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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결투(3)

서로를 향해 달리던 우리 둘은 동시에 훅 꺼지듯 사라졌다.

나 같은 경우는 특유의 연기처럼 사라져서 몇 미터 앞에서 다시 나타나는 이동기를 쓴 것이고, 케일런도 그림자로 비슷한 짓을 했다.

찰나의 순간 공방의 교차가 일어나며 서로를 지나쳤다.

캉!

우리는 만화에서나 본 것처럼 상대를 베고 지나간 뒤에 서로 뒤돌아선 상태가 됐다.

"젠장···."

가슴팍에선 끈적한 검은 피가 배어 나와 의복을 적셨다. 어느 틈에 케일런에게 베인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인 탓에 치명상이 아니었다. 인간이었으면 피가 마구 쏟아졌겠지만, 핏물이 조금 흐를 뿐이다.

나는 얼마나 베인 건지 확인하기 위해 상처에 손가락을 살짝 넣어봤다. 차가운 살점이 만져지고 갈비뼈 일부가 절단된 걸 알 수 있었다. 뼈의 절단면이 까끌까끌했다.

'예상대로 간 보는 듯한 공격이군. 저놈은 초반부터 무리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나는 케일런에 대해 잘 안다. 놈은 신중한 사냥꾼이었다. 앞으로 이런 공격을 누적시키며 점점 날 굴복시켜 나갈 생각이겠지.

"느껴지는 기운이 엄청나던데 실력은 별로군. 형제."

케일런은 히죽히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저리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실전 경험도 부족하고 검술도 배우지 못했다. 지금까지 무식할 정도로 강한 신체 능력으로 때워왔을 뿐이니까.

"그래, 네가 더 낫긴 하군. 하지만 그게 격의 차이를 극복할 정도는 아니다."

"격의 차이라?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여유를 잃지 않고 도발하자 놈은 미간을 구기더니 본격적으로 힘을 일으켰다. 목과 턱에 있던 짐승 이빨의 문신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방금 전 가슴팍을 벤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림자 칼날이었구나. 어쩐지, 보이지도 않더라니···.'

지켜보던 뱀파이어도 감탄과 우려를 터뜨리고 있었다.

"케일런 저놈, 소문보다 더 강해!"

"신참도 나쁘지 않았는데 무리한 상대를 만난 거 같군."

단 한 수 서로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주변은 더욱더 큰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케일런은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드는 듯 흡족하게 웃다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해왔다. 그의 몸에서 움직이던 문신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일제히 내게 쏘아져 온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연기처럼 꺼지며 몇 미터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케일런은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다는 듯 외쳤다.

"그럴 줄 알았다!"

노련한 놈은 애초에 내가 어디로 피할지 짐작하고 다음 수를 준비했던 것이다. 극속으로 돌진해온 그는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창날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위기야말로 내가 노린 것이라는 점을.

케일런의 창날에 반응해 피부에서 드래곤의 비늘이 돋아났다.

카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창이 드래곤의 비늘을 뚫지 못하고 미끄러지며, 창날이 갈려 나갔기 때문이다. 케일런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눈이 커졌다. 하지만 놈은 뭐라 할 틈도 없었다.

철검을 버린 내가 검은 해골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놈 강타했기 때문이다.

터엉!

케일런의 갑옷 일부가 깨지며 결투장을 성대하게 굴러갔다. 그러다 결투장의 경계에 세운 임시 방벽을 요란하게 무너뜨리며 처박혔다.

와르르르! 콰앙!

석재가 무너지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자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신참이 한 방 먹였어!"

"잘했다! 오늘 돈을 가져가는 건 이 몸이다! 크하하하!"

내 완력에 놀란 자도 여럿이었다.

"지팡이로 때려서 저 정도라고?"

"힘이 얼마나 센 거야?"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 내 힘은 아단의 신체개조로 힘깨나 쓴다는 뱀파이어조차 비교가 안 되니까.

"크윽··· 네놈!"

케일런이 먼지를 뚫고 나왔다. 그의 흉갑 보기 좋게 깨져 나갔다.

본래 그가 입었던 명품이라면 이번 공격을 견뎌냈을 테지만, 그걸 팔아먹은 탓에 굴욕을 겪고 있었다.

덕분에 크게 유리해졌다. 이제 무슨 공격이든 저 흉갑의 구멍에 쑤셔 넣으면 되니까.

'워낙 강한 놈이라 좀 쫄았는데 막상 붙으니까 고인물의 저력이 나오는구만.'

저놈 말대로 난 실전 경험은 부족하다. 하지만 고인물에게 수싸움은 기본이다. 수싸움이라면 나는 지지 않는다.

단순히 한 수 정도 앞을 보는 게 아니다. 애초에 첫 일격에 베일 때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깊지 않은 공격에 당해준 뒤 방심하게 하고, 그 뒤에 감춰놨던 비늘을 꺼낸 뒤 카운터를 먹이는 방법이었다.

결과는 보는 것처럼 성공이다. 케일런은 자신의 가슴팍을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알겠다! 그 늙은 네크로맨서가 네게 드래곤의 비늘을 이식했구나! 내게는 안 해주더니 좋은 걸 받았군. 반드시 가져가겠다!"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오해를 하고 있군. 드래곤의 비늘은 아단이 준 여러 가지 능력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괜히 격의 차이를 운운한 게 아니다.

"할 수 있으면 그러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케일런이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면 수싸움도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투 중 쓸 수 있는 수단이 나보다 케일런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초반에 이득을 챙겨도 결국 밑바닥이 보이기 마련이니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할 것이다! 소렌! 네 핏방울은 나를 좀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케일런은 돌격해 왔고, 다시 그와의 공방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삽시간에 그가 다섯 줄기의 검은 그림자로 분화됐기 때문이다.

"!"

내가 연기처럼 꺼지며 이동할 수 있다면 케일런은 그림자로 변한다. 이것은 서로 비슷한 이동기지만 그 숙련도는 차원이 달랐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그렇기에 케일런 같이 숙련된 전사는 미리 타이밍을 읽고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케일런 놈은 한 번에 다섯 방향으로 분화했다. 어디가 진짜고, 어디가 가짜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적어도 어디에서 나타날지 알아야 다음 수를 준비하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그런 여지를 박살내 버리는 것이었다.

"크악!"

케일런의 창자루가 등판을 강타해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간신히 엎드리듯 멈춘 나는 몸을 뒤로 돌려, 케일런의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검은 해골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적의 공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속임수였다. 창을 내리치려던 척하며 내 방어를 유도한 케일런은 나 대신 검은 해골 지팡이를 쳐냈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아귀에서 지팡이가 날아갔다. 그렇게 무장해제를 시킨 케일런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창자루로 내 왼팔을 부러뜨려 버렸다.

퍼억!

어찌나 그 일격이 강하던지 팔이 기괴하게 뒤틀리고는 살점을 뚫고 부러진 뼈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케일런은 재차 창자루를 휘둘러 기어코 내 왼팔을 뜯어버렸다.

퍼어억!

살점과 뼈가 터지면서 팔이 찢어발겨 지며 떨어져 나갔다. 놀라운 위력이었다. 드래곤킨의 근육으로 강화한 팔이 이렇게 간단히 뜯어져 버리다니···.

케일런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역시! 역시 완벽한 능력은 없어. 네 비늘은 날붙이에만 반응하는군. 예상하던 바다!"

케일런 놈은 노련하고 똑똑하게 내가 가진 약점을 바로 파악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드래곤의 비늘은 날붙이라면 대단한 방어력을 자랑하지만, 창자루나 둔기로 때리면 반응하지 않는다. 마치 북어포를 두들기듯 때려서 팔다리를 뜯어내면 별 수 없었다.

"젠장···."

"하하하! 소렌, 내 형제여. 정말로 날 이길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 순진함이 눈이 부시구나."

"역시 좀 무리였나?"

"그래,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말했지? 너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거다. 일어나라. 다시 한번 추하게 바닥을 구르게 해줄 테니."

나는 그가 준 기회를 거절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서서 철검을 주워서는 버텨 섰다. 역시 나이트스토커는 나이트스토커였다. 놈은 아직 가진 수단을 다 꺼내보이지도 않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싸움이라면 지지 않는다."

내 말에 케일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허세를 부리는군. 뭐? 수싸움? 아까 내 흉갑을 뚫었던 그걸 말하는 건가? 그래, 제법 머리를 잘 굴리긴 했지만 결국 거기까지가 아닌가?"

그 말에 나는 어질어질한 시야를 다잡으며 답했다.

"너는 고인물을 얕보는군. 결국 이 싸움은 내가 이길 거다."

"하? 고인물이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헛된 희망에 정신이 나갔나 보군. 그러면 보여주마."

케일런은 다시 돌격해 왔다. 이번에는 그림자로 변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갑자기 내 그림자에서 시커먼 팔 십여 개가 일제히 튀어나오더니, 몸 여기저기를 붙잡아 구속한 것이다.

이것 역시 그림자를 다루는 게 특기인 케일런의 기술이었다. 일단 붙잡히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내 이동기도 무용했기에 계속 얻어터지는 수밖에 없었다.

퍼억! 퍽!

케일런은 계속 창자루로 날 패댔다. 그 일격, 일격이 몸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우둑! 뚝!

갈비뼈가 연달아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제법 버티는군! 정말 단단한 육체구나!"

케일런은 내 내구도에 감탄한 듯했다. 확실히 신체개조 2단계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정도 공격을 연달아 맞는다면 보통 뱀파이어는 육편이 되어 터져나갈 테니까.

하지만 이 광경이 너무 잔혹하고 일방적이었던 건지 지켜보던 자들이 야유를 터뜨렸다.

"충분해! 나이트스토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맞아! 신참을 이만 보내줘라!"

"자비를 베풀어 고통 없이 끝내라고! 이 가학적인 놈!"

관객들은 이제 내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케일런도 그런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창질을 멈췄다. 그리고 야유에도 불구하고 킥킥 웃으며 사방으로 두 팔을 벌려보였다.

"어떤가! 잘 봤나! 이 나이트스토커에게 덤벼든 멍청한 자의 최후를!"

다시 야유가 터졌지만 케일런은 그걸 오히려 즐기는 듯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리고 다시 내 앞에 서더니 물었다.

"소렌, 형제여. 저 오지랖 넓은 뱀파이어들이 네게 자비를 베풀라는군. 참, 가식적인 새끼들이지 않나? 남의 피를 빨아먹을 때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들이면서 이럴 때는 문명인인 척한다는 게? 지들이 아직 인간인 줄 안다니까. 카하하하!"

듣고 있던 관객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케일런은 그걸 무시하더니 창끝으로 처진 내 턱을 들어올렸다. 이미 온몸이 엉망이었다. 날 구속하고 있는 검은 손길들이 아니면 바닥에 널브러졌을 정도다.

"좋다! 그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케일런은 관객들을 향해 외쳤다.

"비록 엉망이 되긴 했지만 이 나이트스토커를 상대로 분전한 이 신참에게 자비를 베풀지. 내가 가진 최고의 기술로 처형해 경의를 표하겠다."

그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설마! 섀도우 스피어(Shadow sphere)를 쓰려는 건가!"

"놈이 가진 최고의 상승기예라고 들었네만···. 운이 좋아 오늘 견식하겠군!"

"듣자니 그 그림자로 된 구체 안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남은 이가 없다고 하던데?"

"맞소. 무적이오. 나이트스토커는 섀도우 스피어를 쓰고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

주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더 이상 케일런을 향한 비난도, 날 향한 동정도 없었다. 다들 사형집행에 들떠서 어서 섀도우 스피어를 보고 싶다 난리였다.

"나이트스토커! 빨리 써라!"

"끝장을 내!"

"어서! 어서! 어서!"

섀도우 스피어는 이름 그대로의 기술이다. 원형의 그림자 구체를 만들어 시전자와 희생자를 가둔다. 그 안은 일종의 결계라 시전자에겐 버프가, 희생자에겐 디버프가 들어간다.

즉, 케일런에게 극단적으로 유리한 환경이다. 실제로 그는 그걸 잘 이용해서 많은 강적을 섀도우 스피어 안으로 끌어들여 살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 때문에 쓰려는 것이다.

'형제의 힘을 들키지 않고 흡수하기 위해서겠지.'

아단의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이다.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그렇기에 케일런은 섀도우 스피어로 대미를 장식하고, 군중의 눈까지 속이려는 것이다.

일단 섀도우 스피어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자! 나와 함께 가자! 형제!"

케일런이 섀도우 스피어를 발동했다. 그러자 주변의 공간이 휘기 시작하며 시커먼 어둠의 그림자가 형태를 갖춰나갔다. 그것은 원형의 감옥이었고, 순식간에 나와 케일런을 집어삼켰다.

"윽······!"

안쪽은 폐소공포증이 절로 느껴질 법한 어둠 속이었다. 그 모든 게 마치 심해처럼 날 무겁게 짓눌렀다.

반면 앞에 있는 케일런은 날아갈 듯 몸이 가벼운 듯했다. 이곳은 모든 게 내게 적대적인 공간이었다.

케일런은 육식동물 같은 이빨을 드러내고 낄낄 웃었다.

"자, 드디어 이 시간이 왔군."

하지만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얻어터지면서도 묵묵히 섀도우 스피어가 발동하는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남들의 눈을 피해 내 성명절기라 할 수 있는 '새벽의 손길'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뱀파이어가 발휘하는 추기경급 치유력, 그것은 비밀이 지켜질 때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알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강력한 뱀파이어라도 허를 찔릴 수밖에 없는 사기적인 기술이었다. 아니, 솔직히 누가 뱀파이어가 치유력을 발휘할 거라고 생각하겠냐고.

나는 하나 남은 손으로 뻗어 놈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발악이지?"

케일런은 어이없다는 태도였지만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저 어딘가에 있을 내 신에게 고했다.

"성녀님, 여기 또 한 놈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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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결투(4)

내 말과 함께 새벽의 손길이 발동했다. 성녀를 떠올리게 하는, 동틀 무렵의 주황빛이 일대의 어둠을 단번에 몰아냈다. 그와 함께 막대한 치유력이 케일런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 무슨! 끄아아아악!"

이 힘은 산 자에게 재생의 공능을 발휘하지만 죽은 자에겐 파괴 그 자체였다.

치유력은 마치 황금을 녹인 것처럼 찬란했는데, 케일런의 내부에서 뱀파이어 인자와 부딪치며 극렬한 고통을 유발했다.

"카아아아아! 끄아아아!"

새벽의 손길을 쓰는 나 역시 죽을 맛이었다. 실제로 신성마법을 전개한 오른손이 무슨 연탄처럼 타들어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러니 케일런은 말할 것도 없다. 비명을 지르는 놈의 입에서 시커먼 연기가 흘러나왔다.

아니, 곧 놈의 모든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타이어가 타는 듯한 지독한 냄새도 났다.

"크아아아아! 카아아악!"

케일런의 근육이 수축하고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갔다. 그리고는 살덩이가 무슨 다 탄 연탄처럼 바스러졌다. 놈의 갑주와 의복이 흘러내리고 살점이 부서져 여기저기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체! 대체! 뱀파이어가 어떻게 치유력을! 끄아아아!"

케일런은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그의 섀도우 스피어에는 한 가지 명확한 조건이 걸려 있으니,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풀린다는 것이다.

평소에 케일런은 그걸 유리하게 이용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을 붙잡은 덫이었다. 그는 마치 철사로 된 올무에 붙잡혀 다리뼈가 다 드러나도록 버둥대는 짐승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섀도우 스피어가 없었다면 치명상을 입고도 어찌저찌 도망갔겠지만, 이 좁은 곳에 갇혀 정통으로 모든 치유력을 뒤집어썼으니까.

털썩.

케일런은 해골로 변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한때 살점이었던 재가 뼈와 섞여서는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비참한 최후로군···.'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어떤 강력한 힘이 내게 흡수되기 시작한 탓이다. 형제를 살해한 대가를 받을 시간이었다.

'그림자의 힘이다.'

솔직히 케일런이 그림자를 다루는 걸 보고는 부러웠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어졌다. 이것은 완전히 내 것이 됐으니까.

'특히 섀도우 스피어는 활용 가치가 매우 높다. 앞으로 들키지 않고 형제의 힘을 흡수하고, 새벽의 손길을 쓸 수 있겠어.'

우우우웅.

시커먼 에너지가 몸 곳곳을 파고들어 왔다. 마치 그림자의 힘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 힘이 어느 한 곳에 뭉쳐서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고,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군.'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서 그림자가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광경이 보였다.

케일런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그가 했던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그림자를 조작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시간만 있다면 못할 게 없었다.

새로운 힘을 흡수한 덕인지 뜯겨나간 왼팔과 새벽의 손길로 타버린 오른팔이 빠르게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섀도우 스피어에 금이 갔다.

파직!

밖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 * *

오늘 재판결투에는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방문해 있었다. 바로 크림슨코트의 수장인 루신다였다.

루신다는 강력한 뱀파이어 클랜인 크림슨코트의 수장이자, 이 세계에서 활동 중인 뱀파이어 중 손에 꼽을 만한 강자였다.

그런 루신다가 직접 행차했으니 모두 오늘의 재판결투가 참으로 화제긴 화제구나 싶었다.

하지만 루신다가 결투장까지 온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 그녀의 옆자리에 있는 존재감 없는 뱀파이어를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카르멘 님, 어찌 이런 보잘것없는 일에 귀하신 발걸음을···?"

루신다는 옆에 있는 뱀파이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무척 놀랄 터였다. 그 막강한 루신다가 공경의 예를 다하는 저 존재는 대체 누구냐고 할 터.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카르멘이 걸친 로브에 강력한 인식 방해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루신다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약간 신경이 쓰여서···. 그뿐이다."

카르멘은 그리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녀 정도 되는 존재가 이런 결투를 구경하러 올 이유는 없었다.

에인션트 뱀파이어인 그녀에 비하면 잔챙이들의 싸움인 데다가, 장구한 삶 동안 재판결투라면 지겹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젯밤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소렌이란 자를 보고 오게.]

카르멘에게 신탁을 내린 존재는 그녀가 섬기는 신인 드라큘라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드라큘라는 저 소렌이란 젊은 뱀파이어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가 특별한 건가···?'

물론 교활하고 혓바닥을 뱀처럼 잘 쓰긴 했다. 떠돌이 늑대같이 위험한 나이트스토커를 농락하고 재판결투까지 끌어들인 솜씨가 아주 놀라웠다.

하지만 막상 싸움이 시작되자 떡이 되도록 터지는 걸 보고 있자니 드라큘라의 뜻을 점점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신체 능력은 발군이긴 하구나. 무기를 전혀 다룰 줄 모르면서도 나이트스토커와 저 정도로 싸울 수 있다니···.'

계속 보니 잠재력만큼은 대단한 것 같았다. 하나 단순히 그것 때문에 드라큘라가 주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섀도우 스피어가 펼쳐졌을 때 카르멘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소렌이 끝장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트스토커는 저 구체를 만들고 실패한 적이 없다고 했지···.'

아무래도 아직 많은 게 미비한 소렌이 당해내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섀도우 스피어 안쪽을 들여다보는 건 보통 불가능했지만, 카르멘 정도 되는 실력자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략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잠시 후 그녀는 무언가를 느끼고 경악한 표정이 됐다.

"!"

그건 막대한 치유력을 쏟아내는 신성마법이었다. 놀랍게도 소렌은 그 힘으로 케일런을 박살 내고 있었다.

'사제 뱀파이어였나? 대체 누굴 섬기는 거지?'

신들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카르멘은 빠르게 후보군을 떠올려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떤 신이 뱀파이어 같은 존재에게 치유력을 내려주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뭐랄까, 그건 마치 신성한 성기사에게 사악한 저주술이나 네크로맨서 마법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드라큘라께서 주목하라고 한 이유가 역시 있었구나.'

이윽고 섀도우 스피어가 끝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케일런이 해골이 돼 죽어 있고, 소렌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이 자리에서 섀도우 스피어 안을 들여다본 건 카르멘 밖에 없었기에 아무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관객들은 하얀 뼈만 남은 나이트스토커의 해골을 보며 숨을 헐떡거렸다. 도저히 지금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 뼈다귀가 나이트스토커란 말인가?"

"신참이 살아남았다고? 섀도우 스피어가 펼쳐졌는데?"

"말도 안 된다. 이건 누가 예측이나 했겠나···."

"대체 무슨 짓을 하면 나이트스토커가 저렇게 타버리는 것이오?"

카르멘을 빼면 이곳에서 가장 빼어난 루신다조차 놀란 기색이었다. 그녀는 대단한 존재긴 했지만 에인션트 뱀파이어처럼 구체 안을 감지할 능력까진 없었으니까.

"이 무슨···?"

여태 차분하게 재판결투를 보던 루신다는 동요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조차 대체 소렌이 어떻게 이긴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소렌은 담담했다.

그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검은 해골 지팡이를 들고는 능력을 발동했다.

바로 시체 일으키기였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제 해골로서 내게 봉사하라."

지켜보던 뱀파이어들이 경악하던 가운데, 한때 나이트스토커라 불렸던 뼈다귀가 덜그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태워 죽인 거로도 부족해 시체 일으키기라고?"

"안식조차 얻지 못하게 하겠다는 건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결국, 크림슨코트의 수장인 루신다가 나섰다.

"소렌이여."

루신다의 부름에 소렌이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아니, 그리 잔혹하게 죽여 놓고······ 해골로 되살려서 부려먹겠다고?"

당혹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도 소렌은 차분한 태도로 답할 뿐이었다.

"케일런은 이전에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그에게 모든 걸 바로잡고, 자신의 평판을 고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주고자 한 것입니다."

"뭐······?"

"저는 항상 믿어왔습니다.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고. 그것이 갱생입니다."

카르멘은 예의 바르게 답하는 그 모습이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건 옆에 있던 루신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이거 미친놈일세."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욕을 먹은 소렌이 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던 거다. 좋은 일을 하는데 왜 욕하지란 느낌이었다.

'요즘 젊은이란 저런 것인가? 실로 두렵구나.'

그렇게 축제 같았던 재판결투는 경악과 공포로 끝났다. 하지만 소렌이란 놈은 주변의 반응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나이트스토커의 무기를 웃는 낯으로 챙겨갔다.

카르멘은 오랜만에 어질어질한 기분을 느끼고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제일 심처에 위치한 드라큘라를 위한 제단으로 향했다.

그곳은 촛불과 온갖 불길한 물건들로 장식된 곳으로 가운데에는 저주받은 모래가 깔려 있었다. 그 모래에 드래곤의 손가락뼈로 글씨를 쓰면, 드라큘라와 소통할 수 있었다.

카르멘은 오늘 본 것에 대해 담담하게 모래판에 적어나갔다. 그러자 얼마 후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소렌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게. 호의를 얻도록.]

어째서인지 이유를 물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결국 카르멘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친해져야 하지? 호의라고?'

매우 좁은 인맥을 가진 카르멘에게 그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경천동지할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친하게'란 말은 혼자 끙끙댈 정도로 답이 안 나왔다.

하지만 섬기는 신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현실. 결국 그녀는 그 소렌이란 작자를 조만간 한 번 초대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일단 뭐하는 녀석인지 좀 알아봐야겠어.'

상대를 알아야 어떻게 호의를 살지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 * *

재판결투에서 승리는 내게 많은 걸 안겨줬다. 일단 케일런이 쓰던 무구다.

내겐 필요가 없는 것이어서 경매장에 홀랑 팔아넘겼다. 그 결과 금 35킬로그램에 해당하는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케일런은 해골병사가 되어 내 곁에서 같이 살아간다. 그 덕에 놈이 머물던 섀도우타운의 주택도 홀라당 내게 됐다.

"케일런, 앞으로 내가 여기서 지내도 되겠지?"

내 물음에 케일런이 답해왔다.

"물론입···니다. 주인이시여. 뜻대로···."

백골로 다니는 게 안쓰러워서 케일런에겐 낡은 갑옷을 입혀 놨다. 물론 그 갑옷도 케일런의 집에 굴러다니던 거다.

"그나저나 집 좋다."

섀도우타운에서 자기 집을 갖고 있다는 건 성공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런 걸 흔쾌히 허락해주는 걸 보면 케일런은 해골이 된 후로 심성이 무척 고와졌다.

'벌써 갱생이 이뤄지는 거구나!'

뭔가 좀 감격스러웠다.

'이게 선한 영향력인가, 뭐, 그런 건가?'

다만 해골이 된 케일런에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착해진 대신 지능이 팍 떨어진 것.

원래 내 손바닥에서 놀아나던 덜떨어진 놈이긴 했지만 지금은 말하는 것도 어눌해졌다. 하지만 차차 고쳐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케일런, 희망을 갖자고. 내가 다시 고쳐줄게.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는다."

그 순간 눈앞의 해골이 몸서리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저 순박하고 착한 놈이 거부감을 보일 리 없을 테니 내 착각이겠지.

"감사··· 합니다."

"좋아. 일단 외출이다."

케일런을 데리고 밖을 나서자, 거리의 뱀파이어들마다 경악했다. 그들은 우리를 보더니 식겁한 표정으로 피해가기 바빴다. 다들 쑥덕거렸는데 내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저 해골바가지가 케일런이라고? 맙소사."

"고개 숙이고 눈 마주치지 말아요! 걸리는 족족 해골로 만들어 버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무시무시한 경고군요. 자기에게 덤비면 저렇게 된다고 온 마을에 떠들고 다니는 셈이니···."

"그것도 그거지만, 케일런의 재산을 몽땅 차지하기 위해 저런 만행을 저질렀다는군요."

"세상에! 드라큘라시여!"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케일런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정말로 한 남자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꺼내기 위한 결단이었다.

아무리 사악한 존재라도 두 번째 기회쯤은 필요할 테니까. 나는 이점을 해명하기 위해 쑥덕대던 놈들에게 다가갔다.

"여러분, 뭔가 착오가···."

하지만 말을 끝까지 할 수는 없었다. 놀란 뱀파이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기 때문이다.

퍼엉! 펑!

어찌나 급한지 연기를 일으키며 동물로 변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늑대랑 박쥐, 쥐새끼까지 다양했다.

'역시 오해를 하고 있군.'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성실한 자세로 저들을 대하다 보면 머지않아 내 진심을 알아주겠지.

나는 이런 점을 케일런에게 설명했다.

"안 그러냐? 결국 너와 내가 따뜻하게 화해한 것처럼 말이야."

"······."

어째서인지 해골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 같이 넉넉한 주인은 하인의 저런 사소한 반항 정도는 못 본 척 넘어가는 아량이 있었으니까.

"루시우스 스타위버 영감을 만나러 가자. 망원경을 사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스타위버의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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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왕국으로 가는 길(1)

***

케일런과 함께 루시우스 스타위버의 작업장에 도착했다.

"주인장, 계십니까?"

안은 별천지였다. 작업실의 천장에는 은은한 빛 아래 별과 행성 등 천제의 모습을 형상화한 장식이 가득했다.

그 아래 작업장으로는 곳곳에 광원이 있어서, 사방에 놓인 렌즈와 유리 공예품을 투과해 어지럽고도 규칙적인 빛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름답군···."

루시우스 스타위버는 뱀파이어치곤 특이하게도 렌즈가 만들어내는 빛에 매혹된 존재였다. 곧 늙수그레한 음성이 대답해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작업장 안쪽에서 스타위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뭔가를 하고 있었던 듯 그의 앞치마는 분진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늙은 뱀파이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뱀파이어로 변하고도 젊음을 되찾지 않고, 인간이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자였다. 기술을 연마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단언하자 스타위버는 작업대 위의 수건에 손을 슥슥 닦으며 어째서인지 물어왔다. 나는 그가 만족할 만한 답을 알고 있었다.

"빛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거든요. 렌즈를 통해 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세상의 규칙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 작업장은 빛의 굴절과 확대, 분산, 그리고 색수차에 관한 예술적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오···! 자네. 이곳의 의미를 알아주는군."

보통 뱀파이어들은 렌즈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끔 망원경을 사러 온 자들도 이 안의 정신 사나운 빛에 학을 떼곤 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런 반응에 스타위버는 늘 섭섭해했다. 한데 자신을 이해해주는 자가 나타나서 그럴까? 그는 무척 반가운 표정이 됐다.

"알다 뿐이겠습니까. 스타위버 님께서 했던 많은 고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말이로군. 하하핫. 내 가게엔 어쩐 일인가?"

"천체용 망원경을 한 개 장만하려고요."

"오, 근사한 걸 찾아왔군. 그거라면 내가 전문이지. 이리 오게."

사실 이렇게 호감을 얻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의 천체관측용 망원경은 1~5등급으로 나뉘는데, 호감도에 따라 판매하는 등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1등급이 제일 좋지만 문제는 비매품이란 것. 나중에 궁극의 렌즈를 만들 수 있는 수정을 구하는 퀘스트가 있는데, 그걸 완료하면 판매한다.

스타위버에게 이빨을 털어서 구할 수 있는 건 최대 2등급이다. 무식한 놈으로 보이면 5등급이나 하나 쥐여 주고 꺼지라고 한다.

'엘프 여왕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2등급 이상이 필요하다. 3등급은 여왕이 가진 것과 동급이라 의미가 없어.'

그래서 게임에선 대화창의 선택지를 잘 골라야 했다. 나야 뭐,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하는지 잘 아니까 문제없었다. 오자마자 렌즈가 어쩌고 한 것도 그 때문이고.

"이건 이번에 개발한 신제품일세. 최고 중의 최고지. 판매하는 물건은 아니네만."

루시우스는 1등급의 제품을 자랑했다. 견물생심이라더니, 저걸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프 여왕이 껌뻑 죽을 텐데···.'

게임에서 안 된다고 포기하긴 아까운 일이다. 애초에 게임에서야 대화창의 제한된 선택지만 있을 뿐이지만, 현실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고.

나는 기왕 온 거 1등급 제품을 노려보기로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가을에 열릴 구혼자 파티에서 레그너 3세가 어깨에 힘을 엄청 줄 수 있을 터.

'어떻게 더 큰 호의를 살까?'

고민하던 나는 현대의 지식을 써보기로 했다. 머릿속을 더듬으니 마침 적당한 게 있었다.

"스타위버 님. 최근 제가 렌즈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낀 걸 수학 공식으로 정리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오? 정말인가?"

나는 그에게 렌즈 방정식을 알려줬다.

(1/f = 1/u + 1/v)

그것은 간단하지만, 중세 수준의 지식을 가진 스타위버에겐 혁명적인 사안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방정식에서 중요한 건 유도와 증명이다. 왜 저런 방정식이 나오는지 그 원리와 과정을 알려줘야 한다. 사실 저 간단한 방정식도 그 과정을 풀면 제법 복잡했다.

다행히 과학 시간에 졸지 않아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기는 물체의 위치고, 이쪽은 곡률의 중심입니다. 또 이쪽은 렌즈에 비친 상의 크기이며······."

내 설명을 듣던 스타위버의 눈이 점점 멍해졌다.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간 경험으로 이해하던 기술을 명쾌하게 정량화하는 공식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의 난잡한 지식이 수학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겠지.

"······다, 다시 한번 설명해 주겠습니까? 선생님?"

수백 년을 살아온 스타위버가 갑자기 존대를 하며 부탁해 왔다.

"말씀을 편히 하셔도 됩니다. 스타위버 님."

"아닙니다. 제게 그 지식을 부디!"

날 붙잡는 스타위버의 아귀힘이 엄청났다. 마치 무협에서 심대한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무사 같아 보였다.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같은 공식을 오목렌즈에서 유도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 어서!"

이어서 한참을 설명했다. 그것은 스타위버에게 거대한 충격을 준 듯했다.

'이제부터 더 나은 렌즈를 설계할 수 있겠지. 철저히 계산해서 만들 게 될 테니까.'

혼자 내가 길게 풀어준 공식을 살펴보던 스타위버는 급기야 내 손을 덥석 잡아 왔다.

"크흐윽! 선생님, 오늘에서야 제가 이런 가르침을 얻다니, 이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난 건지!"

"아하하, 과찬이십니다."

극찬을 아끼지 않는 스타위버를 보며, 이게 이세계로 가서 느낄 수 있는 뽕인 건가 싶었다.

나는 이 틈을 이용해 슬쩍 원하는 바를 말해봤다.

"혹시 이 최신식 망원경을 판매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스타위버 님의 명작을 반드시 소장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1등급 망원경을 얻으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솔직히 엘프 여왕의 반응이 궁금해서 가을 구혼자 파티에 꼭 참석하고 싶을 정도였다.

'엘프 여왕이 레그너 3세에게 매달리는 거 아닐까? 제발 망원경 좀 달라고.'

게임 내에선 2등급 망원경만 가져다줘도 여왕의 호의를 잔뜩 얻을 수 있었다. 1등급이면 차원이 다를 터. 그런 기대를 가지고 묻자 스타위버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크하하하. 선생님 같은 분께 제 졸작이라도 드릴 수 있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공짜로 드릴 테니 가져가시지요!"

"아니, 어찌 공짜로 가져가겠습니까?"

이곳에서 망원경은 대단히 비싼 품목이다. 그런데 천제관측용으로 따로 제작한 거니 그 가격은 가히 천문학적일 터.

솔직히 케일런에게 얻은 금화가 다 털려도 그러려니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짜라니. 값을 지불하겠다고 주머니를 열자 스타위버가 늙고 거친 손으로 극구 만류했다.

"안 됩니다! 방금 알려준 지식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던 것입니다. 이 망원경이라도 드릴 수 있어야 늙은이의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아니, 망원경만이 아니라 뭔가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결국 나는 스타위버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스타위버 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는 얼른 새로 얻은 지식에 몰입하고 싶은 것 같아 자리를 피해줬다. 1등급 망원경은 집으로 배달해 준다고 했다.

"잘 됐군. 흐흐."

기대 이상의 성과에 흡족해하며 밖으로 나오자 뜻밖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크림슨코트 클랜의 수장인 루신다였다.

"잠시 걷지."

루신다는 옆으로 턱짓을 하며 제안해 왔다.

* * *

루신다는 섀도우타운 밖의 한적한 오솔길로 날 데리고 갔다. 딱히 적대적인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대뜸 한마디 했다.

"상당히 박식하더라."

"혹시 들으셨습니까?"

"미안,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귀가 밝은 편이라. 솔직히 스타위버의 괴팍한 취미에 어울려줄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별거 아닙니다."

조용히 걷던 루신다는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너, 크림슨코트에 들어오지 않을래?"

설마 여기서 스카웃 제의를 받을 줄이야! 루신다는 사람 보는 눈이 무척 까다로운데 내 어디가 마음에 든 건지 모르겠다.

"최고의 대우를 해줄게. 얼마 안 가 간부로 올라설 수도 있다. 네 실력과 잠재력이면 충분해 보여."

생각지도 못한 대단한 제안이었다. 크림슨코트는 여러 뱀파이어 클랜 중에서도 손에 꼽는 조직이다.

그곳 수장이 간부 자리를 약속하다니···. 루신다가 날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었다.

'초특급 유망주로 보는 모양이군.'

이적시장에 풀리기 전에 어떻게든 낚아채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네가 밖에서 스킨크들과 꽤 긴밀한 관계라는 걸 알아. 하지만 세계의 이면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뱀파이어의 도움이 필요하지."

솔직히 굉장히 좋은 제안이었다. 뭣보다 언젠가 블라르 백작과 문제가 생기면 루신다가 도와줄 테고.

왜냐하면 루신다는 블라르 백작의 옛 애인이자 원수기 때문이다. 몹시 사이가 안 좋기 때문에 발 벗고 나서줄 게 틀림없다.

"제안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루신다 님."

"바로 물질 않는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앞서 걷던 루신다는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고 어딘지 멍해 보이는 얼굴이 그녀의 잿빛 머리칼과 잘 어우러져 뭔가 무해한 이미지였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굴면 큰일 난다. 저리 보여도 뱀파이어 중에는 손에 꼽을 강자였으니까.

"아직은 조직에 소속되고 싶지 않습니다. 할 일이 많거든요."

"그런가? 알겠다."

거절당했음에도 루신다는 질척거리지 않았다. 대신 작은 수정구를 건네줬다.

"내 직통 연락처다.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말해."

* * *

섀도우타운에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스타위버가 만든 거대한 망원경과 함께였다. 이 귀중한 물건은 묵직한 나무상자에 잘 포장된 상태다.

'참 별일이 다 있었네.'

망원경 하나 사러 가서 딥델버에 케일런에 루신다까지···. 아주 다이나믹했다. 그래도 최고의 성과를 얻어서 기분이 좋았다. 지금 나는 게임에서 했던 진행보다도 훨씬 잘하고 있었다.

'딥델버랑 케일런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시점에 루신다의 스카웃을 받은 적은 없었지. 게다가 1등급 망원경을 구한 것도 처음이고.'

이런 성공들이 앞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 건 확실해 보였다. 나는 점점 게임에서 보지도 못했던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벤트들이 기대되네.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볼지도 모르겠어.'

일단 바로 드워프 왕 레그너 3세를 만나러 갔다.

"폐하, 최고의 망원경을 구해왔습니다!"

당연히 레그너 3세는 반색했다.

"오오! 뱀파이어 공! 해냈군. 참, 이것 좀 보게."

그가 내민 건 엘프 궁정에서 도착한 가을 구혼자 파티의 정식 초대장이었다.

* * *

뱀파이어 다르코 블라르 백작.

어둠의 숲의 주인이며, 잔혹하고 강력한 뱀파이어로 이름 높은 존재다. 뱀파이어 중에서도 그의 명성은 가히 발군이었다.

뭐랄까, 매사 비밀이 많은 뱀파이어치고 블라르 백작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존재였다. 민간에서는 우는 아이는 블라르 백작이 잡아간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뱀파이어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도 부합했다. 키가 크고 위풍당당한 중년인으로, 피처럼 붉은 눈으로 상대를 매섭게 쏘아보는 자였다.

아무리 담이 센 자라도 그의 앞에 서면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있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골치 아파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뱀파이어의 숙적이자 거룩한 도살자라 불리는 태양 교단이었다.

사방에 정보원을 뿌려놓고 갖가지 이야기를 수집하는 블라르 백작은 최근 도는 소문에 곤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뭐라? 최근 이 몸이 작정하고 태양 교단을 방해하고 있단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이더냐?"

블라르의 물음에 그의 충실한 수하인 새블릿 남작부인이 답했다.

"네, 이런 이야기가 돌더군요. 블라르 백작이 어둠의 숲에서 오크를 충동질해 태양 교단의 공격했다."

"뭐?"

"또 드워프를 상대로 심은 태양 교단의 끄나풀을 잡아내 톡톡히 망신을 줬다는 것도 있습니다. 덕분에 태양 교단을 증오하는 자들이 연신 백작님의 위명을 칭송하고 있어요."

그 말에 블라르 백작은 식은땀이 나지 않음에도 인간 시절의 버릇대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 누가 그런 미친 짓을?"

블라르는 잘 알고 있었다. 태양 교단의 대적자란 위명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걸.

"다들 백작님께서 하셨다고 하던데요?"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고, 블라르 백작은 몹시 억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안 했는데···?"

그러자 수하인 새블릿 남작부인이 당혹한 얼굴이 됐다. 그 모습에 블라르 백작은 부하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음을 다시 상기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깔고 큰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쳤다.

콰앙!

"감히 어떤 놈이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건가!"

위엄 넘치는 음색이 대전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제야 새블릿 남작부인은 안도한 얼굴이 됐다. 그 외에 수하들도 얼굴 고개를 숙여 복종의 태도를 보였다.

블라르 백작은 그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는 어서 가서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봐라!"

"명을 받듭니다! 백작 각하!"

열의가 넘치는 대답과 함께 우르르 사라지는 부하들.

그 모습에 블라르 백작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권좌에 몸을 묻었다.

"후우···."

블라르 백작은 그냥 사는 게 피곤했다. 누군지 자기를 사칭하는 놈도 짜증 났고, 강한 척 연기하는 것도 점점 버거웠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무력이나 마법이 약해진 건 아니다. 약해져 가는 건 그저 그의 마음일 뿐.

창밖을 보니 가녀린 잎새 하나가 떨어질 듯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블라르 백작은 어쩐지 그게 자기 처지 같아서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그는 남몰래 품에서 작은 시집을 꺼냈다. 그것은 최근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의 작품집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R3'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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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왕국으로 가는 길(2)

***

레그너 3세는 천체관측용 망원경을 받고는 싱글벙글했다.

"이것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란 말이지?"

"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망원경 중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엘프 여왕은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을 테니 크게 놀랄 것입니다."

"참으로 기쁜 말이군. 어서 선물하고 싶구만. 자, 소렌이여. 그대는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무엇을 받고 싶은가?"

어떤 걸 요구할지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폐하, 적당한 크기의 교회를 하나 지어주십시오."

일전에 룩스 움브라를 처단하고 여신의 사자인 세티스가 강림해 한 말이 있다. 룩스 움브라가 죽은 곳을 성지로 삼고 교회를 건립하라고.

문제는 스킨크들이 둥지 복구에 바쁜 데다가 인력도 자원도 충분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킨크들은 망하는 것만 간신히 면한 거지들이었다.

룩스 움브라가 그들이 사는 봉우리를 온통 헤집은 탓에, 조상 대대로 구축한 갱도와 지하시설의 태반이 무너져 버렸다. 그러니 어머니 스킨크의 교회를 만드는 것도 지지부진할 수밖에.

'문제는 만들어도 볼품없는 게 나올 거 같단 말이지.'

그래서 레그너 3세에게 부탁한 것이다. 드워프라면 건축술의 달인이니 더없이 좋다. 게다가 스킨크들은 반드시 자기들 손으로 어머니의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집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크고 웅장한 게 생기면 좋다고 스에에에! 거릴 놈들이었다.

"교회를? 어디에 말인가?"

나는 사정을 대강 설명했다. 그러자 레그너 3세는 받아들였다.

"좋아. 다만 교회의 크기는 자네의 공을 반영해서 지어주지."

"감사합니다. 폐하."

말은 저렇게 해도 예상보다 더 괜찮은 건물을 올려줄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레그너 3세에겐 내가 계속 필요하니까.

사실 이번 일을 부탁하는 것에는 정치적 의도도 있긴 했다.

현재 스킨크는 어려운 시점이다. 일곱 봉우리의 다른 호전적인 부족들은 스킨크가 약해진 걸 알면 약탈하려 들지도 모른다.

한데 갑자기 드워프 인부들이 잔뜩 모여서 스킨크의 앞마당에서 건물을 올리고 있다? 당연히 약탈자들 입장에선 매우 난처해진다.

섣불리 공격하다 드워프 인부들이 휘말려서 다치거나 건물이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외교적 문제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드워프는 일곱 봉우리 최강의 종족. 척을 져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놈들은 아무도 없었다.

'일종의 인계철선 같은 거지.'

드워프들 똥고집을 고려해 볼 때 누가 쳐들어와도 공사가 우선이라며 물러나지 않을 테니 효과도 만점일 터.

물론 이런 꿍꿍이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현실적으로 드워프들이 버티고 있으면 아무 일 안 날 확률이 제일 높다.

"한데, 그··· 뱀파이어 공."

레그너 3세가 날 멋쩍은 기색으로 불렀다. 뱀파이어 공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부탁할 게 있나 보구만. 뭔지 짐작이 가긴 했다.

"혹여나 짐과 같이 구혼자 파티에 가줄 수 있겠나? 옆에서 조언을 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레그너 3세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물어왔다.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상당히 민망한 듯했다.

사실 나도 레그너 3세를 따라 엘프 왕국을 방문할 생각이 있었다. 일단은 드워프와 엘프의 동맹을 발전시켜 후일 태양 교단이 입지를 다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다.

'뱀파이어 엘프 중에는 희귀한 데이워커가 있지.'

데이워커라 하면 낮에도 활동하는 게 가능한 돌연변이 뱀파이어들이다.

듣기만 하면 뱀파이어의 약점을 벗어던진 궁극의 존재 같지만, 뭐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데이워커는 약했다.

이유는 명확한데, 놈들은 태양에도 피해를 입지 않을 만큼 뱀파이어가 가진 어둠을 조금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애매하단 말이야.'

하지만 내겐 그걸 해결할 방법이 있다. 일단 놈들에게서 돌연변이인 데이워커 인자를 채취한 뒤에, 뱀파이어 성녀의 도움으로 힘도 잃지 않고 낮에도 멀쩡한 궁극체로 변이가 가능해진다.

'이게 내가 1인 사업자인 성녀를 택한 이유 중 하나다.'

솔직히 태양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해만 뜨면 통돼지 바베큐처럼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니 정말 살 수가 없었다. 반드시 대책이 필요했고, 그건 엘프 왕국에 있었다.

안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갈등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호그너 3세··· 아니, 레그너 3세에게 뭔가 더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일단 고민을 좀 해보겠습니다. 폐하, 대신 최대한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뱀파이어 공. 그거면 충분하네."

레그너 3세는 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려면 뭔가 성의가 필요하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

레그너 3세를 만난 뒤 보금자리인 아단의 골짜기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나를 제일 먼저 맞아준 건 에레미나였다.

"주인님!"

녀석은 이전보다 훨씬 활기찬 모습이다. 꽤 무표정한 아이였는데 이젠 제법 웃을 줄도 알았다.

"권속 에레미나여, 잘 있었냐?

"네!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에레미나는 해골 병사 두 마리를 데리고 왔다. 공부하던 사령술이 성취를 이룬 것이다. 쑥쑥 자라는 키만큼 배움도 빨랐다.

우직하게 서있는 해골을 보자 친우인 케일런이 생각났다. 집은 잘 지키고 있으려나?

"잘했구나. 에레미나."

"주인님께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간만에 만난 우리는 두런두런 얘기하며 걸었다. 나는 녀석의 성취를 축하하며 뭔가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사실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데?"

"무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인님."

"아···. 무덤은 꼭 필요하지."

네크로맨서에게 무덤은 중요하다. 시체를 보관하고, 필요하면 사령술로 다시 일으키기도 한다. 일종의 실습장이랄까? 필수라 할 만한데 에레미나는 아직 무덤이 없었다.

"좋다. 약초밭 근처에다 무덤을 만들어야겠군. 무덤 옆에는 네 실험실도 따로 지어주마. 스킨크 인부들을 불러야겠군."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님!"

나는 녀석이 기특해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뭐라고 할까? 공부 잘하는 딸내미가 있었다면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검술 선생도 있어야 할 텐데···."

에레미나는 별의 기운을 타고나 문무겸전의 인재. 마법뿐 아니라 무기술도 익혀야 했다. 역시 선생을 붙여줄 필요가 있었다.

'스킨크 중에도 검의 명인이 있지만, 놈들의 검은 우리가 쓰는 거랑 너무 다르단 말이지.'

고민하다 생각난 게 발레나 공녀였다. 현재 충실한 선전도구로 쓰이고 있는 그녀는 검술에 조예가 깊었다.

'한 번 검토해 봐야겠군. 성기사가 뱀파이어의 선생이 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

모처럼 평화로운 시절이 이어졌다. 솔직히 이 세계로 와서 처음인 것 같았다.

여름의 끝자락과 함께, 나는 한껏 여유를 맛보고 있었다. 물론 딥델버 가문에서 온 드워프들은 고생 중이었지만 말이다.

"깊게 파라! 생각보다 유량이 많다."

드워프 작업반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가주의 명령으로 인부들을 데리고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얼마 전에 내가 딥델버에게 했던 요청 때문이다.

-딥델버여, 골짜기에 상하수도를 설치하고 싶은데 도와줄 거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공사비가 많이 드실 텐데···?

-응? 공사비? 지난번에 선급금을 줬잖아.

-네?

-케일런한테 받은 돈 말이야. 그걸로 상하수도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건물 좀 올릴 생각이다. 딥델버, 네가 힘 좀 써줘.

당연한 얘기지만 놈이 먹은 돈보다 수십 배 많은 공사비가 쓰일 예정이었다.

-······크흑, 알겠습니다.

현재 아단의 골짜기에는 제대로 올라간 건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상하수도부터 깔려는 것이다.

다행히 골짜기에는 유량이 풍부한 개천이 있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드워프들은 야밤에 불까지 켜놓고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농담으로 공사 기일이 늦어지면 인부를 하나씩 잡아먹겠다고 했는데, 설마 그것 때문일까?

"다켄발트 님!"

그때 주변을 순찰하던 스킨크 경비대원 하나가 내게 달려왔다.

"오, 고생이 많다. 무슨 일이지?"

최근 경비를 위해 스킨크족 서른을 데려왔다. 별로 어려운 일도 없고 급료도 잘 줬기 때문에 녀석들은 아주 만족했다.

"드워프 왕이 보낸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나가보니 선물을 가져온 드워프들이 잘 포장된 상자를 내려놓고 있었다.

바로 뜯어봤다. 그것들은 은제 장검과 단검, 그리고 팔찌였다.

은제검은 내가 부탁한 것인데 나중에 다른 뱀파이어를 효과적으로 찔러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왕국 최고의 장인이 은을 코팅했다고 한다.

"예기가 보통이 아니군!"

검을 뽑아보고 그 품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을 가져온 드워프들은 뱀파이어가 은제 검을 보고 좋아하는 걸 기묘하게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팔찌는 뭐지?'

팔찌는 달라고 한 게 아니어서 의아했는데, 사용법이 적힌 쪽지가 같이 있었다.

읽어보니 나 같은 언데드의 사이한 기운을 가려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인간으로 위장하는데 제격이었다.

'때마침 좋은 물건을 보냈구나.'

안 그래도 엘프 왕국을 방문하는 건 때문에 성녀께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그너 3세가 팔찌를 챙겨줘 소원권을 하나 아끼게 됐다.

기뻐하는 날 보더니 선물을 가져온 드워프 하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다켄발트 님. 그런데 폐하께서 이번에 엘프의 왕국으로 향할 때 혹여 동행할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이 정도 받아먹고 모른 척하긴 그렇지. 나도 엘프 왕국에 가야 할 이유가 있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다른 구혼자 놈들을 모조리 털어먹고 반드시 레그너 3세가 엘프 여왕과 가까워지게 만들겠다. 친구로만 만들어도 성공이고, 연인이면 대박, 결혼이면 그야말로 로또급 초대박이다.

선을 주선하고 잘 되면 옷 한 벌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왕과 여왕이다.

받아낼 게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 무수한 금은보화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드워프의 어깨를 잡았다.

"동행하겠다. 걱정하실 것 없다고 전하도록. 폐하께선 원하는 바를 이루실 것이니."

***

닷새 뒤, 드워프 왕의 행렬이 스톤헤븐을 출발했다.

레그너 3세는 훌륭하게 차려입고 멋진 마차에 올라탔다. 그 주위는 왕국에서 엄선된 삼백여 명이 빈틈없이 둘러쌌다.

드워프들은 두꺼운 철갑으로 무장했고, 일부는 커다란 산양을 탄 기병들이었다. 병기가 막 가을에 이른 햇살 아래 번쩍거렸다.

그 행렬은 참으로 웅장해서 누구라도 고개를 돌려 한 번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일곱 봉우리에 사는 주민 일부는 그걸 비웃었다.

"난쟁이가 주제도 모르고 엘프 여왕에게 청혼하러 가는군!"

"망신만 당할 거예요. 이번에 얼마나 근사한 구혼자들이 많이 오는데요!"

하지만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드워프 왕 레그너 3세에겐 이 지혜주머니 소렌 다켄발트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구, 죽겠다."

나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 천을 꽁꽁 싸매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관이 없으니까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신체개조로 불면불휴를 달성하긴 했지만, 특유의 피로감은 어쩔 수 없었다.

"자네 엄살도 심하더군."

레그너 3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왕의 마차에 타는 걸 허락받았다.

"폐하께서도 햇빛에 지져지면 왜 그러는지 아실 겁니다."

아까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커튼의 틈새로 햇빛이 파고들었다. 멍하니 있던 나는 볼에 불이 붙었고, 아프다고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태양 새끼는 좋아하려고 해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곧 해가 질 테니 조금만 참게나."

드워프 왕은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작은 발광석을 곁에 두고 종이에 뭔가 끄적이고 있었다. 슬쩍 보니까 무슨 시를 쓰는 중이다. 뭐냐고 물어보니 자신의 뮤즈에게 다가갈수록 점점 많은 시상이 떠올라 펜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마차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고성과 함께 병장기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까지 들려온 것이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사건은 나도 예상 못 한 것이다. 애초에 드워프 왕이 이 시점에 구혼자 파티로 가는 건 오롯이 나 때문이다. 게임 시나리오에는 없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폐하!"

누군가 다급히 보고를 하러 오자 레그너 3세는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나는 그 즉시 흘러들어오는 햇살을 피하고자 천을 뒤집어썼다.

"무슨 일이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삽시간에 넷이 죽었습니다."

"뭐? 뭐라? 누가 습격한 것이냐!"

"습격은 아니고, 웬 거인 하나가 협로를 막아서서 통행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비가 붙어 전사 넷이 죽었습니다."

"이런 고얀!"

레그너 3세는 분통을 터뜨리고 뛰쳐나갈 듯하다가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물어봤다.

"놈이 무슨 통행세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러는가? 큰 금액이 아니라면 몇 푼 주고 치우는 게 현명할 것이다."

"저, 그것이···."

"어서 말을 해보라."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자는 곧 보고했다.

"통행세로 폐하의 수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라!"

그 순간 나는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음······."

수염은 드워프의 체면.

특히나 지금처럼 구혼자 파티에 갈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왕이 수염을 깎고 등장한다면 개망신이 따로 없으니까.

"이런 쳐죽일! 짐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듯 레그너 3세는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나는 황급히 그를 잡았다.

"폐하."

"이것 놓게나!"

"일단 제 말을 들어보시지요. 뭘 선택하던 적의 의도대로 놀아날 확률이 높습니다.

"뭐라?"

거인을 상대로 수염을 내주면 엘프 왕국에 갈 것도 없이 돌아가야 한다. 아니, 그 정도로 그치지 않겠지. 스스로 존엄을 포기했으니 왕좌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결국 남은 건 전투밖에 없는데, 여기에 함정이 있을 것 같았다.

'드워프에게 왕의 수염을 운운했으니 무조건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이걸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하는 건데···.'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폐하, 어쩌면 다른 구혼자가 폐하를 방해하고 나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 거인을 사주해서 말입니다."

"사실이라면 고약한 일이군···. 참으로 비열하단 생각이 들어. 어찌하면 좋겠나?"

"폐하, 여기서부턴 제게 맡기시지요. 일단 전사들을 물리십시오. 곧 해가 떨어질 테니 제가 거인을 만나보겠습니다."

일부러 나선 것에는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거인이면 피가 많다. 피가 많다는 건 오래 먹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침 새 도시락을 구할 때도 됐지.'

본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맛있는 도시락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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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왕국으로 가는 길(3)

레그너 3세는 내 요청대로 행렬을 뒤로 물렸다.

이에 거인은 콧김을 성대하게 내뿜으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 모습에 레그너 3세는 다시 이성을 잃으려고 해 서둘러 말렸다.

"폐하, 제가 실패하면 언제든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짧은 기다림에 불과할 것입니다."

"···크윽. 알겠네."

해가 지자 나는 마차 밖으로 나서 길옆의 수풀로 향했다. 그리고 박쥐로 변해서는 날아올랐다.

파닥파닥!

열심히 날갯짓을 하자 저 앞에 거인의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놈은 좌우로 절벽이 높게 솟아오른 협로 한가운데 떡하니 앉아 있었다.

'아는 거인일 확률이 높아.'

지금 상황 자체가 게임 스토리와는 틀어졌지만, 엘프 왕국이나 그 근방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같을 터.

엘프 왕국 주변에 거인이 몇 있는데 당연히 다 알고 있었다.

'누군지만 확인하면 대책이 나오겠지.'

일단 근처의 절벽에 조용히 달라붙어서 거인을 살펴봤다. 원래 거인은 둔한 편이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곧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토르페아잖아?'

툭 튀어나온 이마에 주걱턱, 치열이 엉망이 이빨,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쥐새끼 같은 턱수염에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조잡한 외투까지. 틀림없이 토르페아라고 불리는 거인이다.

'엘프의 근심 토르페아가 여기 왜?'

토르페아란 저 거인은 이 일대에 터를 잡고 엘프를 무지하게 괴롭히는 녀석이었다. 크고 강한 데다가 드래곤 가죽을 걸치고 있어 엘프의 활도 안 박혔다. 엘프에겐 아주 골치 아픈 적이었다.

'저놈 분명히 다크엘프 공작인 마레크를 위해 일하고 있지.'

애초에 토르페아가 엘프 근처에 자리 잡고 패악질을 부리는 게 다크엘프 마레크의 사주 때문이다. 외부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마레크 놈이 이번에 구혼자로 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다크엘프 마레크 공작은 가장 유력한 구혼자 가운데 하나이다. 다크엘프면서도 엘프들 사이에서 꽤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존재다. 실제로 이번에 여왕이 내키지도 않는 구혼자 파티를 연 것은 마레크 공작의 압력 때문이었다.

'저 거인이 여기서 레그너 3세를 방해하는 이유는 뻔하구만.'

마레크 공작이 구혼자 중 하나인 드워프 왕을 망신 주기로 작정한 거다.

레그너 3세는 원래 이 시점에서 구혼자 파티에 가지 않으나, 나 때문에 자신감을 얻고 출발하게 됐다. 마레크 입장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니 근처에 있던 거인 토르페아를 급히 보낸 것 같았다.

'이렇게 한 수를 둔다 이거지?'

이번 구혼자 파티는 마레크 공작과의 대결이라고 봐도 좋았다. 다른 구혼자들도 있지만 사실상 쩌리에 가깝다.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새끼를 구워삶아야겠군. 나는 인간형으로 변신해서는 토르페아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왕의 후예시여."

갑작스러운 내 출현에도 토르페아는 별달리 놀라지 않는다. 담이 큰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고.

"음?"

그의 성격이면 눈앞에 거슬리는 놈을 즉각 터뜨려 죽여야 맞다. 실제로 아까 죽었다는 네 명의 드워프 전사는 눌린 알루미늄 캔처럼 변해버렸더라. 옆에 터져 나온 케첩은 덤이고.

하지만 내가 언급한 바위왕의 후예란 말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사실 토르페아는 위대한 바위왕의 혈통이 아니다. 처음에는 허세를 부리기 위한 거짓이었으나 세월이 흐르자 스스로 진짜 그렇게 믿게 된 경우였다.

나는 고대의 바위왕에게 하던 예법에 맞춰, 주변의 돌덩이 세 개를 내 앞에 놓고는 인사했다.

"이 작은 자가 하늘까지 닿을 위대한 혈통에게 인사드립니다."

"크르르. 미천한 게 예법을 좀 알고 있구나."

자신을 추켜세워 준 게 기꺼웠던지 토르페아는 낮게 웃어댔다. 그 웃음은 마치 엠프로 울리는 묵직한 베이스 같았다.

"무슨 일이지? 작은 자여."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저는 현재 드워프 왕의 신하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정체는 다크엘프 마레크 공작에게 충성하는 자입니다."

"마레크 공작이라?"

토르페아는 바로 관심을 보였다. 그 역시 마레크의 끄나풀이니 말이다. 본인은 동등한 동맹이라 믿지만 실상 그는 교활한 마레크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네놈이 진짜 마레크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어찌 믿으란 말이냐. 아니, 그것보다 무슨 일이지?"

여기서 어찌 답하냐가 중요했다. 눈앞의 거인은 마레크 공작이 레그너 3세를 방해하기 위해 보낸 존재다. 하지만 이용하기 따라서 이건 좋은 기회가 될 터였다.

어떤 식으로 토르레아를 농락할지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별로 열심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위대하신 분께서도 마레크 님과 함께하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려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드워프 왕은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 난쟁이가? 무엇을?"

"지금 드워프 왕은 전전긍긍해 하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분께서 그 고약한 놈의 수염을 요구했으니 말이죠."

"크르르르! 분명 똥줄이 탈 것이다. 이 몸과 싸울 용기는 없을 테니."

"그래서 그 비겁한 난쟁이가 속임수를 준비했습니다."

"무엇인지 어서 말해라! 인간!"

"드워프 왕은 얼마 뒤 수염을 바치겠다고 직접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수염은 잘 말아서 옷 속으로 넣고, 겉에 붙인 가짜 수염을 잘라주는 척 위대하신 분을 속일 예정입니다."

"이런 비열한! 정말 난쟁이다운 치졸한 수법이구나!"

거인은 대체로 시력이 안 좋다. 특히 드워프 같이 자기보다 작은 건 미간을 좁히고 자세히 봐야 얼굴을 구별할 정도다. 그런 속임수를 쓰면 속아 넘어가기 쉬웠다.

"그러니 만약 드워프 왕이 오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바로 앞에서 살펴보십시오. 위대하신 분의 지엄한 눈길이 노려보고 있으면 감히 드워프 왕은 속임수를 쓸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괜찮은 생각이구나!"

"분명 쩔쩔매다가 도망칠 게 뻔합니다."

"크하하핫! 그것참 마음에 드는구나."

내 이야기가 몹시 흡족한지 토르페아는 무릎을 치며 웃어댔다. 하지만 놀랄 만큼 빠르게 정색하며 날 노려봤다.

"다 좋다. 하지만 네놈이 공작의 부하라는 걸 어떻게 믿냐는 말이다. 이놈. 해명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줄 알라."

아마 보통의 경우면 눈을 부라리는 거인에게 질려서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겠지.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얘기다. 토르페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님께서 위대하신 분께 뭘 약속했는지 대강 들었습니다."

"네놈! 감히!"

"진정하십시오. 경박하게 떠벌리려는 게 아닙니다. 후일 그 일을 벌일 때 저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크흠······."

토르페아에겐 평생의 소원이 하나 있으니 자신의 진정한 조상이라 믿는 바위왕의 무덤을 열어보는 것이다. 무덤 안에 자신을 거인들의 왕으로 만들어줄 아티펙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고대의 바위왕은 지금의 열화된 거인과 다른 상위 종족이었다는 것. 그 때문에 토르페아는 무덤을 발견하고도 안에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입구를 열기 위해선 매우 고등한 마법이 필요하니까 말이지.'

결국 토르페아는 다크엘프 마레크 공작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이런저런 일을 해주고 있었다.

'게임 스토리에선 그러다 뒤통수 맞고 버려지지만 말이야.'

원래 마레크 같은 놈과 거래하면 끝이 그런 법이다.

"알겠다. 네놈 조언대로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일단 믿도록 하지."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토르페아 님. 만약 열 받은 드워프 왕이 그대로 공격해 오면 어찌해야 할지······."

레그너 3세도 대단한 강자다. 거인 토르페아가 한 수 위긴 해도 왕에겐 강력한 친위대가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드워프가 많이 죽긴 하겠지만, 토르페아도 살아남긴 힘들다.

한데도 저런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가 싶어 질문을 빙자해 떠본 것이다.

"크흐흐흐, 그것도 나쁘지 않지. 놈들이 이 몸을 공격한다면 최악의 수가 될 것이다. 이 절벽 위에 부하들을 매복시켜놨으니 걱정할 것 없다."

아, 매복인가. 나름대로 철저히 대비했구나.

레그너 3세가 수염을 넘겨주거나, 도망치면 체면을 상한다. 그렇다고 덤벼들면 매복에 걸려 심대한 피해를 입을 터. 어느 쪽이든 다른 구혼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일이었다.

"과연, 현명하시군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돌아가야 하나?"

"드워프 왕은 절 신뢰하고 있습니다. 옆을 지키고 있어야 의심하지 않습니다. 수염으로 장난질 할 때 꼭 제 말을 명심해 주십시오."

"알겠다."

토르페아는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고, 나는 얼른 그곳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레그너 3세에게 모든 걸 일러바쳤다.

"폐하! 매복이 있습니다!"

"뭐라!"

물론 오는 길에 박쥐로 변해서 절벽 위쪽을 살펴봤다. 사악한 놀과 버그베어 무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근심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 그저 사슬과 낫을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쓸 훌륭한 몽둥이 하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반드시 폐하를 영웅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후 어떤 식으로 할지 자세히 설명에 들어갔다.

* * *

레그너 3세와 친위대가 거인을 향해 출발했다. 나 역시 박쥐로 변해 뒤따라갔다.

곧 레그너 3세를 위시로 한 일행은 거인 토르페아 앞에 도착했다. 5미터가 넘는 거인 앞에 서니 드워프의 왕조차 무슨 토끼처럼 작아 보였다.

"하찮고 작은 것들의 왕아. 내게 수염을 깎아 바칠 준비가 되었는가?"

"크흠! 물론이다. 이것으로 우리 사이에 마찰이 없길 바란다."

토르페아와 레그너 3세가 대화하는 사이에 조심스럽게 날아 그들의 머리 위쪽 절벽에 달라붙었다.

"내 수염을 깎겠다."

레그너 3세가 자신의 수염을 붙잡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친위대가 비통한 신음을 흘렸다.

"폐하···!"

"어찌 이런 일이!"

지켜보니 드워프들도 의외로 연기를 썩 하지 않나. 레그너 3세는 애써 얼굴을 찡그린 채 단검을 자신의 수염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내 조언대로 토르페아가 고개를 숙여서 레그너 3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작은 것들의 왕아. 설마 내 눈이 좋지 않다고 가짜 수염을 자르려는 건 아니겠지? 바로 앞에서 지켜볼 테니 어디 해 보거라."

"아, 아니!"

레그너 3세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토르페아가 큭큭 거렸다.

"이다지도 비열할 줄이야. 크흐흐!"

이제 토르페아는 레그너 3세를 실컷 비웃고 조롱하려 할 것이다. 나만 없었다면 말이지.

토르페아가 낮은 웃음을 흘리던 순간 이미 나는 변신을 풀고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몽둥이로 거인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빠각!

무슨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거인의 두개골은 두껍고 단단했지만, 내 힘도 가히 초인적이다.

"커억!"

토르페아는 이마를 땅에 박으며 나자빠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놈의 머리칼을 양손을 붙잡아 땅쪽으로 당겼다.

"폐하! 지금입니다! 눈을 찌르십시오!"

레그너 3세는 기다렸다는 듯 양손에 단검 하나씩을 들었다. 토르페아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내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있어서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련한 전사인 레그너 3세에게 그 정도 틈이면 충분했다.

푹! 푹!

"끄아아아아!"

거인의 비명이 협로를 쩌렁쩌렁 울리며 진동했다. 양쪽의 절벽에서 우르르 돌가루와 먼지가 쏟아질 정도였다.

토르페아는 간신히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그 순간 나는 거인의 몸을 타고 있었다.

"낫!"

내 외침에 뒤에 있던 왕의 친위대가 두 자루의 낫을 내게 던졌다. 그것은 끝이 사슬로 연결된 물건이었다.

턱! 터억!

나는 양손에 붙잡은 낫을 찍어가며 빠르게 거인의 가슴팍까지 타고 올랐다.

중간에 거인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나를 솥뚜껑보다도 큰 손으로 잡아 으깨려 했지만, 요리조리 피해 결국 얼굴까지 올랐다. 그리고 두 개의 기다란 낫을 놈의 양쪽 눈에 각각 박아 넣었다.

"쿼어어어어어!"

다시 한번 토르페아가 괴성을 질러댔다. 그 소리에 놀라 절벽 위에 매복해 있던 놈들이 다 아래를 내려다볼 정도였다.

놀과 버그베어들은 우두머리가 당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애초에 놈들에게 충성심이라곤 없으니 당연했다.

나는 그대로 뛰어내리며 레그너 3세에게 외쳤다.

"폐하! 잡아당기십시오!"

그 말과 함께 낫에 연결된 기다란 사슬줄 두 가닥을 레그너 3세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

레그너 3세는 과연 드워프다운 괴력을 발휘했다. 사슬과 연결된 토르페아는 격통에도 있는 힘껏 버텼다.

"이 몸은 바위왕의 후손! 난쟁이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크아아아!"

하지만 드워프의 힘은 굉장했다.

팅! 티잉!

드워프의 근육이 부풀며 갑옷 여기저기가 풀어지며 연결 부위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옷에 달린 작은 장식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보통 갑옷이란 안에 받쳐 입는 누비옷 때문이라도 헐렁한 편인데, 삽시간엔 근육이 얼마나 부풀어 오르면 저렇게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인간의 체질로는 따라 할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크아아압!"

레그너 3세의 기합과 함께 급기야 그의 견갑이 떨어져 나가며 엄청난 팔근육이 드러났다. 무슨 팔이 내 허벅지보다도 굵었다.

이래서 드워프 전사를 무시할 수 없구나 싶었다. 결국 스스로 바위왕의 후손을 칭하던 토르페아는 굴복하고 말았다.

콰아아아앙!

균형을 잃은 토르페아가 앞으로 성대하게 엎어지며 주변에 지진이 난 것 같은 충격을 줬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나는 위쪽에 있는 놀과 버그베어에게 소리쳤다.

"네놈들의 우두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보라! 계속하겠다면 모조리 노예로 잡겠다!"

당연히 놀과 버그베어들은 그대로 줄행랑을 놨다.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도망가는 게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토르페아에게 협박당해 수하가 된 놈들이다. 한데 거인이 쓰러졌으니 다 내뺄 수밖에.

레그너 3세는 쓰러진 거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놈의 머리 위에 올라섰다.

그와 함께 지켜보던 친위대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폐하! 만세!"

"거인을 쓰러뜨렸다! 이건 전설이다!"

"페하아아! 만세!"

이 소란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드워프들에게까지 들렸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왔고, 쓰러진 거인을 밟고 서 있는 자신들의 왕에게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아아아! 거인 살해자시여!"

"위대한 드워프의 지존이시여!"

산지가 떠나갈 듯한 환성으로 가득 찼다. 레그너 3세는 나를 자기 옆에 세우겠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었다.

"어디 갔나? 짐의 옆에 서게! 이 영광을 같이 나누겠네!"

나는 박쥐로 변해 사라지기 전에 그에게 작게 말했다.

"폐하. 홀로 온전히 누리십시오. 이 구혼 전쟁의 시작이 아주 쾌조입니다."

* * *

엘프의 왕국의 수도이자 아름다운 숲속 도시인 에버송으로 여러 존귀한 구혼자들이 몰려들었다.

아직 모두가 도착한 건 아니지만 부지런히 움직여 일찌감치 엘프 여왕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래서 여왕은 그들과 주기적으로 오찬을 하며 주인장의 도리를 해야 했다.

물론 엘프 여왕은 그게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오찬장에도 여러 구혼자가 찾아왔다.

그 면면들은 다양했는데···.

지금은 떠돌이지만 고대에 모든 엘프를 지배했다는 하이엘프의 몰락한 왕자 문브라이트.

세계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하나라는 하플링 거상 라이트풋.

전설적인 엘프 방랑기사이자 절세 검객인 윈드러너 경.

인간 왕국의 강력한 군주인 벤마르 후작.

그 외에도 구혼자들은 많았다.

저마다 목적은 달랐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인 엘프 여왕을 갖고 싶은 자도 있었고, 엘프 왕국과 자신의 영지를 통합해 강력한 군주로 거듭나길 원하는 이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여왕만이 접근할 수 있는 미의 여신의 성물을 노리기도 했다.

이토록 제각각인 개성 강한 구혼자 모임이지만 유독 튀고, 그 힘도 가장 막강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다크엘프 왕국의 공작인 마레크였다.

그는 금빛 찬란한 머리칼을 가졌다. 다크엘프가 보통 은회색의 머리색을 한 걸 비춰볼 때 매우 특이했다. 또한 태닝을 한 것처럼 진한 다크엘프 특유의 피부색도 인상적이었다.

마레크는 외적으로 몹시 훌륭했지만 태도나 인상은 공작이라는 존귀한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양아치 같았다. 그래서 내심 그를 경멸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다크엘프 공작에게 어디 나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마레크의 유난히 화려한 머리 색에 빗대어, 그를 '금빛의 찬란한 태양'이란 이명으로 불렀다.

줄여서 금태양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강자였고 언변과 카리스마 역시 빼어났다. 그렇기에 지금 연회에서도 관심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아름다우신 폐하. 제 손가락에 있는 어떤 보석들도 폐하의 눈동자처럼 반짝이지 못하는군요."

그는 늘 부담스러운 대사를 내뱉었고, 여왕은 속으로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예의 바르게 대해야 했다. 다크엘프 왕국은 여왕과 그녀의 백성들에게 대단한 위협이었으니까.

"과분한 말씀이군요."

"아닙니다. 폐하께선 존재 자체가 마법과도 같습니다. 저는 그것에 매료된 불쌍한 사내랍니다."

"······."

뭐라 대꾸할 말이 없던 여왕은 빈 찻잔만 다시 들었다. 솔직히 구혼자들에게 시달리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레크 공작은 탐욕스럽게 쳐다봤다.

저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미망인을 어떻게든 정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 반드시 저년의 옷을 찢고 침대에 자빠뜨려야겠군. 이 몸에게 깔리고도 언제까지 고고할지 보겠다. 흐흐흐.'

동시에 그는 엘프 여왕과 혼인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할 생각이었다. 현재 그는 다크엘프 국왕을 허수아비로 삼고 있는 최고의 실권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엘프 여왕과 혼인해 그녀의 왕국마저 얻는다면, 그는 무소불위의 위치에 올라선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저년은 내게 선물상자나 마찬가지란 거지.'

마르케는 구혼자 경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으니 드워프 왕인 레그너 3세였다.

'내가 그딴 난쟁이를 근심하게 되다니! 쯧!'

얼마 전 레그너 3세는 새로운 물레방아 장치를 엘프 여왕에게 선물했는데, 그녀가 뛸 듯 기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에 마레크도 귀금속을 선물해 봤지만, 그와 같이 엘프 여왕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여왕은 자신을 치장하는 것 따위보다 백성을 이롭게 할 물건을 훨씬 좋아했기 때문이다. 마레크에겐 그럴 만한 게 없었다.

백성은 수탈의 대상일 뿐이니 뭔가 그들을 위한 물건을 만든다는 발상을 못 해 봤기 때문이다.

'건방진 난쟁이 놈.'

자신이 못한 걸 해냈다는 것 때문에 마레크는 레그너 3세를 향해 증오를 품게 됐다. 그래서 거인인 토르페아를 보내 길을 막게 했다.

'아주 개망신을 당했을 거다. 크크큭.'

마레크는 드워프 왕이 진짜로 자기 수염을 깎았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대신 매복에 군사를 많이 잃고, 형편없는 몰골로 숲에 도착할 거라 여겼다.

'어쩌면 그게 쪽팔려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혼자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갓 짜낸 주스를 들이켰다. 한데 그때 전령이 당도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스톤헤븐의 왕이신 레그너 3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레그너 3세의 등장은 모두의 흥미를 끌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맞이합시다."

"좋소. 레그너 3세의 위명은 익히 들었지."

"어떤 자일지 궁금하군요."

모두 궁전의 입구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그런데 저 앞의 숲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나무들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숲을 헤치고 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함께 묵직한 전고 소리도 들렸다.

두둥! 두두둥! 둥둥!

분명 그것은 드워프들의 북소리였다. 다들 그 웅장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지만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숲을 헤치고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것은 네 발로 땅을 기는 거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황금색 의장용 갑주로 무장하고, 등에는 붉은 망토를 두른 당당한 자가 서 있었다.

바로 드워프 왕 레그너 3세였다.

거인의 눈에는 낫이 꽂혀 있었고, 거기서부터 연결된 사슬을 레그너 3세가 쥐고 있었다. 마치 거인을 말처럼 올라탄 모습에 구혼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저게 무슨···?"

"아니?"

하지만 그들의 잡담도 오래가지 못했다. 드워프 왕을 따르는 철갑 입은 전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왕 중의 왕―!"

마치 성악의 바리톤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중저음이 일제히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산악에 우뚝 선 일곱 봉우리의 지배자―! 위대한 거인 살해자! 레그너 3세께서 당도하셨으니 모두 외치라! 폐하 만세―!"

그 함께 전고도 계속 울려댔다. 마치 그 모습은 신화 속 전쟁의 군주같이 장엄했다.

다크엘프 공작 마레크는 놀라서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주르륵 흘리기까지 했다.

'저 미친 드워프가 대체!'

방해는 고사하고 보냈던 거인이 붙잡혀 무슨 짐승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곧 거인이 멈춰서고 철갑 입은 드워프들이 그 자리에 도열했다. 구혼자들과 엘프 여왕은 말문이 막힌 채로 레그너 3세를 올려다봤다.

짧은 다리를 가진 드워프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모두를 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여왕에게 인사했다.

"여왕이여, 오는 길에 그대의 백성을 괴롭히는 악한이 있기에 이리 잡아 왔소."

여왕은 당황도 잠시, 왕국의 골칫거리가 저리 가축처럼 끌려온 모습에 몹시 기뻐했다.

"오늘 왕국의 우환이 하나 사라졌군요!"

엘프 여왕은 환하게 웃었다. 지금껏 어떤 구혼자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였다. 그것을 지켜본 다른 구혼자들은 레그너 3세가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될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직 모두 몰랐다. 이 모든 게 한 음흉한 사내에 의해 계획된 것을.

이미 그는 구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첫 번째 방문지로 엘프 공주의 거처에 남몰래 찾아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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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르 백작의 혀(1)

엘프 왕국의 수도인 에버송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레그너 3세와 헤어졌다.

"아니, 짐을 두고 어딜 가려는 건가? 뱀파이어 공."

"폐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번 일의 성공을 위한 일입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찾아가려는 이는 엘프 공주인 알테아 실버리프.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그녀는 이번 구혼 전쟁의 중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무언가 알아채도 접근하기 어려울 테지만.'

그도 그럴 게, 엘프 공주는 유폐된 존재였다. 위치 자체가 미상인지라 애초에 만남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게임 속에서 몇 번이고 그녀를 찾아가 봤으니까.

알테아 실버리프는 엘프 궁전의 북쪽에 있는 한 동굴에 유폐돼 있다. 나는 그 근처로 잠입했다.

최근에 거인의 피를 잔뜩 빨아서 기운이 넘쳐났다. 그 녀석, 바위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놈답게 혈액의 품질이 우수했다.

'여기서부턴 주의를 해야지···.'

엘프 공주가 유폐된 동굴 주위로는 경비병과 은밀한 마법 함정이 숨겨져 있다. 솔직히 초행길에 들키지 않고 들어가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수없이 경보를 울리고, 실패하고, 엉망진창이 된 끝에 공주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뱀파이어인 게 컸지.'

엘프 경비병들은 적외선 시야를 갖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 열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숨어 들어가기 몹시 힘든데 뱀파이어는 예외였다.

원래 차가운 시체라서 적외선 시야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뱀파이어는 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게 가능했다.

기다란 귀 때문인지 청각에 극히 민감한 엘프를 상대하기 유리한 특징인 것이다. 물론 이런 장점을 활용하기 위해 인간으로 위장하기 위한 팔찌를 뺐다.

그 뒤 알고 있는 함정의 배치를 피하면서 조심스레 나아갔다. 하지만 뱀파이어 특유의 싸한 느낌은 어쩔 수 없어, 경비병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려왔다.

"오늘따라 느낌이 이상하지 않나? 귀신이라도 나오려나?"

"그런가? 하지만 따로 걸리는 건 없는데···."

"좀 더 신경 써서 보자고."

그래 봤자다. 배치된 인원이나 동선 같은 것도 다 알고 있기에 실수만 안 하면 그만이다. 나는 곧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는 문으로 막혀 있었고 경비가 여럿이다.

하지만 저리로 들어갈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동굴에는 감춰진 바람구멍이 여러 개 있었고, 박쥐로 변해 그쪽으로 기어들어 가면 된다.

실제로 몇몇 뱀파이어가 그런 식으로 엘프 공주를 만나러 드나들곤 했다.

나 역시 그 구멍을 이용했고, 안으로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부의 통로로 들어온 나는 다시 뱀파이어 형태로 돌아와 걸었다.

여기서부턴 경비병이 없기 때문에 안전했다. 동굴 안은 은은하게 빛나는 수정이 일정 간격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우울하고 고립된 장소였다. 엘프풍의 장식이 주변에 있었지만 이곳의 울적함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동굴의 가장 안쪽 공동만은 아주 볼만했다. 아름다운 정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커다란 버섯과 기묘한 발광 이끼로 화려했다. 천장에서 은은한 빛이 내려오는 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정자가 한가운데 있었다.

그 정자에 유폐된 엘프의 공주인 알테아 실버리프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덧없이 져 버릴 것 같은 아름다움의 소유자.

게임 속에서도 대단하다 느꼈는데 실제로 보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쉽사리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군.'

여우에게 홀리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세간에는 엘프 최고의 미인이 여왕이라 하지만, 실제로 저기 있는 공주에 못 미친다. 다만 공주의 얼굴은 본 자가 거의 없으니 그리 알려졌을 뿐이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눈을 반개하고 있던 엘프의 공주는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음성을 물어왔다.

"누구인가? 처음 보는 뱀파이어로구나."

"소렌 다켄발트라 합니다. 전하."

정체를 속이진 않았다. 이 엘프 공주에겐 특이하게도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었다. 바로 탄로 날 거다.

"호···? 최근 명성 자자한 그 소렌 다켄발트인가? 크림슨코트의 루신다가 노리는 인재라지? 설마 날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구나."

공주의 금빛 눈동자가 살며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갇혀 계시면서도 소문에 밝으시군요. 전하의 참새들이 여기저기서 소식을 많이 물어오는 모양입니다."

"충직한 자들이라서 말이야. 그리고 나는 동족의 일에 꽤 관심이 있다네. 이리 와서 앉게나. 손님으로 온 게 맞다면 차를 나누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대리석 정자에 가서 앉아 공주와 마주 보게 되었다. 공주가 손짓을 한 번 하자 허공에 찻주전자가 나타나 차를 조르륵 따라줬다. 찻잔을 코로 가져가 향을 음미할 때 그녀가 물어왔다.

"이리 찾아온 걸 보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군.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가?"

말을 할 때 언뜻 보이는 기다란 송곳니. 그리고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이것만 봐도 공주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알테아 실버리프는 뱀파이어였다. 그것도 데이워커 돌연변이를 가진 존재다.

그녀가 여기 갇힌 것에는 여러 사정이 있지만, 뱀파이어라는 게 가장 주요했다. 일국의 공주가 뱀파이어라면 감당하기 힘든 추문이니까.

"간단합니다.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 말하는 자들이 가장 골치 아픈 것들을 들고 오더군."

"멋진 통찰력이시군요. 이번에도 별로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만, 전하께서 흥미를 느끼실 거라고 장담합니다."

"좋아. 말해보게."

"전하께서 다크엘프 공작인 마레크와 내통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공주는 내 말에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묻는다.

"그래서? 궁정에 고발이라도 하려는 건가? 내 매국 행위를?"

"아닙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건 마레크 공작과 거래해도 전하께서 원하시는 걸 결코 얻지 못할 거란 이야기입니다."

엘프 공주가 원하는 건 자유였다. 유폐에서 풀려나고 공주라는 지위도 벗어던지길 소망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크엘프인 마레크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마레크와 거래한 자는 늘 그렇듯 그녀에게도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마레크는 위험하지. 자네의 예측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제가 공주님께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나는 엘프의 지배자만이 쓸 수 있는 힘에 의해 유폐되었다. 마레크가 혼인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을 신세야."

그녀의 말투에서 엘프 여왕을 향한 증오가 묻어났다.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공주에게 왼손에 있는 낙인을 보여줬다.

"저는 핏빛 새벽의 여신이란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과분하게도 사도의 직을 받았으니 일정한 간격으로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사도라니···!"

꽤나 놀란 듯 여태 무표정하던 공주의 얼굴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게, 이 세계에서 사도란 몹시 희귀한 선택받은 존재였다.

"만약 전하께서 우리 교단의 중책을 맡기로 하신다면 자유를 얻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중책이라 함은 무엇인가?"

"또 다른 사도입니다."

신들이 세상사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지만 사도는 예외였다. 크게 관여하는 건 무리지만 자신의 두 번째 사도가 갇혀 있다면 자유롭게 해주는 정도야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뿅, 하고 모든 걸 바꿔주는 건 아니다. 내게 박쥐 변신 능력을 줬던 것처럼 어려움을 타개할 수단을 부여하는 식이다.

하지만 엘프 공주같이 빼어난 존재라면 그 정도도 충분할 터.

"사도라면 중책이 아닌가···? 내겐 또 다른 멍에나 다름 아니다."

"그분께선 전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가 되면 사도의 위를 거둬들이실 겁니다. 불신자를 계속 사도로 두는 신은 없으니까요. 어디까지나 전하께 자유를 드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성녀님께선 자기 사도를 아무나 임명하지 않는다. 엘프 공주가 설령 사도직을 유지하고 싶다고 해도 들어줄 턱이 없다.

"음······. 거짓은 아니군."

구체적인 방법이 등장하자 엘프 공주 알테아 실버리프는 고민하는 기색이 됐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 방법이 제일 그럴싸할 테니까. 자유를 위해 마레크 공작과 손을 붙잡고 매국 행위를 한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긴 했지만, 그게 썩 마음 편할 리도 없고.

'어머니 여왕을 증오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 역시 조국에 대한 애정이 없지는 않으니···.'

잠시 뒤 공주가 물어왔다.

"대체 그럼 자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소렌 다켄발트."

이번 구혼 전쟁에서 내가 마구 날뛰기 위해선 엘프 공주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만약 그녀가 거절하면 여정 중에 구상한 시나리오를 모두 폐기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공주가 가진 자유에 대한 욕망을 믿고 계획을 수립한 거니까.

"제가 원하는 건 명확합니다. 마레크 공작의 패배입니다."

* * *

레그너 3세는 놀랍게도 엘프 여왕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거인 퇴치에 이어, 내가 가져온 천체관측용 망원경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엘프 여왕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뛸 듯 기뻐했고, 심지어 레그너 3세가 천문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결국 둘은 밤하늘의 별에 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흐뭇하게 여겼다.

레그너 3세가 생각보다 잘해 내고 있었다.

드워프답게 작은 레그너 3세와 모델처럼 키가 큰 엘프 여왕이었지만, 둘은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묵직하고 진중하지만 때론 감수성이 깊은 레그너 3세와 친절하면서도 순수하고 사려 깊은 엘프 여왕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궁정의 시종들도 비슷한 감상을 쑥덕댔다.

"드워프 왕이라면 우리 여왕 폐하를 지켜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과연··· 키는 작지만 어째서인지 그 분위기가 높은 산처럼 느껴집니다."

"여왕 폐하께서도 저분 곁에선 표정이 편해 보여요."

하지만 이럴수록 자제심을 잃어가는 자도 있었다.

바로 금태양 마레크 공작이었다.

나는 저녁 연회에 레그너 3세의 경호원 역할을 하며 참가해 있었다. 낮에야 어쩔 수 없지만 해가 떨어진 후에는 레그너 3세를 따라다녔다.

저녁 연회에 참가한 마레크 놈의 표정이 살벌하기에 예상은 했는데, 기어코 일이 벌어졌다.

"오, 레그너. 그 장난감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건가? 렌즈로 밤하늘이나 하릴없이 보는 그 보잘것없는 물건 말일세."

갑작스러운 무례에 연회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마레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쏠리는 수많은 시선을 기꺼워하는 것 같았다.

레그너 3세가 대답을 하지 않고 술을 들이키자 마레크는 다시 이죽였다.

"내 듣기로 그게 드워프의 물건은 아니라 했다. 하면 그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구한 것일 터인데···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겠군. 딸꾹!"

거나하게 취한 마레크는 딸꾹질까지 해댔다.

주변에서 이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레크가 왕을 상대로 지껄이는 말투가 문제였다.

물론 실질적인 위세나 지위는 다크엘프 왕국의 실세인 그가 더 높다. 레그너 3세는 도시국가의 수장일 뿐이니까.

하지만 엄연히 왕의 위치. 이런 자리에선 서로 공대하는 게 예절에 맞았다. 한데 무슨 아랫사람 대하듯 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밖에.

말리는 이가 몇 나왔으나 마레크는 듣지도 않았다.

"시끄럽다! 모두 조용히 하라!"

결국 레그너 3세가 입을 열었다.

"친우가 구해준 것이오."

그러자 마레크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어련하시겠나?"

"······."

"내 친절함으로 그대에게 조언 하나 하지. 그깟 장난감으로 얻은 환심은 오래 가지 못할 거다."

"유념하겠소. 나는 여왕을 진실하게 대할 뿐이오."

"하!"

레그너 3세가 쿨하게 넘기자 그게 분했던 건지 마레크가 결국 선을 넘었다.

"그녀가 세련되고 아름다운 동족이 아니라 너처럼 짤막하고 수염투성이인 난쟁이를 택할 거라고 생각하나? 응? 꿈도 야무지구나! 꼬마 왕이여! 너희 종족은 이 훌륭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폭언에 레그너 3세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야 그를 개인적으로 모욕했을 뿐이지만, 이젠 드워프를 들먹이고 있다.

왕으로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 그 말은 그냥 넘기긴 힘들겠군."

"하하! 그러면 어쩔 건데! 이 꼬마 왕아! 좋다! 그럼 결투는 어떤가? 남자답게 말이지."

마레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의자가 와당탕 뒤로 넘어갔다. 그는 양손을 벌리고 좌중에 선언했다.

"모두 증인이 되어주시오! 결투에서 내가 진다면 구혼자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나겠소. 하지만 만약 저놈이 진다면, 반드시 꼬마 왕은 사라져야 할 것이오!"

그리 외친 마레크는 레그너 3세를 향해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가? 겁이 많아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순간 레그너 3세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아무래도 나서야겠군.'

레그너 3세는 무조건 싸울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못 이긴다. 레그너 3세가 강한 건 인정하지만 저 금태양은 차원이 다르다.

대체 왜 저런 양아치가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싫다. 하지만 그의 강함은 진짜였다.

거인 토르페아가 이용만 당하고, 엘프 공주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괜한 게 아니다. 그들 역시 비범한 인물들이지만 마레크는 그 이상의 힘을 가졌다.

'마레크와는 절대로 싸우면 안 된다. 지략으로 상대해야 하지.'

마침 엘프 공주랑 얘기도 잘 됐다. 레그너 3세에게 조금만 굴욕을 참으라고 설득해야······.

"그건 제가 허락할 수 없어요."

그때 냉랭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달아오른 분위기를 가위처럼 잘라버렸다.

누군가 해서 보니 엘프 여왕이었다. 여태 잠잠히 있던 그녀가 직접 나선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파티의 주최자로서 이 기간 동안 모든 결투는 금지합니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긴다면 저는 그 사람을 더 이상 구혼자로 여기지 않겠어요."

늘 부드럽던 여왕이 단호한 말투로 선을 그었다. 주변에서 다 놀란 표정이었다. 마레크의 경우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눈이 커진 상태.

설마 여왕이 드워프 왕을 감싸고 돌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지금이라도 취소해 주십시오. 이 마레크가 저 건방진 땅딸보 놈을···."

"그만하세요. 공작. 더 들어주기 힘들군요."

"크윽···!"

마레크는 분이 치밀어도 여왕에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왕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그는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유념하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으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마레크는 곧장 연회를 떠나버렸다.

살벌한 분위기가 맴돌아 모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좋지 않군. 이렇게 됐으니 마레크가 앙심을 품고 더 사납고 비열하게 보복해 올 텐데···.'

결국 나는 계획을 빨리 실행하기로 했다.

* * *

숙소로 돌아온 마레크는 굴욕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질러댔다.

요란한 소리로 문을 닫고 들어간 그는 괴성과 함께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콰앙! 와장창!

방을 장식한 엘프의 아름다운 공예품이 엉망이 됐다. 꽃병이 박살 나고 책상 위의 양피지는 쏟아진 잉크로 엉망이 됐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역사적인 태피스트리 역시 찢어서는 구둣발로 짓밟아댔다.

분노가 마치 독처럼 그의 혈관을 흐르고 있었다. 그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 뭐든 해야 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어먹을! 빌어 처먹을!"

그는 그 땅딸보 드워프와 엘프 여왕이 자신을 이리 모욕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보복해 주마! 반드시 보복하겠다!"

드워프 왕은 팔다리를 자르고 발가벗겨서 돼지우리에 던져줄 셈이었다. 돼지 똥 사이에서 벌레처럼 꾸물거리게 하고, 그 앞에서 엘프 여왕을 능욕할 작정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도도한 척을 해! 앞으로 창녀처럼 굴려주마!"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모욕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조금은 마음이 나아졌고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연락용 수정구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해서 보니 엘프 공주 알테아 실버리프였다.

"그 시체년은 또 왜?"

미녀라면 누구든지 껄떡대는 마레크였지만, 뱀파이어는 딱 질색이었다. 그 차갑고, 무기질의 인형 같은 얼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다 돋는다.

-무슨 일이지?

짜증을 감추지 않고 연락을 받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일을 도와주겠다는 분이 있더군요.

-또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는군. 네년은 그냥 시키는 거나 똑바로···.

분노를 쏟아내려던 마레크 공작은 이어진 얘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블라르 백작이에요.

갑자기 뱀파이어계 최강자의 이름이 나온 것이다.

-뭐, 뭐라고?

블라르란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마레크는 자기도 모르게 전율하며 팔을 가늘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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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르 백작의 혀(2)

***

레그너 3세와 마레크 공작의 감정싸움이 격화됐기에 나는 계획보다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원하는 계책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변신 능력이 필수였다. 그래서 그간 아껴왔던 소원권을 썼다.

"무한한 자비의 성녀시여. 여기 당신의 사도가 겸손하게 청하오니······."

내가 원하는 건 상급 변신 능력이었다. 일반적인 변신 주문보다 훨씬 강력해야 한다.

"누구든 속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뱀파이어 성녀는 들어주지 않았다. 왼손을 보니 푸른빛이 점멸하고 있다.

'이런, 음봉이군.'

너무 무리한 소원이라 접수가 불가능하다는 거다. 하긴, 누구든 속일 수 있다는 조건은 과하긴 하다. 그래서 조정했다.

"마레크 공작과 그의 조언자, 수하들을 모두 속일 수 있는 변신 능력을 원합니다."

이번에는 손바닥의 낙인에서 붉은빛이 점멸했다.

'양봉 떴다!'

수락의 의미였다. 즉각, 거대한 힘이 차원 너머에서 이쪽으로 내리꽂히는 게 느껴졌다.

"으갹!"

정수리에 묵직한 게 박히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볼품없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으윽······."

뭐랄까, 충격이 상당했다. 이유는 알 만했다. 이제껏 받아본 적 없는 강력한 능력 탓에 일순간 몸에 부담이 온 것이다.

'뭐랄까, 고용량 게임 내려받을 때 맹렬히 돌아가는 컴퓨터 팬이 떠오르는군.'

잠시 몸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언데드답게 온몸이 차갑게 식어갔다.

아무튼, 그 덕에 이게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 알게 됐다. 성녀님께서도 소신격에 오르더니 내려주는 능력의 수준이 달라졌다.

반신 때는 박쥐 변신 같이 소소한 거였는데, 이번 건 마레크 공작 같은 강자도 속일 능력이었다.

'캬, 뱀파이어 성녀의 사도를 하길 진짜 잘했다.'

이런 고급 능력을 한 달에 한 번씩 받아먹을 수 있다니. 남들은 이런 능력 하나 얻으려면 피눈물을 흘리며 천단만련(千鍛萬鍊)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첫 번째 사도라는 이유로 날로 먹고 있었다.

"성녀님, 감사합니다. 유용하게 쓸 수 있겠습니다."

그리 감사를 표하자 낙인에서 붉은빛이 은은하게 빛나다 사라졌다. 상당히 흡족한 기색이었다.

"좋아, 이제 해보자."

바로 엘프 공주 알테아 실버리프에게 통신 마법으로 연락해 마레크 공작과의 만남을 주선하라 했다.

-만약 그쪽이 거절한다면 어쩌겠느냐?

엘프 공주의 물음에 나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누가 감히 블라르 백작의 요구를 거절하겠습니까?

* * *

마레크 공작은 블라르 백작의 요청에 응했다. 아무리 자신의 위세가 대단해도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블라르 백작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블라르 백작이라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절대강자. 아니, 그런 괴물이 대체 이 몸을 왜 찾는단 말이냐······.'

아무리 힘이 강해도 양아치는 결국 양아치였다. 자신을 능가하는 초거물의 출현에 마레크 공작은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일단 그는 마음을 다잡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곳은 엘프 공주의 거처. 마레크 공작은 몰래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문제없었다.

"찍찍―!"

작은 쥐로 변해 구멍을 통과한 그는 엘프 공주의 동굴 정원에 도착했다. 느긋하게 앉아 있던 엘프 공주가 입을 열었다.

"왔군요. 이리 앉으시지요."

마레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백작께서는?"

"곧 오실 겁니다."

"공주, 대체 왜 그자가 날 만나자고 한 건지 아나?"

"모릅니다. 다만, 공께서 벌인 일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입니다."

"끄응···."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마레크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지, 아니야. 나는 다크엘프의 공작이다. 그 시체에게 겁먹을 이유는 없다. 괜한 소리를 지껄인다면 준엄히 꾸짖어줘야겠군. 그 뒤에 돌아가면 그만이다.'

속으로 굳게 다짐했지만 막상 주변에 어둠이 깔리며 블라르 백작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런 용기는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마레크 공작."

마치 지옥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중저음이 그를 불러왔다. 그와 함께 한 장중한 체구의 뱀파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레크는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둠의 숲을 다스리는 분께서 오셨군. 반갑소. 마레크라 하오."

"블라르다. 앉지."

그렇게 블라르 백작, 마레크 공작, 엘프 공주 셋이서 대리석 정자에 자리 잡았다. 마레크는 곧장 물었다.

"왜 날 보자고 하셨소?"

"네놈의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보고 있자니 드워프 왕에게 여왕을 빼앗길 것 같더군."

"윽! 블라르 백작. 아무리 그대라도 무례한 말을 삼가시오!"

마레크는 기싸움에서 지기 싫어 세게 나가봤지만, 코웃음만 치는 블라르의 모습에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런 그에게 블라르가 제안했다.

"타박이나 하자고 만남을 요청한 게 아니다. 이번 일에 그대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으니 돕고자 한다. 나와 손을 잡아라. 공작. 엘프 여왕을 반드시 갖게 해주지."

"뭐라···? 아니, 당신이 왜 날 돕는단 말이오? 이유를 모르겠소."

블라르 같은 거물이 나선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테지만, 까닭이 없는 호의는 없다. 마레크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그걸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좋아, 설명해 주지. 내 입장에선 드워프 왕이 구혼에 성공하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본래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네놈이 기대에 못 미쳐 이리 나서게 된 것이다."

"아니, 블라르 백작. 그대 입장에서 드워프 왕이 구혼에 성공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란 말이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일곱 봉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그중 드워프들은 가장 어려운 상대지. 한데 이번 구혼에 성공해 드워프들에게 엘프란 동맹자가 생긴다면 아주 짜증 나는 일이다."

"과연, 일곱 봉우리를 노린다면 그렇겠구려."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블라르는 마레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가 잘할 거라고 믿었다.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오! 그리고 백작, 나는 그대의 부하가 아니니 태도를 조심하시오."

"하면 알아서 잘하지 그랬나? 땅딸보한테 밀리는 주제에 그 주둥이는 염치를 모르는군."

마레크의 얼굴은 수치로 달아올랐다. 격분해서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만 같았다. 블라르는 그런 그를 살살 달랬다.

"널 돕는 이유는 또 있다. 다크엘프를 잠재적 동맹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 이 관계가 좀 더 발전되었으면 한다."

"어째서요?"

"다크엘프가 엘프 왕국을 집어삼키면 이후 내가 일곱 봉우리로 진격할 때 유리할 테니까. 내가 일곱 봉우리를 공격할 때 도와라. 같이 이권을 나누는 거다. 일곱 봉우리는 풍요로운 지역이니 갈라 먹어도 충분하다."

그 말에 마레크는 몹시 혹했다.

'일곱 봉우리까지 진출이라?'

엘프 왕국을 발판삼아 광물과 보석이 풍부한 일곱 봉우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니! 마레크의 머릿속은 야심의 불꽃으로 급격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블라르 백작이 왜 자신의 승리를 바라는지 알게 됐다.

"그 땅딸보 꼬마 왕은 우리 모두에게 큰 방해였구려."

"이제야 내 말을 이해했군. 결국 이 모든 게 적을 없애고 동맹을 만들고자 함이다. 마레크, 그래서 네놈이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밀리고 있지."

"할 말이 없소. 그래서 가져온 대책이 무엇이오?"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마레크에게 블라르는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두 가지를 제시하겠다. 너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듣겠소."

"첫 번째는 정치와 여론을 이용해 여왕이 너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네놈이 여왕의 마음을 얻기는 틀렸으니 그 수가 최선이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오."

"생각해 보라. 대다수의 권력자들이 널 지지한다면 어떨까? 여왕이 그들의 의견을 묵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바라마지 않는 일이오. 하지만 불가하오. 엘프 권력자들은 사방에서 몰려온 구혼자들과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엮여 있소. 게다가···."

"게다가?"

"그들은 다크엘프를 미워하오. 갖은 협박과 압력, 자금으로 놈들을 잠식하고 있지만 모두를 흔들기란 불가능한 일이지."

"내게 그런 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다."

"뭣, 정말이오? 권력자들은 저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솔직히 마레크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꺼낸 게 그 유명한 블라르 백작이었기에 기대를 감출 수 없었다.

"크크큭. 그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어주면 될 일이지."

"감히 나는 짐작도 할 수 없군. 묘책을 들려주시오. 아니, 그것보다 여기 공주가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거요?"

마레크는 곁에서 듣고 있는 엘프 공주를 떫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블라르는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신뢰한다."

"뭐··· 그렇게 말하니 알겠소. 그럼 부디 방법을 알려주시오."

"간단하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떠나 모두의 열망이 집중될 하나의 거대한 목표를 만들면 된다."

"어디에 그런 것이 있단 말이오?"

"세계수. 그래, 세계수의 묘목이면 충분하지."

"뭣!"

마레크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길은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뱀파이어가 어떻게 세계수의 묘목에 대해 알고 있지?'

그것은 최고급 정보로, 엘프 중 최상층만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거대한 세계수 '아만비다'의 씨앗에서 5만 년 만에 잎을 틔웠기 때문이다.

하여 전 세계의 엘프들은 그 새로운 싹을 어디에 심을지 논의에 들어갔다. 저마다 자신의 왕국으로 가져가고 싶어 심한 신경전이 오가는 중이었다.

"대체 아만비다의 싹이 돋은 건 어찌 아는 것이오?"

마레크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지만, 블라르를 참칭하고 있는 소렌에겐 별거 아닌 정보였다. 그는 더한 비밀도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

"모르는가? 이 블라르의 정보망은 거미줄처럼 어디든 뻗쳐 있다."

"···소문 이상이로군. 한데 그 세계수의 묘목을 어찌 이용한다는 것이오?"

"너는 그것을 이용해 모두를 홀릴 비전을 제시해라. 세계수의 묘목을 가져와 이곳 에버송에 심고, 영세불멸토록 이어질 영광의 수도로 삼겠다고."

"아니, 그런 미친! 아무리 나라도 세계수의 묘목을 가져올 가망은 없소! 전 세계의 유력한 엘프 왕국이 달라붙은 상황인데 어찌 승리하겠소?"

"알고 있다. 크크큭. 여왕 하나 못 얻는 놈이 세계수의 묘목이라니 웃긴 일이지."

"크윽!"

블라르 백작은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세계수의 묘목이 여기로 올 거라는 기대감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완전 사기가 아니오! 게다가 그 정도의 거짓말을 어찌!"

"기왕 사기를 치려면 크게 쳐야 한다. 마레크, 모두에게 알려 투자설명회를 열고 거기서 거대한 비전을 제시해라. 그리고 거기 홀린 엘프 권력자들, 심지어 힘 있는 구혼자들에게까지 막대한 투자금을 끌어낸다."

"맙소사···. 설마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다는 게?"

"맞다. 돈이란 가장 훌륭한 가치가, 사방팔방으로 갈라진 물줄기 같은 그들을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로 만들어 줄 것이다."

블라르는 그것은 굴러가는 눈덩이와 같아서 한 번 시작하면 도중에는 절대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이후에는 관성으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투자가 성공해야만 하도록 만드는 것이오···?"

"영민하군. 그래, 너무나 많은 돈을 투자한 권력자와 구혼자들이 실패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서라면 너와 엘프 여왕의 결혼은 필수적이어야 하지."

"어떻게 필수적으로 만든다는 거요?"

"네가 세계수의 묘목을 가져오기 위해선, 엘프와 다크엘프의 두 왕국이 통합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전제를 달면 된다. 그걸 납득시키면 투자금 때문이라도 놈들이 너와 여왕의 결혼을 극렬히 지지할 테니."

결국 여왕은 거기 응할 수밖에 없을 터. 그게 블라르의 계획이었다.

"얘기의 골자는 알겠소. 하지만 권력자들이 순순히 이 허황된 프로젝트에 투자하겠소?"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 쪽에서 그런 일에 특화된 가장 유능한 인재를 보내줄 테니까. 그는 마치 내 혓바닥과 같은 자다. 믿고 맡기도록."

사실 그 혓바닥이란 건 소렌 본인이었다. 혼자 블라르인 척도 하고, 그놈의 부하인 척도 하고 아주 난리였다.

"실제로 어떤 식으로 진행할 건지 한 가지만 알려주지."

"무엇을 말이오?"

"어리석은 놈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여러 방법론이 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게 뭔지 아나?"

"말해주시오."

"바로 고명한 성직자나 명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돈을 내놓으면 지켜보는 자들은 이리 생각하지. 저 정도 되는 이가 돈을 붓는다면 다 이유가 있겠구나라고."

"하면?"

"이번 일에 네놈도 가진 걸 다 쏟아붓도록. 그러면 사람들은 혹할 거다. 저 마레크가 무언가 냄새를 맡고 저러는 게 아닌가 하고. 이것은 투자설명회를 성공으로 이끌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아니, 훗날 어찌 감당하려고···."

"그걸 위해서라도 가장 큰돈을 투자하라는 거다. 나중에 변명할 때 나도 피해자다, 라고 하면 될 거 아니냐?"

"······허!"

이후 블라르 백작은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설명해줬다. 듣던 마레크는 점점 그 얘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블라르에게서 시대의 흐름마저 좌지우지하는 대마두의 품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자는 나와 격이 다르구나!'

크게 보고 수많은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게 감히 자신은 따라할 수 없는 악랄함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전신에 소름이 다 돋는 기분이었다. 마레크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는 물었다.

"첫 번째는 잘 알겠소. 하면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오?"

그 말에 블라르는 매우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보여주마."

블라르는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인형처럼 예쁜 엘프 공주의 하얀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턱을 쥐었다.

"이런 고고하고 신분 높은 여자를 꼬꾸라뜨리고 손에 넣는 것이야말로 우리 같은 자들의 즐거움이지."

대체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었던 마레크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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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르 백작의 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