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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건 누구야?"

"몰라? 그 평민 마법사 있잖아."

성자(星者)의 신전으로 향하는 순례길.

그 끄트머리에 있던 두 남녀 마법사는 구석의 노인을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평민?"

"테르미누스라는 이름 안 들어 봤어? 저 나이에 겨우 4성급밖에 못 간 그 사람."

"테르미누스? 저 노인이?"

마법 학회에서도 유명한 이름을 듣자 여성은 눈을 크게 떴다.

학회에 들어온 지 1년은 넘었지만, 저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구석에 자리를 깔고 산다는 소문이 진실이라 믿어질 정도였다.

"저렇게 늙은 사람이었어? 한 200살은 돼 보이네."

"4성급 마법사가 무슨 200살이야? 70인가 80인가 됐다는 것 같은데. 저런 마나 코어로는 채 1년도 노화를 늦출 수 없다고."

마법사에게 있어 심장과도 같은 마나 코어.

스스로 마나를 생성하며, 그것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긴, 저렇게 오래 노력해도 한계가 있지. 게다가 평민이기까지 하니까."

마나 코어는 선천적인 요소에 크게 기인한다.

귀족과 평민의 핏줄 차이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재능이 한계치를 극명하게 가르는 구조.

그 때문에 평민이면서 역대 최악의 마나 코어를 가진 그는 평생을 바쳐 겨우 4성급에 도달했다.

"어쨌든, 진짜 저 사람이 8성급 마법진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는 거야? 자기는 4성급이면서?"

"불쌍하게 타고난 거지. 쓰지도 못할 마법을 연구는 또 잘하고 있으니."

4성급 마법사는 4성급 마법을 쓰는 것이 한계다.

마나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복잡한 마법진을 이해하는 과정이 극도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르미누스는 유독 마법진의 구조를 해석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본인은 4성급 마법조차 마음대로 사용하기 힘든 마나 코어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학회장님이 직접 데려오셨을 만도 하네. 교수들이 엄청 반대했다면서?"

"뭐, 학회에 평민이 있으면 격이 떨어진다나? 이례적인 일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니, 잠깐. 이르켈 교수는 평민을 싫어하기로 유명하잖아? 그런데 이 순례에 저 노인을 넣었다고?"

"나도 그게 신기해. 능력을 떠나서, 평민에는 진짜 치를 떠는 사람인데...."

성자의 신전으로 향하는 순례는 마법사들에겐 너무도 신성하고, 큰 의미를 갖는 여정이다.

성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 신전에 발을 디디는 것도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을 걸쳐 선발하는 이 순례단에 테르미누스를 집어넣었다.

평민을 생리적으로 혐오하고, 증오하는 이르켈 교수가 말이다.

"쓸모가 있으니까 데려왔겠지. 혹시 이르켈 교수가 시련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자기 연구단도 꽤 많이 데려온 거 아니야?"

"시련은 무슨. 프네우마 님이 성자가 되신 지가 벌써 200년이야.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없던 시련을 갑자기 내리시겠어?"

성자는 보통 선대가 후대를 직접 골라 지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시련은 후보 대상을 가늠하는 방법의 하나인데, 이것이 무조건 성자의 등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 시련의 기회를 받는 것부터가 진정한 시련이지만.

"인정할 만한 그릇이 찾아오면 시련을 내린다고 하셨잖아. 110세에 8성급이면 충분한 거 아니야?"

"대단한 건 맞는데.... 이르켈 교수는 신전에 여러 번 갔었잖아? 시련을 받을 거면 일찍이 받았어야 하지 않나?"

"그릇이 이제야 됐다는 느낌… 은 아니려나."

이르켈 교수가 8성급에 오른 것은 4년 전 여름.

지금 마법 학회장이 130세에 도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하지만 그 성자가 그릇을 일찍이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변화 또한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저 평민을 데려가는 이유는 도대체 뭐야?"

"사실은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해."

"그래? 뭔데?"

"하아, 이거 비밀인데...."

그 질문에 남성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줄였다.

하지만 그 물음을 내심 기다리고 있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8성급 마법진 연구에서 이르켈 교수가 테르미누스에게 진 적이 있거든. 마법진 해석으로 보기 좋게 깨진 거지."

"…뭐?"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여성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고는 강한 의심을 담아 동료에게 되물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게다가 8성급 마법 연구면 기밀인데, 그 결과를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듣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야. 그때, 진짜 살 떨렸다고."

남자는 3년 전, 학회 본부의 소강당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때는 8성급 마법의 연구 발표가 있던 다음 날의 일이었다.

"학회장 놈이 데려온 평민에게 밀렸다는 것이냐? 8성급이 된 네가, 그런 쓰레기한테!"

얼굴이 새빨개져 이르켈 교수에게 소리를 지르는 노인.

교수의 스승이자 부학회장인 그는 타국에서 돌아온 직후, 이곳에 강제로 난입했다.

이르켈 교수의 연구실에 소속된 학자들이 자리한 채였지만, 그걸 신경 쓸 인물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이르켈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학회에 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평민에게 패배한 사실은, 치욕이란 단어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 속에서도 억울함이 뒤섞인 의문이 북받쳤다.

"하지만 놈은 구조의 해석과 이해, 응용 등 모든 면에서 비상식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제가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충분한 대응을...."

"변명은 집어치워라! 네가 그놈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8성급 마법사가 4성급 평민 따위에게 진 것은 역사적인 수치다!"

그의 변명을 끊은 노인은 씩씩대는 숨을 고르며 말을 멈추었다.

그사이 창피함과 분노, 오기가 뒤섞인 이르켈 교수의 눈은 붉게 충혈된 상태였다.

"후우."

잠시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노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음 연구는 내가 하달할 것이니, 최상의 성과를 올려라.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한다."

"예, 스승님. 기필코, 역사에 남을 만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결의가 담긴 다짐과 함께 학회의 연구 전쟁이 시작됐다.

당시의 선언을 증명하듯, 이르켈 교수는 살벌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기까지 노인과 수없이 맞닥뜨려 연구 성과를 겨뤘다.

하지만.

이르켈이 평민 노인을 이기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잠깐, 그럼 진짜? 진짜로 저 평민이 더 좋은 연구 결과를 냈다고?"

마법진을 해석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론에 그치는 것이 보통이다.

4성급과 8성급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수천, 수만 개가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그녀였기에 이 사실은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 이거 절대 남한테 말하지 마. 들켰다간 진짜 이르켈 교수한테 죽을 것 같으니까."

"와… 이건 충격이네. 솔직히 나 같아도 절대 들키기 싫을 거야."

"그러니까, 우린 조용히 있으면 돼. 난 그냥 신전을 내 눈으로 보고 프네우마 님의 존안을 뵙는 것으로 만족하니까."

"하긴. 시련이든 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아, 저기 보인다!"

그런 대화를 이어 가는 사이, 대열의 너머로 아름다운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아름다워...."

마치 마나로 지어진 듯 영롱한 푸른색을 띤 건물.

전체가 보이지도 않는 위치임에도 마법사들은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이동한다."

하지만 선두에 있던 교수, 이르켈은 덤덤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 위치에서 신전까지는 멀지 않았기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전의 관리자인 쿠르파라 합니다."

입구의 계단을 오르자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르켈 님은 벌써 세 번째 방문이시군요."

"…성자께선 자리에 계시나?"

"각국에서 온 서신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첫 방문자들이 대부분이시니, 알현 전까지 제가 신전의 안내를 맡도록 하지요."

"그럼 나는 잠시 바깥에서 경치를 구경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익숙한 듯한 두 사람의 대화가 진행된 후, 순례단은 쿠르파의 안내에 따라 신전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너는 여기다."

마지막으로 들어가려던 테르미누스는 이르켈의 말에 발을 멈췄다.

"…저는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까?"

"네놈 따위를 데려온 이유가 있으니, 따라와라."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그는 신전의 옆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르미누스는 아쉬운 듯 신전을 바라봤지만, 이내 무거운 다리를 이끌며 그 뒤를 따랐다.

"이곳은...."

커다란 신전의 벽면을 걷다 도착한 중앙.

그곳엔 지하로 이어지는 것 같은 계단이 나 있었다.

"따라와라."

앞장서 내려가는 이르켈의 모습에 테르미누스는 삐걱대는 무릎을 붙잡으며 천천히 발을 디뎠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잔말 말고 따라라. 네놈이 발광하는 마법진이 있는 곳이니."

"정말이십니까?"

마법진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기뻐하는 테르미누스.

신전에 있는 마법진이라면 완전히 새롭고, 특이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

그 모습을 본 이르켈의 시선이 노인에게 잠깐 닿았다.

평소 같았으면 매도와 힐난을 던졌겠지만, 그는 조용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열어라. 내부의 마나가 흐트러질 수 있으니, 마법의 사용은 금한다."

"예!"

끝에 도착한 그는 가로막힌 하얀색 문을 턱짓하며 지시했다.

그러자 테르미누스는 소매를 걷으며 앙상한 두 팔로 문을 밀어젖혔다.

"흡!"

끼긱-

헛발질할 정도로 힘을 주자 겨우 들썩이는 문.

하지만 이 안에 마법진이 있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읍!"

끼이익-

다시 한번 기합과 함께 힘을 주자 이번엔 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혼신의 과정이 몇 번이나 반복된 후.

"허억… 허억...."

마침내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확보됐다.

"와라."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르켈은 당연하다는 듯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후우...."

테르미누스의 체력은 거의 한계가 됐지만, 겨우 숨을 고르며 그 뒤를 따랐다.

문을 넘어서자 한눈에 들어온 내부의 공간.

"...."

그제야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 테르미누스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다른 것보다 벽면에 그려진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의 시선을 강탈했기 때문이다.

"이쪽이다."

그런 테르미누스의 반응과 달리 이르켈은 좀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네가 볼 마법진은 이것이다."

그의 발이 멈춘 곳은 작은 제단 앞.

가까이 다가가니 그 위에 그려진 작은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꼼꼼히 구조를 파악해라."

"알겠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작업 지시에 테르미누스는 달려들듯 마법진에 붙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복잡할 수가 있다니.... 성급조차 나타나지 않는 건가? 이쪽은 마나의 순환을 보조하는… 아니, 내부 문양이 여기로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가 중얼거리며 분석을 시작한 사이, 이르켈은 조금씩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에 보호 마법을 걸었지만, 마법진에 몰두한 노인이 눈치챌 리가 없었다.

2.

"어떻지?"

"아무래도 이중 마법진인 듯합니다. 상당히 세밀하고, 복잡한 구조로 별개의 마법을 표하고 있는...."

이르켈의 짧은 물음에 테르미누스는 중얼거리며 감상을 이어 갔다.

질리는 그 반응을 무시한 이르켈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안쪽은 아직 살펴봐야 하지만, 바깥의 마법진은 이런 구조입니다. 정석과는 달라도 결계와 신호의 기능을 가진 구조라 생각됩니다."

팟-!

그의 물음에 테르미누스는 허공으로 손을 가져가더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

세심하게 모양이 잡혀 가는 마법진을 보며 이르켈은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로 어이가 없군.'

이 방은 성자가 마법의 정수, 폰스를 후대에게 전승할 때 사용하는 방이다.

두 번째 순례에서 우연히 이곳을 찾았던 이르켈은 이 공간의 마법진을 모두 살폈다.

벽면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방어와 공격을 위한 구조.

하지만 제단 위의 저것은 너무도 세밀한 구조와 기분이 나쁠 정도의 복잡함을 띠고 있었다.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구조를 베껴 오지도 못했지만, 그는 이미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은 저 마법진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마법진을 살피게 해 주시다니. 얼른 내부의 구조도 파악해 보겠습니다."

뿌득-

그런데 저 평민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구조의 해석에 성공했다.

이중 구조라는 것은 얼핏 알았지만, 저것을 따로 떼어 내는 행위는 너무도 오만한 재능이다.

쓰레기 같은 마나 코어밖에 없는 평민 주제에 매번 이렇게 자신을 능욕한다.

'그놈들에게도 진가를 보여 줘야 하겠지.'

테르미누스와 비교하며 자신을 비웃던 경쟁자들의 얼굴이 머리를 빙빙 맴돌았다.

하지만 이 순례를 끝내고 돌아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학자들과 교수, 학회장, 스승까지 자신을 추앙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아."

그런 생각에 빠진 사이, 테르미누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별개의 구조와 달리, 겹쳐 그려진 부분은 눈으로 살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첫 번째 마법진을 사용해 벗겨 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곤란한 듯한 저 말의 의미를 이르켈은 알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보다 윗급에 해당하기에 곤란하다는 뜻이다.

"올려라."

"…예, 예?"

"잔말 말고 올리라 했다."

이르켈의 명령에 테르미누스는 순간적인 고민에 빠졌다.

성자의 신전에서 멋대로 마법진을 발동한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시없을 기회 앞에서 학자로서의 욕심이 이성을 이기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테르미누스는 허공의 마법진을 그대로 제단 위에 가져다 댔다.

슈욱-

그러자 가까이 다가와 손을 대는 이르켈.

우웅-

형태를 따라 마나를 흘리니 반응을 보이듯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오, 오오...."

테르미누스의 감탄과 함께 겹쳐 그렸던 마법진의 형태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게 의식을 위한 마법진인가.'

겉의 구조가 완전히 사라지자 모습을 드러낸 마법진.

겹치지 않은 덕에 이르켈 또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흠, 옮기는 기능인 것인가."

"그렇습니다. 공간 전체를 표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곳에 담긴 무언가를 후대 성자에게 전수하는 마법인 듯합니다. 아마 폰스를 매개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내뱉자 곧바로 테르미누스가 동조해 왔다.

마법의 정수라 불리는 폰스.

성자의 자리에 오른 자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마법 지식의 결정체다.

아마 이 마법진은 폰스를 후대에게 넘길 때 함께 사용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

거기까지 이어지던 테르미누스의 생각이 끊겼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정면의 마법사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르켈 교수님?"

아까부터 입을 다문 채 마법진을 응시하는 이르켈.

미묘한 분위기에 노인은 의아한 듯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팟-!

갑자기 이르켈이 내부의 마법진에 손을 댔다.

"잠깐, 이 마법진을 그냥 사용하시면...!"

"비켜라."

우웅-

테르미누스의 만류에도 계속해서 마나를 쏟는 이르켈.

이것은 아까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위 마법진이다.

심지어 폰스와 함께 사용해야 할 마법을 저렇게 사용한다면 정상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쿠궁-!

그때, 갑자기 흔들리는 공간.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핏-!

"크윽!"

벽면 어딘가에서 쏘아진 마법이 테르미누스의 팔을 꿰뚫었다.

팟-!

"스톤 월!"

주변의 점등이 이어짐과 동시에 사용한 마법.

쾅-!

투둑-

하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법을 막기에는 역부족했다.

"이르켈 교...."

마지막 희망을 찾아 고개를 돌린 제단.

하지만 이미 사라진 마법진에서 손을 뗀 이르켈은 처음 보는 보호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스륵-

"하하! 이리도 간단한 것을!"

몸에 닿기도 전에 분해되는 마법을 보며 광인처럼 소리치는 이르켈.

그 모습에 테르미누스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나는 성자가 될 그릇이다! 폰스가 없어도 이렇게 힘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지!"

쾅-!

콰광-!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법.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몸을 돌려 출구 쪽으로 향했다.

"교, 교수님!"

호소하듯 외친 말에 이르켈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만 슬쩍 돌려 무자비한 말을 내뱉었다.

"평민의 쓸모는 딱 거기까지다. 네놈이 평생 힘써 온 연구는 이 순간의 나를 위함이었지."

"이...!"

"적어도 신전을 침입한 최초의 평민으로서 기록해 주마. 이제 목숨을...."

팟-!

그때,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 이르켈의 몸.

"무슨… 커헉...!"

그러고는 자신의 몸을 감싸며 팔다리를 비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기괴했던 탓에 화가 났던 테르미누스도 본능적으로 멀어졌다.

"으으… 아아악...!"

팟-!

그의 비명과 동시에 몸 주변에서 생성되는 수십 개의 마법진.

처음 보는 구조들이 시야를 뒤덮었지만, 그것을 살필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슈욱-!

퍼버벙-!

"크억!"

저 마법을 전혀 제어할 수 없는 듯 고통스러워하는 이르켈.

푸슉-!

심지어 벽면의 공격까지 가중되는 상황이었기에 테르미누스는 빠르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온갖 마법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이 공간에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네놈은 내가...!"

그때, 뒤집힌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르켈.

퍼벙-!

"커헉-!"

의지가 섞인 것인지 그에게서 나온 마법이 테르미누스에게 향했다.

"이대로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는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결심을 굳힌 채 공격을 시작했다.

"파이어 버스트!"

"프로즌 오브!"

자신의 한계인 4성급 마법까지 동원된 혼신의 반격.

평소라면 통하지 않아도 저렇게 불완전한 상태라면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나태한 생각은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콰과광-!

"커헉!"

그의 공격을 뚫으며 날아온 수십 개의 마법.

그 하나하나가 너무도 강력했던 탓에 테르미누스는 한순간도 버티지 못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그는 겨우 고개만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생채기 하나 없는 몸으로 기괴하게 다가오는 이르켈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도… 닿지 못한 것인가...."

평민으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최악의 마나 코어로 평생을 한계와 부딪혀 왔다.

8성급 마법진을 연구하고 있음에도 4성급의 마법에 허덕여야 하는 저주받은 몸.

하지만 끝자락에 다다른 그의 마음은 한 가지 행동에 도달했다.

팟-!

겨우 들어 올린 손 너머로 서서히 새어 나가는 마나.

겨우 시선을 다잡자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그려지는 거대한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파지직-

"아름답구나...."

비록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8성급 마법진은 점점 구조를 다잡아 갔다.

죽음을 담보로 해도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지만, 지금은 죽음의 너머까지도 내어 줄 마음이다.

쉬익-!

콰드드-!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몸을 난도질하는 공격들.

하지만 이미 감각이 없어진 테르미누스는 온전히 자신의 마법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법진이 형태를 갖춘 순간.

"헬파이어."

자신까지 삼켜 낼 인생의 마지막 마법을 사용했다.

화악-!

퍼버벙-!

온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붉은 화염이 공간을 뒤덮었다.

"으아악!"

이제 한쪽 눈만을 겨우 뜬 그는 정면에서 불타고 있는 이르켈을 바라봤다.

마법으로는 평생을 닿지 못한 8성급 마법사.

하지만 온몸이 부서지는 대가로 사용한 최후의 마법은 모든 것을 불태웠다.

스스로가 만든 이 아름다운 마법과 함께 죽는다면 여한이 없다.

"만족하느냐?"

그때, 갑자기 위쪽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주인을 찾아 겨우 눈을 돌리자 누군가가 정면에 내려앉았다.

"당… 신은...."

"성자, 프네우마다."

그가 자세를 낮추자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젊은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초상화에서 질릴 정도로 마주했던 최고의 마법사, 성자 프네우마.

그 위인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수고를 덜었군."

프네우마가 시선을 돌린 뒤쪽엔 이르켈이었던 검은 재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전부… 보고 계셨던… 쿨럭!"

말을 이어 가던 테르미누스의 입에서 붉은 핏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목숨으로도 모자라, 이곳의 마나까지 죄다 써 버렸나."

"그게 무슨… 쿨럭!"

계속해서 쏟아지는 피에 말조차 이어 갈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테르미누스의 눈은 성자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억울한가?"

그리고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프네우마가 나지막이 물어 왔다.

하지만 당장 억울함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다.

"아직… 더… 많은… 마법을...."

"그런가."

너무도 단순한 열망에 프네우마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테르미누스의 얼굴 앞에 펼쳤다.

"보아라."

"...?"

파앗-!

순간, 손바닥 위에 생겨난 푸른색의 영롱한 육면체 큐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 신비로운 물건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이, 이건...."

"그래. 이것이 마법의 정수, 폰스다."

바닥에 엎어진 채 고개만 간신히 들고 있지만, 테르미누스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빛났다.

"아, 아아...."

숨이 꺼져 가는 사이에도 그는 위대한 마법의 정수에 매료됐다.

평생 눈에 담을 수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영험한 존재와 마주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스르륵-

그때, 갑자기 큐브에서 빠져나온 초록색 빛줄기.

느릿한 속도로 나선을 그리던 빛은 그대로 테르미누스에게 닿았다.

"같은 뜻이라는 것인가."

그것을 보던 프네우마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폰스의 의지는 성자인 그 또한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빛줄기가 더욱 강해지는 사이, 그가 자세를 낮춰 노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네 어깨는 조금 더 무거워지겠구나."

"...?"

의미 불명의 말에 테르미누스는 시선만을 그에게 고정했다.

하지만 이제 그 초점마저 제대로 붙잡기 어려운 상태다.

상황을 인지하고 있던 프네우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폰스를 찾아라. 모든 답은 그것에 담겨 있으니."

"그게… 무… 슨...."

여전한 의문이 휘몰아치는 사이, 테르미누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툭-

그리고 옅어지는 목숨을 보던 프네우마는 조용히 푸른 수정을 노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부디, 그곳에서 닿길 바라지."

파앗-!

강렬한 빛과 함께 테르미누스의 몸이 사라졌다.

3.

"하아...."

카이사르 제국, 루블린 공작가의 저택.

그 지하 구석방에선 마법사 아르델의 한숨이 크게 울렸다.

"미치겠네, 정말."

그의 시야는 아래에 놓인 작은 침대 위로 닿았다.

그곳엔 힘겹게 옅은 숨을 내뱉고 있는 갓난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기구하기도 하지."

일이 일어난 것은 일주일 전 저녁.

그날은 공작의 첫째 부인과 공작의 성은을 받은 이름 모를 평민 여성이 저택에서 출산을 준비 중이었다.

하필 공작은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기에 첫째 부인은 평민과 아이를 지하로 데려가 출산하기를 명했다.

혹시나 저택 내에 퍼질 목소리가 불쾌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치료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까지도 그녀의 독차지였다.

"그대로 죽어 버릴 줄을 누가 알았냐고...."

당시 옆에서 출산을 도왔던 이들은 단 두 명.

그중 자신이 포함됐던 것은 평민 출신의 마법사였던 탓이다.

어쨌든 맡은 바 임무가 있기에 그는 조산사를 도와 출산을 진행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시간이 길어지고, 어머니와 아이 모두 위험한 상황이 됐다.

"제… 발, 아이만은… 으윽!"

생명의 끝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아이를 걱정하던 평민 여성.

그 의지에 두 사람 모두 땀을 뻘뻘 흘리며 모든 노력을 쏟았지만, 결국 어머니를 살리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숨마저 희미하게 꺼져 가고 있으니 죄책감이 목을 옥죄는 듯했다.

그런데.

"쓸모가 없으면 죽게 두어라."

다음 날, 이 보고를 들은 루블린 공작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런 명령을 내렸다.

마법 명가인 이 루블린가에서 쓸모가 없다는 말은 재능의 유무를 뜻한다.

어머니는 평민에 불과했으니, 그쪽으로는 크게 기대할 수 없는 노릇.

결국 공작 자신의 피를 얼마나 진하게 받았는지 판독하라는 것이다.

"…어림도 없지."

영아 때의 마나 코어는 불안정하기에, 새어 나간 마나가 잔상을 만든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이 아이의 것은 평균보다도 작고, 나약했다.

역시 부모가 모두 고위 귀족인 형제들이 비해 '쓸모'를 주장하긴 어려운 것이다.

"미안하다.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힘겹게 숨을 뱉는 아이에게 사과를 건네는 아르델이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참회이기도 했다.

죽어 가는 아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함은 고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웅-

"...?"

그런 우울감에 빠진 사이, 묘하게 바뀐 공기의 흐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뭐지?"

혹시 몰라 보호 마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주변은 너무도 고요했다.

하지만 불안이 가시지 않았기에 아르델은 아이를 대피시키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파앗-!

"윽!"

갑자기 엄청난 빛이 눈앞에서 뿜어졌다.

후웅-!

사고, 암살 등 온갖 가능성을 예측한 아르델은 곧장 보호를 위해 바람 마법을 시전했다.

일단 아이가 있던 자리를 결계로 씌워 지키는....

"...?"

그때, 점차 빛이 걷히며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던 아르델이 아이를 찾아 바라본 정면엔.

"이게 무슨...."

일평생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마나의 잔상이 펼쳐져 있었다.

***

'…어이가 없네.'

루블린 공작가의 저택, 3층.

그곳의 중앙에 있는 방엔 갓난아이, 테르미누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인의 몸으로 죽어 가던 자신이었기에 괴리감이 격렬했다.

"우으...."

입을 열어도 말 한마디조차 나오지 않는 현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지?'

조금 전 자신을 덮친 의미 불명의 마법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묘했다.

물론 그걸 시행한 개체를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법도 했지만, 테르미누스는 아니었다.

'시간을 건드린 게 아니라, 영을 이송하는 마법인가? 영혼을 옮길 정도의 마법진이면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복잡할 것 같은데.'

환생이라는 기이한 현상보다도 마법의 원리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디르엔 도련님,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아까부터 머리맡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한 여성의 태도는 현실을 자각시키는 듯했다.

'말이 통하는 건 다행인데.'

우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어를 들어 보니 전생의 것과 거의 똑같았다.

어쨌든 여성이 젖을 물리려는 걸 보니 유모인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노인이었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아이고, 잘 드시네. 배가 엄청 고프셨나 봐요."

"아으아."

그런 내적 갈등과 달리 열심히 목으로 넘어가는 식사는 생존 본능을 일컫게 했다.

아니, 애초에 거절할 힘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보자.'

생각보다 안락한 상태였기에 테르미누스… 아니, 디르엔은 지금까지의 짧은 일들을 떠올렸다.

처음 눈을 뜬 곳은 딱 봐도 허름한 지하의 방.

그곳에선 눈을 크게 뜬 한 남성과 마주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안아 들고 달려가더니, 딱 봐도 귀족같이 보이는 사람과 대면했다.

"공작 각하! 갑작스레 죄송...."

"루블린가의 여섯 번째 아들로 받아들일 것이니, 일원들에게 모두 알려라. 그 아이의 이름은 디르엔이다."

보고를 채 듣기도 전에 그런 말을 내뱉은 남성.

검푸른 머리칼과 차가운 인상, 고급스러운 옷차림은 귀족 그 자체였다.

아버지라는 것은 알겠지만, 전생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좋은 감정이 생길 수가 없다.

심지어 공작 정도로 고위 귀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명 받들겠습니다!"

어쨌든 자신을 데려온 남성이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기에 시비를 걸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애초에 걸 방법도 없었지만.

"후우우… 너무 노려보셔서 잘못되는 줄 알았네."

문을 닫고 나온 남성은 자신을 안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걸 보니 상당히 긴장했던 듯하다.

'그러고 보니....'

안겨 있는 상태라 조금 버거웠지만, 그 공작이 자신을 노려보던 건 분명히 기억한다.

아마 이 몸은 꽤 달갑지 않은 아이라는 것이었을까.

"꺼억."

그런 회상을 하는 사이, 작게 흘러나온 트림.

어느새 수유를 끝낸 유모가 자신의 등을 두들기고 있었다.

"잘하셨어요, 도련님. 어쩜 이리 울지도 않고 착하실까."

자신을 안은 채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유모지만, 디르엔의 심정은 미묘했다.

어쨌든 호의적이라면 다행이니, 당장은 상황 파악을....

토닥- 토닥-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등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한 유모.

문제는 그것에 반응하듯 미친 듯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니, 안 돼. 지금은 상황 파악을....'

토닥- 토닥-

'파악을....'

물리적인 한계를 넘으려 온 정신을 집중했지만, 토닥이는 박자에 맞춰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결국.

"아이고, 요정같이도 잠드셨네."

유모의 품에 안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1년 뒤, 루블린 공작가 저택 3층의 어느 방.

"도련님,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응."

훌쩍 몸이 자란 디르엔은 유모가 건넨 젖병을 받아 든 채 입에 물었다.

아직은 신체 구조상 말을 유려하게 할 수 없지만, 의사 표현은 충분한 수준이 됐다.

물론, 너무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적당히 조절한 것도 있었다.

"오늘은 조금 더 달게 만들었어요. 괜찮으세요?"

"응, 앤느. 맛있어."

"어머, 지금 제 이름을 불러 주신 거예요? 세상에...."

디르엔의 대답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유모, 앤느.

언제나 전폭적인 사랑을 보여 주는 이 여성에겐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애초에 이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나름대로 감사를 표한 것인데.

"천재이신가 봐!"

아무래도 이건 조금 빨랐던 듯하다.

"나, 우유...."

"공작 각하께 바로 보고해야 하겠죠? 아르델이 오면 빨리 논의해 보는 게 좋겠어요."

젖병을 물지 못할 정도로 뺨을 비비는 그녀를 보니, 말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교육인가.'

루블린 공작가의 여섯 번째 아들.

하지만 이 몸이 정상적인 직계가 아니라는 것은 자연스레 알게 됐다.

애초에 유모가 혼잣말을 많이 해 준 덕에 꽤 정보가 많이 쌓인 것이다.

'고위 귀족 놈들은 죄다 난봉꾼들인가.'

현재 루블린 공작의 아내는 넷.

슬하에는 아들이 여섯, 딸이 넷이나 있다.

그들의 어머니 또한 모두 고위 귀족이기에 사실상 자신만 외딴섬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사기잖아.'

지금 자신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강한 마나 코어의 기운.

공작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강렬했다.

전생의 어린 테르미누스와 비교하면 개미와 거인의 차이라 기분이 미묘하다.

파직-

생후 12개월의 몸으로 발생시킨 작은 마력의 충돌.

이 마나 운용 훈련은 디르엔이 됐던 1년 전 그날부터 몰래 시행해 왔다.

마나 코어의 성장과 한계치의 탄력성은 나이가 어릴수록 높은 상승 폭을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자신의 지식대로 마나가 운용되는 것을 보니 확신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네.'

테르미누스의 몸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

지금의 지식을 그대로 가져갔어도 최소 7살은 돼야 마력의 흔적을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거였다니....'

타고난 재능의 한계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노력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 느끼고 나니 억울할 정도로 잘 알 수 있었다.

'이런 차이는 너무하잖아...!'

팟-!

그때, 갑작스러운 분노와 함께 몸에서 분출되는 푸른빛.

하지만 디르엔 자신보다도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슈우욱-

"도, 도련님!"

"어?"

앤느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빛은 위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뜬금없는 상황과 달리 디르엔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나 코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 중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순간.

전생에선 경험은 물론이고,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일이다.

그런 생각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길 잠시.

슈욱-

어느새 위로 떠오른 푸른빛이 밀도를 높이며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팟-!

그리고 한 번 더 빛이 반짝인 뒤 올려다본 머리 위엔.

"와...."

사람만 한 커다란 푸른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이, 이건...! 아르델!"

입을 막은 채 서 있던 앤느는 평민 마법사의 이름을 외치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진짜 어이가 없네.'

개화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마나 코어의 잠재적 각성으로 인해 나타난다.

정확히는 그 때문에 발생한 마나의 격류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상징물이 되기엔 충분하다.

이 세계에도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통계상 개화를 경험하는 기회는 소수점까지 떨어진다고 하니까.

게다가.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눈앞에 둥실거리고 있는 네모난 판.

뭔가 마법진과 비슷한 느낌인데, 전생의 글자가 쓰여 있다.

'개화가 이런 거였나?'

슈욱-

영문 모를 물체에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가볍게 통과했다.

뭔가를 하는 것 같으니 놔두는 게 맞는 걸까.

"디르엔 도련님!"

그때,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한 젊은 남성.

눈을 크게 뜬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저자는 마법사 아르델이다.

"저, 정말 개화라니...."

말을 더듬으며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걸 보니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비켜라."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너무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고 말았다.

"고, 공작 각하!"

"어떻게 여기까지...."

저택의 주인이 등장한 탓에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뜬 채 뒷걸음질 쳤다.

저 작은 움직임에서도 그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히 전해졌다.

"…기이한 마나가 이것이었군."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공작의 눈은 디르엔에게 고정돼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개화한 분은 디르엔 도련님이 처음이십니다. 그 황실에서도...."

"혀가 잘리고 싶나? 주제넘게 황실을 입에 담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아르델의 섣부른 말에 곧장 날카로운 경고를 던지는 공작.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황실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개화는 그저 재능의 싹이 있음을 알려 주는 것뿐이다. 그것이 꽃이 될지, 시들어 죽어 버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

"…물론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디르엔 도련님의 재능은 확실합니다. 아마 제르노 마법 학원에서도 충분히 두각을 보이실 것입니다."

"꽤나 애정을 붙이고 있군. 목숨을 살려 냈더니, 네놈이 아비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나?"

"그, 그것이 아니오라...."

아르델의 말에 날이 선 목소리를 내는 공작.

하지만 디르엔의 관심은 튀어나온 한 단어에 고정됐다.

'제르노 마법 학원?'

당연히 전생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새로운 마법.

새로운 이론.

새로운 연구.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이곳은 엄연히 다른 세계다.

그에게 새로운 마법의 지평을 열어 줄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귀족들을 위한 마법 학원에선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기대감이 한계치에 달했다.

"학원!"

그런 마음에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단어.

상황이 영 좋지 않은 와중이었기에 디르엔은 조심스레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루블린의 피를 이었다면 그래야지. 상승 욕구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갑자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왔다.

아니, 이제 12개월 된 아이에게 저게 무슨 소리일까.

"좋다. 10살이 되는 해부터 마르코와 함께 교육을 시작할 것이니, 필요한 기초를 준비시켜라. 그리고 디르엔의 개화는 지시가 있기 전까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그런 말을 끝으로 곧장 문을 나서는 공작.

공작 가문이라면 더 일찍 시작해도 이상하진 않지만, 정해진 계획이 있으면 문제는 없다.

개화한 일을 함구하는 것은 다른 자식들과의 충돌을 막기 위함이겠지.

'마르코라면… 같은 날에 태어난 아이인가.'

첫째 부인의 아들은 자신과 같은 날, 조금 이른 시각에 태어났다고 들었다.

유모가 형제라고는 했지만, 정실과 첩의 자식은 너무도 먼 거리겠지.

띠링-

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이상한 소음.

정면을 보니 아까의 그 네모난 판 속에 몇 개의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일부를 제외한 마법진의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전생의 지식 이전에 성공했습니다.]

[기능 '개조'가 개방되었습니다.]

[마법진을 등록 시, 자동으로 분석을 시작합니다.]

4.

'뭐야, 이게?'

뜬금없는 문장에 디르엔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개화와 함께 나타났던 네모난 창.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가 등장했다.

'전생의 지식?'

이 세계에서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확한 표현이 나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밖에 안 보이는 것 같기는 한데.'

앤느와 아르델은 여전히 옆에 있지만, 이 반투명한 판엔 관심이 없다.

루블린 공작마저 다녀간 상황이니 마나로 감지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설마 폰스의 힘 때문에 생긴 무언가일까.

[마법진을 등록 시, 자동으로 분석을 시작합니다.]

온갖 가능성을 추측하는 사이, 눈앞의 한 문장이 다시금 시선을 끌었다.

이것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마법진이라는 단어.

심지어 전생과 연결 지을 수 있다면 마법의 정진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슥-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던 디르엔은 이불을 덮고, 허공의 판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나 코어의 훈련으로 1성급에 도달한 것은 3개월 전.

아르델의 마법을 관찰한 결과, 이곳의 마법진은 전생의 것과 기본 구조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새로웠어도 즐거웠겠지만, 전생에서 체득한 마법 지식 또한 디르엔의 소중한 자산이다.

'등록은 어떻게....'

띠링-

그런 생각을 함과 동시에 울리는 이상한 소리.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판 속의 글자가 또 변해 있었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등록 마법:파이어 볼트(1성급)]

[분석 결과:개조 가능]

[개조 범위:8.6퍼센트]

[지식에 기반한 자동 개조가 시작됩니다.]

파앗-!

그런 메시지와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한 마법진 속의 문자와 문양.

하지만 이 상황은 디르엔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진짜 개조를 한다고?'

마법진을 개조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윤곽선을 조금만 틀어 버리는 것만으로도 마법진의 구성에 실패하는 것이 다반사.

수십, 수백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수만 번까지도 시도해 가며 맞는 길을 찾아야 한다.

심지어 이런 저급 마법에서는 극악의 효율을 보이기에 전생에서조차도 최소한의 약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스슥-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다는 듯, 조금씩 수정이 되는 마법진.

그것을 지켜보던 디르엔의 눈에 무언가가 밟혔다.

'잠깐, 그거보다는 이게 더 나아.'

평생 마법진을 연구했던 경험 때문일까.

시도와 실험에 뛰어들던 감각이 자연스레 손을 먼저 움직였다.

띠링-

[수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어?'

스윽-

마법진을 건드리자 떠오른 한 문장.

잠깐 고민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니 마법진의 작은 부분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원하는 대로 개조를 이어 가는 사이, 몇 번의 실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마법진은 마치 보조를 하듯 그 부분들을 맞춰 미세하게 수정하기 시작했다.

의견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방향을 함께 찾아 주는 느낌이라 디르엔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홀로 연구했는데....'

재능의 전유물인 마법에 뛰어들어 수십 년을 외로이 걸었던 나날.

그런 그가, 지금은 공작가의 아이가 되어 마법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

그 대단한 성자조차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개조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런 감상에 젖은 사이, 어느새 마법진의 구성이 완료됐다.

다시 뜯어봐도 깔끔하고, 아름다운 구조.

여긴 이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까지 모두 반영된 탓에 감격에 빠질 수준이다.

물론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실제로 시현을 해 보는 것이....

띠링-

그때, 갑자기 귀를 울리는 소리.

마법진에서 눈을 뗀 그는 판에 적힌 문장들로 시선을 돌렸다.

[개조 마법:파이어 볼트(1성급)]

[작은 화구를 날려 폭발시킨다.]

[개조 결과]

마나 소모량 -11.3퍼센트

크기 +20.5퍼센트

사거리 +12.2퍼센트

사출 속도 +18.5퍼센트

폭발 강도 +15.7퍼센트

폭발 범위 +13.5퍼센트

'어이가 없네.'

당연히 방향성을 생각하며 개조를 진행했지만, 이런 세부적인 결과표가 나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예상했던 것보다 수치들이 최상으로 높아져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겨우 8.6퍼센트의 개조로 이 정도라니! 다른 마법진의 개조도 빠르게 시작하고 싶어져 몸이 근질거렸다.

"어머, 도련님, 그렇게 계시면 큰일 날 수도 있어요. 얼른 나오세요."

곧장 작업에 들어가려는 사이, 앤느가 이불을 열어젖혔다.

아무래도 이런 대낮에는 눈에 띄지 않기가 어려울 듯하다.

한동안은 밤중을 이용하는 편이 좋겠지.

그렇다면.

"앤느."

"네, 도련님."

당장 대놓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던 디르엔은 유모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 책 줘!"

***

"음."

8년 뒤, 루블린 공작가의 저택 3층.

10살이 된 디르엔은 책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주변에 흩어진 산더미 같은 서적이 그의 공부량을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글을 배우는 데 꽤 걸렸지.'

호기롭게 책을 달라고 했던 그날, 디르엔은 이곳의 문자가 전생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법진을 이루는 고대 문자가 똑같았던 탓에 미묘한 충격이 있었다.

어쨌든 앤느와 아르델 덕분에 문자는 빠른 속도로 익혔지만, 거의 1년간은 동화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종족>

지금 그가 읽고 있는 것은 세계의 다양한 종족을 정리한 책이다.

사실 마법 서적만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교육을 받기 전엔 접근이 불가하다는 절망적인 통보를 받았다.

아르델에게 질문해도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이라, 책으로는 다른 지식을 채워 가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 와중에도 즐겁게 익힐 수 있었던 건 처음 접하는 것들이 많아서였겠지.

'다른 종족이라....'

여태껏 읽었던 책에도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것은 이 서적이 처음이었다.

전생에선 인간만이 존재했었기에 다양한 종족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족이라 불리는 종족.

마법과 육체 등 다양한 요소에서 강한 재능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식 자체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어둠의 신, 프레첼로가 만든 마계의 차원은 강대한 악의 정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특징을 일부 이어받은 마족은 마계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

신화에 남은 차원 전쟁에서 마계의 세력은 인간을 잔인하게 살육했다.

그 때문에 마족과의 충돌이 잦았지만, 근래에는 비교적 평범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디르엔에게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아르델, 마족이 제일 강해?"

"마족 말씀이십니까?"

젊은 마법사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는 자세를 낮추며 책을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평균적으로 가장 강한 종족임은 확실합니다. 그곳은 농민까지도 전쟁에 투입될 정도니까요."

"그럼 마족들이 공격하면 우리는 지는 거야?"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 것은 한참 예전이라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군요. 애초에 마족은 인구수가 적어서 전체적인 우위를 비교하기는 조금 애매합니다. 지금은 마대륙에도 여러 종족이 흘러들어 간 탓에 더 비교가 어렵겠네요."

그의 답에 디르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력이 비슷한 상황이라면 일방적인 침략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즉, 자신의 마법 정진에 방해가 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마족의 본거지로 가서 그들의 마법을 연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때, 책의 중반부에 나타난 한 구절에서 디르엔의 눈이 멈췄다.

<빛의 신 아체시오는 별의 기원에서 폰스를 떼었다. 그리고 그것을 태초의 성자에게 주어, 마법을 널리 알리라 명했다. 그 제자 중 하나가 이 세계에 도착했으니, 그가 바로 초대 성자 라스제노다.>

성자에 관한 이야기는 꽤 다양한 책에서 서술됐다.

전생의 마법 역사에는 단순히 성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서술되어 있어, 새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폰스는 언제나 먼 과거의 시점에서만 부가적으로 나타날 뿐이었다.

당시에는 똑같은 명칭을 확인하고 곧바로 질문을 던졌지만.

'폰스는 신화에 존재하던 물건이잖아요? 인간들의 세계에 있을 리가 없죠.'

이런 단호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없을 리가 없지.'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세계에 폰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여전히 프네우마의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폰스를 찾아라. 모든 답은 그것에 담겨 있으니.'

전생과 다른 세상이지만, 폰스는 존재한다.

직접 눈으로 마주하고 몸으로 겪었던 마법의 정수.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한 번 더 그것에 닿고 싶어졌다.

프네우마가 자신을 이 세계에 보낸 이유 또한 알 수 있을 테니.

"도련님, 시간 됐어요."

그때, 한쪽에서 옷을 챙기고 있던 앤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디르엔의 평상복을 벗겨 활동복으로 갈아입혔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다른 형제분들과 그 하인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솔직히 어떤 행동을 해 올지 저도 알 수가 없으니까요."

"응. 알고 있어. 조심해서 눈에 안 띄고, 가만히 있을게."

"...."

옆에서 경고를 상기시키는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디르엔.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두 어른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려 왔다.

'겨우 10살이신데....'

보통 가문의 자식이라면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며 자유롭게 자란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디르엔의 경우엔 방을 나서는 일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루블린 공작 역시도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기에 이 어린 도련님의 친구는 책뿐이라 봐도 무방했다.

너무도 빠르게 말과 글자를 익히고, 누구보다 일찍 철이 든 것은 이 때문.

그러니 자신이라도 힘이 되어 줄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준비가 끝났네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똑같은 생각을 마친 앤느와 아르델은 자신들의 마음을 굳히며 어린 도련님의 손을 이끌었다.

'이 둘도 고생이 많네.'

하지만 정작 디르엔 본인은 자신을 돌봐야 하는 둘을 안타까워하는 중이다.

자신의 곁에 있으면 출세는커녕 제대로 된 처우 개선도 힘든 것이 예정된 미래.

이걸 알면서도 공작의 명에 따라야 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나오는구나.'

방을 나서 복도를 걷는 사이, 창을 통해 따듯한 햇볕이 들어왔다.

딱히 외출이 강제적으로 제한된 적은 없지만, 형제들과 마주칠 때면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기 마련.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 안에 박히는 빈도가 늘어나게 됐다.

'나로서는 오히려 좋았지.'

이유야 어쨌든 방에 박혀서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디르엔에게 이득이었다.

다양한 지식 습득과 마나 코어의 훈련, 마법진의 개조까지 너무도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착한 1층의 안쪽 방 앞.

조금 열려 있는 문틈으로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희는 교육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무쪼록… 힘을 내셔야 합니다."

"잘하시겠지만, 수업을 진행하시는 분께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셔야 해요. 다른 형제분들이 시비를 걸어도 꾹 참고, 나중에 저희한테 잔뜩 털어놓으세요. 아셨죠?"

"응. 나중에 봐."

상당히 불안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기에 디르엔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곧장 문을 더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전부 와 있었네.'

먼저 자리하고 있던 검푸른 머리칼의 네 형제.

한 살 터울인 셋째 부인의 이란성 쌍둥이 레이어와 메이어, 넷째 부인의 막내딸 샤를, 그리고.

"더러우니까, 떨어져 있어."

디르엔과 같은 날에 태어난 첫째 부인의 막내아들, 마르코다.

얼마나 조기 교육을 야무지게 받았는지 마주칠 때마다 저런 반응을 보인다.

"디르엔 도련님, 이쪽으로 자리하시지요."

그때, 앞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연갈색 머리칼의 중년 남성.

몇 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던 그는 인자한 얼굴로 소개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루블린 공작 각하를 모시는 마법사단의 단장, 켈리마프라 합니다."

5.

마법 명가인 루블린 공작가에서 마법사단장을 맡는 것은 엄청난 실력자라는 뜻이다.

저 사람보다 훌륭한 교육자를 간편하게 데려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켈리마프 역시, 늘 해 오던 이 일의 중요성을 항상 인지하고 있었다.

"본래 11살이 되는 해부터 시작되는 교육이지만, 마르코 님과 디르엔 님께선 각하의 명으로 한 해 일찍 참여하게 되셨습니다. 부디 잘 따라오시길 바라지요."

"당연하지."

말을 툭 던지는 마르코의 모습은 켈리마프에게 그리 새롭지 않았다.

그 첫째 부인의 교육을 받고 자란 저 아이는 평소에도 오만함과 이기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공작이 직접 재능이 있다고도 말했으니, 아마 저 모습은 평생 이어지겠지.

문제는.

"잘 부탁드립니다."

형제와 달리, 도저히 나이에 맞지 않는 모습으로 정중한 인사를 해 보이는 디르엔.

이 아이는 생후 12개월에 개화를 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내심 기대가 컸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은 출생으로 인해 주어진 상황과 억압이 낳은 결과이겠지.

'그런데 저 눈은....'

제 나이에 맞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르엔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건 무언가 궤를 달리하는 열망과도 같았다.

'…괜한 생각을 하는군.'

어쨌든 교육을 잘 들어 준다면 문제는 없다.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될 일일 테고.

그런 생각을 마친 켈리마프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부터 마법의 기초를 익히기 위한 교육을 시작할 것입니다. 우선은 마법의 급에 관해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설명과 함께 켈리마프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팟-!

하늘로 보였던 손바닥 위로 푸른색의 둥근 구체가 생겨났다.

"마법의 등급은 1부터 9까지 총 아홉 개의 클래스로 나뉩니다. 이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성급'이라는 것이지요."

그의 설명에 디르엔은 푸른색 마나 구체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구체를 만들어 낸 마법진이라고 해야겠지.

그리고 이것을 알아차린 듯 켈리마프가 설명을 이어 갔다.

"아시다시피 이 구체와 제 손 사이엔 마법진이 있습니다. 외곽 공간에는 마법의 클래스를 나타내는 별이 존재하지요. 개수에 따라 구분할 수 있으니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들으니 신기하네.'

지금까지는 홀로 관찰하며 깨달았지만, 실제로 듣는 것은 처음이다.

이 정도로 전생과 비슷하다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별의 개수가 보이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켈리마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마법진 외곽엔 6개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6성급에 해당하는 마법사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6성급의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이지요. 당연히 1성급 마법을 사용하면 위의 별은 하나로 내려가게 됩니다."

"아버님은 7성급이시니까, 7개가 있으시다는 거잖아? 엄청 쉽네."

그의 설명에 쌍둥이 중 여자아이, 메이어가 머리카락을 빙빙 감으며 말했다.

그 예의 없는 태도에도 켈리마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러분의 아버님이신 루블린 공작께선 무려 7성급에 등극하신 분이십니다. 저와 공작 각하 사이엔 커다란 벽이 몇 겹이나 있다고 보시면 될 정도지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지만, 전투 영역에 있어서 6성급 마법이란 재난과도 같은 수준.

전쟁에 참여하는 마법사의 대부분이 4성급 이하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인재다.

당연히 7성급의 루블린 공작은 괴물에 가까운 것이겠지.

60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위 성급으로 도달하기 위해선 마나 코어의 성장과 마법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특히, 마나 코어는 여러 선천적인 요소가 상당히 중요하지요."

선천적인 요소라는 단어에 디르엔의 감각이 반응했다.

정확히는 전생에서의 그 노인이 가졌던 감정이다.

가끔 튀어나오는 이런 충돌도 이제는 빈도가 많이 낮아졌다.

"하지만 몸의 성장과 엄청난 훈련이 따라 주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습니다. 물론 루블린의 피를 이은 여러분이 그런 태만을 보여 주진 않으시겠지만요."

"난 루블린이니까, 엄청난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했어!"

"아버지보다 높이 올라갈 거야."

그때, 눈빛을 반짝이며 소망을 말하는 아이들.

어머니와 주변 하인들이 희망을 불어넣은 결과다.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은 각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요소이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은 최대한 빨리 1성급이 되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겨우 1성급이 뭐야? 그런 건 쉬운 거잖아!"

"맞아! 난 화려하고 예쁜 마법을 빨리 배우고 싶다고!"

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떼를 쓰는 쌍둥이 남매, 레이어와 메이어.

"물론, 재능이 있다면 마법은 대답을 들려주기 마련입니다. 모두 열의가 넘치시는 듯하니 바로 시작하지요."

그것을 가볍게 받은 켈리마프는 양손의 검지를 11자로 세웠다.

그 순간.

파직-!

두 손가락의 마디 끝에서 푸른색의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켰다.

"이것은 마나를 형상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법입니다. 손가락 끝에 작은 통로를 만들어 전신에 흐르는 마나를 바깥으로 꺼내는 것이지요. 루블린가의 피를 이어받으신 여러분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당연하지!"

"맞아, 당연하지!"

"흥."

웃음을 짓는 그의 말에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

하지만 고작 5분이 지났을 땐, 모두가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뭐야, 이거 안 되잖아!"

"왜 이러는 거야?"

"짜증 나...."

'당연히 저렇겠지.'

예상했던 상황에 켈리마프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마나를 실체화하는 것은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루블린 공작가의 아이들이라 해도 감을 익히는 데까지 며칠은 걸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한 살이 어린 아이까지 둘이나 있으니, 당연한....

찌릿-

그때, 갑자기 감각을 스치는 엄청난 농도의 마나.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지만, 이것은 평범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도 여전히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마정석에 문제가 생겼나?'

이 저택에는 8개의 5성급, 6성급 결계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마법에 마나를 공급하기 위한 값비싼 도구가 바로 마정석.

10개가 넘는 개수이기에 마법사단의 구성원들이 주기적으로 돌아가며 마나를 넣고, 결계를 유지한다.

이 방 아래에도 커다란 마정석이 있으니 그것이 파손되었다면 상당한 마나가 유출되었을 것이다.

'…뭐지?'

벽에 손을 대자 느껴지는 마정석의 흔적은 똑같았다.

마법진 또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무언가 파손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득 차 있다고?'

자신이 마나를 흘려도 마정석이 그것을 빨아들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채운 것이 일주일 전이니, 절반은 비어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정석이 누군가의 마나를 흡수해 가득 채워졌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4성급 마법사가 다섯은 붙어야 하는 마정석을 어떻게 한순간에 반이나 채울 수 있는 것일까.

'설마 그때의....'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수년 전의 기억.

루블린 가문의 장남인 카일의 교육을 맡았던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6살의 나이에 4성급 마스터까지 도달한 그 천재는 첫 훈련 당시 켈리마프를 당황하게 했다.

단 한 번에 마나를 실체화한 것은 물론, 이 공간을 짙은 마나로 가득 채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재능과 견줄 수 있는 아이는....

"됐어!"

그때, 앞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시선을 돌리니 마르코가 푸른 마나를 손가락 사이에 흘리고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각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당연하지."

결과적으로 카일보다 한 살 이른 나이에 성공한 마나의 실체화.

하지만 당시의 카일은 물론, 아까의 그 마나와도 질과 양 자체가 달랐다.

'저 아이는… 아직인가.'

가장 끝에 선 디르엔은 뭔가 눈치를 보며 고전하는 듯했다.

역시 양쪽의 부모가 고위 귀족인 아이와 비교하면, 확률적으로 재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그 마나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깜짝 놀랐네.'

켈리마프가 혼란에 빠진 사이, 디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이들이 훈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디르엔은 발아래로 마나를 꺼냈다.

눈에 띄지 않으며 간단히 훈련하는 방법을 생각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마나의 방출과 동시에 엄청난 양이 빨려 나갔다.

잠깐 사이에 알아서 멈춰지긴 했지만, 들킬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다.

좋은 타이밍에 켈리마프의 시선을 끌어 준 마르코를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으아아!"

"왜 안 되는 거야!"

"으...."

그러는 사이, 옆에서 고전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

아무래도 재능은 마르코가 가장 좋은 듯하다.

'…나는 마지막에 보여 주면 되겠지.'

지금 성공해 버리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가능성이 크다.

너무 늦으면 진도를 나갈 수 없으니 적당히 끝물에 맞추는 것이 좋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약 2시간이 지났을 무렵, 켈리마프가 수업을 종료시켰다.

소모가 큰 훈련인 만큼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한 듯했다.

그리고 그 기초적인 훈련이 마무리되는 것은 거의 2주가 지난 뒤였다.

***

한 달 후, 루블린 공작가 저택의 정원.

디르엔은 홀로 그늘진 나무 밑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앤느와 아르델이 멀찍이 서 있는 건 그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다는 분위기를 오래 조성해 온 것이 이런 훈련 시간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마법진을 등록 시, 자동으로 분석을 시작합니다.]

이 신기한 도구를 뭐라고 부를지 고민하던 디르엔은 간단히 '조수'라는 명칭을 붙였다.

홀로 연구하던 과거의 슬픔을 기리며 로망을 실현한 느낌이다.

"많이도 했네."

[개조 리스트]

[1성급 마법:파이어 볼트]

[1성급 마법:아이스 볼트]

....

....

[8성급 마법:헬파이어]

[8성급 마법:블리자드]

[8성급 마법:템페스트]

전생의 지식에 있던 수백 개의 마법은 개조가 끝난 상황.

물론, 지식이 좀 더 쌓이면 추가적인 개량도 충분히 가능하다.

당장은 1년 전에 달성한 3성급이 한계지만, 이 성장 속도는 천재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제 이 몸만 무럭무럭 자라 준다면 누구보다 빨리 상위 성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도 3성급 마스터는 말이 안 되긴 하지.'

이 세계에서 평범한 귀족가 마법사의 성장기는 이랬다.

10~11세:마나의 실체화 및 기초 마법 습득

11~12세:1성급 등극

13~15세:2성급 등극

17~21세:3성급 등극

25~35세:4성급 등극

45~65세:5성급 등극

육체의 성장에 막혀 있긴 하지만, 적어도 10년은 앞선 상황.

아마 성장만 문제없이 된다면 빠르게 다음 성급으로 도달할 것이다.

애초에 마법의 이해도 따위는 8성급까지 완벽하게 숙달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부족하단 말이야.'

지금껏 다룬 마법진은 어디까지나 전생의 영역이다.

루블린 공작… 아니, 황제가 걸어 놓은 여러 제약 덕에 이곳의 마법에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마법인가요?"

"응. 아르델이 조금 가르쳐 주면 안 돼?"

아르델에게 이 질문을 던졌던 것은 어느 여름날.

서적은 교육 전까지 금지라고 했기에 눈을 반짝이며 방향을 튼 시도였다.

"음… 너무 이르게 과도한 훈련을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여리고, 예민한 마나 코어에 자극을 가하면 쉽게 망가지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마법을 접하는 나이도 제국의 법령으로 10살이라 제한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뒤에 시작하곤 하지요."

그의 매정한 대답에 마음이 아팠지만, 속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마법 학회에서도 엄중히 경고했었던 조기 교육의 폐해.

가문과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한 욕심에 목숨을 잃는 아이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심각성을 인지하게 됐고, 제한으로 이어지게 됐다.

'눈에 안 띄길 잘했네.'

디르엔이 지금까지 해 온 훈련법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정교함이 수반된 것이었다.

마나 코어에 무리가 가지 않게, 기술적인 면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부담을 줄였다.

선천적인 재능까지 합쳐진 덕에 지금은 웬만한 성인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생각보다 느린데.'

기초 훈련 이후로 더뎌진 아이들의 진도.

마르코는 며칠 전에 1성급에 도달했지만, 나머지는 마법진을 붙든 채 헤매고 있다.

수업에 사용된 마법도 파이어 볼트인 데다, 다른 서적 또한 아직은 금지된 상황이다.

뭔가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줄 사람은 없는 걸까.

"마, 마르코 도련님!"

"비켜."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다급한 앤느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의 남자아이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6.

"마르코 도련님, 교류는 격이 맞는 자와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님께서도...."

"됐어. 전부 물러나 있어."

시종들의 만류에도 마르코는 눈썹을 찌푸리며 홀로 다가왔다.

저 까칠함도 일관성이 짙으니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무슨 일이야?"

"...."

적당한 물음을 던졌는데, 마르코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자신을 응시했다.

그런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너보다 내가 더 대단해."

갑자기 의미 모를 말을 꺼냈다.

잠시 어떤 반응을 꺼낼까 고민하던 디르엔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기로 했다.

"그렇지. 넌 벌써 1성급에 도달했으니까."

"맞아. 가문의 오점인 너보다 내가 훨씬 대단해. 난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피도 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개화했다고 우쭐대지 말라는 거야!"

"...?"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내지른 당찬 목소리.

분명 루블린 공작은 그 사실을 함구한다고 했는데, 이 아이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우리 어머니는 대공 가문의 공주셨어. 그러니까 뭐든지 알고 계신 거야! 네 평민 엄마랑은 다르다고!"

기세등등한 얼굴로 자랑을 하는 마르코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디르엔의 친모를 건드려 봤자, 전생자의 입장에선 사실상 먼 이야기일 뿐.

그가 바라는 반응이 있겠지만, 거짓으로라도 보여 주기가 어렵다.

'그나저나 대공이 나올 줄은 몰랐네.'

제국에서 대공의 지위는 한 나라의 왕보다도 높은 수준.

그런 엄청난 가문의 딸이라면 공작이 함구하는 대상에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럼 혹시....'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절묘한 생각.

저 정도의 고위 귀족이라면 자식의 교육까지 관여할 가능성이 크다.

"대단하네. 그래도 아직 마법은 파이어 볼트밖에 못 쓰는 거 아니야?"

"장난해? 난 벌써 세 가지나 더 쓸 수 있다고!"

"에이, 말만 그런 거 아니야?"

"너, 똑바로 봐!"

팟-!

가벼운 도발에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는 마르코.

하지만 눈앞에 생겨난 푸른 마법진에 디르엔의 의식은 모조리 집중됐다.

"레드 라이트!"

슈욱-

그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에 생겨난 붉은색 빛줄기.

문제는 저 마법진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는 것이다.

"어때? 이게 색깔 마법이라는 거야. 너 같은 건 평생...."

"훌륭해!"

"어? 어...."

디르엔의 격렬한 반응에 마르코는 조금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색깔 마법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했어.'

행복에 젖은 디르엔은 빠른 속도로 마법진을 눈에 담았다.

몇 년 동안의 밀도 깊은 연구가 계속된 덕에 이 정도의 구조를 눈에 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등록 마법:레드 라이트(1성급)]

[분석 결과:개조 가능]

[개조 범위:31.6퍼센트]

[지식에 기반한 자동 개조가 시작됩니다.]

손을 숨긴 채 마법진을 등록하자 조수가 빠른 결과를 내놓았다.

'…31.6퍼센트라고?'

문제는 수십 개의 마법진을 개조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숫자.

이걸 개조한다면 얼마나 엄청난 결과가 나올까.

"이거 엄청 멋있네. 다른 것도 있어?"

마법진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사이, 마르코를 다시 한번 찔렀다.

"당연하지. 어머니가 알려 주신 색깔 마법은 두 가지나 더...."

"도련님."

새로운 마법이 튀어나오기 직전,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귀족처럼 보이는 한 남성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멜스? 언제 온 거야?"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형제분께 마법을 선보이고 계셨군요."

"맞아. 서자와 나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어.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 마법의 위대함을 깨닫기엔 수준이 조금 맞지 않는 듯합니다."

가볍게 웃으며 답한 남성, 멜스는 디르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붉은 머리칼이 좋은 인상을 주진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르코 도련님의 교육 담당인 멜스 트리미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디르엔입니다."

"듣던 대로 예의가 바르신 분이군요. 당신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인 일입니다."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멜스.

사실, 이런 부류의 비아냥거림은 전생에서 밥 먹듯이 들었기에 전혀 타격이 없다.

"마르코 도련님의 마법은 어떠셨습니까?"

"신기했어요. 저는 아직 1성급에도 도달하지 못해서...."

"베르세르 대공가의 고귀한 혈통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저 아름다운 마법은 베르세르의 피를 이은 자가 아니면 익힐 수 없으니까요."

무언가에 빠진 신도처럼 말을 이어 가는 멜스.

하지만 디르엔의 신경은 오로지 새로운 마법에 쏠렸다.

"색깔 마법은 어떤 건가요? 마르코가 쓴 마법은 파이어 볼트보다도 강한가요?"

"당연하지! 이 빛에 닿으면 피가...."

"도련님, 마님께서 찾으셨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얼른 가 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뭐? 어머님이? 빨리 가자!"

멜스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달려가는 마르코.

아까와 같이 발끈하는 구도를 만들려고 했는데, 저 남자의 말에 무마되고 말았다.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저도 얼른 마법을 쓰고 싶어서요."

"반뿐이지만 루블린가의 피를 이었다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 가문에 있을 필요도...."

"거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아르델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도련님!"

이어서 달려든 것은 유모 앤느.

디르엔을 감싸 안는 것이 악의로부터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다.

"귀족들의 대화에 평민이 끼어들게 되어 있나?"

"디르엔 도련님은 루블린 공작가의 정통한 자제이십니다. 그에 맞는 예우를 갖추지 않으시면, 공작 각하께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그의 경고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멜스.

하지만 루블린의 귀에 들어가면 적잖게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다.

"오늘 일은 기억하도록 하지.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죠."

젊은 마법사를 째려본 그는 디르엔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긴 뒤 사라졌다.

"하아...."

뒷모습이 사라지자 아르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떨고 있는 걸 보니, 중압감이 상당했던 듯하다.

"괜찮아?"

"좋지 않은 경험을 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르코 도련님이 다가오실 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디르엔의 물음에 그는 어두운 얼굴로 대답해 왔다.

앤느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 공기가 너무 무겁다.

"괜찮아. 새로운 마법을 봐서 좋았어."

"색깔 마법 말씀이시군요."

"아르델, 알고 있어?"

"물론입니다. 베르세르 대공의 힘은 제국에서도 유명하니까요."

"알려 줘!"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디르엔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내심 안도한 아르델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색깔 마법은 초대 베르세르의 아이덴티티에서 나온 것입니다. 색마다 특성이 달라서 범용성이 엄청난 마법이죠. 그리고 그 힘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이덴티티?"

"네. 마법사 고유의 마나 성질과도 같은 것인데, 개인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요소입니다. 저쪽을 보세요."

그는 정면으로 손을 뻗더니, 정면의 꽃을 노렸다.

"윈드 애로우."

이어서 1성급 마법을 사용하자 생겨난 반투명한 초록빛 화살.

서걱-

그것은 곧바로 꽃의 줄기를 가볍게 갈랐다.

그런데.

서걱-

서걱-

한 번으로 끝났어야 할 마법이 두 번 더 궤도를 틀어 이리저리 나뭇잎을 꿰어 댔다.

그것을 흥미롭게 보고 있자, 아르델이 말을 이어 갔다.

"제 아이덴티티는 바람 속성의 궤적입니다. 보시다시피 사용한 마법을 다양한 형태로 움직일 수 있지요. 저는 이 정도가 한계지만, 고위 마법사는 훨씬 더 자유로운 운용이 가능합니다."

"신기하다...."

그의 설명에 디르엔은 눈을 반짝이며 잘린 꽃을 바라봤다.

전생에서도 특수한 속성에 강세를 보이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정형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 색깔 마법은 원래 있던 마법이야?"

"아뇨. 그건 조금 특수한 경우인데.... 본래 아이덴티티는 속성 마법에 이점을 더하는 것에서 그칩니다. 색깔도 빛 속성의 마법에 위력과 효과를 강화하는 수준이었죠."

"그걸 넘어선 거구나."

"네. 그 아이덴티티를 이용해 새로운 마법을 만든 것이 바로 초대 베르세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천재라고 볼 수 있겠네요."

새로운 마법.

이 짧은 단어의 울림은 디르엔의 가슴을 뛰게 했다.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얻어? 빨리 가지고 싶은데."

"아쉽지만, 아이덴티티는 신의 정원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마법 학회가 관리하는 곳이라 개인의 출입은 불가능하죠. 14살이면 제르노 학원에 입학하실 테니, 2학년 때는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전혀 의도치 않게 알게 된 중요한 힘.

아르델도 얻었다는 걸 보니 마법 학원은 평민도 갈 수 있는 듯하다.

물론 최소한의 재능이 있는 자에게만 기회가 있는 거겠지.

어쨌든 당장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실망했지만, 모든 것은 제르노 학원에 가면 해결될 일이다.

물론, 뭘 얻을지 벌써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마르코는 어떻게 색깔 마법을 쓴 거야? 몰래 아이덴티티를 얻었어?"

"아뇨. 절대 아이덴티티를 개인적으로 얻을 수는 없습니다. 가문의 일원들이 쓰는 색깔 마법은 2대 베르세르가 고안한 열화 종류라 하더군요."

"그럼 나도 배울 수 있는 거야?"

"그 마법은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힘을 노리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 거죠."

'…그런 걸 내가 쓸 수 있다고?'

완전히 폐쇄적인 마법의 정체에 디르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눈앞에서 열심히 마법진을 개조하고 있는 조수.

아까 그대로는 쓸 수 없었겠지만, 미심쩍은 구조가 풀려 가는 것이 보였다.

"나머지도 얻고 싶은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진심에 디르엔은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마법에 마음이 과하게 들뜬 듯하다.

"그… 마르코는 아까 빨간 마법을 썼는데, 다른 색도 있는 거야?"

"세 가지를 먼저 배우는데, 빨강이 출혈, 파랑이 둔화, 초록이 보호라고 들었습니다. 다른 색들에 대한 정보는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피라고 했던 건가.'

설명을 들으니 마르코가 말했던 피라는 단어가 수긍이 갔다.

"이제 방에 갈래."

"그러실까요?"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에 디르엔은 둘을 재촉해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책을 하나 꺼내 침대에 자리했다.

[수동 개조로 전환합니다.]

책과 눈 사이에 떠오른 반투명한 판.

손가락을 가볍게 올린 디르엔은 마법진의 구조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여긴 이렇게 하고....'

사실 자동 개조가 시작된 시점부터 계속해서 건드릴 부분을 봐 왔다.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그 과정이 계속됐으니, 적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띠링-

[개조가 완료되었습니다.]

약 10분 정도를 세세하게 조정한 끝에 마무리된 작업.

판을 보고 있으니 몇 개의 문장이 주르륵 이어졌다.

[개조 마법:레드 라이트(1성급)]

[붉은 파장의 빛을 쏘아 닿은 범위의 출혈을 유발한다.]

[개조 결과]

마나 소모량 -72.3퍼센트

출혈량 +84.3퍼센트

사거리 +97.5퍼센트

사출 속도 +101.8퍼센트

효과 범위 +112.2퍼센트

특수 마나 인식 해제

'…진짜 미쳤네.'

31.6퍼센트의 개조율로 만든 엄청난 결과에 어이가 없어졌다.

1퍼센트의 성능 향상을 위해 미친 듯이 연구하던 학자들이 이 광경을 보면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특수 마나 인식이 그건가?'

결과의 끄트머리에 붙은 내용을 추측하는 것은 간단했다.

베르세르 가문의 일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피의 제약.

하지만 디르엔은 마법진을 뜯어고침으로써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 버렸다.

이런 게 가능하다면 활용 가능성은 너무도 무궁무진하다.

'실험은 어렵겠고.... 색깔 마법은 두 가지가 더 있다고 했지?'

당장 출혈을 써먹기는 어려웠기에 마르코의 두 가지 마법이 더 필요하다.

빨강을 보였으니, 파랑과 초록이 남은 거겠지.

실용성이든 뭐든 새로운 마법을 가만히 둘 수는 없다.

'좋아, 쫓아다니자.'

마음을 굳힌 디르엔은 다음 날부터 마르코에게 접근했다.

수업 시간을 이용한 치켜세움과 각종 도발은 너무도 쉽게 먹혀들었고.

"어때? 너 같은 건 흉내도 못 내겠지?"

남은 2개의 마법진을 얻어 내는 작업은 고작 이틀 만에 마무리되었다.

7.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루블린 공작가 저택의 최상층.

켈리마프의 보고를 들은 루블린 공작은 의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다섯 아이 중에서 1성급이 하나라는 것인가."

"마르코 도련님의 재능이 비교적 뛰어났던 듯합니다. 다른 분들도 머지않아 1성급에 등극할 수 있겠지요."

그간의 교육에서 두각을 보인 것은 마르코 하나뿐.

한 살 위의 세 아이는 생각보다 더딘 성장을 보였다.

"그 아이는 어땠지?"

"…디르엔 도련님 또한 재능이 있으시지만, 평균을 조금 웃도는 정도인 듯합니다. 항상 마지막에 성과를 보이긴 해도 나이를 생각하면...."

"됐다. 신경 쓸 정도도 안 되는군."

켈리마프의 첨언에 공작은 말을 잘라 냈다.

생후 12개월 만에 개화했다고는 하지만, 독보적인 재능을 보이지는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른 평범한 자식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윗대의 아이들은 어떻지?"

"내년에 제르노에 입학하실 헤스테나 아가씨와 클리턴스 도련님은 2성급에 도달하셨습니다. 하지만 페니파 도련님께선...."

"…여전한가 보군."

둘째 부인의 아들인 페니파는 공작가에서 괴짜로 불리는 14살의 아이다.

마법 명가에 태어나서 마법을 포기한 채, 창술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문제아로 취급될 법도 했다.

"무언가 계기가 필요한가."

"계기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에 켈리마프는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생각을 어느 정도 끝낸 공작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왔다.

"플랜트의 건은 어떻게 됐지?"

"주요 도시들은 순조롭게 정리되고 있습니다. 후순위로 밀리는 것은 남부의 글림튼과 켈파가 될 듯합니다."

대륙의 전역엔 마수가 존재한다.

물론 민가와 닿은 곳은 꾸준한 토벌을 통해 관리하지만, 그 외의 곳까지는 손길이 닿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지역에서 낮은 확률로 생겨나는 마수의 '플랜트'.

이것의 메커니즘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괴하지 않으면 통상보다 20배가 넘는 마수를 생산한다.

통제력을 잃을 정도가 되면 도시에도 영향을 끼치기에 소멸은 필수적인 임무다.

"그럼 켈파를 쓰도록 하지."

"예? 그 말씀은...."

"실전에서 익히는 감각은 영원히 몸에 남는다. 그대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 그렇지만,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제르노에 입학하시기 전까진 안전한 곳에서 교육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평범한 환경에서의 성장은 온실 속의 화초를 만들 뿐이지.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최근 들어 곳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불온한 움직임.

아직은 작은 분쟁에 속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마수는 물론이고, 타 종족과 여러 세력까지 생각하면 조금 더 강하게 자랄 필요가 있다.

"제르노에 가지 않은 모든 아이를 켈파로 보낼 것이다. 토벌의 상황에 따라 교육을 겸할 것이니 인선에 신경 쓰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더 이상의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명령을 내리는 공작.

여전히 불안함은 있었지만, 켈리마프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한 달 뒤, 저택 3층의 방.

"도련님, 수업 가실 시간이에요!"

책을 읽던 디르엔은 앤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뭔가 분주해 보이는 느낌이다.

"왜 그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전언이 있었어요. 도련님을 보내 드리고, 저는 여행 준비를 해야 한답니다."

"다른 지역?"

전혀 듣지 못한 소식에 디르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켈리마프의 입에서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여러분은 플랜트 토벌을 위한 원정에 참여하시게 됐습니다. 간단한 설명 후에 켈파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니, 돌아가서 준비를 마치시면 됩니다."

"토벌? 정말이야?"

"재밌겠다!"

뜻밖의 소식에 기쁜 듯 목소리를 내는 쌍둥이.

샤를은 울상이지만, 마르코는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오, 아버지가 웬일이야?"

그리고 가장 뒤쪽 자리에서 창을 만지고 있는 검푸른 머리칼의 소년.

수업에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둘째 부인의 아들 페니파다.

디르엔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는데, 다른 형제들과 달리 상당히 살가웠다.

심지어 마법이 부여된 무기를 자신에게 몇 번이나 직접 보여 주었기에 싫어할 수가 없었다.

"우선 켈파의 플랜트에서 파악된 마수를 설명하겠습니다. 자료를 봐 주십시오."

켈리마프는 시종을 시켜 무언가를 분배했다.

'엄청 잘 그렸네.'

건네받은 것은 몇 장이 꿰어진 종이 뭉치.

그곳엔 몬스터들의 외형과 특징이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켈파에는 다섯 종류의 F급 마수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약한 순서대로 블루 래빗, 블랙 독, 포이즌 슬라임, 고블린, 파이어 스네이크이지요. 상위의 몬스터 또한 있지만, 여러분이 마주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걸 토벌하면 된다는 거지?"

"내가 제일 많이 잡을 거야!"

"누가 더 많이 잡는지 내기라도 해 볼까?"

"얼마든지!"

켈리마프의 설명에 눈을 반짝이며 열의를 불태우는 쌍둥이.

뒤쪽의 페니파도 열심히 자료를 살피는 것을 보니 꽤 관심이 동한 듯하다.

하지만.

"마르코 도련님을 제외한 다섯 분은 전투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희망의 끈을 깔끔하게 잘라 버렸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돼!"

"마르코 도련님은 1성급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기에 실전 감각을 익히는 것이 유의미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다섯 분은 야생의 마나에 노출되는 경험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페니파 님도 창술을 금할 생각이니, 예외는 아닙니다."

생각보다 강경한 훈련법에 디르엔은 내심 감탄했다.

무려 공작 가문의 자제들을 위험 속에 던진다는 발상은 쉬이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루블린 공작의 성격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으, 치사하게."

"맞아! 훈련이라면서 그게 뭐야?"

그런 켈리마프의 말에 언제나처럼 불만을 표출하는 쌍둥이 남매.

하지만 떼를 써 봤자 마법을 못 쓰는 채라면 마수의 밥이 될 뿐이다.

"1성급에 등극하신다면 각하께서도 곧 다른 훈련을 지시하실 겁니다. 이번 토벌에서 알맞은 성과를 내시길 바라지요."

"진짜 두고 봐."

"그 말, 무조건 지켜야 할 거야!"

다른 희망을 던져 주자 쌍둥이는 알아서 덥석 물어 버렸다.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형제들이 빨리 달성해 준다면 디르엔에게도 좋은 일이다.

'저쪽은 조용하네.'

뒤를 보자 여전히 자료를 살피고 있는 페니파.

창술을 금한다는 얘기까지 들었는데, 별 반응이 없다.

의외로 체념이 빠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 이제 시간이 됐으니 돌아가셔서 준비를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짧은 전달이 끝나자 켈리마프는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마르코, 빨리 방법 좀 알려 달라니까?"

"맞아. 숨기지 말고, 얘기 좀 해 봐!"

방 밖으로 나오자 쌍둥이가 마르코에게 달라붙었다.

평소에도 저런 느낌이라 반응은 예상되어 있다.

"그냥 열심히 잘하면 돼."

무슨 당연한 질문을 던지느냐는 듯한 대답.

하지만 멀찍이 서 있던 디르엔은 저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그 말이야? 너 일부러 놀리는 거지?"

"매번 그러는 거 짜증 나, 진짜!"

원하지 않는 대답에 삐진 듯 몸을 휙 돌리는 쌍둥이.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을 빼고 봐도 외부의 조력이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

재능이 넘친다는 마르코조차 노력의 흔적이 여실히 보인 후에야 1성급에 다다랐으니까.

늘 조용한 누이, 샤를 또한 남에게 의지하지 않은 채 홀로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1성급에 다다를 수도 있겠지.

역시 마법의 길이란 고독과 외로움을 인내해야만....

"도련님!"

그때,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르델이 다가왔다.

그를 따라 방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저희 셋도 같이 가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옷을 갈아입힌 앤느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법사 아르델과 새로이 시종이 된 르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것이 단장님께서 주신 자료인가요?"

"응. 그쪽에서 가장 약한 마수들이래."

디르엔이 가져온 종이를 살핀 아르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의 경중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이 정도면 갓 1성급이 된 마법사도 상대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도련님은 아직 마법을 사용하실 수 없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충분한 호위를 대동한다고 해도 완벽은 없으니까요."

"응, 조심할게."

그의 걱정에 디르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켰다.

솔직히 호위가 붙는 것이 곤란하지만, 마법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하겠지.

'그래도 역시 혼자 다니고 싶네.'

"도련님, 어서 가요!"

그런 생각을 끝으로 디르엔은 저택의 입구로 끌려갔다.

체류 기간이 꽤 되는 건지 가져가는 짐도 적지 않다.

게다가.

'…무슨 마차가 이렇게 커?'

입구에서 정문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마차의 행렬.

제대로 굴러가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에 입이 벌어졌다.

전생에서도 이 정도는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안녕하십니까, 디르엔 도련님. 저는 이번 여정 동안 호위를 맡게 된 얀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때, 디르엔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인사하는 적갈색 머리칼의 젊은 남성.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기사단원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말씀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짐은 다른 시종들이 실을 것이니 이쪽 마차에 오르시면 됩니다. 저는 바깥에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그의 말에 따라 디르엔과 세 사람은 커다란 마차에 올라탔다.

쿠션까지 제대로 깔려 있어 사실상 집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전생에 살던 집보다 좋은 수준이다.

"도련님, 저 이런 마차는 처음 타 봐요!"

그때, 옆에서 눈을 빛내는 르비아.

이 텐션은 배속됐던 날부터 꾸준했기에 지금은 익숙해졌다.

"이건 마법이지?"

"네. 말과 바퀴, 차체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정석까지 함께 설치하는 구조라 말도 안 되게 비싸지만요."

마나를 저장할 수 있다는 마정석은 수급 루트가 매우 한정적이다.

그런 귀한 것을 마차에다 쓸 수 있는 루블린 가문의 재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인 거겠지.

"출발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끝난 준비.

'이런 느낌이구나.'

그와 동시에 마차에 강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동에 의한 관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건 탑승감까지 고려한 마법진의 효과다.

"아르델, 마차에 그려진 마법진이 보고 싶어."

"…이게 도련님의 나이에 맞는 호기심인지 가끔 헷갈리네요."

"아마 맞을 거야. 어디서 볼 수 있어?"

"바퀴는 지금 볼 수 없지만, 차체의 마법진은...."

장소가 바뀌었지만, 평상시와 비슷한 대화.

그런 익숙함 속에 켈파를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8.

쏴아아-

루블린의 저택을 출발한 지 약 5시간.

바깥은 어느새 폭우에 가까운 비가 마차를 뒤덮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여행이 한창이라 말하고 싶지만, 마차는 이미 켈파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한다.

새겨진 마법진들 덕분에 시간 소모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남부는 비가 자주 내린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감기라도 걸리실까 걱정이네."

자신에게 우비를 입히며 대화를 나누는 르비아와 앤느.

하지만 온도에 관한 마법은 정통한 편이라 감기는 문제가 없다.

"도착했습니다."

잠시 후, 마차가 조심스레 멈춰 섰다.

천천히 바깥으로 나가자 몇 개의 건물이 이어진 거대한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옛 루블린께서 지으신 별장입니다. 숲의 입구에 위치한 탓에 실제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지만요."

"바로 앞이 숲인데, 위험하지는 않은 건가?"

"마수용 결계가 저택과 숲의 입구에 이중, 삼중으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웬만한 놈들은 손도 못 댈 수준이죠."

얀테의 설명에 디르엔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으로 보이진 않지만, 확실히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딘가 마법진이 있는 거겠지.

"토벌이 진행되는 동안은 이곳에서 지내시게 될 겁니다. 우선, 안쪽으로 드시지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얀테의 안내와 함께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엄청 크네.'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도 거대한 저택의 공간에 솔직한 감상이 나왔다.

쓸데없는 장식이 적은 탓이겠지만, 디르엔에겐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입구 쪽으로 다가오는 중년의 남성.

이마의 땀을 열심히 닦고 있는 모습이 뭔가 안쓰러웠다.

"저는 켈파 지역을 관리하는 로프만 남작입니다. 편히 로프만이라 불러 주십시오."

루블린가의 아이들에게 자세를 낮추는 그의 모습에서 위치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평민이었던 디르엔에겐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다.

"피로하시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바로 회의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짐은 시종들이 옮기면 될 일이었기에 루블린의 아이들과 토벌대는 곧장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사실 회의장이라기보다는 행사에 쓸 법한 홀을 급히 사용한 것에 가까웠다.

"그럼 토벌 구역에 관한 설명을...."

"아, 내가 하도록 하지."

로프만이 힘겹게 입을 열려는 그때, 입구 쪽에서 켈리마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고맙네. 부탁하지."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듯 자연스럽게 위치를 바꾸는 두 사람.

어쨌든 안정감이 찾아왔기에 디르엔은 설명에 집중했다.

루블린의 아이들은 어디까지나 참관하는 형태였기에 어조는 편하게 진행됐다.

"우리가 토벌할 곳은 성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숲이다. 가까운 곳부터 거리에 따라 1번, 2번, 3번 구역으로 나누었으니 지도를 확인하도록."

부스럭-

그의 말에 장내의 모든 인원이 사전에 받은 지도를 펼쳐 들었다.

'꽤 넓네.'

속이 빈 원 형태로 나누어진 구획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이 토벌에 참여한 것은 기사와 마법사가 수백, 병사는 천이 넘는 규모다.

고급 인력만 봐도 상당한 숫자이지만, 이 범위를 토벌하려면 상당히 고단할 듯했다.

"알다시피 3번 구역이 가장 위험한 지역이다. 그렇기에 성에서 뻗어 나간 길을 뚫어 3번 구역부터 정리를 시작하게 될 거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 투입될 테니, 참고하도록."

한 번에 확실하게 끝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지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장내의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토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플랜트의 소멸이다. 세 구역 중 어디에 존재할지 모르는 만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발견하는 즉시 표식을 쏘아 올려 증원을 부르는 것이 기본. 독자적인 행동은 절대로 금하며, 플랜트를 처리할 때까지 야간 토벌은 없을 것이다."

마수의 플랜트는 땅속을 파고들어 가는 굴처럼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숲에 생겨나면 하늘에서도 나무에 가려지기에 발견이 어렵다.

직접 토벌에 나서는 이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만큼, 토벌의 난이도도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자료의 마지막에 미궁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켈파 지역에 등장하는 미궁은 마지막으로 28년 전에 나타났지만, 이후로는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럼 소멸했다고 봐도 되는 것입니까?"

"28년의 기간은 어디까지나 관측된 보고를 참고한 이야기다. 실종된 모험가와 기사, 마법사 중 그곳에 말려든 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 마주할 확률은 미지수이지만, 소대 단위로 꾸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추측되는 자료를 살펴 최소한의 대비는 할 수 있도록."

'미궁이라....'

켈리마프의 설명을 듣자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전생에선 딱 한 번밖에 들어가 보지 못했던 미궁.

탐사대의 짐꾼에 불과했지만, 사선을 오가던 그 경험은 지금도 생생할 정도다.

문제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고?'

전생의 것과 달리 무작위로 출몰하는 기이한 특성.

살아 있는 거대 마수라고도 불린다는 설명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활동 영역까지 정해져 있다고 하니 더 기묘하다.

한 번 마주할 수 있다면, 그 속에 마법적인 무언가라도 있다면 상당한 발견이 되지 않을까.

"미궁이라고?"

"켈파에도 있었나 보군. 한탕 크게 벌 수 있는 거 아니야?"

"있으면 뭐 해? 어차피 나타날 일도 없는데."

"괜한 희망은 버려. 베테랑 모험가들도 못 들어가 본 사람이 태반이라고."

그런 디르엔의 생각과 달리 일찍이 고개를 젓고 있는 토벌대 일원들.

아무래도 예상하는 것보다 출몰 확률이 상당히 낮은 듯하다.

아쉬워도 당장은 어쩔 수 없겠지.

"출정은 1시간 뒤, 저택 입구에서 소대 단위로 집합한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만큼 준비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이상이다."

켈리마프의 지시가 끝나자 기사단과 마법사단은 빠른 걸음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루블린의 아이들은 자연스레 남겨졌지만, 곧바로 켈리마프가 다가왔다.

"여러분은 내일 오전부터 훈련에 임하시게 됩니다. 저택의 결계 인근에서 조금씩 진행되겠지만, 긴장을 늦추지 마시길 바랍니다."

"뭐? 겨우 집 앞에? 조금 더 멀리 나가도 괜찮잖아!"

"앞서 설명해 드린 구역은 편의상 그은 가공선에 불과합니다. 마수가 그 구역을 지켜 주리라는 것은 너무도 희망적인 바람이지요."

"그래도...."

"여러분이 2번과 3번 구역의 마수를 상대하게 되면 최소한이 사망입니다. 호위가 있다고 해도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애초에 마르코 님 외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실 수도 없습니다."

"...."

켈리마프의 강한 어조에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표정은 불만이 가득하지만, 역시 개죽음은 싫은 모양이다.

"저도 토벌에 참여하기에, 전반적인 교육은 기사단장이 맡게 될 겁니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단장, 타란입니다."

켈리마프의 말에 한 남성이 이쪽으로 경례해 보였다.

디르엔도 멀리서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얼굴은 익숙하다.

"그럼 말씀드린 대로 훈련은 내일 오전에 시작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개인 훈련이나 저택 도서관을 이용해 정진을 멈추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1성급에 도달하신다면 바로 실전 훈련에 임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두고 봐. 당장 해 버릴 거니까!"

"오늘은 진짜 성공할 거야!"

간단한 도발에 쌍둥이는 씩씩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 저도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요. 자, 그럼 슬슬 방으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인 켈리마프는 곧바로 아이들을 내보냈다.

토벌 준비가 한창인 곳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도련님, 방으로 모실게요."

회의장 밖으로 나오자 디르엔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아르델.

그는 앤느와 르비아가 정리를 마무리 중이라며 작게 말을 덧붙였다.

"응."

어쨌든 여기선 할 일이 없었기에 그를 따라 방으로 이동했다.

'여기가 더 크네.'

공작가 저택의 방보다 더 넓은 구조에 내심 감탄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큰 규모는 이 지역의 특색인 걸까.

"도련님, 책 가져다 드릴까요?"

옷을 갈아입자 짐을 정리하던 아르델이 그런 질문을 해 왔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훌륭한 마법사다.

"음… 직접 가서 봐도 괜찮아?"

"네. 저택 내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이셔도 된다 했어요."

"그럼 가서 볼래."

"그러실 줄 알았어요. 바로 모시겠습니다."

지체할 것도 없었기에 디르엔은 그를 따라 2층으로 이동했다.

토벌대들의 준비로 꽤 번잡했지만, 서재는 구석에 있었기에 방해가 되진 않았다.

"저는 다른 쪽에 있을 테니,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높은 위치에 있는 책은 건드리려고 하지 마시고요."

"응."

아르델도 찾는 자료가 있었는지, 몇 가지 경고를 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 좀 살펴볼까.'

혼자가 된 디르엔은 책장 사이를 거닐며 표지를 살폈다.

<남부의 계절>

<켈파 명소 지리도>

<마수 요리 20선>

<기사, 사랑을 쟁취하다>

묘하게 영양가가 없어 보이는 제목들.

하지만 다음 책장으로 옮겨 가자 그럴싸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덴티티의 종류와 고찰>

아르델에게 들었던 마법의 아이덴티티.

제르노 학원에서만 얻을 수 있다기에 체념했지만, 기대감은 언제나 가득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책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펄럭-

감동에 휩싸인 디르엔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책의 내용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아이덴티티는 일정 속성에서 부가적인 효율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고유 능력이다.>

<속성의 부가적인 능력은 형태와 성능, 운용법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극소수의 마법사는 아이덴티티를 이용해 특수한 마법을 제작하며, 그것은 상당히 높은 효율을 보인다.>

<아주 드물게 복수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자 눈에 들어오는 다양한 내용.

점점 뒤로 갈수록 마법 학원에 침입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당연히 그렇게는 안 되겠지만.

"디르엔."

그때, 뒤쪽에서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유명한 문제아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페니파 형님."

"책은 재밌어?"

"네. 저택에 없던 것이 많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형님도 책을 보러 오신 건가요?"

"책보다는 너를 찾으러 왔지. 분명 여기에 있을 테니까."

"…저를요?"

적당히 건넨 물음에 페니파는 웃는 얼굴로 의외의 답을 해 왔다.

저렇게 확신하듯 말을 하니, 아이에게 속마음을 읽힌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페니파가 목소리를 작게 낮추며 물어 왔다.

"너, 심심하지?"

"책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가고 싶지 않아?"

"…아까 들으셨잖아요. 저희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까 더 재밌는 거지. 모험은 그런 거 아니야?"

원론적인 회유에도 감성으로 응하는 페니파.

하지만 어른으로서 말리긴 해야 한다.

"혹시 여러 마수라도 만나게 되면 저는 짐만 될 뿐인걸요. 형님은 대단하시지만, 너무 위험해요."

나는 전력 외이고, 너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느낌으로 돌려 말했더니 갑자기 페니파의 말이 없어졌다.

'화났나?'

어쨌든 창술이라는 길을 선택한 그이기에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화는 나겠지만, 객관적으로 말을 해 줄 필요가....

"너."

그때,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뗀 페니파.

하지만 이어진 말은 평온했던 디르엔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마법 쓸 수 있잖아?"

9.

"…네?"

갑자기 훅 들어온 물음에 디르엔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던 페니파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걱정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다른 가족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거지?"

"…어떻게 아신 건가요?"

"특별한 건 없고.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거든."

"...."

항상 사람이 없는 것을 살핀 뒤에야 임했던 작업.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연구자로 살았던 디르엔에겐 조금의 부족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니파 외에도 누군가 알아챘을지 모르지만, 당장은 고민해도 의미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도대체 이 아이는 인기척도 내지 않은 채 무슨 생각을 하며 보고 있었을까.

"그런데 같은 마법진은 왜 계속 보고 있던 거야?"

"네?"

"멀어서 반짝이는 것만 조금 보였지만, 어차피 파이어 볼트 아니야? 들킬까 봐 마법을 안 쓰는 건 알겠는데, 같은 것만 계속 봐도 재미없잖아."

조수를 통한 작업은 타인이 볼 수 없다.

아마 그가 본 것은 비교용으로 만들어 냈던 실제 마법진이겠지.

애초에 마법에 관심이 없는 페니파이니 구분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그것이 수십 개의 다른 마법이라 해도 말이다.

"…마법진을 익혔다는 게 기뻐서 보고 있었어요."

"아, 그건 그렇네. 나도 창술을 처음으로 썼을 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신났었거든."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페니파.

하긴 새로운 것을 익히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같이 가는 거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페니파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어 왔다.

"음… 경험도 없이 마수와 싸우는 건 역시...."

"당연히 바로 전투에 돌입하지는 않을 거야. 처음엔 슬쩍 둘러보고 오는 거지. 애초에 비 때문에 들킬 위험도 적잖아?"

"어느 쪽에게 들킬 위험이요?"

"물론, 마수와 토벌대 양쪽 다지. 특히 마수는 냄새와 소리로 적을 감지하니까,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을 거야. 숲이라 몸을 숨기기에도 좋잖아?"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네.'

대충 던진 말이라기엔 정확히 알고 있는 이점.

그의 말처럼 몰래 숲을 살피기엔 오늘 같은 날씨가 최적의 조건이다.

'…내가 없어도 혼자 튀어 나가겠지.'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지금은 저 계획을 알아 버렸다.

다음 날 시체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아무래도 찝찝하겠지.

원래는 혼자 나가서 마법 실험을 하려고 했지만, 사회적 방패가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나가실 생각이신가요? 토벌대가 활동 중인 시간엔 피해야 할 눈이 많을 텐데요."

"당연히 밤에 나가야지. 야간 토벌은 없다고 했지만, 이 지역은 마광초가 많아서 밤에도 그렇게 어둡지 않거든."

"마광초라면… 그 마나를 머금은 꽃이요?"

"응. 그렇게 강한 빛은 아니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을 거야."

전혀 모르고 있던 지식으로 돌파구를 만든 페니파.

아무래도 이 아이에 대한 평가를 조금 올려야 할 듯하다.

"그래서, 가는 거지?"

"알겠습니다. 대신 숲에서는 제 의견을 조금...."

"당연하지! 자정에 저택 서쪽 담 너머에서 보는 거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속삭이듯 기뻐하며 사라지는 페니파.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시끄러움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마수는 문제가 없는데....'

사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마실 수준에 불과하다.

F급 마수가 수백씩 몰려들어도 디르엔에겐 전혀 타격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페니파의 자유로움과 토벌대의 눈이 변수가 되겠지.

탁-

생각을 정리한 그는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몇 권의 서적을 더 챙긴 뒤 아르델을 불러 방으로 이동했다.

***

"디르엔? 그게 누군데?"

4년 전, 루블린 공작가의 저택.

기사들과 훈련을 하던 페니파는 들려온 잡담에 물음을 던졌다.

"예? 막냇동생이신 디르엔 님을 모르시는 겁니까?"

"…아! 마르코랑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걔구나."

"아! 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페니파를 보던 기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술과 훈련에는 열의가 넘치지만, 저택 내의 일에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통한 직계가 아니기에 조금 신경을 쓰셔야...."

"귀찮게 무슨 상관이야, 그게?"

"어머님께서도 몇 번이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괜히 살갑게 다가서셨다간 시종들이 힘들어질 겁니다."

"걱정하지 마. 나도 같이 혼나면 되거든."

"하아...."

페니파의 답에 한숨을 내쉬는 기사들.

물론, 어린 나이임에도 구김 없는 성격이라 공작가 내에서도 은근히 따르는 자들이 많다.

시종들은 이미 체념한 상태라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 저기...."

그때, 한 기사가 정원 쪽을 보며 목소리를 냈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 남성과 여성 곁에서 걷는 작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쟤가 디르엔이야?"

"예. 저택 뒤쪽으로만 다닌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정원으로 나왔나 보네요. 어쨌든 최대한 연관되지 않는 것이… 도련님? 도련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장 튀어 나가는 페니파.

주변에서 만류하려 손을 뻗었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안녕?"

작은 아이에게 다가간 페니파는 손을 흔들었다.

동생의 눈이 살짝 커진 것을 보니 조금 놀란 눈치다.

"아, 안녕하세요, 페니파 형님. 저는 디르엔이라고 합니다."

곁에 있던 시종에게 전해 들은 듯 아이는 예의 바른 자세로 인사를 해 왔다.

마르코랑 같은 나이이면 6살인데, 그 까칠한 동생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반가워. 앞으로 잘...."

가볍게 인사를 건네려는 사이, 디르엔의 시선이 조금 옆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오른손에 들린 자신의 창이 있었다.

"마법 명가에서 창을 쓰니까, 이상하지?"

이 길을 선택했을 때부터 언제나 겪었던 이단 취급.

겨우 6살짜리가 아는 것은 없겠지만, 마르코는 이미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

어쩌면 이 아이도....

"아니요. 저는 무기를 못 써서… 대단하신 것 같아요. 창은 많이 무겁나요?"

"어? 아… 이건 경량화 마법이 사용된 거라 무겁지 않아. 한번 만져 볼래?"

"네? 경량화...! 그럼 조금만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창을 앞으로 내민 채 몸을 숙이자 찬찬히 살피기 시작한 디르엔.

겉치레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보는 느낌이라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받던 둘은 서로 만족한 상태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다음에 다른 것도 보여 줄게. 신기한 창들이 몇 개 있거든."

"정말요? 감사합니다, 형님!"

설레는 마음으로 건넨 권유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답하는 디르엔.

그 모습을 보던 페니파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행복한 아이의 얼굴을 본 시종과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켈파의 저택에 찾아온 밤.

어두운 방에서 준비를 마친 디르엔은 창을 통해 바깥으로 내려왔다.

3성급 비행 마법 '플라이' 덕분에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왔어?"

담을 넘어 밖으로 이동하자 어두운 망토를 뒤집어쓴 페니파의 모습이 보였다.

철두철미한 준비가 그의 두근거림을 대변하는 듯했다.

"창은 들고 오셨네요."

"혹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몸은 지켜야 하니까. 마법사인 너도 근접전의 대처는 어렵지 않아?"

"전혀 어렵… 죠."

"그렇지?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를 위한 대비책이야. 막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말실수가 나올 뻔했지만, 페니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F급 마수에 죽을 일은 없겠지.'

마나 코어의 숙련도가 쌓이면 육체를 보호하는 마나 장막을 만든다.

조금이나마 실용적인 효용을 보이는 것이 4성급 무렵.

하지만 생후부터 시작한 디르엔의 조기 훈련은 그 시기를 터무니없이 앞당겼다.

대단한 성능을 보이진 못해도, 저급한 마수에게 목숨을 잃을 리는 없다.

"그럼 출발할까?"

"네."

어쨌든 무사히 대화를 넘긴 후, 둘은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분 정도를 걸었을 무렵, 발소리를 죽이며 이동하던 두 아이는 큰 나무 뒤에 멈춰 섰다.

스슥-'…생각보다 밝네.'

마광초의 희미한 푸른빛은 시야가 닿는 곳마다 존재했다.

굳이 따지자면 어스름이 남은 새벽 정도의 느낌일까.

쏴아아-!

그러는 와중에도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질척이는 땅에 발이 붙어 상당히 불편했다.

"저기 있다."

그때, 조금 앞서가던 페니파가 속삭이듯 외치며 발을 멈췄다.

가려진 수풀 너머를 겨우 보니 붉은 비늘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파이어 스네이크인가 봐."

처음 보는 마수의 모습에 페니파가 눈을 반짝였다.

문제는.

'꽤 많네.'

대충 세어도 20마리는 넘을 법한 뱀의 무리.

다행히 잠이 든 것 같지만, 한 마리가 깨어나면 파티가 시작된다.

"이동하시죠."

"그럴까?"

디르엔의 말에 페니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구잡이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성적이니 미안할 정도다.

"전부 다 봐서 다행이네."

약 1시간 정도를 돌아다닌 둘은 곧장 저택의 부지로 돌아왔다.

대부분 무리를 지은 상태이긴 했지만, F급 마수는 전부 확인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마수와 싸우실 줄 알았어요."

"음… 그러고는 싶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둘로는 무리잖아? 한두 마리면 모르겠지만."

디르엔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는 페니파.

마법을 다루지 못해 그의 실력을 판단할 만한 근거가 없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선 맞는 이야기다.

'차라리 모험가였다면 몰라도....'

마수들의 결집은 곧 그들의 배를 채우는 지능적 사냥으로 이어진다.

경험이 부족한 어린 마법사들이 손을 뻗어 봤자 그것이 잘려 나갈 뿐이겠지.

이러나저러나 정찰로 끝난 것은 옳은 판단이다.

"좋아, 그럼 내일도 오자. 따로 다니는 토끼를 하나 찾고 싶거든."

"토끼면… 블루 래빗이요?"

정확한 목표물의 언급에 질문을 던지자 페니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블루 래빗 중에 뿔이 달린 놈을 찾고 있어. 창끝의 보강에 유용하게 쓰인다고 해서 말이야."

"…아까 자료에는 없던 것 같은데, 잘 아시네요."

"마수에 관한 책이 서재 구석에 있었거든. 너도 볼래?"

"그런 게 있었나요? 꼭 부탁드립니다!"

"좋아. 내일 아침 일찍 가져다줄게."

탓-!

시원하게 약속한 페니파는 가볍게 뛰어 2층으로 올라갔다.

뭔가 순식간에 지나가긴 했지만, 마수에 관한 책이라면 너무도 필요한 순간이다.

그렇게 홀로 고개를 끄덕인 디르엔은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다음 날.

페니파가 찾아온 것은 조식보다도 이른 아침이었다.

건네받은 책은 마수의 특징과 이런저런 정보를 적은 책이었는데, 예상보다 상당히 내용이 좋았다.

토벌의 일선에 선 사람이 작성한 것인지, 전투에 관한 세밀한 조언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도 의외네.'

<아르손의 미궁 탐험기>

어제 서재의 구석에서 찾아 방으로 들고 왔던 책 한 권.

처음엔 소설인가 싶기도 했는데, 너무도 내용이 유익했다.

온갖 지역에 나타났던 미궁들을 정리하고 분석한 것이 10개나 되는 것이다.

전부 직접 클리어했다고 하니, 아르손이라는 사람은 상당한 실력자가 아니었을까.

'역시 특이하단 말이야.'

자료에서 보았듯, 이 세계의 미궁은 살아 있는 거대 마수라고 불리는 극히 자유로운 존재다.

출현하는 상황 또한 너무도 제각각이라 예측은 불가한 수준.

그 때문에 한 미궁의 공략이 공유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마주한 사람이 잡아먹히게 된다.

그것을 열 번이나 겪은 아르손은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다 읽어 버렸네.'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순식간에 완독해 버린 책.

언젠가 미궁에 갈 생각이기도 했기에 문제는 없었다.

물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니겠지만.

"도련님, 슬슬 가셔야 해요."

책을 붙잡고 있는 사이, 어느새 찾아온 훈련 시간.

"응."

빠르게 채비를 마친 디르엔은 시종들과 함께 아래로 향했다.

10.

"그럼 지금부터 훈련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아이가 저택의 입구로 모이자, 기사단장 타란이 그들 앞에 섰다.

"하아, 피곤해."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꼭 가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의 말에 피곤한 얼굴로 반응하는 쌍둥이 남매.

샤를 쪽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마르코는 조용히 열의를 불태우는 듯했다.

"우리는 어제부터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페니파가 웃으며 속삭이는 사이, 다시금 타란이 말을 이어 갔다.

"여러분의 호위는 이번 토벌전 동안 훈련을 도울 겁니다. 아무쪼록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디르엔 도련님."

"응, 잘 부탁해."

오늘 아침 일찍부터 자신을 찾아온 기사 얀테.

약간 지쳐 보이는 것이 어제는 토벌에 참여했던 모양이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타란은 곧바로 앞장서 저택을 나섰다.

정식 루트로 숲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디르엔에게도 새로운 느낌이다.

"마수는 감각에 민감합니다. 특히 시각과 후각, 청각에 특화된 종류가 많아 이런 기상 조건은 놈들에게 최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입구에 멈춰서 설명을 시작하는 타란.

솔직히 이 정도 빗줄기면 사람에게도 최악인 수준이지만, 호위까지 붙었으니 문제는 없다.

"우선 마르코 님은 저를 향해 1성급 마법, 파이어 볼트를 사용해 주십시오."

"좋아."

뜬금없는 그의 말에도 마르코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팟-

그러자 허공에 천천히 생겨나는 마법진.

그것이 완성되자 마법의 영창이 울려 퍼졌다.

"파이어 볼트!"

슈욱-

펑-!

목소리와 함께 날아간 불덩이는 타란에게 닿으며 터졌다.

하지만 손을 뻗고 있던 그에게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칫."

"마나 코어에서 비롯된 숙련도의 차이는 이런 현상을 만듭니다. 이것은 마수를 대상으로 봐도 다른 점이 없으니, 항상 인지하시길 바랍니다."

타란은 검을 쓰는 기사이지만, 3성급 마법사이기도 하다.

애초에 기사들의 급을 나누는 기준도 마나를 어느 수준으로 검술에 녹여 내는가에 달려 있다.

"안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지금부턴 호위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기사단장의 주의와 함께 아이들은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위들도 그렇지만, 모두가 잔뜩 긴장한 채였다.

"저기 고블린이 보이십니까?"

그때, 걸음을 멈추며 정면을 가리키는 타란.

시선을 돌리니 3마리의 고블린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의 포지션은 원거리에서의 저격이 기본입니다. 이곳에서 저 마수들을 공격해 보십시오."

그의 말에 마르코는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아까와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파이어 볼트!"

펑-!

키에엑-!

빗줄기를 뚫으며 날아간 불덩이는 고블린 무리를 삼켰다.

키긱-!

하지만 적중한 것은 두 마리뿐.

나머지 하나는 놀란 듯 안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잘하셨습니다. 마나의 소모에 주의하시면서 훈련을 이어 가면 될 듯합니다."

"으… 나도 하고 싶어!"

"남의 훈련 구경하는 게 무슨 훈련이야!"

마법과 마수의 사냥에 분노를 표출하는 쌍둥이 남매, 레이어와 메이어.

그 모습에 타란은 진지한 얼굴로 조언을 덧붙였다.

"이곳에 산재한 마나를 느끼는 것 또한 훈련입니다. 마법진의 구조와 작용 기전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언제든지 1성급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훈련으로 마나의 감각이 예민해진다면 더 쉽게 풀리겠죠."

그의 말처럼 마수가 가득한 숲의 마나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다.

민감하지 않은 아이들에겐 약간의 스산함이 느껴지는 정도겠지만, 훈련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하겠지.

"조금 더 안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타란의 선도에 따라 훈련은 이어졌다.

마르코의 토벌만을 계속 지켜보는 구도인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다채로운 경험이 병행됐다.

"식물 또한 극소량의 마나를 응축하곤 합니다. 마광초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지요. 나무와 수풀에 손을 대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사체라고 해도, 마수를 직접 만져 보는 것 또한 좋은 경험입니다."

"대기 중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종족뿐입니다. 하지만 마나 코어의 자극 정도는 가능한 수준으로...."

안전에 안전을 거듭하며 이어진 몇 시간의 훈련.

저택 주변을 빙빙 도는 모양새가 됐지만, 덕분에 피해는 전혀 없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진행되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입구에 돌아온 후, 타란의 말과 함께 아이들은 각자 흩어졌다.

디르엔 역시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디르엔, 밤에 알지?"

그때,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이는 페니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디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 그럼 이따 봐."

답을 들은 그는 빠르게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아까도 언뜻 봤더니, 열심히 숲의 지형을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오늘은 직접 사냥을 하려는 거겠지.

"도련님, 고생 많으셨어요. 방으로 모실게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멀찍이서 시종들이 다가왔다.

"응."

잠시 숲을 다시 돌아봤던 디르엔은 이내 시종을 따라 방으로 이동했다.

'…벌써 갈 시간이네.'

방에 틀어박혀 마수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됐다.

주변의 사람들이 물려진 게 언제였는지는 모를 정도로 집중했던 모양이다.

후웅-

옷을 갈아입은 디르엔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왔어?"

서쪽 숲 경계에 도착하자 페니파는 어제와 같은 차림으로 서 있었다.

창의 상태를 보니 상당히 공들여서 정비한 모양이다.

쏴아아-

"오늘은 사냥해도 괜찮겠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보며 웃음을 짓는 페니파.

시야는 그래도 확보가 되지만, 웬만한 소리는 묻혀 버릴 정도였다.

즉, 이것은 실험의 기회다.

"그럼 가 볼까?"

그의 들뜬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페니파는 창을 고쳐 들며 걸음을 옮겼다.

디르엔도 무기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지팡이는 제르노 학원에 입학한 후에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맨손으로도 차고 넘치니 상관은 없는 일이다.

"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페니파의 뒤를 따라 숲으로 이동했다.

스슥-

수풀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선 둘은 페니파가 낮에 봐 뒀던 루트로 길을 나아갔다.

"저거 어때?"

그때, 옆쪽을 걷던 페니파가 좌측의 숲 너머를 가리켰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것은 초록색 액체 덩어리.

어제도 봤던 F급 마수 포이즌 슬라임이다.

"둘 정도면 괜찮겠네요. 하나씩 맡을까요?"

"좋아. 난 왼쪽 놈을 맡을게."

"네."

탓-!

그렇게 말한 페니파는 발을 박차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창을 쓰는 사람은 전생에서도 소수였기에 꽤 관심이 동했다.

휙-!

빠르게 접근한 페니파는 횡으로 창을 휘둘렀다.

철벅-

하지만 순식간에 찌부러진 슬라임의 머리끝을 가볍게 스치고 말았다.

꿀렁-

그러는 사이, 조금 떨어져 있던 다른 슬라임이 동료에게 가세하려고 했다.

당연히 디르엔의 눈은 그보다 빨랐기에 대처에는 문제가 없었다.

"파이어 볼트."

슈욱-!

허공에 생긴 마법진에서 뻗어 나간 불덩이.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간 그것은 순식간에 목표에 적중했다.

펑-!

꿈틀거리며 이동하던 슬라임은 폭발과 함께 바닥에 잔해를 뿌렸다.

나름 조절하려고 했는데 슬라임의 핵과 함께 터져 버린 것이다.

"역시, 제법이잖아!"

그것을 눈치챈 듯 페니파는 목소리를 높이며 전투를 이어 갔다.

'…뭐지?'

꽤 고전하는가 싶었는데, 그 움직임은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신의 마법 실험과 비슷한 목적이라고 봐야 할까.

쉭-!

철퍽-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순식간에 대각선으로 그어진 창날.

궤도가 정확했는지 핵이 쪼개진 슬라임이 바닥에 퍼졌다.

"첫 전투는 성공이네?"

페니파는 창을 가볍게 털어 내며 웃음을 지었다.

그가 매일 기사들과 했던 훈련을 생각하면 준비 운동도 안 되는 수준.

하지만 살아 있는 무언가를 베는 감각은 처음 느껴 보는 경험이었다.

게다가.

"그런데 파이어 볼트가 그렇게 빠른 거였어? 마르코는 좀 더 느렸던 것 같은데."

어제 봤던 마법과 같은데도 무언가가 명확히 달랐다.

마법사단의 훈련 또한 많이 지켜봐 왔는데도, 유독 특이하게 느껴진 것이다.

"비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신 게 아닐까요?"

"음… 그래? 뭔가 달랐던 것 같은데."

"저는 아직 1성급 마법사인걸요. 대단한 걸 할 수는 없어요."

적당히 둘러 대답한 디르엔은 내심 가슴을 졸였다.

여러모로 조정하려고 했는데, 페니파의 감이 생각보다 좋았던 것이다.

'…이거 멈춰야 하나?'

파직-

파직-

그러는 사이, 아까부터 외곽에서 돌고 있던 얇은 전류의 고리.

다양한 마법을 위한 실험을 몰래 진행 중이었는데, 죽인 개체 수가 50을 넘어섰다.

물론, 소멸된 고리의 개수로 판독한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겠지.

토벌이 진행되지 않는 시간이라 인명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체는 챙길 수 없어서 아쉽네. 이게 다 아버님 거라는 거잖아?"

마법을 거두는 사이, 진흙 위에 떨어진 슬라임을 보며 중얼거리는 페니파.

애초에 포이즌 슬라임은 사용처가 거의 없지만, 토벌 기간에 생긴 마수의 사체는 온전히 공작가의 소유다.

그 때문에 사체들은 경로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마지막에 수거 및 해체를 진행한다.

괜히 잘못 건드린다면 애먼 사람이 죄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페니파가 원하는 뿔 하나 정도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디르엔, 왜 그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른 가요, 형님."

잡념을 떨친 디르엔은 페니파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계속된 실험과 가끔의 사냥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영 만나기가 어렵네."

저택의 부지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는 페니파.

블루 래빗은 꽤 마주쳤지만, 뿔이 달린 개체는 없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마수들의 사체가 엄청 많았지? 토벌대가 1번, 2번 구역도 정리하기 시작했나 봐."

"그런… 것 같네요."

오늘 하루 동안 사용한 마법의 종류는 약 30가지.

그에 희생된 마수는 아마 몇백은 될 듯했다.

최대한 피해서 이동하고 싶어도 원형으로 전개를 하다 보니 경로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범위를 좀 더 넓게 운용하는 게 좋을 듯하다.

"어쩔 수 없지. 내일도 나오자. 아니, 슬슬 우리도 멀리 나가려나?"

"플랜트가 토벌되기 전까지는 무리이지 않을까요?"

"그런가? 뭐, 어쨌든 내일 보자. 잘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헤어진 둘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비슷한 하루를 반복했다.

훈련의 영역이 아주 조금 넓어지긴 했지만, 그마저도 저택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게 낮과 밤의 이중적인 생활을 이어 가기를 나흘.

"플랜트의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이곳의 분위기가 반전됐다.

11.

"플랜트가 이리도 손쉽게...."

토벌 나흘째의 밤.

켈파의 저택 회의실에선 켈리마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밝혀졌나?"

"죄송합니다. 아직 단서가 잡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상사의 물음에 기사단장 타란은 곤란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늘 오전에 발견된 엄청난 광경은 토벌대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토벌이 아직 진행되지 않은 1번, 2번 구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마수 사체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구역에 진입했던 토벌대는 빠르게 플랜트를 찾아냈고, 큰 피해 없이 토벌에 성공했다.

전장에 오랜 시간 몸을 담은 켈리마프조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동일 계통의 마법이 아니라 수십 가지 종류였다. 그렇게 깔끔한 흔적이라면 상당한 실력의 전문가 무리일 테지. 로프만, 모험가 길드 쪽에선 답이 있었나?"

"S급 모험가인 노벨로프의 파티가 최근에 이 근방으로 들어왔다고 하더군. 하지만 길드에서도 그들의 행방은 파악하지 못하는 듯했다."

"노벨로프인가...."

켈리마프는 친우인 로프만 남작에게 상황을 알린 후, 조사를 부탁했다.

그런데 제국 내에서도 유명한 고위 모험가 노벨로프의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S급인 노벨로프는 물론, 함께하는 동료들 또한 상당히 강력하다는 베테랑 파티.

그런 모험가들이 어째서 이 조용한 켈파에 찾아온 걸까.

"타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 또한 실력과 상황을 봤을 때, 그들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또 무언가 있었나?"

켈리마프의 물음에 타란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사를 나갔던 단원이 커블로스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커블로스라고?"

"그게 정말인가?"

너무도 뜬금없는 단어에 켈리마프와 로프만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흑마법의 추종자들을 죄다 모아 뒀던 단체 커블로스.

금지 마법을 주로 연구하는 그들은 세간이 들썩일 정도의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실력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탓에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과거의 이야기다.

"놈들은 황실의 명으로 수십 년 전에 토벌되지 않았나. 제국 전체가 나선 탓에 완전히 괴멸했을 텐데."

"켈파 또한 놈들로 인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어째서 그런 소문이 보고되지 않았지?"

두 사람의 날이 선 반응은 당연한 결과.

그 심각성을 잘 아는 타란이었기에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최근 농민들에게서 시작된 작은 소문이라 아직은 보고되지 않은 듯합니다. 토벌과는 관련성이 떨어질지 몰라도, 이게 사실이라면...."

"흠...."

그의 말에 켈리마프는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진실이라면 빠르게 조사해야 할 중요한 사안.

그리고 이 문제는 지역을 관리하는 로프만에게 무엇보다도 중한 문제였다.

"이쪽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뒤는 맡겨도 괜찮겠나?"

"물론이지. 혹시 무언가 있으면 꼭 알려 주게."

"당연히 자네에겐 알려야지. 그럼 서둘러 가 보겠네."

빠르게 대화를 마친 로프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신경이 쓰이지만, 새로운 정보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흠."

어쨌든 타란의 말처럼 커블로스는 토벌의 문제와 큰 연관이 없어 보인다.

놈들이 범인이라면 사체를 죄다 쓸어 갔을 테니까.

결국 마수들의 사체는 야간에 움직이던 모험가들의 작품이라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우선은 토벌의 마무리에 집중해야 한다만.... 바실리스크에 관한 건은 벌써 머리가 아프군."

AA급 마수이자, 상당히 까다로운 토벌 조건을 가진 바실리스크.

이 이야기는 3번 구역에서 마수를 토벌하던 마법사의 보고로부터 시작됐다.

목격자는 하나뿐이지만, 시각에 특화된 아이덴티티를 가진 이였기에 가벼이 넘길 수가 없었다.

"임시 조치는 취해졌나?"

"예. 4성급 결계를 구 형태로 설치한 후 3번 구역의 토벌을 중단한 상황입니다."

"빛을 싫어하는 놈이니,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을 거다. 하필 까다로운 놈이 나타나 버렸군."

피곤한 듯 미간을 만지는 켈리마프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아직 4성급 풋내기일 때, 황제의 명으로 수많은 병력이 국경에 차출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마주하게 됐던 마수 중 하나인 바실리스크.

쳐다만 봐도 온몸이 석화되는 그 능력은 너무도 끔찍한 참상을 불러왔다.

일반 단원 대부분이 4성급 이하의 마법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

어쨌든 지금의 토벌대 역시, 놈을 처치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것을 써야 하나...."

"그것이라면… 히포그리프의 배설물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물을 끌어들이기엔 가장 좋은 미끼이지."

S급 마수인 히포그리프는 쉽게 보기 힘든 희귀종으로 고위 모험가의 표적이 되는 개체다.

한 마리는 커다란 집 한 채와 같다는 말이 돌 정도이니 써먹지 못할 부위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용도라고 알려진 배설물.

이것은 마수들의 신경계를 자극하는 페로몬을 풍겨 아주 강력한 미끼로 사용된다.

"물론, 효과는 가장 좋을 듯합니다. 문제는 이곳에서 쓰기엔...."

그의 중얼거림에 타란은 놀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토벌을 경험했지만, 그 물건을 쓴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목표로 하는 마수만 낚인다면 다행이지만, 아주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흠...."

말을 꺼낸 켈리마프 역시도 최후의 수단이라 상정했던 물건.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건은 조금 고민해 보도록 하지. 일단은 결계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1번과 2번 구역부터 최대한 빠르게 정리를 진행한다. 플랜트는 소멸했으니, 내일부터는 야간 토벌까지 병행하도록."

"알겠습니다."

그의 명령에 타란은 머릿속으로 병력의 분배를 계산했다.

솔직히 남은 마수가 그리 많지 않기에 하루 정도면 끝날 것 같다.

"가문의 자제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번 토벌전에 할당된 중요한 임무.

그 안건을 꺼내자 켈리마프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레이어 도련님이 1성급에 도달하셨다고 했나?"

"예. 어제 훈련에서 마법의 구현에 성공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아직입니다."

"흠."

쌍둥이 중 맏이인 레이어.

솔직히 다른 아이가 먼저 도달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결과다.

"훈련 범위를 조금 더 넓히도록 하지. 나는 당분간 결계 쪽에 상주할 테니, 자네가 재량껏 조절하도록."

"알겠습니다."

경례와 함께 기사단장이 물러난 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미지의 실력자 무리와 바실리스크인가...."

셀 수도 없을 만큼 겪어 왔던 토벌전이지만, 이번 같은 변수가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물며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득과 실이 공존하고 있으니, 상황 파악은 더 어려운 느낌이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