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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흔적

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룬드나의 무인도로 향했다.

어느덧 밤이었고 하늘엔 별빛이 바다에는 아샤가 만들어 낸 마법의 불티들이 가득했다.

나풀나풀 까만 바다를 밝히며 날아가는 노란 불빛들이 우리가 탄 배를 감쌌고 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우리를 적셨다.

"갑자기 룬드나까지 온대서 좀 귀찮았는데 막상 오니까 좋다. 여행하는 거 같고."

잘츠란이 방패에 기대서 씩 웃었다.

나는 녀석을 타박했다.

"귀찮았다고? 감히? 드라키움을 먹는데?"

"아아 형님. 전사가 강해지는 법은 성실한 단련에 있는 거 아닙니까. 영약 같은 것에 연연하는 건 작은 남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잘츠란. 다 컸구나?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드라키움을 양보하겠다니. 너의 그 대범함에 감동했다."

"형."

커다란 덩치, 무거운 방패로 소드마스터의 기마 돌격까지 막아 냈던 녀석이 아이처럼 순박하게 웃었다.

하긴 아무리 어른처럼 굴어봐야 이제 갓 20살이 된 녀석이었으니까.

"사랑해. 그니까 봐줘."

나는 픽 웃으며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이마를 슥슥 문지르며 웃는 녀석.

녀석의 말이 맞았다. 정말 여행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동생들이랑 이렇게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이더라.

그것도 모두가 원하는 천고의 영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여행.

15세 증후군 말기 환자인 미카도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후후후후. 드디어 때가 온 건가. 그동안 어둠 속에서 키워오던 나의 잠재력을 격발시킬 때가...!"

룬드나를 점령하고 난 뒤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혼자서도 검술 수련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거고 저건 저거인지, 이 녀석은 변함없이 무언가에 심취해 있었다.

카트리나가 그런 미카를 보며 혀를 찼다.

"미카야. 그땐 이렇게 말하는 거야. 따라 해 봐. 아, 드라키움이라니! 그런 천고의 영약을 먹을 수 있다니 너무 기뻐!"

"...정말 천박할 정도로 시시한 언행이로군. 죽고 싶어졌다."

"호오? 죽고 싶어?"

카트리나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서자 미카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내 뒤로 숨었다.

카트리나가 스산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왜 숨고 그래? 기사답게 당당하게 맞서야지."

"아, 왜! 란센 오빠. 언니가 자꾸 괴롭혀!"

역시 카트리나. 그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뿐인데도 미카의 불치병이 잠시 치료되었다. 얼마 만에 듣는 정상적인 어투인지 감개무량하기까지 하네.

나는 피식 웃으며 미카와 카트리나 사이를 중재했다.

"다들 떨리냐?"

내 말에 미카와 카트리나는 물론 동생들 모두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왜 그 마음을 모를까. 나도 누구보다 떨리는걸.

전설로만 들어왔던 영약. 그게 곧 우리의 입속으로 떨어진다.

다들 시덥지 않은 농담이라도 하며 이 떨림과 흥분을 해소하려고 하는 거였다.

맨발에 맨살을 드러내고 걷는 것처럼 한껏 예민해진 감각.

우리는 두근거리며 밤바다를 헤치고 마침내 무인도에 닿았다.

드라키움이 묻힌 장소는 이미 <에아 >의 스캔을 통해 확인을 해 두었다.

남은 건 이제 삽질.

이번 시간 여행에서 나는 충직한 성기사 루이스에게 괴이(怪異)들의 심장을 안전한 곳에 잘 묻어 둘 것을 주문했다.

루이스는 그 지시에 충실하게 따랐다.

<에아 >의 스캔에 따르면 드라키움은 무려 36개나 묻혀 있다고 했으니까.

내가 가져간 괴이의 심장은 7개가 전부였는데, 그게 36개로 복사가 되다니!

그곳에서 수많은 괴이를 해치운 보람이 느껴진다.

푹! 푹!

동생들과 삽으로 푹푹 떠내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오빠. 이거 꼭 보물 탐사하는 거 같다. 고대의 유적에서 쏟아지는 금은보화!"

지아 헤네시. 22살.

금화를 정말 사랑하는 녀석.

언제나 반짝이는 목걸이며 팔찌를 치렁치렁하게 걸고 다니는 녀석이 목숨처럼 여기던 그 장신구들을 아공간 아티팩트에 던져 넣고 소매를 걷었다.

아공간 아티팩트라니. 저런 귀한 건 또 언제 얻었대. 하여튼 돈 버는 재주 하나만큼은 대단한 녀석이었다.

바렌이 잔뜩 들뜬 지아를 보며 혀를 찼다.

"넌 평소엔 말도 안 하고 게으름만 부리다가 꼭 보물 있을 때만 활달해지더라?"

"왜 이래, 바렌 오빠? 부자가 되려면 할 땐 해 줘야 하는 거라고."

지아는 그렇게 말하며 긴 머리까지 뒤로 질끈 뒤로 묶고 흙투성이가 되어가며 열심히 삽질을 했다.

지아보다 한 살 어린 룩크랜서가 키득키득 웃으며 지아에게 핀잔을 줬다.

"누나는 좀 평소에도 그래야 돼. 모든 순간순간들이 다 황금과 같다고.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지."

"됐네. 난 너처럼 재미없게 살기 싫어. 할 땐 하고 놀 땐 놀고. 그게 최고지."

지아가 질색을 하며 룩크랜서를 타박했다.

하긴, 룩크랜서는 지독한 수련광이었다. 재능이 뛰어나진 않았다. 오히려 둔재에 가까웠지. 하지만 녀석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는다.

천재가 창 100번을 휘둘러서 깨닫는다면 녀석은 창을 10,000번 휘둘러서 깨우쳤다. 그러고도 '깨우쳤으니 된 거 아닙니까?' 하며 씩 웃을 줄 아는 녀석이었다.

나는 평소와 달리 싱글벙글하는 룩크랜서에게 넌지시 물었다.

"좋냐?"

룩크랜서가 눈을 빛냈다. 언제나 바위처럼 묵직하던 녀석이 이렇게 설레어 하는 건 나도 정말 오랜만에 봤다.

"형. 난 뛰는 게 좋아. 하지만 날 수 있다면 더 좋겠지. 뛸 때는 결코 닿을 수 없던 곳까지 날아갈 수 있을 거 아냐. 다른 애들처럼."

자신의 둔한 재능을 '뛴다'고 표현하고 다른 동생들을 재능을 '난다'고 표현한 룩크랜서.

언제나 무던하고 낙천적인 녀석이었지만, 괴로움이 없었을 리 없었다. 똑같이 해도 금방금방 앞서 나가는 동생들과 형, 누나를 보면서.

그래. 드라키움은 그런 너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어 줄 거다.

단순히 오러를 늘려 주는 영약이 아니라 잠재력 자체를 격발시켜 준다고 알려진 영약이었으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동생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오빠."

그때 세아가 날 불렀다.

"응?"

"이번엔 어떤 모험을 했어?"

"뭐 그냥 평소처럼 싸웠지."

"그러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 봐."

"뭘 새삼스레...."

그냥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동생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말해 줘. 오빠 덕분에 영약을 먹는 건데 적어도 오빠가 어떤 모험을 했는지는 들어야지. 백 번이라도 말해 줘. 다 들을 테니까."

뭐랄까.

가슴 한 켠이 찡한 이 기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힘든 이야기 하지 않는 것.

괴로움을 내색하지 않는 것.

그런 게 어른스럽고 남자다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거 좋은 거 아니라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기 위해서 당신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겪어 냈는지 알려 달라고.

몇 번이고 듣고 기억하겠다고.

아아, 이거 기분 좋은 거구나.

세아한테 또 하나를 배웠네.

나는 피식 웃고 땅을 삽으로 떠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 부모님의 편지와 옷가지를 태우려고 하던 꼬마 아이, 셰네릴부터 시작해서 진정한 전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오크 우르굴락의 이야기까지.

동생들은 때론 탄성을 터뜨리고 때론 질문을 해 가며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 주었다.

삽질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드라키움을 묻어 두었던 으슥한 동굴은 1만 년의 세월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고, 걷어 내야 할 흙더미는 많고 많았으니까.

물론 마력을 사용했다면 금방 끝났겠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두런두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오래오래 땅을 팠다.

내 귀로 마법 메시지 한 줄이 전달될 때까지.

[성자의 사원에 접근이 감지됩니다.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한 자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질문? 성자의 사원?'

예전엔 이런 게 없었다. 그냥 루이스가 안내해준 으슥한 동굴에 괴이의 심장을 묻었을 뿐.

내가 보안을 강조했더니 따로 마법을 걸어 보호를 해 둔 모양이었다.

근데 질문이 뭐지?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곧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때 그 꼬마 아이가 태우려고 했던 물건은?]

어?

이건?

내가 모를 수 없는 질문이었다.

"부모님의 편지와 옷가지?"

[정답. 성자의 사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파스스-

두껍게 쌓여 있던 흙더미가 마치 물이라도 된 것처럼 흘러내리며 좌우로 갈라졌다.

땅속 깊숙이 파묻혀 있던 비밀의 장소가 흙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이게 뭐야?"

데이지가 넋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침을 꼴깍 삼켰다.

'뭐야? 여기가 그 동굴 맞아?'

반듯반듯하게 깎인 돌. 커다란 문. 화려하게 부조된 벽면.

그곳은 동굴이라기보다는 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 성자의 사원.

그그극.

입구가 저절로 열렸다. 사원 내부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저벅저벅-

어느새 우리 사이에 대화는 사라졌다. 머나먼 고대의 신비에 취해 우리는 홀린 듯이 사원 내부로 들어갔다.

두근.

두근.

걸어 들어갈수록 내 심장박동은 가팔라졌다.

지금까지는 영약을 먹는다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던 심장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이유로 뛰고 있었다.

"아...."

긴 탄성이 저절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내가 기억하던 으슥한 동굴은 더 이상 없었다. 사당 내부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한 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향긋하고 신선한 향기와 아련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들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다. 1만 년 전의 고대.

그때의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꾸며 놓은 공간을 경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길 끝에 놓여 있는 거대한 기념비에는,

<성자 란센 반로아를 기리며>

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데이지가 나를 돌아보았다. '진짜 성자였어?' 하는 눈빛.

그럼 진짜 성자였지. 뭐였겠냐.

나는 녀석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 주고 기념비를 읽었다.

기념비에는 그날 대전투에서의 내 활약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각종 과일과 꽃이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겨 치장되어 있었다.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막 딴 것처럼 싱그러웠다.

또 한 켠엔 금화와 온갖 고대의 보물들이 가득했는데 마치 신께 공물이라도 바친 것처럼 그렇게 정갈했다.

나는 그 공물들을 지나쳐 자연스레 시선이 모이는 위치에 놓인 상자 앞에 섰다.

예쁘게 장식된 상자를 열자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셰네릴."

그건 셰네릴이 나를 위해 쓴 편지였다. 내가 괴이의 심장을 묻어 달라고 부탁했던 이곳을 사당으로 꾸미고 마지막으로 봉인하기 전에 쓴 편지.

그곳엔 내가 떠난 이후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성녀가 되었다니...."

비 맞은 강아지 /갈(같)/은 냄새를 풍기던 그 은발의 작은 꼬마는 그 후로도 자신의 생을 이어 갔다.

그날 내가 보여 준 기적은 그녀의 삶의 이정표가 되었고, 결국 다년간의 고행을 통해 성녀가 되었다는 이야기.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졌다.

가슴을 쿵 치는 울림이 있었다.

사실 나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시간 여행이었을 뿐인데.

드라키움을 심어서 이득을 보고. 시간 여행의 임무를 완수할 생각뿐이었는데.

그들은 나를 기억하여 이렇게 흔적을 남겼다.

1만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나는 슬쩍 가슴에 매달린 투명한 꽃을 내려다보았다.

셰네릴이 나의 무운을 빌며 선물해 준 영녕꽃. 그 꽃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생들은 기념비를 읽고 사당 벽면에 새겨진 나의 영웅담을 기리는 조각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들 보이지 않는 어떤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진지하고 조용했다.

모든 게 사라진 것만 같은 고대 마도 문명이었지만. 이렇게 어떤 흔적은 남는구나.

우리도 이렇게 세상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편지를 소중히 접어 아공간 목걸이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싸여 있는 사당 내부에서 유일하게 흙을 드러내고 있는 장소.

거기가 바로 드라키움을 묻은 곳일 테다.

삽을 쓰지 않고 손으로 조심스레 파내니 마침내 드라키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이-

황금색 구체가 자욱한 증기를 뿜어냈다.

만져 보면 말랑했고 심장처럼 두근거렸다.

"고마워, 오빠."

세아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말했다.

"아니 뭘. 별거 아니야."

반사적으로 대답한 말에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정확해야 해.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오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이제 정말 실감이 나네."

온통 나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사당을 쭉 둘러본 세아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빠가 만들어 준 이 기회, 절대 허투루 쓰지 않을게."

세아가 대표로 말했을 뿐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것처럼 동생들이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가족들끼리 생색내는 거 참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세아가 옳았다.

이런 기분. 간지럽고 참 나쁘지 않았다.

#103화 강철

드라키움을 모두 꺼내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도 22개나 남아서 나머지는 아공간 목걸이에 보관해야 했다.

후우....

후....

고요한 사당 안에 동생들과 벌슨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들 바싹 말린 땔감들처럼 보였다.

그만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드라키움이라는 불씨로 타올라 새로운 무언가로 재탄생할 준비가.

카트리나는 굵직굵직하게 패어 둔 참나무 장작 같았다. 뜨겁게 오래 타오를 것이다.

데이지는 잘 말린 건초더미 같았다. 불똥이 튀는 순간, 화르륵! 무섭게 타오르지만 금세 타 버리고 말까 걱정이었다.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참나무 장작이 기대감을 드러내며 눈을 빛냈다.

"빨리하자. 빨리. 빨리."

건초더미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다리를 떨어 댔다.

"데이지."

"응? 왜? 빨리. 빨리."

"호흡."

나는 부산을 떨어 대는 건초더미 녀석의 어깨를 잡고 몸소 호흡을 선보였다.

숨을 깊이 마시고 천천히 뱉고....

"아! 내가 애인 줄 알아?"

데이지 녀석은 딱 애들이 보여 줄 법한 반응을 보이며 온몸을 흔들어 내 손을 털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난 녀석을 놓아주지 않았다.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했다.

"호흡."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탓일까. 데이지는 움찔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나를 따라서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스으읍! 하아아."

"흐읍! 하아아."

카트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그런 데이지를 놀렸다.

"애송이처럼 호르르 들떠 가지고는. 그게 다 뱃심이 없어서 그래. 복근 단련 좀 하라니까?"

데이지는 그런 카트리나를 노려봤지만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다. 데이지는 카트리나를 무서워했다.

그저 조금 있다가 옆에 있는 세클란에게 속삭였을 뿐이다.

"저 언니는 근육이 크면 다 좋은 줄 알아. 실전 압축 근육이란 것도 모르나 봐."

그러자 카트리나도 냉큼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오호? 세상에 실전 압축 근육이라는 게 있다던데. 얼마나 튼튼한지 이따 한번 시험해 봐야겠네."

데이지는 결국 입을 꾹 닫고 말았다.

깊은 호흡과 약간의 잡담으로 긴장과 흥분은 적당히 희석되었다.

동생들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

"후우...."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마지막으로 동생들에게 당부했다.

"다들 내 지시를 정확하게 따라와야 한다."

이 중에서 영약을 먹어 본 경험은 내가 제일 많았다.

반로아 왕국의 왕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제일 좋은 것들만 먹고 자란 것은 물론이었고, 로버랜드에 온 이후로도 빠르게 경지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영약을 찾아 먹었으니까.

하지만 드라키움 앞에서는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태 먹어 온 영약들과는 그 급이 몇 단계나 차이 나는, 지고의 영약이었으니까.

그 가치로 따지면 엘릭서와도 비등한, 전설상의 영약이 바로 드라키움이었다.

이 정도의 영약을 먹는 것은 나도 처음.

약효를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서는 바짝 긴장해야만 했다.

나 혼자 날아오르면 되는 게 아니라 동생들까지 모두 데리고 가야 하니까.

가장 멀리. 가장 높이.

"자. 먹는다. 씹지 말고 한입에 삼켜."

그리 말하고. 모두와 시선을 마주친 다음, 셋을 세고 일제히 드라키움을 삼켰다.

꿀꺽.

드라키움은 말캉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드라키움이 지나가는 경로를 따라 목구멍과 뱃속이 화끈해졌다.

독한 술을 먹은 것처럼 뜨거운 숨결이 코로 빠져나오고 아찔한 취기가 몸을 흔들리게 했다.

하지만 취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약 기운에 헤롱거리는 동생들과 벌슨을 다그쳤다.

"자. 일단 몸에 들어온 영약을 달궈서 활성화시킨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몸을 움직일 거야. 현 시간부로 오러는 사용 금지! 일단 달려! 따라와!"

나는 모두를 이끌고 사당 밖으로 달려 나갔다. 14명이서 다 함께 무인도를 뛰었다.

마법사인 아샤가 금세 숨이 흐트러지며 고통스러워했다.

"헤엑! 헥! 나도. 뛰어야 돼?!"

"첫 번째 단계는 다 똑같아! 체온을 높여서 몸을 용광로로 만든다! 지금 하는 거에 따라서 몸에서 받아들이는 효율이 달라지는 거야."

"끄으아아아-!"

내 말에 아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운동을 많이 하지 않는 마법사의 특성상 힘들 텐데도 이를 악물고 따라와 줬다.

"달려, 달려! 전력으로!"

달리다 보니 자연히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이 갈렸다.

오러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소드마스터와 익스퍼트 하급의 신체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인도의 계곡을 오르내리는 동생들.

나는 전력 질주로 위아래를 오가며 모두를 살펴보았다.

"바렌! 더 뛸 수 있잖아!"

"흐억.... 형. 이거 약 기운 때문에 어지럽고 장난 아닌데."

"이 악물고 하라고!"

"하아...."

재능은 출중하지만 천성적으로 게으름뱅이 기질이 있는 바렌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이게 녀석의 원래 모습이긴 했다. 자히르를 잡겠다고 열정을 불태웠을 때가 특이했던 거지.

하지만 오늘은 봐줄 마음이 없었다.

"요 게으름! 게으름!"

나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꺾어서 말을 채찍질하듯 바렌의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악! 으악! 하지 마! 으아아아!"

바렌은 그 따가움과 짜증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페이스를 올려서 달렸다.

그래. 그래야지.

이번만큼은 모두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영약을 소화한다는 것은 철광석을 녹이고 제련해서 강철을 만드는 것과 같은 과정.

몸을 용광로로 만들려면 한계 그 이상까지 몸을 혹사시켜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모두의 몸이 충분히 달아올랐다 싶었을 때부터는 달리기를 멈추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켰다.

무인도를 뛰어다니며 미리 봐두었던 바위들을 뽑아와 하나씩 들리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켰다.

마법사인 아샤 같은 경우에는 내 오러를 마력으로 밀어내는 훈련을 시켰다.

핵심은 한계 이상으로 힘을 뽑아내게 하는 것.

이 과정을 통해 한껏 달아오른 마력이 체내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끙...!"

"끄으으!"

조용한 무인도에 신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자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뭉개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크하하! 가볍다! 세아야. 그렇지 않아?!"

카트리나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세아를 불렀다.

작은 몸으로 큰 바위를 매달리다시피 해서 겨우 들어 올린 세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힘들어. 마, 말 시키지 마!"

늘 침착하게 무표정을 고수하는 세아의 필사적인 얼굴. 참으로 진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그걸 감상만 하고 있을 여력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오러를 짜내 아샤를 압박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근력만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 올린 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했으니까.

"10회 완료! 30초 쉬었다가 다음 세트!"

쿵!

쿵! 쿵!

지정한 횟수를 채우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들고 있던 바위를 집어 던졌다.

다들 얼굴이 시뻘겋게 익고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 와중에도 카트리나는 경쟁심을 숨기지 않았다.

"허억. 허억. 벌슨 아저씨. 호흡이 가빠진 것 같은데? 허억. 많이 힘들었나 봐? 난. 허억. 멀쩡한데. 나이도 있는데. 쉬엄쉬엄하지 그래? 허억."

"후욱. 후욱. 허허. 카트리나 아가씨. 괜찮습니다. 아가씨야말로. 후욱. 편히 계십시오. 제가 열심히 강해져서 후욱. 아가씨를 지켜 드려야죠."

나를 제외하면 여기서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둘이 열심히 신경전을 벌였다.

참 마음에 드는 성격들이었다. 내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반면에 몇몇 녀석들은 유리병처럼 섬세하게 다루어야만 했다.

게으름뱅이 바렌이라거나, 부자가 꿈인 지아라거나.

"지아! 느려졌잖아! 똑바로 들어!"

"아윽.... 오빠.... 나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최선으로는 안 돼. 그 이상을 해내야 돼!"

"아니, 그러니까. 그게 이 정도...."

"너네가 삼킨 게 뭔지 알지? 같은 크기의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비싼 영약이다? 네가 흡수를 제대로 못 하면 그만큼의 다이아몬드를 잃는 거라고."

"히이익?! 안 돼! 내 다이아!"

바위에 깔려 비척비척 주저앉던 지아가 힘을 불끈 주며 다시 일어섰다.

그렇지. 힘내자고.

"자! 이젠 충격 인내 단계다! 무기 들어! 서로 전력을 다해서 부딪힌다!"

깡! 까아앙!

곳곳에서 전력으로 병장기를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더 세게! 상대를 터뜨려 죽인다는 생각으로!"

달리기에 웨이트 트레이닝에. 이제는 검을 부딪쳐서 만드는 충격까지.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드리고 냉수에 넣어 식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과정이었다.

쇠를 천 번 두드려 강철을 만들 듯. 나도 동생들을 끝없이 독려해서 영약을 완전 녹여 내게 만들 작정이었다.

"세클란! 더 할 수 있잖아! 쥐어짜! 봐주지 말라고!"

"으윽...! 예!"

캉! 카앙!

늘 알게 모르게 데이지에게 져 주던 세클란이 제힘을 발휘했다. 데이지는 어어? 하면서 놀라더니 이를 악물고 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 다시 달리기!"

"으아아!"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드라키움의 약성은 착실히 모두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날이 새도록 온 힘을 다해 드라키움을 소화시켰다.

"후우.... 후우."

"하악. 하악...."

신전의 기둥들이 파묻혀 있는 무인도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다 같이 드러누워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듯한 성취감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우며 치밀었다.

'해냈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싶을 정도로 드라키움을 완벽하게 녹여 냈다.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까지도.

후우우-

세상에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살갗을 스치고 가는 마나가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마나란 이렇게 하늘에 땅에 가득한 거였구나.

마치 내 손가락처럼 예민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단지 기분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그 흐름을 들여다보면 마나는 때론 내 의지를 따라 꿈틀! 하고 몸을 뒤척였다.

'이제 알 거 같아.'

그제서야 나는 진실로 깨달았다. 어째서 이 세상에 소드마스터는 모래알처럼 많아도 그랜드마스터는 손가락으로 꼽아 볼 만큼 적은지.

그건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느껴서 닿게 되는 경지였다.

드라키움 같은 기연을 통해서건, 끝없는 단련을 통해서건, 세계를 순환하는 마나를 내 손가락처럼 느끼고 다룰 수 있을 때야 겨우 도전해 볼 수 있는 영역.

'나는 이미 그 문턱에 닿아 있었어.'

이제야 지금의 내 상태를 온전히 알 수 있었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다루던 외부의 마나를. 이제는 의식적으로 느끼고 조금이나마 영향을 줄 수 있게 된 것.

나는 이미 그랜드마스터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마스터라.... 이젠 정말 목표가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처음 제국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는 모든 게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미 아일룬을 일통했다. 남은 것은 샤말룬. 그곳을 제패하면 세아의 삼전계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 전에 노르베르쥬를 닥쳐올 웨이브를 대비해야겠지만....

우리의 무력은 이미 하루가 다르게 폭증하고 있었다.

남은 건 군대의 질을 상승시키는 것뿐인가?

뭐, 그것도 자신 있었다.

겨울의 초입.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의 열기를 식혀주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멍한 얼굴로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룩크랜서가 보였다.

"기분이 어때?"

그러자 녀석은 씨익 웃었다.

"좀 억울해."

"억울하다고?"

"응. 여태 다른 녀석들은 이런 세상을 보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더니 녀석은 벌떡 일어서서 자신의 애병인 창을 뽑아 들었다.

"못 참겠어. 바로 수련을 해야겠어."

룩크랜서는 훅! 훅! 소리를 내며 묵묵히 창을 찌르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난 녀석의 한결같은 모습이 참 좋았다.

'약효는 확실하네.'

녀석의 창은 아까 전과는 또 완전히 달랐다. 창끝이 살아 있었다. 창질 한 번에도 훨씬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온몸과 오러를 유기적으로 쓰는 예리한 감각이 돋보였다.

이게 바로 재능 자체를 끌어올려 준다는 드라키움의 공능이겠지.

그래. 마침내 투박한 철광석이 걸러지고 걸러져서 별빛 같은 강철이 된 거다.

기분 좋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세아와 아샤가 다가왔다.

"오빠."

"응?"

"우리 고대 마법을 연구하면서 신무기를 개발하려고 했거든."

"신무기?"

"응. 그런데 고대 마법이 너무 어려워서 개념만 잡아 놓은 수준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방금 아샤랑 얘기해 봤는데, 이젠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이걸 여태 왜 못했나 싶네. 세상이 달라 보이는 기분이야."

옆에서 아샤가 뚝뚝 끊어지는 것 같은 특유의 말투로 부연 설명을 더했다.

"대단한 마법 무기. 아니야. 간단한 개념. 적용한 무긴데. 병사들이 쓸 활인데. 좋아."

제국궁보다 더 좋다는 건가?

드라키움.

약효가 끝내줬다.

열심히 쇠를 두드리던 장인은 강철이 완성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는가?

간단하다.

알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렇게. 저절로 맑은 소리를 내니까.

안 그래도 순항 중이던 우리의 계획에 또 한 번 가속도가 붙는 순간이었다.

#104화 발전 계획

무인도를 떠나 룬드나의 영주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쨍쨍한 아침이었다.

동생들은 숙소가 있는 층에 도착하자마자 복도를 달려 자기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으아! 집이다!"

"드디어 쉰다...."

"으.... 씻기도 귀찮아."

드르륵 창문을 열어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이하는 소리. 미리 준비된 욕조로 풍덩풍덩 몸을 담그는 소리. 분주한 소리들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도 욕조와 침대가 간절했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세아랑 아샤. 너희는 좀 더 이따 쉬어야겠다."

"응."

"으으.... 그냥 나중에 얘기할걸...."

선선히 대답한 건 세아였고 말꼬리를 늘이며 괴로워하는 건 아샤였다.

우리는 한 층을 더 올라가 티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천장은 높고 바깥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여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잠시 말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조금 힘이 돌아왔다 싶을 때쯤 내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새로운 활을 개발했다고 너희 둘이?"

"음.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아이디어 단계. 발상을 떠올리고 초안을 설계한 건. 세아. 그래서 활 이름도. '세아활'로 하려고."

그래?

아샤의 말에 나는 세아 쪽을 보았다.

"그래서. 그 '세아활'이라는 게 흑궁보다 더 좋다고?"

제국의 흑궁은 유효사거리가 150m에 달하는 괴물 같은 활이었다.

아일룬의 궁기병대가 자랑하던 뿔사슴활의 유효사거리가 120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가볍고 작아서 휴대하기도 편리했으며 조준도 더 쉬웠다.

그런데도 세아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거야. 계산에 따르면 유효사거리도 조금 더 나올 거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명중률과 관통력은 획기적으로 높아질 거야."

그 말에 나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게 가능해? 유효사거리는 흑궁 이상에, 명중률이랑 관통력까지 높아진다고?"

"응. 우리는 마법 활을 만들 거니까."

그 말을 나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응? 뭘 만들어?

마법 활?

"잠깐. 아까 분명 병사들이 쓸 활이라고 하지 않았어?"

"응. 병사들이 쓸 거야."

"근데 마법?"

어처구니없어하는 나에게 세아가 아닌 아샤가 대답했다. 녀석은 잘난 체하는 표정이었다.

"그게 바로. 고대. 마법의 위대함이지."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세아는 짤막하게 고대 마법과 현대 마법의 차이를 강의해 줬다.

"그러니까. 현대 마법이 펜을 만들어서 글씨를 쓰는 거라면, 고대 마법은 활자를 만들어서 종이에 찍어내는 거야. 대량 생산이 가능하지."

현대의 마법은 마법사가 마나를 직접 조작하고 성형하여 마법을 만들어 낸다. 반면에 고대의 마법은 자연이 품은 의지(혼) 자체를 모방해서 마나가 저절로 이끌려 와 합성을 하게 만든다.

"현대의 마법이 더 강력하고 세밀할 수는 있어. 하지만 고대의 마법처럼 수많은 마도구를 찍어 내지는 못해. 위력과 세밀함도 경지가 높아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고."

세아의 설명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나는 복잡한 마법 이론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결론만큼은 확실히 이해했다.

"그러니까.... 고대 마법을 쓰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마석도 쓰지 않고. 마법 활을 양산할 수 있다고?"

"응. 물론 그 위력이 우리가 흔히 아는 마도구들처럼 대단하진 않아. 하지만 마법은 마법이지. 병사들의 전투력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거야."

오소소-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절로 머릿속으로 웅장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제국의 흑궁을 뛰어넘는 마법 활로 무장한 궁병들과 궁기병들.

적이 가까이 닿기도 전에 쏟아 내는 화살 비. 어지간한 방패나 갑옷도 뚫어 버리는 막강한 파괴력.

나를 더 설레게 한 건, 이게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세아와 아샤에게 고대 마법을 알려 준 후로 이제 갓 3달이 지났을 뿐.

그런데 벌써 이런 성과가 나온다? 앞으로 고대 마법을 계속 연구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런 식이면 언젠가는... 제국도 상대해 볼 만할 거야.'

고대 마법이 가미된 장비로 무장한 우리의 군대.

제국의 강력한 군대마저 압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아의 삼전계가 현실이 된다면?

세아가 동맹으로 점 찍은 노바레아는 첨단 기술로 이름이 높았다. 그들의 기계공학에 고대의 마법이 더해진다면 대체 어떤 병기들이 만들어질까?

그런 병기를 이름 높은 기사들의 땅 아바론드의 전사들이 사용한다면?

아바론드와 노바레아가 주축이 되어 제국의 서쪽을 치고 우리가 동쪽에서 밀고 나간다면?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그 꿈이 이토록 현실감 있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세아는 내가 충분히 감격을 느끼도록 말없이 시간을 주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툭 한마디를 뱉었다.

"좋지?"

"어. 좋다. 무지."

세아의 입가에 보일락말락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튼 신형 활은 그렇게 진행하면 될 거 같아. 시제품을 먼저 만들어 볼게."

"그래. 기대할게."

"그리고 다음 문제인데.... 결국 제국과 싸우려면 지금 체급으로는 많이 부족해."

세아가 화제를 돌리자. 옆자리의 아샤가 냉큼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 활 얘기. 끝? 나, 가서 쉬어도 돼?"

세아는 벌써 일어나려는 아샤의 어깨를 눌렀다.

"너도 관계가 없진 않으니까 들어."

"끙...."

나는 꿍얼거리는 아샤를 바라보다가 세아의 말에 대답했다.

"하긴 체급 차이가 심하지. 다른 걸 다 떠나서 제국이랑은 인구수부터 비교가 안 되니까."

"응. 인구수. 경제. 모든 게 다 문제야."

세아는 언제 준비했는지 한 뭉텅이의 서류를 내 앞에 쿵! 내려놓았다.

"그중 인구는 어쩔 수 없다지만 적어도 경제는 개선해야지. 우리는 오빠가 영주들에게 공언한 대로 노르베르쥬 전역의 산업 체질을 바꿔야 돼."

"생각해 둔 게 많나 봐?"

내가 잔뜩 쌓인 서류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짓자 세아는 서류 더미에 보고서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아직은 다 희망 사항이야. 하지만 그중에서 꼭 이뤘으면 하는 것도 있어."

탁.

내 앞에 보고서를 내려놓고 세아는 말했다.

"직물 산업. 나랑 아샤랑 오빠가 모두 힘을 합쳐서 이 산업을 꼭 일으켜 세워야 해."

왜 하필 직물 산업인가?

이유는 분명했다.

직물 산업은 산업의 기초이며 꽃이니까.

숲이나 산에 살아가는 야만인부터 제국의 문명화된 도시민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기초적이다.

그런데 오묘한 점은 이 기초적인 재화가 고급화 되면 될수록 사치재가 되어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직물은 산업의 꽃이기도 했다.

의(衣), 식(食), 주(住).

이 중에 '의(衣)'가 첫 번째에 놓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직물은 옷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기초 소재이면서 동시에 범선이나 각종 생활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원자재.

하지만 로버랜드는 대륙 전체가 중계 가공무역으로 먹고사는 곳이었다.

직물을 예로 든다면, 서대륙(글로리랜드)에선 동물의 털을 짜서 만든 직물을 비교적 싸게 사서 동대륙(올드랜드)에 비싸게 판매하고, 반대로 동대륙에선 실크와 윤슬면 등의 고급 직물을 비싸게 사서 서대륙에 더 비싸게 판매하는 식이었다.

로버랜드의 산업은 룬드나의 염료 산업처럼 수입한 직물을 판매하기 전에 아름답게 염색해서 더 비싸게 파는 정도에서 그쳤다.

당장 서대륙이나 동대륙의 무역로가 막히면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을 수조차 없는 게 로버랜드의 형편이었다.

옷이 뭐야. 그렇게 되면 먹거리부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아의 산업 발전 계획의 첫 번째 타겟이 직물 산업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이 만만치 않았다.

"그게 단기간에 될까? 일단 기술부터가 문제잖아? 서대륙과 동대륙에는 수백 년 동안 원단만 짜온 숙련된 직공이 많지만 우리는 없어."

내 질문에 세아는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해결할 수 있어. 고대 마법을 계속 연구하면 더 나은 도구들을 만들 수 있으니까. 손기술이 떨어지더라도 동대륙이나 서대륙과 비교해도 손색없이 원단을 뽑아낼 수 있을 거야."

세아의 시선이 부루퉁하게 앉아 있는 아샤를 향했다.

"아샤가 해결할 문제지."

"내가?"

아샤가 내가 왜? 라는 표정으로 항변했지만 세아는 그걸 깔끔하게 무시했다.

"진짜 문제는 소재야."

"소재?"

"응. 우리는 서대륙처럼 양이나 털뱀을 대규모로 기를 수가 없으니까. 동대륙의 실크나 윤슬면은 그 제조 방법을 국가 기밀로 관리하고 있고. 해볼 만한 건 목화로 면을 짜는 건데 그건 우리가 아무리 만들어도 다른 나라에서 안 사 주겠지. 자기 나라 것이 훨씬 쌀 테니까."

천을 짜려면 결국 실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겐 그 실을 만들 소재가 없었다.

"그럼 결국 안 되는 거 아냐?"

내가 묻자 세아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방법이 있어."

"...설마. 시간 여행을 생각하는 거야?"

"정답. 이번에 갔던 사당에 공물들이 놓여 있었잖아."

"그랬지."

"그중에 실꽃이라는 물건이 있더라. 고대엔 그걸로 옷을 지어 입었다고 설명이 적혀 있길래 시험 삼아 그걸로 천을 짜 보니까. 이건 되겠더라."

세아는 미리 준비한 견본과 실꽃을 꺼내 놓았다.

실꽃은 투명한 털실로 빚어 놓은 듯 바람에 흩날렸다.

이파리와 꽃잎 모두가 실 같기도 하고 솜 같기도 한 섬유로 이루어져서 서로 엉키고 뒤섞여서 전체적인 모양새를 만들어 냈다.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었는데 그 색감이 달빛을 머금은 듯 환하고 부드러웠으며, 섬유 하나하나가 아주 가늘고 하늘거려서 언뜻 보면 솜털 보송보송한 아기새가 웅크린 것처럼 귀여워 보였다.

그리고 견본.

실꽃에서 실을 자아내 천을 만든 견본을 보면 절로 탄성이 나왔다.

"엄청 좋은데? 가볍고 감촉도 좋고. 색감이랑 광택도 진짜 좋아. 실크나 윤슬면보다도 훨씬 나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개를 끄덕인 세아가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다음 시간 여행 때 구해 와, 실꽃."

으음.... 조금 부담스러웠다.

"일단.... 노력은 해 볼게."

"노력으로는 안 돼. 꼭 구해."

"아니. 그게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장소나 상황이 다 달라서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 노르베르쥬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거야. 구해. 빨리."

세아는 그렇게 말하며 잔뜩 쌓인 서류 더미를 툭, 쳤다.

그게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이렇게 죽어라 일하는데 너는 똑바로 안 할 거야?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넵.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 보겠습니다."

세아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보일락말락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나한테 이렇게 무섭게 굴지 않았던 거 같은데....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비뚤어진 걸까?

'아후. 근데 실꽃은 어떻게 구한다....'

그때 머릿속을 탁! 하고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 잠깐만."

"왜?"

"올옴니마!"

만상수(萬象樹).

이번 시간 여행에서 봤던 그 거대한 나무에서는 세상의 모든 과일과 식물이 자라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옴니마? 그게 뭔데?"

"어쩌면 실꽃 바로 구할 수도 있겠다."

"응?"

"잠깐만 기다려!"

나는 그렇게 외치고 바로 달려 나갔다.

룬드나의 호숫가를 향해.

1만 년 전. 올옴니마는 룬드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지금은 나엘룬드 대호수로 변한 곳. 고요한 평원이라 불렸던 성지(聖地) 입구에 장대하게 서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올옴니마는 분명 있을 거다.

깊디깊은 나엘룬드 호수 밑바닥에.

#105화 만상수

대호수 나엘룬드는 그 시원한 물을 떠서 마셔보기 전까진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호숫가에는 넘실넘실 파도가 쳤고 끝도 없는 수평선은 푸른 하늘과 나란히 기대 있었다.

염분이 없다는 것만 빼면 영락없는 바다였다.

나는 나룻배를 몰아 그 거대한 호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시간 여행을 했던 무인도를 지나쳐서 더 멀리 나아갔다.

"이쯤이려나?"

정확하지는 않았다. 올옴니마의 모습은 멀리서 보았을 뿐이라서. 심지어 나무가 너무나 컸기에 그게 얼마나 멀리 있던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조명 아티팩트를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일단 들어가 봐야 알겠지."

풍덩.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얀 물보라가 눈 앞을 가리고 잠시 뒤 투명할 정도로 맑은 수면 아래 풍경이 드러났다. 색색의 작은 물고기들이 내가 일으킨 물살에 놀라 이리저리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오. 기분 좋은데?'

그저 올옴니마를 찾으러 온 거였는데 예기치 않게 재미가 있었다.

수면 위로 반짝이는 햇빛 화려한 물고기들 행렬. 그리고 온몸을 기분 좋게 감싸는 서늘한 물.

사방이 한없이 고요해지고 마음도 저절로 차분해졌다.

'그리고 마나가.... 아주 선명해.'

대호수 나엘룬드 호수는 달리 기적의 호수라고도 불렸다.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호수 전체가 아주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아일룬 백마가 그토록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별한 혈통을 가진 그 백마들은 나엘룬드 호숫물을 먹고 자라며 그 마력을 체화하여 특별한 능력을 깨우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나는 한동안 헤엄을 치며 내 몸을 휘감는 나엘룬드 호수의 농밀한 마나를 느꼈다.

그랜드마스터가 되는 길에 들어선 탓인지 호수의 마나는 더욱더 선명하게 내 감각을 흔들었다.

잠시 그렇게 물속을 즐기다가 나는 시선을 내려 호수 밑바닥 쪽을 살폈다.

'엄청나게 깊네.'

저 아래는 마치 무저갱 같았다.

물이 이토록 맑은데도 차츰차츰 어두워졌고 마침내는 깜깜한 밤하늘이 발밑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난 서늘한 물살을 가르며 그 어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내려갔다.

'무겁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내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심상치 않았다.

물의 무게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호수 밑바닥을 향해 빨려 들었다.

나는 조명 아티팩트가 뿌리는 빛에 의지해 호수의 깊은 곳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아직도 호수의 밑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쉽지 않은데...?'

그때쯤 나는 꽤나 답답하고 불편한 상태였다.

온몸을 짓누르는 물의 무게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깊이 내려갈수록 더 농밀해지는 마나가 나를 괴롭게 했다.

얼마나 마나가 지독한지 유형의 힘을 가지고 나를 밀어대는 그 압력에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오러도 아닌 마나에 불과했지만, 이 호숫물만큼 거대한 마나가 나를 짓누르니, 소드마스터의 오러로도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

대자연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하나.

힘이 드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정말 저 끝없는 어둠 속에 내가 찾는 게 있을까?

무려 1만 년 전의 나무가 아닌가? 이미 다 썩어 없어지지 않았을까?

괴롭다. 까마득하다.

그래도 별수 없지.

아직 호수 밑바닥도 못 봤는데.

무려 여신 미바바르가 심었다는 나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야지.

나는 마음을 비웠다.

수련한다 생각하고 꾹 참았다. 수련은 원래 괴로운 거니까.

처음에는 오러를 뿜어내 사방에서 밀려오는 마나에 저항했다.

하지만 한참을 씨름하다 보니 점점 요령이 생겼다.

'...그랜드마스터가 되면 확실히 편하겠어.'

그랜드마스터는 체내의 마나뿐 아니라 체외의 마나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

난 아직 그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미 체외의 마나에 조금은 간섭할 수 있었다.

꿈틀꿈틀.

조금씩 움찔거리는 호수의 마나. 아주 미약했지만 내 오러는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보다 쉽게 호수의 마나를 밀어낼 수 있었다.

하다 보니 점점 심취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캄캄하고 고요한 호수 깊은 곳에서, 마나와 오러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순간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게 되었다.

당장 경지가 상승하지는 않지만, 그랜드마스터로 가기 위한 또 하나의 감각을 절로 깨우치는 중이었다.

'...아.'

그런 나의 몰입이 끊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이 캄캄하기만 하던 호수 깊은 곳에서 마침내 희미한 윤곽을 발견한 탓이었다.

'올옴니마...!'

거대한 그림자가 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기가 찼다. 이게 어떻게 나무란 말인가?

그것은 차라리 거인. 아니 신화에 나올 법한 괴물처럼 보였다. 가장 외곽에, 제일 가늘고 작은 가지조차도 지상에 있는 키 높은 나무처럼 크고 굵직했다.

'진짜 있다!'

1만 년 전 보았던 나무가 정말로 호수 속에 가라앉아 있다.

묘한 감동이 가슴을 스치고 지났다.

머릿속으론 온갖 생각이 들었다.

'장생과도 있나? 혼백초도?'

성기사 루이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장생과는 엘릭서의 원료고, 혼백초는 영혼을 각성시키는 효능을 가졌다고.

천고의 보물들이었다.

그런 걸 대량으로 구할 수 있다면? 마법 약학에 있어서 엄청난 진전을 이룰 수 있을지 몰랐다.

엘릭서까지는 아니어도 그 열화 버전의 물약만 만들어 내도 현대에선 기적이나 다름없으니까.

무려 1만 년 동안이나 견딘 만상수 올옴니마.

그 신화 속 나무가 품은 수많은 보물이 나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런 건 없었다.

진짜 없었다.

'이게 뭐야.'

가까이 다가가서 본 올옴니마는 꼭 죽은 나무처럼 앙상하고 칙칙했다.

나무라기보다는 숯 같았고 숯이라기보다는 돌 같았다.

심지어,

딱! 딱!

주먹으로 두드려 보니 정말 나무가 아닌 차돌을 두드린 것 같은 감촉이었다.

'죽었어?'

아무리 봐도 그랬다. 이파리도 하나 없고 색도 이상하고 촉감 그렇고.

허탈했다.

아무리 신이 심은 위대한 나무라도 1만 년이라는 시간은 견딜 수 없었던 걸까? 하긴 그게 당연한 것 같기는 한데....

웅-

그때, 아공간 목걸이가 작게 진동했다.

아공간 목걸이가 우는 건 단 하나의 경우밖에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운명의 책을 꺼냈다. 일반적인 책이라면 물에 젖겠지만 운명의 책은 특유의 금속 비슷한 재질 탓에 물에 젖을 리는 없었다.

'빛나고 있어.'

운명의 책이 연둣빛으로 달아올랐다.

그 빛을 따라 올옴니마의 가지들이 파도치듯 빛을 뿜어냈다.

'살아나나? 살아 있나?'

하지만 그 빛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지막 불꽃을 뿜어낸 것처럼 한차례 빛난 나무는 다시 돌덩이처럼 침묵했다.

연둣빛의 서광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아....'

기대. 실망. 또 기대. 다시 실망.

반복된 감정의 낙차에 실망을 감추지 못할 때였다.

파아아-

어둠 속으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들었다.

무심결에 바라본 그것은 가지였다.

거대하디 거대한 올옴니마의 최외곽에 있는 작은 가지.

물론 작다고는 해도 어지간한 아름드리나무보다는 큰 그것이, 여전히 연둣빛으로 물들어 빛나고 있었다.

'살아 있어!'

황급히 헤엄쳐 다가가니 보였다. 모두 죽었지만 4개의 가지만큼은 살아 있었다.

이 깊은 호수 밑바닥에서도 수많은 이파리와 꽃을 틔운 채 가지를 흔들었다.

그리고,

세아가 구해 오라고 신신당부한 실꽃이 보였다.

그 밖에도 붉은 꽃과 색색깔의 꽃과 고구마처럼 생긴 길쭉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다른 가지들도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꺼내 두었던 운명의 책이 환하게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살아 있는 4개의 가지들은 마치 스스로 내게 다가오듯 큰 가지에서 꿈틀대며 떨어져 나왔다.

끝부분이 뿌리처럼 치렁치렁 수염을 뻗었다.

나는 얼른 가져온 포대를 풀었다.

원래는 여기에 씨앗들을 담아 가려고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마치 가져가 달라는 듯이 떨어져나온 가지들을 모두 챙겨 갈 작정이었다.

포대를 끈처럼 가늘게 잘라서 그 큰 가지들을 칭칭 묶었다. 양손에 두 개씩 짊어지고 수면을 향해 헤엄쳤다.

'무거워....'

물과 마나가 짓누르고 가지의 무게가 나를 끌어당겨서 온몸이 호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수면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을 한번 찰 때마다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숨 쉬지 않고도 몇 시간은 끄떡없는 소드마스터의 육체가 고된 노동에 헐떡거릴 정도였다.

'그래도... 다 들고 간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수면 밖으로 나온 다음에도 만만치 않았다. 몸은 이미 녹초가 되었는데 올옴니마의 가지는 자꾸만 가라앉으려고 해서 타고 온 나룻배로는 끌고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양손으로 쥐고 호숫가까지 헤엄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철썩- 철썩-

마침내 파도를 헤치고 모래사장 위로 올라왔을 때 나는 완전 탈진해 버렸다.

"흐억. 하악."

모래 위에 털썩 누워 푸른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호수 밑바닥에 들어가서 가지 몇 개 가지고 나온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마갑을 얻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신감이 치솟았는데, 이번에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된 것 같았다.

거대한 자연과 신화 앞에서 나는 여전히 연약하기 그지없다.

"수고했어."

날 기다렸던 걸까?

어느새 다가온 세아가 내 위로 차양막을 드리우며 말했다.

난 헐떡이며 세아를 타박했다.

"왜 나와 있어. 좀 쉬지."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당장 오늘 아침까지 드라키움을 흡수하지 않았던가?

잠도 못 자서 피곤할 텐데 안 쉬고 나를 기다렸다니....

"쉬기는. 오빠는 일하는데."

그러더니 손에 들려 있는 책을 펼치곤 내가 가져온 가지를 살펴보았다.

"흐음.... 이거구나? 잘됐다."

난생처음 보는 식물들을 보고 아는 체를 하는 세아를 보고 나는 물었다.

"그게 뭔지 알겠어?"

"응."

세아는 손에 들고 있는 책을 흔들었다.

"오빠가 일하는 동안 나도 일 좀 했거든. 성자의 사당에 있던 공물들을 정리했어."

"그걸 벌써?"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아무튼 거기서 발견한 책자야. 공물로 바쳐진 물건 중에 식물도 많았잖아? 식물들 이름하고 용도를 하나하나 써 두었더라."

그 말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났다.

"혹시 내가 가져온 것 중에 장생과나 혼백초 같은 것도 있나?"

설마!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그게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오나?

"아니."

그럼 그렇지.

내가 팍 식은 표정을 하자. 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것들이야.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더 좋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장생과랑 혼백초는 사당에 있던 공물 중에도 있어."

"그게 있다고?"

"응. 많지는 않지만. 연구도 좀 하고 소량 정도는 쓸 만큼 있어."

"오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은 이것들이 먼저야."

세아는 내가 가져온 4개의 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책자를 한 번 보고 가지를 한 번 더 보더니 눈을 빛냈다.

"틀림없어. 실꽃, 빛깔꽃, 혈화, 그리고 만나. 딱 좋은 물건들이네."

"...들어 본 적도 없는 것들인데 좋은 거 맞아? 실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응. 좋아."

세아가 내게 책을 보여 주며 말했다.

"빛깔꽃은 고대의 염료 재료래. 이게 있으면 룬드나의 염색 산업이 크게 발전할 거야. 고대인의 염료라고 하면 대륙 끝에서도 사려고 아우성을 치겠지."

그 말에 나는 고대에서 보았던 화사하고 선명한 색감의 옷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요즘 옷들과는 때깔부터가 달랐지.

"혈화는 각종 약에 쓰이는 재료래. 포션 재료로도 쓰이고. 이게 있으면 의약품 산업도 일으킬 수 있어."

의약품은 동서를 막론하고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 심지어 제대로 된 의약품이라면 불모의 땅인 남대륙에서도 탐을 낼 게 분명했다.

확실히 좋긴 좋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고대의 주식 중 하나래. 이거 무게 좀 봐. 이 정도 수확량이 꾸준히 나오는 거라면.... 로버랜드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도 있어!"

나도 귀가 솔깃했다.

세아가 괜히 첫 번째 목표로 식량이 아닌 직물 산업을 내세운 게 아니었다.

식량 산업이야말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기초 산업이었지만, 그건 정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버랜드는 땅이 좁았고 글로리랜드나 올드랜드에 비해 농사 기술이나 종자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마법으로도 해결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그 해법을 찾아온 것이다.

"여기 이것들을 성공적으로 기르고 퍼뜨릴 수만 있다면... 우린 노르베르쥬를 확실하게 바꿀 수 있어."

세아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세아의 두 눈동자 속에서도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마 내 눈도 그렇겠지.

#106화 준비

세아는 일 처리가 빠르다.

이러이러한 작업이 필요하겠지? 라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엔 이미 그 일을 끝마친 뒤인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성자의 사당에서 발견한 공물들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룬드나의 영주성으로 옮겨져 왔으며 다음 날 점심 먹을 때쯤엔 자세한 목록과 사용처까지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모든 보물은 옮기기 좋게 보존 마법이 걸린 상자에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기분 좋게 새로 획득한 보물들 사이를 거닐었다.

사실 물건 자체는 그렇게 특별할 건 없었다.

우리가 사용할 만한 강력한 아티팩트보다는 예술성이 높은 보물들이 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싸긴 해도 당장 쓸 데는 없다.

그중에 특별한 것이라면 엘릭서의 원료가 되는 장생과 그리고 영혼을 일깨워 준다는 혼백초 정도?

하지만 이것도 당장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연구가 필요하겠지.

그래도 기분만큼은 남달랐다.

바로 어제 드라키움을 섭취했으니까.

훨씬 더 예민해진 감각과 몸에 가득한 활력은 떨어지는 낙엽조차 그 전과는 다른 감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했는지 세아는 채 피로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우리도 슬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야지. 그러려면 보물 창고가 필요해."

보물 창고.

어쩐지 그리운 울림이었다.

반로아 왕국에도 왕실 보물고가 있었다.

선대의 유품에서부터 왕국의 오랜 역사 동안 수집한 수많은 보물이 즐비한 곳.

가끔 그곳에 갈 때면 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지곤 했다. 반짝이는 보물들이 주는 황홀함과 유서 깊은 물건들이 주는 어떤 역사감 같은 것.

그 안을 거닐면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반로아 왕실의 영혼과 마주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아바마마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가 있으면 그 보물고를 개방하여 상을 하나씩 내렸다.

왕실의 보물을 하사받은 이들의 눈가에 스쳤던 감격을 나는 기억한다.

그들은 제국의 침공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 모든 기억이 있었기에 나는 세아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 보물 창고가 필요하지."

보물 창고는 왕실의 권위이자 정신이었다.

동시에 신하들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기도 했다.

자고로 신하들의 명예와 충성심은 보물 창고에서 나오는 법이었으니까.

마음은 물질과 붙어 다닌다.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들. 신하들에겐 그런 물건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

왕실과 함께하면 좋은 것들이 뒤따른다는 걸 알게 해 줘야 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게 해 줘야 명예와 충성이 자라나는 법이다.

"그러니까."

세아는 창고에 가득한 보물들을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연구용으로 써야 하는 장생과랑 혼백초 빼고, 나머지 물건들은 보물고로 보내자. 물론 반로아 왕실 보물고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겠지만, 이렇게 시작하면 될 거야. 앞으로도 꾸준히 모아 줘."

"그래. 그렇게 할게."

세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봤다.

"앞으로 뭐 좋은 거 나오면 홀랑 아공간 목걸이에 넣지 말고 보물고도 충실하게 채우기. 공사 구분은 확실해야지."

"아?"

"대답."

"아, 알겠어."

뭔가 기분이 묘했다.

비상금을 숨겨 두는 남편이 이런 심정이려나....

물론 진짜로 아까운 건 아니었다. 보물 창고의 필요성은 나도 잘 아니까.

어차피 내가 자유롭게 쓸 고대 유물들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기도 했고.

로레인에게 받은 게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대답이 흡족했는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인 세아가 내 소매를 당겼다.

"그럼 진짜 보물들 보러 가자."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응. 다들 모여 있을 거야."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아예 룬드나의 외성 밖으로 나가서 영주의 사냥터를 찾았다.

영주의 사냥터는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근처에 작은 요새들도 건설되어 있어서 외성 밖임에도 상당한 방어력을 갖추었다.

에시르 가문은 이 사냥터를 개인의 향락을 위해 썼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부지도 넓고. 보안도 철저하고.

여기만큼 영주 전용 농장으로 삼기 좋은 곳이 어디 있어?

사냥터에서 미리 봐 둔 땅으로 향하자 거기에 동생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진짜 보물.

내가 나엘룬드 대호수 밑바닥에서 건져 낸 올옴니마의 가지 4개가 도열해 있었다.

마법으로 빚어낸 커다란 화분을 특수한 용액으로 채우고 거기에 가지들을 줄에 묶어 똑바로 세웠다.

물에서 막 건져 냈을 때보다 더 푸릇푸릇해진 가지들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다들 잘 쉬었어?"

"어! 날아갈 거 같아! 드라키움 하나 더 먹고 싶다!"

"안 돼. 이 욕심쟁이야."

배부른 사자 같은 카트리나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드라키움을 먹고 하루를 푹 쉰 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나는 녀석들을 내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이 나무들이 우리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노르베르쥬를 변화시킬 기둥들이야."

직물 산업을 위한 실꽃.

염료 산업을 위한 빛깔꽃.

의약품 산업을 위한 혈화.

그리고 농업 혁명을 위한 만나.

설명을 들은 동생들의 얼굴에도 기대감이 어렸다.

"그러니 엄청 중요한 자리지. 이 나무들이 이 땅에서 잘 번성하고 무수한 종자들을 퍼뜨려야 이 모든 게 가능해질 테니까. 그래서 다들 불렀어. 이 역사적인 순간을 같이 하자고."

나는 말을 마치고 한쪽에 모여 있던 마법사와 인부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내 시선을 받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마법을 이용해 올옴니마의 가지들을 들어 올리고 끈을 이용해 자리를 잡았다.

가지들을 심을 땅은 이미 깊이 파둔 상태였다.

사실 처음에는 가지에서 종자를 얻어 땅에 심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가지의 밑동은 매끈하지 않고 작은 줄기들이 가는 수염처럼 뻗어 나와 있다.

누가 봐도 뿌리처럼 보이는 그 부분.

그걸 보고 나와 세아는 가지를 나무처럼 통째로 땅에 심는 것에 합의했다.

마법사들을 통해 이곳의 토지와 상성이 괜찮다는 점은 미리 확인을 했는데... 그래도 자못 떨리는 순간이었다.

"들어갑니다!"

이번 일의 책임을 맡은 마법사가 크게 외쳤다.

마침내 가지가 구덩이로 들어가고 인부들이 빠르게 삽질을 해서 흙을 덮었다.

가지들을 땅에 똑바로 심고 그 위로 나엘룬드에서 퍼온 물을 듬뿍 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반짝반짝한 장신구로 온몸을 휘감은 지아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게 잘 자라면 진짜 대박이겠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겠어!"

항상 돈 욕심이 많은 우리 지아.

그만큼 경제 감각도 뛰어났다. 돈에 관해서라면 세아보다도 훨씬 나을 정도.

반로아 왕국을 재건하면 재무대신은 무조건 저 녀석을 맡길 생각이었다.

"무럭무럭 잘 자라야 될 텐데!"

잔뜩 들뜬 지아의 말대로,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어떠려나. 잘 자라려나?

잘 뿌리 내리더라도 성과를 보려면 몇 년은 필요하겠지?

노르베르쥬 전역에 퍼뜨리면 종자를 많이 얻어 내야 하니까.

푸스스스-

어라?

그런데 땅에 심고 물을 뿌린 뒤 30초쯤 지났을까?

돌연 올옴니마의 가지들이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뾰족한 말뚝처럼 생겼던 가지가 진짜 나무처럼 사방으로 더 작은 가지들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돋아난 가지들에서 풍성한 잎사귀와 꽃과 열매가 맺혔다.

"와...."

"세상에."

실시간으로 자라는 나무라니.

난생처음 보는 이적에 인부들이 입을 헤 벌렸다.

동생들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비교적 차분했다.

'과연 여신 미바바르가 심은 나무.'

애초에 호수에 잠긴 채로 1만 년 넘게 살아남은 가지였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지.

그런데,

우수수수-

이게 뭐냐?

올옴니마의 가지는 더 작은 가지들을 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가지 전체가 꿈틀거리더니 기껏 만들어 낸 가지들을 다시 우수수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떨어져 나온 가지의 단면에도 수염 같은 뿌리가 돋아나 있었다.

그렇게 가지를 모두 떨어뜨린 올옴니마의 가지들은 다시 몸을 떨며 새로운 가지를 뽑아냈다. 다시 이파리와 꽃이 돋고 열매가 맺혔다.

"이건?"

세아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쳤다!"

나는 외치고 세아는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올옴니마의 가지가 떨어뜨린 작은 가지들. 저건 심으라고 떨어뜨린 것이다.

'몇 년.... 어쩌면 10년 단위로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저렇게 가지를 많이 떨어뜨려 준다면, 훨씬 빠른 확장이 가능했다.

노르베르쥬 전역에 산업의 근간이 될 작물들을 퍼뜨릴 수 있는 것이다.

"와아아아!"

그걸 느꼈는지 동생들도 환호성을 터뜨렸다.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이 수많은 가지들을 심고. 그게 자라나면 또 새로운 가지를 심고.

머지않아 노르베르쥬의 들판들마다 가득해질 고대의 작물들.

정말 모든 일들이 착착 진행되는구나.

시간 여행이라는 건 무척 위험하고 감정적으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역시 끊을 수가 없다.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우리의 미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이걸 어떻게 참아?

"자. 봤지? 이걸 시작으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내실을 다지고 기지개를 켤 거야. 앞으로 할 일 많아. 너희들도 놀면 안 돼."

나는 든든한 내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을 다독(?)이고 약속한 것.

각 영지에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고 한 것.

이제 그걸 실행할 때가 되었다.

"지아."

"응."

"너는 노르베르쥬 각지를 다니면서 농지를 사고 손재주 좋은 기술자들을 모아서 조합을 만들어. 고대의 작물들을 퍼뜨리고 그걸 기반으로 산업을 일으킬 거야."

"맡겨만 둬!"

지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지아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다.

경제 관련 일은 지아가 딱 제격.

"룩크랜서. 네가 지아를 보조해서 호위도 하고 자잘한 일 처리도 맡아."

내 말에 지아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 쟤는 재미없는데."

"네! 제가 딱 붙어서 누나가 게으름 못 부리게 감시하겠습니다."

"감시는! 못 들었어? 넌 내 부하야!"

"원래 감시는 부하가 해야 제격이지."

성실하고 금욕적인 수련광 룩크랜서. 놀기 좋아하고 돈 좋아하는 지아.

저 둘은 극과 극인 것 같으면서도 붙여놓으면 은근히 자기들끼리 잘 놀았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바렌은 노르베르쥬 전역의 도로 정비를 맡아.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대충하지 마."

도로는 발전의 근간이었다. 도로를 통해서 이동하는 건 물자만이 아니다. 문화와 사상도 같이 이동한다.

새롭게 정비한 도로를 통해 노르베르쥬 전체가 유대감을 가지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통합될 것이다.

바렌은 늘 그렇듯 하품을 하며 귀찮아했다.

"꼭 가야 하나...."

"해."

"네."

그래도 막상 시키면 말은 잘 들었다.

"마수 소탕도 많이 해야 할 테니까 캐치가 바렌을 보조해. 이참에 바렌 쫓아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요즘 고대 검술 훈련에 심취한 캐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 두 눈에 은색 불꽃을 피워올렸다.

잘할 것이다. 바렌이 좀 게으름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일부러 비교적 단순한 일인 도로 정비를 맡겼으니까.

꼼꼼한 캐치까지 붙여 줬으니 문제는 없겠지.

"그리고 각 영주에게 막대한 차관을 제공할 거야. 뭐, 빌려준 돈은 알아서 쓰라고 해. 하지만 일부는 반드시 방어 시설 확충과 병력 정비에 써야 돼. 기껏 도로 정비하고 산업 발전시켰는데 마수한테 당하면 안 되니까. 조만간 웨이브가 닥쳐오기도 할 거고."

이번엔 카트리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첫째.

"카트리나랑 잘츠란. 둘이 힘을 합쳐서 잘 감시하고 축성을 감독하도록 해."

"오케이!"

카트리나는 늘 그렇듯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업무 분담도 그랬다.

"잘츠란. 내가 영주들을 감시할 테니까. 성 쌓는 거는 네가 알아서 감독해.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응. 누나."

잘츠란은 후안 백작가의 후계.

후안 백작가는 방패술. 중갑술뿐 아니라 수성전과 축성 기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잘츠란이 직접 방어 태세를 점검한다면, 다가오는 웨이브에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좋아. 그럼 다들 바로 출발해. 긍지를 걸고 똑바로 처리하도록!"

나는 동생들을 흩어 보내고 올옴니마의 가지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사실 마음속엔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지금 가장 큰 불안은 역시나 웨이브.

황제는 분명 뭔가 수작을 부렸을 거고, 세아와 나는 그게 인공적인 웨이브일 거라 예측했다.

마음 같아서는 웨이브가 끝난 다음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늦는다. 웨이브가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고.

미래를 설계하며 동시에 웨이브를 대비한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앞으로 바쁘겠네.'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겨울도 금방 지날 것 같았다.

그리고 내년이 오면...

많은 게 바뀌어 있겠지.

#107화 태동

쿠샨시에서 망망대해에 닿을 때까지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시론시(市)가 나온다.

바다에 면해 있어서 농사보다는 어업으로 주로 먹고사는 이곳이 요즘 변화하고 있었다.

구릉지마다 실꽃을 잔뜩 피워 낸 묘목들이 울창한 군락을 이루었고, 그 군락 한복판에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건물마다 물레를 돌려 실을 뽑는 소리, 베틀을 뚝딱거려 천을 짜는 소리가 요란했다.

드라키움을 먹은 지도 벌써 2달이 지난 시점. 나는 오랜만에 임무를 맡긴 동생들을 보러 노르베르쥬 전역을 한 바퀴 돌아보는 중이었다.

지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착착 진행되고 있어. 올옴니마의 가지들은 성장 속도가 엄청나. 가지를 꺾어 심기만 해도 쑥쑥 크고. 본체는 회복 기간만 좀 주면 필요할 때마다 새 가지를 떨어뜨리고. 봐. 보기만 해도 배부르지?"

지아가 언덕을 따라 무성하게 흐드러진 실꽃 군락을 가리켰다.

작은 가지들을 심은 거라 아직은 막 심어 둔 묘목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저 가지들이 자라 숲을 이루면 막대한 양의 실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아가 이번에는 공방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특히 여기는 해변 도시라 그런지, 실 뽑고 천 짜는 기술이 좋아. 낚싯줄 만들고 그물, 돛, 이런 거 만들던 기술자들이 많거든. 여기서 대량으로 천을 만들고 룬드나에 가져가서 염색하면 끝내주는 상품이 될 거야."

그런 게 있다. 당연히 잘 알 줄 알았던 사람이 잘해 줬을 때와 은근히 불안했던 사람이 잘해 줬을 때는 느끼는 게 좀 다르다.

"진짜 고생 많았다. 지아야."

말은 담백하게 했지만, 속으로는 좀 감동스러웠다.

노는 거 좋아하고 가볍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공간 목걸이에 담아온 새참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좀 먹고 놀자!"

"오! 좋아!"

메뉴는 딸기소다파이.

지아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특별히 일루나엘에 있는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가게에서 사 왔다.

입에 넣으면 톡톡 튀는 느낌과 함께 입속에서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파이의 맛이 일품이었다.

"아! 루크! 넌 먹지 마! 뱃살 생긴다고 안 좋아하잖아!"

"이건 살 안 찌더라고. 잘 먹을게, 누나."

지아와 룩크랜서는 오늘도 아옹다옹했다.

간만에 평화를 즐기며 동생들과 수다를 떠는데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아, 저 아줌마 또 왔네."

"...저 사람 나랑 동갑으로 아는데. 그럼 나는 아저씨냐?"

"아, 오빠랑은 다르지."

지아가 무엄하게도 아줌마라고 부른 사람은 카사니아 시론.

지금 우리가 있는 시론시의 영주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란센 대공 전하. 방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차 왔습니다."

카사니아는 나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굳이 인사를 하러 온 것에서 나를 향한 그녀의 호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정책에 협조적인 몇 안 되는 영주 중 하나였으니까.

"반갑습니다. 카사니아 백작님. 여기 딸기소다파이라는 건데 좀 드시겠습니까?"

"...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이걸 먹네.

카사니아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긴장, 어려움, 두려움, 이런 것이길래 거절할 줄 알았는데.

역시, 감정을 고스란히 따라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지란 아주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잠시 돗자리 위에 나란히 앉아 딸기소다파이를 오물오물 먹었다.

카사니아는 줄곧 이 자리를 불편해하고 있었는데도 먼저 화제를 꺼냈다.

"실꽃으로 짜낸 직물을 보았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동방의 실크나 윤슬면이 오히려 초라해 보이더군요."

"노르베르쥬의 특산품으로 손색이 없지요?"

"예. 그런 상품이 있다면 노르베르쥬는 단지 거쳐 가는 통로가 아닌, 세계 시장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겁니다."

카사니아는 잠시 말을 끊고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만나라는 것도 먹어 보았습니다. 빵으로 구우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군요. 열매를 짜면 애초에 반죽 형태로 속살이 나오니 밀가루처럼 힘들게 빻고 반죽할 필요도 없는 데다가 계절도 타지 않고 압도적인 수확량까지.... 정말 노르베르쥬의 미래를 바꿀 만한 작물이었습니다."

하나같이 긍정적인 이야기. 하지만 말을 하는 카사니아의 얼굴에는 희망 대신 긴장이 가득했다.

"정말로 실현될 수도 있겠습니다. 대공님께서 말씀하신 노르베르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하는 것. 단순히 공포와 힘이 아닌 이득으로 엮이기 때문에 더욱더 진득하게 결합할 수 있겠지요."

거기까지 말하고 카사니아는 또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떻게 둘러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

그래서 내가 대신 말해 주었다.

"왜요? 제가 왕이 되겠다고 할까 봐 그러십니까?"

카사니아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속마음이 뻔히 보였다. 그녀는 변화가 두려웠던 것이다.

현실을 파악하고 누구보다도 내게 협조적인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독립적으로 사는 데에 익숙한, 로버랜드 토박이인 그녀에게 왕이라는 존재는 공포스러운 미지의 무언가였을 테니까.

"안심하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왕은 위에 선 자가 스스로 칭하는 게 아니라, 아래에 있는 이들이 추대하여 올리는 거라고요."

"왕이 될 마음이 없으시다는 건가요?"

"글쎄요.... 전 그저 여러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리고 노르베르쥬 전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니,"

나는 카사니아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를 왕으로 삼고 싶은지 어떤지."

그 말에 카사니아는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카사니아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는 그런 그녀를 두고 마지막 남은 딸기소다파이를 지아에게 건네주었다.

왕.

그것은 반로아의 후계자인 내가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칭호.

하지만 다른 영주들을 겁박하여 그걸 얻어 낼 마음은 없다.

애초에 세아의 삼전계에서 필요했던 건 아일룬과 샤말룬이었을 뿐, 노르베르쥬 전체가 아니기도 했으니까.

나. 카사니아. 그리고 노르베르쥬.

앞으로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 보려 한다.

* * *

지아와 룩크랜서를 만나 격려한 후에는 타로스시(市)에서 축성 작업을 하고 있는 카트리나와 잘츠란을 찾았다.

"역시 후안 백작가의 후계다. 금세 방어 태세를 정비했잖아?"

잘츠란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석벽 대신 목책을 세워 도시의 방어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목책임에도 안에 모래주머니를 넣어 방어력을 극대화했고, 마물을 유도하고 둘러싸기 좋은 옹성구조를 채택하여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카트리나는 어땠어? 영주들이랑 충돌은 없었어?"

내 질문에 카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내가 일일이 확인하고 참견하는 건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말은 잘 들어. 다들 차관으로 제공받은 자금 상당 부분을 잘 떼어 내서 성을 짓더라."

"하긴. 그들도 거절할 이유는 없지. 내가 빌려준 돈으로 자기들 안보를 챙기는 건데."

"그런데 오빠.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리 대련이나 한판? 나 요새 머릿속이 간질간질한 게 슬슬 체검도 깨달을 거 같은데."

"좋지."

"어? 형! 나도 할래. 대련."

싸움광 카트리나와 성실한 잘츠란.

나는 둘과 어울려 신나게 대련을 했다. 드라키움 탓인지 짧은 사이에 일취월장한 녀석들의 실력이 나를 흡족하게 했다.

대련을 마치고 쉬고 있자니 타로스시(市)의 영주도 나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그는 카사니아와는 다르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는 바로 자리를 피했다.

하긴.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 맞았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내 무력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협조하는 것이었으니까.

카사니아가 특이했던 거다.

그래도 우리 도움으로 웨이브를 잘 넘기고 나면 저들도 좀 마음을 열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 보았다.

한동안 카트리나, 잘츠란과 시간을 보내던 나는 다시 말을 달려 이번에는 매드베드시(市)로 향했다.

노르베르쥬의 북서쪽 끝에 있는 이 도시에선 바렌과 캐치가 도로 정비 작업에 한창이었다.

나는 둘을 아낌없이 칭찬해 주었다.

그동안 노르베르쥬를 돌아다니며 예전보다 훨씬 다니기 좋게 정비된 도로에 감탄을 했으니까.

마물 청소도 얼마나 깔끔하게 했는지 잿빛 땅을 지나면서 마물에게 습격을 한 차례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형형. 체검(體劍)에 오르니까 전과는 완전히 다른 거 있지. 저번엔 변종 오우거를 혼자 이겼다고?"

캐치는 이번에도 누구보다 빠르게 체검, 그러니까 고대 기준으로 익스퍼트 중급에 올랐다.

신이 잔뜩 나서 나에게 자랑하는 //하는//캐치.

바렌은 그걸 보더니, 아닌 척하면서 은근슬쩍 자기 자랑을 덧붙였다.

"흠- 나는 니오시(市)의 영주가 도로 정비에 훼방을 놓길래 결투를 벌여서 혼쭐을 내줬는데."

그러자 캐치가 얼른 또 다른 무용담을 꺼내고, 바렌은 계속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자기 무용담을 사이사이 끼워 넣었다.

그러는 동안 매드베드시(市)의 영주는 끝까지 나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각지에서 다 비슷하게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음에도 영주들의 반응은 이렇듯 제각각이었다.

뭐, 그래도 결국엔 나에게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한다.

웨이브가 닥쳐오면 바렌과 캐치가 정비한 도로를 통해 지원군들이 이동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웨이브는 대체 언제 일어나지? 빨리하고 치우고 싶은데.'

처음엔 발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는 신경이 많이 쓰였다.

심지어 더 이상한 건, 얼마 전까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던 괴이들이 어느 날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변경에 들끓던 마수들조차 잠잠해졌다.

'뭐지? 성마 웨이브가 안 일어나나?'

분명 황제가 무언가 음모를 꾸민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 * *

한스는 노르베르쥬 헤레폴 출신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것은 그의 출신을 설명할 뿐, 그라는 사람을 대변해 주진 못했다.

그는 한 달에 1달론도 손에 쥐지 못하는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가진 야망은 가히 세계를 뒤덮을 만한 것이었다.

꿈, 야망.

보통 이런 것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인데, 한스의 야망은 그렇지 않았다.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겠다.

모두를 무릎 꿇린 권력자가 되겠다.

그는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 강하게 타올랐다.

그는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한 법.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처음 저지른 일은 도둑질이었다.

철저한 계산과 준비로 도둑질을 통해 자본을 마련한 그가 다음으로 계획한 일은 사기였다.

사업을 한다며 돈을 빌리고. 큰 이자를 내며 갚기를 몇 년. 마침내 사람들이 그를 믿었을 때, 그는 주위 사람들의 전 재산을 빌린 후 다른 도시로 도주했다.

그야말로 성공을 하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태도.

어느 날은 그의 사기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난 피해자가 이를 갈고 그를 찾아냈다.

"한스...! 내 돈 내놔라. 아니면 여기서 네놈 내장을 꺼내 주마."

살기등등한 피해자를 보며 한스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자까지 두둑이 쳐서 드리지요."

"뭐? 진짜 준다고?"

"네. 그런데 그걸로 되겠습니까?"

"닥치고 빨리 내놔."

"저 때문에 많이 고통받으셨을 거 아닙니까? 저를 찾아내려고 또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그거 보상받으셔야지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같이 한탕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손에 쥐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피해자까지 자신의 공범으로 만들며 승승장구를 이어 갔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너, 너희들! 날 속였어!"

한스는 자신을 둘러싼 괴물들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낸 정체불명의 남자들은 아주 수상하게도 잿빛 로브를 뒤집어쓰고 중얼중얼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워 댔다.

"얼마. 얼마면 돼. 달라는 대로 줄게! 살려 줘!"

크르르-

한스는 사정했지만, 그를 둘러싼 마수들은 흉포한 살기를 뿜어내며 점점 거리를 좁힐 뿐이었다.

한스는 후회했다.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어!'

욕심 때문이었다.

돈이라면 원 없이 벌고 있었는데....

저 수상한 남자들은 그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소드마스터도 당해 낼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싶지 않나?"

돈보다도 더 강력한 것은 권력이었고, 이 로버랜드에서 그 권력은 개인의 무력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돈은 많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은 부족했던 한스에게 정말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들어서 거짓말 탐지 아티팩트까지 썼다.

"이런 것까지? 뭐 좋지. 우리를 따라오게. 자넬 위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겠네."

놀랍게도 상대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래서 믿고 따라왔는데....

어떻게 아티팩트를 속인 거지?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살려 달라고!"

강해지는 의식을 치르게 해 준다더니 자신을 괴물들 한복판에 던져 놓았다.

일반적인 마수가 아니었다.

거금을 주고 고용한 익스퍼트 상급의 호위 전사가 저 괴물들에게 장난처럼 찢겨 죽었다.

란센이 괴이(怪異)라고 이름 붙인 괴수들이었다.

소드마스터급의 무력을 가진 그 괴물들을 고작 사기꾼의 호위 전사가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으아아아아!"

결국 한스는 괴물들에게 잡아먹혔다. 수십 마리의 괴이들은 진귀한 진미를 먹는 것처럼 한스를 나눠 먹었고 오래오래 씹으며 그 맛을 즐겼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건 그다음이었다.

끄륵-

끄르르륵-

한스의 살점을 조금이라도 삼킨 괴물들은 예외 없이 몸을 떨었다.

피부가 서서히 녹더니 근육이 녹고 마침내는 뼈조차도 핏물로 녹아내렸다.

주르르-

수십의 괴이들이 핏물로 편하니, 들판에는 순식간에 작은 연못 하나가 고이게 되었다.

그리고....

슈르르르르-

피의 연못이 소용돌이치고, 핏물이 하나로 합쳐져 솟구쳤다.

핏물은 점차 굳어지고 다시 말랑해지더니 한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한스였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다시 태어난 한스는 모두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잿빛 로브를 걸친 이들은 환호했다.

"성공이다! 불멸자를 만들어 냈어!"

"저 정도로 비틀린 욕망을 가진 녀석을 찾는 게 정말 쉽지 않았지."

"이제 폐하게 드릴 말씀이 있겠어!"

"생각보다 어려운 임무였어."

그중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한스에게 손을 뻗었다.

"한스. 아니. 피의 사제여. 위대한 존재께 너를 부탁한 게 바로 우리다. 이제 네가 할 일을 알려 주겠다."

그때 한스는 자신의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다시 살아났군. 거짓말이 아니었던 건가."

잿빛의 후드를 쓴 남자가 흥분하여 말했다.

"그렇다. 너는 위대하게 새로 태어났지. 그러니 이런 은혜를 내려 주신 폐하 앞에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들어라."

한스는 하얗게 웃었다.

그가 손을 휘둘렀다.

그의 발치에서 핏물이 해일처럼 일어나더니 사방을 휩쓸었다.

"으아아아!"

그러자 핏물에 휩싸인 남자들은 그대로 녹아내려 하얀 백골만을 남겼다.

뿌드득.

빠드득.

퍼져 나갔던 핏물은 다시 끈적하게 모여들어 한스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하얀 백골들이 부서지며 삼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후우우-"

길게 기지개를 켠 한스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황제의 명령은 필요 없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알고 있거든. '그분'께서 직접 알려 주셨지."

그의 시선이 지평선 너머를 향해 꽂혔다.

일루나엘시(市)가 있는 방면이었다.

그가 인간이었던 시절, 수없이 그 이름을 들어 본 존재. 패왕 란센. 한스는 그가 그곳 어딘가에 있음을 느꼈다.

"힘을 키워야 해. 들키지 않게.... 패왕 란센을 죽일 수 있을 때까지."

한스는 핏물 속에서도 보존한 잿빛 후드를 집어 들고 뒤집어썼다.

그는 잿빛 땅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가 될 때까지 숨어서 힘을 기를 수 있게.

그의 걸음을 따라 각지의 괴이들과 마수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노르베르쥬 상세 지도>

*회색은 변경(잿빛 땅)

#108화 발전

세아와 아샤의 연구실은 돌려 말해도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캐스크가 울며 건네주었던 마법 관련 서적들이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고 사이사이에는 알맹이만 빼먹은 간식 포장지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캐스크가 봤으면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심지어 여기서 먹고 자고 했는지 갈아입고 벗어둔 옷가지들이 책들 위에 막 내걸려 있었다.

도무지 여자애 둘이 쓰는 연구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시 이렇게 되네.'

뻔했다.

아샤는 청소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다. 그러면서 마법사답게 누가 자기 연구실에 들어오는 것은 질색팔색을 해서 하인들에게 청소를 맡길 수도 없다.

그러면 남는 건 세아인데... 세아는 솔직히 요즘 너무 바빴다.

이 구제 불능의 연구실을 청소할 엄두가 차마 나지 않았을 테니 그냥 눈 막고 코 막고 버텼을 것이다.

"왔어?"

책 더미 한 켠에서 아샤가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어. 연구는 잘돼?"

내 물음에 아샤는 정색을 했다.

"오빠. 세아가 날 죽이려고 해. 살려 줘."

"미안. 나도 세아는 무서워."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아샤는 크게 낙심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녀석의 눈 밑은 잉크를 쏟은 듯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체하고 물었다.

"연구성과 보고할 게 있다고? 세아가 가 보래서 왔는데."

지금 연구실에 세아는 없었다.

세아는 마법 연구 말고도 맡은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애초에 동생들에게 나누어 시킨 일들을 총괄하고 있는 것도 세아였다.

"으으.... 응. 보여 줄게. 가자. 세아 '님'이 시켰으니까. 해야지."

아샤는 세아에게 불만이 아주 많은지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났다.

"근데 아샤. 너 말투가 좀 바뀐 거 같은데? 뭐랄까.... 말을 좀 잘하는데?"

원래 우리 아샤는 사회성과는 담을 쌓은 마법사라서 말을 툭툭 끊어지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투가 꽤나 자연스럽지 않은가?

"세아한테 옮았나 봐. 요샌 맨날 붙어 다니니까...."

아샤는 말하기도 피곤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곤 나를 안내했다.

도착한 곳은 연구실에 붙어 있는 뜰이었다.

말이 좋아 뜰이지 사실상 마법 실험을 하기 위한 장소라서 연무장처럼 넓고 삭막한 장소였다.

아샤는 그곳에서 활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세아활. 샘플이 완성됐어. 한번 직접 쏴 보라고."

"그게 벌써 나왔어?"

"벌써 아니야.... 그거 만든다고 죽을 뻔했어.... 세아가 날 얼마나 부려 먹었다고...."

아샤는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이를 갈아 댔다.

나는 얼른 모른 체를 하며 세아활을 당겨 보았다.

"좀 가벼운 거 아냐?"

생각보다 쉽게 당겨지는 활.

다루기 편한 건 좋은데, 이러면 화살이 멀리 안 나가지 않나?

"한번 쏴 봐."

아샤의 말대로 화살을 메기고 50미터 전방에 보이는 과녁을 겨눴다.

'역시 가볍네.'

활시위가 쫀쫀한 맛이 없었다. 손맛이 많이 아쉬운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시위를 놓는 순간,

쐐애액! 퍼억!

...뭐냐 방금?

화살이 무슨 벼락처럼 튀어 나갔다.

나는 얼떨떨하게 세아활과 저 멀리 과녁을 번갈아 보았다.

"...과녁을 아예 뚫고 지나갔는데?"

"응. 제일 개선된 부분이 관통력이거든. 일반적인 병사용 갑옷이나 방패쯤은 꿰뚫을 수 있을 거야."

"화살의 속도도 흑궁보다 빠른 것 같은데?"

"유효사거리가 한 160m 정도 나오더라."

최고의 활이라는 제국 흑궁의 유효사거리가 150m인데. 그걸 넘는다고?

"어째서? 시위가 이렇게 가벼운데? 어떻게 그래?"

"그러니까 마법이지."

나는 정말이지 감탄해서 세아활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활이었다.

나무와 뿔을 섞여 있는데 각궁과는 완전 다른 방식이었다.

각궁은 나무와 뿔을 서로 맞붙여 만들지만 이건 말 그대로 두 가지가 '섞여'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나무와 뿔이 서로 실가지를 뻗어 얽히고 녹아서 딱 달라붙은 형상이었다.

그리고 인두로 지진 것처럼 까맣게 새겨진 마법 문자를 따라 마나가 이리저리 왜곡되었다.

"이런 활을 양산할 수 있다고?"

"가능은 해. 고대 마법의 위대함은 마법사가 없어도 마법 부여가 가능하다는 거니까."

"마법사가 없어도?"

"응. 생산용 마법 장비들을 잘 설계하면 돼. ...빌어먹을게. 잘. 설계. 하면. 돼."

아무래도 그 설계를 아샤가 하는 모양이다.

한 단어 한 단어 끊어서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에서는 스산한 증오가 묻어났다.

"그, 그렇구나. 그래도. 이건 정말 좋다...."

"좋아야지. 그 고생을 해서 만들었는데. 빠드득."

아샤가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녀석의 치아 건강을 위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거 보여 주려고 부른 거야?"

"그거랑. 다른 것도. 이거 저거."

"다른 것도 있어?"

"있지... 많지...."

아샤는 다시 비척비척 나를 이끌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이번엔 녀석이 보여 준 건 웬 화분들이었다. 화분마다 올옴니마에서 떼어 낸 작은 가지들이 심겨 있었다.

"마나 비료도 연구하고 있어."

"비료를?"

비료는 글로리랜드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로버랜드는 농사 기술이 썩 발달하지 않아 비료를 쓰지 못했다.

"응. 올옴니마 가지가 지력을 빨리 쇠하게 만든다더라. 그래서 연구 중이야. 잘되면 일반 작물의 생산력도 크게 늘어날 거야."

아샤는 그렇게 말하곤 "잘 되면."이라는 말을 한 번 더 중얼거렸다.

그게 잘 되게 해야 하는 사람이 아샤였으니.... 녀석의 갈 곳 없는 분노와 고통이 공기를 타고 넘실거렸다.

나는 또다시 모르는 척했다.

마나비료 다음은 실을 자아내는 방적기와 천을 짜는 방직기였다.

한창 작업 중인지, 제대로 형체를 갖추지 못한 나무 틀들이 연구실 한 켠에 중구난방으로 늘어져 있었다.

"방적기랑 방직기.... 개념은 잡았어. 나무의 영혼을 이용해서 실이 어느 정도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거야. 예를 들면 바늘귀에 실을 넣을 때, 실이 스스로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해서 머리를 들이미는 그런 느낌...?"

"엄청 좋은데? 그러면 손재주가 썩 좋지 않은 사람이라도 명품을 뽑아낼 수 있겠네."

"좋지. 아이디어는 좋아. 근데. 하래. 나더러. 그걸. 나더러. 만들래."

아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녀석이 몸을 휙! 돌리더니 내 소매를 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오빠. 세아는 악마야. 퇴치해 줘. 나한테 맨날 뭐라는 줄 알아?"

아샤의 말에 따르면 둘의 연구는 늘 이런 식이라고 했다.

세아: 틀 전체가 마도학적인 의미소를 상실하지 않게 하면서, 기계학적인 기능성도 충실하도록 설계해야 돼.

아샤: 와. 그럼 진짜 좋겠다. 세아야. 그거 할 수 있어?

세아: 아니. 네가 할 수 있어.

아샤: 내가? 그걸 하라고? 나더러?

세아: 응. 네가. 난 바쁘잖아.

"으아악! 오빠. 진짜 너무하지 않아?"

아샤가 같이 세아를 욕해 달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세아가 그렇게 바쁜 이유가 나 때문이었거든.

나는 대신 아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힘내, 아샤. 넌 할 수 있어."

아샤는 고개를 푹 떨구며 중얼거렸다.

"...오빠도 악마야...."

* * *

한때 사기꾼이었던 한스.

그는 더 이상 한스가 아니었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그저 진리를 따르는 사제일 뿐이다. 이름은 필요 없어.'

진리의 사제.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다.

꼼짝없이 괴물들에게 잡아먹혀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진리를 보았으니까.

자신이라는 허구가 무너지고 세상이라는 기만이 무너졌을 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진리의 손길을 느끼며 그는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다.

진리를 느낀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예전의 머저리 사기꾼 한스와 동일시할 수 없었다.

철퍽 철퍽 철퍽.

그렇기에, 그는 예전이라면 토악질을 하며 몸서리쳤을 풍경 속으로 파고들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바닥에는 흘러내린 피가 발목 높이까지 고여 있었다.

사방에는 심장이 뚫리고 목과 사지가 잘려 피를 울컥울컥 쏟아 내는 마수들이 가득했다.

사제는 그 지독한 피비린내를 천상의 향기라도 되는 듯이 깊이 들이마시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고인 피가 그가 뒤집어쓴 후드를 적시며 흥건하게 타고 올랐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스며드는 핏물을 반기는 듯했다.

그는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주여."

그 한마디에 세계가 흔들렸다. 법칙이 뒤틀렸다. 그의 주위가 일그러지며 드러나서는 안 되는 저편의 모습이 언뜻언뜻 그 그림자를 비추었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던 피가 붉게 투명해지며 저편 어딘가로 연결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 당신의 종이, 당신의 뜻을 기쁘게 받드나이다."

그가 기도를 마칠 때쯤, 투명해진 핏물 속에서 불쑥 거대한 괴물이 솟아올랐다.

일반적인 상괴를 벗어난 괴물, 괴이(怪異)였다.

괴이는 마치 사제의 충실한 종복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뒤로 가서 얌전하게 시립했다.

"감사하나이다. 저를 아끼지 마소서. 가장 험하고 더러운 곳에 사용하여 주소서."

사제는 경건하게 감사 기도를 마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핏물로 변해 장막처럼 드리웠다.

조용히 시립해 있던 괴이가 피로 된 장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제는 괴이를 삼킨 핏물을 흔들어 다시 손으로 되돌린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평원에서는 참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구나. 세상이라는 기만에 속은 어리석은 이들이여. 대체 무얼 위해 그리 죽었다는 말이냐."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방금 소환한 괴이는 그의 군세에서 장군의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해답이 이곳 평원에 잔뜩 묻혀 있었다.

"일어나라. 다시 진리를 맞이할 기회를 줄 터이니."

그가 손끝에서 흘러내린 피 몇 방울을 땅에 떨어뜨리자, 땅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오랜 세월 동안 이 땅 위에서 싸우고 죽었던 인간들이 언데드가 되어 다시 일어섰다.

처음엔 비교적 최근에 죽은 존재들이 하얀 백골을 드러내며 일어섰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득히 먼 과거에 죽은 이들까지 일어섰다.

"생각 외로 쓸 만한 이들이 많구나. 장수로 쓸 수도 있겠어."

오래된 해골들일수록 뿜어내는 기운이 강력했다. 오랜 세월을 썩지 않고 버텨 낼 만큼 막대한 마나를 품고 죽은 시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사제는 갈증을 느꼈다.

그의 주인의 뜻을 펼치기 위해선, 패왕 란센을 꺾기 위해선, 이 강력한 군세도 아직 한참이나 모자라 보였다.

"내 죄가 크구나."

그는 참회했다.

한스라 불렸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그 끔찍한 죄악을.

가슴을 치고 땅을 두드리며 통곡할 정도로 깊이 참회했다.

"내가 더 많은 이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쯤 더 손쉽게 그들을 주님 앞에 바쳤을 텐데."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늦은 일.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불멸자이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사제는 제 안에 품은 괴이(怪異)들의 숫자를 헤아리고, 눈앞에 도열한 언데드 군단을 둘러보았다.

이로써 기초 준비는 끝났다.

"슬슬 세상으로 나아가야겠구나."

란센의 눈을 피하는 건 좋지만, 언제까지 숨어 다닐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죽음 속에서 자신이 보았던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언데드 군단은 잿빛 땅 깊은 곳에 꽁꽁 숨겨 둔 채 홀로 걸음을 옮겼다.

인간들의 도시를 향해.

#109화 평화

끝눈 기념일.

첫눈이 있으면 끝눈도 있는 법.

그 마지막 눈을 기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눈 내리는 날에 하는 건 아니었고 2월 25일로 딱 정해진 기념일이었다.

봄이 거의 다가올 무렵, 4계절을 다 보내고 새봄을 맞이하기 전의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펼쳐 집마다 파티는 여는 날.

1년 중 가장 즐거운 날.

이름에 걸맞게 정말 눈이라도 오면 온 세상 모두가 행복해하는 그런 날이었다.

반로아 왕국 사람들은 이날이 오면 온 가족이 모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새해.

끝눈 기념일.

우리는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반로아 식으로 그날을 보냈다.

내가 폐인이 되었던 시절에는 끝눈 기념일도 그냥 조용히 넘어갔으니까.

"4년 만이군요.... 나무가 앙상하다고 어떻게 죽은 것이겠나. 봄이 오면 이렇게 다시 푸르르게 물드는 것을...."

벌슨은 충혈된 눈으로 또 명언을 읊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나 보다.

"근데.... 주방장에게 일러서 요리를 조금은 준비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끝눈 기념일을 챙길 때마다 우리가 만들었던 요리가 어떤 수준이었는지.

그의 얼굴에는 그래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그때랑은.... 멤버가 다르잖아."

예전에 요리를 함께했던 내 또래 친구들은 다 죽었으니까....

벌슨이 조금 침울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으음.... 얼마 전에 카트리나 소공작님과 바렌 소후작님 요리를 먹어 보았습니다만...?"

아, 나도 먹어 봤다.

끔찍했지.

"오늘은 다를 거야. 내가 직접 요리를 진두지휘할 거니까.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먹는다. 그게 전통에도 맞잖아?"

"...그렇군요. 저는 오늘 배가 아파 많이 먹지 못할 예정입니다."

벌슨은 내 요리 솜씨에도 불신을 드러냈다.

이거 왜 이래?

그래도 나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낸다고.

그래.

오늘은 벌슨에게 내 능력을 보여 주리라.

나는 동생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내가 취할 전술은 바로 '분업 전문화.'

"자! 우선 재료를 썬다. 누가 썰래?"

"나! 나! 내가 한다!"

"제가 누구보다 빨리 썰 수 있습니다!"

"난 더 빨리 썰 수 있어!"

"나 할래! 나 시켜 줘!"

카트리나를 시작으로 캐치, 제페토, 데이지 죄다 달려들었다.

누가 검사들 아니랄까 봐....

그나마 요리에서 칼 다루는 부분이라고 너도나도 나서는 것이다.

근데 그 와중에는 홀로 칼질에 관심이 없는 녀석도 있었다.

"흐.... 형. 나는 철판을 맡을게. 굽는 건 나한테 맡겨 줘."

"응? 잘츠란. 너는 왜 철판?"

"철판이 그래도 방패랑 비슷하잖아. 난 이게 좋아."

아, 참으로 후안 백작가의 자제다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역할을 빠르게 배분했다.

재료 써는 건 쾌검술의 달인인 캐치와 제페토.

철판은 방패술의 고수 잘츠란.

불 조절은 화염의 마법사 아샤.

고기 손질은 용병 칼세릭.

꼬치구이는 명사수 리베라.

뭐 이런 식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나랑 세아가 하나씩 나누어 맡았다.

세아는 레시피를 맡았다.

"으음.... 이론상 완벽해! 버터 송이를 잘 갈아서 바질페스토와 채도 잼을 3대 1대 1의 비율로 섞고 마늘 2알을 잘 볶아 넣으면...!"

세아는 며칠 전부터 연구한 레시피들을 노트에 정리해 와서 계속 확인하며 요리를 지휘했다.

슬쩍 노트를 봤더니 그건 요리 노트라기에는 수많은 수학 공식과 그래프로 뒤덮인 물건이었다.

대체 뭘 얼마나 연구한 거야?

요리가 아니라 연금술을 하려고 하니?

세아가 이번 끝눈 기념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저 녀석, 표정만 무뚝뚝하지 누구보다 정이 넘치는 녀석이었으니까.

"스, 스승님! 카트리나 사고가 간을 봐 주시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 제자 윈스턴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잡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헐떡이며 달려와서 군기가 바짝 든 채로 말하는 걸 보니, 요새 동생들이 왜 이 녀석을 예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이 좀 지난 만큼 풀어질 만도 한데, 녀석은 늘 한결같았으니까.

나는 녀석을 따라가서 카트리나가 섞은 소스를 작은 숟가락에 적셔 맛을 보았다.

'음...! 이 맛은....'

벌슨이 왜 질색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맛이었다.

세아가 완벽한 레시피를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트리나는 기적처럼 소스 맛을 버려 놓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바로 내가 있는 거지.

"카트리나."

"응?"

"설탕 103알. 소금 72알. 투하."

"오옷! 투하!"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탈태를 이룬 소드마스터.

이 몸의 감각은 인간을 한참 벗어난 초인 그 자체.

혀로 맛을 보는 순간, 뭐가 얼마나 더 필요한지 알아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카트리나 역시 익스퍼트 최상급.

비록 미각은 엉망이었지만, 손의 촉감으로 설탕과 소금을 정확히 계량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음. 그래. 이 맛이야."

카트리나가 다시 섞은 소스를 맛보고 나는 통과를 선언했다.

이처럼 우리는 완벽하게 분업 전문화를 이뤄 요리라는 임무를 수행했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이, 이럴 수가! 맛있다니!"

벌슨이 경악하여 손에 들고 있던 스푼을 벌벌 떨어 댔다.

"어떠냐, 벌슨. 이것이 바로 '전략'이라는 것이다."

"아아.... 전하. 믿고 있었습니다! 역시 반로아의 자랑! 반로아의 희망!"

"후훗. 그래. 내가 바로 2왕자 란센 반로아다."

"저어어언하아아아!"

벌슨이랑 나랑 북 치고 장구 치고. 동생들은 그런 우리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반로아 왕국의 전통을 따라 밤이 새도록 파티를 했다.

산처럼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고 마시고 먹고 마시고.

새벽이 밝아 올 때쯤 데이지가 슬쩍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

"진짜 좋다."

"응. 좋네."

"어릴 때 생각 많이 났어."

"어릴 때?"

"응. 마지막으로 끝눈 기념일을 챙긴 게 내가 13살 때잖아."

"그렇지."

"그때 생각이 나.... 정말 좋았는데."

나는 데이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긴 데이지가 느끼는 감상은 나랑은 많이 다를 거다.

23살이 27살이 되는 4년보다, 13살이 17살이 되는 4년이 훨씬 길고 아득한 게 당연하니까.

데이지는 지금 아득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기분이겠지.

"계속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좋겠어. 새해에도. 앞으로도 영영."

그래.

그 많은 우여곡절과 슬픔 뒤로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흘렀다.

그리고 새해였다.

이제 몇 달 뒤면 내 생일이 온다.

반로아 왕국을 떠나 도망친 지 15년.

28살이 되는 거지.

온갖 일들을 다 겪고 있지만 우리는 꾸준히 나아가고 성장하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평화의 날이 1년에 하루라도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피를 뒤집어쓰고 싸울 수 있다고.

"어? 눈이다."

데이지의 말대로였다.

끝눈 기념일을 막 지난 새벽.

세상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평화를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 * *

로버랜드, 노르베르쥬 지방 동북면 끄트머리에는 아르고사시(市)가 있다.

한 남자가 아르고사의 성문을 지나쳤다.

그가 도시에 들어서서 잿빛 후드를 내리자, 주위의 시민들은 홀린 듯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마저 자신의 소임을 잊어버리고 넋을 잃은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미색은 그토록 대단했다.

하지만 그는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도시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장에 닿자 그는 마치 미리 알고 찾아온 것처럼 페로 씨에게 다가갔다.

페로 씨는 10년 전 전쟁에서 허리를 얻어맞아 두 다리가 마비된 사람이었다.

지금은 작은 수레에 앉아 두 손으로 밀어 움직이고 소소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며 사람이 아주 좋았기에, 그는 나름 시장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페로."

남자가 부르자. 페로 씨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페로는 이런 미남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이름은 없네. 그저 진리를 좇는 사제라네."

페로 씨는 생각했다.

이거 이 사람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구만?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는.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때까지만 해도 페로 씨는 이 남자에게 별생각이 없었다.

"페로. 다리가 낫고 싶지 않느냐?"

그런데 이번엔 열이 확 뻗쳤다.

페로 씨는 성격이 좋았지만, 이런 종류의 농담마저 웃으며 넘길 수는 없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낫고 싶지 않느냐?"

페로 씨는 울컥해서 남자를 쏘아보았다.

'어흑!'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어찌 사람의 눈이 저런단 말인가?

기묘한 광채와 일렁거림. 페로 씨는 독사 앞의 개구리처럼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낫고 싶다면 내 피를 마셔라. 거부하지 말고 경건하게 받아 마셔라."

남자가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끝을 베자 그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그때 페로 씨는 기이한 직감이 들었다.

저 피를 마시면 분명 큰일이 날 거라고.

큰일은 나지만 분명 다리가 낫게 될 거라고.

페로 씨는 고민했고,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 마시겠습니다."

페로 씨가 입을 벌리자, 남자는 그 속으로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아.... 아아...."

페로 씨가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아아...!"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장은 난리가 났다.

성격 좋은 페로 씨.

착한 페로 씨.

모두가 좋아하는 페로 씨가 10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으니까.

이 기적 앞에 모두가 두려워했고 경이로워했다.

"천사...!"

"천사다!"

사람들은 페로 씨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

옛 전설에나 나오는 천사가 아니라면 이런 기적은 일으킬 수 없다 생각했다.

남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했다.

"진리를 따르라. 진리가 너희를 지켜 주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따를 수 있습니까?"

남자는 답했다.

"내게 와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라. 너희를 낫게 하고 너희를 크게 키우리라."

사람들은 홀린 듯이 남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피가 뚝뚝 묻어나는 손으로 한 명 한 명 머리를 짚어 세례를 내렸다.

"아아.... 천사님."

"피 흘리시는 천사님...."

노르베르쥬의 땅에 알 수 없는 진리의 세례가 번져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떠돌이 전사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피 한 방울로 앉은뱅이를 낫게 한다고? 대마법사도 그런 짓은 못 해. 다 짜고 치는 거 아냐?"

그러자 페로 씨가 전사를 노려보았다.

떠돌이 전사는 고작 서민 따위가 자신을 노려보면 어쩔 거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사색이 되었다.

페로 씨의 충혈된 눈빛이 너무나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전사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날 밤.

퍼억!

떠돌이 전사 하나의 목이 농사꾼들이 쓰는 낫에 잘려 나갔다.

낫을 든 채, 피투성이가 된 페로 씨는 그대로 식칼을 꺼내 전사의 심장을 꺼냈다.

"네깟 놈이. 네깟 놈이 감히 천사님을 의심해?"

두 눈에서 희번덕거리는 광채가 뿜어지는 페로 씨의 섬뜩한 얼굴은 그가 평생 보여 주었던 선량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페로 씨는 전사의 펄떡이는 심장을 두 손으로 고이 들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에는 그를 낫게 해 준 남자가 머물고 있었다.

"천사님. 천사님. 제 마음입니다."

세상에 누가 자신의 마음을 펄떡이는 심장으로 표현할까?

그런데도 남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페로 씨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펄떡이는 심장을 받아 한입에 꿀꺽 삼켰다.

"잘하였다. 앞으로도 네 믿음을 계속 증명해 주거라."

남자의 말에 페로 씨는 이제 튼튼해진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옷에 흥건한 핏물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경건해 보일 법한 풍경이었다.

#110화 연금술

"후우.... 죽겠다."

2월 25일을 보내고 2월 28일까지. 나는 술에 절어서 매일을 보냈다.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싸우고 일해 준 전사들과 관리들을 위해 논공행상을 하고 도시 전체에 성대하게 축제를 열어 줘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도시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느라 몸이 축났지만,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야 도시는 나의 도시가 되고 군대가 진짜 군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니.

특히 축제를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저 산해진미에 고기와 술을 무제한으로 푼 게 전부가 아니다.

인맥과 돈을 총동원하여 수준 높은 무용수들과 가수들을 불러 최고의 공연을 준비했고, 글로리랜드의 예술가들까지 초빙하여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을 전시했다.

그뿐이랴. 능력 좋은 전사들이 돋보일 수 있는 각종 이벤트도 준비했다.

장애물 극복 대회. 팔씨름 대회. 천하장사 대회. 대식가 대회. 애주가 대회....

축제 기간 중 전사들은 어디를 가나 인기 만점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전사라는 직함이. 그리고 논공행상을 통해서 뿌린 훈장이 곧 화폐가 되었거든.

공연에서 좋은 자리는 모두 전사들에게 돌아갔다. 훈장을 지녔으면 더 좋은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예술 전시도 마찬가지.

거기에 각종 대회에서 맹활약을 보인 전사들은 뭇 사람들의 존경과 찬탄을 받았다.

나는 따로 훈장 수여자들을 위해 프라이빗한 파티도 열었다. 훈장을 지닌 이들은 열심히 여자나 남자를 꼬셔 와서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프라이빗 파티를 즐겼다.

그러니, 이번 축제의 주인공들은 누가 뭐래도 나의 전사들이었다.

처음엔 글로리랜드 샌님도 아니고 무슨 훈장이냐며 질색을 하던 녀석들도 축제 맛을 보자 아주 자랑스럽게 가슴에 훈장을 내걸고 다녔다.

그래.

이런 과정이 있어야 진정한 군대가 탄생하는 거다.

진정한 군대에는 꿈과 사랑이 필요한 법이거든.

그러니,

곳곳에서 술을 먹는 전사들.

술 먹다 마음이 맞는 이성이나 친구들을 찾아내는 전사들.

훈장을 흔들며 공연장으로, 전시회장으로, 프라이빗 파티 룸으로 친구들을 이끌고 향하는 이들.

이건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로버랜드라는 구제 불능의 땅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연금술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나는 얼큰하게 취해서 거리를 걷다가 한 무리의 전사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장애물 극복 대회에서 아쉽게 탈락한 전사가 있는 곳이었다.

"재미들 있나?"

내가 갑자기 끼어들었지만, 이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능청스럽게 나를 받아들였다.

"어! 대공 나으리! 어서 오십셔."

글로리랜드였다면 당장 목이 베어도 할 말이 없는 말버릇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역시 로버랜드 전사들이라는 게 대개 이따위 망종들이라서 그렇다.

뭐, 근데 나는 그걸 싫어하지 않는다.

"자자. 대공 나리. 일단 한 잔 받으시고."

"오냐."

아까 아깝게 탈락한 전사가 대장 격인가 보다. 나는 그가 따라 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전사들을 향해 나도 술병을 들었다.

"너희도 한 잔씩 받고."

"오오, 영광입니다요. 대공 나리."

술잔이 모두에게 돌아가자 우리는 다 함께 잔을 부딪치고 술을 털어 넣었다.

"크으으.... 술맛은 죽이네. 술맛은 죽여. 근데 말입니다. 대공 나리. 좀 아쉽습니다."

대장 놈이 대표 격으로 말하자 다른 전사들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저들이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왜? 다 있는데 여자나 남자가 없어서? 그래서 아쉬워?"

"바로 그거요! 역시 우리 나리. 말이 통하는구먼, 그래?! 우리 남자들뿐 아니라 여전사들도 아주 불만이 많소."

이곳 로버랜드가 그런 곳이었다.

별별 기묘하고 변태적인 유흥을 영주가 나서서 직접 전사들에게 베풀어 주는 게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그런 식으로 전사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의 피와 충성을 받아 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왕국을 세울 사람이었다. 그런 삼류 건달들이나 사용할 법한 방식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런 건 니들이 알아서 해라."

"예에? 그게 무슨 말이요. 대공 나리. 그 영주의 의무 아니요?"

"의무는 무슨. 난 돈을 많이 주잖아? 거기에 훈장에, 각종 특권까지. 내가 이렇게 퍼 줬는데도 여자 하나 니들 힘으로 못 꼬시면 니들 문제 아니냐? 수프 그릇에 코 박고 죽어야지."

"허어.... 직접 꼬시라니. 그거랑 영주님이 베풀어 주는 거랑은 다르지 않소."

"다르지."

나는 술을 한 잔 더 시원하게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이쪽이 훨씬 더 좋지."

"아니. 그게 더 좋은지를 왜 대공 나리가 정하슈?"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다."

"그걸 어떻게 아슈?"

"두고 봐. 내년 이맘때쯤이 오면 이런 생각이 들 거야. 아아. 이번엔 장애물 극복 대회에서 꼭 우승해야지. 작년에 테오스 그놈. 이 축제에서 여자 만나 결혼했지? 나도 이번에는.... 이렇게."

"그럴까?"

"그렇다니까."

나는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반말까지 섞는 이 싸가지 없는 전사에게 넘치도록 술을 따라 주었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난 진심이었다.

난 너희가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내일이 올지 안 올지 모르니 오늘을 아주 방탕하게 불태워 보자는 그런 삶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도시를 찾아 정착해서 살고. 애도 낳고. 아이를 위해 새로운 꿈도 꾸는.

국가란,

그런 식으로 세워지는 법이니까.

내 말에, 건방진 전사 놈은 피식 웃었다.

"거, 되게 지루하게 들리는 소리요."

"지루하지만 아주 좋지."

우리는 마주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 * *

로버랜드의 전사 부카손은 산적처럼 수염을 기른 상남자였다.

정처 없이 천하를 주유하며 내키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로버랜드 전사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그런 인생관을 지녔다.

어쩌다 보니 하룬과 란센의 전쟁에 휩쓸렸고, 또 어쩌다 보니 아일룬을 일통한 란센의 휘하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실 이것도 잠깐이라고 생각했다.

돈을 워낙 잘 주니 한 몇 년은 붙어 있겠지만, 만족할 만큼 벌고 나면 또 훌쩍 떠나지 않을까?

전사 중에는 미래를 위해 착실히 저축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을 한다는 허황한 꿈을 가진 이들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다수는 부카손처럼 한 번 사는 인생 불꽃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로버랜드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며 온갖 도시를 다 경험해 본 부카손에게도, 이런 건 많이 낯설었다.

"허어...."

"흐음...."

란센 대공이 꾸며 둔 전시회장.

어째서인지 부카손은 온종일 그 전시회장을 쉬이 떠나지 못했다.

예술 작품이라는 거, 돈 많은 영주들이 돈 지랄하고 과시 용도로 저택에 늘어놓는 그런 거로 생각했는데....

이 전시회장에 가득한 예술 작품들은 이상하리만치 그의 마음을 잡아끌어 댔다.

"글로리랜드 출신 작가. 아녜스 펜터. 흠.... 역시 글로리랜드인가? 뭔가. 뭔가 다르네."

수 미터나 되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한 마리의 사자.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오래 들여다봐야 사자지,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온갖 색깔들을 마구 색칠해 놓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그 색감에 끌렸을 뿐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색감이 부카손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 색깔들이 모여 사자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때 부카손은 인정했다.

아, 지금 내가 예술 작품이라는 것에 감동을 느꼈구나.

그런 건 펜 잡는 샌님들의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얼마나 그림을 바라봤을까.

"뭐가 보여요?"

웬 여자가 옆에 다가와 물었다.

젊고 아름답고 고상했으며, 두 눈동자를 바라보면 세상의 풍파 따위 모를 것 같은 올곧은 열정만이 가득했다.

부카손은 정말이지 자신과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 생각했다.

다른 세상 사람이랄까?

그에게 여자는 술을 진탕 마시다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날 헤어져 다시는 찾지 않는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부카손의 목소리가 어쩐지 퉁명스러워졌다.

"사자."

"어떤 사자요?"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발랄해졌다.

귀찮게. 왜 이러지? 하면서도 부카손은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면 이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동료 전사들에게는 말해 봐야 샌님이냐며 비웃음만 살 테니까.

"글쎄.... 강하고 당당한데. 조금 외로워 보이는 사자?"

"그래서. 좋나요? 이 그림."

부카손은 순순히 인정했다.

"좋네. 글로리랜드 출신 작가가 그려서 그런가."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그림 작가 글로리랜드 출신 아니에요."

부카손은 말없이 그림 옆에 붙어 있는 금속조각을 턱으로 가리켰다.

거기에 분명 글로리랜드 출신 작가, 아녜스 펜터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15살 때까지는 로버랜드 쿠샨시(市)에 살던 고아였어요. 그러다가 8년 전에 란센 대공님의 은혜를 입어 글로리랜드로 유학을 갔죠."

"그걸 댁이 어찌 아쇼?"

여자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녜스 펜터입니다. 저기, 혹시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요?"

부카손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여자를 한 번 보고 그림을 한 번 보았다.

그러니까.

이 빌어먹게 가슴을 간지럽히는 그림을 그린 양반이 눈앞의 이 여자라고?

부카손은 어버버 하는 사이, 정신을 차려 보니 둘은 어느새 밖에 나가서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

우연히 마주친 동료 전사들이, 휘파람을 불며 "오늘은 그 여자야?" 이딴 소리를 하며 지나갔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돈 많고 힘 있는 란센의 전사들은 요즘 어느 도시에 가나 인기가 많았으니까.

부카손도 오늘 아침만 해도 웬 예쁘장한 남자를 데리고 지나가는 여전사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은 그 남자야? 그 여전사는 뻐기듯이 웃어 댔다.

그런데 왜일까?

지금은 불편했다.

부카손은 괜히 아녜스의 눈치를 보다가 벌컥 화를 냈다.

"그런 거 아니다. 새끼들아! 갈 길 가라!"

점심은 맛있었고 어쩐지 비현실적이었다.

점심 먹고 같이 산책.

그러다가 도서관을 들렀고, 저녁을 먹었고 또 산책.

생전 처음 가 본 칵테일 바라는 곳에서 둘이 칵테일을 홀짝거렸다.

맥주나 증류주가 아닌 칵테일이라니. 그런 건 수염도 안 난 애송이들이나 즐기는 거로 생각했는데.... 왠지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늘 보낸 모든 것들이 그랬다.

한 번도 보내 본 적 없는 하루.

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겨울날의 온천처럼 마음이 보글거렸다.

어느덧 밤이 오고.

아련한 달빛 아래서 아녜스는 말했다.

"어릴 땐 이 도시가 정말 싫었는데....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근데 계속 잊혀지지 않았어요. 근데 있죠? 돌아오길 잘한 거 같아요. 저는 이 도시가 너무 좋아요. 아니.... 이 나라가 너무 좋아요. 심장이 뻥! 터질 것만 같아서 말로 다 표현을 못 하겠어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부카손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도 어쩐지 이 도시가, 이 나라가 좋아지는 것 같다고. 아니. 어쩌면 이미 좋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부카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란센의 도시들 곳곳에서,

연금술이라고 불러야 할 어떤 변화가,

전사들의 마음속을 조금씩 조금씩 바꿔 나가고 있었다.

111화 두려워하라

"기적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고?"

갤란시(市)의 북쪽.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세워진 도시.

테베아시(市)의 영주, 마르텔로는 불쾌했다.

"피 흘리는 천사라고 불린다.... 불구가 된 자를 낫게 하고, 죽어 가는 자를 살린다.... 시민들이 그자를 찬양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는 콧김을 강하게 뿜었다.

"그러니까 웬 사이비 새끼가 감히 내 영역에서 내 소유물을 멋대로 훔쳐 가고 있다는 거잖아?"

마르텔로는 도시의 시민들을 제 소유물이라 생각하는 전형적인 로버랜드의 영주였다.

그들이 괜히 강도 백작이라고 불리겠는가. 권위에 대한 도전은 오로지 죽음뿐.

"당장 그 새끼 잡아 와!"

명령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도시에 있던 '피 흘리는 천사' 바로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왔다.

아니.... 저게 끌려오는 게 맞나?

커다란 창문으로 성 밖을 내려다보던 마르텔로는 화가 나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피 흘리는 천사라는 놈은 끌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이 쩔쩔매며 '모셔 오는' 듯한 모양새였고 도시의 시민들은 그 뒤를 따르며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왜 우리 천사님을 끌고 가는 거냐!

감히?

영주의 권위보다 저자의 사이비 신앙이 더 두렵다는 건가?

마르텔로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의 분노는 그 천사 놈이 알현실로 들어왔을 때, 더더욱 불타올랐다.

'허여멀겋게 생긴 놈이.'

그래. 잘생겼다.

그건 마르텔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저런 얼굴을 좋아하는 놈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꽃밭인 놈들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힘이 아닌가? 란센도 그렇고 저렇게 겉보기에 이쁘장한 것들은 다, 되다 만 것들이다.

천사라 불리는 남자는 실로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심지어,

'인사를 안 하네?'

알현실로 들어온 그 자는 멀뚱멀뚱하게 서서 자신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거의 뭐 목을 베어 달라고 온몸으로 발악을 하는 수준.

마르텔로는 기가 막혀서 남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긴 침묵 끝에, 천사라 불리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를 불렀느냐?"

"허?"

지금 반말을 한 건가?

나를 불렀느냐?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면 말조차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할 말을 잃어버려서 입술만 뻥긋거렸다.

주인의 분노를 느낀 마르텔로의 충직한 수하는 거대한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네노오오옴!"

익스퍼트 최상급의 전사, 아우로스.

그가 동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처럼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그제야 마르텔로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아우로스는 그저 강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간판이었다.

잔혹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르텔로는 언제나 아우로스를 보냈다.

이 멍청하고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충성심만은 대단한 전사는 사람도 무식하고 단순하게 잘 죽였다.

손으로 쥐어 터뜨리고 머리로 박아서 땅에 꽂아 버리고.

그 기상천외한 처형 방법은 언제나 그의 적을 두렵게 했고, 시민들에게 그의 권위를 드높여 주었다.

아기가 울면 시민들은 쉿! 아우로스 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말했고, 그럼 아기도 울음을 뚝 그치곤 했다.

그런 아우로스가 나섰으니 됐다.

저 건방진 놈은 이제 참혹한 고깃덩이가 되고 영주의 권위는 다시 하늘 높이 빛나게 되리라.

찌지지직!

그리고 찢겨 나갔다.

아우로스가.

머리와 팔다리가 저절로 뽑혀 나가는 것처럼.

천사라는 놈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앞으로 걸어가던 아우로스 혼자 산산이 찢겨 바닥에 흩뿌려졌다.

"히이익!"

"무, 무슨!"

알현실을 지키던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건 영주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공포에 질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반사적인 움직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사들을 지켜 주진 못했다.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

피 흘리는 천사라 불리는 남자는 하얗게 웃었다.

"두려워하라. 진리 앞에서 늘 두려워하라."

그가 손을 앞으로 뻗어 죽 긋자, 영주실에 있던 전사들이 일제히 녹아내렸다.

"어읍! 이게 뭐...."

"잠깐...."

"끄아아아악!"

촛농을 흘리는 양초처럼 머리부터 핏물로 녹아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느덧 알현실에는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발치에 찰랑찰랑 차오르는 핏물들만 가득했다.

마르텔로는 자리에 앉은 채 바짝 얼어붙었다.

생전 느껴 본 적도 없는 공포가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차라리 란센처럼 검으로 성을 가르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다.

왜? 어째서? 어떻게 하면 손짓 한 번으로 전사들을 녹여 버릴 수가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힘이 공포가 되어 그의 영혼을 윽박질렀다.

"너, 너.... 뭐야...?"

마르텔로는 영주의 등받이에 최대한 몸을 기댔다. 더 뒤로 물러서고 싶지만, 등받이가 막아 더 물러서지 못하는 것처럼, 몸을 꿈틀거렸다.

천사라는 남자는 그런 마르텔로를 보며 그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르텔로는 다급히 소리쳤다.

"나, 날 죽이면 패왕 란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어찌나 두려웠는지 평소 란센을 못마땅해하던 그가 그런 말까지 했다.

그러자 천사는 입술을 열었다.

알현실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목소리는 담담하고 상냥했다.

"내가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패왕에게 손을 뻗으면 너는 더 많은 것을 패왕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마르텔로는 악을 썼다.

"그, 그래도 그게 죽는 것보단 낫다!"

천사는 고개를 저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천사가 하얀 손을 내민다.

"내 손을 잡거라. 너에게 힘을 주마. 위대한 존재가 되게 해 주마."

공포에 질려 있던 마르텔로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의 말이라면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결코 믿지 않았던 마르텔로였는데.... 지금 그는 천사의 말이 진심을 영혼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었다.

저 손을 잡는다면,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더 강해질 수 있다.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 알 수 없는 확신이 마르텔로의 가슴 속에서 끓어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마르텔로는 자신도 모르게 공손하게 되묻고 말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게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한 걸까?

천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알현실 바닥에 찰랑찰랑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일제히 일어섰다. 해일처럼 넘실거리며 마르텔로를 향해 다가왔다.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며 굴복하거라."

천사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핏물이 마르텔로를 덮쳤다. 마르텔로의 눈, 코, 입, 귀. 그리고 피부로 스며들었다.

"아아.... 아아아...."

두 눈이 피처럼 붉어진 마르텔로가 몸을 떨었다.

"힘이...! 힘이...!"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던 그가 소드마스터의 문을 두드릴 정도로 힘의 상승이 체감되었다.

힘이 주는 쾌락에 몸을 떠는 마르텔로를 보며 천사는 명령했다.

"너의 도시 곳곳에 진리를 설파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더 위대하게 해 주리니."

그렇게 테베아시(市) 곳곳에 피의 세례가 내렸다.

그리고 며칠 뒤,

마르텔로는 천사를 따라 외성 밖 촌락 지역으로 향했다.

아주 외진 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주민들은 일제히 달려 나와 천사를 향해 엎드렸다.

이미 예전에 천사가 와서 여러 차례의 세례를 끝낸 곳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영주인 마르텔로는 본체만체하고 오로지 천사 앞에만 엎드려 찬미의 말을 뱉었다.

천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르텔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며칠, 네가 나를 잘 따라 주었으니, 기꺼이 상을 내리고자 한다."

"가, 감사합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르텔로는 천사가 아주 부담스러웠다.

힘을 더 강하게 해 준 건 좋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어차피 그 정도 강해진 정도로는 란센에게 대적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란센만 해도 짜증 났는데 그보다 더한 작자를 모시고 있어야 한다니. 마르텔로는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천사를 해치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분명 뭔가 속임수가 있을 거다.

분명 어딘가 약점이 있을 거다.

그리 생각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천사가 하는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천사는 말했다.

자기 발밑에 엎드린 마을 주민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기뻐하라. 추수의 때가 왔노라."

그러자,

"아아-"

"아아아-"

주민들이 이상한 노랫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 같이 일제히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더니, 그걸로 제 눈을 찔렀다.

쿠직!

찍!

눈알 터지는 소리.

하얗게 흘러내리는 수정체와 핏물.

"무, 무슨 미친...."

마르텔로는 거기까지만 해도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주민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눈에 박아 넣은 두 손가락을 꿈틀거려서 기어코 자신들의 뇌를 헤집어 버렸다.

풀썩풀썩

뇌가 손상된 주민들이 인형처럼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천사는 벌벌 떠는 영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자.... 세례를 받거라."

그의 손짓을 따라 죽은 시체들이 일렁이며 핏물로 변했다. 핏물을 잔뜩 그러모은 천사가 마르텔로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아아아! 아아!"

정수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핏물을 느끼며 마르텔로는 몸을 떨었다.

이번엔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온몸 깊이 차오르는 전능감과 위대함에 몸을 떨었다.

이거라면. 이런 힘이라면.

'란센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이거구나.

이게 옳은 길이구나.

이게 내가 따라야 할 바구나.

몸속에 예전에는 없던 감각이 생겨났다.

그 감각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마르텔로는 핏발이 선 눈으로, 천천히 무릎을 떨어뜨렸다. 피를 흘리는 위대한 천사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 * *

디오시아시(市).

잘츠란을 데리고 방어 태세 정비를 계속하던 카트리나는 이상한 신고를 들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촌락 지역 사람들이 몰려와 읍소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을이 자꾸 사라진다고?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너희 영주한테 이야기해야지."

그러자 꾀죄죄한 노인이 말했다.

"물론 영주님께 먼저 보고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방관만 하고 계십니다."

카트리나는 여기서 뭔가 기묘한 직감이 들었다.

"사라진 마을이 어떻게 되었는데?"

"그게 정말 이상합니다. 건물도, 물건도, 가축도 모두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만 사라졌습니다."

"사람들만?"

"네. 집에는 먹던 저녁 식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기이한 마수가 나타나 사람들만 잡아먹기라도 한 게 아닌지. 너무 무섭습니다."

그때 카트리나의 머릿속을 스친 건 '사교'라는 단어였다.

란센에게 들었던 사교.

그게 아니면 이런 기이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영주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굉장히 수상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노르베르쥬 곳곳에 웬 사이비 종교가 유행을 하고 있다고 했지? 피 흘리는 천사였던가?'

맹렬한 직감. 이건 사교랑 관련이 있다.

카트리나는 그대로 메시지 반지를 이용해 란센에게 짤막한 보고를 올렸다.

- 디오시아시(市) 인근에서 첩보. 사교로 추정되는 움직임 발견. 확인해 보겠음.

보고를 마치고 카트리나는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있나?"

"예? 뭐가 말입니까?"

"그, 왜. 피 흘리는 천사인지 뭔지 하는 요즘 유명한 사람 있잖아."

"아? 아.... 예. 그분이 이번에 저희 옆 마을에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도 환자들을 데리고 기적을 구하러 찾아간 걸로 압니다."

카트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근처에 있다 이거지?'

이 도시 저 도시를 신출귀몰하게 옮겨 다니는 피 흘리는 천사.

호기심에 찾아보려 해도 그 얼굴을 보기가 참 어려웠는데.... 하필 마을 하나가 사라진 마당에 마침 근처에 있다?

카트리나는 이게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거기로 안내해 봐."

"예? 사라진 마을이 아니라 천사님한테요?"

"그래."

카트리나는 맹렬하게 울리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사라진 마을. 천사. 사교.

분명,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강한 확신이 들었다.

112화 조우

'사교도로 추정된다고?'

카트리나가 보낸 갑작스러운 메시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 사교? 자세히 설명해 봐.

메시지를 보내자 재깍 답이 돌아왔다.

- 피 흘리는 천사라는 사이비 교주가 활약. 마을 단위의 실종 사건. 둘의 연관성을 알아보고자 함.

카트리나가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해진 내용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설마 이거였나?'

난 황제가 노르베르쥬에 인위적인 웨이브를 일으킬 거로 예측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노르베르쥬는 몇 달째 평화를 구가하는 중.

'단순한 웨이브가 아니었던 거야? 민간을 통해 은밀하게 무언가를 획책하는 거였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시간 여행을 해 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사교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강력하다.

나는 즉시 카트리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사교에 관련된 건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너는 그만 철수해.

- 오빠. 나도 이제 소드마스터야. 마갑도 입고 있음!

- 알아. 그래도 사교는 위험해. 나조차도 놈들의 한계를 알 수 없다고.

- 확인. 걱정 마. 그 천사라는 놈이 사교랑 관련이 있나 그것만 알아볼게.

난 잠시 미간을 짚었다.

드라키움을 먹은 카트리나는 꾸준한 수련을 통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오러 검술로는 소드마스터. 검기 검술로 익스퍼트 하급.

내가 크시아스를 잡을 때 수준의 강자가 된 것이다. 거기에 마갑까지.

그만하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었지만....

- 그래도 위험해.

- 놈은 신출귀몰함. 지금 확인 안 하면 늦음. 아직 놈이 마을에 머물고 있는지도 불확실. 누군가는 해야 함. 메시지 한도.

메시지가 길어지자 다시 단문으로 끊어서 왔다. 슬슬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한도도 다 된 모양.

나는 고민에 빠졌다.

카트리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피 흘리는 천사라는 놈에 대한 첩보는 나 역시 들어 본 적 있었지만, 정보를 취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니까.

하루는 이 도시에. 다음날은 저 도시에. 계속 장소를 옮겨 다녔고 늘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조사를 진행하기 쉽지 않았다.

내가 일일이 찾아다닐 수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도 맞았다.

내가 또 너무 애들을 과잉보호하는 걸까?

- ...그럼 약속해. 무리하지 않겠다고. 조사만 하고 바로 빠져나와. 뭘 해 보려고 하지 말고.

- 오빠는 날 아직도 어린애로 아나 봐. 알겠어. 약속할게.

그렇게 카트리나와 메시지를 마친 후 나는 즉시 장비를 챙겨 일어섰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직접 디오시아시(市)로 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애마를 타고 전력으로 달려도,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걸리는 거리.

'혹시 모르니까. 대비해 놓자. 지금 근처에 있는 게....'

나는 아티팩트를 조작해 급히 메시지 하나를 보내 놓고 얼른 마구간을 향해 달렸다.

* * *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카트리나는 홀로 마을 안에 들어섰다.

잘츠란이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란센의 경고가 있었기에 일부러 떼어 놓고 왔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홀로 몸을 빼내는 게 더 편했으니까.

"와! 전사님이다!"

마을 입구에서 웬 꼬마가 카트리나에게 달라붙었다.

"전사님 멋있어요! 저도 크면 전사가 될래요!"

이런 걸 보면 도시 최외각의 촌락 지역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도시 내부에서는 감히 전사에게 말을 거는 간 큰 꼬맹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카트리나는 꼬마 아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꼬마야. 너 혹시 요새 유행하는 그 뭐냐.... 종교 들어 봤어?"

"네? 종교요? 그게 뭔데요?"

꼬마의 반응은 아주 로버랜드다웠다. 애초에 종교가 뭔지도 모르는 무신론자의 땅.

카트리나는 피식 웃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피 흘리는 천사라고 했나? 뭐 그런 이상한 사람이 요새...."

움찔.

카트리나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실방실 웃고 있던 아이가 실핏줄이 다 터져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카트리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마 아이뿐 아니었다.

거리를 걷던, 순박하고 착한 웃음을 짓던 마을 사람 모두가 일제히 카트리나를 새빨간 눈으로 노려보았다.

드르륵!

드르르륵!

심지어 집 안에 있던 이들까지 창문을 활짝 열고 카트리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카트리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이 많은 사람에게 들렸을 리도 없는데 그랬다.

'뭐야, 이게.'

오싹.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 카트리나의 등골에 소름이 올라올 정도로 이상한 광경이었다.

꼬마 아이가 말했다.

"천사님은 이상하지 않아요."

"어, 어. 그래. 내가 말실수했어."

"천사님은 이상하지 않아."

"미안. 미안하다, 얘야."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지 않아."

고장 난 시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꼬마 아이.

카트리나가 입술을 깨물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 위해 감각을 돋우었을 때, 돌연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가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돌아본 카트리나는 소름 끼치는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잘생겼는데?'

후광이 비치는 듯한 남자가 허름한 회색 로브를 걸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알 것 같았다.

저자가 '피 흘리는 천사'라 불리는 사이비 교주라는 사실을.

"천사님."

"천사님 오셨습니까."

아주 이상한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트리나를 노려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카트리나는 자신이 꿈을 꾸는가 싶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사람 표정이 어떻게 저렇게 금방 바뀌지?

지금은 선량한 웃음에서 아까의 그 소름 끼치는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카트리나는 교주를 향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건 다소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에 딱 맞는 행동이었다.

란센이 경거망동하지 말라 했으니, 현재 카트리나의 목표는 그저 이 자가 사교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밝혀내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의를 차렸다.

처음엔 종교에 관심이 있는 척 이런저런 대화를 해 볼 생각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를 보고 생각을 바꾼 것.

최대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필요한 정보만 얻어 가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다.

'그 유명한 세례를 받아 보면 확실해질 거야.'

사이비 교주의 세례에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들었다.

카트리나는 그 힘이 사교의 힘인지 아닌지 구분할 자신이 있었다.

사교의 힘을 품고 있다는 크시아스와도 싸워 봤고 괴이와도 싸워 봤으니까.

"아, 세례를 받으러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교주는 부드럽게 웃고는 손짓을 했다.

"바로 진행하지요. 키가 크시니 살짝 고개를 숙여 주시겠습니까?"

"예."

카트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바짝 긴장했다. 온 신경을 일깨우고 교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혹시나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무언가가 있을 경우에는 바로 반격을 가하기 위해.

하지만 교주의 행동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말을 뱉었다.

"진리가 당신에게 임하여. 당신이 눈을 뜨기를."

그러곤 손을 뗐다.

"자, 끝났습니다."

카트리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난하나.

그게 카트리나의 의심을 부채질했다.

"저기, 천사님. 제가 듣기로 천사님은 피로 세례를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러자 교주는 난처한 얼굴로 두 손을 활짝 폈다.

"예. 보통 돼지나 염소의 피를 사용하지요. 하지만 이 마을에서 얼마 전에 크게 세례를 베풀어서요. 그때 돼지와 염소를 엄청 잡았는데 또 잡으면 너무 부담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특별히 더 힘을 써서 축복을 불어 넣었으니 전사님은 안심하십시오."

너무나 정상적인 어투로 말하는 교주.

그 대답에 카트리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카트리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는 그런 카트리나를 생글생글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쩌어어엉!

교주가 섬전같이 뻗어 낸 손을 카트리나는 검을 휘둘러 빛살처럼 쳐 냈다.

검과 맨손이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쇠끼리 부딪친 것처럼 불티가 흩날렸다.

"어떻게 알았지?"

교주.

일명 피 흘리는 천사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카트리나는 쓰게 웃으며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속마음이라도 읽나.... 내가 눈치챈 걸 넌 어떻게 알았는데?"

"속마음을 읽는다."

"...진짜?"

"넌 어떻게 알았지? 그럴듯하게 설명한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성의가 있어야지."

카트리나는 코를 씰룩였다.

소드마스터가 되며 인간을 초월한 감각이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이 마을에서 얼마나 피비린내가 나는 줄 알아? 이건 돼지나 염소의 피 냄새가 아니라 인간의 피 냄새라고.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에 굳이 나에게 하는 거짓말. 뭔가 구린 놈이라는 건 확실하잖아. 대답해봐. 너 사교도지?"

"아.... 그랬나? 역시 소드마스터라는 건, 좀 귀찮네."

천사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잣말을 했다.

"어쩐다. 아직 란센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마음을 정한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하지. 자, 추수의 때가 왔노라."

그 순간,

아아-

아아아-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기묘한 노래를 부르며 자기 눈알을 터뜨리고 뇌를 헤집어 자살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풀썩풀썩 쓰러지는 모습은 비현실적이기만 했다.

"무슨...!"

카트리나는 온몸이 쭈뼛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참혹하게 쓰러진 사람들이 핏물로 녹아 남자에게 흡수되었다.

질퍽한 핏물이 날개처럼 남자의 등 뒤로 드리웠다.

피 흘리는 천사.

어째서 그런 별칭으로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 모습.

그리고, 확연히 느껴지는 사교도의 기운.

카트리나는 분노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란센의 당부를 기억했다.

사교와 직접 충돌하지 말 것.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뒤로 몸을 던졌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 란센에게 보고부터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피 흘리는 천사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안 되지. 아직은 란센이 알게 하고 싶지 않으니. 그대는, 다시 태어나 줘야겠다."

소드마스터인 카트리나가 마갑의 스킬, [돌진]까지 사용해서 몸을 날렸다.

그런데도 피 흘리는 천사는 그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카캉! 카카캉!

카트리나의 검과 피 흘리는 천사의 손이 찰나에 수십 번을 마주쳤다.

흩날리는 불똥 속에서 잠시 뒤로 몸을 빼낸 천사는 손을 쭉 뻗어 카트리나를 가리켰다.

카트리나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자신의 몸을 잠식해 오는 걸 느꼈다.

"흥!"

그녀는 오러를 끌어 올려 그 기운에 저항했다.

소드마스터의 웅혼한 오러가 공명하자 불길한 기운이 깃털처럼 흩어져 버렸다.

피 흘리는 천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말했다.

"역시 안 되는구나. 익스퍼트 상급만 돼도 쉽게 녹질 않아. 그래. 좀 귀찮기는 하다만 이렇게 하면 어쩔 것이냐?"

쿵!

피 흘리는 천사가 발을 구르자, 땅이 흔들렸다.

불쑥불쑥.

그가 미리 땅속에 숨겨 두었던 언데드들이 흙을 비집고 올라와 사방을 포위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도망갈 수 없노라."

천사의 손이 녹아 핏물로 찰랑거리자, 그 핏물 속에서 10마리에 이르는 괴이(怪異)들이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적에게 둘러싸인 카트리나는 거칠게 이를 갈아붙였다.

"미쳐 버리겠군."

마갑을 입은 자신을 뛰어넘는 힘과 속도를 보여 주는 피 흘리는 천사.

거기에 10마리의 괴이.

거기에 사방을 둘러싼 언데드들까지.

'까딱하면 여기서 죽겠구나.'

명백한 위기.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래. 한번 해보자."

이를 드러내고 웃는 카트리나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는 짜릿한 흥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113화 불멸자

우우우웅-!

카트리나가 입고 있는 마갑은 로레인 연구소에서 B- 등급으로 분류되던 마갑이었다.

사실 B- 등급의 마갑을 다루려면 고대 기준으로 최소 익스퍼트 상급은 되어야 했으나 그녀는 억지를 부려 B- 등급의 마갑을 입었다.

고대 기준으로 익스퍼트 하급의 감응력으로는 B- 등급 마갑의 갑령과 감응하기 어려웠지만, 소드마스터에 이르는 압도적인 오러 제어 능력으로 어떻게든 마갑을 다루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피 흘리는 천사와 10마리의 괴이와 수백 마리의 언데드가 자신을 둘러싼 지금.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마갑에 달렸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구아아앙-!

그녀의 마갑이 엄청난 구동음을 뿜어냈다.

그녀는 마력 회로를 통해 신체 능력을 폭증시키는 마갑의 능력을 오로지 민첩성에 쏟아부었다.

거기에 마갑에 내장된 두 개의 스킬, [돌진]과 [반사 신경] 역시 최대로 활성화했다.

속도. 속도. 무조건 속도.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를 끌어 올린 카트리나는 적들의 사이를 뇌전처럼 내달렸다.

에기온 공작가 비전 검법.

돌격검 [사자 질주]

황금빛 오러가 폭발하며 거대한 맹수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촤아아악!

한 마리의 괴이가 잘려나갔다.

거대한 뱀의 형상에, 비늘 대신 작은 뱀들이 빼곡하게 돋아나 있던 놈은 사람으로 치면, 목 어림이 잘려나가며 땅에 떨어졌다.

콰아앙!

땅을 박찬 카트리나가 그 사이를 헤치고 포위를 빠져나갔다.

지금 카트리나의 목표는 승리가 아닌 생환이었으니까.

쏴아아-

하지만 어둠의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고 했던가?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인 카트리나보다 더 빠르게, 피 흘리는 천사의 양손에서 흘러내린 시커먼 핏물이 카트리나의 앞을 막아섰다.

치지지직!

카트리나는 다시 한번 황금빛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핏물의 장막을 찢어발기려 했으나, 핏물은 시커먼 연기를 내며 타오를지언정 잘려나가지 않았다. 질기게 그 자리를 버텼다.

털그덕.

떨그렁.

그녀가 장막에 가로막혀 잠시 주춤하는 사이, 핏물을 헤치며 해골들이 달려들었다.

"무슨 언데드가...!"

생김새만 보면 해골 병사 같았지만, 결코 그렇게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의 증표인 오러 쓰레드를 휘두르는 놈은 애교였고, 매끈하게 솟아오른 오러 블레이드를 찔러 오는 놈도 있었다.

그중에도 압권은,

"고대의 검기? 마도 시대의 시체로 만든 언데드라고?"

그때의 해골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라면 생전에는 대단한 검사였다는 뜻.

그게 남아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토록 오래된 시체를 일으켜 세웠다는 사실은 더욱더 경악스러웠다.

스아악!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고대의 검기가 인지를 가르며 달라붙었다.

해골의 경지가 검아 일체, 또는 검탁에 닿은 것인지, 예비 동작도 없이 번쩍! 하고 치달았다.

파아앙!

카트리나는 땅을 걷어차며 간신히 몸을 빼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흥건했다.

'마갑이 아니었다면 방금 3번은 넘게 죽었다.'

위험할 줄은 알았다.

란센이 오빠가 그렇게 경고했으니까. 사교가 위험한 존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이 정도까지?'

소드마스터이자 익스퍼트 하급인 자신의 무력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대단하다고?

"포기하거라. 너는 오늘 위대한 진리의 일부가 될 것이니."

"미친놈."

카트리나는 이를 갈아붙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미친놈을 잡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자신을 둘러싼 괴이와 언데드들만으로도 상대가 어려운 전력이었다.

하지만 마갑을 최대한 발휘하면 떨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저놈.

도주하려고 할 때마다 사사건건 방해하는 저놈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생환은 요원한 일이었다.

'승부를 걸자.'

카트리나의 마음속에 차가운 결심이 앙금처럼 맺혔다.

운이 좋아서 놈을 죽인다면, 놈이 소환한 것들도 사라지겠지. 그러면 승리다.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치명상을 입힌다면 도주할 수 있는 틈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수많은 적을 뚫고 기기묘묘한 능력을 지닌 저 괴물을 베어야 한다는 건데....

'못 할 것도 없지.'

카트리나는 숨을 크게 빨아들여 아랫배를 빵빵하게 부풀렸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살아서 란센을 보고 싶었다.

란센을 보고 '거 봐, 오빠.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이렇게 너스레를 떨고 싶었다.

[돌진]

[반사신경]

카트리나는 마갑의 스킬을 최대한 발휘하고 다시 달렸다.

마나 하트에서 마나를 아낌없이 끌어 썼다.

단 1분이라도 좋다.

너무 많은 마나를 끌어다 써서 1분 뒤에 마갑이 작동을 정지해도 좋다.

무수한 적들을 넘어.

피 흘리는 천사라는 미친놈을 벨 수만 있다면.

콰르르릉!

황금색 오러 블레이드가 춤을 췄다.

몰려든 괴이와 언데드들은 먹구름처럼 어두웠고, 그 사이를 누비는 카트리나는 벼락처럼 선명했다.

카각!

카가각!

[반사신경]으로도 모든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마갑에 깊은 상처가 패였다.

각반, 견갑, 투구.... 란센이 구해다 주었던 고대의 갑옷들이 찢기고 갈려 나갔다.

잠깐이라도 멈춘다면 사방에서 난도질해 대는 손톱과 칼날에 갈려 고깃덩이가 될 터였다.

'빠르게. 더 빠르게.'

카트리나는 적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방향을 꺾어 댔다.

거대한 촉수를 스치듯 피해 내고.

불쑥 튀어 오르는 방패를 밟고 뛰어오르고.

날카로운 창끝을 비껴 내고.

휩쓸어오는 칼날과 이빨을 튕겨 냈다.

"대단하구나."

피 흘리는 천사는 카트리나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하지만 승부는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넝마가 되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건 카트리나로서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적은 방심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됐다!'

카트리나의 두 동공 속에 황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한 때 한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

지금은 스스로 이름을 버린 자.

피 흘리는 천사라 추앙받는 자.

사실 그자는 전투 경험이라고는 일절 없는 존재였다.

황제 로크슈탈렌 갈로틴의 계획으로 인해, 사교의 세례를 받고 불멸자로 재탄생하였지만, 가진 바 능력에 비해 전투 경험은 일천했던 것.

그랬기에 그는 알지 못했다.

괴이와 언데드들의 사이를 오가며, 헛된 발버둥을 치는 것만 같은 카트리나가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해 적의 대열을 원하는 대로 조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이다!'

찰나.

괴이와 괴이가 카트리나를 쫓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언데드와 언데드가 포위를 위해 몸을 날리는 그 찰나의 빈 공간.

그 빈 공간이 피 흘리는 천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정렬되었다.

카트리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마나 하트에 남아 있는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는 속도로, 적진의 사이를 꿰뚫었다.

수많은 괴이와 언데드 사이를 스쳐 지나며, 카트리나는 순식간에 피 흘리는 천사 앞에 당도했다.

"부질없구나."

피 흘리는 천사는 감탄했지만, 여전히 긴장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미 카트리나에 대한 모든 걸 파악했다고 믿었다.

쏴아아!

그의 왼손이 녹아내리며 전면에 피로 이루어진 방패를 만들었다.

주르르-

그의 오른손이 녹아내리며 불쑥 솟는 피의 창을 만들었다.

카트리나의 오러 블레이드로는 방패를 뚫을 수 없다.

능력을 벗어난 속도로 달리는 그녀로서는 찌르는 창을 피할 수 없다.

관찰을 바탕으로 한 완벽한 계산이었다.

피 흘리는 천사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게 바로, 그의 전투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뿌드득!

힘껏 움켜쥔 카트리나의 애검 위로 검기와 오러가 휘몰아쳤다.

에기온 공작가 비전 검법.

필살검, [혈사자]

두쿵!

카트리나의 심장에서 오러가 폭발을 일으켰다.

그 힘의 파장이 그녀의 사지 혈맥으로 치달으며, 그녀의 혈관과 근육을 쥐어짰다.

울컥!

눈, 코, 입, 귀에서 터져 나오는 핏줄기.

그 대신 한 호흡, 단 한 호흡에 한해 그녀는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혈사자]

그것은 오러로 심장과 전신 혈맥을 자극하여 한순간 막대한 힘을 끌어내는 비술.

하지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그 반동으로 전력이 급감하기 때문에 사실상 동귀어진에 가까운 수법이었다.

쩌어어엉!

한순간 솟구친 파괴적인 힘.

카트리나는 삐죽 솟구쳐 오른 핏물의 창을 급가속하여 피해 냈다.

황금빛의 오러 블레이드로 눈앞을 가로막은 피의 방패를 찢어발겼다.

콰르릉!

피의 방패가 두 동강 나며 폭발을 일으켰다. 증발한 핏물이 자욱한 안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컥...."

그 너머에 있던 피 흘리는 천사가 제 목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방패를 가른 참격이 뒤에 있던 그마저도 베었던 것이다.

"끄륵...."

천사의 두 손 사이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핏물.

목에서 시작한 핏물이 점점 아래로, 아래로 울컥울컥 번지더니, 마침내 그의 상체가 사선으로 잘려 땅 위로 철퍼덕 떨어졌다.

"하.... 하아.... 죽였다."

카트리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짚었다.

"후.... 죽겠네. 일단 복귀했다가 다시 오자."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는 동강 난 적의 시체를 일별하고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크르르르-

'얘네, 왜 아직 멀쩡하지?'

피 흘리는 천사가 소환한 괴이들도, 또 무수한 언데드들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카트리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환자를 죽였는데.... 소환수가 유지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야. 소환자가 안 죽었으니까."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슈르르르-

바닥에 철벅하게 누워 있던 동강 난 육신이 핏물로 화해 녹아내리고, 그 핏물이 다시 솟구쳐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상처 하나 없이 완벽하게 되살아나는 남자.

카트리나는 그만 맥이 빠져서 두 걸음 정도 비틀거리고 말았다.

"살아난다고?"

"그렇게 낙심하지 말지어다. 충분히 대단했으니. 여기서 혈정을 하나 소모할 줄은 나도 몰랐구나."

혈정?

소모?

살아나는 데 제한이 있는 건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카트리나에겐 더는 싸울 힘이 없었다.

'이렇게 죽나?'

[혈사자]를 사용한 반동으로, 지금 그녀는 익스퍼트 하급의 무력을 뽑아내기도 버거운 지경이었다.

그래도,

삐걱.

카트리나는 자신의 애검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그래도 싸우다 죽어야지.

손끝 하나 움직일 힘이 안 남더라도, 얌전히 서서 죽어 줄 수는 없지.

후회는 없었다.

죽음이 두렵진 않았으니.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미안, 오빠. 나도 먼저 가네.'

이미 많은 이들을 잃은 란센에게 또 한 번 못 할 짓을 하게 되었다는 미안함.

그것만큼은 가슴이 아팠다.

"와라."

카트리나는 마지막 미망을 떨치고 두 눈에 환하게 불꽃을 피워 올렸다.

피 흘리는 천사인지 빌어먹을 새끼인지를 향해 검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서컥!

피 흘리는 천사의 목이 허공에서 빙글 돌더니 땅에 떨어졌다.

"어라?"

놀라서 벙찐 카트리나의 귀에 들려온 건 반가운 목소리였다.

"얘 힘은 센데, 싸움은 진짜 못 하네. 아무리 누나에게 정신을 빼앗겼어도. 이리 쉽게 뒤를 잡혀?"

허공에서 번지듯이 나타나는 한 남자의 신형.

카트리나는 알고 있었다. 저런 식의 은신술과 암격을 사용할 줄 아는 가문을.

로도나 후작가문.

카트리나는 항상 잡 기술에 능한 가문이라고 놀려 대고는 했지만, 전투의 의외성만큼은 왕국 제일이었던 가문.

상대의 허를 찔러 죽이는 기살검(欺殺劍)의 주인.

"바렌?"

"어, 누나. 나야. 형이 메시지를 보냈어. 누나 챙기라더라."

바렌의 목소리는 심드렁했지만,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후다닥 뛰어와서 카트리나를 조심스레 둘러업었다.

"근데 보니까 얘 아직도 안 죽었나 봐. 빨리 튀자."

바렌의 말대로였다.

이번에도 괴이들과 언데드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이 잘려 쓰러진 피 흘리는 천사를 보호하려는 듯 그 주위를 둘러싸고 으르렁거렸다.

카트리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아까만큼 금방 살아나지는 않네."

"뭐, 나름 살아나는 데도 제약이 있는 거겠지."

"몇 번 죽이면 안 살아날까?"

"그러지 마, 누나. 나 누나까지 지키면서 싸울 자신 없어."

바렌의 말이 맞았다.

카트리나는 천천히 핏물로 녹아내리며 다시 꿈틀거리는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자."

"응."

바렌은 제 등에 업힌 카트리나를 꽉 붙잡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놓을 수 없다는 듯이.

꽉 잡고, 이를 꽉 깨물고 몸을 날렸다.

잠시 뒤,

카트리나와 바렌이 떠나간 자리에서 피 흘리는 천사가 몸을 일으켰다.

"...혈정을 두 개나 쓸 줄은 몰랐네. 그러고도 놓치다니.... 역시 패왕 란센의 권속들. 위험하구나."

혀를 한 번 찬 그는 미련을 털고 손을 뻗었다.

그의 주위를 지키던 괴이들이 피의 장막으로 변한 그의 손안으로 다시 빨려 들어왔다. 언데드들은 땅을 파고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뭐, 준비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란센이 알게 되었으니 싸움을 시작해야겠지."

피 흘리는 천사는 조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으나 크게 마음을 쓰진 않는 듯했다.

그는 한가롭게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타박타박 홀로 걸음을 옮겼다.

114화 전쟁의 불길

바렌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 피 흘리는 천사 조우. 카트리나 구출. 추가 충돌을 피해 전속력으로 회군 중.

구출.

그 한 단어가 내 망막에 아리게 박혀 왔다.

'위험했구나. 카트리나....'

바렌이 소드마스터가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2달 전에 소드마스터가 된 카트리나보다 늦게, 겨우 1주일 전에 소드마스터가 된 바렌.

카트리나가 위험했다면, 아무리 바렌이라도 소드마스터가 되지 않은 상태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지독하게 강했던 모양이야.'

두 명의 소드마스터.

심지어 마갑까지 입고 검기를 다루는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추가 충돌을 피해'라고 메시지를 보낸 걸 보면 그 둘이 덤벼도 안 됐다는 것이다.

가슴 한편이 찌르르했다.

동생이 죽을 뻔했다.

이건 나의 약점이었다.

나의 나약함과 안일함으로 인해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들을 모조리 잃어 본 나의 역린이었다.

이번엔 카트리나가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흐를 지경.

'빨리 가자.'

어서 녀석들과 합류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박차를 가해 북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여어! 오빠 왔어?!"

내가 카트리나 일행과 마주친 건 그 후로 반나절은 더 지난 뒤, 엘리움시(市) 인근에서였다.

'구출' 되었다던 카트리나는 아주 쌩쌩했고 쾌활했다.

"거 봐, 오빠. 내가 괜찮다고 했지?"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을 정도로.

반면에 바렌은 아주, 매우, 굉장히 저기압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몰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말을 몰아 다가가 카트리나의 손을 한 번 꽉 잡고 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근데 바렌은 왜 저래?"

바렌이 진짜 이상했다. 내가 자기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땅만 보고 있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뭔가 단단히 마음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저 녀석 남들에게 무관심해 보이고 모든 걸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여도, 뭔가 마음에 하나 박히면 저렇게 완전히 빠져들고는 했다.

예전에 자히르를 죽일 때도 그랬지.

카트리나는 그런 바렌을 쓱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잘 오다가 갑자기 저러던데? 바렌! 너 뭐 배 아프냐?"

카트리나의 말에 바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누나가. 죽을 뻔했어."

그 말에 카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이어 오렌지색 머리칼이 팔락이도록 크게 웃어 젖혔다.

"푸하하하! 뭐야. 너 그런 걸 신경 쓴 거냐? 왜 이래? 나 멀쩡해."

바렌의 등을 팡! 팡! 내리치는 카트리나.

그냥 보기만 하는 내 등이 다 아플 지경이었는데도 바렌은 아프지도 않은지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누나가. 죽을 뻔했다고. 내가 며칠만 더 늦게 소드마스터가 되었어도.... 죽었을 거야. 틀림없이."

솔직히 좀 놀랐다.

저 녀석이 자기 속마음을 이렇게 투명하게 드러내는 건 처음 본 것 같았다.

바렌이란 녀석은 어려서도 도통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왕국이 멸망하고 우리 모두가 카슈시로 피난을 오던 때.

그때도 바렌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렸던 것이다.

보기와 달리 예민하고 툭하면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는 녀석.

그런 녀석을 세상으로 끌어내는 데에는 카트리나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

파하하! 웃으며 말 없는 바렌을 끌고 다니고. 퍽! 퍽! 때리기도 하고.

그렇게 바렌은 조금씩 웃음을 찾았고, 말도 되찾았다.

그런 바렌에게 있어서 카트리나의 존재는 특히나 더 의미가 깊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모두 경험이 있지 않은가?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소중한 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그걸 두 번이나 겪었고 그래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바렌도 뒤늦게 실감이 났던 것이다.

카트리나를 잃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그게 마음에 콱! 박힌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했어. 바렌. 네가 키티를 살린 거야."

"...."

바렌은 여전히 입술을 악물고 땅만 쳐다보았다.

"꼭. 복수하자."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는,

"응."

고개를 들고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힘주어 대답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등을 몇 번 더 두드려 주었다.

옆에서 카트리나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허. 참. 짜식."

힐긋힐긋 바렌의 눈치를 살피는 카트리나를 보며 나는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피 흘리는 천사는?"

그러자 카트리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늘 놀랄 일이 참 많네.

카트리나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워낙에 깡다구로 똘똘 뭉쳐 있던 녀석이라.

오히려 남들을 질리게 만들던 녀석이 창백한 얼굴로 몸서리를 치니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되었다.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야."

"직접?"

"응. 영상 기록 장치로 기록을 했거든."

로레인에게 받아 왔던 여러 아티팩트들 중의 하나.

영상 기록 장치.

그걸 사용했구나.

역시 카트리나.

인상만 보면 무지성의 표본 같지만, 사실은 의외로 꼼꼼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길에서 영상을 열람하기는 조금 그랬기에, 우리는 일단 빠르게 말을 몰아 일루나엘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가신들과 동생들을 불러 모으고 카트리나의 기록 장치를 재생했다.

소리와 영상이 허공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와, 씨! 저게 뭐야!"

생글생글 웃던 꼬마 아이와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볼 때는 여기저기서 놀란 비명이 터져 나왔고,

"...!"

"뭣...!"

그 사람들이 제 눈을 찔러 자살할 때에는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들 목소리가 목에 걸린 듯 입만 뻐끔거렸다.

그건 그런 장면이었다.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그저 보는 순간, 생리적인 혐오감과 본능적인 공포가 느껴지는.

저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나는 기록 장치를 끄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후.... 카트리나가 이걸 찍어 와서 정말 다행이다."

모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번 일로 카트리나가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카트리나는 그만큼이나 가치 있는 성과를 만들어 왔다.

"즉시 토벌대를 준비한다."

토벌.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만 이제 문제는....

"영주 중 몇이나 저쪽으로 넘어갔는지가 관건이겠어."

이미 피를 흘리는 천사와 한통속이 된 영주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는 게 문제.

"만약 놈의 편을 드는 영주가 있으면, 그 영주도 참한다. 관용은.... 일절 없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평화를 원했던 나는, 결국 노르베르쥬를 뒤덮을 수도 있는 대전쟁을 결심했다.

* * *

4월 말.

꽃이 피고 뭉클한 바람이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계절.

란센이 노르베르쥬 전역으로 보낸 편지와 영상 기록 수정구가 노르베르쥬 전역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각 영주는 성에서 그 편지와 영상을 보았고, 시민들은 저잣거리에 내걸린 편지와 영상을 보았다.

노르베르쥬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빌어먹을! 역시 종교쟁이는 가만두면 안 된다니까! 다른 영주들은 뭘 하고 자빠진 거야?! 난 우리 도시 잘 단속했다고!"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은 잔혹하고 뻔뻔하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었다.

인간인 이상, 란센이 보내온 영상을 보고 침착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근원적인 공포와 혐오감에 각 도시의 영주들은 치를 떨었다.

"현 시간부로 그 피 흘리는 천사인지 뭔지 하는 놈을 수배한다! 절대로 도시 근처에도 얼씬 못 하게 해! 그리고 그 사이비 종교에 빠진 주민들이 있다면 모두 모아서 격리한다!"

"예!"

종교 자체가 없기에 오히려 피 흘리는 천사라는 자의 행보에 면역이 없었던 노르베르쥬.

그런 노르베르쥬가 변했다.

비상 걸린 벌통처럼 시끌시끌해졌다.

곳곳에 암암리에 퍼진 신앙들을 배척하고 격리하며, 피를 흘리는 천사에 대한 대응 태세를 갖춰 나갔다.

진실이 널리 알려지자, 시민들의 반응은 더더욱 격렬했다.

"저게 뭐야...."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를 헤집는다고?"

"저건 사람이 아녀. 사람이면 저럴 수가 없어."

"그렇지. 괴물한테 이미 몸도 마음도 다 지배당한 거라고."

"그 기적이, 기적이 아니었구만?"

"그렇지. 몸이 낫는 대신 몸 자체를 바쳐 버린 것이었어."

특히 시민들의 충격은 더더욱 컸다.

그들은 직접적인 당사자였으니까.

"허어.... 우리 조카도 몸이 불편해서 그 천사인지 괴물 새끼인지를 찾아갔다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어."

"저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저 동네 영주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나도 까딱하면 세례를 받을 뻔했는데 십년감수했구먼."

사정은 전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칼과 피를 팔아먹고 사는 떠돌이 전사들도, 영주에게 고용되어 정규군이 된 전사들도, 영상을 본 이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뭐야.... 손짓 한 번에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고?"

"시펄.... 내 평생 전쟁터를 굴러먹으며 살았지만 이렇게 끔찍한 건 처음 본다."

살인마, 전쟁광들조차 눈을 질끈 감아 버릴 정도로. 그 영상은 끔찍했다.

어지간한 일로는 뭉치는 일 없이 각자의 이득만을 좇아 살아온 전사들도 이번만큼은 인간으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놈은 바로 쳐 죽여야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놈이야."

부글부글 끓는 노르베르쥬.

하지만 모두가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테베아, 디오시아 등. 피 흘리는 천사가 직접 방문하고 대대적으로 세례를 내린 땅에선 문제가 훨씬 복잡해졌다.

"망할! 괴물의 하수인이었구만!"

"죽여야 해! 저런 사이비는!"

시민들과 전사들이 분노했을 때,

"뭐, 뭐여?!"

"왜, 왜 그래?"

세례를 받은 시민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피 흘리는 천사를 욕보인 자들을 노려보았다.

싸늘한 공포가 저잣거리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켜! 비켜라!"

"영주님 명령이다!"

영주성에서 나온 병사들이 창과 칼로 위협을 하며 저잣거리에 붙어 있던 방과 영상 기록 장치를 거칠게 뜯어냈다.

"뭐야?"

"그걸 왜 가져갑니까?"

"진실을 알려야지요!"

성난 시민들이 항의했으나.

"닥쳐!"

"으악!"

이미 피 흘리는 천사에게 넘어간 영주는 병사들에게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의 창과 칼이 항의하는 시민들의 배에 꽂히고 목을 훑었다.

"히이익! 힉!"

"도망쳐!"

그 무자비한 폭거에 시민들이 도망쳤으나, 병사들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죽여!"

"영상을 본 놈들은 다 죽여 버려!"

어느새 골목을 포위한 병사들이 시민들을 몰아붙이고 창칼을 찔러 넣었다.

"미친! 이건 아니지 않소! 당신들은 사람 아니야?!"

"이런 식이면 나도 가만 안 있어! 영주님이고 자시고!"

그러자 그에 반발한 전사들도 나서서 무기를 빼 들었다.

그들은 보통 남의 일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나서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서.

아니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자꾸 치미는 구역질과 공포를 이기기 위해, 전사들은 떨쳐 일어나 영주에게 칼을 겨눴다.

도시 곳곳에서 시가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소식은 순식간에 노르베르쥬 전역으로 퍼졌다.

"뭐? 테베아의 영주가 피 흘리는 천사에게 넘어갔다고? 시바.... 그럼 그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거잖아?"

인근 도시의 영주들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따르는 영주들에게 강력한 반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한테도 쳐들어올지 몰라! 당장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준비하며, 영주들은 생각했다.

란센의 투자로 성과 요새를 미리 정비해 둬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노르베르쥬 전역에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15화 변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