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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며칠 뒤, 로이엔 남작가.

백작의 승인을 받았다곤 해도 젤커드 자작가의 영지 내에 있는 그들을 잡기 위해선 자작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하므로 로이엔 남작은 일단 곱게 그들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돌아온 건 내어 줄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뭐라고? 그 잡종 꼬맹이를 내줄 수 없다고? 제정신인가, 젤커드 자작은?"

"그야 딸도 같이 달라고 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겠죠, 남작님. 더구나 딸도 기사급으로 성장한 상태이니, 저 같아도 안 줍니다."

"닥치게, 벤트 경. 지고 돌아온 주제에 말이 많군."

"…예, 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전 남작님의 기사입니다. 실패의 오명을 씻는 건 둘째 치고, 섬기는 가문이 망하는 걸 어떻게 지켜봅니까? 그쪽 따님이 중급 기사인 저랑 맞먹고, 베오날드 도련님의 강함은 분명히 절 능가합니다. 그걸 알아주십시오."

남작의 무례한 태도에도 익숙하다는 듯 받아치는 벤트 경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무례하다고 해도 이미 하급 기사 둘을 잃은 마당이니 중급 기사인 자신의 대우가 깎일 일도 없었다.

아무튼 젤커드 자작의 거부 전갈에 로이엔 남작은 자신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긁으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 분을 터뜨렸다.

"끄으으으응! 이를 어쩌면 좋지? 그러면 젤커드 자작의 영지를 쳐들어가서 내놓으라고 하는 수밖에 없는데...."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젤커드 자작의 전력에 중급 기사급 둘이 더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아니면 다른 자들이랑 손잡아야겠죠. 가령 델마인 남작님이라든가?"

"으음, 그래야겠지. 기사들의 질로 안 되면 머릿수라도 많아야 하니 말이야. 용병들을 더 고용하려 해도… 결국 돈이 문제이니. 끄으응~ 일단… 아니, 내가 직접 남작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즉시 말을 준비해라!"

도움을 받기 위해 직접 델마인 남작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한 로이엔 남작은 즉시 그의 영지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군사 준비를 하고 용병을 고용하는 등등… 칼을 뽑은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하기에 상대보다 더 많은 군세와 기사를 준비하려면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남작님. 그렇게 되면 저쪽 젤커드 자작도 분명 주변 파벌에 있는 기사들과 군사를 끌어모으게 될 겁니다. 자칫하다간 내전 규모로 번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려해 보심이?"

나서려던 찰나, 다른 기사가 벌떡 일어나서 로이엔 남작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젤커드 자작이 일반 귀족이라면 모를까, 나름 캘러메인 백작 아래에서 델마인 남작과는 쌍두마차로서 백작 가문의 안건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 말을 들은 로이엔 남작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으음, 그대의 말도 틀린 건 아니군. 하긴 가문 간의 싸움은 가문 간의 싸움으로만 끝내야지. 하나 그러면 변수가 너무 많아지는데?"

"델마인 남작님의 기사들을 용병으로 위장시켜서 도와 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문과 가문 간의 정정당당한 전쟁으로 한정하자는 것입니다. 백작님에게 그것의 감시와 억제를 해 달라고 하고 말이죠. 상대는 자신들의 전력이 우세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지요."

'정정당당'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무색할 일이었지만, 아무튼 기사의 전략은 합당했다.

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건 캘러메인 백작가도 마찬가지였기에 가문 대 가문의 전쟁으로 한정시켜 달라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다음에 군사들 사이에 델마인 남작의 기사와 정예병들을 용병으로 위장시켜서 몰래 편성한다면 완벽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흐음, 나쁘지 않아. 하지만 문제는 델마인 남작님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용병 행세를 시켜야 한다는 점인데...."

"어떻게 보면 정적을 처리할 찬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쟁'의 방식으로 하면 들킬 염려가 훨씬 적지요. 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면 이 방법뿐입니다. 결투로 정하려고 해도 상대 기사 쪽 전력이 우세할 거고, 이미 군사들과 용병들을 모았는데… 돈이 또… 아깝지요."

"그렇지. 그래, 돈값만큼 일은 시켜야 하니 말이야. 어쨌든 델마인 남작님에겐 가야 한다는 거군. 곧바로 출발하겠네. 나 없는 동안 영지 상황을 지켜봐 주게."

"예, 남작님."

로이엔 남작은 곧바로 말을 타고서 기사들과 함께 델마인 남작의 영지로 향했다.

믿을 구석을 만들어 두고 가문 간의 정정당당한 전쟁을 포장해서 승리하는 것. 겉으론 화려하게 포장하지만 비열한 귀족 사회에 딱 어울리는 계략이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달린 로이엔 남작은 곧바로 델마인 남작가의 응접실에서 여전히 노예들을 의자로 사용하는 델마인 남작을 만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델마인 남작님."

"하하, 무슨 소리인가? 우리 사이에.... 로이엔 남작이야말로 오히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지 않았나?"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음, 그렇겠지.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델마인 남작이 운을 띄우자, 로이엔 남작은 속사포처럼 빠르게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자신의 딸인 메이라 부인이 베오날드에게 모욕을 당했고, 외손자인 랄트가 그에 의해 방구석에 처박히는 건 물론 자신의 기사까지 죽였기에 그를 없애야 하는데, 젤커드 자작이 그를 보호하고 있어서 손을 대지 못한다는 정보를 쏜살같이 전한 것이다.

"그래서? 젤커드 자작에게 전갈은 보냈나?"

"물론입니다. 진작 보냈지요. 한데 거절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놈의 딸년이 베오날드에게 붙어 있고, 또… 받아들일 거라면 진작 저희에게 놈들을 건네줬을 테니까요. 아무튼 어떻습니까? 델마인 남작님의 기사들과 병사 일부를 빌려 주십시오. 물론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흐음...."

"젤커드 자작에게 한 방 먹이는 건 물론 그의 기사들을 다수 처리할 수 있다면 분명 손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또 혹시나 젤커드 자작을 쓰러뜨리거나 포로로 잡으면 그의 땅이 손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 지긋지긋한 근본도 없는 놈이 칼에 망하는 걸 봐야지 않겠습니까?"

가문 간 전쟁의 메리트와 대가에 대해 열심히 늘어놓으면서 힘을 빌리려는 로이엔 남작이었다.

설득력은 충분히 있는 이야기였고, 반대파인 젤커드 자작의 세력을 깎을 정당한 명분이 있는 찬스인 만큼 델마인 남작은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알았네. 듣고 보니 역시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순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곧바로 그 일을 맡아 줄 병사 200명과 기사 10명을 빌려 주겠네. 자네는 위장 계약서를 준비하게나."

"감사합니다! 델마인 남작님!"

"뭘, 감사할 것까지야. 이런 일이 있을 때 협력하기 위해서 손을 잡은 게 파벌 아닌가. 하나,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

"예! 전쟁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곧바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허허허, 그러게. 하긴 전쟁 준비가 손쉬운 게 아니니 말이지."

델마인 남작은 미소를 지으면서 로이엔 남작의 제안을 승낙했고, 로이엔 남작은 매우 기뻐하면서 예를 갖춘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질적으로 모자라면 기사의 숫자, 그리고 병력으로 압도하면 된다.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따라서 꼭 베오날드 놈을 직접 잡는 게 아니라 젤커드 자작을 노리는 것 등등… 실전은 상상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그는 돌아가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지를 한 번 더 다졌다.

***

며칠 뒤, 젤커드 자작 영지.

전쟁의 기운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베오날드는 거점에서 열심히 금속 제련에 힘쓰고 있었다.

귀족 간의 전쟁은 금방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일에 열중했다.

'전쟁 한 번에 밑작업이 엄청 들어가거든… 특히 가문과 가문의 패싸움 같은 전쟁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래서 웬만한 일의 무력 분쟁은 결투로 큰 피해 없이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보통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 벤트 경이라는 기사를 제압해서 보내 놓았기 때문에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하면 내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캘러메인 백작가의 허락 아래에서 가문끼리만의 전쟁을 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귀족 가문 간의 싸움은 마치 육식 동물의 싸움처럼 아주 치열한 눈치 싸움과 기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일단 이길 전략을 세우는 것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이길 것이냐?'를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골치 아픈 문제라 꽤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정말 도련님의 예측은 무엇 하나 빗나가는 게 없군요."

"빗나갈 게 아니니까 빗나가지 않는 거지. 아무튼… 읏챠, 이제야 제대로 된 게 나왔군."

베오날드는 자신의 눈앞에 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나는 철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설비가 저열한 데다, 직접 제련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기도 했고, 철광석과 각종 재료의 질의 차이와 불순물들의 첨가 유무 등등… 각종 변수를 수정하는 것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지만 드디어 완성한 것이었다. 

'베노피스 강(鋼) A타입. …질은 좀 떨어지지만, 이만하면 충분해.'

"음… 겉보기에는 다른 철 주괴랑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그야 근본은 결국 강철이니까. 자, 받아 봐라, 하이디. 그리고 이것도~ 이건 젤커드 영지에서 사 온 철 주괴다."

베오날드는 의문을 제기하는 하이디에게 베노피스 강(鋼)의 주괴와 일반 철 주괴를 동시에 던져 주었다.

그것을 받은 그녀는 눈이 커졌는데, 같은 크기임에도 베오날드가 만든 것이 더 가벼웠기 때문이다.

"예. 어? 이건 대체.... 크기는 완전히 같은데?"

"불순물이 더 빠져서 그런 거다. 거기에 추가로 연금술적 의미로 조치를 취했고, 그걸로 갑주를 만들면~ 아마 강철로 된 갑옷 중에선 걸작이 나오겠지. 아무튼 제조법과 비율을 확정했으니 이제 그걸로 주괴를 더 만들어야겠군. 네 갑옷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 되면 넌 곧바로 대장간으로 가서 그걸로 갑옷 제작을 의뢰해라."

"예? 예? 베오날드 님의 것이 아니라?"

"하이디, 네가 나의 검이자 창인데… 당연히 너부터 가장 좋은 갑주로 무장해야지 않겠느냐? 갑옷을 만들기에 적당한 양이 충족되면 바로 내려가서 네 갑주부터 만들어라. 그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랑 갑옷을 보니 썩 나쁘지 않더구나."

"하나 곧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시간이 맞을지는...."

"충분한 돈과 철 주괴의 출처를 빌미로 삼아라. 결국 대장장이도 기술자다. 좋은 재료를 보면 출처를 묻고 싶어 하는 게 정상일 거다."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것과 연관되는 좋은 것을 봤을 때 자연히 눈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같은 것이었다. 베오날드 자신 또한 연금술을 할 때 더 좋은 약초, 마석, 매개물 같은 걸 보면 어떻게든 사들이려고 발악하거나 여차할 경우 전쟁까지 일으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그 대장장이도 이걸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하려면 좀 더 만들어야겠군. 장인이라고 해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으니 말이야. 흐음~ 그럼 생산량을 더 넉넉히 잡아야겠군. 음, 무기용 철 주괴는 그럼 포기해야 하나?"

"무기용… 철 주괴도… 따로 만든단 말씀이십니까?"

"이상할 게 어디 있느냐? 검과 갑주의 제조법도 발전하는데, 재료의 제조법과 개량도 발전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더냐? 그게 연금술사로서의 내… 크, 크흠! 아무튼 그렇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면서 연금술사라는 걸 밝힐 뻔한 것을 간신히 멈춘 베오날드였다.

귀족의 일에는 평소 스스로를 제어하곤 하는데, 유독 연금술사에 관련된 문제만 되면 전문가 모드로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나도 알고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없었으면 애초에 나는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도 되지 못했을 테니까.'

시작은 벨릭스 폰 노이멀의 자식들 간의 잔인한 사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것이지만, 결국 죽음의 경쟁에서 자신을 살려 주고, 대귀족으로서의 미래를 열어 준 지혜와 기술이 바로 연금술이었다.

가문의 감옥에 유폐된 수수께끼의 연금술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미래는 찾아오지 못했을 테니, 베오날드에게 있어 연금술은 정말 각별한 것이었다.

"저기, 도련님… 부탁이 있는데… 조금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요? 제가 무슨 마력 제어 기구도 아니고… 헤엑...."

"…지금까지 쉬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까 들었다시피 우린 지금 시간에 쫓기고 있네. 그러니 자, 계속해서 지맥의 컨트롤 부탁하네."

히이이이잉!

그리고 지금 생에도 이렇게 잘 써먹고 있지 않은가? 베오날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지맥의 마력과 새로운 용광로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지친 셀리나를 채근하며 계속해서 작업을 해 나갔다.

[59화]

그 뒤, 계속해서 전쟁을 위한 물밑 작업이 이루어졌다.

캘러메인 백작가의 승인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이루어졌고, 그다음엔 로이엔 남작가와 젤커드 자작 간에 무의미하지만 예의 넘치는 전갈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전쟁의 절차를 밟아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캘러메인 백작, 로이엔 남작, 젤커드 자작의 3자 면담을 통해 중재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이미 둘 다 마음은 전쟁터로 가 있었기에 회담은 당연하게 결렬되었고, 다만 이 전쟁에 얼마나 많은 판돈을 걸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베오날드 도련님은 보물입니다. 제 과년한 딸을 우수한 기사로 성장시켜 주신 귀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요. 아시잖습니까? 이 대륙의 모든 국가들의 전력은 기사의 숫자로 결정되는 거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면 기사를 기를 수 있는 재능은 천금을 주더라도 못 바꿀 것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곤 해도 결국은 범죄자요. 거기에 놈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안주인인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소. 이는 캘러메인 백작가를 모독한 거나 마찬가지요. 그런 놈을 가만히 놔둬야 한단 말입니까?"

"고작 신관의 기적이 있으면 고칠 수 있는 걸 가지고 열을 내시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신전에 기부하는 금액이 그 정도도 안 된단 말입니까? 누가 누굴 모독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겉으로 보기엔 치열하게 다투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겉치레. 포커 카드판으로 따지면 서로에게 블러핑을 넣으면서 레이즈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간을 보는 것과 같았다.

캘러메인 백작의 관리 아래에서 전쟁을 하는 것인 만큼 이제 판돈을 어디까지 거느냐가 문제였고, 양측 다 승리를 자신하고 있기에 판돈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가 없군. 그 무례한 태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소! 이 전쟁에 우리 가문의 명예를 걸겠소."

"제가 할 말을 대신 하시는군요, 남작님. 그럼 이 전쟁에서 이기면 제가 남작으로 승작하게 되는 것이려나요?"

"하! 보자 보자 하니! 건방짐이 끝이 없군. 좋소! 어디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시오. 하나 얻으려고 하는 만큼 실패하면 자신도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예예, 그러지요."

그리고 본래라면 이 작은 전쟁의 판돈으로 걸지 못할 규모의 판돈이 도박판에 올라왔다.

이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가주 대리인 렌겔과 메이라 부인과 말데로브 경, 캘러메인 영지의 대신관까지 공증인으로 부르면서 합의가 되었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그리고 전쟁의 일자는 추수 직후 최종 회의를 했던 바로 이 장에서 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베오날드 님."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젤커드 자작은 베오날드에게 회의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설명해 주고 전쟁의 날짜까지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생겨서 좋군요. 또 어설프게 기사들 간의 결투로 결정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무튼 이걸로 모든 판은 도련님의 뜻대로 짜였습니다. 한데… 결전은 저 평야에서 서로 마주 보고 전쟁을 치르는 건데, 과연 이길 수 있을는지요? 이미 대부분의 용병들은 모두 로이엔 남작가에 고용된 상태라서 병력 숫자에서도 밀립니다."

"가문의 명운까지 걸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걱정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병사들과 기사들의 훈련에 더욱 집중하겠습니다."

그렇게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돌아온 베오날드는 거점에서 베노피스 강을 생산하는 데 열중했다.

상대측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고, 판돈이 상당히 커진 바람에 당초 예상했던 거보다 시간이 더 생긴 만큼 본격적으로 시설을 만들어서 생산성을 올릴 여유까지 생긴 것이었다.

"음, 역시 답은 대형화지. 게다가 자본금이 두둑하니 마석과 스크롤도 사서 투입할 수 있어서 좋군."

"안 그랬으면 제가 죽었을 테니까요. 후우~ 이제야 노동에서 해방이...."

"대신 덕분에 마력 컨트롤과 인챈트를 비롯한 여러 기술이 늘지 않았는가?"

"지식이 늘어난 건 아니잖아요! 흑… 정말이지 이렇게 시간이 남을 거였으면 왜 그리 독촉한 거였어요?"

"음? 시간이라는 건 남지 않는 것이야.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적고 많음을 따질 것인가?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제련법이라든가 이거저거 많이 배우기도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라고요."

베노피스 강을 만드는 데 그녀의 역할이 중요했기에 그동안 엄청나게 부려 먹은 셀리나와 이리저리 다투면서도 거리감은 상당히 줄어든 상황이었다.

마법사로서 공부할 때보다도 지독하게 부려 먹는 게 베오날드였는데, 그래도 그는 대가를 철저히 챙겨 주기 때문에 크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거기에 시간이 더 생기니 지맥에 설치하는 용광로를 대형화하고, 일부 주문을 인챈트로 대체해서 효율을 올려서 그녀의 노동량을 줄여 준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자원 효율화는 되지 않아서 지맥의 마력이 너무 많이 빨려 나가는군. 끄으응~"

"지금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지 않나요?"

"좀 더 스마트하고, 효율을 좋게 만드는 걸 바라는 거다. 이거 설치하는 데 드는 시간이 아깝잖아."

"이미 저렇게나 만들었으면서요?"

셀리나는 용광로 반대쪽에 쌓인 베노피스 강(鋼) 주괴 수십 개를 바라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용광로 구조를 개선하고 주문 일부를 개선한 결과 놀라울 정도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는데도 만족 못하는 베오날드가 어이없었던 것이다.

물론 베오날드로서는 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자꾸 눈에 밟히는데, 가만히 놔둬야 하는 현실이 짜증 났고 말이다.

"그냥… 보기가 그래서 그래. 에휴~ 철광석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이러는 동안에도 지맥의 마력은 소모되고 있구만. 쩝~"

더구나 철광석을 비롯한 재료들이 늦게 오는 것에도 베오날드의 불쾌지수는 계속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저 최종 전쟁 회의에도 참여를 안 했어야 했지만,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기에 자신이 가서 대비하는 게 맞았다.

"베오날드 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셀리나 님도 같이 오시지요."

"그래, 세인~ 지금 가마. 자, 가서 밥이나 먹지."

결국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시간이 되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인의 부름에 셀리나와 베오날드는 용광로에서 물러나 임시 거처로 쓰는 통나무집 옆의 식탁에 모였다.

식탁에는 갓 구운 빵을 비롯해서 채소와 야채, 그리고 잘 구워진 고기에 소스까지, 야외라고 볼 수 없는 요리들이 다수 차려져 있었다.

"역시… 그 어떤 일보다도 식사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 으음~ 요리 재료랑 설비가 많이 모자랐을 텐데.... 세인, 부족한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다오."

"식사는 그저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되는 게 아닌가요?"

"무슨 소리. 삶이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식사는 필수불가결한 것. 그렇다면 가능한 한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그런 의미에서 세인의 가치는 아깝지 않지. 어쩌면 셀리나 너보다도 말이야."

"소, 송구스럽습니다. 이런 요리 따위가… 마법사님과 비교된다는 게...."

과한 칭찬에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워하는 세인. 반면 셀리나는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는데 저평가당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을 부풀리며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속에서 느껴지는 풍부한 맛에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베오날드의 접시에 있는 스테이크를 집어 가서 복수하려고 했지만 베오날드의 나이프에 저지당하고 만다.

"쳇!"

"…뭐가 쳇이냐."

"저기, 부족하면 아직 더 있습니다. 셀리나 님, 베오날드 님."

당황한 세인은 허둥지둥 두 사람을 말리려 했지만 셀리나는 고개를 돌리며 투정 부릴 뿐이었다.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흥!"

"…심술부리지 마라. 아무튼 세인, 더 필요하진 않다. 그보다 너는 제대로 먹고 잠은 잘 자고 있느냐? 네 몸은 이제 너만의 것이 아닌 내 것이기도 하다. 허술하게 취급하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

"걱정 마십시오, 베오날드 님."

베오날드의 따스한 말에 세인은 감명한 듯, 눈을 가리기 위해서 허리를 깊게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둘이서 사랑 극장을 찍는 것에 또 소외되는 느낌을 받은 셀리나는 다시금 비아냥거리며 끼어들었다.

"와, 아주 깨가 쏟아지네요. 휴휴~ 아예 결혼해 버리지 그래요?"

"나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으엑? 지, 진짜요?"

"다만 몇 번째 부인이 될지가 문제겠지만 말이지. 일단 첫째 정실 자리는 정치적인 거라서 비워 놔야 하는 걸 빼면...."

"…제정신이에요?"

"제정신이다만? 귀족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정원을 늘리고 가꾸는 행위나 다름이 없지. 세인은 거기에 충분히 어울리는 여성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건 아니고, 그녀의 선택을 기다려야겠지."

여성을 어떤 목적으로든 강압적으로 손에 넣는 건 아버지인 벨릭스 폰 노이멀 때문에 정말 싫었다.

그냥 메이라 부인처럼 권력 다툼을 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연애에 관해서는 베오날드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곤 절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할 말은 다 하고, 여성 쪽에 선택권을 주는 쪽이었다.

"저는… 이미 선택을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지금은 베오날드 님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장래 정부인의 자리가 차면 그때…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런가? 그게 세인 너의 선택이라면 그걸로 됐다. 다만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이야기해도 좋고. 그리고...."

"…하이디 겨어어어어엉! 빨리 돌아와 줘어어어어!"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 이야기를 태연히 주고받는 베오날드와 세인의 쿵짝에 고통받던 셀리나는 숲속을 향해 철광석을 수급하러 간 하이디를 애타게 부를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이 만든 중갑옷을 입은 하이디가 마찬가지로 중무장한 알테리오를 탄 채 철광석과 각종 재료가 담긴 마차를 끌고 돌아왔다.

"오, 드디어 왔구나, 하이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근데 역시 마차가 산을 오르는 게 쉽지 않아서...."

"아니다. 무사히 왔으면 됐다. 그런 거라면 이미 고려하고 있었다. 그보다 마차는 둘째 치고, 알테리오와의 호흡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게, 처음엔 좀 힘들었지만 슬슬 저도 주인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힘으로 이끄는 느낌이 아직 강하지만 말이죠."

"그래? 저 녀석, 참...."

삐이이익!

베노피스 강으로 만들어진 갑주로 중무장한 알테리오는 현재 세인에게서 먹이와 물을 받아먹으면서 행복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완전히 성체가 된 알테리오는 하이디가 타도 될 정도로 거대해진 지 오래여서 타는 건 문제없었지만, 길들이는 데 조금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튼 정말 기대가 되는군. 아주 오랜만에… 전쟁다운 전쟁을 해 보게 될 테니까. 마지막으로 했던 게 언제더라...? 북방 이민족을 토벌하던 거였나?'

전생에 제국의 2인자가 되어서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전쟁'은 끊이질 않았었다.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귀족과 이민족, 각종 문제들로 인해서 반란이 일어나는 땅 등등.... 그는 군부의 실권도 유지하기 위해 황제를 대신해서 직접 전선에 나섰다.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도전하지 못할 세력을 꾸렸기에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전쟁'이라는 찬스가 얼마나 큰 도박판인지 알기에 이기고 나서 얻을 것을 상상하며 하루 빨리 그날이 오길 바랐다.

[60화]

그렇게 로이엔 남작가와 젤커드 자작가는 각자 전쟁에 대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밀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날, 드디어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캘러메인 성의 서쪽에 펼쳐진 평야에 양측 군대가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고, 각자의 진을 꾸렸다.

일단 분쟁이 있는 각 가문끼리의 전쟁이었기에 다른 가문의 깃발 없이 오직 로이엔 남작가와 젤커드 자작가의 깃발만이 보였고, 전쟁이 벌어지기 전 서로 상대측 군세를 보면서 어떤 준비를 해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략을 세울 건지 이야기하느라 각 상층부는 바쁜 상황이었다.

"보자… 역시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군요. 베오날드 님."

"용병들 계약을 의외로 오래 유지했네요. 돈 좀 깨졌을걸요?"

대충 봐도 적의 군세는 약 1,200명. 하나 베오날드 측의 군사는 고작해야 800명 정도였다.

여기서 이제 영지 직속 병사와 용병들의 숫자 비율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데, 베오날드 측은 약 600명이 영지 쪽에서 최대한 긁어서 징병해 온 병사들인 데다 용병들 200명 정도를 간신히 고용해서 숫자를 맞춘 것이었다.

"그동안 노역이라든가, 몬스터 토벌, 농업 등등… 동원할 수 있는 일엔 모두 동원하면서 최대한 손해를 메꿨다고 합니다. 물론 그러고도 일부는 계약 해지를 한 다음 다시 고용했고 말이죠."

"흠, 그렇군요. 한데… 저쪽은 용병들 진영 같은데, 묘하게 움직임이 정돈되어 있군요."

"…예? 어? 그러고 보니!"

그것은 적 진영을 아주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움직임이었다.

베오날드가 지적하지 않았으면 젤커드 자작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으로, 그들은 움직임과 걸음걸이가 묘하게 일정하고 절도 있었으며 용병이 가지지 못할 예기를 뿜어내는 자도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뻔하죠. 가문끼리의 전쟁을 핑계로 자신은 다른 가문에서 기사들과 정예병을 빌려 온 거겠죠."

"…허!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럼 큰일 아닙니까?"

"아니, 이미 예상하던 범위입니다. 그 정도로 믿는 구석이 없으면 이 도박판이 성립이 될 리가 없죠. 이미 승전고를 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꾸며 놓은 꿍꿍이가 들키지 않았고, 거기에 병력 수도 자신들이 월등히 많다.

1,200 대 800. 사실상 1.5배의 차이. 거기에 기사들까지 몰래 다른 귀족에게서 빌려 와서 숫자를 늘렸다면 전장의 승패는 더 이상 가늠할 필요도 없다고 느낄 것이다.

전장은 넓은 평야에서 전면전, 순수한 병력의 힘만으로 싸우는 것이니 전략이 가세할 곳은 더더욱 없다.

"그런… 확신에 차 있는 적을 무너뜨리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죠. 아무튼 시간은?"

"전투 개시 시간은 정오. 11시 30분경에 캘러메인 백작님과 말데로브 경, 대신관님의 전쟁 선포를 시작으로 양군이 격돌. 그 이후 한쪽이 항복하거나 적 군세를 와해 혹은 전멸시킬 때까지 전투가 이루어지며, 승자는 패자 가문의 모든 것을 취하게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저희도 준비하죠. 저도 슬슬… 준비해야 하니 말입니다."

"예."

젤커드 자작과 함께 진영으로 돌아간 베오날드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본래 자신은 지휘부에 앉아서 편하게 지휘하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지만, 지금은 믿을 구석이 있어도 전력에서 밀리기 때문에 변수를 막기 위해 직접 현장에서 뛰어야 할 판이었다.

갑주와 투구를 쓰고 자신의 검과 방패를 챙긴 그는 보병으로 참전할 생각이었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베오날드 님? 엄연히 알테리오는 도련님의 것인데...."

준비를 마치고 전장으로 향하는데, 중무장한 알테리오를 탄 하이디가 그의 옆에 다가와 물었다.

베노피스 강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갑주와 그녀의 힘과 알테리오의 크기에 맞춘 거대한 창이 햇살에 빛나면서 마치 전장의 여신 같은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무표정만 지어도 위엄이 넘칠 모습인데, 그녀는 지금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으로 걸어서 전장으로 향하는 베오날드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다. 하이디, 내 판단을 의심하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주군이 가장 위험한 곳에 가시는데… 걱정하지 않을 자가!"

"흠, 확실히 위험하긴 하지. 하지만 가장 위험한 곳이야말로 승부처가 된다. 그러니 날 믿고 너는 전력을 다해 싸워라. 네게 내 명예가 걸려 있음을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잠시 하나 몰래 조언해 줄 게 있다만… 귀 좀...."

뭔가가 문득 떠오른 듯 베오날드가 말하자, 그녀는 전혀 의심 없이 투구를 아예 벗고 베오날드에게 머리를 갖다 대었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키스를 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하이디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물러나며 소리쳤다.

"베, 베베베베베베오날드 님? 가, 갑자기 이게… 무슨!"

"하핫, 미안하네. 혹시라도 이게 내 생애 마지막이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야. 이걸로 여한은 좀 덜하겠군. 아무튼 지금 것의 다음은 승리 후로 미루지."

"이, 이이이다음 말씀이십니까?"

"물론 다음부턴 허락을 받을 테니 걱정 말게. 그럼~"

그렇게 말한 베오날드는 다시 투구를 쓰고서 보병들의 방진을 향해서 뛰어갔다.

하이디는 아직도 키스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멍하니 방진에 합류해서 보병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하는 베오날드의 모습을 보다가, 기사들을 부르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결의한다.

"반드시… 베오날드 님에게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가자! 알테리오!"

삐이이이익!

태양이 점점 정오를 향해 가는 가운데 그렇게 양측 군대는 배치를 완료했고, 시간이 되면서 렌겔 가주 대리, 대신관, 젤커드 자작, 로이엔 남작이 예정대로 전쟁 선포를 할 과정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렌겔 가주 대리가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와 조건에 관한 내용을 연설하고, 그다음 대신관의 기도가 이어지는 식으로 의식들이 진행되었다.

"슬슬 시작하겠네요."

"과연 어디가 이길까요?"

"역시 로이엔 남작가가 이기지 않을까요? 병력 숫자도 월등히 많은데...."

웅성웅성....

그리고 이것을 현재 캘러메인 성의 성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나름 가문끼리 명운을 걸고 하는 전쟁이니 만큼 캘러메인 백작가 휘하의 가문들에서 모인 것은 물론이었고, 심지어 제국 수도에서 이것을 보러 온 관리와 귀족까지 있을 정도였다.

'과연 무사히 끝날지....'

엄연히 제국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인 만큼 혹시라도 확전되거나 어느 한쪽이 승부에 불복할 때를 대비해서 온 것이었다.

그 외 수많은 백성들도 평야에서 일어나는 일전을 구경하기 위해 성 위와 아래에 몰래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시작되는군요. 오호호호홋!"

"마님, 정말 여기 계셔도 됩니까?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안주인이신데...."

"닥치세요. 나는 반드시 내 앞에 붙잡혀 오는 꼴을 봐야겠습니다."

"하아...."

참고로 메이라 부인은 본래라면 성벽 위에서 관람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자신도 피해자라면서 기어이 로이엔 남작 진영의 천막 안에 있었다.

기사인 제드 경을 참전시키기 위해서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역시 그녀는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베오날드가 잡히거나 죽는 장면을 꼭 직접 보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처음에 로이엔 남작은 딸인 그녀를 말리긴 했었지만 그녀의 얼굴 상태에 대한 것을 알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그녀가 진영에 있는 것을 허락했다.

"태양이 정점… 정오… 의식도 끝났고… 이제 드디어 전쟁 시작입니다! 마님."

"그래, 드디어! 드디어! 내 숙원을 풀 때가 왔어!"

천둥처럼 치는 나팔 소리와 흔들리는 깃발,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기사들의 고함과 병사들이 진군하는 발소리.

로이엔 가문과 젤커드 가문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로이엔 남작군의 병력 구성은 영지 병사 500명에 용병 700명이지만, 이 중 200명은 델마인 영지의 병사들이었기에 사실상 정예병은 700명에 용병이 500명인 상황.

그 아래 세세한 구성을 보면 기사의 숫자는 델마인 남작에게서 빌려 온 10명을 포함해서 총 20명, 그중 중급 기사는 3명이다. 기사들까지 해서 갑주로 무장한 중기병이 50명, 경기병 150명, 궁병과 합쳐서 포함된 보병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용병들은 말을 보유한 이가 적어서 경기병이 100명이고, 나머진 죄다 일반 보병 400명인 상황. 합치면 보병 900명, 기병 300명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알룬 경은 용병대를 이끌고 측면을 맡아 주십시오. 설욕은 역시 직접 갚아야 하니 말입니다. 으득!"

"용병으로 위장한 입장이니 기꺼이 그리하겠소만? 하나 기사의 싸움에서 압도하기 위해서 우릴 부른 것일 텐데… 적어도 우리는 기병대에 참여하는 게 낫지 않겠소?"

"물론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만, 어차피 병력은 저희가 많아서 전면전이 펼쳐지면 적의 측면을 칠 수 있게 되어서 방진을 부수고 유린하면 편해집니다. 정면의 우리 가문 병사들이 적 중앙과 부딪치고 나면 옆을 부숴 주십시오."

"흐음, 알겠소. 경이 그렇다면야."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들과 분리를 해서 배치된 상황으로,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들은 용병들을 지휘하는 진영에 합류해서 측면을 분쇄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로이엔 남작가의 보병들이 먼저 가로로 길게 진을 짜서 전진을 시작, 궁수들은 조금 거리를 벌린 채로 활에 시위를 건 채 천천히 걸어가며 사거리가 되기를 기다린다.

기사들이 자리를 잡은 뒤 기병들은 활의 사거리 밖 측후방에서 보병들이 맞붙기를 기다리면서 천천히 전진, 용병대들의 진영도 전진하면서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상대 군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오길 기다리는 건가? 하긴 병력이 적으니 수세로 나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하나 그래 봐야 둘러싸고 유린하면 될 뿐. 행군한 것도 아니니 군사들이 지치거나 하지 않았으니 문제없… 는데 저게… 뭐지?'

로이엔 남작가 기사의 눈에 보인 적군의 전열에는 묘하게 무장이 잘되어 있는 병사들이 있었다.

수도에서 보던 중장보병 같은 모습으로 방패와 창을 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갑자기 그것을 들어 올리더니 던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투창인가? 시답지 않은 짓을...."

그와 동시에 젤커드 자작의 병사들이 일제히 투창을 던졌고, 훈련된 병사들은 즉시 방패를 들고 그것을 막기 위해 진형을 짰다.

하지만 방패를 위로 들어 올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그들의 앞에 단 하나의 투창이 빠른 속도로 직선으로 날아와 그들의 방진을 덮쳤다.

"끄아아아악!"

"스트~ 라이크! 좋아, 한 방에… 4명 정도인가? 자, 다시 투창 2사 준비! 어깨에 너무 힘주지 말고, 밀어 올린다는 느낌으로 부드럽게 던져라. 쏴!"

젤커드 자작가의 보병 진영에서는 베오날드가 자신이 던진 투창에 쓰러진 병사 숫자를 세고는 다음 투창 사격을 지시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병사들은 위로, 베오날드는 직선으로 던져서 적 병사들에게 이지선다를 강요하는 방식을 취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달려라! 근접전에 들어가면 더 이상 저 짓은 못하겠지. 어차피 우리 측 궁병대가 사격을 해 줄 거다! 그러니 훈련받은 대로 해라!"

"예! 전군, 돌진하라!"

"와아아아아아!"

역시 몬스터와 싸우고 각종 전쟁으로 실전 경험을 쌓은 난세의 군대답게 몇 명 죽거나 다쳤다고 해서 물러서지 않았고, 상대의 공격에 자신들이 해야 할 대처를 잘 알고 있었다.

후방에서 궁병대가 사격해 주는 걸 믿으며 그들 방패를 든 채로 젤커드 자작의 병력과 근접전을 벌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보자… 투창으로 한 3~40명쯤 줄인 것 같은데, 겁먹은 기색이 없군. 하지만 우리 전열만 투창이 있는 게 아니지.'

투창의 비는 비단 베오날드 측에서만 쏟아져 내리는 게 아니었다.

보병은 물론 아군 기사와 용병들에게까지 투창을 모조리 공급한 베오날드였다.

캘러메인 백작가의 통제 아래 벌어지는 것 때문에 전쟁 날짜가 추수 이후로 넘어가서 넉넉해진 시간 덕에 생각보다 더 많은 양의 베노피스 강을 공급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아주 넉넉한 건 아니었지만, 투창으로 만들었으니 공급이 많이 된 거지. 게다가… 모양도 살짝 바꿨고.'

투창의 경우 창날 부분만 금속이고 창대는 나무로 깎아 만들었는데, 대부분의 영지에서 창대는 비축해 두는 상황이라서 모자라면 근처 영지에서 사 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를 만들 수 있었고, 베노피스 강으로 만들어진 창날로 던진 투창은 적들의 나무 방패는 물론이고 강철 방패까지 뚫고 갑옷까지 찢고 들어가 적의 목숨을 끊어 냈다.

"컥! 이, 이게 무슨! 대체 뭐야, 이거?"

"뭔가 달라! 이거 창날이 무슨… 작살처럼? 아니, 이런데 강도가 유지된다고?"

"크아아아악! 아, 안 뽑혀! 뼈까지 뚫었어! 으아아악!"

그뿐만 아니라 관통력을 살린 날카로움에 마치 비늘처럼 비대칭으로 뻗어져서 만들어진 투창은 한번 파고들면 빼는 데 살과 뼈를 찢어야만 해서 엄청난 고통과 출혈이 동반되었다. 아예 싹 관통된 경우가 오히려 더 나을 지경이었지만, 이 난세에 로이엔 가문의 정예병들은 모두 방어구를 탄탄히 갖추었기 때문에 관통되기보단 몸에 꽂히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음~ 남부 어민들이 사용하는 투창 구조를 응용해 봤는데, 썩 나쁘지 않군.'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의 근본은 결국 살상력이다.

이것을 안 인간들은 원시 시대부터 이것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무기, 전략 전술, 진형 등등… 갖은 지혜를 낳은 것이다.

그리고 500년 전 '통일된 제국'에서는 그와 같은 지혜와 기록들을 한데 모아서 편찬하는 사업을 했으며, 제국의 2인자이자 황제를 대신해서 대륙 곳곳의 전쟁터에 나가서 싸운 베오날드는 그 모든 지식과 지혜를 당연히 익혀 두어야만 했다.

지금 사용하는 투창의 날의 구조는 바로 제국 시절 남부 어민들이 고래나 거대한 크라켄 같은 대형 마물을 잡을 때 사용하던 것으로, 웬만한 갑옷만큼 두꺼운 피부로 무장한 그 생물들을 어떻게 잡는지 궁금했던 베오날드가 봐 두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관통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군. 으음~ 베노피스 강으로 만들지 말 걸 그랬어. 이건 내 실수야. 쩝....'

생각했던 완벽한 결과를 낳진 않았지만, 그래도 800명에게 보급해서 전방, 좌우에서 일제히 뿌려진 투창에 공격받은 가장 앞에 달려오는 적 보병들의 기세는 상당히 꺾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나중에 개선하기로 하고, 베오날드는 검을 뽑아 들고 방패를 든 채 가장 앞에서 달려 나가면서 적 보병의 방진을 방패로 후려갈기며 난전에 직접 뛰어들었다.

[61화]

보병들끼리의 난전이 시작되자, 궁수들도 후방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아군의 사격을 막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쏘는 것은 적 궁병이나 혹은 보병 후방 진영 위주. 궁수의 숫자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양측은 서로 소모전을 벌이는 가운데 드디어 전쟁의 꽃들이 등장했다.

"로이엔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본격적으로 가속하는 양측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보병들의 난전이 진형 유지를 위한 방패라면 기사들이야말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창. 특히 오러를 사용하는 기병대 전열에 뭉친 기사들의 살상력은 이 시대 최고의 무기였고, 경우에 따라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보병의 진영을 지원해 줄 수도 있었다.

"적들이 온다! 우리도 간다! 젤커드 자작님에게 승리를 바친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마찬가지로 젤커드 자작 측의 기병들도 전진하기 시작. 하나 기사 숫자에서 밀린다는 걸 눈치챈 건지 젤커드 자작 측의 기병은 기병끼리의 돌격전을 피하고 상대 보병 쪽으로 향했다.

'그런 속셈인가?'

그것을 본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 벤트 경은 어차피 똑같이 일반 병사들부터 잡는다면 숫자가 많은 자신들이 유리하며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들이 용병들과 함께 양 측면을 지키는 만큼 대처는 쉬울 것이었기에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좋아, 이대로 적 궁수들부터 분쇄한 다음 보병의 후방을...."

삐이이이에에에에엑!

궁수들의 진영이 본격적으로 보이려던 찰나, 조류의 높은 울음소리가 전장의 공기를 찢으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폰의 울음소리. 천적이 나타난 것에 말들은 질주하던 속도를 줄이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지만, 사전에 정보를 가지고 있던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태연하게 말들을 진정시키면서 속도를 다시 올리고자 했다.

'이런 것쯤이야. 마법이 난무한 전쟁터에서 훈련한 우리 말들이 겁먹을 리 없지.'

'저번에 당한 거야 어두운 밤인 데다 생각지도 못해서 그런 거지. 충분히 대비하고 훈련도 했으니 어림도 없다!'

"나타났습니다! 그리폰! 알테리오입니다! 측면으로 옵니다! 그리고 저걸 탄 자는… 젤커드 자작의 딸! 하이디입니다!"

말들을 진정시키면서 질주하는 사이, 측면의 수풀 속에서 갑자기 하이디와 알테리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갑주로 완전 무장을 한 그리폰의 모습에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가장 전열에 있는 벤트 경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갑주의 무게로 인해 은근히 속도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는 계속 질주해서 떨어뜨리자는 판단을 내렸다.

"흥! 어차피 날개가 한쪽밖에 없어서 날지 못하는 그리폰 따위 아무리 달려 봐야 우리보다 느리다! 그러니 질주로 놈들을 떨어뜨린...."

"날아라! 알테리오!"

"나, 날았다고?"

벤트 경은 경악한 표정으로 정말로 하늘 높이 떠오른 알테리오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높게 뛰어오른 것뿐이었지만, 그 높이가 상당했기에 기사들의 눈에는 하늘을 날아오른 것으로 보였다.

'음, 질주 속도는 밀리지만 대신 튼튼한 몸과 근육량, 체구에 비해 가벼워. 괜히 하늘을 나는 게 아니지. 그리고 맹수의 특성을 가진 육체라서 탄력도 좋군. 조커 카드가 한 장 늘었어.'

'역시 베오날드 님!'

단점을 해소하는 것만이 아닌 장점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 덕분에 알테리오는 뛰어난 점프력으로 로이엔 남작 기병대의 후방 3분의 2 지점을 덮칠 수 있었다.

말 하나를 쓰러뜨리고 곧바로 창으로 찔러 기수의 목숨을 끊은 하이디는 이 회심의 찬스를 살리기 위해 오러를 끌어 올려 기병대 전방을 향해 베오날드에게 배운 창법을 시전했다.

"황실 기사단의 무(武), 일식(一式)–사자분신(獅子分身) 'Lion Clone'."

황금빛 오러의 바람이 마치 사자의 포효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기세를 뿜어내어 말과 기사들을 밀어내 버렸다.

그 기세는 앞서가던 기사들도 놀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고, 일반 기병은 물론 가까이 있는 하급 기사들도 오러를 끌어 올려 막으려 했지만 여지없이 밀려나 버렸다.

"무, 무슨 저런 괴물이...."

"궁병대! 지금이다! 이쪽을 향해 쏴라! 나는 기사들을 맡겠다!"

"젠장할, 이 무슨!"

포효처럼 울리는 하이디의 외침에 기사들의 돌진에 쫓기던 궁병대는 즉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사격을 시작, 그리고 하이디는 땅에 쓰러진 이들 중 기사들에게 창을 꽂아서 즉사시키면서 계속 후열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벤트 경은 명예를 되찾을 찬스가 왔다고 생각하며 기사들을 이끄는 대장에게 외쳤다.

"루튼 경! 제가 저년을 막겠습니다. 제 명예를 되찾을 기회를 주십시오. 하급 기사들로는 저 괴물을 막는 건 무리입니다."

"음… 알겠네. 자네에게 맡기지. 하나 반드시 이기게!"

"예!"

허가를 얻은 벤트 경은 즉시 기수를 돌려 창을 치켜든 채 하이디를 향해 질주했다.

기사들을 처리하며 전진하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벤트 경을 발견하고는 마찬가지로 창을 고쳐 잡은 채 알테리오와 함께 돌진했다.

기사들의 마상 전투. 이제 다 자라서 말에 맞먹는 체고(體高)를 지닌 알테리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말을 노려보면서 포효와 함께 질주했다.

삐이이이이잇!

"와라! 이 괴물아!"

"하아아아아앗!"

정오쯤임에도 황금빛 오러와 푸른빛 오러가 깃든 무기가 격돌하며 생긴 불꽃이 번쩍이면서 전장을 비추었다.

괴물 같은 힘을 가진 하이디였지만, 벤트 경은 노련한 기량과 경험으로 그녀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말을 노리는 알테리오를 기마술로 능숙하게 피했다.

"큭!"

'역시! 그 괴물 같은 꼬맹이면 몰라도 이 계집은 상대할 만하다! 게다가 지금 그놈은 이 근처에 없으니! 반드시 죽인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그 호랑이가 없기에 벤트 경은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하이디를 없애기 위해 자신 있게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하이디 또한 무기를 휘두르는 감각과 오러의 느낌으로 저번에 쓰러뜨리지 못한 적임을 눈치챘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명예를 위해 벤트 경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결의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이긴다!'

푸른빛 오러와 황금빛 오러가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전투는 갈수록 격해졌다.

시간상으로는 약 한 시간가량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사상자가 양측 합쳐서 수백. 용병들도 슬슬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전투 상황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예상 이상으로 잘 버티는 젤커드 자작 군대의 모습에 메이라 부인은 답답하다는 듯 옆에 있는 제드 경에게 물었다.

"어째서 전투 상황이 대등한 거죠? 1.5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대체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제드 경! 설명해 보세요."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님. 지금 저희 병력은 보다시피 예비대를 구성해서 체력을 온존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상대는 전 병력이 전투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보시면 저기 예비로 놔둔 용병대들이 기사들로부터 궁병대를 지키기 위해서 뛰고 있죠. 하지만 반면 저희는 양 날개 쪽에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와 병력들이 온존해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리 적이 날고 긴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전쟁입니다. 이 평야에서의 전면전은 정직합니다."

"그렇지만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들과 병력들이 아직 안 움직이는데? 저기 궁병들이 쫓기고 있지 않나요?"

"음...?"

메이라 부인의 말대로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이 후방으로 파고들어서 전투를 격렬히 벌이는 것처럼 젤커드 자작가의 기병들도 후방으로 파고들어 궁병들을 신나게 유린하고 있었다.

본래 이런 상황이 되면 양 측면에 대기시켜 둔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여서 완전히 제압하고, 모자랄 경우 본대의 예비대까지 투입할 예정이었다.

"…뭐지? 알룬 경은 왜 안 움직이지? 이 정도 판단도 안 될 사람이 아닐 텐데?"

델마인 남작가 최고의 기사인 알룬 경의 전략적 식견이라면 지금 움직이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제드 경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쪽 진영을 바라보는데, 알룬 경은 돌입 타이밍을 재려는 듯 전군을 진군시키고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궁병들을 희생시키고 적진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리해서 얻는 이득은 별로 크지 않았다.

"마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상황이 이상합니다."

"제드 경?"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제드 경은 빠르게 본대로 뛰어갔다.

그리고 다시 보병들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 중앙. 젤커드 자작군은 매우 잘 싸우고 있었지만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고, 기본적으로 병력 숫자가 더 적었기에 보병들은 싸우는 게 너무 힘들었다.

"베오날드 님, 한 번 물러나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이디의 기습으로 낙마한 기사와 보병 쪽을 지원하기 위해서 예비대로 있던 상대편 기사까지 투입해 들어오자, 이젠 총지휘관인 젤커드 자작까지 직접 전장에 들어와서 베오날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검과 방패를 휘두르며 적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개전부터 싸우기 시작한 베오날드를 걱정하며 일단 한 번 물러나라고 권고했지만, 베오날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랏빛 오러를 일으킨 채로 적 기사의 목을 베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우~ 저 때문에 시작한 전쟁입니다. 그러니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싸워야지 않겠습니까? 하앗!"

"체력 분배도 전쟁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베오날드 님."

"아직 여유 있습니다."

"하긴… 승리의 빛이 서서히 보이니 없던 힘도 솟아나시겠지요. 흠!"

콰득!

젤커드 자작의 말대로 적 기병대는 이미 하이디에 의해 와해되었고, 적 기사들은 아직 남았지만 머릿수가 부족해서 파괴력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궁병들과 용병들은 살육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흩어지고 도망치면서 버텨 주었기에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느린 것이었다.

사실상 적군의 기사와 기병대의 창이 부러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적 진영에 들어간 우리 기사들은 지금 열심히 활약하고 있다.'

젤커드 자작의 기병들은 열심히 궁병들을 유린하고, 짓밟고 난 다음 도우러 온 델마인 남작의 본대까지 깨부수며 압도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 기사와 기병대의 차이. 이미 이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에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들에게 아직 용병과 기병들이 남아 있어서 조금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주력인 보병들과 기사들을 잃은 시점에서 로이엔 남작은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군. 왜 우리 기병들과 기사들이 궁병대를 유린하는데 용병들이 가만히 있지?'

제드 경이 품었던 의문을 젤커드 자작도 똑같이 느꼈다.

적 예비대가 왜 투입 안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이 작은 평야라면 언제든 보병진 아니면 자신들의 기병에게서 궁병대를 지키든지 해야 했을 텐데, 마치 방치한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의아해하면서도 적 병사의 목을 치는 그였는데, 옆에 있던 베오날드가 멀리서 무언가를 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겼네요."

[62화]

나직이 중얼거린 베오날드의 말에 놀란 젤커드 자작이 그를 바라보는데, 베오날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정했다.

"아, 이거 말을 잘못했네요. 쉽게 이기겠네요, 라고 말해야 했는데 말이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시면 압니다."

그리고 눈앞에선 믿기지 않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에 퍼져 있던 로이엔 남작가의 용병들이 갑자기 배신을 해서 같은 로이엔 남작가 보병의 후방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용병으로 위장한 델마인 남작가의 군사들로 본래는 로이엔 남작가와 손을 잡았던 그들이 배신을 때린 것이었다.

'음, 역시 500년 전이나 후나 귀족들의 정치 감각은 비슷하다니까....'

"하… 설마 이걸 베오날드 님이 하신 겁니까?"

"예, 뭐~ 전 그저… 델마인 남작에게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대체 어떤 제안을 하신 겁니까? 무리한 제안을 하신 건 아닙니까?"

"전혀요. 나름 합당한 상식선의 제안을 했습니다. 보장할게요. 아무튼 이걸로 쉽게 이기게 되었으니 열심히 승리를 향해 걸어갑시다."

서걱!

베오날드는 눈앞의 기사를 베어 내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계속해서 진군했다.

젤커드 자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은 난데없는 용병들의 배신에 의아해하면서도 아무튼 자신들이 이긴다는 것에 힘을 내고 있었지만, 반대로 로이엔 남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은 그 배신에 충격을 먹고 전선이 시시각각 붕괴되기 시작했고, 열심히 싸우던 기사들도 충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알룬 경이 왜 갑자기 우리를?"

"젠장! 이게 무슨!"

전선을 유지하는 보병들이 앞뒤로 공격당하는 상황이니 즉각 베오날드는 후방으로 가서 기사들을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탰다.

후방에 고립된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가장 상급자인 루튼 경에게 몰려들어 방침을 물었지만, 그라고 해서 이미 패배한 전쟁에 더 이상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

"…루튼 경!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젠장! 델마인 남작 놈이 배신을 하다니! 같은 파벌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루튼 경!"

"루튼 경! 적들이 몰려옵니다."

"루튼 경! 적 기사들이 포위망을 구성합니다. 빠져나가려면 지금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죠?"

"…항복한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루튼 경은 더 이상 이 작은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알고 포기하기로 한다.

비록 기사로서의 명예는 떨어지고, 오명이 남을지 몰라도 이 이상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 걸고 달려들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모든 기사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후우… 후우...."

"젠장! 망할 델마인 남작가 놈들이 설마 배신을 하다니! 아니지, 처음부터 그 보랏빛 도련님의 계획이었으려나? 씁, 이 망할 전쟁… 졌군. 대체… 너희 도련님은 뭐 하는 괴물인 거냐?"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감쪽같이 모두를 속이고 델마인 남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일까?

그것은 오직 베오날드만이 알 일이었다.

결국 처음부터 이 전쟁판은 모두 베오날드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거나 다름없었고,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 놓고 시작한 것인데… 어리석은 주인이 그것도 모르고 결국 사기도박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베오날드 님은 괴물이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무조건 괴물이라고! 후우~ 그래, 실력 많이 늘었더라? 아무튼… 너도 기사 가문의 따님이니까 내가 항복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지?"

"…예."

아무리 무의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항복한다곤 하지만 이미 그는 한 번 포로로 잡히고 대금까지 지불한 뒤 돌아온 불명예스러운 자였다.

그 명예를 되찾기 위해 지금 하이디와 싸우고 있었는데, 여기서 또다시 항복하게 되면 한번 낙인찍힌 불명예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과 집안에게까지 번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벤트 경은 이곳에서 하이디를 쓰러뜨리든 아니든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주군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만이 최소한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가족과 자식들에게도 불명예를 물려주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

"가자! 알테리오!"

챙강!

하이디의 창과 벤트 경의 창이 또다시 부딪쳤지만 오러의 압력과 창 자체의 강도가 차이 나서인지 드디어 벤트 경의 것이 부러져 버렸다.

하나 이를 악문 벤트 경은 부러진 창 자루를 버리고 검을 들었고,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말을 버리고 그대로 하이디에게 뛰어들어 그녀를 알테리오에서 내리게 했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좀 비겁해도 뭐라 하지 말라고!"

"커억!"

퍼억! 터어엉!

기사라고 할 수 없는 자세로 하이디에게 올라탄 채로 얼굴에 주먹질을 하고 검에 오러를 실어서 갑주의 틈새를 찌르려고 하는데, 검날은 갑옷 틈으로 들어가는 듯했으나 오러끼리 상쇄가 되면서 쇳소리와 함께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할… 무기뿐만 아니라 갑주까지 무슨… 커억!"

벤트 경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하이디가 주먹으로 그의 턱주가리를 그대로 올려쳐서 뒤로 넘기고는 벌떡 일어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큰 키와 신체 조건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대로 창을 휘두르면서 벤트 경에게 찔러 들어갔다.

"받은 대로 되갚은 겁니다!"

"큭! 되갚긴! 여긴 전장이야! 기사든 뭐든 일단 살고 봐야 한다고! 오히려 감사를 들어야겠는데? 차앗!"

채앵!

찔러 들어오는 창을 쳐 내면서 둘은 땅에서 다시 격전을 벌였다.

하이디는 벤트 경의 끈질김에 놀라움을 넘어서 감탄할 지경이었다.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끝에 기다리는 건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끈질기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대단해 보인 것이었다.

하나 그것도 이윽고 한계가 찾아오게 된다.

"커억!"

"…어라?"

한데, 그 회심의 일격은 거창한 황실 기사단의 무예가 아니라 하이디가 눈속임으로 찔러 넣은 허무한 찌르기였다.

어떻게 그런 것에 당했냐 하면 벤트 경의 몸을 둘러싼 푸른 오러가 아주 희미해졌고, 더 이상 싸울 체력과 기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하이디의 몸을 둘러싼 황금빛 오러는 여전히 찬란했다.

결국 승패를 가른 것은 마나 호흡법의 차이였던 것이다.

"젠장할… 10년만 더 젊었어도… 쿨럭! 쿨럭!"

"…정말 대단한 무용이셨습니다."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쿨럭! 하아… 아무튼… 이걸로 난… 명예와 의무를 다했...."

털썩.

끝내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벤트 경은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이디는 노련한 중급 기사에게서 드디어 승리했지만 실력으로가 아닌 부전승으로 이긴 것 같은 찝찝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승리는 승리이며, 명성 높은 로이엔 남작가의 중급 기사 벤트 경을 쓰러뜨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알테리오!"

삐이이이잇?

뭘 하나 했더니 벤트 경의 말을 잡아먹고 있던 알테리오는 하이디의 부름에 냉큼 달려와서 그녀를 태우고, 하이디는 벤트 경의 시신도 같이 실어서 우선 본진으로 향했다.

명망 있는 기사의 시신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점과 엄연히 자신의 전과이기도 했고, 그의 죽음을 알리면 이 전쟁의 끝이 더 빨리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이엔 남작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보며 안색이 파래진 채로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델마인 남작의 기사와 병사들의 배신부터 모든 게 무너졌고, 영지의 정예 병사들은 모두 초죽음이 되는가 하면 적들의 후방으로 달려간 기사들과 기병대들은 항복하기 시작해서 전쟁의 패색이 매우 확실해진 것이었다.

"아, 안 돼. 이러면… 이러면 우리 가문은...."

"아버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왜 우리가 패배하는 겁니까? 왜?"

"그, 그게! 그게 다 델마인 남작이 배신한 것 때문에… 대체 왜? 왜 그분이 배신을 한 거지? 아니, 아니, 아무튼!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다. 일단 여기서 도망을 쳐야...."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는 이대로 가문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빼앗길 순 없다고 생각하고는 남은 병사와 기사들을 이끌고 천막을 빠져나가 도망치려고 하지만, 이미 그들의 후방엔 말데로브 경을 비롯한 캘러메인 백작가의 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전쟁의 성패가 갈린 시점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배치한 것이리라.

"어딜 가십니까? 로이엔 남작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망치시겠다는 건 곧 패배를 의미합니다만, 그러면 패자의 대가를 치르셔야지요."

"자, 잠깐, 말데로브 경! 이건 아닐세! 이 전쟁은 처음부터 사기였던 거야! 무효라고! 델마인 남작이 멋대로 배신을...!"

"델마인 남작이 왜 이 전쟁에서 나옵니까? 엄연히 가문 대 가문의 전쟁인데 말이죠. 설마? 로이엔 남작님, 군대 안에...."

감정에 휩쓸려서 절대 비밀로 해야 할 말을 꺼낸 그는 순간 움찔하며 말데로브 경의 눈빛을 살폈다.

이 가문과 가문의 전쟁은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의 중재하에 치러지는 것인데, 그 안에 부정한 행위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의 명예에도 큰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델마인 남작가의 명예도 손상을 입히기에 이다음 곧바로 델마인 남작가와 전쟁이 이어질까 그는 얼른 부정했다.

"헉! 아, 아닐세.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한 거지. 아무튼 요, 용병들이 갑자기 배신을 하는 바람에...."

"그것도 엄연히 전쟁의 일부입니다. 애초부터 800 대 1,200의 전쟁을 받아 준 상대가 그럼 아무 생각 없이 전쟁을 하자고 했겠습니까?"

"아무튼 이건! 이건 무효야! 무효! 나, 나는 돌아가겠네. 그러니 제발 길을 열어 주게!"

"안 됩니다, 로이엔 남작님. 그럼 패배하신 걸로 하고 신병을 구속하겠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길을 여세요! 말데로브 경!"

그렇게 로이엔 남작과 그 부하들을 제압하려 하자, 이번엔 메이라 부인이 나서서 말데로브 경에게 길을 비키라고 엄포를 놓았다.

비록 로이엔 남작가 사람이었지만 캘러메인 가문의 안주인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자신이 명령하면 그들이 들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안 됩니다. 이 사안은 엄연히 저희 캘러메인 가문의 명예와 권위가 달린 일입니다. 그러니 절대 비켜 드릴 수 없습니다. 빠져나가려고 하신다면 마님이라고 할지라도 저희의 검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말데로브 경!"

"아니면 어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시고 대가를 치르십시오. 남작님, 메이라 부인, 당신들이 무책임하게 도망치려는 이 추악한 순간에도 병사와 백성들이 무의미하게 죽고 있습니다. 귀족으로서, 영주로서의 책임과 긍지가 있다면 어서!"

"크으으… 으으으윽! 그래. 내가… 졌다."

결국 로이엔 남작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사실상 강요된 패배 선언을 하게 되었다.

확실히 패배 선언을 들은 말데로브 경은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히 병사들을 투입했고, 그리고 이곳에 있는 로이엔 가문의 사람들과 메이라 부인까지 모두 합쳐서 밧줄로 구속했다.

그렇게 정오에 시작한 전쟁이 끝난 것은 저녁노을이 서서히 지기 시작할 즈음, 시간으로 보면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정도면 사실 전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분쟁이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승리는 승리. 로이엔 남작가의 항복과 동시에 젤커드 자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의 승리의 함성이 평야와 성에 울려 퍼졌다.

[63화]

비록 한나절 만에 끝난 전쟁이지만, 그래도 엄연히 가문과 가문이 명운을 걸고 벌인 전쟁이었고 캘러메인 백작가의 중재 아래 이루어진 만큼 승자와 패자의 처분은 냉혹하게 이루어졌다.

평야를 정리하는 가운데 대표인 젤커드 자작이 캘러메인 백작가로 가서 패자들에게서 대가를 받기 위한 회의와 과정을 이어 갔고, 결국 승자 인증과 함께 로이엔 남작가의 운명은 젤커드 자작의 것이 되었다.

"…우리 군사도 내어 줄 테니 우선 로이엔 남작가를 접수하게. 말데로브 경이 같이 가 줄 걸세. 그리고 곧… 중앙으로 보낸 서신이 돌아오면 그땐 아마 젤커드 남작이 되어 있을 걸세. 그리고 그의 신병도 넘기겠네."

그리고 당연히 작위 또한 받게 되었으므로 제국 수도에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이 돌아오면 젤커드 자작은 남작으로 승작하게 되리라.

"정말 감사합니다, 가주 대리님."

혹시라도 로이엔 남작가의 남은 병력과 가솔들이 반항을 할지 몰라서 백작가의 병력도 대동하는 것을 허가했다.

젤커드 자작은 모든 서류와 로이엔 남작에게서 빼앗은 인장을 들고나가려는데, 렌겔 가주 대리가 그를 잠시 불렀다.

"한데… 베오날드는 어째서 안 들어온 건가? 이 전투에 분명 참여했을 터인데...."

"베오날드 도련님은 백작님과의 약조가 있는 터라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흠, 아버님과의 약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조언을 하시더군요. 집안 상황 잘 처리 안 하면… 큰일 날 거라고 말이죠."

"크흠! 잘 알고 있네.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게. 아주 확실하게 할 걸세. 자네도…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하게나."

"예, 백작 대리님. 그리고 다시금 정말로 감사합니다."

젤커드 자작의 마지막 말엔 '베오날드 님을 집안에서 내보내시고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라는 긴 말이 빠져 있었고, 그 의도를 렌겔 가주 대리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로 죽 쒀서 남 주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를 뜻하는 것이리라.

렌겔 가주 대리는 젤커드 자작의 사람됨과 한계를 잘 알기에 이번 전쟁의 승리 요인이 베오날드라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후우~ 정말… 아깝기 짝이 없군. 아무튼 우선은 나부터 가문을 위한 일을 해야겠지.'

그렇게 렌겔 가주 대리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가문을 지키고 영지를 키우며 자기 다음 대의 미래를 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베오날드 일행과 젤커드 자작의 군대는 전장을 정리한 뒤 전리품을 가득 챙겨서 돌아갔다.

죽은 기사와 병사들의 무기와 장비 모든 것이 돈이었기에 수레에 잔뜩 실어서 무거운 손으로 돌아가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베오날드 님은 어떻게 델마인 남작의 군대가 배신할 거라는 걸 아셨습니까?"

"음? 아~ 그거 말입니까? 내가 전에 전갈을 보냈잖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곤 델마인 남작이 배신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없잖습니까?"

"확신하진 않았지요. 배신하지 않았으면 그건 그거대로 싸워서 이길 생각이었습니다. 아마 해가 질 때까지 싸우고도 모자라서 수일간 더 싸워야 했겠지만 말이죠. 다만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젤커드 자작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베오날드는 속으론 '그것도 모르나?'라고 생각했지만, 순수 무가의 가장인 그라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는 천천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귀족 간의 파벌이라는 건 말입니다. 일단 겉으로는 서로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없어지길 바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젤커드 자작님의 파벌이 있기에 델마인 남작님의 파벌이 결속력을 지니게 되고, 그중 세력이 가장 좋은 델마인 남작이 그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지요."

"아, 그건 대강 이해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전쟁 때로 돌아가 봅시다. 만약에 오늘 전쟁에서 로이엔 남작이 승리하고 자작님의 가문이 멸망하고 그 아래의 세력들이 모두 흡수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 떻게 됩니까?"

"별로 어렵진 않습니다. 자, 메이라 부인이라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 어미를 가진 외가, 거기다 이번에 델마인 남작님의 강력한 경쟁 파벌인 젤커드 자작님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흡수하면 이제 델마인 남작님에겐 강력한 라이벌이 새로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러면 캘러메인 가문의 힘을 빌려서 로이엔 가문의 입지는 압도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델마인 남작 아래에서 기죽어 지내던 생활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럼에도 젤커드 자작은 아직 의문이 있는 건지 다시금 의문을 제기했다.

"…하나 그렇게 치면 저도 델마인 남작과 대립하는 입장입니다. 결국 다를 게 없지 않나요?"

"아뇨. 젤커드 자작님은 파벌로 있어도 괜찮습니다. 파벌의 성향이 완전 다르니까요. 젤커드 자작님과 따르는 귀족분들은 대부분 캘러메인 백작군에서 종군한 기사이자 전장에서 공훈을 세워서 작위를 얻은 귀족분들, 흔한 말로 하자면 벼락출세 혹은 역사가 짧은 귀족들이지요. 반면 로이엔 남작가는 어떻습니까?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정략결혼을 시킬 정도로 역사가 깊은 정통 귀족 가문이죠. 거기가 파벌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됩니까?"

"델마인 남작과 로이엔 남작이 대립하는 가운데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누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제대로 확인을 못하게 됩니다. 그나마 혼약 관계나 혈연으로 이어지는 건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게 안 되는 귀족들은 아주 골치가 아파지죠. 그리고 누군가는 그 위치를 이용해서 양측에 양다리를 걸치고 박쥐처럼 행동하는 자도 있을 테고 말이죠."

"…아아아아아! 그것참!"

"상상만 해도 머리 아프죠? 지금 내 아래에 있는 이 귀족이, 이 기사가 누구 편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 경쟁자는 캘러메인 백작가에 후계자의 외할아버지와 메이라 부인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있는데… 이러면 누가 제일 머리 아프겠습니까?"

"델마인 남작이군요! 과연, 그 능구렁이는 결국 자신의 권력과 입지를 강화하는 걸 선택할 테니… 배신할 만하군요. 아니, 저라도 배신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걸 어떻게 계산하시고...."

드디어 완벽히 이해가 되었다는 듯 젤커드 자작은 박수를 치면서 베오날드의 선구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귀족 간의 정치 관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이 선구안. 괜히 대귀족으로서 제국의 2인자로 군림했던 게 아니었다.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귀족의 천성이라는 게… 결국 다 같기 마련이거든요."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베오날드 님."

'그렇겠지. 검토해야 할 게 몇 개나 되는데....'

만약 로이엔 남작이 델마인 남작이 아니라 다른 귀족 가문에 기사와 병력을 빌렸을 때라든가? 만약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예상외의 행동을 했을 때라든가? 만약 델마인 남작의 정치 감각이 예상보다 떨어져서 진심으로 로이엔 남작을 배신 안 하고 밀어줬을 때라든가? 등등… 가정을 따지고 모든 선택지가 나쁘지 않을 행동을 연결해서 하는 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계산과 예상에 따라서 주판을 무수히 두드리고, 여차하면 현실적, 물리적 수단까지 강구해야 하는 만큼 베오날드가 한 일은 오직 베오날드만이 할 수 있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무튼… 로이엔 남작가를 제압하는 대로 제가 말한 것들을 델마인 남작가로 보내 주십시오. 뭔지 기억하시는지요?"

"누구 말인데 기억을 못할까요? 우선 로이엔 남작가에 있는 금은보화와 미술품 등등 현물을 확보하고, 로이엔 남작의 가솔들은 수레바퀴보다 큰 자는 모두 죽이고, 작은 아이들만 살리고, 다른 기사들의 가솔들은 건드리지 말라. 다 알고 있습니다."

"참혹하다는 생각은 안 하시죠?"

"지금은 엄연히 난세이니까요. 후환은 없애 둬야 배신을 안 당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륙 전체가 6개의 나라로 나뉜 난세. 서로 칼부림까지 난 상황에서 적 가문, 그것도 전통이 있는 명문가의 핏줄을 완전히 끊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히 후환이 생긴다.

'제대로 안 치우면 정말 단단히 골칫거리가 되니 말이지. 나도 교훈을 얻었고....'

당장 베오날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요소로는 우선 안 해도 될 전쟁의 명분이 되는 것도 있고, 사내놈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서 갑자기 승진해서 걸림돌이 되거나, 귀족 출신인 계집이면 귀족이나 상류층의 첩이나 후처로 들어가서 갑자기 권력 관계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굳이 수레바퀴보다 작은 아이는 살려 두시는 겁니까?"

"그 정도로 작은 아이들이라면 그리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고, 또 교육이 잘 되지 않아서 아직 자신이 어디 가문의 아이라는 걸 자각 못하는 때이니 충분히 덮어씌울 수 있습니다. 다만 노예로 팔진 마시고 철저히 자작님 가문의 하인으로 교육시켜서 관리하십시오. 최악의 적은 멀리 보내는 것보다 시야에 두고 관리하는 게 더 안심이 됩니다."

"아! 예. 정말이지 베오날드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백작님 혹은 그 위의 분에게 조언을 듣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하하하, 역시 캘러메인 가문의 교육이 남다른 건지...."

전생에 공작까지 오른 대귀족이니 젤커드 자작의 느낌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이었다.

아무튼 로이엔 남작 가문으로 간 그들은 패전 소식과 함께 앞으로 로이엔 남작 가문의 명운은 젤커드 자작가에 있음을 알리고 로이엔 남작을 처형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미 로이엔 남작가의 주요 가솔과 기사들은 모두 이들에게 잡혀 있었기에 혹시나 예상했던 저항은 전혀 없었고, 무혈 입성한 다음 로이엔 영지를 봉쇄하고 남작가 저택의 가솔을 깡그리 잡아들였다.

"봉쇄를 유지하고 작은 꼬맹이 하나까지! 모조리 다 잡아들여라! 영지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가산을 챙기는 것도 잊지 말도록! 창고가 있을 만한 곳은 싹 다 털어라."

"하이디, 잘 봐 둬라. 이게 패배한 귀족의 운명이다. 아름다운 꽃 아래의 흙속엔 이 같은 추잡스럽고 야만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 베오날드 님."

로이엔 남작가의 가솔들이 모조리 잡혀 나오고, 수레바퀴보다 큰 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나마 이 시대는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단숨에 검으로 무 베듯이 목을 숭덩숭덩 벨 수 있어서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형을 했다.

이곳까지 끌려온 영지의 주인인 로이엔 남작은 가장 마지막에 처형해야 했으므로 그는 구속된 채로 자신의 가족과 아이들이 죽는 것을 처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베오날드 님, 돈과 보물 및 현물의 확보가 대강 끝났습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할까요?"

"10퍼센트만 지금 같이 온 말데로브 경에게 줘서 캘러메인 백작가로 보내고, 나머지는 델마인 남작님에게 보내세요. 그래도~ 도움을 주신 분인데 이 정도는 보내야죠."

"으음, 저희 기사들에게 보상도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너무 많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만?"

"기사들의 보상은 이곳의 땅으로 주면 그만이죠. 만약 봉토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자산으로 주면 됩니다. 내년이면 세수가 2배 이상으로 뛸 건데,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보내 놔야 젤커드 자작님의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시샘을 안 하고 자작님의 영향력이 유지가 됩니다."

"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기 마련. 파벌의 수장인 젤커드 자작이 로이엔 남작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흡수한 것을 알면 파벌의 결속력이 흔들릴 수 있다.

물론 젤커드 자작이 로이엔 남작의 재산에서 일부씩 떼어 나누어 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적게 받는 자와 많이 받는 자 간에 감정의 굴곡이 생기게 된다.

하나 델마인 남작과 캘러메인 백작에게 이런 식으로 던져 버리면 그쪽에 생색도 낼 수 있고, 적대 파벌인 델마인 남작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는 언론 플레이도 되며, 델마인 남작은 델마인 남작대로 거액의 돈을 받으니 손해는 없는 거였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땅과 영지민, 그리고… 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봉토와 대우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새로이 서약할 자들은 거두시고, 거절하는 자는 노자랑 식량을 챙겨 줘서 가족들과 함께 영지에서 내보내면 됩니다."

"그래도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인데… 혹시라도 충성심에 공격해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충성스러운 기사도 있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기사도와 명예 때문에 강요받는 거죠. 아무튼 그렇게 보내 주면 알아서 젤커드 자작님의 휘하 귀족들이나 다른 지방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게 될 겁니다. 용병 하기엔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가족들은 먹여 살려야 하고, 그렇다고 주군을 배신한 델마인 남작 측 파벌엔 절대 붙진 않을 거고~ 하하."

"과연…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젤커드 자작은 베오날드의 뜻을 순순히 이행했다.

신기할 정도로 너무 순순해서 오히려 베오날드가 혹시 다른 꿍꿍이속이 있나?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렇게 젤커드 자작은 마치 오랜 기간 함께한 신하처럼 그의 말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완수하여 로이엔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모든 영토와 영지민은 젤커드 자작이 흡수하게 되었다.

[64화]

뒤처리는 비단 젤커드 자작과 베오날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도 이번 일로 인해서 권력 구도라든가 서열 등등… 많은 것이 변하기에 렌겔 가주 대리가 해야 할 일도 아주 많았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도록 하시오, 부인."

메이라 부인은 현재 캘러메인 백작가 저택에 있는 지하 감옥에 수감된 채로 붕대 없는 얼굴을 보여 주기 싫은 듯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그리고 남편인 렌겔 가주 대리가 말을 걸자 그녀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그를 노려보면서 악을 썼다.

"나는… 나는 아무 잘못 없어! 이게 다! 그 잡종! 잡종 탓이야! 우리 랄트의 자리를 위협하는 걸! 아버님도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게다가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 잡종이 한 건데! 왜 내가! 왜 내가 여기 갇혀 있어야 하냔 말입니다! 나는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를 낳은 몸이에요! 그러니 당장 풀어 주세요!"

"으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요?"

"…아니, 대체 무슨...."

"아마 지금쯤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로이엔 남작가는 존재하지 않을 거요. 젤커드 자작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주 엄격하게 후환 없이 끊어 낼 작정이더군."

"...!"

남편인 렌겔 가주 대리의 말에 메이라 부인의 안색은 파래졌다.

지금 한 말의 의미, 로이엔 남작가가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그녀의 근본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이는 한순간에 자신의 근본과 혈통, 정략결혼의 가치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로이엔 남작가의 이름은 역사서에 남지만, 실질적으로 메이라 부인은 이제 귀족가의 여식이 아니라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잠깐만! 잠깐만요.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나는 랄트의 엄마예요. 캘러메인 가문의 후계자를 낳은...."

"하나 이젠 그 베오날드와 똑같이 잡종이 되었지. 근본이 사라졌으니 말이오. 과거의 기록과 역사? 흥! 영지도, 가문도 없는 집안의 자식을 과연 누가 귀족이라고 할 수 있겠소?"

"…아, 아니…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메이라 로이엔! 역사 깊은 로이엔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녀야! 감히 누구를!"

"그래 봐야 미치광이가 스스로 황제라고 부르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아무튼… 뛰어난 지혜와 무위, 품위,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잡종이면 후계자로 삼을 수 없는 게 우리 가문의 모토. 그렇다면 자신의 책임과 임무를 방기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잡종 또한 후계자가 될 수 없겠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 그아아아아아아악!"

졸지에 '잡종'으로 격하되어 버린 랄트에 대해 듣자 메이라 부인은 미치광이처럼 발광하면서 더더욱 날뛰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자신의 소중한 아들인 랄트가, 자신 때문에 그 처리하려던 '잡종'과 똑같은 위치로 떨어지다니.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어서 그녀는 정신을 놓고 발광했다.

"아름다울 때도 추악했는데, 그 모습이니 더 추악하군. 암흑신이 만든 악마가 바로 이런 모습이겠지."

"아니야. 아니야. 우리 랄트는… 우리 랄트는 잡종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모든 건 그 잡종 때문이야.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랄트, 랄트, 캘러메인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인데, 잡종이라니. 잡종이라니. 나 때문이라니 믿을 수 없어. 인정할 수 없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무튼 그 추악해진 모습도 그렇고, 이제 더 이상 귀족이 아닌 당신을 부인으로 둘 이유는 없지만, 비록 정략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신전에서 결혼을 맹세했기에 이혼은 하지 않을 거고, 목숨도 빼앗지 않겠소. 하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인해 가문을 멸망시킨 점을 들어 신관이 되어 평생 노동과 기도를 하며 신께 속죄하시오."

"내가 왜? 뭘 속죄하라고! 나는 아무 죄가 없어요!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잠깐! 그럼 우리 랄트는? 우리 랄트는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 랄트는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 하긴. 당신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오? 아무튼… 이제 더 이상 볼 일 없겠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곧바로 신전으로 향하시오."

그렇게 말한 뒤, 렌겔 가주 대리는 메이라 부인을 뒤로하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메이라 부인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곧바로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던 랄트 캘러메인은 그나마 캘러메인 백작의 노력 덕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아직도 방에서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무겁고 힘들던 업무의 공포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서류 같은 것을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거부감을 호소한 것이다.

아무튼 며칠 동안 저택이 엄청 시끄러웠던 것을 떠올리며 드디어 오늘은 조용해졌구나 생각한 그가 잠들기 위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랄트 도련님, 계십니까?"

"누군가? 이 시간에?"

"란테로 경입니다. 백작님의 전갈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할아버님이? 아, 그렇군. 문 앞에 두고 가게."

"백작님께서 직접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백작인 할아버님이 자신을 각별히 생각하는 것을 아는 랄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고 기사들에게서 전갈을 받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린 순간 갑자기 한 기사가 맹수처럼 자신을 덮쳤다.

"이게 무… 으읍! 으으읍! 으읍! 으음!"

"도련님, 죄송합니다. 이게 모두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란테로 경이라 불린 기사는 그대로 랄트의 입에 천을 물리고는 제압해서 이불로 둘러싸 두었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다른 기사 2명이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을 옮기고, 랄트가 올라갈 수 있을 만한 침대 외곽 기둥에 밧줄을 묶은 다음 끝부분을 동그랗게 마치 교수형에 쓰는 것처럼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게다가 저… 저건? 설마?'

그것을 본 랄트는 싸늘한 느낌과 함께 이 기사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할 건지 대충 예감했다.

목적과 이유는 모르지만 이들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자살로 위장해서 죽일 생각인 것이다.

"필적은 어떻나?"

"이 정도면 비슷하겠지요. 더불어 모친의 사정을 알린 전갈도 짜 맞춰 놨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럼 마무리하지. 도련님, 다시금… 정말 죄송합니다."

'안 돼! 안 돼! 난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어어어!'

열심히 발버둥 치지만 이불만 살짝 들썩거릴 뿐, 기사의 제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상태 그대로 기사 2명에게 들려서 아주 천천히 자살을 위해 묶은 밧줄로 옮겨져 갔다.

랄트는 계속해서 발버둥을 쳤지만 기사들의 동체 시력과 운동 능력을 압도할 순 없었고, 아주 가볍게 목이 밧줄에 걸리면서 체중이 실렸다.

'안 돼! 나는! 나는 살고 싶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안 돼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정말 이 방식은 너무 번거롭다니까요. 그냥 칼로 베는 게 훨씬 빠른데, 꼭 자살로 위장해야 한다니...."

"어머님의 실각으로 인한 실망과 후계자로서의 부담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야 가문의 명예가 상처 입지 않는다. 멍청한 놈이 후계자 자리에 앉는 것보단 낫지."

발버둥 칠수록 체내의 산소가 점점 고갈되고, 서서히 죽음이 랄트를 감싸 안는 사이에 들리는 기사들의 말.

왜 자신이 죽는지에 대해서 알아 두라는 이야기 같았다.

"그럼 후계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은 렌겔 가주 대리님께서 다른 부인과 다시 힘써 본다고 하는군. 다만 그 전까진 제시 아가씨랑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 도련님을 혼인시키고, 에라솔 도련님을 데릴사위로 들여서 가문을 운영하게 한다더군."

"어? 저는 베오날드 도련님이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현재의 백작님이 돌아가신 뒤에 돌아오면 약속 따위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이미… 베오날드 도련님의 마음이 떠난 모양이야. 아무튼 정말… 죽 쒀서 남 준 격이지. 쯧쯔쯔… 아, 드디어 멈췄군. 확인해 봐."

"예. 음… 죽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이 결국 랄트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캘러메인 백작가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결국 성인이 되고 2년도 못 되어 가문의 미래를 위해 자살로 위장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메이라 부인이 베오날드를 처리하고자 하는 욕심만 덜 부렸거나 아니면 랄트, 그가 후계자의 일에서 도망치지 않고 계속 버텼더라면 이런 일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자기 응보이자,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나 패배자가 된 이들의 숙명이었다.

***

며칠 뒤.

어둡고 더러운 청소일과 각종 정리가 모두 끝난 뒤에야 드디어 젤커드 자작은 승리의 연회를 열 수 있었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로이엔 남작가의 저택에서 젤커드 자작은 자신의 파벌 귀족들을 모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를 열고 전쟁의 성과를 자랑하는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힘쓴 기사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해야 했다.

"젤튼 경, 후방 궁병대를 전멸시킨 그대의 지휘와 용맹은 아주 훌륭했소. 봉토와 자금, 어느 쪽을 원하시오? 원하는 걸로 주겠소."

"감사합니다, 자작님. 그럼 저는 자금으로 받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봉토를 원하는 기사에겐 봉토를 배분하고, 자금을 원하는 기사들에겐 자금으로 보상을 내렸다.

양쪽 다 장단이 있는 보상으로, 봉토를 받으면 그 땅에서 나오는 세금과 산물, 노동력 등을 지속적으로 받거나 이용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직접 머물러야 하고 여차할 경우 외적의 침략을 막아야만 했다.

반대로 금전을 받을 경우 봉토에서 나오는 수입보단 적지만 젤커드 자작의 영지에 거처를 두고서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고 할 일만 하며 가족들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음 공훈 대상자는 젤커드 자작가의 딸, 하이디 양입니다."

"예!"

그리고 다음으론 하이디의 이름이 불렸다. 그녀는 전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갑주를 입은 채로 포상을 받기 위해 젤커드 자작의 앞에 가서 예를 갖추었다.

연회인 만큼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자신의 외양도 외양이고, 전장에서 공을 세운 것이 있기에 그것을 축하받기 위해선 이 갑주 차림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이디! 너는 그리폰 알테리오를 타고 전장에 나가 아군의 후방을 노리는 적 기병대의 측면을 덮쳐서 진형을 부수어 큰 피해를 입히고, 적 기사들의 목숨을 끊었다. 거기에 로이엔 가문의 명성이 높은 중급 기사 벤트 경과 일대일로 싸워 승리하여 용맹으로써 우리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이로써 너의 무위는 '기사'급에 속하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며 '하급 기사'로 인정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중급 기사를 잡았는데 왜 하급이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중급 기사 이상부터는 공훈을 세우고 난 뒤 제국 수도로 가서 심사를 거쳐서 통과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가 중급 기사를 이길 정도로 강하더라도 곧바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전투에서 네가 없었더라면 아마 아군에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말하거라. 금전? 봉토? 뭘 원하느냐?"

"실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금전으로 받겠으나 그것을 제가 아닌 벤트 경의 남은 가족들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비록 적으로 전장에서 만나 싸웠지만 그는 용맹했고,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저는 앞으로도 베오날드 님을 따라갈 것이라서 말입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하이디는 예를 갖추고 물러나서 베오날드에게로 복귀했다.

베오날드는 현재 세인의 시중을 받으며, 셀리나와 마주 앉아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연회를 즐기는 중이었다.

"어, 돌아왔어? 그나저나 보상은 받아 두지. 그래도 괜찮겠어?"

"그… 받을 걸 그랬습니까?"

"아니, 네 뜻이 그러하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다. 네 노력으로 얻은 것을 좀 더 널 위해 썼으면 하는 생각으로 말한 것뿐이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런데… 베오날드 님, 저기… 그…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그… 이번에 공을 세운 건… 맞잖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베오날드 님에게 보상을 받… 싶은데… 그… 그… 전에… 전쟁터에서… 개전하기 전에 했던 그것의 다음을… 다음을...."

방금 전까지 젤커드 자작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포상을 받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갈수록 조그맣게 되는 목소리로 베오날드에게 말하는 그녀였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는 하이디는 괜히 말했나 싶어 눈을 꼭 감고 쩔쩔맸지만, 다행히 베오날드는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기에 술잔을 잠시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네 방에 네 몸에 맞춘 드레스와 구두, 액세서리들을 마련해 두었다. 대충 저 논공행상이 끝나면… 그것을 입고 내 방에서 밤새도록 두 사람만의 연회를 하도록 하지."

"...!"

베오날드는 그렇게 말하곤 태연히 다시 술잔을 들이켜며 무슨 말을 했는지 묻는 셀리나와 세인에게 농담으로 둘러댔다.

그런 베오날드에겐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한 하이디는 잠시 후, 그와 함께할 밤을 기대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65화]

다음 날.

베오날드가 눈을 뜬 것은 햇살이 너무 밝은 건 물론이고 뜨거워서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 된 시각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방 안에 있는 시계를 본 그는 '조금만 있으면 점심때구나.'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젯밤 하이디와 단둘이 보낸 흔적들이 역력했는데, 다 마신 술병들이 굴러다니는 건 물론 자신의 옷과 속옷, 하이디에게 선물로 한 드레스가 엉망으로 찢어진 채 정리되지 않고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나도 좀 거칠었군. 조금 취하기도 했고 말이지.'

"으으음… 음...."

옆에서 작은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들려오자 이번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한 금발이 햇빛을 반사하는 가운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미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어깨 아래로 그녀가 덮은 이불이 몸매를 따라서 내려가면서 굴곡이 지고, 그 아래로 아주 긴 나신의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베오날드… 님...."

'…뭐, 이 몸으로 첫 경험은 중요하다곤 했지만, 이 정도로 사랑스러우면 만족스럽지. 물론 그… 행위(?)도 만족스러웠고. 그럼 민망하지 않게… 먼저 치워 볼까?'

베오날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광란의 밤으로 어지러워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하이디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옷들과 술병과 잔 등등… 어젯밤 광란의 흔적을 지워 나간다.

그다음에 옷을 갈아입은 그가 아주 조용히 방을 나서자 문밖에서 세인이 그를 맞이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베오날드 님."

"아,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나?"

"예.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보다 하이디 경은?"

"아직 꿈나라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푹 자게 둬라. 휴식은 중요하니 말이다."

"예."

대답하는 세인의 목소리에 어딘가 힘이 없다는 것을 베오날드는 빠르게 눈치챘다.

전생에 부인을 두 자리, 세 자릿수로 두고 놀던 몸이다.

여성의 반응과 행동에 대한 눈치는 정치보다 더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필시 어젯밤 하이디와 잠자리를 가진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이 든 것이리라.

"세인,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런 남녀 관계에 대한 선택권은 모두 너희에게 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정원에 들어온 모든 이들을 사랑해 줄 수 있다. 하이디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어서 나에게 말할 용기가 난 것뿐이지."

"...."

"귀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알다시피 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론 잔혹하고 무서운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남녀의 관계에서 만약 내가 먼저 '선택'을 하게 될 경우 자칫하다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해 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선택은 너희에게 맡기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후사를 위해서 아기로 세금까지 받던 미친 아버지인 벨릭스 폰 노이멀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전생의 아버지였기에 지금 적용할 수 없어서 그가 했던 일과 행동을 에둘러서 설명하는 걸로 대신했다.

"아니면 너는 그런 내가 보고 싶은가? 자기 아집만 강요하고, 귀족 간의 권력 다툼처럼 나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아무 선택권도 주지 않고, 상대를 소유하고 지배하며 감정을 이용하는 나를?"

"…아, 아닙니다! 이, 이해했습니다. 베오날드 님은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럼 됐다. 추가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한 사람만 사랑할 생각도 없으면서 너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한다. 아무튼 이걸로… 음?"

꾸욱~

세인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알자 그녀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다시 갈 길을 가려는데, 갑자기 오른팔에서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세인이 고개를 숙인 채로 베오날드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아래에 붉어진 얼굴을 보면 어떤 신호인지는 더 말할 필요 없이 눈치챌 수 있었다.

베오날드는 곧바로 세인과 함께 이 저택에 다른 누군가가 오지 않을 빈방으로 향했다.

***

이런 일, 저런 일을 하고 난 뒤 정오를 넘어서 오후가 되어서야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이 있는 집무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젤커드 자작은 미소를 띤 채 능글맞게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오셨군요, 베오날드 님. 어젯밤 꽤 격렬하셨으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도 많이 늦으셨군요. 하하핫."

"아~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사끼리라 역시 서로 그… 스태미나가 보통이 아니다 보니 말이죠."

하이디를 푹 재워 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사실 일어난 건 오전이지만 그 뒤로 한 타임 더(?) 뛰고 왔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아무튼 베오날드는 적당히 둘러대었고 젤커드 자작도 그쯤에서 이해를 마쳤다.

"아, 그거 이해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크흠! 아, 이거 이야기가 샐 뻔했군요.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는데...."

"기다리는 분?"

"예. 아시다시피 캘러메인 백작님의 성 옆에서 싸울 때, 성벽 위에서 참관하신 분들이 있잖습니까?"

"그렇죠."

"거기에 제국 수도에서 오신 분이 있는 것도 아시지요? 감찰관으로서 말이죠. 바로 그분입니다. 아마 곧 오실 겁니다. 그… 꼭 베오날드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베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작다곤 해도 엄연히 가문 대 가문의 분쟁이고 운이 없으면 확전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니 제국 수도에서도 파견을 온 거였다.

'음, 하긴 날 만나는 것도 당연한가? 사실상 이번 전쟁의 조커였으니 말이지. 다만 어떤 인간이 오는 건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인데....'

"실례합니다. 젤커드 자작님, 수도에서 오신 황실 기사단원 레파르트 경이 도착했습니다."

"오, 도착했군. 안으로 모셔라."

문을 열자 거기엔 한 마리의 야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이디보다도 머리 하나가 클 정도로 거대한 그는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였다.

하나 그런 거대한 덩치임에도 걷는 데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고, 뿜어내는 예기와 위압감이 상당한 걸로 봐선 과연 '황실 기사단원'이라고 칭할 무력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이거 상당한 걸물이 납셨군. 이런 곳에 올 인물이 아닌데?'

"황실 기사단 소속 레파르트라고 합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 도련님이 맞으신지요?"

"예, 맞습니다. 레파르트 경,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파르트 경과 인사를 나누며 눈을 마주친 베오날드.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그래 봐야 단 한 사람의 무인이다.

제국의 군사 회의장에서 수많은 장군과 무인들의 시선을 일제히 받고도 멀쩡했던 베오날드로서는 아무런 프레셔가 느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좀 덩치가 큰 고릴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아직도 재 보는 건가? 그만 좀 해라. 너 따위에게 쫄아 붙을 내가 아니다. 흥, 날 얼어붙게 하려면 적어도 황실 기사단장 정도는 데려와야지.'

"음, 실제로 보니 소문 이상이시군요, 베오날드 도련님."

"소문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절 만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만나는 것으로 끝이신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베오날드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은 레파르트 경이었다.

베오날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앉아서 그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무슨 조각상인 양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에게 다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곳에 온 건 젤커드 자작님과 로이엔 남작님 간의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감시하고, 캘러메인 백작이 중재를 잘하나 보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한데 베오날드 도련님을 보니 놀라운 일의 연속이더군요. 전장에서 직접 보병의 전열에서 활약하신 점도 그것이지만, 가장 놀라운 건 이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이 베오날드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었다는 것."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과한 칭찬이시군요."

"젤커드 자작님에게 일의 전말을 들었는데…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캘러메인 백작가의 어리석음에 안도해야 했죠. 이런 인재가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중앙으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팠을 테니 말입니다."

'설마… 불안의 싹을 제거하러 온 건가? 제길! 무장을 안 했는데...! 게다가 하이디는 아직!'

레파르트 경의 말에 베오날드의 경계심은 최대로 올라갔고, 무기가 없는 이 상황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장 상태도 무장 상태지만, 저 황실 기사단원의 무력은 딱 봐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내 개인 기량을 올리질 못했어. 젠장할! 만약 여기서 싸운다면… 젤커드 자작을 미끼로 해서 도망을 쳐야 하나?'

"그래서 말입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혹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아카데미?"

"예. 6개의 나라가 서로 경쟁을 하는 이 난세, 베오날드 도련님 같은 인재가 이 제국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합니다. 제가 직접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연령도 마침 올해 17살이시니 충분히 입학이 가능합니다. 본래 15세부터 20세까지 모아서 교육시키는 곳이니 말입니다."

'…오, 이건 꽤....'

어차피 제국 수도로 갈 생각이었던 베오날드에게는 엄청 반가운 소식이었다.

젤커드 자작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제국 수도로 가서 자신의 영지였던 '베노피스'를 찾는 일과 어떻게든 영지를 가지거나 아니면 제국의 상층부로 입신양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꼴에 여신이라고 이런 부분에서 챙겨 주는군. 이게 신의 인도라는 건가? 아주 다행이군.'

"장래에 관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더 큰 세상을 보실 것이고 배움의 기회도 많을 것을 보장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정하기 전에 제국 아카데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들어갈 곳에 대해서 모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알려 드리지요. 또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사실 승낙할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 황실 기사단원에게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모조리 얻어 내자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슬쩍슬쩍 레파르트 경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면서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는 물론 현재 황실의 상황까지도 윤곽을 잡아낼 수 있었다.

"혹시 더 질문이 있으신지요?"

"아뇨. 이제 됐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제국 아카데미… 입학하겠습니다."

베오날드가 확실한 대답을 내놓자 레파르트 경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물론 그래도 기존의 무서운 인상은 그대로라서 긴장을 놓을 수 없었지만, 그는 곧바로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추천서를 쓰고자 했다.

"그럴 거라 믿었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그럼 바로 추천서를 쓰겠습니다."

"그… 추천을 해 주시는 건 좋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말씀이십니까?"

"예. 제국 아카데미는 말해 주신 대로 귀족들이 입학하는 학부와 평민들이 입학하는 학부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차피 저는 귀족으로서는 반푼이라서, 이곳에서도 그랬지만 저는 이대로 귀족 학부로 가 봐야 분란의 씨앗밖에 되질 않으니 평민 학부로 들어가서 조용히 지내고 싶습니다."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의 부탁에 순간 놀랐지만 잠시 생각해 본 결과 그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다고 생각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곳에서 일어난 전쟁도 그의 혈통 문제가 시발점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제국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로 가면 이보다 더 심한 차별과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를 평민 학부로 입학시키라는 추천서를 써 주게 되었다.

[66화]

"…그래서 대충 이렇게 되었다."

그날 저녁, 베오날드는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중요한 일인 만큼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기에 그는 황실 기사단원인 레파르트 경에게 받은 제안을 세세하게 설명했고, 제국 수도로 갈 것이라고 했다.

"수도로… 말입니까?"

"그래, 여기서 할 일은 대강 끝났으니 말이야. 젤커드 자작의 세력은 확실히 커졌고, 이걸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그리고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젤커드 자작의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날 시샘할 거고, 또 내 태생을 언급하면서 잡음이 일어나겠지."

"으음, 부인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평민 학부로 들어가려고 한다. 어차피 내 목적을 이루는 것엔 그거면 충분하다. 학비도 두둑이 받은 게 있고, 이번 전쟁으로 얻은 이익에 대한 사례도 받을 거니 말이다."

베오날드의 목적은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하거나 학문을 익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평민 학부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일행은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상단 주인의 자식으로 위장해서 입학할 생각이다. 평민이더라도 아무 배경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리고 세인, 너는 내게 고용된 고용인 입장으로 함께한다. 하이디, 마찬가지로 너는 기사임을 숨기고 내 경호원으로 위장해서 함께하겠지만 알테리오를 돌보는 일과 수련에 힘쓰도록 조치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알테리오는 내 애완동물로 해서 들어갈 예정이다. 이미 레파르트 경에게 승인서를 받아 놨다.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으니 제국 아카데미에서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 그리고 아카데미 내부 숙소에 들이지 못할 경우 아예 제국 수도 내에 있는 저택을 하나 살 생각이다."

"저기, 저는 그럼 어떻게 하죠?"

한참 두 사람에게 브리핑을 하던 찰나, 셀리나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은 왜 언급 안 하냐는 뾰로통한 시선을 보내는데, 베오날드는 전혀 생각을 안 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아, 셀리나, 엄연히 넌 내… 아랫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침을 줄 수 없지. 오히려 내 계획을 듣고 어떻게 할지를 내가 들어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아, 맞아. 그렇지. 으음~ 그렇지만 딱히 마탑에 돌아가도 지루한 연구만 할 뿐이고, 베오날드 님과 다니는 게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많으니 계속~ 따라다니죠."

"그거 좋은 소식이군. 역시 마법사가 있어야 연금술에 도움이 되니까. 만약 떠난다고 했으면 아카데미에서 다시 구하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고 했었지."

이번에 '베노피스 강'을 만들 때라든가, 용광로에서 이것저것 할 때 느낀 점은 확실히 실력이 모자라도 마법사가 있으면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생에는 이미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백작가라서 따로 마법사를 고용할 필요 없이 그냥 마법 도구를 만들어서 직접 쓰면 되었고, 필요한 주문은 일일이 스크롤을 사서 해결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로 재정이 풍부한 게 아니었으니 그녀의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기요, 절 무슨 편리한 마법 도구 취급하시는 건 아니죠?"

"아… 그건 아니다. 아마도...."

"그 긴 침묵은 뭔가요? 게다가 아마도?"

"자, 그러면! 슬슬 갈 준비를 하지. 겨울이 오기 전에 수도에 도착하는 게 좋을 테니까."

베오날드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먼저 움직였고, 본격적으로 수도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젤커드 자작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마차를 비롯해서 수도로 갈 준비는 차곡차곡 되어 갔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수도까지 호위해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베오날드 님."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뭔가 들려온 소식 있습니까?"

"아, 메이라 부인은 결국 신전으로 가서 평생 고된 노동과 속죄를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랄트 도련님은… 자살을 했다더군요. 이거저거 힘들었을 테니 말이죠. 결국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을 데릴사위로 들여서 임시로 후계자 문제에 대비하고, 렌겔 가주 대리가 새로운 후사를 낳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합니다."

"정석, 그 자체군요."

자신이 렌겔 가주 대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깔끔한 조치였다.

굳이 메이라 부인을 죽이지 않은 것은 아직도 과거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였던 자들이 일부 살아 있는 상황이고, 죽임으로써 동정받거나 혹은 다른 사태의 기폭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시점으로 보면 그녀는 그저 아들의 안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어머니이기에 숭고하게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전으로 보내는 게 베스트였다.

"그러면 그… 메이라 부인의 곁에 딱 붙어 있던 제드 경이라는 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지를 떠났습니까? 아니면 다르게 처벌받거나 처형을?"

"아, 그는 그러니까…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일단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게 아니라 본래 임무인 메이라 부인의 경호에만 신경을 썼고, 다른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죄목을 얹으려고 해도… 주군을 잘못 만난 걸 죄라고 할 순 없고, 또 캘러메인 영지에선 나름 명망이 높았거든요."

"그가요?"

"예. 수도에서 중급 기사 인증에 합격하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공훈을 세운 기사라, 수많은 귀족들이 러브콜을 했지만 결국 로이엔 남작가로 가서 메이라 부인의 기사가 되어 평생을 바쳤잖습니까? 젊을 때야 아름다운 레이디여서 섬겼다곤 하지만 정략결혼 후, 자식까지 낳고도 그의 충성은 변하지 않았으니… 기사의 귀감 중 하나로서 명망이 높을 만하지요."

"흐음, 그래서 결국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설마 메이라 부인을 따라서 신전으로 간 건...?"

"맞습니다. 메이라 부인의 처분을 듣자 그는 즉시 스스로 머리를 밀고 검과 갑옷을 벗고 메이라 부인을 따라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말… 지고지순한 기사의 귀감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귀감은 무슨! 미친놈이지!'

감정이 치밀어 오른 베오날드는 표정을 감출 순 없었지만 그래도 입단속은 할 수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제드 경의 그 모습을 생각하자 그는 불쾌감이 온몸을 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신념에 미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광신도 같은 인간. 계산과 이론, 합리를 좋아하는 베오날드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렇지요. 후우~"

"아, 그리고 저희 영지의 대장장이가 전에 말한 비법을 알려 달라고 베오날드 님에게 전해 달랍니다."

"아~! 그것도 있었죠. 그건 뭐 전갈 한 장이면 충분하니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부모님에게도 전갈을 보내야겠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직접 찾아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그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음, 그게 좋겠군요."

이제 캘러메인 영지를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여기서 떠나기 전에 친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자 더스티클록 영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로이엔 남작의 영지에서 거리가 꽤 되었지만, 혼자서 말 3마리와 알테리오를 교대로 타면서 가니 보통 속도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음, 여전하네. 하긴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변할 게 없지.'

그래도 나고 자랐던 곳이라서 그런지 촌구석 같은 시골의 작은 저택을 보니 살짝 그리움이 솟아났다.

베오날드는 들어가면서 곧바로 시종을 지나치고 큰 소리로 부모님을 불렀다.

"저 왔습니다! 어머님!"

"어, 어머! 이게 누구야? 베오날드니? 세상에나! 갑자기 어쩐 일이니?"

"얼굴 뵈러 왔지요. 그보다 아버님이랑 동생들은?"

"늘 있는 영지 순찰이지. 그리고 동생들은 영지 아이들이랑 지금 뛰어놀고 있단다. 아무튼 정말~ 정말 늠름해졌구나."

캘러메인 백작가에 들어간 이후 약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한창 성장기인 베오날드의 겉모습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말과 알테리오를 격리시켜 둔 베오날드는 모친과 인사를 나눈 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저녁엔 부친과 동생들까지 돌아와서 다 같이 식사를 하며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특히 가장 경악한 사람은 부친인 더스티클록 자작으로, 드문드문 그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었는데 사실이라는 것에 더더욱 놀란 것이었다.

"네가 활약하는 이야기는 드문드문 들었다만 설마… 전쟁까지 참여했을 줄이야. 역시 넌…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아이였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래도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확실히 여기입니다."

벨릭스 폰 노이멀에게서 태어났던 전생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자리를 빼앗고, 경쟁하고, 암살하고, 독살하고, 서로 패를 이루는 등등… 지옥 같은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았던 그때에 비하면 온전히 가족의 사랑을 누리고 자란 지금의 생은 천국이었다.

'…이제 좀 신의 뜻이라는 걸 알 것 같군.'

여신이 왜 굳이 이런 곳에 자신을 태어나게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베오날드였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분명 자신은 전생처럼 헤쳐 나갔겠지만, 이 따뜻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커, 커억! 우웨에에엑! 베, 베오날드 이 새끼! 내, 내 음식에 독을! 커어어억!'

'쿨럭! 쿨럭! 베… 베오날드 오빠, 갑자기… 왜?'

"와… 예쁘다아아. 이런 거 처음 봐요, 오라버니. 고맙습니다!"

"나는? 나는? 와! 멋진 투구다. 고맙습니다, 형님."

전생에선 살아남기 위해서 여동생과 형제에게 칼을 꽂고 독을 선물했는데, 이번 생엔 그런 걱정 없이 순수한 호의를 담아서 선물을 줄 수 있고,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들을 수 있으니 훨씬 나은 삶이었다.

"베오날드? 괜찮니?"

"아, 예. 동생들이 좋아하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서… 하하."

"그나저나 아까 전에 제국 수도에 간다고 했었지? 그러면 다음엔 이제...."

"아마… 못 돌아올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이번에 굳이 온 거예요."

"그렇… 구나. 하긴 너는… 이 작은 물에서 놀기엔 너무나 뛰어난 아이니까...."

서글픈 표정을 하는 모친. 베오날드의 마음도 조금 무거워졌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다시 태어난 것엔 이유가 있고, 숙명이 있었다.

그래도 따스한 가정과 성장 과정을 선물해 준 모친을 위해 끌어안고 위로해 주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못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꼭 살아 계실 때 한 번은 더 올게요."

"그래, 그러렴. 그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울지 마세요, 어머님."

졸지에 식사 자리가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고, 부친인 더스티클록 자작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쌍둥이 동생들을 데리고 빠지는 걸 택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베오날드는 이번 생의 가족들과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쌍둥이 동생들에게도 그랬듯이 부모님에게도 선물을 건네었다.

"짠~ 아이들 것만 있으면 섭섭하겠죠?"

"아니, 오히려 우리가 줘야 하는데… 어쩜...."

선물이 든 상자를 열자 안에는 일단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별도의 칸에 따로 나눠져 있는 상자를 열자 안에는 고급스럽게 포장이 된 포션병들이 여럿 보였다.

베오날드의 부모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눈으로 베오날드를 살펴보는데, 그는 미소 지으며 그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에 포상을 받았어요. 영지 재정에 보태시라고 금화랑 백금화, 보석 좀 챙겨 왔고, 또 건강 챙기시라고 포션도 몇 개 가져왔어요. 거울에 인부들 좀 더 고용해서 공사하세요. 큰 비가 내리면 다 쓸려 나갈 것 같아서 늘 걱정했단 말이에요. 포션은 두 분이 각각 하루 한 개씩만 드시면 돼요. 기운이 난다고 막 2개씩 먹지 마시고, 하루 한 개씩 나눠서 드세요. 아셨죠?"

"그, 그래, 알았다. 세상에… 어쩜...."

"정말로… 대단해졌구나… 우리 아들."

전생이 있기에 이미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베오날드는 부모의 기쁨을 깨지 않기 위해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전생에도 안 해 본 마음 따뜻해지는 효도에 이제 더 이상의 후회는 없을 거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그날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다음 날 새벽 일찍 부모님의 슬픈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몰래 더스티클록 영지를 떠났다.

[67화]

며칠 뒤,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돌아온 베오날드는 수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일행과 합류해서 곧바로 출발했다.

마차는 2대로 마부까지 고용되어 있어 수도까지 베오날드 일행을 운반해 줄 것이다.

2대가 된 이유는 한 대엔 식료품과 각종 짐을 실었고, 다른 한 대에는 알테리오를 가둔 철장을 싣기 위함이었다.

"그… 풀어 두면 가는 동안 각 성문 입구의 검문소를 통과하기 어려울 테고, 살아 있는 그리폰을 노리는 이들도 많을 거라 감추려면 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알테리오가 안에 들어가서 난동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그건 내가 해결하지. 자, 알테리오, 이리 오렴."

삐이이익!

주인의 부름에 알테리오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주저 없이 알테리오를 데리고 직접 철장 우리 안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알테리오의 깃털과 발톱을 다듬어 주고, 간식도 주면서 가볍게 놀아 주어 천천히 철장 우리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나갔다.

"자, 이대로 출발해라.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당분간 여기서 먹고 자고 할 테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드디어 떠나는군.'

짜악! 히이이히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베오날드 일행은 수도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젤커드 자작의 영지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드디어 이 시골구석을 떠나는 게 실감된 베오날드는 수도로 가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칼레움 제국의 역량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지.'

가는 길은 무작정 관광이 아니라, 사실상 제국의 상태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도로의 상태, 도시의 행정력, 지방 귀족들의 발전 정도, 황제의 위상과 권력, 상업 상태, 농업 발전 정도와 생산량, 백성들의 상태, 수도로 가는 길의 영지에 있는 군사 조직과 병력의 대략적인 상황. 직접적인 데이터가 없으니 직접 살펴보고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흠, 생각하자니 끝이 없군. 아무튼 이런저런 걸 고려했을 때, 도저히 내가 권력 잡을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나라로 건너가야겠지.'

6개의 나라 중에 꼭 이 제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하라는 법은 없었다.

난세,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면 그곳이 조국일 것이다.

어차피 500년 전엔 모두 하나의 뿌리였던 나라들인데, 나라 이름이 좀 다르면 어떠랴?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모두 자기 땅이었던 곳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은 좀 다르려나? 그나마 셀리나는 나와 비슷하겠군.'

그나마 초국가적 집단인 마탑 아카데미의 마법사인 그녀는 국가 의식이 옅을 것이다.

반면 세인과 하이디의 경우 태어나서부터 칼레움 제국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베오날드의 이 생각을 이해 못하거나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마 문제없을 것이다.

'하이디는 이미 나에게 충성을 바친 몸이고, 세인은 이제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었으니 말이지. 그나저나 나 없이도 여자 셋이서 잘 떠들고 있나 보군. 뭐, 좋은 일이지.'

베오날드가 알테리오를 돌보기 위해 같이 철장 안에 있는 동안, 다른 마차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다른 마차 쪽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는데, 분명 베오날드에 대해 떠들고 있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순조로이 떠났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를 돌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여행길 내내 정말 평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 식사와 말의 휴식을 위해 멈춘 베오날드 일행은 마부들과 모여 식사를 준비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빵을 가져와서 따뜻하게 데우고, 작은 솥에 먼저 기름을 넣고 각종 야채와 고기를 넣고 볶다가 물과 곡물 가루,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춰서 간단한 식사를 만들었다.

"베오날드 님! 알테리오가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사슴입니다."

"호오, 그거 좋은 소식이군."

"뭐, 사실상… 알테리오가 몰이를 해 주고 제가 잡은 거지만요. 지금 바로 손질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숙을 준비하면서 미리 알테리오를 하이디와 함께 보내서 사냥도 시도했는데, 무사히 성공했는지 하이디는 거대한 사슴을 들쳐 메고 있었다.

이젠 너무 거대해져서 나무가 우거진 숲에선 사냥이 불가능한 알테리오였지만, 그리폰의 포효와 존재감으로 숲의 야생동물들을 몰아넣어서 하이디가 잡는 방법으로 훌륭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먼저 알테리오에게 배불리 먹인 다음 베오날드 일행은 곧바로 사슴을 본격적으로 해체했다.

"수사슴이라 더 마음에 드는군. 이 뿔은 약재로 쓸 수 있겠어."

"잘됐네요. 근데 가죽은 좀 아깝네요. 알테리오가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그건 어쩔 수 없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알테리오의 배를 채우지 않으면 곤란하니 말이야."

그렇게 사슴 고기와 가죽이라는 부수입을 챙긴 일행은 마차 안에서 야숙을 하고 난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여정을 시작, 정오쯤 되어서 브란텐 영지라는 작은 도시에 들러서 식량과 물자 보충을 하고, 지친 말을 돈을 주고 교체한 뒤 여관에서 하루 쉬어 가기로 한다.

"아으으! 이제야 살 것 같네요. 마차에서 자는 것도 힘든 일이라."

"여행의 피로라는 게 우습게 볼 게 절대 아닙니다."

"세인의 말이 맞다. 그럼 방은 너희 셋이 하나를 쓰고, 내가 하나, 마부들이 하나면 충분하겠군. 아무튼 나는 혼자서 도시를 좀 둘러볼 테니 알테리오의 관리를 부탁한다."

알테리오를 일행에게 맡기고 베오날드는 우선적으로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작은 도시이지만 일단 있을 것은 다 있었는데, 골동품 상점 같은 건 영 보이지 않았다.

대충 도시의 분위기를 파악한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이 도시의 부랑자 거리를 알아내었다.

"뭐야? 복장을 보니 못 보던 놈인데, 여긴 너희 같은 놈이 올 곳이 아니니 썩...."

"길 좀 묻지."

징이 박힌 가죽 갑옷을 걸친 인상이 험악한 불량배 하나가 베오날드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려 하자 경고했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눈앞에 은은한 보랏빛의 오러가 흐르는 검날이 들이대어지자 그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안색이 파래졌다.

"기, 기사님이셨습니까? 그, 그러면 진작 말씀하시지."

"여기 혹시 장물아비나 골동품상 아니면 암시장 같은 게 있나? 안내만 확실히 해 주면 이걸 주도록 하지."

"그, 금화! 곧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불량배는 즉시 베오날드를 슬럼가에 위치한 장물아비의 가게로 안내했다.

장물아비의 가게는 슬럼가 외곽이지만 일반인 구역과 가까운 곳이었는데, 훔친 물건을 싸게 구매해서 일반 상점인 척하고서 되파는 일을 하는 건지 겉보기엔 그냥 일반 잡화상처럼 보였다.

"영감! 있어?"

"음? 뭐냐? 쥐털 놈아. 또 뭔가를 훔쳐 왔느냐?"

"아니, 당신 찾는 외지 손님이 있어서 그래. 장물이랑 그런 거 보고 싶나 봐."

"껄껄, 그런 거라면 나야 좋지. 호구를 물어 와 준 거로구먼."

"일단 기사 양반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기사님! 여기입니다."

"이놈아!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불량배를 지칭하는 말은 쥐털인 것 같았다.

베오날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약속한 대가인 금화를 장물아비가 잘 보도록 던져 주었다.

그리고 상점으로 들어간 그는 자신의 말소리가 들렸을 것을 예상해서 굽실거리는 장물아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보관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고 싶네. 쓸 만해 보이는 것은 다 사들이도록 하지."

"예, 예에~ 아, 알겠습니다, 기사님."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뭐라도 있었으면 좋겠군.'

"이리로 오십시오, 기사님."

다 사들이겠다는 말에 장물아비는 꼼지락거리면서 자신의 발아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하실이 개방되었고, 베오날드는 그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갔다.

초에 불을 피우고 내려간 그는 다시 횃불에 불을 옮겨서 지하실을 밝혔다. 안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상자나 책장에 보관된 채로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거 기대하던 것 이상이군."

"헤헤, 이 도시가 좀 작아 보여도 여기저기서 물건은 잘 들어옵니다요. 그럼 전 올라가 있을 테니 느긋하게 보시고 오십시오."

"그러지."

장물아비가 먼저 올라가자, 베오날드는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기나 갑주 같은 건 일절 없었고, 목걸이나 반지류 같은 귀금속들도 진작 팔려 간 지 오래라서 남아 있는 것은 조각 같은 예술품과 해독이 되지 않는 고서(古書)들뿐이었다.

게다가 해독이 되는 서적 또한 마찬가지로 진작 팔려 나갔거나 처분이 되었을 것이므로 남은 것은 읽을 수 없어 혹시나 싶어서 남겨 둔 것들이었다.

'예술품은 쓸모없지만 고서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

수십 년, 백 년 단위를 넘어서 지식을 보전한 고서들. 그 안에 어떤 지식과 내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문법과 내용으로 대강 연도를 짐작할 수 있는 베오날드는 지체 없이 분류해 나갔다.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 500년 전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의 것일 테니 말이다.

'…어떻게 시간을 견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몇 권 건질 수 있으니 다행이군.'

500년 전의 기록을 담은 이 책들이 이 자리에 있는 데는 아마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옮겨 적었을 수도 있고, 다른 보존 방법을 동원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던전이나 밀폐된 창고 같은 곳에 있다가 모험가의 손에 의해 이곳의 장물아비에게 팔렸을 수도 있고… 등등이 있겠지만, 베오날드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중요할 뿐. 그나저나 지도 같은 건… 전혀 없군. 제길!'

척척.

일단 자세한 내용은 여행하면서 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베오날드는 책을 분류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먼지를 마시고 기침을 하면서도 빠르게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약 2시간 뒤, 베오날드는 이곳에서 찾아낸 고서 12권을 들고 지하실 위로 올라가서 장물아비에게 내밀었다.

"음, 책만… 사 가시는 겁니까?"

"좀 화려한 장신구 같은 건 일절 없지 않은가? 남은 건 죄다 오래된 쓸모없는 예술품이고 말이지. 그나마 책은 장식하기가 좋아서 괜찮을 것 같더군. 아무튼 얼마지?"

"오래된 책들이라~ 그럼 금화 12개 주십시오."

"알았네. 그리고 서비스로 지도 한 장만 줄 수 있나?"

"그 정도야. 히히히."

말도 안 되는 폭리. 아무리 이 시대가 책이 비싸다고 해도 권당 금화 1개는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하나 이 책에 담긴 것들이 500년 전, 통일 제국 당시의 기록과 지식이라는 것을 아는 베오날드는 굳이 실랑이할 거 없이 얌전히 금화 12개를 건네주었다.

지하실에서 먼지만 먹던 책들이 금화 12개로 변한 것에 행복해하는 장물아비였지만, 오히려 행복한 쪽은 베오날드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기사 나리! 좋은 물건 사신 겁니다!"

'뭐, 좋은 물건은 맞지. 이 안에 천금보다 더 귀한 지식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이 지도도 역시 개판이군. 제길!'

설사 그런 지식이 없어도 베오날드에겐 500년 전의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그리고 장물아비에게서 받은 지도는 역시나 퀄리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그것을 찢어서 버렸다.

그는 12권의 책을 가지고 돌아가자마자 일단 씻은 뒤 세인에게 차를 부탁하고는 자신의 방에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68화]

"으으으음...."

"어머, 어딜 다녀오셨나 했더니 책을 구하러 간 거였어요? 학구열이 상당하시네요?"

"노크 정도는 하지? 마법사들도 예의를 알아야 할 텐데?"

"이미 저인 걸 눈치채셨으면서~ 너무 섭섭하네요. 그보다 무슨 책을 보는 거예요? 고서라는 건 표지만 보고도 알겠는데… 내용은 모르겠네."

능청스럽게 들어온 셀리나는 베오날드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보는 책을 슬쩍 살펴봤지만 베오날드와 달리 그녀는 이 시대의 사람이라 500년 전의 필체와 문장을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아앙~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공유해요~ 혼자만 좋은 거 보고~"

"그야 난 아직 너를 신뢰하지 않고, 우린 서로 거래하는 대등한 입장이니 그렇지. 그리고 나도 이제 막 이것들을 보기 시작해서 좋은 것인지 모른다. 이제부터 밝혀내야 하는 것이지."

"그러면 제가 도울 수 있게 저에게도 과거의 문자에 대한 지혜를 전수해 주시면 안 될까요?"

"거절한다. 너의 스승이 다른 학파나 연구팀의 마법사가 너희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달라고 하면 주라고 하던가?"

"…대체 마탑의 문화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는 거예요? 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그 연금술 책이라는 거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었던 거예요?"

투정 부리는 셀리나의 반응을 무시하고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책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처음 잡은 책은 500년 전 사람, '라슈텔 폰 푸르매니아'라는 남자의 일기장이었다.

시대는 대략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기록인 것 같았다.

<X월 X일,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이 죽은 뒤 세상은 많이 혼란스러워졌다.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이자 그의 폭정을 멈춘 알테리오 폰 노이멀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선언 이후, 수많은 모험가와 길드, 귀족, 신전의 군대가 베오날드 공작의 저택에 있는 재보를 약탈하면서 불바다가 된 베노피스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비슷한 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뒷내용은 너무 흐릿해서 알아보지 못함)....>

"역시… 개판 났군."

베오날드는 영양가 있는 내용이 있는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잠시 후 세인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 셀리나의 투덜거림에 적당히 맞춰 주면서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탐독해 나갔다.

<X월 X일, 황제 폐하와 대신관은 드디어 정의가 세워졌다면서 매일 선언문을 보내왔다. 또한 베노피스의 유산을 황실 소유로 선언한다고 연일 떠들어 댔지만 대귀족들은 황제의 말을 무시했고, 더 많은 베노피스의 유산을 가지기 위해 결국 전쟁 선포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일단 영지의 기사들에게 비상 체제로 들어가야 하니 병사들을 소집하라고 전했다. 무섭다. 신관들에게 전쟁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미 그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시간 진행을 보기 위해 다시 열몇 장을 넘겼다.

<X월 X일, 황제 폐하께서 친위대와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전쟁 지역으로 향했다. 대귀족들에게 분쟁을 멈추라는 어명도 내렸지만 들을 것 같진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대귀족들은 자신들이 다음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이 되고 싶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내가 모시는 발텐 폰 라클라트 후작님의 명이 내려왔고, 나도 저 추악한 욕망의 전쟁에 끼게 될 것 같다.>

"무슨 내용인데 표정이 그리 어두워요?"

"아…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라서 말이지. 모르는 게 좋을 거다."

"금지된 지식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니야. 아무튼 이건 나중에 다시 봐야겠군."

캘러메인 백작가의 가정교사에게 배웠지만 그래도 역시 그 시대의 사람이 적은 생생한 기록이 더 와닿았다.

그렇게 훑어본 기록은 대부분 전쟁에 대한 투덜거림이었고, 이젠 신전까지 끼어서 아주 개판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신전 새끼들은 뭔데 끼어서 더 개판을 만든 거야?'

그렇게 별다른 내용이 없는 기록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기록이 끊어지는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

마른 핏자국과 글자가 많이 엉클어진 걸 봐선 많이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

<X일.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전쟁으로 나약해진 우리를 악마가 먹으러 왔다. 이제 우리는…(진한 핏자국만 남음)....>

'악마? 무슨 의미지? 잘 모르겠군. 뭔가 의미가 있었다면 여신이 알려 줬을 텐데....'

기묘한 내용에 베오날드는 다른 부분에 뭔가 더 단서가 있을까 싶어 살펴봤지만, 기록은 거기서 끝이었다.

찜찜해지기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자, 베오날드는 한숨을 쉬며 고서를 가차 없이 화로에 던져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지,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쓸모없는 책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지식의 요람을!"

"개인 일기장이라서 의미 없어. 금화 한 개 날렸군. 쳇, 역시 쉽게 되는 게 없군."

그리고 계속해서 책들을 넘겨 보았지만 고서들이라고 해서 유용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셀리나의 고성을 들으며 베오날드는 책들을 화로 더미로 쭉쭉 던져 넣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12번째 책에서 그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매도당하는 걸 좋아하는 여마왕님 1권-'마왕이지만 인간님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책에서 그는 두꺼운 하드커버를 넘겼는데, 거기엔 전생, 현생 합쳐서 생전 처음 보는 말도 안 되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일단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책 내용을 추측해 보려고 노력한 결과, 전생의 자식들 중 한 명이 시시덕거리면서 읽던 상업 소설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 종이를 양산하는 법을 연구해서 많이 만들어 내니 이런 거나 만든 거냐고 한 소리 했지만… 백성들에게 엔터테인먼트도 중요하다고 해서 납득하긴 했지. 아무튼 대체 뭘 만들었....'

<이대로 죽으면 네게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어져! 그래! 네가 죽인 숫자만큼 반인반마 노예를 끝없이 낳게 해서 인류에게 봉사하게 해 주마! 마왕! 메뤼네리스! 받아라! 나의 성(性)검을!

"안 돼에에에에!"

라고 외치지만 사실 딱 이 시추에이션을 바란 그녀는 불타는 증오를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용사의 시선에 가슴과 하복부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기 시작....>

"음… 으으음… 으으으음… 으으으으으음… 으으으으으음… 으으으으으으음...."

"어머? 베오날드 님, 이번엔 그래도 상당히 가치 있는 책인가 봐요? 엄청 심취해서 읽으시네요?"

"음? 아… 아아… 아아아… 조금 어렵게 쓰여 있어서 말이지."

<"마왕 메뤼네리스는 이제 인간님들의 똥개예요. 멍멍! 멍멍멍! 노예 이하랍니다!">

"오오, 대체 얼마나 엄청난 지식이 잠든 책이죠? 혹시 마탑의 유산이 아닌가요? 아니면 설마? 전설로 내려오는 베노피스의 유산일지도?"

"아… 으으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라. 좀 더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래, 심도 깊은 연구가 말이지."

<"멍멍! 멍멍멍! 멍멍멍멍! 멍멍멍멍멍! 헥헥헥! 멍멍멍!">

나중에 혼자 몰래 읽을 생각에 베오날드는 마지막 책을 화로에 집어넣지 않고 자신의 짐 안 깊숙이 감춰 두었다.

그래도 뭐라도 하나(?) 건졌으니 오늘의 탐방은 소득이 있었다. 그는 해독이 끝나면 알려 주겠다고 하고는 셀리나를 내보냈다.

그러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 세인이 새로이 차를 내주며 말을 걸어왔다.

"셀리나 마법사님과 있으면 정말로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베오날드 님."

"뭐, 저 아가씨는 저 아가씨 나름 마법사의 본분에 충실한 거겠지. 아, 맞아. 더스티클록에서 오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바람에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세인, 혹시 글자는 아느냐?"

난데없는 질문에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곧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 예. 메이라 마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럼 그 외에 따로 배운 학문은?"

"없습니다. 간단한 덧셈, 뺄셈 정도밖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세인. 이 시대의 메이드라면 당연한 것이리라.

대부분 청소와 수발 같은 육체노동이 주 업무이기에 배움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글자도 메이라 부인이 자신의 일을 위해서 가르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쭉 문맹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 세인,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너는 이제 내 정원에 들어온 자다. 너의 능력으로 나를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배움. 가능한 한 배워라. 가는 동안부터 시작해서 도착해서도 일반 학과 과정은 모두 수업받게 할 것이다."

"예?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저기… 그...."

설마 자신이 제국 아카데미에서 배움의 기회가 생길 줄 꿈에도 몰랐던 세인은 눈을 크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베오날드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계속해서 설명해 주었다.

"예법이나 검술 같은 실기 부분이 있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배우게 해 주마. 밤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수업은 너에게 맡겨 두고 자는 설정이면 충분하겠지."

"제, 제게 그런 은혜를 베푸신단 말씀이십니까?"

"너는 이제 내 정원의 꽃이다. 그렇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기를 뿐. 아무튼 메이드로서의 업무는 그동안 중단하는 걸로 하겠다. 지금은 우선 배우고 또 배워라. 그에 따른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너는 배움에만 힘써라. 가는 동안 배워야 할 것들을 알려 주겠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레파르트 경에게 아카데미에 대해 세세히 들어 둔 것이 도움이 되었다.

필요한 과목에 대한 예비지식과 수학, 철학 기초 강의 등등 자기 전 몇 시간을 쪼개서 그녀에게 알려 주고 내일 또 여행 중에 할 과제를 내준 뒤에야 베오날드는 드디어 잠이 들 수 있었다.

***

베오날드 일행의 수도로 향하는 길은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마차로 이동을 하고, 도시나 마을에 머무는 동안 골동품상이나 장물아비에게 가서 고서나 골동품을 사들여서 판별하고 화로에 태워 버리는 일의 반복.

추가된 거라면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서 하는 일의 과정 사이사이에 세인을 위한 도서 구매와 하이디와의 대련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타인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도시에 도착했음에도 도시를 나가서 대련을 한 두 사람이었다.

대련을 마치고 땀으로 범벅이 된 베오날드와 하이디는 서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머리카락에 흐르는 땀을 털어 내면서 슬쩍 그녀를 쳐다봤다.

'…진짜 재능은 확실한가 보군.'

역시 무가의 자식인지, 하이디의 기량은 정말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오러의 질과 양은 자신보다 약했지만 타고난 용력(勇力)과 기사로서의 재능이 대련을 하는 베오날드도 이렇게 지치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검술… 또다시 정체기이고 말이지. 하이디는 저렇게 쭉쭉 성장하는데. 뭔가 갑갑하군.'

"베오날드 님, 안 들어가십니까?"

"아, 잠깐 생각할 게 있으니 먼저 돌아가서 씻어도 좋다."

"예!"

'이래서야 언제 3대 오의를 익힌다?' 

베오날드가 연마하고 있는 검술,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에서 남은 것은 3대 오의뿐인데, 또다시 정체 중이었다.

'쌍두사'를 익힐 때처럼 검에도 변형을 주면서 여러 시도를 하고, 계속해서 수련하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형(形)에서 또 이해가 잘 안 돼서 막혔고, 체질도 안 맞아서 이리저리 고민이 많았다.

'형(形)도 정확하고, 마나도 호흡법으로 충분히 익혔어. 근데 왜 안 되는 거지? 또 내가 모르는 게 있나? '10식-쌍두사' 때와 다른 건가? 흐으음… 그럼 나도 어디 목표를 만들어 볼까? 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3대 오의 중 하나를 성공하기!'

베오날드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서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을 익히기 위해 다시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필시 수도에 도착하면 또 여러 복잡한 일들이 있을 거고, 그러면 지금처럼 여유 있게 수련할 시간이 부족할 거라는 예상이 들었기에 그는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검을 멈추지 않고 휘둘러 갔다.

[69화]

하지만 의욕 있게 선언한 것치곤 여행하는 동안 검술의 진전은 전혀 없었다.

정말 허무하게 말이다.

그저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다면 인간들 중에 성공하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후우… 후우… 후우… 크윽!"

그렇게 오늘도 오의의 발현은 실패하고, 땀을 뻘뻘 흘린 채로 오늘 머무는 도시로 되돌아가서 씻고 여관방에 도착했다.

그다음엔 역시나 이 도시에서 사들인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쓸 만한 것은 없었다.

<매도당하는 걸 좋아하는 여마왕님 3권-'전라로 슬럼가를 탐험하자!'>

"…2권이 아니라 왜 3권인 건지. 후우~ 아쉽군."

아니, 그래도 하나는 건진(?) 걸 위안 삼으며 베오날드는 그것을 먼저 구해 둔 1권의 위에 조심스럽게 쌓아 두었다.

1권(?)은 이미 탐독한 상태였는데, 2권도 읽지 않고 3권으로 넘어가는 건 왠지 찜찜했기에 그는 3권은 뒤로 미루고 검술의 진전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에 대해 고민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우리 가문의 기사들도 그렇고, 거의 기본 소양처럼 이야기하던데 말이지.'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의 오의는 사실 말이 오의이지, 그저 가장 강력한 기술에 이름을 붙여 둔 거나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황실 기사단의 것을 베껴서 노이멀 가문 사람들의 성향에 맞게 변형시킨 만큼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만 안 되는 건지. 젠장!'

'쌍두사'를 익힐 때보다 더 높고 넓은 벽이 눈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일전에 큰소리치던 것과 다르게 이제 거의 제국 수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더더욱 머리가 아픈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겉으론 내색할 수 없기에 그는 진정하고 방을 나서서 여관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오후 일찍 도착했기에 시간이 남아서 모두가 함께 제대로 차려진 저녁 식사를 할 여유도 있던 것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뭔가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 개인적인 일이다. 아무튼 식사들 하지. 오히려 나 없이 여성끼리 앉아 있는 동안 무슨 일은 없었나?"

"뭐, 수작 부리려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하이디 양이 모조리 물리쳐 줬어요. 저 긴 머리칼이 사자 갈기처럼 일렁일렁거리니 그냥 물러나더군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

마부들은 마차의 정비 및 말의 관리를 하러 갔기에 오늘은 합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네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세인은 공부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셀리나가 그것을 들어 주면서 나름 마탑에서 공부할 때의 노하우를 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세인 양에게만 공부시킬 게 아니라, 하이디 양도 공부는 해야 할걸요? 전략, 전술을 듣고 이해할 지혜는 필요하잖아요."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예에 집중하게 두고 싶은 거다. 나처럼 쓸데없이 머리가 복잡한 인간이 되면 될 검술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검술이… 잘 안 되세요?"

"젠장!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군. 그래! 나도 벽에 부딪치거나 일이 잘 안 풀리는 때도 있는 법이다. 마시지 않고는 못 버티겠군. …푸하!"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검술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는지 자신도 모르게 고민을 말해 버린 베오날드는 그대로 단숨에 술잔을 비워 버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이디와 세인, 셀리나 모두 여태껏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고 매사 쿨하고 침착하던 베오날드가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자 눈을 빛내면서 바라보았다.

'이건 또 색다르네요. 평소랑 갭이 크니까 뭔가… 뀽~ 하는 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지켜보는 느낌인 사람이 저러니 확실히....'

'뭔가 도움 될 일이 없을까요?'

나름 베오날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작게 말한다고 말했지만, 이미 베오날드의 귀에는 모두 들려오고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는데 안 들리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 베오날드는 못 들은 척하고는 술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들 이것은 나의 문제다. 당초 계획엔 변함이 없다. 후우~ 그저 내게 검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고집에서 나온 거지."

"저기… 베오날드 님, 조언이 될지 모르지만, 말씀을 하나 올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타인의 조언을 무시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게다가 그것이 내가 인정한 동반자 하이디라면 그 어떤 말이라도 무시할 수 없지. 편하게 이야기해라."

"그… 저희 가문의 보물고에 말입니다. '엄청 커다란 뱀의 가죽'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문의 선조님께서 이곳에 정착하실 때 잡은 것으로, 무늬도 엄청 화려하고 크고 긴 놈이었습니다."

'뱀이라. 남 일 같지가 않군.'

노이멀 가문의 상징은 '뱀'과 '히드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어 올라가라는 노이멀 가문의 철칙과 연관된 것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노이멀 가문은 선조들 무렵부터 자신이 가주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어정쩡한 대귀족의 위치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입장이라서 독을 품은 뱀처럼 살고자 한 것이었다.

'아직 말이 안 끝난 것 같으니....'

"어릴 적에 그것을 보면서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봐라. 이 뱀은 수없이 자신의 한계를 깨며 탈피를 한 덕분에 이 크기에 도달할 수 있었지. 하나 봐라.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한계를 넘어도 뱀은 뱀일 뿐이다.'라고...."

"음...."

"…그러니까! 베오날드 님은 태어날 때부터 용이시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성장하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희와는 근본부터가 다르시니 너무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마시라는… 대충 그런 것입니다."

하이디의 말이 끝나고, 다른 두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이디를 바라봤지만 베오날드는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단서를 얻은 듯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뒤에 이어진 용에 대한 말은 잘 듣지 못했지만, '뱀'에 대해 들으니 오래전 가문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갑자기 살아난 것이다.

'우리는 뱀이다. 알았나? '기사'라는 껍데기는 쓰겠지만 우리 노이멀 가문은! '뱀'처럼 살아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배웠다. 고로! 너희도 '뱀'이 되어야 한다. 몇 번이고 한계에 닿아 탈피를 해서 성장해서 살아남는 뱀처럼 말이다.'

'기억이 조금씩… 나는군.'

벨릭스 폰 노이멀의 자식 중 베오날드는 머리가 비상하다는 이유로 강제로 공부 쪽으로 밀어 넣어졌는데, 저택을 지나던 중 훈련하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자신이 어릴 적에 들었던 것이라 상대적으로 더 오래전의 기억이다 보니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맞아. 뱀이었지. '뱀'… 우리 가문은… 우리는… 뱀. 그래… 이걸 베껴서 만든 놈은 자신이 할 수 있으니 만들었을 거 아니야? 그래! 알 것 같아!'

"베오날드 님?"

"좋아! 이제야 감이 잡히는군.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어! 하이디! 너는 아주 큰 공을 세웠다! 어두운 미로를 헤매는 나에게 빛을 찾아 준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네가 그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반드시 들어줄 테니 기억해 두어라. 그럼 먼저 나가마!"

"베오날드 님?"

드디어 잃었던 감을 잡은 베오날드는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검을 챙겨서 다시 뛰어나갔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지만 오히려 베오날드에겐 좋았다.

성벽을 넘어 인적이 드문 숲으로 들어간 그는 맨땅에 그대로 앉아서 눈을 감고 옛 기억을 떠올리며 오러를 끌어 올리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리 노이멀 가문은 뱀이다. 탈피를 거듭하여 크고 더 강해지는 뱀. 독을 품고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뱀. 우리는 용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 노이멀 가문의 이상은 바로 '궁극의 뱀'이다.'

'궁극의 뱀', 노이멀 가문의 선조들이 추구하던 것. 그래서 가문의 문양으로 뱀을 쓰기도 하지만 가세가 커진 이후엔 위험종 몬스터인 히드라도 사용하곤 했다.

뱀의 머리가 여러 개 달린 궁극의 뱀. 하나의 머리가 잘려도 다시 살아나고 혹은 갈라져서 재생하는 뱀. 노이멀 가문의 검술에 담긴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니 감이 왔다.

'설마 내가… 마음이나 무의식 같은 걸 믿고서 행할 줄이야.'

뱀의 마음, 그리고 그 궁극의 표상인 히드라. '검'으로 탈피를 해서 자신이 '히드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말하고도 이런 결론은 참 웃기다고 생각한 그는 잡념을 버리고 집중해서 검을 휘둘렀다.

오러를 끌어 올려서 휘두른 검은 보랏빛 검로를 남기면서 밤을 밝혔고, 베오날드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그것에 몰두했다.

'뱀. 우리는 뱀… 그리고 목표는 용이 아니라 뱀 중의 뱀인! 히드라! 간교한 지혜를 생각할 수많은 머리! 가장 강력한 독을 지닌 자! 잘려 나가도 재생하는 불굴의 생물!'

노이멀 가문을 이해하지 않고서야 노이멀 가문의 검을 이해할 수 없다.

검술은 노이멀 가문의 것이지만, 베오날드의 관념은 '노이멀 가문의 검사'가 아니었다.

베오날드가 스스로를 지칭한다면 그는 연금술사, 제국의 지배자, 간신, 권력자, 베노피스 정원의 관리자 등등 수많은 관념과 지위로 자신을 이미지화할 것이다.

'…나는 뱀이다.'

노이멀 가문의 검술의 오의를 깨닫기 위해선 바로 그것을 깨고, 이해해야 한다. 

오의는 몸 안에 흐르는 마나와 오러가 검술과 하나가 되어야 깨어나는 것.

베오날드의 검술은 노이멀 가문의 검술. 하나 오러는 결국 구결을 외는 베오날드의 육체, 영혼,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 그것이 통하지 않고 있으니 아무리 방법을 알아도 오의는 깨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가 쌍두사까지 깨달은 게 신기한 일이군.... 으아아악! 아무튼 길은 알았어. 이제 언제 도달하느냐의 차이뿐!'

그렇다곤 해도 여전히 도착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하나 확실한 것은 이 길이 맞는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베오날드는 언젠가 탈피하리라 믿으며 '오의:히드라'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검을 휘둘렀다.

***

그리고 며칠 뒤, 여러 도시를 넘어간 끝에 다행스럽게도 가을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베오날드 일행은 제국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성벽과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움직이는 수많은 상인들. 캘러메인 영지는 그저 작은 곳이라는 걸 실감하게 해 주는 광경이었다.

"오오… 드디어 도착했네요."

"역시 수도인가? 엄청 크네요. 와아아아아~ 게다가 마차도 엄청 많아요."

제국 수도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 주는 수많은 마차들의 행렬. 세인과 하이디는 생전 처음 보는 수도의 위용과 엄청난 수의 사람과 이동량에 감탄하며 그녀들이 캘러메인 영지라는 작은 곳에서 왔음을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시골 처녀 같은 그 순수함에 베오날드는 절로 미소가 나왔는데, 셀리나가 그런 베오날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베오날드 님도… 캘러메인 영지를 나오는 건 생전 처음 아니신가요? 왜 그렇게 여유를 부리세요?"

"음? 아~ 나도 사실 속으로는 놀라고 있다. 걱정 마라."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요?"

셀리나의 말대로 사실 베오날드는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500년 전 자신이 가꾼 도시는 적어도 저 제국 수도의 3배는 될 정도였으며, 그것이 아니라도 다스렸던 통일 제국의 수도도 저것보다 월등히 거대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억지로라도 설레는 모습을 연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베오날드의 눈에 갑자기 기이한 것이 보였다.

"뭐, 뭐야? 저거 설마 몬스터?"

"뭐냐니요? 수인(獸人)이잖아요. 아인(亞人)종을… 아, 처음 보셨구나~ 어라? 우리 올 때도 분명 몇 번 본 것 같은데.... 아… 그, 베오날드 님은 혹시 자기 일에만 몰두하시는 성격인가요?"

"부정은 못하겠지만, 그보다 수인(獸人)이라고? 웨어울프나 라이칸스로프가 아니고? 허어...."

베오날드는 지나온 마차에 앉아 있던 개 머리를 하고 온몸이 털로 뒤덮인 짐승 남자를 보고 경악한 것이었다.

500년 전 그가 살던 시대엔 전혀 볼 수 없던 아인종으로, 그가 아는 이종족은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인간과 유사하거나 친밀한 종족 빼고는 죄다 몬스터 취급이었는데, 수인까지 인류에 편입하니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건… 전혀 교육 못 받았는데?"

"…교육받을 틈새 없이 사고만 치셨잖아요. 물론 수인들이 굳이 제국 구석에 있는 캘러메인 영지로 갈 일이 없긴 하지만요. 대부분 가르칸 공화국 사람이거나 노예니까요."

"가르칸 공화국… 아! 그렇군. 그 교육 받은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해. 아… 그렇군. 거기 사람들이...."

"어쨌든 베오날드 님도 시골 출신처럼 행동하니 오히려 안심이 되네요. 후후훗."

"끄으으응...."

셀리나의 웃음소리에 베오날드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500년은 역시 짧은 세월이 아니었기에 변하는 것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는 제국 수도를 오가는 수많은 인파 속의 이종족과 아인종들의 종류를 파악하며 자신의 지식을 갱신했다.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