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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국,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사태는 대충 일단락됐다. 사이보그의 말대로 그는 더 이상 하울 헬퍼와의 전투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이 사태의 원인이 됐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하울 내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이미 이전 도시에서도 사건이 벌어졌는데 범인이 잡히지 않아서 우리에게 업무협조가 들어온 거지. 소울 시티에 정박하는 동안 함께 보안을 담당해달라면서 말이야. 뭐, 우리가 업무조율을 하는 동안 보기 좋게 당해버렸지만."

존 위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사이보그를 힐끗 바라봤다. 사이보그는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척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아마 업무조율이 늦어진 이유가 사이보그 때문인 것 같군.

'그나저나 살인사건이라?'

나는 살인사건이라는 것에 무언가 감이 왔다.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대담하게 살인을 벌일 자는 많지 않다. 아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사망자가 어떻게 죽었지?"

"심장이 꿰뚫려서 죽었다."

사이보그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하필 심장이라.'

점점 확신이 강해진다.

"시신을 볼 수 있나?"

"검시 사진을 보내주지."

사이보그의 광학렌즈가 이번엔 녹색으로 반짝인다.

내가 손목에 찬 워치를 톡톡하고 두드리자, 이브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전송받은 사진을 렌즈 화면이 띄웠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놈이다.'

이 사건의 범인을 말이다.

움직이는 성채, 하울 (5)

57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이종포식」의 매커니즘은 상대 심장에 깃든 생명의 힘을 빼앗는 거다. 각성자의 포스는 심장에 자리잡고, 그 포스가 기프트를 형상화했으니까.

이게 내가 우루사의 심장에 직접 칼을 꽂아 넣은 이유였다.

'물론 이놈은 아예 심장을 취식한 것 같지만.'

사이보그는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고 했으나,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심장은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강한 물리력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라고 보기엔, 상처 부위가 무언가로 도려낸 듯 지저분했다.

이건 뚫고 들어간 게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은 거다.

"뭔가를 아는 눈치군?"

내 표정을 본 존 위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놈인지 대충 알 것 같군."

나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진짜냐? 누가 이런 거지?"

"이건 인간의 소행이 아니다."

"······뭐? 인간이 아니라고?"

존 위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인간이 아니면 뭐지? 오염체라는 소린가? 하지만 하울의 보안을 뚫고 오염체가 어떻게······?"

"그 전에······ 보수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난 공짜로 일하는 취미는 없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굳이 내가 쥔 패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정보의 우위야말로 해결사의 힘 중 하나니까.

"네가 해결사라는 걸 깜빡했군."

내 표정을 본 존 위크가 피식 웃더니 중얼거렸다.

"어떡할 거지?"

나는 고개를 돌려 사이보그를 바라봤다. 하울의 대리자는 존 위크가 아니라 경비대장인 사이보그다. 결국,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사이보그는 대답 대신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광학렌즈가 초록빛으로 점멸하듯 반짝였다.

'또다. 어딘가와 통신을 하는 모양인데······ 설마 하울의 주인인가?'

작은 호기심이 피어날 무렵, 사이보그의 광학렌즈에서 빛나는 초록빛이 꺼지고 그 시선은 내게 향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지? 놈의 목을 가져올 수 있나?"

다소 도발적인 질문이다.

물론 내 대답은 하나였다.

"당연한 걸 묻는군. 나는 해결사다."

"좋아. 그럼 네게 의뢰하지."

고개를 끄덕인 사이보그가 눈을 빛냈다.

"단, 우리도 자체조사를 하겠다. 네가 먼저 잡으면 의뢰금을 받는 거고, 우리가 먼저 잡으면 의뢰금은 당연히 없다. 동의하나?"

의뢰 내기라? 이게 도발적인 질문을 한 의도였나?

나는 피식 웃었다.

동의하냐고?

"물론. 재밌겠군."

당연히 동의한다. 이런 도발적인 내기를 피하면 해결사가 아니지. 그것도 내가 전문인 일을.

나와 사이보그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친다. 8개의 광학렌즈 위로 내 모습이 반사되어 비친다. 나는 웃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위스키를 홀짝거리던 존 위크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얼굴로 외쳤다.

"좋아! 그럼 난 중재자의 역할로 심판을 맡지! 오래간만에 나도 재밌겠군!"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넘어왔군!'

* * *

사이보그와 대화를 했던 일련의 과정은 내가 하울의 방해 없이 각성종을 잡기 위한 사전작업이기도 했지만, 존 위크를 각성종 사냥에서 배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능력자는 아무래도 위험하지. 만에 하나지만, 존 위크가 막타를 쳐버린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이게 존 위크를 배제한 이유였다.

「이종포식」의 매커니즘은 서로 다른 각성종끼리의 기프트 강탈이다.

즉, 내가 「이종포식」을 할 수 있듯, 존 위크 역시 할 수 있다는 뜻.

아직 「이종포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각성자의 존재도 흔치 않은 마당에, 각성종은 더 찾기 힘들었고, 이 둘이 만난다는 건 더더욱 희귀했으니.

'하지만 「이종포식」이 가능하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각성종은 전설의 포켓몬처럼 씨가 마르게 되겠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지금도 각성종을 찾기 힘든데, 사람들이 찾아 나서는 순간 준비된 많은 이벤트들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건 최대한 막아야 했다.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진 모르지만, 늦출 수 있을 때까진 늦춰야 한다.

······최소한 내가 필요한 능력을 전부 얻을 때까지는.

'존 위크는 절대 각성종을 잡아선······ 아니, 마주쳐서도 안 된다.'

존 위크 정도의 감각이 예민한 자라면, 분명 각성종을 만나는 순간 죽이려 할 테니까.

"이만 일어나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존 위크가 어디서 꺼냈는지 위스키를 한 병 더 꺼내며 물었다.

"급한 것도 없는데 한 잔 더 하지 않고?"

그 말에 사이보그의 하관이 구겨졌다. 여기서 급하지 않은 건 심판 역할을 자처한 존 위크 뿐이었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흐음? 장미화원의 가시 돋친 장미 말인가? 정말 사이가 끈적······ 아니, 끈끈한가 보군. 정말 놀라워."

"내 유일한 중개인이니까. 그런데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실없는 소리에 그냥 나가려다가,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장미화원이라고 하는 거야 로세툼(rosetum)의 뜻이니 그렇다고 쳐도, 왜 로제를 가시 돋친 장미라고 부르는 걸까?

그녀의 괄괄한 성격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그 이름을 부르는 대상이 소울 시티를 주름잡는 존 위크다. 단지 성격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닐 터였다.

"오호? 설마 '그 일'을 모르나?"

"뭘 말하는 거지?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던 사건을 말하는 건가?"

내가 떠올릴 만한 사건은, 차기 「다섯 손가락」 후보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기적의 서광」 당시 소울 시티의 혼란 속에 사망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 말고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도 그녀를 믿기보단, 다이손의 이름값을 믿었던 게 더 컸으니까.

"푸하! 진짜 모르는군? 그렇게 가까운 사이면서······ 아니지. 어쩌면 그걸 몰랐기에 네가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대체 무슨 소리를······"

"그만 가보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직접 듣는 게 좋을 테니. 뭐, 그녀 입장에서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 여태껏 말하지 않은 걸 테지만."

그 말을 끝으로 존 위크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위스키를 병째 들이켰다. 진짜 가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던 사이보그가 이를 으드득 갈더니 낮은 저음으로 으르릉거렸다.

"나는 안 주나?"

"아, 미안하오. 그런데 사이보그가 술을 마셔도 되나? 마시면 어디로 가는 거지?"

"······."

나는 사이보그의 광학렌즈가 붉은빛을 토하는 것까지 보고 자리를 떴다.

* * *

엉망이 된 로비에서 나오니, 서성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는 얼굴이 바로 보였다.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진짜 기다리고 있었나.'

백금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다시피 다가온 로제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궁금증 반, 걱정 반이 섞인 눈빛.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살인사건 범인을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살인사건이요? 그럼 그 난리를 친 게 범인을 잡으려고······ 아, 아니 그것보다 그새 의뢰를 받았다고요?"

허둥대며 말하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 위로 반쯤 박살이 난 호텔의 샹들리 에를 확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뭐, 해결사니까."

하지만 그 대답에 로제는 뭔가 불안한 얼굴이 됐다.

왜지?

"호, 혹시 앞으로 제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죠?"

아. 이거였나?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이번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나는 사이보그와 대화했던 의뢰 내용에 대해서 말했다. 의뢰라기보단 내기에 가까운 대화에 관해서.

"하여튼 남자들이란······ 무슨 그런 거로 내기를 하고 그래요?"

그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불안해했던 표정은 풀려있었다.

이럴 때 보면 참 나이답게 느껴지는데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중개인이 필요한 거겠지."

"그럼요! 내가 있었으면 내기는 무슨! 헛소리하지 말라고 욕하고 의뢰대금을 따블로 받아냈을 거예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특유의 톡톡 튀는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좀 아쉽군."

"아무튼, 이왕 하기로 한 거 박살 내고 와요! 로세툼의 에이스가 나다는 걸 보여주라고요!"

로제가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비장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지."

장미화원에 꼭 가시 돋친 장미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 * *

밤이 깊었다.

하지만 하울의 관광지역은 오히려 밤이 더 성행이었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야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지만, 젊은 남녀가 역사를 만드는 시간은 지금부터였으니까.

나는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을 뒤로하고, 하울의 내부시설로 진입했다.

들어오는 과정에서 약간의 마찰과 의심(살인사건은 관광지역에서 벌어졌는데, 왜 내부시설로 들어오냐)은 있었지만, 들어오는 데는 문제 없었다.

물론 CCTV를 비롯한 온갖 감시가 따라붙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유유히 내부시설을 돌아다니며 지도를 스캔했고, 대충 파악이 끝나자 그대로 격납고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더럽게 넓네."

격납고 하나 크기가 대충 축구장 8개를 합쳐놓은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런 격납고가 총 12개가 있었다.

심지어 그 격납고 중 비어있는 자리는 거의 없었다. 전부 다 수송선과 전투기로 가득 차 있었다.

"웬만한 공군 기지보다 더하군."

나는 새삼스레 하울의 스케일에 혀를 내두르며 격납고를 하나씩 살펴봤다.

대략 1시간 정도 지나자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놈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럼 물류창고가 남았나.'

격납고는 놈이 유입된 1차 루트다. 그리고 2차 루트이자 놈이 둥지를 틀만한 곳으로 가장 유력한 장소가 물류창고였다.

나는 그대로 물류창고로 향했다. 격납고 바로 위층이 물류창고였다.

"여긴 더 크네."

격납고도 크다고 느꼈는데, 여긴 더했다. 하울의 모든 물류가 오가는 창고답게 하울에서 가장 거대한 공간이 이곳 물류창고였다.

나는 기감을 퍼트려 경계를 올린 뒤 물류창고를 뒤졌다. 이제 놈이 있을 만한 곳은 여기뿐이니까.

놈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수색했다.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하기만 한다면 의심은 확신이 되고 그때부턴 시간문제다.

······하지만 없다.

아무리 뒤져도 놈의 흔적은커녕, 다른 동물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뭐지? 내 예상이 틀린 건가?'

나는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동물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놈은 분명 둥지 비슷한 걸 만들었을 테고, 그게 하울의 감시를 피할만한 곳은 이곳뿐이었다.

'내 예상보다 하울의 보안이 허술하든가, 아니면 놈의 능력이 뛰어난 걸 수도······'

그때 미간을 찌푸린 시야 끝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 * *

하울의 상주 인원은 1만 명이다. 거기에 관광객까지 받게 되면 그 숫자가 더 늘어나게 된다.

그럼 그 많은 인원의 식자재나 생필품들을 어떻게 보급할까? 일일이 손으로?

아니다. 로봇이 옮기고 이건 물류창고 곳곳에 뚫려 있는 터널로 향한다.

대형 덤프트럭 1개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터널. 심지어 로봇들이 레일로 오가는 곳이라 둥지를 만들 공간이 있을까 싶지만······.

'놈은 박쥐지. 둥지가 땅에 있을 필요가 없어.'

나는 터널들 문 앞에 서서, 오직 터널이 뚫린 방향으로만 기감을 길게 퍼트렸다.

포스가 꿈틀거리며 해일처럼 밀려 나간다. 과학으로 재단할 수 없는 제6의 감각이 포스가 훑고 지나간 감각을 전달한다.

이윽고 그 포스의 파도 끝에서, 무언가 거칠게 부딪쳤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찾았다."

움직이는 성채, 하울 (6)

58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박쥐가 지금 무슨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놈의 기프트는 숫자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았고, 육체 자체도 괴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도 터널 중간에서 만난 놈은 아직까지 괴물로 진화하기 전이었다. 딱보는 순간 박쥐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 외형이었다.

물론 보통 박쥐보다는 훨씬 커서 얼핏 보면 천조국의 독수리처럼 보였지만.

키익!

나를 발견한 놈이 본능적으로 날카로운 울음을 토했다.

서로를 사냥하게끔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놈과 나는 자연스럽게 살기를 토했다.

서로를 향한 맹목적인 살의.

지금 이 터널에선 그것 외엔 그 어떤 대화도, 감정도 필요 없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놈이 이빨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도 입 주위로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

나 역시 말없이 칼을 뽑았다. 은빛 검신이 어둠 속에서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먼저 움직인 건 놈이었다.

퍼드득.

날개를 거칠게 흔든 놈이 매달려 있던 천장에서 떨어졌다. 날개와 함께 몸을 뒤집은 놈이 그대로 내게 쇄도했다.

스릉.

검은 곧게, 자세는 유연하게.

나는 쇄도하는 놈을 향해 검 끝을 겨냥했다. 나와 놈 사이에 검이 있다면, 놈이 어떤 곡예비행을 하더라도 모조리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스르륵.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내게 쇄도하던 놈의 모습이 중간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마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모습.

'이거였나?'

나는 그대로 몸을 튕겨 올렸다.

그러자 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놈이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허공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텁!

허공을 씹은 녀석이 분한 듯 울음을 토했다.

나는 튕겨 올라간 몸을 그대로 뒤집었다. 순간 머리가 땅으로, 다리가 하늘로 향했다. 나는 그 상태로 강하게 검을 찔러넣었다.

놈의 머리를 향해서.

그 순간.

키익!

놈이 나를 바라보며 길게 울음을 내뱉었다.

기우뚱.

몸이 제멋대로 기울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탓에 검의 궤적 역시 크게 어긋났다.

놈은 한순간에 벌어진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대로 눈앞까지 날아든 놈이 날개를 쫙 펼친 채 내 얼굴을 덮으려고 했다.

서걱.

하지만 그 속도보다 내 검이 놈의 날개를 가르는 게 더 빨랐다. 얇은 피막 같은 놈의 날개가 쩍하고 갈라졌다.

키에엑!

비명을 내지른 놈의 모습이 눈앞에서 녹아들며 사라졌다. 다시 들려온 비명은 그보다 십여 미터 정도 뒤쪽의 그림자 속이었다.

"재밌는 능력을 가졌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능력이야."

나는 칼날에 엉겨 붙은 놈의 피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림자 이동.

이건 예전에 만났던 닌자의 능력이었다.

그때 놈과 싸운 뒤, 각성자 간의 싸움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했었다.

일반적인 움직임이나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그 힘을 상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할지 말이다.

그 해법이 지금이었다. 상대에서 허를 찔려 초근접거리를 내준다고 해도, 피하기보다 오히려 상대를 노리는 전략.

내 검술과 피지컬. 그리고 「초재생」을 믿기에 선택한 방법이다.

물론 놈에겐 내가 예상하지 못한 능력도 있었다.

"그나저나 내 움직임을 조작한 그 힘은 뭐지? 염동력 계열인가?"

분명 놈의 비명과 함께 몸이 기울었다. 누군가 그쪽으로 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

키익!

그 사이 놈이 다시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날아올랐다. 분명 날개의 피막을 갈랐는데 멀쩡해 보였다.

"그림자 이동에 염동력 계열, 거기에 재생까지?"

최소 둘은 잡아먹혔단 소린가?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오늘 죽어도 억울해하지 마라."

키이익!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울음을 토한 놈이 내 주위를 날아다녔다. 좁은 공간이지만 어둠에 녹아든 터라 눈으로 좇는 것도 벅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놈도 알고, 나도 안다.

쇄도하는 순간 내 검은 정확히 놈을 노릴 거라는 걸.

그걸 알기에 놈도 내 주위를 위협하듯 날아다니기만 할 뿐,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그럼 이번엔 내가 가지."

나는 그대로 터널을 질주했다. 뻥 뚫린 길 대신 벽과 천장을 타고서.

5미터 남짓한 높이기에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 뜻은, 더 이상 날아다니는 거로 내 검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스릉! 쐐애액!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이젠 말 그대로 사방이 전장이었다. 땅, 벽, 천장. 어디 하나 정할 것 없이 내 검은 놈의 심장을 노렸고, 놈의 이빨 역시 내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항상 서로 한 끗이 모자랐다.

내 검이 닿기 전에 놈의 몸이 사라졌고, 놈의 이빨이 닿기 전에 그 사이로 검이 먼저 끼어들었다.

사실 전력에선 내가 우위였다. 나는 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놈은 내 검의 움직임을 번번이 놓쳤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놈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고, 나는 피지컬이 동반된 검술이었으니.

그럼에도 항상 변수가 생겨서 검은 빗나갔고, 그럴 때마다 위기가 찾아왔다.

텁!

이번에도 간신히 놈의 이빨을 피해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박찼다. 재차 쇄도하는 검을 노려보던 놈의 몸이 그림자에 녹아 사라진다.

'생각보다 귀찮은 능력이군.'

나는 혀를 차며 눈으로는 놈을 쫓았다.

「그림자 이동」이 귀찮은 건 아니었다. 나는 찰나의 움직임으로 그림자 이동전에 놈을 쪼개버릴 자신이 있었다.

귀찮은 건 내 몸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능력이었다.

'염력 계열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닐 줄이야.'

염력은 일견 편리하고 뛰어난 만능 능력처럼 보이고 또 그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염력(念力)은 의지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힘이었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대상자가 시전자보다 의지력이 강하다면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저항했다가 큰일 날뻔했지.'

조금 전 격전에서도 몸을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고자 자세를 바꿨다가 심장에 이빨이 박힐뻔했다.

그리고 몇 번 그런 상황을 겪어보고서야 놈의 능력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중력 조작. 하필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이 저 능력을 갖고 있다니.'

「중력 조작」. 이름 그대로 대상의 중력을 조작하는 기프트다.

염력보다 활용성은 떨어지지만, 극한에 이르렀을 경우 염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괴력을 내는 힘이다. 준비만 갖춰진다면 빌딩 하나쯤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하니까.

'물론 지금은 내 움직임을 방해하는 정도로밖에 쓰지 못하지만.'

문제는 그게 귀찮았다.

지상에서 받는 방해 정도는 테크니컬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필 날아다니는 놈이라 내 두 발이 땅을 밟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몸이 떠 있는 동안엔 「중력 조작」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나.'

나는 터널이 떠나가라 위협적인 울음을 내뱉는 놈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이건 몸에 무리가 가서 웬만해선 안 쓰려고 했는데······ 여기서 더 놈이랑 아웅다웅했다간 사이보그와 존 위크가 끼어들지도 몰랐다.

스릉.

손목을 돌려 검을 한 바퀴 회전시킨 뒤 고쳐잡았다.

내가 자세를 잡자 놈이 거리를 벌리며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몇 번의 격돌로 학습한 거다. 내가 제대로 달려들면 그림자 속으로 숨으면 된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타앗!

나는 터널을 질주했다.

레일 위를 질주하던 다리가 벽을 박찼고, 이내 벽을 타고 달리며 천장을 휘돌았다.

마치 끝없는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빙빙 도는 시야 사이로 스쳐가는 어둠이 길게 늘어진다.

그 순간, 터널 끝에 희미한 소실점 하나가 피어올랐다.

반딧불처럼 나타난 소실점은 나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혹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처럼 커지더니, 이내 해일처럼 밀려와 나를 뒤덮어버렸다

주변의 모든 공간이 늘어졌다.

0.1배속. 아니, 0.01배속으로 흘러가는 늘어진 세계가 나를 맞이했다.

제로의 영역.

시공간의 경계에 선 그 능력이 발현됐다.

모든 사물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차가운 터널의 레일, 고장난 비상등, 꿉꿉하고 습한 터널의 공기, 온 공간에 울리는 하울의 엔진 소리······ 그리고 그림자 아래 숨어 내게 날아드는 놈의 움직임까지.

나는 그새 뜨거워진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현기증을 참아내며 호흡을 들이켰다.

"흡!"

그 순간 고무줄처럼 늘어졌던 세계의 시공간이 다시 줄어들었다.

누가 봐도 '찰나'의 시간.

하지만 내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슈거걱! 슈걱!

키엑!

줄어드는 시공간을 타고 박쥐에게 달려든 나는 그대로 놈을 난도질했다.

놈은 이미 그림자에 숨어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조차 못한 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키, 키에엑!

놈이 내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지만, 말 그대로 꿈틀거릴 뿐이었다.

양팔과 이어진 날개를 시작으로, 다리가 달라붙은 하체까지 전부 조각나버렸으니까.

부글부글부글.

찢긴 상처 부위가 거품 끓듯 끓어올랐다. 실 같은 근육 섬유들이 실시간으로 재생되며 달라붙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초재생」이었나?"

나는 새삼스레 놈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잡아서 다행이지, 정말 3년 뒤에 만났으면 재앙이었겠어."

지금이야 다행히 놈의 육체능력이 미미하고 공격적인 기프트가 없었기에 이정도지······ 나중에 괴물이 됐을 놈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았다.

"잘 가라. 다시 태어나면 만나지 말자."

나는 그새 팔과 다리의 형태가 만들어져 바닥을 기어가는 놈의 가슴에 칼을 찔러넣었다.

키엑! 키에에에엑!

갈기갈기 찢어지면서도 이런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데, 심장을 찔리니 놈이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짧았고, 이내 혀를 내민 놈의 몸은 축 늘어졌다.

그리고 나 역시도 검을 타고 흡수되는 포스의 해일에 아찔함을 느꼈다.

물론 기분 좋은 아찔함이었다.

"······음! 이 능력을 얻었나?"

나는 머릿속에 각인되는 기프트의 정보를 확인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운이 좋군."

* * *

나는 물류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터널과 연결된 외부통로로 나갔다.

이 정도로 소란이 일어났는데 모를 수가 없었기에 존 위크와 사이보그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툭.

박쥐의 사체를 그들 앞에 던졌다.

그들은 지친 내 표정과 눈앞에 던져진 괴생물체의 사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범인이라고?"

존 위크는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봤다는 표정으로 발을 사용해 박쥐의 사체를 툭툭 건드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사이보그가 맨손으로 박쥐 사체를 펼쳐놓으며 이곳 저곳을 헤집어대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괴물 박쥐라서. 정 궁금하면 놈의 위장을 DNA 스캔해보라고. 피해자들 DNA가 나올 테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사이보그가 헤집던 박쥐를 하울 헬퍼에게 넘겼다. 피묻은 손을 수건으로 닦은 그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실력이 좋더군. 보기 좋게 당했어."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악수는 건네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전문가니까."

"흐음. 모든 전문가가 너 같지 않다는 게 문제지. 아무튼, 여기 약속했던 보수다."

사이보그의 눈빛이 녹색으로 반짝였다.

-마스터. 50 하울 코인 입금 확인됐습니다.

50 하울코인. 현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5억에 가까운 돈이다.

역시 돈을 찍어내는 곳이라 돈 쓰는 게 거리낌이 없군.

"깔끔하군.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입금까지 확인한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일단 지금은 피곤해서 당장 쉬어야겠으니까.

그런데 몸을 돌리는 나를 향해 사이보그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 잠시만 기다려라, 소드마스터!"

그러더니 품을 뒤적거리며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이게 뭐지?"

사이보그가 내게 건넨 것은 새까맣게 칠해진 블랙 ID카드였다. 어떤 문구도 없이 가운데 동그란 전자칩만 하나 박힌 심플한 카드.

하지만 사이보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결코 심플하지 않았다.

"하울의 주인께서 널 보자신다."

움직이는 성채, 하울 (7)

59화. 움직이는 성채, 하울

무심한 듯 카드를 받아 떠나는 강현재의 뒷모습을 보며 윌리엄은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사이보그가 아니라 저 칼잡이가 사이보그 같군."

경비대장으로 10년이 넘도록 근무 중이지만, 자신조차도 하울의 주인을 직접 본건 손에 꼽을 정도다.

아마 그 대단하다는 메가 시티의 수장들이나, 메가 코프의 회장들도 하울의 주인을 만나지 못한 자가 많을 테지.

그런데 일개 해결사. 그것도 칼잡이가 저리 무덤덤한 반응이라니.

"어떤 것 같소?"

옆으로 다가온 존 위크가 함께 강현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앞뒤가 없는 질문이었으나, 윌리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인정한 사내답군. 실력도 실력이지만 배포가 저리 클 줄이야. 하긴, 호텔에서 그 난리를 쳤을 때부터 남다르긴 했지만."

"그렇지. 하지만 단순히 배포만을 믿었던 건 아닐 거요."

"배포만 믿었던 게 아니다?"

"그는 뛰어난 칼잡이지만, 동시에 여우 같은 해결사기도 하지. 단순히 본인의 실력과 기량만 믿었던 건 아닐 거요. 아마 호텔의 투숙객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겠지."

"······설마? 그 짧은 사이에 그 정도까지 계산했다는 말인가? 생긴 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윌리엄의 목소리에 불신이 서렸다.

칼잡이가 강하고 배포가 큰 건 인정하지만, 머리까지 똑똑하다고? 그건 그가 가진 칼잡이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수는 이야기였다.

"그게 뛰어난 해결사를 적으로 맞이하면 골치 아픈 이유지. 내가 그와 가깝게 지내려는 이유기도 하고."

"흐음. 과연······ 당신이 그렇게 인정할 만 하군. 나라도 그렇게 할 테니."

둘은 그렇게 잠시 강현재가 사라진 방향을 나란히 바라봤다.

구름 위에 떠 있어서 유난히 커다랗게 보이는 보름달이 하울에 내려앉았다.

* * *

호텔로 돌아온 나는 손에 들린 블랙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고급스러운 검은빛 광택이 아니라 마치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그 공간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았다.

"······취향이 독특하군."

이 카드는 일종의 프리패스 초대장이었다. 하울의 주인을 만날 수 있는 초대장.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한데."

나는 블랙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어차피 약속은 내일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확인해야 할 시간이다.

"「중력 조작」. 설마 이걸 얻을 줄이야."

내가 「이종포식」으로 얻은 능력은 바로 「중력 조작」이었다. 박쥐 놈이 내 움직임을 제멋대로 휘둘렀던 그 능력이다.

「이종포식」은 오직 하나의 기프트만 흡수할 수 있었기에, 다른 능력이 흡수될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미 있는 「초재생」이나, 그림자를 타고 다니는 「그림자 이동」 을 말이다.

만약 「초재생」을 얻었다면 능력이야 조금 더 강해졌겠지만 사실상 꽝이나다름없었다.

「그림자 이동」의 경우는 그나마 낫다. 내 움직임에 은밀함까지 더해주는 최고의 살인기술이 될 테니까.

"하지만 「중력 조작」만큼은 아니지."

「중력 조작」은 '은밀'한 수준을 벗어난다. 아예 그 궤가 다르다. 능력이 강해지면 직접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다른 장소에서 암살이 가능해지니까.

심지어 어디에 숨어도, 어떤 튼튼한 방호 시스템이 보호하더라도 모조리 파괴시키고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도쯤 되면 암살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력 조작」은 수많은 기프트 중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기프트다.

지각이나 감각으로 설명되는 현상계(現象界)의 능력은 그 범위가 멀어질수록 희귀해진다.

예를 들어 직접 신체를 강화하는 「강체」나 회복 계열의 「초재생」이 가장 흔한 편이고, 그 다음이 불, 물, 바람 같은 원소를 다루는 「원소조작」이나 그림자를 이용하는 「그림자 이동」 같은 능력 순으로 희귀도가 짙어졌다.

그럼 「중력 조작」은 뭐냐고?

"몇 안 되는 물자체의 능력을 얻었으니 운이 좋지."

「중력 조작」은 현상계의 능력이 아닌 물자체(物自體)의 능력이다.

지각이나 감각으로 느끼는 현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상태.

그야말로 초초초 레어. 전설의 포켓몬이나 다름없는 능력이라는 소리다.

우주의 4대 근원인 중력을 조작하는 능력이 희귀하지 않으면, 뭐가 희귀하겠는가?

"물론 희귀한 만큼 성장시키기도 까다롭지만······."

나는 조심스레 검을 뽑았다.

스릉.

검집에서 나온 다마스강의 칼날이 서늘한 예기를 뿜었다.

잠시 칼날에 새겨진 휘몰아치는 물결무늬를 감상하던 나는, 그대로 허공에 검을 놨다.

「중력 조작」.

무중력상태가 된 검은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톡 하고 손잡이를 건드리자 허공을 유영하듯 스르륵하고 미끄러진다.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긴 했으나······.

"흐음. 아직 이 정도가 한계인가?"

아직까진 별로 인상적이진 않다.

물론 익숙해지면 나도 박쥐놈이 그랬듯 상대의 움직임을 조작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 정돈 1차원적인 활용에 불과하다.

"상상력을 조금 더해보면······."

나는 어딘가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칼끝이 서서히 기울었다. 중력이 뒤집힌 칼끝은 이내 바닥을 향하며 곧게 섰다.

그리고 그 상태로 중력 조작을 강화하자······

퍽!

칼날이 바닥을 두부처럼 꿰뚫고 들어갔다.

나는 절반쯤 사라진 칼날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칼이 조금 많이 필요하겠어."

하늘을 뒤덮는 강철비. 아니, 칼날의 비가 소울 시티에 내릴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 * *

다음날. 도대체 밤마다 뭘 하는지 또 반쯤 수면 중인 상태로 조식을 먹는 로제에게 말했다.

"그냥 더 자지? 그렇게 피곤한데 왜 굳이 조식을 먹는 거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저 정도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 상태라면, 절대 조식을 먹는 선택을 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무조건 먹어야지 무슨 소리에요? 이런 호텔에서 조식을 안 먹는 건 죄악이라 고요, 죄악!"

그러면서 가져온 조식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는다. 가끔 입 대신 다른 곳으로 음식이 향하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렇게 로제와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더 자겠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호텔을 나섰다. 하울에 올라왔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기에 언제 다시 도시로 내려가도 괜찮았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하울의 주인이라.'

품속에서 블랙카드를 꺼냈다. 직사광선으로 내리쬐는 햇볕조차도 집어삼키는 무저갱의 색.

이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카드가 바로 하울의 주인이 보낸 초대장이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하울의 주인.

5대 메가코프의 회장조차도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 세계의 정점.

하지만 게임에서도 언급만 될 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

이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 왜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지.'

사실 하울이라는 게, 사이버펑크한 이 세계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하늘을 부유하는 거대 성채라니? 이건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물리법칙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맥거핀으로 쓰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줄 알았는데.'

중요한 뭔가가 있게끔 믿게 만들어놓고, 사실 그냥 관객을 속이는 속임수에 불과한 맥거핀.

그리고 모든 상황을 작가의 편의대로 정리해버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실제 게임에서도 하울의 스토리는 메인 스토리와 별개로 다뤄지기에 더더욱 그렇게 믿었다.

의심할 만한 사항은 하울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하울코인이라는 존재도 있었다.

사실상 세계 기축통화나 다름없는 작가 편의적인 설정.

'게다가 플레이어가 세계관에 몰입할 때쯤 통째로 사라져버리지.'

그렇다.

하울의 주인이 등장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3년 후 소울 시티를 재방문했을 때 하울이 초토화됐던 이유.

그건 하울의 주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 *

내부시설 입구에서 블랙 카드를 보여주자, 화들짝 놀란 하울 헬퍼 요원이 안으로 안내했다.

곧게 뻗은 길로 나아가자 시야가 탁 트일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내부 시설의 모든 곳을 연결하는 광장이었다.

반대편이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고, 층고도 수십 층 빌딩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실내에 이 정도 규모의 광장을 만들다니······ 새삼 하울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광장 중앙엔 커다란 나무가 심어 있었는데, 족히 수백 년은 됐을 법한 고목(古木)이었다. 하울이 수백 년이 됐을 리 없으니, 어디선가 가져온 나무겠지.

그리고 그 나무 옆으로, 광장의 천장까지 이어진 기다란 튜브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엘리베이터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하울 헬퍼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하곤 사라졌다.

그런데 이게 끝이라고? 어디로 가는지는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다가갔다. 21세기 한국인답게 당황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출입증을 확인하십시오.

그러자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기계적인 목소리.

'출입증?'

그제야 버튼 위로 카드를 인식하는 패널이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품속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패널에 가져갔다.

-출입문을 개방합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곤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부는 심플했다. 크기는 화물 엘리베이터 정도 크기였고, 화려한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놀란 이유는.

"뭐야? 층수 버튼이 없는데?"

엘리베이터라면 으레 있어야 할 층수 버튼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더니,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하울의 주인 혼자 쓰는 엘리베이터였나?"

과연 스케일이 다르다.

이런 엘리베이터를 혼자 쓰다니.

그제야 주변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뭘로 만들어졌는지 바깥에선 튜브 내부가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선 바깥 전경이 깨끗하게 보였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광장의 모습.

하울 내부시설의 사람들은 관광지구의 사람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의도의 화이트칼라들과 워터파크의 여행객들 차이랄까?

"한가운데 지은 이유가 있었군."

엘리베이터만 뜬금없이 서 있어서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나 했더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도 이런 선택을 했겠다 싶었다. 건물주로서 세입자가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할 테니까.

잠시 전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금세 광장 천장으로 쏙 들어왔고, 이내 서서히 엘리베이터 속도가 줄어들며 어딘가에 멈춰섰다.

띵동!

굉장히 클래식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공간이 펼쳐진다.

한층 전체가 뻥 뚫린 강당처럼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시야 끝에 보이는 창문이 새끼손가락으로 보일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층고는 또 얼마나 높은지 족히 십 미터는 되는 것 같아서, 개방감으로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

나는 이를 악물고 부럽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들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발견한 건, 한쪽 벽면 전체가 CCTV 화면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CCTV 상황판이었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벽면이 전부 CCTV 화면으로 이뤄져 있었으니까.

"······이걸 보면서 관리하는 건가?"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대충 훑어보니 관광지구와 오피스지구뿐만 아니라, 격납고와 물류창고, 전력 실, 발전실, 경호실 등등의 내부시설. 거기에 하울 외부와 지상. 어떤 건 하울의 위쪽인 우주를 찍고 있기도 했다.

"이걸 사람이 관리하진 않을 텐데······ 이렇게 화면을 띄워놓은 이유가 뭐지?"

관음증이라도 있는 건가?

그때 귓가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해?"

"······!"

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붉은빛이 도는 금발은 부드럽게 가슴을 덮었고, 분이 묻어날 것 같은 새하얀 얼굴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다 들어 있었다.

아찔한 코끝에서 떨어진 입술은 빨갛게 물들었는데,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가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게다가 아랫입술과 턱 사이에 난 점이 매력적으로 도드라져서,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퇴폐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내 감각을 속이고 바로 뒤까지 접근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 공간에서, 이 정도 능력을 보여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당신이 하울의 주인?"

바로 나를 초대한 하울의 주인이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반가워. 나는 소피아라고 해."

"아, 나는 강······"

"알아. 이름은 강현재. 최근 소울 시티에 자리 잡은 해결사. 칼잡이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이명은 소드마스터. 얼마 전부터 비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사이코패스 칼잡이, 피에 젖은 도살자라고도 불린다나 봐?"

소피아가 웃는 얼굴로 조곤조곤 과다한 정보를 쏟아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 알고 있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뒤를 돌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따라오라는 거겠지.

그녀는 하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창밖으로 관광지구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였고, 그보다 더 멀리 펼쳐진 드넓은 창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지?"

나는 시선을 돌려 소피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신비하게 빛났다.

"궁금해서."

"······뭐가 말이지?"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입꼬리를 야릇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너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까, 돌아가지 않을까하는 궁금증?"

"······!"

빨간약, 파란약 (1) [삽화]

60화. 빨간약, 파란약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세계로 떨어진 이후, 단연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느낌이다.

"당신······ 누구지?"

대체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글쎄? 너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일수도, 아니면 너 같은 사람을 이미 봤던 걸 수도 있지."

"······."

말장난 같은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건 내 예상과 지식을 벗어난 대화였다.

'진짜 나처럼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그 말은 나 외에도 다른 빙의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그녀 일 수도, 아니면······

'아니면 나 같은 존재를 봤을 수도 있다고 했지. 언제? 어디서? 이 게임의 시작은 튜토리얼이던 「기적의 서광」이 아니라는 뜻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하울'이라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도 이질적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맥거핀, 혹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러자 다른 가정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은 이 세계를 만든 창조자이거나, 관리자일 수도 있겠지."

작품으로 따지면 작가.

게임으로 따지면 운영자.

즉, 세계관인 제4의 벽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

내 대답에 소피아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재밌어.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 그럼 역시 당신은······!"

"글쎄~? 뭘까~?"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그녀의 눈이 기다란 호선을 그렸다. 초승달처럼 휜 눈꼬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보랏빛 달처럼 반짝였다.

"······대답을 회피하는 건가?"

"내가 전부 대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

"······."

나는 미간을 좁히며 포스를 끌어올렸다. 심장을 휘돌던 포스가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숨조차 쉬는 게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압박을 느꼈을 텐데······.

"무리하지 마."

해일처럼 주변을 뒤덮던 포스는 그녀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소피아의 눈동자에 보랏빛 서클이 타오르듯 반짝거렸다.

'······강하다. 나보다 더.'

이건 새로운 의미로 놀랍다. 여태껏 이 세계에 떨어진 뒤, 기세만으로 나를 움츠러들게 한 존재가 있었나? 단연코 없었다.

나는 뻗어 나가는 포스를 거둬들였다. 그녀의 힘이 나보다 강하다는 걸 깨달은 이상, 이런 기세 싸움은 시간 낭비였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전히 보랏빛 써클이 휘도는 눈동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딱히. 진짜 궁금했을 뿐이니까. 예상대로 재미도 있었고."

"······."

진짜 초월적인 존재의 변덕이었던 것뿐일까?

그럼 나는 그 변덕을 이용해 내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 세계의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었던 질문을.

"······그럼 다른 걸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물론 대답은 내 자유."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길게 옆트임 된 드레스 위로 그녀의 새하얀 맨다리가 드러났다. 탄력 있게 부풀어 오른 투명한 허벅지 위로 미세한 실핏줄이 보였다.

"아까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남을지 궁금하다고 그랬지? 그건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뜻인가?"

"그게 궁금해?"

소피아가 발끝을 까딱거리며 되물었다. 그녀의 이미지만큼이나 아찔한 하이힐이 흔들거렸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

"별로. 오히려 너무 심플해서 문제지."

"······심플하다고?"

이 세계에 빙의된 이후, 그렇게 끝없이 고민하고 번뇌했던 질문인데······ 그 해답이 간단하다고? 그걸 믿으라는 소린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살아남아. 계속 살아있다 보면 어느 순간 돌아갈 방법을 깨닫게 될 테니까."

"마치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라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쿡쿡. 설마? 그냥 때가 되면 선택하게 될 거야."

"······뭘 선택한다는 거지?"

까딱거리던 그녀의 발끝이 멈춰섰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하이힐이 또각하고 바닥에 내려앉는다.

자세를 고쳐잡은 그녀가 양손의 주먹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빨간약을 먹을지, 파란약을 먹을지 말이야."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만월이 된 눈동자가 내뿜는 신비함은 나조차도 보랏빛으로 물들일 것만 같았다.

지금 이곳은, 비현실로 가득했다.

* * *

최상층에서 내려와 내부시설 바깥으로 나왔다.

관광지구의 모습은 여전했다.

늘어선 가게엔 손님들로 북적였고, 사람들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소피아와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꿈이나 환상이 아니다.'

나는 보랏빛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장난스러운 눈동자를 떠올렸다.

빨간약, 파란약.

이건 영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선택지였다. 주인공에게 이 매트릭스 속 가상현실에 남을지, 아니면 깨어나 진실을 마주할지에 대한 선택지.

'······나는 뭘 선택해야 하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지만, 언젠가 마주할 미래.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세계가 정말 매트릭스처럼 만들어진 세계라면, 진짜 세계는 어디지?

아니, 진짜 세계라는 게 있기는 한가? 만약 있다면 그 세계에서 나는 어떤 상태인 거지?

'매트릭스처럼 생체 컴퓨터의 재료로 쓰이고 있을 수도······ 아니면 진짜 나는 이미 죽어서 통속의 뇌만 살아있는 걸지도 모르지.'

데카르트의 악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고실험.

'모든 현상을 전기신호로 치환하는 뇌에게, 그 현상을 똑같이 재현한 전기신호를 주게 되면 뇌는 실재(實在)와 전기신호를 구분할 수 있는가?'

정답은 '구분할 수 없다'이다.

마찬가지로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통속의 뇌는 자신이 통속의 뇌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도, 마주하고 있는 세계가 현실세계인지도 알 수 없다.

'애초에 이런 의심 자체도 전기신호에 의한 의심일 수도 있지.'

입맛이 썼다. 가볍게 하울의 주인을 만날 생각만 했다가, 생각조차 못 한 복잡한 의문만 잔뜩 떠안고 와버렸다.

주변으로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팔짱을 낀 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부모의 손을 잡고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그 평화로운 광경에, 마치 내 고민이 쓸데없는 고민같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소피아와 헤어지기 직전 나눴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당신은 무슨 약을 선택할 거지?」

「···내가 아직 선택하지 않은 걸 어떻게 알고?」

「간단하지. 파란약을 선택했으면 내게 이런 말을 해줄 필요도 없고, 빨간약을 선택했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제법인데? 하지만 대답하지 않겠어. 사실 아직 정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한껏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었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하울은 3년 뒤, 주인 없이 소울 시티에 방문한다.'

그녀는 결국, 진실을 마주하는 빨간약을 선택했던 거다.

* * *

호텔로 돌아왔다.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소피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의뢰를 줬다.

대수롭지 않게 말해준 내용엔, 그녀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숨어들었다라······."

바로 테러리스트가 하울의 관광지구에 숨어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인명피해가 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왜 하울에서 처리하지 않는지를 묻자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지?」

그 대답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이긴 했으니까.

"그래. 이런 일은 해결사가 전문가지."

나는 차오르는 호기를 느끼며 그녀가 건네준 간략한 정보를 떠올렸다.

"하울 관광을 위해 바닐라 시티에서 소울 시티로 입국한 일국계 20대 여성.

숙소는 퍼마넌트 호텔로 그곳을 방문하는 차기 시장 후보를 노린다고 그랬지."

이 내용에서 내가 주목한 건 두 단어였다.

바닐라 시티와 차기 시장 후보.

이건 얼마 전, 재개발 건으로 만난 해방 전선의 그라타에게 알려줬던 정보와 일치했다.

다만, 조금 달라진 게 있었다.

"설마 하울에서까지 일을 벌일 줄은 몰랐는데. 이건 사이드 퀘스트에도 없었던 내용이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해방 전선이 바닐라 시티의 테러정보를 알게 되면서 미래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어쩌면 테러를 꾸미는 바닐라 시티와 야당에서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을 더 크게 벌였을 가능성이 컸고.

도시에선 이 내용으로 한창 시끄러울 테니까.

"뭐, 그거야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의뢰에만 집중한다."

하울에 숨어든 테러리스트를 찾아서, 막는다. 끝.

좋아. 심플하군.

나는 검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그런데 때마침 문 앞에서 로제를 만났다. 터덜터덜 걸어오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더니 도도도하고 뛰어왔다.

"어? 어디 가요?"

"퍼마먼트 호텔 수영장."

내 짧은 대답에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갑자기 호흡을 거칠게 내쉰그녀가 허둥대며 물었다.

"수, 수영장을 왜? 아, 아니! 그것보다 거길 혼자 가겠다고요?"

"음? 무슨 문제 있나?"

혹시나 1인 출입이 안 될까 걱정해주는 건가? 그럼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겐소피아가 준 프리패스 블랙카드가 있으니까.

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코끝을 찡긋하며 소리쳤다.

"당연히 문제 있죠! 나를 혼자 놔두고 호텔 수영장을 가겠다니! 그것도 퍼마먼트 호텔 수영장을!"

아? 이거였나?

"오해가 있군. 나는 일 때문에 가는 거다."

"아무튼, 가는 거잖아요! 기다려요!"

"어, 아니, 잠시만······"

그녀가 순식간에 방으로 사라졌다.

* * *

결국, 로제는 나를 따라왔다.

언제 챙겼는지 수영복도 챙겨왔다.

나는 한껏 들뜬 표정의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울에 수영복을 가져왔나?"

바닷가도 아니라 하늘 위에 떠 있는 하울에 오는데? 뭐, 구름에서 수영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

"흥흥~ 호텔에서 머무는데 당연하죠. 당신이 여태껏 수영장에 가자고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라고요."

그러면서 어쩜 남자가 저리 무신경하냐면서 툴툴거렸다.

나는 왠지 머쓱해져서 말했다.

"그럼 혼자라도 가지 그랬나?"

"내가 당신이에요? 호텔 수영장을 어떻게 혼자 가요!"

"아니, 수영장을 왜 혼자 못 가지? 어차피 수영은 혼자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어휴. 말을 말아야지. 혼자 가면 귀찮은 날파리들이 얼마나 꼬이는지 알아요?"

"날파리?"

호텔 수영장에 웬 날파리란 말인가?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 컴플레인이 빗발치듯 들어올 텐데.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한껏 자신만만하면서도 장난기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후훗. 보면 알 거예요. 기대하시라고요."

* * *

이윽고 퍼마먼트 호텔에 도착했다.

수영장에 들어서는데 내 차림을 본 가드가 막아섰다. 하긴, 칼을 차고 수영장에 들어가는 손님은 많진 않겠지.

블랙카드를 보여주자, 역시나 화들짝 놀란 가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비켜준다. 역시 카드는 블랙카드지.

나는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어 바로 수영장으로 향했고, 로제는 수영복을 입고 온다며 탈의실로 향했다.

이따가 만나자면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그녀의 꿍꿍이가 궁금했지만, 그거야 금방 알게 되겠지.

수영장 내부로 들어서자, 역시 로제의 말대로 유명한 수영장인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이브. 사람들 전부 스캔해서 인물 비교해줘. 대상은 유키코 다나카. 그리고 재플린 서브웨이."

-알겠습니다, 마스터.

이브와 연결된 렌즈 위로 수많은 정보가 바쁘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내가 찾는 인물은 둘.

테러리스트 용의자인 유키코와 테러 대상으로 추측되는 차기 시장 후보 재플린이다.

그렇게 수영장 한 바퀴를 전부 돌았다.

"음. 아직 나오지 않은 건가?"

유키코도. 재플린도 보이지 않았다.

시일이 정해진 건 아니라, 오늘 허탕치면 내일 또 와야 한다.

"······그건 좀 귀찮은데."

짧게 혀를 차고 다시 수영장을 살피는데, 어딘가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고성이 오가는 시끄러움이 아니라 탄성과 상기된 목소리가 뒤섞인 소란스러움.

사람들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일제히 멈춰 서서 어딘가를 바라본다.

시선을 따라가자 어디선가 많이 본 실루엣이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온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길을 비켜서는 사람들.

순간 살랑이며 불어온 바람에 빛나는 백금발이 찰랑거렸다. 새하얀 비키니의자태가 눈부시게 드러난다.

그녀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귀 뒤로 넘겼다. 가슴을 덮던 머리카락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놀람과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와 넋 나간 탄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수영장 내부까지 걸어온 그녀가 주변을 살피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새치름하게 손을 뻗어 브이를 그렸다.

로제였다.

빨간약, 파란약 (2)

61화. 빨간약, 파란약

'아름답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아름다움을 모르진 않았다. 오히려 운동을 했던 과거엔 감수성이 너무 풍부해서 문제였다. 주변 사람들이 나보고 검이 아니라 붓이나 펜을 잡아야 했었다고 장난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선 아름답다거나, 멋지다거나, 혹은 예술적이라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목적을 위해 달려야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처절했던 튜토리얼을 겪고 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내 감정은 꽤나 마모되고 변질되어 있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그저 복수심으로 인한 분노와 냉철함으로 포장된 마모된 감정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나 어때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귀찮은 날파리가 뭘 말하는지 알 것 같군."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가 나와 대화를 나눈 이후, 나에게 은은한 살기가 쏟아졌다. 불특정 다수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다.

뭐, 이유야 뻔했다.

"후훗! 당신만 믿을 거니까 날파리들 잘 쫓아주시라고요!"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쏟아지는 살기가 짙어졌다. 흐음. 남자들이란······.

그때 시선 끝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거침없는 자신감이 가득한 발걸음이다.

순간, 잠시 꺼졌던 렌즈의 기능이 작동되더니 시야 위로 상대방의 인적사항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까지가 날파리지?"

"어, 네? 그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상대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혹시 혼자 오셨으면 함께 모히또라도 한 잔 어떠십니까?"

탄탄한 구릿빛 피부의 쾌남이다.

포마드로 정갈하게 정리한 금발은 쏟아지는 태양 아래 멋들어지게 번쩍였고, 환한 미소로 미소 짓는 입가엔 새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어디선가 들었던 '금. 태. 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외모였다.

하지만 로제의 미간은 불편하게 구겨졌다. 짙푸른 눈동자 위로 성난 파도가 넘실거린다.

그 반응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금태양······ 아니, 사내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제 소개를 먼저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공공의 내부자당에 적을 둔 재플린이라고 합니다. 미약하지만, 차기 시장 후보를 준비하고 있지요."

"아······ 정치인이셨군요."

언제 찌푸렸냐는 듯, 로제의 표정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성난 파도가 넘실거렸던 눈빛은 금세 잔잔하게 가라앉았으며, 입가엔 작은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이게 내가 어디까지가 날파리냐고 물어본 이유였다.

그때 재플린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마치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한 과장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그쪽은?"

속셈이 뻔히 드러나는 질문이라 코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적당히 눈인사만 하며 로제를 바라봤다.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서.

"그럼 나는 이만······"

······이라고 말하는 순간, 로제가 갑자기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더니 팔을 낚아챘다.

졸지에 팔짱을 끼게 된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녀가 재플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어쩌죠? 일행이 있어서."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 * *

예상치 못한 전개였지만, 재플린은 쿨하게 떠났다. 물론 다가왔던 걸음보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왜 그랬지?"

나는 뭐가 웃긴지,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 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요?"

"차기 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거물이라면 친해지는 게 좋지 않나?"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라고 생각한 이유였다.

해결사에겐 해결사의 일이 있듯, 중개인에겐 중개인의 일이 있다. 의뢰를 수주하는 중개인들과 정치인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그건 로제에게도 유효할 터였다.

단순히 능력과 성실함만으로 살아가기엔, 이 세계의 부조리함은 치가 떨릴 정도다. 당장에 시 정부가 거주자들을 밀어버리고 재개발하려는 것만 봐도 알수 있었다.

하지만 로제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더니,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장 후보가 아니라 시장이어도 싫어요. 능력으로 인정받아야지, 외모는 어차피 껍데기잖아요?"

"······그런가?"

나는 길게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반신반의했던 의문이 풀렸다.

사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에 이 수영장의 모든 사내들이 나에게 살기를 뿜어대는 것만 봐도 그렇고, 스스로에게 자신 있어 보이는 재플린이 먼저 다가온 것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전문직에 가까운 중개인이라는 탄탄한 직업까지.

만약, 그녀가 사교계에 데뷔한다면 단번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였다.

'그런데 그녀는 집순이지.'

힘 있는 세력이나 정치인 같은 외부교류보다 해결사들과 교류가 잦고, 사교계 정보보다 뒷골목 정보에 민감하다.

처음엔 굳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뒷배가 탄탄해서 그런가 했더니······ 그게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니.

'그녀를 선택하길 잘했군.'

나는 새삼 중개인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요."

"······?"

"사실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도 그리 멀지 않았어요. 그럼 저런 추파도 감히 못 던질걸요? 재플린이라니. 유력 시장 후보도 아니잖아요?"

"알고 있었나?"

"당연하죠. 중개인에게 정보는 생명이라고요."

팔짱을 낀 그녀가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꿈치 위로 그녀의 가슴이 올라왔다.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비키니 탓인지, 그녀의 쇄골과 가슴 사이에 난 손톱만한 점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능력으로 인정받는 게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 그거요? 최근 중개인 순위가 꽤 올라갔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도 올라갈 예정이고."

"앞으로 올라갈 예정?"

뭐 주식도 아니고 그런 건 어떻게 알고?

내가 살짝 어이없는 얼굴로 묻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있잖아요? 로세툼의 에이스, 소드마스터! 흑발흑안의 냉혹한 칼잡이!"

"······."

이거였나?

나는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웃음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 역시 나를 따라서 환하게 웃었다.

그녀와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다. 마주치는 시선 속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기분 좋은 청량함이 느껴졌다.

그러다 아까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말이야. 굳이 팔짱까지 낄 필요가 있었나? 그냥 일행이라고만 했어도 됐을······"

"시, 시끄러워요!"

순간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 * *

화려하게 꾸며진 호텔 방안.

벽에 걸린 커다란 TV에선 토론방송의 패널들이 나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엔 흐릿한 전파음과 함께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표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백색소음들 속에서, 동양계 여인이 벽돌처럼 생긴 단말기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오늘까지 꼭 처리할 수 있도록. 그가 가진 명단이 있어야 우리의 대업이 빨라질 수 있다.

단말기 너머로 변조된 기계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예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여인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그곳에서 죽는 놈들 모두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다. 전부 쓸어버리도록.

"네."

그 말을 끝으로 단말기 너머에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단말기를 쳐다보던 여인이 그대로 손을 움켜쥐었다. 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보안 단말기가 과자 부스러지듯 산산이 부서졌다.

여인이 걸음을 옮겨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한눈에 들어오는 파라먼트 호텔수영장의 전경. 그녀의 시선은 수백 미터를 격해 정확히 한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어느덧 석양이 저무는 시간.

마치 이 시간만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로제는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다.

물론 사진 기사 노릇은 어쩔 수 없는 내 차지였다.

"대체 수영복 입은 사진은 왜 그렇게 찍는 건지 모르겠군. 정작 수영은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찍었던 사진을 하나씩 살펴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에게 툴툴대며 말했다.

여기를 이렇게 찍어라, 어디에 노출을 줘서 찍어라, 배경보다 나에게 집중해라, 등등 그녀의 요구는 꽤나 깐깐했으니까.

피사체가 수영복을 입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하고 도망쳤을 거다.

"떨어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여기서 사진을 찍는 게 국룰이라고요, 국룰! 아름답지 않아요?"

장난스럽게 대답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수영장 바깥을 바라본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화유리로 지어진 수영장은 투명했다. 수영장 아래로 노출된 푸른 하늘이 그대로 물 색깔에 녹아들었다.

그 배경으로 떨어지는 낙조는 환상적이었다. 뻥 뚫린 시야에 펼쳐진 구름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그에 따라 수영장도 점점 붉게 물들었다.

마치 황혼으로 물든 하늘에서 수영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아름답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주어 없이 이야기했다.

황혼의 붉은빛에 물든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붉게 물든 백금발은 저녁노을처럼 반짝였고, 청량함이 가득했던 푸른 눈동자도 나른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때 내게 시선을 돌린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대답도 할 줄 알아요? 당연히 딴지 걸 거라고 생각했더니?"

"딱히 네 질문에 대답한 건 아니다만."

나는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 뭐에요! 하여튼 성격 하고는!"

그녀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어디론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수영하던 사람들도, 선배드에서 쉬던 사람들도, 우리처럼 사진을 찍던 사람들도, 모두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로제가 나타났을 때랑 비슷한 광경인데.'

나도 사람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방금 수영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검은머리의 여인이 보였다.

동양인 특유의 매끄러운 하얀 피부에, 그와 상반된 실로 폭력적이리만큼 아름다운 육체. 피지컬만큼은 동양보단 서양에 가까웠다.

왜 사람들이 넋을 놓고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가 가는 외모.

"헤에. 당신 저런 취향이었어요?"

가까이 다가온 로제가 어딘지 경쟁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오늘 저 사람이 목표다."

"엑!? 당신이 수영장에서 헌팅을 하겠다고요?"

"······뭘 들은 거지? 난 일하러 왔다고 했는데."

나는 깜짝 놀란 로제의 표정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아······? 그, 그랬죠?"

그녀가 머쓱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여인에게 시선을 던지길 반복했다.

나는 쓸데없는 데에 경쟁심을 느끼는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줬다.

"저 여인은 테러용의자다. 하울에서 직접 알려준 정보지."

"테, 테러요?"

어딘가 시무룩해졌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그녀가 뒷골목 갱이나 범죄자, 거친 해결사들에게도 겁을 먹지 않더라도, 테러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휩쓸리면 뭘 해볼 겨를도 없이 죽어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테러만큼은 소울 시티의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나는 움츠러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넌 이만 호텔로 돌아가도록."

중개인에겐 중개인의 일이 있듯, 이제부터는 해결사의 영역이다.

빨간약, 파란약 (3)

62화. 빨간약, 파란약

로제가 수영장을 빠져나가고 나는 여인을 주시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여유롭게 수영장을 거닐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테러리스트의 기본은 최대한 이목을 피하는 거다. 눈에 띄는 만큼 움직임엔 제한이 걸리고, 그건 방해가 될 뿐이니까.

'혹시 정보가 잘못된 건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이 정보를 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하울의 주인이다. 정보의 정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보란 듯이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마치 내가 여깄다고 광고라도 하는 듯했다. 스스로를 광고하는 테러리스트라니. 이 아이러니한 광경에 기가 찼다.

그리고 마침내, 그 광고에 혹한 호구가 등장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시간 괜찮으면 함께 모히또라도 한 잔 어떠신가요?"

어디선가 나타나 작업멘트를 날리는 재플린이었다.

'기가 찬 게 아니라 기가 막히는군. 테러리스트로 왜 저런 여인을 보냈나 했더니, 설마 타겟 맞춤형 광고일 줄이야.'

분명 재플린이라는 타겟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낸 게 분명했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왜 테러를 하는데 굳이 저런 상황을 만드는 거지?'

나는 이야기를 서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웃는 얼굴로 수영장 한쪽에 마련된 프라이빗 바(Bar)로 들어서는 둘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테러는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하기에 테러다. 저렇게 한 명을 노린 거라면 암살이라고 하지 테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소피아는 정확히 테러 용의자라고 지칭했다.

'냄새가 나는군.'

아무래도 테러는 진짜 벌어질 일을 덮기 위한 군불일 가능성이 컸다.

시장 후보에 나서는 정치인에게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것도 소울 시티가 아니라 바닐라 시티에서.

'또 귀찮은 일에 낀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혀를 차며 프라이빗 바로 들어갔다. 은밀한 곳답게 입구를 지키는 가드가 따로 있었으나, 블랙카드를 보여주니 고개를 숙이며 비켜줬다.

안으로 들어서자, 바 안쪽에 따로 자리 잡은 프라이빗 룸으로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이 보였다.

모히또는 무슨.

애초에 개수작이었군.

나는 그들 대신 바텐더에게 모히또를 시킨 뒤, 잠시 목을 축이며 기다렸다.

쌀이 바로 밥이 될 수 없듯, 남녀 사이가 익으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니까.

대충 시간이 흐른 걸 확인하고 둘이 들어간 프라이빗 룸의 문을 열었다. 당연히 잠겨있었으나, 블랙카드 앞에선 프라이빗은 존재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룸은 생각보다 컸다. 작은 룸을 생각했는데 웬만한 고급 호텔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애초에 그 목적이 뭔지 짐작이 갔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둘은 벌써 옷을 벗고 뒤얽혀 있었다. 재플린이 아래, 유키코가 위에 올라탄 야릇한 자세였다.

하지만 상황까진 그러지 않았다.

재플린은 의식을 잃고 기절해있었고, 유키코의 사이버암에서 튀어나온 전선이 재플린의 목 뒤에 부착된 사이버웨어에 꽂혀있었으니까.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해피타임은 끝이야."

* * *

나를 발견한 유키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서서 활짝 팔을 벌렸다. 헐벗은 상체 덕분에 다른 곳에 시선이 먼저 쏠렸지만, 이내 그녀의 팔이 기괴하게 늘어지더니 기다란 칼날이 튀어나왔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글쎄. 너야말로 그만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스릉.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천천히 칼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건방진! 칼을 쓰겠다고?"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나는 그녀의 사이버암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양팔의 팔꿈치 위로 돋아난 그 모습은 마치 사마귀의 앞발처럼도 보였다.

"흥! 나를 네놈같은 비루한 칼잡이와 비교하지 마라!"

코웃음과 함께 소리를 버럭 지른 그녀의 칼날에서 기분 나쁜 고주파 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초진동 분자 커터.

초음파 진동으로 물리적인 분자결합 자체를 끊어버리는 무식한 물건이다. 물리적인 테크무기로는 거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무기였다.

다만, 그걸 사이버웨어로 몸에 임플란트를 박는 건 다른 문제였다.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노미터 단위로 초진동하는 칼날은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대부분 들고 서 있는 것조차 벅찰 거다.

그런데 그걸 몸에 박아놨다? 그 반작용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신체는 시한부나다름없었다.

일정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상대방 대신에 스스로의 분자결합이 끊어지기 시작할 테니.

그러자 유키코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찢어졌다.

"걱정은 네놈이 해야지!"

타닷!

그대로 날 듯이 침대 위에서 뛰어내린 그녀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길게 늘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다.

채챙!

다마스강 검과 초진동 분자 커터가 맞부딪쳤다. 가볍게 부딪치는 것 같은데도 그곳에서 엄청난 불꽃이 튀겼다. 마치 절삭기가 철근을 자르는듯했다.

나는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그녀와 거리를 벌리는 게 아니라 쓰러진 재플린과 거리를 벌리는 거다. 얄미운 놈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을 일을 한 건 아니니까.

예상대로 그녀는 더욱 가깝게 거리를 좁혀들었다. 사이버암으로 개조한 양팔이 눈으로 좇지 못할 속도로 쇄도했고, 거리를 좁히는 그녀의 움직임도 그에 못지않았다.

'양팔만 개조한 게 아닌가 본데.'

내가 틈을 노리며 검을 찔러넣을 때마다 기계처럼 반응하며 몸을 움직인다.

최소한 양다리. 어쩌면 신체의 다른 부분까지도 더 개조했을지 몰랐다.

"죽어엇!"

유키코의 움직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과격해졌다.

그건 그녀의 힘이 점점 강해져서는 절대 아니었다.

'슬슬 초조한가 보군.'

처음 그녀의 얼굴에서 보였던 호기로운 표정이나 다소 도발적이었던 미소는 진즉에 사라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시간은 나의 편이다. 초진동 분자 커터는 사용자에게도 부담이 되는 무기다. 이대로 버티기만 해도 그녀는 스스로 무너질 거다.

그리고 그 시간은 빠르게 찾아왔다.

-마스터. 상대의 초진동 분자 커터의 출력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전장 상황을 공유하는 이브는 실시간으로 상대의 출력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그 출력이 낮아진 걸 확인하자 귀신같이 알려왔다.

그 소리는 슬슬 임계점이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채채챙!

커다란 불꽃이 튀기고, 이전과 다르게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드디어 초진동 분자 커터의 출력도, 그리고 그녀가 거칠게 움직일 수 있었던 동력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다.

"대, 대체 어떻게······?"

그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양팔과 내 손에 들린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말없이 웃자,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

"대체 어떻게 네놈 칼이 멀쩡한 거지!? 이, 이건 말도 안 돼! 어찌 그런 허접한 칼 따위가!"

그녀의 혼란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평범한 칼날이었다면, 최초 몇 번의 격돌이후 칼날이 그대로 산산이 쪼개졌을 거다. 그게 물리무기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초진동 분자 칼날의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네 칼보다 내 검이 조금 더 특별하거든. 이 세계에서 얼마 안 남은 재료로 만들어진 거라."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믿고 싶은 듯 다시 내 칼날을 살폈지만, 내 검은 어떤 흔적도 없이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칼날을 다시 팔꿈치로 수납했다. 어차피 안된다는 걸 알고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자. 그대로 뒤로 돌아서 손 내밀어."

이럴 줄 알고 하울 헬퍼에게 구속구를 빌려왔다.

내가 허리춤에서 구속구를 꺼내자 갑자기 그녀가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손가락 사이로 탄력있는 젖가슴이 도드라져 보였다.

"나를 그냥 놔줘!"

흐음. 흥미롭군. 육탄공세인가?

* * *

호텔로 향하던 로제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다시 걷길 반복했다.

테러라니. 그건 강현재 같은 칼잡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테러를 일으킬 정도의 폭발 속에선 살아남기 어려워······.'

그를 둘러싼 소문에서야 총알도 피한다지만, 폭발은 다른 얘기였다. 그건 진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기억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따랐던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던 그 날을.

'제발 큰일은 없기를.'

작게나마 기도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강현재가 멋지게 성공하기를.

그러다가 테러리스트라던 동양계 여인이 떠올랐다.

'으음······ 분명 그 가슴은 본인께 아닐 거야. 그런 체형에서 그 정도 가슴이 나올 수가 없다고!'

그녀가 슬쩍 아래를 바라봤다.

'그, 그래. 나 정도가 딱 적당하지. 그건 너무 징그러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로제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군."

나는 자신의 젖가슴을 터질 듯 움켜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육탄공세로 해결할 만한 일이 아닌······

"안 그러면 이곳을 폭파시키겠다! 호텔의 시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은 건 아닐 테지?"

······뭐라고?

나는 헐벗은 그녀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말했다.

"허세를 부리는군. 이곳을 폭파하겠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나?"

"······폭탄을 숨겼다거나 하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여긴 하울이니까."

하울의 보안은 만만치 않다. 폭탄을 밀반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구속구를 들고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가 움켜쥔 가슴을 위협하듯 내밀었다. 뭐하는 짓이지?

"경고야! 다가오지 마! 진짜 터트린다!"

나는 발작하듯 소리치는 그녀를 향해 피식 웃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재주껏 해보도록."

"흥! 후회하지 마라!"

미안하지만, 나는 내뱉은 말엔 후회하지 않는 성격······ 어?

순간, 그녀의 젖가슴이 불룩하고 솟아올랐다. 안 그래도 큰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자 만화에서나 볼법한 기괴한 모습이 됐다. 가히 폭발할 것 같은 젖가슴이다.

그리고 이내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이런 미친!'

발사됐다.

* * *

거짓말처럼 튀어나온 폭탄이 곧바로 추진체에서 불꽃을 뿜었다.

그것도 한쪽에 하나씩 두 발.

'큰 가슴의 비밀이 폭탄이었냐!'

발사된 두 발의 폭탄은 곧바로 내게 쇄도했다.

외통수다.

피해도 터지고, 갈라도 터진다.

나야 멀쩡할 자신이 있지만, 유키코의 경고대로 많은 사람이 죽을 거다.

'······빌어먹을!'

정녕 방법이 없나?

그때 머릿속이 간질거리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확장된다.

번개 치듯 뻗어 나가는 상상은 의식과 함께 결합되고, 이내 몇 차례 걸러지며 능력의 범위를 뇌리에 각인시킨다.

이 모든 건 찰나의 시간에 벌어졌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쭉 펼쳤다.

순간 머릿속을 간질거리는 미증유의 힘이 투사됐다. 손끝에서 뻗어 나간 보이지 않는 힘이 전방에 펼쳐졌다.

그리고.

"······!"

날아오던 폭탄이 거짓말처럼 멈춰섰다.

* * *

중력의 원리는 질량이 큰 물체가 다른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지구보다 커다란 목성의 중력이 더 강한 이유고, 그보다 거대한 태양이 태양계 행성을 중력으로 끌어당겨 태양계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중력조작」은 이런 중력을 조작하는 힘이다.

처음엔 단순히 중력을 없애 무중력 상태를 만들거나, 더 강한 중력으로 데미지를 줄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 자체를 바꿔버릴 수도 있군.'

그야말로 섭리를 뒤집는 힘.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응용방법을 깨닫는 건 훨씬 나 중의 일이었을 거다.

"어, 어떻게!"

유키코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폭탄가슴이 사라진 자리 위로 그녀의 진실된 젖가슴이 드러났다. 왜 폭탄가슴을 설치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푸슉! 푸슈슈슉!

허공에 멈춰있던 발사체 화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이제 불발탄으로 남은 폭탄가슴은 큰 충격이 생기기 전까지 폭발하지 않을 거다.

나는 무중력 상태로 허공에 떠 있는 폭탄을 옆으로 걷어냈다. 아직 인조 피부가 달라붙은 폭탄가슴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자신감이 사라져 한결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누가 후회할 차례지?"

빨간약, 파란약 (4)

63화. 빨간약, 파란약

이후 일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사이보그와 함께 나타난 하울 헬퍼가 구속구에 속박된 유키코를 끌고 갔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귀찮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인조피부가 덮여있던 폭탄 가슴만 들고 조용히 사라졌다.

중요부위를 내놓은 채 세상 모르게 기절했던 재플린도 깨어났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난장판이 된 장내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자기가 죽을 뻔했다는 걸 깨닫고 부랴부랴 떠났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

그리고 그 보상은 너무도 달콤했다.

'1000 하울 코인이라니. 역시 가슴만큼이나 통이 크네.'

나는 렌즈 시야 위로 띄워진 코인 지갑의 수량을 확인하며, 이게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1000 하울 코인.

환전하면 무려 100억에 가까운 돈이다.

'세상에 100억이라니. 내가 살다살다 이런 숫자를 보게 될 줄이야.'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차피 자기가 찍어내는 코인인데 조금 더 주면 안 되나?'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속물 같은 생각이라.

고개를 돌려 내부 시설이 들어간 첨탑의 최상층을 올려다봤다.

복잡하게 솟아있는 하울에서도 가장 높은 곳. 닿지 않는 곳에서 모든 곳을 내려다보는 곳.

이 성역의 주인이자, 이 하울의 주인인 소피아는 나와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럼 다음에 또 봐······ 현재 씨?」

「······!」

야릇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

그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한 번도 이름은커녕, '너'라고만 말하던 그녀였기에 그런 변화는 놀람을 넘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다음에 또 보자라······.'

분명 다음을 기약하는 목소리긴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런 인사치레는 하지 않았을 거다. 내 이름을 부르는 파격적인 일도.

하지만 나는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

그녀가 사라진 하울의 미래를.

'과연 그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개입함으로써 무언가 미래가 달라진 걸까?

현재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림이 뒤늦게 알려줄 뿐이다.

나는 그녀가 머무는 첨탑을 조금 더 올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꼭 내 뒤통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뭐 그냥 느낌이겠지.

* * *

하울의 최상층.

그곳의 주인인 소피아는 하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물, 그 자체인 존재라······."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엔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그녀로서도 이런 적인 처음이었다.

이런 존재를 본 것도, 이런 상황을 맞이한 것도.

하필 공교로웠다. 이 권태로운 삶의 마지막을 슬슬 정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때에, 저런 흥미로운 존재가 나타나 버리다니. 이건 반칙이잖아?

톡톡톡.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짚고 있던 창문을 두드렸다. 가녀린 손가락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그때 누군가를 따라 움직이던 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대상이 멈춰서 어디를 올려다봤기 때문이다.

톡.

창문에서 손가락을 뗀 그녀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번엔 재밌겠어."

* * *

꿈같았던 하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도시로 내려왔다.

"오구구. 우리 떡순이 잘 있었어?"

로제가 떡순이를 안아 들고 실내를 빙그르르 돌았다. 하울에 가 있는 동안 맡겼던 펫샵에서 방금 도착했다.

미야옹.

떡순이가 로제의 손에서 파닥거리더니, 풀쩍 어깨를 타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내 발치에 와서 몸을 부볐다.

"떠, 떡순아! 네 주인은 나란 말이야! 저 사람이 아니고!"

떡순이의 탈출에 그녀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에게 손가락질했다.

나를 작게 비웃어주며 그녀가 보란 듯 떡순이를 안아 들었다.

"고양이가 신비한 동물이라더니, 너도 사람을 볼 줄 아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금 비웃은 거 맞죠?"

"내가?"

나는 모른척하며 품에 안은 떡순이를 쓰다듬었다. 녀석이 내 손길을 느끼려는 듯 고개를 들이밀며 기분 좋은 울음을 토했다.

미야옹.

"떠, 떡순아······."

그렇게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그녀를 놔두고 나는 고정석이 된 소파에 여유롭게 앉았다.

터덜터덜 걸어온 그녀가 건너편에 철퍼덕 앉았다. 그리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떡순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떡순이를 건넸다. 그녀의 손에 건네진 떡순이는 잠시 버둥거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운 얼굴로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제야 다시 생글거리기 시작한 그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놨다.

"우리가 짧았지만 재밌게 잘 쉬다 왔어요. 그렇죠?"

"······나는 일하러 간······"

그녀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뿌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호텔 조식도 빼놓지 않고 전부 먹었고, 하울의 핫플레이스인 퍼마먼트 호텔수영장도 다녀왔고, 무엇보다 사진도 왕창 찍었고요!"

어딘지 신나 보이는 얼굴에 나는 말없이 작게 웃었다. 이럴 땐 영락없이 그 나잇대 아가씨였다.

"이번엔 하늘에 있는 하울을 다녀왔으니, 다음엔 호라이즌을 가봐요! 하늘도 좋지만, 휴양지는 뭐니 뭐니 해도 바다잖아요?"

호라이즌(Horizon)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부유섬이다. 그녀의 말대로 하늘에 하울이 있다면, 지상엔 호라이즌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다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하울과 달리 태평양 어느 구역 이상으론 벗어나질 않는다.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똑같은 바다라 벗어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태풍은 모조리 피해서 이동하기에, 호라이즌의 날씨는 대부분이 깨끗했다.

그나저나 '다음엔'이라······.

"······그래. 다음엔 거기에 가보도록 하자."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그 정도 작은 여유는 괜찮겠지.

"좋아요!"

해맑게 웃는 로제가 떡순이를 꼬옥 하고 끌어안는다.

미야옹.

떡순이가 귀찮은듯한 울음을 내뱉었지만,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 * *

[···연이어 테러 관련 폭로가 이어지는 가운데, 제롬 불라드 시장은 이번 테러 첩보에 대해 야당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바닐라 시티와 손을 잡은 건 선을 넘었다며,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공공의 내부자당시장 후보로 유력한 재플린 골든비치 역시 하울에서 정체 모를 테러에 휩쓸렸다 밝혔습니다. 점점 극으로 치닫는 시장 선거가 다시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가운데···]

TV에선 테러 관련 뉴스가 끝없이 이어졌다.

'시작했나?'

그라타에게 알려준 정보가 유효했는지, 아직 실제 테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도시에선 벌써 테러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현 시장인 불라드가 야당을 강하게 비판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야당에선 시 정부와 여당의 음모라며 반박했다.

비슷한 내용이 앵무새처럼 반복되어 나왔고, 그 사이엔 누가 봐도 가짜뉴스처럼 보이는 거짓이 중간중간 들어가 있었다.

선거까지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다 보니, 벌써 여론전을 시작한 거다.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정치판이 개판인 건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도화선에 불붙인 게 결과적으로 나긴 했지만······.

'해방전선과 남궁민수의 능력이 예상보다 너무 뛰어난 게 문제로군.'

솔직히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어차피 이제는 내 손을 떠났다. 내가 저 테러 이야기에 껴들어서 얻을 것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이번 일로 남궁민수도 확실히 알았을 거다. 내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내 무력과 정보력을 직접 확인한 이상, 남궁민수는 나를 찾을 수밖에 없을 거다.

특히, 이번 일을 계기로 전화위복이 된다면 더더욱 안달이 날 테지.

'왜냐면 지금 속도로 시나리오가 흘러간다면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전선이 소울 시티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사건이자, 본격적으로 도시가 막 장을 향해 달려가는 출발점.

바로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 「레지스탕스」의 시작이 멀지 않았다.

아마 그때쯤이면 실력있고, 특히 입이 무거운 해결사가 무조건 필요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에 해당하는 해결사이자······

'이미 큰 비밀을 공유한 나보다 더 알맞은 사람은 찾기 어렵겠지.'

그라타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이게 내가 해방전선을 도와준 이유였다. 그래야 메인 시나리오의 보상을 얻을 수 있으니까.

다만, 현시점에서 내게 첫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보상이 필요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이상으로 강해졌으니까.

'그래서 해방전선이 아니라, 남궁민수를 직접 만나려는 거지. 남궁민수, 그자에겐 내가 필요한 물건이 있을 테니.'

남궁민수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로봇공학자이자, 사이버러너다. 사이버펑크의 화신이자, 그 자체인 인물.

그라면 분명 내가 원하는 그 물건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얻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언제 얻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

새삼스레 그라타와 감자농장 노동자들이 고마워졌다. 덕분에 남궁민수와 직통으로 연결된 것도 모자라, 호의적인 상태에서 거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역시 그때 살려주길 잘한 것 같다.

달그락.

로제가 내 앞으로 찻잔을 내려놨다. 진하게 우려낸 홍차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고맙군."

"뭘요."

그녀가 건너편에 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느긋하게 다리를 꼰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떡순이가 폴짝! 하고 다리 위로 올라갔다. 하울에서 즐겨 입던 짧은 원피스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항상 정갈한 드레스에 스타킹을 신던 모습에서, 가벼운 원피스에 맨살이 드러나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의뢰가 꽤 밀렸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그녀가 허벅지까지 올라간 원피스 대신 떡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쉬었으니 이제 일을 해야지."

"좋아요! 그럴 줄 알고 리스트를 미리 뽑아놨거든요!"

로제가 뿌듯한 얼굴로 바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나와 지낸 게 꽤 되다 보니 이젠 내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샹들리에가 반짝이며 레이저를 쏘아내자, 허공에 의뢰 리스트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나는 로제와 함께 그녀가 추려(?)냈다는 리스트를 하나씩 읽다가, 이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째 갱단과 관련된 일밖에 안 보이는데?"

아무리 이 도시에 갱단이 흔하긴 해도, 이렇게 모든 의뢰에 갱이 묻을 수가 있나? 평범한 의뢰가 하나도 보이질 않는데?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신 갱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골라온 거예요. 스트레스 좀 풀라고요."

"······."

대체 언제부터 갱단 토벌이 스트레스 해소용이 된 거지?

* * *

약간의 고민 끝에 40구역에 해안창고를 불법 점거한 갱단의 토벌의뢰를 맡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33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의뢰 내용도 단순 토벌이라 간단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가서 갱단을 마주하자 놈들의 무장이 심상치 않았다.

"어이. 가까이 오지 마라. 몸에 바람구멍 나고 싶지 않으면."

창고 외부에서 경계를 서던 갱 몇 명이 총구를 들이밀며 경고했다. 테크건에 달린 레이저 조준경이 반짝였다.

원래는 기껏해야 방탄조끼와 돌격소총이 전부일 놈들인데, 전투보조를 도와주는 전장 슈트와 메카닉 테크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건방진 말투를 보아하니 갱은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런 무장을 구한 거지?

'그나저나 근처에 널린 게 해안창고인데, 이렇게 잔뜩 날이 선 반응이라.'

마치 해결사가 올 걸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럼 어울려줘야지.'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없이 칼을 뽑았다.

장미화원의 정원사 (1)

64화. 장미화원의 정원사

스릉.

아직 중천에 뜬 태양에 반사되며 은빛 칼날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칼을 본 놈들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칼잡이다! 칼잡이가 왔다!"

"죽여!"

서로의 무기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사치였다.

놈들은 지체 없이 총을 갈겼고, 테크건에서 쏘아진 탄환은 화망을 그리며 쇄도했다.

투타타탕!

나는 놈들을 크게 우회하면서 빠르게 접근했다. 벌떼처럼 총알이 꽁무니를 쫓아온다. 분명 궤적을 확인하고 피했는데, 중간에 탄환이 꺾이며 내게 날아들었다.

티티팅!

나는 파고드는 탄환을 쳐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군.'

테크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막강한 화력보조를 동반한 파워형 테크건. 그리고 다른 하나가 지금처럼 목표의 움직임을 계산해 탄환궤적을 보정하는 보조형 테크건이다.

궤적을 보고 피하는 내게 파워형 테크건보다, 지금처럼 궤적을 바꿔버리는 보조형 테크건은 귀찮은 무기였다.

'하지만 딱 그 정도야.'

나는 화망을 피하려던 걸 포기하고, 우회하던 움직임을 급하게 바꿔 오히려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내가 직선으로 달려들자 흥분한 놈들이 욕을 지껄이며 총을 갈겼다.

"똑바로 오면 더 좋지 미친놈아! 크하하하!"

"이런 미친놈! 방탄슈트를 믿는 거냐! 뒈져!"

투타타탕!

전방에 쇄도하는 탄환들이 허공에서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마치 정밀유도탄이 목표물로 날아드는 모습이다.

'······방탄슈트라.'

나는 놈들이 지껄인 말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이 검은색 비옷을 보고 한 말일 텐데······.

'원래 목적을 보여줘야겠군.'

콰직.

달리는 발끝에 강하게 힘을 준다. 휘도는 포스가 허벅지를 거쳐 발끝으로 향하고, 그 힘은 폭발적인 추진력이 된다.

순간 영사기의 필름처럼 몸이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놈들의 테크건에서 발사된 탄환과 내가 마주치는 그 순간.

쩌어어엉!

쭉 뻗은 칼날에서 고주파의 검명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검명을 따라 마치 파도치는 물결처럼 공간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투두두둑. 투두둑.

볼록렌즈처럼 울렁이는 공간과 부딪친 탄환은 모조리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흙바닥에 쏟아지는 탄환들로 공간은 금세 자욱한 흙먼지로 뒤덮였다.

"이, 이게 무슨!"

"테크건이 고장 난 거 아니야?"

"제길! 일반 모드로 바꿔!"

흙먼지 너머로 놈들의 당황한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그대로 흙먼지를 뚫고 놈들에게 쇄도했다.

"허, 헉!"

"놈이 멀쩡······ 컥!"

"씨발! 이 새끼 뭔······ 끄억!"

은빛 칼날이 춤을 췄다. 공간을 가를 때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주인을 알 수 없는 신체 부위가 사방에 널브러졌다.

"전장 슈트 켜! 전장 슈트 키라고!"

당황한 놈들이 다급히 부위 착용만 했던 전장 슈트를 전신 모드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체와 하체 일부만 덮고 있던 전장 슈트가 변형되며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게 놈들을 막아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슈걱!

"끄악! 내 팔! 내 ㅍ······ 컥!"

"끅! 사, 살려······!"

투둑.

놈들의 신체는 전장 슈트를 착용했든, 하지 않았든, 칼날 앞에서 공평하게 잘려나갔다.

한 번의 칼질에 한 부위씩.

물론 놈들에겐 내가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동료가 해체되어 죽어나가는 것만 보일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씨발! 어떻게 날붙이가 전장 슈트를······!"

이제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장 슈트를 무 썰 듯 썰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한 놈들은, 이내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뒤를 돌아 도망쳤다.

이게 같은 장비를 써도 갱과 용병의 다른 점이었다. 일단 기세를 제압하면 갱들은 스스로 지리멸렬했다.

"일이 쉽게 끝나겠군."

나는 칼날로 비옷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쿵! 쿵! 쿵!

해안창고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압도될 정도로 높은 5미터에 가까운 전장. 거기에 과하게 부풀려진 몸은 덤프트럭 같았고, 한 손엔 도끼, 다른 한 손엔 전투망치를 든 무식한 외형이었다.

처음엔 로봇인가 했더니······.

'워 머신이군. 그것도 불법개조한 워 머신.'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과하게 출력을 높여 거대해진 불법 개조 워 머신에 대해서.

크기가 커진 탓에 지속시간은 짧고 폭발할 위험도 있으나, 그 출력만큼 파괴력 또한 어마어마한 괴작(怪作).

쾅! 쾅!

창고를 걸어 나오던 워 머신이 도망치는 갱단 몇 명을 전투망치로 찍어버리며 말했다.

-도망치는 놈은 모조리 이렇게 만들어주겠다!

땅바닥엔 핏물과 살점뿐, 사람(이었던 것)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갱들이 다급히 걸음을 멈추곤 돌아왔다.

"······귀찮아졌네."

나는 얼굴을 구겼다. 이대로 끝일 거라 생각했더니, 저런 변수가 튀어나올 줄이야.

-건방진 칼잡이! 어디 이 몸도 그 잘난 날붙이로 덤벼보시지! 크하하하!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쿵쾅거리며 다가온 워 머신이 외쳤다. 스피커가 머리통에 달려 있는지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나저나 이놈들······ 해결사가 올 건 알았지만, 내가 올 줄은 몰랐던 건가?

이쯤 되면 워 머신을 가른 소드마스터에 대해서 떠올릴 법한데 말이다.

-쫄았냐? 푸하하! 살려주진 않을 테니 헛된 기대 말고 재주껏 덤벼보도록!

나는 그 헛소리까지 듣고 나서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늘어뜨린 칼을 놈에게 향하며 말했다.

"잘됐네. 나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거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