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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난 대화를 하러 왔다.

그런데 궁성의 문을 안 열어 주니 어쩔 수 없었다.

콰쾅-!

하룬의 궁성을 지키고 서 있는 육중한 문이 주먹질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환골탈태한 신체와 오러, 거기에 마갑의 근력 보정까지 들어간 묵직한 일격.

그게 우리 대화의 시작이었다.

"들어가자."

동생들을 이끌고 부서진 성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네~!"

데이지가 유독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실전에 데려와 줘서 기쁜 걸까?

여전히 불안하긴 했지만. 뭐, 마갑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저벅저벅저벅

외부 성벽을 넘자, 내궁을 향해 뻗은 넓은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한 반쯤 걸었을까?

수많은 전사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특이점이 있다면, 저기 전사들 뒤에 숨어서 "흐흐" "낄낄" "클클" 대는 마법사가 열댓 명 정도 있다는 점?

"흐흐흐흐흐! 왔구나, 란센!!"

그중 제일 앞에 서 있는 마법사가 어째서인지 나를 격렬하게 반겨 주었다.

그가 우리를 향해 손을 쫙 펼쳤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모든 마법사도 일제히 손을 뻗었다.

"인테그레이티드 커스(Integrated Curse)!"

우우우우-!

마법이 발현되는 순간, 우리가 입은 마갑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엑?"

"윽! 이거 왜 이래?!"

동생들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마갑이 갑자기 먹통이 되었는지 은은하게 스며 나오던 빛이 훅! 꺼졌다.

작동을 멈추지 않은 마갑은 나와 카트리나, 그리고 캐치가 입은 것뿐.

"으윽? 이거 이상한데?!"

"형...! 마갑이...!"

하지만 카트리나와 캐치도 온전치는 못했다. 마갑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꺼졌다 켜졌다 깜빡거렸다.

'이건?'

심지어 내 마갑도 힘겨워했다. 무언가가 마갑의 출력을 짓누르는 느낌?

무슨 짓을 한 거지?

"흐흐흐. 어떠냐?! 힘이 안 나지? 이게 바로 우리가 찾아낸, 소드마스터를 잡는 마법이다! 자! 이제 쓸어버려라!"

쿵! 쿵!

마법사의 명령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전사가 우리를 향해 흉흉하게 다가왔다.

다 이겼다고 생각한 걸까? 그 뒤에 있던 마법사들이 까불거렸다.

"낄낄낄! 소드마스터의 힘은 오러에서 나오고, 오러의 근본은 결국 마나이지요!"

"크흐흐. 온갖 저주를 섞은 [인테그레이티드 커스]가 스며들면, 마나든 오러든 얽혀 들어서 꽁꽁 묶이는 거지. 크흐흐."

오,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그 [인테그레이티드 커스]라는 게 마나를 꽁꽁 옭아매서 마갑의 출력을 봉인했다. 이런 뜻이구나?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현재의 마법을 얕봤는데...

'의외로 위력이 강해.'

고대 마법에 비해 깊이는 얕을지 몰라도 출력 자체는 상당했다. 마도 시대의 정수인 마갑(魔甲)을 침묵시킨 게 그 증거였다.

하지만,

"끙차-"

파직!

나는 내 마갑을 짓누르던 저주를 기합 한 번에 날려 버렸다.

"어...?"

"어어어?"

저 멀찍이서 경악하는 마법사들.

뭘 놀라고 그래.

마갑에는 갑령(甲靈)이 있다.

착용자가 마갑의 의지를 충분히 깨워 줄 수만 있다면... 이딴 저주쯤은 충분히 박살 낼 수 있지.

그러니까,

쿵!

땅을 찍었다.

스킬 [가속]에, 반로아 왕실 검법의 돌진기, [템페스트]를 얹었다.

콰아아앙!

앞을 가로막던 전사들이 순간 사라졌다.

잠시 소실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풍경은 눈을 크게 뜬 마법사들의 얼굴뿐.

후드드득-

등 뒤로 붉은 피의 폭풍우가 몰아쳤다.

마갑의 [실드]가 발동 중이었기에, 나는 뭐가 부딪혔는지 느끼지도 못했지만...

나와 부딪힌 전사들은 이미 그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피 보라가 되었다.

뒤에서 건방 떨던 마법사들 앞에 내가 도래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턱이 쩍 벌어진 마법사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마법사야. 이제 어쩔 거냐?"

딸꾹질하는 소리. 오줌 지리는 냄새.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제일 앞에 있던 그 마법사가 그나마 눈치가 있었다는 것.

"저, 저주. 푸, 풀어 빨리."

동생들에게 걸려 있던 주문을 서둘러 해제하는 모습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흠, 살려 줄까?'

대신,

"이제 여기는 너희가 막는 거다? 저 밖에 전사들이 이 안으로 한 명이라도 들어오면...."

말을 끝까지 하지도 않았는데도 마법사들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일 앞에 있던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그들을 지나쳤다.

동생들이 재빨리 내 뒤로 따라붙었다.

밖의 전사들은 동생들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얼타고 있을 뿐이었다.

뭐, 이제 그쪽은 마법사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내성에 들어섰다.

드넓은 홀이 펼쳐지고 양옆으로 커다란 계단이 호를 그렸다.

그리고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익스퍼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살기가 따끔따끔했다.

전원 익스퍼트 중급 또는 상급에 이른,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숫자는 600명 정도 되나?'

와, 근데 잠깐 600명?

엄청난 숫자였다.

쿠샨시에 있던 중상급 익스퍼트 전사를 다 합쳐야 70~80명 겨우 될 거 같은데....

물론 이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엔 너희 먼저 할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트리나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조옿~지!"

뒤늦게 등 뒤로 남는 그녀의 호쾌한 대답.

그 뒤를 따라 다른 동생들도 속속 앞으로 치고 나갔다.

"큭? 어느새?!"

"뭐, 뭐야! 오러 소드가 안 박혀!"

"계속 두들겨! 연격전 모르냐!"

"아니! 적이 스무 명 가까운데 연격전을 어떻게...!"

"오러를 공유해서 버텨!"

"아니 너무 빠르잖아!?"

"나, 날았어...?"

마갑을 처음 상대해보는 아일룬 전사들은 아우성을 치기 바빴다.

동생들은 안정적으로 잘 싸웠다.

강하고, 안전하고.

이거지. 이게 고대의 맛이지.

'그럼 슬슬 나도 몸을 풀어볼까?'

이만하면 제법 양보해 줬다 싶을 때, 나도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리 마갑을 입었어도 600명은 너무 많았으니까. 적들이 적응을 좀 하고 나면 되레 동생들이 위험할 거다.

[검령각성]

마갑 스킬을 발동시켰다.

내 마갑은 A+ 등급의 마갑. 용의 마갑을 제외하면 로레인 연구소에서도 제일 괴랄한 출력을 자랑했다.

우우웅-!

검령이 각성상태에 들어가자, 반로아의 칼날 위로 무수한 오러 쓰레드가 길게 흐드러졌다.

쩌저저적!

한 번 검을 뻗으면, 오러로 이루어진 수십, 수백의 실이 사방을 조각냈다.

그러니 난 그저,

걸었다.

조각난 전사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뛰었다.

으깨진 핏덩이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빙글 돌았다.

우수수 무너지는 시체들 사이로 공포에 질린 눈동자들이 파르르 떨렸다.

피, 피, 그저 선명한 핏물.

화려했던 하룬의 궁성을, 살점과 피로 칙칙하게 도색했다.

단 몇 걸음 만에 일어난 참상.

개미처럼 밟히고 찢긴 전사들이 공포에 떨었다.

절대적인 무력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600명의 익스퍼트였지만... 상대가 나빴다.

현대 기준의 소드 마스터. 고대 기준의 최상급 익스퍼트인 내가 괴랄한 출력의 마갑으로 스펙을 뻥튀기했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이 상태의 나에겐 솔직히 그랜드 마스터 카인 마누스도 적이 될 수 없었다.

다들 겁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설 뿐이었다.

"으, 으아아아! 란센!!!"

오,

그런데 기개 있는 전사가 하나 있었다.

모두가 충격과 공포 속에 움직이지 못할 때, 홀로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드는 전사.

'제법인데?'

익스퍼트 상급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오러를 도끼날 끝 한 점에 모았다. 저거라면, 소드마스터라해도 제법 타격을 받을 만했다.

푸욱!

그래서 난 그를 예우해 줬다.

얼굴에 난 커다란 흉터 자국이 인상적인 전사.

그 심장에 반로아를 박아넣었다.

오러 쓰레드를 휘둘러 한꺼번에 쓸어버린 게 아닌, 오로지 그 전사 한 명만을 위한 일검.

이게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크륵.... 크...."

끝까지 치켜든 도끼를 내게 휘두르려 애쓰다가 천천히 주저앉는 전사.

그의 가슴을 발로 밀어 반로아를 꺼내고 앞을 보았다.

"어어, 어...."

"괴, 괴물...."

주저앉아 엉금엉금 물러서는 전사. 이미 벽에 찰싹 달라붙은 전사. 허겁지겁 도망치는 전사.

이미 모두 싸울 의지를 잃은 자들 뿐이었다.

어느새 동생들도 싸움을 정리하고 내 뒤로 모였다.

겁 먹은 전사들 사이를 무심히 지나쳐 계단을 오르려 했는데,

"아.... 으아...."

웬 핑크색 머리의 전사 하나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내 앞을 막아섰다.

오,

또 용감한 전사인가?

근데 좀 애매했다.

"으아, 으...."

기세 좋게 앞을 막긴 했는데 막상 날 보니 몸이 굳었나 보다.

양손검을 앞으로 쭉 뻗은 채로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떠는 모습이 가여웠다.

두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여러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공포. 분노.

그리고 적을 앞에 두고도 손 하나 까딱 못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자괴감.

'어려 보이는데?'

우리 지아랑 나이가 비슷하려나?

22살?

괜히 마음이 쓰였다.

투욱-!

나는 그녀의 옆을 무심히 지나치며, 그 핑크색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자책하지 마. 자연스러운 거야."

공포. 그보다 자연스러운 감정이 어딨다고 그래. 나도 느끼는 건데.

우르르- 나를 따라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오는 동생들.

"으아...."

그제야 다리 풀렸는지, 핑크색 머리의 전사가 주저앉는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와씨.... 졸라 멋있어."

미카 세이투스. 우리 15세 증후군 환자는 또 무언가에 꽂혔다.

"자책하지 마라. 자연스러운 거다. 크으으으으으-"

매우 깊은 감탄을 보이는 미카.

난 정말 이 녀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78화 철칙

철벅철벅.

피에 절어서, 우리의 발걸음 소리는 축축했다.

쉬웠다.

이곳까지 오는 게.

그 고집 세고 오만하다는 아일룬의 전사들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도망을 쳤다.

물론 마갑 덕분이었다.

마갑이 없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어쩜 아직까지도 마법사들을 넘어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뚫고 들어왔다 해도, 600명의 익스퍼트들에게 가로막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겠지.

마갑 덕분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고작 마갑일 뿐이다.

노르베르쥬 최강을 자랑하던 아일룬은, 아티팩트 하나에, 고대 시대엔 널리고 널렸던 아티팩트 하나에, 이렇게 무너져 버렸다.

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날 초조하게 해.'

견뎌 낼 거 같지가 않았다.

모서리가 보이지 않는, 두렵고 참혹한 무언가가, 저 멀리 어딘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이 마침내 그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과연 우리는...?

'서둘러야 돼.'

어서 아일룬을 잡아야 했다.

대비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끼이익-

하룬의 궁성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탈색된 듯한 금발 머리에 연둣빛 눈동자.

하룬이었다.

"살아 있었네?"

그렇게 죽었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내 물음에 하룬은 슬쩍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살아 있지."

"더 강해진 거 같은데?"

"그랜드마스터는 못 됐지만."

생각보다 너무 멀쩡했다.

엘릭서라도 먹었나?

빤히 바라보고 있자 하룬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기대했어. 네가 이렇게 쳐들어와 주길. 그러면, 널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는 반짝이는 옅은 금발을 긁적였다.

"근데... 상처는커녕 피도 한 방울 안 튀었네."

그렇게 말하는 하룬의 목소리가 꽤나 허탈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나 죽이러 왔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큼성큼 걸었다.

하룬 주위로 2명의 소드마스터와 16명의 익스퍼트 최상급이 포진해 있었으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사이를 불쑥 꿰뚫었다.

옥좌로 이어지는 계단 중간에 대충 걸터앉아 하룬을 내려다봤다.

"대화하러 왔어."

"대화?"

그래. 대화.

가능한 적게 죽이고 싶다.

죽이면 죽일수록 아일룬의 민심은 시궁창에 처박힐 테고, 그럼 더 많이 죽여야 하니까.

힘자랑은 실컷 했으니, 이제 물어볼 차례였다.

"항복해."

"항복?"

"응. 솔직히 지금 난 아일룬에 발목이 잡혀 있을 시간이 없어. 훨씬 더 큰 걸 보고 있거든."

의지를 칼날같이 벼려 하룬을 쏘아보았다.

뭔가 반발하려던 하룬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냥 한 20년. 아니, 10년만 참는다고 생각해. 훨씬 큰 걸 차지하고 나면, 이깟 아일룬 다시 돌려줄 테니까."

하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꽉 주었다.

아까만 해도 어떤 허탈함이 깃들어 있던 그의 연둣빛 눈동자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어나."

"꼭 이래야 하냐?"

"일어나라고."

애석하게 되었네.

이러면,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려야만 하는데.

뚜벅.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하룬과 마주 섰다. 2명의 소드마스터와 16명의 최상급 익스퍼트들이 오러를 끌어올려 날 견제했다.

"어허! 니들 상대는 이쪽이야!"

카트리나도 칼을 뽑아 들고 나섰다. 그 뒤를 나머지 16명의 동생들이 받쳐 주었다.

팽팽한 살기가 대전 전체를 휘어 감았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하룬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뿐이다.

하룬이 검을 뽑았다.

검날이 지면과 수평이 되게, 어깨 위로 나를 겨눴다.

옅은 금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환하게 떠올랐다.

그게 조금 의외였다.

"이번에는 먼저 덤비게?"

항상 친위대 먼저 보내 놓고 마지막 일격만 주워 먹으려고 하던 녀석이?

그 물음에 하룬은 쓰게 웃었다.

쓰다 못해 자기혐오가 묻어나는 그런 웃음.

"덕분에, 내가 느낀 게 좀 많았거든."

사람이 변했다는 느낌.

흔치 않은 일인데...

새삼,

죽이기 좀 아까웠다.

우우웅-!

하지만 이미 사방에서는 오러가 솟구친다.

하룬의 오러가 그 부하들의 오러와 얽혀 들며 더욱 맹렬한 빛을 뿜는다.

'최상급과 소드마스터의 사이를 오가며 증폭되는 오러라....'

이건 정말, 그랜드마스터라도 쉽지 않겠다.

"세린느. 이오니스. 너희가 지휘해서 떨거지들 맡도록."

그렇게 말하는 이는 처음 보는 얼굴의 소드마스터였다.

'쟤가 뇌성(雷聲)의 토르반인가.'

질풍 7걸의 수장을 맡고 있다는 소드마스터.

예전엔 크시아스와 자주 비견되기도 했던 걸물.

"네. 토르반."

"알겠습니다."

각각 신살(迅殺)의 세린느와 충천(衝天)의 이오니스라 불리는 용장들. 이들 역시 질풍 7걸의 일원이었다.

"크으- 기대된다고! 기대가 돼!"

불가항력의 바르칸.

그는 얼마나 들떴는지,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카트리나가 그런 바르칸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바르칸! 넌 나랑 싸워야지!"

바르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치 구도가 만들어졌다.

하룬, 토르반, 바르칸 이렇게 3명의 소드마스터와 10명의 최상급 익스퍼트가 내게 칼을 겨누었고, 나머지 6명의 최상급 익스퍼트들이 내 동생들을 견제했다.

하룬이 장난스레 말했다.

"미안. 나도 멋지게 일대일 붙어 보고 싶은데...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그 말에 난,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미안할 거 없어."

어차피,

"소용없을 거라."

[검령각성]

[가속]

[템페스트]

콰아아앙-!

뒤에서 터져 나온 폭풍이 내 머리칼을 흩날릴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다음이었다.

"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하룬은 멍청히 입술을 벌렸다.

"쿨럭...."

그는 뒤늦게 피를 토했다.

"뭐냐 이게...."

폭발적인 돌진 후 단 일검.

그 일검에, 오러가 잔뜩 담겨 있던 하룬의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오러와 함께 터져 나간 충격파에 내장이 탕진되었을 거다.

"끄윽..."

"컥...!"

오러를 공유하고 있던,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피를 쏟거나 신음을 토하며 비틀비틀 무너졌다.

"이건 뭐... 괴물이냐? 상대도 안 되네...."

그리 말하며 스르르 주저앉는 하룬.

나는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냥 항복해."

그러자 하룬은 픽 웃었다.

여전히 빛이 꺼지지 않은 연두색 눈동자로 내게 되물었다.

"너라면? 너라면 항복하겠냐?"

나?

잠시 생각을 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하지.'

100번이라도 한다. 그래서 동생들을 살릴 수 있다면.

하지만 하룬은 내 잠시간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거봐. 너도 그렇잖아."

...하여튼 나랑 징글징글하게도 안 맞아요.

하룬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속내를 읽어 내려는 것처럼.

"혹시 말야. 너, 내 부하들... 봐줄 수 있냐?"

"봐서."

꽤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하룬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련하다는 듯이 팔을 벌리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죽여. 난 왕으로 죽을란다."

그래. 여기까지구나.

푸욱-

하룬의 심장을 찔렀다.

목을 베고 싶진 않았기에.

하룬은 눈을 감았다.

"브리다...."

이제 와서,

이미 죽은 연인의 이름을 마지막 숨결로 토해 내는 하룬.

진짜 변했구나. 얘.

왠지 기운이 탁 풀렸다.

'오늘은 그만 죽이고 싶다.'

그리 생각하며 하룬의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다들 어느새 칼을 거둔 채였다.

단 한 명, 웬 미친놈을 제외하고.

"으하하! 이거야! 이걸 바랐다고!"

불가항력의 바르칸.

그놈은 혼자 거대한 대검을 치켜들고 쿵쿵 땅을 박차며 내게 덤벼들었다.

"보여 달라고! 궁극의 힘을!"

보여 달라기에,

그렇게 했다.

꽈아앙!

검으로 베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 많이 베어서.

대신 검을 쥐지 않은 주먹을 그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쿨럭!"

바르칸의 갑옷이 콰득콰득 부서져 내렸다.

그는 피가 줄줄 새는 이를 훤하게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 이거지...."

스르르-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재밌... 었...."

쿠웅!

대자로 뻗어 버린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또 있나?

피곤한 눈으로 돌아보니, 천천히 무릎을 꿇는 하룬의 신하들이 보였다. 이번에도 단 한 명만 빼고.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대답을 해 준 건, 뇌성의 토르반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였다.

"하룬 님이 남기신... 유지가 있습니다."

그가 공손히 다가와 내게 편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하룬이 손수 쓴 편지였다.

[별건 아니고 부탁이나 하려고 편지 남긴다.]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의 내용은 심플했다.

"그러니까... 하룬이 나에게 아일룬을 넘기라고 했다고?"

"예. 자신이 패해 죽을 경우,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란센 님을 따르라 했습니다."

나는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아, 내가 잘 말해 놓긴 했는데... 그래도 말 안 듣는 놈들이 꽤 있을 거야. 가능하면, 좀 봐주라. 아일룬 넘겨주는 것도... 녀석들 죽는 거, 이젠 좀 보기가 싫어서 그러는 거니까. 부탁 좀 하자. 란센.]

허, 참....

전엔 지 부하들을 소모품 취급하더니.

자기 연인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이런 편지에... 마지막 단말마에....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무릎을 꿇었는데 유일하게 꿇지 않은 단 한 명.

여전히 내게 검을 겨눈 전사.

어두운 와인빛 머리칼에 40대.

검에 올곧게 맺힌 오러가 인상적이었다.

"너는? 말 안 듣는 놈?"

내 질문에 그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카시미르 굴라크다. 난... 나는 널 인정할 수 없다."

허.

놀랍네.

일단 꿇고 나중에 딴소리하는 게 로버랜드 스타일 아니야?

사람이 참 올곧다. 여기 사람답지 않게.

난 한숨을 뱉고 고개를 저었다.

"가라. 그냥."

"...? 그게 무슨?"

"가라고.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은 충분히 많이 죽였으니까.

이만하면 목적도 이뤘다.

설마 하룬이 나를 직접 아일룬의 지배자로 지목해 줄 줄은 몰랐으니까.

막연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나은... 어쩌면 최선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니 괜찮았다.

무턱대고 다 죽이지 않아도.

"가라."

그제야 카시미르 굴라크는 내게서 검을 거두었다.

그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다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살짝 벙찐 내 동생들과 얌전히 무릎을 꿇은 16명의 전직 적장들.

'상황이 좋긴 좋네.'

한 명 한 명이 아일룬에서 이름을 떨친 전사들이었고, 각 지역의 유력자들이다.

이들이 정말로 나를 따른다면, 아일룬의 통치는 아주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철퍽철퍽-

누군가 피를 철벅이며 대전으로 걸어들어왔다.

아까부터 기척을 느끼긴 했는데, 이제야 움직이네.

들어온 것은 1명의 일반인이고 대전 문 앞에서 대기하는 것은 2명의 소드마스터였다.

싸우려고?

눈으로 물었더니,

스윽-

'?'

소드마스터 둘은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싸우려고 온 건 아닌가 보네.

대신,

철퍽- 철퍽-

아무 오러도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이 바지 밑단을 피로 다 적시며 내게 다가왔다.

* * *

천면(千面)의 대상 레나죠라 체미엔.

일루나엘에 머물며 어디에 배팅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이던 그는, 하룬의 궁성에서 벌어진 변고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란센이 쳐들어왔다고?!"

그 즉시, 두 명의 소드마스터 호위를 대동하고 궁성으로 왔다.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와야만 했다.

그래야 정확히 상황을 판단해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실로 적절한 대처였다.

'미쳤어. 완전 미쳤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성 입구는 마법사들이 틀어막고 있었고, 그걸 넘어 안으로 들어오자...

시체, 시체. 그저 붉게 도색 된 홀이 보였다.

그 오만하던 아일룬의 익스퍼트들이 패닉에 빠져 덜덜 떨고 있었다.

그 피바다를 건너 마침내 대전에 이르렀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하룬이었다.

그리고 하룬을 죽인 란센 앞에 아일룬의 용장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

계산은 아주 손쉽게, 금방 내려졌다.

그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철퍽- 철퍽-

비싼 옷이 피에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서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란센 님을 뵙습니다."

"누구?"

"미천한 상인 레나죠라 체미엔이 삼가 인사 올리옵니다."

천면(千面)의 대상, 레나죠라 체미엔.

그에겐 철칙이 있었다.

'세상의 판단보다는 나의 판단을 우선한다.'

허나,

'만약 그 판단이 틀렸을 땐,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무릎을 꿇는다.'

그게 그의 두 번째 철칙이었다.

#79화 유도리가 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이게 사람의 가슴에서 날 수 있는 소리란 말인가?

레나죠라 체미엔은 필사적이었다.

얼굴엔 늘 익숙한 웃음을 덮어썼고, 손발은 우아하게 움직여 예를 표했지만....

'도망치고 싶어!'

사실은 그의 속마음은 그랬다.

5왕(王)의 시신이 바로 앞에 놓여 있다고!

그 피가 흘러넘쳐서 지금 내 무릎을 적시고 있잖아!

심지어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호위로 데려온 두 명의 소드마스터는 란센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눈을 깔아 버렸다!

'뭐? 둘이 힘을 합치면 하룬이든 란센이든, 뭐?!'

레나죠라는 당장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물러서서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미천한 상인 레나죠라 체미엔이 일루나엘의 정당한 지배자, 란센 대공 전하의 승리를 축하드리고자 합니다."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 가는데, 입술은 청산유수.

미소는 여유로운데 머릿속은 말벌통처럼 난리였다.

머릿속에서,

란센이 넌 뭐냐! 하면서 목을 뎅강 날렸다.

란센이 불쾌하군, 하면서 퍼석 밟아 죽였다.

란센은 가만 있는데 그 부하가 목을 쳐서...

란센이... 란센은....

모든 결말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망상의 지옥.

그 끝에서 란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너로구나? 황금의 교역로에서 세 손가락에 꼽힌다지? 천면(千面)의 대상."

"소인의 이름이 행여나 귀한 귀를 어지럽혔을까 염려될 뿐입니다."

"뭐... 반갑다. 여기는 좀 그러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자. 누가 여기 새 옷 좀 가져다줘. 차도 준비해 놓고."

란센의 태도는 이미 이 일루나엘이 자기 것이라는 듯이 거침없었다.

아아, 저것이 제왕의 풍모인가!

뭐? 10년은 필요할 거라고?

나란 놈은 이딴 걸 눈이라고 달고 다녔단 말인가?!

1분 1초마다 타들어 가고 썩어들어 가는 레나죠라의 마음.

그래도,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머릿속으론 아직도 하룬의 창백한 시체가 아른거렸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여유를 챙긴 채 란센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푹신하고 화려한 쇼파에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시선? 오케이. 입꼬리? 좋아. 손은? 괜찮아, 안 떨려.'

레나죠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본 후에 마음을 다잡았다.

'후.... 그래. 할 수 있어.'

여유로워야 한다.

상인이 침착을 잃으면 안 돼.

아무리 두려워도 눈앞의 기회는 잡고 위기는 피해야 하는 법이니까.

겁이 나지만, 겁먹은 티를 내지 않는 게 포인트.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고 란센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을 때였다.

"근데."

란센이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많이 무서워? 레나죠라?"

딸꾹!

격렬한 딸꾹질과 함께 레나죠라가 떠올린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다행이다. 찻물을 삼킨 뒤라서....'

적어도 얼굴에 찻물을 뿜은 죄로 사형을 당하진 않겠구나....

* * *

신기하네.

가만히 레나죠라를 관찰했다.

간질간질 무언가가 자꾸 내 감각을 건드렸다.

'감정...? 의지...?'

그 비슷한 게 희미하게 읽혔다.

돌아보면, 지금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검아일체를 이룬 뒤부터였나?'

검과 나의 의지를 합치시키는 경지.

그걸 깨달은 뒤, 이렇게 된 거 같다.

타인의 의지가 희미하게나마 읽힌다.

미처 의식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제 여유를 찾고 보니 확실히 알겠다.

저토록 태연하게 앉아 있는 레나죠라가 속으로는 어마어마한 공포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상인도 쉬운 일이 아니네.'

저렇게 겁 많은 사람인데, 로버랜드의 3대 상회를 일궈 낼 때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도전이 있었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들여다보자, 레나죠라의 태연한 안색에 서서히 금이 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

조금 더 압박하면 뭔가 깨고 나올 거 같은데?

본색을 볼 수 있는 건가?

...재밌을지도?

"란센 대공 전하!"

...감이 좋네.

짓궂은 마음이 들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훅, 들어와 내 타이밍을 뺏었으니까.

근데 나 대공이야?

원랜 다들 백작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일루나엘까지 도시가 4개라고 대공이 된 건가?

뻔한 아첨이었는데, 그게 뻔뻔하리만치 자연스러워서 되레 싫지 않았다.

"실은, 제가 대공 전하의 승리를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약소한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솔직히 시큰둥했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게 있나?

내가 요즘 보물을 한두 개를 봤어야지.

그 귀하다는 고대의 아티팩트가 아공간에 넘쳐나는 판인데.

어지간한 선물로는 안 될걸?

그게 내 생각이었는데,

"...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레나죠라 체미엔의 품에서 나온 물건.

그건,

손가락만 한 병이었다.

투명했으나,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서광을 뿜었다.

나 저거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엘릭서... 잖아?"

천면(千面)의 대상, 레나죠라 체미엔이 빙긋 웃어 보였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진짜다.

진짜였다.

엘릭서.

그는 이어서 푹신한 쿠션이 깔린 상자를 꺼내 그 위에 엘릭서를 올려 두었다.

탁-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 테이블 위에 공손히 바쳤다.

가까이서 봐도 엘릭서.

진짜다.

로레인 연구소에서도 찾지 못했던 엘릭서가 이런 식으로 내 손에 들어온다고?

만감이 교차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레나죠라를 보니, 그는 그 시간 동안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거,

갑자기 사람이 달라 보이네.

아까만 해도 조금 냉정한 마음이었다.

로버랜드에서 부의 원천은 결국 동서대륙을 잇는 황금의 교역로에서 오고, 눈앞의 이자는 그 교역로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 대상인이었으니까.

일단 인상을 보고 손익을 잘 따져서, 마음에 안 들면 쳐내고 다른 상인을 밀어줄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는 말이다.

근데 이젠, 저 인간이 나한테 사기를 쳐도 한 번쯤은 넘어가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깨달은 사실 하나.

"너였구나? 하룬이 어떻게 살아났나 했더니."

레나죠라가 움찔! 놀랐다.

"아, 아주 오래전에 선물한 적 있을 뿐입니다."

재주도 좋네. 엘릭서라는 게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그게 두 병이나 있었어?

"더 있어?"

"어, 없습니다. 천운이 닿아 2병을 구했을 뿐입니다."

음.... 느껴지는 의지로 보건대 진심에 가까웠다.

"아쉽네. 세아야?"

"네. 대공 전하."

세아를 불렀더니, 녀석도 날 대공 전하라고 부른다.

...이제 대공으로 밀고 나가는 거야?

아무튼 세아는 역시 세아.

내 원하는 바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녀석은 무감정한 눈으로 레나죠라를 내려다보았다.

"상인 레나죠라 체미엔. 당신이 원하는 건, 원래 누리던 권리의 계승이겠지?"

레나죠라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떼었으나, 세아의 말이 한발 앞서 이어졌다.

"관세 혜택, 가장 목 좋은 자리에 위치한 교역소 건물, 다른 소송에 앞서 우선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소송 우선권, 에토프산 연기 커피의 독점권, 거기에 경비병을 파견해 별도의 보호 제공까지. 맞지?"

레나죠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 막 일루나엘을 장악한 우리가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근데 진짜 이걸 다 어떻게 아는 거니, 세아야?

나 역시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면 곤란하다.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구 사항이 저 권리들의 계승이라 이거지?'

고민?

하지 않기로 했다.

레미죠라의 첫인상은 합격이다.

하룬을 죽이자마자 날 찾아온 행동력.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걸 티 내지 않는 통제력.

거기에 마음에 쏙 드는 선물까지.

같이 가도 괜찮은 사람 같다.

"들어줄게, 그 부탁. 대신 다음에 올 때 구해 와야 할 물건이 좀 있어. 수량은 최대한 많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세아가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그건 값비싼 재료들의 목록이었다.

세아와 아샤가 진행 중인 고대 마법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

여러 대륙에서 구해야 했기에 쉽지 않은 일.

허나 레나죠라는 종이에 적힌 목록을 확인하고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재료들이군요. 상당히 귀한... 하지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구해 오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견적서를..."

"응?"

"...견적서를 작성..."

"응?"

견적서?

진짜?

레나죠라는 잠시 말이 없다가 꺼냈던 종이와 펜을 다시 품에 구겨 넣으며 활짝 웃었다.

"진상해야죠. 진상하겠습니다. 꼭 구해서 진상 올리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기꺼운 마음에 레나죠라를 그만 자리에 앉게 했다.

다시 쇼파에 마주 보고 앉은 우리.

차를 마시고 가볍게 잡담을 나누고,

이만 자리를 파할까 싶었다.

피를 너무 많이 본 하루였다.

이젠 그만 동생들하고 잡담이나 좀 나누다가 자고 싶었다.

그렇게 이미 반쯤 마음이 떠난 나에게,

"글로잉스틸의 유물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현재 받고 계신 가격보다 50% 더 비싸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 상인은 또다시 뿌리치기 어려운 미끼를 내게 던졌다.

"호오?"

50%?

나야 좋은데, 그렇게 해서 당신은 남아?

번뜩-

레나죠라가 눈을 빛냈다.

인상적이었다.

레나죠라 체미엔.

지금도 겁에 질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귀에 선연한데... 그는 떨지도 않고 자신의 요구를 확실히 말했다.

"다만 글로잉스틸 유적의 유물 독점권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정말 자신 있습니다. 처음엔 50% 인상한 가격으로 사들이고, 나중엔 제가 수익의 20%만 가지고 나머지 80%를 대공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인상적인 화술이었다.

유물 독점권을 먼저 말했다면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 같은데.

50% 인상을 먼저 말하여 자연스럽게 내 관심을 끌면서도, 조금 더 부탁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심지어 조건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하룬 놈은 지가 70% 먹겠다고 했는데.

'재밌네....'

뛰어난 능력. 극도로 겁이 많으나 그걸 극복해 내는 용기. 그게 다 어디서 오는 걸까?

저 남자가 꿈꾸는 미래가 무엇이길래, 저럴 수 있을까?

'그게 이 세계에, 과연 어떤 흔적을 남기려나.'

마도 시대에 몇 번이나 다녀온 탓인지, 자꾸 감상적이게 된다.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

그 사이의 차이.

...뭐,

어찌 됐든 간에,

난 마음에 들었다.

"좋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레나죠라는 잠시 멍하니 내 손을 올려다보다가 무릎을 꿇고 손등에 키스를 하려 했다.

"에헤이."

얼른 일으켜서 레나죠라의 오른손을 가볍게 감싸 쥐고 두 번 흔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 악수라고. 내가 만든 인사법."

"아, 예..."

쩔쩔 매는 레나죠라.

괜히 유쾌하네.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시작이 좋았다.

* * *

황제 로크슈탈렌은 보고서를 읽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묘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자 무력이 월등히 강해지고 마법 효과가 생겨났다?"

그는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심기를 예단할 수 없기에, 신하들은 바짝 긴장한 채 눈치를 살폈다.

황제, 로크슈탈렌 갈로틴.

그의 심연과도 같은 자주색 안광이 서늘한 빛을 뿜었다.

"안 웃어?"

그 한마디에.

"하하하하하."

"껄껄껄!"

신하들은 일단 웃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제야 만족스레 미소 지은 황제는 보고서를 툭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군. 란센. 이 녀석이 어느 라인을 잡았는지. 이미 사멸한 지식을 전해 주는 존재라... 제법이잖아? 라인도 제대로 골랐어. 무려 마도 시대의 마갑(魔甲)을 사용했다 이거지...?"

황제가 홀로 사색에 잠겨 들었다.

이럴 땐 모두 조용히 해야 했다.

열심히 웃던 신하들은 얼른 눈치를 살피며 서서히 웃음을 줄이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의 정적.

마침내 황제가 사색을 마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때? 준비는 끝났어?"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언제나 황제의 곁에 서 있는 의문의 남자.

직책도, 직위도, 정체도 알 수 없다.

그저 검은 로브에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린 수상한 남자.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고했다.

"예. 어제 준비를 마쳤다고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 때가 왔구나. 그럼 진행해."

"예. 그러겠습니다."

남자의 대답과 함께 황제는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희고 긴 손가락을 뻗어 요즘 늘 펼쳐 두고 있는 노르베르쥬의 지도를 쓰다듬었다.

"진수성찬을 차려 줬으니 실컷 처먹거라. 혼돈에서 태어난 더럽고 추악한 것들아. 불쌍하고 안쓰러운 인간들의 살과 혼을."

그리고,

"란센."

황제는 자꾸 신경 쓰이는 그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이번에 지켜보겠다. 네 가치를."

#80화 어느 좋은 날

선연한 검은빛의 오러 블레이드.

그리고,

쩌적-

금이 가 버리는 오러 코어.

벌슨은 늘 그 장면에서 꿈을 깨었다.

"어헉-!"

찌르르 느껴지는 아랫배의 고통.

꿈 주제에 왜 진짜 아픈 건지.

늘 있던 일이라, 벌슨은 대충 일어나 흘린 식은땀을 세수로 닦아 버리고 방 한가운데에 섰다.

그 와중에 내내 침대에서 세면대까지, 새파란 진검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벌슨도 란센의 가르침을 항상 따랐다.

남들 앞에서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늘 검을 든 채 생활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와서 옛 무력을 되찾겠다는 희망도 이미 벌슨에겐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저, 도움이 되고 싶었다.

힘들게 훈련하는 도련님 아가씨들께 어쩌다가 아주 작은 조언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자신도 똑같이 따라 해 보았을 뿐이었다.

"후우-"

벌슨은 들고 있던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눈 뜨면 오러 연공. 그게 그의 루틴이었다.

물론 그의 오러 코어는 이미 산산이 깨져 이젠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 연공을 했다.

이 역시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렇게 해야 그나마 덜 아프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오러 연공법이라는 게 앉아서 가만히 정적으로 시작하다가 오러가 충분히 데워지고 나면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처음엔 체조 수준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온 힘을 다해 격렬하게.

하지만 벌슨의 오러 연공은 늘 느릿느릿한 체조 수준에서 끝이 났다. 애초에 목적이 흉포한 잔여 오러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여기서 더 나아가는 건 그냥 자살행위였다.

우우우웅-

미약하게 우는 검을 가만히 늘어뜨리며, 벌슨은 문득 명언 한 자락을 떠올렸다.

"태산은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바위와 흙이 새로운 자리를 찾은 것뿐...."

지금 상황과 꼭 맞지는 않지만, 나름 통하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되레 오러 제어력과 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구나."

몸속에 남은 잔여 오러.

그 흉포한 것을 품고 벌써 3년 넘게 살아왔다.

그 전 11년 동안은, 손상된 코어를 달래 가며 살았고.

도합 14년.

성치 않은, 또는 아예 없는 오러 코어를 가지고 날뛰는 오러를 견뎌 냈다.

제어력이 좋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검술은 원래부터 재능이 남달랐다.

오랜 시간 제대로 수련하지 못했음에도, 저절로 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정도로.

'심지어 란센 전하께서 그런 가르침을 내려 주셨으니...'

고대의 검술.

듣는 순간 감이 바로 팍! 하고 왔다.

이거구나. 그래. 검에게도 영혼이 있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들고 싶기까지 했었다.

모든 걸 잃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얻게 된 것들.

그래서,

이제 와서,

주책맞게도 이런 바람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기사가 되고 싶다...."

기사의 최소 자격은 익스퍼트 하급.

오러 코어가 성치 않은 벌슨은 이제 기사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젊은 시절엔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꿈을 지녔지만, 이제 남아 있는 건 잿더미뿐이었다.

오랜 고련으로 울울창창하게 가꾸었던 숲은 모조리 타고 잿더미만 수북하게 쌓였다.

그에겐 이제 꿈이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그날, 고대의 마법 포션을 하사받은 날도.

란센의 마음이 고마워서 울었고... 또 미안해서 울었다.

다 타 버린 잿더미 위에, 새로이 씨앗을 심고 다시 한번 숲을 가꾸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런 의미가 담긴 귀한 포션이었겠지만, 벌슨은 그저 미안하고 염치가 없었다.

찌르르-

아랫배를 울리는 고통.

그리고 순간적으로 맥이 쭉! 빠지는 허탈감.

"끙-"

벌슨은 어지러움과 탈력감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14년을 내상과 싸워 오느라 이미 그의 생명은 탈진하여 꺼져 들고 있었다.

포션은 상처와 뒤틀림을 치유할 뿐, 이미 소진된 생명력을 북돋아 주진 못했다.

벌슨은 곧 죽는다. 불이 꺼져들 듯 자연스럽게 쇠하고 쇠하여서.

'전하께서 뿌려 주신 씨앗에선 영영 싹이 움트지 않겠지....'

벌슨은 그게 못내 죄스러웠다.

"훌쩍."

또 코끝이 찡했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마음도 약해졌다.

꼬마 아이들의 악의 없는 말에도 찡하게 떨리는 코끝.

얼마 전에는 웬 녀석이 그랬다.

"그치만 벌슨 아저씨는 약하잖아?"

1년 전인가, 꼬마 아이들 앞에서 난동 부리던 전사와 다투다가 역으로 처맞은 날이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얼굴만은 가려서 전하와 도련님 아가씨들을 걱정시키진 않았는데... 꼬마애들은 그 모습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괜찮다.'

벌슨은 그냥 웃어넘겼다.

그의 하루는 꽤나 바빴다.

그가 하는 일은 무척 많았으나,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정규군의 훈련을 담당하는 총책임.

하지만,

"저기... 벌슨 총교관님. 여기 이 공방일체라는 부분이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다른 교관들이 문제였다.

란센 전하나 도련님 아가씨들과는 어찌 이리 다른지.

그분들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되레 더 발전시켰는데....

그 밖의 교관들과 커리큘럼을 공유할 땐 퍽 고단했다.

'직접 보여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니 말로 한참 떠들다 보면,

"휴.... 네. 알겠습니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한숨 어린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벌슨은 무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얼마나 좋았냐면 매일 밤 전사들이 다니는 선술집을 찾아가 무예를 주제로 떠들어 댈 만큼.

"쾌검이 짱이지! 제페토 님이랑 캐치 님을 보라고! 10합을 받아 내는 전사가 없어!"

그렇게 누가 떠들길래,

"하지만 오히려 정석적이고 수비적인 검술이 있으면 그런 쾌검을 꺾을 수 있지."

라고 한 마디 끼어들었다가,

"아니. 아저씨. 뭐라도 돼요? 한번 떠 볼까?"

공격적으로 나오는 전사에게 찔끔 놀라 얼른 술집을 빠져나온 일도 있었다.

그렇게 이어지던 하루하루였다.

어느 밤. 란센이 벌슨을 찾아왔다.

"좋은 술이 있어. 같이 한 잔?"

"좋지."

벌슨은 기꺼운 마음에 그러자 했다.

그는 여전히 란센에게 평어를 사용했다.

속으로야 전하라고 불렀지만, 란센이 아직 그 호칭이 어색하다며 거부했기에.

벌슨 스스로도, 기사도 아닌 내가 무슨... 이란 자격지심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술이군."

이게 뭘까?

벌슨은 눈앞에 놓인 잔을 보았다.

투명한데 은은한 서광이 비치는 액체가 작은 잔에 담겨 있었다.

"귀한 거야. 일단 잡숴 봐."

"란센은?"

"난 이미 마셔 봐서. 이거나 먹게."

그러면서 가지고 온 다른 술병을 따 자기 잔에 따랐다.

"짠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마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누구 명이라고 거역을 할까. 벌슨은 눈앞의 잔을 홀랑 비웠다.

"...아무 맛도 안 나는데?"

이게 술이 맞나?

고개를 갸웃하는 벌슨에게 란센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다려 봐. 그게 좀 늦게 올라오거든."

* * *

나 한 잔. 벌슨 아저씨 한 잔.

안주는 부드럽게 말린 고기와 치즈.

일부러 천천히 마셨다.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하면서.

"그때 아저씨가 소드마스터를 벴잖아? 크으.... 우리 아바마마도 그랬다니까? 순수 검술은 아마 나이트 벌슨이 왕국 제일일 거라고."

벌슨 아저씨는 멋쩍어하며 시선을 피했지만, 사실 이건 과장이 아니었다.

도리어 축소한 거였지.

아바마마께선 사실 이렇게 말했다.

만약 벌슨이 오러에도 재능이 있었더라면, 왕국제일검은 그가 되었을 거라고.

'백 승의 자히르? 비교할 수도 없지.'

소드마스터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의 정점.

검술 그리고 오러의 이론적 이해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기사.

그렇기에 그가 근위기사단장이었던 것이고,

나를 소드마스터로 키워 낸 것이고,

왕국에서, 또 들카슈의 성에서,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 냈던 것이다.

지금도 눈에 선연했다.

왕국을 탈출하던 날.

벌슨이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베어 죽이던 그 광경이.

다른 기사들의 도움이 조금 있었던 걸 감안해도, 그건 도무지 최상급의 기사가 선보일 만한 무위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기억.

하지만 그게 아마 아저씨에겐 상처로 남았겠지.

그 혈투의 대가로 코어에 금이 가고 말았으니까.

그래도 난 그 기억을 자꾸 끄집어냈다.

"아저씨가 고대 검술을 본격적으로 익히면 금세 실력이 늘걸? 옛날보다도 더 강해질 거야."

벌슨은 내 시선을 피했다.

변명이라도 하듯 웅얼거렸다.

"그래 봤자 다... 옛날 일... 음?"

한숨과 함께 뭐라 말을 꺼내던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작됐구나!

드디어!

"어? 어어?"

벌슨 아저씨는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다.

찬란한 광채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졌다.

"이게 대체..."

그 광채가 서서히 아랫배 쪽으로 모여들었고, 마침내 맑은 소리를 내며 스며들었다.

"내가 말했지? 좀 늦게 올라온다고."

쭉!

한 잔에 털어 마신 술이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아저씨의 표정이 변화무쌍해서 아주 보는 맛이 있었다.

처음엔 의심. 그다음엔 경악. 그러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

"어때?"

죽이지?

사라졌던 오러 코어가 다시 생겨나는 기분.

내가 잘 알거든.

아저씨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뚫어져라.

뚫어져라.

뭔가 굉장한 얼굴로 한참이나 나를 응시하더니, 돌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진중해진 분위기로 검을 뽑아 들었다.

"어떤지...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존댓말까지 해 버리네.... 어색하게.

한마디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서 풀려나오는 반로아 왕실 검법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으니까.

'이야.... 아저씨, 단 하루도 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구나?'

그가 허공을 한 번 베는 순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모범적이고 정석적으로 뻗어 나가는 검격.

심지어,

'이야.... 갈수록 더 잘하네.'

이미 정교했던 검술이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 정교해지고 더 강맹해졌다.

훙- 훙-

몰아치는 시원한 검풍.

대기를 찢어발기는 오러.

거기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자꾸 강해지고 더 정교해진다.

끝도 없이.

"뭐야...?"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처음에는... 감을 잃지 않았네, 이런 수준이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어느 순간, 죽어라 훈련한 동생들의 기세마저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그 카트리나도, 아직 저 정도는 아닌데....

후우우웅-!

어느새 검풍도 강맹해져서 커튼이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테이블 위의 술잔이 달그락거렸다.

그리고 그 끝에 희미하게 맺힌,

"오러... 블레이드?"

소드마스터의 상징.

거기에,

서걱-

잘려 나가는 커튼 자락이 보여 주는...

"고대... 검기?"

고대 익스퍼트 하급의 증명.

'아바마마 말씀이 맞았구나.'

이 아저씨도 천재다.

그는 그저 회복된 게 아니라, 뛰어넘었다.

소드마스터이자 고대의 익스퍼트로.

"...."

아저씨는 말없이 제 검에 맺힌 희미한 오러 블레이드와 날카로운 아지랑이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검 끝이 땅에 닿게 수직으로 세운 채 고개를 숙였다.

"기사, 벌슨 발란차가 존엄하신 반로아의 주인, 란센 반로아 전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옛날 우리 왕실의 예법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난 그게 조금 어색해서.

"안 울어? 울 줄 알았는데. 아저씨 울보잖아?"

장난스레 찔러 봤지만,

"안 울 겁니다. 이젠... 제 검으로 지킬 거니까."

결의로 굳게 다져진 그 목소리를 듣고... 나도 장난 같은 건 때려치우기로 했다.

난 칼자루 위로, 아저씨의... 아니, 나이트 벌슨 발란차의 손을 감싸 잡았다.

그 따스하고 투박한 손을 느끼며,

어쩌면 늘 가슴에 담아 두고 있던,

늘 하고 싶었던,

그 말을 꺼냈다.

"나이트 벌슨. 나의 첫 번째 기사. 참으로 반갑다."

적당히 올라온 취기.

창밖에서 불어온 선선한 바람.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참 좋은 날이었다.

#81화 유도리가 있다

"아가씨."

그 한마디에 데이지는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으아아악! 하지 말라고! 응? 벌슨 아저씨.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아가씨라니.

데이지는 오그라들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모두가 벌슨의 회복을 기뻐했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만큼은 어색해했다.

그중에서도 데이지는 특히 더 어색했다.

소후작 데이지 줄리앙.

줄리앙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이야.

반로아 왕국은 내가 3살 때 망했다고! 기억도 안 나!

하지만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해서 나타난 벌슨은 꿋꿋이 그녀에게 '아가씨' 소리를 했다.

"데이지 아가씨. 다이아몬드는 진흙에 넣고 구워도 다이아몬드인 법입니다. 때가 왔으니 이제 광채를 가리던 진흙을 깨고...."

"으악! 그 와중에 명언병은 또 그대로인 거야?!"

"...아무튼, 이제부터는 슬슬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가문을 재건하셔야지요. 머지않았습니다. 란센 전하께서 곧 왕국을 세우실 테니까요."

"히익!? 란센 아저씨는 란센 전하가 됐어?!"

데이지가 질색에 팔색을 더했지만 벌슨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후.... 알겠습니다. 소후작님. 아가씨란 표현을 싫어하시니 소후작님으로 고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친근함에 아가씨라 부르고 싶지만 원하신다면 소후작님으로 호칭을 하는 것이 예의겠지요. 하지만 란센 전하는 란센 전하입니다. 소후작님께서도...."

"끄아아! 소후작도 싫어 싫다고!"

결국 데이지는 참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벌슨의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다.

"한 1년? 길어야 3년? 계속 부르다 보면 소후작님께서도 자각하시겠지."

참고 인내하며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벌슨의 특기였으니까.

때마침 벌슨의 시야에 미카가 포착되었다.

미카 세이투스.

세이투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벌슨은 얼른 다가가 왼손으로 칼자루를 잡아 내리고 고개를 숙이는 반로아의 군례를 취했다.

"아가씨. 오늘 날씨가 참 맑습니다."

그러자, 미카의 눈이 반짝였다.

늘 반말을 하며 친근하게 대하던 벌슨이 갑자기 존대를 하며 예의를 차린다?

대부분은 떨떠름한 기색을 보였다. 데이지는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고.

허나 미카는 오히려 이 상황을 기꺼워했다.

"호오? 이게 누군가? 나이트 벌슨 발란차 경이 아닌가?"

"예. 아가씨."

"그만, 아가씨라니.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아, 예. 공녀님."

"어허! 본 소공작은 엄연한 기사의 신분! 나이트 미키시엘라 경이라 불러 주면 충분하네."

그러고선 작게 속삭이듯,

"크큭.... 신분을 감추고 평범한 기사로서 살고자 하나, 사실은 왕국에서 두 번째로 존엄한 신분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힌.... 그것이 나 미키시엘라의 운명...."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벌슨은 좋았다.

이제 자신은 기사였고 도련님과 아가씨들께 합당한 호칭을 불러드릴 수 있었으니까.

"네. 나이트 미키시엘라 소공작님!"

"아아!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구나.... 그깟 혈통이 무어란 말이냐...!"

그날 벌슨은 미카에게 사로잡혀 꽤 긴 역할놀이를 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지칠 이유가 없었다.

쌩쌩한 오러 코어에서는 싱싱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고, 온몸에는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생기와 활력이 돌았으니까.

그 기세로 교관 회의에 들어간 벌슨.

그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무게를 잡았다.

"저기... 총교관님. 그냥 이 공방일체 부분은 빼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게 저희부터도 개념이 안 잡히는 것을 가르칠 수는...."

"일어나게."

"네?"

"일어나 보라고."

그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벌슨.

공방일체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던 교관은 엉겁결에 그를 따라나섰다.

"검 뽑게."

"네?"

"검 뽑으라고."

벌슨이 먼저 검을 뽑자 교관도 검을 뽑았다.

"공방일체를 모르겠다고 했지?"

"예.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습니다. 공격이면 공격이고 방어면 방어지. 공방이 일체라는 건...."

"날 공격해 보게."

"예?"

"있는 힘껏 공격해 보라고."

그 말에 교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체로 로버랜드의 전사들이란 사양을 모르는 자들이었으니.

'오.... 기회인가? 맨날 탁상공론이나 하는 저 늙은이를 팰 수 있는?'

이런 불온한 생각마저 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안 봐 드립니다?"

"바라는 바네."

"그럼... 차아아앗!"

오러를 쓰진 않았지만, 벌슨보다 20년은 젊은 전사의 검에는 강맹한 힘이 실려 있었다.

차아아앙!

그러나...

높게 들어서 아래로 찌른 벌슨의 검에, 교관의 수직 베기는 칼날과 삐죽 솟은 크로스가드(칼날받이)에 허망하게 가로막혔다.

"히익...!"

반면에 벌슨의 검은 공격도 받아 내면서 동시에 젊은 전사의 목젖을 겨누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진검의 예리한 날이 목에 닿는 그 섬뜩함을.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는 교관에게 벌슨이 말했다.

오래 묵고 묵은 한을 풀어내듯.

"그것이 바로 공방일체다."

그날 회의는 그간 전달하지 못했던 여러 개념들을 교관들의 몸에 새겨 주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교관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벌슨은 다음 일정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는 훈련뿐만 아니라 대장간의 무기 생산, 군마의 관리, 성벽의 보수 등 다방면의 일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늘 바쁘게 도시를 오갔다.

그런데, 항상 꼬마아이들이 놀던 공터 옆을 지나치다가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훠이! 훠이!"

"낄낄낄. 저놈들 눈 봐라? 잘하면 치겠다?"

술에 취한 세 명의 전사가 술병을 궤짝 채로 들고 와선 공터에서 잘 놀던 꼬마들을 쫓아냈다.

그렇게 쫓겨나는 꼬마들 중에는 란센 패밀리의 어린 식구들도 있었다.

"우리가 먼저 왔잖아요?!"

과연 란센 패밀리답게, 13살의 아이가 반항을 했다. 하지만,

퍼억!

돌아온 건 전사의 발길질이었다.

"씁! 어디서 쪼꼬만 게 눈을 똑바로 뜨고. 확! 그냥! 밟아 죽일까?!"

뒤로 나동그라진 아이를 발로 짓밟을 것처럼 위협을 가하는 전사.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로버랜드에선 흔한 일상이었지만, 벌슨은 저런 걸 그냥 지나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코어가 성치 않았던 지난 14년간에도 내내.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셔야지...!"

쓰러진 아이를 감싸 안고 상태를 체크했다. 다행히 전사도 아주 미친놈은 아니어서, 넘어져서 까진 곳 말고는 크게 다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발길질은 했어도 살짝 밀어 찬 수준이다 이건가....'

정상참작은 되겠지만, 여전히 용서할 순 없다.

유죄!

"뭐야 이 아저씨는."

벌슨이 속으로 판결을 내리는 동안,

20대와 30대로 구성된 젊은 전사 셋은 건들거리며 벌슨을 둘러쌌다.

그중 한 명이 벌슨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어? 이 아저씨 그 아저씨 아냐? 맨날 술집 와서 아는 체하는 그 아저씨."

"아? 아~ 맞네. 저번에 내가 함 뜨자 하니까 토끼드만. 갑자기 용감해지셨어?"

"아재요. 꼬아요? 그럼 함 뜨까?"

건들건들 시비를 거는 그들에게 벌슨은 구구절절이 말을 섞지 않았다.

"너희도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 다리를 절면 좀 그렇겠지?"

그렇게 딱 한 마디를 읊조리곤,

우드득!

빠드득!

쿠직!

한 놈은 팔을 잡아 꺾어 부러뜨리고, 다음 놈은 손목을 비틀어 부러뜨리고, 마지막 놈은 발로 차서 팔뼈를 똑, 부러뜨렸다.

"끄아아아악!"

"히이익! 으아악!"

"크악! 너, 너무 아파 아악!"

겁쟁이들처럼 빽빽 울어 대는 전사들을 내려다보며 벌슨은 물었다.

"정말 제대로 한번 붙어 보길 원하나?"

그 말에서 흘러나오는 스산한 살기에...

용병 일을 주업으로 이 전사들은 그저 눈을 바닥에 처박을 뿐이었다.

* * *

무력을 되찾은,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해져 버린 벌슨은 그야말로 일 중독자가 따로 없었다.

원래도 맡은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군사작전까지 수행했다.

교역로 경비, 마수 소탕, 치안... 가리지 않고 모든 일들을 초인처럼 해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성과를 물어다 주는 벌슨.

덕분에 난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벌슨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공 전하. 기이한 괴물이 있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레나죠라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젠 모두가 나를 대공이라 불렀다.

이것도 자꾸 듣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서, 가끔 누가 "백작님." 그러면, 나도 모르게 '백작? 내가?' 이런 시선으로 돌아보곤 하였다.

그럼 상대방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대, 대공 전하!'라고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권력... 이거 참 재밌다?

아무튼지 간에,

벌슨이 가져온 괴물의 사체는 나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가 잡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걸 알아서 잡아 오네?'

운명의 책에 새로 추가된 기능 [탐색].

거기에 붉은 점으로 표시된 비틀린 세계선이 바로 눈앞의 괴물이었으니까.

요즘 전투 피로 때문에 자꾸 미루던 일인데....

유능한 부하가 있다는 게 이래서 좋은 건가?

참으로 편하고 좋았다.

"나이트 벌슨. 이 괴물은 어땠지?"

벌슨이 진중하고도 심각한 목소리로 답했다.

"실로 대단했습니다. 전력을 다해도 쉬이 베이지 않았습니다.

"마갑을 입고도?"

"훈련을 겸할 겸 마갑은 쓰지 않았습니다. 오러 블레이드만 썼지요. 아직 오러가 미약해서 그런지 그것만으론 가죽을 뚫기 어려웠습니다."

"소드마스터 수준의 괴물이라...? 어떻게 잡은 거야 그럼? 고대의 검기를 썼나?"

"아닙니다. 수십 명의 익스퍼트들이 연격전을 벌여 가죽을 상하게 하고, 체력을 깎아 놓은 후에 제가 참하였습니다."

"엄청 고생했네."

"심지어 상황이 불리해지자 도망을 치는 영악함까지 지니고 있어서... 솔직히 고생 많이 했습니다."

벌슨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부하들을 챙기려는 목적일 거다.

자신은 몰라도 부하들은 꽤나 무리를 해서 싸웠다고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데도 사상자가 없었으니... 벌슨의 노련한 지휘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소드마스터급의 괴물이라. 어쩐지 생긴 것부터 심상치가 않더니... 괴물 중에서도 괴물이었구나?'

보기만 해도 흉측하고 위압감 넘치는 놈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거대한 근육질의 소가 사람처럼 두 다리와 손을 가지고 있는 모양새였다.

여기까지는 꽤나 평범한 마수 같지만 디테일들이 상당히 끔찍했다.

지금도 꾸물대는 가느다란 기생충 같은 털이 온몸에 가득했고, 머리에는 산양 같은 뿔이 있었으며, 꼬리는 뱀과 같았다.

놈은 심지어 웬 무기도 들고 있었는데, 그건 어떤 살 뭉치로 이루어진 철퇴였다.

사람들의 머리를 반죽해 빚은 듯한 거대하고 끔찍한 철퇴.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무수한 입을 뻐끔거렸다.

'이쯤 되니까 비틀린 세계선이라는 건가?'

전에 황제는 선물이랍시고 굉고(宏鼓)라는 전설의 괴물을 잡아 그 심장을 내게 보냈다.

운명의 책은 그것을 먹어 치우곤 '비틀린 세계선'을 획득했다.

로레인 연구소에선 '사도'를 해치웠을 때 비틀린 세계선을 다량으로 얻었다.

즉, 운명의 책이 먹는 괴물은 일반적인 괴물이 아니었다.

괴물 중에서도 더 비틀린 것.

그 어디에서도 목격된 적 없는 새롭고 유일한 것.

일반 마수와 궤를 달리하는 강력함.

그 정도는 되어야 비틀린 세계선을 품고 있는 것.

'그럼 이제 근처에는 비틀린 세계선이 더 없나?'

운명의 책을 꺼내 확인해 보니, 확실히 더 이상 붉은 점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좋다.

마음 한 켠을 누르고 있던 숙제 하나가 해결된 기분.

"수고했어. 나이트 벌슨. 포상이 있을 거야. 같이 수고한 전사들에게도 전부 다."

"영광입니다."

이제 완전히 한 명의 기사로서, 나를 주군으로 대하는 벌슨 아저씨.

그게 그의 기쁨이라는 건 알지만, 나로서는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가끔은 예전처럼 편하게 술 한잔하자고 해야겠어.

부르르르르-

그리 생각하는데, 이놈의 운명의 책은 또 미친 듯이 진동하며 나를 보챘다.

"그래. 먹어라. 실컷 먹어라."

지금 괴물의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은 소형 연무장.

이미 모든 사람을 물려 놨기에 나와 벌슨뿐이었다.

그러니 눈치 보지 않고 운명의 책을 앞으로 내밀었다.

쿠득! 쿠득쿠득!

괴물의 시체가 우그러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콩알만큼 작게 압축이 되어 날아왔다.

덥썩!

운명의 책은 그것을 한입에 삼켰다.

[소량의 비틀린 세계선을 흡수 중입니다.]

응?

이번엔 소량이야...?

얼른 운명의 책의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에필로그 1/1]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음.... 소량이라 안 되나 보네.'

굉고(宏鼓)는 하나만 먹여도 [에필로그] 기능이 해금되었는데...

이번엔 그대로였다.

'더 먹여 봐야 알겠네.'

새로운 기능이 해금되든지, 아니면 에필로그가 늘어나든지. 계속 먹이면 뭐라도 변화가 생기겠지.

[에필로그].

사실 지금으로서는 크게 필요성을 느끼는 기능은 아니었다.

이미 역사 개변을 완료한 장소에 방문할 수 있다는데... 나중에 검술 막힐 때 가서 수련을 할까? 딱 그 정도의 생각.

하지만 어떤 직감이 있었다. 이게 사실은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라는.

'그래, 꾸준히 먹여 보자. 어쨌든 많이 먹이면 좋은 일이 있겠지.'

그렇게 대충 정리하고 아직까지도 무릎을 꿇고 있던 벌슨 아저씨를 일으켰다.

"아저씨. 오늘 고생도 많았는데, 밤에 술 한잔?"

아, 몰라.

그냥 친근하게 부르고 싶어서 원래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더니,

"흐흐. 좋지. 근무 끝나고 보자구."

벌슨 아저씨도 그 곰 같은 얼굴을 구기며 씨익 맞장구를 쳤다.

아, 이래서 이 아저씨가 좋다니까.

사람이 유도리가 있잖아. 유도리가.

#82화 프롤로그

시간은 잘도 흘렀다.

갑자기 도시가 4개가 되니, 할 일은 쏟아져 내렸다.

그 15세 증후군의 미카 세이투스까지 달달 볶이며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야 했을 정도.

그렇게 모두가 자기 일과를 허덕허덕 수행하고 있는 오후 시간.

나는 혼자 한량같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운명의 책의 맨 앞장을.

[프롤로그 1회]

로레인 연구소를 다녀온 이후, 에필로그 아래에 생겨난 새로운 문양.

손으로 만져 보면, 기원이니 기적이니 하는 설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흐음.... 해 볼까?"

고민을 좀 했다.

이게 어떤 기능인지 통 모르겠어서.

행여나 또 나를 빡센 과거로 날려 보내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지금 해 보는 게 맞기는 해."

연달아 전쟁과 전투를 치르고 일루나엘, 키날로, 카슈, 쿠샨 이렇게 네 개의 도시를 차지하게 된 지금.

노르베르쥬의 정세는 말벌 통처럼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위협은 아직 없다.

폭풍의 전야랄까? 치열한 물밑 싸움이 벌어지고 있지만, 당장 무력이 필요한 순간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바쁜 건 세아와 리베라였지, 난 아니었다.

"노르베르쥬 전체적으로 봐도... 좀 더 윤곽이 드러나야 대비를 하든, 대처를 하든 할 테고.... 아일룬에 국한해서 봐도 내가 당장 할 만한 건 없지."

아일룬 지방의 도시는 총 5개.

그중 제일 큰 도시 일루나엘은 이미 우리가 먹었고, 나머지 4개 도시 중 2개 도시가 투항 의사를 밝혔다.

여기엔 질풍 7걸의 역할이 컸다.

뇌성의 토르반은 에기나시(市)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호족이었고, 신살의 세린느와 충천의 이오니스는 로엔시(市)를 꽉 잡고 있었으니까.

이미 협상도 다 끝내고, 우리 행정관들이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중이라 들었다.

그쪽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문제는. 나머지 2개 도시가 문제인데....'

하나는 대놓고 독자 노선을 천명했고, 다른 하나는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슬슬 간만 보았다.

갤란시(市)와 룬드나시(市).

이 둘을 해결하긴 해야 하는데, 당장 군대를 일으키는 건 부담스러웠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도 내실을 다질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또, 무턱대고 정복부터 하면, 불만 세력들이 남아 두고두고 화근이 될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고민과 준비가 더 필요했다.

'그러니까 지금이 맞아.'

거대한 태풍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분열된 아일룬 지방.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이 내게 느끼는 불안과 불만.

이게 본격적인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하면, 또 한동안 정신없이 달려야 했으니까.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태풍에 휩쓸려서 허우적거리기 전에 말이야.

나는 프롤로그를 상징하는 문양을 다시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설명.

[불완전하게나마 기원과 만나게 되는 기적]

단어 하나하나가 다 이해가 안 갔다.

불완전하다?

그럼 완전한 건 어떤 건데?

기원?

무엇의 기원?

기적?

기원을 만나는 게 기적인 거야?

'역시 모르겠다. 그냥 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래야 알게 될 테니까.

'어쨌든 기적이라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그래. 마음먹었다.

나는 프롤로그의 문양 위에 손을 올렸다.

간절히 바라면서.

'이번엔 너무 오래 걸리지 마라. 너무 빡세지도 마라!'

[프롤로그를 사용합니다.]

사무적인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어... 라...?'

털썩.

나는 그대로 책상 위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 * *

'...꿈이네?'

소드마스터는 언제나 자각몽을 꾼다.

습관적으로 감각을 점검해 보면,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 금세 구분이 갔으니까.

깜깜한 꿈이었다.

사방은 연기처럼 어두운데, 그 한가운데에 웬 꼬마 여자애가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되게 서럽게 우네....'

온몸을 떨어 대면서, 정말 서럽게도 울었다.

저 작은 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만큼.

아주 살짝 분홍기가 가미된 하얀색 머리칼.

그 예쁜 것이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애처롭게 흔들렸다.

'아... 이거 약점인데.'

이게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참지 못한다.

아니, 애가 울고 있잖아?

내 눈앞에서.

애가 운다고!

"꼬마야. 왜 울어?"

다가가서 무심하게 물었다.

애들 특징이 너무 상냥하게 대하면 더 서럽게 울어 젖히는 거라서.

무심한 듯 상냥하게. 딱 이 정도가 좋았다.

"누구야?!"

아이가 얼른 눈물을 닦고 날 노려보았다.

오.... 귀한 집 아이인가?

날카롭게 묻는 폼이 참으로 위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옷이 로레인이 입고 있던 그 겉옷하고 거의 똑같네?

하얗고 호주머니가 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왠지 그게 위엄을 더하는 느낌이지만... 그래 봐야 꼬마다.

"나는 란센. 이거 먹을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차피 꿈이니까 주머니에서 뭐든 꺼낼 수 있다.

내가 꺼낸 건 마도 시대의 간식.

요 오도독하면서도 새콤달콤 한 것을 먹으면 어떤 아이든 울음을 멈출 수밖에 없지.

근데 이 녀석은 내가 꺼낸 간식은 쳐다도 안 봤다.

"여긴 내 꿈속인데. 어떻게 들어왔어?"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 꿈속이구만.

그렇게 차분히 설명했지만, 돌아온 것은 단호한 부정이었다.

"아냐! 내 꿈이야!"

애가 고집이 세네....

저 날카로운 눈매. 데이지도 어릴 때 저랬는데.

"그래. 네 꿈이라고 치자. 그래서 왜 우는데?"

애랑 자존심 싸움 벌여 봐야 좋을 게 없다.

나는 은근슬쩍 간식을 까서 꼬마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내 꿈 맞는데 진짜...."

꼬마는 꿍얼거리면서도 무심결에 간식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커지는 두 눈!

"맛있어!"

눈물이 멎고 볼까지 발갛게 변하는 아이의 순수한 기쁨.

이거지! 이래서 간식을 들고 다니는 거지.

"그치? 그게 좀 맛있어."

"이런 거... 처음 먹어 봐."

응? 처음 먹는다고? 귀한 집 애 같은데. 왜?

집안이 망했니?

꼬마애가 눈썹을 찌푸리고 내게 항변했다.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 이런 건 원래 안 먹는다고!"

"어린애잖아?"

"아냐!"

"몇 살인데?"

"...8살."

"맞잖아. 어린애."

"아냐! 나는... '영웅'이라고."

영웅.

그 말에 담긴 무게와 울림은... 도무지 어린아이의 입에 담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애들이 흔히 말하는 '난 영웅이 될 거야!' 할 때의 그 설렘과 들뜸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이미 찌들대로 찌든 피로와 간신히 붙들고 있는 책임감이 뒤섞인....

살짝,

화가 났다.

꿈인 줄 알지만.

화가 났다.

"네가 왜 영웅인데?"

"다들 나한테 물어보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알려 줘야 하니까."

"어른들이? 물어? 너한테?"

"응."

"그거 이상한 어른들이야. 도망쳐."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머리가 달아오르는데, 꼬마애는 단호하게 그리고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망칠 수 없어."

"왜?"

"세상이 멸망하면... 다들 슬퍼할 거잖아. 비샨티도, 케루루스도... 하맥은 더 다쳐 오겠지."

비샨티. 케루루스. 하맥.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지?

아무튼 꼬마애는 그 사람들을 아주 아꼈고, 그래서 도망을 못 친다고 했다.

"참...."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얘가 자꾸 내 약점을 찌르네. 난 너 같은 꼬마들이 싫어."

그 말에 꼬마애가 파르르 떨었다.

"뭐?! 나도 너 싫거든?! 남의 꿈에 함부로 들어오기나 하고!"

"뭐래. 내가 더 싫거든?"

"나는 더 더 싫거든!"

"나는 대륙 전체만큼 싫거든?"

"그럼 나는 하늘, 아니! 우주만큼 싫거든!"

피식.

그제야 굳어졌던 내 입꼬리에 웃음이 걸렸다.

"그렇지! 지금처럼! 지금처럼 해 봐. 좀 애답게 굴어. 응?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말고. 내가 속이 상한다, 인마. 내가."

무릎을 굽혀 녀석과 두 눈을 마주쳤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눈가에 살짝 부풀어 오른 물기가 보였다.

나는 살며시 알을 품듯, 행여나 깨지기라도 할까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주었다.

아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작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고생이 많다."

"끅...!"

아이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그래. 이런 모습이 너무 싫고 거슬리는 거다. 속이 너무 쓰라려. 꼬마애 주제에 눈물을 왜 참는데?

"혼자 다 짊어지지 말고 좀 믿어 봐라, 어른들을. 에고.... 얼마나 힘들었을꼬."

"끄으.... 흐으.... 흐으윽!"

조금씩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

토닥토닥.

가만히 두들겨 주며 말했다.

"그리고 힘들면 나한테 말해. 너 괴롭히는 것들? 내가 다 혼내 줄 테니까."

"흐에에에에엥-"

이제야 펑펑 우는 아이를 안아 주며, 나는 끝까지 속삭여 주었다.

"그리고 내가 보니까, 세상 쉽게 안 망하더라. 신화 시대가 멸망해도, 다시 마도 시대가 열렸고, 마도 시대마저 멸망한 뒤엔 다시 우리가 검의 시대를 열었고.... 뭐, 그렇게 이어지는 거더라. 흔적을 남기면서."

...애가 자꾸 울어서 그런가?

나도 감상적으로 되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애가 알아들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아이를 토닥토닥해 주다가, 꿈에서 깨었다.

나는 집무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시간도 얼마 흐르지 않았다.

왜인지 눈가를 따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뭐냐...?'

내가 왜 울지? 하는 1차 적인 질문은 일단 걷어치우고.

"설마 방금 그 꿈이 [프롤로그]야?"

아니, 뭔 깨어진 인과를 소모해서 얻은 기적이라며?

그래서 긴장도 하고 기대도 했는데... 웬 안쓰러운 녀석이 울어 대는 꿈이 전부...?

그렇게 실망하려 하는데....

스스슥-

운명의 책에 변화가 생겼다.

[운명의 책이 업데이트됩니다.]

- 이제부터 시간 여행이 강제되지 않습니다. 해당 기록을 소리 내어 읽을 때만 시간 여행이 발동합니다.

- 시간 여행이 가능한 목적지를 선택 가능해집니다. 1레벨당 목적지가 하나씩 늘어납니다.

- 과거와 현재의 시간 비율이 12 대 1로 조정되었습니다.

- 임무 완수까지 소요되는 시간의 추정치가 제시됩니다.

- 비틀린 세계선의 흡수 효율이 2배 증가했습니다.

- 레벨 상한이 높아졌습니다. 이제 비틀린 세계선이 임계에 달하면 Lv.3으로 승격이 가능해집니다.

책 위로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표지 부분에 새겨지는 열 개의 막대.

그중 왼쪽 네 개는 까맣고 오른쪽 여섯 개는 하얗다.

오른쪽 끝에는 Lv.3이라고 적혀 있었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저 흰 막대를 모두 까맣게 물들이면 운명의 책이 또 승격되는구나? Lv.3으로.'

원래는 Lv.3이란 거 자체가 없었나 보네.

그 밖에도 하나같이 놀랍고 유용한 변화들이었다.

그간 느꼈던 불편과 불안을 대부분 해소해 줄 만한.

근데... 내가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건,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났냐는 것이다.

난 그저... 꿈을 꿨을 뿐인데?

'뭐지 진짜...?'

알 수가 없었다.

* * *

머나먼 어느 시간대.

남자는 영웅 중에서도 가장 귀한 '영웅'을 보필하기 위해 아침부터 걸음을 서둘렀다.

"기침하셨습니까."

그는 늘 그렇듯, 영웅의 침소 밖에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음...."

침소 안, 침대에 파묻혀 있는 건 아주 작은 여자아이.

연하게 분홍기가 섞인 하얀색 머리칼이 이불 속에서 부스스 흔들렸다.

곧이어 빼꼼 고개를 드는 작은 머리.

란센이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꼬마였다.

꼬마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눈도 목도 다 엉망이었다.

"어.... 이제 깼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놀람이 섞였다.

이제 8살에 불과했지만, 저 위대한 '영웅'은 언제나 자신이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있곤 했으니까.

심지어 목소리는 왜 저렇게 엉망이란 말인가?

"그냥... 꿈을 꿨어."

"어떤 꿈이었습니까?"

"그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꼬마.

곧 그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그려졌다.

"아득히 머나먼, 미래에서 온 꿈."

"네?"

남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벌컥!

여자아이의 방문은 이미 힘차게 열렸다.

어느새 하얀 가운을 걸친 꼬마 아이는 부리나케 연구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다.

"나!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저, 저기! 뛰시면 위험합니다!"

황급히 그런 꼬마를 뒤쫓는 남자.

그러거나 말거나, 꼬마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영웅이기에, 영웅이어야만 했으니까.... 늘 감정을 숨기고 다니던 그 아이가, 그 나이대 아이들다운 해맑은 웃음을 한입 가득 물었다.

어쩐지 입 안이 새콤달콤했다.

#83화 서로 다른 계책?

불안이라는 건 형체가 없다.

숨죽여 수군거리는 소리.

가끔씩 터져 나오는 고성.

시체처럼 굳은 낯빛과

안절부절못하는 눈동자로 드러나는 것.

그 형체도 없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타고 넘으며, 심장을 옥죄고 목구멍을 조른다.

"하룬 님이.... 죽었대."

아일룬 지방 어딘가.

누군가의 목소리는 목이 졸린 듯하고 음산하게 가라앉아 공기를 떨리게 했다.

"란센, 그자. 사람이 아니래. 내 친척의 친구가 하룬의 궁성을 지켰던 전사랑 아는 사이라는데...."

"그 무섭던 전사들이 미쳐 버렸다고 하던데...."

"참살귀랑 혼혈이라 하더라."

공기를 타고 넘나드는 형체 없는 불안감.

그건 사람의 숨결을 타고 들어가 밖으로 다시 나올 때마다 점점 커지고 점점 기괴해졌다.

"하룬 님이 단 일검에 패하셨다더라...."

"진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어떻게 그 하룬 님을...."

특히나 30대 이상의 어른들.

하룬이 아일룬 지방의 다섯 도시를 순식간에 통일시켜 버리던 그 파죽지세를 기억하던 이들은, 하룬이 이토록 쉽게 패했다는 사실에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우리 로엔시(市)는 항복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 하룬 님이 유언으로 후계자라 천명했는데 끝까지 저항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그 괴물 같은 란센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이 점점 고조되던 긴장을 누그러뜨렸지만, 불안이라는 불씨는 여기저기 숨어 있다가 돌연 화르르 타오르며 또다시 새로운 두려움과 초조함을 번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갤란하고 룬드나는 아니잖아."

그 한마디에 퍼져 나가는 탄식.

"갤란은 아예 독자노선 천명했다며?"

그건 갤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일룬 지방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위기.

"갤란은 굴라크 가문이 이끌고 있으니까.... 제국하고 이마 부딪히며 살아온 그 고집불통의 인간들이 말을 들어 먹을 리가 없지."

"현 당주인 카시미르가.... 또 충정이 유별났잖아. 하룬 님한테."

"그치...."

고집불통에 하룬에게 충정을 다 바친 전사 카시미르 굴라크.

"룬드나시(市)는 가타부타 입장 표명 안 하고 시간 끌기 하나 보더라."

"룬드나 놈들은 옛날부터 비열했지. 잔머리나 굴리고."

"룬드나는 에시르 가문이 다스리지?"

"응. 그 욕심 터진 돼지 새끼들. 하룬 님도 안 계시니 룬드나 시민들만 불쌍하네...."

"근데 지들이 란센한테 상대가 되기나 해? 굴라크 가문이야 원래 꼴통들이니 그렇다고 해도.... 에시르 가문은 뭘 믿고?"

"이건 나도 들은 얘기인데.... 해상왕이랑 접촉을 하고 있대."

"해상왕?!"

"쉿쉿."

교활하고 욕심 많은 에시르 가문.

거기에 해상왕과 노르베르쥬의 다른 영주들과 심지어 제국까지 장작으로 투여되며, 불안이란 불길은 점점 크게 번져 나갔다.

전쟁, 식량 부족, 교역로의 단절, 기습과 파괴 공작....

상상 가능한 미래의 모든 위기와 고통이 이미 이곳에 내려앉은 것처럼, 사람들은 가슴의 통증을 느꼈다.

당연히 이런 불안은 란센에게 굴복하지 않은 갤란과 룬드나시(市)의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더 번성하였다.

란센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게 그들의 불안이었다.

"최소 관세를 높이 때리겠지. 아니. 아예 교역로를 끊을걸?"

"미친.... 그럼 우린 뭘 먹고 살아?"

"그렇다고 하룬 님을 죽인 놈한테 무릎을 꿇을 순 없잖아!"

"하지만.... 하룬 님이 란센한테 아일룬을 양도한다고 유언을 남겼다며...."

"넌 그걸 믿냐!"

자존심이 높은 갤란의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한편으로는 분개했다.

"그치만... 아일룬 백마는? 우리 지역은 군마를 대규모로 키울 수 없잖아. 아일룬 백마가 없으면 마수 토벌도 문제고... 제국도 우릴 우습게 볼 거고...."

"이참에 차라리 제국 놈들이랑 손 못 잡을 것도 없지. 하룬 님을 죽인 놈보다야 제국이 낫지 않겠어?"

하지만 이들의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건 결국 공포였다.

"란센 그 미친놈이 또 여기 뛰어 들어오는 거 아냐? 하룬 님한테 한 것처럼 카시미르 님 이하 굴라크 가문 전원 멸족시키고...."

"어허! 그런 재수 없는 말을. 그러지 못하게 우리가 똘똘 뭉쳐야지."

"난... 그냥... 다 싫다. 하룬 님이고 란센이고.... 그냥 평화롭게 살면 안 되나?"

"너 지금 하룬 님 욕한 거냐?!"

"얼씨구. 싸움 났네. 어차피 전쟁 벌어지면 다 죽을 건데 뭔."

"다 죽긴 뭘 죽어! 제국하고 힘을 합치면 된다니까!"

"그럼 더 죽겠지."

결말이 어떻게 지어질지 예상이 되지 않았기에....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고 가슴은 타들어 갔다.

아일룬 지방을 넘어 노르베르쥬 전역을 강타하기 시작한 혼란.

과연 이 혼란이 가라앉기는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내내 전쟁과 궁핍 속에 살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공포에, 누구는 더욱 화를 내고 누구는 침묵하고 누구는 우울감을 토로하며 그렇게 갤란과 룬드나의 시민들은 나날이 불안한 밤을 지새웠다.

* * *

솔직히 말해 볼까?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그냥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땀 흘려 강해지고, 그 강해진 힘으로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 지키는 거.

꼴 보기 싫은 꼴 안 보는 거.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다.

단순하고 협소하기 짝이 없는 바람.

그러니 늘 생각하는 것이다.

벌슨 아저씨가 기대하는 '왕'이라는 거.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내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든 제국이 밉고,

...그래서 지금의 상황도 탐탁지 않았다.

아일룬의 모든 사람이, 또 노르베르쥬 전체가 내 다음 행보를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

아이들.

언제나 아이들이 문제다.

어른들이 불안해하면 아이들은 그 성격마저 변해 버린다.

쾌활하던 아이가 침울해하고, 어떤 아이는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그 시기에 느끼고 다져 놓아야 할 무언가를 건너뛰어 버리고....

많이 봤다.

내가 폐인이 되었을 때, 내 동생들이, 우리 꼬마 식구들이 그랬으니까.

정말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꼴이다.

그래서였다.

세아가 결재로 올린 계책을 읽어 보다가 갑자기 검을 쥐고 연무장으로 나온 이유는.

'계책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어.'

늘 신통하게 정보를 잘 모아 오는 세아.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계책.

그건 세아가 전에 말한 '반간계(反間計)'의 수정본이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갤란과 룬드나를 직접 쳐서 무너뜨리는 건 하책.

그럴 경우 반감을 크게 사서 진심으로 따르게 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거란 계산이었다.

그러니 갤란과 룬드나에 경제, 군사적 압박을 가하며 동시에 그 내부에 우호 세력을 만들고 회유하자는 이야기.

밖에선 눌리고 안에선 친(親) 란센 세력이 자라나 결국 두 도시는 자중지란 끝에 스스로 무너질 거라는 게, 세아가 설계한 반간계의 골자.

좋았다.

효율적이고.

실현 가능성 충분하고.

하지만,

'그 시간 내내 사람들은 불안에 시달리겠지.'

그만큼 아이들의 표정도 어두워지겠지.

"쯧."

서걱!

어지러워지는 상념을 검을 휘둘러 베어 버렸다.

그래.

뭘 고민하냐.

잘하는 걸 하자.

나는 통치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싸움의 이치라면 꽤 잘 알잖아?

칼은 적게 휘두를수록 좋다.

휘두를 때는 그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정확하게 딱 필요한 만큼만 베는 게 좋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내 마음속에선 새로운 계책이 모락모락 자라났다.

세아가 준 정보와 계책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조합되는 계책.

"오빠. 검토는 해 봤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세아가 결국 나를 직접 찾아왔다.

"응. 검토했지."

"어때?

뭐라고 말을 할까....

내가 말을 고르고 있자, 세아가 조곤조곤 설명을 더했다.

"지금 상황이 좋아. 하룬이 남겨 준 유언 덕에 우리한테 명분도 있고, 우호 세력도 곳곳에 존재하니까. 관세로 경제에 압박을 주고 우호세력들 지원만 해 줘도.... 얼마 안 가고 모두 무너질 거야."

그렇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저런 방식을 쓰면 한 번 휘두른 칼에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된다.

그러니,

"세아야. 하지만 반간계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

나는 줄곧 정리해 온 생각을 내뱉었다.

이게 맞다.

내 마음에도 맞고, 가능하면 지켜 주고 싶은 하룬의 마지막 부탁에도 부합한다.

"나는 차라리 감화계를 쓸래."

"감화계?"

"응. 모든 걸 지금처럼 유지할 거야. 경제적, 군사적 압박도 없어. 아일룬이 여전히 하나라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우대해 줄 거야."

"...그러면 당근만 쏙 빼먹고 우리 말은 안 들을 텐데?"

"그럼 그때 칼을 휘두르면 되지. 목을 치든 손목을 자르든 말이야. 이미 그 방법은 네가 잔뜩 준비해 줬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연무장 한 켠에 내려놓았던 세아의 계책 보고서를 흔들었다.

"...."

세아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를 가만히 응시할 뿐.

...내 계책이 마음에 안 드나?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세아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럼, 그때 가서 칼에 맞으면, 내분이 일어나겠네?"

"...그렇지? 내가 먼저 양보했는데, 그쪽에서 양보를 안 해 줘서 생긴 사달이니까?"

"응.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이겠지. 그러면 그 불만 세력이 우리의 우호 세력이 되고?"

"그렇지?"

"그러면 그 우호 세력이 현재의 지배 세력을 무너뜨릴 거고."

"응.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

그러자 세아가 또 나를 빤히 바라보다 하는 말이,

"그게 반간계잖아?"

어?

...그런가?

아니, 아니다!

난 얼른 고개를 흔들고 주장했다.

"세아야! 긍정적인 면을 봐야지!"

"긍정적인 면?"

"응! 칼이 먼저가 아니라, 당근이 먼저니까! 그러니까 감화계지!"

빤-

고요하게 나를 응시하는 세아의 눈동자가 묻고 있었다.

'정말?'

아, 진짜 난 그렇게 생각한다고.

...아마도.

* * *

노을 지는 저녁.

연무장을 뒤로하고 빠져나오던 세아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아마 란센이 보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보기 드문 세아의 미소.

"재밌어."

세아는 사실 놀랐다.

그녀의 반간계와 란센의 감화계는 사실 종이 한 장의 차이였으니까.

압박이 먼저냐, 당근이 먼저냐의 차이.

그런데 그 하나의 차이가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이 안심하겠네. 가장 불안해하는 교역로의 단절이나 거래 상품의 제한 같은 게 없으니까. 당장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도 줄어들고."

그게 바로 란센이 당근을 먼저 내밀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설령 그 후에 다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태의 책임을 란센에게서 찾기보다는 갤란과 룬드나의 지배자에게서 먼저 찾게 되겠지.

물론 정말 그렇게 되려면, 이후에 휘두를 칼날이 아주 예리하고 정확해야겠지만....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닌가?

"정말 재밌어."

또 한 번 픽- 웃어 보인 세아는 서류를 품에 안은 채 걸음을 서둘렀다.

"더 분발하자."

그녀가 중얼거린 다짐이 여름밤의 공기 사이로 물결 같은 지문을 남겼다.

* * *

"반간계겠지."

레미죠라 체미엔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일루나엘에서의 상행을 마치고, 다시 로버랜드 남부에 있는 고르도르 지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반간계라는 게 사실 아무나 못 쓰는 거지만.... 그때 봤던 그 똑똑한 아가씨라면 충분히 해내겠지."

그래도 쉽진 않을 거다.

이 세상에 힘으로 못 할 것은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은 힘으로도 잘 되지 않는 거라서.

그리 생각하며 레나죠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 그나저나 아일룬 무역로가 폐쇄되거나 관세라도 붙으면 우리도 꽤나 팍팍해질 텐데...."

삐빅-

그의 상념을 깨뜨린 건 팔찌에서 울리는 알림음이었다.

마도 시대의 메시지 아티팩트.

긴급한 상황에만 사용하는 아티팩트가 지금 울었다.

"뭐지?"

살짝 긴장하며 메시지를 확인한 레나죠라는 "허어...." 하고 긴 숨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 란센 공식 성명 발표. 아일룬 전역 관세 철폐 유지. 상호 간 평화 희망. 노르베르쥬 전역에 자유로운 무역 보장. 요청 사항 또한 발표. 각 도시 간의 분업 전문화 계획에 동참을 요청. 제국 아카데미와 유사한 일루나엘 아카데미 개설에 참여 요청.

아티팩트의 수명 탓에 짧게 요약된 정보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레미죠라는 서늘함을 느꼈다.

"당근을 먼저 푼다고...?"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의 자신감.

그가 본 란센은 결코 흐물흐물한 호인이 아니었다.

만약 저 당근을 먹고도 란센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 뒤엔 아주 날카로운 칼날이 기다릴 것이다.

'과연 그 칼을 어떻게 휘두를까?'

레나죠라는 그게 궁금했다.

만약 잘 휘두르기만 한다면....

란센은 정말 빠르게 아일룬을 재통일하고 사람들의 진심 어린 승복조차 받아 낼 테니까.

정말 그럴 수 있는 그릇이라면....

'...장차 노르베르쥬 전체가 란센의 손에 떨어지는 상황도... 염두에 두고 셈을 해야겠어.'

레나죠라는 직감했다.

이 로버랜드에, 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을.

#84화 혼란 속으로

평화와 성장.

또는 전쟁과 퇴보.

그 선택의 기로.

언뜻 보면 고민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하고 후자를 버려야 할 것 같지만, 권력자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

그럴 바에는 세상의 반을 태우더라도 기꺼이 싸우고 공멸의 길을 택하는 게 바로 권력자였고... 특히 로버랜드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울부짖고 애원하는 소리라는 게 원래 그랬다. 누구에겐 가슴 미어지는 고통이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시끄러운 소음.

란센이 일루나엘시(市)까지 장악하면서 모든 무역로의 입구를 틀어쥐게 되자 노르베르쥬 영주들의 반응은 전부 비슷비슷했다.

쿠샨시의 서쪽 타로스시(市)의 영주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겨서 책상에 내리꽂았다.

쾅!

"이깟 종이 쪼가리를 믿으라고?!"

그건 란센이 얼마 전에 발표한 성명서였다. 노르베르쥬 전역에 자유로운 통상을 허용하며 무역로를 봉쇄하거나 무기화하지 않겠다는.

물론 무법자의 땅 로버랜드에서 그런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건, '란센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오직 그 가능성뿐.

란센은 이제 언제든지 노르베르쥬에 속한 모든 도시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

그게 사실이었고 그게 문제였다.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테베아시(市)의 영주도 반응이 비슷했다.

"하? 자기가 바라는 것은 노르베르쥬 전역의 발전과 호혜적 연대 강화라고?"

그는 아예 란센의 성명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벌써부터 자기가 노르베르쥬의 왕이 된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쿠샨시 서북쪽 헤레폴의 영주도,

아니 그냥 란센의 세력권 북쪽에 위치한 대부분 도시의 지배자들이 하나같이 분노했다.

"뭐? 아카데미? 뭐? 도시 간의 분업 전문화?!"

비록 란센은 '요청'이란 표현을 썼지만, 그들이 받아들일 때 그건 '간섭'이었고, 란센 본인이 노르베르쥬 전역을 경영하겠단 '야욕'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란센이 너무 쉽게 일루나엘을 장악했고, 심지어 그 하룬이 란센을 후계자로 천명하고 죽었으니....

"이대로는 란센을 멈출 수 없게 돼."

"여기서 갤란과 룬드나까지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우리 목이 떨어지게 생겼다고."

"당장 파발 보내!"

각자의 욕심 때문에 협력하지 못했던 영주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였다.

"반(反) 란센 연합 결성이다!"

"전쟁을 준비한다!"

전령들이 말채찍을 휘두르며 노르베르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는 비탄에 잠겼다.

"그, 그런 돈을 지금 어디서 구합니까?!"

"또 귀찮게 구네. 얘들아! 들어가서 싹 털어 와!"

"잠깐! 잠깐만요!"

"넌 병사로 쓰기 딱이겠군. 따라와!"

"네? 네? 잠깐. 아버지! 아버지!"

"아들! 안 돼! 차라리 저를...!"

"적당히 안 해? 여기서 둘 다 그냥 죽여 버릴까?"

전쟁 준비를 위해 병사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추가 세금을 걷고, 강제 징용을 집행했다.

거리마다 돈 냄새를 맡고 찾아온 험악한 용병들이 들끓었고 그들의 행패로 치안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시민들의 눈물과 통곡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지만, 각 도시의 지배자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울며 자신들의 영주를 원망했다.

"란센은 통상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카데미 생기면 좋은 거 아냐?! 내 자식을 보내고 싶구만!"

"솔직히 도시마다 특산품 개발하고 더 활발하게 교역하면 더 잘 살 수 있는 거 맞잖아!"

란센이 발표한 성명서가 시민들 사이에서도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주들은 사실을 호도했다.

"이게 다 란센 때문이다!"

"란센이 교역로를 봉쇄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나 란센은 이미 정복 전쟁을 준비 중이다!"

영주들이 퍼뜨린 허위 사실이 골목골목마다 넘쳐흘렀고, 점점 사실처럼 굳어졌다.

눈물과 한숨을 장작으로 삼아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원망.

노르베르쥬 전역이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그렇게 1주가 지나고, 12개 도시의 지배자들은 끝내 한 자리에 모여 속전속결로 연맹을 결성하곤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 *

"역겨운 놈들!"

아일룬 지방의 가장 서쪽.

그곳엔 제국과 국경을 맞댄 갤란시(市)가 있다.

란센과 대립각을 세우고 독자 노선을 천명한 영주, 카시미르 굴라크는 손에 들고 있던 동향 보고서를 구겨 버렸다.

그 안에는 노르베르쥬 영주들이 전쟁을 준비하며 일으킨 온갖 만행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눈물과 피로 축축이 젖은 것만 같아서, 카시미르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아예 내던져 버렸다.

"다 죽여 버리고 싶구나...."

사실 그는 시민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로버랜드에선 보기 드문 유형의 통치자였다.

비록 하룬을 죽인 란센을 용서할 수 없었기에 독자 노선을 천명하였으나.... 그렇다고 그가 전쟁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독자 노선을 천명해 놓고도 병력을 늘리지도, 용병을 고용하지도, 특별 세금을 걷어 전비를 확충하지도 않았다.

만약 란센이 쳐들어온다면, 그저 자신의 충신들과 함께 맞서 싸우다 죽을 작정이었다.

심지어 그는 란센의 성명서마저 신뢰했다.

아일룬 지방 내에서의 관세 철폐를 유지하고 통상의 자유를 보장할 거라는 그 관대한 처사엔,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랬던 만큼, 노르베르쥬의 12 영주들이 모여 발표한 공동 성명서를 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베르쥬 자유 연맹 공동 성명서]

노르베르쥬 12개 도시의 일치된 뜻을 란센에게 전한다.

하나, 일루나엘을 자유도시로 삼아, 공동으로 관리한다.

하나, 노르베르쥬의 젖줄인 아일룬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연합군을 주둔시킨다.

하나, 카슈시를 자유도시로 삼아, 공동으로 관리한다.

'미친놈들인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백 번 양보해서 일루나엘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인구 230만의 대도시 일루나엘은, 그 도시 하나의 경제 규모가 노르베르쥬의 평범한 도시 5개를 합친 것보다도 컸으니까.

그만한 힘에, 노르베르쥬를 지나는 모든 무역로를 다 틀어쥐게 되면.... 그래. 두려울 수 있다.

그런데 '아일룬 무역로에 연합군을 주둔시킨다.'는 대체 뭐란 말인가?

"들개 같은 놈들이 한자리에 모여 보니 자신감이 충천했나 보지?"

그 정도 힘이면 늘 군침만 흘리던 아일룬 무역로에도 포크를 찍어 볼 만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좋아. 그것도 그럴 수 있지.

로버랜드니까.

로버랜드의 강도 백작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친놈들. 카슈는 대체 왜?"

지들이 대체 무슨 명분으로 카슈시(市)를 자유도시로 만든다는 소린가?

이건 그냥 협상의 의지 따윈 없는 무지성 선전 포고에 지나지 않았다.

카시미르의 가슴이 답답해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니들이 아무리 모여 봐야.... 란센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냐...."

저 멍청한 놈들은 그날의 란센을 보지 못했다.

그날. 카시미르도 그랬다. 란센 앞에서는 당당하게 굴었지만, 밖으로 나와서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일룬 전역에서 몰려든 전사들이 토막 난 복도와 홀을 지날 때에는 주저앉을 뻔했다.

그런 란센한테 덤빈다고?

시산혈해만 만들고 끝이 나겠지.

한데 진짜 문제는, 그러고 나서도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이 멈출 리가 없다는 데 있었다.

패배로 인해 흔들린 권력을 다잡기 위해 온갖 무리수를 던질 것이고, 자기들끼리 서로 잡아먹기 위해 싸워 댈 것이며, 노르베르쥬 전역이 지옥의 수렁으로 끌려들어 갈 것이다.

그게 벌써 눈앞에 보이는 듯해서, 카시미르는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 꼴을 볼 바에는 그냥 란센에게 투신하여 힘을 실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란센을.

하룬은 그의 영웅이었고 그의 은인이었으니....

그 원수 밑으로 들어가서 하하호호 지내는 것은 너무나도 염치없는 일이었다.

설령 그게 죽은 하룬의 뜻이라 해도.... 그것만은 따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죽고자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란센은 아일룬 일통을 서두르려 하겠지.'

머지않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

"미안하다."

그는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란센과 싸우다 죽어야겠다. 이길 가망은 없다. 그런 싸움을 준비한답시고 시민들을 힘들게 할 생각도 없고. 그냥 이대로.... 란센이 날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러자 그의 전사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기꺼이 함께 죽겠습니다!"

대체 자기 같이 못난 인간의 어디가 좋다고 목숨까지 바치려 드는지. 저런 이들이 진정 자신과 같이 죽어야 하는지.

카시미르의 결심은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고맙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피로한 몸으로 침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연무장 쪽에서 그의 열세 살 아들이 달려왔다.

"아버지! 이것 보세요! 이거! 소드 오러 맞죠?"

우우웅-

고작 열세 살인 아들의 검이 옅은 붉은색 오러로 물들었다.

!!

익스퍼트 하급의 경지.

카시미르의 눈동자가 와들와들 떨렸다.

자랑스런 아들.

어쩌면 굴라크 가문 역사상 제일가는 천재일지도 모르는 우리 아들.

그런 아들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미안하다. 아들아.... 정말 미안해.... 이 아비가 못나서.... 너를...."

카시미르는 결국 무너지듯 자신의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아빠?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지?"

곧잘 하던 존댓말도 걷어치우고 되레 자신을 걱정하며 꼬옥 안기는 아들을 보고, 카시미르의 마음은 또 한 번 더 무너지고 만다.

* * *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

이게 내 지론이고, 그래서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건 나의 오랜 꿈이었다.

그냥, 그런 상상을 해봤다.

어차피 세아의 삼전계(三戰計)에 필요한 것은 아일룬과 샤말룬 지방.

노르베르쥬 전체? 필요 없었다.

그러니 상상을 해 본 것이다.

노르베르쥬 전체가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미래를.

각 도시의 인재들이 일루나엘의 아카데미로 모여 역량을 기르고, 각 도시가 각자의 특산물을 전문화하여 더 부유해지는....

전문적으로 키워진 전사들이 이 무법의 땅에 안정을 가져오는 미래.

그저 중계무역과 관세로 벌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산업적 역량을 가진 더 부강한 땅이 되는 미래.

그런 걸 상상해 봤을 뿐이다.

'물론,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빌어먹을 강도 백작들.

그래도 희망을 품고 싶었는데....

왜냐하면,

'가능하면... 저런 풍경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보기만 해도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으니까.

노르베르쥬 최대의 도시 일루나엘.

5~7층 정도 되는 높은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 광장에 아이들이 모여 수업을 듣고 있었다.

"어허! 리리 경! 그런 식으로 해서 기사라고 할 수 있겠소?!"

"으윽...! 다시 해 보겠소!"

꼬마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는 미카의 얼굴은 싱글벙글했고,

"셈을 할 때 손가락을 쓰면 안 돼. 머리로 암산하는 게 더 빨라. 지금부터 훈련을 해 놔야 익숙해져."

세아는 무표정했지만 꼼꼼하게 셈을 가르쳐 주었다.

일루나엘의 시민들이 광장에 둘러서서 이 풍경을 구경했다.

"진짜 아카데미를 만드실 건가 봐."

"그 제국 아카데미 같은 거 말이지?"

"다르긴 다르네.... 하룬 님 때보다 나은 거 같지 않아?"

"인정.... 일단 세금부터 낮아졌잖아."

그래. 이런 대화

이런 평화.

내가 원한 건 이런 거였다고.

'하지만 너희가 그걸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

현재 노르베르쥬의 급박한 정세는 이 잠깐의 평화도 만끽할 수가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칼세릭과 리베라가 내 옆에 붙어 계속 최근 정세에 대한 걱정을 쏟아 냈다.

"대장. 서둘러 아일룬을 일통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싸워도 이기겠지만, 아일룬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더 수월하게 싸울 수 있잖습니까?"

"맞습니다, 주군. 갤란, 룬드나, 둘 다 조속히 복속시켜야 합니다. 특히 룬드나는 양면 전선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요."

그래.

갤란과 룬드나를, 특히 그중에서도 룬드나는 반드시 병합을 해야 한다 이거지?

"알고 있어. 뭐,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세아와 계책을 논의할 때부터 이미 다 예상을 해 놓았던 전개였다.

감화계.

나는 먼저 당근을 주었다.

허나 갤란과 룬드나는 당근만 입에 문 채 침묵하였으니 이제는 칼을 휘두를 차례.

방법은 이미 생각해 뒀다.

우우웅-

문득 손에 들린 운명의 책이 울었다.

펼쳐 보니....

'또 늘어났네.'

비틀린 세계선.

벌슨이 해치운 후로 보이지 않던 붉은 점들이 요즘 여기저기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상궤를 뛰어넘는 괴물이 점점 늘어난다....'

우려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만 놓고 보면 되레 나에게 도움이 된다.

"좋아. 마음 정했다."

"예? 대장. 뭐라 하셨슴까?"

"잠깐 좀 다녀올게."

"주군!? 갑자기 어딜...."

나는 칼세릭과 리베라를 일별하고 등을 돌렸다.

"갤란시(市)! 나 돌아올 때까지 출정 준비해 놔. 요즘 마수들이 이상하게 많다며? 마수 토벌을 할 거야."

"아, 알겠습니다. 주군. 그런데 갤란엔 어째서...!"

다급하게 따라오며 묻는 리베라에게 나는 짧게 답을 주었다.

"대화."

또 한 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시간이 왔다.

<노르베르쥬 형세 - 갤란과 룬드나가 저항 중>

#85화 란센이니까

"대화를 하러 가신다고...?"

리베라는 그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시미르를 그냥 죽여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돌려 말씀하신 건가?

속도를 점점 높여 이제는 보이지도 않게 멀어진 주군의 뒷모습.

대화...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어느새 다가온 세아가 한마디 했다.

"전에, 일루나엘로 쳐들어올 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대화를 할 거라고."

"...그땐 하룬을 죽였잖아요? 역시 죽이는 겁니까?"

"아뇨. 그때도 일단 대화부터 시도하긴 했어요."

"어떤...?"

"투항 권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칼세릭이 탄식을 뱉었다.

"이번에도 죽겠구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덧붙였다.

"하룬이 끔살 당하는 걸 눈앞에서 봤던 작자라 하지 않았수? 그런데도 저항을 천명했는데 이제 와서 항복할 리가 없지."

리베라도 그 말에 동의가 가는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면 영 좋지 않은데.... 카시미르는 갤란시(市)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입니다. 그런 자를 함부로 죽이면 엄청난 반발이 있을 겁니다."

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리랜드로 이어지는 접경지역이라 그런지 유독 그 지역 사람들은 의리나 충성 같은 게 있다고 하죠. 로버랜드답지 않게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메시지 아티팩트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주군을 설득해서...!"

초조해하는 리베라. 하지만 세아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괜찮아요. 란센 오빠잖아요."

그녀는 하룬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고 판단했다.

'란센 오빠라면... 이번엔 정말 설득해 낼 거야. 그럴 작정이었으니 반간계가 아닌 감화계를 선택했겠지.'

어떤 방법을 쓸지는 그녀로서도 다 짐작이 가진 않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빠는 절대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아.'

이미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란센에게 넘겼다.

란센이 자신의 보고서와 계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은 것도 보았다.

한 번 결심하면, 그 누구보다 가볍게 움직였지만, 그 결심을 내리는 과정은 그 누구보다 무거운 게 란센이었다.

그러니... 란센이라면 해낸다.

"그냥 우린, 우리 할 일을 하면 돼요."

그때 칼세릭과 리베라는 세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남색 머리칼.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

무감정하지만 단단한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지녔다.

어쩐지 그녀가 괜찮다고 하니, 정말 괜찮을 것처럼 느껴지는.

세아는 그런 두 사람을 타박타박 지나쳐서 한쪽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동갑내기 친구를 불렀다.

"아샤!"

동갑 친구라 그런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달리 아샤 크로나를 대할 때는 그녀의 목소리 톤이 조금 더 올라갔다.

패밀리 중 유일한 마법사인 아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척하고 있다가 란센이 사라지자 바로 그늘로 가서 늘어져 있던 중이었다.

"응...? 세아, 왜?"

세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당겨졌다.

"불꽃의 혼. 심상에 그리는 데 성공했어?"

그건 최근 아샤와 세아가 수련하고 있는 고대 마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대의 마법사들은 마나를 직조해 마력을 설계하고, 그걸 세상에 꺼내 보임으로서 마법을 구현했다.

하지만 고대의 마법은 전혀 달랐다.

고대의 검술이 현대의 검술과 다르게, 의지라 불리는 '영혼의 힘(영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고대의 마법도 그랬다.

고대 마법의 시작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혼'을 자신의 심상 속에 모방하여 그려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게 바로 마법의 첫 단계.

"아니. 아직 못 그렸지.... 어려워."

아샤는 입술을 기묘하게 찌그러뜨렸다.

마법에 대한 재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놈의 '영혼'이라는 개념은 잘 와닿질 않았다.

너무 추상적이라고 해야 하나.

불꽃의 영혼이 뭔데?

그걸 어떻게 내 심상 속에 그리는데?

그런데,

"난 그렸는데."

따악!

화륵!

세아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미약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 장면이 아샤에 두 눈에 깊숙이 박혀 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씩-

쉽게 볼 수 없는 세아의 미소가 그려졌다. 비웃듯이 조금쯤 썩어 있는 그 미소.

벌떡!

가로수에 기대 늘어져 있던 아샤가 몸을 튕기듯 일으켜 세웠다.

"너...! 너!"

그녀의 눈동자가 세아의 얼굴과 그녀의 손끝에서 타오르는 미약한 불꽃 사이를 오갔다.

비록 종이나 겨우 태울 법한 미약한 불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등한 힘이었지만....

'이, 특이한 마력의, 파동!"

그것은 틀림없는 고대의 마법이었다!

"너어...!"

아샤가 얼굴을 찌그리며 후다닥 뛰쳐나갔다.

보나 마나 그녀가 향할 곳은 그녀의 연구실.

당장 수련을 하러 떠난 것이다.

세아는 그제서야 억지로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떨어뜨렸다.

"이러면 더 열심히 하겠지."

그녀의 동갑내기 친구, 아샤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뭔가 불타오를 만한 계기가 주어져야 비로소 제 재능을 120% 활용하게 되는.

세아는 멀어지는 아샤의 뒷모습을 눈에 담다가 자신도 발걸음을 돌렸다.

"나도 내 일이나 하자."

수업도 마무리했으니 이제 집무실로 가서 새로운 계책을 짜낼 때였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로 삼전계(三戰計)가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그에 맞게 계책을 계속 수정해야 했다.

'아일룬 정복까지 최소 3년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걸 단 몇 달 만에 이루어 버렸으니까.

덕분에 노르베르쥬, 아니 어쩌면 로버랜드 전역의 정세가 요동쳤다. 거인이 한 번 움직이면 그 물결이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가듯이.

'다음 수, 또 그다음 수, 그다음 수의 다음 수까지. 다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야 돼.'

새로운 변수가 생겼으니, 그 변수를 넣어서 다시 계책을 설계한다.

이번에 추가할 변수는....

'오빠가 카시미르를 설득해서 갤란을 가져온다는 전제를 깔고.'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아도 카시미르 굴라크가 란센에게 무릎을 꿇을 거라는 것.

세아의 믿음은 그토록 확고했다.

* * *

나는 카시미르 굴라크와 대화를 하러 간다.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하룬의 애마 중 하나를 타고 달렸더니,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로엔을 거쳐 에기라를 지나 갤란에 닿았다.

변경 지역에 기이할 정도로 마수가 늘어났다는 특이 사항이 있었지만, 그건 이미 진작부터 보고를 받아 본 사항이라서.

막아서는 마수무리를 오러 쓰레드로 조각내고 갤란까지 쭈욱 달렸다.

갤란시(市)에 도착한 다음엔 말을 적당한 곳에 묶어 놓고 몰래 성을 넘었다.

난 정말 대화를 하러 온 것이라서, 가급적 충돌은 피하고자 했다.

그렇게 영주성까지 직행을 했는데.... 영주성 앞에는 갤란의 전사들이 아예 천막까지 차려 놓고 진을 치고 있었다.

"란센...?"

눈도 좋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터벅터벅 걸어오던 나를 전사들이 눈치챘다.

뎅! 뎅! 데엥!

우르르르-!

비상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순식간에 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날카롭게 곤두선 투기와 살기가 사방을 에워싼다.

우우우웅-

전사들의 몸에서 뿜어진 오러가 성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좋네.'

한때 쿠샨시(市)의 자랑이었던 붉은 전사단.

그들을 상회하는 기세가 아닌가?

그런 전사가 백 명을 넘는다라....

과연, 제국과 이마를 부딪치며 로버랜드의 입구를 지켜낸 전사들이라는 건가.

'늑대들 같네.'

그들을 본 내 첫인상은 그랬다.

야성적인 투기. 꼿꼿한 자존심.

그러고 보면 현재 갤란을 통치하고 있는 카시미르 굴라크부터가 이런 느낌이었다.

자존심 강하고 의리 있고 사나운 늑대.

눈앞에서 하룬이 일격에 패사하는 것을 보고도 끝까지 나에게 검을 겨눴던 인물.

'인상적이었지.'

앞에서 숙이는 척하고 그냥 갤란으로 돌아가서 반항을 해도 됐을 텐데.

이 인물은 굳이 내 앞에서 칼을 들이댔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참으로 로버랜드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란센! 기어코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우릴 다 죽일 순 있겠지. 하지만 우릴 물러서게 할 수는 없을 거다...!"

이번엔 정말로 '대화'를 할 생각이다.

물론 하룬 때도 그런 마음이었지만, 이번엔 정말로 정말로.

그러니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다.

우두머리 늑대를 지키기 위해 이를 드러내고 있는 저 전사들도 제법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래? 물러서지 않아?"

너흰 분명 강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돼. 한참 부족하다.

1만 년 전의 고대를 오가며 내가 쌓은 경험치는 현 시대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라서.

저벅-

한 걸음, 걸으며 그들에게 묻는다.

"그럼 어디 한 번, 움직여 봐."

저벅-

걷는다.

내 스스로 한 자루의 검이 되어서.

"...."

"...."

투기로 부글부글 끓던 장내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벅- 저벅-

그냥 걸었다.

앞을 가로막는 전사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번뜩이는 칼날의 앞을, 치켜든 도끼의 아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스쳐 지났다.

또욱-

또옥-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에서 끊임없이 땀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

되레 늑대처럼 야성적인 자들이기에 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내 영혼이 오롯이 품고 있는 의지는 단 하나.

'벤다.'

검아일체(劍我一體)

검과 합일을 이룬 의지.

그 오롯한 의지가 소드마스터의 극에 달한 오러와 만나니 엄청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오러는 오러대로 더 날카로워졌고,

'벤다'는 의지는 의지대로 더욱 증폭이 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나는 그저 걸을 뿐인데, 사방의 바람이 갈라지고, 전사들 사이를 넘나들던 오러는 잘려 나갔다.

지금 이 자리의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베인다는 걸. 의미 없이 죽는다는 걸.

실제로 그러지 않더라도,

내 의지가 이미 그들의 영혼에 칼날을 드리웠으므로, 그들에겐 그게 기정사실처럼 여겨질 터였다.

그러니,

내가 그저 걸어서 그들 모두를 지나칠 때까지도, 그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영주성으로 걸어 들어가며 나는 뒤를 흘깃 보았다.

여전히 석상처럼 땀만 뚝뚝 흘리며 서 있는 전사들.

하룬 때와는 달리,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검아일체를 잘 사용하면.... 되레 벨 필요조차 없어지는 거였구나.'

극도로 예리해진 검은 뽑지 않아도 적의 마음을 벤다.

"큭...!"

"란센...."

영주성 내에도 전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내 이정표가 되어 줄 뿐이었다.

전사들이 많이 지키고 서 있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그 끝에 카시미르 굴라크가 있을 테니까.

* * *

"많이 놀랐어?"

카시미르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황당하군. 그사이에 더 강해지셨소?"

"뭐, 더 익숙해진 거지. 아무튼 그러니까 투항해."

그러나 카시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내 의지가 그의 영혼에 칼날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는 식은땀을 흘릴지언정 다른 전사들처럼 굳지 않았다.

"그냥 죽이시오. 그편이 서로 편할 거요. 되레 당신이 더 강해져서 다행이군. 기왕 이렇게 된 거 내 부하들은 살려 주시오. 좋은 놈들이라서."

역시.

마음에 드네.

죽이기 싫다.

"널 죽이면 갤란 시민들이 날 미워할 거 아냐. 너 꽤나 인망이 있다며?"

"로버랜드에서 그런 거 신경 쓰는 지배자가 있기나 하오?"

"난 신경 써."

카시미르의 곁을 지나쳐 집무실 쇼파에 앉았다.

삐걱삐걱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카시미르.

그 와중에도 싸우다 죽을 작정인지, 검을 뽑아 든 게 용했다.

나는 쇼파 쿠션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사실... 방법은 너무 많아."

세아가 가져온 정보, 계책, 그 모든 게 내 머릿속에 있다.

"그냥 네 말대로 여기서 네 목을 치고, 반항하는 놈들 있으면 그놈들도 다 목을 자르고, 공포로 통치할 수도 있지."

카시미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면, 그냥 아일룬 백마의 공급을 끊거나 관세장벽을 세워서 서서히 말려 죽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대 유물을 미끼로 내분을 유도해 볼 수도 있지."

하나하나 전부 다 가능했다.

아무리 카시미르의 인망이 높아도, 경제가 어려워지고 군사력이 약해지면 내부 균열이 일어날 테니까.

"근데... 난 이렇게 할 거야."

지금부터가 본론.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카시미르에게 물었다.

세아의 보고서가 알려 준 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그걸 파고들었다.

"아들이 13살이랬나? 검술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다며?"

내 말에....

"...너!!!"

생사에 초탈한 듯 보이던 카시미르가 크게 동요했다. 우우웅-! 공포를 이겨 내고 칼끝에서 붉은 와인빛 오러를 뿜어낼 정도로.

당장이라도 나와 생사결을 벌일 듯한 그에게 나는 제안했다.

"내 제자로 받아 줄게."

"...뭐?"

카시미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나, 란센의 직전 제자로 삼겠다고. 네 아들은 내 동생들과 함께 수련할 거야, 내가 항상 내 동생들을 위하듯 너의 아들 역시 지킬 거고, 내 비전 검법과 심법을 전수해 줄 거야."

나로서도 손해가 아니다.

카시미르의 아들은 노르베르쥬 제일의 천재라고 명성이 자자했다.

아버지의 성품을 보면 아들도 믿음이 간다. 어쩌면, 제2의 나이트 벌슨이 될 만한 인재.

그리고 카시미르 너는....

그래. 눈동자가 흔들리는구나.

네가 살면서 보았던 가장 위대한 검사가 네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준다-

어때? 이건 느낌이 좀 새롭지?

"내 조건은 하나야. 고집 그만 부리고 은퇴해. 나에게 갤란시(市)를 넘겨."

너를 지키던 모든 전사들이 내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고.

네 아들은 내게 인질로 잡혔으며.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룬에게 의리를 다하기 위해 은퇴하는 거야.

명분도, 실리도, 모두 챙겨 주었다.

이만하면 알아들었지?

은퇴하라는 게 오히려 내 배려라는 걸.

툭....

카시미르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마루 바닥에 푹! 하고 박혀 들었다.

갤란시(市)가 내 손 안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86화 괴이(怪異)

이형(異形)의 괴물은 이 세상에서 눈을 뜸과 동시에 이미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알았다.

크르르르르-

부드러운 털을 흩날리며 두 눈에 벼락을 담은 거대한 호랑이.

입으론 뭉클뭉클 뜨거운 증기를 쏟아 냈고 긴 꼬리는 화염으로 타올랐다.

이형(異形)의 호랑이는 근처에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하나 더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역시 자신이 훨씬 더 우월함을 곧 깨달았다.

크르르-

그것은 고민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답은 마치 마음속에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금세 떠올랐다.

먹고 마시는 것.

끝없이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것.

호랑이의 벼락같은 시선이 주위를 살폈다.

이 땅에 번성하는 생물들이 보였다.

그것의 눈에 비친 두 도시는 로엔시(市)와 룬드나시(市).

하나하나는 미천하나 뭉치면 강한 존재로구나.

그것은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럼 이쪽도 뭉치면 되겠구나.

* * *

하룬이 죽은 뒤, 룬드나시(市)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하룬이 살아 있을 땐, 나름의 정도라는 게 있었다.

그는 물론 포악한 정복자였고 백성과 신하를 도구로 여기는 자였다.

하나, 스스로 정상에 군림하여 제 신하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짓눌렀다.

그런 하룬이 죽고 나자, 룬드나시(市)의 오랜 호족이자 지배 세력이었던 에시르가(家)에게는 참으로 살맛 나는 매일이 펼쳐졌다.

하룬이 휘둘렀던 룬드나시(市)의 막대한 재정이 고스란히 에시르 가문의 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짓눌려 있던 스프링이 튀어 나가듯 더, 더 많은 재물을 탐했다.

그 모든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건 결국 힘없는 서민들이었다.

어느덧 여름이 끝나 가고 가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나는 계절.

룬드나시의 분수대. 마주한 젊은 연인들은 울컥 울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미안.... 우리 결혼 미뤄야 할 것 같아."

남자가 뱉은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미안.... 크게 보탬이 못 돼서...."

서로 미안해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집에서 나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돈이, 이젠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걸.

에시르 가문은 온갖 명목을 들어 특별 세금을 뜯어 갔다. 이제 하룬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니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둥, 그간 방치되어 있던 도로를 재정비한다는 둥.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막대한 세금이라는 건, 시민들 입장에서 그저 벼락처럼 떨어진 가난이었고.... 가난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버지? 저 일루나엘로 유학 보내 주신다고...."

"...."

"아버지...! 제가 그거 하나만 보고 얼마나 열심히...!"

철없지만, 그만큼 간절했던 어느 아들의 절규와 그저 침묵으로 대답해야 했던 아버지의 타는 가슴.

그렇게 룬드나의 시민들은 꿈을,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하나씩 하나씩 포기했고 그렇게 포기된 기회들은 고스란히 에시르 가문의 향락과 사치가 되었다.

군사력 강화?

도로 재정비?

그들은 애초에 내세운 명분 따위 하나도 지킬 마음이 없었다.

"전사들의 승전 연회? 그게 뭔데! 미뤄!"

에시르 가문의 막내 아가씨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질을 부렸다.

"아, 몰라! 승전연회인지 구질연회인지는 다른 데 가서 하면 되잖아! 그때 제1 연회장에선 드레스 파티를 열 거라고! 거기가 젤 크고 예쁘고 좋아!"

1벌에 100달론도 넘는, 동대륙과 서대륙에서 건너온 고급 드레스들을 그 넓은 홀에 쫘악 깔아 놓고 마음껏 입어 보고 입혀 보고, 신나게 노는 드레스 연회.

옆에서 올드랜드의 값비싼 차와 다과를 즐기던 첫째 도련님은 한술 더 떴다.

"막내야. 그거 네가 직접 주최한 연회지?"

"네. 오라버니."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우리 막내. 내가 뭘 해 주면 좋을까.... 아, 그래! 드레스에 장신구가 빠질 순 없지? 세상의 모든 보석을 준비해 두마. 드레스에 같이 매칭해 보면 재밌을 거야."

"역시! 오라버니 최고!"

노르베르쥬 전체를 따져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도시, 룬드나의 부는 그런 식으로 줄줄 새어 나가고 있었다.

에시르 가문의 가주 본인부터가 이런 터무니없는 사태를 방관, 아니 종용했다.

"마수 토벌 연대에 성과급을 줘야 한다고? 아니, 지들이 뭘 한 게 있다고 그걸 줘?"

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 행정관이 올린 보고서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올해 성과급은 없어. 내년에라도 받고 싶으면 더 열심히 하라고 해."

"하지만 시장님.... 최근 변경 지역에서 마수가 들끓고...."

"그만! 내 말 못 들었어? 지금 글로리랜드 귀족들과 해상왕에게 들여야 하는 돈이 얼마인데! 무슨 놈의 성과급이야 성과급은!"

허세가 빵빵하게 들어차서 실속이라곤 하나 없는 사교 모임과 접대만 챙기고 있는 가주.

그렇게 지배층이 룬드나를 안에서부터 망치는 동안, 룬드나 바깥에서 도시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이들의 삶은 점점 더 처절해지기만 했다.

룬드나의 마수 토벌 연대는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변경을 토벌하고 교역로의 안전을 확보하며 쉴 새 없이 싸웠고, 그렇게 하루하루 쇠락해 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