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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삼키다 (5)

33화. 태양을 삼키다

태양 아래.

그것도 멀쩡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지역은 칼잡이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일단 몸을 가릴 엄폐물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적의 시야가 뚫려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훤히 드러난 칼잡이만큼 쏘기 좋은 과녁은 없었다.

첨단 무기가 즐비한 이 세계에서 칼잡이가 미친놈 취급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난 빼고.'

몸 안의 혈류가 거세게 치달으며 온몸을 휘휘 돈다. 맥박이 빨라지고, 몸이 뜨거웠다.

허벅지가 부풀어 오른다. 폭발적인 힘이 하체에 깃든다.

콰직!

마른 대지가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이동한다.

순식간에 헛소리를 지껄이던 스캐번저가 눈앞에 보였다.

"푸하하······ 하, 하? 어?"

서걱.

태양을 머금은 은빛 칼날이 공간을 갈랐다. 쏟아지는 태양빛에 순간 칼날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커억!"

왜냐면 이렇게 스캐빈저의 상, 하체가 분리됐으니까.

"저, 저깄다!"

"쏴! 쏘라고!"

투타타타탕!

뒤늦게 총알이 쇄도한다.

수십 명이 쏟아붓는 총알은 마치 거친 폭우와 같았다.

소리도, 그 숫자도.

예전이었으면 제법 당황했을 그 총알비를 이제 오연하게 쳐다본다.

'왼쪽.'

왼쪽으로 한걸음 걷는다.

첫 번째 폭우가 지나갔다.

거친 빗방울이 튀기듯, 폭우를 뚫고 들어오는 총알은······.

티팅! 팅!

칼날로 쳐낸다.

'다시 두 걸음.'

이번엔 두 걸음 더 대각선으로 전진한다.

두 번째 폭우가 양옆으로 지나간다. 역시 변수처럼 센 총알은 칼날로 막아낸다.

티팅!

'이젠 탄환의 궤적이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

포스의 운용이 날이 갈수록 능숙해지면서, 능력도 점점 강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총구의 방향을 보고 총알을 피했다면, 이젠 궤적을 보고 총알을 피한다.

"저, 저 새끼 뭐야! 왜 안 죽는 건데!"

"씨발! 쏴! 쏘란 말이야!"

당황한 스캐빈저들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놈들이 이를 악물고 총을 갈겨댔지만, 점점 나와 가까워지자 놈들의 얼굴은 서서히 공포에 물들었다.

나는 이로써 확신했다.

'이제 피할 수 없이 좁은 곳만 아니면, 나에게 거리는 의미 없다.'

양쪽이 다 막힌 기다란 복도나, 엄폐물이 없는 좁은 실내가 아닌 이상 더 이상 소화기는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확인한 이상, 내 움직임의 범위는 훨씬 더 유연하고 다이내믹해질 수 있다.

-마스터. 10시 방향 중기관총 조심하십시오.

"고마워."

투두두두두!

말을 하기 무섭게 묵직한 소음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기관총답게 탄환이 굵은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나는 기관총의 비구름을 달고 그대로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소화기의 탄환은 막을 수 있어도, 아직 중화기의 탄환은 장담할 수 없었다.

굳이 이놈들을 상대로 위협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으, 으억! 미친놈아! 어디를 쏘는 거야!"

"기관총 쏘는 새끼 누구야! 커억!"

"멈춰! 개새끼야! 멈춰어어억!"

스캐빈저들은 확실히 못 막는다는 거다. 놈들이 기관총을 피해 바퀴벌레떼마냥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를 따라 긴 궤적을 그리던 중기관총이 작동을 멈췄다. 아무리 동료애가 없는 놈들이어도, 제 손으로 모조리 죽일 순 없을 테니.

뭐, 걱정하지 마라.

내가 대신 죽여주면 되니까.

서걱.

"컥!"

주홍빛 칼날이 한 놈의 목을 날리고.

"씨, 씨바알! 내 팔! 내 팔······ 켁!"

또 총과 함께 팔을 날려버리고. 겸사겸사 목숨도 끊어주고.

"사, 살려······ 컥!"

신나게 총질을 하다가 내가 눈앞에 나타나니 목숨을 구걸하는 놈도 죽였다.

휘두르는 칼날이 피에 젖었다. 쏟아지는 태양은 은빛 칼날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이제 보이는 총알은 위협적이지 않군.'

소총탄이든, 기관총탄이든, 어디서 쏘는지 알면 더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막거나, 피하면 되니까.

'가장 큰 위협은 인지하지 못하는 거리에서 날아오는 저격인데······.'

-마스터! 5시 방향 저격입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타앙!

지금의 나로서도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의 탄환이 스쳐갔다.

나는 재빨리 몸을 뒤집으며 허리를 낮췄다. 5시 방향을 확인했지만, 저격수의 위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브! 자세히!"

-5시 방향 970미터 위치에 있는 바위 옆입니다. 형태를 봤을 때, 주변 색과 동화되는 변형위장막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케이!"

이브의 자세한 브리핑대로 5시 방향에 허리춤까지 오는 바위가 보였다. 여기 선 아무리 봐도 저격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바위를 향해 달렸다. 발바닥이 대지를 박찰 때마다 세찬 바람이 귓등을 때렸다.

-마스터, 저격 총구가 조준됩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브가 다시 저격을 경고했다. 정찰 드론 성능이 이렇게 좋았나? 총구 조준까지 확인할 정도로?

짧은 생각 뒤에, 바로 회피 기동을 했다. 왼쪽으로 갈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가, 그대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타앙!

탄환이 스쳐갔다.

나는 그제야 변형위장막 속에 숨어있는 총구가 보였다.

"거깄구나!"

달려드는 속도 그대로 칼을 날렸다.

진짜 날렸다.

쐐에에엑!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칼이 그대로 위장막을 찢고 저격수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저격수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 손잡이를 잡고 칼을 휘저었다. 가슴이 곤죽이 된 놈이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콰직.

나는 저격총을 밟아서 부숴버린 다음, 다시 스캐빈저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몇 명 남지 않은 놈들은 이제 포기한 듯 오토바이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작게 중얼거렸다.

"올 땐 마음대로지만, 갈 땐 아니란다."

저격수 가슴에 꽂힌 칼을 회수했다.

태양을 삼킨 진홍빛 칼날을 힐끔 본 나는 그대로 도망치는 스캐빈저에게 달려들었다.

비명은 진혼곡이 되었고, 마른 대지는 흘러내린 핏물로 갈증을 채웠다.

* * *

"······저게 진짜 사람이라고?"

인턴들은 입을 벌린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견학'했다.

그 흉포하고 무시무시한 스캐빈저들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가을날 고개 숙인 벼를 추수하듯 칼잡이의 움직임은 거칠 것 없었다. 칼날이 반짝일 때마다 스캐빈저들의 수급이 하나씩 떨어졌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눈을 의심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게 진짜인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이라고?

프랭클린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이, 이거 꿈은 아니지? 으억! 뭐야!"

"네가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가 보다."

프랭클린의 목에 당수를 날린 트루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갑자기 부끄럽다."

그때 해리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다른 인턴들이 해리를 쳐다봤다.

"뭐가?"

"저 칼잡이 말이야. 우리가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그거야······."

다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분명 내심 떠오른 대답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해리의 말대로 부끄럽다 못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왜 단장님이 직접 경고해줬는지 알겠어. 하하······ 설마 저런 괴물일 줄이야."

49구역으로 파견 나오기 전, 레드우드 단장이 인턴들을 모아놓고 직접 말했었다.

「절대 그 칼잡이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마라. 너희는 그의 필요에 의해서 머릿수만 채우는 용도니까. 자존심 따위 개나 주고, 가서 그 칼잡이가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 지켜봐라. 그리고 배워라. 앞으로 너희가 겪을 의뢰에서 종종 마주할 광경일 테니.」

꽤 긴 설교이자, 경고였다.

물론 다들 앞에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아니었다.

자존심을 개나 주라고? 그 자존심 하나로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텼던 인턴들이다. 그게 어디 쉽게 되겠나?

트루먼이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소울 시티의 전설로 불리는 존재들이랑도 비슷한 거 아니야?"

"충분하지! 인간이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보여?"

"내 생각도 그래. 다들 봤잖아? 걸어가면서 총알 피하는 거? 그건 사이보그도 못한다고!"

"나도 잘못 본 줄 알았다니까? 세상에 총알을 피하는 인간이라니······."

"그것만이면 다행이게? 저격수 발견하고 달려가는 속도 봤어? 와씨······ 1킬로는 돼 보이던데 그걸 몇 초 만에 갔다고!"

다들 자신들이 본 장면을 떠들었다.

그건 분명 칭찬이 확실했지만, 인턴들의 기저에 깔린 감정은 칭찬으로 인한 경외가 아니라 공포였다.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의 공포. 즉, 미지의 공포가 인턴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해리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소드마스터!"

"어, 뭐?"

"저 칼잡이! 소드마스터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억 안 나? 얼마 전에 혼자서 42구역 갱단 하나 지워버렸다는 칼잡이! 다들 헛소문이라고 얘기했던 거 있잖아!"

"······헉!"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그런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해리의 말대로 헛소문 취급을 했었고.

세상에 칼잡이가 홀로 갱단을 상대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던가?

"······그런데 말이 되네?"

그런데 눈앞의 칼잡이를 직접 보고 나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느낌이다.

저 정도의 퍼포먼스면 갱단이 아니라 웬만한 용병단도 혼자 도륙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젠 더 이상 할 말조차 없어져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대체 우리가 누굴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때 어느샌가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드디어 전투가 끝났나?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인턴들이 엄폐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흐헉!"

언제 도착했는지, 피를 뒤집어쓴 칼잡이가 엄폐물 위에서 인턴들을 내려다봤다.

뚝. 뚝.

칼끝에 맺힌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다들 '견학'은 잘했나?"

분명 출발 전과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인턴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릿한 혈향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세운 인턴들이 바짝 기합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넵! 해결사님! 잘 봤습니다! 이런 좋은 살육······ 아니, 도살······

아, 아무튼 감사합니다!"

"마,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결사님!"

"······?"

강현재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로 바뀐 인턴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놈들이 그사이에 뭘 잘못 처먹었나?

* * *

나는 거점을 정리하고 공무원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목적했던 바는 스캐빈저들 덕분에 달성했고, 오염체 할당량도 진즉에 채웠으니까.

힐끔 뒤를 돌아봤다.

기합이 바짝 든 인턴들이 칼 같은 자세로 따라오고 있었다.

'단체로 뭘 잘못 처먹은 줄 알았더니, 쫄은 거였나?'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내 시선을 느낀 녀석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더욱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로봇처럼 딱딱하게 걷는다. 얼씨구? 손발이 같이 나가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냥이 끝나셨습니까?"

우리가 도착하자, 대충 만든 가판대 같은 곳에 앉아있던 공무원이 물었다.

어조는 정중한데 얼굴은 귀찮아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드로이드는 아니었나 보군.

"여깄소."

공무원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우리보다 먼저 사냥을 끝낸 팀들이 있었는지, 테이블 위에 레이드 태블릿이 쌓여있었다. 하긴, 우리도 스캐빈저의 습격이 없었더라면 더 일찍 끝났을 거다.

무심한 얼굴로 태블릿을 확인하던 공무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 커졌다.

"이, 이게 무슨? 태블릿이 고장이 났나?"

"무슨 문제라도 있소?"

"자, 잠시만요."

양해를 구한 공무원이 태블릿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연신 '이럴리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힐끔 바라보니, 오염체 할당량을 확인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조금 전까지 문제없던 태블릿이 갑자기 뭔 고장이야?

"그, 그게······ 오염체 토벌 숫자가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오류가 난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주심이······."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

공무원 손에 들린 태블릿을 뺏어서 확인했다.

[오염체 사냥 227/100]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맞는데?

"맞는데 뭐가 오류라는 거요?"

"네, 네? 마, 맞다고요?"

"오염체 227마리. 전부 스캔까지 해서 데이터가 저장됐을 텐데?"

"허, 헉! 지, 진짭니까?"

"방금 못 들었습니까? 설마 레이드 태블릿을 속이고 숫자를 조작했다, 뭐 이 딴 개소리를 지껄이려는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레이드 태블릿이 비록 투박해 보여도, 실상은 시 정부의 첨단기술이 집약된 기계였다. 물론 무적은 아니라서 방화벽을 뚫고 데이터 조작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이걸 뚫고 데이터를 조작할 정도의 사이버러너라면, 이런 값싼 노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값은 수십, 수백억 단위니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이라······."

"그럼 끝난 거로 알겠습니다?"

"네. 대금은 오늘 중으로 중개인에게 지급될 겁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았다.

그러자 여기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한 녀석들이 있었다. 인턴들이었다.

"왜?"

"아, 아닙니다, 해결사님!"

"대댄, 아, 아니 대단하십니다!"

"대체 언제 그렇게 오염체를······!"

녀석들은 이제 숫제 경외감 섞인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흘러나오는 실소를 참으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너희 몫은 없다."

"아······."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1)

34화.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나는 호텔에 도착해 간단히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지난 전투를 복기했다.

'포스 운용이 점점 나아지고 있어.'

처음엔 날뛰는 포스를 그저 몸 안에 가둬두고 사용했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동체시력을 뛰어넘는 움직임이 가능했다.

그다음이 육체 바깥인 검에 밀어 넣는 사용이었다. 포스를 머금은 검은 그 자체만으로 불가해한 경도 상승이 일어났다.

「워 머신」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지금은 뚫는 게 아니라, 그냥 찢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때부터였을까?

포스가 더 이상 내부에서 날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길들인 강아지처럼 온몸을 산책하듯 돌아다녔다.

그 결과가, 오늘 있었던 쏘아진 탄환의 궤적을 보는 시력이었다. 물론 게임에서도 있던 설정이긴 했다.

다만······.

'게임에선 인위적으로 뇌 신경을 조작해서 이런 능력을 사용했었지.'

게임에선 뇌에 컴퓨터 칩을 박아야 사용이 가능했다.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기술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내 뇌를 열어서 칩을 박는다? 뭘 믿고 그걸 맡긴단 말인가? 칩에 장난질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포스의 활용도가 훨씬 뛰어나다.'

게임을 할 땐 포스의 기본 능력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성장은 레벨업과 추가 기프트의 획득에 따라 갈렸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이런 변수가 발생한 이유를 첫 번째 기프트로 추측했다.

'주인공 특성 『만능』. 이게 게임에선 그저 무엇이든 쉽게 익힐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 설정의 비밀은 포스의 활용이었던 거야.'

『만능』은 총을 쏘면 사격술을 빠르게 익힐 수 있고, 칼을 사용하면 검술을, 하다못해 라디오를 조립하면 제작기술이 올라가는 능력이었다.

주인공이 괜히 주인공이 아닌 거다.

다만, 그 한계도 명확했다. 몸으로 익히는 것에만 그 효과를 발휘했으니까.

온갖 신비한 기프트가 난립하는 이 세계에서는, 조금 아쉬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사라짐으로써 그 한계도, 제한도 사라졌지. 『만능』의 진짜 능력이 이 정도라면······ 굳이 다른 기프트에 목매지 않아도 되겠어.'

물론 챙길 수 있는 기프트는 꼬박꼬박 챙길 거다. 목맬 필요는 없지만, 굳이 걷어찰 필요는 없으니까.

특히 칼을 사용하는 이상, 이동이나 방어 관련된 기프트는 있을수록 좋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락없이 칼잡이가 다됐네.'

나는 벽에 기대놓은 검을 쳐다보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고 이후, 내게 검은 아픔이었다.

슬픔이었다.

그래서 검도 선수 시절 옷과 장비, 비싼 돈 주고 샀던 진검도 모조리 팔아버렸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팠으니까.

다시는 검을 보지도, 잡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내가 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게임 유튜버가 된 이유도 여기에 기인했다.

······그런데 사실, 굉장히 그리웠었나 보다.

'이 세계가······ 조금은 마음에 드는군.'

새삼스레 감상에 젖어 드는 밤이었다.

* * *

다음날, 바로 로제의 사무실 찾았다.

딸랑딸랑.

오늘도 어김없이 애처로운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당신 왔어요?"

마침 오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는지,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든 로제가 인사했다.

오늘은 새빨간 드레스다.

평소엔 나름 풍성한 드레스를 주로 입었는데, 오늘은 몸에 달라붙은 드레스였다. 흔히 시상식 드레스라고 하던가?

저러고 있으니 꼭 할리우드 시상식에 나타난 배우 같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참 부잣집 아가씨처럼 예쁘게 생겼다.

"어제 의뢰 완료된 건 확인했나?"

나는 언제나처럼 앉던 소파에 대충 걸터앉았다.

"아, 조금 전에 확인했어요.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 왔어요."

"묻고 싶은 거?"

"그래요."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나를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무슨 짓이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붉은날개>의 인턴들도 무사히 돌려보냈고, 시 정부 공무원에게 의뢰 완료 확인까지 받았는데?

"어제 의뢰 대금으로 입금된 금액이 2억 2700만 케이달러에요."

"음. 그렇군."

"음, 그렇군······ 이 아니라고요! 시 정부에서 실수한 게 아니면 오염체를 227마리나 잡았다는 거잖아요?"

"맞는데?"

"무, 에? 맞다고요?"

입술을 삐쭉대며 조잘거리던 로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네 말대로 시 정부에서 실수를 했을 리가 없잖아? 이런 건 「제네시스」가 처리할 텐데."

"······그건 그렇죠."

AI 수준을 초월한 「제네시스」가 단순한 숫자 계산을 실수한다?

그건 내가 소울시티의 시의원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 오염체를 227마리나 잡았다니······ 당신 정말······."

로제가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아! 아니에요. 이제 이 정도로는 놀라지 않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무슨 연습씩이나······."

"당신이 여태 했던 걸 떠올려 보라고요!"

"내가 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곰곰이 그동안의 의뢰를 되새겼다.

물건 찾는 의뢰에서 갱단 하나가 엮여있어 갱단을 지워버렸고, 그다음 의뢰도 공장을 점유한 갱단을 통째로 날려버린 의뢰였고, 드론 성능 테스트를 하러 가서 겸사겸사 오염체를 잡은 게 227마리······.

"······음. 내가 생각보다 이것저것 일을 꽤 했었군?"

"하······?"

황당하다는 듯 숨을 내뱉은 로제가 이마를 짚었다. 뭘 이런 걸로 그러나.

그때 그녀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킁킁. 근데 오늘따라 당신 피 냄새가 너무 심하네요."

로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가늘게 뜬 눈은 불결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정돈가?"

나도 킁킁 냄새를 맡아봤다.

옷도 새 옷이고, 샤워도 어제, 오늘 두 번이나 했는데 그게 느껴지나?

하긴, 어제는 조금 심하긴 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오염체의 피까지 뒤집어썼으니.

"당신 몸에서 나는데 그걸 몰라요?"

"음. 난 전혀 못 느끼겠는데."

"심해요. 그러니까 좀 조심해서 일해요. 피 냄새나는 걸 좋아할 의뢰인은 없으니까."

로제가 새침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데 냄새가 심하다더니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다.

부잣집 아가씨답게 그녀에게선 항상 꽃향기가 났다. 평소에 그런 향기에 둘러싸여 있으면 더더욱 피 냄새가 역하게 느껴질 텐데······ 생각보다 비위가 좋은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라고 피 냄새를 좋아할까. 어쩔 수 없었다. 내 칼이 10미터쯤 길어지면 몰라도."

"······아. 당신 칼잡이었죠?"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짝하고 치며 말했다.

"그럼 비옷 같은 걸 입어보면 어때요? 비를 막아주니까, 당연히 피가 튄 것도 막아주지 않을까요?"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 아니에요? 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푸른빛 사파이어가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군."

"우스꽝스럽다니요! 기껏 자기 생각해서 말해줬더니만!"

* * *

로제와 조금 티격태격하다가 의뢰를 받았다. 이번에도 지명 의뢰였는데······

기다리던 의뢰였다.

"영감님. 오랜만입니다."

"······? 그건 컨셉인가? 며칠 전에 보지 않았나?"

"그냥 인사한 겁니다. 그건 그렇고, 수송 의뢰를 맡기신다고요?"

바로 다이손의 첫 번째 의뢰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준다기에 직접 만물상까지 온 거다.

"이번에 서해 항만으로 물건이 하나 도착하는데······ 그걸 안전하게 가져다줬으면 좋겠군."

"서해 항만이라면······ 40번 구역의 항구 말입니까?"

40번 구역.

소울 시티 서쪽에 위치한 구역으로 서해와 연결된 유일한 항구를 보유한 곳이다.

"그렇지. 하선하는 물건을 바로 싣고 가져올 거라네."

"음! 보관하던 물건도 아니고, 서해에서 들어온 물건을 바로 수송하면서도 저를 고용하신 거라면······ 그 물건을 노리는 자가 있나 보군요."

"······허허?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자네는 참 어울리지 않게 똑똑하단 말이지. 맞다네. 물건을 노리는 조직이 있다고 첩보가 들어왔지."

이 영감탱이가 나를 뭘로 보고.

그런데 무슨 물건이길래 조직까지 거론하면서 나를 고용한 거지? 만물상의 힘이 모자라진 않을 텐데 말이다.

"무슨 물건이길래 그럽니까?"

"뭐겠나? 내가 파는 물건이야 뻔한데."

"······설마 무깁니까?"

"비슷하다네. 이번에 브리타 팩토리에서 신제품으로 내놓은 전투 안드로이드지. 이름이 「터미네이터」라고 하던가?"

"「터미네이터」요?"

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 터미네이터는 아니겠지?

"일단 주문만 먼저 받은 거라 만물상에서 보관하다가 넘겨줄 예정이라네. 그래서 날파리가 꼬인 게지."

"어디서 주문을 받았는데 그럽니까? 꽤 비싼 로봇 아닙니까?"

"꽤가 아니라 자네가 상상하지 못할 가격일세. 일전에 말한 그 조기경보드론보다도 더 비싸지."

"······그 정도라고요? 아니, 떼먹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럴 리는 없을 걸세. 시 정부에서 의뢰한 거니까."

"네? 시 정부에서 만물상에 의뢰를요? 왜 그런 짓을······."

"끌끌끌! 왜 그럴 거 같나?"

다이손이 즐거운 듯 웃으며 연초를 태웠다. 뻐끔뻐끔 내뿜는 연기가 유령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그런 다이손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가, 허공에서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군수 비리. 혹은 검은돈으로 몰래 빼돌릴 생각이로군요."

소울 시티 정도의 메가시티가 브리타 팩토리와 직거래를 못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렇게 되면 거래의 흔적이 전부 남겠지. 높으신 분들이 좋아하는 세금횡령도 하기 어려울 테고.

그래서 여기에 다이손 같은 중개상인을 낀 거다. 그럼 얼마든지 장부 조작이 가능하니까.

"그렇지. 이 도시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이유는 순전히 AI들 때문이지, 시 정부나 의회 같은 윗대가리들 때문은 아닐세. 오히려 그놈들은 죄다 도둑놈들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영감님은 왜 도둑놈들이랑 거래하십니까?"

"나 같은 장사치야 상대방이 도둑놈이든, 사기꾼이든 알 게 뭔가? 내 돈만 안떼먹고 주면 그게 고객님이지. 끌끌끌!"

치이익!

즐거운 듯 웃던 다이손이 연초를 꺼트렸다. 타오르던 불씨가 짓이겨졌다.

나는 새삼스레 내가 아직 이 도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엉망진창으로 펑크한 세계에서 살면서도, 자꾸 현대의 도덕적 관념과 개념이 튀어나오니까.

"죄송합니다, 영감님. 제가 실언을 했군요."

"괜찮다네. 원래 자네 생각이 맞는 게 정상적인 세상 아니겠나? 우리가 비정상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다이손을 쳐다봤다.

솔직히 처음이었다. 이 세계와서 그래도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다들 뭔가 비틀린 도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다이손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뭘 그리 놀라나? 끌끌끌!"

"······영감님이 이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영감님 정도라면 지금의 비정상이 더 좋으실 텐데요."

"지금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말일세, 늙으면 눈앞은 침침해지지만 멀리 있는 건 오히려 잘 보인다네. 지금의 비정상은 오래갈 수 없어."

지금의 비정상은 오래갈 수 없다? 그저 노인의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그 무게 가 남달랐다.

설마 메인 시나리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거기서 만물상은 철저히 중립이었는데.

"혹시 뭐 알고 계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아는 자네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뭘 말입니까?"

나는 솜털이 서는 걸 느끼며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했다. 뭐야? 진짜 만물상에서 앞으로 벌어질 시나리오를 파악하고 있다고? 대체 어떻게?

다이손은 끌끌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더니,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끌끌! 자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자네의 대답에 어울려줘야겠군. 그래. 이렇게 말하는 게 좋겠군."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을 정리한 그가 말을 이었다.

"별들에게 가는 길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네. 누군가는 별을 보려면 당연히 어둠이 필요하다고 하지. 그 별을 위해 흘린 피가 바다가 되었는데도 말이야."

"······."

"언젠가부터 별들에게 가는 길은 어둠보다 깊은 피바다를 건너야 했다네. 너무나 깊고 끔찍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피바다 한복판에 떠 있었거든."

"······."

"자. 이제 어떻게 해야겠나? 지금이라도 되돌아간다? 이를 악물고 피바다를 건넌다? 그것도 아니면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피바다에 그냥 둥둥 떠 있어야 하나?"

다이손의 눈빛이 나를 꿰뚫을 것처럼 강하게 불타올랐다. 입가에 맺힌 장난기 섞인 웃음은 여전했으나, 이 질문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어떤 의도로 형상을 빗대어 말한 건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게임의 세계관을 알고 있는 내게 다이손이 말한 선택들은, 그 별 이름 그대로 이상향(Utopia)에 불과했다.

그렇다. 다이손이 말하는 별. 어둠과 피바다로 뒤덮여 있다는 그곳은 유토피아였다.

그리고 난 유토피아 따위는 믿지 않는다.

"저라면 그 별이 제대로 된 별인지부터 확인할 것 같군요."

"······뭐?"

예상 못 한 대답이었는지, 당혹성을 내뱉은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늘에 별이 한두 갭니까? 그 별이 무슨 별인지 알아야 결정을 할 것 같은데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북극성을 찾아서 방향도 살펴보고요."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핫!"

다이손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거의 비명에 가깝게 꺽꺽거리면서, 눈가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대폭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얼마간 시원하게 웃음을 쏟아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를 바라봤다.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한가득 떠 있었다.

"그래! 이게 자네지! 좋은 대답이었네. 끌끌!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내일 오전에 서해 항만에 있는 만물상 해운창고로 가주시게. 거기서 설명을 듣는 게 빠를 거야."

"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 하는 건 아닐 테죠?"

"그럴 리가? 메인 운송과 작전은 <소울 이터>에서 맡을 거라네."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2)

35화.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항구의 하늘은 모든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 화면 색이었다.

(The sky above the port was the color of television, tuned to a deadchannel)

"음. 바닷가는 확실히 바닷가로군."

나는 바람결에 실려오는 짠내와 비린내의 향연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역선이 오가는 대형 항만이라 어업을 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비린내가 나다니.

"저쪽인가?"

항만창고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대충 둘러봤다. 해안가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창고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언젠가 유럽 계획도시의 건축도를 본적이 있었는데, 그곳보다 더 심했다.

전후좌우. 온통 똑같은 창고들이 바둑판처럼 늘어섰다. 면적도 어마어마해서 마치 '월리를 찾아라'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물론 내겐 치트키가 있었지만.

-전방 780미터 좌측입니다, 마스터.

"고마워, 이브야."

부아앙!

바이크가 조금 속도를 냈다.

이브가 알려준 곳으로 도착하자 일단의 사람들이 창고 앞에 모여 있었다. 대충 봐도 경호원처럼 보이는 검은색 제복을 입은 무리였는데, 자세히 보니 등 판과 가슴팍에 커다랗게 'S.E.S'라고 박혀있었다.

'음. 이들이 <소울 이터>로군.'

소울 시티 최대 보안업체. 로제의 사무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스치듯 만났던 그들이었다.

나는 바이크를 세워놓고 잠시 그들을 살폈다.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 나를 주시하던 <소울 이터> 경호원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확실히 명성이 헛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창고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사내가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강현재 씨?"

"······그쪽은?"

"맞나보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만물상의 창고관리자입니다. 윌슨이라고 편하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윌슨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다이손 영감님이 말했던 사람이 당신이로군요."

"······아? 진짜로군요? 말로만 들었을 땐 믿을 수 없었는데."

"······? 뭐가 말이죠?"

"다이손 회장님을 영감님으로 부르는 해결사가 있다길래 거짓말인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만나 뵈니 영광입니다."

"······."

윌슨이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면서 비비적거렸다. 뭐야, 이 사람?

나는 뭔가 께름칙한 마음에 손을 슬며시······ 빼려다가 하도 세게 잡고 있어서 강하게 뺐다. 그의 표정에 뭔가 아쉬움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진짜 뭐야?

"의뢰 일정이나 설명해주시죠. 영감님······이 자세한 이야기는 이곳에서 들으라고 했거든요."

"아, 의뢰 일정요? 뭐, 별거 없습니다. 잠시 후에 물건을 저기 화물트럭으로 옮길 거고, 강현재 씨는 화물트럭을 따라 30구역 만물상까지 가주시면 됩니다."

"경호 인원은요? 저기 보이는 소울 이터 인원이 전부는 아닐 테죠?"

나는 턱짓으로 창고 앞에 모여 있는 소울 이터 요원들을 가리켰다.

총 여덟 명으로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절대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다.

"하하하! 설마요? 어디 보자······ 자세한 건 직접 듣는 게 좋겠네요. 저도 시간이 많은 사람은 아니라서."

윌슨은 손목에 워치를 톡톡 두드리더니 누군가를 호출했다.

잠시 후 창고 뒤쪽에서 소울 이터 제복을 입은 거구의 사내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터질듯한 근육과 반짝이는 대머리. 제복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고 있어야 할것 같은 비주얼의 사내였다.

"인사하세요. 이쪽은 오늘 운송작전 지휘를 맡아주실 소울 이터의 제이크 분대장님. 이쪽은 다이손 회장님이 직접 고용하신 해결사 강현재님."

"······."

"······."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하! 정말 두 분이 함께 계시니까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 운송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안 그래도 이상한 녀석들이······ 아차차! 이럴 게 아니지.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윌슨은 그 모습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제멋대로 말을 떠들고 사라졌다.

음. 묘하게 나사 하나가 빠진 느낌인데 창고관리자라······ 일은 잘하나 보지?

내가 잠시 윌슨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제이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칼잡이라지?"

"뭐, 보다시피."

나는 대충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누가 봐도 길거리 칼잡이처럼 차려입고 왔다.

그런데 그는 내 옷차림이나 허리에 찬 칼집을 보기보다, 제스처를 하는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력이야 '소드마스터'라는 이명까지 붙었으니 나름 탄탄하겠지만, 이런 대형호송은 당신이 해왔던 일과는 거리가 멀거다. 이건 혼자 활동하는 칼잡이보다 우리가 프로페셔널이지. 인정하나?"

"······그렇게까지 말하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럼 우리가 지휘권을 가져가는 것에도 불만이 없을 테고?"

"그건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깔끔하군."

제이크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우리끼리 움직이는 전술대형이 있으니, 당신은 우리와 적당히 거리만 맞춰서 따라오면 된다. 혹시 워키토키 코드가 어떻게 되지?"

"그런 거 없는데······."

"······흠. 아무리 혼자 활동하는 해결사라지만 워키토키도 없단 말인가?"

제이크가 얼굴을 구겼다. 순간 반짝이는 대머리에 핏줄이 곤두섰다. 얼굴이 험악하다는 게 어떤 건지 손수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과는 반대로 그는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홱하고 던졌다.

"이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 여유로 갖고 있던 보안 워키토키다."

"음······."

나는 워키토키를 살폈다. 이름에서 느꼈지만 내가 짐작했던 무전기가 맞았다.

다만, 기술이 기술인지라 소형 이어폰처럼 귀에 꽂기만 하면 끝났다.

"흠흠.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다."

내가 말없이 워키토키를 살피고 있자, 제이크는 굳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번 언급했다.

이거 고맙다고 말해달라는 거지 지금?

"고맙다."

"크흠! 뭘 이런 걸로."

"······."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더 내뱉은 제이크는 그럼 작전에서 보자며 말한 뒤 사라졌다.

"······생각보다 귀엽네."

역시 사람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봐야한다고 했던가?

저런 거구의 근육 대머리에서 이런 감성을 느끼리라곤 예상조차 못 했는 데······.

그때 이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마스터? 그쪽 취향이셨습니까?

"······뭐라는 거야?"

-아아. 제가 여성체 AI라는 게 천추의 한이로군요. 지금이라도 남성체 AI의 프로세서를 학습해야······

"······시끄럽다, 이브야."

* * *

기이이잉! 끼익!

증증증증!

나는 오토바이에 걸터앉아 화물트럭에 실리는 컨테이너를 지켜봤다.

화물트럭은 해외영화에서 흔히 보던 그 트럭과 비슷했다. 조금 다른 점은, 현실보다 훨씬 튼튼하게 생겼다는 점?

굳이 찾자면 매드맥스의 화물트럭과 유사했다.

"하긴. 언제 총알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니까."

그러니 소울 이터 같은 경호업체나, 나 같은 해결사까지 고용해서 운송하려는 거겠지.

그렇게 물끄러미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색 가죽옷을 상, 하의로 차려입은 사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손짓했다.

"이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

이 새낀 또 뭐야?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내가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지시사항 못 들었어? 절대 눈에 띄지 말라고 했잖아! 일단 몸부터 숨기자!"

사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 짧은 사이에 머리를 굴렸다.

'지시사항? 눈에 띄지 말라? 이거 혹시······?'

어떤 결론에 도달한 나는 사내의 손에 이끌려 다닥다닥 붙은 창고 건물 사이로 숨어들었다.

사내는 다시 한번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좌우를 살핀 그가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휴우! 다행히 걸리진 않았나 보네."

나는 사내의 몰골을 다시 살펴봤다.

덥수룩한 긴 머리는 기름에 떡져 있었고, 검은 가죽 재킷과 가죽바지는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반질반질했다.

허리춤 양쪽으론 권총 파우치가, 허벅지엔 짧은 군용나이프가 매달려 있었다.

'갱처럼 보이는데, 갱은 아닌 거 같고······.'

이 새끼 정체가 뭐지?

내가 말없이 사내를 쳐다보고 있자, 사내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렇게 대놓고 감시하면 어떻게 해! 걸렸으면 네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작전에 영향을 준다는 거 몰라?"

"······."

감시라?

"왜 말이 없어? 혹시 쫄았냐?"

"······내가 조금 긴장했나 보군.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봤지?"

사실 이게 제일 궁금했다.

이놈이 난데없이 나를 자기네 동료라고 생각한 이유가 뭐지? 내가 이놈처럼 가죽 애호가도 아닌데.

그런데 전혀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게 대놓고 바이크를 타고 왔으면서 그게 궁금하다고? 일반인이나 모르지, 블랙스컬 단원이라면 모를 수가 없잖아!"

"······그렇군. 바이크가 여러 대라 헷갈렸나 보다."

"뭐? 너도 여러 대야? 이런 씨발? 대체 바이크를 여러 대나 산 놈들은 돈을 어떻게 버는 거야? 동부지구에서 싸펑코인인지 뭐시긴지로 돈벼락 맞은 놈들 있다던데 너도 코인 하냐?"

"재미 좀 봤지."

"아오! 부럽네! 너도 동부지구 출신이야? 하여튼 좋은 거 있으면 우리 쪽에도 좀 흘려줘 봐."

나는 적당히 놈의 대화에 맞장구쳐주며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감자농장에 쳐들어왔던 용병들이 이놈들인가 보군.'

아직도 내가 타는 바이크는 감자농장을 탈출할 때 탔던 그 바이크였다. 물론 가장 좋아 보이는 녀석으로 고르긴 했지만.

그런데 그 바이크에 블랙스컬 단원들은 아는 표식이 숨겨져 있었다니.

'이번 일이 끝나면 갖다 버려야겠어. 블랙스컬 놈들이랑 괜히 엮이면 귀찮아질 테니까.'

블랙스컬(Black Skull) 용병단.

이름부터 느껴지듯 정상적인 용병단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용병 의뢰보다 주로 음지에서 활동하는 용병단으로 납치, 테러, 암살, 강도 등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는 놈들이다.

덕분에 대놓고 활동하지도 못하고, <블랙스컬>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긴 하나 사실상 점조직에 가까웠다. 하나의 용병단이라기보단, 그때그때 점조직들이 뭉쳤다, 흩어지는 조합형태였다.

눈앞에서 코인 정보 좀 알려달라는 녀석이 나를 동료로 오해하는 이유였다.

"맞다. 그 소문 들었어? 예전에 <나르시스> 약쟁이들 공장 털러 갔다가 전부 다 죽었잖아. 그때 생존자를 찾았다네?"

"그게······."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라고 고민하는 찰나, 도로 쪽으로 기다란 차가 슝하고 지나갔다.

만물상의 화물트럭이었다.

"트럭 움직인다."

"아? 이, 이런!"

사내가 도로 쪽을 힐끔 살펴보더니 황급히 손목의 워치를 두드리며 말했다.

"코인 얘기는 작전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아무튼, 너 절대 소울 이터 새끼들 눈에 띄면 안 돼!"

마지막으로 단단히 언질을 한 사내가 창고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아마 화물트럭을 쫓기 위함이겠지.

"흠. 아무래도 다이손 영감이 받았다는 첩보가 저놈들 같은데······."

나는 길어지려는 생각을 잠시 접고, 나 역시 골목을 빠져나와 바이크로 뛰어갔다.

"일단 따라가 보면서 생각해봐야겠군."

부아아앙!

쓰로틀을 당겼다.

바이크가 거칠 것 없이 질주했다.

* * *

"저 새끼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소울이터 요원 할로웨이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멀찌감치서 화물트럭을 지켜보는 칼잡이가 있었다.

"야, 너두? 야, 나두!"

옆에 있던 맥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동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고용주를 안 겪어본 건 아니다. 이 바닥이 원체 신뢰라든가, 신용이라든가 하는 게 없는 무정한 바닥이었으니까.

그래서 해결사나 용병들과 함께 작전한 적도 꽤 존재했다. 어차피 돈은 고용 주가 내지, 그들이 부담하는 건 아니니 상관없었고.

하지만 그중에 칼잡이는 한 번도 없었다.

"세상이 어느 땐데 칼 따위를 차고 다니는 건지. 어휴, 미친놈들."

"내가 예전에 얘기했잖아. 칼잡이들은 자살하고 싶은데 용기는 없는 놈들이라니까?"

"푸하하하! 그거 말 되네!"

칼이 통하는 수준은 동네 양아치 선에서 정리된다. 간혹 갱까지 상대하는 칼잡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뭐, 뒷골목 어딘가에서 뒈졌겠지. 한때 하수처리장 바닥에 그렇게 날붙이가 많이 발견됐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저 새끼 방탄복도 안 입었잖아? 진짜 미친놈인가?"

방탄복이 아니라 방탄갑옷으로 둘둘 말고 다녀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그냥 옷을 입고 왔다?

나 죽여줍쇼! 하고 돌아다니는 것과 무슨 차이란 말인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드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하며······ 바이크? 하!

저 새끼 칼도 못 뽑고 운전하다가 뒈지는 거 아냐?"

"전투 시작하자마자 저 새끼 먼저 죽는다에 10만 케이달러 건다."

"전투 시작? 푸하하! 나는 시작하기 전에 뒈지고 시작한다에 건다!"

"그럼 나는 도망간다에 걸어볼까? 낄낄낄!"

소울이터 요원들은 칼잡이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욕했다.

그때 컨테이너 선적이 얼추 끝났는지, 제이크 분대장이 느릿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뭐가 그리 재밌나?"

할로웨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제이크 분대장님.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뭔가?"

"만약 전투상황 발생 시, 우리가 저 칼잡이도 챙겨야 합니까? 적들이 나타났는데, 저놈이 칼 들고 깔짝대면 어떻게 합니까?"

그 말에 제이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칼잡이를 챙긴다? 네가?"

"어, 에? 그, 그거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할로웨이가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동료들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

제이크의 시선도 다른 분대원들에게 향했다.

"아니면 맥스 네가 챙길 건가?"

"그, 그게······"

"아니면 누가 챙길 거지? 여기 웃고 떠드는 놈 중에서 자신 있게 손들 놈 있나?"

갑자기 변한 분위기로 제이크가 한 명씩 노려보며 말했다. 반짝이는 대머리 위로 울긋불긋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 서슬 퍼런 모습에 다들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저자는 칼잡이면서도 거리의 이름이 퍼진 해결사다. 그것도 '소드마스터'라는 이명으로. 이게 무슨 뜻인 줄 아나?"

"······."

"없겠지. 알면 그렇게 함부로 웃고 떠들 수 없을 테니까."

제이크가 혀를 쯧하고 찼다. 그리고 충고하듯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이 도시에서 해결사로 이명 가진 자는 강자다. 심지어 저자의 이명은 '소드마스터'다. 칼잡이의 이명이 '소드마스터'인 것에서 뭐 느껴지는 게 없나?"

"······?"

다들 모르겠는지 서로 눈치를 본다.

제이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놈들 정도는 콜라 캔을 따듯 쉽게 죽일 수 있는 강자라는 뜻이다. 애초에 저자를 붙인 게 만물상의 다이손 회장이란 걸 잊었나?"

"허헙!"

"아!"

칼잡이에 대한 선입견에 눈이 멀어 잠시 의뢰인이 누구인지 망각해버렸다.

만물상의 다이손 회장.

소울 시티를 움직이는 메가코프에 비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력의 주인.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분대장님."

"다들 명심하도록.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눈과 머리. 둘 다 있어야 한다는 걸."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3)

36화.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화물트럭 앞뒤로 소울 이터의 험비가 3대씩. 총 6대가 붙었다.

거대한 화물트럭과 험비 또한 장갑차처럼 거대해서 그 위용이 압도적이었다.

나는 멀찌감치에서 화물트럭을 따라붙으며 생각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어설픈 갱은 머리도 못 내밀겠군.'

소울 이터의 험비는 당연히 평범한 험비가 아니었다.

차량 탑에는 전자동 중기관총이 달려 있었고, 창문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서 유사시 벙커로 활용 가능했다. 장갑 역시 말할 것도 없이 튼튼해 보였고.

'문제는 어설픈 갱이 노리는 게 아니라, 블랙스컬이 노리는 건데······.'

소울 시티에서 벌어지는 굵직한 테러나, 전투에서 <블랙스컬>이 빠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이 이렇게 도시를 휘젓고 다니는데도 아직 멀쩡한 이유는, 그들이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까닭도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이유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긴 해도, 전투 실력은 진짜배기인 놈들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놈들에게 털린 기업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블랙스컬이 노린다면, 분명 누군가의 의뢰를 받았다는 뜻인데······ 저걸 누가 노리는 거지?'

잠시 머릿속에서 터미네이터를 노릴만한 기업 리스트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군.'

터미네이터는 최첨단 신형 전투 안드로이드다. 그 어느 때보다 무력이 중요해진 지금, 어떤 기업이 노린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돼.'

쓸데없는 생각을 날리고 워치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브. 40번 구역에서 30번 구역까지 가는 경로랑 지도 좀 띄워줄래?"

-알겠습니다, 마스터.

왼쪽 시야로 반투명한 지도가 떠올랐다. 나는 지도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항구에서 30번 구역의 만물상까지 가는 길은 크게 2개로 압축되는군.'

하나는 40구역 항만을 따라 아래로 길게 뚫린 해안도로를 타고 42번 구역으로 진입. 이후 30번 구역으로 이동하는 길.

다른 하나는 도시 내부의 도로를 따라 40구역, 42구역, 31구역을 그대로 횡단해 30번 구역으로 이동하는 길.

'해안도로를 타면 돌아가긴 하지만 시야가 열려있어서 습격은 쉽지 않을 테고, 도시 내부 도로를 따라 횡단하면 거리는 짧지만, 변수가 많다. 특히, 42구역에서 31구역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산길이라서 습격에 취약해.'

지도만 보면, 누가 봐도 해안도로를 타는 선택을 했을 거다.

약간 돌아가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게 최우선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선택을 하겠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누군가 물건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다이손 영감이다. 그랬기에 나를 따로 고용한 걸 테고.

아마 귀찮게 돌아가는 선택보다, 빠르게 횡단하는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해안도로로 가는 척 페이크를 주다가 내부 도로를 타고 빠르게 산길을 횡단하려 하겠지.'

이게 통하기만 한다면, 적들은 제대로 된 습격 타이밍을 잡지 못할 거다.

······제대로 통하기만 한다면.

* * *

멀리서나마 보이던 해안가가 점점 멀어졌다. 예상대로 해안도로가 아니라 산길을 횡단하는 결정을 내린 거다.

'역시 평범한 선택은 안 할 줄 알았어.'

평범한 운송을 하기엔 이미 첩보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엔 자신감도 있었을 거다. 설령 산에서 습격을 받더라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자신감.

소울이터의 명성다운 자신감이었고, 아마 평범한 갱의 습격이라면 그게 맞을 거다.

'하지만 블랙스컬이 노리고 있지.'

블랙스컬은 절대 소울이터에 뒤지지 않은 조직이다. 하물며 블랙스컬은 상대가 소울이터라는 걸 아는 상황. 분명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 터였다.

만약 습격을 받는다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공격이 행해질 거다.

부아아앙.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완연한 산악지대에 진입했다. 빽빽이 들어찬 빌딩 숲이 아니라, 진짜 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그리고······.

콰콰쾅! 쾅!

투타타타탕! 탕탕!

예상했던 대로 습격이 시작됐다.

* * *

그림자로 덮인 숲속 어디선가 로켓탄이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어지러이 꼬리를 움직이는 로켓탄에 대응해 이번엔 험비에서 퐁퐁퐁! 하고 유도로켓이 쏘아졌다.

험비에서 날아간 로켓은 적의 로켓탄을 정확히 저격했다.

피이이이우!

콰쾅! 쾅!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이언돔이었던가? 로켓을 로켓으로 막는 첨단 방어 체계.

나는 새삼스레 이 세계의 무기기술에 혀를 내둘렀다. 전용포대가 아니라 달리는 차에서 로켓 저격에 성공한 거니까.

습격이 시작되자, 소울이터 험비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어떻게든 빠르게 뚫고 지나가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 의도는 화물트럭이 멈춰섬으로서 꺾어야 했다.

'역시 도로를 막았군.'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화물트럭 한 대가 도로를 가로로 막아선 탓이다.

물건이 실린 화물트럭과 소울이터의 험비까지 전부 멈춰섰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투타타타탕!

콰쾅! 쾅!

"차량 엄폐대형으로 위치해!"

"빨리 움직여!"

"중기관총 9시 방향 대응 사격!"

"저격수가 있다! 체크해!"

"씨발! 맥스가 맞았다!"

전투는 순식간에 일어났고, 전장은 난장판이 됐다.

언제 지뢰를 밟은 건지 험비 2대는 뒤집힌 채 불타고 있었고, 그 뒤로 간신히 피한 소울이터 요원들이 부상자를 수습하고 있었다.

다른 험비들은 재빨리 총알이 날아오는 숲속을 향해 차량을 길게 늘어뜨렸다.

험비를 엄폐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이윽고 한발의 로켓탄이 유도로켓의 저격을 피해 험비 위로 떨어졌다.

콰쾅!

폭음과 함께 험비가 크게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그 뒤에 숨어있던 소울이터요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빠졌다.

험비가 그대로 불타올랐다. 포켓탄이 취약지점인 탑의 중기관총 포대를 뚫고 내부에서 터졌다.

그렇게 또 한 대의 험비가 사라졌다. 6대의 험비 중 3대가 벌써 날아갔다.

"쯧! 날로 먹긴 글렀네."

나는 짧게 혀를 차곤 바이크 뒷좌석에 매달아 놓은 드론 박스를 열었다.

"이브. 드론 띄워."

-알겠습니다, 마스터.

위이이잉!

드론이 하늘로 날아갔다.

빠르게 주변 정경이 시야에 띄워지다가, 이내 한곳을 포커스한다.

-마스터. 후방에서 적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접근합니다.

"확대해."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들을 살폈다.

바이크를 타고 광란의 질주를 하며 달려오는 그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아까 그놈이로군."

나에게 코인 정보를 묻던 블랙스컬 단원이었다.

역시나 적이 맞았다.

"음! 처음 써보는데 불편하진 않으려나 모르겠네."

나는 주섬주섬 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질감의 시커먼 천옷.

바로 비옷이었다.

"얼마나 피를 막아주려나."

나는 비옷을 걸치고 괜히 이곳저곳을 만져봤다.

사실 로제 앞에선 우스꽝스러워서 안 할 거라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

나라고 매번 전투할 때마다 피를 뒤집어쓰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비옷을 걸치고 녀석들을 기다렸다.

부아아앙!

부릉! 부릉!

끼이이익!

나를 발견한 바이크가 하나, 둘 멈춰선다. 화물트럭을 멀찌감치에서 따라갔던 내가 절묘하게 전장과 떨어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자식 뭐야?"

"우리 말고 다른 팀이 있었나?"

"대기조 아니야?"

"대기조가 왜 여기 있어? 저기 숲에 있어야지."

블랙스컬 단원들은 내 바이크를 보곤 다들 의아한 얼굴로 나를 살펴봤다.

그때 무리 안에서 들어본 목소리가 들리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 너 아까 그놈이잖아?"

"또 보는군."

코인 정보를 묻던 그놈이었다.

놈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관찰했다. 아까랑 다른 모습을 찾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비옷은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젖기 싫어서."

"뭐? 이렇게 날이 맑은데 무슨······"

놈이 의아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봤다. 다른 놈들도 괜히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내 고개를 내저은 놈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대체 언제 따라온 거야? 우리도 해안도로로 향하다가 바로 달려온 건데."

"처음부터 따라가고 있었는데."

내가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놈의 눈빛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눈동자를 데룩데 룩 굴리던 놈이 잔뜩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우린 그런 소리를 들은 적 없는데 너 혼자서 따라붙었다고? 들키지 않고 말이지?"

"들킬 이유가 있나?"

"이유가 있냐고? 저 의심병 걸린 하이에나들이 바이크가 뒤쫓는 걸 절대 모를 리가 없잖아!"

놈의 고함에 다른 블랙스컬 단원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전장이 코앞이라 총은 이미 빼어든지 오래다. 당장에라도 총구에서 불을 뿜을 기세였다.

철컥!

놈이 나에게 소총을 조준하며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누구야!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이대로 뒈질 줄 알아!"

나는 놈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뒤에 서 있는 나머지 블랙스컬 단원들의 얼굴도 주르륵 훑어봤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나? 네놈들 저승으로 보내줄 저승사자."

은빛이 공간을 갈랐다.

서걱.

툭.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진 놈의 머리가 발치에 굴러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죽어서도 몰랐던 듯, 놈의 얼굴은 흥분한 얼굴 그대로였다.

털썩.

뒤늦게 놈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힘없이 허물어지는 방향으로 피분수가 뿜어진다. 옆에 서 있던 몇 놈이 그대로 피를 뒤집어썼다.

그제야 움찔한 블랙스컬 단원들이 반응한다.

"이, 이런 씨바알! 죽어!"

"쏴! 죽여!"

투타타탕!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근거리에서 발사된 수십 정의 탄환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내게 그런 움직임들은 너무나 하찮았다.

움직이는 총기들.

불을 뿜는 총구.

쏘아져 나온 탄환.

그 모든 게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흘러갔다.

타아앙! 타아앙! 타아아앙!

느릿하게 쏟아지는 탄환의 궤적을 비집고 칼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친 칼날. 한 놈의 몸이 비스듬히 갈라진다.

"꺼억······."

단말마를 내뱉은 놈의 시체를 칼날에 꿰고 그대로 몸을 회전한다. 탄환의 사각이 만들어진다.

퍽퍽! 사각에 낀 탄환이 시체를 두드렸다.

오른발을 강하게 지지하며 몸을 튕겼다. 내 몸은 정확히 쇄도하는 탄환과 탄환 사이를 꿰뚫으며 전진했다.

서걱.

또 한 놈의 머리를 날렸다.

공중에 떠오른 놈의 얼굴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서걱. 서걱.

툭. 툭. 데구르르.

나는 가을 벼를 추수하듯 놈들의 머리를 추수했다.

두 번의 칼질은 필요치 않았다.

칼질 한 번에 한 놈의 목숨이 여지없이 떨어졌다.

"씨이발! 왜 안 죽는 건데! 왜!"

"이 괴물 새끼! 뒈져! 뒈져!!!"

투타타탕!

과연 일전에 상대한 스캐빈저와는 투지가 달랐다. 열 명쯤 죽었을 때 스캐빈저는 공포에 질려서 도망칠 기세였다면, 놈들은 오히려 악에 받친 듯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물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쐐에에엑!

뎅겅!

허공을 찢은 칼날은 놈들의 목을 갈랐고, 그때마다 피 분수와 함께 놈들은 쓰러졌다.

나는 곳곳에 피 분수를 만들며 놈들을 도륙했다. 도로엔 폭우라도 내린 듯 피가 쏟아졌다.

후두둑. 후두둑.

핏방울이 비옷 위를 거칠게 때렸다.

바스락거리는 비옷은 특유의 소리를 내며 스스로의 기능을 뽐냈다. 마치 피는 내가 잘 막아주고 있어!, 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괴, 괴물······!"

수십 명에 달하던 놈들이 하나 빼고 전부 죽었다.

남은 놈은 탄창이 빈 소총을 들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뚝. 뚝. 뚝.

늘어뜨린 은빛 칼날 끝으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천천히 남은 한 명에게 걸어갔다.

"이, 이 괴물 새끼! 죽어!"

소총을 던져버린 놈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

탕!

탄환이 쏘아졌다.

나는 물끄러미 날아오는 탄환을 바라보다가······.

팅!

칼로 탄환을 쳐냈다.

그 모습을 본 놈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자조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씨발······ 이런 괴물이 있다고 말은 안 해줬잖아······."

탕!

그리곤 자기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털썩.

"······."

나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놈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투타타타탕!

두두두두! 콰쾅!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4)

37화.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나는 전장을 확인했다.

소울이터의 요원들은 유일한 엄폐물인 험비 뒤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벌집이 될 테니까.

'다행히 험비 6대 중 3대는 남았군.'

초반에 쏟아졌던 로켓탄도 이제는 드문드문 날아올 뿐이었다. 그때마다 험비의 유도로켓이 발사됐고.

대체 적재량이 얼마나 되길래 저렇게 많이 쏴대나 봤더니, 유도로켓 크기가 술병보다도 작았다. 새삼스레 이 세계의 엄청난 과학기술에 놀랐다.

'물론 그 과학기술의 끝판왕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위이이잉!

쿵! 쿵! 콰쾅!

쩌적! 콰드드득!

3미터는 될법한 거대 「워 머신」 두 대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아스팔트가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바닥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움푹 패어나갔다.

거대한 힘과 중량의 격돌.

그 폭발적인 힘의 대결은 대기의 공기마저 터져나갈 정도였다.

'소울이터가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이유를 알겠군.'

「워 머신」 하나면 무장병력 1개 중대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쓸어버릴 수 있었다.

무적이나 다름없는 방어력에, 중기관총으로 무장했고, 무지막지한 힘에 순간이지만 슈퍼카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일 수까지 있으니.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인간 학살 기계'였다. 아마 평범한 적이었다면 진즉에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졌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은 블랙스컬이다.'

블랙스컬은 사전에 소울이터의 무장상황을 입수했고, 거기에 맞춰서 작전을 준비했을 거다.

「워 머신」을 맞춰서 동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분대장의 「워 머신」

만 묶는다면 화력으로 압도할 수 있다고 여겼겠지. 실제로도 그랬고.

그렇게 소울이터를 모조리 쓸어버린 뒤, 분대장의 「워 머신」만 남는다면······.

'아무리 「워 머신」이라도 대전차로켓 세례는 버티지 못할 테지.'

실로 적절하고 완벽한 작전이었다.

'나만 없었다면 말이지.'

나는 호흡을 고르며 두 「워 머신」의 싸움을 지켜봤다.

싸움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아마 「워 머신」의 무식한 방어력을 생각하면 당분간 승부가 나지 않을 거다.

'그럼 숲속을 먼저 정리해야겠군.'

휘익.

칼을 털어 희미하게 맺혀있던 핏방울을 모조리 털었다. 태양 아래 은백색 검신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나는 물끄러미 검신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그림자가 내려앉은 숲속을 쳐다봤다.

이제 다시 핏빛으로 물들일 시간이다.

"이브. 적 화력 상태 체크."

-총 서른세 명. 스물네 명이 소총을 포함한 중화기를 휴대했고, 여섯이 로켓포와 소화기를. 세 명이 저격총을 들었습니다.

"좋아. 저격수 위치만 표시해줘."

-알겠습니다, 마스터.

순간 시야에 희미한 붉은빛으로 점 세 개가 찍혔다. 아마 저격수의 위치리라.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대로 몸을 낮췄다.

콰직!

폭발적으로 증가한 근력이 허벅지를 통해 대지로 내리꽂힌다. 아스팔트가 쩌저적! 하고 갈라지며 발자국을 남겼고.

휙!

그대로 튕겨 오른 몸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숲속의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서걱!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블랙스컬의 머리가 허공에 날았다.

푸슈슈슈!

놈의 몸이 기우뚱하고 쓰러지며, 그 방향으로 피분수를 뿜었다.

"으, 응? 이게 뭔······?"

바닥에 엎드려있던 저격수가 머리 위로 쏟아진 끈적한 액체에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었다.

이내 손에 묻은 끈적한 액체의 정체가 피라는 걸 알고 놈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서걱.

툭. 데구르르.

놈의 머리도 바닥을 굴렀다.

"하나 없앴고."

잡다한 놈들은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저격수만 우선 노린다!

나는 그대로 숲속을 질주했다.

그림자를 따라서. 때론 나무를 박차 허공을 가로지르며.

툭.

촤르륵!

나무를 밟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힘을 담아 그대로 한 놈의 몸을 갈랐다.

놈은 데칼코마니처럼 양쪽으로 쓰러졌다.

"저,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뭐, 뭣?"

멀리서 적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죽였던 놈들이 발견된 듯했다.

그제야 늘어진 고무줄 같았던 숲속 내부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승기를 점하고 있다가 허를 찔렸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겠지.

"안 그래?"

바닥에 엎드려있던 저격수와 눈을 마주친 내가 물었다. 적이 나타났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거다.

"저, 저, 적이······! 컥!"

칼날이 놈의 목을 갈랐다. 조금 얇게 베였다. 놈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든 탓이었다.

덕분에 놈의 머리는 절반만 잘린 채 바닥에 처박혔다.

"여기다! 적이 여기 있다!"

투타타탕!

과연 정예는 정예인지, 그 짧은 사이에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두 놈 잡았으니, 한 놈 남았군.'

나는 그대로 나에게 총을 갈겨대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탄환의 궤적을 피하고, 중심에 이른 탄환은 칼로 쳐냈다.

티팅! 팅!

그리고 그대로 놈의 심장을 찔렀다.

"커, 커억!"

나는 놈을 칼에 매달고 그대로 앞으로 달렸다. 옆에서 쏘아진 총알은 내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했고, 정면에서 쇄도하는 총알은 시체방패로 막았다.

그렇게 백 미터가량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나는 그대로 시체방패를 버리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위다! 놈이 위로 뛰었다!"

"어, 어디? 어디야?"

"안보이잖아! 씨발! 어디 갔어?"

놈들이 소울이터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숲속은 내겐 최고의 지형이었다. 즐비한 나무들은 탄환을 막아줬고, 빽빽한 숲속의 그림자는 내 움직임을 숨겨줬다.

나는 나무 위를 달리다가 붉은 점을 확인하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콰드득!

저격수가 자신의 저격총과 함께 일도양단되어 양쪽으로 분리됐다. 나를 노리기 위해 총을 들고 움직이다가 그대로 당한 거다.

'셋. 모두 처리했군.'

나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블랙스컬의 움직임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나?"

휘익.

다시 한번 칼날을 털었다.

숲속의 그림자를 머금은 칼날은 어둠 속 야수의 안광과도 같았다.

지이잉!

칼날이 울음을 토한다.

야수가 먹이를 발견했다.

* * *

서걱!

잘린 머리가 숲 너머로 바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본의 아니게 안타를 쳐버렸군.

"후우. 이놈이 마지막인가?"

늘어뜨린 칼날의 핏물을 한 차례 털었다. 진득한 핏방울이 땅바닥에 흩뿌려진다.

하지만 이미 주변도 피바다였다. 저격수가 사라진 블랙스컬은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저기만 남았군."

나는 뙤약볕 아래에서 열심히 아스팔트를 부숴대는 두 「워 머신」의 싸움을 지켜봤다. 서로 주먹질, 발길질을 해대다가 한쪽의 장갑이 먼저 망가지는 쪽이 패배하는 지루한 승부다.

물론 나는 그런 지루한 승부를 구경할 마음이 없었다.

"······되려나?"

칼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물결무늬가 그려진 은백색 검신은 처음 그때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간직했다.

여기서 포스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순간적으로 「워 머신」의 장갑을 꿰뚫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그 이상의 것이 가능하다는 느낌이 간질거리며 들었다.

지이이잉!

칼날이 울음을 토했다. 포스를 머금은 칼날의 경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주변으로 섬뜩한 예기를 흩뿌렸다.

스르륵!

왼손으로 칼날을 쓰다듬었다. 칼날을 스치는 손바닥이 그대로 쩍하고 갈라지며 피가 쏟아졌다.

-마스터!

귀에서 이브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이브의 목소리를 의식 저편으로 날리고 다시 칼날에 집중했다.

피를 머금은 칼날이 은백색 칼날을 진홍빛으로 물들였다. 뚝뚝 흘러내린 핏방울이 칼날을 전체를 적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으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손에선 계속 피가 흘러내리 는대도 불구하고 말이다.

째애애앵!

검명의 울음소리에서 한 단계 높은음의 소리가 울렸다. 마치 검이 울부짖는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칼날 전체를 적시고 있던 핏물이 사라졌다.

아니, 칼날에 흡수됐다.

"흐읍!"

내 피를 전부 먹어치운 칼날이 불타는 것처럼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은백색 검신은 검붉은 빛을 토해냈고, 구름결 무늬는 피바다의 해일이 되었다.

나는 붉게 타오르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두「워 머신」을 노려봤다.

"싸움을······ 끝내주마."

콰직!

발끝이 대지를 박찼다.

내 몸은 한줄기 핏빛 섬광이 되었다.

* * *

소울이터 요원들은 죽을 맛이었다.

적의 습격과 동시에 주요 전력인 험비 2대가 박살 났다. 바닥에 설치한 대전차지뢰 때문이었다.

많은 요원이 전투불능에 빠졌고, 화력은 열세였다. 쏟아지는 총알세례에 제대로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저 새끼들 대체 뭔데!"

할로웨이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소울이터에 몸담고서 이런 개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위험한 순간이 없었냐?' 하면 분명 있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들은 명실상부 소울 시티 최강의 사병들이었다. 내심 시 정부군을 제외하고선 적수가 없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할로웨이! 맥스는? 어때?"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다가온 제너드가 물었다.

"아직 몰라! 일단 모르핀 주사해놨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데블아이(Devil Eye)는?"

"그건 안돼! 의식이 없어서 그거 놨다간 그대로 뒈질 수도 있다고!"

할로웨이가 한쪽에 쓰러진 맥스를 쳐다봤다.

습격과 동시에 날아든 총알이 재수 없게 가슴을 꿰뚫었다. 방탄조끼도 뚫어버린 걸 보니 저격이 분명했다.

피거품을 물진 않은 걸 봐선 다행히 폐를 피해간 것 같은데, 맥스는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제너드 역시 맥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대로 놔둬도 죽는 거 아니야?"

"빨리 치료만 하면 돼! 산만 넘어가면 바로 병원이 있어!"

"······씨발! 산 넘어가기 전에 우리 먼저 뒈지겠다!"

으드득!

누구라고 말할 것 없이 주변에 있는 모두가 이를 악물었다.

동료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머리만 처박고 있어야 한다니!

투타타타탕!

두두두두두!

"으윽!"

"숙여! 더 숙여!"

다시 집중 사격이 가해졌다.

기대있는 험비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아무리 엄폐용 장갑으로 제작됐어도, 이대로 가다간 오래 못 버틴다. 어디 하나가 부서지는 순간, 그대로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씨이바알! 제발! 제발 누구라도 도와줄 사람만 있다면!"

쿵! 쿵!

할로웨이가 분한 듯 험비를 주먹으로 쳤다. 어찌나 강하게 쳤는지 주먹이 피로 물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서도 주변에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알고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건 알지만, 정말 할로웨이의 말처럼 누구라도 도와준다면 발가락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투타탕!

탕!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적들의 공격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험비를 두드리던 총알은 물론이고, 폭우처럼 들리던 총소리도 점점 잦아들었다.

순간 긴장감이 치솟았다.

"이 새끼들! 뭐 하나 본데?"

"다들 사주경계! 측면과 후방을 주시해라!"

그렇게 한껏 긴장한 상태에서 주변을 주시했다.

화력으로 압도하고, 포위된 적을 사방에서 섬멸하는 건 기본 전술 중 하나였다.

"이깟 기본 전술도 모를 줄 알고? 눈에 보이기만 해봐라! 죄다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줄 테니!"

하지만 측면과 후방에선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오히려 전방에서 쏟아지던 공격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하고 끊겼다.

"······?"

"······뭐지?"

그제야 다들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포위섬멸을 하려면 전방의 화력지원이 필수다. 지금처럼 전방의 공격이 끊겨선 안 된다.

할로웨이가 험비 위로 고개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휘이이잉!

조금 전까지 총알을 비처럼 쏟아내던 숲속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뭐, 뭐야?"

제너드도. 아구치도. 다른 험비의 소울이터 요원들까지 전부 고개를 내밀고 숲속을 쳐다봤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에 빠진 숲속은 그림자로 얼룩져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적외선카메라는 물론이고, 열화상카메라까지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덕분에 작동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태양에 대비해 그늘진 그림자는 더더욱 시야 확보를 어렵게 했다.

그때 흔들리는 그림자 사이로 희끗한 무언가가 반짝하더니······.

휘이이익!

툭. 데구르르.

숲속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아스팔트 위를 뒹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

"이, 이건!"

사람의 머리였다.

그것도 예리한 무언가에 잘린 듯 깔끔한.

"서, 설마!"

할로웨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건 다른 소울이터 요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설마! 그 칼잡이가?'

그러고 보니 분명 운송 의뢰를 함께 받았었다. 뒤에서 따라오느라 눈에 보이지 않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꿀꺽.

누군가가 삼킨 침 넘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사실 누군가가 아니라 그들 전부였다.

휘이잉!

수수수수!

한차례 바람이 불고, 바람에 흔들린 나무들이 서로를 비벼대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순간 숨 막히는 긴장감이 그들을 휘어잡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이 치솟았다.

캉캉! 콰쾅!

쩌적! 쿵! 쿵!

이 순간에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존재들은 두 「워 머신」뿐이었다. 결국, 이 싸움의 승패는 「워 머신」의 승부에 결정이 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림자에 잡아먹힌 숲속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번쩍!

그림자를 뚫고 희끗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햇살에 반사된 무언가가 반짝였다.

눈이 부셨다.

다들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

사라졌다.

감히 눈으로도 쫓아가지 못한 속도다. 그리고 속도의 주인공은 그대로 적의 「워 머신」에게 쇄도했다.

카가가각!

칼날이 철판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다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워 머신」을 쳐다봤다.

역시나 속도의 주인공은 칼잡이었다. 양손에 칼을 쥔 칼잡이는 내려친 자세 그대로 적의 「워 머신」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다. 「워 머신」이 대충 손짓만 해도 인간의 허약한 육체는 그대로 찢어발겨 질 거다.

하지만.

그그극. 그그긍. 그긍!

찢어 발겨진 건 「워 머신」이었다.

왼쪽 가슴부터 오른쪽 허벅지까지 사선으로,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신기(神技)에 다들 넋이 나갔다.

뚝. 뚝.

칼날을 타고 핏방울이 아스팔트에 떨어진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칼잡이.

그가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거칠게 걷으며 말했다.

"······구경은 다 했나?"

쿵!

반 토막이 난 「워머신」의 상체가 뒤늦게 아스팔트에 떨어졌다.

"······."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그 누구도, 어떤 말도, 호흡조차도, 내뱉을 수 없었다.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5)

38화.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

끼긱끼긱!

도로를 가로막은 대형 화물트럭이 누군가에게 멱을 잡혀 끌려가듯 끌려간다.

화물트럭의 끌고 가는 건 다름 아닌 「워 머신」이었다.

쿵! 쿵! 쿵!

「워 머신」이 한걸음 걸을 때마다 바닥이 그대로 갈라지며 족적을 남겼다.

그 거대한 화물트럭을 끌고 가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조는 도로부터 우선해서 치운다! 2조는 후방의 바이크와 시체를 치우고! 숲속은 지원팀을 불렀으니, 지원팀에서 처리할 거다!"

살아남은 소울이터 요원들이 전장 수습을 시작했다.

도로를 가로막은 화물트럭 때문에 바로 출발할 수 없기도 했고, 소울이터와 시 정부 간에 맺은 상호조약에 전투 후 전장 수습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것만 지켜준다면 전투 중에 생긴 사소한 불법 사항은 전부 눈감아준다든가?

굉장히 현실적인 것 같기도 하고, 지극히 소울 시티답기도 했다. 귀찮게만 안하면 적당히 다 넘어가 준다는 소리니까.

나는 바이크에 비스듬히 기대서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몇 명의 요원이 반으로 갈라진 블랙스컬의 「워 머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넘기면 최고 가격으로 매입해주겠다고 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었다.

나야 돈 주고 사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42구역 갱의 「워 머신」도 그냥 버리고 올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이미 지나간 일이긴 했지만, 조금 아깝긴 했다.

'그나저나, 또 한 단계 성장했군.'

나는 조금 전 전투를 복기했다.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고,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스캐빈저들을 상대하면서 잠깐 느꼈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감각은 이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이제 포스를 칼에 담는 걸 넘어서 칼날에 두를 수 있게 됐다.'

이게 「워 머신」의 장갑을 찢어발기고 두 동강 낼 수 있었던 이유다.

단순히 칼의 경도를 올려 단단함과 예리함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칼을 날붙이 그 이상의 무언가로 만들어주는 신비한 힘.

게임에선 그 힘을 이르러 이렇게 표현했다.

'검기(劍氣).'

다룰 수만 있다면, 능히 피륙을 가르고 뼈를 절단할 수 있는 능력.

게임에서도 총보다 검기를 두른 칼이 보스전의 피를 깎거나, 각성종을 사냥할 때 좋았다.

다만,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검기치고는 너무 쎄다.'

검기가 강하다곤 하나, 지금처럼 「워 머신」의 강판을 찢어발길 정돈 아니다. 이 정도로 강했으면 밸런스 붕괴였지.

'어째서지? 내 각성 능력이 상급에 이르러서? 아니야. 게임에서 상급을 넘었을 때도 이 정도 힘을 보여주진 않았어.'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게임에서 만렙도 찍어봤지만, 검기가 이 정도 힘을 발휘하진 않았다. 칼도 지금 쓰는 칼보다 좋은 칼을 썼었고.

그러다가 문득, 게임과 유일하게 달라진 점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고사리 때문인가?'

고사리의 과다 섭취.

덕분에 튜토리얼부터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닐 수 있었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이 세계가 첫 각성의 힘을 레벨 1로 판단했다면······.

'그에 비례한 검기의 힘이 이렇게 강한 것도 이해가 간다.'

즉, 남들은 1, 2, 3······ 이 순서로 강해지는데, 나는 2, 4, 6, 8······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출발점이 달랐으니까.

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나도 내가 어느 정도까지 강해질지 상상이 되질 않는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솜털이 우수수 섰고, 빨라진 혈류가 거칠게 온몸을 내달렸다.

언젠가 막연히 상상했던 미래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 위로 군림하는 삶.

더 이상 강자에게 병탄(倂呑)당하지도. 인탄(躪呑)당하지도 않는 절대자의 삶말이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심장 박동이 급격하게 치솟고 있습니다.

이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기뻐서 그런 거니까."

-······?

그때 소울 이터 요원 몇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워 머신」을 축소화시킨 제이크 분대장과 몇몇 인원들이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나?"

제이크가 잔뜩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하긴 아무리 「워 머신」에 타고 있다지만, 그 격렬한 치고받고를 10분 가까이했으니 지칠 수밖에.

"알아서 따라붙을 테니 언제라도 준비되면 출발하지."

"음. 알겠다. 아! 그리고 이 친구들이 할 말이 있다는군."

"······?"

나는 의아한 얼굴로 제이크를 따라온 요원들을 쳐다봤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그러자 갑자기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잠시 그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한 일로 생색내고 싶진 않군. 의뢰가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동료 아닌가?"

"아······!"

그들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을 거다. 사실 나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이전에 했던 합동작전에선 고맙다는 말 대신 저격 탄환이 날아왔었으니까.

그렇게 서로 인사를 마무리하려는데, 이번엔 제이크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 소문만 들어선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였는데!

내가 이번 일은 꼭 소문을 내도록 하겠다!"

"저도 제 주변에 전부 소문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해결사님 칼자루만 봐도 갱들이 오줌을 지리게 만들겠습니다!"

음. 그건 좀······.

"이만 출발할 준비나 하지.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으니."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만 가보라고 손짓했다. 물러나는 제이크와 소울이터 요원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마스터. 이대로 그냥 보내십니까?

"음? 왜?"

-저들은 마스터의 활약을 제대로 못 보지 않았습니까? 소문을 내준다고 했으니, 저들에게 오늘 활약상을 제대로 알려주는 게 어떨까요? 제가 웹소설 형식으로 멋지고 뽕차오르게 원고를 써드릴 수 있는데요.

"······."

이 녀석 진짜 AI 맞나?

* * *

한편, 험비에 탑재된 카메라로 전황을 지켜보던 다이손이 얕은 탄성과 함께 중얼거렸다.

"역시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군."

「워 머신」을 박살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이 바닥이 워낙 뜬소문이 많아서 반신반의했었는데, 직접 보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면이 있었다.

"순수하게 칼로만 「워머신」을 베어버리다니······."

처음 강현재를 만났던 그 날이 떠오른다. 칼 한 자루 달랑 차고 나타나,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해결사라 소개하던 그 모습이.

그때는 그저 호기심 반, 직감 반이었는데, 이런 진짜배기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예상은 했지만······ 역시 각성자겠지?"

그것도 온갖 소문이 들려오는 각성자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축에 속하는 각성자일 거다.

맨몸으로 「워머신」을 박살냈다는 소문은 여태껏 들어본 적 없으니까.

"성격도 나쁘지 않고, 예의도 나름 차리는 걸 보면 관계를 더 깊게 가져가도 괜찮을 녀석이야. 그 입맛만 좀 어떻게 하면 좋을 텐데."

파란색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속이 안 좋아질 것 같다.

"흠! 의뢰를 훌륭하게 완료했으니, 그에 걸맞은 선물을 줘야 할 텐데······."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칼잡이니 무기도 딱히 필요가 없어 보이고, 움직임을 보니 다른 칼잡이들과다르게 방어구도 거추장스러워할 것 같고······ 그렇다고 조기경보드론을 주자니, 그건 너무 과하고.

······뭐가 좋으려나?

"가만있자······ 녀석이 지금 호텔에서 머물고 있던가?"

다이손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칼 한 자루 달랑 차고 왔다지만, 아직도 호텔에서 머문다?

"좋지 않군. 좋지 않아. 보기와는 다르게 엉덩이가 가벼운 모양이야."

다이손은 이런 방랑벽이 있는 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든 정을 붙이지 않고,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안락함을 대가로 도시의 억압과 압제에 따르느니, 초원의 자유를 더 갈망하는 자들. 집시, 혹은 노마드라 불리는 부류들.

하지만 강현재는 조금 달랐다.

"녀석을 집시나 노마드로 보기엔 어려움이 많지."

일단 깨끗했다. 물이 귀한 세계라 집시나 노마드는 물론이고, 하층민들 대부 분이 잘 안 씻으려고 한다.

게다가 머물고있는 곳도 싸구려 모텔이 아니라, 조금 허름하지만 깨끗한 호텔이었다.

태생이 집시, 노마드, 하층민은 절대 아니었을 거다. 그들은 청결과 돈을 맞바꾼 자들이니까.

"아마 뭔가 사연이 있겠지. 칼잡이가 된 것도, 홀로 떠돌아다닌 것도."

그렇다면 답이 나온다.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환경만 갖춰진다면, 강현재의 방랑이 끝날지도 몰랐다.

"그걸 빌려줘야겠군. 편하게 엉덩이 붙일 곳이 생기면,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도 있겠지."

다이손은 강현재를 놓치기 싫었다.

각성자의 등장으로 세계가 격변하고 있었다. 이 변화의 쓰나미에 굳건하게 버티려면, 어떤 외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세계의 질서가 바뀌고 있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 새로운 질서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제는 잊혀진, 소울 시티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할 수도 있겠지."

* * *

소울이터의 지원팀이 도착하고, 우리는 의뢰를 속행했다.

산을 넘어가자 바로 31구역이 나왔고, 40번대 구역과는 다른 치안 상황에 우리는 무사히 만물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고생했네. 이번 전투의 보상은 넉넉히 지급될 걸세. 사망자의 위로금도 특별히 챙겨줄 거고."

만물상 입구에 나와 있던 다이손이 노고를 치하했다. 소울이터 요원들은 기쁜 얼굴로 환호성을 질렀다. 힘겨운 전투 끝에 맞이하는 보상의 단맛은 그 어떤 것보다 황홀했으니까.

소울이터 요원들이 컨테이너를 마저 만물상 창고에 옮기러 떠나자, 다이손이 나에게 턱짓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는 의미였다.

만물상의 최상층.

다이손의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자네도 수고했네. 자네가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어."

"보수나 넉넉히 주시면 됩니다."

"푸하핫! 그래. 이게 자네 모습이지."

다이손이 유쾌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물건이 무사히 도착해서 기쁜 건가 싶었다.

"안 그래도 자네에게 뭘 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네."

"······? 돈 말고 물건으로 주시려고요?"

솔깃한 소리에 저절로 관심이 갔다. 돈이 넘쳐나는 다이손 영감이 돈 말고 다른 거로 주려고 할 때는, 무조건 받는 게 이득이었다.

다이손이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쯧쯧! 자네가 다른 건 좋은데 돈이 걸려있으면 표정을 못 숨기는군? 그렇게 돈이 좋은가?"

아차차! 너무 속물 티를 냈나?

"흠흠! 제 목표가 뭔 줄 들으셨잖습니까? 부지런히 모아야죠."

"그건 돈으로만 구하기 어려울 텐데?"

"유지비도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이야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흐음! 너무 많은 돈은 때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네."

"그건 많이 있어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끌끌끌! 하긴, 자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테지. 좋아. 자네, 호텔에서 묵는 이유가 따로 있나?"

다이손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내가 호텔에서 묵고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제가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던가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호텔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뭐······ 딱히 고집하는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을 찾아서 묵다 보니 오래 있게 됐더군요."

"그럼 다른 곳으로 옮길 용의도 있고?"

"왜요? 집이라도 주시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호텔 운운하는 걸 보니, 어디 싼 호텔이라도 소개를 해주려는 건가 싶었다.

안 그래도 호텔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다른 호텔로 가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이제는 내 집이 필요했다. 물건도 보관하고, 무엇보다 칼을 휘두를 장소가 필요했다.

그런데······.

"맞다네. 호텔에 있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면 이사하도록 하게나."

"······? 네?"

"여기 출입카드일세. 17구역에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라 자네가 앞으로 지내기에 충분할 거야."

"······."

잠깐만. 진짜 준다고?

체인소드 맨 (1)

39화. 체인소드 맨

"와······ 여기가 이제 내 집이라고?"

나는 그저 감탄의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집의 위치를 들었을 때도 약간 기대 아닌 기대를 했었는데, 이건 기대가 아니라 상상을 뛰어넘었다.

"살다 보니 이런 곳에서도 살아보네."

커다란 통유리가 달린 창밖을 쳐다봤다. 아찔하게 내려앉은 주변 정경이 코딱지처럼 작게 보였다.

지상의 네온사인 불빛들은 아스라이 반짝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론과 부유자동차들이 벌레처럼 보였다.

단지 내가 있는 위치만 달라졌을 뿐인데, 지상의 모든 게 하찮게만 느껴졌다.

"이래서 부자들이 고층에서 사는 건가?"

나는 그게 확실할 거라고 생각했다.

-마스터가 이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 봅니다.

잠시 고층뽕에 취해있는 내게 이브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기쁘지. 내 평생 꿈이 내 집 마련이었거든. 2년마다 거주 불안정 찾아오는 환경에서 살다 보면 누구나 마찬가지일걸?"

물론 이 집을 다이손이 그냥 준 게 아니라, 빌려준 거긴 했다. 투자 목적으로 사놓고 안 쓰는 집이라나?

월세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상대가 다이손이라는 생각에 그만뒀다. 소울 시티전체를 통틀어서 열 손가락에 꼽힐 부자가 다이손이다. 누가 누굴 걱정해준단 말인가?

-제가 가진 데이터로 판단했을 때, 마스터가 지금껏 벌어들인 속도로 돈을 모으실 경우, 이 집을 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1년 안팎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 그 정도 시간이면 얻을 수 있는데, 그렇게 기뻐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거야······."

나는 무의식중에 대답을 해주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이브는 AI다. 아무리 딥러닝을 해서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 속성은 프로그램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가끔 잔망스러운 말이나, 농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배워온 말투나, 농담이니까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가끔 이게 진짜 AI가 맞나?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데 이 질문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AI라도 호기심이 있을 순 있다. 딥러닝이 조금 더 발달하면 호기심의 영역으로 가니까.

그런데 지금 이브의 질문을 달랐다. 이 질문을 분해해보면 '인간은 왜 확실한 성취가 가능한 일에 기뻐하는가?'라는 물음이다.

만약 이것도 딥러닝의 일환이라면, 지금 이브의 학습 영역은 '사물과 사고의인지'에서 '인간' 그 자체로 옮겨지고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판단하는 AI니, 당연히 이브의 결정일 테고.

'인간에 대해서 궁금해하다니? 다른 AI도 이러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왠지 아닐 것 같았다.

AI가 이 정도로 인간에 대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면, 이 세계 사람들도 AI를 단순한 프로그램 취급하진 않았을 거다. 분명 반려AI가 존재했을 테고,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겠지.

'이브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하다.'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기쁜 건 그냥 기쁜 거야. 거기에 이유를 찾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질적인 건 그냥 기쁘다라는 걸 느끼는 거지. 그게 감정(感情)이야."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걸 이해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야. 인간도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면 어려워. 그냥 느끼는 거지. 슬플 땐 슬프고, 화날 땐 화나고. 인간도 먼저 감정을 느끼고, 그다음에 이유를 찾아."

-감정이라는 건 어렵군요.

어딘가 답답한듯한 목소리다.

"어렵지. 그래서 AI와 생명체가 구분되는 이유고."

-······.

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창문 밖을 내려다봤다.

소울 시티는 오늘 밤도 텅 빈 밤하늘 대신 별빛이 내려앉은 불야성으로 가득했다.

* * *

로제는 요 며칠 기분이 좋았다.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비롯된 소문 때문이었다.

"흐응.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라니. 뭔가 더 있어 보이는 별명이잖아?"

이 소문의 시작은 당연하게도 <소울이터>였다.

그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만 돌다가, 험비에서 녹화된 장면 몇 개가 유출되면서 그 이름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영상은 로제가 흘렸다.

"다이손 할아버지한테 혹시 몰라서 영상을 받아놓길 잘했어."

그녀도 처음엔 단순히 궁금해서 받은 영상이었다. 강현재가 엄청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강한지 기준을 세울 수가 없어서.

중개인으로서 해결사의 정확한 능력을 파악해야 앞으로 의뢰 선정이나, 몸값흥정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영상을 직접 보고나니, 그녀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카메라 시선이 제한적이라 많은 걸 담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세상에, 「워 머신」을 칼날로 두 동강 내다니?

그전에 「워 머신」끼리 싸우는 장면이 없었더라면 가짜 「워 머신」으로 의심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진짜 비옷도 입어줬고······."

사실 이게 제일 컸다.

앞에서는 우스꽝스럽다느니, 절대 안 입겠다느니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말을 기억해줬다는 거다.

솔직히 그녀도 반쯤 농담으로 던졌던 말인데 말이다.

"아닌척하면서 은근히 친절하단 말이지."

대뜸 자신의 안목을 믿는다는 핑계로 그녀를 믿는다고도 말해줬고, 다른 해결사들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고.

강현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진 몰라도, 로제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지금의 강현재라면 믿어볼 만했다. 그게 뭐가 되었든.

"덕분에 중개인 순위도 많이 올라갔어."

'비옷을 입은 소드마스터'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지명의뢰를 위해 그녀의 사무실에 걸려오는 연락이 많아졌다. 강현재와 연락이 되는 중개인은 현재로 썬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덕분에 해결사 시장에 독점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그녀의 중개인 영향력 순위가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로제는 몇 계단이나 껑충 뛴 순위를 생각하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다들 「마스터」급 해결사에 목을 매는 거구나."

중개인 영향력 순위가 올라가면, 그만큼 비싼 의뢰를 수주받을 수 있다.

이건 로제에게도 좋은 소식이었지만, 항상 비싼 의뢰를 찾았던 강현재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윈-윈이랄까?

"흥흥~ 선물로 뭐를 해주면 좋을까~?"

로제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까딱거렸다. 드레스 끝자락이 출렁이며 검정스타킹을 신은 발목과 새빨간 스트랩 슈즈가 춤을 췄다.

탁!

소파에서 일어난 로제가 중얼거렸다.

"그때 칼이 10미터쯤 길어지면 좋겠다고 그랬지?"

예전에 비옷 이야기를 할 때, 강현재가 지나가듯 '칼이 길어지면 피를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있다' 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자신처럼 강현재도 반쯤 농담이었겠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런 칼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을 알고 있다.

"그 공방이 아직도 있으려나?"

평범한 도검공방이 아닌 늘어나는 칼을 만들 수 있는 특수공방.

그녀가 알기로 그 공방은 그녀의 구역인 33구역에 존재했다.

* * *

위이이잉!

전기모터 특유의 소음과 함께 새까만 대형세단이 갓길에 멈춰섰다.

탁.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느다란 발목이 문밖으로 나온다. 쏟아지는 햇살에 살짝 미간을 찡그린 로제가 중얼거렸다.

"아, 햇빛. 전화는 왜 안 받는 거야?"

그녀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차 뒤로 가더니 톡톡 트렁크를 두드렸다. 그러자 트렁크 문이 양쪽 열리며 네모난 무언가가 굴러 나왔다.

대략 1.5미터 정도 크기로 보이는 대형 상자였는데, 얼핏 보기에 여행용 캐리 어처럼도 보였다. 물론 캐리어치곤 지나치게 크긴 했지만.

로제가 상자 위로 손을 가져가자, 정말 캐리어라도 되는 것처럼 손잡이가 튀어나왔다.

"얘도 오랜만이네."

슬쩍 미소를 지은 그녀가 손잡이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여행객이었다.

두리번거리면서 길을 찾던 로제가 마침내 목적지를 찾았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경쾌했다. 어쩌면 그녀의 빨간 구두가 내는 발소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 여기가 맞나?"

마침내 도착한 건물을 올려다보는 로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건물의 겉모습이 낡고 허름했다. 지저분하게 붙은 전단지들과 창문에 낀 누런 먼지가 더욱 그렇게 느끼게 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휴우. 다행이다."

다행히 겉모습과 다르게 내부는 깨끗했다. 물론 깨끗하다뿐이지, 다른 공방이나 상점처럼 화려한 광고판도 없었고, 반갑게 맞이하는 안드로이드도 보이질 않았다.

로제가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돌돌돌. 여행용 캐리어도 그녀 뒤를 따라왔다.

"누구시오?"

그때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걸어 나왔다.

거구의 사내였다. 구릿빛 피부와 얼굴을 뒤덮은 수염은 누가 봐도 마초를 떠올릴 정도로 굵직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가장 눈에 띄는 건 양팔이었다. 인조 피부도 덧대지 않은, 차가운 은백색 크롬이 고스란히 보이는 기계 팔.

일견 험상궂은 모습이었지만, 로제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제대로 찾아왔군요. 여기가 <세븐 프롱드> 공방 맞죠?"

"음? 그건 맞소만······."

사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로제를 훑어봤다.

귀족 아가씨가 이런 공방에 무슨 일이지? 저 괴상하게 생긴 캐리어는 또 뭐고.

"그런 눈으로 보실 필요 없어요. 제작의뢰를 하려고 찾아온 거니까."

"제작의뢰 말이오?"

"네. 그, 이름이 뭐였더라? 막 채찍처럼 늘어나는 칼이던데. 이마~안큼."

로제가 허공에 대고 손짓을 하면서 설명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사내가 턱을 긁더니 중얼거렸다.

"흠! 체인소드(Chain Sword)를 말하는 건가?"

"아, 맞아요! 체인소드!"

"······그건 왜? 설마 아가씨가 쓰려는 건 아닐 테지?"

"제가 그런 무시무시한 걸 어떻게 써요? 그거 휘두르다가 본인 팔, 다리 자른 사람이 많던데요."

그래서 처음에 받았던 관심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시장에서 퇴출당했었지.

"크흠! 그건 칼을 제대로 휘두를 줄도 모르는 놈들이 사용하니 그랬던 거고."

"뭐, 그렇다고 치죠. 아무튼, 체인소드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요? 만들어놓은 걸 주셔도 되고요."

"그건······."

사내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칼을 만들 줄 모른다오. 그런 특수무기는 정말 특별한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거지."

"에이. 만드실 줄 아시잖아요."

"모른다니까? 여기 걸린 물건을 보시오. 그런 특별한 물건이 있어 보이오?"

짧게 한숨을 내쉰 사내가 보란 듯이 진열장을 가리켰다. 진열된 물건들은 대부분 전기톱이나 특수절단기, 플라즈마 커터같은 공업용 장비였고, 밭갈이 기계나 수경재배 키트 같은 농사용 장비도 존재했다.

어딜 봐도 무기처럼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로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무라마사 공작소> S급 장인 스미스 씨. 그만 간 보고 하나 만들어주세요."

"······그걸 어떻게!"

사내. 스미스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로제를 쳐다봤다.

자신이 <무라마사 공작소>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 도시에서 손에 꼽는다. 처음 이곳에 정착할 때 도와줬던 몇 명 빼고는 모르는 사실인데, 이 아가씨가 어떻게?

그 시선을 받은 로제가 특유의 도도하고 이지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33구역의······"

쾅!

그때 공방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이봐! 꼰대! 장사 언제 접을 거야? 엉?"

"이거 봐, 이거 봐. 아직도 이사할 준비를 하나도 안 해놨네? 전부 다 엎어줘?"

불량기 가득한 목소리와 껄렁한 걸음걸이.

갱이었다.

"뭐야? 장사를 접으라고 했더니 손님을 받고 있었어?"

"오호! 이런 누추한 곳에 오기엔 너무 예쁜데?"

"와! 살 떨리게 이쁘네? 아가씨, 필요한 물건 우리가 구해줄 테니, 우리랑 질펀하게 한번 놀까?"

깽판을 놓으려던 갱들이 로제의 얼굴을 보고 목표를 수정했다.

성형과 개조가 흔해 빠진 이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싸구려 느낌이 아니라 고급스럽게.

"······말로 할 때 꺼져라."

로제가 껄렁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갱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서릿발 같은 기세에 갱들이 움찔했다가, 이내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서 입을 헤벌쭉하게 벌렸다.

"크캬캬캬! 앙칼진 것 보게. 어디 그 성깔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볼까?"

갱 하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미스가 당황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역시 쓰레기들은 말로 하면 안 듣는구나."

로제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체인소드 맨 (2)

40화. 체인소드 맨

끼기기긱!

금속이 빠르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로제의 등 뒤에서 기다란 은빛 물체가 줄기줄기 펼쳐지더니, 그대로 갱의 얼굴을 후려쳤다.

"컥!"

달려들던 갱이 그대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흔들리는 걸음에 맞춰서 은빛 물체의 공격은 한 번 더 이어졌다.

퍽퍽퍽퍽!

은빛 물체의 정체는 변형된 캐리어에서 뻗친 총 8개의 기다란 크롬 촉수였다.

이 물체는 '실버 박스'로 불리는 호신용 로봇으로, 로제의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뭉툭하게 말려있는 촉수의 끝이 순식간에 갱의 전신을 두드려 팼다.

"꺼억······!"

갱은 비명도 크게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크롬 촉수가 가진 무게와 속도의 운동량은 전성기 타이슨의 핵주먹보다도 강했으니까.

"페르난도!"

"이, 이 맹랑한 년이!"

분노한 갱들이 각자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보온병, 휴대용배터리, 전자담배 등등을 꺼냈다.

이놈들이 미친 건가?

아니다. 생긴 건 저래도 모두 불법개조된 총이다. 우범지대인 40번 구역과 달리 30번 구역은 아주 가끔이지만, 단속도 하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 스미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고, 로제 역시 눈을 빛내며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하려는 찰나······.

"그만!"

갱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부하들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 그치만 대장! 페르난도가!"

"닥치고 총부터 집어넣어. 페르난도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어, 엉? 페르난도가 살았다고?"

"지, 진짜다! 숨 쉬고 있어!"

"이 자식! 기절을 그따위로 하다니!"

갱들이 우르르 쓰러진 페르난도에게 달려갔다. 얻어터진 페르난도의 얼굴은 피멍투성이에 앞니도 두어 개 바닥을 뒹굴었지만, 확실히 숨은 쉬고 있었다.

"실버 박스라······ 그쪽이 소문으로 들리던 33구역의 중개인 <로세툼>의 로제 콜레오넬인가 보군."

팔짱을 낀 대장이 로제를 바라봤다.

"내 소문이 당신들 같은 뒷골목 갱에게까지 퍼질 정도는 아닐 텐데?"

턱을 치켜든 로제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당당하게 대꾸는 했지만, 신경은 잔뜩 곤두섰다.

중개인의 지위가 이런 갱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인 건 맞으나, 기본적으로 중개인은 소문이 나는 부류가 아니다.

결국, 일을 해결하는 건 해결사들이니까.

그런데 한눈에 보고 중개인인 걸 알아채다니? 평범한 갱이 아니었나?

"그쪽한테 한때 관심이 있어서 말이야."

"······뭐?"

"아아. 오해는 하지 말라고. 당신 아버지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그쪽이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인 줄 알았더라면 진짜 관심을 보냈겠지만. 크흐흐흐!"

"······."

로제는 말없이 얼굴만 구긴 채 그를 노려봤다.

그때 쓰러진 페르난도를 들쳐업은 갱이 대장의 등 뒤로 섰다. 나머지 갱들은 다시 로제를 마주 보며 대치했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럼 오늘은 우리가 물러나지."

대장이 후퇴를 선언했다. 갱들의 얼굴에 미약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들도 로제가 중개인이라는 걸 들은 탓이다.

갱들도 내일이 없는 바닥 인생이지만, 그래도 누굴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목록엔 중개인도 들어가 있다. 중개인을 잘못 건드렸다간 언제 해결사가 찾아와서 목숨을 가져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도 기억해라. 오늘은 우연히 끼어들었다고 여기겠지만, 우리가 또 만난다면 그땐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겠다."

공방을 나가던 대장이 로제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미간을 꿈틀거린 로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중개인이라는 허물이 널 지켜주는 것도 그때가 마지막이라는 소리지."

"갱 따위가 무시하기엔 중개인이라는 허물이 클 텐데?"

그 말대로 중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갱단 하나쯤 지우는 건 우습다. 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둘과 가까운 존재가 중개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갱 대장은 입매를 비틀며 대답했다.

"크흐흐! 네 말대로 갱 따위가 상업지역 건물을 살 필요가 있을까? 궁금하면 다음에 꼭 보자고. 내가 밤새도록 땀나게 알려줄 테니. 흐흐흐!"

"······."

그 말을 끝으로 음침한 웃음과 함께 대장이 사라졌다.

끼기기긱!

허공을 떠다니던 크롬 촉수가 다시 실버 박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계음과 함께 변형됐던 캐리어도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시 넋이 나간 듯, 갱들이 사라진 입구와 크롬 촉수가 빨려 들어가는 실버박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스미스가 로제에게 물었다.

"정체가 뭐요······?"

그로서는 밤거리의 무법자인 갱들보다도, 눈앞에서 갱들을 두들겨 패 쫓아낸 로제의 정체가 더 불안했다.

드레스를 탁탁 털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로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33구역의 중개소 '로세툼'의 중개인 로제콜레오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환하게 웃던 미소 위로 싸늘함이 뒤덮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의뢰하실래요?"

"의, 의뢰? 갑자기 무슨······?"

"네. 제가 갱을 아주 싫어하는 실력 좋은 해결사를 한 명 알고 있거든요."

* * *

"이브야. 이 소파는 어때?"

나는 태블릿 PC의 화면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화면엔 하얗다 못해 순백으로 빛나는 거실용 소파가 띄워져 있었다.

-마스터. 집을 병원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전부 다 하얀색으로 채워 넣으면 어떻게 합니까?

"모, 모르니까 물어본 거 아니야······."

-그것보단 우측 세 번째 소파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검은색 특수합성 섬유로 오염에 특화된 상품입니다. 마스터의 병적인 결벽증을 봤을 때 이게 가장 알맞은 제품 같습니다.

"그 정도는 아닌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이브가 말한 소파를 선택해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럼 이제 뭐가 남았지?"

-필요한 물건은 전부 고르셨습니다. 냉장고는 있는 걸 쓰신다고 하셨으니, 남은 건 인테리어 용품 정도겠군요.

"아! 인테리어!"

태블릿 화면이 내일의 집 메인 화면으로 돌아왔다. 이 세계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는 것도 처음인데, 그게 집안 물품을 구매하는 일이라니.

새삼스레 엄청난 괴리감에 온몸에 솜털이 우수수 섰다.

와. 이거 실화냐? 이 사이버펑키한 세계에서 내 집을 꾸미고 있다고? 그것도 창밖엔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시티뷰를 보면서?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심박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아. 괜찮아. 새삼스레 기뻐서 그런 거니까. 이브야. 우리 참 성공했다, 그치?"

-어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 뭐, 그랬을지도. 이게 익숙해지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어렵군요.

이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말없이 그냥 피식 웃으면서 다시 태블릿 화면을 두드렸다. 내 공간,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은 인간이 아니라면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일 테니까.

그렇게 다시 이브와 함께 인터넷 쇼핑의 세계로 빠지려는 그때.

-마스터. 로제양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연결할까요?

"전화? 음. 그래."

전화보다 메시지를 남기는 걸 선호하는 그녀가 전화라?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아. 현재씨? 당신이에요?

"무슨 일이지?"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연락하는 사이에요?

"응. 그렇지."

-쳇. 재미없기는. 의뢰에요.

수화기 너머로 로제의 뾰로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얼굴이 떠올라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좋아. 사무실로 가면 되나?"

-아뇨! 제가 외부에 의뢰인이랑 같이 있거든요. 여기로 오세요.

"······밖이라고?"

나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안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밖으로 외출했던 걸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네! 33구역에 있는 제작 공방이니까 여기로 오세요. 주소 보내드릴게요.

"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 지금 출발하도록 하지."

-오시면 알게 될 거에요!

뚝.

나는 끊긴 전화를 확인하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흐음. 33구역이면 사무실 근처니 멀리 나간 건 아니라지만······ 그녀가 직접 만나러 나간 게 신기하긴 하군."

게다가 제작 공방이라?

그 부잣집 아가씨와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 그곳까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방문을 하셨을까?

"후······ 가보면 알겠지."

나는 태블릿을 책상에 올려두고 외출준비를 했다. 이브의 잔소리로 구매한 온통 검은색 일색의 상하의와 적당히 몸을 감싸는 가죽 재킷.

그리고······.

스르릉!

탁!

칼날을 한번 살핀 나는 고민 없이 검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칼잡이가 다시 나섰다.

* * *

"그러니까 이 아저씨가 <무라마사 공작소> 출신이라고?"

나는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눈앞의 사내를 살펴봤다.

스미스라는 이름의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왜요? 거기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니. 아직은 아닌데······."

아는 사람이라기보단, 알아야 할 사람이 있긴 했다. 공교롭게도 그 사람 이름도 스미스였고.

소울시티의 전설 중 하나.

극한의 개조 명인.

광휘의 스미스.

하지만 그 스미스가 등장하는 건, 캐릭터의 성장이 끝나가는 시나리오 극후반부였다. 아이템을 개조함으로써 템파밍이 끝난 후반부에 다시 목표를 부여한 거니까.

아직 메인 시나리오에 진입조차 못 한 지금 시점에 등장할 캐릭터는 아니라는 뜻이다.

"아직은?"

로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스미스에게 물었다.

"스미스 씨. 혹시 무라마사 공작소에서 왜 나오셨는지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그 갱들이 스미스 씨의 공방만 노리는 건지, 아니면 당신 자체를 노리는 건지 알아보려면 내가 알고 있는 게 좋습니다."

"나, 나를 갱들이 왜 노린단 말이오? 나는 그냥 철이나 두들기는 공방 장인일 뿐인데······!"

"그거야 당신이 무라마사 공작소 출신이 아닐 때 이야기죠. 도시에선 힘없이 능력만 있는 것도 저주입니다. 언제 납치돼서 소모품으로 쓰이다 죽을지 모르거든요."

"허, 헉! 그, 그 정도란 말이오?"

조금 부풀리긴 했지만 크게 벗어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위치가 드러난 사이버 러너의 경우 납치당하는 게 흔하기도 했고.

물론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부풀려 겁준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 스미스가 그 스미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지금 등장할 타이밍은 아니지만, 눈앞의 스미스와 내가 아는 스미스가 겹치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라마사 공작소의 스미스라는 신분. 게다가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구의 체형과 크롬이 드러난 팔. 그리고 무라마사 공작소가 있는 바닐라 시티가 아닌 소울 시티에 있다는 점까지.

'광휘의 스미스라면 분명 무라마사 공작소의 차기 마스터 경합에서 실력이 아닌 정치로 밀려났었지. 거기서 환멸을 느껴 떠난 그가 자리를 잡은 게 소울 시티였고.'

나는 말없이 스미스를 쳐다봤다. 불안한 눈빛으로 입술을 씹던 스미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하아······ 이걸 내 입으로 다시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스미스가 품속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동전처럼 보였는데 사이즈가 조금 더 컸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그걸 확인하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나는 받아든 동전을 살펴봤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무라마사 공작소 금속 명인 존 스미스]

'금속 명인?'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잠깐. 무라마사 공작소의 명인이라면······?"

"맞소. 공작소에서 단 다섯 명에게만 허락된 이름이요. 이제는 옛날얘기지만······."

스미스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 과거를 걷는 그의 눈빛은 아련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찾았다!'

이걸로 눈앞의 스미스가 훗날 소울 시티의 전설 중 하나로 불리게 될, 광휘의 스미스라는 걸 알게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극후반부에나 가능한 아이템 업그레이드가 지금부터 가능하다는 뜻이지!'

체인소드 맨 (3)

41화. 체인소드 맨

스미스는 무라마사 공작소의 다섯 명인 중 한 명이자, 유일한 금속 명인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금속 제품들은 모두 완벽을 넘어서서, 초기 디자인을 초월하는 명작으로 탄생했다.

"알다시피 무라마사 공작소는 수제 공방이오. 절대 같은 제품은 만들지 않고, 대부분 의뢰받은 물건을 만들어주지. 그게 어떤 물건이든 말이오."

이게 무라마사 공작소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며, 무서운 이유였다.

현존하는 기술로 어떤 물건이든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

그건 상상하기에 따라서 엄청난 물건이 나온다는 뜻이며, 전장의 판세를 뒤집는 비대칭전략무기를 만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수제 공방이 아니라 무기 공장이 되어 있더군. 그것도 더 은밀하게,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죽일 수 있는 무기들을 주로 만드는 공장으로."

스미스는 그때부터 무라마사 공작소의 변화를 위해 뛰어다녔다. 이대로 가다간 장인과 명인으로 불리며 인정받던 기술자들이 한낱 무기 공장의 기계 부품으로 전락할 위기였으니까.

그렇게 차기 마스터를 두고 다른 후보와 경합했다. 목이 터지도록 무라마사공작소를 위해 소리쳤지만, 사내 정치에서 처참하게 밀려서 패배했다.

결국, 기술자들의 성지였던 무라마사 공작소도 자본 논리로 인해 무기를 찍어 내듯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회의감이 들었소. 내가 왜 그곳에 남아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스미스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 소울 시티에 자리 잡은 겁니까?"

스미스의 시선이 사내에게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엔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의 고저도 뚜렷하지 않았다. 해결사라는 걸 몰랐더라면 안드로이드가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렇소. 그래서 여기에선 내가 만들고 싶은 물건을 만들면서 지냈지."

"그게 공업용 기계와 농업 장비는 아닐 테지요."

사내가 힐끗 진열장을 쳐다봤다.

"물론이오. 나는 냉병기에 로망이 있는 사람이오.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라고 대부분이 폄하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찾는 사람이 있는 물건이지. 당신처럼."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 스미스가 사내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순간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훤히 보일 정도의 표정 변화였다.

그 반응은 스미스조차 의아할 정도였다.

'이게 그렇게 놀랄 정도인가?'

냉병기를 다루는 장인이 드물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총화기가 발달했어도 못 채우는 부분이 있으니까. 은밀함이나, 휴대성, 근접성 등등.

그러다가 사내가 칼잡이라는 사실을 이내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만큼. 아니, 나 이상으로 냉병기 덕후가 칼잡이들이었지?'

자신은 그래도 공방에서 냉병기를 만드는 수준이지만, 칼잡이들은 직접 그 냉병기를 쥐고 사선을 넘나드니 말이다.

"냉병기를 다루는 무라마사 공작소의 명인이라······ 역시. 좋습니다.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역시? 뭐가 역시라는 거지?

잠깐 고개를 갸웃한 스미스가 이야기를 계속 해달라는 사내의 눈빛에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음? 아아.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렇지. 여기선 내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면서 지냈소. 그대도 알겠지만, 좋은 냉병기는 구하기 쉽지 않지. 그래서 점점 입소문을 타고 도시의 냉병기 애호가들이 하나, 둘 찾기 시작했소. 장사도 잘됐고, 단골손님도 있었다오. ······그때는 말이오."

"과거형인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스미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구릿빛 얼굴이 시커멓게 달아오르자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콧김을 내뿜은 그가 크롬으로 반짝이는 양주먹을 쾅쾅 부딪치며 말했다.

"그 갱놈들이 그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소!"

놈들은 나타나자마자 공방을 팔라며 온갖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곳에 자리 잡을 생각이었던 스미스는 거절했다.

그때부터 갱들의 패악질이 시작됐다. 걸핏하면 찾아와서 장사를 방해했고, 손님들에게 시비를 걸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입소문으로 찾아왔던 덕후들도 갱들의 위세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고, 점점 공방은 기울어갔다.

한때 번듯했던 외관에 먼지가 쌓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십니까?"

이야기를 전부 들은 사내가 스미스를 바라봤다. 마주한 시선에 담긴 사내의 눈빛에선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다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어떤 의뢰를 하더라도 완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

스미스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놈들이 다신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주시오."

그 말엔 미처 담지 못한 말이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즉, 폭력과······ 살인까지 하더라도 말이다.

사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 * *

나는 흔쾌히 의뢰를 수락했다.

이 스미스가 그 스미스라는 걸 확인한 이상, 우호 관계를 넘어서 더 가까운 사이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짝짝!

그때 여태껏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로제가 박수를 두 번 치곤 시선을 주목시켰다.

"해결사가 의뢰를 승낙했으니, 이제 보수 이야기를 해볼까요?"

"······? 그것도 정하지 않고 나를 불렀다고?"

"아뇨. 그것보다 보수가 약간 서프라이즈! 하거든요!"

로제가 텐션이 잔뜩 올라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푸른색 눈동자엔 어떤 기대감마저 엿보였다.

뭐지? 이 불길함은? 이렇게 텐션 높을 때 사고쳤던 게 소드마스터니, 흑발흑안의 검사니 하는 소문을 퍼트렸던 때인데.

게다가······.

"······서프라이즈?"

이 말이 더 불안했다.

특히, 저 장난기 짙은 입꼬리와 기대감 가득한 눈빛 때문에 더더욱.

"스미스 씨?"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스미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미리 얘기되어 있었는지, 스미스가 진지한 얼굴로 진열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수로는 이 검을 드리겠소."

그건 검이었다. 매끈하게 뻗은 검은색 칼날과 가드 없이 바로 손잡이로 이어진 특이한 검.

일견, 검이라기보단 검은색 쇠파이프처럼도 보이는 이 검은······.

"체인 소드?"

이 게임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무기지만,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칼잡이의 단점을 모조리 상쇄시키는 검.

바로 체인 소드였다.

* * *

33구역 서쪽 외곽.

40구역과 41구역과 인접해 있는 이곳은, 당연하게도 다른 곳보다 갱들의 출입이 잦았고 치안율도 떨어졌다.

"흠. 이곳인가?"

나는 로제가 알려준 갱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양조장을 찾았다.

싸구려 밀과 감자로 술을 만들어 내다 파는 하급 양조장으로, 품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에 간간이 여기서 만든 술을 먹고 사망자도 나온다는 곳이었다.

물론 주 소비층이 빈민들이었기에 크게 이슈가 된 적은 없었다고 했다.

"확실히 그런 술을 만들 외관이로군."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확실히 겉보기에도 낡고 허름했다.

공장 주변을 둘러싼 콘크리트 담장은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금이 가 있었다.

난잡한 그라피티와 지저분한 오물의 흔적. 곳곳에 방치된 채 굴러다니는 빛바랜 쓰레기와 갈라진 바닥을 뚫고 나온 잡초들까지.

30번대 구역이 아니라 40번대에서나 볼 법한 외관이었다.

"어이! 누구냐?"

천천히 입구로 다가가자 덩치들이 막아섰다. 미세하게 지직거리며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 낡은 조명이 덩치들을 비췄다. 누가 봐도 '나 갱이오!'하는 얼굴들이다.

나는 낡은 조명 위에 처진 거미줄을 힐끗 쳐다보곤 대답했다.

"스미스 씨의 공방인 <세븐 프롱드>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다."

"어? <세븐 프롱드>라면······?"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덩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따라와라."

* * *

공장 내부로 이동한 나는 기계설비 한쪽에 감시탑처럼 세워진 사장실로 향했다.

"영감탱이 대리인이라고?"

보스로 보이는 놈이 사장 명패를 앞두고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말했다.

뻐끔뻐끔.

물론 싸구려 시가를 뻐끔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스미스 씨의 대리인으로 왔다."

"영감탱이 대리인이든, 손주든, 애인이든, 뭐든 좋아. 그래서? 영감탱이가 가게를 판다던가?"

놈이 잔뜩 기대 섞인 얼굴로 물었다.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포기했다고 여긴 걸까?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아니. 이만 포기하라고 알려주려고 왔다. 앞으로 한 번만 더 공방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뭐? 이런 미친놈을 봤나!"

그게 신호였던 걸까?

놈이 버럭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나를 데려왔던 두 덩치가 주먹을 내뻗었다.

후우욱!

주먹을 가르는 소리가 거셌다. 덩치답지 않게 꽤 빠르기까지 했다.

물론 그게 끝이었다.

퍽! 퍽!

나는 달려드는 두 놈의 팔을 꺾은 뒤 그대로 가슴에 주먹을 한 방씩 꽂아줬다.

"끄아악!"

"꺼억!"

덩치답게 우렁찬 비명을 내뱉는다. 나는 쓰러지는 놈들을 강제로 일으켜 반대쪽 팔도 마저 꺾었다.

"꺼어억······!"

양팔이 반대로 꺾인 놈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 갱 보스가 다급히 책상을 열어 총을 꺼냈다.

"이, 이놈······ 컥!"

나는 놈에게 달려가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뒤로 날아간 놈이 벽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콰직!

발치에 떨어진 총을 그대로 밟아 부숴버린 뒤, 놈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쓰러진 놈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악을 썼다.

"너 이 새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 으아아악!"

나는 쓰러진 덩치들과 공평하게 놈의 양팔도 그대로 뒤로 꺾어버렸다. 양팔이 축 늘어진 놈이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 꿇었다.

스르릉!

소름 끼치는 울음과 함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싸늘하게 빛나는 은색 검신이 날카로운 예기를 토했다.

나는 칼날 끝으로 무릎 꿇은 놈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서 칼날을 마주한 놈의 턱이 덜덜덜 떨렸다.

"어디 해봐. 다음에 만날 땐 팔, 다리를 전부 분리시켜 줄 테니까."

나와 눈을 마주친 놈의 눈빛이 지진이라도 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공포로 수축된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그때 갑자기 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더니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얼거렸다.

"흑발흑안의 칼잡이를 만나면 조심해라······ 헉! 소, 소, 소드마스터!"

"······."

나는 말없이 미간을 구겼다.

* * *

"그, 그럼 살펴가십쇼!"

양조장을 나서는 내 뒤로 갱 보스가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했다. 축 늘어진 양팔이 덜렁거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갱은 꼬리에 불과했나.'

갱 보스는 알아서 모든 이야기를 술술 불었다. 대체 무슨 소문을 들은 건지, 연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아무튼, 내용은 이랬다.

갱들은 기업의 사주를 받고 <세븐 프롱드>를 비롯한 인근 지역 건물들의 주인에게 협박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가게면 장사를 못 하게 방해했고, 집이면 살 수 없게 밤낮으로 찾아갔으며, 도와주는 척 불법 사채를 알선하기도 했고, 몰래 접근해 마약에 중독시키기도 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갱의 악행이었다.

'놈들을 사주한 기업이 건설회사랬지? 싹 다 밀어버리고 재개발을 하려고 말이야.'

이 세계나, 저 세계나 건설회사 더러운 건 마찬가지다. 특히, 현금이 크게 오가는 업종의 특성상, 갱과 비리는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이곳은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사이버펑크의 세계. 머리에 총알부터 박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음?'

그때 무언가 강한 위화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수십 개의 시선이 나를 주시하는 기분.

나는 본능적으로 잡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철그럭!

집중력이 극한으로 올라간다. 소란스러운 소음이 멀어지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과 안드로이드가 하나씩 지워진다.

그렇게 극도로 날카로워진 감각이 주변을 훑었다. 움직이는 물체의 모든 정보가 초 단위로 뇌리에 새겨진다.

이윽고 낚싯바늘에 걸리듯 무언가 걸렸다.

긴 코트에 챙모자를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다. 그는 불규칙한 주변의 움직임과 달리,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지?'

그가 다가올수록 위화감이 강해졌다. 이제 위화감이 아니라 또 다른 감각이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고민이 됐다. '먼저 공격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나?'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챙모자를 두드렸다. 덕분에 아래로 짙게 늘어진 그림자가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때 옆을 지나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빠르게 스쳐 갔다. 길게 뻗은 불빛이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

씨익.

사내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섬뜩하게.

"······!"

그 순간.

부아아앙!

건물 사방에서 벌떼처럼 드론들이 날아올랐다.

독침 대신 총구를 들이밀면서.

체인소드 맨 (4)

42화. 체인소드 맨

별빛이 사라진 밤거리는 불타는 네온사인 불빛으로 대신 반짝였고, 허공을 부유하는 홀로그램은 화려하게 춤을 췄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사이버웨어를 임플란트한 사람들과 호객행위를 하는 안드로이드가 실랑이를 벌였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하늘엔 부유자동차와 비행선이 별똥별처럼 반짝거리며 날아다녔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랬던가?

투타타타탕!

눈앞에선 이 사이버틱하고 환상적인 광경을 뚫고, 총알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물론 내게는 더이상 이런 소총탄은 위협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쏜 탄환도 피하는 마당에, 하늘 위에서 쏟아내는 탄환이라면 더더욱.

티팅! 티티팅!

나는 대부분의 탄환 궤적을 파악해 피하고, 몇몇은 칼날로 튕겨내면서 드론에게 접근했다.

부아아앙!

가까이 다가가자 드론들이 거리를 벌린다. 내가 지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느낌이다.

'제법 나를 조사했나 보군.'

내 능력을 몰랐더라면, 수십 미터 아래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경계할 리 없다.

'누구지? 양조장에 의뢰를 넣은 건설사인가?'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방금 양조장을 나섰는데, 그 사이에 건 설사에서 용병을 고용했다? 가능성이 낮았다.

게다가 상대는 나를 이미 알던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드론의 움직임들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세계의 칼잡이는 경계보다 천대받는 존재였으니까.

투타타탕!

내가 움직이는 데로 드론이 벌떼처럼 몰려다녔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선다.

덕분에 거리가 순식간에 총알 세례로 난장판이 됐다. 아스팔트가 뒤집어지고, 도탄된 탄환으로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씨이-발! 밥 좀 먹자 개새끼야!"

"미친! 또 총질이야?"

"내가 더러워서 20번대 구역으로 들어가고 만다!"

총알을 피해 몸을 숨긴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거리에 총알이 쏟아지는데도 공포보다 짜증이 가득 담긴 음성들이다. 이런 총격전이 일상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사람들을 힐끗 바라보곤 다시 드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제법 나를 조사해본 모양이지만······ 아직 모자라는군.'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이런 소형 전투드론들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 테니 말이다.

뒤로 거리를 벌렸다. 나를 쫓아온 드론들의 고도가 낮아졌다.

나는 그 순간 강하게 바닥을 박찼다. 아스팔트가 쩌적! 하고 갈라진다. 대지를 밀어내는 반탄력이 느껴짐과 동시에 시야가 위로 떠올랐다.

단숨에 건물 4층 높이까지 도약했다. 대략 십 미터가 조금 넘어가는 높이. 여전히 드론들이 떠 있는 위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 움직임은 이제 시작이었다.

타타타탓!

단숨에 외벽을 짚은 나는 그대로 벽을 따라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90도로 쭉 뻗은 외벽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순식간에 수십 미터 높이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대로 외벽을 박차고 도약했다.

콰직!

외벽이 그대로 갈라지며 외장재가 떨어져 나갔지만, 덕분에 나는 수십 미터를 도약할 수 있었다.

쐐애애액!

단숨에 허공을 질주했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드론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마주 보며 총알을 쏟아부었다.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다. 허공에 몸이 뜬 이상 피할 수 없을 테니 기회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게 너희의 패착이다!'

스르릉!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별빛 하나 없는 밤하늘을 그대로 제련한 듯한 시커먼 칼날.

바로 체인 소드다.

번쩍!

밤하늘보다 더 새까만 묵빛 궤적이 하늘을 갈랐다.

콰쾅!

궤적에 걸린 드론 하나가 그대로 두 동강 나며 터졌다.

하지만 아직도 드론은 수십 대가 남아있었고, 그 거리 역시 제각각이었다.

그 순간.

철컥!

촤르르륵!

칠흑의 칼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숨어있던 검은 뱀이 몸을 뒤틀었다. 거칠게 춤추며 꿈틀거리는 표피가 어둡게 빛났다.

묵빛 궤적은 허공을 거침없이 유영하며 드론들을 집어삼켰다.

콰쾅! 콰콰쾅!

그건 마치 이무기가 승천하는 몸부림이었다. 칠흑으로 빛나는 궤적은 몸에 닿는 모든 걸 파괴했다.

몸이 기울었다. 나도 인간인 이상 허공에 오래 떠 있을 수 없다. 나는 중력으로 기울어지는 몸의 움직임에 맞춰 거칠게 검을 흔들었다.

묵빛 궤적이 다시 한번 출렁였다. 이무기가 포효하며 이빨을 드러낸다.

드론들이 다급히 멀어졌지만, 궤적을 피하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제아무리 드론이 빨라도, 쇄도하는 칼날보다 빠를 순 없었다.

한 차례 몸을 뒤집은 나는 가볍게 땅으로 착지했다.

후두두둑!

타당! 타당! 팅! 팅팅!

드론이었던 금속 조각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벌떼처럼 날아다녔던 드론이 모조리 사라졌다. 밤하늘이 다시 깨끗해졌다.

하지만 진짜 깨끗해지려면······.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나는 득달같이 전방으로 쇄도했다. 거리 위로 파괴된 드론 파편들이 후두둑쏟아져 내렸다.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진 거리에서 유일하게 우두커니 서 있는 존재. 챙모자를 쓴 괴인이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미친 걸까? 아니다. 이 정도 전투드론을 동원했을 정도라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 손바닥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더니 그곳으로 빛 입자가 몰려들었다.

-마스터! 전방으로 거대한 에너지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귓가로 이브의 경고가 들려왔다.

'미친! 설마 광자포인가?'

게임에서 봤던 광자포의 충전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한 이상,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광자포는 총알 따위와는 궤를 달리하는 무기다. 광자포의 광(光)은 빛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빛보다 빠를 순 없다. 충전이 필요한 무기 특성상, 이건 애초에 쏘지 못하게 하는 게 좋다.

'빨리!'

바람을 가르는 몸을 더욱 가볍게, 대지를 박차는 발끝은 더욱 강하게, 온몸을 휘도는 포스를 전부 끌어올렸다.

사지 백해로 포스가 뻗어 나갔다. 순간,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느려짐을 느꼈다.

양옆을 스치는 배경이 멀어지고, 시끄럽게 울리는 차량 경적과 유리창이 깨진 가게에서 울려대는 도난벨 소음이 먹먹해진다.

'더! 더 빨리!'

불타는 네온사인 전광판의 불빛도, 여전히 춤추는 홀로그램도, 고개를 빼꼼내밀며 욕설을 내뱉던 사람들도, 서서히 느려졌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움직임을 멈춰갔다.

'더욱 빠르게!'

찌이이잉!

그때 머리를 지끈하게 하는 강렬한 고주파음이 내 몸 안에서 뿜어졌다.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말 그대로,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멈춰섰다.

심지어 소리와 빛마저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꼈고, 온몸을 휘도는 혈류와 폭발할 것처럼 용틀임하는 「포스」를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게 제로의 영역인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첫 번째 관문.

제로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 * *

제로의 영역(Zero Zone).

극한에 이른 지각 능력이 한계를 초월하여 그 이상의 영역에 다다른 상태.

단계에 따라 주변의 속도가 느려지기도,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주변을 인지 하기도 하며, 나중엔 상대의 심리를 읽거나, 짧은 미래마저도 엿볼 수 있는 능력이다.

'이걸 벌써 얻다니.'

원래는 메인 시나리오 중반부쯤 가서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도 누구나 얻는 게 아니라, 꽤 복잡한 퀘스트를 깨야만 가능했다.

'운이 좋군.'

솔직히 능력은 탐이 났지만, 얻는 과정이 괴랄해서 원래 내 선택지에는 없는 능력이었다.

그게 아니면 머리에 칩을 박는 선택지도 있는데, 언젠가 말했지만 나는 멀쩡한 머리를 열긴 싫다.

'어쨌든 이걸 얻었으니······ 써먹어 봐야겠지.'

나는 멈춰진 시공간 속에서 시야를 집중했다. 챙모자를 쓴 괴인과 그가 내뻗은 손으로 몰려드는 빛 입자가 꽃가루처럼 휘날렸다.

급격하게 상승한 인지능력이 모든 루트와 상황을 계산한다. 충전까지 남은 시간과 그게 압축되어 발사되는 궤적까지.

뜨끈하게 달아오른 뇌가 아찔하게 느껴질 때쯤, 나는 모든 계산을 마쳤다.

'지금!'

찌이이잉!

다시금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멀어졌던 소음들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웅얼거리며 들려왔고, 네온사인 불빛은 달무리처럼 번져갔다.

그 시공간 속에서······.

철컥!

촤르르르륵!

칠흑의 칼날이 공간을 도약하듯 뻗어 나갔다. 1m, 2m, 3m······ 끝없이 늘어 나던 묵빛 궤적은 마침내 목표에 이빨을 박았다.

서걱! 서걱!

한 번의 움직임으로 챙모자 괴인의 양팔이 날아갔다.

"······!"

당황한 듯, 챙모자 괴인이 날아간 양팔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는 그대로 공간을 주파해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이질적이다.

콰드득!

놈이 뒤집어쓰고 있는 챙모자를 쳐냈다. 그리고 여태 숨어있는 놈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소드마스터 강현재. 인사는 잘 받았나?"

목을 잡힌 채 허공에 매달린 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인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냐, 너?"

"블랙스컬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로 생각했나?"

블랙스컬?

갑자기 이 새끼들이 왜?

"의뢰에서 벌어진 일은 거기서 끝낸다. 이게 이 바닥 불문율 아닌가?"

나는 놈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블랙스컬과 얽힌 거라면, 바로 직전에 받았던 만물상의 의뢰였다. 그리고 그 의뢰로 내 소문이 널리 퍼진 것도 맞았다.

그런데.

"이번 의뢰야 그렇겠지. 하지만 남부지역 그레이트 필드의 마약농장을 방해한건?"

"······!"

남부지역 마약농장이라면 튜토리얼의 감자공장일 텐데······ 이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나를 특정할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이번엔 간단한 인사였다. 하지만 다음에도 쉬울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나와 적이 되려는 건가?"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목을 틀어쥔 손아귀에 묵직한 반발력이 느껴진다.

우드득. 우득.

놈의 목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피부가 찢어지며 그 사이로 부서진 회로와 전선이 튀어나왔다. 놈의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눈 대신 달린 렌즈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이놈은 인간이 아니다. 그저 어딘가와 연결된 로봇에 불과했다.

"적? 너는 너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우리는 언제라도 너를 죽일 수 있다.

다만, 너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보류할 뿐이지."

"후회할 텐데?"

놈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때 제멋대로 움직이는 놈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어떤 놈이 만들었는진 몰라도 귀밑까지 찢어지는 기분 더러운 미소였다.

"크하하!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지!"

그 순간 이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폭발합니다!

대상을 지칭하진 않았으나, 뭐가 폭발한다는 건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

시내 한복판에서 폭탄을 터트리겠다고?

나는 놈을 움켜쥔 채 몸을 한 바퀴 회전했다.

콰직!

하체로 내려간 무게 중심이 땅바닥을 강하게 지지했다. 콘트리트 바닥이 힘없이 갈라졌다.

그대로 하체로는 땅바닥을 밀어내고, 잔뜩 부풀어 오른 팔근육을 사용해 놈을 하늘로 던졌다.

손에서 벗어난 놈이 쭉쭉 위로 올라갔다. 십 미터, 이십 미터······ 그리고 마침내 중력을 거스르던 놈의 속도가 느릿해질 무렵.

콰콰쾅!

공중에서 터져나갔다.

"······."

나는 사방으로 떨어져 내리는 불타는 조각을 바라봤다. 여기서 터졌으면 무조건 희생자가 발생했을 정도의 폭발력이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군.'

아니. 미친놈들 집단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싸움을 피해 숨어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나같이 불타서 떨어져 내리는 로봇 조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여주게 멋지네!"

"역시 불꽃놀이는 폭탄테러가 제일이지!"

"내가 이 맛에 이곳에 살지! 크흐!"

"······."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잊을 뻔했다.

이곳은 미친 세상이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1)

43화.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혹시 모를 후속 공격을 피해 길거리의 골목 사이로 숨어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달아오른 뇌가 점점 굳어가고, 온몸을 휘도는 혈류가 잠잠해진다는 걸 느낄 때쯤.

핑――

세상이 뒤집어지는 감각과 함께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크윽······"

-마스터! 괜찮으······

귓가에 들려오는 이브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눈앞의 시야가 까매졌다, 밝아졌다 반복하길 몇 차례. 나는 가까스로 품속을 뒤져서 술을 담아놓은 힙 플라스크를 꺼냈다.

덜덜덜덜.

나는 극심한 수전증을 앓는 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돌렸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건지,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뽕!

간신히 마개를 여는 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알콜이 쏟아진다. 킹 세종 17년산. 각성의 후유증을 제어하기 위해 준비한 술이다.

두근두근두근.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알콜을 섭취하자, 느릿하게 뛰던 심장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혈류를 따라 알콜이 돌면서 지끈거리는 두통이 옅어졌고,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엉망이 됐던 균형감각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터! 마···터!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서 죽으면 안 됩니다!

먹먹하게 들렸던 청각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욱. 안 죽어 인마······ 후욱."

두통도 멎고, 몸의 감각도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다.

여전히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온몸은 무기력증에라도 걸린 듯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웠다.

나는 기다시피 골목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지듯 등 뒤를 기댔다. 몸을 기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아예 드러눕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긴장이 풀려서 잠이라도 들면 곤란했다. 언제 부랑자나 도둑놈이 주머니를 털러 올지 모르니 말이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이번엔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브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톤과 뉘앙스가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뚝뚝 느껴졌다.

'······마음이라니? 확실히 내가 정상은 아니로군.'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만 하겠냐? 나도 놀랐다."

이번 발작은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급격했다. 아마 내가 『초재생』 을 얻지 못했더라면 이 골목길에 들어서기도 전에 쓰러졌겠지.

나는 차분히 몸 내부를 관조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이 특히 기프트의 반작용이 심했다. 다른 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딱 하나뿐이로군.'

바로 제로의 영역이다.

'게임 화면으로 봤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이야.'

찰나의 순간이지만 시공간을 지배한다는 것.

직접 겪어보니 이 능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능력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초입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멈추고, 공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산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내 힘의 50%는 부스팅된 느낌이야.'

게다가 제로의 영역이 발전할수록, 할 수 있는 퍼포먼스의 가짓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나중엔 공간이동에 가까운 양자도약까지 하게 되니 말이다.

'······물론 그때까지 몸이 버텨준다면 말이지.'

단 한 번.

그것도 찰나의 순간을 썼을 뿐인데도 이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이걸 전투 중에 또 사용할 수 있을까? 숨어있는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없었다면 몰라도 이대로 포기하긴 아쉽다.'

나는 시선을 내려 손에 쥔 힙 플라스크를 쳐다봤다. 열린 뚜껑으로 은은하게 알콜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의 물방울』을 얻는 거다. 하지만 그걸 구하려면 아직 멀었지.'

물건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살 돈은 더 큰 문제니까.

'결국, 또 돈이로군.'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봐야겠어.'

* * *

골목을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떨어졌다.

툭. 투둑. 투두두둑.

한, 두 방울씩 떨어지며 거리에 흔적을 남기던 빗방울은, 이내 굵은 빗방울로 변해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

빗방울은 금세 길거리를 한 폭의 수채화로 만들었다.

깜빡이는 네온사인 불빛과 사방으로 레이저를 쏘아내는 홀로그램이 빗방울에 번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알알이 맺힌 빛의 파편들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마스터?

잠시 그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자니, 귓가로 이브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래. 비옷이 있었지."

나는 바이크 수납함에서 비옷을 꺼냈다. 혹시 몰라 여러 벌 준비했는데, 이걸 진짜 비옷의 용도로 쓰게 될 줄 몰랐다.

비옷을 대충 걸치고 바이크에 앉았다. 어느새 바닥에 고인 빗물 위로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반사됐다.

부아아앙!

천천히 쓰로틀을 당겼다. 화려하게 채색된 수채화 풍경이 스쳐 간다.

나는 네온사인 불빛에 물들어 형형색색 물감으로 변해버린 빗길을 통과하면서 곰곰이 생각에 정리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내 의도대로 제로의 영역을 제어하는 일이다.'

이번엔 본의 아니게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다 썼다. 그래서 부작용도 심각했고.

이제 최소한의 부작용만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리미트를 확인할 차례였다. 그래야 오늘처럼 쓰러지는 일을 막을 수 있으니까.

'제로의 영역을 제어하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사이버네틱스 코어를 머리에 심는 것.'

사이버네틱스 코어(Cybernetics Core)는 쉽게 말하자면 인공두뇌였다.

물론 인간의 뇌와는 많이 달랐다.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인공두뇌+심장에 가깝달까? 스스로 에너지를 충전하거나 방출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머리를 열어서까지 기계를 박고 싶진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로 죽고 싶지, 기계로 죽고 싶진 않아.'

이게 내가 이 세계에 빙의되어 결심한 첫 번째 맹세였으니까.

어차피 이 악몽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나'로서······ 강현재로서 살아가겠다고 말이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두 번째 기프트를 얻을 때가 왔군.'

* * *

나는 곧장 로제의 사무실로 향했다. 어둠이 자작하게 내린 시간이었지만, 아직 잠을 자긴 이른 시간이다.

딸랑딸랑-!

언제나처럼 애처로운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로제의 고개가 홱 하고 올라온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의뢰는 끝났다."

"······그거 알려주려고 지금 왔다고요?"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 할 말도 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코끝으로 알싸한 냄새가 스쳐 지나간다. 매콤하지만, 달짝지근한 냄새.

조금 더 다가가니, 그녀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던 이유가 나왔다.

"······떡볶이를 좋아했나?"

그건 떡볶이였다. 그것도 딱 봐도 매울 것처럼 생긴 모 브랜드의 떡볶이가 생각나는 시뻘건 색이었다.

"야식으로는 분식이 딱이죠. 당신도 드실래요?"

로제가 우아하게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집었다.

세상에. 드레스를 입은 그녀와 떡볶이와 젓가락이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나?

'이게 K게임이었단 걸 이런 데서 느끼게 해주는군.'

하긴, 애초에 소울 시티의 배경 자체가 확대된 서울이다. 핵전쟁으로 망해버린 서구권 피난민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는 설정이니까.

"아니. 난 매운 음식은 안 좋아해."

"어? 매운 거 못 먹어요? 의외네~"

그녀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냠하고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는 그녀의 볼이 씰룩인다. 뭐가 그리 좋은지 고개를 까닥이며 리듬까지 탄다.

"그런데 할 말이 뭐에요?"

냠.

로제가 떡볶이를 또 하나 입에 넣으며 물었다.

"블랙스컬에 대해서 조사해줬으면 좋겠군."

"블랙스컬요? 그건 왜요?"

"아무래도 그놈들이랑 척을 진 것 같아서."

나는 반대편 의자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나를 노리고 준비했던 공격에 대해서.

그러자 오물거리던 떡볶이를 꿀꺽하고 삼킨 그녀가 테이블에 젓가락을 쾅! 하고 내려놨다.

"이, 이! 근본 없는 쓰레기 같은 용병 새끼들이 감히 로세툼의 해결사에게!"

그녀가 흥분으로 거칠어진 콧김을 내뿜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몇 번 더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더니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알아볼게요! 블랙스컬? 흥! 그 해골바가지 새끼들의 가루까지 모조리 털어주지!"

"······고맙군."

나는 살짝 놀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곱게 자란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입이 걸걸하네.'

오늘 그녀의 의외의 모습을 꽤나 많이 목격한다.

"아, 승질나서 정말!"

그녀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곤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얼굴이지만, 오물거리는 볼의 움직임은 쉬지 않는다.

'흐음. 낮보단 밤에 텐션이 더 올라가는 스타일인가? 이걸 뭐라고 하더라?'

'낮저밤이'였나?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그동안 3건의 의뢰를 완료했고, 양조장을 찾아 킹 세종보다 더 비싼 고급술을 구매했다.

이름하야 엠페러 광개토 17년산!

무려 1억 5천만 케이달러라는 경악스러운 가격의 술이었다.

"아직 아까워서 냄새만 맡고 있지만······ 이 정도라면 제로의 영역 한, 두번쯤은 버틸 수 있겠지."

모든 게임에서 그렇듯, 가격이 비쌀수록 효능도 올라가니까.

"뭐라고요?"

티 테이블에서 홍차를 만들고 있던 로제가 고개를 돌렸다.

"혼잣말이다."

"기분도 좋아 보이고 혼잣말까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마침 홍차가 완성됐는지, 양손에 찻잔을 들고 그녀가 다가왔다.

"고맙군. 뭐, 딱히?"

찻잔을 받아든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흐음~ 아닌 것 같은데······."

맞은편 의자에 앉은 로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화장법을 바꿨는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꼬리가 꼭 고양이를 닮았다.

고양이라? 잘 어울리긴 하네.

나는 피식 웃고는 홍차를 음미하며 물었다.

"그것보다 블랙스컬에 대한 정보는 아직인가?"

"아, 그거요? 아직 겉핥기만 하고 있는데,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겉핥기만 하고 있는데 어떻게 좋은 소식을 기대하지? 말이 앞뒤가 안 맞는데."

내가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묻자, 로제가 생글생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블랙스컬이 점조직인만큼 찾기는 어렵지만, 대신 그만큼 콩가루 조직이거든요. 조직에 대한 충성도는 전혀 없고 오직 돈만 보고 움직이니까요."

"원래 용병들이 다 그렇지 않나?"

"얘네는 조금 더 심해요. 돈만 된다면 조직 정보를 팔아먹는 것도 서슴지 않으니까. 안 걸리기만 하면 된다는 마인드랄까?"

"흐음. 그래서 그런 놈 하나만 걸리면 된다?"

"네. 마침 적격자도 몇 명 찾았고요."

"······그건 좀 놀랍군."

블랙스컬 단원을 찾는 거야 어렵진 않겠지만, 조직을 배신할 적격자를 찾아낸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확실히 눈앞의 이 아가씨의 중개인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긴 하다. 뭐, 100%본인 능력이라기보단 그녀의 아버지가 일궈놨던 인맥의 힘이겠지만.

"그걸 이제 알았어요? 당신은 정말 땡잡은 거라고요. 나처럼 능력 좋고, 예쁘고, 몸매 좋은 중개인을 어디서 만나겠어요?"

"······?"

능력 좋은 거야 그렇다고 쳐도, 뒤에 따라오는 다른 수식어와 중개인이 무슨 상관이지?

내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점점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마, 맞다! 의, 의뢰받으러 왔죠?"

그리곤 다급히 찻잔을 내려놓더니, 태블릿을 꺼내 두들겼다.

타닥타닥.

패드 위를 몇 번 터치하자,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반짝이더니 이내 지상으로 홀로그램을 투사했다.

"이번 의뢰는 메모리 배달부에게 현물로 메모리를 전달받는 의뢰에요. 되도록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게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해결사를 고용하길 원했고요."

허공에 그려지는 홀로그램으로 의뢰 내용과 주의사항. 그리고 메모리 배달부라고 말한 대상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떠올랐다.

나는 이 내용 중 이질적인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메모리 배달부?"

"아, 몰라요? 하긴, 흔히 보긴 어려운 직업이긴 하죠."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2)

44화. 안드로이드는 전기 고양이의 꿈을 꾸는가?

핵전쟁 이후 서로 간 왕래가 사라지면서, 넷(Net)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외부와 단절된 세상에서 넷은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그렇게 세계는 넷과 컴퓨터 공학의 발전으로 빠르게 핵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선 일상의 모든 게 넷상에서 이루어질 정도가 됐다.

그리고 이렇게 일상의 모든 걸 조작할 수 있는 넷의 세계를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라 불렀고, 이곳에 직접 접속하는 자들을 '사이버 러너(Cyber Runner)'라고 불렀다.

"이건 나도 아는 내용인데. 나를 무슨 원시인으로 생각하는 건가?"

"아무래도 칼잡이 이미지가 좀 그렇죠?"

"······."

"장난이에요. 길지 않으니까 그냥 들어봐요."

배시시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방사능으로 지구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못하는 인류에게 사이버 스페이스의 발견은 축복이었다.

단절된 세계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하나가 됐고, 0과 1로 이뤄진 매트릭스엔 어마어마한 정보의 파편들이 흘러다녔다.

개인 메일과 메신저의 대화 내용. 전송한 사진과 동영상. 웹툰과 웹소설 작가의 작업 내용. 기업 간의 계약서와 거래 내역. 연구소의 연구일지나 특허목록······ 등등.

넷과 연결된 모든 정보가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생각했다.

이렇게 전부 연결되어 있다면, 어떤 정보도 내가 원한다면 얻을 수 있겠다고.

그렇게 해커가 등장했다.

"메모리 배달부는 언제 나오는 거지?"

"이제 나올 거예요!"

한동안 해커들에 의해 사이버 스페이스의 모든 정보가 털렸다. 기업이 아무리 방화벽을 높게 세워도, 해커들은 유유히 매트릭스 속으로 뛰어들어 방화벽의 취약점을 뚫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걸 막아야 하는 기업과 취약점만 집요하게 찾는 해커의 싸움은 애초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결국, 기업들은 해커와 싸움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중요한 정보는 사이버 스페이스가 아니라 넷과 단절된 현실에 보관해야겠다고.

찬란했던 미래의 끝은,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였다.

"그래서 등장한 게 메모리 배달부다 이건가? 저장된 정보를 현실에서도 옮겨야 하니까?"

"맞아요. 주로 보안이 중요한 연구 자료나 특허기술이 이렇게 분리돼서 보관되고, 메모리 배달부를 통해 옮겨지죠."

"······이해가 안 되는데. 굳이 메모리 배달부를 이용해야 하나? 어차피 현실에서 옮길 거면 그냥 용병이나 해결사를 고용해도 되잖아?"

이게 의아한 부분이었다. 현물로 보관된 메모리만 잘 배달해주는 거라면, 메모리 배달부가 아니라 누구라도 가능한 거 아니야?

현실을 예로 들자면, 자료가 담긴 휴대용USB를 전달하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내 질문에 로제가 입꼬리를 씩 하고 올렸다. 그렇게 질문할 줄 알았다는 듯한 회심의 미소였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메모리 배달부가 어떻게 데이터를 옮기는지 아세요?"

"옮기는 방법이 따로 있나? 뭐, 특수 보관함이라도 가지고 다니나 보지?"

"오! 비슷해요!"

그러면서 로제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메모리 배달부는 데이터를 여기에 직접 보관하거든요."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 뇌에 보관한다고?"

"네. 사실상 절대 탈취할 수 없는 생체 메모리죠. 그래서 메모리 배달부라고 불리는 거예요."

"······."

나는 잠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 뇌에 데이터를 넣었다, 뺐다 한다는 게 대충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진화의 산물이다.

그런데 거기에 인위적으로 데이터를 넣었다, 뺀다? 그것도 배달부 일을 할 정도로 다량의 정보를 반복적으로?

"······그들도 부작용은 알고 그 일을 하는 건가?"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다.

"당연히 알죠."

"그런데도 그런 선택을 했다고? 돈을 얼마나 버는진 모르겠지만, 그깟 돈 때문에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 부작용은 바로 '나'를 잃어버리는 것.

다량의 정보가 반복적으로 뇌에 덧씌워지는 과정에서, '나'라고 정의할 수 있는 정체성도 함께 덧씌워진다.

그리고 그 끝엔, 인간도 뭣도 아닌 존재만이 남게 된다.

브레인 워싱이라고도 불리는 이 방법은, 테러 단체에서도 자살 폭탄 테러를 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선택하다니?

"현재 씨. 스스로의 정체성보다 눈앞의 돈과 쾌락이 더 중요한 사람도 있는 거예요. 아시잖아요?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

내 반응을 지그시 바라보던 로제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알고는 있었지만······ 항상 아는 것보다 더 빌어먹을 세계라는 거에 놀라게 되네."

"······."

우리는 그렇게 잠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