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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길을 잃는다.

같은 길도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다르고,

낮과 밤이 다르다.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헤맬 정도로.

그런데 지금 로레인의 연구소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사방이 자욱한 분진 속이었고, 무너진 건물 잔해와 피 흘리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심연 거머리들이 가득한 생지옥이었다.

연구원들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 아수라장에 갇혀 절규했다.

[모두 주목!!]

그때 들려온 그 목소리가 그들에겐 아마도 구원이었을 거다.

[마킹 완료! 빛을 보고 중앙 세미나실로 집합!]

로레인이었다.

기어코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가 하늘에, 분진으로 가득한 길목 곳곳에, 환하게 빛나는 화살표를 그려 냈다.

그제서야 겨우 길을 찾아낸 연구원들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단 한 사람.

언제나 먼지 한 톨 없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던 그녀가 온몸에 먼지를 묻히고 나타났을 때, 지옥에는 서광이 깃들었다.

쿠드드득!

그녀가 오른손을 떨치면 무너진 건물 잔해가 두둥실 떠올랐다.

파아앗!

왼손을 떨치면 새하얀 빛무리가 잔해 아래 깔려 있던 생존자들을 치유했다.

"가! 빨리! 어서!"

그녀의 손에서 마법이 뿌려질 때마다 절망 속에 죽어 가던 이들 앞에 새로운 삶의 기회가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장님!"

"인사할 힘 있으면 그 힘까지 써서 달리라고!"

아득.

로레인이 입술을 짓씹었다.

짜릿한 고통이 먹먹해지는 신체를 조금이나마 일깨웠다.

당연히 주문을 숨 쉬듯 쏟아 내는 지금이 정상일 리 없었다.

로레인은 지금 모든 것을 동원해 자신을 120% 불사르는 중.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건 필사의 질주.

허나 그런 질주는 변수를 하나라도 만나는 순간 화려하게 좌초되며 끝을 고하고 만다.

『크르르』

분명 연구원이었다.

로레인은 그자의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았다.

이 연구소에 있는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전부 다 그녀가 직접 뽑았으니까.

이름은 제니. 약혼한 남자가 있다고 했지.

그런데... 건물 잔해 속에서 구해 낸 그녀는 기이한 형상이었다.

두 눈은 야행성 짐승의 광채를 띠었고, 온몸의 관절은 뒤틀려 있다.

"제니?"

그건...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마물에 가까운 무언가의 형상이었다.

『크아아아!』

그것이 잿빛의 연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을 때, 로레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120%의 역량을 발휘하는 중.

저것을 막겠다고 [키네시스] 주문을 해지하는 순간, 둥실 떠 있던 잔해가 쏟아져 내려 기껏 구조한 이들을 죽이고 말았을 테니까.

로레인은 잠시 멍해졌다.

그녀의 냉철한 이성은 설령 생존자들을 다시 깔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먼저 보전할 것을 요구했지만, 어째선지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캬악!』

그리고 지척으로 다가온 그것이 로레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하는 순간,

파지지직!

연노란빛 전류가 휘몰아쳤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을 떨어 대며, 그것, 아니 제니 연구원? 그 무언가가 뻣뻣하게 쓰러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보니 죽진 않은 것 같았다.

"로레인! 괜찮아?!"

캐스크가 불쑥 다가와 물었다. 노란 전류를 뿜어내며 로레인을 보호하는 채였다.

로레인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아, 응."

"저건 뭐야? 연구원 아니었어?"

로레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제일 거대한 머리. 그놈 짓인 것 같아."

"가운데에 있는 거? 처음에 하늘을 어둡게 한 그놈?"

"그래. 그놈.... 대체 어떤 능력이 있나 했는데... 이거였어. 생명의 근원 자체를 변질시키는 저주. 아니, <오염 >."

사도의 일곱 머리 중 가장 거대한 머리에, 마침내 이름이 붙는 순간이었다.

<오염 >

근원을 변질시키는 권능.

놈의 저주를 들이마시고 변질된 연구원은 마수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로레인은 암담해지는 마음에 미간을 주무르며 캐스크를 돌아보았다.

"근데 언제 따라 나온 거야?"

"나? 처음부터 있었는데? 몰랐어?"

몰랐다. 로레인은 전혀 몰랐다.

너무 집중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하늘에서 계속 떨어지는 거머리가 유독 자신에게는 잘 안 달라붙는다 했더니....

캐스크가 뒤에서 엄호를 했던 모양이었다.

쿠쿵-!

마침내 잔해 밑의 생존자들을 모두 구조한 로레인은 허공에 띄워 두었던 잔해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한 50%쯤 구했으려나...?'

그런데 이상했다.

'왜... 점점 빠듯해지지?'

이론상으론, 연구원들을 살려서 중앙 세미나실(지휘통제실)로 보내면 보낼수록 사도를 상대하기 수월해져야 했다.

마법사가 늘어나면 장전도 빨라지고 조준도 빨라지고 마력 샘의 방열도, 실드의 복구도 빨라지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아니, 빨라지고 있는 건 맞는데....

'저놈은 더 빨라지고 있어.'

사도.

그놈은 더 자주, 민활하게 움직이며 소멸 광선과 거머리, 방호의 구슬 따위를 계속해서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콰드드득!

놈이 선수를 쳤다.

"미친!"

흔들리는 연구소 위를 나뒹굴면서 로레인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왜곡 >의 짓이었다.

놈이 또다시 공간을 접어 연구소를 들이받았고, 거의 복구되어 가던 실드를 깨뜨렸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턱을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채 완성되지 않은 실드는 쉽게 부서졌다.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이 정도 충격이라면 다시 마력 샘이 흔들렸을 텐데?'

그렇게 되면 실드를 재생성할 수 없다. 억지로 생성시키더라도 내구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마력 샘은 동력원일 뿐 아니라 반발력을 받아 내는 완충장치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엔 선명히 보였다. 또 다른 머리, <소멸 >이 이쪽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는 모습이.

저게 직격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끝이었다.

"안 돼!"

지킨다고 했는데. 란센이랑 약속했는데!

끝까지 버티겠다고.

"정말 안 돼...!"

이 연구소의 사람들.

오직 나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와 준 사람들....

"안 된다고!!!"

그녀는 달렸다.

이성보다 빠른 감정이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로레인!"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라온 캐스크는 경악했다.

"지금 뭘 하는 거야!"

로레인이 메인 실드를 제어하는 오벨리스크에 손을 얹었으니까.

캐스크는 그녀를 억지로라도 뜯어내려 했지만.

오싹-!

그녀의 연한 연둣빛 눈동자가 빛을 발하는 순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캐스크는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로레인...! 지금 나한테, 마안(魔眼)을 쓴 거야?"

로레인의 눈꼬리를 타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짜 나한테 마안을 썼다고? 마안(魔眼)의 혈통을 타고 나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억지로...? 그렇게까지 해서, 나를?'

캐스크는 기가 막혔다.

아니, 분노했다.

"혼자 희생하고 죽으려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로레인이 중얼중얼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캐스크는 자신의 귀를 뜯어내고 싶었다.

그 계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

"미쳤어?! 지금 네 몸으로 반발력을 받아 내겠다는 거야? 마력 샘 대신!?"

실드 자체는 마력 샘을 동력으로 뽑아내되, 실드가 견뎌야 하는 반발력은 자신의 서클과 생명으로 대신 하겠다는 미친 발상.

그리고 그걸 실제로 이루어내는 터무니없는 연산 능력.

부우우웅-!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빠르게 솟아오르는 실드.

하지만 지금까지의 실드와는 달랐다. 저 실드에 가해지는 충격은 온전히 로레인의 것이 될 테니까.

로레인의 마력이라면 어찌어찌 <소멸 >의 일격을 막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레인 본인은 확실하게 죽을 게 분명했다.

"로레인!!!"

마안(魔眼)의 속박으로 인해 꼼짝도 못 하고 그걸 지켜봐야만 하는 캐스크.

로레인은 그런 캐스크를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미안.'

그녀라고 모를까.

캐스크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쫓아다니는지.

가끔은 상상한 적도 있었다.

캐스크와 함께하는 조금은 다른 미래를.

'근데 역시... 이렇게 끝이 나나 봐.'

란센이 반드시 베겠다고 했는데.

그러니 버텨 달라고 했는데.

이게 한계인가....

더 미래를-

볼 수는 없는 걸까.

턱-

그리 생각하던 로레인의 손등을, 누군가의 손이 덮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역시. 소장님, 구현은 다 해 두셨군요. 저는 그냥 이어받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로레인은 소스라치듯이 놀랐다.

"에오드란? 지금 뭐 하...."

"걱정 마십시오. 지휘는 유능한 선임 연구원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지금 그게.... 아니 뭐 하는 거냐고!"

에오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평생 쌓아 올린 7개의 서클에서 마력을 끌어올리고 그 위에 생명을 얹을 뿐이었다.

"저는 여기까지지만. 소장님은 더 멀리까지 가보셔야지요."

"멈춰! 그만두라고! 이건 내가 책임져야 할...!"

"소장님이 지셔야 했던 책임은 스코트빈가(家)가 무너지던 그날, 이미 다 치르신 겁니다."

"에오드란!"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회색빛 광선이 실드를 휩쓸었으니까.

쏴아아아!

실드의 좌우로 갈라지는 광선.

벼락을 맞은 듯 부들부들 떨리는 에오드란의 몸.

실드의 구현을 유지해야 했기에, 로레인은 오벨리스크에서 손도 떼지 못한 채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껴야만 했다.

"안 돼! 안 된다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잿빛 광선이 마침내 사라지는 순간,

로레인은 에오드란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를 잡고 당겨서 품에 안고 엉엉 울려고 했다.

하지만,

부스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등을 따듯하게 덮어 주던 그 손이, 잡히지 않았다.

부스러지며 사라져 갔다.

"안 돼. 안 돼! 에오드란, 하지 마. 제발!"

"아가씨."

에오드란은 그녀를 아가씨라 불렀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가 모신 분이 당신이어서 제 일생이 모두 영광되었습니다."

"제발.... 에오드란!"

로레인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사라지는 에오드란을 잡기 위해서.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그저 허공뿐. 이미 부스러지며 흩어지는 그의 잔상뿐.

"아가씨."

흩어지는 마나의 알갱이가 로레인의 뺨을 스쳤다. 자상하게 어루만지듯이.

"부디 내내- 평안히...."

훅!

불 꺼진 촛불의 연기처럼 에오드란의 마지막 잔상이 흩어진다.

"에오드라아아안!"

로레인은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어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로레인...."

캐스크가 그런 로레인을 힘겹게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풀린 마안의 속박.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했냐 따져 물으려고 했었으나, 지금의 캐스크는 이미 잊어버렸다.

지금은 그저 로레인의 상실에 같이 가슴이 찢어질 뿐이었다.

"로레인...."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고 몸을 낮추던 순간,

흠칫!

캐스크는 깨달았다.

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중얼-

로레인은 그저 우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울며 계산 중이었다. 빠르게 입 밖으로 뱉어지는 술식은 한 번에 몇 단계씩을 비약하며 빠르게 완성되었다.

"로레인?"

"계산 완료."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로레인은 입술을 짓씹고 일어섰다.

"내가 멍청했어. 한 명 한 명 구할 생각을 했으니...."

"어, 어...?"

"그냥 한꺼번에 '전송'해 버리면 되는 거였는데."

그리 말하며, 그녀는 다시 한번 오벨리스크에 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마력 샘으로 접속을 마친다.

그녀의 동공 깊은 곳에 화륵, 작은 불길이 타올랐다.

"에오드란이 죽고 내가 살았으니까. 그만한 가치는... 해야 할 거 아냐!"

7개의 서클이 개방되고 마력이 대기의 마나를 만나 더 거대한 구조로 조합되었다.

그녀는,

"약속한 거다, 란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버틸 테니까! 나는 버틸 테니까! 너는 꼭...!"

마력 샘에서 거대한 마력을 길어 올리며 힘껏 외쳤다.

"죽여! 죽여줘!"

저,

참혹한 재앙을.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 함께 새파란 마력광이 연구소 전체로 퍼져 나갔다.

#69화 역할

살아남는다.

사람들이.

잔해에 깔렸던 이도.

거머리에 파묻혀 가던 이도.

몸 여기저기 끔벅대는 눈들과 휘적대는 손발들 때문에 바닥을 기던 이도,

<폭식 >에게 의지를 모두 빨려 버려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이도,

후우웅-

사방에서 피어오른 푸른 빛무리가 그들을 안전한 공간으로 대피시킨다.

[다중 텔레포트]

백여 명에 가까운 연구원들이 일시에 중앙 세미나실이 위치한 '학술회관'으로 이동되었다.

"하악!"

이 기적을 일으킨 로레인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코에서 뜨거운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펄펄 끓는 열에 시야가 뒤틀렸다.

"로레인. 넌 진짜...."

캐스크는 감동을 한 건지, 화가 난 건지, 통곡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로레인을 일으켜 세웠다.

마력 샘에서 동력을 끌어왔다 해도, 결국 그걸 제어해야 했던 것은 로레인 본인의 마력.

일곱 개의 서클이 텅텅 빌 정도로, 지금 그녀는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캐스크는 그런 로레인을 부축하며 울먹이듯 말했다.

"가자. 이제 우리도 다시 돌아가야지."

"어.... 부탁해.... 캐스크."

캐스크는 축 늘어진 로레인을 업고 뛰었다.

<폭식 >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나와 의지와 생명을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캐스크는 자신과 로레인에게 [실드]와 [프로텍트] 주문을 겹겹이 씌우고 모든 걸 견뎌 냈다.

"저기 보인다!"

부서지고 뒤섞여서 이젠 그저 낯설기만 한 연구소의 풍경.

그 끝에서 거대한 마나 대포가 달린 '학술회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안에 중앙 세미나실이 있다.

여전히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로레인이 구해 낸 연구원이 워낙 많았으니 당분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캐스크는 한 번 더 [가속] 주문을 캐스팅했다.

『구에에에엑』

그런데 그것은 그저 공교로운 일이었을까?

아니면 저 거대한 사도가 이 먼 곳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도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방증이었을까?

고개를 높이 쳐든 <소환 >이 거머리를 폭포수같이 토해 냈고, 그 거머리들은 정확히 캐스크와 로레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미친!"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하늘에선 거머리가 쏟아지는데,

『끄르륵! 칵!』

지상에서는 연구원들이 튀어나와 앞을 막아섰다.

아니 그걸 연구원이라고 해야 하나? <오염 >에 의해 변질된 그들의 모습은 이미 마물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간신히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던 로레인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진퇴양난.

외통수.

그런 말이 딱 어울렸다.

주변에 아군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오직 적들뿐이었다.

머리 위론 쏟아지는 거머리. 사방에선 다가오는 오염된 연구원들.

특히 마물처럼 변한 연구원들의 모습이 로레인의 눈에 아프게 박혔다.

"어쩐지, 생명 반응이 요상하더라.... 그래서 전송을 안 했던 건데, 정말 다들 이러고 있었네...."

캐스크의 등 뒤에서, 로레인은 팔을 허우적거렸다.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캐스크는 더욱더 단단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로레인은 버둥거리며 짜증을 냈다.

"놔.... 이 건방진 후배야. 이 선배님이 길 열어 줄 테니까 놔 봐."

그 말에,

캐스크는 아득 이를 물었다.

또,

또 저런다.

지금 저 몸 상태로 길을 연다고?

"왜? 서클을 폭주시켜서 자기희생 주문이라도 외우려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분노에 부글거리는 캐스크.

하지만 로레인은 그저 쿡쿡 웃을 뿐이었다.

"안 될 것도 없지."

캐스크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로레인의 발이 땅에 닿았다. 로레인은 휘청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똑바로 섰다.

"이제야 말을 듣네. 잘했어, 꼬맹이."

로레인은 캐스크의 연노란색 머리칼을 슥슥 헝클어 주었다.

그녀의 키가 캐스크보다 7cm는 더 컸기에, 퍽 그림이 자연스러웠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 손길을 받아들이던 캐스크가 로레인을 불렀다.

"누나."

처음으로, 이름이 아닌 예전의 그 호칭으로.

"응?"

파지지직!

캐스크의 전신에서 연노란빛의 전류가 휘몰아쳤다.

이미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 거머리들이 전류에 얻어맞고 까맣게 타서 흩어졌다.

"그때 기억나? 누나가 되게 아까워했잖아. 내가 마검사가 되기로 했을 때."

"갑자기? 음.... 당연히 아까웠지. 명문 중의 명문인 미바바르 마법 대학을 조기 졸업한 정통파 마법사가 갑자기 마검사라니."

"그거 누나 때문이었어."

"뭐? 나?"

"누나를 보고 느꼈거든. 아, 마법은 저런 사람이 해야 되는 거구나. 난 이걸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도움이 안 되겠구나...."

"뭔 소리야? 너 정도면...."

타다닥 탁탁!

전류의 다발 사이로 거머리가 끝없이 튀겼다.

잠깐 사이였는데도 그새 엄청나게 늘어났다.

곧 소낙비가 쏟아질 것이었다.

사람의 피를 빨고 살을 변형시키는 심연 거머리의 폭우가.

하지만 캐스크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직한 거야. 마검사로. 오로세라의 마검사는 특정 전투 주문만큼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쓸 수 있으니까. 그럼... 도움이 될 것 같았거든."

"도움? 무슨 도움."

캐스크가 쓰게 웃었다.

이건 뭐 끝까지 모르는 체를 하는 건지 정말 둔해 터진 건지.

스르릉-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파지직!

연노란빛 전류가 튀어오르는 검을 허공에 그었다.

마법사의 심상은 세상을 담는 그릇.

그 그릇 속에서 가장 격렬하게 번뜩이는 것들만을 꺼내고, 그것을 다시 검령과 반응시켜 새로운 증폭을 이끌어 냈다.

이게 바로 오로세라의 공인된 마검사만이 쓸 수 있는 비기(秘技).

"그러니까, 내가 마검사의 길을 택한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쿵!

캐스크가 그 검을 바닥에 박아 넣는 순간,

파지지지지직!

넘쳐흐른 연노란빛 전류가 대지와 하늘을 뒤덮었다.

『케에에에에!』

『끄르르르!』

마물이 되어 버린 연구원들은 사슬처럼 뻗은 전류에 사로잡혀 몸을 떨어 댔고,

치지지직-!

본격적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거머리들은 하늘을 뒤덮은 전격의 그물에 걸려 모조리 불타 버렸다.

"가. 로레인."

땅에 검을 꽂아 넣은 채로, 캐스크가 말했다.

"있을 거 아니야. 체력과 마력을 일시적으로라도 회복시키는 물약."

"캐스크 너...!"

"빨리 가. 지금 안 가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로레인은 알 수 있었다. 마검사인 캐스크가 저런 대단위 주문을 뽑아내기 위해 얼마나 큰 무리를 하고 있는지.

여기서 저 녀석을 두고 간다면....

"나 안 죽어. 마검사잖아. 전투마법사보다도 생존력이 훨씬 강한 게 마검사야. 마력이 떨어지면 검으로. 검이 꺾이면 다시 마법으로 싸울 거야. 그러니까,"

캐스크는 웃었다. 환하게.

"빨리 가. 바보야. 다들 널 기다리잖아."

울컥. 치미는 이 감정은 뭘까?

로레인은 캐스크의 뺨을 쓰다듬고 싶어 손을 뻗다가, 입술을 악물며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그래. 이게 합리적이다.

지금 전투를 가장 잘 지휘할 수 있는 건 로레인 자신.

약속했잖아? 란센과.

반드시, 꼭... 버텨 내겠다고.

그런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부서질 것만 같을까.

"너...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

"네. 네. 선배님."

그런 말밖에는.

해 줄 수가 없어서.

로레인은 찡하게 떨려 오는 코를 훌쩍이며, 등을 돌렸다.

달렸다.

돌아보지 않고.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캐스크를 돕는 일일 테니까.

* * *

지휘통제실(중앙 세미나실)은 지금 아수라장이었다.

"장전반! 빨리 빨리! 실드가 벗겨지기 전에 한 발이라도 더 많이 꽂아 넣어야 돼!"

"네, 넷!"

"사격반 조준은?!"

"하고 있습니다!"

"빨리! 빨리빨리!"

"기공포수들 뭐해! 저 빌어먹을 구슬이 벌써 3개로 늘어났잖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곡 >의 방해 범위가 점점 더 늘어나서...."

로레인이 밖으로 뛰쳐나간 후, 연구원들은 속속 복귀해 자신의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좀 편해지는 줄 알았는데....

'왜 갈수록 더 강해지는 거냐고 저거!'

에오드란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은 선임 연구원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맞닥뜨린 것 같았다.

날아오르면 날아오를수록 장벽도 따라서 쑥쑥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이 속도대로라면....

'5분? 아니 3분은 버틸 수 있을까?'

절망감이 엄습했다.

선임 연구원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서서히 발목을 붙들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콰앙!

로레인은 바로 그런 절망을 깨부수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단 1초였다.

로레인이 투시와 확대 마법이 적용된 벽면을 살펴보고 전황을 파악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그녀는 곧장 내달려 기공포대 하나를 장악했다.

"비켜!"

"누구, 아앗! 소장님?!"

기공포수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자마자, 그녀의 기공포대가 홀로 굉음을 터뜨리며 빛을 뿜었다.

투투투투투!

탄환 하나하나에 인챈트 되는 마법은 [퓨리파이].

거기에 기공포 자체에도 마법을 부여해 연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저놈들에게는 '정화(淨化)' 계통의 마법이 잘 먹혀! 다들 그쪽 마법을 부여하도록!"

밖에서 거머리와 싸우며 로레인이 몸소 깨달은 것.

그걸 말해 주며 쏘아 내는 탄환은 백발백중이었다.

<왜곡 >이 공간을 뒤섞으며 방어를 해도, 로레인은 그마저도 계산하며 끝끝내 잿빛 구슬 3개를 모조리 떨어뜨렸다. 하나당 5초, 딱 15초가 걸렸다.

"미친...."

"소장님 능력이 대단한 건 알았지만...."

"사람이 저럴 수도 있나?"

사실 이곳의 연구원들은 어딜 내놔도 당당할 엘리트 마법사들이었다.

로레인은 그런 이들조차 경악할 정도의 위용을 선보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서려고 했다.

휘청.

"으윽...."

한계였다.

도망치기 위해 마셨던 각성 포션.

일시적으로 올라왔던 체력과 마력이 조금 전, 15초의 사격으로 모두 소진되었다.

"소, 소장님!"

"괜찮으세요?!"

놀라서 다가오는 연구원들을 로레인은 손을 뻗어 물러서게 했다.

"괜찮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숨기고 지휘권을 다시 돌려받았다.

"자! 버티자! 버티기만 하면 반드시 이겨! 알잖아? 우리한텐 숨겨 둔 칼이 있다고! 그러니까, 우린! 버티기만 하면 돼!"

차츰 절망 속에 익사해 가던 연구원들이 다시 눈을 빛냈다.

그리고 폭풍 같은 시간이 몰아쳤다.

"실드 올려!"

"실드 재건까지 1분!"

"너무 느려! 사격반! 최대 출력으로 발포!"

"발포!"

콰아아앙-!

실드를 충전시킬 시간이 부족할 때는 10르핌의 마나 대포로 후려쳐서 시간을 끌고,

"마력 샘 쿨다운 중! 소,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마력 샘을 폭주시키면 가능하지만... 그럼 그다음이...."

"<소멸 > 움직임 관측! 또다시 옵니다!"

실드도 불가능하고 마나 대포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왔을 땐,

"마석 가공장을 자폭시켜! 그 폭발력이면 일단 소멸 광선이고 뭐고 밀어낼 수는 있어!"

"하, 하지만 거기는...!"

"하라면 해!"

연구소에서 가장 소중하고 값비싼 시설을 희생시켰다.

콰과과과-!

마석 가공장은 마나 하트를 생산하기 위한, 막대한 에너지가 집약된 시설.

그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며 연쇄적으로 타올랐다.

그 덕분에 잿빛의 소멸 광선도 좌우로 흩어져 가장 중앙에 있는 건물, '학술회관'을 지켜 낼 수 있었다.

대신 연구소 전체로 놓고 보면 참으로 처참했다.

외곽부는 거진 다 소멸했고, 알맹이만 간신히 남아 있는 형국.

10분.

그렇게 10분이었다.

로레인이 모든 것을 버려 가며 버텨 낸 시간.

그 후에 찾아온 건 외통수였다.

막 하나의 소멸 광선을 겨우 막아낸 직후,

"헉! 2격! 2격이 날아듭니다!"

"뭐, 뭐야! 왜 딜레이도 없이 바로!"

지금까지 <소멸 >은 광선을 쏘고 나면 잠시 헐떡이며 쉬다가 다시 쏘곤 했는데.... 이번엔 광선을 쏘자마자 곧장 다음 광선을 준비했다.

<폭식 >이 끝없이 빨아먹은 마나와 생명력 덕분에 탈진 상태를 어느 정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마,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번만큼은 로레인도 동감이었다.

지금까진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다 동원해 막아 냈지만... 이젠 정말 모든 수가 떨어졌다.

그러니

이제는 믿는 수밖에.

"마력 샘 폭주시켜!"

"네, 네? 그러면 더 이상 사용이...."

"어차피 당장 죽게 생겼는데 뭔 상관이야! 폭주시켜!"

"네, 네!"

"그리고 장전반! 최대한 빨리! 지금까지 중에 가장 강하게! 집법 완료한다."

"네! 집법 준비!"

이 순간, 로레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사격반."

"네."

"폭주한 마력 샘의 출력을 모조리 마나포에 쏟아붓는다."

"네! 모조리.... 네?"

모든 연구원이 술렁거렸다.

"마지막 마력을... 실드가 아닌 공격에 다 쓴다고요?"

"그, 그랬다가는 마나 대포부터 박살이 날...!"

하지만 로레인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굳건했다.

"해. 어차피 이게 마지막 기회니까."

"그, 그럼 다 죽...."

"시끄러!"

술렁이는 연구원들 사이로, 로레인의 호통이 용의 숨결처럼 흩뿌려졌다.

"이게! 우리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나 믿고. 모든 출력을 모은다! 실시!"

"시, 실시!"

이래서 평소에 군기를 잘 잡아 둬야 하는 걸까?

생명을 던지라는 명령에도 연구원들은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들을 보며 로레인은 입술을 꽉 물었다.

란센,

'이게, 마지막 기회야....'

버틸 만큼 버텼어.

진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이젠...

네 차례야!

* * *

찌이익-

찌익-

난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걸었다.

흉포한 오러 탓에 몸은 만신창이었지만 되레 감각은 더없이 뚜렷해졌다.

다 들렸고,

다 느껴졌다.

그래,

에오드란이 죽었구나. 까다롭긴 해도 꽤 멋진 노인이었는데.

밋시. 네가 그렇게 갈 줄은 몰랐네. 갑자기 왜 사람 구하겠다고 나서서....

캐스크. 넌 진짜....

한 명 한 명 전부 다.

그저 느낄 뿐.

애도하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죽어 가는 이들의 마지막 숨을 외면하고 나는 걸었다.

저들은 저들의 일을, 나는 나의 일을.

기어가듯 쉼 없이 걸으며, 생각했다.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

대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잿빛의 거대한 살덩이가 절벽처럼 내 눈앞을 드리운다.

휘두르면 반드시 닿을 거리.

드디어 나의 일을 할 시간이 왔다.

이를 악물고 반로아를 들어 올렸다. 나의 모든 의지를, 굳건한 맹세를 검에 담았다.

벤다.

저 참혹한 재앙을.

#70화 다음 페이지를 위해

어떤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를 위해 목숨을 요구한다.

끝도 없이 솟은 '사도'의 일곱 머리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알겠다."

세상은 발밑에서부터 무너진다고.

"저게 뿌리였어."

일곱 머리 중에 가장 큰 것.

가운데에 우뚝 서서 온몸으로 어떤 가루를 구름처럼 뿜어 대는 놈.

그 잿빛 '포자'가 만물을 덮고 대지에 스며들어 모든 걸 변질시키고 있었다.

둑을 파고들어, 누군가의 생명이었을 저수지를 무너뜨리는 나무뿌리처럼, 저것은 지금 이 세상을 발밑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었다.

"로버랜드가 이렇게 탄생했구나."

포자에 의해 변질된 대지의 모습. 그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잿빛 땅.

모든 것이 잿빛인, 생명이 살 수 없는 마물의 땅.

포자가 스며든 땅이 잿빛으로 변해 점점 늘어났다.

그 사실을 깨닫자, 곧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저걸 지금 죽이지 못하면 미래는, 적어도 내가 아는 미래는 사라진다.'

세아가 누누이 경고했던 것.

- 과거의 사건이 미래를 크게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놈이 일으킨 '역사 개변'이라는 것 때문에, 사도가 온전히 부활했다.

탈진을 서서히 회복하며 지금도 계속 강해지고 있는 저 녀석이, 완전히 힘을 되찾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이곳에 뿌리를 내려 잿빛 땅을 무한정 늘려 나간다면?

미래가 바뀔 것이다.

어쩌면 대륙의 지도가 바뀔 정도로.

그러니,

'저걸 죽이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볼 수 있다.

세계를 좀먹는 '저것'의 정체.

운명의 책의 비밀.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동생들이. 보고 싶다고."

그걸 위해,

'목숨을 걸어야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목숨 걸고 싸우다가 깨져서 고작 몇 달 전까지 폐인으로 살았는데.

이제 좀 살아나서 꿈을 꿔 보려 하니 왜 자꾸 이런 일이 닥쳐 오는지.

'살아남을 수 있으려나?'

너무나 크고 고차원적이며 무지막지한 존재를 마주할 때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공포.

물론,

무기가 없진 않다.

지금도 내 몸속에서는 용의 오러가 꿈틀대고 있었으니까.

다만,

'단 5초.'

그게 한계였다.

이 미치광이 같은 용의 오러를 통제할 수 있는 시간.

그 안에,

이 모든 오러를 다 쏟아부을 수 있을까?

그 흉포한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

살아남아서,

다시 동생들을 볼 수 있을까?

답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에 예기치 않은 응답이 찾아왔다.

웅- 우웅-

왕의 검, 반로아였다.

반로아가, 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용기와 투지를 말해 주었다.

할 수 있다. 라고.

"그래. 해 보자."

찰나의 질주에 다 걸어서 닿아 보자. 저 너머의 내일에.

콰드득!

나는 반로아의 칼자루를 세게 움켜쥐었다.

* * *

어떤 찰나는 영원을 담는다.

그런 순간이 있다. 일생보다도 무거운 한순간이.

[제발.]

용의 사념은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였다.

[저걸 죽여 줘.]

그래.

그럴 생각이다.

용의 사념과 나의 의지가 일치한다.

검을 쥐고 힘껏 뜻을 불어넣는다.

운명의 책.

세계의 비밀.

나의 동생들.

내일을 열어젖혀서 이 이야기의 끝을 보겠다.

그 한 줄의 의지 위에 올려놓는 나의 모든 것.

크르르르르

착각일까?

오러가 울부짖었다.

꽁꽁 눌러 놨던 기세를 풀어내는 순간, '사도'는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

<왜곡 >이 나를 내려다본다.

공간을 뒤섞는 놈의 권능은 가장 까다로운 것.

나는 저놈이 뒤트는 공간을 베고, 그 너머까지 베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어어어엉-!

눈앞에 푸른 수평선이 펼쳐졌다.

'로레인!'

이건 그녀의 메시지였다.

지금이 기회라는.

10르핌급의 마나 대포가 <왜곡 >의 얼굴에 마지막 통한의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는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나는 땅을 박찼다.

<왜곡 >은 잿빛의 피를 폭포처럼 뿜어내며 넘어갔고, 내가 가야 할 길은 그 뒤로 환하게 펼쳐졌다.

그 길을 따라 몸을 날렸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반로아의 검령을 오롯이 돋우어 가장 날카로운 검기를 세우고,

온몸을 폭발시킬 듯 분출되는 용의 오러를 모조리 오러 블레이드로 집중시키고,

그 모든 걸 유지하기 위해, 나의 일생과 용의 사념을 얹었다.

그리고 단 5초 동안 모조리 쏟아붓는다.

<오염 >.

잿빛 땅을 만들어 내는 근원.

푸화악!

용의 오러가 그 거대한 머리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횡으로 찢어발겼다.

타오르며 허공으로 치솟는 머리.

『키에에에에에-!』

『크라라라라라!』

가운데 머리가 잘려 나가는 순간, 모든 머리가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주변을 흉흉하게 물들이던 불길한 기운이 활짝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온 것처럼 일순 환기된다.

나는 그대로 오러를 뿜어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다음은 <왜곡 >.

정말 지긋지긋한 놈이었다.

콰지지직!

또 하나의 머리가 허공을 난다. 잿빛의 피가 화산처럼 폭발하며 공기 중에 흩어졌다.

역시 가운데 머리가 핵심이었던 걸까? 다른 머리들이 움찔! 하긴 했지만, 반응이 아까만큼 극적이진 않았다.

그저 아까의 고통을 떨치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을 뿐.

좋지.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방호 >

이놈이 구슬을 뱉어 낼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던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써컥!

벤다.

쿵! 쿠웅-!

아까 베었던 머리들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또다시 오러를 뿜어 방향을 꺾었다.

<소멸 >.

이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콰아아앙!

<소멸 >에게 검을 휘두를 때쯤에, 이미 내 오러 블레이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날카롭게 제어하는 걸 포기하고 그냥 남은 힘을 모두 긁어모아 때려 박은 일격.

거대한 철퇴에 얻어맞은 듯, 짐승이 베어 문 듯, 움푹 뜯겨 나가는 <소멸 >의 목.

딱 거기까지.

거기서 5초가 끝이 났다.

'아....'

손끝에서 힘이 풀렸다. 반로아를 놓칠 것 같았기에 얼른 아공간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길 정말 잘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내린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 살 수 있는 거 맞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문득 용의 사념이 속삭인 것 같았다.

[고마워.]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감싸 안았다.

* * *

그것은 차라리 기도였다.

마지막 실드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대신 쏘아 낸 최후의 마나포.

그 푸르디 푸른 기도.

누군가는 불신했고, 누군가는 염원했고, 누군가는 번민했던 그 기도 끝에

벼락같은 응답이 있었다.

땅에서 하늘로 거슬러 올라가는 번개. 아니, 그걸 고작 번개에 빗댈 수 있을까?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연구원이었기에 더욱 절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것은 차라리, '이치(理致)'.

불안하게 쌓인 설산이 눈사태를 일으키듯이, 불타버린 숲 위로 새싹이 흐드러지듯이, 베인 상처 위로 딱지가 붙고 새살이 돋듯이... 그런, 이치(理致).

세상을 잡아먹는 불합리를 정정하는 뜨거운 불길.

넋이 나간 채 침묵만이 가득하던 지휘통제실에서 로레인은 퍼뜩 물었다.

"관측반. 저거 기록했어...?"

"아, 아 네! 기록되었습니다."

"잘했어."

환희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로레인. 그녀의 눈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도'가 보였다.

쿵!

방금, 간신히 매달려 있던 <소멸 >의 머리도 땅에 떨어졌다.

이제 겨우 남은 것은 3개의 머리뿐.

<착란 >, <소환 >, <폭식 >.

그마저도 힘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소장님. 이제 후퇴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선임 연구원 하나가 기쁜 얼굴로 외쳤다.

흐뭇하게 웃던 로레인은 얼굴을 확! 구겼다.

"후퇴? 그게 무슨 뜻이죠?"

그 험악한 분위기에 선임 연구원은 진땀을 흘리며 물러섰다.

"아, 아니. 저희도 이제 싸울 여력이.... 저것들이 지금은 저래도 일단 정신을 차리고 나면 지금 저희로서는 상대하기가...."

"하!"

로레인은 차갑게 비웃었다.

"안 보여요?!"

그녀가 가리킨 곳엔 부상자들이 모여 있었다.

말이 부상자지 사실 하나같이 끔찍한 몰골들이었다.

"으아.... 아아...."

"큭! 틀렸어.... 변이가 너무 몸속 깊은 곳까지 진행되어서...!"

온몸이 눈알과 꿈틀대는 손발로 뒤덮인 연구원.

"크르륵! 으아.... 제발. 제발.... 살려 줘. 아니 죽여 줘 르르륵!"

<오염 >에 의해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는 연구원.

마법으로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들이었다.

로레인은 연구원 모두를 내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해주의 기본은 주문의 주체를 죽이는 거예요! 동료들을 살리려면 반드시 저 '사도'란 존재를 격멸해야 합니다!"

로레인을 바라보는 연구원들의 시선이 묘해졌다.

'저 사람.... 돈만 밝히고 우리에겐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 우릴 생각해 줬던 거야? 그저 우리의 건강엔 관심이 없었을 뿐인가....'

그게 로레인이긴 했다.

돈도 좋아하고, 연구에는 미쳐있지만, 적어도 제 울타리에 들어온 사람을 지킬 줄은 아는 사람.

한때 명문이었던 스코트빈가(家)의 후계로서 쌓아 올렸던 긍지.

하지만, 또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레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괴물을 여기서 잡아야만 했다.

'그것도 그렇고. 이대로 가면 란센은 어떻게 하라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소임을 다 해낸 란센이 저기 사도의 밑에 쓰러져 있었다.

그를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기회야. 이 세계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어째서 그 찬란했던 신화 시대가 멸망했는가.

이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그 끝은 어디인가,

어쩌면, 그 궁극적인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저 너머에 있었다.

과거에 일어났고,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도 모를 어떤 이야기의, 그다음 페이지를 엿볼 단 한 번의 기회.

화륵-

그녀의 동공 속에 다시 한번 짙은 녹색 불꽃이 타오른다.

"보세요!"

로레인은 모든 연구원 앞에서 '사도'를 가리켰다.

"저 너머에! '진리'가 있잖아요!"

연구하는 사람이란,

결코 진리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법.

후퇴를 제안했던 선임 연구원조차, 그녀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후퇴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근데 소장님. 저희 포탄이 다 떨어졌는데요?"

그러자 방열반의 반장도 부연했다.

"마력 샘 방금 죽었습니다. 이제 못 살립니다."

마나포도 없이 저 괴물을 죽일 순 없다.

모두가 그렇게 말할 때, 로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포탄은 결국 마나가 과밀되고 그 위에 집법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론적으로는.... 네. 그렇죠?"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갑의 샘플, 시제품, 싸그리 다 긁어 와요! 당장 여기 학술회관에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할 테니."

"네, 네?!"

"포탄은 그걸로 합니다. 그리고 마력 샘은 우리 모두의 마력을 합쳐 그걸로 대체합니다. 술식은 제가 짜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연구원들에게 그것은 마나포가 눈앞에서 터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저게 그 돈 귀신 로레인이 맞나?

"소, 소장님! 그건 우리 연구소의 핵심 자산입니다! 연구자료마저 엄청 날아갔는데 그것들마저 없으면 저희는...!"

"지금 돈이 문제야! 나 그냥 빈털터리 할라니까, 싹 다 꺼내 와!"

돈, 그까짓 돈이 뭐라고.

로레인은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꿈틀거리는 '사도'를 노려봤다.

그리고 그 주위 어딘가에 있을 란센을 생각했다.

'죽지 마. 란센'

나도 버텼으니까....

너도!

얼마 뒤,

마갑과 마법사들의 마력을 태워 발사되는 푸르른 마나포가 사도의 온몸에 퍼부어졌다.

비록 그 위력은 아까보다 훨씬 약했지만,

그 빛깔만큼은 더 푸르게, 수평선처럼, 새벽빛처럼, 사방을 환하게 뒤덮었다.

* * *

어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사도가 영멸합니다. 그것은 '다시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틀린 세계선을 대량으로 흡수합니다.]

[비틀린 세계선이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운명의 책이 새로운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2레벨 달성! '탐색' 기능이 해금됩니다.]

[⬛⬛⬛⬛⬛⬛의 손길을 벗어났습니다. 깨어진 인과를 획득합니다.]

뭐라는 거야....

그냥 동생들이 보고 싶다.

근데, 또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와 달리,

어떤 떨림이 담겨 있다.

[하나의 위기가 하나의 기적으로 변화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깨어진 인과를 소모하여 「프롤로그 1회」를 획득합니다.]

그리고,

팔락-

어디선가 들렸다.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가는 소리가.

#71화 재회

'보고 싶다'라는 건, 한창 읽다가 중간에 덮어야 했던 책과 같다.

'이별'이라는 건, 다 읽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잃어버린 책과 같다.

* * *

"사도 침묵! 모든 반응과 활동이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관측반에서 사도의 죽음을 알려 왔을 때, 로레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두 사람의 안위였다.

"수색대! 수색대부터 편성해! 즉시 란센 씨를 찾아내! 치유 마법 전문가들로 편성하고!"

"알겠습니다!"

먼저 란센을 챙겼고, 그 후엔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른 한 명을 직접 찾아 나섰다.

"밀라! 세냐! 돌튼! 치유 아티팩트 챙겨서 바로 나 따라와요!"

치유 마법의 전문가들과 함께.

탁. 탁 타닥!

휘청거리는 달리기였다.

다리는커녕 온몸에 힘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로레인은 뛰었다.

마지막으로 캐스크와 헤어졌던 장소로.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 때,

"허어."

"세상에...."

뒤따라오던 연구원들 사이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방에,

타 죽은 거머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까맣게 길이 이어져 있었다.

붉은 피와 타버린 잔해들로 이루어진 길이.

"아...!"

그 길의 끝에서 로레인은 발견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무너진 건물 잔해에 기대어 앉은,

연노란색 머리칼과 연한 주근깨가 귀여운,

그 병아리 같은 녀석이 피에 절어 미동도 없었다.

"캐스크!"

그렇게 외쳤을 때, 로레인의 가슴은 끝없는 질문으로 부어올랐다.

'살아 있지? 살아 있는 거지?'

'응? 살아 있잖아!'

살아있지?그렇지?살았잖아?너까지그러는거아니지?

수십 번을 메아리치는 의문을 삼키며 조심조심, 행여나 자신의 거친 걸음에 저 아이가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어- 누나."

캐스크가 힘이 풀린 그 연노란색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봤을 때,

'찾았다!'

로레인은 찾아냈다.

다음 페이지가 내내 궁금했던 그 책을.

그 뒤 내용이 지금, 눈앞에 펼쳐졌다.

와락-!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그 피 묻은 연노란색 머리칼을 쓸고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 누나?"

캐스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녀석은 머뭇머뭇 조심스레 자신의 손 하나를 로레인의 등에 얹고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슬며시 나머지 하나도 얹었다.

오르락내리락 바쁘게 오가는 그녀의 호흡을 느꼈다.

그러고 한 1분이 지났을까?

캐스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각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 말을 꺼내야 할 때인가?

그래. 남자는 용기와 자신감이 아니던가.

그는 결심했다.

직진!

"누나. 나 사실 줄곧 누날...."

"쉿."

하지만 로레인의 쉿 소리에 그 용기는 턱,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녀는 그저 더 깊게, 캐스크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그의 피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가만히, 지금은 이대로... 가만히."

"어, 어... 어. 그래."

로레인의 등에 자연스레 얹혀 있던 캐스크의 손이 흠칫 굳었다.

자신에게 점점 몸을 기대 오는 로레인.

뺨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머리칼.

향수 하나 쓰지 않았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는 살 내음.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캐스크였다.

뭔가, 불경스러웠다.

내가 감히?

이렇게 안고 있어도 되는 걸까?

그래서 얼른 주제를 바꿨다.

"어, 근데 누나. 란센은 괜찮겠지?"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당연히 괜찮지. 멀쩡히 살아 있을 거야."

"그치?"

"너도 봤을 거 아냐?"

"맞아.... 엄청나더라. 덕분에 살았어. 끝장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거머리들이 지랄발광을... 큼. 아니 막 바닥을 비비적거리면서 죽어 가더라고."

"그랬어?"

"응. 그래서, 겨우 짬이 나서 [어웨이큰]으로 다 없애 버리고 치료도 하고 그랬지."

"그랬구나."

로레인은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 그리 말하며, 캐스크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어라?

캐스크는 어쩐지 신이 났다.

"그리고 나서는...."

종알종알 재잘재잘 떠드는 캐스크와 그걸 하염없이 들어 주는 로레인.

"어, 그래서! 그다음엔! 어...."

그러던 어느 순간, 캐스크는 정신을 차렸다.

한없이 부풀었던 가슴이 쪼그라들고 갑자기 엄청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멍청이.'

캐스크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뭐가 좋다고 신이 나서 떠든단 말인가? 이 참혹한 순간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고 연구소가 다 무너졌는데 지금 신이 나서 무용담이나 읊을 때인가?

보아라. 네 멍청함 때문에 로레인 누나도 한마디 말이 없지 않은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어쩌지?

사과부터 해야 하나?

캐스크는 일단 목소리를 낮추고 분위기를 바꾸었다.

"저기 근데... 누나 괜찮아?"

"훌쩍. 응? 뭐가?"

"그게...."

캐스크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저 풍경.

그 웅장하던 연구소가 다 무너지고 고철이 되어 버렸다.

저 건축비가 다 얼마며, 저 안에 있던 샘플들과 연구 장비들은 어쩔 것이고, 피땀 흘려 만들어 낸 연구자료들에 이르면 그냥 할 말이 없다.

언제나 돈. 그저 돈을 부르짖던 로레인이 이걸 견딜 수 있는 걸까?

캐스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연구소를 성립시키기 위해, 여기까지 키우기 위해 로레인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한 발짝 한 발짝 이뤄 나갈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래서 입술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도 말을 하긴 해야 한다.

자신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 막 조잘조잘 신이라도 난 것처럼 떠들어댄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캐스크는 목에 턱턱 걸리는 단어들을 억지로 뱉어 냈다.

"그... 다... 부서졌잖아. 누나가... 정말, 힘겹게 일으켜 세운...."

그런데,

스윽.

여태 캐스크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로레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캐스크의 양어깨에 두 손을 짚고 마주 보았다.

처음 캐스크는 움찔, 놀랐지만,

'어?'

그다음에는 당황했다.

로레인이 짓고 있는 표정이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 달라서.

"이 꼬맹아. 너 바보냐?"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정말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뭐, 뭐! 내가 왜!"

"아까 봤다며, 란센이 싸우는 거."

"봐, 봤지. 그걸 못 볼 수가 없잖아."

"근데도 그래?"

"뭐, 뭐가?"

"그거! 용의 마갑! 내 일생일대의 역작! 그게 기능을 했잖아! 비록 여기저기 문제가 많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능을 했다고!"

아.

캐스크의 입이 헤- 벌어진다.

"그러니까, 신화 시대 마법에 대한 내 가설이, 다 맞진 않아도 큰 틀에서는 맞았다는 거잖아!"

"그, 그게 그렇게 되...네?"

"그렇지! 거기에 엄청난 사실도 알게 됐지. 어쩌면 저 '사도'라는 존재는 신화 시대가 왜 멸망했는지를 알게 해 줄 단서일지도 몰라! 이 세상의 비밀을 밝혀낼 기회라고!"

로레인의 시선이 저기, 신화 시대의 유적이 있던 장소로 향했다.

흉측하게 녹아내린 잿빛의 살덩이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핥아댔다.

"저걸 연구해 보면 뭔가 나올 거야. 분명 나올 거라고! 더 큰 투자! 더 큰 진리!"

이번에 잔뜩 신이 난 건 로레인이었다.

그녀는 캐스크의 말랑한 뺨을 잡아당기고 머리카락을 헝클며 신이 나서 외쳤다.

"나, 로레인 스코트빈의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그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캐스크.

그게 귀여워서, 또 피에 절은 머리와 뺨을 마구 주무르는 로레인.

이때,

로레인은 간절히 소원했다.

지금 읽는 이 이야기가 도중에 끝나지 않기를.

에오드란의 희생과 란센의 용기로 겨우 넘겨 본 이다음 페이지가,

아주- 아주 멀리까지 쭉 이어지기를.

* * *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하다]라는 것은 일종의 괴물이다.

보지 않고 잊어버리고 살 때는 조용히 구석에 쪼그려 있다가...

함께 훈련을 했던 연무장에서,

자신만만한 신입의 번뜩이는 재능 속에서,

하필 지나쳐야 했던 중앙 광장의 기념비 속에서,

우연히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그것'은 돌연 덩치를 키우고 증식한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끝도 없이.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왜 말도 안 하고 사라진 거지?'

'무슨 사정이 있었나?'

단순하게 시작한 의문은 곧 끝없는 망상으로 분열한다.

'설마 적국의 첩자였나?'

'아니 그럴 리 없지. 차라리 왕실 소속의 비밀 요원?'

'아니. 그냥 어디 남쪽 바다에서 여자랑 뒹굴고 있는 거 아냐?'

망상 속에서 그는 왕자였다가, 사기꾼이었다가, 방랑 시인이 된다.

현 대륙의 최연소 소드마스터, 청뢰(靑雷)의 기사라 불리는 이오딘 세롬은 그런 괴물을 가슴에 키우고 있었다.

집무실에 앉아 팔락 팔락 문서를 넘기던 그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리알라시(市)의 연쇄 실종 사건"

"헤네리안 마탑의 금지된 주문."

"벨로스 숲의 괴생명체...."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는 사교(邪敎) 관련 보고들.

뿌득. 그녀는 이를 갈아붙였다.

"망할 사교도들. 제발 이마에 '나 사교도요.'하고 써 놓고 다녔으면 좋겠네."

그럼 손수 그 목을 동강동강 베어 줄 텐데.

팔락- 팔락-

그렇게 계속 넘어가던 문서가 어느 한 부분에서 다시 멈춰 섰다.

"이건 또 뭐야? 로레인 연구소의 참사? 여긴... 내가 가 보려다가 못 간 곳이잖아?"

좀 더 자세히 읽어 보다가, 그녀는 또 한 부분에 시선이 꽂히고 말았다.

"응? 핵심 참고인 중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만약 죽었다면 마갑의 잔해나 신체의 조각이라도 건졌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그러니까 죽었다기보단,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그것은 일종의 스위치.

우연히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의 가슴 속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괴물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부르르 떨며 한 번 더 증식할 준비를 마친다.

아니, 아니다.

그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의 증세는 이미 그런 단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흥! 이거 뭔 유행이야? 갑자기 사라지는 거? 그놈하고 비슷한 놈이 또 있네."

코웃음 치며 무심한 척 또 서류 한 장을 넘기지만,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라는 것이 끝없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내어, 마침내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무성해진 뒤엔...

마침내 '그리움'이라는 꽃을 피우는 법.

팔랑-

넘어가는 서류.

정보들을 천천히 읽어 내리는 눈동자.

그러다가 어느 한 대목에 이르자, 그녀의 눈동자엔 커다란 파문이 그려졌다.

이오딘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두 눈만 크게 뜨고 서류에 적힌 이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콰당탕!

의자를 뒤로 넘어뜨리며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집무실에 있던 비서들이 깜짝 놀라 "기사님?"하며 쳐다보았지만, 이오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류에 적힌 핵심 참고인의 이름.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어 보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란센... 반로아?"

우당탕탕!

"기, 기사님?"

그녀는 책상마저 밀쳐 버리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 놓곤 다시 문을 쾅! 열고 들어와서는, 두고 갔던 자신의 애검을 챙겨 들고 다시 나갔다.

그 모습에 비서들은 그만 벙- 찌고 말았다.

'검을... 한 번 놓고 가셨다고?'

그녀가 누군가?

최연소 소드마스터, 청뢰(靑雷)의 기사.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여 주지 않는, 모든 기사의 표본이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비록 잠깐이지만 검을 두고 나간다는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서들은 진심으로 충격을 먹었다.

32살인 지금과 달리, 24살의 이오딘이 얼마나 실수가 잦은 아가씨였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아무튼 이런 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기사님! 기사님!"

"어디 가세요! 기사님! 제 결재는 해 주고 가셔야죠!"

황급하게 이오딘을 쫓아 나가는 비서들의 아우성이 시끄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사건이 지나고.

다시 1만 년이 흘렀다.

#72화 비터 스윗

"오빠! 오빠! 눈 좀 떠 봐! 오빠!"

무언가가 몸을 흔든다.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온기가.

"뭐 해! 마법사는 왜 아직도 안 와! 빨리 불러! 빨리! 빨리!"

목소리가 굉장히 다급하다.

안 되는데....

불안해하지 마라, 인마.

내가 있잖아.

어쩐지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다.

내가 누군지.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그조차 혼미하고 혼곤하여,

아무것도 떠올릴 기력이 없는데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오빠? 오빠? 정신이 들어?"

억지로, 정말 어거지로 밀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이고, 그 빛을 등진 웬 여자아이가 보였다.

붉은 머리칼에 짧은 단발.

까칠한 척하는 귀여운 녀석.

아,

이제야 기억이 나네.

"막내. 울지 마라...."

내 막내.

데이지.

* * *

며칠 전,

"다들 어쩜 이래?"

데이지는 심통이 잔뜩 났다.

"걱정도 안 되는 거야? 또 다쳐서 오면 어쩌려고?!"

괜히 발로 바닥을 팍팍 찼다.

진짜 너무했으니까.

언니들, 오빠들, 전부 다!

'우리는 우리 일 하는 게 돕는 거야.' 이런 냉혈동물 같은 소리나 해 댔다.

카슈시(市)에 있는 사교도 예배당.

데이지는 홀로 그곳을 지켰다.

란센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나마 벌슨 아저씨가 자주 찾아오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데이지의 성에 차진 않았다.

바렌 이 오빠는 어쩌다 한 번 슥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슥- 둘러보고 나가기나 하고.

물론 다들 바쁜 건 알지만... 그래도!

"하여튼 다 맘에 안 들어! 란센 오빠.... 아니 이 아저씨도 똑같애! 어떻게 간다고 말 한마디도 안 하고 가 버리냐?!"

란센.

감성이라곤 다 말라죽은 사막 같은 인간이다.

어떻게 그냥 가지?

어느 날 세아 언니한테 '아저씨 어디 갔어?' 하고 물었다가, '갔어. 1만 년 전으로'라는 대답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 길로 말을 달려 카슈시(市)의 예배당으로 와서, 아예 여기서 숙식을 하고 있는 데이지였다.

"내가 다시는 오빠라고 부르나 봐라. 그냥 아저씨. 하는 짓을 봐. 아저씨잖아."

그렇게 이를 갈아붙이며 데이지는 오늘도 자신의 일과를 보냈다.

어두컴컴한 예배당 안에서 칼날이 공기를 석석 잘라 내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란센에게 배운 대로 검을 늘 손에서 놓지 않고 단 1mm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확한 베기와 찌르기, 밀기와 당기기를 연습했다.

처음엔 느리게, 그러다 점점 빠르게, 결국에는 온 힘을 다해.

그렇게 수련에 집중하다가도,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휙! 하고 지나가면 귀를 쫑긋.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온 고양이의 발바닥이 예배당 바닥을 사박! 밟을 때도 쫑긋.

물론 데이지라고 해서 24시간 내내 예배당 안을 지키는 건 아니었다.

답답한 걸 극히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아침이나 오후에 한 번씩 산책을 했다.

"아, 좋네-"

어두침침한 예배당에만 있다가 밖에 나오면, 감옥에서 풀려나온 죄수의 짜릿함마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늘도 땅 위의 도시도, 마음껏 만끽하며 걷던 그녀는, 그러나 돌아갈 때쯤이 되면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혹시 란센이 돌아왔을까?

나중에는 아예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녀는 후닥닥 달려들어 와 예배당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쾅!

"힉!"

그 엄청난 기세에, 데이지 대신 예배당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화들짝 놀랐다.

데이지는 좌우를 빠르게 훑었다.

"안 왔어?"

"아, 안 오셨습니다."

"알았어. 가 봐."

병사들은 그냥 란센이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이용해 어디를 다녀온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다.

후다닥 빠져나가는 병사를 보며 데이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진짜 답답하네. 언제 오는 거야? 하여튼 란센 이 오... 아니, 아저씨는! 어후!"

안 그래도 짜증이 치미는데, 그건 밤이 되면 더 심했다.

"으으! 진짜 이 아저씨 오면 바로 등짝부터 한 대 갈겨야지."

예배당 중앙에 침낭을 깔고 누운 데이지.

원래 잠자리를 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여기는 좀 그랬다.

컴컴한 어둠 속으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일그러진 신상들.

그것들이 꼭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고, 진짜 좀 그랬다.

잘 때마다 악몽도 꾸고.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란센이 떠난 지 4일째 되던 날.

그날도 짜증을 잔뜩 내며 검을 휘두르던 데이지는 무언가가 훅!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고, 몸을 날리고, 이 모든 동작이 거의 한 호흡에 펼쳐졌다.

촤아아악-!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지던 란센을, 데이지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미끄러지며 받아 냈다.

툭.

란센의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안색은 창백하고 온몸은 피투성이에....

"오빠!"

데이지의 얼굴은 오히려 란센보다도 더 창백하게 질렸다.

황급하게 미리 챙겨 둔 포션을 란센에게 먹이고 바르며 외쳤다.

"마법사! 마법사 불러와!"

* * *

깜빡.

어둡게 가라앉던 나의 세상에 다시 빛이 돌아왔을 때,

나를 둘러싼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오빠 괜찮아?"

"형! 정신이 들어?!"

"믿으라며.... 믿으래 놓고 이렇게 다쳐서 오면 어떡해...."

나는 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 그래.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 했던 다음 페이지가.

"아니 왜 말이 없어!?"

"마법사! 마법사! 정말 이상 없는 거 맞아?!"

"믿으라 그래서 꾹 참았는데.... 꾹 참고 일만 했는데...."

다들 너무 신경이 곤두서 보여서, 나는 얼른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다들...."

"어? 말했다!"

"다들... 고맙다."

"고맙다고? 갑자기?"

"응. 살아 줘서... 있어 줘서...."

난 양팔을 벌렸다.

흠칫! 주저하는 아이들.

나는 그냥 더 팔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주춤주춤 다가와 내게 안겼다. 다들 나이를 먹어서 굉장히 어색해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나를 안아 보더니 안심을 한 듯 푹 한숨들을 쉬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는 법.

19세. 아직도 '15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우리 미카 세이투스는, 다가오지도 않고 저 혼자 눈살을 찌푸렸다.

"으으. 오글거려. 어쨌든 오빠 무사한 거 봤다? 난 간다?"

그러곤 책을 펼쳐 읽으며 문밖으로 나섰다. 표지를 얼핏 보니, 요새 유행한다는 소설인 것 같다. 기사들의 용기와 사랑을 그린 작품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동생들을 모두(미카 빼고) 안아 주고 나자, 한 사람이 남았다.

잔뜩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된, 곰 같은 사람.

"아저씨 왜 그래? 나 멀쩡한데."

그렇게 묻자. 벌슨 아저씨는 이리 답했다.

"전하."

"으, 응?"

저 호칭으로 날 부른다고?

갑자기?

물론 맞는 호칭이긴 하다.

나는 반로아의 유일한 왕족이자 제1계승권자. 거기에 이제 3개의 도시를 다스리는 지배자이니 전하라고 불려도 문제 될 건 없지만....

좀 어색하잖아? 지금이 뭐 비장한 순간도 아니고....

그런데 벌슨 아저씨에겐 비장했던 모양이다.

"소신은... 소신이 너무 밉습니다."

주르르.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

아니 아저씨.... 왜 그래. 맘 아프게.

"아니, 내가 다친 건 아저씨 잘못이...."

"그냥, 상상을 해 봤습니다. 만약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런 불충한 미래를 상상해봤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예전 그 일도 있고.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소신은,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다는걸...."

아....

"이놈은 너무나... 너무나 무력하고 한심합니다...."

해 줄 말이 없었다.

너무 잘 알겠어서. 지금 벌슨 아저씨가 느끼는 절망을.

나도 느꼈었으니까.

나도 그랬으니까....

그냥 손을 뻗어 벌슨 아저씨의 두툼한 손등을 잡아 줄 뿐이다.

그러나 속으론,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찾았고 또 찾았다.

내게 왔던 그 기적을 벌슨에게도 가져다주기 위해.

* * *

"벌슨 아저씨. 이거 좀 마셔 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에 우리는 가볍게 피크닉을 즐겼다.

카슈시(市)에서 제일 예쁜 정원에 다 같이 모였다.

이런 장소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게 바로... 권력의 맛?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간식도 먹고.

그러다가 은근슬쩍 벌슨에게 물약 하나를 꺼내 준 것이다.

"이건?"

역시 어른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만 해도 그리 서럽게 울던 벌슨 아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겉은 저래도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겠지.

"일단 잡숴 봐."

아저씨는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작은 병에 담긴 붉은 액체를 훌쩍 마셨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그리고,

"으윽...!"

벌슨은 가슴을 부여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어? 아저씨!"

"아저씨 왜 그래!"

"오빠? 아저씨가 왜? 무슨 일이야!"

바렌을 억지로 일으켜 공놀이를 하던 카트리나도, 혼자 시를 끄적이던 세아도, 히죽거리며 소설책을 읽던 미카도, 다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다가왔다.

"쉿."

나는 당황한 아이들을 물리치고 벌슨 아저씨의 등에 손을 올렸다.

미세한 오러를 흘려 그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이다. 효과가 있어.'

내가 그에게 먹인 건, 로레인에게 받아 온 수많은 마법 물품 중 하나였다.

'최상급 회복 포션.'

오러 코어가 깨지면 몸은 속에서부터 무너진다.

신체 곳곳을 흐르고 있던 오러가 갈 곳을 잃고 그대로 독이 되어 내부를 갉아먹는다.

조금만 무리하게 움직여도 울혈이 터지고, 각혈을 하게 되는.

내가 벌슨에게 고대 검술을 가르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러가 필요 없는 고대 검술이라도 쇠약해진 벌슨의 몸이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비록 최상급 포션 하나로 코어까지 치유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너덜너덜해진 신체를 회복시켜 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으으... 으?"

아니나 다를까, 괴로워하던 벌슨 아저씨가 몸을 일으켰다.

"어라?"

팔을 붕붕 휘두르며 갸웃거렸다.

"어어?"

그의 얼굴에 점점 놀라움이 번졌다.

"어때? 시원하지?"

"이게 대체?"

"당장은 이걸로 참아 줘. 이거 주기적으로 먹으면서 고대 검술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

벌슨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점점 그의 눈이 충혈되고 고개가 수그러들길래 나는 얼른 그의 두 어깨를 잡았다.

"아저씨가 우리 지켜 줘야지. 그러니까 아무 생각 말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해 보자."

아저씨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질까 봐 억지로 참는 것처럼.

좋아. 그럼 이건 됐고.

나는 싱긋 웃고 돌아섰다.

"자, 다들 줄 서 봐!"

둘러서서 구경하다가 같이 눈이 빨개진 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공간 목걸이에 잔뜩 쌓여 있는 고대의 간식을 한 움큼씩 꺼냈다.

로레인이 매일 나에게 한아름씩 선물했던 고대 간식. 드디어 이걸 동생들에게 나눠 줄 순간이 왔다.

제일 가까이 있던 미카 세이투스에게 먼저 쥐여 주었다.

19살인데도 여전히 "15세 증후군" 말기 환자인 우리 미카.

"뭐죠?"

"잡숴 봐."

그 말에 녀석은 "아~ 간식이었나? 생명 활동과 관계없는 사치품이라... 우스워. 크큭." 이러며 포장지를 까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난 보았다.

녀석의 눈동자 속에 휘몰아치는 벼락을.

"이, 이것은...?!"

그치? 이게 고대의 간식이다 인마.

저건 입속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사라지는 단맛이 일품이지. 남는 건 그저 코에 머무는 산뜻한 향기뿐.

무려 마나를 이용해서 만든 단맛이라는 거다.

"간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트리나가 한 움큼의 포장지를 모조리 찢어발기더니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우적우적 씹었다.

"음! 맛있어!"

그 모습을 본 미카가 처참한 표정으로 그녀를 경멸했다.

"야만인!!! 그건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고!!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어도 부족한...!"

"야만인?"

"큼! 크큼!"

하지만 카트리나가 눈을 번뜩이자 바로 꼬리를 말고 딴청을 부리는 미카였다.

귀여운 녀석들.

그래. 이 맛이다.

이러려고 고대에 다녀오는 거 아니겠냐.

"다들 줄 서!"

고대 간식을 한 움큼씩 쥐여 주었다.

"단 거는 먹어 봤자 근육이 안 되는데...." 중얼거리는 잘츠란.

"머리 안 돌아갈 때 좋겠네." 한 줄 평하는 세아.

"와! 맛있어!" 어린아이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는 세클란.

"이건... 팔면 돈이 되겠는데?" 온몸에 반짝반짝 장신구를 한 지아.

"음! 창을 휘두르고 싶어지는 맛이군!" 훈련광인 데다가 체력으로 카트리나와 쌍벽을 이루는 룩크랜서.

그리고 우리 중 유일한 마법사 혈통.

그러니까 반로아의 공후백작가 중 유일한 마법사 가문이었던 크로나 백작가의 후예, 아샤 크로나는... 마법사답게 미친 짓을 선보였다.

"어...? 이거 마력이, 있다? 그럼 이렇게, 하면...?"

퍼어엉!

그녀가 던진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간식들이 허공에서 폭발하며 색색깔의 불꽃을 남겼다.

"오오. 마음에, 들어.... 오오...."

펑! 퍼어엉!

터지는 디저트 폭탄들.

'저게 맞나....'

당혹스럽긴 했지만,

뭐 좋다. 애들도 다 좋아했으니까.

나도 좋았다.

"뭔가. 이번엔 많이 가져왔나 봐?"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눈치 빠른 세아가 물어왔다.

그럼.

어엄청 가져왔지.

이번의 시간 여행은 역대급 성과를 남겼다.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네.

"아샤! 너도 일로 와 봐."

"으음...."

간식 폭죽놀이가 재밌었는지 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 아샤.

난 그런 아샤와 세아 앞에 너덜너덜한 책들과 두 개의 정육면체 크리스탈, 그리고 손톱만 한 구슬 2쌍을 꺼냈다.

캐스크가 준 마법 서적과 노트 중 기초에 해당하는 자료들.

그리고 그걸 텔레파시로 익힐 수 있게 해주는 '리더기'와 '버드'였다.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을 짓는 녀석들에게 나는 은근히 물었다.

"너희 혹시, 고대 마법 안 익혀 볼래?"

"!!!"

아샤의 두 눈에 벼락이 쳤다. 실제로 마력이 튀어 머리칼이 삐쭉 서기까지 했다.

반면에 세아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난 마력 재능은 없는데?"

물론 알지. 세아네 집안인 밀라가(家)도 어쨌든 검을 쓰는 가문이었으니까, 정작 제일 유명한 건 지략이었지만.

"고대 마법은 완전히 체계가 달라서 마력 적성과 관계가 없어. 그래도 관심 없어?"

"!!!"

이번엔 세아의 두 눈에 벼락이 쳤다.

아샤와 세아는 누가 뺏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얼른 내 손의 물건들을 채어 갔다.

얼른 내 설명대로 버드를 귀에 꽂고 리더기를 각자 책 위에 올렸다.

"음...! 이게, 고대 마법?!"

감탄하는 아샤와,

"완전히 새로운 접근.... 고대 검술과도 통하는 맥락이...."

분석하는 세아.

표정 변화가 일반적이지 않은 녀석들이라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지금 둘 다 잔뜩 신이 났구나.

이렇게 동생들의 얼굴을 보니, 마침내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물씬 났다.

#73화 여름 축제 대소동 (1)

동생들과 함께 키날로로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성대한 축제를 기획하는 것이었다.

하룬이 이끄는 아일룬은 현재 우리를 칠 여력이 없고,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은 하룬을 꺾은 내게 알랑방귀를 뀌기 바빴다.

평화.

일시적일지라도 확실한 평화였으므로.

축제를 열었다.

축제.

그것은 모두가 하나 되는 것.

각자 생각은 다 달라도 너도 좋고 나도 좋으니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니냐! 뭐 이렇게 긴장을 누그러뜨려 주는 일종의 마취제.

그래서 우리는 원래도 유명했던 키날로 여름 축제의 규모를 몇 배로 키워 버렸다.

전쟁 때문에 불안했을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서.

우리가 같은 편이라고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공짜 음식과 공짜 술을 실컷 풀었고, 자금 지원을 빠방하게 해 주었다.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병사들도 무장을 최대한 간소화해서 강압적인 인상을 없앴다.

그 결과는 대성황 그 자체였다.

와글와글-

창밖이 아주 떠들썩했다.

"으음...."

하지만 지금 나는 궁상맞게 집무실에서 일이나 하는 중이다.

현재 들여다보고 있는 건 운명의 책.

사도를 죽인 이후, 운명의 책에는 기능이 두 가지나 추가되었다.

하나는 '탐색'

다른 하나는 '프롤로그 1회'

'탐색' 기능은 '비틀린 세계선'이라는 것을 탐색하는 기능이었다.

'그때 그 굉고(宏鼓)같은 괴물의 위치를 알려 주는 거겠지? 상당히 쓸 만한데 이건?'

일반 책이라면 '서문' 같은 게 쓰여 있을 만한 부분에 웬 지도가 추가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대충 옛 반로아 왕국의 영토 정도의 크기를 밝혀 주는 지도.

도시가 대충 3~5개쯤 들어가는 그 지도 중, 키날로와 일루나엘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붉은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특수한 괴물 정도로 짐작이 되었지만... 역시 확인은 필요하다.

"에이-!"

하지만 나는 일단 책을 덮었다.

이번 시간 여행에서 너무 고생을 한 탓인지 당분간은 싸움질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프롤로그 1회]도 마찬가지.

'불완전하게나마 기원과 만나게 되는 기적'이라고 설명이 있었는데... 역시 지금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과거로 날아가면 어떡해?

겨우 죽다 살아왔는데.

"몰라! 나도 놀 거다!"

사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숨이 살짝 막혔다.

고대에서 가져온 산더미 같은 아티팩트도 싹 분류해 둬야 했고, 애들한테 마갑도 입히고 훈련도 시켜봐야 했다.

가진 카드가 늘어난 만큼, 앞으로의 전술 전략에 대해서도 새로 논의할 필요가 있었고.

하지만,

오늘은 안 할란다.

'그래. 이건 노는 게 아니야.'

백성들의 삶을 시찰하는 것도 통치자의 의무가 아니던가?

옳다! 나가자. 나가서 시찰하고 오자!

똑똑-

기세 좋게 일어났는데, 세아가 두꺼운 보고서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겉옷을 입다 말고 멈춰 섰다.

"...그건 또 뭐야?"

"예전에 말했던 거. 고대에서 이득 볼 방법을 정리해 봤어. 근처에 드라키움의 씨앗을 심는다든가 하는 그거 말야."

"아아."

맞아! 그게 있었지. 좋지. 아주 좋아.

그런데 말이야. 세아야.

"너... 오늘도 일해?"

그러자 세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너 때문 아니냐는 듯이.

양심이 쿡쿡 찔렸다. 사실 행정적인 일을 세아한테 도맡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날 원망하지 않았다.

그냥 좀 맥이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놀 거면 세온이나 봐줘."

세온이? 우리 6살 막내?

"키날로의 명물, '어린이 칼싸움'이 있잖아. 안 아픈 버들 칼 들고 전쟁놀이하는 거. 거기 간다더라."

"그럼 잘 있는 거 아냐? 호위 붙였지?"

"붙였지. 근데, 세온이는 이 동네가 처음이잖아. 친구 없을까 봐 그러지."

"아...."

맞네. 역시 우리 세아가 사려가 깊다.

"접수. 나가서 세온이 찾아볼게."

"응. 부탁해."

그렇게 나는 세아의 허가 아래 업무에서 해방되었고,

한 여름날의 축제, 마법 도시 키날로를 떠도는 나만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 * *

'이야.... 키날로가 다르긴 다르네.'

여길 보니까 우리 쿠샨시(市)가 촌 동네로 보일 지경이었다.

인구는 쿠샨이 75만이고 키날로가 110만이니까 50%정도 더 많은 것인데, 체감되는 차이는 그걸 훨씬 뛰어넘었다.

실제로 평균 소득 자체도 키날로가 쿠샨보다 30% 이상 높았으니까.

'키날로가 이 정도면 일루나엘은 대체 어떨까?'

로버랜드 전체를 따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이자 부유한 도시 일루나엘.

하룬이 웅크리고 있는 그곳에 대한 호기심마저 괜히 피어오를 정도였다.

'그나저나 우리 세온이는 대체 어디에 있으려나.'

세온이를 찾아 사람의 파도가 몰아치는 거리를 헤매는데, 정작 세온이는 안 보이고 웬 익숙한 다른 얼굴이 보였다.

"으하하하! 약해빠진 놈들! 키날로에는 진정 인물이 없다는 말이냐!"

...시체?

분명 신나는 축제 한복판일진데... 어째서인지 그곳만큼은 전쟁터였다.

너른 공터에, 죽은 듯한 사람들이 수북하게 널려 있었다.

그 한복판에,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인이 홀로 세상을 오시했다.

"자! 덤벼라! 또 없어?!"

카트리나 에기온.

내 첫째 동생, 카트리나의 옆에는 술이 나무통째로 쌓여 있었다.

건장한 장한 하나가 녀석의 도발에 넘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흥! 건방 떠는 것도 여기까지다!"

"우하하! 도전이냐?!"

둘의 시선 속에 서늘한 살기가 교환되고,

"간다!"

"으럇!"

둘은 동시에 나무 술통을 째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아, 저래서 사람들이 저렇게 쓰러져 있었구나.

"끄... 으... 분하...다...."

나무통 하나를 끝내 비우지 못한 장한이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하하하하하! 가소롭구나! 자! 덤벼라! 나는 이미 50통은 홀로 마셨는데, 이런 내가 두려워서 못 나선단 말이냐!"

사자처럼 울부짖는 그녀의 기세에 나름 동네 술집에서 좀 한다 하던 주당들이 벌벌 떨었다.

'하아....'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카트리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냐? 도전자.... 아, 오빠?"

사자처럼 돌아보다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트리나.

"어, 키티야. 혹시 세온이 못 봤어?"

키티는 카트리나의 어린 시절 애칭이었다.

이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면 꽤 귀여워서 불쑥 키티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세온이? 아까 칼싸움 놀이하는 애들하고 분수대로 가던데?"

"그래? 어때 보였어?"

"흠.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가더라고. 부르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술통을 슥 들어 보이는 카트리나였다.

그래. 술 마시는 데 애를 부르면 좀 그렇지.

"알았다. 혹시 세온이 보면, 이거 전해 줘."

그리 말하며 아공간에서 고대의 아티팩트를 꺼냈다.

어린이용 장난감 아티팩트.

생긴 건 손잡이뿐이지만 버튼을 누르면 빛의 칼날이 생겼다.

마치 오러 블레이드처럼 장엄한 외관이었지만 장난감답게 힘껏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다. 그냥 뒤로 살짝 밀리는 느낌이 들 뿐.

근데 진짜 끝내주는 점은, 신체 부위를 맞게 되면 한동안 그 부분이 빛이 난다는 것이었다.

'너 여기 맞았어!' 하고 알려 주듯이.

로레인은 말했다.

어린이들에게 고대 유물에 대한 호기심과 꿈을 키워 주고, 더불어 돈까지 벌 일거양득의 목표로 만든 물건이었노라고.

난 이런 것도 사양하지 않고 챙겼다.

'나중엔 진짜 별의별 걸 다 받았으니까.'

주급도 아티팩트로 받고, 성과급도 아티팩트로 받고 인체 실험 비용도 아티팩트로 받은 데다가 로레인이 개인적으로 찔러 준 것도 상당히 많았다.

심지어 비밀 보관소에 있던 건 마갑이고 아티팩트고 그냥 다 쓸어 담아 버렸고.

그러다 보니 아공간 목걸이에는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종류의 아티팩트가 쌓여 있었다.

뭐가 있었는지 기억도 다 못 할 정도.

"오! 이거 주면 세온이 인기 작살나겠는데?"

빛의 칼날을 꺼내 든 카트리나가 중얼거렸다.

녀석 키가 180cm는 되다 보니 장난감 칼이 그녀 손에는 아주 작아 보였다.

"알겠어! 세온이 보면 꼭 전해 줄게."

"그래. 그리고 이건 너 해라."

나는 아공간에서 고대의 마법 물품을 하나 더 꺼냈다. 찰랑거리는 회색 연기가 가득한 술병.

홀짝.

내가 먼저 한 입 마시고 카트리나에게 건넸다.

"조금만 마셔도 효과가 있으니까, 너 먹고, 다들 한 모금씩 나눠 줘."

"읭? 이게 뭔데?"

꿀꺽.

그러면서 군말 없이 마시는 게 키티의 귀여움이다.

"오오?"

"스피릿 체인이란 거야. 아직은 느낌이 안 올 거야. 다 같이 마셔."

그리 말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조금 걸어간 뒤부터 느낌이 왔다.

'시작됐네.'

술꾼들이 스피릿 체인을 나눠 마시는 게 느껴졌다.

달아오른 술꾼들의 혼몽한 정신머리가 내 머릿속으로 쑤셔 박혀 온다.

희열이라는 건 말이다. 공유되면 공유될수록 커지는 속성이 있다. 거기에 착안해서 만든 게 바로 '스피릿 체인'.

취한 이들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 서로가 같은 걸 느끼고 같이 기뻐하게 한다.

음유시인의 끝내주는 노래를 듣고 다 함께 감동과 행복에 젖는 것과도 비슷한,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훨씬 우월한 군중 효과를 준달까?

물론 이 경우엔 내가 먼저 마셨으므로....

'정신을 잃지 않게. 하지만 기분은 딱 좋게.'

내 정신력 하나로 저 주당들의 폭주하는 에너지를 잘 컨트롤해 주는 역할을 했다.

"오오오오오!"

"죽인다!!"

하나가 되어 얼싸절싸 즐거워하는 주당들의 환호성이 귓가에 들렸다.

저렇게 좋아해도 내 단단한 정신력이 한 줄기 박혀 있는 이상, 별다른 사고는 없겠지.

* * *

세온이는 분수대로 갔다는데, 나는 한참을 헤맸다.

아직 키날로의 지리도 잘 모르는 데다가 생각해 보니 분수대가 한두 개가 아니었거든.

그래도 물어물어 어떻게든 찾아왔다.

역시나, 꼬마들은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얼굴 하나가 괴상한 차림새의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뭐야? 무슨 갑옷이 저따위야?'

그들의 차림새는... 그래, 기사의 갑옷과 유사했다. 하지만 전혀 실용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저기 비어 있는 부분은 칼로 그어 달라고 저렇게 만들었나?'

'저기는 그냥 창으로 푹 찌르면 웩! 하고 박히겠는데?'

예쁘다.

예쁜 건 알겠는데, 저딴 게 갑옷의 형태를 취하고 있자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에... 누구보다 번쩍이고 누구보다도 죽기 좋아 보이는 갑옷을 입은 애가... 우리 19살짜리 미카 세이투스였다.

...저것도 15세 증후군의 일종인 건가?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미카.

이 녀석은 나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녀석이었다.

세이투스 공작가의 단 하나 남은 혈육.

하지만 처음부터 혼자였던 게 아니었다.

녀석에겐 친오빠가 있었다.

나랑 동갑이었던, 로이 세이투스.

내 절친.

내가 반로아 왕궁에 살던 시절, 아니 내 기억이 있는 시점부터, 항상 궁궐에서 같이 놀았던 소꿉친구.

그 녀석은 죽었다.

혈백작 들카슈의 일격을 나 대신 맞고 참혹하게.

그 로이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미카 세이투스. 유독 마음이 가고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난, 당최 이 녀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쩜 지 오빠랑 저렇게 다른지....

지금 녀석은 괴상한 차림새의 무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이게 대화가 맞나?

붉은 갑옷의 남자애가 먼저 말한다.

"크큭, 고작 이 정도로 겁에 질렸나? 역시 온실 속의 공주님은 아무것도 모르는군. 내가 '진짜' 지옥을 알려 주랴?"

그러자, 웬 핑크색 갑옷의 여자애가 가짜 칼을 들어 올리며 답한다.

"당신은 어떻게... 진흙에서 태어났다는 게 변명이 될 순 없어요. 누군가는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운답니다!"

적절한 타이밍에 검은 갑옷의 여자애가 끼어든다.

"유치한 기사 놀이에 어울릴 시간 따위 없다. 레드 나이트. 네 선에서 정리해라."

그러자, 드디어, 내 동생 미카 세이투스가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후.... 너희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내 안의 '정의'를 자꾸 자극하지 마라....'

어,

알겠다.

그러니까,

이거 그거구나? '기사 놀이' 같은 거.

그래. 할 수 있지.

글로리랜드의 기사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 소드 익스퍼트 하급.

인간을 뛰어넘는 무력을 가진 그들을 충분히 동경할 수 있었다.

동경이 지나치면 이렇게 흉내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미카야,

넌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잖아....

#74화 여름 축제 대소동 (2)

톡톡-

완전히 심취해 버린 미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미카야. 세온이 못 봤어?"

그랬더니 대답이 아주 시건방졌다.

"누구지? 아, 란센인가?"

하?

근데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란센. 난 너처럼 정의를 흘리고 다니는 작자들이 아주 수치스럽다.... 너의 '정의'는 대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미카 이 녀석이 날 경멸하는 눈으로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었다.

...팰까?

순간 맹렬한 충동이 들었지만, 가까스로 참아 냈다.

로이야. 너 때문에 한 번 참았다.

"그래서 세온이 봤냐고."

"누구? 아아, '그 녀석' 말인가? 그 어린 나이에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는 아주 재능 넘치는 소년이었지."

아... 그러냐.

오러 블레이드라고 하는 걸 보니, 카트리나가 나보다 먼저 세온이를 마주친 모양이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칼날은 오러 블레이드처럼 보였으니까.

그래. 그거 하나면 이제 좀 인기가 있겠지?

"그 녀석은 요술 공원으로 가더군. 아아, 그리고 지독한 주독을 풍겨 대는 언데드의 왕, 카트리나라는 괴물도 보았다."

미쳤나.

카트리나한테 맞으면 나한테 맞는 거보다 아플 텐데...?

아무래도 지금 미카는 친구들 탓인지 좀 정신을 놓은 것 같다.

"...알겠어. 미카야. 혹시 세온이 보면 이거 좀 전해 줘."

이번에 꺼내 준 물건은 장난감 갑옷이었다.

이 역시 아티팩트.

가슴만 가리지만, 버튼을 누르면 전신 갑옷으로 변신이 가능했다.

가볍고 튼튼하고 소리는 절그럭절그럭 간지났으며 광택도 번쩍거렸다.

장난감이라곤 해도 미카가 지금 입은 갑옷 따위보다는 훨씬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하!"

그런데 미카는 코웃음을 쳤다.

"그 꼬마 도련님에게 주기엔 너무 미천한 갑옷이로군. 거절하겠다."

...한 번 더 참았다. 로이야.

나는 주먹을 뻗는 대신 아공간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거 줄 테니까, 너도 그거 전해 줘."

"?"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카에게 방금 꺼낸 아티팩트를 설명해 줬다.

얘가 딱 좋아할 만한 물건이라서.

"원하는 대로 주위 풍경을 바꿔 주는, 일루션 아티팩트야."

"뭐, 뭣?"

"써 봐."

미카는 낯선 물건을 본 고양이처럼 잔뜩 긴장을 하며 조심스럽게 일루션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그 순간,

팍!

불이 꺼지듯 주위가 어두워지고, 오로지 미카 단 한 명만을 향해 달빛이 쏟아졌다.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미카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이, 이건!"

녀석이 다시 아티팩트를 조작하자 갑자기 사방에 새하얀 꽃이 피고 그 위에 점점이 피가 흩뿌려진 풍경이 나타났다.

"크으으으으으-!"

미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끝 하나, 미세한 눈꼬리의 움직임 하나에서도 묻어나는 진하디진한 감격.

녀석은 손을 떨며 그제서야 내게서 장난감 갑옷을 받아 갔다.

"임무는 수락하겠다."

어... 그래.

내가 채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볼 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갑옷을 입은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오, 미키시엘라 경!"

아무래도 여기선 미카가 '미키시엘라 경'으로 불리는 모양이다.

"이게 있다면 <진정한 기사님은 죽지 않아요>에서 나오는 '영광의 길'도 재현이 가능하지 않겠소!?"

세온이를 인기 꼬마로 만들어 주려고 나선 길이었는데, 이상하게 미카가 괴상한 무리의 초절정 인기인이 되었다.

"훗. 역시 카시미르 경, 제법이야. 자, 그럼 영광의 길이다!"

그리곤, 주변의 길을 새하얗게 빛나는 고대 가도로 바꾸어 버리는 미카였다.

"오오오오!"

"꺄흙!"

"미쳤다!"

괴상한 무리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 함께 그 길을 행진한다.

나는 그렇게 사라지는 미카의 등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

이젠 모르겠다.

미카 세이투스(19세, 익스퍼트 중급).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 * *

요술공원에 도착했을 때쯤, 나는 어쩐지 이미 지쳐 버린 기분이었다.

탈태까지 한 소드마스터인 내가, 고작 이런 것으로 지칠 리가 없는데....

머릿속에선 카트리나가 주정뱅이들을 이끌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는 게 느껴졌고, 시선을 들면, 번쩍번쩍하며 풍경이 변하고 있는 거리도 얼핏 보였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터덜터덜 요술공원에 들어섰다. 그리고 좀 놀랐다.

"이야- 이거 장관이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아름다운 마법의 향연이었다.

색색깔의 물로 만들어진 고래가 떠다니고, 어딘가에서 소환된 예쁜 돌이 계속 떨어져 층층이 쌓이기도 하고, 곰이었다가 쥐였다가 심지어 마수의 모습으로도 변신을 하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건 우리 아샤 크로나였다.

크로나 백작가.

기사 왕국이라 불리던 반로아에서 마법으로 백작위를 받았다는 건 그만큼 마법 재능이 끝장났다는 뜻이니까.

아샤는 마법도 독학으로 익혔다.

다행히 녀석에겐 나처럼 아공간 아티팩트가 있어서 가문의 비전서들을 챙겨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홀로 공부해 경지에 이른 마법사. 그게 내 동생 아샤였다.

"와.... 엄청나네. 어떻게 저렇게 섬세한 운용이 가능하지?"

"그러니까. 심지어 이 열기를 봐. 위력도 장난이 아니야."

"크으.... 존. 경."

지금 요술공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일종의 마법 자유 경연.

마법사들이 자기 재주를 뽐내면 다른 마법사들이나 관중들이 보고 환호를 보내는 식이었다.

환호를 가장 많이 받은 이가 가장 존중받았고, 그게 바로 우리 아샤였다.

무려 푸른 불꽃으로 재현한 바다 위에 불꽃의 빛을 이용해 조형해 낸 성이 서 있고, 그 주위를 화염의 드래곤이 날고 있었다.

마법으로 깎은 조각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생생한, 예술 그 자체.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아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즐기기까지 했다.

"흐...."

음침한 표정에 삐뚜름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고개를 꺾어 다른 마법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곧 쭉 뻗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신랄한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너의 그 고래는 전혀 살아 있지 않아...!"

"크윽!"

물로 된 고래를 움직이던 마법사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등 뒤에서 고래가 바닥으로 쏟아져 버렸다.

아샤의 손가락은 또 다음 희생양을 찾아냈다.

"넌 그저 소환 원툴인 거냐!"

"앗... 아앗...."

예쁜 돌을 계속 소환해 내던 마법사가 뒷걸음치다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다른 마법사들의 기를 꺾어 놓는 아샤.

나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지. 저래야 내 동생이지.'

승부라면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는 것.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쳤다.

잘하고 있어, 아샤!

한동안 아샤의 승리를 잘 구경하다가 나는 퍼뜩 내 본래 목적을 깨달았다.

"아샤. 혹시 세온이 못 봤어?"

"으,응? 오빠? 아, 세온이? 봤어. 여기, 지나쳐서 중앙대로로."

단어 사이 사이를 툭툭 끊어서 말하는 아샤 특유의 말투가 있다.

"나만 빼고 다 세온이를 봤네. 세온이 어땠어?"

"젤 앞에서, 애들 이끌었어. 칼에서 빛. 갑옷은 번쩍거리고."

오?!

이제 우리 세온이가 대장이 된 거야?

역시! 혹시나 싶어서 애들한테 아티팩트 하나씩 맡기길 잘했다.

두근.

문득 보고 싶었다.

키날로의 아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세온이라니...!

이건 못 참지.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거 세온이 보면 전해 줘."

이번엔 부유 마법이 걸린 어린이용 망토를 건넸다.

아샤는 군말 않고 망토를 받아 챙겼다.

됐다. 이제 세온이 보러 가자.

얼른 등을 돌렸는데, 아샤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카트리나 언니랑. 미카한테 들었어."

"응? 뭘?"

"나도 줘."

참내....

얼른 아공간을 뒤적였다. 마침 아샤가 좋아할 만한 게 있었다.

"옛다."

얼른 던지고 중앙광장을 향해 달렸다. 이젠 진짜 좀 세온이 좀 보자.

근데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헉! 마력이! 보여...!"

"훌쩍. 훌쩍. 내 마력이 이렇게 생겼었어...."

"왜 자꾸 눈물이...."

운다.

흘깃 돌아보니까,

'아샤. 너도 울어?'

눈물을 훔치는 아샤도 보였다.

마력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마나 비전'.

고대의 마법사들이 수련할 때 쓰는 아티팩트였다.

근데, 설마 자기 마력을 본다고 울 줄은 몰랐는데....

마법사들에게 자기 마력을 본다는 게 큰 의미가 있나 보다.

다들 펑펑 울기 바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등 뒤로 마법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졌다.

* * *

중앙대로로 향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에잇.'

그냥 훌쩍 뛰어서 건물 지붕에 섰다.

근데 뭐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키날로의 풍경은....

"예쁘다."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행렬.

그 맨 앞에는 꽃잎이 흩날리는 환영과, 형형색색의 마력의 선들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미카도. 아샤도 다 저기 있구나.

지붕을 밟고 뛰었다. 저 멀리 보이는 영주성 앞 광장에 도착하자 정말 다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거기에선 왼쪽!"

"어허! 측면이 약하잖아! 우회해서 기동 타격!"

그곳엔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꽃잎이 흩날리고 바다가 철썩이는 환영을 배경으로, 두 무리의 기사단이 맞붙고 있었다.

하나는 미카를 필두로 한 열받는 갑옷의 얼간이 기사들.

다른 하나는 버들 칼로 무장한 어린이 기사단.

"크윽! 제법이군!"

미카와 그 친구들은 어린이들을 상대로 꽤나 잘 맞춰 주고 있었다.

살살 버들 칼과 부딪혀 주며, 은근슬쩍 여기저기 맞아 준다.

음, 착한 애들이었잖아? 얼간이 기사단에서 얼치기 기사단으로 승격.

"크큭. 적이지만 인정할 만하구나. 이 일격을 막은 건 네가 처음이다."

미카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대사를 치고 있었다.

그러자 맞은편의 세온이는 잔뜩 신이 났다.

"너도 제법이다! 하지만 이건 못 받아 낼걸?! 받아랏 오러 소드 블레이드 스톰!"

"아, 아닛!"

쩌저저저정!

세온이의 손에 들린 빛의 검이 미카의 전신을 난자했다.

"아아아악.... 나는 여기서 꺾이지만... 정의는 남아... 끝내 다시 피어난...."

"죽어!"

"으아아악!"

거참, 잘 놀아 주네.

"캬! 술맛 난다!"

"크! 맛난다!"

"오늘따라 안 취하는 거 같지 않냐?!"

"오늘 좀 안 취한다?!"

"죽인다!"

"죽인다!"

스피릿 체인으로 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주당들은 계속 서로 비슷한 말들을 지껄여 대며 이 기가막힌 칼싸움 구경을 했다.

"마력.... 아름다워...."

"보인다.... 보여...."

"이 꽃잎, 저 바닷가.... 다 고대의 마법인가? 고대 마법은 마력까지 예뻐...."

요술공원에서 여기까지 온 마법사들은 아직도 울고 있었다.

다른 시민들도 이 진귀한 구경거리를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고.

"헉... 헉...."

제일 앞에서 날뛰던 세온이가 지쳤는지 뒤로 빠졌다.

나는 얼른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쑥 들어 올렸다.

"여어. 세온이."

"아! 쌤!"

환하게 웃는 세온이.

크.

그래 이 맛이지.

"재밌어?"

"응!"

찡-

가슴이 울렸다.

이 녀석이 이렇게 해맑게 웃는 거 처음 본 거 같은데...?

좋아. 그럼 오늘 제대로 힘써 보자.

얼른 아공간에서 스테미너 포션을 꺼내 세온이에게 먹였다.

"오! 오!"

다시 기운이 불끈해서 뛰쳐나가려는 세온이.

얼른 녀석의 뒷덜미를 다시 낚아챘다.

녀석이 발버둥을 쳤다.

"아, 왜!"

"기다려 봐. 더 재밌게 해 줄게."

오늘의, 마지막 아티팩트.

'환혹의 구슬'을 꺼냈다.

이것에 저장된 환영은 단 하나,

[크라라라라!]

진짜 실감 나는 '창룡(蒼龍)'을 만들어 내는 것.

"히이이익?!"

모여 있던 시민들이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 저 하늘에 떠서 벼락을 일으키는 푸른빛의 드래곤은 정말로 실감이 났으니까.

"와...."

세온이도 넋이 나갔다.

나는 그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자. 얼른 가 봐, 세온아."

"응!"

녀석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를 완전히 믿었다.

펄럭! 아샤가 전해 준 부유의 망토가 세온이의 등 뒤에서 부풀고,

후우웅-!

녀석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크라라락!]

그에 맞춰서 땅으로 내려오는 창룡(蒼龍).

"어어억!"

놀라는 시민들 얼굴 위로, 세온이가 휘두르는 빛나는 검의 반사광이 떨어진다.

[캬아아아아!]

온몸이 조각나 흩어지는 창룡(蒼龍).

"세상에. 저것도 환영 마법이었어?"

놀라서 벙찐 시민들 사이에서, 홀로 높이 떠 있던 세온이가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순간,

"우와아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오!"

"직인다!"

"죽여 준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카트리나가 이끄는 주정뱅이들이었고,

"오오오. 어쩜 저리 아름다운 마력이...."

"태어나서 다행이다. 태어나서... 기뻐...."

그 직후에 마법사들은 무릎을 꿇고 울었다.

"과연, '그 녀석'인가. 설마 드래곤마저 해치울 줄은"

"실로 미키시엘라 경의 동생다운 솜씨...."

"새로운 드래곤 슬레이어의 탄생이군."

미카의 친구들도 코를 쓱하며 즐거움을 표했다.

결국 모든 시민들이 이 장단에 놀아난다.

"와아아아아아!"

"이번 축제는 진짜 미쳤는데?"

"그저 전.설."

"아니, 이거 왜 재밌음? 얼마 전만 해도 도시 분위기 개판이었는데...."

"아, 몰라! 재밌으면 그만이지!"

함성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주정뱅이였나, 마법사였나, 기사놀이 하는 패거리였나.... 모르겠다. 아니면 전부 다였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일단 누군가가 시작하자 모두가 따라 외쳤다.

"소드마스터 세온 만세!!!"

"키날로 만세!!!"

"란센 시장님 만세!!!"

이거,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내 이름을 연호하는, 그 순간의 떨림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세온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찢어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여섯 살짜리 아이.

장담하는데,

지금 내 얼굴도 그 비슷할 것 같았다.

"소드 마스터 세온 만세!"

"란센 시장님 만세!"

그날의 환호성은 밤이 깊도록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키날로는 완전히 나의 도시가 되었다.

#75화 1달 1년 10년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보였다.

겉으로는.

하지만 사실,

내 마음속에 뿌리내린 불안은 나날이 커져 가기만 한다.

'사도....'

그 불안의 근원에는 사도가 있다.

무언가의 '손가락'이라 불렸던 그것.

"으음."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떠올리는 순간,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어쩌면 축제를 즐겼던 이유도, 이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베었으나, 그 공포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애초에 그 괴물을 벨 수 있었던 것도 순수한 내 힘이 아니었다.

신화 시대 기술이 적용된 용의 마갑, 거기에 드래곤 하트의 출력까지 모조리 쥐어짜서 겨우 베어 냈던 것이니....

'그마저도, 섬멸천사가 그 「최후의 쐐기」라는 걸 쓰지 않았다면?'

다른 변수가 약간만 있었어도 결과는 달라졌을지 몰랐다.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운명의 책 이거, 너무한 놈이다.

그런 거랑 대체 어떻게 싸우라고 과거로 보내 버리는 거냐?

그런데,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고작 사도. 손가락이란 말이지.'

그럼 손도 있고 몸통도 있나?

그런 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어?

오싹-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사교(邪敎).

사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이상한 힘을 다루는 사이비종교구나 했지.

애초에 고대와 달리 현대는 진짜 정통 종교도 별로 힘을 못 쓰는 시대인데 그깟 사이비 따위 알게 뭔가.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데...

'상상 이상으로 두렵다.'

이젠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그토록 현실적이었던 크시아스가 갑자기 종교쟁이가 되었던 것인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힘의 편린이라도 느낀다면 두려워 경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내 초조함의 근원이었다.

'뭔가 벌어지고 있어.'

사교(邪敎).

만약 그것이 고대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면 이토록 초조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크시아스와 들카슈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은 현재에도 버젓이 존재했다.

심지어 그 칼로틴 제국의 황제마저 사교도인 게 거의 확실한 상황.

그렇다면,

'이 시대에도 그 손가락 같은 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어쩌면 그 주인이 나타날지도....'

나는 준비해야만 했다.

내 동생들.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일룬 정복 같은 건,

사실 그 준비를 위한 준비의 준비 정도밖에는 안 되는 일이었다.

"후...."

나는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책상 위로 던져 버렸다.

책상 위에는 비슷한 내용의 편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글 쓰는 스타일은 다 제각각이고 미사여구도 다 자기 멋대로 붙였지만, 내용은 다 같았다.

'함께 힘을 합쳐 아일룬을 찢어먹자.'

하여튼 누가 강도백작들 아니랄까 봐.

하룬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는 자기 자리 지키기 급급했으면서...

그가 나에게 패하자, 이리 떼나 승냥이 떼처럼 갈가리 찢어먹을 생각에 혈안이 되었다.

"개소리하고 있어."

나는 이딴 놈들이랑 손을 잡을 마음이 요만큼도 없다.

애초에 그게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다들 욕심에 눈이 멀어 있는데 협력?

웃기는 소리. 항상 뒤통수를 감싸고 다녀야 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모두 읽고 답을 해 주는 건, 그냥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단칼에 거절해 버리면, 저놈들은 틀림없이 나를 방해하려고 들 테니까.

그래서, 간 보는 척하는 거다.

나도 힘이 부족하니 너희랑 손을 잡을 수도 있어. 이렇게 우는 척하는 거지.

하지만 실은,

'할 수 있다. 혼자서.'

이미 방법도 생각해 두었다.

저런 편지가 내게 오는 건, 다들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혼자서 아일룬을 정복할 순 없다고.

단순히 인구만 비교해도 그렇기는 했다.

아일룬 지방은 도시가 다섯 개고 인구는 무려 630만을 넘겼다.

반면에, 지금 내가 통치하는 세 도시는 다 합쳐 봐야 인구가 270만.

사이즈부터 달랐으니까.

'그래도 할 수 있어.'

이렇게들 말하겠지.

내가 가진 병력으로는 그 큰 지역을 커버할 수 없다고.

심지어 다른 지역을 눈 아래로 깔아 보는, 고집 센 아일룬 사람들이기에, 더 힘들 거라고.

각지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나고, 세금을 안 내는 등 불복종을 해 버리기 시작하면, 끝없는 수렁 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어.'

내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다 탁상공론이었으니까.

들고 일어날 거다? 불복종할 거다?

정말 실제로도, 과연, 그럴까?

우습게도,

이 순간 내 뇌리를 스친 건... '사도'였다.

그 압도적인 힘과 공포.

고집은커녕,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마저 바꿔 버리는 힘.

그래.

난 이미 마음을 정했다.

* * *

동대륙 올드랜드와 서대륙 글로리랜드.

대상(隊商)들은 세상의 끝과 끝을 이으며 로버랜드를 관통한다.

그들이야말로 로버랜드의 피요, 생명이었다.

그들이 있기에, 로버랜드 전체가 먹고살며, 거대한 도시들이 유지될 수 있었으니.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천면(千面)의 대상(隊商), 레나죠라 체미엔은 지금 아일룬 지방의 주도(主都), 일루나엘시(市)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일루나엘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아일룬을 통과하는 무역로의 입구.

거대 호수, 나엘룬드와 면해 있는 항구.

오르락내리락 구릉지가 많은 다른 지역들과 달리, 아일룬의 무역로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으로 마차가 다니기 편했다.

거기에 튼튼하고 거대한 고대의 가도도 있었고, 잿빛땅의 크기도 다른 지역보다 현저히 작아 마수의 공격도 드물었다.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빠르고 안전한 그 무역로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일루나엘을 통과해야 했다.

심지어 세계 최대의 호수인 나엘룬드를 따라 이어지는 선상 무역로의 종착지였기에, 일루나엘시(市)는 그야말로 돈과 꿀이 흐르는 땅.

'그러니까 일루나엘을 꽉 잡아야 되는 거야.'

애초에 레나죠라 체미엔이 천면(千面)의 대상이라는 칭호를 얻고 로버랜드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상회를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일루나엘에 있었다.

일루나엘을 통과하는 그 많은 물류 중에서 40% 이상을 그가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이래서 항상 권력자들과는 미리미리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지.'

모두가 하룬을 보고 아니라고 외칠 때, 그는 하룬에게 모든 걸 걸었다.

지금도 그때 하룬에게 바쳤던 보물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지만.... 결국 뭐, 결과를 보라. 그 수십 배, 아니 어쩌면 수백 배의 이득을 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레나죠라에게는 또다시 한번 배팅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하룬이 죽었을 리는 없어. 하지만 상당히 난처하긴 할 거야. 그럼 난 뭘 줘야 하지? 뭘 줘야 거절하지 못하려나?'

준비한 카드는 많다.

다만 그중에 뭘 꺼낼지 정하지 못했을 뿐.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던 때, 젊은 상인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꽤 똘똘한 것 같아 눈여겨보던 녀석이었다.

"저, 그런데 상회주님. 이대로 괜찮을까요?"

"무엇이 말이냐?"

"란센에게 선물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이미 그쪽을 맡은 행수가 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회주님께서 직접 한 번 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룬이 란센에게 크게 패해 생사를 오간다는 말도 있고.... 이러다가 일루나엘이 란센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피식-

레나죠라는 웃고 말았다.

똘똘하긴 한데, 역시 어리긴 어리구나.

"당분간은 일없다. 란센 그자가 아무리 대단해도, 향후 최소 10년간은 일루나엘을 도모하지 못할 테니."

"아, 상회주께선 하룬이 살아 있을 거라 판단하시는 건가요?"

"물론 하룬은 살아 있을 게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아니야."

레나죠라는 자신의 양옆에 있는 호위기사들에게 물었다.

"두 분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하룬이 없다고 일루나엘이 무너질까요?"

그 두 명은 무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고한 전사들이었다.

호위기사로 고용했다 해서 함부로 말을 낮추어서는 안 되는 위인들이었다.

되레 고용된 처지인 그들이 말을 놓았다.

"불가."

"안 되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라내는 대답.

젊은 상인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항변했다.

"하지만 란센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검의 천재...."

레나죠라의 오른편에 있던 미중년의 소드마스터가 그의 말을 툭 끊었다.

"안 돼. 애초에 얘랑 나랑 둘이 힘을 합치면 하룬이고 란센이고 충분히 잡을 자신 있어. 그치만 안 된다고. 일루나엘은."

"그렇지."

"아일룬 출신이 아닌 전사가 일루나엘을 먹은 적이 있기는 해?"

"없지."

"그래. 아일룬 놈들은 배타적이라서 그런 꼴 못 본다고 죄다 몰려와서 일루나엘을 지키겠지."

"익스퍼트가 그리 많으면 그랜드 마스터도 갈려 나가지."

"심지어 소드마스터도 아직 둘이나 남아 있잖아?"

둘이서 쿵짝을 맞췄다.

젊은 상인은 그래도 수긍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결국 레나죠라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기로 했다.

"잘 생각해 보거라. 이 로버랜드에 어찌 이리도 많은 전사들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올까?"

"그야 저희 덕분 아닙니까?"

"그래. 바로 우리 황금의 대상(隊商)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서교역로를 이어 만드는 막대한 이익."

"그렇지요."

"바로 그게 있기에, 많은 전사들을 부양할 수 있었던 거고, 그런 전사들이 있기에 득실대는 마수들을 밀어내고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거지."

"그렇지요."

"그러니 생각해 보거라. 란센은 이미 카슈, 키날로, 쿠샨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일루나엘까지 갖게 된다면 어찌 되느냐?"

아!

젊은 상인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노르베르쥬로 향하는 모든 무역로를... 란센이 틀어쥐게 되는군요!"

"바로 그거다. 란센이 무역로를 차단하면 노르베르쥬 전체가 비실비실 굶어 죽겠지."

레나죠라는 저 멀리 펼쳐지는 평야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10년도 꽤나 후하게 쳐준 거다."

그 누구도 란센이 혼자 일루나엘을 먹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약 란센이 그런 욕심을 내비친다면, 아일룬 전역에서 모여든 전사들뿐만 아니라, 노르베르쥬의 각 도시에서 파견한 전사들까지 모두 상대해야만 했다.

모두가 란센을 방해할 것이다.

그가 일루나엘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사실 평생 해도 안 될 가능성도 높아. 차라리 란센이 노르베르쥬의 다른 영주들과 동맹을 맺는다면 모르겠는데...."

레나죠라는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그 욕심쟁이들이 단합이 될 리가 없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양옆에서 소드마스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자, 젊은 상인은 그저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레나죠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레나죠라는 그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젊어서 저러지. 젊어서.'

사람은 쉽게 타인의 말이나 일시적인 기세에 현혹되고 만다.

그래서 그는 항상 3개의 철칙을 따른다.

그중 세 번째.

'세상의 판단보다는 나의 판단을 우선할 것.'

세상은 쉽게 휩쓸리고 흔들려 버리니, 언제나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판세를 읽어야 손해가 없다.

그 판단이 말해 주고 있었다.

란센.

아직은 전혀 신경 쓸 만한 이름이 아니라고.

* * *

세아는 투덜거렸다.

표정 변화는 미미하지만, 불만이 많아 보였다.

"회의를 왜 연무장에서 해."

녀석은 오늘도 서류를 한 뭉텅이나 들고 왔다. 그 와중에도 검을 손에서 안 놓은 것이 신기하다고나 할까.

나는 세아에게 물었다.

"그 서류들은 다 뭔데?"

"이번에 짜 본 일루나엘 복속 계획. 하룬이 죽었다는 가정하에, 운이 따르면, 1년 안에 될 수도 있어. 핵심은 반간계(反間計)인데...."

설명이 길어지려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끊었다.

"미안. 근데 그거 수정해야겠다."

"어째서? 보지도 않고?"

"내가 해 보려는 방법이 있거든. 이건 잘 풀리면... 한 달? 그 안에 일루나엘 복속이 가능할걸?"

세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일루나엘 정복을 1달 안에 한다고?"

나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내가 불러낸 동생들과 리베라까지 주요 간부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응. 차차 설명해 줄게. 일단은...."

나는 세아를 뒤로하고 손을 펼쳐 한쪽을 가리켰다.

"자자! 다들 일단 시작하자. 한 명씩 나와서 이거 입어 봐."

내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무려 31개나 되는 마갑(魔甲)이 주르르 진열되어 있다.

지금 시대에는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강력한 병기.

로레인의 움직이는 연구소에서도 특별히 비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었던, 최첨단 마도 기술의 집약체들이었다.

<노르베르쥬를 지나는 무역로>

*붉은색이 주요 무역로

*보라색이 상대적으로 작은 무역로

#76화 어떻게 할래?

"이게... 뭐야?"

세아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정말 놀랐는지 눈도 크게 뜨고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짜식, 뭘 이 정도로.

"저건 원래 성능의 반도 안 돼."

구우웅-

낮고 은은한 진동음.

마갑(魔甲)을 입은 동생들이 연무장 곳곳에서 몸을 풀었다.

경지가 한 단계 이상은 올라간 것처럼 다들 힘과 속도가 평소와 달랐다.

심지어 움직임의 정밀함과 감각마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저게 절반도 안 되는 거라고?"

"응. 마갑을 제대로 쓰려면 '시동'을 해야 되거든. 그러려면 검기를 쓰는 독검(讀劍) 수준은 돼야 하니까."

마갑의 갑령(甲靈)과 소통을 해야 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경지에 오른 건 카트리나와 캐치밖에 없었으니, 다른 동생들은 '자동 모드'를 쓰는 중이었다.

"자동 모드의 기능이 저 정도면... 시동을 했을 땐 어떻게 되는 건데?"

"저렇게 되지."

나는 턱으로 카트리나를 가리켰다.

파아앙!

"오옷! 오오옷! 이게 [돌진]!"

마침 녀석은 '스킬'을 썼다.

쓰는 순간, 녀석의 몸이 훅! 하고 사라지듯이 튀어나간다.

그냥 써도 저런데 이제 발로 땅을 박차면서 쓰면, 소드마스터도 반응하기 어려운 돌진기가 완성되는 거지.

"저렇게 스킬을 그때그때 켜거나 끌 수 있어."

"맙소사."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기 봐."

이번엔 캐치 쪽을 가리켰다.

녀석은,

파아아앙!

어마어마한 기세로 검을 내리쳤다가 톡! 하고 표범처럼 날쌔게 몸을 뒤로 빼냈다.

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캐치 오빠는 강화 폭이 더 큰 거 같은데? 힘도 속력도."

"바로 그거야. 출력을 특정 기능에 몰아줄 수 있어. 감각을 더 강화하거나 근력이나 속력을 더 강화하거나."

"그건 전투에선 엄청난 차이잖아?"

"맞아. 자동 모드에선 모든 수치가 기본값으로 고정이니까."

"근데 상대가 갑자기 근력에 출력을 몰빵해서 내려치면...."

"답이 없지. 그래서 2배 이상 차이라는 거야."

자동 모드에선 [실드] [관성제어] 같은 패시브 스킬만 적용되었고 그걸 맘대로 켜고 끌 수도 없었다.

마나 하트의 소모마저 더 빨랐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건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그런 터무니없는 병기였다.

"그런 자동 모드인데도 이렇게 강하다는 거네. 이제야 이해가 된다. 오빠가 한 말."

세아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난 1년, 오빤 한 달이랬지?"

"응. 뭐, 실제로 어떨진 지켜봐야겠지만."

"이만한 힘이면 다 가능할 거야. 근데 그래도 문제는 남아. 힘으로 정복은 할 수 있어도 복종은 얻지 못해. 복종이 없으면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어."

지당한 말씀.

나도 그 지점이 고민이다.

세아가 날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계획이 있어? 내 반간계(反間計) 말고?"

"아, 네 계책을 아예 안 쓸 건 아니지."

나는 손에 든 세아의 보고서를 팔락팔락 흔들었다.

"상황에 따라선 네 계책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쓰게 될 거야."

"그래서, 당장은 뭘 하려는 건데?"

"일단은...."

나는 말꼬리를 길게 끌며 연무장을 쭈욱 돌아보았다.

이젠 마갑에 거의 적응한 동생들.

애초에 적응이 어려운 물건이 아니었다.

좋은 물건이란 그런 거니까.

저게 있으면 나도 동생들 걱정을 안 할 수 있다. 실드가 기본 옵션이기에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거거든.

그러니,

힘이 생긴 거다.

안심하고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그걸로 내가 하려는 건,

"대화부터 해 봐야지."

일단 부딪혀 보기.

"아주 진솔하게 말이야."

등 뒤에 커다란 칼을 세워 놓고 물어볼 거다.

이제 어떻게 할래?

* * *

작전 결행일은 3일 뒤로 잡았다.

그동안 나는 개인 연무장에 홀로 틀어박혔다.

한동안은 푹 쉬었다.

동생들과 해후도 나눴고. 키날로도 안정시켰고.

이젠 미뤄 뒀던 고민을 들여다볼 시간이었다.

"...정말 이게 날 지켜준 걸까?"

지금 내가 내려다보는 건, 완전히 녹고 바스라진 '용의 마갑'.

부서진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한계 이상까지 힘을 끌어냈으니까.

그땔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했다.

일곱 개의 머리. 세상을 무너뜨리는 괴물.

잘도 싸웠네, 그런 거랑.

죽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이전처럼 폐인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아니,

'진짜 어떻게 산 거지?'

되레 그게 이상했다.

'분명 나는 못 죽였어. 머리 3개가 남았다고.'

그러니, 마무리를 지은 건 로레인이었을 것이다.

그 얘긴 적어도 수십 번의 마나포를 쏟아부었다는 건데.... 이미 마갑도 부숴지고 오러도 흩어진 채, 의식까지 잃었던 내가 어떻게 살았지? 그 바로 옆에서?

"진짜 용의 사념이 날 지켜준 건가?"

희미하지만 분명히 귓가에 남았던 그 목소리가 있었다.

[고마워.]

그건 기억일까? 아니면 착각일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근데 그게 아니면 내가 살아남은 게 설명이 안 된단 말이지.'

일단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기로 했다.

용의 사념이 날 지켜줬다고.

하지만 그건 고대 시대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념은 사념일 뿐 영혼이 아니기에, 의지가 아닌 맹목이 있을 뿐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이 명제를 진리로 여겼으니까.

그러니 말도 되지 않았다.

죽이겠노라 발광해 대던 사념이 갑자기 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심지어 의지를 발해 나를 보호한다?

불가능하다.

맹목만이 남은 사념은 결코 변하지 않으니까.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일단 그랬다고 가정을 해 보기로 했다.

'뭔가 있는 것 같아.'

직감.

어쩜 이 수수께끼에 검아일체로 나아갈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소거법을 썼다.

온갖 시나리오들을 잔뜩 떠올리고 그 중 불가능한 것들은 싹 지웠다.

그 끝에 남은 단 하나의 가능성.

그게 어두운 밤에 켜진 마법등처럼 내 앞길을 밝혔다.

'의지. 용의 사념이 내 의지와 섞였어.'

단서 하나.

살아생전의 용은 아마도 그 '사도' 비슷한 것에게 죽었던 게 아니었을까?

처음엔 맹목적으로 죽으라고만 외쳐대던 사념이 사도를 발견한 뒤엔 '저걸 죽여줘.'라고 태도를 바꿨으니까.

나도 사도를 죽이고자 했고 용의 사념도 사도를 죽이고자 했다.

그 결과 나의 의지가 용의 사념과 일치했고, 그 둘이 마침내 섞여들었다.

'그래서 사념이 변화한 걸 수도 있어. 의지와 섞인 사념은 더이상 사념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던 거야.'

어렴풋이 설명이 된다.

왜 갑자기 용의 사념이 태도를 바꿔 날 보호해 줬는지.

하지만, 내 상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먼 곳까지 나아갔다.

그때, 사념은 내 의지와 섞여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그 무언가가 반로아에 담겼다.

그래. '담겼다.'

분명히 담겼다.

그걸 되새기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라이테나 대공의 가르침.

[충검(充劍)이란, 네 영혼으로 너만의 검을 벼리는 것이다. 너의 작은 우주에서 시작한 그 검으로 네 손에 들린 검까지 물들일 때 충검이 완성된다.]

충검(充劍) .

고대 소드마스터의 경지.

나에게 목표점을 먼저 보여 주겠다며 그가 무심하게 뱉었던 말이었다.

그게 지금 내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만약, '나만의 검을 벼린다.'라는 뜻이 내 의지를, 나만의 칼처럼 벼린다는 뜻이라면....

그 의지를 실제 검에 불어넣는 게 충검의 경지고 검강을 만드는 방법이라면....

'난 그 순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손끝 하나를 걸쳤던 거야.'

소름이 등줄기를 따라 벼락처럼 내달렸다.

'그래서 벨 수 있었던 거야. 그 괴물을.'

이 역시 직감이었다.

그 사도라는 건 아마도 나보다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였을 것이다.

그림 속의 화살이 그림 밖의 사람을 맞출 수 없듯이, 꿈 속의 칼날이 꿈 밖의 사람을 벨 수 없듯이, 본래라면 나도 그것을 참할 수 없었을 거라는 급작스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게 가능했던 건,

그때의 내가 손가락 끝, 손톱 끝만큼이라도 충검의 경지에 닿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드마스터의 충검은 고사하고 익스퍼트 최상급의 상징, 검아일체에도 가로막혀 있는 내가, 어떻게 두 단계를 뛰어넘어 그곳에 닿았지?

아무리 용의 사념과 내 의지가 섞여서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아...!'

그런 순간이 있다.

깨달음 위에 깨달음이, 소나기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그런 순간이.

[검탁이라는 경지로 따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결국 '검아일체'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

또다시 울려 퍼진다.

대공의 목소리가.

검탁이 검아일체로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

'검아일체는 충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두 단계를 뛰어넘는 게.

단계라는 건 인간이 구분한 것이고 본래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니.

마갑의 성능, 의지에 섞여든 용의 사념, 고양된 의식, 집중력 등등 여러 우연이 섞여, 그 길 끝에 서 있는 무언가의 그림자를 나는 밟았던 것이다.

사아아-

어느덧 소름이 가라앉았다.

마음은 한없이 고요했고, 나는 이제 깨달았다.

높은 언덕에 올라선 것처럼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저 멀리까지 환하게 들여다보였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때 하셨던 말씀이.'

[교감이라기보다는 수렴, 그리고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길은 제각각이지만 정상에선 모두가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나 초월하는 것이지.]

수렴.

그것은 익스퍼트 최상급, 검아일체의 경지를 의미한다.

초월.

그것은 소드마스터, 충검의 경지를 의미한다.

수렴 이후에 초월.

용의 사념과 나의 의지가 하나가 되었듯 먼저, 검의 의지와 나의 의지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수렴이었다.

'벤다'라는 하나의 의지를 또렷이 벼려서, 검과 나의 의지를 합치시키는 것.

그것이 검아일체(劍我一體).

그 후엔 초월이다.

단순히 '벤다'라는 의지를 뛰어넘는 것.

'나만의 검'을 벼리고 그것이 흘러넘쳐 손 안의 검마저 물들이고, 함께 초월하는 것.

그것이 충검(充劍)

이거였구나.

탈태를 하던 날, 멋도 모르고 발을 디뎠던 그 경지가.

여기에 있었구나.

반로아를 뽑아 들었다.

천천히 휘둘렀다.

아니,

함께 춤을 췄다.

'벤다'

오직 그 뜻만을 담은 춤을 춘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정상에서 만나 하나가 되듯이.

반로아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고

남는 건 그저, 칼의 춤.

검무(劍舞).

 우우웅! 우웅-!

점점, 반로아를 타고 검푸른 오러가 흘러넘쳤다.

환골탈태를 이뤘던 그때처럼, 오러가 부풀어 고래되고 호수가 되고 폭풍이 되었다.

즐겁고 또 즐거워,

다시 한번 시간을 잊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부서진 달이 연무장을 은은히 비춘다.

"아."

그렇구나.

저절로 알게되는 또 하나의 사실.

지금 막 입문한 최상급의 길.

하지만 내가 이 길을 끝까지 걸어, 충검의 경지를 바라볼 때가 온다면, 그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도 벨 수 있을 거야.'

최상급이면서도 마치 소드마스터처럼.

작고 미약한 의지일지라도 칼날에 담을 수 있을 거다.

여러 우연이 겹쳐 나는 이미 충검의 끝자락을 엿보았으니까.

찌르르-

몸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가만히 서서 그 여운을 만끽했다.

그저 모든 게 향기로운 시간.

"선생님!"

문득 날 건져 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세클란이었다.

"내일이 작전일이에요! 이만 쉬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벌써 내일이야?

이틀을 꼬박 검만 휘둘렀나 보네.

"어, 고마워. 이제 들어가려고."

그리 대답하고 짜르르 돋은 소름을 가라앉히며 발걸음을 돌렸다.

"근데 세클란."

"네."

"너 언제까지 날 선생님이라 부를 거냐?"

"앗? 그게.... 아무래도 첫 만남이 그렇다 보니, 쉽지가 않아요...."

"그러냐. 아무튼 난 말했다? 언제든 반말해. 데이지처럼."

"네! 그게 편할 때 그럴게요!"

"그래, 인마."

세클란의 머리를 헝클어 주고 침실로 향했다.

내일이 출발이니 오늘은 이만 푹 쉬어야겠다.

* * *

그날,

잠들기 전에 란센은 문득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이제 검아일체에는 입문했는데... 여전히 그건 모르겠네.'

카인 마누스가 보여 줬던 오러의 지고한 경지.

그랜드마스터.

그곳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지금 몸에 오러를 꽉꽉 채워 넣는다고 그게 될 것 같진 않고....'

뿌려진 뒤에도 허공에 남아 있던 오러.

검과 관계없이 허공에서 저절로 피어나던 오러.

그랜드마스터의 상징인 소울 블레이드.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런 고민을 가만히 숙고하고 있을 때,

란센은 알지 못했다.

사각-

그가 이틀 내내 머물렀던 연무장에서, 잎사귀 하나가 방금 막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아주 미세한 오러가 여전히 그곳에 남아 느릿느릿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각-

그 검푸른색 오러 한 줄기가 방금 작은 잎새를 또 한 잎 가르고 사라졌다.

#77화 저마다 계획은 있다

일루나엘.

인구 230만. 노르베르쥬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그 한복판에 자리한 하룬의 궁성은 수많은 전사로 북적거렸다.

일루나엘을 지키기 위해 아일룬 전역에서 몰려든 이들이었다.

그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전사들 앞에서, 지난 전투에 참여했던 패배자들은 그저 죽어 마땅한 죄인에 불과했다.

"아니 솔직히. 탈태한 소드마스터라고 해도요. 상대 못 할 적은 아니지 않아요?!"

핑크색 머리칼.

이제 갓 스물셋, 미모의 여전사.

아주 젊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신입은 패기가 당당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하룬 친위대의 최연소 대원이었으니까.

또래에선 져 본 적이 없는,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

주변의 다른 전사들 또한 그녀에게 동조했다.

"맞지. 심지어 상대 병력이 쿠샨의 촌뜨기 전사들이나 떠돌아다니던 얼뜨기 전사들이었는데...."

"그치! 그런 놈들은 대충 한 손으로 눌러 죽이고 다른 손으로 란센을 패면 되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하룬이 란센 같은 것에게 패했는가.

"내 말이요!"

핑크 머리 전사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짜증.

그건 또렷하게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니...."

"그 상황이...."

풍랑의 구릉지 전투에서 패한 패잔병들.

결국 너희가 하룬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이렇게 된 게 아니냐는 힐난.

물론 패잔병들은 패잔병들대로 할 말이 많았다.

'란센의 군대가 촌뜨기에 얼뜨기라고? 하! 지들이 싸워 봤어?!'

'아니, 란센 혼자서 궁기병대에, 친위대 10명에, 하룬님까지 썰어 버렸는데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하지만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그 말을 결국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욕만 더 먹을 게 뻔했으니까.

핑크 머리의 신입 친위대원은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란센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는 거. 그거 인정합니다. 근데 그래서요? 우리 친위대와 수호대의 모토가 뭐죠?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가 쳐들어와도 압살한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핑크 머리의 신입 전사는 지금, 너네 밥값도 못한 거 아니냐고 그런 비난을 하는 거였다.

겨우 살아남은, 혹은 이미 전사한 선배들까지도 싹 다 싸잡아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당장 대가리부터 박게 시키고 강철 부츠로 여기저기를 노곤노곤 풀어 줘도 모자랄 행패.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최고참 전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패잔병이었기에....

다른 모든 전사가 핑크 머리의 말에 동조하며 눈을 새하얗게 뜨는데, 도무지 입을 열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비난의 화살은 이제 그들을 넘어 다른 최상위 전사들에게까지 향했다.

"솔직히 7걸(傑)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도 좀 거품이 있었지."

누군가 중얼거린 한 마디를 핑크 머리가 대뜸 받았다.

"그렇죠! 전 사실 자히르 님한테도 좀 실망했어요! 저랑 나이도 비슷한 애한테 패하셨다면서요?!"

살짝 분위기가 싸해졌다.

"큼!"

"그건 좀...."

백승의 자히르는 수많은 결투로 스스로를 증명한, 존경을 받는 위인이었으니까.

하지만 핑크 머리는 당최 멈출 줄을 몰랐다.

"진짜 그때 단체로 배탈이라도 났나요? 왜 그랬대요? 소드마스터고 그랜드마스터고! 그냥 눈 딱 감고 일격을 던지면 되는 거잖아요! 연격전 몰라요?! 등 뒤에 동료를 믿고! 있는 힘껏! 내 모든 오러를 단 한 점에 집중시켜서!"

그녀의 시선이 가만히 앉아 있던 최고참 전사를 향했다.

여태까지는 간접적으로 향하던 비난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가장 어린 신입이 가장 경험 많은 최고참을 갈구는 기묘한 풍경.

얼굴에 커다란 흉터 자국이 있는 최고참 전사는 그만 참혹해서 눈을 감고 말았다.

"아니... 그...."

대체 저 햇병아리가 누굴 가르치려고! 욱! 하는 심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결국 할 말이 없었다.

패한 건 패한 거였으니까.

그는 그저, 얼굴의 흉터를 씰룩이며 큰 도끼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 미안하다.... 네 말이 맞아."

"그럼요! 제 말이 맞죠. 만약 란센이 진짜 여길 쳐들어오면! 그땐 제가 맨 앞에서 딱 보여 드릴 수 있어요!"

"넌...!"

최고참 전사는 울컥 치솟던 혈압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목구멍 밖으로 터지려던 호통을 간신히 삼키고, 복잡한 심경을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좋겠다."

* * *

아로트는 이제 자신 있었다.

그는 키날로 출신의 동료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승리를 알리듯 상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드디어 방법을 찾아냈군!"

그러자 동료들도,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했다.

"클클클. 그렇지. 이거라면 더 이상 두렵지 않지."

"낄낄.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룬에게 당했던 건, 그저 우리가 무지해서였을 뿐!"

열댓 명 정도 되는 마법사들.

그들은 본래 키날로의 마법사였으나 하룬에게 패배한 후, 그의 부하가 된 이들이었다.

그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아로트.

그는 무엇보다도 마법의 위대함을 또 한 번 증명해 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흐흐- 마법은 유연해서, 관찰하고 분석만 하면 상대하지 못할 적이 없는 법."

그의 말에 다른 마법사들이 모두 동조했다.

"낄낄! 그랜드마스터도 연구만 할 수 있다면 적이 아니지요!"

"클클- 참으로 그렇지. 더는 두려울 게 없지."

그들은 창대한 꿈을 가슴에 품었다.

지금, 그 두렵던 하룬의 생사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어쩌면 하룬조차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대마법.

그들은 꿈을 꾸었다.

항복한 마법사로서 하룬 밑에서 당했던 멸시를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들이 오히려 하룬을 제치고 아일룬의 주류로 부상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솔직히 란센이 바로 쳐들어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낄낄."

"크흐. 그렇지. 그러면 우리가 란센을 잡고, 전사들의 지지와 명분을 얻을 수 있지."

동료들의 말을 듣던 아로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마법사들이라 그런지 모두 똑똑하다.

"흐흐흐. 그렇다. 그렇게 우리가 아일룬을 장악하는 거다."

"낄낄낄- 키날로를 주고 아일룬 전체를 얻다니 참으로 이득이로군요!"

"클클클. 결국 마법은 승리하는 법이지."

그렇게 부풀고 부풀던 그들의 기대감에, 불을 확! 지르는 소리가 있었다.

콰콰쾅-!

궁성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진 직후,

"침입이다!"

"라, 란센! 란센이다!"

"란센이 침입했다!"

"막아!"

"죽여!"

전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마법사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걸린다.

"흐흐흐흐...."

"낄낄낄낄!"

"클클클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