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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0화

니아 녀석이 벌써 손을 쓴 듯했다. 이를 알고 있는 나는 괜찮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이미 이야기된 거니까요."

내 말에 그녀는 불안해하면서도 나를 마법과 교사에게 안내해 주었다.

"너인가."

마법학과 교무실로 오자 까칠해 보이는 얼굴의 교사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옆에 다른 교사에게 봉투 하나를 받았다.

"따라와라."

그리 말한 교사의 말에 나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마법과로 전과시키려는 거겠지.

마법학과 건물을 나와 본관으로 향하는 숲을 지나고 있던 도중이었다.

탁.

갑자기 대뜸 발걸음을 멈춰선 그의 행동에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그 순간 녀석은 봉투를 불태워 버렸다.

"뭐 하는 거죠."

"지금부터 바로 시험이다. 내 마법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내 불의 늑대를 뚫고, 내 몸에 닿을 수 있으면 통과로 인정해 주지."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한 순간 불로 된 늑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늑대를 한 번 보고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일 리가 있나.'

눈동자에서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기가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잘 느껴지는데.

'어제 그 교장 대리한테 너무 도발했나. 설마 자기가 냄새 맡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학생을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니아 쪽에 무슨 일이 생겨 니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를 죽일 목적으로 보낸 자객이겠지.'

상황을 쉽사리 파악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성좌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답다.

역시 하나만 해도, 어떻게든 이야기를 진행 시켜 준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에 맞게 움직여 주지.

나는 목에 걸려 있는 별천도를 쥐었다.

그 순간 별천도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대로 길어졌고, 교사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이건 마법 시험이다. 검 따위 다뤄 봤자 아무런 시험도 안 돼."

내 무장을 조금이라도 해제시킬 속셈인 듯한 그의 말에 나는 태연하게 별천도를 겨누었다.

"제가 마검사를 꿈꿔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도 확실히 보여 드릴 테니."

"우습군. 마법과로 전과를 한다는 녀석이 그딴 말을 지껄여. 어디 한번 그 검 쪼가리로 막아봐라."

그리 외치자마자 불로 된 늑대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녀석은 목을 커다랗게 부풀리더니, 내게 화염 탄을 몇 발 쏘아 내었다.

날아드는 화염 탄을 보고 나는 오러를 일으킬 것도 없이 별천도를 몇 차례 휘둘렀고, 그러자 화염탄이 베어 갈라졌다.

"마검이냐. 가잖은 짓거리를."

마검이라면 마검이긴 하지.

내가 별천도를 쥔 채 더 해 보라는 양 손을 까닥거리자 그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플람 루프스! 명줄을 끊어 줘라!"

끝내 버리겠다는 양 교사가 지시를 내린 순간, 화염의 늑대의 몸집이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비대하게 커진 근육과 함께 늑대가 입을 쩌억 벌린 채 맹렬히 달려들자 나는 손을 앞으로 겨누었다.

"바람 마법, 음, 템페스트?"

그리고 겨누어진 내 손이 한 차례 초고속으로 휘둘러졌다.

휘둘러진 손아귀에서 생겨난 풍압은 순식간에 늑대 녀석을 뒤덮었고 녀석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게 휘날리다가 한순간에 꺼져서 사라졌다.

풍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 주위의 잔디를 모조리 헤집어 놓으며 날아간 바람은 교사 또한 휘감았다.

"으아아아아아악!"

놀란 그가 급히 방어 마법을 발동했음에도 풍압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그의 몸이 축하니 늘어지자, 나는 별천도를 다시 줄어들게 하여 목에 걸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제 바람 마법."

나무 아래 반쯤 기절한 그에게 다가간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는 거센 기침을 토해 내더니 이를 아득 갈았다.

"썩을 자식이, 교사를 다치게 하고도 마법과에 진학할 수 있을 줄 알아!"

"그건 됐고."

열 받았다는 양 외치는 그의 호통에 내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그의 표정이 묘해지자, 나는 무릎을 낮추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너 니아랑 무슨 관계냐?"

"무슨 헛소리를."

짧은 순간이지만 니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이 흔들렸다.

5회차나 크라운 로드를 반복한 나다.

이런 자그마한 틈을 내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 그럼."

즐거운 심문 시간이다.

* * *

어느 고풍적인 방.

그 방에는 침대 기둥에 마력으로 만든 수갑이 채워진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스텔라 왕가에 내려오는 백색의 머리카락, 아직 어린 티가 다분히 남아 있는 소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언제까지 이럴 속셈인가요?"

"니아, 내 사정도 이해해 주렴."

니아를 이렇게 붙잡아 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둘째 언니 스텔라 피오나였다.

그녀는 따분한 표정으로 입가에 부채를 펼치고 있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지금까지 벌써 5년째 왕위 다툼이 있었어. 그래도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제 거의 끝나서 첫째 오빠가 왕위에 오르는 거로 결정이 나기 직전이야."

피오나는 진절머리 난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당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면 또 어떤 분란이 생길지 모르잖니. 나는 그런 걸 보고 싶지 않아."

"전 왕위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네가 관심 없어도 주위 사람들은 달라. 첫째 오빠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귀족 세력들은 아직 곳곳에 있어. 둘째 오빠와 첫째 언니 그리고 내가 왕위를 포기했으니 그들도 지금은 잠잠해진 거지만, 아직도 먹잇감을 노리고 있단 말이야."

피오나는 니아를 부채로 겨누었다.

"그리고 그 먹잇감이 여기에 떡하니 생겼어. 널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 탓에 또다시 귀족 세력에 분란이 일어날 거야."

"저를 왕위에 올리고 싶어 할 리가...."

"당연히 올리고 싶어 하지. 세상 물정도 모른 채 병으로 누워 있던 가녀린 소녀인데, 그들에게 얼마나 편한 장기짝으로 보이겠어."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귀족들도 약하지 않아. 니아, 왕권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어. 4대 공작가 중 둘은 아직도 왕위를 노리고 있지. 너 같은 어린애는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그런 녀석들이 말이야."

4대 공작의 세력은 니아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4대 공작가 중 셋은 니아의 아버지, 스텔라 왕의 장인이 되는 자들이다.

니아의 어머니도 그런 사대 공작 중 한 명인 판토니마 카타만의 딸이다.

어머니에게 듣기로 니아의 외할아버지는 권력 욕심이 많은 자다.

분명히 그녀를 이용해 어떻게든 왕권에 참여하려 들게 분명했다.

스텔라 왕가의 힘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마당.

아래 귀족들은 매년 마다 세력을 불리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기에 피오나는 니아가 마법을 쓰게 되자마자 이렇게 감금 한 것이다.

하루빨리 왕위가 정해지지 않으면 귀족들이 어떤 짓을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좀 이해해 주렴. 어차피 감금 기간도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첫째 오빠가 왕위에 오른다면 풀어 줄 테니까. 물론 마법을 쓴다는 건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겠지만."

착한 내 동생이라면 왕가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피오나는 그런 표정이었다.

"...싫어요."

하지만 니아는 달랐다.

피오나는 이제 와서 언니 행세를 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동생으로 생각해 준 적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왕가의 사람들이 자신이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보내던 모멸의 시선을.

오빠와 언니들은 니아에게 지금까지 말 한마디 걸어 준 적이 없다.

마법을 못 쓰는 반푼이는 왕가의 치욕이라며 숨기기 바빴던 것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왕가를 위해서 감금당해 있으라고?

나를 나로서 살지 못하게 한 게 이 스텔라 왕가인데.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기로, 걔한테 이야기했어."

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평생을 마법을 못 쓰는 반푼이로서, 사람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았다.

이제야 겨우 자기 뜻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젠 더 이상 누군가의 사정이나, 왕가의 사정 따위에 묶여서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니아야. 니아! 당신들과 왕가의 사정 따위에 휘둘려 마법을 못 쓰는 병든 공주 취급이나 받던 스텔라 니아가 아니라고!"

니아가 소리친 순간 피오나는 눈가를 가늘게 떴다.

"목청 높이지 마. 못 배운 티 내기는."

"못 배우지 않았어! 왕가의 그 사정 따위 덕에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뭐? 이제 와서 마법 하나 다루게 되었다고 기고만장해지기라도 한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마법을 쓸 수 있어. 그런데 귀족이라면 당연한 걸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세상이 전부 네 것이라도 된 거 같아?"

"세상이 어찌 되든 상관없어. 나는 나로서 살고 싶은 것뿐이니까. 내 은인과 한 약속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러고 있을 수 없어."

그러자 피오나의 입술 끝자락이 비틀렸다.

피오나의 웃음에 불안감을 느낀 니아는 소리치던 목소리를 낮추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은인한테 갚을 약속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잘 해결되었을 테니까."

"...천성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니아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니아의 불안감을 느낀 피오나는 고혹적인 진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그렸다.

"네가 마법을 쓰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귀족들 귀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지."

잔인할 정도로 지어진 미소의 니아의 몸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처리했다고?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자기 때문에?

17년을 마법을 쓰지 못한 자신 구원해 주었던 그 사람을?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안 돼! 안 된다고!"

"소리쳐도 소용없어. 이미 끝났을 테니까. 마법과 교사 중 내 수족이 있거든. 8성 마법사이니 별문제 없이 처리 해줬겠지."

그 말을 듣자마자 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오나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채 닿기도 전에 팔의 묶인 수갑 탓에 니아는 손을 뻗지 못했다.

귀기 어린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일대의 공기마저 역류하듯 흐르는 그녀의 살의에 피오나조차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애를 왜! 대체 왜! 나를 구해 준 사람이야! 평생 갚아야 할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이라고!"

"내 알 바니. 그 녀석한테 죄가 있다면, 너랑 만난 죄겠지."

니아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하천성이 죽었다.

니아는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아래로 추락시켰다.

평생토록 사람 구실조차 못하고 살아온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계속 그렇게 울고 있어."

피오나는 니아를 비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캉찰캉!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천성이를, 천성이를!"

니아는 어찌나 힘을 준 건지 수갑에 찢긴 피부에서 핏물이 진하게 묻어 나왔지만, 피오나를 붙잡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발버둥이 무색할 정도로 수갑은 단단했고, 피오나는 더 관심을 주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가 버린 피오나를 보고 니아는 스르륵 팔을 내렸다.

망연자실해진 그녀의 얼굴 속에 절망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법을 각성해 봤자 무얼 하나.

결국 평생을 무력하게 살아온 자신은 여전히 은인 한 명 못 구하는 머저리였다.

"천성아, 천성아, 미안해. 미안해."

눈물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어제 울었던 기쁨의 눈물과는 정반대되는 그 눈물은 지독할 정도로 아팠다.

161화

평생을 앞을 보지 못했던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었던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에 니아는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마법도 못 쓰는 녀석은 우리 왕가의 사람으로서 자격이 없다.」

자신을 몰아세워 놓고 호통치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거냐? 영원히 숨어 살아라. 넌 누구의 눈에도 널 보여선 안 된다.」

딱 한 번, 아버지를 보고 싶어 찾아간 날. 그가 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우리 딸, 마법 못 써도 아무 문제 없어. 엄마가 있잖아.」

왕가에서 사실상 버려지듯 되어 버린 어머니의 씁쓸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사람 중에 포기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어.」

하천성이 해 주었던 그 말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일순 니아의 마력이 미친 듯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 마력은 칼날의 형태가 되고, 주변은 얼음과 바람이 혼합되어 휘날리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정말로 하천성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자신은 포기 하지 않을 거다.

"이번에는 내가 구해!"

이 손목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콰앙!

그 순간이었다.

니아의 마력이 수갑과 함께 손목을 잘라 버리기 직전 방금 피오나가 나갔던 문이 부서졌다.

그곳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깜짝 놀란 니아가 마력도 멈추고 멍하니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곳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놔! 놓으라고! 내가 누군지 알고!"

니아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에 닿았을 때, 한 소년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피오나 공주의 옷을 질질 끌며 방으로 들어왔고, 곧 니아와 마주하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왜 또 울고 있냐?"

"...하천성?"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니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름을 부르자, 하천성은 피오나 공주의 옷을 놓아 주었다.

그녀는 이런 치욕은 처음이라는 양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눈 깔아. 뭘 쳐다 봐."

움찔.

그 자존심 높던 피오나가 하천성의 말 한마디에 스리슬쩍 눈을 내렸다.

어깨를 움츠리며 마치 강자에 굴복한 힘 없는 무지렁이 같은 태도가 되었다.

이 방에 오기 직전 피오나는 하천성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도 8성급 마법사. 어디 가서 절대 꿀리지 않았지만, 그런 피오나가 날린 화염 마법을 하천성은 손바닥으로 튕겨 내 버렸다.

왕가에서 숱하게 뛰어난 마법사들을 봐 온 그녀다.

그래서 하천성의 힘이 자신을 아득하게 넘어섰다는 걸 그 한 번만으로 깨달은 것이다.

"어, 어떻게... 분명히 피오나 언니가 천성이 널 죽였다고."

"죽여? 누가 날 죽여?"

당황한 니아의 말에 하천성은 진심으로 의문을 표했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을 죽일 수 있냐는 듯 오만스러운 태도였지만, 지금 모습만 보면 그가 진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니아의 두 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느꼈던 무력감과 비통함 때문이 아닌, 하천성이 살아 있음에 감사를 담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깊은 안도감이 그녀를 장악했다.

너무나도 급격한 감정 변화는 때론 사람을 빠르게 변화하게 한다.

하천성은 몰랐다.

이 시점부터 니아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건지.

니아는 숨을 가다듬으며 하천성을 바라보았다.

신경질적이지만 자유롭게 사는 그의 모습에서 니아는 가슴속 고동을 느꼈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한 번 느낀 강렬한 감정을 잊지 못한다.

하천성은 그런 니아의 눈동자에서 한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무언가 잘못된 버튼을 누른 것 같은 느낌이 얼핏 들었다.

하천성은 서둘러 분위기를 반전시킬 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네가 마법과에 넣어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어, 응, 그러니까."

멍하니 하천성을 보던 니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허둥지둥거렸다.

니아에게서 순식간에 위화감이 사라지자 하천성은 혀를 가볍게 찼다.

'착각이었나?'

애초에 이미 심문을 통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알고 있다.

질문은 큰 의미가 없었다.

"가만있어."

니아 앞으로 다가온 하천성은 그녀에게 채워진 수갑을 쥐었다.

그 순간 파삭하고 수갑이 부서져 내렸다.

오러를 조금 일으킨 것만으로 마력 수갑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멀리서 주저앉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피오나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작해야 이제 마법을 각성한 니아라고 하더라도 만약을 대비해 여러 가지 마법을 걸어 둔 수갑이었던 것이다.

저 수갑은 일개 민간 마법사가 풀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왕궁에 고용된 마법사들도 저리 쉽게 풀지는 못할 텐데.

"다쳤냐?"

"...응, 조금."

"손 줘."

니아의 손을 잡은 하천성은 포션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목 위에 뿌려 주었다.

그러자 손목이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고, 니아는 상처가 낫자 그의 손을 갑자기 붙잡았다.

"나 어디 안 간다."

그녀의 불안한 두 눈동자를 보고 하천성이 말하자, 니아는 조심히 손을 놓았다.

"고마워."

"그래, 그럼 가자. 마법과에 등록하러."

볼 일은 다 봤다는 양 하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피오나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입구 앞을 양팔을 벌려 막고는 니아와 하천성을 노려보았다.

"멈춰. 니아를 이렇게는 못 보내. 너희 둘 다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고 있어. 나간다면 또 5년이나 벌어졌던 왕위 다툼이 다시 시작될 거라고! 니아! 너 때문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지 알아?! 나야 이 정도 선에서 끝났다지만, 이 뒤는? 너는 물론이고 네 옆에 있는 그 남자까지 똑같이 노려질 거야!"

그 말에 니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자신 때문에 누군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특히 은인인 하천성만큼은.

오늘 같은 일이 또 없을 리가 없다.

피오나의 말대로 이보다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하다.

니아가 하천성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자, 그는 무덤덤하게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있었다.

생판 남 일이라는 양 구는 하천성을 보고 피오나가 입을 쩌억 벌릴 동안 그는 태연하게 파낸 귀지를 후 불었다.

"어쩌라고."

"너, 너 세상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삿대질하지 마라. 부러트려 버리기 전에."

피오라는 하천성을 가리키던 검지를 슬쩍 접었다.

그라면 진짜 부러트릴 것 같았다.

"그리고 뭐든 오라 해. 내가 자는 사이 공격해도 날 상처조차 못 입힐 테니까. 애초에 나 건드리면 엿 되는 건 너희들이야."

"오만도 정도껏 부려야지!"

씩씩거리는 피오나를 두고 하천성은 니아를 돌아보았다.

"니아, 너도 네가 결정해라."

하천성은 니아에게 결정권을 주었다.

이 밖을 나가는 것은 그녀가 해야 할 일.

자신이 요구할 일이 아니라는 양 하천성이 니아의 말을 기다리자, 그녀는 양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 말대로다.

"나는."

니아는 피오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내 삶은 내가 살 거야."

아까 했던 말이다.

그러나 이전보다 훨씬 더 진심이 담긴 그 말에 피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 니아를 막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하천성 탓에 그녀는 엄두가 안 났다.

니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막았던 피오나를 지나쳐 스스로 방 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피오나는 쓴 물을 삼켰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왜 저 아이를 돕는 거야? 혹시 판토니마 공작가의 사주라도 받았어?"

그 말에 하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를 보고 피오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일까,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확답은 내리지 못하지만, 그가 니아의 곁에 있는 사실은 확실히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 사실을 알아내서 그를 니아 곁에서 떨어트려 놔야 한다고 그녀는 결심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가 하천성이 원하던 것이 스텔라 아카데미 졸업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녀는 그걸 알아도 믿지 못했으리라.

"당신 후회할 거야."

"딱히."

이런 거로 후회할 일은 없다는 양 태연히 대답한 그가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피오나는 짜증스레 바닥을 쾅쾅 발로 내려쳤다.

불 보듯 뻔히 일어날 왕권 싸움이 닥쳐오리란 것에 분함을 토해내며.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겠지.

스텔라 왕가의 막내 공주 스텔라 니아가 오랜 병에서 쾌유하고 당당히 마법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새로운 왕위 후보가 등장했다는 것 또한.

* * *

"니아."

감금당하다 저택에서 빠져나온 니아와 함께 거리를 거닐던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녀석은 밖에 나오자마자 소란을 피하고자 반지를 이용해 남자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나는 용천성의 용포를 만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앞으로 이거 입고 다녀라."

"이게 뭔데?"

"마법 아티팩트, 널 공격하면 지켜 줄 거다."

그 말에 니아는 조심히 얇은 교복 반 팔 위로 용천성의 용포를 여몄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나한테 심문을 당했던 교사 녀석이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던 건 아니었기에 니아를 찾느라 이곳저곳 들쑤시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던 탓이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도심 거리 수풀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던 니아는 갑자기 걷던 발걸음을 멈췄다.

"천성아, 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쓸데없는 소리 하면 대답 안 한다."

"중요한 거야. 내 마법을 깨워 준 것은 그렇다 쳐. 그래도 이렇게까지 도울 필요는 없지 않아?"

"네가 마법과에 넣어 준다고 했으니 그런 건데, 헛소리냐."

니아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반지를 빼고 있었다.

거리를 빛내기 시작한 가로등이 그녀의 눈같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너라면 마법과에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잖아. 내 도움 없이도."

니아의 두 눈동자는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피오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무언가 의도하고 자신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은 거 같다.

아까 내가 느꼈던 위화감은 그녀의 그런 불안감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오히려 내가 물어보자. 왜 뭐든지 의미 부여를 하려는 거냐?"

"그건."

"너 내가 본관에 갔을 때 따라왔지. 그때 왜 따라왔냐?"

"그야 걱정되어서."

"그렇담 이 상황도 똑같은 상황 아니냐?"

"...날 걱정해서?"

아니, 당연히 층 클리어를 위해서지.

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나쁜 남자라고 비난합니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남 보기 부끄럽다고 비난합니다.]

이것들이 왜 자기들이 난리야.

['서릿발의 고양이'가 뭐 어떠냐며 꼬리를 살랑거립니다.]

['돌원숭이'가 참가자로서 잘한 거 아니냐며 코를 후벼 팝니다.]

이번엔 다른 쪽 성좌들이 난리였다.

['이매망량의 속앓이' 가 그딴 거 필요 없고 독각귀나 찾아보라며 재촉합니다.]

['세상을 몸으로 두르는 뱀'이 혀를 날름거립니다.]

중립인 녀석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162화

내가 성좌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실소를 내뱉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남이 날 걱정해 준 건 어머니 이후로는 처음이라서."

니아의 입가에 꽃이 만개하듯 서서히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것마저도 큰 행복이라는 양.

"좋아. 그럼 난 약속 지켜야지. 피오나 언니가 수를 부리기 전에 먼저 교장 선생님을 만나야겠어."

"어머니한테 알리러 간다더니, 그건 끝난 거냐?"

"응, 제일 먼저 달려갔어. 나오던 도중에 피오나 언니께 붙잡혀 버리긴 했지만 말이야. 왕궁을 다시 찾은 내가 수상해서 뒤를 밟았던 거겠지."

니아는 앞으로도 그런 일이 많을 거라는 양 씁쓸히 웃었다.

"이제야 겨우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정작 나는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하네."

용천성의 용포를 여미며 니아는 자그마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 강해져야겠어. 마법을 잔뜩 익혀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강해질 거야."

그건 그리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녀석에게 내재된 재능은 웬만한 사람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으니까.

"천성이 너만큼 강해지면 나도 자유롭게 살 수 있겠지?"

"그건 힘들걸. 나만큼 강해질 방법은 없거든."

내 잘난 척에도 니아는 기쁜 듯 웃었다.

"...그리고 천성이 널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할 거야."

마지막 니아의 중얼거림이 얼핏 들렸지만, 나는 못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녀석은 내가 자기 때문에 죽은 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니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지금은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겠지.

우리는 그렇게 길거리를 지나 학교로 돌아왔다.

반지를 뺀 니아 녀석은 용천성의 용포와 함께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녀의 뒤를 내가 얌전히 따라가자 야간 수업을 마친 마법과 학생 몇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니아와 나의 마법학과 교복을 보곤 두 눈을 부라렸으나, 곧 멈칫하였다.

니아의 백색 머리카락은 스텔라 왕가 핏줄만이 가진 머리카락이었다.

그녀가 누군지는 몰라도 스텔라 왕가와 관련된 사람인 것을 눈치챈 것이다.

"누구야? 본 적 없는 사람인데."

"모르겠어. 스텔라 왕가에 우리 나이대랑 비슷한 사람이 있었던가."

"있다고 해도 왜 왕가 사람이 마법학과 옷 따위를 입고 있는 거야?"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지나쳐 교장실 앞으로 다가온 니아는 손을 들어 올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전에 순박했던 모습은 없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묻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텔라 니아로서 학교를 찾은 것이기에 그에 걸맞게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똑똑.

짧게 두 번 노크하자 잠시 후, 교장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안을 힐끔 보니 거기에는 저번에 보았던 비서와 함께 교장이 있었다.

올백으로 넘긴 검은색 머리카락, 미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는 얼굴.

190cm는 가볍게 될 법한 키를 가진 그는 비서가 냄새를 맡았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내가 살짝 극혐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자 비서가 나를 째릿 하고 노려보았다.

"스텔라 니아 공주님이 직접 저희 학교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아가 이미 교장실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우리를 맞이한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신지요."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아는 덤덤하게 그의 말을 받고는 책상 앞으로 걸어와 섰다.

나도 그 옆에 따라 섰지만, 교장은 내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하였다.

"보아하니 저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으셔서 오셨겠군요."

"네, 절 마법과에 넣어 주셨으면 해서요."

"하하, 이거 참."

니아의 요구에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양 웃었다.

"니아 공주님,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법과라니.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더니 의지가 샘솟아서요. 스텔라 왕가는 다들 스텔라 아카데미를 나왔으니 저도 당연히 해야죠."

"그렇게까지 왕가를 생각하신다면 지금 선택이 어떤 의미이신지도 잘 아실 텐데요."

왕가의 왕위 싸움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는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니아 공주님, 왕권의 혼란은 나라 전체에 혼란을 퍼트립니다. 이 선택 하나로 세상에 퍼질 혼란을 감당하실 수 있습니까?"

니아는 순진무구하게 두 눈동자를 깜빡였다.

마치 그 사실이 어쨌냐는 양.

"혼란이고 뭐고 그게 뭔 상관이죠? 교장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훈수를 받을 위치였나요."

아이러니하게도 니아는 피오나 덕분에 결심을 굳혔다.

자신의 앞을 어느 누가 막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겠다고.

"교장 선생님과 저는 처음 본 사이지 않나요? 제 삶은 제가 살아가요. 남에게 명령받지 않고요. 그리고 저는 부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통보죠."

그러면서 그녀는 교장이 앉아 있던 탁자를 양손으로 콰앙 내려쳤다.

새파란 두 눈동자가 교장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저를 마법과에 넣으세요. 이야기는 끝입니다. 넣지 않으시겠다고 하셔도 방법이 있다는 건 아실 거예요. 전 스텔라 왕가의 막내 공주 스텔라 니아니까요."

멈추지 않는 전차처럼 거침없는 니아의 두 눈동자는 이글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두 눈동자에 언뜻 광기가 느껴졌다.

그런 그녀와 마주한 교장은 잠시 동안 침묵하더니 곧 입가를 가린 채 조그맣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거 참, 조신한 공주님이신 줄 알았는데. 패기가 넘치시는 분이셨군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 의지는 있어야 니아 공주님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있겠죠."

그리 말한 교장은 종이 한 장을 마법으로 책상에 가져왔다.

이어서 그 위로 만년필 하나가 저절로 글자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고, 모든 글자가 쓰였을 때 그는 도장 하나를 찍었다.

"등록되었습니다. 내일부터 니아 공주님은 마법과로 등교하시게 될 겁니다."

"고마워요. 아, 그리고 제 옆에 있는 분도 같이 마법과로 전과시켜 주세요. 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 서요."

"일이 많아지는군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니아의 당찬 미소는 그야말로 오만한 공주님이었다.

"안됩니다."

이야기가 잘 풀리는 도중 갑자기 비서가 대신 입을 열었다.

교장의 대답이 오기도 전에 그녀가 막자 모두가 그녀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하천성 학생은 원래도 본래 마법과 편입 시험을 치르기로 했지만, 시험 교사에게 상해 입히고 도주했습니다. 그 교사는 지금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죠. 그런 그를 마법과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퇴학 처리는 물론 감옥에 보내야죠"

이것 봐라.

교장 옷 냄새를 맡는 변태 행각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나를 멀리 보내고 싶다 이거지.

"처, 천성아?"

나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니아가 불안한 듯 날 바라보았다.

물론 내가 그런 게 맞긴 하는데.

"전 시험 교사가 자신을 쓰러트리면 시험 통과를 시켜 주겠다 하여 한 것밖에 없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견된 교사 상태가 너무 심각했습니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다친 사람을 그렇게 버리고 가나요?"

보통 학생이라면 이런 질문에 당황할 테지만 나는 회귀자다.

이미 수많은 이야기를 보아 온 나는 얼굴 위로 단단한 가면을 덧씌웠다.

"무슨 소리죠? 선생님은 분명 자기 발로 돌아가겠다고 하셨는데요."

어린애로 돌아간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는 양 내 얼굴에 머물던 적의는 사라지고 걱정이 깃들었다.

"그게 무슨...?"

"아무래도 저한테 괜찮은 척을 하셨던 모양이군요. 선생님이니 학생한테 티 내고 싶지 않으셨겠죠. 곤란하네요. 다시 찾아가서 사죄드리겠습니다."

물론 간다면 한 번 더 조질 생각이지만.

하지만 내 속은 모르는 비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내 속내를 파내고자 했지만, 내 얼굴에는 전혀 의심할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하게."

교장이 입을 열었다.

질타하는 눈에 비서는 눈을 내리깔았고, 교장은 나를 돌아보았다.

"교사를 이겼다면 마법과 학생으로서의 재능은 충분히 보여 준 게지. 시험에 전력을 다한 학생을 그리 취급해서 쓰나."

교장은 인자한 미소를 띄웠다.

"걱정하지 말게. 하천성 학생은 문제없이 마법과에 들어갈 수 있을 걸세."

그 대답을 듣고 니아는 보이지 않게 안도하였다.

혹여나 내가 마법과에 못 들어 갈까 봐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럼 저는 이만."

우리 둘 다 마법과에 들어갈 수 있단 확답을 받자, 니아는 한마디 인사말과 함께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곤 들어 왔을 때와 같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교장실 밖을 나왔고, 나도 그녀를 뒤따라 방을 나섰다.

그러던 순간 니아가 내 옷깃을 잡았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자, 니아는 다리라도 풀린 듯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 나 잘한 거지?"

"완전히 악역 공주님이던데."

"놀리지 마. 이런 건 처음이란 말이야. 천성이 네가 옆에 없었으면 나 분명 아무 말도 못 했을 거야."

그래도 곁에 있어 준 게 나쁘지는 않았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은 이번 층의 열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층의 클리어와 이어질지 모른다.

그렇기에 빠른 클리어를 위해서라도 니아는 열심히 층의 이야기를 진행시켜 주어야만 했다.

"마법과에 들어갔으니 된 거잖아."

"응, 그렇겠지."

어딘가 찝찝한 듯하였지만, 니아는 그래도 한결 편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다리에 힘주는 것이 힘든 모양인지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오늘 이래저래 일이 많았던 탓에 그녀의 눈에 짙은 피로감이 엿보였다.

"이걸로 첫걸음은 잘 뗀 거겠지?"

"아니, 아마 한참 남았을걸."

나는 앞을 직시했다.

그곳에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자들이 걸어오고 있었고, 니아는 그들을 아는 눈치인지 내 뒤로 살며시 물러섰다.

교장과 마주했을 때와 다르게 니아는 공주로서가 아닌 약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뻔하다.

피오나 공주와 교장이 말했던 대로 왕위를 노리는 자들 쪽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받은 핍박이 자연스레 그녀를 위축시킨 거겠지.

나는 확신한다.

니아는 확실하게 이번 층의 클리어를 위한 열쇠다.

그렇다면 니아가 나아가는 길에 층을 클리어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졸업장을 따려고 하면 얼마나 걸릴지 장담도 못 하고.'

이참에 이 녀석을 왕으로 만들어 버릴까.

왕 정도 되면 아카데미 졸업장 정도야 문제없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니아를 이런 녀석들에게 기죽게 해 두어서는 안 되었다.

"비켜라. 어딜 잡것이."

그 순간 내 앞에 다가온 녀석들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니아 녀석을 뒤로 피신시켰기 때문이다.

'이거, 그거군.'

니아가 나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일부러 나를 짓눌러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다.

얕은수다.

뒤에서 욱한 표정으로 니아가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신 내 몸에서 딱 한 명만을 노리고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익?!"

흘러나온 오러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의 형상을 갖췄다.

드러난 이빨은 순식간에 그의 목을 물어뜯는 환상이 되었다.

내 앞에 서 있던 자는 비명을 내지르며 자신의 목을 감싸 쥔 채 주저앉았다.

내 눈동자를 피해 눈을 내리깐 그는 벌벌 떨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자들이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자네 왜 그러나?"

"헛디디기라도 했어?"

나머지 두 사람이 그의 동태를 살피는 동안에도 나는 오러를 풀지 않고 있었다.

'한 놈 본보기로 완전히 정신을 박살 내 둘까.'

163화

격의 차이가 너무 나기에 내가 오러를 본격적으로 조절하자, 다른 이들은 그 기운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을 때 나는 등 뒤를 잡는 손길을 느끼곤 오러를 풀었다.

니아도 내가 뭘 한지는 몰라도 이 이상 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한순간에 폭삭 늙은 그는 몸을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네, 네가 한 거냐!"

이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 한 명이 외치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 갑자기 넘어진 건 그쪽이잖아."

"그건...."

둘도 두 눈으로 보았다.

놈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자기 혼자 넘어진 것을.

게다가 그들은 딱 보기에도 고위 마법사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내가 마법을 썼다고 생각할 리 없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전혀 없다.

한 명은 이미 정신이 맛이 간 듯 망가져 버리자, 나는 가볍게 웃음 지어 보였다.

그들의 눈에 악마가 비춰 보였다.

"니아, 어쩔까?"

"...천성아, 어차피 이야기해야 했어."

그녀는 겨우 정신을 되잡고 내 뒤에서 걸어 나왔다.

굳이 나를 말리지 않았던 건 그녀도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 판단한 거겠지.

순진무구한 공주님이긴 하지만, 앞에서 보여 준 행동도 그렇고 상황 판단 만큼은 훌륭했다.

"무슨 볼일이죠? 판토니마 가의 사람들이."

니아가 그들에게 물음을 던지자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주님을 데리러 판토니마에서 왔습니다. 따라와 주시죠."

"싫습니다만."

"예, 예?"

너무도 당돌히 거절했기 때문일까, 니아의 대답을 듣고 남성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서서히 니아의 얼굴에 오만한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눈빛이 곤두섰다.

니아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녀의 몸에서 오러가 흘러나왔다.

피오나와의 일 이후 니아는 자연스럽게 오러를 쓰는 법을 익혀 나가고 있었다.

오러는 그녀 곧 자신. 그렇게 니아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 중이었다.

사냥을 준비하는 표범 같은 형상이 니아에게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가에 오만함이 완전히 자리 잡을 때쯤, 니아는 주위에 스산한 기운을 감돌게 했다.

그리고 그 포스가 왜인지 모르게 익숙했기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 녀석 날 따라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거라면 아직 한참 부족하긴 했다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모습이었다.

"제가 왜 당신들을 따라가죠? 저에게 용무가 있으면 직접 오라고 하세요."

"무슨! 공작님의 명입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지만, 조부의 명을 거역할 생각입니까!"

"제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얼굴 한 번 안 비춘 분이 조부라.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제게 이런 식으로 막대할 수 있는 분은 세상에 제 아버지 한 분밖에 없을 텐데요."

빙그레 웃은 니아의 얼굴에 살기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어느 앞이라고 자신을 이렇게 대하냐는 듯 도도한 태도를 하자 오히려 상대 쪽이 기죽기 시작했다.

어린 공주라고 얕봤다가 주도권이 완전히 빼앗긴 탓에 상황을 따라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세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스텔라 왕가가 우습나 봅니다. 당신들이 늘 외치는 귀족의 권위보다 높은 왕가의 권위를 잊은 모양이네요."

쿠웅, 니아가 바닥을 내려찍었다.

표독스러운 눈매가 더더욱 날카로워지자, 상대가 기죽어 눈을 피했다.

"저에게 할 말이 있다면 직접 오라고 하세요. 제 조부라 한들 그는 귀족, 저는 왕족입니다. 잊지 마세요."

"이, 이."

자신이 섬기는 공작이 모욕 당했다는 것에 그들은 모멸감을 느끼는 듯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러나 자신보다 높은 위치인 니아를 상대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돌아섰다.

부리나케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니아가 이마를 감싸며 기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만큼은 더 이상 이런 일에 엮이지 않고 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가자. 천성아. 나 더 이상은 무리야."

그리고 그런 니아의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동안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 하나 잊은 모양인데.

"기숙사 배정이나 빨리 받지 그러냐. 너 마법학 학생 기숙사에서 머물고 있었잖아."

"아."

니아는 교장실을 다시 들어가야만 했다.

녀석이 기숙사 배정과 관련해 교장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그때 보았던 벽을 다시 찾았다.

여러 일이 자꾸 겹쳐서 생긴 탓에 첫날 이후 쭉 확인 못 했던 내게 이제야 벽을 살필 시간이 났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생겼다.

'없다.'

벽 너머에 있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눈치챈 나는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벽 일부를 가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가 보였다.

텅 빈 광장, 그리고 그 광장의 중심에 있는 수백 개의 사슬.

봉인 마법으로 만들어진 사슬들을 보고 나는 눈가를 짚었다.

저번에 걸려 있던 방범 마법은 해제해 두었지만 내부에 다른 봉인 마법 같은 건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즉, 이곳에 있던 녀석은 내가 니아에게 시간을 할애할 동안 봉인 마법을 풀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계속 엇갈리더니.'

결국 이렇게 됐나.

내부에 있는 녀석은 이 층에서 세계관 최강급인 존재였다.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성좌 녀석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장애물 같은데.'

굳게 봉인되어 있던 걸 보아하니 꽤 악랄한 짓을 벌인 모양이고, 그렇담 반드시 무언가 사건이 터지겠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둘까. 주의는 하겠지만, 결국 이야기 흐름일 게 뻔하고.'

악당이라면 쓰러트려 주고 대가로 졸업장을 받을 수도 있을 거다.

나는 일단 흐름에 맡기자고 생각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뒤를 힐끔 보니 벽은 저절로 수복되고 있었다.

학교에 자체 수복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거겠지.

밖으로 나와 오러 감지로 살펴보아도 잡히는 게 없다.

보아하니 한참 전에 도주해 버린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후를 도모하기로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 시간을 이용해 드디어 도서관을 찾을 수 있었다.

니아를 통해 듣기로, 전과 후 마법과에서 들을 첫 수업은 1시 30분부터.

점심시간 이후 인 탓에 나는 느긋하게 도서관의 책들을 살필 시간이 생긴 것이다.

'세계관 파악이 늦어도 너무 늦었지.'

나는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몇 가지 꺼내 들었다.

하나하나 조사하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책을 통해 알아내는 게 세계관 파악하기에는 좋았다.

'니아 녀석은 일이 있다고 했으니. 이제야 좀 혼자서 움직이기 편하겠네.'

책장을 사락사락 넘기며 나는 세계관 파악을 시작했다.

내용을 읽어 보니 스텔라 왕가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우선 전 세계를 통틀어 왕이라 할 만한 존재가 지배하는 곳은 스텔라 하나뿐이었다.

과거 스텔라 파티가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지켜 내었고, 그 후 스텔라 파티의 이름 아래로 한데 뭉친 인간들은 스텔라를 내세워 단일 국가를 세웠다.

그것이 현재의 스텔라이며, 스텔라 아카데미는 그런 스텔라 파티 멤버들이 다니던 아카데미를 개량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왜 공작가들도 쩔쩔매나 했더니.'

왕가는 스텔라 멤버의 직계 후손이고, 귀족들은 그런 스텔라 멤버들을 도왔던 자들이자 옛 나라 잃은 왕족들의 자손이었다.

스텔라 파티가 죽고 2,0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단 걸 보면 그동안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계급 사회가 심화된 것도 이런 이유구만.'

귀족들의 조상은 스텔라 파티와 함께 세상을 지켜 낸 자들이다.

반면에 평민들은 자기 살고자 도망가기를 바빴던 자들이었으니, 왕족과 귀족들은 2,000년 동안이나 그걸 들먹이며 그들을 핍박하고 있는 거였다.

'귀찮네.'

나도 여기서는 평민 취급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귀족은 과거의 명예에 죽고 사는 자들이라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할 게 뻔했다.

'삼류 악당극은 그만 좀 보고 싶은데.'

책을 대강 다 읽고 덮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정면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올랐냐."

"응."

거기에 있는 것은 검왕이었다.

내가 층을 클리어하면서 그녀 또한 같이 클리어되었을 테니, 검왕이 내 뒤를 따라 층을 오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10대 중후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앳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의 이목을 끄는 외모였다.

"당신도 참 발 빠르네. 벌써 스텔라 막내 공주랑 손잡았던데."

"회귀자들이면 다 똑같지."

그리 말하며 나는 검왕을 흘깃 보았다.

녀석의 옷에는 방금 전 보았던 귀족 공작 가문 중 하나인 홍등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니아한테 붙을 동안 녀석은 홍등가에 붙은 거겠지.

'홍등가는 첫째 왕자 세력.'

니아가 왕위를 노린다면 검왕과는 분명 적이 되리라.

"나락은."

"그 성격 잘 알잖아."

또 어딜 가서 딴짓하고 있나.

"그건 그렇고 당신 잘도 마법과에 들어왔네. 당신 마법 못 쓰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본인도 검만 쓰는 주제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그녀를 보고 있자 검왕은 미소를 지었다.

"난 오러를 마력으로 바꿔서 사용하는 법을 마술사에게 배웠었거든. 게다가 최상위 성좌 찬스 좀 썼지."

예상은 했다.

"당신은 성좌 덕은 봤을 거 같지 않고."

당연하지.

성좌 녀석들이 나를 도울 리가 있나.

민폐만 끼치지.

"오러를 안 쓰고 힘만 쓰니 마법이라 착각하더군."

"...당신도 참."

잘도 그런 거로 속였다며 검왕은 어이없어했다.

"천성아?"

어딘가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힐끗 시선을 돌린 장소에는 니아가 서 있었다.

눈이 연상 되는 백색의 머리카락.

마법과를 증명하는 화려한 느낌의 옷.

그리고 스텔라 공주로서 권위를 상징하고자 찬 값 비싸 보이는 목걸이.

내가 준 용포까지 입고 있는 그녀는 이제 호니아의 모습이 아닌 진짜 자신을 되찾은 듯하였다.

"그 사람은."

검왕이 홍등가의 문양을 옷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인지 니아는 검왕을 경계했다.

홍등가는 첫째 왕자의 세력이니 그쪽에서 수를 쓰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 걱정하지 마요. 저는 하천성과는 홍등가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 사이여서 잠깐 얼굴 보러 온 거거든요."

"내가 왜 너랑 친구 사이냐."

검왕이 째릿 노려봤지만, 나는 무시했다.

"반응을 보니 친구 사이는 맞나 보네요."

니아는 조금 안심한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슬쩍 내 옆에 다가와 앉는 게 왠지 검왕을 경계하는 이유에 다른 의미가 더 있는 듯하였다.

그런 니아를 귀엽다는 양 미소 지은 검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또 봐. 하천성."

"볼 생각 없다."

"또 까칠하게 굴기는. 어차피 나도 마법과 학생으로 들어갈 예정이야. 싫어도 얼마 안 가 보게 돼 있어."

회귀자답게 녀석도 벌써 마법과에 들어 올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몸을 돌리며 내게 손을 들어 보인 검왕이 떠나가자 니아는 그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예쁜 사람이었지."

예쁘다라.

부정은 하지 않는다.

검왕의 미모만큼은 시대를 불문하고 칭송받을 만했으니까.

하지만 검왕을 아는 나는 그녀의 외모는 중요치 않았다.

'몇 회차를 반복하면서도 아직도 처음과 같은 정신력.'

내가 매일같이 착해 빠진 성격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검왕의 정신력 덕분이었다.

크라운 로드의 최전선만큼 사람의 정신을 갉아 먹는 것도 없으니까.

"천성이 너도 예쁜 사람이 좋지?"

나는 니아를 돌아보았다.

"너 나한테 마음 생겼냐?"

니아의 어깨가 굳었다.

164화

그녀의 두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이해는 한다.

10대의 어린아이들은 첫눈에도 쉽게 사랑에 빠지곤 하니까.

게다가 니아의 경우, 나는 두 번이나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계기로서는 충분하다면 충분했다.

니아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질문은 아니지 않아?"

"돌아가는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그리 말하면서 나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안 해."

"뭐든 말해야 아는 것도 아니다."

책을 원래 장소로 되돌리자 니아가 말없이 내 옆을 따라왔다.

그녀는 그러면서 내 옷 끝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럼 그 사람은 천성이 너한테 뭔데?"

"누구."

"아까 본 사람."

검왕을 묻는 말에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검지와 엄지로 니아의 이마 정중앙에 딱밤을 날려 주었다.

니아가 울상을 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소유욕을 나한테 드러내지 마. 그 녀석이랑 나랑 무슨 관계든 네가 한 번 품은 질투심으로 막연하게 상상할 게 뻔히 보이니까."

"...나 아직 좋아한다고 말 안 했다니까."

니아는 투정 부리듯 바닥을 툭툭 걷어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자벨라 녀석도 이렇게 대놓고 드러났다면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천성이 넌 날 걱정해서 돕는다고 말해 줬잖아."

나는 니아를 돌아보았다.

남들에게 사랑받고 자라오지 못했기 때문인지 니아는 내게 무언가 계속 확인하고 싶어 했다.

당차게 살아왔다 한들 어린애다.

내면에 상처를 숨기기에는 아직 서툴렀다.

나는 니아의 머리 위에 툭 하니 손을 올렸다.

"그래, 걱정하고 있어. 그것도 꽤."

내 말을 듣고 이제는 한계치가 온 건지, 니아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해 버렸다.

마지막에는 정말 얼굴이 터질 것 같았기에 나는 갈 곳 잃은 손을 내 머리를 긁적였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당신에게 그런 짓 좀 하지 말라고 비난합니다.]

그야 어쩔 수 없다.

연지 녀석 때문인지, 10대 꼬마 애들한테는 자꾸 이렇게 대하게 되었으니까.

'애초에 그 이전에 회귀자는 어쩔 수가 없다고.'

회귀자는 육체적으로는 어리나, 대부분 정신적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 보니 10대 애들은 어려도 너무 어렸다.

'세대 차이 수준을 넘었다고.'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나는 비적비적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고 세계관에 대해 대강 파악을 한 나는 전과하기로 한 마법과로 걸음을 옮겼다.

전과 달리 마법과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본관 건물을 다녀도 이제는 시비를 거는 녀석들이 없었다.

배정받은 마법과 앞에 도착하여 문을 열자 한순간 시선이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누구야? 신입?"

수군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온 나는 빈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창가 끝자리. 그 자리에 도착한 후, 혹시 몰라 책상 서랍을 힐끔 살펴봤으나 들어 있는 건 없었다.

내가 의자에 털썩 앉자 아이들 몇 명이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 이름은?"

새로 온 학생에게 관심 있는 모양인지 그들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묻자, 나는 귀찮아하며 대답했다.

"하천성."

내 이름을 듣고 학생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들어 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아이들은 물끄러미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곧 셋 다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흘겨보았다.

"마법과에 갑자기 신입 왔다 했더니 웬 듣보잡이야."

"너 무슨 빽으로 들어 왔어? 평민 따위가."

그들의 비아냥거림에 나는 지겨운 표정을 지었다.

예상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너, 너!"

그러던 중 갑자기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웬 남자애 하나가 소리치자, 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투였기에 내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그는 이를 까득 부딪쳤다.

"이리스, 너 이 녀석 알아?"

"뭐? 아, 아니, 몰라."

나를 아는 눈치인데, 이놈이 누구더라.

'아, 그놈인가.'

본관을 살펴보던 첫날 나한테 바람 마법이라고 속인 주먹에 얻어맞은 그 녀석.

얼굴은 기억이 안 났지만, 이리스라는 이름 덕에 생각났다.

"레피드 이리스, 나를 잊다니 섭섭한걸."

"뭐야, 이리스 이 녀석은 너 아는 눈치인데."

히죽 웃으며 아는 체하는 나의 태도에 아이들이 반응했다.

평민인 나에게 얻어맞은 이리스이니, 들통났다간 애들에게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모른다.

어느 집단이나 얕보이면 끝이니까.

"무슨 사이냐? 이리스."

게다가 이리스는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 높은 위치도 아닌 듯하였다.

말문이 막힌 이리스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자, 아이들 사이에서 슬그머니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야, 애들아! 대박, 대박 사건!"

그 순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속보라는 양 뛰어온 학생 한 명이 오두방정을 떨며 애들 시선을 모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몰아붙이던 아이들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이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 일인데 이렇게 난리야?"

애들 몇 명이 그에게 물음을 던지자, 잠시 숨을 몰아쉬던 그는 씨익 하니 웃었다.

"무려 스텔라 왕가 막내 공주님께서 오늘 마법과로 오신다더라!"

"공주님?!"

"진짜 특보잖아. 진짜야?"

"내가 두 눈으로 봤다니까. 마법과 교무실에 백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애가 있었어. 선생님도 스텔라 니아 님이라고 극진히 대하고!"

"미쳤다. 왕가 연줄이 생길 기회잖아!"

아이들의 소란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니아 이야기로 난리였다.

제3 자의 입장으로 내가 물끄러미 그들을 보고 있자, 갑자기 내 반대편 자리의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니아 님이 오면 내 옆자리다."

꽤 짜증 나게 잘생긴 녀석이 금발을 반짝거리며 외쳤다.

그의 말 한마디에 아이들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그렇지. 그럼 말고."

"공주님 같은 분은 바할 렉시스 님 옆 말고는 앉기도 싫을 거야."

바할이라는 이름은 분명 공작가 중 하나였다.

저 녀석은 바할가의 자제로 보아하니 마법과의 우두머리 정도는 되어 보였다.

그의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는 따분한 표정이 되었다.

이럴 때 사람은 참 볼품없어 보인다.

"오랜만이야."

그런 도중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는 저번에 니아를 도와주었던 레미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전히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라면 분명 마법과에 올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운이 좋았지."

"운이라."

그녀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보았던 드센 모습은 아무래도 귀족 애들 사이에서 버티기 위한 방어책인 듯하였다.

이게 그녀의 진짜 모습이겠지.

"그래도 썩은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네."

"동감이야. 나 마법과에서 평민 동기를 만난 건 처음이거든. 잘 지내 보자."

그녀가 손을 내밀자, 나도 따라 내밀어 맞잡아 주었다.

"옆자리 비었지. 나 이쪽으로 옮겨도 될까?"

"상관없긴 한데 아마 다른 녀석이 올 거야."

"다른 사람?"

레미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켜."

그런 순간 레미를 밀치며 이리스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은 모욕을 당했다는 양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나는 흥미 없는 눈초리로 그를 직시했다.

"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네가 나한테 쳐맞은 거?"

"닥치라고! 윽."

이리스는 큰소리를 내다 혹여나 아이들이 다시 자신에게 주목받을까 봐 눈치를 살폈다.

옆에 있던 레미만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복도 쪽에서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 보폭으로 천천히 이어진 구두 굽 소리가 아이들 시선을 그쪽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누군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륵.

곧 교실 문이 열리고 백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첫 마법과라고 그새 꾸미고 온 듯 머리칼을 반 묶음으로 왕관처럼 땋은 니아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내가 그때 주었던 용천성의 용포가 고급스럽게 보일 정도로 기품이 흘러나왔다.

원래도 예쁜 얼굴이었던 탓에 아이들이 넋 놓고 그녀를 보고 있자, 니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스텔라 니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여러분."

니아는 모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했다.

그야말로 공주라고 할 수 있는 포스에 아이들이 어벙해 있을 때 렉시스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니아 앞으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스텔라 니아님, 바할 렉시스라고 합니다."

니아가 자신에게 시선을 두자, 그는 귀족식 인사를 그녀에게 올리며 이름을 말했다.

"네, 반가워요."

너무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았기 때문일까, 렉시스는 살짝 당황한 반응이었다.

그의 이름을 듣고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렉시스는 공주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는 걸 자각한 듯 서둘러 표정을 고쳤다.

"니아 님은 오늘 마법과의 첫 입학이시니, 니아 님을 제가 옆에서 돕고자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네, 저야 나쁘진 않죠."

니아가 긍정을 보이자, 렉시스는 기세를 잡았다는 양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리로 오시죠. 제가 학우 소개와 함께 니아 님을 옆에서 돕겠습니다."

"아, 그건 됐어요."

"예?"

니아의 거절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 듯 렉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는 동안 니아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지나쳐 이쪽으로 걸어왔다.

"니, 니아 공주님."

그러자 자기한테 다가온 거라고 착각한 것인지 이리스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얼굴까지 붉히는 그의 행동에 주위가 수군거릴 때쯤 니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좀 비켜 주실래요."

"네? 네!"

자신에게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리스가 부끄러워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모두가 의문을 가졌을 때 니아는 그대로 내 옆자리에 치마를 살포시 정리하며 앉았다.

"공주님 다됐네."

"원래 공주였어."

그랬긴 하지.

"그런 기품 있어 보이는 모습은 누구한테 배운 거냐?"

"어머니한테서. 그래도 나도 공주였으니까."

훌륭한 어머니를 뒀군.

"뭐, 뭐야. 왜 공주님이."

"뭐지. 저 녀석 공주님의 종자라도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아."

아이들이 경악하고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나, 니아에게 차마 의문을 물을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이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 갔다.

그러는 사이 나와 니아의 관계를 본 이리스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렉시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때문에 학교생활이 귀찮아졌잖아."

"쌤통이야. 나를 자꾸 놀리니까 그런 거잖아."

딱히 놀린 적도 없다만.

나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주도권을 잡았다는 양 니아는 실실 웃었다.

여기에서라면 그런 태도 못 취하겠지 하는 니아의 반응에 나는 딱밤을 먹여 주려다 말았다.

"...어떻게."

자리를 뜨는 타이밍이 늦었기 때문일까,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레미가 내게 눈짓을 보냈다.

그런 그녀의 눈짓을 눈치챈 듯 니아가 레미를 돌아보자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레미라도 왕족 앞에서까지 당당한 태도를 보이긴 힘든 모양이었다.

"아, 레미 양이죠. 그때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네?"

165화

레미를 알아본 니아의 말에 레미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었다.

그러곤 의문을 해소하고자 나를 바라봤고, 나는 뭘 묻느냐는 듯 무신경하게 손 위에 턱을 괴었다.

"네가 나랑 처음 볼 때 거기 있었잖냐."

"공주님이 거기 있었다고?"

레미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했지만, 떠오르는 건 없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동안 니아가 그녀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고자 반지를 꺼내 놓았다.

"이 반지는 본 기억이 있을까요."

반지를 본 레미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곧 무언가를 깨닫고 눈동자를 서서히 크게 뜨기 시작했다.

"이건."

"기억하시나 보네요."

니아가 미소 짓자 레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때 자신이 구한 사람이 니아였다는 것을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소란이 일어날 테니까요."

"네."

레미는 고개를 열심히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러면서 혹시나 자기가 그 전에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고민하는 듯하였다.

"귀여운 사람이네."

레미가 떠나간 뒤, 니아는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스텔라 왕가의 공주로서 사는 게 이런 느낌인 줄은 몰랐네."

"권력 좀 휘둘러 보니까 재밌냐."

"응, 처음부터 휘둘렀다면 모를까. 기분이 좀 새롭기도 하네."

평생을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탓인지 니아는 웃음 사이로 살며시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과거가 있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아. 적어도 나는 저런 귀족들처럼 되지는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모를 일이지."

괜히 졸부들이 심보가 더 고약한 게 아니다.

사람은 자리의 따라 바뀌는 경우는 옛날부터 더러 있으니까.

이래 보여도 나도 1회차 때에 스스로 돈 벌며 살았기 때문인지 성격이 좀 유순해졌기도 하고.

['서릿발의 고양이'가 유순한 성격의 정의를 모르냐고 묻습니다.]

어쩌라고.

"그 말. 조금 상처받았어. 날 완전히 못 믿는다는 말이잖아."

"그냥 그런 경우도 있단 거야. 난 딱히 네가 그렇게 되든 말든 상관없어. 네가 원한다면 왕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니까."

내 이야기를 농담이라 생각한 걸까, 니아는 쿡쿡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 녀석 아무래도 내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아직 감을 못 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건 괜찮아.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해. 마법과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즐거우니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수업이 시작하고 니아는 누구보다도 즐겁게 마법 수업을 들었다.

잃어 버린 삶을 되찾아 가는 과정은 본디 즐거운 법이다.

없어 보았기에 열심히 하게 되는 것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이 아무리 이걸로 만족한다 해도.'

주위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지.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법과 수업은 애초에 들어 봤자 전혀 도움 안 되는 것들이었기에 자연스레 딴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거 뒤에서 움직이는 걸 파악할 정보 수단이 하나 필요하겠는데.'

나는 이 층에서 쓸 만한 부하의 필요성을 느꼈다.

정보를 모아 줄 그럴 녀석이 필요했다.

그때 마침 이리스의 뒤통수가 눈에 걸렸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이리스가 자기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입가에 서서히 비릿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빙고.'

쓰고 버리기 좋은 녀석을 발견한 내 눈이 먹잇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반달 형태로 휘었다.

이리스는 오한이라도 느끼는지 한 차례 몸을 떨었지만 이미 늦었다.

* * *

레피드 가문. 스텔라 왕국 남작 가문인 그들은 본래 귀족이 아니었지만, 돈으로 어떻게든 몰락한 남작가의 감투를 썼다.

그 탓인지 아직도 그들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천대받는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럴듯한 감투를 백날 써봤자 평민은 평민이라며 귀족들은 손가락질한 것이다.

그 탓인지 레피드 가문의 장남으로 살아온 이지스는 평민들은 막 대하지만, 진짜배기 귀족들에게는 주눅 들어 있었다.

마법과에서 그는 사실상 가장 덜떨어진 취급을 받는다.

그나마 다행히 마법 실력은 나름대로 괜찮아서 레피드 가문은 이지스가 마법으로 대성하여 가문을 일으켜 세워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지스에게 최근 한 가지 큰 문젯거리가 생겼다.

다름 아닌 자기가 그렇게 무시하던 평민에게 마저 마법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레미는 괜찮았다.

그녀는 수석인 렉시스를 제외하면 다른 귀족들도 찍어 누르고 차석을 차지할 정도로 마법 실력이 좋았으니까.

'그래, 저 정도로 실력 좋으면 평민이라도 인정이긴 하지.'

이지스가 보기에도 하루 종일 마법 공부만 하는 레미는 질릴 정도였으니 그녀는 그러려니 했다.

하나, 하천성은 어떤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타나 스텔라 니아를 빽으로 업고 학교에서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비록 그에게 한 번 얻어맞긴 했지만, 그건 그가 마법학을 다니는 수준 낮은 마법사라 판단하여 당한 불의의 습격이었지 제대로 붙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도저히 그에게 먼저 도전장을 내밀 수 없었다.

만약 혹시나 진다면?

만약에라도 애들 앞에서 깨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분명 자신감은 있었지만, 선뜻 나설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저 녀석 너무 재수 없지 않아?"

"평민 주제에 무슨 능력으로 붙은 건지."

"수업 시간에 집중하는 꼴을 못 봤어."

그러는 사이 하천성의 평판은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평민인 이상 좋을 수가 없는 평판이었지만, 니아로 인해 그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더더욱 떨어져 바닥을 뚫다 못해 지하까지 내려갔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조만간 렉시스 님이 조지시겠다고 날 잡고 계셔."

"정말 짓궂은 분이시라니까."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아에게 대놓고 쪽을 당한 렉시스는 그날 이후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니아에게도 열이 받은 것 같긴 했지만, 그보다도 그는 하천성이 더 미운 듯 싶었다.

렉시스가 하는 일이다.

분명 하천성 저놈에게 큰일이 생기겠지.

이지스는 부디 렉시스에 의해 저 드높은 하천성의 콧대가 꺾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이지스.

"네, 아버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지스는 그가 보이지 않는데도 고개 숙여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는 오랜만에 들어 본다고 생각하며 이지스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학교에 하천성이라는 분이 계시지.

"네? 분, 분이요?"

그 순간 이지스는 돌아온 아버지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왜 아버지 입에서 하천성이 나온 거지?

그것도 이름에 존칭까지 붙이면서.

이지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그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분을 잘 보좌해 드려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아, 아버지 잠시만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넌 알 거 없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해. 알겠냐? 하천성님을 꼭 잘 보좌해 드려라!

그러고 나서 전화가 끊겨 버렸다.

이지스는 무언가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상황이 이상하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그의 동태를 살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하천성은 여전히 수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양 행동했다.

대체 어제 받은 통화는 무슨 의미일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그는 조심히 하천성에게 다가갔다.

"저기."

하천성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저 눈을 볼 때마다 괜스레 위축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는 물어야 할 게 있었기에 나름 용기를 내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우리 가문이랑 무슨 관계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조심스러운 질문에 하천성이 희한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지스는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역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하천성이 아니라 다른 녀석을 말한 건데, 이놈한테 원한이 너무 많으니 무의식적으로 착각했으리라.

"아니면 됐어."

"그건 네가 잘 알아야 할 텐데."

하지만 이지스가 몸을 돌린 순간 하천성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이지스가 고개를 돌리자 하천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그는 스산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 뭐라고?"

"아버지가 꽤 괜찮으신 분이더라고. 사업을 좀 만져 드리니 금방 성장하시더라."

"무슨 헛소리를!"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입에 오르내리자 소리치려던 이지스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하천성은 자기 아버지의 사업에 관여했다.

이지스는 원래도 돈만 많은 집안이라는 소리를 듣던 상황, 만약 그가 아버지의 사업의 깊게 관여했고 자신 때문에 그가 아버지와 손을 놓아 버린다면 분명 큰 손해를 볼지 모른다.

아니, 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한테 직접 저 녀석을 보좌하라는 말 같은 걸 할 리가 없으니까.'

돈이 많기에 얻을 수 있는 지위, 그렇기에 돈이 없다면 얼마나 쉽사리 무너질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분하더라도 이지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가 봐."

자신의 처지를 발 빠르게 이해한 이지스는 하천성의 말에 얌전히 떠나갔다.

그 이후로도 하천성은 딱히 그에게 일을 시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또 내심 불안하여 이지스는 하천성의 곁을 똥 마려운 개처럼 계속해서 맴돌았다.

"이지스."

그러던 어느 날 이지스가 불안감에 지쳐 자포자기했을 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창고 용도로 쓰이는 빈 반에서 한 아이가 그에게 들어오라는 양 손짓 하고 있었다.

이지스가 의문을 가지면서도 다가가자, 그는 이지스의 팔을 반으로 끌어당겼다.

거기에는 렉시스 파벌이 있었다.

마법과에서도 실력 좋은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파벌을 보고 이지스는 기가 죽었다. 그러자 중심에 앉아 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너 하천성이랑 좀 친하지."

"친, 친하다고? 내가?"

내가 어떻게 그런 놈이랑 친할 수가 있단 거지.

이지스가 그런 식의 생각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그들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양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널 왜 같은 실습 팀에 넣어. 아까 교무실에서 들었어. 다음 실습 수업은 팀제인데 너랑 레미, 니아 님, 하천성으로 하기로 했다고. 네가 레미나 니아 님과 친할 일도 없잖아."

그 말을 듣자 이지스는 경악하듯 입을 벌리려 했지만, 급히 다물었다.

마법과에 들어오고 나서 줄곧 아이들 눈치만 보고 자라온 이지스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린 그는 여기서 태도를 굉장히 신중하게 취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냉정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숨길 거 없어. 어차피 네가 니아 님 옆에 붙으려고 술수 쓴 거 다 알아. 하천성이라는 놈이랑 옛날부터 아는 사이인 것도 대강 파악하고 있고. 늘 그렇듯 돈 좀 쏟아부었지?"

아이들의 비아냥이 이지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욱할만한 말이었으나, 이지스는 얌전히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 자식 일부러 기다린 거야.'

언젠가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자신이 직접 누구 편에 설지 고르도록.

본래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 문제였겠지만 아버지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도 그런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어 봤자 별 의미는 없을 거야."

"썩은 동아줄이라니? 그래도 하천성 그 자식은 니아 님 곁에 있잖아."

166화

스리슬쩍 이지스가 물음을 던지자 아이들은 같잖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정보가 느려서야. 위쪽 왕위 쟁탈전이 첫째 왕자님으로 승리로 결정되기 직전에 니아 님이 마법과에 입학했어. 니아 님은 그동안 병으로 왕위 쟁탈전 때 제외되어 있었지만, 이번에 이렇게 아픈 기색 전혀 없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첫째 왕자님을 원하지 않던 세력이 니아 님 곁으로 붙겠지."

"그, 그렇다면 오히려 니아 님에게 좋은 기회인 게."

"너 바보야? 그래봤자 이미 왕으로 결정 나기 직전까지 갔던 첫째 왕자님 세력이 훨씬 크지. 니아 님이 왕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마지막 기회를 잡고자 했던 사람들이 절대 그렇게 두지는 않겠지. 니아 님은 이러나저러나 결국 세력 싸움에 짓눌려 사라질 운명이야. 썩은 동아줄이라고."

이지스는 침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고작해야 남작가의 자제인 자신 따위로는 판단할 수 없는 거대한 일들이 지금 스텔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첫째 왕자님 반대 세력의 주축이 될 수밖에 없는 니아 님의 미래는 뻔하지. 왕위 쟁탈전에서 패하여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머나만 곳으로 유배 가거나, 심할 경우에는 사형이야. 최근에 다른 애들이 니아 님에게 굳이 다가가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는 좀 알겠지?"

이지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묘한 기류가 돈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새삼 자신이 얼마나 아이들 사이에서 왕따 취급당하고 있는지 또한 알았다.

"그래서 렉시스님은 생각한 거야. 이건 첫째 왕자님 세력 쪽에 잘 보일 기회라고."

"니아 님을 공격 하겠다고?"

"그럴 리가. 니아 님은 같은 왕족끼리 해결할 일이지. 스텔라 왕가의 왕족을 우리가 건드릴 리가 있나. 대신 주위 조력자를 없애야 하지 않겠어?"

조력자, 뻔하다.

학교 내에서 니아의 조력자라고 해 봤자 바로 하천성이었으니까.

고작해야 학교 친구일 터인 그를 조력자 취급하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아이들 생각이 원래 그런 법이다.

자신이 이해 못 하는 건 넘겨짚기 십상이니까.

"그랬다가 니아 님한테 밉보일 가능성도."

"그게 상관있어?"

이지스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너 언제까지 니아 님을 두둔하려고? 네가 잡은 동아줄이 썩은 걸 결코 인정 못 하겠다. 이거야?"

썩은 동아줄.

이 말이 왠지 모르게 이지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지스에게는 돈이 전부였다.

마법과에 오고 나서 계급의 가치를 알게 되었지만, 그러한 권력을 산 것이 결국 돈이 아니던가.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미래에 아이들이 하는 말처럼 니아는 썩은 동아줄처럼 떨어져 나가 버려질 운명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아버지가 말했다.

본디 평민이었지만, 남작가까지 계급을 끌어올린 아버지가 직접 하천성을 보좌하라고.

이지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할 일이 뭔데."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지스는 담담히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웅도 없이 모든 계획을 듣고 밖으로 나왔을 때, 이지스는 복도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창문 아래 벤치에서 하천성이 태평하게 누운 채 다리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창문을 연 이지스는 창문의 놓여 있던 화분을 대뜸 들어 그에게로 던져 버렸다.

황당한 짓이었지만, 하천성은 전혀 보이지도 않을 방향에서 예기치 않게 날아든 화분을 손으로 잡으며 이쪽을 힐끔 보았다.

차라리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지스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며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하천성이 있었다.

그는 이지스가 자신에게 던졌던 화분을 위로 던졌다가 받았다가를 반복하더니 씨익하니 웃었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빴지만, 이지스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뭐부터 하면 돼?"

"네가 듣고 온 거 전부 말해."

썩은 동아줄?

그게 어쨌단 거냐.

현재의 내가 없으면 미래의 나도 없는데.

만약 그 끝이 썩어 잘려 나가더라도 이지스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올라야만 했다.

그것이 이지스가 사는 법이었으니까.

* * *

이지스를 통해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나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애들 계획이 기껏해야 얼마나 대단한 건가 하겠느냐마는.

'마수사를 고용하겠다라.'

어느 때에는 몬스터, 어느 때에는 유해종, 마수 등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는 생물.

그리고 그런 생물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 있다.

이번 실습 수업으로 나갈 곳은 마수들이 사는 장소로 유명한 설요옥잠이라는 숲이다.

물론 수업인 만큼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을 예정이지만, 선생님들이 지정해 둔 루트대로 이동해야 한다.

렉시스는 거기서 마수사를 고용해 강한 마수로 우리를 습격 한 뒤, 뿔뿔이 흩어지게 할 생각이라는 모양이다.

정확히는 나만을 노려 내가 팀에서 이탈하도록.

그 뒤는 뻔하다.

집단 린치지.

'왜 이놈들은 남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일까.'

이지스에게 아이들이 한 부탁은 니아가 눈치 못 채도록 하천성을 두고 도망치게 하는 것.

정확히는 자신들이 나서는 것보다 선생님을 찾아서 하천성을 구하는 편이 더 낫다고 바람잡이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느긋하게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면 전혀 문제가 아닌 일이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 어디까지나 이걸 유용하게 쓸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지스의 아버지를 통해 나는 첫째 왕자의 반대 세력들이 니아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얼마 안 가 그들이 움직이리라.

'니아를 왕으로 만들고자 해도 니아는 딱히 그럴 마음이 없어. 내 마음대로 녀석을 왕으로 만들어 봤자, 나한테 왕이 된 포상으로 졸업장을 주는 일은 없겠지.'

오히려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했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보아온 니아는 고집스러운 면모가 있다.

내 삶은 내가 살겠다는 말을 했던 것과 같이 자신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생각이 스치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니아가 왕이 될 생각이 없다면 좋다.

그 녀석이 왕이 되지 않아도 되는 세계로 만들어 주고, 그 대가는 다른 녀석에게 받으면 되니까.

'첫째 왕자 세력이랑 접촉해야겠네.'

그리고 그 세력과 제일 가까이하고 있는 녀석이 마침 하나 있었다.

이용할 건 전부 이용해야지.

"검왕."

세상 저편의 울음소리를 발동시켰다.

"만나야 할 일이 생겼다."

내 쪽에서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쪽에는 확실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잠자코 녀석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뒤,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옆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마법과 교복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그녀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욕실에서 당신 목소리가 들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가 네 몸을 훔쳐보러 들어가기라도 할 거로 생각했냐?"

"그랬다간 나도 가만있지는 않았을 거야."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어."

그러자 왜인지 모르게 검왕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볼일은?"

"홍등가에서 네 지위는 어느 정도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내 말에 검왕은 살며시 웃음 지었다.

"층을 클리어할 방법이 생각 난 모양이네."

"그래, 아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나야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니까 좋지. 기왕 이렇게 된 거 평소에도 이렇게 나랑 같이 층을 오르는 건 어때?"

내 표정이 노골적으로 찌푸려지자 검왕은 기대도 안 했다는 양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당신의 고집이 안 꺾이는 건 내가 잘 아니까. 홍등가에서 내 위치는 홍등가 가주가 우연히 발견한 원석 정도야. 아마 훗날 써먹을 패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너라면 그것만이 아닐 텐데."

"들어간 김에 내부 장악을 하고 있긴 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일단 쓸 만한 패들은 모아 뒀어."

역시 랭커답다.

술술 자신이 해 온 일을 말하는 걸 보니, 나에게 완전히 협조할 마음도 있는 모양이고.

"그렇담 정보를 모아 줘. 첫째 왕자 녀석 정보와 그 반대 세력 쪽도."

"그런 건 이미 모으고 있어. 어쩌려고? 그 공주님을 왕으로라도 만들려고?"

"그건 본인이 딱히 원하지 않으니까 의미 없어. 왕은 첫째 왕자가 된다. 대신 녀석이 우리한테 대가를 치러야 왕이 될 수 있도록 설계를 해 둘 뿐이야."

"대가는?"

"스텔라 아카데미 졸업장."

검왕은 눈웃음을 지었다.

"괜찮네. 좋아. 협력할 게. 홍등가 세력에 더해서 다른 세력도 몇 개 더 삼켜 둘 테니까. 당신은 그 공주님을 잘 키워 놓으라고."

"그래야겠지."

니아 녀석에게는 지금 자기 몸을 지킬 수단이 전혀 없다.

이러나저러나 니아는 결국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세력을 키워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마수사를 한 명 고용해 줬으면 하는데."

"마수사? 그거야 찾아보면 어렵지는 않겠지만."

"가능하면 높은 수준의 마수를 다룰 수 있는 녀석으로 부탁해. 물론 홍등가의 이름으로 고용하고. 당연히 네 정체는 안 들키는 선에서 말이야."

내 말을 듣고 의아해하면서도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획이 있겠거니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아, 아쉽네. 조금 있으면 나도 학교 다닐 생각에 신나서 교복까지 입어 봤는데. 이러면 못 다니잖아."

"이제 와서 학교 다녀 봐야 뭐하냐."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녀 본 적 없거든?"

"검도 국가대표라서냐."

"어라, 그거 알고 있었구나."

검왕 녀석의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맞아. 국가대표에 들어가려고 운동만 하다 보니까 초등학교 때도 출석 일수가 많이 적었어. 중학교 때부터는 검도장이 거의 우리 집이었고. 그래서 학교에 대한 기대감이 좀 있었거든."

이제는 그것마저도 추억이라는 양 검왕은 후후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이야기는 동료들이랑만 하는 이야기인데. 당신이랑 하니까 같은 동료 된 거 같고 그러네."

"전혀."

"정말, 밉상이라니까. 그래도 당신이 있는 덕분에 층을 오르는데 외롭지는 않네. 나도 혼자서 움직이는 건 오랜만이기도 하고."

검왕은 자신의 동료들을 떠올리는 듯 따스한 눈빛이 되었다.

"다음에는 당신 살던 이야기도 좀 해 줘. 우린 참가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잖아."

너무 크라운 로드를 오르는 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지 말라는 양 검왕은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라운 로드의 최정상을 달리는 자들은 다들 자신을 잃어 간다.

소설로 간접적인 체험을 하는 독자가 아닌 이야기를 직접 겪는 등장인물이 되니까.

그렇기에 크라운 로드를 혼자서 오르는 자들은 적었다.

황제 또한 그러했고, 하물며 야신마저 그러했다.

홀로 층을 올라가는 나는, 자신을 잃어 가는 중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별천도'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줍니다.]

목에 걸린 별천도가 잠시 동안 빛을 내었다.

나는 적당히 녀석에게 그래그래 라고 달래 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찌 되었든 나는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거다.

설령 나 자신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남은 건.'

니아가 해 줘야 하는 일이 있다.

"나락."

나는 다시금 세상 저편의 울음소리를 발동시켰다.

이 층에 있는 또 다른 회귀자 놈.

"여기로 와라."

지금 이 녀석이 필요했다.

167화

잠시 뒤 나는 니아를 찾아갔다.

점심시간 땡땡이치며 돌아다니는 나와 달리 니아는 도서관에 앉아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어지간히 마법 공부가 재밌는 모양이었다.

나는 들여다 봤자 이해도 못 할 것들이었기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자 니아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온 걸 이제야 알아차린 듯 웃음 짓는 그녀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네 처지를 모르냐?"

"새로이 나타난 경쟁자 생각한 첫째 오빠 세력이 나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는 모양이네."

그 정도야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느긋하게 책장을 넘겼다.

"괜찮아. 지금은 아직 못 건드려. 왕위 쟁탈전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나는 아직 스텔라 공주니까. 괜히 나를 공격해서 스텔라 왕가와 척지고 싶은 사람은 없어."

"네 오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할 수는 있겠지."

"충성이 적의 목을 가져와서 받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잖아? 모름지기 눈앞에 먹이를 보고도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충직한 개가 더 낫다고 생각해. 지성 없는 개는 오히려 독이지. 지금 상황에서 내 목을 가져갔다간 전부 오빠가 한 짓이라고 의심을 살 텐데. 완벽한 왕위 계승을 원하는 첫째 오빠가 그런 오명을 원할 리가 없겠지."

"너 얼마 전까지 그 벌벌 떨던 호니아 맞냐? 내가 못 보는 사이에 다른 사람 된 거 아니야?"

내 물음에 니아는 기다랗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내 진짜 모습이고 이것도 내 진짜 모습이야.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네 덕인 건 알지?"

그리 말하며 니아는 자신이 입고 있던 용천성의 용포를 톡톡 두드렸다.

"이거 없었으면 이 정도로 당당하지는 못해. 나는 어디에 기댈 곳이 있으면 한없이 강해질 수 있는 약삭빠른 사람이거든."

"그것도 만능은 아니야. 파 놓은 함정 같은 곳에 빠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그때는 천성이 네가 있잖아."

나한테 의존하겠다. 이건가.

물론 아직 제대로 된 지위가 없고, 능력 또한 부족한 니아다.

지금은 내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맞고.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우선 자신을 지킬 능력을 줄 생각이었다.

"마법 실력은 지금 어느 정도냐."

"얼추 3성 마법사쯤은 되지 않았을까? 아직은 이론만 배우고 있으니까."

마법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는 게 아쉽다는 양 니아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가르쳐 줄까?"

"천성이 네가?"

"아니, 넌 내 꺼는 못 배워."

솔직히 내가 쓰는 건 물리지 마법이 아니니까.

니아에게는 내 능력을 쓰는 데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처럼 들렸는지, 그녀는 납득한 표정이었다.

"너한테 마법 가르쳐 줄 놈은 따로 있어."

내가 뒤를 가리키자 거기에는 한 녀석이 걸어왔다.

늘 그렇듯 양복 차림인 그는 어느샌가 황금으로 도금한 삽을 등에 진 채 나타났다.

도저히 마법사로 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인지, 니아가 미묘한 표정을 짓자 나락은 손을 번쩍 들곤 귀족식 인사를 해 보였다.

"반가워요! 니아 꽁쭈님, 천왕님 탓에 고생이 많으시죠?"

괜히 공주라는 단어를 꼬아서 말하는 나락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자 니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천왕?"

"내 별칭이야."

내가 대강 둘러대자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락을 이상한 표정으로 보았다.

겉에서부터 미친놈 티가 팍팍 나니 그럴 수밖에.

"이렇게 보여도 마법은 잘 다뤄."

네크로맨서계 마법이긴 하나 마법의 기초는 같다고 들었다.

나락이 니아에게 가르칠 건 어디까지나 마력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럼 잠깐만 살펴봐도 될까요? 가볍게 마력을 전개해 주시면 돼요!"

활기찬 나락의 말에 니아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아귀에서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마력으로 반환되었다.

"속성은 더블로 얼음과 바람. 가장 기본이 되는 마력량이 굉장히 많군요. 재능 있네요."

속성은 가끔씩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더블로 나타나기도 한다.

니아는 타고나기를 두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마법 또한 바람과 얼음 둘 다 뛰어나리라.

"가르칠 것도 딱히 없겠는데요? 가만히 두면 어련히 알아서 강해질 거예요."

난생처음 마법에 대한 칭찬을 받았기 때문인지 니아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마법 관련으로는 내가 가르칠 수 없긴 했다만, 나도 너무 칭찬이 인색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다루는 데 채찍과 당근은 같이 따라와야 하는데 말이다.

"시간 단축이 필요해.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도록."

"흐음,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씨익 하니 웃은 나락의 표정이 불안하긴 했지만, 나는 별일 없겠거니 싶어 의사를 묻고자 니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니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도 강해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 천성이 네 말대로 자기 몸 하나 지킬 수는 있어야겠지."

본인이 그렇다면야.

내가 나락에게 해 보라고 손짓하자, 그는 우리를 적당한 장소로 안내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온 나락은 삽으로 바닥을 한 차례 팠다.

그 순간 파인 땅 아래에서 불쑥 손 하나가 올라왔고, 그것은 곧 뼈로 된 건물이 되었다.

"네크로맨서 마법."

니아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락은 박스 형태의 건물을 툭툭 두드렸다.

"이 내부에는 참가자가 마력을 발동시키면 그 즉시 마력의 일부를 빨아들여요. 그리고 그걸 통해 생성된 에너지가 계속해서 벽과 벽을 부딪치며 마치 우박을 맞는 양 계속 마력을 두드리겠죠. 이건 그걸 견디는 훈련이에요."

"마력의 유지력을 늘리려는 거냐."

"맞죠! 하지만 장애물에 부딪칠 때마다 마력 탄은 점차 강해져요. 그걸 견디기 위해서는 보다 고출력의 마력을 끌어내는 법을 알아야겠죠. 게다가 마력에 예민해지는 만큼 마법사를 상대할 때 반사 신경이 매우 올라가요."

괜찮긴 하다만.

"단점은."

"마력의 너무 장시간 노출되면 오감이 마비돼요. 세상을 마력으로만 느끼게 되죠. 게다가 오감이 마비되는 만큼 그 상태에서 힘을 줬다 간 몸이 빠직, 잘 아시죠?"

나는 이마를 감쌌다.

단점이 너무 크잖아.

"그래도 시간 조절만 하면 괜찮아요! 니아 님 정도면 20분 정도는 안전하겠네요. 무엇보다 본인이 마력을 해제하면 타격을 받을 일이 없기도 하고요."

"니아, 할 수 있겠냐?"

자칫하면 오감이 마비된다고 하니 나도 걱정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락 녀석이 하는 말이니 믿음이 전혀 안 갔기 때문이다.

"저 뭔가 도와주고 있는데 욕먹은 거 같아요!"

나락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으나 무시했다.

"괜찮아. 해 볼게."

"위험하면 그냥 큰소리로 외쳐. 부술 테니까."

"이거 제가 만든 건데 말이죠."

나락은 완전히 외면당한 채 니아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이걸로 보시죠."

나락이 삽을 콩 찍자 뼈로 된 TV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 화면에는 니아가 비추고 있었고 공간 마법이 적용되어 있는지 보기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 니아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이내 나락이 말해 줬던 대로 마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니아의 몸이 옆으로 크게 휘었다.

마력 탄에 맞은 듯 니아는 엉덩이를 높게 든 자세로 엎어져 부들부들 떨더니, 곧 의지에 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마력 탄에 그대로 맞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니아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니 서서히 마력 탄의 대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마력 탄의 세기가 강해졌지만, 그에 따라 니아의 출력도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는 걱정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은 가르칠만한 게 있냐?"

"천왕님은 제가 네크로맨서계 마법만 하는 줄 알죠?"

그리 말한 순간 나락의 주위에 여러 가지 속성의 마법 원소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제 오러 속성은 애초에 퀀터플 속성이에요."

그랬었나.

하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녀석이 사용하는 언데드 중에는 여러 속성을 가진 녀석들이 많았다.

생전에 그런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나락 녀석이 그렇게 부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웬만한 마법은 다 알죠. 그리고 저희 오래 살았잖아요? 저도 마법 지식으로는 대마법사들 뺨쳐요."

이건 사실이었다.

회귀자라면 다들 그럴 테니까.

특히 마법사들은 지구에서도 학자인 녀석들이 많았다.

크라운 로드까지 와서 공부하는 건 우습지만, 그걸 재미로 사는 이들이었으니까.

'나락은 마법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많지만.'

지금도 열심히 성좌 방송을 진행 시키는 중인 나락을 보고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다가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를 이렇게 도와주는 건 분명 이 놈도 니아를 도와서 얻는 게 있다는 소리일 거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이해 관계가 맞을 때는 철저하게 이용해 주는 게 상책이니.

"이게 끝나면 니아한테 마법 좀 가르쳐. 되도록 공격력이 강한 거로."

"방어 마법 없이 강한 공격 마법을 썼다간 그 반발에 되레 당할걸요? 마법은 오러와 달리 시전자를 구분하지 않거든요. 강한 마법일수록 본인에게도 그 강한 마법을 견딜 육체와 마법이 필요하죠."

"방어는 충분해."

니아는 용천성의 용포를 두르고 있으니까.

지금은 안에 들어가느라 내가 용천성의 용포의 효과를 거두어 놓았지만, 이 층 어느 곳에서도 내 오러를 뚫을 수 있는 녀석은 없다.

그렇기에 니아가 공격 마법을 써서 반발이 오더라도 내 오러가 일부 깃든 용천성의 용포가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간 마법도."

"그건 시간이 엄청 걸릴 텐데요. 공간 마법만큼은 이론을 알아도 안 되는 부분이거든요. 저도 거의 안 쓰기도 하고."

"최대한 해 봐. 시간은 일주일 정도 있으니까."

"정말 턱도 없는 말을 하시네요."

툴툴거리면서도 안 된다고 하지 않는 걸 보면 해낼 수 있다는 소리겠지.

일주일 뒤인 실습 날까지 나는 니아를 어떻게든 강하게 만들어 놔야만 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를 해 주어야만 했으니까.

준비는 차근하게 되고 있다.

남은 것은 막힘없이 일을 진행 시키는 것뿐.

"그리고 한 가지 더."

"시키실 일이 많으시네요."

"아카데미 내부에 봉인된 벽이 하나 있다. 거기 내부에 있던 녀석이 도망쳤는데, 느낌상 세계관 최강자야. 성좌 녀석이 일부러 녀석을 만나지 못하게 술수를 부린 거 같은데 좀 알아봐."

정보 모으는 건 이 녀석이 제일 빠르다.

내 말을 듣고 나락은 그건 어렵지 않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죠. 천왕님, 이런 거보다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요."

좋은 층 클리어 방법이라도 있다는 건가.

나락을 내가 힐끔 돌아보자 녀석은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그냥 첫째 왕자를 언데드로 만들어 버린 뒤, 졸업장을 하사하도록 하면 되는데요."

무언가를 받아 내야 하는 층일수록 나락에게는 간단하다.

그는 상대를 죽이고 명령하여 받아 내면 그만이니까.

"개소리 마. 너한테 층 클리어의 선택권을 줄까 보냐. 그리고 너 저번에도 나한테 그 소리 하고 무시당했던 거 까먹었냐?"

하지만 나는 이 녀석을 믿지 않는다.

나락에게 정신병자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지금은 호의적이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게 나락이다.

게다가 이 녀석이라면 반드시 층 클리어를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해 올 게 분명했다.

"너에게 주도권을 줄 바에야 니아를 왕으로 만드는 게 더 나아."

"절 너무 못 믿으시네요. 별님들한테도 예쁨을 받는 저인데, 왜 천왕 님은 저를 이토록 미워하실까요?"

"또라이니까."

간단명료한 내 대답에 나락은 어깨를 으쓱이었다.

"천왕님도 저만큼이나 또라이에요."

"뭐, 이 새끼가."

"어, 꽁쭈님이 정신을 잃으셨어요!"

화들짝 놀란 나락의 말에 내가 허튼짓하지 말라고 녀석을 쏘아보자, 나락은 서둘러 건물로 뛰어갔다.

이내 TV 화면을 바라보니, 진짜로 니아가 쓰러져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속고만 사셨나."

"그럼 저 타이밍에 안 속이는 놈이 이상하지!"

"왜 저한테 화내시는 건지 전 모르겠네요."

툴툴거리는 나락을 보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 들었지만 참았다.

니아를 키운 다음 녀석의 목을 베어 버리자고 결심하면서.

168화

일주일간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는 검왕 녀석이 넣어 준 편지 한 장을 살핀 뒤 방을 나섰다.

이윽고 1층으로 내려오자, 먼저 나온 듯 니아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숙사는 남녀가 따로 쓰기에 자주 만나지 못해서인지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 수업 기억하지?"

니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7일간 나락 녀석에게 마법을 배웠던 니아다.

이 녀석도 마법을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겠지.

"나는 나서지 않을 거다. 전부 네가 해야 해."

"걱정하지 마. 일주일 동안 거의 못 잤지만, 나도 이제 꽤 강하다고?"

자신만만한 니아의 눈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보였다.

실제로 휴식을 취하기 전까지 니아의 몸과 오러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만큼 나락의 단기 수업이 고되었다는 소리겠지.

"가자!"

눈을 반짝이는 니아를 보고 뒤를 따랐다.

반에 도착하자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아가 썩은 동아줄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이후, 아이들은 그녀에게 별다른 접촉을 하지 않았기에 이쪽으로 관심이 쏠리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눈에 니아는 그냥 건드리면 안 되는 폭탄같이 보이겠지.

친해져 봤자 잘려나갈 동아줄, 그렇다고 왕가의 사람이니 미운털 박혀 봤자 좋을 거 없으니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다.

"니아 님, 하천성, 어서와."

유일하게 평민인 레미만이 우리 둘에게 친근히 인사를 해 보였다.

어차피 이전부터 귀족들에게 미움받고 지내던 레미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우리가 썩은 동아줄이든 말든 상관없었기에 친구로서 우리를 대하고 있었다.

"레미, 학교에서는 말 놓아도 괜찮다니까."

"미안, 아직 안 익숙해서."

지난 며칠간 레미와 자주 다녀서인지 둘은 어느샌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히는 레미를 보며 나는 의자를 빼고 털썩 앉았는데, 책상 서랍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서랍 안 내용물의 정체는 다양한 종류의 고급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쿠키였다.

내가 물끄러미 쿠키를 보고 있자 니아가 씩 하니 웃었다.

"천성이 인기 있네."

"너 첫날이랑 태도가 너무 다르지 않냐."

"남이사."

사실 이 쿠키는 처음이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과자를 매일같이 넣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지스.

처음에는 여자애가 직접 포장한 것 같은 쿠키를 보고 얼굴이 굳었던 니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다음 날 몰래 일찍 와서 누가 과자를 넣는지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게 이지스란 걸 알고는 겨우 안도했다.

'이 녀석 날이 갈수록 집착이 심해져 간단 말이지.'

아직은 10대 꼬맹이의 재롱 잔치 느낌이었지만, 나는 녀석의 감정이 살짝 위험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의지하도록 일부러 한 일들이 많긴 했다마는, 녀석은 의지하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이 뒤섞여서 감정이 깊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자신을 자신으로 살지 못했던 만큼 니아의 자존감은 상당히 낮았다.

그리고 그런 자존감을 내가 회복시켜 주었고, 그 덕분에 니아는 이제야 스텔라 왕국의 공주로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락에게 듣기론 내가 훈련 때 잠깐 자리를 비운 걸 나중에 듣고는 어미 잃은 새끼처럼 계속 불안해했다고 했었지.'

피오나 때의 일이 트라우마가 된 걸까.

날이 갈수록 니아는 의존증이 심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손을 뗄 수도 없다.

니아의 위치는 상당히 위태위태한 상태다.

내가 지금 손 뗐다간 이 녀석은 얼마 안 가 왕위 싸움에 휘말려 꼭두각시 신세가 될 테니까.

"너무 믿게 되는 것도 골치군."

"응? 뭐라 했어?"

내 중얼거림에 이지스의 쿠키를 먹던 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양 대강 손을 흔들었다.

'이 녀석 내가 졸업장을 따면 떠날 거란 걸 눈치채면 졸업장 못 따게 손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지금이야 내가 언제든 옆에 있을 거로 생각해서 이러고 있지만, 나중에 내가 떠난다고 하면 어떻게든 붙잡으려 할지도 모른다.

내 목적인 졸업장을 절대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쯧, 원래 사람 성향이 다 다른 법이긴 하지만.'

니아의 경우 내가 극적인 상황에서 도와준 게 너무 많기도 했지만.

'하다못해 같은 동성이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같은 여자였다면 연정을 품은 상대가 아닌 동경이나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유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방의 광대라도 써 둘 걸 그랬나.'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니까.

그 때문에 내게 반한 니아는 내 곁에 다가오는 여성을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

혹여나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자신이 차지한 옆자리를 뺏길까 봐.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고.'

그간 의지할 곳 없이 살았기에 의지할 곳이 생기자마자 이렇게 된 건 이해는 하겠다마는.

덕분에 새로운 난관에 봉착 해버렸다.

"실습수업 시작하겠습니다. 학생 분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와 주세요."

다른 애들도 오랜만에 실습이라서일까, 녀석들은 신난 듯 체육복을 챙겨 탈의실로 떠났다.

"너도 갔다 와."

"알았어."

레미와 함께 떠들며 가는 니아를 보고 나는 주머니에서 한쪽만 있는 이어폰 하나를 귀에 걸었다.

그러곤 나는 세상 저편의 울음소리를 발동시키며 말했다.

"준비는."

―다 됐어. 마수사도 고용해 놨고. 미리 정해 둔 위치에 도달했을 때 신호만 주면 곧바로 움직이기로 되어 있어.

"그래."

이 이어폰은 검왕이 편지에 같이 보내 준 것이었다.

나만 일방적으로 말하니, 원활한 작전을 위해서는 원거리 대화 수단이 있어야 편하지 않겠냐는 말에 그녀가 따로 준비한 물건이었다.

"그럼 있다가 다시 말할 테니 대기하고 있어."

―라져.

무슨 스파이 일이라도 하는 양 장난스레 대답하는 검왕을 두고 나는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탈의실로 향했다.

곧 탈의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나를 제일 먼저 반겼다.

그런 그들을 지나쳐 내 이름이 적힌 라커 앞에 서서는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하천성."

체육복 저지를 몸에 걸친 순간,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렉시스가 서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경고한다. 오늘 실습에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놀랍다.

일부러 도발해 올 줄이야.

'아니, 다른 걸 노린 거군.'

나를 습격하게 될 마수사를 고용한 게 자신이라고, 렉시스는 일부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내가 마수사에게 당한 뒤, 살아남는다면 자신인 것을 알 테니 열이 받아 공격해 올 게 당연.

그리고 그걸 빌미로 나를 니아 곁에서 완전히 떨어트리고, 직접 손 볼 생각이었겠지.

'대담하네. 참, 이용해 먹기 딱 좋아.'

권력과 자신의 실력을 믿고서 당당히 구는 렉시스를 보고 나는 꽤 마음에 든다는 양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람을 담그려면 그렇게 해야지. 뒤에 숨어서 장난질 쳐 봤자 무슨 재미야. 그치?"

내 말을 듣고 렉시스는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기에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곤 지나갔다.

네 덕분에 재미 좀 보겠다.

"저, 저 버릇없는 놈이!"

"감히 누구 어깨를!"

"됐다. 내버려 둬."

내가 지나쳐 가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더 오두방정을 떨었지만, 렉시스는 냉담히 말했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 마음대로 떠들어라, 이 말이겠지.

밖으로 나오자 니아가 레미와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는 이지스가 소심하게 같이 서 있었고, 그는 나를 보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렉시스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이지스에게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지스의 어깨 위에 팔을 걸쳤다.

"표정 고쳐라. 너는 우리를 속이는 척해야 돼."

"으, 응."

이지스는 허리를 곱게 펴며 서둘러 표정을 고쳤다.

혹여나 자신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책임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지스도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이후 우리는 마법과 선생이 있는 운동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대규모 공간 마법을 위해서 바닥의 마법 진을 그리고 있었다.

"준비됐습니다. 설요옥잠 숲 입구로 이동할 테니 다들 멀미 주의하세요."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아이들 대부분은 공간 마법의 여파를 적응 못 하고 매스꺼워하고 있었다.

"불필요하게 마력이 너무 들어갔네."

그런 도중 옆에서 교사의 공간 마법을 평가하는 니아가 있었다.

나락에게서 공간 마법을 배운 덕분이었다.

눈에 보이는 게 있었던 듯한 그녀를 보고 나는 그래도 나락이 제대로 가르쳤구나 하고 생각했다.

'쓰는 것까지 당장은 기대 안 하지만.'

차차 실력이 늘어난다면 모르지.

"니아 학생 팀, 이쪽으로 오세요."

교사의 부름에 나는 토까지 하고 있는 이지스를 질질 끌고 다가갔다.

안경을 치켜 쓴 교사는 우리에게 가야 할 루트 설명과 길을 안내할 정령 한 마리를 달아 주었다.

"중간에 마수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전부 확인해 두었기에 대부분 문제없이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부분에서 많은 걸 배우실 수 있을 겁니다. 길만 잘 따라가 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정령을 안전장치라고 설명했다.

만약 아이들로도 대응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 즉시 교사들이 나설 거라는 뜻이었다.

대표인 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우리를 데리고 입구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곤 시간 체크를 위해 시계를 살피며 앞을 가리켰다.

"니아 팀, 출발해 주세요."

니아와 레미가 들뜬 마음으로 선두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뒤에서 지켜볼 생각인 나는 이지스의 등을 앞으로 밀며 뒤따랐다.

"위치는 얼마나 더 가고 나서냐."

"...앞으로 좀 더 가야 해."

그렇게 얼마간 숲을 헤쳐 지나갔을까, 내 물음에 이지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숲을 통과하는데 걸릴 시간이 대략 10시간 정도라고 했으니 이제 막 10분의 1 정도를 지난 셈이었다.

'10시간은 휴식도 포함한 시간이긴 하겠지만.'

니아와 레미는 능숙하게 주변에 감지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둘 다 마력 고갈이 오지 않게 얇지만 위험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분담하여 잘하고 있었다.

"이지스, 넌 뭐 안 하냐?"

"네가 계속 재촉만 안 한다면 할 건데."

아까부터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이지스만 갈궜기 때문일까, 녀석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천성이 너나 좀 돕지?"

그런 이지스가 불쌍했는지 니아가 나를 타박하자, 어깨를 으쓱이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이미 진작 숲 거의 반절을 오러로 뒤덮어 놓았다.

교사나 학생들은 나와 수준 차이가 너무 나는 탓에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런 도중 지나가던 마수 한 마리와 마주쳤다.

감지 마법으로 눈치챈 니아와 레미는 긴장한 표정으로 마수와 마주하고, 호랑이 형 마수는 우리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레미는 몇 번 마수에 대한 경험이 있는 듯하지만, 니아는 처음이기 때문인지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아. 해 봐."

하지만 내가 뒤에 있다.

니아는 나를 흘깃 보곤 양 주먹을 꾹 쥔 채 마수를 노려보았다.

169화

그 순간 마수 쪽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이빨을 드러낸 채 쏜살같이 달려든 마수의 공격에 레미가 먼저 바위로 된 벽을 세워 그의 진로를 막았다.

"니아!"

레미의 부름에 곧바로 니아는 준비하고 있던 얼음 마법을 발동시켰다.

다섯 개의 얼음 창은 니아의 바람 마법까지 더해져 빠르게 마수를 덮쳤다.

비록 급소에는 닿지 못했지만, 마수의 몸에 자잘한 상처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사냥감이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일까, 마수는 뒤로 물러서서 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녀석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지스였다.

두 여자의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그를 보고 마수는 약한 녀석이라 판단하고 달려들었다.

화륵!

그러나 이지스도 엄연히 스텔라 아카데미 마법과 학생이었다.

녀석은 화염 마법으로 마수가 달려드는 것을 제지했다.

이지스의 화염 마법에 당황한 마수가 몸을 뒤로 급히 빼려 했지만, 이미 뒤에는 레미의 바위벽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마수가 완전히 고립된 순간, 니아는 장전된 얼음 포탄을 녀석에게 날렸고 그에 직격당한 마수는 일격에 즉사했다.

'끼어들 것도 없었군.'

애초에 지금 니아의 실력상 저런 마수는 방심만 하지 않으면 혼자서도 손쉽게 쓰러트렸을 것이다.

그러니 별다른 걱정 없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내 나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돌아보는 니아와 시선이 마주 쳤다.

처음으로 마법을 써서 상대를 쓰러트렸으니, 기쁜 눈치였다.

내가 보기에도 나쁘지는 않았던 첫 실전이었기에 잘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자, 니아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다.

"슬슬 다 왔는데. 나 정말로 신호 보낸다."

"그래, 하기나 해."

이지스가 연락을 넣자 나 또한 검왕에게 똑같이 신호를 보냈다.

나는 니아 녀석의 자신감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랐다.

이 녀석이 상대해야 할 마수는 고작 저런 게 아니었으니까.

이지스가 연락을 넣은 뒤, 녀석의 표정이 더더욱 초조해지기를 몇 분.

쿠웅!

어디선가 커다란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이 주위를 장악하고, 레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가."

"레미, 이 정도 진동이 흔한 일이야?"

"아니야. 이런 건 처음이야. 설요옥잠 숲에서 이런 진동이 있을 리가 없는데. 지진이라도 난 건가?"

하지만 지진이라기에는 진동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도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면서.

"뭔가 와!"

레미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친 순간 우리 앞에 있던 거대한 나무 몇 개가 부러져 쓰러졌다.

쿠웅 하고 나무가 먼지를 일으킨 자리에는 산만한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코앞으로 드러난 코끼리 상아 같은 여섯 개의 뿔에는 검은색 띠가 둘려 있었고, 녀석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콧방귀를 후웅 내쉬었다.

그것만으로 우리를 날려 버릴 만큼 강력했기에 레미와 니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서걱!

바로 그때 나는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정령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이제 선생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쪽으로 바로 오지 못할 것이다.

"니아."

"처, 천성아."

이 정도 마수는 생각도 못 했던 니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자 나는 미소 지었다.

"쓰러트려."

"...너 설마."

니아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입을 떼려던 순간, 멧돼지의 발 구르기가 시작되었다.

그걸 본 니아는 결국 나에게서 눈을 떼고 멧돼지를 향해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잘못되면 천성이 네 탓이니까!"

"걱정도 팔자다. 레미, 넌 뒤로 물러나는 게 좋을 거야. 저건 너한테는 위험해."

"하지만 니아도."

"괜찮아."

그 순간 니아가 입고 있던 용천성의 용포에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저 녀석 방어력은 최강이거든."

그리고 산만한 멧돼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 * *

콰앙!

거칠게 울리는 폭음에 놀란 아이들이 숲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뭔가 커다란 게 부딪치기라도 한 거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무리 몇 번 실습을 해 봤더라도 설요옥잠 숲은 마수가 살고 있는 숲이다.

수업 때마다 방심하다가 다치는 사람이 나왔기에 긴장하며 길을 나아가던 아이들은 더더욱 놀란 듯하였다.

"드디어 시작됐군."

그 순간이었다.

팀의 대표인 렉시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의 미소를 본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곤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렉시스 님이 준비하신 거군요."

"그래, 내가 고용한 마수사다. 돈은 꽤 들었지만, 값은 하는 모양이군."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기가 일어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수사가 고용한 마수는 가이 포레스트라는 거대한 나무형 마수다.

그 몸은 강철 같으며 크기도 웬만한 거목 만하다고 한다.

나무로 위장해 있다가 이지스 녀석의 신호와 함께 급습을 시작했을 테니, 저쪽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당했으리라.

"그러게, 좋은 말로 했을 때 빠졌어야지."

렉시스는 당당했던 하천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그는 하천성이 엉망진창으로 당하는 걸 상상하며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로 간다."

"괜찮으시겠어요? 꽤 소리가 큰데."

"멍청한 소리 마라. 저기 있는 마수는 내가 고용한 녀석이 다루는 놈이야. 우리한테 상해 같은 걸 입힐 거 같냐."

"그렇군요!"

"너희도 궁금하지 않나? 그 녀석이 곤죽이 되어 죽어 가는 모습을."

아이들의 눈동자가 반짝이었다.

계급 사회에 깊게 물든 아이들은 자신보다 아랫것들이 설치는 꼴을 극도로 싫어 한다.

게다가 저 팀에는 하천성은 물론 같은 평민인 레미까지 있다.

평민 주제에 자신들보다 마법을 잘 다룬다는 게 거슬리기 그지없었는데, 그녀까지 엉망으로 될 걸 상상하니 아이들은 들뜬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니아 공주님은 이지스 녀석이 잘 데리고 갔을 거야."

"맞아. 레미 그년은 나서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니, 분명히 하천성이랑 같이 마수와 싸우고 있을 걸?"

키득거리는 아이들을 두고 렉시스가 먼저 걸어가자, 아이들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아이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 볼 광경이 얼마나 자신들의 우월감을 얼마나 채워줄지 상상이 안 갔다.

그 녀석들은 평민 따위가 귀족에게 덤비면 어떤 처참한 꼴이 되는지 이제 확실히 알게 되리라.

그러나 렉시스는 아이들과 다르게 그들이 평민이든 말든 관심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건 단 하나.

니아가 자신을 무시하고 하천성에게 가던 그 치욕뿐이었다.

렉시스의 목표는 하천성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에게 이런 치욕감을 준 니아 또한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려 발아래 둘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날 막대할 수 있는 인간 따위 없다. 설령 그것이 왕족이라도.'

렉시스의 눈에서 불길한 응어리가 흔들거렸다.

니아와는 반대로 드높은 그의 자존감은 절대로 건드려져서는 안 될 시한폭탄이었다.

'만약 마수 놈이 모자란다면.'

렉시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면서 혹여나 하천성 그놈이 마수 녀석을 쓰러트릴 기미가 보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망가트려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이 끝일 거로 생각하지 마라.'

풀숲을 해치고 같은 팀들보다도 한발 먼저 달려간 그는 얼마 안 가 한 장소에 도착했다.

아직도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듯 흙먼지가 날리는 그곳에서 그는 눈에 불을 켜고 하천성을 찾았다.

"나 찾냐."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렉시스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하천성이 서 있었다.

나무에 몸을 기댄 채 팔짱까지 낀 그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의 옆에는 무슨 일인지 이지스와 레미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렉시스의 뺨이 희미하게 굳었다.

"너 왜."

렉시스가 마저 묻기도 전에 하천성은 손을 들었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킨 순간 렉시스의 시선도 그에 따라 돌려졌다.

흙먼지 사이로 희미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렉시스가 자세히 보고자 눈을 모았을 때, 흙먼지를 뚫고 인영이 튀어 나왔다.

"어?"

렉시스가 멍하니 말을 중얼거린 순간 그자는 다시 흙먼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또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졌다.

"...니아 공주?"

렉시스는 두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보았던 게 정말인가 하고 의문을 가졌지만, 아카데미에서 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니아 단 한 명뿐이었다.

"너 무슨 짓을!"

렉시스가 하천성에게로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분명 하천성을 공격해야 할 터인 마수가 어째서 니아 공주와 싸우고 있단 말인가.

만약 자신이 고용한 마수사 때문에 니아 공주가 상처 입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놔라. 어금니 부서지기 싫으면."

"너 때문에 내 어금니는 지금도 나가게 생겼어!"

으득 이를 가는 렉시스를 보고 하천성의 두 눈동자에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렉시스는 거대한 거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감각에 빠졌다.

그는 이 이상 멱살을 잡고 있다간 뭉개질 것 같은 오싹한 감각에 반사적으로 하천성의 멱살을 놓아 버렸다.

뒤이어 렉시스는 하천성에게 겁먹어 손을 놓았다는 것에 극심한 치욕감을 느꼈다.

"렉시스 님!"

"어떻게 됐나요!"

뒤따라온 같은 반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등장하다가, 대치하고 있는 렉시스와 하천성을 보곤 흠칫하였다.

렉시스의 말대로라면 그가 습격을 당했어야 할 텐데 왜 그가 여기 있는가.

뒤쪽에서는 여전히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먼지구름 속사람은 대체 누구라는 걸까.

"...니아 공주를 구한다."

니아를 언젠가 망가트릴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렉시스의 머리가 냉정하게 식었다.

지금은 치욕감보다 니아 공주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천성 따위 언제든지 짓뭉갤 수 있다.

"안 되지."

그러나 그가 먼지구름으로 나아가려던 순간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그들의 눈에 곤욕스러움이 깃들었고, 렉시스는 시선만을 뒤로 돌렸다.

설마 이놈이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소리도 없이 발동된 마법에 그가 눈을 부릅뜨고 있자 하천성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깃들었다.

"네가 끼어들 틈 없어."

"헛소리냐! 니아 공주가 다친다면, 아니, 혹여나 죽기라도 한다면 어떡하려고!"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지."

렉시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의 말 속에 이 일을 일으킨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가시 돋친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넌 그 두 눈으로 보기만 해."

후우우웅!

갑자기 하천성을 중심으로 강력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돌풍을 못 이긴 렉시스가 나자빠지고, 이내 그가 몸을 움츠렸을 때 먼지구름 또한 바람에 의해 걷혔다.

"윽?!"

그 순간 렉시스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놀라 신음을 들이켰다.

거기에는 거대한 멧돼지가 있었다.

산만한 멧돼지는 태양마저도 다 가린 채 검은색의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자이언트 보어.'

마수 중에서도 2급 마수라고 불리는 괴물의 등장에 렉시스의 전신이 굳었다.

"꺄아아아아아!"

"저, 저게 뭐야!"

이윽고 뒤쪽에서 아이들의 비명이 울리자 그는 자기 두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자각했다.

자이언트 보어는 도시 하나를 혼자서 궤멸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다.

'저건 내가 고용한 마수사가 보낸 게 아니야.'

자신이 고용한 마수사는 기껏해야 4급 마수를 다룰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2급 마수인 자이언트 보어를 다룰 수 있을 턱이 없다.

그 순간 그는 자이언트 보어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녀석이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자이언트 보어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니아가 서 있었다.

170화

양팔을 자이언트 보어에게 겨눈 채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온몸을 흠뻑 적신 땀 탓에 질척할 정도로 몸에 붙은 옷.

거기에 흙먼지까지 진득하게 묻은 니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유일하게 그녀가 늘 두르고 다니는 용이 그려진 용포만이 깨끗했다.

그러나 외양만 그럴 뿐, 니아의 몸 어디에도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친 쪽은 자이언트 보어였다.

녀석의 몸에는 몇몇 눈에 띄는 상처가 보였다.

그곳에 거대한 얼음 송곳이 몇 개 꽂혀 있는 걸 보아하니, 마법에 당한 듯싶었다.

'마법? 누구의 마법에?'

설마 저기 있는 니아에게 자이언트 보어가 당했다고?

니아의 수준을 몰랐던 렉시스는 경악했다.

이래 보여도 렉시스는 스텔라 아카데미 수석이다.

그런 그로서도 자이언트 보어에게 마법이 통할지 알 수 없는데, 니아의 마법이 통하고 있다니.

그렇다는 건 자신보다도 니아가 훨씬 더 우위라는 소리가 아닌가.

쿠웅!

이윽고 자이언트 보어가 또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오러를 두른 자이언트 보어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재빨랐다.

렉시스는 그 즉시 니아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니아가 자이언트 보어에게 부딪혀 몸이 산산조각 나 오장육부가 다 드러나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니아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단거리 이동 마법 블링크를 이용해 자이언트 보어 등 위에 나타났다.

그러곤 자이언트 보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 위 얼음 송곳이 여러 개 나타났다.

그녀의 마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타난 얼음 송곳에는 바람 마법이 덧씌워지더니 드릴처럼 고속 회전을 시작했고, 곧이어 자이언트 보어를 향해 날아가 두꺼운 가죽을 짓이겼다.

"쿠허어엉!"

니아의 마법을 맞은 자이언트 보어가 몸을 돌려 그녀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했다.

그 마법을 지켜보던 렉시스는 터무니없는 마력량에 경악했다.

니아의 마법 수준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법 한 발 한 발에 담은 마력량이 일반 마법사의 5배는 될 수준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력이 많기에.'

단순한 마법이라도 저렇게 엄청난 마력을 실으니, 자이언트 보어의 가죽을 뚫는 파괴력이 나올 수밖에.

"보이냐."

렉시스가 경악하고 있는 동안 그의 머리맡에 하천성이 다가왔다.

그는 악마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렉시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너희가 건드리려 했던 니아다. 잘 봐 둬라. 너희가 어떤 녀석을 건드렸는지."

내가 건드리려고 했던 건 네놈이다!

그렇게 렉시스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여나 그랬다가는 자이언트 보어에게 시선이 끌릴 거 같아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자존감에는 또 커다란 스크래치가 생기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니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자이언트 보어의 몸에 계속해서 상처가 늘어났지만, 녀석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거대한 몸만큼이나 우직한 체력 탓에 니아는 그 많던 자신의 마력이 서서히 줄어듦을 느꼈다.

'안 돼. 모자라.'

그녀는 또 한 번 달려드는 자이언트 보어를 피하고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력 분배를 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마법식을 꽉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마법을 구현하는데 10초가량의 연산 시간이 필요하다면, 지금의 그녀는 그걸 단 5초로 줄이고 있었다.

니아의 코에서 핏물이 흘러 내렸다.

너무 많은 마력을 쏟아부은 탓에 몸의 과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마법이 필요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이언트 보어의 돌진 속도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블링크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피할 방법이 보이지가 않았다.

계속되는 블링크 탓에 그녀는 자이언트 보어를 상대로 강한 마법을 준비할 시간이 모자랐다.

니아의 두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자이언트 보어는 겉으로 보기엔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도 쌩쌩하다.

그에 반해 자신의 체력은 물론 마력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

「니아, 네가 쓰러트려라.」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탓에 입가에 비릿한 핏물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천성이 말했다.

저놈을 네가 쓰러트리라고.

그는 자신의 마법을 단련하는 데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니아는 블링크를 발동시키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던 순간 질척해진 땅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자이언트 보어에게 얼음 마법을 쏟아붓던 중 빗맞은 송곳들이 녹아 땅을 적신 것이다.

진흙같이 된 바닥을 보고 그녀는 자이언트 보어를 돌아보았다.

또 한 번 시작 된 발길질과 함께 녀석이 달려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니아의 두 눈동자가 반짝이었다.

승기가 보였다.

그 순간 자이언트 보어가 또 한 번 그녀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사력을 다한 맹렬한 돌진을 보고 니아는 두 손을 모았다.

2성 마법

프리즌(Prison)

그 순간 자이언트 보어의 발아래에 있는 땅이 얼어붙었다.

뒤이어 자이언트 보어는 물론 녀석의 돌진으로 인해 드러난 숲의 지면까지 전부 얼음으로 뒤덮였다.

1성 마법

그리스(Greece)

그뿐만이 아니었다.

니아는 얼음에다가 미끄러움이 강해지는 마법을 추가로 걸었다.

자이언트 보어는 가뜩이나 무거운 덩치에다가 본래 달리던 가속도까지 붙자, 미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옆으로 기울여졌다.

2성 마법

디그(Dig)

자이언트 보어가 기울어지자마자 니아는 또 한 번 마법을 발동시켰다.

녀석이 넘어지는 장소에 생긴 거대한 구덩이는 순식간에 그의 몸 반절을 집어삼켜 버렸다.

2성 마법

아쿠아(aqua)

2성 마법

프리즌(Prison)

복수의 마법이 발동된 순간, 자이언트 보어가 빠진 구덩이 속이 물로 가득 채워졌다.

녀석이 뒤늦게 몸을 움직여 빠져나오려 했지만, 구덩이 속 물은 이어지는 마법으로 인해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시간을 벌었어.'

니아는 자이언트 보어가 얼음 속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자세를 바로 하곤 심호흡을 하였다.

그 순간 그녀의 주위에 대량의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이언트 보어의 저 단단한 가죽조차도 뚫을 수 있는 마법.

니아는 머릿속에 거대한 창 한 자루를 연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랜스의 형태를 띤 창은 모든 것을 꿰뚫을 만큼 날카로웠다. 니아는 곧 그걸 얼음의 형태로 구현해 내었다.

이윽고 그녀의 앞에 자이언트 보어조차 뚫어 버릴 창 한 자루가 완전히 생성되더니, 바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창 하나를 쏘아 보내기 위해 대량의 마력이 추진력이 되어 줄 바람으로 변환되고, 니아는 곧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콰직!

"쿠허어어어어어!"

그 순간 한 번의 포효만으로도 이명을 일으키는 자이언트 보어가 얼음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얼음 속에 갇혔던 탓에 붉게 물든 녀석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로 인해 자이언트 보어는 단 한 가지 실수를 해 버렸다.

일어나며 자신의 입을 니아를 향해 쫘악 벌려 무방비하게 약점을 노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틈을 타고 창이 날아들었다.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콰직! 콰드드드드드드드득!

거대한 창은 순식간에 자이언트 보어를 급습했고, 녀석이 반응하기도 전에 입안을 찢어 버리며 그대로 그의 내장까지 모조리 박살 냈다.

하나, 창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마수의 두꺼운 가죽까지 꿰뚫고 지나 가버렸다.

졸지에 완전히 관통당해 반대편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 된 자이언트 보어는 그 일격에 즉사했다.

쿠웅!

마수의 거대한 몸이 바닥에 쓰러지자 흙먼지와 함께 한차례 모래바람이 일어났다.

창은 자이언트 보어를 뚫고도 힘이 남은 건지, 숲을 헤집어 놓았고 니아는 그 광경을 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얼마나 많은 마력을 사용한 건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몸에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조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겉옷을 꾸욱 쥐었다.

이 용포 덕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니아."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미해지는 정신 사이로 니아는 눈동자를 위로 움직였고, 그러자 하천성이 시야에 보였다.

그녀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살며시 자리 잡았다.

"천, 성아."

그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니아의 의식이 끊겼다.

"여기다! 어서 빨리!"

하천성이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 준 순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는 뒤늦게 온 교사들이 있었다.

숲에서 난 소란 탓에 급히 온 그들은 몸이 관통당한 자이언트 보어를 보곤 경악했다가, 곧 하천성과 니아를 발견했다.

"자, 자이언트 보어잖아?!"

"하, 하천성 학생? 자네가 한 건가?"

일의 전말을 모르는 선생들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 순간, 하천성은 새침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 리가요."

그는 자신의 품에 있는 니아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전부 이 녀석이 했습니다. 니아가 절 살려 줬어요. 갑자기 마수가 공격 해와 난리가 아니었죠."

그는 그러면서 쓰러진 아이들 쪽을 가리켰다.

"렉시스가 도우러 오긴 했지만, 자이언트 보어가 너무 강해서 다들 당하고 말았습니다."

렉시스의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하천성이 공격당했다면 대놓고 면박을 줄 수 있겠지만, 자이언트 보어에게 공격당한 건 니아다.

만약 자이언트 보어가 그가 고용한 마수사가 한 일이라면, 자신의 안위가 위험해질 테니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선생님들 니아가 마력이 다해 쓰러졌습니다. 우선 수업을 끝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지. 다들 어서 정리부터 하게나. 치유 마법사를 불러. 니아 님을 치료해야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선생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매미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양호실.

나는 의자에 앉아 침대의 누운 니아 녀석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니아의 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 자는 척을 할 속셈인가.

"여, 니아, 잘 잤냐."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기에 내가 질문을 던지자, 니아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검지와 엄지로 녀석의 코를 막았고, 이내 니아가 버둥거리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숨 막혀서 죽게 하려고?"

"자다가 코 골길래. 시끄러워서."

"나, 나 코 골았어?!"

"아니."

내가 농담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니아는 나를 째릿 하고 노려보았다.

"그 대신 내 이름을 너무 많이 부르던데."

"어."

"뭐, 그건 됐고."

새빨갛게 귀를 물들이는 니아의 모습에 나는 녀석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력은?"

"아, 회복됐어."

니아가 기절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마력 고갈이다.

용천성의 용포 덕분에 그녀에게 상처는 전혀 없었기에 사실 쉬기만 하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거기에 잔뜩 묻었던 먼지도 교사가 클린 마법을 걸어 준 덕분에 지금은 깨끗하니, 니아는 방금까지 자이언트 보어와 싸운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양호실 나가면 한동안 고생 좀 할 거다."

"내가 자이언트 보어를, 쓰러트린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니아는 자이언트 보어를 확실하게 쓰러트렸다.

이 일은 이제 왕국 전역에 퍼져 나갈 것이다.

'정확히는 내가 퍼트릴 거지만.'

아카데미 학생이, 그것도 스텔라 왕가의 막내 공주가 2급 마수인 자이언트 보어를 쓰러트렸다.

세간이 떠들썩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그 마수 천성이 네가 준비한 거지?"

171화

"아니, 홍등가에서 고용된 인물이야."

"나 바보 아니야. 레미랑 이지스를 몰래 재우는 거 봤어. 그리고 천성이 너라면 저 정돈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는데, 일부러 나한테 맡겼잖아."

"그야, 네가 스스로 위기를 돌파하고 성장하기를 바라서 그랬지."

내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자 니아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담 그런 거겠지."

이 녀석 말대로 니아는 바보가 아니다.

녀석은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했는지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내 입으로 해 주기를 바라는 거겠지.

"니아."

며칠밖에 보지 않았지만, 나는 니아의 성격을 대강 파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둘러 말하는 것보다는 그녀의 의중을 확실히 묻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넌 왕이 되고 싶냐?"

니아는 나를 바라보았다.

왕이라는 말에 고민하듯 그녀는 옆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그러곤 이내 서서히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어. 권력은 강하지만 사람을 그것 말고는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경외를 받는다는 감정에 취해 정작 보아야 할 건 보지 못하게 되어 버리니까. 너무 많은 걸 잊어."

자신 또한 왕가에서 잊혀 버렸듯이. 니아는 왕가 자체에 질려 있는 표정이었다.

만약 공주라는 지위 없이도 마법과를 다니고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랬을 거라는 양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주위 사람들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렇겠지. 날 어떻게든 왕으로 내세워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거야."

"그래서 난 너한테 선택권을 주려고 한다."

니아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었다.

"오늘 일로 넌 세간에 크게 알려질 거야. 널 왕으로 추대하고픈 세력들뿐만 아니라 첫째 왕자에게도 알려질 거다. 네가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건 큰일 아니야?"

"반대로 네 입지를 확고하게 굳힐 기회지. 첫째 왕자는 어떤 식으로든 귀족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패인 널 제거하려 할 거다. 설령 귀족들의 손을 잡지 않으려 한다고 한들 왕이 되기 전에 후환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겠지."

스텔라 왕가의 왕은 현재 병으로 누워 있긴 하나 죽지는 않았다.

즉,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너에게 다가오는 귀족 세력을 네가 삼키는 거다."

"그랬다간 왕이 되어야 할 텐데."

"이용을 당하면 왕이 되겠지. 하지만 네가 이용당하지 않을 만큼 위로 올라가면 그만이야. 그 녀석들이 너를 꼭두각시로 조종할 수 없도록 너 스스로 움직이면 되니까."

니아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불린 세력을 이용해 첫째 왕자가 너를 도저히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때 네가 선택하면 돼. 왕이 되기 싫다면 싫다는 말 한마디가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네 의견에 반박하지 못할 테니까."

"천성아, 왜 그렇게까지 나를 도와?"

"너 정도 되는 빽이 있으면 세상 살기 편 할 테니까."

"천성이 너라면 나 없이도 마음대로 살 거잖아."

잘 아는군.

"그리고 정말로 인맥을 얻을 거라면 차라리 나한테 왕이 되라고 했을 거야."

진실을 말해 달라는 듯한 니아의 눈을 보고 나는 어물쩍 넘어가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이 녀석은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어 봤기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하는 습성이 몸에 밴 듯하다.

그래서 저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니아는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 했다.

"내가 저번에 말했지 않았냐?"

"선의로 돕는 거. 사람의 선의를 무시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천성이 넌 그럴 타입이 아니잖아."

그동안 꽤 오래 같이 있었기 때문인지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듯한 니아의 말을 듣고 나는 손 위에 턱을 괴었다.

크라운 로드를 올라야 한다던가, 네가 등장인물이니까 라던가.

그런 식의 진실은 아무리 말해 줘 봤자 니아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상황에서 니아에게 해 줄 수 있는 말 중 가장 적절한 답을 찾아내었다.

'사랑은 짜증 나지만.'

때로는 어떤 것보다 확고한 믿음을 만들어 주곤 한다.

물에 빠진 여자 친구를 구할 것인가, 친어머니를 구할 것인가를 동일 선상에 둘 정도로.

"그냥 보고만 있기 힘들어서."

내 입술이 열린 순간, 니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내가 불쌍해서야?"

"그거뿐이었다면 내버려 뒀을지도 모르지. 어느 순간, 타인이 소중한 사람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네가 그랬듯이 나도 그래."

내 이야기를 듣고 니아는 잠시 동안 눈을 깜빡이었다.

그러곤 내 이야기의 담긴 의미를 눈치채고 얼굴이 서서히 빨갛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니아는 당황한 눈치로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어, 언제부터야."

"네가 처음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처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니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이 대답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바라던 대답이었다.

"나 마음 생겼냐고 물으면서 놀렸잖아."

"원래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항상 장난쳐."

"여자애들은 그런 남자애를 싫어해."

"그래서, 나 싫어하냐?"

니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확고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시간은 0.2초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그것이 길든 짧든, 또 언젠가 깨져 나간다 한들 그때만큼은 사랑하는 이에게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어 한다.

"니아."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니아는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내 눈과 마주치는 것만으로 부끄러운 지 그녀의 시선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널 돕고 싶어. 네가 위험에 처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렇기에 사랑이란 때론 무자비할 정도로 이용하기 좋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 그래서 난 널 귀족에게 이용당하게 두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침대 위에 올린 니아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었다.

부드러운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오늘 일도 그걸 위해서였어. 너한테 설명하지 않았던 건 미안해. 그렇지만 널 지키려면 내가 널 지키는 게 아니라, 너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만드는 게 훨씬 안전해."

니아의 손을 타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네가 왕이 되든 말든 나는 그 둘 다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네가 안전했으면 좋겠어. 네가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게슴츠레하게 반쯤 풀린 그녀의 눈동자가 사랑에 취해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세상이 분홍빛으로 보이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달콤하게 들리곤 한다.

"...천성이 너도 내가 피오나 언니한테 납치당한 날 걱정했어?"

"내가 왜 그날 종일 전국을 뒤지면서 너를 찾았겠어."

니아의 눈동자가 나에게 향하고 그녀는 조심히 양팔을 벌렸다.

"그럼 한 번만 안아 줘."

사랑을 확인받고 싶다는 듯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감으며 끌어안았다.

내 심장 부근에 깃든 오러가 고동 소리를 빠르게 울리기 시작했다.

"네 심장이 엄청 쿵쾅거려."

"시끄러. 너도 마찬가지야."

니아는 내 품에 안겨 그 소리가 즐거운 듯 눈을 감았다.

"니아, 널 지킬 발판을 만들 거다."

"알았어."

"고생 좀 할 거야."

"늘 하던 게 고생인걸."

웃음 지었던 니아는 내 얼굴이 바로 앞에 있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다가 나와."

니아를 두고 밖으로 걸어 나온 내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자 옆에서 느껴진 인기척과 함께 검왕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사이 정이 좀 들었는 모양이네."

"시끄러워."

"힘들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선한 감정을 이용하는 건. 차라리 악당을 이용하는 거라면 마음이 편한데. 선한 사람이나 안타까운 처지의 등장인물에게는 막대할 수만은 없으니까."

"그건 너나 그래."

참가자들은 등장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너무 깊은 감정 이입을 했다가는 100층이나 되는 크라운 로드를 오르다가 감정이 마모되어 사라져 버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검왕 녀석과 같이 정신력 강한 녀석들밖에 없다.

특히 회귀자들은 그 경향이 더욱 심하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등장인물은 어차피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천성, 당신은 제일 앞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나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검왕의 말마따나 맨 앞을 달리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야기 자체를 완전히 풀어 나가야 하는 역은.

4회차, 제일 앞을 달리던 것은 황제였다.

나도 최전선이기에 그를 따라 여러 이야기를 공략했지만, 이야기를 완전히 통제하는 건 어디까지나 황제의 몫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주인공이었고, 황제 친위대와 다른 이들은 어디까지나 그런 황제를 보조하기 위한 역이었다.

"이야기 속 엔딩을 보기 위한 주인공이 된다는 건 그런 거야. 성좌가 써 낸 이야기는 사람을 계속해서 좀 먹어. 그러니까 앞에선 참가자는 제일 빠르게 망가져 가는 거지."

후발 주자들은 앞에서 클리어한 참가자들이 한 공략법을 토대로 공략을 하면 된다.

검왕과 같은 황제 친위대들은 후발 주자들을 최전선으로 조금이라도 끌어모으고자 그들에게 층의 공략법을 계속해서 알려 왔으니까.

그렇기에 후발 주자들은 이야기 속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일이 적다.

공략법이란 수단이 생긴 순간부터 등장인물들을 가상의 인물이라고 인식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최전선, 이야기를 제일 앞에서 풀어 나가야 하는 이들은 다르다.

공략이 없기에 하나하나 모든 것을 직접 알아내야 하고,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등장인물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 층을 클리어할 열쇠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참가자가 무심코 등장인물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만다.

"층이 끝나면 이야기는 끝나고, 등장인물과의 연은 끊어지지. 물론 참가자들은 마음속에 이야기를 묻어 두고 다음으로 나아가지만, 그렇다고 겪은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아."

검왕은 기다란 검지로 내 가슴팍을 꾹 눌렀다.

"어떤 이야기든 여기에 남아서 하천성 당신을 괴롭힐 거야.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당신도 언젠가 등장인물을 이야기의 단순한 파편이라고 치부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올 테니까."

"나보다 좀 더 빠르게 층을 오른 적이 있다고 선배 행세라도 할 생각이냐?"

"아니, 현실을 인식시켜 주려고 그래. 당신이 무심코 이야기에 너무 빠지지 않을까 싶어서."

검왕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든."

"화 많다는 걸 돌려 말하지 마라."

"화뿐만이 아니야. 당신은 희로애락이 강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고 저번 층에서도. 당신이 키운 아이를 보고 미소 짓는 그런 감정 말이야."

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검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의 그런 모습이 좋아. 등장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것도 그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도. 그런 당신이니까 여러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는 거로 생각해."

"앞에서 한 말이랑 다르잖아. 감정 이입하지 말라고 했던 주제에."

"방금 건 같은 참가자이자 회귀자로서의 조언, 이번 건 나라는 사람이 순순히 당신을 평가한 거야. 황제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 말에 나는 잠시 황제를 떠올렸다.

172화

확실히 그 녀석은 감정적인 면이 없잖아 있긴 했다만.

"그리고 야신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었어."

검왕의 두 눈동자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야신 꼴 아니면, 황제 꼴이 날 거다. 이거냐?"

"뭐든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가급적이면 난 당신이랑 함께 크라운 로드를 오르고 싶어. 동료가 있으면 현실로 쉽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

"은근슬쩍 끌어들이지 마라."

내가 못마땅한 듯 검왕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래, 아직 39층이니까. 당신도 아직은 괜찮겠지. 그래도 연심 가지고 장난치면 나중에 어찌 되어도 난 몰라."

검왕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쯧 하고 혀를 차고 몸을 돌렸다.

결국 오지랖이다.

* * *

다음 날, 마수사 한 명이 치안대에 잡혔다.

실습 수업 중인 스텔라 아카데미의 학생을 자이언트 보어로 습격한 그는 홍등가에서 고용된 인물이었고, 사람들은 이를 듣고는 저마다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린 말은 하나였다.

첫째 왕자 쪽에서 니아를 견제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그것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니아가 왕위 계승을 놓고 벌이는 쟁탈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시발점이자, 반대 세력인 귀족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는 계기였다.

거기에 또 다른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17세, 아직 어린 소녀인 니아가 자이언트 보어를 혼자서 쓰러트렸다는 이야기였다.

2급 마수종은 최소 7성 마법사는 되어야만 아슬하게 쓰러트릴 수 있는 괴물이다.

스텔라 아카데미 학생 평균이 5성, 뛰어난 학생이 간혹 6성인 것을 고려하면, 니아의 마법 실력은 세상을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후에 성장하면 대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며 요란한 소문이 돌자 첫째 왕자 쪽 세력도 서서히 경계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법 세계, 이곳은 마법 수준이 곧 권력이 되는 세계다.

니아의 뛰어난 마법은 그녀를 왕으로 만들게 하기 위한 세력의 강력한 카드가 될 것이다.

스텔라 왕가의 오랜 전통에 따라, 마법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자가 왕을 해왔기 때문이다.

불온한 움직임들이 세계 각지 여기저기에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첫째 왕자를 반대하던 세력인 귀족들 또한 이것이 자신들이 떠오를 기회임을 눈치챘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한들 평생을 병상에 누워 있던 17살 여자애.

잘 이용하면 왕권을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판토니마 카타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직접 찾아가지."

올해로 74세.

깊은 주름이 눈에 띄는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넘겼다.

"판토니마 공작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래, 저쪽에서 직접 오라는데 가 줘야겠지. 미래의 왕이 될 사람이 아닌가."

끌끌거리며 웃음을 흘린 그는 허리를 곧게 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당한 거구인 그는 다리가 조금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전에 만나야 할 녀석이 있지."

카타만은 약점을 이용할 줄 아는 자였다.

그리고 그는 니아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오랜만에 딸의 얼굴을 좀 봐야겠군."

니아가 손녀라면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

왕의 아내가 되기 이전까지 20년이란 세월 동안 함께한 사람은 카타만이다.

비록 그 딸이 낳은 자식이 마법도 못 쓰는 쓰레기 손녀라 왕권에서 눈을 돌렸던 그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 손녀가 왕이 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는가.

그의 눈에 왕좌가 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탐욕스러운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카타만은 곧바로 마차에 올랐다.

그가 향하는 곳은 니아가 머무는 스텔라 아카데미의 기숙사.

판토니마의 문양이 커다랗게 찍힌 마차가 덜컹거리며 그의 영지를 떠나 스텔라로 향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덜컹거리며 그의 마차가 정지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의 게슴츠레 눈을 뜬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차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그에게 보인 것은 한 남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위로 데려온 마법 기사의 목을 반쯤 꺾어 놓고 있었고, 카타만의 눈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주위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는 지금 혼자다.

그러나 마법 기사 5명과 마부가 짧은 순간에 그의 손에 전부 당했다.

마법진이 그려진 장갑을 꾸욱 누르며 카타만은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카타만에게 닿았고, 카타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보냈지."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검격이었다.

휘둘러진 검 날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려던 순간, 카타만의 방어 마법에 막혔다.

카타만은 스텔라에서도 손꼽히는 10성 마법사.

오러로만 친다면 그랜드 마스터급이다.

"내가 마법 기사를 고용한 건 내가 나서기 귀찮아서인 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널브러진 마법 기사들은 기껏해야 5성급들.

고작 기사들을 쓰러트렸다고 기고만장해진 습격자를 보고 카타만의 두 눈이 번뜩였다.

곧 그의 손에서 나타난 수천 개의 얼음 창이 합쳐져 뱀의 형태가 되었다.

얼음 창으로 이루어진 뱀은 날카로운 창날을 고속 회전하며 습격자를 덮쳤다.

이내 얼음이 깨져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습격자가 쥔 검이 뱀의 창날을 모조리 갈라 버리고 있었다.

휘둘러지는 검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멀리 있는 카타만에게 풍압이 느껴질 정도였다.

'뭐지. 저 움직임은? 신체 강화 마법인가? 마력은 느껴지기는 하는데.'

이 정도로 강한 신체 강화 마법은 본 적 없던 카타만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검은 구시대에나 사용하는 무기이건만 가끔씩 저렇게 신체 강화에만 집중하는 녀석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나곤 한다.

검이 마법에 뒤처지는 구시대 무기 취급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검에 자신 있다면."

카타만의 등 뒤에 수백 자루의 검이 생겨났다.

얼음으로 세공된 검들은 마력을 둘러 강철마저 베어 버릴 정도의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카타만이 손을 뻗자 수백 개나 되는 검들은 습격자가 어디에도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사방팔방에서 그를 베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격자는 일체의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고 검 한 자루로 모든 검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 기이한 움직임에 카타만이 다시금 새로운 마법을 발동하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별빛이 반짝이었다.

그 순간 카타만은 시야를 잃었다.

"아아악!"

눈알이 베였다는 감각과 함께 새까만 공간이 그를 잠식하고, 붉은색 뜨거운 덩어리가 눈에서 쏟아져 내렸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야가 없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급히 회복 마법을 걸어 간신히 한쪽 눈을 복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그의 시야는 어느새 새하얀 별빛으로 가득 매워져 있었다.

그는 시야에 들어온 별빛이 그제야 매우 자그마한 검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별빛이 자신을 구 형태의 감옥으로 가 두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이게 전부 검이라는 건.'

만약 이 별빛이 조여들기라도 하면 그 즉시 카타만은 자그마한 검에 난도질당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뱃속이 아릴 정도로 죽음이 눈앞에 들이닥치자 카타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빛 너머 방금 전 검을 쥐고 있던 남성이 걸어왔다.

그의 검은 손잡이밖에 없었다.

"판토니마 카타만."

"누구냐! 대체 네놈은 누구야!"

"알 거 없다."

피를 토하듯 카타만이 외쳤지만, 남성은 시큰둥하게 말하곤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빛의 검들이 카타만을 조여 오자 카타만이 다급히 외쳤다.

"워,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닌가! 난 판토니마 카타만이다! 날 죽이면 스텔라 어디에도 네놈이 살아갈 수 있을 곳은 없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눈앞까지 조여든 별빛의 검들을 보고 카타만은 죽음을 직감했다.

콰앙!

그 순간 갑자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거기에는 별빛 검들보다도 강렬한 번개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번개 사이로 검 한 자루가 뻗어 나왔다.

별 문양이 그려진 검은 순식간에 습격자를 몰아세웠고, 카타만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날아든 검 날이 습격자의 옷 일부를 찢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홍등가의 문양이었다.

'홍등가, 첫째 왕자 세력이냐!'

설마 자신을 정면에서 습격할 거라 생각 못 한 카타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첫째 왕자 세력이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나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어.'

한순간 당황했던 카타만이지만, 그는 침착하게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습격자가 홍등가의 문양을 가지고 있긴 하나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일부러 홍등가 문양을 지니고 자신을 습격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사태 파악은 나중이다.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야.'

카타만은 별빛 검들이 자신을 조여드는 것을 멈추고 서서히 줄어들어 가는 것을 눈치챘다.

새로 등장한 인물의 공격을 막고자 습격자가 빛의 검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틈이 없다고 생각한 카타만은 급히 장갑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짧은 거리를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있게 좌표를 자동으로 지정해 주는 장갑에 깃들자, 그 순간 카타만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악!"

뒤이어 그는 양 손목에서 느껴진 격렬한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장갑 채로 사라진 양 손목이었다.

곧 텔레포트로 그의 몸이 이동되는 대신 자신의 팔에서 잘려 나간 양 손목만이 방금 찍힌 좌표로 날아가 버렸다.

'이 자그마한 검들의 짓이야.'

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이 검들 텔레포트의 발동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타만은 식은땀을 흘렸다.

양 손목에서 흐르는 출혈로 정신이 금방 혼미해졌지만, 그는 치료 마법으로 겨우 손목의 출혈을 막았다.

통증 탓에 머릿속이 흐려져 영창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탓에 손목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가 없었다.

통증이 가실 때까지는 제대로 된 마법도 쓸 수 없으리라.

'젠장, 빠져나갈 유일한 기회인데.'

갑자기 나타난 남자 덕분에 별빛 검들의 수가 조금씩이나마 더 줄어들고 있지만, 빠져나갈 틈은 여전히 없었다.

두 사람은 어느샌가 숲으로 들어 가 버린 탓에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다.

"썩을, 썩을."

욕을 내뱉으며 카타만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렇게 별빛 검들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