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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그냥 들어온다면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빽빽한 숲, '딥 포레스트.'

스스스스슥-.

글루미엠의 의식이 강림한 엘프가 발을 뻗자, 숲이 저절로 움직인다.

이 모든 숲을 지탱하는 게 세계수고, 글루미엠은 세계수의 화신이다.

그런 글루미엠의 단말과 함께하니 어려운 건 아무것도 없다.

"반짝아."

"예, 여왕님."

그녀를 따르는 로스 후작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인간 중에서 '딥 포레스트'에 정식으로 초대받고 발을 디디는 건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강제로 들어간 자는 당장 로스도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고.

평상시 엘프들이 이렇게 빡빡한 숲에서 어떻게 다니나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서야 답을 얻었다.

헤터워드가 다른 생각을 할 때, 글루미엠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아홉 엘더 중 나는 둘을 잃었어."

엘더 리히스 오히긴, 워럴드 로스에게 사망.

엘더 페이 멕게리티, 아르나의 화살에 사망.

"그리고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하나를 더 희생시켜야 해."

시그마리 에이그리히, 희생.

"엘더 셋이 빠진 상황인데, 네가 엘더 셋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할 거야."

로스 후작은 잠시 글루미엠을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곧장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다 왔어."

어째서 밖에선 보이지 않은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가운데 있다.

그리고 나무와 넝쿨로 지은 집들이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소담스레 지어져 있다.

로스 후작은 집들의 틈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의 눈동자들을 느꼈다.

글루미엠이 있는 만큼 적의보다는 의아함과 경계심이었다.

글루미엠은 땅이 어떻든 쭉쭉 미끄러져 나갔다.

로스 후작은 피의 힘을 조금 끌어오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도착했다.

거대한 나무, 세계수 아래.

흰색의 제단 위.

시그마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저벅, 저벅-.

글루미엠이 지금까지 강림해 있던 엘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앞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바로 허리를 숙였다.

인간의 소녀와 같은 키.

나른한 표정.

풍성한 초록의 머리와 바람을 잘라다 만든 듯한 연둣빛 드레스.

"돌아가 봐."

글루미엠의 본체였다.

그녀가 손짓하며 말하자 엘프는 인사를 남기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녀는 눈만 깜빡이는 로스 후작을 보며 웃었다.

"내 진체를 직접 본 인간은 반짝이, 네가 세 번째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돼."

세 번째.

로스 후작은 첫 번째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글루미엠은 눈치 빠른 그가 물어볼 줄 알았지만, 입을 닫고 있는 걸 보았다.

한 줄기 웃음을 더 얼굴에 담았다.

"내가 언급하는 걸 싫어할까 봐 안 물어보는 거야?"

"여왕님께 좋은 기억은 아닐지라."

"하긴 그 에드먼드는 너도 싫어하지."

두 번째는 에드먼드였다.

지난 11차 원정 당시 에드먼드는 보급병을 구하고 그대로 '딥 포레스트'를 세검으로 공격했다.

이곳을 휘감은 결계는 마법과 마녀의 '기적'을 버무린 거대한 대결계기에 고작 인간의 검에 무너지겠냐 싶었다.

하루, 이틀, 사흘.

에드먼드는 중간에 물을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오러를 씌운 세검으로 찔렀다.

기술이 아니라 힘으로 흔드는 결계.

결계가 무너지진 않겠지만, 너무 흔들리다 보면 보수의 어려움이 생기겠다고 판단한 글루미엠은 그대로 에드먼드를 결계 안으로 삼켰었다.

글루미엠은 당시를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게 인간이라니 말도 안 돼."

로스 후작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그럼 시작해 보자."

글루미엠은 누워 있는 시그마리의 옆에 섰다.

돌 위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정말 로스 후작의 꿈을 위해 제물로 쓴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글루미엠은 고개를 들었다.

"네 누이인 에버윈 로스를 이제부터 빚어 낼 거야."

사아아아아아-.

시그마리와 로스 후작의 몸에서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빛망울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루미엠의 초록 눈이 조금씩 검은색으로 물들어 간다.

올리시렌도 그렇고 마녀의 힘을 강하게 쓸 때의 특징이었다.

"이 세상에 죽은 자를 되살리는 수법은 없어. 언데드라고 할지라도 그건 정교한 모사에 불과해."

"잘 압니다. 이 빌어먹을 혈족은 죽어서 대부분이 언데드로 깨어나니까요."

피의 저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로스 혈족은 나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리는 언데드가 아니라 나름 자연발생 언데드로서 두 번째 삶을 영위하는 기분이었으니까.

파스스슷-.

세계수의 가지가 흔들린다.

글루미엠의 몸이 점차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하는 건 에버윈이라는 여자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너의 운명 중 과거의 에버윈에 대한 모든 걸 모아서 넣는 것뿐."

"몇 번이고 말씀해 주셔서 잘 압니다."

엘프는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

다만 방랑엘프는 지키지 않는다.

그 차이는 세계수에 있었다.

세계수에 연결되어 여왕이나 다른 일족과 의식이 동조된 엘프가 거짓말을 한다면 점차 연결이 무뎌진다.

반면 방랑엘프는 세계수라는 거대한 힘을 포기하고 자유를 얻은 만큼 거짓말의 자유도 있었다.

그리고 엘프 여왕쯤 되면 조금의 거짓말도 치명타로 다가오기 마련.

"너는 네 역할을 충분히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너는 이제 가장 '에버윈 로스'와 가까운 가짜를 만날 거야."

꽈악-.

로스 후작은 두 손을 꽉 쥐었다.

배어나오는 땀에 손바닥이 축축해졌지만, 그딴 건 관심 없었다.

"시그마리를 제물로 쓰길 잘한 것 같네. 그동안 너와 쌓인 유대가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화를 이끌고 있어."

화아아아아-!

초록의 빛 망울이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그마리의 심장으로 들어갔고.

두근-.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그녀가 변화했다.

늘씬하고 길쭉한 시그마리에서 로스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에버윈으로.

"어쩌면 진짜보다도 네겐 더 진짜 같은 가짜일 거야."

"그거면 됩니다."

몇 번의 심음이 터지고 가라앉자 이곳에 시그마리는 없었다. 로스 후작과 어딘가 닮은 여인이 누워 있었다.

에버윈 로스.

그리고 하이볼트의 아내이자 올리시렌의 친모였던 카를라 오우드리.

그녀가 로스의 새장을 탈출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아...."

인류를 배신한 대가로 얻은 사랑.

로스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에 손을 대었다.

그때 글루미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짜는 가짜."

"...?"

"그만큼의 감수해야 할 것도 있지."

약속의 범위는 가능한 한 에버윈을 살린다는 것이었으며, 약속 너머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운명의 눈을 지닌 글루미엠의 비웃음이 있었다.

* * *

짜악-.

엘프들이 물러서고 원정군과 에셀레드 기사단이 정리하고 있는 전장.

청아한 타격소리가 울렸다.

"지금 날 때렸어?"

뺨을 감싸 쥔 올리비아가 물었고.

꽈악.

올리시렌은 그녀를 멱살 채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왜 바로 명령하지 않았지?"

그녀의 새카만 눈동자엔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곧장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112 EP.Ⅱ-3

폭풍의 계절 (2)

-올리비아, 명령해!

마녀의 힘으로 글루미엠의 환상을 부순 올리시렌은 소리쳤었다.

-얘야!

맥로든 후작도 마찬가지.

그러나 카인이 엘븐나이트와 엘더 페이에게 몰린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지.

-....

지독한 살벌함 속.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그 순간 에셀레드 기사단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한 일.

올리비아는 멱살을 잡힌 채 왼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선연한 금빛의 눈으로 검게 물든 올리시렌을 응시했다.

"이젠 똑같네. 내 눈이나 당신 눈이나 회색이 아닌 건."

존대나 존경 따윈 버렸다.

모두 앞에서 올리시렌이 먼저 뺨을 날린 이상 1왕녀라는 이유로, 이복자매라는 이유로 대우하진 않기로 했다.

올리시렌은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꽈악.

올리비아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거칠게 잡아채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속셈이었지?"

"하! 속셈? 내가 무슨 속셈이-."

짜악!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다시금 뺨을 후려쳤다.

지켜보고 있던 맥로든 후작이나 다른 기사들은 심장이 덜컹하는 것 같았다.

로스, 맥로든, 에셀레드.

셋 중 어디 소속의 기사라도 살면서 눈앞에서 왕녀가 왕녀에게 뺨 맞는 걸 몇 번이나 보겠는가.

그것도 전장에서.

올리비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질렀다.

"너 지금 뭐 하는-."

짜악.

"미친-."

짜악!

올리시렌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가 딴소리 할 때마다 후려쳤다.

그저 때려야 할 걸 때리듯.

죽여야 할 걸 죽이듯.

"올리시렌 왕녀님!"

지켜보던 맥로든 후작은 놀라서 올리시렌을 말리고자 했다.

그러나 올리시렌의 섬뜩한 흑색 눈을 마주하자 몸이 저절로 굳었다.

평범한 눈이 아니다.

마녀의 눈.

그것도 엘프 여왕 글루미엠마저 그 한계를 알지 못한 이 세상 마지막 마녀의 검은 눈이었다.

"카인을 죽일 생각이었니?"

올리시렌의 물음.

지켜보던 카인은 멱살 잡힌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치솟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고함쳤다.

"당연히! 그때만큼 좋은 기회가-."

짜아아악-!!

지금까지가 맹물이었다면 지금 날린 뺨은 독약.

힘을 견디지 못한 올리비아의 옷깃이 찢어지면서 그녀는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왼눈의 실핏줄이 터진 듯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럼 내가 너를 죽여야지."

올리시렌이 움직이려 하자 맥로든 후작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원정군의 기사들이 움직이면서 올리비아를 지키고자 했다.

2왕녀 올리비아가 자신들의 총사령관이었던 만큼 당연한 반응.

"전원 착검."

상황을 지켜보던 아벨이 나지막이 말했다.

흩어져 있던 에셀레드 기사단 아흔다섯은 바람처럼 오와 열을 맞춰 서서 무기를 쥐었다.

"왕녀님."

아벨이 올리시렌에게 말을 걸었다.

"저 여자가 형님을 죽이려고 한 거군요."

살기.

웬만한 엑스퍼트급 기사라도 몸을 떨 정도로 싸늘한 살기가 아벨의 눈빛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그대들이 오지 않았다면 카인은 크게 힘들었을 거예요."

아벨과 아르나는 올리시렌의 대답을 알아들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 카인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그런 일에 공짜가 없는 걸 알기에 카인이 늘 희생한다는 것도 알았으며.

"이해했습니다."

올리시렌이 이렇게 화내는 건 카인이 다시 한번 자신을 희생할 뻔한 걸 봤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벨은 기사단장인 클로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기사단장인 아벨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지지했다.

가장 진중하고 무거운 게 클로이드라지만 한 번 꽂히면 무작정 달려드는 무식한 에셀레드의 검이기도 하다.

"로드를 해치려 했다면 용서할 수 없다."

이름 모를 귀족도 함부로 말한다고 베어 버리는 그가 막을 리는 만무한 일.

"나도 돕겠다!"

라마이닝 영지에서 아벨에게 패배한 에셀레드의 기사가 된 빅터 밀링턴은 사실상 아벨의 호위로서 활동했다.

클로이드보다 경험도 풍부하고 비슷한 무력을 지닌 빅터가 에셀레드에 녹아드는 건 금방이었다.

꽈악-.

"...."

밴더빌트는 별 말 없이 등에 멘 대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곧장 참격을 날릴 기세다.

에셀레드 영지의 기사 셋을 꼽으라면 무력이든 경력이든 인망이든 어느 쪽으로든 꼽힐 셋이 아벨을 지지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카인을 상하게 할 뻔한 건 용서치 못했다.

우우우우우-.

원정군도 살기 넘치는 에셀레드의 기사들을 보며 무기를 쥐었다.

한쪽은 올리비아의 군단이며 다른 쪽은 올리시렌이 대표하는 군단.

"자네, 지켜만 볼 건가!"

보다 못한 맥로든 후작이 카인에게 소리쳤다. 강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싸움 나게 생겼어!"

스스슷-.

기사들이 그를 돌아본다.

두 왕녀도 돌아봤다.

양쪽을 조율할 수 있는 건 카인뿐이라.

카인은 담담히 읊조렸다.

"좀 싸우면 안 됩니까."

"자네!"

"어차피 북방원정군이라고 데리고 온 건 쓰레기들 아닙니까?"

쿠웅.

폭탄이 떨어졌다.

원정군의 살기가 그 순간 카인을 향한다. 카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절반은 아이리안을 배신한 로스 후작의 시큰둥한 애들이고."

"네놈! 말이 심하다!"

로스 후작의 기사단이 반발했다.

이미 필립 때부터 <로스 데 캐롯>과는 철천지원수인 카인으로선 그들이 조금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후작님께서 엘프에게 투항했다는 건 너희들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이것 보십쇼."

지독한 훈련의 결과 올리비아의 명령에 움직였을 뿐, 당시 제정신이던 원정군은 거의 없었다.

그 소리는 엘프와 함께 사라진 로스 후작을 본 자가 없다는 의미.

그런 만큼 카인이나 올리시렌 쪽에서 로스 후작이 엘프들과 붙어먹는다고 말해도 믿을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못 믿을 놈들입니다. 그리고 맥로든의 기사들은 대의보단 결국 영감님을 지지하죠."

맥로든의 호위 기사들만 봐도 훤했다.

마법으로 그들을 제약하는 맥로든이 기사를 키운다면 어떻게 키우겠는가.

당연히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명령에 충실할 기사로만 키울 터.

"그리고 영감님은 올리비아에 대한 지지를 멈출 수 없죠."

손익으로 이어진 관계라면 손절이라도 하겠지만, 맥로든과 올리비아는 혈연으로 묶인 관계.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 아니라면 함께 갈 것이다.

카인은 검지를 들었다.

바닥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뺨을 붙잡고 반쯤 일어서 있는 올리비아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 친구는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번 원정의 책임을 져야 하는데, 누가 지겠습니까? 당연히 올리비아가 짊어지는 겁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든 희생양을 만들어야겠죠. 아니면 색다른 계획으로 실패를 뒤엎든가."

카인은 이들의 모두를 파악하고 있었다.

대장벽의 절대자로서 살아온 세월이 십 년. 이 정도 세력의 분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쓰레기들."

"당신-!"

올리비아가 다시금 소리쳤다.

오히려 고마웠다.

자신뿐 아니라 원정군 전체를 싸잡아서 욕하는 덕에 원정군의 대표로서 발언권이 강해졌으니까.

그걸 기다렸다는 듯 카인은 씨익 웃었다.

"그런데 쓰레기도 재활용이 가능한 게 있습니다."

카인은 걸음을 중심으로 옮겼다.

그리고 엎어져 있던 올리비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멀뚱멀뚱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잡아."

"...?"

그간처럼 장난칠 여력도 없는 올리비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카인을 흘겼다.

"메이누스에서 날 한 번 구해 줬으니, 나도 너를 한 번 구해 주마."

"무슨 속셈이지?"

카인은 스윽 전장을 훑었다.

한쪽엔 엘프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고, 반대쪽은 환상에 휩싸인 채 죽어 간 자들의 시체가 모여 있다.

기사들이 보기엔 두 시체의 산 가운데 오연히 선 카인.

그는 원정군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까 재미있는 걸 봤지."

파지지직-!

카인의 보랏빛 눈동자에 순백의 뇌전이 튀었고.

['겨울'이 은닉된 진실을 일부 드러냅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묘한 한기가 북방원정군을 스치고.

스으으읏-.

마법으로 가려져 있던 엘프 특유의 큰 귀가 나타났다.

옆에 엘프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던 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총 열두 명의 엘프였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가만히 서서 눈을 끔뻑였다.

잠시 나타났던 귀는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맨 처음 이 전장에 왔던 카인 일행은 알았다.

"인간으로 변신한 엘프야."

원정군을 잔혹하게 죽이던 엘프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시체를 없앤 후 옷과 갑옷을 뺏어 입고 변신하던 자들도 있었다.

카인은 그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맞아.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입을 꾹 처닫고 눈만 굴리고 있더군."

스스스슷-.

정체를 들킨 엘프들은 매끄러운 줄을 타듯 땅을 미끄러지면서 한군데로 모였다.

원정군과 에셀레드 기사단은 언제 으르렁거렸다는 듯 반쪽씩 맡아 그들을 포위했다.

"자네, 설마...."

그 모습을 보며 맥로든 후작은 가장 먼저 카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입을 떡하고 벌렸다.

"어차피 서로 싸워야 할 사이고 그 안에서도 복잡하게 갈라져 있죠."

정말로 싸움을 붙이려던 게 아니다. 적절한 기회를 보고 있다가 나선 것이다.

맥로든 후작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카인 에셀레드의 진짜 힘은 소드마스터라고 불리는 칼이 아니라, 불리한 상황에서도 답을 찾아내는 머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

스릉.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뽑아 들었다.

밤을 벼려 만든 것처럼 새카만 칼날이 천천히 엘프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하나 앞에선 뭉쳐야 합니다."

"엘프...."

로스 후작이든.

올리비아의 복권이든.

그리고 올리시렌이 마녀인 일이든.

적어도 이 아이리안 땅에선 엘프에 비하면 뒷순위. 국가의 탄생부터 모든 시간을 엘프의 절멸에 쏟은 만큼 그들은 모든 것보다 우선했다.

"그러니 잡아."

카인은 다시금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네 과오는 엘프를 절멸시키는 공으로 덮어씌우면 돼."

"어떻게...?"

올리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는 아까 전 원정군을 집어삼켰던 공포스런 하얀 안개가 반구형으로 뭉친 대결계가 있었다.

'딥 포레스트'를 수백 년간 지켜 온 마법과 '기적'을 조화시킨 방벽이었다.

까딱, 까딱.

카인은 엄지로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딱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올리시렌이었다.

마녀의 힘이 어느새 풀린 건지, 그녀의 머리카락 색은 흑색에서 다시 원래의 회색으로 돌아왔다.

다만 눈동자는 아직도 검었다.

"저기만 마녀 있나. 우리도 마녀 있어."

마법으로서 결계는 한 번 뚫었다. 마녀의 '기적'을 뚫지 못해서 당했을 뿐이지.

하지만 올리시렌이 마녀의 힘으로 글루미엠의 '기적'을 이미 한 번 이겨 냈으니, 결계도 해제할 수 있으리라.

카인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아이리안의 역사상 그 어떤 원정군도 우리만큼 성공에 가깝지 못했다."

그건 소속과 관계없이 칼을 쥔 기사들이라면 진혼이었으며.

"모든 운명과 우연이 합쳐져 지금 이 자리에 마녀와 마법, 그리고 우리가 있다. 쓰레기들아, 그리고 에셀레드여."

카인은 엘프들을 가리켰다.

"죽여."

쿵-.

카인의 명령에 에셀레드 기사단은 곧장 움직였고, 원정군 역시 서로의 얼굴을 보곤 움직였다.

덥석.

그리고 카인은 반쯤 내민 올리비아의 팔을 잡아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쉐에에엣-!

엘프는 강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들이닥치는 기사들을 이기긴 어려웠다.

카인은 그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뒤돌았다.

올려다보는 올리비아에겐 엘프들이 죽으면서 흩뿌려지는 피가 카인의 뒤로 내리는 피의 비처럼 보였다.

"시작하자. 진짜 원정을."

올리시렌은 그런 카인의 모습에 고개를 돌려 혀를 찼고, 아르나는 쓰게 웃으면서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113 EP.Ⅱ-3

폭풍의 계절 (3)

「하얀 눈이 내린다.

바람이 없기에 그저 내리고 또 내리는 폭설의 숲.

쉬익-.

순백의 대검이 허공을 가른다.

검을 처음 쥔 자부터 수십 년 검을 쥐어 온 자까지 모두 똑같은 검로를 그리지만, 그의 궤적은 달랐다.

사아아아아아-.

눈송이들이 쓸려나간다.

적의 침입을 막아 세우던 빽빽한 숲이 베인다.

휘황한 오러도 없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도 없었다.

그저 사내는 검을 휘둘렀고.

투두두두둑-.

숲은 잘렸다.

그의 옆에 있던 백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보, 저기 봐요."

수천 그루가 잘려 만들어진 벌판.

철사로 찰흙을 깔끔하게 자른 듯, 눈이 닿은 모든 곳의 나무가 횡으로 잘린 곳.

덜덜덜-.

어린 엘프가 하나 있었다.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키가 작아서 살았군."

사내의 참격이 닿는 높이에 소녀의 키가 닿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높았으면 머리채로 잘렸으리라.

"이 사람은 잔인한 말을 너무 태연하게 한다니까."

여인의 타박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잔인한 말인가?"

"아무리 엘프라도 애인데 당연하죠."

"애든 어른이든 아이리안의 사람들은 엘프라면 다 죽일 텐데."

"후... 여보. 우리는 이 섬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들의 은원이 괜히 휘말릴 필요 없어요."

관조자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백발의 그녀라.

그녀는 압도적인 칼 아래서 덜덜 떨고만 있는 어린 엘프를 향해 다가갔다.

사내는 대검을 들고 느릿하게 그녀를 쫓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어린 엘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헛짓하면 곧장 대검을 머리에 꽂겠다는 의지가 줄줄 흘러나왔다.

"얘야."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과 잔뜩 수축한 동공마저 꼼짝 못 하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끄덕끄덕끄덕-.

엘프 소녀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휙-.

여인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흘리는 사내에게 고개를 잘게 저었다.

"여긴 대장벽이 아니에요."

"엘프들은 조금이라도 방심을 풀면 안 된다고...."

여인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사내는 그간의 경험으로 여기서 더 고집을 피우면 큰일 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곧장 기세를 갈무리했다.

"허헉-."

그제야 엘프 소녀는 숨을 내뱉었다.

"숨 쉬렴. 크게 그리고 깊게."

여인은 마치 딸을 대하듯 친절하고 과장되게 숨을 쉬었고, 어린 엘프는 그녀를 무작정 따라 했다.

그러자 금세 진정되었다.

"이름이 뭐니?"

"그, 글루미엠."

"좋은 이름이구나."

"...."

글루미엠은 눈앞에 있는 두 남녀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하다는 인간들도 봤지만, 이들만 한 자는 없었다.

이 둘은 마치 별세계에 살다가 뚝 떨어진 괴물들이었다.

"너는-."

여인의 하얀 눈이 반짝인다.

글루미엠은 이제야 그녀의 백발과 백안이 그저 하얀색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빛을 그러모아 흩뿌린 것 같은 반짝임. 명멸하는 모든 순환이 깃든 것만 같은 눈빛.

"나쁜 엘프구나."

"...!"

마치 글루미엠의 운명을 읽은 듯, 여인은 파리한 미소를 지었다.

"죽이실 건가요?"

글루미엠은 치솟은 공포를 내리누르며 물었다. 죽는다면 적어도 아프지 않게 죽여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이 섬의 살아 있는 엘프는 다 나쁜 엘프니 괜찮단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넌 죽기 전까지 모를 일이니까 몰라도 된단다. 다만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만 기억하렴."

꿀꺽-.

글루미엠은 침을 삼켰다.

살면서 처음 만난 인간들은 너무도 강하고 또 강했다.

그런 자들이 자신을 살려 준다고 하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기에 말 정도는 백 번이고 들을 각오가 있었다.

"너는 살면서 총 세 번. 딱 세 번 인간을 마주할 거란다."

"이미 몇 번 봤는걸요."

세계수를 중심으로 엘프들의 의식은 공유된다. 다른 엘프의 눈으로 글루미엠은 이미 인간을 봤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글루미엠의 맑은 초록색 눈을 가리켰다.

"네 두 눈으로 직접 말이야, 지금처럼."

"네...."

"내 이름은 카렌 에셀레드."

쿠궁-.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세상이 조응한다. 북방의 숲을 하얗게 물들이는 폭설마저 그녀를 피하고, 천천히 그녀가 품은 '기적'이 흘러나왔다.

"네가 앞으로 만날 셋은 모두 에셀레드의 성을 쓰고 있을 거야."

"...."

"그리고 너는 세 번째 에셀레드를 만날 때 죽는단다."

글루미엠의 눈이 동그래진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로서는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신의 종언이었다.

스윽, 스윽-.

카렌은 그런 글루미엠의 초록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단다. 그때의 너는 아무 죄도 없는 지금의 네가 아니라 충분히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는 거니까."

글루미엠은 깨달았다.

뒤에 있는 무시무시한 남자만 문제가 아니라 머리를 쓰다듬는 카렌이라는 여인도 보통 미친 게 아니라는 걸.

미친 주제에 힘도 세니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문제일 뿐.

"그런 너를 나의 아홉 딸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로구나."

"예?"

또르륵-.

카렌의 왼쪽 눈에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글루미엠은 지금까지 엘프와 인간의 무수한 마법을 보았지만, 눈물이 떠오르는 것 같은 작은 마법은 처음 보았다.

어쩌면 마법이 아닐 수도 있었고.

"나의 일곱 번째 딸아, 여덟 번째 마녀가 되어 '봄'을 지키렴."

카렌의 눈물이.

이 세상 첫 번째 마녀의 일곱 번째 눈물이 글루미엠에게 스며들었다.」

* * *

"역시 '그림자의 혈족'은 인간으로 세지지 않나 보네."

글루미엠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하늘을 뚫을 듯 거대하게 치솟은 세계수를 흘깃 올려다보곤 고개를 내렸다.

"에, 에버윈...."

추했다.

중년의 로스 후작이 한참이고 어린 모습의 에버윈의 손을 잡아가는 게.

시그마리를 재료로 다시 빚어 낸 에버윈 로스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눈을 끔뻑였다.

"나, 나야. 헤터워드."

"내 동생...? 근데 왜 이렇게 늙었어? 머리는 왜 빤짝여?"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거든."

"시간?"

이미 삶의 중반을 넘어선 어른과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소녀의 대화다웠다.

하지만 헤터워드 로스는 제 앞에서 에버윈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친구를 버리고.

가문을 등지고.

인류를 배신하면서까지 얻은 빛의 이름은 '에버윈'이라.

헤터워드의 살짝 주름진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글루미엠은 투명하게 흐르는 눈물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눈빛.

스윽-.

에버윈은 헤터워드의 눈가를 닦았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엔 물기가 묻어났다.

"맞네, 내 울보 워드."

"...응."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는?"

"...."

헤터워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워럴드의 끝은 알지만, 에버윈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에버윈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딱-.

글루미엠은 손가락을 튕겼다.

맑은소리와 함께 에버윈이 굳어서 멈췄다. 마치 작동을 멈춘 시계 같다.

로스 후작은 놀라서 글루미엠을 바라보았고, 엘프의 여왕은 다시금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

그리고 닳고 닳은 거로는 맥로든 뺨치는 그답게, 글루미엠의 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했다.

"...에버윈은 여왕님의 손아귀에 있군요."

온전히 되살린 게 아니다.

그녀가 처음부터 말한 것처럼 진짜에 가장 가까운 모사일 뿐.

"세계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엘프들의 중앙정신화랑 내 '기적'으로 운명을 엮어 되살린 건 이해하지? 엘븐나이트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야."

"예."

글루미엠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로스 후작에게 모든 과정과 원리를 말했다. 엘븐나이트라고 하여 인체실험도 충분히 거쳤었고.

다만 로스 후작이 에버윈이라는 빛에 눈이 멀어 버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굳이 짚어 주지 않았을 뿐.

이미 모든 게 이뤄진 지금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여덟 번째 마녀로서 내 이명은 뭘까?"

로스 후작의 눈이 커진다.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어서 간과한 점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 지금까지 이어졌던 북방원정의 역사만 되짚어 봐도 알아차렸을 일!

글루미엠은 헤터워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보며 미소 지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돌아보지 않는 숲'의 마녀가 나야. 그래서 난 이 숲을 나가지 않아."

"숲의 마녀기에...."

"그래. 내 힘은 숲에서만 작용하거든. 내 진짜 몸이 숲 밖으로 나가 버린다면 나는 그저 평범한 엘프 여왕일 뿐이지."

"에버윈은 이 숲을 나설 수 없군요."

글루미엠은 환하게 웃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엘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엘프답게 그녀의 웃음은 보기 좋았다.

정확히는 보기만 좋았다.

"이 아이는 너의 유일한 약점인데 내가 놓아줄 거 같았어?"

"...."

로스 후작은 따지고 싶었지만, 따질 거리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다 말했고 그 말은 다 맞았으니까.

그리고 만약 그가 물었다면 그대로 답했을 것도 안다.

"로스야, 로스야. 엘프를 잡아먹는 그림자의 혈족아."

숲이 다가온다.

아이리안의 건국 이후 백 단위로 세어야 할 세월 동안 굳건히 제자리를 지켜 왔던 엘프의 여왕이 온다.

인간들의 북진을 아이리안 섬의 중부까지로 한정시킨 북방의 마녀가 헤터워드의 턱을 쥐었다.

"이제부턴 인간을 잡아먹어라. 나를, 숲을, 우리를."

글루미엠은 눈을 돌렸다.

딱딱하게 굳은 에버윈이 있었다.

"그리고 너의 에버윈을 위해."

사라라라라-.

그녀의 뒤로 세계수가 바람에 잎사귀를 부딪쳤다.

본래는 싱그럽기 그지없을 봄의 소리였겠지만, 헤터워드에겐 비웃음으로 들렸다.

* * *

"'딥 포레스트'에선 글루미엠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아까 전 엘븐나이트처럼 엘프들이 계속 회복하니까요."

북방원정군과 에셀레드 기사단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다.

전초기지를 마련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선이 있듯 철저하게 나눴다.

"아니, 얼굴조차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녀의 '운명 관측'으로 위치가 낱낱이 추적될 거니까요."

카인의 행동으로 상황이 얼추 정리되고, 각자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아르나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올리비아는 손을 들었다.

아직도 그녀의 뺨엔 붉은 핏기가 선명했다.

"그 전에, 당신은 에드먼드 백작의 첩인 걸로 알아요. 뭔데 그렇게 잘난 척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르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고, 올리시렌은 새카만 눈으로 휙하고 째려보았다.

"입 닥쳐, 올리비아."

"또 때려 보든가, 마녀 왕녀."

"엘프 왕녀보단 낫지."

"그래서 성국에게 침략당하려고? 하긴 난 여기서 죽나 성국의 팔라딘에게 죽나 똑같겠어."

이미 서로 선을 넘은 상황.

남이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을 시작했다.

올리비아의 옆에 앉아 있던 맥로든 후작은 울상을 지은 채 카인을 돌아보았고, 카인의 옆에 있던 아벨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벨까요?"

"다들 성격이 너무 과격해졌군."

그제야 맥로든 후작은 웃었고 기 싸움을 벌이던 두 왕녀도 입을 다물었다.

"내가 중재하겠다."

올리시렌도 이런 왕녀가 아니었다.

이전 세계선에서야 프리문디의 시험을 거치고 마녀로 각성하고 성격이 변했으니 이상했던 거고.

지금은 그러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거칠어졌다.

아벨 역시 그렇다.

어디 귀족가의 공자님 같던 녀석이 무슨 일만 있으면 칼부터 뽑아서 해결하려는 게 단단히 이상한 물이 들었다 싶었다.

'...나 때문은 아니겠지.'

카인은 아주 잠시 마음에 찔렸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할 말부터 했다.

"엘더 페이의 머리가 터지는 건 봤지?"

"...."

"말하는 건 자유인데 언제 아르나 님이 네 대가리를 터트릴지 모르니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침묵이 내려앉는다.

두 왕녀의 대립으로 뜨거웠던 공기가 차게 식는다.

올리시렌은 카인에게 물었다.

"혹시 중재라는 말의 뜻을 알아?"

카인은 뭘 그런 걸 다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양쪽 다 입 다물게 하는 거지."

"중재 잘하네...."

올리시렌은 말문이 막혀 말끝을 흐렸고, 아벨은 카인을 선망의 눈초리로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맥로든 후작은 아이리안의 미래를 걱정했다.

#114 EP.Ⅱ-3

폭풍의 계절 (4)

타닥-, 타닥-.

북방 엘프의 숲에도 밤은 온다.

다행스럽게 엘프의 병력이 물러나자 비가 그쳤고, 북방원정군은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두 왕녀와 후작, 마탑의 마법사 대표 등 중요한 사람들끼리 타닥- 타는 모닥불 하나를 두고 둘러앉았다.

카인은 발갛게 타오르는 모닥불 빛을 보랏빛 눈에 담으며 뒤늦게 아르나를 소개했다.

"아르나 님은 지난 원정에 참여했었습니다."

지난 원정에 참여했던 자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금발 중에서도 흔치 않은 밝은 레몬 빛 머리에 활을 기가 막히게 잘 쓰는 미녀는 안 알려질 리가 없었으니까.

"저 여자가 그 용병, '섬광'이라고?"

맥로든 후작마저 알고 있던 눈치.

다만 다들 용병 '섬광'과 에드먼드의 부인이 같은 사람일 거라곤 예상 자체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뭐요? 지난 회차의 참전자라면 우리 쪽도 많아요."

올리비아였다.

올리시렌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인지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다만 카인과 아벨이 말없이 바라보자 눈을 돌렸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아이리안 최강의 형제를 상대할 각오까진 없었으니까.

"작은어머님."

카인은 정중히 아르나를 불렀다.

그 호칭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귀족의 장자이자 본처의 아들이 후처를 저렇게 친근하게 올려 부르는 건 매우 드문 일.

"공개해도 되겠습니까."

아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 자리에 오는 순간부터 각오했으니까.

평생을 숨겨 오던 본인의 천형이라지만, 그 천형을 부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부끄럽다고 숨길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녀는 자기 귀를 가리켰다.

"제 말에 신뢰도가 생기려면 어쩔 수 없겠죠. 저는 하프엘프입니다."

"...!"

귀가 조금 뾰족한 편이긴 하나 길쭉한 수준의 엘프에 비하면 그저 사람의 귀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아르나만큼 뾰족한 귀가 있으니 다들 의심조차 하지 않았고.

"그리고 아벨을 키우기 위해 '딥 포레스트'의 외곽을 전전했고."

그녀는 손가락을 들었다.

짙은 안개로 휩싸여 안이 무엇인진 전혀 보이지 않는 글루미엠의 숲이 있었다.

"저곳에서 몇 번 정도 만났었습니다. 글루미엠을요."

"...!"

유일한 '딥 포레스트'의 관측자.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말 원정군에 딱 필요한 인물이 아르나임을 이 자리 모두가 깨닫는다.

동시에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맥로든 후작은 대표로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저 숲에 들어가선 글루미엠을 이길 수 없다고...?"

"예. 엘프 여왕은 해당 지역의 세계수의 화신에 가깝습니다. 즉, 세계수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선 무한한 힘을 받죠."

아르나는 학자 랑베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받아적을 엘프 사회의 구조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엘프의 특징인 '중앙정신화'는 같은 세계수에 연결된 엘프들끼리의 의식을 연결합니다."

"그럼 모두 같은 사람인가?"

아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각자 다른 사람이긴 하지만 상위의 엘프에게 언제나 감시당하고 자신을 바칠 준비를 하죠."

평범한 엘프는 엘더에게, 엘더는 여왕에게.

같은 클래스끼리도 연결이 된다지만, 그건 의사소통의 수준이고 본격적인 강림은 클래스의 차이가 필수적이다.

"의식만 연결되는 건 아니겠군?"

이번 원정까지 세면 세 차례 원정에 참여했던 맥로든 후작은 그간 봤던 엘프를 떠올리며 물었다.

"예. '중앙정신화'의 가장 무서운 점은 기존 엘프의 힘과 더불어 연결되는 다른 엘프의 힘도 더해진다는 거죠."

"거참 빌어먹게 짜증나는 종족이로군."

대륙에서 인간과 엘프는 데면데면하게 지낼지언정 이렇게 원수처럼 지내지는 않는다.

과거에야 엘프를 사냥해서 인간의 노예로 팔려고도 시도했지만, 저 '중앙정신화'로 곧장 죽어 버리니 근절되었다.

'방랑엘프를 잡아가는 놈은 있다지만....'

카인은 자신이 봤던 대륙의 어두운 면모를 잠시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아르나는 맥로든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수긍했다.

"예, 엘프는 죽거나 방랑하는 것을 제외하곤 참으로 빌어먹을 종족입니다. 특히 해당 세계수의 화신, 여왕이 어떤 개체냐에 따라서 성향이 많이 달라집니다."

"정점의 엘프가 누구냐에 따라 '중앙정신'이 달라지는군요?"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탄식을 뱉으며 반문했다.

올리시렌에게 어깃장을 놓고 싶긴 했지만, 아르나의 말을 들을수록 엘프의 새로운 생태에 대해 알게 되니 혹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확합니다."

"그래도 온건한 대륙의 엘프와 달리 아이리안의 엘프가 지질맞은 건 다 글루미엠 탓이다?"

"예."

모든 문제의 원흉이 하나로 귀결된다.

꽈악-.

카인은 옆을 돌아보았다.

표정 없이 경청하는 아벨. 하지만, 손엔 표정이 있었다.

차디찬 엘리바가르의 강바람이 아벨의 열을 식혀 주려 하지만, 검 손잡이를 으스러지라 쥔 녀석의 손은 풀지 못했다.

카인이 보는 걸 느낀 아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툭.

글루미엠에게 아르나-아벨 모자가 얼마나 고된 일을 당했는지 듣긴 했어도 카인은 잘 모른다.

그렇기에 아벨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러자 바람마저 녹이지 못했던 아벨의 손이 조금 풀어졌다.

"그럼 글루미엠을 숲 밖으로 유인해서 죽이는 수밖에 없군요."

올리비아의 말에 아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밖으로 유인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설사 한다고 해도 엘프 여왕은 세계수의 화신인 만큼 조금의 타격이 있을지언정, 곧장 세계수 근처에서 되살아납니다."

"그럼 세계수를 없애야겠군요."

"그것만이 글루미엠을 죽이는 방법이죠."

"...세계수로 저희가 진격하는 건요?"

아르나는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마법사와 검은 눈동자의 올리시렌을 번갈아 보았다.

"우선 마녀와 마법사가 같이 있으니 '딥 포레스트'의 결계는 부분적으로나마 해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글루미엠은 여왕이면서 마녀입니다."

올리시렌은 고개를 돌렸다.

백색의 안개가 휘감긴 진짜 북방 엘프의 숲.

자신의 진명 각성이 성큼 다가와서 그런지 마녀의 '기적'을 사용하는 게 용이해졌다.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이는 북방 엘프의 숲은 천혜의 요새였다.

"나뭇잎 하나, 뿌리 하나. 모든 것에 글루미엠의 '기적'이 스며 있어요."

"여왕이 마녀인 만큼 세계수도 오염되었을 거고, 세계수가 그렇다면 그 영향을 받는 모든 나무가 그럴 겁니다."

"그리고 글루미엠의 '기적'은 두 개군요. 하나는 '정신 현혹', 둘은 '운명 관측'."

"하나의 '기원'에서 시작한 두 개의 '기적'. 그래서 숲에 들어가는 순간. 아니."

아르나는 말을 끊었다.

그러곤 이곳에 온 후 상시 꺼내두고 있는 폭풍활 호크마를 꽉 쥐었다.

카인은 그 모습이 아벨과 똑 닮아 보였다.

"숲에 들어가려 마음먹는 순간 글루미엠은 숲에 관련된 그 운명을 관측합니다. 그리고 대비하죠."

올리비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투덜거렸다.

"밖에서는 못 죽여, 안에서는 모든 걸 다 보고 있어서 못 죽여, 이거 완전 괴물이네."

맥로든 후작도 그녀들과 같은 쓴웃음을 지으며 숲을 돌아보았다.

"이게 우리의 한계인가."

원정으로 엘프의 힘을 깎는 것은 충분히 성공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일은 아득해 보였다.

무슨 방법으로도 답이 없다.

힘만 부족한 게 아니라, 힘도 부족한 상황이다.

'대수림의 결계'만 열면 곧장 진군해서 밀어 버리려고 했던 올리비아의 계획은 백지장처럼 찢겼다.

그때.

"한계는."

카인이 일어섰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정하는 거지, 상황이 정하는 게 아니다."

저벅-.

카인은 모두가 둘러앉아 있는 가운데로 향했다. 작은 모닥불 빛만이 쏟아지는 어둠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카인의 절반은 빛에 휘감겨 있고, 절반은 세계의 어둠에 묻혀 있었다.

아벨과 올리시렌은 왠지 알 수 없었지만, 카인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일렁였다.

마치 바라지 않던 미래가 성큼 다가온 것만 같이.

"지금부터 모든 원정군과 에셀레드 기사단의 명령권은 내가 행사한다."

카인이 공식적으로 발언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지만, 카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카인이 보여 준 힘, 쌓아 온 명성, 에셀레드라는 배경까지.

"나 제레미 맥로든 후작은 카인 에셀레드를 지지한다."

시작은 맥로든 후작이었고.

"올리비아 룬 아이리안, 지지합니다."

퉁명스럽긴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도.

"로스 후작령의 기사들도 지지합니다."

"에셀레드 기사단장 클로이드, 명령을 따릅니다."

"마탑도 지지합니다."

모두가 카인을 지지할 때, 올리시렌만이 그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난 지지 못해."

바람이 불었다.

카인의 정적으로 불려도 될 사람들이 모두 지지하는 순간에 가장 가까운 올리시렌이 그를 반대했으니까.

"아까도 그랬지. 내가 쟤와 부딪칠 때를 기다린 거지?"

"...."

카인은 쓴웃음만을 지었다.

올리시렌은 곧장 쏘아붙였다.

"쟤는 너를 죽이려 했어."

"안다."

"그러면 적어도 사과는 받아야지. 왜 대의로 포장해서! 모두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덮어서!"

올리시렌의 말이 격해진다.

맥로든 후작은 크게 한숨 쉬었다. 올리비아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아벨은 그런 둘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듯 눈빛을 형형하게 빛냈다.

그리고 올리시렌의 외침이 이어졌다.

"왜 넌 너를 생각하지 않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다."

카인은 선을 긋고자 했다.

하지만 올리시렌은 이미 카인과 이 봄을 함께 달린 동료다.

그의 생각을 잘 알았다.

"내가 맞춰 볼까? 지금부터 네가 말할 계획을?"

기기기기긱-.

카인에게만 들리는 묘한 톱니 소리.

올리시렌의 검은 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글루미엠이 누군가의 운명을 본다면 그녀의 눈은 아이언하트에서처럼 세계의 가능성 그 자체를 읽어 들인다.

"너는 글루미엠이 운명을 읽을 수 없는 상대야. 그렇다는 건 숲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고."

"...."

"양동작전이겠지? 나와 마법사가 결계를 푼다면 엘프들은 응전해야 하니 다들 여기로 나올 거야. 우린 여기서 싸우고, 너는 그 틈에 숲으로 들어가 세계수를 벨 거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르나가 말한 제약을 이겨 내면서 싸울 방법은 그것뿐이긴 했다.

"그리고 너는 그만큼 희생할 거고. 내 말이 틀려?"

숲으로 잠입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세계수를 지키는 병력과도 싸워서 이겨야 하고 엘프 여왕 글루미엠의 진체도 쓰러트려야 한다.

오히려 밖에서 양동을 펼치는 원정군이 더 쉬우리라.

여기는 여럿이지만, 숲에선 혼자니까.

계획을 들킨 카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올리시렌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난 반대야. 너를 제물로 삼아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올리시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아니!"

기기기기긱-!

다시금 울리는 톱니 소리.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울린다.

아르후안이 무한히 되살아나듯 그녀가 지닌 끝을 모를 마녀의 힘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런 건 내가 없애."

이토록 강한 마녀가 있었던가.

카인은 너무도 거대해 보이는 올리시렌의 힘에 자신이 듣고 봤던 마녀를 떠올리다가 말했다.

"언젠가는 가능하겠지. 그러나 이 원정군이 흩어지지 않고 엘더 급 엘프가 보충되지 않을 때는 지금뿐이다."

"카인!"

둘의 언성이 격해진다.

스윽-.

그때 잠잠히 듣고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년이 손을 들었다.

"제 운명도 못 읽었습니다."

남에서 북으로, 에셀레드 기사단을 이끌고 온 아벨이 말했다.

"제가 형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115 EP.Ⅱ-3

폭풍의 계절 (5)

카인이 홀로 숲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는 글루미엠이 지닌 마녀의 '기적'인 '운명 관측'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아벨도 그랬다.

다른 자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카인만큼은 아벨이 글루미엠의 '기적'을 어떻게 피하는지 알았다.

태생은 숲이요, 운명은 용사라.

어찌 감히 시대의 주인공을 꼽을 수 있겠냐마는, 카인은 단언할 수 있었다.

'이전 세계선의 주인공은 아벨이었다.'

당시 세계를 잊히게 할 '망각'의 마왕이 일어났을 때, 아벨 일행은 마왕성으로 진격했고 결국 마왕을 죽였다.

마왕을 죽인다는 것.

단순히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마왕에게 유의미한 공격을 입힐 수 있는 격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사계절의 신기>가 필요했고.

개인의 '격'이나 '운명'이 세상이 빚어 낸 '마왕'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타격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혹은 쥔 무기가 신기라면 가능하다.

어쨌든, 아벨은 성검, '여름'의 선택을 받은 여름의 용사였고 마왕도 죽인 놈이다.

'그리고 이번 세계선에선 녀석의 운명을 내가 완전히 뒤바꾸었지.'

하나는 죽고.

하나는 죽이고.

카인은 그 절망의 연쇄를 자신의 미래를 불태워서 시작부터 끊어 냈다.

글루미엠이 아무리 날고 기는 마녀라고 해도 가능할 리 없었다.

"형님."

아벨이 카인을 재촉한다.

다른 자들도 카인을 돌아보았다.

카인이 아르나와 아벨을 귀하게 여기는 걸 알지만, 지금 필요한 인재라는 건 피할 수 없는 사실.

"아벨은 너무 어려."

카인은 어렵게 입술을 뗐다.

그러자 곧장 아벨이 반박했다.

"형님도 아직 어립니다."

"나는...."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 왕국의 전부가 그리고 아이리안 섬에서 그간 진행되었던 투쟁의 역사가 형님의 어깨에 있습니다."

카인의 행보에 시대가 바뀌리라.

정말 글루미엠을 끝장낸다면 아이리안 섬은 북방의 한계가 사라질 것이고, 왕국은 꿈을 이룬다.

그뿐일까.

잔혹하고 지독한 아이리안 섬엘프에 고통받던 왕국민은 사라질 것이고, 국력의 태반을 쏟아붓던 마르퀴스 벨트의 힘은 이제 온전히 국가의 동력으로 바뀌리라.

지금까지 이어지던 시대가.

엘프의 역사가.

인간의 꿈이.

전부.

카인의 어깨 위에 있었다.

"제가 나눠 지겠습니다."

아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릉-.

아벨은 세검을 뽑았다.

다들 놀라 눈을 부릅떴다. 오직 아르나만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아르나가 용병, '섬광'이었다는 소리를 들은 맥로든 후작은 그런 그녀를 경계하다가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제 칼날은 아직 형님에겐 닿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르지."

"하지만 형님의 옆에서 싸울 수 없을 정도는 아닐 겁니다."

"...."

카인은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았다. 장작은 자신을 불태워서 빛과 열을 발하고 있었다.

희생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모닥불마저 희생으로 굴러가고.

희생이 없다면 빛도 없으리라.

그리고 아벨은 그 가까운 희생을 담당하겠다고 카인에게 제 검을 보였다.

"시험해 보시죠."

묵묵부답인 카인을 다시금 재촉하자,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봐준다."

아벨은 씨익 웃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가장 바라던 대답이었으니까.

카인과 처음 만날 때 피어났던 봄이 이제 슬슬 저물기 시작하는 때가 왔다.

그땐 맥없이 패배하며 카인에게 다음 봄에나 오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벨은 그럴 수 없었다.

카인을 볼 때마다 불안했다.

다음 봄까지 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내일이 없다는 듯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그를 막고자 아벨은 이번 봄에 모든 걸 해결하고 싶었다.

카인이 뒤돌아 공터로 갈 때, 아벨은 에셀레드 기사단 쪽을 돌아보았다.

클로이드, 빅터, 밴더빌트.

세 명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벨을 응원했다.

* * *

후우우우-.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해가 졌다고 찝찝할 정도로 가득하던 습기는 사라졌고, 풀냄새만이 은은하기 깃든 바람.

카인의 검은 머리를 살랑였다.

소속을 가리지 않고 원정군의 기사들이 빙 둘러 있었고, 가운데는 카인과 아벨이 각자의 검을 들었다.

"이전의 저를 생각하고 방심하시면 큰코다치실 겁니다."

아벨답지 않은 농담에 카인은 입꼬리를 들었다.

"너한테는 방심하지 않아."

대륙 변방의 소년이 성국과 제국에서도 손꼽힐 무력을 지니게 된 건 찬란한 재능과 무한에 가까운 지원 덕이었다.

카인은 아벨의 미래를 봤기에 열과 성을 다해 수련했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스윽-.

천천히 움직이는 발걸음.

아벨은 혀를 찼다.

"사실 좀 방심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 네 재능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다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방심할 순 없지."

"...평범."

아벨은 인상을 썼다.

듣고 있던 올리시렌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소엘을 돌아보았고, 그녀는 조금 재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열일곱의 나이에 왕국을 통으로 뒤바꾸는 게 재능이 아니면 뭘까 싶었으니까.

채앵-!

분위기가 풀어지는 찰나.

아벨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세검이 바닥에서 튀어 올라 카인의 얼굴을 향해 내찔러졌다.

티잉-!

카인은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그웨스카를 수직으로 들면서 검을 돌렸고, 가볍게 아벨의 세검을 옆으로 튕겨 냈다.

"가벼워."

"그러게요."

아벨의 가벼운 대답에 카인은 바로 긴장했다.

로 마이어 Lo Meyer.

채애애애애애앵-!

밴더빌트의 시그니처 기술인 수직의 참격이 아벨의 손에서 수평의 베기로 변했다.

카인의 칼에 튕겨 나갈 것을 계산하고 펼친 기술!

아그웨스카를 살짝 기울이며 세검을 미끄러뜨렸다.

스윽.

아벨은 검을 당기고.

쿠웅-.

왼발로 땅을 디뎠다.

사아아아-.

그의 세검으로 바람이 몰려든다.

어차피 길게 갈 싸움이 아니다.

간을 보는 첫 번째 공격 이후 이어질 두 번째 공격에서 끝을 보고자 했다.

카인은 눈을 부릅떴다.

아벨의 자세는 너무도 익숙했다.

'나구나.'

늘 카인을 뒤에서 지켜보던 아벨은 카인의 삶을 흡수했다.

대장벽의 세월 동안 다듬어진 카인의 호흡부터 걸음까지 따라 한다.

'그런데 그 끝은 내가 아니야.'

형의 등을 보고 자란 동생은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길의 이정표를 이 순간 보였다.

아벨식 아르드바르-.

에셀레드의 백악절벽이 짓쳐 온다.

세검은 절벽의 웅장함과 바다의 무한함을 품었고 그걸 담은 건 아벨.

사아아아아아-!

밤이 찢긴다.

아벨의 세검에서 은빛의 오러가 휘황하게 빛을 발한다. 그 궤적은 오래전 누군가 절벽에 새겨 둔 검흔에서 피어났으니.

아가트람 Airget-lam.

파앙-!

섬전이었다.

아벨의 발끝 뒤로 흙의 파도가 일어날 정도로 엄청난 힘이 집중되어, 일부 기사는 아벨을 놓칠 정도였다.

'괜찮군.'

카인은 내심 미소 지었다.

은빛 오러에 휘감긴 검을 매섭게 찔러오는 아벨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어려.'

오러가 깃든 순간부터야 서로의 속도가 비등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가능한 칼끼리 부딪치는 건 지양할 일이다.

카인은 맞상대하지 않았다.

전사보단 어른의 방법으로.

타닥.

뒤로 물러섰다.

아벨이 새로 만든 기술이 기꺼웠으나 굳이 맞아줄 건 없었으니까.

칼끝을 보고 피할 수 있는 속도의 세계에 접어든 자들만 할 수 있는 걸음이었다.

후우우웅-.

예상했던 타격지점을 벗어난 아벨의 세검이 힘을 잃는다.

"제법이-었-."

하지만 카인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꿀-렁.

아벨의 세검이 기묘하게 튕기더니 다시 재가속했으니까!

아벨식 아르드바르.

아케트라브 Airgead-lámh.

피할 여유 따윈 없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아그웨스카에 순백의 뇌전을 담았다.

파지지지직-.

순식간에 일어난 '겨울'의 오러가 반짝였고.

콰아아아앙-!

아벨을 세검 채로 날려 버렸다.

아벨은 땅에 긴 자국을 남기며 뒤로 쓸려나갔다. 순간적으로 반응한 카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바닥에 밀려 나간 아벨에게 달려갔다.

"괜찮으-."

"시험은 통과했습니까?"

아벨은 놀라 걱정하는 카인의 말을 끊었다.

"...."

"아직 부족한 건 압니다. 하지만 형님의 짐을 나눠서 질 정도는 되겠습니까?"

모두가 카인의 입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쉬이 허락의 말을 담지 못했다.

아벨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에셀레드의 절벽에 검흔이 있더군요. 당연히 에드먼드 백작님이 만든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초대 에셀레드께서 만든 거라고 했습니다."

"그걸 보고 만든 기술이구나."

"예. 따라가고 싶었으니까요."

"그럼 왜 두 번의 찌르기로 만든 게냐?"

카인이 보기에 아벨의 신기술은 일격필살이 조금 더 어울렸다. 물론 두 번 내찌르는 건 그만큼의 박력은 부족하나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이었고.

그 카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할 정도로.

아벨은 씨익 웃었다.

"에셀레드의 검은 두 번 몰아치니까요."

광검, 아르드바르.

클로이드에게 남겨진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술 역시 이어지는 이연격.

카인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미소 지었다.

"정말 치사한 가문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두 형제의 웃음이 마주한다.

스윽-.

카인은 바닥에 나자빠진 아벨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아벨은 그 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통과했습니까?"

카인은 알았다.

자신이 아벨을 데려가지 않으려고 한 건 그를 전사로 보라는 입과 달리 그의 마음은 아벨을 애로 봤기 때문이라는 걸.

그러나 이 순간.

전사로서, 검사로서 그리고 용사로서.

나아가는 아벨을 봐 버렸다.

"...그래."

더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짝짝짝-.

무엇이 그리 감동적인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보던 맥로든 후작이 손뼉 쳤고,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씩 손뼉을 마주했다.

서로의 소속은 관계없었다.

둘이 왜 싸우는지 평범한 기사들은 몰랐지만, 그것도 별 상관없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두 형제의 칼을 본 순간 모두가 한마음이었으니까.

"내일 아침이다."

카인은 아벨을 일으켜 세우곤 아그웨스카를 하늘 높이 들었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끊겼다.

스으으윽-.

그리고 칼이 내려오며 흰색의 안개에 휩싸인 '딥 포레스트'를 향했다.

"내일 우린 엘프의 시대를 끝낸다."

* * *

"에셔."

카인은 자신이 입고 다니던 옷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에셔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빈자리를 들키지 않게 하겠습니다."

카인과 나이와 체격이 비슷한 만큼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글루미엠을 속이기 위해 카인의 흉내를 내기로 결정했다.

힘이야 압도적으로 부족하지만, 발람과의 전투 때처럼 올리시렌의 버프가 있다면 어떻게든 될 일이었고.

카인은 에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자리를 부탁한다."

쿵-.

에셔는 주먹을 가슴에 올리며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예스, 마이 로드."

에셔가 돌아나가고.

카인이 홀로 있을 때.

똑똑-.

카인의 천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셔가 나간 문틈으로 주름진 얼굴 하나가 보였다.

"들어가도 되나?"

맥로든 후작이었다.

"어차피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들어오실 거 아닙니까."

카인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맥로든 후작은 넉살 좋게 웃으며 들어왔다.

"그건 그래."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반대라면...."

"반대를 왜 하나. 우리 손녀사위께서-."

꽈악.

카인은 더 말없이 아그웨스카를 쥐었고, 맥로든 후작은 혀를 찼다.

"제 맘대로 안 되면 칼부터 잡는 거 안 좋은 수단이다, 그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하죠."

"...독한 놈."

"그럼 뭐 응원입니까?"

"아니."

맥로든 후작의 얼굴이 굳는다.

사아아-.

카인은 천막 주위로 방음 결계가 펼쳐지는 걸 느꼈고.

"용병, '섬광' 말일세."

이전 원정에 참여했던 늙은 후작은.

"정말 에드먼드의 둘째 부인이 맞는가?"

품고 있던 의문을 토했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16 EP.Ⅱ-4

기억으로 지나갈 (1)

「십 년 후엔 우리를 칭송하겠지.

백 년이 흐르면 우리는 전설이 될 거고.

오백 년이 지나면 우리는 신화가 될 것이야.

그럼 천 년이 흐르면?

누가 우리를 기억할까.

이 세상에 사계절이 있다는 걸.

사계절의 마왕이 눈을 떴었다는 걸.

그렇게 세상의 종말과 영원이 한 판 승부를 가렸다는 걸.

-이름 없을 현자의 노래.」

"예?"

카인은 자신답지 않게 얼빠진 반문을 뱉었다. 맥로든 후작은 예상했다는 듯 혀를 찼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구만."

"그거야...."

에셀레드 백작가는 바보가 아니다. <로스 데 캐롯>의 필립이 아르나와 아벨을 데리고 왔을 때도 말이 있었다.

에드먼드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

클로에가 죽고 나서는 오직 검만 바라보던 인간이 갑자기 원정 중에 둘째 부인을 얻었다는 것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백작가에서 아벨을 인정한 이유가 있었다.

-북에서 아벨이란 아이가 오면 내 아들로 받아들여라.

맥로든 후작의 눈이 똥그래졌다.

"에드먼드가 그런 말을 남겼다고?"

"예. 그래서 클로이드가 아벨과 아르나 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상한데."

그는 턱을 쓸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일어날 리 없는 일을 들은 표정이었다.

"뭐가 이상하십니까."

"아마 에드먼드에 대해선 너보다 내가 잘 알 거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세계선을 통틀어도 에드먼드를 직접 본 건 정말 어릴 때 드문드문 나는 기억 말곤 없다.

그러나 맥로든 후작은 에드먼드의 어릴 때부터 봤으니 자신보다 더 친하고 더 잘 알 터.

"그 자식은 그렇게 친절하게 말을 남겨 둘 놈이 아니야."

"...."

카인은 할 말을 잃었다.

에드먼드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증언을 들어 보면 검 솜씨 말곤 다른 면에선 하나같이 꽝인 인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클로에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것도 이상해. 지난 원정 때 '섬광'은 그 미모나 실력 때문에 유명하긴 했다."

"그럴 겁니다."

"그렇다고 에드먼드가 관심을 가졌냐? 하면 전혀 아니다. 그놈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강하냐 약하냐만 보는 놈이거든."

"...."

"그 아들 앞에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솔직히 이상한 놈은 이상한 놈이었어."

"이해합니다."

맥로든 후작은 옆을 돌아보았다.

아르나의 천막이 있을 방향이었다.

"아무튼 이상해. 그 에드먼드가 여자를 다시 만나서 애를 가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카인은 고민에 빠졌다.

이전 세계선에서도 그렇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일을 이렇게 짚으니 이상하긴 했다.

"그리고 그 '섬광'도 무작정 좋은 사람은 아니야. 제 이득이 되지 않으면 꼼짝도 안 할 용병이거든."

"그건 잘 압니다."

"그럼 다행이고."

맥로든 후작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말 친할아버지라도 되는 듯 걱정하는 눈빛으로 비치며 물었다.

"아까 봤으니, 아벨이라는 아이가 얼마나 올곧고 너를 좋아하는진 알겠지만 믿을 수도 있겠느냐?"

그 정체가 의심스럽다.

게다가 하프엘프라고 했다.

맥로든 후작은 혹시나 아르나가 글루미엠이 심은 첩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라고 다니는 아벨 역시 믿기 어려울 것이고.

"믿습니다."

맥로든 후작의 의심은 타당했다. 카인은 단호하게 긍정했다.

"들어 보니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존재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미 아르나 님과 아벨은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말로 자신을 스스로 증명할 순 있다. 그리고 말보다 강력한 게 행동이고 함께한 시간이다.

카인은 그 둘에게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었다.

맥로든 후작은 카인의 우묵한 보랏빛 눈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그렇게 자부한다면 믿어야지. 내 손녀사위 말을 믿지, 누구 말을 믿을까."

카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직도 그 타령입니까."

"내 손녀가 널 좋아한다."

"퍽이나 그렇습니다."

올리시렌과 갈 데까지 갔고 서로 이제 체면이고 내숭 없이 싸운다.

게다가 올리비아는 '대수림의 결계'의 현혹에 당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었다.

맥로든 후작은 노회한 정치가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너를 노리겠지."

"...아."

"충성보다 강한 게 결혼이니까."

이번만큼은 정치적인 계산에서 맥로든 후작보다 느렸다.

카인이 입을 벌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천막 밖으로 나섰다. 맥로든 후작이 나가자마자 방음 결계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텁-.

다만 맥로든 후작은 천막을 잡고 얼굴만 안으로 들이밀어 말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맥로든 후작은 부끄러운지 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아이리안의 기둥 중 하나.

로스 후작이 자신의 책무를 내버리고 제 욕심을 챙기러 갈 때, 행동은 가볍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자.

제레미 맥로든 후작.

카인은 그가 나선 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전대 로스 후작인 워럴드가 죽어서도 지켰던 것처럼, 아이리안을 살아가는 귀족들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오고 있었다.

* * *

가장 어두운 밤.

밤이 가장 무르익고 해가 뜨기 직전 여명조차 비치지 않을 칠흑의 어둠 속.

임시 기지들 사이로 반짝이는 모닥불 몇과 불침번들이 보일 때, 카인은 일어섰다.

그 옆엔 모든 준비를 끝낸 아벨과 아르나가 있었다.

"공자님."

아르나가 입을 열었다.

카인이 돌아보자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살아 돌아오세요."

평균 생존 72시간의 대장벽에선 어차피 눈 깜짝하면 옆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런데 일일이 그가 누군지 무슨 배경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파악할 겨를 따윈 없다.

결국은 감이었다.

같이 다닐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감.

그것만이 대장벽의 전사가 지녀야 할 덕목이었고, 적어도 카인은 그 감으론 최고였다.

"알겠습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이전 세계선에선 자신의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카인이 주는 독주만 마시면서 죽어 간 아르나지만.

이번 세계선에선 달라졌다.

적어도 등을 맡길 동료다.

저 멀리 올리시렌이 다가오는 걸 보며 아르나는 몸을 뒤로 뺐다.

해가 뜨면 시작될 전투를 위해 쉬러 가는 길.

카인과 아벨이 어둠과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숲을 향해 움직였고, 올리시렌은 그들의 옆에 서 나란히 걸었다.

"나 강해지고 있어."

"...?"

그녀의 눈은 회색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마녀의 힘을 제대로 쓴 이후,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마녀의 낙인인 것인지.

그녀의 눈은 새카맸다.

그리고 그 까만 눈이 카인과 마주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알겠어. 뭔가를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언가가 속삭여 주거든."

마녀의 속성인가 혹은 그녀만이 다른 것인가.

북방 엘프의 숲에 온 이후 회색의 올리시렌은 매분 매초 달라졌다.

그 방향이 옳은지 틀린지 누가 함부로 이야기 하겠냐마는, 적어도 그 방향은 그녀가 바라던 것.

"우리는 미끼로 있지 않을 거야. 튀어나오는 엘프들을 모조리 죽이고 세계수까지 진격해서 널 도울게."

아벨이 그러하듯.

올리시렌도 그러하다.

자신의 생을 바꾼 구원자이자 인생을 뒤바꾼 사람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마라."

"너도."

툭-.

셋은 걸음을 멈췄다.

희끄무레한 '대수림의 결계' 앞이었다. 미리 나와 있던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따 봐."

올리시렌의 말에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우우-.

마법사는 소규모로 해제 술식을 펼쳤고, 결계의 마법 부분이 흩어졌다. 그 틈으로 드러난 '기적'을 바라보며 올리시렌은 명령했다.

열려라.

스스스슷-.

천천히 희끄무레한 안개가 흩어진다. 평범하게 빽빽한 숲의 모습이 건너편으로 보인다.

아벨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카인은 뒤따라가다 고개를 돌렸다.

"이따 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는 아쉬워 말을 남겼다.

올리시렌은 이번엔 미소로 화답했다.

인간이 침입한 적 없던 엘프의 땅으로 향하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사아아아아-.

그녀와 마법사가 힘을 풀어 버리니 결계는 언제 뚫렸다는 듯 다시 복구되었다.

올리시렌은 기지로 돌아왔다.

철컥-.

모든 기사가 깨어 있다.

그들의 앞.

맥로든 후작과 올리비아보다도 더 앞에서.

펄-럭-!

올리시렌은 반쯤 해진 원정군의 깃발을 들었다.

수백 쌍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올리시렌은 짧게 말했다.

"마지막 원정을 시작한다."

와아아아아아-!

저 멀리서부터 해가 뜨기 직전의 여명이 비춰온다. 마치 올리시렌의 후광처럼 보였다.

* * *

"여왕님!"

숲 안에서 대기하던 엘더 에스메가 급하게 글루미엠에게 달려왔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이 숲에 사는 모든 엘프가 허겁지겁 장비를 쥔 채 회합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겨, 결계가 해제되고 있습니다!"

회합장은 위로 뻥 뚫려 있다.

그리고 보이는 건 푸른 하늘이 아니라 늘 희끄무레한 회색으로 숲을 감싸던 '대수림의 결계'.

수백 년간 엘프들을 지키던 결계가 지금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그러네."

그 한가운데.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권좌에 앉아 있던 글루미엠이 괴던 턱을 풀었다.

"인간들이 마녀의 힘까지 쓰게 될 시대가 될 줄은 몰랐네."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다.

기분이 좋아서 밝은 건 아니다. 그저 담담히 꼬여 버린 상황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자신이 보았던 운명에선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았던 미래기에, 글루미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멸족인가 승리인가.

글루미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과의 지지부진했던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다."

딱-!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

엘프들은 각자 들고 있던 무기들을 부딪치며 화답했다.

"가자. 우리의 땅을 노리는 인간들을 죽이러!"

따다다닥-!

박수도 충성의 맹세도 아닌.

나무의 노래를 부르며 엘프들은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수 아래 앉아 있던 글루미엠의 진체는 눈을 떴다.

"헤터워드."

그녀의 앞엔 헤터워드 로스와 에버윈 로스가 있었다. 둘은 밤새 많은 이야기를 한 듯 제법 친해져 있었다.

"인간들이 결계를 해제하고 쳐들어온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도 점차 흩어지는 결계가 보였다.

"그렇군요."

"우리가 인간들을 이길 수 있을까?"

엘프들에겐 할 수 없는 말.

누구보다 정확히 상황을 보고 있던 글루미엠은 인간의 후작에게 물었다.

"우린 신비롭고 강해. 하지만 인간은 약하지만, 불꽃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있어."

글루미엠은 모든 원정을 지켜보았다. 인간은 늘 변화했고 달라졌다. 언제나 고여 있는 엘프와는 전혀 다른 종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립을 선택했지. 절대 뚫리지 않는 결계로 우리를 숨기면 인간들이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마녀와 여왕의 힘을 녹여 만든 대결계가 흩어질 때.

글루미엠은 그간 미뤄왔던 엘프의 마지막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넘어서지 못할 절망으로 남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역사서 한 줄로 스러질 텐데, 무엇이 될 거 같아?"

행동과 말은 가볍다.

하지만 적어도 책임과 생각은 한 종족의 여왕다웠다.

헤터워드는 그녀의 고뇌에 답했다.

"제가 이 세계수를 지켜 절망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의 왼손은 에버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소리에 글루미엠은 피식 웃었다.

"에버윈을 지킨다는 거겠지."

세계수가 죽으면 죽을 에버윈.

로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고, 글루미엠도 그 정도면 만족했다.

콰앙-.

저 멀리서부터 아련하게 들려오는 폭음.

엘프와 인간이.

절망과 도전이.

그리고 전설과 현실이 칼을 맞댄다.

#117 EP.Ⅱ-4

기억으로 지나갈 (2)

"흙을 디딜 땐 부드러운 흙을 디뎌라. 그래서 소리가 안 나."

"예."

숲에 들어온 카인은 끊임없이 아벨을 가르쳤다.

마치, 지금이 아니고선 더는 시간이 없다는 듯.

"그런데 대개는 발자국이 찍히지. 그럴 땐 땅에서 도드라진 나무의 뿌리를 밟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스스스슥-.

둘은 유령 같았다.

온갖 수풀로 빽빽함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나아갔다.

다만 직선은 아니었다.

숲 바람의 방향에 맞춰 방향을 바꾸면서 늘 정면에서부터 뒤로 공기가 흘러가게 했다.

카인은 코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인간 외 종족과 전투를 상정할 때는 오감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해야 해. 우리는 못 맡는 냄새를 맡는 놈들이 꼭 있거든."

"그래서 바람을 앞에 두는군요."

"이래도 맡는 애들은 맡긴 하는데 할 만큼은 해 봐야지."

카인은 남쪽을 돌아보았다.

콰아아앙-.

폭음이 울린다.

이제야 가져온 마법폭탄을 쓰는 모양이었다.

대륙의 도시연합, 특히 상업도시 <델프트>에서 만들어 내는 문명의 총화는 무시무시했다.

콰아앙-!

이전의 인간이 오러나 마나에 선택받아야 강해지는 것과 달리, 이젠 마법총이나 마법폭탄만 있으면 무언가를 죽이는 게 매우 쉬워졌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의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던 신비가 인간의 문명에 부서지는 시대.

지금.

"엘프의 끝인가."

그런 신비를 상징하던 종족 중 하나가 엘프다.

카인은 신비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바뀌는 걸 느끼며 나아갔다.

아무리 큰 결계라고 해도 결계.

유지하는 술식이나 힘의 총량을 생각해 보면 무한정 커질 순 없다.

따라서 작정하고 달리면 순식간에 중간에 닿겠지만, 카인은 조심했다.

아벨은 그런 카인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걸음을 따라 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경험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잘 아는지 궁금했지만, 입은 꾹 닫았다.

적어도 카인이 먼저 말하기 전까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

얼빠진 여인의 목소리.

카인과 아벨은 걸음을 멈췄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에 앞이 보이지 않던 것이 끝나 갈 무렵, 한 나무에 소녀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다.

카인과 비슷한 새카만 머리에 어딘가 요사스러워 보이는 홍옥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소녀였다.

그리고 얼굴엔 지루함이 그득했고.

"인간?"

"인간이네?"

서로가 서로를 보았다.

평범한 북방의 숲이라면 몰라도 '딥 포레스트'의 '대수림의 결계'안에 인간 소녀가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카인은 옆을 흘깃 보았다.

아벨은 그 눈짓에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

아벨이 말을 거는 틈.

소녀가 아벨을 바라보며 대답하려는 호흡과 호흡의 사이.

스릉.

카인은 곧장 내달리며 아그웨스카를 뽑아 들었다.

'베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무슨 일로 여기 있는지 묻는 건 사치다.

자신이 빠르게 세계수와 글루미엠을 처리해야 원정군이 살아남는 상황에서 카인은 이상보다 현실을 선택했다.

쉐에에에에-!

가볍지만 빠른 흑색 궤적이 그려진다. 그 끝은 소녀의 파리할 정도로 창백하고 가느다란 목.

휭-.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닿았는데, 촉감이 없었다.

'그림자?'

마지막에 보았다.

소녀가 나뭇잎에 그늘진 음영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경악에 가득한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걸.

슈욱-.

옆이었다.

카인의 옆, 그림자가 고인 웅덩이 속에서 엘프들이 주로 쓰는 세검이 솟아올랐다.

목표는 카인의 옆구리였다.

하지만 검이 너무 가벼웠다.

콰-득!

카인은 그대로 발을 들어 검을 짓밟아 으스러뜨렸다.

"어!?"

검과 함께 그림자에서 나오던 붉은 눈의 소녀는 놀라서 다시 들어갔다.

카인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근력이 약한 엘프들을 위해 만든 검만큼 약하기도 했고, 다시 깨어난 이후 '겨울'의 패시브가 한계로 이끄는 육신이 그만큼 강해졌다.

아벨과 처음 싸울 때, 미래를 태워서 써야 했던 키리에를 이젠 맨몸으로도 한두 번은 쓸 수 있었으니까.

'엘프들의 검을 쓴다라.'

적.

카인은 소녀를 정의했다.

후우우우우우-.

불어오는 숲의 바람.

카인은 눈을 감았다.

'혈계 능력이겠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러한 특수능력을 사용하는 건 극히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

그게 바로 혈계 능력.

그림자나 어둠에 관련된 건 고귀한 밤의 귀족, 뱀파이어와 관련된 것이라.

---!

그들은 소리가 없다.

존재 자체가 어둠에 동화된 자들이기에 눈으로도 찾을 수 없다.

쉐에엣-!

하지만 그들에게선 언제나 묘한 피 냄새가 난다.

카인은 지극히 옅은 비릿함을 잡아선 오른쪽으로 아그웨스카를 찔러 넣었다.

"어떻게!"

붉은 눈의 소녀는 카인의 칼에 찔려 죽기 전에 놀라서 튀어나왔다.

가벼운 몸으로 멀어지려고 하지만.

"잘."

하얀 별의 걸음 White Starlight.

슈우우우-.

카인의 발끝마다 얼음꽃이 핀다.

인류의 동방 한계선, 대장벽을 질주하던 '겨울'의 전사가 걸음을 내디딘다.

그 걸음에 담긴 무게.

달려가던 소녀는 거대한 무언가가 짓누르는 압력에 순식간에 느려졌다.

"이, 이게 뭐야?"

"너같이 촐랑촐랑 도망가는 놈들을 잡기 위한 걸음이다."

소녀처럼 땅을 디디는 적이라면 그나마 편하다.

하늘을 나는 건 기본이요, 툭하면 공간이동으로 튀는 놈들이 널린 게 대장벽이다.

그러니 자신이 빠른 것도 중요하지만 적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

"끄으윽-."

소녀는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마치 깊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파지지지직-.

소녀는 순백의 뇌전을 두르며 다가오는 카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조금 커졌다.

누군가의 모습을 카인의 얼굴에서 찾아낸 것 같았다.

"에드먼드?"

"...."

"아닌데, 닮았는데 에드먼드는 아니야."

"아들이다."

그 순간 소녀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카인의 '하얀 별의 걸음'에 당했을 때보다 더더욱 믿기 힘든 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에드먼드가 결혼했다고? 그럴 미친년이 이 왕국에 있었어?"

"...."

"아니, 그리고 애를 낳아? 그 검에 미친 에드먼드가?"

스윽-.

카인은 칼을 내렸다.

아벨은 그런 카인의 한 걸음 뒤로 움직이며 혹시 모를 위험을 경계했다.

'본래 바로 죽이려고 했지만.'

카인은 쓰게 웃었다.

고향이라는 말이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있었다.

자신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자들이 있는 곳이 고향이지, 어디가 고향일까.

'그리고 에드먼드를 잘 아는군.'

맥로든이나 로스 후작, 심지어 하이볼트 국왕까지 에드먼드를 대하는 태도가 엇비슷했다.

이 소녀처럼.

"넌 누구냐."

카인은 상대의 정체를 알고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너 살기가 그대로인데?"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죽일 거거든."

"왜?"

"엘프의 숲에서 자유롭게 다니는 인간이라면 살리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죽이는 게 맞지."

소녀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세상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할 무언가를 보는 눈초리.

"에드먼드를 전쟁에서 10년 정도 굴리면 나올 법한 말이야."

스윽-.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휘둘러 소녀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자신을 응시한다. 소녀가 카인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찾은 것처럼, 카인도 이 순간 누군가가 떠올랐다.

'올리시렌?'

그리고 소녀가 말했다.

"난 에버윈 로스."

"...!"

카를라 오우드리라는 가명을 썼던 아이리안의 왕비였던 자.

"내 동생이 엘프 여왕과 거래해서 날 되살렸어."

그리고 로스 혈족의 직계이자, 헤터워드 로스의 누이.

"너는 누구지?"

"카인. 카인 에셀레드."

에버윈은 웃었다.

새장 속에 같은 새가 부르는 처연한 노래가 들리는 듯한 묘한 미소였다.

"내 동생을 죽여 줘."

"...."

"그리고 그 빌어먹을 엘프 여왕을 죽여 줘."

아벨은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카인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럼 당신부터 죽여야겠군. 어차피 생명의 부활은 불가능한 건데, 살렸다는 건 뭔가 더러운 수를 썼다는 거고."

"눈치 빠르네."

"아마 엘븐나이트를 만들던 것과 비슷하게 재료가 될 무언가를 여왕의 권능과 기적으로 개조했겠지. 그럼 지금 우리의 대화도 낱낱이 보고되고 있나?"

카인은 엘프들의 '중앙정신화'를 잘 알고 있었다.

들켰다면 이미 소녀를 마주한 순간부터 늦은 거니 편하게 물었다.

절레절레.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 정도로 동기화되지 않았어. 뭐 직접 명령을 내리면 꼼짝도 못 하지만."

"다행이군. 그럼 이제 죽어라."

쉐에에에에-.

아그웨스카에 카인의 오러가 담기고, 단번에 에버윈의 목을 베어 버리려 했다.

그때 에버윈이 말했다.

"그 전에 이용할 건 다 이용해야지. 적어도 이 숲에서만큼은 난 이용할 만하거든?"

"...?"

"동생이 오기까진 시간이 조금 남았어. 그 전에 안내해 줄게."

스윽-.

그녀는 뒤편을 가리켰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거대한 나무, 세계수.

주위의 수천수만의 나무를 휘감은 탐욕스러운 군주가 그녀의 손끝에 걸렸다.

"가야지, 빨리."

콰아아아앙-.

다시금 울리는 폭음.

인간과 엘프의 전쟁이 격하다는 의미.

-이따 봐.

올리시렌은 이따 보자고 했다.

카인이 세계수나 글루미엠과 싸울 때 도우러 오겠다는 뜻.

'불가능하지.'

그녀가 마녀로서 빠르게 강해지고 있지만, 엘프나 글루미엠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물러서면 올리시렌이 아니다.

아마도 모든 힘을 쥐어짜 엘프의 군세를 뚫고 있을 터, 카인도 그러기로 했다.

에버윈을 짓누르던 중압을 풀어내며 말했다.

"가."

* * *

부스스스.

세계수 아래 나무 옥좌.

원래의 나무에서 탈락한 나뭇가지들을 엮어 만든 웅장한 옥좌에 앉은 글루미엠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렵네."

그녀의 정신은 인간과의 전장에 있다.

여러 엘프에 동시에 강림하여 세계수의 힘을 전해 주고 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인간 자체는 옛날에 비해 강해지지 않았는데, 도구가 까다로워졌어."

엘프는 신비롭다.

그들의 노래는 적의를 깎아 내고 그들의 정령은 마법이 닿지 못하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뿐일까, 평생을 바쳐 빚어 내는 활과 검은 강했다.

하지만 인간은 다채로웠다.

분명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폭음을 일으키는 폭탄과 대포엔 엘프의 신비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기는 위력이 있었다.

제아무리 신비롭다고 해도 압도적인 화력 앞에선 무력했다.

"그리고 마녀...."

글루미엠은 미간을 찌푸렸다.

신비를 화력으로 상대하는 인간의 군대가 짜증 났다.

"가져왔습니다."

헤터워드 로스였다.

흑색의 코트를 두른 그는 거친 길을 갔다 온 듯 군데군데 찢어지고 흙이 묻어 있었다.

"반짝이가 이럴 땐 유용하다니까."

그는 두 손에 맑은 샘물을 담고 있었다.

글루미엠은 오라고 손짓했고, 그대로 그의 손에 있던 샘물을 받아먹었다.

우우우우우우우-.

세계수가 진동한다.

지쳐 있던 글루미엠의 전신에 다시금 세계수의 힘이 깃든다.

"세계수의 정상에 이렇게 빨리 갔다 올 수 있다니, 대단하네."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손에만 담을 수 있어서 까다롭지만 역시 이게 최고-."

글루미엠은 날카로운 눈으로 엘프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샘물로 완전히 회복하자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

"반짝아."

"예."

"적이야. 네 에버윈과 함께 있네."

후웅-.

로스 후작은 대답하기도 전에 순간 어둠으로 변하며 사라졌다.

그가 모든 걸 바쳐서 만들어 낸 에버윈에 대한 일이니 당연했다.

글루미엠은 반대 팔로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설마 에셀레드인가."

그러나 전장에 이미 방패를 든 채 싸우는 에셀레드가 있었다.

당장 자리를 뜨거나 '운명관측'을 펼쳐서 살피고 싶었지만, 글루미엠은 어쩔 수 없이 전장으로 의식을 보냈다.

전장에서 눈을 뗄 여유가 없었다.

#118 EP.Ⅱ-4

기억으로 지나갈 (3)

엘프의 마을.

살았던 흔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를 걸으며 에버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어. 로스 혈족은 로스의 후작령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부터 내 목을 졸라오는 것 같았거든."

"어."

"근데 거긴 나왔는데...."

"어."

에버윈은 인상을 썼다.

사람이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너무 성의 없이 대답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 덕분에 숲에서 빨리 빠져나와서 세계수로 가고 있는데, 대답 좀 잘하지?"

"죽일 사람하고 대화하는 취미는 없다."

"...에드먼드보다 독한 놈."

이전엔 잘 몰랐지만, 이젠 확실했다.

에드먼드와 비교되는 순간 욕이고 더 못하다는 건 상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욕이라는 걸.

"아벨, 네가 상대해라."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더 앞으로 향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에버윈은 기가 찼다.

"지금 사람을 짐으로-."

"사람 아니니까."

"...."

"그리고 너는 이미 죽었다. 존재 자체가 모순이지."

카인은 말해 놓고서도 내심 쓰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묘했으니까.

이 세상을 바꾸고 고정하는 자.

순간, 카인의 뇌리에 떠오른 의문.

'왜 세계선 고정도가 움직이지 않지?'

퀘스트의 갱신이야 워낙 제멋대로니까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세계선 고정도의 경우엔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건 이전의 세계선과 다른 미래를 만들수록 늘어난다는 것.

그런데 하이볼트에게 '헤드 브레이커'를 받고 18.5%로 바뀐 이후 변동되었다는 메시지를 본 적이 없었다.

'꽤 많은 일이 있었는데?'

카인은 무언가 찜찜했다.

마치 앞으로 올 거대한 무언가를 위해서 숨 고르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다.

카인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고, 에버윈은 그 뒤에서 재잘재잘 말했다.

"나 죽었어? 그럼 나도 결혼했어? 눈치로 볼 때 헤터워드랑은 안 한 거 같던데."

"...."

"하이볼트 국왕 전하랑 했습니다."

아벨이었다.

카인이 대답하지 않고 갈 길만 가자, 넘겨받은 아벨이 답했다. 에버윈은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그 재수 없는 하이볼트랑? 미쳤대?"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어린 애들이 뭘 알겠어. 그럼 내 애도 있어?"

"예."

"날 닮은 딸을 가지고 싶었는데, 혹시 딸이야 아들이야?"

"딸입니다."

로스 후작과 글루미엠이 빚어 낸 에버윈은 에드먼드가 그녀를 탈출시키기 전의 에버윈이다.

즉, 당시의 에버윈 입장에서 지금의 자신이 했던 일을 듣는 건 신기할 따름.

"우와 나 잘 사나 보네. 근데 왜 죽은 거지?"

"로스 혈족의 저주라고 들었습니다."

"아...."

그녀는 곧장 수긍할 수 있었다.

자신의 성격은 자신이 잘 안다.

"그래, 나라면 그냥 버티고 버티다가 죽었을 수 있어. 역시 나네. 근데 그건 얼추 해결해서 그렇게 빨리 죽진 않았을 텐데?"

"뭐?"

듣고 있던 카인이 몸을 돌렸다.

에버윈은 제 머리를 검지로 두드리며 말했다.

"헤터워드가 몸이 튼실하다면 나는 머리가 좋거든. 그래서 로스 혈족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얼추 고안해 냈단 말이야."

하지만 현실의 에버윈은 로스 혈족의 저주에 휩싸여 주위를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거의 0에 가깝게 본능을 내릴 수도 있어. 그만큼 능력도 사라지지만."

그리고 에드먼드에게 부탁했다.

자신을 죽여 달라고.

제 심장을 터뜨려 달라고.

"실패해도 웬만한 인간이 사는 만큼은 살다 갈 텐데 왜지? 누가 나한테 저주라도 건 건가?"

"...."

카인은 '보통 사람들'이 떠올랐다.

역사의 뒤편.

용사와 로드이스트마저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던 자들이라면 모를 일이다.

'정보력도 엄청나고 힘도 대단하니.'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조직.

[은닉된 비밀을 알아차립니다.]

[세계선 고정도 : ▲ 18.6%]

카인은 쓰게 웃었다.

절대 증거가 남지 않을 일이 우연과 기적을 거쳐서 드러났다.

'이게 이땐 오르는군.'

마치 답을 알려 주기 위한 것만 같았다.

카인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걸 다시금 느낄 때.

수우우우우우-!

저 멀리 세계수에서부터 흑색의 무언가가 짓쳐들어오는 게 보였다.

콰릉-!

내리치는 번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명멸하는 빛.

그리고 반짝이는 머리!

"카인!"

헤터워드 로스였다.

그의 두 손엔 단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공간을 접어 달리듯 쾌속으로 달려온 그대로 카인의 목과 심장으로 단검을 찔렀다.

스릉-.

그리고 뽑히는 아그웨스카.

'두 점은 선으로 이어진다.'

티잉, 티이이잉-!

최소의 거리를 움직이며 두 개의 단검을 튕겨 냈다.

단검도 흑색, 아그웨스카도 흑색이라지만 그 색의 깊이는 차원이 달랐다.

둘의 칼날이 닿는 순간 불꽃이 튀었다.

쉬이익-.

헤터워드는 바람처럼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곧장 팔을 휘둘러 카인의 허벅지 근육을 끊어 내려 했다.

탓.

카인은 발을 교차하며 옆을 디뎠다. 그리고 드러난 로스 후작의 머리를 향해.

파앙-!

그대로 뒷발을 쭉 뻗어 냈다.

담긴 거력에 허공엔 백색의 뇌전이 번쩍였고, 만약 맞았으면 로스 후작의 머리는 산산이 터졌을 터.

그는 순간 그림자에 들어가는 걸로 피해 냈다.

"아벨!"

카인의 외침에 아벨은 에버윈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스릉.

그리고 곧장 세검을 뽑아 그녀의 파리한 목에 가져다 대었다.

질풍처럼 쏟아지던 로스 후작의 기세가 사라졌다. 아마도 그림자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터.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꽉 쥐며 말했다.

"어이, 왕국의 배신자."

"...."

"긴말 필요 없고."

카인은 손을 들었다.

아벨은 그 즉시 세검을 에버윈의 목에 꽂으려 했다.

꽈악-.

상황을 이해한 그녀는 제 죽음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스스슷-.

그 순간 바닥에서 헤터워드가 솟아올랐다. 마치 그림자를 전신에 휘감은 듯했다.

그의 코트는 숲의 바람에 펄럭였고, 그 안에 딱 달라붙는 슈트는 로스 후작의 몸을 그대로 드러냈다.

까딱-.

카인은 나타난 헤터워드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살리고 싶으면 덤벼."

"어린놈이 건방지구나."

"늙은 놈이 인류를 배신하는 것보단 낫지."

"...진즉, 죽였어야 했는데."

스스슷-.

로스 후작은 몸의 중심을 낮췄다.

엄청난 속도와 그림자를 이용하는 특성답게 생각보다 더 몸을 낮췄다. 상대의 빈틈과 사각을 노리기 위한 자세.

마치 어쌔신에 가까웠다.

그 순간.

세상의 색이 사라지면서 잠시 멈췄고, 발람을 상대했을 때처럼 테두리의 색이 조금 다른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

『영락한 그림자의 혈족』

고귀한 밤의 귀족이 영락했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영광과 명예는 스러졌고 권능과 책무마저 사라졌습니다. 남은 건 그저 약간의 힘과 그림자뿐.

클리어 조건 : '헤터워드 로스'의 끝.

성공 시 : 한 번 운이 좋아집니다.

실패 시 : 계속 운이 나빠집니다.

*추가 보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카인은 씨익 웃었다.

'쉽군.'

다시금 돌아오는 색.

솨아아아아-!

소리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달려오는 헤터워드.

쉭-.

횡으로 베어 오는 그의 단검을 피하고.

쉬식-.

가슴을 찌르는 단검도 피했다.

"...!"

이렇게 쉽게 자신의 칼날을 피하는 자는 에드먼드 이후로 처음.

자신이 낱낱이 드러난 기분에 헤터워드는 한층 더 가속했다.

꿀-렁.

게다가 이젠 그림자까지 섞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내찔렀지만, 그림자가 그의 팔을 삼켰고.

퓌싯-!

카인이 디디던 땅바닥에서 그의 발을 꿰뚫고자 칼날이 치솟았다.

지극히 까다로운 공격들.

호흡과 호흡 사이를 노린다.

인간이 움직이기 전에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반사적인 작은 움직임만을 해체한다.

그림자의 혈족답게 로스의 검은 지독히도 음험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단련한 그의 몸은 초고속의 공방에도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쿠웅-.

그때 카인이 한 걸음 내디뎠다.

헤터워드의 두 눈이 터질 듯 커졌다.

하얀 별의 걸음 White Starlight.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먹구름이 지고,

해가 뜨고,

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불고.

그 모든 자연을 하나로 삼켜 버리는 거대한 중압감.

모든 하늘의 끝에서.

눈이 내린다.

세계를 흰색으로 덮어 버릴 폭설이 헤터워드의 어깨 위로 쌓이고, 눈송이의 무게는 그가 지닌 슬픔의 무게라.

"감-히!"

그는 접혔던 허리를 폈다.

하지만.

쿠웅-.

카인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에버윈을 잡아챌 땐 위력을 조절했지만, 이렇게까지 싸운 이상 글루미엠도 눈치챘을 터.

양동작전을 펼치는 전장의 올리시렌과 원정군을 믿으며 카인은 몸 안을 내달리던 순백의 번개를 풀어냈다.

파지지지지직-!

휘황한 순백의 번개가 카인의 전신과 아그웨스카에서 튀어 올랐고, 헤터워드를 내리누르는 중압감은 끝도 모르고 치솟았다.

"적이 빠르다고 무조건 내가 빠를 필욘 없지."

카인은 천천히 걸었다.

그 끝에 있는 헤터워드는 그림자를 통해 도망가고자 했지만.

스스슷-.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라, 그림자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어떤 식으로든 적보다만 빠르면 되니까."

쿵.

헤터워드의 무릎이 꺾였다.

속도만으로는 에드먼드보다 빠르다고 자부했지만, 카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쏟아지는 무게를 버텼다.

"상대가 나빴어."

카인의 말에 그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최악이군."

"당신 같은 것들을 상대할 일이 많아서 만들었거든."

"마법은 아니고 주술과 걷는 법을 합쳤군. 이런 기술이 세상에 있을지 몰랐다."

마법이라면 말 그대로 무게를 증가시켰을 터.

그러나 카인이 펼친 '하얀 별의 걸음'은 무게에 더해 마음의 짐까지 있었다.

"마지막 할 말은?"

그는 아벨의 검 아래 있는 에버윈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제 죽음에 일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좋았다.

"그녀는 죽어도 살아도 로스군."

그렇기에 사랑했다.

이 끝이 너무도 허무했지만, 로스 후작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를 살려다오."

파지지직-.

몰아치는 번개 속.

카인은 고개를 저었고.

"안 돼."

"...."

세계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기 죽음을 바라거든."

"그녀답군."

쉐에에에엣-!

카인의 아그웨스카가 허공에 흑색의 검신과 백색의 번개가 그리는 흑백의 궤적을 그렸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툭.

로스 후작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었다.

카인은 그들이 언데드로 되살아나기 쉽다는 걸 떠올리며 로스 후작의 몸에 다시금 칼을 꽂았다.

파지지지직-.

아그웨스카에서 흘러나오는 순백의 뇌전이 그의 몸을 불태워 버렸다.

"이젠 혼자 갈 수 있지?"

아벨은 힘을 풀었다.

에버윈은 눈을 감은 헤터워드의 머리를 들며 물었다.

"고마워."

"원래 할 일이었다."

"이 녀석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고통스럽게 죽여도 되는 거잖아. 그럴 능력도 있고."

카인은 눈을 돌렸다.

"그러고 싶었지만...."

이전 세계선부터 이어 오던 로스 후작에 대한 분노.

그만 없었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을 터. 그의 삐뚤어진 사랑만 없었어도 모든 것은 일어나진 않았겠지만.

이미 일어났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래도 친족의 앞에서 그렇게 죽이고 싶지 않더군."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락한 그림자의 혈족』을 성공하였습니다.]

[앞으로 한 번 운이 좋아집니다.]

에버윈은 그의 목을 든 채 몸에 다가갔고, 카인의 칼날과 로스 후작의 코트를 쥐었다.

['그림자의 심장'이 아그웨스카에 흡수됩니다.]

번개에 지져진 로스 후작의 코트와 떨어져 있던 검은 단검들이 천천히 칼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미안해. 마지막은 로스 혈족으로 남을 시간을 줄 수 있겠어?"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칼집에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세계수가 무너질 때까진."

아벨은 카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동생의 머리만 쓰다듬는 에버윈을 지나 세계수에 다가갔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19 EP.Ⅱ-5

끝없이 새하얀 (1)

「세상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이 시대의 끝엔 무엇이 올까요.

여름이 피고 가을로 지고.

겨울이 태어나 봄으로 저물 때.

'여름'이 자신의 주인을 찾아 떠나고 '겨울'이 언제나처럼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가을'이 그들을 품에 안고.

언제까지 '봄'이 있을까요?

'봄'이 없는 세상은 그럼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마왕에게 계절을 빼앗기지 않을까요.

- 종언의 동화」

* * *

엘프 마을까지 온 이상 세계수에 못 갈 일은 없다.

마을의 중앙에서부터 시야가 담지 못할 저 끝까지 쭉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니까.

"벽이군."

카인은 수풀에 손을 얹었다.

로스 후작과 에버윈을 해결하고 다가온 세계수의 근처로는 수풀의 벽이 삥 둘러져 있었다.

아벨은 수풀의 벽에 검을 넣었다가 뺀 다음 말했다.

"그냥 들어가도 될 거 같습니다."

빽빽해서 그렇지 움직이는 데 어려움은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수풀이었다.

게다가 그 이파리의 틈 사이.

저 멀리 세계수의 몸통이 보인다.

그렇다는 건 세계수의 정말 코앞이라는 의미.

아벨은 그냥 강행 돌파를 주장했다.

"대개 나쁜 놈들은 행동이 비슷하다."

반면 카인은 달랐다.

그가 상대했던 적 중 글루미엠보다 신비했던 적을 세어 봐도 열 손가락은 가볍게 넘고, 강했던 적도 훨씬 많다.

그러나 까다롭기로는 글루미엠만 한 적은 거의 없다.

쿵쿵-.

카인은 발을 굴렀다.

"자기 땅에선 엄청나게 강해진다는 거지. 왜냐고? 본인이 만든 함정들이 그대로 있거든."

글루미엠이 수백 년간 군림했던 숲.

온갖 기기묘묘한 신비와 함정이 가득한 만큼 까다로웠다. 그리고 카인은 대놓고 약해 보이는 수풀을 가리켰다.

"이것도 마찬가지고."

스릉-.

아그웨스카가 칼집에서 튀어나온다. 유려한 궤적이 폭발하며 수풀을 베었다.

스스스슷-.

하지만 수풀은 영리했다.

아벨의 칼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받아들였지만, 카인의 칼은 닿을 부분을 움직여서 아무것도 없이 비웠다.

그렇게 칼을 피한 다음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쯧. 그래도 이 정도면 사람을 죽일 만큼의 힘은 못 담았겠군."

마법이나 기적엔 한계가 있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을 일으키는 것들이지만, 그건 시전자의 힘이나 준비 그리고 대상자의 환경에 따라 제한선은 존재했다.

카인은 방금의 일격으로 수풀의 성질을 대강 파악했다.

"이건 어떻게든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고 만든 거야. 지 특기인 '정신 현혹'을 잔뜩 불어 넣어서."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휘익-.

카인은 바닥의 돌을 집었다.

그리고 수풀의 위로 던졌다.

수풀은 칼을 피하던 것처럼 유연하게 위로 쭉 늘어나 돌멩이를 삼켜 버리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카인은 그걸 지켜보더니, 엄지와 검지를 붙여서 동그라미를 그렸다.

"정신 계열 공격이 들어가는 힘이 좀 적거든, 결과물은 좋고. 게다가 마녀로서 특기니 더 싸게 먹혔겠지."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그냥 수풀이 있구나 정도만 파악했는데, 그 근본을 알아차리는 카인이 존경스러웠다.

무슨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지 저렇게까지 빨리 인지하는지 궁금한 따름이었다.

카인은 눈을 반짝이는 아벨에게 말했다.

"아벨."

"예, 형님."

"들어가야만 세계수에 닿을 수 있지만, 견딜 수 있겠나?"

아벨은 카인을 잠시 우묵하게 바라보았다. 매번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주는 카인이 좋았지만.

저벅.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단숨에 몸의 절반을 수풀에 넣었다.

"견딜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는 건 압니다."

스윽-.

그러곤 사라졌다.

카인은 그 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싹수가 보여."

아벨에 뒤이어 수풀에 몸을 담았다. 칼날을 피하고 돌조차 잡아채는 신비의 수풀이 카인과 아벨 두 형제를 삼켰다.

* * *

수풀은 마치 길이라도 되는 양, 카인을 안내했다.

'일단 우리 둘을 나눴어.'

전력을 분산시켰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무엇인가.

후우우웅-.

저 멀리 아른거리는 세계수의 모습에서부터 순간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실린 연둣빛 무언가가 얼굴에 화악 불어닥쳤고.

-새로운 삶을 살아 주세요, 형님.

숲이 사라졌다.

나타난 건 성국의 헤네랄리페.

자신이 펼친 '겨울'의 필살기에 막혀 다가오지 못하는 용사 일행들과 절규하는 성녀가 보인다.

제국, 성국, 도시연합.

세상의 모든 세력이 용사 아벨이 죽고 그를 죽인 카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려오는 공간.

툭-.

죽음을 맞이한 용사 아벨이 팔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너무 잘 사시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다시 눈을 떴다.

모든 걸 카인에게 맡기고 사라진 아벨이 아니라, 분노와 원망에 가득한 갈색의 눈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저는 이렇게 형님 손에 죽었는데, 어째서 형님은 그렇게 잘 사시는 겁니까?

스릉-.

카인은 대답 대신 칼을 뽑았고.

-원망스럽습니다. 부럽습니다.

절규를 토해 내는 아벨의 목을 베었다.

환상 속이었으나 손에 느껴지는 감각부터 아벨의 목이 떨어져 흩날리는 것까지 완벽했다.

물론 카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기억에 간섭해서 가장 겪지 않았으면 상황을 보여 주는 부류군. 제법이네, 글루미엠."

카인은 수풀의 신비를 간파했다.

정신 공격의 구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카인은 시전자가 생각한 걸 보여 주는 것과 대상자가 생각하는 걸 긁어 와서 보이는 것 두 가지로 나눴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더 어렵다.

헤네랄리페에서 맞이했던 세상의 마지막은 글루미엠이 상상도 못 했을 테니 후자라.

우--- 우----.

환상이라고 하나 당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아마도 다음 환상으로 넘어가리라.

그때.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대단해.]

원래의 상황에선 세상의 색이 흐려지며 무너지고, 카인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당시를 다시 떠올리는 환상이기에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아벨 에셀레드, 네 승리다. 그러나 결국 이것도 이 세계선의 종말이라. 마음에 들어.]

떨어진 아벨의 목.

반개한 눈의 틈으로 은빛이 새어 나왔다.

[세계여, 사계절을 모아 나를 막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아벨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혼잣말을 뱉었고 말이 끝나자마자 세상이 사라졌다.

'...뭐지?'

불길했다.

당시의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혼잣말일 터.

하지만 그 혼잣말의 주인은 아벨의 속내에 있던 무언가다.

자신의 당시 기억을 긁어 만들어진 환상 속에서 놓쳤던 단서를 찾았다.

사아아아아-.

수풀의 신비는 한 번 실패했다고 멈추지 않았다.

다시금 나타난 에드먼드 백작가의 절벽.

우둔한 클로이드를 비롯해 어디로 붙어야 할지 모를 기사들이 자신과 아벨을 둘러싸고 있었다.

올해 봄이 오는 날, 아벨과의 싸움.

저 멀리 검은 여우 필립이 보이는 게 분명했다.

스릉-.

카인은 이야기조차 듣지 않았다.

그대로 아벨의 머리를 쪼개 버렸고 필립의 목을 베었다.

사아아아-.

이번에 보이는 건 밴더빌트의 시체와 완전히 마녀로 각성하여 인격이 변해 버린 올리시렌이었다.

스릉-.

카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베었다.

아르나.

바다의 표류.

대륙의 밑바닥 용병.

스승, 조니 워커.

마검, '겨울'의 계승.

아벨이 기어 올라오는 마왕을 물리치고 대장벽의 전사들이 평화에 죽어 갈 때.

스릉-.

카인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모조리 베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떻게...?"

글루미엠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카인은 이젠 아그웨스카를 집어넣지도 않은 채로 답했다.

"이미 벤 것이다."

글루미엠의 환상이 보이는 건 이전 세계선에서 카인이 가장 후회했던 순간들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세계선이 바뀔 때, 『사계』가 한 번씩 보여 줬던 것들.

카인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순백의 뇌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몇 번의 환상이 카인에게 무너진 이상 수풀의 신비는 힘을 많이 소진했다.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만큼 실패하면 급격하게 상태가 성능이 안 좋아지는 게 정신계 공격이다.

그리고 카인은 그 틈에 '겨울'의 뇌전을 불어넣었다.

차자자자장-.

환상들이 무너진다.

거대한 유리가 깨진다.

흩날리는 유리 조각은 제각각의 환상을 품었고, 그 모든 건 카인이 후회하고 슬퍼하던 그 세월이라.

저벅-.

카인은 떨어져 내리는 환상의 조각 사이로 걸었다.

"그리고 나는."

과거는 지나왔다.

미래는 알 수 없다.

카인은 이미 지겹도록 과거에 시달렸고, 미래를 위해 달려 봤다.

그렇기에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오늘을 살아."

과거에 사로잡혀 오늘을 잊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잃고.

오직 오늘, 지금, 이 순간.

스윽-.

오늘만을 사는 카인이 아그웨스카를 수직으로 들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오늘을 만드는 검.

그리고 스승에게 가장 먼저 배운 검을 펼쳤다.

그에 화답하듯.

촤아아아아아-.

세계가 잘려 나간다.

온갖 환상을 비추던 수풀이 반으로 잘렸고.

세계수가 저 앞에 나타났다.

그 아래.

황금빛 나뭇잎 몇 장이 수호하듯 떠 있는 곳.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엘프의 옥좌에 한 여인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다.

도자기보다 새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에, 윤기가 도는 풍성한 초록빛 머릿결.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

완벽이라는 글자를 여인으로 빚어낸다면 아마도 그녀리라.

"빌어먹을 에셀레드."

욕설마저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봄에 피어나는 모든 초록을 담은 듯,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가 카인을 응시했다.

"네가 역시 나의 마지막 에셀레드로구나."

신록의 여왕.

아이리안 북방한계선의 주인.

'딥 포레스트'의 마녀.

돌아보지 않는 숲의 글루미엠이었다.

"그렇군."

탓-.

카인은 짧게 말하곤 그대로 달렸다.

파지지지직-.

전력으로 끌어 올린 힘에 그의 온몸에선 순백의 번개가 흘렀고, 멀리서 보면 새하얀 화살이 쏘아지는 것 같은 질주!

카인은 곧장 아그웨스카를 횡으로 휘둘렀다.

적과 길게 말하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채앵-.

글루미엠을 지키려는 듯 치솟은 세계수의 뿌리가 칼을 튕겨 냈다.

"왜 이리 성격이 급해?"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절대적인 강자만이 지니는 여유였다.

채앵-, 챙!

카인은 칼이 튕겨 나오자마자 허리를 거꾸로 돌려 휘둘렀다. 세계수의 뿌리 하나가 더 치솟으며 칼을 막았다.

수직과 수평 그리고 그사이의 찌르기.

순식간에 카인은 몇 번의 검격을 날렸지만, 바람으로 글루미엠의 앞머리나 조금 들썩이게 할 뿐 제대로 된 타격은 없었다.

"너는 강림한 나를 몇 번 이겼었지."

그녀는 카인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수십의 뿌리가 치솟아 카인을 꿰뚫을 듯 튀어 나갔다.

"목도 베었지."

팅-.

카인은 두 다리를 단단히 땅을 디디곤 칼로 뿌리들을 튕겨 냈다. 마치 화살비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화살들을 막는 기분이었다.

티이이이이잉-!

문제는 화살 하나에 담긴 힘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무겁다는 것!

뿌리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카인의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글루미엠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그래. 내 목을 벤 건 네가 처음이지. 그런데 말이야."

"...!"

"여긴 나의 땅이야. 엘프로서, 마녀로서 수백 년간 머물렀던 나의 땅."

구르르르르르-.

세계수가 몸을 비튼다.

글루미엠의 감정에 하늘까지 치솟은 세계수가 복종한다.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운명의 분기점을 발견했습니다.]

[종언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현재 상태로 초록의 마녀와의 전투 시 예상 승리확률은 1.7%입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말과 함께 나타난 메시지.

그리고 처음으로 나타난 승리확률과 돌아갈 수 있다는 듯 나타난 물음.

카인은 씨익 웃었다.

"당연히."

스윽-.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몸의 중심을 낮춘다.

아그웨스카를 수평으로 들어 그 끝을 오만한 여왕으로 삼았다.

"내가 이긴다."

인류 세계의 동방한계선, 대장벽.

대장벽 최강이자 모든 전사를 통솔하는 자를 로드이스트라고 부른다.

['겨울'이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겨울을 등지고 눈을 짊어진 채.

피로 범벅되는 설원의 지배자가 승리를 다짐했다.

#120 EP.Ⅱ-5

끝없이 새하얀 (2)

인간은 약하다.

검을 들고 마법을 부린다고 해서 모두가 카인처럼 강하고.

"뭉쳐-!"

카인만큼 용기 있을 순 없다.

"엘프들이 약해졌다-!"

그렇기에 인간은 다른 인간과 함께하기로 했다.

홀로 오롯한 자가 아니라 같이 있기에 일어설 수 있는 인간. 그런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곳은 역시 전장이다.

투둑-, 툭-.

밤사이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린다. 빗방울이 차가운 게 오랫동안 맞을 부류의 비가 아니었다.

"이건...."

군집을 이뤄 엘프들을 상대하던 기사들의 외침처럼, 그들은 정말로 약해졌다.

단숨에 머리를 꿰뚫을 것 같던 화살은 약해졌고, 수백의 정령들이 날뛰던 폭풍은 산들바람처럼 변했다.

그리고.

쿠웅-.

저 멀리.

묘한 진동이 들렸다.

올리시렌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아르나가 말했다.

"도착했나 봅니다."

엘프들의 전력을 이쪽으로 빼 두고, 세계수를 떠나지 않는 글루미엠을 죽이기 위해 카인과 아벨이 숲으로 들어갔다.

수백 년 동안 아이리안 북방의 절망으로 군림하던 엘프 여왕 글루미엠을 둘이서 죽이겠다는 계획.

성공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러나 그 작전의 주인공이 카인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엘프들 사이사이에 강림하던 글루미엠이 더는 전장에 개입하지 못하는군요."

올리시렌의 새카만 두 눈이 전장을 훑는다.

그녀는 냉철하게 상황을 살피면서 공세의 진형을 수비로 조금 돌렸다.

글루미엠이 이 엘프, 저 엘프 번갈아 나타나면서 그들의 공격은 매서웠다.

원정군들도 자신의 목숨을 챙기며 싸울 여유 따윈 없었다.

싸우든가 죽든가.

상상 이상의 힘을 부리는 엘프와 싸우기 위해선 인간은 목숨을 던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다음은 없고 저들에게 글루미엠이 사라졌다. 지금뿐이야! 밀어 버려!"

"알겠습니다."

올리시렌의 명령이 적절히 배치된 자들에게 닿았고, 그들은 한꺼번에 확성 마법을 펼치며 명령을 전달했다.

"아르나 님."

"예."

그녀는 아르나가 쥔 폭풍활 호크마를 턱짓했다.

"몇 번이나 더 쓰실 수 있습니까?"

"네 번 정도가 한계입니다."

"최선을 다해 부탁드립니다."

기기기기긱-.

본래의 회색으로 돌아왔던 올리시렌의 머릿결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든다.

완연한 검은 마녀, 올리시렌.

그녀는 왼손을 뻗었다.

그 손이 향하는 끝, 한 명의 엘프가 갑작스레 나타난 무형의 힘에 잡혀 발버둥 쳤다.

"엘더입니다."

유난히 원정군을 죽이는 게 보여서 잡았는데, 시작부터 대어.

꽈아아악-.

올리시렌은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반투명한 검은 손이 일어나더니 이름 모를 엘더급 엘프를 쥐어짰다.

그대로 조각 나 버리는 엘프.

놀라울 정도로 잔인한 광경에 아르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올리시렌을 불렀다.

"와, 왕녀님?"

"시간이 없습니다."

휘이이익-.

올리시렌의 손끝에서 새카만 채찍처럼 긴 마녀의 힘이 풀려나온다. 마치 이 전장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다짐한 듯했다.

"저희가 이렇게 함께 싸울 때 카인은 글루미엠과 싸웁니다. 어디 한 쪽이라도 먼저 무너지면 패배하죠."

굳세라-!

마녀의 파동이 울린다.

세상을 희롱하듯, 마치 이것이 올바른 원래의 모습이라는 듯, 그녀의 말에서 흘러나온 검은 꿀렁임이 천천히 원정군을 감쌌다.

"어-?"

그들의 갑옷 위로 아이리안 왕국의 문양인 도끼와 하얀 목련꽃이 새겨진다.

"가볍다!"

"힘이 세졌어!"

"피로가 풀린 것 같아!"

원정군들은 감탄을 터트렸다.

그 어떤 버프보다 확실했다.

올리시렌이 마녀의 힘을 부린다는 걸 알고 '빛'을 믿던 자들은 그녀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런 걸 가리지 않고 모두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짧게 숙였다.

신앙은 멀고, 그녀는 가깝고.

성국은 팔짱 끼고 바라만 볼 뿐 그들의 왕녀는 직접 전장에 나와서 모두를 돕고 있다.

이 순간 엘프에게 칼을 맞대는 기사라면 당연히 올리시렌에 대한 충성심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쯧."

올리비아는 혀만 찼다.

자신에게도 새겨진 도끼와 꽃의 문양.

그 후로 피로가 엄청나게 가시는 걸 느끼니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그 안개꽃이 이렇게 되었다니."

한순간에 따라잡을 수 없는 어딘가로 치솟아 올라가 버린 것 같았다.

동시에.

"...."

올리시렌은 주먹을 쥐었다.

조금은 무서웠다.

두근-.

마녀의 힘이 '딥 포레스트'에 온 후로 끝도 없이 강해지고 있다. 아무리 약하게 했다고 하나 단번에 수백의 기사를 강화했다.

그게 인간이 가능한 힘인가?

마녀라고 해도 가능한 일인가?

절레절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털며 흩어 버렸다.

쿠우웅-.

중요한 건 숲의 중심부에서 울리는 진동이다.

그 울림은 카인이 또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사실이며 자신은 또 무력하게 바라야만 한다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한쪽이 승리하면 먼저 가서 도와줄 수도 있죠."

아르나는 올리시렌의 각오를 보았다.

"예스, 유어 그레이스."

두근, 두근-.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에서부터 눈을 뜨기 시작했다.

* * *

채애애애앵-!

글루미엠은 여전히 옥좌에 앉아 있다.

카인은 그런 그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기기기긱.

그러나 다가갈 수 없었다.

땅에서부터 튀어나온 세계수의 뿌리 수십 가닥이 활처럼 칼처럼 카인에게 쏘아진다.

"대단한 검술이야. 에셀레드는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글루미엠은 중얼거렸다.

과거의 에셀레드나 에드먼드라면 몰라도 또 다른 에셀레드마저 세계수의 공격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버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나하나가 인간이 지은 건물 정도는 으스러뜨릴 공격이다.

그런 걸 새카만 칼 하나 가지고 버티는 카인이 놀라웠다.

네 장의 황금 나뭇잎 아래서 글루미엠은 다른 쪽으로 턱을 괴었다.

"아쉽게도 저 잡종은 '현혹의 벽'에서 한참 헤매는 모양이야."

카인은 흘깃 뒤를 보았다.

그가 거치고 나온 수풀의 벽이 보였다. 들어간 아벨은 아직도 나오지 못했다.

'이게 정상이긴 하지만....'

평범한 소년이 환상을 마주했을 때, 카인처럼 거침없이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환상 속에서 지내다가 묘한 위화감을 깨닫고 나오는 게 최선.

즉, 시간이 걸린다.

글루미엠은 씨익 웃었다.

"지루하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풍이 아무리 거세도 그 중심은 고요하듯, 글루미엠이 있는 곳이 그랬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세계수에 손을 얹었다.

"앞으로도 우리의 세계수는 천 년이고 만년이고 이 자리를 지킬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사아아아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계수의 가지들이 부딪치며 소리를 내었다.

그 후 초록빛으로 은은히 발광하기 시작했다.

휘익-.

뿌리들이 좀 더 빨라졌다.

좀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수가 늘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며 뿌리들의 공격을 막았다.

"아마 그때 기차에서 보였던 그 힘은 쉽게 쓸 수 없는 거겠지?"

글루미엠은 목을 쓸었다.

시그마리를 구하기 위해 기차 강림했을 때 한 번, 숲 앞에서 두 번.

아무리 별 느낌이 없다고 한들 목이 베인다는 건 유쾌하지 않은 법.

"그렇다고 이렇게 체력만 소모하고 있는 건 좋지 않을 텐데. 내 목을 썰고 싶다며?"

글루미엠이 카인을 조롱한다.

아니, 좀 더 카인이 '밤의 겨울'을 쓰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네가 이길 거라 자신하는군."

가장 강한 상태의 카인을 짓눌러 실추된 자신의 자존감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선연하다.

글루미엠은 어깨를 으쓱였다.

"숲 밖에서라면 몰라도, 이 땅에선 난 절대 죽지 않거든."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그럼 네가 보여 봐."

카인은 그녀 뒤로 보이는 황금 나뭇잎 네 장을 슬쩍 흘겨봤다.

'사실상 저 넉 장이 글루미엠의 여벌 목숨이군.'

초장거리 공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엄청난 재료인 만큼, 품고 있는 마력이 무시무시하다.

저 세계수가 백 년에 다다르는 시간 동안 한 번씩 만들어 내는 나뭇잎이니 당연한 일.

카인은 나뭇잎에 담긴 힘을 직감하며 이를 악물었다.

'단기 결전으로 끝내야 한다.'

성검, '여름'은 쥔 자가 버틸 수 있는 만큼의 힘만 준다. 어떤 특별한 대가 없이, '여름'의 주인만 된다면 받을 수 있다.

반면 마검, '겨울'은 쥔 자가 필요한 만큼의 힘을 준다. 한계를 넘으면 넘을수록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하기에 마검이었다.

꽈아아악-.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쥐었다.

더는 이렇게 버틸 수 없었다.

지금까지 '겨울'의 패시브, 순백의 뇌전으로 강해진 상태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카인은 그 한계를 넘기로 결심했다.

'겨울이여.'

미래를 잃는다는 건 카인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직관적으로 수명이 사라지면 몰라도, 미래를 소모한다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무섭다.

['겨울'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 오늘을 살지 않으면 내일을 살 수 없다.

카인은 늘 오늘을 살았고, 오늘에서 살아남기 위해 검을 쥐었다.

'일어나라.'

카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적정한 힘만 주는 '여름'이 자신의 신기였다면 절대 이 자리까지 자신이 올 수 없다는 걸.

한계를 초월하는 '겨울'이 자신에게 어울린다.

스스스스슷-.

카인을 중심으로 차디찬 한기가 일어난다. 언제나처럼 카인을 중심으로 한기가 짜일 때.

『삼하인(Samhain)의 '겨울'... 보류.』

[근처에 있는 '여름'이 반대합니다.]

덜컹-.

'겨울'의 힘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겨울'이 자신의 바람을 넘긴 적이 없었기에 카인은 당황했다.

['여름'은 '겨울'의 주인이 무제한의 힘을 쥔다는 무게를 아는지 궁금해합니다.]

['여름'은 당신이 당신을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성검, 여름.

'...빌어먹을 성녀.'

성녀가 움직였다면 그녀가 수호해야 하는 성검 역시 움직였을 터. 그리고 숲에 들어왔다고 하니 성검이 어디 있을 거라곤 예상했다.

'그게 이렇게 될 줄은.'

글루미엠은 카인의 표정을 보며 슬쩍 웃었다.

"무언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네."

휘익-!

그 순간 땅에서 숨겨져 있던 뿌리 하나가 카인의 턱을 노리며 치솟아 올랐다.

경이로운 반응 속도로 카인은 턱을 들어 뿌리를 피했다.

휘익-, 휘이이익-.

이번엔 머리와 무릎을 노리고 수평으로 뿌리가 휘둘러졌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땅에 꽂아 아래의 것을 튕겨 내고.

파지지지지직-.

'겨울'이 자기 몸으로 무한히 불어넣던 순백의 뇌전은 오른손에 집속시켰다.

카인식 아르드바르.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콰아앙-!

머리를 노리던 건 주먹으로 튕겨 냈다.

'...젠장.'

방금의 일격으로 몸에 품고 있던 뇌전의 절반을 소모했다.

평상시라면 문제없었다.

이 정도라면 '겨울'이 계속 패시브로 불어 넣을 테니까.

하지만.

['가을'이 '여름'의 뜻에 찬성합니다.]

늘 성녀의 머리 위에 있는 성류관, '가을'마저 '겨울'의 힘을 반대했고.

스스슷-.

카인은 자신을 휘감고 있던 '겨울'의 패시브마저 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여름'과 '가을'은 당신이 온전한 인간의 힘으로 싸워 자격을 증명하길 바랍니다.]

글루미엠의 눈이 곱게 휘어진다.

점차 궁지에 몰리는 카인의 모습을 보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직접 마주하니 별거 없었구나, 세 번째 에셀레드야. 지금까지 해 온 준비가 허무할 정도야."

구구궁-.

뿌리들이 공격을 멈춘다.

아니, 그녀의 앞에 수십 가닥의 뿌리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뿌리로 변했다.

글루미엠은 검지로 카인을 가리켰다.

"그럼 이제 죽어."

콰가가가가가-!

땅의 해일이 짓쳐 왔다.

#121 EP.Ⅱ-5

끝없이 새하얀 (3)

「전사는 강하다고 전사가 아니다.

물러서지 않아야 전사다.

대장벽에서 강하다는 건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볼 수 있다는 것.

그 어떤 절망에서도 꺾이지 않을 불꽃을 가슴에 품은 자.

그런 자만이 진정 대장벽에서 강한 자다.

믿어라.

네가 살아남은 어제를.

네가 오늘까지 휘두른 검을.

그렇게 네가 볼 내일을.

-로드이스트, 조니 워커」

마치 절벽이 무너져 쏟아지듯, 설산에서부터 눈사태가 달려들 듯 글루미엠과 생을 같이하는 압도적인 세계수의 뿌리가 쏟아진다.

카인은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러곤 정신을 집중한다.

우우웅-.

마음이 꺾이지 않으면 절대 부러지지 않는 검, 아그웨스카가 공명한다.

천천히 검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그와 검을 휘감던 휘황한 순백의 뇌전도 없다.

'겨울'의 상징 같았던 순백의 망토도 없다.

하지만 카인은 카인이었다.

전사가 쌓은 업이 칼에 담기고.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수평의 검격이 허공에 그려졌다.

파드드득-.

베인다.

지금껏 힘을 담아 휘둘러도 칼을 튕겨 내던 뿌리에 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글루미엠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여름'이 경악합니다.]

어떤 힘도 깃들어 있지 않은 듯한 카인의 칼이 수십의 뿌리가 엮인 것을 횡으로 베어 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음으로야 만들어진 틈을 파고들어 곧장 글루미엠의 목을 베고 싶었다.

'움직여-!'

하지만 카인의 몸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온몸이 지독한 가뭄으로 갈라져 버린 논바닥 같다. 조금 전 그 일격에 모든 걸 쏟아 냈다는 듯, 멈춰 버렸다.

움직일 의지는 가득했지만, 늘 힘을 주던 순백의 뇌전이 빠져 버리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소드... 마스터?"

글루미엠은 방금의 일격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정답을 찾아냈다.

오롯한 검의 주인.

수천수만 번 검을 휘두르며 끝없이 스스로의 검을 갈고닦은 자만이 닿을 수 있는 위대한 경지.

단순히 오러의 양으로 만들어내는 검이 아니라 검 자체에 인간의 의지가 깃든 상태.

"무섭구나."

글루미엠은 몸을 떨었다.

지금의 카인을 공격하면 된다는 걸 알았음에도 쉬이 움직일 수 없었다.

"에셀레드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이 셋 다 소드마스터일 줄이야."

카인은 쓰게 웃었다.

어떤 소드마스터가 칼을 한 번 휘둘렀다고 이렇게까지 움직이지 못할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직 이번 세계선의 몸은 진짜 소드마스터가 되기엔 부족했다.

그 부족함을 '겨울'의 패시브로 매번 때웠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막힌 상황.

소드마스터가 무엇인지 이미 잘 알기에 과거의 검을 따라 했을 뿐.

이미 몸은 한계를 넘어섰다.

그때, 글루미엠이 웃었다.

충격이 가시고 머리가 돌아가면서 상황을 깨달았다.

"아하, 그게 마지막이었어. 단 한 번이구나?"

콰드드드드득-!

그녀의 앞으로 다시금 뿌리들이 치솟는다.

카인이 '겨울'의 힘을 받듯, 그녀는 세계수의 화신답게 세계수의 힘을 다뤘다.

"내가 너무 쫄았었나 봐. 이전에 본 것들이 너무 엄청나서 말이야."

뿌리들이 다시금 뭉친다.

아까보다 더욱 큰 크기.

그녀는 먹잇감을 잡고 나서 괴롭혀 죽이고자 하는 고약한 맹수처럼 카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그 괴물 같은 에셀레드라고 해도 다 자라지도 못한 애가 이렇게 강할 리가 없지."

"...."

"잘 생각해 보면 매번 너는 싸움을 길게 가져가지도 않았고."

"네가 길게 싸울 만한 적이 아니니까."

글루미엠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겉보기엔 아름다웠지만, 그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아 징그러웠다.

"강해서?"

"아니. 너무 약해서."

죽음을 선고하듯.

칼날이 목을 베기 전에 자신의 위용을 보이듯.

글루미엠은 앞으로 팔을 내밀어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세계수의 뿌리가 부드드득- 소리를 내며 짓이겨지고 하나가 되었다.

글루미엠은 활짝 웃었다.

"그럼 나보다 더 약한 너는 이만 사라져."

콰가가가가가가강-!

다시 한번 짓쳐 오는 땅의 해일.

고고한 절벽이 무너지는 듯한 기세.

북방을 지배하는 세계수의 힘이라.

꽈악-.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힘겹게 들었다.

온몸이 떨린다.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겨울'이 없어도 자신은 자신이었지만, 꽤 무력한 자신이었다.

['여름'이 아쉬웠다고 말합니다.]

['가을'이 '여름'의 뜻을 따릅니다.]

'아쉬워?'

카인은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것은 눈꺼풀이 만들어 내는 암흑. 들리는 것은 자신을 찢어 죽이러 쇄도해 오는 거대한 뿌리.

'건방진 것들.'

한계는 몇 번이고 마주했다.

쾅-.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디뎠다.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근육은 끊어질 것 같고, 뼈는 부서져 내릴 것 같다.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연약함이라.

하지만 카인은 '겨울'이 있기 전부터 카인이었다.

'부서질 거면 부서져라.'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끊어질 거면 끊어져라.'

마검, '겨울'이 없을 때도 카인은 늘 미래를 희생해 왔다. 그저 조금 더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뿐.

화아아아아-!

카인의 보랏빛 눈이 반짝인다.

늘 보이던 순백의 뇌전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지닌 신념의 불꽃!

'다만 너도 같이 부서지고 끊어진다-!'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쉐에에에에에-.

타오르는 빛은 없다.

하지만 수직의 궤적이 달을 노래한다.

세계수의 뿌리에 직격했다.

양쪽 다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애써 카인이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사실로 자신을 안도시키던 글루미엠은 입을 벌렸다.

"말도...."

외식 外式.

엘레이손 Eleison.

이 역시 언제나처럼 휘황하게 감기던 빛은 없었다. 그러나 그 수평의 궤적 속 담긴 것은 태양이라.

달과 해가 조우하는 그 순간.

쿠웅-.

카인이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섰다. 그의 죽음에 마주하며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내려오던 희망을 그렸다.

십자격 十字擊.

키리에 엘레이손 Kyrie Eleison.

"안 돼!"

찌이이이익-.

수직으로 두 개, 수평으로 두 개.

글루미엠이 쏘아 보낸 세계수의 뿌리가 네 개로 찢긴다.

빛도 소리도 없었지만, 오직 검에 담긴 의지만으로 이뤄 낸 기적!

"카인 에셀레드-!"

글루미엠은 더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카인에게 시간을 줬다간 어디까지 성장할지 모르기에.

탓-!

곧바로 땅을 박찼다.

갈라지는 뿌리의 가운데, 카인의 보랏빛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죽어라.-!"

마치 별을 잡기 위해 손을 휘젓는 사람 같았다.

카인은 내심 쓰게 웃었다.

자신의 머리를 터트리기 위해 날아오는 글루미엠이 하나하나 보이지만 이젠 정말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운이 좋아집니다.]

그 순간 글루미엠의 광기 서린 얼굴을 가리며 나타난 메시지.

로스 후작을 처리할 때 나타났던 메시지였다.

아르드바르.

카인의 뒤.

수풀이 갈라진다.

글루미엠을 향해 살기가 뚝뚝 묻어나는 갈색의 눈이 튀어나온다.

루 라바다 Lugh Lamhfhada!

에셀레드 가문의 첫 번째 기술.

아벨이 카인의 옆을 지나치며 그대로 글루미엠의 미간에 세검을 꽂아 버렸다.

콰가가가강-!

위치는 정확했다.

하지만 글루미엠의 실드를 뚫지 못했다.

"너-"

그녀가 말을 더하기 전.

아벨은 허리를 힘껏 뒤로 젖혔다.

쿠웅.

왼발로 부서지는 뿌리를 짓밟았다. 온몸의 중심이 튀어 오르고, 잔뜩 긴장된 근육이 한 방향을 향해 도울 때.

에셀레드의 검은 늘 두 번인 법.

아르드바르.

루 델바흐 Lugh Delbaeth.

이번엔 그녀의 목을 향해 피의 궤적이 터져 나왔다.

평범한 엑스퍼트라면 닿을 수 없다.

자신의 의지를 검으로 투영할 수 있는 자만이 그녀의 실드를 부수고 상처를 내리라.

"어림없다, 고작 어린 에셀레드 주제-?"

글루미엠은 그래서 긴장하지 않았다. 한 세대에 어떻게 둘이나 천재가 나타날 것인가.

그리고 천재도 천재의 수준이 있다. 어떻게 형제가 소드마스터에 가까울까.

글루미엠은 실드로 가볍게 튕겨 내고 한꺼번에 죽일 생각으로 세계수의 힘을 끌어냈다.

치잉-.

하지만 패착이었다.

아벨의 세검이 그녀의 실드를 꿰뚫는다.

카인에 대한 걱정과 함께 어릴 때부터 쌓인 글루미엠에 대한 분노가 깃든 검.

"글루미엠-!!"

그리고 카인을 이렇게까지 몰아간 글루미엠에 대한 살의까지.

한순간 아벨의 검은 진짜 소드마스터의 것에 가까워졌다.

푹-.

아벨의 세검이 그녀의 하얀 목을 꿰뚫었다.

"커-헉."

글루미엠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그녀의 방심과 아벨의 의지.

그것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어 그녀의 숨통을 끊었다.

쉬익-.

아벨은 세검을 뽑았다.

방금까지 움직이던 글루미엠은 시체가 되어 털썩 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형님."

아벨은 급하게 카인에게 다가왔다. 카인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벨은 그에게 사죄했다.

카인은 팔을 들어 아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럴 거 없다."

"아니, 중간에 내가 잡아서 네가 방금 뿌리를 네 동강 내는 것까지 봐서 그래."

아벨의 뒤.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죽은 헤터워드의 머리를 품에 꼭 안은 소녀, 에버윈 로스였다.

"글루미엠은 태생이 거만해서 조금의 틈만 있으면 방심하거든. 틈을 보고 한 번 제대로 찌르면 목숨 하나 깔 거 같더라고."

"...왜 왔지?"

카인은 차갑게 물었다.

에버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헤터워드의 머리를 슬쩍 들어 보였다.

"내 복수랑 얘 복수도 좀 할 겸."

"...?"

스스스슷-.

순간 세계수에서 무언가 불타는 소리가 들렸다.

넉 장의 황금 나뭇잎 중 하나에 불이 붙었고, 글루미엠의 옥좌에 발부터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목에 칼 한 번 꽂았다고 글루미엠이 죽을 거라 생각해?"

에버윈은 활짝 웃었다.

목을 손으로 가르는 시늉을 했다.

"그런 거였으면 에드먼드가 어떻게든 죽였을 거야."

부활이었다.

일반적인 생명의 죽음은 글루미엠에게 해당하지 않았다. 세계수가 존재하고, 그 힘인 황금 나뭇잎이 있는 한 그녀는 되살아났다.

"그렇군."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여?"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에버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카인은 그런 에버윈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헤터워드의 머리였다.

"네게 방법이 있을 테니까."

"정답."

그녀는 헤터워드의 머리를 들었다.

"이 녀석이 재미있는 짓을 했더라고."

스스슷-.

글루미엠의 회복이 빨라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에버윈이 나무 옥좌를 흘깃 보고 말을 이었다.

"저 멍청한 여왕이 이 녀석에게 세계수의 샘물을 떠 오라고 했었어. 이 녀석이 얼마나 치사한 놈인 걸 모르고!"

휙-.

에버윈은 아벨에게 머리를 던졌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버윈은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세계수의 정상이었다.

"샘물 근처에 우리의 피를 좀 두었어. 여차하면 로스의 피를 풀어서 세계수를 무너뜨릴 생각이었나 봐."

헤터워드 로스의 노림수였다.

숙이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세계수의 핵심에 들어가 자신들의 피로 오염시키려는 계획.

"왜?"

에버윈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어떻게든 숲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글루미엠을 협박하려고."

카인은 세계수의 정상과 아벨 그리고 머리만 남은 헤터워드를 살폈다.

"방법은?"

"얘가 죽었으니 이젠 머리를 세계수 정상에 있는 샘물에 넣으면 쟤가 설치해 둔 장치가 움직일 거야."

"그럼 세계수가 오염되고."

"더는 회복하지 못하겠지."

카인과 에버윈의 말이 교차할 때.

아벨은 고개를 저었다.

"못합니다. 형님을 두고 어떻게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아벨."

"...."

"너밖에 없다."

올리시렌과 둘이 양동작전을 벌였듯.

지금도 둘이 갈라져야만 했다.

"형님-."

카인의 상태를 아는 아벨은 차마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시합이다. 네가 올라갈 때 내가 글루미엠을 세 번 더 죽일지, 네가 그 머리로 죽일지."

아벨은 카인의 보랏빛 눈을 응시했다.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신념이 엿보였다.

"글루미엠의 회복이 거의 다 끝나 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벨은 이를 악물었다.

"이따 뵙겠습니다."

아벨은 에버윈의 말이 끝나자마자 달렸다. 오러를 발에 모아 세계수의 옆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보내긴 했는데, 그럼 우린 저걸 어떻게 막지?"

쇄골, 목, 아래턱.

점차 나타나는 글루미엠에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채점이 끝난 거 같거든."

파지지지지지직-.

키리에에 이어서 재차 터져 나온 외식 엘레이손.

정치가는 입으로 자신을 말하고 전사는 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리고 카인은 증명했다.

['여름'과 '가을'이...]

메시지가 잘렸다.

카인은 처음 보는 일에 눈을 빛냈고.

『삼하인(Samhain)의 '겨울'... 개방.』

['겨울'이 분노합니다.]

급하게 튀어나오는 메시지에 미소 지었다.

"해 보자고, 2차전."

#122 EP.Ⅱ-5

끝없이 새하얀 (4)

파지지지지직-!

에버윈은 카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휘황한 빛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겨울'이 함부로 간섭한 '여름'과 '가을'에 노여워합니다.]

카인은 가끔 <사계절의 신기>에 에고(Ego)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단순히 주인을 가리는 것뿐 아니라 사람과 같은 의지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놈을 제외하곤 다들 드러내지 않았지.'

'겨울'은 긴가민가하는 짧은 메시지로만 의사를 표현했고, 지금도 침묵을 지키는 '봄'만이 제대로 나타났었다.

따라서 신기의 에고를 확신할 수 없었다.

['겨울'이 패시브의 레벨을 강제로 상승시킵니다.]

['여름'이 반....]

['겨울'이 '여름'의 연결을 잘라 버립니다.]

하지만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밀어닥치는 순백의 번개가 바닥났던 카인의 온몸을 회복시키고.

언제나 카인의 행복을 바라던 '겨울'이 진심으로 분노했다는 게 느껴졌다.

카인은 미소 지었다.

이전 세계선부터 지금까지 늘 함께하던 '겨울'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겨울'이 돌이킬 수 있는 건 지금뿐이라고 말합니다.]

['겨울'의 끝엔 종말뿐입니다.]

[그럼에도 '겨울'을 걸으시겠습니까?]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매번 할지 말지 되물을 때 아벨이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은 깨달으며 답했다.

"당연히."

스윽-.

칼을 들었고.

왼발로 땅을 찍었다.

그 끝엔 천천히 눈을 뜨는 부활한 글루미엠이 있었다.

"내게 세상은 언제나 겨울이었으니까."

['여름'이 침묵합니다.]

감히 누구를 증명하라 했던가.

누구보다 앞서는 카인의 모습에 '여름'은 입을 닫았다.

['가을'이 침묵합니다.]

여름이 지고 이어 오는 가을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을 거쳐야 맞이하는 계절.

"일어나라, 겨울이여."

밤의 겨울 Winter of Night.

[미래가 소모됩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에버윈은 팔로 앞을 가려도 파고드는 순백의 빛에 질려 하며 한참이고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 아벨을 이끌고 나왔던 수풀이 등에 닿을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카인이 강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에버윈이 봐 온 그 어떤 신비로도 도달할 수 없는 위대하고 찬란한 무언가!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마저 모욕인 것 같은 무언가.

쩌어어어어억-.

하늘이 갈라진다.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막던 먹구름이 짓이겨지며 흩어진다.

후우우우우-.

그리고 저 먼 우주.

파란 하늘에 그어진 흑색의 상처에서부터 우주의 한기가 카인에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옥좌의 글루미엠이 눈을 떴다.

작렬하는 흰색의 번개.

조금 삐뚤어졌지만 떠나지 않을 순백의 왕관.

펄럭-!

그리고 모든 숲을 휘감을 듯한 순백의 망토까지!

"잠 깼나?"

'겨울'의 액티브 '밤의 겨울'을 극한까지 꺼낸 카인이었다.

글루미엠은 고개를 들어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잡종이 올라가네."

"녀석과 내기했지."

콰드드드드드득-.

카인이 발을 디디고.

대지가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아그웨스카를 쥔 그의 팔에 근육이 잔뜩 수축했다.

"누가 먼저 너를 죽일지-!"

팟.

카인은 내달렸다.

순백의 번개와 우주의 한기가 어우러진 그의 질주는 그야말로 벼락.

직선의 일격이 글루미엠의 목을 향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글루미엠은 황금나뭇잎이 부서졌음을 깨닫고 치솟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젠 사라져라!"

푸푸푸풋-.

땅에서 세계수의 뿌리가 치솟는다.

수십 개만 꺼냈던 방금까지가 장난이라는 듯, 한 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뿌리가 치솟았다.

"나의 마지막 에셀레드야!"

파아아앗-.

수백의 뿌리 끝이 날카롭게 갈라지더니 숲의 무거운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졌다.

하얀 별의 걸음 White Starlight.

[미래가 소모됩니다.]

초겨울의 봉인을 넘어 얻어 낸 삼하인의 겨울. 그리고 액티브까지 펼친 상황에서 카인은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부득-.

다가오지 못했다.

부드드득-.

아니, 정확히는 카인에게 다가오던 뿌리는 하얀 별의 걸음이 짓누르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으깨져 버렸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카인은 귓가에 울리는 대장벽의 기도에 칼을 실었다.

-신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별조차 숨어 버린 밤을 가르는 검.

동방의 위대한 지혜와 대장벽의 간절함이 빚어 낸 수호의 검.

암천일광 暗天一光.

파아앗-.

아그웨스카에 하얀 한기가 서린다. 칼이 지난 곳으로 눈이 만들어진다.

본식 本式.

키리에 Kyrie.

수직의 검이 글루미엠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스으으읏-.

남은 세 장의 황금나뭇잎 중 하나가 사라지고, 분노에 가득 차 마치 악마처럼 보이는 글루미엠이 오른손을 올렸다.

그대로 칼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뻗어지는 왼손.

우우우우웅-.

신록의 푸름이, 숲의 생명, 엘프에게 허락된 초록의 힘이 가공할 만큼 압축되어 카인의 심장을 노렸다.

-우리를 굽어살피소서.

외식 外式.

엘레이손 Eleison.

검이 아니다.

카인은 비어 있던 왼손을 횡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글루미엠과 마주하는 건 맨손이 아니니.

[미래가 소모됩니다.]

파아아아아아아앙-!

초록과 순백이 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충격파가 세계수를 뒤흔들고 바닥에서 솟아 있던 모든 걸 부쉈다.

에버윈은 납작 엎드려서 버텼다.

한 번의 충격파가 가시고 고개를 들었을 때, 카인의 비어 있던 왼손에 순백의 세검이 하나 보였다.

"...!"

물리적인 검이 아니다.

'겨울'의 한기를 뭉치고 뭉쳐서 만들어 낸 기적. 구원을 간절히 바라던 대장벽의 또 다른 구원의 가능성.

그리고 겨울과 종언의 검.

외식 外式.

레퀴엠 Requiem.

카인은 두 검을 교차했다.

스겅-.

가위로 목을 잘라 내듯, 거대한 힘을 끌어 쓴 나머지 잠시 틈이 난 글루미엠의 목을 베었다.

저 멀리 엎어져 있는 시체처럼, 글루미엠의 목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동시에.

스으으읏-.

또 하나의 황금 나뭇잎이 불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 건 한 장!

카인은 두 장의 나뭇잎을 직시했다.

두 개를 하나로 잇는 것.

나눔과 동행의 기적을 상징하는 대영광.

-나의 검으로 평화를 만들리라.

카인은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세계수와 함께하는 글루미엠이 생각보다 강했으며, 상황이 여의찮았기에 거침없이.

칼을 뻗었다.

[미래가 소모됩니다.]

암천일광 暗天一光.

본식 本式.

글로리아 Gloria.

파사사사사삿-!

아그웨스카와 레퀴엠에 찔린 황금 나뭇잎이 얼어붙는다. 글루미엠을 부활시키던 그 상태 그대로 '겨울'의 한기에 굳는다.

파삿.

그리고 천천히 부서지는 얼음.

수백 년간 제자리를 지켜 왔으며, 글루미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황금나뭇잎 모두가 스러진다.

여름과 가을.

그 사이에 강맹했던 그 무엇도 겨울에 고개를 들 수 없듯, 작정하고 카인이 뻗어 내는 칼에 나뭇잎은 버티지 못했다.

카인은 멈추지 않았다.

칼을 그대로 세계수로 찔러 넣었다.

구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뿔피리 수천 개가 동시에 울어 재끼는 것처럼 세계수가 비명을 내질렀다.

'마지막이다.'

글루미엠은 죽지 않았다.

황금나뭇잎을 모두 소모한 만큼 쉽게 다시 살아나진 못하겠지만, 이 세계수가 있는 한 그녀는 돌아올 것이다.

카인은 그런 건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한 번 칼을 뽑았다면 끝을 봐야 하는 것이 그의 규칙.

-그리하여 오늘의 영광을 얻을지어다.

스르르르릇-.

'겨울'의 한기로 빚었던 레퀴엠이 세계수 속으로 녹아든다.

거대했던 발람의 육신에 새겨졌던 회색의 칼자국처럼 하늘 끝까지 치솟은 세계수에도 천천히 순백의 검흔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도 꽂아둔 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두 손을 들었다.

[미래가 소모됩니다.]

삼첩 三疊.

글로리아 엑스첼시 데오 Gloria Excelsis Deo.

후우우우우!

바람이 분다.

지독하게도 차가운 바람.

마시는 순간 허파를 얼려 찢어 버릴 것 같은 극한의 바람.

구우우우웅!!

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세계수의 검흔이었다.

안에서부터 치솟아 부수는 '겨울'의 공격에 세계수는 전신을 비틀었다.

단순히 크고 강한 게 아니라 세월의 저력과 신비가 뭉쳐져 있는 만큼 발람처럼 터져 죽진 않았다.

하지만.

스슷-.

울창했던 세계수가 앙상해진다.

모든 나뭇잎이 가을을 맞이한 듯 갈색으로 얼어붙었다가 눈송이처럼 흩어진다.

카인은 팔을 뻗었고, 아그웨스카는 실이라도 달린 것처럼 허공을 날아서 그의 손에 잡혔다.

푹-.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땅에 꽂았다.

"큭."

하지만 이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선혈을 바닥에 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에버윈이 다급히 달려왔고, 카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 보이나?"

"안 괜찮으니까 물은 거지! 방금 그건... 아니 그것들은 뭐야? 너는 대체 누구야?"

강해도 정도가 있다.

힘을 되찾는 순간, 글루미엠의 남은 목숨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세계수까지 끝내 버리는 건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영웅의 업적이다.

그걸 눈앞에서 해낸 카인이 도저히 사람 같지 않았다.

"너도 나처럼 다시 살아난 거야?"

"...그런 게 말이 되나."

말이 되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토끼처럼 옆에서 놀라는 에버윈을 보니 올리시렌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쉽게 되었군. 헤터워드의 독은 쓸 일이 없겠어."

그러자 방금까지 애써 농담을 던져 카인을 진정시키던 에버윈은 쓴웃음을 지었다.

"끝나지 않았어."

"뭐...?"

"내가 자결하지 않고 왜 왔는데. 왜 그 녀석의 머리를 들고 온 건데."

쿠궁-.

대지가 요동친다.

카인의 눈에 반쯤 죽은 세계수로 무언가가 흘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에버윈은 밖을 가리켰다.

이미 수풀의 벽은 진즉 사라졌고, 보이는 건 마을과 숲.

"미친."

카인은 보이는 광경에 저절로 욕이 나왔다. 마을은 물론이고 빽빽했던 숲이 말라 죽고 있다.

"글루미엠 개인은 죽였겠지. 하지만 세계수는 불가능해. 그건 이 숲 전체거든."

훙-.

세계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따듯해진다.

카인이 불어넣은 '겨울'의 힘을 이기는 생명의 힘.

세계수는 주위의 모든 숲을 악착같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살기 위한 탐욕적인 발악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말라비틀어진 세계수를 달리며 내려왔다.

쿵.

바로 아벨이었다.

"해냈습니다!"

세계수의 머리.

천천히 암적색으로 물들어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카인의 글로리아를 이겨 낸 것처럼 세계수는 더더욱 숲의 생기를 빨아들여 로스의 피도 위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쾅.

에버윈은 작은 주먹으로 땅을 치며 중얼거렸다.

"로스의 피라면 될 줄 알았는데...!"

"...북방의 숲 전부를 없애야만 세계수를 죽일 수 있겠군."

"전부까진 아니겠지만...."

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벨은 카인이 뱉은 핏자국을 보며 놀라 외쳤다.

"형님!"

"아벨, 내가 없어도-."

"안 됩니다!"

유언 같은 카인의 말에 아벨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됩니다!"

"내가 해야지. 여기서 저 큰 걸 없앨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카인은 아그웨스카를 두 손으로 쥐었다.

끝을 볼 때였다.

"제가, 제가 더 빨리 강해졌어야 했는데."

아벨의 갈색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카인은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넌 이미 충분하다."

"하지만 형님에게 결국 나머지를 모두 맡겨야 하잖습니까!"

카인은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구름을 모자 삼을 정도로 장대한 광경을 향해 칼을 들었다.

"그저 내가 살던 세계가 겨울이라 그럴 뿐. 겨울은 고독한 법이거든."

그 순간.

['18.6%'의 세계가 미소 짓습니다.]

황혼이 북쪽 하늘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천공에서 지상으로 번개처럼 작렬하는 일격의 찌르기.

한 인간이 발하기엔 너무도 찬란한 금빛 황혼이 세계수를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버리며 카인의 앞에 꽂혔다.

아르드바르.

최종식.

클라우 솔라스 Claíomh Solais.

카인의 흑발과 아벨의 갈색 눈이 함께 있는 왕국 최강의 검.

"미안하다, 늦어서."

에드먼드였다.

Episode.Ⅱ

봄의 광시곡

#123 EP.Ⅱ-6

나는 겨울이다 (1)

「지금까지 만들어진 암천일광의 본식은 총 다섯이다.

첫 번째, 키리에 Kyrie.

두 번째, 글로리아 Gloria.

그리고 남은 세 가지 본식은 조심해라.

존재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꾸고, 현현하는 것만으로 운명을 뒤트는 최강의 식이니까.

무수한 외식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진정한 '암천일광'은 세 번째 본식부터야.

즉, 이 소리는 그 대가도 만만치 않다는 의미지.

뭐냐고?

직접 겪어 보도록.

설원의 가르침은 그렇게 핏빛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조니 워커의 가르침 중」

"구아아아아악-!"

반으로 쪼개진 세계수의 가지들이 뭉치면서 서로 합쳐진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이 비명을 질렀다.

화아아아아-!

바람이 뜨겁다.

수백 년간 한 자리에 붙박여 살아오던 엘프의 숲이 천천히 흩어진다.

인간의 욕심으로 사라지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숲을 살라 먹는 것은 한 그루의 욕심쟁이 나무라.

"용서, 하지, 못한다!"

세계수가 소리친다.

아니, 글루미엠의 고함이었다.

세계수의 화신인 엘프 여왕답게 모든 목숨을 카인에게 잃어버리고 세계수와 융합한 상태였다.

본래도 거대했는데, 한층 더 거대해진 세계수.

아벨이 퍼뜨린 '로스의 피'나 카인의 '글로리아', 에드먼드의 '클라우 솔라스'에 당한 상처를 수복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전장과 달리 세 남자 사이엔 찬 바람만 불었다.

아벨은 자신의 기억이 닿는 한 처음 보는 에드먼드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카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음."

카인도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조금 당황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여기서 에드먼드가?'

적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적이 아니더라도 아군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할 순간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과해 온다.

늦었다고.

카인은 가슴 한구석을 간질거리는 느낌이 말에 비칠까 걱정되어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카인, 아벨."

결국 먼저 입술을 뗀 건 에드먼드였다.

그가 아무리 눈치 없고 검만 휘두르는 바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는 눈치챌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에드먼드 에셀레드, 너희의 아버지다."

"...압니다."

물론 대사는 적절하지 못했다.

쿠카카카카카강-!

반으로 갈라졌다가 합쳐진 세계수가 날뛰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방향은 남쪽.

엘프들과 원정군들이 치열하게 교전을 벌이는 방향이었다.

'음?'

카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색함이 시간에 흘러가고 전설처럼 듣던 에드먼드라는 이름에 익숙해지자 보이는 건 그의 상처였다.

목, 심장, 허벅지, 허리, 이마.

이미 옷은 찢어질 대로 찢어져 너덜너덜했고, 급소라고 할 만한 곳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뚝- 뚜욱-.

그리고 에드먼드의 다리를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지독한 부상이었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이 기적인 상태.

카인은 바닥에 고인 핏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벨은 그제야 에드먼드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갈색 눈과 카인의 검은 머리가 함께하는 어른의 존재는 너무나 생경했고, 새로웠으며, 좋았다.

그래서 진면목을 늦게 발견했다.

에드먼드는 특유의 고저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래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미친 칼이 막더구나."

카인은 곧장 눈치챘다.

자신의 힘에도 제동을 걸었던 신기, '여름'이리라.

에드먼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의 은빛 세검을 쥐며 세계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서 부수고 왔다."

"성검을... 부쉈다고요?"

카인이 황당해하며 반문했고, 에드먼드는 그답지 않게,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물었다.

"어떻게 성검을 아느냐?"

"성녀랑 같이 숲에 들어왔다는 걸 들었습니다. 그럼 같이 있을테죠."

"혹시나 해서 멀리서 지켜보던 놈을 죽이지 않았는데, 다행이구나. 네 사람이어서."

역시 왕실정보국이 에드먼드의 행로를 알고 있던 건, 그가 봐주었기 때문.

쿠웅- 쿵-.

세계수가 움직일 때마다 지진처럼 땅이 울린다. 그 기묘한 박자 속에서 카인이 입을 열었다.

"딱히 제 사람은 아닙니다. 저 아는 사람의 사람이지."

"친구?"

"...뭐, 그렇죠."

카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젊을 때 친구는 있어야지."

카인은 부끄러움을 이겨 내고자 대뜸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에드먼드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인은 남쪽으로 칼을 향하며 말했다.

"가릭, 디그리드, 하이볼트, 헤터워드."

"아-."

에드먼드는 다시금 웃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를 향한 어른의 웃음이었다.

"그래, 좋은 친구들이지."

"...예."

카인은 그들이 에드먼드를 어떻게 말하는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드먼드가 짓는 미소는 먼지 낀 창을 소매로 닦으며 과거를 추억하는 아이와 같았다.

그래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카인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

"정말 성검을 부수셨습니까?"

"정확히는 나는 칼끝만 조금 부쉈고, 그 후로 갑자기 얼어붙더니 원래 있던 봉인함으로 들어가더군."

['겨울'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습니다.]

카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계절의 신기> 간에 이런 상성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고 자신과 이전 세계선부터 늘 함께하던 '겨울'이 호의적이라서 좋았다.

어쩌면 '겨울' 삶이면서도 친구리라.

울려라!

세계수가 걸을 때마다 움직이는 진동과 전혀 다른 진동이 울렸고.

-카인, 들려?

올리시렌의 목소리였다.

북방 엘프의 숲 전체에 울리는 외침.

그러나 무작정 크지도 않은 게 단순히 소리가 큰 게 아니라, 이번에도 마녀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았다.

에드먼드나 아벨이 신기한 듯 카인을 돌아보았고, 카인은 되나 싶은 마음으로 답했다.

"들린다."

-다행이야, 정말...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울먹이는 소리.

걱정이 안도로 바뀔 때 나는 소리.

그리고 올리시렌의 소리.

카인은 씨익 웃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아?"

-죽는 것도 문제지만, 너 또 너를 희생했을 거 아니야.

아벨은 으스러지라 검을 쥐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카인은 저 빌어먹을 백색의 망토를 둘렀다.

기적의 힘을 불러일으키지만, 기적이 공짜일 리가 있는가.

아벨은 올리시렌이 무슨 마음으로 저 말을 하는지 알았다.

카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거 아니다."

-나한테는 별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스으으윽-.

카인은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칠흑의 아그웨스카를 가슴께부터 수직으로 들었다.

"...."

에드먼드는 묘한 눈빛으로 카인의 자세를 바라보았다. 마치 익숙한 무언가를 보는 눈이었다.

카인은 담담히 먹구름을 제 머리로 가르며 나아가는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처리해야 해."

-아니.

단호한 올리시렌의 말.

카인은 저절로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아아아아아아-!

빗줄기가 휘어진다.

음습했던 세계수의 생명의 힘이 불타오른다. 한순간에 퍼져 나가는 압도적인 열기가 온 세상을 뒤흔든다.

나무의 이파리는 한순간에 갈색으로 바싹 말랐고, 습도 넘쳤던 땅은 퍼석해졌다.

그뿐일까.

저 남쪽을 중심으로 마치 천사의 링처럼 구름의 동심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일으키는 구름의 링.

-이젠.

아이리안을 초토화하겠다는 듯 움직이던 세계수가 멈춘다.

"마, 말도 안 돼!"

붉음이 치솟는다.

일출이 아니다.

용암이었다.

"내가 너를 지켜."

달라지는 올리시렌의 말.

저 남쪽에서 일어나는 붉은 거인.

발람이었다.

아니, 발람처럼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인이건만 생김새는 올리시렌에 가까웠다.

그때 카인의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순환하는 계절 LI』의 성공 보상 '영원의 성장'이 주어집니다.]

['영원의 하수인'이었던 51번째 악마, 발람이 '올리시렌'의 가능성으로 흡수됩니다.]

[미각성 마녀, '올리시렌'의 강렬한 염원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18.6%의 세계가 미소 짓습니다.]

쿠웅-.

거인이 움직인다.

세계수에 비하면 머리 한두 개 정도 적지만, 나무와 사람이다.

후우우우웅-!

순간, 뻗어지는 거인의 주먹.

콰가가가가가가가가-!

폭발.

그 단어 말고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강렬한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광풍은 세계수의 얼굴 부분에 정확히 작렬했고.

"크아아아악!"

글루미엠이 비명을 내지른다.

휘익-.

동시에 치솟는 세계수의 뿌리.

그대로 용암의 거인을 베었다.

하지만.

후우우웅-!

돌아오는 건 두 번째 주먹일 뿐.

뿌리는 분명 베었지만, 어찌 칼로 물을 벨 것인가.

당연히 나무뿌리로 용암을 베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 반 정도 들어가던 세계수의 뿌리는 그대로 녹아서 흡수했다.

에드먼드는 칼을 내리며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용암의 거인과 거대한 나무가 싸우는 건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가 참 크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날씨가 아쉬워."

투두두둑-.

용암 거인이 일어나는 순간 흩어졌던 비가 다시금 내린다.

문제는 비가 거인에 닿을 때마다 검은 연기가 일어났고, 묘하게 거인이 작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수는 흙과 숲이 생명을 되찾을수록 건강해졌다.

콰앙-! 쾅-!

거인과 세계수가 맞붙어 싸우는 광경 앞에서 에드먼드는 내렸던 칼을 들었다.

"내가 보기에 네 친구는 패배한다."

상대와 상황이 너무 나쁘다.

세계수 그 자체만 죽인다면 에드먼드 선에서도 충분히 끝나리라.

하지만 상대는 이 '숲'이다.

저 먼 지평선까지 너울지는 초록의 '세계'를 이겨 내야 한다.

"내게 방법이 있어."

그때 뒤로 물러나 침묵을 지키던 에버윈이 나선다.

단숨에 그녀를 알아본 에드먼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인사를 할 상황은 아니군."

"나중에 그냥 내 무덤에 꽃이나 놓아줘, 에드."

두 마디로 감정을 정리한 둘은 카인을 돌아보았다. 아벨도 함께였다.

"너한테는 이 '초록의 세상' 전부를 죽일 기술이 있지?"

에버윈의 눈이 바라보는 곳.

그 방향은 카인이지만, 그 도착지는 카인과 연결된 세상의 하얀 끝이라.

"있다."

카인은 선선히 끄덕였다.

그의 순백의 망토가 펄럭이고 하얀 왕관이 반짝였다. 마치 카인의 말을 기다렸다는 것만 같았다.

에버윈은 에드먼드를 돌아보았다.

"너는 사람만 죽일 줄 알지, 이런 거대한 걸 상대할 기술은 없고."

"죽을 때까지 칼을 쑤시면 죽는다."

지독하게도 에드먼드다운 발언,

"그 몸으로?"

에버윈은 상처로 가득한 그의 몸을 가리켰다.

아마도 처음의 '클라우 솔라스'도 엄청난 무리였으리라.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리할 수 있다."

에드먼드는 단호히 말을 이었다.

"못난 아버지라도 그 정도 각오는 있으니까."

"...너, 제법 좋은 어른으로 자랐구나?"

어린 에버윈의 눈이 휘어진다.

가장 걱정되던 에드먼드가 제법 멋진 어른이 된 게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만들었다.

에버윈은 카인을 돌아보았다.

"방금 봤어. 네가 엄청난 힘을 쓸 때마다 너의 무언가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걸."

"...."

카인은 에버윈이 어떻게 본 건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로스 혈족, 엘프의 중앙정신화도 관련 있겠지만 핵심은 '운명'.

세상에 흩어진 '운명'을 엮어서 만든 에버윈인 만큼 카인의 '미래'가 흘러감을 볼 수 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친 기적이자.

신화가 만들어지는 이 시대의 신화다운 일이었다.

"날 써."

에버윈은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 흐름이 보이는 나라면 네 제물이 될 수 있으니까."

피의 제물로 태어나고 죽었다.

엘프를 제물로 다시 태어나 한 인간의 욕심의 제물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 딸이 살아갈 이 세상을 지켜 줘, 카인 에셀레드."

에버윈은 각오했다.

스스로를 위해.

딸을 위해.

세상을 위해.

제물이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