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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하루살이

어제 동생이 죽었다.

아니, 어쩌면 내일.

Episode. 0

작은 손의 기도

#1

Chapter. 1 사계(四季) (1)

마왕의 공포가 아이들을 잠재우는 이야기가 되고 전사가 돈에 팔리는 시대.

파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하얀 절벽 위.

한 남자가 낡은 묘비를 마주하며, 코트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다를 참 좋아하셨는데 이렇게 늘 바라보시니 어떠십니까. 안 질리십니까, 작은 어머니."

철렁-.

황금빛 술이 넘실거린다.

꺼낸 건 라벨조차 지워진 제국의 오래된 증류주였다.

그는 상처 가득한 엄지로 뽕-하고 뚜껑을 따곤.

주르르륵-.

묘비 위로 술을 부었다.

글자가 새겨진 곳으로 더 많은 술이 흘렀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사과파이를 만들던 아르나 에셀레드를 위하여.」

빈 병 너머.

사내의 보랏빛 눈이 비친다.

평화로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전쟁의 눈이었다.

"아벨 녀석이 마왕의 목을 땄답니다. 아, 마왕 새끼도 저승에 갔으니 이미 들으셨겠군요."

후우웅-.

순간 거친 바닷바람이 불었고.

-카인 공자님, 입!

바다를 등진 남자.

카인 에셀레드.

그는 바람결에 들리는 것 같은 아르나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포기하십쇼. 최전선에서 굴러먹다 보니까 귀족다운 말은 다 까먹었습니다."

우웅-.

다시금 부는 바람.

답은 없었다.

"제가 쫓겨난 후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영락없이 뒈질 줄 알았던 제가 여길 돌아올 정도로요."

카인의 외양은 누가 봐도 닳고 닳은 전사의 그것이었다.

최대한 몸을 가리고 체온을 지키는 가죽 코트.

그 안쪽에는 일부러 여러 겹을 덧댄 옷과 중요 부위를 지키는 철판들이 붙어 있다.

게다가 카인의 등에는 그의 키만 한 대검이 매달려 있었다.

"마왕이 죽으니까 몬스터의 씨가 말랐습니다. 덕분에 칼 닦을 일이 없어졌죠."

마왕이 세계의 동쪽에 자리하던 시절.

카인과 같은 전사들은 최전선에서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마왕이 죽고 도래한 평화의 시대.

그들은 달라져야 했다.

"다들 이 평화를 좋아하던데 전 평화가 더 어렵더군요. 차라리 몬스터 대가리만 썰면 되던 그 옛날이 조금은 그립습니다."

마왕과 몬스터가 없으면 인류의 적은 사라지는가?

아니다.

이제 인류의 적은 인류 자신이었다.

세계를 위해 싸우던 전사들은 이제 몇 푼의 금화를 위해 칼을 휘두른다.

명예와 영광은 스러지고.

남은 건 생존과 금화뿐.

한때 '불굴'이라 불리던 전사는 퀘스트샵을 전전하며 집 나간 고양이만 찾아 주고 있는 시대였으니까.

물론 카인에겐 다른 놈들보다 '불굴'의 삶이 더 나아 보였다.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건 말해 봤자 재미도 없으실 테니, 제일 궁금하실 아벨 이야기나 해 드리죠."

용사 아벨.

그리고 카인 에셀레드의 이복형제인 아벨 에셀레드.

"녀석이 이젠 황제가 된답니다."

후우우웅-!

바닷바람이 거세게 분다.

카인은 이 바람만큼 아르나가 놀랐으려나 하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철혈황녀랑 사랑에 빠져서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파다합니다. 며느리가 황녀일 거라고 상상이라도 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아르나, 아벨, 카인이 같이 지내던 시기는 이런 농담을 할 수 있을 때도 아니었다.

아르나는 늘 아팠고.

아벨은 늘 싸워야 했으며.

카인은 늘 패배하던 그 시절.

그땐 절대 할 수 없었을 대화를 이어 갔다.

"소문처럼 사랑은 당연히 아닐 테고, 황제는 남자만 된다니 기왕이면 용사를 데릴사위 삼아서 힘과 정통성을 다 챙기겠다는 황녀의 수작이겠죠."

우우우우-.

망망대해의 푸른 파도 소리가 야유처럼 들려왔다.

카인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답을 바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기에 얼마 남지 않은 기억 속 그녀를 되새기며 계속했다.

"그 순진한 아벨이 여우같은 황녀와 잘 살지 걱정되시나 봅니다."

카인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묘비의 건너편.

아무것도 없는 초록의 초원.

"안 그러냐, 아벨?"

하지만 카인의 눈은 그 외의 것을 바라봤다.

스으으으-.

세상이 일렁인다.

투명하게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을 벼린 듯한 갈색의 눈.

단정하게 한 줄로 묶은 갈색의 머리.

짧고 상처들이 파먹은 검은 머리에 맹수와 같은 자색 눈을 지닌 카인과는 딴판인 남자.

"알고 계셨습니까?"

착하고 곱상하게 생겼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무시하진 못하리라.

"앞에 뻔히 보이는데 못 찾는 등신도 있나?"

"마왕만 알아보던데요."

최강의 '용사'.

용사 아벨 에셀레드.

그를 향해 카인은 말했다.

"니 주위엔 등신들만 있나 보네."

아벨은 묘비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탁-, 탁-.

아벨의 허리춤에 매달린 금빛 레이피어가 발걸음에 맞춰 경쾌한 박자를 일으킨다.

카인은 턱짓했다.

"성검?"

스릉-.

아벨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땅에 붙박여 하늘을 지탱하는 지엄하고 성스러운 검.

신이 인간계에 남긴 <사계절의 신기> 중 하나.

성검 '여름'.

수만의 적을 베고 마왕의 목까지 벤 검치곤 너무나 얇았다. 날도 세워지지 않아 쇠막대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한번 쥐어 보시겠습니까?"

아벨은 날을 쥐며 손잡이를 내밀었다. 카인은 기가 찬 듯 손을 내저었다.

"자격 없는 자가 쥐면 불타 죽는 거 다 안다."

"죽지는 않습니다. 죽지는."

그 미묘한 말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살벌한 건지는 성검 '여름'과 아벨만이 알 뿐이었다.

착-.

그는 성검을 집어넣곤 카인과 나란히 섰다. 그러곤 친모인 아르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님. 형님이 또 술을 드렸군요."

"...마음에 안 들면 내 목도 썰든가."

아벨은 묘비로 손을 뻗었다.

고랑에 맺힌 술을 손으로 쓸어선 맛보았다.

"어릴 땐 형님이 참 싫었습니다. 원래도 좋을 구석이 없는 인간이긴 했는데, 가장 싫은 건 아픈 어머니에게 자꾸 독한 술을 드려서였죠."

카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살갑게 말하던 사이였다고.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죽더라."

아벨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저희는 너무 멀리 돌아왔죠."

상처만이 가득한 마음이 비치는 씁쓸한 미소였다.

그 속에 담긴 둘의 과거는 역겨운 음모와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이었기에 둘은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원한도 삭이고, 거칠었던 삶은 과거를 아름답게 덧칠하기도 하는 법.

아벨은 모든 일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 것들을 입에 담았다.

"이젠 압니다. 그때의 빌어먹을 형님이 안 계셨으면 어머니가 더더욱 고통에 떨면서 돌아가셨을 걸요."

아르나는 늘 아팠다.

아벨을 낳는 대가로 마녀의 저주에 걸렸었으니까.

그녀를 살리려면 성국의 성녀나 추기경의 축복이 필요했지만, 이런 시골까지 그런 자들이 올 리는 당연히 없었고.

아르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약은 술뿐.

고통이라도 무디게 하기 위해 카인은 몰래몰래 독주를 가져다주곤 했었다.

저주에 대해 자세히 모르던 아벨은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냈었다.

"저희도 한잔하죠."

"...?"

우웅-.

아벨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물결처럼 일렁이면서 그의 팔꿈치까지 사라졌다.

용사의 권능 중 하나, [인벤토리].

철렁-.

그 속에서 아벨이 꺼낸 건 카인이 묘비를 적시던 술이었다.

다만, 카인의 것과는 달리 「크로이츠 제국 111년산 레드브레스」라는 라벨이 단정히 붙어 있었다.

카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술이라면 학을 떼던 아벨이 [인벤토리]에 술을 들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자라랑-.

아벨은 이번엔 고급스러운 유리잔 두 개를 꺼내선.

휘익-.

하나를 카인에게 던졌다.

탁-.

카인은 자연스럽게 잔을 받아들었다.

그는 익숙하게 술병을 딴 후 조르르- 자신과 카인의 잔에 금빛 술을 따랐다.

"십오 년 만입니다. 이렇게 마주하는 게."

"그때가 어제 같은 데 벌써 그렇게...."

카인은 고개를 내렸다.

현 용사이자 차기 황제가 따라 준 술이 손에 들려 있는 게 영 어색했다.

순간, 카인은 고개를 번뜩 들어선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한테 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냐."

십오 년간 왕래가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났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카인은 아벨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아벨은 별 대답 없이 잔을 쑤욱 내밀며 웃었다.

"일단 마시죠."

카인은.

짠-!

맑은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치곤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으-."

카인은 소매로 입가를 쓸었다.

뜨거운 술기운이 식도를 타고 오르며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반면 아벨은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어릴 땐 그렇게 싫어하더니. 엄청 잘 마시네."

"성검의 주인이 되면 독과 저주에 면역이 됩니다. 술도 맛만 느끼죠."

"안 취할 거면 술은 왜 마셔."

"인생이 너무 쓰니까 술이 참 달아서요."

카인은 황당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 중지를 들어 올렸다.

"어디서 겉멋 든 애들이나 할 소릴. 술 마시고 그런 소리 하는 건 다 등신들이야."

"형님이 제게 했던 말입니다."

카인은 손가락을 스르륵 접었다. 바다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 등신이 나였군."

상처 가득한 카인의 얼굴도 새빨갛게 만들 정도의 부끄러운 과거였다.

"등신 형님."

"이 새끼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후우우-.

다시금 바람이 분다.

이번엔 오열 같기도, 절규 같기도 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 사이로 비치는 아벨의 갈색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카인은 자신과 아벨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용사님을? 뭔 수로?"

"최전선, 절대방위선."

"...."

최전선이 언급되는 순간 가벼운 분위기의 카인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무수한 고난을 넘었던 전사 카인이 있었다.

"가면의 설원공, '카인 로드이스트'라면 할 만할 겁니다."

"애먼 사람 잡지 마. 대륙에서 카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만 줄 세워도 성국 한 바퀴는 돌릴 거다."

아벨은 관자놀이를 툭툭 치면서 자신의 갈색 눈을 가리켰다.

"[인벤토리]처럼 용사의 권능 중엔 [스테이터스]라는 게 있습니다. 상대의 이름이나 직업, 속내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를 보죠."

끝까지 잡아떼려 했다.

그러나 용사의 권능으로 봤다 하니 뭔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침묵이 두 이복형제 사이에 내려앉는 순간.

휘익-.

아벨은 유리잔처럼 성검 '여름'을 내던졌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쳐 내고자 했다.

하지만.

['여름'이 '카인 에셀레드'에게 귀속됩니다.]

중간 과정도 없이 성검은 카인의 손에 들려선 울었다. 이제야 올바른 자리를 찾았다는 것 같은 울음이었다.

아벨은 만족스레 웃었다.

"역시."

"역시는 개뿔. 이거 뭔데?"

카인은 그 유명한 성검이 착 달라붙은 게 어색할 따름이었다.

아벨은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는 가짜 용사고."

휘익-.

그러곤 카인과 성검을 번갈아 가리켰다.

"형님이 진짜라는 겁니다. 게다가 등 뒤에 그건 마검 '겨울'이지 않습니까."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세상에 어느 가짜가 마왕을 죽여. 가짜래도 그 정도면 진짜지."

아벨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으니까.

"형님, 가짜는 가짜의 역할이 있는 겁니다. 억지로 진짜가 되려고 하면...."

펄럭-.

아벨은 입고 있던 제복의 가슴팍을 열었다.

선명하게 그어진 상처들과 단단한 근육질의 몸의 가운데, 은색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전신으로 가느다란 실을 뻗고 있었다.

스읏-.

게다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벨의 심장을 파먹을 거미 떼 같았다.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을 주는 모습.

세상의 밑바닥을 보았다 자부하던 카인조차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이 잘난 성검이라면 술이든 저주든 다 해결되는 거 아니었나?"

아벨은 고개를 저었다.

몸을 파고드는 은빛을 손가락으로 스윽 만지며 말했다.

"이래 봬도 성국에서 새겨 준 '축복'입니다."

"그러면 추기경이나 성녀를 싹 다 죽이자고 해야지, 왜 널 죽-."

아벨은 카인의 말을 잘랐다.

"형님은 지난 삶이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

카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가에서 불명예스럽게 누명을 쓰고 쫓겨나고.

대륙으로 밀항해서 밑바닥을 전전하며 무수한 피와 죽음을 맞이했고, 용병으로 온갖 더러운 걸 마주했다.

그리고 최전선.

사연 없는 놈 없고, 살아 있는 놈 없는 곳답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니 눈물이 말라 버렸다.

모든 삶이 후회였다.

"그 삶이 누군가의 음모였다면요?"

"...!"

"전 후회합니다."

아벨에게 용사로서의 삶은 늘 후회고 절망이었다.

"돌이키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용사 따위 되고 싶지도 않고요. 이 모든 게 가능한 건 진짜인 형님뿐입니다."

"애들이나 할 소리-."

아벨은 어처구니없어하는 카인의 말을 끊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형님이 도와주셔야만 가능하지만요."

아벨은 하얗고 작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서 제 뜻대로 해 달라는 신호였다.

탁-.

카인은 곧장 그의 손을 후려 쳤다.

푹.

그러곤 성검을 옆에 꽂은 후 묘비 앞에 주저앉으며 빈 잔을 내밀었다.

"더 따라봐."

"예?"

"왜 그딴 미친 소리를 하는지 길게 들어 보자."

아벨의 두 눈엔 습기가 어렸다.

"들어 주실 겁니까?"

"들어 보고."

남보다 못했던 둘이.

하나는 용사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전사였던 둘이.

처음으로 형제가 되는 순간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형제일 순간이었다.

#2 Ep.0-1

사계(四季) (2)

한 달 후, 라테라노 성국.

수도 헤네랄리페는 꽃과 환호로 가득했다.

"용사님, 만세!"

퍼버버벙-.

마법으로 만들어진 꽃잎들이 무한히 흩날리고 세기의 결혼식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골목은 꽉꽉 들어찼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마왕을 죽인 아벨을 향한 감사의 외침이었다.

"평화를 위하여!"

그런 용사가 크로이츠 제국을 다시 일으킨 철혈황녀와 결혼한다니 세상이 들썩이고도 남았다.

"저기다-!"

누군가의 외침.

끼기기기긱-.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여덟의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가 위용을 자랑했다.

다그닥, 다닥.

결혼식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가장 앞엔 아벨이 서 있었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했다.

"용사님, 저희 어머님을 낫게 해 주세요."

"마왕을 죽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용사에게 닿기를.

그들의 절망을 아벨이 풀어 주길.

금빛의 관을 쓰고 백색의 정복을 멀끔히 입은 아벨은 그런 모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모두가 아벨을 향해 기도한다면, 아벨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황녀는 맨 뒤에 있으니 상관없고.'

카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벨의 손 역시 애처롭게 기도하는 손으로 보였다.

몇 번을 고민하고,

몇 번을 생각해도.

아벨의 기도하는 손을 잡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결말이겠지만.

팟-!

그는 달렸다.

사람들의 어깨를 밟으며 새처럼 날았고 모습이 드러나는 건 금방이었다.

순간, 아벨과 눈이 마주쳤다.

-결혼식 날 절 죽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날 절벽에서 들은 아벨의 말이 귓가를 스친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축복'을 받고서부터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삶을 대신 살아 주는 느낌이었죠.

아벨은 마지막까지 '아벨 에셀레드'로 살기를 바랐다.

이 축복이 자신의 몸을 차지해 버리면 늦는다.

그렇기에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온전한 자신으로, '아벨 에셀레드'로 죽기를 바랐다.

-마왕을 죽인 후부턴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잠깐씩 사라지던 기억이 며칠 단위로 길어졌죠.

그건 카인이 칼을 들 이유로 충분했다.

"아-벨-!"

그의 손엔 거대한 백색의 대검이 들려 있었다. 성검과 쌍을 이루는 마검 '겨울'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백색의 뇌전이 몰아친다.

짓쳐 드는 카인이 마치 하얀 폭풍처럼 보일 정도로.

콰가가강-.

그 힘에 아벨을 지키던 수백의 기사들이 잡초처럼 뽑혀 날아갔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단숨에 정리했고 아벨까지 남은 건 넷.

용사 아벨과 함께 마왕을 죽인 그의 동료들이었다.

-기억이 없어질 때마다 동료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제의 저는 어땠냐고요. 하지만 답은 늘 같았습니다.

"막아-!"

"미친놈이 감히 용사님의 결혼을 망쳐?"

날아드는 욕설에도 카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아벨의 동료가 아니었으니까.

-'똑같다'. 분명 저는 다른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같다고만 말했습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절 속이는 건지....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카인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것처럼 [스테이터스]로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면 안 되냐고 반문했었다.

그러자 아벨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 순간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권능은 처음으로 거짓을 보여 줬죠.

아벨은 모든 걸 잃었다.

동료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용사의 권능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 순간.

-형님이 떠올랐습니다.

용사가 되기 전, 헤어진 카인은 다르리라.

진짜 자신을 알아보리라.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카인을 찾은 아벨은 두 주먹을 쥐며 환호성을 간신히 참아 냈었다.

찾지 못할 줄 알았던 '겨울'이 카인의 등에 있었으니까.

아벨은 운명이라는 걸 느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형님.

쿠드드드득-.

카인이 땅을 디뎠다.

발뒤축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헤네랄리페의 바닥이 바스러졌다.

쉐에에엣-!

발을 굴렀다.

세계의 풍경이 이지러진다.

찰나라는 시간조차 카인의 질주를 표현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마왕과 싸웠던 넷 역시 놓칠 정도였다.

오직 하나.

아벨만이 똑바로 바라보았고.

스윽-.

성검을 슬쩍 기울였다.

순식간에 아벨의 앞에 나타난 카인은 그 틈에 성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 순간 두 형제는 상대의 눈에 비친 각자의 얼굴을 보았다.

"나 같은 놈한테 뒷일을 맡긴 게 후회되지 않냐?"

카인의 한탄과

"오히려 좋습니다."

아벨의 기쁜 미소가 교차했다.

즈즈즈즛-.

그는 곧장 성검을 뽑아선 아벨의 가슴에 꽂았다.

뼈를 부수고 피륙을 가르는 감각이 카인의 손에 선명했고.

두-근.

천천히 느려지는 아벨의 심박이 성검을 타고 전해졌다.

"죽여-!"

"막아라!"

"용사님을 살려야 한다!"

고막이 터질 것 같다.

둘을 향해 달려오는 수천수만의 외침이 찔러든다.

그러나 물속을 나아가는 화살처럼 모든 걸 계획대로 짜 맞춘 두 형제에게 닿기엔 느렸다.

후우우우웅-.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용사의 권능으로 상처가 아물려는 아벨의 가슴에 백색의 '겨울'을.

푸쉬시시싯!

마저 찔러 넣었다.

상처가 벌어지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아벨의 얼굴에선 혈색이 사라졌다.

반면 카인의 얼굴에선 빨간 핏물이 뚝뚝 흘렀다.

"그렇게... 슬퍼하실 필요 없습니다."

설원만큼 창백해진 아벨.

죽어 가는 눈.

그럼에도 아벨은 흐려지는 눈의 초점을 어떻게든 맞추며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카인의 눈물을 닦았다.

"모든 건 계획대로입니다...."

두 개의 신기에 관통당한 은빛의 무언가가 미친 듯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러자 아벨의 가슴팍에 박힌 성검 '여름'이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옆의 마검 '겨울' 역시 부르르 떨었다.

"역시 신기가 직접 꽂히니 '축복'이 잠잠해지는군요."

아벨은 제 일을 남 일처럼 태연히 말했다.

카인은 이 모든 걸 계획한 그가 안타까웠다.

황녀와의 결혼은 역시 사랑은 아니었다. 당연히 황제가 되고 싶던 것도 아니었고.

아벨의 머리 위에 놓인 금빛의 관.

성국에서 계승되는 성류관 '가을'.

이 정도의 사건을 만들지 않으면 아벨이 쓸 일이 없는 물건이기에 그는 결혼을 승낙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아벨, '봄'은 어디에 있지? 아무리 봐도 없어. 이러면 그냥 개죽음일 뿐이야!"

마지막 신기, '봄'.

둘의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마지막 신기였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성검이니 마검이니 정체라도 알려져 있었지만, '봄'은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기록조차 극히 드물었다.

카인이 그런 '봄'을 어떻게 찾냐고 했을 때, 아벨은 자신 있다고 했다.

"제겐 봄이 보입니다."

지금처럼.

그는 피투성이의 가느다란 검지를 들어선 카인의 가슴을 톡톡 쳤다.

['카인 에셀레드'에게서 '봄'이 시작됩니다.]

[<사계절의 신기>가 모두 모였습니다.]

[『사계』가 피어납니다.]

쿠구구구구구구-.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몸이 아니라 혼이 느끼는 떨림.

카인은 따스한 무언가가 흘러들어 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한테 '봄'이...?"

동시에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도 모르던 걸 아벨이 알고 있던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봄이라는 놈이 원래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있고 누구에게도 없죠."

"마지막까지 지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신났구나?"

아벨은 웃음 지었다.

용사의 미소가 아니라 어릴 적 형님을 바라보던 소년의 미소였다.

꽈아아악-.

그러곤 마지막 힘을 불태우며 카인의 코트 깃을 붙잡았다.

아벨의 갈색 눈동자가 카인의 고독한 눈을 마주했다.

"다시 시작하는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사계』가 '용사'의 소망을 듣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 주세요, 형님."

투웅.

그 순간 아벨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더는 아벨이 아닌 한 구의 시체가 힘없이 떨어졌다.

"못난 놈-!"

카인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온몸이 뜨겁고 눈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우-.

먼 곳에서부터 절규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온다.

카인은 그 속에서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절대 잊지 않겠다, 용사 아벨 에셀레드!"

우--- 우----.

카인을 잡기 위해 달려오던 자들이 사라진다.

하늘의 푸름도.

피의 붉음도.

칼의 은빛까지도.

모든 색이 카인에게 빨려 들어가며 흑백만 남은 세계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경계마저 흐려지더니 회색으로 뭉쳐서는 별도 달도 없는 허무의 세상이 되었다.

[회귀를 시작합니다.]

모든 게 사라진 세상, 카인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철로 만든 상처투성이의 거대한 액자가 앞에 나타났다.

그곳엔 방금 카인이 아벨을 성검과 마검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네가 바라던 기적이더냐, 아벨. 기적이라는 놈 참 못생겼구나."

주마등을 보듯 액자 속 그림은 카인의 과거로 향했다.

+

「한 달 전, 에셀레드 해안절벽.

아벨이 길고 긴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있다.

"<사계절의 신기>를 모두 모으면 소원을 이뤄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빌 겁니다."」

+

하지만 아벨은 돌아갈 수 없었다.

몸과 정신을 파먹는 은빛의 '축복' 때문이라고 했었다.

카인은 그림을 계속 바라보았고 액자는 그가 지나쳤던 후회들을 하나씩 비추기 시작했다.

+

「최전선의 전사들이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걸 바라만 볼 때.」

「스승님의 마검 '겨울'을 들어야 했을 때.」

「대륙을 전전하던 용병이었을 때.」

「에셀레드 백작가에서 쫓겨날 때.」

「작은어머니 아르나가 아무리 독주를 마셔도 고통스러워 할 때.」

「바다와 싸우곤 시체로 돌아온 노기사의 손을 꼭 잡고 울음을 참을 때.」

+

"내 삶도 참 등신 같았군."

무엇 하나 순탄치 않았고, 어느 하나 카인의 것은 없었다.

하나 있다면 상대를 죽이는 검뿐.

다시금 그림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고급스러운 귀족의 방이었다.

한가운데의 큰 의자엔 흑발에 보랏빛 눈을 지닌 카인이 앉아 있었고.

초조한 듯 눈이 떨린다.

잊었던 기억.

카인은 어릴 적의 자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노기사는 어린 카인의 손을 따스하게 잡으며 말했다.

"아벨 공자님과의 결투가 두려우십니까."

"...."

카인은 호기로운 말도, 떨리는 속내도 말하지 못했다. 노기사는 안타까운 듯 손을 꽉 쥐었다.

"제 고향에선 '흔들리는 건 바다가 아니라 마음이다'라는 말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밴더빌트가 언제나 도와드리겠습니다."」

+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사람은 잃고서야 알게 되는 게 있다.

대개 그런 것들의 이름은 후회였고, 밴더빌트라는 이름이기도 했다.

"나만 포기하지 않았다면-!"

저 이후의 미래를 안다.

연무장에서 아벨과 싸워 처참히 패배한다.

백작가를 노리던 적들은 후계자인 카인이 이복동생인 아벨에게 졌다는 걸 이용하며 가문을 흔들었다.

아르나는 고통 속에 죽었고.

백작이 돌아오지 못한 백작가는 결국 멸문했으며, 아벨은 성검을 쥐곤 성국으로 끌려가 용사의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 마지막은 배신과 죽음.

마지막으로 카인은 과거를 바라보게 되었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미래가 없던 삶.

어쩌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때를 보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때.

[분기점을 확인했습니다.]

카인과 액자만이 존재하던 세계가 금빛의 직선으로 갈라지고.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백색의 뇌전이 몰아쳤다.

사라졌던 사계절의 색이 제자리에 깃든다.

동시에 카인의 신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읍!"

카인은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모든 신경이 불타오르고.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쪼그라들고.

세상의 모든 고통이 엄습했다.

[회귀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카인의 세계가 바뀌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3

Chapter. 1 열일곱의 봄 (1)

「우리의 신은 울보였다.

녀석의 눈물로 만들어진 <사계절의 신기>가 모인다면 어쩌면 다시 웃을지도 모르지....

- 어느 마술사왕의 술주정」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이 창밖으로 비치고 붉은 벨벳 커튼이 그마저도 가린다.

한쪽엔 북방 엘프의 숲에서만 나는 목재로 만든 책장들이 늘어서 있고, 책들이 이빨처럼 꽂혀 있었다.

가운데 놓인 유난히도 큰 의자엔 검은 머리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벨 공자님은 좋은 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로스 후작가를 생각한다면 아마 오늘 결투는...."

계속 소년에게 말을 걸던 노기사는 입을 닫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기사는 소년의 손을 잡으며 온기를 전했다.

"공자님, 아벨 공자님과의 결투가 두려우십니까."

"...."

소년의 보랏빛 눈이 떨렸다.

이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무게가 소년의 머리를 짓눌렀기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노기사는 소년의 손을 꽉 잡으며 힘을 주고자 했다.

"제 고향에선 '흔들리는 건 바다가 아니라-."

파지지지지지직-!

순간 소년의 전신에서 백색의 뇌전이 치솟아 올랐다.

밴더빌트는 흠칫 놀랐지만, 더더욱 손을 꽉 잡았다.

나쁜 마법이라면 본인이 감당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마음이지. 그걸 알게 될 때까지 먼 길을 돌아야 했어."

뭔가 달라졌다.

"카인 공자님?"

뇌전이 사라지자 방금까지 초조해하고 떨던 소년은 더는 없었다.

에셀레드 백작가의 정식 후계자.

카인 에셀레드.

카인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밴더빌트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 밴더빌트."

노기사는 머뭇거리면서도 카인을 경계했다.

기묘한 뇌전이 번뜩이고 달라진 카인이 의심스러웠으니까.

밴더빌트는 대검이 매달려 있는 등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카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지키려고 하고, 지금은 죽이려고?"

"그...."

노기사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카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방의 취향은 친부의 것이다.

기억에 남아 있던 광경 그대로였지만, 너무 긴 시간을 돌아온 나머지 어색하게 이곳저곳을 만졌다.

밴더빌트의 눈에 긴 여행을 거치고 돌아온 사람 같아 보일 정도로.

"답답하던 곳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평범하네."

카인은 책장을 손으로 쓸었다.

가시 하나 배기지 않는 게 잘 손질된 책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카인은 이 북방 엘프나무의 가치를 알았기에 이렇게 낭비한 게 아까웠지만, 이 방의 주인을 떠올리면 당연해 보였다.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

카인과 아벨의 아버지이자, 에셀레드 백작가의 가주.

에드먼드의 집무실은 그의 전리품들을 전시해 둔 곳이었다.

이 나무는 엘프의 숲 원정에서 이기고 왔다는 증표였으며, 커튼은 상인 연합 <델프트>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걸 상징했다.

"던전은?"

앞뒤 없는 카인의 물음이었지만, 노기사 밴더빌트는 곧장 알아먹고 대답했다.

"여전히 닫혀 있습니다."

"정말 계속 싸우고 계신 건가."

"...에드먼드 백작님이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왕국 최강의 검호니까요."

밴더빌트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달라진 카인이 어색할 뿐, 그가 충성을 다할 대상이 아닌 건 아니었으니까.

"다시 열리지 않는 건 후작들의 말처럼 오류일 수도 있고."

던전은 들어간 자가 살아 있는 한 다른 자가 더 들어오는 걸 막는 성질이 있었다.

그걸 '닫았다'라고 대개 표현했다.

"일반적으론 그렇습니다."

에드먼드의 집무실을 카인이 쓰고 있다는 뜻은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

에드먼드 백작은 후작들의 정치질에 홀로 던전에 들어갔고 1년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던전에는 식량이 존재치 않으니 후작들은 그가 진즉 죽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왕국 최강의 검호가 사라진 자리를 지키는 건 아직 어린 카인뿐.

그들은 자연스레 에셀레드 백작령을 향해 마수를 뻗었다.

만만했으니까.

"밴더빌트."

"예."

"오늘 내가 아벨과 싸워서 이길 것 같은가? 질 것 같은가?"

카인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밴더빌트는 지금껏 카인을 의심하던 것도 까먹은 듯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패배하실 겁니다."

"너무 대답이 냉정한데?"

"북방에 계시던 아벨 공자님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로스의 '검은여우 필립'입니다. 그 교활한 놈이 이번 결투에도 분명 무슨 수를 썼을 겁니다."

"그럼 결투하러 나가면 안 되겠네."

농담 섞인 카인의 말.

"솔직히 그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밴더빌트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꼭 말을 해야만 전해지는 건 아니다.

카인은 그의 속내를 읽고는 입을 열었다.

"에셀레드의 후계자라는 놈이 동생과의 결투도 피하면 누가 날 따르겠어. 결국 로스 후작가의 영향력만 커지겠지."

"예. 그렇습니다."

털썩-.

카인은 에드먼드 백작이 앉던 푹신한 1인용 소파에 앉은 후, 깍지를 꼈다.

"아주 판을 잘 짰어. 도주하면 겁쟁이 후계자, 패배하면 백작가를 잇기엔 무능력한 후계자."

밴더빌트는 한참을 고만하다 넌지시 말했다.

"대리기사전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카인은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려는 밴더빌트를 올려다보았다.

'이전엔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그저 응원만 하던 밴더빌트가 부족하긴 하지만 다른 의견도 꺼냈다.

카인은 지금부터 할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도주하는 것보단 낫지만 나 대신에 싸울 기사도 없잖아."

쿵-.

밴더빌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성성한 그의 백발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이트 밴더빌트, 공자님의 칼입니다."

"그대가 유일한 내 칼이지. 에셀레드의 기사가 아니라 어머님의 기사라서 문제지만."

한때는 밴더빌트의 충심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등을 돌려도 오직 그만이 자신을 지켜 주려 했었던 걸 기억하기에 카인의 말엔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노기사와 어린 후계자가 바라보는 순간.

쾅쾅쾅-!

집무실의 문을 거칠게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제 결투 시작인데, 빨리 나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밴더빌트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면서 분노를 토했다.

"감히, 공자님께 무슨 망발이냐!"

끼익-.

문이 열리고 보이는 건 세 명의 기사였다. 그들은 왼팔에 주황색 천을 묶고 있었다.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증표였다.

"역시 질질 짜고 있을 줄 알았어. 이 조그만 영지에서 뭘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다 늙은 영감하고 속닥속닥."

"제이든 네놈! 로스 후작이 네 뒤에 있다고 이리 오만한 게냐."

밴더빌트는 번쩍 일어서면서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온 세 명의 기사 중 가장 앞에 있던 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이젠 후작님의 기사인데 전처럼 고개 숙일 필요는 없잖아?"

밴더빌트는 곧장 대검을 빼려 했다.

그러나 제이든은 오히려 목을 길게 빼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감당할 수 있으면 베시든가."

주황색은 로스 후작의 색이었다.

그리고 주황색 끈을 묶는 기사들은 후작의 기사들인 <로스 데 캐롯>뿐.

즉, 후작을 대신하여 영지에 온 자들인 만큼 당당했다.

더군다나 에셀레드의 기사도 아닌 밴더빌트가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맞지 않았다.

"밴더빌트, 참아."

"...!"

카인은 나지막이 명령했다.

그 모습에 제이든을 비롯한 다른 두 기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똑똑하십니다. 카인 도련님."

"그래. 에셀레드보다 그쪽이 더 나은가?"

카인은 배신자 제이든에게 물었고 그는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후작님은 능력에 따라서 대우해 주시니까요."

"네가 에셀레드의 무고한 영지민을 함부로 죽여서 쫓겨났던 것도 아시고?"

"...."

제이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들과의 싸움을 피하던 카인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밴더빌트."

"예."

"시체 잘 처리할 수 있지?"

"...예?"

뜬금없는 카인의 말에 밴더빌트는 의문을 표했다.

제이든을 비롯한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스릉-.

카인은 의자 옆에 세워뒀던 자신의 레이피어를 뽑았다.

제이든은 코웃음을 쳤다.

"뭐 찌르기라도 하시려-."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푸욱-.

순식간에 제이든의 사각에서 날아든 카인의 세검이 그의 목에 틀어박혔으니까.

"끄-어억."

날을 타고 제이든의 피가 흐른다.

카인은 어떤 감정도 없이 무표정한 눈으로 제이든의 숨통을 끊으며 그의 가슴을 밟고 뛰어올랐다.

제이든의 뒤에 있던 기사 둘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멈칫했고.

푸우욱-.

단숨에 제이든의 목에서 세검을 뽑아낸 카인은 바로 왼쪽 기사의 벌어진 입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둘."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에 둘이 죽고 남은 하나는.

스릉-!

본능적으로 칼을 뽑았다.

본래 타 영지의 기사는 가문의 내실에 들어설 때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이들이 에셀레드를 무시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하지만 지금.

아무리 약해졌고, 힘이 없다 한들 수천의 낮과 수천의 밤에 싸워 왔던 카인이 돌아왔다.

당연히 그의 검이 좀 더 빨랐다.

푹.

세 번째 기사가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그의 발등에 세검이 꽂혔다.

"카-인!"

그는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칼을 들었다.

하지만 빈 저택에 올 사람은 없었고, 바닥에 꿰인 발에 그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카인은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뛰어올랐다. 그의 머리를 두 무릎으로 단단히 잡고 대답해 줬다.

"그래."

부드드득-.

그러곤 한 바퀴 돌렸다.

"유언치곤 짧네."

쿠웅-.

세 번째 시체가 철푸덕 쓰러졌다. 카인은 그들의 팔에 묶였던 주황색 끈을 풀었다.

얼굴과 옷에 튄 피를 닦으면서 밴더빌트를 돌아봤다.

"할 수 있지?"

"고, 공자님?"

노기사는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아무리 이들이 약한 축이라고 해도 나름 <로스 데 캐롯>의 평기사다.

하나면 몰라도 셋은 명백히 카인의 역량으론 이길 수 없는 전력.

그런데 이겼다.

오러로 짓누른 것도 아니고 빈틈을 노리고 가장 단순하게 움직이며 하나하나 순식간에 죽였다.

카인은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볍게 웃었다.

"뭐 이런 걸로 놀라. 이제 시작인데."

"이게요?"

콰릉-!

먹구름 낀 밖에서 순간 번개가 내리쳤다. 집무실은 번뜩였고.

"에셀레드는 내 땅이다."

그 순간 카인의 눈이 번쩍였다.

밴더빌트는 나름 경험이 많은 기사였지만, 한순간 카인의 기백에 밀렸다.

"감히 내 땅에서 지들 멋대로 판을 벌려?"

게다가 더욱 무서운 건.

카인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

상대를 죽이겠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나타나야 할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밴더빌트는 본능적으로 침을 삼키며 두려움을 억눌렀다.

-저는 어머니를 살릴 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필립 부단장의 말을 따랐죠.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날 절벽에서 들었던 아벨의 말이 떠오른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저 멀리 보이는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음모의 장소.

그리고 몰락의 시작.

"밴더빌트, 내겐 도주와 패배 말고 다른 선택지도 있다."

콰가가강-!

다시 한번 내리치는 번개.

그 속에서 카인은 섬뜩하게 웃었다.

"승리. 그리고 죽음."

평균 생존 72시간의 최전선.

그곳에서 십 년 가까이 싸워 왔던 전사의 웃음이었다.

#4 Ep.Ⅰ-1

열일곱의 봄 (2)

솨아아아아-.

굵은 비가 내린다.

저 멀리 수평선이 지글지글하는 걸 보니 저녁까지 내릴 비였다.

카인은 가벼운 차림으로 왼 허리춤엔 세검만 장비한 채 빗속을 걸었다.

밴더빌트는 그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

성내의 사람들은 카인의 그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빗속을 걸어가는 고독한 후계자.

오늘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가 안다.

로스 후작가에서 갑자기 에드먼드의 아들이라고 북방전선에서 데려온 아벨과 싸우는 날이며 카인이 패배할 날이라는 걸.

아벨이 온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엄청난 재능을 지녔는지 소문이 돌긴 충분했다.

-이게 진짜 백작님의 아들이지!

-아벨은 천재야. 검의 천재!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희대의 천재.

아벨에게 검을 가르친 기사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왕국 최강의 검 에드먼드를 이길 자는 미래의 아벨뿐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반면 적장자였던 카인에 대한 평가는 애매했다.

-카인 공자님도, 나쁘진 않지만....

-괜찮긴 하신데, 좀....

웬만한 기사들보단 카인이 나았지만, 비교 대상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재능을 지닌 아벨.

당연히 에셀레드 백작령을 이을 후계자로서 카인의 위치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외가에서도 인연을 끊은 모양이시고.

게다가 카인의 어머니 클로에의 라마이닝 백작가에서도 선을 긋기 시작했다.

카인에게 남은 건 한 자루의 검과 노기사 한 명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걸 꾸민 게 바로 로스 후작가였다.

그들은 일부러 아벨과 아르나를 데리고 와서 여론을 흔들고 오늘의 결투를 만들었다.

-에셀레드의 후계자시니 친히 동생분께 검을 가르쳐 주시죠, 카인 공자님.

가는 눈웃음을 잘 짓는 <로스 데 캐롯>의 부단장 검은 여우 필립은 교활했다.

어차피 아벨에게도 에드먼드의 피가 흐르는데, 굳이 약한 카인이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가.

향후 찬란하게 성장할 아벨을 추대해서 에드먼드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 어떤가.

로스 후작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내세웠다.

그의 작전이 무엇인지 뻔히 알았지만 당해야 했다.

카인에겐 힘이 없었으니까.

"오우거에 둘러싸인 기분이야."

카인은 가까워진 기사들의 연무장을 보며 말했다.

밴더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강했다면...."

카인이 후계자로서 에셀레드를 이끌기 위해선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열일곱이고 아벨이 열다섯이라지만 검으로는 아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쿠르르르릉-.

구름 사이로 번개가 노니면서 천지를 울리는 순간.

"괜찮아. 오우거는 내가 잘 잡거든."

카인이 연무장에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인사도 하지 않는다.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 그를 거부했고, 로스의 기사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벅-.

카인이 제자리에 섰다.

계속 들어올 줄 알았던 그가 멈추자 몇몇 기사들이 의아해했다.

"클로이드."

카인은 나지막이 에셀레드의 기사단장 클로이드를 불렀다.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장년의 기사, 클로이드가 앞으로 카인의 앞으로 나와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다음은 없어."

"...?"

클로이드는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들어 카인을 바라보았다.

묘했다.

분명 생김새는 그가 알던 카인이었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알맹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고, 공자님."

게다가 늘 무표정하게 카인을 지키던 나이트 밴더빌트가 무언가 알아먹은 듯 놀란다.

카인은 손을 들어 노기사를 막곤 클로이드를 향해 말을 이었다.

"에셀레드의 기사가 감히 주인을 고르려 해?"

"...!"

"그것도 이 땅을 노리고 들어온 외적들을?"

화아아아아아아-!

한 순간.

카인이 지니고 있던 살기의 일부분이 풀려 나가며 그를 덮쳤다.

클로이드는 이 세상에 자신과 카인만이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속에서 카인은 구름을 뚫을 정도로 거대한 거인이었고, 단숨에 찍어 죽일 수 있지만 친절히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클로이드 단장의 본능이 맹렬히 울었다.

죽는다.

카인을 거스르면 죽음뿐이다.

기사로서 살아온 모든 세월이 그에게 경고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가슴은 카인의 의지를 읽어 냈으니까.

"그건-."

급하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다시 말하지. 다음은 없어."

카인은 그의 말을 자르며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클로이드는 굳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간신히 고개만 돌려 카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르다. 너무 달라...!'

클로이드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비가 내려서가 아니라 이전의 카인과는 전혀 달라진 그를 보았으니까.

'궁지에 몰려서 바뀌신 건가, 원래부터 저런 모습이 있으셨던 건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카인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던 자신의 모호한 태도는 오늘로써 끝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런 카인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다.

전장의 에드먼드와 너무나 닮았으니까.

"결투 전에 너무 기강을 잡으시는 거 아닙니까?"

기사들이 갈라진다.

한쪽에 몰린 주황색 띠를 감은 기사들 사이에서 느끼한 목소리가 울렸다.

"필립 로스 프랜시스."

털이 수북한 여우.

'로스'의 이름을 가운데 이름으로 쓰는 게 허락된 기사 중의 기사.

에셀레드 백작령에 있는 모든 <로스 데 캐롯>을 지휘하는 부기사단장이기도 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가소롭다는 미소였다.

"하긴 오늘 아벨 님께 패배하면 못하실 테니 실컷 해 두셔야겠죠."

짝-, 짝-.

카인은 돌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날카로운 박수가 빗방울을 뚫고 필립의 귓가를 찔렀다.

"대단해."

필립이 비릿한 미소를 지우며 반문했다.

"...무슨 의미입니까."

카인은 대답보다 먼저 연무장을 쓱 돌려보았다.

양측의 기사들이 모두 참관하고, 가운데에는 갑옷을 입고 세검을 든 아벨이 서 있었다.

그런 아벨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경은 검은 여우라는 별명처럼 기사보다는 관료나 참모가 더 어울리는 것 같더군. 에셀레드를 흔들기엔 완벽한 계책이었어."

"이젠 가면을 쓰지 않겠다는 말씀이군요."

카인은 필립이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클로이드는 다음이 없지만, 그대는 지금이 없거든."

필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클로이드가 카인과 대화 중 움찔 했던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달라지셨군요."

필립이 만든 상황에 무력하게 끌려만 다니던 카인은 사라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이빨을 드러낸 어린 맹수였다.

"달라져야만 네가 짜 둔 판을 엎을 수 있을 테니."

"뭐, 늦었지만 응원하겠습니다. 결과가 바뀌진 않겠지만요."

그는 아벨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벨의 천재적인 재능에 자신이 가르친 검이면 오늘의 결과는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벨의 목줄도 쥐고 있으니 필립은 오늘 승리의 쐐기를 카인의 가슴에 박기로 했다.

앞으로 에셀레드 백작령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글쎄."

카인은 묘한 웃음을 남기고 연무장 가운데로 향했다.

"아, 그리고 고마워, 필립."

"...?"

"날 마중 보낸 기사들 말이야. 덕분에 몸이 좀 풀렸어."

필립은 그 순간 시린 겨울바람이 등허리로 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솨아아아아아아-.

점점 더 거칠어지는 비.

카인은 그를 뒤로하고 연무장 가운데로 움직였다.

-과거로 돌아가시면 부탁드립니다. 이용만 당하던 어리석은 저를 혼내주시고.

콰가가가강!

번개가 더욱 강해진다.

명멸하는 빛 속에서 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세검을 뽑았다.

카인보다 조금 더 작은 체구의 아벨 역시.

스릉-.

같이 뽑았다.

이번 결투의 심판인 클로이드는 급하게 다가와서 둘의 가운데 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어머니를 살려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형님.

클로이드가 시작을 외쳤지만 카인과 아벨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빗줄기가 그들의 정수리부터 턱을 타고 속절없이 흐를 때.

"아벨."

카인이 그를 불렀다.

아벨은 짧게 끄덕였다.

"이 꽉 깨물어. 혼 좀 내줘야겠으니까."

카인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연무장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예."

게다가 아벨의 순순한 대답.

에셀레드 백작령의 미래를 걸고 싸우는 이복형제간의 결투보다는 형제간의 지도대련에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후우웅-.

바람이 분다.

늘 옅은 짠내가 감도는 에셀레드 해안의 바닷바람.

미래의 카인이 십오 년 만에 맡았던 바람과 같은 냄새였다.

둘의 결투가 당장이라도 시작되려는 때, 카인의 눈엔 다시금 낡은 액자가 반투명하게 보였다.

+

『멸망의 대적자 Ⅰ』

'카인 에셀레드'의 회귀로 세계선이 나뉘었습니다. 운명의 분기점을 바꿔 새로운 세계선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세계선 고정도 : 0%

클리어 조건 : 아벨의 패배

성공 시 : 『사계』 일부 해금, 세계선 고정도 상승

실패 시 : 회귀 취소.

+

시간을 뒤로 돌려 다시 얻은 삶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선전 포고.

퀘스트샵의 의뢰서와 비슷했다.

카인은 쓰게 웃었다.

'기적에는 대가가 필요한 모양이야.'

하지만 그에겐 익숙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늘 대가가 필요했으니까.

"어디다가 한눈을 파십니까."

아벨은 미묘하게 어긋나 있던 카인의 시선을 꼬집었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그래도 돼."

뻔뻔한 대꾸에 아벨의 말문이 막혔다.

지켜보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점점 연무장의 흙이 비에 젖어 가고, 아벨의 세검을 타고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카인은 달려드는 대신 자신의 검의 끝과 끝을 잡고는.

파창-!

무릎으로 찍어 반 토막을 낸 후 뒤로 던져 버렸다.

아벨은 동요하지 않고 구석을 턱짓했다.

구석엔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연습용으로 쓰는 세검이 몰려 있었으니까.

"칼을 가져오십시오."

"필요 없다. 넌 이 주먹이면 충분해."

아벨은 인상을 썼다.

천재답게 그는 카인의 무력을 알 수 있었다.

검을 든다면 그래도 조금은 싸울 수 있겠지만, 맨손이라면 반드시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말했다.

"칼을 들지 않으시면 너무 금방 끝날 겁니다."

"그래, 금방 끝나겠지."

카인의 묘한 말.

아벨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좋습니다."

필립은 자신에게 더 유리해진 상황이라 웃었으며, 클로이드는 카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고뇌했다.

저벅. 저벅.

주위가 어떻든 둘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틈을 노리는 두 마리의 맹수 같았다.

카인은 걸음만으로도 아벨의 수준을 눈치챘다.

'너무 정석적이야.'

딱딱한 말투도 검을 든 것도 카인에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뻔한 모습.

슷-.

일부러 팔을 내렸다.

경험으로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빈틈이었다.

아벨의 눈이 반짝였다.

동시에 세검의 끝이 흔들렸다.

'지금!'

아벨이 찔러 들어오려고 움찔한 그 찰나.

카인은 온몸을 쥐어짰다.

뼈가 휘어질 정도로 근육이 꽉 조여지며 고통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팟-!

카인은 그대로 바닥을 박찼다.

한 번의 질주로 수백의 기사를 날려 버렸던 카인다운 속도였고, 아벨의 눈이 갈피를 잃었다.

놓쳤다.

어디로 간 건지 고개를 돌리려 했다.

우웅-.

그 순간, 전투본능이 맹렬히 울었다.

아벨은 직감적으로 옆으로 피했다.

시-잇!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카인의 오른 주먹이 지나갔다.

파스스슷-.

그친 풍압만으로도 갈색 머리 몇 가닥이 잘렸다.

압도적인 위력.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던 주먹에 아벨의 몸은 얼어 버렸고, 머리는 카인이 왜 충분하다 했는지 알아 버렸다.

"배가 비었네."

빗방울의 틈으로 카인의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바보가 아닌 카인은.

까아아아앙-!

그대로 아벨의 복부 갑옷을 후려쳤다.

#5 Ep.Ⅰ-1

열일곱의 봄 (3)

아벨의 갑옷이 주먹 모양으로 우그러들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충격을 상쇄했지만.

"커헉-."

이미 타격은 전해졌다.

숨통을 꽉 조이는 고통에 허리가 절로 굽는다.

카인은 그런 아벨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지는 가짜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확실히 용사가 될 만해.'

방금 주먹이면 웬만한 용병이라도 한 방에 정신을 잃었을 텐데, 그걸 고작 열다섯의 아벨이 버텨 냈다.

전투 센스나, 맷집이나 제 나이를 아득하게 초월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

아벨을 봤던 모든 자들이 의심 없이 왜 용사라 찬미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 대 영."

첫 승리는 카인의 몫이었다.

끄덕.

아벨은 수긍했다.

카인이 주먹이 아니라 검을 들고 있었으면 방금의 기습에 죽었을 테니까.

"평소 하던 대로만 해!"

필립이 소리를 높였다.

지금의 아벨을 키워 낸 건 이러나저러나 필립 로스 프랜시스.

에셀레드가 품지 못했던 아벨을 데리고 온 만큼 그는 자격이 있었다.

"...예."

아벨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과거의 카인은 아벨이 왜 그렇게까지 필립의 말을 잘 듣는지 관심도 없었다.

-북방의 엘프들은 개새끼입니다.

그 아벨이 욕부터 하는 놈들이 모여 있는 곳, 왕국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엘프의 숲.

아벨과 아르나는 그곳에서 왔다.

-그때 필립이 찾아왔죠. 인간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고, 어머니의 저주도 해결해 줄 수 있다고요.

본래 아벨은 생명을 해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폭력 역시 싫어했다.

하지만 검을 들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어머니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그렇기에 지금의 아벨은 필립의 말을 믿고 온 힘을 다했지만.

-성검 '여름'을 쥐고 성국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던 필립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란 걸.

미래의 아벨은 필립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복수할 힘을 얻었을 땐 이미 필립이 죽은 후였다.

카인은 그런 필립과 아벨을 번갈아 보며 씁쓸히 웃었다.

과거의 자신이 몰랐던 게 꽤 많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기 때문에.

필립의 눈치를 보는 아벨을 향해 말했다.

"어따 한눈을 팔아."

카인은 다시금 주먹을 들었다.

바꿀 것이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사는 세계를 바꾸리라!

"그런 적... 없습니다."

아벨은 힘겹게 부정했다.

복부의 고통이 여전히 숨통을 조이기도 했으며, 아무 잘못도 없는 카인에게 상처를 내야 한다는 가책이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아벨은 이를 악물며 세검을 들었다.

"이젠 봐드리지 않-."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고 하는 말을.

쉐에에엣-!

카인이 달려들며 끊었다.

엄한 필립의 눈빛을 보며 아벨은 전의를 다졌다.

이젠 막다른 길이었다.

카인이 다칠까 쉽게 뻗지 못하던 세검을 이제야 시원히 뻗어 내기 시작했다.

싯-! 시싯-!

빗방울을 가르며 날아드는 찌르기.

유려하게 휘감아 치는 베기.

사각을 파고드는 다음 수!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반짝였다.

'가르쳐도 하필 엔 자우어를 가르쳤군.'

세검은 본래 인간을 죽이기 위한 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용병들이 쓰는 세검이 악랄한데, 필립이 가르친 건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는 엔 자우어였다.

용병으로 전전했던 카인은 그의 칼끝을 보자마자 단숨에 알아봤다.

'필립 이놈이 끝까지 초를 치려 했어.'

반면 에셀레드의 검술, '아르드바르'는 공명정대하게 나아가는 특징이 있었다.

'엔 자우어'의 습관이 들면 익힐 수 없을 정도로.

쉬익-.

아벨이 뻗어 내는 궤적마다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절실함이 묻어난다.

카인은 바람에 눕는 갈대처럼 그의 절실함을 피했고.

툿-.

피할 수 없는 건 주먹으로 후려쳤다.

간단하지만 기존의 카인이라면 절대 반응할 수 없던 움직임과 과감함이었다.

"쯧."

필립은 이렇게까지 카인이 분전할 줄은 예상치 못했기에 얼굴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카인이 너무 달라졌다.

그리고 더욱 문제는 애써 아벨 쪽으로 기울게 했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잇-.

핏방울이 튄다.

아벨의 궤적에 담긴 것이 절실함이라면.

투웅!

세검을 쳐 내는 주먹에서.

검이 스친 볼과 팔에서.

비산하는 핏방울은 카인의 절규였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나아가는 자, 카인 에셀레드.

지금의 카인과 저 처절한 주먹을 느낀다면 그리고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어 본 적 있는 남자라면 가슴 뜨거워질 싸움이었다.

티이잉-!

카인의 주먹에 아벨의 세검이 부러졌다.

콰르르르릉-!

저 멀리 바다를 때리는 번개.

함께 대기를 찢어발기는 천둥.

카인과 아벨.

아니, 두 형제는.

지금이 싸움의 끝이라는 걸 직감했다.

"으아아아-!"

아벨은 울부짖었다.

몰려오는 패배의 직감.

필립에게 반드시 약을 받아서 하얗게 마르는 어머니를 살려야 하기에.

자신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듯 날아오는 카인의 주먹을 향해 부러진 세검을 내질렀다.

즈즈즛-.

세검이 카인의 어깨를 파고든다.

여린 살갗.

튀는 피.

걸리는 뼈.

그 모든 것이 아벨의 손에 생생히 느껴졌다.

그 낯선 감각에 아벨은 얼어붙었다.

하하호호 끝나는 대련이라면 몰라도 서로의 삶이 걸린 전투에선 실수였다.

"아직인데?"

야수는 상처를 입었다고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카인은 최악의 마수였다.

보랏빛 눈이 아벨의 코앞에서 타오르며 아직 어린 용사를 비웃었다.

"끝이 나야 끝이지."

파앙-!

빗줄기를 가르며 카인의 주먹이 그의 턱을 향해 치솟았다.

휭.

아벨의 전투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주먹을 피해 냈다.

카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역시, 미친 재능.'

저런 녀석에게 성검까지 주어졌으니 마왕의 목을 베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아직... 어리다!'

하늘로 치솟은 카인의 주먹.

예상이라도 한 듯 칼날처럼 쫙 펴졌고, 반대 손으론 그대로 굳어 버린 아벨의 멱살을 잡아챘다.

시이잇-.

그의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떨어진다!

아무리 아벨이 천재라도, 이 거리를 피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누군가 끼어드는 건 가능했다.

퍼어어어억.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

카인의 손날을 잡은 건 굳은살이 가득한 필립의 손이었다.

그는 특유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의 승부는 이미 났습니다, 카인 도련님."

오늘은 패배할지라도.

아벨의 재능은 진짜니 더는 소모시키지 않고 다음을 노리겠다는 의도가 물씬 풍겼다.

"아니."

카인은 아벨의 멱살을 한 번 더 잡아끌며 말했다.

"이제 이 대 영이다."

끝까지 끝을 내지 않겠다는 카인의 단단한 의지.

필립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손이 얼얼하다.

게다가 카인의 머리가 생각보다 잘 돌아가고.

배짱이 두둑하다.

카인에 대한 평가를 상향하며 입을 열었다.

"더 싸우면 자칫 한 쪽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 혹시 이 기회에 아벨을 죽이려고 하시는 건지요?"

카인은 추잡한 술수를 거는 그를 향해 짧게 대답했다.

"지랄."

이렇게까지 받아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로스 후작의 사냥개 주제 감히 에셀레드의 이름을 입에 담아?"

후작을 대리해서 백작령에 온 그를 사냥개라 낮잡아 부르는 순간, 필립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 말씀이 지나치십-."

"지나치긴. 아벨이 엔 자우어를 쓰더라. 혹시라도 아벨이 가문을 이으려고 해도 에셀레드의 검술을 못 익히게 하려고 한 거잖아."

물론 아벨 정도의 재능이 있고, 지금 수준이라면 에셀레드의 검을 익힐 순 있을 것이다.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웅성웅성.

에셀레드의 기사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벨의 검 끝이 예사롭지 않은 건 모두 알아봤지만, 설마 그게 말로만 듣던 대륙의 엔 자우어인지는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의 서쪽 너머 섬나라, 아이리안 왕국.

아이리안에서도 한참 구석에 박힌 에셀레드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필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선의였습니다."

"선의는 개뿔. 구린 냄새 풀풀 풍기는 니들의 이익이겠지."

카인이 이렇게까지 대차게 나오자 필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반응만을 바라보는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부하들.

여기서 밀리면 지금껏 작업해 둔 것들이 무너지리라.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곤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 에셀레드까지 오는 길이 지루해서 아무거나 한두 수 알려 준 겁니다."

"그뿐일까?"

카인은 반쯤 기절한 아벨을 한쪽 팔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녀석이 내게 결투를 신청하게 만든 것도 너잖아."

이전의 카인이라면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카인은 옳지 않은 걸 틀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칼을 뽑았으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는 최전선의 전사가 카인이었으니까.

"...!"

카인이 어디까지 가려는지 가늠되지 않는다.

필립의 머리가 순간 복잡해졌다.

그러나 순하게 눈만 끔뻑이는 에셀레드의 기사들을 둘러보다 피식 웃었다.

제법 따끔하게 찔러 왔지만, 결국 카인은 혼자.

"아까 말씀하셨죠, 제게 참모가 어울릴 거라고요.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기사인 줄 아십니까?"

시골 영지의 위태로운 후계자, 카인.

그가 막 나온다고 로스 후작가의 기사인 자신이 수그러들 이유는 없었다.

화아아아-!

순간, 필립의 예리한 살기가 카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어쭙잖은 평기사가 아니라 확실하게 엑스퍼트에 오른 기사가 발하는 살기였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어쩌실 겁니까."

노기사 밴더빌트는 바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탁.

그러나 클로이드 단장이 분노한 노기사의 어깨를 잡아 멈췄다.

야수처럼 뒤돌아보는 밴더빌트를 향해 그가 말했다.

"당신은 에셀레드의 기사가 아니십니다."

"그 잘난 에셀레드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가!"

"그건...."

클로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도 눈을 피했다.

"백작님이 돌아온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가?"

"...!"

카인의 노기사 밴더빌트가 클로이드의 연약한 마음을 찔렀다.

"당장이 없으면 미래도 없는 것을 왜 몰라!"

"백작님의 마지막 명령은 '대기하라'였습니다."

밴더빌트는 속이 끓는 듯 가슴을 쳤다.

에드먼드라는 걸출한 영웅이 있을 때야, 이들의 활약은 꽤나 대단했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자 이들은 우두머리를 잃은 소 떼에 불과했다.

개개인이 강하다지만, 움직이지 않으려는 자들은 무해하다.

필립은 그 모습을 턱짓했다.

"카인 도련님, 저게 당신의 현실입니다."

그의 살기가 한층 더 강해진다.

전신을 짓누르는 그의 기세에 카인의 발이 물러진 흙바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인은 꼿꼿이 허리를 폈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눈으로 필립을 마주했다.

필립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숙이십시오. 아니면 저들에게 도와달라 겁쟁이처럼 징징거리십시오. 그러면 저도 물러나지요."

다소 강압적인 방법이었으나, 어떻게든 필립은 카인의 위신을 깎아 내고자 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후계자.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자.

힘없이 말만 앞서는 어리석은 자.

씨익-.

필립은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 생각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차선은 되리라.

하지만 카인은 숙이거나 도와달라 말하지 않고.

"아벨."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아직도 멱살 잡혀 있던 아벨을 불렀다.

스윽-.

아벨은 조심스레 고갤 들었다.

"마녀의 저주에 약 따위는 없다. 성국의 도움을 받거나 마녀를 족치는 수밖에 없어."

순간 아벨의 눈이 커졌고.

아벨의 후견인으로서 나서던 필립의 동공이 떨렸다.

"필, 필립 경은 축성한 이슬을 마신다면 가능하다고-."

"마녀가 뒷집 개 이름도 아니고 고작 성수 원샷으로 잘도 풀리겠다."

아벨은 떨리는 눈으로 필립을 돌아봤다.

지금까지처럼 아벨을 속이기엔 너무 많은 눈이 있는 상황.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틈에 카인의 입이 열렸다.

"내 동생, 아벨 에셀레드."

"...!"

아벨은 놀랐다.

이복동생이며 그간 카인이 그를 인정하지 않아 이름 뒤에 가문을 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카인이 직접 부른 이상 아벨은 이제부터 '아벨 에셀레드'였다.

카인은 그를 향해 물었다.

"승패는?"

승리는 강한 자의 것.

그리고 패배는 용감한 자의 것.

아벨은 인정받은 에셀레드로서 대답했다.

"제 패배입니다."

[『멸망의 대적자 Ⅰ』을 성공하였습니다.]

#6 Ep.Ⅰ-1

열일곱의 봄 (4)

「승리와 패배가 뒤바뀌자 5%만큼 세상이 바뀌었다. 그렇게 내일이 5%만큼 달라졌다.

- 이름 없을 기록자」

[세계선 고정도 : ▲ 5% ]

[『사계』의 봉우리 하나가 피어납니다.]

['겨울'이 일어납니다.]

파지지지직-.

처음 '겨울'을 쥐었을 때처럼 척추를 타고 뇌전이 끓어 넘친다.

순백의 설원을 내달리는 벼락.

'겨울'의 주인에게 허락된 절대의 뇌전!

가까이 있는 필립이나 아벨 둘 다 카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쯧쯧."

필립은 아벨을 향해 혀를 찼다.

자신이 짜 둔 판을 패배를 인정하면서 엎어 버렸으니까.

"내가 분명 거짓말을 하긴 했지."

카인은 멱살을 풀었고, 아벨은 마주 섰다.

휙-.

아벨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필립은 당당하게 턱을 들며 말했다.

"어차피 마녀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살 수 없어. 네 어머니는 죽었다고 치고 냉정히 생각해 봐라."

아벨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르는 게 모양새였다.

"엘프의 숲에서 고통 받던 너희 모자에게 손을 내민 건 로스 후작님이다. 조금만 더 시키는 대로 하면 넌 평생 얻지 못했을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

"닥쳐-!"

아벨은 소리 질렀다.

그에겐 부도 권력도 필요 없었다.

자신을 낳고 키우기 위해 마녀의 저주를 감수하고 엘프들의 박대에서도 버텨 낸 어머니, 아르나만이 아벨의 모든 세상이니까.

설득이 실패했다.

필립은 고개를 젓곤 평상시 생각을 툭-하고 뱉었다.

"이래서 천한 피는...."

그 순간.

"로스의 여우 새끼가 감히."

카인은 당장이라도 씹어 버릴 듯 필립을 향해 욕설을 뱉었다.

필립은 눈을 크게 뜨며 카인 쪽으로 고갤 돌렸다.

화아아아아-.

동시에 지금껏 연무장을 짓누르던 필립의 기세가 밀려난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카인의 것.

"분수를 모르고 내 동생을 천하다 모욕하는구나."

카인의 보랏빛 눈에서 거칠 것 없는 뇌전이 번뜩였고 필립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쿠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린다.

아니, 카인의 신경과 근육의 모조리 불사르며 달리는 '겨울'의 포효였다!

필립과 카인.

둘이 일으킨 기세에 빗줄기조차 휘기 시작했다.

필립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러라고...!"

엑스퍼트 나이트.

인간의 한계선 너머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자격.

기사 하면 떠오르는 '전장의 도살자'는 엑스퍼트부터 시작이었다.

그런 엑스퍼트는 오러를 피울 수 있냐 없냐로 구분되는데....

지금.

카인의 전신에서 순백의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다. 카인 역시 엑스퍼트 나이트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상상도 못 했던 일에 필립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카인의 전신에서 불꽃처럼 피어난 오러는 그대로였다.

"안 됩니다, 카인 도련님!"

클로이드 단장은 외쳤다.

카인이 오러를 각성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늘 카인이 달라진 이유도, 다른 행동을 하던 것도 이제야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갓 각성한 초보.

진즉 엑스퍼트에 올라 숙련된 필립은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참으셔야 합니다!"

카인은 클로이드를 손가락으로 한 번 가리켰다. 그 후 목을 써는 수신호를 하며 말했다.

"다음은 없다고 했어."

"필립은 공자님께서 이길 수 없는 대상입니다!"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움직여야지. 안 그런가, 그중 한 사람?"

"그, 그건...."

클로이드는 차마 더 입을 열 수 없었다.

카인의 번뜩이는 보랏빛 시선이 에셀레드의 기사들을 한 번씩 훑는다.

그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그리고 생각해라, 에셀레드의 기사들이여. 기사가 언제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했지?"

"...!"

"언제부터 싸울 자리를 고르기 시작한 거냐?"

묘한 울림이 퍼져 나갔다.

에드먼드가 사라진 후 시골 중의 시골인 에셀레드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던 기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그들이 하나둘 움직이려 할 때, 카인은 말을 이었다.

"괜히 감동했다며 고개 들지 마. 이제야 그러면 이 여우 새끼랑 함께 너희들도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공자님!"

클로이드 단장은 험한 카인의 말에 놀라서 말했다.

"클로이드. 지금이 그다음이야. 당신도 죄인이니까 닥치고 있어."

필립은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일단은 관망하다 카인의 속내를 알 것 같아 한마디를 보탰다.

"무능이라는 죄입니까?"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해 하는 에셀레드의 기사들과 달리.

"적이 더 잘 아네, 더 잘 알아."

필립이 먼저 눈치를 챘으니까.

카인과의 거리는 일곱 걸음.

그는 스윽 다리를 벌렸다.

거리를 재며 몸의 중심을 낮추고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그 에드먼드의 아들이 너무 무르다 했는데, 역시... 제법 날카로운 이빨도 숨기고 계셨군요."

필립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클로이드 단장처럼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누구나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법이니까. 내 칼은 좀 큰 거고."

과거의 자신은 필립의 말대로 물렀었다.

상황이 계속 안 좋게 흘러갔지만,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에셀레드의 기사들이라면 가장 중요할 때 나서줄 거라 기대했다.

아니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닳고 닳은 카인은 분명히 안다.

'내겐 밴더빌트뿐.'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정의보단 안온한 현재를 택했다.

철저하게 버려졌던 카인은 이젠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움직였다.

"후후,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스릉-.

필립은 그의 세검을 뽑았다.

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그를 감싸던 주홍색의 오러가 조금씩 검으로 움직였다.

"상황이 이렇게 꼬인 거 원래의 목표는 달성해야겠습니다."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물러서라, 아벨."

둘의 가운데에 자리한 아벨은 이제 방해였다.

카인은 귀찮다는 듯 클로이드에게 아벨을 데려가라 수신호를 보냈다.

"공자님!"

클로이드는 재차 카인을 만류했다.

하지만 카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저 뒤에 있는 유일한 자신의 기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늙어 버린 기사.

전성기는 진작 지나 죽음만을 앞둔 그였지만, 늙은 만큼 오래 타오르는 불꽃을 가슴에 품은 기사!

"나이트 밴더빌트!"

카인이 부른 순간.

수십 년간 가슴속에 타오르던 그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예스, 마이 로드!"

"칼."

후두두둑-.

빗줄기가 굵어진다.

노기사는 흔들림 없이 비를 뚫고 2m에 달하는 대검을 뽑아선 양손으로 받쳐 들고 카인에게 다가갔다.

쿵.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모든 충성을 다 받치는 대상을 향한 제물.

"들기나 하시겠습니까."

필립은 그런 그들을 비웃었다.

늙었다지만 밴더빌트의 체구는 에셀레드의 사람 중 가장 우람했다.

카인 역시 세검술을 주로 익힌 만큼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어이, 여우 새끼."

'겨울'이 일어난다.

뇌전이 시시각각 카인의 몸을 불태우고 재생시킨다.

어떻게 보면 끔찍한 고문이지만, <사계절의 신기>의 주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시련.

카인은 고통 속에서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잘난 혀 잘리기 싫으면 이 악물어."

카인은 한 손으로 노기사의 대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콰강-!

뇌전은 뇌전으로.

그 순간 번개가 대검을 내리쳤다.

크고 무겁지만 균형이 좋아서 낭비되는 힘이 없다. 그런 밴더빌트의 대검이 손에 착- 하고 감겼다.

'노기사와 평생을 함께한 검.'

누군가의 온 생애가 담겨 있다는 것만큼 빛나는 건 없는 법이니까.

꽈아아악-.

그리고 카인은 두 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더는 잃지 않겠다.'

잃고 빼앗기고 후회했던 카인은 이젠 없다.

무수한 후회를 짊어진 한 명의 전사가 대검을 들었다.

쿠르르릉-.

한층 더 요란해진 바다의 날씨.

바닷가 절벽에 만들어진 연무장이 그런 날씨에 직면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천둥번개가 귀청을 때리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필립과 카인의 싸움에 방해될까 봐 아벨이 클로이드를 물리고 스스로 물러섰을 뿐.

쿠쿵-!

번개가 내리꽂힌다.

필립의 이마를 타고 쉴 새 없이 빗방울이 흘렀다.

내심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흐르는 것 중 몇은 차게 식은 땀.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카인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괴물.

카인을 마주하고서야 아벨이 분전을 치렀다는 걸 느꼈다.

카인의 등 뒤, 무한히 펼쳐진 바다.

지금 필립은 시골 영지의 어린 후계자가 아니라 무궁한 바다를 향해 칼을 들이미는 기분이었다.

휘오오오오-!

폭풍우에 바닷바람이 좀 더 매서워졌다.

그럼에도 둘은 꼼짝하지 않았다.

마주하는 둘 사이에 일어나는 치열한 공방을 아는 기사들은 각자의 주먹을 꽉 쥐었다.

"주둥이 놀리던 필립 경은 어디 갔나?"

먼저 대치를 깬 건 카인이었다.

스윽-.

가볍게 한 발을 내밀었다.

다닥-.

반면 필립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하며 물러섰다.

기세 싸움의 승자가 누군지 명명백백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필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열일곱밖에 안 먹은 카인이 자신을 이렇게 압박할지는 방금까지도 예상치 못했다.

"도발이 훌륭합니다."

"그래? 근데 필립 경은 이런 단순한 거에 넘어오는 등신은 아니지?"

카인은 그를 계속해서 비아냥거렸다.

군기가 바짝 들어 나서지 않던 <로스 데 캐롯>의 다른 기사들이 더 열 받을 정도로.

"부단장님, 시골쥐 놈한테 엑스퍼트가 뭔지 가르쳐 주십쇼!"

카인을 향한 모욕.

"세상 높은 줄 모르는 꼬맹이에게 쓴맛 한 번 보여 주십쇼!"

에셀레드 전체를 깔보는 그들의 태도.

동시에 카인은 입맛이 썼다.

'기사들의 정신 수준은 확실히 로스 후작가가 낫다.'

저들도 기사인 만큼 자신들이 뱉는 말이 지독히 무례하고 용납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필립의 승리를 만들고 후작가의 이득을 위해 그런 선 따위는 가볍게 넘는다.

자중만 할 줄 아는 에셀레드와는 급이 달랐다.

결국 에드먼드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강했어.'

왕국 최강의 검호.

대륙으로 넘어가도 열 손가락 안에는 꼽힐 최고의 기사.

에셀레드 기사단은 에드먼드라는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칼을 빼 본 적 없는 자들에게 명령하던 에드먼드가 사라졌으니 이런 물렁한 모습이 오히려 어울리리라.

그리고 지금.

그런 에셀레드에 카인이 돌아왔다.

"뚫린 입이라고 건방지네?"

사위가 고요해진다.

피와 파도 그리고 천둥만이 소리를 낼 때 카인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에셀레드의 땅에서 그따위로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머리가 붙어 있길 바라지 마라."

차디찬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 순간 모두는 카인의 적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가깝게는 아벨이고 필립이라지만, 멀게는 <로스 데 캐롯>의 모두이자 눈을 감은 에셀레드의 모두.

이 연무장에 카인의 편은 딱 한 명, 노기사 밴더빌트뿐이었다.

"적지로 홀로 쳐들어오셨군요."

필립은 카인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상향했다.

적들만 있는 곳으로 스스로 걸어온 소년의 심경은 그라도 쉬이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대가 마중까지 해 줬으니 와야지."

"...!"

필립은 카인이 처음 말했던 마중 보냈던 기사들이 이제야 떠올랐다.

다만 이번 작전지가 에셀레드 영지인 만큼 에셀레드 출신의 평기사 셋을 기용했었다.

본래라면 절대 뽑지 않을 하잘것없는 쓰레기들.

이러나저러나 명령을 맡겼으니 딱 그만큼의 신경만 쓰였다.

그런데 같이 오지 않았다.

늦게라도 와야 하거늘, 지금까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필립은 섬뜩한 직감이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인이 오러를 쓸 수 있다는 건....

"글쎄. 좋은 곳으로 먼저 가더라고."

"...설마?"

필립은 알 것 같았다.

콰가가가강-!

백색의 번개불빛 속에서 카인은 살기가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줬다.

"우리 필립 경도 곧 갈 곳이고."

#7 Ep.Ⅰ-1

열일곱의 봄 (5)

기사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카인의 말뜻을 못 알아먹을 자는 없었다.

물론, 에셀레드 쪽은 이해가 좀 느리긴 했다.

클로이드 단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밴더빌트에게 물었다.

"제이든은 죽었...나?"

"그가 공자님께 오는 걸 알고 계셨군요, 클로이드 단장."

밴더빌트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둘 간의 관계가 본래부터 데면데면했지만, 카인이 자신의 노선을 분명히 했으니 그는 밴더빌트의 적일 터.

클로이드는 제이든이 마중하러 간다고 들었을 때 했던 생각을 급하게 말했다.

"나름 우리의 기사였으니 공자님을 모시기엔 충분 할...."

"밴더빌트!"

카인은 신경질적으로 노기사를 불렀다.

밴더빌트는 가슴에 손을 얹고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곧장 외쳤다.

"예!"

"클로이드 좀 닥치게 만들어. 들을수록 성질만 나니까."

"알겠습니다."

스윽-.

밴더빌트는 바위만 한 두 주먹을 들었다.

"클로이드 단장."

대검은 카인의 손에 있으니 그의 무기는 주먹뿐이지만, 카인의 말대로 그를 닥치게 하긴 충분했다.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더 꺼내면 제 주먹이 당신의 입에 들어갈 겁니다."

밴더빌트의 고요한 협박.

그가 두 주먹을 들고 자신만을 경계하는 걸 보니 클로이드는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네가 죽였나?"

필립의 살기가 예리해진다.

지금까지 상대를 압박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젠 정말 죽이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그 쓰레기들이 걱정돼서?"

"그들이 아무리 못났더라도 내 기사니까."

카인은 내심 혀를 찼다.

<로스 데 캐롯>이 적이고 필립이 이런 상황을 만든 나쁜 놈이긴 하지만, 능력적으론 확실히 괜찮았다.

에셀레드의 한심한 기사들과 비교하니 더더욱 크게 느껴졌고.

"그래, 내가 죽였다."

필립은 카인의 대답과 동시에 왼팔을 들고, 세검을 쥔 오른팔은 화살을 쏘듯 뒤로 뺐다.

우우-.

주홍색의 오러가 수평으로 세워진 세검에서 타오른다.

상대의 목숨을 반드시 끊는다는 '엔 자우어'의 제대로 된 기수식이었다.

"오러를 각성했으니 기습으로 그들 셋을 죽이는 건 별문제 없겠지."

카인은 그의 말을 굳이 정정해 주진 않았다.

그저 어깨너비로 발을 벌리고 허리를 조금 숙인 후 대검을 가슴께까지 들 뿐.

저-벅, 저벅.

질척이는 흙바닥으로 새겨지는 발자국.

동시에 둘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벨과 펼치던 공방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고, 공자님 이기십시오!"

아벨은 저 멀리서 주먹을 꽉 쥐며 카인을 응원했다.

필립은 아벨이 그런 말을 한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는 그의 꼭두각시로 쓸 수 없다는 신호였으니까.

"그냥 형님이라 불러."

그리고 카인은 시원하게 그를 인정해 줬다.

"...형님!"

아벨과는 이제 계속 같이 가야 할 대상이기도 했으며, 앞으로 그가 해 줘야 할 일이 많기도 했고.

'빚을 갚아야지.'

자신을 회귀시킨 게 아벨이다.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빚이었다.

후우우-.

카인은 상념과 함께 숨을 뱉어 냈다.

하얀 입김이 겨울의 찬 빗방울을 파고든다.

마검 '겨울'은 없지만, '겨울의 힘'은 있다.

밴더빌트의 대검을 좀 더 꽉 쥐며 카인은 속으로 기적을 불렀다.

'일어나라, 겨울이여.'

마검이 마검이라 불리는 이유.

성검처럼 기적을 이뤄 주지만, 성검과 달리 대가를 받아 가기 때문이다.

['겨울'의 끝엔 종말뿐입니다.]

[그럼에도 '겨울'을 걸으시겠습니까?]

'전처럼 적을 부술 힘을 다오.'

[『사계』가 당신의 선택을 만류합니다.]

'그 끝이 어떻더라도 지금이 없으면 다음도 없어. 그러니 지금을 살아갈 힘을 다오!'

그것이 어른의 방식.

소년 카인이 아니라 어른 카인이 선택하는 자신의 삶!

[미래가 소모됩니다.]

희생만이 '겨울'의 힘을 제대로 쓰는 열쇠였다.

파지지지직-!

전신에서 하얀 불꽃 정도가 아니라, 순백의 뇌전이 튀기 시작했다.

콰릉-.

카인의 뇌전에 이끌린 듯, 저 먼 바다로 거대한 번개가 내리쳤고 모두의 시야를 명멸시켰다.

탓!

그 빛이 번뜩이는 그 짧은 틈.

카인은 내달렸다.

필립도 반응했다.

"로스를 위하여-!"

만만치 않은 카인의 기세를 헤치며 그 역시 달려들었다.

허공에 그어지는 주홍의 직선.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대검.

끼기기기긱-!

목숨과 목숨이 맞부딪치는 전장에서나 어울릴 공격이 교차하면서 불꽃이 튀었다!

카인은 팔과 손목을 비틀며 대검을 옆으로 넓게 뉘었다.

대검의 표면에는 백색의 오러가 은은히 서려 있었고, 필립의 세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그 위를 미끄러진다.

콰가가가-.

대기가 떨린다.

둘의 오러가 반발하는 순간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빗방울이 사방으로 튕겼다.

숨 돌릴 새 없었다.

평기사들은 넋 놓고 엄청난 전투를 바라봤고, 엑스퍼트에 오른 진짜 기사들은 경이로움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필립의 실력은 알았지만.

카인이 이토록 강했던가.

단순히 오러라는 힘을 얻은 정도가 아니라 수천의 사선을 넘어선 자만이 지닐 경험이 언뜻언뜻 보였다.

까앙-!

그러나 생각할 틈은 없었다.

둘의 대결은 더욱 뜨거워졌다.

카인은 그대로 대검을 들어 휘둘렀다.

필립은 거리상으로 유리한 대검을 막기 위해 왼손으로 허리춤의 소검을 꺼내 쥐었다.

채앵.

소검과 세검.

두 개의 검을 교차하며 대검을 쳐 냈다.

필립은 눈을 빛냈다.

대검은 일격, 일격이 강력하지만, 실패하면 자세가 무너지고 빈틈이 바로 생긴다.

방금 자신의 반격으로 분명 생길 카인의 빈틈을...!

쿵!

카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피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갔다.

"어떻게!"

필립은 경악했다.

칼의 공포가 몰아치니 당연히 물러서야 했고 그 틈에 반격하고자 했지만.

카인은 우직하게 다가왔으니까.

동시에 튕겨 나가던 대검이 우뚝 섰다.

'비등하다.'

카인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기적.'

기적은 기적이다.

하지만, 엑스퍼트급 부단장과 오러를 각성한 나름 재능 있는 후계자가 보일 법한 적당한 전투였다.

카인은 이런 걸 바라지 않았다.

그의 심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친 뇌전들 역시 이딴 밋밋한 전투는 바라지 않았다.

승리할지라도.

패배할지라도.

전신을 불태우고 가슴을 터트릴 것 같은 그런 힘이 필요했다-!

카인은 어금니가 부서지라 이를 악물었다.

더 큰 기적을 바랬다.

'더-!'

평범하고 무미건조하게.

그렇게 길게 길게 숨만 쉬는 삶은 싫었다.

이미 카인은 칼날 위를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가슴을 지닌 자였으며, 스스로를 불태워서라도 목표를 이루고 싶은 사람이었다.

[미래가 소모됩니다.]

파지지직-.

순백의 뇌전이 한층 더 밝아졌다.

아직 어린 카인의 뼈가 삐걱대고, 근육이 타오른다.

신경 사이로 튀어 오르는 뇌전이 뇌를 긁어낸다.

사라지는 '미래'만큼 닥쳐올 고난과 운명이 다시금 선명히 그려지지만.

카인의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두 번의 사는 삶을 위해.

필립이라는 작은 악당을 상대하는 것조차 이렇게 지지부진한 꼴은 볼 수 없기에.

압도적으로 나아갈 큰 기적을 바라기에!

'나는 그래도 내일이 보고 싶다, 겨울이여.'

[미래가 더욱 소모됩니다.]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내리던 빗방울이 허공에 멈춰 버린다.

그 속.

파짓-.

보랏빛 눈에서 순백의 뇌전이 튀었고.

파지지지지지지지직-!

카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뇌전은 그를 찬란케 했다.

천천히 변해 가는 필립의 표정.

파도처럼 퍼져 나가는 경악의 얼굴들.

그딴 건 카인은 바라지 않았다.

오직 하나.

'이 정도가 되어야만 쓸 수 있는 나의 검!'

최전선의 역사는 길었고.

'겨울'의 시간은 더더욱 길었다.

마검의 주인들은 생을 불태우면서도 힘을 간절히 바랐다.

손에서 손으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목숨에서 목숨으로.

-신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해!

후대의 누군가는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살지 않기를!

그들의 소망은 빛이었다.

그리고 별조차 숨어 버린 밤을 가르는 검이 되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모든 뇌전이 한순간에 밴더빌트의 대검으로 집속한다.

누군가는 절망을, 누군가는 비명을 그리고 이전의 카인은 후회를 담았던 검.

지금의 카인은 희망을 실었다.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뇌전의 검기, 키리에.

초승달처럼 카인의 검에서 쏘아지며 끝없이 내리든 빗방울과,

필립을 갈랐다.

그리고.

과거의 카인과 지금의 카인 역시 갈라 버렸다.

콰카카카카카-!

허공에 뇌전의 상흔이 그어진다.

선명히 세상을 찢은 초승달의 검기는 저 먼 바다까지 한참을 내달리다 흩어졌다.

솨아아아-.

충격과 경악 그리고 공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순간을 메우는 건 빗소리였고.

툭, 투툭-.

두 번째는 반으로 갈라진 연무장 흙바닥으로 쓰러지는 필립의 시체'들' 소리였다.

방금까지 살아 있던 기사는 어깻죽지부터 허리까지 한 번에 잘려 죽었다.

카인은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일 대 영."

"...!"

압도적인 폭력!

이제 오러를 갓 각성한 백작가의 후계자가 숙련된 엑스퍼트 나이트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다다다다-.

반사적으로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은 몰려나와 방진을 이루며 필립의 시체를 감쌌다.

"부, 부단장님...."

생사를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명쾌히 죽어 있는 필립 로스 프랜시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부릅떠진 그의 눈을 감겨 주는 것뿐이었다.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은근히 낮잡아 보던 카인의 이런 모습에 혼란스러워졌다.

오직 밴더빌트만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척-.

대검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주황색 띠를 맨 기사 하나가 절규했다.

"너무하십니다!"

"뭐가?"

"고작 대련에서 이렇게까지-."

"고작? 대련?"

카인은 코웃음을 쳤다.

대검을 쓰윽 휘두르며 이 자리에 서 있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내게 사형장이었다. 백작가를 통으로 처먹으려고 이복동생까지 데리고 오는 너희 새끼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에셀레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클로이드조차 카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신이 빠져서 지켜보자, 기회가 올 것이다, 백작님이 오면 다 달라질 거란 말만 하는 한심한 우리 새끼들까지. 모두 나의 사형집행인이 아니었나?"

"...."

그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누구나 알던 사실이었으니까.

말로만 하지 않았을 뿐 오늘이 에셀레드의 후계자, 카인의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그러기에 카인이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고, 방조하고 누구도 손 하나 뻗은 적 없었다.

있다면, 오직 밴더빌트뿐.

카인에게 대들던 <로스 데 캐롯>의 기사가 다시금 소리쳤다.

"후작님께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카인은 끄덕였다.

"그렇겠지."

너무 태연한 대답에 오히려 그가 당황할 정도였다.

"근데 후작이 어떻게 알고?"

동시에 지어지는 죽음의 미소.

순간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은 몸을 떨었다.

살벌한 북방의 한기가 그들의 척추에 쑤셔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클로이드."

"...예, 공자님."

대답에 힘이 없다.

클로이드 단장은 한순간에 십 년은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그가 살아온 삶이 통렬하게 질책당하자 지독하게 씁쓸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셀레드의 바다는 험하다. 게다가 폭풍우까지 불고 있지. 절벽의 연무장에서 수련하던 <로스 데 캐롯>의 기사들이 정말 안타깝게도-"

"설마?"

"모두 실족사했다."

"공자님!"

클로이드는 놀라 소리쳤다.

카인의 마음이 너무도 독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카인은 눈빛 하나 바꾸지 않고 스멀스멀 칼을 쥐기 시작하는 <로스 데 캐롯>을 가리켰다.

"카인 에셀레드가 명령한다. 죽여."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스스로를 입증한 카인의 말에 멍하니 무기를 쥐기 시작했다.

클로이드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다! 이러면 전면전이란 말입니다!"

"왜?"

"...예?"

"사람을 죽여서 입을 없애 버리면 된다."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카인은 칼을 들어 클로이드의 말을 잘라 버렸다.

수직으로 든 양쪽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그런 칼이었다.

콰강-!

순간 번개가 카인의 대검으로 때렸고, 뇌전이 카인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방금 전 필립을 죽였던 그 모습이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

"죽여."

클로이드는 움찔했다.

냉정하게 타오르는 모습이 다시 봐도 에드먼드와 똑 닮아 보였다.

클로이드 단장만 느낀 게 아닌 듯 카인의 말과 동시에 에셀레드의 기사들이 머리를 잃은 로스의 기사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위한 제물은 붉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니까.

카인 에셀레드, 열일곱 살.

지금은 그의 봄이 오기 전 마지막 겨울이었다.

Episode.Ⅰ

봄의 찬미

#8

Chapter. 2 봄이여 오라 (1)

「최초의 용사님이라.

그래.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지.

어떤 게 진짜인지 모를 정도로.

숨기는 것보다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진실을 가리기 좋았거든.

나를 찾았으니 한 가진 알려 주마.

초대 용사는 우리들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신기에 대해 아홉 글자밖에 전할 수 없었지.

뭐냐고?

패시브, 액티브, 필살기.

- 어느 현자의 고백」

쿵-.

기사들의 발걸음이 동일하다.

군기가 바싹 든 모습이 처음 기사단에 들어온 신입 같아 보일 정도였다.

혹은 같은 죄를 저지른 공범자일 수도 있었고.

쿠웅-.

비에 젖은 바닥도.

쿵.

피에 절은 그들의 신발도.

그 무엇도 그들의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그들의 가장 앞 에셀레드의 후계자, 카인이 멈추지 않았으니까.

"클로이드."

카인의 부름에 기사단장 클로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예."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카인은 걸음을 멈췄고, 우두머리를 쫓아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양 떼 같던 에셀레드 기사단도 멈췄다.

그러곤 뒤를 돌아본다.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한 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기사들 중에는 실력 대 실력으로 붙으면 어떻게 될지 모를 강자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카인이 은연중에 보이는 압박감과 끔찍할 정도로 어둡고 날카로운 살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당신을 포함해서 이들이 모두 에셀레드의 기사라곤 할 수 없어."

"저희는 에드먼드 백작님에게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기사 중 하나가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카인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너희는 에드먼드 백작의 기사다. 에셀레드 백작가의 기사가 아니고."

"어차피 똑같은 거 아닙니까. 백작님께서 돌아만 오시면...."

카인의 보랏빛 눈이 순간 살기로 번쩍였다.

입을 열던 기사는 본능적으로 움츠렸다.

"그렇게 늘 과거에 살고 싶다면 다시 입 열어. 영원히 과거에 묻히게 해 줄 테니까."

압도.

한마디, 두 마디.

말이 이어질수록 카인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더더욱 강렬해졌으며,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 중 반드시 배신자가 나올 거다. 분명 '실족사'한 <로스 데 캐롯>이 우리에게 죽었다고 후작가에 말할 쥐새끼가 말이야."

"그럴 리-."

"있지?"

반발하려던 클로이드는 말을 자르고 치고 들어오는 카인의 말에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날 뿐이었다.

"나는!"

카인은 목소리를 순간 드높였다.

"너희를 믿지 않는다!"

"...."

"그리고 너희도 나를 믿지 않는다!"

카인은 에셀레드 기사단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힘으로는 제법 강해 보이는 자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카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자는 없었다.

있다면 단장이었던 클로이드뿐.

그러나 클로이드조차 무능하기에 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공범이다."

솨아아아아아-.

저녁으로 날이 향하지만, 빗줄기는 여전히 매서웠다.

길 한가운데 멈춘 카인의 얼굴을 타고 빗물이 흐른다.

같은 것이 에셀레드의 기사들에게도 흘렀다.

"아버지는 두 후작의 혓바닥에 던전에 들어가선 소식이 없다. 그러곤 로스와 맥로든 후작은 곧바로 차기 왕권을 제 입맛에 맞게 하려고 다섯 백작가를 정리 중이고."

시골 영지, 에셀레드에선 대부분이 알지 못하던 아이리안 왕국의 전체적인 상황.

미래에서 돌아온 카인은 힘은 좋지만 어리바리한 에셀레드의 기사들에게 현실을 꼬집었다.

"문제는 현 왕실엔 왕녀 둘뿐이란 거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다."

"...!"

"너희들이 후작들의 편을 들든, 왕녀의 편을 들든 관심 없다. 다만 한 가지."

콰릉-!

저 멀리 백작가의 성을 향해 내리치는 거대한 백색 번개가 세상을 다시 한번 밝혔다.

그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보랏빛 눈은 담담히 선언했다.

"내 적이 되지 마라. 대가리에 내 칼이 박히고 싶다면 되든가."

카인은 몸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정신이 유약한 에셀레드의 기사들에게 큰 기대는 없다.

그저.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듯, 너희에게도 한 번은 주마. 한 번은.'

그래도 왕국 최강의 검호 에드먼드를 따르던 자들이니, 그 뿌리까진 썩지 않았으리라.

"예스, 마이 로드."

진흙탕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충성을 외치는 건 역시 노기사 밴더빌트였으며.

쿵.

그다음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움직이는 아벨이었고.

쿵. 쿠웅-, 쿵!

하루아침에 달라진 에셀레드의 후계자를 맞이하는 기사들이었다.

단 한 명.

클로이드만이 우두커니 서서 성으로 돌아가는 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끼고 어두운 현재.

쿵.

"백작님. 이제야 겨울이 물러나는 모양입니다."

그 역시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다.

* * *

카인이 돌아온 이후.

백작가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카인을 바라보던 기사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카인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 생각하던 아벨은 그를 향해 엎드렸다.

당연히 로스 후작가의 입김이 닿은 시종들과 관리들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위상이 달라진 카인의 보랏빛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카인이 달라진 이후 장갑을 끼거나 절뚝이는 자들이 늘어난 이유를 아는 자는 없었다.

본인들을 제외하곤.

그렇게 며칠 후.

덜컹-.

집무실의 문은 상당히 크고 무거웠다.

그런 만큼 열리면 꽤 소리가 났고, 문 앞에 있는 건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벨과 창백한 얼굴의 아르나였다.

"형... 님."

아벨은 조심스레 집무실 안에 앉아 있는 카인을 불렀다.

"그래, 들어와라. 작은어머님도 들어오시죠."

아벨의 친모, 아르나.

그녀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카인이 정말 이복동생인 아벨을 진심으로 거뒀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귀족가의 장자인 카인이 자신까지 '작은어머니'로 받아들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집무실 안의 작은 테이블.

그 옆에는 레이피어 한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카인은 미리 준비된 찻주전자를 기울이며 둘의 앞에 차를 따랐다.

맑은 향이 확 퍼지며 코 안까지 들어왔다.

"요아힘 허브를 우린 차입니다. 독주만큼이나 고통을 줄여 드릴 겁니다."

"...!"

"시종장이 먼 곳에서 구해 온 거니 부담 없이 드시죠, 작은어머님."

아벨은 존경하는 눈빛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준비한 '형'이 좋았다.

진짜 형이 생긴 기분이었다.

"요아힘 허브라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아르나는 조심스레 찻잔을 쥐며 카인과 눈을 마주쳤다.

레몬 빛에 가까운 밝은 금발.

분명 아벨과 같은 갈색의 눈동자지만 빛이 비치면 언뜻언뜻 나뭇잎처럼 초록빛이 보인다.

티 하나 없이 맑은 백색의 피부와 부드러운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이목구비가 그녀를 요정처럼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러나 홀쭉한 볼과 퀭한 눈두덩은 아르나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마녀의 저주'가 여전하다는 것도 보였다.

"시종장이 자신의 사비로 '꼭' 구매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후릅-.

카인은 허브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벨은 조금이라도 카인을 더 따라 하고 싶은 듯 급하게 마셨다.

반면 아르나는 찻잔은 들었지만, 입술에 대진 않았다.

짙은 향을 맡았다가 눈을 들어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시종장을 안다.

얄쌍하게 삐쩍 곯아서는 매번 기분 나쁜 눈초리로 자신을 훑어보던 자.

에드먼드 백작이 자리에 없다면 조용히 다닐 법도 한데, 마치 사자의 위에 탄 것처럼 가슴을 내밀던 놈.

그 욕심쟁이가 사비로 허브를 사들였다니 쉬이 믿기지 않았다.

"독 안 들었습니다."

카인은 멈칫한 아르나를 향해 말했고, 그녀는 날카로웠던 눈초리를 흐려 버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시종장의 '선의'가 이상하셔서 그렇습니까?"

카인은 오른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묻기를 바랐던 것만 같았다.

아르나는 몸만 컸지 아직은 애 같은 아벨을 슬쩍 보곤 대답했다.

"예."

"손가락을 하나 잘랐습니다. 비명을 지르더군요. 다음 걸 잘랐습니다. 그러자 후작에게 받은 뒷돈을 말했지요."

"그 시종장이라면 그럴 만합니다."

아르나는 너무도 태연히 대꾸했고.

"그리고 이야기했죠. 뒷돈을 토하고 죽을 건지 아니면 그 돈으로 허브를 구해 올 건지. 살려 준다는 말도 안 했는데 후자를 고르더군요."

후릅-.

카인은 다시금 태평하게 차를 마셨다.

"설마 요즘 장갑을 낀 사람들이 늘어난 이유가... 딸꾹."

반면 아벨은 둘의 살벌한 대화에 본인도 모르게 멈춰 서 딸꾹질을 했다.

"그런 거라면 기쁘게 마시겠습니다."

아르나는 그제야 차를 마셨다.

비싼 값어치를 하는지 그녀의 뼛속에서부터 울리던 고통이 조금은 둔화되는 기분이었다.

"작은어머님."

카인은 반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곤 아르나를 불렀다.

신경을 마구 긁어 대던 저주의 고통이 사라져 조금 노곤해진 아르나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예, 공자-."

쉐에에에에엣-!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카인은 레이피어를 잡고는 그대로 아르나의 머리를 꿰뚫어 버릴 듯 내찔렀다.

살기도 없었고.

전조도 없었다.

그러나 아벨은 천재답게 곧장 반응했다.

단숨에 찻잔을 던지곤 앞에 놓여 있던 포크를 쥐어선 본능적으로 아르나를 지키기 위해 내뻗었다.

채앵-!

은 포크와 카인의 레이피어가 부딪치며 순간 불꽃이 튀었다.

검이 멈추자 아벨의 표정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배반이라도 당한 듯 습기 어린 눈을 크게 뜨며 카인을 바라보았다.

"왜!"

까딱-.

"보거라."

아까와 전혀 다름없는 카인의 어조에 아벨은 묘하게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의 턱짓에 따라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쭉 뻗은 은빛의 레이피어를 훑어보는 순간 아벨의 본능이 공격을 읽어 냈다.

카인이 완전히 아르나를 꿰뚫으려고 하진 않았다는 걸.

그리고.

후릅.

무언가 이상했다.

코앞에 닿은 레이피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

레이피어에 머리를 관통당할 뻔했던 자신의 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태연하게 남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님."

아르나는 빈 찻잔을 내려 두며 아까 끊겼던 말을 지속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벨의 포크와 카인의 레이피어를 양옆으로 밀었다.

카인은 순순히 검을 치웠다.

에드먼드의 과한 집무실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밝은 금발의 미녀, 아르나.

-최고의 여자 용병? 그거야 당연히 '섬광'이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화살 수십 대가 꽂혀. 그러니 그녀랑 함께하면 어딜 가도 든든했지. 볼래?

카인이 백작가에서 쫓겨나서, 대륙의 용병으로 전전할 무렵.

전설처럼 남은 용병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중년 용병이 품에서 소중히 꺼내는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낡고 뭉개진 흑백사진 속.

피범벅이 된 채 두 눈에 화살이 꽃잎처럼 가득 꽂힌 트롤의 머리를 들고 있는 금발의 여자 용병.

아르나였다.

'이건 아벨 녀석도 몰랐었다.'

회귀 전 아벨과 계획을 세울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어른 아벨이 놀라던 얼굴이 선연하다.

물론 저 앞의 소년 아벨이 놀라던 얼굴과 똑 닮았었고.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다른 귀족이면 몰라도 검에 미친 그 아버지가 그것도 북방원정 중에 평범한 여인을 만난다? 말도 안 되죠."

태연하게 진실과 거짓을 섞었다.

"그렇다면 정들 수밖에 없는 여인이 있을 거다 생각했고, 조금 수소문해 보니 나오더군요. 의외로 원정군에 미녀는 적어서요."

오죽하면 전리품으로 그녀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용병이 있었을까.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칭찬해 드립니다, 카인 공자님."

아르나는 차가 제법 입맛에 맞는지 주전자를 기울여 빈 찻잔에 따랐다.

어투만 들으면 어느 귀족가의 티타임과 같았지만 내용엔 추궁이란 이름의 칼이 날아다녔다.

"게다가 숲의 마녀 글루미엠의 저주를 수십 년 동안 견딜 하프 엘프가 둘이나 있을 리 없죠."

"예-?"

아벨은 바람 빠지듯 반문했다.

"그것도 눈치채셨을 줄이야."

반면 아르나는 한층 더 개운해진 표정으로 수긍했다.

"이거저거 많이 알아냈는데, 가장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뭐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벨이 여우 필립한테 속고 있다는 걸 눈치채셨을 텐데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얼추 예상한 답은 있었다.

지독하게 냉정하고, 아벨을 위해 마녀의 저주를 수십 년간 견딘 어머니라면 아마도.

"그래야 제 아들이 살 테니까요."

제 죽음조차도 아들을 위해 써먹으리라.

#9 Ep.Ⅰ-2

봄이여 오라 (2)

「"어머니가 그렇게 대단한 수준의 용병이었다고 치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용사 아벨은 증거까지 있는 마당에 동일인이 아니라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있었다.

"왜 제게 아무것도 안 가르치셨던 걸까요. 미리부터 배웠다면...."

카인은 대신 대답했다.

인연이 닿아서 알게 된 엘프의 생태에 따르면 어릴 땐 꼭 세계수의 영향에 있어야만 한다는 걸.

하프나 쿼터는 상대적으로 필요한 기간이 짧겠지만 그래도 길었다.

문제는 그런 곳은 이미 기존 엘프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눈치 보며 간신히 지내는데 괜히 기술을 전수하는 것 같은 걸로 도박하진 않았을 터.

아벨은 얼굴을 감싸며 다시 의문을 꺼냈다.

"또 그런 어머니가 필립이 말한 '약'이 거짓이란 걸 몰랐을 리 없... 습니다."

당시 아르나는 늘 아팠지만, 늘 밝았고 카인에게 은근히 거리를 좁히면서 친근하게 다가왔었다.

병약하고 요리를 못하고 눈치 없는 시골 아가씨라면 의아할 것이 없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이 그랬다면 그 모든 것엔 목적이 있었으리라.

카인은 아벨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답은 다시 마주한 아르나의 입에서 똑같이 흘러나왔다.」

* * *

"전 곧 죽습니다. 그나마 엘프의 숲 가까이에서 지내서 좀 더 버텼죠."

"마녀가 거절해도 세계수는 하프 엘프에게도 손을 뻗는 겁니까."

아르나는 카인이 아벨을 편하게 불렀을 때보다 조금 더 놀란 듯 눈을 떴다가 고갤 끄덕였다.

"카인 공자님은 정말 많은 걸 아시는군요. 예. 세계수는 저 같은 반쪽짜리도 챙겨 주더군요."

"그럼 여긴 왜 오셨습니까? 그곳에 있었다면 더 사실 텐데요."

엘프의 숲은 아이리안 왕국의 북부 경계 너머에 있다.

반면 에셀레드 백작령은 최남단 해안가에 존재하니 둘의 거리는 극과 극이었으며, 세계수 할아버지가 와도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거리였다.

아르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아벨을 돌아보았다.

"첫째는, 제 아들이 조금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갔으면 하니까요."

"어머니가 있는 앞에서 필립이 말했었습니다. 자신에게 마녀의 저주를 풀 약이 있다고요...."

아벨의 표정은 작은 강아지가 비를 잔뜩 맞은 듯 축 처져 갔다.

제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투쟁을 각오했건만, 그것이 결국 아르나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거짓말인 걸 아셨을...."

아벨의 말끝이 흐려진다.

차오르는 눈물이 그의 말길을 막은 것이리라.

아르나는 하얗고 가는 손을 뻗어 아벨의 풍성한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알았지. 늘 말했잖느냐. 세상에 어머니가 모르는 건 없다고."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어머니의 피를 빨아서 살던 거였군요."

쿵.

아벨은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필립의 말에 따랐던 건 전부 아르나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프 엘프는 존재해도 쿼터 엘프는 세상에 없는 이유.

그건 엘프 여왕이자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인 글루미엠의 저주 때문이었다.

엘프와 인간 사이에선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하프 엘프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하프 엘프가 남성이면 상대방이, 여성이면 본인이 저주의 영향으로 견디지 못하고 임신 중에 죽는 글루미엠의 저주가 있었으니까.

"아벨."

아르나는 따스한 목소리로 절망하는 아벨을 불렀다.

녀석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어머니 아르나와 눈을 맞췄다.

그 순간 엘프들에게만 보이는 초록빛이 햇빛에 반사된 둘의 눈에 연하게 비쳤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아르나가 말을 꺼내는 순간 지켜보던 카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회귀 직전에 아벨이 읊조리던 그 말이.

"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었죠."

"살아간다면 언제고 다시 쓸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저는!"

"아들은 이 엄마가 그렇게 착하게만 보이니?"

아르나는 순간 웃었고, 아벨은 움찔했다.

그리고 카인은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들고 있었지만, 찻물에 비치는 자신의 보랏빛 눈을 보며 내심 한숨 쉬었다.

'작은어머니가 녀석에게 했던 말이었군.'

묘한 기분이었다.

분명 이 시간을 보냈었지만, 저 사람을 알았었지만, 다시 겪는 이 순간은 너무나 달랐다.

몰랐던 게 너무 많았던 과거를 다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씁쓸한 일이었다.

아르나는 아벨을 내버려 두고 카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인은 쓰게 웃으며 물었다.

"첫 이유가 아벨의 미래였다면, 두 번째는 어떤 겁니까."

"숨만 쉬면서 십 년을 살 바엔, 단 한 순간이라도 저로서 살고 싶었습니다."

쿠웅-.

순간 아르나의 눈빛이 달려졌다.

슬픔에 가득 찼던 아벨조차 본능적으로 물러서게 할 살기.

온몸에 서린 서늘한 한기.

'섬광'의 아르나!

하프 엘프 여인으로서 수십 년간 용병생활을 했다면 응당 지닐 기세였다.

하지만 그녀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죽이겠다는 듯 잔인한 기세를 흩뿌려도, 카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올려다볼 뿐이었다.

"커헉-."

잠시 후.

아르나는 검게 죽은피를 토하며 급하게 식탁 위의 수건을 쥐었고 아벨은 놀라서 달려갔다.

후릅.

카인은 태연하게 차의 맑은 향을 깊게 삼켰다.

전장의 공기만큼이나 청량했다.

아르나는 그 사이에도 피 섞인 기침을 몇 번이고 반복했고, 아벨은 수건을 급히 새 걸로 바꾸며 말했다.

"어머니, 빨리 들어가서 쉬셔야...."

"지금 카인 공자님과 말하는 중이란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아르나는 단호했다.

마지막을 앞두고 아직 어린 자식이 빨리 홀로 서길 바라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벨도 그 마음을 느꼈다.

"전 방금 공자님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카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꽤 강하셨죠."

적어도 아까의 기세를 뿜어내던 아르나에게 활이 들려 있었다면, 기사단장 클로이드 정도는 죽였으리라.

아르나는 카인의 묘한 대답에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

"저는 초원에서 태어나서 피와 죽음을 마시며 전장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제게 모든 게 멈춰 있는 숲은 지옥이었죠."

아벨의 기억 속 아르나는 애매한 미소만 짓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벨을 지키기 위한 아르나의 연기였을 뿐.

진짜 아르나는 전사였다.

"아벨을 지키기 위해 그 지옥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셨고요."

"...!"

그녀는 이 자리에서 자신만의 투쟁을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것이 카인일 줄은 더욱더.

동류를 만나 조금 더 편해진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제 앞에 계신 공자님이 이제 충분히 제 아들을 맡아 주실 것 같군요."

아벨은 마주 앉은 아르나와 카인을 돌아보았다.

둘은 당사자인 아벨이 없다는 듯 대화를 이어 갔다.

"오늘 저를 처음 보셨을 텐데 뭘 믿고 그러십니까."

툭.

아르나는 자신의 창백한 코 위에 검지 하나를 올렸다.

"요아힘 허브 향도 절대 가리지 못할 냄새가 공자님에게 나니까요."

"아침에 씻는다고 씻었는데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피 냄새가 씻는다고 지워지겠습니까."

"...."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리고 그저 아르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카인의 눈빛은 '작은어머니' 아르나가 아니라 '섬광'이었던 그녀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나 역시 입꼬리를 들었다.

돈에 죽음을 팔던 용병 시절의 그 표정 그대로였다.

"코가 참 좋으십니다. 피 냄새 나는 놈이라면 더욱 멀리하셔야죠."

"어쭙잖은 선의만 보였다면 공자님께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 사람 좋은 시골 아가씨의 모습만 보였겠죠."

실제로 과거의 아르나는 그랬다.

카인이 간혹 가져다주던 고통을 삭일 독주만 받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 앞에 있는 게 전사라면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뭘 주실 겁니까."

"아벨."

그녀는 거래 품목으로서 그녀의 아들을 올렸다.

"제 아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이 녀석은 천재입니다. 잘 키우신다면 제법 쓸 만한 칼이 될 것입니다."

"인정합니다만-."

카인은 아벨을 바라보았다.

이 냉정한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아벨의 표정.

그를 가볍게 훑고는 다시 아르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제 손에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빠르고 늦고의 차이만 있겠죠."

아르나가 죽은 후 어차피 지금의 아벨이 기댈 것은 카인뿐이었다.

즉, 거래 품목으로는 부적합했다.

싱긋-.

그녀는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었다.

카인의 냉철한 계산에 더욱 신뢰가 가는 눈치였다.

"그럼 하나 더 얹죠. 로스, 맥로든 둘 중 어디를 원하십니까."

아이리안 왕국의 두 후작의 이름이 아르나의 입에서 언급되었다.

카인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그녀가 거래의 품목으로 올리자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암살?"

"아이리안 섬에서야 후작이니 뭐니 하지만, 대륙에서 보면 별것 아닌 승냥이죠."

죽음을 각오하고 활을 쥔 '섬광'이라면 충분히 후작 중 하나 정도는 죽일 것이다.

아르나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최고의 패를 꺼낸 상황.

그녀는 로스 후작의 계략에 흔들리는 에셀레드의 후계자라면 이 거래를 거절치 못할 거라 확신했다.

카인은 곧장 말하지 않고 빈 잔만 몇 번이고 만졌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렇게 아주 조금 후.

똑똑-.

"카인 공자님, 클로이드입니다."

집무실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 전에 들린 발소리를 생각하면 적어도 열 이상이 서 있을 것이다.

카인은 아르나와 아벨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말했다.

"들어와."

끼이이익-.

아까와 달리 불길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앞.

단장 클로이드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사지를 결박당한 젊은 기사 둘이 도축장으로 끌려온 돼지처럼 끌려왔다.

"읍! 읍읍!"

둘은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입에 묶인 재갈과 사지를 잡고 있는 다른 기사들의 억센 손에서 빠져나오진 못했다.

클로이드는 보고를 이어 가려다 아르나와 아벨이 눈에 걸리는지 잠시 멈칫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냥 해."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카인의 눈빛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말씀하셨던 내통자들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찾았냐...면."

하지만 클로이드의 보고는 이어지지 못했다.

카인은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레이피어를 집어 들었고.

화아아아악-!

앉은 채로 내던졌다.

퍼어억-, 퍽.

화살처럼 날아가선 묶여 있는 두 기사의 머리를 관통해 버렸다.

"쥐새끼들을 잘 찾았군."

카인의 칭찬.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클로이드는 반문했다.

기사단은 지금껏 카인의 고난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카인이 자신들을 멀리하는 걸 이해했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기사단은 카인에게 인정받고자 이들이 누구인지, 로스 후작가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었는지, 어떻게 찾았는지 상세히 보고하면서 신뢰를 얻으려 했다.

하나 카인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마치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내 기사들이 그렇다고 하니 믿어야지."

'내' 기사라는 말.

그 말엔 울림이 있었다.

죽은 기사들을 잡고 있었던 다른 기사들의 얼굴을 상기시키기에도, 늘 같은 자리에만 있으려던 클로이드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충분할 정도로.

카인은 손을 휘저으며 나가라고 신호했다.

"나갈 때 집무실의 피를 치워야 한다고 전하고. 시체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충-!"

기사들은 소리 높여 충성을 외쳤다.

클로이드는 카인의 무심한 자색의 눈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클로이드가 카인을 자신의 주인은 아닐지언정 에셀레드 백작령의 주인으로 지금 인정했다.

기사들이 클로이드를 바라봤다.

클로이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돌아 나갔고, 기사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다가 두 구의 시체를 질질 끌며 그를 따랐다.

순식간에 끝난 처형.

요동치는 기사들의 충성심.

아르나는 바닥에 끌리는 시체들이 그리는 붉은 피의 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공자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지금 말씀 드릴 건 한 가지입니다."

카인은 곧장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클로이드!"

복도 너머로 가던 기사들이 멈춰 돌아봤다.

척-.

클로이드는 명을 기다린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일부터 아벨에게 아버지의 검을 알려 주도록."

갑작스러운 말에 클로이드도 아르나도 가만히 있던 아벨도 놀라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 속.

의자 앉아 있는 흑발의 카인은 나지막이 웃고는.

"제가 누구냐고 물으셨죠? 작은어머님과는 '거래'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카인은 목숨을 걸고 제안한 아르나의 거래를 거절했다.

#10 Ep.Ⅰ-2

봄이여 오라 (3)

과거 아르나의 취미는 사과파이를 굽는 것이었다.

시시각각 파고들었을 저주 속에서도 그녀는 흰 밀가루를 얼굴에 묻혔고, 에셀레드의 유일한 특산품인 사과를 좋아했다.

오죽하면 당시 무뚝뚝하던 카인이 왜 그렇게까지 사과를 좋아하냐고 물어볼 정도로.

아르나는 반죽을 만들던 엉망진창인 모습 그대로 대답했다.

-빨갛잖아요. 숲엔 붉은색이 없었거든요.

이해할 수 없던 그녀의 대답.

그리고 그땐 이해하기도 전에 불편했던 아벨과 나란히 앉아서 그녀의 사과파이를 먹어야만 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먹었던 사과파이는 더럽게 맛이 없었고, 그 아벨이 오죽하면 먹다가 슬쩍 도망쳤었다.

그러나 카인은 계속 먹었다.

단 한 번도.

어머니의 파이를 먹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 * *

"공자님!"

클로이드가 카인의 명령에 놀랐다.

아벨을 동생으로 인정하고, 친해진 것은 안다.

그렇다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던 아벨에게 그 검술을 전수하라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백작가의 후계구도가 언제 어떻게 다시 흔들릴지 모를 선택이었으니까.

"클로이드는 아버지의 검을 알고 있을 텐데?"

"그거야...."

에드먼드는 클로이드가 말을 잘 듣는다고 단장으로 뽑아 두고선 제 검술의 전반부를 가르쳤었다.

"가르쳐. 아벨도 에셀레드다."

클로이드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무릎을 꿇으며 다시 말했다.

"재고해 주십시오. '아르드바르'는 에셀레드의 상징입니다."

광검(狂劍) 아르드바르.

에셀레드 가문에 내려오는 검술이며 에드먼드가 왕국 최강의 검호가 되면서 최고의 검술이 된 녀석.

전반부에 불과해도, 아벨이 습득한다는 건 카인의 뒤통수를 칠 무기가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아벨."

카인은 얼떨떨해하는 아벨을 부르곤 클로이드를 턱짓하며 말했다.

"나는 네게 기회를 준 거다. '엔 자우어' 같은 쓰레기는 떼어 버리고 '아르드바르'를 익힐 수 있겠느냐?"

"형님!"

"긴 시간은 줄 수 없다."

"...?"

"열흘. 그 사이에 너는 아르드바르를 익혀야 한다."

"예?"

이번엔 혼란스러워 하는 작은어머니 아르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벨을 맡지 않겠다고 한 카인이, 가문의 검술을 가르치라고 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품목은 제법 괜찮았습니다만 더 좋은 게 있어서 거절했습니다."

"더 좋은 거...?"

"시한부의 작은어머니가 아니라 저주를 이겨 낸 작은어머니 말입니다."

아르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벨 역시 놀라서 카인을 바라보았다.

이미 로스 후작가의 검은 여우 필립이 아르나의 저주를 걸고 아벨을 이용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순진한 아벨을 속여먹은 것이고.

지금은 다르다.

아벨도 모르던 아르나를 카인은 알고 있었고, 클로이드와 저 멀리서 묵묵히 보고 있는 기사들이 있다.

즉, 카인은 속일 수도 없었고 속여서도 안 되었다.

"혀, 형님께선 어머니의 저주를 풀려면 성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국에서...."

"그 인간들이 퍽이나."

카인은 곧장 고갤 저었다.

대륙의 남부, 거대한 반도에 자리 잡은 그 성국의 추기경이나 성녀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아이리안 섬왕국까지 올 리 만무하다.

또한 아르나가 그 멀리 있는 성국에 가는 것도 건강상 불가능하다.

'가 봤자 돈 없다고 쫓겨날 거고.'

카인은 내심 쓰게 웃었다.

추기경이나 성녀를 만나기라도 하려면 적어도 에셀레드 영지의 삼 년 예산 정도는 기부해야 될 테니까.

"성국의 도움이 아니라면 설마?"

아르나는 조금 놀란 어투로 반문했다.

방법은 분명 두 가지였다.

아벨 역시 카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국의 도움을 받거나 마녀를 족치는 수밖에 없어.

"마녀와의 담판...."

성국의 도움이 아니라면 저주를 건 마녀를 찾아가야 했다.

클로이드는 아벨에게 아르드바르를 전수하라는 카인의 말의 진의는 알 수 없었으나, 마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는 잘 알았다.

"공자님. 수차례의 북방원정이 있었지만, 원정군은 결국 한 틈의 숲도 차지하지 못했었습니다."

아르나가 클로이드를 뒤따라 말했다.

"게다가 제게 저주를 내린 건 글루미엠이에요. 마녀면서 모든 엘프의 여왕인 그녀를 찾아가려면...."

"길을 막는 모든 엘프들의 목을 썰어 버리면 되겠지."

대수롭지 않게 하는 카인의 말.

젊은 기사들은 얼토당토않다는 걸 머리론 알았지만, 그 패기에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카인이 엘프의 위험성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걱정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카인은 그들을 쓱 훑으며 피식 웃었다.

"그냥 해 본 말이고 꼭 저주를 건 마녀를 찾아갈 필요는 없다. 같은 마녀라면 해제할 수 있어."

아르나는 곧장 반박했다.

"그게 더 어려워요. 다른 마녀의 저주를 멋대로 푸는 건 상대와 척을 지겠다는 거니까요. 그리고 수백 년간 살아온 글루미엠의 저주를 지울 마녀가 존재할지도 의문이고요."

"운명을 믿으십니까?"

"...?"

카인이 대뜸 던진 질문에 아르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본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벨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운명이라는 건 때론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더군요. 물론 운명이 다가와도 힘이 없으면 놓치기 마련이고요."

"형님?"

"아벨, 보통 사람이라면 엔 자우어를 떨치긴 어렵겠지만 너라면 가능할 것이야. 이번엔 진짜 네 손으로 어머니를 살려야지."

척.

아벨은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잡곤 카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들었다.

"운명이 온다는 말이십니까."

카인은 아르나와 클로이드를 번갈아 보며 끄덕였다.

"반드시."

그 순간 아벨이 카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형님."

아벨의 절절한 진심이 보이는 마당에 클로이드는 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아들을 빼앗겼군요."

"그래서 거래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카인은 아벨의 등을 툭툭 쳐서 지금의 클로이드를 빨리 따라가게 했다.

아벨은 곧장 따라 나갔고, 카인은 아르나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가족끼리는 거래하는 거 아닙니다."

"...!"

아르나는 놀라서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레몬 빛 머리가 찰랑였다.

카인은 씨익 웃었다.

"그냥 돕는 게 가족입니다."

"저는... 아니 저희는 카인 공자님의 가족이...."

홀로 태어나 피를 마시며 전장을 살아온 아르나.

그녀는 갑자기 가슴에서 치솟는 따스하고 뭉클한 감정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카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었죠. 하지만 이젠 합시다, 가족."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닫는 게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이미 흘러간 과거의 아쉬움이다.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

카인은 회귀 전 아벨과 계획을 세우며 다짐했었다.

다시 사는 삶에선 모든 걸 쥐겠다고.

그중엔 어린 아벨도, 저주로 잃어버린 아르나도 존재했다.

[운명의 분기점을 뒤틀었습니다.]

[세계선 고정도 : ▲ 5.5%]

['겨울'이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카인과 함께 시간을 건너온 『사계』 역시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어쩌면 그가 진즉 누렸어야 했을 봄의 한 조각이었을 테니까.

* * *

처-얼썩, 철썩.

푸른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친다.

이름 모를 어느 해안가의 작은 집.

길게 뻗은 지붕 아래 손때 묻은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그곳엔 긴 백발을 지닌 여인이 밀짚모자를 쓰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저 멀리 점점 서쪽으로 밀려가는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탄식'이 태어날 때인가."

후우웅-.

바닷바람이 맹렬하게 불었고, 그녀의 모자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녀의 눈이 보인다.

백태가 끼어 있는 것이 젊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왠지 모르게 그녀가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손을 뻗었다.

척.

그러자 저 멀리 날아갔던 밀짚모자가 잡혀 있었다.

마법이었다.

그녀는 담담히 모자를 다시 쓰고 얼굴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아흔아홉 번째의 어린 마녀여, 너는 수평선에 닿을 수 있을까?"

모자 아래로 비치는 그녀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리는 순간, 신기루처럼 그녀도 그녀의 집도 사라졌다.

철썩-.

남은 건 늘 그 자리를 향해 달려오는 파도뿐이었다.

* * *

기기기기깅-!

카인의 가느다란 세검이 밴더빌트의 거대한 대검을 옆으로 비껴 냈다.

둘의 힘이 맞닿는 부분에서 주홍색의 불꽃이 튀었다.

쿠웅.

카인은 그 순간 한 걸음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으로 세검을 쥐고 있으니 왼손은 비어 있었고.

그대로 대지를 밟으며 왼 주먹을 내질렀다.

아벨을 무릎 꿇렸던 그 수법이었다.

휘잉.

그대로 쳐 맞은 아벨과 달리 노기사 밴더빌트는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대검의 무게를 이용해서 원래보다 더 빨리 옆으로 움직이며 카인의 주먹을 피해 냈다.

구구구궁-.

그러곤 수십 년간 단련해 왔던 전신의 근육이 꽉 수축시켰다.

멀리 날아가던 대검이 허공에서 아름다운 반원을 그리며 그대로 카인을 향해 내리꽂혔다!

파직-.

그 순간 카인의 보랏빛 눈에서 순백의 뇌전이 반짝였다.

동시에 카인의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필립을 상대할 때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딱 밴더빌트의 거친 피부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보이고, 그의 가쁜 숨결에 커지는 콧구멍이 보일 정도의 느림.

팟-!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인이라면 승리를 가져올 시간이었다.

카인은 그대로 대검을 옆으로 피하고는 밴더빌트의 얼굴을 향해 레이피어를 투창처럼 내던졌다.

동시에 그대로 몸을 숙이고 달려들어 맨손으로 그의 하반신을 노렸다.

척.

바닥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잠시 시야에서 피했다.

다다닥-.

한 머리의 뱀이 적을 휘감듯 그대로 밴더빌트의 근육질의 오른 다리를 잡아챘다.

"승패는?"

카인은 고개를 들으며 물었고.

팟.

자신의 얼굴로 날아드는 힘 빠진 레이피어를 맨손으로 쥔 노기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도 공자님이 이기셨습니다."

카인은 결박을 풀고 일어섰다.

만약 목숨을 거는 전투였다면 레이피어에 오러를 담았을 것이고, 방금 다리를 쥘 땐 그대로 무릎을 반대 방향으로 접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밴더빌트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밴더빌트는 충분히 강해. 그런데 너무 정해진 적들만 만났었어."

"전 공자님이 더 신기합니다. 하루아침에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기술들을 익히신 겁니까."

노기사는 카인의 변화가 얼떨떨했다.

분명 강해진 건 좋았지만, 경험이 없다면 익히지 못할 것 같은 수들을 현란하게 사용하는 카인을 보니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자신이 알던 카인이 영영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책 보고."

"무술이 책 보고 가능할 리가 없죠."

"난 되던데."

카인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밴더빌트는 그의 말이 거짓말임을 기사로서 직감했지만, 그냥 웃어 버렸다.

앞으로 에셀레드의 주인이 될 카인이 비밀을 만들 정도의 심계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 되짚어 보지."

둘은 맨 처음처럼 조금 떨어져서 자세를 잡고는 아주 느리게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동시에 이어지는 카인의 조언들.

밴더빌트는 패배자답게 순순히 받아들였다.

에드먼드조차 할 수 없을 친절한 설명들이었다.

하지만 들을수록 노기사는 궁금했다.

"왜 공격들이 다 제 가슴을 노리는 겁니까?"

카인은 조금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꿈에서 밴더빌트가 가슴이 뚫려서 죽었거든."

"...."

노기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꿈에서 봤다는 걸 뭐라 할 수도 없고, 빈틈이 채워지는 건 맞았으니까.

그는 의도적으로 말을 돌렸다.

"아벨 공자님껜 열흘이라 하셨죠?"

대놓고 들으라고 했던 말인 만큼 성내에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래."

"오늘이 그 열흘째입니다."

"그렇지."

"...혹시 뭔가 일어나는 겁니까."

카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일부러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연륜의 힘인지 밴더빌트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러나 미래에서 와서 안다고 말 할 순 없다.

어떻게 넘길까 생각할 때.

댕- 댕-!

저 멀리서 낮고 거대한 종소리가 울렸다.

기사 둘이 카인과 밴더빌트가 쓰던 연무장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앞선 기사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온 건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허억,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밴더빌트가 먼저 나서서 되물었다.

"나이트 에셔, 무슨 일인가."

"왕...."

"왕?"

"1왕녀님께서 방금 성에 오셨습니다!"

젊은 기사, 애셔는 급하게 말했고 그 대답에 밴더빌트가 굳어 버렸다.

반면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성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러곤 당황한 노기사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왕녀가 이런 깡시골까지 오다니 뭔가가 일어날 모양이야."

"혹시 열흘을 말씀하셨던 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카인이라면 절대 예측 못 했겠지만.

"우연이야."

지금의 카인이라면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우연'이었다.

#11 Ep.Ⅰ-2

봄이여 오라 (4)

"올리시렌 왕녀님, 곧 카인 공자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수염을 멋들어지게 정리한 클로이드가 응접실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앞.

여인의 회색빛 단발이 찰랑인다.

중요한 손님에게만 제공하는 의자에 앉은 왕녀 올리시렌.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이드는 뒷걸음치며 최대의 예의를 보이며 응접실에서 나섰다.

탁.

그가 문을 닫자 이 공간에 남은 건 그녀와 호위 기사 한 명뿐.

"이소엘."

1왕녀 올리시렌은 이곳까지 자신을 따라온 기사를 불렀다.

"예스, 유어 그레이스."

딱딱한 목소리.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는 두꺼운 철제 투구와 걸치고 있는 꽤 두터운 중갑.

그럼에도 이소엘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가릴 순 없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멀쩡하다.

왕국 최남단의 에셀레드 영지가 이렇게까지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

이소엘은 무겁게 고갤 끄덕였다.

"기사들도 달라 보였습니다."

"이러나저러나 그 에드먼드의 기사들이니까 강하긴 하겠지. 그런데 여기 애들 물렁하다고 소문났잖아."

후작들이 알고 휘두를 약점이라면 왕실도 안다.

그것도 왕위와 가장 가까운 1왕녀 올리시렌이라면 더욱더.

그녀는 툭 하고 에셀레드 기사단의 약점을 찔렀다.

이소엘은 주위를 살피며 듣는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익히 들은 소문과 달리 직접 보니 기세가 다들 하나같이...."

"괜찮다?"

"예. 어떻게 보면 에드먼드 백작이 있을 때보다도 날카롭습니다."

"로스의 필립이 데려온 이복동생 때문인가?"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스 후작이 서남부의 백작가들을 흔들고 맥로든 후작이 동북부의 백작가들을 흔드는 현 상황.

왕실은 로스 후작이 아벨을 이용해 백작이 자리를 비운 에셀레드 영지를 흔들고 있는 걸 알았다.

그러나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에 두고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직접 와 보니 예상했던 상황과 딴판이라 의아했다.

"미리 영지의 사정을 알아 두지 못한 제 실책입니다."

기사 이소엘은 고갤 숙였다.

올리시렌 왕녀는 손을 흔들며 시녀들이 준비한 다과를 집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우리는."

"...."

"뭐 어떻게 굴러가든 상관없겠지."

까득-.

올리시렌은 딱딱한 쿠키를 이빨로 끊었다.

태연한 말투와 달리 그녀의 눈빛엔 쇠심줄 같은 독기가 번뜩였다.

안개꽃의 1왕녀.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표정을 누가 본다면 늘 미소를 짓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낸다는 소문은 싹 날아갈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기사 이소엘에게만 보이는 그녀의 참모습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창밖의 해가 기울었다는 게 느낄 정도가 된 시간.

올리시렌은 눈짓으로 한쪽 구석에 놓인 탁상시계를 가리켰다.

이소엘은 곧장 움직여 시계를 가져왔다.

"에셀레드의 '곧'은 한 시간이 넘나 봅니다."

"그러네."

올리시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앉아 있던 소파가 부풀어 오르는 게 느릴 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시골이라서 왕도랑은 시간 감각이 다를 줄은 알았지만, 이건 귀족으로서 왕실을 대하는 예의의 문제 같은데 말이야."

"맞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영 실망이야, 에셀레드."

올리시렌은 큰 보폭으로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소엘은 그녀의 왼쪽 뒤에 딱 붙어서 그녀의 검으로서 움직였다.

활짝-.

열어 버린 응접실의 문.

저 앞으로 난 긴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조금 차갑고 습했다.

우우웅-.

복도의 왼쪽으로 나 있는 창문들이 기묘하게 울었다.

올리시렌은 적막한 광경에 순간 멈칫했다가 창밖을 돌아보았다.

우우우우웅-.

보이는 건 성내의 연무장.

그곳엔 방금 전 그녀를 안내하던 중년의 기사를 비롯해서, 영지의 모든 기사들로 보일 정도의 숫자가 서 있었다.

이소엘은 창으로 좀 더 가까이 가서 내려다보았다.

채애앵-, 우우-.

기사들이 둘러싼 곳.

바싹 마른 금빛의 모래 연무장 위 두 명의 청년이 칼을 맞대고 있었다.

채애애애-.

둘의 칼이 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고.

우우우우-.

창문이 파공음에 운다.

해안 영지니 바닷바람 때문에 그런 줄 알았던 올리시렌과 이소엘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갈색 머리였고, 다른 하나는 흑발이었다.

그리고 흑발의 청년이 칼과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색의 청년을 팼다.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올리시렌은 얼굴이나 몸이나 성한 데가 없어 보이는 갈색 머리 청년을 가리키며 이소엘에게 물었다.

"...."

바로바로 대답하던 이소엘은 멍하니 바라보느라 듣지 못한 듯했다.

"이소엘?"

올리시렌이 두 번을 부르고 나서야.

"죄송합니다."

"치열한 싸움이긴 한데 네가 그렇게 정신을 빼앗길 정도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검을 수련하지 않았던 이상 볼 수 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꽈악-.

반면 왕도에서 제일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 평가받던 이소엘은 분한 듯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둘은 아마 에드먼드 백작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녀답지 않은 의견 개진.

그리고.

"갈색의 청년은 싸우는 순간마다 발전하고 있습니다. 재능으로만 따지면 제 이상입니다."

"...!"

이소엘답지 않은 말에 올리시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 이소엘이 말을 이었다. 아까도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한층 더했다.

"그리고 저 흑발의 기사님은 아마도...."

쉬이 끝맺음 짓지 못하는 평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소엘의 상대를 부르는 호칭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 * *

왕녀들이 기다리기 시작할 때, 카인과 밴더빌트는 평기사 에셔를 앞에 세우며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카인이 순간 몸을 틀었다.

"카인 공자님?"

올리시렌 1왕녀가 기다리고 있을 성이 아니라 연무장으로 방향을 트는 카인에 둘은 고갤 돌렸다.

"가기 전에 확인부터 하지."

"확인이라시면...."

"이상한 거에 손대서 피똥 싸고 있을 내 동생."

카인이 그렇게 부를 대상은 단 하나, 아벨.

둘은 급하게 카인의 뒤를 쫓았다.

"그건 일단 왕녀님을 뵙고 나서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밴더빌트는 초조한 눈치로 왕녀가 있을 응접실과 카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도 되겠지."

"그런데 왜 굳이 지금...."

"내가 지금 보고 싶거든."

"...."

순간 밴더빌트와 에셔 둘 다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에셔는 한편으로 카인의 거침없는 모습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공자님-!"

저 멀리.

성에서 오던 길.

카인을 찾으러 오던 클로이드가 길을 벗어난 카인을 향해 달려왔다.

카인은 따라오라고 손짓하면서 연무장에 도착했다.

후웅-.

세 기사와 카인 그리고 한 명.

아벨 에셀레드.

그가 있었다.

후웅, 후웅-!

아벨은 에셀레드의 세검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연무장의 모래엔 아벨의 발이 짓이긴 무수한 자국들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후웅!

그리고 그 아래.

모래의 색이 달랐다.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벨의 아래 모래만 조금 어둡다는 걸 알 것이다.

뚝, 뚝.

그 이유는 아벨의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 때문이었다.

절벽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두 손으로 밀어내려는 듯,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내려던 아벨의 흔적.

짝.

카인은 박수를 치며 아벨을 멈추게 했다.

"...오셨습니까."

열흘간 물도 못 마신 건지, 아벨의 양 볼은 홀쭉했다.

눈두덩이는 시커멨고, 눈은 빛을 잃고 흡사 시체의 눈 같아 보였다.

"어렵지?"

"...."

"답답도 하고. 눈앞엔 '아르드바르'의 길이 훤히 보이는데 네 재능이 담긴 몸은 모든 투로를 '엔 자우어'로 하니까 말이야."

"정말로...."

털썩.

아벨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서 있던 힘은 몸의 힘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구할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과 그녀의 생을 희생해서야만 살 수 있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실함과 아득함.

그것들이 합쳐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아벨을 파먹고 있었다.

"제가 해낼 수 있는 겁니까, 형님."

카인은 눈물로 나올 수분조차 사라진 아벨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골치 아플 왕녀와 만나기 전에 보러 오길 잘했군.'

휙.

그러곤 고개를 돌렸다.

본래 아벨을 가르치기로 했던 클로이드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서 현상 유지만 하려던 이전과 달리 그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정말 최선을 다해서 가르쳤습니다."

"클로이드 경의 가르침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걸 지켜봤던 밴더빌트조차 끄덕이며 카인의 의심을 지우고자 했다.

하지만 카인은 다른 생각을 하며 아벨을 훑어보았다.

이내 그의 눈에 보였다.

'재능이 예상보다 더 뛰어나서 문제군.'

카인은 아벨의 '엔 자우어'가 그 사이에 이렇게까지 숙련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그 원리 자체를 몸으로 체득한다는 건 또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즉, '엔 자우어'를 체득한 몸이 정반대의 '아르드바르'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다.

카인은 고개를 들었다.

우뚝 솟은 성의 응접실이 있는 방향을 한 번 바라봤다.

왕녀인가, 아벨인가.

당연히 백작가의 다른 모두는 왕녀가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앙숙처럼 지내는 밴더빌트와 클로이드조차도 지금만큼은 같은 말을 할 만큼.

그러나 카인의 생각은 달랐다.

'무조건 아벨이 우선이다. 왕녀나 이소엘을 생각해서도.'

이미 과거에 카인은 왕녀와 이소엘을 만났었다.

그날 겪었던 굴욕과 치욕은 제법 깊어서 아직도 떠올랐다.

그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한 건 처음 겪는 실패와 주인을 잡아먹을 정도의 재능에 짓눌리는 '동생'이다.

카인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근육을 풀었다.

누가 봐도 한 판 붙으러 가는 자세라 클로이드가 대경해서 말했다.

"지금 왕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이 주인을 기다려야지."

"공자님! 왕국의 첫 번째 왕위계승권자시란 말입니다!"

그의 외침에도 카인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뻗었다.

"검 달라고."

"카인 공자님!"

"정말 왕녀가 다음 왕위를 계승하는 게 확실하다면 지금처럼 후작들이 난장판을 칠까?"

"그건...."

왕실이 원하는 건 정통성을 지닌 안개꽃의 1왕녀 올리시렌이다.

반면 후작들이 바라는 다음 대 계승자는 정열의 홍화라 불리는 2왕녀 올리비아.

향후 권력을 위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에셀레드 백작가는 그 싸움에 휘말린 안타까운 새우 한 마리일 뿐이었다.

"잘 생각해, 클로이드. 그 대단한 왕녀가 뭘 뜯어먹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예?"

"왕실은 방문할 곳에 미리 연락을 주는 것이 관례다. 준비할 시간을 주는 거지. 그런데 그녀는 기사 하나만 달랑 데리고 말도 없이 왔어."

"...."

왕녀라는 이름에 매몰되었던 클로이드는, 카인의 지적을 듣고서야 의아한 점을 파악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고. 왕녀고 뭐고 누가 더 아쉬울지."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죠-!"

카인의 대화를 듣던 평기사 에셔가 끼어들어 외쳤다.

카인은 그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에셔라고 했나?"

"예스, 로드 에셀레드!"

에셔는 빳빳하게 차려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스릉-.

카인은 피식 웃곤 에셔의 허리춤에서 세검을 뽑아 들었다.

"싹수가 보여."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아벨."

카인은 몸을 돌렸다.

아벨은 혼이 반쯤 나간 눈으로 카인을 응시했다.

"이젠 형님이 직접 가르쳐 주마."

화아아아아아-!

바람이 분다.

바닷바람이 아니다.

카인을 중심으로 뻗어 나오는 설원에서나 불 차가운 북풍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살기는 지독하고, 섬뜩했다.

"물론 못 배우면 죽는 거고-!"

아벨은 본능적으로 바닥을 차고 일어났다.

쉐에에에엣!

그리고 카인의 세검이 아벨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12 Ep.Ⅰ-2

봄이여 오라 (5)

카인은 광검 '아르드바르'를 모른다.

과거 클로이드에게 배울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며, 가르쳤어야 할 에드먼드 백작도 결국 돌아오지 못했었으니까.

하지만.

카인의 날카로운 찌르기가 아벨의 왼눈을 노렸고.

아벨은 순간 움찔했다.

퍼억!

그리고 카인의 세검이 인정사정없이 한 박자 느렸던 아벨의 왼팔뚝을 후려쳤다.

카인은 피가 비치는 아벨의 팔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금은 아르드바르였다면 가볍게 튕겨 냈을 거다."

"...맞습니다."

"지금처럼 머리론 알아도 몸이 안 따라 주는 게 문제다."

"...."

아벨은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카인의 말대로 머리로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았지만, 몸은 익숙한 '엔 자우어'를 펼치려고 하다 보니 반응이 늦었다.

이미 아벨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고, 피가 번져 나오는 곳도 제법 많았다.

'아르드바르는 모르지만, 엔 자우어는 알지. 아주 잘.'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했다.

낮춰지는 자세.

아벨은 세 걸음 물러난 후 아르드바르의 기수식을 취했다.

"나는 철저히 엔 자우어의 약점을 찌를 거다."

훤히 보이는 엔 자우어를 뚫고 공격하는 건 카인에겐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

"아르드바르를 쓰지 못한다면 내 검은 결국 네 목숨을 꿰뚫을 거야."

"공자님!"

클로이드는 놀라서 카인을 불렀다.

이미 주위는 에셀레드의 기사들로 가득했다.

단장인 클로이드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다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아벨 공자님은 아직 애입니다."

카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애 같은 소리 하네. 당신 눈엔 저 녀석이 애로 보이나?"

카인은 에셔의 세검으로 아벨을 가리켰다.

고요했다.

클로이드가 뭐라 말하든, 기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오직 이 세상에 단 둘.

자신의 검과 카인만을 완전히 집중하는 자세였다.

카인은 그런 아벨의 맞은편에서 자세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내겐 발전하려고 발버둥 치는 전사로 보인다."

"...."

클로이드는 입을 닫았다.

그의 머리와 달리 기사로서 그의 가슴 역시 카인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카인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살벌한 아벨의 기세를 마주했다.

'어려도 용사는 용사인가. 최전선에 있었어도 크게 되었겠어.'

카인이 마지막 10년 동안 싸웠던 최전선.

그곳엔 눈과 피가 그치지 않았고.

전사들이 있었다.

대장벽에서 각자의 목숨을 불태우며 침공을 막아 내는 자들.

숨을 이어 가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그곳에선 느긋하게 검을 가르치거나 할 수 없다. 그저 싸우고, 발전하고 그러지 못하면 죽을 뿐.

피로 붉어진 설원의 최전선.

그곳에서 '가면의 설원공'으로 십 년을 버텼던 카인은 자신의 방식대로 아벨에게 검을 뻗었다.

탓-!

카인이 대지를 박찼다.

그간 지쳤고 상처가 가득한 아벨의 반응은 조금 느렸다.

하지만 아벨의 전투본능은 이전에 싸웠을 때보다 더욱 벼려져 있었고.

후웅-!

카인의 검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피했다.

움찔.

그러나 반격할 순간 몸이 엔 자우어의 방향으로 가려 하자 멈칫했고.

퍽!

그 틈에 카인의 왼발이 번개처럼 그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다시!"

"예, 형님!"

카인의 우렁찬 목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듯 아벨은 따라 외쳤다.

일방적으로 아벨의 패배가 쌓인다.

"형님,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다.

"한 번 더 부탁드립니다, 형님!"

연무장의 한 구석을 어둡게 할 정도로 땀을 흘리며 연습하던 아벨이 이젠 피를 뚝뚝 흘린다.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은 눈빛으로 카인을 바라봤고, 카인은 묵묵히 맞상대했다.

에셀레드의 기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부분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일전에 죽였던 로스 후작의 기사들을 떠올렸다.

멈춰 있던 심장이.

두근.

기사로서 달려 나가고 싶던 그들의 가슴이.

두근, 두근.

두 형제의 멈추지 않는 대련으로 조금씩 불타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으아아아아아아-!"

아벨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도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대한 한탄이었다.

"아벨."

"...."

"이번엔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

스슷-.

다시금 앞으로 내뻗어지는 카인의 왼발. 중심이 낮아지며 평평하게 쥐어진 세검.

카인의 입에서 냉혹한 말이 흘러나왔다.

"엔 자우어로는 지금의 공격을 절대 막을 수 없어. 아르드바르를 정확한 순간에 뻗어야만 살 것이다."

클로이드는 아벨을 바라보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밴더빌트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었다.

그만큼 아벨은 위태해 보였고, 카인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네 재능은 나를 뛰어넘는다. 세상 그 누구를 데리고 와도 너를 뛰어넘지 못해."

카인은 담담히 아벨을 인정했다.

지금에선 모르겠지만, 이미 이전 세계는 용사 아벨을 인정했던 만큼 카인도 받아들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너는 너다. 그 재능이 네가 아니야."

아벨은 두 눈을 끔뻑였다.

가슴으로는 카인의 말을 이해했지만, 머리로는 분명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인은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아벨을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재능에 고삐를 채워라. 제아무리 빠른 말이라도 다루지 못한다면 쓸모없다!"

타아앗-!

카인의 질주.

눈 깜빡할 사이에 가까워진 카인의 모습을 보며 아벨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세상이 느려진다.

그리고 조금 후의 미래가 보이듯 카인이 어떻게 칼을 찔러 들어올지가 느껴졌다.

그동안 계속 똑같은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아벨의 진짜 재능이 눈을 뜨고 있기에 가능한 순간!

아벨이 되뇐다.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말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석한 후 칼을 뻗자.

자신을 따르지 않았던 전투본능을 직시하며 아벨은 으스러질 만큼 단단히 검을 쥐었다.

이 순간.

그 어떤 엔 자우어로도 카인의 일격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선 순간!

휘이이이이-.

바람이 불었다.

에셀레드 해안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닷바람이 아벨의 등을 밀었다.

광검 아르드바르.

에셀레드 해안절벽의 엄중함이 담겨 있으며, 에셀레드 만의 푸른 바다의 잔잔함이 어려 있고, 에셀레드를 딛고 살아가는 소박한 자들의 마음이 담긴 검술.

아벨은 깨달았다.

그저 약점을 파고드는 것만을 위한 엔 자우어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아르드바르의 넓이를.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의 의지가 몸의 재능을 뛰어넘었다는 걸!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파아아아앗-!

아벨이 쥔 세검에서부터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나온다.

카인이 찔러 오는 검을 맞찌르는 빛의 직선이 되었고.

티잉!

그대로 카인의 검을 부숴 버리곤 하늘로 치솟았다.

카인도 아벨도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서로를 마주했다.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을 때.

"...전사라."

클로이드는 본인도 모르게 카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가 봐 왔던, 생각했던 세상이 방금 무너졌다.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방금 일어났다.

극한의 상황에서 목숨을 잃을 뻔할 때 아벨이 진정한 아르드바르를 펼쳐 냈으니까.

동시에 클로이드는 의아했다.

어째서 카인은 아르드바르를 익히려 하지 않는 것인가.

카인의 보랏빛 눈에 담긴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기분이 어떠냐."

카인은 씨익 웃었다.

아벨의 검에 잠시나마 휩싸였던 햇빛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오직 동생을 향해서만 짓는 웃음이었고.

"날아갈 것 같습니다."

아벨 역시 화답하며 웃었다.

"축하한다. 아벨 에셀레드."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뭐든."

"제가 언젠가는 형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아벨의 눈이 반짝인다.

상대를 이기겠다는 것에 매몰된 눈이 아니라, 순수하게 목표를 넘어서겠다는 무인의 열망이었다.

"새로운 봄이 온다면."

이 말의 뜻을 아는 자는 카인뿐이라.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벨을 껴안았다.

그 순간 치열한 혈투와 굳건한 의지의 부딪침에 입도 벙긋 못하던 기사들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카인 공자님 만세!"

"아벨 공자님 최고!"

사람은 자연스레 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치고 올라오는 자를 응원하는 법.

처음엔 아벨이 외부인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던 소년이었고.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던 한계를 뛰어넘는 전사였으며.

이길 수 없을 적을 향해서 멈추지 않고 달려들던 기사였다.

이젠 아벨도 정말 에셀레드였다.

카인은 아벨의 치열한 땀 냄새에 피식 웃곤 포옹을 풀었다.

그러곤 곧장 뒤를 돌아 환호하는 기사들과 클로이드를 돌아보았다.

"클로이드. 현재 부단장이 공석이지?"

에셀레드 기사단이 큰 것도 아니고 지켜야 할 영역이 넓은 것도 아니라 당연히 비어 있었다.

"예."

"에드먼드 에셀레드 백작의 장자이자 에셀레드 백작령의 후계자로 묻겠다. 부단장으로 아벨 에셀레드는 어떻지?"

순간 기사들은 팔을 내리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동시에 클로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곧장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순간이 정확했군.'

그리고 카인은 내심 미소 지었다.

아벨은 어리다.

또한 에셀레드로서 살아온 시간도 너무나 짧다.

백 번 양보해도 단장의 부재 시 기사단을 책임질 부기사단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벨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며 꺾이지 않는 자라는 걸 전부가 알게 된 이 순간에 이런 말을 꺼낸 만큼 바로 거절의 말을 할 순 없으리라.

그리고.

"물론 아벨이 일반적인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카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뭐라 거절의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클로이드의 얼굴엔 물음표가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에셀레드 기사단엔 꼭 필요한 것 같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너희는 아벨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고 아벨은 너희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

힘도 에셀레드라는 이름도 있는 기사들이지만 그들은 물렁하다 못해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웠다.

반대로 아벨은 한 번 물면 멈추지 않는 기사의 싸움을 몇 번이고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워야 하는 상황.

"그래서 부단장으로 아벨을 올리고 싶다."

"공자님, 설마...."

그래도 기사단장으로 지낸 세월이 헛된 건 아닌지 클로이드는 카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기사단의 체질 변경.

지금처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움직이는 기사단에서 치열하게 싸울 수 있는 기사단으로 바뀌길 바라기에 이런 무리한 인사를 단행하려 하는 것이리라.

아르드바르를 굳이 아벨에게 전승시킨 이유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카인은 더 말하지 않고 클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억지로 밀어붙일 순 있지만, 그건 의미가 없어.'

카인이 바라는 에셀레드의 큰 그림이 있다. 그걸 그리기 위해선 이런 단계가 꼭 필요했다.

그의 의도대로 싸움이 마무리될 때.

"영지의 부기사단장을 정하는 일이 정말 중요한 건 알고 있어요."

저벅-.

성에서부터 두 명의 여인이 걸어왔다.

회색빛 단발의 왕녀 올리시렌과 그녀의 뒤를 따르는 중갑의 기사 이소엘이었다.

"왕녀 저하를 뵙습니다."

클로이드는 카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곧 오신다던 분도 여기 계셨군요."

하늘의 해가 움직인 걸 보니 얼추 한 시간이 흘렀다는 걸 클로이드는 알 수 있었다.

카인이 주도하는 상황에 휘말려선 이렇게까지 시간이 흘렀는지는 몰랐었다.

"실망이 크네요."

올리시렌의 한마디.

안개꽃의 왕녀라 불릴 정도로 늘 조용하게 살던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기사들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만큼은 태연했다.

"형님, 왕녀가 높은 사람입니까?"

북부 엘프의 숲에서 살다 온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아벨과.

"쫌. 그렇게 높진 않고."

올리시렌과 이소엘을 번갈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카인이었다.

#13 Ep.Ⅰ-2

봄이여 오라 (6)

「"밴더빌트 아르츠위버는 너무 약했어요."

오래전, 카인이 소년이었을 때.

올리시렌 왕녀는 지금처럼 에셀레드 영지에 왔었다.

그녀는 기사를 바랐다.

당시 필립은 사사건건 카인을 싸고도는 밴더빌트를 그걸 핑계 삼아 왕녀에게 보내 버렸다.

영지의 기사가 용병처럼 끌려가는 상황이지만, 카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막지 않았다.

"쯧. 에드먼드 백작이 있었다면...."

"그래도 시골 영지의 노기사치고는 꽤 분전했습니다."

기사, 이소엘은 올리시렌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들의 앞에 가슴이 쩍 벌어진 채 죽어 있는 밴더빌트의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나름이겠죠."

카인은 죽은 밴더빌트의 상처 가득한 손을 감싸 쥐었다.

말라비틀어진 피와 썩어 문드러진 시신이 밴더빌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흘렀다.

단 하나뿐이었던 자신의 기사.

유일한 자신의 아군.

밴더빌트 아르츠위버.

왕녀 올리시렌과 기사 이소엘.

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밴더빌트를 사지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밴더빌트는 죽지 않았으리.

카인은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세계가 뒤바뀔지라도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 * *

카인은 그때의 카인이 아니었으며, 그때의 아벨도 아니다.

안개꽃의 올리시렌은 가시가 돋친 카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말씀이 불쾌하게 들리는 건 제 착각일까요."

"불쾌하라고 일부러 말했습니다."

척.

이소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단단히 긴장한 게 보였지만, 올리시렌의 명예를 위해선 나서겠다는 의지 역시 굳건해 보였다.

"이소엘, 괜찮아."

올리시렌은 그녀를 뒤로 물리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신 걸까요. 저랑 당신은 초면일 텐데요."

"그거야 당신을 떠보려고 도발하는 겁니다."

"아하. 백작의 후계자 따위가 왕국의 왕녀를 떠보겠다라. 참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둘 사이에 불꽃이 튄다.

"마음에 안 드셔도 뭐 어쩌실 수 없을 테니 이때라도 해야죠."

"...."

꽈아아악-.

올리시렌은 들고 있던 접이식 부채를 부서지라 쥐었다.

본래 성질 같아선 카인의 얼굴을 향해 부채를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안개꽃'이라 불리며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지금의 모습을 한순간의 성질로 잃을 순 없으니까.

"정 마음에 안 드시면 제게 왕실 모독죄라도 씌우시죠."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의 그와 달리 가벼워 보이는 언행들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지독하리만큼 무거웠다.

그 덕에 아벨이나 밴더빌트는 지금 카인이 철저하게 계획대로 움직임을 눈치챘다.

반면 클로이드를 비롯한 기사들은 주춤거리며 눈치 보기에 바빴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기사라도 지금 카인과 왕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벼락을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리시렌도 만만치 않았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이렇게 카인 공자님에게 홀대 받는 건 제가 연락도 없이 급하게 와서일 텐데요."

일부러 자신을 낮추고 허물을 밝히며 카인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에 넘어갈 카인이 아니었다.

"그렇죠. 저희 같은 시골 영지에선 사실 왕녀님이 진짜 왕녀인지 아닌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왕실의 사절이 와야만 알죠."

"그 말은 제가 '1왕녀 올리시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소리일까요?"

하지만 이 싸움에서 먼저 패배하는 건 올리시렌 쪽이었다.

"그래도 이전에 신문 속 사진과 닮았으니 본인일 거라 생각은 합니다. 생각은."

에셀레드 같은 시골 영지에는 없지만, 중심 도시에는 신문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작년 올리시렌의 생일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신문엔 참석자들의 단체 사진이 올라왔었다.

지방 귀족들은 어떻게든 면면을 익히기 위해 신문을 구했고, 에셀레드 역시 시종장이 진즉 구해 뒀었다.

"뭐 진짜인지 아닌지는 클로이드가 확인하진 않았으니까 알 수 없겠죠."

카인은 그 클로이드가 왕녀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에 손가락을 걸 수 있었다.

떨리는 그의 두 눈동자가 정답을 맞혔음을 말했다.

"상황이 워낙 급해서 온다는 게 이런 결례를 낳았군요."

올리시렌은 치마의 양 끝단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카인은 마주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녀의 다음 수를 예측했다.

'에드먼드를 걸고넘어지겠지.'

백작령에 없는 백작, 에드먼드.

"진짜 후계자도 아닌 분이 절 의심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카인은 후계자지만 후계자가 아니다.

에드먼드가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식은 카인 하나기에 다들 당연히 카인을 후계자라 여겼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단 한 번도 카인을 후계자라 공표한 적이 없었다.

'날 후계자에서 배제하려고 했기보다는 별생각이 없었을 테고.'

카인은 기억 속 어렴풋이 남아 있는 에드먼드를 떠올렸다.

그가 이런 정치적인 문제까지 고려했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다.

'왕국 최강의 검호'이라는 이명처럼 검에만 미친 남자였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아벨의 존재를 염두에 둬서 말을 안 했을 수 있지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에드먼드는 돌아오지 않는다.

에셀레드 해안 던전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며, 후작들의 정치질에 홀로 던전을 토벌하겠다고 들어간 에드먼드는 나오지 못한다.

성국에서 맨날 말하는 신의 기적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에는.

"진짜인지 모를 왕녀와 진짜가 아닌 후계자라."

카인은 손을 내밀었다.

피와 흙이 묻어 지저분한 기사의 손이었다.

올리시렌 왕녀는 안개꽃처럼 희미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화해를 요청하시는 건가요?"

"저희는 화해를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올리시렌의 눈이 가늘어진다.

백작의 아들과 왕의 딸.

후계자와 첫 번째 왕녀.

그리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치.

카인의 짧은 말에 담긴 의미가 무겁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진의를 쉬이 유추할 수 없었다.

"대신 거래를 합시다."

"거래라. 무언가를 타인과 주고받는 행위죠.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받을 건 있어도 드릴 건 없습니다."

올리시렌은 자연스레 카인의 손을 거절했다.

생각한 대로 풀리진 않아서 아쉽지만 왕녀라는 이름으로 무력을 강제로 차출해 가는 걸로....

"가장 어두운 밤, 아르후안(Arthuan)."

그 순간.

스릉-!

이소엘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카인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채앵.

뒤에서 지켜보던 아벨은 햇빛처럼 내달려선 검을 내뻗었다.

이소엘의 검이 하늘로 튕겨 나갔다.

후우우우우-.

한 순간에 벌어진 싸움.

올리시렌은 부릅떠진 눈을 숨기지 못하고 입까지 벌렸다.

"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저는 그 녀석을 봐야겠습니다. 길잡이가 되어 주시죠. 그러면 검이 되겠습니다."

"어디까지 아는 거죠?"

올리시렌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평화로웠던 어조에서 이소엘의 검처럼 내찌르는 말투.

"알 만큼 압니다."

"...."

카인은 다시금 자신의 더러워진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이소엘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도 달려 나갈 듯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벨 역시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지치고 상처 입은 몸에도 이를 악물었다.

"잡으시죠. 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궁지에 몰아넣고 죽든가 잡든가하는 거래는 왕도의 정치판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척.

올리시렌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욕을 억누르며 카인의 손을 잡았다.

"본래 사람은 어디서든 죽는 법이니까요."

카인은 손을 흔들며 이 자리에서 오직 자신만이 제대로 셈을 하고 있을 거래를 받아들였다.

* * *

똑-닥.

광석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노을의 붉은빛이 거대한 아치형 창을 넘어 응접실로 쏟아진다.

아까 전 올리시렌과 이소엘만 있던 것과 달리 지금은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올리시렌은 미간을 찌푸리며 사람들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당신과 아벨이라는 동생까지는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 동생의 아픈 어머니까지 왜 여기 있는 거죠?"

올리시렌의 지적에 아르나 역시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었다.

전후 설명 없이 카인이 불러서 온 만큼 어째서 자신이 왕녀와 마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밴더빌트가 있는 건 뭐라고 안 하십니까?"

카인은 다리를 반대로 꼬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노기사를 가리켰다.

"당신은 말에 가시를 담지 않으면 말을 이어 가지 못하나 보군요."

"찌르기 좋은 말씀을 하신 왕녀님의 책임이죠."

"절 왕녀라고 생각은 하나요?"

"언제까지 왕녀일지는 모르겠다고는 생각합니다."

카인과 올리시렌의 말싸움은 손을 잡은 후에도 이어졌다.

툭툭 내뱉는 카인과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짜증을 내는 올리시렌의 대화에 아벨이 잔뜩 얼어선 두 눈만 좌우로 굴렸다.

그 모습을 본 카인은 피식 웃으며 응접실을 바라보았다.

인원은 총 여섯이다.

자신과 밴더빌트.

그 맞은편엔 거울에 비춘 듯 올리시렌이 앉아 있었고 이소엘이 그녀의 뒤에 서서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아벨과 아르나가 나란히 앉아서는 양측의 대화를 듣고 있다.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 대화를 주도해 나갈 카인과 올리시렌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바라만 보면서 입을 열지 않는다.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이 천천히 차오를 때.

"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려 주시죠."

올리시렌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녀로서는 꼭 숨기고 싶던 비밀을 카인이 한순간에 들췄으니 출처는 파악해야 했다.

"비밀입니다."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거절했다.

회귀해서 얻은 정보라 말할 수도 없고, 과거 올리시렌의 모습이 여전히 겹쳐 보이기 때문에 그녀의 분통 터져 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으니까.

꽈아악-.

올리시렌은 쥐고 있던 부채를 부러질 듯 쥐었다.

당장 눈앞의 카인을 죽여서 입을 막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

"그런 잡설은 미뤄 두고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카인은 그녀가 한계치에 다다랐음을 느끼고 아르나를 향해 손짓했다.

아르나는 겉보기엔 영락없는 시골 아가씨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미소를 방긋방긋 지었다.

"현재 작은어머니가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 글루미엠의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

아르나의 미소가 지워진다.

동시에 올리시렌이 놀라서 아르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보이는 듯 몇 번이고 휘둥그레져서 훑어보던 올리시렌은 입을 열었다.

"글루미엠의 저주에 걸렸다면 하프라는 건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버텼답니다."

"말도 안 돼요. 다른 마녀도 아니고 지난 삼백 년간 북부 숲에 군림하고 있는 그 마녀의 저주인데!"

"잘 버티셨겠죠."

카인은 심드렁한 말투로 그녀가 따지는 걸 끊었다.

아르나조차 카인이 어디까지 말할까 궁금하던 찰나에, 그런 답변을 듣자 피식 웃어 버렸다.

카인은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그러곤 하나씩 접으며 올리시렌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둘입니다. 첫째, 우린 마녀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 둘째, 여덟 번째 마녀인 글루미엠보다 높은 마녀를 찾아야 한다."

"어중이떠중이 마녀도 아니고 그 글루미엠보다 높은 마녀는...."

"존재하죠. 새로운 마녀가 탄생할 때 가장 어두운 밤, 아르후안을 이끌고 피의 축제를 여는 '두 번째 마녀'가요."

올리시렌은 본인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제 앞에 새로운 마녀가 되실 분이 있군요."

이소엘은 다시금 움직이려 했다.

그녀들이 가장 숨겨야 할 내용을 거침없이 찔러 들어오는 카인을 이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척.

그러나 올리시렌은 팔을 올려 이소엘의 행동을 막았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셋과 달리 맡긴 물건을 돌려 달라는 것처럼 뻔뻔한 얼굴의 카인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왕녀가 아니고 이젠 마녀 올리시렌인데 안 무섭나요?"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왕녀든 마녀든 목 잘리면 죽습니다."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고, 올리시렌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마디를 참지 못하고 꺼냈다.

"미친놈."

Episode.Ⅰ

봄의 찬미

#14

Chapter. 3 봄날 (1)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마녀는 '눈물'의 마녀, 카렌 마이어였다.

그녀는 눈물을 벼려 '밤'을 밀어내는 대장벽을 세웠다. 그 후 대장벽은 인류의 최전선이 되었고, 장벽도시가 발전하고 인구도 늘었지만 그 누구도 모른다.

어째서 마녀, 카렌이 대장벽을 세운 건지.

그리고 알 수 없다.

순백의 대검을 지닌 대장벽의 전사왕이 왜 카렌을 쫓았던 건지.

하지만.

카렌이 장벽도시의 입구에 새겨 둔 마지막 말만큼은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흔아홉 번째의 마녀가 피고 질 때, 겨울은 수평선을 잡아먹을 것이다.

- 대도서관의 일천 금서 중」

현 대륙 어디에 있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명령이 하나 있다.

마녀는 죽는다는 것.

성국의 칼인 이단심판관들은 시뻘겋게 두 눈을 부릅뜨고 온 세상을 샅샅이 훑었다.

마녀를 찾으면 죽인다.

마녀가 될 것 같으면 죽인다.

마녀의 지인은 모두 죽인다.

마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살해 버리는 이단심판관 앞에서 섬 왕국 아이리안은 힘이 없었다.

즉.

"왕녀여도 마녀인 게 밝혀지면 전 죽어요."

올리시렌은 자신과 카인의 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왕녀 아빠도 죽을 거고."

카인은 심드렁하게 말을 덧붙였고, 올리시렌은 기가 막혔다.

"그거 진짜 왕실 모독죄인 거 아세요?"

"미친놈 소리도 들었는데 못할 것 없습니다."

"...."

올리시렌은 다시 욕을 입에 담진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녀가 눈으로 욕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럼 글루미엠은 왜 괜찮은 건가요?"

아벨이 조심스레 묻는다.

마녀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이제야 처음 알게 된 그로서는 언제나 숲을 지배하던 숲의 마녀 글루미엠이 왜 멀쩡한지 궁금했다.

아르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해야 열다섯 소년에게 복잡한 문제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할 때.

"강해서."

카인이 세 글자로 정리했다.

아벨은 존경스럽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카인은 심드렁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성국의 이단심판성은 이름대로 이단을 심판하지. 문제는 그 이단을 팔대 추기경과 성녀가 정해."

"그럼 신도 아닌 사람들이 이단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나요?"

"그래.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으로 움직이니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

올리시렌의 눈이 조금 커졌다.

힘을 앞세우는 단순무식한 전사와 같은 자라 은연중에 생각했다.

하지만, 대륙의 정세를 꿰뚫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이는 모습에 그가 달라 보였다.

휙-.

카인은 손짓하며 모두를 테이블 가까이 불렀다. 테이블 위의 체스판을 정리하며 이어 말했다.

"숲은 멀다. 성국 입장에선 바다도 건너야 해. 왕국도 지나야 하니 더 힘들지. 게다가 북부 엘프의 숲에 엘프가 총 몇인지도 모르니 얼마나 심판관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

"...정말 당신 말대로 세서 두고 보는 거군요."

올리시렌은 조금 씁쓸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이리안 왕국의 제 1왕녀로서 국제정세는 합리와 타협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성국이 아이리안 왕국을 '존중'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손익'을 계산해서 놔둔다는 냉철한 말이 나오니 입맛이 썼다.

카인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잘게 고갤 끄덕였다.

"지금 왕녀님이 개고생하는 것도 약하셔서 그런 겁니다. 저쪽 숲보다 여기 왕국이 더 만만하니까요. 보시죠."

"...."

탁, 탁!

카인은 체스판의 양쪽에 흑백의 여왕을 각자 두었다.

그리고 사이에는.

와르르르-.

나머지 체스 말을 쏟아부었다.

"현재 아이리안 왕국은 두 왕녀를 두고 왕위계승 문제가 치열합니다."

타탁.

그리고 백색 여왕의 뒤로 나이트 두 개를 나란히 두었다.

"그리고 2왕녀에겐 두 후작이 붙어 있죠."

올리시렌은 홀로 있는 흑의 여왕을 잠시 바라보았다.

"제겐 아무도 없군요."

"아뇨."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탁, 타탁-.

그리고 흑과 백 상관없이 손에 집히는 대로 모든 체스 말을 들어 올리시렌을 상징하는 검은 여왕 뒤에 두기 시작했다.

"정통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이볼트 전하께서 멀쩡히 살아 계시고, 당신에게 결격사유만 없으면 이 싸움은 완승입니다."

카인의 달콤한 말.

하지만.

와르르르-.

올리시렌은 여왕 뒤에 있던 말들을 손으로 쓸어 바닥으로 버렸다.

"문제는 이 자리에서 하필 그 결격사유를 들켰네요."

백날 정통성이 있어도, 현 국왕이 지지한다 해도 마녀라면 모든 게 무색해진다.

들키는 순간 성국의 이단심판관이 날아와서는 그녀의 목을 베어 버릴 테니까.

카인은 올리시렌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곤 체스 말 중 비숍을 뽑아선 두 여왕 사이에 두었다.

"결국 힘의 균형입니다. 성국의 입김이 강한 아이리안으로서는 그들의 의견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카인은 두 비숍을 2왕녀를 상징하는 백색 여왕 쪽으로 붙였다.

여왕, 두 나이트, 두 비숍까지 총 다섯.

그리고 여왕 하나.

절망적일 정도의 차이였다.

카인은 흑색 왕을 하나 들어 올리시렌에게 보였다.

"물론 왕국 제일의 검호 에드먼드가 있으면."

탁-.

그녀의 뒤로 등장한 왕의 말.

5대 2의 상황이 되지만 힘으로는 비등비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카인은 곧장 흑색 왕을 손가락을 튕겨 날려 버렸다.

"어떻게든 될 것 같지만, 안 되겠죠. 저쪽의 둘은 맨날 싸워도 이럴 땐 또 힘을 합치니까요."

올리시렌은 고개를 들었다.

분위기가 뒤바뀐다.

정제되지 않고 명명되지 않은 마녀의 마력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르나는 급하게 아벨의 손목을 붙잡고 뒤로 움직였다.

밴더빌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칼을 쥐었고, 기사 이소엘은 밴더빌트를 견제했다.

그리고 천천히.

올리시렌이 안개꽃 같은 회색빛 눈동자를 들어 카인을 마주했다.

"당신 정체가 뭐야."

강하다.

영리하다.

그리고 서늘하다.

기억이라는 게 시작하는 어릴 적부터 왕궁에서 수많은 사람을 봤던 올리시렌은 종잡을 수 없는 카인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수식어로도 어울리지 않는 자.

하나 있다면, 설원(雪原).

"어떻게 이런 것까지 이 땅에서 예측하는 거지?"

그는 지평선 위에서 홀로 눈을 맞이할 고독한 자이리라.

마녀로서 그리고 왕녀로서도 올리시렌은 카인을 이해할 수 없기에, 엄습하는 미지가 그녀에게 맹렬한 공포와 적의를 끌어냈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그녀의 마력들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카인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카인 에셀레드다."

"에셀레드 백작이라도 당신만큼은 생각지 못해."

"내 아버지가 그러든 말든 그게 중요한가?"

"뭐?"

카인은 제 머리를 검지로 톡톡 쳤다.

그러곤 올리시렌의 머리를 검지로 가리켰다.

"생각해라. 우리는 거래를 하는 거다. 나는 너를 미끼로 써서 두 번째 마녀와 담판을 지을 뿐이야."

올리시렌의 눈이 찌푸려진다.

글루미엠도 아니고 역사상 두 번째로 등장한 '수평선의 마녀'를 함부로 언급하는 카인에게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는 기사가 필요해. 마녀로 각성할 때 일어날 아르후안의 재앙은 그대 둘만의 힘으로는 이기지 못할 테니까."

"믿음이 가지 않아."

"그러면 말든가. 호위 기사 하나 말곤 아무 힘도 없는 안개꽃이 퍽이나 하겠군."

"...."

올리시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가장 어두운 밤, 아르후안을 이겨 내기 위해선 둘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올리시렌은 왕녀.

자신의 사익을 위해 아르후안이 시작될 땅의 백성들을 제물로 바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더 강한 자가 필요했다.

"당신이 바라는 당신의 몫. 그거 하나만 생각해. 거기엔 내가 누군지 따위는 중요치 않을 테니까."

겨울이 내려앉는다.

한없이 차갑고 서늘한 겨울에만 맡을 수 있는 눈의 향기가 응접실을 채운다.

카인이 발하는 기세였다.

눈으로 덮어 울긋불긋하던 세상을 모조리 백색으로 만들어 버리듯, 그녀가 뻗어 낸 마력 따위도 삼키는 '겨울'의 힘이었다.

"당신에게 내가 마녀인지 왕녀인지 상관없는 것처럼?"

"그래."

스으으읏-.

올리시렌의 마력이 흩어진다.

카인 역시 자신의 기세를 흩어 버렸고, 응접실은 언제 둘이 부딪쳤냐는 듯 평화로워졌다.

밴더빌트와 이소엘은 서로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세를 풀었다.

민감하게 반응한 아르나 역시 시골 아가씨와 같은 편안한 미소를 다시 연기했다.

그렇게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카인."

올리시렌이 어린아이가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왕녀 저하."

"방금 전까지 서로 반말로 으르렁거렸는데 원래대로 존대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

카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안개꽃의 왕녀가 원래 이런 여자였나?'

그가 보았던 그녀나 소문으로 들었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털털함이 보인다.

다시 사는 과거 속엔 몰랐던 게 참 많았다.

"그래."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밴더빌트가 순간 놀라서 카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카인이 늘 파격적이긴 했지만, 왕녀에게도 이렇게 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었다.

후릅.

카인과 올리시렌.

둘은 자신의 이름을 제외한 모든 수식어를 버린 채,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며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벨은 칼은 없지만, 둘이 계속해서 싸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아벨의 물음이었다.

"그... 마녀가 되는 걸 거부할 수는 없습니까?"

문제의 시작은 올리시렌이 마녀가 되기 때문이니, 그게 사라지면 어떠냐는 의견이었다.

카인은 올리시렌에게 하던 것과 달리 친절히 말했다.

"불가능. 마녀로 각성이 시작되면 늦고 빠르고의 차이는 있어도 절대 거부할 수 없어."

올리시렌 역시 씁쓸히 말을 덧붙였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마녀가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더라고요."

어떻게든 마녀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실패한 자의 말이었다.

그래서 올리시렌은 계획을 바꿨다.

"이단심판관이 어떻게 마녀를 찾는지 아시는 분?"

그녀의 물음에 아벨과 밴더빌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면 아르나는 가만히 있었다.

카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은연중에 대답하길 종용했다.

그녀는 조금 미간을 찌푸리곤 산전수전 다 겪었던 용병답게 마녀심판에 대해 꺼냈다.

"마녀가 탄생할 때 나타나는 '아르후안'을 추적하거나 마녀가 힘을 발휘하면 퍼지는 마력을 추적합니다."

"엇, 그럼 방금 마력으로도 추적되나요!"

아벨은 놀라서 물었고 아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힘이라곤 했지만 진짜 마녀는 각자 '기원'을 가진단다. 그 이름에 걸맞은 '기적'이야말로 마녀의 힘. 성국은 그 기적을 쫓지."

올리시렌은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아르나가 그냥 시골 귀족의 첩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동시에 카인이 아르나는 짐이 아니라 동료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 일부러 대답을 시켰다는 것도 간파했다.

"여우네."

그녀는 카인에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영지의 사람들은 여우라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조심해."

"필립? 그러고 보니 안 보이네."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로스 후작가의 부기사단장 필립이 보이려면 진즉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디 좀 멀리 갔어."

카인의 태연한 대꾸와 달리 에셀레드 백작가의 인물들의 눈이 조금 떨리는 걸 올리시렌은 느꼈다.

물론 아르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채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고.

"어디?"

"저승."

"...."

올리시렌은 평범해 보이는 카인을 훑어보았다.

방금 전 그와 벌였던 신경전이 생각보다 더 위험했던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