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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태주는 선계에 방문해 당군악을 만났다.

신선들도 그가 왔다는 소식에 우르르 모였다,

미테란 차원의 같은 영혼, 로디와 연결됐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이거 참 놀랍구먼. 같은 영혼이 셋이라고?"

"한 명이 더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다중우주는 접하면 접할수록 놀라워."

"저도요."

"이런 식이라면 이계 신(神)의 소원이 이루어진 거나 마찬가지군."

"그런가요?"

당군악도 태주가 이계의 신, 라넬리아와 소통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 오픈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로디에게 무한공간과 공유창고도 만들어줬어요. 그리고 신호가 와서 물건도 몇 가지 챙겨 보냈고요."

"으흠."

당군악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

왜지?

무한공간을 허락도 없이 만들어서 그런가?

하긴! 아무리 같은 영혼이라고는 하나, 무한공간은 독선 당군악만의 선술.

"죄송해요. 무한공간 만들기 전에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응? 무슨 말인가? 왜 허락을 받아? 자네 무한공간은 자네 건데."

"근데 표정이···, 언짢은 거라도?"

"아쉬워서 그러지."

"네?"

"왜 자네만 연결됐지? 나는? 나도 같은 영혼이잖아."

"···."

"나도 물건을 전해주고 싶어서 그래. 쯧쯧, 얼마나 힘들었을꼬, 어린 나이에 광부 일이라니,"

그게 섭섭했구나.

"안 되겠어. 오늘부터 좌선 수련이나 해봐야겠군."

"수련요?"

"로디와 만나보고 싶네. 등선할 때처럼 좌선을 통해 마음을 수련하면 그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하!"

당군악도 수련을 통해 로디와 영혼 연결을 해보려는 모양.

태주와 독선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검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좌선 수련이라, 그거 해본 지도 오래됐군. 이참에 나도 해볼까나?"

신선들이 같잖다는 눈으로 빈정거렸다.

"검선답지 않게 좌선 수련은 무슨!"

"그대와 수련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오?"

"하던 대로 쭈그려 앉아 너튜브 쇼트 영상이나 보시오."

신선들의 반응에 묘한 미소로 답하는 검선.

"그대들은 궁금하지도 않은가?"

"응? 뭘 말이요?"

"우리라고 같은 영혼이 없을까? 천마 새끼에다, 드렉 카락스, 유럽 제국의 황제, 빈센트 뭐시기에, 그런 잡놈들까지 같은 영혼들이 있는데, 우린?"

그러자 뭔가 깨달은 듯,

"···어?"

"응?"

"흠,"

"오!"

"맞는 말이야."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라고 없을까?

그래서 신선들도 멀티플렉스 앞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 수련에 들어갔다.

수련의 목적.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과 연결해보자.

시간이 꽤 흐르고,

순간!

"허어어억!"

소스라치게 놀라는 주선.

"왜 그러시오? 주선! 설마 같은 영혼을?"

"다, 다리에 피가 안 통해서···,"

"에잉! 깜짝 놀랐네."

등선 이후 좌선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본 신선들이었다.

다리에 쥐가 나서 그만두고, 지루해서 그만두고, 멍 때리다 졸고···,

제대로 될 리가 있나?

※ ※ ※

무너진 갱도 안.

나가는 입구는 막혔지만 안쪽은 꽤 넓었다.

10평 원룸 정도 크기.

불편하긴 해도 지낼만했다.

멀찍이 화장실도 파고, 누워서 잘 곳도 정비하고.

로디는 태주님이 보내신 식량과 독물로 열심히 혼원무상독령공만 수련했다.

독물도 충분하다.

가는 길도 안다.

깨달음도 가지고 있다.

2성 돌파는 식은 죽 먹기.

그리고,

찌르르르,

막힌 갱도 안에서 맞이하는 2차 배송.

"와! 이게 다 뭐래?"

공유창고로 보내온 지구의 물건들.

소형 발전기 한 대, 가정용 산소 발생기와 공기 청정기, 전자레인지, 간이 접이식 침대, 스탠드가 달린 조명···.

태주님도 자신이 이곳에 오래 있을 거라고 예상했나 보다.

'이거면 1년도 가능해.'

그밖에 식물독, 동물독, 광물독, 화학독 등 각종 독물과 간편 조리식 식량과 생수, 신발과 겉옷, 속옷, 없는 게 없다.

위이잉!

로디는 발전기를 먼저 작동시켰다.

미테란 차원의 마정석과 매우 흡사한 마나 결정체를 원료로 하는 전기 발생 장치.

실제로 경험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로디도 마법이 최고인 줄 알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영혼 연결 이후 깨닫고 말았다.

미테란의 마법이라는 게 얼마나 비루한 학문이라는 걸, 인류 문명의 발전에 쓰이기는커녕 오로지 기득권만을 위해 차별적으로 쓰인다는 걸.

그들만의 학문.

이러니 세상이 퇴보하지.

'내가 변화시키면 돼.'

라넬리아님도 그걸 원하고 있는 듯하니.

로디에겐 원대한 목표가 생겼다.

우선 발판을 만들자.

첫 단계는 혼원무상독령공 5성.

현재 20일 정도가 지난 시점.

2성에 올라섰으니, 못해도 2달만 더 수련하면 5성은 금방이다.

강호 무림으로 따지면 절정의 경지.

여기에 암기술과 용독술까지 갖춰지면?

'마법사가 뭐가 두렵겠어?'

스슷!

로디의 손에서 태주가 전해준 탈명비도가 나타났다.

'일섬(一閃)부터.'

쉬잇!

탈명비도가 날아서,

탁!

바윗덩이에 살짝 박혔다.

아직은 턱도 없다.

'태주님이라면 한 번에 가루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암기로 바위를 부술 수 있을 때까지.

혼원무상독령공과 암기술을 병행해서 수련한다.

※ ※ ※

테일즈 마정석 광산의 갱도는 하나가 아니다.

출입구는 하나지만 들어가면 이쪽저쪽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갱도들이 있어서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

그런데 요즘 광산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이 퍼진 시점은 갱도가 무너지고 한 달이 지난 후.

광부 로디가 홀로 야간작업을 하러 들어간 그 갱도 말이다.

기묘한 소리가 광산의 갱도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낮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마정석 채굴하는 소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하지만 밤이 되면 들린다.

특히 광산 입구로 가면 조금 더 명확했다.

쉬익! 탁! 쉬익! 탁! 쉬익! 탁···,

대체 무슨 소리지?

갱도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서 그런가?

아니면 동굴 쥐? 야생짐승들?

그렇다고 해도 그전엔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혹은 로디의 유령일 지도.

쉬잇, 탁! 소리가 무너진 갱도 쪽에서 들려왔으니까.

처음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용한 밤에만 들리는 터라, 숙소에서 자는 광부들이 잠을 설친다는 것 외엔.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나 두 달째가 되자,

츠핏! 팍! 츠핏! 팍! 츠핏! 팍···,

괴이한 소리는 더 뚜렷해졌다.

이제는 낮에도 들렸다.

밤에는 더더욱 시끄럽게.

그리고 그 이야기는 감독관 얀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뭐? 유령? ···폐쇄된 갱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네, 광부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밤에도 잠을 못 이룰 정도라서."

얀스도 광산 입구로 들어가 확인해봤다.

츠핏! 팍! 츠핏! 팍! 츠핏! 팍!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로디가 야간작업하러 들어갔다가 무너진 갱도.

'놈이 살아있나?'

그럴 리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물도, 식량도 없을 텐데 어떻게 두 달을 버텨?

그래서 점점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새끼! 죽으려면 곱게 뒈질 것이지."

"어,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로디의 유해를 찾아 정상적으로 장례를 치르면···,"

"무슨 헛소리야? 월 생산량도 간당간당한 판에!"

"···유, 유령은요?"

"눈으로 직접 봤어?"

"그건 아니지만···,"

"닥치고 일이나 해! 생산량 못 맞추면 할당량 제일 낮은 새끼부터 목을 따버릴 테니."

일단은 입단속 시켰다.

설령 유령이라 해도 뭐가 무서워?

그래봐야 로디 유령인데.

살아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

예를 들어 테일즈 백작가에서 파견 나온 3서클 마법사 말이다.

그러나 한 달이 더 지나 석 달째가 되어갈 때쯤.

츠피릿! 콰직! 츠피릿! 콰직! 츠피릿! 콰직···,

이제는 대낮에도, 굴 안이 아닌 바깥에서도 소리가 확실하게 들린다.

광부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몽둥이로 때려도 광산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츠피피핏! 콰지직! 츠피피릿! 콰지직!

무언가 날아가는 소리, 그것이 벽에 박히는 소리.

더더욱 강렬해졌다.

규칙적으로 들렸다.

얼마나 크고 또렷한지, 광산 관리인 3서클 마법사 게릭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얀스!!!"

"네네, 나, 나으리!"

"이게 무슨 소리지? 채굴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저어, 그, 그게···,"

감독관 얀스는 마법사 게릭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석 달 전에 무너졌던 갱도에서 나는 소리란 말이냐?"

"···네."

"광부 놈들은 유령일까 무서워 벌벌 떨면서 안에도 광산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마, 맞습니다요."

게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갱도가 무너진 건 알고 있었다.

어린 광부 한 놈이 죽었다는 사실도.

돌더미에 깔렸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고,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석 달이 지난 이상 굶어 죽었을 터.

'놈이 죽은 건 확실해.'

그럼 정말 죽은 자가 유령이 됐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당장 언데드 몬스터만 해도 과거 인간이었던 자들이 대부분.

스켈레톤, 좀비, 듀라한, 스펙터, 데스나이트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인위적이다.

마족이나 흑마법사들이 죽은 자의 시체나 영혼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것들.

'언데드는 확실히 아닌데···,'

마기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다.

'지원 요청을 해야 하나?'

그건 좋지 않다.

무능한 마법사로 찍힐 수도 있다.

그 와중에도 계속되는 소리.

츠피피핏! 콰지직! 츠피피릿! 콰지직!

점점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츠피피핏! 콰지직!

쿠쿵! 와르르르, 쿠쿠쿠쿵!

돌 더미가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미세하지만 땅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

츠치칫! 콰지지지직!

쿵쿵! 쩌적! 쿠쿠쿵!

시간이 흐르고,

거짓말처럼 소리가 멎었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광산 입구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안엔 아무도 없을 텐데, 모두 밖에 나와 있는데.

저 발소리는 뭐지?

광부들은 긴장했다.

감독관 얀스도 마찬가지.

3서클 마법사 게릭도 광산 입구 밖에서 우뚝 서 있었고.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만 울릴 뿐.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청년.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윤기가 잘잘 흐르는 피부.

감독관 얀스는 그 청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광부 중에 저런 놈도 있었나?

하지만 낯이 익다.

그래서 요모조모 뜯어봤는데.

"···로디?"

맞다.

그 로디였다.

갱도 사고로 사망 처리가 된.

"무, 무슨?"

죽어서 유령이 된 것이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비쩍 말라서 창백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얼굴은 살이 올라서 붉은빛을 띠었다.

또한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키.

흐읍!

로디는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외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신선하네."

아무리 공기 청정기를 가동했다 하더라도 바깥 공기에 비할까.

갑자기 햇빛을 보니 조금 눈이 부셨다.

스슷!

무한공간에서 명품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하고.

명품이 어디 선글라스뿐인가?

검정색 수트와 구두, 태주님이 하사하신 환상 여우 가죽 롱코트.

더불어 가슴팍에 착용한 바디캠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했다.

경지가 오르면 독령폰이나 이기어폰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을 텐데.

광부들은 완전히 변해버린 로디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바로 그때!

"저놈이 그 로디라는 놈이냐?"

마법사 게릭이 얀스를 보며 물었다.

"네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이리로 끌고 와서 무릎을 꿇려라. 물어볼 것이 많아."

"알겠습니다."

얀스는 자신의 심복 부하 광부들에게 눈짓했다.

먼저 앞으로 나가는 얀스.

동시에 넓게 퍼져 포위하는 부하 광부들.

"로디, 살아있었구나."

"내가 목숨이 좀 질겨서."

"그 신발과 옷은 어디서 났어? 얼굴에 쓴 건 또 뭐고?"

"왜? 탐나냐?"

"흐흐흐, 벌레 새끼, 대체 뭘 믿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츠피릿! 푸악!

감독관 얀스는 로디의 손에서 뻗어나는 은빛의 선을 목격했다.

그 선은 자신의 가슴과 이어져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 확인해보니.

"···헉!"

뭐지?

가슴에 나버린 주먹만 한 구멍.

여긴 심장이 있어야 할 부분인데.

왜 뚫려있지?

"어어어."

피도 흐르지 않고 고통도 없었지만, 점차 시야가 흐려졌다.

호흡도 불가능했다.

그저 어어, 소리만 내다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털썩!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광부들.

"으아아아아!"

"사, 사람이, 사람이 죽었다."

"로디가 사람을 주, 죽였···,"

한편 3서클 마법사 게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디를 보며 말했다.

"얀스를 죽였군."

"아아, 그동안 맺힌 게 많았거든. 순간적으로 욱하는 성질 때문에."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네가 감독관을 맡아라. 오늘 일은 문제 삼지 않겠다."

로디는 피식 웃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마법사 놈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뒤로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

"어이, 마법사! 지금 네가 하는 그거, 뭐든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큰일 나기 싫으면."

"응? 내가 뭘 한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게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엄청난 마나의 유동과 함께.

화르르륵!

로디의 머리 위쪽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

게릭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뒈져!"

화륵!

불꽃 덩어리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퍼엉! 콰콰콰쾅!

로디가 있던 자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얼굴이 후끈하다.

바위마저 녹여버리는 뜨거운 열기.

끝났다.

이 정도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게릭은 조소했다.

"낄낄낄! 멍청한 놈,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3서클 마법사를 상대하려고 해?"

광부들의 겁에 질린 표정.

"보아라! 이것이 마법사에게 덤빈 대가다."

역시 노예들은 힘으로 억눌러야 제맛.

그런데?

'···응?'

광부들의 시선이 이상하다.

놈들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뒤를 보고 있었다.

게릭은 고개를 돌렸다.

"다 했냐?"

"···헉!"

로디였다.

왜 등 뒤에 있지?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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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게릭은 로디가 감독관 얀스의 가슴에 구멍을 냈을 때부터 주문을 읊고 있었다.

나름대로 빠른 판단이었다.

놈은 마법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기사 일리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암살자?

어쨌든 강한 놈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즉시 시전 주문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다.

먼저 놈을 방심시켜놓고 몰래 거대한 파이어볼을 만들었다.

동시에 내리 꽂아버렸다.

그런데 왜 뒤에 있지?

등줄기가 오싹했다.

어떻게 피했는지 보지도 못했다.

"브, 블링크? 마, 마법사였어?"

"아닌데?"

"그럼 대체 무슨···,"

로디는 궁금했다.

혼원무상독령공 5성으로 몇 서클까지의 마법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태주가 지구에서 흑마법사들과 상대했다는 건 영혼 연결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는 그가 혼원무상독령공을 10성 대성한 이후, 그러니까 독령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당시의 태주는 7서클 흑마법사마저도 가지고 놀았던 수준.

너무 강했다.

그의 경험만으로는 데이터가 부족하다.

이왕 싸우는 김에 3서클 마법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자.

또 독공과 마법 간의 상성도.

환영미리보는 아예 인지하지도 못했다.

'블링크'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이게 전부야? 3서클이라면 제대로 된 마법사로서 한몫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파이어볼 수준이 영···,"

"닥쳐라!"

게릭은 다시 재빨리 주문을 영창했다.

가까이 있으니 방어주문을 우선적으로 완성하고.

"쉴드!"

지이잉!

그러고 나서 다음 마법을 준비하던 순간,

푸다다다닥!

게릭의 시야를 가리는 콩알만 한 금속 쇳덩이들.

"···어억!"

채채채채채챙!

쉴드가 순식간에 깨어지면서,

파바바바바박!

쇠구슬이 전신에 박혔다.

"끄아아아악!"

비폭의 위력에 나가떨어진 게릭.

로디는 이번에도 실망이다.

"쉴드가 왜 이렇게 쉽게 깨져? 유리창이야?"

"이, 이놈!!!"

너무 셌나?

힘을 뺀다고 뺐는데.

아니면 3서클이 너무나 약한 거겠지.

게릭이 쓰러진채 버둥거리며 말했다.

"나, 날 죽일 테냐? 배, 백작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백작가라, 그건 좀 무섭긴 하네.

"알았어. 대신 치료는 안 해줄 거야. 스스로 재주껏 살아 남아봐."

로디는 쓰러진 게릭을 내버려 두고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한편 게릭은 안도한 표정.

협박이 통했다.

당연히 백작가가 무섭겠지.

결국 놈은 애송이일 뿐이다.

'멍청한 놈!'

저러면 가만히 둘 거로 생각했나?

일단 몸을 추스르고 테일즈 백작가로 돌아간다.

그리고 통신용 수정구로 지원을 요청한다.

3서클 쉴드가 와장창 깨어졌지만, 그 덕분에 쇠구슬 공격은 그리 치명적이진 않았다.

쇠구슬이 피부에 박혔어도 주요 혈관의 손상은 없다.

'먼저 상처부터 치유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션을 꺼내는 게릭.

순간!

멈칫!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예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시커멓게 변색하기 시작하는 손끝.

툭!

데구르르르.

포션 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이, 이건?'

독이다.

놈이 던진 쇠구슬에 독이 묻혀있었다.

"포이즌 큐어! 포이즌 큐어! 포이즌 큐어···,"

게릭은 남은 마나를 총동원해서 해독주문을 시전했다.

"···후우!"

살 것 같다.

굳었던 손가락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포션병을 주우려고 엉금엉금 기어갔는데.

"커헉!"

다시 가슴에 느껴지는 격통.

"제, 제기랄!"

독은 전혀 해독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무서운 기세로 심장의 마나 고리를 공격해왔다.

째앵!

고리 하나가 부서졌다.

"끅!"

미친!

무슨 독이 서클을 파괴해?

이런 독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째앵!

하나 더,

"켁!"

째앵!

3개의 고리가 모두 사라졌다.

"푸웁!"

게릭의 입에서 검고 찐득한 피를 뿜어졌다.

동시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숨은 이미 멎어있었다.

광산 관리인이 죽었다.

무려 마법사 말이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광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로디도 게릭이 죽었다는 걸 알았다.

먼발치에서 놈이 쓰러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해독했다면 살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독을 해독하지 못했다.

놈은 겨우 3서클 마법사.

자신의 경지를 확인하기엔 너무나 모자란다.

5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해독주문을 시전한다면 모를까.

로디는 광산 관리인의 거처이자 광산에서 캐낸 마정석을 보관하는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 가득 들어찬 마정석 상자들.

중급부터 최상급까지 등급별로 나뉘어 있었다.

'다 쓸어 담자.'

중급은 엘리트 마나 결정체 수준.

상급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가장 귀한 최상급 마정석은 지구의 비욘드 마나 결정체 품질과 비등하다.

수량도 몇 개 없다.

'중급은 내가 팔아서 쓰고 상급과 최상급 위주로 보내드려야지.'

태주님에게 너무 많은 걸 받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보답할 방법이 변변치 않았다.

지구와 선계는 거의 대등한 가치로 서로 물건을 주고받았는데.

로디는 중급, 상급 마정석 상자들을 무한공간에 집어넣었다.

몇 개 안 되는 최상급 마정석도.

'이제 도시로 나가볼까?'

만나볼 사람이 하나 있다.

그에게 물어볼 것도 많고.

귀에다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을 착용하는 로디.

무한공간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미리 다운된 음악을 재생했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역시 삼한의 S팝이 최고다.

※ ※ ※

리치홀 시(市)는 테일즈 백작의 영주관이 있는 중심 도시.

요즘 리치홀의 분위기가 흉흉하다.

성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에 대해 검문 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시가지엔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수시로 순찰을 다닌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그대로 끌려갔다.

북쪽 산맥에 위치한 테일즈 마정석 광산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감독관이 살해당하고 관리자로 파견된 3서클 마법사마저 죽었다.

채굴해서 보관해둔 마정석도 털렸고.

광부들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상태.

물론 멀리 가지 못하고 하나둘씩 잡혀 왔다.

그 와중에 알게 된 사실.

이번 사건의 주범이 고작 20살밖에 안 된 광부 로디였다.

'로디라,'

고리대금업자 피트 도노반은 금방 이름을 기억했다.

테일즈 광산의 거의 모든 빚 노예 광부들은 자신이 다 집어넣었다.

빚 노예 중에서도 로디는 매우 어렸던 놈.

'아마 그때가 15살이었지?'

그래서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헌데 이런 사고를 칠 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3서클 마법사마저 죽이다니.

광부 주제에 어떻게?

'쯧, 골치 아프군.'

피트는 단순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다.

테일즈 백작가 소속 정보 암살 길드의 수장.

음지에서 비밀스러운 일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빚 노예들을 만들어 광산으로 보내는 일도 백작가의 지시를 받고 하는 작업이었다.

'무조건 잡아야 해.'

이미 벌어진 일이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은 사후 처리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페론 테일즈 백작의 신임을 계속 받을 수 있다.

피트 도노반은 서둘러 자신의 은밀한 거처로 돌아왔다.

길드의 주 수입원 중의 하나인 고급 살롱의 술을 보관하는 지하실.

술 보관실엔 오직 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 맞은 편에 놓인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그 안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는 피트.

여기에 로디에 관한 정보가 있을 것이다.

"어디 보자, 여기 있을 텐데···,"

피트는 서류를 몇 번 뒤적뒤적하다가 종이 한 장을 쑥 빼냈다.

"찾았군."

바로 그때!

"찾았어?"

흠칫!

피트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방안엔 자신 말고도 누군가 있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봤는데,

"넌···,"

회색 코트를 입고 있는 앳된 얼굴의 청년.

보자마자 알았다.

"로, 로디?"

"어, 맞아. 눈썰미가 좋네."

"···."

"그 서류 뭉치들, 이리 가져와."

피트는 고민했다.

어떡하지?

잡을 수 있을까?

놈은 3서클 마법사도 죽였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분명 한 수가 있을 터.

우선 달래나 보자.

애송이니까.

"서류를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걸? 오히려 절망스러울 거야."

"그건 내가 판단해. 빨리 가져와. 말로 하는 건 여기까지야."

"···."

피트는 로디에게 서류를 건넸다.

묵묵히 서류를 읽는 로디.

내용은 간단했다.

평범한 자들을 빚 노예로 만드는 과정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그 평범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가족이었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쓴 아버지.

하지만 치료사들도 백작가 소속이었기에 돈만 받아먹고 의도적으로 병을 방치했다.

치료비로 지불한 돈은 다시 고리대금업자 피트의 주머니로 돌아갔고.

헛돈을 쓴 셈.

억울하게 빚을 진 아버지는 광산으로 끌려가셨다.

그러나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셨고, 마침내 빌린 돈도 다 갚으셨다.

하지만 이 지독한 새끼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있나?

사고로 위장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있지도 않은 빚을 로디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리하여 로디도 아버지를 대신해 빚 노예로서 5년 동안 광산에서 일한 것이고.

희생자는 로디 가족뿐만이 아니다.

광산 노동자 대부분이 비슷한 방식으로 광산에 끌려왔다.

그 모든 과정이 테일즈 백작가의 지시하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마정석 광산은 큰 수익이 나지 않는다.

노동환경이 좋지 않아서 인건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워프 왕국에서 값싼 마정석을 수입해서 쓰는 게 더 합리적.

그러나 테일즈 백작가는 마정석 광산을 직접 운영했다.

이렇게 공짜 노동력이 있으니까.

'후우.'

피트만 죽이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원흉은 테일즈 백작가.

고리대금업자 피트 도노반은 놈들의 하수인.

예상도 못 했던 사실이었다.

'산 넘어 산이군.'

로디가 고민에 빠져있자, 지켜보던 피트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읽어봤다면 잘 알겠지. 로디야,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단지 백작님 명령에 따른 거···,"

순간!

츠핏!

푸욱!

뜨끔!

피트는 자신의 인중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가늘고 얇은 바늘 같은 것.

그런데 움직일 수 없었다.

발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게다가 은은하게 밀려오는 어지럼증.

"피트라고 했지? 넌 곱게 죽으면 안 되겠다."

"자, 잠깐!"

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는 피트.

"으으으···,"

혀가 굳기 시작했다.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변했다.

"···독?"

"꿈틀거려봐,"

"아, 안돼."

피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털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실 마법사 게릭은 빠르게 죽인 편이었다.

해독주문이 성공했다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원한이 없었으니까.

그저 잘못된 장소에 있었을 뿐.

하지만 피트 도노반, 이놈은 다르다.

부모님의 원수, 자신을 5년 동안이나 광산에서 썩게 한 원흉.

그래서 아주 천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록 독을 조절했다.

"끄억! 끅, 끅···, 사, 살려줘."

눈코입에서 흘러나오는 피.

"헉, 허어어억, 제에발, 끄어어어···,"

피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바닥을 기었다.

아주 천천히, 내장이 몽땅 녹아내릴 때까지.

로디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을 회상하면서.

복수는 후련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이걸 보시지 못한다는 거.

피트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체는 무한공간에 넣었다.

※ ※ ※

로디는 피트가 운영하던 고급 살롱 밖으로 나왔다.

마법사들과 기사, 병사들이 거리에 쫙 깔렸다.

하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역용술과 축골공은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슴에 바디캠을 달고 한참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로디는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앉아 식사 대용으로 무한공간에서 선도 하나를 꺼내 으적으적 씹어 삼키고는,

'선택해야 해.'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하수인인 피트를 죽인 걸로 만족하느냐, 아니면 바로 테일즈 백작가로 쳐들어갈 것이냐.

자신은 혼자다.

혼원무상독령공을 익혔지만 5성에 불과했고.

반면 페론 테일즈 백작은 7서클의 마법사.

그가 보유한 영지군도 있다.

기사와 병사들, 3서클에서 5서클의 마법사 부하들이 수두룩하다.

한마디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

여기서 물러나?

어림도 없는 소리.

무조건 죽인다.

7서클의 마법사?

체계적으로 훈련된 군대?

전혀 두렵지 않다.

"난 혼자가 아니야."

함께 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로디는 스스로에게 혼잣말로 다짐하듯 말했다.

"지구의 절대독마 태주님, 강호의 절대독마 독선님, 그리고 선계의 신선님들도 있잖아."

뭐가 두려울까?

고작 7서클 따위에게 겁먹고 도망친다고?

"쪽팔리는 짓은 하면 안 돼. 난···, 미테란의 절대독마니까."

바로 그때!

찌르르르르!

태주님에게서 온 배송 신호.

'왔구나.'

공유창고에서 물건을 빼고, 마정석 상자들을 집어넣고, 지금까지 바디캠으로 찍었던 영상이 담긴 스마트폰도.

이제 물건을 확인해보자.

"···오!"

마침 가장 필요했던 물건들이 도착했다.

보더 더 강력한 독물들과 선계의 보패 신령비도, 그리고 단주 선인의 부적.

이길 수 있다.

싹 쓸어버릴 수 있다.

강호의 절대독마 당군악처럼.

그가 제갈 세가를 멸문시켰던 방식으로.

'먼저 6성 달성부터.'

독정의 힘을 한 단계 더 키운다.

그리고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 ※ ※

선계 멀티플렉스 상영관.

영화 한 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관객들이 가득 들어찼다.

어느덧 영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복수에 성공한 주인공.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진정한 흉수는 따로 있었다.

섣불리 맞서기 힘든 강력한 적이.

저대로 포기하나?

아니었다.

다짐하듯 그가 내뱉은 대사.

- 난 혼자가 아니야.

- 지구의 절대독마 태주님, 강호의 절대독마 독선님, 그리고 선계의 신선님들도 있잖아.

- 쪽팔리는 짓은 하면 안 돼. 난···, 미테란의 절대독마니까.

영화가 끝났다.

짝짝짝!

검선이 먼저 기립했다.

감동의 손뼉을 치면서.

"최고다, 로디!"

뒤를 이어 줄줄이 일어나는 사람들.

짝짝짝, 짝짝짝짝짝···,

기립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얼굴도 잘생겼어."

"역시 태주 대협과 같은 영혼이야."

"암! 독선과는 차원이 다르지."

"진짜 같은 영혼은 미테란 차원에 있었군. 선계가 아니라."

한 인간이 성장하는 자전적인 다큐 영화.

하지만 불만도 있었다.

"그런데 감독관 얀스나 마법사 게릭, 고리대금업자 피트가 죽는 모습은 왜 편집됐어? 쓰러지는 모습만 보여주고 말이야."

"맞소. 똥 싸다가 중간에 끊은 느낌이야."

"잔인해서 그런가? 내가 애도 아니고."

"페론 테일즈, 그 새끼 죽는 모습은 상세하게 보여줬으면 좋겠네."

당연히 반론도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사람이 죽는 걸 보고 박수치는 건 아니지."

"하긴···, 흉측하긴 하오."

"딱 이 정도가 좋아."

"빨리빨리 복수 마무리하고 힐링 스토리로 넘어갑시다."

"태주 대협, 다음 화는 언제 상영하오?"

"글쎄요. 한 일주일 뒤?"

선계에서도 미테란 대륙의 로디 이야기는 화제 만발이었다.

날것 그대로의, 리얼 버라이어티 영화였으니까.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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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란 대륙의 모든 영지가 그렇듯,

카두인 왕국 테일즈 백작령도 철저하게 폐쇄된 공동체였다.

신분의 구분도 엄격하다.

귀족이 아닌 평민끼리도 그렇다.

개척마을이나 화전민촌에 사는 사람들은 성 주변에 사는 사람보다 못하다.

성 밖의 사람들과 성벽 안에 사는 시민의 지위도 다르다.

도시 안이라고 차별이 없을까?

리치홀 시는 전형적인 이중 성곽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외성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 중앙에 위치한 높고 평탄한 언덕, 그 위에 내성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내성 안에 사는 사람과 외성 안에 사는 사람도 구별된다.

또한 내성 안에 위치한 세 번째 성.

바로 영주관.

페론 테일즈 백작과 그 가족들이 사는 거처.

경비 임무를 맡은 기사와 병사들, 마법사들이 설치한 마법진,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철통같은 요새였다.

로디 또한 저 영주관에 직접 들어가는 건 힘들다.

들어갈 생각도 안 했다.

굳이?

그가 주목하는 건 수도교.

사람이 살기 위해선 물이 필요하다.

북쪽의 산 위에 형성된 호수의 깨끗한 물이, 높게 세워진 수도교를 타고 외성과 내성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론 수원지의 방비는 엄중하다.

뿐인가?

수도교 위에도 각종 마법진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정화 마법진, 해독 마법진, 안티 매직 마법진···,

로디가 그 수도교 위에 있었다.

가슴에 투명부를 붙인 채로.

안티 매직 마법진이 작동할까?

절대 감지할 수 없다.

신선의 술법과 마법은 근본부터 다르다.

단주 선인이 만든 부적을 마법 따위가 어떻게 간파해?

로디는 수도교에 손을 담궜다.

얼마 전에 혼원무상독령공이 6성으로 올랐다.

화경 직전의 경지.

덕분에 독정의 크기가 훨씬 더 커졌다.

집어넣을 독기는 아주 약하게, 은밀하게, 있는 듯 마는 듯,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게끔, 대신 독정을 텅텅 비울 정도로 많이.

하루에 한 번 투명부를 붙이고 수도교 위에 올라 독을 풀었다.

그 이튿날도, 다음 날도, 일주일 동안 계속.

그러나 이 독으로 죽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독의 주요 성분은 변종 3줄 무늬 모기 독과 강호의 산공독을 섞은 것.

마나를 가진 사람에게만 작용한다.

약효도 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아마 한 달 정도?

대상은 기사와 마법사들이다.

그들을 완전하게 무장해제 시킨다.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만든다.

자신들이 중독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후일 터.

※ ※ ※

리치홀 내성에 위치한 영주관.

7서클 마법사 페론 테일즈 백작은 건물 최상층 꼭대기 테라스로 나와 밑으로 펼쳐진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웅다웅 열심히 살아가는 영지민들.

충직한 노예들이다.

저놈들이 있어야 테일즈 가문의 영광과 부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

자신에겐 똑같지만 노예들에게도 급이 있다.

내성에 사는 노예, 외성에 사는 노예, 성 주변에 사는 노예, 성 멀리에서 사는 노예, 화전촌 노예, 개척촌 노예.

페론 테일즈 백작도 노예들의 급수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우를 해줬다.

그래야 통치하기 편하다.

일종의 갈라치기 전법.

노예가 노예를 막아준다.

반란?

일어나면 뭐 해?

상위 노예가 하위 노예들을 알아서 진압해 줄 텐데.

자신들이 가진, 한 줌도 안 되는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런데 이 평화롭던 테일즈 영지에 문제가 생겼다.

벌레만도 못한 빚 노예 광부 한 놈이 관리자를 죽이고 마정석을 털어 도망친 것.

'감히···,'

그깟 마정석이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백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광산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건 치욕적이었다.

빨리 잡아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페론 테일즈는 테라스에서 방으로 돌아와 집무실 의자에 앉아 그를 보좌하는 집사에게 물었다.

"피트는? 아직도 연락이 없나?"

"네, 하지만 반란자를 추적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염려 마시옵소서. 곧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흐음."

반란자의 이름은 로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단검과 쇠구슬로 날려 관리자와 감독관을 죽였다던데.

그렇다면 암살 계통의 기술을 익혔을 터.

더불어 심계도 깊은 것 같다.

무려 5년 동안 광산에서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살아왔다는 뜻.

뭐, 아무리 강해봤자 7서클 마법사 페론 테일즈에겐 손끝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는 허약한 벌레일 뿐, 사실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찾으면 생포할 필요 없이 바로 죽이라고 전해."

"네!"

"목만 잘라서 가지고 오도록."

시간이 흐르고,

페론 백작은 로디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영지의 지배자로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변고가 발생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질병이 퍼진 것.

먼저 기사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간단한 질병이었다.

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기 불편한 정도?

열도 나지 않았고.

그 정도야 치료하면 되지.

치료사들을 불러 약을 지어 먹였다.

그다음 날.

이번엔 마법사들이 쓰러졌다.

전염병인가?

이러면 골치 아픈데.

즉각 병자들을 다른 곳에다 분리했다.

또 다음날.

기사와 마법사들의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더더욱 악화됐다.

심지어.

"···서클이 깨졌다고?"

"그, 그렇습니다."

서클이 부서지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무리한 마나 운용으로 서클이 깨질 수는 있다.

그러나 병 때문에 그리되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저주나 독 쪽으로 조사해봐."

"이미 하고 있습니다만···,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아서."

"허허,"

쓰러진 자들은 마법사들.

3서클이 되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이 포이즌 큐어, 해독 마법, 또한 저주라도 사제가 신성 마법을 펼치면 금방 해제된다.

"앞으로 음식과 물을 마시기 전에 해독 마법을 먼저 사용하라고 해. 창고를 열어 해독 주문 스크롤도 나눠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라넬리아 성교의 사제님들을 모셔와."

영지 신전의 사제들이 도착했다.

효과가 있었다.

신성 마법 치유 주문을 사용하니 쓰러졌던 마법사들이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일시적인 효과였을 뿐.

다음 날 더 많은 숫자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쓰러졌다.

5서클 마법사인 집사도 쓰러졌다.

페론 테일즈의 아내와 자식들도 포함됐다.

대체 원인이 뭘까?

독이라면 일반인들도 영향을 받아야 하는데,

내성의 일반 시민들과 하인들은 멀쩡했다.

외성의 상황도 마찬가지.

오직 기사와 마법사들만.

급기야 사제들마저 쓰러졌다.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이 쓰러졌다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밀려드는 공포감.

'설마?'

페론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가족들을 비롯해 기사와 마법사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있는데 자신은?

조용한 집무실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7개의 서클을 하나하나 돌려봤다.

우우우우웅!

"아!"

그리고 발견했다.

워낙 미세해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서클의 마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이물질을.

"포이즌 큐어! 포이즌 큐어! 포이즌 큐어···,"

해독 주문을 연달아 시전했다.

그러자 이물질이 점차 사라지는 듯 했는데.

"이런!"

자신이 발각된 걸 알아차렸는지, 두 배로 증식해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달려드는 기운,

미치고 환장할 노릇.

영지의 사제들도 쓰러져 신성 마법도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탈출 러시가 시작됐다.

병사들이 겁에 질려 도망갔다.

관리와 부유층 상인들도.

내성이 텅 비었다.

외성의 시민들도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페론 테일즈 백작은 증상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7서클 마법의 힘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그도 속수무책, 방법이 없는 건 매한가지.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야.'

분명 누군가 있다.

질병이든, 독이든, 저주든.

이렇게 만든 원흉이.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페론은 통신 수정구를 통해 라넬리아 성교 대신전에 연락을 취했다.

추기경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자.

- 악마의 저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마족이나 흑마법사 같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는지.

"성녀님을 파견해 주십시오. 되도록 빨리."

- 흐음, 그분은 워낙 바쁘신 몸이라,

"제가 그동안 교단에 많이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듣기로는 대신전을 증축하실 계획이라고···,"

- 허허, 백작님이 그걸 어찌 아시고?

흥정이 시작됐다.

성녀를 불러오는 대가.

돈이면 다 되는 거지.

- 알겠습니다. 백작님, 성녀님에게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됐다.

성국 대신전의 성녀.

라넬리아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분.

그녀라면 질병도, 독도, 저주도, 모조리 완치시킬 수 있을 터.

페론 테일즈 백작은 영주관에서 홀로 남았다.

성녀 일행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면 금방 오실 텐데.'

하지만 그를 찾아온 자는 성녀가 아니었다.

※ ※ ※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착용하고,

지구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로디는 내성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텅텅 비어있었다.

일반 병사들과 하인, 하녀들이 몇몇 남아있었지만 그들이야 위협조차 되지 않으니.

독의 효과는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럴 수밖에.

강호의 절대독마 당군악이 익힌 혼원무상독령공.

지구의 절대독마 김태주가 익힌 혼원무상독령공.

미테란의 절대독마 자신이 익힌 혼원무상독령공.

모두 각각 출발점이 달랐다.

셋 중에서 가장 특혜를 받은 사람이 바로 로디 자신.

처음 배울 때부터 선도를 섭취했다.

따라서 조화의 선기는 독정과 결합하였고.

보통 독정이 아니다.

선기가 합쳐진 조화의 독정이다.

그 독정이 만들어낸 독을 마법 주문으로 해독할 수 있나.

삐걱,

로디는 영주관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긴 대전의 끝.

높은 단상에 놓인 의자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페론 테일즈 백작이었다.

페론은 누군가 영주관 문을 열고 저벅저벅 걸어올 때부터 직감했다.

아무리 지키는 이가 없다고 한들 영주관에 서슴없이 들어와?

그렇다면 저놈이다.

자신의 영지를 이렇게 만든 원흉.

하지만 낯선 얼굴.

입고 있는 옷도 특이했다.

귀에는 뭘 꽂은 거지?

페론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놈을 향해 물었다.

"너로구나. 이런 짓을 벌인 놈이."

"맞아. 내가 했어."

"···이유가 뭐냐? 과거에 나와 만난 적이 있나?"

"아니, 오늘 처음 봐."

"그럼 대체 왜?"

"너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 넌 알지도 못하겠지만."

로디는 무한공간에서 고리대금업자 피트의 시체를 꺼냈다.

털썩!

페론 백작은 피트의 시체를 유심히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알만하군. 빚 노예였어. 네가 광산 관리자를 죽인 로디?"

"생각보다 똑똑하네. 맞아. "

"평범한 벌레가 아니었군. 독을 잔뜩 품었어."

"오! 나에 대해 잘 아는구나."

스슷!

로디의 손에 나타난 유엽비도.

길게 끌 생각은 없다.

빠르게 끝내자.

먼저 찍먹부터 해볼까?

츠피릿!

잔영을 남기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비도.

"쉴드."

지잉!

동시에 페론 백작의 몸 위에 씌워지는 반투명한 보호막.

채챙!

유엽비도가 막혔다.

찌직,

깨어지진 않았지만 쉴드에 금이 갔다.

역시 7서클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아이스 스피어."

그 틈을 노려 페론이 발현한 거대한 얼음창이 로디에게 쏘아졌다.

쐐애애액!

스스슷!

마법이야 환영미리보로 가볍게 피하면 그만.

페론이 의자에 앉은 채로 주문을 영창했다.

"슬립! 일루젼! 블라인드!"

정신에 작용하는 제어 마법도 소용없었다.

선기가 막아주니까.

당황한 표정의 페론.

마법이 안 통해?

방심할 놈이 아니다.

츠피릿!

이어지는 로디의 일섬 공격.

"블링크!"

팟!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하는 페론.

'쯧!'

태앵!

암기가 목표물을 잃고 의자에 박혔다.

제일 성가신 마법.

혼원무상독령공이 7성만 되어도 블링크 마법 따윈 아무것도 아닌데, 독기를 이용해 암기를 유도할 수 있으니까.

"아이스 필드!"

쩌저저적!

바닥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동이 어려울 정도로.

뒤를 이어, 셀 수도 없는 빙결 마법이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파바바바박!

아이스 필드로 움직임이 제한된 로디.

블링크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페론.

하지만 로디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스릇!

그의 손에 들린 신령비도.

태주님이 보내 준 철장선인의 보패.

츠피릿!

영주관 대전에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쉴드!"

채챙!

페론의 쉴드가 유리창처럼 깨졌다.

그것도 모자라 신령비도가 다시 선회하면서 달려들자.

"헉!"

페론이 대경실색하면서 블링크 주문을 연달아 외쳤다.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하지만 신령비도는 집요하게 쫓았다.

츠핏! 츠피핏!

그리고 혈접.

수십 마리의 혈접이 허공에서 나풀나풀 날았다.

너무나 느리기에 암기 같지 않은 암기.

신령비도를 피하느라 정신없는 페론은 혈접을 인지하지 못했다.

인지했더라도 진짜 나비인 줄 알았을 터.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팟팟팟팟!

패론이 신령비도를 떨치기 위해 블링크로 이동한 바로 그 자리에,

때마침 날아가던 혈접이,

사뿐!

페론의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쿡!

동시에 혈접의 더듬이가 페론의 정수리를 찔렀다.

"윽!"

독기가 주입됐다.

페론이 서둘러 머리에 앉았던 혈접을 잡아챘지만,

"끝났네."

로디는 히죽 웃었다.

"···뭐?"

순간!

순식간에 밀려오는 격통.

"어억, 으으으···,"

페론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째앵!!!

그동안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서클의 고리하나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커헉!"

츠핏!

동시에 공중을 떠돌던 신령비도가,

푸욱!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페론은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블링크 시전이 안 된다.

쉴드도 펼칠 수 없었다.

마나 로드가 딱딱하게 굳었다.

"아, 안 돼!"

다 신령비도 덕분이다.

독령을 깨우치기 전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대안.

로디는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

스슷!

비도를 손에 쥐고.

"유언이 있으면 지금 말해."

"자, 잠깐···,"

그때였다.

"멈춰!!!"

어느새 영주관 입구에서 나타난 여인 하나.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성기사와 사제들.

로디는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알았다.

'···성녀?'

성녀는 바닥에 쓰러진 고리대금업자 피트의 시체와 입에서 피를 흘리는 페론 백작을 힐끗 보면서 로디를 추궁했다.

"너어, 정말 악독한 새끼구나. 영지에 저주를 내리고 사람을 죽이다니."

로디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이때 성녀가 나타나다니.

복수를 끝내기도 전에.

"···성녀님께서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복수라서요."

"그건 나중에 판단할 일이고 손에서 흉기부터 내려놔."

"싫다면?"

"거룩한 라엘리아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려주지. 후끈하게."

이대로 물러서?

천만에.

"그럼 해보시던가."

"흥! 난 분명히 경고했다? 야! 다들 저 새끼 잡아!"

척척척척!

성기사들이 방패와 검을 들고 로디의 주변을 포위했다.

페론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로디를 조롱했다.

"껄껄껄껄, 벌레 새끼야! 뭐? 끝났다고? 끝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씨발!

좋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간다.

성국과 원수가 되어도 할 건 한다.

바로 그때!

화아악!

성녀의 전신에서 솟아나는 빛.

"어머?"

성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현상은 라넬리아님의 계시인데.

갑자기?

"···네?"

성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했다.

"아아,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 아뇨, 나쁜 새끼는 맞지만 그래도 귀족이라, 헉!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죄, 죄송해요. 네? 사과는 저분에게 하라고요? 네네, 아, 알아서 잘 모실게요."

얼굴이 빨개진 성녀.

잠시 머뭇거리더니 로디에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와서 치마를 잡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호호호, 안녕하세요. 귀인님, 전 성녀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완전하게 달라진 그녀의 태도.

"···어, 전 로디라고,"

"와! 이름도 좋으시네요. 귀에 착착 감겨요."

"···."

이건 또 뭐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페론 백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서, 성녀님, 저 천한 놈에게 왜?"

"닥쳐! 확 입을 꿰매기 전에!"

"···네?"

그리고 다시 로디를 보며,

"로디님, 제가 대신해드릴까요?"

"뭘?"

"이 새끼 죽이는 거요."

"···성녀님께서 직접요?"

"어머? 성녀라고 사람만 살리는 건 아니랍니다. 때로는 죽이기도 해요."

성녀가 왜 이러는지 알만하지만,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길 순 없지.

"제가 할게요."

"넵!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하게 일 보시고 나오세요."

성녀와 성기사들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아무튼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

멍하니 입만 떡 벌리고 있는 페론 백작.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웬만한 왕국의 국왕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성녀인데.

저 빚 노예 따위에게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

로디가 페론 가까이 다가갔다.

"지옥이라고 들어봤어?"

"지, 지옥?"

"악한 놈들을 벌주는 곳이지. 네가 지구에서 태주님에게 죽었다면 지옥에 떨어져 수천 번 죽었다, 살았다 하면서 대가를 치렀을 텐데,"

페론의 머리에 손은 얹는 로디.

"여긴 미테란이니까,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다."

"···제, 제발!"

"하지만 낙원은 절대 아닐 거야."

"살려···,"

우우우웅!

독기 방사가 시작됐다.

독정의 모든 독이 페론의 몸으로 주입됐다.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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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테란 대륙, 인간계의 신, 라넬리아는 여느 때처럼 만신계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드래곤 하트와의 연결도 끊긴 상태.

주신께서 허락한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더는 지구의 모습을 관찰할 수 없었다.

그럼?

지금 다스리는 인간들이나 살펴봐야지.

그러다 순리를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개입하고.

원래 자신이 관장하는 종족 사회라 할지라도, 직접 개입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대신 대리인을 통한 간접 개입은 허용된다.

주신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만신계 각 신들도 종족별로 딱 한 명씩의 대리인을 두어, 소통하고 있는 중.

다만 개입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계시를 남발하면 안 된다.

라엘리아의 대리인은 성녀 베로니카였다.

성녀라고 하면 아름답고 유순하며, 자애롭고 희생적인,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틀린 말은 아니다.

베로니카 이전의 성녀들은 그러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실패를 맛봤다.

교활한 인간 사회의 권력자들에게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휘둘리고, 조종당하고, 강요당하고···.

그래서 성녀 베로니카는 강하게 키웠다.

처음부터 기질이 드세고, 심지가 굳건한 아이를 선택했다.

살짝 양아치 기질이 있긴 해도···,

뭐, 전대 성녀에 비하면 훨씬 낫지.

요 며칠 성녀에게 조금 소홀했다.

지구를 관찰하느라 바빴던 탓에.

이제 시간도 생겼겠다, 오랜만에 성녀 베로니카의 눈을 통해 미테란의 인간 사회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응? 저주?'

성녀가 추기경의 부탁을 받고 파견 나갔다.

카두인 왕국 테일즈 백작령에 발생한 악마의 저주를 조사하는 임무.

'악마의 저주라···,'

아무리 마족 새끼들이 음흉하다고는 하나, 악마를 인간계에 함부로 강림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대전쟁의 빌미가 생긴다.

라엘리아도 인간계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게 되는 셈이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진짜 악마의 저주인지, 아니면 악마의 저주를 가장한 인간 사회의 계략과 권모술수인지.

보통은 후자일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맛?"

옆으로 드러누운 채 베로니카와 함께 시야를 공유하던 라엘리아가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쟤는 누구야?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일단 입고 있는 복색.

익숙한 롱코트와 안쪽에 입은 옷.

움직이기 편하게, 장인 정신으로 한땀 한땀 정성껏 만든···,

'트레이닝복?'

게다가 귀에 착용하고 있는 물건.

격렬한 전투로 한쪽은 땅에 떨어져 있었지만 한쪽은 귓구멍에 꽂혀있다.

'브, 블루투스 이어폰이구나.'

미테란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물건.

게다가 저 청년이 사용하는 기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스르릇, 나타나는 단검과 금속체들.

'서,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틀림없다.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김태주.'

지구의 반신급 초월자.

라엘리아는 두 손을 불끈 쥐고 외쳤다.

"영혼 연결!"

지구의 김태주와 같은 영혼이 미테란에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저 청년이 바로 그 영혼이고.

그런데 이게 웬일?

성녀와 청년의 만남이 처음부터 삐걱댔다.

- 너어, 정말 악독한 새끼구나.

- 거룩한 라엘리아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내려주지. 후끈하게.

아니, 저것이 미쳤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고 해?

꿈에도 그리던 지구와의 연결이 성사된 판에.

그래서 라엘리아는 즉시 베로니카에게 계시의 권능을 펼쳤다.

비록 개입 가능한 횟수가 줄어들겠지만 이럴 때 사용하지 언제 사용해.

[야이, 베로니카 망할 것아! 죽을래? 다시 성력을 거둘까? 그 청년이 누군지 알고 까부니?]

[미친년이, 지금 저 백작 새끼 살리는 게 그렇게 중요해? 딱 봐도 나쁜 새끼잖아.]

[어이구,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 말고 당장 저 청년에게 사과해.]

[좋아, 일단 자리를 비켜주고, 밖에 나가서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꾸나.]

판이 바뀌었다.

인간 사회에 변화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계기가 마련된 것.

할 수 있는 만큼 해줘야 한다.

저 로디라는 청년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를 수 있게.

'뭘 먼저 해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라엘리아 성교 대신전이 미테란에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계시의 유지 시간이 끝나기 전에,

라엘리아는 베로니카에게 빠르게 몇 가지 지시했다.

※ ※ ※

로디는 페론 백작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독을 너무 많이 주입한 탓인지, 그대로 녹아버린 놈.

복수는 다 끝났다.

페론의 자식들이 있지만 그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생각.

아비의 잘못을 자식들이 물려받을 필요가 있나.

뭐, 복수하겠다고 찾아오면 상대는 해주겠지만.

'자, 이제 뭘 한다?'

할 일이야 많다.

복수는 목표 축에도 들지 못했다.

앞으로의 행보에 장애물 정도 치웠을 뿐.

그것도 태주님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받은 것이 너무 많아.'

많은 정도가 아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다.

적어도 균형은 맞춰야 한다.

현재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건 공유 창고를 통한 문명과 문명 간의 교류.

미테란 대륙에서도 지구와 선계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텔레포트 마법진에 대한 지식을 지구에 넘겨준다면?

교통과 물류의 혁명이 일어나겠지.

마법이란 학문 그 자체, 마법 연금술, 각종 일상생활에서 쓰는 마도구, 도움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려면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부와 권력 말이다.

'태주님처럼 상단을 만들면···,'

지구의 물건으로 돈을 벌어서 미테란 대륙의 경제를 장악하는 방식.

'후우, 쉽지 않아.'

그렇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미테란 인간 사회는 신분제가 중심이 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마법을 도구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귀족들.

세상은 그들 위주로 돌아간다.

평민으로서 귀족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지면 매우 위험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대륙 전체와 상대해야 하고.

'확 뒤집어엎어? 어차피 신분 해방은 이루어져야 하잖아.'

일단 성녀 베로니카를 만나보자.

자신을 기다린다고 했으니.

삐걱,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니.

"로디님!!!"

다다다닥,

반색하며 달려오는 성녀 베로니카.

"일은 잘 보셨어요?"

"네, 덕분에."

"혹시 향후 일정은 어떻게?"

"글쎄요. 딱히 정해진 건 없습니다만."

"아! 그럼···,"

베로니카가 갑자기 로디 곁으로 다가왔다.

화악!

붉어지는 로디의 얼굴.

20살이라도 여자의 향기를 이렇게 가까이서 맡아본 적은 처음.

"제가 제안 하나 드려도 될까요? 로디님께 도움이 될 거예요."

"···들어는 보죠."

베로니카가 품에서 주섬주섬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미테란 대륙의 지도랍니다."

"그러네요."

커다란 지도였다.

엄혹한 추위의 북부 그린스킨 구역, 동북쪽은 우드 엘프의 대삼림과 다크 엘프의 어둠 숲, 서남쪽은 드워프들이 사는 대산맥, 수인들이 사는 대고원, 그밖에 리자드 족, 고블린 왕국, 뱀파이어 지하 세계 등등, 수많은 종족과 그들이 사는 지역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인간이 사는 지역은?

남쪽의 대평원지역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인간의 대평원이 작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구의 유라시아 대륙만 한 크기.

인간이 사는 구역만 그렇다.

그런데 왜 베로니카는 지도를 꺼냈을까?

로디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여기가 우리 라엘리아 성국이예요. 아시다시피 성국은 엘페스타 왕국 안에 있고요."

라엘리아 성국, 혹은 라엘리아 대신전.

국가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중소 도시 정도의 크기로 그리 넓지도 않다.

지구로 따지면 이탈리아 안에 있는 바티칸 시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터.

그런 이유로 엘페스타 왕국과 라엘리아 대신전은 서로 공생관계.

대륙 최약체로 분류되는 국가가 바로 엘페스타 왕국이다.

흔한 마탑 하나 없다.

그러나 라엘리아 대신전 때문에 타국에게 침략당할 일이 없고, 대륙 곳곳에서 신도들이 신전을 방문하기에 관광 산업으로 먹고사는 나라.

"제가 엘페스타 왕국의 국왕과 잘 아는 사이거든요."

그렇겠지.

대신전이 없으면 금방 망했을 나라니까.

"자! 골라 보세요. 여기, 여기, 여기, 이 세 곳이 왕국이 직접 관리하는 직할지랍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영지들이고요."

"네? ···영지를 준다고요?"

"대신전 차원에서 국왕에게 부탁하면 즉시 영지가 수여될 겁니다. 이곳에서 시작해 보심이···,"

"아!"

무슨 뜻인지 알겠다.

아마 라엘리아 신의 의도일 터.

그녀도 지구와 미테란의 교류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그 기반을 영지에서 쌓으라는 거겠지.

"제가 추천하는 곳은 바로 여깁니다. 인구가 가장 많은 영지고, 교통이 좋아서 상업도 발달했거든요."

하지만 문제가 있다.

"전 평민이라서 영지를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요?"

"호호호,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귀족 작위를 받으면 되니까, 반대하는 귀족 새끼들이 있으면 저, 베로니카가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

진짜 그래도 되나?

"마음 같아선 백작위에서 출발하고 싶지만 그러면 주변 국가에게 주목받을지도 몰라요. 죄송스럽지만 남작위에서 시작해서 3년 안에 공작으로 올려드릴게요."

3년 안에 공작이라.

비록 작고 약한 국가라도 공작위가 우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한술 더 떴다.

"아예 엘페스타를 먹어버리죠. 능력도 없는 국왕 놈 치워 버리고. 정치적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로디는 잠시 고민했다.

괜찮은 제안이다.

엘페스타 왕국이 약하긴 해도 대신전과 성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초기 성장에 매우 유리한 조건.

'유리한 정도가 아니야. 라엘리아 대신전의 도움이라면 대륙 정복도 꿈꿀 수 있겠는데?'

영지를 성장시키는 건 자신 있다.

지구의 과학 문명과 지식, 그리고 공유 창고를 가지고도 자신 없다면 그냥 나가 뒈져야지.

"좋습니다. 엘페스타에서 시작하죠."

방긋 웃는 성녀 베로니카.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넵! ···아참! 작위를 받으시려면 이름 말고도 성(姓)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 만들어보심이?"

로디는 평민.

따라서 성(姓)이 없었다.

"제가 하나 적당한 걸로 만들어 드릴까요?"

"아뇨, 이미 정했습니다."

"뭘로···,"

"킴! 킴으로 하겠습니다."

"으음, 로디 킴이라, 호호호, 마음에 들어요."

그리하여 미테란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절대독마 로디 킴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선계 멀티플렉스 상영관.

태주는 영상을 종료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 이로써 로디의 복수 3부작이 끝을 맺었습니다."

짝짝짝짝.

상영관에 가득 찬 박수 소리.

꽤 흥미로웠나 보다.

하긴 전혀 새로운 세상을 간접 경험하는 건데.

"우리 가문에 또 한 명이 추가됐어."

"흐흐흐, 로디 킴, 김로디. 우리 막내군."

"막내 선물이나 찾아봐야지, 다들 가만히 있을 거요?"

"요마계나 한번 다녀옵시다. 인면지주가 몇 마리 남았나?"

성녀에 대한 대화도.

"그 성녀라는 여자 말이야, 신의 대리인이라면서 말투가 너무 걸걸한 거 아닌가?"

"난 괜찮은데? 하선고에 비하면 천사지."

"어허! 하선고가 비교 대상이 되오? 해맑이라면 모를까."

"에이, 해맑이는 너무 나갔지."

"아무튼 베로니카와 로디가 서로 잘 어울리는데, 로맨스 진행되나요?"

"그래도 결혼은···, 태주 대협부터 보내고 나서 합시다."

"당연하지. 순서가 있는 법인데."

여운이 많이 남는 모양.

영화가 끝났는데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 화.

미테란 대륙의 문명은 충분히 소개했다.

로디 또한 작위와 영지를 받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영상을 찍어서 보내는 것도 당분간 그만.

그래서,

"마지막까지 시청해주신 신선님들과 천인분들, 황천계 관리님과 용궁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의미를 담아···,"

순간!

"무슨 말씀이시오? 마지막이라니."

"이제 시작이잖소!"

"한참 새로운 컨텐츠가 시작되려는 참인데."

"영지를 얻을 거잖소! 영지 발전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르고 있군."

"자기도 구례와 파주 경영으로 꿀을 빨았으면서."

"이제 겨우 3편이오. 300회 갑시다!"

난감하다.

볼 거 다 봤는데 뭘 또?

로디의 미래는 안 봐도 뻔하다.

혼원무상독령공 7성만 올라도 강기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선 적수가 별로 없을 것이고, 10성 대성과 독령은 깨우치면 거의 신급 존재가 될 텐데.

또 영혼 연결로 얻은 지구의 과학 지식.

공유 창고를 통한 물건의 거래.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태주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있자 검선이 말했다.

"태주 대협, 아니 태주 선인."

"···네? 제가요?"

뜬금없이 선인?

"선인에게 선인이라 부르는데 뭐가 문제요? 예전에 선인이라 칭했어야 했소."

신선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태주 선인도 이젠 고인물이요. 그래서 신선한 맛이 없어."

"···."

아아아!

태주는 충격받았다.

신선하지 않다니.

그러나 반박불가였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뉴비가 보고 싶소. 결과가 정해졌다는 건 알지만···, 그게 중요한가? 우리의 도움으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는 게 중요하지."

검선의 말에 맞장구치는 신선들.

"맞소. 영지 성장물로 넘어갑시다."

"영지물의 시작은 비누지. 비누 만들어 팔아보자고."

"맨날 비누야? 저긴 비누가 없나? 차라리 치킨을···,"

"온돌 보일러 시스템도,"

"저쪽에서 물건이 건너오면 반만이라도 주시오. 특히 술맛이 궁금하군."

"흑암철은 안 필요한가? 저긴 철이 귀한 편이라면서."

그러자 염라가 재빨리 대답했다.

"흑암철 공급은 신경 쓰지 말게. 충분한 수량을 약속하겠네."

탁탑신장도,

"천계 꽃도 쓰임새가 많을 듯한데."

하아.

신선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생판 남도 아니고, 태주, 당군악과 같은 영혼.

선계와도 인연이 생겨버렸으니까.

사실 영화를 통한 간접 경험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독선 당군악에게만 말했다.

아예 게이트를 열어버리면 된다.

영혼 연결이 한 번만 더 이루어지면 지구와 미테란 사이의 차원 구멍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을 터.

그리고 구멍을 키워서 직접 다녀오는 거지.

당군악과 함께.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문제니까.

태주는 그 뜻을 담아 당군악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도 자신이 말하는 바를 알았는지 같이 웃었다.

태주, 당군악, 로디,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게 될 날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 꾸찌꾸찌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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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도 많은 편수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 같은 내용 우려먹기가 될까,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렇게 쓰면 어땠을까?

재미는 충분했나?

유료의 가치가 있는 글인가?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었고요.

그래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기분도 듭니다.

앞으로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좀 쉬었다가 새로운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