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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강림(4)

***

완성된 피의 제단이란 강력한 마력의 원천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했다.

가장 중요한 건 뱀파이어가 짓게 되는 신전의 내핵 역할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게 있었으니, 바로 제단의 주인인 뱀파이어에게 강력한 힘을 선사하는 것이다.

똥개도 자기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신전을 지은 뱀파이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자기 신전에서 버티는 뱀파이어를 쓰러뜨리는 건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마치 단단한 요새 안에 숨어 나갈 생각이 없는 놈을 처리해야 하는 것 같달까.

'한데 그 신전의 내핵을 떼어왔단 말이지.'

이런 일은 역사에 드물었다. 신전의 내핵인 피의 제단을 옮기는 건 다분히 리스크가 큰 행동이니까.

뭣보다 피의 제단을 철거하면 힘들게 쌓은 신전이 통째로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나는 무너질 신전이 없으니 이런 과감한 짓거리가 가능했다.

'룩스 움브라 같은 초대형 괴물은 이런 또라이짓이 없으면 상대하기도 불가능하고 말이지.'

게다가 내 피의 제단은 일반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치된 성유물이 바로 성녀의 손가락. 게다가 나는 성녀의 첫 번째 사도. 이런 시너지 효과로 내 피의 제단은 가공할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풍부하고 넘치는 마력을 통째로 사용해 기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이건 제단의 막대한 마력과 사도라는 내 지위가 어우러져 가능한 초대규모 신성마법이라 하겠다.

'뱀파이어가 신성마법이라니 웃기긴 하군.'

하지만 뭐, 신성마법이란 게 별거냐? 모시는 신의 힘을 현세로 발현하면 그게 신성마법이지.

우우우웅!

발밑에서 진동하는 제단의 마력음이 아주 웅장했다.

지금부터 일으키는 힘은 통상적인 게 아니다. 게임에선 이벤트에나 등장하고 실제로 게임 내의 기술 목록에도 없는 것이다.

기술명은 '새벽의 강림'이다. 뱀파이어 성녀를 섬기는 사도의 끝판왕급 기술로 이벤트 컷씬에만 나온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 세계. 첫 번째 사도인 내가 새벽의 강림을 못 쓸 이유는 없다. 물론 새벽의 강림의 사용에도 제약이 있겠지.

아마 성녀의 낙인에 대고 한 달에 한 번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시간제한 같은 게 있을 듯했다.

'정확한 건 써봐야 알겠지만···.'

하지만 안 될 리가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나는 이벤트 컷씬에서 봤던 기도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읊조려 나갔다.

"찬란한 새벽이여! 그 빛나는 손길을 간구하오니, 당신의 대적이 몸을 움츠리리라. 하늘에서 쏟아지는 영광의 등대여, 신도를 밝히는 어머니의 빛이여!"

과연 기도문은 효과가 있었다. 제단의 마력이 빠르게 소모되며 주변이 온통 주홍빛과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뱀파이어 성녀가 응답했군!'

신의 힘이 일대를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피의 제단이 요란하게 진동해댔다. 마치 과부하가 걸린 거대한 엔진음 같았다.

'제단이 없다면 감히 시도도 못 하겠군.'

일대를 새벽의 빛이 가득 채우자 내 살갗이 화상을 입기 시작했다. 태양 저항 물약을 먹었음에도 이랬다. 하지만 나는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크르르르르! 크워어어!

룩스 움브라가 이상을 느끼고 발버둥 쳐댔다. 놈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촉수를 흔들어 댔지만 이미 늦었다. 마치 새벽빛으로 만든 것 같은 굵직한 사슬이 나타나 놈을 얽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주변의 점점 여명에 가까워지자 룩스 움브라의 몸이 신성한 불길에 휩싸였다.

크르르르! 크르르르르!

온몸을 비트는 게 마치 산 채로 불에 구워지는 문어같았다. 그런데 지켜보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이렇게 세?'

새벽의 강림은 대단히 강력한 주문이 맞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본래는 한 방 먹인 후에 큰 싸움을 예상하고 있었다.

스킨크 전사와 주술사까지 동원해 물량으로 룩스 움브라를 밀어버릴 생각이었다.

괜히 내가 족장에게 태양 교단 놈들의 쓸모가 다하면 체포하라고 한 게 아니다. 싸울 때 방해가 되면 귀찮으니까 말이다.

'한데 이거 대체···?'

한 방 맞고 저 강력한 고대신의 조각이 거의 맛이 가버렸다. 이대로 빛만 내리쬐면 그냥 타죽을 것 같았다.

'성녀님 반신 아니었나? 이 정도 위력은 드사장도 흉내 내지 못할 수준인데?'

내 혼란은 별개로 지켜보던 스킨크들은 좋아서 죽으려고 했다. 놈들은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문어가 타니까 마냥 좋은 거다.

"어머니께서 적을 태우신다!"

"스킨크의 어머니여! 스에에!"

반면 태양 교단은 당황하고 있었다. 특히 지위가 높아 보이는 성직자 하나는 자신의 셉터를 휘두르며 노호성을 터뜨려댔다.

"대체! 대체 이 거짓된 기적을 행하는 자가 누군가!"

보니까 아는 얼굴이다.

'교구장 아달릭이군.'

일전에 어둠의 숲에서 교세의 확장을 위해 인간 마을로 오크를 유도한 간악한 놈이다. 그는 산지에서 혈전을 치르느라 차림새가 엉망이었다. 깨끗한 성의(聖衣)는 피와 얼룩으로 더러웠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원래라면 여유가 없어서 대답도 못 했겠지만, 룩스 움브라가 내버려 둬도 뒤질 것 같았기에 바로 대꾸해줬다.

"거짓된 신이라 했나?"

"그렇다! 태양은 오직 존엄하신 아버지의 것이다. 한데 어찌 불경하게 태양빛을 흉내 낸단 말인가! 네놈이 섬기는 신이 누군지 정체를 밝혀라!"

밝히라면 못 밝힐 것도 없지. 이제 신도들도 생겼고, 교단이 첫발도 내디뎠다. 언제까지 은인자중할 생각은 없었다.

본래 종교라는 건 알리고 포교하는 것. 이 자리에서 핏빛 새벽 교단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궁금하다니 알려주마! 너희 태양 교단 놈들은 귀를 씻고 똑바로 들어라!"

나는 왼손의 낙인을 그들에게 보이며 외쳤다.

"내가 섬기는 분은 태양 교단의 성녀셨다! 그분께서는 교단의 정화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셨지만, 교황과 권력자들에게 배신당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지신 분이다!"

내 말에 태양 교단의 놈들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분은 명예로운 고트시크 가문 출신이시며, 성녀임에도 박해받아 뱀파이어가 되어야 했던 이다!"

교구장 아달릭은 발악하듯 답해왔다.

"누, 누굴 말하는지 알겠군! 더럽고 더럽도다!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더니 거머리처럼 끈덕지게 다시 출현했군! 감히 그년은 성녀라 칭하지 마라! 그 여자는 악에 물들어 뱀파이어가 된 타락한 존재에 불과하니!"

"닥쳐라! 그분께서 뱀파이어가 된 건 교황이 한 짓거리가 아닌가! 너희가 억지로 흡혈의 인자를 주입해 뱀파이어로 만들고 교단에서 내쫓은 걸 알고 있다!"

내 말에 듣고 있던 태양 교단 몇몇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건 극히 일부만 아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분께선 기어코 반신의 위에 올라 돌아오셨다. 너희 태양 교단의 거짓된 권력자들을 정화하기 위해서!"

"이단이다! 이단! 불경한 자여! 네 모든 말이 거짓이며 악이다!"

교구장 아달릭은 핏발이 선 눈으로 악을 써댔다.

"거짓이며 악이라? 이 자리에서 가장 악한 자가 그런 소리를 하니 정말 기가 막히군! 모두 잘 들어라! 이제부터 교구장 아달릭의 더러운 실체를 폭로해 줄 테니까!"

고인물의 장점이란 무엇인가?

바로 압도적인 지식이다. 그 지식 안에는 부패한 성직자들에게 관한 것도 많았다.

즉, 공개된 자리에서 폭로전에 들어가면 무적이란 거다. 나는 갑자기 솟구치는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이건 압도적으로 유리한 분야였다.

'그간 고인물로서 능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한 게 사실이지.'

이 세계에 와서 여러 차례 당황하는 일이 많았다. 게임 속에 없던 부분이 출현한 것도 문제였지만, 설령 알고 있는 사안에서도 허둥댔다.

왜냐하면 눈앞의 상대가 날 진짜로 죽이려 한다는 건, 마우스로 클릭질 몇 번 하는 것과 비교 불가였기 때문이다.

당장 날아오는 무기, 악의와 욕설, 상처로 인한 고통까지··· 그런 걸 직접 겪으면 공포와 긴장으로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굴러가질 않더라.

'물론 그런 와중에도 협잡질을 하긴 했지만 돌아보면 미비한 점이 있단 말이야. 나답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나는 빠르게 이 세계에 녹아들었다.

'기나긴 모멸과 핍박을 넘어, 이제 고인물 공략쟁이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미 머릿속으로 교구장 아달릭에 관한 모든 게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 저놈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교구장 아달릭은 게임 중반에나 활약하는 빌런이기 때문이다. 내버려 둬도 교회에서 쫓겨나는 놈인데, 놀랍게도 이후에 성직자 출신 뱀파이어가 된다.

이렇게 초반부에 엮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이상 활용할 수 있는 정보는 넘쳐났다.

일단 아달릭 저 새끼 최근에 저지른 치부를 찔렀다.

"아달릭! 이 가증스러운 놈! 네놈이 포교를 위해 인간 마을로 오크를 유도한 죄악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악자여! 변명할 말이 있으면 답해 보라!"

아달릭은 놀란 듯 움찔했다. 하지만 입만 열면 구라를 달고 사는 놈답게 바로 부인해 왔다.

"한심하군! 어둠의 존재!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모함 밖에 없단 말이냐!"

하지만 내가 괜히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놈을 흔들 단초가 근처에 있었으니까. 바로 아달릭 옆에 있는 예쁘장한 수녀가 목표였다.

"한심하다고? 그렇다면 그대가 말해보라. 일마레 수녀!"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일마레 수녀는 놀란 얼굴이 된다.

"네 비밀스러운 정인(情人)의 치부를 부정할 것이냐? 너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일마레 수녀는 남몰래 아달릭 교구장과 사통한 관계다. 남녀의 열정에 이끌리긴 했지만 그녀는 그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번민하고 있었다.

거기다 아딜릭 교구장의 선을 넘는 행동은 일마레 수녀를 심한 고통에 빠뜨려왔다. 내가 어둠의 숲에서 아달릭을 처음 봤을 때, 곁에 앉아 있던 일마레 수녀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마음속의 번민을 감추지 못했던 거다. 하자만 그녀도 일단 부인했다.

"모함이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 연약한 영혼을 굴복시키는 건 간단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태양이 점점 떠오르고 있다! 뱀파이어도 그 빛 아래 당당히 서 있는데, 너는 태양 아래서 거짓을 고할 셈이냐!"

"그건···!"

"네가 용기가 있으면 너희 신 앞에서 계속 그리 거짓을 말해보라!"

마음이 약한 일마레 수녀에게 태양신을 들먹이는 건 전가의 보도였다.

실제로 게임 스토리에서도 일마레 수녀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결국 모든 죄를 고백하고 자살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은 일마레 수녀와 아무 관계없다고 선을 긋는 아달릭 놈이 대단했었지.

"흐으흑! 흑흑!"

결국 일마레 수녀는 무릎을 꿇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다른 태양 교단 놈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웬 뱀파이어 놈이 모함을 하는가 했더니 상황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으니까.

"일마레 자매! 정신차리시오!"

교구장 아달릭은 당황해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는 뭔가 변명을 입에 담으려 하기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달릭! 네놈의 비리를 말하자면 다시 밤이 올 때까지 떠들어도 시간이 부족하다! 지금까지의 횡령, 족벌주의, 권력의 남용, 힘없은 자들을 향한 협박 등 그 끝간데 없는 죄악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네놈이···!"

나는 잠시 의도적으로 말을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었다. 제일 센 폭탄을 던지기 딱 좋은 때였다.

"그렇게 깨끗한 척하는 아달릭 네놈이 사실 뱀파이어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내 폭로를 예상도 못했는지 아달릭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더니 급기야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는 악을 쓰듯 답했다.

"나는 태양 교단의 사제다! 가, 가, 감히! 그딴 망발으으을! 말도 안 되는 소리!"

"크흐흐!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얘기를 꺼낸 줄 아냐? 뭐든 말하면 여기 있는 자들이 다들 믿을 거라고 여기고? 아니지, 아니야."

"네놈!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불안감을 느낀 건지 아달릭은 덜덜 떨리는 팔로 땅을 짚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달릭! 계속 부정해 봐라. 대신 여기서 네 주인의 이름을 폭로해 줄 테니까!"

"커윽!"

내 말에 아달릭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심지어 아무런 답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아달릭의 주인은 에인션트 뱀파이어니까. 괜히 아달릭이 중반부에 뱀파이어로 변하는 게 아니다.

에인션트 뱀파이어란, 최초의 뱀파이어이자 흡혈의 인자를 세상에 뿌린 어둠의 거인들이다. 그들에 관한 건 절대적인 비밀로, 아달릭은 설령 자신이 파멸해도 발설해선 안 되는 부분이다.

설마 내가 그걸 찌를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아달릭! 상스러운 주둥이가 드디어 막힌 건가? 어서 뭐라고 해보라!"

"다, 닥쳐라! 그딴 망발 따위에 흔들릴 이 몸이 아니다! 그, 그건···."

"기어코 내가 끝까지 말해야 할 것 같은가!"

"히끅!"

아달릭은 경기를 일으키는 반응이다. 나는 그가 섬기는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문장에 새겨져 있는 좌우명을 말해줬다.

"어둠을 통해 영원으로!"

"!"

아달릭은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는 내가 자신의 주인에 대해 안다는 걸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만! 그만하라!"

당연히 아달릭의 이런 반응에 태양 교단은 경악했다.

"교, 교구장님? 주인이라니요?"

"저자의 말을 어서 부인하십시오! 저는 믿지 않습니다!"

"교구장님께서 그럴 리가!"

하지만 아달릭은 부인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교회법을 어긴 것은 파문이나 징역으로 어찌저찌 때운다 쳐도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 분노는 감당할 수 없다. 노예 언데드로 전락해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기에 아달릭은 파리해진 얼굴로 입술을 덜덜 떨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달릭이 아니어도 좋다. 너희 중 떳떳한 놈이 있으면 나서서 반박해 봐라. 성녀께서 거짓이며 지금 이 태양빛이 가짜라고! 너희에겐 이 빛이 그렇게 보이는가?"

여기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룩스 움브라가 실시간으로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태양광은 이제 더욱 강해지고 있어서 이제 아침 해를 방불케 했다. 새벽을 지나 아침에 이르니 성녀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의식을 끝낼 시점이었다.

이미 룩스 움브라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내내 비명을 지르던 그것은 힘을 잃고 타들어 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회생 불가였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기도를 읊었다.

"자애로운 성녀시여. 여기 고대신의 신력을 얻으시고, 소신격으로 거듭나소서."

설마 성녀가 벌써 소신에 오를 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하지만 몹시 고맙게도, 태양 교단의 목숨을 건 헌신 덕에 막대한 신력을 얻게 됐고 모든 게 예정보다 훨씬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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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강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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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성녀의 이명은 '핏빛 새벽의 여신'이다. 듣기에는 꽤나 멋진데 나름대로 슬픈 사연이 있다.

어느 날 교단의 존경받는 성녀가 뱀파이어가 됐다. 절망한 그녀는 새벽의 끝 무렵에 태양빛에 몸을 던져 타죽고자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미 신성이 발아하기 시작했던지라 자살은 실패했고 결국, 성녀는 상처투성이로 되살아났다.

당시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시커멓게 탄 살점이 쩍 갈라져서 안쪽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피에 젖은 모습으로 인해 핏빛 새벽의 여신이라 불리게 됐다. 나름대로 기구한 사연이 담긴 이명인 것이다.

문제는 사도인 나 역시 그녀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재현 중이라는 거다.

"그아아아악! 크으윽!"

어느새 아침으로 넘어가는 햇살에 온몸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태양 저항 물약은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룩스 움브라는 이제 완전히 죽었는데 자칫하다가는 나도 그 뒤를 따라가게 생겼다.

'햇살이 싫다! 증오스럽다!'

새삼 어둠이 뱀파이어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실감했다. 이미 내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콧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의식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기적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이었고, 지켜보는 눈길도 많았으니까.

겉으로는 화염 속에서도 고고한 사도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성녀님, 제발 빨리! 빨리 좀!'

현재 성녀는 죽은 룩스 움브라가 남긴 막대한 신력을 흡수 중이었다. 봉인의 석주를 세 개나 부순 덕에 그 양은 대단했다.

신력이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마치 블랙홀에 붙들린 별이 길게 늘어지며 소용돌이치는 모습과도 흡사했다.

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타고 있는 내 입장에선 만족스럽지 못했다. 점점 내 안에서 성녀님이 아니라 성녀야가 돼가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아픔 앞에 내 신앙은 생각보다 한없이 가벼웠다. 한데 그때, 지켜보던 스킨크 주술사들이 끼어들어 내게 시커먼 뭔가를 뿌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그게? 으윽!"

고통에 이를 악물며 힘겹게 묻자 스킨크 주술사들이 부활한 불사조 둥지에서 긁은 잿가루라고 했다. 그건 태양 저항 물약을 만드는 주재료다. 덕분에 몸에 붙은 불길이 군데군데 꺼지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건 매우 귀한 마법 재료인 데다가 스킨크들이 쓰지 않는 거라 갖고 있을 리가 없는데?

"스에엣! 에레미나 님께서 혹시 필요한 때가 있으면 쓰라고 챙겨주셨습니다."

아니, 에레미나 이 녀석! 이렇게 센스가 넘칠 줄이야. 피의 제단을 뜯으려고 스킨크 주술사들이 작업할 때 넘겨준 모양이다.

"고맙다. 후우···."

잿가루 덕에 잠시나마 햇빛으로부터 안전해졌다. 하지만 오래 가진 못할 것이다.

'어서, 제발 좀.'

설마 이런 식으로 내 신앙이 시험받을 줄은 몰랐다. 다음에 몸에 또 불이 붙으면 성녀를 행해 욕설을 날리지 않을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으으윽."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시 고통이 시작되려는 때 마침내 성녀가 신력을 흡수하는 작업이 끝났다.

"됐다!"

무슨 게임처럼 완료 메시지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사도기에 섬기는 신의 격이 올라간 걸 곧장 알 수 있었다.

동시에 타들어 가던 내 몸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또한, 태양빛이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못하게 됐다.

뱀파이어 성녀가 급히 권능을 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힘에서 무언가 다급한 감정이 느껴졌다.

신력을 수습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내가 생선구이처럼 변해간 것이 몹시 미안한 기색이었다. 화상투성이의 몸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우···."

잘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뭔가 더 하려는 것 같은데?

새벽의 강림이라는 초대규모 신성마법도 끝나고, 성녀의 신위도 올라갔다. 룩스 움브라는 잿더미가 됐고.

이대로 끝나도 무방할 텐데,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힘이 응축되는 게 느껴진 것이다. 지켜보고 있자니 하늘이 갈라지며 빛과 함께 장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스킨크들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바짝 조아렸다.

"경배합니다! 스에에에!"

"축복을! 어머니시여!"

태양 교단 놈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강신인가?'

직접 튀어나오나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차원의 틈새로 나타난 이는 신의 사자였다.

사자는 붉은 로브를 입고 하얀 가면을 쓴 여성으로, 등에는 박쥐 날개가 돋아 있었다. 과연 신의 사자라 그런지 느껴지는 힘이 어마어마했다.

그녀는 차분히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무언가를 건넸다.

[저는 새벽의 시종 세티스입니다. 충실한 사도여, 여신께서 당신에게 이걸 보내셨습니다.]

세티스란 존재는 내게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의 은제 접시를 내려줬다.

[여신님의 하사품입니다.]

이 세계에선 신격은 그 위가 오르면 사도들에게 하사품을 돌리는 게 관례였다. 뱀파이어 성녀에게 사도는 나 혼자뿐이니 신경 쓴 물건일 게 틀림없었다.

틀림없이 대단한 물건 같은데 무슨 용도인지는 바로 알 수 없었다. 일단은 감사를 표하며 받았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 마음가짐이 아름답군요. 사도여, 여신께서 전하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을 성지로 삼고 교회를 세우라 하셨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는 만날 날이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새벽의 시종 세티스는 사라졌다. 뱀파이어 성녀가 전하라던 언젠가 만날 거란 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불멸의 여왕에게 했던 연인 선언 때문인가?'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더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사방에서 몰려온 스킨크들의 환호성으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어머니께서 우리를 택하셨다!"

"이곳이 성지다!"

"스킨크의 어머니시여!"

모두 자신들이 여신에게 선택받았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뭐랄까, 약소 종족의 설움이 폭발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간 의지할 구석 없이 죽은 신만 붙잡고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신앙의 대상이 생긴 것이다. 또한 내게도 열광했다.

"사도시여!"

"스킨크의 구원자! 영웅!"

"뱀의 송곳니의 주인이여!"

산지가 열광한 스킨크들의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 * *

소렌이 요청한 초대규모 신성마법을 전개하는 건 뱀파이어 성녀에게 대단한 부담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최근 신력이 보충되긴 했지만 지출은 꾸준했다. 새벽의 시종 세티스를 창조하고, 아룬델의 대도서관에서 각종 서적을 빌려야 했으니 말이다.

뱀파이어 성녀는 넥타르 한 잔조차 마시지 못할 정도로 절약했지만 살림살이가 궁박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초대규모 신성마법을 전개하기 위해선 남은 모든 신력을 쏟아 넣어야 했다. 새벽의 시종 세티스는 우려를 표해왔다.

"여신이시여, 이번 일이 실패하면 그 빈궁함을 감당하기 어렵나이다."

쉽게 말해 알거지가 된다는 거다. 하지만 뱀파이어 성녀는 단호했다.

"사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니 전력으로 응해줘야 합니다."

"사악한 바람의 정령들에게 다시 괴롭힘을 당할지 모르옵니다."

"상관없어요.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사도의 성공이에요."

물론 성공하기만 하면 저 고대신의 조각이 품은 신력을 갖게 되니 투자 대비 엄청난 이득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뱀파이어 성녀는 그런 세티스의 마음을 헤아렸다.

"언제나 절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사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고 싶어요. 아무도 찾지 않아서, 이 황량한 바위 차원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던 절 구해준 게 소렌이에요. 절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요."

세티스는 성녀가 흙투성이가 될 때까지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던 걸 떠올리고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티스가 본 바에 의하면 성녀의 마법진은 반신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된 것이었다. 기대를 걸어 봐도 좋을지도 몰랐다.

"여신이시여, 뜻대로 하소서."

이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새벽의 강림이 작렬하자 룩스 움브라는 막대한 신력을 남기고 타버렸다.

솔직히 그 과정을 지켜본 세티스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가 태양 교단을 이용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신력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대단한 수완가란 생각이 들었다.

"자애로운 성녀시여. 여기 고대신의 신력을 얻으시고, 소신격으로 거듭나소서."

소렌이 그리 기도한 순간 지켜보던 세티스도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주인은 곧장 룩스 움브라의 신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보잘것없던 반신이 소신으로 거듭났다.

우우우우웅!

거대한 신력이 진동하며, 기도하듯 눈을 감은 성녀를 휘감았다. 그와 함께 우주의 질서와 규칙을 나타내는 신의 문자가 그녀를 둘러쌌다.

그 문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제 성녀가 필멸자와 불멸자의 경계에 있는 반푼이 신격이 아니라, 진정한 신좌의 주인으로 거듭난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신의 문자는 중대한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성녀의 별자리가 만들어졌으며, 우주에서 그녀가 담당하는 영역이 생겼다는 얘기였다.

뱀파이어 성녀는 피와 새벽, 뱀파이어, 스킨크의 신격이 되었다. 특히 스킨크의 어머니가 된 것을 확실히 인정받았는데 이건 몹시 중요했다.

스킨크가 크게 성세를 이루는 종족은 아니지만, 한 종족의 종족신이 된다는 건 신으로서 대단한 성공이었다.

왜냐하면 그만큼 안정적인 철밥통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참 신들은 어떻게든 종족신 자리를 꿰차려고 갖은 애를 써댔다.

하지만 극히 일부만이 종족신이라는 꿀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뱀파이어 성녀는 첫 번째 사도 덕에 그걸 이뤘다.

스킨크족이 일곱 봉우리에만 사는 건 아니다. 행성 전체에 퍼져 있는 스킨크족의 총인구는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즉, 엄청난 노다지였다.

물론 그들 전부가 성녀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고, 또 행성 전체로 신앙이 퍼져나가는데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성녀의 성공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티스는 주인의 이런 성공에 몹시 흥분했다.

"언젠가 파충류의 종족신인 수정유물의 주인 사르자스가 부활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전에 여신께서 스킨크들의 어머니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승급을 끝낸 성녀는 서둘러 권능을 써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고 있던 소렌을 치유하고 태양빛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조치했다.

"후우···."

성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신으로 승급하고 있으면서도 소렌이 고통받는 모습에 애간장이 탔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성녀는 그제야 여유가 생겨 세티스에게 답했다.

"스킨크들에게 어머니라 불리게 되었으니 정성껏 돌볼 생각이에요."

이에 세티스는 한 가지를 간했다.

"이참에 외형을 스킨크로 바꾸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그들이 훨씬 빠르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나이다."

"문장만이 아니라 제 모습을 자체를 말인가요? 확실히······."

성녀는 돌로 만든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다 거절했다.

"지금 모습이 좋아요."

"포교에는 스킨크로 변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연유를 여쭤도 되겠나이까?"

그 말에 성녀는 부끄러운 기색이 됐다.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베베 꼬더니 간신히 답했다.

"사도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요······."

"네···?"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세티스는 답을 찾지 못했다. 세티스는 외형상 가면을 쓴 여성이긴 하지만 신을 위한 시종일 뿐이고 인간적인 감각이라곤 전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성녀가 말하는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재차 간언하려는 그때 성녀가 나긋하게 말해왔다.

"또 중요한 이유가 있답니다."

"무엇인지 들려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간단해요. 이대로 더 나아가 중신격에 오르면 분명 전 미의 여신이 될 테니까요."

눈물점이 매력적인 성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제야 세티스는 자기 주인을 다시 보게 됐다.

언제나 털털하고 상냥한 성격이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소신격에 오른 주인의 외형은 참으로 놀라웠다.

신성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청초하면서도 요사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존재였다. 그 기묘한 조화를 마주한 세티스는 주인이 농담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성녀는 다른 여신들을 모두 평범하게 만들어 버릴 미모의 소유자니 신위가 오르면 분명히 가능하리라.

하지만 의문도 따랐다.

"어째서 '미(美)'라는 영역을 갖고자 하시나이까? 연유가 있으리라 생각되옵니다."

세티스가 본 성녀는 아름다움에 크게 집착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만약 첫 번째 사도가 없었다면 기꺼이 자신을 파충류 종족의 외형으로 바꿔버리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미의 여신이 되겠다고 하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이에 성녀가 답했다.

"복수를 위해서죠."

이전에 아단이 소렌을 신체개조해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게 공양하던 그때, 신격 셋이 출현했다. 그때 오른쪽에 자리 잡고 좀처럼 말이 없던 녹색 연기의 여신.

당시 소렌은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 탓에 마치 겨울의 여신 같단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반면 성녀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봤다. 바로 자신의 대적이라 할 존재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의 여신이었다.

"내 원수가 가진 영역을 빼앗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신위가 떨어지는 걸 봐야겠어요."

새삼 세티스는 여신의 측근이면서도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답해줄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런 세티스를 보며 성녀가 살포시 웃었다.

"일단 심부름을 하나 부탁드릴게요. 물질계로 나가서 사도에게 이걸 건네주고 오세요."

뱀파이어 성녀는 법기(法器)를 하나 창조하더니 내밀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은제 접시였다.

"그리하겠나이다."

세티스가 떠나자 뱀파이어 성녀는 신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황량한 암석 차원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세계 전체가 그녀의 영역으로 물들어갔다. 그러자 황량한 바위 차원의 토박이인, 사악한 바람의 정령들이 몰려와 종이 되길 자처했다. 그들은 지난날 존재감이 흐릿해지던 성녀를 무던히도 괴롭혔던 놈들이다.

특히 그들의 왕족은 목에 사슬을 걸고 바닥을 기어 성녀에게 다가왔다. 자유로운 정령이 사슬을 걸고, 바람이 땅을 긴다는 건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굴종이었다.

"여신이시여, 그저 천한 종이 되길 바라니 원하는 대로 부려주십시오."

"이곳의 바람과 돌,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게 당신의 것입니다."

진정한 신이 되자 그녀를 둘러싼 세계 전체가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뱀파이어 성녀는 그것보다 다른 게 기뻤다.

사도에게 이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수 있겠단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자신의 노예가 된 사악한 바람의 정령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제 사도인 소렌의 동상을 세우세요. 아주 크고 멋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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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스러운 형제(1)

***

누군가 했던 말이 있다.

승패는 신속하지만, 그 여파는 오래 간다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인데 내겐 이런 의미로 들렸다.

'싸움보다 뒤처리가 더 문제다.'

실제로 이번 일도 그랬다. 룩스 움브라는 성녀를 단번에 소신격으로 올려버릴 정도로 신력의 꿀단지였지만, 놈이 남긴 파괴의 흔적은 지대했다.

스킨크들은 잠도 못 자고 복구에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문젯거리는 바로 태양 교단이었다.

'그 신성 바퀴벌레들을 어떻게 할까?'

일단 놈들을 치료해준다는 핑계로 모두 억류했다. 실제로 치료해주고, 밥도 주고 있다. 스킨크들에게 정중하게 대하라고 언급도 해놨고.

'처음 계획대로 처리하긴 애매해졌지.'

원래 룩스 움브라와 싸우는 동안 방해가 될까 봐 체포하려고 했던 거다. 거기에 더해 룩스 움브라에서 얻은 신력의 소유권 문제도 있었고.

하지만 우리 위대하신 성녀님의 태양빔이 너무 뜨거웠던 건지, 그 고대의 문어가 간단하게 타죽어 버렸다.

결국 태양 교단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됐고, 굳이 놈들에게 강하게 나갈 필요는 없어진 거다.

게다가 함부로 건드리면 후폭풍도 문제였다. 원체 유명한 신성 깡패 집단이니 말이다. 놈들은 태양 문신을 새기고 다니는 갱단이라고 보면 맞았다.

결국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그냥 풀어주는 거였다. 임무 실패에 아달릭이 뱀파이어 스캔들까지 터뜨린 놈들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털레털레 돌아갈 테니까.

한데도 나는 이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뭔가 공짜로 보내주긴 아깝고 배알이 꼴린다!"

그렇다. 고인물로 다시 각성한 나는 극한의 이득충이었던 거다. 풀어주면 해결될 건데, 그 와중에 뭐라도 얻고 싶어 잔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번 원정대에 세속성기사 발레나 공녀가 참가했다는 거다.

발레나 공녀라고 하면 일전에 나와 어둠의 숲에서 성녀의 손가락 때문에 술래잡기를 했던 관계다.

'그년이 신성 검기를 마구 날리며 쫓아왔었지.'

나 같은 뱀파이어에겐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일이었다.

일단 발레나 공녀를 따로 불러들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꾀죄죄한 차림이지만, 그 미모만은 범상치 않은 발레나 공녀가 도착했다. 나는 그녀에게 차를 권하고는 입을 열었다.

"설마 원정대에 참가했을 줄은 몰랐는데."

"···저도 여기서 당신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입장에선 다행이군. 그래도 너는 정화의 기사단 소속이니 말이 좀 통할 거 같거든?"

"저도 어디까지나 교리에 묶여 있습니다.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당신······."

발레나 공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뭐? 왜?"

"어떻게 그 사이에 이렇게 강해진 겁니까···? 느껴지는 압박감에 가슴이 조여 오는 기분입니다."

발레나 공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저리 생각할 법하네. 예전에 만났을 때 나는 저 여자 때문에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바빴다. 무슨 터미네이터가 쫓아오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가만히만 있어도 내 기세에 발레나 공녀가 짓눌리고 있었다.

게다가 저쪽은 내게 붙잡힌 상태기도 했으니 이전과는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셈이다. 실제로 발레나 공녀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긴장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진 못했다.

"너 같은 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공녀."

그리 말하고 노려보자 발레나 공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읏···!"

사실 아단의 신체개조 덕이라고 말하기 애매해서 괜히 무게 좀 잡은 건데 효과가 엄청났다.

"오늘 널 부른 건 태양 교단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똑바로 답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일단 네놈들 상황이 어떻나?"

"아달릭은 체포됐습니다. 원정대의 이단심문관께서 권한을 발동하셨거든요."

듣자니 태양 교단의 원정대는 아달릭이 뱀파이어의 하수인이란 문제 때문에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억류도 억류지만 아달릭의 처리 때문에 잡음이 컸단다. 그러다 결국 원정대에 있던 이단심문관이 나섰다는 것.

"정황상 아달릭이 뱀파이어와 손을 잡은 게 확실해 보여도 교구장을 그렇게 막 체포할 수가 있나?"

"일마레 수녀의 추가적인 증언과 증거 공개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걸 예감했는지 아달릭의 비리를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갖고 있더군요. 구체적인 혐의는 본단에 가서 재판에서 밝혀질 테지만요."

"뱀파이어 건은 재판으로 간다는 거군."

"네, 그렇죠."

잠시 생각하던 나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너뿐 아니라 정화의 기사단 모두. 교단의 상층부와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얼마나 엮여 있는지 모르니까."

발레나 공녀는 슬픈 얼굴이 됐다. 그녀는 순수하고 정결한 교단을 원한다. 그렇기에 뱀파이어가 교단의 내부에 손을 뻗쳤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힘든 거겠지.

"어째서···."

"응?"

"어째서 그런 자들까지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걸까요? 그런 타락한 마음가짐으로······."

실제로 아달릭 교구장을 비롯한 그들의 파벌은 태양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태양신의 정의가 살아있다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일 테지만 사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비밀 가운데 하나였다.

'왜 그런지 알지만 말해 봐도 안 믿을 테니······.'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발레나 공녀 역시 혼잣말에 가까운 푸념이었다.

"뱀파이어가 뱀파이어에 대해 경고해 오니 참 이상하군요."

"뱀파이어도 다 입장이 다른 법이지. 그보다 아달릭은 어떻게 될 것 같나?"

발레나 공녀는 그가 재기할 확률은 없다고 했다. 설령 뒤를 봐주는 거물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란다.

"이번 일에는 책임질 자가 필요하거든요."

태양 교단이 일부러 오크를 인간 마을로 유도한 건에 대해선 그 자리에 있는 스킨크들이 다 들었다.

당연히 일곱 봉우리에도 소문이 나고, 나중에 그건 인간의 왕국까지 흘러갈 거다.

거기에 더해 원정까지 성대하기 조졌다. 결국 이 모든 걸 책임질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사악한 아달릭이 욕심에 눈이 멀어 오크와 내통하고 원정대까지 실패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태양 교단의 뜻과 어긋난다, 아마 그런 스토리를 교단의 상부가 택할 거란 얘기였다.

"그래? 나름대로 괜찮은 결말이군."

"뱀파이어, 그러니 저희를 풀어주세요. 계속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풀어주는 게 무난하고 좋은 수습이지만 역시 공짜로는 안 된다. 그래서 일단 눈을 부라렸다.

"공녀! 자기 처지를 망각한 것 같군. 정중히 대해 주니까 무언가 요청할 수 있는 위치 같나?"

서서히 마력을 일으키니 발레나 공녀가 비지땀을 흘려댔다. 그 고고한 눈동자로 어떻게든 날 마주 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굴욕감이 이 지체 높고 고결한 여성의 얼굴에 번져갔다.

"으읏···."

성녀가 내려준 막대한 마력으로 사악한 기운을 풀풀 쏟아내고 있었으니 받아내기 버겁긴 하겠지.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호오, 원정대의 복귀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건가?"

그 말에 발레나 공녀는 흔들리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입술을 잘근 깨물며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습니다.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대체 무엇까지 각오한 건데 저리도 결연한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실로 고매한 성기사의 표본이었다. 더러운 놈들만 그득그득한 세상에서 이런 존재는 귀한 법이지.

나는 딱히 그녀와 원수를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흘려내던 마력을 멈췄다. 그제야 발레나 공녀가 숨을 제대로 쉬었다.

"하아··· 하아···."

그녀는 사우나라도 들어간 것처럼 땀에 잔뜩 젖어 있었다. 아름다운 은발이 얼굴에 달라붙은 채 입술을 파르르 떠는 게 몹시 가련해 보였다.

"좋아. 원하는 게 있다. 만약 수락하겠다고 하면 원정대를 전원 풀어주지."

"···무엇입니까?"

"정화의 기사단의 단장과 만남을 주선해라."

앞으로 태양 교단의 거물들과 싸우기 위해선 정화의 기사단과의 손을 잡는 건 필수다. 드워프 광산에서 드라크린 때도 그랬듯 내부의 협력자란 최고의 카드였다.

"단장님을 말입니까?"

"그래,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거든."

"······."

"정화의 기사단은 교단을 개혁하길 바라지. 그리고 내가 섬기는 성녀께선 교단의 부패한 수뇌부를 제거하길 원하신다. 서로 적이 같으니 손을 잡지 못할 것도 없지. 애초에 네가 어둠의 숲에서 날 끝까지 추살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발레나 공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어왔다.

"성녀님께선 아직도 교단을 정화할 사명을 갖고 계신 건가요?"

"아니, 이제 그분은 신이다. 더 이상 교단의 일을 걱정하는 한 명 교인이 아니야. 그저 그들이 성녀님의 적이자 원수이기 때문이다."

한때 성녀를 모함했던 그 무리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핏빛 새벽 교단을 짓밟아 버릴 힘을 갖고 있으니 투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건 생존의 문제기도 했다. 나와 성녀의 성공을 위해선 위협이 되는 태양 교단의 세력은 사라져야만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태양 교단이 풍비박산이 나야 우리 쪽이 편해지거든? 그 과정에서 몰락을 하든, 개혁을 하고 거듭나든 알 바 아니고."

결국 발레나 공녀는 고민 끝에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단장님과의 만남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좋다. 다만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너는 인질로 여기 남는다."

"뭐, 뭐라고요!"

놀란 발레나 공녀가 양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여 왔다.

"귓구멍이 막힌 건가? 너는 이 만남을 보장하는 장치로 남게 되는 거다."

"아니, 제가 가서 단장님을 설득해야······."

"개소리 집어치우도록.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나?"

내가 뭘 믿고 홀라당 이 여자를 풀어주겠나. 게다가 발레나 공녀의 가치는 몹시 높다.

발레나 공녀만 손에 쥐고 있다면, 앞으로의 진행 상황에 따라 내가 흑막이 되어 그녀를 고트리브 가문의 후계자로 만들 수도 있을 터.

그렇게만 하면 왕국의 명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뱀파이어가 되는 것이다.

이래저래 발레나 공녀를 가지고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계획이 많았다. 활용가치가 높으니 어디 가지 못하게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뱀파이어. 절 억류하면 교단이나 저희 가문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흐흐흐, 그 점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너는 자의로 이곳에 남는 거니까."

"뭐라고요?"

"고결한 성기사 발레나는 룩스 움브라가 남긴 다른 위협이 없는지 조사하기로 결의한 거다. 또한 무지몽매한 스킨크족에게 포교한다는 거룩한 임무 때문에 머무는 것이야. 어떤가?"

내 말에 발레나 공녀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이, 이런 사기꾼 같은!"

발레나 공녀는 분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수록 나는 즐거워졌다.

'키키킥. 이거지.'

본래라면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태양 교단을 그냥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하나 더 이득을 보려고 발레나 공녀를 인질로 붙잡게 됐다.

"알겠습니다···."

결국 발레나 공녀는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몹시 분한 듯 눈가가 살짝 촉촉하게 젖어서는 나를 반항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공녀에게 한마디 했다.

"참, 기왕 있는 거 무슨 이야기 속 공주님처럼 굴 생각은 하지 마라. 이것저것 좀 하란 말이야."

"누굴 식충이 취급하려는 겁니까! 그리고 저는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불쌍한 스킨크 둥지를 재건하는데 도움을 좀 주란 말이다."

그 말에 발레나 공녀는 발끈한 게 민망했던지 볼을 살짝 긁적였다.

"아, 그런 거라면야···. 어려움에 빠진 이들은 돕는 건은 성기사의 의무입니다."

아마 발레나 공녀의 성격상 그 봉사활동을 열심히 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가 나빴다. 그 부탁을 한 게 꽤 음흉한 뱀파이어란 점에서 말이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녀를 선전용 도구로 써먹을 작정이다.

스킨크들에게 저 인간 성기사가 스킨크의 어머니에게 감화돼, 결국 태양 교단을 버리고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촉새처럼 떠들 생각이다.

열심히 둥지를 고치는 모습을 보면 스킨크들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테고.

'흐흐흐, 기왕 인질 생활을 하는 거 이 몸에게 도움이 되라 그거다.'

그런 선전은 공녀가 앞으로 축낼 빵값에 비하면 그야말로 개이득이다.

물론 나도 양심은 있다. 공녀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르게 해줄 생각이다. 실로 신사다운 배려라 할 수 있다.

"열심히 하라고."

웃으며 격려해 주자 발레나 공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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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스러운 형제(2)

***

일이 대강 다 정리되자 피의 제단을 뜯어서 귀환했다. 돌아오는 발걸음은 몹시도 가벼웠다.

'일곱 봉우리 중, 벌써 하나를 점령하다니!'

게임에서도 이리 빠르게 봉우리 하나를 꿀꺽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모니터 속 세계와 비교도 안 되는 현실에서 더 대단한 성과를 낸 것이다. 뿌듯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하핫! 역시 게시판을 주름잡던 근본은 어디 안 가는군. 나머지 여섯 개도 금방 먹어치워 주마. 크흐흐.'

절로 어깨에 뽕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돌아와 보니, 달빛이 내리쬐는 골짜기 입구에서 누군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에레미나였다.

"앗! 주인님!"

녀석은 날 발견하더니 반색해서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왔다.

"무사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어떻게 알았어? 연락도 안 했는데?"

"스킨크의 둥지 쪽에서 느껴지던 거대한 기운이 사라진 탓입니다. 주인님께서 성공하신 게 틀림없으니 금방 돌아올 거라 판단했습니다."

이런, 똑똑한 녀석을 보겠나. 그래도 언제 복귀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을 텐데, 서성거리던 걸 보니 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던 모양이다.

"주인님, 치열한 싸움을 하셨군요. 의복이 너덜너덜합니다."

"그래, 하지만 이것은 내가 용감했다는 증거다."

"과연 주인님이십니다."

이후 피의 제단을 운반해 온 일꾼과 주술사들이 원래 위치에 그것을 다시 설치하기 시작했다. 대충 반나절 정도 걸렸다.

"어디 잘 작동하나 볼까?"

이것저것 점검해 보니 피의 제단은 완벽했다. 다만 새벽의 강림 같은 초대규모 신성마법을 전개한 탓에 마력이 텅텅 빈 게 느껴질 뿐이다. 다시 차오르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달리 분부하실 바가 있으신지요?"

스킨크 주술사의 물음에 나는 한 가지를 주문했다.

"이 지하실에 벽을 쌓아 구역을 나누고 방을 만들고 싶군. 마침 석공들이 여럿이니 도움을 줄 수 있겠나?"

"그저 분부만 하시면 그만입니다. 저희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스킨크 주술사는 아주 공손했다. 하긴, 눈앞에서 룩스 움브라를 태워버리고, 신의 사자가 하사품을 내리는 걸 봤으니 그럴 수밖에.

"어떤 식으로 작업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피의 제단을 둘러싸 보호할 벽을 세워라. 이곳은 신전의 중심이니 엄중히 보호받아야 한다."

내가 방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자 스킨크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 후 공사는 일주일이 걸렸다. 자재는 근처의 유적에 널려 있는 벽돌을 주로 썼고, 석회 모르타르와 문을 만들 목재는 스킨크들이 둥지에서 직접 가져왔다. 녀석들은 사도의 거처라 그런지 열과 성을 다해 작업해줬다.

"사도시여. 부족하지만 완성했습니다."

공사 책임자는 나이 많은 석공 스킨크였다. 그의 표정은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주 제대로 만들었다는 태도다.

"훌륭하군."

나는 내부 시설을 둘러보고는 스킨크들에게 금화로 품삯을 지급했다. 그러자 놈들은 사도에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펄쩍 뛰었으나 억지로 금화를 쥐여줬다. 그러자 금을 좋아하는 놈들답게 표정이 헤실헤실 풀렸다.

역시 인력은 공짜로 부리는 게 아니다. 어차피 드워프 광산 금고를 털어와서 돈도 많았고 말이지.

"이만 저희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스킨크들이 떠나자 에레미나와 내부를 둘러봤다. 꼬맹이는 잔뜩 들뜬 기색이었다.

"주인님, 제가 이렇게 크고 훌륭한 시설에 머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내부는 석재로 된 황량한 풍경이지만 가난한 사냥꾼의 딸이었던 에레미나에겐 대단해 보이는 듯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안의 구조는 이랬다. 지하실의 입구를 지나면 길고 넓은 복도가 보인다. 복도의 좌우에는 각기 세 개씩의 방이 있었다.

복도 끝의 문을 열면 커다란 방이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피의 제단이 있었다. 그 방의 좌우에는 문이 있어 각기 나와 에레미나의 방으로 이어졌다.

제단의 오른쪽이 내 방이고 왼쪽이 에레미나의 방이다. 과거 제단 좌우에 석재관 하나 덜렁 가져다 놓고 잠들던 것에 비하면 실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제방이 생긴 건 난생처음입니다."

에레미나와 내 방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상대의 방으로 도망칠 수 있게 비밀통로로 연결했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 비밀창고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비밀창고는 이 지하실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았다.

"이걸로 신전의 지하실이 만들어졌다. 이제 여유가 될 때마다 위로 건물을 쌓아 올리겠다."

앞으로 골짜기 지역에 만들 건물이 많았다. 신전은 단순히 예배당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역할을 해줄 건물을 짓게 되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신의 사자를 불러들이기 위한 챔버.

-각종 방어 설비와 함정.

-새로운 추종자를 유치하기 위한 시설.

-다른 차원의 용병을 고용하기 위한 관문.

-일정 구역 버프를 뿌리는 동상.

기타 등등 다양했다.

앞으로 이런 온갖 건물과 설비로 가득 찬 훌륭한 신전을 세우는 게 내 목표다. 그것은 신전이며, 나만의 요새기도 했다.

내가 이런 포부를 밝히자 에레미나가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정말 멋진 야망입니다. 주인님."

이제 겨우 지하실 하나 정비한 거니 갈 길이 멀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벌써 내 머릿속에는 훌륭한 신전이 보이는 것 같았다.

***

며칠간 휴식이 이어졌다. 이 골짜기에는 나와 에레미나 말고도 새로운 주민이 생겼다.

바로 하인으로 삼은 스킨크 다섯이다. 다만 그들 중 둘은 스킨크 둥지로 보냈다.

일종의 감시역이었다. 지난 일로 스킨크들이 내게 충성한다지만 헛짓거리하지 않나 지속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었다.

골짜기에 남은 스킨크는 셋이었다. 에레미나의 종복인 암컷 스킨크 키라와 내 종복인 수컷 스킨크 스칼릭스, 암컷 스킨크 차라였다.

이들이 주로 맡은 임무는 나와 에레미나가 관에 들어가 있는 낮에 경계를 서는 일이었다.

"근무 중 이상 무!"

관에서 몸을 일으키자 스칼릭스가 경례를 해왔다.

"수고가 많군. 쉬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분. 그런데 스킨크 둥지를 통해서 편지가 하나 왔습니다."

"음?"

뭔가 해서 보니까 드워프 왕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허허, 이분도 참···."

레그너 3세가 룩스 움브라의 일이 끝났으니 어서 자신이 엘프 여왕과 가까워지게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도둑맞은 거긴 하지만 엄청난 금과 보석을 내어줬다. 내 주머니가 금으로 넘쳐나는 게 저 양반 덕이라는 거다. 그의 소망을 이뤄줘야 도리에 맞았다.

"에레미나. 드워프 왕을 만나러 갔다 오겠다."

"네. 잘 다녀오십시오. 주인님. 저는 그동안 흑마법을 공부하고 있겠습니다."

실제로 이 녀석은 혼자서도 빠르게 마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전설급이라 그런지 무시무시한 재능이었다.

"성실하구나."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커다란 마도서를 들고 있던 꼬맹이는 기쁜 듯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에레미나와 인사하고 바로 드워프의 도시인 스톤헤븐으로 향했다.

박쥐로 변해 직선 경로로 가로지르니 금방이었다. 나는 날아가는 동안 레그너 3세의 부탁에서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했다.

'진정한 공략쟁이라면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새로운 대박으로 연결해야 한다.'

마침 머릿속에 좋은 수가 떠올랐다. 또 한탕 할 생각에 가는 길이 절로 즐거워졌다.

파닥파닥!

편지에서 미리 정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드워프 도시인 밖에 있는 왕의 별장이었다.

뱀파이어로 변해 별장을 향해 걸어가자 미리 언질을 받은 드워프 병사들이 길을 내줬다. 그들은 몹시 과묵해서 뱀파이어인 날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왔군."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레그너 3세가 날 맞아줬다. 벌써 그는 몸이 들썩들썩하고 있었다.

"폐하."

"뱀파이어 공. 이제 자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차례야."

"물론입니다. 이전에 말한 대로는 하셨습니까?"

"그렇네. 일단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동맹으로 다가가려 하고 있지. 여왕의 환심을 살 증기기관 역시 준비 중이라네."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동맹자인 척하고 나서는 개인적인 접근도 필요한 법입니다. 본디 친분이란 개인과 개인의 감정적 교류 아니겠습니까?"

"오, 개인적인 접근이라. 참으로 옳은 말이네."

레그너 3세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엘프 여왕이 아름답다고 해도 드워프와 엘프는 미의 기준이 다른데 그렇게도 좋을까?'

하긴, 사랑이란 이해가 아닌 감정의 문제.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엘프 여왕과 가까워지는 건 취미를 공략하는 게 확실합니다."

"너무 고리타분한 방법이 아닌가? 짐이 연애 서적을 들여다보니 여자한테 취미가 뭐냐고 묻는 것보다 한심한 질문은 없다고 했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가 엘프 여왕이라면 먹힙니다. 왜냐하면 여왕의 은밀한 취미를 아는 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오오, 은밀한 취미?"

"네, 폐하께서 그 취미에 어울려주실 수 있다면 여왕은 기뻐할 것입니다. 당장 그것만으로 친구가 될 리는 없습니다만, 훨씬 더 자주, 즐거운 대화를 나눌 계기는 되겠죠."

"훌륭하군. 짐이 그대의 계책에 흡족하도다. 하면 대체 엘프 여왕의 은밀한 취미가 무엇인가?"

"바로 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별을 관찰한다고 하니 레그너 3세는 뭔가 감성적인 얼굴이 됐다.

"실로 낭만적인 취미로군."

레그너 3세는 영감이 떠오르는 듯 곧장 무언가를 종이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왕의 취미를 공략하기 위해선 이쪽은 낭만은 싹 다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엘프 여왕은 자신만의 천문대를 가지고 있는 진정한 전문가입니다. 그녀는 천문지식의 대가이며 천체에 대해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이입니다. 만약 낭만이 어쩌고 하며 별에 관한 시나 읊어댄다면 엘프 여왕은 폐하께 관심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헉!"

놀란 레그너 3세는 끄적이는 것을 황급히 치웠다. 그것은 그가 즉석해서 떠올린 시구였다. 슬쩍 보니까 별자리란 칠흑의 바다를 춤추는 왈츠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뭐랄까, 이 중년은 감수성이 넘치는 사내였다.

'엘프 여왕에게 저런 거 보여주면 조진다. 진짜···.'

민망해 헛기침을 하는 레그너 3세에게 나는 엘프 여왕의 호의를 얻으려면 천문지식에 관해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레그너 3세는 난색을 표해왔다.

"짐은 기꺼이 공부할 의향이 있네. 하지만 그대의 말에 따르면 여왕은 수백 년간 천문을 파고든 대가 중의 대가. 어쭙잖은 지식으로 대화해 봐야 상대해주지 않을게 뻔하네."

"제대로 보셨습니다. 학자라 불릴 정도는 되어야 여왕에게 겨우 말이나 붙여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하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소렌, 짐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게나. 부디!"

"걱정마십시오. 폐하. 당연히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레그너 3세는 진정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에 빠진 그는 작은 일로 일희일비했다.

"바로 천문 관측용 망원경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여왕이 가진 물건은 구식의 망원경입니다. 최신 기술로 제작된 망원경을 선물한다면 크게 호의를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천문 덕후인 여왕에게 최신 망원경을 주면 호감도가 폭발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레그너 3세는 의문을 표했다.

"엘프라면 밤하늘을 보는데 마법을 쓰지 않나? 굳이 망원경까지 필요한가?"

"폐하, 마법만 쓰는 것과 마법과 망원경을 같이 쓰는 건 효율에서 천지차이입니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겠군. 참으로 귀중한 정보야. 그럼 그 최신식 망원경은 어디서 구해야 하나? 노움이 갖고 있으려나?"

"아닙니다. 뱀파이어가 갖고 있습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기술하면 노움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뱀파이어 중에 렌즈 제작의 거장이 있습니다."

나는 렌즈 제작에 평생을 바친 한 어떤 거장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름은 루시우스 스타위버로, 살아생전 왕국 최고의 렌즈 장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루시우스는 죽음이 찾아오자 그걸 거부하고 뱀파이어가 됐습니다. 왜겠습니까?"

"알 것 같군···. 기술에 대한 끝없는 욕심 때문이겠군. 더더욱 렌즈 제작에 매달리고 싶은 거야."

"맞습니다. 현재 그는 뱀파이어의 마을인 섀도우타운에서 머물며 자신의 기술을 계속 갉고 닦고 있습니다. 감히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수백 년의 기술을 녹여 만든 망원경은 노움이라도 따라 하지 못합니다."

"놀라운 장인이로군! 확실히 그럴 것 같네."

"루시우스의 최신식 망원경은 여왕조차 감동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걸 선물하는 게 폐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아! 생각만 해도 근사하군."

"맞습니다. 여왕의 호의를 사기 충분합니다. 그걸 주고 여왕에게 별자리에 관심이 있으니 가르침을 구해보십시오. 반드시 열정적으로 알려줄 겁니다."

원래 덕후에게 뭐 물어보는 것만큼 가까워지는 법도 없다. 다만 여왕은 방어력이 높은 덕후라 문제인데, 루시우스의 망원경이면 그냥 끝난다. 이후에 둘이 친해지는 건 문제 없을 터.

이런 계획을 알려주마 레그너 3세는 몹시 감격해서는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뱀파이어 공! 뱀파이어 공! 그대가 짐의 지혜 주머니다. 이런 현인이 있을 줄이야! 짐이 오늘 크게 개안하고 탄복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번 일은 내게도 중요했다. 단순히 드워프 왕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 과정에서 이득을 챙긴다는 정도가 아니게 됐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의 중립지대인 섀도우타운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섀도우타운에는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있지···.'

즉, 존나게 위험한 임무라는 거다. 그렇다고 피할 일도 아니었다. 모름지기 위험이란 외면하면 나중에 몇 배로 불어나서 굴러오는 법이니까.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주구인 아달릭을 폭로한 이상 이미 투쟁은 시작됐다고 봐야지.'

게다가 놈들은 태양 교단의 수뇌부와 유착했기에 어차피 나랑 부딪칠 수밖에 없는 관계다. 그러니 아직 저쪽이 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재빨리 움직이는 게 유리했다.

"루시우스의 망원경을 사기 위해선 섀도우타운으로 가야 하나? 대체 얼마쯤하고!"

레그너 3세가 열정적으로 물어왔기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워프 왕도 돕고, 나도 이득을 보는 구도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 이게 정답게 살아가는 이치지.'

나는 일부러 안색을 좀 굳혔다.

"그게, 제가 알고 있긴 한데··· 그것이 구하기 몹시도 어려운지라···. 쓰읍."

자신 없다는 태도를 보이자 레그너 3세는 안달이 나서는 소리를 높여댔다.

"아니! 자네답지 않게 무슨 소린가! 뱀파이어 공! 대체, 대체 무엇이 필요한가! 짐이 다 지원해 줄 테니 기탄없이 말해보게."

흐흐흐, 폐하.

아주 잘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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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스러운 형제(3)

"자, 뱀파이어 공 무엇이 필요한가?"

사실 생각해 둔 게 있지만, 바로 답하진 않고 대답을 미뤘다.

"그 부분은 차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듯합니다."

그러자 레그너 3세가 불안한 얼굴이 됐다.

"아니, 이 새끼 나중에 뭘 또 요구하려고···."

"폐하?"

"아, 아닐세.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나."

이 난쟁이 놈 일부러 들으라고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이 몸은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 굳이 남의 본심을 헤집어 정겨운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다. 서로 속으로 뭘 생각하든 일단 겉으로는 웃으며 거래하는 사이니까.

'그래, 내면 따위보다 가면을 쓴 겉모습이 더 중요한 법이지.'

그 가면을 가식이라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고 싶다. 가면이야말로 어른의 염치와 예의 같은 거니까.

"하하하! 폐하."

"허허허! 뱀파이어 공."

우리는 서로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참, 폐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드워프 귀족을 한 명 만나고 싶은데, 제가 찾아가면 문전박대를 당할 것 같군요. 자리를 좀 주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이번 일에 필요한 건가?"

"네, 섀도우타운으로 가기 위해선 그 귀족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알겠네, 조치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성과를 기대하겠네. 뱀파이어 공!"

나는 맡겨달라는 듯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이번 일의 목적지인 섀도우타운은 매력적인 장소다. 물질계가 아니라 그림자 차원 한쪽 구석에 걸쳐 있는 마을로 뱀파이어들의 숨겨진 안식처였다.

마을은 중립지대로 사방에서 모여든 뱀파이어들을 위한 도박장, 격투장 같은 오락 시설부터 경매장이나 각종 상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 같은 뱀파이어와 정보를 나누고 친목질을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섀도우타운의 질서는 오래간 유지되고 있는데, 크림슨코트라 불리는 강력한 뱀파이어 클랜에 의해 관리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소동을 일으켰다가는 크림슨코트의 제재를 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뱀파이어라면 방문해 볼 만한 장소였지만, 문제는 출입 권한을 얻기가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

출입 권한을 가진 정회원의 추천을 받아야만 했다.

사실 섬기는 주인 뱀파이어가 있다면 이런 때 도와주지만, 나 같은 혈혈단신인 경우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기존의 정회원 뱀파이어의 도움이 필요했고, 오늘 드워프 귀족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나는 미궁 같은 드워프의 지하 도시를 걷다가 한 대저택의 앞에 섰다. 그리고 철갑으로 무장한 문지기에 말을 걸었다.

"소렌 다켄발트다. 오늘 골미르 딥델버 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

뱀파이어 특유의 사이한 기운을 가리기 위해 두툼한 로브를 입고 왔다. 다행히 문지기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기다리십시오. 확인해 보겠습니다."

레그너 3세를 만났던 게 어제다. 다행히 그 양반이 빠르게 손을 써줬다. 딥델버는 몹시도 바쁜 작자지만 왕의 명령 때문에 다음날 바로 약속을 잡게 됐다.

듣자니 다량의 금이 오고 갈 중대한 약속을 나 때문에 미뤘다고 한다. 오늘 그자의 심기가 좋지는 않을 듯했다.

잠시 후 집사로 보이는 드워프가 나와 인사를 해왔다.

"다켄발트 님. 확인했습니다. 안에서 주인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군."

저택 안의 모습은 딥델버의 위세를 알 만했다. 보통 드워프 저택의 천장이 낮은 편인데, 여기는 인간의 주택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집사는 나를 딥델버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집무실 안은 몹시 화려했다. 천장에서 크리스탈이 가득한 샹들리에가 빛났고, 방의 벽면은 금을 칠해놨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단한 참나무 책상 위에 울적한 인상의 늙은 드워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흰머리가 많고 코는 보통 드워프보다 더 넙데데한 그가 바로 골미르 딥델버였다. 딥델버는 날 보지도 않은 채 서류를 끄적이며 물었다.

"자네가 소렌 다켄발트인가?"

초면부터 태도가 아주 띠꺼웠다. 왕의 편지 탓에 억지로 만나긴 했는데 그게 불만이란 기색이 역력하다.

사실 딥델버의 정체는 드워프 사회에서 암약 중인 뱀파이어다. 도시에서 종종 생기는 실종자는 저놈 작품이었다.

"그렇다."

내 말투에 딥델버는 깃털펜을 바쁘게 놀리던 손을 잠시 멈췄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내가 레그너 3세의 손님이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일로 온······."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들던 딥델버의 눈이 커졌다.

"네놈! 뱀파이어였군!"

본디 뱀파이어는 뱀파이어를 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바로 날 간파했다.

"그래, 필요한 게 있어서 왔다. 섀도우타운으로 가야 하는데 좀 도와줬으면 좋겠군."

나는 거래를 원할 뿐 딱히 문제 일으킬 생각은 없다. 재화를 지불하고 딥델버의 도움으로 섀도우타운의 정회원 자격을 얻는 게 목표니까.

하지만 딥델버는 순순히 협조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주 탐욕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뱀파이어 따위와 거래를 해야 하지?"

아니, 자기도 뱀파이어면서 무슨 뻔뻔한 소리를 하는 거지? 어째 이놈의 태도가 상대의 약점을 잡고 휘두르려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군. 게임에서보다 성격이 더 쓰레기네?'

당장 달려들어 이빨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일단 어디까지 가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크흐흐흐. 지금 네놈 태도에 따라 네 운명이 결정될 거란 소리지. 뱀파이어인 게 알려지면 스톤헤븐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터. 긴말하지 않겠다. 거래하고 싶다면 이걸 받아라."

딥델버는 무언가를 휙 던졌다. 그건 세 개의 금속 링이 결합한 팔찌였다. 보자마자 뭔지 알았다.

'지배의 팔찌군.'

이건 뱀파이어가 다른 뱀파이어를 지배할 때 사용하는 거다. 받아들이면 상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그걸 껴라."

"뭐라고?"

"받아들인다면 네놈이 뱀파이어인 걸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마. 그 팔찌를 봐라. 세 개의 고리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네가 세 번 내 부탁을 들어주면 끊어지게 돼 있다. 고리가 다 끊어지면 이후에는 나도 네 거래에 응하지. 우리는 초면이다. 이 정도 안전장치는 있어야 나설 수 있지 않겠나?"

저거 철저히 개소리다. 세 번의 부탁을 들어주면 팔찌가 끊어지는 건 맞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에서 새로운 팔찌를 끼라고 부탁하면 꼼짝없이 들어줘야 한다.

즉, 평생 노예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거다. 참고로 팔찌를 일단 끼면 적대적 행동도 못한다. 그야말로 노답.

'이 새끼 아주, 뱀파이어 본 김에 뽕을 뽑으려고 작정했네.'

뱀파이어 같이 강력한 존재를 하수인으로 부릴 수 있다면 큰 이득이다. 지금 놈은 오늘 중요한 약속이 취소된 것 따위는 생각도 안 날 게 틀림없다.

'이 새끼, 내가 섀도우타운도 안 가본 뱀파이어라고 얕보고 이 지랄을 하는 게 틀림없군.'

나는 일단 팔찌를 집어 들고는 그에게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폐하께서 내가 뱀파이어인 걸 알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해봤나?"

"뭐라? 크하하하! 그딴 헛소리로 빠져나가려고 해도 소용없다. 폐하가 뱀파이어를 보고도 가만두셨을 리가 없다. 설령 나라의 귀족이라고 해도 뱀파이어인 게 들키면 바로 목이 날아갈 것이거늘."

"후환이 두렵지 않나?"

"아니! 네놈이 비록 폐하의 손님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뱀파이어인 걸 파악했다고 오히려 칭찬하실 터."

딥델버는 레그너 3세가 내가 뱀파이어인 걸 안다고 생각조차 안 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게 말이지···. 너네 폐하께서 아이돌 덕질에 정신이 나가셨거든.'

말해봐야 믿을 거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딥델버 저놈은 정신 개조가 필요해 보였다.

온건하게 거래를 하려 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사태는 결국 저놈이 자초한 거다.

나는 팔찌를 주머니에 넣고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는 딥델버 놈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앞으로 돌진해서는 책상을 걷어찼다.

콰와아앙!

신체개조 2단계, 힘줄과 인대 교체 덕에 초인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발차기가 작렬했다.

참나무로 만든 묵직한 책상이 박살나며 의자에 앉아 있던 딥델버까지 날려버렸다.

쿠아아앙!

딥델버는 책상에 밀려 뒤의 벽에 성대하게 처박혔다. 그 충격에 벽면의 값비싼 그림이 와르르 떨어졌다.

"시발 진짜. 이 새끼가 좋게, 좋게 나가려고 하니까."

이 세상을 사랑과 배려로 살아가려고 해도 꼭 이런 놈들이 나오더라. 나는 주먹을 이리저리 풀며 딥델버에게 다가갔다. 놈은 경악한 얼굴이었다.

"이, 이놈! 감히!"

"주둥이 그만 털고 덤벼. 너도 뱀파이어인 거 알고 왔으니까."

"뭐? 무슨 헛소문을!"

"아, 모른 척하시겠다?"

"닥쳐라!"

딥델버는 몸을 일으키더니 자기를 누르고 있던 거대한 책상을 대번에 쪼개 버렸다. 역시 뱀파이어라 그런가 괴력이네.

"이놈!"

딥델버는 품에서 유리병을 여러 개 꺼내더니 기습적으로 던져왔다.

까앙!

유리병이 내 발 근처에서 깨지며 안에 들어간 액체가 기화하며 일대를 마늘 냄새가 가득 채웠다. 이것은 뱀파이어에게 해로운 마늘 포션이었다. 그것도 공기 중에 노출되자마자 기화하도록 처리를 한 고급품이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면 이런 방 안에서 마늘 포션이 여러 개 깨지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아단의 신체개조 1단계는 마늘에 대해 완벽한 저항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음, 나쁘지 않군."

진한 마늘향은 오히려 한국인인 내 식욕을 자극했다. 내가 여유있는 태도로 코를 킁킁거리자 유리병을 던졌던 딥델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네놈? 분명 뱀파이어가 맞을 텐데!"

"맞지. 하지만 마늘에 대한 대책을 가진 게 네놈만은 아니다."

딥델버는 같은 뱀파이어를 상대로 매우 치사한 전술을 즐겨 썼다.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마늘, 은, 태양 등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뱀파이어 주제에 마치 '뱀파이어 헌터'처럼 굴었다. 놈이 그런 짓거리가 가능한 건, 특이하게도 마늘, 은, 태양에 저항하는 아티펙트를 모두 가졌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면 딥델버의 전술은 잘 먹힌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에 저항력이 있었고, 게임 덕에 딥델버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던질 게 있으면 더 던져봐라! 아직 그 팔이 붙어 있을 때 말이지!"

주먹을 쥐고 돌격하자 놀란 딥델버가 이번에는 수은과도 같은 상태로 특수하게 만든 은 시약을 뿌렸다. 하지만 나는 망토를 들어 그것을 막고는 단번에 놈의 멱살을 쥐고는 집어던져 버렸다.

와자차앙!

집기가 박살 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악!"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딥델버는 필사적으로 뒤로 기어서 도망갔다. 다리 한쪽이 괴이하게 꺾여 있었다.

"어, 어째서! 축복받은 은도 안 먹히는 거냐! 크아아악!"

"뭐, 내가 좋은 삼촌을 둔 덕이지. 일단 좀 맞자. 주둥이 돌아가는 걸 보니 예절이 덜 주입된 것 같다."

"네 이놈! 왕국의 귀족인 내게 무슨 짓을! 감당 못 할 것이다!"

"귀족은 무슨, 뱀파이어 주제에."

나는 딥델버를 깔고 앉아서 마구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강력한 파운딩이 이어지자 딥델버의 얼굴은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됐다.

"네놈 코뼈를 식도까지 밀어 넣어주마!"

"끄아아아! 끄으으으!"

삽시간에 딥델버의 얼굴은 엉망이 됐다. 확실히 뱀파이어라 내구도가 대단하긴 했지만 광대가 함몰될 쯤에는 덜덜 떨며 빌어왔다.

"제, 제발! 자비를 베풀게! 자네와 내 격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겠어!"

"내가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 살려만 주면 뭐든 하겠네!"

그것 참 잘 대답했군. 나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 넣어뒀던 팔찌를 꺼내서 내밀었다.

"껴."

"뭐, 뭐라고?"

"귓구멍이 막혔나. 끼라고."

그때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마구 두들겨댔다.

쿵! 쿵!

쿠웅!

"가주님! 무슨 일입니까!"

"가주님!"

"문 좀 열어보십시오!"

소란을 듣고 경비병들이 몰려온 것 같았다. 나는 딥델버에게 선택의 기회를 줬다.

"한 번 어디 골라봐. 팔찌를 낄지, 아니면 저기 문을 열지. 만약 문을 열겠다면 막지는 않을게."

나는 그리 말하고는 웃는 낯으로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러자 딥델버가 두 팔을 부들부들 떨더니 답했다.

"파, 팔찌를 끼겠네."

"어째서? 문을 열면 부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 그렇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죽일 생각이 가득한 자를 어떻게 이기겠나? 내, 내가··· 큰 실수를 했어. 팔찌를 낄 테니 부디 목숨만은 구해주게."

이어서 딥델버는 밖에 소리를 빽 질렀다.

"돌아가라! 별 것 아니니까!"

"하지만 가주님!"

"가주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나는 아무 이상 없다!"

결국 몰려 왔던 자들은 물러났다. 딥델버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팔찌를 끼더니 바닥을 기어와 내 앞에서 이마를 쿵쿵 찍어댔다.

"주인이시여! 이 미천한 골미르 딥델버가··· 앞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뭐든 말씀··· 하십시오. 이 딥델버 가문을 통째로 주인께 바치겠습니다."

물론 저게 진심이 아님을 안다. 딥델버 놈은 일단 숙이는 척하고 빠져나갈 구석을 찾으려 하겠지.

'그래봐야 네놈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저 새끼 짱구 굴리는 게 뻔히 보였다. 일단은 그런 속셈을 모르는 척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 딥델버."

딥델버 가문은 부동산이나 금융에 많은 노하우를 가진 부유한 집안이다. 그 가주를 손아귀에서 부리게 됐으니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돈줄기가 이렇게 또 눈앞에서 흐르는구나.'

아단이 가니 이번에는 드워프가 물심양면 내 앞길을 닦아주고 있다. 놈들은 빼앗을 금이 많다는 점에서 몹시 사랑스러운 종족이었다.

나는 딥델버에게 명령했다.

"좋아. 섀도우타운으로 가는 문을 열도록."

* * *

섀도우타운으로 가기 위해선 블랙코인이란 게 필요하다. 블랙코인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그림자 차원에 있는 마을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만 조건이 있는데, 소유자인 뱀파이어 본인이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고 동행은 한 명만 허락됐다. 물론 그 동행도 뱀파이어야 했다.

"문을 열겠습니다."

딥델버는 블랙코인을 가져오더니 굽실거렸다. 나는 어서 하라고 손짓을 했고, 그가 블랙코인에 마력을 넣었다.

우우우웅!

허공에 시커먼 문이 생겨났다. 섀도우타운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모든 게 깜깜해진다 싶더니 섀도우타운에 도착했다.

"드디어 왔군."

섀도우타운.

태양이 뜨지 않는, 영원히 밤이 지속되는 뱀파이어의 마을이다.

사방은 누가 봐도 으스스하게 생겼는데, 이 복잡한 곳에는 수많은 비밀과 역사를 머금고 있었다.

하늘에는 섬뜩한 빛깔의 달이 세 개 떠 있었고, 마을의 골목마다 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제일 특이한 점은 사방의 건물이 온갖 서로 다른 시대에서 모인 건축양식의 박물관 같다는 거다. 이것만 봐도 이 마을이 얼마나 오래 됐는지 짐작게 했다.

하지만 이런 광경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제법 활기가 넘쳤다.

"딥델버. 날 정회원으로 추천해라."

"알겠습니다. 접수창구는 저쪽 건물에 있습니다.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다리를 분질렀지만 뱀파이어답게 금방 재생해서 쫄래쫄래 잘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곧 내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주인이시여. 정회원으로 등록해 드리면 세 가지 부탁 중에 하나를 들어드리는 것입니까?"

하핫! 이거 웃기는 새끼네. 역시 급한 김에 가문을 통째로 바치겠다느니 뭐니 해도 이럴 줄 알았다. 아마 내가 자기가 쓰려고 했던 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잔머리 굴리지 마라. 딥델버. 세 번째 부탁 때 새로운 팔찌를 다시 채우면 그만이니까."

그 말에 딥델버는 눈이 커지더니 두 다리를 후들후들거렸다. 내가 영원히 자신을 놔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안 까닭이다.

"왜? 네놈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잖냐? 안 그래?"

"그것이······."

"애초에 거래에 응했으면 아무 일도 없이 돈이나 받고 끝났을 것을. 블랙코인 없는 신참 같으니까 잡으려다 그런 꼴 된 거 아냐?"

나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키가 작은 드워프는 누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걸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몸을 떨 뿐이었다.

"가문을 통째로 바치겠다고 했잖아? 기대한다고."

"···물론입니다."

이후 딥델버와 정회원 등록을 했다. 절차는 간단했다. 이제 나도 섀도우타운에 드나들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가볼 데가 있다. 너도 여기 온 김에 볼 일 좀 보던가. 대신 부르면 바로 오고."

"알겠습니다."

딥델버는 내게 연락용 수정구를 주고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이대로 렌즈 장인인 루시우스 스타위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한동안 섀도우타운의 밤거리를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던 중 섬뜩한 기운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어떤 뱀파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자는 젊은 남성 뱀파이어로 푸른 머리칼에 턱과 목덜미에 짐승의 발톱 같은 문신이 가득했다.

"!"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단이 신체개조를 했던 뱀파이어로, 나와는 서로 먹고 먹혀야 하는 관계라는 걸.

상대 역시 곧장 날 알아봤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마치 그 미소가 사람을 뜯어먹는 구울처럼 흉측했다. 실제로 놈의 이빨은 마치 상어처럼 뾰족했다.

"형제."

그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본능이 맹렬하게 위험을 경고해 온다.

나는 허리춤의 철검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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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스러운 형제(4)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뽑으려던 그때 상대가 제지해 왔다.

"여기선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걸. 애송아."

놀랍도록 차갑고 서늘한 음성이었다.

"나도 날붙이로 남의 몸을 가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크림슨코트가 관리하는 곳에선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지."

그 말에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검에서 손을 떼자 놈이 해죽 웃었다.

"너무 실망하진 말라고. 서로에게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테니까."

기회라는 게 무얼 말하는지는 너무 명백했다. 그건 바로 아단에 의해 만들어진 형제를 죽이고 힘을 취하는 것이다.

"섀도우타운은 넓은 곳이고 도시의 어둠 또한 깊다. 크림슨코트가 돌보는 건 대로와 몇몇 시설물 정도야. 외진 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

상대는 느긋하게 말하며 내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지금 당장은 본인 말처럼 싸울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예민해지고 송곳니가 근질근질거렸다.

두 가지 다 뱀파이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흔히 보이는 증상이다. 인간이 식은땀을 흘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 새끼, 누군지 알겠군.'

게임에서 본 모습과 디자인이 꽤 달라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확실하다. 저 상어 같은 이빨에 푸른 머리칼, 절로 소름이 돋는 불쾌한 감각까지···.

'케일런이군. 케일런 더 나이트스토커.'

뱀파이어 중에 미치광이 살인마로 불리는 녀석이다. 사이코패스의 뱀파이어 버전이랄까.

보통 뱀파이어가 상대를 잡아먹겠다고 하면, 그건 피를 빨거나 가진 힘을 흡수하겠다는 의미다. 반면 저 새끼는 죽인 적을 진짜로 뜯어먹는다.

'설마 이 또라이가 아단이 만든 형제일 줄이야. 게임에선 그런 정보가 전혀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직접 마주한 케일런은 나보다 명백한 강자였다. 그간 빠르게 강해졌음에도 이런 본격적인 네임드는 역시 버거웠다.

"통 말이 없군. 형제? 그 혈관 속에 흐르는 힘을 내게 넘겨줄 생각에 겁먹은 건가? 두려워할 거 없어. 네 살점을 먹어줄 테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야."

케일런은 자신의 우위를 알아채고는 여유가 넘쳤다. 아니, 이 미치광이는 자신보다 강자를 만나도 저런 태도일 거다. 나는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각자 이름을 걸고 하나 약속하자고."

"무엇을?"

뒷짐을 진 채 내 주변을 돌던 케일런이 멈춘 채 내게 흥미로운 시선을 보낸다.

"우리 둘 다 섀도우타운을 떠나지 않기로 하는 거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뭐라?"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는지 녀석은 눈이 커졌다.

"왜? 자신 없나? 나는 처음으로 발견한 형제가 몰래 달아나버릴까 싶어 불안하거든."

"이런 미친 새끼를 보겠나? 크하하핫! 크하핫!"

케일런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자신보다 명백히 하수인 내가 그런 말을 하니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사도고, 내 역량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케일런을 상대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이 새끼야. 이 몸의 성명절기인 새벽의 손길 맛 좀 보여주마. 추기경급 치유마법을 처맞고도 멀쩡한지 보자.'

이 세상에 나 말고 치유마법을 사용하는 뱀파이어가 더 있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추기경급 사제나 사용 가능할 초고위력이지 않나. 이건 뱀파이어에겐 대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치면 웬 미치광이가 양손으로 방사선을 사방에 뿌리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내 자신감을 느낀 건지 여유만만하던 케일런 놈의 얼굴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무모하군. 형제. 그 입방정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네놈의 죽음은 아주 느리고 고통스러울 거다. 끝까지 살아서 자신의 팔다리, 그리고 그 차가운 내장이 남의 입으로 들어가는 꼴을 볼 테니까. 이제라도 무례를 사과하고 그 제안을 철회하면 자비를 베풀어 편한 죽음을 약속하지. 잘 생각해라."

나는 대답 대신 뒷짐을 쥐고는 멈춰 있는 그의 주변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아까 케일런의 시건방진 행동을 따라 한 것이다.

그러자 그의 눈이 커지며 이 새끼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라는 표정이 됐다. 그렇게 한 바퀴 느긋하게 돌고 놈의 앞에 멈춰서 답해줬다.

"거절하겠다. 먹음직스러운 형제여."

"이놈···!"

"지금 네 앞에 있는 자의 표정을 잘 봐. 겁먹었나? 아니지. 아니야. 웃고 있잖아.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워서."

케일런의 어깨너머로 상점의 유리창이 있었다. 거기 비췬 내 모습은 입꼬리가 길게 찢어져서 웃고 있는 게 실로 귀신 같았다. 이제야 케일런은 내가 진심인 걸 깨닫고는 분노했다.

"이 개새끼가···!"

참지 못하고 케일런이 검을 뽑으려는 순간,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아. 애송이."

"!"

격노한 케일런이 내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나는 미소와 함께 양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단검을 뽑았다.

"뱀파이어답게 약속하자고."

단검으로 내 손바닥을 관통했다.

푹!

날카로운 칼끝이 손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단검을 빼내자 뱀파이어 특유의 끈적거리고 시커먼 피가 조금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손을 상대에게 내밀었다.

"부디 마주 잡아주면 좋겠군. 형제."

"···후회할 거다."

케일런은 나와 똑같이 단검으로 손을 뚫었다. 그리고 내민 내 손을 잡았다. 동시에 서로의 피가 섞이며 약속이 성립됐다.

"나 소렌은 눈앞의 이 멋진 형제에게 교훈을 줄 때까지 섀도우타운을 떠나지 않겠다."

"나 케일런은 이 빌어먹을 애새끼를 부위, 부위 다 뜯어먹을 때까지 섀도우타운을 떠나지 않겠다."

그와 함께 신비로운 마법의 힘이 우리의 약속을 성사시켰다. 이것은 뱀파이어가 다른 뱀파이어와 무언가 중대한 약속을 할 때 행하는 유구한 전통이었다. 물론 이게 약속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기게 되면, 다른 뱀파이어들이 볼 수 있는 낙인을 부여받게 된다.

그건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지구에서 열심히 관리하던 신용점수가 떨어지는 거랑 비슷한 거다. 광야로 가서 혼자 살 거 아니면 약속을 저버리긴 쉽지 않았다.

"소렌이라고? 네놈. 오늘부터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이제부터 내 창이 널 언제 노릴지 모르니까."

케일런은 창의 대가다. 창술의 고수가 대개 그렇듯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케일런, 너무 주둥이 털지 마. 나중에 지면, 뱉었던 걸 수습하기 어렵거든."

"자신만만하군!"

케일런은 이를 갈며 떠났다. 그와 함께 흥분했던 내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히 날 잡아먹겠다고 해? 아까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제 힘만 믿고 날뛰는 미치광이에게 고인물의 무서움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나는 '붉은 성지'라 불리는 고급 숙소로 향했다. 크림슨코트에서 직접 관리하는 곳으로 섀도우타운의 안전지대로 통한다.

요금은 비싸지만 케일런의 암습을 막기엔 최고였다. 나는 큰돈을 들여 붉은 성지의 객실 하나를 빌렸고, 망할 놈의 케일런을 어떤 식으로 요리할지 장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뒤 결론이 나오자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일단 마법의 수정으로 딥델버를 불렀다.

-붉은 성지의 2층 끝방이다. 당장 튀어오도록.

-헛,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딥델버가 나타났다. 나는 붉은 비단 의자에 앉아 물었다.

"너 마법 좀 쓰냐?"

"네, 그렇습니다."

"서류나 이런 건 잘 알고? 뱀파이어간의 관습이나 거래에 관계된 거로."

"네, 재산에 관한 거라면 아무래도 드워프가 전문가입니다. 저희 종족은 반짝이는 보석보다 잉크 냄새나는 양피지가 더 비싸다는 걸 잘 알거든요."

"좋아. 그 새끼 엿 먹일 방법이 떠올랐다. 너도 같이 하자."

"그, 그 새끼라뇨?"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부 설명해줬다. 물론 아단이 만든 형제에 관한 건 쏙 빼고 말이다. 그러자 딥델버 놈이 소스라치기 놀란 표정이 됐다.

"뭐, 뭐라고요? 그 잔학무도한 나이트스토커와 말입니까?"

"이 새끼 속으로 존나 웃고 있으면서 겉으로 심각한 표정이네. 내가 이번에 뒤지면 풀려날까 싶어 좋아 죽겠지?"

"아, 아닙니다! 저도 전투에서 반드시 한 몫을 보태서···."

"닥쳐라. 싸움도 뒤지게 못 하면서."

"크윽!"

"나이도 많은 뱀파이어가 왜 이리 약해? 평생 돈만 세고 다니니까 그런 거 아닌가? 쯧쯧!"

내가 혀를 차자 딥델버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는 약한 편이 아니다. 상대가 나라서 운이 없었던 것뿐이다.

"아무튼 네놈이 해줄 일이 있어."

"알겠습니다. 시켜주시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 새끼, 하여간 말하는 것마다 진정성이 이렇게 안 느껴지는 것도 재능이네."

에레미나랑 완전히 반대구만.

"아무튼, 네놈이 할 거는 판매대리인이다."

"네? 판매대리인이요? 그게 무슨···."

딥델버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렸다. 이름난 미치광이랑 싸우겠다는 양반이 판매대리가 어쩌고 하니 이해가 안 되겠지.

"간단해. 케일런이란 놈은 창의 명인이지. 그런 놈은 다 똑같아. 좋은 창이라면 환장한다고."

"네, 그렇겠죠?"

"한데 마침 내게 아주 좋은 게 있지."

나는 드워프제 마법주머니에서 스킨크들의 걸작인 '뱀의 송곳니'를 꺼냈다. 족장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이 창은 룩스 움브라에게 큰 타격을 가했을 정도로 막강한 무기다.

"오, 엄청난 창이군요. 문외한인 제가 봐도 느껴지는 기운이 장난 아닙니다."

"그래, 나는 이걸 익명으로 경매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케일런은 알게 될 거다. 왜냐하면 놈은 좋은 창을 편집증적으로 집착해서 늘 경매장을 뒤지기 때문이다.

케일런이 섀도우타운에서 어슬렁거리는 이유도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뱀파이어들이 새로 출품하는 창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창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올릴 거야. 케일런 새끼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래서요?"

어느새 딥델버 놈은 내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뭔가 사악한 음모의 냄새가 나는 게 딱 제 놈 취향에 맞는 거겠지. 저런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쯧쯧.

"케일런은 아깝게 여기겠지. 갖고 싶은데 가격이 안 맞고. 그런데 그때 네놈이 딱 케일런에게 접근하는 거다."

"제가요?"

"그래, 익명으로 창을 출품한 사람의 판매대리인이라고 말이야."

"제가 진짜 판매대리인이 되는 겁니까?"

그 어벙한 물음에 나는 놈의 정수리에 딱밤을 먹였다.

"멍청한 새끼야!"

"아악!"

"나는 진짜로 뱀의 송곳니를 팔려는 게 아니다. 아까 너보고 서류나 마법에 능하냐고 물어봤잖냐!"

이쯤 되자 딥델버도 눈치를 챘다.

"서, 설마?"

"그래. 너는 위조된 위임장을 가진 가짜 대리권자가 된다. 그리고 창이 너무너무 갖고 싶은 케일런에게 접근하는 거지. 마치 진짜로 익명의 출품자에게 대리권을 받은 사람처럼."

"세상에!"

"이후에 이빨을 좀 털어. 경매장에는 비록 비싸게 올렸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쪽 요구를 받아주면 합리적인 가격에 넘겨줄 수 있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엔 케일런 당신이 제격이다. 뭐, 이런 식인 거지."

나는 어떤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딥델버를 지도했다. 그러자 딥델버는 눈이 찢어져라 크게 떴다.

"이런 악랄한 방법이! 아이구야, 여태 나는 세상을 순진하게 살았구나!"

"그래, 칭찬 고맙군. 어때? 먹힐 것 같나?"

"크흠···! 먹힐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욕망에 물든 자는 속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의문이 있습니다. 대리인이라 속이고 돈을 받은 뒤에 같이 경매장으로 가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제 위임장은 위조된 거니 경매장에서 창을 내주지 않겠죠. 이걸 어찌합니까?"

"이런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같이 경매장까지 갈 것도 없어. 중간에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서 물질계로 튀라고."

"네? 당연히 놈이 물질계로 쫓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다음에는 불쌍한 이 노구가 오체분시 되는 결말뿐입니다."

"크흐흐흣. 케일런 그 새끼, 섀도우타운을 못 떠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나는 케일런이 한 약속을 알려줬다. 딥델버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확실히··· 그 나이트스토커라면 약속 때문에 안 쫓아오겠군요. 하지만 제가 후환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케일런 그 새끼 뒤질 텐데 무슨 상관이야? 한탕 해 먹고 좋잖아?"

"······헐."

딥델버는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렸다.

"이런 질문은 죄송합니다만··· 주인께서 패사(敗死)하시면···."

"아, 그러면 결론은 간단하지. 존나 열 받은 케일런이 물질계로 쫓아가 널 조각조각 내겠지. 토막살인! 야, 무시무시하구만."

"커헉!"

"하지만 너무 근심할 건 없어. 그 새끼가 노인은 안 먹잖아. 뻣뻣하고 냄새가 난다나?"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표정 풀어. 내가 이길 테니까. 아무튼 시키는 거나 잘하라고."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딥델버의 표정이 오묘하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저런 얼굴을 많이 봐서 무슨 생각인지 잘 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새끼랑 엮여서는···, 뭐 그런 거겠지.

"좋아. 이참에 그 빌어먹을 놈에게 창질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걸 알려주자고. 꼭 배때기에 뭐가 꽂혀야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털썩 주저앉게 되는 게 아니야. 열심히 모은 돈, 뒤통수 처맞고 털려도 똑같다니까? 그 새끼라고 다를 거 같아?"

이후 케일런의 행동은 뻔하다. 날 얼른 죽이고 맹세를 지킨 뒤에, 물질계로 사기꾼을 잡으러 가려 할 테지.

"케일런 그 새끼, 엉덩이에 불붙은 것처럼 날 찾아다닐 게 벌써 보이네. 크흐흐흐. 놈이 미끼를 무는 순간부터는 그냥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거야."

본디 조급해지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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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결투(1)

***

케일런은 모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단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형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소렌의 동태를 파악하고자 수하를 불렀다.

"가서 그 빌어먹을 놈이 뭐 하는지 살펴보고 와라."

"네, 주인님!"

케일런의 수하는 에니족이라 불리는 사악한 집요정이었다. 놈은 작고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몸에 박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뱀파이어 밑에서 자주 봉사하는 사악한 종자들도 그럭저럭 괜찮은 능력의 소유자였다.

놈은 그림자처럼 꺼져서 사라지더니 한 시간 뒤에 나타났다.

"주인님! 주인님! 놈에 대해 알아 왔습니다!"

놈은 추악한 회녹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다가왔다. 케일런은 그 모습이 짜증 나 발로 차버리고 싶었지만, 쓸 만한 하인이라 참았다.

"보고해."

"그 겁쟁이가 크림슨코트가 운영하는 숙소로 들어가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뭐라?"

붉은 성지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곳은 투숙비가 매우 비싸지만, 위험천만한 섀도우타운에서 믿을 수 있는 안전지대였다.

솔직히 케일런이라도 놈이 거기 박혀 있으면 건들 방법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계속 거기 틀어박히려는 건가? 일단 계속 살펴보며 보고하도록."

하지만 소렌은 사흘째 밖에 나오질 않고 있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케일런은 짜증과 분노로 엉망이 됐다.

"호전적인 놈인 줄 알았는데 이리 겁쟁이일 줄이야!"

솔직히 소렌과의 싸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잠재력을 느끼기도 했다.

'간만에 좋은 자극이 될 줄 알았는데!'

케일런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분기가 절로 치밀어 올랐다.

'더욱 잔혹하게 죽여주마. 애송아.'

하지만 크림슨코트랑 영영 척질 게 아니라면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던 중 그의 집요정이 특이한 소식을 물고 왔다.

"주인님! 놈은 미동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흥미를 가질 만한 게 있습니다!"

"뭐냐?"

"대단한 창이 경매장에 떴습니다!"

집요정은 소렌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없었기에 주인이 자신에게 울화를 터뜨릴 걸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경매장에 들렀는데, 다행히 그곳에 주인을 기쁘게 할 소식이 있었다.

"어떤 창이냐?"

케일런은 대번에 관심을 드러냈다.

"뱀의 송곳니라 불리는, 일곱 봉우리 스킨크족의 보물입니다! 전에 주인님께서 언급하신 창이 아닙니까? 케케케!"

"진짜 그게 떴다고? 정말이냐!"

"틀림없습니다!"

케일런은 금방 흥분에 사로잡혔다. 뱀의 송곳니는 고대의 스킨크 영웅이 썼다는 이름 높은 창.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일곱 봉우리의 스킨크족이 그걸 보물로 여기고 내놓지 않았으니까.

케일런은 이 믿을 수 없는 기회에 눈이 돌아갔다. 심지어 스킨크의 창이 자신의 운명과도 같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누가 내놓았냐? 입찰가는 얼마고?"

"출품자는 익명입니다. 그리고 최저가격이 있는데······ 그것이······."

집요정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케일런은 짜증을 냈다.

"얼마인데 그러느냐!"

"···금 200킬로그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단위가 틀린 게 아니더냐?"

아무리 뱀의 송곳니가 대단하다지만,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순간 팔 생각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금 200킬로그램이면, 지금껏 수많은 살인으로 큰돈을 번 케일런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네, 주인님. 저도 눈을 비비고 몇 번을 봤지만 확실합니다."

"직접 가봐야겠다!"

기어코 경매장에 방문한 케일런은 진짜 금 200킬로그램을 요구하는 걸 알게 됐다. 이미 소문을 듣고 온 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간만에 엄청난 무기가 떠서 와봤는데, 이거 팔 생각이 없는 거 아뇨?"

"신종 기만인가? 어떻게 얻은 거지?"

"그러게 말이오. 일곱 봉우리의 스킨크 놈들이 갖고 있는 건 다들 알았지만, 내놓질 않아서 못 구했는데···."

스킨크가 일곱 봉우리 최약체긴 하나 어디까지나 세력전에서 그렇다는 거지, 개인이 쳐들어가서 약탈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놈들의 둥지에는 함정이 가득하니 케일런 같은 뱀파이어조차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늘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이런 터무니 없는 가격에 뜨다니. 케일런은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전시된 뱀의 송곳니를 보며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놀랍군. 아름다운 창이다.'

스킨크의 영웅이 참살했다는 거대 서펜트의 이빨로 창의 머리를, 뼈로 창의 자루를 만든 물건이었다.

송곳니인 창두는 뭐든 꿰뚫고, 뼈로 만든 창자루는 뭐든 막아낼 수 있다고 정평이 자자했다. 거기에 창에 부여된 신비로운 마법과 독을 주입하는 기능까지 더하면 그 가치는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케일런은 눈이 돌아갔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은 뭔가? 출품자의 의도가 뭐냐?"

경매장의 직원에게 따지듯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똑같았다. 자신들은 모른다고.

결국 거처로 돌아온 케일런은 그날부터 몹시 초조해졌다. 뱀의 송곳니가 갖고 싶은 기분이 점점 심해져 거의 열병을 앓는 사람과도 같이 변해갔다.

'방법이 있을 텐데···.'

그는 혼자 방에서 왔다, 갔다 하며 어떻게 그걸 가질 수 있을지 궁리했다. 하지만 한참 머리를 굴려도 답은 없었다.

"답답해서 돌아버리겠군!"

결국 모든 걸 걸고 경매장 습격이라는 초유의 짓거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이 뱀의 송곳니의 적법한 판매대리인이란 자가 나타났다는 것. 충직한 집요정이 즉각 상황을 알려왔다.

"주인님, 딥델버란 자입니다! 위임장도 제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딥델버라고? 아, 그 드워프 놈이군."

케일런은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드워프 뱀파이어를 떠올렸다. 재산이 많기로 유명한 자라 판매대리인이란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딥델버가 주인님과 한번 만나고 싶다더군요. 이번 경매에 관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요!"

"뭐! 멍청한 놈! 왜 그걸 이제 얘기하는 건가!"

급기야 케일런은 집요정을 걷어차 버리고 딥델버를 만나러 갔다. 가보니 창 때문에 온 자들이 여럿이었고, 한참 기다린 뒤에야 딥델버를 만나게 됐다.

"딥델버, 집요정에게 들었다. 경매 건으로 나를 만나고자 했다면서?"

케일런은 기다리느라 짜증이 잔뜩 난 상태였지만 기대감에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경매장의 가격은 정상적인 조건이 아닌 거다. 뭔가 따로 제시할 게 있는 게 틀림없어. 저놈은 내게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딥델버의 말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꼭 자네만 만나고자 했던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그럴 듯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뱀파이어면 다 만나보고자 했지."

딥델버는 거만한 기색으로 연초를 태우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미 방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무슨 소리지?"

"나는 적법한 판매대리인이고 광범위한 재량권을 허락받았다. 출품자에게 금덩이만 갖게 해주면 뭐든 자유라고.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꼭 금이 아니라도 네놈이 원하는 대가를 받겠다는 거 아닌가. 어차피 네가 대신 출품자에게 금을 지불하면 되니까."

"잘 이해했군. 나이트스토커."

그러자 케일런은 다소 긴장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그래서 내게 뭘 원하지?"

딥델버는 누구든 태연하게 죽이는 놈이 창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웃겼다.

'확실히 욕망이란 게 무섭구나. 저 나이트스토커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속일 수 있겠군.'

이미 여기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소렌에게 시나리오를 받은 뒤다. 그렇기에 딥델버는 말투에 여유가 넘쳤다.

"이쪽 요구가 커서 돈만으로는 처리하기 어려울 거야. 그래서 부족분을 채울 두 가지를 더 요구하고 싶군."

"말해라."

"첫 번째는 자네가 입고 있는 그 갑주 말이야. 그걸 넘겨주게."

"뭐?"

뜬금없이 갑주를 달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한 듯 케일런이 놀란 표정이 됐다. 그의 갑옷과 투구는 드워프제의 마스터피스라 대단한 품질을 자랑한다. 그만큼 비싸서 거의 작은 건물 몇 채를 몸에 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갑주는 대체 왜···? 네놈이 입기엔 사이즈가 안 맞을 텐데? 땅딸보."

"그 갑주를 누가 만든 지는 알고 있나? 나이트스토커?"

"모른다. 그딴 건 관심 없다. 품질이 좋으면 입고, 아니면 말뿐이다."

"그 갑주를 제작한 게 우리 딥델버 가문의 조상님이지."

여기서 딥델버는 소렌이 알려준 대로 그럴싸한 이유를 댔다.

딥델버 가문은 금융업에 집중하면서 갑주 제작법을 상당히 잃었는데, 조상의 갑주에서 그 기술을 되찾고자 한다는 얘기였다.

"조상님이 만든 물건 중 최고가 필요하다. 바로 네가 가지고 있는 갑주 세트인 '칠흑의 습격자'면 딱 적당하지."

"이게 그렇게 가치가 있는 건가?"

"그래, 우리 가문에겐 그렇지. 갑주를 넘기면 꽤 돈을 깔 수 있을 거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다. 저 칠흑의 습격자는 딥델버 가문이랑 하등 상관없었다.

그럼에도 소렌이 갑주를 받아오라 한 것은 조만간 조질 케일런의 방어력을 하락시키기 위해서였다.

사기도 치고, 싸울 상대방의 무장도 빈약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소렌의 성미에 맞는 계책이었다.

"흐음··· 아끼는 것인데."

"어차피 다른 갑주도 많잖아?"

딥델버의 물음에 케일런은 고민하는 기색이 됐다. 그의 말대로 갑주는 여러 벌 있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게 최고다.

'그래도 뱀의 송곳니가 탐난다.'

심지어 케일런은 소렌을 몹시 얕보고 있었다. 잠깐 뭔가 있는 놈 같다고 여긴 적도 있지만, 그가 숙소에 처박힌 이후로 거의 경멸하는 수준이다. 그딴 놈은 맨몸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여겼기에 결국 갑주를 넘기기로 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좋다. 화끈하군. 거기에 더해 부탁인데, 그건 나중에 내가 원하는 뱀파이어 하나 치워주는 거다. 가능하겠나?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자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부탁하는 거야."

"하하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거야말로 내 특기니까. 맛있는 놈이면 좋겠군."

사실 세 번째는 속임수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살인을 부탁하려 했다는 핑계는, 딥델버가 케일런을 고른 것에 대한 좋은 이유가 되어줄 테니까.

결국 그들은 금 25킬로그램 가치에 해당하는 동전과 보석+칠흑의 습격자 갑주 세트+살인 의뢰, 이렇게 세 가지 항목으로 뱀의 송곳니를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즉석에 계약서가 작성됐는데, 케일런은 딥델버가 제시한 위임장이나 여타 서류를 자세히 확인해 봤다. 케일런도 나름대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딥델버 가문이 총력을 다해 만들어낸 위조서류를 간파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먼저 계약금으로 금 25킬로그램의 가치에 해당하는 동전과 보석을 내놓도록."

딥델버의 요구에 케일런은 반발했다.

"그것은 경매장에 같이 가서 처리해도 되지 않나!"

"아니, 계약금도 지불할 재력이 없다면 거래에 응하지 않겠다. 게다가 우리가 한 계약의 세 번째 조건은 창을 넘겨준 다음에 행하게 되어 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자네에게 유리하게 맺어준 것인데? 막말로 나이트스토커 자네가 창만 먹고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쩌겠나?"

"계약을 하지 않았나?"

"계약이 모든 걸 완벽하게 보증하지는 않지. 그러니까 최소한의 신용을 보이도록 하게. 계약금을 내. 안 그러면 이번 거래는 여기서 끝이야."

딥델버는 거래에 관해서라면 베테랑이다. 단호한 태도로 선을 긋자 애가 타던 케일런은 결국 받아들였다.

"잠시 기다려라. 바로 주지."

그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토해냈다.

"오늘 바로 가능하겠나? 딥델버."

"아니, 일정이 있어서 어렵다."

"뭐라!"

"출품자에게 연락을 하고 이것저것 조율을 해야 한다. 경매장 운영 시간이 두 시간도 안 남았는데 빠듯해서 그렇다. 내일 다시 만나지."

"크으윽···."

납득할 만한 사정이었으므로 케일런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상대에게 놀아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계약금도 지불했고, 내일이면 창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다.

"내일도 거래가 밀리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땅딸보."

"약속하지. 내일은 아무 일 없을 거다. 애초에 내가 일부러 늦추는 것도 아니지 않나."

결국 그들은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

다음날. 경매장이 열 시점에 맞춰 케일런은 바로 딥델버를 찾아갔다.

"드워프! 당장 거래에 응해라. 출품자와는 아무 문제 없겠지?"

"물론이다. 최종적인 조율이 끝났다. 지금 바로 경매장으로 가지."

"드디어!"

케일런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그는 지금 일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 유명한 뱀의 송곳니가 자신의 품에 들어온다니! 그걸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어서 창을 쥐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그런 그에게 딥델버가 드워프의 마법주머니를 던졌다.

"갑주를 여기 넣어라. 그 뒤에 출발하지."

"네놈! 또 무슨 개수작이냐? 갑주는 경매장에서 어련히 넘겨줄 것을!"

"창만 받고 도망가면 방법이 없다. 어서 마법주머니에 넣어라."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네놈, 감히!"

"그래서 이제 와서 파토 내겠다고?"

"크윽!"

"대신 이걸 넘겨주지."

딥델버는 서류 한 뭉치를 케일런에 내줬다. 판매대리에 대한 위임장과 경매장 물품의 수령에 필요한 각종 서류였다.

"나도 잘 합의된 거래 가지고 괜히 꼬장 부리려는 게 아니다. 출품자가 갑주를 미리 챙기라고 주문해 와서 말이지. 대신 서류를 먼저 넘겨주겠다. 본래 이것은 경매장에서나 주는 걸 알고 있겠지?"

서류더미를 호쾌하게 내놓자 케일런도 태도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살펴보니 창을 케일런에게 넘긴다는 각종 증명과 사인이 가득했다. 이것만 봐도 이미 거래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케일런은 안심했다.

"좋다."

케일런은 입고 있던 갑주를 차례로 벗어서 마법주머니에 넣었다. 딥델버는 그걸 받아 챙기고는 서류를 내줬다.

"이러면 서로 괜찮지 않나. 자, 경매장으로 가서 마무리를 짓자고."

"좋다."

그렇게 숙소 밖으로 나섰는데 딥델버가 멈칫했다.

"아, 미안하군. 물건을 하나 두고왔어. 잠깐만 기다려 주게. 금방 나올 테니."

"음··· 알겠다."

케일런은 좀 떨떠름한 기분이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이미 서류도 받았고, 이제 와서 딥델버가 개수작을 부릴 거 같지 않아서다.

"음······."

한데 잊은 물건만 챙겨서 금방 나오겠다는 딥델버 감감무소식이다. 케일런은 짜증이 일었고 잠시 더 밖에서 서성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땅딸보! 대체 뭐하고 있나?"

한데 어째서인지 답이 없었다. 그리고 딥델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서류도 받았다. 그리고 내 보복이 두려워서라도 헛짓거리할 리가 없는데.'

그러다 숙소에서 일하는 노예 종족이 지나가기에 다그쳤다.

"이봐! 그 드워프 어디 갔나! 드워프!"

"아, 그분이라면 아까 뒷문으로 나갔습니다만?"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일행분 말씀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몹시 서두르시던데···?"

케일런은 곧장 뒷문으로 행했다. 뱀파이어답게 어찌나 신속하던지 눈을 깜빡이는 순간 건물 뒤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딥델버는 어디론가 사라진 상황. 케일런은 이를 악물고는 자신의 집요정을 소환했다.

"빌어먹을! 가서 그 땅딸보를 찾아와! 섀도우타운 어디에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라고!"

"히익! 알겠습니다! 주인님!"

주인의 고성에 놀란 사악한 집요정이 바람 같이 사라졌다. 케일런은 어디로 간지도 모르는 딥델버를 찾는 대신 서류를 들고 경매장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불길한 예감에 숨통이 조여 왔다. 하지만 그는 애써 불안을 억눌렀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지만 그의 기대는 배신 당했다. 경매장으로 가자 관리인인 크림슨코트의 뱀파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나이트스토커. 이 서류는 모두 가짜입니다."

"뭐? 지금 뭐라고?"

"놀랍군요. 이 정도로 정교한 위조서류는 처음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격분해서 입에서 불길을 토할 것 같은 케일런에게 관리인은 차분히 답했다.

"딥델버 그 친구, 처음부터 대리인 자격이 없었다는 겁니다. 정말 놀랍군요. 딥델버면 나름대로 잘 알려진 자인데 이렇게 대놓고 사기를 치다니?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건지······."

"그 말인즉, 내가 저 창을 못 가져간다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케일런의 흉흉한 눈빛을 보더니 뱀파이어 가드 셋이 창 앞에 섰다. 물론 케일런의 솜씨면 저딴 놈들은 몇 초 안에 도륙 내 버릴 수 있었지만, 그건 크림슨코트에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케일런은 그냥 다 뒤집어엎고 싶다는 자신의 충동과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했다.

으득, 으드득.

충혈된 눈으로 이를 가는 케일런의 모습에 관리인은 안색이 굳었다. 케일런 작정하고 덤비면 한두 명 죽는 걸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분노하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잘 고려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경매장을 부수는 것보다 딥델버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맞는 얘기였다. 분노에 눈이 멀어 크림슨코트와 대판 붙으면, 이 일의 원흉인 딥델버만 좋아할 터. 그는 창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간신히 돌렸다.

"충고··· 고맙군."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네놈들, 도의상 드워프를 찾는 걸 도와야 하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크림슨코트는 도시를 제한적으로 관리할 뿐입니다.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개인들 간의 일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아주··· 잘나셨구만!"

간신히 폭발하려는 걸 참고 밖으로 나오자 그의 집요정이 나타났다.

"주인님!"

"찾았냐! 이 쓸모없는 것아!"

"딥델버가 물질계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목격자가 여럿입니다!"

"뭐라?"

순간 케일런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물질계로 튀는 정도로 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는 나가서 딥델버를 토막 낼 작정이었다. 그러자 집요정이 말렸다.

"주인님, 안 됩니다!"

"이게 미쳤나!"

"끄아아악!"

집요정은 발길질에 얻어맞고 십 미터 이상 굴러갔다. 녀석은 피를 쏟으면서도 충직하게 외쳤다.

"소렌이란 자와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멋대로 나가시면 곤란합니다."

"이런 젠장!"

생각해 보니 소렌을 처리하기 전까지 물질계로 나갈 수 없었다. 그걸 깨달은 케일런은 결국 더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러댔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다고! 끄아아아아!"

늘 냉정하고 침착한 그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자 다른 뱀파이어들이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그가 사기를 당했다는 건 빠르게 퍼져나갔다.

"꼬숩네요. 크크크큭!"

"저도 같습니다. 늘 재수가 없었는데 잘 됐어요."

케일런은 지 혼자 잘난 맛에 살며 남을 무시했기에 이번 일을 기뻐하는 자들이 많았다. 다들 깨소금 맛이라고 낄낄댔다.

반면 딥델버에 대해선 다들 놀라움을 표했다.

"그자가 그리 용감한 줄은 몰랐습니다."

"돈이나 밝히는 늙은이인 줄 알았는데 그 나이트스토커의 뒤통수를 이리 치다니."

"저도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노인네였어요."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는 케일런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맛봤다. 세상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케일런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좀처럼 믿기지도 않았고.

돈이란 게 이렇게 무서웠다. 스스로 쿨한 미치광이라 여기는 그의 가면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으니까. 돈이란 문제 앞에서 그 같은 살인마조차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소렌 놈을 처리하고 물질계로 쫓아간다.'

이제 소렌이 관건이 됐다. 그는 크림슨코트의 숙소인 붉은 성지로 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소렌! 이 비겁한 새끼! 나와라! 나오라고!"

보통 뱀파이어가 붉은 성지에서 이 정도 소란을 부린다면 즉각 잡혀갔겠지만, 케일런은 강자였기에 크림슨코트도 그 정도는 어쩌지 못했다.

"나오라고! 언제까지 처박혀 있을 건데! 빨리 나올수록 편히 죽여주마! 내일부터는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을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켜보던 뱀파이어들은 대체 소렌이 누군지 쑥덕댔다.

"나이트스토커가 부르는 소렌이 대체 누군가요?"

"새로 등록한 신참이라더군요."

"그런 신참을 왜?"

"글쎄요, 아무튼 상황이 점점 재밌어지네요."

하지만 소렌은 답이 없었다. 대신 몇 시간 뒤 케일런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안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곤궁한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애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본디 어려울 때 돕는 게 형제인 법이니까.>

그 뻔뻔한 태도에 케일런은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진짜 화나는 내용은 그 뒤에 있었다.

<고민 끝에 자네를 위해 숙소를 떠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자네도 적당한 성의를 표해줬으면 좋겠군. 금 2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재산을 베풀어 주게. 하면 숙소를 나가주지.>

놀랍게도 소렌은 이틈을 이용해 금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케일런이 어떻게든 자신을 숙소 밖으로 내보내려 할 걸 알고 뻔뻔하게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다.

금화 2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재화는 이제 케일런에겐 남은 재산 전부였다. 한데 소렌은 마치 남의 금고를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걸 요구해 온 것이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재물이란 게 저승까지 가져갈 건 아니지 않나. 자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사랑하는 형제를 위해 베풀어 주고 가게.

-우애를 담아. 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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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결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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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런 놈의 재산 사정은 대강 알고 있다. 그렇기에 딥델버에게 털린 후 놈에게 남아 있을 만한 걸 싹 다 달라고 했다.

'거절하긴 힘들 거다.'

과연 기다리고 있자니 예상대로 됐다. 케일런이 제안에 응한 것이다. 협상을 위해 찾아온 케일런의 못생긴 집요정이 조건을 나열했다.

"먼저 체크아웃을 해야 합니다. 또한, 주인님께선 소렌 님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만날 장소도 정하고자 하십니다."

그 요구에 나는 한술 더 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명확하니 이러는 게 어떤가? 집요정군."

"네?"

박쥐 같은 얼굴이 날 보며 갸웃거리고 있었다.

"크림슨코트의 입회 하에 재판결투를 하자는 거지. 둘 다 빠져나갈 수 없는 자리가 될 거야. 일을 마무리하기엔 제격이 아닐까?"

사실 그간 숙소에서 머물며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이 판을 더욱 키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오!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주인님께서 만족하실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소렌 님을 쳐죽일 수 있겠군요!"

"단, 하루 뒤에 크림슨코트가 지정하는 곳으로 하지. 나도 결투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케케켁!"

사실 여기서 계속 버텨서 놈의 피를 말릴 수 있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참다 참다 폭발한 케일런 놈이 결국 약속을 저버리고 물질계로 튀어 나갈 게 뻔하니까.

'뭐든 적당한 게 좋지.'

결국 케일런은 내 조건을 수용했다. 딜델버에게 당한 수법 때문인지 하루를 미룬다는 점에 발끈했지만, 크림스코트가 입회한다기에 받아들였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숙소 밖으로 케일런을 만나러 갔다.

"형제! 다시 보게 되어 정말 기쁘군!"

"이 빌어 처먹을 새끼! 남은 하루를 실컷 즐겨놔라. 네 생의 마지막이니까!"

이미 주변에는 싸움 구경에 몰려든 뱀파이어로 인산인해. 모처럼 섀도우타운에서 흥미를 끌 떡밥이 터진 것이다.

"저자가 소렌이군요?"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젊은이가 무모해 보이는군요. 나이트스토커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관심이 뜨거웠다. 연극을 위한 훌륭한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극의 주연으로서 한마디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근처에 돌로 된 단상 같은 게 있기에 올라섰다. 그러자 떠들던 모두가 날 주목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

"무슨 얘기를?"

다들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훌륭하신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이번 일의 경과에 대해 알리고자 몹시 엄숙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방에서 수많은 개성을 가진 눈동자들이 내게 쏟아졌다.

"최근 도는 풍문에 대해 단언하자면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밝힙니다. 명예로운 딥델버 님께선, 저 간교한 나이트스토커에게 속은 피해자일 뿐입니다!"

당연히 듣고 있던 케일런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이 뱀 같은 놈!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케일런은 당장이라도 내 말을 막으려 했지만 지켜보는 대중이 그렇게 두질 않았다.

"물러나라! 그가 말하게 둬라!"

"말하는 거나 들어보자고!"

아무리 케일런이 잘났어도 군중의 기세에 눌려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했다.

"딥델버 님은 케일런의 암습에 큰 상처를 입었고, 일단 물질계로 피신하신 상태입니다! 그 뒤 저 간악한 자는 자기가 피해자니, 뭐니 하면서 딥델버 님을 모함하고 있으니 이 어찌 참담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케일런은 분노로 눈이 돌아가려 했다.

"거짓이다! 아니, 애초에 네놈이 뭔데 딥델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냐! 소렌!"

나는 소리치는 케일런 대신 군중에게 외쳤다.

"제가 재판결투를 제안한 것은 간단합니다. 딥델버 님께서 제게 결투의 대전사(代戰士)를 부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음을 밝힙니다!"

케일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내가 딥델버의 대전사라니 무슨 소린가 싶겠지. 애초에 그는 내가 딥델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놈은 내 계획 속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내가 재판결투를 제안하고, 대전사를 운운한 덕에 이번 일은 딥델버 먹튀 사건의 연장선이 됐다.

그 때문에 수많은 관심이 재판결투에 쏟아졌다. 이것은 단순히 케일런과 내 대결이 아닌, 최근 섀도우타운을 달구는 떡밥의 '절정' 부분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몰려든 뱀파이어들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갈수록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엄숙하게 선언했다.

"여러분께서도 딥델버 님께서 얼마나 명예롭고 의로운 사내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분께서 자리에 쓰러져 분루를 삼키고 계십니다. 하여 이 소렌, 기꺼이 그분을 위해 나설 것입니다!"

이제 케일런은 제자리에서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케일런은 평소부터 인덕이 없던 데다가 여기저기서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들 내가 말한 스토리 쪽이 더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여러분! 이 소렌이 피 흘리는 심경으로 말씀드립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저 나이트스토커 같이 자기 이득만을 위해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는 자는 결국 파멸하기 마련입니다."

케일런이 당연히 발끈했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몰려 있는 자들에게 내 할 말만 했다.

"이것은 사악한 도전이지만, 여러분 같이 참과 거짓을 분별할 지혜로운 자들을 속일 순 없습니다. 내일 모두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 속임수에 대한 진실의 승리, 불명예에 대한 명예의 승리를!"

"와아아아아!"

광장에서 듣던 자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솔직히 진실은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그저 다들 케일런이 좆된 거 같아서 기쁜 모양이다.

"결코 타락과 방종은 올곧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이 소렌, 마지막 순간까지 명예롭게 싸우겠습니다!"

나는 무수한 갈채 속에서 연설을 끝냈다. 그러자 결국 케일런이 참지 못하고 단상 위로 올라와 나를 밀쳤다. 녀석도 한마디 하려는 것 같았다.

"비켜라!"

"맘대로 해."

나는 케일런을 내버려 두고 물러났다. 여기서 섣불리 방해하면 대중의 반감을 살 뿐이다. 아까 케일런이 내가 말하는 걸 막으려다 비난을 들은 것과 다르지 않다. 억지를 부리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일 터.

"소렌이란 저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으로 모두를 속이고 있다! 이 케일런이 진실을 고하고자 한다! 사기꾼인 딥델버와 그놈을 따르는 저 비천한 놈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제 케일런은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이겠지만, 내겐 모두의 호응을 받으며 방해할 방법이 있었다.

짤랑짤랑.

품에서 금화가 맑은 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을 모두에게 뿌렸다.

"명예로운 딥델버 만세!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보내는 성의입니다!"

별안간 금화와 보석을 뿌리기 시작하자 사방이 난리가 났다.

"와아아아! 진짜 금화?"

"비켜!"

"내꺼라고!"

다들 떨어진 걸 줍느라 난리가 났다. 당연히 케일런의 해명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케일런은 설마 내가 이딴 식으로 나올 줄 몰랐는지 당혹한 기색이다. 사실 지금 뿌리는 건 케일런에게 뜯어낸 재화다.

즉, 케일런의 돈으로 케일런을 방해하는 것이다. 더 좋은 건 설령 재판결투에서 놈이 이기더라도 이렇게 뿌려버린 이상 금을 되찾긴 글렀다는 거다.

"여러분! 딥델버 님을 향한 지지를 외쳐주십시오! 그러면 저 역시 더욱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호응해 주면 돈을 더 주겠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뱀파이어들은 열광적으로 외쳤다.

"딥델버 만세!"

"딥델버 만세! 딥델버 만세!"

사방에 가득 찬 함성 속에서 나는 금화를 뿌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걸 줍겠다고 광장의 뱀파이어들이 모두 따라왔다. 흡혈의 귀신이 되어도 금이 좋은 건 변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케일런의 돈을 실컷 쓰며 그들을 끌고 갔다.

내 발걸음에 따라 케일런의 말을 듣던 자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슬쩍 돌아보니 케일런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크크큭. 이런 싸움은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사실 나도 상대의 연설을 온당하지 못하게 방해한 셈이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금화가 굴러다녔기 때문이다.

"딥델버 만세! 딥델버 만세!"

"명예로운 딥델버! 딜델버!"

그렇게 물질계로 도망가 케일런이 쫓아올까 전전긍긍해 하는 늙은 드워프의 명성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

섀도우타운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늘 마을의 대부분이 결투를 보러 올 거란 소문이 벌써 파다했다.

'크흐흐, 원하는 대로 됐군.'

모두의 관심이 쏠린 만큼 이번 결투에서 이기면 나는 엄청난 명예를 얻게 터였다.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뱀파이어나 사회에서 명성은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자는 뭐든 수월하게 처리하고, 자기 세력을 만들기 편하다.

나이트스토커 케일런의 참살은 신참 뱀파이어에겐 엄청나게 화려한 데뷔였다. 일부러 계속 사건을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에인션트 뱀파이어인데······.'

섀도우타운의 깊은 곳에는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있다. 이렇게 성대하게 날뛰면 결국 주목을 끌게 될 테지만,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다.

'어차피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한 번 만나봐야 한다.'

게임에선 일정 수치 이상의 명성을 쌓으면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초대'라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현실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터.

'다만 문제는 그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누구냐는 거지.'

이 게임은 랜덤 요소가 강하다. 일곱 봉우리에서도 룩스 움브라가 갇힌 봉인이 어느 종족 밑에 있는지 무작위로 정해졌었다.

마을에 자리 잡은 에인션트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에선 이 마을에 자리한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태양 교단과 끈이 닿은 자인지, 전혀 상관없는지가 중요했다.

'관계가 없으면 솔직히 안심이지. 최상의 시나리오야.'

설령 태양 교단과 관련된 자라고 해도 만날 필요가 있다. 여러 에인션트 뱀파이어 중 누군지 파악해야 대비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 적에 대해 아는 건 병법의 기본이었다.

'어둠에서 영원으로···, 그 좌우명을 쓰는 자만 아니면 된다.'

생각해 보니 천체망원경을 사러 왔다가 별일을 다 겪고 있다. 루시우스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시간 됐습니다."

크림슨코트의 뱀파이어들이 방에 대기하고 있던 날 데리러 왔다. 이미 무장을 끝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고."

숙소 밖에는 많은 뱀파이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결투는 마을 광장에서 이뤄지는데, 광장으로 가는 길을 동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열띤 반응으로 날 맞아줬다.

"소렌! 소렌!"

"소렌! 소렌!"

뱀파이어들은 아주 떠들썩했다. 그들에게서 설렘과 기대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저마다 오늘 결투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대담한 신참이 승리할 거야!"

"내기를 신참에게 몰빵하더니 믿음도 깊어진 모양이군. 미안하지만, 나이트스토커를 상대로는 가망이 없어."

"시끄러워! 주둥이를 찢기 전에 닥치지?"

"자자, 싸우지 마세요. 모처럼 좋은 날인데!"

"이번 일은 꽤나 오래간 화제가 될 거 같습니다. 자, 어서 따라갑시다!"

마을의 짙은 안개 낀 골목은 어깨를 들썩이는 뱀파이어의 실루엣으로 가득했다. 광장으로 가자 환호가 다시 터졌다.

"왔다! 신참이 왔다!"

"응원하고 있다고! 힘내라!"

이미 결투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는 여럿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쪽에도 임시로 단상이 설치됐고, 다들 자기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모인 이들에게서 오늘의 이벤트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급기야 누군가 백파이프를 불어서 분위기를 달구자 더욱 큰 함성이 터졌다.

"와하하하하!"

"뭐라도 터뜨려라!"

오늘 아주 제대로 즐기려는 듯 뱀파이어들은 밤하늘에 폭죽과 마법을 쏴댔다. 다들 박수치고 난리였다.

내가 결투장 한가운데에 설 무렵 환호성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오늘 진실은 승리할 것입니다!"

즐거움 때문에 마음이 넉넉해진 뱀파이어들은 뜨거운 박수로 호응해줬다. 그리고 마침 케일런도 결투장에 도착했다.

"비겁한 케일런이다!"

"케일런이 왔어!"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오늘 그는 악역이었다. 하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내 앞에 서더니 으르렁댔다.

"소렌, 처음부터 딥델버와 네놈이 꾸민 짓이었군. 그 교활함에 어처구니가 없어질 지경이다."

"억울하면 날 쓰러뜨리면 되겠군. 이긴 쪽이 진실이 될 테니까."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그게 재판결투의 좋은 점이지."

케일런은 허공에서 자신의 창을 꺼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무기로 달빛을 떠올리게 하는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지켜보던 뱀파이어들 탄성을 터뜨렸다.

"나이트스토커가 창을! 전력을 다하겠다는 거군."

"주무기인 창을 꺼내는 게 드문데 말이지. 오늘 좋은 구경을 하겠군!"

이제부터는 문답무용이다. 결투의 입회인인 크림슨코트의 인물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우리 둘은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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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결투(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