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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 다섯째 날.

"오늘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은 타란의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매일 똑같아서 안 그래도 지겨웠는데!"

"칫."

하루를 복사해 붙여 넣듯 지겹던 나날.

그 때문인지 레이어의 반응이 뜨거웠다.

옆에 있던 메이어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쌍둥이 오빠가 1성급에 먼저 도달한 것 때문이다.

"더 안으로… 가는 건가요?"

"뭐, 당연하지."

샤를과 마르코의 반응 또한 여전하지만, 디르엔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더 멀리 간다는 건, 플랜트 처리에 성공했다는 말이지?"

"예. 1번과 2번 구역의 접경지에서 발견이 됐습니다만, 완전히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 목소리로 묻자, 옆에 있던 얀테가 대답을 해 왔다.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네.'

그의 설명에 디르엔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몰래 나간 사이에 플랜트와 엮여 버렸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마수를 많이 처리한 것도 플랜트와 연계돼서 적당히 얼버무려진 모양이니, 문제는 없겠지.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어쨌든 사전 설명이 끝난 후, 아이들은 조금 더 늘어난 호위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섰다.

전투 훈련에 레이어가 추가된 것 외에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평소와 비슷한 구도로 이어졌다.

그렇게 약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됐다.

"하아… 진짜 찾기 힘드네."

나무에 기대어 서 있자 옆에서 한숨을 푹 내쉬는 페니파.

아무래도 아직 찾지 못한 블루 래빗의 뿔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확률이 1할도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형님은 구매하셔도 충분하지 않으세요?"

"직접 구하는 거랑은 느낌이 완전 다르대. 끝까지 못 구하면 사러 가야 하겠지만. 근데 쟤는 뭐 하는 거야?"

"네?"

말을 이어 가던 페니파는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쌍둥이 남매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좀 만져 보자니까!"

"아, 잠깐만 있어 봐!"

레이어의 가방끈을 붙잡고 놓지 않는 메이어.

잘 보니 유리병의 뚜껑처럼 생긴 무언가가 보였다.

"가 보자."

"네."

같은 장면을 본 두 사람은 쌍둥이에게 다가갔다.

"뭐야?"

"너무 떠들면 마수들이 몰려올 거야...."

그에 이끌리듯 다가오는 마르코와 샤를.

조금 떨어진 곳에 호위들이 있긴 하지만, 주변의 경계에 신경이 쏠린 듯하다.

"궁금해서 왔구나?"

아이들이 몰려들자 레이어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내 손 위에 올렸다.

"뭔지 알겠어?"

맞혀 보라는 듯한 물음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놀란 목소리가 이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 이건...."

"너희들 설마...!"

투명한 병에 담긴 검은 액체.

반도 채 차지 않은 양이지만, 이 물건을 모를 아이들이 아니었다.

어제의 훈련 직전, 기사단장의 교육에서 사용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끼릭-

"윽! 냄새!"

"지독해!"

레이어가 뚜껑을 조금 돌리자 바로 코를 막는 아이들.

어제는 단순히 눈으로만 보며 설명을 들었기에 이런 충격은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비가 오는 숲에서, 심지어 채 열지도 않은 상태로 이 정도라면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이, 이걸 들고 오면...."

"냄새나니까 일단 좀 닫아! 숨을 못 쉬겠잖아!"

마수들을 모으는 데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히포그리프의 배설물.

문제는 그 효과가 너무 강력한 탓에 쉬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걸 그냥 가져오신 거예요?"

"밤에 사람들이 줄어든 틈을 타서 몰래 가져왔지. 어차피 토벌은 거의 다 끝났다고 했잖아?"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장난으로 다루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다.

"그걸 쓰려고? 큰일 날 텐데?"

"난 안 무서워. 형이랑 다르게 마법을 쓸 수 있거든!"

레이어는 이틀째의 1성급 경력을 내세우며 자신을 보였다.

아직은 마법을 하나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격렬한 달성감에 콧대가 높아진 것이다.

"그래? 진짜 안 무서워?"

"당연하지. 겁나면 멀리서 보고나 있어!"

"너무 무서워서 그래야겠네."

동생의 비난에도 웃으며 뒤로 물러나는 페니파.

물론 말려야 하는 게 맞지만, 디르엔의 연구 자아가 조금 더 강세를 보였다.

"어떤 식으로 사용하시려는 건가요? 어제 교육에선 엄청 효과가 강하다고 했었는데."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걸 희석할 거야."

"희석이요?"

"보기나 해."

끼릭-

씩 웃음을 지은 레이어는 병의 뚜껑을 돌렸다.

"우욱...."

"코가 썩을 것 같아!"

마개가 사라지자 수십 배는 강렬하게 풍겨 오는 악취.

하지만 그 넓은 입구로 쉴 새 없이 들어가는 것이 있었다.

"이러면 옅어지겠지?"

"...."

빗물에 섞여 가는 검은 액체를 보며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이지만, 엇나가도 크게 엇나갔다.

저런 짙은 농도의 물질에 빗물 따위를 섞는다고 연해질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크륵-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

고개를 돌리니 먼 수풀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개가 눈에 들어왔다.

"블랙 독이에요. 일단 병마개는 닫고, 다른 쪽으로 몸을 숨기는 게...."

"장난해? 그러면 아무것도… 엇!"

퍽-

물리적으로 말릴 새도 없이 거꾸로 쏟아져 버린 병.

경악스러운 상황에 모두의 몸이 굳어 버린 사이, 레이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큰일 났다."

12.

"어떡할 거야!"

"나, 나만 믿어! 내가 마법으로...."

"겨우 1성급이잖아!"

충격적인 사고에 쌍둥이 동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 방울로 마수를 끌어들이는 물질이 한 병만큼 사용됐다.

그렇다면 어떤 마수가 미끼를 물어도 신기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물러서십시오!"

그때, 원형으로 주변을 경계하던 호위들이 다급히 돌아왔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숨겨 보려 했지만, 그들의 눈이 커지는 것이 먼저였다.

"역시 이 악취는...!"

"레이어 도련님! 그걸 가지고 나오셨던 겁니까!"

"게다가 전부 땅에...."

엎어진 병을 보며 목소리를 높이는 호위들.

저 물건의 위험성은 몇 번의 경험과 교육으로 이미 체득한 상태였다.

그러니 무려 한 병이 엎질러진 상황은 정신이 아득해질 수준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이탈하겠습니다!"

피융-!

펑-!

하늘을 향해 불꽃을 쏘아 올린 얀테는 다급한 목소리로 디르엔을 이끌었다.

다른 호위들 역시 담당하는 아이에게 붙어 저택을 향해 달리려 했다.

하지만.

쿵-!

"윽!"

갑자기 흔들린 땅에 모두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전부 대비해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호위들은 빠르게 대열을 갖췄다.

"바, 방금 그거 뭐였어?"

"몰라!"

원으로 둘러싼 호위들 사이에서 쌍둥이가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뭐지?'

이 지역에 나오는 마수의 종류는 서적에서 대부분 파악했다.

하지만 방금과 같은 충격을 지면에 가할 수 있는 종류는 없었다.

"디르엔, 어떻게 생각해?"

"네?"

고민에 빠진 사이, 페니파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물어 왔다.

이런 상황인데도 침착한 것을 보니 신기할 정도다.

"엄청난 일이 생겼잖아? 어떤 마수가 나올 것 같아?"

"…제가 아는 한에선 짚이는 마수가 없네요. 형님은 뭔가 있으십니까?"

"아까 저택에서 소문을 들은 게 조금 있거든."

"소문이요?"

"응. 3번 구역의 토벌에서 목격된 마수인데, 이름이...."

"형님?"

그때, 말을 이어 가던 페니파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니,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 같지 않아?"

"구름 때문이 아닐까요? 비도 더 심해지는...?"

그렇게 말하며 바닥을 보던 디르엔은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조금 전만 해도 바닥에 그려졌던 나뭇잎과 가지의 희미한 그림자.

하지만 지금은 훨씬 더 커다란 물체에 가려진 듯 커다란 음영만이 보였다.

"어?"

머리에 떠올랐던 의아함은 순식간에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호위와 아이들이 동시에 올려다본 그곳엔.

"바실리스크다!"

엄청난 크기의 뱀 머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도망쳐야 합니다!"

"눈을 보시면 안 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코얀! 텔리파! 너희가 길을 뚫어라!"

당황했던 정적도 잠시, 호위들은 다급히 아이들을 이끌고 이탈을 시작했다.

몰려오는 마수들은 여전해도 그런 세세한 위협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콰광-!

"윽!"

그런 자신들을 보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바실리스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개죽음은 질색이었기에, 디르엔은 마법을 준비하려 했다.

콱-!

그때, 갑자기 머리를 휙 젖히는 바실리스크.

뭔가 싶었는데, 놈의 목에 거대한 얼음 창이 박혀 있었다.

"저택으로 향해라!"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옮겨졌다.

그곳엔 마법사단장 켈리마프가 마법진을 펼친 채 비행하고 있었다.

"켈리마프다!"

"단장님!"

콰과과-!

지상에서의 외침에도 그는 계속해서 마법을 쏘며 바실리스크를 밀어냈다.

아이들은 물론 토벌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장소를 옮기려는 것이다.

"이동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 얀테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쪽입니다!"

"뒤를 보지 마십시오!"

다른 호위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데리고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슈욱-!

"바실리스크입니다!"

그 긴급한 보고에 켈리마프는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애초에 지원 요청 신호가 있었다는 보고까지 받았던 터라 마음이 바빠졌다.

키에에-!

"…오랜만에 보는군."

많이 이동할 것도 없이 곧바로 눈에 들어온 거대한 뱀.

당장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고는 싶지만, 공작가의 자제들이 숲에 있다.

"아이스 랜스."

콰드득-

일단 장소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켈리마프는 수십 개의 거대한 얼음 창을 만들어 냈다.

그의 아이덴티티는 물 속성의 증폭.

말 그대로 물 계통의 마법을 사용할 때, 질과 양적인 성능을 대폭 상승시킬 수 있다.

콱-!

키에엑-!

빠른 속도로 사출한 얼음 창이 바실리스크의 목에 박혔다.

놈은 괴성을 지르며 저항하려 했지만, 엄청난 마나를 실은 얼음덩어리를 떨쳐 내진 못했다.

콰과과-!

마나를 더 싣자 숲의 안쪽으로 밀려나는 바실리스크.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 했지만, 몇 개의 마법이 더 날아든 탓에 저항은 무의미해졌다.

쿠구구-

3번 구역까지 밀려나자 켈리마프는 마법을 거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4성급 결계에 파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군.'

바실리스크가 2번 구역이나 1번 구역에 있었다면 일찍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3번 구역에 있었다는 것인데, 구 형태의 결계를 그냥 통과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키에엑-!

고민할 시간은 주지 않겠다는 듯 머리를 세우는 바실리스크.

석화는 자신에게 통하지 않지만,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놈의 살기는 여실히 느껴졌다.

"정말로 많은 동료들이 죽었지."

직접 마주하자 떠오른 과거의 기억은 묘한 감정과 함께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6성급이 되어 루블린 공작가의 마법사단장을 맡고 있다.

그 무게와 자부심은 언제나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때와는 다를 것이다."

자세를 다잡은 켈리마프는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파앗-!

그러자 상공에 그려지는 거대한 마법진.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런 싸움에선 일격이 중요하다.

키에엑-!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바실리스크는 긴 몸을 흔들며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이스 레인."

콰과과과-!

곧바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얼음의 세례에 놈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이덴티티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마법의 성능은 허공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다.

키에엑-!

증폭에 증폭을 거듭한 6성급 마법에 바실리스크의 몸이 빠른 속도로 찢어지기 시작했다.

피하려고 몸을 비틀어도 거대한 마법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직이다!"

유리한 상황에서도 멈출 생각이 없던 켈리마프는 좀 더 마나를 부으며 강도를 높였다.

팟-!

허공의 마법진을 유지한 채로 생성한 또 다른 6성급 마법진.

"워터 블래스터!"

영창과 함께 커다란 물의 구체가 표면을 회전시키며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바실리스크의 중심에 닿는 순간.

퍼버벙-!

엄청난 폭발과 함께 수백 개의 물의 칼날이 사방으로 사출됐다.

키엑- 끼에엑-!

아이덴티티의 힘으로 증폭된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잘라 냈다.

쏟아지는 얼음의 세례와 몸을 난도질하는 물의 칼날.

그 일방적인 공격에 바실리스크의 몸은 원래의 형태를 잃어 가고 있었다.

집중력을 더 끌어올린 켈리마프는 놈의 상태와 피해 정도를 파악했다.

이 정도라면 위력 중심의 마법으로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으리라.

쿠구궁-!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커다란 소음.

바실리스크에게 집중하던 그였지만, 엄청나게 불길한 마나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뒤쪽을 보자 펼쳐진 기이한 풍경에 허망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푸르던 숲이 무언가에 베어 먹힌 듯 비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분명히....

쿠궁-!

다시금 뒤쪽에서 들려온 같은 소음에 켈리마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마법이 내리꽂히던 그곳엔.

"이런...!"

숲과 함께 거대한 바실리스크의 모습이 소멸해 있었다.

***

'깜짝 놀랐네....'

디르엔이 서 있는 곳은 돌로 둘러싸인 공간.

뜬금을 넘어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방금 전의 상황을 복기하기로 했다.

'분명히 도망치고 있었는데....'

바실리스크가 나타난 후 그는 호위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소음이 들리더니 시야가 까맣게 변하며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시작과 결과만 남은 탓에 혼란스럽지만, 의심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전생에서의 미궁도 이런 느낌이었지.'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마치 거대한 마수와도 같다고 했으니 이렇게 집어삼켜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레이어가 쏟은 히포그리프의 배설물이 미궁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충분하겠지.

'그런데 무슨 마나가 이렇게 짙어?'

미궁엔 갖가지 요소들로 다양한 마나가 축적된다.

마수는 물론이고, 이곳에 갇혀서 죽은 사람들의 마나까지도 이 공간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곳의 마나는 뭔가 이상했다.

지금의 디르엔은 특정한 마나를 구분할 정도가 못 되는데도, 짙은 마나의 기운이 온몸을 자극해 왔다.

이런 농도라면 마법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그걸 버틸 수 있다면 말이다.

'…얘는 어쩌지.'

자신의 옆에 곱게 누워 있는 한 남자아이.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마법을 쓰던 마르코다.

물리적으로 떨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 높은 밀도의 마나를 한순간도 견디지 못한 듯하다.

호위와 다른 아이들도 먹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그린 라이트."

어쨌든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기에 그는 자신과 마르코의 몸에 초록 색깔 마법을 사용했다.

[개조 마법:그린 라이트(1성급)]

[초록 파장의 빛을 쏘아 닿은 범위를 보호한다.]

[개조 결과]

마나 소모량 -85.3퍼센트

보호량 +99.3퍼센트

사거리 +101.5퍼센트

지속 시간 +113.8퍼센트

효과 범위 +140.2퍼센트

특수 마나 인식 해제

41퍼센트의 개조율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마법 그린 라이트.

빛에 닿은 부분을 마나로 보호하는 것인데, 투자하는 양에 따라 상당히 양질의 보호가 가능했다.

마법을 제공한 당사자에게 거는 느낌이 미묘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윈드 블로우."

보호 마법이 마무리된 후, 디르엔은 이동을 위해 마르코의 몸을 띄웠다.

'가 볼까.'

채비를 마친 그는 바로 옆에 형제를 둔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방통행의 동굴 구조였기에 딱히 길을 고민할 것도 없었다.

"...."

경계심을 끌어올린 채 이동하기를 약 5분.

예상했던 것과 달리 무언가로부터의 공격은 전혀 없었다.

마나 농도가 점점 짙어지는 것 외에는 시작점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정도다.

'저기가 끝인가?'

그렇게 평온한 상태로 걷다 보니 길의 끝을 알리는 계단 입구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미궁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계단 근처로 다가간 순간 사라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계단, 정확히는 그 너머에서 지금까지의 몇 배는 넘을 법한 마나가 느껴졌다.

멀쩡히 서 있는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로 정상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다.

"매직 실드."

무언가 있음을 감지한 디르엔은 마르코와 자신의 몸에 3성급 보호 마법을 덧씌웠다.

그리고 몇 개의 마법진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조심스레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엄청 크네.'

직선형의 계단을 오르자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반구 형태로 이루어진 방이었는데, 쓸데없이 크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너무 거대했다.

"아."

그리고 헤매던 시선이 자리를 잡은 바닥의 중앙.

마나의 기운만으로 존재감이 느껴지는 그곳엔.

우웅-

하얀 마정석이 영롱한 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13.

마나는 삼켜야만 하는 것이다.

우연히 깨어났을 때,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그 본능뿐이었다.

퍼진 채로 떠도는 마나는 삼키기 어렵지만,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삼켰다.

처음엔 하나, 그다음엔 둘, 그리고 셋, 넷.

의지와 상관없이 깨어날 때면 삼키고 또 삼켰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마나 덩어리를 삼켰는지 모를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이 나타났다.

이상했다.

오랜 시간 삼켜 왔던 마나와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삼켰다.

그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는 새로움이 가득한 신기한 것이었다.

빠져나가지 않게 꼭꼭 가둔 채, 자신에게 녹여 냈다.

시끄러운 소리는 멈추지 않아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

덩어리는 그렇게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속이 가득 찼다.

지금껏 느끼지 못한 포만감은 모든 곳을 빈틈없이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삼킨 뒤부터는 머리가 맑아졌다.

이후로는 무엇을 삼켜도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배 속에 들어옴과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들을 없앴다.

사냥을 위한 갖가지 요소들까지 천천히 몸속으로 녹였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비슷했다.

흘러온 시간 동안에도 많은 마나 덩어리를 삼켰지만, 그것과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갈구하던 그 특별한 마나 덩어리를 찾아내고 말았다.

예전과는 다르지만, 훨씬 더 특별했기에 온 힘을 다했다.

주변에도 자신을 강하게 이끄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오로지 그것만을 노렸다.

삼켜진 많은 것들엔 관심이 없다.

그저 이 특이한 마나 덩어리에만 집중한다.

이번에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

'저게 핵이구나.'

마정석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곳의 정체가 미궁이 확실하다는 것.

두 번째는 저것이 미궁의 근간인 핵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시신이나 마수의 사체를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서서히 미궁에 흡수된 탓이리라.

'그런데 이게 끝이라고?'

미궁의 본 목적은 귀중한 보물을 얻는 데 있다.

그런데 가뜩이나 들어오기 힘들다는 이곳에 와서 아무것도 챙겨 가지 못한다니.

심지어 그럴싸한 마법진도 없어서 의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가기나 해야지.'

책에서 봤던 미궁의 소멸은 마정석의 파괴로 이루어진다.

보통은 그것을 지키는 함정이나 마수 따위가 있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마법적인 이득이 하나도 없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니 말이다.

결정을 내린 디르엔은 마르코를 조금 떨어트려 놓은 뒤, 손을 뻗었다.

"파이어 볼트."

그리고 정면을 향해 1성급 마법을 사용했다.

슈욱-

펑-!

빠르게 날아가 크게 폭발하는 불덩어리.

'뭐, 이렇게 되겠지.'

하지만 마법이 적중한 마정석은 그을림조차 없었다.

그나마 유의미한 건 약간의 떨림 정도일까.

'속성을 바꿔 볼까.'

위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약간의 실험 정신이 의식을 건드렸다.

"아이스 애로우."

쾅-!

얼음 속성의 마법을 사용한 디르엔은 마정석의 변화에 집중했다.

드드-

그러자 이번에도 약간의 떨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거 재밌는데?'

마치 움직이지 않는 실험체를 두고 연구하는 느낌.

심지어 숲에서와 달리 마법의 전 과정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다.

"라이트닝 볼트."

"스톤 볼."

"윈드 애로우."

"매직 볼트."

"레드 라이트."

열의가 생긴 디르엔은 속성을 바꾸며 1성급 마법을 차례대로 사용했다.

그 결과, 색깔 마법인 레드 라이트가 가장 유의미한 반응을 끌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위로 가 볼까.'

하지만 그 역시도 파괴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디르엔은 성급을 올려 실험을 이어 갔다.

"파이어볼."

"아이스 볼."

"윈드 커터."

....

....

그런 과정이 이어지길 약 1시간.

'이건 이쪽이 더 낫겠네.'

마법을 하나씩 사용하던 디르엔의 실험은 마법진의 추가 개조로 변조되고 말았다.

상황이 조금 미묘하긴 해도, 이렇게 직접 마법을 쓰면서 개량할 기회는 얻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개조는 이쯤이면 됐고....'

모든 마법을 손본 디르엔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우웅-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영롱한 빛을 내비치는 마정석.

가진 마법으로 파괴할 수 없다는 건 깨달았지만, 마냥 여기에 갇혀 있는 것도 곤란하다.

'…뽑아 볼까?'

둥지 같은 바닥 위로 떠오른 마정석은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다.

만약, 저 자리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거라면 옮기는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

위험성이 있다고 해도 즉각 반응하면 될 일이겠지.

판단을 내린 디르엔은 천천히 마정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보호 마법이 가득 둘러진 손을 뻗었다.

툭-

-…마!

"...?"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자 갑자기 들려온 소리.

반사적으로 손을 뗐는데, 뭔가 사람이 외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지?'

들리는 소리라기보다는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감각에 가까웠다.

이건 또 무슨 신기한 현상일까.

스윽-

관심도가 급격히 올라간 디르엔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툭-

-…지 마!

그러자 다시 한번 머리를 울리는 소리.

이번엔 놓칠 생각이 없었기에 그는 손바닥을 완전히 마정석에 가져다 댔다.

-손 떼지 말라고!

이젠 완전한 문장이 된 소리에 디르엔은 의식을 집중했다.

-진짜 떼지 마! 제발! 안 들리는 거 아는데, 제발 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너무도 절실한 목소리.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디르엔은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누가 계신 건가요?"

-어?

그런 물음을 던지자 되돌아온 얼빠진 젊은 남성의 목소리.

뭔가 싶었는데, 말이 이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뭐야...? 내 말이 들려? 진짜야?

"네, 잘 들립니다. 그러니까 설명을 좀...."

-...!

말로 표현하기 힘든 환호성이었다.

들리는 걸 들린다고 했을 뿐인데, 반응이 상당히 좋다.

그리고 이 짧은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혹시 거기 갇히신 건가요?"

-맞아. 마법이 실패한 것도 억울한데, 이런 곳에 갇혀 버렸다고!

가볍게 묻자 그는 억울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디르엔의 관심은 하나의 단어에만 집중됐다.

"마법?"

-그런 게… 아니다. 일단 여기에 마나를 흘려 봐.

"마나요?"

-이 상태로는 마나 덩어리밖에 보이지 않거든. 네가 여길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니까, 아주 조금만 흘려 봐. 그럼 자세하게 말해 줄게.

"그러죠."

그의 말에 디르엔은 아주 적은 양의 마나를 흘려 보냈다.

무슨 짓을 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궁금하다는 생각이 함께였다.

-좋아. 조금씩 보여. 잠깐만 기다리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엄청난 속도로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잠깐, 너 애잖아? 애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마나는 또 왜 이렇게 짙은.... 그것보다 왜 멀쩡해? 기절 안 해? 내 마나가 호구로 보여? 아니, 애초에 애면 소용이 없잖아!

"소용이 없다니요?"

-하아… 다 틀렸어. 나도 못 나가고, 너도 못 나갈 거야.

디르엔의 물음에도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포기하는 것보다 머리를 맞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머리를 맞대? 마법의 '마' 자도 모를 것 같은 놈이 뭘 안다고! 여기 있는 마법진을 파악하려면 7성급은 돼야 한다고!

"마법진이요?"

울분에 찬 듯 외치는 그이지만, 저 단어는 디르엔에게 있어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에 있나요?"

-뭐? 네가 봐서 어떡하려고? 우린 그냥… 잠깐, 손 떼지 마!

영양가 없는 목소리에 디르엔은 손을 떼고 마정석을 살폈다.

그리고 자리를 뒤쪽으로 옮기자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특이한 구조네.'

마정석의 중앙에 새겨져 있는 작은 마법진.

디르엔은 곧바로 조수를 부른 뒤, 작업을 시작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등록 마법:???(고대)]

[분석 결과:개조 가능]

[개조 범위:26.2퍼센트]

[지식에 기반한 자동 개조가 시작됩니다.]

'고대 마법이라고?'

분석이 끝나자 떠오른 문장에 디르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에서도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던 고대의 마법진.

그런데 이런 곳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수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엄청 어렵네.... 오히려 좋지만.'

워낙 구조가 복잡했던 탓에 디르엔은 이런저런 시도를 반복했다.

상당한 난이도였지만, 전례 없는 집중을 쏟은 덕인지 결과에 다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개조 마법:익스트랙션(고대)]

[아이덴티티를 보유한 대상으로부터 마나 인자를 추출해 흡수한다. 대상에 따라 동일 인자를 최대 5개까지 얻을 수 있다. 단, 추출된 대상의 아이덴티티는 사라진다.]

[개조 결과]

특수 제한 해제

띠링-

[기능 '아이덴티티'가 개방되었습니다.]

[5개의 마나 인자를 사용해 아이덴티티를 조합할 수 있습니다.]

[복수 종류의 인자를 조합 시, 가장 강한 성질을 따르게 됩니다.]

개조가 끝남과 동시에 떠오른 문장.

평소와 달리 수치가 없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이덴티티를 만든다고?'

상상과 예측을 넘어선 설명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팟-!

마정석과 손 사이에 떠오른 고대의 마법진.

"후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디르엔은 기대감에 벅찬 목소리로 외쳤다.

"익스트랙션!"

우웅-

영창과 동시에 푸른빛이 마법진에 감돌았다.

스슥-

발동이 잘된 것인지, 마정석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푸른색의 무언가.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는 것은 고작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아이덴티티 인자 5개를 획득했습니다.]

[인자를 조합하시겠습니까?]

[네/아니요]

'…5개?'

시작부터 얻어 낸 최대치의 인자에 디르엔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저기에 갇혀 있던 남자는 생각보다 거물이었던 모양이다.

슥-

어쨌든 고민할 부분이 전혀 없었기에 그는 손가락을 선택지에 가져다 댔다.

[아이덴티티 조합이 시작됩니다.]

한 문장을 끝으로 변하지 않는 판의 내용.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한 작업으로 보인다.

마법진처럼 건드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전적으로 조수에게 맡겨야 하는 부분이겠지.

"…그래서 이건 어쩌지."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뭐야, 이거 뭔데? 어떻게 된 거야? 너 뭐 했어?

"...."

마정석을 만지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을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

아무래도 목표했던 것과 달리 좋지 않은 게 들어온 듯하다.

"혹시 마법 잘 아세요?"

-뭐?

"마정석에 있는 고대 마법을 썼는데, 약간 잘못된 것 같아서요."

-하?

디르엔의 말에 남성은 또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게 뭐야? 뭣도 모르면서, 그 마법진을 건드려?

"그쪽이 너무 애매한 존재인 탓이죠. 어쨌든 마법은 잘 아시나요?"

-하… 당연하지. 난 100년 전까지만 해도 7성급 마법사였으니까!

귀를 크게 울리는 두 가지 단어.

5개의 인자가 들어온 이유를 바로 들어 버린 듯하다.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은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다행이네요. 마법진을 보여 드릴 테니 방법을 한번 찾아보시죠."

팟-

디르엔은 바로 마법진을 구현해 눈앞에 띄웠다.

"보이세요?"

-무슨 원리인지, 네 눈으로 보는 느낌이야.

"어떻게 하면 될지 아시겠어요?"

-기다려 봐. 애가 함부로 건드린 마법 따위는 바로....

순간, 기세 좋게 이어 가던 남성의 말이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야, 뭐야, 이게?

"네?"

-뭐냐고, 이거. 구조가 무슨.... 아니, 원래 마법진은 어디로 갔는데?

"개조했는데요?"

-개조했는데요? 지금 개조했다고 했어? 너같이 어린 게 고대 마법진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수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스윽-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리는 고성에 디르엔은 마법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구조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보이시죠?"

-허....

아무래도 잘 보이는 듯, 허망한 숨소리를 내는 남성.

사실 마법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 성자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뭔가 아실 것 같나요?"

-…알 것 같냐고? 완벽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의 이 마법진을?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누구기에 이런 걸....

쿵-!

그때, 갑자기 들려온 기이한 소음.

대화를 멈춘 디르엔은 곧장 마정석으로부터 물러났다.

-야, 이거....

쿵-! 쿵-!

계속 이어지는 소리와 진동은 대강의 위치를 가늠하게 했다.

"뭔지 아세요?"

-당연하지. 수십 년 동안이나 여기를 지키던 놈인데!

그의 말을 듣던 디르엔은 좀 더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이 왔던 계단의 입구로 발을 딛는 순간.

콰과광-!

반대쪽의 벽이 무너지며 소음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좀 머리가 아프네.'

아까도 마주했었던 거대한 크기의 뱀, 바실리스크.

설마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외나무다리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상태가 왜 저래?'

아까의 위압적인 모습을 잃은 놈은 넝마보다 심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날아간 머리와 드러난 뼈.

몸통 곳곳과 꼬리는 심하게 잘리고, 갈라져 피를 철철 흘리는 중이다.

-망했다, 망했어… 진짜 망했어.... 내가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일단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자, 남성의 중얼거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심스럽기는 해도 딱히 이상한 반응은 아니다.

저런 상태라 해도 AA급 마수의 본질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지금 가진 마법만으로는 유효타를 주기가....'

띠링-

그런 고민에 빠진 사이, 귀를 울리는 익숙한 소리.

반사적으로 정면의 판에 시선을 돌린 디르엔은 두 문장과 마주했다.

[조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이덴티티 빛 속성의 태양이 등록됩니다.]

14.

-야, 이건 또 뭐야? 태양의 힘이라면 내 거잖아!

"이게 보이세요?"

-지금 그게 문제야? 태양의 아이덴티티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말이 안 된다며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을 보니 보이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단순한 의식의 공유가 아니라 무언가 이어져 버린 걸까.

쿵-!

그때, 꼬리를 흔들며 몸부림치는 바실리스크.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지만, 고통 때문인지 자신을 노리는 건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기절한 마르코를 계단 쪽으로 물린 디르엔은 다시금 자세를 고쳤다.

-그 걸리적거리는 건 좀 버려!

"일단은 형제라서요. 어쨌든 저것부터 먼저 해결하죠. 안 그러면 당신도 저랑 같이 죽어 버릴 테니까요."

-…좋아. 일이 끝나면 밖으로 나가서 해명해. 그리고 당신이 아니라 나는 크로노야!

시간이 끌리면 곤란했겠지만, 다행히 남성… 크로노는 빠르게 수긍해 왔다.

"그래서, 뭔가 방법은 있으십니까? 지금까지 계속 보셨다면서요."

-본 게 아니라 마나를 느낀 거지. 게다가 아무도 모르는 약점도 알고 있다고.

"약점을요?"

-일단 저놈의 움직임을 멈춰야 해. 문제는 내 아이덴티티를 사용하려면 빛 속성 마법이 필요하다는 건데....

복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크로노.

분명 빛 속성은 다루기가 어려워 하급 마법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디르엔에겐 형제로부터 받은 선물이 있었다.

"빛 속성이면 쓸 줄 아는 게 있긴 합니다."

-뭐? 라이트 같은 기초 마법은 안 돼.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마법이어야 해.

"네, 있어요. 2개."

-...?

당당한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멈춘 크로노.

또 미묘한 이야기로 이어지나 싶었지만, 다행히 흐름이 유지됐다.

-하아… 이젠 모르겠다. 어쨌든 죽으란 법은 없구나, 진짜.

"하지만 1성급이라 큰 의미는 없어요. 애초에 저는 아직 3성급이라 마나 코어도 미숙합니다. 바실리스크에게 통할 리가 없잖아요."

-3성급 같은 소리 하네. 몸의 성장 때문에 성급은 억눌려 있지만, 네 마나 코어는 그런 수준이 아니야.

디르엔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답하는 크로노.

물론 생후부터 시작된 훈련 덕에 남들보다 마나 코어의 성장도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육체가 받쳐 주지 못하는 이상 상한선은 분명하기 마련이다.

그 말을 되뇌고 있으니, 크로노가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어디서 처맞고 왔는지는 몰라도 저런 상태라면 괜찮아. 내 태양의 힘이 더해지면 3성급 이상의 효과는 낼 테니까.

"근거는 있는 거예요?"

-어린놈이 왜 이렇게 의심이 많… 앞에!

키에엑-!

그때, 몸을 뒤틀다 위로 튀어 오른 바실리스크.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디르엔은 마법을 사용했다.

"아이스 월!"

쾅-!

솟아오른 얼음벽에 놈의 거대한 몸이 부딪치자 곧바로 구조가 무너졌다.

그 틈을 노린 디르엔은 곧바로 마법을 연계했다.

-마나 속에 또 다른 마나를 채우는 것처럼 상상해 봐! 밀도를 높일수록 강한 효과를 낼 수 있어!

시기를 맞춰 머릿속에서 울리는 크로노의 목소리.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조언대로 마나 속에 다른 마나를 섞는 이상한 느낌에 집중을 더했다.

"레드 라이트. 블루 라이트."

부서진 얼음벽의 잔해들을 반사하며 쇄도하는 두 색깔의 빛.

게다가 그것을 감싸는 황금색의 옅은 아지랑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저것이 태양의 힘인 듯하다.

팟-!

그때, 미친 듯이 난사하던 빛이 바실리스크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드득-!

키에엑-!

"…진짜 먹히네."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놈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진 것이 보였다.

게다가 엄청난 숫자의 상처에서 쏟아지는 출혈 또한 눈에 띄게 증가했다.

-뭐야, 너 베르세르 가문이었어?

"아뇨."

-…무슨 소리야? 색깔 마법을 쓰는데 그쪽 가문이 아니라고?

크로노는 놀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디르엔의 시선은 정면에 집중됐다.

'다행이긴 한데....'

반신반의로 쏟은 마법이 유의미한 효과를 보였다.

당연히 엄청나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놈은 AA급 마수 바실리스크다.

본연의 마나 저항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사한 수준이다.

"쇼크 웨이브."

드드드-!

내부를 더 흔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디르엔은 놈의 드러난 상처를 향해 충격파를 날려 보냈다.

키에엑-!

그러자 고통스러워하던 바실리스크가 조금 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좋아! 조금 더 해 봐!

팟-!

크로노의 신난 목소리가 들리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쏟아 낸 마법.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나를 퍼부었더니, 바닥에 처박힌 수준으로 움직임이 줄었다.

"그래서, 다음은요?"

-다음? 당연히 약점을 노려야지.

디르엔의 물음에 크로노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는 즐거운 듯이 설명을 이어 갔다.

-바실리스크의 코 주변엔 적을 감지하는 특수한 기관이 있어. 보통은 숨기고 다니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렇게 드러나곤 하지. 엄청 연약해서 그냥 칼로 찌를 수도 있을걸?

"대충 알겠네요."

자세히 코를 살피니 주변에서 꿈틀거리는 구멍 같은 게 보였다.

눈으로 보인다고 해도 미친 듯이 움직이는 놈의 코를 노리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애초에 눈을 피하려 시선을 처리하고 있었으니 더욱 고난도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저런 상태라면 별다른 리스크 없이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

-방금 마법에서 황금색 아지랑이가 보였지? 그걸 뜨겁게 한다는 느낌으로 마나를 왕창 쏟아 봐. 빛에 취약한 대상을 태워 버리는 효과가 있으니까.

"레드 라이트."

그 미묘한 조언에도 디르엔은 곧바로 빛의 마법을 사용했다.

팟-!

빠른 속도로 사출된 붉은색 빛.

그리고 아까의 감각을 떠올리며 마나를 쏟으니, 황금색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슈욱-!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나아간 빛은 정확히 놈의 코 부근에 도달했다.

그 순간.

치이익-!

키에엑-!

무언가 타는 소리와 함께 엎어져 있던 바실리스크가 이쪽으로 튀어 올랐다.

일단은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그 타이밍이 조금 늦어 버렸다.

-야, 피해!

콰광-!

그대로 휘둘러진 꼬리가 내려찍은 지면.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쾅-!

콰광-!

미친 듯이 날뛰는 바실리스크의 발악에 지면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고작 몇 번 반복된 순간.

후욱-!

무너진 땅 아래로 몸이 추락했다.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플라이!"

지지대를 잃은 디르엔은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몸을 띄웠다.

하지만.

키에엑-!

그걸 놔둘 생각이 없다는 듯 거대한 뱀의 머리가 쇄도했다.

"윽!"

벌어진 입 위로 번쩍이는 눈.

하지만 시선을 피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젠장!"

결국 석화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친 디르엔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그런데,

"...?"

분명히 바실리스크의 눈은 자신에게 닿아 있다.

문제는 모든 게 끝났어야 할 자신의 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빨리 피해!

잠깐 멈칫하는 사이, 들려온 크로노의 목소리.

"흡!"

하지만 디르엔은 회피가 아닌 다른 방법을 택했다.

-…야, 뭐 해! 미쳤어!

턱-!

바람으로 떠올랐던 그가 착지한 곳은 바실리스크의 머리.

그대로 달라붙은 디르엔은 주저함 없이 결착에 나섰다.

"레드 라이트!"

팟-!

말 그대로 코앞에서 생성된 붉은빛은 온전히 목표 지점에 착지했다.

치이익-!

키에엑-!

심할 정도로 마나를 담은 탓인지 미친 듯이 몸을 비트는 바실리스크.

하지만 방심을 완전히 배제한 디르엔은 태양의 힘에 집중한 채, 더 강렬한 빛을 쏟아 냈다.

소모되는 마나는 이 세계에 온 이후로 가장 방대한 수준이다.

팟-!

아래로 떨어지는 사이, 어느새 붉은빛이 놈의 머리 전체를 뒤덮었다.

그 중심에 있던 디르엔이었지만, 스스로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의 체공이 이어지길 잠시, 어느새 추락이 끝을 보였다.

콰과광-!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그는 머리를 발로 차며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플라이!"

그리고 다시금 바람을 이용해 조금 떨어진 잔해 더미로 착지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너 그대로 먹혀서 소화당할 뻔했다고!

"도망쳤으면 진짜 그렇게 됐을걸요? 게다가 결과는 이렇게 좋잖아요."

눈앞에서 길게 널브러진 거대한 뱀.

머리 전체가 까맣게 그을린 놈은 완전히 움직임을 잃었다.

-하아… 도대체 무슨 행동력이야.... 위험하다는 인식이 없는 수준이잖아. 게다가 마나를 얼마나 쏟았기에 이런 상태가 되는 거야?

"그냥 되는 만큼 했어요. 눈을 마주쳤는데 멀쩡한 이유는 전혀 모르겠지만요."

-…저놈의 석화는 마나를 침투시켜 마나 코어의 근간을 공격하는 방식이야. 성장도랑은 상관이 없으니, 네 걸 뚫기엔 어림도 없지.

디르엔의 말에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 크로노.

지식엔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오늘의 일을 겪어 보니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 왔다.

-내 평생 너 같은 애는 본 적이 없어. 아니, 애초에 애는 맞는 거야? 정체가 뭔데?

"루블린 공작가의 막내입니다. 보시다시피 애도 맞죠. 익스트랙션."

우웅-

말을 잇던 디르엔은 바실리스크에게 다가가 마법을 사용했다.

아까부터 저 마수의 사체가 자꾸 실험 정신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슈욱-!

그때, 바실리스크로부터 빠른 속도로 흘러오는 마나의 흔적.

그 작업이 끝나자 이번에도 조수가 문장을 띄웠다.

[아이덴티티 인자 1개를 획득했습니다.]

"…이게 되네."

9할 정도는 안 되리라 생각했는데, 성공적으로 인자를 얻어 냈다.

혹시 마수의 급이랑 관련된 것이 아닐까. 디르엔은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이래도 그냥 애라고?

"네, 그보다 여기는 또 뭡니까? 미궁에 이런 공간도 있었어요?"

작업이 끝나자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너지기 전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너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상한 점이었다.

-나도 몰라. 마나가 퍼져 있던 건 위쪽의 공간뿐이었으니까.

"흐음. 플라이."

그의 대답을 들은 디르엔은 곧장 뚫린 천장 위로 날았다.

그리고 계단에 두고 왔던 마르코를 회수한 채 아래로....

"어?"

천천히 내려오는 사이, 흐트러진 바닥에 시선이 고정됐다.

흩뿌려진 잔해들의 틈 사이를 잇는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건...! 에어 웨이브!"

후욱-!

마법을 사용하자 바닥의 잔해들이 중심으로부터 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치워진 땅 위엔....

"역시."

절반 정도가 지워진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뭐야? 왜 이런 게 여기에....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는 듯 크로노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은 디르엔의 신경 밖이었다.

[분석에 실패했습니다.]

[등록된 마법진을 보존합니다.]

"뭐, 그렇겠지."

훼손된 마법진을 베껴 등록했지만, 예상한 답이 돌아왔다.

절반을 채우는 건 마법진을 새로 만드는 수준이니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연구할 맛이 나는 소재가 생긴 덕에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다.

쩌적-

그때, 갑자기 들려온 이상한 소리.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니, 하얀 마정석이 그 형태를 잃고 있었다.

-이거 설마....

가만히 보고 있자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다.

"뭔데요?"

-미궁의 핵은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 부서져. 이번의 경우엔 아마… 저거였던 것 같아.

"저 마법진이요?"

그의 말에 디르엔은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자신이 한 것은 바람으로 돌을 치워 마법진을 본 것뿐이다.

조수에 등록해 두기는 했지만, 반쪽짜리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도대체 무슨 조건을 만족했다는 걸까.

-일단 준비나 해.

"준비요?"

-슬슬 시간이 됐거든.

쿠궁-!

그의 말과 동시에 울리기 시작한 공간.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떤 뜻인지 알 것 같다.

옆의 마르코를 붙잡은 디르엔은 물음을 던졌다.

"탈출은 어떤 식으로 하는 거예요?"

-탈출은 그냥....

슈욱-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시야가 암전됐다.

그리고 잠깐의 부양 감각이 느껴진 순간.

-이렇게 되는 거야.

어느새 비 내리는 숲의 어귀에 도착해 있었다.

15.

바실리스크와 함께 두 아이가 사라진 것은 약 2시간 전.

정황상 미궁의 출현이라 판단이 됐기에 모험가까지 동원해 다급히 수색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그 미궁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필 그렇게....'

휘말린 두 아이 중 전투가 가능한 것은 마르코 하나.

재능이 있다고는 해도 고작해야 1성급이다.

잡다한 마수는 물론이고, 바실리스크까지 들어간 이상 기적을 바라기도 어렵다.

하지만.

"범위를 넓히고, 다시 처음부터 수색해라!"

공작가의 자제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

그렇기에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함에도 몇 번이나 수색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마르코 도련님!"

"디르엔 도련님!"

게다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뛰쳐나온 시종들 또한 숲속에 있다.

그나마 토벌대들이 한 번 수색을 끝낸 구역으로 한정 지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게 하나만 더 있었다면....'

사건의 시발점이 된 것은 레이어가 훔쳐 간 히포그리프의 배설물.

문제는 그것을 전부 쏟아 버린 탓에 부르지도 못할 놈을 불러 버리고 말았다.

결국,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눈으로 찾아다니는 방법밖에....

"찾았다!"

그때, 하늘을 날고 있던 켈리마프의 귀를 울리는 목소리.

"제발...!"

순식간에 몸을 선회한 그는 인파가 모이는 곳으로 빠르게 활강했다.

부디 두 아이의 목숨이 무사하길 바라면서.

***

다음 날 정오.

방 안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던 디르엔은 겨우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전날의 복귀 상황에서 썼던 간단한 대응법이 시종들의 보호 본능을 강하게 일깨웠기 때문이다.

"도련님, 조금 더 누워 계세요.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기절해 계셨는데, 한동안은 조심하셔야 해요."

지상에 돌아왔던 그때, 디르엔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기절한 마르코와 비슷한 느낌으로 묻어가려던 단순한 의도였다.

"아이고, 도련님!"

"도련니이임!"

"제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토벌대에 섞여 있던 세 명의 시종들이 자신을 붙잡고 오열을 시작했다.

아마 옆에 있던 마르코가 눈을 떠 주지 않았다면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을 가능성도 있다.

'마르코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네.'

-그래서 그걸 죄다 덮어씌운 거야?

그런 생각에 빠진 사이, 머릿속을 울리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

나쁜 의미로 꿈인 것 같지만, 자칭 대마법사 크로노는 여전히 디르엔 속에 있다.

심지어 독백처럼 말한 것까지 공유가 되는 터라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다.

'덮어씌운 게 아니라, 알아서 그렇게 믿은 겁니다. 공식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마르코뿐이니까요.'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지. 어떻게 눈치를 못 채?

두 아이가 정신을 차린 직후, 다급하게 달려온 켈리마프가 미궁에서의 상황을 물었다.

하지만 마르코는 시작부터 기절했던 상황.

잠시 고민하던 디르엔은 그가 마법을 쓰는 것을 본 뒤로 정신을 잃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마르코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본인의 기억에 확신이 없는 듯했다.

'계속 숨기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미궁을 돌파한 건, 누군가의 조력이 있었을 거라 결론이 났잖아요.'

-어린애가 미궁을 공략했다는 것보단 현실성이 있지. 모험가든 뭐든 그럴듯한 건 많잖아.

'뭐, 알아서 판단하겠죠. 그런데 이거 너무 불편하네.'

-뭐?

머리를 계속 울리는 목소리에 디르엔은 이불 속에 숨은 뒤, 마나 코어에 집중했다.

그러자 전신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마나.

하지만 평소와 달리 특이한 줄기 하나가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뭐야? 뭐 하는 건데?

'기다려 보세요.'

마정석으로부터 흡수했던 크로노의 마나는 아이덴티티 제작에 사용됐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크로노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공존하게 된 것이다.

'이걸 실체화하는 느낌이면....'

지금껏 매일같이 해 왔던 마나 훈련의 감각.

이번은 상당히 운용 난이도가 높지만, 안 될 것은 없었다.

스륵-

-이런 미친.

온 신경을 집중하자 눈앞에서 형태를 다잡는 반투명한 마나.

딱히 생각한 형태는 없었는데, 무언가 하찮은 마법진의 형태로 가닥이 잡혔다.

-뭐야, 이게!

작업이 끝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크로노.

"도련님, 안 답답하세요?"

그때, 앤느가 이불을 슬쩍 젖히며 걱정의 말을 던졌다.

크로노의 목소리가 컸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시선을 살피니 눈앞의 이것도 볼 수 없는 듯하고.

"응, 괜찮아."

-괜찮기는 무슨! 심지어 말할 때마다 깜빡거리잖아!

그의 목소리와 비례해 빛을 발산하는 작은 마법진.

어쩐지 이미지와 어울리는 느낌이라 만족스럽다.

-고개 끄덕이지 마!

'몸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하아....

좋지 않냐는 듯한 물음에 크로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체념한 듯 다른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래서, 나는 어쩔 거야?

'어쩌다니… 아, 혹시 그 마정석에 다시 들어가고 싶으세요? 그럼 당장 연구해 볼게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방향성 같은 그런 거 있잖아!

하얀 마정석을 떠올리며 던진 질문.

사실 별 의미는 없었는데, 크로노의 반응은 격렬했다.

'방향성이라고 해도.... 애초에 무슨 마법을 잘못 썼기에 육체도 없이 마나만 떠다녔던 거예요? 대마법사라면서 미궁에 갇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후우… 역시 이야기해야 하나. 때는 100년 전, 60의 나이에 7성급 마스터까지 도달한 나는....

'요점만 말하세요. 어떤 마법이었는지 위주로.'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길어지려는 말을 끊자, 서운한 듯한 목소리를 내는 크로노.

하지만 그런 잔잔한 것들보다 실패했다는 마법이 궁금하다.

물론, 디르엔의 마음을 모를 대마법사는 약간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간단히 말하면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에 실패한 거야. 괜히 40년이라는 욕심을 부리다가 1초도 돌아가지 못한 거지.

'시간...! 그게 가능했던 겁니까?'

-이론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실패했어. 허공으로 의식을 담은 마나만 흩어진 채 떠돌다가 50년 전쯤에 미궁에 먹혀 버린 거야.

대강의 전후 사정은 파악했지만, 시간 마법에 관한 궁금증은 더욱 가중됐다.

'마법진은요? 설명하실 수 있으세요?'

-그 복잡한 걸 어떻게 기억해? 무려 20중이 넘었던 마법진이었다고. 게다가 너무 오래 지나서 기억도 잘 안 나.

'…돌려놓을까.'

-자, 잠깐만!

강한 실망감을 입에 담자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크로노.

당연하지만, 다시 마정석에 갇히기는 싫은 모양이다.

-그, 그래! 네 마나도 엄청 특이한데, 무슨 사정이 있는 거지?

'사정이요?'

-그래. 어제 네가 했던 행동들은 내 상식을 모조리 무너뜨릴 정도였어. 어차피 너한테 귀속돼 있으니 알려 줘도 괜찮잖아?

아무래도 궁금증이 커졌던 듯 크로노가 꽤 적극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애초에 이런 관계가 된 이상 딱히 숨길 필요도 없겠지.

게다가 7성급 마스터였다면 성자나 폰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좋아, 알려 줄게.'

-…갑자기 반말이라고?

'들으면 이해할 거야.'

디르엔은 자신이 전생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냈다.

생각보다 내용이 조금 길어졌지만, 크로노는 중간중간 이상한 반응을 보이며 경청을 이어 갔다.

'대충 이렇게 된 거야. 그러니까 반말은 별로 이상하지 않지?'

-잠깐만, 이거, 하아....

가볍게 묻자 당혹스러운 듯 깜빡이는 작은 마법진.

디르엔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성자에 폰스라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받아들이긴 뭘 받아들여! 폰스는 전설이나 신화에서만 나오던 거잖아!

'뭐야, 너도 모르는 거야?'

-성자를 직접 만났을 때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어. 하지만 정말로 그게 있다면....

생각에 잠긴 듯한 크로노지만, 디르엔은 김이 새 버렸다.

7성급에 올랐던 마법사조차 모르는 폰스의 존재.

역시 성자들이 의도적으로 숨겨 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다.

-좋아!

그때, 무언가를 결심한 듯 반짝이는 크로노.

뭔가 싶었는데,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폰스가 정말로 있다면 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찾자!

'무슨 수로?'

-당연히 성자를 만나야지. 아직 로베르카가 그 자리에 있는 거 아니야?

'맞아. 책에서 봤던 이름도 로베르카였어.'

약 150년 전에 성자가 되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성, 로베르카.

자세한 서술을 한 책은 없었기에 지금까지 이름만 알고 있었다.

-그럼 됐어. 일단 눈에 띄게 강해지면 그쪽에서 관심을 가질 거야. 그 여자, 마법에 미쳤거든.

'마법에 미친 성자?'

그는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지만, 디르엔의 눈은 반짝였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알아차린 듯 크로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성격은 좀 이상해도 로베르카는 특별한 인재에 관심이 많아. 평소엔 마법 대륙에 있는 탑의 연구실에 매일같이 박혀 있다고 하지만.

'너랑 친했던 거야?'

-친하기는 무슨. 나는 개인 연구실이 아니면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항상....

'…너도 혼자였구나.'

-아니, 그런 느낌이… 야, 눈을 왜 그렇게 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전생의 자신이 떠올라 측은하게 바라봤는데, 크로노의 반응이 격했다.

아무래도 정말 그랬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카이사르 제국이라면 제르노 학원이지? 그쪽에서 착실히 성과를 올리면 졸업하기 전엔 탑으로 초대받을 수 있을 거야.

'역시, 학원에 빨리 들어가는 게 답이네.'

-마법 학회에서도 나이는 꽤 중요하게 보는 요건이야. 빨리 시간이 지나길 비는 수밖에 없다고.

'흠.'

그의 말처럼 당장은 여러 한계가 있다.

일단 가문에 묶여 있는 것도 그렇고, 육체적인 성장 또한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엔 얻은 게 많네.'

우연히 미궁에 들어가 손에 넣은 갖가지 마법들.

사건의 원흉이었던 레이어는 오전에 찾아와 억지로 사과했지만, 두 손을 붙잡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도련님, 이제 루블린가로 이동하실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앤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해 왔다.

하루는 더 지켜볼 줄 알았는데, 빠르게 옮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춥지는 않으시죠?"

"응."

옷을 갈아입은 뒤, 물 흐르듯 마차에 올라탄 몸.

곧바로 멀어지는 저택을 보니 뭔가 침울해졌다.

'심심해지겠네.'

다시금 새로운 마법에게서 멀어지는 생활을 그리자 우울해졌다.

이런 큰 사건에 휘말린 이상, 비슷한 훈련을 감행할 리가 없기 마련.

아쉬워도 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개인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 확신과 체념으로 인고의 시간을 견디려고 했지만.

"디르엔 도련님께선 글리바스로 가시게 됩니다."

그 예상이 깨진 것은 고작해야 2년 후의 일이었다.

16.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켈파에서 복귀한 직후, 켈리마프는 곧바로 루블린 공작을 찾아갔다.

이미 중요한 것들은 모두 전달이 된 상황이었지만, 대면과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

긴 보고를 들은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아이의 잘못으로 미궁에 휘말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

게다가 토벌 과정의 개입자와 흑마법 단체 커블로스의 소문 등, 머리가 아파지는 일뿐이다.

게다가.

"마르코의 상태는 어떻지?"

큰 이상을 보이지 않았던 디르엔과 달리 마르코는 마나 중독 현상을 보였다.

마나 감도의 차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찍이 1성급에 도달한 마르코라면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다.

문제는 빠져나온 것을 보면 미궁은 공략된 것이 확실한데, 두 아이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또한 경험인가.'

마나 중독은 말 그대로 압도적인 마나 밀도에 노출되어야만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겪고 난 일부 마법사가 유의미한 마나 코어의 성장을 보인 기록이 있다.

혹시 모르니 마르코와 디르엔 모두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주변의 모험가는, 찾았나?"

"수색이 진행되던 곳에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S급 모험가의 파티라면...."

"쉬이 발견하긴 어렵겠지."

보고에 섞여 있던 모험가 노벨로프는 루블린 공작도 익히 들은 인물.

그 정도의 실력자들이 개입했다면 일련의 상황들도 이해가 된다.

"길드에 의뢰하고, 행방을 찾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관련자들의 처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이어는 내 허가가 있기 전까지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해당 물건을 관리하던 소대는 2주, 호위는 일주일의 근신에 처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약한 처벌에 켈리마프는 내심 놀랐다.

하지만 이어진 공작의 말에 결정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소문의 진위와 상관없이 조사대를 꾸려라. 커블로스의 작은 흔적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겨우 소문의 씨앗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높은 악명.

커블로스라는 악의 단체가 입에 오른 만큼, 사태를 관망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영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더 나아가선 대륙과 세계에 영향을 줄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인원을 선정한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도를 파악한 켈리마프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세가 불안해지는군.'

최근 제국 바깥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단체가 하나 발견됐다.

보고에 따르면 몰락한 국가와 종족의 생존자들이 뒤섞인 구성이라고 한다.

문제는 아직 명확한 죄를 짓지 않은 데다, 본거지조차 알 수 없어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커블로스까지 부활한다면 말 그대로 세계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준비가 필요한가.'

좋지 않은 징조가 연속으로 나타난 이상, 평온한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다른 종족과 국가들의 관계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불확실성은 높아지겠지.

아직 제르노에도 입학하지 못한 아이가 많지만, 가문의 미래를 위한 준비는 필수다.

켈파에서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면 그것마저 경험과 양분으로 삼는 것이 루블린이니까.

'당분간은 칩거가 좋겠군.'

외부에서의 훈련은 자극에 좋지만, 아직 1성급에도 도달하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무모한 것과 도전적인 것의 차이는 분명하기에 시간을 들여 기반을 다듬을 필요가 있겠지.

정보의 취득과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생각하면 최소한 1년은 걸릴 일이다.

"각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그때, 바깥에서 들려온 시종의 목소리.

어느새 영주로서의 업무를 이행할 시간이 된 듯하다.

필요한 생각을 모두 정리한 공작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지."

***

-그것보단 이게 낫지 않아?

"이쪽이 더 낫지."

2년이 지난 해의 겨울.

이제 12살이 된 디르엔은 정원의 나무 그늘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을 볼 수 있는 타인은 하나뿐이다.

-전생에도 고작 4성급이었다면서 네가 뭘 알아? 이런 기성 마법은 내 의견이....

"그래서 마법에 실패했어? 마법진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아니, 그 마법이 얼마나 어려운 거였는지 알면 너 아무 말도 못한다니까?

"그러니까 마법진을 외웠어야지."

번쩍이는 작은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크로노의 목소리는 근 2년 새 완전히 적응했다.

이런 걸 얻을 줄은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근데 루블린 공작 가문도 너무하네. 어떻게 한 번을 못 나가게 해?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솔직히 둘 다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저택에 돌아온 이후론 검사와 회복의 연속이었다.

사실 디르엔 쪽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르코가 심한 마나 중독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뭐, 그 나이대에는 꽤 큰 충격이었겠지. 괴물 같은 너랑은 다르게 말이야.

"착실하게 훈련에 임한 결과지."

-그래, 착실하게 생후부터 훈련했지. 너 그거 학회의 마법사들이 알면 피눈물 흘릴 거다.

전생에 관한 일을 공개한 후, 크로노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흘렸던 훈련법은 당시에 상당히 격렬한 반응을 불러왔다.

확실히 이런 사기적인 수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

-어쨌든, 전생과 같은 4성급에 도달한 기분은 어때?

얼마 전, 디르엔은 막혀 있던 4성급 마법의 구현에 성공했다.

애초에 육체적인 부분의 한계였으니 당연히 도달하리라 생각했던 부분.

하지만 과거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미묘한 느낌이다.

물론, 딱 거기까지지만 말이다.

"지금은 계속 위로 갈 생각뿐이야. 마법진 개조도 더 하고 싶고."

-아니, 6성급 이상의 마법은 몰라도 아래 성급을 뭘 더 고쳐? 내 눈이 빙빙 도는 수준이라고.

"고칠 게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 지금도 선의 각도 같은 건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 정도면 병 아니야?

"병이고 뭐고, 난 완전무결한 마법진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할 거야."

-…대단하다, 대단해.

2년 동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광적인 집착은 언제 봐도 놀랍다.

크로노 또한 마법과 마법진에 일가견이 있지만, 이쪽과는 괴리감이 너무 큰 것이다.

-그건 이제 됐고. 숨기는 건 언제까지 할 거야? 4성급이 1성급인 척하는 건 너무 답답하잖아.

켈파에 다녀온 이후, 다른 아이들도 착실히 1성급에 도달했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디르엔은 계획한 대로 가장 마지막에 성과를 내보였다.

"눈에 띄어서 멀쩡했던 사람을 본 기억이 없어. 더군다나 이런 출신이라면 더 그렇지."

-…부정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너무 아깝잖아. 12살에 4성급 마스터면 역사 단위의 문제라고.

4성급에 등극함과 동시에 얻어 낸 마스터.

이 마스터라는 명칭은 해당 성급에 존재하는 마법을 일정 개수 이상 익혔을 때 주어진다.

당연히 디르엔의 경우엔 기존 지식만으로도 이 조건을 달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난 그냥 마법이 좋을 뿐이니까."

-어련하시겠어.

크로노는 답답하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지만, 디르엔에겐 말 그대로 관심 밖이다.

유일한 문제는 새로운 마법을 접할 수단과 지식 욕구를 채울 방법이 없다는 점.

솔직히 몰래 나가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이 부근에선 큰 소득이 없을 듯하다.

아무래도 제르노 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도련님! 수업 가실 시간이에요!"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앤느의 목소리.

어떤 배려인지, 디르엔의 시종들은 그가 혼자 있는 시간을 상당히 존중해 준다.

덕분에 연구에 집중할 수 있으니 감사하지만.

"갈게."

자리에서 일어난 디르엔은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꽤 추운 날씨였기에 발걸음이 빨랐다.

"다들 모이셨군요."

아이들이 모두 자리하자 앞에 선 켈리마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그의 손에 몇 장의 서류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데자뷰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기쁘게도 여러분은 모두 1성급에 도달하셨습니다. 과거의 훈련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에도 정진하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콜록, 콜록!"

과거의 잘못이 나오자 사레가 들린 듯 기침하는 레이어.

하지만 평소보다 긴 서론을 들으며 디르엔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켈리마프가 말을 이어 갔다.

"아시다시피 레이어 님과 메이어 님, 샤를 님은 내년에 제르노 마법 학원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루블린 가문에선 필수적으로 치러지는 시험이 하나 있지요."

"뭐야? 시험?"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랑 언니들은 입학하기 전에 놀러 다녔잖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쌍둥이가 눈을 크게 뜨며 반발했다.

이 가문의 교육법은 항상 이런 식인 걸까.

어쨌든 디르엔 역시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헤스테나 님과 클리턴스 님 또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에 관한 설명을 해 드릴 것이니, 각 자료를 봐 주시길 바랍니다."

'…각 자료?'

미묘한 표현에 의아해하고 있자, 켈리마프가 아이들에게 서류를 분배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든 종이 한 장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여러분은 내일, 각자 선정된 지역으로 이동하시게 됩니다. 시험의 중점은 어떤 형태로든 성과를 남기는 것. 평가는 루블린 공작 각하께서 직접 내리실 것이니, 깊게 생각하며 움직이시길 바랍니다."

"아, 아버님이 직접 평가하신다고?"

"이번엔 진짜 칭찬받고 말 거야."

그의 말에 쌍둥이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디르엔의 입장에선 신경 쓰이는 부분이 따로 있다.

"저랑 마르코도 가는 건가요?"

"네. 공작 각하의 명이십니다. 두 분 모두 이른 나이에 1성급에 도달하셨고, 사용 가능한 마법도 늘리고 계시니 문제는 없겠지요."

'…이렇게 내보내 준다고?'

나이도 나이지만, 미궁에 휘말린 둘은 입학 전까지 계속 가둬 둘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이런 시기에 밖으로 나가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심지어 각자 이동하는 거라면 꽤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을까.

"그… 성과라는 건 예를 들어서 어떤 건가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샤를이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지만 켈리마프는 웃음을 지으며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정형화된 것은 없으니, 각자의 대답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시험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어려우시다면 제가 드린 자료에서 힌트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단,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금지하겠습니다."

"뭐? 여긴 지도랑 지역 설명밖에 없는데?"

"이걸로 성과를 어떻게 내라는 거야!"

그의 말에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이는 쌍둥이.

별 영양가는 없어 보였기에 디르엔은 자신의 자료에 집중했다.

'글리바스네.'

책에서도 본 적이 있던 이 지역은 루블린의 영지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다.

자료에서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꽤 세세하게 표현된 지도.

그 아래에는 지역의 짧은 역사와 특징에 대해 적혀 있다.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

글리바스는 광산이 주 수입원이지만, 일반적인 영지보다 가난한 지역이다.

문제는 이곳에서 무슨 성과를 내라는 것일까.

12살짜리에게 경제적인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럼 내일 출발 전까지 자유롭게 정보를 모으시면 됩니다. 부디 지식의 힘을 잘 이용하시길 바라지요."

여전히 일방적인 통보로 상황 설명이 끝났지만, 디르엔은 곧바로 책을 찾아 나섰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 학원으로의 입학에 문제가 생기는 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단한 성과보다는 통과에 의의를 두면 될 일이다.

-이 가문도 참 특이하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애들을 밖으로 내보내?

책을 가지고 방으로 오자, 크로노가 마법진을 깜빡이며 말했다.

'공작 가문이 강한 계보를 이어 오는 이유일 수도 있지.'

-이래서 내가 고위 귀족들을 다 미쳤다고 하는 거지. 그 시간에 마법을 더 열심히 가르치는 편이....

'그건 됐고. 성과에 대해서 뭔가 짚이는 건 없어?'

-성과? 뭐, 행정이라도 도와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건 너무 밋밋한 것 같은데.'

-애초에 12살한테 뭘 바라? 관리하는 사람한테 가정 교육 잘 받은 느낌이라도 내면 될 일이지.

의외로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이쪽은 답이 아닌 듯하다.

정형화된 것이 없을수록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펄럭-

그런 고민을 머릿속에 넣은 디르엔은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17.

다음 날 오전.

빠르게 준비를 마친 디르엔은 저택의 입구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다섯 아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만큼, 동행 인원 또한 숫자가 남달랐다.

"디르엔!"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페니파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 돌아오신 거예요?"

"응. 한동안은 여기에 있을 것 같아."

미궁에서 복귀한 직후, 페니파는 마법 공부에 직접 참여하며 1성급에 도달했다.

물론 모두가 놀랄 정도의 변화였지만, 진로를 모험가로 정한 것은 너무도 의외였다.

지금도 훈련을 겸해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왔으니, 상당히 진지한 게 아닐까.

"그나저나 아버지의 시험을 본다면서?"

"네. 형님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나? 나는 아니지. 애초에 제르노 학원에 갈 자격도 없었잖아?"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1성급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는 완전히 논외였다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성과를 낼지는 정했어?"

"아뇨. 감이 안 잡혀서, 직접 보고 판단하려고요."

"힌트를 하나 주자면… 최대한 사람들을 잘 살펴봐."

"영지민들을 돌보라는 말씀이신가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 카일 형한테 들었던 이야기거든."

"큰형님께요?"

디르엔은 이름밖에 들어 보지 못한 장남, 카일.

가문에서도 역대급이라 불릴 정도로 천재라는 것만 들었는데, 페니파는 꽤 가까웠던 모양이다.

"응. 넌 그 형만큼 똑똑한 것 같으니까 잘할 거야. 아무튼, 이제 출발하는 것 같으니 잘 다녀와."

"…네, 감사합니다."

페니파가 그런 담백한 인사를 남기고 떠난 뒤, 그는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랐다.

시종은 평소 그대로지만, 호위의 숫자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상태였다.

"얀테, 원래 이런 거야?"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각하의 명으로 작년보다 호위 병력이 증가했습니다. 도련님께 상시 붙는 인원은 정해져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디르엔의 물음에 마차 밖에서 정중히 답하는 얀테.

사실 그는 과거의 미궁 사건 때문에 커다란 자책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눈앞에서 보호 대상을 잃어버렸으니, 호위의 입장에선 절망 그 자체였으리라.

'이번엔 더 움직이기 어려우려나.'

솔직히 자유롭게 마법적인 요소들을 찾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이 여정엔 마법 학원이라는 목표가 달려 있으니, 최대한 할 일은 하는 게 좋겠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잔잔한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마차가 이동을 시작했다.

"아르델, 글리바스에 가 봤어?"

"네. 두 번 정도 들른 적이 있어요."

옆에 있던 아르델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시험에 관한 내용은 아는 상황이라 직접적인 질의응답은 피하고 있다.

"자료에 적힌 것 말고. 직접 봤을 때는 어떤 느낌이야?"

"음…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부유하지 않은 것도 못살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래?"

"네. 애초에 활발한 지역이 아니라, 특색을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난한 대답에 디르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단순한 여행 정도라면 평범한 게 가장 좋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도대체 무슨 성과를 내야 하는 걸까.

'…쉽진 않겠네.'

그런 짤막한 판단을 내린 그는 시종들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들으며 여정을 이어 갔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평범한 고급 저택의 앞에 멈춰 섰다.

켈파에 갔을 때와 같은 구도이지만, 주변의 하얀 눈을 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마차에서 내리는 사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년 남성.

추운 지역이라 배불뚝이 관리를 생각했는데, 의외로 관리가 잘된 몸이다.

"저는 이 지역을 관리하는 아메프 글리바스 자작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머무르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듣던 대로 배려가 넘치시는 분이시군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 말씀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편하게 하대해 주십시오."

"…알았어."

살짝 감당하기 어려운 기세에 디르엔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봤던 흔한 모습이지만, 대놓고 아첨하는 것을 들으니 불편해지는 느낌이다.

"날씨가 춥습니다. 얼른 안으로 드시지요."

어쨌든 이곳에 머무르는 건 결정 사항이었기에, 디르엔은 그를 따라 저택으로 이동했다.

"누추하지만, 머무르실 방은 가장 좋은 곳으로 준비했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시종을 시켜 말씀해 주십시오."

'…의외네.'

내부의 구조는 일반적인 저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일반적인 범주에 들어갈 귀족의 장식품을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켈파의 별장보다도 훨씬 휑한 느낌이다.

아메프 자작은 상당히 검소한 사람인 걸까.

"이쪽입니다."

어쨌든 짐을 푸는 것이 먼저였기에 그가 준비한 방으로 이동했다.

공작가의 것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디르엔 도련님, 혹시 생각해 두신 일정은 있으십니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아메프가 다가와 물었다.

너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공작의 그림자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우선은 도시를 보고 싶어."

"바로 시찰을 준비하겠습니다. 마차를 대령해라."

짧은 한 문장에 곧바로 지시를 내리는 아메프.

여전히 미묘하지만, 시험을 치르는 상황에서 협조적인 태도를 마다할 생각은 없다.

"여기 서재도 있어?"

"다른 영지보다는 적지만, 보관하고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머무르시는 동안 편히 읽어 주십시오."

"응. 고마워."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자, 좋은 대답이 돌아왔다.

자작에 대한 인식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조심스레 다가와 보고하는 시종.

지체할 것도 없었기에 그들은 곧장 저택 밖으로 이동했다.

"글리바스는 어떤 곳이야?"

올라탄 마차가 출발하자, 디르엔이 정면을 보며 물었다.

그곳에 앉은 아메프는 창밖을 슬쩍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글리바스는 광산을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입니다. 감자와 호밀 같은 작물도 재배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교역에 의존하는 구조이지요. 아, 저곳이 광산입니다."

그의 말에 창가로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민가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정갈하게 이어진 길은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광산에 관심이 있으시면 바로 모시겠습니다."

"음, 일단은 도시를 먼저 볼게."

"알겠습니다. 거리로 이동해라."

아메프의 지시에 마차는 천천히 선회하며 왼쪽 길로 들어섰다.

'…뭔가 휑하네.'

민가와 가게들이 나열된 거리는 도시의 풍경과 일치했다.

그런데 정작 거리를 다녀야 할 사람들이 몇몇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원래 이렇게 적어?"

"이 시간이면… 광산과 밭으로 나가 있는 노동자들이 많겠군요. 저녁 즈음엔 좀 더 활발한 거리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디르엔의 물음에 가볍게 웃으며 설명하는 아메프.

주 수입원에 관한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쏠린 구조인 모양이다.

"응?"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구경하는 사이,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의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싼 기이한 광경이었다.

"아, 저건 린토넬라군요."

"린토넬라?"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바로 설명하는 아메프.

누구인가 싶었는데, 그는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도시의 유일한 약사입니다. 헐값에 좋은 약을 팔면서도 저렇게 무상으로 사람들을 돕곤 하지요. 배울 점이 많은 친구입니다."

"그래?"

상당히 후한 평가에 디르엔의 관심도가 증가했다.

그리고 사람을 잘 살피라는 페니파의 조언이 갑자기 번뜩인 것은 단순한 감이었다.

"내려도 되지?"

"예?"

"저 사람이랑 잠깐 얘기해 보고 싶어서. 세워 줘."

"아, 알겠습니다."

아메프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곧바로 마차를 세웠다.

그곳에서 내린 디르엔은 호위들과 함께 천천히 무리를 향해 이동했다.

"이건 바로 드시면 되지만, 당분간은 댁에서 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르모, 계속 떼쓰면 과자 안 줄 거야. 사르파 할머니께는 이걸 가져다 드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분주하게 움직이는 린토넬라.

하지만 디르엔과 눈을 마주치자 그 행동이 순식간에 멈췄다.

"루블린 공작 가문의 자제이신 디르엔 도련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춰라!"

조금 뒤쪽에서 울린 아메프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흔히 예를 표하는 방법이 있지만, 평민들에게까지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고개는 들어도 괜찮아. 린토넬라라고 했지? 약을 다 나눠 준 뒤에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저, 저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호명에 눈을 크게 뜨는 린토넬라.

곱슬기가 있는 갈색 머리칼과 끝이 늘어진 눈매는 선한 인상을 줬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와 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기에 디르엔은 그 말을 남긴 채 마차로 돌아왔다.

12살짜리라도 공작 가문의 피는 짙다는 것이겠지.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약을 나눠 주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으니, 아메프가 질문을 해 왔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가문 안에서만 공유된 상황.

잠시 고민하던 디르엔은 적당한 답을 내놓았다.

"그냥. 힘들게 남을 돕는 게 신기해서."

"…확실히 쉬운 일은 절대 아니지요. 린토넬라는 이제 글리바스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됐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참 빠르군요."

"3년?"

"예. 그가 이곳에 온 것이 3년 전이었습니다."

의외의 답에 디르엔은 내심 놀랐다.

당연히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연고도 없는 타지에 저런 노력을 쏟는 것은 도대체 어떤 심리일까.

"아, 분배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해산된 인파.

짐을 정리하는 린토넬라의 모습에 디르엔은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도련님?"

"혼자 다녀올 테니까, 여기 있어."

"예? 하지만...."

"귀족들이 너무 많으면 말하기 어렵잖아? 호위는… 얀테만 따라와."

"알겠습니다."

당황한 듯한 아메프를 뒤로한 채,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 얘기해도 괜찮지?"

"어?"

가까이 다가가자 뒤늦게 디르엔을 발견한 린토넬라.

"죄,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고 뵈러 갔어야 하는데...."

허겁지겁 정리를 이어 가던 그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열심히 사죄를 해 왔다.

"괜찮아. 그보다는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아, 알겠습니다. 일단 자리를… 아니, 앉으실 만한 장소를 찾겠습니다."

그는 몸과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혼란에 빠졌다.

"자리는 필요 없으니까, 제발 진정을...."

아무래도 물리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디르엔은 움직이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찌릿-

갑자기 손끝으로 느껴진 날카로운 마나의 감각.

그것에 반응하려 했지만, 둥실대던 작은 마법진이 반짝이는 것이 먼저였다.

-이것 봐라?

18.

'왜 그래?'

크로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디르엔은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작은 마법진이 다시 반짝이며 목소리를 냈다.

-너, 커블로스라고 알지?

'커블로스?'

갑작스럽게 등장한 단어지만, 이걸 모르는 제국민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를 흔들 정도로 유명했던 흑마법의 추종자들이니 말이다.

문제는.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수십 년 전에 완전히 토벌된 집단이잖아?'

지금 존재할 리가 없을 범죄자들의 이름이 등장한 이유다.

하지만 그 되물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크로노가 목소리를 높였다.

-…완전히 토벌했다고? 그놈들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황제의 명령으로 완전하게 정리했다는 게 여러 기록으로 남아 있어. 몇 년에 걸쳐서 잔당까지 전부 소탕했다고 하더라고.'

-하아… 그놈들은 씨를 말리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멍청한 거야, 오만한 거야?

깊은 한숨을 내뱉는 그를 보니 아무래도 꽤 정보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상황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커블로스라는 거야?'

-흑마법을 사용했는지, 단순히 노출된 건지는 몰라. 내 안에 남아 있던 흑마법의 흔적이 반응했을 뿐이니까.

'뭐? 너 흑마법까지 손댔었어?'

-착각하지 마. 시간 마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딱 한 번 살펴본 것뿐이니까. 나는 그 벌레 같은 놈들이랑 다시는 엮이기 싫다고.

'....'

질린다는 듯한 그의 말에도 디르엔의 의식은 정면에 집중됐다.

얼핏 보기엔 흑마법과는 전혀 무관계한 모습.

뭔가 아는 게 있으면 좋겠지만, 디르엔의 전생에선 흑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크로노가 아니었다면 한참이 지나도 인지할 수 없지 않았을까.

'혹시 모르니까, 다시 확인해 볼 수 있지?'

-말했잖아. 남은 흔적이었다고. 아까 충돌로 나한테 있던 건 완전히 사라졌어.

재확인을 위해 다시 손을 대려고 했는데, 장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12살의 모습으로 가볍게 묻기에도 화제가 너무 심각하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자, 린토넬라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의 날카로운 감각은 이쪽에만 전달이 됐던 걸까.

아니면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걸까.

"아무것도 아니야. 자작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3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면서?"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럼 궁금한 게, 왜 그렇게 돕고 있는 거야?"

"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게 신기해서 말이야. 뭔가 이유라도 있어?"

"...."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직접 말을 걸려고 했던 이유는 시험의 단서를 얻기 위한 것.

하지만 흑마법의 흔적이 나타난 순간부턴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곳 글리바스는 제 스승님의 고향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조심스레 대답하는 린토넬라.

뜻밖의 단어가 나왔기에 디르엔은 곧바로 되물었다.

"스승님?"

"예. 어릴 적 갈 곳 없던 저를 거두어 주신 고마운 분이지요. 미약하지만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이곳에 들른 것입니다."

아까의 허둥대는 모습과 달리, 린토넬라는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의심을 한 채로 봐도 저 모습에 거짓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흑마법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야, 너 그 표정 짓지 마. 이거는 진짜 안 돼.

고민을 이어 가는 사이, 크로노가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렇게 분리된 이후로는 의지를 담은 독백만이 전달되는 탓에 속마음은 읽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간의 시간을 통한 경험으로 표정까지 읽는 수준이 됐다.

'그냥 생각만 하는 거야.'

-생각은 무슨. 너 흑마법도 파헤칠 생각이지? 장담하는데, 그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

'조심은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가만히 둘 수도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하아....

전생은 물론 이번 생에서도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흑마법.

불법의 영역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저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디르엔은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괜찮으면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도시 말씀이십니까?"

"영지민의 시선에서 보는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 아, 혹시 광산으로 같이 가 줄 수 있어?"

"…예?"

뜬금없는 제안에 린토넬라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귀족들과 함께 다니는 것은 속이 쓰리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떤 단서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 돼? 혹시 바쁜 거면 내가 나중에...."

"아, 아닙니다. 미천한 몸이지만, 필요하시면 써 주십시오."

아이의 눈으로 묻자, 그는 곧바로 예를 갖추며 응했다.

공작 가문의 자제라는 신분과 12살이라는 나이의 힘이 잘 먹힌 듯하다.

"그럼 가자."

어쨌든 결정이 됐기에, 디르엔은 두 사람과 함께 마차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아메프는 의아해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겠습니다."

모두가 자리하자 마차는 광산으로 향했다.

린토넬라와의 동승은 아무래도 무리였기에 다른 병사의 말에 오르는 모양새가 됐다.

"이곳이 글리바스가 자랑하는 헬리아스 광산입니다."

잘 닦인 길을 따라 순식간에 도착한 설산.

양쪽으로 길게 두른 성벽을 보니, 등을 지키기엔 더없이 좋은 느낌이다.

'진짜 여기에 다 있었네.'

게다가 광산의 초입부터 보이는 인파는 아까의 묘한 분위기를 빠르게 거둬 갔다.

광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단번에 이해가 될 정도다.

"디르엔 도련님, 아메프 각하."

그때, 이곳으로 다가오는 검붉은 머리칼의 중년 남성.

작업자인 줄 알았는데 손에 짧은 지팡이가 들려 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광산의 관리자인 셰링엄이라고 합니다."

"마법사가 여기를 관리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광산은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이기에, 5성급 마법사인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마나가 필요한 일들 또한 담당하고 있지요."

디르엔의 물음에 셰링엄은 정중한 자세로 답했다.

광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하다.

"이자는 A급으로 활동하던 모험가였는데, 제가 눈독을 들이다 고용했습니다."

"모험가?"

"예. 제르노 학원을 졸업한 뒤, 제국 전역에서 활동하던 A급 베테랑 모험가였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저를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이지요."

대화를 듣다, 부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이는 아메프.

솔직히 광산을 관리하기엔 아까운 인재라 신기한 느낌이다.

아마 적지 않은 시간을 교류한 게 아닐까.

"우선은 작업자들을 모아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작업에 집중하게 둬.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지시하려 하자, 디르엔은 곧바로 그것을 막아섰다.

한창 일이 바쁜 이들을 우르르 모아 인사하는 모양새는 아무래도 보고 싶지가 않다.

"디르엔 도련님, 제가 광산을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셰링엄이 질문을 해 왔다.

"응, 부탁할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자 그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 입구에선 채굴한 광석의 분류 작업을 진행합니다. 외부로의 수출, 도시 내 대장간으로의 납품 등 여러 경로로 나누어지지요."

"안쪽에 사람이 더 많은 거지?"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군요. 이것을 이용하면 빠르고 안전하게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가벼운 물음에 셰링엄은 웃으며 정면을 가리켰다.

그곳엔 수레처럼 생긴 물체와 안쪽으로 이어진 2개의 철길이 나 있었다.

"저건… 광석을 실어 나르는 거야?"

"정확히는 광석과 인부를 위한 도구입니다. 마차에 사용되는 마법진의 하위 호환 정도를 사용하고 있지요. 꽤 승차감이 좋으니, 마음에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마법진?"

바로 관심이 생긴 디르엔은 빠르게 수레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뒷면에 그려진 마법진을 살폈다.

"이제 오르시지요."

몰래 마법진을 등록한 뒤, 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수레에 올랐다.

생각보다 공간이 넓어 호위까지 빠짐없이 탈 수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끼릭-

정리가 끝난 뒤, 수레는 마찰음을 내며 갱도 안으로 들어섰다.

'꽤 밝네.'

내부의 벽면은 등불 같은 것들이 간격을 두고 나열돼 있었다.

완전히 안쪽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다.

'저쪽도 괜찮은 것 같고.'

린토넬라가 조금 걱정돼서 돌아봤는데, 광산은 익숙한 듯했다.

사람들을 돕는 약사이기에 이곳에도 들른 적이 꽤 있던 거겠지.

"추위는 괜찮으십니까?"

"응. 옷에 방한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하하, 역시 루블린가의 힘과 재력은 대단하군요."

지금 디르엔이 입고 있는 옷엔 보온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이미 그것은 개조까지 끝내, 실물이 없어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상황.

문제는 마정석까지 불편하게 달린 이 물건을 내팽개칠 명분이 대외적으로 없었다는 것이다.

"마수가 안 보이는데, 여기는 안전한 거야?"

"예. 산 위쪽에도 결계가 있기에 마수의 공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디르엔의 물음에 셰링엄이 막혀 있는 위쪽을 가리키며 답했다.

그 넓은 구역에 잘도 설치했다 싶지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거겠지.

그나마 광산 안에 마수가 없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이제부터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돌아가시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좀 더 나아가자 아래로 이어진 길의 경사가 가파르게 변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환경은 아니다 보니 저쪽에서도 걱정이 되는 듯하다.

"응. 힘들면 말할게."

"예.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고민 없는 대답에 셰링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뭔가 찝찝한데....

그때, 크로노가 마법진을 반짝이며 불쾌하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찝찝하다니?'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는데, 그냥 찝찝해. 무슨 광산이 이렇게 기분 나빠? 마나도 묘하게 짙고.

'여기서 흑마법이라도 쓴 거 아니야?'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면 여기선 안 하겠지. 눈에 너무 잘 띄잖아.

이렇게 사람들의 출입이 잦은 곳에서 흑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밤과 새벽을 이용한다고 쳐도, 입구에는 항시 병사들이 지키고 있으니 들킬 위험이 크겠지.

어떻게 생각해도 사람이 찾지 않는 장소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더 깊이 내려가길 잠시.

"어?"

일방통행이던 길이 정면에서 갈라지는 분기점이 보였다.

"잠깐만."

"예?"

"잠깐만 멈춰 줘."

"알겠습니다."

끼익-

디르엔의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셰링엄은 신속하게 수레를 멈췄다.

"저기, 양쪽 다 쓰는 곳이야?"

"아… 왼쪽 구역은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좀 더 들어가시면 채굴 지역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으음...."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답에도 디르엔의 시선은 왼쪽으로 고정됐다.

'저기 어떤 것 같아?'

-여기서는 몰라. 조금만 자유로웠어도 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크로노를 날려 보내고 싶어도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강제로 돌아오는 탓에 쓸 수가 없다.

지금은 무리지만, 지식이 쌓이면 마법진을 좀 더 건드릴 필요가 있을 듯하다.

"도련님, 이동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안쪽의 광석들은 상당히 아름다워 보시는 즐거움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아메프가 슬쩍 다가와 말을 꺼냈다.

찝찝한 감은 있어도 강제로 저곳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 눈에 띄겠지.

"응. 가자."

"출발하겠습니다."

빠르게 판단한 디르엔의 말에 다시금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분기점을 지나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온 풍경.

이전과 구조는 다를 바가 없지만, 벽면에서 비치는 푸른 잔광이 시야를 지배했다.

"이게 전부 다 마나야?"

"예. 이곳은 채굴 지역이 아니지만, 광산이 머금고 있는 마나가 짙어지기 시작하는 경계입니다. 그 덕분에 작업자의 시야 확보가 충분할 만큼 되는 수준이지요."

셰링엄의 설명을 듣던 디르엔은 자리를 옮겨 벽면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숲에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한 마나가 감각을 자극했다.

"광석이랑 마나는 상관이 없는 거야?"

"광석을 캐면 빠르게 사라지는 탓에 특별한 사용은 불가합니다. 블루 스틸처럼 마나 전도율이 높은 광석이 있었다면 도시도 상당히 부유했을 테지요."

아메프는 아쉽다는 듯 주변의 광석을 보며 말했다.

책에서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던 블루 스틸.

페니파가 쓰는 창도 그것을 섞어 만들었다고 하니, 좋은 광석임은 확실하다.

"저곳 하나하나가 모두 채굴지로 이어집니다. 완전히 소모된 곳은 따로 표시해 구분하고 있지요."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사이, 셰링엄이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오면서 상당히 많은 갈래의 길을 봤기에 대강 어떤 느낌의 구조인지 예상이 갔다.

"이제 곧 목표로 한 작업장에 도착합니다."

깡-!

그의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깡-!

깡-!

곡선의 길을 지나자 눈에 들어오는 광경.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작업자를 보니, 조금 자세히 살피고 싶어졌다.

"세워 줘."

"알겠습니다."

끼익-

디르엔이 짧은 부탁을 내뱉자 수레는 마찰음을 내며 곧바로 멈췄다.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시험을 치르는 상황에선 둘러볼 필요가 있다.

"어떠십니까?"

조금 안쪽으로 걷자 아메프가 슬쩍 옆으로 와 물었다.

"다들 엄청 열심히 하네."

"이런 영지민들의 노력은 글리바스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여유로운 수익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채굴량이 꽤 되는 것 같은데, 수익이 안 나는 거야?"

"전반적인 유통은 상단에 맡겨 둔 상황입니다만, 경쟁력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광석이 대부분인지라...."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히 그런 문제라면 해결법이 없기에 영주인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쪽의 이야기는 충분한 듯하니, 슬슬 린토넬라를 불러서....

"호, 혹시 루블린 가문의 자제분이십니까?"

그때, 갑자기 디르엔 쪽으로 다가오는 한 남성.

40대 정도 된 듯한 나이인데, 얼굴이 상당히 초췌했다.

"물러서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주변의 모든 이들이 다급하게 막아섰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주변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제발, 제발 저희 아들을 찾아 주십시오!"

19.

'…아들?'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단어에 디르엔은 귀를 기울이려 했다.

그런데 아메프가 곧바로 그것을 막아섰다.

"당장 다른 곳으로 데려가 진정시켜라."

"제발, 한 번만!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병사들의 손에 끌려 강제로 몸을 일으키는 남성.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디르엔은 앞으로 나섰다.

"잠깐 기다려.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디르엔 도련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자는 사고로 아들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투입했는데, 아직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을 줄은...."

"아, 아닙니다! 저희 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만 정신 차려라! 아들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나!"

남성의 말에 목소리를 높이며 반박하는 아메프.

대충 상황은 알 것 같지만,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린다.

"아메프,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그리 복잡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자는 몇 년 전에 정착한 노멘이라는 자인데, 홀로 두 아이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주 전 숲에서 6살 된 큰아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지요."

"숲에서?"

"예. 아마 약초나 열매를 따기 위해서 나간 것 같은데,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숲으로 나간 적이...!"

"노멘의 이야기도 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계속 대화가 끊어지는 상황이었기에 디르엔은 일단 그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도시 밖의 숲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이상하긴 하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확인해 봤어?"

"예. 모두 노멘과 아이가 나갔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말리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아이가 없어진 뒤에 조사는?"

"바로 그날, 성문의 병사로부터 보고를 받고 수색대를 꾸렸습니다. 결국 며칠에 걸친 조사 끝에 숨이 끊어진 아이가 발견되었지요."

그의 말을 쭉 들은 디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체적인 상황의 그림을 그려 봐도 대응에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면 시작점과 연관된 이의 말을 들어 볼 차례겠지.

"노멘,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 줘."

"저는 제 아이… 파르체를 데리고 성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어린것의 손을 잡고 위험한 숲에 갔을 리가 없습니다!"

"성문의 병사들까지 봤었다고 하는데?"

"그건 제가 아닙니다! 그때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이의 얼굴을 본 기억도, 손을 잡았던 기억도, 거리를 거닐던 기억도 어느 것 하나… 흐윽...."

허망한 듯한 말과 함께 눈물을 쏟는 노멘.

저게 사실이라면 당장 미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수준이다.

'어떻게 생각해?'

-좀 더 근거가 필요하겠지만, 흑마법에 당했을 여지는 충분해.

'이 사람의 기억은? 환영 마법 같은 걸 쓴 거야?'

-…아니. 그놈들이 쓰는 건 정신 조작에 가까워. 반복하다 보면 사람을 망가뜨리게 되거든.

'...?'

조금의 정적과 함께 들려온 크로노의 대답.

작은 의문이 생겼지만, 당장 그걸 해소할 여유는 없다.

그런 생각에 디르엔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기 사람들이 커블로스에 가담하고 있을 확률은 낮지?'

-그놈들이 골치 아픈 이유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지.

이번엔 바로 들려온 답에 불온한 기운이 한층 더 강해졌다.

린토넬라의 건도 있으니, 놈들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판단하는 것이 좋겠지.

문제는.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네.'

도시 내에서 커블로스가 활동하고 있다면 경계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다수가 흑마법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

다른 하나는 영주를 포함한 수뇌부가 커블로스라는 단체와 내통 혹은 소속된 상태인 것.

물론 아메프를 떠보는 것이 먼저이지만, 마법사가 아닌 그는 애초에 흑마법에 취약하다.

내통은 둘째 치고, 글리바스에서 온전한 정신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하나뿐이겠지.

'흑마법사도 성급으로 구분해?'

-별의 색깔은 붉지만, 성급으로 나뉘는 건 똑같아. 저 마법사를 떠보려는 거지?

생각을 읽은 듯 크로노는 마법진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디르엔의 시선은 옆쪽에 고정되어 있다.

베테랑 모험가이자 5성급 마법사인 셰링엄.

흑마법사의 수준을 알 수는 없지만, 글리바스에서 그보다 강한 마법사는 없다.

흑마법의 화제를 올려 반응을 보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물론, 그와 커블로스가 전혀 무관한 관계인 것이 가장 좋은 결과다.

'남은 건… 아이였지.'

방향이 정해졌기에 디르엔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울고 있던 노멘도 약간 진정되는 모습이었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이가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뭐야? 시신을 직접 봤다는 것 같은데."

"분명… 외형은 똑같았지만, 파르체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아비인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하아…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그의 절실한 답에도 한숨을 내쉬는 아메프.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지금은 흑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둔 상태다.

제대로 알아본다면 무언가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잘 들었어. 곧 방침을 정할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자. 노멘도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된 후, 디르엔은 다시 수레에 올랐다.

"출발하겠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태로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 수레.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채 쭉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처음 들어섰던 두 개의 갈림길을 지나치게 됐다.

'저쪽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멀어지는 와중에도 왼쪽 길로 자꾸만 쏠리는 시선.

안전상의 이유로 막아 뒀다는 것은 특별할 게 없는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직접 와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바로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광산의 입구로 나오자 아메프가 곧바로 마차를 향해 손짓했다.

"잠깐만."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기에 디르엔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린토넬라, 잠깐 얘기 좀 할까? 둘이서 얘기할 거니까 얀테 외에는 다 물러나."

"아,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호명에 다급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린토넬라.

사실상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단서가 되는 것이 이 사람이다.

어쨌든 모두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디르엔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노멘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어?"

"예. 제가 돕던 가족 중 하나라 잘 알고 있습니다. 파르체 역시 저를 잘 따랐기에 마음이 아팠지요."

"그럼, 뭔가 이상한 점은?"

"이상한 점 말씀이십니까?"

"응. 만약에 환각을 봤다면 이전부터 증세를 보이지 않았을까 싶었거든."

"환각… 그렇군요."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린토넬라.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이어 갔다.

"생각해 보니 이전부터 몽롱한 듯한 모습을 보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라플레타의 잎을 섭취했을 때와 같은 증상이지요."

"라플레타의 잎?"

"예. 수면 작용을 돕는 마약성 꽃인데 일반 약초와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독성이 누적됐다면 환영을 봤을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작은 의문을 던졌을 뿐인데 상당히 합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흑마법이 아니라 독초로 틀어 버린 방향.

심지어 구분하기 어려운 부류라면 상당히 그럴듯하다.

물론 흑마법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면 말이다.

"그럼 조사를 부탁해도 괜찮을까? 노멘과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독초는 약사가 직접 알아보는 편이 정확할 테니까."

"…미천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또한 노멘을 돕고 싶으니까요."

디르엔의 부탁에 예를 갖추며 답하는 린토넬라.

의심이 짙은 이상, 무언가를 지시해 반응을 보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인 일이다.

물론 그의 의견이 맞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

"그럼 부탁할게."

어쨌든 상황이 정리된 후, 디르엔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대화는 잘 나누셨습니까?"

자리에 앉자 정면에서 말을 건네는 셰링엄.

올라오던 길에 동행을 미리 요청했는데, 그는 작업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흔쾌히 응했다.

'…뭐, 저렇게 되겠지.'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메프가 린토넬라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공작 가문의 아이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하기도 하겠지.

어쨌든 지금은 오히려 좋은 기회다.

"셰링엄."

"예, 디르엔 도련님."

"흑마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조금 당황한 듯이 반응하는 셰링엄.

아무래도 두서가 없긴 했기에 디르엔은 좀 더 말을 덧붙였다.

"개인적인 의심인데, 혹시 이번 사건에 흑마법이 사용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생각하시는 근거가 있으십니까? 흑마법, 그러니까 커블로스는 여러모로 상당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무엇이든 알고 계신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특별히 뭔가 있는 건 아니야. 단지 노멘의 일이 책에서 봤던 흑마법의 피해 사례랑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거든."

"그런 책이...."

가상의 사례를 방패로 삼자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의심일 뿐이지만, 뭔가 짚이는 건 없어? 5성급 마법사면 아는 게 많을 테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흑마법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선은 아메프 자작과 의논해서 조사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진짜 흑마법이라면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지 않을까? 이미 당한 사람도 있을 테고, 앞으로 피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제게 밀정을 맡기시려는 것이군요."

"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아."

조금 돌려 말한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는 셰링엄.

일부러 흑마법을 언급하며 표정을 살폈는데,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린토넬라를 주시해서 살펴 줘."

"예? 그는 흑마법과 전혀 연관이 없는 듯합니다만...."

"따로 조사를 부탁한 게 있어서 좀 더 위험할지도 모르거든."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경과는 상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의 표정은 꽤 비장했다.

이 모든 반응이 연기인지 아닌지는 이후로 받게 될 보고에서 추측해 볼 수 있겠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 대화를 마친 후, 아메프가 마차로 들어섰다.

다행히 셰링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뒤에서 말이 오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마저도 실마리가 되기 마련이다.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 만들어졌어도 당장은 어쩔 수 없겠지.

"출발하겠습니다."

어쨌든 모두가 자리했기에 마차는 빠르게 저택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노멘의 사건이 화제로 올랐지만, 크게 영양가 있는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저택에 도착한 이후에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의미 없는 회의가 끝난 후, 셰링엄은 바로 저택을 떠났다.

혹시 몰라 주시해서 살폈는데, 아메프와 따로 접촉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그럼 방에 있을게."

"편히 쉬십시오."

더 나눌 대화는 없었기에 디르엔은 호위들과 함께 방으로 이동했다.

"얀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도련님, 제게는 무엇이든 명령을 내리시면 됩니다."

"그게, 호위에서 떨어지게 되는 일이라서...."

"…예?"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자 의아한 듯이 반응하는 얀테.

그에겐 숨길 것이 전혀 없었기에 필요한 이야기를 모두 전달했다.

흑마법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를 제시하는 모양새가 됐지만, 반응은 의외였다.

"그런 사례를 알고 계시다니.... 지금까지 홀로 그 문제를 고민하고 계셨던 겁니까?"

말이 끝나자 그는 황당한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위험한 일에 관심을 가지시면 안 돼요!"

"도련님, 이제 방에 계셔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주변의 시종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커블로스는 위험한 악인들이니까, 정확히 알아보고 싶어. 나도 루블린 가문의 아이잖아?"

"도련님...."

솔직히 그런 대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론 맞는 이야기다.

시험의 성과와도 관련될 수 있으니 놓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무래도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얀테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

"이곳에 올 때 호위들의 숫자에 관해 물으셨지요?"

"응, 평소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그게 왜?"

"본래는 도련님께 알려 드릴 예정이 전혀 없었지만...."

얀테는 허리에 찬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양피지 같은 서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받은 임무 중 하나는 커블로스의 조사입니다."

20.

"…어?"

"이걸 봐 주십시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의아해하고 있자, 얀테가 양피지를 내밀었다.

스륵-

그것을 받아 펼치니 몇 줄의 짧은 글과 마지막에 찍힌 루블린 가문의 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허가증 같은 건가?'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커블로스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권한을 공작이 인정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커블로스의 조사는 왜 하는 거야?"

"급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첫 외부 조사는 켈파에서 복귀한 직후였으니까요."

"켈파?"

뜬금없이 튀어나온 익숙한 지명.

빠르게 머리를 굴려 연관성을 찾고 있자, 얀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기로는 농가에서 돌던 소문이 시발점이 된 듯합니다. 실체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 진술이 구체적이라 조사를 넓히게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뭔가 얻은 게 있어?"

"목격 진술은 간간이 있었지만, 실체적인 증거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아마 이번 조사가 마지막이 될 가능성도 있을 듯합니다."

"…황실에는 보고되지 않은 거야?"

"비공식적인 보고에 그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한 근거 없이 공표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사안이니까요."

그의 말에 디르엔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과 세계를 흔들었던 불온한 존재이니만큼, 루블린의 판단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번 조사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심혈을 기울인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그래서, 글리바스로 온 건 뭔가 단서가 있어서야? 아니면 내 시험 때문에?"

"아닙니다. 굳이 순서를 말씀드리자면, 각 지역으로 배정된 조사대가 먼저였습니다. 그중 시험 지역이 겹친 것뿐이지요."

"그럼 아메프 자작은 알고 있어?"

"대외적인 명목은 주변의 마물 현황 및 치안의 조사입니다. 글리바스 내에 아는 인원은 전혀 없지요."

그의 대답을 들은 디르엔은 작은 만족과 함께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황을 다루는 것이 여러모로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블로스를 향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니, 든든하다 못해 마음이 평온해진다.

게다가 루블린 공작의 명령이 함께하는 이상 공식적으로 흑마법을 파헤칠 수 있게 됐다.

"도련님, 린토넬라와 셰링엄에게 내리셨던 지시는 그대로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뭔가를 고민하던 얀테가 입을 열었다.

"응. 갑자기 멈추는 건 이상할 테니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을 테고."

"…예전에도 그랬지만, 도련님이 12살이신 것을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요. 커블로스에 대해 말씀드린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이 됩니다."

"아르델이나 앤느가 말한 것처럼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럴 거야. 그리고 커블로스 같은 단체가 나이를 따지진 않을 테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디르엔의 답에 그는 작게 숨을 내뱉으며 수긍했다.

애초에 내면과 외면의 괴리를 구분하며 말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마법적인 부분은 숨겨 온 탓에 영민한 아이 정도로 인식되어 온 건 다행이겠지.

어쨌든 속마음의 공유는 끝났기에 디르엔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 다른 조사는 진행되고 있는 거야?"

"예. 도시 내외로 분배해 흔적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료들을 참조해 확률이 높은 곳을 찾고 있지요."

"어렵겠네."

"커블로스를 다루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린토넬라와 셰링엄을 감시할 인원 또한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아메프 자작의 움직임도 살필 필요가 있겠군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하는 얀테.

물질적인 증거를 떠나서 조사의 갈피를 잡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는 듯하다.

흑마법의 반응이 있었다고 말해 주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직접 조사하긴 어려우니까, 일단 모른 척 있을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사의 결과는 바로바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응."

그런 대화를 끝으로 얀테와 호위들은 방을 나섰다.

몇몇은 문 앞을 지키겠지만, 대부분은 바로 조사에 투입되겠지.

"도련님, 저는 도련님이 12살이라는 사실을 꼭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블로스는 호기심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상당히 중대한...."

시종들과 남게 되자 자연스레 시작된 잔소리.

그것에 적당히 답하며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저녁을 먹은 후,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도 보고는 없었지만 말이다.

"도련님, 편히 주무세요."

"응. 잘 자."

취침 시간이 되자 시종들은 인사를 남기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다 보니 바깥의 움직임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진짜 갈 거야?

"당연하지."

침대에서 일어서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크로노.

하지만 방에 머무른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고민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인비저빌리티."

영창을 입에 담자 투명해지는 전신.

크로노가 알려 준 이 4성급 마법은 디르엔의 입장에서 은혜로울 정도였다.

그에게서 뜯어낸 다양한 마법들까지 생각하면 미궁에서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다.

끼익-

조심스레 창을 연 디르엔은 그대로 뛰어내렸다.

"플라이."

동시에 마법을 사용하자 하늘로 날아오르는 몸.

이 비행 마법은 조금 더 개조를 거쳐 효율과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래도 전생의 자신은 사용하기 어려웠겠지만.

슈욱-!

어쨌든 방향은 명확했기에 그는 바로 비행을 시작했다.

루블린가의 저택에선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기에 해방감이 온몸을 감쌌다.

결계는 물론이고, 7성급 마법사와 6성급 마법사의 눈을 피하기엔 위험 요소가 크니 어쩔 수 없겠지.

탓-

빠른 속도로 이동하자 곧바로 도착한 광산의 입구.

최대한 조심해서 착지한 것은 보초를 서는 중인 두 명의 병사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피곤하네."

"그래도 광산 근무는 편하잖아. 다들 여기 걸리려고 난리라고."

"그건 그렇지만.... 심심한 건 사실이잖아."

잡담을 나누는 둘의 모습에선 조금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외부인의 침입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플라이."

주변을 조금 살피던 디르엔은 다시금 비행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중앙의 공간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작은 바람조차 일으키지 않기 위해 속도를 낮췄기에 답답함은 극에 달했다.

"으으… 어깨가 결리네."

"...!"

고도를 높인 채 나아가던 그때, 갑자기 한쪽 병사가 하늘로 팔을 치켜들었다.

"어? 뭐가 닿은 것 같은데?"

"뭐가?"

빠르게 회피했지만, 아주 살짝 스쳐 버린 옷의 끝자락.

그나마 얇은 부분이라 병사는 긴가민가한 반응을 보였다.

슉-

두 사람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디르엔은 숨을 죽인 채 안쪽으로 날았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에 다시 잡담이 이어졌기에 들키진 않은 듯하다.

보초라는 직무를 생각하면 한심하지만, 지금은 고마울 따름이다.

슈욱-!

완전히 혼자가 된 디르엔은 속도를 높여 내부로 나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벌써 도착했네.'

낮에 마주했던 두 갈림길 앞에 섰다.

-보호 마법 다 써.

'그럴 거야.'

크로노의 말에 동의한 그는 각종 보호 마법을 몸에 덮어썼다.

다섯 겹에 달하는 이 방패를 뚫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슈욱-

준비를 끝낸 디르엔은 다시금 몸을 띄워 왼쪽으로 들어섰다.

'아직은 비슷한 느낌이네.'

오른쪽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초입.

하지만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자 그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뭐야, 여긴?

갱도를 빠져나오자 도착한 넓은 공간은 낮에 들었던 경고를 상기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걸어서 왔다면 그대로 떨어졌을 낭떠러지가 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엄청 깊네. 어디까지 떨어지는 거야?

크로노의 말처럼 새카맣게 물든 아래의 공간은 공포심마저 들게 했다.

위험하다고 했던 말은 진실이었던 걸까.

'마나는 어때?'

-조금 더 짙기는 한데, 특별한 건 없어. 저쪽은 또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디르엔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낭떠러지 때문에 길은 끊어졌어도 반대쪽엔 엄연히 갱도가 존재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으니, 직접 가 봐야겠지.

슈욱-

돌아갈 생각은 없었기에 디르엔은 몸을 띄워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하며 다시금 안쪽으로 나아갔다.

'별다른 건 없네.'

일반 갱도와 다른 점은 정돈되지 않은 길 정도다.

마법으로 대충 뚫어 놓고 방치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크로노에게 재차 확인해 봐도 마나 차이 또한 없는 수준이라 특별한 것은....

'어?'

그때, 빠르게 나아가던 디르엔의 몸이 멈췄다.

일방통행이던 갱도의 정면에 작은 갈림길 하나가 보였기 때문이다.

-조심해. 저쪽은 마나가 훨씬 짙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자 크로노가 경고를 해 왔다.

하지만 그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마나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하면 마나를 다루는 감각 자체가 섬세해졌기에 더 그렇겠지.

슉-

조금 더 경계심을 높인 디르엔은 천천히 샛길로 들어섰다.

완전히 꺾인 길이라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 걱정은 곧바로 사라졌다.

'...?'

굽은 갱도를 나아가자 나타난 넓은 공간.

그곳엔 돌로 만들어진 작업대 같은 것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금 당혹스러웠다.

문제는.

'…생각도 못했네.'

돌 작업대 위에 놓인 수백 개의 맑은 푸른색 광석들.

속에 내포한 마나를 강렬하게 뽐내는 저것은 책에서도 몇 번이나 봤던 물체다.

-이런 구린 짓을 하고 있었네.

블루 스틸의 등장에 크로노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디르엔 역시 아까 한탄을 내뱉던 아메프의 말이 역하게 느껴질 정도다.

혹시 몰랐을 가능성을 그려 보고 싶어도 필사적으로 자신을 막던 모습들이 아른거린다.

-어쩔 거야?

'당장 어쩌지는 않을 거야. 괜히 변화가 생기면 흑마법의 조사에도 문제가 될 테니까.'

현장 적발이라는 이유로 추궁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일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이상 변수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이거, 오래된 거겠지?'

-대대로 이어져 왔다면 그렇겠지만.... 문제는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마법사?'

-마나를 담은 광석은 일반인이 구분할 수 없어. 구분한다고 해도, 채굴 이후에 특수한 마나 처리를 하지 않으면 돌멩이로 변질하거든. 당연히 그 기술자는 상당히 적은 편이고.

크로노의 설명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인물.

상당한 실력자인 그가 굳이 글리바스에 정착한 이유가 설마....

탁-!

그때, 갑자기 들려온 소리.

자신이 왔던 길 쪽이었기에 디르엔은 빠르게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기다리길 잠시.

"샛길은 매번 불편하군. 한번 제대로 정비를 해야 하나."

"공작가의 사람들이 돌아가면 고민해 보시지요."

익숙한 얼굴의 두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21.

-역시 저놈들이었네.

이야기를 나누는 아메프와 셰링엄의 모습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이 공간에 들어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겠지.

심지어 샛길까지 있다고 하니, 어지간히 본격적인 모양이다.

"이번은 양이 조금 적군. 뭔가 문제가 있었나?"

"노멘의 아이가 실종됐던 즈음에 작업장이 조금 어수선했던 적이 있습니다. 기한까지 물량을 맞추는 것엔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 미친것이 자꾸 살아 있다는 둥 헛소리를 해서는.... 괜히 그 어린놈이 관심을 가져 버렸잖은가."

"강한 충격을 받으면 그럴 법도 하지요."

물 흐르듯 이어지는 이야기 끝에 붙어 버린 뒷담화.

하지만 디르엔의 의식은 그런 잡다한 것에 매몰되지 않았다.

'아메프는 정말로 모르는 건가?'

짧은 대화일 뿐이라도, 거짓말을 하는 듯한 분위기는 아니다.

게다가.

"문제는 그 아이가 뜬금없이 커블로스를 입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어 보였지만, 관심을 쉽게 끄지는 않을 듯합니다."

"머리에 피도 채 안 마른 놈이 그런 뒤숭숭한 것을.... 첩의 자식 주제에 무서운 게 없나 보군."

아까 비밀스럽게 나눴던 이야기는 빠르게 보고가 이뤄진 듯하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는 애매한 생각을 반쯤 확실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조사를 진행하고 있기에, 무언가 발견하면 각하께도 보고드리겠습니다."

"보고는 무슨. 그 미친놈들은 옛날에 씨를 말려 버리지 않았나. 어차피 애들 놀음이니, 시끄러워지지 않게 적당히 어울려 주게. 물론 블루 스틸의 작업에 영향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알겠습니다."

손을 대충 젓는 그의 말에 셰링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전반적인 발언들을 복기해도 흑마법의 추종자라 하기엔 무리가 있는 수준.

차라리 이런 쪽으로 내통이 이루어진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 린토넬라 쪽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괘씸한 놈이 말을 더듬으면서 빙빙 돌려 대더군.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잊어버렸나 본데, 공작 가문이 떠나면 바로 쫓아 버릴 걸세."

"각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자는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됩니다. 잡다하게 돈이 드는 부분까지 알아서 희생하니 충분히 써먹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같잖은 인식이 쌓여서 그놈이 기세등등한 거 아닌가! 글리바스의 왕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맹한 사람이라 무엇이 우선인지 모르는 듯합니다. 제가 내일 만나 생각을 고쳐 놓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

대화의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 탓에 귀를 의심했지만,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린토넬라가 여전히 비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의심되는 인물이 이런 자세를 취하니 느낌이 미묘했다.

"잡다한 일들보다 사업 이야기를 하시지요. 양은 적지만, 이번의 품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좋습니다."

"흠."

셰링엄이 화제를 돌리자 아메프의 눈이 작업대로 향했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블루 스틸을 살피는 모습은 상당히 진중했다.

"그럼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특별한 대화 없이 검수가 끝나자 두 사람은 곧바로 작업장을 나섰다.

혹시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블루 스틸의 마나가 잘 숨겨 준 듯하다.

물론 셰링엄의 감지 능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겠지.

-이제 어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크로노가 마법진을 반짝이며 물어 왔다.

'이제 어디서 어떤 정보가 들어오는지 봐야지.'

-제대로 된 건 없을 것 같은데....

'뭐, 그렇게 되면 직접 움직일 거야. 마냥 방에만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게 더 불안한 게 문제야.

간단한 계획을 알리자 묘한 반응을 보이는 셰링엄.

하지만 커블로스라는 단체는 일반적인 조사로 꼬리가 잡힐 놈들이 아니다.

조금 더 상식에서 벗어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갔나 보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바깥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샛길이라는 것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도 가자.'

당장 조사할 것은 없었기에 디르엔은 곧장 광산의 입구로 향했다.

보초들은 졸음과 싸우는 중이었기에 편안하게 저택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디르엔은 보고를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책과 함께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 예상대로 단서를 찾기는 어려운 듯하다.

'흑마법은 아는 거 없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지시 물음을 던지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하는 크로노.

한 번 손을 댔었다고 하기에 물은 건데, 반응이 격렬하다.

'직접 쓰면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직접 쓰면 감옥에 끌려 들어가겠지. 제발 정상적인 사고를 해 주면 안 될까?

'몰래 하면 괜찮은 거 아니야? 어차피 마법인데, 안 들키면 문제는 없잖아.'

-…너 설마, 흑마법의 근본이 뭔지 모르는 거야?

'근본?'

그의 질문에 디르엔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자 크로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하아… 커블로스가 왜 흑마법을 연구하는 것 같아?

'금단을 연구하는 게 재밌어서?'

-그건 네가 흑마법을 건드리려는 이유고. 커블로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계의 현현이야.

'…마계?'

갑작스레 등장한 단어, 마계.

마족의 시초들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신화에서밖에 등장하지 않는 차원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 세계와 연결한다니, 가능하긴 한 걸까.

-뭐, 어이가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 어떤 역사를 뒤져도 비슷한 사례조차 없으니까. 만약 진짜 성공한다면 최소한이 멸망일걸?

'장소를 불러온다면… 공간 마법 아니야? 흑마법이 그런 쪽이었던가?'

-흑마법도 범주가 꽤 넓지만, 궁극적인 요소는 공간이야. 일반적인 공간 마법과는 궤가 너무 달라서 참조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나도 한 번 건드렸다가 크게 후회했다고.

과거의 실패 사례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는 크로노.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지만, 아직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쓰면 안 되는 이유는 뭐야? 마계나 반인륜적이라는 것 말고도 뭐가 있는 거지?'

-…간단히 말하면 마나가 속에서부터 갉아먹혀.

'갉아먹힌다고?'

-푸르게 빛나는 마나가 붉게 변하다 끝내는 까맣게 타락해 버리는 거지.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 버틸 수 없어.

크로노의 말을 들으니,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7성급 마법사마저 피할 수 없는 잠식이라면 누가 견딜 수 있을까.

'직접 쓰는 건 무리겠네.'

-드디어 이해해 줬구나. 모든 흑마법의 근간에 깔린 장치라 피하는 건 불가능해. 아마 마법진을 새로 쓸 수준까지 가야… 아.

안도한 듯이 말을 이어 가다 다급히 멈춘 크로노.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디르엔의 표정을 확인한 그는 이미 늦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잠깐만. 방금은 잘못 말한 거야. 흑마법의 반동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알려 줘.'

-아니, 이거 진짜 아니라니까? 심지어 걸리면 바로 사형까지....

'알려 줘.'

-하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일관된 말을 내뱉는 디르엔.

이런 상태가 되어 버리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나밖에 모르는 데다, 정확하지도 않아.

'그거면 충분해.'

-하아아....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크로노는 억지로 기억을 뒤졌다.

그 모습을 인지한 디르엔 역시 책으로 손을 숨긴 채 준비에 들어갔다.

-좋아. 어떻게 되든 해 보자.

이내 체념한 크로노와 함께 시작된 흑마법의 복구 작업.

아무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하루를 꼬박 투자한 끝에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등록 마법:섀도우 링크(3성급)]

[분석 결과:개조 가능]

[개조 범위:42.1퍼센트]

[지식에 기반한 자동 개조가 시작됩니다.]

-아… 이젠 진짜 모르겠다.

움직이는 붉은 마법진을 보며 앓는 소리를 내는 크로노.

색상 자체는 심상치 않지만, 구조를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 범위만큼의 개조에 성공한다면....

똑똑-

마법진에 몰두하려던 그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고개를 드니 무거운 표정의 얀테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련님,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평상시의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디르엔은 작업을 잠시 멈춘 채 눈을 맞췄다.

"응, 말해 줘."

"조금 전, 조사대 인원인 기사 롬펠트가 사망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사망?"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내용에 디르엔의 자세가 바로잡혔다.

"커블로스가 한 짓이야?"

"아직은 명확히 파악된 내용이 없습니다. 마법이 아니라 검에 당한 탓에 용의자를 좁히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아메프 자작도 알고 있지?"

"예. 숲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이미 병력을 차출해 조사 중입니다. 그쪽에선 도적단의 짓이라 추측하고 있더군요."

그의 묘한 설명에 디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적단인가.'

살해당한 사람은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다.

즉, 무기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흑마법사가 검으로 상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적단의 짓이라 예상하는 아메프의 의견도 합리적이라 볼 수 있다.

"얀테의 생각은 어때?"

"…저 또한 도적단의 존재를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루블린 가문의 문장을 소유한 기사를 살해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일개 도적이라 해도 공작가의 힘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요."

"범인을 도적단으로 몰아가려고 한다는 거지?"

"목적이 사건의 은폐인지, 빠른 마무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서두르는 태도를 봤을 때,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별개의 조사를 통해 응당한 보복을… 내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마지막 말을 잇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틈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분노는 디르엔에게도 닿을 정도였다.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를 잃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내일 숲에 한번 들러도 괜찮아?"

"예? 그런 위험 지역에 가시는 것은...."

"루블린 가문을 위해 노력해 준 사람이니까, 제대로 조사하고 싶어.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면 좀 더 신중하게 하지 않을까?"

공작 가문의 기사가 목숨을 잃은 것은 아메프 자작에게 있어 너무도 좋지 않은 일이다.

괜한 불씨로 인해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 루블린의 입김이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의 책임을 적당한 도적에게 부과하고, 토벌까지 진행하면 깔끔한 결말이 된다.

특히 블루 스틸에 관한 것까지 감추고 있는 상황에선 더욱 불안하겠지.

그리고 비리를 모르는 얀테 또한 사건의 축소에 대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정말, 도련님은 언제나 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보통이라면 12살 아이가 떠올렸다고는 보기 힘든 말.

하지만 켈파부터 이어져 온 시간은 디르엔이 가진 깊이를 충분히 헤아리게 했다.

특히 그 미궁 사건 직후에 했던 말은 얀테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잘 붙어 있어야 했는데, 미안해. 많이 곤란해졌지?'

사죄를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갔던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질책은커녕, 몸을 회복 중이던 10살 아이가 되레 자신을 위로한 것이다.

아마 디르엔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저희로서는 너무도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안전을 확보해야 하니, 내일 준비를 마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그리고 의논해야 할 게 있는데...."

앞선 이야기가 마무리됐기에, 디르엔은 블루 스틸에 관한 비리를 풀기 시작했다.

당연히 광산에 몰래 들어간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에 대화를 얼핏 들었다는 구도가 됐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심각한 사안이지만,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블루 스틸의 존재 여부와 물량, 발견 시기, 유통 등에 따라 죄의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최악의 경우엔 글리바스 가문의 역사가 송두리째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응, 그래서 먼저 얘기한 건데.... 이 문제까지 조사할 여유는 없는 거지?"

"확실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물음에 얀테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보통이라면 고작 12살 아이의 말을 무시하면 될 뿐인 사건.

하지만 디르엔의 말을 들은 것이 얀테인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 정확한 장소를 들으신 이상 제대로 된 확인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증원을 요청할 예정이었으니, 이 부분에 관한 건도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장에서 검증할 수 있다면 아마 발뺌도 하기 어렵겠지요."

"마법사단에 블루 스틸을 감정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어?"

"켈리마프 단장께서 판단하시겠지만, 당장 찾기가 어렵다면 필요한 인원을 보내실 겁니다. 당면한 문제를 파헤치는 것엔 문제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응. 걱정은 안 할게."

그의 말에 디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켈리마프라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주겠지.

"그럼 저는 보고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어쨌든 필요한 이야기가 끝났기에 얀테가 경례와 함께 방을 나섰다.

"도련님, 이 글리바스에선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요...."

"숲으로 직접 가시는 것은 너무도 불안하지만, 훌륭하신 결정이셨습니다. 공작 가문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행사하실 수 있는 위용이지요."

"저는 이제 잘 모르겠어요...."

무거운 대화가 끝나자 시종들의 각기 다른 반응이 쏟아졌다.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이만 잘게."

하지만 디르엔에겐 시급한 일이 있었기에 빠르게 이불을 덮어썼다.

그리고 시종들이 모두 방에서 나간 뒤, 아까 등록했던 붉은 흑마법진을 불러왔다.

"슬슬 해 볼까."

-…흑마법진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건 커블로스 말고는 너뿐일 거야.

개조를 시작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하는 크로노.

하지만 새로운 마법을 앞에 두고 울상인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자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수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어쨌든 조수의 힘을 빌려 손을 움직이다 보니, 필요한 개조가 착실히 진행됐다.

크로노의 훈수도 함께하는 덕에 속도도 빨랐다.

슥-

몰두한 채 작업을 이어 간 끝에, 어느새 마지막 개조 부분에 도달했다.

그리고 예정했던 대로 구조를 고치는 순간.

팟-!

붉게 빛나던 마법진이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변모했다.

[개조가 완료되었습니다.]

22.

-이런 말도 안 되는....

푸른 마법진을 보며 넋이 나간 목소리를 내뱉는 크로노.

대충 상황을 알 것 같던 디르엔은 눈앞의 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개조 마법:섀도우 링크(3성급)]

[그림자 위에 2개의 영역을 지정해 통로를 생성한다. 그림자 사이로 생명체를 제외한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다.]

[개조 결과]

마나 소모량 -75.6퍼센트

지정 범위 +115.2퍼센트

이동 거리 +157.5퍼센트

기본 마법 구조 교체

특수 디버프 해제

"이게 이렇게 되네."

개조를 이어 가면서 미심쩍은 부분을 죄다 건드리긴 했다.

하지만 마법진은 요소들이 연쇄에 연쇄를 잇는 복잡한 구조라 결과를 명확히 예측하긴 어려운 것이다.

수치로 표현하자면 3을 예상했는데, 10이 튀어나온 느낌 정도일까.

-이렇게 되네, 라는 수준이 아니잖아! 흑마법을 일반 마법으로 바꾼다고? 이게 말이나 돼?

"뭐, 이전과는 궤가 다르긴 하지. 좀 더 건드려 볼까?"

-…내 상식이 붕괴할 것 같으니까, 그만해. 애초에 여기서 뭘 더 할 수도 없다고.

마법진에 걸린 제한을 푸는 작업은 색깔 마법과 고대 마법에서 이미 겪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근간 자체를 뒤엎어 버리는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팟-!

"섀도우 링크."

곧바로 마법을 사용하자 그림자 위에 표시되는 2개의 영역.

미리 자신의 그림자와 구석의 선반 그림자를 생각했는데, 자연스레 설정으로 이어졌다.

쑤욱-

발아래에 책을 떨어트리자 곧바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슉-

그리고 조금의 지연도 없이 선반 아래에서 그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계 거리는 지금의 몇 배는 될 거야. 지정 범위도 이 침대 세 개는 들어갈걸?

"괜찮네."

개조에 의한 것이겠지만, 생각보다 더 효용성이 좋다.

아쉬운 게 있다면 생명체가 이동할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그래서, 이걸 어떻게 쓸 건데? 흑마법처럼 안 보인다고 해도 대놓고 사용하긴 애매하잖아.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야. 숲의 상황이랑 여러 조사 결과도 아직 살펴야 하니까."

-하아… 무슨 예측을 할 수가 없네. 카이사르 제국이 원래 이런 느낌이었나.

평범한 대답을 건네자 깊은 한숨을 내쉬는 크로노.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선 정보를 갈무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일은 증원도 온다고 하니, 상황은 더 좋아지겠지.

"그러고 보니, 내가 잠들면 너는 어떻게 돼?"

-한 5분 정도 있으면 내 의식도 바로 끊어져. 항상 깨어 있던 미궁 시절을 생각하면 진짜....

가벼운 의문을 던졌을 뿐인데, 과거의 회상으로 돌입했다.

물론 이 구도 또한 익숙했기에 멋대로 이야기가 흘러갔을 때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아침을 먹은 뒤, 책을 읽고 있었더니 얀테가 찾아왔다.

"오후에는 숲으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증원 또한 비슷한 시간에 도착할 테니, 함께 움직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빠르네.'

밤중에 보고가 전달된 것인지 대응 속도가 상당했다.

여러모로 중대한 사안이 겹쳤으니 당연한 결정이라 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린토넬라가 도련님을 뵐 수 있는지 조사대를 통해 물어 왔습니다."

"그래? 셰링엄은?"

"보고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이번 사망 사건을 위해 투입된 듯합니다."

"음… 그럼, 린토넬라는 이따 숲으로 데려와 줄 수 있을까?"

"예. 도련님께서 이동하시는 시간에 맞춰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엔 이쪽으로 부르려고 했지만, 숲에서 만날 필요성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두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기에 무언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의문이 드는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의문?"

"예. 도련님의 말씀을 들은 후, 글리바스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들을 조사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이… 아이들의 실종과 사망에 관한 건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야?"

"서류상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근 2년간 전체적으로 사망자가 늘었다고 하더군요. 특히 실종된 아이가 후에 사체로 발견된 경우 또한 처음이 아닌 듯했습니다."

글리바스에 오기 전에 찾아본 자료에선 특별한 사건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

역병이나 마수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면 이해가 가지만, 갑자기 사망자가 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심지어 노멘의 아이가 겪은 일과 같은 사례까지 있다면 의심은 짙어질 수밖에 없다.

"커블로스랑 관련됐을 가능성은?"

"도련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직은 심증뿐입니다만.... 과거의 동일 사례가 나온 만큼, 일반적인 선에서 상당히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린토넬라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네. 숲에 갈 수 있게 되면 말해 줘."

"예. 최대한 안전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얀테는 경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진짜 그놈들 짓이면, 역시 기분 나쁠 정도네.

다시 방이 조용해지자 크로노가 질린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말이야?'

-마법이든 연구든, 흔적을 하나도 안 남기잖아. 나쁜 쪽으로 더럽게 꼼꼼하다는 거지.

'숨어서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을 테고.'

-걔들이 하는 연구는 규모가 작을 수가 없어. 오죽하면 실험장 크기로 자랑하는 놈도 있었다니까?

그의 말에 디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험할 장소가 필요하다면 쓸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지 않을까.

그런 고민과 함께 흘러간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을 넘어갔다.

그리고 마법진을 조금 살피고 있었더니,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도련님, 숲으로 모시겠습니다."

얀테의 말에 빠르게 마친 외출 준비.

이후 마차에 올라 성문으로 향하는 데까진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꽤 넓은 구역까지 경계를 배정했기에 숲의 안전은 확보된 상황입니다. 린토넬라는 이미 대기 중이지만, 아메프 자작을 먼저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도착이 가까워지자 바깥에서 이동하던 얀테가 말을 전해 왔다.

그리고 숲에 도착한 직후에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디르엔 도련님!"

마차에서 내리자 바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아메프 자작.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일부러 현장에 계속 붙어 있었다는 듯하다.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중이라는 걸 알아 달라는 뜻이겠지.

"이번 사건을 잘 봐주고 있다 들었어. 아버님께는 잘 말씀드릴게."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오히려 루블린 공작가의 기사단에 피해를 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도적단을 일찍이 토벌했었다면 이런 일은...."

과장된 표정으로 사죄를 하는 아메프이지만, 광산에서의 진짜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증원이 제대로 도착하면 현장을 덮쳐 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인원을 분배해 도적단의 아지트를 수색 중입니다. 워낙 곳곳에 흩어져 활동하는 집단이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완전하게 토벌하겠습니다."

"…부탁할게."

"맡겨 주십시오."

이미 이쪽의 기대는 전혀 없었기에 적당한 답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메프는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갔으니 예상 범위 내에서 움직여 주겠지.

"린토넬라는?"

"여기 있습니다, 디르엔 도련님."

본 목적이었던 사람을 찾자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약간 피곤한 듯한 얼굴의 린토넬라가 먼발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얀테만 빼고, 전부 물러나."

주변에 다른 병사들도 많았기에 디르엔은 곧바로 사람들을 멀리했다.

얀테 하나만을 남긴 이유는 공평한 당위성을 겉으로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내 부탁 때문에 고생했지?"

"아, 아닙니다. 이것 또한 제 일과 관련된 것이기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도움? 뭔가 발견한 거야?"

"예. 이것을 봐 주십시오."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꽃 한 송이와 풀 한 포기를 꺼냈다.

"그때 말씀드렸던 라플레타의 잎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커틀렌이라고 하는 진정성 약초이지요. 이 두 가지가 모두 노멘의 집 창고에서 발견됐습니다."

"환각을 봤었다는 게 맞았던 거야?"

"…안타깝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처방했던 약들과 두 약초의 상호 작용이 강한 환각을 불러일으킨 것이겠지요. 약사로서 미처 살피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하는 린토넬라의 얼굴엔 죄스러움이 가득했다.

여러 의심이 없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하지 않았을까.

"치료할 수는 있는 거야?"

"아무래도 정신적인 부분이라 쉬이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천천히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것밖에는...."

"치료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어?"

"성 속성 해독 마법이라면 기대해 볼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고위급 신관이 필요합니다. 제도의 대신전이 아니라면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막힘없이 줄줄 대답을 이어 갔다.

제도의 고위급 신관이라면 황제조차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런 지방의 평민을 위해 행차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겠지.

글리바스에도 신전은 있지만, 가벼운 치유와 정화 외에는 기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최대한 노멘을 잘 살펴 줘. 필요한 게 있으면 알려 주고."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노멘을 위한 약초를 구한 뒤에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같이 움직이자. 조사대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도련님의 호위 중 한 분이 사망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안타까움에 젖은 얼굴로 조의를 표하는 린토넬라.

그를 보던 디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슬프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사를 부탁하는 것밖에 없네. 아, 혹시 나랑 같이 다니는 게 불편해?"

"아, 아닙니다. 단지 더러운 흙밭에 발을 들이시는 것이 송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럼 같이 가자. 얀테, 최소한만 남기고 다른 호위들은 조사를 돕게 해 줘."

"알겠습니다."

디르엔의 뜻을 알아들은 얀테는 지시를 내린 뒤 몇 명의 호위와 함께 돌아왔다.

"제가 앞장서 모실 테니, 발을 조심하면서 따라와 주십시오."

대충 구성이 정해진 후, 디르엔과 호위는 린토넬라의 뒤를 따라 숲으로 나아갔다.

아메프가 붙인 병사 또한 몇 있었지만, 대화를 명목으로 떨어트려 놓았다.

"이 약초는 테브레사라는 것인데, 속에 쌓인 독성을 빼내기에 적합합니다. 이쪽은 회복약의 재료에도 사용되는...."

주변의 수풀을 뒤지며 설명을 줄줄 읊는 린토넬라.

하지만 계속해서 상황을 살피던 디르엔은 속삭이듯 마법을 내뱉었다.

팟-!

"섀도우 링크."

모두의 시선을 피해 생겨난 마법진과 함께 두 그림자 영역이 겹친 채로 설정됐다.

-야,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흑마법의 사용에 크로노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미끼 한번 던져 보는 거야.'

-그러니까 미끼를 왜 흑마법으로 던지냐고. 옆에 사람들 많은 거 안 보여?

'오히려 이 정도가 딱 좋아.'

-뭐?

어이가 없다는 듯한 그의 반응도 이해는 가지만, 이것은 필요한 과정이다.

'섀도우 링크는 기본 축에 속한다고 했지?'

-공간 계열 흑마법 중에선 가장 기초지. 그래서, 뭘 하려는 건데?

'간단해.'

크로노의 물음에 디르엔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곳에서 몸을 숙인 채 약초를 선별하고 있는 린토넬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의 시선 아래엔 겹쳐진 2개의 그림자 영역이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슥-

슬쩍 몸을 낮춘 디르엔은 작은 돌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그림자로 돌을 던졌다.

슈욱-

당연하게도 검은 음영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돌.

슈욱-

하지만 겹쳐진 영역 때문에 비슷한 위치에서 그것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설정한 위치 덕에 돌은 제자리에서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

그 이상을 감지한 것인지 린토넬라의 시선이 바로 집중됐다.

이제 저것에 대한 반응을 본다면....

"디르엔 도련님."

그때, 정면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셰링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슥-

그 모습을 알아챈 것인지 린토넬라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콱-

린토넬라의 발이 정확하게 그림자 영역을 덮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23.

-저거, 일부러 숨긴 거지?

린토넬라의 행동을 살피는 사이, 크로노가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그의 반응에 관한 생각이 제대로 일치한 듯하다.

"도련님?"

잠깐 생각에 잠겼더니 셰링엄이 가까이 다가왔다.

"응. 숲속에 있던 거야?"

"예. 조사를 진행 중이었는데, 이곳에 들르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급하게 돌아왔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디르엔의 시선은 린토넬라의 발아래로 쏠렸다.

셰링엄이 다가오기 전에 마법은 이미 해제했지만, 저 반응은 깊은 내적 한숨을 불러왔다.

'…이건 최악이네.'

흑마법을 사용했을 때, 상정했던 반응은 여러 가지다.

흑마법 자체를 모른다면 당황함과 동시에 겉으로 반응을 보이기 마련.

그런데 흑마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정확히 두 가지로 나뉜다.

흑마법에 당했던 과거가 있다면 악감정 혹은 공포가 표출될 것이고.

자신의 선택으로 흑마법에 연관되어 있다면, 당장은 주변에 들키는 것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후자에 속해 버린 린토넬라는 사실상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맞겠지.

"조사는 어땠어?"

일단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디르엔은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셰링엄은 조금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숲의 안쪽에서 몇 개의 이동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작은 것들이 옅게 남은 것으로 보아, 아마 도적단의 움직임이 맞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거랑 연관됐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지?"

"예. 며칠간 흔적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의 불미스러운 사건에서도 특이한 점은 없었으니, 불안을 거두셔도 될 듯합니다."

주변을 생각해 일부러 배제한 커블로스라는 단어.

다행히 의도를 읽은 그는 흐름에 맞춰 답을 해 왔다.

하지만 셰링엄 또한 비리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이상, 정보의 신뢰도가 미묘해졌다.

-이거 묻는 게 의미가 있어?

같은 생각이었는지 크로노가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흑마법이랑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시끄러워지면 자기가 한 더러운 짓까지 걸릴 텐데, 뭐가 있어도 제대로 말할 리가 없잖아.

'멋대로 숨기다가 나중에 터지면 더 큰일인 거 아니야? 커블로스에 관해서 모를 리도 없으니까.'

-돈 때문에 패가망신한 놈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이미 미친놈들이니까, 제대로 생각을....

"도련님."

그때, 얀테가 뒤에서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왜?"

"증원이 도착했다고 하는데, 어찌하시겠습니까?"

"…직접 보러 갈게."

미묘한 타이밍에 도착한 증원이지만, 셰링엄과의 대화는 이제 의미가 없다.

"방해될 수 있으니까, 나는 먼저 가 볼게. 린토넬라도 작업은 끝난 거지?"

"…아, 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가자. 셰링엄, 남은 조사도 잘 부탁할게."

"맡겨 주십시오."

적당히 상황을 마무리한 디르엔은 곧장 마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안녕하십니까, 디르엔 도련님."

수풀을 빠져나오자 멀리서 지팡이를 든 중년의 마법사가 다가왔다.

루블린가의 저택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저는 마법사단의 보레아트라 합니다. 이번 증원대의 대장으로서 성실히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보레아트 공은 5성급의 우수한 전력입니다. 증원 병력도 예상보다 많으니, 유의미한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옆에서 말을 덧붙이는 얀테의 얼굴은 꽤 밝아 보였다.

그만큼 공작 가문 내에서도 정통한 인물이라는 거겠지.

다른 기사들과 마법사들만 해도 수십, 일반 병력은 백 단위라 상당히 든든한 구성이다.

디르엔은 멀리 서 있는 글리바스의 조사대와 린토넬라를 살핀 후,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럼 보레아트가 그걸 감정할 수 있는 거야?"

이번 증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블루 스틸과 관련된 일이다.

이제 그 부분을 현장에서 판명할 수만 있다면....

"죄송하지만, 그 부분은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어?"

그 핵심적인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젓는 보레아트.

너무 예상 밖이라 당혹스러운 표정이 나왔던 것인지, 그가 다급히 말을 이어 갔다.

"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켈리마프 단장께서 늦어도 내일까지는 보내 주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다행이네."

빠르게 사라진 우려에 디르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증명하지도 못할 비리를 파헤쳤다간 되레 역풍이 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장을 덮치는 것과 비리의 검증은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추가 증원이 올 때까진 다른 쪽의 조사를 할 거지?"

"예. 기사단원이 사망한 사건과 함께 좀 더 세밀히 파고들어 갈 생각입니다."

커블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보레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의문을 불러왔다.

"다만, 기존의 포괄적인 조사와 달리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위주로 짚어 나갈 듯합니다."

"내가 한 말?"

"예. 저희가 이곳에 도착한 데는 도련님의 의구심이 크게 작용했으니까요. 이것은 '두 문제'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어?"

그의 말에 디르엔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고서에 그대로 적었다고?'

어제 말을 전할 때, 가장 우려했던 것이 자신의 나이다.

물론 진실만을 담는 것이 보고의 기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증원을 위해선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도 괜찮은 거야?"

"루블린가 내에서 도련님의 성품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가벼이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켈리마프 단장께서도 잘 알고 있으시지요. 애초에 그런 물음을 건네시는 것부터가 신뢰를 주시기에 충분합니다."

당연한 결정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얀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결과적으론 필요한 증원을 부르는 데 성공했다.

"물론 확실히 죄를 물을 수 있도록, 충분한 조사는 이행할 생각입니다. 모든 사안에 대해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하겠습니다."

뭔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보레아트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어쨌든 블루 스틸의 감정사가 올 때까진 커블로스와 사망 사건에 집중하면 될 일이겠지.

"응. 그럼 나는 숲을 조금 더 살펴본 뒤에 도시로 돌아갈게. 너무 방해하면 안 되니까."

"어차피 저희도 현장의 확인이 필요하니, 함께 이동하시지요."

그런 대화가 마무리된 후, 디르엔은 많은 병력과 함께 숲속을 살폈다.

현장을 포함해 여러 곳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지나간 1시간.

역시 특별한 단서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숲의 구조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무언가 찾게 되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어쨌든 필요한 일은 끝났기에 디르엔은 조사대를 남긴 채 도시 안으로 이동했다.

린토넬라 역시 함께였지만,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얀테, 밤에도 조사를 진행해?"

저택의 방으로 돌아온 후, 디르엔은 곧바로 얀테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 왔다.

"숲 주변의 탐색은 오늘로 대강 정리가 되는지라, 야간에는 움직이지 않을 듯합니다. 내일부터는 조사 구역을 더 넓히게 될 테니까요."

"그럼 커블로스의 단서는 어때?"

"예?"

"증원이 와도, 제대로 된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거지?"

"...."

갑작스럽게 이어진 물음에 그는 조금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커블로스는 대상을 특정해도 검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워낙 철저한 놈들이라 작은 증거조차 쉽게 남기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 과거에는 어떻게 찾았던 거야?"

"대부분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마저도 생존한 피해자나 실험실 같은 다른 증거가 없다면 검거가 불가한 수준이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커블로스에 대한 크로노의 평가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평범하게 타개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분명하게 각인됐다.

"내가 루블린가로 돌아가도, 조사는 계속 진행되는 거지?"

"켈리마프 단장께서 결정하시겠지만, 증원까지 보내신 것으로 보아 쉽게 물리진 않으실 듯합니다. 이렇게 의심을 가질 만한 사건조차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렇구나."

2년 동안 상당히 조용하게 진행됐던 커블로스의 조사.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했었으니, 최대한 힘을 쏟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게다가 여러 사건까지 겹친 탓에 영지를 헤집고 다닐 명분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조사대를 돕는 거지? 나는 계속 방에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

"…감사합니다. 신속히 끝낸 뒤에 자리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읽은 디르엔의 말에 얀테는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진심을 담은 경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제 어쩔 거야?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자, 크로노가 질문을 해 왔다.

'네 생각은 어때?'

-하…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제일 좋은데, 어차피 안 그럴 거잖아.

'여기까지 왔으면 제대로 파헤치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지.'

-그 호기심 가득한 눈부터 어떻게 좀 해 봐....

한숨을 내쉬는 크로노지만, 피할 수 없다면 얻어 가는 게 있어야 한다.

그게 마법적인 부분이어도 딱히 문제가 되진 않겠지.

"도련님, 편히 주무세요."

이후 저녁을 먹고 조용히 책과 마법진을 살피다 보니, 모두가 잠들 시간이 됐다.

매일같이 밤에 움직이는 것이 피곤하긴 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팟-!

"인비저빌리티."

반짝이는 마법진과 함께 곧바로 투명해지는 몸.

창문을 연 그는 설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산에 또 가려고? 어제 다 봤잖아.

"정확히 다 본 건 아니지. 그리고 먼저 들를 데가 있어."

-들를 데?

"가 보면 알아. 플라이."

팟-!

짧게 대답한 디르엔은 곧장 마법을 사용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오후에 갔던 숲을 향해 순식간에 속도를 냈다.

-어?

"왜 그래?"

-뭔가 붉은빛 같은 거 안 보였어?

성벽 위를 넘어가자, 갑자기 크로노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숲을 멀리까지 둘러봐도 캄캄한 어둠뿐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잘못 본 거 아니야?"

-봤던 것 같은데.... 아닌가?

"어디였는데?"

-몰라. 너무 잠깐이라 거리감도 모르겠어.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애매한 답을 해 왔다.

솔직히 모든 것을 의심해 볼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이 숲을 죄다 뒤질 만큼의 기대치는 없다.

일단 필요한 것을 끝낸 다음에....

스슥-

그때, 고도를 낮추는 그의 귀에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시야 확보가 안 됐기에 비행 상태는 유지한 채로 탐색을 시작했다.

스슥-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움직이자 사람의 실루엣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거리를 좁혀 확인한 수풀 너머엔.

'…역시.'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의 린토넬라가 있었다.

24.

-저놈을 찾으러 왔었구나?

익숙한 얼굴의 등장에 크로노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흔적이라도 뒤져 볼 생각이었는데, 정확히 이 시간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마법사였나 보네.

'실력?'

-경비들을 피해서 빠져나오려면 투명화 마법은 거의 필수니까.

'인비저빌리티는 4성급이니까,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 않아?'

-그건 4성급 중에서도 상당히 복잡한 축에 속해. 5성급이 될 때까지 안 건드리는 마법사들도 엄청 많을걸?

'이 좋은 걸 왜 안 익혀?'

-그러니까 마법의 난이도가.... 아니다. 너한테 말한 내가 잘못이지.

디르엔의 반응에 반쯤 포기한 듯이 말하는 크로노.

하지만 평생을 마법진과 함께한 그에겐 어려움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팟-!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린토넬라의 정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분명히 마법진인 것 같기는 한데,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어?'

그때, 갑자기 디르엔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린토넬라.

순간적으로 숨을 참았지만, 투명화 마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슥-

그리고 역시 기우였다는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쩔 거야?

'당연히 따라가야지. 커블로스의 단서를 얻을 기회잖아?'

-그 행동력을 조금만 몸의 안전에 써 주면 안 될까?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괜찮아.'

-그러니까 내가 안 괜찮....

'놓치겠다.'

슈욱-

린토넬라가 멀어지고 있었기에 디르엔은 대화를 끊으며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를 알 수는 없지만,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찬찬히 뒤를 따를 수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날아가길 약 20분.

앞서 있던 린토넬라가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뭐 하는 거지?'

그가 서 있는 곳은 낮은 절벽 아래의 막힌 길이었다.

그 위의 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광산으로 이어지긴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저기, 간다.

그때, 갑자기 벽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린토넬라.

스윽-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그의 몸이 순식간에 안쪽으로 사라졌다.

'결계 같은 건가?'

-아니, 저건 그냥 환영 마법이야.

'환영?'

-지형 정도만 바꾼 거면 4성급인 것 같은데… 저걸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설명을 잇던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저 마법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그렇게 안 봐도, 환영 마법은 알려 줄 거야. 어차피 습득 난이도는 너한테 문제도 아니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되돌리는 크로노.

조용히 보고 있던 의도가 조금 다르게 전달이 된 듯하다.

물론, 마법진이 궁금하기도 했던 디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린토넬라가 아는 마법도 더 있겠지?'

-지금 그게 문제야? 저놈이 예상보다 더 강하거나, 배후가 따로 있는 걸 경계해야지.

'그런 가정은 수십 개도 더 생각하고 있었어.'

크로노의 잔소리에 담긴 경고는 많고 많은 상황 중 하나에 속할 뿐이다.

애초에 가만히 생각할 시간이 워낙 많았기에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일단 가 볼까.'

슈욱-

지체할 시간은 없었기에 디르엔은 곧바로 벽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 조금 속도를 낮춰 벽에 닿는 순간.

슥-

가볍게 몸이 통과하며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동굴이었네.'

정면으로 쭉 뻗은 동굴의 구조.

딱히 특별한 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좀 더 안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꽤 떨어지고 말았지만, 린토넬라의 뒤를 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걸어가는 거지?'

-뭐가?

'오르막인데, 불편하게 걸어서 가고 있잖아. 아까 투명 마법을 안 쓰고 있던 것도 그렇고.'

-그 마나는 어떻게 감당할 건데? 괴물 같은 네 몸이 이상한 거라고. 전생을 생각해 보면 알 거 아니야.

'아.'

이 몸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잠시 놓쳤던 과거의 감각.

심지어 지금은 개조까지 더해져 남들보다 훨씬 높은 효율로 마법을 쓰고 있다.

일반 마법사와 비교하기엔 궤가 너무 다르겠지.

슈욱-

짧은 반성과 함께 계속해서 나아가길 잠시.

어느새 동굴을 빠져나와 넓은 공간에 도달했다.

주변은 막힌 채 위쪽으로 뚫린 구조였는데, 그 끝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여기, 아까 그 낭떠러지 아니야?

'아마 그런 것 같아.'

동굴을 지나온 시간과 방향을 고려했을 때, 이곳이 광산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확신했다.

하지만 갈림길의 낭떠러지 아래와 이어져 있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팟-!

그때, 멀리 떨어져 있던 린토넬라의 정면에 마법진이 생겼다.

"플라이."

그리고 영창과 함께 위쪽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슈욱-

어쨌든 그가 움직였기에 디르엔은 천천히 뒤를 따랐다.

-길이 왜 이렇게 많아?

'그러니까 여기에 숨었겠지.'

고도를 높이는 사이, 벽면에 뚫린 수많은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라면 무언가를 숨기기엔 가장 적합하다.

탓-

수십 미터 정도를 올라왔을 때, 린토넬라가 우측에 뚫린 동굴의 입구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나가 왜 이래?

조금 시간을 둔 채 동굴로 들어서자 크로노가 불쾌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흑마법이야?'

-잘은 모르겠는데, 저놈한테서 느꼈던 거랑은 비교가 안 돼. 솔직히 역겨울 정도야.

진심이 담긴 그의 말에 디르엔은 멀리서 앞서가는 린토넬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보호 마법을 온몸에 휘감았다.

팟-!

작업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디르엔은 뒤를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다행히 린토넬라가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기에 미행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길이 개판이네.

안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길 약 10분.

처음엔 조금 꺾이는 구조인가 싶었는데, 빙글빙글 도는 길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 외에는 방향을 알 수가 없다.

'어?'

조심스레 길을 나아가던 그때, 막힌 벽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뭐야? 걔는 어디 갔어?

문제는 앞서가던 린토넬라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는 상황.

거리를 둔 채 관찰하던 디르엔은 조심스레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벽면 가까이 근접한 순간.

슈욱-

기이한 느낌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이런 미친....

차마 주변을 살피기도 전에,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속에 깃든 분노의 이유를 곧바로 발견했다.

'....'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넓은 공간에 기괴하게 흩뿌려진 석판들.

각 방향의 벽면엔 철로 만들어진 감옥 수십 개가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천이 대충 덮어진 철창 속에는.

'진짜 미친놈들이었네.'

스물이 넘는 사람들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이 쓰레기들은 변하질 않는다니까.

'흑마법은 원래 인간을 재료로 쓰는 거야?'

-원래가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거야. 그 난리를 떨어도 결과를 못 낸 게 웃기지만.

한심하다는 듯한 그의 말에 디르엔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단은 이 사건의 주범일 린토넬라의 행동을 살펴야....

팟-!

그때, 등을 지고 있던 그의 정면에 생겨난 마법진.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구분이 되진 않았다.

그런데.

"잘 따라오셨군요."

갑자기 이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이상한 말을 해 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정확히 이곳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투명 마법이 풀렸는지 확인해 봐도 이상은 전혀 없다.

-설마, 일부러 데려온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점차 이곳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니, 대강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디르엔 도련님. 모습을 드러내셔도 괜찮습니다."

정확히 이름까지 부르며 대화를 유도하는 린토넬라.

괜한 자극을 할 수도 없었기에 디르엔은 곧바로 마법을 해제했다.

"어떻게 알았어?"

"제 스승께 받은 탐지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설마 4성급 마법을 사용하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경이로운 재능이군요."

당연한 물음에 그는 가벼운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끝에 들려온 한 문장만으로도 정상 범주가 아님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목적이 뭐야? 흑마법으로 글리바스를 멸망시키려는 거야?"

"멸망이라니요? 저는 더러운 커블로스의 범죄를 밝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그 더러운 놈들과 동류로 보지는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지고하신 스승의 사랑으로 근본부터 닦여진 몸이니까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커블로스에 대한 적의가 거짓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 누군데? 글리바스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는 거야?"

"놈들은 생각하시는 것처럼 어둠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법이 필요한 자리를 유려하게 꿰차곤 하지요. 게다가 그자는 이미 도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

그의 대답에 디르엔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저 단서에서 도출해 낼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설마, 셰링엄이야?"

"역시나 바로 답을 찾으시는군요. 무서울 정도로 영민하십니다."

"그럼 블루 스틸은...."

"설마, 그 부분도 파악하신 겁니까."

비리의 소재를 입에 담자 린토넬라가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놀랐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것은 실험의 연막과 자금 조달 역할을 모두 해 주는 중요한 광물입니다. 멍청한 아메프 자작 덕분에 일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지요."

그의 답을 듣는 사이에도 디르엔은 의문점을 찬찬히 정리했다.

상황의 이해와는 별개로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

"물론입니다. 글리바스에 도착하기 전부터 셰링엄과 함께 행동했으니까요. 산 정상에 있는 이 실험장의 제작과 실험 재료의 수급 등 다양한 방면에서 도움을 줬습니다."

"…저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을 도왔다는 말이야?"

"물론입니다. 흑마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재료이니까요."

너무도 당당하게 답하는 린토넬라의 말에 디르엔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꼼꼼히 되짚을 것도 없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커블로스의 죄를 밝히려고 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이런 범죄를 몇 년이나 방치했다고? 노멘의 아이가 실종된 것도 너희 둘의 짓이지?"

"조금 오해가 있으시군요. 이 실험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한부입니다. 대의를 위해 여생을 조금 빌리는 것뿐이지요. 노멘의 아이 또한 약으로 나을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으니 문제는 없습니다."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불쑥 끼어든 크로노의 반응에 디르엔은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도 미친 사람을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방향은 처음이라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야. 네가 해 왔던 행동과 말이 왜 다른지 설명해 봐. 낮에는 내 마법도 숨겼지?"

"흑마법을 모방한 그것을 말씀하시는군요. 누가 알려 준 겁니까?"

"암시장에서 흘러온 책에 적혀 있었어."

"그런 저열한 책이.... 하나 충고 드리자면,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흑마법을 아는 자라면 필시 관심을 가질 테니까요."

"…그래서, 그 마법은 왜 숨겼던 건데?"

"간단합니다. 셰링엄이 당신을 더 경계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지요. 숭고한 계획이 틀어지면 저 또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까요."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네가 바라는 게 뭐야?"

교묘한 대화 수법에 디르엔의 인내심이 조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반응 또한 즐겁다는 듯 린토넬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 목적은 세계까지 닿을 명성을 얻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의 피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겠지요."

"명성?"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셰링엄과 커블로스는 엄청난 파란을 불러올 겁니다. 그리고 그 당사자를 제국에 넘긴다면 저는 크나큰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겠지요."

여전히 혼란한 대화지만, 목적 자체는 분명하다.

어차피 본인이 지은 죄는 숨길 테고, 흑마법사를 가져다 바치면 결과는 분명하겠지.

커블로스의 재등장과 맞물려 퍼진다면 명성은 확실히 얻을 수 있다.

문제는 저 목적의 근원이 무엇인지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명성은 달리 쌓을 수도 있잖아."

"제 스승께선 너무도 고고하고 위대하신 분이기에,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십니다. 고작 커블로스의 등장 따위에 관심을 주실 리가 없지요."

"스승?"

불현듯 등장한 단어와 함께 과거의 기억이 겹쳤다.

글리바스에 온 것이 스승의 고향에서 은혜를 갚기 위함이라 했었는데, 전부 거짓은 아니었던 건가.

고민에 머리를 굴리는 짧은 시간에도 린토넬라는 말을 이어 갔다.

"제게는 스승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신세계가 필요합니다. 긴 서사가 밝혀지면, 제 이름 또한 그분의 귀에 들어가겠지요. 벌써 재회할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줄줄이 말을 뱉는 그의 얼굴엔 황홀함이 가득 차 있었다.

스승을 떠올리는 건 알겠는데, 저것은 뭔가 존경과는 결이 다른 듯하다.

어쨌거나 이해는 절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고작 스승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작?"

그때, 대화를 끊으며 조용히 중얼거리는 린토넬라.

뭔가 싶어 얼굴을 봤는데, 그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지금 고작이라고 했습니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