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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 *

"소드마스터!"

반가운 목소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 누군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백광의 달빛을 담은 머리카락은 백금색으로 반짝였다.

느린듯하면서도 열심히 달려온 그녀가 숨을 헥헥거리며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부스스한 금발 머리에 동그랗다 못해 땡그랗다는 말이 어울리는 눈. 그리고 달려온 바람결을 따라 밀려오는 은은한 체리향.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안나, 였나? 해방전선의 번개 각성자."

"맞아요! 기억하고 계셨네요?"

"잊기 쉬운 날은 아니었으니까. 너도 마찬가지고."

"앗! 그, 그렇죠? 헤헤······."

그녀가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배실배실 웃는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됐다.

평범하게 바라볼 땐 그렇게 커다랗더니, 웃을 땐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웃음이 뚝하고 멈췄다. 한껏 솟아있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아마 강아지였다면 귀도 축 늘어지지 않았을까?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안나가 슬쩍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런데 왜 답장 안 해주셨어요?"

"답장?"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편지라도 보냈었나?

"네. 알려주신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는데요. 저는 답장이 없으셔서 당연히 절 잊으신 줄 알았는데······."

"······메시지를 보냈다고?"

그럴 리가?

나는 안나에게 어떤 메시지도 받지 못했다. 내게 왔던 메시지들은 대부분 로제나 유혜리뿐이었고, 그나마도 일과 관련된 내용이 전부였다. 내가 이 도시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니까.

그 외엔 전부 스팸 메시지였는데······.

'······설마?'

그때 머릿속으로 오래전에 왔었던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온갖 특수문자와 이모티콘이 섞여 있던 메시지가.

내용도 별 내용이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흥분과 열기로 가득했던 그 날 밤이 떠오르네요]······ 였나?'

귀여운 이모티콘과는 달리 별 내용이 없는······ 오히려 이상한(?) 쪽으로 상상을 자극하는 메시지.

당연히 스팸 메시지로 생각하고 지웠었는데······.

"······무슨 내용이었지?"

"네? 아, 메시지요? 별 내용은 아니었는데······ 그냥 안부를 묻는 인사였어요."

"혹시 메시지를 쓸 때 이모티콘이랑 특수문자를 자주 쓰는 편인가?"

"아? 맞아요! 기억나셨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무언가 기대하는 눈치.

나는 잠시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미안하군. 모르는 번호라 지웠던 것 같다."

"아,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제 소개를 먼저 해야 했는데······ 이 바보!"

안나가 앙증맞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콩하고 내리쳤다.

"이제 알았으니 답장을 꼭 하지."

"가, 감사해요! 꼭 보낼게요!"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해방 전선이 여기엔 무슨 일이지? 내가 있는 걸 알고 온 건가?"

"아, 그게 사실은······."

"그건 내가 대답해주도록 하지."

그때 천천히 다가오던 해방전선 단원들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라타?"

"오랜만이군, 강현재."

그라타가 익살맞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만나자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너희가 아큐마 제약엔 무슨 일이야?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습격을 하다니?"

"글쎄. 혼자서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어쩌다 보니 이런 의뢰를 받아서."

내가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그라타를 바라봤다. 이제 네 차례라는 뜻이다.

"우린 예전부터 아큐마 제약의 각성자 실험실을 찾아다녔다. 너를 만났던 49구역의 연구소도 그렇게 찾아낸 거지. 그리고 우린 그곳에서 얻어낸 자료로 도시 전역에 걸친 놈들의 실험실을 파괴하는 일을 했다."

"여긴 실험실이 아닌데?"

"물론 아니지. 그래서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마지막이라는 워딩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그래. 우린 아큐마 제약의 실험실을 모조리 파괴했다. 최소한 우리가 확보했던 연구소 데이터에 따르면 말이야. 아마 최근 자료였으니, 새로 지어지진 않았을 거다."

"······."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아큐마 제약이 어딘가? 세계 5대 메가코프로 군림하는 거대 기업이다. 비록 그 본진이 바다 건너에 있다 하더라도, 소울 시티에 그들이 구축해놓은 인프라가 작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걸 일개 반군 무리인 해방전선이 모조리 파괴했다고?

'······각성자의 시대.'

나는 이제야 두 번째 시나리오의 주제가 떠올랐다.

과학과 로봇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각성자들로 시대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순간.

나는 격변하는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은밀히 이곳으로 아큐마 제약의 보안이 집중된다는 걸 알아냈지. 분명 뭔가 일을 꾸미는 거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먼저 선공하기로 결정한 거다. ······물론 네가 있을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많이 오지도 않았겠지."

그라타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뒤쪽에 늘어선 해방전선 단원들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50명이 넘어가는 인원이 서 있었다. 당연하게도 저들 모두가 각성자였다. 그것도 조금 전 연수합격에서 보듯, 모두 전투 감각이 뛰어난 각성자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를 낚으려다가 해방전선까지 낚아버린 셈이군.'

참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오늘 해방전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패배한 건 괴물들이 아니라 내가 됐을 거다.

"아니. 충분히 도움이 됐다. 저 괴물들은 나도 상대하기 어려운 놈들이었거든."

"······너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체 저것들은 뭐지? 바이오 로봇도 아닌 것 같고."

"그건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지.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겠는데."

내가 손목을 툭툭 두드리자, 그제야 그라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슬슬 SCPD나 귀찮은 것들이 나타날 시간이긴 하지. 우린 데이터 센터로 갈 거다. 기왕 왔으니 챙길 건 챙겨야지. 너는?"

"나도 찾을 물건이 있어서."

"그렇군. 하긴, 의뢰를 받았을 테니 당연한 건가? 그럼 이따가 보지."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라타가 해방전선 단원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가장 뒤늦게까지 남아있던 안나가 해방전선 단원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힘겹게 걸음을 떼며 소리쳤다.

"무, 문자 꼭 할게요!"

"그래. 이번엔 답장할게."

"헷! 네!"

나는 한껏 기쁜 웃음을 지으며 사라지는 안나를 바라보다가, 나 역시 피식 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마스터,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저런 취향을 좋아하십니까?

"······."

나는 올라간 입꼬리를 슬며시 내렸다.

* * *

역시나 내부엔 알이 없었다.

처음부터 나를 노린 함정이었던 셈이다.

'아큐마 제약이 나를 노릴 이유는 없다. 놈들도 나처럼 낚인 거야.'

그럼 이 모든 계획을 한 배경엔 누가 있는 거지?

'······역시 제네시스 밖에 없나?'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이 컸다. 로보 테크니카를 지배하는 건 제네시스일 테니.

'하지만 심증일 뿐, 확실한 물증이 없다. 심증만으론 제네시스를 처리할 수 없어.'

이게 딜레마였다.

제네시스는 소울 시티의 마더 AI고,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외부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만들어졌다.

시 정부의 통제하에 협력하긴 하지만, 그게 제네시스 스스로의 존폐가 걸린 일이라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제네시스를 폐기하는 방법은 확실한 물증을 잡아서 의회는 물론 소울 시티 여론 자체를 움직여야 가능했다.

물증이 확실하지 않다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인해 의회 통과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으니.

'그래서 유혜리도 물증을 찾으려고 나를 고용한 건데······.'

그런데 그걸 예상하고 역으로 나를 노릴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네시스를 폐기하는 게 쉽진 않겠어. 인간을 뛰어넘는 초지능이라더니, 이런 계략까지 쓸 줄이야.'

꽤나 귀찮게 됐다. 게다가 원작 게임에선 이런 상황이 없어서 앞으로 어떤 전개가 기다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따지자면 진짜 AI가 만들어낸 퀘스트라고 해야 할까?

'제네시스. 제네시스라······.'

나는 곰곰이 제네시스에 대해서 기억을 되새겼다.

이 초거대 AI는 게임 내 묘사로도 종종 언급된다. 소울 시티 출입구 전광판처럼 제네시스는 우스꽝스럽게도 연출되지만, 대부분이 대단하다, 뛰어나다라는 말이었다.

다른 메가시티 AI와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도 못하는 걸 한다, 인간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종국엔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라는 묘사.

하지만 실제 게임에선 언급만 될 뿐, 미션이나 퀘스트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대체 무슨 물증을 찾아야 하지?'

그때 내 시선으로 데이터 센터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는 해방전선이 보였다. 다들 얼굴이 밝은 게 원하던 정보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 개고생을 하고 결국 허탕만 쳤는데.

그렇게 뚱한 시선으로 녀석들을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하며 돌아갔다.

'······아니지. 내가 꼭 제네시스를 폐기할 필요가 없잖아?'

내가 왜 물증을 찾고, 의회가 제네시스를 폐기할 때까지 손가락 빨고 기다려야 하지?

"그냥 내가 없애면 되는데."

나는 다가오는 해방전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그 방법을 알만한 사람이 해방전선에 있었으니까.

시대의 주인공 (1)

177화. 시대의 주인공

해방전선과 함께 아큐마 제약을 빠져나왔다.

예상외로, 그때까지 소울 시티 쪽에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위를 길게 늘어진 다리에서도, 별빛만 가득한 밤하늘에서도, SCPD의 경광등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을 뗐다.

"많이 강해졌더군."

"응?"

그라타가 고개를 갸웃한다.

"너희들 말이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완전 딴판이야."

"아아. 49구역에서 말인가? 확실히 그때와 비교하긴 어렵지. 일단 각성자 숫자도 늘어났고, 따로 훈련도 하니까."

"훈련?"

나는 의외라는 눈으로 그라타를 바라봤다.

해방전선이 아무리 나름 체계적인 조직의 형태로 발전했다지만, 군대가 아닌 한 훈련을 하는 조직은 드물었다.

게다가 해방전선은 반군세력에 가까운 터라, 대놓고 훈련을 할 만한 곳도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수배자 신세였다.

그리고 애초에 훈련까지 할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군대를 가지 뭐하러 여기 있겠는가? 언제 감옥에 갈지 모르는 신세인데.

"뭐, 거창한 건 아니고. 우리끼리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보니, 이 기프트라는 게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지더라고. 그래서 원하는 사람들 위주로 서로 능력을 쓰면서 훈련을 했더니, 하하하! 어느새 다들 하고 있더라니까?"

"자발적으로?"

"당연히 자발적이지! 군대도 아닌데 훈련하라고 등 떠민다고 하겠어?"

"그 후유증을 겪고도 말인가?"

나는 눈매를 좁혔다. 혹시나 그라타가 거짓말을 하나 싶어서.

포스 후유증. 이건 나도 겪는 후유증이다. 한계 이상으로 사용된 포스가 내부를 진탕시켜서 무기력증에 빠뜨리는 후유증.

어떤 느낌이냐면, 술을 진탕 마시고 필름이 끊긴 다음 날 아침을 떠올리면 된다. 치밀어오르는 구토감, 깨질 것 같은 두통, 누가 손을 넣어서 위장을 휘젓는 것 같은 속쓰림.

이걸 버텨야 포스의 크기가 미약하게나마 커진다.

그리고 이 정도로 눈에 띌 정도로 발전했다면······ 한두 번으론 어림도 없다. 최소 수십 번이다.

"흥! 그깟 후유증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 너도 감자공장에 있어봐서 알잖아? 나는 다시 거기로 돌아가느니, 매일 후유증을 겪는 삶을 살겠어!"

그라타가 콧김을 내뿜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감자공장에서의 삶은 확실히 살아도 산 게 아닌 부품에 불과했으니까. 아마 그곳에서 탈출한 다른 각성자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해방전선 각성자 모두가 그런 삶을 산 건 아니다. 각자 사정이 있어 반군세력에 가까운 해방전선으로 흘러들었겠지만, 평범한 인생을 살다 온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그런 자들이 매일 저런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을 한다? 한두 명도 아니라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우리야 그렇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 같은 삶을 산 건 아니잖아?"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비참한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너도 알잖아?"

"······?"

'아······ 혹시?'

나는 불현듯 스쳐 지나간 기억에 입을 열었다.

"혹시 49구역에서 구조한 각성자들도 있나?"

"물론. 그리고 49구역뿐만 아니라 아까도 말했듯 우린 도시 전역에 있던 아큐마 제약 실험실을 공격했어. 이곳에 온 이들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그라타와 안나를 제외한 사람들 대부분이 초면인 것 같더라니······ 아큐마 제약에 납치됐던 각성자들이었나?

"복수인가?"

"비슷한 거지."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그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을 할법하다.

그게 복수가 됐든, 다신 실험실 쥐 신세가 되기 싫다는 감정에서 비롯됐든,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동기니까.

그럼에도 아직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단순히 훈련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실전과 훈련은 다르다.

특히, 이들이 맞이한 상황은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을 상대하면서 일말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짜놓은 각본처럼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공격이 이어졌다.

아마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이들끼리 충분히 괴물을 잡았겠지. 조금 애를 먹긴 했겠지만 말이다.

그라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마 전투 경험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탓이겠지."

"아큐마 제약의 실험실을 파괴하느라?"

"그것도 있고. 최근 각성자 범죄들이 늘어나면서 우리가 자경단 역할 하고 있는 건 알지?"

"직접 보기도 했다. 각성자 범죄는 아니었지만."

물론 그때 목격한 범죄는 해방전선이 아니라 캔디라는 염력소녀가 해결했었다.

"네 생각보다 각성자 범죄가 심각한 수준이야. 뉴스로 나오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게다가 그동안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들인지, 기프트를 사용하는데 망설임이 없어. 덕분에 강제로 실전 전투 훈련도 된 셈이지."

"어느 정도길래?"

나는 그라타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각성자 범죄가 심각하다고? 그럴 리가? 이제 시나리오 초반부인데 벌써 심해질 리가 없다.

분명 처음엔 각성자의 등장에 환호와 흥분이 우선이고, 시나리오 후반부에 이르러야 각성자가 만들어낸 폐해가 부각된다.

'그래야 이어질 세 번째 시나리오와 맞물리게 되니까.'

그런데.

"오죽하면 우리가 출동하겠어? 강도에 강간에 아주 쌩난리야. 사람 열댓 명 죽이는 건 다반사라니까? 요즘 40번대 구역에선 갱보다 이놈들이 더 문제라고."

"······그 정돈가?"

"그래. 덕분에 아주 지랄 같아. 대체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만 죄다 각성했는지 모르겠어."

"······."

그거야 고사리를 주로 먹는 부류가 하층민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간혹 음식을 가리지 않는 상류층도 있다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따라서 각성자 대부분은 하층민이라 봐야 옳고, 여태껏 각성 사실을 숨기고 살았을 정도로 눈치를 보는 삶을 살았을 거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핍박을 받았을 수도, 부당한 대우나 노예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랬던 자들에게 감시 없는 힘이 주어졌으니······ 가만히 있는 게 더 어려웠을 거다.'

30번과 40번대 구역의 치안 공백. 거기에 금천교의 난 이후 더 이상 각성자인 걸 숨기지 않아도 되는 환경.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기 빠듯한 주머니 사정까지.

이 정도면 범죄를 저지르라고 등을 떠미는 격이긴 했다.

'그럼에도 너무 빠르다. 벌써 이 정도라면 세 번째 시나리오 진입도 빨리 질 거야.'

그럼 모든 계획이 변경된다.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 얻으려 했던 이점도 대부분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여태껏 느리게 돌아가던 초침을 누군가 억지로 돌리는 느낌이다. 시나리오의 시간 선이 당겨진다면, 분명 서로 어긋나거나 부딪치는 에피소드도 발생할 터.

그럼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중요한 건 메인 시나리오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다.'

서브 에피소드쯤이야 손해를 조금 보는 셈 치고 스킵해도 된다.

하지만 메인 시나리오는 아니다. 메인 시나리오에 눈을 떼는 순간 도시가 날아간다.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그래도 범죄자들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혼자서 자경대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던데."

"하아! 있기야 있지. 그런데 그게 도움이 안 되는 게 문제야. 그놈들이 설치면서 오히려 피해자가 늘어났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피해자가 늘어나다니?"

"범죄자나, 혼자서 자경대 활동하는 놈이나, 둘 다 기프트 컨트롤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서로 죽자고 싸우는데 일반 시민들만 피해를 보는 거지."

으음. 그게 또 그렇게도 연결되는군.

그러다가 문득 캔디라는 염력소녀가 떠올랐다.

그녀의 기프트 컨트롤은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뛰어났다.

염력의 특성상 다수를 상대할 때 취약해지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갱들 다섯의 몸을 나무젓가락처럼 분질러놨다.

그리고 심지어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 사라질 땐 날아갔다.

스스로의 몸을 제어해 날아가는 건, 염력 중에서도 최고 난도에 속했다.

"혹시 캔디라고 아나?"

"캔디? 무슨 캔디? 난 민트초코 캔디가 좋던데."

"······그 캔디 말고. 그리고 무슨 민트초코를 좋아하나? 제정신인가?"

"어허! 민트초코가 얼마나 생산성이 높은 음식인지 모르는군? 민트초코는 무려, 먹고 나서 양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음식이란 말이다!"

그라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성을 냈다.

나는 녀석과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래. 너나 많이 먹고. 아무튼, 내가 말한 캔디는 사람 이름······이다. 아까 말했던 혼자서 자경대 활동을 하는 소녀지."

"그게 왜?"

"네가 말한 것과 다르게 엄청나게 강한 각성자거든. 기프트 컨트롤도 말도 안 되게 섬세하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 반응을 보아하니 꽤 유명한 것 같던데."

내 말에 그라타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미튜브니 스타그램이니 해서 SNS에서 화제가 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아마 그중 하나인가 보군."

"그래? 그 정도로 강한데 해방전선과 접점이 없다?"

나는 기억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테지만, 내 예민한 청력은 그 혼잣말을 모조리 들었다. 귀엽고 깜찍한 외모와 말투완 달리, 혼잣말을 할 땐 입이 걸었다는 걸.

그리고 분명, 해방전선이 다가오는 걸 미리 감지하고 도망치듯 날아갔다. 누가 봐도 만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요즘 그런 애들이 한 둘이 아니야. 게다가 영상조작도 조금만 돈을 쓰면 어렵지 않으니 진짜를 구분하기도 쉽지 않고."

"흠. 그런가?"

"그래. 그래도 네가 말할 정도면 진짜인 건 확실한 것 같으니 접촉은 해봐야겠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쉽지 않을 거다. 분명 그녀의 반응은 해방전선의 등장을 꺼려하는 분위기였으니.

그러는 사이,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이크를 숨겨놓은 장소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방전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나 잡아달라는 소리와 같으니까.

그라타만 나를 따라왔다. 따라온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심심하단 이유였다. 마침 자기가 타고 갈 차도 근처에 주차해놨다고 하고.

내가 바이크 근처로 다가가자, 굴곡위장처리를 하고 있던 바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이거 뭐야? 갑자기 바이크가 나타났잖아?"

"군용 무기도 다루는 놈이 이게 신기한가?"

"그건 무기고! 세상 많이 좋아졌네. 시판용 바이크에 이런 기능이 다 들어가 있고."

그라타가 신기한 듯 바이크를 기웃거리며 살펴봤다.

나는 그 중 한 가지 정보를 수정해줬다.

"시판용 바이크엔 당연히 이런 기능이 없다."

"엉? 그럼 이건 뭔데?"

"뭐, 돈 많은 부자의 취미활동 중 하나인 셈이지. 아, 내가 부자라는 건 아니고 이 바이크를 구해다 준 놈을 말하는 거다."

이 호버 바이크는 알리오가 구해왔다.

자동차 수집이 취미인 녀석답게 이 호버 바이크를 구입할 때도 당연한 듯 풀옵션을 넣었고, 일반 시판용 바이크엔 있을 수 없는 기능들이 다수 추가됐다.

처음엔 별생각 없었는데, 나중에 풀옵션 추가금액이 호버 바이크 구입 비용과 맞먹는다는 걸 듣고서 바이크 옵션에 대해서 공부했을 정도다.

그 정도 돈을 처들여서 달아놨는데, 그래도 써봐야 억울하지 않으니까.

물론 내 돈은 아니었지만.

"와······ 역시 소드마스터! 우리 같은 하층민과는 클라스가 다르네!"

녀석이 과장되게 환호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놈들 창고에서 굴러다니는 무기 몇 개만 가져와도 사고도 남으니까."

"크크크!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네가 잘나가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네가 왜?"

"에이!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인데! 함께 잔 날이 몇 날이고, 밥 먹은 끼니가 몇 끼며, 같이 씻은 횟수가 몇 번이야? 난 아직도 너에게 비누를 빌려줬던 그 날 밤이 생생하게······"

"······알았으니까 닥쳐라."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부터 느끼긴 했지만, 저놈도 정상은 아니다. 감자공장에서 노예처럼 살았던 삶을 저렇게 말하다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열이 받는군.

"크크크! 장난이다. 그래도 네가 잘나가는 것 같아서 기분 좋다는 건 사실이야. 너나, 나나. 모두 그 거지 같은 감자공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살아나온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도시의 거물이 되다니 얼마나 뿌듯한 줄 모를 거다. 그 뭐더라, 이런 걸 대리 만족이라고 하나?"

녀석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다소 경박스러울 정도로 말하긴 했지만, 녀석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만큼은 진실이었다.

내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대리만족을 얻는다라······ 솔직히 왜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진 모르겠다.

녀석과 편하게 대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일정 선 이상은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세계의 이방인이자, 빙의자. 이곳에 얽매인 인연은 언제라도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수 있으니까.

분명 그랬는데······.

'······어쩌면 이 녀석이랑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군.'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녀석이 말하는 것처럼 감자공장 동기라서 그런 걸까?

"대리만족은 무슨. 그러기엔 너야말로 해방전선에서 아예 자리 잡은 것 같더군. 지난번 재건축 때도 네가 리더격이었고, 오늘은 아예 네가 리더잖아?"

"하핫! 그런가? 사실 나는 잘 몰라. 나야 단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전부거든. 복잡하게 머리 쓰지 않아도 되고."

"그래?"

나는 피식 웃었다.

녀석이 저렇게 말해도 감자농장에서 여실히 보여줬듯 태생적으로 머리가 비상한 놈이다.

그 여우 같은 남궁민수가 괜히 그라타를 수족으로 쓰진 않을 거다. 그만한 능력이 있기에 대우를 해주는 거지.

나는 바이크 위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남궁민수는 잘 있나?"

"단장? 단장이야 뭐 한결같지. 그 이상한 냄새나는 연초만 끊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조만간 찾아간다고 전해줘. 사업적으로 할 말이 있으니까."

"사업적으로?"

시대의 주인공 (2)

178화. 시대의 주인공

그라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긴, 나와 사업이 어울리지 않긴 하지.

"그래. 너희한테 도움될 만한 일이다. 물론 나도 남궁민수에게 도움 받을 일이 있고."

"오? 뭔데뭔데?"

"그건 너희 단장과 이야기가 잘 되면 말해주지."

"쳇! 설마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글쎄. 딱히 너를 못 믿는 건 아니다."

"그럼?"

"난 누구도 믿지 않는다."

"······."

그라타가 입을 다물었다. 황당한 눈으로 나를 위아래 훑어보더니 이내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하긴······'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잠깐······. '하긴?' 쓰읍.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나는 왜인지 모르게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

"그런데 자경대는 누구 아이디어지?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지금이야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지만, 처음 해방전선이 자경대로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수배령이 떨어진 신세였다.

언제라도 시 정부에서 총구를 겨누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안나라고, 너도 알지?"

"번개 기프트 각성자 말인가?"

"흐음. 맞는 말이긴 한데, 안나가 들으면 실망하겠는걸? 보통 금발머리의 귀여운 아가씨라고 말하거든.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취향이 그런(?) 쪽인가? 그러고 보니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렇고, 단장을 혼자서 만나려는 것도 그렇고······"

"······그 입, 임플란트로 대체하고 싶나 보지?"

"······."

또다시 그라타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이번엔 혼잣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눈빛으로 욕을 했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나라는 금발머리 귀여운 아가씨의 의견이라도 너희 전체 의견과 어긋났다면 통과하진 못했을 텐데?"

"······뭐, 그렇지. 그런데 그거 아나? 금천교의 난을 가장 가까이서 겪은 게 우리다. 도시가 광기에 빠지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봤지."

"그러고 보니 금천교의 난 때 너희가 조용했군. 왜 나서지 않았지?"

사실 이게 묻고 싶었다. 금천교의 난이 도시엔 재앙이었을지언정, 반정부 세력인 그들에겐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금천교의 난이 끝나기까지 해방전선은 침묵을 지켰다. 물론 그 덕분에 지금의 기회를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거야 결과론적인 이야기.

그 당시 상황만을 놓고 봤을 때, 해방전선이 가만히 있었던 건 확실히 특이한 경우였다.

남궁민수, 그자의 성격이라면 분명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갔을 텐데 말이다.

"······으음! 이건 원래 비밀인데, 뭐 이미 금천교가 붕괴한 상황이니 말해도 괜찮겠지."

"무슨 비밀이길래 이리 뜸을 들이지?"

"우린 금천교와 협약을 맺었었다."

"······뭐?"

* * *

나는 귀를 의심했다. 화들짝 놀란 내 반응에 녀석이 실없이 웃는다.

"흐흐흐. 너도 그런 표정을 짓기도 하는군. 하긴, 충분히 놀랄만한 이야기지. 나도 처음엔 놀랐으니까."

"대체 어떻게 된 이야기냐?"

"별거 없다. 우린 금천교가 활개치는 걸 지켜보고 있었고, 내부에선 금천교와 손을 잡아야 한다, 저들이 중앙 지역에 한눈 팔린 사이 우리가 빈집을 털어야 한다로 의견이 갈리고 있었지."

"그래서 손을 잡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나?"

그라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반대였지. 아무리 우리가 반정부 세력이라도 금천교의 광신도 무리와 엮이는 건 싫었거든. 간부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몇 놈을 만나봤는데, 다들 정신머리가 갱이나 다를 바 없더라고. 씹장이라고 그랬나? 아무튼, 난 반대였어. 다른 단원들도 그쪽이 우세했고."

"그런데?"

"뭐, 뻔하지. 단장이 나타나서 말해주더라고. 금천교와 은밀히 협약을 맺었다고. 그들은 중앙 정부를 상대하고, 우린 외곽 지역 치안과 관리를 담당하면서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하는 역할이었지."

"······역시 남궁민수다운 선택이로군."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나는 놀라서 올라갔던 어깨를 천천히 내렸다.

그라타 저 녀석이 자극적으로 말을 해서 그렇지, 내용을 까보니 남궁민수다운 여우 같은 선택이었다.

은밀한 협약이라는 것 자체가 '비밀'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외부엔 금천교와 해방전선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다.

거기에 금천교가 30번대와 20번대에 걸쳐서 중앙 정부와 싸우는 동안, 이미 정리가 끝난 40번대 구역을 해방전선이 수습한다.

즉, 해방전선 입장에선 손 하나 대지 않고 40번대 구역을 꿀꺽할 수 있는 협약이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다.

'금천교가 멍청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아마 금천교도 그게 최선이었을 테지.'

제아무리 금천교라도 도시에서 가장 넓은 구역을 차지하는 40번대 외곽지역까지 관리하면서 전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던 시기였고, 금천교는 40번대 구역을 해방전선에 넘겨줌으로써 후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운 거다.

그들로선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전쟁이 끝나버림으로써 금천교 지역 전체가 붕 떠버린 거지.'

당연히 갱과 기업들이 쓸려나간 40번대 구역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권력과 범죄는 공백을 허용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게 오히려 해방전선에게 기회가 된 셈이다.

'해방전선은 이미 금천교와 밀약을 맺으며 40번대 구역을 관리할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을 테니.'

여기서 또 남궁민수의 현명한 선택이 이어진다.

무장세력으로 40번대 구역을 점령한 게 아니고, 안나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경대 활동으로 노선을 틀었던 거다.

이건 뉘앙스에 굉장한 차이가 있다.

시 정부도 방치한 40번대 구역의 치안을 담당한다? 이건 아직 금천교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40번대 구역의 시민들의 압도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버린 시 정부를 욕했고, 치안을 관리해주는 해방전선에게 환호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시 정부도 손을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해방전선이라는 무장세력은 버젓이 수배 중이었지만, 시 정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해방전선을 공격한다면 두 번째 쿠데타 혁명이 연달아 일어날지도 몰랐기에.

즉, 시 정부는 암묵적으로 해방전선의 자경대 활동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해방전선이 단기간에 40번대 구역의 자경대로 급부상한 이유다. 거기에 지금은 30번대까지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역시 판을 짜는 능력 하나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겠군. 의도한 판이 망가졌는데도 이렇게 대응을 하다니.'

"너희가 단숨에 40번대 구역의 자경단으로 자리 잡은 이유가 그거였군. 어쩐지 너무 빠르다 했어."

"미리 준비했었으니까. 가끔 단장이 혹시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라니까?"

녀석이 낄낄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 이번에도 그런 능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아, 진짜 뭔데 그래? 힌트만 줘."

그라타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달라붙으려 하자.

"그럼 간다."

부아앙!

나는 곧바로 바이크를 띄워서 하늘 위로 날아갔다. 발아래에서 그라타가 '저저!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쓰로틀을 당겼다. 밤하늘 위로 바이크가 미끄러지며 검은 융단을 탔다.

* * *

밤바다 위를 가로질렀다. 먹물을 쏟아낸 듯 시커먼 수면 위로 고고한 달빛이 반사됐다.

나는 자율주행 모드로 전환하곤 천천히 지난 전투를 복기했다.

아큐마 제약의 각성자들. 처음 그들과 마주했을 땐 반신반의에 그쳤는데, 괴물로 변하고 나서부턴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놈들. 정상적으로 각성한 게 아니다.'

포스는 지문이다. 개인마다 미묘하게 다르기에 누구도 고유의 포스 속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놈들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고유의 속성이랄 게 없었다. 처음부터 혼란한 포스를 가지고 있었고, 결국 제어를 벗어나자 이성보다 본능이 날뛰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거기에 방점을 찍었던 게······.

'놈들이 가슴에 박아넣은 쇠막대기였지.'

나는 품속에서 쇠막대기를 꺼냈다. 바닥에 뒹굴던 걸 혹시 몰라서 챙겨온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평범한 쇠막대기가 아니었다.

'가슴을 꿰뚫고 내용물을 단숨에 신체 내부로 주입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주사다.'

놈들은 이걸 심장에 꽂은 이후에 완벽한 괴물이 됐다. 신체는 검붉은 근육질 외피도 뒤덮였고, 내부에서 꿈틀거리던 포스가 외부까지 일렁거렸다.

물론 멍청한 짓이다. 포스는 사용하는 순간 소모된다. 아끼고 아껴도 모자랄 포스를 외피에 두르는 건 무식한 짓에 가까웠다.

그런데 놈들은 그렇게 낭비된 포스를 보충할 방법이 있었다.

'······동료의 시체를 먹었지.'

불과 몇 분 전까지 인간이었던 자들이 괴물의 형태로 변한 것도 놀라운데,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먹었다.

나도 이때부턴 이놈들을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여기기로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놈들이 괴물이 됐다는 게 아니었다. 나도 그 괴물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놈들의 특징을 알았더라면 방법을 찾았겠지만······ 그땐 이미 늦은 상황이었지.'

그러다 해방전선이 개입했다.

이전에 만났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압도적인 해방전선의 화력.

단숨에 모든 괴물들을 사로잡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데까지 성공했다.

불과 나타난 지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내가 마무리하긴 했지만, 아마 제대로 붙었어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거다.'

나는 경각심이 들었다.

지금까진 초반 각성의 유리함과 미리 알고 있던 정보로 그들보다 훨씬 앞서나갔지만, 이렇듯 나 혼자선 단체를 감당하기 어려운 시점이 도래했다.

만약 해방전선이 적이었다면?

'······꼼짝없이 죽었겠지.'

내가 도시가 비좁다며 날뛰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다른 각성자들이 시 정부와 메가코프의 눈을 피해 숨어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들은 나처럼 앞으로 전개될 미래도 모르고, 개개인의 힘이 나처럼 강력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해방전선도 그렇고, 캔디 같은 숨어있던 각성자도 그렇고, 앞으로 무수히 많은 각성자들이 도시의 전면으로 등장할 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 중 일부는 내게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분명 위협이 되기도 하겠지.'

각성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상, 시 정부든 기업이든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 은밀하게 영입했던 각성자들을 대대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겠지.

'전쟁무기는 누구나 돈이면 공평하게 구할 수 있는 대칭 전력이지만, 각성자야말로 비대칭 전력의 핵심이니까.'

앞으로 각성자의 능력이 조금씩 알려질수록 각성자에 대한 구애는 짙어질 거다.

훈련을 통해 강해진다는 것까지 알려진다면, 아마 더욱 몸값이 치솟겠지.

각성자로 군대를 조직하는데 관심이 없었던 정부나 기업도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을 거다.

'이미 시대의 흐름은 달라졌다. 이제 각성자들의 시대다.'

지이이잉!

쓰로틀을 강하게 당겼다. 자율주행모드에서 수동모드로 변경되며 바이크가 급격하게 가속했다.

발아래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밤하늘을 가르며 지나치는 불빛들은 마치 은하수 속에서 흐르는 별빛 같았다.

나는 흐르는 별빛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 별빛이 흘러온 시작점을 향해.

'나도 더 강해져야겠어.'

단체를 감당할 수 없다고?

그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강해지면 된다. 나는 그럴 능력도, 지식도 충분하다.

나는 강현재. 총과 로봇이 지배하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오롯이 검으로 군림하는 소드마스터이며······.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

소울삼림 (1)

179화. 소울삼림

-우리가 속은 거라고?

홀로그램 너머로 한껏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은 보이는 것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래. 처음부터 내가 추적할 걸 알고 파놓은 함정이었지. 덕분에 이번엔 진짜 위험했어."

-······.

유혜리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엄살 피우지 마'라거나, '그래서 뭐 어쩌라고?' 같은 반응이 나왔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아큐마 제약이다. 셀리케 바이오텍과 함께 세계 5대 메가코프로 손꼽는 거대 기업.

당연히 그 역량이 동원된 함정이었으니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거다.

그녀 역시 메가코프의 보안실장. 메가코프가 한번 함정을 파면 얼마나 지독하게 파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유혜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어, 소드마스터. 내가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아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말한 건 아니야."

-나도 아니야. 이건 우리 쪽 실수가 맞아. 위성추적을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상대가 AI라는 사실에 방심했나 봐. 이 일은 내가 꼭 보상할게.

유혜리가 차분히 실수를 인정했다.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메가코프의 보안실장이 일개 해결사에게 실수를 인정하다니.

아무리 나름의 친분이 쌓인 관계라 해도, 이런 실수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게 기업 종특인데 말이다.

'······어쩌면 그게 더 이득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

셀리케가 나에게 맡긴 의뢰들은 하나같이 굵직한 것들이었다.

어떨 땐 그들의 역량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의뢰 역시 내가 맡아 처리했었다.

이번 의뢰처럼 말이다.

즉, 차라리 실수를 인정하면서 이 관계의 지속성을 늘리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의 나는 무려 아큐마의 함정을 격파하고 나온 해결사가 된 셈이니까.'

물론 내가 겪었던 유혜리의 성격상 진짜 미안한 마음에 실수를 인정했을 수도 있지만······.

글쎄. 근본적으로 이 세계의 기업인들은 믿기가 어렵다. 특히, 유혜리처럼 무려 메가코프의 고위직까지 올라간 사람이라면 말이다.

'여긴 꽃과 나무가 우거진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사이버펑크 세계니까.'

-이봐, 화난 거 아니지?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이번 일은 특이케이스로 봐달라고. 그리고 보상도 한다니까?

"딱히 화난 건 아니다. 그래도 보상은 기대하지."

-······칫! 나 설마 속은 건가? 처음부터 이게 목적? 역시 내 몸을 노리고 있었구나? 그래. 보상으로 내 몸을 요구하겠지? 좋아! 오늘 밤 화끈하게 어울려줄게!

내 말에 그제야 안심을 한 건지, 다시 원래의 텐션으로 돌아온 유혜리다. 물론 여전히 저 의식의 흐름은 쫓아가기 어려웠지만.

"난 돈이면 돼."

-왜! 이 탐스러운 몸을 앞두고 그깟 돈이 중요해?

"해결사잖아."

-쳇! 그러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어지네. 해결사가 무슨 마법의 단어도 아니고, 왜 그렇게 써먹는 거야?

"해결사 인식이 워낙 바닥이라? 너도 단번에 수긍했잖아?"

-에잇! 에잇!

유혜리가 성질이 나는지 어딘가를 발로 연거푸 찼다.

홀로그램 통신 너머로도 둔탁한 소리가 퍽퍽! 거리며 들려오더니 이내 우지끈! 하며 박살났다.

-앗! 망할! 이게 또 부서졌네? 왜 이렇게 약하게 만드는 거야?

"······."

아마 소파나 책상을 찬 것 같은데, 본인이 안드로이드라는 걸 잊은 모양이다.

그것도 보급형도 아니라 오메가 안드로이드니, 전투형이 아니더라도 기본 성능 자체가 넘사벽이다. 저렇게 발길질 몇 번에 부서지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네시스」는 어떻게 됐지? 아직도 별다른 소득이 없나?"

-후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너무 아파. 시 정부도 제네시스를 의심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잖아? 그리고 증거가 없으면 그 대단하신 양반들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정황상 증거가 들어맞는다고 해도?"

-뭐, 너도 알잖아? 정황 따위는 얼마든지 끼워 맞출 수도,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쉽다는 걸. 그래서 처음에 AI법이 제정될 때도 제네시스는 예외조항으로 둔 거잖아.

"흐음······ 그건 그렇지."

유혜리의 말대로 사실상 이게 문제였다.

제네시스는 AI법에 구속되지 않는 유일한 AI다. 따라서 제네시스의 통제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했는데, 그중 하나가 시 의원 90% 이상의 동의다.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평범하게는 통과할 수 없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한쪽이 이 안건을 들고나오는 순간 다른 쪽에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니까.

의회라는 건 결국 좌석 수를 따먹는 파벌싸움이다. 일단 대립하고 싸워야 표가 된다.

그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는 건 한참 후고,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시민들이다.

'아마 시 정부 설립 당시, 의회가 제멋대로 제네시스를 통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만든 조항이었지.'

일명, 시 의회와 제네시스의 이원화다.

의회가 도시의 법과 규율을 제정하면, 실행하는 건 제네시스가 담당한다.

일체의 감정이나 손익 없이 정해진 대로만 행동하는 제네시스가 도시를 운영하기에, 소울 시티는 명실상부 세계 최대의 메가시티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던 제네시스에게 자아(自我)가 생겼다면?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무언가가 됐다면?'

물론 그때의 시 정부로선 절대 알 수 없을 미래였을 거다.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일 뿐. 그저 데이터의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전부였을 테니.

아마 인간의 손에 휘둘리지 않게 만드는 게 그 당시로선 최선의 선택이었겠지. 그게 맞기도 했고.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경향이 조금씩 옅어졌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30년 전 그 난리를 겪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30년 전에 일어났던 로봇 쿠데타.

로봇 의체를 가졌던 AI들이 방위군과 충돌했던 그 사건을 분기점으로 모든 AI는 물리적인 의체를 잃었다.

지금 안드로이드니, 휴머노이드니 하는 것들은 전부 짜여진 로직에만 반응하는 반자율 로봇에 가까웠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린 거다.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을 테니.

-그들에겐 지나간 과거일 뿐이니까.

유혜리가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얼핏 그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는 목소리였다.

'무슨 사연이 있나?'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보려는 찰나.

-무엇보다 제네시스가 작동을 멈춘다면 시 정부 행정 역시 멈추게 되잖아? 비상상황에 따른 매뉴얼이야 존재하겠지만, 제네시스의 능력을 따라갈 순 없지. 안 그래도 금천교의 난 때문에 어수선한데 행정까지 마비되게 놔두고 싶겠어?

"으음······ 그건 그렇지."

이어진 유혜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 정부가 가장 경계하는 건, 제네시스의 반란 같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아니었다.

어수선한 틈을 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쿠데타다.

안 그래도 소 잃고 외양간을 열심히 고치는 와중에, 불이 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싶진 않겠지. 지금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물론 진짜 불이 나게 된다면 외양간이 문제가 아니라 집 자체가 타버리겠지만······.

'그땐 도시에서 탈출하면 된다는 생각이겠지. 돈만 있으면 어느 도시를 가든 마찬가지일 테니.'

아마 이게 딱 지금 시 의원들 인식일 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증거야. 시민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확실한 증거. 그럼 의회는 움직이게 돼 있어.

"여론을 먼저 움직이잔 말이군."

-맞아. 의원들에겐 제네시스의 반란도, 쿠데타 혐의도 중요하지 않아. 그저 표심이 중요하지.

"······쉽지 않겠어."

문제는 증거를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거다.

로보 테크니카에서 빠져나왔을 때가 최적기라 여겼는데, 오히려 그걸 함정카드로 사용했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안 그래도 고민중이야. 사람도 아니라서 꼬리를 찾기도 쉽지 않고······ 일단 의뢰는 완료된 거로 처리할게.

"그래도 괜찮나? 결과물이 없는데."

나는 유혜리의 배려에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의뢰를 하면서 함정에 빠진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아무런 결과물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다못해 함정을 통해 꼬리라도 잡았는데······ 이번엔 연결고리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결과물이 왜 없어?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건가?

-아큐마 제약 지부를 박살냈다며? 그게 결과물이지. 아마 위에선 그 소식을 더 좋아할 거야.

유혜리가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셀리케 바이오텍과 아큐마 제약의 관계를. 이 거대한 두 메가코프가 오래전부터 서로 앙숙이었다는 사실을.

-그럼 새로운 의뢰가 생기면 다시 연락할게! 혹시 언제라도 술이 땡기면 찾아와! 내가 옷 벗고 기다릴 테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 *

"······."

강현재와의 홀로그램 통신 종료 후, 조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유혜리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함정이라고?"

목소리에 한기가 서렸다.

"감히······ 일개 AI 주제에 이 몸을 속였다, 이 말이지?"

눈빛은 여전히 차가운데 입꼬리만 섬뜩하게 올라간다.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유혜리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이내 어둠으로 뒤덮인 시선.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그녀는 어딘가로 도착했다.

어느새 보이는 시야로 사방에서 떨어져 내리는 초록빛 데이터 문자열이 들어왔다.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문자열들은 0과 1. 그리고 불특정한 기호들로 이뤄졌다.

이곳은 사이버 스페이스.

오래전 그녀가 구축해놓은 개인 좌표였다.

「방법을 찾을 때까진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유혜리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때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탈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었던가.

아마 자신이 셀리케 바이오텍이라는 메가코프 소속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이곳에 갇혀있었을 거다.

「······뭐, 반쯤은 아직 갇혀있는 셈이지만.」

그녀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데이터 문자열을 맞으며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는 작은 집 모양의 문자열들.

그곳으로 이동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어느새 그녀는 집 안에 있었다.

놀랍게도 이곳만은 달랐다.

창밖엔 여전히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공간과 어딘지 모를 하늘 끝에서 떨어지는 데이터 문자열의 비가 쏟아졌지만, 이곳만큼은 현실과 똑같았다.

작은 원룸 형태를 갖춘 이곳은 현관문도, 부엌도, 거실도 있었다.

밥솥에선 이제 갓 취사를 마쳤는지 증기를 내뿜었고, 한쪽 벽에 걸린 TV에선 오래된 고전 영화를 재생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까딱이며 회전하는 선풍기 바람엔 하얀색 안개꽃이 살랑이며 흔들렸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바깥세상과 격리된 공간.

그리고 이곳의 중앙엔······.

「잘 있었니?」

유혜리가 잠들어 있었다.

오래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소울삼림 (2)

180화. 소울삼림

그건 뭐랄까, 비현실적인 이곳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지게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잠든 유혜리를 내려다보는 유혜리라니.

그때 잠들어 있던 유혜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감긴 눈이 떠졌다.

부스스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만나러 온 또 다른 자신을 향해서.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때가 됐나?"

그건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보면 싸늘하다 못해 무감정하기까지 한 목소리다.

「미안. 아직이야.」

현실의 유혜리가 고개를 저었다.

"······? 그런데 왜 찾아왔지?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부탁할 일이 생겼어.」

"부탁?"

잠들어있던 유혜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살짝 찡그린 미간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좌표를 하나 찾아줘. 로보 테크니카의 사설 서버거나, 거기와 연관된 좌표로.」

"그건 왜?"

「제네시스. 그 망할 AI를 찾아야 해.」

"······? 그게 왜 필요하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로봇이나 AI 따위가 아닐 텐데."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원래도 감정의 고저 없던 목소리가 딱딱하게 변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걸 지나, 부정적인 반응이다.

그 눈빛을 마주한 현실의 유혜리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이게 사실 그녀의 본래 모습이었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성으로 잘도 직장생활 했었네. 쳇! 그런데 나한테까지 이럴 필요는 없잖아? 나나, 자기나 똑같은 사람인데.'

속으론 툴툴거렸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이랬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어떻게 말을 해야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을지를 떠올렸다.

「당연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제네시스가 기계 생명체를 몰래 연구하고 있거든.」

"기계 생명체? 제네시스가 말인가? 설마 시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바이오테크에 진출하려는 건······"

「아니야. 제네시스의 독단적인 일이야.」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제네시스의 독단이라고? 말도 안 돼. 아무리 마더 AI라지만, 어떻게 AI가 독단으로 그런 연구를 할 수가 있지?"

「말하자면 길고 복잡해. 아무튼, 사실이야. 심지어 제네시스는 시 정부를 배신한 정황까지 있다고.」

"······대체 바깥세상에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설마 우리도 위험한 상황인가?"

잠들어있던 유혜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외부와 격리된 그녀는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아직까진 아니야.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 묘하긴 해. 제네시스가 만들었던 샘플들도 심상치 않고.」

"······답답하네. 나도 외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녀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현실의 유혜리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되는 거 알잖아. 외부 정보가 덧씌워지는 순간 백업 정보의 순수성이 훼손되니까.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잖아?」

"그랬지. 네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모를 리 없었다. 왜냐면 자기 자신이니까.

「그건 미안해. 나도 찾아오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네 도움이 필요해.」

"별수 없지. 어차피 지금의 주체는 너잖아? 네가 바깥세상에서 소득을 얻지 않는 한,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씁쓸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현실의 유혜리가 고개를 저었다.

「너나, 나나 모두 유혜리야.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줘.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렇겠지. 내 성격을 나도 잘 아니까."

그렇다.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지만, 둘은 같은 존재였다. 내 생각이 곧 상대의 생각이며,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잠시간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던 중 잠들어있던 유혜리가 먼저 시선을 돌리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로보 테크니카의 사설 서버? 으음······ 좋아. 여기를 이렇게 들어가면······"

무언가를 하는 듯 닫힌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찾았다."

* * *

유혜리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현실에서 찾아온 유혜리가 서 있던 자리다.

그녀는 자신이 좌표를 알려줌과 동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음에 또 보자와 같은 작별인사도 없었다.

사실 그게 맞았다. 다음에 또 본다는 건, 이번만큼이나 바깥세상 일이 녹록지 않게 돌아간다는 뜻이니까. 최대한 서로 안 보는 게 좋다.

'우리'가 '하나'가 될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이제 다시 잠이 들 시간이다.

의식이 깨어있다면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될 테고, 그럼 새롭게 데이터가 생성된다.

그건 우리의 의도와 벗어난 현상이다.

그녀의 데이터는 순수해야 한다. 처음 이 세계에 갇혔던 그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래야 다시 하나가 됐을 때, 변해있을 바깥세상의 자신이 원래의 나로 되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모르겠어.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그녀는 저 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다.

한없이 고요한 호수와 같았던 마음에 바깥세상에서 던진 돌멩이가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부엌을 지나 화장실, 그리고 현관문 앞으로.

최대한 변질되지 않도록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 구축해놓은 경계선 앞으로 말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그래. 어쩌면 우리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몰라. 기억을 통조림에 넣어놓는다고 변질되지 않는 건 아니니까."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 * *

불 꺼진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의뢰 완료라······."

증거를 확보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유혜리는 의뢰 완료를 통보했다. 심지어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면서.

물론 그녀의 말대로 셀리케 입장으로선 제네시스의 폐기가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뒤집어놓은 아큐마 제약 지부의 초토화에 더 관심이 있어 할 거라는 것도 사실일 거다.

셀리케 바이오텍과 아큐마 제약.

이 둘의 이름에서 유추되듯, 바이오 기업으로 시작한 이 두 기업은 모든 사업영역에서 안 부딪치는 곳이 드물었다.

지금이야 한쪽은 신약개발, 한쪽은 바이오테크로 가닥이 잡혔다지만, 초창기 산업이 개화할 시기엔 서로 어마어마한 피를 흘려가며 싸우기까지 했다.

지난 네 번의 기업전쟁 중 두 번이 셀리케와 아큐마가 직접 부딪친 전쟁이었고, 나머지도 간접적으로 얽혀있었다.

그야말로 원수나 다름없는 관계.

눈엣가시 같던 아큐마 제약의 소울 시티 지부가 풍비박산 났으니, 유혜리의 말대로 셀리케는 당분간 거기에 더 신경을 쓸 거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끝낼 순 없지."

셀리케야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기업이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신경 쓸 것은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 그러려면 당연히 도시가 멀쩡해야 했다.

"제네시스를 가만히 놔뒀다간, 도시가 사라질 가능성이 커."

아니면 인간의 자리를 전부 안드로이드가 대체한 기계 도시가 되거나.

"그건 용납할 수 없지."

시 의원들처럼 다른 도시로 떠난다는 선택지는 내게 없다.

나는 알고 있는 정보를 통해 이 도시 위로 군림하고, 이 빌어먹을 게임 속 세계의 엔딩을 봐야 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게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 같으니까."

그러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강제로 파괴하는 방법밖에."

그래. 내가 언제부터 시 정부 눈치를 봤었나? 의원들이 자기 밥그릇 놓고 싸우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는 건 내 성미와는 맞지 않는다.

"남궁민수. 그라면 분명 제네시스의 본체가 어디 있는지 알겠지."

남궁민수.

해방전선의 단장이자 세계관 최고의 사이버러너로 손꼽히는 이 자는 해방전선을 이용해 한 가지 목적을 이루려 했다.

소울 시티의 붕괴.

해방전선이 부지런히 반정부 활동을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게 자경단 역할을 하는 것도. 모두 도시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결국, 도시의 근본은 시민. 지금의 소울 시티가 붕괴하고, 새로운 도시가 건설될 때를 대비한 지지세력을 만드는 거다.

과격했던 금천교와 달리, 다소 온건한 반정부 세력이랄까?

하지만 여기엔 비밀이 있었다.

"소울 시티를 만들었던 최초의 선구자 중 한 명이 바로 남궁민수라는 사실이지."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 손으로 맨땅에서 세계 최대 메가시티인 소울 시티를 만들었던 창조자가, 제 손으로 붕괴시키려 하다니.

물론 여기엔 복잡한 과거와 사연이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의 과거가 아니었다.

"소울 시티를 만든 당사자라면, 당연히 제네시스의 위치도 알 거다. 게다가 제네시스의 창조에 그의 지식도 상당량 들어가 있으니······"

다만, 문제가 조금 있었다.

"남궁민수가 순순히 이야기해줄 리가 없다는 거지."

그가 소울 시티를 떠난 게 벌써 백여 년 전이다. 그와 함께 소울 시티를 건설했던 이들 중 아직까지 살아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게다가 그는 세계 최고의 사이버러너.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해 전혀 다른 인물이 됐다.

즉, 이 도시에서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내가 뜬금없이 정체를 밝히며 제네시스 위치를 물어본다?

남궁민수의 성격상 차라리 죽음을 택하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다.

이건 최악의 선택이다. 그 순간 해방전선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럼 이 역시 방법은 하나다.

"역시 우호도를 쌓는 게 먼저겠군."

닫힌 입을 여는 방법. 그건 어느 게임에서나 공통으로 사용되는 우호도 작업이다.

그리고 마침, 우호도 작업을 하기 딱 좋은 일거리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럼 사업 이야기를 하러 가볼까?"

* * *

해방전선 지부 중 하나에 들렀다. 길게 둘러친 담벼락을 전부 사용하는 운송회사 건물이었다.

"여, 강현재. 진짜 왔네?"

입구에 서 있던 그라타가 손을 흔들면서 반겨준다.

참 한결같은 녀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일이 있으니까. 그런데 여긴 너무 대놓고 해방전선 지부 아니야? 시 정부에서 갑자기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처음 여기로 찾아오라고 했을 때는 반신반의 했었다. 지부가 아니라 그냥 약속장소로 사용하려는 건가?

그런데 막상 찾아와보니 여긴 해방전선 지부라는 말보다는 소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지부로 쓰는 건물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점이나 식당에도 해방전선 단복을 입은 단원들이 돌아다녔고, 길거리에 주차된 차량과 바이크에도 단원들이 삼삼오오 기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푸핫! 시 정부가 뭐하러? 자기들 앞가림도 못 하는 놈들인데."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니야? 너희가 이전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찾기 어렵다면 몰라도, 이렇게 대놓고 모여있는데 그걸 잠자코 참겠어? 거기도 권력욕에 눈이 먼 놈이 있을 텐데."

"와우. 충고 고마워. 네 말도 일리는 있지. 권력욕에 눈먼 미친놈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런데 네 말에 틀린 게 하나 있어."

그라타가 장난스럽게 웃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 뭐지?"

"여기가 특별한 지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 특별한 게 아니라면······? 설마? 다른 지부들도 이렇다고?"

나는 설마 하는 눈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딩.동.댕! 정답이야. 도시 전역의 모든 지부가 이런 상황인데,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생각이 아니라면 시 정부에서도 움직이지 못하겠지. 그리고 뭐,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시 정부 능력으론 그게 불가능하고 말이야."

"······."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모든 지부가 이 정도 규모로 운영된다니. 내가 알기로 각 구역마다 해방전선 지부가 있는 거로 아는데 말이다.

"······놀랍군. 세력이 커진 건 알겠는데, 이 정도로 커졌을 줄이야. 대체 단원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글쎄? 늘어나는 숫자가 너무 빨라서 추산할 이유가 없어.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또 내일도 다를 테니까."

"미쳤군. 정말 도시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작정이야?"

지금 눈에 보이는 인원도 족히 백 명은 가뿐히 넘어갔다.

자경단 활동도 하는 녀석들이니 이 자리에 없는 단원들이 훨씬 많을 텐데, 여기서 더 늘어난다고?

"그러게 말이다. 나도 궁금하니까 네가 단장에게 물어봐라."

그런데 그라타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장난스러운 미소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반응에 눈을 빛냈다.

"이렇게 단원들을 빠르게 늘리는 이유가 남궁민수의 지시였나?"

"그래. 우리도 단장이 시키니까 받는 거지, 이렇게 빠르게 커지는 건 곤란하다고.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받는다는 건 단순히 숫자놀음이 아니야. 다 관리를 해야 한다고. 안 그래도 중간관리자가 너무 부족해서 미쳐버릴 지경이라니까?"

"······그래?"

나는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러면 이야기가 쉽겠는데?'

소울삼림 (3)

181화. 소울삼림

문을 열자마자 뿌연 연기가 구름떼처럼 쏟아진다. 은은한 초록빛을 띤 연기가 좁은 실내에 가득하다.

그 한가운데에서 점처럼 타오르는 불빛만 아니었다면, 불이 난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용케 폐암에 안 걸리고 살아있군."

나는 연기를 헤쳐가며 반짝거리는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불빛이 한번 거세게 타오르며 붉은빛을 내뿜더니, 그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소드마스터. 잠시만 기다려라. 지금 하는 일이 있어서."

해방전선의 단장. 남궁민수였다.

사이버러너용 전용 의자에 앉은 그는 바이크 헬멧처럼 생긴 걸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마 다이브용 헬멧일텐데······ 이름이 아이리스였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해."

나는 대충 아무 의자에 걸터앉고 주변을 둘러봤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자욱한 연초 연기 때문에 깨끗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이곳이 어떻게 생겨먹은 곳인지 파악하는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군."

출입문에서 5미터도 걸어오지 않았는데 밟히는 쓰레기가 세 개였고,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는 가득 차서 먹다 남은 음료수병에도 꽁초가 가득했다.

식탁으로 쓰이는 건지 식사 흔적이 있는 테이블엔 피자 박스가 10단으로 쌓여있었고, 그중 벌려진 박스 하나엔 딱 봐도 며칠은 돼 보이는 맛이 간 피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한 조각엔 베어먹은 자리도 있는 거로 봐선, 분명 한입 먹었다가 뱉은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들어온 건 한쪽에 쌓여있는 통조림들이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파인애플과 토마토, 배양육으로 맛을 낸 청어나 황어, 정어리 따위와 같은 생선들.

"돼지우리라니.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

마침 헬멧을 벗은 남궁민수가 사이버러너용 의자에서 일어났다. 입엔 여전히 연초가 물려있었다.

"그 정도까지,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여기가 더럽다는 건 알고는 있나 보군."

"하핫! 나도 깨끗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네. 어차피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니 깨끗하게 유지할 필요가 없잖나?"

"······."

나는 기가 막혀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최소 1주일은 넘게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변명을 한다고?

그런 내 눈빛을 느꼈음일까? 남궁민수가 머쓱한 듯 말을 돌렸다.

"그런데 뭘 그리 보고 있었나? 아? 피자? 배가 고픈가?"

"······이 광경을 보고 배가 고팠냐고 묻고 싶나? 있던 입맛도 떨어지게 생겼는데."

"크흠! 그럼 뭘 보고 있었나?"

헛기침을 한 그가 연초를 빨며 물었다.

나는 턱짓으로 통조림들을 가리켰다.

"무슨 통조림을 이렇게 많이 샀지? 이제 멀쩡한 식사를 해도 괜찮지 않나?"

이 도시에서 통조림을 먹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특히, 40번대 구역에선 통조림들이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다. 일단 싸니까. 그래서 이곳에선 통조림으로 하는 요리들이 발달했다.

물론 해방전선은 다른 의미에서 통조림을 먹었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해방전선은 시 정부의 수배를 받은 조직이다.

남궁민수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끊임없이 거점을 바꾸며 이동한다. 추적을 피해야 하니까.

그 과정에서도 식사는 해야 하니, 당연히 보관이 용이한 통조림이 주식이었을 거다. 무엇보다 유통기한이 무식하게 기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해방전선이 수배중인건 여전했지만, 시 정부는 더 이상 해방전선을 쫓을 여력이 없었다.

지금 이 지부만 해도 대놓고 활동중이고, 이런 지부가 각 구역마다 있는 셈이다.

즉, 이젠 과거처럼 쫓겨다니듯 거점을 옮길 필요가 없어진 거다.

그런데 왜 이런 통조림을 이렇게 산처럼 쌓아놓고 먹는 거지? 아무리 특이취향이라도 통조림 음식이 맛있어서 먹진 않을 텐데 말이다.

"아? 그거 쓰레기라네."

그런데 남궁민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게 뭔 소리지?"

쓰레기라고? 설마 입이 고급이라서 통조림이 쓰레기라고 말하는 건가?

"유통기한 지나서 못 먹는다는 소리지."

"······? 그걸 왜······?"

"왜 여기에 쌓아놨냐고? 나도 모르지. 보급 담당이 버릴 곳이 마땅치 않다고 여기에 놔두고 가던데."

"······."

그런가. 나만 이곳이 돼지우리라고 느낀 게 아니었군. 설마 여길 쓰레기장으로 사용할 줄이야.

"그런데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그라타 말로는 사업 이야기라던데······ 무슨 사업? 소드마스터니 대장간이라도 차릴 생각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리고 대장간을 차리는데 당신과 사업 이야기를 할 건 없잖아."

"그래서 말이야. 나와 무슨 사업 이야기를 한다는 건가? 자네나, 나나 사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남궁민수가 연초를 뻑뻑 피워대면서 물었다. 그의 눈빛엔 호기심 반, 귀찮음 반이 섞여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시 정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그런데?"

그걸 왜 자기한테 얘기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입에 물고 있는 연초에서 연녹색 연기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나는 흐물거리는 연기를 뚫고 남궁민수에게 얘기했다.

"그 의뢰가, 당신 목을 가져오라는 의뢰야."

"······!"

툭.

연녹색 연기를 피워올리던 연초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 * *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바라는 게 있으니 순순히 말해주는 거겠지?"

그새 다시 연초를 빼어 문 남궁민수가 플라즈마 라이터에 불을 켜며 물었다.

"당신을 죽일 거냐고 묻진 않나?"

"후우······ 날 놀리고 싶은 건가? 그대 성격상 바라는 게 있으니 순순히 말해줬겠지.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내 목을 가져갔을 테고."

피식 웃는 입술 사이로 연녹색 연기가 내뿜어진다. 그리곤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특유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한다.

언젠가 느꼈지만, 그의 눈빛엔 생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그때그때 춤추는 희미한 감정의 편린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군가는 이런 눈빛을 보고 사람을 꿰뚫어 본다거나, 현자의 눈이라고도 하겠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저 눈빛은 그저 노회한 눈빛이다. 인간 세상의 생사고락과 희로애락을 모두 겪은,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눈빛.

적어도 150년은 살아왔을 인간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열었다.

"역시 똑똑한 사람이라 얘기가 편하군. 정확히 시 정부가 의뢰한 건, 당신과 간부들의 목이다. 해방전선의 관리자를 모조리 죽임으로써 알아서 무너지길 바란 거지."

"그래서? 너는 어떤 사업 이야기를 제안으로 가져왔지?"

"오는 길에 봤다. 지부 규모가 말도 안 되게 커졌더군. 그라타에게 듣자 하니 전 지부가 이렇게 운영된다지?"

"······아직 시 정부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때가 세를 키울 절호의 시기니까. 지금 최대한 영향력을 키워놔야 시 정부가 돌아왔을 때도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그건 잘 먹히고 있는 것 같군. 시 정부에서 나까지 고용해 해방전선을 견제하려는 걸 보면 말이야."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남궁민수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간단해. 해방전선이 비대해진 만큼 부패한 자가 있을 거다."

"있을 거라 단정 짓는군."

"당연하지. 부랑자, 노숙자, 마약상, 갱 출신 등등. 너희 근본 없는 놈들이 대부분이잖아?"

"······."

내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남궁민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초를 빨았지만,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놈들 위주로 죽여주겠다. 나도 실적을 챙기고 네게도 도움되는, 윈-윈 전략이지. 어때? 마음에 드는 사업 이야기지?"

"······그게 전부인가?"

잠자코 듣고 있던 남궁민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신반의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긴 나 같아도 의심스럽긴 할 거다. 자신을 죽이라는 의뢰를 받은 해결사가 오히려 내부의 골칫덩이를 제거해준다는 제안을 했으니.

"그럴 리가? 네가 잘하는 넷을 이용해서 은밀히 소문을 내줬으면 좋겠어."

"어떤 소문을?"

나는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해방전선의 보스가 『신의 물방울』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

* * *

어둠이 자작하게 내린 47구역 밤거리.

휑했던 거리에 하나, 둘 불빛이 켜지고, 잠깐 사이 온갖 알록달록한 전광판과 네온사인들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던 거리가 금세 술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여기. 어느 골목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에선 아직도 작동하는 게 신기한 턴테이블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All the leaves are brown and the sky is gray ♬

-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SC ♫

잡음이 많이 낀 오래된 포크락이 흘러나온다.

그 속에 섞인 사람들의 말소리가 훌륭한 배경음이 되어 주고, 거기에 술잔에 담긴 호박색 위스키가 더욱 운치를 더했다.

나는 말없이 음악을 들으며 술잔을 들이켰다가, 작게 움찔거린 뒤 천천히 술잔을 내려놨다.

"······여기가 어디인지 잠시 깜빡했군."

나는 목구멍을 훑고 지나가는 짜릿한 공업용 알콜의 독성에 한껏 얼굴을 구겼다. 분위기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술잔을 들어버렸다.

"입에 맞지 않으세요, 손님?"

내가 얼굴을 구기며 술잔을 내려놓자, 바텐더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물어왔다.

"내 취향은 아니로군."

"앗! 그럼 혹시 어떤 취향이실까요? 고급형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고급형은 뭐지?"

"아하! 고급형이 취향이시구나?"

바텐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여기서 좀 더 바디감과 향이 풍부한 '리틀보이'는 어떠세요? 아니면 목 넘김은 산뜻하지만, 식도에서 팍! 하고 임팩트를 주는 '펫맨'도 괜찮은 선택이십니다!"

"······? 술 이름이 리틀보이랑 펫맨이라고······?"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그러자 바텐더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역사 공부를 하신 손님이 오실 줄이야! 맞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과거 일국이라는 나라에 떨어졌던 핵폭탄의 이름이죠."

"불길하게 술 이름을 왜 그런 거로 지은 거지?"

"왜긴요! 당연히 폭탄주니까요! 이거 한잔이면 그날 기억은 깔끔하게 잊으실 수 있습니다! 술 먹고 개가 되는 건 본인 역량! 어떠십니까? 한 잔씩 말아드릴까요?"

해맑게 웃던 바텐더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물어왔다. 꼭 내게 그 맛을 보여주고 싶어 해서 안달이 난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따가 일이 있어서. 그건 다음에 경험해보도록 하지."

"그, 그럼 맛보기라도······?"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뒤에서 바텐더가 구시렁거리며 다시 잔을 닦았다. 작게 '오늘 호구 하나 건질 수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잠시 바텐더에게 시간을 빼앗겼지만, 오늘 내 목표를 잊진 않았다.

창밖.

정확히는 골목길 건너 반대편에 있는 스트립바. 거기에 내 목표가 있었다.

확실히 스트립바라 그런지, 찾아오는 사람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그중 절반 정도는 입구에서 기도를 서는 가드에게 쫓겨났다.

뭐, 쫓겨난 면면을 보니 쫓겨날 만했다고 생각이 들긴 했다.

하나같이 옷도 제대로 못 걸치고 나타난 거렁뱅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눈 밑이 시커멓거나 얼굴이 누렇게 뜬 마약중독자였으니.

그때 스트립바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검정색 가죽 재킷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껄렁한 사내였다.

그건 확실히 눈에 띄었다. 입장료를 받는 스트립바 특성상 아직 한창때인데 나오는 거니까.

그것도 스트리퍼로 추정되는 여자 한 명을 옆에 끼고서 말이다.

설마 벌써 눈이 맞아서 내빼는 건가? 이건 가드가 가만히 있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놀랍게도, 사내와 눈이 마주친 가드 둘이 허리를 숙였다.

사내가 기분 좋게 웃으면서 가드들에게 돈을 내미는 순간.

"찾았군."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무언가를 걸쳤다.

그때 뒤에서 바텐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손님. 밖에 비도 안 오는데 왜 비옷을······?"

나는 테이블 위에 돈을 올려놓고는 그대로 걸어나가며 대답했다.

"이제 올 것 같아서."

소울삼림 (4)

182화. 소울삼림

인파를 거슬러 나아갔다.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 춤추는 홀로그램. 어디선가 들려온 피아노맨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그 모든 게 어우러져 하나의 카니발을 만든다.

"바바라. 오늘 잠 잘 생각은 말라고. 내가 안 재울 테니까!"

"어머, 오빠! 저번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그냥 뻗었잖아?"

"그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거야! 오늘은 각오하라고! 크흐흐!"

목표를 뒤따라 걸었다.

짧은 길을 걷는 와중에도 사내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스트립걸의 몸을 더듬었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와중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지나치는 사람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길가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제법 비싸 보이는 모텔에 도착한 둘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속으로 셋을 새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그새 카운터에서 키를 받은 둘은 복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 어? 밖에 비가 옵니까?"

내가 들어서자 카운터를 보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깥을 쳐다봤다.

"아니. 비가 올 것 같아서."

"네? 어······ 그런 일기예보가 있었나?"

"요즘 그런 걸 누가 믿는다고."

"그건 그렇죠. 하하! 방은 어떻게?"

의외로 쉽게 수긍한 직원이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여자랑 화끈하게 보낼 방이 필요한데······ 괜찮은 방 있나? 그래. 내 앞에 왔던 커플은 어떤 방을 사용했지?"

"이야! 눈썰미가 있으신 손님이시네. 하긴 스트립걸들이 밤일로 유명하긴 하죠."

"나도 스트립걸과 쓸 것 같은데."

"오오! 그렇다면 제가 바로 옆방으로 드리겠습니다! 벽도 얇아서 숨소리까지 다 들릴 겁니다! 누가 더 격하게 밤일을 하나 대결도 가능하죠! 하하하하!"

"······그거로 부탁하지."

나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직원에게 키를 받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아잇! 오빠앙~ 먼저 씻어야지~"

"이, 이리와! 네가 먼저 도발한 거야! 크흐흐!"

객실을 지나는데, 복도에까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지은 건물이기에 복도에까지 말소리가 새는 거야?'

나는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멀쩡하게 생긴 것 같은데, 설마 판자만 덧대 벽을 만든 건가?

'뭐, 아무렴 상관없지.'

오늘 대화할 일은 없을 테니까.

스르릉.

나는 칼을 꺼내 그대로 문틈을 갈랐다.

철컥!

땡그랑.

문 너머로 자물쇠가 단번에 갈라지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뭐, 뭐야?"

"꺄아악!"

이제 막 옷을 벗어 던지고 물고 빨고를 하려는 참인지, 사내의 얼굴과 목덜미엔 립스틱 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열려있는 문을 천천히 닫으며 말했다.

"토레프 바그너. 해방전선 47구역 물자보급관. 가장 최근에 해먹은 게, 보급으로 나온 방탄슈트 물량을 빼돌려 팔아먹은 거로군. 하다못해 양말과 팬티도 빼돌렸네."

놈을 바라보는 내 시야 한쪽엔 놈의 인적사항과 횡령기록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남궁민수가 보내준 표적 리스트에 적힌 내용이다.

"그, 그걸 어떻게? 너! 너 누구야?"

철컥.

어느새 정신을 차린 놈이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흔들리는 시선만큼이나 총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글쎄. 누굴 것 같나?"

나는 피식 웃으며 놈에게 다가갔다.

"다, 다가 오지 마! 더 오면 쏜다!"

"그러던가."

"지, 진짜! 쏠 거야! 쏠 수 있어!"

"마음대로 하래도?"

"이, 이익!"

놈이 이를 악물더니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탕탕!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탕탕탕!

철컥! 철컥철컥!

탄창의 총알이 전부 비워질 때까지.

물론.

"······어, 어떻게?"

나는 단 한발도 맞지 않았다.

그저 꺼내든 칼날로 파리를 쫓듯 대충 휘두르며 총알을 쳐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덜떨어진 표정으로 바라보던 놈의 눈이 갑작스레 커졌다.

"그 칼솜씨······ 서, 설마 소드마······ 컥!"

툭.

데구르르.

그리고 그게 놈의 마지막이었다.

* * *

[7] [★] [♣]

[꽝!]

[머신을 다시 돌려주세요!]

온갖 숫자와 기호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파친코 머신이 신나게 돌아간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떠다니며 사람들의 환호를 먹어치운다.

"또 죽었다고?"

그중 한 대의 머신 앞에 앉아있던 사내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롭다 못해 베일 것 같은 인상이었다. 길게 찢어진 눈과 얄팍하게 가는 입술. 긴 매부리코는 왼쪽으로 살짝 비틀려 있었으며, 콧잔등엔 길게 찢어진 상처가 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르코. 해방전선의 초창기 멤버이자 기프트를 각성한 각성자로, 43번 구역을 맡은 자경단 조장이었다.

"제길! 알았어. 조심하지."

누군가와 전뇌통신을 하고 있었는지, 푸른빛을 반짝이던 눈동자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잠시 파친코 머신을 노려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나타난 거야?"

그는 조금 전 전뇌통신을 떠올렸다.

벌써 며칠째 간부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누군가 해방전선 간부들만 집중적으로 암살하고 있다고. 워낙 귀신 같은 놈이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나마 목격자가 하나 있긴 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진술을 했다. 경찰처럼 범죄사실을 줄줄 이야기하더니 번쩍하곤 목을 벴다나?

"경찰이라니. 그럴 리 없지. 진짜 SCPD라면 암살이 아니라 지부를 공격했을 테니까."

게다가 더 믿을 수 없는 말은 칼로 목을 벴다는 진술이었다. 그것도 총알을 모조리 튕겨낸 뒤 말이다.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그런 기술을 SCPD가 쓸 수 있을 리 없지."

칼날로 총알을 튕겨낸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방위군의 특수부대쯤이나 되면 모를까, SCPD의 능력으론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 정도 능력을 가졌다면 기업에 있지, SCPD에 있진 않을 테니까.

그럼 설마 소드마스터가 범인일까?

"그럴 리가. 아마 우리와 소드마스터의 관계를 모르는 놈들이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이겠지."

파르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드마스터 강현재.

외부에선 모르겠지만, 소드마스터와 해방전선의 관계는 친밀함 이상이었다. 함께 전투했던 게 몇 번이던가?

무엇보다 확실한 건, 소드마스터의 출신이다.

"나와 같은 감자공장 출신이니까. 더없이 끈끈한 동료애가 있지."

그렇다.

파르코는 강현재와 함께 감자공장을 탈출한 노동자 중 한 명이었다.

"벌써 가십니까? 더 즐기시지 않고요?"

그가 파친코 가게 입구로 걸어나가자, 가게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흥이 깨졌다. 상납금은?"

"그, 여, 여기······"

가게 주인이 플라스틱 카드를 내밀었다. 하울 코인이 담긴 코인 지갑이었다.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든 파르코가 팔꿈치 어림에 장착된 사이버웨어에 꽂아 넣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돈이 모자란데?"

"그······ 이, 이번 달에 장사가 별로 안돼서······ 컥!"

가게 주인의 변명을 듣고 있던 파르코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가게 주인이 컥컥거리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

파르코는 숨이 막혀 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이 장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엉? 원래 위에선 없애자는 걸 내가 막은 건 알아?"

"커, 커억! 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이따위 개수작을 부려?"

"죄, 죄송합······ 끄윽!"

필사적으로 대답을 하던 가게 주인의 눈이 슬슬 뒤집어지려는 순간, 파르코가 거칠게 손을 내팽개쳤다.

다리가 풀린 가게 주인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커헉! 허억! 헉헉!"

"이번에 못 받은 이자까지 합쳐서 다음 달 상납금은 두 배야."

"헉! 파, 파르코님! 제발! 가게 운영비도 빠듯합니다!"

"닥쳐! 우리가 네놈 사정까지 봐줘야 돼? 정 싫으면 관둬. 너 말고도 이 가게 운영할 사람은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쯧! 진즉에 그럴 것이지."

탁탁 손을 턴 파르코가 땅바닥에 침을 한번 퉤! 하고 뱉고는 사라졌다.

여전히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앉아있던 가게 주인이 파르코가 뱉어놓은 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개새끼······ 이전에 있던 갱들도 이렇게까지 뜯어가진 않았는데······"

차라리 예전이 좋았다. 금천교니, 해방전선이니 하는 것들이 없었던 그때가.

예전에도 갱단들이 돌아가며 상납금을 받으러 왔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때 망연자실한 그의 곁을 지나가며 누군가 말을 건넸다.

"주인장. 잘 놀다 가오."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 어?"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건넨 가게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홀린 듯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헛것을 들었나?"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 * *

어둡고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쿵쿵거리는 음악소리와 교통체증으로 성난 경적소리. 싸움이라도 난 듯 거친 고함소리와 별안간 들려오는 총소리까지.

그 모든 게 아스라이 멀어졌다.

대신 뒷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시끄러운 소리는 줄어들고, 어둡고 음습한 소리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마약 중독자들의 웃음소리라든가, 희미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 노숙자들의 경계 어린 눈빛과 그 아래 숨어있는 탐욕스러운 감정까지.

"확, 마! 눈 안 깔아?"

파르코가 자신을 바라보는 노숙자 무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검게 칠해진 사이버웨어 암을 치켜들었다.

노숙자 무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항상 이 뒷골목을 지나다녔던 파르코를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억했다.

그를 털어먹으려고 덤볐던 한 노숙자 무리가 모두 죽기 직전까지 처맞았다는 걸.

물론 파르코는 죽이지 않고 떠났으나, 그들 모두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다는 것까지.

이 뒷골목에서 빈사 상태까지 두드려 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쓰레기 같은 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쯧!"

노숙자 무리를 노려보던 파르코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길을 걸었다.

"이 몸은 이제 너희 같은 버러지들이랑 다른 존재라 이 말씀이야."

파르코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노숙자 무리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잔뜩 움츠러든 몸으로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넙죽 엎드린 자들도 있었다.

파르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래. 이 맛이지. 버러지들을 짓밟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정복감! 내 마음대로 거리낄 것 없이 해도 된다는 쾌감!'

이게 그가 이 지저분한 뒷골목을 매일 지나가는 이유였다. 그도 과거엔 저 노숙자 무리 중 한 명에 불과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라.

자신은 하늘이고 저들은 땅이다. 나는 주인이고 저들은 노예다.

도시 밖 감자공장에 끌려갔을 때만 해도 이 빌어먹을 인생을 한없이 저주했었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될 기회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큭큭!"

파르코는 각성했다. 그 지옥 같던 날, 마침내 감자공장에서 탈출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소울 시티에 도착했다.

처음엔 뭘해서 먹고 사나 고민이었는데, 해방전선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진 몰라도 해방전선의 단장은 엄청난 부자였고, 단순히 먹고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이버웨어와 무기까지도 지원해줬다. 왜냐면 그는 각성자였으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심지어 각성자라고 대우까지 받았다. 꿈에서조차 바라지 못했던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진짜는 그 이후였다.

금천교라는 사이비놈들이 도시를 한번 뒤엎은 이후, 해방전선에 기회가 왔다. 뒤집힌 도시를 수습할 기회가.

그들은 빠르게 도시를 수습했고, 40번대 구역을 중심으로 외곽구역들을 하나씩 손에 넣었다.

시 정부의 행정과 치안이 도달하지 않는 지금, 사실상 40번대 구역의 주인인 그들이나 다름없었다.

"크으! 지금처럼만 유지되면 조만간 은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주머니에서 하울 코인이 담긴 코인지갑을 꺼낸 파르코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방전선에선 상납금을 뜯어가지 않는다. 즉, 이 상납금은 모조리 자신의 돈이었다.

추적이 불가능한 하울 코인으로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 조금만 더 신세 좀 지자."

꾸깃.

코인 지갑을 우악스럽게 구긴 그가 골목길 옆으로 휙하고 던졌다. 어차피 내용물은 이미 빼서 없다.

그런데.

홱.

그가 던진 구겨진 코인 지갑을 누군가 캐치볼 하듯 잡아챘다.

"고맙군. 스스로 증거품을 던져주다니."

"······!"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에 파르코가 화들짝 놀라며 경계했다.

"누,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철컥.

본능적으로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든 그가 그림자에 가려진 불청객을 겨눴다.

불청객은 골목길 어림에서도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곳에 서 있었다.

딱히 조명이랄게 없는 뒷골목이기에, 멀리서부터 떨어진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무저갱과 같이 어두웠다.

불과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임에도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서운하군. 내 목소리를 잊었나?"

뜻 모를 말을 내뱉은 불청객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짙은 그림자를 지나 희미한 빛이 만들어낸 무대 위로 그가 올라왔다.

그제야 상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시커먼 광택이 도는 비옷이다.

'이 날씨에 비옷이라고?'

미간을 찡그린 순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을 고스란히 담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서늘하다 못해 스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무표정한 얼굴.

'······!'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이 허리춤으로 향하고, 그곳에 길게 늘어진 검집이 눈에 들어왔다.

"······소드마스터?"

네가 왜 여기에?

뒷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강현재를 본 순간, 며칠 전부터 시달리다시피 들었던 간부 암살사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으니까.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알아챈 강현재가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그래. 내가 왜 왔는진 알겠지?"

"······지, 진짜 소드마스터, 당신이었다고? 대체 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다. 그리고 그게 맞는 감정이기도 했다. 진짜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소드마스터와 해방전선은 동료나 다름없지 않던가?

"말이 굳이 필요할까? 어차피 죽으면 의미 없는 건데."

"왜, 왜 의미가 없어! 뭔가······ 뭔가 오해가 있는 거야! 그래!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오해라······."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강현재가 잡아챈 코인 지갑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이게 무슨 오해일까?"

"그, 그건······!"

"변명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파친코 가게에서 주인을 구타하는 것까지 전부 봤으니까."

스르릉.

강현재가 천천히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파르코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만! 잠깐만, 소드마스터! 나 몰라? 나 파르코야! 너와 함께 그 지옥같은 감자공장에서 탈출했던 동료라고!"

"그래서?"

저벅.

고저 없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꾸한 강현재가 한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강현재가 다가온 만큼이나 뒷걸음질로 물러선 파르코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살려줘! 제발!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우리는 동료잖아? 어?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함께 탈출했잖아?"

"그건 맞지."

"그, 그렇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강현재의 모습에 썩어들어가던 파르코의 얼굴이 밝아지려는 찰나.

"네가 오늘 죽는 것도 맞고."

이어진 강현재의 말에 다시 파르코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왜! 대체 왜 이러는데! 그깟 돈 좀 뜯었다고 그래? 조, 좋아! 그 돈 전부 너한테 줄게! 그럼 돼?"

"그리고?"

"그, 그리고? 어······ 앞으로 상납금으로 받을 돈도 네게 줄게! 아니지! 그럴 게 아니라 나한테 아예 네 이름을 빌려줘. 그럼 이런 푼돈 말고 더 큰돈을 상납금으로 바칠 수 있어! 어, 어때?"

파르코가 간절한 눈빛으로 강현재를 바라봤다. 제발 돈을 바치게 해달라는 복종의 눈빛이었다.

강현재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것도 줘야지."

"뭐, 뭘? 말만 해! 다 줄 수 있어!"

"네 목숨."

"······!"

파르코의 얼굴이 구겨졌다. 공포에 잠식된 감정이 아예 마비됐다. 이성이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제야 강현재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강현재는 전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걸.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는 걸 말이다.

"너! 강현재! 이 개새끼! 그라타여도 죽일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강현재의 눈썹이 좁혀졌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났다.

자신의 계획이 먹힌 파르코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너 그라타랑 친하잖아? 그 돈을 받은 게 그라타여도 죽일 거냐고! 나만 이러는 거 같아? 모두 똑같다고! 네 친구 그라타도 나처럼 뒷돈 받아먹는 건 똑같단 말이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대답해! 어? 그라타여도 죽일 거냐고 이 새끼야! 어디 정의로운 척을 하고 지랄······"

"물론이다."

"······뭐?"

한껏 구겨진 얼굴로 독설을 내뱉던 파르코의 입이 벌어졌다.

"그라타가 너와 같은 죄를 지었다면 그놈도 죽어야지. 걱정하진 마라. 네가 저승에 가 있으면 그라타도 따라갈 테니까."

"이, 이 잔인한 새끼!"

"그런데 착각하는 게 있군. 네가 죽는 이유는 이깟 푼돈 조금 받아서가 아니야."

"뭐, 뭐······? 그럼 이유가 뭐야!"

"적색 등급 마약유통에 손을 댔더군. 그것도 해방전선 이름을 팔아서. 간도 크지."

"그, 그걸 어떻게······?"

파르코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렸다.

이내 그 지진은 눈동자에서 턱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퍼졌다.

덜덜덜덜.

그제야 죽음의 그림자가 완벽하게 자신을 덮쳤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전까지 강현재와 입씨름을 할 때까지만 해도 '혹시나'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적색 등급 마약유통이 까발려진 이상, 죽음은 기정사실화됐다.

강현재는 진짜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거다.

"너는······ 너는 우리를 이해 못 해!"

"······?"

"감자공장에서부터 그렇게 강했으니, 너는 이미 잘 먹고 잘살고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어? 우리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단 말이다! 평생 이 빌어먹을 조직에서 살 순 없잖아! 우리도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고!"

파르코가 울부짖었다. 그가 내뱉은 절규엔 광기와 절망, 희열과 탐욕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해라······."

다가서던 발걸음을 멈춰선 강현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사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엔 큰 의미란 없지. 사람이란 변하니까. 어제까지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지."

"마, 맞아! 네 말이 맞다고! 사람은 다 변해! 그게 이 도시의 섭리야! 그, 어? 파, 파인애플! 나도 원래 좋아했는데 오늘부터 싫어졌어!"

파르코의 목소리에 다시 희망이 깃들었다. 울부짖었던 절규가 내일을 노래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거 아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현재가 파르코에게 물었다.

"······? 뭐, 뭘?"

본능적으로 움찔한 파르코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게 네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진 않아."

"씨, 씨바알!"

결과적으로 그건 맞는 선택이었지만······.

서걱.

그 선택이 그를 살려주진 않았다.

"꺽! 꺼어억!"

어둠을 가르며 날아든 은빛 궤적이 파르코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다가 이내 무릎을 털썩하고 꿇었다.

푸슉! 푸슈슈슉!

뒤늦게 터진 피분수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후두둑.

한줄기의 핏줄기가 비옷을 두드렸다. 부스럭거리는 비옷 특유의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쓰러진 파르코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강현재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짙은 혈향이 풍겨왔다. 평소의 매마르고 먼지가 잔뜩 낀 공기가 아니라, 습한 기운을 머금은 공기였다.

"······진짜 비가 오려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현재가 뒷골목을 떠났다. 그 자리엔 음습한 공기와 파르코의 시체만 덩그러니 널브러져 남았다.

잠시 후.

툭. 투둑. 투두두둑!

쏴아아아―――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였다.

소울삼림 (5)

183화. 소울삼림

빗방울이 어지러진다.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짝이는 조명과 네온사인. 춤추는 홀로그램과 허공을 유영하는 레이저 불빛들.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쏴아아아―――

그건 빛의 향연이었다.

감히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색깔의 빛들이 빗방울에 반사된다. 서로 뒤섞인 채 빛을 내뿜고, 그 빛은 또 다른 물방울에 반사되어 뒤섞여 반짝거리고, 그 빛은 다시······.

끝이 없는 빛의 순환.

마치 빅뱅 이후 터져나간 무한의 우주가 이곳에 내려앉은 것 같은 광경이다.

투둑. 투두둑.

그런 빗방울들이 비옷을 두드린다.

빛이 팡팡 터져나간다. 쏟아지는 폭우의 빗소리, 비옷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터져나가는 빛의 산란.

이 모든 게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되어 나를 휘어 감았다.

"······진짜 비가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며 작게 중얼거렸다. 상쾌한 비 내음이 코끝에 머물렀던 혈향을 말끔하게 걷어갔다.

그리고, 그 혈향의 주인공을 떠올려본다.

파르코. 놈은 변했다. 놈의 말대로 지옥 같았던 감자공장을 탈출하고 이 도시에 도착했던 그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은 변하니까.

영원한 건 없는 법이니까.

'나도 변했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세계에 처음 빙의했던 그때, 나조차도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막연한 목표만이 있었을 때.

내가 나임을 잊지 않기 위해 결심했던 게 있다.

[고맙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군. 나는 그라타다.]

[······현재. 현재라고 부르면 된다.]

[현재(Present)? 독특한 이름이네.]

감자공장을 탈출하던 그 날. 나는 이 세계에서 쓸 이름을 정했다.

'강현재. 그게 내 이름이다.'

전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내가 나임을 잊지 않기 위해. 비록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떨어진 빙의자가 되었다고 해도, 내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의지의 발로로 나는 내 이름, 강현재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였다면 평생 살았어도 겪기 힘든 일을 지난 1년 사이에 모조리 겪었다.

'나는 변했나?'

다시 중얼거려본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세차게 비옷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뒤섞여 내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모르겠군. 내가 변했는지.'

어쩌면 파르코가 변했듯, 나 또한 변했을지도 몰랐다. 이 용광로 같은 도시는 멀쩡한 사람을 두고 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내 기억과 각오는 그대로다.'

나는 여전히 나라는 것.

그전의 나도, 혹시나 변했을 지금의 나도.

'여전히 소드마스터 강현재다.'

이게 파르코와 내가 다른 점이다.

녀석은 단순히 변한 게 아니라, 상해버렸으니까. 변화(變化)가 아니라 변질(變質)되어 버렸으니까. 유통기한이 한껏 지난 통조림처럼.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뒷골목을 끝을 향해 걸어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그 유통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길 바라야겠군. 녀석처럼 상해버릴지도 모르니.'

혹시나 유통기한을 적는다면.

만년으로 해야겠다.

* * *

제로 넘버링 구역인 여의의 지하벙커 중 한 곳.

그곳에서 은밀히 열린 최고 회의에 또다시 5명의 의원이 모였다.

"······47구역 보급관 토레프 바그너. 43구역 자경단 조장 파르코 디센트. 딱 스무 명이로군."

백발의 노년 신사가 화면에 띄워진 리스트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과연 소문이 헛되진 않았어. 저렇게 귀신같이 간부진들만 암살에 성공하다니."

그는 매우 흡족한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나날이 커져만 가는 해방전선 세력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도시를 복구하고 있지만, 내부 수습이 늦어지고 있었다. 셀리케에서 적극적으로 제네시스를 의심하면서 도시 행정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지금은 도시복구가 우선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나 적극적인지 괜히 제네시스 편을 들어줬다간 매달 들어오는 후원금을 끊겠다고 나설지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용납할 수 없었기에 의원들도 셀리케의 말을 어느정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은 의회에서만 처리됐는데, 그게 복구가 늦어진 가장 큰 이유였다.

뭘 하려고 하면 의회가 파행되고, 표를 받기 위한 온갖 포퓰리즘 안건이 난무하니 자연스레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는 어떤가?

불과 열흘이 넘기도 전에 엄청난 성과를 가져왔다.

해방전선 간부진 스무 명의 암살.

시 정부에서 파악한 대로라면, 해방전선은 급격한 비대화로 관리자급이 없어서 관리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상황에 간부진 스무 명이 죽어 나간다면 그 혼란은 가속화될 터.

몸을 불리는 것에 제한이 걸릴 뿐만 아니라, 어쩌면 내부에서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관리가 되지 않는 조직, 그것도 개나 소나 받은 무장세력이라면 언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훌륭합니다! 역시 커티스 의원님의 선견지명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외눈 안경의 사내가 박수를 쳤다. 그리곤 같이 박수를 치자며 주변의 다른 의원들을 돌아봤다.

그 눈빛에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커티스 의원이라 불린 노년 신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메이슨. 이건 내 의견이 아니었다네. 에드가의 의견이었지. 안 그런가?"

"의견이랄 것까지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훌륭하신 분들이 결정을 내리셨으니 가능했던 일이지요."

커다란 중절모를 쓴 사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멈춰서 되겠습니까? 아직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남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아랫놈들이 죽어 나자빠져도 대가리가 멀쩡하면 헛수고지. 그런 의미에서 소드마스터가 한 가지 요구를 해왔다네."

"요구요?"

"건방지게 해결사 따위가 무슨 요구를 했단 말입니까?"

"버릇을 고쳐야······"

의원들이 하나, 둘 발끈하며 말을 하려는 순간, 커티스가 그만하라고 손을 들었다.

"해방전선의 단장이 『신의 물방울』을 구한다는 소문이 있다는군."

"신의 물방울이라면······?"

"술 말입니까?"

"그렇다네. 확인 결과, 진짜 해방전선 말단 단원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야."

"허어? 그 단장이란 놈도 제정신은 아니로군요. 이 상황에 그런 고급술을 찾다니."

"배때지가 처 불렀군! 그게 얼마짜린 줄 알고!"

"해방전선도 오래 갈 조직은 못되나 봅니다. 단장이란 게 벌써 그런 사치를 부리다니."

다들 앞다퉈서 해방전선 단장에 대해 욕을 내뱉던 의원들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왜겠나? 소드마스터가 요구한 게 신의 물방울이라네."

"헛! 그럼?"

"신의 물방울을 미끼로 단장을 암살하려고 하는 모양이로군요!"

"역시 소드마스터로군! 마냥 칼만 잘 쓰는 게 아니라 머리도 쓸 줄 알아!"

그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소드마스터가 신의 물방울을 요구한 게 설명이 됐다.

건방진 해결사라고 생각했더니, 이런 계획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명성이 헛되진 않았다.

"마침 우리에게 신의 물방울이 한 병 있지 않던가?"

"······?"

커티스 의원의 말에 다들 물음표를 띄었다.

그들 가운데 신의 물방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커티스 의원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가 더욱 의문이었다.

누구 한 명을 지칭하면 지칭했지, '우리'라니? 꼭 공동의 소유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지 않는가?

그때 가장 먼저 '아~'하고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있었다.

"정부청사 박물관에 있는 걸 말씀하시나 보군요."

중절모를 쓴 중년 사내. 에드가였다.

"정부청사 박물관에 그런 게 있었나?"

"얼마 전에 박물관 전시물이 한번 로테이션 됐다더니, 그때 새로 들어왔나 보군."

"하긴······ 신의 물방울 정도면 박물관에 전시될 법도 하지."

그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라고 했던 이유. 그건 개인의 물건이 아니라 시 정부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말로 하자면, 진짜 '우리'의 물건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동의하면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사유할 수 있었으니까.

좌중을 둘러본 커티스 의원이 물었다.

"나는 그 신의 물방울을 소드마스터에게 줄 생각이라네. 다들 동의하나?"

"그런 술 한 병 주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동의합니다."

"해방전선 단장의 머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더한 것도 줄 수 있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밀실에서 이뤄진 만장일치로, 정부청사 박물관에 있던 신의 물방울의 주인이 바뀌게 됐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 * *

"······이걸 드디어 얻었군."

나는 눈앞에 놓인 적갈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신의 물방울.

핵전쟁 이전에 빚어진 최후의 와인.

이제는 세상에 몇 안 남은 핵전쟁 이전의 음식물이자, 설정상 각성자의 각성 후유증을 치료해주는 유일한 치료약이다.

물론 이걸 그냥 마신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아마 다른 술들처럼 잠깐의 후유증을 가라앉혀주는 정도에 그치겠지.

"하지만 이걸 증류해서 브랜디로 만들면······ 전혀 다른 물건이 돼지."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증류주 브랜디. 불순물을 거르고 오롯이 신의 물방울에 담긴 순수만을 담아낸다면, 각성의 후유증을 말끔히 치료할 수 있다.

나는 미리 준비해놓은 소형 증류기에 신의 물방울을 흘려 넣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진하게 풍겨온 달큰한 포도향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조심스레 신의 물방울을 한 방울도 빠짐없이 증류기에 넣고 증류를 시작했다.

달아오른 증류기에서 열을 내뿜고, 한쪽에선 새하얀 수증기가, 한쪽에선 걸러진 순수가 한 방울씩 고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완성됐군."

나는 유리잔에 가득찬 브랜디를 바라봤다. 내 팔뚝만 한 와인을 증류해서 나온 결과물이 이 한잔의 브랜디다.

반투명한 호박색 액체가 투명한 유리잔에서 찰랑거린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액체 속에선 잠들지 못한 알콜이 헤엄쳤다. 유리잔 위로 알콜 기운이 새어 나오며 아지랑이가 질정도였다.

"후우······."

꿀꺽.

나는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독하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목울대를 타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린다.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까지가 브랜디에 대한 느낌이다.

"큭!"

그리고 지금부터가.

"크, 크윽!"

신의 물방울이 만들어낼 기적의 시작이다.

우득! 우드득!

온몸의 뼈가 뒤틀린다. 저절로 몸이 펄떡거리며 춤을 춘다. 근육이 찢어졌다, 재생했다를 재생하고, 뒤틀린 뼈가 부러졌다, 붙었다를 반복했다.

너무나 끔찍한 고통에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벌린 입으로 가는 숨소리만 내뱉을 뿐이다.

하지만 외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퍼서석!

"······!"

나는 내부에서 들려온. 아니, 들려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격한 고통에 눈을 부릅떴다.

어찌나 크게 떠졌는지, 눈가가 축축해지며 끈적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눈꼬리가 찢어진 듯싶었다.

이렇게 놀란 이유는 하나였다.

'포스를 담는 그릇이 깨졌다!'

심장 어림에 위치한 포스를 담는 그릇이 깨졌다. 이건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포스는 형체가 없다. 따라서 그걸 저장하기 위해선 그릇이 필요했다.

물론 그릇도 형체는 없다. 다만 미증유의 힘으로 흩어지려는 포스를 끌어당긴다. 그렇기에 각성자는 저장된 포스를 끌어다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릇이 깨졌다.

그럼 앞으로 벌어질 일은 뻔했다.

"컥!"

뭉쳐있던 포스가 사지백해로 흩어진다. 단순히 흩어지는 게 아니다. 댐에 갇혀 있던 물이 한꺼번에 방류되듯, 그릇이 사라진 포스는 내 온몸을 쓸어버릴 듯 거칠게 내달렸다.

혈관 하나하나가 모조리 파괴되고, 손끝과 발끝까지 이어진 세포와 신경이 모조리 분쇄되는 느낌이다.

가히 상상조차 못 할 고통이 덮쳐왔다. 핑하고 시야가 돌며 어두워진다. 당장에라도 의식이 끊어질 듯 위태롭게 깜빡였다.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죽는다!'

나는 본능적으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다는 걸 느꼈다.

이대로 의식을 잃고 포스가 날뛰는 걸 방치한다면, 죽는다!

'······이렇게 죽으려고 악착같이 산 게 아니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온몸을 뒤덮은 채 나를 익사시키고 있는 포스에 의지를 전달했다.

'돌아와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처음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슨 개가 짖냐는 태도로 포스는 내부를 찢어발겼다.

'그만 날뛰고······ 돌아와!'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몸이나 다름없던 포스에 굴복할 순 없었다.

불굴의 의지는 곧 불길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거대해진 의지는 블랙홀이 되었고, 이내 온몸을 헤집고 다녔던 포스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쿠쿠쿠쿠!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처럼 포스가 되돌아왔다. 연어가 고향에 돌아오듯, 의지에 이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냥 돌아오진 않았다.

사아아아―――

찢겨나간 혈관이. 파괴된 신경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포스를 따라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튼튼하게.

콰콰콰콰―――!

이내 흩어졌던 포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우웩!"

나는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먹물을 내뱉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검게 변한 죽은 피였다. 코끝으로 비릿한 혈향과 함께 알 수 없는 악취가 함께 풍겨왔다.

비단 토한 죽은 피뿐만 아니었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나는 진흙 속을 뒹굴다 나온 것처럼 시커먼 땟국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성공했군."

게임 설정상, 신의 물방울로 몸이 재구성된 상태를 이렇게 칭한다.

리-제너레이션. 혹은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온몸에 더없이 활력이 넘친다. 이전에도 몸이 가벼웠지만,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게······ 단전인가?"

심장 어림에 있던 포스의 그릇이 배꼽 아래로 이동했다. 묵직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훨씬 커지고 단단해졌다. 형체가 없었던 심장의 그릇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단전에 담긴 포스를 확인한 그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단계를 넘었군."

포스 등급의 다음 단계에 들어섰다고.

이제 3단계 스킬도 후유증 없이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릉.

검을 뽑아 들었다. 서늘한 은빛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포스를 끌어내 칼날에 담았다. 더없이 순수하고 찬란한 빛이 칼날 위로 반짝였다.

처음엔 푸른색으로, 이내 시리도록 눈부신 백청색으로, 마침내 귀기(鬼氣)마저 느껴지는 신비한 보랏빛으로.

"······검강(劍罡)."

그건 검강이었다.

선녀와 나무꾼

184화. 선녀와 나무꾼

분홍색 꽃무늬 찻잔에서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피어오른다.

연붉은 찻물이 찰랑거린다.

코끝으로 홍차 특유의 부드럽고 달큰한 향이 느껴졌다.

"이대로 정리해도 괜찮은 거예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로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한 나는 찻잔을 내려놨다.

"어차피 그들도 내가 성공할 거라고 기대는 안 했을걸?"

"제 말은 당신 명성에 흠이 갈까 봐서예요. 여태껏 실패한 의뢰가 없었잖아요. 아무리 이 의뢰가 외부에 공개되지 않더라도, 당신이 실패했다는 건 알려질 수밖에 없어요."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나는 시 정부에 암살의뢰 실패를 알렸다. 정확히는 해방전선 단장의 암살 실패를.

이로써 성공 보수는 못 받게 됐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번 의뢰는 보수를 보고 받은 게 아니었으니까.

'목적은 달성했다.'

애초에 시 정부의 구린내 나는 의뢰를 받은 이유는 신의 물방울 때문이었다. 그걸 받아낸 이상, 의뢰를 지속할 의미가 없다.

흠이 간 명성? 다시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그 정도 자신감은 있었다.

"전에 말했던 그 이유 때문이죠? 시 정부로부터 받아낼 게 있다는 거."

"음? 어, 그렇지."

"그게 설마 신의 물방울이었어요? 겨우 술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요?"

"신의 물방울 때문은 맞지만, 그게 겨우 술은 아니야. 내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으니까."

"······마셨어요?"

"어?"

"신의 물방울. 그거 이미 마셨냐고요."

"그, 그렇지?"

얘가 왜 갑자기 이렇게 날이 바짝 섰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로제가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마냥 나를 흘겨봤다.

"언제요? 누구랑요?"

"······그게 왜 궁금한데?"

"아, 빨리요! 누구랑 마셨는데요!"

"혼자 마셨지. 누구랑 마셔 그 아까운걸."

브랜디로 증류하고 나니 겨우 한 잔 나왔다. 내가 먹을 것도 없었다.

"진짜죠?"

"그래. 그러니 그게 왜 궁금했는지 이제 말해주실까?"

"비, 비밀이에요!"

"나한테는 꼬치꼬치 다 캐묻고 너는 비밀이다?"

"그런 게 있어요! 다 알려고 하지 말아요!"

"······."

이 무슨 내로남불이냐.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잠시 할 말을 잃은 그 순간, 소파에 엎드려 게임을 하고 있던 데이지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의 물방울이 정력에 좋데."

"······뭐?"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뭔 력? 정력?

내가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기겁을 한 로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데, 데, 데이지! 너! 입 다물지 못해!"

"로제는 네가 어떤 여자랑 신의 물방울을 마시고 함께 밤을 보냈는지 궁금······ 읍!"

"꺄, 꺄아악! 너, 너! 조용히 해!"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에서 소파까지 날아가다시피 한 로제가 데이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이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로제를 바라봤다. 붉어진 얼굴은 귀부터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데이지와 실랑이를 벌이던 로제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나를 향했다가 마주친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애꿎은 데이지의 볼만 늘어지도록 꼬집었다.

그때 로제의 품에서 버둥거리던 데이지가 그녀의 손을 피해 쏙 빠져나오더니 말했다.

"로제는 왜 솔직하지 못해? 같이 자고 싶으면 자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

"꺄아아악!"

기어코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붉어졌던 로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이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그리곤 문을 쾅하고 닫고는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왜 그랬어."

나는 작게 헛웃음을 지으며 데이지에게 물었다. 평소 녀석이 로제에게 하는 행동을 봤을 때, 오늘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데이지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다가,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너야말로. 보아하니 로제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받아주지 않는 거지? 혹시 안 서나?"

독설이었다.

"······잘 선다."

"그럼 왜? 취향을 타기엔 로제의 외모가 뛰어나서 말이 안 되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집안도 훌륭하고 가진 돈도 많고.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

"그럴 리가."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나도 그녀가 싫진 않아. 다만, 받아주기엔 내 상황이 여의치 않을 뿐이다."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순간부터 로제의 마음을 알고는 있다.

다만, 앞서 말했듯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나는 바깥에서 온 이방인이자, 잠깐 들렀다 사라질 순례자일 뿐.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이다.

"사지도 멀쩡하고 물건도 잘 서는데 무슨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거지? 혹시 아다?"

"······못하는 말이 없군."

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데이지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던가? 원래 암살자 출신답게 매마른 오아시스처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로제의 영향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데이지의 얼굴에 표정이라는 게 생겼었다.

물론 남들이 봤을 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봤던 나는 확연히 변화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든 게 데이지가 로제를 졸졸 따라다닌 이후부터다. 지금은 둘이 같이 살기까지 하니 더 영향을 받았겠지.

"로제에게 상처를 주지 마.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데이지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고요한 붉은색 눈동자 아래로 괴물이 꿈틀거렸다. 언젠가 팬텀의 암살자들을 격살하던 그 괴물이다.

나 역시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왜 웃지?"

"네가 있어 다행이라서."

"······?"

데이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무슨 말이지? 고민하는 눈빛이다.

그리곤 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하더니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너, 넌 내 스타일 아니야!"

"······."

으음. 오늘따라 두 여자의 감정 기복을 따라가기 힘들군.

나는 작게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게 아니라 네가 로제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이다. 내가 없어도 안심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그제야 다시 슬그머니 나를 바라본다. 살짝 붉어진 양 볼을 보니 자기도 부끄러운 건 아나 보다.

"너도 들었지만, 나는 이 도시 출신이 아니다. 이방인이라는 소리지."

"······?"

"나는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내가 로제를 받아줄 수 없는 이유다."

이만 대답이 됐겠지? 하는 표정으로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게 언젠데?"

"······?"

"도시를 떠난다며. 그게 언제냐고."

"그거야······."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니까. 그게 언제인지, 또 그날이 온다 하더라도 진짜 떠날 수 있을지까지도.

"······나도 정확히 모르겠군."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다.

처음 이 세계에 빙의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어느 것 하나 확실한 삶이 아니었다.

그런 마당에 누가 누굴 품나?

그러자 데이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럼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다가오는 사람을 쫓아낸다고?"

"쫓아낸 적은 없······"

"비겁해.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겁쟁이마스터라고 불러야겠어. 대체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진 거지? 하다못해 뒷골목 갱들도 너보다 자기감정에 충실할 텐데."

"······."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받아줄 수 없다고? 그 결정이 멋있어 보여? 그건 멋있는 게 아니라 찌질한 거야. 자기감정을 회피하는 변명이고, 그 도구로 로제를 사용했을 뿐이라고."

"······."

데이지의 신랄한 평가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진짜 나는 비겁한 변명을 했던 것에 불과했나? 로제의 감정을 그저 변명의 도구로 사용한 건가?'

설마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데이지를 통해서.

하지만 충분히 고민해볼 문제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 미래가. 아니, 우리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조언 고맙군. 확실히 도움이 됐어."

"그래서 대답은?"

데이지가 여전히 싸늘함이 풀풀 풍기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데이지가 작게 '칫!'하고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홱하고 돌렸다.

* * *

"어때? 도움이 됐어?"

데이지가 감자칩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얼마 전 새로 출시한 프리미엄 감자칩이었는데, 무려 합성 탄수화물 파우더가 들어가지 않은 100% 순수 감자칩이었다.

그리고 밥 대신 그것만 먹고 있어서 로제가 금지했던 간식이기도 했다.

"잘했어."

로제가 감자칩 한 봉지를 더 꺼내 데이지 앞에 올려놨다.

"허니버터맛······ 이거 구하기 힘든 건데······"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 데이지가 곧바로 봉지를 뜯더니 한 움큼 쥐고 그대로 입속으로 넣었다.

한가득 오물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이 꼭 햄스터 같았다.

로제는 그런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현재 씨한테 여자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고, 왜 나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알아냈어.'

그녀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교류되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강현재의 사이는 가까워졌고, 그녀는 충분히 그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고 여겼다. 이미 그녀는 강현재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강현재는 아니었다. 분명 친밀함 이상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이상 가까워지는 걸 경계했다.

항상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꾸욱.

로제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강현재가 도시를 떠난다? 강현재가 도시에 없다?

'······그건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리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강현재가 앉아있었던 곳을 바라본다. 그녀의 맞은편, 그녀가 앉은 의자와 똑같이 생긴 의자를.

강현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저 의자는 강현재 전용 의자였다.

어떤 의뢰인이 와도 저 의자엔 앉을 수 없었다. 저 자리는 오로지 강현재의 자리다.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이 로세툼이 문을 닫는 그 날까지.

'그가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해.'

로제는 오래된 동화를 떠올렸다. 선녀를 천상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나무꾼의 이야기를.

'현재 씨의 날개옷은 뭐지?'

로제의 고민이 깊어지는 하루였다.

* * *

여의의 방공호 지하.

근 열흘 만에 또다시 최고 의원들이 모였다.

"소드마스터가 암살 실패를 알려왔더군. 의뢰도 포기한다고 하네."

커티스 의원이 담뱃불을 붙이며 말했다. 붉게 타오른 불꽃이 연초를 태우며 녹색 연기를 내뿜었다. 크로노타이늄 연초였다.

"설마 소드마스터가 의뢰까지 포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여러 번은 시도할 거라 생각했는데요."

"첫 번째 시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본인 목숨이 위험했거나요."

"하긴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적진 한가운데 숨어있는 해방전선 단장을 암살하는 게 쉽진 않았겠죠. 아쉽긴 합니다. 아까운 카드인데."

"신의 물방울을 한 병 더 구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해방전선 단장이 바보도 아니고 같은 수에 또 당하겠습니까?"

"지금 내게 바보라고 한 게요?"

"뭐 꼭 지칭하진 않았습니다만?"

"허?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자기들끼리 떠들던 의원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기본적으로 이곳에 모인 의원들은 전부 여야에서 방귀 깨나 뀌는 최고 의원들이다.

원래라면 같은 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이들이다. 각 당파의 수장들이었으니까.

그런 이들이 이곳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전부 상석에 앉은 커티스 의원 때문이었다.

소울 시티의 살아있는 권력이자 구도자. 베일 뒤에 숨은 막후의 실력자가 커티스 의원이었으니까.

그것도 이 도시가 설립된 이후, 백 년 가까이 말이다.

그런 커티스 의원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연초만 피워대고 있었다. 저들이 떠들어 대는 걸 그저 지켜보면서.

그때 중절모의 중년 사내. 에드가 의원이 여태껏 다물고 있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사실 의원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뭐요?"

서로 목소리를 높여 비난하던 의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들이 싸웠던 건 그저 습관의 일종이었을 뿐, 실제로 싸울만한 이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가는 그런 의원들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커티스만을 바라봤다.

치이익.

커티스가 재떨이에 연초를 끄며 말했다.

"말해보게, 에드가."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인 에드가가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저에게 재밌는 영상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처음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혹시 조작 영상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로요."

"무슨 영상인데 그러오?"

"연예인 섹스 비디오라도 입수한 거요?"

"허어? 에드가 의원이 아무리 젊다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걸 말하겠소?"

"흥! 농담도 구분 못 하시오?"

"아니, 이 사람이 또 시비를······"

다시 시끄러워지려는 찰나, 커티스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좌중에 커티스가 턱짓했다.

"영상 이야기를 꺼낸 걸 보니 우리에게 보여줄 게 있나 본데, 시간 끌지 말고 재생하게."

"역시 커티스 의원님. 알겠습니다."

에드가의 눈빛이 푸르게 물들었다. 좌측 관자놀이에 붙은 전뇌 구동칩이 반짝거리더니, 이내 회의실 천장에서 쏟아진 홀로그램이 하나의 영상을 재생했다.

그건 어딘가를 빠져나오는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검은색 가죽재킷을 형상화한 전장 슈트. 해방전선이었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거지?'

모든 의원들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보아하니 해방전선 놈들이 기업 하나를 털어먹고 나오는 것 같은데, 이 자리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은 에드가가 말했던 것처럼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랄 만한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소드마스터?"

해방전선 무리들과 사이좋게 나오는 인물.

바로 해방전선 암살 의뢰를 넣었던 소드마스터였다.

1984 (1)

185화. 1984

"잘 해오다가 갑자기 의뢰 실패를 이야기하더니만······ 설마 우릴 배신했을 줄이야."

영상을 지켜보던 커티스 의원이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소드마스터가 배신했을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소드마스터가 해결사인 이유가 가장 큰 이유였다.

해결사라면 환장할 돈.

이번 의뢰에 걸린 돈은 그가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규모의 돈일 테니까.

돈이라면 목숨마저 거는 게 해결사 아니었던가? 그런 해결사의 정점에 서 있는 자가 설마 돈을 포기하고 배신을 할 줄이야.

"소드마스터가 배신하다니······ 해방전선에서 대체 뭘 받았길래?"

외눈 안경을 닦고 다시 착용한 매이슨 의원이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한 행동이었다. 그의 안구는 최신식 사이버아이였으니까.

"더 큰 돈을 주지 않았겠소?"

짧은 머리가 인상적인 프랑코 의원이 터질 듯 부푼 양팔을 팔짱 낀 채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의뢰금이 얼마인 줄 알고? 성공보수까지 합치면 자그마치 1조요! 해방전선 따위가 감히 엄두도 못 낼 압도적인 돈이란 말이요!"

"그, 그렇게 많이 썼었나?"

"어차피 불가능할 거라 봤으니까.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손해라고 보진 않았소. 1조를 들여서 해방전선을 걷어낸다면 오히려 싸게 먹힌 거지."

"으음······ 그건 그렇지."

그 둘의 이야기에 좌중의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해방전선이 좀먹고 있는 30, 40번대 구역을 되찾고, 다시 도시가 정상화된다면 그깟 1조쯤 시간이 문제지 다시 벌어들일 수 있다.

시 정부, 그리고 의원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이대로 상황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개발이 진행될 노른자 땅이 30번대 구역에 있었다. 얼마가 들더라도 해방전선을 치워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때 여태껏 해방전선 관련해서 크게 의견을 내지 않았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흑발이었을 머리카락에 백발이 섞인 회색빛 단발머리를 한 중년 여인이었다.

이상한 모습이긴 했다. 외모는 중년인데, 하얗게 샌 머리카락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목소리 역시 독특했다. 저 얼굴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쉰 목소리였다.

그런 그녀의 발언에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매이슨과 프랑코도 입을 다물었고, 영상을 가져왔던 에드가도 중절모를 고쳐 쓰며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단 한 명. 커티스 의원만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요나 의원. 말씀해보시게. 그대의 통찰력이 어떤 걸 느꼈는지."

요나 의원이라 불린 중년 여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곤 말을 이었다.

"저 영상만으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소드마스터가 실패한 건 해방전선 단장을 암살하는 일뿐, 실제로 그가 죽인 관리자급이 스물이 넘습니다."

"우릴 속이려고 희생시킨 거 아니겠나? 듣자 하니 해방전선 단장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던데."

"······한 둘도 아니라 무려 스물입니다. 당장에 내각의 관리자 스물이 사라져도 업무가 마비되는 마당에, 그보다 더 작고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해방전선은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비교가 되는 말을 하자 의원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관리자급 스물이라고 했을 땐 그냥 그랬는데, 실제로 자신들 부처에 관리자급 스무 명이 없다고 생각해보니 끔찍했던 거다.

커티스 의원 역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턱짓으로 영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저 영상에선 분명 소드마스터와 해방전선이 함께 하고 있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는 군인이 아니라 해결사이지 않습니까? 해방전선과 친분이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흐음······ 해결사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 역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많은 해결사들이 의뢰를 해결하는데에 자신의 인맥을 휴민트로 사용했다.

흔히 해결사를 청부살인업자의 이미지로 많이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해결사들이 하는 일은 많았다.

의외인 점인 칼로 모든 일을 해결할 것만 같았던 소드마스터에게 저런 인맥이 있었다는 거다.

그때 외눈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매이슨 의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요나 의원 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영상을 가리켰다.

"이 영상의 출처. 아큐마 제약이 아닙니까? 의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전부터 아큐마 제약은 소울 시티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개척세력이 있었던 도시 초창기엔 불가능했다. 아큐마 제약의 모태가 되는 곳과 소울 시티가 있는 한반도엔 넘지 못할 과거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대교체가 많이 된 지금. 아큐마 제약의 과거사는 과거로만 남았다.

그리고 그 세대교체의 대표격인 인물이 바로······.

"어떻게 생각하시오? 에드가 의원?"

중절모의 중년 신사.

에드가 의원이었다.

* * *

모두의 시선이 에드가를 향했다. 마치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 듯했다.

그 시선을 오롯이 받은 에드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큐마 제약이 어때서 말입니까?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은 세계 최대 메가시티인 소울 시티입니다. 언제까지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가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이오!"

군인 출신답게 프랑코가 가장 먼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하핫! 프랑코 의원님. 언제부터 기업을 믿으셨습니까? 그들은 원래 못 믿을 자들 아닙니까? 현명한 자라면 그들을 이용할 생각부터 해야죠."

"내 말은 그게 아니잖소!"

"에드가 의원.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시끄러워지려는 찰나, 커티스가 손을 들었다.

"그만. 이유야 어쨌든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는 맞다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

"그래서 다음은 뭔가, 에드가 의원?"

커티스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에드가를 바라봤다.

날카로워 베일 것 같은 기세다. 잠시 그의 편을 들어줬지만, 더 확실한 이유를 내놓으라는 압박이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에드가가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 원인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드마스터나, 해방전선이나 전부 그 원인의 부작용이나 다름없습니다."

"원인?"

커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다른 의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 사태의 원인을 찾자면 한두 개가 아니다.

해방전선이 지금처럼 활개 칠 수 있었던 건 금천교의 난 때문이고, 그건 금천교의 난에서 커다란 공을 세운 소드마스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금천교의 난이 원인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금천교가 무장을 얻고 SCPD와 방위군과도 싸울 수 있었던 이유로 의심되는 게 제네시스의 배신이니까.

고로 순수하게 금천교의 난이 원인이 될 순 없다.

"생각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언제부터 버러지 같은 무장세력이 감히 시 정부에 대들고, 일개 해결사 나부랭이가 배신을 꿈꿀 수 있었겠습니까?"

"허어······ 그건 그렇지."

"몇 년 전만 해도 어불성설이었거늘!"

"그때가 좋았지······."

"방위군을 동원해서 한번 싹 밀어버려야······"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내뱉는다.

최근 들어 워낙 큰일들만 연달아 일어났던 터라 잊고 있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 정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 시 정부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그들의 권력 또한 마찬가지였고.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에드가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 이유는 모두 각성자 때문입니다."

"각성자?"

"그 돌연변이들이?"

"조금 귀찮긴 하지만, 그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의원들을 향해 에드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인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다들 1년 전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으셨습니까?"

"1년 전쯤?"

"그때쯤이면······ 아!"

"기적의 서광?"

기억이 떠올랐다. 하늘을 백광으로 뒤덮었던 신비의 밤을.

그리고 그날 밤 이후 한 달.

도시는 이유를 찾지 못한 소요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맞습니다. 기적의 서광. 각성자들이 최초로 나타났던 그 날밤 말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그 이유가 밝혀진다. 기적의 밤 이후 등장한 각성자들. 소요사태의 이면엔 각성자들이 있었던 거다. 정확히는 각성자들이 일으킨 사건들이.

"금천교가 그렇게 커질 수 있었던 건 행정력의 부재가 컸고, 그건 1년 전에 있었던 기적의 서광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각성자에 대해 대비조차 못 했던 그때, 얼마나 많은 정부 관료와 기업가들이 죽었습니까?"

그때는 정말 혼돈 그 자체였다.

전체적인 규모로 보자면 금천교가 뒤집어엎은 지금이 더 컸지만, 단기 임팩트로 보자면 기적의 서광이 압도적이었다.

최소한 금천교의 난 때문에 죽은 정부 고위 관료나 기업가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잔 말이오? 각성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불가능하단 건 에드가 의원이 가장 잘 알지 않소? 행정안전부 담당이니."

프랑코가 불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안 그래도 1년 전 각성자 문제를 놓고 프랑코와 에드가가 싸웠었다. 시 정부로 끌어들인 각성자의 거취를 두고서.

그 결과는 에드가의 승리였다. 시 정부 소속 각성자들은 행안부 소속 에이전트로 활동했다.

중절모를 만지작거리던 에드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줄을 채우는 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목줄?"

"우리가 우려하는 건 통제되지 않는 각성자입니다. 저 화면 속에 있는 놈들처럼 말이죠."

다들 시선이 화면을 향했다.

해방전선과 소드마스터. 모두 인정하고 말 것도 없는 대표적인 각성자들이었다.

에드가가 말을 이었다.

"저놈들이 날뛰는 걸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하겠습니까? 자고로 소울 시티의 시민이라면 시 정부의 규제와 통제에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요?"

"각성자 등록법을 발의하겠습니다. 패스트 트랙으로 통과시켜 주십시오."

"각성자 등록법을?"

"패스트 트랙으로?"

에드가의 시선이 커티스를 향했다. 그건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커티스 의원은 고요한 눈빛으로 에드가를 마주봤다. 분위기가 고조됐다.

다른 의원들은 그 둘의 모습에 괜히 등에서 땀이 났다. 이전에도 몇 차례나 이 일로 둘이 부딪쳤던 모습을 봤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전히 법안이 통과되지 걸로 설명이 끝났다. 커티스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성자 등록법.

이름 그대로 소울 시티에 거주하는 각성자들이라면 시 정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라는 기본적인 법안이었다. 마치 주민등록법처럼 말이다.

그 말인즉, 시 정부가 등록한 모든 각성자들의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조리 말이다.

이게 커티스가 반대한 이유였다. 그 막강한 정보를 행안부가 차지하게 된다면 힘의 균형이 기울게 되니까.

각성자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행안부 담당이 될 수밖에 없기에 처음부터 배제한 거다.

조금의 구멍이 생기겠지만, 어차피 이 도시에 구멍이 한두 개도 아니었고 그런 건 기업이 알아서 채울 테니.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건가?"

커티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힘의 균형을 생각할 게 아니라, 한쪽에 확실히 힘을 실어서 밀어붙여야 했다.

즉, 에드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그렇습니다. 이제 각성자도 시민의 의무를 다해야 할 시기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말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커티스가 기꺼운 웃음을 터트렸다. 고조됐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렸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언제까지 미룰 순 없는 일이니."

"감사합니다, 커티스 의원님!"

에드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의원들의 얼굴에 한순간 아쉬운 감정이 스쳤으나, 그건 잠깐이었다. 커티스의 말대로 각성자 등록법은 시간의 문제였지, 언제라도 통과될 법안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소드마스터는 그냥 놔둘 건가?"

"그럴 리가요."

고개를 숙이느라 흐트러진 중절모를 고쳐쓴 에드가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자고로 말 안 듣는 개는 매가 약입니다."

* * *

왈왈!

"이놈의 개새끼가 왜 또 지랄이야?"

짖어대는 로봇 개를 향해 주인이 거침없이 발길질을 했다. 버그라도 걸린 듯 제자리에서 날뛰던 개가 그대로 발에 걷어차이며 날아갔다.

깨갱! 깽!

"개 짖는 소리도 참 리얼하게 만들었군."

길거리를 걷는 와중 벌어진 광경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세계 기술은 참 쓸데없는 곳에서 리얼하단 말이지.

빠아앙.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며 질주했고, 밤거리를 밝히는 네온사인 불빛들이 현란하게 번쩍거렸다.

어둠은 불야성을 피해 달아났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메가시티답게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저마다 개성이 넘쳤다. 단순히 인종뿐만 아니라 그 외모에서도 드러났다. 이 세계는 사이버웨어라는 자기를 표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도로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왔다. 가끔씩 찾는 라면 가게가 이곳에 있었다.

"이랏샤이마세~"

"신라면 하나."

"아, 네."

머쓱한 얼굴로 주문을 받은 직원을 지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유리에 비친 TV화면에 커다랗게 [속보]라고 뜨더니 진짜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안드로이드 아나운서가 스피커처럼 떠들어야 하는데, 진짜 사람이라니?

[속보입니다. 시 의회에서 익일 00시부터 긴급조치를 발동, 소울 시티에 거주하는 모든 각성자들은 각 구역 센터에 각성자 등록을 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긴급조치의 효력은 발동 즉시이며, 일주일의 유예기간 이후 등록하지 않은 각성자들은 처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도시의 치안과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뉴스 내용을 가만히 듣던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주 지랄을 하는군."

1984 (2)

186화. 1984

TV에서 떠드는 내용은 단순했다.

"각성자들을 잠재적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이제부터 등록해서 관리하겠다는 거겠지."

말이 등록이지,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인적사항이 공식적으로 등록되는 순간 추적쯤이야 우습다.

이곳에선 먹고 자고 싸는 모든 기록이 데이터에 기록되니까.

즉, 시 정부에서 각성자들을 통제하겠다는 뜻이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각성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순순히 등록하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처럼 시 정부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은 시기에.

아마 각성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어쩌면 등록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도 있다.

위조신분을 만들고, 차명계좌를 사용하고, 등록된 사이버웨어도 전부 다른 거로 바꿔야 하지만······ 차라리 그 정도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낫다는 각성자들도 분명 있을 거다.

"다시 개 목줄을 차느니, 들개로 살겠다는 거지."

각성자들의 힘이 부족했더라면 건네주는 목줄을 스스로 차는 방법밖에 없다.

거부한다면 전염병에 걸린 가축처럼 살처분돼 죽어 나갈 테니까.

그게 압도적인 권위와 힘에 굴복해 가축처럼 살아가는 이 세계 시민들의 진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더 이상 각성자들은 시 정부나 기업들의 눈을 피해 숨지 않았다. 당당히 스스로를 드러내고 힘을 과시했다.

그 배경엔 해방전선이 있다. 이제는 시 정부와 기업조차도 섣불리 건드리기 꺼려질 정도로 거대해진 무장세력이.

그런 해방전선의 지지기반이 일반 시민들. 특히, 하층민과 노동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각성자 비율은 하층민과 노동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말이야."

각성의 키는 고사리다. 이 대도시에서 고사리를 먹는 대상은 하층민이 대부분이다. 싸고 양이 많으니까.

그런 하층민들에게 처음으로 힘이 생겼다. 시 정부와 기업들도 무시 못 할 힘이.

그런데 그 힘에 목줄을 걸고 통제하려 한다. 다시 빼앗아가려고 한다.

가축처럼 살아가며 억눌렸던 본능이 깨어난 지금, 그걸 가만히 납득할 사람이 있을까? 하물며 지금 시 정부는 행정력마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지. 시민들도 더 이상 예전의 시민들이 아니니."

금천교의 난 이후, 시민들의 시민의식은 많이 달라졌다.

거대한 권력의 억압과 통제에 익숙했던 삶에서 자유와 희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허허벌판에서 마천루를 올렸던 하늘강의 기적, 언젠가 이 도시를 향해 뛰어들었던 그 날처럼.

시 정부 또한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저런 개수작을 하는 거겠지."

나는 물끄러미 TV화면을 바라봤다. 속보라더니, 벌써 5분이 넘도록 각성자 등록법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도시의 언론은 시 정부와 기업이 독식하고 있다. 그들의 입맛대로 뉴스를 가공하고 보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연신 떠들어대는 아나운서의 워딩은 의도가 뻔하게 보였다.

[······각성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벌써 1,000여 건이 넘어가는 실정이며, 치안이 닿지 않는 외곽 구역에선 이 시간에도 각성자 범죄로 인한 사망자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통제하지 못할 힘을 가진 어린아이처럼 닥치는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시 정부는 이에 대응해 전담 부처를 설립할 예정이며, 시민들에게도 각고의 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바로 각성자와 시민의 분리다.

각성자가 평범한 시민들, 이웃들이 아니라, 언제라도 범죄자로 변할 수 있는 위험요소로 구분하는 거다.

일견 쓸데없어 보이는 이 과정은, 의외로 시민들의 여론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앞으로 하루 종일, 시간이 멀다 하고 같은 내용을 떠들어 댈 테니 말이지."

인간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아닌 사실이라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떠들게 된다면 어느샌가 그게 진실이 되어 버린다.

내 생각도, 의지도 왜곡된 진실을 따라 흔들린다.

물론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라면 거짓 정보에 현혹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니지. 시 정부도 그걸 노리고 여론 플레이를 하는 걸 테고."

결국, 시민들은 분열된다.

각성자를 옹호하는 자들과 각성자를 배척하는 자들로.

각자 확고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금세 오염된다. 그리고 이내 남는 건 서로를 향한 맹목적인 적대감이다.

정치권과 기업들이 가장 잘하는 게 이거다.

하나된 시민들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지만, 반으로 나뉜 시민들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한쪽만 품에 안으면 되니까. 그럼 지지자란 이름으로 대신 나가서 싸워준다. 이 얼마나 편한가?

"이게 세 번째 시나리오의 주요 내용이지."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해방전쟁」.

무엇에 대한 해방인지는 앞으로 진행될 시나리오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진행될 시나리오를 알고 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어떤 결과를 맞이하며 최종장으로 달려갈지 말이다.

물론 게임과는 다르게 약간의 변수는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세 번째 시나리오는 이전 시나리오와 달리 엔딩의 분기점이다.

내 선택에 따라 엔딩의 내용이. 도시의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된다.

각성자들이 돌연변이로 취급되며 사냥당하는 세계를 맞이할 수도, 전체주의 정부가 들어서며 디스토피아를 맞이할 수도 있다.

어쩌면 도시 자체가 갈가리 찢겨 무수히 많은 스몰시티, 스몰빌리지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수많은 갈림길 중에서 그나마 최선의 엔딩을 선택 해야 한다.

그게 어떤 엔딩일진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해피엔딩이면 좋겠군."

그런데 이 게임에 해피엔딩이 있었던가?

* * *

주문한 라면이 나왔다. 한 젓가락 입에 넣자 그 이름대로 익숙한 맛이 퍼진다.

"이래서 여길 못 끊지."

이 신라면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차라리 봉지라면으로 팔았더라면 쉽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았다.

추억을 맛보는 시간이 끝나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자작하게 어둠이 내린 창문 밖엔 흐드러지는 네온사인 불빛만이 깜빡거렸다.

"오늘따라 한산하군."

메인도로에서 한 블록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유동인구가 꽤 있는 골목길인데 오늘따라 지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피해가 누적되는 가운데, 시 정부는 이번 긴급조치로 각성자 범죄율이 급감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각성자 등록법이 통과되고 정부의 통제와 규제가 잇따르면, 각성자들도 마음 놓고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게······]

TV에선 여전히 각성자 등록법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다.

중간에 몇 번의 광고와 다른 뉴스가 짧게 나왔지만,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와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조잘거렸다.

"어쩌면 저 뉴스에 불안해서 밖을 안 나왔을지도 모르겠군."

TV에서 저렇게 범죄에 대해서 떠들어대니 나가려다가도 멈칫하지 않겠나? 특히나 이런 뒷골목엔 말이다.

나는 작게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은 해방전선을 찾아가 봐야겠다. 저 뉴스의 타겟이 누구인지는 뻔했으니까.

"간 김에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지."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다. 삭막하게 생긴 무표정의 사내가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를 걸치곤 카운터에 기대있었다.

'직원이 달라졌군.'

처음 나를 맞이했던 어설픈 일본어를 하던 직원이 아니다.

나는 여태껏 카운터 직원이 바뀐 걸 본 적이 없다. 그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그가 가게 주인이나 매니저가 아닐까 생각됐다. 안드로이드로 대체해도 되는 일을 굳이 고집했으니까.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스쳤다. 뭐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제6의 감각.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감각을 확장했다. 휘도는 포스가 수면 위에 퍼져나간 파문처럼 뻗어 나간다.

그러자 느껴진다. 가게 밖 골목 어디선가, 일단의 무리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다시 보인다. 나를 제외한 가게 안 손님들이 하나같이 나를 의식하듯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나는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크레딧 카드 대신 허리춤을 움켜잡았다.

스르릉.

은빛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네놈들 어디서 나온 놈들이냐?"

* * *

놀라는 대신 얼굴을 와락 구긴 놈이 버럭 소리쳤다.

"쳐라!"

투타타탕!

둔탁한 총성이 인다. 그건 손님으로 위장했던 놈들이 꺼내든 소총에서 비롯됐다.

한순간에 벌어진 총격으로 실내가 터져나간다.

나는 그대로 칼날을 내밀어 얼굴을 구긴 놈의 주둥이에 쑤셔줬다.

"커, 커헙!"

당황한 놈이 사이버웨어가 장착된 손을 휘둘렀지만, 그대로 잡아챈 뒤 등 뒤로 넘어갔다.

퍼버버벅!

쏟아지는 총격이 놈의 몸에 틀어박혔다. 훌륭한 고기방패다.

놈들은 동료의 몸이 걸레짝이 되어가는데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역시 사람 목숨이나 노리는 놈들답게 동료애는 사치다.

철컥. 철컥.

한 놈, 두 놈, 비어버린 탄창을 교환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화망을 이뤘던 궤적에 빈틈이 생긴다.

나는 고기방패를 걷어차고 놈들을 향해 내달렸다.

조준이 엉망인지, 실내조명이 모조리 터졌다. 실내를 환하게 밝히던 LED 조명이 사라지자, 창밖에 머물렀던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둠 속을 비추는 광원은 창밖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과 깨진 조명 대신 파직거리는 전깃불. 그 와중에 용케 깨지지 않은 가게 전광판뿐이었다.

그리고 좁은 실내와 어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전장이다.

"컥!"

순식간에 짓쳐 든 칼날이 한 놈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희미한 빛에 반사된 은빛 궤적이 유령처럼 스쳐갔다.

투타타탕!

다시 불꽃이 번쩍이며 탄환이 쇄도한다.

나는 갈라낸 놈을 내던지고 옆으로 이동했다. 쇄도하는 탄환이 나를 쫓아왔으나, 내던진 시체를 피하는 놈들도 있기에 화망에 사각이 생겼다.

사각을 타고 다시 한 놈의 목을 날렸다. 뎅겅! 하고 날아간 놈의 얼굴엔 이해 못 할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은 건지.

물론 앞으로도 이해 못 하겠지만.

푸슈슈슉!

잘린 목으로 피분수가 뿜어졌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쫓아온 탄환궤적이 목 없는 시체를 두드렸다. 가죽 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깃덩이로 변한 시체가 쓰러졌다.

나는 쓰러지는 시체와 함께 몸을 숙였다가, 그대로 낮게 지면을 스치며 날아갔다.

"어, 어디 갔어?"

"죽었나?"

한순간 나를 놓친 놈들이 총격을 멈추고 중얼거리는 찰나.

서걱.

칼날은 또 한 놈의 목을 날렸다.

"여, 여깄다! 아직 살아있어!"

"뒈져어! 괴물 새끼야!"

투타타타탕!

잠시 어둠에 빠졌던 실내가 다시 총구의 불꽃으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이젠 의미가 없었다.

처음 그들이 자리 잡았던 대형은 무너진 지 오래고, 충만했던 자신감도 바닥에 꺾인 지 오래다.

서걱.

쇄도하는 탄환 속을 질주하며 그대로 정면에 있는 한 놈을 통째로 갈랐다.

쩌어억.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양쪽으로 갈라진 시체가 거짓말처럼 바닥에 쓰러진다.

그 모습에 남아있는 놈들이 기겁을 하며 중얼거렸다.

"씨, 씨발! 그냥 칼잡이라며?"

"소드마스터 코스프레라며?"

"지, 진짜 소드마스터 아니야?"

전의가 꺾인 놈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놈들의 총구 역시 바닥으로 꺾였다.

휘익.

나는 칼날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곤 놈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다시 묻지. 네놈들 어디서 온 놈들이냐?"

"다, 다가오지 마!"

"우, 우리도 속았다고! 이렇게 강하다곤 안 했단 말이야!"

멈칫.

나는 다가서던 걸음을 멈췄다.

속았다? 그럼 누군가 보낸 놈이 있다는 건데.

"누가 보냈냐?"

"마, 말하면 살려줄 거냐?"

"혀가 짧군. 살려주기 싫게."

"······마, 말하면 살려주실 겁니까?"

"말하는 거 봐서. 누구야? 나 죽이라고 시킨 놈이."

나는 칼날을 들어 올린 채 놈들을 향해 까딱거렸다. 제대로 대답 안 하면 언제라도 휘두르겠단 경고였다.

칼날이 자신들을 향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던 놈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 놀라실 겁니다. 저희를 찾아왔던 자들의 정체는 사실······"

그 순간.

부아아아앙!

"······!"

창밖에서 벌떼가 날아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 소리는 이전에도 들었던 소음이었다.

바로 머신건이다.

콰콰콰쾅!

붉게 달아오른 탄환들이 실내를 휩쓸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굵기가 두꺼운 탄환들은 소총탄이 만든 흔적을 가볍게 뒤덮어버렸다.

구멍만 송송 뚫려있던 실내는 단숨에 초토화가 됐다. 콘크리트와 내장재가 터져나가고, 철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그런 마당이니 사람은 볼 것도 없었다.

"커!"

"끅!"

실내에 있던 놈들은 제대로 된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한 채 탄환에 쓸렸다.

고기방패가 불가능한 탄환의 위력에 신체 모든 부위가 터져나가며 해체됐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사람의 흔적은 놈들이 걸치고 있던 옷 쪼가리와 맹수가 씹다 뱉은 고깃덩이처럼 생긴 살점밖에 남지 않았다.

폭풍처럼 들이닥쳤던 탄환 세례가 끝나고, 휑하게 뚫린 가게로 누군가 저벅거리며 걸어들어왔다.

몸에 딱 달라붙는 붉은색 전장 슈트에 머리엔 깔맞춤 한 커다란 헬멧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파워레인저나 바이오맨 같은 특촬전대물에서나 보던 디자인이었다.

놈이 양팔에 들고 있던 머신건을 바닥에 던지며 소리쳤다.

"그 대답은 내가 대신해주지, 소드마스터."

1984 (3)

187화. 1984

시커멓던 헬멧의 안면부가 투명해지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극동아시아인의 얼굴이었는데, 그의 시선은 정확히 어둠 너머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큐마 제약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했나, 소드마스터?"

"······뭐야. 네놈들이었나?"

뼈대만 남은 콘크리트 기둥 뒤에서 강현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에 묻은 콘크리트 부스러기와 먼지를 툭툭 털던 그가 귀찮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특촬전대물 오타쿠인 줄 알았더니, 그보다 못한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었네."

삐뚜름한 시선으로 나타난 사내를 바라본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눈빛에도 귀찮음이 가득했다.

자신을 바퀴벌레로 매도한 강현재였지만, 사내는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역시 듣던 대로 죽을 위기 앞에서도 여유가 넘치는군."

"여기 위기가 어딨지? 설마 네놈들이 쏴댔던 장난감 따위를 믿는 건가?"

"큭큭! 장난감이라······."

헬멧 안으로 비친 사내의 얼굴에 기꺼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이 정도 반항은 있어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지.

"······그 장난감에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아주 궁금해졌어."

사내의 말과 함께 휑하게 박살난 창문 너머로 사내와 똑같은 차림의 슈트를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사내까지 총 여덟 명.

어둠 속에서 네온사인의 화려한 빛에 반사된 슈트는 더더욱 특촬전대물 느낌이 물씬 풍겼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라, 소드마스터."

도망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듯 전면을 포위한 그들을 보며 강현재의 입꼬리가 가소롭다는 듯 올라갔다.

"너희야말로 지난번보다 숫자가 모자라는데? 산수를 못하는 건가?"

"큭! 설마 그 불량품들과 우리를 똑같이 여기는 거냐?"

"불량품?"

강현재가 미간을 좁혔다. 그 괴물들이 불량품이라고?

"네놈이 상대한 실험체는 전 세계 각지에 있는 샘플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결과가 모이는 곳이 바로 본사지."

사내가 자신을. 그리고 바깥에 자리를 잡고 선 다른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본사에서 나왔다. 네놈이 상대한 불량품 전부를 합쳐도 나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이제 알겠나, 소드마스터?"

한쪽 입꼬리를 올린 사내가 이죽거리듯 말했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 * *

놈들이 주사제를 꺼냈다. 이전의 투박한 쇠막대기 같던 모양에서 조금 더 앰풀과도 같은 모양이다.

푹.

하지만 가슴에 박아넣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광경까지도 비슷했다.

"크허허헝!"

인간의 목청에서 낸 거라 믿을 수 없는 흉포한 야수의 울음소리.

그와 함께 대기가 요동친다. 폭발하듯 확장된 포스가 놈들을 뒤덮는다.

우극. 우그극!

놈들의 외형이 부풀어 올랐다. 타이트한 슈트 위로 금세 울룩불룩한 근육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과거처럼 스테로이드를 잔뜩 맞은 근육돼지로 변하진 않았다. 그저 신체의 모든 부위가 우람하게 커졌을 뿐이다. 특수제작한 슈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나는 놈들이 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놈의 말이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틀린 부분은 하나 있군."

어둠 속에서 우락부락하게 변하는 놈들 위로 네온사인의 알록달록한 불빛이 떨어져 내린다.

진짜 특촬전대물 변신장면 같다. 물론 주인공이 아니라 괴물의 변신장면이다.

스릉.

손잡이를 고쳐쥔다. 은빛 칼날이 놈들을 향한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네온사인 불빛이 칼날에 반사되길 잠시, 이내 은빛 칼날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어둠 속에서 막 깨어난 도깨비불이 푸른 눈을 떴다.

"크허헝!"

그게 시작이었다.

콰직!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닥을 디딘 콘크리트가 잘게 쪼개지며 날아가고, 그 반탄력이 어마어마한 속도를 부여한다.

공간 속으로 몸이 녹아드는 느낌.

우리는 시간을 촌각으로 나눈 시각 속에서 서로를 향해 살수를 겨눴다.

파파파팟!

푸른빛으로 물든 칼날과 검붉게 물든 칼날이 마주한다.

푸른 칼날은 나고, 검붉은 칼날은 놈들이다. 손목에서 뽑아낸 50cm가량의 뼈로 된 블레이드였다.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놈들이 이전에도 검기를 버텨내긴 했지만, 그건 괴상하게 변형된 촉수였다. 단순히 방어력이 뛰어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명백하게 포스를 칼날에 담아내고 있다. 그것도 내 검기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카카카캉!

전후좌우를 점한 놈들의 열여섯 개의 칼날이 나를 노린다.

좁은 실내에서 벌어진 싸움은 여유를 빼앗았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놈들의 움직임은 호흡을 빼앗았다.

'자신이 있을 만했군.'

놈들 말대로 나를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할 만한 실력이었다.

이 자리에서 서 있는 게 내가 아니었다면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울 시티 최강자 중 한 명인 노리스조차도 버티기 어려울 거다.

칼날이 맞부딪칠 때마다 번쩍거리는 스파크가 어둠을 밝혔다. 그게 촌각이 멀다 하고 부딪쳐대니, 마치 클럽의 사이키 조명마냥 실내를 밝혔다.

그때 놈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나를 몰아쳤던 놈 중 둘이 빠져나갔다. 어차피 실내라서 그 둘이 빠진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물론 내 상황은 변했다.

피융!

'······!'

칼날이 초고속으로 마주치는 그 순간, 이질적인 파공성이 들렸다.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고개를 젖혔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뺨을 스쳐 갔다.

콰드드득!

뒤이어 어딘가에 틀어박히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어디까지 박힌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는 놈이 보였다.

재차 무언가가 쏘아졌다. 쏘아지는 걸 눈으로 먼저 본 뒤에야 소리가 들렸다.

'미친놈들. 자기 뼈를 쏘다니.'

총도 아니고 뭘 쏘나 봤더니, 벌어진 손바닥에서 뼛조각이 쏘아졌다.

하지만 뼛조각이라고 절대 경시할 수 없었다. 놈들이 쏘아낸 뼛조각에서 응축된 포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게 나조차도 간신히 반응했던 속도와 건물 벽을 뚫고 사라진 강력한 위력의 비밀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머지 여섯 놈의 칼질은 여전했다.

목숨을 노리는 열두 개의 칼날. 그리고 틈을 노리며 저격하는 음속의 뼛조각들.

놈들 말대로 아큐마 제약 본사에서 나를 죽이겠다고 보낼 만한 실력이었다.

아마 아큐마 제약 무역지구에 처음부터 이놈들이 있었더라면, 나조차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그때의 나였다면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놈들이 실험체라 부르는 괴물들과 싸우며 인간이었던, 그리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괴물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놈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어떤 변칙적인 공격을 해도 놀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때보다 강해졌지.'

나는 근본적으로 강해졌다.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단계를 넘어섰으니까.'

카카캉!

맞물린 칼날을 쳐내고, 그 틈을 노려 쏘아진 뼛조각을 튕겨낸다.

데에엥――!

막강한 운동에너지와 포스가 담긴 뼛조각이 칼날을 때리며 진한 검명을 울렸다.

놈들은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갑자기 몸을 움츠리더니 한순간에 튕겨내며 쇄도했다.

어느새 50cm였던 뼈 칼날의 길이는 1미터 가까이 길어져 있었다. 그 위로 검붉은 포스가 줄줄 흐르며 끔찍한 살기를 뿜어댔다.

한순간에 쇄도하는 12개의 칼날. 전후좌우 할 것 없이 길어진 칼날이 모든 방위와 사각을 점하며 찔러 들어왔다.

분명 위기라면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그 광경을 한눈에 담으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이 싸움을 끝낼 때다.'

화륵!

내뻗은 칼날 위로 푸른색 불꽃이 거세게 타오른다.

어둠을 집어삼키던 불티가 점점 진한 색으로 변하더니, 불꽃의 바깥에서부터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검강(劍罡).

별의 이해를 담은 불가해의 힘이 지상에 강림했다.

――――――!

그 순간 세상이 멎었다. 긴박하게 진행되던 액션영화가 정지버튼을 누른 듯 멈춰섰다.

멈춰진 세상은 무채색에 가까웠다. 화려하게 반짝이던 네온사인 불빛들도, 놈들의 뼈 블레이드 위로 덧씌워진 검붉은 빛도, 모조리 색을 잃었다.

그 무채색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보랏빛 불꽃만이 타올랐다.

그 빛은 너무나 찬란했다. 무채색 어둠으로 뒤덮인 세상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제로의 영역」 3단계 레벨.

공간 절단. 「자하(紫霞)의 자락」.

사르륵―――!

한순간 폭발하듯 뿜어진 보랏빛 불꽃이 주변을 휩쓸었다. 운무처럼 밀려드는 불티가 모든 걸 집어삼켰다.

그건 보랏빛 노을(紫霞)이었다. 무한의 우주에 펼쳐진 성운(星雲)이었다.

아득한 별무리는 불가해의 불꽃이 되어 모든 걸 불살랐다.

찢겨나간 철제 테이블과 의자, 바스라진 콘크리트 파편, 그리고 아큐마 제약의 괴물들까지도.

타닥. 타닥.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불씨가 잔불을 태우며 반짝인다.

"끄, 끄으윽······"

간신히 전신 소멸은 면한 놈들 중 하나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놈은 흉측하게 녹아버린 헬멧과 상체의 일부만 남아서 꿈틀거렸다.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이 자리에서 죽는 건 너희라고."

바르르 몸을 떨던 놈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 소드마스터······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큐마가 널 지켜볼 거다······."

"그래. 또 와라.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

거칠게 숨을 내쉬던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더 놈을 내려다보다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깨끗하게 폐허로 변해버린 가게를 바라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라면은 못 먹겠군."

* * *

각성자 등록법이 제정됐지만, 실제 등록을 하는 각성자는 손에 꼽았다.

누가 봐도 의도가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지금, 시 정부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시 정부 역시 이를 예상했다.

물론 이유는 달랐다. 시민들의 불신을 이유라 생각하지 않고, 우매하고 간사한 시민들이라면 절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거라 여긴 거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몇 가지 계획을 준비했다. 우매하고 간사한 대중들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아주 좋은 방법을.

[각성자들이 단체를 이뤄 각성자 등록을 거부하면서 치안에 문제가······]

[각성자 등록을 거부한 범죄자들이 날마다 기승을······]

[각성자 범죄자들이 속속들이 무장세력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시 정부는 이를 우려의 시선으로······]

[각성자 범죄가 나날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를 방지할 각성자 등록율은 바닥을······]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각성자들이 등록을 거부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또한, 등록을 하지 않은 각성자들이 무장세력에 합류하고 있고, 다수가 각성자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얼핏 들으면 각성자들이 합류한 무장세력이 각성자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고도 들릴 내용이었다.

당연히 처음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30, 40번대 구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이곳의 치안이 그나마 유지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나마 유지되는 거지, 예전과는 같지 않았다. 특히, 대로변 이면의 골목상권은 범죄에 몸살을 앓았다. 제아무리 자경단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어서 빨리 해방전선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 정부의 기대와는 반대로, 시 정부를 믿느니 가까이 있는 해방전선을 믿겠다는 선택을 한 거다.

그런데 그때, 각성자 사냥꾼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사이보그와도 같은 기갑 슈트에 최첨단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한 자들이.

이때부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우, 우린 범죄자가 아니라고!"

막다른 골목길을 마주한 피투성이 사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어찌나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엔진 소리마냥 거칠게 들렸다.

"닥쳐! 이 돌연변이 새끼야!"

그런 피투성이 사내를 둘러싼 무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묵직한 기갑 슈트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골목길에 울렸다.

"씨, 씨발! 나는 아무 잘못 없어!"

콰앙!

사내가 손을 내뻗자, 미증유의 힘이 공간을 점유하며 쏟아졌다.

쩌저적!

그 궤적을 따라 땅바닥이 쩌저적하고 갈라졌고, 기갑 슈트 역시 걸어오던 발걸음이 튕겨 나갈 정도로 뒤로 밀려났다.

"이 범죄자 새끼!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그럼 가만히 네놈들 손에 죽으라는 거······ 컥!"

피투성이 사내가 발끈하며 소리치는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기갑 슈트가 사내의 목을 움켜쥐었다.

"아론 메이슨. 살상 목적으로 각성 능력을 사용했지? 넌 즉결 처분이다."

"끄, 끄윽! 니, 니들이 뭔데!"

"우리?"

피식 웃은 기갑 슈트의 안면부 바이저가 내려갔다. 얼굴을 확인한 피투성이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너, 너는! 네가 어떻게 나한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다. 심지어 서로 아는 사이임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게 누가 그렇게 나대래?"

두둑!

피투성이 사내의 목이 꺾였다. 찢어질 듯 커진 눈은 죽는 순간에도 감기지 않았다.

그때 다른 기갑 슈트를 입은 자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다음 구역은 어디야?"

"44구역. 거긴 네 구역이지?"

"크흐흐! 드디어 우리 구역 차례가 왔구만! 다들 기대하라고! 내가 알아놓은 놈들만 열이 넘으니까!"

"오? 이번엔 손맛 좀 보는 건가?"

기갑 슈트를 입은 자들이 낄낄거리며 골목에서 사라졌다.

막다른 골목길.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엔 목이 꺾인 시체 한 구만이 남아있었다.

1984 (4)

188화. 1984

[SOUL CITY IS WATCHING YOU]

"허억······ 허억······!"

한 사내가 낙서 된 벽을 지나 달려간다.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을 내달린다. 드문드문 설치된 가로등을 지날 때마다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여긴 어딜까? 어디쯤 온 거지? 놈들은? 아직도 쫓아오나?

사내는 당장에라도 뒤돌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 잠깐의 욕심으로 발걸음이 느려지게 되고, 그 순간 자신을 쫓는 놈들에게 잡히게 될까 봐.

무엇보다 뒤를 돌았는데, 놈들의 모습이 보인다면 절망스러울 것만 같았다.

그건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른 그가 그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과 같기에.

'대체······ 대체 왜 이런 꼴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삼킨다. 그의 머릿속으로 지난 기억이 스쳐 갔다.

「큰돈을 벌어보고 싶지 않나?」

「누, 누구요?」

「그게 중요한가? 각성자라 들었다. 언제까지 비렁뱅이로 살 텐가? 능력이 있으면 걸맞게 써야지」

기억 속에서 사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일용직을 전전하며 하층민으로 살아왔던 그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큰돈! 그리고 각성자!

사내는 언젠가 이런 기회가 찾아오리라 내심 기대했었다.

더 이상 비렁뱅이처럼 살지 않아도 되고, 큰돈을 벌어 떵떵거릴 수 있는 기회.

그건 막연한 꿈도, 망상도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말했듯, 사내는 각성자였으니까.

'나는 더 이상 비렁뱅이가 아니다! 무려 각성자라고!'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런 내심을 정확하게 자극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각성자인 네게는 어쩌면 굉장히 쉬운 일이지. 어때? 해볼 텐가?」

「내, 내가 뭘 하면 됩니까?」

"허억······ 허억······!"

찢어질 듯한 호흡의 격통에 기억이 끊겼다.

하지만 더 떠올릴 것도 없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으니까.

'빌어먹을! 그때 그 의뢰를 받지 말걸 그랬어!'

큰돈이 눈이 멀었던가? 아니면 평소에 귀를 닫고 살았던 탓일까?

사내는 목소리의 유혹을 따랐고, 며칠은 행복했다. 수중엔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돈이 담긴 크레딧 카드가 있었다. 이 돈이면 더 이상 비렁뱅이처럼 싸구려 모텔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한 번 저지르는 게 어려웠지, 두 번, 세 번은 쉬웠다. 고급아파트에서 섹스돌을 양쪽에 끼고 사는 미래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에 닿은 건 거품이었다.

부풀었던 꿈이 터지며 지독한 현실로 사내를 끌어당겼다.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빛이다. 거의 도착했어.'

골목길 미로의 끝. 그곳이 사내의 목적지였다.

40번 구역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와 인터체인지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20차선의 거대한 도로 위로 수백 킬로미터 속도로 질주하는 차량들로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놈들이라도 저기까진 쫓아오지 못하겠지.'

사내의 각성능력은 자기력(Magnetic Forces)이었다. 내달리는 자동차에 달라붙는 건 일도 아니었다.

타타타탁!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술래잡기의 끝이 다가왔다.

이윽고 빛으로 물든 골목길을 빠져나오려는 그 순간.

'탈출하면 다른 도시로 떠야겠······ 어?'

빛으로 물들었던 골목길 끝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늘어졌다. 빛을 등지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건 한 명이 아니었다. 양팔을 두 번 정도 뻗어야 닿는 골목길을 가득 채울 정도의 인원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모습도 아니었다.

우람하기 그지없는 로봇의 형태.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사내를 바라보는 그들은······

"가, 각성자 사냥꾼!"

바로 기갑 슈트를 입은 각성자 사냥꾼들이었다.

달리던 걸음을 멈춰 서고 귀신에 홀린 듯 각성자 사냥꾼들을 바라보던 사내가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았다.

하지만.

"대, 대체 몇 명이나······?"

뒤에서도 그를 쫓던 각성자 사냥꾼들이 골목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 두 명만 됐어도 도망칠 기회를 노려보겠는데, 눈에 보이는 인원만 여섯이다. 이건 방법이 없었다.

쿵. 쿵.

기갑 슈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각성자 에이다 랜커. 벨로드 3가 골드샵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훔쳐서 달아났더군. 그 와중에 목격한 목격자는 살해했고 말이야."

기갑 슈트 사이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숨을 헐떡거리는 사내. 에이다 랜커라 불린 각성자가 버럭 소리쳤다.

"아, 아니야! 죽이지 않았어! 내가 죽인 게 아니라고! 난 보지도 못했단 말이야!"

에이다는 억울했다. 그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살인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건 아니다. 정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목격자를 만났더라면 죽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애초에 쥐도 새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를 자신이 있었기에 골드샵을 털었던 거다. 능력을 사용한다면 가까이 갈 필요도 없었으니까.

"닥쳐라, 이 각성자 범죄자 새끼! 네가 안 죽였으면 그 자리에서 사람이 왜 죽어?"

"아, 아니야! 난 결백해!"

"결백은 범죄자가 아닌 사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거다! 네가 골드샵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다 찍혔는데 발뺌할 생각이냐? 불도 질렀고 물건도 훔쳤겠다, 눈에 뵈는 게 없었겠지. 그래서 목격자를 죽인 거잖아!"

"······!"

에이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분명 모든 감시카메라를 찾아서 망가뜨렸는데, 설마 그 장면이 찍혔을 줄이야!

그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 도시에서 미란다의 원칙이니, 범죄자의 인권이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공권력은 사라지고 각성자 사냥꾼이라는 괴물들이 법을 집행하는 상황. 범죄자인 게 확실해졌으니, 이 자리에서 죽인 후 정당방위라고 주장해도 어쩔 수 없었다.

공포에 질린 에이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난 잘못이 없어! 애초에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골드샵을 턴 것도 누가 시킨 거라고!"

쿵.

다가오던 각성자 사냥꾼들의 발걸음이 멎었다.

기갑 슈트의 바이저 너머로 붉게 반짝이는 안광이 에이다를 향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에이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들의 눈치를 봤다.

당장에 그를 찢어 죽일 것처럼 다가오던 발걸음이 멈췄다.

'토, 통했나?'

그때 가장 앞에 있던 기갑 슈트 하나만 천천히 걸어왔다.

"시켰다? 누가 시킨 거지?"

얼어붙은 에이다의 코앞에 다가온 기갑 슈트가 그를 내려다봤다.

꿀꺽.

마른 침을 힘겹게 삼킨 에이다가 대답했다.

"자, 자세히는 몰라! 그런데 시 정부인 건 확실해!"

"시 정부?"

기갑 슈트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다. 여기서 그걸 듣게 될 줄 몰랐다는 목소리다.

에이다는 자신의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며 거칠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마, 맞아! 분명 시 정부야! 그놈!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공무원이 확실했다고!"

"공무원이라······ 너,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데?"

기갑 슈트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건 뒤쪽에 서 있던 다른 각성자 사냥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렁뱅이라서 뇌에 똥만 들은 줄 알았더니, 생각이라는 것도 할 줄 아네?"

"내가 뭐랬어? 저런 놈들이 눈치는 귀신 같다고 했잖아."

"어떻게 아직까지 객사 안 하고 살아있나 했더니, 그 눈치 덕분이구만? 낄낄낄!"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그들이 농담과도 같은 말을 내뱉으며 낄낄거리자, 에이다는 혼란에 빠졌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끄, 끄으윽······!?"

에이다의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던 기갑 슈트가 그의 목을 틀어쥐며 말했다.

"그게 네가 죽는 이유다."

"무, 뭐, 뭐가······"

"적당히 모른 척도 하고 살아야지."

두둑.

* * *

[······각성자 범죄율이 폭증하는 가운데, 각성자 사냥꾼이라는 자들이 등장해 자경 업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량한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궐기했으며 오로지 각성자만을 상대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시 정부에서는 그들의 등장을 반기며 ······]

나는 TV에서 떠드는 뉴스를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각성자 사냥꾼이라······.'

몰랐던 사실은 아니다. 원래 스토리에도 각성자 사냥꾼들이 등장했다. 애초에 이 게임의 스토리는 사이버펑크 세계에 나타난 각성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

다만, 그 시기가 일렀다.

각성자 사냥꾼들이 등장하는 건, 조금 더 시 정부와 각성자들의 갈등이 격화된 이후다.

그런데 이제 막 각성자 등록법이 시행됐는데 나타나다니.

'그만큼 급했던 거겠지만.'

하긴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시 정부 똥줄이 탈만도 하다. 금천교의 난 때문에 해방전선이 원래 스토리보다 너무 빠르게 커졌다.

이건 나도 예상 못 했던 바다. 금천교 자체가 원래 게임 스토리엔 등장하지 않는 단체다 보니 나도 이렇게 판이 굴러갈지 몰랐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로제가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각성자 사냥꾼. 뭔가 기분 나빠요."

그녀는 불쾌하단 표정으로 TV를 바라봤다.

때마침 자료화면으로 각성자 사냥꾼들이 범죄 현장을 급습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기갑 슈트를 입은 각성자 사냥꾼이 각성자의 기프트를 뚫고 그의 머리통을 날렸다.

"그런가?"

"꼭 각성자 전부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 같잖아요? 모두 다 그런 게 아닌데······"

그러면서 나를 힐끗 바라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치고는 의뢰는 잘도 그런 걸 받아왔군."

"흥. 의뢰는 의뢰니까요. 당신이 자주하는 말이잖아요? 게다가 각성자 사냥꾼이 기분 나쁘더라도 각성자 범죄가 거짓인 것도 아니니까."

로제가 받아온 의뢰는 시 정부 의뢰였다.

각성자 범죄를 일으키는 각성자를 사로잡아달라는 것.

'해방전선 단장 암살의뢰를 실패한 게 며칠이나 됐다고 이런 의뢰를 넣다니······ 의도가 뻔히 보이는군.'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코끝으로 달큼한 홍차향이 풍겨왔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의뢰는 거절한다."

"거절이요? 왜요?"

로제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류 의뢰를 거절할 줄은 몰랐던 거다. 하긴, 그랬으니 애초에 이 의뢰를 냉큼 들고 왔겠지만.

"시 정부 놈들 꿍꿍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꿍꿍이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턱짓으로 TV를 가리켰다.

"각성자 사냥꾼을 저렇게 홍보해주면서, 각성자를 대표하는 나한테 각성자 범죄자를 사로잡는 의뢰를 넣는다? 의도가 불순하잖아."

"······의도가 불순?"

이해를 못 한 듯 검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로제가 '음······'하며 콧소리 섞인 숨을 내쉬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시 정부에서 각성자 사냥꾼에 힘을 실어주려는 건가요? 소드마스터의 명성을 빌려서?"

"그래. 놈들 광고판이 될 순 없지."

이게 내가 시 정부 의뢰를 받지 않는 첫 번째 이유다.

"게다가 놈들이 가져가는 게 하나 더 있어."

"그게 뭔데요?"

"내가 시 정부 편이라는 이미지."

"아······?"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알겠지만, 반으로 나뉘기 시작한 여론에 한쪽 편을 들게 되면 반대편은 자연스레 적이 된다. 이게 평범한 논쟁거리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그 말꼬리를 바로 잡아챈 로제가 대답했다.

"······적이 된다는 반대편이 각성자인 게 문제로군요."

즉, 각성자의 대표격인 소드마스터가 각성자의 적이 된다. 이거야말로 시 정부가 이 의뢰 뒤에 숨기고 있던 노림수였다.

이게 내가 의뢰를 받지 않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지. 나는 누구 편도 아니지만, 지금은 더더욱 한쪽 편으론 분류되어선 안 돼."

"왜요? 둘 다 싫어해서?"

로제가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줄 알겠군."

"······?"

'그럼 아닌가요?' 라고 써놓은 얼굴로 로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말없이 얼굴을 구겼다.

* * *

딸랑딸랑.

로세툼을 나섰다.

로제에게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내가 중립을 지키려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더 나은 엔딩을 위해서.'

이번 메인 시나리오는 매우 중요했다. 여기서 하는 선택은 하나, 하나가 모두 엔딩의 분기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기준이 될만한 사건이 진행조차 되지 않았다. 금천교 등장 이후 시나리오 시간선이 꼬여버린 탓이다.

즉, 지금은 꼬여버린 시간선이 다시 풀리며 흩어졌던 사건들이 다시 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주인공인 소드마스터 강현재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면?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부캐를 꺼내야 할 때가 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