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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39 EP.Ⅱ-10

폭풍전야 (1)

「세상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죽어야 할 자를 살리고.

살아야 할 자를 죽였다.

이 세상의 영원을 방해하는 사계절의 마왕을 물리치고 계절의 순환을 몰고 왔어도 세상은 그대로였고.

신에게 빌고 울어도 그대로였다.

빌어먹을 세상.

아무리 해도 고정되지 않는 세상.

내 이름 ■■■ 세 글자조차 알릴 수 없게 만든 이 세상.

신이여 나는 당신을 원망합니다.

어째서 저를 보며 눈물짓고 웃으신 겁니까. 왜 당신의 세계를 내가 지키길 바라신 겁니까.

그리고 왜 절 떠나신 겁니까.

나는 당신을 다시 뵐 것입니다.

너무나도 넓어져서 당신이 흩어져 버린 이 세상을 다시금 그러모아 이 손으로 으깨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나타나겠지요?

-이름 없을 자의 일기.」

에셀레드 백작령, 에델웨알흐.

에드먼드가 성검, '여름'을 쥔 채 클라우 솔라스를 내찌르며 반쯤 부서진 바위.

그 덕인가.

솨아아아아-.

늘 불길한 안개가 감싸고 있고, 바다마저 험난했지만 이젠 장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잔잔한 바다였다.

그 바다의 수평선.

대륙으로 향하는 수평선 너머에서부터 이곳에 온 적 있던 배 한 척이 오고 있었다.

"멀군."

사도, 금빛 새벽.

그의 덥수룩한 백발이 바닷바람이 젖혀지고 시퍼런 눈이 아이리안의 땅을 올곧이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교리수호단원이 반쯤 홀린 표정으로 있었다.

"이제 곧입니다."

선장 노인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며, 금빛 새벽의 말에 대꾸했다.

"성녀를 태우고 올 때는 힘들었겠군."

"황금의 새벽이 오리라 믿고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이름 없을 그대에게 보통의 축복을."

금빛 새벽은 두 손을 잠시 모아 선장을 축복했다. 선장 역시 경건히 손을 모은 후 화답했다.

"이름 없을 사도에게 새벽의 은총을."

"그대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금빛 새벽의 한마디가 배를 감싼다. 분주하게 돛을 펼치고 배를 정비하던 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대표로서 선장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어디에도 있으니까요."

"후후, 그리고 이름 없는 우리는 어디에도 없고 말이야."

선장 노인, 선원, 교리수호단원 그리고 금빛 새벽까지.

그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름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될 뿐이라.

그것이 보통의 사람들.

세상의 누구도 관심 두지 않지만 각자만의 이야기가 있고 삶이 있는 자들.

"정말 대... 단합니다! 어떻게 사흘 만에 성국에서 여기까지."

교리수호단원은 보통 사람들의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 보통의 걸음으로 움직인다면 대개 성국에서 제국을 거쳐 아이리안까지 오는 데 몇 달을 잡는다.

중간에 기차나 말을 탄다고 해도 십수 일은 걸리는 게 상식.

하지만 해가 뜨는 것을 단 세 번 보고서 아이리안에 도착했다.

"혹시 <릴>도 우리입니까?"

그 힘은 마법 도시 <릴>에서 대륙 곳곳에 만들어 둔 공간이동 게이트 덕분이었다.

대개는 각 지역의 대부호나 권력자만 이용할 정도로 관리가 까다롭고 비싸기에 게이트를 이용한 이동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금빛 새벽과 교리수호단원은 게이트를 몇 번 타면서 대륙의 가장 서쪽 항구에 금세 도착했고, 준비되어 있던 선장의 배를 타고 아이리안에 도착했다.

"우리도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금빛 새벽은 싸늘한 눈초리로 말했다.

"실언을 저질렀습니다."

순간 창백해진 교리수호단원은 고개를 숙이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바라보던 금빛 새벽은 그를 일으켜 세운 후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네. 그대는 이제 큰일을 해야 하니까."

"큰일...?"

"후후."

금빛 새벽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에 가득 찬 백악절벽 때문인지, 혹은 아무 말 하지 않아야 새벽을 볼 수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끼익-.

배가 반파된 에델웨알흐를 지나 에셀레드에 닿았다.

금빛 새벽은 교리수호단원을 들고 훌쩍 뛰어내리고 물었다.

"아이리안 섬의 별명을 아나?"

"은둔하는 엘프의 섬으로 들었습니다."

아이리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엘프의 대치는 대륙의 식자 간 유명한 화젯거리였다.

자신들의 땅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유희거리에 불과하니까.

금빛 새벽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것도 있지. 하지만 난 이곳을 이렇게 부른다. 마녀의 섬."

"마녀의 섬?"

"이 섬은 예전부터 질 좋은 넘버즈 마녀들이 많이 나타나거든."

"아."

"랄랑드 성표에선 많이 보이지 않겠지만 말이야."

교리수호단원은 금빛 새벽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성황궁의 지하, 전 세계의 마녀를 쫓는 랄랑드 성표.

그것을 만든 건 성국뿐이 아니라.

마법 도시 <릴>과 상인도시 <델프트>의 기술자들과 함께 만든 물건.

그리고 그런 도시 연합들과 깊은 관계를 가진 보통 사람들이라면 당시에도 뭔가를 했으리라.

스윽-.

교리수호단원은 목을 쓸었다.

왠지 점점 너무 많은 것을 깊게 알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기분.

툭툭-.

금빛 새벽은 그런 단원의 어깨를 소탈하게 치며 길을 걸었다.

"깊게 생각하지 마라. 하나만 생각해라. 우리의 불꽃으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둘은 아이리안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엄중히 바라보던 배의 사람들은 둘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쯤.

"우리의 불꽃으로."

콰가가강-!

폭탄을 터트렸다.

이 자리에 어떤 배가 있었는지 알 수 없게.

"세계를 갱신하리라."

순도 높은 고열의 화염 속, 그들은 스스로를 바쳐 순교하는 자들처럼 웃었다.

그렇게 맹렬한 불꽃 속에서 그들은 불타 사라졌다.

* * *

에버윈은 두 눈을 끔뻑였다.

스스로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도 영 신기했지만, 어느새 왕도 린드브룸에 와서 자신이 살았던 백은의 궁에 온 게 꿈같았다.

"내가 여기서...."

그 옆에는 올리시렌과 하이볼트도 있었다.

멍하니 궁을 훑어보는 에버윈의 모습에 둘은 미소 지었다. 사람이 조금 달라졌을 뿐, 이곳에 있어야 할 모두가 제자리에 위치했으니까.

그리고 아주 조금.

둘은 세계수와 로스 후작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이상해."

한참이고 백은의 궁에 있던 자신의 방을 쓸어보던 에버윈이 중얼거렸다.

"무엇이 말이오? 생전의 그대가 있을 때랑 가능한 한 똑같이 유지하고 있었는데."

하이볼트가 반문했다.

물론 궁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만 있는 에버윈이니 어색할 순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로스의 저주를 이기지 못하고 미쳤었다고 했었지?"

"그렇소."

"헤터워드가 로스의 칼이라면 나는 로스의 머리. 난 힘을 잃는 대신에 로스의 저주도 거의 없애는 방법을 만들었어."

그녀는 자신의 침상 주위를 몇 번 돌고 발로 몇 군데를 때려 보았다.

투웅-.

딱딱한 소리가 아니라 묘하게 울리는 곳을 발견했다.

"...!"

이곳을 계속 찾았던 하이볼트나 올리시렌으로서도 몰랐던 공간의 존재였다.

에버윈은 피식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내가 왕비가 된 게 맞나 보네. 이 패턴 그대로 만든 걸 보면 말이야."

"그곳을 들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바로 들면 안 돼. 이런 공간은 언제 어떻게 발견될지 모르니까 함정도 설치해 뒀거든."

에버윈은 퉁- 소리가 나던 바닥의 공간 주위를 살펴보다가.

끼익-.

촛대와 장식 몇 개를 돌렸다.

청소를 하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닦게 되는 물건들이지만 에버윈이 순서에 맞춰 움직이자.

덜컹-.

바닥의 돌이 살짝 들렸다.

들기 편하게 아래는 좀 파여 있었다.

"역시 나야. 돈이 생기면 이렇게 할 줄 알았지."

그녀는 주먹을 쥐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질린 듯이 올리시렌과 하이볼트가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눈을 돌리며 변명했다.

"로스에 있을 땐 내가 쓸 수 있는 돈이나 구할 수 있는 게 한정되어서 이렇게까진 못했거든. 왕비쯤 되면 되겠거니 했는데 꿈을 이룬 게 좋아서...."

"예...."

올리시렌은 어릴 적에 죽은 에버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쌓이기도 전에 사라진 만큼,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이 미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보다 더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나타난 에버윈은 천방지축이라는 말에 딱 맞고 교활한 여우라는 느낌이 나는 좋은 여인이었다.

올리시렌은 옆을 돌아보았다.

하이볼트가 미소를 띤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그러느냐?"

그는 올리시렌을 향해 반문했다.

"아닙니다."

부부가 되길 잘한 인연이다 싶었다.

어쨌든 소녀 에버윈은 차근차근 뚜껑을 열었고, 바닥에는 상자 하나 분량의 공간이 파여 있었다.

들어 낸 뚜껑 아래.

올리시렌은 붙어있던 스크롤을 가리켰다.

"혹시 저건-."

"응, 마법 스크롤. 아마 하급 파이어윈드일 걸?"

아무리 하급이라고 해도 이름 그대로 불바람을 일으키는 살상력 높은 마법.

에버윈은 올리시렌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신나서 말을 이었다.

"아까처럼 순서에 맞추지 않고 억지로 열면 팡-! 하고 터지는 거지."

"왜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 스크롤을 침상 옆에 두신 건가요?"

"그래야 내 연구 결과를 도둑맞지 않지. 도둑놈도 구워 버리고. 그래도 이 기관을 알지 않으면 절대 안 터지니까 걱정하지 마."

"예...."

에버윈은 손을 뻗어 땅속에 숨겨진 몇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대개는 노트와 펜이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약병도 있었다.

사륵-.

그녀는 연구 노트를 넘겨보면서 미래의 자신이 어디까지 해냈는지 살핀 후 고개를 들었다.

"확실해. 난 로스의 저주를 이겨 냈어."

세계수 근처 딥 포레스트부터 에버윈은 제 죽음에 의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의문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난 함정에 빠졌던 거지."

"함정이요?"

"누군가 내 저주를 알았어. 티가 안 날 정도까지 억눌려 둔 저주를 강제로 터트린 거고."

"그게 누구일ㄲ-."

에버윈의 눈이 순간 부릅떠졌다.

뚜껑 위 파이어윈드 스크롤에 부착해 둔 끈이 당겨지는 게 보였다.

그녀가 만들어 둔 기폭장치.

그녀의 방 밖으로 뚫린 긴 창밖.

"우리의 불꽃으로-."

반쯤 눈이 풀린 사내!

성황궁에 출입할 수 있는 품계의 성직자만 입는 성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는 은빛의 실을 꽉 쥔 채 중얼거렸다.

"세계를 갱신하리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응하기 어려운 찰나의 순간.

"하급의 스크롤이 아닌-."

꽈악-!

에버윈은 바뀐 스크롤에 놀라다가 곧장 그대로 자기 몸으로 스크롤을 감쌌다.

하이볼트는 곁에 있던 올리시렌을 몸으로 감쌌다.

콰가가가가가가강-!

최상급의 파이어윈드 스크롤이 터졌다.

에버윈이 몸으로 막아서 폭발이 약해졌지만, 왕궁의 대마법 결계가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기기기기기기긱-!

뒤늦게 일어난 흑색의 파동.

검은 눈과 검은 머리로 변한 올리시렌이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우리 딸-."

에버윈의 희생으로 폭발은 약해졌지만, 그녀의 몸은 온전치 못했다. 그녀의 머리만이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고.

조금 늦은 올리시렌의 힘에 하이볼트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미 몸의 뒤편은 새카맣게 될 정도로 익어 버렸다.

그리고 창이 있었던 자리 너머.

백은의 궁 벽에 처박힌 성직자는 끊임없이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크크큭- 우리의 불꽃으로-."

엘프 여왕 글루미엠이라는 외적의 존재로 대체로 평안했던 아이리안의 땅에.

"세계를 갱신-하리라-."

불의 폭풍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140 EP.Ⅱ-10

폭풍전야 (2)

"허-억-."

숲의 한가운데.

아벨은 간신히 숨을 쉬면서 나무에 몸을 기댔다. 긴장을 풀지 못하는 듯 오른손으론 세검을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 머리카락이 보이네."

쉐에에에엑-!

이젠 지긋지긋하고 공포스러운 아르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벨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화살이 날아왔다.

쿵-.

화살촉을 없앤 나무 화살이었다.

아벨은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움직여 피했다.

"숨 쉴 여유가 있구나."

이어지는 카인의 말.

쉐엣-!

나무의 그림자 틈.

언제 어떻게 숨어 있던 건지 알 수 없던 카인이 평범한 세검을 들고 아벨의 발이 있던 곳을 찔렀다.

티잉-!

아벨은 칼을 휘둘러 카인의 검을 튕겨 냈다.

카인 역시 평범한 병사들이 찌를 수준으로 찔렀기에 가볍게 튕겨 나가면서 다시금 숲의 그림자로 숨었고.

쉐에에엣-.

아벨이 한숨 돌리기도 전에 아르나의 화살이 아벨의 가슴을 노렸다.

팅!

그리고 아벨이 입고 있던 갑옷에 튕겨 나갔다.

"아벨 패배!"

신난 아르나의 목소리와 함께 둘이 나타났다.

아벨은 그대로 땅에 누워선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숨을 쉬었다.

"허억-, 헉. 오늘은 얼마나 버텼습니까."

아르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파리 틈으로 비춰오는 햇빛 조각만으로도 시간을 계산했다.

"한 네 시간 정도."

탁-.

"4시간 37분."

카인은 품속에서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 정확히 말했다. 그 모습에 아르나는 쓰게 웃었다.

"그거 생각보다 잘 쓰시는군요."

"그래도 선물 받은 거니까요."

-네가 없는 만큼 잘해 볼게.

원정군이 남하하는 날.

올리시렌은 카인에게 회중시계를 건넸다.

-하지만 너무 늦지는 마. 내가 시계까지 줬으니까 시간 잘 보고 와야 해. 공작위 받아야지. 카인 워커 공작님.

아쉬웠다.

카인과 멀어져야 하는 것이.

하지만 올리시렌은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왕관이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왕관을 줘야 한다는 걸.

그래서 아쉬움을 담아 회중시계를 건넸다.

때가 되면 내려오라고.

어느덧 거의 끝에 다다르는 봄.

아마도 전령이 올 터.

카인은 아벨을 업고는 아르나와 나란히 숲 밖으로 나섰다.

"여깁니다!"

저 멀리 카인을 따르던 충성스러운 노기사 밴더빌트가 손을 흔들었다.

"공자님."

그리고 아벨을 따르는 노기사 빅터가 쪼르르 달려왔고, 카인은 그에게 아벨을 맡겼다.

빅터는 흐뭇한 얼굴로 아벨을 부축했다.

"오늘은 꽤 버티셨습니다."

"빅터 경이 알려 주신 정보들이 제법 좋았습니다."

듣고 있던 아르나가 한마디를 덧대었다.

"어쩐지 묘한 꼼수만 늘었더니."

그러자 빅터는 뒤통수를 긁었다.

"일단 살아야지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벨 공자님께 알려 드린 건 그런 것들이죠."

"아,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덕분이 아벨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아르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빅터는 화답하듯 숙였다.

"북쪽에서 산양 하나를 잡았습니다."

큰 솥을 젓고 있던 밴더빌트의 말에 넷은 둘러앉았다.

카인, 아벨, 아르나.

그리고 밴더빌트와 빅터까지 에셀레드의 다섯 명이 내려가지 않고 숲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에셀레드의 기사단장 클로이드도 남고 싶어 했지만....

'아무리 한가로운 영지라고 해도 책임자 하나는 있어야지.'

자신도 에드먼드도 없는 영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클로이드다. 무식할 정도로 우직한 만큼 가장 현상 유지를 잘하니 맡길 만했다.

툭-.

카인은 밴더빌트가 그득하게 담아준 스튜를 품속에 있던 수저로 퍼먹으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까지 클로이드를 우직하게 키웠나 했더니, 이런 마음이었나.'

답답한 인간, 클로이드.

하지만 변화가 없이 언제나처럼 늘 농사를 짓는 에셀레드 영지엔 더없이 걸맞은 인물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볼 땐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땐 믿고 맡길 만하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밴더빌트도 수련해야 할 텐데 괜히 우리 때문에 요리 수련만 하는 것 같군."

맛있었다.

밴더빌트가 없었다면 늘 요리하고 싶어 하던 아르나가 할 뻔했다.

굳이 먹어 보지 않아도 그 맛이 상상되기에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그때 밴더빌트가 자신 있게 일행들의 식사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아르나보단 낫겠지 했는데.

"와, 속이 확 풀리는 거 같아요."

아벨이 해맑게 웃으며 말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나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밴더빌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에셀레드 영지에서 주로 혼자 지내니 느는 건 요리 실력뿐이었습니다."

아리안을 죽였다는 오명.

그 덕에 홀로 오두막을 짓고 살고, 아니면 카인과 같은 저택에만 있어야 했다.

허겁지겁 먹던 빅터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럼 내가 자주 놀러 가도 되는가? 에셀레드 영지에서 나이대가 비슷한 게 그대밖에 없어서."

"당연히, 환영하오."

두 노기사는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카인과 아벨.

섬기는 자는 다르지만 둘이 친형제보다 더 끈끈하게 지내는 이상, 기사들 간에도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섯이 웃으면서 스튜를 먹던 중.

덜그럭-.

가장 먼저 수저를 멈춘 건 카인이었다. 몇 초 후에 멈춘 아르나는 카인을 돌아보았다.

둘의 반응에 다른 셋도 의아한 듯 식사를 멈췄다가, 같은 걸 느낀 듯 이내 얼굴을 굳히고 각자의 무기를 잡았다.

"스물입니다."

아르나는 등에 메고 있던 폭풍활을 다시 쥐며 카인에게 말했다.

"소리로 보아하니 전원이 갑옷을 착용했습니다."

그다음은 아벨.

클로이드와 빅터는 각자의 무기를 쥐고 전위로 나섰고, 아르나는 후위에 섰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카인과 아벨이 섰다.

저벅-, 저벅-.

남쪽에서부터 줄 맞춰서 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 새카만 망토를 두른 채 은빛의 갑옷을 입은 왕실기사단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웨인 단장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군."

카인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일행들은 카인의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왕실기사단장 웨인 시케르는 손을 들었다.

"전원, 정지."

쿵.

그를 따르던 왕실기사단 스물은 제자리에 멈췄고 그 혼자 카인의 앞으로 나왔다.

"시간으로 따지면 스무날이 좀 안 되는데,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웨인 경의 말소리엔 전과 달리 숨길 수 없는 피로와 지침이 섞여 있었다.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려오라고 연락이 슬슬 올 때라곤 생각했는데, 웨인 경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하이볼트의 기사다.

그는 그의 뒤를 살피며 물었다.

"전하께서도 오신 겁니까. 딱히 보이시진 않는데."

"전하께선 현재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십니다."

"...?"

이번에 느껴지는 건 절망이라.

휘익-.

웨인 시케르는 자신의 검은 망토를 당겨서 카인에게 보였다.

"에버윈 왕비께서 다시 사망하셨습니다."

"...!"

"하이볼트 전하는 간신히 목숨은 건지셨지만, 현재 의식을 찾지 못하시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테러입니다."

카인은 그 순간 올리비아가 남긴 한마디가 떠올랐다.

-당신이 같이 내려오지 않고 올리시렌에게 상황을 맡기는 며칠은 과연 악수일까요, 묘수일까요.

"혹시 범인은 올리비아인가?"

선은 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인성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라는 억제기를 믿었다. 그녀가 먼저 선을 넘어서 왕위를 탐하면 자신 역시 거침없이 죽일 테니까.

하지만 카인의 예상과 달리.

"성국입니다."

"뭐...?"

웨인 시케르는 담담히 폭발이 일어났던 그날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테러범에 대해 이어 말했다.

"성국의 고위급 성직자의 정체는 이단심판성 교리수호단의 단원, 파피 로레단(Papi Loredan)입니다. 그가 백은의 궁에서 2급 파이어윈드 스크롤을 터트렸습니다."

"미친. 성녀는 뭐라고 하지?"

"자신들은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 그가 교리수호단원은 맞지만 이미 며칠 전에 성황궁에서 배교자로 낙인찍었다고."

"꼬리 자르기인가, 사실인가."

이미 성녀가 내정간섭을 하겠다고 선언한 상황.

'이렇게까지는 아닐 텐데.'

성국의 열렬한 교도를 이용해서 상황을 반전시킬 순 있으리라.

올리시렌이 왕이 되는 데 가장 큰 지분은 정통성이다.

즉, 현왕인 하이볼트의 지지.

이전에야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지만, 이제 활동하는 그의 지지라면 꽤 크다.

'그걸 이렇게 날린다?'

카인은 턱을 쓸었다.

대륙에서야 흔한 일이다.

아이리안이 과할 정도로 서로 친하고 하하호호 지낼 뿐이지, 당장 크로이츠 제국만 봐도 황실에 피바람이 그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정말 그가 배교자일 수도 있다.

사건을 저질러 놓고서 눈 가리고 아웅 하듯, 배교자라고 뒤집어씌워 두고 꼬리 자르기를 하는 걸 수도 있는 상황.

"그리고 현재 아이리안은 절반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올리시렌 대 올리비아.

원래도 절반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죽이면서까지 싸우려 하진 않았다.

'승자는 왕을, 패자는 아마 로스 후작령을 계승했겠지.'

그러나 이젠.

"성녀께서 올리비아 왕녀님을 지지하는 이상, 올리시렌 왕녀님께선 왕위계승에서 이기기 위해 저지른 테러라고 생각하십니다."

"저쪽에선?"

"억울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마녀의 힘으로 성국의 배신자를 만들어서 일으킨 자작극이 아니냐고 하고 있죠."

"저들의 발언은 무리가 있군."

웨인 시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의 힘이 대단하다고 하나 아이리안 섬에서 제국 너머 성국의 성직자를 회유할 순 없으니까요."

"그럴 만한 세력도 없고."

제국의 황실에서나 가능할 스케일이다.

카인은 잠깐 북쪽을 돌아보다가 웨인에게 물었다.

"혹시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있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에드먼드 경께선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십니다."

"불행 중 다행이군. 나한테는 성녀 쪽에 있겠다고 하셨으니까."

아무리 에드먼드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성녀를 지지하진 않을 눈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귀족 세력의 무게도 무게지만, 직접적으로 강한 무력이 한쪽에 쏠려 있으면 큰일이 날 터.

카인은 그래도 밸런스가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웨인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성국의 '가을기사단'에서 팔라딘 셋이 건너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수석 팔라딘이라서...."

"부기사단장 급이군."

평범한 영지의 기사단에서도 부기사단장이면 기사단의 허리.

쉽게 말해서 2인자.

기사단장 다음으로 두 번째로 강한 자들이다.

성국은 영지들로 구성된 아이리안 왕국이나 직할령과 공작령으로 구분된 제국과 달리 철저한 일원 체계다.

성황의 이름으로 일사불란하게 성국의 작은 땅은 물론이고 전 대륙을 향해 자신들의 힘을 보내야 하므로, 그들의 다섯 기사단은 엄청나게 강했다.

최정점엔 마스터 팔라딘이.

그 아래는 다섯 기사단장이.

그다음이 수석 팔라딘이라 불리는 부기사단장 급 기사가 있다.

게다가 이단과 관련된 사안에선 바르베타 총교구장 급의 힘을 부릴 수 있는 자들.

"올리시렌 쪽이 밀리겠어."

카인이 없는 상태에선 일방적이라.

그나마 그녀가 지닌 끝도 모를 마녀의 힘이 버틸 것이다.

"카인 워커, 예비 공작님."

쿵-.

웨인 시케르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쿠구궁-.

그를 따라 왕실기사단 스물도 같이 무릎을 꿇었다.

"아이리안을 다시금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141 EP.Ⅱ-10

폭풍전야 (3)

['겨울'이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고개 숙인 웨인 시케르의 머리 위로 '겨울'의 메시지가 보였다.

['겨울'이 이전 세계선에서 하이볼트가 죽은 날과 이번 일의 날짜가 같다고 말합니다.]

'하이볼트가 그렇게 빨리 죽었다고?'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가문에서 천대받고 있었어도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못 들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자 겨울은 부연해서 말했다.

['겨울'은 하이볼트가 죽은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당시에도 눈을 감은 채 더는 못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하이볼트는 같은 날 다른 이유라지만 더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카인은 동시에 이런 일에 대해서는 절대 어떤 말도 하지 않는 <사계절의 신기>인데 갑자기 말해 준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 세계선 고정도?'

['겨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카인이 바꾼 세계만큼이나 바꾸지 못한 세계도 크다고 말합니다.]

현재 세계선 고정도는 22.5%.

그렇다면 바뀌지 않은 이 세상의 정해진 운명은 무려 77.5%라.

카인이 무수히 바꿨지만, 아직도 그득하게 남아 있는 운명이 카인의 주위에 산재되어 있다.

카인은 마음을 굳히곤 물었다.

"올리시렌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웨인 시케르는 무거운 표정으로 카인의 눈을 피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카인은 직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이볼트의 기사 웨인 시케르가 병상에 있는 그를 두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으리라.

그리고 그건 올리시렌과 관계되어 있을 터.

"왕녀님은... 눈앞에서 폭발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녀가 마녀의 힘을 얻었다고 기사가 되는 건 아니다.

찰나의 시간을 노리는 검을 맞상대하는 기사나 워록은 되어야 짧은 시간에 자신의 힘을 끌어 낼 수 있다.

이런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아무리 강한 힘을 들고 있다고 해도 즉각적인 반응은 힘들었을 터.

"반응이 늦었겠군요."

카인은 단숨에 맞혔다.

웨인 시케르는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왕녀님의 가슴을 무겁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직접 보지 않았지만, 카인은 알 수 있었다.

정신을 되찾은 아버지, 하이볼트.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잠시나마 돌아온 어머니 에버윈.

일반적인 부모님이 눈앞에서 죽어도 서러울 판국에, 되찾은 부모가 죽는 걸 보면 어떤 심정일 것인가.

그것도 자신이 막을 힘이 있음에도 못했다면?

"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

웨인은 왕도가 있는 남쪽을 돌아보았다.

* * *

린드브룸의 왕궁, 알현실.

"언니, 아버지를 살려야죠!"

올리비아는 소리 질렀다.

그녀의 뒤로 성녀 카테리나와 수석 팔라딘, 둘이 서 있었다.

그리고 왕좌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올리시렌은 입을 열었다.

"꺼져."

새카만 눈과 새카만 머리.

지금까지는 마녀의 힘을 필요할 때만 꺼내 썼고, 그에 반응하듯 그녀의 눈과 머리의 색이 검게 변했었다.

하지만 불의 폭풍이 치솟은 날부터.

올리시렌의 눈과 머리는 언제나 새카만 흑색이었다. 한순간이라도 절대 틈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한 그녀의 의지였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뒤에 있는 성녀를 가리켰다.

"성녀께서 성법을 베풀어 주신...."

콰앙-!

올리시렌은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뭐, 베풀어? 이제 와서? 일을 저질렀으면 끝을 보든가.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성녀?"

절절한 분노가 스며든 올리시렌의 말에 올리비아는 움찔했다.

아이리안 왕가의 회색을 가졌을 때 안개꽃이었던 올리시렌은 이젠 조금만 닿으면 누구라도 죽여 버릴 흑장미가 되었으니까.

가슴을 꽉 쪼이는 올리시렌의 힘에 성녀는 담담히 말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교리수호단원 파피 로레단은 배교자입니다."

"사건은 벌여 놓고, 추궁은 당하기 싫어서 배교자라. 참 성국다운 행동이군."

"저희는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성녀도 성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반쯤 눈이 돌아간 듯 분노에 삼켜진 올리시렌에겐 철저히 딱딱한 모습만 보였다.

쿠웅-.

파동이 퍼져 나간다.

마녀가 자신의 힘을 쓸 때 일어나는 파동과 닮았지만, 이제는 그것과도 달라진 기묘한 파동.

그 속에서 느껴지는 허탈함과 분노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셋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대들이 그를 배교자로 선언한 건 며칠 전이라고 했지. 성국에서 아이리안까지 며칠 만에 오는 게 가능한가?"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릴>의 공간이동 게이트를 사용한다면...."

"게이트가 돈만 있으면 타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신분을 검사하는데, 어찌 배교자가 게이트를 탈 수 있지?"

무작정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올리시렌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봤고, 가장 심증이 높은 건 역시 성국이었다.

"그리고 아이리안으로 들어오는 배는?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배를 타고 와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인데, 이게 배교자 하나의 힘으로 가능한가?"

성녀의 눈이 가늘어진다.

논리도 충분하고 이미 감정에 사로잡힌 올리시렌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도 이미 말씀드린 거지만, 저희가 아니라 그건 다 '보통 사람들'이라는 조직이 있어서."

"그들이 대단한 건 나도 알지. 하지만 그게 성황청에 배교자를 만들고 <릴>의 게이트를 뚫고 바다를 건너서 린드브룸 왕성의 경비를 넘을 정도인가?"

"...."

"정체도 알 수 없는 그들보다는 성국에서 마녀가 왕에 오르는 걸 막기 위해 벌인 테러라는 게 좀 더 가능성 높은 추측 같은데."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겠군요."

"말로 할 시간은 끝났으니까."

저벅-.

성녀는 몸을 돌렸다.

수석 팔라딘은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고, 올리시렌과 성녀 사이에서 미간을 찌푸리던 올리비아는 소리쳤다.

"자꾸 이렇게 거부하시면 결국 있는 건 내전뿐이에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는 내가 앉아 있는 이 왕좌를 바라는 것뿐이면서."

올리시렌의 차가운 말.

"제 일보다 왕국민의 고통을 생각해서 내전을 일으키지 않으려던 언니는 어디 갔죠?"

"네 말을 듣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네 말에 흔들리던 올리시렌은 어머니와 같이 죽었다."

올리시렌은 자신의 검은 머리를 들었다.

회색의 눈과 머리를 지녔던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불처럼 타오르는 어둠과 복수의 왕녀만 있을 뿐.

"...."

올리비아는 씨알도 통하지 않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젓곤 성녀를 따라나섰다.

쿵-.

알현실의 문이 닫힌다.

아무도 없이 고독한 왕좌에 앉아 있던 올리시렌은 걸음을 옮겼다.

휘적-, 휘적-.

왕궁에 사람이 없다.

이미 누가 어떻게 성국에 회유된 건지 모르는 이상 못 믿을 사람을 가까이 둘 수 없었다.

끼익-.

그녀가 걸어간 곳은 하이볼트의 침실.

소독을 해 줄 향이 곳곳이 피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하이볼트가 눈을 감은 채 둥둥 떠 있었다.

그의 뒤통수부터 등판, 엉덩이, 발끝까지.

완전히 타 버린 피부 위로 올리시렌은 가져온 포션을 천에 묻힌 후 천천히 올렸다.

"아버님은 잃을 수 없습니다."

성국의 신성 포션을 쓰면 좀 더 빨리 치유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성국을 믿을 수 없는 바.

올리시렌은 마탑에서 소량으로 만들어지는 마법 포션만으로 하이볼트의 화상을 감쌌다.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절대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전에 보이던 건 자신의 미래였다. 하지만 이제 보이는 건 에버윈의 머리였으며, 폭발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구하려던 하이볼트의 품이라.

"복수할 거야."

꽈악-.

올리시렌은 두 주먹을 으스러지라 쥐었다.

지금까지 남을 위해 강해지려던 그녀는 이제부터 자신을 위해 살 것이다.

더는 이렇게 잃고 살 순 없으니까.

까악-, 까악-.

왕궁에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저 멀리.

왕궁의 대마법 결계 밖, 높은 탑에 노인이 걸터앉아 있다.

그는 성녀와 올리비아가 밖으로 나와서 메이누스 총교구로 향하는 걸 보며 씨익 웃었다.

"마녀가 잘 숙성되고 있군."

* * *

"이젠 마녀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차 안에서 성녀 카테리나가 입을 열었다.

"올리시렌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눈앞에 있는 증거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있어요."

"정말 성국이 아닌가요?"

올리비아의 물음.

성녀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요, 이미 역사서에 나와 있던 것처럼 저희는 타국의 정치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제가 내정간섭을 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차원. 그리고 당시엔 성국에다가 마녀가 있다고 보고조차 하지 않았었고요."

성녀 입장에선 속이 터졌다.

카인과의 약속에 따라서 마녀의 존재는 눈감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국의 추기경 회의에 보고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할까.

"게다가 정말 이런 자작극을 벌일 거라면 멍청하게 성복을 입은 채로 테러를 벌이겠어요?"

평범한 하인인 상태로 일을 저질렀다면 이런 상황이 오지도 않았으리라.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차의 밖을 돌아보았다.

"아이리안의 국법에 따르면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채 전대 왕이 승하한다면, 칠대귀족의 선거로 차기 왕을 뽑습니다."

"저희에게 조금은 유리하겠군요."

성녀는 올리비아의 말에서 승산이 있음을 느꼈다.

이러나저러나 이쪽엔 맥로든 후작이 있으니까.

"예. 아버지께서 저렇게 되어서 카인이 아직 공작이 아니라 더더욱 나아졌죠."

"그럼 선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힘을 실을 수 있으면 실어드리죠."

카테리나는 올리시렌에게 학을 뗐다.

마녀도 문제지만 지금처럼 정신의 문제도 보이는 이상 철저하게 올리비아를 밀어 줄 생각.

올리비아는 아이리안의 국법에 관해 설명했다.

칠대귀족의 선거가 있을 땐 각자 지닌 표가 다르다.

백작이 1표.

후작이 2표.

언제 생길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나타나면 공작은 3표.

그리고 백작이 총 5명이니 5표가 가능하고, 후작은 2명이니 4표.

"저는 맥로든 후작과 브래들리 백작의 표가 있어서 3표예요."

"그럼 올리시렌은 4표겠군요."

네 명의 백작.

웨어햄, 크로울, 라마이닝, 에셀레드.

각자 한 표씩이니 성녀는 투표에서 밀린다고 바로 판단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에셀레드는 현재 백작이 없죠."

"카인이...."

"그가 로드라고 불리긴 하지만 백작위를 공식적으로 계승하진 않았죠. 게다가 아직은 공작도 아니니 3표를 행사할 수 없고."

"에드먼드 님은 실종상태시니 표를 행사하지 못하지요."

3대 3.

로스 후작이 죽으면서 비어 버린 두 표만큼이나 저쪽의 표도 계산이 애매하게 된 상황이라 절묘하게 표가 갈렸다.

성녀는 저쪽 백작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신실한 분이 없으시군요."

"아이리안은 워낙 실용적이라."

왕권을 상징하는 도끼의 이름이 엘프의 머리를 잘 쪼갰다고 해서 '헤드브레이커'인 마당.

당연히 고위 귀족들의 성향 역시 신실한 신자보다는 현실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

올리비아는 쓰게 웃었다.

"서로 힘 대결입니다. 죽어서 모든 걸 잃거나, 살아서 모든 걸 얻거나."

각자의 세력을 걸고 벌이는 내전.

하이볼트 국왕이 비운 자리를 두고 두 왕녀가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성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북쪽을 돌아보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상황을 온건히 풀 사람은 하나밖에 없겠습니다."

"예. 그리고 그가 돌아오면 저는 패배가 확실한데... 보고 싶긴 하군요."

카인 에셀레드.

불의 폭풍이 휩쓴 자리에 자라나는 분노의 초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42 EP.Ⅱ-10

폭풍전야 (4)

후두둑-.

비가 내린다.

세계수가 사라지면서 숲의 절반이 뜯어져 나갔지만, 절반은 남아 있었다.

카인 일행은 간이 천막을 둥그렇게 두른 후 뻥 뚫린 가운데에 비에도 꺼지지 않는 마법의 모닥불을 피워두었다.

박자감 있게 떨어지는 빗소리와 언제 들릴지 모르는 장작 소리가 함께하는 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르나가 카인에게 물었다.

낮에 왔던 왕실기사단장 웨인은 카인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자,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기다리겠다며 돌아갔다.

그리고 카인은 별다른 말 없이 오늘 진행하려고 했던 아벨의 수련을 모두 끝냈고.

"...."

카인은 아르나의 물음에도 딱히 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카인의 보랏빛 눈에 가득한 고민을 보았다.

"저희는 공자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노기사 밴더빌트와 빅터는 카인을 향해 슬쩍 몸을 돌리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형님, 숲의 수련도 좋지만, 숲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을 겁니다."

아벨은 카인이 짊어진 짐 중 자신의 무게를 덜고자 입을 열었다.

카인은 자신을 걱정하고 믿어 주는 동료들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다가 마지막에 아르나를 바라보았다.

"작은어머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이 일을 명분으로 삼아서 곧장 올리비아를 처리하고, 올리시렌 왕녀님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할 겁니다."

"그리고요."

"이번 테러는 여러 가지로 의문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급한 일이 있으니, 일단 왕이 되면 그때 파고드는 걸로 하겠습니다."

대륙식 처리법.

사실보다도 본인에게 이득이 되냐를 따진 후 철저하게 써먹는 것이 비정한 대륙의 정치였다.

아르나는 어쩔 수 없이 대륙에서 태어나서 자랐었으니 대륙적인 생각을 했다.

"정석적이군요."

아르나는 카인의 대답에 눈을 빛냈다. 그녀의 선연한 눈동자가 망설임이 가득한 카인의 눈을 뒤쫓았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예, 올리비아도 꽤... 아니, 솔직히 올리시렌보다 더 왕에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아르나는 카인이 뱉은 고민에 뒤따라 물었다.

"제가 감히 공자님의 모든 생각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저희는 올리시렌 왕녀님을 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카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답지 않은 멈칫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카인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왕도로 가 보죠. 과연 누가 더 왕에 어울릴지 우리가 판단하기보단, 그들이 증명할 수 있게."

결국 깊은 속내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다음 날 남하를 결정했다. 그 카인답지 않은 애매함에 아르나는 한 번 더 물으려다가.

꽈악-.

소매를 당기며 작게 고개를 젓는 아벨의 모습에 입을 닫았다.

* * *

['겨울'이 카인이 왜 이렇게까지 머뭇거리는지 궁금해합니다.]

모두가 잠든 심야.

뜬눈으로 모닥불가에 앉아 있는 카인에게 '겨울'이 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전부터 쭉 자신과 함께했던 '겨울'의 물음이라면 피하기 어려웠다.

카인은 불쏘시개로 반쯤 무너진 장작들을 그러모으면서 낮게 말했다.

"아이리안에 물든 모양이다. 이들의 평화와 정에 나도 빠져 버렸어."

['겨울'이 당신을 향해 쓴웃음을 짓습니다.]

아르나와 반대로 카인은 아이리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어른으로 성장한 곳은 대륙이었다.

용병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했고.

용병 중에서도 가장 더럽다는 제국 귀족들의 추문을 해결하는 최하급 용병이었으며.

결국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고위 귀족의 사생아와 엮이면서 고난을 겪었다.

그 후 용병 일을 집어치웠지만, 할 줄 아는 건 칼질뿐이라,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싸운다는 대장벽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소꿉놀이 같았다. 고위 귀족들은 어릴 적 모두 친구였고,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잘 알지."

제국은 크게 3대 공작령과 황실 직할령으로 나뉜다. 네 개의 영역은 각각 아이리안보다 훨씬 컸고, 하나의 국가처럼 움직였다.

서로 간에는 철저하게 남남이었으며, 같은 영역 내에서도 냉혹한 땅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 선택으로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누군가는 살아야 하지."

['겨울'이 모두가 살아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당신을 위로합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과 어느새 약해진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칼을 쥔 자는 각오를 해야 해. 언제든 칼을 휘둘러서 상대를 죽일 각오, 그리고 내가 칼에 맞아 죽을 각오."

타닥-.

카인이 애써 모았던 장작이 무너진다. 그는 익숙하게 불쏘시개를 휘둘러 좀 더 오래 가게 모았다.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최악의 각오를 결심해야 하는 게 나다. 그리고 나는 유약하게도 아직 죽일 각오를 하지 못했어."

['겨울'이 언제나처럼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카인은 쓰게 웃었다.

어쩌면 아까 전 겨울이 지었던 쓴웃음과 한없이 닮은 것이라.

순간 둘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스륵-.

뒤에서 소리가 났다.

조용히 중얼거리던 카인은 고개를 돌렸고, 가벼운 복장의 아르나가 걸어와선 카인의 옆에 앉았다.

"저는 공식적으로는 모험가입니다. 가끔 용병 공고가 뜨면 지원하는 정도죠."

모험가와 용병.

서로 퀘스트나 의뢰에 따라 움직이는 건 같지만, 성향이 극명히 달랐다.

모험가는 말 그대로 모험하는 자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사소한 의뢰들이나 돌아다니는 자들만 해결할 수 있는 의뢰를 맡는다.

반면 용병은 피를 먹고 사는 자들.

용병들이 불리는 곳은 전장이며, 용병을 찾는 자들은 피를 바라는 자들이다.

물론 돌아다니면서 의뢰를 받는 것은 서로 같으니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니나, 아르나처럼 용병으로서 전장까지 참여하는 모험가는 극히 드물었다.

"모험가는 퀘스트 샵을 통한 퀘스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죠. 반면 용병은 철저하게 용병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용병 길드 시스템에 속해 있고요."

"예."

"재미있는 건 양쪽의 성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퀘스트 네트워크에는 작은 상처가 났을 때 쓰면 좋은 약초 정리나, 맛없는 음식을 단번에 살려내는 조미료 모음 같은 것도 올라옵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용병으로 생활할 때 한두 번 본 적이 있었다.

['겨울'은 그런 글까지 봤으면서 사과파이는 왜 그딴 식으로 만드는지 물어보자고 합니다.]

카인도 조금은 궁금했지만 못 들은 체했고, 아르나는 말을 이었다.

"반면 용병 길드 시스템에는 그런 교류가 없다시피 합니다. 철저하게 의뢰나 불성실 용병, 길드 지부의 치부 등만이 올라오죠."

"그렇군요."

"그래서 용병으로 활동할 땐 가끔 모험가의 퀘스트 네트워크가 부럽곤 합니다, 그들이 햇살이라면 용병은 핏빛이니."

"그리고 모험가도 가끔은 용병 길드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느슨한 퀘스트와 달리 용병의 의뢰는 반드시 지켜지니까요."

아르나의 눈이 커진다.

카인이 대륙에서 생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너무 잘 알고 있어서였다.

카인은 조금 더 부연해서 말했다.

"피를 부르는 용병을 부르는 자들이 사기를 치면 길드 차원에서 철저하게 응징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용병 길드의 의의.

걸린 의뢰는 반드시 달성하며.

달성한다면 반드시 보상받게 한다.

철저한 주고받기의 신념 아래 뭉친 것이 용병 길드라, 용병들이 용병 길드의 높은 수수료를 욕하면서도 나가지 않는 이유였다.

그간 길드를 따라 한 자들은 많았지만, 결국 긴 시간 동안 신뢰를 잃지 않은 건 그들뿐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카인 공자님은 모험가와 용병 사이에서 고민하시는 것 같습니다."

"...."

맛을 봐 버렸다.

늘 피의 구렁텅이와 전장의 설원을 구르던 전사가 따스한 아이리안을 만났다.

로스 후작이 제법 사나웠다곤 하나 대륙의 기준에선 그것마저 귀엽다.

"그리고 친구라는 것에 당황하시는 것 같고요."

아르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카인은 곧장 그녀를 돌아보았고, 아르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올리시렌 왕녀님과 친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거 같습니까."

"뭐... 그렇습니다."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붙이자면 '친구'리라.

"그래서 이러시는 겁니다."

"...?"

"이전엔 그녀는 왕녀였습니다. 왕이 돼서 우리를 위해 움직여 줄 자. 이름보다 왕녀나 왕이라는 것으로만 불려도 충분한 사람."

아르나는 아르나였다.

제법 오래 살기도 했고 모험가와 용병 생활을 오래 하면서 핵심을 꿰뚫는 능력이 생겼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런 역할로 불리기보단 '올리시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맞는 사람이 되었죠."

"우리에게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무섭지요."

['겨울'이 아르나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제법 괜찮은 멘토 같다고 말합니다.]

타닥-, 타닥-.

카인과 아르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계속해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관계.

그리고 역할의 관계.

카인은 아르나가 짚어 준 핵심을 들으며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저답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결심하신 겁니까?"

"예. 단꿈에 잠시 저를 잊었던 것 같습니다."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카인 공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툭-.

카인은 허리춤의 아그웨스카를 쳤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기보단, 당장 다음 발걸음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가 급한 사람."

미래를 생각하며 몸을 사리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과거의 힘을 조금 되찾고 아이리안 내에서 강해졌다는 것에 취했었다.

그가 가야 하는 건 대륙이다.

에드먼드와 같은 괴물들이 산재해 있고, 별별 괴물과 신비가 숨 쉬고 있는 땅.

그뿐일까.

인간들도 제국과 성국, 도시연합의 형태로 모여서 그 모든 신비를 짓밟는 곳.

스윽-.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아벨의 막사였다.

"제가 생각했던 계획의 1단계가 얼추 마무리되니 헛생각에 빠졌었나 봅니다."

1단계, 아벨을 아이리안에 둔다.

그렇기 위해선 아이리안 왕국이 아벨에게 편안하게 안정되어야 한다.

이전 세계선에서 카인이 다짐했던 목표였다.

아르나는 되물었다.

"그럼 다음 단계는요?"

-저는 가짜 용사고, 형님이 진짜라는 겁니다.

카인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이번엔 비어 있는 반대편 허리춤을 치며 말했다.

"용사가 되어 보려고 합니다."

아르나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째서 제가 진짜 용사인지 궁금해졌거든요."

오른편의 허리엔 용사의 상징인 성검, '여름'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겨울'이 자신도 돕겠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좋은 말'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든든한 연결도 있다.

휙-.

카인은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아르나는 한결 가벼워 보이는 카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세계수보다 더욱 거대하게 움직일 미래의 용사를 향한 경의였다.

그렇게 북쪽의 폭풍이 한층 더 거세졌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43 EP.Ⅱ-11

화이트아웃 (1)

「본래 성국은 성류관, '가을'을 계승하고 있었고, 크로이츠 제국은 성검, '여름'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계절의 신기>는 성황과 황제의 정통성을 상징하였으나.

"당신들은 '여름'을 가지고 있을 자격을 잃었어요."

성국의 위세가 하늘을 뚫고, 제국이 사분오열로 찢겼던 과거.

지금의 제국이었다면 하는 즉시 바로 전쟁을 벌였을 제안을 건넸다.

"어딜 봐서 제국이죠? 제대로 된 황제 하나 나오지 않는데."

당시 성황은 분열된 크로이츠 제국의 상황에 '여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었다.

"성검, '여름'을 저희에게 맡기시죠. 그러면 내전에서 승리하도록 도와드릴 테니."

"...좋소."

당시 크로이츠의 마지막 황손이었던 시브란트와 맹약을 맺었다.

성검은 성국이 보관하는 것으로.

제국의 황제는 성국의 성황에게 인정을 받아 성검의 권위를 받는 것으로.

그리고 성국은 '시브란트 D 크로이츠'를 통일 크로이츠 제국의 황제가 되게 하는 것으로.

"99년으로 합시다."

시브란트의 말.

당시 성황은 턱을 쓸었다.

마음 같아선 무한정의 계약으로 하고 싶다. 하지만 대륙의 시선도 있고, 어차피 99년 후는 미래의 일.

이토록 태양처럼 빛나는 성국이 힘을 잃을 거 같지도 않고, 저렇게 불안한 제국이 강해질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시죠."

마지막 조항은 성국이 제국의 성검, '여름'을 임시로 보관하는 건 영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99년으로 한정한다고 정했다.

그렇게 130년이 흘렀다.

영원한 낮도, 여름도 없는 법.

제국은 1황제 3공작 체제로 안정되었고, 성국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문제가 되어 자신들의 힘을 잃어 갔다.

하지만 아무리 강해져도 제국의 황제가 즉위하기 위해선 성국의 성황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다.

"여름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쥐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저 존재만으로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성검이 필요했다.

"우리의 여름이 돌아와야 한다."

황족부터 평민까지 모든 제국민의 염원은 '여름'이라.

치욕적인 과거를 청산하고 찬란히 빛날 여름을 위해 성검이 필요했다.

성국의 <가을 기사단>을 상대하고자 만들어 낸 제국 최강의 <여름 기사단>이 천천히 서쪽을 바라보았다.

"성검이 제국 밖으로 나와 있다?"

제국에 드리워진 성국의 그림자를 지워 버리고 제국이 오롯이 제국으로 서기 위해 <여름 기사단>이 천천히 서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 * *

밤이 없는 도시 메이누스의 밤.

솨아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밤새 켜져 있어야 할 시장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고, 한동안 밀려났던 어둠이 몰려오는 밤.

저벅-.

가릭 크로울 백작이 우산을 쓴 채 걷고 있었다.

"마법으로 막아준다니까?"

그 옆에는 8급 실드 마법을 통해 빗방울을 튕겨 내는 디그리드 웨어햄 백작 겸 마탑주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가릭은 그의 실드에서 튕겨 나오는 빗방울이 어깨를 계속 젖게 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전에 이렇게 튀는 거나 좀 막아주지."

"마법의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마법사의 한계는 유한한지라. 미안."

디그리드는 가볍게 윙크하며 그를 놀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가릭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저 멀리 보이는 메이누스 대성당을 가리켰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

"그러게 말이야. 칠대귀족 중 셋이나 이런 비 오는 밤에 함께할 줄은 몰랐고."

가릭과 디그리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라마이닝 영지의 신임 백작인 브레디올 라마이닝이 어색한 표정으로 우산을 쓰고 있었다.

"두 백작님을 뵙습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같은 백작이라고 하나 나이나 경력, 무엇으로 봐도 선배였으니까.

디그리드는 이렇게 모인 셋의 면모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이리안에서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사람 일곱을 꼽으라면 그중 우리 셋이 꼭 들어갈 텐데, 이렇게 모였다니."

"그럴 만한 녀석이 우리를 불렀으니까."

셋은 좀 더 걸었고, 대성당 맞은편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하하하하, 바르베타 총교구장님이 이렇게 소탈하신 분인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맥로든 후작의 호쾌한 웃음.

그 맞은편에는 아이리안의 모든 신앙의 정점인 바르베타 총교구장이 미소 짓고 있었다.

"맥로든 후작님과는 거래를 위해서만 뵈었지, 이렇게 속을 터놓고 말하기 좋은 분인 걸 처음 알았습니다."

둘 다 나이대가 비슷한 노인이라 그런지 통하는 게 많은 모양.

물론 셋은 그들이 앉아 있는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 옆에 놓인 술병의 개수를 세며, 다른 의미로도 통했다는 걸 깨달았다.

디그리드는 가릭에게 귓속말했다.

"바르베타 할아버지는 바위산처럼 깐깐한 영감탱이 아니었어?"

가릭은 한심한 눈초리로 디그리드를 내려다보았다.

"...들릴걸."

성국에서 총교구장으로 보낼 정도의 성직자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듣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터.

평상시 근엄한 바르베타답지 않게, 그는 빈 술잔에 술을 채우며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하하, 깐깐한 영감이 따르는 술을 마시는 건 어떻습니까. 웨어햄 마탑주."

디그리드는 예상 못 했다는 듯 뜨끔했다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바르베타의 옆에 앉았다.

그렇게 셋과 맥로든과 바르베타가 있는 곳.

딸랑-.

문에 달린 벨이 울렸고.

두 손에 가득 갈색 봉지를 들고 오는 중년인이 있었다.

"하이고, 비가 오니까 이 동네 닭집이 싹 다... 닫아서...."

브래들리 백작.

그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최근에 북방 엘프의 숲에서 한 번씩 보았던 대귀족의 얼굴이 있을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으니까.

맥로든 후작은 비어 있는 자신의 반대편 옆자리를 치며 말했다.

"어서 오게! 안주가 영 심심한 찰나였는데, 잘 왔어."

"...이게 무슨 자리입니까."

브래들리 백작은 쭈뼛대며 움직였다.

현재 공석인 에셀레드 백작과 로스 후작을 제외하고선 다섯 명의 대귀족이 모였다.

그뿐일까.

바르베타 총교구장까지.

딸랑-.

그리고 다시 열리는 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비를 뚫고 나타난 건, 올리시렌 왕녀였다.

그녀의 새카만 눈이 안을 훑었다.

브래들리 백작은 놀라서 맥로든 후작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 올리시렌 왕녀에게 붙는 겁니까?"

맥로든 후작은 술잔을 들고 들이켜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걸?"

"저도 연락받고 왔어요."

올리시렌은 무표정하게 자리로 움직였다. 두 왕녀로 나뉜 파벌이 섞여 앉아 있는 자리 위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상석에 앉았다.

딸랑-.

이번에 들어온 건 올리비아 왕녀와 카테리나 성녀였다.

"억지로 모은다고 해도 모을 수 없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네요."

올리비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긴 테이블이니 올리시렌을 마주 보는 반대편 상석에 앉았다. 성녀는 아이리안의 모든 권력자들이 모인 이 자리에 어이가 없었는지 웃었다.

그러곤 바르베타 총교구장을 시퍼런 눈으로 응시했다.

"술입니까?"

"아이리안의 명주입니다. 브래들리 백작령에선 레몬이 참 잘 자라는 데 '브래들리 리몬첼로'가 크게 독하지도 않고 맛있습니다."

잠시 서 있던 카테리나는.

스윽-.

빈 술잔 하나를 집은 다음 바르베타에게 내밀었다.

"맛은 보도록 하죠."

조르르륵-.

바르베타는 성녀의 빈 잔을 따르며 말했다.

"모든 것은 빛으로."

"...빛은 우리의 것으로."

성녀와 총교구장.

두 명의 왕녀.

한 명의 후작.

그리고 네 명의 백작까지.

현재 아이리안에 가장 중요한 모든 인물이 모여 있는 곳.

저벅-.

밖이 아니라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시던 자들은 모두 어둠으로 휩싸인 안쪽을 돌아보았다.

위로 나 있는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미안하군. 하필 모두를 부른 날에 비가 와서."

콰가강-!

그 순간 내리치는 번개!

명멸하는 빛과 썰물과 밀물처럼 너울지는 어둠 속에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끼익-.

낡은 계단의 외침이 천천히 공간을 가득 채우고.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꺼져 있던 등불들이 한꺼번에 켜지면서, 좀 더 밝아졌다.

"카인."

올리시렌이 그를 불렀다.

"응."

"언제 내려온 거야."

"웨인 경이 급하게 와 달라고 해서 왔지."

"...나한테 좋은 소리는 아니었겠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고."

콰르르릉-.

침묵의 틈새에 천둥이 스며든다.

카인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밖으로 의자를 빼 앉았다.

"사실 고민 좀 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제가 하란 대로 할 사람들도 아니고."

"할지도?"

웨어햄 백작이 슬쩍 말을 덧붙이자, 옆에 있던 맥로든 후작이 그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일단 들어 보게."

"...네."

언제나의 웨어햄이기에 카인은 익숙하다는 듯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차기 왕위는 대귀족의 투표로 이뤄지는 거니 손부터 들어봅시다. 맥로든 후작님은 두 손 다 드시고요."

"알겠네."

"올리시렌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분?"

스윽-.

라마이닝, 크로울, 웨어햄.

세 표.

"그럼 올리비아가 왕이 되었으면 하는 분?"

맥로든 후작의 두 손과 브래들리 백작의 손.

역시 세 표로 삼 대 삼.

카인은 말없이 잔만 홀짝이는 성녀에게 물었다.

"뭐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지만...."

"예. 저는 올리비아 왕녀를 지지합니다."

국법상으로 성녀는 상관없지만, 그녀가 지닌 무게는 유의미하다.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어느 쪽에도 끼지 않고, 눈치껏 빈 잔에 술을 따라 주기 바빴다.

"서로 쌓일 것도 쌓였고 위험한 것도 있는 걸로 압니다."

"카인. 왜 이렇게 너답지 않게 비효율적으로 가려는 거지?"

올리시렌의 검은 눈이 번쩍인다.

구구구궁-.

일어나는 마녀의 힘.

"적어도 제 앞에선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후우우웅-.

그리고 맞상대하는 성녀의 힘.

둘의 힘이 부딪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소멸되었다.

올리시렌은 성녀를 날카롭게 흘겨보다가 카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효율?"

"너라면 적들의 목을 바로 썰어 버려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여기 적들이 있고."

"올리시렌."

"응."

"그러기 위해선 적을 잘 골라야 해. 한 번 휘두른 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이야."

"...지금 나에게 훈계하는 거야?"

다시금 번뜩이는 마녀의 눈.

카인은 그런 눈을 올곧게 마주했다.

"어. 나만 할 수 있으니까."

"네가 뭔데?"

['겨울'이 올리시렌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너무 변한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카인도 실감했다.

하이볼트 부부의 폭사를 보고 올리시렌이 많이 변했다는 웨인 시케르의 말을 이제 이해했다.

그렇기에 카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후회하는 사람. 후회의 아픔을 아는 사람."

"...."

"분노로 너 자신을 잃지 마. 그건 후회니까."

올리시렌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말없이 들 뿐이었다.

그 모습에 올리비아가 이어 말했다.

"그럼 저와 결혼-."

파지지지직-.

카인은 말 대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누구라도 걸리면 제대로 지져 버리겠다는 듯 순백의 번개가 번쩍였다.

맥로든 후작과 올리비아 왕녀는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어차피 투표는 동률이고, 내가 억지로 공작위가 있으니 투표하겠다고 하면 성국에선 반발할 테고."

"잘 아시는군요."

성녀는 카인의 말에 화답했다.

카인은 모두를 돌아본 후 말했다.

"시원하게 패싸움으로 왕위를 결정합시다."

"...?"

모두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순간 생겨났고.

카인은 양손을 들어 손가락을 세 개씩 폈다.

"표가 삼 대 삼이니 고대의 법처럼 결투로 삼 대 삼 승부를 냅시다."

"그 무슨 우악스러운...."

성녀의 말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국보 이름부터 '헤드브레이커'인 나라입니다, 여긴."

콰가가-!

다시금 명멸하는 실내.

오직 카인만이 웃고 있었다.

#144 EP.Ⅱ-11

화이트아웃 (2)

「하얀 설원에 흰 눈이 내린다.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알 수 없다.

뽀득-.

지나간 길을 되돌아보아도 보이는 건 그저 하얀색뿐.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 보이는 것이 없는 상황, 화이트아웃(White-out).

등에 마검을 맨 채 한 사내가 그 속을 걷고 있었다.

로드이스트 카인 에셀레드.

대장벽의 용감한 다른 전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화이트아웃을 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떻게 가는 것인가.

그 모든 물음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지금까지처럼.

언제나.

늘 그렇게.

홀로.」

* * *

작은 카페가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나름 괜찮은 거 같습니다."

브래들리 백작부터.

"내전만 일어나지 않는다면야 괜찮습니다."

바르베타 총교구장까지.

모로 봐도 카인의 해결책이 나쁘지 않았다. 얼추 그쪽으로 여론이 기울 때, 올리비아는 손을 들고 당당히 물었다.

"외부 세력을 끌어 올 수 있습니까."

올리시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만 그때 카인이 바로 말했다.

"된다."

올리시렌은 고개를 휙 돌려 쏘아봤다.

"아이리안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에 외부 세력의 대전사를 데리고 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되지."

"...?"

"하지만 지금 올리비아가 말하는 건 팔라딘일걸?"

카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성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성녀님께서 허락하시면요."

성녀 카테리나는 잠시 고개를 내리고 자신의 앞에 일렁이는 술을 바라보았다.

이미 많은 것이 변했고.

앞으로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제국의 압박 속에서 성국은 달라져야 하며, 그 시작이 아이리안인 것도 나쁘지 않을 터.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본국의 콘시스토리움(Consistorium)을 임시 개최해서 허락을 받아오도록 하죠."

"콘시스토리움?"

"팔대추기경과 성녀, 성황이 모이는 회의입니다."

올리시렌은 턱을 괴곤 반대 손으로 술잔을 들며 비웃었다.

"타국의 내정에 간섭을 안 하겠다는 성국의 맹세가 삼십 년 만에 성녀의 손에 무너지겠군요."

카테리나가 고개를 든다.

그녀의 푸른 눈이 올리시렌의 새카맣게 물든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덕분에요."

"핑계는."

"당신이 언제까지 예비 마녀라고 생각하나요?"

카테리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올리시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의 날 서린 대화 사이에 있던 바르베타 총교구장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저희가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건 올리시렌 왕녀님이 마녀로서 각성하지 않아서입니다."

맞은편의 맥로든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마녀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이쯤 사니 의아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각성하지 않은 마녀가 이렇게도 강할 수 있는 것이오?"

바르베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없지요. 정확히는 마녀에 대한 기록이 시작되고 처음일 겁니다. 자신의 '기원'을 각성하지 못한 채 '기적'에 가까운 힘을 쓰는 마녀는요."

"...."

"그리고 이제 정말 마녀로 각성한다면 저희도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할 거죠?"

올리시렌은 담담히 물었고.

바르베타의 말을 이어 카테리나 성녀가 답했다.

"심판해야겠죠."

"마녀라서?"

"마녀니까."

"후후, 되고 싶지도 않던 마녀가 된 게 참 좋군요."

"...?"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제가 감히 성국의 성녀님께 이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겠나요. 아니다, 아차."

올리시렌은 술을 들이켰다.

그러곤 분노와 미약한 광기가 비치는 흑색의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테러한 자들의 성녀인데, 당연히 전 마녀의 힘이 없어도 이랬을 거 같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그 일과 무관합니다."

"예, 뭐 그런 시나리오라는 건 알겠습니다."

조금도 좁혀지지 않는 성녀와 올리시렌의 평행선.

이미 사건이 벌어졌으니 당연하겠지만, 둘의 균열은 생각보다 더 큰 불안 요소였다.

"그럼 제 대전사를 말하죠. 이소엘, 웨인 시케르, 카인 워커 공작."

올리시렌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패를 꺼냈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1승을 가져가겠다는 건가요?"

"당연히. 카인은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패니까."

"나는 안 나간다."

휙-.

그 순간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다.

솨아아아아-.

그 침묵 사이로 들려오는 빗소리.

카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 대신 아벨이 나갈 거야."

"아벨도 강하긴 하지만... 왜?"

올리시렌은 되물었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두 왕녀를 번갈아 가리켰다.

"둘이 잊고 있는 게 있으니까."

"잊고 있는 거?"

"하이볼트-에버윈 테러의 진범을 잡아야지."

"그건 성국이-."

"올리시렌."

카인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리안이 죄를 지었다면 너일 수도 있고 올리비아일 수도 있어. 성국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들 전체가 죄인이 아니라 범인은 따로 있을 거야."

"그러면 여기 있는 성녀겠지."

올리시렌은 단정했다.

성녀가 기가 막힌 듯 술잔을 꽉 쥔 채로 따를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카인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성녀는 아닐 거다."

"지금 내 앞에서 저 여자를 두둔하는 거야?"

카인은 내심 쓰게 웃었다.

-제 동료들을 이젠 모두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리나만큼은 믿고 싶습니다. 함께 여행한 시간이 있으니까요.

용사 아벨이 하던 말을 기억한다.

성국의 축복과 동시에 은빛의 무언가를 얻었다면서, 성녀 카테리나는 어떻게든 믿으려고 하던 아벨.

'마지막에도 그렇고....'

자신이 용사를 죽일 때 성녀의 반응을 기억한다.

물론 그것마저 연기일 수 있다. 하지만 카인은 아벨의 유지에 따라서 성녀의 결백을 조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 결백의 증거이기도 하고.'

정말 그녀가 '보통 사람들'의 일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을'을 통해 이전 세계선의 자신을 보자마자 대륙의 변방 중의 변방, 아이리안까지 달려온 걸 보면 그녀가 아벨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다.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올리시렌의 삐딱한 말에 대꾸했다.

"저 성녀라면 그런 테러 같은 걸 하기 전에 자기 주먹으로 널 죽였을걸?"

"...."

직설적이어도 너무 직설적인 카인의 표현에 다들 순간 말이 사라졌다.

그러다 바르베타 총교구장이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내리며 말했다.

"적확합니다."

카테리나 성녀는 눈빛만으로 상대를 죽일 것 같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한순간에 상황을 반전시킨 그는 나이답게 그 눈빛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카인은 얼추 정리돼 가는 상황을 보며 말했다.

"에버윈이 과거에 설치해 둔 함정의 스크롤이 사람 하나만 태울 하급에서 공간 전체를 날려 버릴 최상급으로 교체되어 있었다는 게 이번 테러야."

"맞아요."

그간 꽉 막힌 올리시렌을 상대하던 성녀는 카인의 말을 들으며 도리어 속이 시원해졌다.

침착하게 사실을 정확히 짚는 걸 보니, 그가 어떻게 왕국 전체를 쥐고 흔드는 위치까지 올라갔는지 알 것 같았다.

"올리시렌, 당연히 과거를 읽어 봤겠지. 어땠어?"

지금 그녀는 진범을 찾기 위해 불타 버린 백은의 궁의 과거를 읽었다.

"...없었어."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선을 도려낸 것처럼 마법 스크롤과 관련된 부분엔 보이는 게 없었다.

카인은 미소 지었다.

"있었잖아, 그런 경우."

"...보통 사람들."

올리시렌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런 경우가 없었다면 모르지만, 카인의 말대로 단 한 번 그런 적 있었다.

그것도 에셀레드 영지.

카인의 친모인 클로에의 정체를 찾아갈 때, 아리안이라는 시녀를 추적할 때 딱 그랬다.

"성안의 시종들을 모두 내쫓은 건 너도 그 생각을 해서 그런 거 아니야?"

"...."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는 분노를 표하고 있었으나 내심 그녀도 보통 사람들을 의심했다.

하지만 어떻게 추릴 것인가.

그들의 말대로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말 그대로 보통 사람들을 전부 의심할 수는 없다.

"스크롤은 아마 최근에 바꾼 걸 거야."

"어머니가 숨겨 둔 건 엄청나게 철저했어. 그걸 그들이 어떻게 알고?"

왕궁의 시녀가 전부 보통 사람들의 인원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하다.

침소를 아무리 청소하고 살핀다고 해도 올리시렌이 본 에버윈의 장치는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한 번 봐야....

"설마?"

올리시렌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거겠지. 너처럼 과거를 보는 게."

"과거를 볼 수 있는 마녀의 힘을 지닌 사람이 들어와서 보곤 스크롤을 바꿔두었다? 왜?"

"왜라는 건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굳이 하나만 꼽으라면."

카인은 위를 가리켰다.

꽉 막힌 이 천장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하늘.

"이미 죽어서 사라진 사람이 그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죽여서 입을 막았는데 살아 돌아와서 귀찮게 할까 봐?"

"내 생각은 그래."

"그럼 왜 하필 성국의 성직자를 데리고?"

"지금처럼 네가 성국과 싸우길 바라서."

"...."

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물론 브래들리 백작처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묻기에는 분위기가 무거워서 눈만 굴리는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 진범을 잡을 생각입니까?"

성녀 카테리나처럼 적극적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다.

카인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성국의 사람이라는 게 힌트지."

"...?"

"린드브룸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추적할 수 없지. 왕궁에 들어온 건 추적해야 하지만 시간선을 지울 정도의 능력자들이 거기에 걸릴 리는 없고."

"예."

"그런데 다행인 건 아이리안이 섬이라는 거야."

"배! 최근까지 성국에 있던 사람이 범인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며칠 안에 바다를 건너와야만 하는 거죠!"

성녀는 생각에 잠겼고 올리비아는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신과 성녀에게 쏟아지는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다 조사해 봤어. 어차피 대륙과 무역량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주요 항구 세 곳에 최근에 들어온 대륙의 선박이 있는지."

올리시렌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과는 제로. 어느 항구에도 대륙의 선박이 온 적이 없어."

"밀항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올리비아의 물음에 이번엔 맥로든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겠지만,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밀항은 필연적으로 작은 배를 이용한다.

문제는 아이리안과 대륙 사이의 바다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

즉, 성국에 며칠 전에 있던 이가 아이리안에 도착하려면 제대로 된 배가 필요하니 밀항은 불가능했다.

"마법 같은 걸로 바다를 건너는 건 안 됩니까?"

브래들리 백작은 나름 잘 생각했다는 듯 손을 들어 물었다.

"그 정도 마법사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걸?"

물론 바로 웨어햄 백작의 한마디에 바로 내렸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다시금 미궁에 빠질 때.

성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능... 합니다."

"항구에 닿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된 배로 오는 게요?"

"제가 그렇게 왔으니까요."

"...!"

"에셀레드의 백악절벽 쪽으로 오면 최단 거리라서 빠릅니다."

성녀는 당시 알 수 없었던 '가을'의 반응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의 미래를 경고한 것이라.

그리고 카인은 미소 지었다.

"진범을 쫓을 힌트가 나왔군."

#145 EP.Ⅱ-11

화이트아웃 (3)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회의가 끝나 가자, 카인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결전은 열흘 후."

두 명의 왕녀는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대귀족과 성녀, 총교구장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맥로든 후작이 뒤를 이어 말했다.

"장소는 메이누스와 린드브룸 사이에 버려진 경마장."

"좋습니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부분은 삼 대 삼 왕위결정전을 대중들에게 공개할지 말지였다.

해당 부분은 하나의 세력이라고 묶이는 사람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렸었다.

향후 아이리안의 지배자를 뽑는 자리니 명명백백하게 다 보여야 하는 쪽과 귀족들과 주요 인원들만 불러 모으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공개하는 쪽으로."

물론 결국엔 카인의 의견대로 정해졌다.

"글루미엠이 죽었고, 동시에 왕궁에 폭발이 일어났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역사에 없던 큰일이 연달아 일어난 이상 국민들 사이에 말이 많을 거다."

"그렇지."

"그러니 눈을 돌려야 해. 향후 왕위를 결정짓는 왕위결정전으로."

철저하게 실리를 고려한 카인의 의견에 반발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승자는 모든 걸 얻겠네."

올리시렌의 말.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패자라고 해도 딱히 실패하는 건 아닐 거다."

"왜?"

"로스 후작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계속 비워 둘 수는 없고, 로스 혈족은...."

카인은 잠시 올리시렌을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현재 살아 있는 로스 혈족은 언니뿐이죠. 그냥 제가 왕하고 언니가 차대 로스 후작이 되면 참 그림이 좋을 텐데 말이에요."

휙-.

올리시렌의 날카로운 검은 눈빛이 살기를 띤 채 올리비아를 향한다. 그녀의 농담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

카인의 말대로 진범이 따로 있을 거란 건 받아들였지만, 그건 머리의 일.

아직 그녀의 마음 속에서 적은 성국이었고 그런 성국과 붙어먹는 올리비아는 '적'.

"아쉽게 되었어."

"뭐가 말이죠?"

"패자의 목을 그 자리에서 자르는 줄 알았는데."

화아아아아-.

살기가 회합장을 휩쓴다.

올리시렌답지 않은 말에 몇몇은 조금 놀랐고 성녀와 바르베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그 상대방.

올리비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목, 목 거리는 게 누구한테 물들어 버렸군요."

"그 누구가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순하게 하려고 해서 문제지만 말이야."

쿵.

카인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찍었다. 깊은 울림이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올리시렌이 보인 살기를 흩어 버렸다.

"죽이고 싶으면 모든 게 끝나고 나서 해."

"그러다 늦으면?"

올리시렌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카인을 획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돌이키지 못할 일을 할 바엔 늦는 게 낫다."

"...."

이럴 때마다 카인의 말엔 무게가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올리시렌도 차마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돌려 버렸다.

"그럼 닷새 후 각자 내보낼 기사의 이름을 공개하고 열흘 후에 보도록 하지."

짝-.

카인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

다들 이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따라 손뼉을 쳤다.

피해는 거의 없을 거고, 향후 아이리안을 위해선 올바른 일이지만, 너무 부드럽게 내전이 멈춰졌다.

아이리안은 물론이고 대륙의 역사를 다 뒤져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봉합한 일은 없을 터.

"우리 이름은 역사서에 남겠네."

드륵-.

맥로든 후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뒤로 뺐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브래들리 후작과 올리비아가 일어났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죠."

올리비아는 그와 함께 나섰고.

"우리도 가시죠."

올리시렌과 세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마이닝, 크로울, 웨어햄 백작은 차례로 카인에게 인사를 하며 나갔고.

"죽을 수도 있어."

올리시렌은 문을 나서기 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차마 카인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순 없었다. 반쯤 열린 문을 붙잡고 밖을 보며 말했다.

솨아아아아-.

아까보단 약해졌지만, 여전히 굵은 빗소리 사이.

"애들 장난이 아니야. 네가 아벨을 믿는 건 알지만, 아마 올리비아는 맥로든 최고의 기사와 성국의 팔라딘을 데려오겠지."

그 말에 성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삼 대 삼 왕위결정전을 진행하겠다는 순간 당연히 카인이 나올 걸 상정하고 수석 팔라딘을 내보낼 생각이었다.

카인이 글루미엠을 어떻게 이기는지 보았기에.

그쯤은 되어야 균형이 맞을 거라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고작 열다섯인 동생을 내보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녀는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귀만 열었고.

"안다."

조르르르-.

카인은 빈 술잔 하나를 집곤 브래들리 영지의 레몬술을 따르며 대꾸했다.

"죽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다칠 수도 있어."

"그렇겠지."

"그럼에도 아벨을 내보낼 거야?"

"네 선택이지. 아벨을 내보낼지 말지는."

꽈악-.

올리시렌은 나무문을 으스러지라 쥐었다.

문에 머금어진 빗물이 배어 나와 손에 묻는다. 하지만 그녀의 피부에서 일어난 흑색 불꽃에 언제 그랬냐는 듯 뽀송뽀송해졌다.

"난 복수할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할 거야."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선연하다.

어떻게든 폭발을 줄이기 위해 몸으로 스크롤을 감싸는 에버윈.

자신을 살리기 위해 껴안는 하이볼트.

둘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조금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럼 아벨을 내보내야겠지. 내가 아는 한 아벨만큼 승리를 잘하는 녀석은 없으니까."

"너...."

"아벨은 어린애가 아니다. 이미 훌륭한 전사야. 녀석이 스스로 안 나간다고 하면 모를까, 죽을 거 같다고 안 싸우는 놈이 아니야."

"...."

올리시렌은 복잡한 심경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카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고.

쿵-.

거칠게 문을 닫았다.

문에 난 작은 나무창 너머로 밖에서 우산을 든 채 자신을 기다리는 백작들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두 왕녀와 대귀족들이 빠진 공간.

성녀, 바르베타 총교구장, 카인 셋이 남았다.

"그럼 저희도...."

바르베타가 빈 술잔을 정리하며 일어나자, 성녀도 같이 일어나려 했다.

"잠깐."

하지만 카인은 성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뭔가요?"

"성국의 성녀라면 공부를 많이 했을 거 같아서."

"아는 만큼은 압니다만, 굳이 당신의 질문을 받아 줄 필요는 없을 거 같군요."

그녀는 쌀쌀맞았다.

클로에와의 대화와 글루미엠을 죽이면서 그가 보였던 희생을 보며 조금 생각을 바꿔 먹긴 했다.

하지만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성류관, '가을'이 보여 준 아벨이 죽던 그날의 광경.

그날 자신이 느꼈던 그 감정.

그것이 그대로 지금의 그녀에게 전해지는 만큼, 적의가 조금 누그러진 것뿐이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카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책이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가장 전문가일 거 같아서 묻는 건데."

"제 말은 듣지도 않는군요."

거절하는 카테리나의 말을 무시하며 카인은 질문을 이어 갔다.

"혹시 보통의 마왕이라고 아나?"

"보통의 마왕...?"

그대로 자리를 뜨려고 했던 성녀는 다시 앉았다.

바르베타는 자신보다 성녀가 더 전문인 분야기에 잔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걸레를 들고 나와 테이블을 닦았다.

그가 총교구장인 걸 모르고 보면 평범한 주점의 늙은 주인일 정도로 능숙해 보였다.

"처음 듣는 모양이군."

카인은 혀를 찼다.

전 세계에서 마왕이란 존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을 꼽으라면 성황이나 성녀를 꼽을 것이다.

그런 성녀조차 처음 듣는다는 걸 보니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마왕이면 마왕이지 보통이 붙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나도 몰라서 물었다. 사실은 마왕이 하나인지 둘인지도 잘 모르지만 말이야."

"시답잖은 질문이라면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런 건 역시 제가 답하는 게 맞겠군요."

성녀는 바르베타가 치우지 못한 술잔, 네 개를 마름모꼴로 두었다.

그리고 머리에 있는 '가을'을 가리키고 세 번째 술잔을 가리켰다.

"<사계절의 신기>는 몇 개죠?"

"네 개."

"그럼 마왕은 몇 명일까요?"

"...네 명이군."

"물론 대부분 사람은 몰라요. 한 시대에 눈을 뜨는 마왕은 하나뿐이니까요."

성국은 '빛'이 생겨난 시점부터 끊임없이 모든 걸 기록해 왔다.

그런 만큼 이 세계의 마왕이 모두 넷이라는 것과 그들이 돌아가면서 나타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마왕이 될 때마다 여러 가지가 달라지지만 부리는 힘은 대개 비슷해요. 이명은 그 힘을 부르죠. 망각의 마왕이랄지, 공허의 마왕이랄지."

"이름도 있나?"

"글쎄요.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어요."

카인은 마왕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이전 세계선에서 겪은 건 세상의 마왕이 나타났다는 것, 그걸 아벨 파티가 가서 죽였다는 것과 그래서 대장벽의 몬스터들이 사라졌다는 것.

실제 마왕이 괴수 같은 것인지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마왕은... 그냥 마왕입니다.

본인에게 물어도 저런 애매한 대답만 하니 카인도 마왕이라는 존재가 궁금했다.

['겨울'이 마왕의 칭호들을 잘 들어 두라고 말합니다.]

카인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는 말을 이었다.

"이런 이름들은 저희가 마음대로 붙인 게 아니라 '빛'의 첫 번째 성전에 적혀져 있어요."

"오."

"그런데 '보통'이라는 이명을 지닌 마왕은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는 잠시 입을 닫았다.

망각의 마왕은 사람을 망각하게 만든다.

공허의 마왕은 사람의 모든 것의 가치를 없애 버린다.

그렇다면 보통의 마왕은?

"모르겠군요. 그런 마왕이 있다고 성전에 적혀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한다면 무슨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의 마왕일 수도."

"보통 사람들...?"

성녀의 눈이 커진다.

카인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눈치챈 모양.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목표는 알 거 같다."

"보통의 마왕?"

"그래."

"풉."

성녀는 순간 웃었다.

카인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말하는데 얼토당토않다는 반응이 좋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들은 그런 자들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들을 아나?"

"당장 성국에 그들의 길드도 있는걸요?"

"...뭐?"

카인은 두 눈을 끔뻑였다.

누구보다 더 은밀하게 행동하는 자들의 길드가 성국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길드라서 대부분은 모르지만요."

"평범한?"

"예. 상인, 직공인, 기술자, 사냥꾼, 전보원, 선원 등등. 평범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군."

"예. 그리고 당신에게만 말하자면 성국에선 그들의 이름을 훔쳐 쓰는 과격분자가 순진한 성직자를 꾀어 낸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요."

"멀쩡한 남의 나라 왕궁을 테러할 정도로 대단한 과격분자겠군?"

카인은 성녀를 올곧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 순간 성녀는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보통 사람들'과 아이리안에서 마주하고 들었던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간극으로 카인이 날카로운 말을 찔러 넣었다.

"평범하기에 더욱 무서운 것도 있지. 당장 마나나 오러 같은 힘이 없어도 위험한 자들도 많고."

에셀레드의 하녀로 들어왔던 아리안.

크로울 영지를 들었다 놨다 했던 또 다른 아리안.

그리고 그런 아리안을 따르는 이름 없는 전사, 데이브레이커.

"일단은 조사해 보죠."

성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맡은 역할은 배를 조사하는 것이다.

"에셀레드까지 직접 갈 건가?"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긴 하지만 열차도 안 깔린 영지를 갔다 오기엔 십 일이라는 일정이 너무 빠듯해서요. 라마이닝의 성직자들을 보낼 예정입니다."

"지금 영지에 있을 클로이드에게 내 이름을 대면 좀 더 편의를 봐줄 거다."

"...당신."

성녀는 카인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모든 것은 빛의 뜻대로."

성녀는 짧은 인사말을 남긴 채 나가 버렸고,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146 EP.Ⅱ-11

화이트아웃 (4)

성녀가 카인과 헤어진 지 며칠이 흘렀다. 그녀의 초장거리 통신으로 성국의 상층부가 뒤집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콘시스토리움의 결과가 나왔어요.]

피오렐리 추기경의 목소리가 메이누스에 마련된 성녀의 방에 울릴 때가 되었다.

[가을기사단의 수석 팔라딘, 리날도 피사니 (Rinaldo Pisani)의 아이리안 왕위결정전 참전을 허가합니다.]

성녀는 성호를 그으며 대답했다.

"모든 것은 빛의 뜻대로."

[하지만, 카테리나.]

"하문하소서."

[다른 추기경은 물론이고 성황께서도 마녀가 왕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맹세를 깨셨다는 걸 기억하세요.]

"...죄송합니다."

수화기 건너편.

바다를 건너 제국 너머 존재할 성황궁에 있는 피오렐리 추기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사과할 건 아니에요. 당신은 '빛'의 대리자로서 그 선택이 빛의 뜻일 테니.]

"...."

[왜 대답이 없죠?]

"잘 모르겠습니다. 제 뜻은 물론이고 성류관이 보여 주는 미래 역시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성녀 카테리나는 담담히 자신의 속내를 고백했다.

처음엔 카인이 마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자신의 순수를 증명해 냈다.

아무리 안 좋게 보려고 해도 '빛'이 최고의 가치로 보는 희생을 언제나 각오하는 그의 태도를 깎아 내릴 수는 없었다.

[막상 그를 만나 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았니?]

피오렐리는 추기경이 아니라 카테리나를 키우고 이 자리까지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던 할머니로서 말을 건넸다.

카테리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

[미래를 보는 마녀도 만났다고 했었지?]

성녀는 본래 성국에 아이리안의 사실을 보고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올리시렌의 정체를 대충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이 여의찮았다.

엘프 여왕 글루미엠을 죽인 일은 이미 성국 정도쯤 되면 바로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수석 팔라딘을 왕위결정전에 내보내야 하니 추기경들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이리안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모두 보고했고, 피오렐리 추기경도 잘 알고 있었다.

"예."

[둘이 본 미래가 다르진 않았고.]

"똑같은 광경이었습니다."

[마녀라고 해서 꼭 악독하진 않단다. 그 힘이 세상을 희롱하기에 우리가 미리 처단하는 것일 뿐.]

"그럼 제 해석이 틀렸다는 말씀입니까?"

카테리나는 뾰족하게 되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을'이 직접적으로 보여 준 미래를 잘못 해석했다고 비난받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피오렐리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수도 있지.]

"저는 최선을 다해서 해석한 것인...."

[모든 최선이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란다.]

피오렐리 추기경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길 바라는 사람.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카테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계시를 들었던 날, 나를 비롯한 다른 추기경분들까지 한 가지를 걱정했었다.]

"무엇입니까."

[감정.]

"...!"

이전의 성녀들은 대부분 철저히 무심했다. 그렇기에 미래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건조하게 사실만을 나열했었다.

그렇기에 바르베타 총교구장도 카테리나의 예지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진실은 너무나도 연약하여 인간의 감정에 왜곡되는 것이니까.

[그날의 너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단다. 그건 그 미래의 광경 속에 있던 '너'의 감정이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과거에서 미래를 볼 땐 좀 더 넓게 봐야 하지. 너는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직 누군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네가 말한 그 철혈의 황녀가 왜 성국에서 결혼식을 했는지?]

"...!"

카테리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무나 당연한 배경이라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성류관이 보여 준 미래 속 성국의 수도 헤네랄리페에서 제국의 '황녀'와 용사 아벨이 결혼식을 한다는 일.

[사실상 제국을 제패한 여인이 어째서 제국의 수도가 아니라 성국까지 와서 결혼한 걸까. '여름'의 권위가 탐났다면 더더욱 제국 내에서 해야 했을 텐데.]

"그건...."

[그리고 당시 카인 에셀레드가 '겨울'의 대검으로 추정되는 걸 들고 왔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피오렐리 추기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듯, 떠올리지 않았으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추억을 퍼 올리듯.

미묘한 정적이 흐르고.

['여름'의 주인은 용사라고 불리고, '겨울'의 주인은 로드이스트라고 불린다.]

"로드이스트...? 아, 대장벽의?"

[그래. 동방의 멸망으로부터 서방 인류 세계를 지키는 대장벽의 가장 위대한 자.]

"카인이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카인이'?]

피오렐리는 성녀의 말투에서 미묘한 호칭의 차이를 짚어 냈다.

성녀 카테리나는 순간 움찔하곤 급하게 말을 이었다.

"존칭을 붙이기엔 애매하여 편하게 부르던 것이 입에 붙었습니다."

[조심하거라. 네 행동, 네 말투, 네 눈빛까지 모든 것이 우리 추기경들과 마찬가지로 성국의 품위와 여유를 나타내는 것이니.]

"모든 것은 빛의 뜻대로."

카테리나는 사실 이미 그런 건 피오렐리 추기경부터 글러 먹은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대장벽의 전사왕이 어째서 용사를 죽인 걸까?]

"모르겠습니다."

[즉, 미래라는 건 중간의 모든 과정이 사라진 한 번의 광경이란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미래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고.]

성국은 성류관, '가을'을 계승하는 곳.

따라서 가끔이나마 '가을'이 던져 주는 미래를 해석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해석하는 데 도가 텄다.

그녀의 말을 한참이고 곱씹던 성녀는 툭 하고 되물었다.

"그럼 제가 아이리안으로 가겠다고 할 때 왜 말리시지 않았습니까. 성류관과 성검까지 움직이는 큰 여행인데."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이요?"

[네가 성국 밖으로, 아니 헤네랄리페 밖으로 걸음을 옮기겠다고 말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피오렐리의 말투는 따스했다.

지금까지 추기경과 성국의 선배 성직자로서 왔다 갔다 했다면, 이번에는 진짜 할머니답게 말했다.

[안전한 곳에선 성장할 수 없단다. 그리고 우리는 판단했지. 네 선택이 감정적이든 무엇이든 다시 성장하기 위해선 모험이 필요하다는 걸.]

"마우로 추기경도 알았습니까?"

아마도 추기경 회의에서 내린 결정이리라.

성녀는 자신의 성장을 위해 성국으로서 상당히 큰 도전을 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

[그 천둥벌거숭이한테는 목숨 걸고 너를 지키라고만 말했단다. 이런저런 걸 다 말해 뒀으면 너한테 쪼르르 가서 말할 게 뻔했으니까.]

같은 추기경이라고 하나 세월이 다르다.

가장 어린 마우로 추기경은 성녀의 호위를 위해 붙인 최고의 주먹이었다.

"실제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별 쓸모없었다고 말하려다가 성녀는 그냥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그래, 별거 안 했지. 헤네랄리페로 돌아오면 단단히 정신을 차리게 해 줘야겠지. 추기경 달았다고 빠져 가지곤.]

어차피 다 알 테니까.

그리고 마우로는 피오렐리 추기경에게 어릴 때부터 배운 만큼 가장 무서워하기도 했고.

[리나.]

성녀, 카테리나 피오렐리.

현재까진 유일하게 그녀의 애칭을 부를 수 있는 피오렐리 추기경이 그녀를 불렀다.

"예."

[내 말이 길었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거라. 네 마음대로 하거라.]

"...예?"

[팔라딘의 참전 허가까지 난 이상 네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괜히 왕녀나 마녀에게 밀리지 말고.]

"감사합니다."

보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피오렐리의 따스한 정이 성녀의 허리를 굽히게 했다.

[그래서, 그 예비 마왕이라는 '카인이' 이 할미의 손주사위 후보-]

"이만 통신을 끊겠습니다."

카테리나는 수화기를 내렸다.

꼭 마지막에 이런 농담을 곁들이는 게 피오렐리의 통신 방식이었다.

어릴 때는 꼬박꼬박 받았지만, 이젠 익숙하게 끊었다.

"아."

하지만 한 가지 더 물을 게 남아 있었다.

툭-.

다만 수화기 저편 상대방이 자리에 있으면 켜져 있는 불빛이 꺼졌다.

카테리나는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통신실을 나섰다.

기기긱-.

외부의 소음을 철저히 막는 두꺼운 철문을 열고 나가자, 밖엔 통신실 담당 성직자가 서 있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카테리나는 이번 통신에서 못한 뒷말을 그에게 전했다.

"헤네랄리페와의 다음 정기 통신 때 '보통 사람들'에 대해 제가 알아야 하는 게 있는지 같이 물어봐 주세요."

"알겠사옵니다."

성직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보통 사람들'을 언급할 때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그리고 성녀님."

"네."

"손님... 비슷한 분이 와 계십니다."

"손님 비슷한 분이요?"

"그게...."

* * *

카테리나는 입을 쩍 벌렸다.

미리 와 있던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어딘가 기운 빠져 있는 웃음을 지었다.

"뭐, 새로 공사할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다행입니다."

둘이.

정확히는 성직자들이 몰려와서 파편을 치우고 있는 곳.

메이누스 대성당의 외당 중 하나.

그 지붕이 둥그렇게 지어져서 제법 아름답기로 유명한 외당이었는데.

"저 인간이 부순 겁니까?"

성녀는 검지를 들어 사내를 가리켰다.

의자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자세.

허리춤에는 은빛의 세검 한 자루.

텅-.

그리고 머리엔 철 양동이를 쓰고 있었다. 눈과 코 부분엔 손가락으로 뚫은 듯한 구멍이 나 있었다.

"예. 자칭 '철가면의 기사'가...."

"누가 봐도 에드먼드 백작인데요?"

그녀는 기가 찼다.

에드먼드 백작과 이러나저러나 적잖은 시간을 같이 여행했고 그때와 옷도 안 달라졌으니 당연히 알아볼 수밖에.

저 멀리 있던 자칭 '철가면'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철가면이다."

저벅, 저벅-.

성녀와 바르베타는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 피오렐리 추기경에게 자기 행동이 성국의 품위를 나타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못 참을 것 같아서.

"혹시 그사이에 좀 미치셨습니까, 에드먼드 님."

"나는 철가면-."

"그건 철가면이 아니고 양동이맨이겠죠!"

결국 성녀의 언성이 높아졌다.

바르베타는 그 모습에 쓰게 웃었다.

아이리안의 상층부에서 공공연하게 쓰이는 '에드먼드 같은 놈'이라는 욕이 왜 있는지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스윽-.

에드먼드는 결국 양동이를 벗었다.

"내 정체를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장님도 알아볼 겁니다."

"...음."

"그래서 왜 그런 걸 쓰고 남의 성당의 천장을 부수면서 나타나신 겁니까, 에드먼드 님."

"철가면이 아니고선 말할 수 없는 일이오."

꽈악-.

성녀는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몽크나 기계화 팔라딘들처럼 무력이 강했다면 답답함을 풀고자 주먹을 날릴 터.

하지만 그래도 성녀라.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그 철가면의 기사라고 생각할 테니 그냥 말하시죠."

"크흠."

에드먼드는 헛기침하곤 목소리를 깔았다.

"나는 왕위결정전에 나가고 싶다. 나를 내보내라."

"...?"

"나 잘 싸운다."

성녀는 이마를 짚었다.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말에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고, 웃고 있던 바르베타가 입을 열었다.

"철가면 님, 이미 저희 쪽은 다 정해졌습니다. 맥로든 후작님이 보내 주신 분과, 왕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그리고 수석 팔라딘께서 나가실 겁니다."

"그렇다면...."

에드먼드는 손가락을 꼽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느끼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실의 부기사단장을 처치하고 오겠다."

"미친놈."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47 EP.Ⅱ-12

사람의 땀, 인간의 피 (1)

"호오."

백발의 사도, 금빛 새벽.

그는 아이리안 왕국에 마련된 보통 사람들의 비처에서 자료를 읽고 있었다.

"'그분'의 강림 실험을 이곳에서도 진행했었군."

'보통 사람들'의 정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서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순간부터 서로의 정체를 정의할 수 없는 것.

그들을 엮는 하나의 신념이 있기에 함께할 수 있는 거지, 일반적인 조직구성으로 보면 모래알 중에서도 모래알 조직이라.

아무리 사도라고 하지만 다른 지역의 '보통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모든 것을 알 순 없기에 새로운 지역에 가면 기록을 읽는 게 관례였다.

"대륙에 비하면 거의 백 년 정도는 뒤처져 있는가. 심지어는 열차조차 안 들어가는 대귀족의 영지가 있다니, 쯧쯧."

이미 3차 마나혁명이라고 하여 많은 부분이 달라지고 있다.

반면 아이리안은 이제 겨우 그 시작에 가까운 상황.

금빛 새벽은 아이리안을 조사해 둔 기록을 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보통력 6월 21일,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어지는 날 '계시의 판'이 반짝임.

-보통력 7월 2일, 에셀레드 백작이 후처로 용병, '섬광' 아르나를 들임.

-보통력 9월 23일, 가을의 시작 날 아이를 출산. 이름은 '아벨'.

-의문 1. 에드먼드가 후처를 들일 성격이 아님.

-의문 2. 인간의 아이치고는 임신 기간이 너무 짧음.

-의견. 남녀 사이의 일은 알 수 없고, 여인의 특징상 임신이 티가 안 날 경우가 많음.」

그렇게 넘어간 기록이다.

백작 정도 되는 귀족에게 첩이 있는 것이 흠은 아니다.

전장 중에 만난 예쁘장한 용병과 눈이 맞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툭-.

금빛 새벽의 주름진 손가락은 그 부분들을 쓸었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여름에 시작되어 가을에 태어난 아이, '아벨'.

'보통 사람들'의 사도로서.

황금의 새벽을 간절히 바라는 금빛 새벽으로서.

왠지 모를 직감이 스쳤다.

자신이 아이리안에 온 이유가 어쩌면 이것일 수도 있다는 예감과 함께.

* * *

"어...."

자칭 철가면인 에드먼드는 반사적으로 성녀의 욕에 말문이 막혔다.

"왜죠?"

카테리나는 그런 적 없다는 듯 얼굴을 싹 바꾸며 물었다.

"뭔가를 들은 것 같은데."

"들은 적 있으십니까, 총교구장님."

카테리나는 바르베타에게 물었고.

"없습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맨 처음 감정에 휩싸여서 앞뒤 재지 않고 강경한 발언만 하던 카테리나의 바뀐 모습에 지어진 미소였다.

"뭐 그렇다면...."

에드먼드는 쓴웃음을 짓고는 자신이 설정한 '철가면의 기사'답게 대답했다.

"내 아들을 죽이고 싶다."

성녀는 두 손을 맞잡았다.

이것 역시 '빛'의 뜻이라 생각하면서 간신히 욕을 참고 되물었다.

"아들을 죽이고 싶다는 게 무슨 말이십니까."

"그래야 강해질 테니까."

"누가요?"

"카인이."

"카인은 이번 왕위결정전에 안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

에드먼드의 눈이 방금 성녀가 그랬던 것처럼 동그래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눈치.

"대귀족들과 저희를 불러서 말한 겁니다. 아직 저쪽이 누구를 내보낼지 발표는 안 했지만, 아마 아벨이 나올 겁니다."

"음."

에드먼드는 들고 있는 양동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침음성을 흘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에드먼드... 백작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갈색 머리의 중년 기사가 다가오며 물었다.

스윽-.

에드먼드는 즉시 양동이를 쓰고 대꾸했다.

"나는 에드먼드가 아니라 철가면의 기사다."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으셨습니다."

"욕해 놓고 아니라고 우기는 거랑 같은 거라 괜찮다."

"...모든 것은 빛의 뜻대로."

쓸데없는 곳에서 예리한 에드먼드의 말에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바르베타는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아닌 척하지만, 성녀의 성질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미래를 위해 참아야만 했다.

"아, 이번에는 그런 설정이십니까."

다가온 기사는 익숙한 듯 되물었고.

"나이트 갈웰(Gallwell), 이젠 왕실 기사단의 부기사단당이었지?"

"예. 다 에드먼드 백작님이 제게 검을 알려 주셔서 그렇습니다, 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올리비아가 왕위결정전에 내보낼 기사답게 전신이 근육으로 꽉 차 있고, 기골이 장대했다.

그런 그가 크게 웃자 주위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많이 컸군."

"그렇지요. 웨인 기사단장님과 한판 벌이실 때 구경하던 게 어제 같은데 이젠 저도 아저씨가 다 되었습니다."

갈웰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뚜껑이 열렸고.

틱-.

시계 뚜껑에는 갈웰과 그의 아내, 딸 셋이 찍은 사진이 작게 붙어 있었다.

"이젠 저도 아버지입니다. 백작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었던 저도 이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축하한다."

"전까지만 해도 저 같은 놈이 어떻게 가정을 꾸리고 살지 싶었는데-."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철가면 설정은 가족사진 앞에서 녹아 버렸고, 에드먼드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갈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말씀하셨죠. 시간을 견디라고. 꺾이지 않는다면 성장한다고."

"난 검의 조언만 했을 뿐, 인생을 성장시킨 건 네 몫이다."

쿵.

기사는 심장 위로 주먹을 올리곤 맑게 웃었다.

"예스, 로드 에셀레드. 그래서 철가면은 또 어떤 설정입니까."

이렇게까지 이야기한 이상 아무리 그 에드먼드라고 해도 겸연쩍은 눈치.

그는 머리를 긁으려다가 애꿎은 양동이만 긁곤 말했다.

"아이리안의 무명 기사인데, 올리비아를 위해 왕위결정전에 나가고 싶어 하는 거다."

"아하."

갈웰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반쯤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맥로든 쪽의 기사는 올리비아의 직계니 어떻게 할 순 없고, 수석 팔라딘은 성국 쪽의 전력이니 못 건드리시겠군요."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전투를 위해 거리를 잡는 상황.

"다들 일단 나가 있게."

바르베타는 눈치껏 다른 성직자들을 물렸다.

스릉-.

에드먼드는 그의 은빛 세검을 뽑았다.

"그렇지."

"구색 갖추기 겸, 웨인 기사단장님을 상대하려고 데려온 저를 밀어내고 나가시고 싶으시겠고요?"

스릉.

갈웰 역시 그의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어차피 반쯤 폐허가 된 곳이니 싸워도 아무 문제없으리라.

성녀는 이마를 짚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안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서는, 어휴."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녀는 바르베타의 말에 샐쭉하게 쳐다보며 당장이라도 싸울 듯한 둘에게서 멀어졌다.

"사는 게 한 번뿐인 게 참 다행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삶이니."

"저 사람들은 인간부터 되어야겠는걸요."

"인간은 정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정이 있고."

"...원래 이런 분이셨습니까?"

바르베타 총교구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사람을 볼 뿐입니다."

"제가 달라졌다는 말씀이시군요."

성녀는 다른 의미로 마음 한 구석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성류관, '가을'이 보여 주는 예지의 감정에 흔들리던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멀어졌다는 걸 깨달으면서.

둘이 멀어진 순간.

채애애애앵-!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갈웰과 에드먼드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예전처럼 만만하진 않을 겁니다-!"

갈웰의 고함.

스윽-.

그의 칼에 힘이 빠진다.

동시에 앞으로 내딛는 다음 발!

쉐에에에엣-.

한 바퀴 뒤를 돌아 옆에서부터 물수제비 치는 돌멩이처럼 유려한 곡선으로 롱소드가 날아온다.

그의 어깨의 유연성과 중심을 잡는 근력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는 필살의 일격.

사각에서 날아오는 검격!

"그렇군."

에드먼드는 양동이 속에서 씩 웃었고.

투웅-!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면서 갈웰의 몸통을 자기 몸으로 쳐 버렸다.

그 탓에 균형을 잃은 갈웰의 검이 목표에 닿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에서 멈췄다.

"기사는 똑똑해야 한다. 생각하고 때려야지 잘 때릴 수 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초근접의 상황.

갈웰은 활짝 웃고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까아아아아아앙-!

그러곤 양동이 위로 에드먼드의 머리를 박아 버렸다. 그의 이마가 찢어지면서 붉은 피가 흘렀다.

"근데 제가 물러설 줄을 몰라서 말입니다."

까아앙!

그리고 이어지는 박치기.

둘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쿠웅-.

에드먼드의 왼 주먹이 갈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갈비 몇 대가 부서지는 감각이 제대로 느껴졌다.

까아아아앙!

"이거죠!"

갈웰의 눈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머리에 몰린 피가 눈에 차는 거라.

갈비뼈의 고통이 치솟는 것이라!

하지만 갈웰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웨인 단장님도 강하시긴 하지만 정말 목숨을 위협하시는 느낌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까아앙!

양동이가 우그러들다 못해 찢어진다. 세로로 찢어지는 틈 사이로 에드먼드의 눈이 보였다.

"피...."

미친 소 둘이 부딪치는 듯한 둘의 싸움을 보던 성녀는 놀랐다.

양동이 속 에드먼드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보였으니까.

"지금 우리가 회복시켜 줄 줄 알고."

까앙-.

"저 난리를 피우는 거죠?"

쿠웅-.

이어지는 주먹과 박치기의 소리.

바르베타는 학을 떼는 성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걸 겁니다. 그리고 갈웰 경은 오랜 시간 엑스퍼트에 머물러 있었던 만큼 답답했겠죠."

"답답하다고 저러고 싸웁니까."

"저게 진짜 기사입니다."

"...우리 쪽 팔라딘 분들도 그렇습니까?"

성녀의 물음에 바르베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리날도 경에게 한 번 물어보시죠."

"미친놈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칼 하나를 믿고 적들에게 달려들겠습니까. 좋게 봐주시죠. 승부가 났군요."

털썩.

한 남자가 무릎을 꿇는다.

"커헉-."

바닥에 새빨간 피를 토하면서도 씨익 웃는 자.

"제법이었다, 갈웰 경."

퉁퉁퉁-.

에드먼드는 다 찢어진 양동이를 바닥에 던지면서 말했다.

"아직 모자랐군요."

갈웰은 어딘가 개운해진 얼굴로 그의 평가를 기다렸다.

주륵-.

에드먼드 역시 멀쩡하진 않았다.

양동이 속에서 박치기를 당해서 그런 건지 그의 귀와 코에선 붉은 피가 흘렀다.

갈웰의 피와 똑같은 사람의 피였다.

"하지만 전보단 덜 모자라졌지. 아버지다워."

"극찬 감사합니다."

검 앞에 있어선 누구보다 냉정한 말을 하는 에드먼드의 칭찬이니 갈웰은 기뻤다.

"그럼 내가 너 대신 왕위결정전에 나서겠다."

"어차피 이 부상으론 출전이 불가능합니다."

툭-.

갈웰은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하지만 반쯤 바스러진 갈비뼈들이 내장을 찔렀고 지독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회복하라.

지켜보던 성녀는 상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신성 마법으로 갈웰을 회복시켰다.

"후. 어쩔 수 없겠네요. 올리비아 왕녀의 허락은 받아 오셨을 테니, 그럼 저도 에드먼드 님이 나가는 걸로 생각하겠습...?"

카테리나는 에드먼드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돌아가는 걸 보았다.

대충 옷소매로 얼굴의 피를 닦은 후 바닥의 양동이를 집어 들어선.

우드드득-.

찢어진 부분을 악력으로 뭉쳐 대충 줄이고 얼굴에 썼다.

"철가면은 허락 맡고 온다."

"설마 무작정 그냥 왔던 겁니까?"

"...."

휙-.

언제 싸웠냐는 듯 에드먼드는 가볍게 바닥을 박차며 뚫린 천장으로 나갔다.

성녀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또 천장을 부수진 않겠죠."

바닥에 누워서 치료를 받던 갈웰이나 바르베타는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할 인간이 자칭 철가면 에드먼드니까.

콰가가가강-.

그리고 여지없이 저 멀리 들리는 큰 소리.

방향을 생각해 보면 맥로든 후작의 별장이라.

"카인이 정말 잘 자란 거군요."

카테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남쪽에 있을 그를 언급했다.

올리비아가 어째서 그를 보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심정으로.

#148 EP.Ⅱ-12

사람의 땀, 인간의 피 (2)

성녀는 바빠서 에셀레드 영지까지 갈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즉, 안 바쁜 사람은 직접 갈 수 있다는 뜻.

"지독한 놈들입니다."

성직자 하나는 백악절벽 아래 해안에서 검은 조각을 들었다. 생김새를 보아해선 사람의 팔이었다.

"배를 통으로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이 다 타 버릴 때까지 불꽃 속에 있었고요."

그리고 다른 성직자가 말했다.

앞에 놓인 간이 수술대 위로는 불타 버린 사람의 몸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기도와 폐 속에 남아 있는 검은 재를 긁어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광신도군요."

"으윽-."

같이 온 나이트 에셔는 잔혹한 시신들을 보기 힘든지 고개를 돌렸다.

반면 클로이드와 카인은 팔짱을 낀 채 성직자들의 조사를 묵묵히 들었다.

그러다가 카인이 클로이드를 불렀다.

"클로이드 경."

"예."

"여기 일어난 불이나 혹 움직인 두 사람을 봤다는 보고가 있었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긴 사람이 잘 없는 곳이라...."

에셀레드 영지의 영지민 대부분은 백작성 근처에 모여 살았다.

땅만 넓지, 백작성 인근을 제외하곤 버려진 초원이나 해안이 대대부분이었기에.

카인은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조사도 성직자분들이 하고, 지키는 건 팔라딘이 할 거고."

카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두 남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팔라딘을 따라 아이리안까지 건너온 다른 두 명의 팔라딘이었다.

카인은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곤 몸을 돌렸다.

"에셔는 성국 분들의 편의를 봐드려."

"제, 제가요?"

카인과 같이 돌아가려던 에셔의 얼굴은 죽상이 되었다.

불타 부서진 배 조각이나 선원들의 소사(燒死)한 시체를 보는 건 비위에 영 맞지 않았으니까.

"그럼 클로이드를 시킬까?"

클로이드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명이라면 하겠습니다."

평기사가 일하기 싫다고 어찌 기사단장에게 제 일을 떠넘길까.

에셔는 쓰디쓴 무언가를 삼키는 표정으로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모습에 팔라딘 둘 중 여인이 말했다.

"제가 본 귀족들은 하나같이 권위를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카인 공자님은 좀 다르시군요."

"...음."

카인은 여자 팔라딘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소개받지 않아서 못 들었던 걸 떠올렸다.

그녀는 바로 눈치채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반데카 마린 (Vandeca Marine)입니다. 가을기사단의 평기사죠."

"카인 에셀레드입니다. 흠 그런데...."

카인은 둘을 훑어보았다.

그가 아는 팔라딘은 3m에 다다르는 거대한 기계를 타고 적을 찢어발기는 자들.

그들의 주위로는 기계의 열을 식히는 물이 증발하며 뿌연 증기가 가득했고.

기계의 가운데서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빛'의 신성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최강의 광신도들이었다.

"짐이 너무 가벼워 보입니다."

대장벽에서 봐 왔던 육중한 팔라딘들과 달리 너무 간단한 둘의 무장에 카인은 의아했다.

"예?"

"제가 아는 팔라딘 분들은 짐이 거대하셔서."

"아, 일번대 분들을 보셨군요. 가장 험지의 전장만 다니는 분들이라 저희도 거의 못 보는 분들인데."

"일번대?"

반데카는 성국 가을기사단의 구조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총 일곱 개의 대로 구분되어 있는 곳.

일번대는 가장 강하고 정의로운 팔라딘만이 속할 수 있고, '기계승화'를 입은 채 싸우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속한 곳은 가을기사단의 오번대였다.

"저희는 헤네랄리페 내부의 일을 주로 맡아요. 일반적인 수도의 치안대에 가깝죠."

"아하."

"쫓는 적이 여기까지 도망쳐서 왔는데,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꽈악-.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철저하게 증거를 인멸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희생시켰다. 이런 종류의 인신공양은 이단이 확실하기에.

"반드시 저희가 정체를 밝히겠습니다."

팔라딘과 성직자들은 의지를 불태웠다.

카인은 에셀레드 영지의 임시 주인이 아닌 올리시렌의 친구로서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은 빛의 뜻대로."

* * *

"클로이드 경은 먼저 돌아가도록."

백악절벽을 오르는 길.

클로이드는 고개를 돌렸고 카인은 반대편을 가리켰다.

"볼 게 좀 있거든."

"아, 검흔 말씀이시군요. 아래 것이 예전 거고, 위에가 최근 것입니다."

제법 익숙한 눈치.

클로이드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백작님은 사흘간 물 한 모금 드시지 않고 검흔을 보시면서 깨달음을 얻으셨었습니다. 카인 공자님도 무언가 얻기를 바랍니다."

아마 클로이드는 얻지 못했으리라.

자신의 재능을 한탄했을지 실력을 원망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카인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얻으면 나눠 주지."

"...감사합니다."

솨아아아아-.

파도가 몰아친다.

던전 에이레가 사라지고 나서 에셀레드의 앞바다는 평화로워졌다.

처-얼썩.

물론 이전에 비해서.

여전히 이곳은 파도가 험했고 바다는 밑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게다가 배가 닿기에는 흰 절벽이 툭 나온 곳이라 접근하기 어려웠고.

저벅-.

카인은 가시처럼 솟은 하얀 돌들을 밟으며 가볍게 뛰었다.

간만에 보는 하얀 햇살과 푸른 바다에 가슴까지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곳.

화아아아아아-.

바닷바람이 분다.

그리고 바람이 제 몸을 연신 부딪치는 백악절벽에 두 줄기의 검흔이 있었다.

"...."

압도(壓倒).

카인의 보랏빛 두 눈은 두 개의 검흔에 사로잡혔다.

['겨울'이 아래 건 에드먼드가 던전을 부수면서 내지른 일격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웠다.

과거의 자신이라도 그려낼 수 없는 기적의 검흔.

'물론 방향이 다르다지만.'

에드먼드가 찌르기라면 자신은 베기다.

가는 길이 다르기에 같은 검흔을 만들 순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에드먼드가 성검을 쥔 채 만들어 낸 곡진하고 유장한 검흔 앞에서 카인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가 소드마스터입니다.

로드이스트 조니 워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했던 자신의 말.

당시엔 기억 속 어렴풋이 남아 있던 에드먼드의 일격을 떠올리며 말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진짜 소드마스터."

무식하게 오러량만 잔뜩 끌어 올려서 칼을 반짝이게 하는 양산형 가짜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를 벼리고 또 벼리면서 세상의 압력을 이겨 내는 진짜.

"에드먼드는 진짜다."

씨익-.

카인은 미소 지었다.

그런 에드먼드가 자신을 죽인다고 말했다. 아마 다시 왕도 린드브룸으로 간다면 그와 싸우게 되리라.

그리고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과거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 카인은 자신이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직감했다.

천천히 해가 진다.

정신없이 에드먼드의 검흔만을 보던 카인은 길어진 주홍빛 햇빛에 깊어지는 위의 검흔을 보았다.

단순하다.

투박하다.

아름다울 정도로 기예가 잘 닦여 있던 에드먼드의 검흔과는 전혀 달랐다.

'베기-!'

카인의 눈이 반짝였다.

에드먼드의 것은 쉽게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카인 자신과 수준이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위의 검흔은 달랐다.

햇빛이 여러 모습을 비출 정도로 오래 바라보며 익숙해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놀랍군."

아마도 용사였던 아벨의 검보다도, 그런 아벨을 죽였던 자신의 검보다도 위의 검.

소드마스터라는 경지를 아득하게 초월한 검흔.

['겨울'이 보고 싶냐고 묻습니다.]

"보고 싶다?"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솨아아앗.

그 순간 파도가 멈췄다.

천천히 내려앉던 노을이 정지한다.

액티브, '밤의 겨울'에 얼어붙는 것처럼 카인을 둘러싼 무인의 공간이 멈추고 시간이 천천히 느려진다.

['겨울'이 다른 거라면 불가능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쿠웅-.

시간이 돌아간다.

정확히는 절벽의 시간이 돌아간다.

순식간에 에드먼드의 검흔이 지워졌고, 어둠과 빛이 무수히 명멸하며 돌아간 과거.

솨아아아아-.

다시금 움직이는 바다.

아무 흔적 없는 새하얀 절벽.

그 앞에.

그 바다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스윽-.

그는 두 손으로 순백의 대검을 쥐었다.

카인은 보는 순간 저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겨울'이군."

['겨울'이 이건 자신의 기억이라 보여 주는 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사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라는 걸 보여 주듯 그에 색은 없었다.

그저 흑백으로 구분된 사내는 '겨울'을 들고 눈을 감았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반면 카인의 눈은 부릅떠졌다.

누구보다 익숙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썼던 자신의 검.

동방과 함께 초대 로드이스트가 만들고 이후의 계승자들이 하나씩 덧댄 최강의 검술, 암천일광!

그 첫 번째 검식을 사내가 휘두른다.

훙-.

그의 칼이 허공을 벤다.

하지만 절벽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다.

"키리에...."

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사내의 보폭과 어깨를 따라 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게 휘두른 것이지만 직접 따라 해 보니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보다 더 많은 키리에를 휘둘렀다는 걸.

글로리아 Gloria.

두 번째의 검, 글로리아.

크레도 Credo.

그리고 세 번째 본식.

카인은 침을 삼켰다.

자신도 익숙하게 펼쳐 내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검식이 겨우 시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부족하다.'

카인이 자신을 반성할 때.

스윽-.

사내는 대검을 다시 등에 멨다.

그 손에 검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빈 허공을 검이 있는 것처럼 쥐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아식 我式.

랩소디 Rhapsody.

화아아아아아아아아-!

사내의 흑백이 순간 주위를 울린다.

바다는 찬양하듯 몰아쳤고, 대지는 그 무게에 압사당하기 싫은 들 요동쳤다.

그렇게 허공을 쥐고 공허를 벤 칼.

무한한 자유가 엿보이면서도 환상의 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길이는 알 수 없으며 두께는 그의 의지가 닿는 모든 것이라.

기기기기긱-.

톱니바퀴들이 부서지다 못해 쪼개지는 소리가 울렸고.

쿠웅-.

단 일격에 절벽에 검흔이 남았다.

그 순간 모든 세상이 그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카인이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바라보았다.

[이것이 나의 검이다.]

암천일광의 모든 것을 계승한 카인이라지만 생전 처음 보고, 조니 워커조차 말한 적 없던 검에 카인이 꼼짝도 못 할 때.

[너의 검은 무엇이냐.]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분다.

봄날의 꿈처럼 그의 환영이 지워지고, '겨울'이 보여 주던 환상이 흐려진다.

철썩.

다시금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카인은 얼굴에 바닷물이 튈 때까지 멍하니 그 광경을 떠올렸다.

"누구지?"

암천일광을 사용하고, 마검, '겨울'을 쥔 자라면 대장벽과 반드시 관련 있으리라.

['겨울'이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마지막에 말한 건 나를 보고 말한 건가?"

늘 즉답하던 '겨울'이 말은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잠시 정적이 흘렀고.

열 번의 파도가 치고서야.

['겨울'이 당시에는 빈 곳을 보고 말하길래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알고 말한 거 같기도 하다고 합니다.]

솔직한 '겨울'의 말에 당황스러움이 묻어 나온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에드먼드의 검흔 위에 남은 검흔을 보았다.

해가 지고.

밤이 오고.

어둠으로 뒤덮여 모든 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아직도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카인은 전사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미소 지었다.

에드먼드와의 싸움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149 EP.Ⅱ-12

사람의 땀, 인간의 피 (3)

왕도, 린드브룸의 왕성.

본래 올리시렌이 쓰던 '백은의 궁'은 저번 테러 사건 이후로 꽁꽁 닫혔다.

그녀는 하이볼트와 함께 가장 중심인 '그랜드 크로스'로 거처를 옮겼고, 아벨도 궁을 하나 배정받았다.

궁의 이름은 '홍화의 궁'.

가장 넓은 연무장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 주인이 2왕녀 올리시렌이었던 곳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두 다리를 접은 후 그 위에 칼을 올리고 크게 숨을 쉬는 기사, 왕실기사단장 웨인 시케르.

그는 익숙하게 동방의 무사들이 주로 한다는 자세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맞은편.

"크흠."

갈색 머리가 윤기 나는 아벨이 웨인의 자세를 따라 한 후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꽉 감겨 있어야 할 그의 눈이 움직이면서 조금씩 열리려고 했고.

"버티십시오."

"...예."

"몸의 불편함을 떠올리지 말고 먼 바다와 같이 잔잔한 수면을 떠올리십시오."

"에셀레드의 바다는 멀어도 잔잔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견디다 못해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자 웨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귀여운 아들이 투정 부리는 것 같았기 때문.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잘 알고 있었다.

"카인 공자님이 모레 올라오신다는 거 같던데."

아벨은 카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감았다.

"저희가 싸울 때 맞춰서 올라오신다고 연락이 왔었죠."

"끝에 적혀 있는 거 보셨습니까?"

후우우우웅-.

밝은 봄바람이 둘 사이에 불었다.

햇볕은 따스했고, 홍화의 궁 곳곳에 심어져 있는 붉은 꽃에서부터 기분 좋은 향이 퍼졌다.

동시에 아벨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예.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거기서 어떻게 더 강해지시는 건지. 저도 에셀레드로 내려가면 꼭 절벽을 보려고 합니다."

"대단하시지요."

"저보다 고작 두 살 많으신데 하는 걸 보면 수십 년은 더 산 거 같을 때가 있으십니다."

"카인 공자님은 그런 편이시지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끊임없이 강해지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러게요."

웨인은 성의 없이 대꾸를 이어 갔고, 아벨은 눈치채지 못한 채 카인에 대해 말을 쏟아 냈다.

끔뻑-.

웨인은 슬쩍 눈을 떴다.

말을 하면서도 아까보다 더욱 바른 자세로 꼿꼿하게 있는 아벨의 모습.

"그래서 저도 최선을 다해서-."

"공자님."

웨인은 아벨의 말을 잘랐다.

아벨도 눈을 떴고, 둘은 서로를 마주했다.

"아벨 공자님도 이미 같은 나이대의 실력은 아득하게 넘으셨습니다. 왕실기사들도 함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죠."

"하지만 형님은 모두 이기시지 않겠습니까."

"...."

"아! 물론 웨인 경을 상대로는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요."

눈앞에 웨인이 있고 멀리 카인이 있음에도 아벨은 조금의 아부 없이 제 생각을 말했다.

그건 마치 믿음을 초월해 광신에 가까운 모습.

웨인 쓰게 웃었다.

"굳이 그렇게 돌려서 위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리안 삼백 년의 대적, 엘프 여왕과 세계수를 칼로 죽인 이상 이 왕국의 누굴 감히 카인 공자님과 빗댈 수 있을까요."

"에드먼드 백작님?"

"...그분 빼고요."

"그럼 없을 거 같네요."

"열일곱에 왕국의 최강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아이리안에 강자가 적다고 해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 되는데 말이 안 됩니까?"

인간의 세계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 유년기 전부를 숲에서 자랐기에 일반 상식이 빠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아벨과 함께하면서 그걸 잘 알게 된 웨인은 차근차근 말했다.

"예. 일반적인 인간들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저희 형님은 일반적이시지 않은 거군요. 역시."

아벨의 눈이 반짝인다.

평상시에는 말이 적지만, 카인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아벨을 보며 웨인은 웃음 지었다.

"그리고 아벨 공자님도 좀 다르십니다."

"다행이네요. 어떻게든 형님을 따라가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말이죠."

"어느 열일곱 살이 진짜 소드마스터가 될 것이며, 어느 열다섯 살이 왕국의 왕위를 결정짓는 전투에 나갈까요...."

올리비아 쪽으로 나가기로 한 녀석이 정체를 누구나 알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양동이의 기사'에게 당한 이후로, 당장 왕실기사단 중 나가는 건 자신뿐이다.

그런 자리에 나가는 아벨은 자신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죠."

"네... 여기 맞습니다."

웨인은 성격상 아벨의 모든 말에 반박할 순 없었다.

어차피 같이 전장에 올라갈 동료기도 했고, 남은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저는 언제까지 이런 명상을 해야 하나요?"

아벨은 다시 찌뿌둥한지 웨인에게 물었다.

하루라도 더 검을 휘두르고 싶다.

목숨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 속에서 번뜩이는 검을 펼치고 싶다.

아벨과 그의 속에서 숨 쉬는 가공할 재능들이 답답해했다.

이미 북방 숲에서 아르나와 카인과 했던 훈련이 지옥만큼 힘들었지만, 그리울 정도로.

"이미 충분히 빠르지만, 아벨 공자님이 벽을 뛰어넘기 위해선 필요한 과정입니다."

"벽?"

"각자에게 벽이 무엇인지, 벽이 어딘지 모두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론 진짜 소드마스터의 갈림길이지요."

"아하. 소드마스터가 되려면 이렇게 앉아서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아벨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웨인은 아벨의 재능을 믿었다.

그러나 전투본능과 검을 참오하는 재능은 다른지라. 이럴 때 보면 평범한 열다섯과 똑같은 아벨에 웨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예."

"정체불명의 상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고 할 때, 아벨 공자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목에 칼부터 찔러 넣겠습니다."

웨인의 미소가 점점 쓴웃음으로 바뀌고, 아벨은 자신이 틀린 건가 싶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럼 심장...?"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형님과 어머니가 그렇게 하시니까요."

"...."

웨인은 카인만 언급되었으면 제 생각을 그대로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벨이 어머니까지 들먹이니 차마 곧장 말하진 못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을 골랐다.

"그게 문제입니다."

"아! 그럼 목과 심장을 둘 다 찔러야 하는군요!"

"그것도 맞긴 한데... 진짜 소드마스터가 되시려면 틀렸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보다 완벽한 형님이 길을 보여 줬고, 건강해진 어머니가 맞다고 했다.

그런데 웨인 경이 틀렸다고 하니 아벨로서는 답답할 따름.

웨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 꽃향기를 품은 맑은 바람이 둘을 휘감았다.

"그건 아벨 공자님이 찾은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답이 아닙니까?"

"답이지요. 카인 공자님과 아르나 님의 답."

"아...."

아벨은 웨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열다섯의 소년에게 자신의 길을 찾으라는 선구자의 조언.

"누군가의 답을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벨 님에게도 답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요."

웨인은 조금 더 말을 풀어서 열다섯의 소년도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올리시렌 왕녀님은 파이를 좋아하십니다. 무슨 맛인지 가리지 않고요."

아벨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머니의 사과파이를 맛있다고 먹는 올리시렌의 모습을 기억하니까.

"하지만 올리비아 왕녀님은 까다롭습니다. 최상의 재료로 최고의 파티시에가 만든 파이만을 드시지요."

"같은 파이를 먹어도 서로의 입맛이 다르듯, 검에도 각자의 답이 다르다는 말씀이군요."

한 번 돌려서 말하자마자 바로 알아듣는 아벨의 모습에 웨인은 흡족했다.

글에 박힌 표현처럼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아벨은 웨인의 모든 말을 알아들었다.

"이미 아벨 공자님의 육체와 기술은 한계입니다."

몸이 더 자라지 않는 이상 현재 이상으로 강해질 순 없다.

기술 역시 처절한 실전 속에서 완벽해졌다.

"그래서 형님은 제게 목숨이 걸린 실전을 권하셨죠."

한계를 뚫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다.

아르나와 카인은 용병과 전사 출신답게 극한의 실전을 선호했다.

"그런 실전에서 강해지는 건 정말 하늘이 내린 재능에 운이 좋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반면 웨인은 아니었다.

철저히 기사로 자라 기사로 살아왔던 그로서는 그런 무식한 실전을 열다섯의 소년에게 권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요?"

"자신을. 성장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갖춘 사람이 실전에 던져졌을 때 가장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웨인 경은 제게 재료를 주고 싶으신 거군요."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

카인은 웨인에게 많이 배우라고 하고 떠났고, 아벨은 그 말에 충실히 따랐다.

활동적이었던 카인과 달리 웨인은 지겨운 과거 이야기나 여러 가지 검술에 대해 말해 줬다.

그래도 왕실기사단의 합격진과 검은 재미있었으나, 검을 쥘 땐 어떤 마음이어야 하고 어떻게 서야 한다는 이론들은 지겨웠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예. 정확히는 제 답이자 기사단이 찾아낸 답입니다."

카인에겐 카인의 답이.

웨인에겐 웨인의 답이.

"이젠 아벨 공자님도 공자님만의 답이 필요합니다."

"답...."

"진짜 소드마스터는 자신의 의지를 칼날처럼 벼려 이 세상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즉, 자신을 모르면 나아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렇군요."

아벨은 무릎 위에 올려 두었건 세검을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살갗을 갈라 버릴 위험한 흉기이자 동시에 누군가에겐 희망이며 누군가에겐 절망이 될 도구가 손에 있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저녁에 언제나처럼 같이 식사하시죠."

매일 밤, 올리시렌과 이소엘 그리고 웨인까지 넷은 같이 저녁을 먹었다.

각자 수련하다가도 밤에는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이제 와선 없으면 서운했다.

툭-.

아벨은 다시금 칼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웨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상 누가 열다섯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에 도전하는 소년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 * *

후우우웅-.

바람 끝이 차다.

낮의 따사로운 해는 온 힘을 다한 듯,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다.

길어진 주홍빛 햇살이 홍화의 궁의 연무장을 비추고 그 가운데 있는 아벨은 눈을 떴다.

훙, 후웅-.

바람결이 달라졌으니까.

아무도 없는 왕궁.

시종들도 왕위결정전이 끝나기 전까지 들어올 수 없는 땅에 8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일곱은 그림책 속, 사막의 부족인 듯 눈만 내보인 채 천으로 자신을 똘똘 감고 있다.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백발의 노인, 사도 금빛 새벽이 아벨의 앞에 있었다.

"자네가 아벨인가?"

철판을 긁는 것과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

툭툭-.

아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느릿느릿하게 바지의 흙을 털면서 일어났다.

"그렇습니다."

"그럼 확인부터 할-."

노인이 숨을 들이쉬고 말을 잇는 순간.

아벨식 아르드바르.

아가트람 Airget-lam.

쉐에에에에엣-!

지금까지 느릿함은 연기였다.

단숨에 적을 찔러 꿰뚫는 세검이 금빛 새벽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일곱의 사막 용병들이 달려들었고.

팅-.

아벨의 검이 튕겨 나왔다.

하지만 아벨의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으니-!

아벨식 아르드바르.

아케트라브 Airgead-lámh.

무수히 쏟아지던 세계수의 가지를 튕겨 내던 아벨의 찌르기가 하늘의 별빛처럼 터져 나왔다.

티디디디딩-!

단숨에 일곱의 공격을 맞상대한 아벨은 적의 목에 칼을 꽂고자 했지만, 거기까진 불가능했다.

"못된 버릇이야."

금빛 새벽은 목을 쓸며 말했다.

처음의 일격은 철저히 자신이 쉬는 숨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카바옐로스 리벨리온>이 이젠 무기까지 들고 있는 이상 다시금 아벨이 짓쳐들지 못할 거라 생각하며 말했다.

"상대의 말도 듣지도 않고 칼질하는 건 안 좋은 버릇-."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하지만 아벨에게 그딴 건 상관없었다.

-적이다 싶으면 목이나 심장부터 찔러.

카인의 말이 아벨의 칼끝을 금빛 새벽의 심장으로 인도할 뿐.

#150 EP.Ⅱ-12

사람의 땀, 인간의 피 (4)

꽈악-.

아벨의 세검이 금빛 새벽의 주먹에 잡혔다.

뚝-, 뚝.

날카롭기 짝이 없는 세검을 쥔 만큼 그의 손에서부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사막의 용병 일곱의 칼날이 아벨의 목을 휘감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어 버릴 듯.

"야수인가."

금빛 새벽은 아벨과 마주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인체실험의 결과물 중 하나인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건데.

"혹은 맹수인가."

지금 마주하는 건 괴물이다.

이제 겨우 열다섯.

청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어린 소년이 이토록 검을 잘 다루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보통의 인간은 아니군."

비웃음과 진짜 웃음 사이의 미묘한 무언가. 금빛 새벽의 오른쪽 입꼬리가 들어 올려진다.

아벨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금빛 새벽을 직시했다. 마치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곧장 목을 따 버리겠다는 듯.

그리고 그 눈빛은 자신을 불태우며 싸우던 전사, 카인의 것과 똑 닮은 것이었다.

"누가 키운 것인지 보고 싶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야수로 만들어 내다니."

"넌 누구냐."

"호오."

금빛 새벽의 눈이 반짝인다.

아벨의 목소리에 놀란 것이 아니다. 싸늘한 살기가 감돌면서도 겉으로 전혀 티 내지 않는 그의 자세에 놀랐다.

"날 전혀 궁금해하지 않아.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묻는 것이야."

"대마법결계가 펼쳐진 왕궁에 이렇게 쉽게 들어온 걸 보면 백은의 궁의 테러를 저지른 자군."

"후후. 그건 성국의 성직자가 저지른 일."

금빛 새벽은 가볍게 부정했다.

하지만 그 순간.

픽-.

아벨은 세검을 돌리며 그의 손바닥 상처를 벌렸다.

스윽-.

용병들은 반사적으로 아벨의 목에 칼날을 더 가져다 대었다.

금빛 새벽의 손에 흐르는 핏물처럼 아벨의 목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용병들의 칼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

"에버윈 왕비님이 설치해 둔 스크롤이 바꿔치기 되어 있었지. 그렇다는 건 누구보다 은밀하고 정보력이 좋은 자들이 범인이라는 거고."

"그래서 나다?"

금빛 새벽은 아벨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척-.

그는 아벨의 세검을 놓으며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용병들도 아벨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러나 아벨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달려들 듯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아벨은 천천히 칼을 내리며 깊게 숨을 쉬었다.

-위기일 땐 가능한 시간을 끌어. 그리고 숨 쉬어. 느리고 깊게. 앞으로 보일 틈에 네 모든 힘을 때려 박을 수 있도록.

아벨은 카인이 지나가듯 했던 말까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라마이닝 백작가를 치러 갈 때 카인이 해 주었던 조언을 떠올리며 숨을 골랐다.

그 모습에 금빛 새벽은 경탄했다.

"허참, 어린애답지 않군. 구르고 구른 용병다워."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너희일 텐데."

"그럴 리가."

금빛 새벽은 위를 가리켰다.

아벨의 눈이 가늘어진다.

노을빛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꺾이는 게 보였다.

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홍화의 궁을 둘러싸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방음, 인지 불가, 시선차단. 밖에 있는 자들은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 수 없지."

"보통 결계가 아니군."

"나름 귀한 거야. 나니까 쓰지."

"그래서 누구냐."

"호오, 이번에는 정말 나를 궁금해하는구나."

금빛 새벽은 미소 지었다.

인간과 대화하면서 이렇게까지 즐거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저 살기 위해 뛰던 그의 심장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는 것만 같았다.

"알아야 묘비에 이름을 써 주지."

"말본새 교육을 누구한테 받았는지도 궁금하구나."

"제시."

"알고 싶으면 돈을 내라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

금빛 새벽은 말문이 막혔다.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 밑바닥 용병 같으면서, 하는 말은 건들건들한 양아치다. 그러면서 검은 누구보다 공명정대하고 올곧은 직선의 검이라.

살아온 시간으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라 자부하는 금빛 새벽은 그간 정말 많은 사람을 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벨 같은 자는 없었다.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턱을 쓸었다.

"재미있군, 왠지 끌려."

"...."

아벨은 소름이 돋았다.

난잡하게 뻗어 있는 백발 속에서 번뜩이는 그의 눈이 유난히도 징그러워 보였으니까.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이름 없을 자'를 따르는 사도 금빛 새벽이다."

"보통 사람들?"

"허어, 너 같은 어린아이가 우리를 알다니."

"사도라고 하면 제법 높은 사람인 것 같은데 왜 날 찾아왔지?"

스윽-.

그는 왼손을 들었다.

그 방향은 아벨의 심장이라.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무... 슨."

아벨의 말이 느려진다.

꾸드드득-.

금빛 새벽의 왼손바닥에 무언가의 입술과 이빨, 혀가 나타났다.

마치 여인의 것처럼 작고 반짝였다.

이름 없을 당신께 경배를.

쿠웅-.

마치 마녀가 기적을 발하듯.

성녀가 '빛'의 신성을 불러오듯.

금빛 새벽의 손에 생긴 입이 무언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새벽을.

한 단어를 통해 뜻을 이루는 그들과 달리 이것은 긴 말에 힘을 담았다.

두근-.

아벨은 왼손을 심장 위에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야생마가 질주하듯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부름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박동하는 가슴에 아벨은 의아함을 느꼈다.

■■■■■■■-.

무언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다.

아니, 심장이 자신의 혼에 말을 거는 것만 같고.

쿵.

무언가 머리를 타고 오르는 기분에 너무 어지러웠고, 한쪽 무릎을 땅에 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불꽃으로-.

"우리의 불꽃으로."

손바닥의 입에서부터 울리는 말.

노인을 비롯해 일곱의 용병이 동시에 따라 한다.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주문에 아벨은 귀를 막았다. 수천 마리의 벌레가 자신을 타고 오르는 것만 같았다.

세계를 갱신하리라.

"세계를 갱신하리라."

뚝-.

아벨의 붉은 피가 멈춘다.

목에 났던 상처에서부터 흐르는 건.

뚜욱-,

은빛의 피.

그걸 보며 금빛 새벽은 활짝 웃었다.

"역시 확인해 보길 잘했어, 이토록 건강하게 살아 있는 실험체가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가시지요, 그릇이여."

금빛 새벽은 왼손 주먹을 쥐며 입을 감췄다.

그리고 바닥에서 거칠게 숨을 쉬는 아벨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함께 찬란한 새벽을-."

그 순간 아벨이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은 갈색이요, 다른 눈은 은빛이라!

금빛 새벽이 멈칫한 순간.

쉐에에에에에엣-!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아벨은 바닥을 박차며 끝까지 쥐고 있던 세검을 내질렀다!

쿠드드드득-.

금빛 새벽의 오른손에 직격한 세검은 그대로 손바닥을 꿰뚫었다. 동시에 아벨은 바닥을 디디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세검이지만 들고 있는 마음의 검은 대검!

밴더빌트의 검술, 수직의 참격이 폭발했다.

로 마이어 Lo Meyer.

툭.

금빛 새벽의 오른쪽 팔뚝이 절반으로 잘리며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고통을 모르는 듯 피가 흐르는 팔을 그대로 둔 채 멍하니 아벨을 돌아보았다.

스윽-.

아벨은 왼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이것이 나의 검이다."

아까 들었던 웨인의 조언에 아벨은 자신의 검을 찾고자 했고, 이제야 찾았다.

카인과 아르나.

그들의 검과 다르지 않다.

아벨은 깊고 또 깊게 생각했고, 결국 자신의 검이 향하는 곳은 카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카인의 치열함과 위대함을 쫓아갈 것이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칼."

그 어떤 위험에서도 자신의 날카로움을 잃지 않고 나아가길 바랐다.

그래야 카인에게 닿을 테니.

"...분명 그분의 은빛이 깃들어 있거늘."

금빛 새벽은 바닥에 떨어진 자기 팔을 집어 들었다.

꾸욱-.

그는 마치 인형의 팔을 끼우듯 상처 부위에 팔을 붙였고.

꽈악-.

순식간에 붙은 오른손을 쥐었다 펴기 시작했다.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하는 거지?"

스윽-.

아벨은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몸의 중심을 낮추고 세검을 들었다. 순식간에 압박해 오는 일곱의 용병을 감지하면서 금빛 새벽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인체실험의 결과물이 아닌가."

금빛 새벽은 혼란스러웠다.

방금처럼 깨우면 그대로 의식을 잃어야 하거늘, 분명 은빛을 각성했음에도 정신은 그대로다.

"버티는 것인가, 하지만 한낱 인간이 어떻게?"

그가 끊임없이 중얼거릴 때.

아벨은 서쪽을 보았다.

해가 진다.

그리고 해가 지면.

"이겼군."

"...?"

저녁 먹을 시간.

콰가가가가가강-!

함께 저녁을 먹을 사람이 안 온다면 찾아오는 법.

결계가 흑색의 어둠에 휘감기며 부서졌다. 그 틈이 벌어지자마자 서쪽에서부터 한 중년인이 검을 든 채 날아왔다.

칸트레브 Cantref.

웨인 시케르의 칼이 동시에 아벨의 좌측 용병 둘의 목을 베어 버렸고.

크레드네 Credne.

콰가가강-!

이소엘이 쥔 중력망치가 우측의 용병들을 벽에 박아 버렸다.

굳세어라.

이어 아벨을 비롯한 둘의 전신에 흑색의 어둠이 휘감기더니 단단한 갑옷으로 바뀌었다.

떨어진 체력을 순식간에 채우고 신체를 강화시키는 신비!

찬란하라.

셋의 무기에도 어둠이 휘감긴다.

크레드네는 더욱 거대하게, 웨인의 검은 더욱 날카롭게!

둘은 남은 용병을 처리한 후 금빛 새벽을 둘러쌌다.

아벨 역시 칼을 들었다.

완벽하라.

쿠웅-.

그리고 하늘에서 흑색의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한 명의 마녀.

올리시렌 룬 아이리안.

처절할 정도로 불타고 있는 흑색의 눈으로 금빛 새벽을 내려다보았다.

"매번 일찍 와서 식기를 놓는 아벨이 왜 이리 안 오나 했더니."

그녀는 금빛 새벽을 바라보았다.

흑색 마녀의 눈으로도 알 수 없는 불길한 자.

아벨이 입을 열었다.

"아마 테러범인 거 같습니다."

"확률상으로도 그렇고 이렇게 왕궁에서 난리를 피운다는 것만 봐도 일단 잡아 봐야겠고."

스윽-.

올리시렌은 두 손을 교차했다.

웨인과 아벨이 수련하듯, 그녀도 놀지 않았다.

자신이 지닌 마녀의 힘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파악했고.

촤라라라라-!

그녀의 주위에서부터 흑색의 사슬이 터져 나왔다.

탓-.

금빛 새벽은 그대로 대지를 박찼다.

콰아아앙-!

이소엘은 곧장 공기를 찢으며 크레드네로 그를 후려쳤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 일어난 은빛의 방어막을 부수진 못했다.

쿠웅-.

그건 웨인의 검도 마찬가지.

사라라라라-.

올리시렌은 세계수의 뿌리를 떠올리며 만든 자신의 검은 쇠사슬을 뿌렸고, 수십 가닥의 사슬이 금빛 새벽을 잡기 위해 뻗어 나갔다.

"예비 마녀가 어떻게!"

그는 경악하면서 허공에서 몸을 놀렸다.

사슬은 세계수의 뿌리 같기도, 악마 발람의 무수한 손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은 그를 잡지 못했다.

새보다 자유자재로 허공을 나는 그를 잡을 요령은 없었으니까.

"생각보다 섬나라의 종자들이 강했군."

씨익-.

금빛 새벽은 마녀 올리시렌이 웃는 걸 보았다.

"한 사람 잊은 거 같지 않아?"

촤악-!

아벨이었다.

그녀의 '완벽하라'가 피워낸 흑색의 날개로 어느새 하늘로 치솟은 아벨이 금빛 새벽보다 위에 있었다.

아벨의 눈동자를 물들였던 은빛이 사그라지고.

쿠구구구구궁-!

밤하늘에서 지상으로 아벨이란 이름의 유성이 떨어져 내렸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51 EP.Ⅱ-13

진심과 진실 (1)

「"구원자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사막에 엎드려 있는 사내가 고개를 든다.

흐릿한 시야 속, 천으로 코와 입을 막은 사람이 보였다.

스윽.

그는 그 천을 열어선 입을 벙긋했다.

"■■■."

"...예?"

무언가 들렸다.

하지만 무엇인지 들리지 않았다.

인간이 짐승의 소리를 모사하듯 조금이라도 따라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말했던 자는 더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스윽-.

그저 물통을 기울여 엎드려 있던 자의 바싹 마른 입술을 적셨다.

"왜 이런 사막을 다니는 거지?"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은혜?"

"세상 사람들은 잊었지만 사백 년 전 용사님이 계셨습니다."

"...."

"성녀, 대현자, 마술사왕, 초록의 활 등 하나하나가 전설인 분들과 함께 마왕을 물리치셨죠."

"마왕은 물리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사내의 눈이 동그래진다.

이런 사막에서 만난 누군가가 학자는 되어야 알 수 있는 마왕의 현존성을 알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래서 용사님께선 부활한 마왕을 다시 물리치시고 그를 네 조각으로 잘라선 봉인했다고 하십니다."

"그 조각 중 하나가 여기 있고?"

"예."

"그대는 마왕의 조각으로 힘을 얻고자 하는 건가?"

절레절레-.

"아닙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저는 은혜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은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만들어 주신 용사님에 대한 은혜를!"

"...."

"이상하리만큼 다른 파티원의 기록은 있어도 용사님에 대한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분이 해 둔 마왕의 봉인은 그대로일 것이고."

트르륵-.

물을 먹였던 자는 바닥에 엎어져서 눈을 반짝이는 사내의 짐을 열어 보았다.

은식기 몇 개와 나름 고급으로 취급되는 건조 음식이 좀 보였다.

그러곤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돌아보았다.

"제사라도 지낼 생각이었나?"

"...예."

"동화로도 남지 않은 전설의 끄트머리를 잡고 이 사막을 오다니, 단단히 미친놈이로군."

그리고 그는 고급 육포를 꺼내 들었다. 자연스레 포장을 까서 먹으려던 그의 손목을.

척.

"놓으십시오. 그건 용사님을 위한 공물. 아무리 구원자시라지만 안 됩니다."

잡았다.

물도 먹지 못해 말라 죽던 그의 몸 어디서 힘이 난 것인가. 그는 무감각한 눈으로 힘을 내는 마른 사내를 응시했다.

섬뜩하다.

살기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수만의 생을 거둔 학살자만이 지닐 냉담한 눈빛이.

찔러든다.

"차라리 절 죽이고 빼앗으십시오."

사내의 결연한 의지.

피식-.

그는 웃은 다음 사내의 손을 가볍게 뗐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 손을 잡아당겨 두 손을 마주 잡게 했다.

그러곤 육포를 태연하게 씹으면서 웃었다.

"고맙군."

"...?"

"비싼 육포답게 맛있어. 자네도 좀 먹게."

쭈욱-.

익숙하게 큰 육포를 찢어서 사내에게 건넸다.

그러곤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반갑군, 나의 추종자. 나는 존 도우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기생하는 전직 용사며 현직 백수라네."

"...!"」

* * *

콰가가가가가가강-!

흩날리는 흙먼지.

단단한 돌로 덮었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연무장의 바닥-!

그곳에 한 명의 노인이 서 있었다.

아벨이 천공에서부터 내리찍는 검풍에 그의 덥수룩했던 머리는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의 묘한 눈빛과 함께 선 굵은 이목구비, 짙은 수염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드드득-, 까드드득-.

그리고.

"제법이군."

그는 두 손으로 아벨의 칼을 잡아챘다.

정확히는 손바닥에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입이 물어 챘고, 이빨들이 칼날을 계속해서 씹어 먹으려 했다.

우우웅-.

그리고 노인의 이마.

은빛의 상처가 보인다.

마치 가시덩굴에 긁힌 듯한 상처 하나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내 봉인을 하나 풀게 할 줄은 몰랐군."

"봉인...."

"이름 없을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우리의 가련한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게나."

후우우우우웅-.

분위기가 달라진다.

완벽한 연계와 올리시렌의 적절한 도움으로 노인을 압도했지만, 이젠 아니다.

슝-.

아벨은 그대로 칼을 뽑아서 그와 거리를 벌렸다.

아벨의 양옆으로 웨인과 이소엘이 섰고 그들 뒤론 올리시렌이 섰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파티가 있을 줄이야."

노인은 가볍게 팔을 내렸다.

뺨, 목, 팔뚝.

손바닥을 제외한 다른 곳 여인의 것과 같은 눈과 입, 코가 하나씩 만들어진다.

그 기괴한 모습에 넷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겠는가. 왕위결정전과 상관없이 나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나를 놓아줄 것인가."

"영감,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기기기기기긱-.

카인만이 들을 수 있는 톱니의 소리가 들리고 올리시렌의 발끝에서부터 흑색의 불꽃이 치솟는다.

그녀는 인간의 지성과 마녀의 광기가 공존하는 눈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왕위보다 중요한 건 복수야."

"허어, 내가 범인이 아니라도 말인가?"

"범인이 아닌가?"

"나는 아니다."

진실.

올리시렌이 깃들어 있는 마녀의 힘이 그가 한 말의 진위를 가렸다.

그녀가 멈칫한 순간 그는 씨익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맞지."

진실.

"옛날에 죽여 둔 왕비가 귀쟁이들의 신비로 살아 돌아왔으니 다시 죽여야지. 그것이 우리의 자비."

진실.

"하지만 고작 너희가 우리를 상대할 순 없으리라."

또 진실.

후우우웅-.

밤의 바람이 분다.

왕도의 치열함을 식히는 밤의 바람이 그들의 사이를 지나고. 사도, 금빛 새벽의 모든 입이 웃었다.

"거래를 하지."

"테러범과는 거래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내가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마. 나와 싸울 수 있는 기회."

"...?"

"대신 나는 저 친구가 탐난다."

스윽-.

그는 검지를 들었다.

그 끝엔 아벨이 있었다.

"내가 이기면 데려가고."

"당신이 지면 죽는 거고."

올리시렌은 바로 말했고, 금빛 새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

"그럼 거래를 받아들일 필요 없겠어."

"...?"

"그냥 이 자리에서 죽이면 그만이니까!"

그녀의 외침에 셋이 무기를 꽉 쥔 채로 바닥을 박찼다.

단숨에 금빛 새벽을 갈아 버리겠다는 의지!

"그래?"

틱-.

왼손으로 이소엘의 크레드네를 막았다.

투웅-.

오른손으론 웨인의 검을 잡았다.

그리고 앞.

자기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아벨을 향해선.

멈춰라.

멈춰라.

멈춰라.

....

그의 몸에 보이는 여인의 모든 입들이 하나의 명령을 내뱉었다.

"무, 슨...."

아벨은 순간 깊은 심해에 빠져 숨 쉬는 것마저 불가능할 정도의 압력을 느꼈다.

눈을 감고, 숨을 쉬며, 심장이 뛰는 모든 것이 멈춰 버릴 것 같은 느낌.

"큭-."

아벨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역시, 각성하지 못하는 만큼 기적의 언령도 잘 먹히는군."

금빛 새벽의 모든 입은 다시 말했고.

꿇어라.

쿠웅-.

올리시렌의 활용과는 차원이 다른 언령의 힘이 울려 퍼졌다.

다리가 부러질지언정 버티려던 이소엘의 무릎이 땅에 박혔고, 웨인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버텼지만.

쿵-.

결국은 두 무릎을 땅에 대었다.

서 있는 건 올리시렌뿐.

저벅-.

이마에 은빛의 상처가 형형하게 빛나는 노인은 산책을 나온 것처럼 그녀에게 걸어갔다.

"예비 마녀가 이렇게까지 다양한 마녀의 힘을 쓸 수 있다니, 이 섬나라엔 재미있는 게 가득하군."

넘어져라.

올리시렌은 그에게 명령했다.

그 날숨에 담긴 마녀의 힘이 금빛 새벽을 짓누른다.

우우웅-.

하지만 노인의 이마에 난 상처가 한 번 반짝이고 올리시렌의 언령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쓰러져라.

기절하라.

올리시렌이 계속해서 연습했던 언령이 쏟아진다.

하지만 노인의 상처가 반짝일 때마다 허무하게 스러졌다.

"마녀 사냥꾼 잭(Jack)."

"...?"

"나를 상대하려면 나를 찾아볼 시간을 줘야 할 테니까."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분다.

그리고 올리시렌을 지나쳐 걸어간 금빛 새벽은 어딜 봐도 없었다.

잘 싸웠지만, 상대가 너무 나빴다.

패배였다.

* * *

와아아아아-!

"신사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왕위결정전의 진행을 맡은 몰리우트 남작입니다."

메이누스와 린드브룸 사이, 버려진 경마장.

수만의 사람들이 환호를 내지르고 있다.

그 가운데에 어쩌다가 떠밀려 나와서 마법의 확성기를 쥔 채 서 있는 라곤도 몰리우트 남작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경기는 간단합니다. 두 왕녀님의 기사가 셋이 나옵니다. 세 번의 시합 중 둘을 이기면 승리입니다."

지독하게도 간단한 방법.

동시에 너무나도 간단해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승패가 갈리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패배라고 외치거나 죽거나."

하지만 누가 패배라고 쉬이 말할 수 있을까.

본인의 명예에도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 기사인데, 자신이 따르는 주군을 왕으로 만드는 전투에선 더욱더 이기지 못하면 죽으리라.

와아아아아아-!

경마장을 넘어 근처 도시까지 울릴 정도의 함성이 퍼졌고.

몰리우트 남작은 몇 가지 말을 한 후 귀빈석을 가리켰다.

"올리시렌, 올리비아 왕녀님이십니다."

두 왕녀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건 대귀족들.

반면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적당히 넘기게. 몰리우트 남작.

왕위결정전의 시작 전 라마이닝 백작과 맥로든 후작은 그를 찾아왔다.

-성녀님과 카인 님은 늦게 참석하실 거야.

올리비아를 지지하는 성녀, 카테리나.

올리시렌을 이 자리까지 끌어 올린 희대의 천재, 카인 에셀레드.

둘이 동시에 늦게 온다는 사실에 몰리우트 남작은 무언가 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감히 되물을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굳이 자신이 따르는 라마이닝 백작의 수심 가득한 표정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끼어들 곳이 아니라는 걸 잘았으니까.

-편히 말해도 돼. 편하게.

-필요 없어.

-잘.

고작 한두 달 전이지만 체감상으로는 몇 년 전 같은 그때, 카인을 마주했었다.

카인의 에셀레드 영지에서 살아 돌아온 것으로 왕국 내 유명 인사가 되었고, 카인이 승승장구하면서 자신도 나름 반사이익을 챙겼다.

하지만 아직도 악몽으로 카인의 목소리를 듣는 몰리우트는 조금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고.

"그럼 왕위결정전 시작하겠습니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소리 질렀다.

해일처럼 몰려드는 환호에 즐거움을 느끼며 왼쪽을 가리켰다.

"맥로든 후작령의 기사-! 차기 소드마스터로 유력한 창공의 푸른 별!!"

저벅-.

그늘진 입구에서 늘씬하고 긴 사내가 걸어 나온다.

그는 가벼운 경갑을 입고 있었고, 양 허리에는 롱소드가 한 자루씩 매달려 있다.

"나이트! 마티이인 그레이엄-!"

와아아아아.

맥로든의 기사이자 올리비아의 첫 번째 승리를 가져오려고 나온 마틴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이미 이 자리에 나온 이상 아이리안에서 손꼽히는 기사라는 뜻.

그의 창창한 미래가 손에 잡힐 듯했다.

"그리고 상대는 올리시렌 왕녀님의 호위 기사이자 왕도 아카데미 사상 최고의 천재 기사!"

철컥-.

마틴이 나올 때와 다르다.

어둠으로 가려진 입구에서 들리는 무거운 발소리에 담긴 살기.

의지.

무게.

관중들의 열기가 싸늘하게 식어 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체는 웨어햄 백작가의 영애! 이소엘 웨어햄!"

후우우우우-.

그늘 밖으로 나온 이소엘은 중갑을 걸쳐 입었다. 이미 손에는 자신의 몸만 한 망치를 들고 있었고.

철컥, 철컥.

그녀의 주위를 휘감는 서늘한 살기가 주위를 짓누른다.

원래 그녀가 이런 분위기였는지 떠올리던 몰리우트 남작은 잡스러운 이야기는 다 빼고 바로 외쳤다.

"첫 번째 경기 시작-!"

탓-.

마틴은 여유롭게 서서 손을 까딱였다.

"레이디 퍼스트."

멋들어진 미남의 말.

게다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는 그의 유머에 관중들이 조금씩 피식거릴 때.

후우우웅-!

마틴의 풍성한 머리가 허공에 휘날린다.

그의 귀에서 피가 흐르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곤 휘둘러진 이소엘의 망치가 그의 얼굴 한마디 옆에 멈췄다.

"죽음에는 퍼스트든 라스트든 없습니다."

저벅-.

이소엘은 다시 뒤로 걸어 자리 잡았다.

거대 전투 망치를 단단히 쥔 이소엘의 모습에.

꿀꺽-.

마틴은 침을 삼켰다.

방금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걸 깨달으면서.

#152 EP.Ⅱ-13

진심과 진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