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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웨이브 (2) > 끝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멈추지 않고서 연신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콰카카캉────!!!!

[···이봐요, 주인님. 대체 너 뭐예요?]

에스더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일일이 답해줄 여유는 없었다.

딸칵-

피우우우웅─!!!

17형 탄두 피사체가 격렬하게 날아갔다.

목표물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대충 쏜 것이긴 해도,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 레드 라인의 전선에는 말 그대로 땅 반 마수 반이었으니 맞추지 못할 일은 없었다.

이제 아크에서도 내 존재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애초에 병참 장교 게드윈과 거래를 한 순간부터 내 존재는 아크에 알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콰카카캉────!!!!

[···이봐요, 주인님. 대체 너 뭐예요?]

쾅!

콰카카캉!!

무수한 마수와 마물 무리가 나를 응시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풍겨오는 흉성에 주변에 있는 에테르가 들썩였다.

[무, 서, 워······.]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끼익, 끼기익······.]

한때 일부러 내가 있는 곳에 마수와 마물들을 유인하기도 했던 에테르들이지만, 에테르 감응력이 늘어나며 나에게 점차 우호적으로 바뀐 것이다.

'슬슬······.'

어느덧 달려드는 마수 무리가 지척까지 다다랐다.

나는 다시금 뼈 촉수를 하나 뽑아들고는 그대로 땅에 내리찍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27분 51초.]

어그로 초기화.

하지만 이번에는 딜레이 없이 곧장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27분 46초.]

그리고는 과열된 TITAN-17 대마수 로켓을 미리 설치해둔 뼈 받침대 위에 올려두어서 열이 빠르게 식게 한 뒤, 이제 어느 정도 열이 식은 NOA-8 중기관포를 다시 잡았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못쏠 수준은 아니지.'

NOA-8 중기관포의 손잡이를 잡은 내가 마수 무리를 조준했다.

짤깍-

다시금 총구가 섬광을 뿜어냈다.

다만, 이번에는 열 관리를 하기 위해서 조금씩 끊어서 발사했다.

콰카카카-

콰카카카!!

다시금 마수와 마물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괴암종, 화강암 골렘을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암종, 화강암 골렘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7급 식물종, 변이된 나팔 덩굴을 처치하였습니다.]

[7급 식물종, 변이된 나팔 덩굴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정밀한 사격이라기보다는 마구잡이 폭격에 가까운 파괴적인 현장.

그 속에서 상대가 야수종이든, 괴암종이든, 식물종이든 가리지 않고서 섬광처럼 쏟아져 나간 20mm 총알은 평등하게 마수와 마물들을 갈아버렸다.

콰카카카카카!!!

한때 마수였던, 그리고 마물이었던 온갖 살점들이 불꽃과 함께 전장에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주인, 저쪽!]

에스더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바닥에 있는 그림자가 커졌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총구를 위로 들어서 머리에 떨어지는 바위를 그대로 갈아버렸다.

콰카카카카캉!

그와 함께 하늘 위에서 돌가루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막아."

[···시켜먹기는.]

에스더가 투덜거리면서도 나에게 떨어져 내리는 돌가루들을 가뿐히 막아냈다.

에스더 정도의 유령종에게 이 정도 물리력을 발휘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였다.

'흐음.'

나는 나에게 이 몹쓸 바위를 던진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끼룩, 끼룩!]

[캬오오오오오──!]

어그로를 너무 끈 탓일까.

비단 지상에 있는 마수 무리뿐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나를 향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딜.'

마침 과열된 중기관포의 열기도 식힐 겸 나는 뼈 촉수를 뽑아 들었다.

제까짓 놈들이 무리 지어서 몰려와봤자 이거 하나면 충분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27분 45초.]

멈칫-

다시금 마수와 마물들의 어그로가 초기화되며 놈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모든 마수와 마물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그우우우우우······!]

[캬우, 캬우!]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가 통하지 않는 마수와 마물.

즉, 최소 4급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이었다.

'흐음.'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많고 많은 마수와 마물 중에서 지금 하늘에 남아 있는 건 네 마리 정도뿐.

4급 괴암종, 가고일.

3급 비행종, 하늘 백상아리.

4급 괴수종, 변이된 프테라노돈.

3급 거충종, 장군 말벌.

하나 같이 나를 일격에 바스러뜨릴 수 있는 무식한 마수와 마물들.

그러나 겁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에 대한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으니까.

철컥, 철컥-

나는 NOA-8 중기관포의 뚜껑을 열어서 그대로 탄을 교체했다.

지금까지 사용한 탄은 20mm 일반탄.

교체할 탄은 20mm 고폭소이철갑탄이었다.

고폭소이철갑탄은 이것저것 섞어놓은 짬뽕탄이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여러모로 특이한 탄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고폭탄에는 어느 정도 소이 효과가 있지만, 고폭소이탄은 여기에 소이 효과를 극대화시킨 탄종이다.

거기에 더해서 고폭소이철갑탄은 탄두를 철갑탄으로 바꾼 것으로, 이러한 특성 덕분에 날개가 약점인 비행종과 공중형 거충종에게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키에에에에에에!]

[끼에엑!]

가장 먼저 달려든 건 하늘 백상아리였다.

역시 하늘의 포식자답게 저 넷 중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속도였다.

'생선이면 생선답게 물에나 있을 것이지.'

NOA-8 중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목표는 하늘 백상아리의 날개라고 볼 수 있는 지느러미였다.

콰카카카카카─!!!

20mm 고폭소이철갑탄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총알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구멍이었고, 이내 그 구멍들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소이 효과였다.

[그우우우우우!]

피어오르는 화염과 함께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하늘 백상아리가 추락했다.

물론 하늘 백상아리쯤 되는 마수가 고작 하늘에서 추락한 정도로 죽을 리는 없었지만, 이미 전투 불능이 된 상태니 나중에 얼마든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선, 한놈.'

그다음으로 달려든 건 장군 말벌과 변이된 프레라노돈이었다.

녀석들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이리저리 총구를 피하면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저 기동성이면 NOA-8 중기관포로 조준하기는 어렵겠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수종과 거충종.

거기다가 기동성 역시도 단순히 빠르기만 했던 하늘 백상아리와는 다르게 총알을 피하는 데 최적화된 회피 기동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NOA-8 중기관포의 손잡이를 내려놓고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다잡았다.

장전된 총알은 A-985 폭발탄.

목표는 여전히 조준하기 어려웠으나, 조준이 아예 불가능했던 NOA-8 중기관포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군 말벌의 움직임 패턴은······.'

머릿속에서 천천히 장군 말벌의 움직임이 그려진다.

'왼쪽, 거기에서 다시 오른쪽 위. 한 바퀴 돌고 다시 왼쪽.'

철컥.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아아앙!────

쏘아진 총알이 궤적을 그리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뻗어나갔다.

하지만 이내 그곳에 도착한 장군 말벌이 말 그대로 총알에 머리를 들이 박았다.

자기가 스스로 죽음을 향해서 날아든 것이다.

콰아아아앙!

아무리 장군 말벌이라 할지라도 머리에 폭발탄을 정통으로 맞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츠츠, 츠츠츠······.]

하지만 그럼에도 장군 말벌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이걸 빈틈으로 여긴 건지는 몰라도 변이된 프테라노돈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끼루우우───!!!]

지금 총구를 돌리기에는 늦은 상황.

하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수가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에스더."

[알차게도 부려 드시네······.]

물론 아직 미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에스더 혼자만의 힘이라면 4급 괴수종의 돌진을 막을 수 없다.

이와 반대로 내가 지닌 에테르만으로도 4급 괴수종의 돌진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에스더는 나의 일부.

곧, 내가 지닌 힘 역시도 내가 허락만 한다면 얼마든지 에스더가 사용할 수 있었다.

[막아, 이 녀석들아.]

에스더의 명령과 함께 내 주변에 있는 에테르와 내 안에 있던 에테르가 함께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아?]

[우리가?]

[막자.]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막아······.]

4급 괴수종, 변이된 프테라노돈의 강철 같은 부리가 나를 꿰뚫기 직전.

[···끼루?]

변이된 프테라노돈의 몸이 허공에 아주 잠깐 멈춰섰다.

그리고 그 정도 틈이면 내가 총구를 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철컥.

"꺼져."

타아앙!─

이미 근접 거리에서 급소를 노출한 변이된 프테라노돈이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양쪽 눈에 두 발씩.

그리고 마무리로 다시금 한발씩 꽂아넣은 폭발탄이 변이된 프테라노돈의 머리를 말 그대로 날려버렸다.

[4급 괴수종, 변이된 프테라노돈를 처치하였습니다.]

[4급 괴수종, 변이된 프테라노돈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푸슈우우욱······.

이제 남은 건 4급 괴암종, 가고일뿐.

가고일은 괴암종답게 이동 속도는 다른 비행종에 비해서 느렸지만, 그만큼 단단한 외피를 지닌 마물이었다.

'괴암종 특성상 폭발탄으로는 그럴듯한 피해를 주기는 어려울 터.'

A-985 폭발탄은 대부분의 마수와 마물에게 매우 유효한 탄이지만, 괴암종처럼 전신이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마물에게는 그 효과가 크지 않았다.

철컥.

나는 탄창을 철갑탄 탄창으로 교체했다.

괴암종인 가고일 특성상 조준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천천히 가고일의 움직임을 읽었다.

'지금.'

거침없이 방아쇠가 당겨졌다.

탕!

타타타탕!!!

아무래도 탄이 폭발탄이 아닌 철갑탄이었기에 어지간한 파괴력으로는 4급 괴암종을 잡을 수 없는 게 사실.

그렇기에 나는 질보다는 양 전략으로 마구잡이로 총알을 퍼부었다.

딸깍-

철컥, 철컥.

날개와 몸 곳곳이 파손된 가고일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의 모드를 자동 소총으로 변경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총알을 퍼부었다.

[그우우우우!]

총구에서 뻗어 나간 철갑탄의 숫자가 어느덧 세자릿수가 되었을 때, 가고일의 몸이 힘없이 추락했다.

쿠웅-!

[4급 괴암종, 가고일을 처치하였습니다.]

[4급 괴암종, 가고일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후우······."

[이런 무모한 주인 같으니라고··· 대체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있었잖아."

[뭐 이런··· 아니, 아니다.]

에스더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흐음.'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들도 어느 정도 정리했겠다, 나는 이번 웨이브에 겸사겸사 목표로 했던 것을 얻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탑승물이 필요했었지.'

하지만 아크에서 얻을 수 있는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 같은 건 비용도 비싸고, 아크 바깥에서는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선, 그것부터 얻어야겠지.'

나는 레드 라인의 전선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리저리 날뛰며 중화기를 거침없이 퍼부어댄 덕분인지 레드 라인의 전선은 한껏 여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내가 지금 작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찾았다.'

내 시선 끝에 있는 건 전신에 온갖 뼈들이 돋아난 거대한 지네 형태의 마물이었다.

'7급 괴수종, 스컬 센티피드.'

스컬 센티피드는 스컬 하운드의 심장에 기생하는 뼈 기생체가 스컬 하운드의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며 변이를 일으킨 개체다.

즉, 스컬 센티피드로 변이에 성공한 뼈 기생체는 스컬 하운드의 심장에 기생하고 있는 뼈 기생체보다 강하다는 이야기다.

'저놈이 좋겠어.'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의 심장에 자리를 잡고 있을 뼈 기생체를 얻기 위해서.

< 세 번째 웨이브 (3) > 끝

철컥-

나는 스컬 센티피드를 향해서 선전포고 겸 머리를 조준했다.

즉사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대부분의 마수와 마물에 있어서 머리는 급소 중 하나이지만, 스컬 센티피드는 스컬 하운드와는 다르게 뼈 기생체가 전신을 완전히 장악한 마물이었기에 머리는 사실상 장식이나 다름없었다.

스컬 센티피드의 급소는 뼈 기생체가 자리를 잡고 있는 심장 바로 옆.

하지만 나는 일부러 머리를 노렸다.

타앙─!

공기를 가르고서 뻗어 나간 총알이 스컬 센티피드의 머리에 적중했다.

총알 자체도 철갑탄이었던 터라 예상했던 대로 별 타격은 없었는지 스컬 센티피드는 이내 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흉성을 토해냈다.

[캬오오오오!]

쿵! 쿵!

스컬 센티피드를 위시한 주변의 마수와 마물들이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물론 하고자 한다면 스컬 센티피드가 접근하기 전에 심장을 날려버릴 수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스컬 센티피드 안에 있는 뼈 기생체를 탈취하기 위해서는 스컬 센티피드가 내가 있는 곳까지 와줘야 했기 때문이다.

'굳이 아크의 감시망 안쪽에서 할 필요는 없으니까.'

물론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전선의 외곽에 있는 나에게까지 시선이 닿지는 않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다.

[기겟, 기기깃!]

그러는 와중에도 스컬 센티피드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뭐야? 주인 지금 뭐해? 안 쏴?!]

"제압할 거다."

[뭐?]

스컬 센티피드의 외형은 그야말로 흉악한 마물 그 자체다.

전신을 뒤덮은, 마치 가시처럼 돋아난 온갖 종류의 뼈들.

기괴하게 뒤틀린 신체.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생김새였지만, 지금의 내가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제 뼈 갑옷을 포함한 내 근접 전투 능력은 7급 마물 따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키에에에에!]

마침내 영산 노아와의 경계선까지 다다른 스컬 센티피드의 뼈 촉수가 나를 향해서 뻗어왔다.

하지만 고작 7급 마물의 공격이 나에게 닿을 리가 만무했다.

[기깃!]

스스스!

내가 굳이 먼저 뭘 말할 필요도 없이 뼈 갑옷에서 뼈 촉수들이 뻗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뼈 갑옷에서 뻗어나온 벼 촉수들과 스컬 센티피드가 뿜어낸 뼈 촉수가 서로 부딪쳤다.

콰드득!

양 측의 뼈 촉수가 서로 부딪치자 스컬 센티피드의 뼈 촉수들이 마치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뼈 갑옷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뼈 촉수로 스컬 센티피드의 몸을 완전히 제압했다.

새삼스레 경질화나 강철화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이미 순수한 힘에서 스컬 센티피드와 뼈 갑옷 사이에는 압도적인 차이가 났다.

[기에에엑!]

스컬 센티피드가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신체를 완전히 제압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키에에에에!]

스컬 센티피드의 뒤를 이어서 다른 마수와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들을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Ark-15 자동 소총을 들었다.

짤깍-

나는 탄창을 교체했다.

A-985 폭발탄이었다.

콰아아아앙!

방아쇠가 당겨지기 무섭게 재차 일어난 폭발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미 전선에 가득 피어오른 폭연에 묻혀서 딱히 눈에 띄지도 않았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스컬 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을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뼈 갑옷이 스컬 센티피드의 심장에 뼈 촉수를 뻗었다.

심장 옆에 고이 자리를 잡고 있는 또 다른 뼈 기생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푹! 푸푹!

기민하게 움직인 뼈 촉수들이 마치 수술대에 오른 의사처럼 스컬 센티피드의 개복을 시작했다.

이내 스컬 센티피드의 몸이 갈라지고 그 속에 있는 뼈 기생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깃, 깃!]

[키에에에에!]

뼈 갑옷의 뼈 기생체와 스컬 센티피드의 뼈 기생체가 서로를 마주 보며 마치 공명하듯이 울었다.

"시끄러워."

나는 그대로 스컬 센티피드의 심장 옆에 자리를 잡은 뼈 기생체를 잡아뜯었다.

뚜둑-

뚜드득─!

[키엑, 키에에엑!]

과연 스컬 센티피드답게 연결이 꽤 튼튼하긴 했지만, 이미 뼈 갑옷에게 호되게 당하며 가진 힘을 거의 힘은 상태였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스스스─

나는 새롭게 얻은 뼈 기생체를 뼈 갑옷의 촉수로 감쌌다.

일종의 밀봉이었다.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스컬 센티피드로 변이까지 했던 뼈 기생체가 숨이 막혀서 죽을 염려는 없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기겟!]

스컬 센티피드의 뼈 기생체가 자신을 가둔 뼈 촉수를 두드리며 발악했지만, 같은 뼈 기생체라도 힘의 차이가 현격했기에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충 됐나.'

나는 뼈 기생체를 가둔 뼈 촉수 공을 품에 챙겼다.

얻어야할 것도 얻었겠다, 아무래도 아직 전쟁이 한창인 와중이었기에 다시금 전선에 합류할 필요성을 느껴서였다.

[···그걸 뭐 하려고요?]

"쓸 거다."

[아크 바깥에서 뼈 기생체를 다루는 건 절대로 쉽지 않을······ 아.]

말을 이어가던 에스더는 이내 내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이 어떤 갑옷인지는 떠올렸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지? 아닌데, 분명히 인간 맞는데······.]

에스더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에스더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건 그거고······.'

나는 전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록 내가 화력을 퍼부은 덕분에 레드 라인 전선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지만, 웨이브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거기다가 뼈 기생체의 코어로 삼을 마수의 심장과 탑승물로 삼을 만한 마수도 찾아봐야 하니까.'

계획은 간단하다.

뼈 기생체에게 55형 진통제를 주입한 뒤, 코어로 삼을 마수의 심장과 연결한 뒤에 그걸 살아있는 마수의 심장에 넣는다.

그렇게 되면 가축화된 뼈 기생체가 마수의 심장을 장악하며 이내 변이를 시작할 테고, 곧 가축화된 마물이 등장한다.

뼈 갑옷을 만드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방법이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대상이 아크제 보호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마수라는 점이다.

당연히 살아있는 마수를 생포해야 하는 일인 만큼 어지간한 이가 아니고서는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물론 아크에서 뼈 기생체 가축 마수를 만들지 않는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

딱히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효율이 좋지 않아서다.

일단 투자를 하면 웬만하면 효율이 나오는 스컬 나이트나 뼈 갑옷과는 다르게 뼈 기생체 마물을 가축화하는 건 효율 면에서 영 좋지 않다.

본질적으로 뼈 기생체는 마물이다.

그렇기에 스컬 나이트나 뼈 갑옷으로 활용하게 될 경우, 마물의 본능을 억제하고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에는 스컬 턴코트로 변모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스컬 나이트의 강력함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뼈 기생체를 통한 마수의 가축화는 또 다르다.

'필요한 게 너무 많지.'

살아있는 마수를 생포해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크 내에서도 상당한 가치를 지닌 뼈 기생체를 소모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고생해서 뼈 기생체 마수를 만들어 내면 전투에 매우 큰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애매했다.

한 마리의 마수가 아군이 된다고 해서 그게 전력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하물며 그 마수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엄청나다면?

그렇기에 아크에서는 스컬 나이트나 뼈 갑옷 등의 장비는 운용해도, 뼈 기생체를 통해서 마수를 가축화하지는 않는다.

기회비용 대비 효율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크의 경우고,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지금의 내 상황에서 이동 수단으로 삼을 딱 한 마리면 나쁘지 않지.'

더군다나 나 같은 경우에는 마수와 마물을 시체를 구하기가 비교적 쉽다.

즉, 뼈 기생체 마수를 성장시키는 것도 상당히 수월하다는 이야기.

'우선, 저것들 숫자 좀 줄여볼까.'

나는 NOA-8 중기관포를 다잡았다.

이 지긋지긋한 전쟁의 끝을 고하러 갈 때가 됐다.

* * *

"하······."

이모샤 중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날부터였을 거다.

바놀 중령의 손에 이끌려서 화이트 라인을 다녀온 뒤부터 이모샤 중위의 머릿속에는 늘 그날의 기억뿐이었다.

'긴급 라인 회의.'

회의 내용 자체가 워낙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던 터라 많은 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건 있었다.

화이트 라인에서 긴급 라인 회의가 소집된 이유 중 하나.

'새로운 변절자의 출현.'

스컬 턴코트는 개체 별로 차이가 매우 심한 마물 중 하나다.

그렇기에 같은 스컬 턴코트라 할지라도 아크에서는 개체 별로 다르게 식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스컬 턴코트에게 각기 다른 식별 번호를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크에서는 최소 2급 이상으로 분류된 스컬 턴코트들들에게 각기 다른 이름을 부여한다.

지금까지 아크에서 이름을 부여한, 스컬 턴코트는 총 다섯.

이번에 이름을 부여한 스컬 턴코트 역시도 앞선 다섯의 스컬 턴코트와 마찬가지로 체스 기물에서 이름을 땄다.

'변절자 폰.'

체스 기물 중 가장 기본적인 병사지만, 끝에 다다르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기물.

등급 외 괴수종이자 지역의 주인급 마수와도 맞설 수 있는 스컬 턴코트.

현재까지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아크가 판단하고 있는 변절자 폰에 대한 평가였다.

"하아······."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데 새로운 변절자의 출현이라니······.

이모샤 중위로서는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참 장교의 말로는 칼 마커스가 아크를 찾아와서 상당한 양의 물자를 가져갔다고 하던데······.'

처음 병참 장교 게드윈으로부터 칼 마커스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모샤 중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우연히 레드 라인 특수 목적 무기 연구소장, 메이벨 필그림 중령을 구했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채 눈치를 채기도 전에, 병참 장교 게드윈이 한 말에 이모샤 중위는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칼 마커스가 병참 장교로부터 받아간 물자는 보통이 아니었다.

무려 NOA-8 중기관포나 TITAN-17 대마수 로켓 같은 중화기와 A-985 폭발탄이 포함된 물자였다.

'게드윈의 말로는 탄이 얼마 없으니 제대로 활용하기는 어려울 거라고는 했지만······.'

그런데 왜일까.

이모샤 중위는 칼 마커스에 대해서 무언가 묘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혹시, 그가 정말로 아크를 위해서 싸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이모샤 중위가 언제나처럼 지평선을 바라보며 경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

저 멀리서 밀려드는 먹구름.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비단 이모샤 중위뿐만이 아니었다.

치직, 칙─

["1급 위험 상황 발생! 1급 위험 상황 발생! 다시 한번 전달한다. 1급 위험 상황 발생!"]

웨이브.

마수와 마물 군단이 다시금 아크를 향해서 진군을 시작했다.

"다들 위치로!"

무전을 타고서 전해진 이모샤 중위의 명령에 Red-17 소속 병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키에에에에에!!!]

[끼엑, 끼에엑!]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아크가 무수히 겪어왔던 전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의 명운이 달린 전쟁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쾅!

콰카캉!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폭음.

들려오는 마수와 마물들의 괴성.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그 속에서 이모샤 중위는 무전을 통해서 전해진 한 가지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여기는 Red-3 게이트. 신원 미상의 인물이 영산 노아와 인접한 경계에서 마수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장비는 중기관포와 대마수 로켓으로 보인다."]

무전을 들은 이모샤 중위는 왜인지 알 수 있었다.

칼 마커스.

그가 아크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 세 번째 웨이브 (4) > 끝

NOA-8 중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목표는 레드 라인의 전선.

마치 파괴 광선 같은 붉은 빛이 레드 라인의 마수와 마물들을 마구잡이로 휩쓸고 지나갔다.

콰카카카카───!!!

한때 드넓은 레드 라인의 전선을 가득 메웠던 마수와 마물들의 숫자가 점차 뜸해졌다.

분당 1만 발이 넘게 쏟아진 탄과 함께 어느덧 이 전쟁도 종막을 향해서 나아갔다.

[그오오오오오······.]

아크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형 마수와 마물들도 어느덧 아크의 막강한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서 쓰러졌다.

철갑탄과 칼날 탄환 특성을 이용한 집요한 급소 공략 덕분이었다.

[3급 네임드 괴수종, 긴 목의 아드몬을 처치하였습니다.]

[네임드 마수를 처치하였습니다.]

['괴수 사냥꾼' 효과가 10배로 적용됩니다.]

[3급 괴수종, 변이된 에드몬토에 대한 피해량이 0.5% 증가합니다.]

비록 거의 막타만 친 탓에 네임드 마수 처치로 인한 보상이 크진 않았지만, 이 정도도 나에게 있어서는 감지덕지였다.

'이쯤이면 되겠지.'

이제 레드 라인의 전선에 남은 건 말 그대로 떨거지들뿐.

아크에게 맡겨두면 어렵지 않게 잔당을 소탕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하려고 한다면 내가 끝까지 나서서 마무리를 해도 될 테지만, 저 정도 마수와 마물들을 일일이 처리하며 얻는 공적치와 지금부터 따로 움직여서 얻을 보상을 생각한다면 이쯤에서 움직이는 게 나았다.

'뼈 기생체의 서식지로 삼을만한 마수의 심장은 딱 봐둔 게 있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둬야 할 게 있었다.

바로 탑승물로 삼을만한 적당한 마수를 찾는 일이었다.

조건은 대충 세 가지 정도였다.

1. 현재 살아있을 것.

2. 네임드급의 강력한 마수일 것.

3. 공중형 마수일 것.

내가 굳이 이 세 가지 조건을 단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마수가 살아있어야 뼈 기생체를 통한 장악을 할 수 있으니 첫 번째 조건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왕 할 거라면 당연히 강한 마수를 부하로 삼는 게 유리했기에 두 번째 조건 역시도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조건 같은 경우에는 필수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이동 수단으로 삼을 거 하늘을 날 수 있으면 더 좋으니 말이다.

그 왜, 탈 것은 날탈이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대충 저쯤이었던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마침 그 조건에 부합하는 마수가 한 마리 근처에 있었다.

아까 전투가 한창 일어나는 와중에 내가 유심히 봐두었던 마수였다.

나는 검은색 판초와 쿠프의 뼈 가면을 쓰고는 레드 라인의 전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수와 마물이 득실대고 폭격이 쏟아져 내리는 장소로 말이다.

[미, 미친! 지금 어딜 가려고요?!]

에스더가 기겁하거나 말거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돕기나 해라."

[···진짜 내가 미쳐.]

쾅─!

콰캉──!!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바로 근처에서 폭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저 정도의 폭격은 뼈 갑옷과 에테르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기에 겁낼 필요는 없었다.

'물론 충격이야 오겠지만······.'

원래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도 치러야 하는 법.

거기다가 조심해야 할 건 비단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격뿐만이 아니었다.

[키에에에에!]

[끼엑, 끼엑!]

마수와 마물들.

이제 전선에 남아있는 마수라고 해봐야 대부분 7급 이하의 오합지졸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마수와 마물들의 흉성은 맨몸의 인간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굳이 싸울 필요 없지.'

나는 그대로 아크의 시선이 닿지 않게 은밀하게 발끝에서 뼈 촉수를 뽑아내서 땅에 박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13분 11초.]

어차피 지금 나는 마수들과 전투를 벌이러 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어그로 해제를 위해서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금 마수 탐색이 시작됐다.

피어오르는 불길 덕분에 아크에서 나를 발견하지는 못할 테지만, 쏟아지는 폭격이 증명하듯이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아까 추락하는 걸 봤는데······.'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서 불꽃에 휩싸인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 사이에서 백색의 비늘로 뒤덮인 마수 한 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3급 네임드 괴수종,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상태는 딱 봐도 좋지 않았다.

몸 곳곳에 난 총알 구멍.

마치 닭털처럼 뽑혀나간 비늘.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

이제 곧 있으면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숨이 끊어질 거라는 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르르르······.]

내가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에게 다가서자, 알카사르가 적의를 내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발밑에서 뻗어낸 뼈 촉수를 지하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아크에서는 절대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말이다.

스스스───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강철화'가 발동합니다.]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나는 그대로 알카사르의 발밑 공간에 공동을 만들었다.

혹시 모를 아크의 시선을 피해서 알카사르를 지하로 빼돌리기 위해서였다.

와르르르!

[그오오오······!]

순식간에 땅에 꺼지며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그대로 땅속에 파묻혔다.

'좋아.'

혹시 모를 아크의 의심은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폭격이 이토록 쏟아진 장소다.

당연히 지반이 힘을 잃고 무너지는 것 정도야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스륵, 스스슥──

알카사르를 땅속으로 빠뜨린 뒤, 나 역시도 이내 함께 땅밑으로 들어간 뒤에 알카사르의 몸을 뼈 촉수로 엮은 뒤에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가 제법 멀긴 했지만, 가고자 한다면 못 갈 것도 없었다.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땅속에서의 이동이 시작됐다.

예상했던 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후아······."

그렇게 폭격과 마수들의 공격을 피하며 노아 근처까지 알카사르를 끌고 간 후에야 나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만약 에스더와 뼈 갑옷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런 미친 짓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터였다.

'대충 이쯤이면 되겠지.'

나는 알카사르를 적당한 곳에 옮겨두고는 뼈 기생체의 거처로 삼을 마수의 심장을 찾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적당한 게 근처에 있기도 했고 말이다.

3급 네임드 괴수종, 긴 목의 아드몬.

조금 전에 내가 막타를 쳤던 마수였다.

나는 땅속으로 들어간 채로 긴 목의 아드몬의 시체에 접근했다.

팔자에도 없던 굴착 공사에 전신의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전투가 마무리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기에 쉴 틈은 없었다.

'이쯤이었던가.'

마침내 긴 목의 아드몬의 시체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엥켈렌스의 창을 뽑아 들었다.

다행히 아드몬이 쓰러진 자세가 배를 밑으로 깔고서 쓰러진 자세였던 터라, 땅 밑에서 아드몬의 배를 가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걱, 스걱, 스걱······.

아무리 3급 네임드 마수의 가죽이라고 할지라도 강철화와 경질화까지 적용된 엥켈렌스의 창에는 어림도 없이 잘려나갔다.

그렇게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까지 손에 넣은 나는 다시금 땅을 파고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대충 필요한 재료들은 다 얻었나.'

뼈 기생체.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

살아있는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

내가 이동 수단을 손에 넣기 위해서 모은 아주 고급진 재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웨이브를 완전히 끝내는 것뿐.

다시금 노아와의 경계로 돌아온 나는 아크의 시선이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지상으로 나온 뒤에 NOA-8 중기관포를 다잡았다.

슬슬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지이이잉······.

10개의 총신이 회전을 시작하며,

불꽃과 굉음이 뿜어졌다.

*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

타들어가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

마침내, 세 번째 웨이브가 끝났다.

[Red-03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였습니다!]

[공적치가 누적됩니다.]

[+31,411 공적치]

[전장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공적치가 추가로 적립됩니다.]

[+5,000 공적치]

[현재 공적치 : 37,551]

'호오.'

보통 세 번째 웨이브에서 아무리 활약해봤자 얻을 수 있는 공적치는 2천 이하다.

물론 나 같은 경우에는 조금 특이 케이스긴 해도, 바로 직전의 두 번째 웨이브에서 내가 얻었던 공적치가 모두 합쳐서 약 1만 5천 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2배를 훌쩍 넘는 성과였다.

'역시 중화기가 좋긴 해.'

NOA-8 중기관포와 TITAN-17 대마수 로켓.

거기에 더해서 A-985 폭발탄까지 더해지자 내가 지닌 화력은 이전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중화기 같은 고정식 병기는 스테이지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사용하기 어려워지긴 할 테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고정식 병기가 사용하기 어려워질 뿐이지, 나중에 가서는 그냥 중화기 자체를 들고 다니면서 싸우게 될 테니 말이다.

'뭐, 그건 그거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묻혀 있는 곳을 향해서.

탈 것을 만들러 갈 때다.

* * *

웨이브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크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아직도 사상자 수습 및 전선 뒷정리, 그리고 장비 정비 같은 뒷정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신없는 상황인 만큼 이모샤 중위는 바놀 중령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의아함을 느낄 수 없게 없었다.

이런 바쁜 시기에 난데없는 호출이라니?

하지만 곧 바놀 중령을 마주한 이모샤 중위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알 수밖에 없었다.

"···조사팀, 말입니까?"

"그래. 자네가 그 팀의 인솔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는데. 현재 그 일은 기밀 사항이고,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적임자는 자네뿐이야."

바놀 중령의 용건은 간단했다.

바로 얼마 전에 아크의 서쪽에서 있었던 지역의 주인급 마수와 이제는 변절자 폰으로 명명된 스컬 턴코트의 흔적에 대해서 조사하라는 임무였다.

다만, 역시나 아크의 고질적인 인력난이 문제였다.

"······훈련병들만으로 말입니까?"

"그래. 듣자 하니 이번 기수 훈련병들이 아주 뛰어 나다던데, 이 참에 실전 경험을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차출 권한은 부여하지. 원하는 훈련병들로 데려가도록."

말이야 허울 좋았으나, 최악의 경우 피해를 훈련병들을 잃는 것 정도로 끝내겠다는 이야기였다.

아크의 병사는 귀중하다.

하물며 여러 번의 전쟁을 거치며 단련되고 숙련된 병사일수록 더욱더 그러하다.

아크를 지켜야 할 그런 귀중한 병사들을 외부 임무 같은 위험한 곳에 보냈다가 자칫 잃기라도 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놀 중령의 판단은 어찌 보면 지휘관으로서 당연히 내려야 할 판단인 셈이었다.

이모샤 중위는 턱밑까지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으나, 애써 참아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훈련병들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아크 바깥이 어떤 곳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의미 없는 죽음만 될 겁니다."

"물론 자네한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건 아니야. 나를 너무 나쁜 상관으로 만들지 말게."

바놀 중령의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덧붙였다.

"이번 임무에 용병을 고용하도록. 유능하고, 아크 바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칼 마커스."

그와 함께 이모샤 중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설마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자에게 이번 임무를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하게."

사실 바놀 중령이 칼 마커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그 이름이 여기에서 나올 줄은 몰랐을 뿐이지.

"···승낙하지 않는다면요?"

"그럴 일은 없어. 이번 임무에 대한 거래 조건으로 내걸 건, 아크의 출입 권한이니까."

"······예?"

이모샤 중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세 번째 웨이브 (5) > 끝

"······알겠습니다."

이모샤 중위가 평소보다 거칠게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그녀가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이를 바라보던 바놀 중령은 그저 애꿎은 시가만 태울 뿐이었다.

칼 마커스는 이번 전투, 아니 어쩌면 지난번 전투에서부터 크게 활약했다.

아크의 입장에서는 은인인 셈.

이모샤 중위로서는 그런 은인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바놀 중령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가 만무했다.

삐빅-

그렇게 바놀 중령이 피우던 시가가 어느덧 반쯤 타들었을 때쯤, 바놀 중령의 책상 위에 놓인 전용 회선이 울렸다.

바놀 중령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버튼을 눌렀다.

"보고하라."

["1차 조사 결과 보고드리겠습니다. 예상하셨던 대로 크로노스 잔당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다만, 칼 마커스와의 공조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영산 노아 쪽으로 보급을 진행한 흔적 역시도 없었습니다."]

"그런가."

바놀 중령이 품은 의심은 간단했다.

이번 전투에서 칼 마커스로 추정되는 인원의 활약은 엄청났다.

그 덕분에 레드 라인의 서쪽 전선 자체가 한결 숨통이 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제는, 그 활약이 보통의 상식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는 점이다.

NOA-8 중기관포의 분당 탄 소모량은 1만 발이 넘는다.

하지만 병참 장교 게드윈의 보고에 따르면 칼 마커스가 지닌 탄은 기껏해야 110발이 전부.

NOA-8 중기관포의 연사력을 생각한다면 1초도 채 쏘지 못하는 총알인 셈이다.

거기에 더해서 TITAN-17 대마수 로켓은 또 어떠한가?

이 역시도 칼 마커스가 지닌 17형 탄두는 고작 2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작 확인된 발사 횟수만 해도 서른 발은 거뜬히 넘는다.

즉, 이 모든 조건을 생각했을 때 칼 마커스는 다른 곳에서 탄을 보급받거나 구매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아니면 자체적인 공정을 통해서 총알을 만들어 내기라도 했든가.

사실상 후자의 가능성은 불가능하다는 걸 생각했을 때, 칼 마커스가 뿜어내는 화력을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다른 세력과의 공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바놀 중령은 복잡한 심경 속에서 말했다.

"임무에 속행하라."

["알겠습니다."]

연락이 끊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정찰용 드론이라도 사용해서 노아에 있을 칼 마커스를 감시하고 싶었지만, 영산 노아는 특유의 에테르 파동으로 인해서 드론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사람이 찾아가는 방법뿐.

칼 마커스는 아크의 적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게 아크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던가?

정답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정답을 알 수 있었다면 그에 따라서 곧장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칼 마커스를 죽이든지,

혹은 아크에 받아들이든지.

바놀 중령이 이 문제에 대해서 평소답지 않게 신중하게 접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바놀 중령이 보기에 칼 마커스라는 인물은 아크에 위협이 되는 동시에 영웅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치이이익······.

짙게 타오른 시가의 재가 떨어졌다.

* * *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묻혀 있는 장소로 가기에 앞서, 나는 은신처에 잠시 들렀다.

뼈 기생체를 가축으로 만들 55형 진통제를 챙기러 가기 위해서였다.

이걸 사용하고 나면 남은 55형 진통제는 고작 한 개.

물론 병참 장교 게드윈과의 거래 루트가 뚫린 지금의 상황에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보충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뼈 기생체를 더 늘릴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쓸모가 많은 물건이니까.'

뼈 기생체는 분명히 유용한 마물이지만, 그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 통제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성장 효율도 굉장히 안 좋아진다.

한두 마리 정도야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를 먹여가며 키워도, 그 이상으로 숫자가 일어나게 되면 결국 성장에 발목을 붙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어중간하게 숫자만 늘려봤자 의미 없어. 확실하게 필요한 것들만 집중해서 키운다.'

그게 바로 뼈 갑옷과 이번에 만들 이동 수단이었다.

'그러면······.'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을 꺼낸 뒤에 품속에서 뼈 기생체를 가둔 뼈 공을 꺼냈다.

퉁! 퉁퉁!

뼈 기생체가 안쪽에서 연신 공을 두들겼으나, 숙주를 잃은 녀석이 무려 뼈 갑옷이 만들어낸 뼈 공을 부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내가 뼈 공을 열기 무섭게, 그 속에 있던 뼈 기생체가 펄쩍 튀어 올랐다.

[기깃! 키기깃!]

물론 내가 그걸 그냥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비록 약해진 녀석이긴 해도 멀리 도망가게 내버려 두면 잡기 귀찮을 테니 말이다.

"잡아."

[···아주 나한테 다 시키지.]

"딱히 너한테 시킨 건 아닌데."

그 말을 증명하듯이 에스더가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테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아.]

[잡았다······.]

그대로 허공에 붙들린 뼈 기생체.

그만큼 내 에테르 감응력이 많이 성장했다는 뜻이었다.

[···치잇.]

에스더는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물론 내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저러다가 말 테니까.

나는 허공에 붙들린 뼈 기생체를 뒤로한 채로 가장 먼저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에 55형 진통제를 주사했다.

찌이익······.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55형 진통제를 머금은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의 색이 변했다.

예전에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곧이어서 나는 허공에 붙들린 뼈 기생체의 앞에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을 들이밀었다.

[기깃, 기기깃······.]

본래 뼈 기생체가 장악하고 있던 스컬 센티피드의 등급은 7급.

하지만 지금 긴 목의 아드몬의 등급은 무려 3급에 해당한다.

당연히 보다 강한 숙주를 원하는 뼈 기생체의 본능 상,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을 터.

뼈 기생체에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기깃, 기이이잇!]

뼈 기생체의 촉수가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에 달라붙었다.

스스스!

이내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으로 뼈 기생체의 몸이 빨려 들어가듯이 달라붙었다.

그와 함께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며 뼈 기생체가 괴성을 내질렀다.

[끼게게겟!!]

──────────────

[뼈 기생체(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 [★★★★★★★(7성)]

3급 네임드 괴수종,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을 숙주로 삼은 뼈 기생체.

현재 55형 진통제로 인해서 마물로서의 본능을 잃고서 가축화되었다.

특정 에너지원에 연결 시, 뼈 기생체와 긴 목의 아드몬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결과는 성공이었다.

'좋아.'

나는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을 숙주로 삼은 뼈 기생체를 들고서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묻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조금 되긴 했지만, 상관없겠지.'

아무리 생매장된 상태라지만, 무려 3급 네임드 마수쯤 되는 녀석이 숨이 막혀서 죽었을 리는 없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쯤이었지.'

이윽고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묻혀 있는 포인트에 도착한 나는 뼈 갑옷에게 땅을 팔 걸 명령했다.

[기깃!]

스스스───!

과연 뼈 갑옷답게 굴착 공사는 금세 끝이 났다.

[키엑! 키에엑!]

오랜만에 빛을 본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괴성을 내질렀다.

예상했던 대로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는 거의 다 죽어가고 있긴 했어도 아직 숨을 붙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뼈 갑옷에서 나온 뼈 촉수들이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키엑! 키에엑!]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뼈 기생체를 갈라진 알카사르의 배 안으로 집어 넣었다.

이제, 남은 건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몸속으로 들어간 뼈 기생체가 알아서 할 터였다.

[키엑, 키에에에엑!]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발버둥쳤다.

하지만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을 숙주로 삼은 뼈 기생체를 당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키에에에엑······.]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전신에서 뼈 촉수들이 울긋불긋 솟아났다.

뼈 기생체가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전신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푸슉! 푹! 푹!

꾸득, 꾸드득······!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고, 형태가 변해간다.

자랑으로 여겼던 하얀 비늘들 역시도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자라난 뼈 촉수들이 비늘과 유사한 형태로 바뀐 뒤에 자리를 대신했다.

[키엑! 키에엑!]

[기깃, 기기깃!]

보편적으로 뼈 기생체가 마수의 신체를 장악해서 변이한 개체를 스컬 센티피드라고 부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뼈 기생체가 마수에 바로 기생하는 형태가 아니라, 이미 다른 마수의 심장에 기생한 뒤에 신체를 장악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즉, 이제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는 단순히 뼈 기생체를 품은 마물이 아니라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키이이이······.]

이윽고 변이가 완료된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전신에서 뼈 촉수들이 마치 갑옷처럼 일어났다.

흉포하게 흐르는 기세.

이런 형태의 마물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탄생하지 않기에, 당연히 공식적으로 정해진 이름 역시도 없었다.

[기깃, 기기깃······.]

마물이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숙주를 장악한 뼈 기생체가 가축화된 상태였기에, 한때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였던 마물이 마치 강아지처럼 나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기기깃······.]

"그래, 그래."

최소 2급 이상의 마물.

만약 내가 무방비로 있었다면 단번에 나를 씹어삼킬 수 있는 마물이 마치 강아지처럼 얼굴을 들이대는 모습은 굉장히 묘했다.

그렇게 탄생한 이름 없는 마물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역시. 필요하겠어.'

이로써 내가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는 총 두 마리가 되었다.

즉, 언제까지고 뼈 갑옷을 부를 때 뼈 기생체라고 칭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한쪽에는 본체의 이름인 알카사르라는 이름이 있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뼈 기생체가 몸을 장악한 껍데기의 이름이지 본질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호칭에 대한 건 유사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기에 나는 두 마리의 뼈 기생체에게 각각 이름을 지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안 그래도 매번 뼈 기생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했지.'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게임을 할 때 캐릭터 생성창에서만 한 시간은 넘게 고민을 하는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곳에 있는 다른 이에게 의견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뭐 좋은 거 있어?"

그제야 이제껏 침묵하던 에스더가 뾰로통한 입술을 내밀었다.

[혹시 저한테 물어본 거 아니죠? 그렇겠지. 친구들도 많던데 왜 나한테 물어보겠어.]

아무래도 에스더는 아까의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단히 삐친 상태였기에 의견을 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말해보지."

[됐다니까요.]

"정말로 흥미 없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기회인데."

그제야 에스더는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뼈돌이랑 뼈순이?]

"기각."

[그러면 튼튼이랑 쌩쌩이는요?]

"내가 알아서 짓지."

귀신한테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아, 왜요! 귀엽기만 한데.]

"귀여운 게 다 죽었나보군."

아니, 애초에 그 괴상한 센스는 둘째치고 이 마물들에게 귀여운 이름을 붙이려는 태도부터가 글러먹었다.

[그러는 주인님은 뭐로 지을 건데요?]

"그야······."

< 조사팀 > 끝

"알파랑 베타?"

[···진심으로 하는 소리?]

"이게 어때서."

[아니, 하······.]

에스더가 진심으로 경악했다는 듯이 뜨악한 표정을 짓자 어째 조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뼈일이랑 뼈둘이?"

[뼈돌이랑 뼈순이는 싫다면서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진심으로 하는 말씀은 아니시죠?]

왠지 오기가 생긴다.

"그러면 스노우 앤 화이트?"

[그게 뭐예요. 눈이랑 하양이도 아니고. 아, 하양이는 좀 귀엽네.]

"···땅이랑 하늘이?"

[지금 대충 무슨 의도로 지었는지 알 것 같은데.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으음······.

아니, 근데 알파 베타나 스노우랑 화이트는 좀 괜찮지 않았나?

"···모르겠네."

[그냥 뼈돌이 뼈순이로 하자니까요? 남매 같고 좋구만.]

"기각."

애초에 얘네 둘이 남매도 아닌데 그런 이름은 대체 왜 짓는단 말인가?

'으으음······.'

예상했던 대로 뼈 기생체들의 이름을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중으로 미뤄두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 미뤄봤자 결국 나중에 가서 같은 순간이 올 게 뻔했기에 나는 조금 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곧, 나는 다시금 되는 대로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스컬 이랑 본?"

[주인님 이름이 인간이나 사람이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요?]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에휴······.]

또다시 고민이 이어졌다.

"여름이랑 겨울?"

[어! 전 좋아요. 귀여운 느낌.]

웬일로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문제는 그 이름이 저 마물들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별로인 것 같네."

[아, 왜요!]

에스더가 저렇게 귀엽다는 것에 집착하는 건 순전히 타인을 기만하는 행동 양식이 뼛속까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실은 에스더 본인도 자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터.

요컨대, 에스더의 의견을 청취함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뭐 좋은 거 없나?'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뼈돌이와 뼈순이로 이름이 정해질 것 같았기에, 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야누스와 호루스."

뼈 갑옷이 야누스고, 알카사르의 이름이 호루스다.

[전 별로요.]

"왜?"

[안 귀엽잖아요.]

사실 근본 있는 작명은 아니다.

야누스는 로마 신화의 신이고, 반대로 호루스는 이집트 신화의 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작명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가는 오늘 안에 못 끝낼 것 같았기에 나는 적당히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한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왜 물어봤어요?]

"의견 수렴은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씨알도 안 먹히는 의견 수렴이 왜 중요하냐고요.]

"적어도 뼈일이랑 뼈둘이는 안 했잖아."

[허어.]

에스더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애초에 호흡을 하지 않는 유령종에게 의미 있는 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그런 제스쳐려니 했다.

"그러면······."

내가 뼈 갑옷과 뼈 기생체에게 장악당한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이름은 지금부터 야누스와 호루스다."

['뼈 갑옷(뼈 기생체)'에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뼈 갑옷(뼈 기생체)'의 명칭이 변경됩니다.]

['뼈 갑옷(뼈 기생체)' -> '야누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뼈 기생체)'에게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뼈 기생체)'의 명칭이 변경됩니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뼈 기생체)' -> '호루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뼈 기생체)'를 조련하였습니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뼈 기생체)'가 당신을 따릅니다.]

[가축화된 뼈 기생체들에게 각자 독립된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야누스'와 '호루스'의 충성도가 상승합니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충성도 상승을 의미하듯이 이제 야누스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뼈 갑옷에 있는 뼈 촉수들과 이제는 호루스가 된 전(前)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가 뼈 촉수를 뻗어서 나에게 비볐다.

[기깃!]

[기이잇······.]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 같아서 조금은 귀엽긴 한데, 역시 비주얼이 문제였다.

'내가 남말할 소리는 아닌가.'

어쨌거나 해야 할 일 중 한 가지를 끝냈으니, 이제 남은 건 웨이브 후의 뒷정리였다.

비록 이번에는 레드 라인 전선 앞까지 나서서 싸운 탓에 노아에 마수와 마물 시체들이 별로 없어서 많은 소득을 얻지는 못할 테지만, 그 대신에 공적치를 그만큼 쌓았으니 나쁠 건 없었다.

'일단, 이것부터 먹일까.'

나는 품 속에서 우로보로스의 역린의 일부를 꺼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아끼고 아껴두었던 것이었다.

"먹어."

내가 절반이 남은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내밀자, 호루스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것을 집어 먹었다.

까득, 까드득─!

그와 함께 하얀 빛으로 물들어 있던 호루스의 뼈들이 점차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우로보로스의 역린이 지닌 힘을 흡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깃, 기이이잇······!]

호루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2급 네임드 마수 긴 목의 아드몬의 심장을 품은 뼈 기생체.

마찬가지로 2급 네임드 마수인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의 육체.

거기에 더해서 우로보로스의 역린까지 더해지자 이제 호루스의 힘은 거의 2급 중에서는 최상위에 해당하는 마물로 탄생했다.

[······읏!]

그 존재감이 어찌나 강렬한지, 한때 1급 유령종으로서 군림했던 에스더조차도 잠시 몸을 움찔할 정도였다.

제아무리 에스더가 지금은 힘을 많이 잃은 상태라지만, 그 사실만으로 호루스의 존재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작게 감탄했다.

하얀 비늘의 알카사르는 분류상 용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색의 비늘을 지닌 비룡과 상당히 유사한 외형을 지닌 괴수종이다.

그러나 이제 뼈 기생체에게 장악당하고, 우로보로스의 역린의 힘까지 흡수한 호루스의 외형은 전신에 검은 뼈가 돋아난 작은 본 드래곤 같은 외형이 되었다.

외형만 보면 거의 지역의 주인급 위압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런 걸 만들어서 대체 뭘 하려고요? 밥도 엄청 많이 먹을 것 같은데.]

"너보고 챙기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나와 에스더가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이제 야누스가 된 뼈 갑옷이 칭얼댔다.

[기잇, 기이잇······.]

아무래도 호루스에게만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는 저번에 먹었잖아."

[기깃! 기기깃!]

이제는 대들기까지 한다.

[이래서 자식 둘 키우면 힘든 거예요. 뭘 하나 해줘도 똑같이 해줘야 한다니까?]

"···꼭 키워본 것처럼 얘기하네."

[그걸 꼭 키워봐야 아나요?]

조금 얄밉긴 했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비록 호루스가 탄생하기 전에 야누스가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먹긴 했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었으니까.

"그러면 가볼까."

[어딜요?]

"얘네 밥 구하러."

내가 호루스 앞에 서자, 똑똑하게도 내 의도를 알아들은 호루스가 납작 엎드린 뒤에 등 위에 돋아난 검은 뼈들을 몸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형태를 적당히 조작해서 마치 등받이처럼 만들기까지 했다.

"역시 똑똑해."

[기깃!]

그렇게 검은 뼈들을 발 받침 삼아서 호루스의 등 위에 올라탄 내가 마치 손잡이처럼 달린 검은 뼈 두 개를 잡았다.

"가자."

[기에에엣!]

그와 함께 호루스의 발이 거칠게 땅을 박차고는 거친 날개짓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쿠웅!

하늘로 떠오른 호루스는 이내 검은 뼈로 뒤덮인 날개를 펄럭이더니, 점차 속도를 높여갔다.

펄럭! 펄럭!

시원하다 못해 칼바람 같은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낙엽 한 장만 있어도 피부가 베일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그럼에도 속도를 늦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연······.'

한때 드넓게만 느껴졌던 영산 노아의 풍경에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새삼스레 그 명언이 체감이 됐다.

'역시 탈 것은 날탈이지.'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레드 라인의 전선으로 가서 널려 있는 마수와 마물 시체를 야누스와 호루스의 먹이로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호루스의 존재를 아크에서 포착하게 된다.

당연히 나로서는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기수를 돌렸다.

'지금이라면 하늘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겠지.'

아크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기술력과 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기를 비롯한 폭격기 같은 비행체를 운용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크 바깥의 하늘은, 또 다른 의미로 포식자들이 즐비한 야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크라고 해서 대공망에서 늘 자유롭지만은 못한 게 사실이다.

실제로 아크에서 가장 경계하는 수비 구역 중 하나가 바로 뻥 뚫려 있는 하늘이었다.

'웨이브 도중에 병사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것 역시도 비행종을 비롯한 공중형 마수와 마물들이지.'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대산림이었다.

'평소에는 멀어서 가기 귀찮았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잠깐 들르는 것도 괜찮겠지.'

물론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호루스 정도되는 마물이 대산림에 얼쩡되면, 당연히 숲의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자."

*

대산림에 들어간 나는 마수와 마물 몇 마리를 사냥해서 야누스와 호루스의 먹이로 주었다.

그중에는 예전이었다면 잡는 것만으로도 한참은 고생했을 6급 이상의 마수들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비닐 포대에 쓸모가 있는 온갖 약초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풀들은 물론이고 대산림의 흙들을 담았다.

대충 봐도 어마어마한 양이었지만, 호루스 정도 되는 마물에게 이 정도 무게는 크게 무리도 아니었다.

[음? 그건 왜 가져가려고요?]

"나중에 여유가 되면 노아 안에 농사나 지어볼까 해서."

[···네? 무슨 농사요?]

에스더가 뜨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익히 알려지길, 영산 노아에서는 식물들이 거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들을 채운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비록 내가 이에 대해서 직접 해본 건 아니었지만, 유저 커뮤니티에 있는 몇몇 컨셉 유저들 중 하나가 노아에 농산을 짓는 일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당연히 빈번히 실패했지만, 결국 그는 끈질긴 시도 끝에 영산 노아에서 농사를 짓는 데 성공하게 된다.

'방법이 전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핵심이 대산림의 흙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대산림은 영산 노아와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숲을 이룬 구역이다.

이곳의 흙이라면 영산 노아 내에서도 농사를 짓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농사에 성공하면 지긋지긋한 멀티 칼로리 바나 마수 고기도 안 먹어도 되겠지.'

그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요리에 힘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자, 그러면······.'

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호루스를 타고서 은신처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야누스와 호루스를 이끌고서 영산 노아 내에 있는 마수 및 마물들의 시체를 먹였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되겠지만, 그래도 썩은 시체를 먹이는 것보다는 싱싱한 시체를 먹이는 게 나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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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갑옷(Lv.5)] [야누스] [★★★★★★★★★★(10성)]

아크의 장교용 기본 방호복(Lv.5)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야누스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흡수했으나, 아직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26.6%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이 15%를 돌파하여,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할 수 있다.

6급 네임드 지하종, 땅굴 파는 뮬의 피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 힘을 흡수했다.

땅굴 파는 뮬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5급 네임드 영장종, 돌팔매질의 무그를 흡수했다.

돌팔매질의 무그가 지닌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흡수했다.

우로보로스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3급 네임드 비행종, 하늘 포식자 샤크돈을 흡수했다.

하늘 포식자 샤크돈이 지닌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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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가 레드 라인의 전선에 있는 터라 전부 다 먹어치울 수는 없었지만, 소득은 있었다.

3급 네임드 비행종, 하늘 포식자 샤크돈의 시체.

지금까지 야누스가 먹어 치웠던 것들 중에서 엥켈렌스의 송곳니와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최상위의 소재였다.

그 덕분에 뼈 갑옷의 힘이 한결 더 강해지고,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역시도 크게 올랐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30%를 찍을 수 있겠어.'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이 15%쯤 되었을 때 엥켈렌스의 창 소환 능력을 얻었으니, 아마 30%가 되면 한 가지 능력을 더 얻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호루스 역시도 더 성장했지.'

안 그래도 2급 중에서 최상위에 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던 호루스는 영산 노아 내에 있던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를 먹어치우며 이제 거의 1급에 준할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진짜 1급 마물에 비하면 여전히 약간 손색이 있겠지만, 그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비록 웨이브 때는 아크의 시선이 신경 쓰이므로 온전히 활용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 외에는 거의 완벽한 이동수단이었다.

'1급에 준하는 마물 정도면, 밖에서 타고다니더라도 웬만한 마수나 마물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지.'

즉, 이는 지금까지 이동과 시간의 제약 때문에 가지 못했던 곳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전에··· 게드윈부터 만나볼까.'

나는 호루스를 은신처 근처에 내버려 두고는 도보로 레드 라인의 전선을 가로 질렀다.

기껏 이동수단을 얻어 놓고 다시 걷게 되는 게 조금 불만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루스는 아크에 보이기에는 여러모로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으니까.

'혹시나 내가 스컬 턴코트로 활동할 때 호루스를 타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레드 라인 게이트에 도착한 나는 게드윈을 호출했다.

이미 내 신원이 아크에 알려져 있던 터라 어려울 건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호출한 건 병참 장교 게드윈이었건만, 어째서인지 게드윈의 옆에 동행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다만,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붉은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드 라인의 Red-17 게이트 관리자, 이모샤 중위.

바로 그녀였다.

< 조사팀 (2) > 끝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게드윈에게 시선을 돌리자, 게드윈이 곤란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

"그건 제가 답해드리겠습니다."

이모샤 중위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웨이브 때 격렬한 전투를 겪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칼 마커스,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제안?"

"아크 서쪽 평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조사하는 팀에 용병으로서 합류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압니다. 그에 따른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하겠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였다면 이 시기에는 이런 서브 시나리오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짐작가는 건 있었다.

"서쪽 평원?"

"예."

"정확히 어떤 일이지?"

"···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만약 들으신다면, 반드시 받아들이셔야만 합니다."

"나보고 어떤 일인지 듣지도 않고 판단을 하라는 건가? 그러면 듣지 않고 거절하지."

"······아크의 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을 마무리해 주신다면 추후 아크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오호.

이 정도까지 지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내민 패를 넙죽 받을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아크 출입 권한까지 내걸 정도라면, 상황의 다급함 이상으로 무언가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아크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아나?"

"예?"

"이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없다면, 거절한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도록."

사실, 이모샤 중위가 말하는 서쪽 평원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야 뻔했다.

지역의 주인급 마수, 우로보로스의 등장.

우로보로스의 이동 속도를 생각한다면 아크에서 그렇게까지 먼 거리도 아니었기에, 아크에서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모샤 중위의 제안을 거절한 건 대충 두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는 그 속내가 너무 뻔히 보여서.

두 번째는 내 몸 값을 올리기 위해서.

아크에서 정말로 나를 고용하고 싶다면, 기존에 준비했던 것 이상의 몸값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정도로 말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모샤 중위가 잠시 자리를 피했다.

이에 대해서 상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인 듯했다.

"거래 얘기나 하지."

"아, 예!"

이모샤 중위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게드윈과 이번에 얻은 공적치를 사용할 거래 품목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허어······."

현재 내가 지닌 공적치는 37,551.

저번에 내가 두 번의 웨이브를 치르며 얻었던 공적치가 모두 합해서 약 3만 2천 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고작 한 번의 웨이브로 앞선 두 번의 웨이브를 추월한 것이다.

당연히 게드윈의 표정에는 경악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군요. 아크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아크의 피해가 적었습니다."

"거래 얘기나 해보지."

"아, 예."

3만 7천은 분명히 적지 않은 공적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장비를 얻기에는 조금 애매한 수치였다.

그렇기에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공적치를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한 번에 모아서 전술적인 장비를 구매할지, 아니면 당장 필요한 자잘한 물품들을 구매할 것인지.

'어차피 공적치는 웨이브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쌓이게 되어 있어.'

무엇보다도 전술용 장비는 지금 가진 것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 내가 지닌 장비들의 수준은 오렌지 라인은 물론이고 옐로우 라인에서도 능히 활약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각종 농사용품, 멀티 칼로리 바, 소금 후추와 같은 기본적인 조미료, 자화자찬을 위한 고기 등등······.

나는 대략 1만 공적치에 해당하는 일상용품들을 게드윈에게 주문했다.

지금까지 내가 게드윈에게 요구했던, 전술용 장비나 생존에 필수적인 용품들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주문이었다.

아무래도 당장 급한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보니, 이제는 삶의 질을 올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오늘 품목들은 유난히 특이한 것들이 많군요. 어디 농사라도 지으십니까?"

"그래볼까 생각 중이다."

"···예? 어디서요?"

"어디긴."

내가 잠시 시선을 노아 쪽으로 옮기자, 게드윈은 멀뚱멀뚱 내 얼굴만 바라보다가 이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노아에서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노아에서는 농사를 짓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애초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양을 구하는 것도······."

이럴 때는 늘 사용하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영혼의 목소리가 가능할 것 같다고 일러주더군."

"아··· 예."

게드윈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둘 테니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게드윈이 내가 요구한 물자들을 가지러 가기 위해서 돌아간 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모샤 중위가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별로."

"···이번 임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듣고 나서 원치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들어보지."

아무래도 바놀 중령이 꽤나 양보를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며칠 전, 아크 기준 서쪽 방향으로 수백km 떨어진 지점에서 이상 현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아크에서는 긴급히 정찰용 드론을 파견했고, '지역의 주인'급으로 파악되는 초대형 마수를 감지했습니다. 여기 사진 자료입니다."

이모샤 중위가 손목에 있는 디바이스를 조작하자, 이내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

예상했던 대로 아크가 긴급히 조사팀을 파견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우로보로스 때문이었다.

[아는 얼굴이네요?]

에스더가 키득 웃었다.

'누구 때문인데.'

[에이, 엄밀히 말하면 주인님 탓도 절반 정도는 있죠. 일종의 5:5 쌍방 과실이라고 할까요?]

'시끄럽다.'

그렇게 이모샤 중위가 내민 홀로그램 화면을 보고 있던 나는 이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저 장면은······.'

홀로그램 속 화면에서 우로보로스가 발버둥을 치고 있다.

즉, 저 장면은 나와 우로보로스가 엉켜서 싸우고 있을 때의 장면이었다.

'역시 걸렸나.'

비록 이모샤 중위가 나에게 내민 홀로그램 속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 장면이 촬영된 사진에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상했다.

즉, 아크에서 내가 우로보로스와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우로보로스와 싸울 때 내가 쿠프의 뼈 가면을 비롯한 검은 판초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나는 아크에 스컬 턴코트로서 알려져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광경까지 보였으니 아크에서 어떻게 나올지야 뻔했다.

'이 정도면 이름까지 받았겠군.'

아마 지금 시기라면 남아 있는 이름이··· 폰이었던가?

변절자 폰.

아마 그게 아크에서 스컬 턴코트인 내 모습을 부르는 이름일 가능성이 컸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건 현재 이모샤 중위가 변절자 폰에 대한 사실을 나에게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가능성은 있었다.

아크에서는 스컬 턴코트로 판단하고 있겠지만, 사실 스컬 나이트와 스컬 턴코트는 거의 같은 존재였으니까.

사실은 스컬 나이트인 존재가 이리저리 활동하며 아크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면 순수하게 내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든지.'

이 역시도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바놀 중령의 특성상, 이런 위험 임무에 귀중한 병사들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외부인의 손을 빌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지 간에 확실한 건 아직 아크에서 내 정체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번거롭게 임무 제안이 아니라 레드 라인 직속 수비대를 출동시켰을 것이다.

아크 시민권도 없는 외부인을 심문하는 건 저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임무지?"

"초대형 마수가 출현했던 해당 지점으로 가서 마수의 동태를 살피고, 아크에 위협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임무입니다."

"무척이나 위험하겠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칼 마커스."

본래였다면 넙죽 승낙했을 이야기였다.

뭐니뭐니 해도 이런 서브 시나리오는 쏠쏠한 보상을 가져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거기다가 그곳에서 혹시 나에 대한 흔적을 발견하면 은폐하기도 해야 하고.'

하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흘러가서야 재미 없다.

무엇보다도 협상의 기본은 일단 한 발 빼고 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크에서의 지원은?"

"···제가 인솔에 나서고, 레드 라인 소속 병사 4명이 함께할 겁니다."

"어떤 병사들이지?"

"···이번 기수의 훈련병들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바놀 중령은 이번 조사팀을 거의 버리는 패로 쓰려는 듯했다.

이 사실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거절한다. 정예병들과 가도 모자랄 판에 훈련병들? 우습군."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칼 마커스. 재고해주십시오."

이모샤 중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레드 라인의 게이트 관리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한낱 외부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흐음.'

이쯤에서 적당히 받아들이고 이모샤 중위와의 친밀도를 높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내 기분이 조금 나빴다.

"그렇다면 대가가 부족하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크의 명예 시민권. 그 정도라면 생각해보지."

"······명예 시민권.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크의 명예 시민권.

이는 단순 아크 출입 권한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권리였다.

일반적인 시민권과 명예 시민권의 가장 큰 차이는 아크의 시민으로서 져야하는 의무와 권리다.

아크의 일반적인 시민은 권리가 있지만, 그에 따른 의무 역시도 존재한다.

아크의 병사로서 근무하는 게 가장 흔한 사례 중 하나다.

그러나 명예 시민은 다르다.

명예 시민은 아크 외부의 조력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특권으로서, 아크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있지만 반대로 의무는 없다.

아크가 주는 혜택은 온전히 누릴 수 있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이다.

'물론 명예 시민권을 얻기 위한 과정 자체가 책임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특권이 주어지는 만큼, 아크의 명예 시민권은 아무에게나 발급되지 않는다.

아크의 외부 조력자 중에서도 극소수, 아크에 확실히 우호적이고 동맹 이상의 관계를 지닌 주요 인물에게만 부여된다.

내가 요구한 명예 시민권은 바로 이러한 권한이였다.

"···제 권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너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아크에 요구한 것이지."

"······."

이모샤 중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이모샤 중위가 다시금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게드윈과 함께 나왔다.

아무래도 타이밍이 묘하게 맞물린 모양이었다.

"요구하신 것들입니다."

"확실하군."

"제가 누굽니까? 하하."

그렇게 내가 게드윈에게 받아든 물자들을 끈으로 묶으며 챙기고 있을 때, 함께 나온 이모샤 중위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결단을 내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칼 마커스,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 의외로군."

"출발은 내일 아침입니다. 그때까지 이곳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알았다. 이동 수단은 어떻지?"

"도보입니다."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도 지원을 안 해준다라······.

어지간히도 대우가 별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투정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이쯤에서 수긍했다.

"알겠다. 내일 보지."

"기본적인 식량과 야전 물자는 저희가 챙길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나는 게드윈과 이모샤를 뒤로한 채로 은신처로 향했다.

할 일이 많았다.

*

은신처로 돌아간 나는 게드윈에게 받은 물자들을 정리하고는 곧장 채비를 했다.

내일 아침부터 출발하려면 아무래도 해둬야 할 일이 많아서였다.

[내일 정말로 가려고요?]

"그래."

[아크에서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던데, 혹시라도 들키면 굉장히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보상이 확실하니까."

[흐음···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주인님 머릿속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보면 안 될까요?]

"실험탄을 맞아 본 지 조금 오래됐나 보군."

[아하하··· 농담이었죠, 당연히. 조크도 모르나봐.]

그리고······.

마침내 다음날이 됐다.

"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기기깃······.]

나는 호루스는 은신처에 내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기껏 호루스를 손에 넣고도 쓰지 못한다는 게 참 안타까웠지만, 호루스는 나에게 있어서 비장의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아크에 노출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집 잘 보고 있어. 뼈순아.]

[기이익!]

호루스가 괴성을 내지르며 항거했다.

물론 에스더는 그마저도 귀엽다는 듯이 키득 웃었다.

그렇게 내가 어제 갔었던 레드 라인의 Red-1 게이트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칼!"

< 조사팀 (3) > 끝

나는 나를 부른 사내를 알고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무식한 근육과 문신.

닦으면 빛이 날 것 같은 민머리.

특유의 호탕한 웃음까지.

"쿠릴타."

"그래! 이번에는 안 잊어버리고 잘 기억하고 있군! 와하하!"

과연 아크답다고 해야 할지······.

훈련병을 차출한다고 했을 때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 쿠릴타가 나왔다.

"보고 싶었다! 형제여."

전신이 문신으로 뒤덮인 흉악한 근육 대머리가 나를 향해서 덮쳐왔다.

땀내 나는 사내 자식과 포옹을 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나는 살며시 피하는 것으로 재회의 인사를 대신했다.

"···안 본 사이에 조금 부끄러움이 많아진 것 같군, 형제."

"오랜만이다, 쿠릴타."

아크의 속내가 뻔히 보이는 인원 차출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안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침 잘 됐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쿠릴타와는 언젠가 한 번 만나려고 했었다.

일전에 에스더가 말했던 칼 마커스에 대해서 알아볼 게 있어서였다.

'지금은 보는 눈들이 많으니··· 나중에 시간날 때 물어봐야겠어.'

그 말마따나 익숙한 얼굴들은 쿠릴타뿐만이 아니었다.

"오셨군요."

인솔자로 나선 이모샤 중위.

"······."

힐데가르트.

"흥."

드미트리.

"이번 임무에 함께 한다는 용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클린트입니다."

클린트.

이하 쿠릴타를 포함한 4명.

모두 다 내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역시 칼라킨은 없나.'

칼라킨은 지금 시점에서도 아크에서 주목을 하고 있는 훈련병이다.

이런 위험한 임무에 함부로 차출할 리가 만무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아크 측에서는 최악의 경우까지도 상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이번 임무에 실패할 가능성.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여기에 차출된 훈련병들은 하나 같이 치명적인 단점이 있거나, 혹은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이들뿐이었다.

쿠릴타와 드미트리 같은 경우에는 능력은 있어도 병사로서의 자질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테고, 힐데가르트나 클린트 같은 경우에는 큰 단점은 없지만 전반적인 훈련소 성적에서 썩 뛰어난 편이 아니다.

즉, 유사시에 아크로서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인선이었다.

'뭐, 나야 별로 상관없지만.'

아크에서야 이번 임무를 매우 위험한 임무로 여기고 있을 테지만, 나는 이미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쓸데없이 우로보로스를 자극하는 일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웬만해서는 위험할 일이 없을 터.

'그나마 신경쓰이는 게 있다면··· 역시 힐데가르트인가.'

힐데가르트는 저번에 실험탄 GHOST-157 회수팀에 참가했던 전적이 있다.

거기까지는 괜찮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지닌 눈이었다.

'통찰안.'

꿰뚫는 자 힐데가르트는 대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물론 회수팀에 참가했을 때나 지금이나 통찰안이 아직 숙련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웬만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에 대해서 꿰뚫어 볼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 나로서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출발하는 건가?"

"예.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거리와 오가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엄청 여유롭지는 않으니까요."

예전에 처음 Red-17 게이트에서 만났던 이모샤 중위와 비교한다면 사뭇 다른 태도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말이다.

"그러면 가지."

조사팀에 대한 별다른 소개나 인사 없이 곧장 이동이 시작됐다.

그런 사소한 것들은 이동하면서 해도 됐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도보를 통한 이동인 만큼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쿠릴타는 이미 알고 있으실 테고··· 이쪽부터 힐데가르트, 드미트리, 클린트입니다."

이모샤 중위의 소개와 함께 훈련병들이 차례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힐데가르트입니다."

힐데가르트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드미트리다."

드미트리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오만해 보였으며,

"클린트입니다."

클린트는 어디 모난 곳 없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의 반응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역시나 힐데가르트의 반응이었다.

'당분간은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최악의 경우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칼 마커스다."

간단한 인사가 끝난 후, 기다렸다는 듯이 쿠릴타가 곁에 다가왔다.

"너라면 살아있을 줄 알았다, 형제."

"마찬가지야."

"하하하! 여전하군."

에스더가 키득 웃었다.

[이야, 아크에 친구도 있었어요? 이건 또 의외네. 성격만 보면 밥도 매일 혼자서 먹었을 것 같은데.]

'시끄럽다.'

[그나저나, 저 대머리 어디서 본 것처럼 생겼는데··· 예전에 주인님 머릿속에서 봤었나?]

'뭐가 기억났나?'

[아뇨? 그냥 왠지 저 대머리가 낯이 익어서요.]

그러면 그렇지······.

에스더의 쓸데없는 쫑알거림을 뒤로한 채로 쿠릴타와의 대화가 계속됐다.

"듣자 하니 노아에서 지냈다던데··· 괜찮나?"

"잠을 설치는 것만 빼면."

"하하! 그것도 여전하군."

역시 쿠릴타는 칼 마커스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둘만 있을 때, 이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어렵겠지.'

지금 조사팀의 진형은 아크의 표준 전술 기동을 택하고 있다.

말소리 정도는 주변의 팀원들에게 얼마든지 들린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번 임무에 대해서 알고 있나?"

"조사 임무라고 들었다. 뭐, 이 몸이 워낙 뛰어나니 맡긴 걸 테지! 하하!"

사실은 버림패로서 차출된 것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그 사실을 말했다가는 훈련병들, 특히 드미트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어떻지?"

"그게 불만이란 말이지."

쿠릴타의 시선이 훈련병들이 있는 곳을 슬쩍 훑었다.

그리고 힐데가르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힐데가르트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걸 들켰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저렇게 늘 남을 힐끔힐끔 쳐다본다니까. 음습한 계집애야."

힐데가르트가 지닌 눈을 생각한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그걸 모르는 타인에게는 이렇게 비춰지는 게 당연했다.

"그런가."

"그리고 저 자식은··· 전사의 명예를 모르는 빌어먹을 놈이지."

쿠릴타의 시선이 특유의 오만한 표정과 건들거림을 무장한 이에게로 향했다.

드미트리의 이야기였다.

"내가 왜 이딴 놈들과······."

드미트리는 다 들리라는 듯이 걷는 내내 투덜거렸다.

실제로 드미트리 올레그는 레드 라인 내에 있는 귀족 가문인 올레그 가문의 출신으로서, 귀족 특유의 선민사상과 우월주의에 찌들어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만큼 능력이나 배경 면에서 출중하긴 하지만··· 인성에 하자가 있지.'

레드 라인의 귀족 출신이나 되는 인물이 버림패로서 차출된 배경 중 하나였다.

아크의 군은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하는 집단이고, 신분과 배경은 분명히 큰 도움이 되지만 그게 능력주의를 가릴 수준은 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저 샌님은··· 흠.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나마 다른 녀석들보다는 조금 낫다. 자기 주제를 알고 있거든."

쿠릴타의 신랄한 말과 함께 옆에서 이를 훔쳐 듣고 있던 클린트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훔쳐 들었다기보다는 쿠릴타가 대놓고 말했다고 보는 게 옳겠지만 말이다.

"······."

쿠릴타의 말마따나 클린트는 신분도, 배경도 평범할뿐더러 지닌 능력 역시도 평범하다.

이러한 특성 탓에 클린트는 더 디펜스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닌 엑스트라 내지 조연으로 분류된다.

그 어떤 특색도 없는 인물.

그게 클린트라는 훈련병이었다.

'이번 조사팀에서 가장 죽을 확률이 높은 인물이기도 하지.'

아크 바깥은 야생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으니,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그건 설령 같은 목적을 지닌 팀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 사실을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굳이 쿠릴타를 통해서 확인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인물들의 특성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이 점을 염려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세 번째 웨이브가 일어나는 동안 아크에서는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이들의 신분이 아직까지도 훈련병인 것부터가 그러했다.

'원래였다면 첫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이번 기수의 훈련병들은 훈련소를 수료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타티아나 벨로프를 살리면서 첫 번째 웨이브의 시기가 앞당겨졌고, 자연스럽게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야 할 훈련병들이 차출이 되며 훈련 일정이 변했다.

그 탓에 무려 세 번째 웨이브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여전히 훈련소를 수료하지 못하게 되었다.

'원인은 많겠지. 원래였다면 입소해야 할 예비 병사들이 웨이브에 휩쓸려서 죽었다든가, 아니면 이번 기수의 훈련병들이 수료해야 할 훈련들을 마치지 못했든가.'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런 변수들이 있었음에도 이들의 변화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이봐요, 주인님.]

에스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나도 느끼고 있던 바였다.

'마수인가.'

[네, 좀 많은데요?]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니··· 숨어야겠군.'

이런 평원 지대에서 어설프게 전투를 일으켰다가 고립되기라도 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나 혼자였다면 땅밑으로 숨든지, 아니면 은신처에 있는 호루스를 호출한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일단 조사팀의 임무 결과에 따라서 나도 걸린 게 많았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정지."

"···무슨 일이죠?"

"마수 무리다. 숨어야 한다."

"이봐, 형제! 지금 겁쟁이처럼 숨자고 말한 건가?"

"아크 바깥에서 초빙한 용병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숨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쥐새끼였나?"

쿠릴타와 드미트리였다.

도저히 안 어울릴 것 같은 둘이, 어째서인지 지금만큼은 의사를 통일한 모습이었다.

"그러면 죽던지."

"······뭐?"

"말리지 않는다. 나는 숨겠다."

어차피 저 꼴통들을 일일이 말로 설득하느니, 차라리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나았다.

그렇게 내가 숨을 준비를 하자, 인솔자이자 조사팀의 지휘관인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그 말을 따르겠습니다."

지휘관이 나서자, 쿠릴타나 드미트리도 더는 말하지 못했다.

나야 외부인일 뿐이지만, 이모샤 중위는 명령권을 지닌 지휘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군기가 빠진 놈들이라 할지라도 훈련병은 훈련병들이다.

아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명령계통인 만큼 항명은 있을 수 없었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쿠릴타와 드미트리는 내키지 않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어디에 숨죠?"

"따라와라."

내가 앞장섰다.

* * *

거침없이 앞서가는 칼 마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뒤따라가던 힐데가르트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저 뒷모습이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뭐지?'

힐데가르트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칼 마커스를 보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몇 번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있었어.'

힐데가르트는 이와 비슷한 현상을 일전에도 겪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지닌 통찰안이 대상을 온전히 읽지 못했던 일.

'실험탄 GHOST-157 회수 임무에서 보았던 스컬 턴코트.'

어째서일까.

칼 마커스의 뒷모습에서 그때 보았던 스컬 턴코트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럴 리가 없지.'

스컬 턴코트는 마물이다.

하지만 칼 마커스는 누가 봐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니, 아크 바깥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평범하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렇다.

'하지만 분명히 그때······.'

힐데가르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일전에 실험탄 GHOST-157의 회수팀이 오파쿰의 늪지대에 고립되었을 때, 누군가가 마수들을 죽이고 회수팀을 구했던 것을.

'우연인가?'

답은 알 수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복잡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발걸음을 옮겼다.

[컹! 컹!]

[크르릉······.]

마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 조사팀 (4) > 끝

마수 무리의 기척이 느껴진 후.

우리는 적당한 곳에 땅을 파고서 누운 후에 그 위에 위장막을 덮었다.

평범한 위장막이 아니라 무려 4레벨의 방호 능력과 은폐 기능을 갖춘 아크제 위장막이었다.

"이쪽으로."

비록 작은 투닥거림이 있긴 했어도 명령이 내려지자 훈련병들은 훈련받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물론 작업을 마친 후에는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이대로 저 쓰레기들한테 깔려 죽으면 아주 우습겠어. 우리 목숨을 저 야만인의 판단에 걸다니······."

"흥, 전사의 명예도 모르는 자가 감히 칼의 의견에 토 달지 마라."

"천한 야만인주제에 감히 명예를 논해?"

쿠릴타와 드미트리가 부딪쳤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훈련소에 있는 내내 부딪쳤던 모양.

처음에는 내 의견에 반발했던 쿠릴타지만,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다들 조용히."

물론 싸움은 거기까지였다.

마수 무리의 기척이 가까워지자 이모샤 중위가 이를 제지한 것이다.

"···알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야만인."

물론 4레벨 위장막에는 60cm 콘크리트에 비견되는 방음 기능도 있었지만, 마수들의 감각은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예리하다.

기껏 잘 숨어놓고 팀원들끼리 투닥거리다가 마수 무리에게 발각되는 것만큼 머저리 같은 일은 없었다.

[온, 다······.]

[킥킥······.]

[왜··· 숨어?]

주변의 에테르가 들썩였다.

하지만 이 에테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중에서 나뿐이었다.

아크 내에서도 에테르 적합자는 그만큼 보기 드문 존재였다.

'아니··· 한명 더 있나.'

흠칫, 흠칫-

저도 모르게 들썩이는 힐데가르트의 어깨.

힐데가르트는 통찰안 덕분인지 에테르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읽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통찰안의 숙련도가 더욱더 오른다면 아마 에테르를 꿰뚫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지금은 아직 어설펐다.

[와요.]

'나도 보고 있다.'

에스더의 경고와 함께 우리가 숨어 있는 지역의 300m 안쪽까지 마수 무리가 다가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숨어 있는 장소는 마수 무리가 평소에 지나다니는 길에서 200m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웬만하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을 터였다.

[크르릉······!]

[캬오오!]

그러는 사이에 마수 무리가 우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우리를 찾고 있는 모양새였다.

'여차하면 엥켈렌스의 영역을 발동해야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팀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엥켈렌스의 영역을 발동하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엥켈렌스의 영역이 발동하며 발생하는 특유의 기파는 숨길 수 없을 터.

웬만큼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크르르······.]

[커헝! 컹!]

무려 수천 마리에 달하는 마수 무리의 이동은 꽤 길었다.

'진행 방향은··· 대충 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는 건가.'

웨이브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의 마수 무리가 이동하는 일은 드물었건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우로보로스와 관련있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말이지.'

물론 최악의 경우 우로보로스와의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겁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나는 우로보로스에게 치명적인 약점 한 가지를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위장막 밑에 엎드려서 있다 보니, 어느덧 마수 무리가 우리를 완전히 지나쳐갔다.

"간 것 같은데?"

쿠릴타의 말에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드미트리가 이죽거렸다.

"흥, 야만인답게 인내심이 없군."

"내가 참을성을 가지는 건 그게 명령이라서다. 명예도 모르는 얼뜨기야."

"뭐? 이 천한 것이······."

"한 판 해볼 테냐?"

마수 무리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다 싶더라니, 쿠릴타와 드미트리가 다시금 부딪쳤다.

힐데가르트와 클린트는 이런 일이 익숙했는지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다들 그만."

어째 이모샤 중위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 있었기에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진짜 악취미네, 우리 주인님.]

'뭘.'

[저 대머리는 주인님 말이라면 껌뻑 죽잖아? 말릴 수 있으면서도 그냥 지켜보는 게 악취미라는 거지.]

'저들과 나는 처한 환경과 신분이 달라.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지.'

[말은 잘해요.]

에스더가 키득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마수 무리의 모습이 작은 점만큼 작아지자, 긴장한 채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클린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간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힐데가르트 역시도 동의했다.

이모샤 중위는 동의를 구하듯이 나를 한번 흘겨본 후,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다시 이동한다."

이모샤 중위의 명령과 함께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우리를 지켜주고 있던 위장막을 벗어났다.

"후아······."

우리는 찜통 같았던 위장막을 벗어나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했다.

위장막의 보호 능력과 은폐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곧 외부와의 차단력 역시도 뛰어나다는 거다.

즉, 그 속에서 여섯 명씩이나 되는 인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부 온도가 확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위장막을 벗어나자 이모샤 중위를 비롯한 훈련병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만큼 위장막 내부의 온도는 아무리 잘 단련된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온도였다.

"역시 칼 너다. 이 정도 더위는 거뜬하다는 건가?"

"뭐. 그렇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레벨 3에 이른 에테르 능력 덕분이었다.

이미 방출의 영역까지 이른 나에게 있어서 체온 조절 정도는 어렵지도 않았다.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때, 쿠릴타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족장님도 그랬지. 아무리 덥거나 추운 날이어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어."

"족장?"

"위대한 영혼의 후예 말이다. 칼, 너처럼."

위대한 영혼의 후예라······.

일전에 쿠릴타에게 칼 마커스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와 같았다.

뜻하지 않게 점차 칼 마커스에 대한 단서를 얻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내가 무어라 질문을 이어가려 할 때, 이모샤 중위가 다가왔다.

"칼 마커스. 이야기 나누시는 와중에 미안합니다만, 계속 가시죠."

"아··· 그러지."

애석하게도 쿠릴타와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었다.

빠듯한 일정상, 지체된 시간만큼 곧장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동한다."

이동이 계속됐다.

솔직히 말해서 이동 속도는 그렇게까지 빠르지는 않았다.

"칼 마커스. 이동 속도를 조금 더 늦춰야할 것 같습니다. 훈련병들이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알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 페이스대로 가고 싶었건만 지금의 훈련병들로서는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물론 이들은 아크에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었지만, 지금의 나와 비교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비교조차 안 되지.'

단순 신체 능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에테르를 통한 강체 능력 발현과 뼈 갑옷의 신체 보조 능력이었다.

훈련병들이 입은 보호복의 레벨은 기껏해야 2레벨.

신체 보조 기능이 없는 레벨이었다.

"역시 칼이군. 나도 질 수 없지. 으랴아!"

"쿠릴타! 페이스 배분을 해라! 지금 우리는 마라톤을 하는 게 아니다!"

"아니! 칼이 하면 나도 한다. 그게 전사라는 거다!"

쿠릴타가 내 뒤에 따라붙었다.

"저 야만인 자식이··· 나는 못할 것 같나?"

그 모습을 본 드미트리가 이를 악물고서 그 뒤를 따랐다.

"흥! 무리하지 마라. 뒤로 가서 하던 대로 차나 마시지 그래?"

"웃기지 마라, 야만인. 네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천한 것이 함부로 내 가능성에 대해서 평하지 마라."

제법 신랄한 단어 선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릴타는 재미있다는 듯이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여유가 잔뜩 느껴지는 미소였다.

'흠.'

예상했던 대로 신체 능력만 본다면 여기 있는 훈련병 중에서는 쿠릴타가 가장 뛰어났다.

'칼라킨 수준까지는 힘들겠지만··· 확실히 병사로서 포텐은 있어.'

이 추세라면 예전에 쿠릴타가 말했듯이 정말로 나에게 도움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뭐,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했지만 말이다.

여정이 이어졌다.

만약 이게 평범한 전술 행군 훈련이었다면 1시간을 걷고 10분씩 휴식을 취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이건 실전이었다.

동시에 목숨이 달린 일이었고.

우리는 3시간씩 걸을 때마다 5분씩만 쉬면서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덧 하늘에서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이동하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슬슬 이쯤에서 야영할 생각인데, 칼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나도 그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 이상 무리해서 이동해봤자 전투시에 대응할 체력을 잃을 뿐이니."

"그렇다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모샤 중위의 손짓과 함께 쿠릴타를 비롯한 훈련병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불은 따로 피우지 않았다.

본래였다면 모닥불은 야영에 위협이 되는 야생 동물을 쫓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는 오히려 마수와 마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조사팀이 가져온 CD형 4레벨 위장 텐트에는 4레벨의 보호 기능은 물론이고 온도 조절 기능도 있었으므로 밤새 추위에 떨 걱정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충의 야영 준비가 끝난 뒤, 이모샤 중위가 말했다.

"불침번은 2시간씩 2인 1조로 서고, 야간용 투시 장비를 착용한 채로 서겠습니다. 제한된 인원수 상 칼 당신과 저도 서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이곳은 아크 바깥.

아무리 웨이브 직후라 한적하다고는 해도 잠깐만 실수해도 목숨이 날아가는 위험지대인 만큼, 불침번은 2인 1조로 물샐 틈 없이 서는 게 상식이었다.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초번은 칼 당신과 힐데가르트가 서는 거로 할까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러지."

불침번은 본래 초번과 말번이 가장 편하다는 걸 생각했을 때, 이모샤 중위의 작은 배려라고 볼 수 있었다.

'이왕이면 쿠릴타와 서는 게 여러모로 나았겠지만··· 어차피 기회가 있겠지.'

내가 요구한다면야 불침번 순서를 바꾸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굳이 내 옆에 힐데가르트를 붙인 이유도 조금 궁금하고.'

어떤 의도가 있어서인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우연인가?

'확인해 보면 알겠지.'

이모샤 중위는 훈련병들에게 근무 순서를 정해주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이모샤 중위 역시도 오늘 하루 동안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던 듯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이모샤 중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곧장 텐트에 들어가서 잘 준비를 했다.

괜히 조사팀의 인솔자랍시고 억지로 버티면서 잠을 설쳐 봐야 팀 전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나와 힐데가르트는 각자 야간용 투시 장비를 착용한 채로 조용히 숨을 죽인 채로 어둠이 깔린 평원을 응시했다.

언제 어디서 마수와 마물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방심은 금물이었다.

삼십 분이 흘렀다.

텐트 안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점차 줄어 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다들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한 시간이 흘렀다.

슬슬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잠자코 있던 에스더가 투덜거렸다.

[하아암··· 지루해.]

'새삼스럽게. 너는 원래 잠도 안 잘 텐데?'

[그거야 제가 자유로울 때의 이야기고요. 지금처럼 멍하니 밤하늘이나 바라보고 있는 게 얼마나 지루한지 알아요? 차라리 귀염둥이들이나 왔으면 좋겠네.]

'혹시라도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실험탄을 한 방 먹여주지.'

[···농담이었어요, 농담. 진짜 농담을 모른다니까.]

그렇게 내가 에스더와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나와 반대편 평원을 경계하고 있던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저어······."

"무슨 일이지?"

"하··· 이게 진짜 이상한 소리라는 거 아는데요······ 아 미치겠네."

"용건만 말해라."

그리고선 한참을 고민하던 힐데가르트의 입술이 조심스레 달싹였다.

"······그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왠지 꼭 어디서 본 것만 같아서······."

"아니. 없다."

"···그런가요?"

"그래."

비록 야간 투시경과 복면에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힐데가르트가 굉장히 당황했다는 게 느껴졌다.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읽었나.'

비록 지금은 확신하지 못한 듯했지만, 만약 힐데가르트 앞에서 조금만 더 빈틈을 보였다가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힐데가르트를 제거하는 방향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데.'

힐데가르트는 황금 기수라 불리는 이번 훈련병 중에서도 특별한 인물 중 하나다.

장차 아크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인 만큼, 차라리 내 정체가 아크에 노출되면 노출됐지 힐데가르트를 제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감출 수 있는 만큼 감출 수밖에 없겠지.'

최악의 경우, 머리라도 한 대 세게 때려서 기억 상실을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물론 이건 농담이었지만.

'에스더.'

[네, 왜요? 나쁜 주인님.]

'힐데가르트에게 빙의해서 기억을 조작할 수 있나?'

[흐으음··· 예전이었으면 가능했을 텐데, 약해진 지금은 안 돼요. 저 계집애, 귀찮은 걸 달고 있거든요.]

'역시 그런가.'

통찰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에스더의 말마따나 에스더가 온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문제될 게 없었겠지만, 에스더는 여전히 힘을 회복 중인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번 임무에서 최대한 힐데가르트의 의심을 피하는 것 정도였다.

막말로 힐데가르트의 기억 상실을 노리거나, 죽이는 건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의 방법이었으니 하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다시금 시간이 흘렀다.

지긋지긋한 불침범도 이제 삼십 분이 채 남지 않았을 때, 문득 어둠 저편에서 어떤 존재감이 느껴졌다.

'에스더.'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요.]

에스더가 경계할 정도로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거대했다.

더욱더 안 좋은 건, 그 존재감이 점차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힐데가르트."

"예?"

"무언가 온다."

"···네?"

그제야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어둠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통찰안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짧고 굵게 외쳤다.

"적습이다!"

그와 함께 텐트 안에서 거의 이십 초도 되지 않아서 이모샤 중위와 쿠릴타가 튀어나오고, 그 뒤로 드미트리와 클린트가 나왔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던 무언가의 존재감이 이곳을 향해 달려든 것 역시도 거의 동시였다.

"경계 태세!"

이모샤 중위가 외쳤다.

그와 함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닥거리던 쿠릴타와 드미트리조차도 진지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끼긱, 끼기긱─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신경을 거스르는 끔찍한 협주곡 같은 소리였다.

[기깃, 기이잇······.]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전신을 갑옷처럼 감싼 뼈 촉수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흉포한 기세.

인간과 유사한 형태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

'저건······.'

나는 저 존재를 알고 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변절자 중 하나.'

변절자 나이트.

아크로부터 이름을 수여 받은 네임드 스컬 턴코트 중 하나가 나타났다.

< 조사팀 (5) > 끝

변절자 나이트.

아크에게 이름을 부여받은 등급 외 네임드 마물, 스컬 턴코트 중 하나.

놈이 이곳에 나타났다.

[긱, 기기긱······.]

어둠 속에서 변절자 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모샤 중위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대원, 산개하라."

나지막한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지금까지 팀에 비협조적이었던 쿠릴타와 드미트리 역시도 군소리 없이 이모샤 중위의 명령에 따랐다.

둘 모두 평소처럼 삐딱하게 굴 때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저건······."

"···망할. 어쩐지 순탄하더라니."

힐데가르트와 클린트가 변절자 나이트를 바라보며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로 변절자 나이트는 위협적인 마물이었다.

'갑작스러운 마수 무리의 이동도 녀석의 출현 때문이었나?'

변절자 나이트는 본래 아크 밖을 배회하는 일종의 랜덤성 필드 네임드 마물이다.

즉, 운이 안 좋다면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마물인 셈.

하지만 나는 이게 단순히 우연 같지만은 않았다.

[기이잇······!]

아니나 다를까,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이제는 야누스가 된 뼈 갑옷이 조용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금 나타난 변절자 나이트에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

변절자 나이트의 출현이 야누스와 관련되어있는 건가?

아니면 우로보로스 때문에?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아낼 시간 역시도 없었다.

"온다!"

이모샤 중위의 경고와 함께 수십 갈래로 뻗어 나온 뼈 촉수들이 우리를 향해서 덮쳐왔다.

쐐새색─!!!

"대응 사격!"

훈련병들이 뒤로 몸을 날리는 동시에 자세를 유지한 채로 변절자 나이트를 향해서 대응 사격을 했다.

쐑!

쐐애액!

한밤중에 이곳으로 마수 무리를 불러들이고 싶은 이는 없었기에 소음 모드가 적용된 소총이 작은 불꽃을 뿜어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깡!

까강!

뼈 촉수에 맞고서 힘없이 튕겨 나가는 총알들.

애석하게도 쏘아진 총알은 변절자 나이트를 공격을 저지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변절자 나이트에게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도 못했다.

"피해!"

"제기랄!"

쐐액!

쐑, 쐑, 쐑!

마치 가시처럼 돋아난 뼈 촉수들이 훈련병들을 덮쳤다.

훈련병들은 간신히 몸을 날려서 뼈 촉수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으나,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나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큭!"

"클린트! 괜찮아?"

"괘, 괜찮아 스쳤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훈련병들이 지닌 장비는 별도의 업그레이드나 커스터 마이징이 되지 않은 순정 상태의 Ark-15 자동변환 소총.

당연히 저 정도의 화력으로는 변절자 나이트씩이나 되는 마물에게 큰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했다.

나는 빠르게 상황을 살폈다.

'조사팀 내에서 나를 제외한다면 변절자 나이트에게 그럴듯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병기는 현재 이모샤 중위가 지닌 DR-404 리볼버 정도.'

그렇기에 이모샤 중위 역시도 변절자 나이트의 빈틈을 내내 노렸지만, 애석하게도 변절자 나이트는 빈틈을 내주지 않았다.

아무리 마물이라 할지라도 변절자 나이트쯤 되는 마물들은 본능적으로 어떤 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깃! 기이잇!]

그러는 사이에도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은 끊이지 않고서 훈련병들을 위협했다.

"으랴아!"

Ark-15 자동변환 소총으로는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한다고 여긴 걸까.

쿠릴타가 허리춤에 있는 스멜 공방제 도끼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와라!"

뼈 촉수와 도끼가 부딪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Ark-15 자동 소총의 총알의 운동 에너지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뼈 촉수들이 사람이 휘두른 도끼질에 막힐 리가 만무했다.

까앙!

쿠릴타의 도끼와 뼈 촉수들이 맞닿은 순간, 그대로 쿠릴타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쿠릴타!"

"저 야만인이······!"

쿠릴타의 육탄전 시도는 무모하기 짝이 없었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짧게 일어난 그 틈 사이에 이모샤 중위가 변절자 나이트의 빈틈을 포착한 것이다.

타앙───!!

DR-404 리볼버의 첫발이 발사됐다.

[기깃!]

하지만 변절자 나이트가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DR-404 리볼버에서 쏘아진 총알은 아슬아슬하게 변절자 나이트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의미는 있었다.

초탄 자체는 빗나갔지만, 그 덕분에 훈련병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전 대원에게 알린다. 지금 나타난 마물은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로 확인되었다. 다들 방심하지 말도록."

그 사이에 이모샤 중위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는지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변절자 나이트의 분류상 등급은 2급 네임드 마물에 해당한다.

하물며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둔한 대형 마수가 아니라 인간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마물이다 보니, 당연히 상대하기는 그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

즉, 현재 조사팀의 전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이야기다.

'할 수 없나.'

웬만하면 나서지 않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도 야누스의 힘은 여기에서 사용할 수는 없어.'

뼈 갑옷, 그러니까 야누스가 지닌 힘은 사실상 당장 내가 지닌 전력 중 절반가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나는 야누스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했고, 실제로 그 기대에 부응하듯이 야누스는 엥켈렌스의 송곳니나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먹으며 엄청나게 성장했다.

만약 여기에서 야누스를 활용해서 싸운다면 2급 네임드 마물인 변절자 나이트와도 충분히 한번 붙어볼 만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이미 아크에서는 스컬 턴코트의 모습을 한 내 존재를 알고 있다.

하물며 이곳에는 통찰안을 지닌 힐데가르트까지 있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조리 희생시키는 건 수지에 맞지 않는 일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나는 야누스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 이번 전투에 임해야 했다.

'이거야 원··· 퀸이랑 룩 떼고 체스 두는 격이군.'

체스 기물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기물 두 개를 떼고 둬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나보다 하수인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강하다고 봐야겠지.'

야누스를 포함한 내가 변절자 나이트와 충분히 붙어볼 만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게 변절자 나이트를 압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급 네임드 마물인 변절자 나이트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본래 지닌 패를 쓸 수 없다면, 쓸 수 있는 다른 패를 쓰면 될 뿐이었으니까.

마침 당장 손안에 있는 패가 썩 나쁘지만도 않았고 말이다.

철컥-

쉴 새 없이 조사팀을 몰아붙이는 변절자 나이트를 향해서 나는 거침없이 총구를 조준했다.

현재 내가 지닌 무기는 훈련병들과 같은 Ark-15 자동변환 소총이지만, 기본적인 업그레이드와 커스터 마이징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물며 사용자의 특성과 총알까지도 차이가 났으니, 같은 총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괴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총구에서 뿜어진 불꽃과 함께 폭발탄이 변절자 나이트를 덮쳤다.

[기깃, 기기깃······!]

변절자 나이트가 괴성을 토해내자, 주변의 에테르가 들썩였다.

[화, 났어.]

[무서워······.]

[싸우··· 자.]

나는 방아쇠를 두어 번 더 당기며 변절자 나이트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든 뒤, 힐데가르트에게 합류했다.

"힐데가르트."

"···예?"

"지금부터 네가 팀의 눈이 된다.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을 어디까지 읽을 수 있지?"

힐데가르트는 내 말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듯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감출 때가 아님을 자각하고는 말했다.

"······두 번. 그 정도요."

"충분해."

두 번.

말 그대로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을 두 수 앞까지는 내다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너는 지금부터 공격은 최대한 배제하고,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을 팀원들에게 전달한다. 할 수 있겠지?"

"네, 네!"

"좋아."

내가 시선을 돌렸다.

"쿠릴타! 클린트와 함께 전위를 책임져라. 목숨 걸고 막을 필요는 없어. 최대한 저지만 해라."

"맡겨만 두라고!"

"드미트리, 너는 후방으로 빠져서 힐데가르트를 엄호해라."

"···이번만이다. 야만인."

"이모샤 중위, 너는 나와 함께 변절자 나이트의 틈을 노리고 유효한 공격을 가한다."

"···알겠습니다."

그 어떤 사전 합의나 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지휘권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이모샤 중위가 무능한 지휘관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이모샤 중위보다 변절자 나이트를 비롯한 각 훈련병이 지닌 능력과 특성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릴타! 뒤로 세 보!"

"응? 세 보?"

"빼!"

힐데가르트가 빼액 소리를 지르고나서야 쿠릴타는 뒤늦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쿠릴타가 있던 바닥에서 뼈 촉수가 솟구쳤다.

쐑!

쐐새색─!

땅 밑에서 솟구치는 뼈 가시들을 피해서 쿠릴타의 몸이 뒤로 거칠게 굴렀다.

"흡!"

비록 온몸이 흙먼지에 끼얹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꼬챙이 신세가 되는 것만큼은 피한 셈이었다.

'저건······.'

나는 변절자 나이트가 사용한 기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능력이었다.

'땅굴 파기까지 지녔나.'

변절자 나이트는 오랜 세월을 아크 바깥에서 살아온 마물이다.

저 정도 능력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뒈질뻔했군."

쿠릴타가 진땀을 빼는 사이에도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전방 30m 반경 내에서 다 피해!"

힐데가르트의 경고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변절자 나이트의 전신에서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듯이 뼈 촉수들이 사방으로 뻗었다.

스스스스─!!

"망할!"

"피해!"

훈련병들이 우왕좌왕하면서도 어찌어찌 공격 범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게 성공했다.

그 범위가 정확히 30m 반경.

그야말로 흉험하기 짝이 없는 무식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큰 공격은 그만큼 큰 빈틈을 낳는 법.'

내가 이모샤 중위에게 신호를 보내자, DR-404 리볼버와 Ark-15 대물 저격총의 총구에서 화염이 번쩍였다.

쾅─!

콰카캉!

'이것도 처먹어.'

나는 NO-13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비록 NO-13 유탄 발사기의 파괴력 자체는 A-985 폭발탄보다 한 수 아래라고 보는 게 옳았지만, 폭발 범위만큼은 그래도 유탄이 한 수 위였기 때문이다.

[기깃, 기기기기······!]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 속에서 검은 실루엣이 일렁거렸다.

비록 보이는 건 실루엣뿐이었지만, 조금 전에 있었던 집중포화로 인해서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뼈 촉수들이 부서져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동··· 족······.]

그 모습을 본 클린트가 경악했다.

"···마물이 말을 해?"

"흥, 겁먹지 마라! 그래 봤자 마물에 불과하다."

"이번만큼은 야만인의 의견에 동의한다."

쿠릴타와 드미트리가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지만 변절자 나이트가 인간의 말을 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는지, 살며시 몸이 굳어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그것과는 별개로, 나로서는 변절자 나이트가 말을 하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 동족 같은 의미심장한 단어를 내뱉는 건 더욱더 그러했다.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끝낸다.'

내가 다시금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은 그 순간.

쐐애애애액───!!!

폭연을 꿰뚫고서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로 뼈 촉수 하나가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이건, 못 피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뻗어온 뼈 촉수는 지금까지와의 뼈 촉수와는 다르다는 걸.

"칼!"

쿠릴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비록 야누스가 대놓고 활약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힘을 못 쓴다는 건 아니었으니까.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강철화'가 발동합니다.]

진즉 보호복 안쪽에 은밀하게 만들어놓았던 뼈 촉수들의 강도가 점차 강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났을 때, 내 심장을 노렸던 변절자 나이트의 뼈 촉수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튕겨 나갔다.

지익-!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뼈 촉수가 아슬아슬하게 내 보호복 겉을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지금이다.'

앞서 말했듯이, 큰 공격 이후에는 늘 큰 빈틈이 찾아온다.

지금 역시도 그러했다.

변절자 나이트가 내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공격을 할 수 있었음에도 지금에서야 꺼내 들었다는 건, 곧 그 공격이 리스크가 있는 공격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에스더.'

[알았어요.]

단번에 내 의사를 읽은 에스더가 내가 지닌 에테르를 비롯한 주변의 에테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누스가 활약할 수 없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공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모여.]

[이쪽, 으로······.]

에테르가 응집된 곳은 철갑탄.

변절자 나이트처럼 단단한 외피를 지닌 마물을 상대하기에는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철컥-

그와 함께 거침없이 방아쇠가 당겨지며, 에테르가 담긴 총알이 변절자 나이트를 향해서 쇄도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와 파괴력을 머금은 채로.

파아아앙───!!!

거칠게 일어난 파공음.

그대로 공기를 찢고서 날아든 철갑탄이 곧이어서 변절자를 꿰뚫었다.

< 조사팀 (6) > 끝

만약 나 혼자였다면 총알에 에테르를 담는 정밀한 조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더는 가능했다.

에스더의 본질은 에테르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는 1급 유령종이었고, 덕분에 날아가는 총알에 에테르를 담는 말도 안 되는 기예가 가능했다.

[영혼을 총알에 실어 쏘아 보냈습니다!]

[놀라운 에테르 활용입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22 -> 23]

칼날 탄환의 효과로 인해서 이미 변절자 나이트의 외갑의 방어력은 많이 낮아져 있던 상태.

그렇기에 에테르를 담은 철갑탄은 단번에 변절자 나이트의 단단한 외갑을 뚫고서 나아갔다.

콰드득───!!!

에테르를 품은 철갑탄이 변절자 나이트의 어깨를 파고든 순간.

[기에에에엣───!]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으윽······!"

"큭!"

훈련병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큼 변절자 나이트의 괴성은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끔찍한 소음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귀를 틀어막고서 저 소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다.

이모샤 중위는 귀를 찢는 듯한 소음 속에서도 표정을 찌푸리며 DR-404 리볼버를 다잡았다.

철컥.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DR-404 리볼버의 방아쇠가 당겨지며, 격렬하게 일어난 불꽃과 함께 총알이 변절자 나이트를 향해서 쇄도했다.

콰앙──!!

총알이 향한 곳은 변절자 나이트의 머리.

비록 몇 겹의 뼈 촉수로 이루어진 단단한 투구를 완전히 뚫지는 못했지만, DR-404 리볼버의 운동 에너지만으로도 변절자 나이트에게 충격을 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변절자 나이트의 머리가 크게 휘청인 것이다.

[게엑, 게게겍!]

"사격!"

안 그래도 방어가 많이 약해진 변절자 나이트다.

DR-404 리볼버에서 쏘아진 총알이 변절자 나이트에게 적중하는 것을 시작으로, 간신히 소총을 다잡은 훈련병들의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콰카카카─!!!

[기에에에에!]

아무리 훈련병들의 공격이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한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무방비하게 포격이 쏟아지면 변절자 나이트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변절자 나이트가 날뛰면 다시금 괴성이 울렸다.

다만, 조금 전과 같은 끔찍한 소음은 아니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발 더.'

나는 탄창을 A-985 폭발탄으로 갈아 끼고는 변절자 나이트의 외갑이 부서진 자리를 조준했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와 폭연, 그리고 거칠게 움직이는 변절자 나이트의 움직임 속에서 그 틈을 조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가능했다.

피웅───!

핑──!

총 세 번의 방아쇠가 연속해서 당겨졌다.

오밀조밀한 시간차로 날아든 A-985 폭발탄이 차례로 변절자 나이트의 빈틈에 적중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카카카캉───!!!

[기에에에······.]

변절자 나이트가 울부짖었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 구슬프게 느껴지는 울음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방아쇠를 멈추지 않았다.

스스스스───

변절자 나이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뼈 촉수들이 변절자 나이트의 몸을 감쌌다.

완전한 방어태세였다.

이는 곧 변절자 나이트가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게 꼭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물론 지금 변절자 나이트와 우리를 비교한다면 저쪽이 고양이에 가까웠지만, 중요한 건 궁지에 몰린 게 쥐든 고양이든 무는 건 똑같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마수와 상대한 경험이 많은 이모샤 중위는 그에 맞는 명령을 내렸다.

"전 대원, 현재 거리를 유지하며 마물을 완전히 제압한다."

다시금 탄이 쏟아졌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어?"

힐데가르트가 의문성을 토한 순간, 나는 변절자 나이트를 감싼 고치에게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목격했다.

'뼈 고치의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저렇게 되면 당연히 방어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을 텐데도 변절자 나이트가 저런 일을 벌인다는 건, 당연히 반격의 징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피, 피해─"

힐데가르트가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스르르륵───

변절자 나이트를 감싼 뼈 고치 사이에서 뼈 촉수의 끄트머리가 살며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뼈 촉수들의 개수가 수십 개를 넘어섰을 때, 그것들이 일제히 뻗어 나왔다.

콰콰카카카카카───!!!

"아, 안 돼!"

힐데가르트가 비명을 내질렀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비명 속에서 나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힐데가르트의 뒷덜미를 잡았다.

"어?"

나는 그대로 힐데가르트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로 뒤로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흡!"

쿠구구구구구!

뼈 촉수와 우리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강체는 물론이고 야누스의 신체 보조 능력까지도 최대한 끌어내서 몸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폭풍처럼 밀려오는 뼈 촉수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에스더, 도와!'

[지금 나보고 다른 여자 구하는 걸 도우라고요? 농담도 지나치셔라.]

'장난할 때가 아니다.'

[치잇.]

그제야 에테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내가 직접 에테르를 움직여도 되지만, 내 의지로 움직이는 에테르와 에스더를 통해서 발현되는 에테르는 그 정밀성이나 위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애초에 지금은 내가 에테르에 정신을 집중할 정도의 여력이 없었다.

[던··· 질까?]

[던지, 자······.]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던져.]

[히힛, 날았, 다······.]

거칠게 요동친 에테르와 함께 마치 태풍에 휩쓸리듯이 나와 힐데가르트의 몸이 튕겨 나갔다.

"힉!"

나야 아슬아슬하게 착지에 성공했지만, 힐데가르트는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아무렴 뼈 촉수들에 의해서 꼬챙이 신세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만 힐데가르트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신음했다.

수십 미터를 넘는 거리를 날아서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으니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으으······."

그렇게 간신히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나는 힐데가르트를 뒤로한 채로 곧장 다른 일행들을 찾았다.

'어디에 있지?'

그리고 머지않아서 나는 등으로 뼈 촉수들을 막아낸 쿠릴타와, 그 앞에 있는 드미트리, 그리고 얼마 떨어진 곳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클린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야만인!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감히 나를 구해?"

"······시끄럽다."

"너··· 아, 망할."

드미트리의 시선이 멈췄다.

쿠릴타의 등을 비롯한 전신에서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자칫 잘못하면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큰 상처였다.

"···책임은 귀족의 의무다. 감히 야만인 따위가 내 명예를 모욕해?"

"시끄, 럽다고··· 했을 텐데."

"감히, 감히 야만인주제······."

드미트리는 이를 악물었다.

진심으로 분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변절자 나이트의 공격에 휩쓸린 건 쿠릴타뿐만이 아니었다.

"끄으윽······."

"클린트!"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힐데가르트가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클린트에게 달려갔다.

흘린 피의 양으로 보건대, 쿠릴타 이상의 중상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원래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쿠릴타와는 다르게, 클린트 쪽은 정말로 생명이 위험했다.

"기다, 기다려."

힐데가르트가 떨리는 손으로 의료 키트를 꺼냈다.

아무래도 이렇게 많은 피를 보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드미트리!"

"이쪽도 바쁘다!"

힐데가르트와 드미트리가 각각 클린트와 쿠릴타를 치료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중위님, 중위님은?"

"모른다!"

패닉에 빠진 힐데가르트와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드미트리.

그야말로 환장의 상황이었다.

'···이렇게 됐나.'

그러는 사이에 나는 경계를 낮추지 않고서 변절자 나이트가 있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없다. 어디로 갔지?'

나는 빠르게 시선을 훑었고, 이내 변절자 나이트가 저 멀리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쫓아야 하나?'

현재 아군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조사팀의 인솔자이자 지휘관인 이모샤 중위는 어디에 있는 건지 찾을 수 없었고, 남은 인원 중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 중상을 당했다.

누가 봐도 도망치는 변절자 나이트를 추격하는 건 무리로 보였다.

"칼! 쫓아라."

그때, 나를 향해서 외친 건 다름 아닌 쿠릴타였다.

"괜찮겠나?"

"흥, 고작 이 정도로 죽을 거였다면 진작 죽었겠지. 난 걱정 말고 가라! 칼."

"···그래."

엄밀히 말하면 쿠릴타의 판단은 옳았다.

지금 변절자 나이트를 놓치게 되면 이번 임무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설사 운 좋게 이번 임무를 무사히 넘어가더라도, 훗날 아크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겠지.'

즉, 변절자 나이트가 약해진 지금을 기회로 삼아서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방향은··· 대충 서남쪽으로 향했나.'

내가 변절자 나이트가 도망치는 방향을 시선으로 쫓았다.

저 정도 속도라면, 비록 거리가 어느 정도 있긴 해도 따라잡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조사팀 일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휘관인 이모샤 중위가 부재중인 지금, 공식적인 지휘권은 아니어도 상황에 대한 판단은 사실상 나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희는 이곳에서 쿠릴타와 클린트를 치료하고, 이모샤 중위를 찾아라. 나는 변절자 나이트를 쫓겠다."

"···혼자서 괜찮겠어요?"

힐데가르트였다.

그녀는 내가 제법 과격하게 구한 탓에 온몸이 온갖 먼지로 뒤덥혀 있었지만,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만무했다.

"충분하다."

힐데가르트의 눈동자가 떨렸다.

무슨 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죽지 마세요."

"저쪽 친구들이나 걱정해라."

나는 쿠릴타를 비롯한 힐데가르트, 드미트리, 클린트와 시선을 한 번씩 교환하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가볼까.'

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제까지 훈련병들과 이동할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였다.

[아까 그 귀염둥이 죽이려고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에스더가 마물을 보는 관점은 꽤 뒤틀린 부분이 있었다.

애초에 에스더 본인이 1급 유령종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귀여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죽여야 하는 건 맞다. 살려두면 후환이 될 가능성이 커.'

[흐으음··· 개인적으로는 그러지 않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왜?'

[그 귀염둥이 녀석, 처음부터 싸우러 온 게 아니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지?'

어느새 내 앞에 얼굴을 내민 에스더가 능글맞게 웃었다.

[글쎄요?]

지금 내가 엄청난 속도로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꽤 기묘한 광경이었지만, 이제 와서 놀랄 것도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에스더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변절자 나이트는 아크에 위협이 되는 마물 중 하나였고, 지금 변절자 나이트는 상처 입고 약해졌다.

죽이기에는 절호의 기회인 셈.

그렇기에 나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변절자 나이트를 쫓아서 죽일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추격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점으로 보이던 변절자 나이트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900m, 850m, 800m······.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하지.'

나는 이동을 하는 와중에 Ark-15 대물 저격총을 들었다.

보통 이동 중 정밀 저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못 맞출 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빗나가도 상관없다.

철컥-

나는 조준경도 보지 않고서 대충 견착을 한 뒤에 방아쇠를 당겼다.

쐐액─!!!

초탄으로 뻗어 나간 총알이 변절자 나이트의 왼쪽 다리를 노렸으나, 견고하기 짝이 없는 외갑에 의해서 튕겨 나갔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왼쪽 다리에 있는 외갑이 쩌적 갈라지더니, 이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떨어져 나간 외갑 자리가 복구가 되지 않고 있다.'

즉, 지금 변절자 나이트 역시도 한계에 몰려 있다는 뜻이었다.

'하긴.'

애초에 조금 전에 변절자 나이트가 도망치기 직전에 했던 광범위 공격은, 어마어마한 뼈 촉수의 질량을 만들어내야 하는 기술이다.

사실상 최후의 발악에 가까운 공격인 만큼 아무리 변절자 나이트라 할지라도 여력이 남아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발부터 뺏어볼까.'

쐐액!

다시금 방아쇠가 당겨지고, 뻗어 나간 총알이 그대로 변절자 나이트의 왼쪽 다리를 꿰뚫었다.

[키에에에!]

변절자 나이트의 몸이 그대로 쓰러졌다.

아무리 마물이라고 해도, 숙주로 삼은 대상의 육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두 다리 중 하나가 총알에 맞으면 당연히 달릴 수 없었다.

쓰러진 변절자 나이트를 요리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자동 소총 모드로 바꾸고는, 이동과 동시에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탄창은 A-985 폭발탄이었다.

콰캉!

콰카카캉──!!

[키에에······!]

그렇게 화염에 휩싸인 변절자 나이트를 향해서 내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끝이다."

내가 마무리를 위해서 총구를 변절자 나이트를 향해서 들이민 순간.

[동, 족··· 어째··· 서······.]

변절자 나이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변절자 나이트의 눈동자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 조사팀 (7) > 끝

순간적으로 당겨지려던 방아쇠가 멈췄다.

이제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면 변절자 나이트를 끝장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뭐지?'

변절자 나이트는 마치 정말로 내가 자신을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치를 떨고 있었다.

거기다가, 당장 내가 망설이고 있음에도 반격을 하기는커녕 체념한 듯이 눈을 감았다.

'···이런 적이 있었나?'

더 디펜스에서 마수와 마물을 길들이려고 시도했던 괴짜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중에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더 디펜스를 클리어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진지하게 이에 대해서 연구했던 이들도 있었다.

마치 애완용 강아지처럼 마수와 마물들을 잡아놓고서 먹이를 주며 길들이려고 한 이들도 있었고,

모트교에 귀의해서 마수와 마물과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내려 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스스로 스컬 나이트가 되어서 마물인 척 연기해보려고 했던 이들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

인간과 마물은 화합할 수 없다.

그게 오랜 연구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고,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분명히 그랬을 텐데······.

'대체 뭐지?'

짐작가는 이유는 있었다.

야누스, 정확히는 5레벨 보호복과 결합한 뼈 기생체 때문일 터.

애초에 그것 말고는 변절자 나이트가 나를 동족으로 여길 이유가 없었다.

'설명해라.'

어째서인지 조금 전부터 귓가에서 들려오는 에스더의 웃음소리가 점차 짙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딱 보면 몰라요? 동족이라잖아요. 동족.]

'그러니까 왜 날 동족으로 보는 거지? 야누스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게 가장 큰 이유겠죠? 아니면 말고.]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납득은 가지 않았다.

지극히 당연한 의문 때문이었다.

'단지 그뿐만이었다면 진작 방법이 알려졌어야 해.'

뼈 기생체 장비는 분명히 만들기 까다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디펜스에 익숙한 플레이어라면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크에도 이 사실이 알려져 있어야 정상이다.

마물에게 동족으로 여겨지는 방법 따위가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야누스 때문만은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실제로 나는 뼈 갑옷은 물론이고 스컬 나이트로도 매우 많이 플레이를 해왔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나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즉,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

[안 죽여요? 지금 목 빼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불쌍하기도 해라.]

에스더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해석하기 위해서는 에스더의 설명이 필요할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라.'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주인님 입장에서는 그냥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비아냥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

어째서인지 에스더는 지금 조금 화가 나 있는 듯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그에 대한 판단은 너에게 설명을 듣고 해도 늦지 않아.'

[진짜 제멋대로시네.]

에스더의 조소가 커졌다.

[저 멍청이가 멈추라고 얼마나 말했는지 모르죠? 왜 그러냐고 울부짖은 것도 모르죠? 아프다고 비명을 내지른 것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냥 죽여요. 괜히 더 불쌍하게 만들지 말고.]

'나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가 마물의 말을 어떻게 알아듣나?'

[그렇겠죠. 그런데, 저는 알아듣거든요. 우리 잘나신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는 마물의 언어라는 거.]

마치 울분을 토해내듯이 한껏 쏟아낸 에스더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변절자 나이트를 바라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머저리 같은 놈. 동족도 제대로 못 알아보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차례차례로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을 재정리했다.

'마수와 마물들은 웬만해서는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다.

마수와 마물들끼리도 영역 다툼을 비롯한 사소한 분쟁이 일어날 시, 부딪치기도 하니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수와 마물들은 웬만해서는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

마치 인간끼리도 서로 반목하는 이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동족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듯이, 마수와 마물들도 웬만해서는 서로를 향해 먼저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웨이브다.

수백, 수천 종이 넘는 마수와 마물들이 한데 엉겨서 밀려듦에도 불구하고 그중 그 어떤 마수나 마물들도 서로 물어뜯거나 싸우지 않는다.

자, 그렇다면 그 마수와 마물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뭘까?

외형?

냄새?

아니면 다른 무언가?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수와 마물은 인류의 적.

그게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 마수와 마물의 존재감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외형과 냄새는 물론이고 마수와 마물만이 지닌 고유한 무언가까지도 흉내를 낼 수 있다면, 그때 마수와 마물들은 그 대상을 어떻게 대할까?

'설마······.'

이제껏 무수히 많은 실험을 했던 이들과 나 사이에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들에게는 에스더가 없고,

지금의 나에게는 에스더가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즉, 1급 유령종인 에스더의 존재로 인해서 나는 마물만이 내뿜을 수 있는 특수한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야누스로 인한 뼈 기생체의 냄새까지도 가지게 되었다.

둘 중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면 변절자 나이트가 나를 동족으로 착각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 두 가지가 모두 겹치자 진짜 마물마저도 착각을 한 것이다.

'가능성은 충분해.'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변절자 나이트가 나를 동족으로 착각할 리가 없었다.

기나긴 생각을 마친 나는 내 앞에 있는 변절자 나이트를 바라보았다.

[그우우우······.]

변절자 나이트는 이제 움직일 기력이 남지 않았는지 그저 음울한 울음소리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흐음.'

나는 슬쩍 뒤를 살폈다.

알고 있던 대로 이미 조사팀과 나 사이의 거리는 10km가 훌쩍 넘었기에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즉,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조사팀에서는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스스스───!

내 의지에 감응한 야누스의 뼈 촉수들이 내 전신에서 돋아났다.

[기익, 기긱!]

그 모습을 본 변절자 나이트가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다는 듯이 말이다.

[기이이!]

변절자 나이트와 야누스가 서로를 바라보며 울었다. 공명이었다.

"···귀 아파 이것들아."

[기잇!]

마치 나를 제 친구처럼 구는 변절자 나이트를 바라보며, 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그냥 보내주기는 조금 그런데······.'

비록 지금 당장은 나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변절자 나이트의 본질은 마물이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난 뒤에 다음에 만났을 때 나를 적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니··· 설사 나를 적대하지 않더라도 변절자 나이트는 본질적으로 아크의 적이다.'

살려둬서는 안 되는 존재.

그게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였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것도 사실인데······.'

변절자 나이트의 전례를 보건대, 아마 스컬 턴코트들 역시도 나를 동족으로 여길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모든 스컬 턴코트들이 동족에게 우호적일까? 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잘 모르겠다.

스컬 턴코트는 숙주가 각기 다른 본연의 특성상 개체 별로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었다.

'으음······.'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인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보지?'

[저였으면 당연히 데려가서 키우죠. 하는 짓도 깜찍한데.]

'퍽이나 그렇겠군.'

이 시점에서 에스더의 의견은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마물인 에스더와 나 사이에 보는 관점이 같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대로 그냥 죽이는 게 좋겠지만······.'

그렇게 처분을 하자니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동, 족··· 너, 강하다··· 나보다.]

변절자 나이트가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며 내 앞에 조용히 다가왔다.

기습인가 싶어서 저도 모르게 잠시 움찔했으나, 적의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한 야누스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가만히 변절자 나이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스스스······.

이내 변절자 나이트의 전신에 있는 뼈 촉수들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나에게 적대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그랬다면 야누스는 물론이고 에스더가 격렬하게 반응했어야 하는데, 그 둘 모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끼익, 끼기긱······.

변절자 나이트의 가슴 한가운데에 뼈 촉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가닥, 두 가닥, 세 가닥, 네 가닥, 다섯 가닥······.

최소 열 가닥 이상의 뼈 촉수들이 모여서 마치 꽈배기처럼 꼬이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뼈 창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거··· 바친다······.]

변절자 나이트는 뼈 촉수들이 뭉쳐져서 만들어낸 뼈 창을 나에게 건넸다.

내가 경계를 낮추지 않고서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야누스가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야, 야!"

설마하니 저걸 그대로 먹어치울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뼈돌이가 주인보다 낫네.]

'뭐?'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시라고요. 주인님.]

에스더가 키득 웃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알림이 나타났다.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에게서 '복종의 증표'를 받았습니다.]

['뼈 기생체'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뼈 기생체'와 관련된 모든 효과 및 능력치가 15% 상승합니다.]

['뼈 기생체'의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앞으로 '뼈 기생체'의 대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통솔' 능력치가 생성됩니다.]

'이건······.'

통솔 능력치는 더 디펜스 내에서도 장교 및 지휘관 루트를 택한 후에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나 생성되는 능력치다.

즉, 통솔 능력치가 생성되었다는 것 자체가 변절자 나이트가 나를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하나의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기잇, 깃!]

야누스는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이내 변절자 나이트가 그랬듯이 뼈 촉수들을 베베 꼬아서 뼈 창을 만들어냈다.

다만, 변절자 나이트가 건넸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색 역시도 칠흑처럼 어두운 색이었다.

[기잇!]

야누스가 그것을 변절자 나이트에게 건네자, 변절자 나이트가 그것을 받아들고는 야누스가 그랬듯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나타난 알림들.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에게 '종속의 증표'를 수여하였습니다.]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를 완전히 종속시켰습니다.]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뼈 기생체'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뼈 기생체'와 관련된 모든 효과 및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통솔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 -> 2]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끼긱, 끽··· 동족··· 따르겠다.]

부하가 생겼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 조사팀 (8) > 끝

나는 야누스를 살폈다.

이번에 변절자 나이트를 종속하며 생긴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뼈 갑옷(Lv.5)(야누스)'의 정보를 열람합니다.]

['뼈 갑옷(Lv.5)(야누스)'의 설명이 일정 수준을 초과하여, 일부 설명이 "상세보기" 란으로 이관됩니다.]

설명 축소라······.

'하긴, 조금 길긴 했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야누스의 성장은 범상치 않다.

만약 평범하게 아크 안에서 병사로서 생활했다면 절대로 이룩하지 못했을 성장을,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환경 덕분에 이뤄내고 있었다.

설명이 길어질 만도 했다는 이야기였다.

'뭐어, 그건 그거고······.'

나는 야누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뼈 갑옷(Lv.5)] [야누스] [★★★★★★★★★★(10성)]

아크의 장교용 기본 방호복(Lv.5)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아누스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28.4%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 변절자 나이트를 종속시켰다.

변절자 나이트의 위치를 알 수 있으며,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상세보기"

──────────────

얼핏 봤을 뿐인데도 확실히 설명이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위치 파악이야 그렇다고 쳐도, 명령까지 내릴 수 있다라······.

나는 실험 삼아서 변절자 나이트를 보며 말했다.

"앉아."

그런데, 변절자 나이트는 고개를 멀뚱멀뚱할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내가 의아함을 느끼고 있던 순간.

[기깃!]

야누스가 무어라고 짖자, 그제야 변절자 나이트가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앉았다.

'···아, 그런 건가.'

변절자 나이트가 복종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야누스다.

야누스가 내 소유물이니 거기서 거기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소령이 대위보다 계급이 높아도, 중대에 대한 지휘권은 중대장한테 있는 거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되겠지.'

뭔가 비유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명령이 한번 걸러서 전달되면··· 전투 중에 세세한 지시를 내리지는 못하겠어.'

하지만 큰 결정 같은 건 야누스를 통해서 얼마든지 내릴 수 있었으니 별로 상관없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는데.'

이제부터 변절자 나이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간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었다.

안 그래도 아크 내에서 나에 대해서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고 있을 터.

이런 상황에서 변절자 나이트와 동행 따위라도 했다가는 곧장 마물 혹은 반 아크 세력으로 판단되어서 제거당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숨을 자신은 있지만···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지.'

무엇보다도 나는 아크의 적이 아니라 앞으로 쭉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야 할 대상으로 있어야 한다.

굳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뿐.

"가라."

변절자 나이트를 부하로 만든 건 분명히 예상외의 소득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동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변절자 나이트는 야누스의 수하가 되었고,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불러들일 수 있었으니까.

[기깃!]

내 말을 야누스가 마치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나서야 변절자 나이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면··· 동족 너는··· 괜찮··· 은가?"]

확실히 뼈 기생체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한 덕분인지, 전부는 아니어도 변절자 나이트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말해.'

[기잇, 기깃!]

물론 그건 어느 정도 인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변절자 나이트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고, 야누스의 말은 여전히 괴성으로 들렸지만 말이다.

["알겠··· 다."]

변절자 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의 쓸데없는 말 없이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변절자 나이트가 발걸음을 내딛기 직전, 한 마디를 남겼다.

["조심··· 해라."]

가진 힘을 거의 다 사용했던 변절자 나이트였으나, 야누스가 복종의 증표를 수여하며 어느 정도 힘을 회복했는지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변절자 나이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어디로 갔는지 느낄 수 있어?"

[기잇!]

야누스가 뼈 촉수 끝으로 변절자 나이트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나도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자, 야누스가 전해준 변절자 나이트의 위치가 느껴졌다.

'GPS라도 심어놓은 기분인데.'

내가 알기로 본래 뼈 기생체에게 이런 능력은 없었으나, 아무래도 야누스 자체가 워낙 먹은 게 많다 보니 이런 능력도 생긴 모양이었다.

아니면 본래부터 있었지만 내가 알 기회가 없었든가.

'뭐가 됐든지 간에 잘된 일이지.'

[그러게요.]

에스더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밝아 보였다.

아니, 단순히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어느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옆에서 알짱거리며 어울리지도 않은 애교를 부려대고 있었다.

[역시 우리 주인님. 저는 믿고 있었어요. 우리 주인님이 누군데 그런 귀염둥이를 함부로 죽이겠어요? 아깝게.]

'잘도 지껄이는군.'

[그게 또 제 매력 아니겠어요?]

아무래도 에스더는 내가 변절자 나이트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정도로 기쁜 듯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괜히 더 상대했다가는 흰머리만 늘어날 게 뻔했기에 나는 변절자 나이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됐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조사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곤란해져.'

그중에는 장차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쿠릴타는 물론이고, 아크에 꼭 필요한 힐데가르트나 드미트리 같은 인재들도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이번 임무에는 아크 명예 시민권까지 달려 있었으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물론이고 아크에도 큰 손해였다.

'돌아간다.'

나는 야영지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야영지에서 불 따위는 피우고 있지 않았기에, 아마 부상자 치료는 완벽한 빛 차단이 가능한 4레벨 위장 능력을 보유한 CD형 텐트 안에서 이뤄지고 있을 터.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라도 이런 위험 지대에서 보초를 세우지 않을 수는 없을 테고··· 아마 드미트리가 서고 있겠지.'

그 어느 때보다도 전력을 다해서 달린 덕분에 야영지 근처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저긴가.'

익숙한 실루엣.

아니나 다를까 보초를 서고 있는 건 상대적으로 멀쩡한 드미트리였다.

"누구냐."

"칼 마커스다."

드미트리는 잔뜩 날이 선 표정으로 나에게 총구를 겨누고는, 이내 나라는 걸 확인하고는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왔나."

"부상자들은?"

"목숨은 건졌다."

드미트리는 변절자 나이트에 대한 건 아예 묻지도 않고서 나에게 턱짓으로 CD형 텐트를 가리켰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을 나누는 것보다 직접 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끄으윽······."

방음 효과가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건 고통에 신음하는 목소리였다.

클린트와 쿠릴타.

변절자 나이트로 인해서 6명의 조사팀 중에서 무려 2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왔군요."

왼쪽 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는 이모샤 중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변절자 나이트를 쫓으러 갈 때만 해도 이모샤 중위가 사라져서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은 듯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기절해 있던 탓에······."

"신경 쓰지 마라. 상대는 2급 마물이었다. 이 정도 피해면 오히려 싸게 먹힌 셈이다."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은 아니다.

2급 마물은 일전에 잔영의 사르트와의 격전에서 증명되었듯이 매우 위험하다.

실제로 잔영의 사르트는 무려 네이비 라인 소속의 정찰대인 타티아나 벨로프 소령이 이끄는 기동 타격대의 손에서도 유유히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이번에 우리가 변절자 나이트를 비교적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변절자 나이트가 우리를 향해서 적의를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변절자 나이트가 처음부터 적의를 내비치며 우리를 향해서 거침없이 공격을 했더라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야누스의 정체를 드러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요. 이들이 이렇게 된 건 다 제 탓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모샤 중위의 시선이 병상에 누워 있는 두 명의 부상자를 향했다.

의료용 스킨 스테이플러를 비롯한 임시 조치로 간신히 출혈 정도만 막은듯한 클린트와 쿠릴타의 상태는 딱 봐도 심각했다.

그나마 쿠릴타 같은 경우는 원체 강인한 녀석인지라 나름대로 버티고 있는 듯했지만, 클린트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중위님, 클린트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당장 아크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잔뜩 뒤집어쓴 힐데가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클린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괜찮으니··· 끅! 임무를······."

"시끄러워!"

힐데가르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고!"

"그, 그래도 임무를······."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클린트."

모두의 시선이 이모샤 중위를 향했다.

이모샤 중위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크의 병사의 목숨은 이번 임무보다 중요하다."

경상도 아니고 무려 중상자가 두 명이나 발생한 상황.

그 강인한 쿠릴타조차도 부상 수준으로 보건대 한동안은 거동하는 게 어려운 수준이었으니, 힐데가르트의 말대로 이 상태라면 더 이상 임무를 속행하기는 어려웠다.

"···아크로 복귀한다."

결국, 굳은 표정으로 이모샤 중위가 결단을 내렸다.

클린트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내려진 결정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번 조사팀 임무는 나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역시 아크의 명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이고, 두 번째로는 뱀동굴을 비롯한 우로보로스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나에 대한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어.'

지금에야 내가 용병으로 참여했지만, 그때 가서 또 아크에서 나를 고용하려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최악의 경우 변절자 나이트와 한통속으로 몰려서 아크의 적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사실이긴 했지만, 그게 또 사실이 아니었으니 참으로 억울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나.'

그렇게 내가 이모샤 중위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

"카, 칼······."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쿠릴타가 짜내고 짜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말해라."

"임무를··· 부탁한다."

"괜찮겠나?"

"너라면··· 할 수 있을 테니, 걱정은··· 안 한다."

쿠릴타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나도 그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알았다, 쿠릴타."

< 조사팀 (9) > 끝

지금까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쿠릴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에 움찔한 힐데가르트가 빠르게 쿠릴타의 바이탈을 체크했다.

"···잠든 거네요. 난 또."

"아예 악담을 퍼붓지."

"네?"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농담을 건넬 줄 몰랐는지 힐데가르트는 멍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뻘쭘한 기분이었다.

"칼 마커스."

이모샤 중위가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임무 아닌가?"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이모샤 중위는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 이거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모샤 중위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힐데가르트 훈련병!"

"예, 예?"

"칼 마커스와 함께 임무를 완수하도록. 나와 드미트리는 부상자들을 데리고 아크로 복귀하겠다."

힐데가르트는 잠시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경례했다.

"···훈련병 힐데가르트!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조금 불만이었다.

드디어 혼자 움직이나 했는데, 이모샤 중위가 짐 덩어리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짐 덩어리를 나에게 붙인 것이다.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아닙니다. 비록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처지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말이야 그럴듯했으나, 실상은 나를 통해서 전해진 보고를 온전히 믿을 수 없으니 아크의 병사를 데려가라는 이야기였다.

여전히 나는 아크에게서 의심을 받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명예 시민권 요구를 순순히 승낙한 것 역시도 괜히 아크 바깥에서 돌아다니게 두느니, 안에서 감시하겠다는 목적이었을 터.

'물론 그 뜻대로 움직일 생각은 없지만.'

명예 시민권은 권리다.

당연히 의무를 짊어지지 않으니, 아크의 명예 시민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아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알겠다. 바로 출발하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상자가 둘.

그걸 이동시켜야 하는 사람도 둘이었다보니, 하는 수 없이 이모샤 중위와 드미트리는 들것을 2인용으로 임시 개조해서 두 명을 한 번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바퀴가 있는 게 다행이었으나, 2명분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으니 돌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칼 마커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미트리와 힐데가르트가 들것을 임시 개조하는 동안 나는 이모샤 중위로부터 이번 임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야 자세한 사항을 밝히지 않았지만, 조사팀의 임무가 완전히 나에게로 옮겨지니 상세한 내용을 말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번 조사팀의 목적은 총 세 가지.

첫 번째는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의 현재 위치 혹은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우로보로스와 맞섰던 스컬 턴코트의 흔적에 대해서 조사하는 일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불안 요소에 대해서 조사하는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크에서는 스컬 턴코트 모습을 한 나를 변절자 폰으로 명명하고, 현재 위험 마물로 지정한 상태였다.

'변절자 폰이라··· 이것 참.'

아크에서 네임드 스컬 턴코트들에게 체스 기물에서 딴 이름을 짓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변절자 폰이 등장하는 건 본래 스테이지가 중반 이상으로 넘어간 뒤였건만, 덜컥 내가 그 이름을 차지해 버렸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내가 어느덧 채비를 마친 이모샤 중위와 마주 보았다.

"그러면··· 임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헤어짐에 있어서 따로 인사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저, 서로 알겠다는 듯이 작게 시선을 교환했을 뿐.

그렇게 우리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부상자들을 이끌고서 아크로 귀환하는 자들과,

끝까지 임무를 속행하는 이들로.

우리는 당연히 후자였다.

"가지."

"아··· 예! 예. 가요."

갑작스럽게 나와 단둘이 되어 버리자 힐데가르트는 사뭇 긴장한 눈치였다.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좋겠어요? 저런 이쁜이랑 단둘이서 여행도 하고.]

'여행은 무슨.'

조금만 삐끗해도 목숨이 날아가는 여행이 세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

"무슨 일이지?"

"아, 아뇨. 아까부터 계속 무섭게 쳐다보고 계시길래."

나는 그제야 에스더가 힐데가르트와 나 사이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힝, 약오르징.]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여기서 귀신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하면 어떤 미친 취급을 받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출발하지."

나는 여전히 의아함이 뚝뚝 묻어나는 힐데가르트의 시선을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무 속행이다.

*

순식간에 조사팀의 인원이 6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는 계속됐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혼자서도 아크 바깥을 잘 돌아다녔던 나지만, 오히려 인원이 애매하게 2인이 되자 해야 할 일이 부쩍 늘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지. 마수 무리다."

만약 혼자였다면 그냥 무시하고서 가다가 적당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하기만 해도 됐을 것을, 이제 마수 무리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마수 무리와 싸울 것인지,

아니면 숨은 채로 기다릴지.

대부분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마수 무리와의 교전이 또다른 마수 무리를 불러오는 건 아크 바깥에서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르릉······!]

[컹! 컹!]

스컬 하운드가 이끄는 헬하운드 무리가 위장막으로 모습을 감춘 우리 앞을 지나쳤다.

지금이라면 스컬 하운드 및 헬하운드 무리 정도야 권총 한 자루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크 바깥에서 마수들과 교전을 벌이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피할 수 있는 건 피하는 게 여러모로 상책이었다.

"···갔나요?"

"그래."

물론 모든 마수 무리와의 전투를 피한 건 아니었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는 상황 혹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경우, 나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돌아갈 길이 없다. 교전한다."

그나마 다행히도 웨이브 직후의 상황인 터라

그 때문일까.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진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테지만, 아무래도 지금의 힐데가르트 수준으로는 내 이동 속도를 따라오기에는 버거웠다.

"허억, 허억······."

"힘들어 보이는군. 쉬었다 가지."

"아닙, 아닙니다··· 계속, 계속 가시죠."

"지쳐 있는 상태로는 방해만 될 뿐이다. 차라리 10분간 쉬지."

"죄송,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힐데가르트는 정말로 분하다는 듯이 흐르는 땀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흐르는 건 땀인가, 눈물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힐데가르트는 기껏해야 3번의 웨이브밖에 치르지 못한 애송이 훈련병이었고, 나는 강체 능력은 물론이고 야누스의 신체 보조 능력까지도 있었다.

단순한 근력과 체력의 능력치 차이 이상으로 나와 힐데가르트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차라리 그냥 업고 갈까?'

그런 생각도 잠깐 해봤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경험들이 훗날 힐데가르트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비록 지금은 훈련병에 불과하지만, 힐데가르트는 훗날 아크의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

그녀가 지닌 통찰안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눈이었고,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잠재력 역시도 매우 뛰어났다.

'이번 계기로 힐데가르트의 성장이 촉진되면 좋지.'

그렇게 마수 무리를 피하고, 강행군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밝고, 다시금 밤이 찾아왔다.

슬슬 힐데가르트의 상태는 물론이고 나도 조금은 피곤해졌기에 이쯤에서 쉬어가는 게 옳은 판단일 듯했다.

"이쯤에서 야영한다."

"그렇다면 보초는······."

"교대로 서는 게 좋겠지만, 어차피 CD형 텐트도 없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나는 야삽을 들고서 적당히 땅을 판 뒤에 그 위에 위장막을 둘렀다.

잠은 침낭을 이렇게 위장막 사이에 깔고서 자면 될 터.

편히 잠을 이루기에는 조금 불편한 모양새긴 해도, 은폐력면에서는 따로 보초를 서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사 마수 무리가 우리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에스더가 깨워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은신처에서 1인용으로 사용하던 CC형 텐트는 눕기에 따라서 최대 4인까지도 있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을 구겨 넣었을 때의 이야기다.

CC형 텐트는 잠을 자기에는 충분해도 거주하기에는 애매한 크기를 지닌 텐트다.

반면, CD형 텐트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최소 인원 12인 형으로 설계된 물건이었기 때문에 야전 중에도 매우 쾌적한 실내 환경을 누릴 수 있다.

막말로 샤워 시설만 없을 뿐, 야전에 있어서 있어야 할 기능들은 거진 거의 다 있었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쓸 수밖에.'

그렇게 내가 두 겹으로 겹친 위장막 사이에 침낭 하나를 깔고서 누웠을 때였다.

어째서인지 힐데가르트가 조금 망설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하나?"

"···아, 아무것도요."

그리고는 주뼛주뼛하면서 내 옆에 침낭을 깔고는 천천히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침낭 두 개가 나란히 있으니, 답답하긴 했어도 잠을 자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했다.

"저······."

"이제부터는 조용히 해라. 4레벨 위장막의 방음 능력은 제법 쓸만하지만, 밤의 마수들은 그것마저도 알아차린다."

"아, 네······."

에스더가 한마디했다.

[와, 진짜 개 머저리네요.]

밤이 깊었다.

* * *

힐데가르트는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자고 있는 이의 존재 때문이었다.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한편, 그러면서도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칼 마커스의 모습을 보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위장막 속이라지만, 보초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저렇게 속 편히 잠들다니······.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힐데가르트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실험탄 GHOST-157을 회수하기 위한 작전에서 만났던 스컬 턴코트.

회수팀을 모조리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서 유유히 그곳을 떠나던 스컬 턴코트.

사방에서 들려오던 마수의 울음소리와 그때 느꼈던 절망감.

오파쿰의 늪지대를 벗어나면서 보았던 마수들의 시체와 그곳에 있었던 무수한 구멍들.

처음으로 칼 마커스를 본 순간, 힐데가르트는 어째서인지 모르게 그때 보았던 스컬 턴코트를 떠올렸다.

이제는 아크로부터 변절자 폰이라 명명된 바로 그 존재를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다.

칼 마커스의 행동, 말, 그 모든 게.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도대체 어떻게 칼 마커스가 아크 바깥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칼 마커스는 모든 것에 신중했다.

절대 함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고, 조금만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칼 마커스가 싸움을 겁내는 겁쟁이였냐?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칼 마커스는 싸움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솜씨는 무려 2급 네임드 스컬 턴코트인 변절자 나이트마저도 패퇴시킬 정도였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통찰안으로도 칼 마커스에 대해서는 많은 걸 읽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스컬 턴코트와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점점 더 억측이었다는 가능성에 기울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진즉 죽었을 테니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데가르트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있었다.

'칼 마커스는 스컬 턴코트가 아니야.'

스컬 턴코트는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서 뼈 기생체가 완전히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얻은 존재를 말한다.

즉, 인간의 언어 역시도 어설프게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완벽한 구현은 불가능하다.

'여전히 정체에 의심스러운 부분은 많지만··· 쿠릴타가 보증했으니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

힐데가르트는 쿠릴타에 대해서 제법 믿는 편이었다.

쿠릴타는 남을 속일 정도로 요령이 좋은 사내가 아니었고, 동시에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강인한 사내였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있다 보니, 어느덧 힐데가르트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다음날이 되고, 다시금 치열한 여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임무의 목적지라고 볼 수 있는 뱀동굴에 도착했을 때, 힐데가르트는 보았다.

"여기가 맞나?"

"아, 예. 사전에 받았던 정보로는 분명히 이쯤이었는데······."

"무너져 있군."

"···그러네요."

아크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한참을 이동해야 나오는 뱀동굴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 안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이 말하는 바는 명료했다.

"저 안에 있던 게 깨어났다···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네요."

저쪽으로 가봐야 하나?

힐데가르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그만."

"예?"

"그 이상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칼 마커스가 경고했다.

힐데가르트는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슨─"

힐데가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순간.

[키에에에에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진 뱀동굴 안쪽에서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