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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고스의 형제들 > 끝

사실, 보초를 제거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소음기를 낀 Ark-15 대물 저격총으로 저격하는 것이다.

현재 보초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약 700m.

이 정도 거리면 보초 둘 정도야 보초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총을 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지 흔적이 남는다는 거지.'

나는 바고스의 형제들의 죽음을 총을 쥔 누군가가 아닌 마물의 습격으로 보이고자 했다.

괜히 내가 했다는 걸 들켜봤자 복잡한 은원 관계가 생겨날 테니 말이다.

'바고스의 형제들은 인간 이하의 쓰레기들이지만, 우호 관계에 있는 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아.'

끼리끼리 논다고 하던가.

모트교에 버금가는 사교 중 하나인 붉은 여명회나 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다 먹어치우며 살아가는 들쥐들 같은 세력들은 살인강도가 일상인 바고스의 형제들과도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만약 바고스의 형제들을 내가 죽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이야기.

물론 그들조차도 모르게 뒤처리를 하려면야 할 수는 있겠지만, 완벽하게 하려면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린다.

요컨대, 귀찮다.

'어차피 원거리 공격을 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내 결론은 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침 바고스의 형제들 정도면 이번에 뼈 갑옷이 얻은 새로운 능력들을 실험해보기에 아주 좋은 상대들이기도 했고 말이다.

'가볼까.'

나는 검은색 판초와 쿠프의 가면으로 위장을 마친 뒤 천천히 그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뿌득, 뿌드득──!

내 의지에 감응한 뼈 갑옷이 뼈 촉수 두 개를 뽑아냈다.

마치 당장이라도 발사될 것처럼 회전을 머금은 상태였다.

650m, 600m, 500m······.

평소 내 공격 사정거리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었으나, 뼈 촉수의 사정거리를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다가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초들의 사각으로 진입한 덕분에 내가 300m 지점까지 다다르는 동안 보초들이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쐐애애애액───!!!

거칠게 일어난 파공음과 함께 내 양어깨 위에 솟아났던 뼈 촉수가 보초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들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날아든 사신은 단번에 보초 둘의 생명을 앗아갔다.

비명은 없었다.

소리를 질러야 할 머리는 이미 그들의 목 위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두둑······.

나는 보초 둘의 머리를 말 그대로 터트려 버린 뼈 촉수들을 회수하고는 그대로 뱀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거리낄 건 없었다.

바고스의 형제들은 하나 같이 인간 이하의 쓰레기들이다.

저딴 것들을 죽이는 데 양심의 가책 따위가 느껴질 리가 만무했다.

'확실히, 초인적인 정신력 특성 때문인가.'

본래였다면 어느 정도는 동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더없이 차가웠다.

'이대로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굳이 일을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의 나는 굳이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루트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잠입 루트를 활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땅속이라든지.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뱀동굴은 단단한 암석과 초대형 마수의 점액질이 굳어서 만들어진 동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질화가 적용된 뼈 촉수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뼈 갑옷의 등급은 무려 9성.

이제 더 디펜스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뱀동굴의 지하 속으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땅속에서 이동을 시작했다.

어차피 뱀동굴의 내부 지도는 머릿속에 훤히 들어 있었고, 혹시라도 길을 잃더라도 그때 가서 다시 찾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기깃.]

뼈 기생체의 신호에 나는 내가 누군가의 발밑에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씩, 진동이 느껴진다.

누군가 내 머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조금 더 귀를 기울이자 지상 위에서 바고스의 형제들이 나누는 대화까지도 들려왔다.

-어제 또 한 건 했다지?

-아, 그거? 제법 쏠쏠했지.

시답잖은 대화를 계속 들어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뼈 갑옷에 의지를 전달했다.

쑤우욱!

뼈 촉수가 지상으로 솟구치고,

-컥!

-이게 무슨─

짤막한 비명과 함께 바고스의 형제들이 그대로 절명했다.

발밑에서의 암살자.

잔영의 사르트가 즐겨 사용하는 지독한 취미의 암살 방식 중 하나였다.

'이 방식이면 바고스의 형제들을 조용히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았다.

동굴의 구조상, 이 이상 마음대로 땅굴을 파면서 헤집고 다니면 동굴 자체가 무너질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땅굴 파기는 뼈 갑옷의 힘을 꽤 많이 소요시키는 능력이야.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그런 낭비를 할 수는 없지.'

곧, 나는 지상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상이라고 해봐야 여전히 동굴 속이었지만 말이다.

단번에 동굴의 밑바닥을 헤집고 나온 나는 그대로 내가 처리한 바고스의 형제들 둘의 시체를 옆으로 치웠다.

혹시나 누군가 본다면 내 존재가 발각되는 게 더 빨라질 테니 말이다.

'결국 걸리기는 하겠지만 굳이 광고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뼈 갑옷에서 뼈 촉수 두 개를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 바고스의 형제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마물에 의해서 당한 거다.

그걸 완벽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뱀동굴 내부 구조는 기본적으로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다.

애초에 내부 자체가 초대형 마수 중 하나인 '우로보로스'가 오가며 만들어낸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굴 내 곳곳에 놓여 있는 촛불이 비추는 곳을 피해서 어둠 사이로 은밀하게 움직였다.

"웬놈─"

쐐액─!

나는 어둠 속을 거닐면서 바고스의 형제들을 하나씩 사냥하기 시작했다.

"침입─"

대개 그들은 한 단어를 채 내뱉기 전에 명을 달리했지만, 아닌 자도 있었다.

"씨발!"

제법 노련한 강도였는지 내가 뼈 촉수를 채 뻗기 전에 허리춤에서 뽑아든 방아쇠가 먼저 움직였다.

타앙─!

총성이 울려퍼졌다.

물론 그 총알은 경질화된 뼈 갑옷에 너무나도 쉽게 가로막혔다.

"뭐 이딴─"

두 번째 격발은 없었다.

망설임없이 휘둘러진 뼈 촉수가 바고스의 형제들의 목을 단번에 베어갈랐기 때문이었다.

"꺽, 꺽······."

그자는 목을 붙들고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서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저쪽이다!

-움직여 이 굼벵이 새끼들아!

첫 번째 총성을 신호탄으로 뱀동굴 내에서 소란스러움이 일어났다.

'슬슬 걸릴 때가 되긴 했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준비됐지?'

[기잇!]

대답은 잘해요.

"저기다!"

"감히 어느 새끼가 겁대가리도 없이 우리 본진에 쳐들어 왔어?!"

"이쪽이야!"

동굴 내에서 울려퍼지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바고스의 형제들이 나를 발견했다.

"저게 뭐야?"

"···마물? 갈겨!"

"씨발!"

그들에게 망설임이란 없었다.

당겨진 방아쇠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총탄이 쏟아졌다.

콰카카카캉!!!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나는 천천히 그들의 장비를 살폈다.

'화기의 수준은 기껏해야 1성에서 2성 장비 수준인가. 이 정도야 거뜬하지.'

아크의 기본 보급품에도 못 미치는 수준 이하의 장비들로 내가 지닌 뼈 갑옷을 뚫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깡, 깡깡!

빗발치는 총알 중 그 어느 것도 쿠프의 가면과 뼈 갑옷을 뚫지 못하고서 튕겨 나갔다.

"악!"

"이런 씨발, 도탄이다!"

오히려 몇몇 바고스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쏜 총알의 도탄에 맞아서 쓰러졌다.

"뭐 이런 병신들이 다 있어?!"

"도탄은 알아서들 피해라 좀!"

"바주카 가져와! 총으로는 못 뚫어!"

그것참 좋은 생각이다.

중화기라면 아무리 뼈 갑옷이 단단하더라도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 올 테니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여기 앉아서 순순히 그걸 맞아줄 때의 이야기겠지만.'

뿌득, 뿌드득─

다리 근육이 마치 스프링처럼 튕겨지며 내 몸이 날아갔다.

오렌지 라인 병사 수준에 다다른 신체 능력과 더불어서 2레벨에 다다른 에테르 감응력으로 인한 강체 능력.

거기에 더해서 9성에 다다른 뼈 갑옷의 신체 보조까지 합쳐지자 내 움직임은 정말로 마물을 방불케했다.

"씨발 온다!"

나는 양 손에 든 뼈 촉수 두 개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어차피 저들이 지닌 화력으로는 내 방어를 뚫지 못하니 남은 건 마음껏 날뛰는 것뿐이었다.

"크악!"

"이런 개새─"

"쏴! 쏘라고!"

총성이 연신 울리며 총알들이 쿠프의 가면과 뼈 갑옷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나에게 그럴듯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예전 같았다면 총알의 운동 에너지가 내부에 전달되서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겠지만, 뼈 갑옷이 9성이 된 이후에는 그것도 없었다.

뼈 갑옷이 충격을 완전히 흡수해준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이건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나는 온갖 방법으로 바고스의 형제들을 도륙해 나갔다.

양손에 들린 뼈 촉수로 베어 가르기도 하고, 혹은 전신에서 무수한 뼈 촉수들을 뿜어내며 고슴도치처럼 그들을 꿰어 죽이기도 했다.

"괴, 괴물······."

푹!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바고스의 형제들이 절명하고, 전투를 방자한 학살이 끝이 났다.

그 순간.

"감히 누가!"

동굴 저편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쿵! 쿵!

거칠게 울려퍼지는 발소리.

얼핏 들어도 상당한 무게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겠군.'

강탈자 바고스.

그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냐? 내 형제들을 죽인 게?"

나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물이 말을 하면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상위 마물들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꽤 있지만.'

뭐어, 그건 그거고······.

나는 조금 전에 바고스가 들고 온 익숙한 모양의 중화기를 바라보았다.

N256 미니건.

이 시대를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과거의 장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한 명 정도 갈아버리는 건 일도 아닌 중화기임에는 확실했다.

드르륵─

미니건의 총구가 서서히 회전을 시작하더니, 이내 거침없이 총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N256 미니건이 분당 쏟아내는 총알의 숫자는 약 6000발.'

그런 무식한 물건에 정면으로 맞게 되면 아무리 뼈 갑옷이라 할지라도 안에 있는 나에게 가해지는 충격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맞아줄 때의 이야기겠지만.'

내가 좁은 동굴 내부를 이리저리 입체적으로 움직이면서 총구를 피하자, 이내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해.'

내 의지에 감응한 다수의 뼈 촉수가 어깨 위로 솟아나며 이윽고 바고스를 향해서 쇄도했다.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쐐애애액─!

"흥!"

그러나 날아든 뼈 촉수들은 이내 쏟아지는 총알들이 만들어낸 탄막에 의해서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아무리 시기가 시기라고 해도 바고스는 바고스라는 건가.'

물론 방법은 있었다.

지상 위가 탄막에 의해서 공격할 방법이 없다면, 다른 곳으로 공격하면 될 뿐.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땅굴 파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바닥에 멈춰설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체념으로 받아들였던 건지, 바고스가 코웃음쳤다.

"드디어 포기했나 보군! 이 빌어먹을 마물 새끼, 다진 고기로 만들어주마!"

드르륵─

다시금 미니건이 거칠게 회전하며 거침없이 총알이 쏟아졌다.

콰카카카카!!!

더는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곧장 뼈 촉수들을 뿜어내서 전신을 감쌌다.

일전에 에테르 폭풍을 견뎌냈던 방법이었다.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깡!

깡깡깡─!

나를 둘러싼 뼈 촉수를 향해 총알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으나, 뼈 촉수는 더욱더 단단히 나를 막아섰다.

아무리 N256 미니건이라 할지라도 9성의 뼈 갑옷이 작정하고 방어에 나서면 뚫어낼 방법은 없었다.

"저건 또 뭐야?"

바고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잠시 빈틈이 드러난 순간.

쐐애애액!!!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하에서 솟구친 뼈 촉수가 단번에 바고스가 쥐고 있던 미니건을 꿰뚫었다.

콰드득!

N256 미니건의 잔해가 흩어지기 무섭게 나는 뼈 촉수들을 거둬들이고는 곧장 바고스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끝이다.'

내가 손에 쥔 뼈 촉수로 바고스를 꿰뚫으려던 순간.

[키득······.]

조심스레 들려오는 비웃음 소리.

나는 그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지이잉!

내가 살며시 몸을 빼기 무섭게 섬광 하나가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오, 피했나?"

나는 바고스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알아볼 수 있었다.

'플라즈마 소드.'

일개 도적단 두령이 가지고 있기에는 조금 과한 물건인 것 같았지만, 바고스가 훗날 어떤 인물이 되는지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로서는 조금 귀찮아진 셈이었다.

'흐음.'

지금 내가 지닌 장비들 중에서는 플라즈마 소드와 근접 전투를 벌일 수 있을 만한 장비가 없다.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한다면.

'한번 해볼까.'

아직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현재 내가 지닌 장비 중에서 굳이 플라즈마 소드와 대적할 수 있는 장비를 꼽자면 이것뿐이었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15분 16초.]

바고스가 달려든다.

"나한테 이걸 꺼내게 했으니, 곱게는 못 뒈질 거다!"

손끝에서 자연스럽게 뽑혀 나오기 시작한 칠흑의 창이 플라즈마 소드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이잉!

"어, 어떻게 플라즈마 소드를······."

그러게, 나도 조금은 놀랐다.

'설마 이것까지 버틸 줄이야··· 역시 엥켈렌스의 일부라는 건가.'

플라즈마 소드는 거의 못 자르는 게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절삭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런 플라즈마 소드와 맞대고도 창의 이가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플라즈마 소드의 출력이 줄어들었다는 건······.

'엥켈렌스의 창은 플라즈마 소드가 지닌 절삭력 이상의 강도를 지니고 있다.'

이 정도면 사실상 파괴할 수 없는 물질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바고스가 플라즈마 소드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 어떤 기술도, 절제도 없는 공격에 내가 당해줄 리가 만무.

이내 자연스럽게 휘둘러진 앵켈렌스의 창이 너무나도 쉽게 플라즈마 소드를 쳐내고는, 곧이어서 바고스의 목을 꿰뚫었다.

"꺽, 꺽··· 이 개새······."

풀썩.

[단신으로 '바고스의 형제들'을 처치하였습니다!]

[투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6 -> 7]

[당신이 '바고스의 형제들'을 처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시, '바고스의 형제들'과 적대하는 세력의 우호도가 상승합니다.]

'대충 됐나.'

바고스가 플라즈마 소드를 가지고 있던 건 조금 의외긴 했지만,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서 저걸 다시 써먹기는 어려울 듯했다.

플라즈마 소드는 강력한 위력만큼이나 정밀한 도구였기에 내구도 면에서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쌀 지경이군.'

그렇다고 해서 바고스를 어설프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다른 거라도 챙기기 위해서 바고스의 품을 뒤적거렸다.

'별 건 없네.'

그렇게 내가 뒤돌아선 순간.

'음?'

내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주변의 에테르가 동요하고 있는 걸 발견한 뒤였다.

[그녀가, 그녀가 와······.]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끼에에에에에에에───!!!]

[아아아아아아아!!!]

에테르가 거칠게 요동친다.

무언가, 온다.

"긱, 기기긱······."

그와 함께 쓰러져 있던 바고스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이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죽은 바고스가 되살아난 게 아니었다.

바고스는 분명히 숨이 끊어졌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뿐.

'···강신 현상.'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이 영산 노아처럼 에테르 농도가 짙은 장소도 아니고, 갑자기 강신 현상이라니?

'갑자기 왜?'

그러나 나는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일어난 바고스에게서 익숙한 분위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흐응······."]

바고스의 입에서 겹쳐서 울려퍼지는 에테르 파동.

나는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림자단의 일원이자,

타인의 신체를 강탈하는 마물.

["이 자를 죽인 게 너인가요? 제법 마음에 드는 장난감이었는데······ 이것 참 곤란하네요. 죽여 버리고 싶게."]

깃드는 자, 에스더(Esther).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 바고스의 형제들 (2) > 끝

그림자단에는 첩보 및 잠행을 주로 맡은 이들이 있다.

잔영의 사르트와,

깃드는 자, 에스더.

비록 이들은 그림자단 내에서 전문적인 전투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지닌 힘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잔영의 사르트 같은 경우에는 타티아나 벨로프가 이끄는 네이비 라인 출신의 특수 기동 타격대의 합공을 받고도 유유히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거기에 더해서 특히나 에스더 같은 경우에는 고위 유령종 특유의 불멸에 가까운 생존력과 까다로운 공격 방식 탓에 시나리오 후반부에도 암약하는 존재였다.

["최근에 꽤 재미있게 가지고 놀고 있던 장난감인데··· 이렇게 망가뜨린 책임은 어떻게 질 셈이죠?"]

그렇기에, 더욱더 이런 곳에서 만나서는 안 될 이 이기도 했다.

'···에스더가 대체 왜 여기에서 나타나지?'

내가 알고 있기에 바고스의 형제들과 그림자단 사이에는 그럴듯한 접점이 없다.

적어도 바고스의 형제들이 본격적으로 활개 치기 시작하는 실크로드 시나리오에서는 그렇다.

애초에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섣불리 바고스의 형제들부터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스더는 바고스를 장난감이라고 했다.'

이로써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 정도.

'즉, 이때 까지만 해도 바고스와 접점이 있었지만 나중에 가서 질렸다는 건가.'

에스더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장난감이라는 말도 그렇고, 에스더는 재밌어 보이는 게 있으면 일단 가지고 노는 아주 나쁜 버릇이 있었으니까.

나로서는 타이밍이 꽤 안 맞았다고 볼 수 있었다.

["흠, 흐흠······."]

바고스의, 정확히는 그 안에 깃든 에스더의 시선이 나를 보았다.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

["너, 인간이군요."]

역시 에테르에 민감한 유령종답게 에스더는 단번에 내가 인간이라는 걸 꿰뚫어 봤다.

아무리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며 보아도 진짜배기 고위 마물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

나는 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미 들켰다고는 해도 저 추론에 확신을 더해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내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있다.'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내 존재가 벌써부터 그림자단에게 발각됐다가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여기서 입을 막는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전투를 피할 수는 없다.

상대는 깃드는 자 에스더.

그림자단 내에서도 적잖은 영향력을 지닌 존재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실험탄 GHOST-157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 놓는다.'

물론 실험탄 GHOST-157을 사용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에스더를 내쫓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에스더라도 에테르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실험탄 GHOST-157에 맞아본 경험은 없을 테니까.

문제는, 그럴 경우에 그림자단으로 돌아간 에스더에 의해서 내 존재가 그림자단에 알려질 수밖에 없다.

'에스더를 이곳에서 반드시 잡는다.'

내가 천천히 자세를 잡기 시작하자 바고스에 깃든 에스더의 시선이 나를 흘겨보았다.

["흐흥, 지금 뭐 하는 거죠? 설마 싸우기라도 하려고?"]

나는 대답 대신에 앵켈렌스의 창을 다잡았다.

예상했던 대로 에스더는 나를 아주 크게 얕보고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 정도의 전투력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어머, 진짜로 그럴 생각?"]

에스더의 입이 길게 쭉 찢어졌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찢어졌다.

어차피 이미 죽은 육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마구잡이로 변형하는 모양새였다.

["재미있네."]

에테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단순히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만으로 주변 에테르가 동요할 정도의 존재감.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때린다───]

어느새 눈앞에서 실체화된 거대한 에테르 덩어리가 주먹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걸 본 순간 본능이 외쳤다.

'막으면··· 죽는다.'

애초에 저걸 물리적인 방법으로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

나는 전신을 뼈 갑옷으로 보호한 채로 그대로 최대한 옆으로 피했다.

콰아아앙─!!

주먹이 동굴 벽면을 후려치자, 사방으로 돌 파편이 흩날리며 뱀동굴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단순히 의지만으로 행한 에테르 뭉치가 저 정도의 물리력을 발휘하다니··· 직접 보고도 기가 질리는 장면이었다.

흩날리는 흙먼지와 돌가루 속에서 나는 여전히 바고스의 껍데기를 쓴 채로 여유만만해 보이는 에스더를 바라보았다.

'우선, 지금 에스더가 머물고 있는 바고스의 육체부터 완전히 파괴한다.'

이런 상황에서 실험탄을 제외한 무기를 아낄 수는 없었기에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샷건 모드로 변경했다.

지이잉─

철컥, 철컥.

["역시, 인간이었네."]

에스더가 히죽 웃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언제까지고 내가 마물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걸리기도 했었고.

["그러고 보니 사르트가 어떤 인간한테 당했다고 하던데··· 왜일까? 나는 지금 그 인간이 막 떠오르려고 하네? 같은 스컬 나이트인 것도 그렇고. 너 말이에요."]

누가 에스더 아니라고 할까 봐 참으로 귀신 같은 눈치였다.

아니, 귀신이 맞나?

뭐가 됐든지 간에 에스더와 입씨름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에 대한 대답 대신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러나, 에스더를 향해 날아든 산탄은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멈춰.]

요동치는 에테르.

허공에 멈춰선 산탄들.

["숙녀를 향해서 그런 흉악한 걸 쏘면 어떻게 해?"]

숙녀는 개뿔이······.

그러나 불평을 토해낼 틈은 없었다.

에스더의 손끝이 가볍게 멈춰선 산탄을 밀자, 이내 산탄들의 방향이 바뀌었다.

쐐애애액!!!

산탄이 날아들었다.

나는 다급히 방아쇠를 당겨서 상쇄를 시켜보려 했으나, 총알로 총알을 맞춘다는 게 말처럼 쉬울 리가 만무했다.

깡!

까가강!

날아든 산탄들이 쿠프의 가면을 비롯한 내 전신을 두들겼다.

바고스의 형제들이 쏘아낸 총알에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뼈 갑옷이 들썩이며 엄청난 충격이 내 몸을 강타했다.

"콜록! 콜록!"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그러나 에스더는 내 사정 따위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제2 격을 날려왔다.

["그러고 있으면··· 너 죽어요."]

그 말마따나 곧이어서 날아든 돌 파편들이 나를 향해서 쇄도했다.

쐐새새색─!!!

'막아!'

[기잇!]

이건 못 피한다.

그 사실을 직감한 내가 뼈 기생체에게 명령하자, 전신에서 돋아난 뼈 촉수가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쾅!

콰캉! 쾅!

마치 대포가 몸을 두들기는 듯한 충격.

이마저도 에스더에게 있어서는 마치 노는 것과도 같았으니, 에스더와 나 사이의 전력 차이가 얼마나 극심한지 알 수 있었다.

'아직, 아직이다.'

혀에서 쇠 맛이 났다.

아무래도 입안이 터진 모양.

입안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피멍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려 9성 등급의 뼈 갑옷 내에 충격이 전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격이었다.

'개 같은······.'

목구멍까지 욕지거리가 차올랐으나 나는 애써 참아내고서 조심스레 SW-01 스왑형 탄창의 버튼을 눌렀다.

딸깍-

그리고는 Ark-15 샷건을 자동소총 모드로 변경하고는 거침없이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니까 그건 안 통한단─"]

그야 그렇겠지.

애초에 정직한 공격이 통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쑤우우욱─!!!

이내 땅밑에서 치솟은 뼈 촉수.

["잔재주를······."]

에스더가 가볍게 뼈 촉수를 쳐내려고 했으나, 그녀의 손에 휘감아진 에테르가 뼈 촉수에 맞으며 흩어졌다.

["응?"]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에스더가 다급히 힘을 모으려 했지만, 이미 뼈 촉수는 그녀의 지척까지 다다른 이후였다.

마치 심연을 머금은 듯한 칠흑빛의 창이 에스더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에스더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막는다. 멈춘다. 정지한다. 움직이지 않는다.]

에테르 폭풍이 일어나며 쇄도하던 앵켈렌스의 창이 에스더의 코앞에서 멈췄다.

["제법 재밌는 잔재주였어요. 너도 할 땐 하잖아요?"]

에스더가 한껏 여유를 부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철컥-

총구가 겨눠진다.

목표는 바고스의 전신.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타타타탕───!!!

["고작 총알 따위로 뭘 어쩌시려고요?"]

다시금 에스더의 손이 움직였다.

엥켈렌스의 창으로 에스더의 시선을 잠시 빼앗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가 얻어낸 틈은 아주 찰나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해.'

총알이 궤적을 그린다.

그중 몇십 발은 에스더가 막아냈으나, 그렇지 못한 총알도 있었다.

단지 몇 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카카카카카캉────!!!!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폭발탄과 에스더가 맞닿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동굴이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아니,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A-985 폭발탄은 본래 대인용으로 개발된 탄환이 아니다.

어지간한 탄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는 마수와 마물들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개발된 탄환.

아무리 물리적 타격에 거의 면역인 유령종이라 할지라도 쓰고 있는 껍데기까지도 무사할 수는 없다.

에스더에게 닿은 폭발탄은 고작 몇 발.

하지만 에스더를 품고 있는 바고스의 육체를 날려버리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하하··· 이거 당했네. 이런 걸 숨겨두고 있었어요?"]

이미 팔다리가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너덜거리는 바고스의 얼굴이 히죽히죽 웃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질리는 광경이었다.

["아깝게도 이 장난감은 더 이상 못 쓰겠네요. 너무 너덜너덜해졌어. 대체 남의 걸 이렇게 고장내면 어쩌자는 거에요?"]

바고스의 육체는 이제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아니, 애초에 시체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효율상 썩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마침 쓸만한 게 있는 것 같네요?"]

에스더의 눈에서 붉은 빛이 흘렀다.

그와 함께 바고스의 몸이 허물어지며 에스더가 바고스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나는 재빨리 허리춤에 있던 HE2050 권총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이미 내 앞에 없었다.

'어디에 있지?'

최대한 감각을 집중했으나, 이미 주변의 에테르는 모조리 에스더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기에 내가 에스더를 추적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순간.

[키득······.]

귓가에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딜 보는 거야?]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기분 탓이 아니었다.

에스더는, 바로 내 근처에 있었다.

쑤우우욱───!

느껴진다.

무언가, 내 안에 들어왔다는 게.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체내에 있는 에테르가 격렬히 반항했다.

하지만 상대는 고위 유령종.

지금 내 수준으로 품고 있는 에테르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시끄러워요.]

짤막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와 함께 체내에 있던 에테르가 비명을 내지르며 제압당했다.

[끼익!]

[깍──]

[끅!]

그리고 마치 뱀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어디 보자··· 이야, 이번 장난감은 제법 튼실하겠는데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육체가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끅!"

[버텨봤자 소용없어요. 너는 이제 내꺼라니까요?]

"지랄, 하지, 마······."

[아아, 칼 마커스. 나의 칼 마커스. 너의 기억이 너무나도 탐스러워요.]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소름이 끼쳤다.

[너의 기억 속에 있는······ 어?]

내 기억을 훑던 에스더가 멈췄다.

아주 찰나의 틈.

하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틈이었다.

나는 정신력을 짜내고 짜내서 간신히 HE2050 권총을 들었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겨눴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었다.

[······어머, 지금 뭐 하는 거죠? 자살이라도 하려고요?]

머릿속에서 에스더의 조소가 울려퍼졌다.

내가 그 질문에 답했다.

"아니."

체크 메이트.

< 깃드는 자, 에스더 > 끝

철컥.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바로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앙─!

총성과 함께 발사된 총알이 그대로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멍청한······.]

머릿속에서 조소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니, 피조차 나지 않았다.

애초에 실험탄 GHOST-157는 물리적인 피해를 거의 입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 어, 어? 꺄아아아악!!!]

이내 머릿속에서 에스더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대체, 무슨, 짓을──]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역시 고위 유령종답게 한 발 정도는 거뜬히 버티는 듯했지만, 내가 고작 한 발로 끝낼 리가 만무했다.

타앙!!

한 발, 두 발, 세 발.

총성이 연신 울려퍼지며 실험탄 GHOST-157가 내 관자놀이를 계속해서 때렸다.

"···큭!"

골이 울린다.

아무리 물리적인 타격이 고무탄 수준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관자놀이에 대놓고 쏘면 당연히 아프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실험탄 GHOST-157에 맞고 있는 에스더만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끼야아아악─!!!]

머릿속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내 골이 다 울릴 지경이었으나 나는 방아쇠를 당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타아앙!!!

[무슨, 무슨 짓을······.]

에스더의 목소리에서 내내 느껴지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당황을 넘어서 경악까지도 느껴질 정도였다.

[서, 설마 실험탄이 양산화에 성공했다고? 그럴, 그럴 리가──]

역시 아크 내의 사정에 밝은 그림자단답게 실험탄 GHOST-157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

다만, 에스더가 모르고 있는 게 있다면 여전히 실험탄 GHOST-157는 양산화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제 에스더는 그 사실을 영영 알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나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그만, 제발··· 그만!]

탕!

[끼야아아악!!!]

"······윽."

대체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긴 건지는 몰라도, 나에게도 신체에 가해지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단순히 실험탄의 물리적인 타격뿐만 아니라 에스더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확실히··· 질겨.'

깃드는 자, 에스더는 마물로서 분류하자면 1급 유령종에 해당한다.

유령종 중에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최상위 마물에 해당하는 만큼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에스더가 나에게 빙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취했다면 설령 실험탄 GHOST-157가 있다고 한들 절대로 나는 에스더를 이토록 쉽게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 졌지.'

이 정도로 안 죽는다면,

죽을 때까지 쏘면 될 뿐.

타앙─!!!

또다시 방아쇠가 당겨졌다.

[끼야아아아아악───!!]

방아쇠가 연신 당겨지며 내 몸속에 있는 에스더의 존재가 점차 줄어들어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지금까지 에스더의 존재에 짓눌려 있던 에테르들이 다시금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

[죽어버려······.]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꺼져.]

느껴진다.

내 몸속에 숨어든 불청객이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잃어 버리고 있다는 게.

일어난 변화는 비단 주변 에테르의 변화뿐만이 아니었다.

에스더 본인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사뭇 풍겨왔다.

[이제, 이제 그만하자. 그래. 응?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이쯤에서──]

물론 내가 그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지만.

탕!

[꺄아아아아악!!]

대체 몇 번의 방아쇠를 당긴 건지 이제는 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멈출 리가 만무했다.

[너, 너, 이제 그만 좀 해!]

싫은데.

타앙!

[꺽, 꺽······.]

머릿속에서 연신 날뛰던 에스더의 목소리가 점차 멎어갔다.

그만큼 실험탄으로 인해서 존재를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이제 힘이 많이 약해졌어.'

등급으로 치면 4급 정도는 될까.

본래 에스더가 1급 유령종에 해당하는 고위 마물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엄청나게 약해진 것이다.

'이제, 끝낸다.'

나는 다시금 총구를 겨누었다.

목표는 역시나 관자놀이.

같은 곳을 연신 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느덧 피가 조금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자, 잠깐!]

에스더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금 방아쇠가 당겨졌다.

타앙─!!!

[아파, 아프다고······!]

에스더의 존재감이 더 약해졌다.

이제 에스더의 힘은 약 5급 수준.

몇 번만 더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끄윽······."

머리가 어지럽다.

아무리 강인한 육체라고 할지라도 총알을 이렇게 얻어맞으면 당연히 멀쩡할 리가 만무했다.

[나, 나갈 거야. 나갈 거야······.]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느낀 걸까.

에스더의 일부가 나를 벗어나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총구를 돌려서 내 몸을 벗어난 에테르를 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탕!

[끼야아아악!!!]

그와 함께 내 몸을 벗어났던 에스더의 일부가 곧 흩어지며 주변의 에테르에 흡수되었다.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넌··· 이제 내꺼야.]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더 줘.]

한때 1급 유령종으로서 에테르계의 최상위 포식자였던 깃드는 자 에스더는 이제 이름 모를 에테르들에게 자신의 일부를 뜯어 먹히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마치 들판에 놓여진 사자의 시체가 무리를 이룬 하이에나들에게 물어뜯기듯이 말이다.

[잠깐, 내 말 좀, 말 좀 들어봐요. 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반항도, 도주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건지 이제 에스더가 타협을 시도했다.

하지만 내가 그에 응할 리가 만무했다.

타앙!

재차 방아쇠가 당겨지며 에스더의 에테르가 흩어졌다.

[꺽, 끅끄으윽······.]

물론 나도 이제는 한계였다.

이대로 무식하게 방아쇠를 더 당겼다가는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만약 정말로 기절이라도 했다가는 기껏 거의 다 잡아놓은 에스더를 놓칠 수도 있었다.

[너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그래, 나는 알아!]

끝을 모르고서 당겨지던 방아쇠가 잠시 멈췄다.

에스더의 말 때문인 건 당연히 아니었고, 단순히 내가 한계를 느껴서였다.

[그래, 말로, 말로 하자고······.]

이대로 무시해봤자 에스더가 도망칠 궁리나 할 게 뻔했기에 나는 협상에 응하는 척 말했다.

"무슨 말?"

[칼 마커스, 난 알아··· 네 목적. 그래, 안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지?"

내 목적은 간단하다.

더 디펜스를 클리어하는 것.

그걸 위해서 아크를 지키는 것.

새삼스레 협상의 여지가 있는 목적 따위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내 기억을 좀 봤나 본데, 그딴 걸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을 줄 알았나?"

내 목적과 그림자단의 존재는 서로 이율배반적이다.

물론 그림자단은 이용하기에 따라서 분명히 아크에도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지만, 그건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힘이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위협일 뿐.

지금 내가 깃드는 자 에스더를 소멸시키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허세, 부리지 마··· 너가, 얼마나 부족을 위하고, ······을 찾으려는지 알아. 나는, 안다고요······.]

그제야 나는 내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에스더가 읽은 기억은 내 것이 아니었다.

칼 마커스의 기억.

곧, 에스더가 말하는 목적 역시도 칼 마커스의 목적이라는 이야기였다.

'칼 마커스의 목적이라고?'

그런 게 있던가?

이 부분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칼 마커스가 어떤 과거와 배경을 지녔는지,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무척이나 제한된 정보뿐이었다.

'흐음.'

에스더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단순히 내 시선을 돌리려고 하는 거짓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이걸 나에게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재료로 보았을 수도 있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무엇이 됐든지 간에 칼 마커스의 과거는 지금의 내게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약간의 휴식을 마친 나는 다시금 총구를 겨누었다.

[자, 잠깐─]

기다려 줄 필요는 없다.

재차 방아쇠가 당겨졌다.

탕!!!

[꺄아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아프다잖아! 내가 아프다고 몇 번을 말해!]

분노는 에테르를 증폭시키는 큰 원동력 중 하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주변의 에테르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그래 봤자······.'

내가 재차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갑작스레 내 앞에 겁에 질려 있는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여자 애?'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전혀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러한 등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환각.'

그러나 보통 환각은 아니었다.

이미 저 모습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에스더.'

겉모습에 속을 필요는 없었다.

물리적인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유령종에게 외견은 그다지 의미 없다.

그럼에도 에스더가 평소에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순전히 그게 타인을 기만하기에 더 좋기 때문이다.

'허튼 수작이지.'

이제 에스더의 힘은 처음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해졌다.

마물로 말하자면 거의 7급 유령종 수준까지 떨어진 셈.

앞으로 방아쇠 몇 번이면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다시 총구를 겨눴다.

이제 모든 걸 끝내려는 순간.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죽이지만 마요··· 나, 아직 죽기 싫어. 없어지기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눈앞의 소녀, 에스더가 빌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녀석이 저렇게 말하고 있는 데 단번에 방아쇠를 당길 정도로 모질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당황했다.

"······뭐?"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가.

깃드는 자, 에스더.

무려 1급 유령종의 마물로서 더 디펜스가 진행되는 내내 그림자단의 일원으로서 아크 내외로 암약하며 어떨 때는 플레이어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또 어떨 때는 그 무엇보다도 성가신 장애물로도 등장한다.

그런데, 그 에스더가 지금 내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니?

나조차도 깃드는 자 에스더를 소멸시켜 본 경험이 몇 번이 채 되지 않았으니, 이 모습이 사뭇 낯설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런 건가.'

유령종 대부분이 그렇지만, 사실 1급 유령종쯤 되면 그 존재 자체가 거의 불멸이나 다름없다.

즉, 이미 죽은 존재라고 치더라도 막상 죽음이 닥쳐온다는 위기 자체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굳이 내가 에스더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에스더를 소멸시키면 끝.

그게 지금의 현실이었다.

철컥-

다시금 총구가 겨눠졌다.

[자, 잠깐만요! 너, 아니 선생님! 무, 무슨 일이든지 할게요!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총구가 멈췄다.

설마 하니 에스더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무슨 일이든지 한다고?"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 네! 그러니까 제발······.]

'흐음.'

이게 단순한 기만이든지, 아니면 진실이든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그 말을 강제로 실천시킬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내 말이 이어지자, 에스더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 깃드는 자, 에스더 (2) > 끝

"너를 종속(從屬)하겠다."

내가 말을 내뱉기 무섭게 에스더가 동요하며 주변의 에테르가 함께 떨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종속? 나를? 감히? 인간 따위가?]

만약 에스더가 본래의 1급 유령종 수준의 힘을 갖추고 있다면 감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제는 거의 8급 수준까지 떨어진 에스더라면 나에게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도 가능할 터.

[그, 그건··· 그러니까······.]

에스더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지금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종속(從屬).

말 그대로 깃드는 자 에스더를 내가 품은 에테르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에스더는 존재 자체가 내 의지에 종속된 채로 내가 다시 풀어주지 않는 한 영원히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조금 전까지 뭐든지 하겠다고 말했던 에스더가 망설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싫으면 그냥 죽고."

철컥.

[자, 잠깐만요! 잠깐, 잠깐만 시간을······.]

비록 당장은 8급 수준까지 힘을 잃었다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1급 유령종.

거기다가 보통의 1급 유령종이 아니라 네임드를 넘어서 거의 보스(Boss)로 분류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을 지닌 마물이다.

지금도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본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실제로 그럴 수 있기도 하고.'

그런데 나에게 종속을 당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설령 이후에 에스더가 힘을 되찾더라도 그건 내 힘의 일부가 강해지는 결과일 뿐이지, 에스더라는 독립된 개체로서 강해지는 게 아니다.

비루한 삶이냐, 당당한 죽음이냐.

이미 반쯤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유령종에게는 조금 우스운 이야기였으나, 어쨌거나 지금 에스더에게는 저 두 가지 선택권밖에 남지 않았다.

'종속은 나한테도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깃드는 자 에스더 정도라면 어지간한 리스크는 감내할만해.'

만약 이런 방식이 무조건적으로 이득이었다면 나는 일전에 들렀던 제놀란 동굴에서 유령종 사냥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유령종에 대한 종속은 상당히 리스크가 크다.

우선, 완벽하게 해당 유령종의 의지를 제압해야 한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이지가 갖춰지지 않은 유령종은 제압한다 한들 죽을 때까지 달려들 테니 종속을 시도할 수 없다.

두 번째로는 설령 유령종을 에테르의 일부로 받아들인다고 한들 내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는 유령종을 상대해야 한다.

그건 지금처럼 밤에 잠을 못드는 수준은 가볍게 넘어설 터.

즉, 내가 종속을 시도하는 것도 상대가 그만한 가치가 있기에 리스크를 짊어지는 거지 어지간한 유령종에게는 그럴 생각도 없었다.

[으읏······.]

머리카락과 같은 은빛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생긴 외모였으나, 저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물리적 형체가 없는 유령종에게 외견은 그다지 의미가 없고, 무엇보다도 앞서 말했듯이 에스더가 굳이 저 모습을 평소에 고집하는 건 단순히 상대를 기만하고 방심시키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생각할 시간을 너무 오래줬나보군."

내가 방아쇠에 살며시 힘을 주자, 그제야 깃드는 자 에스더가 부랴부랴 손을 내저었다.

[하, 할게요! 그렇게, 할게요······.]

"못 믿겠는데."

[진짜, 진짜예요!]

깃드는 자 에스더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고 이용하는 데 능하다.

어설프게 상대하고 틈을 내주었다가는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올 터.

그렇기에 나는 어설픈 협박 대신에 확실한 내 의지를 전했다.

"허튼 수작을 부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부려라. 단, 그에 대한 대가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다."

[으웃······.]

파르르 떨리는 에스더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물론 기만이다.

애초에 생리 작용도 없는 유령종이 흘리는 눈물이 진짜 눈물이겠는가.

저건 그저 보여주기 위함일 뿐이다.

'자, 그러면······.'

나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내 의지에 감응한 에테르가 조금씩 꿈틀거리며 깃드는 자 에스더를 감싸기 시작했다.

[키득······.]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우린, 이제 함께야······.]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주위의 에테르가 조금씩 에스더를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스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유령종 같은 정신체에 있어서 언약(言約)은 이미 하나의 정식적인 계약이나 다름없다.

이미 말을 내뱉은 이상,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우읍······!]

에테르가 에스더의 몸을 감쌌다.

1급 유령종.

내가 지닌 에테르 감응력으로는 근처에 가기만 해도 에테르가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깃드는 자, 에스더는 약해졌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면 내가 지닌 에테르로도 충분히 에스더를 종속시킬 수 있었다.

[키득······.]

그우우우우───!

작은 에테르 폭풍이 일어난다.

서서히, 깃드는 자 에스더의 존재가 나에게로 종속되어 갔다.

[에스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에스더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어떻게 내 이름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 잠깐─]

에스더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이내 일어난 에테르 파동이 에스더의 영체를 덮쳤다.

[깍─────]

느껴진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가 나의 일부로 자리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

깃드는 자, 에스더가 나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고오오오오오오─────

주변의 에테르가 소용돌이쳤다.

거대한 격을 지닌 마물이 자신의 주체성을 버리고서 귀속되려 한다.

그 여파가 작을 리가 만무했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왔다.]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에스더.]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우린 하나야.]

거칠게 파도치는 에테르 속에서 마침내 에테르의 파동이 점차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내 깃드는 자 에스더의 존재가 나에게로 완전히 종속되었다.

[1급 유령종, '깃드는 자, 에스더'를 종속시켰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고위 마물을 종속시켰습니다. 영혼들이 당신을 우러러보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17 -> 21]

[에테르 감응력이 'Lv.3'에 도달하였습니다.]

['방출(放出)'을 습득하였습니다.]

──────────────

[방출(放出)] [Lv.1]

에테르를 순간적으로 방출하여 주변에 에테르 파동을 일으킨다.

"상세 보기"

──────────────

['강체(强體)'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

[강체(强體)] [Lv.3]

에테르를 받아들여 신체를 강화한다.

"상세 보기"

──────────────

'호오······.'

예상했던 대로 에스더를 종속시키자 에테르 감응력이 크게 늘어났다.

비로소 타티아나 벨로프와 같은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가 된 것이다.

'방출과 강체.'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가 되면서 나는 드디어 방출 능력을 손에 넣었다.

이제 나는 하기에 따라서 에테르를 임의로 방출하며 에테르 파동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에테르를 통한 원거리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해진 것이다.

강체 능력이 레벨 3을 달성하면서 몸이 한결 가벼워진 건 덤이었다.

'확실히··· 에테르 감응력의 성장세가 보통이 아니야.'

물론 다른 능력치 역시도 성장이 빠른 편이긴 했으나, 에테르 감응력 같은 경우는 아예 궤가 달랐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네이비 라인의 소령이자 특수 기동 타격담당관인 타티아나 벨로프가 레벨 3의 에테르 적합자다.

즉, 이를 바꿔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에테르 감응력만큼은 네이비 라인의 소령급에 비할 수 있을 정도라는 거다.

'칼 마커스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는 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알면 알수록 칼 마커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의구심이 쌓여갔다.

조금 전에 에스더가 했던 말도 그렇고, 이 비정상적인 에테르 감응력의 성장세도 그렇고.

'그냥 야만 부족의 후예가 아니었나?'

아무래도 여유가 생긴다면 레드 라인에 있을 터인 쿠릴타를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일단 우선도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은 일이니··· 나중에 찾아보면 되겠지.'

더군다나 굳이 멀리 쿠릴타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에스더에게 내 기억 속에서 무얼 봤느냐고 물어보면 어느 정도 단서는 얻을 수 있을 터.

"일어나라."

내가 천천히 에테르를 움직이자 어느덧 나에게 종속된 에테르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깃드는 자 에스더였다.

[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아까 나에게 빙의를 시도했던 것처럼 끔찍한 목소리가 아니라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거, 망했네요.]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저게 원래의 말투였는지는 몰라도 에스더는 평소처럼 차분한 말투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참, 적응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그런 것치고는 태연한데."

[울고불고 짠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에스더의 목소리에서 체념이 뚝뚝 묻어났다.

그 말마따나 이제 에스더는 내가 풀어주지 않는 이상 나의 일부로서, 나의 에테르로서 종속된 채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근본이 무려 1급 유령종인 만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다른 에테르들에 뒤섞여서 자기 자신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에스더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웬만하면 없을 테지만.'

나로서도 에스더가 가급적이면 주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게 좋았다.

무려 1급 유령종이자 그림자단의 일원인 에스더는 나에게 있어서 아주 유능한 수족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

"순순히 받아들인다니 다행이군."

[딱히 그뿐만은 아니에요. 너에게 제법 흥미가 생겼거든요.]

지나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특히나, 호칭부분이.

"너?"

상황이 이토록 달라졌는데도 처음과 같은 뻣뻣함이라니······.

아무래도 호칭 정리를 겸해서 서열 정리를 조금 해둘 필요성이 느껴졌다.

[지금 뭐 하려는─]

에테르가 들썩였다.

그리고 이내 주변에 있는 에테르가 형태를 갖추더니 이내 에스더의 머리에 꿀밤 한 대를 먹였다.

[따콩!]

[아얏!]

유령종은 실험탄 GHOST-157을 제외한 물리적인 타격에는 거의 면역이지만, 같은 에테르로 행한 공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물며 에스더는 이제 나에게 종속된 신세였으니 반항이나 회피 따위는 당연히 불가능했다.

[아파아······.]

에스더가 울상을 잔뜩 지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에스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내 머릿속을 조금 시끄럽게 만드는 것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내가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 금세 제재를 당하겠지만 말이다.

[···으읏. 그러면 뭐라고 불러요?]

"너만 빼고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흐음··· 그러면 주인님?]

"······뭐?"

에스더가 키득 웃었다.

[아, 이런 취향이었구나? 알았어요. 주인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라."

[부끄러워하기는.]

에스더는 그 뒤로도 한참을 쫑알거렸다.

아무래도 귀찮은 녀석이 들러붙은 듯했다.

아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귀신 들렸다고.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었다.

< 깃드는 자, 에스더 (3) > 끝

해야 할 일이 끝났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됐다는 뜻이다.

'음.'

돌아가기에 앞서, 나는 바고스의 형제들의 거처에 있는 물건 중 값어치가 될 만한 것들을 슬쩍 챙겼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것들을 싹 다 긁어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가방의 용량에 한계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마물의 소행으로 보이는 건 반쯤 물 건너 갔어.'

에스더와의 전투 과정에서 너무 많은 탄을 발사했다.

일반적인 탄들뿐만 아니라 폭발탄까지도 사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저 모든 걸 뒷정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서 여길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값진 건 역시 바고스의 비밀 금고 안에 있겠지.'

어려울 건 없었다.

이미 뱀동굴 내의 지리는 완벽하게 꿰고 있었으니까.

'바고스의 비밀 금고의 위치는······.'

나는 기억을 더듬어서 뱀동굴 내에 있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바고스의 비밀 금고로 향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동굴 벽처럼 보이지만, 내가 벽면을 살짝 밀자 벽면이 열리며 기계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는 방법은 몇 가지 기계 장치를 순서에 맞게 조작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것들이었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끼익, 끼익-

덜컹─

마침내, 바고스의 비밀 금고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던 것도 그렇고, 우리 주인님께서는 꽤 아는 게 많은가 봐요? 이건 나도 몰랐는데.]

"그런 편이지."

호칭에 대한 문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괜히 그 부분에 대해서 물고 늘어져 봤자 더욱더 집요하게 파고들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성격은 더럽게 나빠 가지고.'

바고스는 악명 높은 도적답게 아직 스테이지 초반부임에도 불구하고 꽤 값나가는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서 보았던 플라즈마 소드도 그렇고, 이제는 멸망한 크로노스제 장비들도 있었다.

'호오······.'

아크 내에서야 크레딧이 화폐로 사용되지만, 아크 바깥에서는 총알을 비롯한 현물들만이 가치를 지닌다.

당연히 바고스가 지닌 재물들 역시도 현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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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 플라즈마 소드] [★★★★★(5성)]

아크제 기본형 플라즈마 소드.

강한 절삭력을 지녔다.

다만, 에너지 효율이 썩 좋지 않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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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N-017] [★★(2성)]

크로노스의 기본 보급형 자동 소총.

기본에 충실하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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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OM-07] [★★★(3성)]

크로노스제 점착 폭탄.

부착 후 일정 시간이 지나거나 별도의 조작 시 폭발한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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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제법 쏠쏠한 물건들이 손에 들어왔다.

'이건 모래바람 상단한테 팔면 될 것 같고··· 이건 아크에 팔면 되겠군. 몇몇 개는 내가 직접 써도 괜찮겠어.'

솔직히 말해서 아직 초반 스테이지라서 이런 부가 수입에는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건만, 예상보다 바고스의 주머니가 두둑했다.

'대충됐나.'

챙길만한 건 다 챙겼다고 느낀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괜히 뱀동굴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건 없었으니 말이다.

[···아주 탈탈 털어가시네요.]

"어차피 이젠 주인 없는 물건이니까."

[뻔뻔도 하시고. 우리 주인님.]

에스더가 귓가에서 이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바고스의 형제들의 시체들을 뒤로한 채로 마침내 뱀동굴을 나섰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능하다면 저 안에서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그게 깨어날 수도 있으니.'

내가 괜히 뱀동굴에 있는 걸 내내 찝찝해한 게 아니었다.

"네가 봤다는 기억, 어떤 기억이지?"

[···으응? 기억? 무슨 기억이요?]

"아까 나에게서 무슨 기억을 봤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요? 그랬나? 기억이··· 잘.]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내가 HE2050 권총을 꺼내서 에스더에게 겨누자, 에스더가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아, 진짜 기억 안 난다고요! 아까 주인 너가 내 머리를 날려 버렸잖아요!]

그것도 그러네.

유령종에게 머리를 날리는 게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중요한 건 그로 인해서 에스더의 일부가 사라진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실험탄 GHOST-157에 맞으면서 에스더의 일부와 함께 기억까지도 소실된 모양.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또 에스더에게 내 머릿속을 보여주기에는 좀 그렇고······.'

비록 지금은 약해져 있다지만, 그 본질은 그림자단의 일원이자 1급 유령종인 깃드는 자 에스더다.

순순히 내 기억에 접근하는 걸 허락했다가는 에스더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으니, 영 내키지 않았다.

내 정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는 없어도,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에스더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 말이다.

'역시 쿠릴타를 만나봐야 하는 건가.'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칼 마커스의 과거에 대한 건 우선 순위상 그다지 급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단지 그뿐.

지금 나에게는 그것말고도 해야 할 일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우선, 돌아가야겠지.'

예상치 못하게 에스더와 투닥거림을 하느라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잡아먹었다.

안 그래도 돌아가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다음 웨이브가 닥쳐오기까지의 시간이 아슬아슬한 상황.

이 이상 여유를 부릴 틈은 없다는 뜻이다.

[돌아가려고요?]

"그래."

[아크를 이런 식으로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주인님께서는 어느 라인 출신이신지?]

"나는 아크 출신이 아니다."

[······네?]

그러고 보니, 내 거주지가 어디인지 에스더에게 소개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마, 유령종인 에스더에게 있어서는 썩 좋지 못한 소식이 될 테지만 말이다.

"나는 영산 노아에서 살고 있다."

[그게 무슨······.]

에스더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령종인 에스더에게 영산 노아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모를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만 가지."

[잠깐! 잠시만요오!]

*

어느덧 밤이 깊었다.

아크는커녕 영산 노아 바깥에서 노숙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밤에도 멈추지 않고서 이동했다.

이런 밤 중에 불빛을 냈다가는 금세 마수들이 몰려들게 뻔했기에 나는 달빛에 의지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 그대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니나 다를까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옆에서 귀신이 속삭였다.

[저기··· 주인님?]

"뭐."

이동하는 내내 시끄럽게 구는 통에 이제는 상대하는 게 귀찮았다.

[꼭 영산 노아에서 살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제가 꽤 아늑한 장소 몇 군데를 알고 있는데······.]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온종일 이에 대해서 떠들어댈 게 분명했기에 나는 확실히 못을 박아둘 필요성을 느꼈다.

"레이먼드 구릉지와 구 크로노스 지대, 그리고 잊혀진 사원을 말하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갈 생각 없으니까."

[그걸 대체 어떻게······.]

그림자단에게는 몇몇 거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는 게 잊혀진 사원이고, 나머지 두 곳 역시도 자주 활용하는 장소 중 하나다.

[······주인님, 대체 정체가 뭐에요?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는 거죠?]

그림자단은 아직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는 이야기.

에스더로서는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알 거 없어."

[하 진짜 치사하게··· 이제부터 한솥밥 먹을 처지인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에스더는 나에 대해서 하나둘씩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에스더에게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말해주어도 그다지 상관은 없다는 이야기.

하지만······.

"귀찮다."

[읏··· 진짜 너무하네.]

에스더가 한껏 불쌍한 척을 하며 은빛의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그나저나 실체화는 언제까지 하고 있을 셈이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그 말마따나 에스더는 나에게 종속된 이후에 꾸준히 실체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힘을 잃었다 하더라도 에스더쯤 되는 유령종에게 실체화를 유지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눈에 거슬리는 건 사실이었다.

에스더는 이미 나에게 종속된 신세니 굳이 저렇게 실체화를 해서 눈에 거슬리지 않고도 나와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면 외로울까봐 일부러 길동무 해주려고 한 건데, 제 배려를 이렇게 몰라주시나요?]

"필요 없다. 애초에 혼자도 아니고."

[그건 저를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이신지? 저랑 있어서 외롭지 않다, 그런 거죠?]

에스더가 부끄럽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았다.

물론 정말로 부끄러울 리는 없고, 그냥 평소에 하던 기만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니."

내 단호한 대답과 함께 뼈 기생체가 짖었다.

[끼잇!]

에스더는 뼈 기생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스컬 나이트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나에게 종속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네요. 저 친구가 있었네. 앙증맞은 게 확 깨물어 주고 싶어.]

[기깃.]

대체 말이 통하는 건지 안 통하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에스더와 뼈 기생체는 같은 마물답게 꽤 죽이 잘맞는 듯했다.

'이동하는 데 시간이 꽤 많이 들어. 아무래도 슬슬 이동 수단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다면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 같은 걸 구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아크 내에서도 특수 기동 타격대 같은 특별한 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탑승물이다.

물론 공적치를 모은다면 어떻게 구하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과연 이동 수단에 다량의 공적치를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 하면 나로서는 의문 부호가 찍힐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것뿐인가.'

내가 조만간 이동 수단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이상하다······.]

"뭐가."

[분명히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네요.]

"그러면 말을 말든가."

아무튼, 도움이 안 된다.

[아니, 정말로 중요한 거였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그게 문제에요. 기억이 안 나요. 하필이면 누가 머리를 날려버리는 바람에······.]

"말을 말지."

그게 뭔지는 몰라도 에스더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니 분명히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뭔지를 알아야 대책을 세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닌가.

'설마 그건 아니겠지?'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스쳐지나갔다.

조금 전에 뱀동굴 안에서 과할 정도로 날뛰었던 게 생각나서였다.

내가 뱀동굴을 안전한 장소로 여기지 않는 가장 큰 이유.

그곳에는, 아직도 주인이 있다.

[으으음······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에스더가 내내 신경을 거스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평범한 지진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주변에 있는 에테르가 날뛰었다.

[끼익, 끼기긱───]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도망가자.]

[무, 무서워······.]

에테르가 요동치는 가운데 에스더가 말했다.

[아, 기억났어요!]

"···참 빨리도 해내네."

[뱀동굴이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려고 했어요. 분명해요!]

에스더의 말대로였다.

이 부근에서 이런 거대한 진동이 일어날 만한 일이라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쿵!

쿠우웅─!!

거대한 굉음이 울려퍼지고,

[끼에에에에에에에───!!!]

이내 천지를 뒤흔드는 끔찍한 울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주인님, 이거 어떻게 해요?]

우로보로스(Ouroboros).

뱀동굴의 주인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 우로보로스(Ouroboros) > 끝

아크 바깥은 광활하다.

당연히 그곳에는 각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주인들이 있다.

지역의 주인들.

오파쿰의 늪지대의 오파쿰.

대산림의 숲의 주인.

범람하는 강의 수신(水神).

갈라진 사막의 불멸자(Immortal).

그외 등등······.

뱀동굴의 우로보로스 역시도 그러한 지역의 주인 중 하나였다.

내가 뱀동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우로보로스의 존재를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바고스의 형제들과 그림자단이 연관되어 있고, 거기에 에스더가 나타날 줄은 몰랐을 뿐이지.

'본래였다면 우로보로스가 깨어나는 건 훨씬 더 나중의 일이어야 했건만······.'

애석하게도 뱀동굴 내에서 하도 시끄럽게 군데다가, 에스더가 에테르 파동까지도 뿜어낸 탓에 긴 잠에 빠져 있었던 우로보로스가 깨어나고 말았다.

[끼에에에에에에───!]

멀찍이서 다시금 우로보로스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으, 으으······.]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도망, 도망가자······.]

에테르가 요동쳤다.

에스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에스더 같은 경우에는 울부짖음보다는 칭얼거림에 가깝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주인님, 우리 망했는데요?]

"흠."

[아니, 흠흠 거리지 말고요!]

에스더는 이제 나에게 종속되었다.

즉,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에스더 역시도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

본래였다면 웬만하면 죽음을 겪을 리 없는 불멸성을 지닌 에스더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러울 터였다.

[뭐라도 좀 해봐요! 주인님 이렇게 그냥 죽을 거예요?!]

당연히 아니지.

쿵!

쿵! 쿠쿵──!

느껴진다.

저 멀리에 있는 뱀동굴이 무너져 내리고, 그곳에 있는 주인이 오랜 잠을 깨고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건 바고스의 형제들의 뒤처리는 걱정할 필요 없어졌다는 점 정도인가.'

우로보로스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으니, 보나 마나 뱀동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곳에 있는 바고스의 형제들의 시체나 흔적 같은 건 이제 찾기 어려울 터.

아니, 오히려 우로보로스라는 확실한 원인이 생겨났으니 이 부분은 나에게 있어서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바고스의 형제들을 누군가 죽였다는 의혹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직 뱀동굴과 내가 있는 곳 사이에는 적잖은 거리가 있다.

하지만 우로보로스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여기까지 오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우로보로스는 아직 내가 지닌 화력으로는 잡을 수 없는 상대야.'

설령 얼마 전에 공적치를 주고서 구매한 중화기들을 모두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우로보로스의 등급을 마수로 분류하자면 등급 외 마수에 해당한다.

스테이지 보스(Boss)급의 마수.

실제로도 시나리오를 진행하다 보면 히든 스테이지의 보스로 출현하는 마수이기도 했으니 딱히 틀린 분류도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도망간다.'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영역을 웬만하면 잘 벗어나지 않는 마수다.

즉, 일단 도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우로보로스 역시도 머지않아서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갈 거라는 이야기.

"에스더."

[이제야 내 말 좀 듣네. 어서 도망가요. 네? 여기 있으면 죽어요!]

"저거 잘 달래서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할 수 있지?"

[···제가요?]

"그래, 네가."

깃드는 자, 에스더.

비록 지금은 그 힘이 많이 약해졌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다.

온전한 힘을 가진 에스더라 할지라도 우로보로스를 물리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잘 어르고 달래서 원래 있던 동굴로 돌려보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허어.]

에스더는 멍청한 눈으로 나를 끔뻑끔뻑 바라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주제에 참으로 인간다운 제스쳐였다.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까지 주인님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하······ 진짜. 죽지마요. 죽으면 나한테 죽어요. 알았어요?]

"그래."

순전히 자기 보전을 위한 염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일단은 걱정은 걱정이었으니까.

[진짜 뭣 빠지게 도망쳐요. 알았죠?]

"알았다니까."

쓸데없는 한마디를 덧붙인 에스더의 몸이 서서히 흩어졌다.

실체화를 거두고서 에테르의 형태로 우로보로스에게 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이상 페이스 배분 따위를 신경쓰고서 이동을 할 여유는 없었다.

'너도 도와.'

[기깃!]

츠츳, 츳─!

뼈 갑옷과 5레벨 에너지원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며 신체 능력 보조가 거의 최대치로 활성화되었다.

덕분에 한동안 뼈 기생체가 배고프다고 난리를 치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한밤중의 도주가 시작됐다.

쿵! 쿵!

그러는 와중에도 저 멀리 뒤쪽에서 우로보로스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비록 어둠 속인 터라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진동만으로 우로보로스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동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대로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따라 잡힌다.'

물론 에스더가 우로보로스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을 테지만, 힘을 잃은 지금의 상태로는 쉽지 않을 터.

'최악의 경우에는 실패할 수도 있고.'

그렇기에 나로서도 단순히 도망만 칠 수는 없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즉, 우로보로스를 돌려보내는 데에는 달콤한 당근뿐만이 아닌 채찍도 어느 정도 필요했다.

'단순히 화만 돋우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면 되겠지.'

짐승의 공격성은 생존본능에서 기인한 것이다.

상대가 나를 해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곧 공격성을 만드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면, 네 목숨도 걸어라.

나는 우로보로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잠시 멈춰서서 총구를 돌렸다.

['저격수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Ark-15 대물 저격총이 어둠을 응시했다.

거창하게 조준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우로보로스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대충 방향만 맞춰서 쏴도 맞을 테니까.

'저쪽인가.'

방아쇠가 당겨지고,

쐐애애애액────!

총구가 바람을 토해냈다.

총알이 궤적을 그린다.

장전된 총알은 A-985 폭발탄.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간 총알이 마침내 목표물에 닿은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끼게에에에에엑!!!]

멀찍이서 들려오는 흉포한 비명.

고통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아무리 A-985 폭발탄일지라도 초대형 마수이자 등급 외 마수인 우로보로스의 비늘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귓가에서 에스더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스더의 존재는 이미 나에게 종속되어 있었으므로 거리가 떨어져도 언제나 소통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에스더는 내가 선공에 나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라."

[지금 총질 해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얘 지금 화났잖아! 설득하라면서 총질을 하면 어떻게 해요?!]

"그냥 말로해서 돌아갈 상대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건······.]

에스더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멈췄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우로보로스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마요.]

쿵!

쿵! 쿵쿵!

진동이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아무리 강체와 뼈 갑옷의 보조가 있다고 한들, 인간의 두 다리로 달리는 이상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떻지?"

[······몰라요.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총알이 더 필요하다는 거군."

[네?]

철컥-

[자, 잠깐만!]

에스더의 목소리가 다급히 들려왔으나 나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쐐애애액!!!

이번에는 한 발이 아니었다.

A-985 폭발탄을 장전한 총구가 연신 불꽃을 토해내며 다가오는 재앙을 향해서 저항의 불꽃을 뿜어냈다.

쾅!

콰카카캉─!!!

[끼이이익··· 키에, 키에에에!]

우로보로스의 비명이 커졌다.

이번에는 단순히 분노뿐만이 아니라 고통도 어느 정도 섞여 있는 비명이었다.

[아니이······!]

귓가에서 들려오는 에스더의 비명 섞인 외침 속에서, 진동이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달렸으나, 그 진동이 가까워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초대형 마수의 이동 속도는 인간의 두 다리로 벗어나기에는 너무나도 빨랐다.

[조심해요!]

"······쯧."

나는 다시 뒤돌아서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쐐애애애액!!

콰카캉─!!!

폭발의 일어난 장소가 가깝다.

일어나는 불꽃 속에서 서서히 칠흑빛의 비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급 외 마수, 우로보로스.

뱀동굴의 주인이자 훗날 히든 스테이지의 보스로도 등장하는 초대형 마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스───

몸을 뉘어서 세상의 끝에 닿을 것만 같은 압도적인 크기를 지닌 마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제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는 300m가 채 되지 않았다.

우로보로스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코앞이나 다름없는 거리였다.

[아, 아아아······.]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흐익, 끄이익······!]

에테르가 거칠게 요동치며 우로보로스에 대한 두려움을 표했다.

물론 나도 두려운 것 사실이었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을 비롯한 투지 능력치 덕분인지 애써 진정할 수 있었다.

'···과연.'

이렇게 눈앞에서 녀석을 보니 더욱더 확신이 들었다.

우로보로스와의 전투는, 애초에 고려할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키에에에에!]

우로보로스가 괴성을 내지르며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덩치에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다가온 거체가 단번에 덮쳐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온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대로 깔려 죽기 직전, 나는 다급히 뼈 갑옷에게 의지를 전했다.

'숨어!'

['땅굴 파기'가 발동합니다.]

내 몸이 아슬아슬하게 땅굴 밑으로 파고들기 무섭게 우로보로스의 몸이 내 위를 덮쳤다.

콰아아앙─!!

덕분에 우로보로스에게 깔려죽는 건 피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키이이이이······.]

느껴진다.

지금 우로보로스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게.

아무래도 놈의 화가 풀리려면 어중간한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을 듯했다.

[조심해!]

에스더의 경고와 함께 우로보로스의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도대체 저 거체가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나 싶을 정도.

문제는, 지금 치켜 올라간 꼬리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내려쳐 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안 피하고 뭐해!]

"시끄럽다."

쐐애애애액──!!!

이대로 땅속에 숨어 있다가는 그대로 땅굴이 메몰되어서 죽을 게 뻔했기에 나는 다급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쿠우우우우웅─!!!

우로보로스의 꼬리가 대지를 내리치며 거대한 기파가 일어났다.

콰카카카카───!!!

"큭!"

간신히 꼬리의 범위에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기파로 인해서 내 몸이 날아갔다.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크레이터.

이게 정말로 일개 생명체가 만들어낸 일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지닌 탄으로는 우로보로스의 비늘을 뚫을 수 없다.'

'그나마 타격을 줄 수 있는 부위는 눈이나 입이 벌어졌을 때 정도.'

'하지만 그때를 노린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어.'

우로보로스를 죽이는 건 불가능.

치명상을 입히는 것도 불가능.

"상황이 어떻지?"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는 애를 건드려 가지고······.]

"엄밀히 말하면 깨운 건 너다."

[그러니까 그 깨운 애를 왜 더 건드냐고요!]

"해야 할 일이나 해라."

상황은 대충 예상했던 대로였다.

어차피 우로보로스를 돌려보내는 게 쉬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획은 여전히 같았다.

우로보로스의 돌려 보내는 것.

다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과격한 방법을 써야할 것 같았다.

'우로보로스쯤 되는 마수를 상대로는 거의 통하지 않겠지만······.'

아주 잠깐의 틈을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나는 뼈 촉수를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땅에 처박았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19분 33초.]

< 우로보로스(Ouroboros) (2) > 끝

분명히, 엥켈렌스의 영역은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건 등급 외 마수이자 지역의 주인인 우로보로스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잠깐의 틈은 만들 수 있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당장이라도 나를 깔아뭉갤 것처럼 날뛰던 우로보로스의 움직임이 잠깐이지만 멎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그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타다닥─

나는 우로보로스에게로 향했다.

이 이상 도망만 다니면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자, 잠깐! 지금 뭐 해요?!]

귓가에서 에스더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서 우로보로스에게로 향했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10분 5초.]

왼손에서 뻗어 나오는 칠흑빛의 창.

공교롭게도 우로보로스의 비늘과도 같은 색의 창이었다.

[키이이이······.]

우로보로스의 눈에 다시금 흉험한 기세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꺄아아악!]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속에서 나는 거침없이 우로보로스의 몸에 올라탔다.

물론 그냥 올라타기에는 비늘이 너무나도 미끄러웠기에 나는 뼈 갑옷과 엥켈렌스의 창을 이용해서 비늘 사이를 붙잡고 버텼다.

[키이이이이······!]

그렇게 내가 우로보로스의 몸에 올라타기 무섭게 우로보로스의 몸이 거칠게 일어났다.

엥켈렌스의 영역으로 인한 효과가 끝이 났다는 뜻이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해제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19분 25초.]

이 이상 엥켈렌스의 영역을 펼쳐나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하고는 우로보로스의 몸을 붙들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으로 우로보로스를 붙을 수 있는 시간은 약 8초.'

그러는 와중에도 에스더가 외쳤다.

[거, 거길 대체 왜 매달려요?! 당장 내려와요!]

애석하게도 지금은 저 칭얼거림에 일일이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에!]

마치 나를 떼어 내려는 듯이 우로보로스의 몸이 거칠게 움직이며 대지에 상흔을 남기기 시작했다.

콰앙!

콰카캉!

움직이는 재해(災害).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크기와 위용 속에서도 나는 꿋꿋이 우로보로스의 비늘을 붙잡고서 차근차근 몸을 기어올랐다.

[끼에에에에에에───!!!]

우로보로스의 움직임이 점차 격해졌다.

이대로 우로보로스가 몸을 뒤집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대로 깔려 죽을 게 분명했기에 나는 엥켈렌스의 창을 등산용 폴로 삼은 채로 필사적으로 우로보로스의 몸을 올랐다.

"···큭!"

그렇게 우로보로스의 몸을 오르던 내 시야에 마침내 그토록 찾고 있던 목표가 보였다.

우로보로스의 비늘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거꾸로 선 비늘.

'역린(逆鱗).'

본래 역린은 용종에게서나 발견되는 공통적인 약점이다.

하지만 우로보로스는 분류상 용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용종의 특색 중 하나인 역린이 있다.

이에 대해서 한때 유저 커뮤니티에서는 우로보로스가 사실은 용이 되려는 이무기가 아니냐 하는 추론들이 오갔으나,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여타 용종들이 그렇듯이 역린은 우로보로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다.

다른 비늘과는 달리, 역린의 비늘은 반대로 돋아난 탓에 비교적 쉽게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우로보로스의 비늘은 아크제 합금보다도 단단하고 플라즈마 소드만큼이나 날카롭지만, 비늘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남는 건 곧 우로보로스의 약점이 된다.

[너······ 아니, 주인 너 설마 저걸 노리려는 건 아니죠?]

왜 아니겠어.

나는 대답 대신에 손아귀에 힘을 준 채로 그대로 당기는 힘을 이용해서 뛰어올랐다.

그렇게 발밑에 엥켈렌스의 창을 내버려둔 채로 오게 되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 해제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9분 35초.]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9분 34초.]

소환 해제 후 재 소환.

이런 류의 장비로 사용할 수 있는 테크닉 중에서 매우 유용한 테크닉 중 하나였다.

[끼에에엑!]

그러는 사이에도 우로보로스의 몸이 더욱더 거칠게 요동쳤다.

쾅!

콰카캉!

우로보로스의 몸이 거칠게 움직이며 주변이 휩쓸려 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비늘 사이에 박힌 엥켈렌스의 창과 주변의 비늘들을 붙든 뼈 갑옷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텨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우로보로스의 몸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망할.'

쉬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우로보로스의 몸이 돌아가는 것에 맞춰서 어떻게든 깔려 죽는 비참한 꼴을 피하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끼긱, 끼기긱······.

내 의지에 감응한 뼈 기생체가 엥켈렌스의 창에 즉석으로 만들어낸 뼈 고리를 걸었다.

마치 쇠사슬처럼 연결된 엥켈렌스의 창을 내가 다잡았다.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파아아앙!

거칠게 일어난 파공음과 함께 내 모든 신체 능력과 뼈 갑옷의 보조가 합쳐진 엥켈렌스의 창이 날아갔다.

'아무리 엥켈렌스의 창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우로보로스의 비늘을 꿰뚫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

그렇기에 창끝이 날아든 목표 지점은 비늘 사이였고, 다행히도 비늘 사이에 박혔다.

나는 엥켈렌스의 창에 매달린 뼈 고리들을 붙잡고서 우로보로스의 몸을 기어올랐다.

그 순간.

쒸이이이익!

내가 매달려 있는 우로보로스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너, 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나를 매단 채로 우로보로스의 몸이 대지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일어난 거대한 기파가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재해라 부르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크윽!"

당연히 그 위에 매달려 있는 나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로보로스가 자기 몸을 땅에 내리쳤을 뿐이지만, 충격은 온전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콰앙! 쾅! 쾅!

우로보로스의 몸이 땅을 향해서 마구잡이로 내리쳐졌다.

'망할 뱀새끼가······.'

나는 비늘 사이에 박힌 엥켈렌스의 창을 지지대로 버티며 Ark-15 대물 저격총을 다잡았다.

목표는 우로보로스의 눈.

물론 맞춘다고 한들 우로보로스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럴듯한 피해는 주지 못할 테지만, 지금 날뛰는 녀석을 잠시 잠잠하게 만들 수는 있으리라.

철컥.

거침없이 방아쇠가 당겨졌다.

쐐애액!

총알이 궤적을 그린다.

이내 총알이 우로보로스의 눈에 적중하며, A-985 폭발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아니 또 이런 짓을······!]

[케에에에엑!]

우로보로스가 분노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비명에 비해서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무리 A-985 폭발탄이라 할지라도 발사대가 Ark-15인 탓에 등급 외 괴수종에게 그럴듯한 피해를 주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깐의 틈은 얻었다.'

여전히 우로보로스가 날뛰고 있기는 했어도 조금 전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뼈 촉수를 뽑아들었다.

본래 송곳 토템이 영역을 발휘하는데 필요한 제약은 대지에 직접 성물을 꽂아 넣는 것이다.

그 제약은 송곳 토템을 흡수한 뼈 갑옷에도 이어져서,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뼈 촉수를 땅에 내리꽂아야 했다.

하지만, 꼭 직접 꽂아야 할까?

나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날아든 뼈 촉수가 대지에 박힌 순간.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19분 24초.]

우로보로스의 몸이 다시금 멈췄다.

아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가 우로보로스를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약 8초.

7초.

나는 엥켈렌스의 창을 다잡은 채로 우로보로스의 역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라면··· 할 수 있다.'

6초.

[아니, 대체 아까부터 무슨 짓을 하려는─]

5초.

뿌득, 뿌드드득──!

나는 엥켈렌스의 창을 다잡은 채로 목표 지점을 바라보았다.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에테르까지도 응집시켰다.

[던진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기이이익!]

['방출(放出)'이 발동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엥켈렌스의 창을 투척했다.

파아아앙────!!

거칠게 일어난 파공음.

마치 섬광처럼 뻗어 나간 한 줄기의 어둠이 우로보로스의 역린 사이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단지 그뿐.

역린을 떨어뜨리는 데는 실패했다.

'부족했나.'

남은 시간은 약 2초.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 해제한 뒤에 다시 던질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든 뒤에 엥켈렌스의 창이 박혀 있는 역린을 조준했다.

'엥켈렌스의 창과 역린의 사이.'

탄착 지점을 정한 나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쐐애애액!

총구에서 작은 불꽃이 일어나며 총알이 발사됐다.

1초.

발사된 총알이 역린에 꽂힌 엥켈렌스의 창 옆에서 폭발나며,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우로보로스의 역린이 떨어져 나갔다.

[키에에에에에에엑───!!!]

우로보로스에게서 처음으로 분노가 아닌 고통의 울음이 터졌다.

"이제 네 몫이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에스더의 주특기 중 하나는 대상이 지닌 감정 중 하나를 증폭하는 것이다.

지금 우로보로스의 감정 중에서 에스더가 증폭할 감정은 뻔했다.

'두려움.'

이제 우로보로스도 느낄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키엑, 키에에엑!]

우로보로스의 움직임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나를 죽이려고 했던 우로보로스였으나, 역린이 떨어져 나가며 약점이 드러나자 태도가 바뀌었다.

[뭐해요?! 빨리 거기서 내려가요! 거기 있다가 깔려 죽기라도 하려고요?]

"···나도 안다."

내내 뼈 촉수에 의지한 채로 우로보로스의 비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나는 거침없이 우로보로스 밑으로 몸을 던졌다.

얼핏 봐도 수십m는 될 것 같은 아득한 높이였지만, 추락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받아.'

[기깃!]

그와 함께 전신에서 돋아난 뼈 촉수들이 내 몸을 감쌌다.

그뿐만이 아니라, 에테르 역시도 움직이면서 내가 낙하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받아?]

[받아······.]

쿠웅!

그 덕분에 내가 지상에 추락했을 때는 사실상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멀쩡한 건 아니지만.'

아까 우로보로스가 자신의 몸을 땅에 마구잡이로 내리칠 때 충격 때문인지 몸속이 엉망진창이 된 기분이었다.

"콜록! 콜록!"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끼이이이······.]

내가 지상으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로보로스는 나를 향해서 꼬리를 내리치기는커녕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이게 통하네. 대체 주인 너 정체가 뭐에요? 어떻게 인간이 우로보로스를······.]

"마무리나 잘 해라. 지금 돌아오면 끝장이니까."

[나도 알아요. 설마 내가 자살 같은 거라도 할까.]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유령종들은 특유의 불멸성 탓인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응당 자신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민감하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에스더가 비교적 쉽게 나에게 굴복한 것 역시도 에스더의 최우선 가치가 생존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드디어 끝났나.'

비로소 우로보로스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걸 본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후아······."

만약 조금만 더 어설프게 대응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크 바깥에서 지역의 주인을 마주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마침 에스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봐야 하나······.'

반대로 생각하면 만약 에스더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우로보로스가 깨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쌤쌤인 셈이었다.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를 패퇴시켰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행했다기에는 믿기지 않는 업적입니다! 영혼들이 당신을 칭송할 것입니다.]

[에테르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21 -> 22]

[특성, '공포탄'을 습득하였습니다.]

──────────────

[공포탄]

일정 확률로 대상에게 상태 이상 공포를 유발한다.

"상세 보기"

──────────────

'오호······.'

공포탄 특성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유용한 특성이다.

특히나 이 빌어먹을 세계처럼 온갖 곳에 마수와 마물이 득실대는 세계에서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디 보자··· 대충 이쯤으로 날아갔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땅거죽의 위를 거닐다 보니, 마침내 내가 찾던 걸 찾을 수 있었다.

──────────────

[우로보로스의 역린] ★★★★★★★★★(9성)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의 역린.

일반적인 비늘과는 다르다.

"상세 보기"

──────────────

< 우로보로스(Ouroboros) (3) > 끝

우로보로스의 역린.

말 그대로 우로보로스의 심장을 보호하고 있던 거꾸로 솟은 비늘.

그렇기에 역린은 우로보로스를 비롯한 용종 마수의 약점임과 동시에 가장 특별한 비늘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급소 중 하나를 보호하는 비늘이 보통 비늘과 같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우로보로스의 역린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크제 합금보다도 단단하고,

플라즈마 소드보다도 날카로우며,

에테르 전도율 역시도 뛰어나다.

당연히 이러한 우로보로스의 비늘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아크에 파는 거고, 그다음으로는 가공해서 장비를 만들 수도 있지.'

본래였다면 나도 그중 하나의 방법으로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활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뼈 갑옷의 가치를 새로이 알게 되면서 역린의 사용처 역시도 자연스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게 제일 낫겠지.'

나는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뼈 기생체에게 먹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전부 다 먹이기에는 어딘가 아까운 것도 사실.

'음, 좋아. 그렇게 하자.'

나는 엥켈렌스의 창을 들어서 바닥에 있는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바라보았다.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평범한 상태로도 플라즈마 소드를 압도하는 강도와 경도를 지닌 엥켈렌스의 창이 더욱더 단단해졌다.

그러한 엥켈렌스의 창을 쥔 채로 나는 힘껏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내려쳤다.

깡!

까앙-!

처음에는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반발 작용으로 인해서 엥켈렌스의 창이 튕겨 나왔다.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

하지만 에테르를 최대한 집중하고 뼈 갑옷의 신체 보조 능력까지도 끌어낸 뒤에 같은 곳을 집요하게 노리자, 머지않아서 역린의 가운데가 갈라졌다.

쩌적, 쩍─!

분류로 따지면 엥켈렌스나 우로보로스나 둘 다 등급 외 마수였지만, 같은 등급 외의 마수라 할지라도 엥켈렌스 같은 경우에는 아크 바깥에 있는 주인들 이상의 힘과 격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반으로 조각난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집어들었다.

비록 반쪽짜리긴 해도 뼈 기생체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반쪽짜리를 먹이나 온전한 것을 먹이나 큰 차이는 나지 않을 터였다.

'자, 먹어.'

나는 반으로 잘린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뼈 기생체에게 건넸다.

애초에 자르지 않고서 뼈 기생체가 반만 베어 물면 참 좋겠지만, 뼈 기생체 특성상 전부 다 먹어 치워버릴 가능성이 컸기에 굳이 고생을 하며 자른 것이다.

[기잇!]

뼈 기생체는 혹시라도 줬다 뺐을라 곧장 뼈 촉수를 뻗어서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받아먹었다.

마치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 같은 모양새였다.

까득, 까드득─

뼈 갑옷에서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씹어먹는 소리가 한참 동안 들려왔다.

[기잇, 기이잇······!]

뼈 갑옷이 격하게 떨렸다.

환희, 기쁨, 쾌락.

그외에도 무수한 감정들이 뼈 갑옷을 통해서 전해졌다.

[기깃!]

머지않아서 뼈 갑옷이 들썩이며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완전히 소화했는지,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뼈 갑옷'이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흡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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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갑옷(Lv.5)] [★★★★★★★★★★(10성)]

아크의 장교용 기본 방호복(Lv.5)의 에너지원에 가축화시킨 뼈 기생체를 연결한 방어구.

뼈 기생체의 숙주로 6급 네임드 괴수종 이끼의 쿠프의 심장이 사용되었다.

뼈 기생체의 힘과 이끼의 쿠프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이끼의 쿠프의 피와 살을 섭취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이끼의 쿠프의 힘이 늘어났다.

등급 외 용종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흡수했으나, 아직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할 수 있다.

현재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 : 21.6%

엥켈렌스의 송곳니 흡수율이 15%를 돌파하여,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할 수 있다.

6급 네임드 지하종, 땅굴 파는 뮬의 피와 살을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 힘을 흡수했다.

땅굴 파는 뮬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5급 네임드 영장종, 돌팔매질의 무그를 흡수했다.

돌팔매질의 무그가 지닌 능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등급 외 괴수종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흡수했다.

우로보로스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다.

"상세 보기"

──────────────

무려 10성짜리 방어구.

사실상 아크 내외에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장비의 등급이 8성 정도가 한계라는 걸 생각한다면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성장세가 아닐 수 없었다.

'역시는 역시인가.'

이미 뼈 기생체 자체가 어느 정도 성장한 덕분인지, 송곳 토템을 먹었을 때처럼 흡수율이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우로보로스와 앵켈렌스와 비교하는 게 무리긴 하지.'

우로보로스는 분명히 등급 외 괴수종으로서 지역의 주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엥켈렌스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다른 존재였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이번에 얻은 뼈 갑옷의 새로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의지를 전달했다.

['강철화'가 발동합니다.]

그와 함께 뼈 갑옷의 뼈 촉수들이 우로보로스의 비늘과 같은 칠흑빛으로 물들었다.

단순히 색깔만 바뀐 게 아니라, 마치 보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지기까지 했다.

'이건······.'

강화형 능력.

어찌 보면 이끼의 쿠프를 먹어치우고서 얻은 경질화의 상위 능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단순 상위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것이, 강철화는 경질화와 함께 발동할 수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경질화'가 발동합니다.]

나는 시험 삼아서 바고스에게서 얻은 플라즈마 소드로 경질화와 강철화가 모두 발동한 뼈 촉수를 내리쳤다.

지이잉!

놀랍게도 엥켈렌스의 창도 아닌 일반 뼈 촉수가 플라즈마 소드를 어느 정도 견뎌냈다.

'플라즈마 소드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내구도와 강도라니······.'

물론 플라즈마 소드를 몇 번 더 휘두르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뼈 촉수가 부러지긴 했지만, 애초에 플라즈마 소드를 견딜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거기다가 엥켈렌스의 창 역시도 강철화와 경질화에 영향을 받지.'

보통 상태로도 플라즈마 소드를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닌 엥켈렌스의 창이다.

거기에 더해서 경질화와 강철화까지 적용한다면, 거의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이 탄생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먹은 뼈 갑옷의 능력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후아··· 겨우 돌려보냈네.]

언제 돌아온 건지는 몰라도 어느새 에스더가 내 옆에 자리를 잡고서 뼈 기생체의 촉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잘 끝났나?"

에스더가 툴툴거렸다.

[잠깐 돌려보낸 거예요. 이미 잠에서 깨어났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요.]

"그렇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로보로스를 돌려보는 게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을뿐더러,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이제 우로보로스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생겼으니까.

설사 예정에 없던 히든 스테이지가 발생하더라도 우로보로스를 격퇴하는 게 마냥 어렵지만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와주면 고맙지.'

이미 약점이 드러난 지역의 주인.

그건 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공적치 자판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슬슬 돌아가지."

이미 충분히 이동이 지체됐다.

안 그래도 웨이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사고까지 있었으니, 준비할 시간이 더욱더 촉박해졌다.

[······진짜로 영산 노아에서 살아요? 거짓말이죠? 그쵸?]

아무래도 에스더는 내가 영산 노아에서 살고 있고, 곧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진짜다."

내가 쐐기를 박듯이 말하자 에스더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

그리고는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혹시 이사할 생각 없어요?]

* * *

아크, 레드 라인.

이모샤 중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전에 그녀에게 올라온 보고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일이었다면 이렇게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원격으로 보고를 했을 테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모샤 중위는 그녀의 직속 상관이자 레드 라인 동부 전선 담당 수비대장인 바놀 중령의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라."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 건너에서 돌아오는 바놀 중령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고저도 없었다.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보고하라."

"이번에 이상 반응이 일어난 지역에 출동한 정찰용 소형 드론이 촬영한 장면입니다."

이모샤 중위가 손목의 디바이스를 조작하자 곧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지금으로부터 약 12시간 전, 아크 서쪽 지점에 있는 뱀동굴에서 이상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Red-7 게이트 담당관이 부재중이었기에 제가 대신 지휘를 맡았고, 정찰용 소형 드론을 출동시켰습니다."

"계속하라."

홀로그램 화면에서 나타난 건 몇 장의 사진이었다.

아크 바깥으로 파견되는 소형 드론은 데이터 전송 속도를 감안해서 대부분 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전송된다.

영상과 사진은 애초에 데이터의 크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형 드론이 파괴되기 전까지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센서에 감지된 에너지에 따르면 최소 1급 이상의 마수로 추정됩니다."

"크기와 에너지 반응으로 보면 등급 외 마수로 보는 게 맞겠군. 정확히 무엇인지는 파악했나?"

"현재 레드 라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종입니다. 에너지 반응이나 크기로 보건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지역의 주인'들과 거의 동급의 마수로 추정됩니다."

"좋은 소식은 아니군."

바놀 중령이 시가를 꺼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역의 주인급 마수.

그 존재들이 지닌 강함은 아크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지역의 주인급 마수의 몸에 올라탄 작은 점 하나.

"저게 뭐지?"

"여길 보십시오."

사진이 조금씩 확대되었다.

"인공지능으로 보정한 화면입니다."

그리고 이내 흐려져 있던 사진이 조금씩 보정되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건 인간이었다.

정확히는, 인간의 모습을 한 무언가.

애석하게도 파견된 드론이 마수가 날뛰는 여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중간에 파괴된 탓에 전송된 사진이 많지는 않았다.

"인간인가?"

"아닙니다. 검은 판초를 뒤집어쓴 모습과 주변의 뼈 촉수들로 보건대, 실험탄 GHOST-157의 회수팀이 마주했다는 스컬 턴코트로 추정됩니다."

"스컬 턴코트라고?"

평소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바놀 중령이었지만, 이 보고에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컬 턴코트가 저 마수를 부리는 건가?"

"아닙니다, 아직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니지만 정황상 서로 싸우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이유는? 파악했나?"

"현재로서는 영역 다툼 혹은 생존 경쟁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지역의 주인급 마수와 맞설 수 있는, 최소 1급 이상의 스컬 턴코트가 출현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흔히, 스컬 턴코트를 분류할 때 등급 외로 분류하는 이유는 스컬 턴코트의 강함이 1급 이상이여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개체별로 전투력 차이가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기존 데이터에는 없었던 새로운 지역의 주인급 마수의 출현도 모자라서 그에 맞설 수 있는 스컬 턴코트의 출현이라니······.

바놀 중령이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쓸어내리자, 이모샤 중위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바놀 중령이 탄식을 내뱉었다.

"···더 이상 내 선에서 처리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슬슬 가봐야겠어. 자네도 함께 가지."

"어디로 말입니까?"

바놀 중령이 짧게 답했다.

약간은 먼 곳을 응시한 채로.

"화이트 라인."

< 전야 > 끝

잊혀진 사원.

그곳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의장석에 앉은 단장이 의석을 둘러보았다.

외눈의 크룩스.

변절자 룩.

소피아 벨로프.

오늘 단장의 호출에 응한 단원은 고작 이게 전부였다.

"오늘은 셋뿐?"

"다들 바쁘잖아."

"하긴. 그러면 바로 시작하지."

평소처럼 장난을 치며 빙빙 돌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단장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에스더가 사라졌어."

단장의 말에 의석에 앉아 있던 단원들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지금 단장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었다는 건가?"

외눈의 사내, 크룩스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금발의 여성, 소피아가 언제나처럼 딴죽을 걸었다.

"에이, 설마. 귀신이 어떻게 죽어?"

"귀신이 아니라 유령종이다. 그리고 유령종도 얼마든지 소멸할 수 있다. 단지, 조건이 까다로울 뿐이지."

"그러니까 에스더가 그 평범한 유령종하고 같냐고."

그 둘이 언제나처럼 투닥거리는 동안 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룩이 단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장,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프로젝트 고스트가 성공했다는 건가?"

프로젝트 고스트.

아크의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에서 진행한 대(對) 에테르 병기 프로젝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프로젝트 고스트는 성공하지 못했어. 하지만 에스더는 사라졌지."

소피아가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데 에스더가 어떻게 사라져? 그게 말이 돼?"

단장이 답했다.

"상황을 파악 중이야. 하지만 최악의 경우, 계획을 앞당겨야 할 수도 있어."

깃드는 자 에스더는 단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대뜸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히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소피아의 물음에 단장은 한참이나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더니, 이내 결단을 내렸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룩스, 소피아."

"예, 단장."

"응응. 말해."

"너희 둘은 에스더의 흔적을 쫓아. 그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

"알았어."

단장의 시선이 흑의의 사내, 룩에게 향했다.

"그리고 룩."

그림자단의 단장이 변절자 룩에게 명령했다.

"너는 나와 아크로 간다."

* * *

어느덧 새벽이 밝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우로보로스가 깨어나면서 주변의 마수와 마물들이 모조리 도망간 탓에 이동하는 데 크게 제약은 없었다.

[그거 아세요? 영산 노아처럼 귀신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면 음기가 강해지는데, 음기가 강해지면 이게 또 남자한테 굉장히······.]

거기에 더해서 돌아가는 내내 옆에서 에스더가 하도 쫑알거린 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마냥 지루하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내가 살다살다 현직 유령종한테 귀신 들려서 안 좋은 법에 대한 미신 따위를 듣게 될 줄 알았겠는가.

물론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듯이 저 쫑알거림도 듣다 보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시끄럽다."

[그러니까 노아 말고 제가 아는 곳으로 가자니까요? 훨씬 더 아늑하고, 안전하고, 수세식 화장실도 있는 곳인데 왜 굳이 음산하고 화장실도 따로 없는 산으로 가려는 거에요? 네?]

수세식 화장실에서 저도 모르게 움찔할 뻔했으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에스더의 말에 따르면 당장은 편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게 나중에 가서 내 발목을 붙잡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곳으로 가게 되면 웨이브를 막기가 어려워져. 조금 불편해도 아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나아.'

아니면 아예 아크 안으로 들어가거나.

물론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바깥에서 살다 보니 아크 밖에서 사는 게 꼭 단점만 있지는 않았다.

'만약 나중에 아크 출입이 허락되더라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한 사람으로서 제 몫을 해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병사로 차출되겠지.'

그렇게 되면 내 행동에도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병참 장교 게드윈과의 안면도 트였으니 이렇게 바깥에서 사는 게 꼭 나쁘지는 않았다.

'뭐,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기나긴 평원 지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영산 노아와의 경계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노아다."

[···아, 망할.]

에스더가 투덜거렸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내가 영산 노아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에테르가 들썩거렸다.

[키득······.]

[익숙해······.]

[깃드는 자··· 에스더.]

[그녀가 왔어.]

[그녀가?]

영산 노아의 에테르가 내 주위를 멤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적대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거슬렸을 뿐.

"인기가 많은데."

[···저게 제가 좋아서 저러는 줄 알아요? 대체 나를 얼마나 괴롭혀댈지······.]

"친구끼리 친하게 좀 지내지."

[하! 친구? 내가 저까짓 것들하고요? 내가 이런 꼴만 아니었어도······.]

에스더가 투덜거렸다.

여기부터는 어찌 보면 일종의 안전지대라고 봐도 좋았기에 나는 조금 여유롭게 이동했다.

[저기, 주인.]

"왜."

[꼭 이사를 가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닌데··· 진짜로 여기서 살고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괜찮다."

[···흐음.]

에스더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에스더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좋을 건 없었으니 말이다.

산행이 이어졌다.

영산 노아의 지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미 나에게 있어서는 어느정도 익숙해진 지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은신처에 돌아왔다.

*

은신처에 돌아온 뒤 기절하듯이 쓰러진 내가 일어났을 때는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었다.

내가 엄청나게 피곤했던 건지, 아니면 에스더의 존재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무런 약초를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잠을 설치지는 않았다.

[초대형 마수와의 격전 뒤에 충분한 수면을 취했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5 -> 16]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8 -> 19]

덕분에 능력치가 상승했다.

나는 오랜만에 내 상태를 점검했다.

──────────────

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근력 : 16

체력 : 19

재주 : 14

행운 : 10

투지 : 7

에테르 감응력 : 22

보유 특성 : [강인한 체력], [불면증],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접신], [저격수의 시간], [괴수 사냥꾼], [불살주의], [초심자의 행운], [칼날 탄환], [공포탄]······.

보유 능력 : [강체(强體)(Lv.3)], [방출(放出)(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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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능력치 88.

여기에서 재주와 행운을 빼더라도 무려 62에 달하는 말도 안 되는 능력치였다.

'에테르 감응력이 확실히 큰 역할을 하긴 하지.'

이 정도면 이제 오렌지 라인 후반은 물론이고 하기에 따라서 옐로우 라인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실질적인 전투력을 감안한다면 그 이상에서도 충분히 가능하고.'

그걸 뒷받침 해주는 게 바로 온갖 패널티를 감수하고서 얻어낸 특성들과 새롭게 얻은 특성들이었다.

물론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경우는 종합 능력치가 100이 되면 사라지게 될 특성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요긴한 특성이었다.

'잘 느껴지진 않지만··· 아직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게 특성이 잘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겠지.'

아마 조금 전에 있었던 우로보로스와의 전투에서 우로보로스가 순순히 돌아간 것에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터였다.

행운이란 늘 있을 때는 잘 몰라도 없어지면 그 역체감이 큰 법이었으니까.

나는 아침 식사용으로 멀티 칼로리 바(바닐라맛)을 먹었다.

으적, 으적-

입맛 자체가 하향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예전이었다면 바닐라향으로 느껴졌을 멀티 칼로리 바가 산해진미보다도 더욱더 맛있게 느껴졌다.

'굳이 아껴먹을 필요는 없겠지.'

예전에야 아크와 거래를 할 방법이 없으니 비상식량 용으로 아껴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병참 장교 게드윈과 안면도 텄고, 공적치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정도 사치는 얼마든지 부려도 된다.

'다음에는 요리를 할만한 식재료 같은 것도 구해봐야겠어.'

아크 바깥에는 몇몇 특별한 장소를 제외한다면 마수와 마물을 제외한 동물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아크 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크 안에는 옐로우 라인부터 블루 라인까지 걸친 대규모 경작지와 더불어서 목축도 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원료는 멀티 칼로리 바 등의 원료로 소진되지만, 그렇지 않은 재료들이 있는 것도 사실.

'가격이 꽤 나가긴 하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식재료 같은 건 모래바람 상단 쪽이 오히려 더 싸던가.'

신선도 면에서는 당연히 아크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에 비해서 밀리겠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크게 밀리지 않을 터.

'뭐, 그건 나중에 하고.'

먹는 문제가 중요하긴 했어도 당장 급한 것까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으······ 이봐요, 주인님. 나 진짜 힘들어서 그런데 잠깐 노아 밖으로 산책 좀 하고 오면 안 될까요?]

"그러든지."

[아니이··· 나 혼자 가봤자 소용이 없잖아! 주인 너가 가야죠.]

에스더의 말대로였다.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내가 노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지금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에테르들은 변함이 없을 터.

물론 그건 그거고,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에스더의 징징거림을 일일이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바쁘다."

[하··· 진짜 치사하게. 이러다가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안 생긴다."

유령종인 에스더에게 있어서 영산 노아의 환경이 견디기 쉬운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에테르들이 에스더에게 어떤 직접적인 해를 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깃드는 자 에스더의 본질은 무려 1급 유령종.

어지간한 에테르들은 격의 차이로 인해서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존재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지간한' 수준을 뛰어넘는 에테르들은 이 영산 노아에 사막의 모래처럼 많았지만 말이다.

[에스더······.]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우리랑 놀자.]

[이쪽이야······.]

속삭이는 에테르들.

그에 질린 에스더가 내 곁에 바짝 붙었다.

[아, 진짜 쟤들 좀 어떻게 좀 해봐요! 그 총! 그걸로 확 쏴버리든지.]

"필요하다면 그러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아악!]

에스더가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에스더의 힘은 조금식 회복되어 갔다.

이제 수준으로 치면 거의 6급에 육박할 정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세였다.

'이 정도면 전투에서도 바로 활약할 수 있겠어.'

어디까지나 에스더가 나에게 순순히 협조할 때의 이야기지만, 에스더의 입장에서는 협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어떤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방식 자체가 조금은 일방적일지언정 궁극적인 의미로 이제 나와 에스더는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슬슬 때가 됐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준비는 만반이었다.

[이봐, 주인님.]

에스더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 역시도 지금은 칭얼거릴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알고 있다."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지평선 너머에서 먹구름이 몰려든다.

일반적인 먹구름이 아니다.

마수와 마물로 이루어진 먹구름.

[까악, 까악──!]

[끼기긱!]

세 번째 웨이브가 시작됐다.

< 세 번째 웨이브 > 끝

그우우우우우우───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했건만, 여전히 먹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 떼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무언가 있었다.

그러한 감상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에테르가 거칠게 동요했다.

[도망, 가자······.]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히이이익······.]

에스더가 비웃었다.

[봐봐요. 얘네들한테 쓸데없이 잘해줘봤자 이럴 때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니까? 그냥 그 총알로 확 쏴버리는 게 최곤데. 그 있잖아요, 실험탄 GHOST-157.]

"나중에 필요해지면 네가 싫다고 해도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라."

웨이브 때 에테르가 들썩이는 건 딱히 특정한 무언가를 탓할 상황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어떤 현상에 가깝다.

여기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없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이날을 위해서 준비했던 NOA-8 중기관포와 TITAN-17 대마수 로켓이 설치된 포인트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존에 머물고 있던 은신처에서는 사정거리가 애매했기에 먼저 전선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놓은 상태였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웨이브에 임해도 되겠지.'

지금까지 나는 웨이브를 막을 때 멀리서 저격만 하거나, 마수와 마물들을 영산 노아에 유인하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완벽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언정 어느 정도의 준비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전선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부지런히 움직일 수록 아크가 입는 피해가 줄어든다.'

나는 포인트로 이동하는 동시에 먹구름처럼 몰려드는 마수 군단을 바라보았다.

3급 비행종. 하늘 고래.

5급 거충종, 거대 말벌.

4급 괴암종, 가고일.

'우선, 인사부터 해볼까.'

내가 노리는 건 하늘 고래였다.

하늘 고래는 쉽게 말해서 하늘을 나는 이끼의 쿠프와 비슷한 마수다.

물론 두 마수 간 급수 차이가 차이인 만큼 그 강함은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가진 특성은 거진 비슷했다.

육중하고 거대한 몸집.

몸집만큼이나 두꺼운 가죽.

상대적으로 둔한 움직임.

한마디로 말하자면, 급소를 노리기에 더없이 쉬운 상대라는 점이다.

철컥.

나는 Ark-15 대물 저격총을 겨눴다.

초탄은 관통력이 높은 철갑탄.

목표는 하늘 고래의 눈.

쿠웅─!

총성과 함께 바람을 가르고서 나아간 철갑탄이 하늘 고래의 눈을 향해서 뻗어 나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선제공격으로 인해서 10%의 추가 피해가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Ark-15 대물 저격총의 철갑탄으로는 하늘 고래의 눈을 꿰뚫을 수 없다는 걸.

'그게 한발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초탄을 발사한 뒤 나는 거의 초 간격으로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소음 모드를 해제하긴 했지만, 메이벨 필그림에게 업그레이드를 받은 뒤 대물 저격총의 소음도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쿵!

쿵! 쿠웅-!

칼날 탄환 특성은 적중한 부위의 방어력 감소.

즉, 초탄으로는 뚫지 못할 가죽도 같은 곳을 연속해서 맞추면 뚫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쐐애애애액───!

마치 어미새를 쫓아가는 아기새들처럼 초탄의 뒤를 따라서 총알들이 날아갔다.

여전히 하늘 고래가 움직이고 있는 만큼 그 궤적은 조금씩 달랐지만, 총알이 도착하는 시간은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초탄이 하늘 고래의 눈에 적중했다.

잠시 하늘 고래가 움찔하는 듯했으나 철갑탄은 하늘 고래의 각막을 완전히 꿰뚫지 못했다.

아무리 약점이라 할지라도 고작 한 발로는 저 덩치의 마수의 눈을 완전히 꿰뚫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균열은 생겼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곧이어서 도착한 철갑탄이 하늘 고래의 눈에 일어난 균열에 파고들었다.

[크우우우우우우!]

바로 지금처럼.

그 와중에 나는 빠르게 탄창을 갈아 끼웠다.

갈아낀 탄창은 당연히 현재 내가 지닌 탄 중에서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A-985 폭발탄이었다.

이미 하늘 고래의 약점은 드러났다.

남은 건 약점을 터트리는 것뿐.

쿠웅!

세 번의 방아쇠.

줄이어서 날아간 세 발의 폭발탄.

그것들이 하늘 고래의 균열을 파고들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쾅!

콰캉!

하늘 고래의 눈과 머리에서 울룩불룩한 폭발이 일어나며, 이내 텅 비어버린 눈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3급 비행종, 하늘 고래를 처치하였습니다.]

[3급 비행종, 하늘 고래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이번 전쟁의 시작을 알리기에 딱 적당한 시작인 셈이었다.

[···방금 뭘 한 거에요? 어떻게 하늘 고래를 저렇게 쉽게······.]

"약점을 노렸을 뿐이다."

[···진짜 주인 너 뭐예요? 저런 건 크룩스 같은 이상한 녀석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에스더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확실히 조금 전에 내가 보인 솜씨는 과장을 조금 보태서 신기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나는 경악 섞인 에스더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볼까.'

나는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A-985 폭발탄 덕분에 이제는 원거리 저격으로 3급 마수도 약점을 노리기에 따라서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하늘 고래 같은 경우가 특히나 철갑탄 폭발탄 조합에 취약한 마수이긴 하지만.'

하늘 고래처럼 거대한 몸집과 두꺼운 가죽을 지닌 마수들에게 철갑탄 폭발탄 조합이 유효하듯이 마수와 마물들은 각 개체에 따라서 취약한 탄 조합들이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폭발탄 하나로 그 대부분의 조합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탄의 용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뭐, 그건 그거고······.'

마침내 중화기가 있는 포인트에 도착한 나는 위장막을 거뒀다.

그 사이에 마수 군단 역시도 어느덧 아크의 전선까지 다다라 있었다.

철컥.

달칵, 달칵-

내가 먼저 잡은 건 NOA-8 중기관포였다.

그곳에 장전된 총알은 고작 한발뿐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기관포의 손잡이를 잡은 나는 레드 라인의 전선으로 몰려드는 마수와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케에에에······!]

[끼룩, 끼룩!]

[캬오오오오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수 군단.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위이이잉─

총 10개로 이루어진 중기관포의 총열이 거친 회전을 시작했다.

지이이잉─!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발사 뿐.

콰카카카카카카───!!!

중기관포가 몰려드는 마수 군단을 향해서 거친 불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총구에서 연신 쏟아지는 붉은 섬광은 마치 플라즈마 병기를 발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10급 야수종, 열대 초원 랩터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열대 초원 랩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을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거충종, 근면한 일개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NOA-8 중기관포의 별명은 지우개.

말 그대로 NOA-8 중기관포의 총구가 지나가는 곳이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이 깨끗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중기관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그저 피와 파괴뿐이었다.

[키에에에에에!]

[케엑, 케엑!]

[끼이이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섬광 속에서 마수들의 온갖 괴성이 울려퍼졌다.

이미 내 위치는 어느 정도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에테르가 나설 필요도 없이 마수 군단의 일부가 나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주, 주인아!]

마수 군단의 흉성이 나를 향하자 에스더에게서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무리 내가 지닌 화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몰려드는 마수들을 모조리 상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이다.

철컥.

다시금 기관포의 총열이 회전했다.

콰카카카카카───!!!

NOA-8 중기관포의 가장 큰 단점은 분당 1만 발이 넘는 연사 속도에 비례하는 어마어마한 수의 탄 소모였다.

이는 아무리 아크라고 할지라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소모량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크에에엑!]

[끼엑!]

[깍, 깍!]

분당 1만 발이 넘는 괴물 같은 연사 속도가 조금도 멈추지 않고서 다가오는 마수와 마물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아크를 위협하는 온갖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20mm의 괴물 탄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뭐, 뭐야?]

그제야 에스더 역시도 내가 쏟아내는 무한의 탄에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했지만, 이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해줄 시간은 없었다.

여전히 마수와 마물 떼는 나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멈췄다.

치이이이익······!

'음.'

도대체 몇 발을 쏜 건지는 몰라도 NOA-8 중기관포의 총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무리해서 발사를 하면 총열이 상하게 될 테니, 어느 정도 휴식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면 슬슬······.'

어느덧 마수 무리와 나 사이의 거리가 500m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사실상 코앞이나 다름없는 거리.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만무했기에 나는 뼈 갑옷에서 촉수를 뽑아들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31분 31초.]

우로보로스의 역린을 먹어치운 뒤 엥켈렌스의 송곳니에 대한 흡수율이 많이 올라갔다.

즉, 엥켈렌스의 영역과 창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과도 같았다.

[히끅!]

마수들의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반응한 건 에스더였다.

[아··· 기분 더럽게 이상해.]

아무리 유령종이라 할지라도 본질은 마물.

등급 외 마수인 우로보로스조차도 잠깐은 영향을 받았으니, 힘이 약해진 지금의 에스더가 엥켈렌스의 영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케룩?]

이내 갈곳을 마수와 마물들이 다시금 자신들이 지닌 흉성을 아크에게로 옮기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중 포화 후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를 통한 어그로 초기화 및 총열 휴식.

이 테크닉과 사이클은 앞으로 내가 레드 라인의 전선을 벗어나서 오렌지 라인과 옐로우 라인, 그리고 그 이상의 전선으로 향할 때 반드시 숙달되어야 할 테크닉이었다.

아크 바깥에서 살아가는 내가 오렌지 라인 이상의 전선에 영향을 끼치려면 노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건 곧 이제까지처럼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사격을 할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이내 마수 무리가 기수를 돌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에스더가 말했다.

[말도 안 돼······.]

에스더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수 무리와의 거리를 살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충분히 벌어졌다고 느끼자, 나는 망설임 없이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했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해제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27분 52초.]

물론 중기관포의 총열이 식으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지만, 나에게 있는 건 NOA-8 중기관포뿐만이 아니었다.

잘그락-

TITAN-17 대마수 로켓을 다잡은 나는 아크로 향하는 마수 무리를 조준했다.

딱히 정밀한 조준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이제부터 보이는 건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푸슈융!!

방아쇠가 당겨지며 대마수 로켓에서 17형 탄두가 발사됐다.

콰아아아아아앙───!!!

유탄과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파괴력.

그야말로 대형 마수를 사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폭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키에에에에에에!]

그 폭발 속에서도 외곽에 있던 마수와 마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에게로 다시금 기수를 돌렸다.

물론 그런 건방진 시선을 오래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쾅! 콰카카캉!

콰아아아앙───!!!

다시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내 존재를 확실히 알리듯이.

< 세 번째 웨이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