의 능력을 이용할 이유는 페일이 추천해 줬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메리트가 필요하다.

"당신을 도와주면 내게 뭘 줄 거지?"

"정보상으로서의 전부요."

페르네가 주먹을 쥐었다.

"정보를 달라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보를 구해 줄 것이고, 의뢰가 필요하다면 최고의 의뢰를 주선해 주겠어요. 돈은 인건비만 받을 게요. 인프라만 재건해 준다면 제 능력을 전부 드리겠어요."

즉, 베르덴의 전속 정보상이 되겠다는 뜻.

괜찮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이거라면 한번 키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잠깐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있겠어.'

기회를 살린다면 정보상으로 쓰겠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가차 없이 버릴 생각이다. 동정 따위 필요 없다. 이건 전적으로 페르네의 실력에 달려 있다.

베르덴이 말했다.

"의뢰 좀 보지."

페르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여기 지금 제가 연결해 드릴 수 있는 의뢰 전부예요!"

페르네가 의뢰 서류를 전부 가지고 나왔다.

그래 봤자 몇 장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여러 정보상에 마구잡이로 뿌린 거나,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의뢰들뿐이었다.

"그래도 아인종의 부산물은 수입이 꽤 괜찮아요. 아세른 근처에 있는 '슬론 숲'에는 아인종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거든요. 어떠세요?"

시작으론 나쁘지 않다. 어디까지나 페르네에겐.

하지만 베르덴에겐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보수였다.

좀 더 큰 게 필요했다. 단번에 페르네의 기반을 마련하면서도 베르덴에게도 이득이 되는 의뢰가.

"...."

의뢰들을 쭈욱 훑어봤다.

여러 범죄에 관련된 의뢰가 상당수인데 베르덴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붉은색으로 표시된 의뢰서가 눈에 띄었다.

용병단 '바제스의 철퇴' 토벌.

보수는 무려 1억 1천만 엘크. 다른 의뢰들과는 자릿수가 다른 액수였다.

"이건 어떻지?"

"이, 이거요? 보수는 엄청나긴 하지만... 이건 아무도 안 해요. 아니,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바제스의 철퇴는 용병 길드에 소속된 용병단이자 악질적인 도적단이기도 했다.

오직 돈으로 고용되어 잔혹하게 의뢰를 수행한다.

줏대가 없어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지만 워낙 잔혹해서 섣불리 건드는 사람이 없었다. 괜히 그랬다가 잘못 걸리면 죽을 테니까.

"아세른에서도 애써 쉬쉬하는 망나니예요. 용병 길드와 각종 연줄에 돈을 발라서 잡히지도 않고요. 바제스의 철퇴는 용병단의 탈을 쓴, 법을 벗어난 살인자 집단 그 자체예요. 이 의뢰를 받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럼 의뢰주는 누구지?"

"이건 바제스에게 당한 사람들이 돈을 모아 의뢰한 거예요. 당연히 다른 정보상이 받아 줄 리가 없으니 떠넘기고 떠넘기다 보니까 저에게 온 거죠."

다른 의뢰주도 있었고 또 그 의뢰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부 죽었다. 그렇게 죽은 사람만 두 자릿수를 넘어간다. 그리고 바제스는 의뢰한 사람마저 기어코 찾아내 살해했고, 그 시체를 거리에 대놓고 전시했다.

위험도만 따지면, 바제스는 아세른 주변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였다.

"제가 알기로는 곧 왕국의 암흑가인 '로아프라'로 간다고 들었어요. 체급을 키웠으니 무대를 넓히겠다는 거겠죠. 그러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고 봐요."

페르네가 베르덴을 바라봤다.

그녀는 바제스를 본 적이 있었다. 무지막지한 근육으로 휘두르는 철퇴. 골목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던 전직 금 등급 모험가도 한 방에 몸이 터져 죽었다.

'페일이 2등급이라고 하긴 했지만 리스크가 높아.'

괜히 현상금... 아니, 보수가 1억에 달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실패했을 경우 페르네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베르덴은 달랐다.

"용병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데 죽여도 문제는 없나?"

"예? 아, 그건 상관없어요. 그쪽에서도 바제스는 눈엣가시거든요. 뇌물은 받았지만."

그 대답에 베르덴이 의뢰서에 서명을 했다.

"위치가 어디지?"

"어, 어? 잠깐, 진짜 이걸 하려고요?!"

베르덴이 수긍했다.

그 자신감에 페르네는 할 말을 잃었다. 막을 방법도 없었고.

결국 페르네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용병단과 함께 슬론 숲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로 다시 생각...."

"저녁쯤에 다시 오지."

페르네의 만류를 무시하고 베르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점을 나서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순수한 마력의 빛이 명멸했다.

* * *

바제스는 스스로를 왕이 될 재목으로 여겼다.

당연히 에스티리아 왕가에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은 아니다. 왕국의 암흑가를 지배할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바제스를 우물 안 개구리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는 자신이 만든 요새 안에선 정점이었다.

슬론 숲 길목 근처에 있는 동굴.

바제스는 그 깊숙한 곳에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독한 술을 연거푸 목 안에 처넣었다.

"크으. 그래, 이 맛이지."

이게 술이지. 이게 인생이지.

바제스의 얼굴엔 흉악한 미소가 가득했다.

'요새 일이 너무 잘 풀리는군. 아주 좋아, 좋고말고.'

명실공히 아세른의 거물 취급을 받는 바제스는 고작 2년 사이에 개인 수익으로 무려 수억 엘크를 벌어들였다.

의뢰를 통해 얻기도 했고, 마음에 안 드는 놈들에게서 빼앗기도 했었다. 또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 버러지들에게서 강탈하기도 했었고.

적당히 사치를 부리면 시골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금액.

하지만 그 정도로는 바제스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돈이었다.

수억 엘크는 투자금에 불과했다.

"어이, 빈치스! 내 편지는 제대로 전달했겠지?"

"물론이죠, 바제스 단장. 곧 '빈테르트(Vintert)'에게서 연락이 올 겁니다."

빈테르트.

왕국의 암흑가 로아프라를 지배하는 최대의 조직. 일반적으로 외부인이 그곳에 들어가려면 막대한 돈을 바쳐야 한다.

바제스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전 재산을 몽땅 갖다 바쳤다.

'조금 아깝기는 하다만 뭐, 금방 되찾을 수 있겠지. 나라면 빈테르트에서 금방 간부 자리를 꿰찰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도움닫기일 뿐이다.

확신하건대 곧 바제스란 이름이 전 암흑가에 울려 퍼지며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질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 살인을 하는 듯한 쾌락이 느껴졌다. 바제스가 히죽거렸다. 빈테르트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동굴 내부에 울려 퍼졌다.

"바, 바제스 님! 비상입니다, 비상!"

"뭐야 또?"

"누가 동굴에 쳐들어왔습니다! 어,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으나 너무 강해서...!"

또 누가 의뢰를 했나 보군.

바제스는 귀찮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케벤에게 말해라. 걔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 케벤 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케벤이 죽었다고?"

바제스가 몸을 일으켰다.

케벤은 엄연히 용병단의 3인자다. 실력 또한 마찬가지. 단검으로 상대의 급소만을 노리는 기민한 움직임은 확실한 장점이었다.

물론 바제스보다 훨씬 약하긴 하지만 어지간한 상대는 대처가 가능할 터.

'이것 봐라?'

아무래도 이번엔 꽤나 강한 놈이 찾아온 모양이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나쁘지 않겠군. 자리에서 일어난 바제스는 구석에 있던 거대한 철퇴를 한 손으로 들었다.

"그 새끼 어딨어?"

* * *

베르덴이 바제스의 은신처를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숨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연이어 마력감지를 펼치며 움직이자, 얼마 되지 않아 찾아내는 데 성공했으니.

비행을 쓰던 베르덴이 투명화를 해제하며 두터운 목책 앞에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용병 두 명이 허둥지둥하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뭐, 뭐야?! 갑자기!"

"바제스는 안에 있나?"

"단장님은 무슨 일로...."

안에 있군.

콰아아앙!

베르덴은 오큘러스를 꺼내 그대로 용병들과 함께 입구를 날려 버렸다. 난데없이 터진 폭음에 용병들이 몰려들었다.

악명 높은 용병단답게 꽤나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베르덴의 시선이 작은 요새를 훑었다.

구석에 온갖 고문을 당한 시체 몇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바제스는 없나.'

저 동굴 안에 있는 건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페르네의 말마따나 상대는 용병단의 탈을 쓴 살인자 집단.

생포해 봤자 소용없다. 만약 뇌물을 주고 풀리기라도 한다면 귀찮아지니까. 애써 후환을 남기는 건 멍청한 판단이었다.

뭐,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하기 좋은 무대다.

베르덴은 부여 마법만을 시전하고 오큘러스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죽이지 말고 잡아! 팔다리만 끊어라!"

누군가의 목소리에 용병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누구도 베르덴의 감각을 피하지는 못했다. 현란하게 회전하는 오큘러스. 그 끝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가 이곳 작은 요새를 휩쓸었다.

그때, 단검을 든 용병 하나가 잽싸게 베르덴의 뒷목을 노렸다.

상당한 속도였으나 이미 간파했다. 베르덴이 허리를 비틀어 오큘러스로 용병의 옆구리를 강타하자, 그 충격파에 용병이 날아가더니 목책을 박살 냈다.

운 나쁘게 나무 파편이 목에 박힌 놈은 곧 축 늘어졌다.

얼마 안 가 용병단이 전멸했다.

'이제 좀 몸이 풀리는군.'

가볍게 어깨와 목을 푼 베르덴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동굴 중앙에서 근육질의 거한과 남은 용병들을 마주쳤다.

바제스가 베르덴을 보며 코웃음 쳤다.

"이 근방에서 못 보던 놈인데. 여긴 무슨 볼일이지? 내 목이라도 따러 왔나? 벌서 여섯 번인가 일곱 번째인 것 같은데 질리지도 않는 건지, 원.... 이번엔 얼마 준다고 하디?"

"1억."

정확히는 1억 1천만.

"1억? 거참,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거하게 걸었군. 뭐, 나야 좋지만."

바제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사냥꾼을 역으로 사냥하는 것.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오락이었다. 그리고 의뢰주가 1억을 걸었으니, 놈인지 놈들인지 몰라도 찾아낸다면 1억을 그대로 빼앗을 수 있다는 뜻.

"의뢰를 주선한 정보상이 누구냐?"

"그게 왜 궁금하지?"

"그야 네놈을 죽이고 찾아가 본보기를 보여야 하니까. 감히 이 몸을 건든 대가는 치러야지."

후웅!

바제스가 철퇴를 가볍게 휘둘렀다. 무게가 상당한 모양인지 바람이 일었다.

"빈치스, 가서 저놈 팔다리만 잘라 와라. 내 부하들을 쉽게 처리했으니 방심은 하지 말고."

"예예, 바제스 단장."

바제스의 최측근이자 용병단의 2인자, 빈치스.

그가 구불거리는 도신을 가진, 기이한 검을 빙빙 돌리며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기세 좋은 움직임.

하나 정면을 선택한 빈치스의 악수였다.

콰앙!

"억?!"

충격파에 의해 빈치스가 뒤로 날아갔다.

깜짝 놀란 바제스가 반사적으로 철퇴로 후려치자, 지면에 부딪힌 빈치스는 그대로 목이 부러져 사망했다.

최측근의 허무한 죽음에 바제스가 입맛을 다셨다.

"...그 스태프, 마법 물품인가? 꽤나 비싸 보이는데."

"확실히 너의 목보단 비싸지."

베르덴의 말에 바제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내 입가를 비틀었다.

"적당히 팔다리만 부술 생각이었는데 그 주둥아리만 남겨야겠군."

바제스가 기운을 끌어 올렸다.

양손으로 철퇴를 붙잡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베르덴도 오큘러스에 마력을 집중했다.

"뒈져라아아아아!"

이윽고 바제스의 철퇴가 낙하했다.

베르덴은 전혀 피할 생각이 없다는 듯 스태프를 휘둘렀고 이내 서로가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앙!

막대한 충격이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99화 간단한 의뢰 (2)

마법사와 전사의 근접전.

이건 백이면 백 전사가 유리했고, 압도하지 못하면 전사로서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상식이었다.

'이게 뭔...!'

그런데 바제스의 철퇴와 정통으로 부딪쳤음에도 베르덴은 멀쩡했다.

마력으로 된 충격파가 충격을 상쇄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바제스를 밀어냈다.

힘에 밀려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친 바제스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런 마법사 새끼가!"

쾅!

바제스가 철퇴를 휘둘렀다.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주위를 무차별적으로 강타했다. 한 방 한 방 속도가 빠르고 파괴력이 강하나 그렇기에 정직했다.

감각이 뛰어난 자는 그야말로 바제스의 천적.

종이 한 장 차이로 계속해서 철퇴를 피해 낸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어스 스피어>

트리플 캐스팅.

마법서로 강화된 대지의 창이 바제스에게 육박했다.

바제스의 근육이 융기했다. 허리와 어깨를 비틀어 억지로 철퇴의 방향을 뒤바꾼 바제스가 마법을 단박에 부숴 버리고는 아래로 내리찍었다.

흔들리는 지면.

중심을 잃은 베르덴을 향해 철퇴가 날아왔다.

"맞고 뒈져라!"

<염동력>

반투명한 막이 철퇴의 궤도를 비틀었다.

그것만으로 염동력의 장막이 깨졌다. 확실히 충격력 하나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는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쿠웁!"

오큘러스가 바제스의 빈틈을 강타했다.

놈이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움켜쥐었고, 그사이 베르덴이 뒤로 거리를 벌렸다.

'슬슬 끝낼까.'

오큘러스의 성능은 실전에서 검증이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불리한 근접전을 지속할 이유는 없다.

다음은 삼원색의 중심 차례.

베르덴이 연산 능력을 극적으로 발휘하며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화염과 냉기.

서로 상극인 원소 마법들이 각각의 특징이 추출되어 하나로 합쳐진다. 이윽고 스태프 끝에 자그마한 푸른 연꽃이 피어올랐다.

<빙염화>

마력이 확산하며 푸른 꽃잎이 순식간에 동굴 내부에 흩날렸다.

지면에 꽃잎이 내려앉아 삽시간에 냉기가 퍼져 나갔다. 그에 닿은 바제스 또한 마찬가지.

"시발! 이게 대체 뭐야!?"

꽃잎에 닿은 피부가 얼어붙었다.

화염의 특성 중 하나인 '확산'을 품은 냉기. 바제스가 아무리 손으로 털어 내 봤지만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기운을 끌어내 조금이라도 냉기에 저항하는 게 전부였다.

뒤에 있던 그의 부하들은 이미 전신이 얼어붙었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마법.

그 사실에 바제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마도사라고?'

마법의 법칙에서 벗어난 도달자.

물론 베르덴은 아직 마도를 걷지 못했다. 애초에 5위계에 이르지도 못했다.

이건 아티팩트 덕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적일 뿐.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다면 타인의 눈에 비치는 베르덴은 영락없는 마도사였다.

<크랙>

콰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악!"

바제스의 몸뚱이에서 얼음이 폭발했다.

전신이 찢어지는 격통에 바제스가 무릎을 꿇었고, 그런 그의 앞에 회색의 단검이 육박했다.

푸욱.

목을 관통당한 바제스는 유언조차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세른에서 날뛰던 악명 높은 용병은 그렇게 타국에서 온 마법사에게 짓밟혔다.

단검을 회수한 베르덴이 직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아티팩트로 만든 마법 때문인지 마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마력 외적인 문제다.

첫째는 연산 능력.

단시간에 마법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작 마법 한 번에 머리에 뜨겁게 열이 오를 정도니.

그리고 두 번째로 마력회로의 출력.

첫 번째 이유와 마찬가지로 마법 분해 및 조립, 그것이 차지하는 마력회로의 할당량이 상당하다.

이 이상으로 삼원색의 중심이 부여한 혼돈을 일으켰다간 분명 마력회로에 과부하가 올 것이다.

한 번의 전투에 삼원색의 중심을 활용할 수 있는 건 많아 봤자 세 번. 물론 더 많은 속성을 다룬다면 그마저도 더 줄어들 것이다.

"뭐, 익숙해지면 되겠지."

아직 성장할 길은 많이 남아 있다.

베르덴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고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곳은 악명 높은 용병단의 은신처.

그렇다는 건 가져갈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괜찮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베르덴의 모습이 동굴 안쪽으로 사라졌다.

* * *

페르네는 식사도 거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침내 희망이 동아줄이 내려온 줄 알았는데, 막상 잡아 보니 기름칠이 되어 있는 기분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이내 불안에 휩싸였다.

"...실패하면 어떡하지?"

페일 기준으로 2등급이라고 했다. 그럼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하지만 페르네는 애셔란 이름 외엔 가진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단지 페일의 말을 신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이러다 애셔가 죽고 바제스가 앙심을 품고 찾아온다면.

페르네는 정말로 최악의 결말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제발... 제발...!"

페르네가 기도했다.

누구에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디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끝장나지 않기를, 부디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인 것 같은데 그게 애셔인지 바제스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페르네가 침을 삼키며 입구를 바라보자, 마침내 문이 열렸다.

"아...!"

베르덴이었다.

페르네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겨우 한숨 돌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베르덴의 모습은 나가기 전과 같이 멀끔했다.

마치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처럼.

아!

페르네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바제스 못 찾은 거죠? 하기야 놈이 은신처에만 있을 리가 없죠. 비행 금지령인데 이렇게 빨리 찾아내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쨌든 다행이에요. 저는 정말로...."

"무슨 소리지?"

"네?"

페르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바제스 못 찾은 것 아니에요?"

"못 찾았으면 안 왔겠지."

베르덴이 공간가방에 손을 넣었다.

바제스가 이끄는 용병단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 그냥 땅속에 묻어 버리기엔 아까웠다. 품질이 괜찮은 금속이라 대충 중고로 팔아도 최소 수백만 엘크는 받을 테니.

쿵!

바닥에 떨어진 바제스의 철퇴와 여러 무기를 본 페르네의 표정이 굳었다. 베르덴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낡은 책을 한 권 꺼내 페르네에 건넸다.

"이게 뭐... 죠?"

"장부. 바제스에게 돈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

페르네가 스윽 훑었다.

귀족, 상회주 등 몇몇 유명한 이름도 보인다. 즉, 이건 불법 자금 장부다. 아무리 불법이 판치는 왕국이라지만, 이걸 적대 귀족이나 상회에게 넘긴다면 엄청난 무기가 된다.

말 그대로 사용하기에 따라 상대를 끝장낼 수 있는 명분 그 자체.

연이어 베르덴이 바제스가 보관하고 있던 재물들을 페르네에게 보였다.

돈은 별로 없었지만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것이 몇 개 있었다. 책상 위에 하나씩 보기 좋게 나열했다.

마지막으로 바제스의 머리를 꺼냈다.

단단히 얼려 놓은 터라 피가 흐를 일도 없었고,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훼손되지도 않았다.

페르네가 멍하니 그 머리를 받아 들었다.

"이거면 됐나?"

"...."

페르네와 죽은 바제스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털썩.

페르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바제스의 사망 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세른을 강타했다.

길거리에 시체를 장식했던 잔인함 때문에 그 악명은 시민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아세른의 모든 주점에서 저마다 화젯거리를 씹어 댔다.

"바제스? 그 망나니 새끼가 죽었다고? 누구한테?"

"몰라. 누가 죽여 달라고 의뢰라도 한 것 아니야? 워낙 미친 새끼여야 말이지. 아니면 귀족 나으리들께서 처리하신 게 아닐까?"

"그런 건 관심 없고. 누군지 몰라도 바제스 그 새끼 손도 못 쓰고 뒈졌다나 봐. 용병단에 아무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최근 대장간에서 그 새끼들 무기 중고로 팔리고 있는 것 봤냐?"

"와, 진짜 무섭네. 근데 바제스 같은 놈이 또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길 바라야지. 뭐, 어쨌든! 망나니의 죽음에 건배!"

바제스의 죽음.

누군가는 기뻐하며 술을 들이켰고, 누군가는 바제스와 같은 놈이 또 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이야기.

그레이에서 활동하는 자들은 달랐다.

바제스는 꽤나 거슬리는 경쟁자였다. 대놓고 맞붙자니 잃을 게 많았고, 같이 지내자니 놈은 하이에나같이 의뢰들을 빼앗았다.

그런 놈이 사라졌으니 자연스레 그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탐욕을 드러냈다. 분명 얼마 안 가 바제스의 이름은 잊히겠지.

그리고 바제스가 아닌, 그를 죽인 자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자도 있었다.

아세른의 대부업자, 바르톨이 턱을 쓸었다.

"페르네에게 고용된 자에게 바제스의 목이 날아가다니. 아세른 바깥에서 온 자인가... 아니면 해외에서 들어온 자일지도 모르겠군."

흥미롭다.

다 망해 가던 페르네가 어디서 그런 자를 데려왔을까.

"알아볼까요?"

"아직은. 고작 바제스 따위를 죽였다고 그렇게 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지금 같은 혼란한 시국에 나타난 외부인이라."

과연 왕국에 녹아들지, 아니면 불순분자가 될지.

뭐가 됐든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야 한때 왕국 그레이를 휘어잡던 페르네가 망하기 직전에 데려온 존재니까.

"이러다 빚을 다 갚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조합'에서는 페르네의 채무 권리를 넘기라고...."

"권리를 넘기라고 했지, 강제로 빚을 지우라는 말은 안 했잖아? 페르네가 구렁텅이에서 나오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지. 돈만 잘 갚으면 아무 상관 없다고."

퉷.

바르톨이 침을 뱉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합 놈들이 맘에 안 들어. 귀족을 등에 업고 날뛰는 좆같은 새끼들...."

"하지만 조합의 영향력이 너무 강합니다. 자칫 적대하게 되면 피해가 클 텐데요."

"그래서 조합이든 아니든 가만히 내 일만 하고 있잖아. 그리고 아직 뭘 선택할 때가 아니야. 왜냐하면 내 직감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거든."

지금은 베팅할 때가 아니라 지켜볼 때라고.

바르톨은 이러한 직감을 믿어 왔고, 그 결과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빈민가에서 악착같이 올라온, 현 아세른의 권력자 중 하나.

그것이 대부업자 바르톨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다. 근거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그런 바르톨의 근거 없는 확신에, 부하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 * *

페르네는 정말로 이를 악물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베르덴이 가져온 장비를 여러 대장간에 팔아넘겼고, 의뢰인에게 그토록 원하던 바제스의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장물아비에게 보석과 장신구도 적당히 값을 받아 넘기기도 했고.

그 결과 그녀에 손에 남은 건 무려 3천만 엘크의 거금.

베르덴에게 줄 보수를 제외하고, 의뢰를 통해 정보상이 받는 수수료와 바제스의 재산을 정산하면서 베르덴에게 받은 돈이었다.

피곤에 찌든 페르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걸로 한동안 이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원금의 일부를 상환하기까지! 꽉 막혀 있던 숨구멍이 조금이나마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페일 님! 감사합니닷!"

훌쩍 떠나 버린 옛 선배에게 감사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오랜만에 시원한 공기를 맛보고는 곧바로 사고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애셔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거지?'

마법사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최근 경황이 없다 보니 공국에 대한 정보가 갱신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중에 정보망을 원상태로 복구하면 한번 알아봐야겠지.

그렇게 판단한 페르네가 지폐 뭉치를 한 아름 들고 방에서 나갔다.

적막한 그녀의 주점에서 베르덴이 홀로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앞에 차곡차곡 돈을 올려놨다.

"총 1억 3,800만 엘크. 제대로 확인했으니 액수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예요."

베르덴이 신문을 접고 보수를 챙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페르네가 페일의 소개장을 떠올렸다.

[2등급. 극진히 대할 것.]

말인즉슨, 의뢰 주선뿐만 아니라 원하는 정보도 있다는 뜻. 그렇지 않았다면 페일이 굳이 이런 소개장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페르네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정보가 뭐예요?"

100화 미스릴 모험가 파티 (1)

첫째, 오브(Orb)로 만든 스태프.

둘째, 마도왕의 무덤.

셋째, 경매장 초청장.

이렇게 현재 베르덴의 관심사는 총 3가지였다. 에스테리아 왕국에 온 이유이기도 하고. 목적을 상기한 베르덴이 페르네의 물음에 답했다.

"왕국에 '외수'라는 마법 물품 장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원하는 건 그에 대한 정보인가요, 아니면 소재인가요?"

"둘 다."

페르네는 곧장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녀가 여태까지 모은 정보 중, 인물에 대한 정보가 담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케케묵은 먼지를 털고는 그 내용을 읽어 내렸다.

"외수 '라이너스 볼티모그'. 일단 성격으로는 젊었을 때부터 엄청 제멋대로였다고 해요. 돈이나 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니면 제작을 맡지 않았어요. 게다가 전투 망치를 엄청나게 잘 다뤄서 백금 등급 모험가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특이한 건 무려 드워프 장인의 수제자 중 하나였다고 해요."

"드워프?"

금속과 창작의 종족, 드워프.

키가 작은 편이고 마력을 다룰 수 없으나, 강인한 근력과 섬세한 손재주를 타고났다. 워낙 자존심이 높은 종족이라 타 종족과의 사이는 좋지 않다. 특히 그런 드워프를 노예로 써먹었던 인간과는.

현재는 대륙의 서남쪽에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일이죠. 그런데 그런 30대 초반 무렵에 드워프 장인에게 파문을 당했다나 봐요. 아마 오른팔을 잃은 것도 그때였을 거예요. 단지 추측일 뿐이지만요. 명확한 이유도 모르고요. 하지만 이후에 엄청나게 훈련을 했는지 입이나 발을 이용해 부족한 팔을 대신했고, 그 이후로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외수라고 불리기 시작했죠."

페르네가 다양한 재료가 적힌 목록을 건넸다.

"이건 외수가 다뤘던 재료들이에요. 그가 만든 장비들을 보고 기록한 거죠."

기본적인 금속은 물론이고 미스릴과 다마스 강철 및 흑요석이나 오리칼큠, 데인스 강과 같은 최상위 금속까지. 거기다 사용한 아인종이나 이형종의 소재도 수백 가지가 넘었다.

이 정도라면 오브를 능히 다룰 수 있으리라.

"그런데 마지막으로 외수가 목격된 건 6년 전이에요. 이곳 왕국에서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잡혀 감금이라도 당했는지는 당장 알 순 없어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어요. 워낙 어려운 의뢰라... 무엇보다 제 정보망을 되살리는 게 먼저인데 빌어먹을 조합이 문제예요. 놈들이 그토록 저를 밟아 놨는데, 제가 다시 정보상으로서 완전히 되살아난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어쩌면 애셔 님이 없는 사이, 암살자가 제 목을 쓱싹해 버릴 수도 있죠."

페르네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왕국 전역을 뒤져 봐야 하는, 이런 큰 정보를 얻으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가능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고, 혹시 모르니 정보 교란도 해야 하니까요. 제 목숨을 지키려면 말이죠. 하지만 맡겨만 주시면, 아무것도 못 찾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페르네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섣불리 움직였다가 페르네가 죽으면 베르덴으로서도 곤란하니까.

"좋아, 맡기지. 그럼 다음으로 '유물'을 해석할 사람이 필요해."

"유물이라면... 어떤 건지 봐도 될까요?"

베르덴이 흔쾌히 유물을 넘겼다.

유물엔 조예가 없어 혼자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니 조력자가 필요하다. 꽁꽁 숨기고 있는 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페르네가 유물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저도 유물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이건 되게 특이하네요. 이렇다 할 문양 같은 것도 없고. 마치 타원형 구조의 사파이어를 보는 것 같아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이거 정말 유물 맞아요? 장식품은 아니고요?"

"출처는 믿을 만해."

"그런가요... 일단 알겠어요. 유물 관련 전문가를 한번 찾아볼게요. 이거 일부분만 그림을 그려도 될까요?"

베르덴이 수긍했다.

페르네는 빈 종이를 꺼내 곧바로 유물을 그려 냈다. 상당한 그림 실력이었다.

"한창 페일 밑에서 심부름꾼 하고 있을 때 의뢰서 만드는 작업도 했었거든요. 정보상 중에 저만큼 글씨체나 그림체가 좋은 사람은 없을걸요? 자, 여기 유물이요. 그럼 정보는 이걸로...."

"하나 더 있는데."

"...네? 또요?"

엄청 어려운 의뢰 두 개에다가 하나 더?

"'푸른 구름'이라는 상단의 일원인, 메딘이라는 사람의 소재가 필요해."

"메딘... 혹시 직책이 뭔지 아시나요?"

"호위로 활동하면서, 간부 역할을 맡고 있다더군."

그러자 페르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앞의 의뢰들보다 찾는 것은 훨씬 쉽네요. 아마 경비대장쯤 되는 사람일 테니, 이동 상단하고 같이 움직이고 있을 거예요. 몇몇 도시에 상단 건물이 있으니 그쪽을 통해 알아볼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애셔 님이 의뢰를 해 주시면 더욱 빨리 찾을 수 있겠죠?"

페르네가 슬쩍 의뢰서를 몇 개 꺼냈다.

바제스처럼 억대의 보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천만 단위였다. 의뢰를 해결할수록 페르네의 정보망이 빠르게 재건될 것이다.

'어차피 나도 돈을 벌 필요가 있으니.'

베르덴이 의뢰서 중 하나를 집었다.

물론 보수가 가장 높은 걸로.

* * *

베르덴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의뢰를 해치웠다.

슬론 숲에서 아인종의 소재를 얻거나, 현상 수배범을 잡거나. 공국과 비슷한 의뢰였으나 확실히 숫자로 따지면 왕국이 훨씬 많았다.

비행 금지령이 있기에 값비싼 군마를 하나 빌렸다.

강화된 감각 덕분에 승마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지 않았다. 오히려 의뢰를 주선하는 페르네가 버거울 정도.

그렇게 나날이 돈이 쌓여 갔고, 페르네는 자신의 주점인 페르페르 주점의 영업까지 다시 재개했다. 물론 일할 종업원도 구했고.

하지만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멀었다.

더 큰 의뢰가 필요하다.

그리고 페르네는 바제스 이후로 보수가 높은 의뢰를 구해 왔다.

"이번엔 미스릴 등급 모험가 파티의 의뢰예요. 내용은 아인종 토벌이고요. 자세한 내용은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데 어떠세요?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신원은?"

"확실해요. 타국에서 왕국으로 들어온 모험가들인데, 모험가 활동에만 열중하는 파티예요. 정치적 관련이나 범죄 행위는 하나도 없는 데다가, 극히 드물게 평판도 매우 좋고요. 가끔씩 그레이에서 마법사를 구해 같이 토벌 의뢰를 맡은 적도 있어요. 적어도 뒤통수 맞을 일은 없을 거예요."

공국과 달리 왕국의 그레이는 범위가 넓다.

용병과 모험가, 그 사이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이런 의뢰도 비교적 흔한 편이었다.

그런 페르네의 정보를 믿고, 베르덴이 의뢰인을 직접 만났다. 페르네의 주점에서 베르덴은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와 마주했다.

"안녕하시오. 미스릴 등급 모험가 파티 '만하'의 리더, '스칼드'라고 하오."

개인이 아닌 파티 단위의 등급.

그렇다 해도 미스릴 등급을 보는 건 베르덴도 처음이었다.

"애셔입니다."

"최근 그레이에서 미친 듯이 의뢰를 처리하고 있는 마법사라고 들었소. 모험가 못지않게 아인종 토벌도 능숙하게 해낸다고. 거기다... 바제스까지 처리하셨다고?"

베르덴은 부정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스칼드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진짜인가 보군. 뭐, 그런 이유로 의뢰를 하러 왔소. '슬론의 깊은 숲'에서 포레스트 와이번 무리와 오우거의 상위종이 발생해서 말이오. 내일 당장 우리가 토벌을 맡기로 했는데, 마침 우리 쪽 마법사가 자리를 비우게 되어서... 하아, 마탑 출신이라 그런지 여러모로 다루기 어렵다오."

"마탑이라면...."

"젠티르 마탑이오."

젠티르 마탑.

다양한 원소 마법을 연구하는 보헤미른 마탑과 달리 물과 냉기에 특화된 마탑이다. 범위가 한정된 만큼, 마탑의 종사자만 배울 수 있는 전용 마법이 존재한다.

"갑자기 마법 연구를 한다면서 집에 틀어박혔소. 뭐,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토벌 직전에 지랄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요."

"그런데 굳이 제가 필요합니까?"

미스릴 등급인데.

스칼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으면 걱정할 게 없다. 이게 내 모험가로서의 철칙이오. 방심했다간 죽는 일이 십상이니 말이오. 그리고 최근 슬론의 깊은 숲에서 아인종 출몰이 너무 많다오. 안일하게 나설 이유는 없는 것이지."

정석적인 모험가다운 자세다. 이래서 미스릴 등급에 오른 건가.

베르덴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법사의 빈자리를 제가 채우면 되는 겁니까?"

"그렇소. 당신도 원소 마법이 주류라고 했으니 역할도 딱 맞고. 그렇다고 너무 손발을 맞출 필요는 없소. 애초에 그 마법사 친구도 제멋대로 움직였으니까. 그런데도 팀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고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당신은 적당히 발만 맞춰 주면 되오. 아, 잔이 비었군. 여기 스카치위스키 하나 더!"

"네, 바로 갖다드릴게요!"

스칼드가 종업원에게서 위스키를 받아 들곤 단번에 들이켰다.

주량이 강한 건지 입가를 쓱 닫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보수는 괜찮게 주겠소. 여정은 약 2일에서 5일. 식사 제공. 포레스트 와이번, 우두머리 포함 8마리와 오우거 4마리 그리고 트윈 헤드 오우거 한 마리까지 기본급으로 4천만 엘크. 그 이상 넘어가면 와이번은 두당 200만 엘크, 오우거는 두당 300만 엘크로 주겠소."

"보수가 꽤 세군요."

"우리 쪽에 해체 전문가가 있소. 소재 하나하나 놓치지 않지. 시가로 쳐서 인원수에 맞게 배분하면 딱 그 정도 되오. 기타 자잘한 비용이 들긴 하나 그건 넘어가고, 더해서 그 외 아인종이나 이형종은 위험도가 오우거나 와이번에 근접한 정도면 보수로 쳐주겠소. 고블린 하나하나까지 보수로 책정할 순 없으니 말이오."

합리적인 조건이다.

애써 협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미스릴 등급의 전투라. 오히려 돈을 주고서라도 보고 싶을 정도였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수락하겠습니다."

"하하, 결정 한번 시원하시군! 그럼 같이 잘해 봅시다."

스칼드가 잔을 내밀었고, 베르덴이 잔을 부딪쳤다.

* * *

이른 아침, 아세른의 성문.

약속 시간보다 일찍 모인 모험가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버민이 스칼드의 등을 팔꿈치로 툭 치며 감탄했다.

"이야, 용케 하루 만에 마법사를 구했네? 어떻게 한 거야?"

"흐흐. 이게 술의 마법이지."

"그런데 누구야? 설마 어중이떠중이 데려온 건 아니지?"

궁수 루비나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스칼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오. 아마 여기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 봤을걸? 애셔라고...."

"애셔라면 그레이에서 활동하는 그 마법사 말이야? 바제스를 토벌했다는?"

"오, 그 이름은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성직자 케디언이 말했다.

"최근 아세른에서 떠오르는 인물이라더군요. 맡은 의뢰는 하루도 안 되어서 해결하고, 4위계 원소 마법사이면서 전격 계열 마법을 다룬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위 속성을?"

"전격 계열도 4위계라더군요."

"진짜? 와, 그 정도면 바제스 죽일 만했네. 대체 어디서 온 거래?"

케디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왕국은 아닐 테고... 해외에서 온 거라면 공국에서 온 게 아닐까요? 그나마 가까우니."

"그런가? 공국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네. 그나저나 스칼드, 그 애셔란 마법사는 어때? 설마 겔톤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

겔톤은 파티의 마법사다.

연구할 게 생겼다고 토벌 약속을 파투 내는. 그래도 막상 해야 할 때는 잘하기에 묵인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런 머저리 같은, 더해 독단적이고 초면인 마법사와 같이 움직이는 건 사절이었다.

"나도 어제 얼굴 본 게 전부라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꽤나 점잖더군. 꼬박꼬박 존댓말도 해 주고. 그리고...."

"그리고?"

"외모가 훤칠했소. 마치... 그래, 어릴 적 상상하던 마법사 같더군. 푸른 눈에서는 총기가 넘치고 말이오. 내가 판단하기엔 보기 드물게 좋은 마법사 같소. 실력은 봐야겠지만."

예상치 못한 스칼드의 고평가.

팀원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기며 기대감을 품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잠시 후,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며 베르덴이 나타났다.

"오...."

스칼드가 말했던 것 이상의 분위기에 스칼드를 제외한 팀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늦긴 무슨! 아직 약속 시간도 안 되었는데. 자 자, 우리 팀원들과 인사부터 하시오."

베르덴이 모험가들과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기본적인 팀의 역할과 진형에 대해 간략하게 전달받았다.

"벌써 외우셨소? 마법사답게 머리가 좋으시군. 그럼 준비됐으면 출발하겠소."

베르덴과 스칼드 일행이 성문을 걸어서 나섰다.

101화 미스릴 모험가 파티 (2)

슬론 숲에 들어온 지 어느새 14시간이 흘렀다.

이쯤 들어왔으면 비행을 써도 왕국 병사에게 발각될 일은 없겠지만 일행의 주체는 모험가 파티 만하이고 리더는 스칼드다.

계약한 날짜는 최소 이틀이기에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중간중간 간단히 식사를 하는 등 휴식을 취하긴 했으나 겨울임에도 몸에 열이 차올랐다. 이따끔씩 베르덴의 움직임을 살피던 스칼드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소, 애셔? 괜찮아 보여서 오래 움직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에게는...."

"문제없습니다."

베르덴은 솔직히 답했다.

고작 한나절쯤 행군을 했다고 지칠 체력이 아니었다. 정말로 태연한 모습에 버민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대단하네요, 애셔 씨는. 우리 마법사였다면 못 걷겠다고 몇 시간 전에 침낭 깔고 자고 있었을 텐데. 안 그래, 루비나?"

"누가 아니래."

"자, 약속 파투 낸 겔톤 뒷담은 그쯤 하고.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왔으니 내일이면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겠소. 그러니 2시간 후에 자리를 잡아 야영지를 만들도록 하겠소."

모험이 이어졌다.

도중에 아인종이나 마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거나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충돌은 없었다. 놈들도 직감한 것이다. 저들을 사냥하려 했다가 도리어 사냥당할 거라고.

이윽고 날이 저물고 적당한 공터를 찾았다.

평소대로라면 버민과 루비나가 저녁을 준비하고 나머지가 텐트를 치거나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으나, 이번에는 베르덴이 있었다.

베르덴이 염동력으로 다섯 개의 텐트를 움직여 순식간에 바닥에 설치했다.

이 정도의 위치 계산과 조작은 손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어 손가락을 튕겨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버민이 감격한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게 진짜 마법사?"

너무 편하다.

불 하나 못 피우고 오로지 냉기와 물 마법에만 몰두하는 겔톤과는, 생활적인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그런 색다른 여유로움 속에서 저녁이 만들어졌다.

미스릴 등급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비프스튜. 버민이 한 사람 한 사람 그릇에 퍼서 전달했다.

베르덴이 비프스튜를 앞에 두었다.

문득 비르온 영지로 언데드를 토벌하러 갈 때, 이리스 일행과 먹었던 스튜가 떠올랐다. 꽤 맛은 있었는데.

베르덴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이게 더 맛있군.'

그렇게 늦은 저녁을 먹던 중 자연스레 대화가 시작됐다. 모험가들끼리 하는 시시콜콜한 잡담. 베르덴은 외부인이었지만 나름대로 듣는 재미는 있었다.

양이 부족했는지 스튜를 한 그릇 더 담은 스칼드가 베르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소. 입맛에는 좀 맞으신가?"

"맛있습니다."

요리를 담당했던 버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하, 그럼 그럼. 내가 모험가 생활이 몇 년째인데 스튜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지."

"너는 재료 손질만 했잖아?"

"그게 맛의 비결이지."

루비나의 눈총에도 버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애셔 혼자 묵묵히 밥만 먹는 걸 보니 좀 그렇군. 그래서 그런데 우리에게 혹시 뭐 궁금한 건 없소? 간단한 거라도 좋으니 말이오."

궁금한 거라.

베르덴이 고민하다 케디언에게 물었다.

"성직자가 모험가를 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루아스교에서 클레릭(Cleric) 칭호를 부여받아서 가능합니다. 루아스교의 성직자로서 공식적으로 외부 영리 활동이 가능한 자격이지요."

"대신 일정 기간마다 모험가 길드에게 중개료를 지불하고, 루아스교회에 '헌금'을 하고 있소. 물론 전혀 아깝지야 않지."

성직자의 존재 하나만으로 파티의 생존률이 달라진다.

이들이 파티 단위로 미스릴 등급에 올라온 건, 단지 무력만이 아니라 안정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모험가 길드는 이렇게 오래갈 수 있는 모험가를 선호하며 등급 심사 등에 가산점을 부여하기도 한다. 온갖 편의를 봐주는 건 덤이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툭하면 죽어 나가는 게 세상이었다.

"가늘고 길게 가는 삶. 모험가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는 말이지만 그게 우리 꿈이오. 몸이 삐걱거릴 때쯤 은퇴한 뒤에, 그때까지 벌어 놓은 돈으로 가족 일구고 유유자적 사는 것. 아니면 길드에서 돈 따박따박 받으면서 떵떵거리고 살거나."

거창한 꿈이 아니다.

으레 모험가라면 바라는 평범한 미래였다.

"꿈이야 그때마다 달라지는 것 아니겠소. 아무것도 모를 때는 혼자서 흑요 등급 모험가가 되어서 세상에 군림하고 싶었소.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지. 아! 이러다가 얼마 안 가 뒈지겠다고. 그래서 파티를 모았소."

차례대로 버민, 루비나, 겔톤, 케디언.

퍼즐처럼 서로가 딱 맞물리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백금 등급에서 몇 년간 실적을 쌓고 심사를 통과해 미스릴 등급으로.

루비나가 말했다.

"원래는 저기 제국에서 활동하다가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왕국이 땅이 넓어서 그런지 위험도가 높은 아인종이나 이형종이 비교적 자주 출몰하거든요, 지금처럼."

"뭐, 솔직히 에스티리아 왕국은 개판이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살짝 그 속을 들여다보면 썩어 문드러졌지. 왕권 다툼이니 뭐니 서로 편 가르고 땅따먹기 하고 있거든. 그래도 다행히 미스릴 등급쯤 되면 별로 건드리는 사람은 없소. 그래서 비교적 편안하게 활동하고 있지."

모험가 길드에서도 두 번째로 높은 등급.

망나니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머리가 반쯤 뭉개져 있지 않는 이상,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미스릴 등급과 척질 사람은 없다.

그래 봐야 본전도 못 건질 테니.

스칼드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애셔, 당신도 꿈이 있소? 마법사니까 겔톤처럼 마도사가 되는 것이오?"

마도사는 꿈치곤 소박하다. 적어도 베르덴에겐 그랬다.

그의 목적은 7위계 마도사인 마탑의 정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타인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뭐, 그렇습니다."

"그렇군. 애셔, 당신은 겔톤보다 훨씬 젊어 보이니 그만큼 오래 살겠지. 그러니 분명 다다를 수 있을 거요."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젊다.

해가 넘어가도 고작 26살이니. 굳이 나이를 밝혀 주목을 끌 필요는 없었다. 베르덴에게 중요한 건 나이에 비해 월등한 것이 아닌, 마법사로서 월등한 것이었으니까.

대화는 더 이어졌다.

베르덴도 대화에 끼어들어 맞장구를 쳐 주었다.

시간이 흘러 밤 그늘이 차올랐다.

* * *

"불침번은 애셔부터 서시오."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솔직히 우리쯤 되면 며칠 날밤을 새워도 끄떡없소. 그리고 마법사는 전사보다 컨디션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으니, 불침번 시간은 항상 처음이나 마지막으로 고정되어 있소."

양보.

어쩌면 그것이 파티의 균형을 유지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맡기겠소."

만하의 파티원들이 눕자마자 곧바로 잠에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모험가로서의 능력 중 하나.

그러나 순간의 살기라도 느낀다면 곧바로 일어나 전투태세에 돌입할 것이다. 불침번을 세우는 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일 뿐, 설령 모두가 잠에 든다고 해도 이들의 감각을 속이긴 어렵다.

타닥타닥.

베르덴은 모닥불 앞에 앉았다.

따뜻한 열기를 느끼며 스칼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꿈이라.'

베르덴의 꿈은 복수다.

그건 과거나 지금이나 같았다. 설령 도중에 죽는다고 해도, 몸이 산 채로 짓이겨진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하고 난 다음에는... 난 뭘 해야 하지?'

눈앞의 모닥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불태울 장작이 없으면 아침이 되기 전에 사그라들 것이다. 후에는 흔적만이 남겠지.

그리고 그건 베르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내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그런 먼 미래까지 생각할 자격은 없다.'

역천을 이룬 지 1년도 안 됐다.

누군가는 그를 천재라고 여기겠지만 베르덴에겐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 4위계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기엔 너무 일렀다.

생각하자.

마탑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을.

실험 단계인 여러 약물에 중독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그때를.

자유를 빼앗기고 물건처럼 다루어졌던 인생을.

마법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엄이 짓밟혔던 과거를.

생사의 기로에서 증오와 분노를 가슴속에 새겨 넣었던 처음을.

그 고통과 무력감 그리고 절망.

잠시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전신을 휘감았다.

어금니를 강하게 깨문 베르덴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피가 흘러내렸다. 간신히 살기를 억누르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이 깨는 일은 없었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흥분.

그래, 이게 베르덴이 가져야 할 감정이다. 먼 미래를 생각할 여유는 없다. 겉으로는 일절 드러내지 않을지언정 속은 언제나 지금의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게 베르덴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니까.

"후우...."

깊게 숨을 내쉬자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일그러졌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간가방에서 최상급 포션을 꺼내 몇 방울 손바닥에 떨어뜨리자, 리커버리 팔찌의 효과와 겹치며 곧 회복되었다.

피를 완전히 씻어 내고는 조용히 불침번을 이어 갔다.

그러던 그때.

[...까득.]

숲 어딘가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베르덴이 곧장 반응하며 저 안쪽으로 마력감지를 펼쳤다. 전신의 감각을 일깨워 경계를 극도로 높였다.

'...그사이에 사라졌다고?'

베르덴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고작해야 풀이 스치는 소리나 벌레의 울음소리뿐. 어쩌면 베르덴이 과민하게 반응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생각은 없다.

마침 다음 불침번을 깨울 때가 되었다. 스칼드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어흠, 잘 잤군. 고생했소, 애셔. 뭐, 별일은 없었소?"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

스칼드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베르덴이 자신이 들었던 소리에 대해 말하자 스칼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분 착각으로 넘어가고 으레 착각으로 드러나는 편이나,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소. 그리고 그 경우에는 파티가 전멸할 가능성도 매우 높지. 불침번을 이어 가면서 확실히 전달하도록 하겠소."

스칼드가 자신의 양날 도끼를 어루만졌다.

오랫동안 모험가 생활을 해 온 그에겐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었다. 그게 오래 이렇다 할 부상 없이 오래 살아온 비결 중 하나였다.

깊어 가는 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여전히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음 날까지.

[까득. 까득.]

* * *

다음 날 정오, 마침내 슬론의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나무의 높이가 한층 더 높아졌고, 나무 사이의 간격은 더욱 멀어졌다. 덩치가 큰 마수나 아인종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습격을 당하기 좋은 환경이군."

버민과 스칼드가 전방에 서며 후방에 있는 베르덴과 케디언을 감싸는 진형. 탐색을 담당한 루비나는 기민한 움직임으로 목표물의 흔적을 수색했다.

도움닫기도 없이 나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부러져 있는 나뭇가지. 나무의 몸통에는 날카롭고 거대한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포레스트 와이번이야. 가장 얇은 발톱이 스칼드의 허벅지보다 두꺼운 걸 보면, 우두머리 중에서도 꽤 사이즈가 큰데?"

"당첨이군. 모두 전투 준비."

포레스트 와이번은 워낙 영역 관리가 철저한 터라 서식지 근처에 반드시 흔적을 남겨 놓는다.

이걸 넘으면 침입자의 체취를 맡은 포레스트 와이번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든다.

베르덴의 마법으로 체취를 지울 수는 있다.

하지만 스칼드는 그러지 않았다. 흩어진 놈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보다 한데 뭉쳐 상대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이건 오만이 아닌 철저하게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자신감이었다.

이윽고 저 앞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키르르르르륵...!]

포레스트 와이번.

우두머리 포함 총 10마리. 숫자가 많긴 하나 오차 범위 내다. 침을 뚝뚝 흘리던 놈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일제히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베르덴을 포함해 모두 제자리에 서서 진형을 지켰다.

어느새 나무를 옮긴 루비나가 활시위를 당겼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화살에 스며들었다.

"일단 하나."

피잉──── 콰지직!

와이번의 머리가 꿰뚫리며 그 사체와 와이번들이 뒤엉켰다. 난장판이 된 숲. 스칼드가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는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 압력에 지면이 일부 깨어졌다.

"지금이오!"

콰앙!

그의 돌진이 토벌의 시작을 알렸다.

102화 정령 (1)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세 가지 힘 중 하나, 기.

통상적으로 기는 붉은 색채를 띠며, 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하거나 무기나 방어구에 덧씌워 파괴력 또는 방어력을 증가시키는 데 쓴다.

하지만 특별한 기를 타고나거나 숱한 훈련과 전투를 거친 소수의 인물들은 더욱 기를 다채롭게 응용할 수 있다.

도살자 갈리아크의 파쇄破碎.

핏빛검 레이라의 혈섬血閃.

잭의 무섬無閃

저마다의 방식으로 변형되고 단련된 기의 방식.

그것을 세계에서는 기예(氣藝)라고 부른다.

스칼드 또한 자신만의 기예를 가지고 있었다.

강체剛體.

기를 활성화하자, 스칼드의 팔과 다리에 핏줄이 돋으며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양손 도끼를 뒤로 당긴 스칼드. 가장 앞서 있던 와이번과 닿기 직전, 다리로 속도에 제동을 걸며 허리를 강하게 비틀었다. 뼈와 고기가 분쇄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번에 포레스트 와이번을 양단한 스칼드가 그대로 돌진을 이어 나갔다.

그 뒤를 버민과 루비나가 지켰다.

루비나가 나무 위를 오가며 족족 화살로 포레스트 와이번의 연약한 신체 부위를 노렸고, 방패를 든 버민이 정면을 막아 냈다.

그사이 성직자 케디언이 영창을 마쳤다. 하늘에 떠오른 성스러운 빛이 하나의 형상을 갖췄다.

<홀리 서번트>

성스러운 갑옷을 두르고 황금의 창을 든 빛의 하인.

루아스교의 성직자 중에서도 클레릭의 계급을 하사받은 자가 사용할 수 있는 신성 소환.

"루아스의 하인이여, 우리의 적들을 분쇄하소서!"

케디언의 부름에 응한 서번트가 포레스트 와이번과 맞섰다.

각자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파티의 아인종 토벌은 언제나 그랬듯 순조로웠다. 화살을 절반가량 소모한 루비나가 나뭇가지에 안착했다.

'다른 아인종은 몰려오지 않는 모양이고... 음, 변수는 없네. 그럼 새로운 마법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좀 볼까?'

번개를 다루는 마법사는 몹시 드무니까.

루비나가 활시위에 화살을 얹으며 베르덴에게 시선을 향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베르덴도 마찬가지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긴 했지만 생각했던 광경은 아니었다.

스태프를 휘두를 때마다 충격파가 터진다.

그에 머리를 적중당한 와이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와 동시에 단번에 세 개의 마법을 발동해, 거대한 석편으로 와이번의 얇은 뱃가죽을 꿰뚫었다.

벌써 베르덴의 손에 죽은 것만 네 마리였다.

'무슨 마법사가 저렇게 무식하게 싸워?'

안전한 거리에서 마법을 쏘아 내는 게 마법사의 정석인데.

그는 오히려 거리를 좁히며 신체와 마법을 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미련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루비나의 눈엔 다르게 비쳤다.

포레스트 와이번의 움직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는 뛰어난 감각 그리고 대범함. 근거리에서 펼쳐지는 마법은 더없이 위력적이었다.

'독학은 아닐 테고... 아마 스승이 있는 거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만약 혼자서 저렇게 싸워 왔다면 진즉에 죽었을 테니. 타고난 재능도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해 왔을 것이다.

'저 외모에 실력... 얼굴값 제대로 하네.'

그렇게 멋대로 결론을 지은 루비나가 다시금 나무를 박찼다.

어느새 전투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건 포레스트 와이번 무리의 우두머리뿐.

[키에에에에에에엑!]

다른 개체보다 거대한 크기를 가진 와이번이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하늘로 도약한 놈이 루비나의 화살들을 피해 내고는 그대로 낙하하며 스칼드에게 돌진했다.

기를 전력으로 끌어올린 스칼드가 양손 도끼를 앞으로 뻗었고, 와이번의 앞니와 충돌했다.

콰드드드드득!

스칼드의 다리가 지면에 파고들며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몸은 여전히 굳건했다.

스칼드가 팔을 밀며 와이번의 이빨 사이에 도끼를 끼웠다. 이내 힘껏 허리를 비틀며 팔을 위로 쳐올렸다.

한순간에 와이번 우두머리의 거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애셔! 루비나!"

<스톤 크랙>

날카로운 암석들이 와이번의 뱃가죽을 찢어발겼다.

뒤이어 루비나가 연속으로 발사한 화살들이 제각기 급소를 꿰뚫었다.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힌 우두머리 와이번. 스칼드가 다시금 도끼를 들어 놈의 목을 반쯤 잘라 냈다.

부들거리던 우두머리가 곧 축 늘어졌다.

포레스트 와이번 무리는 전멸했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멀리서 기척을 느낀 베르덴이 마력감지를 펼쳤다.

"상위종을 포함한 오우거가 다섯 마리. 수가 꽤 됩니다."

"본래 소란이 들리면 짐승들은 도망가기 마련이지만, 스스로를 포식자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다르오. 사냥감이 있다 싶으면 주저 없이 다가오지. 모험가로서 오래 살아남는 방법은, 전투의 흥분 속에서도 눈앞의 적만 생각하지 않고, 혹시 모를 위험 또한 상정하는 것이오."

스칼드가 도끼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시선을 돌렸다.

숲 안쪽에서 걸어오는 트윈 헤드 오우거 한 마리와 오우거 네 마리. 놈들이 들고 있는 거대한 통나무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저놈들이 길드의 모험가들을 죽인 놈들이군. 애셔, 선공을 맡아 줄 수 있겠소?"

상대는 다수이며 거리도 적당히 떨어져 있다.

전격 마법을 쓰기엔 제격이다.

스칼드에게 호응하며 앞으로 나선 베르덴.

마력이 집결된 스태프에서 우레 소리가 낮게 울렸다.

<연쇄번개>

* * *

오우거.

거체에 어울리는 강인한 근력과 단단한 피부를 무기로 삼는 아인종.

상위종인 트윈 헤드 오우거는 그보다 한 단계 더 진화된 개체다.

보다 큰 체격에, 동족인 오우거마저 잡아먹는 흉포함은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 잡히는 순간 어지간하면 그대로 터져 죽을 테니, 아인종 토벌에 이골이 난 모험가라 해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물론 미스릴 모험가 파티 만하와 베르덴은 그런 실수 따위 저지르지 않았다.

전투의 여파로 인해 엉망이 된 숲.

주변에는 오우거의 피가 가득했고, 전투 도중 소란에 이끌려 온 마수의 사체들마저 널브러져 있었다. 이윽고 케디언이 소환한 서번트가 마지막 남은 아인종의 입천장을 꿰뚫었다.

───쿠웅.

만신창이가 된 트윈 헤드 오우거가 쓰러졌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이제 더 오지 않는 모양이야."

"휴우, 길드 말대로 평소보다 많긴 하네. 이게 대체 몇 마리야? 와이번까지 합쳐서 스무 마리는 그냥 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예상 범위 내긴 하오. 위험도가 높은 아인종들을 이만큼이나 토벌하는 데 성공했으니 당분간 숲은 조용해지겠지."

세상은 항상 변화한다.

평소와 다른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드문 일이긴 해도, 자연적으로 아인종이 대량 발생하는 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다.

"그럼 소재 좀 부탁하겠소. 나는 애셔와 함께 경계를 서도록 하지."

"예이, 예이. 수가 많으니 잡다한 소재는 제외할게."

버민이 오우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검을 꺼내 기를 덧씌운 뒤, 팔과 다리를 갈라 두꺼운 힘줄을 채취했다. 루비나와 케디언이 그를 옆에서 보조했다.

베르덴이 스칼드에게 물었다.

"안 도와줘도 되는 겁니까?"

"소재 채취할 줄 아시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모험가도 아닌데 알 리가 없었다.

"그럼 여기 있으면 되오. 우린 쉬는 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위협이 없는지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이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어차피 소재 채취에 대한 인건비도 따로 분배가 되니 말이지."

"그렇다면야...."

베르덴의 시선이 루비나에게 향했다.

경계를 설 거라면 궁수가 하는 게 낫지 않나? 파티 내에서 수색과 탐색을 맡은 것 같은데.

그런 의문에 스칼드가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사실 내가 손재주가 없소. 소재 채취할 때만 되면, 긴장해서 그런지 힘을 너무 많이 주게 되더군. 그렇게 날린 소잿값이 꽤 커서... 자연스레 배제되어 버렸소."

크흠흠.

스칼드가 헛기침을 하곤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그 전투 방식은 어디서 배웠소? 도저히 마법사다운 움직임은 아니던데."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런 설정이다.

스칼드가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부여 마법으로 마법사 스스로를 강화해 활용한다라... 단순히 마법적인 재능만 있었던 게 아니었군. 당신은 전사의 길을 걷었다 해도 분명 대성했을 것이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움직임은 룬의 반지 엑시드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이 과감하게 움직이는 건 가능한 한 피했겠지.

'그런데 마법사가 아닌 다른 길이라.'

역천을 이루기 전, 베르덴의 한계 위계는 1위계.

마법적인 이해력과 연산력은 천재의 반열이라고 해도, 마법사로서의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어쩌면 마법 대신 검을 들었다면... 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절망도 고통도 없는 그런 삶을 말이다.

하지만 의미는 없다.

먼 미래도, 지나간 과거도.

지금의 베르덴에겐 필요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갈 계단만을 찾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숨긴 채 베르덴은 스칼드와 간단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동안 나머지 모험가들이 소재 채취를 마쳤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씻은 버민이 지쳤다는 듯 팔을 털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피부가 너무 질겨. 근육도 그렇고. 나 손 떨리는 것 보여?"

"하하, 고생하셨소. 아세른으로 돌아가면 내 한턱 쏘지."

"가방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케디언이 소재가 담긴 공간가방을 챙겼다.

배낭 형태인 만큼 베르덴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용량이 컸다.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지만 미스릴 등급 파티에게는 그리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투는 길었지만 보수는 두둑하다.

해가 지기 전에 슬론의 깊은 숲을 벗어난 뒤 야영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순간.

[...까득]

전날 밤에 베르덴이 들었던 소리.

이번에는 다른 모험가들도 들은 모양이었다.

모두가 슬그머니 무기를 꺼내 들곤, 경계를 극도로 높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지나온 숲 가운데, 녹색 빛 덩이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 * *

'저게 뭐지?'

처음 보는 녹색 빛 덩이에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과 필적하는 정순한 마력이 정체불명의 빛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던 가운데, 버민이 이내 눈을 부릅뜨고 경악했다.

"서, 서, 설마... 정령?"

"정령이라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모험가들의 얼굴이 굳었다.

스칼드가 심각한 얼굴로 버민에게 물었다.

"정령이 확실하오?"

"저 녹색 빛무리... 책에서 본 것과 똑같아. 분명히 숲의 정령이야."

정령?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버민이 정령의 눈치를 보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정령이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이형종.

온순할 때는 안전하지만 정령이 분노하게 되면 그 위험도는 극상으로 치닫는다.

"숲의 정령은 주변의 생물들을 끌어들이는 데다가, 또 다른 정령들을 불러 모으는 습성이 있어요. 심지어 오래된 정령은 자신을 매개체로 골렘을 조종하기도 하고요."

"거기다 물리적인 타격은 소용이 없는 데다가, 마력 저항력도 높습니다. 자연을 조종해서 상대하기도 쉽지 않고요. 토벌 등급은 미스릴 등급이지만, 지금의 저희로서는 토벌할 방법이 없습니다. 파티가 아닌 개인의 무력이 미스릴 등급이 아닌 이상은...."

베르덴이 정령을 주시하며 스칼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대로 도망가면 괜찮을 거요. 정령은 화가 나지 않으면 굳이 우리들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을 테니."

스칼드를 따라 한 발짝씩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여섯 발자국쯤 이동했을까. 정령에게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득.]

정령이 발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루비나가 시선을 돌렸다. 깊은 숲 안쪽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도 사방에서.

"...뭔지는 모르겠는데 정령이 화가 난 것 같은데? 그것도 엄청?"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키에에에에에에엑!]

이윽고 슬론의 깊은 숲에서 수많은 아인종과 마수가 범람했다.

103화 정령 (2)

바닥을 기어 다니는, 맹독을 품은 거대 지네.

굴강한 육체로 전부 들이받아 버리는 마수, 마흐바트.

단단한 발톱과 깃털로 나무를 타고 움직이는 아울 베어.

한번 정한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레드 리자드 등.

이와 같이 위험도가 어느 정도 높은 괴물이 가득했다.

슬론의 깊은 숲에 있는 아인종과 마수는 죄다 몰려든 모양. 거기다 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지면.

흙이 솟구치더니 거대한 형태를 갖추었다.

버민의 눈이 화등잔같이 커졌다.

"이런 미친... 무슨 골렘까지 나와?!"

흙으로 구성된 골렘.

과거에 베르덴이 상대했던 골렘보다는 약하지만, 매개체를 없애지 않으면 죽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더해서 눈앞에 있는 골렘은 하나가 아닌 두 기였다.

케디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거 위험하군요."

골렘을 무력화하려면, 정령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당장 정령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도망가기엔 숫자가 너무 많았다. 궁지에 빠져 버렸다.

"버민, 정령 좀 어떻게 할 방법 없어?! 약점이라든가!"

"야, 약점? 잠깐, 일단 생각을 좀...!"

"온다! 모두 준비하시오!"

어느새 놈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무거운 긴장감 속에서 모험가들이 무기를 꽉 쥐었고, 고블린 하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든 순간.

<선풍의 장막>

거센 바람이 베르덴과 모험가들을 감쌌다.

날아간 고블린이 골렘과 부딪혀 머리가 으깨졌다. 뒤이어 접근한 놈들도 마찬가지. 이곳에 모인 골렘과 아인종 및 마수가 달려들었으나 선풍의 장막을 뚫을 수 없었다.

스칼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건... 5위계 마법이 아니오?"

"마법 물품 효과입니다."

"아, 그렇군. 어쨌든 덕분에 살았소. 하지만...."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상황은 그대로다.

버민이 뭔가 생각난 듯 다급하게 베르덴에게 물었다.

"이 마법,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죠?"

"3분 정도 됩니다."

"3분이라...."

대답을 곱씹던 버민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정령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알고 있어요. 한 번 힘을 쓰면 긴 휴식기를 가진다고. 그러니 시간을 끌면 정령은 무력화되겠지만... 아무리 적어도 30분은 끌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건 무리요. 제자리에서 버티는 건 당연히 안 될 테고, 각자 흩어진다면...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멀쩡하지는 않겠지."

"정령을 토벌할 방법은 없습니까?"

베르덴의 물음에 버민이 답했다.

"정령의 실체를 벨 수 있을 정도로 기를 웅축하면 되는데, 우리 중에 기를 그만큼이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남은 건 마법인데... 정령은 마력으로 이뤄진 이형종이라, 마력 저항력이 엄청 높아서 5위계 마법 정도는 돼야 하죠. 그것도 숲의 정령의 약점 속성인 화염 마법으로요. 저희로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화염 마법이라...."

베르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령은 토벌이 가능하다.

성신 마법 중 하나만 쓰면 지금 상황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쓸 순 없다.'

유성은 당연하고 혜성 또한 마찬가지.

성신 마법은 베르덴의 비장의 수단이다. 함부로 패를 타인에게 보이는 건 꺼려진다. 특히나 여러 지역을 오가는 모험가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베르덴은 타인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럼 남은 건 합성 마법인가.'

4위계 마법이라 해도, 속성을 합성하면 5위계 이상의 위력을 내는 게 가능하다.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고 해도 정령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있을 터.

다만 문제는 모험가들이다.

아무리 연산 능력이 빠르다고 해도, 몇 초 동안은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마수와 아인종이 거슬린다.

그렇다고 광범위 마법 폭격을 가하자니 모험가들이 방해된다.

모험가들은 죽으면 안 된다.

보수를 줄 사람이 사라지니까. 거기다 베르덴만 살아남는다면 앞으로의 의뢰 수행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정령 토벌과 만하의 생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그러면 되겠군.'

방법이 떠올랐다.

베르덴이 고뇌에 빠진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 * *

* * *

베르덴의 작전을 들은 스칼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시선을 끌라고? 그건 어렵지 않소만...."

문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느냐.

버민과 스칼드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루비나와 케디언은 위험하다. 그러자 둘이 고개를 저었다.

"내 몸은 내가 간수할 수 있어. 나 몰라?"

"신성 보호막으로 몸을 지키면 됩니다. 범위를 저 하나로 축소한다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동의했다.

스칼드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정령을 제압할 수 있겠소? 당신이 강한 건 알지만, 4위계 마법사로는...."

"가능합니다."

베르덴은 확신했다.

단호한 대답에 스칼드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소. 그럼 믿겠소."

선풍의 장막이 사라지는 순간이 시작이다.

제자리에 선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전력으로 활성화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유형화되어 불꽃처럼 타올랐다.

심상치 않은 압박감에 모험가들이 경악했고, 베르덴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시작하겠습니다."

화아아악.

그들을 지켜 주던 바람이 사라졌다.

* * *

케디언이 석장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신성력이 발광하며 샛노란 구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루아스시여, 저들에게 광활한 빛을!"

구체가 터지며 빛이 주변 일대를 집어삼켰다.

그 빛을 정면으로 목격한 아인종과 마수들의 시력이 한순간 멀었다. 시각을 잃은 지금, 놈들은 다른 감각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터.

숨을 깊게 들이마신 스칼드가 함성을 내질렀다.

"이리 와라!"

청각을 진동시키는 목소리에 일제히 괴물들이 스칼드에게 달려들었다.

계획대로 버민은 골렘들만을 상대했고, 케디언은 서번트를 소환해 버민의 등을 보호하며 남은 신성력으로 작은 보호막을 둘렀다. 루비나는 놈들의 머리나 어깨를 밟으며 화살로 철저하게 서포트했다.

누구 하나 실수하면 사망으로 직결되는 상황.

'그래도 꽤 버티는군.'

그사이 투명화를 쓴 베르덴이 몰래 정령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놈이 베르덴을 인식했다. 정령이라 그런지 투명화 마법을 손쉽게 꿰뚫어 봤다.

베르덴이 곧장 스태프를 겨눴다.

<플레어>

고열의 화염 광선.

그러자 지면이 솟구치며 마법과 충돌했다. 녹아 버린 대지가 용암이 되어 흘러내렸고, 그 열기에 화들짝 놀란 숲의 정령이 멀찍이 떨어졌다.

[까득.]

그 소리와 함께 명멸하는 정령.

녹색빛이 나무에 닿자 수십 개의 가지가 비틀리며 날카롭게 변형되더니, 일제히 베르덴을 향해 쏘아졌다.

베르덴이 <화염 장막>을 둘러 나뭇가지들을 전부 태워 버렸다.

비행을 쓴 베르덴이 접근했고, 정령은 도망쳤다.

하늘에서 숲을 불태우다시피 했으나, 정령의 크기가 워낙 작아 맞히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민첩하기도 했고.

닿을 만하면 정령은 나무와 대지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지켰다.

성가시다.

마치 끈질긴 마법사를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다.

'잠깐, 마법사?'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정령의 움직임을 멈출 방법이.

베르덴은 지면으로 내려갔다.

도망치던 숲의 정령이 빛을 반짝였다, 마치 약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마력을 최대한 끌어모은 베르덴이 푸른 눈을 번뜩였다.

마력 위압.

방대한 마력이 정령을 집어삼켰다.

[...!]

숲의 정령이 경직되었다.

'예상대로군.'

마법사는 마력에 민감하다.

과거 금 등급 모험가인 고드가 베르덴의 마력 위압에 기절한 것처럼 말이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정령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 생각은 당연하게도 적중했다.

베르덴이 더욱 위압의 강도를 높이자, 정령도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력과 마력의 충돌. 버민의 말대로 마력 저항력이 상당하다. 출력만 따지자면 4위계의 마력회로의 윗줄이다.

하지만 베르덴의 마력량은 그 이상.

잠깐 동안은 정령이 베르덴의 마력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지속되는 힘 싸움에 견디지 못했다. 서서히 힘이 약해지는 게 마력을 통해 느껴졌고, 이내 완전히 정령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덴이 마안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형태를 갖춰 가는 합성 마법.

타오르는 대지의 창이 일대를 불태웠고, 그 창끝은 숲의 정령을 가리키고 있었다.

[...!]

놈이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마력을 움직였으나, 전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사이 베르덴이 마법을 완성했다.

<용암격창>

───콰과과과과!

붉은 화염이 정령이 있던 장소를 휩쓸었다.

그것으로 부족할 것 같아 연이어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숲을 진동시키는 폭발. 거센 열기에 피부가 화끈거렸다.

어느새 숲의 일부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는 더 이상 정령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의 끝에서 매개체를 잃은 골렘이 기울며 지면에 쓰러지는 게 보였다.

확실히 정령은 소멸되었다.

이제 남은 건 모험가들에게 몰려든 괴물들을 처리하면 끝.

베르덴이 끌어모은 마력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구름에 스며든 세 개의 벼락. 짙은 청색의 구름에서 수천 개의 번개가 요동쳤다.

오싹한 기운을 느낀 스칼드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애셔의 마법이다! 모두 자리를 벗어나시오!"

스칼드가 케디언을 어깨에 메고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버민과 루비나도 마찬가지. 작전대로 모험가들이 범위를 벗어난 걸 확인한 베르덴이 스태프를 아래로 휘둘렀다.

<삼뢰적멸三雷寂滅>

콰과과과광!

거대한 벼락이 숲을 강타했다.

* * *

거대한 소울 트리에게마저 치명상을 입힌 마법.

그보다 훨씬 약한 아인종과 마수들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중심에 있던 놈들은 사체도 남기지 못했고, 그 반경에 있던 괴물들은 강렬한 전류에 폭사당하거나 신체 내부가 완전히 불타 버렸다.

최외곽에 있던 몇몇 마수가 겨우 살아남긴 했지만, 얼마 못 가 그대로 피거품을 내뿜으며 쓰러졌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모험가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숲 한가운데 새겨진 그을음과 파열된 지면. 사방에 널려 있는 사체들이 시야에 비쳤다.

버민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 이게...."

그의 동료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4위계 전격 마법을 접해 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생물체 한정으로 절대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력만큼이나 엄청나게 많은 마력을 소모한다고도.

스칼드가 직전의 벼락을 떠올렸다.

'그 마법은 <낙뢰>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 파괴력은... 설마 합성 마법인가?!'

확실하다.

그것도 더블 캐스팅이 아닌, 트리플 캐스팅을 통한 합성 마법. 스칼드가 알고 있는 <낙뢰>의 위력과 비교하면 분명 그러했다.

'무슨 시전 속도가....'

그때, 베르덴이 모험가들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괘, 괜찮소."

스칼드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디언이 슬쩍 베르덴에게 물었다.

"저, 근데 애셔 씨는 4위계 마법사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위력은...."

"4위계라고 다 같은 마법사는 아닙니다."

아... 그 한마디에 모험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덴에게서 느꼈던 거대한 마력 그리고 소수에게만 적합성이 있는 고위 속성뿐만이 아니라 여러 속성마저 능숙하게 다루는 극한의 재능, 원거리와 근접전을 오가는 특이한 전투 방식, 상식에서 벗어난 마법의 시전 속도.

뭐가 됐든 상식으로 판단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방해였나.'

그는 아직 숨겨 둔 수가 많아 보인다.

만신창이가 된 모험가들과 달리, 베르덴은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으며,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정령을 토벌하고도 모자라, 그만한 마법을 시전했는데도 부담이 없다는 뜻이겠지.

'천재... 아니, 괴물이군.'

모험가들은 생각했다.

어쩌면 훗날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마법사를 만난 걸지도 모른다고.

허허, 스칼드가 웃었다.

"어쨌든 덕분에 목숨을 구했소, 애셔. 내가, 아니 우리가 사람을 너무 몰라봤군. 아무래도 당신에게 줄 보수에 대해 상향 조정을 해야 할 것 같소. 목숨값에 더해 이만한 수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말이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령은 어떻게 됐소?"

베르덴이 잿더미를 가리켰다.

<파도>를 사용해 열기를 지우자, 숲의 정령이 있던 자리에는 녹색의 수정만이 남아 있었다.

104화 정령 (3)

정령이 소멸했던 자리에 남은 자그마한 수정.

베르덴이 염력으로 들어 올려 가까이 끌어당겼다. 녹색의 빛이 그의 청안에 반사됐다.

'이게 뭐지?'

외형은 마석과 비슷한데, 그 특유의 마력이 전혀 없었다.

느껴지는 거라곤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뿐. 그것도 한 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물건에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버민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이거 정령석이군요!"

정령석?

처음 듣는 명칭이다. 그래도 마력이 있는 걸 보면 마석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생소한 이름만큼, 어쩌면 희귀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베르덴이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버민의 다음 말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연적인 마력을 품고 있는 돌인데, 딱히 쓸모는 없어요. 마석과 달리 세공이 불가능해 마법 물품 재료로도 쓰지 못하니까요. 정령에게서 나오는 만큼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데 수요조차도 없죠. 장식품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너 아까부터 되게 잘 안다? 정령에 대해 공부라도 했어?"

"막 모험가 입문했을 때, 모험가 추천 서적들을 읽고 다녔거든. 그중에 정령 얘기도 있었지. 나도 엄청 자세한 건 몰라. 그냥 겉핥기식으로 본 거라."

버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덧붙이자면 정령석은 자연의 마력을 흡수해 부활한다는 얘기가 있어."

케디언이 물었다.

"부활 말입니까?"

"아, 그런데 당장은 아니고. 한 수십 년은 지나야 한다나? 자연적인 마력을 모아야 하는데, 이게 인위적으로 불가능하거든.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그렇게 깨끗한 마력을 가지고 있겠어? 그래서 옛날에 어떤 마탑이 실험했다가 금방 버렸다고 하더라고."

버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굳이 용도가 있다면... 엘프가 비싸게 구입한다고 듣긴 했는데."

"엘프라면... 그 악명 높은 엘프 말이오?"

자연의 주민, 엘프(Elf).

드워프와 같은 인간종 중 하나로, 긴 귀와 하나같이 미려한 외모가 특징이다. 베르덴 또한 마탑에 있을 시절, 책으로 접해 본 적이 있는 종족이었다.

분명.

"인간이 가장 건드리지 말아야 할 종족이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 엘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무서운 종족이죠."

엘프는 개인이 아닌 절대적인 집단주의 사상을 가진 종족이다

한 개체가 위험에 빠진 걸 지각한 순간 엘프들은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동족을 구해 낸다. 몇몇 엘프는 동족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엘프에 대한 사례는 너무나 유명하다.

남녀 할 것 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어, 과거의 인간들은 엘프를 노예로 삼으려고 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멋모르는 노예 상회가 엘프를 납치했고, 귀족에게 팔았다. 아주 비싸게. 그 가치를 눈으로 본 탐욕스러운 자들은 곧바로 엘프 사냥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했다.

엘프를 사냥하러 간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로부터 얼마 후 노예를 납치한 상회가 전멸했다. 그곳을 방문한 손님마저 살아남지 못했다.

또한 귀족 가문도 몰살당했다. 귀족도, 기사도, 하인도 전부.

그들의 시체는 잔혹하게 난도질당해 숲에 걸렸다.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엘프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 틈에서 확산되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서서 엘프를 토벌하겠다고 나섰죠. 자국의 귀족이 죽었으니 명분도 있었고요. 그렇게 전쟁이 벌어졌는데...."

"국가가 말라 죽어 버렸지."

어떤 종족보다도 은밀하며 사냥에 특화된 엘프에게 도시로 향하는 모든 물자들을 파괴당했으니.

아무리 강자를 호위로 세워 놓아도 소용없었다. 상대는 엘프 종족 전체. 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었다.

"국가 규모로 치면 소국이긴 했지만... 그 파장은 꽤나 컸다고 하죠. 사람이 엄청나게 죽었으니까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륙 남쪽 대수림(大樹林)에 있는 엘프들.

그 사건 이후로 머리에 화염구라도 맞지 않는 이상, 그들을 해코지할 인간은 없었다.

루비나가 버민에게 물었다.

"그래서 엘프가 정령석을 왜 비싸게 사는 건데?"

"나도 몰라. 내가 동 등급 모험가일 때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거라서. 확실하지 않으니 믿을 건 못 돼. 그런데 억지로 연결하면 이런 게 아닐까? 엘프는 자연의 주민이고, 정령도 말하자면 비슷한 부류니까...."

"둘이 공생 관계란 말입니까?"

"그렇지. 어쩌면 여기에 정령이 있는 이유도 엘프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고.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잖아. 정령이 난데없이 우리에게 오더니 화를 낸 것도 그렇고.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니면 누가 해코지라도 한 거겠지. 정령 본인이거나 아니면 엘프에게."

"그 말은... 왕국의 누가 엘프를 납치라도 했다는 말이오?"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모험가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이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미치지 않고서야 엘프를 납치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오."

"거기다 대수림이 얼마나 먼데. 사실이라고 해도 오기 전에 분명 엘프한테 걸려 죽었을걸?"

그 의견은 베르덴도 동의했다.

정령이 있는 건 이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엘프하고 연관 짓는 건 비약이 심했다.

"그럼 잡담은 이쯤 하고. 그 정령석은 애셔가 가지시오. 정령을 토벌한 건 본인이니까 말이오. 물론 그건 분배될 보수에 포함하지 않을 거니까 안심하시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해야지. 그나저나 당분간 슬론의 깊은 숲에 올 이유는 없겠소. 분노한 정령이 불러 모은 놈들이 죄다 죽었으니까 말이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죽긴커녕 팔다리 하나 잃은 사람이 없다니 천만다행이군."

모험가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전적으로 베르덴의 덕분이었다.

스칼드가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피로가 담겨 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아세른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군."

* * *

지형을 조작해 사체들을 묻거나 분산했다.

그렇게 많은 사체가 깊은 숲속에 방치되어 부패된다면 언데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웬만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렇게 아세른에 돌아간 후 곧바로 보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결과 받은 금액은 총 3억 8천만 엘크. 베르덴이 스칼드와 서로 합의한 보수였다.

기본급의 9배가 넘는 액수였지만 결코 과하다곤 볼 수 없었다. 정령 토벌도 그렇지만, 그 10배가 되어도 미스릴 등급 파티의 목숨값에 비할 건 아니었으니.

다행히 모험가 길드에서 보고를 받고 추가 보수를 내려 줬기에, 모험가들도 적자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연스레 페르네에게 지불되는 수수료도 상향 조정 되었다.

"헤헤, 이게 대체 얼마야?"

페르네는 진심으로 좋아 죽었다.

고작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도와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어느새 그녀의 정보상은 과거의 형태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물론 아직 멀었지만 너무나도 좋은 시작이었다.

애셔. 페일이 소개해 준 그 마법사 한 명만 있다면... 어쩌면 전보다도 더 잘나가게 될지도 몰랐다.

본디 정보상에게는 주변을 기웃거리며 대충 보수를 타 먹을 어중이떠중이 수백 명보다, 실력이 뛰어난 한 사람의 존재가 더 중요했으니.

'그러니까 지금은 투자를 할 때야.'

페르네는 지금까지 들어온 돈의 대부분을 정보망 구축에 쏟아부었다.

빚을 청산하는 것도 좋긴 하다. 적어도 불안에 떨며 살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페르네는 그런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돈을 빌리지도 않았겠지. 빚은 이자 및 원금 일부 상환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은 최대 고객인 애셔에게 잘 보여야 돼.'

페르네가 보는 그는 주체적이며 능동적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자신만의 계산을 통해 리스크와 보상을 저울질하며 판단해 움직이는 걸로 보인다.

즉, 지금 그가 닥치는 대로 의뢰를 처리해 페르네를 돕는 것은, 단순히 보수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의 가치가 더욱 무거워서 그런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에게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럼 끝장이야.'

저울이 반대로 기울어진 순간 곧바로 페르네를 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그가 보여 준 성의만큼, 페르네 또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할 때다. 그녀에게 기울어진 저울이 넘어가지 않도록 추에 무게를 더해야 한다.

"절대 놓칠 수 없어."

눈을 번뜩인 페르네가 바쁘게 움직였다.

* * *

무언가를 연구한다는 건 그것에 대해 깊이 조사하고 진리를 따지는 것.

지금의 세상은 연구의 결과물로 가득 차 있다. 강철을 두드리고 담금질하여 만든 장비도, 마법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 마법 물품도, 심지어 강철은 단단하다는 기본적인 특성 또한 연구의 산물이다.

정령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친 베르덴은 그에 대해 고민했다. 아무리 쓸모가 없다 하지만 자연의 마력이 담겨 있는 희소품인 만큼, 한때 연구원으로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 연구를 해 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래서야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니까. 그렇기에 가능한 효율적으로 연구를 하기 위해, 정령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게 우선이었다.

결심한 베르덴은 곧장 아세른의 서점들을 방문했다.

[무서운 이형종 모음]

[모험가가 피해야 할 괴물 40선]

[숲은 위험하다]

...정령에 관련되었다 싶은 책을 찾아 전부 구입했다.

그래 봤자 몇 권 되지는 않았다. 속독하면 새벽이 오기도 전에 전부 읽는 게 가능하겠지.

'여기가 마지막 서점인가.'

안으로 들어가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미 구입한 책의 제목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책장 구석에서 헌 책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건드리지도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숲의 친구]

어린이 동화 같은 제목.

책장을 열어 가볍게 목차를 훑었다. 다른 책들과 비슷한 내용이었으나, 마지막 목차에 시선이 끌렸다.

'엘프와 정령.'

여타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당장 읽고 싶었지만 서점 주인이 지켜보고 있다. 책을 구입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읽고 가 버리는 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었다.

"이거 주시죠."

서점을 나서는 베르덴의 공간가방에는 오래된 책이 담겨 있었다.

* * *

바깥에서 저녁을 먹은 베르덴이 고급 여관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씻고 난 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베르덴이 책상 앞에 앉았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을 쌓아 놓고 하나씩 읽어 나갔다.

사락. 사라락.

베르덴의 손과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문장 하나하나 모두 읽을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정령에 대한 정보뿐이니.

한 권, 두 권....

다 읽은 책들이 바닥에 쌓여 갔다.

다만 아직까지 베르덴에게 확 와닿는 지식은 없었다.

정령의 생태나 종류와 같은 겉핥기식 정보들. 그런 내용에 대한 반복일 뿐이다. 첵 제목만 다르지,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령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장작으로도 못 쓰겠어.'

객관적인 지식 대신 주관적인 사족이 가득 담긴 쓰레기 같은 책을 던져 버리고, 다음 책을 찾았다. 마지막 권이자 가장 오래된 책이었다.

먼지를 툭툭 털고 독서를 시작했다. 다른 책보다 더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긴 하나 정령에 대한 내용은 적었다.

빠르게 넘기자, 이내 마지막 목차에 다다랐고, 첫 장을 넘겼다.

[정령에게는 지성이 존재한다.]

그 문구는 베르덴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베르덴은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지성체인 정령은 의사 표현이 가능하며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 분노한 정령 등 여러 객관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니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다만 실제로 어렵사리 정령을 포획해 실험했지만, 확신할 만한 결과물은 얻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반발이 심해서 도저히 진행이 되지 않아 결국 전부 실험 자체가 폐기되었다고.

버민이 말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였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건 좀 아쉬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목차에 써 있던 엘프와 정령에 대한 이야기.

책은 자연의 종족인 엘프와 자연의 마력을 품고 있는 정령의 연관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는데, 실제 사례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누군가의 주장과 저자 본인의 의견을 섞은 내용으로 가득했다.

[엘프는 자연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며, 정령은 자연의 마력을 통해 부활한다.]

[일부 엘프는 정령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는 목격담이 있다.]

[엘프 또한 마력은 지니고 있으나, 인간과 달리 자연적인 마력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엘프는 알려진 종족 중에서도 가장 수명이 길다. 그들의 문화에선 죽음은 곧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정령처럼.]

...그리고 결론은 이러했다.

[엘프는 정령과 '친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엘프가 가진 힘은 정령에게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본 베르덴은 뒤로 책을 던졌다.

"괜찮다 싶었는데 이것도 쓰레기였군."

정령과 엘프의 유사성에 대해 설명했지만, 둘이 연관되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었다.

그저 추측만 난무했고 추측으로 결론을 지었을 뿐이다. 엘프와 정령을 어떻게든 연결하려 하는 게 훤히 보인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저 책은 지식이 담겼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하나의 사견에 불과하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정령석을 꺼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자연의 마력이 담겨 있다. 다시 보니 전보다도 마력이 더 차오른 듯하다. 그래 봤자 손톱만큼도 되지 않았지만.

'정령이 부활한다라....'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베르덴의 뇌리에 스쳤다.

자연의 마력은 곧 한없이 정순한 마력을 뜻한다. 그리고 정령은 그걸 흡수해 부활한다. 애초에 정령이란 것이 자연의 마력으로 이루어졌으니까 납득할 만한 이치였다.

'그럼 내 마력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역천을 통해 얻어 낸 마력.

정순함만 따지면 객관적으로 봐도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건....

이거, 실험해 볼 가치가 있다.

베르덴은 정령석을 손에 쥐었다.

주저하지 않았다. 연구원으로서의 호기심도 그렇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곧바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설령 정령이 부활한다고 해도 마력 위압으로 제압하면 그뿐이다.

이윽고 베르덴이 마력을 주입했다.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정령석.

이내 터져 나온 푸른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105화 정령 (4)

정령석의 마력과 베르덴의 마력이 뒤엉켰다.

서로가 동일한 마력이 아니었기에 약간의 반발력이 있긴 했으나 잠시뿐, 이내 정령석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소모한 마력만큼 정령석이 채워지는군.'

대충 가늠하자면 정령석을 가득 채우려면 생각보다 많은 마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베르덴이 마법사로서 가진 강점 중 하나가 위계를 아득히 벗어난 마력량이니까.

파아아아앗!

베르덴은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하고는 더욱더 마력을 강하게 주입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어느새 충전량은 절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베르덴의 마력은 넘쳐흘렀다.

'이대로면 금방....'

그 순간.

정령석의 마력이 역행하며 베르덴에게 흘러들어 왔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곧바로 마력 주입을 중단했다.

어차피 정령석에 있던 마력의 성질은 베르덴의 것이기에 일절 문제는 없었지만, 순간 눈앞에 햇빛이 내리쬐는, 울창한 숲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건 베르덴이 모르는 기억이었다.

"기억전이?"

그래, 하르칸의 기억전이와 같은 감각이다.

알 수 없는 현상에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떠한 책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터. 아니, 정령석에 마법사의 마력을 불어 넣는 데 성공한 것부터가 아주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정령의 기억이라....'

잠시 고민하던 베르덴이 이내 마력 주입을 재개했다.

어차피 기억전이 마법으로는 베르덴에게 어떠한 피해도 줄 수 없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호기심이 앞섰다.

대부분 수명이 존재하지 않는 이형종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니.

마법사라면 그리고 연구원이라면 누구도 참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베르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시금 마력이 발광했다.

정령석이 채워지며 그와 동시에 마력이 역행해 흘러들어 왔다. 서서히 흘러들어 오는 생소한 기억.

베르덴은 저항하지 않고 그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마치 연극을 보듯이.

베르덴의 시야가 숲의 정령의 것으로 바뀌었다.

* * *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그 울창한 숲.

그곳에는 낯선 존재가 서 있었다. 화사한 금발, 깨끗한 피부와 미려한 외모 그리고 긴 귀. 본 적 없는 형태의 경장 갑옷을 입은 사내는, 누가 봐도 엘프였다.

엘프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숲을 종횡했다.

간간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무언가 말을 하는 걸 보아, 숲의 정령과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맞을 터.

다만 어떤 애기를 하는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상황은 전처럼 평화롭지 않았다.

표정을 찌푸린 채 곡도를 들고 있는 엘프. 그의 앞에는 보랏빛 로브를 두른 인간들이 서 있었다.

그중 회색 수염을 가슴 언저리까지 기른 중년의 사내가 엘프에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대화가 엘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건 분명했다.

엘프와 숲의 정령.

둘은 인간들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며 달려들었고, 중년 사내는 비웃음과 함께 마력을 일으켰다.

여기서 기억은 다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숲.

거기에는 엘프도 인간도 없었다. 남은 건 지면에 말라붙은 피와 숲의 정령의 비틀거리는 시야뿐.

기억을 통해 정령이 느끼고 있는 당혹감이 전해졌다.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어떤 엘프도, 어떤 정령도 납치당한 엘프에 대해 찾지 못했다.

그렇게 정령은 엘프를 찾아 정처 없이 홀로 세상을 떠돌았다.

풍경이 온통 숲이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그때, 정령은 마침내 마주했다.

엘프를 납치한 중년의 마법사를.

하지만 무턱대고 습격하지 않았다.

정령은 학습한 것이다. 자신 혼자서는 이기지 못한다고. 그리고 저들을 쫓아가야만 엘프를 찾을 수 있다고.

정령은 끈질기게 그들의 흔적을 따라갔고 이윽고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는 슬론의 깊은 숲에 닿았다.

그런데 거기서 흔적이 끊겼다. 정령은 다시 하염없이 숲을 맴돌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령은 인간들 무리를 보았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베르덴을.

엘프를 데려간 중년의 사내가 아니었지만... 정령은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쌓여 온, 인간들에 대한 분노. 지칠 대로 지친 정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령은 베르덴과 모험가들의 앞에 나타났고 분노를 드러냈다. 그리고 베르덴의 마법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베르덴.

잠시 마력 주입을 멈춘 그가 생각을 정리했다.

'엘프와 정령이 친구였다니.'

아무래도 책의 저자가 쓴 의견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식으로서의 가치로는 인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어 베르덴이 중년 사내의 마력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인지 정령의 기억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엘프와 숲의 정령을 제압한 걸 보면 5위계 이상의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법사가 엘프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당장 알 수는 없었다. 주어진 정보가 부족했다.

엘프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이 세상에 퍼지지 않는 걸 보면, 중년의 마법사가 모종의 수단으로 엘프의 위치를 숨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너무 멀어서 엘프들이 동족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언제 일어난 일인지 알 수가 없군.'

시간의 흐름을 판단하기엔 기억이 너무 한정적이었다.

어쩌면 엘프가 납치를 당한 건 수십, 수백 년 전에 있던 일일지도 모른다. 정령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엘프가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았다.

이내 베르덴은 흥미를 잃었다.

엘프가 납치되든 말든 베르덴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얼굴도 모르는,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엘프에게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은 사고를 전환했다.

다시 정령으로.

'그나저나 정령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아직 정령석을 가득 채우려면 마력이 더 필요하다.

이대로 마력을 주입해 부활시킬 수 있지만 딱히 정령의 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령에 대한 궁금증은 기억전이로 거의 해소된 상태였기에 더욱.

베르덴이 곰곰이 생각을 더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래, 그거면 되겠군."

마법진 실험과 정령의 용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방법이 떠올랐다.

정령석을 챙긴 베르덴이 바깥으로 향했다.

* * *

슬론 숲에 온 베르덴은 지하에 공동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마법진을 바닥에 그렸다. 평범한 마법진이 아니기에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였다.

흙 한 톨이라도 어긋난다면 실패하고 말 테니까. 이건 베르덴조차 성공을 반밖에 장담하지 못할 최상위 마법진.

별다른 재료는 필요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확해야 한다. 마탑에서 벗어날 때 사용했던 공간 이동 마법진의 정교함처럼.

"후우, 이 정도면 됐나."

베르덴이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그의 발 앞엔 거의 빈자리가 없는,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작은 마법진 하나에 쏟은 시간은 무려 17시간.

아마 바깥은 오전을 넘어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겠지.

베르덴이 정령석을 쥔 손을 마법진 위에 올렸다.

멈추었던 마력 주입을 다시금 시작했다. 푸른빛이 공동 전체를 밝혔다.

이윽고 용량이 가득 찬 정령석에 금이 가더니 그 안에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조각은 마력으로 산화했는데, 정령의 색깔이 이상했다.

'녹색이 아닌 푸른색?'

...뭐, 색깔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령의 부활을 확인한 지금, 베르덴은 정령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마법진을 기동했다.

강제 마법진 콜젼(Coercion) 활성화.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가 베르덴의 자유를 빼앗았던, 증오스러운 마법진.

마탑의 보물고를 뚫은 베르덴도 끝내 이 마법진을 직접 파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마법사는 이 마법진의 편린조차 이해하지 못할 터.

'내 실력으로는 마탑주만큼의 효과를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령의 행동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지성이 있는 이형종이라고 한들, 인간이 가진 자율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마법진의 마력이 정령을 옭아맸다.

그리고 한때 베르덴의 몸에 새겨졌던 것과 같은 문양이 정령 위에 떠오르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고요해진 공동.

그 중심에서는 푸른 정령이 미약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베르덴이 명령했다.

"이리 와."

[...?!]

정령이 움직였다.

한순간 저항하려다 콜젼에 의해 곧바로 제압당했다. 정령의 마력을 통해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마법진 발동은 성공한 것 같군.'

보물고에 있는 마법진을 파훼하기 위해 마탑주의 마법진을 수년간 연구했다.

그러나 이처럼 최상위 마법진 가동에 성공한 건 공간 이동 마법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베르덴은 마법사로서의 성취감과 고양감을 만끽했다.

그럼 다음이다.

숲의 정령은 베르덴의 마력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성질이 달라지며, 숲의 정령으로서의 능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어떨까.

베르덴이 정령에게 물었다.

"넌 뭘 할 수 있지?"

부활하자마자 마주한, 자신을 소멸시켰던 마법사.

정령이 다시 힘껏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억압이었다. 정령은 정령생 처음으로 공포란 걸 느꼈다.

결국 정령이 완전히 체념했는지 미약한 불빛을 반짝거리며 명령을 따랐다.

화염.

물.

얼음.

번개.

땅.

정령은 자연을 조종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속성의 원소 마법을 선보였다. 베르덴의 마력이라 그런지 그와 같은 위계의 원소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모양.

숲의 정령으로 있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사용이 가능한 건 원소 마법뿐이고 한계는 4위계 하위까지. 합성 마법이나 집중이 필요한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어."

생각했던 용도로 충분히 쓸 만할 것 같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에 베르덴이 미소 지었다.

* * *

페르네에게 연락을 받은 베르덴이 그녀의 주점에 찾아갔다.

"푸른 구름 상단의 위치를 찾았어요."

퀭한 눈을 한 페르네가 말했다.

미완성된 정보망으로 정보를 수집하느라 바빴는지, 며칠 밤을 새운 듯한 몰골이었다.

"위치는 광산 마을 '마일드륀'. 아직 그쪽까지 제 정보망이 닿지 않아 최근 정보는 모르겠지만, 상단과 관련된 거래 일지를 찾아보니 그곳에서 광석과 마석을 대량으로 구입해 대규모로 운반할 계획인 모양이에요."

"언제까지?"

"물량을 보니 거래 규모가 상당하던데요. 그래서 평소보다 체류 기간이 길 거예요. 말을 갈아타면서 움직이면 여유롭게 마일드륀에서 만날 수 있겠죠."

페르네가 말을 이었다.

"애셔 님이 푸른 구름 상단의 메딘에게 무슨 볼일이신지는 묻지 않겠어요. 저는 정보상이니까요. 하지만 명심하실 게 하나 있어요."

"뭐지?"

"최근 정보에 의하면 '조합'이 푸른 구름 상단과 접촉하고 있다고 해요. 단순히 상단 의뢰를 맡기려는 건지, 조합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조합과 마찰이 생기는 일은 피해야 해요. 놈들의 뒷배로는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있으니까요. 제 힘으로는 놈들을 상대하긴커녕 버티기조차 어려워요."

자칫하면 페르네의 정보망이 완전히 붕괴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랬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베르덴이 없었다면 페르네는 진즉에 끝장났을 것이다. 언젠가 조합에게 복수를 하긴 할 테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페르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부디요!"

베르덴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푸른 구름 상단의 메딘에게 가는 것은 초청장을 구하기 위함이다. 굳이 조합과 마찰을 빚을 이유도, 생각도 없다.

그렇게 베르덴의 다음 행선지는 마일드륀으로 정해졌다.

"아, 그리고 하나 줄 게 있는데."

"...네? 저한테요?"

설마 돈인가?

하지만 나타난 건 그 이상의 것이었다.

베르덴의 품에서 나온 푸른 정령이 페르네에게 다가갔다.

"정령이다. 꽤나 쓸 만하니 어이없게 암살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

페르네가 말했다.

조합에게 목숨을 위협받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베르덴은 정령을 붙여 주기로 결정했다.

워낙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편하니까. 그리고 베르덴의 마력을 흡수한 정령은 생각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데리고 다녀도 되지만 딱히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걸리적거릴 가능성이 높다.

베르덴의 마법 특성상 혼자일 때가 가장 자유롭게 싸울 수 있었으니. 주변을 신경 쓰며 힘 조절을 하는 건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페르네가 입을 뻐끔거렸다.

"...정령? 제가 알고 있는 그 정령이 맞나요? 이형종?"

"널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은 마라. 그럼 다녀오지."

페르네가 입을 우물거리며 혼란해하는 사이, 베르덴은 훌쩍 주점을 벗어났다.

주점에 남은 페르네와 정령.

둘은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봤다.

106화 경매장의 초청장 (1)

푸른 구름의 표식이 새겨져 있는 화물용 마차들이 마일드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중 호위용으로 개조가 되어 있는 한 마차. 그 안에서 상단주와 경비대장 '메딘'이 서로 마주 앉아, 얼마 전 조합의 사람이 찾아왔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조합... 조합이라...."

상단주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메딘에게 물었다.

"메딘, 자네는 조합과의 거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말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조합이 푸른 구름 상단을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바로 마석의 거래였다.

현재 이 바닥에서 조합과 거래를 트는 건 충분히 환영받을 일이긴 하지만... 조합에서 요구하는 마석의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나 많은 마석을 구해 오라니. 저희 상단의 규모로는 감당하지 못할 일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면 구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일드륀의 다른 상회들과 적대하게 되겠지. 그 양을 수급하려면 거의 마석을 독점하다시피 해야 하니까."

희소한 상품의 독점 판매는 상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하나 기존에 있던 걸, 그것도 수요가 높은 마석을 독점하려 한다? 이익이고 나발이고 자칫하다 그 길로 상단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었다.

메딘이 말했다.

"저는... 왠지 모르게 조합이 저희 상단을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쓰다가 버릴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거래를 강요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뭐, 서로 이용해 먹으며 사는 게 상인이니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근데 그 대상이 우리라는 게 문제지만. 제길, 며칠 동안 조합 생각만 하다 보니 아주 돌아 버릴 것 같군. 거절하자니 조합에게 밉보일 게 분명하고."

상단주가 창밖을 바라봤다.

깊어진 겨울, 새하얀 눈이 가득했다.

"후우, 일단 마일드륀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재협상을 해 봐야겠어. 어느 정도라면. 그래, 조금은 마석의 양을 낮출 수 있을 거야. 그들도 상인이라면 말이야."

"...뭔가 잘못되지 않을까요?"

걱정 가득한 메딘의 말에 상단주가 웃었다.

거래 규모가 빌어먹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결국 마석의 거래다. 어떤 특별한 화물을 옮겨 달라는 것도 아닌, 아주 흔해 빠진 거래일 뿐이다.

상단주는 한마디로 답했다.

"에이,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질주하는 마차들.

그들은 서서히 마일드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광산 마을, 마일드륀(Mildrun).

여러 개의 거대 광산을 기반으로 형성된 규모가 큰 마을로, 그 중심에는 광부들에게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거대한 시계탑이 놓여 있었다.

마을 특성상 각종 상회와 상단이 오가는 곳이다. 마석과 광석은 지금 세계에 있어서 필수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산지에 형성돼서 그런지 다른 곳보다 추위가 강하군.'

마일드륀에 도착한 베르덴.

그의 시선에 눈 덮인 광산 도시가 비쳤다. 몸소 광부들이 돈을 벌기 위한 도시였지만 하얗게 내린 눈이 그 삭막함을 덮어 주었다.

나름대로 운치가 있는 도시였다.

운반 상회에서 빌린 말을 반납하고, 거리를 거닐었다.

페르네가 준 정보에 의하면 푸른 구름 상단 건물은 시계탑에서 북쪽으로 가면 있다고 한다. 대로를 걷자 어느새 구름 모양의 상표가 새겨진 건물이 나타났다.

푸른 구름 상단.

베르덴은 주저 없이 건물 앞으로 향했다. 경비를 맡고 있던 사내가 입구를 막아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메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희 경비대장님을? 실례지만 용건이...."

베르덴이 소개장을 꺼냈다.

그 수신인에는 메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는 분께 개인적인 일로 소개를 받았습니다. 메딘에게 보여 주면 알 거라더군요. 그러니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소개장을 든 경비가 곧바로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갈색 머리의 사내가 뛰쳐나오듯이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베르덴의 소개장이 쥐여 있었다.

사내가 베르덴을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애셔 님이십니까?"

베르덴이 수긍하자 사내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저는 파이테 남작님의 조카, 메딘이라고 합니다. 푸른 구름 상단에서 경비대장을 맡고 있죠. 저희 삼촌께서 신세를 지셨다는 얘기를 소개장을 통해 들었습니다. 일단 바깥이 추우니,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시죠."

베르덴이 메딘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 *

끼익. 끼익.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낡은 판자가 비명을 질렀다. 복도뿐만이 아니라 건물이 전체적으로 낡아 있었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푸른 구름 상단의 핵심은 물류 운반. 대도시면 모를까, 사용 빈도가 낮은 광산 도시의 건물마저 인테리어에 돈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럴 돈으로 마차 관리나 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다만 창피하긴 했다.

하물며 가족의 은인에게 보이기는 말이다.

메딘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죄송합니다. 이거, 빨리 보수를 해야 하는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르덴의 관심은 경매장의 초청권에 향해 있었다.

판자 소리가 어떻든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걸 배려라고 생각한 메딘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메딘의 방에 들어간 두 사람이 서로 소파에 마주 앉았다.

뒤이어 상단의 직원이 뜨거운 차를 가져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메딘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삼촌께서 그러시더군요. 애셔 님은 대단한 마법사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이렇게 소개장을 써 주실 정도라면 분명히 대단한 분일 거라 생각이 되는데... 실례지만 저에게 어떤 용건을 가지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굳이 대화를 빙빙 돌릴 필요 없이, 베르덴은 담백하게 답했다.

"경매장의 초청권이 필요합니다."

"아! 암흑가의 경매장 말이시군요."

메딘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이제 3개월 정도 남았으니 슬슬 수요자가 있을 때가 됐지요. 마침 저희 상단은 초청권 두 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본래 나머지 하나는 팔 생각이었는데... 가족의 은인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소유권이 상단주에게 있어서 그냥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값은 지불하겠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메딘이 소파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든 상단주께 잘 말씀드려보겠지만... 대략 6천만에서 최대 1억 1천만 엘크까지는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일반적으로 시중에 풀리는 초청권은 개당 2억 언저리에 팔리니까요. 이 이하면 상단주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좋습니다. 가격이 책정되면 현금으로 드리죠."

베르덴이 즉답했다.

메딘이 말한 금액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억 단위의 금액에도 일말의 주저함이 없는 결정에 메딘이 눈을 깜빡였다.

"근데 언제쯤 거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예? 아, 예. 가능하면 빠르게 드리고 싶지만... 잠시 후에 '손님'이 찾아올 예정이라 빨라도 내일이나 모레쯤 연락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워낙 큰 거래라 상단주가 많이 예민하거든요. 근처 여관에 머물고 계시면 후에 꼭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하루에서 이틀이라.

그 정도는 예상 범위 내였다.

"알겠습니다."

베르덴이 메딘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라 노을빛이 도시에 가득했는데, 건물 앞에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점잖은 사내에게 메딘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상단주님."

"방금 왔네. 도중에 '조합'의 사람들과 만나서 말이야. 이제 식사를 하러 갈 예정인데, 옆에 있는 분은...?"

"멀리서 저를 찾아오신 손님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 우선 식당으로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으음, 그러지."

고개를 끄덕인 상단주가 노인과 함께 가도를 걸었다.

바로 근처이기에 마차를 탈 필요도 없었다. 이어 한 쌍의 남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럼 애셔 님, 추후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한 메딘도 상단주를 따라갔다.

남겨진 베르덴은 비싼 여관을 찾아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조합에서 왔다는 자들을 떠올렸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난 노인. 그리고 젊은 남녀.

베르덴이 주목한 건 그 남자와 여자였다. 그들에게서 마력이 느껴졌으니까. 예상하건대 대략 3위계. 베르덴에 비하면 낮은 경지이지만, 세간의 기준으로 따지면 기사에 필적하는 실력이란 건 분명하다.

그런 마법사들을 개인 호위로 쓰다니.

조합의 위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모양이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베르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초청권.

조합이든 뭐든 일절 관심이 없었다. 놈들이 방해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 *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식사를 끝낸 상단주와 노인은 푸른 구름 상단의 건물로 가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워낙 얘기가 잘 통한 터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방금까지는.

쨍그랑.

상단주가 놓친 컵이 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른 상회나 상단이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마석을 끌어모으라고 말했습니다. 최하급부터 시작해 최상급 마석까지 말입니다."

"그, 그런 짓을 벌였다간 저희 상단은 끝장입니다! 그리고 이 건에 대해 이미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체드, 당신이 알겠다고도 했고!"

"알겠다고만 했지,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체드가 이죽거렸다.

터무니없는 대답에 상단주의 손이 부들거렸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그러니까 조합은 저희 상단을 이용하고 버리겠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생각을...."

"맞습니다, 그 생각. 조합은 푸른 구름 상단을 이용해 마석을 모은 뒤 버릴 생각입니다. 효용 가치가 사라진 상단의 말로야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단주는 체드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나 마석을 구하려는 건지, 왜 굳이 조합의 계획을 밝히는지 말이다. 상단주가 화를 삭이며 물었다.

"...그걸 듣고도 제가 조합과 거래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말은 거절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쾅! 상단주가 책상을 내려쳤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체드. 그가 손가락을 들어 상단주를 가리켰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뼈바늘>

푹.

마법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뼛조각이 정확히 상단주의 심장에 박혔다. 서서히 옷에 피가 배어나며 심장에 발작이 일어났다.

가슴팍을 움켜잡은 상단주가 책상 위로 요란스럽게 쓰러졌다.

"꺼억... 꺽...."

"나는 충분히 설득을 했네. 거절한 건 자네니 원망하지 말도록. 뭐, 사실 시체를 조종하는 편이 훨씬 편하지만 말이야."

체드의 말투는 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오만과 권위가 가득한 마법사의 위세였다.

이윽고 상단주의 숨이 끊겼고, 체드가 그의 시체에 마력을 침투시켰다.

"자네 상단은 내가 잘 써 주겠네."

<마리오네트>

죽은 상단주가 몸을 일으켰다.

* * *

────쿠당탕!

"이게 무슨 소리지...?"

자신의 방에 있던 메딘이 소리를 듣고 복도로 나갔다.

밤이 늦은 터라 상단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건물에는 상단주와 메딘 그리고 조합에서 온 세 사람이 전부였다.

끼익. 끼익.

메딘이 상단주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체드와 상단주의 목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혹시 몰라 방문을 살짝 열어 몰래 안을 들여다봤다.

둘은 식사를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행히 거래에 대한 문제가 잘 풀린 모양.

'근데... 이 기분은 뭐지?'

분명 목소리도, 말투도 심지어 행동도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도 상단주의 옆모습은 뭔가 달랐다. 심지어는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뭐라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메딘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고개를 돌리자 조합에서 나온 여성이 복도 중앙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 문신이 있는 기묘한 여자.

그제서야 메딘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메딘에게 여성이 말했다.

"들켰네?"

"이런 제길...!"

메딘이 재빨리 검을 뽑았지만, 그보다도 빨리 여자의 그림자에서 날카로운 쇠사슬이 튀어나와 그의 어깨를 베었다.

난생처음 보는 마법.

다행히 갑옷 덕분에 어깨가 뜯겨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면 죽을 거라고 확신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사고가 빠르게 가속되던 중.

끼익.

그 소리를 들은 메딘이 기를 끌어모아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낡은 층이 무너져 내리며 메딘이 1층으로 떨어졌다.

잔해에 얼굴이 긁혀 피가 흐르고, 도중에 검을 놓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곧바로 창문을 부수고 아무도 없는, 마일드륀의 밤거리로 나가 전력으로 도망쳤다.

'살았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섬뜩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니, 뼈로 이뤄진 무언가가 메딘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 빨라 소리를 지를 시간도 없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거리. 이윽고 날카로운 뼈가 메딘의 다리를 베었다. 바닥을 구른 그가 필사적으로 기었으나 도망칠 수가 없었다.

맞서려고도 했지만 곧이어 팔이 깊게 베였다. 메딘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더군다나 무기 없이는.

점차 다가오는 괴물.

두려움에 떨던 메딘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살려 주세요!"

생존 본능.

창피함 따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기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밤거리는 여전히 고요했다.

각박하지만 위험한 세상이기에 그러했다. 특히 이런 산골에 있는 마을에서는 말이다. 괜히 도우려다가 개죽음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구할 정도로 정의로운 기사는 여기 없었다. 어떤 위험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강자 또한 없었다.

불과 어제까지는.

<석벽>

메딘에 앞에 솟아난 벽이 괴물의 일격을 막아 냈다.

베르덴.

그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07화 경매장의 초청장 (2)

여관의 가장 높은 층을 빌린 베르덴은 언제나처럼 마력회로를 확장하고 있었다.

꾸준한 노력이야말로 베르덴의 근간.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단 하루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내 충만한 마력을 가라앉힌 베르덴은 간단히 씻은 뒤 잠에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마일드륀 중앙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있었지만 명확하게 베르덴의 귀에 들렸다. 심지어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까지.

순식간에 복장을 갖춘 베르덴이 창문 아래로 뛰어내려 목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리고 맞닥뜨렸다.

메딘의 목숨을 위협하는 뼈의 괴물을.

'언데드?'

어째서 언데드가 마을 한복판에 있는 거지?

의문이었지만 메딘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석벽>으로 메딘을 보호한 뒤, 곧장 비행을 써서 언데드에게 육박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뼈를 가볍게 피한 뒤, 오큘러스의 충격파로 놈을 날려 버렸다. 이어 베르덴이 바닥을 두들겼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지면에서 솟아난 불기둥이 언데드를 덮쳤다.

위력을 버티지 못한 언데드가 허공에 떠올랐고, 베르덴이 정확히 놈을 향해 오큘러스를 겨냥했다.

트리플 캐스팅.

<록 페이탈>

파가가각!

음속을 넘어선 석편들이 언데드의 중요 골격들을 박살 냈다. 지면으로 추락한 언데드는 잔해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부활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애 버린 것이다.

손쉽게 언데드를 토벌한 베르덴.

그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딘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 * *

메딘은 다급하게 베르덴을 데리고 버려진 옛 광산에 몸을 숨겼다.

낡은 햇불에 불을 붙였다. 베르덴에게 중급 포션을 받아 상처의 출혈을 막은 메딘이 겨우 한숨을 내쉬며 광산 한편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베르덴이 마을에서 했던 질문에 답했다.

조합과의 마석 거래, 상단주, 여성, 마법 그리고 언데드까지. 그제서야 푸른 구름 상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애셔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죽었을 겁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메딘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설마 삼촌의 은인이 자신의 은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언데드를 삽시간에 없애 버린 그 실력. 확실히 대단한 마법사가 분명했다.

베르덴은 그를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파이테 남작에게 소개장을 받아 경매장의 초청권을 구하러 왔더니,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려 버린 것 같다.

뭐, 이미 벌어진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나저나 그림자에서 사슬을 뽑아내고, 언데드를 다룬다라.'

베르덴이 지식으로 알고 있는 마법이다.

그걸 쓰는 마법사들은 오직 한 종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군."

* * *

흑마법사는 사령술이나 저주 계열 등의 흑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들을 뜻한다.

단순히 마법만으로 보면 사악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다. 과거에는 흑마법사들을 적으로 삼고 보이는 족족 섬멸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다르다.

10개의 마탑 중에는 흑마법 계열을 주로 다루는 '다크워튼(DarkWarton)'이라는 마탑이 존재한다. 그들은 과거 배척받고 탄압받던 자들이 아닌 세상에 공인된 존재들이다.

이처럼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흑마법사는 꽤 있다. 특히 사령을 다루는 흑마법사는 무덤지기를 하기에 그리 적합할 수가 없었다.

다만 흑마법에 안 좋은 인식이 남아 있다는 건 사실이다.

마력을 넘어서 영혼까지 다루며 죽은 생명체의 피와 시신까지 다루니. 그리고 그걸 악행에 이용하는 흑마법사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그러했다.

루아스교가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기도 했고.

조합에 숨어 있는 정체불명의 흑마법사들.

단언하건대 결코 떳떳한 놈들은 아닐 것이다.

베르덴이 말했다.

"아마 상단주는 죽었을 겁니다."

마리오네트.

시체를 조종하는 흑마법의 하나다. 실력 여하에 따라 최소 며칠에서 몇 달까지 부패시키지 않고 조종하는 게 가능한데, 4위계에 있는 흑마법인 만큼 나름의 실력자일 것이다.

메딘이 탄식했다.

"대, 대체 왜 흑마법사들이 저희를...."

그건 알 수 없다.

세상이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데, 놈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지 상식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었다. 글러트니를 상대했던 베르덴이기에 그러했다.

어쨌든 조합에 뭔가 있는 건 분명하다.

그 많은 마석을 요구했다는 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일 테고, 푸른 구름 상단은 계획을 위한 수단으로 쓴 것일 터.

베르덴은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내게 필요한 건 경매장의 초청장.'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초청장 하나에 더 시간과 돈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빼앗는다.'

페르네가 조합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곤 했으나 이건 별개다.

먼저 건든 건 저쪽이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이렇다 할 손해조차 입지 않았지만 그 의미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메딘."

"저는...."

메딘이 젊은 시절을 바친 일자리.

그렇기에 푸른 구름 상단에 애착이 있었으며 상단주와도 친분이 깊었다. 그걸 송두리째 앗아 간 자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지만... 메딘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직전에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 않았던가.

이대로 도망칠까. 그게 가장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메딘은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에 베르덴이 답했다.

"저는 경매장의 초청장이 필요합니다."

"...예? 초청장이요? 하지만 그건 상단주의 금고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메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베르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났다.

"그러니까 거래합시다."

* * *

다음 날 오후.

흑마법사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직도 못 찾았나?"

"으음, 감쪽같이 숨었던데?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놈이야."

여성의 말에 사내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러게 그 자리에서 당장 죽였어야지. 너 때문에 이게 웬 개고생이냐! 그딴 작은 상단의 경비대장 하나 못 죽이고 말이야!"

"허, 이 새끼 봐라? 건물 복도를 부수고 도망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그리고 너는 기껏 힘들게 만든 언데드도 잃어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그러게 누가 언데드 하나만 보내라고 했어! 했냐고! 내가 병신같이 허세 부리지 말고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

"병신? 이런 잡년이...!"

"잡년? 한마디만 더 해 봐. 그 모가지 찢어발겨서 혀를 뽑아 버리기 전에."

여성과 사내가 대립했다.

서로가 살기를 드러내며 흉흉한 마력을 번뜩였다. 누가 하나 손을 쓰는 순간, 둘은 진심으로 서로를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기 전에 체드가 나타나 중재했다.

"그만하시게. 여기까지 와서 이게 뭔가? 내가 보기에 둘 다 잘못했으니까 그만하고 맡은 일이나 하게."

"그러나...."

"하지만...."

체드의 웃음기 가득한 시선에 둘이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강했으니까. 그가 하고자 한다면 둘을 영원히 침묵시킬 수도 있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좋아. 모두 진정한 모양이군. 그럼 광산으로 가지. 서둘러 마석들을 수급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놈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은 내버려 두게. 그깟 놈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큰일을 해결한 뒤 작은 일을 처리해도 늦지 않아. 어차피 곧 처참하게 죽게 될 것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지금은 마일드륀에 있는 마석들을 '조합장'에게 가져다주는 게 우선이네. 그러니 방금 전과 같은 일로 마찰을 빚는 건 그만하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여성과 사내가 수긍했다.

마음에 드는 대답에 함박웃음을 지은 체드. 호선을 그린 그의 눈동자 안에는 섬뜩할 정도로 무감정한 눈동자가 있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체드가 상단주를 앞세웠다.

몸뚱이는 시체였지만 흑마법으로 인해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푸른 구름 상단이 통째로 체드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그때, 푸른 구름 상단의 직원 하나가 다급하게 방문을 열었다. 예의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가 호흡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상단주에게 말했다.

"마석 갱도가 무너졌습니다!"

체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조종하는 상단주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뿐만이 아니라 저희 상단과 거래할 예정이었던 마석들이 죄다 박살 났습니다! 상급 이상의 마석이 담긴 보관 상자도 사라졌고요!"

사내와 여성이 체드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의 얼굴은 방금 전과 달리 한없이 괴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 *

저 멀리 푸른 구름 상단 소유의 갱도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푸른 구름 상단의 직원들이 제각기 그쪽으로 향했다. 조종당하는 상단주와 흑마법사 사내, 여성 그리고 체드까지. 상단의 건물이 거의 비었다.

그 틈을 타 메딘이 잠입했다.

경비는 셋.

그들은 메딘의 부하였는데, 상단주처럼 흑마법사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기절시킨다.'

메딘이 검날을 반대로 하고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며 경비들이 기절했다. 대충 그들을 근처 방 안에 던지고는 꼭대기 층에 있는 상단주의 방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메딘이 벽을 더듬거렸다.

"분명 이쯤 어디에...."

철컥.

숨겨진 버튼을 누르자, 벽 한가운데에 걸려 있던 그림이 약간 벽에서 떨어졌다.

메딘이 그림을 잡아 오른쪽으로 3번 그리고 왼쪽으로 2번 돌렸다. 이내 그림이 떨어져 나가며 그 뒤에 숨겨져 있던 금고가 나타났다.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는 경비대장. 만약 상단주가 부재 시, 그의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곧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는 상단주의 비상금이자 재산이 담겨 있었다.

두툼한 무기명 채권들과 금괴 10덩이.

다마스 강철 주괴 4덩이.

미스릴 주괴 2덩이.

마지막으로 경매장 초청권 2장이 놓여 있었다.

메딘이 감탄했다.

눈앞에 놓인 재산이 아닌 베르덴에게.

'설마 갱도를 무너뜨리자고 할 줄이야. 거기다 놈들이 구하려고 했던 마석까지 망가뜨리고.'

덕분에 아주 단단히 이목이 끌렸다.

메딘이 큼지막한 가방 안에 금고 안에 있는 걸 꽉 눌러 담았다. 기분 좋은 묵직함이 느껴진다.

이걸로 계획의 절반은 성공했다.

건물에서 나와 망토를 뒤집어쓴 메딘. 그가 숲 쪽을 바라봤다.

'자신 있어 보이긴 했는데 과연 괜찮을까?'

메딘도 나름 칼 밥 좀 먹었다.

그런데 감히 그 흑마법사 여자에게는 대적할 생각도 못 했다. 그런 그들을 단신으로 처리하겠다니.

'아니, 괜찮겠지. 다름 아닌 삼촌이 소개한 인물인데.'

그래, 소개장에 적혀 있었다.

대단한 마법사가 갈 테니 무조건 그를 도와주라고. 그리고 그 실력의 편린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메딘은 자신을 구해 준 베르덴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그 시각, 베르덴은 숲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푸른 구름 상단이 가지고 있던, 그리고 거래 예정이었던 마석들을 모조리 4위계 화염 마법으로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 갱도마저 무너뜨렸다,

메딘에게서 들은 상단의 정보 덕분이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내 것도 아니니.'

베르덴의 시선이 공간가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챙길 수 있는 건 챙겼다. 상급 이상의 마석들을 그냥 없애 버리기에는 양이 적어 챙기기 수월했으니.

그 후에 베르덴은 광산에 흔적을 남겼다.

놈들이 그걸 보고 이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아마 곧 찾아올 것이다. 그런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한다면 애초에 신경 쓸 필요도 없는 흑마법사들이란 걸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내 해가 기울며 석양이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상인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내, 여성 그리고 체드가 나타났다.

사내가 말했다.

"뭐야, 메딘이 아니었잖아? 넌 뭐지?"

"마법사."

마법사?

고개를 갸웃거리자 베르덴이 최상급 마석을 하나 꺼내 보였다.

"이건 내가 잘 갖도록 하지."

"이런 미친──"

"어제저녁에 메딘과 있었던 자로군. 죽이기 전에 묻지. 대체 왜 우리의 마석들에 손을 댄 거지? 내 기억으로는 자네와 같은 자와 척을 진 적은 없는데?"

베르덴이 스태프를 들었다.

"원래는 메딘에게 볼일이 있었지. 그런데 누가 푸른 구름 상단을 건드렸더군. 덕분에 내 일에 차질이 생겼다."

"...고작 그런 이유로 우리를 건드렸다고? 흑마법사인 걸 알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체드가 멍해졌고, 사내와 여성이 코웃음 쳤다.

"하하하, 이제 보니 미친놈이었잖아? 어린 마법사가 뭔 배짱이지?"

"체드, 저놈은 죽여도 되는 거죠? 저희의 계획을 방해한 장본인이니. 마석도 빼앗아야 되고."

체드는 이번엔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흉악한 시선을 베르덴에게 향했다.

"시체는 남겨 두어라. 내 손수 저자의 몸을 갈라 집에 장식할 테니."

흑마법사들이 마력을 일으키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에 맞춰 여유롭게 스태프를 돌린 베르덴이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108화 경매장의 초청장 (3)

사내와 여성은 나름대로 전망이 좋은 흑마법사였다.

각기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령 계열과 저주 계열이 3위계 상위에 이르렀으니, 대략 2년 정도만 있으면 4위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의 한계 위계는 5위계이니 언젠가 흑마법의 마도를 이룰지도 몰랐다.

재능이 있다.

그들은 그렇게 믿어 왔다.

베르덴을 만나기 전까지.

"...."

"끄윽... 끄르륵...!"

머리를 잃은 채 죽은 사내와 복부를 움켜쥔 채 피거품을 흘리고 있는 여성.

노인, 체드가 직전의 마법전을 떠올렸다.

사내가 먼저 리치를 소환했다.

리치는 3위계 마법사에 필적하니, 숫자를 늘려 상대를 압박하는 건 좋은 전술이었다.

여성은 언제나 그랬듯 저주 계열 마법인 <고통의 사슬>을 시전했다.

워낙 숙련도가 높았기에 사슬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건 극히 어려웠다. 상대가 마법사라면 더더욱.

둘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니, 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전투 방식은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엇이냐.'

날카로운 돌조각이 파공음을 내며 날아와 리치의 두개골을 아작 냈다. 심지어 그 뒤에 있던 사내의 머리까지. 당연히 즉사였다.

그걸 본 여성이 당황하며 사슬을 움직였다.

그런데 잿빛 머리의 마법사가 스태프로 가볍게 쳐 내고는, 역으로 여성에게 돌진했다.

휘둘러진 스태프에서 충격파가 일었다.

그에 직격당한 여성이 바닥을 굴렀다. 장기가 손상되었는지 목 안쪽에서 피거품이 끓었다.

그걸로 그녀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둘이 전투 불능이 된 걸 본 체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보다 위력이 강하다. 마법의 한계까지 마력을 쏟아부은 것 같은데... 그래도 위력이 이상하군. 마법서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경지는 대략적으로 추측이 가능했다.

눈앞의 상대는 체드처럼 4위계, 그중 상위에 오른 마법사라는 걸 말이다.

"허허, 내가 외모에 속았군. 설마 나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나이가 드니 외모로 상대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자꾸 잊게 되는군."

체드가 고목으로 만든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확실히 태도 하나는 직전의 사내와 여성과는 달랐다. 빈틈을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 시선은 베르덴의 손끝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는 걸 보면.

체드가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걸세. 나도 저들을 한 수에 제압할 실력 정도는 되니까 말이야."

"그랬으면 좋겠군."

베르덴의 가벼운 도발.

체드는 유쾌하게 웃고는 흉흉한 마력을 내뿜었다.

"참으로 건방진 젊은이야."

* * *

<포이즌 스피어>

3위계 흑마법, 맹독의 창이 베르덴의 화염 마법과 충돌했다. 다음 마법도 마찬가지.

정확하게 체드의 마법에 대응하는 베르덴의 높은 정밀성에 체드가 감탄하며 미소를 지었다.

"눈썰미가 좋군. 하지만 이건 어떨까.

체드가 고목 지팡이로 지면을 두들겼다.

콰득. 콰드득.

체드가 딛고 있는 땅 아래에서 수많은 언데드가 흙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검과 방패, 창 또는 활을 든 스켈레톤부터 시작해, 무덤 파수꾼과 리치 그리고 뼈의 기사까지.

그 숫자는 수십에 달했다.

언데드를 다루는 사령 마법 특성상,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뼈나 시체 등 매개체가 될 재료들을 통해 언데드를 창조한다. 그리고 한번 만들어진 언데드는 죽거나 시전자가 마법을 해제할 때까지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즉.

"가는 길마다 언데드를 끌고 다닌 건가?"

"그렇지. 조금 귀찮기는 해도 이처럼 내 수족이 되어 주니 말이야. 마법사란 준비하는 자라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체드가 입가를 비틀었다.

"총 67마리. 현재 내가 다루고 있는 언데드의 숫자네. 일반적인 스켈레톤이라면 100마리 이상은 거뜬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좀 더 강력한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숫자를 많이 희생해야 하지. 특히 뼈의 기사를 만드느라 아주 고생했지. 게다가 내가 가진 마법은 이게 전부가 아니네."

별로 궁금하지 않은 내용이다.

베르덴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거 하나 이해 못 하는 걸 보니, 수준에 비해 지능이 좀 떨어지나 보군. 그러니까 자네는 날 이길 수가 없다는 뜻이네. 타고난 재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살아온 세월은 아득히 내 쪽이 기니."

체드 또한 4위계 상위 마법사.

거기다 수적 우위 또한 압도적이었다. 체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준비를 전부 갖춘 만큼, 그의 머리에는 패배라는 단어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체드는 알지 못했다.

일 대 다수의 전투야말로 베르덴이 가진 마법을 적극 활용할 수 있으며, 그는 같은 위계의 마법사와 비교조차 불허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베르덴은 이미 루펠을 상대하며, 단신으로 수천을 상대했던 경험까지 있다.

마력을 끌어올린 베르덴.

오큘러스의 끝에 붉은 화염과 거센 폭풍이 동시에 몰아쳤다.

<화염폭풍>

거대한 불길이 삽시간에 언데드와 체드를 집어삼켰다.

* * *

"하, 합성 마법?!"

체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눈앞에 있는 잿빛 머리의 마법사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합성 마법까지 터득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소 마법사들이 그토록 원하는 경지를 어떻게 저 나이에...!'

그리고 더욱 이상한 건 마법의 시전 속도다.

주위를 완전히 뒤덮어 가는 규모의 화염폭풍. 저걸 고작 몇 초 만에 연산하는 데 성공했다고? 터무니없다.

'휩쓸리면 죽는다.'

체드는 곧장 여성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뽑혀 나오는 마력. 겨우 숨만 붙어 있던 여성의 목숨이 끊어졌지만 체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마력에다가 자신의 마력을 더해 사령 마법을 시전했다.

<영혼 장막>

청록색의 보호막이 체드를 감쌌다.

그 직후 화염폭풍이 덮쳐 왔다. 어마어마한 위력에, 약한 언데드는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산화했고 무덤 파수꾼과 리치마저 그 뒤를 따랐다.

"끄으으으으윽...!"

장막 바깥으로 무거운 압력이 느껴진다.

체드가 이를 악물고 버텨 냈고, 잠시 후 화염폭풍이 사라졌다. 마법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뼈의 기사와 진땀을 흘리고 있는 체드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상대 또한 지쳐 있을 터다.'

대규모 합성 마법을 사용했으니 당연하다.

어쩌면 마력 결핍 현상을 겪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에 반해 체드에겐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베르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에...."

순간 뒤통수가 서늘함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체드가 허리를 숙이자, 파공음과 함께 돌조각이 그 위를 지나갔다. 그가 쌓아 온 경험이 아니었다면 머리가 터져 죽을 수도 있었다.

침을 삼킨 체드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여유롭게 서 있는 베르덴. 그가 체드를 향해 오큘러스를 까딱거렸다.

눈썹을 씰룩인 체드가 전력으로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그와 동시에 베르덴도 마력을 번뜩였다.

<애시드 자벨린>

<파이어 자벨린>

콰아아앙!

산성과 불꽃의 창이 서로 부딪쳤다.

산성 연기가 시야를 가렸고 체드가 이어서 마법을 시전했다.

독과 산성 그리고 뼈.

체드가 평생을 일궈 온 사령 마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더블 캐스팅까지 더해진 위력은 5위계를 눈앞에 둔 마법사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드의 표정이 일그러져 갔다.

그가 시전한 마법이 전부 가로막혔다. 정면을 노리든, 속임수를 써서 빈틈을 노리든 무의미했다.

베르덴은 철저하게 체드의 마법만을 겨냥해 무력화했다.

한바탕 마력을 쏟아 낸 체드.

그가 가쁜 호흡을 추스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왜 자네는 멀쩡한 거지? 분명히 나보다 더 많은 마력을 사용했는데 어째───"

───촤아악!

대답 대신 날카로운 바람이 체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등으로 얼굴을 문대자 피가 묻어났다. 깊게 베였는지 볼 안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이이...!"

체드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나 그런 반응과는 달리 체드의 머릿속은 차가웠다. 그 또한 노년까지 살아남은 마법사.

감정에 휘둘려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현재를 직시했다.

화력에 특화된 원소 마법사를 상대로 밀리는 건 사실이다. 마력량 또한 마찬가지. 재능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나 체드는 흑마법사였다.

'지금!'

콰아아악!

땅 속에 숨어 있던 뼈의 기사가 베르덴의 뒤를 노렸다.

너덜거리는 몸뚱이였으나 연약한 인간의 살갗을 뚫기에는 충분하다. 동시에 체드는 베르덴에게 저주를 내렸다.

<절규>

한에 가득 찬 비명 소리.

이걸 들은 자는 정신에 타격을 받는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빈틈이 생길 게 분명하다. 그때를 자신이 사역하는 언데드가 노리는 것.

이것이 체드의 노림수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베르덴이 스태프로 공격을 막더니, 한 바퀴 회전하며 언데드를 날려 버렸다.

뒤이어 지면에서 솟아난 흙기둥이 뼈의 기사를 강타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뼈의 기사가 체드 앞에 뒹굴었다.

더 이상 체드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 어떻게 저주를 받고도 정신력이...!"

파지지직!

마찬가지로 대답 대신, 베르덴의 왼손에 붉은빛이 맺혔고.

<열뢰>

바닥에 내리꽂힌 적색 벼락.

사방으로 퍼져 나간 열화가 체드와 뼈의 기사를 집어삼켰다.

* * *

체드는 전력으로 저항했다.

마력회로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하여 몸을 지킬 장막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고위 속성인 전격 계열을 사용한 합성 마법. 어떻게든 견뎌 내려 했으나 급조한 장막으로 고온의 번개 줄기를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깨어진 장막, 전신을 파고드는 강렬한 열기.

고목 지팡이가 박살 나며 몸의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인 체드가 바닥에 쓰러졌다. 간산히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얼마 안 가 절명할 정도의 치명상.

베르덴이 체드에게 다가갔다.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그의 표정을 읽은 체드가 힘겹게 말을 쥐어짜 냈다.

"끄윽... 자, 자네, 일부러 나를 죽이지 않았군. 나에게서 뭘 원하는 거지?"

"정보."

체드가 피식 웃었다.

"왜 흑마법사가 상단에 손을 댔는지 궁금한가? 그거 유감이군. 자네가 날 살려 줄 생각이 없는 걸 아는데, 굳이 힘들게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알면 어쩔 수 없지.

체드의 부상을 회복시키고 심문을 하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겠으나, 아쉽게도 베르덴은 고문 같은 기술에 조예가 없었다.

시도해 본들 포션값만 아까워지겠지.

그때, 체드가 말했다.

"하,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해 주지. 자네는 잘못 건드렸어. 감히 누구의 앞길을 막아섰는지 몰라...! 만약 이를 그분께서 아신다면 자네는 필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점치 빛이 사라져 가는 흑마법사의 눈동자.

그 순간 체드가 눈을 번뜩이며 마력회로를 팽창시켰다.

"위대한 주검에 무한한 영광을!"

퍼억!

체드의 시체가 폭발했다.

소리는 컸으나 위력 자체는 베르덴의 마력 방벽조차 손상시킬 수 없었다. 피로 물든 대지를 보며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그분이라.'

역시 흑마법사의 배후가 있는 모양.

4위계 상위 마법사를 부하로 다루는 걸 보면, 그분이 마법사라는 가정하에 최소 5위계, 어쩌면 마도를 이룬 강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르덴은 체드의 경고에도 두려움이나 공포와 같은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베르덴 또한 강자의 반열에 들어선 지 오래였으니.

더 이상 4위계의 마법사들이 베르덴의 상대조차 되지 않는 지금, 베르덴은 그 이상의 강자를 갈구했다.

'어쨌든 이걸로 내 일은 끝났군.'

베르덴은 주변의 흔적을 지면 아래 깊숙이 처박았다.

깔끔하게 황무지를 만든 베르덴.

그는 메딘과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버려진 광산 근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메딘.

그가 이쪽을 향해 오는 베르덴을 보곤 다급하게 뛰어갔다. 상처 하나 없는 그의 모습에 안도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흑마법사들은...."

"다신 볼 일 없을 겁니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

메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물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예! 여기 잘 챙겨 놨습니다. 물론 경매장의 초청권도요."

메딘이 가방 안에 있던 걸 꺼내 바닥에 나열했다.

두툼한 무기명 채권들과 값비싼 주괴들. 메딘이 직접 베르덴에게 초청권을 건넸다.

"초청권은 대부분 무기명이라 어떻게 사용하든 출처가 알려질 일은 없을 겁니다. 남은 한 장은 팔거나, 지인분이 계시면 같이 데려가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메딘이 채권들 전부와 주괴의 3분의 2를 넘겼다.

"이건 거래 조건에 없던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입니다. 애셔 님이 아니었다면 복수는커녕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저는 이것들로 만족하겠습니다. 상단에서 퇴직금 받은 셈 치지요."

메딘은 깔끔하게 욕망을 잘라 냈다.

그가 챙긴 건 미스릴 주괴 1덩이와 금 주괴 3개. 다마스 강철 주괴 2덩이.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가져간 것이다.

베르덴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떠나야겠죠."

푸른 구름 상단의 인맥은 대부분 상단주의 것이다.

그런 그가 죽었으니 상단은 사실상 해체나 다름없었다. 잘 수습한다면 몇몇 거래처를 붙잡을 수 있긴 하겠지만 거래 규모는 반의반 토막이 나겠지.

이대로 상단에 남아 봤자 망하는 길밖에 없었다.

'거기다 조합이 뭔 짓을 벌일지도 모르고.'

조합의 흑마법사.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또 죽을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직접 한 건 아니지만 상단주의 복수는 성공했으니 의리는 지킨 셈이다.

미련은 없다.

메딘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왕국을 떠나 공국에 가 볼까 합니다. 제 삼촌 되시는 파이테 남작님에게 얹혀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걸 드린다면 무조건 받아 주시겠죠. 뭐가 됐든 더 이상 조합과 관련되기는 싫습니다."

메딘은 이미 자신의 살길을 찾은 모양이다.

베르덴이 애써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메딘이 악수를 요청했다.

베르덴이 손을 맞잡았다.

"훗날 다시 뵙게 된다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렇게 베르덴과 메딘은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났다

* * *

페르네는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감히 생각도 못 했던, 비싸고 달콤한 핫초코를 음미하며 몸을 데웠다. 그러던 그때, 정령이 반짝이며 다가왔다.

"왜 그래, 블루? 새로운 정보라도 온 거야?"

블루.

페르네가 정령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이형종이기에 처음에는 가능한 멀리 떼어 냈지만, 다시 보니 말도 잘 듣고 굉장히 순했다. 친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블루가 염동력으로 정보원에게서 온 정보들을 가져왔다.

페르네는 허공에 떠오른 문서들을 바라봤다. 대부분 당장 쓸 만한 정보는 없었지만 어느 하나 버릴 건 없었다. 모아 두면 언젠가 반드시 쓸 데가 있을 테니. 정보상으로서의 경험이었다.

그때, 익숙한 문구가 보였다.

푸른 구름 상단.

페르네가 베르덴을 떠올렸다.

'애셔 님은 언제 오시려나 몰라.'

떠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만큼 베르덴의 존재는 페르네에게 중요했다. 그가 없으면 그녀의 정보상이 마비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정보를 확인했다.

[푸른 구름 상단주 실종. 마일드륀 테러. 갱도 파괴 및 마석 폭발 사고. 사실상 푸른 구름 상단 해체.]

"...?"

순간 이해가 따라가지 않았다.

이윽고 곧 정보의 퍼즐이 맞춰졌다.

마일드륀에 누가 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깨닫자 페르네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힘없이 손을 떨궜다. 들고 있던 컵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합.

아무래도 페르네의 최대 고객이 놈들과 마찰을 일으킨 모양이다.

"...이거 어떡하지?"

바닥에 엎질러진 핫초코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아주 울상이었다.

109화 조합의 정보상 (1)

푸름 구름 상단의 일로 마일드륀이 매우 소란스러웠지만, 베르덴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경매장 초청권과 기타 부수입을 얻은 뒤 걸어서 근처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고, 말을 구해 아세른으로 향했다.

'역시 비행을 못 쓰니 불편하군.'

구름 위를 통해 움직일 수는 있지만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유자의 로브에 내장되어 있는 투명화가 있긴 하나 횟수 제한이 있기에 아껴야 한다. 혹시 필요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으니까.

투명화를 자유롭게 사용하려면 5위계 상위에 올라야 한다.

지금 당장은 요원한 일이다. 왕국의 비행 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는 승마에 의존하는 수밖에.

그래도 말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의지대로 향하는 발걸음.

베르덴은 거기서 자유를 느꼈다.

어느새 아세른에 도착한 베르덴은 곧장 페르네에게 향했다.

주점에 들어오는 베르덴을 본 페르네가 곧장 달려오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대체 마일드륀에서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음, 말하자면 긴데.

* * *

푸른 구름 상단과 조합 그리고 흑마법사.

베르덴은 마일드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했다. 메딘의 일부터 시작해 마리오네트의 시전자가 사라지면서 푸른 구름 상단주의 시체가 붕괴됐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이야기에 페르네가 입을 떡 벌렸다.

"흑마법사가 상단주를 조종하고 있었다고요?"

"그래."

"아니, 걔네들이 왜 조합에 있죠?"

"나야 모르지."

페르네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호흡을 고르고 있는 사이, 베르덴이 말을 이었다.

110화 조합의 정보상 (2)

고요한 긴장이 감돌았다.

바르톨이 허공 위에 떠오른 식기들과 단검을 봤다.

머리, 목, 심장, 팔, 복부 등 스무 개 가까이 되는 숫자임에도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곳을 노리고 있었다.

저게 일제히 날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 하나라도 허튼 수작을 부렸다간 당장 이 방 안이 피로 물들 것이다. 그게 누구의 것일지는 자명했다.

'올디면 몰라도 나는 죽는다.'

바르톨은 범인(凡人)이었다.

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마력도 깨우치지 못했으며, 신성력을 허락받은 독실한 성직자 또한 아니었다.

그가 아세른의 권력자가 된 것은 힘이 아니라 독기 덕분이었다.

주어진 기회를 잡아 악착같이 올라온 것이다. 물론 올디와 같이 나름 실력이 있는 부하는 있지만, 지금 당장 바르톨의 몸을 지켜 주기는 어려워 보였다.

운 좋게 마법사를 죽인다 해도 적어도 바르톨은 치명상 혹은 사망. 그는 저녁을 먹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바르톨이 올디에게 턱짓했다.

"잠깐 나가 있어."

"...예."

올디는 순순히 명령을 따랐다.

그도 상황이 그대로 흘러갔다간 바르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올디가 나가고 베르덴, 바르톨, 페르네만이 방에 남았다.

바르톨이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기운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쉰 그가 페르네를 째려봤다.

"대체 목적이 뭐지? 정말로 조합하고 맞붙을 생각은 아닐 테고."

"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르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르톨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건가?'

일개 정보상이 조합을 뭘 어쩐다고?

하지만 바르톨이 아는 페르네는 어처구니없는 허언을 남발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보상인 만큼 계산적이다.

그렇다는 건 숨겨 둔 수가 있다는 뜻.

바르톨이 베르덴을 힐끗 쳐다봤다.

'저 마법사가 그렇게나 강하다고?'

바제스의 용병단을 몰살했다고 듣긴 했는데... 그것과 별개로 확실히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 바닥엔 바르톨보다 위험한 자가 즐비하다. 하물며 조합이다.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뒷배로 있는 상회와 정보상의 집단.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혼자 어찌할 방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페르네?"

"솔직히 말하면 저희도 손잡을 귀족을 구하려고요."

"누구?"

"에스퍼렌사 후작가요."

바르톨이 턱을 쓸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 대귀족이면 상대는 되겠지만... 어떻게 손을 잡으려고? 그럴 만한 정보라도 있는 거냐?"

"그걸 구하려고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조합은 합법적인 일만 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들과 관련이 깊은 귀족들이 결코 깨끗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깊이 파 보면 후작가의 흥미를 당길 만한 정황이 나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조합 밑에서 일하고 있는 정보상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제 힘으론 찾기 어려워요. 그래서 조합의 꼬리를 잡아야 하죠.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래서 나보고 너에게 붙으라는 거였나."

바르톨은 조합과 거래를 맺었다.

페르네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그 채무 권리를 조합에게 팔아넘기기로. 그렇기에 조합의 연락책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

페르네는 그걸 알고 있었다.

바르톨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였다면 듣자마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합이 그의 뒤통수를 치려 했던 정황이 포착됐다.

그의 선택지는 총 3가지.

아무에게도 붙지 않고 관망만 하다가 나가리 되거나.

조합에게 걸었다가 뒤통수 맞고 그대로 뒈지거나.

페르네가 내민 손을 잡아 승률이 낮은 도박을 하는 것.

고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베팅을 해야겠군.'

상황도 그렇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다.

페르네가 저렇게 대담하게 나온 건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근간이 저 잿빛 머리의 마법사임이 분명하다고.

이내 바르톨이 생각을 끝냈다.

"조건은?"

페르네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베르덴이 푸른 구름 상단에서 가져온 무기명 채권들, 그 절반이었다.

"이 정도면 남은 빚을 갚고도 계약금 명목으로는 충분하겠죠?"

바르톨이 입가를 씰룩였다.

"진작에 이것부터 꺼냈어야지."

그가 손을 뻗자 페르네가 채권을 당겼다.

거기서 3분의 1을 떼어 바르톨에게 건넸다.

"나머지는 일이 끝난 뒤에 드릴게요."

"날 못 믿는 건가?"

"이 바닥에서 돈만 받고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군."

바르톨이 채권을 받았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배신할 이유가 없으니 상관없다. 페르네가 제시한 채권의 액수는 최소 수억 엘크를 거뜬히 넘을 터.

정산 과정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긴 하지만 웃으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한배를 탄 셈이군. 조합의 연락책은 어떻게 갖다 줄까? 납치해서 주점 안에 던져 주면 되는 건가?"

"그건 내가 직접 하지."

베르덴이 말했다.

조합의 연락책을 심문해 정보를 뜯어내는 것이 곧 시작점이다. 그런 중요한 일을 남에게 맡길 순 없었다.

페르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들으셨죠?"

"뭐, 좋아. 그럼 4일 뒤에 자리를 만들 테니 준비하고 있어. 기회는 확실히 만들어 주지."

으저적.

바르톨이 이어서 소갈비를 뜯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

* * *

바르톨이 준비를 하는 동안, 베르덴은 평소처럼 훈련에 집중했다.

타인에게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모험가 길드의 연무장을 2시간 동안 통째로 빌리고 체력 및 봉술을 단련했다.

후에 남은 시간에는 마력과 마법 수련에 몰두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오직 자신의 성장에만 집중하는 정신력.

베르덴은 날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더 정교해지며 강해지고 있었다. 훗날 5위계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는 전보다도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진척이 없어.'

사실 당연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 온 이후로 이렇다 할 자극을 전혀 받지 못했으니까.

악명 높은 용병, 바제스.

의뢰로 인해 맞닥뜨린 현상 수배범.

조합의 흑마법사.

나름의 실력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 베르덴을 위협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솔직히 글러트니의 이식자들이 더 강했다. 놈들은 인간을 벗어난 능력으로 예상을 깬 일격을 가하기도 했으니.

'루펠만큼의 격전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긴장할 만한 상대가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갈증.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 일렀다. 공국보다 훨씬 거대한 이 왕국에는 아직 강자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건 베르덴이 소극적으로 움직였다는 뜻. 그렇기에 앞으로 더욱 과감하게 움직여야 된다.

목숨의 경중 따위 상관없다.

세상에 군림하는 숱한 강자들. 생사의 경계에 선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 모든 것이 베르덴에게 있어 경험치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했고, 그래야만 오를 수 있다.

벽을 넘고 인간을 벗어난 초월자의 격.

그곳에 베르덴의 목적이 있었으니까.

상념에 잠길수록 베르덴의 훈련이 거세졌다.

빛이 번쩍이며 폭음이 터져 나왔고, 거센 진동에 연무장 일부가 무너졌다. 물론 훈련을 끝낸 후에는 <지형조작>으로 원상태로 되돌리고 있으니 길드가 손해를 입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길드장이 이마를 감쌌다.

연무장의 방진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

그 옆에 있는 길드 건물이 흔들릴 때마다 직원들이 길드장을 쏘아봤다. 시끄러우니 어떻게 좀 해 달라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침에 연무장을 잠깐 빌려주는 것으로 돈을 준다니. 공돈이나 다름없는데 어느 길드장이 고개를 저을 수 있을까.

거기다 연무장도 말끔히 청소해 주기까지 하니...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르고.'

느껴지는 충격으로 봤을 때 최소 4위계 중위 이상이다. 길드로 치면 최소 백금 등급 이상.

자칫 마법사의 심사가 뒤틀려 날뛴다면 감당하기 어렵다. 의외로 인격자일 수도 있지만 길드장은 여러 괴팍한 마법사를 겪어 온 사람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자는 수도 없이 봐 왔다.

'본인이 제 발로 나가는 걸 기다릴 수밖에.'

그게 최선이었다.

그때, 마침 훈련을 끝낸 베르덴이 길드장과 마주쳤다.

베르덴이 작게 목례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오지 마....'

길드장은 겨우 말을 삼켰다.

* * *

어느덧 4일이 지났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바르톨이 바깥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와 화창한 날씨.

아세른의 거리를 넘어 구석진, 허름한 건물에 도착했다.

계단 위로 올라가 벌컥 문을 열었다.

케케묵은 먼지 냄새. 그 창가에서 조합의 연락책이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르톨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락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네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모른 척하기는. 이미 조합에서도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닌가? 페르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것쯤은 말이야."

"그야 물론이죠."

연락책이 바르톨에게 고개를 향했다.

"애셔, 망나니 같은 바제스 용병단을 단신으로 몰살한 4위계 전격 마법사. 그리고 널리고 널린 현상 수배범들을 하루 만에 찾아 잡기도 하고, 미스릴 모험가 파티인 만하와 토벌을 함께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세른은 조합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는 게 많구만."

"입소문은 도시 안팎을 가리지 않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 마법사 때문에 조합의 상회주들께서 매우 심기가 편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조만간 직접적으로 처리할 예정입니다. 이미 그레이에서 적임자들을 찾고 있죠."

바르톨이 미간을 찌푸렸다.

"처리한다고? 평소처럼 회유는 안 하는 건가?"

"물론 그렇게 되면 좋겠죠. 고위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는 무척이나 귀하니까요. 조합의 일원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라면 다 죽어 가는 페르네에게 붙지 않았겠죠. 어떤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됐든 대화부터 시작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칫 전격 마법에 당하면 피해가 무척이나 클 테니까요."

"그러다 다 뒈지는 것 아닌가?"

연란책이 웃었다.

"독이든 기습이든 방법은 많습니다. 방심한 마법사를 무력화하는 것 따위, 그레이의 실력자들을 고용하면 아주 간단한 일이죠."

"아하, 그러니까 일단 잡아 놓은 다음에 권유를 받으면 살려 주고, 거절하면 죽이겠다? 아주 조합다운 일 처리군."

쯧. 바르톨이 혀를 찼다.

연락책이 손목에 찬 시계를 두들겼다.

"그럼 슬슬 용건을 말씀해 주시죠. 이렇게 오래 만나는 건 별로 좋지 않으니까요."

"내가 할 말은 하나다. 그 일에 나도 동참하고 싶군. 필요하다면 그 애셔란 놈이 어디서 뭘 먹고, 언제 자며 뭘 하는지 알려 주도록 하지. 그렇게 하면 일 처리가 더 수월하지 않겠나?"

"그 말은... 저희 조합과 완전히 손을 잡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왜, 나도 대세를 따르겠다는데. 안 되나?"

연락책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죠. 상회주들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대부업자 바르톨이 아세른에 끼치는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아부는 됐고. 거래의 답을 알려 주면 곧바로 마법사의 위치를 알려 주지."

"호오,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 정도도 못 할 거라고 보이나? 이쪽은 내 구역이라고. 못 믿겠으면 그놈이 어디 있는지 당장 알려 줄까?"

바르톨이 손가락으로 연락책을 가리켰다.

"네 뒤에."

"...네?"

터엉!

휘둘러진 스태프가 연락책의 머리를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충격. 이어 벽에 머리가 부딪혔다.

뇌가 크게 흔들렸는지 연락책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고, 이내 부들거리다 고개가 축 늘어졌다.

투명화가 해제된 베르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절한 연락책의 뒷덜미를 잡았다.

"수레는?"

"밑에 준비해 뒀다."

베르덴이 연락책을 끌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이런 일에 익숙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성격이 담담한 건지 일체의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다.

바르톨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스태프로 대가리를 갈기는 마법사라니.

'X나 무섭군.'

만약 페르네의 제안을 거절했으면 자신도 저렇게 됐을까.

바르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111화 조합의 정보상 (3)

비어 있는 오크통에 연락책을 집어넣었다.

이어 바르톨의 부하들이 오크통을 술 운반용 수레에 싣고는 떨어지지 않게 덮개를 씌웠다.

수레가 페르네의 주점으로 향했다.

베르덴은 뒤에서 거리를 두고 주변을 확인했다. 혹여 연락책을 감시하는 조합의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으니.

물론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별 탈 없이 페르네의 지하 술 창고에 연락책을 옮기는 데 성공한 뒤, 베르덴이 지하 벽면에 마법진을 새겼다.

지하의 소음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페르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마법진도 쓸 줄 알아요?"

"기본이지."

...언제 마법진이 마법사의 기본이 됐지?

페르네가 멍하니 있는 사이, 베르덴이 오크통에서 연락책을 꺼냈다. 그러고는 빈 의자에 앉히고 지형을 조작해 몸을 단단히 구속했다.

"입도 막아 줄 수 있어요?"

"...?"

지금해야 할 건 심문이다. 그러니 입을 막으면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베르덴은 페르네에게 되묻지 않고 지형을 조작했다. 그는 이렇게 정보를 캐는 것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지면이 뿌리처럼 돋아나더니 연락책의 머리를 감싸며, 그 입을 휘감았다.

이걸로 준비가 갖춰졌다.

"고마워요. 이제 깨울게요."

페르네가 물이 담긴 양동이를 연락책에게 뿌렸다.

촤아아악!

"...!"

연락책이 번쩍 눈을 떴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에 발작하듯 몸을 움직였지만 당연하게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전신이 구속당한 걸 깨달은 연락책이 고개를 들었다.

페르네와 베르덴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상태로 어떻게 할 거지?"

"저도 그렇게까지 전문가는 아니지만 심문을 할 때는 하나만 명심하시면 돼요. 묻지 말고 공포심부터 심어라. 그래야 제대로 된 정보를 내뱉는 법이거든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겁부터 주는 게 보다 확실할 것이다.

"방법은?"

"기사단에서 하는 심문 방법 중 하나를 할 건데,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한번 보시는 게 이해하기 더 쉬울 거예요. 뭐, 정 안 되면 바르톨에게 맡기면 되니까요. 좀 많이 망가지긴 할 테지만요."

망가진다니.

연락책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조합의 상회 중 하나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간단히 왔다 갔다 하면서 연락만 전해 주면 돈을 주니, 선뜻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견딜 인내심이나 충성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말할 테니 제발 입 좀...!'

"읍읍!"

연락책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이 막힌 탓에 그 뜻을 전할 수가 없었다.

"반항이 심하네요. 역시 입부터 막아 놓길 잘한 것 같아요."

'말하겠다니까!'

눈을 번뜩이는 연락책을 무시하고 페르네가 움직였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리고 잠시 후.

"뭐든 말할 테니 제발 그만해!"

"봤죠?"

효과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