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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개월간 백작가는 잠시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테알 슬럼가의 일을 맡겼는데, 돌아온 것은 표면적으로는 실패였지만 실패가 아니라 백작가의 하위 파벌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만 올려 준 상황이라서 캘러메인 백작과 메이라 부인은 일단 베오날드에게 무언가를 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베오날드의 일상은 급격히 한가로워졌고, 가끔 렌겔 가주 대리가 시키는 일을 제외하면 저택에서 놀고먹으며 하이디와 단련, 셀리나의 지식욕을 채워 주는 연구 정도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라도 어떤 일을 맡아서 베오날드가 랄트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업적이나 공적 같은 걸 세우면 영지의 후계 구도는 완전히 끝장나기 때문이었다.

"관심 안 가져 주니 아주 좋군. 게다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다니 참~ 평민들이 부러워할 삶이군."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에 있는 은신처에서 한참 마법과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셀리나와 티타임을 가지던 베오날드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음? 뭐가 문젠가? 내가 뭐~ 정말로 놀고먹는 것도 아니고, 기량 단련과 연구 모두 철저히 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 랄트 도련님도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고 말이야."

이렇게 여유롭기 그지없는 베오날드와 다르게 백작가의 후계자인 랄트는 이번 테알 슬럼가 문제 때문에 급부상한 베오날드의 명성과 업적을 누르기 위해서 백작, 메이라 부인과 그녀의 본가 가신들과 함께 영지의 각종 일과 공부에 치여 사는 중이었다.

사실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약 15년간 제대로 교육받지 않고 논 대가를 치르는 거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택의 메이드와 집사들이 웅성거리는 말에 의하면 요 근래 랄트 도련님은 매일같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새벽 2~3시까지 일과 단련, 공부를 하고 잠드는 하드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라고 한다.

"걱정되는 것은 오히려 도련님의 신상입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제 메이라 부인이나 백작이 노릴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현재 백작가의 후계 구도를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를 가만히 놔둘 두 사람이 아니었기에 셀리나의 우려는 설득력 있는 것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차를 계속 들이켜면서 우아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45화]

"그럴 거였다면 진작 움직였겠지. 암살자라도 보냈을 거야. 물론 지금 내겐 말데로브 경과의 친목, 거기에 그의 아들 에라솔, 젤커드 자작의 따님인 하이디도 있지. 또 암살 임무를 받을 다크티스 조직과도 인맥이 있으니 웬만해서는 무리이겠지만...."

"아… 하긴 움직일 방도가 없네요."

"그러니 안심해도 되는 거지. 오히려 지금 이대로 가만히 두는 게 최선책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지. 또 내가 있어야 그 랄트 도련님이 열심히 뛰거든."

이 점 하나만큼은 렌겔 가주 대리든, 백작이든, 메이라 부인이든 모두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베오날드가 뒤에 서 있기에 그 게으르고 나태했던 랄트가 지금 업무와 공부를 병행하며 달리는 건 사실이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백작가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안심하는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아직 이용 가치는 있고, 또~ 나를 어떻게 할 명분이 없잖아? 기회를 보는 거겠지. 슬슬 휴식 시간은 끝. 다음 강의로 들어가지."

"그러네요. 아~ 아쉬워라. 도련님의 머릿속에 있는 걸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지금 가르쳐 주는 거나 다 외워라. 아무튼 다음 강의로 가지."

"예이~"

지금까지의 잡담은 그저 연금술 수업 뒤, 쉬는 시간인 것이었다. 

연금술 조수로 써먹으려면 이렇든 저렇든 기초적인 교육을 해야 했기에 베오날드는 셀리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가서 일대일 교육을 계속 이어 나갔다.

연금술의 기초, 원소와 물질에 관한 이해부터 시작해서 '마력 변환' 및 '원소 변환'을 배우기 전의 기초부터 단단히 주입시켰다.

"근데 이거 외울 이론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마탑의 연금학부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꼭 멍청한 애들이 기초 이론이랑 물질, 원소 특징 무시하는데, 멍청하게 '변환'과 '제조', '연성'에 도전하다가 사고 치는 거야… 라고 책에 나와 있었다. 크흠!"

"방금 뭔가 설명에 체험한 것 같은 리얼함이 담겨 있었는데요?"

"아니, 그럴 리가~"

15살이라는 배경에 맞추기 위해서 연금술의 출처를 숨기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우연히 찾은 고서로 공부했다고 거짓말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책에 대해서는 외워 버리고 폐기했다는 말로 출처를 아예 없애고서 그녀에게 연금술의 기초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다행히 마법사인지라 기본 두뇌가 되고, 또 마탑에서 같이 연구하는 타 부서의 이해를 위해 교양으로 배우게 한 덕분에 가르침은 수월했다.

그렇게 약 1시간가량 수업하고 난 뒤, 베오날드는 수업을 마쳤다.

"아무튼 수업료 겸 과제로 약속한 치유 포션 만들어 오는 거 잊지 마라."

"예, 걱정 마십시오. 치유 포션이라면 명분도 충분하니 만들기 쉬울 거예요. 제 쓸모를 증명해야 더 많은 걸 배우니까요. 물론 백작가에 납품하는 거랑 도련님에게 드릴 걸 별도로 만드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치유 포션의 제조법을 2개 알려 준 이유는 자신과 자신의 가신들이 사용할 것을 당연히 더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백작가엔 저급한 것을 주기 위해서였다.

특히나 성능이 더 좋은 포션은 자신이 직접 연구하고 개량한 것이라서 더욱 남이 사용하게 해선 안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저 셀리나를 시험해 볼 수도 있었고 말이다.

'뭐, 차라리 사고를 쳐서 죽일 명분을 만들어 주면 그게 더 고마운 일이겠지만.... 아무튼 슬슬 나갈 시간이군.'

베오날드는 저택 사람이나 캘러메인 백작가 사람들이 모르게 셀리나와 완전히 다른 루트로 돌아서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맞이하러 온 세인과 함께 알테리오를 데리러 올라간 다음, 저택 내의 수련실로 향하여 베오날드가 알려 준 마나 호흡법과 창술을 한창 단련하는 중인 하이디를 문밖에서 불렀다.

"하이디, 나다. 슬슬 외출하도록 하자."

"아! 예! 도련님! 금방 나가겠습니다!"

"도련님? 오자마자 또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오자마자 다시 나간다는 말에 전속 메이드인 세인이 질문을 하자 베오날드는 태연히 답했다.

"아~ 이 녀석 밥 주러 나가야지. 육포랑 간이식만 먹이는 건 몸에 안 좋고, 산책도 해 줘야 되거든. 저번 테알 슬럼가 일로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니까 어떻게 되었는지 봤지 않나?"

삐이이이잇!

"그럼 저녁 식사는 안 드시겠군요. 말씀해 두겠습니다."

덜컹!

세인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수련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선 후끈한 공기와 함께 수련으로 인해 땀범벅이 된 하이디가 갑주를 차려 입은 채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오, 오신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씻고 준비를 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어떤 꼴인지 깨닫고 허둥지둥거렸지만, 베오날드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 애초에 네가 수련을 해서 강해지는 것을 바란 건 나다. 그러니 배려는 내 몫이지. 씻고 오는 걸 기다리지. 아니면~ 기왕 하는 거, 같이 씻으러 들어갈까?"

"아, 아아아아아아닙니다! 무, 물론 그게 싫은 건 아닙니다만! 아, 아직 이, 이르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바로 씻고 오겠습니다!"

'음~ 반응이 좋아서 아주 귀엽군.'

터무니없는 무의 재능과 강인한 외모를 가진 것과 달리 하이디의 성격은 우직하면서도 터무니없이 소녀스러워 이렇게 살짝 놀리기만 해도 반응이 좋았다.

또한 뭔가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인 게 너무 마음에 드는 베오날드였다.

"…하이디 양이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다들 저 키와 체구만 보고 너무 편견에 싸여 있어. 내면은 저렇게 순수한 소녀인데 말이지."

"흐음~ 순수한 타입이 취향이신지요?"

"아,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내 취향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은 편이거든. 아주 어리지 않고, 그리고 내 가슴을 뛰게 할 매력과 재능만 있으면 충분하지. 물론 세인 너도 내 취향 안에 들어와 있으니 안심해도 되네."

그렇게 태연하게 대답하며 산뜻한 미소를 짓는 베오날드.

보통 사람이었다면 느끼하거나 자아도취가 심한 자라고 생각할 법했지만, 베오날드는 외모도 외모일뿐더러 이 백작가에서 능력까지 보이고 있는 다크호스였기에 당당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세인이었다.

그래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를 감시하라는 메이라 부인의 말이 다시금 머리와 가슴을 따갑게 하며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끔 했다.

'잊지 말거라. 행여나 허튼 생각을 하면 이 매질보다 더한 대가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고작 다크호스라고 해 봐야 놈은 결국 잡종인 시골 출신이니까 말이야.'

"윽...!"

"아, 그렇게나 기분 나빴나? 하하, 미안하게 되었군."

베오날드는 세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보고 불쾌한가 싶어 더 이상 추근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제대로 머리도 말리지 않아서 축축한 금발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하이디와 함께 다시 저택을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런데 도련님, 오늘은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 사냥터라면 얼마 전에 갔던 곳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으음~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이디."

현재 이 외출의 명분은 그리폰인 알테리오의 산책과 식사를 공급하기 위한 사냥이었다.

사실 산책은 둘째 치고 식사를 위한 사냥은 이미 베오날드의 경지라면 손쉬운 일이어서 지금 하이디가 지적하는 대로 영지 밖의 다른 숲으로 멀리 올 이유가 없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어느 정도 깊숙이 숲에 들어오자 작은 컵에 물을 담고 거기에 붉은 액체를 몇 방울 흘린 다음 물 위에 뜬 그 액체가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건 뭡니까? 도련님."

"일종의 탐지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켜보고만 있도록. 그리고 알테리오를 돌봐 주렴."

"예! 도련님."

하이디는 알테리오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금방 친해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완전 무장에 튼튼한 피지컬, 거기에 무의 재능과 힘을 가진 덕분에 알테리오가 험하게 달려들어도 마치 애완동물을 다루는 것처럼 다룰 수 있었다.

그렇게 베오날드와 하이디는 몇 시간가량 숲을 헤매다 위험종 몬스터의 영역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 하이디와 놀던 알테리오가 깃털을 바짝 세우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이디 또한 그것을 보고는 창을 꺼내 들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지만, 베오날드는 여전히 태연하게 계속해서 무언갈 찾다가 어느덧 어두워지자 찾는 것을 멈추고 말했다.

"으음… 역시 쉽게 나오지 않는군. 슬슬 돌아가자."

"도련님은 도대체 무엇을 그리 찾으시는 것입니까?"

"아~ 찾는 거? 지맥(地脈)이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마나 호흡법'을 하면 그 배 아래쯤에 '코어'가 생성되지? 그리고 전신의 곳곳으로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곳으로 모이고, 어느 곳으론 흐르면서 신체를 강화하거나 발달시키지. 알지?"

"예. 한데 그게… '지맥'이라는 것과 무슨...."

"무인들의 말로는 자연이야말로 거대한 '궁극의 신체'이며 그것과 닮아 갈수록 더 고귀한 경지라고 하지. 그럼 반대로 궁극의 신체 또한 결국 인간의 것과 닮아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는 건 곧… 살아 있는 자연에도 분명… 마나가 흐르며 그것이 '코어'처럼 모이는 곳이 존재한다는 거지. 나는 그것을 우리가 사는 '별'의 이름을 붙여서 '성맥'이라고 부른다."

"아하!"

"그 '성맥'은 아마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마나 호흡법을 쓰는 신체 곳곳에 마나가 '모이는 곳'이 존재하기에 이 '별'에도 그것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지맥'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걸 찾으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기까지 말했으면 이해를 할 거라 생각했는데… '마나 호흡법'은 알다시피 자연에 있는 마나를 신체에 모으는 방법이다. 오래된 가문들이나 명문 무가들이 가진 '마나 호흡법'의 경우 효율이나 성능, 체질에 따라 개선된 것이라서 저잣거리에 나도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가문의 핵심 비밀이자 보물 취급을 받는다. 그럼 반대로 그 '마나 호흡법'을 실행하는 환경 요인인 자연의 상황을 더 좋게 하면 어떻게 될까?"

쩌엉!

거기까지 말하자 하이디는 그제야 감탄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면서 박수를 쳤다. 그러자 금속으로 된 갑주의 건틀릿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이는 곱셈의 원리와 같다.

'자연 속 마나×마나 호흡법의 효율=마나 코어 생성 및 성장 속도'라고 보면 좋거나 개량된 마나 호흡법을 쓰는 건 뒤의 숫자를 올리는 것이고, 자연 속 마나가 풍부한 곳을 찾는 것이 전자에 속하는 것이리라.

"이제야 이해를 하는군. 그래, 보통은 신체가 성장하기 전부터 마나 호흡법을 해야 효율이 좋지. 하나 너는 배우기도 늦게 배웠고, 별로 좋지 않은 걸 하다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큼 진도를 좀 더 빠르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그럼 저를 위해서 찾으시는 겁니까?"

"그것도 맞지만 지맥은 그거 외에도 많은 용도로 쓰이거든. 가령 연금술사들이 하는 마력 변환, 원소 변환, 연성 같은 건 보통 마정석이 필요하지만 지맥이 있으면 그것 없이 할 수 있지. 마력이… 흐르는 곳이니 말이야. 하지만 역시 찾기가 쉬운 게 아니지."

마력이 풍부한 만큼 위험한 몬스터들이 살 확률이 높기도 하고, 쉽게 찾아지는 곳조차 아니었다.

하나 찾는다면 하이디의 마나 호흡법 성장도 성장이지만, 베오날드로서는 제조할 수 있는 연금술의 각종 비약도 많아질뿐더러 연성을 통해서 다양한 도구의 제작까지 가능해진다.

여태껏 잔재주들이나 썼던 것과 다른 '마스터 연금술사'로서의 전공과 진면목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지맥'을 찾아야 할 수 있는 이야기였고, 오늘 찾지 못한 베오날드는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6화]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모험가 길드의 몬스터 분포 자료와 저택에 있는 주변 지역 지도를 대조하고,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서 철저히 수색한 결과 드디어 두 달여 만에 '지맥'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지맥이 있는 곳은 깊은 산속의 작은 폭포가 있는 강가로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며 매우 만족해했다.

연금술 실험엔 대부분 '물'이 꼭 필요한 만큼 식수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곳이라면 더더욱 좋았기 때문이다.

안 그랬으면 이곳에 올 때마다 '물'을 운반해 오거나 근처에서 수원지를 찾아야 했을 테니, 그동안 안 찾아져서 곤란했지만 결국 찾은 곳이 이렇게 좋은 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기뻤다.

"좋아, 좋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수원지 근처라는 게 더더욱 마음에 드는군."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습기가 강하면 갑주나 무기에 녹이 슬기 쉬워서...."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튼 빠르게 거점부터 만드는 게 좋겠군."

"아, 알겠습니다."

베오날드와 하이디는 각자 무기를 꺼내 나무를 베어 내고 다듬어 거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둘 다 오러를 사용하는 초인인 기사들이었기에 나무들은 수수깡처럼 금방 다듬어졌고, 완력이 뛰어나다 보니 챙겨 온 못만 가지고 조립을 하자 금방 그럴싸한 나무 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베오날드가 챙겨 온 약품을 뿌리기 시작하는데, 독한 냄새가 나자 하이디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도, 도련님, 이게 뭡니까? 독입니까?"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보다시피 만들긴 쉬웠지만 이것들, 제대로 말리지 않은 생나무라서 벌레들이 많을 거니 미리미리 제거하기 위한 약이라네. 물론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처리를 더 해야 하지만 말이지."

"오오… 그렇군요. 처음 봤습니다."

'당연히 대귀족 체면에 야생 생활을 해도 더럽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약을 뿌려 두고 하이디에겐 개인 수련을 하라고 한 뒤,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누군가의 접근을 알 수 있는 간단한 트랩 설치 및 야생 동물이나 몬스터의 서식지, 또 약초나 버섯이 있나 확인했다.

"오! 찾았다! 알테리오! 받아! 한연초다."

삐이이잇!

지맥 근처는 그야말로 생명의 보고였기에 좋은 약초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즐거워하면서 모조리 채집했고, 군데군데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느꼈지만 그리핀인 알테리오가 포효하자 죄다 두려워하며 물러나서인지 싸우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동안 바쁜 일이 많아서 제대로 신경을 못 썼지만 이제 알테리오는 거의 성체라고 해도 좋을 크기까지 자란 지 오래였다.

잘 자란 준마보단 살짝 작은 사이즈였지만 맹수의 육체 같은 몸집과 근육량, 날개가 압도적이어서 전쟁터를 거친 말들도 무서워서 도망칠 레벨이었다.

"음, 이렇게 된 거 한번 타 볼까? 슬슬 타는 훈련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삐잇?

"밥값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온다는 거다, 알테리오. 너도 귀족가의 가솔이니 말이야. 아무튼 보자… 좋은 약초도 많이 얻었는데, 뭐부터 만들어 볼까? 흐흐흠~"

그렇게 '지맥'과 더불어 연금술을 하기에도 최적의 조건인 거점을 구한 베오날드는 행복한 고민을 하며 알테리오와 함께 거점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평온한 듯 보이는 나날 속에서 그는 또다시 일어날 폭풍에 대비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

몇 개월 뒤.

어느덧 계절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여름, 가을, 겨울… 한 해가 마무리되어 가는 캘러메인 백작가였다.

베오날드의 경우, 테알 슬럼가 일 이후엔 그 어떤 일도 맡지 않아서 오전엔 셀리나의 교육, 오후엔 하이디와 함께 검술과 마나 호흡법 단련을 비롯해서 꾸준히 자기 기량 상승과 계획하던 일을 착착 진행하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하아아...."

하나 반대로 본래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어제도 아침이 밝아 오기 전에 겨우 잠들었다가 일어난 랄트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현재 그는 14세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누가 봐도 고생한 티가 역력한 모습이었다. 

눈 밑엔 진한 다크서클, 화려하고 아름답던 머리칼은 푸석푸석해졌고, 몸이 축나기 시작한 것의 신호인지 피부엔 트러블이 가득했다.

'…자고 싶어.'

누가 봐도 명백한 수면 부족. 랄트는 멍한 상태에서도 좀 더 수면을 취하길 원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몸의 저항을 물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

자신은 이 백작가의 정통 후계자. 시골에서 굴러들어 온 잡종에게 이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더 공부하고, 더 단련해야만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련님."

"어… 어… 어어! 하아… 하아...."

"안색이 좀 안 좋으십니다만?"

"아니! 이 정도야 좀 쉬면 나을 걸세!"

눈을 뜬 이상 오늘 하루의 일정이 또 시작된다.

아직 성장 중이라서 그런지 이 가혹함을 견디며 그는 병사들과 하는 아침 체력 단련을 하러 나섰다.

이제는 꽤 적응이 된지라 랄트는 병사들의 뜀걸음에 맞춰서 잘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단련 중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고, 또 저 저택 창문 안으로 자신보다 늦게 일어나서 느긋하게 아침을 보내고 있는 베오날드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자식!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하긴 차라리 저렇게 안 보여 주는 게 낫지. 젠장!'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원인이 된 놈. 물론 그를 데려와서 양자로 삼은 것은 친아버지인 렌겔 가주 대리였지만, 결국 저놈의 존재 자체가 지금 자신을 이렇게 몇 달째 고생시키고 있는 거였다.

현재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에게 단련을 받는다는 이유로 병사들과의 공통 체력 단련에서는 빠진 상황이었다.

처음엔 혼자 도망치는 거라 생각했지만, 역으로 랄트로서는 보기 싫은 놈을 안 봐서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저 망할 놈! 꼴도 보기 싫은데… 이이이으윽!'

하나 보기 싫다고 해서 안 볼 수가 없는 사이인 게 문제였다. 

단련 때는 애써 무시하더라도 이렇게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는 도저히 도망칠 방도가 없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식사 자리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행사였기에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베오날드, 오늘은 일정이 있느냐?"

"음~ 일단 오전엔 알테리오의 무장 제작을 의뢰할 생각입니다. 드디어 사람을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컸으니까요."

"알테리오라면 그 그리폰 이야기인가? 그렇구나. 무장이라는 건… 설마 그걸 타고 전쟁터를 나갈 생각이냐?"

"예. 실전성은 둘째 치고, 무장시켜서 전장에 나간 다음 적 진영의 말들에게 포효하기만 해도 존재감이 넘쳐흐를 것이고, 가문의 위상이 오르게 되겠지요. 최소한 손해는 없을 겁니다. 물론 아직 좀 더 조련을 해야겠지만요. 녀석이 크더니 야생성이 살아나려는 건지, 참~"

"과연 그렇군. 조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식사 자리에선 무릇 가문 식솔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며 근황을 확인하는 것이 가주의 임무였다.

가장 먼저 질문을 받은 베오날드는 오늘 그리폰의 무장을 맞추고 조련에 힘쓸 거라는 이야기를 꺼냈고, 이는 가문에 득이 되는 일이었으며 잘 처리되고 있기에 더 이상 질문이 오가지 않았다.

"랄트, 저번에 맡긴 외벽 공사 지휘는 어떻게 되었느냐? 예정대로라면 이미 완성됐어야 하는데, 아직 진행 중이라는데?"

"그, 그게… 서, 석재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조금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럼 석재 공급을 개선할 방안은 세웠느냐? 내가 분명 다른 영지나 상인을 통해서 추가 구매를 하라고 말해 주지 않았느냐?"

"예? 그, 그게 아직...."

"영지와 성의 방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등한시하면 적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맡은바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렌겔 가주 대리의 꾸중이 바로 들려왔다.

물론 랄트라고 후계자의 일이 싫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선은 자신이 맡은 일이 이거 하나가 아니라는 점, 거기에 상인과의 교섭이 능숙하지 않은 점 등등… 변명으로 내놓을 수 있는 건 너무나 많았다.

하나 그것을 지금 입으로 내뱉는 것은 자신의 평가만 깎아 먹는 짓일 뿐이니 할 수 없었다.

"빠, 빠른 시일 내에 완수하겠습니다."

"아니면 네게 부여된 일이 많은 거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어떻겠느냐?"

"랄트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뿐이에요. 그러니 굳이 배분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사정을 렌겔 가주 대리가 모르는 건 아니어서 조금은 짐을 덜어 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모친인 메이라 부인이 극구 저지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실패했다는 흠을 남기고 싶지 않은 그녀는 일을 덜어 주려는 렌겔 가주 대리의 제안을 무시한 것이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식사가 끝나고, 랄트는 지옥 같은 업무로 돌아가기 전 모친에게 자신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님, 방금 건 너무하셨습니다. 솔직히 저 너무 힘들어요. 지금 이 일만 맡은 게 아니라 범죄자 재판, 형무소 시찰, 병영 개선, 각 길드 회의 참석, 시젤 백작가 축하 파티 참석 준비…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물론 안단다. 하지만! 여기서 네가 하지 않으면 분명 이 일들은 모두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에게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와 저 아이의 격차를 더 보여 주게 된다고!"

"이이익… 하지만 이건 무리라고요! 저 혼자서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네가 해야 할 건 직접 다 하는 게 아니다! 일을 관리하고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거란다! 사람에게 맡겨서 성공하면 상을 주고, 실패하면 처분하면 되는 것을 왜 그리 어렵게 보는 게냐? 아무튼 네 일을 절대 빼앗겨선 안 된다! 기껏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가 아무것도 못하게 막고 있는데!"

유일한 아군인 어머니도 결국 자신의 고통과 힘듦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대로 하라고 강요했다.

사람을 쓰면 된다니? 일을 관리하면 된다고?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사인하는 기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면 결국 그 일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못해요! 더는 못해요! 그냥 그 자식을 죽여 버리라고요! 내가 왜 그 자식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오늘 일 안 해! 몰라! 엄마가 알아서 해요!"

"얘, 얘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그 자식 후계자 시켜요! 이런 게 후계자면 나 안 해!"

결국 참고 있던 것이 폭발해 버린 랄트였다.

애당초 평범한 15살 소년에겐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다. 몇 달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개인 시간도 없으며, 부여된 과중한 업무는 아무도 덜어 주지도 않는 데다, 유일한 아군인 모친마저도 해결책이나 도움 없이 무지성으로 일하라고 밀어붙이기만 하니 이렇게 되는 게 당연했다.

특히나 랄트는 고작 1년 전만 해도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던 자유를 누렸기에 더더욱 그 반동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버틴 건 오직 저 베오날드라는 잡종에게 자신의 '것'인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의지 덕분이었는데,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기에 그는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당장 쌓여 있는 수면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뛰어갔다.

"쟤, 쟤가?"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에 보통 15세 아이에겐 당연히 찾아올 사춘기의 영향. 

어쩌면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메이라 부인에겐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다급히 캘러메인 백작을 만나러 갈 수밖에 없었다.

[47화]

폭주의 대가로 랄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숙면에 들어갔고, 그러면서 결국 그가 하던 모든 일은 스톱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각, 알테리오의 갑주를 설계하기 위해 치수를 재고 나무를 다듬던 베오날드는 사전 설명 없이 자신을 부르는 가주 대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리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가주 대리님."

"그래, 왔느냐? 후우~ 오는 동안 혹시 이야기를 들었나?"

"아뇨. 그저 오라고만 하더군요."

"다행이군. 혹시라도 허튼소리를 했다면 목을 쳐야 했을 테니."

"가문의 명예에 문제가 되는 건가 보군요."

끄덕.

통찰력이 들어간 베오날드의 대답에 렌겔 가주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했다.

그의 말대로 백작가의 정식 후계자인 랄트가 일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가문의 명예에 금이 가는 것이었기에 전달하는 하인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해 둔 상황이었다.

만약 입을 함부로 놀렸다면 그 하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그렇지. 아무튼 요점만 말하자면 랄트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일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질 않고 있지. 그 아이가 맡았던 영지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말이야."

"측근으로 두고 계신 귀족이나 가신에게 맡기시면 안 됩니까?"

"물론 배분할 수 있는 건 배분했다. 하지만 가문의 혈족이 맡아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렇군요. 즉시 맡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연유를 잘 아는지라 베오날드는 더 의문을 표하지 않고 렌겔 가주 대리에게 해야 할 일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책상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베오날드에게 건네주었다.

꺼낸 것은 바로 금발 머리칼로 된 가발과 장식이 많이 달린 새하얀 고급 옷으로,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이었다.

"이건 랄트 도련님의?"

"그래, 녀석이 주로 입는 것과 같은 것이지. 가발은 알다시피 녀석의 머리색과 같은 색이고...."

"변장이라. 흐음~ 재미있는 걸 생각하시는군요, 가주 대리님."

"정말 미안한 제안이 되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거라. 테알 슬럼가의 일은 너무 상상 밖이었어. 이 이상 너의 위상이 올라서는 안 되거든."

이미 시작부터 베오날드와 랄트의 위상 차이는 심각했는데, 테알 슬럼가의 일로 더 벌어진 것도 모자라서 지금 랄트가 일에서 도망쳤다고 하면 사람들은 앞으로 당연히 캘러메인 영지의 주인감은 베오날드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아예 랄트 본인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에 절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메이라 부인 측과 그 파벌들의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게 된다는 계산이 나오기에 렌겔 가주 대리는 부득이하게 베오날드에게 랄트의 대리 역을 맡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저는 테알 슬럼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패했습니다."

"하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르다. 오히려 거기서 부정한 게 더 큰 반향을 일으켰지. 의심의 그림자가… 생겨 버렸으니 말이야."

'으음, 그게 역효과였나?'

"아무튼 이런 부탁을 할 수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하구나."

가주 대리로서 가문의 평화와 집안의 안정을 생각한다면 이게 최선이었다.

그 또한 베오날드가 만약 지금 이대로 가문을 잇게 되면 하위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한바탕 큰 다툼이나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에 베오날드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는 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빨리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머리를 숙이며 사죄까지 하는 렌겔 가주 대리였다.

베오날드는 그 뜻을 이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순순히 승낙해 주기엔 좀 그랬기에 대가를 받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건 둘째 쳐도… 사람인 이상 일을 했으면 대가를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

"게다가 본래 얻어야 할 명성과 업적을 고스란히 남에게 넘겨야 한다면 당연히 그만큼의 대가도 추가되어야 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 대가로… 뭘 원하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돈입니다. 금화로 주십시오. 아주 많이 말이죠. 그러면 이 베오날드, 랄트 도련님의 이름과 모습으로 훌륭히 일을 해내도록 하지요."

어차피 기왕 일을 하는 것이니 만큼 실리적인 것을 얻겠다고 생각한 베오날드였다.

수전노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시도할 수 있는 거점을 얻은 만큼 다양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선 '돈'이 많이 필요했기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이라는 대가는 워낙 교환성이 높아서 다른 목적을 떠올릴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돈이라.... 그걸로 뭘 할 생각이지? 잘못되면 영지를 도망칠 자금이라도 필요한 건가? 아니면....'

베오날드가 '돈'을 요구해도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떠올릴 수 없었고, 또 행여나 물어본다고 한들 핑곗거리는 넘쳐흘렀기에 렌겔 가주 대리는 그의 목적을 짐작하는 게 불분명했다.

그렇다고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엔 지금 랄트가 쌓아 둔 일과 상황이 너무 급박한 것도 사실.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했다.

"…좋다. 다만 확실하게 해결한 일에 한해서 보수를 넉넉하게 지급하겠다."

"그거면 됩니다. 그러면 어디… 옷부터 갈아입겠습니다."

"사이즈는 걱정 마라. 이미 맞춰 놓았다. 그리고 변장이 의미 없을 만큼 너와 랄트의 외모 차이는 크지만 그 부분은 다들 대충 넘어가게 하라고 전해라. 집사들에게도 전해 놓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베오날드는 랄트를 대신해서 일을 맡았고, 밖에서 기다리는 하이디에겐 자율 단련을 맡긴 다음 대기하고 있는 집사들과 함께 랄트의 서류 뭉치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쓰던 회의실에 앉아 랄트가 아닌데 랄트의 분장을 한 자신을 이상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깊게 신경 쓰지 말게. 나는 지금 랄트 도련님일세.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런 걸로 취급해 주게나~ 렌겔 가주 대리님과 협의된 사항이며 지금은 가문의 일이 중요하니까. 아무튼 일이 많을 테니 사사로운 건 신경 쓰지 말게."

"예, 예! 알겠습니다."

"외부로 나서는 일은 오후에 나갈 때 한 번에 할 테니, 그 전에 일단 급한 사항들부터 주게. 그리고 집사 제군들, 자네들은 내가 각자 전하는 일을 준 곳으로 가서 3시간마다 한 번씩 돌아와 나에게 상황을 보고해 주게. 시간은 금이니 철저히 지키게. 그리고 가문과 면담이 필요한 사람들은 모조리 저택으로 불러 주게. 그다음엔...."

베노피스 영지와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다스리던 대귀족의 경력이 어디 가지 않는다고, 단숨에 사람들을 휘어잡고 자신에게 부여된 인력을 배치, 일의 우선도부터 가려 급한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시키면서 거침없이 업무들을 처리해 나갔다.

'성 외벽 공사의 석재 공급이 문제인가? 으음, 수요와 공급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여기가 이 주변 영지들의 상권 중심이라서 물건들이 모여야 정상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물량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석재를 취급하는 상인이나 영지들 간의 담합이 있다는 거군.'

"베오날드 님?"

"말데로브 경에게 병사들을 일부 이끌고, 석재를 공급하는 상인이 운영하는 채석장으로 가 보라고 전해 주게.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고, 순찰 루트나 훈련 루트에서 조금 꼬아서 가면 충분하다고 전하게. 그리고 다른 행위는 하지 말고, 생산된 석재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보고 오면 된다고 하게."

"예."

"그리고 말데로브 경이 돌아오는 즉시 이 서찰을 전해 주게."

"…아, 알겠습니다. 그… 베오날드 도련… 이 아니라! 랄트 도련님."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약 가지고 장난치는 건 똑같고, 해결 방법도 똑같지.'

깡패나 양아치 같은 방법일 수 있지만, 군사력을 가진 영주의 힘은 결국 무력이다.

캘러메인 백작가의 핵심은 역시 말데로브 경. 어차피 성의 외벽 공사라면 결국 군사적, 전략적 문제였기에 기사와 군대를 투입시킬 명분도 충분했다.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을 보내서 해당 상인이 운영하는 채석장의 상황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세만 취해도 그 상인은 자신이 석재 가격을 가지고 장난치려 한 것을 들킨 걸 깨달아서 공급을 다시 원래대로 돌릴 것이다.

만약 조금 간이 두둑해서 그런 상황에서도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그 상인에겐 석재 가격을 올려 준다는 떡밥을 던져서 영지에 부른 다음 그의 아랫급이 되는 다른 석재상과 손잡고 놈을 죽인 뒤 적절한 죄목을 붙여서 그의 채석장과 상회를 접수해 버리고 석재 공급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계약서를 새로이 갱신하면 그만이다.

"가능하면 첫 수에 해결되었으면 좋겠군. 두 번째 수로 가면… 손쓸 게 많아질 테니. 이거랑 이건 젤커드 자작, 이건 델마인 남작에게 보내 주게. 그리고… 보자. 이게 다 재판인가? 참 나~ 다 평민들의 것뿐이군. 후계자이니 만큼 역시 어려운 재판은 모두 아버님이 가져갔겠지. 그러면 어렵지 않지."

어차피 평민들의 범죄 수준은 거기에서 거기인 만큼 죄목별로 분류한 다음 베오날드는 묶음 위에다 처분을 써 넣는 것으로 해결한다.

절도는 피해액의 10배에 해당하는 손해 배상. 만약 돈이 없을 시엔 영지 노역으로 노동 액수를 계산해서 보상하는 것으로 몰아 버렸고, 폭행 및 상해 치사는 치료비 및 배상금을 변상하지 않으면 가문의 노예로 사들이고 판매 금액은 피해자에게 보상… 등등, 당 시대의 상식적인 기준에 의해서 처리를 배분하는데, 놀란 집사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와 반발했다.

"저, 저기, 잠시만 도련님, 이 안에는 유력 상인 가문의 자제도 있습니다만… 그, 선처를 요구한다는 그 상인의 목소리도 그렇고… 엄청난 액수의 뇌물이...."

"…남의 집에 상회 패거리들을 끌고 가서 일가족을 강간한 놈에게 선처? 영지의 백성을 해칠 수 있는 건 우리 귀족뿐일세. 이건 귀족의 권위와 재산을 건드린 행위. 그 상인 놈 아들과 패거리 놈들 모두 '거세'한 뒤 알몸으로 칼을 씌워 죽을 때까지 저잣거리에다 세워 두라고 전해라. 그리고 그 뇌물은 모조리 돌려보내라."

보통의 귀족이라면 유력 상인 가문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겠지만, 베오날드는 이런 문제에 있어선 가차 없었다.

영지란 귀족의 정원이며, 백성은 그 정원에 사는 벌레 혹은 식물들이다.

그것들을 돌보아 정원을 아름답게 번영시키는 것이야말로 귀족의 의무이며, 그것을 방해하거나 권리를 침범하는 건 '귀족'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오나 고작 아무것도 아닌 양민 몇 명 때문에 상회를 적대하는 건 손익이.... 차라리 뇌물을 받고 그것으로 보상을 하는 게...."

"'돈'은 중요한 것이 맞지. 하지만 때론 돈으로 거래해선 안 되는 것이 있네. 그것은 바로 귀족의 권위와 정의이지. 한두 푼의 뇌물에 혹해서 남이 내 정원의 꽃과 벌레들을 짓밟는 걸 허락하게 둔다면 그 정원이 무사하겠는가? 당장 그리하고, 도시 전체에 공표하게."

"아, 알겠습니다."

원래 캘러메인 백작가의 방식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베오날드는 맡은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빠르게 일 처리를 해 나갔다.

그러자 소화 불량처럼 쌓여 있던 일은 마치 소화제를 사용한 것처럼 빠르게 해결되었고, 대부분의 주요 업무는 처리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날이 지나고 아침 식사 후, 렌겔 가주 대리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베오날드는 어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하고 그에게 대가를 받기 위해 서 있었다.

"사후 확인이 몇 가지 필요하지만 우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으음, 좀 과격한 점이 보이는구나. 이 상인 가문의 자제를 '거세형' 시킨 건 좀 심해 보인다만? 적절한 금액의 배상을 받으면 좋았을 것을...."

"영지민과 백성에게 손댈 수 있는 건 귀족뿐입니다. 다른 귀족이라면 적절한 금액의 배상을 받고 끝냈을 수 있습니다만, 고작 상인 나부랭이가 귀족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것도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권위를 침범한 것이니 가만히 둘 수 없는 것이지요."

"흠, 그런 의미라면… 알겠다."

렌겔 가주 대리는 혹시나 치기로 인한 정의감 같은 걸 변명으로 내세웠으면 반박하려고 했지만, '귀족의 권위'를 앞세우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랄트가 쌓아 둔 일들을 모두 깔끔하게 마친 것을 확인한 렌겔 가주 대리는 베오날드에게 대가로 금화를 지불했고, 이 모든 일은 '랄트'가 해결한 것으로 깔끔히 합의했다.

"그럼 전 이만… 본래 하던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건 반납하죠."

"그러도록 해라."

그렇게 금화가 든 상자를 받은 베오날드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렌겔 가주 대리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랄트가 폭주한 것도 폭주한 거지만, 베오날드가 너무나 유능한 게 한편으로는 가슴이 쓰렸던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아들아."

"아버님? 들어오시지요.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누워 계시지...."

갑작스러운 캘러메인 백작의 행차.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는 그가 찾아오자 놀란 렌겔 가주 대리였다.

캘러메인 백작은 아직 방 안에 그대로 있는 가발과 새하얀 옷을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렌겔 가주 대리를 향해 말했다.

"아주 재미난 사고가 일어났다고 들어서 말이다. 도저히 누워 있을 수 없더구나."

"아, 랄트 문제입니까? 그건...."

"랄트가 문제가 아니다. 아직 어린애가 일이 힘들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말하는 건 바로 저거다. 이젠 아예! 그 아이의 자리까지 뺏으려고 해?"

백작의 노성을 들은 렌겔 가주 대리는 아차 싶었다.

그의 의도는 랄트와 베오날드의 격차를 더 벌리지 않으려는 거였지만, 관점을 다르게 해서 보면 그가 아예 베오날드로 하여금 랄트를 대신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였다.

분노한 백작의 앞에서 렌겔 가주 대리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48화]

"…그래서 이렇게 베오날드에게 변장을 시킨 겁니다, 아버님. 오해하신 겁니다."

"오해? 설사 네 의도가 그렇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은 어떻겠느냐? 랄트가 도망치자마자! 랄트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려 한다고 생각할 게다! 차라리 그 일들을 네가 다 했어야지!"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시간이 뭐가 문제인가! 하여간 성미만 급해 가지고! 아무튼! 이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 당장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를 처분해야 한다."

"아버님!"

백작의 노성에 렌겔 가주 대리는 반박했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되자 백작은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곤 하더라도 렌겔 가주가 저지른 짓은 백작의 말대로 랄트의 존재를 대체해 버릴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더러운 피를 가진 놈이 이젠 랄트의 이름과 신분까지 뺏어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백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렇기에 백작은 역정을 내면서 베오날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렌겔은 그거까진 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버님의 우려는 압니다만, 그만한 인재는 구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혈족 아닙니까?"

"그 정도나 되면 혈족인 게 오히려 재앙이다. 너무 뛰어나서 탈이야! 이미 공을 세워서 문제인 걸 보지 않았더냐? 당장 처분해 버려라."

"지금 상태로는 처분도 쉽지 않습니다.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은 그렇다 쳐도, 젤커드 자작의 딸이 가신으로 붙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아이는 어느새 기사입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다. 메이라 그 아이와 같이 말이다. 너는 그저 우릴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알았느냐?"

"…예, 알겠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건 엄연히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 아버지의 분노를 부른 것이었기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더는 말릴 수 없었던 렌겔 가주 대리는 방해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베오날드에게 위협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보를 마친 캘러메인 백작은 곧장 랄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베오날드를 처리할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현재 그녀는 두문불출인 아들을 걱정하느라 다른 일에 손대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그이가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래, 아주 제정신이 아니지. 이대론 우리의 고귀한 혈통이 더럽혀지게 된다. 렌겔 그놈이 또 무슨 수작을 벌이기 전에 처분해야 해."

"아버님은 정말로 현명하시군요. 당연히 그래야죠. 제게 맡겨 주십시오. 며칠 안에 놈을 차디찬 시체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후후훗...!"

이제 이 가문의 주인인 백작의 승인이 난 이상 메이라 부인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방 안에 틀어박힌 랄트는 베오날드를 처리하면 나올 것이기에 그를 처리할 방안을 만들기 위해 속히 자신의 수하들을 불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제드 경과 베오날드의 전속 메이드로 붙인 세인이 그녀의 방으로 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그 잡종을 처리할 때가 온 것 같다. 놈은 지금 무얼 하고 있지?"

"다시 그리폰의 무장을 만드는 거랑… 슬슬 기승 훈련을 시작하더군요. 오늘부터 훈련 장비를 차고서 기마들의 훈련 코스를 돈다고 했습니다. 아마~ 가문의 기사들이 감탄할 거라 생각됩니다."

'기사(騎士)'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처럼 기사들에게 있어 '말'은 전장을 함께 달리는 동료이자 자신의 반신 혹은 연인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거대하고 튼튼한 군마의 존재는 기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일반 군마를 능가하는 위험종 몬스터를 타고 전장을 달리는 건 거의 동화나 전설에서나 듣던 이야기였다.

한데 그것을 실제로 보여 준다면 부러움은 물론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야말로 기사의 로망이군요. 저조차 보고 싶어지네요. 직접 타진 않아도 같이 전장을 달릴 거라고 생각하면… 흐음...."

"제드 경!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크흠, 죄송합니다. 사실… 그건 모든 기사의 로망인지라, 어쩔 수 없는 거라서 말이죠."

"하여간 이 답답이!"

제드 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메이라 부인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제드 경.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서 따라왔으며 지금도 그녀를 따르는 기사로, 본 실력은 아무도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아주 젊은 나이에 '중급 기사'에 도달했으며 수많은 귀족들에게서 영입을 제안받았지만 그녀의 옛 가문에서부터 메이라 부인만을 섬겼고, 지금까지 따라온 충절로 유명한 기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온갖 더러운 일을 맡는 해결사이기도 했다.

"아무튼 백작님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복잡한 방법은 필요 없습니다. 암살이든 독살이든 뭐로든 해도 된다는 거지요. 제드 경, 늘 하던 대로 깨끗하게 처리하세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마님, 이번엔 평소처럼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놈에게 성가신 자가 붙어 있습니다."

"성가신 자? 말데로브 경의 아들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쪽은 순진한 청년이니 제압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다른 쪽, 마치 맹견처럼 붙어 있는 그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입니다. 그 여자, 올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기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또 무슨 소리죠? 기사가 되었다니?"

메이라 부인 또한 썩어도 귀족가의 여식. 가문의 핵심 전력이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인 기사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마나 호흡법부터 시작해서 특수한 재능이 받쳐 주어야만 될 수 있는 것이 기사로,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이 직접 가르친 아들도 현재 기사가 되지 못해서 종자로 일하고 있을 정도인데, 젤커드 자작의 딸이 '기사가 되었다.'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 잘못 안 건 아니겠죠? 아니면 감춰져 있던 게 드러난 건가요?"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이 저택에 왔을 땐 마나 호흡법을 한 흔적이 있었지만 '코어'가 생성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코어'가 만들어지고 기량이 눈에 띄게 올라가서는 무시무시해졌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가 하고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요인이 베오날드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면 베오날드 도련님도 기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대체 그 잡종은… 한계가 어디까지인 거지? 신도 무심하시지! 우리 랄트에게 그런 재능을 내려 주셔야지! 어떻게 그런 잡종에게!"

빠드득!

분에 못 이겨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메이라 부인의 베오날드에 대한 분노는 점점 커져 갔다.

잡종 주제에 예법 등 귀족적 재능을 비롯해서 오만 것들이 뛰어난 것도 못 참겠는데, 이젠 기사까지? 혈통 빼고는 마치 하늘이 내린 것 같은 대귀족의 그릇이라는 것을 떠올릴수록 질투와 열등감이 커질 따름이었고, 더더욱 비교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베오날드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증폭되었다.

"역시 오자마자 없앴어야 했어! 무리해서라도!"

'마님이 드디어 칼을 뽑으시려는구나. 그리고 도련님이 기사라.... 후우~'

그것을 보면서 세인은 드디어 자신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짐작했다.

일단 그녀는 메이라 부인의 집안에 속한 자로서 베오날드 쪽에 붙어 스파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적인 면모라든가 인물적인 면모에서 베오날드 쪽에 좀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음은 베오날드 님을 따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도면 베오날드 도련님이 뛰어나며 더 상냥하고 매력적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따르는 것에 적극적일 수 없는 게, 한번 선택을 하게 되면 되돌릴 수 없게 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 현재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 있는 모친의 목숨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녀는 메이라 부인 측의 전력을 너무나 잘 아는 반면 상대적으로 베오날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고, 또 개인과 집단의 대결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오날드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여러 번 보여도 긴가민가하면서 고뇌하고 있었는데, 이젠 진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쩌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고민이자 도박. 베오날드 도련님에게 도움이 될 것이냐? 아니면 메이라 부인을 끝까지 따라서 베오날드를 처치할 것이냐?

물론 그냥 제삼자의 입장에서 단순한 장기짝이 되어 아무 쪽에도 협력하지 않고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경우에도 최악의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 누가 이겨도 아무런 득이 없이 위험부담만 생겨.'

제삼자로서 방관하게 되면 메이라 부인 측이 이기든 베오날드 도련님이 이기든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메이라 부인이 패배하고 그것이 그녀의 본가에 영향을 끼치면 모친의 생명에 위험이 생길 것이고, 베오날드 도련님이 패배해서 죽는다면 자신은 메이라 부인에 의해서 또 다른 암투를 위해 장기짝으로 다뤄지는 미래뿐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도련님을 섬기고 싶어.'

일단 마음으로는 베오날드 도련님을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녀다.

외모와 품격, 지성 모두 압도적인 매력이지만, 일개 메이드인 자신을 존중해 주는 상냥한 면도 끌릴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하지만 무서워. 마님을 거역하면...!'

반대로 메이라 부인이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모친의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점도 문제였지만, 그것 외에도 폭력과 공포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선뜻 베오날드를 따르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또 베오날드 측에 붙는다고 해도 자신이 도련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느 정도 가치나 메리트가 있어야 그분도 자신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모친을 구해 줄 텐데… 자신이 그분에게 바칠 것도 있어야만 했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흐음, 아무튼 그 잡종이 상당한 무력이 있으니 다소 준비가 필요하겠군요. 제드 경,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십시오. 입막음도 필요한 일이고, 또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진행해야 하니… 본가 쪽에서 기사와 병사들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칼을 뽑기로 한 이상 제대로 뽑으려는 듯,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서까지 사람을 불러오려는 것에 세인은 드디어 핵심적인 정보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 정보가 들어간다면 일주일의 시간, 그 지원이 없는 사이에 베오날드 도련님이 역습을 하게 되면 승산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메이라 부인이 역습으로 죽는다면 그녀의 본가에 있는 자신의 모친이 위험해지게 되는데.... 여기서 또 걱정이 되지만, 승부를 보려면 지금뿐이었다.

'…지금 이 정보를 얻은 순간이 가장 비싸게 그분과 거래할 수 있는 타이밍!'

세인은 그렇게 메이라 부인의 지시를 들은 다음 방을 나와 베오날드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동안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자, 베오날드가 가문 내 기사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그리폰인 알테리오를 탄 채로 저택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고고하면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리폰이 비록 한쪽밖에 없는 날개였지만 그것을 펼친 채 돌아오는 모습은 정말로 동화나 전설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휴우~ 수고했다, 알테리오. 오? 세인 아닌가? 마중 나온 건가? 마침 잘됐군. 이 녀석이랑 같이 씻어야 하니까… 비누 하나만 줄 수 있겠나?"

"예, 도련님.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을 그대로 담아 둔 광경과 베오날드의 상냥한 미소에 세인의 결단은 한 번 더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가 지시한 대로 비누를 가져다주고는 돌아오는 대로 메이라 부인의 계략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49화]

베오날드가 강에서 알테리오를 씻긴 뒤 저택 내로 돌아오자마자 세인은 시중드는 척을 하면서 그를 보필했다.

하나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거의 호위 무사처럼 계속 붙어 있는 하이디는 물론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까지 베오날드에게 달라붙어서 징징거리는지라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도련님! 부탁입니다. 제게도! 제게도 도련님이 가지신 무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니, 너는 말데로브 경의 후계자라서.... 엄연히 남의 무가 사람이라 곤란하다."

"하지만 그건 하이디 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이디 양은 아예 그쪽 가주인 젤커드 자작이 나에게 맡긴다고 했으니까 다르지. 에라솔, 말데로브 경은 너보고 나를 도우라고 했지, 나에게 널 기사로서 키우라곤 하지 않았다. 특히나 나는 아직 기사 서임도 받지 않아서 정식으로 널 종자로 삼을 수도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련님?"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중요한 내용인 건지 웅성웅성 대면서 이야기가 꽤 길어졌다.

세인의 관점에서 보면 베오날드의 옆에 있자마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기량이 상승한 하이디 양을 보고 무언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 에라솔이 그것을 알려 달라고 베오날드를 조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의 아들. 엄연히 독립적인 무가의 아들이었기에 함부로 손대거나 가르쳐 줄 순 없었다.

당연히 에라솔은 가문의 비전이나 무예를 배웠을 텐데, 접근만 해도 그것을 훔치려 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고, 그것은 말데로브 경을 적대한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음, 방법은 일단 내가 말데로브 경의 제자로 들어간 다음 널 받아들이는 방식을 쓰든가, 아예 네가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없애 버려야 하는데.... 둘 다 불가능한 방법이지 않나."

"...."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너라면 지금은 조금 늦는 것처럼 보여도 부친이 준 가르침을 착실하게 수행한다면 분명 어느 경지까진 반드시 도달할 게다. 혈통과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마다 가진 재능이라는 게 다를 뿐이지."

말데로브 경의 가문에 대한 모독이나 비방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쓰면서 설득하는 베오날드였다.

하나 에라솔의 입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기사인 말데로브 경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엄청난 기대와 압박 속에 살았는데 옆에서 갑자기 미친 속도로, 기사의 경지도 모자라서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하이디를 보자니 더욱 조급함이 생긴 것이리라.

"애초에 내 방법으로 배운다고 한들 될 거라는 보장도 없다. 하이디 양은 젤커드 자작에게서 배우긴 했지만 기초 중의 기초로 토대만 만든 정도라서 적용이 되었던 거지만, 자넨 가문의 비전을 모두 배우고 실천하지 않았나?"

"저는 그… 토대조차 없습니다."

"거기에 다른 문제로도… 곤란해지는 게 너무 많아서 무리일세. 나는 안 그래도 가문 내에서 문제아로 찍혀 있어서 말이지. 정말 미안하네."

결국 허리를 숙여서 정중히 사과하는 베오날드였기에 에라솔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베오날드의 옆을 따라가는 하이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이 폭풍이 끝나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세인은 베오날드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베오날드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으음? 뭐지? 세인,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도련님. 메이라 마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거…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군."

메이라 부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베오날드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리고 세인은 드디어 그녀가 백작의 승인을 받아서 칼을 뽑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주일 내로 그녀의 본가에서 기사들이 지원 올 것이라는 정보까지 모조리 전했다.

이제 완벽히 주사위는 던져진 셈.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베오날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상입니다."

"음, 역시 틈을 안 내 주니까 결국 폭발한 건가? 그래서 테알 슬럼가의 일을 실패한 것처럼 속였는데.... 뭐, 그것도 내 생각대로 흐르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으으음… 기사라. 나랑 하이디를 예상해 둔다면 둘… 넷… 여섯 정도인가? 그리고 일주일...."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계산을 하는 베오날드.

자신을 죽이는 것만이면 몰라도 하이디까지 기사급 전력으로 인식했고, 제드 경이 중급 기사이니, 중급 기사 한 명을 더 추가하고 하급 기사들로 채운다고 하면 못해도 지원은 총 6명이 올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세인은 '역시 베오날드 도련님은 머리 회전이 빠르구나.' 하고 감탄하는 동시에 그에게 말했다.

"예. 그 안에 무언가를 하셔야...."

"아니, 이 좋은 기회를 버릴 순 없지. 하이디, 일주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보자… 남은 5일간 거점에서 수련하고 실전 준비를 하도록."

세인은 베오날드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녀가 메이라 부인의 계획을 알려 준 건 지원 기사들이 오기 전에 먼저 움직이라는 뜻에서였는데, 베오날드는 오히려 그 기사들을 처리할 계획을 짜는 게 기묘했기 때문이다.

제드 경을 포함해서 기사 여섯이 더 추가가 되는데, 산술적으로 2명이서 이길 가능성은 적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하이디조차도 신나하는 모습에 그녀의 혼란만 더 커졌다.

"보자. 메이라 부인의 본가가… 확실히 로이엔 남작가였나? 기사 여섯 다 죽으면 상당히 타격이 크겠군. 인질을 잡을까?"

"그…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나도 같이 갈 거니 무리는 아닐...."

"저, 저기, 도련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베오날드는 이 기회에 하이디에게 아주 적절한 실전 경험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세인이 말을 걸자 순간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또 빼먹은 정보가 있나 싶어서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부디 저의 어머니를 구해 주십시오. 현재 로이엔 남작가 본가에 계시는데, 이대로 베오날드 도련님이 남작가의 기사들을 처리해서 메이라 마님의 심기가 흐트러지게 되면… 저를 벌하는 건 물론이고, 어머님도 위험해집니다."

"으음, 그런 사정이 있었군. 하긴 그런 약점을 쥐고 있어야 내 옆에 안심하고 붙여 놓을 수 있었겠지."

"혹시 제가… 마님 측 사람이라는 걸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아니, 딱히 짐작하진 않았어도 애초부터 이 집안의 모든 인물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 귀여운 알테리오와 확실히 충성을 확인한 하이디를 제외하면 말이지."

"아...."

경계 대상이라는 것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말하는 베오날드의 태도에 오히려 설득이 되는 그녀였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눈을 굴리면서 계산하더니 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친을 구해 달라는 거지? 그러면 빼 와서 맡겨야 할 곳이 있어야겠군. 젤커드 자작이 있어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우리 은신처에 데려와서 돌볼 사람을 붙여야 했겠지."

"맡아 주시는 겁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인질이 있음에도 배신하고 부탁하는 걸 보면 이미 결단이 섰다는 이야기 아닌가? 다만 시간도 시간이고, 우리 사람 수가 부족하니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기꺼이 하지. 그러니 세인, 너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들키지 않게 평소처럼 지내고 있어라. 혹시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에게 말해서 보호해 달라고 하고."

"아… 예!"

스스로가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손쉬울 정도로 베오날드는 자신의 모친을 구해 주겠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하이디와 함께 메이라 부인의 역습에 대응할 준비를 위해 곧장 움직였고, 특히 방금 전 보냈던 에라솔을 다시 불러서 그에게 세인의 보호를 요청했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이군. 하긴 방금 전 그렇게 거절을 때려 놓고는 일을 시키니 당연하겠지만… 흐음~'

타닥탁탁....

베오날드는 빠르게 두뇌로 주판을 굴렸다.

이대로 부탁한 채로 놔두어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혹시라도 세인의 안전을 확보하지 않거나 감정에 휩쓸려 허술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자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의 안전이 확보만 된다면… 본래라면 비밀로 해야 하지만, 기사가 되는 데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도움을 하나 주도록 하지. 검술, 마나 호흡법의 정보와 관계없지만 보장할 수 있다."

"…정말이십니까?"

"여신과 캘러메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지켜 내겠습니다."

단숨에 바뀌는 태도와 반응에 조금은 속물 같아서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맥에 대한 것을 알리긴 아까웠지만 그래도 세인은 지금 상황에서 절대 잃을 수 없는 카드였기에 그는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면서 하이디와 함께 단련실로 향했다.

그러던 중 하이디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도련님, 그 세인이라는 메이드에게 너무 공을 들이시는 게 아니신지요. 정보를 제공해 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에라솔 도련님에게 저렇게까지 확답을 받아야 할 정도인가 생각하면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음? 아, 물론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자질과 의지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생각해 봐라. 그녀는 엄연히 메이라 부인의 밑에서 가족을 인질로 잡혀 협박과 폭력으로 길들여지고 있었지. 그런 상황에서 확실하게 성사되지도 않을 부탁과 함께, 승산이 계산되지 않는 내 쪽에 붙는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나?"

"어… 확실히… 어렵겠군요. 그보다 그녀가 폭력을 당하는 건 어떻게 눈치채셨습니까?"

"왜 눈치를 못 채겠나? 날 돌볼 때마다 상처에 바르는 약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움직임도 다른데.... 물론 자세한 사정은 모르기에 아무 말 안 하고 지켜보았지만, 모르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다른 걸로 의심하는 것도 한두 번. 귀족가의 경우 하인들과 사용인, 노예들에게 폭력과 체벌로 규율을 유지하는 일은 그리 낯선 것도 아니었다. 참견할 사안인지 아닌지는 몰랐기에 따로 나설 수 없던 것뿐.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밝힌 시점에서 그 체벌의 원인과 결과를 완벽히 알아차렸기에 이젠 막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참, 메이라 부인도 어이가 없지. 그 정도 담력과 의지를 가진 인재를 그따위로 취급하다니.... 아무튼 내 기준에선 충분히 이 정도 수고와 대가를 지불할 인물이니 데려오려는 거다." 

"그렇… 습니까?"

"왜 그런 반응이지? 아~! 오해는 하지 말게. 나는 본인이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이상 강제로 소유하려는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그녀도 매력이 있으니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은 할 거고, 내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온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말이지."

"…예, 그러시군요."

'시대가 바뀌고, 500년 후가 지나도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같군.'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세인에 대해서 질투하는 게 딱 보이는 하이디의 반응이 귀엽게 느껴지는 베오날드였다.

체구는 크면서도 그런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베오날드는 미소를 지었고, 그녀와 함께 세인을 완벽히 얻기 위한 작전과 훈련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알테리오의 무장을 만드는 것과 사냥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서 거점의 물자를 보충, 일주일이 되기 전 할 수 있는 대비는 물론 메이라 부인을 처리하고 차후 교섭과 이 캘러메인 백작가를 어떻게 할지 이리저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50화]

6일 뒤, 저녁. 캘러메인 영지 경계.

메이라 부인의 집안인 로이엔 남작가의 영지는 캘러메인 영지의 성에서 말로 달려 약 2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연락을 보내고 난 뒤, 로이엔 남작의 승인을 받기 위한 기사들의 일정 조율과 준비 기간을 포함해서 아슬아슬하게 6일째 저녁이 되어서야 캘러메인 영지에 거의 도달할 수 있었다.

"이랴! 이랴! 참 나! 메이라 아가씨는 시집간 지 오래되었는데도 늘 제멋대로시군!"

"이젠 백작 부인이다, 벤트 경! 언제까지 아가씨라 부를 텐가?"

그곳으로 향하는 6마리의 기마들 중 가장 앞에 있는 두 기사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50세는 넘어 보이는 기사는 벤트 경이라 불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을 질책하고 있었는데, 그는 기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경박한 어조를 사용하며 불평을 내뱉었다. 

"아니, 아무튼 우리 아가씨는 맞잖습니까? 더구나 이렇게 갑자기 호출하는 것도 막무가내이고 말이죠. 세상에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원래 이번 주는 제 딸의 생일이 있었단 말입니다!"

"어쩌겠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드 경이 '중급 기사' 한 명을 대동하라고 하지 않았나? 중급 기사 중에 유일하게 비번인 게 자네뿐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그래도 대가는 제대로 지불한다고 하지 않았나? 참게."

"예예~ 일하고 나서 캘러메인 영지에서 선물이라도 사서 가야겠네요."

벤트 경의 투덜거림이 끝나고, 6명의 기사들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했지만 역시 시간이 촉박했던 탓인지 이미 어두워진 상황. 하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캘러메인 성이었다. 다 와서 야숙은 싫은 건지 다들 타고 있는 말을 재촉했다.

"후우~ 이 언덕만 넘어가면 이제… 어억?"

캘러메인 성까지 이제 언덕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 벤트 경은 잘 달리던 말이 갑자기 꼬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기사라는 존재였기에 그대로 몸을 날려 착지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애마는 땅을 굴러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벤트 경! 괜찮나?"

"예,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 '데드문'이… 망할!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일에 기사들은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벤트 경은 자신의 애마가 빠르게 달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지는 바람에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비번에 출장 나온 것도 서러운데, 자신의 귀중한 애마가 완전히 쓸모없어지자 슬픔과 분노가 함께 몰려온 것이었다.

"이런 젠장!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제길! 역시 괜히 왔어! 대체 이게 무슨...!"

"벤트 경! 이걸 보게! 여기 밧줄이 매어져 있었네! 누군가가 우릴 노리고 설치한 것 같네!"

"뭐라고요? 그러면...."

퓌이이이이이요오오오오!

자신의 말이 넘어진 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함정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멀리서 공기를 찌르는 높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은 몬스터 토벌을 자주 가곤 했지만 위험종인 그리폰의 서식지엔 가지 않아서 마주친 적이 없는지 그 울음소리를 그저 기이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탄 말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워워! 소울 윈드! 왜 이래? 진정해! 그냥 새의 울음소리잖아!"

"갑자기 이 녀석들이 왜 이래?"

"젠장! 왜 도망가려고 하냐고? 진정해!" 

히이히히힝! 푸히히힝!

위험종급 몬스터에 대한 대처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그런지 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요동쳤고, 기사들은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난리였다.

유일하게 말이 없는 벤트 경만이 상황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데, 순간 옆의 풀숲에서 황금빛의 줄기가 말을 진정시키는 기사들을 노리고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저, 저건? 이봐! 다들 조심해!"

"어? 어어?"

'저건… 오러? 황금빛 오러라고?'

히이히히힝!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기사 2명은 제대로 된 대응 한번 못해 보고 그 황금빛 오러의 잔영이 지나간 순간 목이 날아갔고, 말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도망쳤다.

벤트 경은 이를 갈면서 그 황금빛 오러의 주인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앞에 서서 푸른빛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적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소리쳤다.

"당장 거기서 멈춰라, 이 비겁한 놈! 보아하니 오러를 두른 기사 같은데… 감히 이런 기습을!"

"더러운 일을 하러 오는 자들에게 존중해 줄 명예는 없지."

'뭐야?'

"으아아아아악!"

히히히히힝!

황금빛 인영의 앞을 막아서며 외친 순간, 그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와 함께 또 다른 동료의 비명 소리와 공포에 떠는 말이 도망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나 그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금세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황금빛 오러가 깃든 창을 막아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카랄 경! 들립니까? 카랄 경! 살아 있습니까? 이 노친네야, 상황 파악 좀 해 주십쇼!"

"아! 듣고 있네! 그러니까… 메이슨, 듀럴 경은 죽었고, 마커스, 맥심은 부상! 멀쩡한 건 나와 자네뿐인 것 같네. 그리고 난 지금 그놈과 마주하고 있네. 이제 어쩌면 좋겠나? 벤트 경."

"지금 다른 생각 할 틈이 없습니다! 이놈, 장난이 아니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일세."

같이 있는 카랄 경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벤트 경은 아쉽지만 눈앞의 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상대는 완전 무장을 한 기사이면서 자신보다 훨씬 큰 키와 거대한 체구에 창까지 들고 있었는데, 아주 선명한 금빛 오러를 뿜어내고 있어서 더욱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딱 봐도 속도와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타입이었지만, 아까 전에 눈으로 좇을 수 없었던 속도를 낸 것을 떠올리며 벤트 경은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탄탄하면서 절도 있는 자세와 움직임으로 '정통 기사' 쪽에 가까운 타입이라는 점이었다.

"…이봐,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딱 봐도 기사 같아 보이는데… 인사치레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

'젠장! 대화는 필요 없다는 건가?'

황금빛 오러를 뿜어내는 기사는 말없이 달려와 벤트 경을 향해서 창을 휘둘렀다.

땅이 단순히 파이는 수준을 넘어서 갈라질 정도로 막강한 위력에 순간 놀라는 벤트 경이었다.

그러나 금방 몇 번의 합을 더 주고받자 공격의 궤도나 방식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이 녀석… 뿜어내는 오러라든가 힘과 속도는 장난 아닌데, 왜 싸우는 법이 무슨 몬스터나 짐승 레벨? …그렇군. 이 녀석… 딱 봐도 경험 부족이야!'

벤트 경은 엄연히 15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살았기에 백병전에 이골이 난 자였다.

이 기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15년 이상 전쟁터를 구르면서 싸워 온 짬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이제 막 실전을 경험하는 하이디의 공세를 너무나 단조롭게 여길 만했다.

'이것이… 실전?'

황금빛 오러를 두르고서 열심히 분투하던 하이디는 내심 실전은 다르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베오날드가 알려 준 '잊힌 제국 황실 기사단의 마나 호흡법'과 마찬가지로 '잊힌 제국 황실 기사단의 창술' 덕분에 자신의 능력이 상승하는 것을 느낄 정도로 성장한 하이디는 내심 중급 기사는 물론 상급 기사까지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꽤 차 있었다.

'예상과 너무 다르지만… 그래도 도련님을 실망시켜선 안 돼!'

더구나 이번 일은 베오날드가 자신에게 맡긴 아주 중요한 일. 여러모로 받은 베오날드의 은혜와 정에 감사를 표하는 건 물론 칭찬을 받고 싶은 그녀는 첫 기습 때는 훌륭하게 적을 쓰러뜨렸지만 지금 벤트 경과의 대치에서는 쉽게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상대하긴 하는데… 뭔가 치고 들어갈 약점이 보이질 않아.'

그러나 하이디에게 천만다행하게도 벤트 경의 경험이 우월해서 공격을 간파당하곤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하이디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오러의 힘과 피지컬의 차이가 넘사벽이라서 검에 푸른 오러를 실어서 휘둘러도 황금빛 오러에 튕겨 나가거나, 분명 갑옷 틈새로 검을 찔러 넣었는데 검이 들어가질 않는다든가? 전투로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건 안 좋아. 엄밀히 말해서 도망쳐야 할 상황이야.'

십수 년간 온갖 전쟁터와 싸움터를 돈 기사로서의 냉철한 판단. 지진 않지만, 이기지 못할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게다가 더 화나는 것은 상대의 대처나 기량도 한 수씩 주고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늘고 있어서 마치 자신의 힘을 빨아먹는 것 같은 불쾌함까지 더해져 이제는 진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인 벤트 경이었다.

"좋아, 이걸로 정리는 끝. 현장 정리하고 있을 테니 그 녀석 마무리해라."

'젠장! 노친네가 졌어? 이렇게 되면....'

믿고 있던 동료까지 패배한 것을 눈치챈 벤트 경. 결국 적에게 포위당한 꼴인 그는 하이디의 공세를 막으면서 다른 방향으로 도망칠 길을 찾아보았다.

그나마 천운이 따르는 건지, 자신이 상대하지 않은 다른 놈은 태연하게 시체에서 소지품을 꺼내고, 제압한 기사들을 구속하는 데 온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더 이상 생각할 게 없었다.

'일단은 도망치고 보자! 캘러메인 영지가 눈앞이니까 금방… 이렇게!'

터어어엉!

빈틈 속에서 찾아온 기회를 노리고 오러를 최대한 끌어 올려 하이디를 발로 차서 밀어 버린 그는 전력으로 베오날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눈앞의 하이디보단 저쪽이 그래도 약하니까 자신이 아닌 하급 기사들을 상대한 거라 생각한 벤트 경. 그 추측은 나름 합리성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베오날드가 아직은 하이디보다 더 강한 검사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으음… 멍청하진 않군.'

'좋았어.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칠식(七式)-붐슬랭'.

퍼억!

자신이 달려오는 것을 전혀 눈치 못 챈 듯 가만히 있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벤트 경은 비켜 갈 수 있다고 좋아했지만, 다리와 옆구리로 아주 익숙한 날붙이에 베이는 고통이 느껴지면서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노이멀 칠식–붐슬랭'.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베는 신속의 사냥꾼.

쓰러지는 벤트 경은 처음엔 눈치 못 챘지만 간신히 보랏빛 오러의 궤적이 가루처럼 흩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베오날드의 짓임을 깨달았다.

"이, 이게 무슨...."

"…역시 도련님!"

"으음~ 좀 더 네 기량을 올리고 싶었는데… 뭐,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테니까 여기까지 할까? 이 녀석들을 구속해라. 참고로 기사들이니까 인간의 기준보다 더 강하게 해야 하는 거 잊지 마라. 하급 기사는 그나마 몬스터를 구속하는 수준이면 되는데, 중급 기사 이상은 이 정도로 힘줄을 끊어서 출혈을 만들어 놔야 힘이 빠지니까 잘 알아 둬라."

여유롭게 다가온 베오날드는 쓰러진 벤트 경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교육용 견본을 보여 주듯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벤트 경은 다시 일어나려고 발악하지만 정말로 다리가 말을 안 들었고, 옆구리에서 피가 상상 이상으로 흘러나와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젠장… 까딱 정신을 놓으면 진짜 죽겠는걸?'

"자, 그럼 포로가 된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님들에게 전합니다. 네 분 모두 몸값을 받기 위해서 포로로 대우할 생각이지만, 도망치려 하거나 구속을 풀려고 할 시엔 그 즉시 처형, 물론 다들 부상을 입으셔서 그게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이죠. 아무튼 그런 우려가 있기에 협상이 완료되기까진 제대로 된 치료는 없습니다. 그러니 엄살 피우거나 아픈 척하진 마세요. 기사 분들이 쉽게 안 죽는 건 저희가 더 잘 아니까요."

"…오오...."

"몸값은 빚이 되겠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고급 인력이라서 살아만 계시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아내, 자식이 있는 분도 있을 거고, 괜히 명예도 없는 이런 곳에서 죽는 걸 택하는 어리석은 분은 없길 바랍니다."

제압도 제압이었지만, 완벽한 베오날드의 언변에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저항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렇게 기사들을 미리 마련해 둔 숲속 거점에 가두어 놓고 하이디에게 감시를 맡긴 베오날드는 알테리오를 몰고 곧장 세인의 모친이 있는 로이엔 남작가로 향했다.

[51화]

"그럼 하이디, 경계를 잘 부탁한다. 하나하나가 비싼 인질들이니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아까 말했듯이 반항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그냥 죽여도 좋다."

"예! 도련님."

베오날드가 신신당부하고 떠난 뒤, 홀로 남은 하이디는 묶어 둔 이들을 감시하며 오늘 있었던 전투에 대해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기습으로 우세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중급 기사 하나도 제대로 제압 못한 자신의 실력.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의 마나 호흡법과 창술을 배웠는데도 이기지 못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경험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그럼 대체 도련님은 뭐지? 분명 올해로 16살이실 텐데? 대체 도련님은… 그게 규격 외라는 걸까?'

경험의 차이가 크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자신보다 실제 나이로는 어린 베오날드에 대해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녀였다. 

방금 전 싸움만 해도 자신이 일대일로 쩔쩔매는 사이에 다른 기사들을 제압하는 건 물론, 도망치는 벤트 경을 아무렇지 않게 검술로 제압하는 것까지. 그 압도적인 강함과 여유, 자신도 그런 무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서 흠모하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게다가 도련님은 무력뿐 아니라 지식, 교양도 뛰어나시고, 귀족으로서도 완벽하시고… 그러면서도 내 재능을 알아봐 주시고 재촉도 안 하시고… 우으으으… 여자 같지 않은 날 배려도 해 주시고… 게다가… 고백까지 해 주셨지.'

'정말 찬란히 아름다운 하이디, 네 마음만 허락한다면 너와 가족이 되어 모든 영광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딱 하이디 나이대의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완벽한 남성상.

심지어 먼저 고백까지 다이렉트로 해 왔기에 그녀가 말만 하면 단순히 가신과 주군이 아닌 관계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냐. 나는… 그분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야말로 그분은 큰 사랑과 은혜로 자신을 받아 줄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이디는 자신이 아직 그분의 옆에 서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저 그분의 빛 아래에서 은혜만 받기보다는 같이 고난과 역경을 나누며 걷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니 감시를 한다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철그럭!

갑주를 입은 채로 일어난 그녀는 이 잠깐의 시간도 아쉽다는 듯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 전 싸움의 광경을 똑똑히 떠올리며, 베오날드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 노력하고자 다짐했다.

***

알테리오를 탄 베오날드는 로이엔 남작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렸고, 예상보다 빠르게 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체 구조가 고양잇과 맹수의 것이라 그런지 평온한 도로를 오래 뛰는 건 말보다 약간 느렸지만, 본래는 날아다니면서 사냥감을 찾고 강습하는 그리폰이라서 스태미나는 아주 발군이었다.

하루를 넘어서 새벽 내내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체력과 수풀과 나무로 우거진 험지도 민첩하게 돌파할 수 있는 기동력 덕분에 길을 돌아서 가지 않을 수 있었고, 말보다 더 빠르게 로이엔 남작가의 영지 근처에 도착할 수 있게 된 베오날드였다.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영지 근처에 도달한 그는 숲에 알테리오를 대기시켜 두고 홀로 로이엔 남작의 영지로 들어갔다.

"벤트 경의 지시로 전갈을 전하러 왔습니다."

"이건… 벤트 경의 인장?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영지의 경비병들에게는 기사들에게서 빼앗은 인장과 위장용 서찰을 보여 줌으로써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곧바로 성내의 도심을 지나서 메이라 부인의 본가인 로이엔 남작가의 저택에 도달, 마찬가지로 입구의 경비들에겐 벤트 경의 인장과 서찰을 보여 주고 쉽게 통과했다.

'여기까진 참 쉽군. 문제는 세인 양의 어머님이 있는 위치인데....'

'어머님은 아마 하인들이 묵는 처소에 같이 있을 겁니다. 저택의 구조는 대략....'

세인이 모친이 있을 법한 장소를 알려 주긴 했지만 전령으로 위장한 상황에서 멋대로 저택을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에 일단 타이밍을 기다리는 베오날드였다.

우선은 수상한 자로 취급받지 않도록 저택 내부로 들어가서 남작이 자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남작님은 지금 업무로 바쁘십니다. 서찰을 주시면 전해 드리도록 하죠."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 벤트 경이 꼭 직접 전하라고 했습니다. 전 그걸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구요. 그러니 기다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화장실은 어디인지? 물론 하인들이 쓰는 곳으로… 당연한 이야기지만요."

집사장과 능숙하게 대화한 베오날드는 화장실을 핑계로 드디어 저택 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명분을 얻어 냈다.

그다음 하인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찾는다는 식으로 돌아다니다가 세인 나이대의 하녀가 보이자 그녀에게 다가가서 세인의 모친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캘러메인 영지에서 온 전령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세인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설명하자 하녀는 손뼉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아~ 그러시군요. 근데 세인의 어머니는 지금 여기 없어요."

"여기… 없다고요? 그럼 어디에?"

"그게… 돈도 돈이고, 사람을 쓰는 것도 저택 내의 일손을 쓰는 거라 신전에 맡겨 버렸거든요. 남작 부인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셔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신전은 이곳 남작님 영지의 신전인가요?"

"예. 어디 먼 곳으로 보내진 않았겠죠?"

하녀의 정보를 토대로 베오날드는 남작가의 집사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한 뒤 곧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역시 그가 늘 보고 상상하던 것보단 훨씬 작은 집 같은 신전. 새하얀 석재와 조촐한 여신상을 보며 신전 안으로 들어간 그는 적절한 양의 헌금만 내고 기도를 드리고 난 뒤에 신관을 만나 세인의 모친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남작가에서 맡겨진 분을 찾으신다고요?"

"예. 캘러메인 백작 영지에서 왔는데… 지인의 모친이 여기에 맡겨졌다고 해서 말이죠."

"아,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베오날드의 이야기를 들은 신관은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약 한 시간가량이 지나서야 아까 전 신관보다 어린 여신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설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리저리 확인을 하느라.... 말씀하신 남작가에서 맡기신 분이라면 그게…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지금 신관님께서 경위에 대해 확인하느라 제게 먼저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아! 무덤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음, 안됐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편하게 됐군.'

세인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 이야기였지만, 괜히 인질로서 가능성이 있을 바엔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편한 일이었다.

물론 본인 앞에선 절대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무튼 여신관을 따라 신전 뒤쪽의 공동묘지로 향한 베오날드는 구석에 자리한 작은 무덤 앞에 섰다.

"여기입니다."

"후우~ 이거 참~"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편한 거지,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베오날드는 안타까워하며 세인의 모친의 무덤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 먼 곳도 아니고 기마로 2~3일 거리인데, 상인을 통해서 전갈이라도 보내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물론 자신도 대귀족이기에 귀족들이 일개 하인이나 사생아에게 그 정도 배려를 생각 못하는 게 역으로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가문이 이상했던 거지. 벨릭스, 그 미친놈의 정책 때문에 말이야.'

상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베오날드의 가문은 상식적이지 않은 벨릭스의 정책 때문에 거리감이 있을 뿐, 귀족 가문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아무튼 예의상 무덤에 참배를 드리고 난 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베오날드에게 처음에 만났던 남성 신관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인에 대한 기록과 정리해 둔 유품을 찾느라 늦었습니다. 여기 그녀가 차고 있던 목걸이입니다. 그리고 이건 유언장입니다. 딸아이가 오면 전해 달라고 했는데…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하도록 하지요."

헌금을 넉넉히 주니 서비스도 확실한 신관에게서 세인의 모친의 유품과 유언장을 전해 받은 그는 곧장 신전을 나서 영지를 떠났다.

이 영지에 대해서 착잡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일상적인 귀족 수준을 뭐라고 할 것도 없고, 지금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으며 처리를 결정하는 건 자신이 할 일이 아니었다.

'세인에게 정하게 해야겠군. 그럼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는데....'

그러고선 알테리오에게 돌아간 그는 일단 주변의 동물들을 사냥해서 배부르게 먹이고 한숨 잔 다음 다시 거점으로 복귀했다.

도착하자마자 포로로 잡은 기사들의 상태를 보는데, 베오날드가 처음에 묶어 둔 그 상태에서 전혀 풀지 않은 듯 흘린 피와 대소변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치 주인을 맞이하는 대형견처럼 저 멀리서 풍성한 금발을 휘날리며 하이디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그래, 잘 지키고 있었구나."

"예! 도련님이 지시한 대로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무시하고!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그래, 아주 잘했다. 어차피 기사들이라서 이 정도론 죽거나 하지 않는데, 보통 사람인 줄 착각하고 인간적인 대우를 하다가 빈틈을 보이는 경우가 많거든.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베오날드의 칭찬에 하이디는 그 나이대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그러면서 눈치를 보는 듯싶었는데, 감이 빠른 베오날드는 이런 타입이 원하는 게 뭔지 빠르게 깨닫고는 슬쩍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인지 그녀는 베오날드의 손길에 아주 만족해했다.

"저, 정말…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아이일수록 애정 결핍이 심한 경우가 많지. 심성은 외양에 상관없이 성장하는데, 부모가 금방 손을 놓아 버리니까....'

어릴 땐 똑같이 사랑받았겠지만 하이디처럼 갑자기 나이에 비해 쑥쑥 커 버릴 경우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베오날드였다.

수많은 처와 첩을 자신의 곁에 둘 정도로 여성 경험이 많은 건 물론 그 아래로 자식들도 엄청 많이 거느렸기에 아버지로서의 경험도 풍부했다.

특히나 자식들을 후계자가 될 후보로만 보는 아버지인 벨릭스의 아래에서 고생한 만큼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꽤 깊은 편이었다.

'근데 그걸… 알테리오가 다 망쳐 버렸지.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후우~ 베티아… 찰렌, 델크로스, 엡솔, 제리드… 에란트, 세이온, 요크란… 그리고....'

"도련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표정이...."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이제 본격적으로 거래해야 하니 저 기사들 꼴부터 어떻게 하자꾸나. 똥오줌에 범벅된 상태는 그래도 좀 심하니 말이다. 나도 돕지."

오랜만에 옛 자식들 생각을 하다가 하이디의 말에 정신을 차린 베오날드는 금방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와 함께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먼저 약 1박 2일로 방치해 놔서 몰골이 말이 아닌 기사들을 대충 물고문처럼 강에 집어넣었다가 빼는 걸로 씻기고 물 정도만 마시게 했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구속한 뒤 알테리오와 함께 하이디에게 맡겨 둔 그는 홀로 캘러메인 백작가로 돌아가서 세인을 찾았다.

[52화]

"오셨습니까? 도련님."

"그래, 세인. 할 이야기가 많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선 곤란하니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세인을 호위하느라 수고했다, 에라솔. 약속한 대가는 곧 치르도록 하지."

"예! 베오날드 님! 감사합니다!"

만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베오날드는 곧바로 로이엔 남작의 영지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의 모친은 남작가에서 쫓겨나서 신전에 의탁한 지 오래였고, 베오날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세인은 처음엔 그 이야기를 믿지 못했지만 베오날드가 건네준 모친의 유언장과 유품을 받아 들자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메이라 마님께서는 분명히...! 하지만 이건 분명히 어머님의 글씨…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죠?"

"그… 귀족의 관점으로 해석해 준다면 '어차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라는 것과 병석에 누운 사람 하나를 돌보는 데 들어가는 식사, 노동력, 약값이 아깝기도 했을 테니 말이지."

"하지만 저는 메이라 마님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있는데!"

"아, 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무슨 일을 같이 저지른 건지 모르지만, 어차피 귀족이 아닌 너의 진술을 들어 줄 사람은 없고, 행여나 증거를 가지고 간들 '같이' 저지른 시점에서 꼬리 자르는 용도가 되겠지. 어차피 그녀의 뒤엔 로이엔 남작가도 있고, 같은 파벌인 델마인 남작까지 있으니 말이야."

"그럴 수가...."

베오날드의 깔끔한 분석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그녀였다.

물론 그녀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안이 없었기에 그저 자기 합리화하는 식으로 '믿어 버린 것'. 아니, 믿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어차피 그것을 캐내거나 반항하려고 한들 그녀에게 남는 건 병든 모친을 혼자서 먹여 살리기 위해서 노동을 하거나 창관에 들어가거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졸부의 첩이 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뭐,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갈 수 있는 길이 낭떠러지와 험한 길뿐이라면 누구라도 죽음에 이르는 낭떠러지를 선택하기보단 험한 길이라도 고통을 견디면서 가려고 할 테니까."

"…베오날드 님?"

"그러니 너는 잘못한 것이 아니다. 너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한다. 네가 한 생각과 판단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이… 어머님이...."

"사슴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쁜 것이 있다면 메이라 부인과 비록 하급자이자 사생아라곤 하나 신의를 맺은 것을 거부한 로이엔 남작가이겠지. 그러니 마음을 놓아라."

베오날드는 아주 능숙하게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베오날드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다.

그녀에겐 아직 죄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본래 메이라 부인의 명으로 베오날드의 전속 메이드가 되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리고, 그가 한 말과 행동을 전한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상냥하신 베오날드 도련님. 저는 이런 도련님을 진작 알아보지 못하고, 메이라 마님의 명에 따라서 도련님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나 너는 결국 나를 선택했다. 모친의 안전, 메이라 부인의 강압 속에서 희망을 나에게서 찾아서 알렸다."

"그저 살기 위해서… 메이라 마님을 배신하고 도련님에게 붙은 것뿐입니다."

"배신도 배신 나름이지. 메이라 부인이 너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었더냐? 만약 그런 상황에서 배신했다면 나도 널 경멸했겠지만 너는 아니지 않느냐? 자비와 은혜는커녕, 그저 '도구'로서 이용만 하며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존중하지 않았지. 그런 건 배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야기다. 너는 옳은 선택을 했다."

"…정말… 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더 이상 울지 마라. 눈이 퉁퉁 부어서 아름다운 얼굴이 망가지지 않느냐? 그리고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나를 따르면 된다. 나는 보물을 썩히고 헛되이 취급하는 그 어리석은 할망구와 같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아… 베오날드 님."

만약 신을 만났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배신, 죄책감, 슬픔, 모든 부정한 감정과 생각을 품어 주고, 구원해 주는 베오날드의 자애로움 앞에 세인은 감격으로 전율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베오날드의 품에 뛰어들어 그동안의 고생으로 쌓인 슬픔과 한을 쏟아 냈다.

베오날드는 마치 부모처럼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가 울음을 그치는 것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정말이지 메이라 부인에겐 감사하고 싶을 정도야. 하긴 신분이나 성별에 얽매여서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못 보는 것들이니… 어련하겠어.'

겉으론 자상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베오날드는 사실 속으로는 쾌재의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메이라 부인이라는 악역이 있어 준 덕분에 이 아름답고 현명한 인재가! 자신이 명하면 불 속에라도 당당히 뛰어들 충성심을 지닌 채로 손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자, 이제 진정했느냐? 아직 우리 상황이 그리 좋은 게 아니고, 승부가 난 게 아니다. 그러니 정신 차려야 한다, 세인."

"…예, 베오날드 님."

"좋아. 나는 이대로 메이라 부인과 마무리를 지으러 가고자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길 원하느냐?"

"어떻게 하길 원하느냐는 말씀은...?"

"메이라 부인에게 어느 정도로 보복을 해 주고 싶으냐, 이 말이다. 나는 우선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 4명을 잡아 두고 있어서 그들의 몸값과 수작질을 한 대가를 받으려고 하는데… 네가 만약 메이라 부인에 대한 원한과 증오, 혹은 풀리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풀어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진 세인의 호감도를 올리고 그녀가 자신의 부하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과정에 불과했다면 이것은 확실한 마무리 도장을 찍는 행위였다.

어차피 이제 메이라 부인과 백작 둘 다 자신을 아니꼽게 볼 테고, 다른 귀족의 기사들을 부른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캘러메인 백작가에 있을 의미가 사라진 만큼, 떠나기 전에 기사들의 몸값을 비롯해서 단단히 한몫 챙길 작정이었는데, 겸사겸사 그들의 처분을 세인에게 맡김으로써 그녀의 충성과 애정 모든 것을 굳히자는 것이었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기사들의 몸값을 비롯해서… 이거저거 받아 낸 다음 이곳을 떠날 생각이라서 말이다. 물론 너도 데리고 갈 거다. 이제 내 사람이니까. 아무튼… 네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그냥 곱게 받을 것만 받을 것이고, 만약 로이엔 남작과 메이라 부인 모두 없애 달라고 하면 나는 쫓길 각오를 하고서라도 그 둘의 목을 너에게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베오날드의 강렬한 제안에 세인은 또 한 번 몸 둘 바를 몰랐다.

메이라 부인과 로이엔 남작. 평생 자신을 지배하던 귀족들의 목숨을 자신의 부탁이면 끊어 준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 현실이 되려 하자 그녀의 머리는 과부화가 되었다.

아직 손에 있는 모친의 목걸이와 유서를 꼭 쥔 채, 그녀는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눈을 질끈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주 잠시 후, 생각을 마친 그녀는 베오날드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

메이라 부인의 방.

그리고 같은 시각, 베오날드가 한참 세인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메이라 부인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자신의 방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가 초조해하는 것은 본래 늦어도 어제면 와야 하는 자신의 본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늦는다면 뭔가 기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아무 소식이 없으니 갑갑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제드 경, 설마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왜 요청한 기사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거죠?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이미 다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작가엔 도달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남작가의 일이 있어서 기사들을 편성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서 늦게 보내는 것일 테니 차분히 기다리시면 됩니다, 마님."

"그런 거겠죠? 하긴 갑자기 기사들을 부르니… 조금 늦는 거겠죠?"

"예, 그런 것입니다."

제드 경의 차분한 말에 메이라 부인은 심호흡을 하며 초조함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조금 늦는다고 해서 걱정할 일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여유를 되찾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그나저나 그 베오날드는 지금 어디에 있죠?"

"여전히 키우는 그리폰의 먹이를 구하러 사냥을 나가거나 하이디 양과 대련을 하는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딱히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베오날드의 일 처리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제드 경은 물론 그 아랫사람들 모두 베오날드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처리하고 일부 포획한 것을 꿈에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들어온 정보에 따라 메이라 부인은 일단 베오날드를 처리하는 일에 대해선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속을 썩이는 일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후우~ 그건 그렇고, 우리 랄트는 어떤가요?"

"랄트 도련님이라면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십니다. 그나마 백작님이 직접 가셔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나아지곤 있다고 하지만…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님이 직접 돌보신다니 다행이네요."

집안의 정통 후계자인 만큼 결국 백작까지 나서서 랄트를 돌보는 덕분에 차도는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소중한 마당인데… 빨리 후계자로 복귀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다른 부인들의 움직임은 어떤가요?"

"랄트 도련님이 칩거하시면서 렌겔 가주 대리님을 자주 뵈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허튼 꿈을 꾸는 것이겠지요."

"이이이익! 망할 것들이! 이제 와서 사내아이를 가진다고 한들! 우리 랄트가 있는데...!"

"만약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백작님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랄트가 방에 처박히고 난 뒤, 초기엔 그냥 오버워크로 인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그 기간이 길어지자 메이라 부인에게 권력이 밀렸던 다른 부인들은 역으로 찬스라고 생각하고 렌겔 가주 대리와의 2세 생산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면서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랄트가 지금 저 모양이니, 사내아이만 가지게 되고 랄트가 계속해서 나오지 않으면 필시 새로이 낳은 자신의 아이가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메이라 부인은 실각하는 거나 마찬가지. 정말로 사내들의 정치 전쟁만큼이나 가혹하고 무서운 것이 바로 여자들의 전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앙큼한 계집들이! 감히 누구 자리를 넘봐! 사내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내가 곱게 기르는 꼴을 그대로 볼 거라 생각해?"

"이번엔 제대로 지키겠다는 뜻이겠지요. 아무튼 이런 현상도 결국은 랄트 도련님이 다시 정신만 차리면...."

똑똑!

한참 가문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낯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음 문 뒤에서 낯익으면서 절대 이곳에서 들려올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접니다, 어머님. 베오날드입니다. 혹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 저것이 어떻게 여기에?"

"마님, 일단 정신 차리시고, 차림을 정돈하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은 제가 잠시 시간을 끌겠습니다."

일순 당황한 메이라 부인이었지만 제드 경이 얼른 나서서 베오날드를 맞이하였고, 그동안 옷매무새와 심경을 정리하며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약 30분 뒤, 모든 마음의 정리를 대략 끝낸 메이라 부인은 베오날드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다음 시종과 집사들을 불러서 본격적으로 대접하며 그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53화]

"흐음, 사전 기별 없이 막 찾아올 정도로 우리 사이가 좋은 건 아닐 텐데… 어쩐 일로 온 게냐?"

"아들이 어머니를 보러 오는 게, 뭐가 그리 문제입니까?"

"후우~ 그래. 형식상으론 너 같은 잡종이라도 양자니까 아들 취급을 해야겠지. 그래서? 빨리 용건이나 말하렴. 잡종과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불쾌하니 말이다."

"아주 대놓고 싫어하시는군요. 하긴 그 모자란 아드님을 방구석에 처박아 버린 원인이니 불쾌하실 수밖에 없는 건 알지만… 아무튼 중요한 용건이기에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저 망할 것이!'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베오날드의 말에 발끈한 메이라 부인은 당장에라도 제드 경을 시켜 저 망할 잡종을 제압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제드 경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저 아이도 엄연히 캘러메인 가문의 '혈족'. 대놓고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용건은?"

"그~ 보내 주신 선물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려고 말이죠."

"선물? 나는 그런 걸 보낸 적이 없는데...."

그 순간, 베오날드의 품에서 나온 반지 6개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를 굴렀다.

각각의 반지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거기엔 메이라 부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바로 로이엔 남작가의 문양.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닌 로이엔 남작가의 혈족이나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에게 지급해 주는 인장 반지였다.

"이, 이걸 대체 어디서?"

메이라 부인은 물론 제드 경조차도 살짝 떨면서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혹시 위조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귀족 가문의 인장을 위조하는 것은 매우 위중한 범죄이며, 자신의 손가락에 껴져 있는 반지 중 하나도 같은 것이라 도저히 못 알아볼 수 없었기에 출처를 물을 만했다.

"어디서라니요? 직접 보내셨으면서 발뺌하시는 겁니까? 세인 양이 아주 잘 말해 주던데요."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음, 발뺌이라. 그것도 좋지요. 일개 메이드의 증언은 증언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철그럭.

베오날드는 다시 품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작은 단검. 금과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여러 보석으로 장식되고, 마찬가지로 로이엔 남작가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의 눈빛은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이 단검… 그러니까 딱 봐도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이지요. 아마 뛰어난 전공을 세웠거나, 혹은 오랫동안 가문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수고한 기사에게 특별히 선사할 법한 물건인데… 이래도 부인하시겠습니까?"

"…큭!"

"이 단검의 주인이라든가, 다른 기사분들이 이미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아~ 왜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냐면… 그 기사분의 명예를 위해서 일부러 함구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돌려보내야 하는데, 누구인지 밝히면 돌아가서도 곤란하실 거 아닙니까? 명예가 다치니 말이죠."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그것으로 날 협박할 생각인가? 백작에게 보고라도 해서?"

"아뇨. 하하하, 협박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애초에 저 같은 잡종을 하루빨리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요. 다만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행동하실 줄은 몰랐지만요. 아무튼 제가 바라는 건 합리적인 것입니다. 제게 포획된 로이엔 남작가 기사들의 몸값이죠." 

기사들의 몸값을 받기 위해 왔다는 결론을 말하자,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은 의외라는 눈으로 베오날드를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들이야 백작과 손을 잡아서 그에게 일러도 아무 문제없지만,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혈족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짠 것이라 그것을 백작에게 이야기 안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후계자'로 직행하는 길일지도 모르는 카드였는데, 무시해 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뭔가 다른 걸 노리는 건가?'

"일단 잡은 기사는 총 4명. 절 노리고 온 기사 6명 중에 4명입니다. 리스트는 벤트 경과 카랄 경, 그리고...."

'…무슨 속셈인 거지?'

"한 분은 중급 기사이고, 다른 셋은 하급 기사입니다. 포로 비용을 받으면 맨몸으로만 보내 드릴 테니 그리 아십시오. 설마~ 로이엔 남작가에 가서 받으라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그럴 경우 그냥 모조리 없앤 다음 돌아갈 겁니다. 그 원망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몸값 지불을 거부하셔도 됩니다."

베오날드는 미소를 띤 채 기사들의 몸값에 대해 이야기하며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하긴 후계자 습격에 대한 것은 제외하더라도 로이엔 남작가에 기사들을 요청한 일의 뒷감당도 만만치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액수는 뭐, 두둑하게 주셔야 할 겁니다. 기사잖습니까?"

"흥, 하지만 그들을 죽이게 되면 로이엔 남작가를 적대하게 될 텐데? 그 감당을 할 수 있겠니?"

몸값 협상을 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라 부인도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저 잡종에게 거액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로이엔 남작가의 위세를 빌려 베오날드를 꼬리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히 말했다.

"감당이라. 어차피 여길 떠날 몸인데, 그런 걸 생각할 필요는 없지요."

"…뭐?"

"이미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를 둘이나 처치한 시점에서 강은 건넜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로이엔 남작가, 어머님이 계신 곳의 기사 아닙니까? 이미 감정은 상했으니 한몫 받아서 떠나려는 겁니다. 어차피 둘을 처치하나 여섯을 처치하나 그게 그거이지 않습니까?"

채찍만 휘둘러서야 얻을 것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슬쩍 당근도 보여 줘야 한다.

물론 그 당근이 단순한 당근이 아니라, 협박도 들어 있는 당근이었으니 문제였지만 말이다.

베오날드가 이 영지를 떠난다는 건 후계자 구도의 방해물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기사 여섯을 잃은 로이엔 남작의 원망을 받아 낼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선택지는 없겠지. 저쪽으로서는 기사 둘을 잃는 것과 여섯을 잃는 건 또 다르니 말이야.'

"큭, 얼마나 요구할 참이지?"

"기사니까… 싸진 않잖습니까? 여기 이렇게 금과 보석이 박힌 단검을 하사받은 기사까지 끼어 있으니 말이죠. 이것도 돌려 드려야 하니까… 한두 푼이 아닌 건 아시죠?"

으득!

베오날드에게 들릴 정도로 메이라 부인의 이빨을 가는 소리는 컸다.

그리고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 마음 같아선 분통을 터뜨리며 난리 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녀는 제드 경에게 눈빛을 보냈다.

10년을 넘게 함께해 온 기사인 제드 경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당장 이 잡종을 제압하고 구속하세요! 도저히 못 봐 주겠군요! …라고 하시는 것 같군. 아무튼 밖에 다른 이는 없으니 조심스럽게 처리해야겠군.'

제드 경은 그렇게 베오날드를 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압을 하려면 한순간, 말소리도 못 내게 단 한순간에 의식을 끊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호흡을 조절하며 메이라 부인에게 베오날드의 시선을 끌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메이라 부인은 마치 화를 못 이기는 척 터뜨리면서 완벽하게 베오날드의 의식을 빼앗으려고 애썼다.

"이이이이익! 망할 잡종 같으니! 감히 내게...!"

"저는 곱게 해결하자고 하는 일인데, 그렇게 화를 내실 것까지...."

'지금...!'

단숨에 오러를 끌어 올린 제드 경의 몸이 베오날드를 제압하기 위해서 빠르게 덮쳐졌다.

푸른 잔상이 베오날드를 덮치고, 동시에 그가 앉은 의자를 쓰러뜨렸다.

하나 제드 경은 자신의 손과 몸에 아무런 감촉이 없는 것을 느끼고 의아해했다.

'뭐지?'

"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어, 어떻게? 헉!"

경악하는 제드 경의 앞에서 베오날드는 어느새 메이라 부인의 목에 로이엔 남작가의 그 단검을 겨누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선 그의 몸 위로 은은히 빛나는 보랏빛 오러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제드 경은 그제야 베오날드가 기사의 경지에 오른 것을 눈치채고, 허리의 검을 뽑아 겨누었다.

"설마… 도련님이 기사였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말데로브 경이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그야, 제가 너무 높은 산이면 랄트가 절망하잖아요? 말데로브 경 같은 충신의 경우, 후계자 교육을 위해서 자신이 욕먹는 것쯤은 감당하는 자이니까 협조가 쉽던걸요? 물론 저로서는 조커 카드를 숨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말이죠. 아무튼 지금 이 행동의 의미는 그러니까… 몸값을 지불하기 싫어서 한 거라고 봐도 되는 거고~ 내 목숨을 노렸으니 죽을 각오는 되었나요?"

"자, 잠깐! 잠깐 기다려! 알았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하지. 제드 경! 뒤로 물러서! 그리고 검도 버려!"

일방적으로 사람을 지배해 온 악당일수록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베오날드가 겨눈 단검이 목에 살짝 상처를 내자 메이라 부인은 지레 겁을 먹고 제드 경을 제지시켰다.

그래, 일방적으로 남을 해하기만 했을 뿐 누군가와 겨룬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다치는 것에 겁먹을 수밖에 없었고, 충성스러운 제드 경은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검을 버리고 물러났다.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러면~ 일단 제드 경은 방구석에서 벽을 보고 손을 들고 있어 주세요.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당신 주인의 목숨은 없습니다. 엄연히 중급 기사이니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알겠다."

"돈은 집사와 메이드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그럼… 기사 4명분의 몸값 빠르게 준비 부탁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구할지는 상관 안 할 테니까."

결국 메이라 부인은 자신의 본가에서 데려온 전속 하인을 불러 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베오날드가 몸값의 시세를 정확히 모를 것 같아 슬쩍 가격을 후려쳐 보려고 했지만,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짠 베오날드는 현역 중급 기사인 젤커드 자작과 하이디에게서 몸값에 대한 시세를 알아 온 지 오래였다.

"자꾸 수작 부리시려고 하네요. 손가락 몇 개 정도 잘라 드려야 하려나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살기를 담은 베오날드의 엄포에 결국 메이라 부인은 기사 4명분, 그것도 중급 기사까지 끼어 있어 그 몸값이 상당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은 물론 상인에게 빚까지 지고도 모자라서 남편 몰래 이 백작가의 금고와 창고에까지 손을 대서 간신히 금액을 채웠다.

그러자 만족한 베오날드는 묵직해진 커다란 자루를 챙겨서 메이라 부인의 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여전히 협박은 유효해서 제드 경은 벽을 보고 손을 든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 기사분들은 오늘 달이 뜨기 전에 돌려보내지요. 저는 누구처럼 협상한다고 해 놓고 뒤를 덮치는 그런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신의 이름과 이 캘러메인 백작 가문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지요."

"크으으윽! 그래, 알았으니 썩 꺼져. 다신 이곳에 나타나지 마!"

"예예. 아! 맞다. 그리고 하나 더 계산할 게 있는데 말이죠."

"또 뭐?"

"세인과 세인의 어머님에 대한 빚 말입니다."

"그게 무슨 빚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에 메이라 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고작해야 소유물인 메이드와 그 메이드의 모친에 대한 빚이라니. 황당하다는 눈빛의 그녀를 보며 베오날드는 피식 웃고는 아주 품위 있게 입을 열었다.

"귀족으로서… 자신이 가진 미술품이나 보물에 누군가 상처를 입히면 아주 기분이 나쁘겠지요? 당신은 내 정원에 들어와 내 것이 된 세인의 몸과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러니 이건 정원의 주인으로서 아주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녀는 나를 걱정해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정원을 가꾸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이해해 주시겠죠? 어머님."

"그, 건...!"

메이라 부인은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껴 몸을 떨었고, 안색은 창백해졌다.

이때까지 잡종이라 생각했던 그는 지금 더없이 귀족스러운 이유와 품위 가득한 오만함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정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아버님, 할아버님이 자신을 엄청 혼낼 때 도저히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두려움에 덜덜 떨 때처럼 메이라 부인의 몸은 경직되어 움츠러들었다.

'이, 이이익! 어떻게 내가? 내가 이런 잡종에게?'

그리고 그 압력에 굴한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잡종에 불과한 베오날드보다 더 천하고, 더 아래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치 수도에서 다른 대귀족이나 황족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 기분과 유사한 것에 그녀는 또 한 번 굴욕감을 느꼈지만, 베오날드의 처분은 이제 시작이었다.

[54화]

"그러니 내 '것'을 손상시킨 죗값은 가볍지 않을 거다."

"아아악!"

"마님!"

단검이 보랏빛 궤적을 그리며 오러를 내뿜었고, 그대로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직격, 궤도가 그려진 대로 메이라 부인의 얼굴이 난도질이 되면서 거기서 피가 뿜어졌다.

고통에 찬 메이라 부인의 비명 소리에 제드 경은 결국 다시 움직였지만, 이미 베오날드의 단검은 그어졌고, 그는 품에서 수상한 약병을 꺼내 그 내용물을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뿌리고 뒤로 물러난 지 오래였다.

"네놈, 감히!"

"죽지는 않을 거야. 하나 상처가 남을 걸 걱정한다면… 나와 싸워서 시간 낭비하기 전에 신관부터 알아보는 게 좋을걸?"

"제드 경...! 아파! 빨리 어떻게 좀! 으으으으윽!"

그 말을 남기고서 베오날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

제드 경은 난도질이 된 마님의 얼굴을 한시라도 빨리 치유하기 위해 베오날드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메이라 부인을 메이드와 집사에게 맡긴 다음 신관들이 있는 신전으로 바로 향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빠른 속도로 층을 오르고 올라서, 위치는 알았지만 직접 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기사들을 무시한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머, 멋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

"이게… 무슨 소란이지? 너는 여기에 어쩐 일이냐?"

"예, 백작님. 노크도 안 하고 무례하게 들어와서 죄송하지만 시간이 좀 급박해서 말이죠. 일단 소란은 뭐…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과 관련한 일이니 이 친구들 좀 물러나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문의 비밀을 들어선 안 될 텐데요."

들어온 곳은 바로 캘러메인 백작의 방.

대충 베오날드가 메고 있는 묵직한 자루부터 시작해서 로이엔 남작가의 이름이 언급된 것까지, 캘러메인 백작은 베오날드의 이야기에서 어떤 사정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좋다. 베오날드와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 다들 나가 있거라."

"아, 알겠습니다."

백작의 방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렇게 백작의 말에 물러났다.

로이엔 남작가의 이름을 들었으면 자연히 메이라 부인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까지 알려지겠지만, 확실하게 어떤 일인지 이야기가 되지 않는 한 입단속시키는 건 문제가 없다.

가문을 위해서 일하는 기사들이니 말이다.

"보아하니… 메이라 그것이 실패했나 보구나. 쯧쯔쯔… 결국 저항도 못하는 아이들만 죽이는 게 그년의 한계였나?"

"아뇨. 그 정도면 나름 귀족으로서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진 건 맞습니다. 다만 상대가 저라는 점과 부하와 가신들 단속을 잘못한 게 문제였을 뿐이죠."

"그게 한계라는 거지. 껄껄. 그래서? 고작 그걸 고발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용건이 뭐냐?"

"메이라 부인이 절 싫어하는 건 그렇다 쳐도 가문의 주인이신 백작님도 절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그렇게 껄끄러우신데 남아 있으면 죄송하니 떠나고자 합니다만,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어서 요청 좀 할까 합니다."

"…요청?"

"별거 아닙니다. 가문의 인장이 박힌 반지 하나, 제 이름까지 적힌 집안 가계도 하나, 제도까지 표시되어 있는 지도 하나, 그리고 폐가 안 된다면 노잣돈도 조금 추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신 다시는 캘러메인 영지에 돌아오지 않도록 하지요."

백작이 듣기엔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깐 듯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지만, 그렇다고 못해 줄 정도로 무리인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다시는 캘러메인 영지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본인 입으로 말했으니 그 말을 어긴다면 즉시 죽여도 상관없을 터.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다.

'하나 조금 굴욕적이군. 저 잡종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건 말이지.'

다만 놈의 말대로 해 주는 것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백작은 참았다.

수도에서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이나 왕족들이 즐비한 정치판에서 누벼 온 몸. 애송이에게 겪는 작은 굴욕쯤은 참을 만한 것이었다.

더구나 혈족이자 외손자 아닌가? 잡종이라서 가문의 정통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조금 져 준다고 해서 기분 나쁠 게 없는 존재였다.

"자, 여기… 인장이 새겨진 금강석 반지, 가계도, 지도,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으로 주는 노자다."

"의외로 순순히 주시는군요. 나가서 가문의 명예니 뭐니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허! 뭘 해도 손해가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감각이 없는 건 아니군.'

그렇다. 베오날드가 영지를 나가서 사고를 치거나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을 해도 캘러메인 백작가로서는 '우리도 X같아서 죽이려 했다. 잡종이라 근본이 없어서 그렇다.' 등등… 핑계가 많았던 것이다.

반대로 잘돼서 명예를 높이는 일을 하면 결국 캘러메인 백작가라는 출신과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니 백작가로서는 손해가 전혀 없었다.

"아무튼 이제 줄 건 다 줬으니 썩 꺼져라. 다시는 내 눈앞에 보이지 마라."

"예, 그러죠. 아, 하나 더~ 그 망할 어머님께서 제 친부모님에게 손대는 일도 없게 해 주시죠. 물론 한다면 대가를 치를 거라는 것도 전해 주시구요."

"…일단 말은 해 두겠다."

"그럼."

마지막으로 예를 갖춘 베오날드는 즉시 뒤도 안 보고 그곳을 나가 알테리오와 세인을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

너무 늦으면 제드 경이라든가 메이라 부인이 세인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시바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는데, 다행히 그녀는 에라솔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손님도 한 명 더 있었다.

"짜잔~ 어서 오세요. 기다리느라 지쳤다고요."

"너는 왜 여기 있지? 셀리나."

"그야 저도 도련님과 함께 가려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녀는 보란 듯이 자신의 등에 메어진 커다란 배낭을 가리켰다.

또다시 살펴보니 튼튼한 부츠에 로브 아래로 바지까지 단단히 챙겨 입은 걸 봐선 정말로 자신을 따라갈 생각인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붙어서 당혹스러워진 베오날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지?"

"당연히 도련님을 따라가면 얻을 게 많으니까 그렇죠. 마탑의 마법사는 어딜 가도 환영받는 존재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아, 맞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에 있는 은신처는 제가 흔적을 없애 놨습니다. 후후!"

"그거야 에라솔에게 맡겨도 되는 것이지만… 아무튼 멋대로 여길 떠나면 마탑에서 뭐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일단은 편지를 보내 놨어요. 지식의 원천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냐면서 말이죠."

"후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좋다."

"사실은 마법사가 합류해서 기쁘신 거죠?"

"…솔직히 메리트가 크다고 할 수밖에 없군. 아무튼 다들 준비되었으면 가도록 하지."

그렇게 모두와 함께 베오날드는 드디어 캘러메인 백작가를 벗어나게 되었다.

혹시라도 메이라 부인이나 캘러메인 백작의 방해가 있을까 긴장하긴 했지만, 그런 일 없이 조용히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성문을 나선 베오날드는 살짝 뒤돌아보며 자신이 남긴 '선물'을 메이라 부인이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해했다.

캘러메인 백작가 정도 되면 가문의 저택에 상주하는 치유 신관이 존재하는 법이다.

훈련을 하다가 다친 기사와 병사들을 돌보는 것과 가문의 주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사인 제드 경이 오러를 두른 채로 아주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신속하게 신관을 데려올 수 있었다.

"마님! 이제 걱정을 놓으십시오. 제가 신관을… 어?"

"제드 경...!"

"마님! 잠깐, 그건 어떻게?"

"그놈이… 그 잡종 놈이 대체 무슨 짓을?"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춰 있었고, 오히려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이는 상태였다. 

비록 메이라 부인의 곁에 오래 있다 보니 실전 감각이 떨어진 제드 경이었지만, 베오날드가 입힌 상처가 상식적으로 이렇게 빨리 치유될 수준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메이라 부인은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귀족가의 부인에겐 미모가 모든 가치나 다름없었으며, 후계자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엔 이견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해칠 듯한 이런 아름답지 못한 문둥이 같은 얼굴이 된다면 필시 랄트에게도 무시당할 게 틀림없는 상황이었기에 메이라 부인은 제드 경에게 달라붙어서 애걸하기 시작했다.

"내 얼굴… 내 얼굴이 대체!"

자세히 보니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칼로 베인 상처와 피딱지, 고름, 피를 비롯한 흉이 잔뜩 남아서 그로테스크한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메이라 부인의 얼굴은 엄청 뒤틀려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는가 생각하던 제드 경은 문득 바닥에 낯선 약병이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건가? 그 망할 놈이 대체 이 안에 무엇을...!"

"그건… 저희 신전에서 파는 치유 물약이군요. 그것도 가장 싼… 것으로, 은화 몇 개에 팔리는 가장 저급 품질의 물약입니다."

"뭐, 뭐라고? 치유 물약이라면 치유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마님의 얼굴이 저렇게 된 거지?"

"그, 그야… 가장 저급 품질이고, 싼 것이니까요. 신전에서 만들어진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기사님과 귀족님들에게 납품이 되고, 중급은 군대와 최상위 용병 길드에게, 그리고 남은 건 떨거지 모험가나 도적, 불량배들에게 파는 겁니다. 가장 저급 품질이라서 치유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양을 늘리기 위해서 물을 타거나 다른 식물의 즙 같은 불순물을 섞은 거라서… 그...."

"그 망할 놈이!"

제드 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이미 영지를 벗어났을 베오날드를 떠올리며 분노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만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신관에게 치유를 부탁했다.

"아무튼! 좋다! 마님의 얼굴을 고칠 수 있는가? 어서 치유해라."

"그, 그게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

"빨리 말하지 못할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여신이시여, 여기 고통받는 자가 당신의 손길을 원합니다. '치유의 손길'."

제드 경의 윽박에 신관은 얼른 메이라 부인의 얼굴을 치유하기 위해 신성 마법을 사용했고, 은은한 녹색 빛의 손길이 메이라 부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따스한 기운과 점점 사라지는 고통에 메이라 부인은 자신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하나 눈앞의 제드 경과 치유를 시전한 신관의 표정이 어둡기에 불안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설마?' 하는 심경으로 거울을 찾아 움직였다.

"마님!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메이라 부인의 외모는 충분히 아름다웠으며, 백작가에 어울리는 미모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탱탱한 피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였었는데, 지금 치유가 된 얼굴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비뚤어지고 뒤틀려 버린 추한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내… 내 얼굴, 내 얼굴… 이게… 이게 어떻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분명 치유 마법은 들었을 건데?"

"그게… 그러니까… 저 물약 탓일 겁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그대로 두었다면 깔끔하게 치유되었겠지만, 저 물약으로 일부가 '어설프게 치유'된 탓에… 치유가 먹히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뭐라고?"

연금술사인 동시에 뛰어난 의술 덕분에 황제의 주치의가 되어 권력을 잡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 그의 라이벌은 역시 의술로 권력을 누리던 신관들이었는데, 한때 그는 신의 존재성을 알아내기 위해서 '치유 마법'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에 기대어 치유하는 '치유 마법'의 원리는 그 자리에 있는 상처를 원형으로 복원하고, 신체를 활성화해서 자가 치유력을 올리는 두 가지 효과가 모두 있음을 알아내었고, 이미 '치유'된 육체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베오날드가 검으로 베고 난 뒤 끼얹은 저급 물약에 의해서 '어설프게 치료된 부위'는 '치유 마법'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얼굴이 균형을 잃고 추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마치 한번 무너진 돌다리에 나무 기둥을 몇 개 끼워 넣고 나머지 부분만 돌로 복원했다가 무너진 격이다.

신관의 설명을 들은 제드 경과 메이라 부인은 이런 것을 모두 계산하고 그런 짓을 벌인 베오날드의 간교함에 소름이 돋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55화]

'내가 벌인 수작을 눈치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아마 큰 고통을 받는 건 변함없겠지. 눈치를 못 챈 채로 치유하면 뒤틀려진 채로 치유될 거고, 눈치챘다고 한들 얼굴 가죽을 벗겨 내고 치료해야 하는데, 그걸 감당하려면 고통스럽겠지. 제대로 마취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여신이 베푸는 기적으로 인해 의술의 발달이 상당히 더딘 것은 500년 전이나 500년 후나 다를 게 없었다.

베오날드의 경우는 가문에 수감된 수수께끼의 연금술사에게서 의술도 덤으로 배우고 연구도 했기에 나름 전문적인 마취약도 만들 수 있었지만, 반대로 신관들은 고작해야 독한 술을 먹이거나 마약을 투여해서 고통을 줄이는 것밖에 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냥 얼굴 가죽만 벗기고 치유하면 되는 게 아니라 뒤틀린 뼈들의 위치도 맞춰야 하니 신관 레벨에선 불가능한 일이지. 출혈도 신경 써야 하니까.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제....'

추한 얼굴로 죽을 때까지 살든가, 아니면 무리한 수술을 하다가 죽는 것뿐이다.

혹시나 낫는다고 해도 그 과정 동안 그녀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대가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미소 지으면서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 있던 에라솔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도련님, 저기… 이제 떠나시는 게 사실입니까?"

"어? 그렇게 되었지. 갑작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그게 나아 보이더군. 말데로브 경에게 미리 이야기 못한 건 아쉽지만~ 네가 편지를 가져가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대가는 내가 가는 곳에 있으니 너무 걱정 마라."

"예!"

그렇게 베오날드 일행은 다시 산속에 있는 거점으로 돌아갔다.

하이디는 여전히 굳건하게 포로들을 지키며 자기 단련에 힘쓰고 있었는데, 베오날드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퇴근하고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연한 금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돌아오셨습니까? 도련님! 명하신 일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보다 뭔가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만?"

"아, 별거 아니다. 아무튼 하이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이것까지 같이 지켜 다오."

"예! 오! 꽤 무겁군요."

메이라 부인과 부친에게서 받은 재보를 건네주고 일행을 내버려 둔 다음 베오날드는 우선 에라솔만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때쯤, 베오날드는 에라솔에게 지맥의 비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계의 마력이 흐르던 중 일부 지형이나 구간에 멈춰서 고이는 장소.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 맙소사, 정말입니까? 그, 그런 게 있을 줄은?"

"나도 책으로만 보던 거라 늦게 알았다. 아무튼 이곳에서 수련하면 좀 더 좋을 거다. 너도 마나 호흡법의 기본 정도는 수련했을 테니, 해 보면 느낌이 다르다는 걸 알겠지."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걸로 빚은 갚았다. 장소를 기억했을 테니, 이제 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영지에 데려가는 일을 대신 맡아다오. 우린 쉬었다가 떠나야 하니 말이다."

대가의 지불이 끝난 뒤, 베오날드는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에라솔에게 맡겨서 캘러메인 영지로 보냈다.

상급 기사로 명성이 높은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고 하니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도 딴생각하지 않고 에라솔의 인솔에 따라서 귀환했다.

그리고 베오날드 일행은 곧바로 거점을 정리하고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자자, 이제 신경 쓸 부분은 다 끝났으니 곧바로 이동하지. 여기서 쉬고 가도 좋지만, 적을 등지고 쉬기엔 불안하지 않은가? 근처 마을로 가서 쉬는 게 훨씬 낫지."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도련님."

"일단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가지. 아, 그리고 이젠 도련님이 아니니까 그냥 베오날드 님으로 부탁한다. 다들~"

하이디, 세인, 셀리나에게 그리 말한 다음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에게 짐을 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금화와 백금화에 보석으로 가득한 주머니는 특별히 무거웠기에 베오날드와 하이디가 나눠서 들었다.

그 뒤 그들은 근처 마을로 향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저… 베오날드 님, 에라솔 도련님에게 혹시 '지맥'에 대해 알려 주신 겁니까?"

"그렇다. 대가를 받았으니 나도 지불해야지. 그 정도는 해 줘야 수지가 맞거든."

"정말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에라솔 도련님이 혹시라도 가문에 알려서 훈련장 같은 걸로 쓰이면...."

"아, 지맥을 손에 넣어서 우리를 따라잡고, 캘러메인 백작가가 강해져서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인 건가? 걱정 마라. 지맥은 어디까지나 세계에 흐르는 마력이 고여 있는 곳이다. 쓰지 않아도 언젠가 넘치거나 아니면 자연의 흐름과 세계의 변화 등등 요인으로 사라지게 된다. 쓰면 더 빨리 변화하는 것뿐이지."

"아! 그렇군요."

"하나 반대로 영원히 나오는 곳도 존재한다. 별의 생명점, 마력이 샘솟아 세계에 뿌려지는 곳. 나는 그곳을 '성맥(星脈)'이라고 부르지. 대륙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장소다."

"세상에! 대체 베오날드 도련님은 얼마나 마법에 조예가 깊으신 겁니까? 지맥과 성맥까지 아시다니요?"

베오날드와 하이디의 대화 중에 아는 단어가 나오자 힘겹게 걸어오던 셀리나가 깜짝 놀라서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맥과 성맥, 마력이 흐르는 곳, 이런 이야기엔 역시 마탑 출신 마법사인 그녀도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순간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베오날드는 기존에 하던 대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봤던 연금술 책에 그렇게 쓰여 있던 것뿐이다."

"와앙~ 세상에! 그런 좋은 책을 자기만 외워 버리고 없애다니 말이 되나요? 기억한 걸 다시 써서 지식을 보존해야 한다고요, 도련님."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군. 내 것을 줄까 보냐? 아무튼 성맥도 찾아야 하긴 하겠군. 거기가 바로....'

베노피스, 베오날드의 집이자 고향 같은 곳.

물론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신이 찾아서 직접 가꾸고 쌓아 올린 영지임은 틀림없었다.

애초에 그의 가문 이름은 노이멀인데, 영지 이름이 왜 노이멀이 아니라 베노피스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가?

벨릭스 폰 노이멀 시대까진 노이멀 영지에 살았지만 베오날드가 가주가 되고 연금술을 익히면서 지맥과 성맥의 이론을 세우게 되고, 그곳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권력을 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맥이 있는 장소에 새로이 영지를 만들었고, 그곳이 바로 이후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멸망한 베노피스, 자신과 평생 함께한 곳이었다.

"아무튼 도련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뭔가 대책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오늘 마을에서 묵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음, 그렇군. 그 정도는 이야기해 줘야겠지. 우선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간다. 로이엔 남작이 그냥 물러나 주면 좋겠지만 메이라 부인이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하지. 우리가 행방불명이 되면 결국 자연스럽게 분노의 대상을 찾고자 할 거고, 자연히 하이디가 있는 젤커드 자작의 영지를 노릴 게 뻔하다."

"예? 하지만 전 이미… 베오날드 님에게 맡겨진 몸인데...."

"음~ 바로 그래서 노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거다. 물론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지만, 만약 위험한 상황이 현실이 될 경우 우린 젤커드 자작을 도와야겠지. 하이디, 너도 집안 자체는 무사한 게 좋지 않으냐?"

베오날드의 말에 하이디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집안에서 대우가 좋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태어난 고향이자 집이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부친인 벨릭스 폰 노이멀 같은 막장 레벨을 겪은지라 젤커드 자작 정도면 나름 평범한 기사치곤 노력한 축이라고 생각되었다.

"음, 그럼 저기, 만약 젤커드 자작의 영지 쪽 일이 끝나면요?"

"그다음? 비밀이다. 우선 해야 할 일부터 하지."

"아니면~ 역시 마탑에 가는 건 어떠세요? 베오날드 님이 가진 연금술 지식이라면 분명 환영받을 텐데요?"

"아쉽지만 학자나 마법사의 길을 갈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이요?"

그래, 즐겁게 사는 것 같지만 베오날드는 엄연히 여신에게 사명을 받은 자다.

대륙의 평화와 안전, 미증유의 위협인 암흑신과의 싸움을 대비하는 일을 맡는 조건으로 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자연스럽게 압축이 된다.

"뭐긴, 귀족 출신으로서 꿈꿔야 할 것이 무엇이냐? 바로 '나의 정원'을 가지고 가꾸는 것이 아니겠느냐?"

"정원이라는 건… 영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지만이 아니다. 내 주변과 내가 거느리는 모든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하이디, 세인 너희 둘은 내 정원의 꽃이자 같이 운영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난 너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너희와 함께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 나가고 싶다."

'정원'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결국 보금자리를 같이 가꾸자는 의미.

그렇기에 한 과감한 어프로치와 고백을 이해한 세인과 하이디는 얼굴을 붉히면서 베오날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저는요? 저는요? 베오날드 님?"

"셀리나, 너는 나를 섬기는 게 아니라 내 지식을 노리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아직… 출입 금지인 상황이지."

"흐으음~ 그럼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정도면 아직 젊고 예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래 보여도 나름 마탑에서 청혼도 많이 받았다고요."

"외양이 좋으면 보기 좋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치우치지 않는다. 내 정원에 어울리는 성품과 재능을 갖고 있다면 나는 설사 그것이 고블린 여성이라도 품을 것이다."

단호한 베오날드의 대답에 셀리나는 깨갱하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세인과 하이디는 베오날드가 그냥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깊게 받아서 한층 더 감동하면서도 껄끄러운 부분이 역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블린은 좀… 그렇죠?"

"애초에 고블린에 여성체가 있던가요? 몇 번 토벌에 참여해 봤는데, 죄다 남성체밖에 안 보였습니다만?"

"비유가 그렇다는 거다, 비유가! 아무튼 서두르자. 알테리오가 있다고 해도 혹시 모를 사태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삐이이이이이이!

베오날드의 말에 대답하는 알테리오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행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걸은 지 1~2시간 정도 지나자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베오날드 일행은 무사히 마을에 도착했지만 여관도 없는 곳이었기에 한 가족이 사는 집을 통째로 빌려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고, 하루 종일 피로한 몸을 드디어 쉬게 할 수 있었다.

'후우~ 정말 피곤하군. 그나저나 메이라 부인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과연 메이라 부인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잠시 궁금해하던 베오날드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는 그대로 깊게 잠이 들었다.

겉으론 태연해 보였어도 사실은 마나 호흡법과 검술 단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쓰러졌을 정도로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한 그였다.

마찬가지로 하이디 또한 베오날드와 거의 비슷한 스케줄을 감행했기에 똑같이 피로를 호소하며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

그 무렵, 캘러메인 백작가의 메이라 부인은 현재 붕대를 감아 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증오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베오날드가 만든 상처와 저급 포션 때문에 신관의 치유를 받아도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고 추한 형태로 일그러진 채였다.

그녀는 일단 붕대로 가리는 조치를 해 둔 채로 신관이 한 이야기를 다시금 곱씹었다.

'그러니까… 마님의 얼굴은 이미 '치유'가 완료되었기에 다시… 치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치유를 하려면… 얼굴 가죽을 벗겨 내고, 이미 뒤틀린 뼈의 자리를 맞춘 다음에 치료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건 도저히....'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쨍그랑! 쨍그랑!

신관이 한 이야기를 떠올리니 다시금 분통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얼굴.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얼굴이었던 우아한 부인으로서의 모습. 이래서야 내일 아침 식사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부인'에게 그 자리를 넘겨야 하게 될 판이었다.

"망할 잡종! 잡종! 잡종! 잡종이이이이! 나를! 감히 나를 이따위로! 그 잡종… 그리고 그 망할 세인… 도저히 용서 못해! 절대로… 절대로 용서 못해애애애애애애! 제드 경이… 제드 경이 돌아오면! 반드시!"

그의 수족 같은 제드 경은 자신의 얼굴을 고치지 못한다는 걸 알자마자 베오날드와 세인을 추적하러 나간 상태였다.

자신의 보물 같은 얼굴을 이렇게 만든 베오날드와 자신을 배신한 세인을 반드시 잡아서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그녀는 깨진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56화]

얼마 뒤, 젤커드 자작 영지.

베오날드는 곧장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가기보다는 주변 상황이나 소문을 들으면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며칠 시간의 여유를 두고서 일부러 주변 마을을 돌아서 천천히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가 함께한 덕분에 베오날드 일행은 딱히 그리폰 알테리오에 대한 경계나 제재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소식을 들은 건지 저택에 가자마자 젤커드 자작이 베오날드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알테리오는 하이디와 세인에게 맡기고, 베오날드는 우선 자작의 응접실로 가면서 계속해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작님. 하나 전 이젠 도련님이 아닙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그냥 베오날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하하,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혈통이 다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러는 편이 제가 더 편합니다, 베오날드 님."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나저나 대충 사정은 아실 것 같은데...."

"예. 대강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캘러메인 백작가와 로이엔 남작가에 아주 큰일을 벌이셨더군요."

끄덕.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의 말을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 계속 들었다.

젤커드 자작은 현재 로이엔 남작가에서 베오날드를 잡아 죽이기 위해 이를 갈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가문의 소중한 인재인 기사를 둘이나 죽인 데다 그들이 가진 로이엔 남작가의 재산은 물론 메이라 부인이 가진 재산도 거의 갈취하다시피 기사들의 몸값으로 가져갔기에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혹시 군사 행동의 기미는?"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로이엔 남작 영지에 상주하는 병력 5백 전원 소집. 치안은 촌장들과 영지의 각 영역에 있는 민병대 수비 체제로 전환, 용병들까지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이 근방 영지를 나가기 전에 잡아 죽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요."

"예상대로군요. 혹시 자작님에겐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제가 하이디를 맡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올 가능성을 생각했을 텐데...."

"물론 왔습니다. 베오날드 님과 일행이 오면 반드시 잡아서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그러면 딸은 봐주겠다고, 만약 편을 들 시엔 자신의 가문의 적이 되는 걸 각오하라고 하면서...."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자작님은 절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잡아서 로이엔 남작에게 바칠 겁니까?"

"하하핫, 그럴 거라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지요. 왜냐면 베오날드 님은 이미 이런 사태를 모두 대비해 둔 게 아닙니까?"

젤커드 자작의 예상에 베오날드는 기분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대비했다고 하는 건 말이 이상하지만, 아무튼 젤커드 자작의 말대로 지금 이 상황이 온 것에 대해서 베오날드는 유기적으로 곧바로 대응할 수 있게 준비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대비라.... 그건 과찬입니다. 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우선은… 델마인 남작님에게 편지 한 통 쓸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그리고 저는 당연히 베오날드 님의 편에 설 겁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 주십시오."

'뭐랄까? 너무 눈치가 좋고 배려가 좋아서 뭐라 할 말이 없군. 막 우려라든가, 책임이라든가, 아니면 위험하니 나가 주셔야 할 것 같다든가? 반박이 올 것 같았는데 말이지.'

'역사는 결국 소수의 천재의 손에 굴러간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그 역사를 주무르게 될 큰 손. 투자할 가치는 있다.'

지금만 해도 어떤가? 보통 귀족이라면 집안에서 쫓겨나고 남작가에서 군대까지 동원해서 쫓아다닌다고 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당장이라도 헐레벌떡 도망치려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베오날드라는 자는 어떤가? 압박이나 불안은커녕 태연히 자신이 준 용지에 편지를 써 나가고 있었다.

'도저히 갓 성인이 된 아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저 기품. 수도의 황자님들이나 수많은 천재 귀족들을 보는 것 같아. 그러니 이건 얌전히 따라가기만 하면 무조건 큰 이익이 생길 싸움이다. 하이디만 봐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몰라보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베오날드를 신뢰하는 근거에 추가된 것은 바로 하이디의 변화였다.

젤커드 자작은 자신의 딸인 하이디를 보았을 때 정말 크게 놀랄 뻔했다. 예전엔 그저 여자답지 않은 허우대만 가진 채 어설픈 느낌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막강한 오러의 느낌부터 시작해서 강하게 자리 잡은 예기(銳氣). 베오날드가 그렇게 성장시킨 게 틀림없었다.

그런 만큼 젤커드 자작은 이전 테알 슬럼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얌전히 베오날드를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좋아, 편지는 이 정도면 되겠군요. 곧바로 델마인 남작에게 보내 주시죠. 그리고 이제부터 할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그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베오날드 님."

"그럼 대응할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줄 테니 곧바로 진행합시다. 시간은 금이니 말이죠."

젤커드 자작이 자신에게 뭘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선 잘 따라 주니 더 이상 뭐라 할 게 없는 만큼 베오날드는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함과 동시에 일행에게 돌아가 그들이 할 일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세인, 예전부터 그랬지만 앞으로도 계속 내 메이드이자 동반자이다. 너는 알테리오를 돌보는 건 물론 이 저택의 상황과 영지에 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하며 네 재량껏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보충해 놔라. 자금은 넉넉히 주마."

"예, 베오날드 님."

"하이디는 외출할 때의 세인을 지켜 줘라. 그리고 틈틈이 단련과 수련을 잊지 말도록. 젤커드 자작님에게 개인실을 개방해 달라고 이야기하면 될 거다. 정 안 되면 내 방에서 저 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수련을 해도 좋다. 그땐 세인이 지켜 줘라."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셀리나, 너는 날 따라오도록. 지금 바로 외출한다."

"어머~ 불러 주셔서 너무나 황송하옵니다. 후훗."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린 뒤, 베오날드는 돈을 일정량 챙겨 나와서 말 한 필을 구매한 다음 셀리나와 함께 영지 밖으로 나갔다.

그다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셀리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이전에 기사들을 구속해 둔 거점에 갔을 때, 뭔가 느낀 게 있었나?"

"아~ 그 왠지 모르게 마력의 농도가 짙던 곳 말인가요?"

"역시 느끼고 있었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고, 마정석으로 대신할 수 있으니까요. 또 그 지맥은 마력이 사라지면 결국 없어지잖아요. 게다가 역시… 마법사라면 마력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지식이 우선이 되기도 하고요."

'500년 전이랑 어떻게 저리 똑같은 말을 할꼬....'

500년 전에도 베오날드는 연금술사로서 마탑에 속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지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마법사들은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마력의 양과 질 부분은 결국 더 큰 자본이나 권력만 있으면 쉽게 해결되는 것이라고 여겼고, 지맥의 마력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곳에 대해서 신경 써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무가에서는 이걸 알아도 마나 호흡법의 성능이 문제라서 지맥에서 수련을 한들 효율 차이를 그리 못 느끼지.'

베오날드나 하이디가 사용하는 마나 호흡법은 무려 이 대륙을 통일했던 제국 황실과 황실 기사단의 것이었다.

그런 걸 사용해야 지맥과 일반적인 환경에서 마나 호흡법의 효율을 체감하는 거지, 일반적인 마나 호흡법 가지곤 효율이 좋지 않아서 체감하기도 힘들었다.

'에라솔에겐 그 말을 안 했지만, 어차피 상급 기사 가문의 마나 호흡법이면 어느 정도 효율이 나올 테니까....'

"그래서 결국 요점이 뭔가요?"

"그 지맥을 찾아다오. 내가 찾으려니 연금술 지식으로 찾아야 해서 말이지. 혹시 몰라서 오러로 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더군."

"그야 오러의 본질은 결국 순수한 마나를 육체로 쌓고 제어해서 사용하는 거니까요. 그걸로 찾으려는 게 이상한 거죠. 마법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마법사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아무튼 찾을 수 있나?"

"흐흥! 걱정 마시라. 당연히 찾을 수 있죠."

콧대를 높이면서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하는 셀리나. 베오날드는 뭔가 아니꼬웠지만 일단 참아야 했다.

지금은 지맥을 찾는 일이 최우선이었으니 말이다.

로이엔 남작가와 메이라 부인이 자신의 행적을 알고 전쟁을 걸어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 그럼 빨리 해라."

"예. 그럼 솜씨를 기대해 주세요. 아, 혹시 위험한 지역이라도 상관없을까요?"

"가까운 곳이면 어디든 좋다."

"예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다음 연금술 수업을 빨리 재개 좀 해 주세요~"

애교를 부리면서 말에서 내린 셀리나는 품에서 마법 책을 하나 꺼내더니 무언가 땅에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서인가 싶어 베오날드는 슬쩍 봤지만, 그의 지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계산식이 가득해서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보자. 여기서는… Rra랑 Kmd 주문을...."

'하긴 그 녀석들도 내 연금술 노트를 봐도 아무것도 못 알아 먹었으니… 피장파장인가? 후우~'

"아니지. 여기선 WIDa를 집어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마법진과 씨름을 하며 끙끙대기를 약 한 시간. 쉽게 쓰던 주문과 다르게 지맥 탐색은 뭔가 복잡한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아까웠던 그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물었다.

"약… 한 시간 정도 더 주세요. 계산이 왜 이렇게 안 맞지?"

"주문 하나를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는군."

"그야 몸을 지키거나 싸울 때 쓰는 정형화된 주문들은 단순해서 미리 메모라이즈를 해 두는데… 이 탐색 같은 경우는 여러 개의 주문을 엮어서 새로 구성해야 해서 오래 걸리는 거라구요. 쉽게 말하자면 이번 같은 경우는 하급 주문 4~5개를 한 번에 시전해서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제어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으음… 확실히 500년 전보다 후퇴한 게 맞군.'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베오날드는 이미 500년 전에도 지맥을 찾는 일을 마법사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친분이 있는 다크엘프 마법사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그는 저런 복잡한 계산 같은 거 없이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만 '동서쪽으로 2,400걸음 가라.'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해 줄 정도였다.

'아무튼 4급 마법사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그다지… 높은 계위는 아니라는 거군.'

그렇게 기다린 끝에, 셀리나는 결국 계산을 완료하고서 당당하게 베오날드의 앞에서 주문을 시전했다.

그러자 셀리나의 몸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주문에 따라 구성이 되었고,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지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그녀는 반 바퀴쯤 돌더니 드디어 뭔가를 발견한 듯 환호성을 질렀다.

'뭔가… 내가 생각한 거랑 다르군.'

"찾았다! 찾았어요. 이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나올 거예요."

"좋아. 그럼 타라. 우선 오늘 위치를 확실히 찾는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목적을 완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만족한 베오날드는 다시 셀리나를 태우고 지맥을 찾으러 움직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 메이라 부인과 로이엔 남작가는 자신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그는 빨리 다가올 전쟁 혹은 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57화]

다음 날, 젤커드 자작 영지.

셀리나의 협력 덕분에 다행히 전날 지맥을 찾을 수 있었던 베오날드는 돌아와서 자고 난 뒤 일행을 모두 데리고 곧장 대장간으로 향해서 제련하지 않은 철광석과 코크스와 석회석, 석탄 등등을 포함해서 제련에 쓰이는 것들을 모조리 사들였다.

"나리, 이걸 어디다 쓰실 겁니까? 그… 제가 직접 제련한 철주괴도 있는데, 하다못해 그걸 사시는 건 어떨는지요?"

"다 쓸 곳이 있으니 물건이나 내주게. 돈은 있으니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나리."

보통 사람이라면 잘 사 가지 않을 것을 저리 사 가니 대장장이는 궁금해서 물었지만, 베오날드는 일제히 무시한 채 받은 물건의 양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추가로 곡괭이와 망치 같은 공구, 가죽 장갑, 가죽들도 몇 개 더 사서는 모두 알테리오와 어제 산 말에 실어서 운반, 잡화점에 들러서 각종 도구와 약초, 식량, 천을 한가득 산 뒤 다시 거점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도련님, 이것들로 뭘 하시려는 겁니까?"

"강철 제련이다."

"예? 그런 거라면 그냥 대장간에 맡기시면 되지 않습니까? 거기 철 주괴도 있던데 말입니다."

"예로부터 좋은 물건을 손에 넣으려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게다가 연금술 지식도 써 볼 겸 말이다. '연금술'의 학문적 기반이 뭔지는 잘 알고 있지?"

금속과 물질을 제련하여 자신의 영혼을 더 높은 상태로 이끌거나, 엘릭서 같은 비약을 만들거나 완벽한 금속을 만드는 등등… 목적은 조금씩 달랐지만, 아무튼 '금속의 제련'은 연금술의 필수 과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연금술사이면서 동시에 한 영지의 영주이자 제국의 권력자인 그는 '금속 기술'이 군사력의 질을 압도적으로 올려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연금술과 연관해서 '금속 제련 기술'을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개발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베노피스는 더더욱 번영할 수 있었지. 연구비가 엄청 들어갔지만 그래도 베노피스 강(鋼)이라고, 나름 명품 강철이 나와서 완벽하게 회수했고.'

'베노피스 강(鋼)'. 엄청난 액수의 돈과 연금술사, 대장장이들을 갈아 넣다시피 해서 약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그 시대 최고의 '강철'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개선과 개발을 통해서 '베노피스 강'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여러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베오날드 폰 노이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걸작 중 하나였다.

'물론 사실 그것도… 성맥이 있는 덕분에 만든 거지만.'

베오날드가 파악한 금속 제련과 연금술은 결국 '에너지'량과 강도의 싸움이었다.

더 크고 많은 양의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게 가능할수록 금속 제련도 더 안정적이며 순도 높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순도 높은 것을 얻으면 아주 정확한 합성과 조합, 제조 공식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며, 그 결과가 바로 베노피스 강(鋼)이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은 더 좋은 게 나올 줄 알았건만… 오히려 후퇴해 버렸던가? 하긴 내가 제조 공정을 유출 안 하려고 엄청 빡세게 관리하긴 했는데, 정말 흔적도 안 남을 줄이야.'

베오날드가 모르는 점이 있다면 설사 그의 조합식이나 제조 방법을 알아도 베오날드급의 연금술 지식이 없으면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베오날드 자신의 숙청 때 대다수가 처형당하고, 마탑 내의 내전으로 인해 또 처형당하는 바람에 제조법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물론 이 제국에서만 사라진 걸 수도 있으니 확신하는 건 오산이겠지만, 아무튼 캘러메인 영지에 있는 무기와 장비의 수준을 봐선 이 근방의 철제 무기들 수준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확실하다.'

이 주변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인 캘러메인 영지의 수준이 그렇다면 주변 영지의 것은 더 떨어지면 모를까,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이런 수준의 장비들이라면 베노피스 강(鋼)을 100퍼센트 수준으로 만들지 않아도 압도적으로 능가할 것이며, 철이 철을 만나서 유리처럼 깨어지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베오날드였다.

"좋아. 도착했군. 보자… 하이디는 알테리오를 데리고 이 주변 지역을 탐색하며 사냥, 세인은 내 작업을 보조하면서 어제 본 것들의 보고를, 셀리나는 마찬가지로 내 보조다. 우선은 지맥의 흐름을 보고 고로를 설치할 곳부터 살펴보지. 셀리나, 마력 탐지는?"

"후훗, 걱정 마시라구요. 어제 미리 메모라이즈해 왔어요."

그렇게 베오날드의 지휘 아래 지맥의 중심점 위에다 제련을 할 용광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본래 대장간에도 용광로가 있지만 이건 '지맥'의 마력을 이용해서 불을 피우고 열을 내는 방식으로, 목재나 석탄보다 더 빠르며 '지맥'의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지속되는 특징이 있었다.

'제대로 된 건 성맥에다 설치해 놨지만… 아무튼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안 되면 어쩌나 했지만… 돼서 다행이군.'

구조는 베오날드가 다 알고 있으니 만들 수 있었고, 마력을 빨아들이기 위한 인챈트 주문은 셀리나에게 맡겼다.

물론 시행착오라든가 구조의 문제로 인해서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지만, 베오날드와 셀리나는 끈기 있게 매달려서 결국 그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용광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대장간의 것보다 압도적으로 좋은 화력이 뿜어져 나오는 용광로를 보면서 베오날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휴우~ 좋았어. 이제 이 지맥에 고인 마력이 사라질 때까진 계속 이 화력이 유지되겠지. 아주 좋은 열이야."

"확실히 대장간의 그것보다 강한 것 같네요. 근데… 도련님? 저 뜨거운 화력을 어떻게 이겨 내시면서 작업을 하실 거죠? 손만 가까이 대도 타서 흔적도 없어져 버릴 것 같은데...."

"본래라면 샐러맨더 같은 용암 지대에 사는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방화복을 입거나, 불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를 고용하거나 화염 내성 마법을 걸고서 작업하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나에겐 이게 있으니 문제없지."

"오러!"

짙은 보랏빛으로 빛나는 오러. 신체 강화는 물론 수련이 쌓이면 물리적인 보호 능력도 갖추게 된다.

베오날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마나 호흡법으로 수련을 한 몸. 검술의 진척은 아직 모자랐어도 축적된 오러의 힘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인력이 부족해서 일일이 해야 하니… 답답할 노릇이지.'

덕분에 뜨거운 용광로를 겁낼 필요가 없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강철을 제련하기 위한 과정을 진행해 나갔다.

***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는 현재 로이엔 남작가의 베오날드를 규탄하는 서찰과 군사 준비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치유되지 않은 메이라 부인의 얼굴 문제 때문에 내부적으로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메이라 부인은 치료를 받았음에도 고쳐지지 않는 얼굴로 인한 히스테리를 하인들이나 다른 부인들에게 풀었고, 이는 제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당신! 엄연히 전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기둥 중 하나예요! 그런 저를 이 꼴로 만들었는데! 심지어 백작가의 병력은 쓰지도 않고 제 본가의 병력과 기사들만 움직이겠다는데, 그것조차 안 된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로이엔 남작가의 군사 행동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렌겔 가주 대리의 말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렌겔 가주 대리는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사태 파악에 힘썼다. 그리고 베오날드가 떠난 사실과 에라솔이 인솔해 온 자신의 저택에 있는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이 그 증거였기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애초에 먼저 손을 댄 것은 부인 아니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심지어 가주 대리인 나에게 말도 없이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를 여섯이나 데려와? 아무리 아버님의 재가가 있어도 그렇지, 날 바보로 만든 거나 다름없소. 근데 뻔뻔하게! 우리 혈족을 죽이려는 군사 활동까지 한다고? 어처구니가 없군! 심지어 아버님까지 날 속이다니!"

렌겔 가주 대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일을 진행했다는 것에 매우 화난 상태였다.

가주 대리라곤 하지만 백작이 연로하여 사실상 본인이 백작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묻을 생각입니까? 절 이렇게 만들었는데?"

"치료된다고 하지 않았소? 게다가 당신이 부른 기사 여섯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죽이지 않은 게 자비로운 거지. 다만 그 아이가 기사였을 줄은 몰랐군. 말데로브 경과 손을 잡고서 숨겼을 줄이야. 허 참~"

제드 경을 통해서 기사인 사실이 밝혀지자 렌겔 가주 대리는 말데로브 경을 추궁했지만, 랄트가 벽을 느낄까 걱정이 됐다는 충성 어린 발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애당초 그가 기사라는 게 알려졌으면 랄트의 절망은 더 커졌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니까요! 애초부터 속이 시커먼 놈이었어요! 아무튼 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꿍꿍이를 꾸밀지 몰라요. 그러니 당장 잡아서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뿌려야겠어요!"

'이상하군. 부인은… 자존심이 강해서 모욕당하는 것에 화를 낼 순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실리를 위해서 속내를 감추는 사람인데 이렇게 화를 내다니. 애초에 스스로 영지를 떠난 아이라서 이제 후계자 구도에 방해가 되지 않는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저 태도가 어딘지 꺼림칙한 렌겔 가주 대리였다.

베오날드를 없애려는 음모는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베오날드는 스스로 이곳을 떠났다.

물론 귀중한 기사라는 인재 2명을 잃은 게 크긴 했지만, 후계자로 랄트가 확정 난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부인… 혹시 그 얼굴의 붕대를 잠시 풀어 볼 수 있겠소?"

"아?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조만간 제스 자작의 영지에 시찰을 갈 일이 있잖소? 게다가 얼마 안 있으면 수도로 가야 할 일도 있고. 그러니 상처의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아, 아직 아물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보일 수 없습니다. 아,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 베오날드라는 잡종을 처리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아이는 재앙의 싹이에요. 그러니 미리 제거해야 합니다."

렌겔 가주 대리의 날카로운 추궁에 메이라 부인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능숙하게 변명하면서 넘겼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어설프게 치료된 것과 신관의 치료가 얽혀 있어 추한 상태였는데, 이걸 고치려면 얼굴 가죽을 거의 다 벗기고 뼈를 맞추고 난 다음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 현 시대의 의술에선 거의 불가능한 수준을 요하기에 사실상 고칠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얼굴에 무슨 문제가 있나 보군.'

하나 반평생을 같이 살아온 렌겔 가주 대리에겐 그녀의 변명은 반대로 얼굴에 의혹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었다.

렌겔 가주 대리는 문득 차라리 베오날드를 이용해서 그녀를 처리할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으음, 문제가 있다면 처리해야 하는데… 내 손으로 처리하기엔 부담이 되고, 로이엔 남작가도 작은 집안은 아니니… 차라리 베오날드에게 맡길까? 로이엔 남작가가 상처 입으면 이 부인을 제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으음… 부인의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허락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소."

"정말이십니까?"

"단, 오로지 부인과 로이엔 가문 선에서 처리해야 하오. 알겠소?"

"그, 그거면 충분하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결국 캘러메인 가문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렌겔 가주 대리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완벽하게 OK나 다름없었다.

렌겔 가주 대리가 갑자기 승낙해 준 사실에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어쨌든 베오날드와 자신을 배신한 세인을 잡아서 복수할 생각에 그 찜찜함은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졌다.

'일단 그 망할 놈을 잡으면 나와 똑같이 만들어 줘야겠어. 그 반반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과 이빨을 모두 뽑고 팔다리를 잘라서 거지 굴에 던져 놓을 거야. 그다음은 세인 그년! 감히 여태껏 먹이고 재워 준 날 배신해? 그년은 일단 손발톱을 모두 뽑는 고문을 한 다음에 영지 병사들의 성 노예로 굴리다가 뒷골목 창부로 팔아 버리겠어. 감히… 감히!'

"마님, 접니다. 놈들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한창 증오를 불태우는 중 반가운 소식이 그녀의 뒤에서 전해져 왔다.

현재 백작가 주변에 퍼뜨려 놓은 첩자들 중 하나가 드디어 베오날드 일행의 위치를 밝혀낸 것이었다.

"제드 경! 그래! 어디 있지?"

"예상대로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들어갔습니다. 기댈 곳이 거기뿐이니까요. 로이엔 남작님께서 곧바로 준비에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후훗, 곧장 연락을 하세요. 가문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즉시 움직이라고요. 그리고 이번엔 나와 당신도 갈 겁니다. 놈을… 놈을 잡는 모습을 반드시 봐야 하니까요! 그리고 용병들도 더 많이! 가능한 한 아주 많이! 고용하세요! 빚은 얼마든지 져도 좋습니다. 어차피 그놈에게서 돈을 되찾으면 그만이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제드 경은 메이라 부인의 명에 따라 곧바로 로이엔 남작가에 전령을 보냈다.

백작가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군사 활동 규모로 베오날드를 잡으러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아직까진 젤커드 자작이 베오날드의 편을 들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금방 베오날드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움직였지만, 그것이 오산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