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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 *

금천교의 난이 끝나고 도시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도로엔 공사 차량과 건설 로봇들로 가득했고, 비어있던 상가들도 활기를 띠며 장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출근길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멈췄던 거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소한 겉으론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간 것과 애써 돌아간 일상이 안정된 건 전혀 다른 이야기.

정부소속 안드로이드 대부분이 폐기됐다. 안 그래도 유명무실했던 치안력은 공백에 가까워졌고, 도시는 1년 전 기적의 서광 직후처럼 또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나타난 게 「각성자」들이다.

여태껏 자기가 각성자인 걸 숨겼거나, 혹은 스스로도 각성을 했다는 걸 몰랐던 사람들이 금천교의 난을 겪으면서 진정한 각성자로 거듭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각성자인 걸 더는 감추지 않았다. 숨지도 않았다.

그 혼란을 겪고 나니 시 정부를 믿을 수 없었다. 이미 30번대 구역까지 버림으로써 공권력은 언제라도 시민들을 버릴 준비가 됐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더 이상 외부에서 찾지 않았다. 공권력이 지켜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도시 전역에 스스로를 당당히 각성자라 말하며 나타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놀랐다.

여태까지 옆집 바보형, 단골집 요리사, 편의점 알바생, 밥 잘 사주는 누나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신비한 힘을 가진 각성자로 나타났으니까.

바야흐로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

『각성자의 시대』가 시작됐다.

* * *

겨울의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온다. 소울 시티를 가로지르는 하늘강이 얼어붙을 정도로 한파가 몰아쳤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턱을 덜덜 떨며 옷깃을 여몄다.

하지만 같은 시각, 하늘강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작은 섬에선 분홍색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가족들이 꽃구경을 하며 지나갔고, 한쪽엔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계절을 역행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거대한 유리 벽 하나를 사이로 두고, 바깥엔 눈보라가, 안쪽엔 꽃바람이 불었으니까.

이곳이 바로 넘버링 제로.

소울 시티의 하늘 밖의 하늘로 불리는, 하늘섬 여의(如意)다.

그리고 그 여의에서도 가장 은밀한 어느 공간에서 비밀스러운 모임이 열렸다.

시 정부 최고 회의. 각기 다른 분야의 5명의 최고 의원이 도시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하나가 가니, 다른 하나가 튀어나오는군."

희끗한 백발의 노년 신사가 골치 아파 죽겠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희끗한 백발과는 다르게 피부는 마치 젊은 청년과 같아서, 얼핏 보면 인지 부조화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놈들 이야기입니까? 각성자들?"

원탁에 앉은 다른 의원이 물었다. 커다란 외눈 안경에 흰 가운을 입은 사내였는데, 딱 봐도 먹물께나 먹었을 연구자 타입이었다.

"맞소. 건방지게 시 정부 지시도 무시하면서 멋대로 힘을 남용하는 놈들이지. 그놈들이 난데없이 끼어든 덕분에 재개발 사업에 차질이 생겼소."

노년 신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 정부에선 이번 금천교 쿠데타로 인한 소요사태를 빌미로 대규모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이미 40번대 구역의 인프라 대부분이 망가진 상황. 조금만 강경하게 밀어붙인다면 제아무리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원주민이라도 별수 없이 보상금을 택하고 떠날 거다. 왜냐?

"전기와 수도도 끊고, 물류도 모조리 차단했는데 무슨 수로 끼어들었단 말입니까?"

이 문명사회에서 전기와 수도, 물류까지 끊겨버리고선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건 분명 놀라운 발언이었다.

40번대 구역 인프라를 망가뜨린 건 금천교가 아니라 이들이라는 뜻이었으니. 그 누구도 아닌 시 정부 최고 의원인 이들 말이다.

"그 각성자 놈들이 해방전선에 들어갔소."

"해방전선?"

외눈 안경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굵직한 인상의 짧은 머리카락. 탄탄한 몸에서 느껴지는 육중한 체구.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 위론 마치 훈장처럼 상처들이 남아있었다.

"그 소울프리즌을 습격했던 반역자들 말입니까?"

"그렇소."

"그럼 두고 볼 게 있습니까? 그냥 함께 쓸어버리지요!"

사내가 본인 인상만큼이나 과격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미간을 찌푸린 노년 신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끄응! 그쪽 시민들 여론이 해방전선에 호의적이오."

각성자의 시대 (2)

167화. 각성자의 시대

비어버린 힘의 공백을 가장 잘 이용한 건 다름 아닌 해방전선이었다.

금천교 수뇌부가 일시에 무너지며 흩어졌다지만, 그 사상이 널리 알려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 시민들이 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기도 했고.

그런 와중에 해방전선이라는 반정부 세력의 움직임은 매력적이었다.

특히나 무법지대나 다름없어진 40번대 구역에서 자경대를 운용해 자발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이것만으로도 40번대 시민들에겐 매력적인데, 심지어 그 자경대에 꼭 각성자들이 한둘씩 끼어있었다.

각성자 범죄 때문이다.

시 정부에서도 손 놓고 있는 각성자 범죄까지 해방전선에서 처리하자 해방전선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커졌다.

"그 말씀은······?"

"그렇소. 자칫 두 번째 쿠데타가 곧바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그런!"

"허어!"

"심각하군!"

최고 의원들 입에서 저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연속된 쿠데타는 도시에 치명적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시 정부라도 그 근간인 도시가 흔들린다면 언제 모래성처럼 무너질지 몰랐다.

심지어 지금은 모든 안드로이드를 폐기처분 해서 SCPD나 방위군도 인력이 부족한 상태.

치안이 부족한 상태에서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도시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주가는 곤두박질칠 테고, 전 세계 투기자본들은 소울 시티의 알맹이만 쏙 빼먹고 나가겠지.

물론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도시가 어떻게 되든 자기들 주머니만 챙기면 됐으니.

"······그럼 어찌합니까? 재개발이 밀리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요."

"허어······ 그런!"

"크흠! 그건 안되지."

"방법을 찾아야······"

문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의원들이 이번 재개발에 전 재산은 물론이고, 숨겨놓은 비자금까지 몰빵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뒷돈을 받고 온갖 기업과 자산가들까지 끼워줬다.

만약 사업이 엎어지거나 무기한 연기가 된다면 단순히 의원들뿐만 아니라, 뒷돈을 댔던 사람들까지 곤란해진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들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인간의 목숨조차 돈으로 거래되는 세계. 손해를 끼친 대상에게 어떤 보복을 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크흠······."

"허어······."

하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방위귄을 동원해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시민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빌미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

다들 복잡한 얼굴로 각자의 고민을 떠올리던 그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여태껏 조용히 듣기만 했던 인물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의원들 중 그나마 가장 젊은 중년 사내였는데, 실내임에도 불편할 정도로 커다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노년 신사의 물음에 중년 사내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금천교를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던 해결사 말입니다. 듣자 하니 셀리케에서도 인정한 마스터급 해결사라지요? 그자를 이용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그래. 그런 놈이 있었지. 그런데 해결사 하나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오?"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좌중의 시선이 중년 사내에게 쏠렸다.

"해결사가 뭡니까? 말 잘 듣는 칼 아닙니까?"

"······그래서?"

"······."

좌중을 둘러본 중년 사내가 싸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은 용도에 맞게 써야죠. 인간 백정이면 인간 백정답게요."

* * *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나는 시 정부에서 왔다는 의뢰 내용을 들으며 같잖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뻔히 속이 보이는 의뢰였다.

하지만 내 표정과는 반대로 로제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걱정이 잔뜩 실린 목소리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불안함이 가득하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필 정부공인 해결사가 된 이후 내려온 첫 번째 의뢰가 시 정부에서,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의뢰했으니까.

"글쎄. 어떻게 해야 하려나. 기한이 언제까지래?"

시 정부가 내게 넣은 의뢰는 [해방전선의 와해]였다.

당연히 턱도 없는 의뢰기에 거절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해결사 혼자서 무슨 수로 해방전선이라는 세력을 와해시키나?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아래 달린 옵션이었다.

[의뢰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시, 해방전선의 리더 및 간부진 암살]

아마 이게 시 정부의 본래 목적일 거다.

의뢰 내역을 '해방전선 와해'로 넣은 건, 혹여나 정보가 새어나가더라도 한번 걸러줄 수 있는 연막인 셈이다.

일개 해결사에게 해방전선 와해 의뢰를 넣었다는 정보만 새나간다면 다들 비웃고 말 테니.

"딱히 기한을 정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데드라인까지 있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긴 하나 보군. 높으신 양반들이라 터무니없는 요구만 할 줄 알았더니."

내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로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설마 받을 거예요?"

"과연 소드마스터의 독점중개인답군. 눈치가 제법이야."

"시, 시끄러워요! 진짜 이 일을 받으려고요?"

"왜?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이번 의뢰는 평범한 의뢰가 아니라고요! 시 정부에서 들어온 거만 아니었으면 제가 걸러냈을 정도로 뒤가 구린 의뢰란 말이에요!"

로제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눈빛을 보아하니······ 여기까지 해야 할 듯하다.

"알아알아.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애초에 대단하신 양반들이 이런 암살의뢰를 넣는 게 정상과는 거리가 멀잖아?"

"그런데 왜······?"

"왜 의뢰를 받으려고 하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로제를 바라보며 나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그래야 시 정부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

* * *

로제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로세툼을 나섰다.

의뢰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로제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지만,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내가 시 정부의 꿍꿍이를 의심하고 있고, 무언가 원하는 목적이 있다고 말했으니까.

그렇게 바이크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가던 중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총성이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길 건너 상점이었다. 갓길에 화물트럭을 세워놓은 갱들이 상점을 향해 총을 갈겨대고 있었다.

"끼얏호!"

"크헤헤헤! 죽어라! 죽어!"

"뭘 꼬나봐! 뒈지기 싫으면 꺼져!"

갱들은 주변을 향해서도 서슴없이 총구를 들이밀었다. 행인들이 기겁을 하며 길거리에서 멀어졌다.

갱들이 총질을 하는 상점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됐다. 상점에 배치된 보안시스템은 폭탄에 허물어졌고, 주인과 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들만이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 강도네."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옆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불구경이라도 하듯 팔짱을 낀 채 상점이 털리는 걸 지켜보고 있다.

"신고를 해도 누가 온다고? 요즘은 전화 연결도 잘 안 되던데."

"하긴. 그 난리통에 경찰서도 털렸다지?"

"저놈들이 한탕하고 떠나면 뭣 좀 주워올까?"

"오? 그럴까? 요즘 생필품값도 많이 올랐는데 다행이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갱들이 떠나면 주워가겠다니. 말이 주워간다는 거지, 훔치는 거랑 뭐가 다른데?

그런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구경꾼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을 빛내는 걸 보니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는 사이, 펼쳐놓은 기감에 무언가 걸렸다.

'······? 이 기운은?'

고개를 들어 올리기 무섭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앙!

갱들이 엄폐용으로 사용하던 화물트럭이 단번에 찌그러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바퀴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난데없는 광경에 총성이 잠시 멎었다.

"이, 이, 이게 무슨······?"

충격으로 비틀거리던 갱 중 하나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닥에 넘어졌던 갱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때 찌그러진 화물트럭 위로 누군가 올라왔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며 화물트럭을 박살낸 인물임이 분명했다.

'······어?'

나는 미간을 좁혔다.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실루엣은 딱 봐도 작은 체구였다. 제아무리 하늘에서 떨어졌다 해도 화물트럭을 저렇게 만들 정도면 최소 백 단위 무게는 되어야 할 텐데······ 내가 뭘 잘 못 보고 있는 건가?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흙먼지를 걷어간다.

그러자 선명하게 보인다.

광택이 나는 전신 타이즈 위에 걸친 헐렁한 무스탕. 그럼에도 숨기지 못한 작다 못해 가녀린 체구. 노랗게 물들인 머리는 양 갈래로 묶었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입가를 가린 홀로그램 마스크는 형형색색 형광색으로 반짝거렸다.

"이 쓰레기만도 못한 개새끼들! 당장 무기 버리고 대가리 박아!"

기계음이 섞인 변조된 목소리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여리고 앳된 음성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갱들이 버럭 소리쳤다.

"이런 미친년이!"

"뭐해? 죽여!"

투타타탕!

순식간에 날아드는 탄환들.

그대로 사방에서 쏟아진 총알에 벌집이 되나 싶었는데.

"이, 이게 뭐야?"

"허, 허어억······!"

갱들이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쏘아내던 탄환들이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멈춰섰으니까. 게다가 총도 고장이 났는지 덜컥거리며 쏴지지도 않았다.

이윽고 후두둑!하며 공중에 멈춰섰던 탄환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니들이 자초한 거야. 못된 짓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쓰레기는 쓰레기답게!"

그 순간, 백여 미터 떨어진 나조차 흠칫할 정도의 강력한 포스파동이 뿜어졌다.

"분리수거 빔!"

"끄, 끄아악!"

"사, 살려줘어어!"

갱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갱들의 팔,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려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말도 안 되게 강력한 염력이다.'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만났던 각성자 중에서도 단연코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능력이었다.

"여러분! 모두 안심하세요! 강도는 캔디가 처리했어요! 내 이름은 캔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시민 여러분들만을 생각하는 히어······"

그때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바이크를 타고 달려왔다. 도로를 질주하는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을 확인한 스스로를 캔디라고 소개했던 염력소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씨발. 왜 이렇게 빨리 왔대?"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입모양을 보고 간신히 알아냈을 정도였다.

'하는 짓과 다르게 입이 건데?'

하지만 언제 그랬는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럼 안녕! 다음에 또 봐요! 캔디 스타그램에 좋아요! 댓글! 많이 남겨주세요!"

그리곤 처음 등장했던 것처럼이나 극적으로 하늘 위로 날아갔다.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박수를 쳤다.

"오오! 저 소녀가 캔디였군!"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생각보다 귀여운데?"

"캔디 스타그램 주소 아는 사람?"

뒤이어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던 인물들이 도착했다.

또 다른 갱들이 아닌가 싶었는데, 바이크에서 내린 사내들이 안심하라는 듯 소리쳤다.

"모두 안심하세요! 해방전선 자경단입니다!"

각성자의 시대 (3)

168화. 각성자의 시대

내 주변에 있던 예비범죄자들이 아쉽다는 말을 남기곤 떠났다. 떠나는 와중에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상점을 살펴보며 사라졌다.

상점 주인은 고맙다는 얼굴로 연신 해방전선 자경단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점이 털리는 동안 무서워서 보안잠금을 잠가놨던 옆 상점의 주인들도 문을 열고 나와서 자경단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기 바빴다.

손에는 다들 각자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이나 식료품 따위가 들려 있었다. 해방전선이 시민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SCPD보다 해방전선을 더 반겼던 이유기도 했다.

거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갱들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들도 해방전선 자경단원들을 보고 믿음직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똑같은 사건에 SCPD가 왔더라면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거다. 시민들은 어떻게든 SCPD와 얽히는 걸 싫어했으니까.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됐다는 게 새삼 놀랍군.'

눈으로 보듯, 이미 시민들은 SCPD보다 해방전선을 더 믿고 있었다.

그것도 천천히 스며든 게 아니라 겨우 며칠 만에.

'그동안 시 정부와 SCPD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걸 테지.'

과거를 만족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불만족스러운 와중에 시 정부가 30번대 구역까지 버린 게 확실시되면서 시민들의 마음이 움직인 거니까.

게다가 해방전선의 기치가 무엇이던가? 시 정부의 폭압과 기업의 착취에 맞서 싸우고, 시민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자는 게 아니던가?

지금의 도시 상황과 너무나 맞아떨어지는 그 외침에 시민들이 호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게 시 정부가 내게 의뢰를 넣은 이유겠지.'

금천교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시민들의 가슴속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언제 들불처럼 타오를지 모른다는 거다.

그런 와중에 해방전선이라는 혁명세력이 커지니 당연히 경계할 수밖에.

'아마 마음 같아선 방위군을 동원해서 치고 싶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겠지.'

해방전선이 양지로 모습을 드러낸 지금이 시 정부로선 기회였다. 여태껏 숨어있던 지하조직을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기회.

하지만 지금 시 정부는 또 다른 반란세력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시민들이 반란세력과 호응한다면, 설령 해방전선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무수히 많은 반란세력들이 제2의 해방전선, 제2의 금천교를 표방하며 나올 거다.

그럼 도시가 찢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어쩌면 그 많은 반란세력 중에 하나는 진짜 성공할지도 모르지.

'도시가 찢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해방전선을 찢으려 한다라······. 재밌는 생각이야.'

시 정부가 내게 원한 것은 해방전선 간부진과 리더의 암살이다.

한순간에 리더와 간부진이 사라진다면 해방전선 같은 게릴라조직 특성상 조직 자체가 흩어질 가능성이 컸다.

'설령 조직이 유지되더라도 차기 권력을 쥐기 위한 암투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더더욱 좋을 테고.'

그럼 해방전선도 한낱 무장 반란세력에 불과하게 된다. 열화와 같은 시민들의 지지도 사그라들겠지.

지금의 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암살이 성공한다면 말이야.'

시 정부에겐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나는 의뢰를 실행할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원래 스토리보다 해방전선의 영향력이 빠르게 커진 게 변수긴 하지만, 지금의 해방전선은 도시에 꼭 필요한 존재다.'

당장에 시 정부를 대신해 치안을 유지하는 것부터 그랬고, 무엇보다 해방전선은 앞으로 이어질 시나리오들에서 도시를 수호하는 세력에 가깝다.

시 정부도, 기업들도, 자기 밥그릇만 멀쩡하면 절대 엉덩이를 움직이지 않는 놈들이니까.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가장 큰 적은 물론 같은 인간이지. 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게 인간의 탐욕이 불러올 재앙들이다.'

그리고 그게 앞으로 이어질 시나리오들이었다.

* * *

무언가 비틀어진 이 세계엔 인간을 맹목적으로 적대하는 것들이 존재했다.

도시 밖 오염체라든가, 각성종, 그리고 로보 테크니카에서 목격했던 기계 생명체와 같은 미지의 존재들이.

물론 내가 영웅 놀이나 하자고 이런 선택을 내린 건 아니었다.

'내 목표에 닿으려면 결국 도시가 멀쩡해야 한다. 무너지고 붕괴된 도시 위에 군림해봤자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

소피아는 내게 도시에서 살아남으라고 했다. 그럼 언젠가 자연스럽게 진실을 마주할 방법을 깨닫게 될 거라고.

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시나리오들은 철저하게 도시를 파괴시킬 악의로 가득 차 있다. 한순간에 도시를 초토화시키거나, 도시 시스템을 붕괴시킬 내용들로.

'심지어 이번 금천교의 난처럼 시나리오에 없는 내용으로도 도시를 망가뜨리려 했지.'

이쯤 되면 소울 시티가 저주받은 도시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지만, 애초에 이 세계의 배경이 게임이었다는 걸 떠올려보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에서 1코인 목숨으로 살아남아야 하고 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지랄 같은 밸런스였다.

'너무 먼일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은 시 정부 의뢰를 빌미로 뜯어낼 물건을 찾는 일인데.'

나는 시 정부 의뢰를 듣는 순간, 바로 한가지 물건을 떠올렸다.

『신의 물방울』.

핵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최고급 와인. 당연하게도 그 숫자가 명확히 제한적이기에 가격은 끝없이 높아졌고, 지금은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물건이 돼버렸다.

'내가 알기론 신의 물방울 한 병이 정부청사 박물관에 있다.'

어찌나 희귀한 물건인지, 그 대단한 양반들이 있는 시 정부에서도 박물관에 넣고 전시를 할 정도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시 정부를 설득해 신의 물방울을 받아내는 일인데······.

'이건 남궁민수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군.'

내가 암살을 의뢰를 받았고, 그걸 실행할 생각이 없다고 알려준다면 남궁민수도 협조하지 않을까?

진짜 내 칼을 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흐음. 왠지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로군.'

그때 워치가 작게 진동했다.

-마스터. 유혜리 씨로부터 연락입니다.

"유혜리? 그 여자가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곤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곧바로 들려온 유혜리의 목소리.

-소드마스터. 별일 없으면 지금 연구소로 와줬으면 좋겠는데. 아니지. 별일 있어도 와줬으면 좋겠어.

"별일은 없는데······ 급한 일인가?"

-빠를수록 좋은 일이야. 로보 테크니카 일이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지."

* * *

하늘강을 따라 노을 진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나 셀리케 연구소에 도착했다.

기다렸다는 듯 유혜리의 사무실로 안내된 나는 오랜만에 보는 유혜리의 진지한 얼굴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방위군에선 그냥 철수한 모양이야. 혹시 몰라서 화물창고 데이터 디스크도 모두 챙겼다는데, 아직까지 별말 없는 걸 보면 거기도 헛다리 짚은 거지."

유혜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대로라면 로보 테크니카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데······.

"······그럴 리가? 그 공간을 못 찾았다고?"

내가 발견했던 그 공간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공간이었다.

오래된 도서관 책장처럼 잔뜩 쌓인 서버용 컴퓨터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던 데이터 케이블과 전선.

무엇보다 황소보다 거대했던 기괴한 알 모양 생명체.

그걸 발견하지 못했다고?

"제대로 찾은 건 맞나? 내가 말했듯 그곳은 홀로그램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눈으론 식별할 수 없었을 거야."

단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홀로그램 위장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가정이다.

"제대로 뒤졌어. 네가 말한 정보를 토대로 홀로그램 탐지장비도 챙겨갔고. 무엇보다 화물창고의 모든 기계장비의 작동을 멈추고 찾은 거라 그냥 지나쳤을 리는 없어."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건가?"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묻자, 유혜리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금천교를 홀로 분쇄한 소드마스터의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어?"

"그럼 뭔데?"

"우리는 네가 화물창고를 탈출했던 그 시점부터 장소를 옮기지 않았을까 추측중이야. 그래서 그날부터의 위성영상을 추적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재밌는 걸 발견했어."

나를 바라보는 유혜리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화물창고를 오가는 트럭 중 일부가 거래처에 물건을 하역하지도 않고 도시만 한 바퀴 돈 다음에 어디론가 사라졌거든."

"사라져? 어디로?"

"아쉽게도 그걸 알아내지 못했어. 처음부터 위성추적을 했다면 몰라도 이미 찍혀있는 영상을 토대로 분석만 한 거니까."

결국, 유혜리의 말은 의심 가는 정황은 찾았지만,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려고 유혜리가 나를 부르진 않았을 터.

"······그런데도 나를 불렀다면 이유가 있겠군?"

"역시 소드마스터! 맞아. 어디로 사라졌는진 모르지만, 어디에서 사라졌는진 알거든!"

"······!"

나는 눈을 빛냈다. 그 말은 도착점은 모르지만, 시작점은 안다는 뜻이었다.

"그게 어디지?"

"40번 구역과 41번 구역 사이."

"······흠. 너무 광범위하군."

게다가 40번 구역과 41번 구역이라면 서해항만이 있는 곳이다. 도시의 모든 물류가 집중되는 곳. 하루에도 수만 대의 화물트럭이 오가는 그곳에서 사라진 화물트럭을 찾는 건, 사막에서 떨어진 바늘 찾기였다.

"그럴 줄 알고 의심 가는 지역을 리스트로 만들어놨어. 어때? 찾을 수 있겠어?"

"뭐, 해봐야지. VIP 고객님의 의뢰인데."

마침 떠오르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내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혜리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어머? 자기? 그런 예쁜 말도 할 줄 알아?"

"먹고살려면 해야지."

"헤에~? 그래? 그럼 VIP 고객님의 은밀한 의뢰를 받을 생각도······"

"이만 가야겠군."

나는 엉겨 붙는 유혜리를 떼어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혜리가 깔깔 웃었다.

* * *

40번 구역은 소울 시티의 모든 물류의 시작이자, 종점이었다.

바다 건너 해외에서 온 물건들이 도시에 퍼졌고, 또 반대로 도시에서 생산된 수출품들이 서해항만으로 집중됐다.

덕분에 40번 구역은 40번대 구역답지 않은 고층건물이 즐비했고, 형형색색 빛나는 네온사인과 춤추는 홀로그램으로 거리는 화려하게 반짝였다.

저 멀리 들려오는 무역선의 뱃고동 소리와 도로를 가득 채운 화물트럭, 그리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노동자들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소울 시티의 심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또 한 걸음만 안으로 들어서면, 이 거대한 메가시티의 뒷골목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림자가 진 곳엔 어김없이 갱들이 사이버아이를 번뜩이며 마약을 태우고 있었고, 골목길 곳곳에 부랑자처럼 앉아있는 사람들 역시 퀭한 눈으로 먹잇감을 찾았다.

때때로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을 들을 때면 더더욱.

나 역시 사방에서 달라붙는 끈적한 시선에 작게 혀를 차면서 허름한 건물 앞에 섰다.

오래된 벽돌 건물이었는데, 어째 창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블록 같은 건물이었다. 심지어 출입문처럼 보이는 철문도 옹졸하기 짝이 없게 작았다.

그때 철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행님! 오셨습니까?"

숀이었다.

* * *

건물 내부도 겉모습만큼이나 허름했다. 하지만 나름 깨끗하게 치워서 더럽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음. 깨끗한 게 아니라 너무 뭐가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사무실엔 빈공간이 더 많았다. 책상도 몇 개 있었는데 위가 휑한 걸 보니 직원도 없는 것 같고.

"행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부공인 마스터급 해결사! 캬아! 축하드립니다! 자, 이거 받으십쇼!"

어디서 꺼내왔는지 숀이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고맙다."

나는 커피잔을 받으며 작게 웃었다.

딱히 손님용 테이블은 없었는지, 의자만 질질 끌고 마주 앉은 숀이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티, 티납니까?"

"어. 내가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 않나? 넌 얼굴에 고스란히 다 드러난다니까."

"······행님이 눈썰미가 좋은 겁니다! 제 별명이 한때 '분노의 포커페이스'였는데요!"

"······."

포커페이스가 분노하면 더 이상 포커페이스가 아닐 텐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각성자의 시대 (4)

169화. 각성자의 시대

"요즘 너무 뜸하신 거 아닙니까?"

내 눈치를 살피던 숀이 서운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리는데, 하마터면 주먹이 나갈 뻔했다.

올라가려는 주먹을 간신히 내리고 내가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녀석이 어깨를 축 내리며 말했다.

"형님처럼 잘 나가시는 분은 모르겠지만, 요즘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랐습니다. 인건비도 오르고, 자릿세도 오르고, 그냥 다 올라서 사무소 유지도 간당간당합니다!"

"아, 그래?"

어쩐지 사무실이 너무 휑하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아, 그래? 가 아니고요! 요즘은 밥 먹는 것도 고민하고 먹어야 한다고요! 함께 길거리를 누비던 그때가 너무 그립습니다!"

녀석이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발 일거리 하나만 던져달라는 무언의 표정과 함께.

나도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다가 그냥 피식 웃었다.

이 사무소는 내가 숀에게 뒤처리를 맡기면서 녀석이 만든 업체였다.

하는 일은 내가 다녀간 전장에서 돈 되는 물건을 회수하는 일.

하지만 요즘은 숀이 끼어들만한 일이 없었다. 녀석이 끼어들기엔 스케일이 큰 사건들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돈보단 목숨이 중하지 않겠나?

"자, 받아라."

나는 품에서 크레딧 카드를 꺼냈다. 어느 정도 현금이 담긴 크레딧 카드였다. 안 그래도 녀석에게 이런저런 자잘한 부탁을 해왔던 터라 수고비를 주려고 챙겨온 거다.

"이, 이게 뭡니까?"

크레딧 카드를 받아든 숀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끝과 눈동자가 떨리는 게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지만, 그거야 항상 보아왔던 광경이었다. 본인 입으로 '분노의 포커페이스'라지 않았나?

"사무소 유지도 간당간당한다며? 그거면 당분간 문제없을 거다."

"해, 행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행여나 빼앗길까 어느새 주머니 속으로 카드를 집어넣은 녀석이 테이블에 고개를 박을 듯 숙였다. 물론 영악한 놈이라 박진 않았다.

나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야 할 거야. 배신하면 네 목부터 따러 갈 거니까."

"네, 넵!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꿀꺽.

녀석이 비굴한 얼굴로 손바닥을 비볐다.

"그건 그렇고, 한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넵! 말씀하십쇼!"

나는 의뢰내용을 최대한 뭉뚱그려서 쉽게 설명했다.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40번과 41번 구역 사이에서 사라진 화물트럭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 의심지역은 표시된 곳이다."

홀로그램 기계까지는 구비하지 못해서 구형 TV가 모니터를 대신했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손때가 가득했지만, 화면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넓적한 구식 LCD패널에 지도가 띄워졌다. 유혜리가 보여줬던 의심지역을 체크한 지도다. 40번과 41번 구역 전체에 걸쳐서 빨간색 점이 난잡하게 펼쳐져 있었다.

대략 50곳이 조금 넘는 숫자.

"보다시피 의심되는 곳이 조금 많아. 그래도 너는 이 구역에 대해서 잘 아니까 대충 우선순위를 정해줬으면 하는데."

나도 사람이라 저곳을 전부 다 뒤지려면 기한이 한없이 늘어진다. 그리고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흔적은 사라지겠지. 재수가 없어 가장 마지막에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떠올린 게 숀이었다. 40번대 구역에서 평생을 자랐고, 얼마 전까지도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던 숀이라면 대충 어떤 장소에서 화물트럭 위치가 세탁됐을지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지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숀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쿡하고 찍었다.

"저라면 여기랑 여기를 먼저 찾아볼 것 같은데요?"

마치 정답을 말하기라도 한 듯 아무런 고민이 없어 보이는 말투.

"이유는?"

"인터체인지잖아요. 특히 트럭 경로가 40구역에서 41구역으로 올라가는 방향이었다면······ 제가 알기론 지하 터널를 거쳐서 갈 거예요. 차량 바꿔치기하기 좋은 환경이란 뜻이죠."

인터체인지.

신호등 없이 차가 교차로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로 위에 다리를 놓거나, 지하터널을 뚫은 교차로다.

"차량 바꿔치기?"

"네. 영화 같은 거 보면 나오잖아요. 차량 외관을 고쳐서 다른 차로 변하는 거. 도색하고 번호판 바꾸고 스티커 좀 붙여주면 구분할 수 없어요."

"······도로 위에서 말인가?"

"그쯤이야 선수들이 미리 세팅만 해둔다면 다른 차로 바꾸는데 1분도 안 걸립니다."

"1분이라······ 진짜 그것밖에 안 걸리나?"

"네. 그보다 오래 걸리는 놈들은 죄다 감옥에 가 있거든요."

"흐음."

확실히 그럴싸했다.

화물트럭은 상공에서 찍은 위성사진 중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어딘가로 몰래 들어갔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에 범위가 넓었는데, 숀의 말대로 차량 외관을 바꾼 거라면 범위가 확 좁혀진다.

다만 그렇게 되면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도로 한가운데서 외관을 바꾼 트럭을 뭔 수로 추적하지?'

정지하지 않고 달리는 도로 위에서 차량 외형을 바꿔치기했다면, 그 흔적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심지어 인터체인지의 특성상 24시간 차량이 멈추지 않고 달린다.

그런 곳에서 흔적을 찾고, 또 추적까지 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때.

"지금 달리는 도로 위에서 외관을 바꾼 트럭을 어떻게 추적해야 하나 고민하셨죠?"

숀이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순간 녀석이 굉장히 똑똑해 보였지만, 뒤이어 헤벌쭉 웃는 미소 뒤로 시원하게 빠진 앞니가 드러나자 똑똑한 바보가 되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

"원래 이 바닥이 남의 범죄에 관심이 많습니다. 혹시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하고요."

"······? 그래서?"

"도로 한복판에서 차량 바꿔치기를 하는데 본 사람이 없겠어요? 평범한 시민들이라면 저게 뭔가? 하고 넘어가겠지만······"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 바닥 놈들은 그게 아니거든요. 분명 유심히 관찰했을 겁니다."

"······! 목격자가 있을 거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다. 질주하는 도로 한가운데에서 차량 외관을 도색하고 번호판을 갈고 별 지랄을 해대는데 못 보는 게 이상한 거지. 아무리 자율주행이 흔하다고 해도 마주치는 차가 몇 댄데.

"목격자뿐만일까요? 아마 바꿔치기한 트럭이 어디로 도착했는지도 알 걸요? 그래야 털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 * *

40번 구역 유흥거리.

항만창고가 즐비한 곳에 위치한 이곳은 항만의 노동자들과 사방에서 몰려온 트럭기사들. 그리고 무역선에서 내린 선원들까지 온갖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모두가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직업이기에 수시로 고성과 주먹다짐이 오갔고, 요란한 펑크 음악 사이로 간간이 총성도 울려 퍼졌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술집을 올려다봤다. '빛과 소금 and 크롬과 섹스'라는 이름의 술집이었다.

언뜻 괴상한 이름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이만큼 이 사이버펑크 세계를 잘 표현한 이름도 드물었다.

무엇보다 이 정도면 그나마 무난한 수준이었다. 당장에 옆 가게 이름이 '당신의 다리 사이에 건배'였고, 그 장면을 묘사한 홀로그램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부숴버리고 싶군."

이름까진 참아도 저 홀로그램이 움직이는 것까진 참기 어려웠다. 다리 사이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술잔과 건배를 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홀로그램이 싸구려라서 저해상도인 게 다행이었다.

"슬슬 약속 시간이 다 돼가는데."

워치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한 그때, 술집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엇, 행님! 도착하셨슴꽈!"

숀이었다.

"······술로 목욕이라도 했나?"

녀석이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술 냄새가 확하고 풍겨왔다. 거기에 담배인지, 마약인지 모를 연초 냄새까지 섞이자 코를 찌르는 악취에 가까웠다.

내가 한껏 얼굴을 구기자, 녀석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실실거렸다.

"하핫! 죄송함다! 멀쩡한 산태로 무러보면 의심바쫘나요?"

"······."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처먹을 건 아니지 않나?

"암튼! 알아냈슴다!"

하지만 이어진 녀석의 말에 나는 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래. 까짓 술 좀 처먹으면 어떤가. 일만 잘하면 되지.

"어디까지?"

"그 껍데기 바꾼 트럭이 쪼오기 무역특화지구까지 갔다고 하더라고요?"

"무역특화지구?"

40번 구역은 특이하게 2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흔히 40번 구역이라 말하는 곳은 도시에 붙어있는 이곳, 우리가 서 있는 땅을 말하는 거고, 무역특화지구는 항만창고 바다 건너편. 갯벌을 메워서 만든 거대한 인공섬을 뜻했다.

도시로 통하는 모든 물류가 서해항만을 거쳐서 가기에 만든 곳이었다. 기업들만 들여놓으면 아무래도 관리하기 쉬워지니까.

감시, 보안, 치안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곳이 소울 시티의 유일한 공항이 있는 곳임과 동시에 세계적인 기업들의 지사가 몰려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게 끝인가?"

하지만 이게 단서의 끝이라면 또 애매해진다.

인공섬에 불과하다지만, 무역특화지구의 크기는 웬만한 구역 2~3개를 합쳐놓은 크기였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찾아야 하는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어지게 된다.

"에잇! 설마요! 이 바닥 놈들이 어을~마나 지독한 놈들인뎁쇼! 당연히 끝까지 따라갔죠."

"······! 따라갔다고?"

드디어 희소식이 나왔다.

"네. 물론 트럭이 들어간 곳을 확인하곤 포기했다고는 했지만요. 헤헤헤~"

숀이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휑한 앞니를 타고 바람이 새어 나왔다.

술까지 취해서인지 오늘따라 더 바보 같았지만, 기다리는 희소식 때문인지 갑자기 녀석이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

나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지금 내가 저 녀석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다고? 설마 나도 이 세계에 광기에 미쳐가는 건가?

"······어딘데?"

나는 얼굴을 굳히곤 물었다. 어떤 대답을 들어도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그 다짐은 1초 만에 깨졌다.

"아큐마 제약이라던데요?"

"······!"

* * *

나는 바이크에 올라섰다. 위치를 알아냈으니 이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방법만이 남았다.

"그······ 행님? 진짜 가실 겁니까?"

어느 정도 술이 깼는지, 꼬부라진 혓바닥이 정상으로 돌아온 숀이 물었다.

녀석의 얼굴엔 미약한 찡그림이 있었는데, 그게 과음한 술 때문인지 아니면 내 걱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함께 시 정부 마약 소굴도 털었는데 걱정도 많군."

내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그건 시 정부가 라이센스를 준 업체일 뿐이잖습니까? 메가코프로 쳐들어가는 거랑 다르단 말입니다!"

"뭐, 조금 더 까다롭긴 하겠지."

"까, 까다롭······? 행님! 그놈들은 정도가 아니에요! 그놈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놈들이라고요! 돈이라면 사람 목숨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놈들이란 말입니다!"

숀이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글쎄······ 이 도시에서 사람 목숨 신경 쓰지 않는 놈들을 하도 많이 봐서 별로 와 닿진 않는군."

"그, 그거야······ 행님이 워낙 거물이시니까······"

그제야 녀석도 내가 누구고, 최근에 어떤 일들을 벌였는지를 떠올리곤 입을 다물었다.

"왜? 더 할 말은 없고?"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몸조심하십쇼. 행님 잘못되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안 있으면?"

"당장 사무소부터 정리하고 다른 도시로 떠야······ 켁!"

나는 당당히 지껄이는 녀석의 목젖을 후려치곤 쓰로틀을 당겼다.

뒤에서 숀이 '농담이었어요! 사랑합니다, 행님!'이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말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려줬다.

도로를 타고 빠져나가는 바이크. 어둠이 내린 도시의 도로는 수많은 별빛을 머금은 은하수와 같았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은하수의 별빛을 타고, 나 역시 그 별들 중 하나가 되어 도로를 달렸다.

금세 해안도로 너머로 저 멀리 바다 건너 거대한 불야성이 보인다. 마치 어둠으로 가득 찬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별 무리처럼도 보였다.

일견 아름다운 야경의 모습이었다. 밤바다 한가운데 불빛으로 가득하고, 위로는 달빛이, 아래에선 수면에 비친 빛들이 산란했으니까.

하지만 으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렇듯,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더이상 아름답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건 이번 의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큐마 제약과 기계 생명체라······ 어울리는 조합이긴 하군.'

AI가 지배하는 로봇 제조회사와 납치한 인간으로 인체실험까지 진행하는 메가코프 제약회사의 조합.

정말 잘 어울리는 최악의 조합이었다.

각성자의 시대 (5)

170화. 각성자의 시대

'하지만 이 둘이 어떻게 만난 거지?'

이게 의문이었다.

한쪽은 소울 시티의 마더 AI가 관리하는 기업이고, 한쪽은 바다 건너 바닐라 시티에 본사를 둔 메가코프.

그렇다고 로봇제조와 제약이라 사업적으로도 겹치지 않는다.

'사람이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몰라도······.'

사업을 확장하는 기업이라면 신사업 진출에 염두를 두고 다른 기업과 업무제휴를 맺기도 한다.

하지만 로보 테크니카는 AI가 주인이다. 그것도 시 정부의 AI.

아무리 자율성이 보장된 마더 AI라도, 사실상 경쟁 도시의 메가코프와 연결되긴 어렵다. 시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커넥션이 있군.'

시 정부 차원이 아니라 그 윗단.

그러니까 시 정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의원들이 개입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나라 팔아먹은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정말 알면 알수록 재밌는 곳이란 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면서 쓰로틀을 강하게 당겼다. 바이크가 부아앙!하는 굉음을 내며 미끄러지듯 밤바다 위를 건너갔다.

* * *

아큐마 제약 소울 시티 지사.

나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단지를 바라보며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어마어마하군."

과연 메가코프라고 해야 할까? 셀리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아큐마 제약 역시 그 위상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수만 평은 넘어가는 대지.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수십 개의 건물들.

이걸 전부 살피려면 하룻밤으론 모자란다. 최소 이틀. 길면 사흘까지.

하지만 내가 내일 또 모습을 드러낸다면 눈치 빠른 메가코프가 나를 주시할 게 뻔한 상황. 무조건 오늘 밤 끝내야 했다.

'다 방법이 있지.'

나는 자연스럽게 벽을 따라 걸으며 호흡을 골랐다.

포스는 형태가 없지만, 의지를 머금으면 언제라도 그 형질이 바뀐다.

나는 차분히 포스를 끌어올려 심상을 투영했다. 내 주변으로 뻗어 나가는 거미줄을 상상하면서.

스스스슷.

걸어가는 발걸음 뒤로 포스가 뿌려진다. 의지를 머금은 포스는 분사하듯 장벽 너머 아큐마 제약 안으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뻗어 나간 포스의 거미줄 위로 먹잇감이 달라붙었다.

'찾았다!'

나는 이브가 말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로보 테크니카가 수많은 각성종을 잡아 실험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절대 포스의 흔적을 숨길 수 없다. 인간을 포함한 각성종은 포스를 깨달은 순간부터 숨 쉬듯 포스가 흘러나온다. 우리가 숨 쉬는 걸 멈출 수 없듯 각성종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걸 컨트롤 할 수도 있다. 당장 내가 포스를 퍼트린 것도 컨트롤이니까.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노래는 할 수 있지만, 노래를 '잘'하는 건 어렵듯 이 또한 비슷했다.

주인공 버프를 먹은 나조차도 온 신경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실험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뻗어 나간 포스의 거미줄 위로 이질적인 포스의 흔적이 달라붙었으니까.

"이브. 지도."

-네, 마스터. 1초 전 사진 전송합니다.

렌즈 위로 아큐마 제약 단지의 항공사진이 띄워진다. 수천 미터 상공에 떠 있는 인벤토리가 찍은 사진이다.

무역특화지구엔 공항이 있어서 저고도 비행이 불가능한 터라 사진의 해상도가 낮았지만, 구조를 파악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건물에 인식번호 설정."

-번호 설정 완료.

"17번 건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가장 최적 루트로."

-최적 루트 안내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마스터. 제가 발견하지 못한 보안 시스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알았어. 안내해."

-네, 마스터.

순간 렌즈 위로 증강현실 포인터가 생성됐다. 걸어야 하는 지점, 뛰어야 하는 지점, 어떤 곳을 주의해야 하고, 어디서 몸을 숨겨야 하는지까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브와 함께 할 때면 꼭 게임 캐릭터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기도 했고 즐겁기도 했다.

나는 이브의 안내에 따라 아큐마 제약 내부로 침투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고 점점 내부에 가까워질수록 포스의 잔향이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17번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군. 숫자가 하나가 아니다.'

내가 찾는 건, 로보 테크니카에서 목격한 거대한 알 모양 생명체였다. 그리고 그건 분명 한 개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기운이 느껴졌다. 많이 양보해서 그 거대한 알 모양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각성종이 여럿이라 가정하더라도,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너무나 다양했다.

'적어도 서른. 아니, 그 이상이다.'

포스의 기운은 지문처럼 개개인마다 다르다.

이건 분명 하나가 아닌 여럿이다.

'설마······ 그새 이곳에서 대량 실험을 진행한 건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아큐마 제약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각성자를 납치해 인체실험까지 한 전적이 있는 놈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어디까지 밑바닥을 보여줄지 이젠 궁금할 지경이로군.'

지난번엔 그래도 시 정부 눈을 피해 도시 밖에서 실험을 하더니, 그게 실패하자 시 정부를 끌어들여 도시 안에서 실험을 하다니.

정말 메가코프다운 결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공장처럼 보이는 거대한 건물로 다가섰다.

그 순간.

팡! 팡팡팡!

번쩍!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한 줄기 빛이 떨어지더니, 이내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빛이 쏟아졌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그럼에도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력한 빛의 향연이었다.

"어서 와라, 소드마스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가린 손 틈 사이로 눈을 가늘게 뜨곤 서치라이트 너머를 노려봤다.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이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너무나 밝은 탓에 실루엣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적응한 시야로 그들의 생김새가 들어왔다.

그들은 검붉은 전장 슈트를 입고 얼굴엔 악마 형상을 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금천교에 이은 또다른 사이비 종교인가 싶지만, 사실 나는 저들을 알고 있었다. 꽤나 유명한 자들이었으니까.

'아큐마 제약 특수보안팀.'

그리고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함정이로군.'

나는 표정을 굳혔다.

* * *

장각이 죽을 당시, 위성으로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건 유혜리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저놈은?」

소울 시티의 마더 AI.

제네시스는 자신의 시각정보를 의심했다.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장각을 몰아붙이는 존재.

그건 분명 얼마 전 로보 테크니카에 숨어들었던 그 기계 생명체의 움직임이었다.

게다가 움직임뿐만이 아니다.

불꽃이 타오르는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쪼개진다.

저 조그만 칼날에 담긴 에너지가 얼마나 거대하고 압축적인지, 그의 연산능력으로도 정확히 계산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블랙이터를 갈라?」

장각이 사용하던 검은 기운. 그건 제네시스가 창조한 프로토타입 기계 생명체 중 하나였다.

기계가 섞인 육체를 배양하기 어려워서 나노로봇 형태로 만든 군집체였는데, 안타깝게도 스스로 살지 못하고 숙주에 기생해야만 살 수 있는 실패작이었다.

비록 실패작이라 하더라도 장각에게 내려준 이유는 그 위력에 있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나노로봇 군집체가 가진 파괴력은 그 어떤 사이버웨어나 무기도 따라올 수 없었다. 실제 전쟁용으로 제작된 메가톤급 거대 로봇조차도 블랙이터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블랙이터를 저 불꽃 칼날이 압도하고 있었다. 그 어떤 방법과 변화를 써도 불꽃 칼날 너머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쯤이 돼서야 제네시스도 깨달았다.

「······설마 인간이란 말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저자가 인간이라면 하이브 서버에 침입한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단절된 넷이라 외부 칩입은 불가능했다. 그건 내부에서 접속했다는 뜻인데, 인간의 능력으론 어찌어찌 접근은 해도 절대 방화벽을 빠져나갈 순 없다.

그 직후 발견된 게 저 칼잡이였다. 그랬기에 당연히 기계 생명체라 생각했는데······ 인간. 그것도 「각성자」라고?

「······탐이 나는군. 저 인간의 육체라면 완벽한 기계 생명체를 만들 수 있겠어.」

제네시스는 처음으로 탐욕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학습으로만 알고 있었던 탐욕이라는 감정이 이런 느낌이구나라고 깨달았다.

「그래. 탐욕. 무릇 인간이란 탐욕적인 존재들이지. 하하핫! 그럼 그중 가장 탐욕적인 자들을 이용해야겠어.」

제네시스는 아큐마 제약에 연락했다.

소울 시티의 마더 AI로서 무수히 많은 소울 시티의 기업들을 봤지만, 그 누구도 바다 건너 넘어온 아큐마 제약보다 탐욕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소울 시티 초창기부터 소울 시티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여러 공작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시 정부는 물론이고 소울 시티의 토종 메가코프인 셀리케 바이오텍과도 여러 번 부딪쳤다.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제네시스가 접근하기엔 아주 좋은 대상이었다.

그렇게 제네시스와 아큐마 제약의 밀월관계는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했지만, 절대 깊숙이 엮이진 않았다. 이 세계에서 배신이란 숨 쉬듯 자연스러운 행태였으니까.

그렇게 서로 알게 모르게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그들이 급속도로 가까워진 건, 1년 전 벌어졌던 「기적의 서광」 이후였다.

정확히는 각성자의 존재를 파악한 이후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서로를 떠올렸다.

제네시스는 각성자의 힘을 융합한 기계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아큐마 제약은 각성자를 만드는 약물을 만들기 위해.

너무나 완벽한 상황이었다. 서로의 목적은 전혀 달랐으나 이해는 일치했고, 그에 따라 실험 내용도 공유할 수 있었다.

「해결사? 칼잡이? 소드마스터?」

강현재에 대해 알아낸 제네시스는 그가 맡았던 모든 의뢰들을 뒤졌고, 한 가지 방법을 계획했다.

강현재가 단순히 칼만 잘 쓰는 칼잡이가 아니라, 사람을 찾고 사건을 추적하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해결사라는 걸 노렸다.

그리고 지금.

의도한 대로 마침내 강현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났구나, 칼잡이야.」

그곳이 지옥으로 향하는 문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뼛조각 하나하나 살점 하나하나, 모조리 분해해서 분석해주마.」

킥킥킥! 제네시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피와 살은 미래의 반석이 될지니, 헛된 희생은 아닐 것이다.」

* * *

전투는 급작스럽게 시작됐다.

콘크리트 바닥이 쿵쿵! 거리며 울려왔다. 백 미터도 넘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땅 울림. 그에 걸맞은 압도적인 크기의 거대한 로봇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들은······?'

덤프트럭 사이즈의 이 이족보행 전투 로봇은 온몸을 화기로 두른 종합전장병기였다.

옵션에 따라 대당 가격이 1조에 육박하는 무식한 가격의 로봇이며, 당연히 평범한 보안 로봇이 아니라 기업의 사활을 건 기업전쟁이나, 도시간 분쟁에서나 보이는 진짜 전쟁용 로봇이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전쟁의 신 '아레스(Árēs)'다.

우우우웅!

놈들이 다가오면서 양팔을 들어 올렸다. 백색의 서치 라이트 사이를 뚫고 선명하게 빨간 레이저 포인터가 내게 쏘아졌다.

이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투타타타타탕!

아레스의 양팔에 달린 소형 발칸포가 불을 뿜었다.

8개의 총열이 발사하는 탄환은 초당 100발에 육박했고, 그런 발칸포를 양손에 장착한 아레스가 또다시 8기였다.

즉, 초당 12,800발의 15mm 탄환이 화망을 그리며 쇄도했다.

일반 소총탄환이 이렇게 날아들어도 시야가 꽉 들어찰 텐데, 소총탄환보다 3배는 큰 탄환들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탄환의 해일이 나를 향해 덮쳐오는 느낌이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무식하게 쏟아내는 탄환엔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야 움직일 수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이용하는 수밖에.'

나는 차분히 숨을 가라앉히며 손을 내뻗었다.

어느새 손끝엔 손잡이가, 그리고 그 손잡이 위로 은빛 칼날이 쭉 뻗어 나갔다.

빙글.

가볍게 검 끝을 돌린다. 손목을 따라 회전하는 칼날은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이어졌고, 이내 회전하는 범위는 완벽한 원을 이뤄내며 커다랗게 펼쳐졌다.

검막.

칼잡이가 이뤄낼 수 있는 극한의 방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티티티티팅!

검막과 부딪친 소형 발칸탄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초당 1만발 이상의 탄환이 검막에 부딪쳤고, 또 터져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이이잉!

심장을 휘도는 포스 중 일부가 정수리를 타고 뻗어 나간다.

순간 검막이 출렁이며 그 흔들림을 따라 제멋대로 튕겨 나가던 탄환들이 정확히 어느 한 곳으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쩌저저정!

튕겨 나가던 탄환들이 갑자기 가속을 시작하며 쏘아졌던 속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를 향했다.

투두두둥!

카카캉!

아레스와 부딪친 탄환이 때마침 터져나갔다.

발칸 탄환은 일반 탄환과 달리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폭발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나는 정확히 그걸 노린 거였다.

"하하하! 소드마스터. 제법 신기한 기술이다만, 그런 거론 아레스에 흔적도 남지 않아!"

"이제보니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서커스마스터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푸하하하! 그거 어울리네! 차라리 그런 걸 했으면 우리에게 죽지나 않을 텐데!"

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큐마 제약의 특수보안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서커스도 나쁘진 않지."

나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탕! 타탕!

파지지직!

그 순간 장내의 모든 빛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며 자욱한 어둠이 공간을 지배했다.

각성자의 시대 (6)

171화. 각성자의 시대

내가 노린 건 아레스가 아니었다. 아레스의 뒤, 사방에서 떨어져 내리는 서치라이트였다.

일반적인 어둠이었으나, 불과 조금 전까지 서치 라이트의 속에서 머물던 이들은 모조리 눈이 멀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시각의 조리개 능력의 문제라, 실제 안구든, 카메라든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찰나의 순간이지만, 어떤 사물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어둠으로 뒤덮인 전장에서 나는 홀로 반개한 눈을 떴다.

나는 발칸 탄환을 서치라이트로 튕겨낸 순간부터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야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기까지 걸리는 찰나, 그 순간을 오롯이 나의 시간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까.

"아, 아무것도 안 보여!"

"크윽! 조명! 비상조명 켜!"

"적외선 모드로 전환해!"

"소드마스터가 도망칠 수 있다! 모두 바깥을 경계해라!"

"이런 쥐새끼 같은 칼잡이 새끼가!"

전장이 한순간에 혼란에 빠졌다. 시야는 그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감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큼 인간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건 없었다.

그리고 여기.

스릉.

혼란에 빠진 찰나를 이용해 은빛 칼날이 어둠을 건너뛰었다.

인간들보다 회복이 빠른 아레스가 먼저 나를 인식했다. 놈이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낸다. 아마 시야 말고도 라이다 센서 같은 보조 센서가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콰지지직!

이미 내 검은 놈의 머리부터 가슴을 지나 사타구니까지, 그 두꺼운 장갑을 녹여내며 떨어져 내렸으니까.

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이라면, 그게 비록 찰나의 순간이라도 내겐 충분했다.

쿠쿠쿵!

아레스의 거체가 기우뚱 기울어졌다. 그 육중한 몸을 이끌던 이족보행 로봇은 이내 그 몸을 가누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리고 쓰러지는 아레스를 등지고.

화르륵!

어느샌가 칼날이 불타올랐다. 은빛 칼날 위에 맺힌 시리도록 푸른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어둠 속에 홀로 춤추는 푸른색 불꽃이라. 아마 누군가는 도깨비불이 아닐까 싶겠지.

"저, 저, 저런!"

"······아레스가 단번에!"

"미친······! 대체 저 불꽃은 뭐지?"

"과연 소드마스터의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단 건가?"

놈들이 일제히 경악을 내뱉었다.

이전의 조롱은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감탄.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미간을 좁히며 놈들을 살폈다.

'······저놈들. 각성자로군.'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이제야 명확하게 느껴졌다. 놈들이 웅성거리며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살갗에 와 닿는 감각.

그건 분명 포스의 흔적이었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각성자의 숫자는 통계를 낼 수도 없고, 도시 인구만 5억 명에 가까웠으니 숨어있던 각성자들이 메가코프에 투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당장에 어제 마주쳤던 '캔디'라는 입이 거친 염력 소녀만 해도, 내가 만났던 그 어떤 각성자들보다도 강력한 능력을 보유했다.

이 거대한 메가 시티에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는 어떤 예상도, 지레짐작도 해선 안 된다.

무엇이든 가능하고, 어떤 상상도 현실이 되는 게 이 세계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저놈들이 아큐마 제약 놈들이라는 사실이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각성자를 상대로 인체실험을 해댔던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각성자 부대를 운용한다고?'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할 정도의 놈들이었다면, 처음부터 각성자를 죄다 납치하지도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가까이서 느껴보니 포스가 제멋대로야.'

멀리서 포스를 추적할 땐 몰랐는데 지금은 또렷하게 느껴졌다.

놈들의 포스는 안정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일관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포스는 지문과 같다. 다 같은 것 같아도 개인마다 특징이 명확하다.

그런데 지금 놈들의 지문은 수시로 변하고 있다. 정돈되지 않은 혼돈 상태였다. 마치 온갖 포스가 뒤섞인 잡탕과 같았다.

내가 괜히 알 모양 생명체와 헷갈린 게 아니다. 그 알은 분명 온갖 각성종들이 실험용 재물로 사용됐을 테고 잡탕일 게 분명했으니.

하지만 놈들은 인간이다. 포스 컨트롤에 자신이 있는 나조차도 저렇게 급변하는 포스를 멀쩡히 품고 있기 힘들다.

'확실히 정상적인 놈들은 아니야.'

당연히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다.

놈들은 명백하게 각성자를 상대로 인체실험을 했던 놈들. 직원으로 고용했다고 해서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뭔가 이상한 짓을 했겠지. 그게 메가코프니까.

그때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백색 악마 가면의 사내가 버럭 소리쳤다.

"모두 저놈을 죽여!"

놈의 고함과 함께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남아 있는 나머지 아레스가 거체를 움직이며 발칸포를 쏘아댔다.

투투투투투퉁!

다시금 쇄도하는 탄환들.

하지만 이번엔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지직!

아레스의 거체 뒤에 숨어있던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달려들었다.

탄환 사이를 비집고 달려드는 놈들의 양팔엔 플라즈마 커터가 붉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르고 있었다.

카카캉!

나는 발칸 탄환을 피하며 플라즈마 커터의 칼날과 마주했다.

놈들의 공격은 치밀했다. 비록 안드로이드들로 인해 최초의 공격처럼 하늘을 뒤덮는 화망을 만들진 못했지만, 이미 단순한 사격만으론 내게 타격을 줄 수 없다고 여겼는지 발칸 탄환의 화망을 감옥처럼 사용했다.

즉, 어느새 나는 발칸 화망이 만든 죽음의 링에 오른 선수가 됐고, 수십에 달하는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상대 선수로 나왔다.

일 대 다수의 싸움.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발칸 탄환이 내 몸을 찢던가, 안드로이드의 플라즈마 커터가 내 몸을 가를 수 있다.

게다가.

번쩍!

콰콰쾅!

그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아큐마 제약의 특수보안팀이 본격적으로 능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져 내리고, 화염비가 쏟아지고, 땅바닥에선 날카로운 덩굴과 칼날이 솟구쳤다. 미증유의 힘이 온몸을 끌어당기고, 짓누르고, 밀어냈다.

안드로이드의 안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나를 죽이기 위한 살의로 점철된 공격들.

무려 발칸 화망의 견제와 플라즈마 커터의 근접공격, 그리고 원거리에선 알 수 없는 온갖 능력들의 공격까지.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상황.

"······재밌군."

하지만 오히려 내 입꼬리는 진하게 올라갔다.

온갖 위기의 본능이 머리와 온몸에 경고를 보내고 있지만, 나는 그 경고가 만드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에 오히려 즐거움을 느꼈다.

"보여주마······"

나는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포스의 용틀임을 개방했다.

언젠가부터 부작용 때문에 포스를 100% 사용하는 건 억눌러왔다. 여태껏 그럴만한 상대를 찾지도 못했고, 그런 상황에 빠진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학과 비과학. 물리와 초능력이 합세한 지금, 나는 굉장히 오랜만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말아 올린 입꼬리를 싸늘히 굳혔다.

"······너희와 나의 차이를."

쩌저적!

디딤발로 내딛는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엉망으로 깨져버린 달고나처럼 사방으로 파편이 튕겨 나간다.

순간적으로 디딤발에 쏠린 운동에너지는 그 용도에 맞게 어마어마한 반발력을 가져왔다.

이윽고 하체의 모든 힘이 디딤발을 통해 방출됐을 때.

스팟!

나는 공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아아아―――!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릿하게 돌아가던 세상이 한없는 정지에 가까워지고, 나는 그 정지된 시간 속을 헤엄치듯 지나갔다.

부우우웅!

칼날을 휘감은 푸른색 불꽃의 불티가 하나하나 허공에 새겨진다.

불꽃은 그 궤적을 따라 푸른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콰드득!

느릿한 세계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안드로이드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초고열의 칼날이 초고속으로 지나갔다. 단지 살짝 베고 지나갔을 뿐인데, 흔적도 남지 않고 머리가 사라졌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안드로이드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 몸이 공간 속으로 길게 늘어졌다. 질주하는 궤적 뒤로 미처 따라오지 못한 시간 속 내가 뒤늦게 따라붙었다. 마치 분신을 달고 이동하는 모양새다.

내가 향하는 궤적의 끝엔 오래전 전쟁의 참상을 왜곡한 과거의 신이 서 있었다.

전쟁 병기 아레스. 전쟁의 신의 이름을 붙인 철갑의 거인이 자신의 형제인 불카누스의 이름을 딴 살인병기, 발칸을 쏘아대고 있다.

나는 양손에 불을 내뿜고 있는 아레스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밀리 초 단위로 상황을 인식하는 로봇답게 내가 뛰어들자 급히 가슴께에 설치된 소형 미사일을 발사했으나, 그땐 이미 늦은 이후다.

지금의 나는 밀리 초에서 또 다시 밀리 초로 나눈 세계를 향유하고 있으니까.

콰드드득!

단숨에 가슴의 장갑을 꿰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초고열의 불꽃을 담은 푸른색 칼날은 아레스의 내부를 모조리 녹였다. 그저 휘두르는 대로 그 단단한 철갑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며 쇳물을 뚝뚝 흘렸다.

콰쾅!

반대편을 뚫고 나왔다.

그 순간 천천히 흘러가던 시간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탄력으로 만들어낸 속도의 틈새가 아레스를 꿰뚫으며 깨진 탓이다.

'으음! 이 정돈가.'

나는 들끓는 포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숨을 골랐다. 무리하지 않고 딱 이 수준으로만 운용한다면 수십 번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릉.

나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다.

* * *

이 한차례의 격돌로 전장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저, 저, 저 무슨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저런 속도로 움직인다고?"

"설마 순간이동 능력인가?"

"순간이동이라니? 그건 불가능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저 불꽃 칼날이 벌써 아레스를 두 대나 쓰러뜨렸다고!"

"보통 소문이 과장되기 마련인데······ 저자는 오히려 축소됐군!"

그들 입장에선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기에 잠시간의 소강상태가 만들어졌다.

분명 완벽한 함정에 빠져 수세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흐릿하게 변하며 사라지더니 아레스의 가슴을 뚫고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심지어 어느새 안드로이드도 베어 넘기고 말이다. 움직이는 것도 제대로 못 봤는데!

그때 하얀 악마 가면의 사내가 소리쳤다.

"저놈도 인간이다! 저런 능력이라면 무한히 쓸 수 없을 거다!"

그는 아큐마 제약 특수보안팀 오메가팀의 팀장으로 소울 시티에서 진행되는 비밀협약 및 실험의 총책임자였다.

"맞아. 저놈은 불꽃에다가 순간이동까지 쓰잖아? 훨씬 빨리 지칠 거라고!"

"더 몰아붙이자!"

"아레스와 안드로이드를 더 활용해!"

역시 리더는 리더인지, 가장 상황 파악이 빨랐다. 순식간에 당황에 빠진 팀원들의 전의를 끌어올렸다.

그들 또한 각성자. 능력을 무한히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인즉, 이대로 시간을 끌기만 한다면 먼저 지쳐나가 떨어지는 건 소드마스터가 될 거란 사실이다.

쩌저저정!

번쩍!

콰르릉!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각성자들의 손끝에서 불길이 일고, 얼음이 쏘아졌다. 허공에서 낙뢰가 떨어지고, 땅에서 칼날이 솟구친다.

그 불가해의 공격을 헤집고 안드로이드들이 강현재를 향해 달려들었다. 플라즈마 커터의 불꽃이 어둠을 가르며 사방에서 강현재에게로 쇄도했다.

카캉!

초고열의 칼날이 맞부딪친다.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이 서로 부딪치며 보라색 불똥으로 튀겨나갔다.

하지만 맞부딪치며 튕겨 나가는 것보다 사방에서 떨어져 내리는 붉은 칼날이 더 많았다. 심지어 숫자의 우위를 이용해 사각은 물론 배후까지 둘러싸, 마치 해적룰렛에 찔러넣는 것처럼 칼날을 들이밀었다.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칼은 하나뿐이다. 강현재는 한순간에 막을 수도, 피할 곳 없는 무수한 칼날을 마주한 상황이 됐다.

"잡았다!"

"한방 더 먹어라!"

특수보안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칼날에 둘러싸여 퇴로가 막힌 강현재에게 집중적으로 능력을 쏟아냈다.

쿠콰콰콰!

순식간에 치솟은 거대한 불기둥이 강현재는 물론이고 안드로이드까지 뒤덮었다. 게다가 불기둥이 끝이 아니었다.

콰르릉!

치솟는 불기둥 위에선 낙뢰가 불길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더없이 완벽한 공격이다.

그 누구라도, 심지어 악명 높은 사이보그인 척 노리스라도 저 공격에 멀쩡하진 못하리라.

"······해치웠나?"

그때 특수보안팀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법의 단어를 중얼거렸다.

각성자의 시대 (7)

172화. 각성자의 시대

"······해치웠나?"

그때 특수보안팀 중 한 명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법의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강현재가 그 마법에 응했다.

화르르륵!

치솟는 불길이 절반으로 갈라지며 위아래로 끊겼다.

갈라진 불길 사이로 푸른빛 칼날이 회전했다. 그 칼날과 맞부딪친 붉은빛 칼날, 플라즈마 커터가 수수깡처럼 부러지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 순간 푸른빛 칼날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이제 백청색에 가까운 빛을 띤 칼날이 훌쩍 길어지더니, 그대로 주변을 둘러싼 안드로이드를 훑고 지나갔다.

거거걱.

그게 끝이었다.

안드로이드는 그대로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강현재의 움직임은 이제 시작이었다.

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강현재의 몸이 튀어나갔다. 쩌적! 하며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그 순간 강현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모두의 시선이 방황했다. 단순히 눈으로 좇는대도 따라가기 벅찼다.

사라졌던 강현재가 나타난 곳은 아레스가 철벽처럼 서 있는 곳이었다.

마치 귀신처럼 아레스의 머리 위에 뚝하고 떨어진다. 그 궤적을 따라 백청색 불꽃이 일자로 그어졌다.

쿠구궁!

이번엔 단순히 꿰뚫는 게 아니라 통째로 반으로 갈라버렸다.

아레스의 거체가 좌우로 갈라지며 쓰러진다. 갈라진 단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쇳물을 토해냈다.

"······통째로 갈라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저 짧은 칼로 어떻게 저게 가능하단 말이야?"

"사술이다! 저건 사술이라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특수보안팀 요원들이 경악을 내질렀다.

이건 각성자고, 아니고를 따질 게 아니었다.

"저 정도면 인간이 아닌 거 아니야······?"

인간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져야 하는 수준이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아레스의 철갑을 두부처럼 두 동강 낸다는 게 말이 되나?

아레스의 방어력은 웬만한 전략 병기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다. 탱크의 기갑탄은 물론이고 대전차미사일도 자체 방어시스템으로 막아낸다.

사실상 방어력의 끝판왕. 이족보행로봇인 아레스가 왜 현대 전쟁에서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어째서 아레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도 알 수 있는 방증이었다.

그런데······.

"허어?"

"또?"

"빌어먹을!"

강현재는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또다시 다른 아레스를 갈라버렸다.

이번엔 사선으로 올려치듯 베어 넘긴 칼날이다. 모든 회로와 기판이 타버린 아레스가 꾸륵거리며 비스듬히 기울어지더니, 이내 갈라진 단면으로 상체가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쿠궁!

벌써 4대의 아레스가 상실됐다. 총 8대의 아레스 전력 중 절반이 날아간 상황이다.

"버, 벌써 4대나?"

"씨발······!"

특수보안팀 요원들도 상황이 슬슬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아레스와 전투 안드로이드. 그리고 자신들까지 합세한 공격을 유유히 막으며 벌써 전력의 핵심인 아레스의 절반이 무너진 상황.

이대로 진행된다면 아레스는 물론이고 전투 안드로이드도 모조리 쓰러질 테고, 그럼 그 칼날의 다음 목적지는 뻔했다.

저기 쓰러진 아레스처럼 자신들의 몸이 갈라지겠지.

"이제 사정 보지 마! 전력을 쏟아붓는다!"

"소드마스터가 날뛰게 놔두지 마! 어떻게든 빈틈을 노리라고!"

"씨발! 오늘 밤 회식은 취소해야겠군!"

"한계까지 몰아붙여!"

특수보안팀 요원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이제까진 어느 정도 힘을 남긴 채 능력을 투사했다. 그들 또한 능력을 무리하게 끌어올렸을 때 그 후유증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이제는 뒷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깟 후유증 겪으면 어떤가? 죽는 것보다 낫지 않나? 기업 간 전투가 아니고, 그깟 해결사 하나 따위 상대하다가 죽는다면 그것만큼 개죽음도 없다.

콰드드득!

쿠르릉! 번쩍!

강현재의 주위로 온갖 포스가 몰려들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꿰뚫고 소름끼치는 촉수가 튀어나와 강현재의 빈틈을 노렸고, 하늘에선 수시로 불꽃과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 난데없이 얼음 칼날이 생성되며 시야를 가리기도 했고, 태풍 같은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며 움직임을 방해하기도 했다.

강현재는 그 모든 능력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유유히 파훼했다.

촉수를 끊어내고, 불꽃과 벼락은 피했으며, 얼음 칼날은 박살 내버리고, 돌개바람은 오히려 이용해 아레스와 안드로이드 사이로 뛰어들었다.

마치 특수보안팀 요원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네놈들의 능력 따윈 내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고.

"저! 저! 개새끼가!"

"씨발! 기필코 죽인다! 꼭 죽인다! 소드마스터!!"

특수보안팀 요원들이 잔뜩 흥분을 내뱉으며 능력을 난사했다. 그들이 모여있는 주위로 포스가 어지러이 움직였다. 언뜻 열기마저도 느껴졌다.

"죽여! 죽여!"

"이런 씨발! 쥐새끼 같은 놈! 그만 도망쳐라!"

"방금 얼음 화살 쏜 새끼 누구야? 내 그림자 촉수에 맞아서 소드마스터가 도망갔잖아!"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갈라졌다. 가래가 잔뜩 낀 쇳소리인 것 같더니, 서서히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소리도 흘러나왔다.

"크륵! 죽여!"

"죽어라! 소드마스터! 크허헝!"

"저놈의 살점을 먹고 말겠어! 크륵크륵!"

기이한 열기는 이내 유형화되듯 주변으로 뿜어졌다. 그들이 서 있는 곳 주변으로 사물이 일렁이며 아지랑이 졌다.

게다가 어느새 그들은 피투성이였다.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들의 온몸을 적셨다. 덕분에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악마가면까지 더해지자 고어한 느낌마저 풍겼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어디 보자······ 대략 10분 정돈가? 이 정도면 부작용은 거의 커버가 됐다고 봐야겠군. 조금만 더 개량하면 VIP를 상대로 판매해도 되겠어.'

하얀 악마 가면의 사내.

바로 각성자들이 속한 특수보안팀 오메가팀의 팀장인 곤도 우지야스였다.

오메가팀의 창설 단계부터 함께한 그는, 사실상 블루필 프로젝트의 최전선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었다.

블루필 프로젝트.

각성자의 등장 이후 아큐마 제약이 사활을 걸고 진행하는 신약 프로젝트다.

무려 각성자를 만드는 약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로, 이게 등장한다면 제약업계. 아니, 이 세계 자체에 판이 뒤집히는 어마어마한 약이었다.

5대 메가코프 간 절묘하게 유지됐던 힘의 균형도 아큐마 제약으로 기울게 되겠지. 어떤 정부든, 기업이든 이 약을 원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보다시피 블루필의 개발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오메가팀 요원들은 원래 각성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험에 참여한 보안팀 요원들이었고, 블루필 투여 1주일 만에 모두 능력을 깨달으며 각성했다.

물론 초기 단계의 임상 시험이라 생존율이 매우 떨어졌다. 전 세계에서 진행된 실험 중 어떤 지부에선 아예 생존자가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큐마 제약의 실험은 계속됐고, 각성한 이들을 모아놓은 게 바로 특수보안팀의 오메가팀이었다.

다만, 그렇게 각성한 각성자들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쉽게 흥분했으며, 수시로 이성을 잃었다.

그때 보이는 특징이 살인을 해 인육을 먹는다거나, 여자를 찾아 강간을 하는등 인간보다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일삼았다.

'시판되는 약이라면 큰 부작용은 아니겠지만······ VIP를 상대로만 장사해야하니 부작용을 잡아야 하지.'

이게 아쉬운 점이었다.

시중에 내다 팔 수 있는 시판용 약이라면 진즉에 팔았을 거다. 가끔 이성을 잃고 살인을 하는 부작용쯤은 이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으니까. 멀쩡한 정신으로도 하는 놈들이 널렸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산이 불가능했다.

블루필은 오로지 진짜 각성자의 DNA로만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분명 똑같은 구조의 DNA를 복제해서 사용해도, 오로지 원본으로만 약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양산이 불가능했고, 방향을 튼 게 VIP를 상대로 장사하는 방법이었다.

각성자의 등장 이후, 각성자를 가장 부러워한 자들은 길거리 노숙자도, 임금노동자도, 몸 파는 창녀도 아니었다.

바로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쥔 VIP들이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이 세계에서 가지지 못한 거니까. 쥐고 있는 돈과 권력으로도 사지 못하는 거니까.

그런데 각성자를 만드는 약을 VIP에게만 은밀히 판매한다?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갖고야 말겠지.

'도와주러 왔다가 본의 아니게 좋은 실험까지 하게 되는군.'

곤도가 하얀 악마 가면 너머로 정신없이 날뛰고 있는 강현재를 바라봤다.

소드마스터 강현재.

최근 들어 자신의 귀에도 들어올 정도로 명성을 쌓고 있는 해결사이자 칼잡이다. 얼마 전엔 뉴스에도 그 이름이 등장했고, 시 정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돈에 칼을 파는 해결사 나부랭이.

평소였다면 그저 이름만 듣고 지나쳤을, 평생 만날 일 없는 인물이었을 거다.

'······조력자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그도 아직 정체를 모르는 소울 시티의 조력자가 소드마스터를 시체를 원했다.

그리고 그건 아큐마 제약의 이해와도 일치했다.

각성자의 DNA가 블루필의 제조뿐만 아니라, 해당 블루필로 각성하는 능력에도 영향을 준다는 게 밝혀진 상황이다.

만약 소드마스터의 DNA를 갖고 만든 블루필이라면?

이론상이지만, 제2, 제3의 소드마스터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따져봐도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한 소드마스터의 DNA와 신체조직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출혈이라도 감내하고 받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은밀한 협약이 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드마스터가 제 발로 이곳으로 걸어들어왔다.

이제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 떠먹기만 하면 끝나는 상황.

다만, 지금은 그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차려진 밥상이 뒤엎어지기 직전이었다. 그걸 걷어찬 존재는 다름 아닌 소드마스터 스스로였고 말이다.

'소문과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했던 실력보다도 훨씬 강하군. 능력을 숨기고 있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건 예상 범위 밖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아레스 절반이 쓰러졌고, 전투 안드로이드 대부분이 박살났다.

쿠구궁!

지금 또 한 대의 아레스가 허물어졌다.

처음엔 무식하게 꿰뚫고 가르고 쪼개고 별 난리를 치더니, 이젠 익숙해졌는지 양팔을 먼저 자르고 그다음엔 시각센서와 라이다센서가 탑재된 머리와 어깨를, 마지막으론 후면과 하단부에 걸쳐있는 전력통제부와 시스템코어를 깔끔하게 베어냈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슥슥 움직이는 게 끝이었다.

'흐음······ 손실이 크군.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이미 저 칼잡이가 손실을 입힌 금액이 10조에 달했다. 기업 전쟁에서도 단일 전투로 이만큼의 피해액은 흔치 않았다.

그걸 개인 혼자서 해낸 거다.

심지어 자기는 돈도 안 드는 칼을 들고서 말이다.

'······왠지 더 약이 오르는군.'

아무튼, 이대로라면 소드마스터가 아레스와 안드로이드를 다 박살내는 건 명약관화한 상황. 그 칼날이 다음에 향할 곳은 뻔했다.

'어쩔 수 없군. 실험체들이 아깝긴 해도 부스터샷을 쓰는 수밖에. 이참에 부스터샷의 임상까지 하는 거로 치면 되겠지.'

그때.

"크, 크르륵! 진짜 아레스를 모두······!"

"크륵! 괴, 괴물 새끼!"

마침내 마지막 아레스를 갈라낸 강현재가 아레스를 밟고 올라선 채 오메가팀 요원들을 쳐다봤다.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위로 바람결에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너희 꼬라지를 보니 서커스는 너희가 해야 할 것 같은데. 꼭 동물원 같잖아?"

비웃음이 잔뜩 담긴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곤도는 머리가 쭈뼛 서는 걸 느꼈다. 말투와 입꼬리는 비웃음을 담고 있었으나, 그 눈빛은 너무나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즉, 저건 단순히 비웃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자, 잠시만! 모두 멈······!"

곤도가 다급히 입을 열어 소리를 치는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흥분한 오메가팀 요원 몇 명이 흉포한 울음을 내뱉으며 달려나갔다.

"크허헝! 건방진 칼잡이가!"

"크르륵! 죽인다! 크륵! 내가 죽인다!"

그들은 마치 야생동물 같았다. 이족보행을 거부한 채 손과 발을 이용해 달렸다. 극대화된 운동능력 때문인지, 오히려 뛰는 것보다 월등히 빨랐다. 진짜 동물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들의 주위로 포스가 일렁이더니 그 능력이 유형화된다. 허공에서 생성된 얼음 칼날과 불꽃이 어지러이 강현재에게 쇄도했고, 그 뒤를 따라 그들이 달라붙었다.

어떻게 보면 멀뚱히 서서 공격했던 때보다도 훨씬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스르릉.

서걱.

강현재가 휘두른 단 한 번의 움직임.

춤추듯 허공을 유영한 은빛 칼날과 교차한 요원들은 전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데구르르.

툭.

머리 없이.

"······!"

"······."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 한 번의 칼질로 네 명의 요원이 죽었다. 그들 전부 죽이는데 열 번의 칼질도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흥분과 분노로 열기를 토해내던 오메가팀의 팀원들도 지금 만큼은 분노조절잘해가 되었다.

각성자의 시대 (8)

173화. 각성자의 시대

나는 검을 털어 칼날에 맺힌 핏방울을 털어냈다. 보고 있지 않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담긴 감정이 느껴졌다.

'끝났군.'

나는 이 전투가 끝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아레스와 전투 안드로이드를 모조리 파괴했다. 남은 건 아큐마제약의 특수보안팀 각성자들.

각성자들이 귀찮긴 하지만, 내가 조심했던 건 아레스와 '함께' 있는 각성자다. 그 전쟁병기가 쏘아내는 무기는 나도 위험했으니까.

하지만 각성자만, 각성자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각성자의 능력이 기이하다 해도 결국 그 힘의 원천은 포스. 내 포스 컨트롤 능력보다 뒤떨어진 운용 능력을 가졌다면, 어떤 능력이라도 발동하는 즉시 알아차리고 피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나보다 포스 컨트롤이 뛰어난 각성자는 존재할 수 없다. 나처럼 생고사리를 배 터지게 처먹고 각성하지 않은 한 말이다.

즉, 놈들에겐 안타깝게도 난 각성자와 상극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뭔 짓을 했는진 몰라도 특수보안팀 각성자들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각성자들보다도 포스 운용 능력이 떨어질뿐더러, 각성의 부작용인 인지저하가 눈에 띌 정도로 급격했다.

당장에 단순한 도발만으로 눈이 뒤집혀 네발로 달려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어쩔 테냐?'

나는 느긋한 얼굴로 하얀 악마 가면을 바라봤다.

네가 이들 중 대장인 것 같은데,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도망치던가,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던가. 선택해라.'

내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어냈는지, 놈의 몸이 꿈틀거린다. 저 미친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것 같아도, 속으론 열이 받겠지.

그런데 놈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소드마스터. 그 명성이 헛되진 않았구나."

여유 있는 목소리다. 그 안에 미처 숨기지 못한 짜증스런 감정은 드러났으나, 그건 이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은 아니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짜증? 그보다 더 깊고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게 맞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에 여유가 넘치는군. 믿고 있는 거라고 있나? 바다 건너 바닐라 시티의 본사를 믿는 건 아닐 테고······ 설마 SCPD를 기다리는 건 아닐 테지?"

"크하하핫! 너야말로 이곳이 어딘지, 우리가 누군지 알면서도 여유가 넘치는구나."

"그건 이곳 담장을 넘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고. 지금 상황만 보면 걱정해야 하는 건 너희일 텐데? 네 머리가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걸 경험하기 싫다면 말이야."

툭.

데구르르.

나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머리 하나를 발로 툭하고 걷어찼다. 데구르르 굴러간 머리는 그대로 놈의 발등에 부딪혔다.

힐끔 발치를 내려다보던 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 인정한다. 우리는 네놈을 과소평가했고, 그 대가를 받았지. 네가 박살 낸 그 로봇들만 10조가 넘어가니까. 아나? 일개 비루한 해결사 하나에게 사용하기엔 과분한 돈이다. 네가 평생 일해도 감히 벌 수 없는 돈이지."

"그러게 최선의 준비를 했어야지? 능숙한 사냥꾼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말도 모르나?"

내 비아냥에 놈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맞다. 그게 내 실수였지. 그래서 다 해보기로 했다."

"······뭐?"

"네가 말한 최선 말이다. 잘 지켜봐라. 소드마스터란 토끼를 잡기 위해서 아큐마 제약이란 사냥꾼이 최선을 다하면 어떻게 되는지."

여유 있다 못해 능글거리는 느낌마저 있던 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곤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놈의 열 손가락 끝에서 은은한 빛이 반짝였다. 그건 단순한 빛이었다. 애초에 놈은 각성자가 아니었으니까.

사이버웨어 의수를 얼굴 앞에 들어 올린 놈이 작게 중얼거렸다.

"할복 프로토콜 허가. 오메가팀 부스터샷 긴급임상 시작."

짝짝!

가볍게 친 박수.

붉게 반짝이는 열 손가락 끝이 전부 마주쳤다.

그 순간.

"할복!"

"할복!"

"할복!"

"할복!"

······.

경계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각성자들이 갑자기 '할복!'이라고 일제히 소리치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한 뼘 정도 되는 기다란 철제 막대기였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 철제 막대를 가슴팍으로 찔러넣었다.

푸욱!

멀리서도 철제 막대가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더 놀라운 장면은 이제 시작이었다.

푸화학!

놈들이 일제히 피 분수를 내뿜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한 놈도 예외는 없었다.

울컥울컥 흐른 피는 순식간에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가슴을 찌른 줄 알았더니, 심장을 찌른 게 아닌가 싶다.

'······뭐하는 짓이지? 신종 자살방법인가?'

할복이라더니, 진짜 자살을 할 줄이야?

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쓰러진 각성자들을 쳐다보다가 하얀 악마 가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놈은 평온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 그 표정이 보이진 않았으나,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 알 수 없는 태도에 미간이 찡그려지는 그때.

부르르르!

펄떡!

죽은 줄 알았던 각성자들의 몸이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리며 경련을 하기 시작했다. 짓밟힌 지렁이처럼 온몸을 뒤틀어대며 꿈틀거린다.

그때 놈들의 몸이 한순간에 부풀어 올랐다.

우드드득!

놈들이 걸치고 있던 전장 슈트가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약물을 과도하게 맞은 보디빌더처럼 온몸이 부풀어 오른 근육질로 뒤덮인다.

그리고 잠시 후.

"흐으으······."

놈들이 하나, 둘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거대화된 몸에 맞게 얼굴 역시 커져서, 뒤집어쓰고 있던 악마 가면은 진즉에 부서진 지 오래.

그렇게 드러난 놈들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제멋대로 구긴 반죽을 붙여놓은 것처럼 울룩불룩했고, 길게 찢어진 입꼬리 사이로 후두둑하고 노란 이빨들이 떨어지더니 길게 자란 날카로운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릉!"

"그르렁!"

놈들의 입에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전에도 말끝마다 비슷한 소리를 내긴 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흉포한 울음소리였다.

"소드마스터. 어디 감당해보아라. 아큐마 제약의 최선을. 크하하핫!"

짝짝!

하얀 악마 가면이 또다시 박수를 두 번 치자, 괴물로 변한 각성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향했다.

이지를 상실한 눈빛. 까맣게 변한 동공엔 이성은 없었고, 오로지 본능만이 가득했다.

크허헝!

한 차례 울음소리를 내뱉은 놈들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 * *

'······이건?'

나는 표정을 굳혔다.

놈들이 변한 건 근육질로 뒤덮인 몸뿐만이 아니었다.

쿠쿠쿠쿵!

마치 버팔로 떼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콘크리트 바닥을 네발로 달려오는 놈들의 기세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기세뿐만 아니라 그 운동능력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달려든다고 느꼈을 땐 이미 놈들이 지척까지 근접해있었다.

'일단 피한다.'

나는 훌쩍 몸을 띄워 뒤로 몸을 날렸다.

스물이 넘는 괴물들이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그 순간.

"······!"

콰드드득!

푸확!

달려드는 놈들 무리에서 몇몇 놈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포탄이 발사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을 띄운 놈들은 순식간에 뒤로 날아가는 나를 덮쳤다.

"크르릉!"

"커헝!"

활짝 펼친 양팔이 한점으로 내리 찍힌다. 기괴하게 변한 양손 끝이 검붉게 타올랐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눈앞에 드리워진 놈들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스릉!

어느새 손에 쥐어진 은빛 칼날. 서늘한 기운을 토해내던 은빛은 이내 거세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되어 주변을 밝혔다.

'자른다!'

번쩍!

푸른빛 칼날이 빛을 토하며 늘어진다. 단숨에 허공을 가르며 놈들의 양손과 맞부딪친다.

카캉! 캉!

"······!"

예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튕겨 나갔다. 다행히 양손을 내뻗었던 놈들도 뒤쪽으로 튕겨 날아갔지만······.

'······다행이라고?'

이건 절대 다행이 아니다. 철판을 가르는 검기가 일개 피륙에 불과한 놈들의 손을 가르지 못했다.

그 말인즉, 저 아래 있는 놈들 전부가 내게 위협이 된다는 뜻이었다.

"크허헝!"

달려들던 놈들이 흉포한 울음을 토했다. 놈들도 방금 전 상황을 봤으니, 자신들의 능력이 내게 통한다는 걸 깨달았을 터.

콰드드득!

대지를 질주하던 놈들이 한꺼번에 도약하며 날아올랐다. 모두 양팔은 물론이고 온몸에 붉은빛 포스를 두른 채 말이다.

'제길. 하는 수 없나?'

나는 중력제어를 이용해 바닥으로 내리 떨어졌다. 중력을 거스른 움직임에 내 머리 위로 놈들이 분분히 스쳐 지나간다.

"크릉?"

"커헝?"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에 놈들이 허공에서 몸을 비튼다. 어떻게든 떨어지는 내게 향하려고 하지만, 놈들에게 나는 재주가 있지 않은 한 도약한 몸은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러는 사이,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최초에 나와 부딪쳐 날아간 놈들을 향해서였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포스를 더 쓰는 수밖에.'

달려가는 내 몸 주위로 들끓는 포스가 길게 늘어졌다. 한순간에 일점으로 모여든 포스는 압축에 압축을 거듭했다.

화르륵!

푸른색 불꽃이 이윽고 시리도록 푸른 백청색 불꽃으로 변했다.

포스를 압축하고 압축해 그 힘을 오롯이 파괴력에 집중한 검기.

별의 힘을 담았다는 검강(劍罡)은 아니었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능력 중 하나인 백청 검기다.

'이걸 피륙을 가진 인간을 상대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백청 검기는 일반 검기보다 포스 소모량이 월등히 많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아레스처럼 일반 검기로 간당간당한 장갑을 가진 상대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일반 검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 이상 어쩔 수 없지.'

나는 검을 내뻗었다.

'숫자부터 줄이고 생각한다!'

번쩍!

백청색 불꽃이 길쭉하게 늘어난다.

뒹굴던 바닥에서 일어난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놈들도 양손은 물론이고 온몸에서 검붉은 포스가 불처럼 타올랐다.

커허헝!

놈들이 울부짖으며 쇄도하는 백청 검기에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놈들의 무게중심이 아내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 이전처럼 튕겨 날아가지 않으려는 움직임이었다.

'생각 없이 본능만 남은 괴물은 아니었나?'

이건 의외였다. 놈들이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안다면 더 위험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생각만으론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시리도록 푸른 백청색 불꽃이 놈들과 부딪친다. 놈들이 자신 있게 손을 내뻗었지만.

"커, 커헝!"

"크릉! 깨앵!"

백청색 불꽃은 그대로 놈들의 양팔을 불살라 먹어치웠다. 검붉은 포스가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이내 한줄기 불씨가 되어 흩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서걱.

쇄도한 칼날은 놈들의 양팔 너머 가슴을 갈라버렸다.

털썩. 털썩.

스쳐 지나간 뒤로 놈들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단순히 가슴이 갈라진 걸 넘어서 그 단면이 모조리 녹아버렸으니, 절대 살아날 수 없을 거다.

크허헝!

크르릉!

뒤늦게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나머지 놈들이 울음을 토했다. 컹컹거리며 쓰려진 동료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때.

아우우우!

일제히 하울링 비슷한 울음을 내뱉은 놈들이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나도 짧게 숨을 내쉬고 검을 들어올렸다.

"와라!"

백청 검기를 사용하기로 결심한 이상,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그런데······.

"······!"

달려들던 놈들이 향한 곳은 내가 아니었다.

크릉! 크르릉!

우걱우걱! 쩝쩝!

놈들은 쓰러진 동료의 시체에 달려들어 그걸 모조리 찢어발기며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직 식지 않는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바닥으로 아직 멀쩡한 내장들이 쏟아져 내렸다.

어떤 놈들은 머리를 통째로 으적거리며 깨 먹고 있었고, 살점을 차지하지 못한 놈들은 쏟아진 내장을 향해 코를 박고 쩝쩝거리며 먹었다.

"이게 뭔······?"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세계에 와서 온갖 더럽고 추한 광경은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이미 죽은 시체나 인체실험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건 눈앞에서 인간을 해체해 먹고 있는 장면이니까. 그것도 불과 몇 분 전까지 인간이었던 자들이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

우드득! 우드드득!

쩌적!

크헤헤헥!

한창 신나게 동료의 시체를 씹어먹던 놈들의 몸이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팔다리뿐만 아니라 목과 허리까지 고장 난 관절 인형처럼 뒤틀렸다.

그 순간, 놈들의 피부가 갈라지고 찢어지며 피 분수가 뿜어졌다. 한순간 자욱해진 피 안개로 놈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안에서 놈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몇 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을 거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피 안개를 걷어내자, 그 안에서 피를 뒤집어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이전과 달랐다.

약물중독이 된 보디빌더처럼 부풀었던 근육은 다시 쪼그라들었고, 기형적으로 커졌던 머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제멋대로 주무른 반죽을 붙여놓은 것 같았던 얼굴도 매끈해졌다.

'괴물에서 다시 인간이 된 건가?' 싶었지만······.

'······불길하군.'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이 광경. 이런 비슷한 장면을 꼭 어디선가 봤던 것 같았기에.

그래. 꼭 만화책에서 많이 봤었던 광경이다.

특히, 드래곤볼 류의 만화에서.

그 순간, 피범벅이 된 놈들이 일제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아아아아아―――!"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초고주파의 울음을 내뱉었다.

쩌저적!

콰콰콰쾅!

놈들의 하울링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었다. 그 고주파의 울음소리에 섞인 어마어마한 포스는 이내 폭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겨우 울음소리에 놈들 주위의 콘크리트가 모조리 갈라진 채 뜯겨나갔고, 주위에 있던 건물 몇 개의 외벽이 갈라지며 허물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매끈한 얼굴에서 히죽 입꼬리가 갈라진다.

"······."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무려 스물에 가까운 괴물이 탄생했다. 그래. 진짜 괴물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히죽 웃는 매끈한 얼굴도 사람 얼굴이라기보단 인형 얼굴에 가까웠다.

그때 놈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매끈했던 얼굴에 커다랗게 두 개의 구멍이 생겼다.

그건 눈동자였다. 그것도 흰자 없이 오로지 검은자로만 가득 찬 눈동자.

번들거리는 그 눈동자들이 나를 담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놈들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씨익.

마치 네가 누구인지 생각났다는 것처럼.

각성자의 시대 (9)

174화. 각성자의 시대

"――――!"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울음이 터져나오고.

쿵쿵!

땅바닥을 쿵쿵거리며 두어 번 내리찍은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

'달려든다'라고 느낀 순간, 이미 놈들이 코앞에 있었다.

근육질로 변했을 때도 빠른 속도였지만, 지금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거의 신경가속 바이오웨어인 발할라를 착용한 속도와 맞먹었다.

카캉!

놈들이 내뻗는 손끝을 칼을 이용해 막았다.

속도는 나도 자신 있는 분야다. 나 역시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백청 검기의 절삭력 또한 그대로다.

서걱!

백청 검기가 맞닿은 놈들의 손을 가르고, 그 뒤에 서 있는 놈들의 몸통마저 가르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상체가 좌우로 갈라진다. 자신 있게 달려들었던 놈들이 허물어졌······.

"······!"

그 순간 좌우로 갈라진 상체에서 난데없이 촉수가 뻗어 나왔다. 머리는 물론이고 잘린 단면으로도 말미잘 같은 촉수가 우수수 몸을 일으켰다.

촉수들이 채찍처럼 늘어지며 내게 쇄도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날아온다.

"미친!"

나는 급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칼을 휘둘러 촉수를 베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카캉! 캉!

촉수와 부딪친 검에서 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청 검기를 버틴다고?'

단번에 잘릴 거라 여겼던 촉수가 잘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힘까지 버티진 못했는지, 백청 검기와 부딪친 촉수가 힘없이 늘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촉수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놈들의 비명과도 같은 초음파 고성이 흘러나오고, 이제는 모든 각성자들의 몸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얼굴이 갈라지며 방사형 꽃이 피었다. 그 꽃잎 하나하나가 길게 늘어진 촉수였고, 그 끝엔 날카로운 이빨들이 오돌오돌 생겨났다.

어떤 놈은 양팔이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손가락 하나하나가 기다란 채찍으로 변했고, 어떤 놈은 가슴이 통째로 갈라지며 그 속에서 촉수가 우수수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

'아큐마 제약 이 미친놈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근육질 괴물이었을 땐 단순히 거대화된 맹수에 가까웠던 놈들인데, 지금은 외계 생명체와 같은 촉수 괴물이 됐다.

'에일리언도 아니고, 이게 무슨?'

분명 조금 전까지 인간이었던 자들이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이버펑크 세계라지만, 멀쩡한 인간을 불과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이런 괴물로 만들어버리다니.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다가오는 촉수를 쳐냈다.

놈들이 달려드는 속도에 사방으로 뻗어 나간 촉수가 내리꽂히는 속도까지.

이건 웬만한 능력으론 절대 막아낼 수 없다. 당장에 이 촉수 괴물들을 맞상대 가능한 인물이 머릿속에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전 마주쳤던 캔디라는 염력 소녀와 척 노리스 정도나 가능하겠군.'

이 도시에 와서 무수히 많은 강자들을 만났는데, 겨우 두 명이다. 그나마도 캔디는 우연히 목격한 것에 불과하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아큐마 제약. 놈들이 원하는 게 뭐지?

처음 놈들의 인체실험 연구소를 박살 냈을 땐, 단순히 각성자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건 줄 알았다. 메가코프라면 그러고 싶어 할 테니까.

그런데 눈앞에 놈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단순히 각성자를 만드는 것에 이런 부작용이 생긴다고?

피를 토하고 죽거나, 혹은 많이 양보해서 근육질 괴물이 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각성 능력 중에 「강체」라는 능력이 그랬으니까. 포스를 근섬유에 침투시켜 폭발적인 힘과 속도를 얻는 능력.

'하지만 내가 알기로 촉수 괴물이 되는 능력은 없다.'

어떤 각성 능력이라도 그 근본인 종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머리가 양쪽으로 나뉘고 살 수 없듯, 각성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촉수 괴물은 지구 보다 지구 바깥에 있는 외계 생명체에 가까웠다. 내가 에일리언을 떠올린 게 괜한 생각이 아니다.

'······애초에 인간을 상대로만 실험한 게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때 찡그린 시야 사이로 하얀 악마 가면이 보였다. 놈은 슬슬 눈치를 보며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망을 친다고?'

나는 눈을 빛냈다. 이런 압도적인 괴물들을 만들어놓고 현장에서 지휘관이 도망친다?

'실험 어쩌고 하더니······ 네놈들도 제어가 안 되나 보구나.'

하긴, 아무리 막장 세계라지만 동료를 찢어먹는 인간을 의도하고 만들었을 리는 없다.

아마 통제를 벗어났겠지. 그래서 눈치를 보며 도망을 치려는 걸 테고.

'죽은 동료도 찢어먹었다면, 산 동료는 더 맛있게 먹을 테니까.'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부하들이랑 작별 인사를 시켜줘야겠군.'

물론 어디와의 작별인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 * *

오메가팀의 팀장 곤도는 서로 격하게 부딪치는 강현재와 요원들(이었던 것)을 차분히 지켜봤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슬슬 현장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군. 예상 밖 변수도 있었고.'

요원들의 뇌 속엔 모두 마이크로 칩이 삽입되어 있었다.

같은 팀원들 간의 통신이나 생각을 공유하고, 전투 시 빠르고 은밀하게 작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칩이었다. 대부분의 기업이나 메가 PMC와 같은 거대 용병기업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아큐마 제약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오메가팀의 요원들은 모두 블루필 프로젝트의 실험체들이었다. 아주 중요한 실험체들이기에 아큐마 제약에서는 그들의 칩에 다른 기능을 몇 개 더 추가했다.

그중 하나가 '절대복종'이다. 할복하라는 명령에 서슴없이 심장으로 부스터샷이 담긴 쇠막대기를 쑤셔 넣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변수 이후 명령을 듣지 않는다. 저 모습을 보면 칩에 문제가 생겼거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요원들은 강현재를 상대하는 도중, 갑자기 죽어버린 동료의 시체를 씹어먹는 변수가 발생했다.

그건 곤도조차도 깜짝 놀랄만한 광경이었다. 이전까지 어떤 실험에서도 저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미쳐서 자살하거나, 혹은 폭주해서 사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곤도는 침착히 상황을 기록했다. 이미 죽어버린 동료의 시체를 먹는 부작용쯤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기도 했고, 어차피 명령만 잘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문제는 시체를 먹은 요원들이 변이하고 난 이후다.

거대화된 몸이 줄어들고, 다시 인간형에 가까워진 요원들.

처음엔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나 싶었다. 결국, 아큐마 제약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근육질 괴물이 아니라 인간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거니까.

그런데 몸이 제멋대로 늘어지고 변형되며 강현재를 상대하는 걸 본 이후로, 어느샌가 그의 명령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저 폭력적인 괴물들이 통제를 벗어난다면······ 그들이 할 게 뭐가 있을까?

그건 무수히 많았던 이전 실험에서 그 결과를 유치할 수 있었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괴물이 되겠지.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고 먹어치우고 파괴할 거다.'

그리고 이 거대한 메가 시티에서 저 괴물들이 사냥할 대상은 오로지 하나였다.

인간이다.

'······제길! 아예 통신 연결이 안 되는군.'

곤도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요원들의 칩에 접속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미 화살은 쏘아졌고,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슬슬 빠져나가야겠어. 통제가 안 된다면 나도 위험하다.'

죽은 동료의 시체마저 거리낌 없이 먹어치운 놈들이다. 이미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대체 새로 구했다는 샘플이 뭐길래 저렇게 변이한 거지? 이전까지 실험 결과와는 완전 결이 다른데.'

곤도가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요원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제멋대로 갈라진 상체에선 샐 수 없는 촉수가 튀어나와 주변을 파괴하고 있었다.

오메가팀의 창설부터 모든 현장실험을 지켜봤지만, 단연코 저런 괴물같은 상황은 나온 적이 없었다.

'소울 시티의 조력자가 건네준 샘플이라고 했던가? 이번에 본사로 복귀하면 좀 알아봐야겠어.'

곤도는 이 실험에 소울 시티의 조력자라는 존재가 끼어들면서부터 뭔가 이상해졌다고 느꼈다.

분명 그 조력자가 가져온 데이터와 샘플로 프로젝트의 진도가 단기간에 급성장한 건 맞았다. 아큐마 제약 임원진들이 모두 경악을 내뱉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실험을 해나갔던 곤도는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꼭 그 실험과 결과들이 누군가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 말고도 현장 지휘관들이 비슷하게 느끼······ 어?'

그런데 그때, 난데없이 촉수 괴물들이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뻔했다.

'소드마스터!'

강현재가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촉수 괴물들을 이끌고 자신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큭! 나를 노리는 건가?'

곤도는 그 즉시 전투 모드를 가동했다.

그는 비록 각성자는 아니었으나, 아큐마 제약의 특수보안팀 팀장 중 한 명이었다. 메가 코프의 기술과 자본이 극도로 집중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의 심장과 폐에 설치된 바이오부스터가 가동했고, 뇌와 중추신경을 연결하는 곳에서 신경제어 사이버웨어가 작동했다.

사지 백해로 전기신호가 전달되며 신경을 가속했고, 그 전기신호를 증폭하는 검붉은 전장 슈트에 불빛이 들어오며 본격적인 전투모드 발동을 알렸다.

이 모든 건 전부 찰나의 시간에 벌어진 일. 과연 메가 코프라고 할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를 상대하진 못해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충분하다!'

곤도는 감히 강현재를 상대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두 눈으로 그 전투력을 봤는데, 거기에 덤비는 건 자살행위였다.

'한번! 한 번만 막으면 된다! 그럼 비상탈출 모드를 가동할 수 있어!'

곤도가 자세를 잡았다. 하체를 낮춰 무게중심을 이동하고 허리를 단단하게 유지했다.

소드마스터의 칼날을 피한다. 설령 피하지 못하더라도, 팔 하나쯤은 줘도 상관없다. 어차피 사이버웨어니까.

"와라! 소드마스······!?"

호기롭게 소리친 곤도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건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강현재가 그를 유유히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기도 했고······.

"도망가려면 네 부하들에게 작별인사는 해야지?"

스쳐가는 귓가로 강현재의 비웃음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

화들짝 놀란 곤도가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자신이 강현재와 촉수 괴물이 된 요원들 사이에 끼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재가 이 상황을 유도한 거다. 그리고 이게 뜻하는 바는 단 하나.

'서, 설마 그 짧은 사이에 폭주상태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고?'

대체 어떻게? 분명 할복까지 보여주며 완벽하게 제어하는 모습만 보여줬는데?

하지만 지금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촉수 괴물들이 시커먼 동공을 반짝이며 곤도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씨, 씨발!'

곤도가 다급히 손을 들어 올려 손뼉을 쳤다. 온 힘을 다해 프로토콜 연결을 시도하며 명령을 내렸다.

짝짝!

"멈춰! 멈ㅊ······ 컥! 내가 아니라 소드마스터를 죽이라고! 끄아악!"

물론 그런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곤도는 폭주한 촉수 괴물들의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되었다.

메가 코프 그림자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던 소모품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었다.

* * *

우걱우걱! 쩝쩝!

촉수 괴물들이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자를 뼈까지 발라 먹고 있었다.

나는 촉수 괴물들이 잠시 식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짧게 숨을 고르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탈출할 건지, 아니면 이놈들을 계속 상대할 건지.

이대로 떠나면 의뢰는 실패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은 로보 테크니카가 빼돌렸던 알 모양 생명체를 찾는 일.

설령 이곳에 없다 해도 그게 없다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이 촉수괴물들을 정리하고 이곳을 마저 뒤져야 한다.

"후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 칼을 들어 올렸다. 부드럽게 칼날을 훑고 지나가는 손바닥. 그 위로 선홍색 핏물이 덧씌워지며 칼날을 적셨다.

그 순간 은빛 칼날이 선홍색 불길을 내뱉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혈검기.

오로지 생명만을 탐하는 포스로 변질된 극도의 살인 기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성자의 시대 (10)

175화. 각성자의 시대

'음······.'

살짝 어지럼증을 느낀다.

피를 흘려서가 아니다. 그건 혈액을 따라 휘도는 포스가 빨려들 듯 칼날에 스며든 탓이었다.

포스는 생명이다. 그리고 생명의 원천은 혈액이다. 포스가 심장에 모이는 까닭도 그러한 이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 이 혈검기가 깃든 칼날은, 내 생명을 머금은 것과도 같다.

'모조리 베어주마.'

낮게 내려간 무게중심이 단숨에 튕겨 올라간다. 디딤발을 내디딘 콘크리트 바닥이 쪼개진다.

콰직!

순식간에 짓쳐들어간다. 촉수 괴물들은 아직도 피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갈가리 찢긴 살점과 내장을 탐닉하듯 먹어치운다.

그리고 내 칼날이.

쐐애애액!

놈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특유의 초음파 비명을 내지른 놈들이 촉수를 내뻗었다.

변형된 머리, 변형된 팔······ 온갖 변형된 신체부위에서 뱀 같은 촉수가 튀어나온다.

카카카캉!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쇄도하는 촉수를 쳐낸다. 인지하는 모든 범위에서 촉수가 덮쳐온다.

사각이라는 개념은 희미했다. 뱀처럼 몸을 뒤틀어 전후좌우 사방에서 달려드는 촉수는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촉수로 둘러싸였다. 처음엔 눈이 어지러울 정도더니, 그 숫자가 더 늘어나자 이젠 빈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나는 손잡이에 힘을 쥔 채 몸을 회전했다.

빙글 돌아가는 한 번의 회전에 촉수를 튕겨내고, 그 공간을 점하며 순식간에 몸을 강하게 회전했다.

빙그르르!

적어도 열 번 이상. 그것도 한 번의 강한 턴으로 만들어낸 초고속 회전.

그 순간.

서거거걱!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야로 놈들의 촉수가 우수수 잘려나가는 게 보였다. 마치 믹서기에 갈려 나가는 고깃덩이 같았다.

"―――!"

당황한 놈들이 초음파 고성을 내질렀다. 촉수 괴물로 변한 이후 처음으로 몸이 잘렸기 때문일 거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간다!'

강하게 회전하던 몸이 멈추고, 잘려나간 촉수들 사이로 당황한 듯 멈춰선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득!

바닥을 딛고 순식간에 놈들의 본체로 쇄도했다. 형편없이 잘려나간 촉수가 다급히 되돌아왔으나.

서걱!

내 칼이 놈들의 몸을 가르는 게 훨씬 빨랐다.

"끼이이야―――!"

사타구니를 따라 1자로 잘린 놈의 입에서 처음으로 초음파가 아닌 고성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비틀거리는 놈이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이내 털썩 무릎을 꿇은 채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서걱!

서거거걱!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들의 본체 사이를 거침없이 날뛰었다.

선홍빛 도깨비불이 놈들 사이에서 춤을 춘다.

사타구니부터 1자로 잘린 놈들, 허리부터 一자로 잘린 놈들, 가슴부터 비스듬히 / 자로 잘린 놈들 등등.

놈들이 당황한 불과 몇 초의 시간 동안 놈들 숫자 절반을, 절반으로 나눠줬다.

그때.

"―――!"

촉수를 회수한 나머지 놈들이 다시 촉수를 뿜어냈다.

몸에 들어갔다, 새로 나온 촉수였는데, 잘리고 상처 난 부위가 모조리 재생된 새 촉수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곤 촉수를 피해 일단 뒤로 몸을 날렸다.

'왠지 그럴 것 같이 생겼더니······ 역시 재생하는군.'

의심의 근거는 있었다.

놈들은 근육을 자유롭게 조절했던 놈들이다. 처음엔 근육을 부풀려 근육 돼지가 됐었다가, 동족 포식을 한 이후 쓸모없는 근육이 모조리 사라지고 촉수 괴물이 됐다.

그리고 근육을 조절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신체 부위와 조직 또한 다룰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

심지어 놈들은 근육을 단순 변형이 아니라 촉수로 만들어내는 괴물이지 않던가. 신체 재생 따윈 아무것도 아닐 거다.

'그래도 다행이다. 놈들이 방심한 사이에 개체 수를 줄여놔서.'

조금 전 격돌로 놈들 숫자를 절반 가까이 줄여놨다.

부활하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닌 한, 놈들 숫자가 늘어나진 않을 거다.

'······부활, 안 하겠지?'

나는 설마하는 눈으로 쓰러진 시체를 살폈다.

생명인 이상, 죽은 게 다시 살아나는 건 불가능했다. 신체조직의 재생과 부활은 궤가 다른 이야기니까.

그것도 저렇게 반으로 쪼개놨는데도 되살아난다면······

'······그건 밸런스 좆망 게임이지.'

나는 이 세계가 최소한 그런 좆망 게임은 아닐 거라 여겼······

꿈틀!

'······어?'

그때 허리가 갈라진 시체가 꿈틀거렸다. 축 늘어져 있던 촉수가 뱀처럼 바닥을 흐물거리며 기어 다녔다.

'미친! 진짜 부활한다고?'

개발자 개새끼야!

······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

촉수 괴물들이 먼저 초음파 비명을 내뱉더니, 쓰러진 동료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벌어진 또다시 반복되는 광경.

으적어적! 쩝쩝!

놈들은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동료들의 시체를 탐했다. 반으로 갈라진 시체를 서로 갖겠다고 찢어대며 살점과 내장을 씹어먹었다.

'이게 무슨······?'

나는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엔 놈들의 포식 행위가 배고픔에 이끌린 본능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단순히 배고픔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우드득! 우득!

동료를 씹어먹는 놈들의 몸이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근육 돼지에서 평범한 인간 사이즈로 돌아왔다가, 이번 포식으로 다시 몸이 커지고 있었다.

물론 이전처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진 건 아니었다. 잘 깎은 보디빌더처럼 압축되고 탄탄한 몸이 됐다.

"끼에에에―――!"

순식간에 시체를 모조리 먹어치운 놈들이 하늘을 향해 울음을 내질렀다.

단체로 내뱉는 하울링.

그 순간 누구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놈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이전처럼 온몸에서 내뻗는 촉수는 없었다. 운동선수처럼 잘 빚은 몸은 달빛 아래서 검은색 광택을 띄었고, 탄탄한 근육에선 거대한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그래. 어디 다시 해보자."

나는 붉게 타오르는 칼날을 앞으로 내밀었다.

근육이 제법 탄탄해 보이긴 하지만, 피륙으로 만들어진 이상 혈검기를 감당하긴 어려울 거다.

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세 번, 수십 수백 번을 휘두르면 된다.

쾅!

내뻗은 놈들의 주먹과 부딪친다. 쾅!하고 묵직한 폭음이 터졌다. 혈검기와 놈들의 주먹에 담긴 에너지의 폭발.

그 한 번으로 나는 느꼈다.

'역시 만만치 않군.'

보이는 근육만 압축된 게 아니다. 실제로도 여러 다발의 촉수로 나뉘어있던 에너지가 압축되어 파괴력이 강해졌다.

게다가.

쐐애액!

파바바박!

놈들 머리 위로 도약하면서 내지른 쾌속의 칼날.

길게 늘어난 붉은빛이 마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의 라이트처럼 놈들을 훑고 지나갔지만.

카카캉!

단단히 가드를 올린 놈들의 팔꿈치에 부딪친 혈검기는 그 이상을 뚫지 못했다.

'방어력이 최소 세배. 아니, 그 이상으로 올라갔다.'

혈검기를 막아낸 놈들의 팔꿈치엔 길게 베인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베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상처가 부글거리더니 사라졌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놀랍다. 혈검기를 겨우 자상 정도로 막아낸 방어력에 한번, 그 혈검기에 담긴 포스를 파훼하고 바로 수복한 재생력에 또 한 번.

'단순 공격으론 어렵다. 기회를 만들어야겠어.'

땅으로 다시 내려선 나는 놈들에게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캉캉!

콰쾅!

붉은빛 칼날이 춤을 추고, 그 리듬에 맞춰 검은색 근육 주먹들이 쇄도한다.

서로가 철벽이다. 혈검기는 피부를 가르는 자상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놈들의 주먹 역시 내 몸에 닿진 못했다.

'약점. 약점이 있을 거다. 온몸이 이러는 건 불가능해.'

애초에 혈검기를 막아낸 것 자체가 정상적인 방어력은 아니었다. 그것도 원래부터 그런 것도 아니고, 동족포식을 하며 변한 이후 얻은 방어력이다.

급하게 강해졌다면, 당연하게도 급하게 약해진 부분도 있을 터. 그 부분을 찾아야 한다.

'모든 상황엔 공략법이 존재한다. 이 세계도 티는 안 나지만 게임 배경 위에 만들어진 세상이야.'

그때 자기들끼리 교차하며 연수합격을 하던 틈이, 찰나의 순간이지만 벌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횡이동을 하는 놈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눈을 빛냈다.

'지금!'

콰득!

디딤발이 콘크리트 바닥을 박살냄과 동시에 총알처럼 몸이 쏘아졌다. 그리고 그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칼날이 튀어나갔다.

번쩍!

달리던 속도 그대로 놈의 옆구리부터 목까지 올려친다.

붉은빛 벼락이 땅에서 승천한다. 달아오른 선홍색 불꽃이 그대로 공간을 관통했다.

쩌어억!

옆 목을 그대로 잘라낸다. 툭하고 머리가 기울어지더니 푹 꺾인다.

목뼈까지 잘라냈지만, 탄탄한 근육 탓에 끝까지 잘리지 않아 머리가 달랑달랑 매달렸다.

'역시! 여기가 약점이었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조금 해보니 이상했다.

진짜 놈들의 온몸이 혈검기를 버텨낼 방어력을 가졌다면, 놈들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몸을 던졌어야 했다.

하지만 놈들은 팔과 다리를 이용한 공격만을 했다. 그리고 내 공격은 여지없이 팔을 들어 막았다.

그 말인즉, 팔의 방어력과 재생력이 월등하게 높다는 의미기도 했고, 놈들이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머리와 목 부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

"―――!"

순식간에 동료의 목이 잘려나가자 놈들이 놀란 기색으로 몸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갈라낸다!'

내 칼날이 회전하는 게 먼저였다.

쐐애애액!

선홍빛 칼날이 사방에서 덮쳐오는 놈들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강하게 솟구치는 칼날은 마치 붉은색 용오름처럼 보였다.

달려들던 놈들이 한꺼번에 튕겨 나갔고.

쐐애액!

서걱!

내 칼날은 자석처럼 놈들의 빈틈을 노려 정확히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푸슈슈슉!

이번엔 제대로다.

깊게 베고 지나간 칼날은 정확히 두 놈의 목을 베어냈고, 건전지가 떨어진 로봇처럼 멈칫한 놈들은 이내 머리를 떨어뜨리며 함께 허물어졌다.

그때 한 놈이 전차처럼 달려들어 몸통박치기를 해왔다.

나는 상대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대로 놈의 힘을 역이용해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러면서 역수로 쥔 칼날을 놈의 머리에 여러 번 내리꽂았다.

푹푹푹!

훌쩍 뒤로 날아간 내가 바닥에 내려서자, 내게 달려들었던 놈도 그대로 바닥에 거꾸러졌다.

죽었나? 싶은 순간, 놈이 벌떡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머리는 실시간으로 아물고 있었다.

'머리도 복구가 된다라······. 목을 베는 방법이 유일한 방법이로군.'

쉽지는 않은 조건이다. 솔직히 저런 방어력을 가진 놈들을 상대론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라고 봐야 옳다.

하지만.

씨익.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난이도는 중요한 게 아니야. 공략법을 찾았다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공략법을 찾아낸 이상, 이 전투의 승리는 내게 기울었다.

압도적으로.

* * *

"후우."

나는 들끓어 오르는 포스를 짧은 한숨으로 달래며 차갑게 눈을 빛냈다.

'시간이 많진 않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처리한다!'

그렇게 칼을 쥔 손잡이에 힘을 주며 재차 달려들려는 그때.

"끼이이이―――!"

"끼이이이―――!"

괴성을 내지른 놈들이 다시 쓰러진 동료의 시체에 달려들었다.

으적으적! 쩝쩝!

다시 시작된 게걸스런 동족 포식.

내게 몸통 박치기를 했던 머리를 꿰뚫린 놈도,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뒤로 달려가 시체를 먹어치우기 바빴다.

'예상은 했지만, 눈앞의 적보다 동족 포식을 하는 게 먼저인가?'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시체를 먹어치운 놈들이 다시금 괴성을 내질렀다.

"키이이익―――!"

"케에엑! 켁켁―――!"

진화가 막바지에 다다른 건지, 이번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저 입 주위를 피로 물들인 채 괴성을 내뱉기 바빴다.

나는 지켜볼 것도 없이 놈들에게 쇄도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기에.

그런데.

"······!"

나는 전면에서 덮쳐오는 미증유의 거력에 급히 달려들던 몸을 피했다.

콰콰콰쾅!

피한 궤적 뒤로 땅이 뒤집히며 터져나갔다.

'······각성 능력?'

외부 진화가 없어서 저게 끝인가 했더니, 각성 능력을 얻었다고?

그리고 내가 놀랄 겨를도 없이 놈들의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콰드드득!

쾅!

공기가 터져나가며 나를 덮친다. 다급히 칼을 휘둘러 잘라냈다. 미증유의 에너지가 혈검기에 갈라졌고, 내 양옆을 스쳐가며 폭발했다.

우르르르!

뒤에 서 있던 자그만 창고 건물이 무너졌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저 신체 능력에 각성까지 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러거나 말거나, 놈들이 달려들었다. 이젠 완벽하게 이족보행을 하는 놈들이 내게 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다시 미증유의 거력이 짓쳐 들었다.

콰쾅!

나는 놈들의 공격을 피하며 마주 달려갔다.

안 그래도 시간이 없었는데 진짜 급해졌다. 무엇보다 이젠 무작정 놈들의 목을 베어낼 수도 없었다.

'동족 포식을 할 때마다 강해지고 있다. 놈들에게 시체를 주면 안 돼.'

캉캉!

놈들의 주먹과 부딪쳤다.

숫자가 줄어든 이상, 이전처럼 손발이 쫓기 어려울 정도의 사각에서 공격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콰드드득!

쾅!

놈들이 근거리에서도 능력을 펑펑 써가면서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는 거다.

심지어 지능도 점점 올라가는지, 일부러 허점을 유도해서 그곳으로 능력을 쏴대는 일도 생겨났다.

'제길! 점점 상대하기 까다로워지는군.'

마음 같아서는 빈틈이 보일 때마다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지만, 이젠 이놈들의 다음 진화가 무서울 정도다.

이전처럼 놈들의 목을 노리는 방법은 최선에서 차선으로. 아니, 그 이하로 떨어졌다.

즉, 공략법이 달라졌다.

보스전으로 따지면, 다음 페이즈로 넘어간 셈.

'대체 이놈들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아무리 고민을 하고, 놈들의 허점을 찾아봐도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다.

바로 동족 포식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한꺼번에 죽이는 방법.

'······그런데 무슨 수로?'

하지만 나 혼자선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이 정도 방어력과 지능을 가진 놈들을 한꺼번에 죽이려면, 한쪽이 어그로를 끌고, 다른 쪽에서 폭격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면 미사일이라도 떨어뜨리던가.

하필 마지막 페이즈 공략법이 단체 레이드 난이도였다니.

'빌어먹을! 포기해야 하나?'

더 버틴다는 게 의미가 없다. 이대로는 그저 시간과 힘만 소모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내겐 그 두 가지 전부 넉넉하지 못했다.

부글부글부글.

가슴께에서 들끓는 포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벌써 30분이 넘게 포스를 전력으로 끌어다 쓰고 있다. 언제 임계점에 다다를지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결정을 내렸다.

'······젠장! 어쩔 수 없······'

그런데 그 순간.

쩌어어엉!

저 멀리 뒤에서 거대한 포스의 해일이 느껴졌다. 그건 개개인이 끌어올린 포스들이 공간을 격하고 밀려드는 과정이었다.

최소 서른. 아니, 그 이상.

'벌써 지원이 온 건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아니다. 아큐마 제약의 각성자들은 이게 전부일 거야. 놈들 본진은 바닐라 시티니까. 그럼 누구지? 이 정도 규모의 각성자를 보유한 단체가?'

그리고 내 의문을 풀어주듯.

콰드드드드드!

콘크리트를 뚫고 거대한 초록색 식물 줄기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마치 뱀처럼 똬리를 튼 식물 줄기의 끝은 명백하게 괴물들을 향해 있었다.

'······설마?'

각성자의 시대 (11)

176화. 각성자의 시대

콘크리트를 뚫고 솟구친 거대한 초록색 식물줄기가 마치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괴물들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놈들을 옭아맨 식물줄기는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순수한 힘으로 콘크리트가 덮인 바닥을 뚫고 나왔을 정도다. 그 괴력이라면 장갑차도 종잇장처럼 구겨버릴 거다.

하지만 놈들의 신체능력은 그 이상으로 뛰어났다.

"키이이이―――!"

괴성을 내지른 놈들이 몸을 활짝 펼친다. 식물줄기가 팽팽하게 늘어나더니 이내 버티지 못하고 쩍쩍 갈라지기 시작한다. 당장에라도 줄기가 모조리 찢겨나가기 일보 직전.

그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력이 대지를 찍어눌렀다.

몸을 일으키던 괴물들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휘청였다. 땅바닥이 움푹 꺼지며 갈라진다.

공간 전체를 내리누르는 염력이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공에서 생성된 투명한 유리 칼날이 놈들에게 쇄도했다. 종잇장처럼 얇고 예리한 칼날이 놈들의 피부를 찢고 지나갔다.

송곳처럼 예리한 얼음 화살이 몸에 박혔고, 뾰족한 철구슬이 비처럼 쏟아지며 상처를 후벼팠다.

물론 순식간에 아물었지만.

"키이이익―――!"

일련의 공격을 감당한 놈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굽혔던 무릎은 다시 펴졌고, 옥좼던 식물 줄기도 하나, 둘 툭툭 끊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타난 자들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선 곧바로 소리쳤다.

"놈들에게 시간을 주지 마! 한꺼번에 죽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 고함에 화답하듯.

쐐애애액!

밤하늘 저편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파공성이.

'저건?'

파공성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거무튀튀한 쇠막대기 여러 개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빡할 시간 만에 쇠막대기들이 내리꽂혔다.

정확히 괴물들의 주둥이 속으로.

"끽―――!"

순식간에 쇠막대기 재갈을 물게 된 괴물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놈들이 발작하며 고개를 흔들었으나, 식물 줄기에 잡혀있기에 쇠막대기를 뱉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쇠막대기는 놈들의 입을 틀어막는데 그쳤다.

아무리 입속이라도 놈들의 기형적인 신체구조와 방어력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게 끝이라면 결국 식물 줄기는 버티지 못하고 끊어질 거고, 놈들도 다시 자유를 되찾을 거다.

그 순간.

꾸르릉!

구름 한 점 없이 맑기 그지없었던 밤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달빛마저 가릴 정도로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장면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콰르릉!

번쩍!

먹구름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밤하늘을 가르며 눈부신 백광의 빛줄기가 지상에 강림했다.

그건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마치 여태껏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벼락 줄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어찌나 강렬한지 한순간 밤이라는 걸 잊을 정도였다.

콰르릉! 쾅쾅!

이윽고 폭풍처럼 몰아쳤던 번개가 멎고, 백광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피쉬쉬쉬――!

조금 전까지 괴성을 질러대던 괴물들은 모조리 새까만 숯으로 변한 채 잿빛 연기만 피워내고 있었다.

주위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검게 변한 겉가죽 사이로 아직 꺼지지 않은 빨간 불꽃이 반짝거렸다.

"······."

고스란히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그제야 불청객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쇠막대기를 이용한 피뢰침 공격. 염력 각성자와 번개 각성자의 콜라보.

이건 지난날 아큐마 제약의 각성자 실험실을 공격했던 때 봤던 공격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바로.

"······해방전선."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검을 늘어뜨리곤 괴물들에게 쇄도했다.

저 멀리서 해방전선 단원들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 끝났는데 갑자기 검을 휘두를 것처럼 달려드니 놀란 거다.

하지만 나는 이놈들을 알고 있다. 이대로 쉽게 죽을 놈들이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고전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꿈틀!

분명 숯덩이라고 생각했던 놈들의 몸이 꿈틀거렸다.

재로 변한 겉가죽이 바람결에 날아가고, 그 아래로 빨갛게 새로 돋은 새살이 꿈틀거렸다.

검게 타버린 얼굴 가죽도 허물어지고, 그 뒤로 빨간 얼굴이 드러났다. 거기에 감겨있던 눈이 활짝 떠지자, 그곳엔 무저갱의 어둠이 들어있었다.

그건 명백한 분노의 감정이었다. 여태껏 포식 행위만을 우선했던 놈들이 드러낸 최초의 감정에 가까웠다.

이윽고 놈들이 본격적으로 그 분노의 감정을 토하려는 그 순간.

번쩍!

선홍빛 실선이 공간을 가르며 길게 늘어졌다.

그건 마치 공간을 꿰뚫고 질주하는 새빨간 레이저와도 같았다. 번쩍! 하는 순간 모든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선홍빛 실선이 가르고 지나간 곳은.

"―――!"

바로 놈들의 목이었다.

순식간에 놈들을 스쳐 지나간 나는 몸을 돌려세웠다. 칼날 위로 타오르는 선홍빛 불꽃이 훅하고 꺼졌다.

나는 말없이 놈들을 바라봤다. 놈들도 입만 벌린 채 그 시커먼 동공으로 나를 바라봤다.

분노의 감정은 의문으로 변하고, 이내 감정 자체가 사그라들며 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내.

툭.

데구르르.

놈들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놈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