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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전황 파악

'좋아. 한 건 해치웠고.'

나는 씩-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그대로 신전을 빠져나왔다.

이오딘이 "후배는 상식이 너무 부족합니다!" 하면서 억지로 가르쳐 준 성경 구절을 아주 잘 써먹었다.

셰네릴 녀석의 얼빠진 얼굴을 보니 내 연기가 아주 기가 막히게 먹혀들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흘러넘치는 결의와 투지도 그랬다.

'...꽤 짜릿한데?'

타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거.

표정과 목소리 자세. 그것도 가슴을 웅장하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 직접적으로 흘러나온 굳은 의지는 내 머리를 아찔하게 자극했다.

"성하!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성기사 루이스가 헐레벌떡 나를 따라 나왔다. 그새 다리가 다 나았는지 더 이상 절지 않고 똑바로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에아 > 그거 말하는 건 좀 멍청해도 능력은 어마어마하네.'

힐링필드의 위력엔 솔직히 나도 놀랐다. 잘려 나간 사지까지 재생시켜 줄 줄은 몰랐으니까.

'반경 200m 안의 모든 사람에게 엘릭서에 준하는 효과를 낸다?'

신의 존재를 그 자체로 입증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힘.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그런 대단한 것들이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거냐.'

어쩌면...

'이것도 운명의 책 때문인 건가?'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도 같았지만, 속 시원하게 누군가 '맞다!' 하고 말해 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근데 운명의 책이 13주신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을 해도 이상한 게 또 있었다.

'그럼 시간 여행을 할 땐 왜 11악마가 빛난 거야? 13주신이 빛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체 뭐가 뭔지. 시간 여행을 반복하다 보면 이 의문을 다 풀 수 있을까?

"전황을 살펴보시겠습니까, 성하?"

루이스의 물음에 나는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상념을 일단 걷어치우고 다시 현재에 집중했다.

"루이스."

그래, 성기사 루이스.

이젠 존대를 해 줄 필요는 없겠지?

"예. 성하."

"이 근처에, 은밀하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우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뭐 그런 장소가 있을까?"

"네?"

"그러니까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만큼 지반이 안정적이고 사람들이 잘 기웃거리지도 않을 장소 말이야. 귀한 물건을 땅에 파묻기 좋은 그런 곳."

"아... 예! 있습니다!"

루이스의 눈동자에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독실한 성기사답게 그는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 그럼 거기로 가자."

전황 파악은 이거부터 하고 나서 할 생각이었다.

"예. 앞장서겠습니다, 성하."

나는 루이스의 뒤를 따르며 아공간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드디어.

천고의 영약 드라키움.

그 씨앗이 될 악(惡)의 심장 7개를 땅에 심을 때가 온 것이다.

* * *

'이로써, 이번 시간 여행의 메인 목표는 달성했네.'

성기사 루이스가 안내해 준 곳은 잘 숨겨져 있는 으슥한 동굴이었다. 정말로 안전하면서도 드라키움을 심기에 딱 좋았다.

그곳에 7개의 심장을 묻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꽤 깜깜했다.

사이키델릭문도 어느새 상당히 낮아져서 그 현란한 빛이 아까처럼 하늘을 뒤덮지 못했다.

듣자 하니 애초에 내가 이곳에 떨어졌던 시간이 이미 새벽 5시를 훌쩍 넘긴 때.

이젠 6시를 넘었으니, 곧 동이 틀 시간이었다. 가장 어둡고 가장 추운 시간.

"아, 그런데 루이스."

"예! 성하."

"나 그거 좀 봐도 될까?"

손을 내밀었다.

루이스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검.

그중 하나가 몹시 신경이 쓰였으므로.

"물론입니다. 성하!"

루이스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내가 원하는 검을 끌러 건네주었다.

스릉-

그건... 사실 검으로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길이는 애매하게 짧고 칼날은 무뎠다.

"이게 성검이라고?"

"예. 성하. 신화 시대 때 신의 전사들이 썼다고 알려진 성검입니다."

아,

그랬구나.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했더니. 신화 시대 유물이었어?'

마도 시대의 유물인 줄 알았더니....

이게 성검이라면, 나도 성검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3자루나.

첫 시간 여행을 다녀오고, 일네온 던전에서 우리는 금화와 여러 아이템과 함께 3자루의 검을 발견했다.

그때 다른 것들은 다 잘 써먹었는데, 검만큼은 끝내 쓸 곳을 찾지 못했다.

애매하게 짧고 검날은 무뎠으니까.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성검이었다니....

사실 아까 루이스가 땅 파는 걸 도와줬는데, 그때 그가 성검을 썼다. 꽤 깊이 파야 했으니까.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런 게 3자루라....

'좋은데?'

지난겨울 외투 속에 넣어 뒀던 금화를 발견한 기분.

"고마워. 잘 봤어."

"예! 영광입니다!"

그렇게 신전 앞으로 돌아오니,

"성자님!"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셰네릴이 서성이고 있다가 날 보고 활짝 웃었다.

도도도 달려온 그 녀석의 손에는 웬 예쁜 꽃이 들려 있었다.

유리로 빚은 것처럼 투명하면서도 하늘거리는 꽃.

"성자님. 이거!"

자꾸 까치발을 들길래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췄더니.

"이거 좀 벗어 봐요."

갑자기 로브를 벗을 것을 요구했다.

뭐, 어차피 이제 전투에 나서야 하니 기꺼이 벗어서 루이스에게 맡겼다.

그러자,

"됐다! 이쁘다!"

녀석이 내 마갑(魔甲) 위에 꽃을 달아 주었다.

별다른 고정 장치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꽃의 줄기가 담쟁이처럼 스르르 뻗어 갑옷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옆에서 루이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녕꽃이라는 겁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고 튼튼하기에, 장신구의 소재로 많이 팔려 나갑니다. 이 주변 풍습으로는 기사의 무운을 빌 때 영녕꽃을 선물하지요."

오, 그런 거야?

성기사 루이스가 셰네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 투명한 영녕꽃은 보기 드문 물건인데 어디서 찾아냈느냐."

"헤헤. 만상수에서 일할 때, 하나씩 챙겼어요. 여태 딱 2개. 헤헤."

"허허 그랬느냐. 귀한 것을 성하께 드릴 수 있어서 참으로 잘 되었구나."

"헤헤. 네!"

정말로 내게 줄 수 있어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는 웃음.

처음에 달달 떨어 대던 모습이 떠올라서 지금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셰네릴."

"네! 성자님!"

"이기고 올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셰네릴이 내게 했던 첫 번째 부탁, '사람들을 낫게 해 주세요'는 지켰으니까, 이젠 다음 차례다.

싸워서 이길 차례.

우우웅-

운명의 책은 아까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

꺼내서 펼쳐 보니,

'역시....'

<탐색 > 페이지에 드러난 풍경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래. 이쯤 되니까, 다들 절망했던 거겠지.

그곳에는 십수 개의 붉은 점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더 멀리, 대충 5km밖에는 천천히 회전하는 붉은 소용돌이가 있었고.

붉은 점은 계속 생겨났다.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생겨나고, 둘이 사라지면 또 두 개가 생겨나는... 끝도 없는 혈투가 그 페이지 위로 아로새겨진다.

'이상하긴 했어.'

마을에서 본 기사들은 사실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대개가 익스퍼트 중급 이상에, 상급도 많고 최상급도 꽤 보였는데... 어째서 그리 심하게 당했나 싶었다.

그런데 상대가 괴이(怪異)라면 말이 되었다. 소드마스터에 검기까지 깨우친 나이트 벌슨조차 고전한 괴물이 바로 괴이였으니까.

그래서,

"루이스."

"예. 성하."

"부탁 하나만 하자."

"하명 하십시오."

"적 중에 유독 강력한 개체들이 있지?"

"헛? 어떻게 그걸.... 예 맞습니다."

어떻게 알긴 운명의 책에 빨간 점이 딱 찍혀 있으니까 알지. 여튼.

"놈들을 다 토벌하고 나면, 그놈들 심장은 따로 빼서, 내가 아까 묻은 데 기억하지?"

"네."

"거기에 적당히 거리 두고 심어 줘. 씨앗처럼. 꼭 해 줘야 해."

"핫! 그렇게 악을 정화시려는...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수상한 부탁을 해도 알아서 좋게 좋게 해석을 해 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좋아. 잘만 하면 드라키움을 엄청 많이 수확할 수 있을지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적은 분명 강하지만... 도리어 설렜다.

"고마워. 그럼 전사들 준비되면, 한 번에 치고 내려와. 내가 먼저 가서 요리해 둘 테니까."

"예? 전사들도 곧 준비가 될 것입니다. 같이...."

"응. 준비되는 대로 와. 먼저 길 열어 놓고 있을게."

난 그대로 내리막을 걸었다.

지금 내려가는 곳은 마을 반대편 협곡이었다.

공기 중에 피 냄새와 괴물 노린내가 점점 짙어졌다.

협곡을 따라 모퉁이를 한 번 도니, 전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대열은 흐트러졌고, 다들 고립되어 있고, 상황을 타개할 만한 기사들은 죄다 괴이(怪異)들에게 묶여 있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전장.

하지만 그걸 홀로 지켜내고 있는 전사가 하나 있었다.

가장 선두에 서서 괴이(怪異) 여럿을 도륙 내고 있는 거대한 오크.

'오크? 소드마스터잖아...? 엄청 잘 싸우네.'

새카만 오크였다.

키는 2.7 미터?

거리가 멀어서 여기선 엄지손톱만큼 작아 보일 뿐이었는데도,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태산이 허물어지고 해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싸르르 소름이 돋았다.

괴이(怪異)와 각종 마물(魔物)은 허공을 찢고 나타났다.

그중 절반 이상이 선두에 선 오크를 노렸다.

검은 오크는 그 많은 괴물을 홀로 상대해 냈다.

거대한 양날 도끼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 검붉게 물든 오러로 사방을 휩쓸었다.

거기에 휘말린 괴물들은 쪼개진다기보다는 박살이 나서 흩날렸다.

거대한 맹수의 아가리를 연상시키는 두 개의 도끼.

그 어떤 것도 그 앞에선 갈기갈기 찢겨나갈 뿐이었다.

라이테나 대공이 보여 준 검강과는 조금 달랐지만, 위력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엄청나다....'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세상은 정말 넓어.'

라이테나 대공이 보여 주었던 검강 앞에서 벌벌 떨었던 내 과거가 떠올랐다.

지금은 어떨까?

지금의 나는 저 오크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우르굴락을 보고 계셨습니까?"

등 뒤에서 성기사 루이스가 다가왔다.

이따 전사들 이끌고 같이 오라니까 왜 혼자 온 거야?

"말씀을 전하고 저는 우선 성하를 수행하러 급히 내려왔습니다."

지극정성이다. 정말.

"저 오크가 우르굴락이라고?"

"예. 오크부족의 대족장입니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지요. 지난 3박 4일간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저 자리를 지켰습니다."

3박 4일....

체력이 어마어마하네.

오러로 신체 능력을 뻥튀기하는 현대의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감당이 안 될 거 같은 싸움인데.

그러고 보니 우르굴락은 상당히 만신창이였다. 검은 몸체가 붉은 피로 도색되어 있을 정도.

자세히 보면 팔이나 다리의 움직임도 불편해 보였다.

한계.

그런데도 난 처음엔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투지는 무시무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르굴락이란 이름도 낯이 익었다.

'셰네릴이 기도할 때도 우르굴락을 말했었지?'

불현듯 기억이 났다.

'특히 우르굴락 아저씨요. 아프지 않게. 죽지... 않게. 제발요. 진짜 진짜요.'

셰네릴은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태우면서 분명 그렇게 기도를 했다.

'너... 애들한테도 인기가 많구나?'

그렇다면 살려야지.

이제 전장 파악도 끝났고.

"그럼 루이스."

"예 성하."

"적당히만 따라와. 적당히만, 어차피 계속 따라오진 못할 테니까."

"예?"

일일이 설명해 보아야 입 아프지.

우우우웅-!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오러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반로아의 왕실 검법 [템페스트].

체검(體劍)을 섞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몸을 가볍게 하고, 무게중심을 옮기고, 공기저항을 갈라 내며, 신체를 강화하고 탄력적으로....

거기에 마갑의 스킬 [가속]까지.

아마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거다.

파아아앙-!

땅을 박차는 순간, 훅-! 눈앞의 풍경이 한 장의 종이처럼 얇게 압축되었다. 나는 그걸 찢고 저 너머 끝에 단숨에 닿았다.

무너지고 있는 전장을 뒤집기 위해.

여태까지 마을을 지킨 영웅, 우르굴락을 살리기 위해.

#94화 길은 뒤에 있는 것

투욱!

땅을 한 번 밀어 차고,

투욱!

다시 밀어 차니,

멀리 보이던 전장이 벌써 코앞.

'일단 이쪽을 치고... 저기까지 길을 낸다.'

머릿속으론 이미, 길을 명확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어떤 괴물을 먼저 죽여야 할지, 어디서 어디까지 길을 내야 할지. 저 드글드글한 괴물무리를 어떻게 흩어 놔야 아군이 씹어 삼키기 좋을지.

결론은 금방 나왔고, 결론을 내린 순간 이미 나는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검아일체(劍我一體).

뜻이 일었을 땐, 이미 내 칼이 베고 지나간 다음.

쿠우우웅!

철혼의 오러가 검푸르게 타올랐다.

한 번 땅을 찍을 때마다, 괴물을 조각내고 하나의 길을 뚫어 냈다.

"흐억...! 방금 그건?"

얼빠진 아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또 한 번 쿵! 땅을 짓밟고 뛰었다.

'일단 후퇴하는 아군들부터.'

후방은 지옥이었다.

공포에 질린,

피로에 찌든,

부상이 심한...

아군들이 후퇴를 할 때, 허공을 찢고 나온 괴물 무리는 그런 아군들을 잡아먹었다.

"미안...."

누구에게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사과가,

"...전 할 만큼 했어요...."

눈물 어린 고백이,

"안 돼. 안 된다고!!"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절규가, 내 귀에 들리고 내 눈에 보인다.

극한에 이른 소드마스터의 감각은 이 지옥을 여과 없이 느끼게 해 주었다.

콰아아앙-

발을 굴렀다. 등 뒤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어...?"

노년의 기사를 짓누르던 마물을 조각냈다.

"사, 살았다!"

젊은 기사를 끌고 가던 괴이(怪異)를 두 조각내고 관통했다.

뒤엉킨 실을 풀어내듯이, 괴물을 지우고 퇴로를 열었다.

어느새 여명이 비치는지 어둑하던 공기가 푸르게 밝아 왔다.

괴물 무리는 검푸른 폭풍에 휩쓸려 부스러졌다.

'이쯤 하면 되었나?'

후방은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괴물들은 지리멸렬했고, 아군들은 길을 찾아 안전하게 후퇴했다.

이젠 전장의 중심으로 파고들 차례.

쿵!

힘껏 땅을 차고 달리는데,

푸른 새벽 공기 사이로,

"이거 놔! 후퇴 안 한다니까!"

"시끄러! 이나파르 경의 명령이야!"

"일단 다친 심령이랑 내상부터 회복하자고!"

막 난전 속을 빠져나와 후퇴하는 3명의 기사가 보였다.

"놓으라고! 우르굴락이 죽는다고!"

"네가 있어도 도움 안 돼!"

갓 어린애 티를 벗은 소녀 기사가 다른 2명의 기사에게 꽉 붙들려서, 강제로 후퇴당하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 3박 4일째야! 우르굴락은 한숨도 쉬지 않고 싸우고 있다고! 빠질 거면 너희나 빠져!!"

"너도 같이 빠져야 된다고. 이 고집불통 꼬맹아!"

근데... 저 고집쟁이 꼬마 기사.

눈에 익었다.

'지금이... 루세라스력 4663년이면.'

딱 14살이네.

그래. 저 여자아이처럼.

금발에 파란 눈.

아직 어려서 얼빵한데, 또 표정은 기사답게 날이 서 있는. 그래서 귀여운.

나 안다. 저 사람.

반가워라....

"이오딘. 여기서 뭐 하냐?"

후방과 전장의 중심 사이.

나는 진격을 잠시 멈추고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내 선배. 이오딘 세롬.

"어?"

내가 몰아온 폭풍 속에 꼬마애의 금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14세의 이오딘이 나를 돌아보았다.

* * *

그녀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너 뭐야? 나 어떻게 알아?!"

이오딘? 이오딘이 누구야? 하면서 수군거리는 기사들을 보니, 여기선 제 신분을 속였나 보다.

천하제일검 라이테나 대공의 제자라는 대단한 신분을.

"수호 기사가 있을 텐데? 어디 두고 왔어?"

"너 뭐냐고?!"

거 선배. 어릴 땐 영 버르장머리가 없으셨구만? 어른한테 반말이나 찍찍 하고 말이야.

왠지 웃겨서 한마디 하려는데,

"무엄하다! 성자님께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황급히 내 뒤를 쫓아온 루이스가 호통을 쳤다.

덕분에 분위기는 급변했다.

"성자님? 그럼 방금 가호를 내려주신...?"

"아, 어쩐지 갑자기 저주에 저항하기가 쉽더라니.... 성자님께서?"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군례를 취했다.

갑자기 눈이 동그랗게 변한 이오딘도 어버버 군례를 따라 했다.

"이오딘."

"예, 예! 성자님."

당황한 그녀.

난 아공간 목걸이에 손을 집어넣으며 명령했다.

"입."

"예?"

멍청하게 벌어진 그 입으로 달콤한 고대의 간식 하나를 톡, 밀어 넣었다.

"읍?!"

이오딘은 당혹스러워하며 입에 들어간 걸 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저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연기처럼 흩어지거든. 달콤하고 향기로운 기운만 스르르 남기고 말이야.

"달지? 정신이 번쩍 들지?"

"예? 예.... 예?"

"그치만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예? 그건 성자님이...."

또 나불대는 이오딘의 입에 작은 유리병 하나를 붙여 주었다.

턱을 톡, 밀어서 쭈욱 넘기게 해 주었다.

"꿀꺽! 컥! 뭐, 뭡니까?!"

"최상급 포션."

"네?!"

작게 소분한 것이지만, 어쨌든 최상급 포션은 최상급 포션.

이거면 지금 입은 부상쯤은 완치될 거다.

"이제 싸울 수 있을 거야. 싸우고 싶을 때 싸워야지."

그게 그녀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의 어린 선배에게 내 검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어... 엇,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받아먹지 말고."

"아니, 그건 성자님이...!"

"이오딘."

"예?"

느껴지는 기세로 봐서 이오딘은 지금 익스퍼트 하급이었다.

입문하기 어려운 고대의 검술인데... 14살에 익스퍼트 하급이란 건 정말 천부적인 재능.

그런 선배에게 좀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미리 보여 주고 싶었다.

"싸우려고 들지 마."

이오딘의 눈이 동그래졌다. 파란 눈동자가 큼지막하다.

"적을 보지 말고, 검과 너의 내면에 집중해. 적은 무대일 뿐이야. 중심은 네 안에, 그리고 네 손에 들린 검의 영혼 속에. 그 아득한 세상을 펼쳐 보인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적을 대해."

이건 나의 깨달음이었다.

체검(體劍)을 깨달았을 때의 그 감각을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아...."

무언가를 느낀 듯이 차분해지는 그녀의 얼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싶을 때 나는 덧붙였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수호 기사 옆에서 딱 붙어 싸워."

"아, 하지만, 이나파르 경은 지금...."

뒤를 흘깃 돌아보는 이오딘.

아, 경호를 맡은 게 이나파르 경이었어?

난 글로잉스틸에서 보았던 단단한 인상의 고위 기사를 떠올렸다.

지옥도가 펼쳐진 전장.

그 난전 한복판에 이나파르 경이 보였다.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해도, 저 수라장을 뚫고 들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

하지만....

"길은 내가 열게. 그러니까 이나파르 경 옆에 딱 붙어서 싸워. 그게 내 조건이야. 안 그러면 신전으로 돌아가."

"길을 연다고요? 길이... 없는데요?"

없기는.

잘 따라오기나 해라. 선배.

"길은, 걸어가고 나면 그 뒤에 있는 거라더라."

나는 마지막으로 루이스와 눈을 마주쳤다.

이오딘을 지켜.

내 속삭임에 루이스는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아쉽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또 보자고. 선배.

쿠웅-!

땅을 찍었다.

폭풍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아군에게로, 또 저주받을 괴물에게로 이어지는 선을 그었다.

아득히 초월한 감각은 신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분류하고 파악했다.

전방에 세 명의 기사가 느껴졌다.

"제발! 안 돼!"

"카멜!!!"

그래. 너희 셋은 친구구나?

콰아아앙!

흩어지는 잿빛 살점과 피.

카멜이란 기사를 끌고 가던 괴물은 조각조각 나서 허공에 뿌려졌다.

"어...?"

벙찐 카멜과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는 두 친구.

후드득-!

그 위로 떨어지는 잿빛 피와 살점.

지나쳤다.

"사, 살려 줘! 더는... 나, 나는... 으아아악!"

겁에 질려 도망치는 어린 기사의 얼굴엔 영원히 그 자리에 주조되어 결코 풍화되지 않을 것만 같은 공포가 새겨져 있었다.

쩌저저정!

나는 흩날리는 오러 쓰레드로 그 일대의 괴물을 일제히 쓸어버렸다.

"어.... 어어...?"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어린 기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얼굴에는 여전히 두려움, 공포.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꽉 잡고, 그의 연한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럴 수 있어. 괜찮아. 가서 좀 쉬어. 쉬다가 진정되면 다시 싸우자."

툭-

투구를 한번 만져 주고,

지나쳤다.

지나치고, 지나치고, 지나쳤다.

고립된 아군들 사이로 길을 내고, 적들을 갈기갈기 찢어 흩어 버렸다.

그 끝에 도착한 것은 이나파르 경.

이 전장에는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가 여럿 있었으나, 이나파르 경은 세계 최강 호라이즌 기사단의 고위 기사였다. 같은 최상급이어도 그 안에서의 격이 달랐다.

아마도,

저 앞의 검은 오크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기사.

그리고 가장 뛰어난 지휘관.

"내가... 더! 더 해야...!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를 불사르며 무리하는 그 기사의 옆에서, 나는 쿵! 발을 찍고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억!

최상급의 검기와 합쳐진 오러 블레이드는 두 마리의 괴이(怪異)조차 단숨에 베어 버렸다.

반로아의 기운에 불타오르는 괴물들,

이나파르 경의 얼굴에 새하얀 불꽃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나는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당부했다.

"병력을 결집시키고 대형을 유지해. 곧 증원군이 올 테니까. 버텨."

"예, 예?"

"그리고 지켜. 반드시. 이오딘을. 당신의 임무를 완수하라고."

"예? 아니.... 당신은 누구...."

대답할 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내 시선이 꽂혀 있는 곳은 저 앞. 홀로 무수한 괴물과 드잡이질을 벌이는 거대하고 검은 오크의 피투성이 등.

이나파르 경은 그래도 내게 뭔가를 물으려 했으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곧 그 의문을 덮어 버렸다.

"저기 검푸른 폭풍이 바로 성자님이다! 성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나를 따라오던 루이스였다. 그는 성검을 뽑아 든 채였다. 성물에서 신성력을 전달받는다는 성검은 찬란한 서광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제 길이보다 1미터는 더 넘게 뽑아내고 있었다.

익스퍼트 상급인 루이스가 최상급 이상의 활약을 보일 정도로, 성검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와아아아아-!"

"성자님이다! 성자님이 함께하신다!"

살아남아서 다시 대형을 이루기 시작한 아군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돌격!"

"저주받은 것들을 토벌하라!"

"성자님을 따르라!"

때마침 신전에서 치유를 받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협곡을 따라 밀려 내려왔다.

내가 먹기 좋게 대형을 흐트러뜨린 괴물들을 찔러 죽이고 밟아 죽이며.

그래. 이제야 좀 싸워 볼 만하겠네.

"당신이... 성자님?"

화들짝 놀라는 이나파르 경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땅을 박찼다.

콰아아앙!

적을 찢어발기고 아군을 이어 주며 앞으로, 앞으로, 마침내 최선두에 섰다.

그곳에 거대한 오크가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엄청나네.'

태산 같은 체격. 산맥 같은 근육이 용암처럼 꿈틀거리며 하얀 증기를 뿜어냈다.

뜯겨 나가고 뚫린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그림자 사이사이로 여기저기 빛이 비쳐 들 정도였으나, 흉포한 투기와 기백이 그 빈 자리를 모두 메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내가 다가온 것을 느꼈는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건넸다.

"네가 성자인가?"

검은 오크, 우르굴락의 목소리는 지진처럼 낮고 우렁우렁했다.

그는 한번 킁! 하고 콧김을 내뿜더니.

콰콰콰쾅!

돌연 온 힘을 쏟아 사방으로 두 개의 도끼를 난자했다.

검붉은 검강이 크게 부풀며 일대를 찢어발겼다.

거대한 용이 공간을 통째로 씹어 삼키는 듯한 일격에 양옆의 협곡이 부스러지고 지반이 내려앉았다.

그를 붙들고 있던 다섯 마리의 괴이(怪異)가 갈기갈기 찢겨 흩어졌다.

'...뭐야? 이 터무니없는 위력은.'

솔직히,

좀 충격적인 무위였다.

#95화 우르굴락

'소드마스터급이 맞았네.'

그렇지만 지난번 라이테나 대공이 보여 준 충검(充劍)과는 달랐다.

그때 내가 그의 검에서 보았던 것은 '검' 그 자체에서 파생한 듯한 어떠한 개념이었다. 나는 그걸 '죽음'이라고 느꼈고.

검과 검사의 의지가 서로 꼭 맞게 합일을 이루어 서로의 영혼을 정제시키고 한없이 응축시킨 것.

검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파생시키고 마침내 형상화한 것. 그것이 라이테나 대공의 강기였다.

반면에 지금 우르굴락이라는 오크가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런 정제된 의지가 아니었다.

도리어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

도끼와 합일을 이루었다기보다는 자신의 넘치는 본성을 도끼에 때려 박아, 도끼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물들인 무언가.

'의지를 무기에 실었다는 면에선 충검과 같지만, 그 의지가 무기의 영혼과 합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충검과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충검(充劍)에 딱 반만 걸친 경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힘이 검강에 비해 손색이 있는 건 또 아니었다.

무기의 영혼 따위 필요 없다는 듯, 제 스스로의 영혼의 힘(영력)을 극한까지 키워 휘두른, 압도적인 폭력.

사방을 뒤덮은 검붉은 오러가 그 증명이었다.

오러 심법을 연공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의지에 자연스럽게 이끌린 마나만으로 저토록 강맹하고 거대한 오러를 빚어낼 수 있다니.

고대의 검술은 확실히 천장이 높았다. 한 단계 한 단계 경지가 오를 때마다 터무니없이 강해지는....

나 역시, 고대 기준으로 익스퍼트 최상급이었고 현대 기준으로는 소드마스터의 극에 달했지만, 그런 나도 저 오크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고대에는 익스퍼트 최상급과 소드마스터 사이의 무력 차이가 터무니없이 아득했다.

물론 내가 마갑까지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겠지만....

"킁!"

지금껏 홀로 최전선을 지켜 낸 우르굴락이 콧김을 세게 뿜으며, 등 뒤로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험상궂게 튀어나온 사각 턱에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그는 씨익 웃었다.

"반갑다. 우르굴락이다. 왔으니 부탁하는 건데, 나 딱 5분만 쉬게 해 주지 않을래?"

호쾌하다.

이 오크.

방금의 일격은 분명 강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무리를 했던 게 분명했다.

3박 4일을 쉼 없이 싸워 놓고, 온갖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저런 기술을 쓴다?

아마 지금 당장 혼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휴식이 더없이 간절하겠지.

그런데도 우르굴락의 말투는 아주 가벼웠다.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5분? 그걸로 될까? 너 지금 배랑 가슴에 뚫린 구멍이 다섯 개가 넘어."

"크흐- 이 정도쯤이야."

참내.

오크식 허세인가?

웃으며 최상급 포션을 하나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회복이 필요하십니까?]

머릿속으로 성물 <에아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아?"

[네. 에아. 대기 중입니다.]

"회복이 가능해?"

[40km 내에서 에너지 전송이 가능합니다.]

아, 그 말이 40km 내에선 얼마든지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거였어?

"그럼 회복시켜."

[네. 타게팅 완료. 힐을 전송합니다.]

파아아앗!

곧장 우르굴락의 몸이 환한 빛으로 타올랐다.

"어?"

그는 순식간에 아무는 자신의 상처를 보며 내게 물었다.

"이게 그쪽 능력?"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가 또 씨익 웃었다.

"죽이네. 성자."

오크라는 종족은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힐 완료. 다만 내부에 파편화된 마나가 들끓고 있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안정화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심령에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 역시 제 능력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이제 보니 <에아 >의 능력은 외상 한정이었다.

내상까지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는 엘릭서랑은 차이점이 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우르굴락을 살폈다.

"너 5분으로 안 되겠는데? 내상도 입고 심령에도 타격을 입은 거 같은데...."

"오~ 성자의 눈엔 그런 것도 보이나?"

우르굴락이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뭐 이 정도쯤이야. 영광의 상처지."

"영혼에 난 상처는 위험해."

"그게 그거지."

"그러다 죽어."

설령 죽지 않더라도 두고두고 고생하게 되지. 내가 잘 안다 그건.

하지만 우르굴락은 태연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글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아?"

어디서 거짓말을.

난 지금 그의 의지를 아주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상처를 입어서 그런지, 원래 오크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의 의지가 전혀 통제되지 않고 콸콸 흘러넘쳤으니까.

그 대부분은 투지였으나, 그 가운데에는 분명한 두려움이 뿌리박혀 있었다.

우르굴락은 내 지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두렵지. 하지만 죽는 건 두렵지 않다."

"그럼?"

"내가 아는 사람들이 죽는 게 두렵지."

아,

"마을이 사라지는 게 두렵지. 그래서 셰네릴 같은 아이들이 친구가 없어지는 게 두렵다. 애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웃지도 못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그게 두렵다고."

우르굴락은 씨익 웃으며 내 가슴을 한 번 가리키고 자기 가슴을 한 번 가리켰다.

이제 보니, 가슴까지 늘어진 그의 원석 목걸이에 투명한 영녕꽃 하나가 달려 있었다.

내 마갑에 매달린 영녕꽃과 똑같은.

"셰네릴한테 받은 거지? 그거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건데. 너 좋은 인간이구나? 성자."

동감이다 우르굴락.

너도 좋은 오크인 거 같다.

방금 이 녀석, 오크들의 성소라는 올옴니마는 언급도 하지 않았거든.

"애들이 웃지 못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게 두렵다?"

그 한 마디는 꼭 내 마음속의 말과 같아서....

하, 거참, 싸울 맛 나네.

"받아."

"어. 고맙다."

상급 포션 하나를 우르굴락에게 던져 주었다.

저거면 내상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겠지.

반로아를 힘껏 틀어쥐었다.

어느새 새로운 괴이(怪異)들이 허공을 찢고 나타나고 있었다.

"5분이랬지?"

"그래."

"10분 줄게."

"어?"

"10분만 딱 쉬고 다시 싸워라."

"그러지."

"푹 쉬어 둬. 10분 뒤엔 다시 너 혼자 싸워야 될 테니까."

"응? 너는? 어디 가나?"

나?

"난 이 사단을 일으킨 놈들을 죽여야지."

이 임무 예상 소요 시간이 3일이었던가?

사교도의 의식이 3일 동안 진행되는 모양이지?

그걸 얌전히 앉아서 다 기다려 줄 마음 따위 없었다.

의식을 견디는 게 아니라, 의식을 행하는 놈을 잡아 죽인다. 그편이 좋잖아?

"빨리 끝내고 쉬자고."

우우웅-!

반로아의 칼끝을 타고 검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부풀어 올랐다.

* * *

10분.

나는 등 뒤의 우르굴락을 지키며 딱 10분 동안 새로 나타난 괴이(怪異) 두 마리와 마물 수백 마리를 참살했다.

"10분 지났어."

우르굴락.

이 거대한 오크는 나를 완전히 믿는 건지, 아니면 신경줄이 무식하게 굵은 건지, 그 10분 동안 아예 대자로 뻗어서 코를 골며 잠을 잤다.

"크륵… 킁! 아, 벌써 10분인가? 킁! 잘 쉬었다!"

"그래. 이제 부탁할게."

"오냐. 앞만 보고 가라. 사교도놈들. 손 놓고 당할 놈들은 아니니까."

이거 걱정 맞지?

기분 참 이상했다.

내 시대의 오크는 그저 괴물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런 오크가 날 걱정해 주는 모습을 다 보다니.

난 피식 웃고 목적지를 노려봤다.

협곡이 끝나는 곳, 그 너머의 한 언덕.

운명의 책이 바로 저곳에 붉은 소용돌이를 표시했거든.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겠지, 뭐.

끝없이 태어나는 괴물.

쏟아지는 저주.

그게 이유 없이 시작된 건 아닐 테니까.

저곳에서 사교도의 의식이 벌어지는 걸 테고, 그걸 뒤집어엎으면 싸움은 거기서 끝이 날 거다.

우리의 승리로.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당히 멀긴 해도, 내 감각이라면 뭔가가 걸리는 게 당연한데....

아무리 보아도 그저 평범한 언덕이었다.

하지만 난 운명의 책을 믿는다.

저곳에, 이 모든 원흉이 존재한다.

"다녀올게."

마갑의 스킬, [가속]

왕실의 돌진기, [템페스트]

파아아앙-!

전력 질주로 달렸다.

땅을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멀리 있던 작은 언덕이 불쑥 불쑥 제 몸을 키웠다.

3km 앞.

그리고,

2km 앞.

그때까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찌이이익!

돌연 허공이 무슨 사람 피부처럼 쭉 갈라졌다.

그 안에 보이는 것은 새카맣고 혼탁하고 꿈틀거리는 무언가.

찌이이익!

찌이익!

찌익!

사방에서 허공이 찢겼다.

그리고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온갖 흉측한 것들.

어떤 것은 사마귀를 닮았고, 어떤 것은 돼지머리와 양 머리, 그리고 소머리 같은 것이 여기저기 불쑥 튀어나와 있었고, 아예 형용하기 어려운 부정형의 촉수 같은 것과 그림자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래. 이 방향이 맞지?'

되레 안심이 되었다.

온갖 괴이(怪異)와 마물들이 내 앞을 가로막는 걸 보면, 저 너머에 사교도들이 있는 게 확실했다.

반로아를 뽑았다.

[검령각성]

소드마스터의 극한에 이른 오러에 최상급에 도달한 검기를 덧씌웠다.

콰가가가각!

하얀 불꽃이 세상을 뒤덮었다.

반로아에게 찢긴 괴물들이 새하얗게 불타 흩날렸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괴물들을 자르고 쪼개며 달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괴물이 새로 허공을 찢고 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쩌어어엉-!

때론 내 오러와 검기를 튕겨내는 강력한 괴이(怪異)도 있었다.

쿠드득!

잘리면서도 밀고 들어와 기어코 아가리를 벌리는 놈도 있었다.

푸슉!

땅으로 스며들어 내 발밑에서 솟구치는 놈도 있었다.

그놈들에게 밀려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던 나는, 결국 목표 지점을 1km 앞두고 멈춰 서고야 말았다.

'힘드네....'

괴물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주가 갑자기 지독해졌다.

넓게 퍼져 있던 저주를 오직 나 하나에게 집중시킨 것처럼.

눈앞이 번뜩거렸다.

피부가 간질거렸다.

귀에서 환청이 쿵쿵거렸다.

그 저주를 버텨 내느라, 내 정신력과 영력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여기서 승부를 걸어야 하나?'

내 마갑에 각인된 스킬은 총 네 가지.

[가속], [실드], [검령각성],

그리고 [스톰 블레이드]

현재 이 중에 내가 사용한 것은 [가속]과 [검령각성] 둘뿐이었다.

'방어는 [실드]로 떼우고, 나머지 모든 힘을 공격력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스톰 블레이드]까지 쓴다면....'

스톰 블레이드는 광범위한 범위를 파괴시킬 수 있는 최강의 공격 스킬.

그거면 뚫을 수 있다.

한 번에 뚫고, 단숨에 목표 지점까지 달린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몰려 있으니 되레 좋구만!"

등 뒤에서 거대한 존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를 뛰어넘었다.

콰아아!

검붉은 오러가 해일처럼 정면을 휩쓸었다.

괴물들이 썩은 통나무처럼 쩌억 쪼개졌다.

녹색의, 잿빛의, 파랗고 붉은, 갖가지 색채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어이 성자! 내 뒤에 딱 붙으라고!"

우르굴락이었다.

네가 왜 여깄... 어? 넌 후방을 지켜야지.

"어차피 뒤에 있어 봐야 할 게 없어서 왔다! 네가 괴물들을 다 쓸어가서 지금 뒤는 널널하다!"

우르굴락은 쾌활하게 웃으며 쌍도끼로 사방을 짓이겼다.

결코 멈출 수 없는 산사태처럼, 괴물들을 쓸어버리며 앞으로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니 그러다가 내상이 두고두고 굳어진다니까....

진짜 못 말릴 오크였다.

#96화 돌파

전신전령(全身全靈).

우르굴락의 도끼질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도끼질 한 번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걸어 버린 공격.

쭉 뻗은 촉수가 몸을 꿰뚫어도, 갑자기 튀어나온 송곳니가 어깨를 뜯어도, 우르굴락은 멈추지 않았다.

저게 지금 심령을 다치고 내상을 입은 전사가 보여 주는 무위가 맞나?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너 그러다 죽어. 우르굴락."

녀석은 크하하 웃었다.

"인간은 머리가 나쁜가?"

아, 그래. 죽는 건 무섭지 않댔지....

지금 우르굴락은 하얀 톱날 같은 이빨을 빛내며 웃고 있을 거다.

녀석은 내게 선봉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끙차!

용을 쓰며 우르굴락은 또 한 차례 괴물의 파도를 찢어발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안 도와줘도 나 혼자 뚫을 수 있었어."

"그럼 그 힘, 아껴 둬라...! 크하!"

하기야.

아끼면 좋지.

저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500m, 300m, 마침내 100m.

우르굴락을 따라 언덕에 올라서는 순간, 드디어 보였다.

사교도 무리와 그들의 제단이.

역시 진짜 있었구나!

우르굴락의 전진도 이쯤에서 저지당하고 말았다.

"쿨럭...!"

천둥 같은 기침 소리와 함께, 그의 발밑으로 시커먼 피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간신히 버티고만 서 있는 우르굴락.

이마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에아."

[네. 힐을 전송합니다!]

우르굴락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 되지. 진짜 문제는 내상과 심령의 타격일 테니까.

내상은 체내의 오러가 날뛰어서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것이고, 심령의 타격은 힘의 근원인 영력 자체가 손상을 입는 것이다.

지금 우르굴락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마도 시대의 기술이라 해도 최소 10년은 제대로 정양을 해야 나을까 말까.

아니면 엘릭서를 먹거나.

그러니까...

"고맙다."

덕분에 진짜 힘을 아꼈다.

"크흐.... 가라. 네 차례다."

그래. 내 차례지.

저기, 제단 앞에서 기도하는 사교도 무리.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사교도들의 형상은 기이했다. 본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미 사람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어떤 자는 번쩍거리며 빛과 그림자로 흩어지고 있었고,

또 어떤 자는 손가락과 발가락과 혀, 심지어 눈알까지도 문어 다리 같은 촉수로 변해 가고 있었고,

어떤 것은 두꺼비처럼 부풀어 오른 제 배를 팡팡 두드리며 북소리를 냈다.

그들은 빛을 뿜고 사방을 더듬고 소리를 내며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 늦었다. 늦었어.

- 아아 초월이다. 이것이....

- 허물을 벗고 진정한 존재로....

사교도들의 환희가 내 귓구멍을 간지럽혔다.

대체 뭘까?

사교라는 건.

뭔데 이토록 흉측하고 역겹고 불길할까.

특히 저 제단.

그 위 떠올라 있는 게 너무나 끔찍했다.

처음엔 툭, 잘린 거대 문어의 다리 같은 거라 생각했다.

잠깐이지만 그렇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런 게 아니다.

저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상상의 너머에 놓여 있으며,

함부로 엿보려 했다가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언가.

그런 오싹함과 끔찍함, 혐오감과 공포만이 밀려들었다.

'부숴야 해.'

발작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것을 부숴야 한다.

부숴야 한다.

파아아앙!

땅을 박찼다.

그동안 아낀 힘으로 남은 100미터를 단숨에 뚫고 나아갔다.

마지막 괴물 무리를 돌파하자 사교도들이 직접 내 앞을 가로막았다.

번쩍이는 것들이, 더듬는 것들이, 소리 내는 것들이...

이미 변질될 대로 변질되어 인간의 원형을 잃은 그것들이...

내 눈, 귀, 코, 혀, 피부,

그리고 내 영혼 속으로...!

일제히 저주를 퍼부었다.

온 세상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일었다.

아.... 지금까지 견뎌 온 저주는 그냥 애들 장난이었구나.

이게 진짜 저주구나....

우우우웅-!

반로아가 미친 듯이 울어 대며 내 혼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터벅터벅.

한 걸음. 한 걸음.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뜻이 있으면 이미 그곳에 닿아 있는 검아일체.

그게 아니었다면 한 걸음조차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걸으며 간신히 힘을 모아 입술을 움직였다.

"에...아...."

[네. <에아 > 대기 중입니다.]

"생츄어리...."

[네 사용자를 중심으로 일대의 침리(浸理) 현상을 해소합니다.]

쏴아아아-!

어디선가 전달된 힘이 내 몸을 찬란하게 물들였다.

그 빛 속에서 뒤틀리던 시야와 꾸물거리던 감각과 먹먹하던 귀가 차츰 해소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잔뜩 취한 것처럼 어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생츄어리를 발동하고도 이 정도라니. 정말 지독한 저주였다.

그래도 간신히 찾은 한 줌의 여력으로 나는 반로아를 휘둘렀다.

[실드]

[검령각성]

[스톰 블레이드]

여력이 없었기에 그저 마갑의 스킬에 의존하여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처음으로,

마갑이 가진 가장 강력한 스킬 [스톰 블레이드]까지 발동시켰다.

콰아아아앙-!

죽다 살아난 기분.

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자욱한 연기를 걷어내듯이 혼란스럽던 감각이 일순간에 툭! 트였다.

'이게 [스톰 블레이드].'

사방을 휩쓰는... 아니, 아예 갈아엎어 버리는 바람과 검기와 오러의 칼날이 보였다.

그 안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사교도.

카가가가각!

모든 것이 쓸려 나갔다.

수십 명의 사교도 무리도.

제단도.

하지만 그 위에 떠 있던 알 수 없는 문어 다리 같은 것만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톰 블레이드가 아무리 그것을 할퀴어도 물에 비친 달을 베듯이 잠시 일그러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우르굴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 돌아 버리겠군."

사교도들이 갈려 나간 덕분인지 주변에 들끓던 괴물들은 어느덧 연기처럼 흩어진 다음이었다.

"저거, 나도 벨 수가 없다. 지금은... 힘이 부족해. 잘못 건드렸다가는 되레...."

죽는 게 두렵지 않다던 그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꾸물꾸물.

스톰 블레이드에 조각났던 사교도들의 몸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죽은 줄 알았던 그들의 목소리가 내 귀를 어지럽혔다.

- 저것은 그분이 남긴 일부.

- 닿을 리 없지. 열등한 존재야.

- 베지 못하는 이상, 우리도 죽지 않는다....

우르굴락이 길게 탄식했다.

"너무 늦었나.... 사교라는 게... 이토록이나 강대했나...."

"아니. 안 늦었어."

저벅.

자신 있게, '그것'을 향해 걸었다.

그러니까,

너무 고차원적이라서 벨 수 없다는 거잖아?

마치 '사도'처럼.

이걸 베려면 드래곤의 힘과 의지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거잖아?

아마 그래서였나 보다. 운명의 책이 이번 임무 소요 시간을 3일로 예측한 것은.

저것은 벨 수 없으니, 그저 저것의 힘이 다할 때까지 버티라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쨌든 남겨진 일부라는 건... 지금은 죽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잖아?'

잘린 손가락을 두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하지 않듯이 말이야.

우웅-

아공간 목걸이에 손을 넣었다.

죽은 사도가 어떻게 되었더라?

죽은 괴이(怪異)를 어떻게 할 수 있더라?

왠지 확신이 들었다.

이건 통한다고.

파라라락!

목걸이에서 운명의 책을 꺼내고 앞으로 쭉 뻗었다.

사막처럼 메마르고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먹어 치워."

쿠드드득!

반응은 곧장 나타났다.

쿠득! 쿠드득!

움푹움푹 꺼지며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 잘났다는 '그분'의 일부라는 것이 점점 더 작게 더 작게, 처참히 구겨졌다.

- 말도... 안 돼!

- 어떻게... 마도서 따위가!

- 초월이! 바로 눈앞이었는데...!

스멀스멀 되살아나던 사교도들이 다시 흩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콰드드득!

마침내 작은 구슬만큼 작게 구겨진 그것은,

꿀꺽!

입처럼 쫙 벌어진 운명의 책의 페이지 사이로 삼켜졌다.

[다량의 비틀린 세계선을 흡수 중입니다.]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운명의 책 표지에 그려져 있던 막대 4개가 까맣게 물들었다.

이젠 까만 막대가 8개. 하얀 막대가 2개.

곧 있으면 3레벨이 되겠구나.

그게 전부였다.

....

....

....

그저 모든 게 갑자기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평화가 언덕 위로 내려앉았다.

사교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어 다리는 물론이고, 전장에서 날뛰던 괴물들도 싹 사라졌는지 그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언덕.

"후...."

뒤를 돌아보니, 멍청한 얼굴의 우르굴락이 있었다.

이건 좀 뿌듯하다.

잘난 척 엄청 하던 그 오크가 화들짝 놀랐네?

나는 <에아 >를 불러 녀석을 치유해 주며 물었다.

"어때? 지켜 낸 소감이. 지키고 싶었다며."

우르굴락은 잠시 얼떨떨하게 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본래의 얼굴을 되찾았다.

그는 피에 젖은 톱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건... 내가 기대한 환한 웃음이 아닌, 비웃음이었다.

"인간은 꼭 이런다니까. 소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도대체?"

"...힘들게 이겼잖아. 소감이 있을 거 아냐?"

"성자야. 소감이란 건 죽을 때나 돼서 말하는 거다. 앞으로 몇 번이든...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니 죽어서도 이 땅을 지킬 건데 소감은 무슨 소감이냐. 승리란 없다. 끝없는 투쟁만이 있다."

우르굴락은 나를 열심히 비웃었다.

...좀, 기분이 그렇긴 한데.

그래도 멋있네.

승리란 없고 끝없는 투쟁만이 존재한다라.

"잘났다. 오래오래 살아라."

그런 전사에게 나는 기꺼이 귀한 최상급 포션 하나를 던져 주었다.

"잘 마시마."

이 오크는 사양할 줄도 모르고 날름 그걸 마셔 버린다.

그리고...

'아, 이젠 느낌이 오네.'

돌아갈 시간 되었다.

임무가 완수되었으니.

다만 전과는 좀 달랐다.

갑자기 돌아가는 게 아니라 돌아갈 시간을 약간, 아주 약간 미룰 수 있는 권한이 느껴졌다.

'이것도 업데이트 때문인가?'

아무튼 잘됐다.

"에아."

[네. <에아 > 대기 중입니다.]

"스캔. 대상은 셰네릴."

[스캔 결과를 사용자의 망막에 투영합니다.]

눈앞으로 떠올랐다.

셰네릴의 모습이.

녀석은 승리 소식을 들었는지 방방 뛰고 있었다.

그 티 없는 웃음을 보니...

이제야 좀 안심이 됐다.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거, 이만하면 지킨 거 맞지?

픽 웃으며 한 번 더 에아를 불렀다.

"스캔. 하나 더. 이번엔 이오딘 세롬."

장면이 바뀌었다.

갑자기 사라진 괴물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우를 살피는 이오딘의 모습이 보였다.

잘 살아 있구나.

이제 진짜 안심이 되었다.

근데 세아의 말로는 내가 과거를 바꾸면 미래도 바뀐다던데.... 그럼 내가 만났던 미래의 이오딘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린 이미 여기서 만났는데. 역사가 좀 꼬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시간이란 건 정말 골치 아프기 짝이 없어서, 나는 그냥 고개를 휘휘 털어 버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시간선 밖으로 튕겨 나가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이오딘에게 그녀는 듣지 못할 인사를 남겼다.

"또 보자 선배. 반가웠어."

정말로.

퉁!

"어? 뭐여? 어디 갔어...?"

째깍째깍째깍째깍

당혹스러워하는 우르굴락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나는 또다시 시간의 강물에 휩쓸렸다.

곧 눈을 뜨면 다시 룬드나의 무인도겠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결 속에 이젠 꽤 익숙해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치보다 훨씬 빠르게 완벽한 역사 개변을 이루어 냈습니다.]

[쓰이지 않고 남겨진 인과의 조각이 에필로그를 강화합니다. 「에필로그 1/1」이 「에필로그 2/2」가 되었습니다.]

[변칙 현상 발생!]

[프롤로그가 남긴 기적! 인과의 조각을 타고 머나먼 시간의 기억이 흘러들어 옵니다.]

그러곤 꿈을 꿨다.

여자애가 나왔다.

하얀색에 가까운, 아주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97화 시간 속의 상념들

꿈이다.

저번 꿈에 나온 그 애가 또 나왔다.

'이런 일은 별로 없는데....'

내 꿈엔 처음 보는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개 내가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이거나, 내가 아는 사람들이 조합이 되어 새로운 인물로 등장하는 식이었다.

근데 얘는 진짜 잘 모르겠다.

애초에 하얀색에 분홍색 한 방울 떨어뜨린 듯한, 저런 특이한 머리카락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그래도 처음 봤을 때는 로레인이 좋아하던 그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있길래, 로레인하고 섞인 인물인가 싶었는데... 지금은 또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차림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인데, 그게 전신을 다 감싼 채 뒤통수까지 쭉 올라와 있고, 재질을 알 수 없는 굵은 선이 뒤통수와 온몸에서 뻗어 나와 녀석이 앉은 거대한 금속제 의자와 연결되었다.

깜빡깜빡거리는 빛이 사방에서 점멸을 하고....

뭐랄까. 금속으로 이루어진 괴생명체에 잡아먹힌? 아니. 그런 괴물과 아예 하나로 융합되어 버린? 그런 기괴한 형상이었다.

- 야, 괜찮냐?

나도 모르게 물었다.

안 괜찮아 보였으니까.

입은 옷이며 주변을 둘러싼 기괴한 환경은 그렇다 치고.

- 내 말 들려?

그새 좀 컸는지, 이젠 한 12살쯤 되어 보이는 녀석은, 그 거대한 의자에 앉은 채 미동도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그저 녀석의 완연한 분홍색 눈동자뿐.

근데 눈동자가 저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가 있는 건가?

벌새의 날갯짓도 저렇진 않을 것이다. 위로 아래로, 좌우로 사선으로. 쉴 새 없이 건너뛰는 녀석의 눈동자.

눈이 점점 충혈되다가, 주륵- 코에서 흐르는 코피.

- 야!

나는 녀석을 잡고 흔들려고 했다. 일단 저 의자에서 떼어내야 애가 좀 괜찮아질 것 같아서.

하지만 내 손은 아이를 그냥 통과했다. 그러고 보니, 내 목소리도 그랬다. 주변 공기에 그 어떤 흔들림도 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지켜만 봐야 하는 유령 같은 신세.

그게 지금의 나였다.

툭.

툭....

가만히 코피를 떨어뜨리고 있던 아이는 힘이 쪽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계산 완료."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저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존재들이 어느새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 오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해결책을 찾으셨습니까?

솔직히, 토악질이 치밀었다.

이봐 너희들.

어른 아니야? 어른들이 저 꼬마애 하나 두고 지금 매달리고 있는 거야?

니들은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내 목소리는 저들에게 닿지 않는다.

꼬마가 입을 열었다.

"마르세티로는 포기합니다. 자폭 명령을 내리세요."

그러자 주변의 그림자들이 난리가 났다.

- 네?! 어떻게 그런!

- 지금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 마르세티로가 없으면 저희는...!

하지만 꼬마는 아주 차갑고 냉정하게 답했다.

"마르세티로는 포기합니다. 다른 경우의 수는 없습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끔찍한 침묵.

그러고는 풍경이 바뀌었다.

어느새 그 어둡고 기괴하던 풍경은 사라지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꼬마가 자기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녀석은... 울고 있었다. 또.

툭-

투둑-

부푼 눈물이 자꾸 떨어져서 옷과 침대를 적셨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나도 싫었다고.... 나라고 그 많은 사람을...."

그렇게 서럽게 울던 아이는 문득 시선을 들었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저씨. 거기 있지?"

- 뭐야? 나 보였어?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나에게 또렷이 맺히지 않고 내 주위를 부유할 뿐이었다.

"있다고 생각하고 말할게. 기다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나도... 포기 안 할 테니까."

아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보다 코피 흘린 거는 좀 괜찮냐?

뭐라도 말을 해 보려고 했는데... 사방이 다시 어두워졌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와 함께 나를 쓸어 가는 시간의 강물.

그리고 나는 확실히 깨닫는다.

'이거... 그냥 꿈이 아니었네.'

운명의 책은 말했다. '인과의 조각을 타고 머나먼 시간의 기억이 흘러들어 옵니다.'라고.

그러니까 저 아이는, 운명의 책의 비밀과 관련된 누군가일 거다.

...아마도 아주 먼 옛날에 정말로 살아 있었던.

매일 울고 매일 피 흘리며,

무능한 어른들에게 해답을 구해 주면서.

뿌득-

왠지 더 열이 뻗쳤다.

그리고 차츰차츰 의식이 흐려졌다.

* * *

꿈? 아니면 꿈결의 사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물론 애기가 혼자 알아서 똥오줌을 잘 가린다거나, 먹을 걸 구해 온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라는 말의 의미는, 어른이 아이의 경험과 성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던 때에 홀로 가장 소중한 것들을 태워 가며 기도를 했던 셰네릴이 그렇듯, 모든 아이는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어진 경험을 해석하고 자신만의 모험을 시작한다.

데이지도 그랬다.

어린 시절의 데이지는 단 한 번이라도 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엄청난 자존심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싸움꾼이었다.

녀석에게 있어서 우리가 사는 일네온 던전과 쿠샨시(市)의 뒷골목은 무사 수행을 위한 장소와도 같은 거였다.

싸우고, 또 싸우고,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지면, 이를 가고 재도전해서 반드시 때려눕히고야 마는....

녀석은 그렇게 쿠샨시의 제 또래들과 몇 살 위의 아이들까지 다 때려눕힌 후에야 뒷골목을 졸업했다.

제대로 승부를 가리지 않은 건 세클란 정도뿐이었을까?

세클란이 항상 먼저 데이지에게 한 수 접어 줬으니까.

반면에 아샤는 뒷골목이든 일네온 던전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혼자, 틀어박혀 책을 읽고 마법을 수련하는 게 전부였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랐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하지만 내가 본 꿈속의 그 아이는, 머리에 분홍빛 한 방울을 떨어뜨린 듯한 그 아이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어야만 했던.

어른들의 요구에 맞춰서,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모험을 떠날 기회도 없이.

그게 참 짜증 나고 신경이 쓰였다.

째깍.

마침내 흐릿하던 정신이 또렷해지고, 눈을 떴을 때.

"...데이지?"

어느새 낮이 밝아온 무인도.

작은 개울이 졸졸졸 흐르는 계곡 옆에서 데이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검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 * *

"네가 왜 여깄냐?"

좀 당황스러웠다.

이번 원정에 데려온 건 세아와 미카뿐. 데이지는 일루나엘에 두고 왔는데?

근데 데이지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천천히 뒤따라왔지 뭐. 발자국 찾아가면서."

"하아?"

듣자 하니 자기 마음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우리 흔적을 쫓아 따라온 모양이었다.

이봐. 이봐. 애들이란 건, 이렇게 제멋대로인 거라니까.

"신경 꺼. 세아 언니한테 허락도 받았다고."

아니.

세아 말은 잘 들으면서 왜 내 말은 맨날 무시하는 건데?!

오늘은 그걸 좀 따져 보려고 했는데.

데이지가 내 몸 여기저기를 흘깃흘깃 살피더니 딴청을 부리며 툭, 던지듯 말했다.

"뭐.... 근데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

오호라?

이거 봐라?

"왜. 또 다쳐서 올까 봐 걱정됐어? 날 그렇게 걱정해준 거야? 여기까지 쫄래쫄래 따라올 만큼?"

내 물음에 데이지가 빨간 눈동자로 아무 말 없이 날 쏘아봤다.

어, 음.... 이건 더 놀리면 왠지 재미없을 거 같다.

"큼!"

헛기침 한 번 하고 슬쩍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까.

데이지 너,

"독검(讀劍). 해냈구나?"

고대 기준 익스퍼트 하급의 경지. 아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었다.

데이지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어.... 어, 음. 알아보네? 뭐, 별거 아니더라!"

누가 봐도 알아봐 줘서 엄청 기쁜 눈치였지만, 굳이 콕 짚지 않기로 했다.

'잘됐네. 그럼 이제 곧 세클란도 독검에 오르겠네.'

세클란은 늘 그런 식이었다. 데이지가 먼저 앞서가면 곧장 뒤따르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늘 기가 막히게 딱딱 데이지의 뒤를 따라 성장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둘 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대 기준으로도 익스퍼트 하급에 오르는 것이다.

'이 녀석들은 어떻게 성장하려나.'

다들 현대의 오러 검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다음 고대 검기 검술을 배웠다.

나부터도 그랬고.

하지만 오러와 검기를 엇비슷하게 맞춰서 수련하고 있는 이 녀석들은 어떨까?

또 미처 짐작 못 한 굉장한 시너지가 있을 것만 같아서 괜히 기대가 됐다.

"데이지."

"뭐, 왜."

아직도 좀 쑥스러운지 시선을 못 마주치는 데이지.

그런 녀석에게 진심을 다해 말해 주었다.

"고맙다."

잘 자라주어서.

좋은 환경이 아니었는데도, 밝게 웃고 적게 울어서.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강해져 주어서.

"뭐, 뭐가. 갑자기."

"아니. 축하한다고. 수고했어."

"뭐, 딱히...."

짜식.

나는 괜히 안 기쁜 척하는 데이지를 데리고 이만 발을 옮겼다.

자박자박 걸어 오르는 계곡 길.

청명한 아침의 기운이 숲의 습기와 더해져서 한층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 언덕 끝에서 우린 신전의 잔해들을 다시 마주했다.

"아...."

작은 탑처럼 웅장한 기둥들이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은 모습.

데이지는 그 앞에서 기분이 좋은 듯 조잘거렸다.

"아침에 보니까 또 예쁘네."

그래. 예쁘다.

근데...

나는 사실 조금 슬펐다.

'똑같네. 여전히 무너져 있구나. 여기는.'

바로 방금 전까지. 이 신전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목숨 걸고 싸웠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렇게 지켜낸 신전도 1만 년이라는 시간을 견뎌낼 순 없었나 보다.

셰네릴. 이오딘. 우르굴락.

너희는 알았을까?

아무리 목숨 걸고 싸워도 결국엔 시간 앞에서 이렇게 무너져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오로지 시간 여행자인 나만이 갖게 되는 애상.

데이지가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오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여기를 지키려고 죽어라 싸우다가 막 돌아온 참이어서."

"아...."

데이지.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다.

녀석은 살짝 몽롱하게 풀어진 눈으로 기둥만 여기저기 흩어진 폐허를 살폈다.

"정말... 여기 사람이 살았던 거구나. 거기에 오빠도 있었고...."

그랬지.

7살짜리 셰네릴도 있었고, 사명감 넘치는 성기사들이 있었고, 크고 멋진 오크도 있었지. 심지어 반가운 선배도.

"진짜 이상하겠다. 여기 사람들하고도 막 얘기도 나누고... 그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도 있고 그랬겠네."

그랬지.

정말 그랬지.

"그것도 여기서 받은 거야? 엄청 이쁘다."

데이지의 시선이 내 마갑 위에 장식된 투명한 영녕꽃에 박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7살짜리 애가 줬어. 여길 지켜 달라고. 무운을 빈다면서."

"헤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데이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또 한 번 새삼스레 폐허를 되돌아보는 데이지.

역시. 보기랑 달리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다.

뭐, 아무튼....

감상은 감상이고, 할 일은 해야지.

스릉-

반로아를 꺼내 들었다.

데이지가 놀라서 날 돌아봤다.

"칼은 왜?"

"잠깐 물러서 봐."

주춤주춤 멀어진 데이지.

나는 천천히 신전 터를 살피며 한쪽으로 걸었다.

'대충 이쯤인가...?'

그러곤,

콰드드득!

오러와 검기를 힘껏 끌어올려 땅을 파헤쳤다.

궤적에 걸려든 신전 기둥 같은 것은 말끔하게 잘라서 튕겨 내고, 땅은 조각내서 폭파시키고 사방으로 잔해를 쳐서 날렸다.

유적이 있던 곳의 지반 자체가 주저앉으며 오랜 세월을 버텨 냈던 기둥들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데이지가 경악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응?

"왜 다 부수냐고!"

왜 놀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해 주었다.

"찾을 게 있어서."

"아, 아니... 그럼 방금 전에 그건 뭔데?"

"뭐가?"

"여기 유적지! 추억이 깃든 곳이라면서."

"응. 아련하지. 의미도 깊고"

"근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부수고...?"

"?"

뭐가 문제라는 거지?

콰가가가가!

나는 오러를 더 힘껏 끌어올려, 일대를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

이제 주변엔 흙더미와 조각난 파편들만 가득해서 여기에 신전이 있었다는 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데이지가 큰 충격을 먹고 중얼거렸다.

"아저씨... 냉혈동물이야. 역시 냉혈동물이었어...."

?

무시하기로 했다.

여러 동생을 키우면서 느낀 건데, 사춘기 꼬마들의 속내를 짐작하려고 애쓰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거든.

그냥 그 나이 때 꼬마들은 이해를 하지 않는 게 서로 편하달까?

파카카카칵!

힘껏 땅을 파헤치다 보니, 느낌이 왔다.

"여기구나!

이번엔 반로아를 섬세하게 놀렸다. 실수로 같이 잘라 버리면 안 되니까.

콰아아-!

마지막으로 치솟는 흙더미.

그리고 그 아래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저기 깨지고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그 특유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구체.

"찾았다. <에아 >."

신의 힘을 전달하는 성물.

그 녀석이 1만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현세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98화 드넓은 세계

"이게 뭐야?"

데이지가 내게 물었다.

"성물."

"성물?"

1만 년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에아 >의 낡고 부스러진 표면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응. 신이 내려 줬다고 하는 성물."

"신? 종교? 그럼 사기꾼 아니야?"

그렇지. 이게 이 시대, 그중에서도 불신의 땅인 로버랜드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지.

"아냐. 엄청 소중하고 고마운 거야. 이 녀석 덕분에 정말 많은 사람을 살렸거든. 실제로 강력한 힘을 지녔어."

"힘이 있다고? 그럼 뭐... 진짜 신이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에아 >가 중요했다.

여기저기 성치 않아 보이는 이 녀석이 여전히 살아 있을지 어떨지.

손을 얹었다.

가만히 그 안에 깃든 성령을 더듬어 보았다.

'또 잠들었나? 아니.... 기절인가?'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더 세게 흔들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뭔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데이지가 물었다.

"왜? 왜? 부서져서 안 돼?"

글쎄....

될 것도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손바닥을 쫙 펼쳐서 높이 치켜들고.

타앙!

<에아 >를 후려쳤다. 힘껏! 의지를 담아서.

빡! 빠악!

주변이 왕왕 울리도록 세게 후려쳤다.

어째서인지 데이지가 또 당황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응?"

"아니, 아까 이거 소중하고 고마운 거라고...."

"응. 소중하고 고마워."

빠악!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깨우고 있잖아.

"아저씬... 괴물이야."

어쩐지 데이지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

무시하기로 했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은 내가 알 수가 없지 뭐.

빠악!

그리고 또 한 번 힘껏 <에아 >를 내리쳤을 때,

우우웅-

드디어, 그 표면을 타고 잔물결 같은 떨림이 일어났다.

[접속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

"어?"

나를 노려보던 데이지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레스 시스템 C113 알파. 코드네임 <에아 > 대기 중입니다.]

"오빠. 얘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거야? 되게... 신비로운 말소리인데?"

뭐야? 데이지. 너 이게 들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 하는데?"

과거에서는 아무도 <에아 >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성기사와 견습 사제들조차도.

그런데 데이지는 듣는다?

'...진짜 우리 혈통에 뭔가가 있는 거야?'

고대 영웅의 혈통.

성자의 자질.

과거에서 들었던 그 단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에아."

나는 신어(神語)를 사용해 에아에게 말을 걸었다.

[네. 에아, 대기 중입니다.]

"왜 네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겐 안 들리는데 옆에 데이지한테는 들리는 거야?"

[개체명 '데이지' 등록. 해당 개체는 보호 지정 코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호 지정 코드? 그게 뭔데?"

[보호 지정 코드는... 오류. 아카식 레코드의 신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보호 지정 코드는 보호 지정 코드입니다.]

에라이.

그럼 그렇지. 너한테 뭘 바라냐 내가.

"와! 오빠 뭐야? 얘랑 대화하는 거 맞지? 말이 엄청 예쁘다!"

옆에서 데이지가 눈을 반짝였다.

"응. 그런 듯."

건성으로 대답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기억만 해 두자. 반로아의 혈통, 고대의 영웅, 성자의 자질.'

당장은 정보가 적어서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음에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 그때 더 알아보는 걸로.'

이것들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운명의 책과도 관련이 있는지.

다만 쉽진 않을 것 같았다.

드라키움을 심을 때 루이스한테도 살짝 물어봤는데, 성기사인 그도 아는 게 딱히 없었으니까.

그냥 '고대 영웅이란 신의 사도들로서....'하는 두루뭉술하고 상징적인 이야기가 전부.

하지만 분명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만날 거라고 믿는다.

고대의 비밀을,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 * *

확인해 본 결과,

<에아 >의 현재 상태는 온전치 않았다.

[전반적으로 막대한 손상이 감지됩니다. 온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출력은 전과 동일하나, 능력 유지 시간에 제한이 생겼습니다.]

어쩐지 전에는 깨어나자마자 막대한 빛을 뿌려 대더니 이번엔 안 그러더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봤지만, 역시나 이 녀석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포기하고, 능력 유지 시간이 얼마나 되나 물어보았다.

[힐링필드 30분 발동. 또는 생츄어리 1시간 발동 후에 24시간 동안 시스템이 다운됩니다. 통신과 스캔은 자유로우며 에너지 전송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엄청나게 약해지긴 했다.

전에는 몇 날 며칠이고 힐링필드와 생츄어리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럼 성검은? 성검의 힘도 성물에서 오는 거라고 하던데."

아공간에서 성검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에테르 블레이드는 제 시스템이 다운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상시 지속이 가능합니다.]

아, 성검의 정식 명칭이 에테르 블레이드였어?

일단 확인.

그런데 신기하네.

에테르 블레이드(성검)에는 유지 시간이 없다?

힐링필드나 생츄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뜻인데....

대체 무슨 원리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잘됐네.'

나는 들고 있던 성검을 데이지에게 넘겼다.

데이지는 뭉툭한 성검을 뽑아 보더니 휙휙 휘둘렀다.

"이거 그거네? 쓸모없는 검?"

"이제 안 그럴걸?"

나는 씩 웃으며 에아에게 말했다.

"에아. 데이지에게 에테르 블레이드 사용 권한을 줘."

[네. 개체명 '데이지'에게 인증 코드를 부여합니다. 이제 에테르 블레이드를 통해 모든 블레스 시스템에 액세스가 가능합니다.]

원래 성검은 성령의 가호를 받은 성기사만이 쓸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에아 >의 말에 따르면 마도 시대의 성직자들이 쓰는 방법은 '오작동'에 불과한 것.

정상적인 방법은 이거였다.

권한자가 권한을 주고 나면... 그 누구라도 대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나는 가장 높은 권한이라는 「제로코드」를 가지고 있다.

"데이지."

"응?"

"<에아 >라고 말해 봐."

"어? 에아?"

쿠우우웅-!

데이지의 입술에서 <에아 >, 그 한마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성검이 막대한 서광에 휩싸였다.

"어? 어어엇?!

데이지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이, 이거 뭐야? 오러 블레이드? 아, 아닌데.... 갑자기 검령도 엄청 선명하게 느껴져! 오러도 무지 잘 받아들이고.... 아니, 증폭돼! 오러가 증폭돼!"

우우우웅-!

그녀의 검에서 크게 부푸는 오러와 검기.

성검의 위력이 저렇다.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상급 익스퍼트 수준의 파괴력을 발휘하는데, 거기에 오러를 넣거나 검령을 자극해 검기를 만들어 내면 기하급수적으로 위력이 증폭되었다.

그 대단한 명검. 반로아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데이지는 그 힘에 완전히 취한 것 같았다.

"아... 검령이 나한테 말을 거는 거 같아. 오빠! 이거 나 주는 거지?"

주기는.

지금 네 수준에서는 오히려 독이다.

기물에 취하면 정작 자기 자신의 성장은 느려진다고.

"와앗? 자, 잠깐! 왜 뺏어?!"

나는 데이지의 손에서 성검을 냉큼 낚아채서 아공간에 휙 던져 넣었다.

"잠깐! 오빠!"

꽥꽥대는 데이지를 뒤로하고 다시 <에아 >와 마주했다.

아까 녀석이 했던 말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으니까.

"<에아 >, 너 말고 다른 애들도 있는 거야? 그 '블레스 시스템'이라는 거."

아까 이 녀석, 분명히 '모든 블레스 시스템에 액세스가 가능'하다고 말했거든.

그럼 다른 것도 있다는 뜻이지.

[예. 블레스 시스템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혹시 그 위치도 알아?"

[예.]

"안다고?"

세상에,

그냥 확인차 물어본 거였는데.

당연히 모를 줄 알았다.

또 아카식 레코드 어쩌고 할 줄 알았는데....

[예. 알고 있습니다. 다만 62,311년 동안 업데이트되지 않은 자료입니다.]

...시간 단위가 엄청나네.

6만 년 전이라.

확실히 성물이란 건 신화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게 아직도 작동한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신화 시대는 정말 신들이 지상 위를 걸어 다니던 시대였던 걸까?

"6만 년 전.... 뭐 좋아. 그래도 알려 줘. 다른 블레스 시스템이 어디 있는지."

[예. 가지고 계신 시스템으로 전송하겠습니다.]

시스템?

내가 가진?

'그게 뭔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우웅-

울었다. 아공간 목걸이가.

난 직감적인 판단으로 운명의 책을 꺼냈다.

역시나 운명의 책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자, 새로운 페이지에 지도가 새겨지고 있었다.

'...뭐야 이게.'

근데 그 지도라는 게 터무니없었다.

'세계 지도...?'

서부의 글로리랜드. 중부의 로버랜드. 동부의 올드랜드와 남부의 데쓰랜드.

거기에 얼어붙은 땅인 북부의 포가튼 랜드와,

심지어... 전설의 드래곤랜드까지 표기되어 있는 세계지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에...

'드래곤랜드가 진짜 있는 거였어?'

오래된 바다(고해) 너머 최초의 그랜드마스터, 마키나 아브락사스가 건너왔다는 전설 속의 땅.

그게 지도에 표기되어 있었다. 정말 있는 땅이라는 것처럼.

나는 거기서 1차로 놀랐고.

'심지어 이렇게 많다고? 블레스 시스템이?'

블레스 시스템의 숫자에 또다시 놀랐다.

여섯 개의 대륙, 다섯 개의 바다. 그 전부를 빽빽이 뒤덮듯이 푸른 점이 찍혀 있었으니까.

저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일단 노르베르쥬부터 확인하자.'

지도를 확대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 로버랜드의 서북면, 노르베르쥬 지방 곳곳에도 푸른 점이 박혀 있었다.

'터무니없네.'

설령 그 기능이 떨어졌다고 해도... 블레스 시스템의 능력은 사기적인 것이었다.

힐링필드를 펼치면 잘린 팔다리가 순식간에 다시 생겨나고, 생츄어리를 펼치면 온갖 저주에서 안전해질 뿐 아니라 정신적적으로도 단단해졌다.

반경 40km 내에서는 그 능력을 끌어다 쓸 수도 있고, 성검도 사용이 가능했다.

그 말은...

'노르베르쥬 전역에, 아니, 세계 전체에 내 전용 요새가 생긴 거나 다름없잖아?'

이 푸른 점 중 절반만, 아니 반의 반의반만 살아 있어도... 전략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

나는 새삼스럽게 운명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신화 시대의 유산은 정말 대단하네....'

온 세상을 뒤덮은 블레스 시스템도 그렇고, 또 운명의 책도 그랬다.

<에아 > 덕분에 확실히 알게 된 사실.

녀석이 '시스템'이라고 말하고, 거기에 '운명의 책'이 반응했으니까.

운명의 책.

'이거 역시 신화 시대 물건이었어.'

그래. 놀랍다기 보다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그 비슷한 무언가가 아니라면 절대로 이런 건 만들어 내지는 못할 테니까.

이로써 그 「제로코드」란 것도 운명의 책이 부여해 준 거라는 게 거의 확실시되었다.

짐작은 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말해 주는 존재가 없어서 좀 갑갑했는데, 이제야 조금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그럼 일단 확인할 건 다 확인했고... 마지막으로.

"에아. 혹시 근처에 묻혀 있는 강한 에너지원이 느껴져?"

[스캔 완료. 예. 있습니다. 강력한 에너지원 여럿이 한 장소에 모여 있습니다. 해당 위치를 '시스템'으로 전송합니다.]

또 운명의 책에 변화가 생겼다.

파란 점들이 찍혀 있는 페이지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노란 점이 하나 생겨났다. 위치로 보니 확실했다.

'좋아. 드라키움도 무사하네.'

이번 시간 여행의 주요 목적이었던 드라키움 씨앗 심기.

그 씨앗이 1만 년 동안 무럭무럭 자라서 진짜 드라키움이 되었다.

왠지... 감동적인 순간.

당장 찾아가서 파내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충동을 억눌렀다.

'조금만 참자.'

천고의 영약이라는 건, 먹는 데에도 준비가 필요한 법.

거기다가,

'드라키움은 땅에서 뽑아내면 바로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일단은 두고.'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데이지! 이제 돌아가자."

기분 좋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데이지는 아직도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캬악거리는 아기 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달라고오!"

"뭘."

"그 칼!"

한 번 맛본 성검의 맛을 잊지 못한 모양이었다.

"응. 안 돼."

"돼! 된다고! 왜!"

"안 된다면 안 돼."

"줬다가 뺐는 게 어딨어! 이 아저씨야!"

"응. 그럼 뺏기지 말지 그랬어?"

"다, 다시 해! 다시 줘 봐! 이번엔 안 뺏겨."

어림도 없지.

요놈아. 네가 그걸 안 뺏기려면 최소 검탁(劍托)의 경지에는 올라야 할 거다.

나는 깩깩거리는 데이지를 무시하고 그대로 언덕을 내려갔다.

이제 룬드나시(市)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시 통일된 아일룬을 발전시키고, 난리법석이 난 노르베르쥬 전역에 안정을 가져와야지.

할 일이 아주 많았다.

<5대양 6대주>

#99화 믿음

고맙다.

푸르스름한 새벽을 지나 새소리가 들리는 투명한 아침.

데이지를 침소로 보내고 홀로 룬드나시(市)를 걸으며,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고맙다고.

큰일은 혼자 이룰 수 없는 거라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좋은 마을이 생기고, 좋은 도시가 생기고, 좋은 국가가 생겨야 한다. 그래야 어른들이 여유를 찾고,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다.

극에 달한 소드마스터의 감각. 거기에 의념마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해진 영감(靈感).

그 덕분에 나는 호젓이 대로를 따라 걸으면서도 이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시간 여행을 돌아온 새벽.

나에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곳에서는 룬드나시를 복속하고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밤새 승전 파티로 먹고 마셨던 시민들과 전사들 대부분은 쿨쿨 잠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 말짱히 깨어 있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인 듯했다.

리베라가 그랬다.

쿠샨시(市)의 남작. 크시아스에 맞서 반란 세력을 일궈 낼 정도의 수완이 좋은 남자.

그의 서글서글한 친화력과 매력은 특별한 것이었다.

'분위기 좋아 보이네.'

귀 기울이면 들렸고, 눈 감으면 느껴졌다.

리베라는 친목을 도모하는 중이었다.

내 휘하의 지휘관들과 룬드나의 고위 전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화기애애하게 떠들었다.

특유의 입담이 센스를 빛내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하여튼 재주도 좋아.'

사실 저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내 휘하의 지휘관들부터가 서로 어색한 사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크시아스를 죽인지 이제 반년....

출신도 다 다르고 살아온 경험도 다 다른 전사들을 그저 내 무력과 돈으로 한데 뭉쳐 놨을 뿐이었다.

우리도 그런데, 거기에 이제 막 우리 휘하에 들어온 룬드나의 전사들까지 더해지면... 사실 저 자리는 친목 도모는커녕 불편하고 어색한 자리가 되는 게 맞았다.

로버랜드의 전사들이란 원래 한 자리에 붙여놓으면,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면서 싸워 대기 일쑤였으니까.

근데 리베라는 저걸 해낸다.

유머를 섞어 가며 모두를 떠들썩하게 웃게 하고, 과열되는 분위기는 카리스마와 합리적인 언변으로 중재하고, 한 명 한 명 소외되지 않게 말을 붙이며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아군으로 느끼도록, 홀로 다해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리베라처럼 노련하진 못했지만, 룬드나의 젊은 영웅, 레테도 꽤나 적극적이었다.

리베라의 의도를 파악한 것인지 룬드나 전사들의 수장인 그가 나서서 리베라를 존중해 주고, 스스로 긴장과 경계를 내려놓음으로써 분위기를 유하게 이끌었다.

저러니 고맙지.

리베라가 안 했으면 내가 해야 했거나, 언젠가 쌓이고 쌓여 문제가 되었을 일.

'알아서 잘해 주는 동료라는 건... 진짜 최고야.'

리베라뿐만 아니다.

다들 그랬다.

귀를 기울이면 세아의 목소리도 찾을 수 있었다.

- 응. 응. 그래. 역시 그렇게 나오는구나.

- 그래. 알겠어. 계속 자유연맹 영주들을 주시해.

- 핵심은 놈들이 오판하지 않게 하는 건데. 흠....

- 그래? 해상왕이?

녀석 역시 자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얜 진짜 신기해.'

전에 나한테서 통신 아티팩트를 잔뜩 가져가더니, 그걸 자기 정보 조직 요원들에게 나눠 준 모양이었다. 지금도 곳곳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하여 계책을 짜내는 모양.

그런데 진짜 신기한 건,

'대체 언제 저렇게 정보 조직을 만든 거야?'

정보 조직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얼마 전만 해도 우리 형편이 썩 좋질 않았는데... 그 작은 머리로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든든하기 짝이 없다.

고맙다.

내 동생들.

이번 원정 이후로 눈빛이 조금 달라진 미카가 지금까지도 땀 흘려 수련하는 것도 느껴졌고, 침소로 돌아간 데이지가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시 눈 붙이는 것도 느껴졌다.

그 모든 게 다 고마웠다.

덕분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 믿고 맡겨도 된다.'

열 사람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다 이렇게 답할 거다.

이제는 웅크리고 내부 결속을 다질 때라고.

고작 쿠샨시(市) 하나의 지배자였던 내가 반년 만에 8개 도시를 아우르는 거대 세력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무법자들의 땅 로버랜드에서.

다른 이들의 눈에 이게 얼마나 위태로워 보일까?

그저 나의 무력으로 억지로 이어 붙인 것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거라고.

그러니 몇 년은 웅크려야 한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내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단해. 적어도 기둥과 대들보는 제대로 세웠다.'

아직 벽을 세우고 지붕을 드리는 일이 남았지만, 그 뼈대는 이미 완성되었다.

질풍 7걸 중 살아남은 3인방은 내 무력 앞에 그리고 하룬의 유언 아래에 완벽히 굴복했고,

갤란시의 지배자 카시미르 굴라크는 확고히 마음을 정했으며,

룬드나시(市)의 레테 역시 그랬다.

카슈와 키날로 역시, 내 지배를 온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의 도시들은 이미 하나로 녹아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단하게 굳히는 과정뿐.

그리고 나에겐 그 과정을 충분히 대신해 줄 수 있는 유능한 동생들과 신하들이 있다.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덕분에 나는 시야를 외부로 돌릴 여유를 얻었다.

'지금 시급한 문제는 오히려 노르베르쥬 그 자체지.'

노르베르쥬에 닥친 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아마도 제국의 황제가 인위적인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런 와중인데 정신 못 차린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이 이상한 연맹을 만들어 나를 적대한다는 것이다.

물론 싸우는 게 두렵진 않다.

문제는 그들이 오판을 했을 때 피해를 보는 건 엉뚱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가정이 찢기고, 아이들은 울부짖겠지.

나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다.

"세아."

나는 팔찌 형태의 통신 아티팩트에 대고 세아를 불렀다.

- 오빠? 돌아왔어?

"응. 리베라랑 레테 좀 내 집무실로 불러 줄래? 세아 너도 같이. 이따 집무실에서 보자."

- 알겠어.

작은 요청에 이유를 묻지 않는 것.

이런 사소한 것에서 때론 우리의 가까움과 신뢰를 느낀다.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 * *

잠시 뒤 집무실.

세아는 무덤덤한 표정이고, 리베라는 여유가 있고, 레테는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나는 우선 세아에게 물었다.

"세아. 자유 연맹 놈들 난리가 났겠지?"

세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가 아일룬을 너무 빠르게 일통했으니까.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아. 분노하고, 당황하고 좌절하고."

당연한 일이다.

경제력이나, 무력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젠 인구에서도 우리가 그들에게 우세를 점했으니까.

인구 150만의 룬드나와 120만의 갤란을 손쉽게 차지함으로써, 전세가 완전히 기운 것이다.

"하지만 이미 졌다는 걸 받아들일 놈은 별로 없겠지?"

"이 대륙엔 머저리들이 많으니까."

동감이다.

"그럼 조만간 다시 모이겠네?"

"그럴 거 같아."

"혹시 어디서 모일지도 알아?"

세아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답했다.

"지난번과 같을 거야. 헤레폴시(市)."

"쿠샨 바로 옆이네?"

"음. 자기들이 모일 때, 우리가 쳐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봐. 대응하기 좋은 장소에 모이는 거지."

가까이서 모이면 정말 대응이 된다고 생각하나?

진짜 나랑 싸움이 된다고 여기는 걸까?

정말이지. 왜 노르베르쥬 놈들은 항상 싸울 생각부터 하는 건지.

안 싸우고 힘을 합칠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하는 것 같다.

"오빠, 설마...."

세아가 뭔가를 느꼈는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내가 또 다 때려 부술까 봐 저러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패왕 패왕 하니까 내가 진짜 패왕인 줄 아나.

"난 잠시 자리를 비울 거야.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예에? 지금요?"

리베라가 깜짝 놀랐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이제 막 아일룬을 일통한 내가.

이 시기에 자리를 비운다면 불안하겠지.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세아. 경제와 내정은 너에게 일임할게. 리베라는 나이트 벌슨과 함께 훈련을 담당해. 부탁하고 싶은 건 하나야. 아일룬은 물론이고 쿠샨, 키날로, 카슈의 모두를 하나로 화합시켜 줘."

무책임한 말이었다.

다들 제멋대로에 문화도 다르고 처지도 다른 도시 8개를 하나로 융합시켜 달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자리를 비우겠다니.

당연히 쏟아질 반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겠어. 음, 오히려 더 괜찮다. 패왕(覇王)다운 행보야. 진짜 패왕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는 거니까."

세아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자꾸 패왕을 강조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묻지도 않고 이렇게 받아들여 줄 줄은 몰랐다.

"아예 더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겠다. 오빠가 여기 없다는 걸 강조해서 다른 영주들의 돌발 행동을 막을 수 있어. 먼저 오빠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고 난 다음에 행동을 하려 할 테니까."

내 뜻에 의문을 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계책을 만들어 가는 게 아닌가?

심지어 처음에 당혹을 드러냈던 리베라마저도 그랬다.

"아...! 거인은 큰 걸음을 걷는 법...!"

벌슨에게 배운 듯한 명언 한 구절을 읊더니 나를 향해 두 눈을 반짝였다.

"맡겨 주십시오. 자잘한 것들은 저희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크게 보시고 주군의 보폭으로 걸으시면 됩니다!"

...이거 맞아?

되레 내가 당황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힘든 일을 다 떠넘기고 나는 훌쩍 떠났다 오겠다는 건데... 이걸 되려 열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당황했지만,

'...나쁘지 않아.'

괜히 찡한 감동까지 있었다.

나는 가만히 리베라와 세아를 바라보다가 이번엔 레테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테. 너는 룬드나의 전사들과 함께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 넌 당분간 리베라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돼. 그를 존중하고 따라."

레테의 협력이 필요했다.

리베라가 아무리 친화력이 좋다 해도 우리 정규군의 훈련은 아주 빡센 것이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레테가 솔선수범해 주지 않으면 꽤 많은 문제가 발생하겠지.

레테의 낙엽 같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자신의 검을 끌러 리베라에게 공손히 바쳤다.

"주군의 명대로. 이제 리베라 님의 지휘를 절대적으로 따르겠습니다."

레테가 이런 사람이다.

도움을 청할 때는 대적자의 목을 베어 오는 성의를 보이더니,

이번에는 제 검을 끌러서 진정성을 보여 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는 남자.

덕분에 나도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이거 받아."

"이건...?"

"뽑아 든 다음에, <에아 >라고 말해. 그게 주문이야."

기꺼이, 세 자루의 성검 중 한 자루를 레테에게 맡겼다.

'룬드나는 레테가 지켜 주는 걸로.'

곧 있을 몬스터 웨이브.

그때 룬드나에까지 소드마스터를 배치할 여력은 없을 거다.

그러니 이 도시를 지키는 건, 이 도시를 가장 사랑하는 전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성물이 있는 이곳에서는 성검을 쓸 수 있고, 그렇다면, 최상급 익스퍼트인 레테도 소드마스터급의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에아."

콰우우우우

레테의 부름과 함께 성검을 타고 휘몰아치는 서광.

그 가공할 힘과 오러의 폭증을 느꼈는지 레테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잠시 뒤, 그 힘을 충분히 느낀 레테가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젠 도리어 무섭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제가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곧 굳은 결의를 빛내며 다짐했다.

"그저,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게 룬드나를 지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임을 확신합니다."

그 올곧은 목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세아."

"응?"

"벌슨 아저씨한테 전해. 동생들 전부하고 리베라, 칼세릭까지 한데 모아서 훈련 시켜 놓으라고."

"갑자기 훈련? 무슨 훈련?"

무슨 훈련이긴.

"영약 섭취 훈련. 다들 몸 만들어 놔야 하니까, 확실히 조져 달라고 전해."

"영약? 그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아.

그래. 그거. 드라키움.

"그런데 7개밖에 없지 않아? 우리가 전부 먹기엔...."

괴이(怪異)의 심장이 딱 7개 있었음을 기억하는 세아였다.

하지만,

"늘어났어."

그것도 아주 많이 늘어났다.

다 같이 먹고도 한참 남을 만큼.

이번 시간 여행에서 괴이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잡았거든.

천고의 영약 드라키움.

마치 조개가 진주를 만들 듯, 무려 1만 년 동안 대지가 품고 녹여서 만들어 낸, 자연의 정수.

그게 넘쳐 난다.

여기저기 문제가 산적해 있어도,

자꾸 웃음이 실실 나왔다.

드라키움에 대한 기록이 반만 사실이어도, 아마 바렌과 카트리나는 확정적으로 소드마스터가 될 거고. 분명 나에게도 꽤 효과가 있을 테니까.

벌써 침이 고였다.

#100화 이만하면 알겠지

반 란센의 기치를 건 영주들이 회합을 여는 도시 헤레폴.

그곳의 거리는 요즘 매일 소란스러웠다.

이젠 제법 추워진 날씨에도 웅성웅성 모인 사람들의 하얀 입김으로 거리는 부옇게 흐렸다.

"란센은 괴물입니다!"

조금 넓은 공터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어깨와 팔꿈치를 부딪쳤고, 그 한가운데에는 항상 헤레폴의 영주성에서 나온 관리가 있었다.

자리에 모인 시민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웅성거리고 불안한 눈빛을 빛냈다.

"우린 다 죽을 겁니다! 모든 걸 빼앗길 겁니다! 그는 끝을 모르는 탐욕의 괴물이니까요! 상상해 보십시오. 노르베르쥬를 지나는 모든 무역로를 란센이 독차지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콩 한 쪽도 나눠 주지 않을 거라고요."

그의 말에 따르면 란센은 악마였다. 노르베르쥬 전역을 짓밟고 노예화하려는 폭군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합니다! 비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선 당장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란센을 악마화한 이유는 결국 이 뒤에 이어질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란센이 아일룬 전역을 차지하기 전에 싸워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를 패퇴시키고 우리의 자유와 번영을 되찾기 위해선 바로 지금 싸워야 합니다."

란센과의 전쟁.

그 두려운 사실에 시민들의 얼굴엔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웠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많았다.

변경 지역의 괴물들 때문에 통행이 자유롭지 않은 로버랜드였기에 영주 입장에서는 정보를 조작하는 게 너무나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곳 시민들은 영주가 보낸 선동꾼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올리는 것? 부역 징발을 하는 것? 영주님도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영주님은 시민 여러분들이 부유하고 여유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선 란센을 꺾어야 합니다!"

그렇게 전쟁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달콤한 보상의 약속이었다.

"지금 싸우면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그리고 이기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풍요로운 아일룬 평야의 모든 것에서 세금을 걷을 겁니다. 그 세금이 이 도시를 위해 쓰일 겁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식들은! 이 땅의 모든 선조보다 훨씬 부유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이야기를 듣던 시민들의 눈에 조금씩 기대감이 서렸다.

이런 식으로 헤레폴... 아니, 노르베르쥬의 전역이 란센을 상대로 한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란센에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덮어씌워 가며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작자들은 지금 모두 헤레폴에 모여서 열띤 토론, 아니, 난장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최악입니다!"

"갤란시가 그렇게 넘어갈 줄이야...."

"카시미르 굴라크. 끝까지 싸울 것처럼 굴더니. 허풍이었어! 나약해 빠진 놈!"

"지금 당장 쳐들어가야 합니다! 룬드나까지 넘어가면 진짜 답이 없어요!"

영주들은 저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떠들어 대기 바빴다.

"좀 의제에 집중을 합시다! 일단 도시마다 병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는지 현황 파악부터...."

"아니, 그전에 우선은 맹주부터 뽑아야지!"

"맹주를 어떻게 바로 뽑습니까? 일단 회의를 진행할 임시 의장이라도...."

"젠장. 굴라크 가문 놈들 맨날 센 척 거드럭거리기나 하고!"

그건 회의라기보다는 겁 많은 멍멍이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왈왈왈 짖어 대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적어도 시론시(市)의 영주 카사니아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이게 맞나? 벌써 5시간째 논의에 진전이 하나도 없잖아? 이딴 놈들하고 뜻을 같이하는 게 맞아?'

하나의 세력이 노르베르쥬로 향하는 모든 무역로를 틀어막았다.

이 초유의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일단 행동을 같이하긴 했지만 보면 볼수록 회의감이 커지는 그녀였다.

"갤란이 넘어간 건 너무나 뼈 아프지만 룬드나는 그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요."

"그렇지. 에시르 가주의 욕심은 내가 잘 알지."

"에시르 가주와 즉시 연락을 넣읍시다. 룬드나가 배후에서 찌르면 아무리 란센이라 해도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어요."

"맞소. 지금 상황에서 더 나빠질 일은 없소. 당황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해서 전략을 짭시다."

할 만하다고? 정말?

카사니아는 좋을 대로 떠드는 영주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정신인가? 란센의 무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아직 파악도 못 했잖아?'

싸움을 할 때 이게 이길 싸움인가 질 싸움인가 각부터 보는 것. 그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그런데 지금 영주들은 다들 자신의 희망 사항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정보가 없는 건 이해했다. 란센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하룬을 죽였고, 아일룬을 차지해 나갔으니까. 그의 무력을 직접 본 사람부터가 소수였고 진상을 파악할 시간은 적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모든 걸 어림짐작으로 진행해도 되는 건가?

란센의 무력 대충 이 정도겠지.

란센 군의 전력? 그건 이 정도겠지.

그 정도라면 이길 수 있어.

이런 식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기들만의 승산을 보는 영주들.

카사니아는 이딴 식으로 싸워서 이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급보! 급보입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전령의 한마디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룬드나! 룬드나가 3일 전에 함락당했습니다! 란센이 아일룬을 일통했습니다!"

룬드나 하나만 믿고 있던 영주들은 경악했고 곧 정보의 진위를 의심했다.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야?"

"3일 전? 3일 전이라고? 근데 왜 이제야 정보가 와! 메시지 아티팩트는 어쩌고!"

전령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했다.

"괴, 괴물. 소드마스터급의 괴물들이 먼저 룬드나를 침공했습니다. 그 괴물이 포효를 터뜨리는 순간 메시지 아티팩트들이 고장이 났고... 그래서 직접 달려와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소드마스터급의 괴물? 포효 하나로 아티팩트를 망가뜨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 하지만 진실입니다! 직후에 최상급 익스퍼트 레테가 반란을 일으켜 에시르 가문을 멸문시키고 란센을 끌어들여 괴물을 토벌했습니다!"

회의장은 그냥 난리가 났다.

이미 최악이라고 더 나빠질 수 없다고 떠들어 대던 게 방금 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진짜 최악이 지금 닥쳐왔다.

누군가는 전령을 의심했다.

"네놈! 네 말이 거짓일 경우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

"란센이 보낸 첩자 아니야?!"

또 누군가는 수염에 불이 붙은 것처럼 펄쩍펄쩍 날뛰었다.

"즉시 병력을 일으켜야 하오! 란센이 아일룬을 안정화시키면 그 후엔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가 없소!"

뜨거운 주전자처럼 펄펄 끓는 회의장.

시론 시의 영주 카사니아는 이 순간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그녀는 시선을 돌려 여러 영주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흥분해서 왈왈 짖는 작자들 말고.

현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영주들을 찾아냈다.

몇몇 영주들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 차라리 란센한테 붙을까?'

'그럴까?'

은밀한 시선들이 오고 가고 대략 서너 명의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저 바랄 수밖에 없었다.

'란센. 말이 통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네.'

전에 란센이 발표한 대로 자유로운 무역을 보장해 주고 노르베르쥬 전역의 공동발전을 모색해 준다면 까짓거 힘을 합치지 못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회의가 끝나는 대로 곧장 일루나엘로 서신을 보내야겠군.'

이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란센이 충분히 이성적이길. 그래서 말이 잘 통하는 상대이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카사니아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을 때,

훅!

돌연 천장에서 남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은 최소 익스퍼트 최상급이었고, 그중에는 소드마스터도 다수 있었으나 그 누구도 남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 책상마저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검푸른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회의장 중앙에 서서 모두를 오시했다.

"내 당신들이 이럴 줄 알았지. 그래서 직접 왔습니다. 우리 허심탄회하게 얘기나 좀 나눕시다."

란센 반로아.

그의 두 눈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 * *

난 사실 진짜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이들과 싸울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저들이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웨이브가 임박한 지금 우리끼리 싸웠다가는 노르베르쥬 전역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여러분들의 불안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역로를 마음대로 틀어쥘까 봐 그게 걱정인 거 아닙니까?"

나는 서두를 떼었고,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란센!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이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잘 됐다는 듯이 칼부터 빼어 드는 놈.

"그래. 그래서 일루나엘과 카슈시를 자유도시로 내놓고 아일룬 평야에 연맹군의 주둔을 받아들이겠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내세우며 비릿하게 웃는 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로버랜드의 욕심 터진 영주들이라도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나는 웃었다.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없는 놈들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난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나는 좋은 제안을 들고 왔으니까.

"이렇게 합시다. 꼭 싸울 필요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이득으로 뭉칩시다. 그러니까 무역로를 열어 두는 쪽이 나에게도 이득이 되면 나도 당연히 무역로를 열어 둘 것 아닙니까?"

"됐고, 우리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남는 건 전쟁뿐이오."

"란센. 여기 온 건 네놈 실수다. 너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

미친놈들이 짖어 대는 소리는 일단 무시하고 나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진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니까 그러네.

"여러분들에게 투자를 하겠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영주들의 도시. 12개의 도시 전체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고요. 제가 말했죠? 노르베르쥬도 자체적인 산업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요. 충분한 돈을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특산물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내 입장에서도 무역로를 유지하는 편이 이득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면서 나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영주들에게 하나씩 날렸다.

오러로 완벽하게 컨트롤한 종이는 팔랑거리지도 않고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각 영주들의 앞에 정확히 떨어졌다.

남들이 보기엔 신기에 가까울 내 오러 제어 능력에 영주들은 신음을 흘리며 내가 던진 종이들을 살펴보았다.

"헛...."

"흐음...!"

그 종이에는 내가 각 도시에 투자할 금액이 적혀 있었다.

어때.

놀랍지?

엄청난 액수에 관대하기 짝이 없는 조건.

대놓고 돈을 준다는데.

이래도 나랑 싸울 거야?

...라고 생각했던 나는 순진했던 거였다.

"그러니까. 이 정도 돈을 막 뿌릴 역량이 있다는 거지?"

"하. 란센 당신도 우리랑 싸우는 게 부담스럽긴 했나 봐?"

"됐고. 그래서 일루나엘을 내놓을 건가?"

얘기가 이렇게 된다고?

그냥 하나하나 다 박살 낼 수도 있는 내가 먼저 굽히고 이렇게 좋은 조건을 내미는데도 이런다고?

울컥 분노가 치밀었지만 나는 한 번 더 참았다.

그래. 아무리 욕심만 많고 상도의 따위 모르는 강도 백작들이라고 해도.... 머리가 아주 없진 않을 거다. 기본적인 셈도 못 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테니까.

"전쟁을 하면. 여러분이 무사할 거 같습니까? 왜 쉬운 길을 두고 힘든 길을 가려고 합니까. 진짜 좋은 제안입니다. 나도 이기고 여러분도 이길 수 있는 제안이라고요. 다시 한번...."

하지만 나는 말을 마칠 수조차 없었다.

"흥! 말로는 뭘 못 하겠나!"

"이렇게 공수표 날려 놓고 시간만 질질 끌면서 아일룬을 안정화시키려는 속셈인 줄 모를까 봐?!"

"사기꾼 같은 놈!"

"란센. 네가 여기에 혼자 찾아온 순간 네놈의 패배는 확정된 거다. 이 멍청한 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아무리 내가 관대한 제안을 해도 저들에게는 도통 통하질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저들과 나의 말이 헛도는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너넨 너희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힘이 부족해서 이런 회유책을 들고 왔다고 생각했나 봐?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애매하게 짧고 뭉툭한 검.

일명 성검이라는 것이다.

"에아."

그리고 이름을 불렀다.

헤레폴 근처에서 찾아낸 성물.

녀석도 손상이 좀 있었지만 무리 없이 기동에 성공했다.

특이한 점은 이 녀석의 이름도 '에아'라는 것. 아무래도 성물들은 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에테르 블레이드 시스템 ON!]

머릿속에서 에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구우우우웅-!

애매하게 짧고 뭉툭하던 검신에서 검푸른 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나왔다.

성검.

헤레폴 인근에서 찾아낸 성물은 하늘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을 부여받고 그 기운을 다시 성검에게 쏘아 준다.

그 결과가 이거다.

"미친...."

"저게 대체...."

성검에서부터 뻗어 나온 오러 블레이드가 하늘에 닿았다.

문자 그대로 천장을 가르고 하늘까지 뽑혀 나왔다.

'놀라야지. 나도 놀랐으니까.'

성검의 힘을 처음으로 시험해 봤을 때, 나도 얼마나 놀랐던가.

훙!

성검을 내리긋는 순간, 별다른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칼로 무른 버터를 자르는 것처럼 거대한 성을 갈라내는 오러 블레이드.

원래대로였다면 강맹한 오러 블레이드의 폭풍에 성 자체가 쪼개져 흩어졌겠지만, 내 오러 블레이드엔 지금 성검으로 인해 한껏 강화된 검기가 같이 감겨 있었다.

예리하게 잘라낸 성은 그저 잘려 나갔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저 잘린 자리를 통해 이곳 회의장으로 길게 햇빛이 비쳐 들었다.

바닥을 살펴보면 아래층과 깊은 지하가 보였다.

"...."

"...."

더 이상 입 밖으로 말을 뱉는 자가 없었다.

나는 성검을 거두고 얼어붙은 영주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내 제안은 유효해. 싸우든가. 아니면 받아들이든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얼빠진 대답들이 하나둘씩 들려왔다.

"네... 넵."

"아, 알겠소."

"딸꾹."

난 영주들의 확답을 받아 내고 헤레폴을 빠져나왔다.

헤레폴을 뒤로하고 걷는 내 귓가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뭐야?"

"란센? 란센이 쳐들어왔다고?"

"성이 두 동강이 났는데?"

"저... 저런 거랑 싸우라고요? 우, 우리가요?"

전쟁을 준비하던 시민과 전사들의 사기가 우수수 깎여 나가는 소리.

그리고,

"살다 살다 이렇게 설득력 있는 연설은 처음 보네...."

카사니아라고 했나? 아까 나서지 않고 내 제안을 유심히 읽어 보던 영주의 목소리도 들렸다.

뭐, 이만하면 다들 알겠지.

각자 앞으로 노선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101화 제자

일루나엘 성의 어느 방.

촛불이 가늘게 타고 있는 아늑한 방에서 13살 소년 윈스턴 굴라크는 편지를 썼다.

갤란시(市)의 영주 카시미르 굴라크의 아들로 평생 살다가 패왕 란센의 제자가 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 소년은 아직 모든 게 어색하고 두려웠다.

그래도 윈스턴 굴라크는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부모님 전상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계절이 다가옵니다. 몸 건강히 지내시는지요. 저는 건강합니다.

스승님은 아직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큰일을 하러 자리를 비우셨다고 들었는데 헤레폴에서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두 분도 이야기 들으셨지요?

스승님께선 홀로 12명의 영주를 굴복시키셨다고 합니다. 전쟁을 하겠다고 모였던 그들 모두가 항전 의지를 잃고 벌벌 떨며 스승님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고 하네요.

믿어지시나요? 한 사람이 홀로 성을 가를 수 있다는 사실이요. 저는 그 말을 들은 뒤로 가슴이 떨려서 쉽게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 대단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다니. 하루라도 빨리 스승님을 뵙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곳에선 모두들 저에게 잘 대해 줍니다.

세아 사고(師姑)는....

여기까지 한 번도 멈춤 없이 술술 편지를 적어 내려가던 윈스턴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세아를 만났던 순간이 재생되고 있었다.

남색의 머리칼과 바다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가만히 쏘아보던 여자.

체구는 작았지만, 윈스턴은 차갑디 차가운 겨울 바다를 앞에 둔 것처럼 위축되었다.

'넌 이제 굴라크 가문의 가주이기 이전에 란센 반로아 대공 전하의 제자야. 이 사실을 명심해. 고작 노르베르쥬 제일의 기재라는 것 따위로 건방 떨면 안 돼. 드넓은 천하를 바라보고 노력해야 돼. 부끄럽지 않게 잘해. 지켜볼 거야.'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 깊은 바다에 빠뜨려 죽일 것만 같은 짙은 눈동자.

하지만 윈스턴의 손은 편지 위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적었다.

세아 사고는 지혜롭고 상냥하셨어요. 배울 점이 많아요.

그리고 데이지 사고는....

윈스턴은 또 한 번 펜을 멈추었다.

붉은 머리에 뾰족한 인상의 여자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 천재라며? 13살인데 익스퍼트 하급? 나보다 2년 빠르네.... 야! 잘난 체하지 마라. 항상 죽을힘을 다해서 정진해라! 그래도 언제나 내가 네 앞에 있을 테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붉은 불꽃이 이글거렸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불꽃이 이글거렸다. 사람 눈이 저럴 수가 있을까.

바짝 쫄아서 '네! 세아 사고!'라고 외쳤더니 그 불길이 두 배는 더 강하게 타올랐다.

'사고라니! 누나라고 불러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너울거리는 눈동자.

흉포했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래도 윈스턴은 적었다.

데이지 사고는 강한 분이셨어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세클란 사숙은....

세클란을 말할 때, 윈스턴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의 펜이 거침없이 편지지 위를 누볐다.

세클란 사숙은 엄청나게 친절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멋지고 강하고 사려 깊어요.

윈스턴은 데이지가 한바탕 휘젓고 간 뒤에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던 세클란을 떠올렸다.

'너무 놀라지 마. 알고 보면 착한 애야. 모르는 거 있으면 뭐든 물어보고.'

그러면서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고대 간식이라는 걸 한 움큼 쥐어 주고 갔었다.

윈스턴은 생각난 김에 아껴 먹고 있던 고대 간식 몇 개를 편지 봉투에 같이 챙겨 넣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을까 싶게 맛있는 신과 같은 음식이었다.

스승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는데도 배울 게 너무 많아요. 캐치 소로아 님과 제페토 소로아 님이랑 대련도 해 봤는데 세상에 그렇게 빠른 검은 본 적이 없어요. 벌슨 선생님은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셨어요.

훈련은 힘들지만.... 그보다는 배우는 즐거움이 더 커요.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꼭 가문을 빛나게 할게요!

다시 뵈었을 때는 저도 어엿한 전사가 되어 있을 거예요.

- 자랑스러운 아들 윈스턴 굴라크 상서

* * *

헤레폴에서 영주들을 말로 좋게 설득한 이후, 나는 바로 복귀하지 않고 노르베르쥬 전역을 돌아다녔다.

곳곳에 흩어진 성물을 찾아내고 활성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찾아낸 성물의 총 개수는 61개.

그중 현재까지 작동되는 것은 25개. 나머지는 완전히 부서져서 쓸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변경 지역에 있던 성물들은 하나도 온전한 게 없었어.'

아직 기능을 유지하는 성물들은 하나같이 물빛 땅, 그러니까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에만 위치해 있었다.

기가 막히게 사람이 사는 곳에만 성물이 남아 있었기에, 노르베르쥬에 존재하는 20개의 도시 대부분을 성물로 커버할 수 있었다.

그건 좋은데...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게 우연일 리 없단 말이지.'

나는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사도'라는 놈이 멀쩡하던 땅을 잿빛 땅으로 바꾸던 모습을.

로버랜드를 특징짓는 잿빛 땅이라는 건 사도 같은 놈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잿빛 땅에 있는 성물만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게 우연일 리 없지.

'커다란 싸움이 있었다는 거야. 아마도 잿빛 땅을 만들어 낸 그 미지의 존재와의 싸움.'

신화 시대는 왜 사라졌으며 마도 시대는 왜 멸망했는가?

이제는 그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사교 탓이다.

사교와 관련해서 엄청난 싸움이 있었다. 기적 같은 신화 시대가 몰락하고 그 강대한 성물이 모두 박살이 날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

문제는 사교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들카슈가 그랬고, 크시아스가 그랬고, 제국의 황제 로크슈탈렌이 그러하듯 여전히 사교를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

그게 내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우리의 시대도 그런 식으로 멸망을 하게 될까? 언제? 우리도 그 멸망을 막아 낼 수 있는가?

없다. 지금의 우리는 막을 수 없다.

당장 그 손가락이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해도 그걸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10르핌급 마나 대포 같은 것도 없는 허약한 시대가 말이야.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일루나엘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내가 조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동생들을 집합시켰을 때,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벌슨이 일을 잘했구나.'

내 앞에 도열한 동생들에게서 따끔따끔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몸은 사냥감을 앞둔 맹수들처럼 긴장되어 있었고 두 눈은 칼날처럼 번뜩거렸다.

몸이 충분히 달궈지고 잠재력이 올라온 상태.

그러니까 영약을 섭취하기 제일 좋은 상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너는?"

도열해 있는 동생들의 맨 끝에. 웬 처음 보는 꼬마애가 서 있었다.

이제 갓 13살 정도 된 소년.

"스승님을 뵙습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땅에 세우고 두 무릎을 꿇었다.

아아.

너구나?

"윈스턴 굴라크? 카시미르 굴라크의 아들인가?"

"예. 스승님! 부족한 제자가 처음으로 인사 올립니다."

조그만 녀석이 군기가 꽉 잡혀서 똘망똘망 대답하는 게 귀여웠다.

나는 녀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직 어려서 몸이 여물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신체 밸런스가 좋았다. 자세 하나하나에도 각이 서 있는 게.... 짜식 싸움 잘하게 생겼네.

"일어나라."

"예!"

"검 뽑아 보고."

"예!"

시원하게 검을 뽑아 드는 윈스턴.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훌륭하네.'

검을 뽑고 쥐는 자세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제 손발처럼 검을 익숙하게 다뤄 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익숙함이 녀석의 손끝에서 뚝뚝 묻어났다.

채앵-!

나도 녀석처럼 검을 뽑아 들었다. 윈스턴의 두 눈에 긴장감이 서렸다.

"받아 봐라."

녀석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정수리.

이거,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른다. 자신보다 훨씬 큰 상대가 머리 위에서 휘두르는 검이 주는 위압감.

초보자들은 제때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제법 노련한 이라 해도 검을 막아 내며 자세가 무너지게 마련이었다.

물론 막을 수 있게 내 딴에는 살살 휘둘렀지만, 그래도 내가 휘두르는 검이다. 어지간한 검사들에게는 부담스러운 힘과 속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카가가강!

이걸 막았다. 아주 깔끔하게.

윈스턴의 자세는 검술 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완벽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막아?"

"아앗!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검을 치우는 윈스턴.

"아냐. 아냐. 잘했어. 왜 눈치를 봐?"

"죄, 죄송합니다! 눈치 보지 않겠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강단이 철철 넘치던 자기 아버지랑은 달리 애가 말랑말랑하네.

나는 허둥대는 윈스턴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다음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이것도 받아 봐라."

이번엔 속임수를 썼다. 허벅지를 노리는 것처럼 검날과 어깨를 비틀었다가 그대로 탄력을 이용해 윈스턴의 어깨를 노렸다.

까앙!

근데 막혔다.

이번에도 아주 깔끔하게.

당황해서 움찔! 하는 모습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어깨를 노릴 줄 알았다는 듯한 방어였다.

"또 막아?"

"으아아앗!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아냐. 잘했어. 사과하지 마."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성격은 지내다 보면 점점 나아지겠지.

나는 허둥대는 윈스턴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허벅지가 아니라 어깨를 노렸다는 거."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 그게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예."

"그런데 어떻게 막았어."

"스승님의 자세에서 노릴 수 있는 공격점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나가 허벅지. 하나가 어깨. 그런데 허벅지는 제가 발을 빼내서 피할 수 있는데 어깨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스텝을 밟으며 어깨를 방비한 겁니다."

벌써 자세를 볼 줄 안다고? 13살짜리가?

재밌다.

진짜 재미있었다.

이 정도면 검술은 정말 타고났다는 거고....

"익스퍼트 하급이라고?"

"예!"

"그럼 이거 한번 따라 해 볼 수 있어?"

나는 윈스턴 앞에 검을 내밀고 오러 소드를 살짝 흔들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굉장한 오러 감응력이 있어야 시도할 수 있는 묘기였다.

오러를 그냥 밀어 넣는 게 아니라 밀도에 변화를 줘서 파동을 일으키는 것.

익스퍼트 상급의 오러 슈팅과 익스퍼트 최상급의 오러 쓰레드로 연결되는 기본 훈련. 같은 익스퍼트 하급이어도 오로지 극상의 재능을 가진 이들만 이걸 할 수 있었다.

'아마 못 알아보겠지만....'

괜히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동생들과 함께 수련했고 녀석들의 검술을 봐줬으니까.

내 동생들은, 동생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천재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재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들도 어릴 땐 이걸 알아보지 못했다.

오러의 미세한 흔들림.

나는 당연하게 느끼고 당연하게 해냈지만, 동생들은 보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했다.

동생들을 가르치기 힘들 때가 바로 그럴 때였다.

'이거랑 이거가 다르잖아?'

'응 똑같은데?'

이러면 뭘 할 수 있겠는가.

또는,

'이거 어떻게 해?'

'그냥 하면 되는데....'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앗! 오러가 흔들렸어요! 이럴 수도 있군요!"

이 녀석 이걸 알아봤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심지어 오러 소드를 뿜어내더니,

웅! 우웅!

어설프게나마 흉내를 냈다.

"아아.... 잘 안 되네요. 죄송합니다. 스승님."

뭐지 이 녀석?

입가로 미소가 진해진다.

문득 확신이 들었다.

은근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제자라면 충분히 잘 기를 수 있겠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잘했다. 제자야. 앞으로도 잘해 보자."

"핫!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와인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녀석이 귀여웠다.

이거 신나네.

나는 기분 좋게 다시 동생들을 둘러보았다. 거기에 제자까지.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구나.

"그럼. 다들 준비된 것 같으니. 가자."

나는 앞장서서 걸었다. 동생들이 따라오며 물었다.

"어딜 가는데?"

어디긴 어디야.

"더 강해지러 간다."

이제 드디어 1만 년의 농사가 결실을 볼 때였다.

그래. 드라키움을 섭취할 때다.

#102화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