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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나, 내가 어딜 멈추냐며 검을 내지르자 보리도 어쩔 수 없이 다시 검을 부딪쳤다.

"무슨 소린가 그게. 족장, 어딜 가려고? 족장한테 원한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그래, 맞아. 그 원한이 좀 무서워서 말이야. 도망치려고."

"헛소리다. 족장이 도망갈 리가 없다. 대련에서 이기려고 허튼수작 부리는 거 다 안다."

"그런 수작 안 부려도 넌 그냥 이겨 자식아."

빈틈을 노려서 보리를 한대 걷어 차준 나는 씨익하고 웃어 보였다.

넘어진 채 나를 올려다보던 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용히 물었다.

"...진짜인가? 족장. 정말로 떠날 생각인가?"

"그래, 앞으로 3일 뒤쯤이면 간다. 이제 내 얼굴 안 봐도 되니까 좋지?"

보리는 혼란스러운 듯하였다.

내가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 볼 겸 실실 웃었지만 녀석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족장, 혹시 내가 어제 족장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세운 걸 눈치채고 이러는 거냐?"

그딴 걸 짜고 있었냐.

"네가 내 뒤통수 백날 쳐봤자 달라질 건 없거든?"

"그럼 어째서냐. 내가 모자랐나? 그렇게나 가혹한 훈련을 시키고 튀는 게 어디 있나!"

도망치지 말라는 양 외치는 보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나를 붙잡고 싶어 하는 녀석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년, 길다면 길었다.

내가 많이 괴롭히긴 했지만, 처음부터 나를 잘 따랐던 녀석이다.

몇 번인가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적도 있었지만 보리는 꿋꿋이 버텨냈었다.

보리는 강해진다는 것 자체에 매료되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도 나대로 녀석을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그리고 녀석은 그 기대에 잘 보답해주었다.

"아니, 충분해서야. 슬슬 너한테 족장 자리를 물려 줘도 괜찮을 거 같아서."

"족장, 족장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건 1년밖에 안 되었다. 더 있어도 된다."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을 보리는 돌려서 했다.

내가 계속 함께해 줄줄 알았는데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1년간 나는 그 정도로 보리의 삶에 깊숙하게 파고든 것이다.

"그래, 그것밖에 안 됐지. 그런데 그것밖에 안 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잖냐. 그래서 슬슬 때가 되었다고 느꼈어. 난 종족 통일이던 트롤을 이끌던 그런 거에는 관심 없어. 그런 쪽에 관심 있는 건 보리 너지."

실제로 지금도 다른 종족들은 나 보다는 보리를 믿고 있었다.

보리는 매일 같이 적극적으로 다른 종족의 왕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 생겨나는 문제의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

녀석의 자유로운 사고는 종족 간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만들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보리는 족장이자 왕이었다.

"난 아직 족장을 꺾지 못했다. 족장 자리는 족장을 꺾어야만 얻는 거다."

보리의 두 눈은 진심이었다.

나를 꺾을 때까지 자신은 족장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가짐이 굳게 느껴졌다.

날 닮아 버려 고집스러운 녀석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고집의 마지막을 장식할 방법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시험 하나가 곧 올 거다."

콰앙!

그 순간 내 옆에 번개가 내려꽂혔다.

주위 종족들이 놀라 일사불란하게 도망칠 동안 걷힌 연기 사이로 독각귀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독각귀 조율.

전 속성 오러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그는 금관 하나를 쓰고 있었다.

금관에는 뇌귀라고 적혀 있었으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보니 저게 바로 그를 강하게 만들어 준 도구인 듯하였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자기가 만든 것과 당신이 만든 것을 붙여 보자며 눈을 반짝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매망량 녀석이 조율을 통해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싸움 붙이기를 좋아하는 이매망량이다.

내가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조율을 보낼 것이란 것을 눈치챈 나는 이것을 보리의 성장에 마지막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어차피 아래층 간섭으로 제약을 받은 이매망량이 용써봤자 나랑 맞붙을 수준으로 조율을 강화할 수는 없을 노릇.

그렇담 그의 성격상 반드시 내가 키워 놓은 보리 녀석을 노릴 것이었다.

'나 원, 성좌의 성격 따위는 파악하고 싶지 않았는데.'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녀석들의 메시지를 봤기 때문인지 어느새 별천도에 깃든 최상위 성좌 녀석들의 성향을 대강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것 치고도 너무 강하게 돼서 온 것 같긴 한데.'

다음 층을 생각하면 이런 걸 상대해 보는 것도 보리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

"보리, 만약 저 녀석을 내가 떠나기 전에 쓰러트릴 수 있다면 네가 날 꺾을 수 있을 때까지 쭉 함께 있어 주마."

"기다려라! 족장! 이렇게 도망치는 건 용납 못 한다!"

"꼬우면 이놈 이겨."

보리는 어차피 내가 떠나는 것을 말릴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떠나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이다.

보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아직 나에게 배울 것이 많다는 양 보리의 의지가 느껴졌다.

"...족장, 그 말 후회하지 마라."

"후회 좀 하게 만들어 봐라."

씩하니 웃은 나는 조율을 돌아보았다.

듣기론 이 녀석도 꽤나 개 같은 성격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매망량에게 이리저리 주물러진 모양인지 녀석은 보리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늑대가 조교 당해 개가 되어 버린 거겠지.

이매망량이 내게 말했던 대로 조율은 보리랑만 싸울 속셈으로 이곳에 온 것이리라.

하긴, 자기 원천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녀석들은 같은 성좌 급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겠지.

"잘해봐라."

내가 뒤로 물러나자 그 즉시 조율이 보리에게 달려들었다.

번개와 같이 날아든 조율은 보리를 붙잡고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났다.

"괜찮겠니? 조율, 저래 보여도 나만큼이나 강해."

"알아. 지금은 너보다도 강할 거다."

무려 최상위 성좌께서 강화해 주셨으니.

그런 나를 보고 소니는 무언가 눈치챈 듯하였다.

"너, 처음부터 저 약속 지킬 생각이 없었구나."

그 말대로 나는 보리가 3일 안에 조율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 안 했다.

보리가 빠른 속도로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강화된 조율만큼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 번개와 번개가 맞부딪치며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의 대부분은 조율이 내뿜는 것일 것이다.

보리가 밀리고 있다는 소리겠지.

"정말로 떠날 생각이야?"

소니가 조심스레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나는 딱히 필요 없는 사람이야."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게 너면서 쏙 도망가면 어떡하니. 넌 그렇게 말하지만 네 영향력은 생각보다 엄청 커. 쟤들, 네가 여러 가지로 수작 부려서 짓눌려 있는 거잖아. 네 공백을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반란부터 일어날걸."

내가 없어지고 나서의 일이 눈에 훤하다는 양 소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없어지면 너한테는 이득 아니냐?"

"그건 별개지. 숲 전체가 혼란스러워질 게 뻔히 보이는데. 가만히 둘까 봐?"

"보리가 알아서 할 거야."

"보리한테 너무 많은 걸 맡기고 있잖아."

내가 냉담하게 말하자 소니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첫 시작부터 나를 많이 따르게 된 보리다.

옆에서 같이 봐온 소니 입장에서는 보리가 이렇게 내팽개쳐지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나도 다 사정이 있어. 그리고 난 처음부터 부외자였고. 너도 알잖아? 내가 일반 트롤들이랑 다르다는 거."

"그건."

소니는 부정하지 못했다.

계속 성장하는 다른 트롤들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완성형이었다.

내가 트롤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라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적당히 거짓말이나 해주기로 했다.

"난 사실 너희의 신 마냥 트롤의 신이거든. 저 녀석들 키워 주려고 온 거야."

"저, 정말로?"

"내가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내 능력에 관한 게 설명이 안 되잖아?"

내 능력을 옆에서 직접 체감한 소니는 이 말을 믿는 눈치였다.

세계관 최강자인 자신의 어머니마저 나한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점에서 차라리 내가 트롤의 기원쯤 되는 게 그녀가 받아들이기도 쉬웠으리라.

"어쩐지. 너무 강하더라 했어. 이제야 이해가 되네."

거봐라.

['서릿발의 고양이'가 저놈 보게 성좌 사칭하네라며 야유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거짓말은 좋지 않다고 다그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내가 키운 독각귀가 더 강하다며 가슴을 폅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성좌 녀석들을 무시하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다 됐어. 남은 시간은 저 녀석들의 몫이야."

어쨌든 한 번 컨셉 잡은 거, 끝까지 유지해 주기로 했다.

떠나는 걸 납득시키기에도 이게 좋겠지.

"보리한테는 비밀이다. 내가 떠난 뒤에는 말해도 딱히 신경 안 쓰겠지만."

"알았어. 그렇게 할게."

트롤이 왜 이렇게 빨리 강해졌는지 이제야 이해했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바보 소니를 두고 나는 보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3일.

만약 보리가 조율을 이겨낸다고 해도 결말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해볼 수 있다면 해보라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3일 뒤.

보리는 끝끝내 조율을 이겨내지 못했다.

150화

3일이 흐른 시점에서도 둘이 싸우고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번개가 치솟고 있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자기 부하가 이긴다며 득의양양합니다.]

"시끄러워. 끝까지 가면 저 녀석이 결국 이겨. 넌 끝까지 다 보고 와라."

보리와 조율의 싸움을 보고 외치는 이매망량의 말에 나는 살짝 짜증을 냈다.

50층에 오르면 찾아내서 직접 걷어차 주던가 해야지.

"가는 거니?"

보리와 조율의 싸움에서 내가 몸을 돌렸을 때 소니가 물어왔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미리 써두었던 편지 한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끝나면 건네줘라."

"이렇게 가면 남은 애들은 어떻게 하라고."

"자기 인생이잖아. 언제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지."

오히려 이렇게 사라지는 게 그들에게 좋을지도 모른다.

공공의 적이 된 마당에 작별 인사를 해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 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위험으로 남는 게 더 좋으니까.

나는 소니에게 해두었던 용천성의 용포를 거두었다.

"너도 이제 자유의 몸이다. 알아서 살아. 아, 미운 정을 봐서 편지 정도는 건네주면 고맙겠네."

"정말 미운 정 밖에 없네."

녀석의 말에 나는 핫하고 웃어주곤 몸을 돌렸다.

['별천도'가 한 명 잊어먹지 않았냐고 의사를 밝힙니다.]

"아, 그러고 보니 깜빡했다."

나는 허리춤에 매여있던 에고웨폰의 왕을 그대로 들고 갈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허리춤에서 녀석을 뽑아 들자 에고웨폰의 왕이 몸을 떨었다.

"아직, 아직이다! 내 청혼은 끝나지 않았다!"

['별천도'가 무시합니다.]

이 녀석들 아직도 이러고 있었나.

내가 모르는 사이 에고웨폰의 왕이 별천도에게 열심히 구애 활동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포기해라."

"안돼에!"

"질척거리는 연애는 의미 없다."

그리 말한 나는 에고웨폰의 왕을 땅속에 깊숙이 박아 넣어 주었다.

['별천도'가 당신의 선택에 기뻐하며 반짝거립니다.]

그러곤 손을 탁탁 털어낸 나는 내 앞에 내려온 다음 층으로 오를 계단 앞으로 걸어갔다.

"수고해라."

층에 남은 모두에게 남긴 한마디 말과 함께 나는 계단을 올랐다.

소니에게는 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겠지.

[축하합니다. 3번째로 37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7층의 주인' '원초의 씨앗'이 싹을 틔우며 당신의 클리어를 축하합니다.]

층의 알림 소리를 들으며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느 한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 내 앞에는 거대한 수정구 하나가 놓여 있었고 나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반가워. 친구."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자 수정구 위에서 한 꼬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꼬마는 거대한 씨앗을 중심으로 뭉쳐진 빛의 덩어리 같은 형상이었다.

꼬마는 마치 자연과 같았다.

꼬마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빛은 언뜻 내가 들판 위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 정도였다.

층의 주민들과는 다른 격의 차이.

층의 창조자이자 세계를 만드는 그는 이 층의 성좌 '원초의 씨앗'이었다.

['38층의 주인' '원초의 씨앗'이 당신에게 싹을 틔워 보입니다.]

꼬마의 씨앗에서 한두 개 싹이 돋아났다.

"웬일로 층의 성좌가 모습을 다 드러내는군."

"나는 입으로만 설명하는 건 재미없어하는 타입이거든. 어때 나는 나름대로 격을 잘 조절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목소리를 직접 들어도 별 타격 없지?"

"너 따위 격으로 내가 타격받을 거 같냐."

내 도발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줄곧 기다렸어. 다수의 참가자가 한 번에 38층으로 오르기를. 지나간 참가자들은 개별로 와버려서 영 재미가 없었어."

다수의 참가자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내 등 뒤에서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누군지 진작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검왕과 나락 녀석이 서 있었다.

나와 동시에 층을 오른 두 사람이다.

다음 층의 클리어를 위해서라도 12일을 꽉 채우고 왔을 테니 당연히 오르는 시간대가 겹칠 수밖에 없었다.

"1년 만이네. 하천성."

"12일이다."

"현실 시간으로는 그렇긴 하지."

검왕은 태연하게 웃었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여러 일을 겪었는지 그녀는 살짝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은 무슨 종족이었어."

"알려 줄 생각 없는데."

"어차피 저기 있는 저 수정구로 우리 종족들의 전쟁을 구경하는 거잖아. 여기서까지 정보를 숨겨서 무슨 득이 있어."

"그렇다면 네가 먼저 말해. 그리고 나락 네놈도."

내 반응을 보고 검왕은 여전하다는 양 한숨을 푹 내쉬곤 토라진 표정으로 허리춤에 양손을 올렸다.

"싫어. 당신이 그런 태도로 나오니까 나도 심술부릴 거야."

"귀여운 척하지 마라."

"아, 안 했어! 내 나이가 몇인데!"

재빨리 허리에 올렸던 손을 내리는 검왕을 보고 나는 눈꼴 시리다는 듯 그녀를 보다가 나락 녀석을 돌아보았다.

"넌."

"저도 비밀로 할게요. 그게 더 재밌지 않겠어요?"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성좌 녀석을 돌아보았다.

['38층의 주인' '원초의 씨앗'이 모두에게 인사를 해 보입니다.]

빛으로 이루어진 손을 녀석이 흔들자 검왕과 나락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들 38층에 온 걸 환영해. 이번 층의 목적은 간단해. 이 층에는 이전에 다녀간 참가자의 종족이 지배자로 남아 있어. 너희가 키운 종족이 그들을 꺾으면 층은 클리어될 거야."

그런 시스템이었나.

"꺾어야 하는 종족은 뭐냐. 그리고 이 앞을 지나간 참가자는 누구지?"

"미안, 그걸 발설하는 건 규칙에 어긋나. 나는 층에 관한 설명을 하러 온 거지 너희에게 다른 참가자의 정보를 주려고 온 게 아니니까."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층의 지배자가 누군지는 알려줘야겠지."

원초의 씨앗은 수정구를 발로 두드렸다.

그 순간 수정구 속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행성 하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오, 신기하네요. 지구 미니어처 같아요."

옆에 있던 나락이 과장스레 말하는 동안 수정구 속 행성은 점점 가까워져 왔고 얼마 안 가 전장 한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령들이 있었다.

"이프리트잖아."

제일 먼저 정령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검왕이 중얼거렸다.

내가 저번에 뽑으려 했던 S급 이프리트가 저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이 여기 있단 건.

"이전 참가자 녀석이 뽑은 게 이프리트였냐."

"맞아. 전 참가자가 해놓은 데이터 그대로 남아 있으니 관람하는 재미가 있을 거야."

이쯤 되면 내 운은 얼마나 없는 걸까.

누구는 S급에서 시작하고 누구는 F급에서 시작하니 말이다.

"이프리트가 이곳에 지배자들이야. 너희 종족은 이들을 꺾어야 하지. 방법은 간단해. 종족의 우두머리를 쓰러트리는 쪽이 승리야."

하지만 우리는 이 전쟁에 간섭할 수 없다.

그저 우리가 키운 종족들이 이프리트에게 승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너희가 떠난 뒤의 애들 행적이 궁금하지? 참고로 내가 보여줄 시점은 너희가 떠나고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시간대야."

"50년이라고?"

50년이나 지났다니.

젠장, 트롤의 수명이 어느 정도였더라.

보리 녀석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살짝 걱정스레 보고 있자 원초의 씨앗은 수정구를 또 한 번 두드렸다.

"그럼 제일 먼저 검왕네 애들이야."

수정구가 또 다른 장소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설녀들이 서 있었다.

허리춤에 검을 매고 있는 그녀들은 내가 평소 알던 빙결 마법을 다루는 설녀의 모습과는 다르게 마치 여검사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검왕을 힐끔 돌아보자 그녀는 부끄러운 양 시선을 피했다.

"나는 검밖에 못 다룬단 말이야."

마법이 전문인 녀석들을 검술가로 키워 놓은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했다.

"검왕, 설녀의 등급은 몇이었냐."

"A급인데."

썩을.

"그럼 다음은 나락의 애들이야."

또다시 수정구가 비추던 곳이 뒤바뀌었다.

이번 전장에는 용아병들이 잔뜩 서 있었다.

나락 녀석 운이 좋았군.

네크로맨서인 나락이니 용아병을 잔뜩 강화시키기 좋았으리라.

"참고로, 애들 서번트였어."

그러나 돌아온 원초의 씨앗에 대답에 나와 검왕이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서번트란 본디 물에서 살아가는 해룡족이다.

그러나 수정구 속 녀석들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용아병이었다.

내가 나락을 돌아보자 녀석은 쑥스러운 양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이거 참 부끄럽네요. 그래도 제가 만든 아이들 멋지지 않나요? 여러 종족의 뼈를 모아 잔뜩 개조했거든요."

미친놈.

종족을 선택받자마자 전부 몰살시킨 뒤 네크로맨서 클래스로 부활시켜 뼈를 맞췄을 나락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질린 듯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그동안 미친 짓을 많이 해왔지만, 저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나락, 서번트의 등급은."

"A급이었네요."

옘병.

"마지막으로 천왕의 애들이야."

그리 말한 순간 드디어 트롤 녀석들이 보였다.

나와 함께 지냈던 아침 물향나무숲, 그곳에서 녀석들은 어수룩하게 허둥지둥거리고 있었다.

'검왕의 설녀나 나락의 서번트는 절도 있게 움직이더니.'

내가 너무 제식 교육도 없이 막 키웠나.

남들 보여주기 창피할 정도로 어슬렁대며 움직이는 녀석들을 보고 내가 한숨을 내쉬고 있자 대뜸 한 녀석이 소리쳤다.

- 모두 모여라! 적이 온다! 대열을 갖춰라!

그 외침 하나에 트롤들이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트롤들을 지휘하며 한데 뭉치게 하는 녀석을 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보리놈, 꽤 잘 컸네.'

그럴싸하게 지휘를 하는 보리는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다행히 50년이나 지났지만, 현역인 양 수명도 별문제 없는 모양이고.

"천왕님, 저 애들은 등급이 뭐랍니까."

"F급."

내 대답에 나락과 검왕이 동시에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것들이.

"너네, 지금 트롤 무시하냐? 너네 종족들도 싹 다 쓸려 버릴 거다."

"누가 자기애들 아니랄까 봐, 버럭 하기는."

검왕을 쏘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모르는 척 휘파람을 불었다.

두고 봐라, 마지막에 가서 이기는 건 결국 트롤일 테니까.

"이프리트들이 이제 자신의 땅에 들어온 종족들을 눈치챘을 거야. 그럼 구경 잘해. 누군가 승리를 하면 돌아올 테니까."

그 말을 남긴 원초의 씨앗이 사라지고 수정구가 여러 상황을 비추기 시작했다.

원초의 씨앗이 사라지자 대뜸 검왕이 아이템 창에서 돗자리를 꺼냈다.

그러곤 차곡차곡 차 세트와 과자까지 꺼내자 나는 황당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서 볼 필요는 없잖아."

"그런 건, 왜 들고 다니는 거냐."

"예전에 보상으로 받은 '다과의 시간'이라는 아이템이야. 내가 설정하는 대로 다과를 꺼낼 수 있어서 즐겨 쓰고 있어. 게다가 일시적이지만 버프에 피로도 풀어 주거든. 꽤 유용해."

층 보상으로 별걸 다 준다.

그래도 무한한 식량과 피로 회복, 버프는 층이 어떤 상황일지 모르는 만큼 유용한 건 사실이었다.

검왕은 앉으라는 양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둘 다 옆에 앉아. 같이 먹어도 괜찮으니까."

"그럼 당연히 앉아야죠!"

은근히 먹는 데 관심이 많은 나락 녀석이 침을 흘리고 있다가 좋다고 앉았다.

151화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던 내가 따라 앉자 검왕이 흰색 고급 주전자에서 찻물을 따라 내게 건네주었다.

한 모금 마시자 확실히 일시적인 버프가 걸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레이드와 같은 걸 할 때라면 상당히 유용하게 작용하리라.

"검왕,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층을 빨리 클리어 한 사람일수록 유용한 아이템을 줬었지?"

"응, 그런데? 1000위 이후부터는 롱소드나 단검 같은 일반적인 무기 정도밖에 안 챙겨 주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알긴 안다.

롱소드나 단검의 비하면 내가 그동안 받은 아이템들의 효과가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검왕이 쓰고 있는 다과의 시간에 비하면 뭔가 부작용이 있거나, 부족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쯤 되면 참가자 편애 아니냐?'

['서릿발의 고양이'가 예쁜 애한테 뭐라도 더 주는 거 아니냐며 비웃습니다.]

['돌원숭이'가 네가 뭐가 예쁘다고 챙겨 주냐며 중지를 올립니다.]

일단 이매망량을 이어서 죽일 녀석들이 두 놈 더 늘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자기가 하나 챙겨 주겠다며 소곤거립니다.]

그리고 얼마 전 나를 고자로 만들어 버리려 했던 녀석의 말은 무시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무시당했다며 슬픔을 표합니다.]

무시했다.

그러는 동안 수정구 속 화면은 계속해서 전환되었다.

그렇게 내가 흥미 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빠각.

"씨발."

내가 들고 있던 찻잔의 손잡이가 부서져 내렸다.

검왕과 나락이 동시에 나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지만, 나는 수정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일성."

그곳에는 하일성이 있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이프리트의 왕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아까 성좌 놈이 뭐라고 했었지?'

분명히 이전 종족의 데이터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했었다.

그럼 저건 먼저 층을 클리어한 하일성 놈의 데이터?

아니면 내가 위로 올라가는 걸 막아서기 위해 남은 건가?

"나락."

"네, 네."

내가 녀석을 부르자마자 나락은 손을 번쩍 들며 내 곁에 바짝 붙었다.

그 꼴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여기서 제일 정보통이 좋은 건 이놈이다.

"저 녀석 진짜냐."

"별님들한테 물어볼게요."

나락은 하일성을 잠깐 바라보더니, 성좌 방송을 통해 물음을 던져 보았다.

얼마간 성좌들과 대화를 나누던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가짜입니다. 더미 데이터에요. 진짜는 위에 있어요."

그 말에 조금은 안도했다.

만약 녀석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면 나는 층을 클리어할 새로운 방법을 고민했어야 할 테니까.

진짜 하일성이 여기 있는 이상 우리가 키운 종족들만으로 녀석을 꺾을 방법은 없었다.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알 수 없는 편법을 사용해 직접 이 층을 돌파했다. 이거냐.'

썩을 자식, 성좌의 규칙도 모조리 무시해 버리는 꼬락서니하곤.

"뭐야. 뭔데 나만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

멀뚱멀뚱 찻잔을 쥔 채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있던 검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딱히 설명해 줄 기분은 아니었기에 내가 아무 말 없이 수정구만 보고 있자, 옆에 있던 나락이 속삭였다.

"천왕님 형입니다. 지금 1위인 패왕이죠."

"패왕? 하천성, 당신 형이 패왕이었어?"

놀란 눈으로 검왕이 묻자 나는 고개만 까닥거렸다.

"뭐야. 형제가 나란히 최정상 랭커를 달리고 있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려는 건 집안 내력이야?"

"저 녀석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게 목적이 아냐."

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더미 데이터라고 하더라도 이프리트 속에서 남아 거들먹거리는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신 편입니다. 저 사람."

"야신?"

나락이 대신 설명을 해 주자 이번에는 검왕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머리카락이 스멀스멀 공중으로 오를 정도로 야신에 대한 증오심을 표하던 그녀는 나를 획 하니 돌아보았다.

"당신 형이라며, 설득하면 안 돼? 가족이잖아."

"넌 나보다 고집 센 인간한테 설득이 통할 거 같냐?"

"안 되겠다."

포기는 빠르군.

"그리고 저놈은 가족이 아니야. 개새끼지."

"예쁜 말 좀 써. 그래도 나쁜 새끼는 맞네. 야신 편에 붙다니."

게슴츠레 눈을 뜬 검왕은 수정구 너머 하일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확실히 당신 형이네. 저런 똥고집 눈은 흔하지 않으니까."

"내 눈이 어쩌고 어째?"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봐줬더니 은근히 신경을 살살 긁네.

"...그런데 말이야. 당신 형은 왜 굳이 층을 클리어하고 다음으로 넘어간 걸까?"

"뭐가?"

"그도 그렇잖아. 야신 편이라며? 야신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 못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잖아. 그렇담 참가자들이 개입하지 못하는 이 층에서 막는 게 가장 좋을 텐데."

이 부분은 나도 생각했었다.

우리가 개입하지 못하는 만큼 이 층은 참가자를 올라가지 못하게 막기에 아주 적합하다.

그런데 하일성 녀석이 굳이 층을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층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50층이 가까워지는 만큼, 막는 것이 더 힘들 텐데 말이다.

"패왕 앞에 한 명이 더 있나 보군요."

그러던 순간 이유를 알아차린 나락의 중얼거림에 나와 검왕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천성, 당신 몇 번째였어?"

"3번째였다."

"분명 우리보다 앞선 참가자의 종족을 남겨 뒀다고 했었지. 지금 보이는 건 당신의 형이 이끄는 이프리트족이니까, 두 번째로 클리어했다는 건데."

퍼즐이 맞춰지자 나는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진명을 얻은 성좌가 된 야신의 지원을 받은 하일성보다도 앞선 사람이 있다.

하일성은 지금 그자를 막고자 계속해서 층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냐."

하일성과 같이 층을 클리어했다는 소식을 아래층에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야신 녀석이 그 녀석에게도 알림이 작동하지 않도록 손을 쓰고 있다는 소리다.

나는 서둘러 참가자 랭킹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랭킹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랭킹 중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진선이다만.

"검왕, 진선은 어디 있었지?"

"모르겠어. 진선은 이번 회차에서는 줄곧 안 보였어. 처음에는 찾아다녔지만, 랭킹에 꾸준히 남아 있는 걸 보곤 이번 회차에서는 혼자 움직이기로 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렇담 제일 위에 있는 게 진선일 수도 있는 거냐?"

"확신은 못 하겠어."

과거 같은 황제 친위대였던 검왕조차 진선의 위치를 모른다면, 역시 층을 오르고 있는 건 진선인가?

"난 진선에 대해 잘 몰라. 그 여자, 어떤 사람이었어?"

"그냥 느긋한 사람이야. 층을 클리어할 때도, 친위대에서 함께 일할 때도 언제나 전력을 다하는 느낌은 아니었어. 친위대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으니까."

친화력 좋은 검왕조차 겉돈다는 표현이라면 남들과 사실상 교류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도 강해. 바람 마법에서 그 사람을 이길 사람은 없어."

"그건 알아. 몇 번 봤으니까."

"그리고 황제, 그 사람이랑 친했어. 친위대이니까 당연한 거긴 하지만, 유일하게 그녀가 마음을 연 게 황제였어."

"혹시 황제랑 애인 사이였냐?"

"그 부분은 잘 모르겠는데."

어찌 되었든 황제와의 친분은 확실하다 이거지.

문득 나는 이전 층에서 보았던 황제를 떠올렸다.

황제는 죽어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이전 회차에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잘됐어. 지금 이 위에 하일성 놈을 억제 하고 있는 수단이 하나 있다는 거니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런데 지금 위층이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그 순간 유일하게 태연하던 나락이 말을 걸어왔다.

녀석은 수정구를 손으로 쓱쓱 가리켰고 나와 검왕은 수정구를 돌아보았다.

수정구 속에는 이프리트들에게 밀리고 있는 세 종족이 보였다.

"이대로면 패왕뿐만 아니라 이프리트조차도 못 이길 거 같지 않나요?"

확실히 더미 데이터인 하일성이 나서지 않았음에도 종족들은 이프리트에게 크게 버거워하고 있었다.

"아니, 내 아이들이 이겨."

"아니, 저 녀석들이 이긴다."

그러자 검왕과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서로를 곁눈질로 본 나와 그녀는 각자의 종족을 직시했다.

"이기는 건 내 아이들이야."

"아니, 우리 녀석들이다."

"두 분 다 저들을 참 아끼시네요. 좋아요. 저도 제가 만든 아이들을 믿어 봐야죠!"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콰강.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번개가 치솟았다.

일대를 황폐화하는 번개가 계속해서 맞부딪쳤다.

그 번개의 중심에는 조율과 보리가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조율과 보리가 벌인 싸움의 여파 탓에 아침 물향나무숲은 지도를 새롭게 그려야 할 만큼 뒤바뀌었다.

처음 둘의 싸움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던 자들은 어느새 지쳐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보리의 머릿속은 승리를 향한 갈망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조율은 강했다.

자신이 싸워 본 자 중 하천성을 제외하면 가장 강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보리는 그저 계속해서 버티는 것만을 목표로 잡았다.

하천성에게 달구질 당한 덕분에 체력과 오러 유지력만은 자신 있었다.

그 순간 갈라진 껍질 사이로 핏물이 튄다.

끊어질 듯한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사선을 오간다.

눈앞에 내려치는 번개를 맞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보리는 견뎠다.

하천성은 약속했다.

3일 안에 조율을 쓰러트린다면 자신과 함께해 주기로.

전투 속에서 보리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족장 후보 하천성.

대뜸 족장에게 달려가 그를 한 방에 쓰러트려 버리곤 족장 자리에 앉아 버린 자.

처음에는 하천성 옆에 빌붙으며 한자리해 볼 속셈이었던 보리다.

하지만 그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화가 많았으며 쉴 틈 없이 트롤들을 괴롭혔다.

그가 족장 자리에 앉자마자 평화로웠던 트롤의 일상은 순식간에 지옥 같은 나날로 변했다.

그에 의해 뒹굴며 정말 몇 번이나 죽음이 눈앞에 왔다 갔다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

하천성에 의해 보리와 트롤들은 강해졌고 튼튼해졌다.

지금은 보리와 트롤들도 잘 안다.

만약 하천성이 자신들을 그렇게 단련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트롤은 나바족의 침략 때 멸족했을 것이다.

트롤은 태생부터 너무나도 약했으니까.

보리의 기억 속 아버지와 어머니도 어느 날 갑자기 톨울프에게 잡아 먹혀 사라졌었다.

나약한 트롤들에게는 모든 게 위험이었고 적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얌전히 군락에서 햇볕을 쬐는 것 말곤 없었다.

그러나 하천성은 그런 트롤들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트롤 중 가장 강한 이들만 차출되던 이전의 족장 중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는 해 주었다.

물론 트롤들은 여전히 하천성을 욕하고 야유한다.

하지만 그런 트롤들에게 하천성은 진짜 족장이었다.

그를 야유하는 건 친근감의 표시고 그를 욕하면서도 하천성이 하는 일에 아무도 토 달지 않는다.

그는 투박하고.

화가 많고.

짜증도 많으며.

자신들을 괴롭힌다.

그렇지만 그는 트롤들을 강렬한 태양 빛에서 지켜주는 그늘을 가진 거대한 나무가 되어 주었다.

152화

그가 한 모든 건 트롤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보리는 하천성이 트롤과 계속 함께 있어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그늘을 떨쳐 낼 자신이 없었다.

하천성은 언제나 자신을 리더인 양 취급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법이다.

트롤에게 족장은 단 한 명.

그뿐이다.

'나는 족장이 되지 못한다.'

'당신 같이는 되지 못해.'

'나는 아직 당신을 뛰어넘을 방법을 몰라.'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확신과 믿음을 줄 수 있는 건 그였기 때문에.

'하천성, 족장, 너였으니까.'

'그러니까 함께 있어 줘라.'

'족장, 나는 아직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처음에는 간악한 마음으로 따랐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1년. 짧다면 짧았지만, 그 시간 동안 보리는 줄곧 족장 옆에 있지 않았는가.

처음 오러를 깨우치고 족장에게 배운 검술의 즐거움을 보리는 아직도 잊고 있지 않다.

「잘 들어. 그냥 막 휘두르며 따라 하는 게 아니야. 뭐든 네 것으로 만들어야 의미가 있어. 이미지 해라. 이 검술을 처음부터 네가 가졌던 것처럼.」

글자를 가르쳐주고 은근슬쩍 남들과 어울리는 법을 가르쳐 주던 것도 보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게 이거고, 이게 이거라고. 썅, 글자 내가 왜 글자까지 가르쳐야 하냐! 아, 그리고 어제 시리스 녀석들이 팔씨름하면서 놀더라 너도 거기 한 번 갔다 와.」

잠자는 것도 거슬린다며 괴롭히면서도 잘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 따뜻함을 보리는 잘 알고 있다.

「새끼, 코고는 거 시끄러워 죽겠네. 이불 좀 똑바로 덮고 자라. 감기 걸린다.」

언젠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지어주었던 칭찬이 담긴 그 미소를 보리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잘했다.」

'족장은.'

번개가 치솟았다.

'족장은 나한테.'

또 한 번 번개가 치솟았다.

'하나뿐인 가족이다.'

그리고 다음 번개가 치솟았을 때, 보리는 더 이상 번개로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싸움 속에서도 회복되던 보리의 겉껍질이 조율의 번개에 완전히 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보리는 에고웨폰을 꽈악 쥐었다.

가족이 떠나가려고 한다.

그 가족에게 아직 해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갚아야 할 것도 많이 있는데.

그 사람은 계속해서 떠나겠다고 한다.

보리는 싫었다.

그는 미운 정이라고 하지만, 보리에게 하천성은 또 다른 아버지였다.

오래전에 죽은 아버지보다 더 진한 감정을 깨우치게 해 준 아버지.

"족장!"

내려친 보리의 검이 조율을 앞서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외친 보리의 몸에서 터져 나온 오러가 주위를 휘감았다.

"네가 아직 필요하다!"

빠각.

조율의 머리 위에 자리한 금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은 순식간에 금관을 뒤덮었고, 이내 두 동강 난 금관이 조율의 머리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뿔이 부서진 조율이 바닥에 누웠다.

보리는 숨을 고르게 내쉬기 시작했다.

지잉지잉 하고 울리는 이명이 귀를 가득 메우며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러나 보리의 마음은 고요했다.

"소니."

보리의 눈앞에는 안타까운 눈빛을 한 소니가 있었다.

"족장은."

소니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보리도 알고 있다.

조율과 자신이 싸운 시간이 너무 많이 길었다는 걸.

3일이라는 시간은 진작 지나가 있었다.

보리는 그날 처음으로 이별의 아픔을 깨닫고 슬픔을 느꼈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 트롤의 군락은 싸움의 여파로 사라져 있었다.

하천성과 함께 살았던 군락은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보리에게 소니는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투박하게 적힌 글씨.

하천성이 쓴 편지였다.

[열심히 해라.]

족장답다.

긴말을 적어 두지 않았다.

그러나 보리는 그 편지를 가슴 속에 품었다.

"소니, 나는 아침 물향나무숲을 나가겠다."

"쉽지 않을 거야. 세상은 넓으니까."

"그래도 족장과 이야기했다. 나가 보겠다고. 그리고 더 강해지겠다고."

소니는 옅게 미소 지을 뿐 보리를 말리지 않았다.

"세계를 다 돌았을 때쯤에는 족장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몰라."

하천성은 소니가 보는 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소니는 보리에게 확답을 내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보리는 왠지 모르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족장이 어디선가 강해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보리는 믿었다.

그리고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침 물향나무숲을 나가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보리는 그동안 수많은 것을 배웠다.

펜시스의 도움으로 다른 종족들과 만나고, 간혹 적과 싸우기도 하며 큰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한 번은 최상위 종족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쫓기던 신세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 낸 보리는 당당히 최강의 자리에 앉았다.

50년.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지만, 보리는 그 50년이 과거 하천성과의 1년에 비하면 쉬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따라나선 트롤들도 함께 성장했다.

어느새 세계에서 트롤은 가장 강하며 자유로운 종족이 되어 있었다.

과거 하천성이 강하고 자유로웠듯 그를 따라 트롤들도 그렇게 되었다.

"아빠, 족장 자리는 왜 비어 있는 거야?"

보리의 어깨 위에 앉은 그의 아들이 궁금증을 표했다.

보리는 자기 아들을 보고 자랑스레 미소 지었다.

"이 자리는 딱 한 명만 앉을 수 있는 자리거든."

"다른 트롤들은 아빠가 정복왕이라던데? 왕이 족장보다 높은 거 아니야?"

"달라. 우리 트롤에게 족장은 특별한 자리거든. 나는 아직 족장 자리를 물려받지 못했어. 우리 트롤의 족장은 힘으로 이겨야만 물려받을 수 있단다. 나는 아직 족장을 이기지 못했거든."

"아빠는 세계에서 가장 강하잖아. 아빠가 질 정도야?"

"그래, 세계에서 가장 강해져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있어."

그리 말한 보리는 씁쓸한 눈빛을 취했다.

족장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그는 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보리는 또 한 번 그때의 1년을 추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트롤들 사이에서 최근 이상한 검은 균열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다른 종족은 발견하지 못하는 균열은 오직 트롤의 눈에만 보였다가 사라졌다.

이상함을 느낀 보리는 균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트롤의 유능한 마법사들도 균열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

하루하루 불안감이 더해져 가던 나날.

"으아아아아악!"

트롤 한 명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보리가 급히 그곳에 가보았을 때 그곳에는 몸의 반이 균열에 잡아먹힌 트롤이 있었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두 다리가 균열 밑에서 버둥거리고 있었으니까.

보리는 그 트롤을 구하고자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을 휘둘러야만 했다.

왜냐면 보리가 달리던 순간 그의 앞에 똑같은 균열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균열에 잡아먹힌 보리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숲이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숲을 그가 멍하니 보고 있을 때 하나둘 다른 트롤들도 균열에 잡아 먹혀 이곳으로 넘어왔다.

"보리님!"

근위 기사 한 명이 보리를 부르던 순간 보리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곳은 그곳이다.

과거 자신이 자라왔던 트롤의 군락.

족장과 함께 살았던 그곳.

"어떻게."

보리가 놀란 눈을 뜨고 있을 때 숲 밖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붉은색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구름이 아니었다.

"이프리트."

고대 종족이라 불리던 불꽃의 화신들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전쟁이다! 다들 전투를 준비해라!"

지금의 트롤은 모두가 타고난 전사.

보리의 외침에 전원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프리트를 겪어 본 녀석은 얼마나 있지!"

셋 정도가 손을 들었다.

젠장, 고대 종족인 이프리트의 불은 상당한 고열임은 물론, 일반 불과는 다른 정령 능력이다.

정령은 흔하지 않다.

살면서 이프리트를 본 것은 보리도 딱 한 번밖에 없을 정도니까.

그렇기에 다른 트롤들은 정령 능력과 관련된 내성을 겉껍질에 만들어두지 못했다.

아무리 지금까지 수많은 사선을 넘은 트롤들이라고 한들 이프리트의 고열에 노출된다면 죽는다.

하지만 트롤들에게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마법사들! 이프리트의 정령 능력의 화력을 최대한 줄이도록 빙 계통 마법을 쏟아부어라! 우리는 늘 하던 대로 한다! 끝까지 버텨라! 끝까지 버티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오오오오오오!"

보리의 외침에 트롤들이 무기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숲으로 들이닥친 이프리트와 트롤 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트롤은 자신들의 숲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이프리트에게 맞섰다.

이프리트의 고열은 강력했다.

마법사들이 아무리 빙결 마법을 퍼부어도 마법을 뚫고 들어온 고열이 트롤들을 죽여 나갔다.

하지만 버텼다.

트롤들은 악착같이 이프리트를 상대로 버텨 내었다.

버티는 것은 트롤의 최고의 장기다.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트롤의 겉껍질은 언젠가 내성을 가지게 된다.

그것만이 트롤들에게 유일한 살길이었다.

이프리트의 고열에 노출되어 죽어가는 동료들 속에서도 트롤들은 검을 휘두르고 싸웠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겉껍질이 닳고 지독한 화상을 입었지만, 트롤들은 놀라운 회복력으로 재생하여 다음 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프리트와의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삼 일.

이프리트 쪽에서도 서서히 트롤들에게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고열을 뚫고 공격해 오는 트롤들의 숫자가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삼 일, 드디어 트롤들이 이프리트의 고열의 내성을 갖기 시작했다.

"무찔러라!"

트롤들은 이프리트에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에고웨폰은 이미 트롤과 한 몸.

그렇기에 트롤과 함께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에고웨폰들은 정령인 이프리트에게도 큰 타격을 입혔다.

트롤은 강인했다.

S급인 이프리트였지만, 강해진 F급 트롤들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으아악!"

트롤 쪽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놀란 트롤들이 그곳으로 지원을 갔을 때, 거기에는 한 이프리트가 서 있었다.

검 한 자루를 늘어트린 채 차가운 눈빛으로 트롤들을 보던 그는 트롤들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도륙이 시작되었다.

트롤 모두가 그를 막고자 달려들었지만, 그자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막겠다! 모두 물러서!"

"보리님!"

그런 그를 보고 보리가 트롤들 사이에서 뛰어올라 그의 앞에 착지했다.

그의 몸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며 보리는 그에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이자는 분명 다른 일반 이프리트와는 다르다.

정체가 뭐지?

보리가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보리.

귓가에 스치듯 들려온 목소리.

50년 만에 들어 본 그 목소리에 보리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눈물까지 맺히는 기분이었다.

"족, 장."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에 보리가 벅차오른 감정을 느꼈을 때.

―튀어. 인마!

그런 반가움과는 달리 족장은 다급했다.

153화

"튀어. 인마!"

내 외침이 광장을 쩌렁쩌렁 하게 울렸다.

옆에서 보던 나락과 검왕이 나를 TV에 대고 소리치는 바보처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쟤들이 몰라서이다.

왜냐면 나는 같은 층에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능 세상 저편의 울음소리.

종말을 부르는 늑대 녀석이 주었던 이 권능이다.

'이렇게 쓰일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어찌 되었든 잘됐다.

내 목소리를 들은 보리가 트롤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족장!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우리의 숲이 있다! 후퇴하려면 숲을 버려야 한다!

"그깟 숲 그냥 버려 멍청아. 뒈져 버리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그렇군.

역시 내가 키운 놈답게 받아들이는 건 빠르다.

"하천성, 당신 안에 있는 애들과 의사소통 하는 방법이 있었어?"

"그래, 어찌어찌 있다."

"잘됐잖아! 우리가 지휘하면 패왕의 더미 데이터도 쓰러트릴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

그 순간 나는 핫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아니라 내가겠지."

하일성을 쓰러트리는 건 나다.

그게 더미 데이터든 뭐든 간에.

"...당신 방금 정말 재수 없었어."

"원래 늘 그랬습니다."

아무렇게나 떠들어라.

여기서 대화가 가능한 건 나뿐.

이 녀석 둘보다 빨리 층을 클리어해서 다음 층으로 향할 거다.

"그렇담 저도 움직여야겠네요."

내가 보리에게 지휘를 내리며 퇴각을 시키고 있자, 갑자기 나락 녀석이 수정구에 다가와 섰다.

녀석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용아병들을 보고는 손을 들어 올렸고, 곧 그 손아귀에서 진득한 검은색 오러가 흘러나왔다.

"자자, 저희 애들도 움직여야죠."

그 순간 용아병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마치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양 녀석들은 체계적으로 이프리트를 상대해 나갔다.

그 뿐만 아니라 이프리트의 불 공격에 당하기만 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스텟이라도 오른 양 대항하기 시작했다.

나와 검왕이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 나락은 우리 둘에게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이며 씩 하니 웃었다.

"어디에 있던 제 아이들인걸요. 조종과 버프는 언제든 가능하죠."

"너 설마 저기 있는 녀석들 전부를 아직도 네 오러로 움직이고 있는 거냐?"

"그렇죠?"

재수 없는 놈.

나락과 내가 수단이 있는 만큼 검왕도 있을 거란 생각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검왕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꼬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나는 말없이 다시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왜, 뭐, 나한테는 왜 안 물어보는데."

"아무 말도 안 했다."

"눈으로 말했어."

쀼루퉁한 검왕을 두고 나는 수정구 안에 하일성 놈을 가리켰다.

"시끄러워. 그것보다 너희 둘도 회귀자잖아. 저 녀석이 무슨 클래스를 가졌는지나 유추해봐. 저놈을 쓰러트려야 다음 층으로 갈 거 아니야."

더미 데이터라곤 하나, 녀석은 하일성이다.

그렇다면 클래스도 반드시 실제 하일성과 같은 종류의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번 건 기회야.'

자신의 더미 데이터가 남는지 안 남는지 몰랐던 하일성은 실수했다.

나에게 고스란히 정보를 알려 주게 생겼으니까.

'혹은 이걸 처리 못 할 만큼 선두를 쫓기 바쁜 상황이었다던가.'

반대로 이런 걸 처리 안 해도 문제없다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얻어야만 했다.

"일단 확실하네요. 전 본 적 없는 종류에요."

나락 녀석이 제일 먼저 외쳤다.

이래 보여도 황제와 야신 다음을 줄곧 달리던 녀석이다.

이 녀석이 본 적 없는 거라면 역시 S급 클래스가 맞았다.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좀 많이 이상해. 무언가 억지력이 작용하고 있어."

실제로 하일성은 딱 한 번의 공격으로 적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두 번째 공격은 할 필요도 없다는 양, 녀석의 첫 일격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내가 녀석을 상대로 한 번 죽을 뻔했던 것처럼 말이다.

"저거 분명 클래스지?"

"그런 거 같아."

내 말에 검왕이 긍정했다.

역시 그때 그 일격은 너무 말도 안 되는 일격이었다.

수정구에 비친 하일성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강한 일격을 날릴 수 있는 클래스라고 해도 그건 규격을 넘었었다.'

아무리 내가 방심했다고 한들, 내 스텟과 오러를 뚫어 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일격이었다.

그런 건 나와 동등한 스텟을 찍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다.

아니, 분명히 나보다도 더 높은 스텟이어야만 했다.

녀석이 무슨 클래스를 가진 건지 고민하며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만약 하일성이 어떠한 방법으로 나와 동등한 스텟을 만들었다면 분명 저기 있는 녀석들은 일격에 죽는 게 맞다.

보리가 강해졌다 한들 나와 동등한 수준에 하일성을 쓰러트릴 방법은 전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하일성이 그때 내게 보여 준 일격과 지금 휘두르는 일격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마치 갑자기 약해지기라도 한 양.

'그때의 일격은 우연의 일치?'

그럴 리가.

어떤 우연이 겹쳐도 내 스텟을 뛰어넘을 방법은 없다.

'무언가 더 있다.'

녀석이 가진 클래스의 비밀이 더 있다.

"두 번째 공격을 볼 방법이 없는 게 문제네요. 첫 일격에 전부 쓰러트려 버리니까요."

아무리 성좌 방송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는 나락이라도 참가자 개인의 정보까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녀석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때 능력치가 달라지고 있어. 나, 이거랑 비슷한 걸 본 적 있어."

그러던 순간 검왕 녀석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수정구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말에 내가 녀석을 돌아보자 검왕은 수정구 속 하일성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봐봐. 지금 이 트롤과 저 트롤을 상대할 때 움직임이 달라. 민첩과 힘, 모든 스텟 수치가 다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이 움직임 격차가 이 정도로 다를 리가 없어."

"...썩을."

이제 알았다.

하일성의 클래스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스텟 수치가 적에 따라 달라지는 거냐."

그렇기에 나를 상대했을 때 하일성의 스텟이 내 수준으로 뻥튀기된 것이다.

"그런 거 같아. 하지만 그거로도 역시 설명이 부족해. 결국 같은 스텟 수준이라면 이 정도로 압도적이지는 않을 거야."

"상대하는 적의 스텟보다 더 높은 수치가 된다던가."

"S급 클래스는 사기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한 힘에는 제약이 따르는 법이야. 그런 부분에서는 시간적 제한이라든가, 횟수 제한이 붙겠지. 그리고 하천성, 당신도 눈치챘잖아."

그래, 스텟이란 스텟은 전부 다 찍어 본 나다.

하일성의 움직임은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공격력 하나만큼은 일격에 상대를 쓸어버릴 정도지만, 오러나 다음 목표를 찾을 때의 움직임은 그와는 달리 평범했다.

"내 느낌으로 스텟은 같아. 오러량의 차이도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두 개네요."

대뜸 나락이 중얼거렸다.

"패왕이 쓰고 있는 클래스는 두 개예요. 하나는 두 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적과 동등한 스텟을 가지는 것, 또 한 가지는 일격에 필살 수준의 억지력을 담아 공격하는 것."

"짜증 나는 건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 이거지."

당장 쳐들어가서 하일성 놈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뭐가 되었든 하나는 S급이 확실하네. 스텟 모방은 거의 없었으니까. 우리 셋 다 모르는 클래스인 시점에서 다른 하나도 S급일 것 같지만."

검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패왕이 강한 거야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두 눈으로 보니 더 터무니없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클래스가 두 개뿐일 리가 없다.

분명히 더 많은 클래스를 하일성은 보유하고 있으리라.

'망할 새끼.'

진명을 가진 성좌가 된 야신이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으니, 좋은 클래스란 클래스는 죄다 삼키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는 S급 클래스를 본 적도 없는데.

"구천옥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중에 클래스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니까."

전 층에서 헤어진 구천옥녀를 떠올리며 검왕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수정구 속 하일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락,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

괜찮은 게 떠올랐다.

하일성 놈이 가진 클래스가 어떤 종류인지 확실히 알아볼 방법이.

"그건 저한테 부탁하시는 건가요? 남에 도움은 절대 받기 싫어하는 천왕 님이 부탁이라니 황송하네요."

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명령이야."

"네네, 그렇죠."

나락은 뭐든지 들어 주겠다는 양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아니꼽긴 했지만, 이번 건은 녀석이 필요했다.

"용아병 속에 용아병을 넣을 수 있냐."

"불가능하지는 않는데요."

"그렇다면 한 마리한테 그렇게 해서 하일성 녀석에게 접근시켜 봐. 바깥 녀석만 공격하고, 안에 있는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도록 하고. 대신 내부 녀석은 밖에 있는 녀석보다 훨씬 강한 놈으로 해."

나락은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엇을 시험해 보려는 지 녀석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저 클래스가 어떤 건지 알아보려는 거구나. 능력치를 베껴서 공격하는 거면 내부에 있는 용아병한테는 안 통할 테니까."

검왕 또한 알아차린 듯하였다.

"그래, 만약 그 공격이 내부 용아병도 똑같이 당한다면 평범한 공격 클래스가 있는 걸 테고. 반대라면 한 놈한테만 적용되는 클래스가 있는 거겠지."

"확인해 볼 가치는 있는 거죠."

나락의 조작으로 수정구 속 용아병 몇 기가 합체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 용아병 하나를 삼킨 용아병은 검을 든 채 하일성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패왕이 1위인 만큼 자체 스텟도 꽤 높을 텐데. 클래스를 사용하지 않고 싸우면 어떡하려고?"

"스텟 하나는 내가 키워 놓은 녀석이 있으니까 상관없어. 50년 동안 소뤼에느의 영약이랑 은하수의 눈물을 먹은 놈이 있으니까."

"...당신 저번 층에서도 그렇고 키우는 데는 진심이구나? 둘 다 최상위 성장 아이템이잖아."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다."

다른 참가자들한테는 유용한 아이템일지언정 나한테는 전혀 필요 없는 두 아이템이다.

그렇기에 나는 스텟만큼은 보리 녀석도 밀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실제로 이프리트를 상대로 보리는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 싸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짜식, 50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거겠지.'

방법은 있다.

분명히.

하지만 문제는 하일성의 더미 데이터가 과연 어디까지 녀석의 데이터를 그대로 이행하는 지다.

"하여튼 하나부터 열까지 방해지."

하일성을 짜증스레 본 나는 나락의 준비를 지켜보았다.

어떻게든 여기서 녀석의 정보를 뜯어내야만 했다.

"갑니다."

완성된 합체 용아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일성이 쉽사리 눈치채지 못하도록 용아병들 사이에 섞여들기 시작한 그들은 이프리트와 격돌했다.

"패왕을 제외하면 S급 종족인 이프리트는 그리 문제 되지 않네요."

그 말대로 나락의 버프와 지휘를 받은 용아병들은 이프리트들을 손쉽게 이기고 있었다.

"뻔하지. 저놈 자기만 있으면 층 클리어가 충분히 되니까. 이프리트를 뽑고 바로 층을 올라온 거야."

"자신감 넘치는 분이네요."

154화

"그만큼 급한 거겠지."

합체한 용아병들이 드디어 하일성에게 도착했다.

자신의 뼈로 된 검을 들고 있던 녀석들이 하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용아병이 휘두른 검이 하일성에게 닿기 직전 녀석의 오러가 기묘하게 뒤바뀌었다.

분명 반응할 수 없는 방향에서 공격했음에도 하일성이 이미 그 공격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억지스러운 움직임.

클래스가 확실했다.

'다음은.'

하일성의 검이 용아병에게 닿았다.

빠각!

어김없이 박살 난 용아병의 잔해가 흩어져 날아갔다.

겉에 있는 용아병은 하일성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내부에 있는 용아병은 달랐다.

하일성의 검은 내부 용아병의 목을 때렸다.

그러나 겉에 있는 용아병의 스텟으로는 내부 용아병을 죽이지 못했다.

'빙고.'

하일성의 눈동자가 게슴츠레 떠졌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마치 이쪽을 바라보는 듯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녀석은 무언가 눈치챈 듯 몸이 불길에 휘감겼다.

불나방 조각으로 변한 하일성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B클래스 불나방.

도주용으로 용이한 단거리 공간계 클래스였다.

"선공기, 첫 공격을 반드시 성공한다는 클래스인 거 같네."

검왕이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일성의 공격은 겉에 있는 용아병은 물론 내부에 있는 용아병의 급소에 확실히 닿았다.

그것도 내부에 용아병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한 상대에게 딱 한 번만 발동되는 걸까요.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착각하도록 두 번째 공격은 보여주지 않고 빠져나간 걸까요. 뭐가 됐든 상황 판단 능력은 빠르네요."

나락은 재밌다는 양 히죽 웃고 있었다.

"무조건 선공을 성공시키는 억지력이 작용하는 클래스, 게다가 적과 동등한 스텟을 가지는 클래스까지. 이 사람 말도 안 되는 조합을 완성 시켜왔네."

검왕의 말대로 저 두 조합은 1:1로는 이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사기적인 조합이었다.

동등한 능력으로 반드시 선공을 성공시킨다면 방금과 같은 꼼수가 아니고서야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의 하일성은 사실상 정보 없이 만난다면,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드디어 내가 녀석에게 당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레벨을 어떻게 이리 빨리 올렸나 했더니.'

레벨 높은 녀석들을 보는 족족 저걸로 다 죽이고 다녔겠지.

"첫 공격만 성공하는 클래스여서 어떻게 막는다 쳐. 하지만 그 뒤도 문제네. 동등한 능력치면 결국 가지고 있는 클래스나 아이템 말고는 이길 방법이 없는 거잖아."

"천왕 님 가문은 다 이런 사람들인가요."

검왕과 나락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침묵했다.

지금의 나한테는 하일성의 저 선공 공격을 한 번 막을 방법이 있다.

권능 죄악 태만.

어떤 클래스라도 1회 거부할 수 있는 권능이다.

죄악 태만이 깃든다는 알 수 없는 패널티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막을 방법이 이제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 뒤는.'

나는 클래스 복이 없다.

벌써 5회차나 됐으면서 S급 클래스는커녕, 고작 A급 클래스 검의 길 하나밖에 없으니까.

만약 녀석과 동등한 스텟으로 싸우게 된다면 클래스가 없는 내가 밀리게 될 것이다.

'썩을.'

짜증이 난다.

망할 성좌 자식들 저 녀석에게는 클래스를 퍼주는 주제에 나만 이 꼴이다 이거지.

―족장, 족장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까 그 녀석을 쓰러트려야 하지 않나.

그 순간 보리 녀석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보리 녀석 시점으로는 오랜만에 대화기 때문인지 어딘가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태평한 녀석 같으니.

"나락, 용아병 녀석들로 협조해라. 우리 애들한테 갑옷처럼 입혀."

"그거야 문제없죠."

나는 보리 녀석에게 용아병들을 찾아가도록 지시했다.

"그래, 그거 입어."

―족장, 대체 어느 사이에 언데드까지 포섭한 거냐.

"어떤 머저리 놈 부하들이다."

"네네, 전 머저리 나락이에요. 제 옆에 있는 사람은 머저리한테 도움받는 사람이에요."

머저리 취급을 당하자 나락 녀석이 내 옆에 얼굴을 들이밀며 질 수 없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런 녀석을 무시한 채 수정구를 응시했고, 잠시 후 용아병과 합류하게 된 보리와 트롤들이 보였다.

나를 알고 있는 트롤 녀석들은 용아병을 척척 갑옷처럼 입었지만 내가 사라진 후 태어난 트롤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생물인 이상 언데드는 거부감이 드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입어라. 명령이다.

하지만 제일 먼저 용아병을 입은 보리가 지시하자, 나머지 트롤들도 어쩔 수 없이 하나둘 입기 시작했다.

보리 녀석, 그래도 제대로 된 리더가 되긴 한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락 녀석과 하일성을 쓰러트릴 방법을 논하였다.

이 녀석도 짜증 나는 놈이긴 하나, 이런 부분에서 도움은 되니까.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검왕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저기 우리 애들은 뭘 하면 될까?"

나락과 내가 검왕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둘다 곧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자 검왕은 조용히 울상을 지었다.

* * *

―잘 들어. 네가 입은 용아병은 혼자서도 움직인다. 그 안에 있을 때는 기척을 완전히 지워야 해.

"정말 그걸로 되는 거냐."

―일단은. 너뿐만이 아니다. 네 적은 강해. 그래서 방심하게 해야 한다. 용아병을 입은 트롤들로 하여금 그놈을 둘러싸게 만들어서 계속 공격을 퍼부어. 그리고 녀석이 방심했을 때가 네가 나설 때다.

하천성의 지시에 용아병을 입은 보리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까 전 본 상대는 보리의 마음에 호승심을 지필 정도로 강한 상대였기에 그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족장."

―왜.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

처음에 트롤들과 함께 날아왔을 때 보리도 불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50년 만에 다시 족장을 만난 순간, 그 불안감도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들뜬 마음이었다.

족장과 다시 한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만날 수 있나?"

―못 만나.

"그렇군. 아쉽게 됐다. 내가 두드려 패줄 생각이었는데."

―깝치지 마라. 뒤지려고 이게.

"하나도 안 무섭다. 족장은 어차피 못 나타나지 않나?"

―어쭈, 이게 잔머리 굴리네.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족장이 나타나서 적을 쓰러트렸을 테니까.

자신에게 맡기는 이유는 족장이 모종의 이유로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족장, 다들 말했었다. 나는 이제 왕이라고. 내 아들 대부터는 이제 족장의 존재조차 모른다."

―아들도 낳았냐.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많이 낳았다. 걔들뿐인 줄 아나. 손자, 손녀도 있다."

보리는 자랑스레 미소 지었다.

"족장이 사라진 뒤로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는 내가 트롤을 이끌고 있다. 족장이 보기에 나는 괜찮게 이끌고 있나?"

그리고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이 괜찮냐고.

문제없이 잘해 온 것이냐고.

보리는 하천성에게 물었다.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보리는 미소 지었다.

"족장, 저번 시험은 내가 실패했었지."

―그래, 조율 하나 때려잡는 데 3일씩이나 걸렸으니까.

"이번에는 하루 만에 끝내 주겠다."

―해보던가.

퉁명스레 말한 족장이지만 그 목소리에서 믿음이 느껴졌다.

좋다.

50년간 잃어 버렸던 의지가 오랜만에 다시 차올랐다.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족장의 아래에서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 살아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족장, 이번 일이 끝마치면 내가 족장을 이어받아도 되겠나?"

하천성이 사라지고 줄곧 비어 있던 족장의 자리.

그 자리를 이제는 자신이 계승해도 되겠냐는 물음에 하천성은 가볍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놈한테 한 번 졌다. 그러니 네가 그 녀석을 꺾으면 나보다 강한 거겠지. 그놈을 이긴다면 네가 해라, 족장.

족장이 한 번 졌던 상대.

보리의 두 눈이 이제껏 없을 정도로 불타올랐다.

"좋다."

보리는 에고웨폰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뒤에 있던 트롤들이 호응하듯 커다랗게 소리를 내질렀다.

"트롤들이여 가자. 우리의 적을 쓰러트리러!"

보리가 제일 먼저 앞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트롤들이 함께 내달렸다.

― 위치는 내가 찍어 준다. 그 녀석 어디 있는지 내 눈에는 훤히 보이거든.

든든하군.

보리는 그리 중얼거리며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이프리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 순간 보리의 검면을 타고 번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보리 사식(四式)

뇌리(雷螭)

검에서 쏟아져 나온 번개가 거대한 이무기의 현상으로 뒤바뀌었다.

하천성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검술.

번개가 된 이무기는 이빨을 드러낸 채 이프리트를 습격했다.

한순간에 몇 마리의 이프리트가 소멸했다.

그런 이프리트를 보며 보리는 선봉장처럼 이프리트 사이를 종횡무진하기 시작했다.

―야, 이 멍청아! 그렇게 하면 그 녀석이 널 위험하다고 판단할 거 아냐!

"음, 그런가?"

이프리트의 머리를 쥐고 있던 보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족장의 말에 불이 붙어서 열심히 싸웠건만 핀잔을 받게 될 줄이야.

"그럼 어떡하나."

―일단 뒤에 빠져 있어. 넌 비장의 무기라고.

비장의 무기, 이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트롤들이 다 싸우고 있는데 자신만 빠져 있으라니.

― 뒤에서 슬쩍슬쩍 죽여 나가. 티 안 나게.

"족장이 예전에 했던 것처럼 말이냐?"

―그래, 약한 녀석들은 약한 녀석들끼리 싸우라고 그래. 우리는 진짜만 노린다.

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겁하게 뒤에서만 움직이는 건 족장의 모습을 따라 하면 어렵지 않았다.

―너 속으로 내 욕했지.

"아니다. 족장은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 빠르다.

보리는 하천성같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약한 척하며 뒤로 빼면서도 트롤들이 위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 도와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보리가 앞에서 싸웠을 때 보다 트롤들의 사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목숨을 지켜 주는 안전 방편이 생겼다.

그것은 선봉대에 서던 보리를 향한 믿음과는 또 다른 믿음이었다.

"족장이 왜 줄곧 뒤에서 있었는지 알겠군."

처음으로 트롤들의 뒤를 지키게 된 보리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발견했다. 계속 진격해.

하천성의 긴장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리 힘을 빼고 기척을 지워라. 다른 녀석들한테도 비슷하게 하게 해. 용아병한테 잠시 맡겨.

"알았다."

보리는 발 빠르게 트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를 듣고 트롤들은 용아병에게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이프리트와 싸우며 몇 번인가 용아병에게 도움을 받은 트롤들이 그들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 잠깐만 썩을 저 개자식 뭘 하려는 거야!

그 순간 갑자기 하천성의 거친 욕설이 들려 왔다.

보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을 돌아보던 순간 하천성이 외쳤다.

―야! 보리야 작전 변경이다! 빨리 저놈을 막아야 해! 어떻게든 내가 말했던 방식으로 첫 공격만 피해라!

그 외침에 당황하던 보리였지만 그는 곧바로 하일성의 기척을 쫓기 시작했다.

확실히 안 좋은 감각이 느껴졌다.

이걸 이대로 뒀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모두 비켜라! 지나가야겠다!"

용아병 갑옷을 입은 보리가 트롤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트롤을 지나쳐 가자 이프리트들이 보리를 제지하려 들었지만, 종족 성장이 거의 없는 그들로서는 보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보리가 근원지에 다다랐을 때.

보리의 눈에는 거대한 화염 구체가 들어왔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익을 정도의 열기.

그 구체를 둘러싼 수천의 이프리트들이 계속해서 화염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멸되더라도 계속해서 화염을 공급했다.

그때마다 화염의 구체는 커지고 있었고, 보리는 그 중심에 하일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막아야 한다.

직감적으로 상황이 급박해졌음을 안 보리는 그 즉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젠장, 늦었다.

하지만 족장의 말이 울린 순간 화염 구체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응축된 고밀도의 화염 덩어리는 고스란히 하일성에게 이어졌고 곧 새하얀 불길이 타올랐다.

155화

A클래스 '식사.'

같은 속성의 오러를 삼켜 흡수한 오러를 전부 소모할 때까지 자신의 오러로 사용할 수 있는 클래스.

하일성은 이프리트를 통해 오러를 공급받은 것이다.

―저 새끼, 내가 자기가 가진 수를 확인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천성의 짜증 섞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일성은 하천성에게 더 이상 자신의 정보를 들키지 않고자 다른 클래스로 적들을 사냥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보리, 튀어라. 저 능력으로 녀석의 클래스가 발동되면 너라도 죽어.

"족장, 저 힘은 얼마나 유지 되나."

도망치라는 말에 보리는 하일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 물음을 듣고 하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리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모은 오러를 전부 소모할 때까지 일 거다.

"그 말은 즉, 오러를 소모할 상황이 생겨야 한다는 거 아닌가."

그리고 오러가 소모될 상황은 싸움밖에 없다.

자신이 여기서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 검이 향할 곳은 트롤들이다.

"족장, 난 트롤의 족장이 될 트롤이다."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트롤들이 전부 죽어도 똑같다."

둘이 대화하는 와중에도 하일성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보리의 검에서 다시금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차피 클래스인가 뭔가 하는 걸 쓰면 오러를 소모할 테니, 첫 공격만 버티면 이후부터는 점점 더 약해질 거 아니냐."

단순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키운 보리다.

이 녀석의 가장 큰 장점은 끝까지 가면 이긴다는 것이다.

끈질김이야말로 트롤이니까.

―막을 수 있겠냐.

"족장, 날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리 말한 보리는 검을 쥐고 하일성에게 겨누었다.

"보리다. 무려 족장이 직접 키워 준."

그리고 보리가 달렸다.

* * *

"나락!"

"네네, 오러 내성, 화염 내성, 물리 방어력, 마법 방어력까지 동시에 최대치로 올리고 있어요."

보리가 하일성에게 달려들자마자 외친 내 말에 나락은 바로 양손을 들고 네크로멘서계 클래스를 발동 중이었다.

첫 공격.

하천성이 클래스를 쓸지 안 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그 일격을 막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해도 막을 수 있는 건 처음뿐이에요. 클래스가 담긴 일격을 맞으면 분명히 제 용아병은 부서질 테니까요. 그 후에는 솔직히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고."

"상관없어."

나락의 염려에도 나는 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버티면 돼."

내 타오르는 눈을 보고 나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번이다.

딱 한 번을 견딜 수만 있다면 보리는 괜찮다.

"버텨라!"

내 거센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수정구 속 보리와 하일성의 검이 동시에 휘둘러졌다.

번개와 화염이 휘몰아쳤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화염과 번개의 바람이 수정구 속을 가득히 매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저릿할 만큼 강력한 오러의 폭풍을 나는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야! 보리!"

내가 외친 순간, 수정구에 격돌한 곳과는 한참 떨어진 장소에 서 있는 보리가 비쳤다.

녀석은 쓰러지지 않았다.

비록 용아병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보리는 검을 든 채로 한 장소를 오롯이 노려 보고 있었다.

그은 얼굴, 뼈가 몇 마디 부러진듯한 몸, 벗겨진 겉껍질 사이로 보이는 화상 입은 피부.

엉망진창인 모습이었지만 견뎠다.

하일성의 공격을 견딘 것이다.

나는 하일성을 가만히 돌아보았다.

녀석은 보리와는 달리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했다.

그 순간 알았다.

하일성 녀석은 내게 정보를 주지 않고자 반드시 공격을 성공하는 S급 클래스는 사용하지 않았다.

'독한 새끼.'

거기다가 스텟이 동등해지는 클래스 또한 발동하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의 스텟과 이프리트들의 오러로 적들을 쓰러트리기로 마음먹은 듯하였다.

"클래스 없이도 강하네."

옆에서 지켜보던 검왕이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하일성은 강했다.

참가자 랭킹 1위를 달리는 만큼 녀석의 레벨과 스텟은 무척이나 높았다.

실제로 첫 일격 때 나락 녀석이 용아병의 방어력을 극도로 올려 주지 않았다면 보리는 빈사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견뎠다.

가장 많은 오러가 모여 가장 강력할 터인 첫 일격을 보리는 견딘 것이다.

보리가 다시 내달렸다.

강력한 화염의 오러가 품은 열기 속에서 보리는 겉껍질이 타올라 가면서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견딘다.

견디고 또 견딘다.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보리는 견디고 있었다.

확실하다.

내가 없이 50년이라는 기간 동안 강해졌던 보리라도 하일성의 순수 힘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일격에도 보리는 쓰러지지 않았다.

끝까지 가면 이긴다.

보리의 두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떠나가지 못하도록 조율과 싸우던 보리가.

그때는 끝까지 봐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이곳에 있다.

보리의 싸움을 끝까지 봐 줄 내가.

"보리."

나는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내 오러 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해 빠졌던 녀석이 지금은 하일성과 맞서고 있다.

보리가 또 한 번 하일성의 검격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날아갔다.

하지만 녀석은 꿋꿋하게 검을 쥐고 하일성을 향해 달렸다.

마치 무딘 도끼를 갈고 또 갈아 날카로운 바늘을 만들어 내듯.

녀석은 하일성을 찌를 바늘이 되고자 계속해서 그를 두드렸다.

녀석은 약자였다.

하일성과 같이 처음부터 강자가 아닌, 쭉 약자의 삶을 살았다.

강자를 꺾고, 또 꺾고, 꺾으며.

오로지 그 체력과 끈질김만으로 녀석은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렇기에 강자를 마주한 보리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자신이 단 한 번도 닿지 못한 강자를 이미 두 눈으로 보았으니까.

보리가 50년간, 평생을 담아 만들어 낸 단 하나의 힘.

보리 오리진

마부위침(磨斧爲針)

우직한 끈질김은 또 다른 힘으로 개화한다.

보리의 겉껍질이 하일성의 화염을 견디기 시작했다.

수없이 단련되어 두드려진 겉껍질은 또 한 번 새로운 힘에 내성을 가졌다.

딱 한 번.

단 한 번을 견딘 시점에서 승기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서서히 전세가 바뀌어 간다.

본디 하일성이 압도하던 상황이 변해 가기 시작했다.

하일성의 눈빛이 변했다.

자신의 공격에 내성을 가지게 된 보리가 서서히 버거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명 상처는 보리가 훨씬 더 많았다.

지금도 팔 한 짝이 거의 너덜너덜해져 한 손으로밖에 검을 쥘 수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의 눈은 조금도 물러남이 없었다.

'처음 겪어 봤을 거다.'

일격으로만 모든 상대를 모조리 해치워 오던 하일성이 처음 겪어 봤을 상대.

'너만 강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그 오만한 눈.

형제이기에 닮은 그 오만함이 단 한 번의 실수가 되었다.

하일성은 층의 살고 있는 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자신이 하면 될 일이라며 층의 규칙을 부수고 제멋대로 층을 클리어하며 나아갔다.

그렇기에 녀석이 키운 이프리트들은 S급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층의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필사적인 자세는 때론 층을 오르는 우리들을 뛰어넘기도 한다.

'우물 속 개구리가 작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 우물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개구리라면.

네가 설령 뱀이라 한들 잡아먹히는 건 네 쪽일 테니까.

빠직!

하일성의 검의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본체인 하일성이 사용하던 검이 층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유니크 무기인 듯 더미 데이터가 가진 검은 일반 장검이었다.

그렇기에 평생을 함께 보리의 겉껍질을 먹으며 파트너로서 살아온 에고웨폰과는 내구력이 차원이 달랐다.

또 한 번 휘둘러진 검격이 맞부딪쳤다

치솟은 번개는 하일성의 검의 균열을 타고 올라 검을 깨트렸다.

검의 파편 사이로 하일성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녀석이 그 즉시 바닥을 박차 자리를 이탈했다.

승기를 놓쳤다고 판단하고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대로 보내 주면 분명히 다시 이프리트의 힘을 흡수해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오러가 천 단위였지만, 다음은 몇일지 모른다.

아무리 재생력이 좋은 트롤인 보리라고 한들, 힘을 비축한 하일성의 다음 공격을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괜찮아. 우리 애들도 왔으니까."

그 순간 검왕이 옆에서 은은하게 미소를 띄웠다.

그 말에 시선을 돌리자 하일성을 중심으로 가득 메운 설녀와 용아병, 트롤들이 보였다.

보리가 싸우는 동안 녀석들이 힘을 합쳐 나머지 이프리트들을 쓰러트린 것이다.

하일성은 A클래스 식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곧 녀석의 눈에 갈등이 깃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패를 이용해 이곳에서 빠져나갈 것인가.

아니면 층을 오르고 있는 자신을 위해 패를 숨기고 최대한 해 볼 것인가.

녀석은 부서진 검을 내던지고 오러로 만든 심검을 쥐었다.

녀석의 선택은 후자인 것 같았다.

"그래, 넌 그런 놈이지."

현재보다는 미래를 중시하는.

오로지 앞만을 생각하는 그런 놈.

그것이 하일성의 패착이다.

"보리, 끝내라."

내 한마디가 울린 순간, 보리의 검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녀석의 검을 중심으로 타고 흐른 오러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새까만 구름 위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번개를 머금은 용 한 마리가 꼬리를 보이더니, 곧 머리를 드러냈다.

미드르족의 오러에 일화를 담는 법을 배운 듯 보리의 몸 주위에 미친 듯한 스파크가 튀었다.

보리 구식(九式)

뇌룡(雷龍)

주위가 번개에 잠식되었다.

내려친 번개의 용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오로지 빛만이 공간을 장악했다.

서서히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을 때, 보리는 검을 내질렀다.

지면으로 내려친 번개의 용에 맞아 얼굴과 몸이 반쯤 무너진 하일성이 심검을 아직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자신을 끝내기 위해 달려드는 보리를 향해 검을 들더니, 그대로 베었다.

이번 일격은 이전과는 달랐다.

하일성의 검은 이전과는 다르게 억지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기도 전에 휘둘러진 검은 보리의 목을 정확히 갈랐고, 핏물이 솟구쳤다.

마지막에 가서 선제공격을 성공한 하일성의 눈에 희비가 교차했을 때.

보리의 두 눈동자가 조금도 죽지 않았음을 깨닫고, 하일성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서걱!

선명하게 울린 소리와 함께 하일성의 목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갔다.

마지막, 하일성은 보리의 스텟을 복사하여 보리와 똑같은 힘으로 공격했다.

반드시 성공하는 일격이었으나 그 거로는 보리를 쓰러트릴 수 없었다.

왜냐면 자신의 겉껍질을 가장 많이 깎아낸 것이 보리 자신이었으니까.

보리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강한 녀석이었다.

―족장.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가에 흐르는 핏물에도 불구하고 보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겼다.

오래전 조율과의 싸움을 끝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는 듯.

녀석의 두 눈동자는 별과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내 층이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를 다음 층으로 보내고자 바뀌어 가는 층을 보며 나는 수정구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말했지. 그놈한테는 졌었다고."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네가 다음 족장이다."

보리가 눈을 감고 곧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그렸다.

보리가 하일성을 쓰러트렸으니, 이제는 녀석이 이 층의 보스로서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결국 보리를 꺾는 자들이 나타나겠지만.

나는 이 층에서의 최강을 보리라고 영원히 마음속에 품을 것이다.

[축하합니다. 3번째로 3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8층의 주인' '원초의 씨앗'이 싹을 틔우며 당신의 클리어에 축복을 내립니다.]

눈앞에 계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제일 먼저 클리어 한 사람으로서 다음 층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11층.'

이 층 안에 하일성이 존재한다.

보리가 하일성의 분신을 꺾었듯 나 또한 진짜를 꺾어 주겠다며 두 눈에 담긴 의지를 불태웠다.

나는 늘 그렇듯 또 한 번 층을 오른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위해서.

156화

Chapter 12. 학교 마왕

나는 38.5층을 지나쳐 곧바로 39층으로 올랐다.

38층에서는 쭉 관람만 했을 뿐이기 때문에 나는 쉬지 않고 층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하일성과 진선.

이 두 명을 쫓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층들을 클리어해야만 했다.

['39층의 주인' '여름날 매미 소리'가 당신을 향해 소리를 내어 웁니다.]

['39층의 주인' '여름날 매미 소리'가 당신에게 39층의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해 여름, 당신은 세계 최고의 마법 아카데미에 보결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오로지 마법만이 존재하는 세계. 당연히 마법사만을 우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당신은 마법을 쓰지 못하군요. 그래도 우리 함께 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힘내 봅시다.]

[※39층은 참가자 개인이 졸업장을 따야만 클리어로 인정됩니다. 만약 더 이상 진행될 이야기가 없다고 판단하면, 그 즉시 층 클리어 실패 및 세계는 처음 시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또 무언가 짜증 나는 층에 올라온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때쯤, 주위 장소가 뒤바뀌고 기숙사 방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밖에서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자, 방에 걸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10대 정도로 한참 어려진 외형, 싸 보이는 교복.

영락없는 학생이었다.

내 10대 때의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기 때문에, 나는 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예전에도 잘생겼네."

['서릿발의 고양이'가 당신을 비웃습니다.]

나는 성좌들의 말을 무시하며 교복 넥타이를 풀고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꽉 조이는 건 취향이 아니다.

그 순간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왓!"

내가 먼저 문을 열자, 당황한 소년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 예쁘장하게 생긴 미소년은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앗 하고 소리 내었다.

"먼저 와 있었구나. 네가 내 룸메이트지? 잘 부탁해. 나는 호니아야."

"...하천성이다."

그러고 보니 이 방은 2인용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체구에 비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낑낑거리며 가방을 안으로 들고 들어온 그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후우, 무겁네."

그러곤 힘겨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표정을 고치곤 친절한 미소를 띄웠다.

"천성이 넌 몇 성 마법사야?"

"난 마법 못 써."

"뭐?"

내가 태연히 대답하자 호니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런, 마법 세계 층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마법을 못 쓰는 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이었나.

"정, 정말? 나 처음 봤어. 나 말고도 마법을 아예 못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래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호니아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못해도 10살 때는 누구나 1성 마법사 정도는 각성하는데 말이야. 참 우리 인생 우습지?"

호니아는 내게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마법 세계라더니, 정말 너도나도 전부 마법을 쓰는 세계인 건가.

층 난이도는 확실히 오른 모양이다.

"너나 나나 고생이네. 그래도 마법학을 정말 잘하나 봐. 스텔라 아카데미에 들어온 걸 보면."

"그렇긴 하지."

적당히 맞장구치며 정보를 대강 알아낸 나는 짐 정리를 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보다가 내 짐을 발견했다.

짐의 내용물은 별거 없었다.

내가 입을 옷과 아카데미 소속을 나타내는 배지가 하나 있었다.

배지에 적혀 있는 것은 마법학이라는 글자 하나였다.

"호니아, 이 학교를 졸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졸업? 보통 마법학 학생은 스텔라 아카데미 졸업생으로 쳐 주지 않아."

"그럼?"

"스텔라 아카데미는 마법과 학생들만 졸업장을 주거든. 우리는 그냥 뭐랄까, 그냥 덤이지."

그는 아쉬운 웃음을 지으면서도 오래전에 포기한 듯한 뉘앙스였다.

"우리는 마법을 못 쓰니까 당연한 거지. 5성 마법사부터 마법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하니까. 우리랑은 천지 차이지. 애초에 사는 세계에서 마법은 곧 지위고 권력이잖아? 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이 학과로 온 거 테고."

호니아의 말에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공부나 시키는 따분한 곳인 줄 알았더니, 마법을 쓰지 못하면 졸업도 못 한다라.

어이가 없는 상황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교장을 두드려 팬 뒤, 졸업장을 얻는 건 어떨까.'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을 거 같긴 하지만, 막무가내로 행동했다가 안 되면 며칠을 허무하게 날릴지도 모른다.

'하루 정도는 정보를 모으며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나는 우선 학교 상황부터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수업은 언제부터였지?"

"오늘 오후부터야. 우리는 마법학과에 빈자리가 생겨서 보결로 들어온 거니까. 오리엔테이션 같은 것도 없이 바로 수업에 들어간다더라."

"그래? 그럼 난 잠깐 밖에 좀 다녀온다."

"잠깐만."

호니아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녀석이 나를 불렀다.

내가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돌아보자 호니아는 내 허리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학교 돌아보는데 검은 왜 가져가?"

검은 늘 몸에 달고 다녔기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이 층에 하일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감안하면 별천도를 두고 다닐 수는 없었다.

['별천도'가 두고 가면 슬프다는 양 빛을 냅니다.]

녀석이 이러지 않아도, 나는 호신 무기를 두고 다닐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이번에는 제대로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나섭니다.]

그 순간 오만의 아틀리에의 말에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돕는 건 죄다 문제 있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자신의 이미지를 고치겠다며 결연하게 말합니다.]

쯧, 하긴 다른 성좌 녀석들이 도와줄 것도 아니긴 하니.

나는 일단 해 보라는 식으로 눈짓하자 별천도의 빛이 강해졌다.

환한 빛에 놀란 호니아가 두 눈을 가리고 있자, 별천도의 모습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손아귀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별천도는 곧 자루 끝에서 줄이 나와 목걸이 형태가 되었다.

"형태 변환이냐?"

['오만의 아틀리에'가 언제든 오러량에 따라 크기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별천도'가 자신의 잘 빠진 몸매가 작달막해졌다며 슬퍼합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쓸 만한 걸 해 줬군.

나는 별천도 목걸이를 걸곤 이제 됐냐는 양 호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두 눈을 끔뻑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거 마법 아티팩트야? 잘도 그런 비싼 걸 가지고 있네. 마법 아티팩트는 고가잖아."

"호신용으로 오래전에 부모님이 줬어."

대강 둘러댄 내가 방 밖으로 나가려 하자, 호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갈게."

그가 남자치고 조금 긴 금발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말하자 나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정보는 혼자서 찾아다니는 게 편한데.

'그래도 옆에 설명할 녀석 하나 데리고 다니는 건 나쁘지 않으려나.'

어차피 룸메이트로 당분간 같이 지내야 하는 만큼 이 녀석과 마주할 일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층 클리어 열쇠가 되어 줄지도 모르니 같이 어울려 주기로 했다.

나는 호니아와 함께 기숙사 복도를 거닐어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새 하얀색과 금색이 뒤섞인 건물 하나가 보였다.

미술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꽤 화려한 건물을 보고 있으려니 옆에 다가온 호니아가 말했다.

"저게 스텔라 아카데미 본관, 우리는 아마 갈 일 없을 거야."

"그럼, 저기로 간다."

"어, 어?"

본관이라는 말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기가 본관이라면 성좌가 제시한 졸업장을 딸 방법이 저곳에 있으리라.

"자, 잠깐만! 천성아! 가서 어떻게 하게!"

"졸업장 따야 해서 교장이나 한번 보려고."

"미쳤어! 본관에 들어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마법과 학생들 소문 못 들었어? 매년 마법학에서 자퇴자가 계속 나오는 이유도 마법과 학생들이 괴롭혀서라잖아!"

내 뒤를 따라오며 다급히 외치는 호니아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 옆에서 쫄랑쫄랑 시끄럽다.

"됐어. 걱정하지 말고. 넌 그냥 따라오지 마. 나 혼자서 갔다 오면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위험해. 마법학 학생들에게 첫날부터 찍힐 셈이야?"

호니아는 도저히 본관으로 가는 걸 볼 수 없다는 양 내 앞을 막았다.

그런 녀석을 보고 나는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호니아, 이거 봐봐."

"뭘."

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 양손에 전 속성의 오러가 모였다.

그 순간 나는 박수를 강하게 쳤다.

콰앙!

"우와악!"

부딪친 전 속성의 오러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강렬한 빛과 천둥이 치는 듯한 소음을 발생시켰다.

그러자 호니아가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형 감각이 무너진 듯 녀석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부들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두고 바로 본관으로 향했다.

"처, 천성아!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면 정말로 다쳐!"

귀와 눈이 잠깐 멀었을 텐데도 호니아는 계속해서 소리를 쳤다.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정보를 모으는 걸 방해한다면 여기서 두고 가는 게 나았다.

이후 나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게 샛길을 지난 뒤, 뒷문을 찾아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뭐, 내부에 이것저것 해 뒀네."

마법 학교라 이건지 여러 가지 각종 마법이 학교 내부에 걸려 있었다.

보아하니 마법사 중에 꽤 실력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세계관 최강은 여기 있는 거려나.'

나는 느긋하게 구경을 하며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바깥과 같이 흰색의 복도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먼지가 생기는 즉시 청소하는 마법이라도 사용해 둔 거겠지.

'제일 먼저 갈 곳은 아카데미 교장.'

졸업장을 쥐고 있는 건 교장일 터.

앞에서 말했듯 협박도 고려하고 있었기에, 그를 찾고자 천천히 오러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법 학교 교장 정도면 상당한 실력가일 테니, 오러에 잡히는 강한 녀석을 찾아가 볼 속셈이었다.

'어디 보자.'

학교가 꽤 크긴 하지만, 내 오러로 뒤덮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걸리는 기척들을 살피고 있었을 때, 나는 그중 유난히 커다란 오러 하나를 발견했다.

'이 녀석이 교장이려나.'

기척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그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뭐 이리 숨겨 논 거야? 이거, 교장실은 확실히 아닌 거 같은데.'

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3층.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장소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벽이 하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벽조차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인식 저하 마법이 걸린 것을 확인하며 나는 턱을 매만졌다.

'여기에 중요한 게 있나 본데.'

이렇게나 숨겨 놨다는 건 층을 클리어할 힌트라는 것.

그 사실을 어림짐작한 나는 손 위로 오러를 두르기 시작했다.

파직!

뻗어 나간 내 손이 서서히 벽에 걸려 있는 마법들을 부숴 나갔다.

그러던 그때.

"너 뭐야."

157화

손에 오러를 둘러 마법을 파훼하던 순간 내 교복보다 화려한 복장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너 마법학 학생 아니야? 마법학 학생 주제에 왜 본관에 있어?"

힐끔 시선을 낮추니 마법과 학생임을 증명하는 배지가 보였다.

이 벽 너머를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건 나중으로 하기로 하고 벽에서 손을 떼었다.

"야, 물어볼 게 있는데."

"야? 지금 나한테 '야'라고 했어? 마법학 학생 따위가!?"

"됐고, 교장실이 어딘지 아냐?"

내가 물음을 던지자 그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더니 곧 무언가 눈치챈 게 있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핫, 맞아. 매년 마다 꼭 있지 마법도 못 다루는 쓰레기 주제에 마법과 쪽에 진학하고 싶어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는 녀석이!"

딱히 별말 하지 않았는데, 이 녀석 혼자 오해하기 시작했다.

"머저리 같은 놈. 마법학 학생으로라도 아카데미에 받아들여 준 걸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욕심이나 부려? 교장 선생님은 마법의 새로운 역사를 쓰신 분이야. 그런 분을 너 따위 수준 낮은 녀석이 귀찮게 해서 쓰겠어?"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너 한 번만 삼류 악당 클리셰 대사를 지껄이면 아가리 터트려 버린다."

"뭐, 뭐?! 이게 지금 뭐라 지껄이는 거야."

살면서 이렇게 대해진 적이 없다는 양 녀석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킨다.

올라간 내 손이 녀석의 입을 검지와 엄지로 틀어잡았다.

미처 반항할 틈도 없이 내 손에 입술이 꽉 잡힌 그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경고한다. 입 털지 마. 내 말만 얌전히 들어. 난 영양가 없는 클리셰 대사는 질색이거든."

녀석의 두 입술을 잡은 내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교장실, 어디 있냐?"

그러자 녀석은 말없이 조용히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계단도 없는 쭉 일직선인 복도.

보아하니 가다 보면 나오는 모양이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곱게 나오면 얼마나 좋아."

녀석의 입술을 놓아 준 나는 손에 묻은 침을 녀석의 교복에 쓱쓱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벽을 잠깐 힐끗 봤지만, 이건 조금 있다가 해결하기로 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멍하니 보던 그는 곧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더니 내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 새끼가 죽으려고! 감히 나 레피드 이리스한테!"

꽤 자존감이 넘치는 녀석이다.

어디 귀족이라도 되는 걸까.

"죽여 주마."

그 순간 녀석의 머리 위에 열 개의 매직 미사일이 생겨났다.

기고만장한 표정의 그는 품에서 꺼낸 완드로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죽어라!"

그러자 매직 미사일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하나하나 구체가 꽤 큰 게 일반 사람이 맞으면 포탄을 맞은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 닿는 건 매직 미사일이 아닌 조각조각 날리는 모래 가루였다.

"어, 으어?"

자신의 매직 미사일이 순식간에 분쇄 당했음을 깨달은 그의 당혹감 서린 목소리가 울대를 타고 울려 퍼졌다.

내가 녀석이 만든 매직 미사일을 주먹으로 죄다 다 부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 마법? 하찮은 마법학 학생 따위가 5성급 마법사인 내 마법을 박살 냈다고?!"

내 주먹이 자기 눈에 안 보이니 마법이라 판단한 걸까.

'그러고 보니 마법과 학생들만 졸업장을 딸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러면서 문득 생각난 호니아의 말에 잠시 고민하며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마법에는 재능이 전혀 없다.

마법은 솔직히 센스의 영역이라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면 그른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마법을 배워 마법과에 들어가 졸업장을 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이 녀석에게 한 것처럼. 내 기술들을 마법이라고 속인다면 이야기가 어떨까.'

사람은 본디 보이는 것만 믿는다.

내 스텟이라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것도, 주먹을 쓰는 것도 전부 가능하다.

"그래, 내 바람 마법이다. 5성급 마법사는 나한테 상대도 안 되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 판단한 나는 곧바로 연기 모드에 돌입했다.

지금부터 나는 바람 마법사다.

"네놈, 분명히 마법학 학생이잖아! 마법학 학생 따위가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마법을?!"

"시끄럽고 바람 마법이나 마저 받아라."

내 주먹은 녀석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안면을 강타해 그대로 날려 버렸다.

"크학!"

안면이 붕괴된 채 바닥에 기절한 녀석을 보고 손을 탁탁 털었다.

내 바람 마법, '안면 강타 정권'이다.

일단 현역 학생에게는 내 주먹이 마법으로 보인다는 건 알아냈으니, 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곧바로 교장실로 향하기로 했다.

레피드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가르쳐 주기는 제대로 가르쳐 줬는 듯 곧 교장실이 적힌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한 교장실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내 문을 벌컥 연 순간,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교사로 보이는 옷차림을 한 그녀는 남자 코트 하나에 깊게 코를 파묻고 있었다.

황홀한 듯 두 눈이 풀려 있는 변태 같은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말없이 문을 닫았다.

그런 뒤 다시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고, 거기에는 어느새 코트를 걸어두고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방금 전 일은 전혀 없었다는 양 사무적이고 냉철했다.

"교장 선생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쪽은?"

"교장 비서 바이어스 세리드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자리를 비우실 때는 제가 일을 대신하고 있으니 용무가 있으시다면 제게 말해 주세요."

자리를 비웠다라.

나는 다음에 교장을 만나게 된다면 코트를 챙기고 다니라고 충고해 주고 싶어졌다.

어쨌든 그녀가 대리인이라고 하니, 일단 여기 온 이유를 말하기로 했다.

"제가 마법학과에서 마법과로 전과 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질문을 듣고 그녀는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였다.

"마법학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마법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텐데요?"

나는 손을 들었다.

교장 비서를 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거겠지.

그렇담 내가 하는 행동을 제대로 알아보는지, 아니면 그 녀석처럼 마법이라 착각하는지를 시험해 볼 차례다.

"바람 마법을 좀 하는데요."

"바람 마법이요?"

내가 미심쩍은 것일까, 그녀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렇담 지금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보여달라라.

교장 대리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는 그렇담 적당히 해 주기로 했다.

"바람, 조심하세요."

말과 함께 나는 그 즉시 다리를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인 다리는 엄청난 힘을 담고 있었고, 그녀의 눈에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순간 다리에서 일어난 풍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정리되어 있던 책들과 종이들이 풍압에 의해 흩날리고, 나와 세리드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책상을 부여잡고 간신히 서 있던 세리드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바람 마법인데 어때요."

바람 마법 '다리 휘두르기' 되시겠다.

"어, 어라. 마, 마력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는데요."

그야 그냥 힘으로 휘둘렀으니까.

애초에 마력이란 본디 오러다.

오러의 형태를 보다 고착화한 것이 마법이니까.

하지만 기원이 오러일 뿐 마력은 오러와 다르다.

오러를 마력으로 정제시키는 방법을 알긴 해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만큼 나는 아무거나 가져다 붙이기로 했다.

"제가 특별한 기술을 쓰거든요. 우리 가문에만 내려오는 비기랄까요."

"비기라니. 그런 게 있다고요?"

"의심스러우면 방금 전 마법은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평생을 마법만 공부하고 산 녀석들이다.

과학자들이 세상에 모든 이치를 과학으로 풀어내려는 것처럼 마법사들도 같다.

무엇이든 마법이라고 갖다 붙이면 이해가 안 되어도 대부분 납득하고 마는 것이다.

"어, 으음."

풍압은 진짜였다.

지금도 나풀나풀 종이들이 날리고 있으니까.

그걸 설명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일까, 세리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법과에 들어가려면 정식 시험을 치러야만 가능합니다. 지금은 시험 기간이 아니라서 기다려야 합니다."

"방금 전 일로 소란스럽기 싫으면, 그 부분은 알아서 잘 처리하실 거 같은데요."

그러자 그녀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미소 지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더라도 소문이 나면, 교장 선생님이 비서님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아시겠죠. 주위 학생이랑 선생님들 시선도 있을 거고요."

"그게, 그건."

"아, 혹시 합의된 건가요? 그래도 상관없긴 하지만요."

협박은 늘 해 온 만큼 특기다.

나한테 약점이 들킨 이상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나는 책 한 권을 들어 서재에 넣어 주며 말했다.

"잘해 주실 거예요. 그죠? 시험만 빨리 치르게 해 줘요. 결과로 왈가왈부하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아, 제 이름은 하천성이고 마법학 기숙사 304호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그쪽으로 연락 넣어주세요."

그녀가 잘해 줄 거라 믿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마법 쪽으로 들어갈 방법은 됐고, 나는 아까 보았던 벽이랑 아직 모자란 층의 정보를 수집하기로 결심했다.

'벽을 확인하고 난 다음, 도서관 쪽에 가서 역사랑 경제 한 번 대강 훑으면 세계관 정리는 끝이지.'

하루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학 따위가 감히 본관에 들어와?"

창밖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뻗어 나가던 발을 우뚝 멈춘 나는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마법학 학생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학생 무리.

나랑 똑같이 마법학 학생이면서 본관에 들어온 녀석이 있다면, 마법을 못 쓰는 검왕 녀석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층을 올랐듯이 그 녀석도 층이 클리어되자마자 뒤따라 올라왔을 터.

하지만 그런 내 추측과 달리 그 중심에 있던 건 다름 아닌 호니아였다.

'쟤가 왜.'

아니, 뻔하지.

나를 따라온 거다.

그 꼴을 당하고도 따라올 정도로 오지랖 넓은 녀석이라 생각하며, 나는 창가의 팔을 올려 기대어 섰다.

"그, 그게 아니라. 전 그저 친구를 찾으러."

"친구? 본관에 수준 낮은 마법학 학생 따위랑 친한 녀석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뇨. 그게 아니라 마법학 동기인 친구를 찾으러 온 거예요!"

"마법학 떨거지가 왜 여깄어?"

어떻게든 항변하는 호니아의 모습에 다수의 마법과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그를 몰아세웠다.

한 명은 검지로 아예 그의 이마를 쿡쿡 찌르고 있었지만, 호니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또 유치한 짓 하고 있네."

그 순간 때마침 지나가던 마법과 학생 한 명이 그들을 발견하곤 눈살을 와락 찌푸린 채 다가와 보호하듯 호니아의 앞에 섰다.

그녀의 등장에 방금까지 호니아를 괴롭히던 학생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고, 이내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레미, 너 지금 마법학 학생 따위를 편드는 거야?"

"쟤 또 저런다. 오지랖 오져."

"편드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한심해서야. 너네는 왜 남을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자기보다 마법이 뛰어나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꼼짝도 못 하면서,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

레미라고 불린 상대적으로 작은 키의 소녀는 아이들의 비난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서 5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몰아세우며, 그녀는 고양이가 화낼 때처럼 표독스럽게 굴었다.

"레미, 같은 평민이라고 편드는 짓은 그만하지?"

그 순간 마법과 학생 한 명이 그녀의 치부를 드러내며 씨익 하니 웃었다.

"하여튼 태생이 평민인 것들은 마법 수준이 높아져도 천한 건 똑같지."

"마법과 1학년 차석을 하면 뭐해. 꼴이 이런데."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이제는 호니아가 아닌 레미에게 표적을 돌렸다.

158화

보아하니 지금까지 그녀가 평민이라는 점을 이용해 이것저것 괴롭혀 온 모양이었다.

"내가 평민이면 뭐. 너희들이 보태 준 거 있냐?"

열폭 하지 마. 사실을 말하는데 왜 화를 내니?"

입술을 꽉 깨문 레미를 보며 아이들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참, 시시껄렁한 짓이다.

나도 재벌가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살아온 만큼 부잣집 아이들이 얼마나 잔혹한지 잘 안다.

날 때부터 아랫사람을 보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사람을 하대하는 법을 제일 쉽게 배우니까.

"옛날 생각나네."

크라운 로드에 오기 전 나도 망나니였다.

아버지는 어차피 하일성 그 망할 놈만 챙겼고, 난 딱히 필요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래도 굳이 저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짓거리는 안 했다.

"좀 설치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한 번 무시한 상대는 그 상대가 어떻게 되던 무시하게 된다.

하일성이 내게 그러듯 저 상황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 나는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얼굴을 보이면 나까지 엮여 귀찮아질 수 있다.

그러니 나는 곧바로 손에 오러를 모아 기탄의 형태로 만들어 내었다.

문답무용.

나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다섯 개의 기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내 날아간 기탄이 다섯 명의 머리를 정확히 때렸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다섯 명이 다 쓰러지자, 나는 유유자적 나타났다.

"처, 천성아?!"

호니아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자 나는 스윽 하고 손을 들어 인사해 줬다.

"어이, 도서관은 어디 있냐."

"도서관을 가겠다고?!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갑자기 애들이 쓰러져서."

내 기탄을 맞고 쓰러진 애들 탓에 혼란스러운 듯 호니아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길 괴롭히는 애들이니 그냥 내버려 두면 될 텐데, 녀석은 기어코 애들을 일으켜 세우며 양호실까지 데려가려 했다.

귀찮은 성격이군.

"걍 내버려 둬.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아니, 그렇지만 갑자기 쓰러졌잖아."

내가 나타난 타이밍만 봐도 누가 한 짓인지 알 수 있지 않나?

"네가 한 거지?"

그 순간 호니아랑은 다르게 눈치가 있는 레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마법과 애들을 볼 때랑은 다르게 조금 누그러진 눈빛이었다.

"지나가던 마법사가 했어."

"딱히 숨겨도 상관없어. 선생님한테 이를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 말한 레미는 아이들을 잠깐 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아이들을 한 명씩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애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레미는 그들을 공중에서 밀어내며 말했다.

"가봐. 변명은 내가 해 둘 테니까. 나도 얘네들은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나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곤 호니아를 붙잡아 끌고 가며 나는 녀석에게 도서관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천상아, 본관은 진짜 위험하다니까. 아까 못 봤어? 도서관도 본관에 있단 말이야."

"넌 진짜 눈치가 없는 거냐,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냐. 아까 그놈들을 내가 쓰러트린 건데, 정말로 모르는 거냐?"

"어? 하지만 방금 지나가던 마법사가 했다고 했잖아."

그렇군.

내가 마법을 못 쓴다고 알고 있으니, 조금도 의심 안 한 건가.

"나 마법 써. 방금 마법과 시험을 치겠다고 교장 대리한테 말하고 오는 길이야."

"뭐? 마법을 못 쓴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어?"

딱히 둘러댈 말은 없었다.

호니아는 마법을 아예 못 쓴다고 말했었다.

모든 사람이 마법을 쓰는 세계.

수준이 낮든 높든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자신만 못한다는 것에 호니아는 평생을 괴로워한 모양이었다.

그런 마당에 만난 마법학 동기가 자신과 같이 마법을 못 쓴다고 했으니, 내심 많이 기뻤던 모양이다.

먼 이국에서 오랜만에 같은 국적, 그것도 같은 동네에서 자라난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겠지.

"...왜 그랬어. 거짓말할 필요 없었는데."

하지만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자, 호니아는 깊게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되었지만, 호니아가 나를 이토록 걱정했던 이유는 전부 내가 자신처럼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호니아는 본인이 그동안 많은 수모를 당했기에, 나 또한 같은 일을 겪었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법과에서 봉변을 당하면 큰일이라고 판단해서 이렇게 집요하게 따라온 것이었다.

"어정쩡하게 마법을 쓴다면 차라리 안 쓰는 거로 생각하고 살기로 했어. 난 평민이니까. 하지만 오늘 마법과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오니, 나도 가능하겠다 싶었어. 내 꿈이 마법과 진학이었으니까."

나는 호니아 녀석을 위해 적당히 설정에 살을 붙여 주었다.

그러자 호니아의 두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드디어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자 그는 또다시 깊은 고독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하지만 호니아는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도록.

"그랬구나. 난 천성이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 그래서 네가 왜 그토록 본관에 가 보려고 했는지 잘 몰랐었는데, 이제 이해했어."

호니아는 풀린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두 눈동자는 큰 아쉬움 만큼이나 안도가 담겨 있었다.

"다행이야. 천성이 네가 나랑 같은 체질이 아니라서."

그는 하염없이 착해 빠진 녀석이었다.

거짓말을 한 내가 밉기도 했을 테지만, 자신과 같은 곤경에 처한 사람이 없다는 것에 그는 안도하고 있었다.

"네 체질이 뭔데."

조금 궁금해졌다.

이 녀석이 어째서 마법을 못 쓰는지.

호니아는 제 입으로 이 층에서 10살 어린애들도 마법을 쓴다고 했다.

그러니 10대 중반인 호니아가 마법을 못 쓸 리가 없었다.

분명 마력을 깨우치는 시스템도 잘 되어 있을 거고, 그렇담 마력을 진작 느꼈을 텐데 왜 마법을 못 쓰다는 걸까.

"나는 마법을 못 쓰는 저주받은 몸이야. 마력 자체를 느끼지 못하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나처럼 마법에는 센스가 없어서 그런가 했더니, 마력 자체를 못 느낀다고?

사람은 누구나 오러 회로는 가지고 있다.

단지, 오러를 느낄 수 있느냐 못 느끼느냐로 시간이 걸릴 뿐.

그 건즉슨 마법도 배운다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소리다.

크라운 로드에서 마법을 못 쓰는 몸이라는 건 없다.

'성좌는 이야기 속 모든 것에 가능성을 내포해 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호니아를 돌아보았다.

다시 보아도 녀석은 사내치곤 꽤 예쁘장한 얼굴이다.

어디 가서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좋아할 얼굴인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 속 엑스트라였다면, 이렇게 열심히 만들지도 않았겠지.

"호니아, 너 여기 앉아봐."

내가 대뜸 옆에 있던 벤치를 가리키자 호니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앉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뒤편에 가서 등 위에 손을 올렸다.

"천성아?"

"네가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없는지 확인 좀 해 보자."

"어어? 하지만 나 마법 적성 검사는 옛날에도 받아봤는데, 그때도 내 몸에서 마력을 아예 못 느꼈다고 말했어. 그래서 신께 저주받은 몸이라고...."

"상관없으니 얌전히나 있어."

나는 손 위에 오러를 두르곤 호니아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내 전 속성 오러 탓에 호니아는 움찔거리며 반응하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살피기 시작했다.

'어쭈? 이놈 봐라.'

그 순간 내 눈이 가늘게 떠지기 시작했다.

호니아의 몸속 깊은 곳 오러의 원천을 발견한 나는 그 크기를 보고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놈 오러량만 놓고 보면 그랜드 마스터급이다.

오러도 느끼지 못하는 놈이 내재된 오러가 이 정도나 있다는 건 이렇게 낮은 층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왜 네가 마법을 못 썼는지 잘 알겠다."

이 녀석보다 훨씬 수준 낮은 마법사들이 아무리 용 써봤자 오러가 느껴질 리가 있나.

녀석들의 눈에는 오러가 너무 커서 오히려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타고난 마도일체.'

몸과 오러가 일체화될 정도로 공명한 탓에

녀석의 오러 회로가 몸 전역을 뒤덮고 있다.

수준 낮은 녀석들은 오러 회로를 한 바퀴 지나는 데만 한참이 걸릴 테니 호니아에게 오러의 존재를 느끼게 할 수 없었으리라.

'치트란 치트는 다 넣어 놓고 정작 주위에서 일깨워 줄 녀석이 없어서 각성 못 한 꼴이라니.'

참 아깝게 만들어 놨다고 생각하며 나는 호니아의 오러 회로를 엄청난 속도로 뚫어 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오러를 느끼거나 써본 적이 없는 건 정말인 듯 오러 회로는 묵은 때가 뭉친 낡은 배수구처럼 꽉꽉 막혀 있었다.

그 탓에 한 개의 오러 층이 뚫릴 때마다 스파크가 튀긴 했지만, 호니아 녀석은 잘 견뎌 내었다.

처음에는 날 미심쩍어한 호니아지만 무언가 점점 성과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녀석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 천성아."

"가만히. 그냥 내 오러를 계속 느낌으로 따라와."

내가 뚫어 준 길을 타고 마치 강둑이 열린 양 호니아의 오러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워낙 대량의 오러라서인지 호니아의 오러는 회로 속 남은 찌꺼기들을 모조리 분쇄하며 맹렬한 속도로 내 오러를 쫓았다.

그렇게 몇 분.

호니아의 오러가 자신의 몸을 한 바퀴 돌았을 때.

나는 상기된 호니아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녀석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안 거다.

자신이 드디어 마법사로 각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17년이었어."

호니아의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남들은 다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었으니까."

모두가 말을 하는 세계에서 나만이 말을 못 하면 어떨까.

다들 안타까워하겠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결국 본인일 것이다.

호니아는 그런 시간을 17년 동안 혼자 쭉 겪어 왔다.

세계 자체에 소외된 그 감각을 평생토록 느끼며.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평생을 못 할 거로 생각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낄 감정은 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일 거다.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닭똥 같은 눈물이 호니아의 눈에서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녀석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는 듯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복받쳐온 감정은 호니아를 완전히 집어삼킨 듯 녀석은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빨리 도서관에나 가고 싶은데.'

['오만의 아틀리에'가 감수성이 망가진 게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시끄럽다.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해도 다 큰 사내놈이 눈앞에서 펑펑 우는 거에 감정 이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호니아 녀석이 콧물까지 훌쩍이고 있자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이템 창에서 적당히 천 하나 꺼내 던져 주었다.

"고마워."

훌쩍이며 천을 받은 호니아는 눈물을 닦고 코까지 팽 풀었다.

그러곤 천을 돌려주려 하자 나는 그냥 가지라고 하고 내버려 뒀다.

"천성이 넌 대체 어떻게 내 마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줬던 거야? 다른 마법사는 못했는데."

"내가 그 마법사 보다 센 거겠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호니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에 따라 하도 운 탓에 빨갛게 물든 눈과 볼이 녀석의 가녀림을 강조했다.

가뜩이나 남자치고 마른 몸인 녀석이니 잘못 본다면 환자로 보일 정도였다.

"그것보다 네가 제일 처음 써야 할 마법이 뭔지 알겠다. 얼음 마법이든 뭐든 써서 눈부터 어떻게 해 봐라."

"아, 보기 흉해?"

"어."

덤덤히 사실을 말하자 호니아는 뭐가 좋은 건지 포근하게 미소 지었다.

159화

"천성이 넌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사는구나."

"욕하냐?"

"아니, 부러워서. 나는 그게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해."

호니아는 양손을 모으곤 오러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딱 보아도 마법을 써보기 위해 뭐든지 해왔을 거다.

애초에 경쟁률이 높아 뚫기 힘들다는 마법학과에 들어 온 시점에서 호니아는 마법 이론으로는 완벽하리라.

마력으로 변환된 오러가 그녀의 손 중심에 맺히고 곧 그것은 몇 개의 얼음 덩어리가 되었다.

"됐다. 됐어! 천성아 이것 봐!"

양손으로 얼음을 받아 든 채 호니아가 밝게 웃자, 나는 뚱한 얼굴로 사용이나 하라고 고갯짓했다.

그러자 호니아는 배시시 웃으며 얼음을 쥐고 자기 눈가에 올렸다.

마법을 쓴 것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울어 봤어. 어느 순간부터는 우는 것도 잘 모르게 되었는데."

"원래 다 포기하고 나면 사람은 안 울어."

감정이란 건 희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법이니까.

"천성이 너도 포기한 적 있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야 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넋 놓고 살고 있던 때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 넋 놓고 살던 그때로 돌아가려고 발버둥 중이었지만.

「나야말로 하천성 네가 지구로 돌아가고 싶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크라운 로드에서 처음 만났던 하일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잘 가. 하천성.」

뒤이어 이자벨라 녀석이 했던 마지막 작별 인사도 떠올랐다.

내가 층을 클리어하고 싶은 이유.

분명 처음에는 단순히 군대 전역 직전 이딴 곳에 오게 되었다는 것에 열 받아서였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이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 못 하는 모습도 짜증 났으니까. 차라리 내가 이걸 끝내겠다고 나섰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 싶다.

이유나 사명감 같은 겉치레는 치우고.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품고, 5회차나 반복하게 된 이 크라운 로드의 끝을 보고 싶어졌다.

"사람 중에 포기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어."

누구든 무언가를 한 번쯤 내려놓을 때가 있다.

몇 번이고 크라운 로드를 올랐던 대협 녀석이 끝끝내 무너져 버렸듯이.

야신 녀석이 마지막에 가서 황제를 배신해 버렸듯이.

누구나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든 결국 자신이 포기한 것을 돌아보게 될 때가 온다.

그리고 그 포기한 것을 다시 주울 수 있는 기회도 오겠지.

"그렇구나."

호니아는 살짝 녹아내린 얼음을 잔디 위에 내려 두었다.

"천성이 넌 마법과에 들어갈 거라고 했지."

"그래."

그래야만 졸업장을 딸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도 들어갈래."

녀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도 마법과에 들어가고 싶었으니까."

호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개운해졌다는 양 녀석은 양팔을 벌리곤 기다랗게 숨을 들이쉬더니 나를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저무는 태양이 녀석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

"그래도 쉽지는 않겠지. 이제야 마법을 깨우친 나니까 시험에 통과 못 할지도 몰라."

내가 보기에는 얼마 안 걸릴 거로 생각한다만.

"그러니 권력을 쓸 거야."

그 순간 권력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뭔 권력?"

이 녀석 평민이라고 하지 않았나.

"천성이 네가 마음대로 살았듯이 나도 내 마음대로 살기로 결심했어. 다시 소개할게. 내 은인인 너에게라면 숨기고 싶지 않으니까."

그 순간 호니아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빼내었다.

그러자 어느새 길어진 그녀의 백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별을 담은 양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함께 호니아는 여성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예쁘장했던 앳된 얼굴은 이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아 그녀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나는 스텔라 니아. 스텔라 왕국의 막내 공주야."

이거, 보통이라면 경악할 상황이겠지.

하지만 니아가 성좌가 준비해 뒀을 열쇠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했던 나는 무덤덤했다.

그 이전에 지금까지 몇 번이고 크라운 로드를 오른 나는 충격적인 비밀을 너무 많이 봐 와서 이 정도는 별 감흥이 없었다.

생각보다 덜한 반응에 니아 녀석도 반지를 빼었던 어정쩡한 자세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조금은 놀랄 거라 기대한 모양이었다.

"근데, 너 여자면서 나랑 같은 방 쓰려 한 거냐?"

"어, 아, 그, 미안."

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 입장에서는 불쾌한 상황일 수도 있었다는 걸 자각한 모양이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굳이 네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이유가 뭐야?"

"응, 나는 마법을 못 쓰니까. 스텔라 왕가에서 마법을 못 쓰는 아이가 나왔다는 건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니, 대외적으로 나는 몸이 약해 병으로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있다고 되어 있어서 말이지."

니아는 풀 죽은 듯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가뜩이나 마법을 못 쓰는 것도 서러운데 주변에서 본인의 존재를 부정까지 했으니.

녀석이 왜 마법을 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펑펑 울었는지 잘 알겠다.

"아버지는 내가 마법을 못 쓴다는 걸 안 이유로 거의 본 적도 없고, 두 번째 왕비인 우리 어머니는 마법을 못 쓰는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별거 당하셨어. 그래도 강한 분이셨지. 내가 마법학을 줄곧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어머니 덕이었거든."

니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 듯 반지를 소중히 감쌌다.

그녀가 쥐고 있는 반지 또한 그 사람이 준비해 준 것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스텔라 아카데미 마법학과로 나를 보내 주셨어. 내게 세상에 대해 공부해 보라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은 기쁜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슬퍼 보였다.

그녀도 느낀 거겠지.

마법과가 아닌 마법학과로 보낸 시점에서 어머니도 자신에게 마법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자신을 위해 주는 것이 미치도록 아플 때도 있으니까.

니아가 어머니에게 바란 것은 마법학과로 가도 괜찮다는 배려가 아닌, 마법을 쓰도록 더 노력하라는 모진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천성이 네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어. 나도 이제 더 이상 숨어 있을 필요는 없는 거야."

니아는 가슴을 곱게 폈다.

이제는 자신도 당당해질 때라는 양.

"어머니에게 알리고 아버지에게도 알릴 거야. 그리고 스텔라 니아로서 아카데미 마법과에 당당히 입학할 거야."

열정을 불태우는 니아를 내가 말없이 보고 있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쥐었던 주먹을 내리곤 다가왔다.

"그러니 천성이 너도 내 이름으로 마법과에 같이 추천할 생각인데."

"호오, 권력 남용이냐."

"그, 그렇긴 하지? 싫으면 괜찮아. 천성이 너라면 얼마든지 마법과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니아가 미안한 듯 말하자 나는 씨익 하니 웃었다.

"싫을 리가. 권력 남용은 좋아하는 편이거든."

나는 다리를 꼬고 얼마든지 하라는 양 고개를 까닥였다.

시험 치를 일 없이 편하게 전과할 방법이 생겼는데, 굳이 돌아갈 이유가 없다.

내 대답을 듣고 니아는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마음대로 사는구나."

"내 인생 내가 마음대로 살겠다는데, 불만 있냐."

"아니, 없어. 오히려 받아 줘서 고마워. 내 은인한테 아무것도 못 한 게 마음에 쭉 걸릴 거라 생각했거든."

니아는 기쁜 듯이 웃곤 반지를 다시 손에 꼈다.

"그렇다면 난 일단 어머니를 만나고 올게. 하루 정도는 걸릴 거야."

"마음대로."

어서 가 보라는 양 내가 손을 까닥거리자, 니아는 작게 웃더니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깐 보고 있자 그녀는 내게 '고마워.'라는 말을 남기곤 떠나갔다.

"아, 도서관."

니아가 사라지자 나는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을 떠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저물어 버린 해를 잠깐 보고 있던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니아 녀석의 오러를 뚫어 주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걸려 버렸다.

왠지 도서관으로 가면 문을 닫았을 것 같은데.

게다가 길도 니아 녀석이 알지 나는 모른다.

"쯧, 어쩔 수 없나."

혀를 찬 나는 몸을 돌려 기숙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말고 뭔가 한 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오후 시간에 배정된 마법학 수업에 안 갔네.'

뭐, 마법과로 갈 거니 상관없나.

이후 나는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쯤 되어서야 그 벽을 잊은 걸 알아차렸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을 먹고 있자 마법학 선생이 직접 찾아왔다.

니아는 하루 만에 자퇴 처리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전날 결석한 나를 마법학 수업으로 데려가러 온 것이다.

어제 수업에 빠진 이유에 대해 묻자, 개나 '본관에 갔다가....'라고 사실대로 말하려는 데 그게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이 이해해 주었다.

선생 반응도 그렇고 본관 녀석들은 어지간히 저지른 일이 많은 모양이다.

"요, 첫날부터 결석생. 얼굴이 죽을상이네."

나에게는 조금도 감흥 없는 마법학 수업을 꾸역꾸역 듣고 있었을까, 나는 옆에서 들린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금발, 태닝에 넥타이를 반쯤 풀어 교복을 불량하게 입은 한 녀석이 있었다.

"본관 녀석들한테 된통 맞고 왔다면서?"

맞은 건 그 녀석들이다만.

딱히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낀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거참, 너무하네."

그 순간 녀석이 내 어깨 위에 손을 턱 하니 올렸다.

"까칠한 건 잘 알겠지만. 우리 마법학과에도 입학 룰이 하나 있거든. 본관에서 처맞는 것과는 또 다른 룰이."

씨익 하니 웃은 녀석의 말에 나는 그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텃세를 부리겠다, 이건가.

"표정 풀어. 새끼야. 점심시간에 뒤로 나와."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녀석의 얼굴을 턱 하니 붙잡았다.

"야, 뭐 하는, 아, 아아악!"

그러곤 그 즉시 힘을 주기 시작하자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해. 같잖은 짓거리하지 말고."

"우, 어아악!"

내 악력 때문인지 그가 비명을 지르자 놀란 학생들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그만, 그만해!"

그러자 한 학생이 달려들어 내 팔을 붙잡았으나, 나는 미동도 없었다.

내 힘이 생각보다 강했기 때문일까, 말리던 녀석의 얼굴에도 당황이 서렸다.

"이 녀석이 점심시간에 뒤로 불러서 할 게 있다는데, 아는 거 있냐?"

"그냥 입학 축하 파티로 서프라이즈를 하려던 거야!"

"그냥 축하 파티? 그럴 리가 있냐."

"진짜라고! 모드, 그거 들고 와봐!"

그 순간 뒤에 있던 다른 학생 한 명이 급히 케이크 하나를 들고 왔다.

거기에는 하천성이라는 내 이름과 호니아가 적혀 있었다.

"케이크를 먹으려 하면 얼굴에 묻히기는 하는데. 정말로 그 정도밖에 없어!"

그의 필사적인 외침에 나는 얼굴을 붙잡은 녀석을 바라보았다.

울상이 된 녀석을 보고 조용히 얼굴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나는 조용히 내게 얼굴이 잡혔던 녀석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히 오해하게 만들지 마라."

"...차라리 사과를 하지."

싫어. 안 해.

그 뒤로 나는 억지로라도 입학 축하를 하려고 케이크를 얼굴에 묻히려는 녀석들을 밀어내어야만 했다.

"하천성 학생."

아이들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을까, 갑자기 선생 한 명이 나를 불렀다.

그녀는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들도 장난칠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만두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선생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마법과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뇨. 딱히."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렇지만 마법과 교사 한 명이 찾아왔어. 너를 만나서 데려갈 곳이 있다는데."

마법과 입학 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