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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pisode.Ⅰ

봄의 찬미

#72 EP.Ⅰ-19

내생에 봄날은 (1)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

성검 '여름'을 쥐어도 불타 죽지 않는 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국의 성직자들은 그를 존중했다.

하지만 조금의 걱정은 있었다.

'이런 섬나라의 백작이면 건방지지 않을까?'

파견 성직자들에게 파견지에 대한 기본적인 학습은 필수.

대륙에 비해 신분제가 공고한 아이리안인데, 소드마스터라고 하니 성국을 등에 업고 건방지게 움직일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감사하오."

에드먼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아침 세숫물을 가져온 어린 성직자는 그의 정중한 인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성호를 긋곤 물러선다.

에드먼드는 도도도-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세수를 시작했다.

"참으로 겸손하고 과묵한 사내입니다."

마우로 추기경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던 아이리안 총교구장, 노초 바르베타는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에드먼드 백작은 북방원정 때가 아니라면 워낙 활동이 드물어서 저희도 처음 뵙는 건데, 걱정과 달리 좋은 분이군요."

나란히 선 둘 뒤로 풍성한 금발의 여인이 걸어왔다.

둘은 성녀를 향해 급하게 인사했다.

"모든 것은 빛으로."

카테리나는 가볍게 목례하곤 입을 열었다.

"빛은 우리의 것으로. 저런 분이니 성검 '여름'이 에드먼드 님의 손에서도 화염을 쏟아 내지 않는 겁니다."

"역시."

마우로는 고개를 주억였다.

우우웅-.

다만 평생을 성직에 바쳐 온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수인을 그리곤 음파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결계를 만들었다.

그러곤 에드먼드를 등지며 총교구장 본인과 서기 한 명만 열람할 수 있는 1급 기밀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성녀님, 에드먼드 백작을 너무 믿으시면 안 됩니다."

"...."

카테리나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아벨이 용사가 되어 마왕을 물리치고 카인이 그런 아벨을 죽이는 미래를 성류관 '가을'에게 계시받은 입장에서 '여름'이 선택한 자를 의심하는 그를 좋게 볼 수 없다.

바르베타는 에드먼드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할 때 성녀의 싸늘할 반응은 이미 각오한 바였기에,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에드먼드 백작의 본처인 클로에가 마녀였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 책임질 수 있습니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카테리나의 말에 바르베타는 고개를 저었다.

"마녀심판으로 판정하진 않았기에 '정황'입니다."

"그럼 그 클로에라는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제 근처에 있다면 마녀인 걸 알 수 있으니,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다시금 고개를 젓곤,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 고독하게 얼굴을 씻고 있는 에드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었습니다."

"검증할 수 없는 일로 그런 말을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시체를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

"클로에가 마녀라는 익명의 신고를 받고, 저희도 고민했습니다. 아이리안의 칠대귀족, 그것도 소드마스터인 에드먼드의 아내를 어떻게 검증할지요."

이단심판성의 추기경으로서 마우로는 바르베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에 비하면 이단들이 차라리 더 쉽다.

누가 어떻게 마녀가 되는지도 모르기에 마녀를 잡으러 자신만만하게 가도 마녀가 강하거나 권력자라면 한계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북방의 글루미엠도 있고 말입니다."

카테리나 역시 성국의 정의가 세계만방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당장 글루미엠을 토벌하려면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를 것도, 아이리안 왕국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걸 알기에 공공연하게 두고만 보고 있기 때문.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두고만 볼 순 없었습니다. 비밀리에 에드먼드 백작에게 클로에가 마녀로 의심되며, 제가 직접 방문하겠다고 했죠."

카테리나나 마우로는 그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제야 눈치챘다.

단순히 본처 클로에가 마녀라는 익명의 신고를 받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젠 다음 날 에드먼드 백작은 클로에가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장례도 치르지 않았고, 시체도 없었죠."

말 그대로 정황.

"에드먼드 백작이 마녀를 감싸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하지만 너무나 의심스러운 정황.

바르베타는 카테리나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차마 더 파볼 수가 없어서 그대로 멈췄었습니다."

"마우로 추기경."

"예, 성녀님."

"랄랑드 성표에서 아이리안 지역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라테라노 성국의 수도 헤네랄리페엔 거대한 순백의 성황궁이 자리한다.

그리고 그 성황궁의 지하엔 전 세계의 마녀를 추적할 수 있는 '랄랑드 성표'가 자리한다.

올리시렌의 각성을 추적한 것도 랄랑드 성표의 반짝임이었다.

그러한 변화의 추적을 담당하는 것이 이단심판성.

마우로 세노초크 추기경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리안 지역은 엘프 여왕의 영향력으로 마녀의 각성 때를 제외하곤 제대로 표시가 안 돼서...."

"알겠습니다."

카테리나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꺾어 바르베타의 어깨 너머로 에드먼드를 살펴보았다.

"혹시 그 마녀의심자와 에드먼드 사이에 자녀가 있습니까?"

바르베타는 눈을 반짝였다.

이 부분을 말하기 위해 말을 에둘렀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리안 섬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카인 에셀레드가 클로에와 에드먼드의 아들입니다."

반면 카테리나 성녀의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 몰랐다는 듯 바르베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벨과 이복형제라는 걸 떠올리며 금세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에드먼드 님이 마녀의심자를 숨겼다면 어디가 유력합니까."

바르베타는 위를 가리켰다.

하늘이 아니라 지도상의 북.

"북방엘프의 숲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이라면 저희가 알아내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카테리나는 마우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에드먼드 백작이 가려 하는 곳도 북방입니다."

"재미있군요."

카테리나는 대리석 조각이 지을법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성검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마녀에게 홀려 잠시 삿된 길을 가려 한다면, 정정하는 것이 성녀로서의 업.

"일단 북방에 가면 알 수 있겠군요."

성녀의 결정에 바르베타와 마우로는 고개를 숙였다.

후우우우.

바람이 불었다.

에드먼드는 흘깃 셋을 바라보더니,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은 건가?'

카테리나는 그 순간 마주한 에드먼드의 무심한 눈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성법의 무음 결계로 분명 소리를 막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눈빛은 모든 걸 안다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 * *

성녀의 행차지만 아이리안 총교구에서 마련한 파티는 10명 남짓한 소수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장소라면 성전의 대군세라도 일으키겠지만, 아무래도 미지의 북방엘프의 숲이라면 인원이 많아 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

가능한 한 정예 중의 정예만 모았다.

아이리안에 파견된 팔라딘 다섯과 이단심판관 출신 셋.

그리고 성녀와 추기경.

평범한 상단으로 위장하여, 가장 가까운 열차역에 내렸다. 그 후 길잡이를 구해 최단 거리로 북방 엘프의 숲에 닿았다.

"도착했습니다."

길잡이가 울창한 숲 앞에서 멈췄다. 성국의 파티보다 조금 앞서 걷던 에드먼드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성직자만 입을 수 있는 옷과, 긴 천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잘했소."

"여기서부턴 외곽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내부의 진짜 엘프의 숲엔 닿지 않길 바랍니다."

팅-!

에드먼드는 은화를 엄지로 튕겨 길잡이에게 던졌다.

"숲 안은 내가 더 잘 아오."

"...예예."

길잡이는 얼굴을 가린 천의 틈 사이로 보이는 무감각한 눈을 마주하곤 돈을 쥐고 곧장 사라졌다.

에드먼드는 이번에도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하십니까?"

카테리나의 물음에 에드먼드는 턱을 쓸었다.

"딱히 이상하진 않소.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하다?"

"별것 아니오. 그 전에 내 변덕에 성녀님부터 해서 다들 움직여 주다니 참으로 감사하오."

에드먼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작답지 않게 가벼운 머리였지만, 그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성국의 일행들은 마주 인사했다.

그 순간.

"미친놈."

화아아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북방 엘프의 숲 안쪽에서부터 차디찬 바람이 불었고, 바람결에 여인의 목소리가 실려 있었다.

"네 운명은 에이레에서 죽는 건데, 어떻게 살아온 거야?"

"모른다, 글루미엠."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

세상에서 여덟 번째로 나타난 마녀이자, 엘프여왕 글루미엠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성국의 인원들은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이렇게 입구부터 만날 줄은 몰랐지만, 최악을 대비해 뒀기에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화아아아아-.

다시금 바람이 불었고.

"하긴, 너 같은 놈에게 그런 걸 묻는 내 잘못이지. 왜 왔지?"

"궁금한가?"

카테리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에드먼드의 어조가 바뀐 건 하나도 없지만, 그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

"건방지구나."

"나는 너와의 거래로 에이레에 스스로 들어갔다."

성녀 일행을 포함해 아이리안 대부분은 에드먼드가 두 후작의 정치질에 들어간 걸로 알았지만, 조금 더 깊은 일이 있다는 걸 조금 전 대화로 눈치챘다.

"그래서? 나는 모든 엘프의 여왕인 글루미엠이다. 숲에서 어쩌겠다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만."

척-.

에드먼드는 허리춤에 매달린 세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후우우우우-.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거세고 차갑다 못해 시린 살기가 숲을 향해 쏟아진다.

해를 찔러 떨어뜨리는 그의 검이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저 먼 곳에 앉아 있는 글루미엠을 노린다.

"방해하면 죽인다."

"네놈!"

"방해하지 않으면 나도 먼저 건드리지 않겠다."

"이전 원정 때처럼 네놈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쿠르르르릉-.

숲이 진동한다.

성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강해. 이게 여덟 번째 마녀인가.'

오래된 마녀일수록 강한 만큼, 글루미엠이 보이는 힘은 그녀의 모든 신경을 건드릴 정도로 섬뜩하고 마녀다웠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돌려 카테리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

들썩-!

그녀가 어깨에 메고 있던 상자가 열렸고 성검, '여름'이 허공을 날아 에드먼드의 손에 잡혔다.

손이 닿는 부분부터 찬란한 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스윽-.

에드먼드는 왼발을 앞으로 디디며 몸의 중심을 낮췄다. '여름'을 가슴께 앞 횡으로 잡아 들며 숲을 향했다.

"설마 황혼의 오러가 밤을 갈랐던 것이...."

글루미엠의 목소리가 떨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성검 '여름'.

평범한 철검을 쥐어도 무시무시한 에드먼드의 손에 쥐어진 성검은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려웠다.

"다시 말하지. 방해하면 죽인다. 방해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

선명한 그의 갈색 눈에 천천히 살기가 피어오르면서 멀리서 보면 금빛으로 보였다.

"...."

그리고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사라졌던 길잡이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에드먼드 백작으로 추정되는 자를 북쪽의 길잡이가 발견했어."

올리시렌은 왕실정보국이 올린 자료를 보며 맞은편, 카인에게 말했다.

카인은 애꿎게 찻잔만 돌렸다.

그녀는 예상했던 반응에 피식 웃곤 다른 서류를 들어서 보였다.

"로스 후작에 대한 정보부터 들을래?"

"엘프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가 나왔나?"

"그건 아닌데 나름 재미있는 정보더라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73 EP.Ⅰ-19

내생에 봄날은 (2)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

"미들네임이 로스라면, 로스 후작가의 기사?"

카인의 반문에 올리시렌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서류를 들어 시그마리의 사진을 보여 줬다.

"정확히는 기사단장. 머리는 초록색이고. 기사단장이 된 지 꽤 되었는데 하나도 안 늙었고 말이야."

"평범한 인간의 머리가 초록색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 매일 바깥으로 나가 싸우는 기사가 수십 년 동안 겉늙지 않을 가능성도 낮고."

올리시렌은 다음 장을 넘겨 한 줄로 적힌 결론을 가리켰다.

-로스 후작가의 시그마리 기사단장은 엘프 혹은 하프 엘프로 추정됨.

-명확한 증거는 발견 못함.

이미 서류를 살핀 올리시렌은 간단하게 줄였다.

"알려지지 않은 출생과 과거, 나이나 외모에 비해 엄청난 실력, 과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우리 왕실정보국은 꽤 확률이 높다고 봐."

"명확한 증거가 없을 뿐?"

그녀는 입맛을 다시면서 '명확한 증거'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엘프가 인간사회에, 그것도 후작가에 녹아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뭘 증거로 잡아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카인은 팔짱을 끼며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군. 하나하나는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로스 후작의 기사단장이라면 확실해."

올리시렌은 카인을 훑어보았다.

칼만 뽑으면 달려들기 바쁘지만, 그 전이라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정도로 신중한 게 그다.

그러나 로스 후작가에 관련된 건 너무도 빠르게 결정 내리고 있는 게 영 어색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아는 거야?"

"너도 본 거다."

올리시렌은 카인이 이전에 설명해 주었던 걸 떠올렸다.

"아! 숲의 비전!"

그녀가 떠올린 것은 로스 후작이 보냈다는 기사들의 오러 색깔.

"그래. 기사가 피워 내는 오러의 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확실한 건 없지만, 대개는 그 사람의 성향으로 갈리더군."

"뭘 익히냐에 따라서 성향이 달라지고?"

"대개는 그렇지 않지만, 엘프의 비전은 익히는 자의 성향을 하나로 만드는 쪽이다."

"어떻게?"

카인은 잠시 턱을 쓸었다.

굳이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숲에 가면 말해 줄게. 듣는 거랑 직접 겪고 보는 거랑은 확실히 다르니까."

"...."

에셀레드 백작령에만 있던 카인이 북방숲에 간 적이 없을 텐데, 마치 직접 가 본 것처럼 말을 하니 어이가 없다.

올리시렌은 잠시 카인을 흘겨보았다.

카인은 뺨을 만지며 물었다.

"뭐, 묻었나?"

"...반질반질한 게 뻔뻔해 보여서."

"칭찬 고맙다."

그 의도가 뭔지 훤히 보였기에, 카인은 능글맞게 받아쳤고, 올리시렌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곤 엘프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 카인에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엘프가 귀를 숨기고 인간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어."

카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다른 평범한 엘프들은 전쟁 중이 아니니까."

죽느냐 죽이느냐.

아무리 삼백 년 가까이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고 해도 아이리안 왕국과 엘프는 전쟁 중.

아무리 엘프가 인간으로 분장하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리를 위해선 백 번도 할 것이다.

"게다가 여왕부터가 마녀인데, 뭘 못할까."

"하긴."

팔랑-.

그녀는 서류를 넘겼다.

장난스러웠던 표정을 지우곤 진지하게 카인을 돌아보았다. 카인 역시 얼굴을 굳혔다.

"사실 이제부터 본론이야."

"뭔데 이렇게 무게를 잡아."

"클로에 님의 사망 발표 이틀 전에 에드먼드 백작과 시그마리 기사단장이 접촉했다는 기록을 발견했어."

꽈악-.

카인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물과 기름보다 더 어울리지 않을 둘이 만났다는 사실은 카인의 뒤 허리에 얼음을 꽂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클로에 님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아들인 나도 시체를 보진 못했지."

"왕실정보국에서도 사실은 클로에 님이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나 봐."

"추적해 봤나 보군."

올리시렌은 고개를 끄덕이곤 표로 정리된 다음 장을 보여 주었다.

아이리안 섬 중남부에 존재하는 왕국의 전 지역들의 지명이 적혀 있고, 그 옆에는 X표시가 되어 있었다.

"교단 안에 있어도 어떻게든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을 텐데, 정말 아무데도 안 계셨어. 그렇다는 건...."

"정말로 죽어서 몰래 묻혔거나, 북방 엘프의 숲에 있다는 소리겠군."

왕실정보국의 눈이 닿지 않는 두 군데였기에 카인은 올리시렌의 뒷말을 쉽게 예상했다.

"게다가 며칠 전엔 교단 측에서도 에드먼드 백작과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다는 정보도 있어."

"확실한가?"

올리시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니야. 에드먼드의 감각 때문에 가까이서 수집한 정보는 아니니까."

"이것도 정황만 보인다 정도군."

"그래."

카인은 한쪽 팔걸이에 팔을 올리곤 턱을 괴었다.

후우우우-.

열린 창틈 사이로 봄바람이 불었다. 퀴퀴한 아이언하트의 매연은 적었고 맑은 꽃향기만이 둘의 사이를 갈랐다.

툭.

분홍빛 꽃잎 하나가 카인의 찻물 위로 떨어졌다.

카인은 금색 티스푼으로 건져 내며 입을 열었다.

"마녀인 걸 눈치챈 교단을 피해서 에드먼드 백작이 북방 엘프의 숲으로 어머니를 도피시켰다는 게 되나."

"도피를 위해 시그마리와 협상이 있었을 것이고."

타락-.

카인은 발람과 싸울 때 봤던 환영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명확한 사실은 알 수 없었지만, 카인은 가능한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가지고 생각했다.

즉, 위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로스 후작이 에드먼드 백작에게 요구한 게 뭔지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에드먼드 백작이 단순하고 정치에 눈이 어두워서 두 후작의 음모에 던전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투 속에서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아버지를 오해해 왔던 그의 과거가 내는 맛이리라.

"사실 일반적인 백작이 그렇게 순순히 던전에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야."

"아내를 살리기 위해 살아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던전에 들어갔다라."

카인은 찻물 속으로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뽀얗고 하얀, 어린 얼굴.

이 얼굴이 자라서 밑바닥 용병이 되고 대장벽으로 흘러가 전사가 된다.

'그리고 동생의 가슴에 칼을 꽂지.'

그 모든 비극의 시작을 찾으라면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의 실종이리라.

그가 사라지면서 두 후작가는 야욕을 드러냈고 아벨을 이용해 자신을 축출했다.

『사계』가 시간을 돌려 멈춘 것이 절벽에서 아벨과 싸우던 날이던 것만 봐도 모든 분기점의 시작은 그날.

그리고 그날을 만든 건 에드먼드의 부재.

'난 에드먼드의 선택을 늘 멍청하다고 욕했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카인의 마음에 났던 상처가 그러했다.

이제는 완전히 아물어 흉터만 희미하게 남았지만, 성숙하지 못했던 과거의 카인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당연히 에드먼드였다.

하지만, 멍청한 선택이 아니라.

클로에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간신히 봉합되었던 상처가 벌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올리시렌은 생각에 빠진 카인의 눈치를 보다가 처음에 하다 만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북쪽의 길잡이가 에드먼드임을 확신하지 못하던 건 성직자의 옷을 입고 성국 사람들과 같이 있어서래."

"성국?"

카인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백 번 양보해도 에드먼드와 성국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세검을 들고 숲을 향해 자세를 취했다고 하더라고. 그 살기에 주저앉을 뻔했다고 하니...."

"맞겠군."

아이리안에서 세검을 들고 그 정도를 보일 사람은 자신과 에드먼드 둘 말곤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을 정리했다.

예상치 못한 과거가 드러나는 찰나.

덜컹-!

"왕녀님, 총사령관이-."

가릭 백작과 디그리드 백작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린드브룸 왕궁에서 귀족회의를 하고 바로 올리시렌에게 온 모양.

다만, 카인이 있을 줄 몰랐기에 두 사람은 잠시 멈칫했다.

"이번 북방원정. 아니죠, 엘프 전쟁의 총사령관이 정해졌습니까?"

카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가릭 백작은 헛기침을 하곤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네. 자네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어."

사실 가릭과 디그리드 백작은 카인이 대뜸 올리비아가 총사령관이 될 거라고 말할 땐 의아했다.

지금까지 왕가의 인물만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만큼 늘 하이볼트가 맡았다.

아무리 두 후작이 뭐라고 해도 하이볼트가 당연히 올리시렌에게 줄 거라 예상했으니까.

판세를 읽고 판단하는 카인의 눈에 두 백작은 소름 돋았다.

디그리드 백작도 가릭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밤이라도 샌 듯 눈두덩이가 시커멨다.

"2왕녀 올리비아가 정말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올리시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올리비아는 이제 열일곱이에요. 성년식도 치르기 전이라고요. 아무리 권력이 중요하다고 한들 애를 어떻게 전장에...."

가릭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말리는 대신들도 많았지만, 로스와 맥로든 두 후작이 동시에 지지하고 나서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원정군을 실질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할 둘이 힘을 합쳐 주장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리고 두 백작은 카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열일곱이라는 이유로 올리비아의 총사령관 임명을 거부한다면 같은 나이의 카인 역시 암묵적으로 인정되던 로드 에셀레드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외통수군요."

올리시렌은 본능적으로 손톱을 물려고 했다.

카인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방해하곤 두 백작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공작을 만들어서 왕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걸 넘어서, 올리시렌은 아무것도 못하는데 올리비아는 총사령관까지 맡아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걸 보여 주겠군요."

"맞아. 올리비아에게 왕위가 가는 건 자연스럽다고 어떻게든 홍보할 거야. 피를 흘린 자와 피를 흘리지 않은 자의 차이는 명확하니까."

카인은 올리시렌을 잠시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그럼 에셀레드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예상했던 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진즉, 계획은 세워두었다.

가릭 백작은 당황한 듯 언성을 높였다.

"총사령관의 명은 왕명과 같네. 그걸 어긴다는 건 반역이야!"

"왕명도 닿아야 명령입니다."

카인의 짧은 말.

두 백작과 올리시렌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카인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총사령관의 명령을 듣지 못하는 깊은 곳으로 저희가 들어간다면, 현장 지휘권은 총사령관에서 당장 명령이 가능한 올리시렌에게 이양됩니다."

"그렇지! 왕가의 인원이니 그녀도 명령권을 가질 수 있어!"

디그리드 백작은 일어서며 외쳤다.

"네. 그리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면 명분상으로도 문제가 없고, 올리비아에게 몰리는-."

덜컹.

다시금 문이 열렸다.

이번에 뛰어 들어온 건 아벨과 밴더빌트였다.

이 순간에 들어온 둘을 보자 카인은 묘한 서늘함을 느꼈다. 에셀레드 본성과 연락을 담당하는 아벨이 말할지 말지 우물쭈물하자 카인은 손을 휘저었다.

"괜찮아, 말해도 돼."

"올리비아 총사령관의 첫 번째 명령이 에셀레드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백작이 부재중이니 이번 원정에는 참여하지 말고 가능한 전력을 보존하라고...."

카인은 목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재밌네?"

조금 전에 느낀 서늘함은 칼날의 서늘함이 아니라 정치의 서늘함이라는 걸 알았기에.

"상대편에 앉아 있는 자들이 말랑말랑한 호구가 아니었군."

로스와 맥로든 그리고 글루미엠까지.

아이리안의 두 거인과 괴물이 카인 에셀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74 EP.Ⅰ-19

내생에 봄날은 (3)

로스 후작성의 집무실.

헤터워드 로스 후작은 턱을 괸 채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두 개의 체스판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날뛰어 봤자 너는 에드먼드가 될 수 없어."

툭-, 툭.

왼쪽 체스판에 놓인 검은 나이트를 손가락으로 치며 중얼거렸다.

카인 에셀레드의 존재로 맥로든 후작과 짜 왔던 계획이 많이 어그러졌다.

하지만 에드먼드처럼 존재만으로도 전쟁의 승리를 가져올 정도가 아니라면, 방법은 늘 있는 법.

탁-.

나이트를 들어 왼쪽 체스판에서 오른쪽으로 옮겼다.

새로운 체스판.

기존엔 같이 있는 무리가 많았지만, 이젠 없다. 홀로 서 있는 흑색 나이트를 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판 자체를 짜는데 칼 좀 휘두르는 정도로 무엇을 하겠느냐, 카인."

그리고 로스 후작의 눈이 데구루루 움직이다 체스판의 밖으로 향했다.

두 체스판의 사이.

홀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킹을 잠시 째려보았다.

"하이볼트...."

후작들이 하는 계획을 모조리 방해하고 엎을 수 있지만 눈을 감은 왕, 하이볼트.

아무리 후작이라고 해도 그의 이름을 이렇게 불러선 안 되지만 로스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엔 살기까지 서려 있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서지 말라. 그렇다면 네 목숨만큼은 계속 이어 줄 테니까."

하지만, 올리시렌의 목숨은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준비는?"

"언제든지."

달빛이 비치는 창가 아래.

꼿꼿하게 서 있던 시그마리는 이슬이 맺힌 나뭇잎처럼 웃어 보였고, 로스 후작은 만족한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일국의 왕녀가 마녀인 게 들키고 그런 마녀를 지원하던 귀족들은 성국에서 치워 줄 테니 아주 마음에 들어."

스스로가 세운 계획들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느낀 로스 후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시그마리는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후작님, 에드먼드 백작이 숲에 나타났습니다."

"...."

그는 웃는 채로 굳었다.

아무리 판을 잘 짜고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절대 통하지 않는 존재가 에드먼드였으니까.

"다행인 건 곧장 숲 안으로 들어가 북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계는 전혀 관심이 없나 보군."

"네. 그리고 성국의 성직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국...?"

로스 후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피식 웃어 버리곤 집무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붉은 소파를 응시했다.

차라라-.

그 옆, 투명한 유리컵 안 얼음들이 녹아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금빛의 위스키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에드먼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알 수 없는 놈이에요, 에버윈."

"...."

시그마리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는 소파를 향해 말하는 로스를 익숙한 듯 보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로스 후작은 시그마리가 사라지는 걸 흘깃 보곤 빈자리를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 * *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방을 비추는 마법 등불에 번쩍인다. 그리고 그 눈은 두 백작과 올리시렌을 훑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무엇이든."

가릭 백작은 당당히 답했고 디그리드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할 준비를 했다.

"카를라 오우드리."

"...."

하지만 카인이 던진 이름의 파괴력은 강했다.

아이리안 칠대귀족이자 어릴 적 친구로서 같이 다니던 두 백작의 입을 꽉 닫게 했으니까.

카인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올리시렌 쪽으로 향했다.

"그 본명은 에버윈 로스라고 하셨죠. 현 로스 후작의 친누나라고 했고요."

"그랬지."

"올리시렌, 뭔가 알아낸 건 있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1왕녀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국왕 하이볼트와 카를라의 하나뿐인 딸이지만, 어머니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몰랐었다.

그녀는 폭풍우 치는 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일렁이는 마음을 억누르고, 입을 꾹 닫는 두 백작을 향해 눈을 떴다.

"없었어. 정확히는 내가 열람할 수 있는 왕실정보국의 정보엔 단 하나도 없어."

"너보다 더 강한 권한을 지닌 사람은?"

"아버지뿐이야."

콰릉-!

분명 낮에는 날씨가 괜찮았다.

하지만 해가 지면서 먹구름이 성큼성큼 몰려오더니, 저 멀리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토톡, 톡.

카인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어둠 속에서 서늘한 안광을 빛냈다.

"로스 후작은 올리비아를 지지합니다. 크게 보면 올리시렌은 조카인데,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2왕녀를 밀고 있죠."

"...."

"국왕도 이상합니다. 여기 올리시렌을 분명 차기 왕위계승권자라 발표했는데, 정작 하는 건 하나도 없죠."

콰르르르릉-!

아까 전보다 더 요란해진 천둥.

번쩍이는 번개의 불빛 속에 카인은 손가락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것도 2왕녀를 총사령관으로 만들겠다는 두 후작의 떼를 받아 주고요."

"그러고 계시지...."

"이 상태 그대로는 답이 없습니다."

셋은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상 엘프전쟁이 확정된 탓에, 카인이 지금까지 백작가들을 회유하고 접수하던 방법은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두 후작이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 둔 이 판은, 개인의 무력으로 뒤엎을 수가 없다.

카인은 답답하여 재차 물었다.

"카를라에 얽힌 비사가 도대체 뭡니까. 뭐길래 로스 후작이 날을 세우고, 하이볼트 국왕은 그녀가 죽고 나선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

"말할 수 없네...."

가릭 백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거절했다.

"이 상황에도 우리가 말을 안 하는 건, '신뢰의 맹약서'를 작성했기 때문이야."

뒤를 잇는 디그리드의 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길래 백작들에게 신뢰의 맹약서까지 쓰게 한 것인가.'

명문가에 은밀히 내려온다고만 들었지, 카인조차도 직접 본 적 없는 아티팩트, '신뢰의 맹약서'.

효과는 간단했다.

해당 맹약서에 사인한 사람은 맹약서의 맹약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만약 맹약을 어긴다면 그들이 대가로 건 걸 빼앗기고.

디그리드 백작은 자신과 가릭을 번갈아 가리켰다.

"목숨과 더불어서 나는 마나를, 이 친구는 명예를 걸었네."

"사실상 두 분이 지닌 모든 걸 거셨군요."

"그래."

"당시 일을 알고 말할 수 있는 건 하이볼트 국왕뿐이고요?"

콰르르릉-!

다시 한번 번쩍이는 번개.

가릭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둘일세. 하이볼트와 에드먼드."

"에드먼드 백작은 왜 빠진 겁니까."

"하이볼트가 에드먼드는 맹약서 따위를 적지 않아도 입을 열지 않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럴 리가 없지.'

하이볼트 국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친우처럼 지내던 다른 둘에겐 맹약서를 받고 에드먼드에겐 받지 않은 이유가 분명 있을 터.

카인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황에 답답함을 삭이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밤.

저 북쪽 숲에 가닿기 전에 존재하는 수도, 린드브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인이 바라보는 끝에는 철옹성의 둥지 속에서 침묵하는 국왕이 있었다.

'이전 세계선에선 별일은 없었다.'

카인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로스 후작가에 넘어간 에셀레드에서 쫓겨나고 대륙으로 흘러 들어간 탓에 아이리안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문과 전보가 발달한 대륙에서 정보를 보려면 못 볼 것도 없다. 큰 소식이면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고.

'국왕은 자연사. 1왕녀는 마녀로 몰려서 사망. 그리고 2왕녀가 새로운 왕이 된다.'

왕위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런 큰 소식.

카인은 올리시렌이 죽고 올리비아가 왕이 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 후 아이리안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귀족들의 입김으로 흔들린다더라.

새로운 여왕이 문란하다더라.

북쪽의 엘프들이 밀고 내려왔다더라.

수많은 뜬소문 중에 분명했던 건, 지금의 굳건한 아이리안은 사라지고 유약하고 이름만 남은 국가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총사령관은 2왕녀가 가져갔고, 에셀레드의 병력은 막혔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나 라마이닝의 병력을 따로 움직이는 건 바로 반역이고요."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전을 격화시키고 바로 반역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반대야. 그럴 바엔 내가 광장에서 화형당하는 게 나아."

올리시렌은 단호했다.

차라리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본격적인 내전이 벌어져서 아이리안이 전쟁의 화염에 불타는 건 볼 수 없었다.

해당 부분에 대해선 카인에게 몇 번이고 말했고 카인도 그녀의 숭고한 의견을 존중했다.

"우리는 그대의 뜻을 따르겠네."

"나도."

가릭과 디그리드 백작은 카인을 향해 말했다.

쏟아지는 셋의 시선 속에서 카인은 창틀에 두 손을 짚곤 어른어른 자신이 비추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뒤로 셋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고, 저 앞으로는 꽃의 초원에 무수한 비가 내리고 있다.

그 아래.

발전한 도시인 아이언하트답게 마법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이 우산이나 비옷을 입고 종종 걷는 게 보였다.

카인은 한참이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에 검은 머리를 한 얼굴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기해. 아벨 하나만 생각해. 어차피 아벨이 용사가 되지 않게 하고 잘 살게 하는 게 목표였잖아?

마음속에서 울리는 맨 처음 자신이 가졌던 생각에 카인은 쓰게 웃었다.

지금도 저 목표가 달라진 건 아니다.

-어차피 마녀면 글렀지. 숨긴다고 해도 숨겨지겠어?

성국 놈들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카인도 잘 안다. 오죽하면 대장벽까지 쫓아와서 이단을 색출해 내려고 했을까.

-이 섬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황이 꼬인 이상 그냥 버려. 아벨을 죽게 만든 그 보통 사람들이나 찾아서 죽이자고.

툭.

카인은 몸을 돌려 창틀을 기대섰다. 그러곤 자신을 바라보는 셋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너 혼자만 잘 살면 되는 거야.

이윽고 카인은 입을 열었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오오?"

디그리드 백작은 꽉 막힌 상황에서 방법을 생각해 낸 카인에게 놀랐고.

"방법이 있다고?"

올리시렌은 떨리는 눈동자로 반문했다. 카인이 선택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엇인가."

이어지는 가릭 백작의 물음.

-너만 생각해, 너만.

"상황이 이렇게 꼬인 건 하이볼트 국왕의 모호한 태도 때문입니다. 계승권은 올리시렌에게 주고 후작들이 떼쓴다고 2왕녀에게 총사령관을 준다?"

"그렇지...?"

올리시렌의 말끝이 떨린다.

카인이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맥로든 후작이야 제 손녀가 2왕녀니까 거기로 붙겠죠. 그런데 로스는 왜? 혈연으로 따지면 조카인 올리시렌을 더 지원해야겠죠."

"...."

아이리안의 권력 구도에 숨겨진 비밀.

"에버윈 로스."

콰릉-.

다시금 치는 번개를 등지고 카인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러곤 북으로 난 유리창을 가리켰다.

"방관하고 있다고 하나 중요한 건 다 하이볼트 국왕이 쥐고 있죠. 그럼 우리끼리 고민한다고 뭐가 풀리겠습니까."

순간 디그리드와 가릭은 입을 쩍 벌렸고 올리시렌의 두 눈은 부릅떠졌다.

"서, 설마 아버지를 암살하려고?"

"카인, 자네가 강하다곤 하지만 그건-."

카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절 어떻게 생각하시면 그런 말이 먼저들 나오는 겁니까."

"자네가 그간 해 온 걸 생각해 보게."

"...."

아무리 카인이라지만, 그들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만하게 행동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필요하면 하긴 할 겁니다."

"역시!"

실제로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국왕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이볼트는 정례회의를 제외하곤 얼굴도 내밀지 않고 있어."

카인은 올리시렌을 가리켰다.

"그래도 설마 딸이 보자는 것도 싫다곤 안 하시겠죠?"

"카인."

콰르르릉-.

다시금 치는 번개.

그리고 쏟아지는 백색에 올리시렌의 회색빛 눈이 반짝였다.

"왜?"

많은 뜻이 들어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잘 살려고."

"그러면 이런 가시밭길이 아니라 올리비아에게 가는 게 나아."

"나는 나 혼자가 아니다."

"...?"

"여기 있는 모두, 아벨, 아르나, 밴더빌트, 에셀레드 영지, 라마이닝-."

마음속의 자신에게도.

현실을 사는 자신에게도.

세계선을 건넌 자신에게도.

"지금의 내가 가진 게 좀 많아졌거든."

고독하고 찬란했던 가면의 설원공 로드이스트 카인이 아니라, 따스하고 반짝이는 카인 에셀레드의 대답이었다.

"왜 우리 이소엘은 이야기 안 하나?"

그 뒤로 디그리드 백작의 작은 물음이 있었지만, 셋은 듣지 않은 척했다.

#75 EP.Ⅰ-19

내생에 봄날은 (4)

논의는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두 백작은 카인의 말대로 움직였고, 카인과 올리시렌은 아이언하트로 왔던 일행 그대로 움직였다.

"아벨."

그렇게 도착한 기차역의 귀빈실.

카인은 아벨에게 말했다.

"너는 에셀레드로 돌아가라."

"...예?"

당연히 카인의 옆에서 왕도 린드브룸까지 갈 줄 알았던 아벨은 눈을 부릅떴다. 카인은 에셀레드가 있는 동쪽을 가리켰다.

"말을 타고 에셀레드로 가서 이걸 아르나 님과 클로이드랑 함께 읽어."

툭.

카인은 붉은 인장으로 단단히 밀봉된 편지 하나를 건넸다. 아벨은 반사적으로 받았지만, 갑작스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차를 타고 라마이닝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에셀레드까지 말 타고 가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급한 편지라면 가장 빠르게 에셀레드로 돌아가는 방법은 아벨의 말이 맞다.

하지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왕국법에 따라 기차를 이용하려는 자는 모두 신분을 철도청에 밝혀야 해."

"왕녀도 예외는 없더라고."

올리시렌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철도가 처음 아이리안에 설립될 무렵 워낙 많은 테러나 범죄가 일어나면서 왕국법으로 정해졌다.

그 이후로는 철도에선 사소한 범죄는 벌어져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카인은 자신과 아벨을 번갈아 가리켰다.

"즉, 적은 우리가 기차를 예약한 순간,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고 있다는 거다."

"로스 후작가가요?"

"그래. 현재 철도청장인 루브릭 남작은 로스 후작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자랐거든."

카인은 올리시렌을 향해 고맙다는 표현을 담아 눈을 찡긋했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벨은 까끌까끌한 봉투를 손가락으로 문대다가 바닥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말고 밴더빌트 경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카인이 자신을 보내는 건 이유가 있으리라.

하지만 아벨은 너무도 아쉬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전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밴더빌트도 적합하니까.

카인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밴더빌트를 흘깃 보곤 아벨의 말을 부정했다.

"그는 에셀레드의 기사가 아니야, 내 기사지. 하지만 너는 에셀레드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잖나."

"...!"

아벨은 카인의 말에서 은은한 피 냄새를 맡곤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꼭 네가 가야 해."

그 피는 적의 것이라.

직감적으로 아벨은 자신이 들고 있는 이 편지의 내용이 위험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툭.

카인은 살짝 굳은 아벨의 어깨를 두드렸다.

"믿는다. 너밖에 없어."

아벨은 밴더빌트를 바라보았다. 노기사는 다시 험한 길을 돌아갈 아벨을 향해 묵례했고, 아벨도 그의 인사를 따라 했다.

"무탈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카인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을 안부 인사를 했다.

카인은 쓰게 웃었다.

"너야말로. 그 편지를 열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맨날 왜 제겐 돌이킬 수 없다고만 하십니까, 형님."

굳은 아벨의 갈색 눈.

카인은 그 위로 피를 토하며 마지막만큼은 스스로 선택했던 용사를 겹쳐 보고 있었다.

"저는 형님을 만나곤 단 한 번도 돌아가고 싶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건 배신당하고 자신을 잃어버린 용사 아벨이 아니라, 카인의 등을 바라보며 자라는 소년 아벨이었다.

"...그래."

카인은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억눌렀다.

눈물인가 기쁨인가.

알 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용사 아벨의 시간은 이젠 오지 않을 것이다.

카인 역시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는 할지언정 현재를 포기하고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너는 아벨이구나.'

아르나를 살렸고, 아벨도 살린다.

용사 아벨의 그림자를 지워 내며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너를 보내는 거다."

투웅-.

아벨은 카인의 편지를 품에 넣고, 그 위로 꽉 쥔 주먹을 소리 나게 올렸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그러곤 옷깃을 세워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갔다. 카인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에셔."

"예!"

"따라가."

"예?"

가만히 있던 평기사 에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 혼자 보내? 수행 기사 한 명쯤은 있어야지."

"예, 예스! 로드 에셀레드!"

에셔는 자신의 몸통만 한 방패를 등에 단단히 매고는 허둥지둥 아벨의 뒤를 쫓았다.

"에셀레드 기사단 소속 둘을 보냈네?"

올리시렌은 카인에게 속삭였다.

"눈치가 빠르군."

아벨이 그러했듯, 그녀도 카인의 말에서 은은한 피 냄새를 맡았다. 마녀로서의 직감이자 왕녀로서의 판단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써서 보낸 거야?"

"곧 알 수 있을 거야."

"나한테도 못 말해 주겠다?"

휘릭.

카인은 크로울에서 준비해 준 흑색 코트를 입었다. 안쪽에 단단히 장비한 무기와 방어구를 가리기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올리시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카인의 옆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적의 대군세 앞에 홀로 맞서는 기사의 모습 같아서, 올리시렌은 장난으로라도 더 이상 쏘아붙일 수 없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열차표를 들었다.

"가자고."

"그래. 이번 열차 여행에선 별일 없었으면 좋겠군."

카인의 작은 바람.

그 소리에 듣고 있던 밴더빌트나 이소엘은 움찔했다. 그리고 올리시렌은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뚝을 쓸었다.

"설마. 또 얼음다리를 만들거나 싸우거나 할 일은 없겠지."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아갔다.

"거기까진 없겠지만, 피 볼 일은 있을 거 같군."

"너 불길하게 그런 말 할래?"

"칼을 뽑아야 할 때 안 뽑을 수는 없잖나."

티격태격.

카인과 올리시렌이 말을 이어 가며 개찰구로 나가는 걸 바라보며 밴더빌트와 이소엘도 둘을 따랐다.

간밤에 요란하게 내리던 비는 여전한 듯, 하늘엔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긴 증기를 내뿜으며 넷을 태운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 * *

"모든 왕도행 열차가 린드브룸에 바로 도착하지 않는 건 알지?"

올리시렌은 놀릴 거리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카인에게 말을 걸었다.

입을 닫고 흘러가는 창밖 풍경만 바라보던 카인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나를 놀리고 싶나?"

"아니, 에셀레드는 기차도 안 들어오는 곳이니까. 혹시 아나 싶었지."

"어차피 너도 왕녀라 많이 안 타 봤으면서."

"그건... 맞아."

올리시렌은 뺨을 긁으며 수긍했다. 대개 장거리를 움직이는 기차의 특성상 린드브룸을 벗어날 리 없는 왕녀가 탈 일은 극히 드물었다.

"육지의 항구, 메이누스."

카인은 툭 뱉었고, 올리시렌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네?"

"열차가 수도까지 직통으로 가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본래 메이누스는 평범한 평야 지대였다. 특징이 있다면 린드브룸과 멀지 않다는 것만 있었고.

아이리안에서 처음 철로를 깔 땐 남부의 백작가와 중부의 후작가의 철로를 린드브룸에 집중하고자 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반란이나 외세가 쳐들어온다면 수도가 순식간에 위험해질 수도 있는 법.

따라서 메이누스 평야로 에셀레드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귀족가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모았다.

그래서 왕도로 가려면 우선 메이누스로 가서 린드브룸으로 가는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물길이 모이면 항구가 되듯.

기차의 흐름이 모이는 메이누스엔 사람들이 하나둘 정착하며 이젠 상당히 큰 상업 도시가 되었다.

그런 메이누스의 별명이 육지의 항구였다.

"카인."

올리시렌이 목소리를 낮춘다.

그녀는 작은 쪽지 하나를 두 손가락에 껴서 들었다.

"몇 시간 전, 메이누스에 시그마리 기사단장이 나타났다는 말이 있어."

로스 후작가의 기사단, <로스 데 캐롯>의 정점. 그리고 엘프로 의심받는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

아마도 왕실정보국이 긴급으로 보낸 정보일 터.

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전 승무원이 왜 들어왔나 했더니, 정보국 소속이었나.'

올리시렌이 타고 있는 VIP 객차엔 철도청 승무원들도 쉽게 들어올 순 없다. 다만 아까는 이소엘이 잠시 나가서 불러 와선 먹을 간식 등을 준비해 줬었다.

그때 카인은 올리시렌의 냅킨이 다른 사람의 것과는 조금 더 평평하지 않은 걸 봤었다.

아마도 저 쪽지가 들어 있었으리라.

"혼자?"

카인은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고.

"아니, 기사단 하나 정도의 숫자와 동행해 왔다고 해. 당연히 복면을 쓰고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고."

"재미있군. 북방원정을 기획 중인데 기사단장이 내려와 있다라."

카인은 턱을 쓸었다.

인간의 기사단을 이끄는 엘프인가, 그저 머리카락 색이 특이하고 잘 늙지 않는 인간일 것인가.

"직접 보면 알겠어. 인류의 배신자인지 아닌지 말이야."

"싸울 거야?"

올리시렌은 카인의 말에서 묻어 나오는 묘한 느낌에 반문했다. 그러자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기회만 되면 칼을 뽑는 사람인 줄 아나."

"아니야?"

"...맞긴 하지."

카인은 스윽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올리시렌은 이제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할 건 나쁜 기분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똑똑-.

올리시렌은 왕녀의 권한으로 기차의 한 량을 통째로 빌려서 쓰고 있었기에 누군가의 노크가 멀리서 들렸다.

"누구시죠?"

이소엘은 자연스레 칼을 손에 쥐며 물었다.

이번엔 부르지 않은 불청객이었으니까!

똑, 똑.

하지만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뚝뚝 끊어지는 노크였다.

척.

그리고 노크가 끊어지기 전에 카인은 물론, 밴더빌트도 무기를 손에 쥐었다. 좋은 의도로 온 건 아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누구냐."

밴더빌트는 대검을 손으로 쥐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돌아오는 건 맑은 여인의 목소리.

예상치 못한 답에 셋은 카인을 돌아보았고,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매정하시군요. 그쪽에서도 저를 보고 싶어 하는 걸로 알고 찾아뵈러 왔습니다만."

스릉-.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뽑았다.

그리고 얇은 나무문 건너편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부러 칼 뽑는 소리를 크게 울린 만큼, 건너편의 여인도 들을 수 있었다.

"나이로는 제가 훨씬 더 많은데, 칼부터 뽑으시다니 무례하십니다."

"그럼 가는 순서도 더 빠르겠군."

"에셀레드의 공자님이 이렇게까지 삭막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에 담긴 내용과 달리 목소리의 고저는 변하지 않는다. 카인은 천천히 숨을 뱉으며 몸에 가벼운 긴장을 불어 넣었다.

"섭섭한가?"

"조금요."

"그러면 안 되지."

쉐에에에에엣-!

카인은 수평으로 들고 있던 아그웨스카를 그대로 나무문을 향해 내찔렀다.

물을 파고들 듯 아그웨스카의 칼날이 막힘없이 문을 꿰뚫었다.

'피했군.'

하지만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스륵-.

검을 다시 잡아당기자, 아그웨스카의 칼날이 만든 구멍으로 초록색 눈알 하나가 나타났다.

"놀랐습니다.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칼부터 꽂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지 알기 전에 미리 해치워두면 편하니까."

가늘게 휘어지는 눈.

카인의 대답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눈치였다.

"이쯤 되니까 고작 열일곱에 소드마스터니, 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군요. 감탄했습니다."

쫑긋-.

그 순간 카인의 귀가 움직였다.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그의 본능이 무언가를 잡아냈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열차의 천장을 쓰윽 둘러보았다.

"이 위로 움직이는 것들은 네가 준비한 건가?"

"놀랍군요. 숲의 비전을 둘러서 소리도 안 나고, 진동도 열차에 먹혀서 없었을 텐데."

그 말에 카인을 제외한 세 사람도 문 건너편의 초록 눈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인간 사회에 파고든 엘프.

엘프의 명예를 버리고 전쟁의 승리만을 바라는 위대한 엘더.

후두두두-.

객실의 모든 창으로 초록의 눈알들이 나타난다. 이소엘은 급하게 올리시렌의 앞을 막아 섰고, 밴더빌트는 카인의 등 뒤에 섰다.

끼익-.

문이 열린다.

그리고 들어오는 건 호리호리한 한 명의 여인.

또각-.

걸음마다 흔들리는 초록빛의 머리.

"처음 뵙겠습니다. <로스 데 캐롯>의 기사단장, 시그마리 로스 에이그리히라고 합니다."

여태까지가 후작들과 싸우기 위한 준비였다면, 이제부턴 본격적인 전쟁이리라.

카인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76 EP.Ⅰ-20

아크투루스(Arcturus) (1)

「"모든 전사들의 위대한 절망이자 찬란한 희망, 로드이스트를 뵙습니다."

초록 머리의 사내가 뻣뻣하게 굳어선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소리쳤다.

그 맞은편.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예사니스."

무감각한 보랏빛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면의 설원공, 카인이 앉아 있다.

카인은 손짓으로 초록 머리의 사내, 예사니스도 앉게 했다.

그는 군기가 잔뜩 든 신병처럼 카인과 마주했다.

"생존일은?"

"현재 백 일이 조금 넘었습니다."

"방랑엘프 치곤 대단하곤."

카인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대장벽에 흘러들어온 방랑엘프가 몇 있었지만, 평균 생존 72시간의 대장벽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엘프는 없었다.

예사니스가 이레귤러일 뿐.

"감사합니다!"

그는 카인의 말에 곧장 기립해서는 소리쳤다.

"...그래."

하지 말라고 말해 봤자 통하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어,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예,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엘프는 어떻게 해야 잘 죽일 수 있나. 은근히 까다롭던데."

"...예?"

예사니스는 본인도 모르게 얼빠진 눈으로 반문했다.

카인은 그런 그를 보며 차갑게 살짝 웃었다.

"우리의 장벽을 넘어 인류 세계를 침범하려는 적 중에는 가끔 엘프도 있으니까."

"아, 다크엘프!"

"그래."

"백 번이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미친놈들인 엘프들을 죽이는 데 무엇을 말씀 못 드리겠습니까!"

그런 엘프가 끔찍하여 스스로 세계수와의 선을 끊고 방랑을 선택한 방랑엘프, 예사니스.

"가장 중요한 건 '선'을 보는 겁니다."

그는 한 명이라도 전우를 더 살리기 위해 생긴 것과 달리 끔찍한 엘프의 모든 걸 말했다.」

* * *

수십 쌍의 눈동자.

마치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거미인 양 눈동자만 드러낸 자들이 열차의 창밖에서 카인 일행을 바라본다.

"당장은 여러분들을 해칠 생각이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또각- 또각.

그리고 시그마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카인 일행이 통으로 빌린 객차를 이리저리 훑어본다.

"난 있는데."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다시금 쥐었다.

그러자 달리는 열차에 딱 붙어서 이 상황을 감시하던 엘븐나이트들이 카인 쪽으로 일제히 눈을 돌렸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기괴한 광경에 올리시렌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시그마리는 카인의 그런 행동을 젊은 날의 객기로 판단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넘치시는군요. 하긴 어린 나이에 그렇게 강한 힘을 쥐게 되면 그럴 만합니다."

반면 카인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시그마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았다.

"엘프가 버젓이 후작가의 기사로 활동한다라. 재미있군."

"오호. 제 귀는 둥그런데 엘프라 하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시그마리는 사람과 똑같은 자기 귀를 흔들며 카인에게 말했다.

파직-!

그 순간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에 순백의 뇌전이 잠시 튀었고.

['겨울'이 은닉된 진실을 일부 드러냅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묘한 한기가 한순간에 스쳐 가더니.

스으으읏-.

마법으로 가려져 있던 엘프 특유의 큰 귀가 나타났다.

시그마리는 카인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뭘 하신 겁니까."

"내가 뭘?"

카인이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자, 시그마리의 귀는 다시 인간의 것처럼 변했다.

그녀는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인의 다른 일행들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방금 겪은 게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마법을 풀고 자신을 드러내게 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시그마리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진다.

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객차 밖에 붙어 있는 그녀의 기사들이 습도 짙은 숲과 비슷한 살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재미있습니다. 후작님이 뭐라고 하셨어도 이전에 없애 버려야 했군요."

까딱-.

카인은 시그마리의 손가락이 세검에 닿는 걸 보았다.

"지금이라도 없애게?"

칼을 뽑기 위해 천천히 몸의 중심을 낮추며 시그마리는 카인을 응시했다.

정체 모를 흑색의 검을 쥔 흑색 머리의 카인.

외양은 아직 어려 보이지만, 그 속내도 모르겠고 조금 전처럼 정체 모를 힘도 지니고 있다.

"가능하면 그래야겠습니다."

카인이 그러하듯 시그마리도 정체불명의 적을 보면 일단 검부터 찔러 넣는다.

거울의 반대편처럼 싸울 때만큼은 비슷한 둘은 차가운 눈동자로 서로를 응시했다.

초록의 눈과 보랏빛 눈.

엘프와 인간.

'그리고 나의 과거를 부쉈던 로스의 칼이여.'

스으으으으읏-.

시그마리의 기사들이 흘리는 살기가 얼어서 부서지고, 그 자리를 메우는 건 설원과 같은 공허하고 끝없는 카인의 차디찬 살기!

당장이라도 깨질 듯한 살얼음판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시그마리였다.

"한 다리 거쳐서 듣는 정보와 실제 마주하는 건 역시 다릅니다. 그럼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유언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자가 말했다면 건방진 도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카인이 입을 열자 명확하게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 같았다.

시그마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치솟는 긴장감에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아벨이나 아르나 같은 잡종을 살려 두는 건지 모르겠군요."

"...."

"인간 귀족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도 태연하게 죽이던데,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복형제를 살리는지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카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올리시렌이나 밴더빌트는 카인의 얼굴을 보면서 느꼈다.

지금 그의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걸.

그걸 알 리 없는 엘프, 시그마리는 카인의 무언을 말하기 곤란한 것이라 치부했다.

"어차피 잡종이 낳은 잡종. 뽑고 짓밟아도 잡초처럼 숲의 외곽에서 살아남던데 이젠 끝낼 때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뽑고 짓밟았나?"

카인의 어조는 평범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얼마나 폐쇄적인지, 여왕이나 세계수와 연결되지 않는 방랑엘프나 하프엘프에게 얼마나 혹독한지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니까.

그러나 카인이 만난 건 대륙의 엘프들인지라.

정작 아르나나 아벨이 아이리안 섬의 엘프들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들어 본 적 없었다.

물어봐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을 생각도 없었고.

시그마리는 담담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인간의 아이는 물이 상당히 필요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숲의 외곽에 있는 모든 샘을 막았습니다. 아르나가 쓰지 못하게요."

"...."

"아르나 본인이야 며칠이고 물이 없어도 살겠고 숲을 떠나도 되겠지만, 어린아이는 세계수의 가호가 필요하니 떠날 수가 없죠."

"아벨만 두고 잠시 물을 뜨러 갔다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자 시그마리는 인형이나 지을 법한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커서 두고만 보던 쓰레기가 분리되면 당연히 저희가 청소했겠죠."

용병 '섬광'의 아르나는 강하다.

제아무리 엘더라도 일대일이라면 승리를 점치기 힘들 정도.

그렇기에 두고 봤지만, 아이만 두고 사라진다면 그 아이를 죽이겠다는 끔찍한 말을 그녀는 태연히 입에 담았다.

덜컹- 덜컹-.

철로가 끊기던 지점이었는지 한층 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고, 시그마리는 못다 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왕님께서 자비로우셔서 그녀의 감각 하나만 받고 다시 풀어 주셨죠."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각?"

"미각을 바쳤었습니다."

"...."

아르나의 사과파이가 맛없던 이유.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생각하던 이유.

끊임없이 싸우고 감각이 날카로워진 용병의 미각만이 이상했던 것.

그저 날 때부터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그마리는 카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그다음엔 일 년 동안 왼팔을 바쳤었죠."

"일 년간?"

"여왕님과의 맹세입니다. 일 년간 왼팔을 쓰지 않으면 원래대로 풀어 주고, 쓴다면 곧장 자기 손으로 아벨을 죽이게 하는 강제 맹약."

"...!"

"그렇게 일 년씩."

시그마리는 제 몸을 한 부위씩 가리키며 즐겁게 말을 이었다.

"팔, 다리, 코, 귀... 그 독한 종은 쓰지 않더군요. 편하게 쓰고 자식을 죽이는 걸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

"그런데 이젠 잡종들이 죽는 걸 보겠습니다. 우리야 약속만 지키면 가만히 있지만, 당신네 인간들은 그런 거 상관없이 마음에 안 들면 죽이니까요."

시그마리는 씨익 웃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짓는 뒤틀린 미소에 카인은 아벨의 말에 떠올랐다.

-북방의 엘프들은 개새끼입니다.

용사가 된 아벨도 제 죽음에는 초연했지만, 엘프에 대해선 이를 갈았고.

-저는 어머니의 피를 빨아 살았습니다.

지금의 어린 아벨도 엘프의 숲 외곽에서 살았던 시간을 지옥으로 여겼다.

어째서인지는 지금까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그마리에게 고마웠다.

바로 밴더빌트를 바라보았고 노기사는 눈빛만으로 뜻을 알아채곤 이소엘의 옆으로 가서 올리시렌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미의 마음을 농락하는 그딴 게."

쿠웅-.

카인의 발이 열차를 디딘다.

그저 무게가 찍혀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모든 살기가 폭발하는 것만 같은 진동이 울렸다.

"즐거운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화내는 카인의 모습에 시그마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인간들도...."

"인간이고 엘프고."

카인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스윽-.

그러곤 아그웨스카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 끝으로 시그마리의 머리를 가리켰다.

"내 눈앞에서 그딴 짓 하면 죽어."

스릉-.

시그마리는 자연스레 은빛의 세검을 뽑은 다음 카인을 보며 비웃었다.

"참으로 감정적인 인간입니다. 무엇을 그리 자신하죠? 그리고 지금 이곳을 노리는 제 부하들이 있는-."

탓-.

카인은 다시금 그녀의 말을 자르며 박찼다.

'주절주절 말이 길어도 죽는다.'

말을 하는 중이면 어쩔 수 없이 한 박자 늦을 수밖에 없으니까.

카인의 아그웨스카가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달려든다.

채애애앵앵-!

그와 동시에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돌입하는 기사들!

밴더빌트와 이소엘은 각자 올리시렌의 좌우를 맡으며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쉐에에에에엣-.

카인의 아그웨스카는 그대로 공기를 찢어발기며 찔러 들어갔다.

채앵-!

하지만 시그마리는 시그마리.

<로스 데 캐롯>의 기사단장이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듯, 초록의 오러가 휩싸인 세검으로 카인의 검을 튕겨 냈다.

그러나 완전히는 불가능했다.

목을 노리던 카인의 검을 옆으로 밀어냈지만, 조금뿐이라.

그녀의 귀를 반으로 가르며 뒤로 뻗었다.

"빈틈."

동시에 시그마리는 입이 귀에 걸리게 웃었다.

생각보다 너무 무거웠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자신에게 승기가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카인은 아그웨스카의 손잡이 그대로 시그마리의 쇄골을 내리찍었다.

콰앙-!!

동시에 튀어나오는 무릎.

시그마리의 명치를 후려치며 그녀의 몸을 객차의 반대편에 틀어박았다.

"커헉-. 어떻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초록 머리는 산발이 되고, 내부가 진탕된 그녀는 피를 토했다.

"저 인간을 죽여-."

그러면서 내뱉는 명령.

눈이 공허한 초록 눈의 기사들이 카인을 향해서도 달려든다.

파지지지지지직-.

카인의 전신에서 들끓는 순백의 뇌전이 신경을 불태우고 근육을 자극하며 온몸을 내달려!

그의 아그웨스카까지 뇌전으로 물들였다.

스윽-.

단숨에 양측에서 달려들던 엘븐나이트 둘의 허리를 횡으로 베었다.

"에드먼드의 자식은 역시...."

"에드먼드가 잘난 게 아니다. 내가 잘난 거다."

"쿠쿡, 큭."

시그마리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 미소도 카인의 다음 말로 멈췄다.

"글루미엠, 나와."

"...?"

"음흉하게 다 보고 있는 거 안다. 튀어나오라고, 당장."

데구루루르르-.

그 순간, 시그마리의 눈알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부분까지 돌아가 버려 흰자위만 남은 상황.

"아비나 아들이나 하나같이 건방져."

열차의 싸움이 멈췄다.

모든 공간이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묘한 기세가 흐르기 시작했고, 시그마리의 육체가 공중에 떠올랐다.

"근데 아비랑 다르게 엘프에 대해서 잘 아는 모양이네? 아르나는 침묵의 맹세를 하고 있어서 못 말했을...."

쉐에에에에-!

공기를 찢어발기는 칼의 소리.

'하나같이 말이 길어서 좋군.'

카인의 검이 다시금 내달렸다.

그 끝엔 엘프 여왕 글루미엠이 강림하며 카인의 눈에 선연히 보이기 시작한 '선'.

시그마리의 정수리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어지는 은빛의 선이었다.

#77 EP.Ⅰ-20

아크투루스(Arcturus) (2)

여왕, 글루미엠은 카인을 보며 처음엔 비웃었다.

세계수의 화신인 여왕과 연결되는 '선'만 멀쩡하면 엘더급 엘프가 죽을 리 없는데 멍청하게 달려드는 꼴이 웃겼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카인의 칼끝이 노리는 건.

까아아아아아앙-!

그녀의 머리 위!

순백의 뇌전에 휘감긴 흑색의 아그웨스카가 닿자마자 그녀의 머리 위로 천공을 향해 솟아 있는 은빛의 '선'이 나타났으니까.

"어떻게!?"

"잘."

얼마나 단단한지 카인의 일격을 받아 냈다.

그리고.

까아아아앙-!

이번엔 다시금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선을 베어 내고자 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이 출렁였지만, 엘프의 '선'은 끝내 끊어지지 않았다.

"쳐!"

시그마리의 몸에 강림한 글루미엠은 손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그러자 멈칫거리던 엘븐나이트의 눈이 데구루루 굴러가더니 그대로 카인을 향해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아무리 카인이라도 엑스퍼트의 끝자락에 달하는 힘을 뿜어내는 엘븐나이트 여럿을 쉽게 상대하긴 부족하다.

게다가 인형극의 인형처럼 누군가의 조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달려드는 것들을 죽이는 건 더 어려운 일.

"공자님-!"

밴더빌트가 자리를 이탈해 카인을 지키고자 했다.

솨아아아-.

카인은 왼편에서 달려들던 엘븐나이트의 목을 베고 뒤에서 암습하던 건 무릎을 차 무너뜨리면서 소리쳤다.

"가만히!"

"...!"

밴더빌트는 그의 명령에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시에 올리시렌도 눈을 부릅떴다.

악마, 발람과 싸울 때야 주위에 아무도 없지만, 지금은 마녀이자 엘프 여왕이 떡하니 나타나 있는 상황.

카인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꽈악.

이소엘은 무력감에 몸서리치는 올리시렌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이 열차는 그녀들의 전장이 아니었다.

"에드먼드...!"

휜 눈자위만 번뜩이는 시그마리는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며 에드먼드 백작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쉐에에에엣-!

허공을 가르는 흑색의 궤적.

그에 따라 피어나는 피의 폭죽!

아무리 인간들이라 하지만, 특별히 '숲의 비전'을 전수한 엘븐나이트가 단체로 볏단처럼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건 글루미엠으로서도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건 의문이었다.

"아무리 아들이라지만 너무 강해."

글루미엠은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이십 년도 살지 못한 인간이 엘븐나이트를 이렇게 쉽게 상대한다는 건 그녀로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나이의 에드먼드도 저렇게까지 잘 싸울 거라곤 상상되지 않았기에.

휘익-.

그녀는 손을 뻗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일어나라.

시그마리의 '선'이 뿜어내는 은빛이 환해지더니.

와라라라라라-!

무기질의 열차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초록색 넝쿨.

덜컹, 덜컹.

갑자기 나타난 굵은 넝쿨로 금방이라도 철로에서 튀어 나갈 듯 객차가 흔들린다.

그 넝쿨은 단숨에 카인의 두 발을 잡아채려 했다.

타탓-.

하지만 카인에겐 의미 없었다.

땅을 딛고 사는 게 인간이지만, 그는 이제 벽과 천장을 디디며 싸우기 시작했으니까.

날아오는 넝쿨은 피하고.

엘븐나이트가 휘두르는 오러는 가볍게 튕겨 내고.

수욱-.

빈틈이 보이면 단숨에 칼을 꽂고!

벽, 천장, 바닥.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공간 전체를 활용하면서 내달리는 카인의 모습에 글루미엠은 이를 악물었다.

일어나라.

다시금 공간을 울리는 여왕의 명령.

스윽-.

그러자 카인에게 조각나버렸던 엘븐나이트의 시간이 되감긴다. 곳곳으로 터졌던 살점과 피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모이고.

척-.

죽음에서 돌아온 기사가 되었다.

카인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숲의 비전을 전한 수준이 아니라 이건 무슨 언데드인데?"

"인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거지."

"효율이라...."

엘프와 인간.

종족이 다르지만, 장벽 밖의 적을 상대하는 데는 똑같은 인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버린다.'

카인은 그 생각을 지웠다.

대륙의 엘프라면 몰라도 적어도 눈앞에 있는 섬엘프의 여왕은 같은 인류가 아니다.

아니, 같은 인류기에 이렇게까지 잔혹하겠지만, 로드이스트로서 카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나도 효율적으로 싸우겠다."

카인의 선언에 글루미엠은 비웃었다.

"퍽이나. 꼬맹이라 그런지 입만 살았구나."

"그래?"

파지지지지지직-!

그와 동시에 찬란하게 퍼져 나가는 뇌전의 백광.

그 백색의 격류 속에서 카인의 보랏빛 눈을 보는 순간 글루미엠은 가슴 한구석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자신의 본체는 저 멀리 숲의 궁전에 앉아 있는데도!

씨익.

카인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다가오는 엘븐나이트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그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엘프를 제대로 죽이는 방법은 둘.

첫째는, '선'을 끊어서 죽이는 것. 대다수 엘프가 강한 건, 개인의 의식보다 '선'으로 연결된 같은 부족 엘프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즉, 틈만 나면 모두의 힘을 가져올 수 있기에 '선'을 끊어야만 죽이기 쉬웠다.

'엘더급 이상 엘프라면 선을 끊지 않으면 죽이기 힘들고.'

하지만 예사니스가 이 방법을 말해 주기 전까진 카인은 늘 두 번째 방법을 사용했었다.

퍼어어어억-!

지금까지 칼날로 적을 베었다면, 이번엔 아그웨스카의 옆면으로 엘븐나이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겨울'의 뇌전이 깃든 절망검의 일격을 받아 낼 엘븐나이트는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

퍼억.

카인은 머리만 노렸다.

"미친놈!"

보다 못한 글루미엠은 욕을 토했다.

엘프를 죽이는 방법 두 번째는, 머리를 없애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생겨나면 다시는 못 살아날 때까지 부숴 버리고!

'숲의 비전'을 이용해서 만든 것답게 죽는 방식도 엘프와 비슷했다.

쿠웅-.

잘 짜인 음악과도 같은 리듬으로 카인은 발을 디뎠다.

그러곤 왼 주먹과 오른손에 쥔 아그웨스카로 집요하게 엘븐나이트의 머리만 노렸다.

글루미엠의 손짓에 간혹 다시 살아나는 개체도 있었지만, 카인은 놓치지 않았다.

부수고, 부수고, 그리고 부수고.

저들도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푸른 꿈을 지닌 젊은 기사였을 것이고.

하지만 로스 후작의 야욕과 엘프의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한낱 싸우는 인형이 되어 버린 자들을 위해.

퍼어억!

'죽인다.'

죽음조차 마음대로 가질 수 없게 된 자들을 위해 카인은 검에 진심을 담았다.

전사만이 할 수 있는 장례였다.

그렇게 살아남은 엘븐나이트를 한 손에 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글루미엠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물렸다.

휘익.

카인은 땅을 향해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그러곤 선명한 보랏빛 눈으로 글루미엠을 응시했다.

"왜 그랬나?"

시그마리의 몸이 아니라 저 '선'너머 존재하는 여왕 그 자체를 바라보는 듯한 눈.

치열한 싸움으로 요란히 흔들리던 객차가 원래의 안정을 되찾을 정도가 되어서야 글루미엠은 미소를 지었다.

"아르나? 아벨?"

"그래."

"이유가 필요하나?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야."

그 순간.

카인도 똑같이 미소 지었다.

거울을 마주하는 것만 같은 미소에 글루미엠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고.

"너는 좋은 엘프다."

"...?"

카인의 갑작스러운 말에 글루미엠은 물론 올리시렌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그를 바라보았다.

카인은 왼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칼을 쥐었다.

덜컹-.

열차가 한 번 떨리고 카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세상에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이거든."

[미래가 소모됩니다.]

『삼하인(Samhain)의 '겨울'... 개방.』

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늘 차가웠던 그의 보랏빛 눈에 순백의 뇌전이 무수히 몰아치다 못해 불꽃처럼 보였다.

우우우우우우우-.

우주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한기 속에서 절망의 외침이 울린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개 같은 엘프!'

아벨이 뱉었던 욕들이 뼛속 깊이 이해되기에 카인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아르나는 무슨 마음으로 아벨을 키운 것인가.

아벨은 그런 아르나를 보고 무슨 마음으로 자라난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런 둘을 이전에 어떻게 대했는가!'

차오르는 후회와 타오르는 분노가 카인의 등을 떠밀고.

파앗-.

카인의 발이 바닥을 박찬다.

그의 발이 닿았던 곳마다 얼음꽃이 피어난다.

파사사사삿-.

그를 잡아 죽일 듯 쏘아지던 넝쿨은 닿기도 전에 순백의 얼음에 휩싸여 부서졌다.

"막아!"

글루미엠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온 신경을 잡아 뽑아 버릴 듯한 차가운 살기에 소리쳤다.

"그아아아아-."

그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남은 엘븐나이트들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온몸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어린 에셀레드야, 제법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만, 네게 뾰족한 방법은 없어!"

글루미엠은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스윽-.

엘븐나이트 한 기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스윽-.

상처를 회복해야 하지만, 베인 곳 위로 뇌전이 스치며 화상을 입히고 그 안쪽으로 한기가 파고들어 괴사시키니 엘븐나이트라고 해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쉴 동안 카인은 남아 있는 엘븐나이트를 도륙해 버렸다.

"...!"

이 세상에 단 하나.

오직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과거를 위해 미래를 불태우는 카인을 막을 건 아무도 없었다.

후우우우우우우우-.

글루미엠은 카인의 눈을 응시했다.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시리고 오싹한 카인의 살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저벅-.

카인은 다시금 피를 털고 검을 쥐며 걸었다.

"어차피 나는 여기에 없어."

"안다."

글루미엠은 현재 조종하고 있는 시그마리의 초록빛 머리를 들며 카인을 조롱했다.

"너의 분노를 이 평범한 다른 엘프에게 풀려고? 참으로 못된 아이로구나?"

"방금 말했지. 좋은 엘프는 죽은 엘프뿐이라고!"

팟-!

카인이 바닥을 박차며 짓쳐들어 갔다.

얼마나 무거운 힘이 실린 건지 열차의 나무 바닥이 폭탄이라도 터진 듯 부서졌고 단단한 쇠 프레임을 드러냈다.

타탓-.

혜성처럼 쇄도하는 카인.

제 미래를 불태우며 분노하는 한 명의 전사를 바라보며 글루미엠은 두 손을 뻗었다.

무너져라.

마녀의 기원이 톱니바퀴처럼 드러나며 세계에 있을 수 없는 기적을 피워 낸다.

여왕의 힘을 초월한 마녀의 힘!

이 세계 여덟 번째 마녀이자 엘프 여왕의 존재감이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기긱-.

카인의 귓가로 다시금 세계의 톱니바퀴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면서 부딪치는 굉음이 들렸다.

"어차피 이 아이를 상처 입혀도 나는 멀쩡하지! 하지만 넌 아니야! 짓눌려 죽어라, 어린 에셀레드야."

글루미엠의 광소.

에셀레드에게 당했던 과거를 풀어내려는 한풀이.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마녀의 힘.

기적의 거대한 무게감이 카인을 납작하게 만들 듯이 짓눌러 왔다.

['겨울'이 당신의 검을 지지합니다.]

쿠르르릉-.

하늘은 푸르고 맑건만, 저 멀리서부터 천둥이 울린다.

"뭐...?"

그러나 글루미엠은 단숨에 그 소리가 카인의 오른손에 쥐어진 흑색의 검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달았다.

카인식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에드먼드에게 보았던 그날의 검을 따라 한다.

목줄 풀린 맹견처럼 뇌전이 질주하고 바람이 일어나고.

콰가가가가가가!

번개폭풍에 휘감긴 흑색의 아그웨스카가 시그마리의 정수리에서부터 하늘로 치솟는 '선'을 자르고.

후웅-.

두 번 찌르는 에셀레드의 검답게 그대로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다시 달려들었다.

글루미엠은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안 돼!"

"돼!"

#78 EP.Ⅰ-20

아크투루스(Arcturus) (3)

시시각각 다가오는 카인의 칼날.

글루미엠은 아홉 엘더 중 누구도 잃을 순 없었다.

엘더급 엘프가 빠질수록 세계수를 지탱하는 자신의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

특히 인간계에 숨어든다는 불명예를 스스로 짊어진 시그마리는 특히 더 유용한 엘더기에 글루미엠은 더 늦기 전에 결단했다.

바친다!

끼기기기기긱-!!

마녀가 자신의 기적을 행사할 때마다 카인에게 들리는 톱니바퀴의 부서지는 소리가 증폭된다.

시그마리의 뒤.

반짝이는 은빛의 '선'에 연결된 초록색 눈으로 바라보는 글루미엠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보였고.

'세... 계수?'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하지만 카인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숭-덩.

'느낌이 없어.'

분명 가느다란 하얀 목을 베었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은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에드먼드 이후로 처음이야."

글루미엠의 끓는 목소리가 울린다.

화아아아아-.

시그마리의 발끝에서부터 주홍색 불티가 튀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그녀를 사라지게 한다.

카인은 그녀의 뒤에 보이는 글루미엠의 본체를 응시하며, 칼을 내렸다.

"도망쳤나."

"그래. 네 칼에서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바치지 말아야 할 걸 바쳤어."

거대한 세계수의 가운데.

하나의 가지에 다섯 개의 황금색 나뭇잎이 붙어 있다. 그러나 그중 맨 왼쪽의 하나가 주홍색 불꽃에 삼켜지고 있었다.

글루미엠의 환영은 그곳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린 에셀레드야, 너는-"

"카인이다."

카인은 글루미엠의 말을 잘랐다.

아마도 마녀의 기적에 세계수를 바쳐서 시그마리를 초장거리 공간이동 하는 것이리라.

대장벽으로 달려들던 마물 중 지능이 있고 신비를 가진 것들이 드물지만 보이던 거라 딱히 새로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간이동으로 사라지는 건 대이적답게 엄청난 대가가 필요한 일.

"엘프 여왕을 도망치게 만든 사람의 이름 정도는 외워야지?"

씨익.

그렇다면 지금의 승리는 자신의 것.

카인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

"카인이라고 다시 말해 줘야 하나? 하긴, 도망치는 데 바쁘니 외울 정신은 없겠지."

불꽃이 시그마리의 허리까지 삼키며 사라졌다. 그만큼 저 멀리 북방의 숲과 열차의 공간이 이어진다는 의미였고.

우우우우웅-.

패배의 굴욕과 분노에 몸서리치는 엘프 여왕 글루미엠의 기세가 더욱 진해졌다.

시그마리의 몸에 강림했던 것은 약과인 양, 세계수를 등진 진짜 엘프 여왕의 힘은 카인조차 한 걸음 물러나게 할 수준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카인 에셀레드. 그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니 외워 주마."

"어차피 싫어도 기억날 것이다. 부하를 보내 놓고 주둥이만 나불거리다가 급하게 도망가는데, 기억이 안 나면 바보지."

"...으득."

카인의 도발에 글루미엠은 잇소리가 울릴 정도로 이를 갈았다.

동시에 올리시렌과 이소엘, 밴더빌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흘깃 바라봤다.

평상시 카인과 달리 이렇게까지 말꼬리를 잡는 게 어색했으니까.

그러나 카인의 꽉 쥔 주먹을 살피곤 다들 내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벨과 아르나에게 특히 무르던 카인이기에 진심으로 분노했음이 엿보였으니까.

"나는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이자 지나가 버린 운명의 마녀. 미래의 조율자."

스윽-.

카인은 본능적으로 아그웨스카를 들었다.

섬뜩하다.

그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치솟는다. 그녀의 초록색 눈에 먹물이 풀리는 듯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영광으로 여기렴. 이렇게 내가 직접 누군가의 '운명'을 만지는 건 에드먼드 이후 처음이니까!"

화아아아아아-.

그 순간 카인은 검은색 번개가 파도처럼 쏟아지는 걸 느꼈다.

귀청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무수한 톱니바퀴에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완전히 검게 물들어 버린 그녀의 눈.

"운명이여! 저 건방지고 어리석은 것의 미래를 보여라!"

우우우우우-.

지금까지가 엘프 여왕 글루미엠의 힘이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마녀로서의 기적!

운명을 읽고 미래를 살피는 운명의 관측자로서 글루미엠은 잔혹할 정도로 무감정한 초록 눈을 빛냈다.

"뒤틀어라! 짓이겨라! 시련과 혼돈으로 녀석의 운명을 잡아먹어라!"

그 속에서 엘프 여왕이 피눈물을 뚝뚝 흘리며 카인의 운명을 파고들고 제멋대로 바꾸려는 것도 아무도 알 수 없을 터.

"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그마리의 머리만 남을 정도로 공간이동이 진행되었지만, 카인은 가만히 서 있었고 글루미엠은 피범벅이 된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역시 입만 살았군."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내렸다.

글루미엠이 하도 당당하게 말해서 혹시 자신이 모르는 엄청난 방법이 있나 했지만, 없었다.

게다가 공간이동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니 뭔가 있어도 하긴 늦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네 미, 미래가 왜 없지...."

"한심하긴."

카인은 그녀를 조롱했다.

['봄'이 쓴웃음을 짓습니다.]

['겨울'이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내심 글루미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겐 미래가 없다는 것인가.'

이미 한 번의 운명을 살았다.

그리고 살게 된 두 번째의 기회.

미래를 불태워서 현재를 지키는 자신에게 정해진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전 세계선의 모습으로 늘 나타나는 '봄'이 카인에게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기에 걷는 길이 나의 길이라.'

카인은 미래가 없다는 그 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후회 없이 살리라.

그것만이 자신의 두 번째 삶이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엘프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시그마리를 보낸 건 나를 살펴보고 가능하면 싹을 미리 자르려던 거겠지?"

"...."

글루미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가는 그녀의 표정으로 충분히 답을 들었다.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었다.

덜컹- 덜컹-.

둘의 싸움으로 이미 객차 안의 의자나 테이블 중 멀쩡한 건 하나도 없다.

카인은 엘븐나이트의 시체를 대강 발로 밀어 공간을 만들고, 찌부러진 철제 의자 하나를 가져와 대충 앉았다.

화아아아아아-.

부서진 차창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다. 피에 물을 살짝 탄다면 나올 법한 짙은 주홍색 석양빛이었다.

카인은 그 햇빛 아래서 패배에 몸서리치는 글루미엠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올렸다.

당연히 중지였다.

"꺼져라, 패배자."

"네, 네놈!!"

분노 서린 글루미엠의 외침!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올리시렌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만큼 글루미엠의 진체가 내뱉는 외침은 가공할 만한 위력이었다.

후웅-.

그러나 카인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뒤로 흩날리던 흑발을 쓸어 넘길 분이었다.

"그리고 아벨에게 감사히 여겨라."

"어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 주마. 입 더러운 카인 에셀레드!"

"오늘 내가 그대의 엘더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아벨이니까."

"하! 죽이지 못한 거겠지."

순간, 카인의 보랏빛 눈이 석양에 번뜩였다.

글루미엠은 실제로는 한참 멀리 있는 카인이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순간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살기에 움찔거렸다.

"정말 그럴까?"

"...."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당연히 헛소리라고 비웃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본능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카인은 손목을 꺾어 폈던 중지 그대로 글루미엠의 머리를 가리켰다.

"아벨이 칼을 들고 네 목숨을 따러 갈 때까지 꼭 그 지긋지긋한 삶을 더 살고 있어라. 귀쟁이 여왕."

"어린 에셀레드야."

"카인."

"...오늘 패배한 건 나이니 네 그 건방진 요구를 들어주마. 카인 에셀레드."

어느덧 시그마리의 눈만 남은 상황.

그녀의 초록 눈에 겹쳐진 엘프 여왕의 시선이 카인을 내려다본다.

"지금의 승리를 즐기거라. 그 시간이 길지 않을 테니."

"에드먼드가 당신의 숲에 들어간 걸로 안다."

그리고 카인은 천천히 비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힐난했다.

"그때 입도 뻥긋 못 한 여왕이 하는 말은 신뢰가 가지 않는군."

단숨에 찔려 버리는 그녀의 역린.

"이 개...."

하지만 이전에 카인의 말에 분노하던 것과는 달랐다. 에드먼드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 역시 난처해 보이는 게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오래전의 에드먼드다.'

직접 마주하면 또 다르겠지만, 글루미엠이 보이는 힘은 대장벽에서 상대하는 보스급 마물에 가까운 힘.

이곳이 대장벽과는 가장 먼 후방이고, 제국이나 성국과도 국력의 차이가 심한 걸 생각해 보면 글루미엠쯤 되면 거의 최강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런 글루미엠조차 에드먼드의 이름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니 에드먼드 백작의 힘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너희가 과연 숲까지 올 수 있을까?"

시그마리의 눈도, 그녀에게 강림해 있는 글루미엠의 눈도 곱게 휘어진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적은 인간이던데 말이야."

후우우우우웅-.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치던 글루미엠과 세계수의 환영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그마리가 있던 자리에는 그녀가 들고 있던 고급 세검만 덜렁 남았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

카인은 이미 떠나 버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잘 알 수밖에 없던 게 마왕이 죽은 후 겪었던 전사의 삶이었으니까.

"공자님!"

글루미엠이 사라지고 가장 먼저 달려오는 건 노기사 밴더빌트였다.

뒤를 이어 올리시렌과 이소엘도 다가왔다.

카인은 턱짓하며 주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의자들을 가리켰다.

"앉아. 아직 한 시간은 넘게 가야 하는데 앉아서 가야지."

"카인...."

올리시렌의 목소리가 떨린다.

글루미엠이 등장했을 때 아무것도 못 한 채로 두 기사의 뒤에만 있었던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리라.

카인은 물끄러미 올리시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배웠지?"

"...?"

"글루미엠이 쓰던 기적들 말이야."

"아, 그거야."

마녀의 말이 현실 세계에 구현되는 것이 기원에서 비롯하는 기적이다.

올리시렌은 많은 말로 연습했었지만 쓸 수 있는 단어는 몇 없었다.

"마녀가 이렇게 성국 걱정 안 하고 힘을 쓰는 경우는 저 귀쟁이 여왕 말곤 없을 테니까, 다음에도 잘 봐둬."

"알았어."

석양이 지고 어둠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며 밤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열차는 밤을 헤치며 메이누스에 다다르고 있었다.

* * *

우웅-.

숲길을 걷던 카테리나 성녀는 몸의 안쪽에서부터 울리는 기묘한 공명에 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물끄러미 서쪽을 돌아보았다. 앞장서던 에드먼드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 있소?"

"마녀의 파동이 느껴집니다."

에드먼드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물속에 손을 넣어 물결을 재어 보듯 바람 속에 손을 넣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소. 글루미엠의 것이겠지. 성녀께선 어떻게 하시겠소."

카테리나는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돌렸다.

"아이리안 섬엘프의 토벌은 정식 의결이 늘 되지 않기도 하고, 그렇다고 메이누스의 총교구 차원에서 움직이기엔 상대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마녀 글루미엠을 토벌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열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신의 뜻과 인간의 현실은 같이 하기 어려운 일이니."

그러나 다시금 파동이 느껴지자 성녀가 움찔거린다. 에드먼드는 그 모습을 흘깃 보곤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남았소."

"도착지가 말씀이신가요?"

"글루미엠의 멸망이."

"예?"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말해 줬소. 글루미엠은 에셀레드의 이름을 지닌 자에게 죽는다더군."

카테리나나 다른 성직자들은 그 말을 반갑게 받아들였지만, 에드먼드의 눈빛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79 EP.Ⅰ-21

봄의 증명 (1)

「빛이시여, 마녀는 정말 죽여야 하는 존재가 맞사옵니까?

어제 저는 마녀의 심장에 말뚝을 박았습니다.

그 마녀가 낳은 두 아들의 목을 비틀었고, 마녀의 결혼한 남자의 팔과 다리를 뽑았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누군가의 아비와 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 목도 가누지 못하던 아이들까지.

마녀를 숨겨 준 그 마을의 모두를 죽였습니다.

빛이시여.

제가 믿고 따르는 당신의 말씀은 세상 모두는 빛 아래 평등하고, 죄를 지었어도 진심으로 속죄한다면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또한 저희는 무슨 죄를 짊어졌기에 아이만이라도 살려 달라 울부짖는 자들을 없애야 하던 것입니까.

이 작은 기도의 답을 들을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과 뜻은 '여름'으로 피어나 '가을'로 저문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부족하고 불경한 의심을 품는 제게 당신의 빛을 빼앗아 가지 않는 것이 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겁도 납니다.

정작 마녀를 죽이지 않는다면, 당신께서 손길을 거두어 갈까 두렵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뜻이옵니까.

'가을'을 쥔 성녀의 말씀이 뜻이옵니까, 경전에 기록된 말씀이 뜻이옵니까.

혹은 마녀 엘프가 살아 숨 쉬는 아이리안 섬으로 이 불민한 자를 보내시는 것도 뜻이옵니까.

-어느 성직자의 일기.」

* * *

"달려! 달리라고!"

이히히힝-!

루브릭 남작의 외침에 마차의 말들이 한껏 투레질하며 내달린다.

육지의 항구, 메이누스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인 만큼 마차가 달릴 길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에 이런 질주가 가능했다.

"젠장! 젠장!"

그리고 마차 안.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중년의 루브릭이 머리를 붙잡으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지. 아무리 시그마리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승차인명부에 적지도 않고 태우다니."

그는 아이리안 전역의 철도를 총괄하는 철도청장으로, 메이누스의 철도청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청장님! 올리시렌 왕녀님의 객차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자도 아니고 왕녀가 탄 객차가 습격당했다.

시체만 남은 적들에게 정체를 알 수 있는 증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루브릭은 단숨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직전 로스 후작에게 마법 통신으로 시그마리를 은밀하게 보내라는 명령을 받았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왕녀도 적어야 하는 승차인명부에서 그녀와 <로스 데 캐롯>의 기사 몇 명을 적지 않고 태웠으니까.

시간대를 맞춰 보면 메이누스에서 타고 가서 중간역에서 왕녀의 열차에 탔을 터.

스윽.

루브릭 청장은 목을 쓸었다.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로스 후작은 자신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러 온 왕실기사단은 승차인 명부부터 찾고....

"이상한 점을 바로 찾아내겠지."

재깍재깍.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이 순간.

루브릭 청장은 가능한 빨리 메이누스 대환승역에 달려가 올리시렌 왕녀에게 머리를 박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없던 시골 남작가의 장남이었던 자신을 아이리안 철도청장까지 끌어 올려 준 로스 후작에겐 감사하나, 이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까.

탁-.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살폈다.

이제 곧 왕녀가 탄 열차가 들어 올 때다.

"더 빨리 달려!"

미리 준비하라곤 했으나 혹시 모르니 그는 급해진 마음만 일찍 도착하고자 했다.

콰가가가가강-.

그때 마차의 창밖.

열차의 굉음과 같은 소리에 올라서 고개를 돌렸다.

메이누스가 육지의 항구라면 육지의 배도 존재하는 법.

그의 작은 마차 옆으로 거대한 하얀 배가 엄청난 증기를 내뿜으며 내달렸다.

열 개의 바퀴는 바퀴살이 휘어 보일 정도로 돌았고, 그것이 떠받치는 몸통은 티 하나 없이 하얗고 거대하여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루브릭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순식간에 멀어지는 하얀 배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바르베타 총교구장이 어딜 이렇게 급하게...!"

그는 순간 입을 막았다.

이 길은 메이누스 대환승역으로만 뚫려 있기에 도착할 곳은 하나뿐.

철도청장인 자신과 아이리안 섬의 모든 성직자의 우두머리인 바르베타 총교구장에 올리시렌 왕녀까지.

어떻게 일이 풀릴지 암담해진 그는 본능적으로 성호를 그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이시여, 제발 손자가 다 자랄 때까진 이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옵소서."

그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소원을 빌며 계속 내달렸다.

* * *

끼기기기기기긱-!

두꺼운 철로와 열차의 바퀴가 맞물리면서 천천히 속도가 줄어든다.

폐허에 가까운 객차에 있던 카인 일행은 짐을 챙기며 밖을 보았다.

메이누스의 전경이 보인다.

반파된 그들의 객차를 보는 도시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경악에 가까웠다.

"아마 나가면 철도청장이 나와 있을 거야."

"왜?"

올리시렌은 카인의 반문에 기가 막힌 듯 제 얼굴을 가리켰다.

"무려 왕녀가 탄 열차에 이런 테러가 벌어졌는데, 안 나오고 배기겠어?"

"그렇군. 왕녀였지."

"뭐?"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짓자, 카인은 자연스럽게 웃은 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우인 것만 생각했다."

"너...."

그것이 카인 나름의 농담임을 안 올리시렌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소엘과 밴더빌트는 남은 짐을 챙기며 카인과 올리시렌의 뒤를 따랐다.

"청장이 로스 후작의 사람이었지?"

"어, 아마 시그마리나 기사들이 타는 걸 눈감아 준 게 루브릭 청장일 테고."

카인의 짐까지 들고 있던 밴더빌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몰래 탄 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루드 크로울 공자도 아이언하트로 가던 열차에 잠입했었으니 말입니다."

올리시렌은 이소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소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차 끝에 있는 문 위를 가리켰다.

복잡한 모델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맨 처음은 모두 '4'로 시작하고 있었다.

"열차의 세대가 달라서 청장이 눈감아 준 거로 생각하는 겁니다."

"세대요?"

열차가 달리지 않는 시대부터 검을 잡던 노기사로선 아무래도 어색한 내용.

이소엘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이리안이 철도를 도입할 때, 대륙의 철도는 3.5세대 즈음이었습니다."

"아...."

"3세대 열차까지는 평범한 열차라면, 메이누스와 수도 린드브룸으로 향하는 열차는 마법도시 <릴>이 만든 경계 마법이 장착된 4세대입니다. 따라서 이 열차는 불법침입자를 바로 잡아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복잡합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빠르지 않았는데, 세상이 너무 빠릅니다."

밴더빌트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진다.

카인은 앞으로 훨씬 더 변화가 빨라지고, 지금 대륙엔 5세대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는 걸 말하려다가.

툭툭-.

밴더빌트의 어깨만 두드렸다.

그렇게 셋이 나아갈 때.

올리시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카인이 머리를 터트려 버린 엘븐나이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마치 언데드와도 같던 자들.

상황이 마무리되고 철도원들이 조사하기 전 카인과 미리 살펴보면서 그들이 여전히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포를 거세하고 뼈에 숲의 비전을 박아 엘프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게 개조된 상태였다.

꽈악.

적이라도 아이리안 왕국민이라면 죽는 걸 껄끄러워하던 올리시렌답게,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카인이 대뜸 입을 열었다.

"엘프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었다."

다들 자신을 쳐다보자, 카인은 엘븐나이트를 베면서 튄 붉은 피가 굳은 벽을 손으로 짚었다.

그의 손에 피가 쩌억-하고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젠 싫다. 아벨이 왜 그렇게까지 엘프를 싫어하는지 알겠거든."

아이리안 왕국의 뿌리 깊은 엘프 혐오.

용사까지 된 아벨이 보이던 엘프에 대한 증오.

사람과 비슷하게만 생겼을 뿐, 그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종족의 아래서 자랐던 인간의 아이라면 당연하리라.

"그러니 왕녀 올리시렌."

"아까는 전우라며,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목소리를 깔아."

"이번 엘프전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네 왕위를 위해서도, 이 왕국을 위해서도, 엘프들을 죽이기 위해서도."

올리시렌과 카인은 서로를 응시했다. 따스한 격려보다 뜨거운 마음이 느껴졌다.

"네가 말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랑 확실하게 담판 지을 생각이었으니까 걱정 마."

"그래?"

카인이 그만큼 준비가 다 되어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묻자, 올리시렌은 품속에서 작은 반지를 하나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웨어햄 백작이 끼고 있던 것 같은데."

"맞아, 크로울 영지를 떠나는 날 밤에 내가 따로 받아 둔 증표야."

-마탑은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해서....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이 헐렁하다고 해도 아이리안 마탑의 주인답게 처음에는 에둘러 거절했었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옆에 서 있던 이소엘을 찔러서 말을 시켰고, 그는 자기 반지를 바로 빼서 올리시렌에게 주었다.

-하하, 딸이 부탁하는데 뭐가 대수겠습니까. 우리 마탑은 올리시렌 왕녀님을 보증합니다.

카인은 올리시렌의 이야기를 듣곤 피식 웃었다.

'애지중지하는 딸이 1왕녀의 호위 기사인데 안 뺄 수도 없었겠지.'

어쩐지 출발하는 날 이소엘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별로던데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

올리시렌은 어깨를 쫙 폈다.

"아버지가 만약 독대를 안 해 준다고 해도 왕국법으론 마탑주나 총교구장의 보증을 받거나 혹은 왕실기사단장을 이기면 할 수 있거든."

"그건 처음 들었군."

이전 세계선이든 지금이든 아이리안 왕실과는 별 상관없는 카인으로선 알 수 없던 규칙.

올리시렌은 '마탑주의 반지'를 다시금 품에 넣었다.

"그러니까 나도 진심이라는 거야. 단순히 왕녀라고 가만히 있을 생각 없어."

"잘했다."

카인은 피식 웃곤 몸을 돌렸다.

엘븐나이트와 시그마리를 보고 카인은 현재 국왕인 하이볼트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있던 찰나였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인가.'

혹은 모든 걸 알지만 가만히 바라만 보는 것인가.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라면 올리시렌이 딸이라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올리시렌의 행동이 제법 기꺼웠다.

드륵-.

카인은 어느새 가까워진 객차의 문을 열었고.

"문을 열까요?"

객차와 객차 사이.

미리 나와 있던 철도원들이 절도 있게 경례하며 물었다.

열차는 이제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천천히 멈추고, 카인은 반투명한 유리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메이누스 대환승역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이는 건 없지만, 사람이 꽤 많이 모여 있다.

문고리를 쥔 철도원은 카인의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

"현재 청장님께서 마중을 나와 계십니다."

"그런 것치곤 사람이 좀 많아 보이는데."

"그게...."

쉬이 말을 잇지 못한다.

철도청장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와 있다는 뉘앙스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메이누스에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나? 왕실에서 온 사람인가."

하지만 린드브룸에서 오기엔 웨어햄 백작처럼 날아오는 게 아니라면 시간상 불가능하다.

또 다른 칠대귀족가의 사람이 와 있는 게 아닌 이상 현재 메이누스에 철도청장보다 높은 사람은 있을 리 없다.

철도원이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기에 카인은 슬쩍 웃었다.

어차피 살기도 없으니, 열차의 큰 문을 곧장 열었다.

"카인 에셀레드 공자님을 뵙습니다."

철도청의 정복을 입은 중년인이 고개를 숙인다.

그의 가슴께에 부착된 명패에 적힌 루브릭이라는 이름이 그가 청장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

쿠우우우웅-!

수십 개의 금빛 창이 대환승역의 바닥을 내리찍는다.

기계갑옷을 입은 성국의 기계화 팔라딘이 왼쪽에 한 줄로 서 있고, 반대편엔 이단심판관이 서 있다.

그 섬뜩한 두 줄 사이.

깡마르고 볼이 홀쭉하고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기계화 팔라딘과 이단심판관이 따르는 자.

"이단심판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아이리안 총교구장, 노초 바르베타 대주교가 상처인지 주름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빼곡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80 EP.Ⅰ-21

봄의 증명 (2)

척-.

카인은 손을 들어 자신을 뒤따라 나오려던 올리시렌을 막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 슬쩍 고개를 더 내밀었다가 성복의 흰 자락을 보고 급히 뒤로 숨었다.

그 기색을 느끼며 카인은 허리를 펴고 성국의 인물들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직 각성은 안 했다고 하지만 모른다.'

성국의 이단심판.

이교도라면 순수 사제들도 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고, 마물이라고 하기엔 아이리안 섬은 너무나 안전한 땅.

그렇다면 남은 건 마녀일 터.

올리시렌이 '기원'을 깨달아 '기적'을 부린다면 온전한 마녀로서 들킬 테지만, 아직은 아니다.

'...하는 짓은 마녀 뺨치지만.'

발람과의 전투를 잠시 떠올린 카인은 더더욱 눈앞에 있는 성직자와 올리시렌은 마주하게 하면 안 된다 판단했다.

"누구지?"

카인의 하대.

후웅-!

그 순간 기계화 팔라딘과 이단심판관들은 일제히 들고 있던 창을 카인에게 향했다.

"다들 젊어서 이러는 거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셀레드의 장남 카인. 나는 노초 바르베타, 불민하나 아이리안의 대주교입니다."

쿠웅-.

노인이 부드럽게 손을 올리자 다들 원래의 자세를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리안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심지어 중앙정계에서 힘 좀 쓴다는 루브릭 철도청장마저 바르베타 총교구장 앞에선 꼼짝 못 하고 있다.

카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은은한 압박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대장벽에 죄인들을 찾으러 쫓아 온 성국의 비밀특무성과 상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아이리안에서 몇 번 싸움을 겪었지만, 사람이 주는 섬뜩한 느낌은 세계선을 건너서는 처음이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카인 에셀레드입니다. 먼저 다짜고짜 심판부터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냥 묻죠. 죄목이 뭡니까?"

카인은 더욱 여유 있게 나갔다.

올리시렌이 마녀임을 들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게 생각해 뒀으나, 당장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카인의 머리가 새로운 전략을 짜기 위해 치열하게 돌아갈 때, 바르베타 총교구장의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카인만을 바라보았다.

"마녀입니다."

"마녀라. 그럼 대상자는 누굽니까."

"당신입니다. 카인 에셀레드."

"...?"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올리시렌을 잡기 위해서 쫓아온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작은 실마리라도 얻어서 무작정 두드리러 온 건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자 의아했다.

'에드먼드가 성국의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했는데, 관련이 있는 건가.'

올리시렌의 왕실정보국에서 준 정보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성직자의 외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성복을 함부로 입는 건 상당한 중죄기에 에드먼드의 성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테고 분명 성국의 배려로 받은 것이리라.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

상황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까지 진행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것도 성국을 움직이는 것이.

"제가 알기로 이단심판은 성국이 바라는 답을 할 때까지 고문하는 겁니다."

카인의 한마디가 물결을 일으키고.

"대주교님!"

바르베타 총교구장의 양옆에 있단 팔라딘과 이단심판관들은 발끈했다.

그러나 바르베타는 못 들은 척 하얀 수염을 쓸면서 카인의 보랏빛 눈을 직시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요."

"대주교님?"

성질내던 자들이 그의 한마디에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카인 역시 예상치 못한 발언에 바르베타를 쳐다보았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특히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이교도나 마물이면 몰라도 마녀의 경우엔 파악하는 방법이 어려워서 그런 말이 나옵니다."

"그럼 마음에 안 드는 자를 마구잡이로 잡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카인의 도발.

하지만 노회한 바르베타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럴 순 있지요. 그러나 저희를 빛께서 늘 내려다보고 계시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럼 급하게 왕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건 당신들의 '빛'께서 시키는 일이십니까?"

바르베타 대주교의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까지야 넘길 수 있지만, 저 말은 그들의 신앙의 대상인 '빛'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

정말 이단심판으로 넘어간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기에 카인은 더더욱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정체불명의 흉수에게 왕녀와 칠대귀족가의 일원이 테러당한 마당인데 말입니다."

옆에서 초조하게 듣고 있던 루브릭 청장의 안색이 하얗게 변한다.

카인의 어조가 올라감에 자기 목이 뎅-겅하고 썰리는 미래가 보였다.

그렇다고 끼어들 수도 없다.

소드마스터라는 소문이 도는 에셀레드의 카인과 바르베타 대주교의 담화에 감히 껴들 엄두조차 나지 않기 때문.

"루브릭 철도청장."

그때 카인이 그를 불렀다.

척-!

루브릭은 철도청에 막 들어온 신병처럼 각 잡고 바로 서서 대답했다.

"네!"

"테러범은 누군지 찾았습니까?"

"그게...."

카인은 루브릭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보았다. 게다가 떨리는 손과 흔들리는 눈빛.

'올리시렌의 말대로 시그마리를 묵인한 건 이놈이겠어.'

예상한 적과 예상치 못한 방해물이 생긴 상황에 카인은 둘을 동시에 치우기로 했다.

시그마리를 칼로 물리쳤다면, 이제는 혀의 시간이었다.

"승차인명부는?"

"...."

루브릭은 갑자기 자신에게 튄 불똥에 당황하면서도 아픈 부분만 팍팍 찌르는 카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어 보이는데 뭔지 잡히지 않기에, 카인의 말을 기다렸고.

"역과 철도에 한해서는 하이볼트 전하 다음의 권력을 지닌 게 당신이란 걸 압니다."

"예, 그렇습니다!"

물론 칠대귀족가가 입김을 불면 흔들리는 자리지만, 공식적으론 그랬다.

"그렇다면 왕국과 상관없는 총교구장이라는 자가 신원미상의 범인에게 테러당한 절 심판하겠다고 하는데, 두고 보실 겁니까?"

카인의 눈이 웃음 짓는다.

동시에 루브릭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덜덜 떨며 바르베타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그는 루브릭이 무슨 결정을 지을지 지켜보겠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르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은 차기 에셀레드 백작이 확실시되는 미래의 소드마스터, 다른 쪽은 아이리안의 모든 신성 권력의 정점인 총교구장인 대주교.

차라리 아빠가 좋냐, 엄마가 좋냐는 질문이 그리워질 정도의 난제였다.

"청장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바르베타 대주교는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루브릭은 그가 순순히 한 발 빼는 것 같아서 내심 안도했지만.

"성국의 이단심판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어찌 감히 대들겠습니까."

"...!"

이어지는 칼날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침묵이 이어진다.

팔라딘과 이단심판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철도원과 카인까지 모두 루브릭의 입만 바라본다.

게다가 희대의 테러 사건으로 메이누스 대환승역의 해당 플랫폼은 폐쇄한 만큼, 열차 소리도 거의 없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짓누른다.

루브릭의 얼굴은 시시각각 하얗게 변했다.

"루브릭 청장이 충성하는 건 아이리안 왕국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죠."

"루브릭 가문은 갓난아이까지 전부 세례를 받아 교적에 올라와 있지요. 참으로 신실한 가족입니다."

양측의 압박이 거세진다.

사이에 낀 루브릭은 이미 망한 인생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그만."

그때 들리는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

또각-, 또각-.

수십의 사람을 이끌고 한 여인이 걸어 들어온다.

새빨간 드레스에 손에는 검은 쥘부채를 쥐었다.

'가면?'

과거에 가면의 설원공이라 불릴 정도로 가면을 썼던 만큼, 카인의 눈에는 그녀의 눈동자까지 완전히 가린 가면이 먼저 보였다.

마법으로 가면 안에서도 밖이 잘 보이는 구조 같았다.

"총사령관으로서 이제 마르퀴스 벨트에 올라가려고 역에 왔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이네요."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보는 여인이지만 방금 말로서 누군지 알 수 있었고.

"올리비아 왕녀님을, 불민한 빛의 종이 뵙습니다."

꼿꼿했던 바르베타 대주교의 목이 잠깐이나마 숙여진다. 왕족이 아니라면 그가 숙일 자가 없기에 상대의 정체는 뻔했다.

'2왕녀 올리비아 룬 아이리안.'

그녀는 카인을 향해 호감 어린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대주교님은 자주 뵈었는데, 이쪽은 처음 만나네요.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인 걸 보니 카인 에셀레드겠고요."

올리시렌의 왕위를 위협하는 여인이자 맥로든 후작의 손녀, 로스 후작의 지지를 받는 자.

그리고 올리시렌의 동생인 '정열의 홍화' 올리비아였다.

서로의 친모가 다른 게 확실한지 체구나 기질의 차이가 컸다.

'적이다. 그러나 적인가?'

그녀는 카인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였다.

"바르베타 대주교님."

"예, 왕녀님."

"제가 듣기론 카인 공자를 이단심판에 올릴 생각이라는 것 같던데, 맞나요?"

우아하다.

동시에 정열적이다.

올리시렌이 어째서 '안개꽃'이라 불렸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올리비아는 빨간 장미와도 같은 여인이었다.

바르베타는 카인을 한 번 보고 말을 이으려고 했다.

탁-.

하지만 올리비아는 일부러 소리 나게 부채를 잡으며 바르베타의 말을 끊었다.

"말에는 어감이라는 게 있어요. '받아야 한다'와 '받으셔야겠다'는 참으로 차이가 크죠."

바르베타의 눈썹이 들썩인다.

지금 올리비아 왕녀가 바라는 걸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르베타에게 한 걸음 더 걸어갔다.

"차이가 있나요?"

"...예."

"그럼 꼭 이단심판을 해야겠다는 것처럼 제가 들은 건 잘못 들은 것이지요?"

대주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곤 눈앞의 2왕녀와 열차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1왕녀를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 참고인 조사를 위해 마중 나온 것이지 심판대에 올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카인 공자?"

"...."

카인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명백히 자신을 바르베타의 마수에서 구해 주는 꼴.

'내가 올리시렌 쪽인 건 잘 알 텐데 이 기회에 해치우지 않고, 나를 살려 준다라.'

성국을 등에 업을 수 있는 지금만큼 자신을 제거하기에 최고의 때는 없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걸 포기하면서 카인에게 친절히 말했다.

"언니와 함께 있다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테러당하셨다니,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카인은 그녀의 속셈을 헤아리고자 했고, 올리비아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사가 조금 길어질 듯해요."

그녀는 뒤를 눈짓했다. 그러자 왕실 기시단의 기사가 말했다.

"승차인명부를 보관하는 제3 문서고에 방금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루브릭 청장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라고 어찌 그 생각을 안 해 봤을까.

하지만 문서고는 철저하게 마법적인 보안이 걸려 있어서 그의 힘으로는 건드릴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루브릭 청장을 쥐고 흔들어도 당장은 나올 게 없답니다?"

촤악-.

다시금 부채를 펴며 귀부인이 웃듯 입가를 가렸다.

"그럼 문서고의 화재를 일으킨 자는 누구입니까."

카인은 되물었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자연발화일 수도 있고 엘프가 와서 테러를 한 걸 수도 있습니다. 아직 밝혀진 게 없어서 말이죠."

"밝히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제가요? 왜요?"

"...."

조사를 안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사해서 뭔가 나오면 곤란해지는 건 로스 후작은 물론이고 같은 쪽인 올리비아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건 조사를 질질 끌어서 모두에게 잊히게 만드는 것.

카인은 올리비아에게 다른 의미로 왕의 자격이 있음을 알아챘다.

사람 좋은 올리시렌이 부리기엔 어려운 정치적인 술수이자, 자신이 한 번 구해 줄 테니 당신도 넘어가라는 담화를 하는 걸 보니 적어도 정치적으론 훌륭한 왕의 그릇이다.

"그러니 여기까지 둘 다 하시죠. 지금 열차 안에서 승객들이 얼마나 떨고 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요."

그리고 올리비아의 고개가 미묘하게 돌아간다.

카인이 내린 문을 슬쩍 보면서 자신의 가슴께에 부채를 얹었다.

"언니조차 내리지 못하고 창문으로 구경만 하고 계시니 정말 아파요."

자신에게 적인지는 의문이나, 올리비아가 올리시렌의 적인 건 확신할 수 있었다.

#81 EP.Ⅰ-21

봄의 증명 (3)

양측의 대결로 치닫던 상황이 올리비아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되었다.

게다가 올리시렌이 기차 안에만 있는 것과 달리 대조적으로 직접 나서서 상황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이미지도 쌓는다.

'어려운 적이야.'

카인은 내심 혀를 찼다.

그저 노회한 두 후작의 꼭두각시 왕녀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마주하니 만만치 않았다.

시그마리의 공격을 명분으로 로스 후작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것도 그녀가 한 발 먼저 움직여 막혔고.

아쉽긴 했다.

그래도 바르베타의 이단심판은 피한 만큼 카인이 물러서려 할 때.

"심판은 아니어도 같이 차나 한잔 마시면 좋겠습니다, 카인 공자."

바르베타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다른 일행분들은 먼저 가셔도 되고, 공자님만 모실 수 있으면 됩니다.

무언가를 아는 건가.

나를 의심하는 건가.

생각보다도 집요한 바르베타 대주교에 카인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올리비아 역시 평소라면 순순히 물러날 대주교가 이렇게 나오자 놀랐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는.

"어쩌죠?"

덥석.

그대로 카인의 왼팔에 팔짱을 끼며 바르베타를 마주했다.

"사실 카인 공자님과 제가 먼저 선약이 있어요."

누가 들어도 거짓말임을 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거짓이라 손가락질할 수 없는 핑계였다.

"대주교님, 한 번만 봐주세요."

폭풍의 핵처럼 떠오른 왕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바르베타로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올리비아와 카인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감사해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하지만, 카인 공자님. 저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

바르베타는 카인을 향해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하고 뒤돌아 나갔다.

"알아들으셨어요, 카인 공자님?"

절레절레-.

올리비아의 물음에 카인은 그녀의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에드먼드 생환.

물론 당연히 거짓말.

카인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아먹었다.

바르베타 대주교의 걸음에 따라 시립하던 팔라딘과 이단심판관이 따라 나가고, 플랫폼이 한산해졌다.

"이걸로 빚진 거 퉁친 거로 해요."

올리비아는 떨어지며 상쾌하게 말했다.

카인이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자, 올리비아는 부채로 위를 찔렀다.

"제가 에셀레드 백작가의 참전을 막았잖아요."

"그게 당신이 내린 선택입니까?"

카인은 조금 놀라며 반문했다.

당연히 두 후작이 총사령관 올리비아의 이름을 빌려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왜요? 놀랐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중하고 늘 진심으로 부딪치는 올리시렌과 전혀 다른 타입.

카인은 올리비아가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법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쵸! 엘프를 죽이는 데 진심인 아이리안에서 왕위 계승자가 엘프를 못 죽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국왕 하이볼트가 인정한 계승자, 올리시렌의 명분을 무너뜨리기엔 아주 적절한 선택.

대개라면 여기서 물러났겠지만, 카인 역시 전장은 물론이고 이권이 오가는 정치판에서도 구르고 굴렀기에.

"그럼 그 왕위를 노리는 사람이 엘프와 손을 잡은 건 괜찮습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주 찔렀다.

"...호오."

올리비아는 부채를 펼치고 가면 위, 입가를 가리며 묘한 소리를 냈다.

다만, 그녀를 따라왔던 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질 뿐이었다.

휙-.

올리비아는 그 기색을 느낀 건지 뱅그르르 돌아선 말했다.

"혹시 나 대신 화내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서지 마요. 아까 대주교 뒤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얼마나 추해요."

그러곤 고개를 돌려 카인을 흘겨보았다.

"제법이시네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숨기는 것도 제법이고. 아주 마음에 들어요."

"...."

"그거 알아요? 우리 둘이 동갑이라는 거?"

카인은 두 눈을 끔뻑였다.

세계선을 건너고는 나이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에 생각해 보고서야 그렇다는 걸 인지했다.

올리비아는 부채로 자기 정수리와 한참 위에 있는 카인의 머리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런데 크기만 보면 훨씬 더 어른이네요."

"칼질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봅니다."

"흐흠. 뭔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카인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지금 카인의 육체는 성장기와 함께 겨울의 뇌전이 온몸을 헤집으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마검, '겨울'을 얻은 게 저번 생에선 20대 중반.

이번엔 10대 후반.

신기가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했다. 아마도 로드이스트일 때보다 더욱 단단하게 자랄 터.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말해 드리는 건데, '저'는 엘프와 손을 잡지 않았어요."

아마도 가면 아래 눈은 가늘게 웃고 있으리라. 교활하지만 사악하지 않은 소악마의 웃음처럼.

"만약에라도 엘프의 손을 잡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라질 뿐이겠죠."

즉, 맥로든 후작과 자신은 깨끗하고 문제가 생긴다면 로스 후작에게 뒤집어씌운다는 말.

"어때요?"

"뭐가 말씀입니까."

"언니는 버리고 저한테 갈아타는 거요."

"...."

"당신이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어요."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그러십니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얀 두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이걸 주죠."

그리고 손을 모은다.

개울물을 떠 마시려는 듯 곱게 모은 두 손을 카인에게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준다는 상황에 카인이 묵묵히 내려다보았고, 올리비아는 카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때요?"

"뭘 주신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요."

"...."

"당신을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걸 걸 수 있어요."

"제 가치를 높게 보시는군요."

"그럼요."

올리비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카인을 응시했다.

완전한 가면을 쓰고 있기에 그녀의 눈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초롱초롱하리라.

"일단 강해요. 그리고 영리하고, 에셀레드 백작가의 장남이고, 어른스럽고, 뻔뻔하죠. 그뿐일까요? 사악하고, 못되면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이복동생을 끼고돌 정도로 유약하기도 하죠."

"중간부터는 욕 같습니다만."

"그래서 좋은 거예요.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완벽한 주인공 같으면서도 누구보다 사람다운 게 당신이니까요."

카인은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여자는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는-, 아니 미쳤다는 걸.

"올리비아 왕녀님."

하지만 카인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미치지 않고서는 일분일초도 살 수 없었던 지옥이었고.

"전 올리시렌이 왕이 되는 걸 원합니다."

올리비아의 광기 따위는 닿지 못할 정도로 아득하리만큼 먼 곳에 있는 게 카인이었다.

"언니가 왕이라."

자신의 페이스에 카인이 휘말리지 않자 올리비아는 가면을 붙잡고.

스윽-.

그대로 옆으로 치웠다.

풍성한 회색의 머리부터 올리시렌과 확실히 비슷하지만, 어딘가 조금 더 선이 가는 얼굴이 드러난다.

그녀는 가면을 코끝까지만 내렸다.

올리비아의 황금빛 눈이 깜빡이며 카인의 보라색 눈을 쫓았다.

"재미있네요. 그렇게 하면 저는 당신을 가질 수 있나요?"

"왜 그렇게 제게 집착하는 겁니까."

올리비아가 웃는다.

언뜻 보면 누구보다 맑고 순수해 보이는 미소.

하지만 카인은 그녀의 눈이 웃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말라 죽었어야 할 언니가 당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렇게 커졌는데, 당연히 욕심나요."

"그것뿐만은 아닐 겁니다."

"어머, 절 얼마나 만났다고 재단하시죠?"

"뭔가 더 있을 것 같으니까요."

카인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의뭉스러운 말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왕녀와 전사.

올리비아와 카인 에셀레드.

무수한 말이 오갔지만, 이 순간에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올리비아는 가면을 완전히 내렸다. 그리고 주홍색 튤립을 갈아 바른 듯한 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언니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그래서 저도 뺏어가겠다?"

척.

올리비아는 날카로운 미소를 짓곤 다시 가면을 썼다.

"물론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것도 있죠. 잘 생각해 봐요. 할아버님도 은근히 당신과의 혼약을 긍정적으로 고려하시던데."

휘익-.

바람처럼 나타난 그녀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금 또각-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아차."

올리비아는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손에서 놓지 않던 부채를 들어 열차의 깨진 창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 속에는 이 상황을 지켜보던 굳은 얼굴의 올리시렌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에는 제대로 마주하면 좋겠네요, 올리시렌 언니.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세상인데 죽기 전에 자매끼리 밥 한번 먹어야죠."

"...."

올리시렌은 아무 말 없었다.

잠시 그녀를 흘겨보던 올리비아는 몸을 휙 돌리며, 카인의 귓가에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돌아갔다.

"재미없어."

문서고가 타 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얼굴이 밝아진 루브릭 청장도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갔다.

"너희들은 남아서 승객들의 하차를 돕고!"

그럴 리는 없지만 다른 객차의 승객이 테러범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으니 수사를 위해 모두 기차에 잡아 두고 있었다.

카인의 대화를 들을 정도로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창문을 통해 누가 왔었고 물러났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

숙련된 철도원들의 안내에도 승객들은 잔뜩 겁먹은 채로 움직였다.

특히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 있는 카인의 눈치를 보며 내렸다.

"왕녀님은 모두가 내리고 내리시기로 했습니다."

카인의 객차에 있던 밴더빌트가 먼저 내려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지금 내리면 왕족에게 인사를 해야 하니 혼란이 가중될 터.

올리시렌다운 배려였다.

"밴더빌트."

"예스, 마이 로드."

"혹시 내게 혼약자 같은 건 없었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노기사는 카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 못해 눈을 끔뻑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었습니다. 제안이 안 들어온 건 아니나 에드먼드 백작님이 관심이 없으셔서...."

와르르르르-.

별일 없다는 걸 알자 승객들이 내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에 따라 발소리가 요란해진다.

게다가 막아두었던 근처 플랫폼까지 풀면서 열차가 들어오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카인은 그 도시의 소음 속에서 올리비아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벨은 시켜야겠지?"

"예...?"

"가능한 저런 미친 여자만 아니면 좋겠군."

다음을 기약하진 않았지만, 북방원정의 총사령관이니 분명 숲에서 다시 만날 터.

카인은 내심 올리비아에게 학을 뗐다.

그 사이 승객들이 다 내리고 마지막으로 올리시렌이 내려왔다.

그녀는 땅만 보고 걸었다.

"뭘 그렇게 숙이고 있어."

"너 혼자에게 다 맡기고 있어야 했으니까. 걔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고."

"올리시렌."

"응."

"할 말이 없으면 칼로 찌르면 돼."

이소엘과 밴더빌트가 눈을 부릅뜨며 카인을 돌아보았다. 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상대도 너를 죽이려는데, 너도 가능한 물어뜯어."

"난 아무것도 없는걸. 대주교 앞에 나설 수도 없고...."

"시간이 있다."

"...?"

"이소엘과 함께한 시간. 나와 함께한 시간. 우리가 같이 싸운 시간.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나?"

"...!"

"누군가 너를 때릴 거 같다면 미리 때려라. 잘 모르겠으면 일단 때리고 보는 게 맞다."

올리시렌이 왕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카인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봐 왔던 올리시렌은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인은 자신의 방법을 말했다.

"그게 밑바닥을 사는 사람의 방식이야."

"마치 그렇게 살아 본 것처럼 말하네."

질리도록 살았기에 카인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생각이 정리된 올리시렌은 카인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와 똑같은 회색 머리였지만, 눈동자는 그녀와 다른 회색이다.

"대주교님에게 갔다 와."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영감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어. 마지막에 남긴 것도 네가 어떻게든 오게 만든 거지?"

"...."

"우린 먼저 가 있을게. 어차피 난 내 집에 잠시 가는 거인 걸."

카인은 잠시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따라가지."

#82 EP.Ⅰ-21

봄의 증명 (4)

밤의 검은 하늘이 어느새 조금씩 밀려나면서 군청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시간.

아이리안의 모든 열차가 몰리는 메이누스답게 새벽이 다가오는 심야에도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가게가 많았다.

솨아아아아아-.

아니 많았었다.

비가 오는 깊은 밤.

하지만 점차 그 불빛도 꺼진다.

대장벽은 끊이지 않는 눈이 내리는 설원이기에 카인은 비엔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는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거야.

올리시렌이 왕도로 떠나는 열차에 바로 몸을 실으며 남긴 말.

때론 헤어지고서야 아는 것도 있다. 어둠에 사로잡힌 메이누스의 밤거리를 홀로 걷던 카인은 저 멀리 보이는 대환승역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혼자 다니게 된 건 처음인 것 같군.'

이 세계선에 온 후로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함께했었다.

밴더빌트, 아벨, 올리시렌....

혼자가 익숙했던 카인이지만, 이젠 혼자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아는 이 하나도 없는 어둠의 도시를 걸으며 카인은 과거의 자신을 되찾아 가는 기분이었다.

저벅-.

그렇게 한참이고 걸어서.

메이누스 한복판에 자리한 성국의 거대한 성당 앞에 도착했다.

도심의 불이 꺼지는 것과 달리 성당은 요새처럼 불이 켜져 있었다.

카인은 검은 우산을 살짝 들어 성당 입구를 지키던 두 명의 사제에게 얼굴을 보였다.

"...!"

몰려오는 밤으로부터 성당을 지키듯 묵묵하게 서 있던 둘의 눈동자가 커진다.

카인은 입을 열었다.

"언제나 문이 열려 있다고 들었습니다."

올리시렌과 함께 왕도 린드브룸으로 올라가지 않고 와야 할 만큼 바르베타가 지닌 정보는 중요했고.

"이야기 들었습니다. 드시지요."

그들에게도 역시 '카인 에셀레드'는 여러 의미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카인은 용족의 마수가 입을 벌린 것처럼 거대한 정문을 올려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예?"

"들어가서 무슨 짓을 당할지 알고 순순히 들어갑니까."

카인의 냉정한 말.

아이리안 전역의 신성과 숭배를 한 곳에 모으면 이곳이라.

카인의 말을 그들의 '빛'에 대한 모독이라 느낀 두 사제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들은 감정을 누르고 잠시 서로를 마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편의 사람이 정문 옆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솨아아아아아-.

비가 한층 더 굵어지고 카인이 쓴 검은 우산을 꿰뚫듯 내리기 시작할 때.

기기기기긱-.

거대한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부턴 밤조차 낮으로 바꿔 버릴 만한 빛이 터져 나왔다.

카인이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익숙한 모습의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희가 그렇게 경우 없는 곳은 아닙니다."

노초 바르베타 아이리안 총교구장.

카인에게 이단심판을 언급하며 결국 그를 불러낸 노회한 고위 사제였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다르게 가벼운 걸음으로 문에서부터 땅으로 향하는 13계단을 내려왔다.

"그렇다곤 들었습니다."

카인의 짧은 말에 '실제론 어떤진 모르겠지만요.'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걸 바르베타 대주교는 바로 알아먹었다.

"안으로 들어오기 불편하다 하시니 그럼 밖으로 가시죠."

저벅.

그리고 내려온 카인과 똑같은 땅.

노인과 청년.

둘은 잠시 마주하다가, 바르베타 추기경이 가리킨 바로 앞 3층짜리 작은 건물로 향했다.

심야답게 불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1층은 카페 겸 빵집으로 사용되는지 은은한 빵 굽는 냄새와 차향이 맡아졌다.

드륵-.

바르베타 대주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 옆에 놓인 화분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꺼낸 작은 열쇠를 들어 문을 열었다.

심야답게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탁-!

하지만 그가 손을 한 번 흔들자 간간이 박혀 있는 마법등과 촛불이 한꺼번에 불을 밝혔다.

"이 불민한 노구가 멀리 가진 못하여 바로 앞의 카페로 왔는데 어떻습니까."

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국 측에서 꼭두각시로 사용한다고 하기엔 사용감이 꽤 있었고, 그렇다고 진짜 카페라기엔 바르베타의 행동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스윽.

그는 손가락으로 가운데 빈자리를 가리켰다.

카인은 신발에 묻은 빗물을 입구 근처에 털고 들어갔다.

"저는 대주교님을 못 믿습니다."

카인의 말에 간단한 음료를 만들 수 있는 카운터로 가던 바르베타는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카인을 곁눈으로 보며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바르베타 님이나 '어이, 노초!'라 부르십시오."

"...."

대환승역에서 봤던 바르베타 대주교는 제 소신이 꿋꿋하면서도 휘어질 땐 휘어질 줄 아는 사제였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그의 모습은 집 앞에서 카페 하는 성격 좋은 동네 할아버지에 가깝다.

그 간극에 카인이 입을 열지 않자 바르베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호칭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이 저를 대주교라 부르면 저는 대주교여야 하며, 바르베타라고 부르면 바르베타가 되는 거죠."

"...그래도 어이, 노초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건 농담이었습니다."

달그락-.

그는 주름진 깡마른 손을 뻗어 차를 우릴 수 있는 도구를 차곡차곡 정리해 쟁반에 담았다.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카인의 테이블에 가져와 하나씩 차리기 시작했다.

카인은 잠시 내려다보다가 그를 도왔다.

바르베타는 그때만 기다렸다는 듯 맞은편에 앉은 후 카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카인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씨익 웃었다.

"노인네가 힘에 부쳐서 도와달라는 건데 싫은 겁니까?"

"역에서 뵌 사람과 너무 달라서 한 번 봤습니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카인의 손놀림은 정확했다.

순식간에 다 정리가 되었고, 바르베타는 익숙하게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곳엔 저를 '대주교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기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죠."

"그래서 이곳엔 아무도 없는 겁니까."

카인은 바르베타를 응시했다.

자신은 그를 믿지 못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베타는 그를 믿는 듯 이 근처엔 쥐새끼 한 마리 없었다.

'팔라딘 하나쯤은 동행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막말로 카인이 마음먹고 칼을 뽑아도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바르베타는 카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있다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니까요. 대주교로서의 말만 해야 하고."

"제가 이대로 바르베타 님을 공격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탁-.

그는 주전자 속에 재료들과 맑은 물을 다 넣곤, 소리 나게 뚜껑을 덮었다.

안이 보이지 않는 백색 주전자를 가리켰다.

"이 안의 차가 어떻게 우려지는지 아나요?"

"찻잎에서 뭔가 나와서 맹물을 찻물로 바꾸겠죠."

"그걸 우린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보지 못한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있죠. 카인 에셀레드. 저도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르베타는 검지를 들어 카인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저를 대주교가 아니라 바르베타라고 부르는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걸 이 주전자 속과 같이 아는 것뿐입니다."

카인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건방지고 고압적인 사람이라면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베타처럼 능글맞은 자는 대하기 어려웠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후우우우우우-.

열을 받은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르베타는 급하게 불을 끄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카인 에셀레드, 이단심판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역에서 했던 말과 같은 대사.

하지만 어감이 달랐다.

역에선 당신에게 혐의가 있으니 조사를 해 봐야겠다는 의미라면,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해야 한다는 느낌.

주전자를 뜸 들이듯 기다리던 바르베타는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한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밀고가 들어왔습니다."

"밀고라."

"당신이 '돌아보지 않는 숲'의 글루미엠에게 마녀의 축복을 받아서 강해졌다고 하더군요."

"...!"

카인의 눈이 커진다.

단숨에 저 밀고가 어떤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카인의 반응에 바르베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무도한 자들입니다. 성국이 자기네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쓰는 칼도 아니고 제 잇속을 위해 저희를 써먹다니."

"정치공세인 걸 아시면서 왜 하시려는 겁니까."

탁-.

뜸 들이기가 끝난 모양.

바르베타는 주전자를 들었다.

카인의 잔에 먼저 졸졸- 붉은 찻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성녀께서 당신의 종말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언급되자, 카인은 놀라 반문했다.

"카테리나 피오렐리?"

이번에 놀란 건 바르베타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성녀님의 풀네임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이번 대 성녀님이 되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구에서도 모르는 사제가 태반인데."

카인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기 싫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용사 아벨과 함께 다니는 성녀 카테리나의 무용담은 동쪽 끝의 대장벽에까지 시끄럽게 울렸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엔 성녀가 공개가 안 된 모양이군.'

생각지도 못했던 실책에 카인은 앞으론 이런 상황도 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답했다.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녀는 저를 왜 죽이려는 겁니까."

다행히 바르베타는 더 깊이 따지고 들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당신이 마왕이라고 하시더군요."

"...예?"

"마왕과 용사가 형제로 태어났으니 마왕이 더 자라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게 성녀님의 뜻입니다."

"...."

카인은 찻잔을 들어 뜨거운 찻잎을 들이켰다.

대주교가 끓인 차답지 않게 상당히 싸구려 맛이었지만, 뜨끈한 것이 속을 풀어 주는 기분은 좋았다.

바르베타 역시 찻잔을 들었다.

"헤네랄리페에서 단숨에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진심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더군요."

그 순간 카인은 성국의 수도 헤네랄리페를 떠올렸다.

잊을 수 없었다.

비도 눈도 아닌 꽃이 내리던 날.

제 손으로 용사 아벨을 죽이던 그날의 장소.

에셀레드의 하얀 절벽에서 마주한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여정을 되짚던 카인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바르베타를 바라보았다.

"에드먼드 백작님을 구한 건 성녀입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에드먼드 백작님입니까?"

"...."

정곡을 찔린 카인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바르베타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이리안에 오시는 길에 에이레에서 구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이제야 그림이 그려진다.

카인이 모르던 곳에서 움직이던 것은 성녀며, 성녀가 에드먼드를 구한 것이며, 본래 죽었어야 할 그가 다시금 이 땅을 활보한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이야기에 카인은 찻물 속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왜 성녀가 움직인 것인가.

용사 아벨 때야, 마왕이 본격적으로 발호하면서 인류세계를 위협하니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본래 헤네랄리페의 성황청에서 나올 일 없던 그녀가 굳이 밖으로 나온 것 무엇인가.

아벨이 용사고 자신을 마왕이라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빛께서 성류관, '가을'을 통해 계시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바르베타가 순순히 알려 주었다.

세계선을 건너게 해 준 『사계』는 <사계절의 신기> 네 개가 합쳐진 기적이다.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겠지만.'

그런 『사계』를 구성하는 신기 중 '가을'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성녀의 것.

그렇다면 자신처럼 이전 세계선의 기억을 갖고 있어도 말이 된다.

'정확히는 신기를 통해 바라보는 거겠지.'

죽고 살아난 자신이 세계선을 건넜다면, 그녀는 아마도 세계선의 '관측자'이리라.

이제야 자신을 왜 마왕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짠.

바르베타는 심각한 얼굴색의 카인의 얼굴이 비치는 찻잔에 자신의 찻잔을 들이밀었다.

순간 찻물이 일렁이면서 카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뭔가 짚이시는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마왕."

"마왕 아닙니다."

"성녀께서 틀리셨다는 말이군요?"

성국의 지도자가 성황이라면 성녀는 그들의 신앙을 대리하는 자.

대주교 앞에서 그녀가 틀렸다 지적하는 건 싸우자는 소리였다.

"틀렸습니다."

그리고 카인은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요?"

바르베타는 예상했다는 듯 능숙하게 넘기며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그럼 그대의 어머니인 클로에가 마녀라는 것도 틀린 겁니까?"

"...!"

#83 EP.Ⅰ-21

봄의 증명 (5)

카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르베타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아는 것인가.'

대장벽 안쪽, 인류 세계.

다양한 국가들이 존재하지만 크게 제국과 성국, 도시연합이 삼대 축을 이루고 있다.

그중 성국의 위치는 특별했다.

그 힘이 제국엔 미치지 못하나, 신성력의 존재가 '신'을 증명하는 만큼 '신'을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존재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외딴 아이리안만 해도 왕국민의 절반이 성국의 신앙을 따르고 있는 수준.

다만, 성국도 지닌 힘에 비해 어수룩한 행동으로 역사에 수많은 실패와 과오를 저지르며, 이젠 현실 정치와 가능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이 아이리안의 정치에 간섭하고자 한다면 바르베타 대주교가 선봉장이겠지.'

후릅-.

조금 차가워진 찻물을 들이켜곤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또 누가 밀고한 겁니까. 정치공세에 마녀가 참 많이 쓰이는군요."

친모 클로에에게 마녀라는 증거가 있다면 진즉, 이단심판관이 왔을 거다.

증거가 없다면 굳이 그렇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카인은 뻔뻔하게 대꾸했다.

바르베타는 카인의 동작을 따라 차를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마녀는 스스로가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 찾기 어려워서 자주 이용되곤 합니다. 이 세상에 약속된 마녀는 아흔아홉인데 마녀신고만 일 년에 수천 건에 달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렇다는 건 저에 대한 신고도, 어머니에 대한 신고도 의미 없는 신고겠군요."

카인이 물을 타려고 하자 바르베타는 높은 곳에 뚫려 있는 원형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마녀심판을 함부로 할 수 없는바. 허위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신고 후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군지 추적하는 겁니다."

초기의 성국이 힘만 있고 정보는 없는 채로 거하게 저지른 실수들은 역사에 상처로 남아 있다.

그 후 성국은 지속해서 정보에 힘을 쏟아서, 이젠 밀고자의 대부분은 바로 추적할 정도로 정보력이 강해졌다.

"예를 들어 카인 공자님에 대한 신고는 로스 후작 쪽에서부터 일곱 단계를 거쳐서 메이누스의 사서가 했죠."

바르베타는 주름진 눈으로 살짝 윙크하곤 말을 마무리했다.

로스 후작이 펼치는 계책을 미리 알려 준 걸 보면 그들의 손에 놀아나야 한다는 게 꽤 마음에 안 든 모양.

"하지만 말입니다, 그대의 어머니에 대한 신고는 달랐습니다."

"밀고자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까?"

바르베타는 잠시 고개를 숙여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로스 후작을 말할 때와 달리 몇 번이고 고민하는 기색.

막 끓인 차향이 실내에 일렁인다.

솨아아아아-.

하지만 나무로 막아둔 창밖에서 더욱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잡아먹히는 건 금방이었고, 이내 바르베타가 고개를 들어 카인의 보랏빛 눈과 마주했다.

"예."

"그래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말든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해라면 손해일 사람이었습니다."

카인은 머리에 번뜩하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친모 클로에의 가문이었던 라마이닝의 사람들. 특히 로스에서 받아 온 엘븐나이트의 뒤에 숨어 으스대던 영감.

"바이스 라마이닝 전대 백작?"

절레절레-.

바르베타는 고개를 젓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그분이 밀고했다면 편했을 겁니다. 부모나 자식이 마녀가 되었을 때 서로 신고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카인 역시 잘 알았다.

지금의 자신이 주로 귀족들을 만나서 대부분 편한 가정만 보는 것뿐, 불행한 모습의 가정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것을.

바르베타에게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카인은 그의 의도를 찔렀다.

"처음부터 말해 주시려고 부른 거 같은데 돌리지 말고 말씀하시죠."

"하이볼트 룬 아이리안."

"...!"

"그때도, 지금도 이 아이리안의 왕이죠."

카인의 눈이 순간 부릅떠진다.

바르베타가 곧장 말한 이름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이름이었으니까.

카인은 반사적으로 북동쪽을 바라보았다.

왕도, 린드브룸.

올리시렌이 하이볼트와 담판을 하겠다고 떠난 곳.

선대의 역사가 꼬이고 꼬인 이상 그녀가 호언장담한 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게 확실했다.

* * *

"아비로는 만날 수 있으나, 국왕으로선 접견을 거부한다?"

린드브룸의 왕성, 백은의 궁.

하얀 꽃이 궁을 감싸고, 군데군데 안개꽃으로 수놓아진 순백의 궁의 주인은 올리시렌이었다.

그녀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반문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중년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시케르 경."

"예스, 유어 그레이스."

왕궁기사단장, 웨인 시케르.

에드먼드 백작이 사라진 이상, 아이리안 최강의 기사로 불리는 그는 거목처럼 흔들리지 않는 기세를 품고 있었고.

백은의 궁을 감싸는 꽃향기마저 그에게 닿는다면 싸늘한 철의 냄새로 바뀔 기사였다.

대검을 휘두르는 밴더빌트의 덩치는 에셀레드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컸다. 그에게 흠이라면 이미 너무 늙어 버렸다는 것.

반면 웨인 시케르는 흠이 없는 밴더빌트와 같았다.

"전 이 나라의 1왕녀예요. 그런데 국왕 전하를 마음대로 못 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올리시렌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전하께서 명령하셨고, 저는 그걸 따를 뿐입니다."

올리시렌도 하이볼트 국왕의 뜻을 대충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궁정 관료가 아니라 가장 말이 안 통하는 웨인 시케르 기사단장을 보냈다는 건, 이야기 자체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툭-.

이런 상황까지 예상했기에.

"여기 마탑주의 보증입니다. 공식적으로 요청하죠."

왕국법에 따르면 마탑주, 대주교, 왕실기사단장 셋 중 하나의 보증만 가져와도 국왕과 마주할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정식 절차를 따라서 접견을 요구했지만.

스윽-.

웨인 시케르는 마탑주의 반지를 확인하곤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왜죠? 국법에-."

"왕녀님에게 내려진 유폐를 푸는 것으로 마탑주의 보증이 방금 제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유폐?"

올리시렌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다.

"예. 전하께서 왕녀님께 무기한 유폐를 내리셨었습니다."

"이유는요?"

"70년 전 마무리된 아이리안 대전쟁을 이번에 칠대귀족가 간 영지전을 허가하시면서 일으킬 뻔했기 때문입니다."

"암묵적으로 허가하신 사항입니다."

"저는 명시적으로 명령받았습니다."

올리시렌의 회색 눈과 웨인 시케르의 투명한 푸른 눈이 마주한다.

분명한 건 양측 다 절대 흔들림이 없다는 것.

"유폐를 받았다면 진즉, 절 잡아갔어야 할 텐데요?"

"국왕 전하께선 딸이라 차마 그렇게까진 안 하신 겁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군요."

올리시렌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이볼트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할진 몰랐다.

카인의 말대로 그래도 친딸이고 본인이 손수 임명한 왕위 계승자니,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 상황.

올리시렌은 서늘한 눈빛으로 웨인 시케르를 응시했다.

"그럼 대주교의 보증을 가져오면 됩니까?"

"그럼 아마 가져오는 사람의 죄를 사해 주실 겁니다."

"...카인 에셀레드에게 죄가 있다?"

"예. 전하께서 그렇게 판단하시면 있는 겁니다."

올리시렌의 뒤에 있던 이소엘과 밴더빌트의 압박이 쏟아졌지만, 웨인 시케르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셋을 쓱 훑어보았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

"아버지를 뵈려면 결국 당신의 보증이 필요한 거군요."

"예."

"그대의 보증을 받으려면?"

"이전에 에드먼드 백작이 했던 것과 같습니다."

탁-.

그는 왼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을 소리 나게 치곤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꽈악-.

올리시렌은 주먹을 쥐었다.

하이볼트가 철저하게 그녀와 일행을 피하는 이상, 대주교의 보증을 가져와서 왕실기사단장을 칼로 이길 사람은 한 명뿐.

그녀는 남서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왠지 카인의 보랏빛 눈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도 카인이 있어야만 풀릴 수 있다는 절망이 잠시 스쳤다.

* * *

"그때 전 막 총교구장에 임명되어 아이리안에 왔을 때인데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타국의 정치에 발을 걸치게 되는 것이며, 소극적이라면 글루미엠의 경우처럼 마녀의 성장을 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할 터.

"한 나라의 국왕이 백작의 아내를 마녀라고 밀고했다라."

바르베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피부에 가득한 상처와 주름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만드는 웃음엔 깊이가 있었다.

"이 불민하고 불경한 자로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어 몇 날 며칠을 고민했었지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르베타는 에셀레드에 은밀히 의견을 전하고, 조사하러 간다고 하자마자 에드먼드가 클로에의 사망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저 가만히 있으니 해결되었습니다."

스윽-.

바르베타는 검지를 들어 카인을 가리켰다.

"마녀의 아들로 의심되며 마녀의 축복을 받을 자, 카인 에셀레드."

무엇 하나 확인되지 않았지만, 모든 게 진실인 명제였다.

당장 카인이 들고 있는 아그웨스카부터 마녀가 자신의 기원을 서려 만든 검이며, 올리시렌의 축복이 그를 살렸고, 클로에가 카인을 현생에 만들어 냈으니까.

"굉장한 모욕이군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웃음기가 묻어 있는 바르베타의 물음에 카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불민한 자가 고언을 청합니다."

카인의 눈이 어른어른한 마법 등 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이 열렸다.

"대주교쯤 되는 양반이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까. 무슨 목적일까. 성녀가 날 잡아 죽이고 싶어 한다는데 왜 날 도와주는 것일까."

"모든 것이 물음이로군요."

"모든 것이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의문으로 가득 찬 세계를 물음으로 살아간다라, 마음에 듭니다."

바르베타는 그런 카인이 마음에 드는 지 몇 번이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간, 팔을 벌렸다.

"제가 아이리안의 총교구장이 되기 전에 뭘 했는지 맞혀보시지요."

카인은 그를 쓱 훑어보고 코끝을 툭툭 쳤다.

"제가 피 냄새 하나는 잘 맡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겐 처음부터 옅은 냄새가 나더군요."

"오호."

"그럼 피 냄새가 나는 사제라면 뭐가 있겠습니까. 이단심판관이겠지요. 기계화 팔라딘이라면 기름 쩐내도 같이 날 테니."

바르베타는 자신을 가리키며 수긍했다.

"맞습니다."

휘익.

그러곤 그가 자기 손으로 무수히 집행했던 당시를 생동감 있게 손짓으로 표현했다.

"마녀의 심장에 말뚝을 박고, 마녀가 낳은 아이들의 목을 비틀고, 마녀에게 홀린 남자의 사지를 뽑았었죠."

"...."

그의 말이 진행될수록 피 냄새가 짙어진다.

마녀나 사람이나 똑같이 붉은 피를 흘리고 똑같은 피비린내가 나는 생명이기에.

"그것뿐이겠습니까. 마녀가 머무르던 곳에 그녀와 접촉했던 모두를 죽였죠. 늙든 젊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

밀이 익으면 수확하고, 밀알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빵을 굽는다는 걸 말하는 것과 바르베타의 말의 차이를 알 수 없다.

사람으로서 금기시되는 걸 신의 이름으로 당연하게 했다는 그 광신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르베타는 그걸 보고 카인에게 물었다.

"마녀심판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예."

그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저런 말엔 긍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런 말을 하면 바르베타가 불같이 화낼 거라 생각했지만.

"저도 마음에 안 듭니다."

예상이 어긋났다.

#84 EP.Ⅰ-21

봄의 증명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