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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

세븐 프롱드가 있는 상업 거리에 도착했다.

나는 야외 공방과 연결된 뒷문으로 바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

한쪽에서 이브의 작업용 안드로이드가 커다란 망치를 들고 금속 덩어리를 깡깡거리며 잘게 부수고 있었다.

몇 번을 두드리고 파편을 골라내고, 다시 몇 번을 두드리고 골라내고를 반복한다. 무언가 원하는 걸 채취하고 있는 모양이다.

꼭 별 모양 달고나를 쪼개는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녹색 안드로이드라서 그런가?

그때 작업장 한쪽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스미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어서 오시오! 생각보다 빨리 왔구려."

단말기를 내려놓은 그가 성큼성큼 커다란 걸음으로 다가왔다.

항상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체구 하나는 진짜 압도적이다. 아마 이 세계가 사이버펑크 세계가 아니었다면 감히 시비를 거는 자는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세계는 타고난 피지컬보다 후천적으로 임플란트한 사이버웨어의 성능이 더 중요한 사이버펑크 세계.

저런 피지컬을 가졌으면서도, 갱에게 가게를 통째로 뺏길뻔한 과거가 있지 않던가.

뭐, 그 덕분에 이렇게 나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만.

"마침 오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진전이 있었습니까?"

나는 투박하게 내민 스미스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다.

"그대가 액체금속을 말했을 때, 사실 떠올랐던 게 몇 개 있었다오. 다만, 벌써 십 년 가까이 된 기억이라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지."

스미스가 작게 웃으면서 따라오라며 턱짓을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작업실을 가로 질렀다.

원래부터 그리 작지 않은 공방이었는데, 최근 들어 새로운 기계들이나 로봇들이 많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곳곳에 보이는 로봇용 기계 팔들이 무언가를 조립하거나, 용접하고 있었고, 컴퓨터에 앉은 작업용 안드로이드가 3D프린터를 출력하고 있거나, 시제품을 테스트한다고 자기들끼리 부딪치기도 했다.

처음 이곳에 왔던 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때는 스미스와 짐을 나르는 운송용 안드로이드뿐이었으니까.

"공방이 많이 커졌군요. 못 보던 로봇이나 물건들이 많습니다."

"아? 하하하하! 다 그대 덕분이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정말 고맙소!"

"저요?"

난데없는 감사 인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예전에 갱단을 쫓아준 걸 말하는 건가? 그게 벌써 언젠데 이제와서?

"소드마스터! 그대가 내가 준 칼을 사용하지 않았소?"

"아······ 체인소드라면 지금도 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공방이 커진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하하하핫! 소드마스터. 그대의 이름값을 너무 모르는 거 아니오?"

"······?"

이름값?

"지금 시대에 냉병기는 말 그대로 지나간 유물에 불과하오. 돈 많은 부자들의 수집품이거나, 과거에 취해있는 오타쿠들의 취미에 불과하지. 나도 마찬가지고. 하하하!"

스미스가 껄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소드마스터가 등장했다, 이거요. 이 냉혹한 도시에서 오직 칼 한 자루로 뒷골목의 정점에 선 칼잡이. 바닥부터 시작해 다섯손가락의 선택을 받은 해결사. 이게 그대란 말이오."

"하하······. 그런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띄워주는 거지?

"그런데라니? 그대를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하는 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팬이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런데 스미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확인사살을 해줬다.

"하하하하! 그렇소! 다들 찾아와서 소드마스터의 칼을 만든 공방이 이곳이냐, 어떤 칼을 쓰냐 안달이란 말이오."

"······."

나는 스미스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해결사가 하는 일 중에 합법적인 일은 드물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가 불법적인 일이고, 어떻게 그 불법적인 일을 안 걸리게 하는지가 해결사의 능력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해결사를 동경하고 닮고 싶은 것도 모자라······ 팬이라니?

범죄자가 꿈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않소? 그래도 칼잡이 흉내를 내겠다면 최소한 다른 사람은 죽이기 힘들 테니 말이오. 어설프게 총이나 폭탄에 미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나는 이어진 스미스의 말에 일정 부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총과 폭탄이 흔해 빠진 이 세계에서, 최소한 칼을 들고 설치는 게 남에게 피해는 덜 줄 테니 말이다. 스스로 죽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런데 문뜩 든 생각이 있다.

"혹시 체인소드도 파셨습니까?"

체인소드의 존재.

이게 외부에 팔렸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내가 체인소드를 독점하겠다거나, 특별한 비밀이 있어서 그게 유출될까 봐 걱정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스미스의 체인소드는 내가 사용하기 전부터 세상에 출시됐던 기성품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가진 궁금증도 여기서 기인한다.

애초에 기성품이었던 체인소드가 혹평과 함께 단종된 이유.

그건 체인소드를 다룬다는 게 사실상 나 정도의 신체 능력이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수어사이드 소드(Suicide Sword). 자살용 검이라는 별명이 붙었겠나?

"걱정하지 마시오. 앞으로 체인소드는 만들 생각 없으니. 그건 오직 소드마스터의 상징으로만 남겨두겠소!"

"······별로 그런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닌데요."

"하하하하! 아무렴 어떠오? 그대 덕분에 자살검이라는 오명도 벗었고, 오히려 프리미엄 이미지까지 붙었으니!"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작업장 한쪽에 세워진 홀로그램 패널로 향했다.

"자, 이걸 먼저 보시오."

스미스가 터치 패널을 몇 번 두드리자, 공중에 떠오른 홀로그램이 부서지며 정리된 서류형태의 문서파일이 떠올랐다.

손을 한번 홱하고 젓자, 페이지가 넘어가듯 홀로그램이 변하더니 어떤 공장의 사진이 되었다.

"최초로 액체금속을 연구했던 기업이오. 사우드 시티의 <하우스 오브 크롬>이라는 곳이지."

"사우드 시티요?"

사우드 시티는 중동에 위치한 메가 시티다. 워낙 땅덩이가 넓고 대부분이 사막인 지역답게 핵폭탄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중 가장 방사능 오염이 덜 된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성된 도시였다.

즉, 소울 시티에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걱정할 것 없소. 지금은 망했으니까. 액체금속을 개념화하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직접 구현하는 단계에서 망했지."

"······하지만 제가 본 건 분명 액체금속입니다."

"하핫! 내가 말하지 않았소? 최초로 연구했던 기업이라고."

"그럼?"

"여기가 망하면서 특허권이 잘게 찢겨져 사방으로 팔려나갔소. 액체금속도 그중 하나였지. 액체금속의 특허권은 총 5곳에 팔렸소."

스미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이 변했다.

"5곳 중 2곳은 연구를 공식적으로 폐기했소."

떠오른 2장의 기업 문서에 X자 표시가 되더니, 이번엔 하나의 영상이 떠오른다.

"1곳은 액체금속을 만드는 데까진 성공했으나, 그 경도가 납 정도의 수준이라 안드로이드를 만드는덴 적합하지 않지."

홀로그램 영상이 재생됐다. 금속이 액체화되어 어떤 형상을 이뤘지만, 간단한 총탄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밀가루 반죽처럼 곤죽이 됐다.

"다른 1곳은 경도를 성공적으로 끌어올렸으나, 액체화 컨트롤이 가능한 수준이 1킬로에도 미치지 못했소."

이번엔 다른 영상이 재생됐다.

액체금속이 변환하여 자그마한 강아지로 변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무라마사 공작소를 떠나기 전까지 알고 있던 정보였소."

스미스가 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없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곳은 5곳.

아직 1곳이 남았다.

"혹시 마지막 1곳이 성공한 겁니까?"

"그렇소."

딱!

스미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거대한 기업의 풍경이 떠올랐다.

여태까지 보여줬던 그 어떤 기업보다도 압도적으로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

"비교적 최근에 상업생산에 성공한 곳이 있소. 그리고 독점 계약으로 납품하는 곳도 알아냈지."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디일 것 같소?"

"설마 안드로이드 생산 기업입니까?"

"비슷하다오. 세계최대 군수기업인 <브리타 팩토리>니까."

"브리타 팩토리······."

골드오션 시티에 위치한 5대 메가코프 중 한 곳이자, 세계최대 군수 기업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현실의 호주에 위치한 이곳은 핵전쟁 이후 엄청난 이민자를 받았다. 핵전쟁을 일으켰던 패권국들이 지구 북반구에 대부분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남반구인 이곳엔 영향이 덜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이민자 중에는 군수산업 종사자들이 많았다.

핵전쟁이 불러일으킨 비극과 전쟁의 참상에 질려 자국을 떠났고, 사실상 전쟁의 시발점에서 가장 먼 이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전쟁과 가장 멀었던 이곳에 최첨단 군수 기업을 설립했다.

그들이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뼛속까지 군수산업자들. 전쟁의 억제는 더 강한 군사력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럼 그들이 액체금속으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데 성공한 겁니까?"

"일단은 그렇게 추정되오."

"······추정만 된다고요?"

내가 미간을 찡그리며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정확한 제원을 모르니 말이오. 원래 그런 물건은 VVIP를 상대로만 설명하니까."

"그럼 확실하지 않다는 거 아닙니까?"

"뭐, 그런 셈이지. 이 세계에서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한 100%는 없으니 말이오. 하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요."

딱!

그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공장 사진. 그러니까 브리타 팩토리의 사진이 부서지고, 어떤 서류 한 장이 떠올랐다.

얼핏 봐선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홍보용 전단지처럼도 보였다.

"······? 이게 뭡니까?"

"브리타 팩토리가 VIP를 상대로 뿌리는 홍보용 팸플릿이오. 여기보면······"

딱!

홍보용 팸플릿의 어느 부분이 확대됐다.

"보이시오? 어떤 장애물도 통과할 수 있고, 어떤 사물로도 변신이 가능한 차세대 전투용 안드로이드."

"······! 이건······?"

"그렇소. 그대가 내게 말해줬던 그 액체금속 안드로이드와 유사한 특성이지. 흐흐흐! 그래서 내가 좀 알아봤소."

스미스가 자신 있는 웃음을 흘렸다. 수염 너머로 실룩이는 입꼬리가 보였다.

"닉네임은 종결자라는 뜻을 가진 '터미네이터'. 오직 VVIP를 상대로만 특수제작되는 모델이라고 하오."

나는 난데없이 들려온 이름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터미네이터요?"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터미네이터라고?

그때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터미네이터라면 그때 그 물건이잖아?'

금속 십자가 (2)

145화. 금속 십자가

세븐 프롱드를 나선 나는 곧바로 만물상을 찾았다.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나는 불퉁한 표정으로 연초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다이손을 바라봤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대답했다.

"······후우. 그래. 이번엔 진짜 오랜만이로군. 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그동안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던 겐가? 딸 아이에게 듣자 하니 얼마 전에 거기도 갔었다고 하던데."

"뭐,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설마 말도 없이 도시를 떠나려는 건 아니겠지?"

다이손이 연초를 툭툭 털더니 재떨이에 꽂아 넣었다. 한가득 쌓인 재떨이가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하하. 설마요. 아닙니다. 진짜 사정이 있었습니다. 알아볼 일이 있어서요."

"믿겠네. 떠나려거든 꼭 내게 말해주게."

"송별파티라도 해주시려고 그러십니까?"

"송별파티는 무슨. 자네가 떠나지 못하게 잡으려고 하는 말이지."

다이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떠나겠습니다. 한번 잡아주시죠."

"······늙은이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렸나?"

"궁금해서요. 이 거대한 만물상을 운영하시는 주인께서 저를 잡으려고 뭐를 던져주실지 말이죠. 기왕이면 돈이면 좋을 텐데요."

"쯧! 모아놓은 돈도 많으면서 왜 아직도 돈에 욕심을 내나?"

"목적이 있는 돈이라 아직 제 돈이 아닙니다. 부족하기도 하고요."

"끌끌! 기다려보게. 안 그래도 조만간 의뢰를 넣을 일이 있으니."

"기대하겠습니다. 의뢰금은 꼭 두둑하게 부탁드립니다."

"에잉! 실없기는!"

나와 다이손은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회포를 푸는 이야기였다.

사실 처음엔 다이손의 이런 태도에 무언가 숨은 목적이나 의도가 있을 거라 여겼었다. 물론 아예 없진 않을 거다. 혈혈단신으로 이런 거대한 부를 쌓은 다이손이 순수한 의도로 나 같은 길거리 해결사에게 잘해줄 리가 없으니까.

다만,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렸다.

다이손의 의도가 결코 불순하거나, 악의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건 지난날 짧게 나눴던 선문답 같은 대화에서 확실하게 느꼈다.

[별들에게 가는 길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네. 누군가는 별을 보려면 당연히 어둠이 필요하다고 하지. 그 별을 위해 흘린 피가 바다가 되었는데도 말이야.]

[언젠가부터 별들에게 가는 길은 어둠보다 깊은 피바다를 건너야 했다네. 너무나 깊고 끔찍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피바다 한복판에 떠 있었거든.]

[자. 이제 어떻게 해야겠나? 지금이라도 되돌아간다? 이를 악물고 피바다를 건넌다? 그것도 아니면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피바다에 그냥 둥둥 떠 있어야 하나?]

항상 노인네처럼 허허거렸던 다이손 영감이 처음으로 진의를 드러냈던 물음이었다.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에 닿기 위해 흘리는 피는 과연 옳은가?'

'절대다수의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위한다는 목적과 미명하에, 짓밟히고 스러지는 자들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인가?'

나는 이 물음을 듣고서야 다이손에게 조금은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이 하층민의 희생 위에 세워진 빌어먹을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어쩌면 가장 유토피아에 닿을 수 있는 다이손 같은 권력자가 이런 의문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는 방증이었으니까.

'물론 선한 것과 내가 믿는 건 별개의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나도 적당히 그의 호의에 어울려주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거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그리고 그건 다이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를 무작정 도우려는 게 아니라, 의뢰를 빌어서 도와주거나 거래의 형태로 도와주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다이손의 태도가 더욱 그를 신뢰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영감님. 예전에 제게 맡기셨던 의뢰는 기억나십니까?"

"누굴 치매 걸린 늙은이로 보는 겐가? 당연히 기억하지! 안드로이드 수송건 아니던가?"

다이손이 얼굴을 구기며 버럭했다. 선한 것과 별개로 성질은 고약한 편이다.

"그럼 그 안드로이드 이름은 기억나십니까? 그때 분명 '터미네이터'라고 하셨었죠?"

"음? 그랬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겐가?"

역시 맞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안드로이드, 지금 어딨습니까?"

* * *

새빨간 불꽃이 타오른다.

거세게 반짝이며 영역을 불사른 불씨가 잦아들고, 이내 기다란 한숨과 함께 연기로 내뱉어진다.

"······후우. 그래서 얼마 후 그들이 가져갔지. 지금은 여기 없다네."

다이손이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엔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들이라면 영감님께 의뢰를 맡겼던 시 정부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리인이라고는 했지만 말일세."

"대리인요?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점점 깊이 물어오는 강현재의 물음에 다이손의 눈이 복잡해졌다.

그건 강현재가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할 물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 물건의 주인에게 말이다.

연초를 깊이 빤 다이손이 다시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그 한숨의 깊이만큼이나 자욱한 연기가 뿜어졌다.

"······후우. 대리인이 왜 대리인이겠나? 그런 걸 일일이 밝히기 싫으니 대리인을 보낸 게지. 나도 별로 알고 싶지 않고."

때론 알아도 모른척해야 할 때가 있다.

이번 일도 비슷하다. 몰라야 서로가 편한 경우였다.

적당히 눈감고, 적당히 못 본 척하면 된다.

도시 아래로 흐르는 검은돈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흘러갈 테니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건 왜 묻는 건가? 설마 그 안드로이드에 관심이라도 생긴 겐가?"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강현재의 표정을 본 다이손은 가슴이 철렁했다. 저 얼굴은 이전에도 봤었던 결심이 선 표정이었으니까.

'지난번에 저 표정을 하고 나서 콜레오넬 가문과 싸웠었지.'

일개 개인이. 고작 해결사이자 칼잡이가 소울 시티에서도 손에 꼽는 거대 가문과 홀로 부딪쳤다.

물론 사생결단이 아니고 로제의 일에 개입했던 거지만, 그런다고 개인이 가문과 부딪쳤던 게 달라지진 않는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하나의 가문 정도가 아니야.'

소울 시티의 검은돈과 관련된 사람을 꼽자면 몇 명이나 될까? 수십 명? 수백 명? 어쩌면 수천 명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신에게 비공개 전투 안드로이드를 의뢰하고 그걸 은밀히 가져갈 정도의 실력자라면 절대 많지 않다.

무려 5조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다.

그 '터미네이터'라는 전투 안드로이드를 가져오는데 그들이 지불했던 비용이 말이다.

중개인인 자신에게만 무려 수천억에 달하는 이익을 가져다준 의뢰.

이정도 돈을 시 정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 숫자도 많지 않을뿐더러, 그 정체 역시 어마어마할 거다. 그런 돈을 거리낌 없이 세탁할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쥔 자겠지.

그런 자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누군가 자신의 뒤를 캔다는 걸 알게 되면 기를 쓰고 죽일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건 곧, 도시 전체가 살의를 갖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들이 쥔 권력이, 이 거대한 도시 그 자체였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나?"

"······? 왜 그러십니까?"

"자네가 강하다는 건 안다네. 이번에 셀리케와 꽤 대단한 의뢰를 성공한 것도 알고.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일이야."

이건 그가 맡았던 어떤 의뢰보다도 위험했다.

콜레오넬 같은 가문 하나와 싸우는 것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일이 꼬이면 어디까지 얽힐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내뱉은 다이손이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지 않던가? 그건 시 정부 고위층의 비리와도 연관된 물건일세. 자칫 시 정부와 부딪칠 수도 있어. 자네가 여태껏 상대했던 갱단이나 용병단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험한 일이란 말일세. 왜 돈도 안 되는 그런 일에 목숨을 걸려고 하나?"

다이손이 걱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자신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강현재가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다가 죽어버릴까 봐.

이 도시에서 제대로 빛나보기도 전에 떨어진 수많은 별똥별 중 하나가 될까 봐 말이다.

그런 다이손의 걱정을 알았음일까?

눈을 커다랗게 뜬 강현재가 피식 웃었다. 눈꼬리가 금세 작게 휘어졌다.

"걱정은 감사합니다. 저도 시 정부와 부딪칠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이 도시를 떠날 마음이 없어서요."

"그럼······?"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제게 중요한 일이거든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일 생각입니다."

강현재의 말에 헛웃음을 지은 다이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태껏 잘 해왔으니 이번 일도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길 바라네."

그래도 마냥 걱정만 가득했던 표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최소한 불도저처럼 들이박진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다만, 더 이상은 내가 도와줄 순 없네. 미안하네."

"이해합니다."

"크흠! 대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알려주겠네. 터미네이터를 가져간 자들은 알 수 없지만, 최초로 의뢰를 넣은 자는 알고 있다네. 자네 능력이라면 이정도만 알려줘도 충분하겠지?"

직접적으로 도와줄 순 없지만, 그 시작점을 앞당겨줄 순 있었다.

"그게 누굽니까?"

"40번대 구역 서기관인 산티아고라네."

* * *

40번 구역.

소울 시티의 모든 물류가 서해항만으로 집중되는 만큼, 이곳은 40번대 구역이면서도 특별했다.

다른 40번대 구역과는 다르게 고층건물이 즐비했고, 기반 시설도 잘 깔려 있어서 언뜻 30번대 구역이나 번화가는 20번대 구역 느낌마저도 났다.

시민들의 소득 수준도 높은 편이고, 상대적인 빈부 격차도 적었다. 일거리가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밝은 부분이 많을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이곳엔 40번대 구역에서 활동하는 대다수의 갱단과 마약상들의 거점이 있었고, 그만큼 살인, 방화, 강도 같은 범죄율 또한 높았다.

돈과 마약, 폭력과 살인이 이곳 40번 구역에 집중된 셈이었다.

따라서 시에서도 이곳을 집중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었고, 거대한 40번대 구역을 관리하는 구역청도 이곳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곳의 가장 높은 관리자 중 하나가 서기관 산티아고였다.

'일단 미행부터 한다.'

산티아고가 의뢰를 넣었다고 해서 그가 몸통일 가능성은 적었다.

다이손은 무려 5조에 달하는 검은돈이 움직였다고 했다.

'5조라니······ 상상조차도 안 되는 금액이로군.'

그때 조기경보드론보다도 비싸다고 했던 터라 꽤 금액이 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서기관에 불과한 산티아고가 움직일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중앙정부 예산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금액이다.'

즉, 산티아고는 끄나풀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게 산티아고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구역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따라다니다 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그때 어디선가 하나, 둘 나타난 사람들이 어느샌가 구역청 한쪽에 무리를 지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들은 특이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무리를 지은 그들은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도 했고,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행색이었고, 생김새나 성별도 모두 제각각이었으며,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빈민들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40번대 구역엔 널리고 널린 게 빈민들이다. 이걸 무리의 공통점으로 꼽을 순 없었다.

이들이 모여든 이유가 빈민이라서는 아닐 테니 말이다. 그것도 구역청 앞마당에서.

'빈민 구제 사업이라도 하나?'

불현듯 든 생각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렴 그런 일이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발생할까. 잡아다가 팔아먹지만 않아도 다행이지.

그렇게 그들에게 신경을 끄려는 순간.

"일찍이 사이버 스페이스를 지배한 그분께서 이르시길, 창천은 저물고 금천이 떠올랐으니! 난세의 끝에서 영웅이 등장하리라!"

"금천! 금천! 금천!"

"그분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자요,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니, 모두다 앙복하라! 복종하라! 기다렸던 우리의 영웅을 맞이하라!"

"금천! 금천! 금천!"

나는 난데없이 벌어진 종교집회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뭐하는 짓이지?'

저걸 하려고 모였던 건가? 그런데 대체 왜 구역청 앞에서 하는 거야?

게다가 더 어이가 없는 건, 그걸 멀뚱히 서서 지켜보는 구역청 경비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자 출동한 SCPD다.

아니, 누가 봐도 사이비종교 집회인데 이걸 보고만 있다고?

그때 그들 무리가 갈라지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오늘도 많은 형제분께서 오셨군요. 다들 잊지 마시고 저녁 집회도 참가하셔서 따뜻한 식사도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그럼 서둘러서 움직여주세요. 여러분들의 목소리가 많이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다들 감동한 얼굴로 허리를 꾸벅 숙인 그들은 곧장 일렬로 무리 지어 구역청을 떠나갔다.

마치 거리행진이라도 하듯 도보에 늘어선 그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선전 문구가 쓰여진 커다란 피켓과 깃발을 흔들며 창천이 어쩌고 금천이 어쩌고를 외치며 행진했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제라고 불렸던 사내를 쳐다봤다.

렌즈 화면에 떠오른 인적사항엔 '서기관 산티아고'라고 선명히 쓰여 있었다.

금속 십자가 (3)

146화. 금속 십자가

길거리 행진을 나선 사람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구역청 안으로 다시 들어갔던 산티아고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오래된 클래식 차량을 몰았다. 서기관 정도면 부유자동차를 몰아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였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부유자동차를 띄워서 날아갔으면 은밀히 따라붙는 건 포기해야 했으니까.

산티아고의 차량이 향하는 곳은 서해항만이었다.

저녁노을이 지는 수평선을 향해 움직이는 클래식 차량의 뒷모습은 영화에 나올 것처럼 멋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얼굴은 점점 구겨졌다.

'인파가 몰려드는군.'

서해항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금 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길거리 행렬이 보였다. 곳곳에서 몰려든 행렬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산티아고의 차량이 항만창고들이 모여있는 곳에 진입했다.

나는 바이크로 산티아고의 차량을 따라붙는 게 너무 눈에 띈다고 판단하고, 적당한 곳에 주차한 뒤 몸을 날렸다.

창고 지붕에서 지붕을 넘어가면서 산티아고의 차량을 쫓길 몇 분, 이내 산티아고는 어떤 창고 건물에 도착했다.

역시나 그곳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기껏해야 창고를 지키는 경비원 정도나 있을 시간인데, 빽빽하게 늘어선 인파는 시장 거리를 방불케 했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창고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창고 앞에 늘어진 배식대엔 각종 음식과 술들이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가난한 노동자들은 나눠준 음식과 술을 먹고 있었다.

이상한 건, 이런 일이 있으면 시장통처럼 고성이 오가거나 음식을 두고 다투는 일이 보통이었는데, 다들 차분히 순서를 기다리며 음식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짜 교회라도 되는 것 같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저들이 저렇게 순순히 통제를 따르다니. 심지어 총을 들고 눈을 부라리는 자들도 없는데 말이다.

그때 산티아고가 나타났다.

천천히 걸어들어오며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다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30분 뒤에 집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천천히 먹고 마시고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그렇게 산티아고는 인파를 헤치고 창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다가 환풍구 구멍으로 들어갔다. 단순한 화물창고라 환풍구 너머는 바로 창고 내부였다.

눈에 보이는 창고 내부는 깨끗했다. 원래 컨테이너나 화물로 들어찼을 공간이기에, 그게 없으니 꽤나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떻게 보면 휑하기까지 한 너른 공간.

그중 산티아고가 걸어 올라간 단상 위에는 이 창고의 유일한 구조물이자 가장 눈에 띄는 상징물이 서 있었다.

'······십자가?'

그건 거대한 십자가였다.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십자가.

다만, 그 십자가의 모양이 뒤집혀 있었다. 상단이 길고 하단이 짧은 모양.

역십자(逆十字)다.

흔히 반기독교, 적그리스도의 상징이자, 악마숭배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이상하군.'

하지만 이상했다.

이 게임의 세계관은 거대 종교가 없다.

말 그대로 지역별 민속 신앙은 존재할망정, 현대의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이 되는 거대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솔직히 안드로이드가 활보하는 세계에서 신을 찾는 것도 웃기니까.

따라서 당연히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독교가 없는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굳이 역십자를 상징으로 쓴다?'

왜? 어차피 십자가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멀쩡한 십자가를 써도 되지 않나?

'······꼭 누군가가 억지로 이 게임의 세계관에 개입한 것 같은 느낌이군.'

나처럼 이 세계 말고 외부 세계의 지식을 가진 자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십자가에 대한 선입견이 없을 테니, 굳이 저런 역십자를 상징으로 쓰는 일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직은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순 없다. 내가 모르는 게임 설정일 수도 있고, 정말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이벤트일 수도 있다.

아직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결론을 열어놓고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것도 알 수 없다는 건,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미 터미네이터라는 특이점이 발생한 이후다. 지금은 최대한 꼼꼼히 살펴서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무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산티아고를 지켜보는 가운데, 이윽고 집회가 시작됐다.

창고 건물이 가득 찬 것도 모자라서, 그 문밖으로도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창고 내부에만 수천 명은 족히 되는 것 같으니, 바깥까지 합치면 만 명은 훌쩍 넘는 것 같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참고 기다려라! 악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배불리 일어선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모든 업은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법이니!"

"금천! 금천! 금천!"

"악으로 일어선 자 팔, 다리가 끊어져 앉은뱅이가 될 것이며, 남을 속인 자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리게 될 것이고, 그릇된 재물로 배를 불린 자 오장육부 꺼내 개의 먹이로 줄 것인즉! 오로지 금천을 따르는 자들만 낙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금천! 금천! 금천!"

산티아고의 설교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호응은 뜨거워졌다. 그들의 목소리로 창고 건물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나는 계획을 조금 변경하기로 했다.

원래는 산티아고를 잡아다가 터미네이터를 의뢰 넣은 자를 알아내려고 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닐 수도 있겠어.'

나는 차가운 눈으로 열기로 가득 찬 집회를 내려다봤다. 그들의 열정적인 얼굴에 떠오른 눈빛은 언제라도 다른 모습으로 변할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 * *

산티아고의 일상은 단순했다.

구역청과 항만창고, 집을 오가기만 했고 따로 만나는 사람도, 방문하는 곳도 없었다.

며칠간 그를 지켜본 나는 숀을 호출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40번대 구역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숀이었으니까.

녀석은 나와 함께 몇 건의 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자그마한 정보조직을 만들었다.

이건 꽤나 의외였다.

소매치기나 할 줄 알았던 녀석이 정보조직을 꾸릴 생각을 하다니.

물론 말이 거창해 정보조직이지, 길거리 소문들을 취합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이것만으로 40번대 구역이 돌아가는 걸 파악하는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최근에 사람들을 대상으로 급속도로 퍼지는 금천교라는 신흥종교입니다."

숀이 알아온 정보를 말했다. 녀석에게 며칠 전 미리 언급했었기 때문이다.

"교리가 뭐길래 저렇게 퍼지는 거지?"

"종말 끝에 기계신이 나타나서 인간을 구원한다던데요? 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고요."

"기계신? 웃기는군. 기계와 신이라니.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과학의 산물인 기계와 가장 비과학적인 존재인 신을 묶다니. 그리고 애초에 기계는 인간이 만든 물건이 아니던가. 그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소린데, 그게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는다고?

숀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냉소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사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저들이 믿고 싶은 건 그저 불합리한 지금 시대의 종말과 모두가 평등한 시대의 시작이니까요."

나는 그 말에 숀을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기계신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저렇게까지 사고를 확장해서 생각한다는 게 놀라워서 말이다.

사실 저 광신도 무리에 숀이 끼어있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녀석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매치기였다.

그러자 머쓱한 듯 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마침 저도 관심이 있어서 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너도 기계신을 믿어보려고?"

"에이, 아닙니다. 저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수법을 알아본 겁니다. 우리 조직이 좀 더 커지려면 아무래도 사람도 사람이지만, 조직에 대한 믿음이나 충성같은 것도 있으면 좋으니까요."

"흐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달라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나? 지금 대답이나 태도를 보면 절대 과거의 소매치기 숀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항상 후줄근한 옷을 입고 다녔는데, 지금은 비교적 깔끔하고 정돈된 옷이었다. 기름기로 번들거리던 머리도, 기름기 대신 포마드로 정갈하게 정리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숀의 말은 이어졌다.

"산티아고도 어느 순간부터 금천교의 사제로 불리며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 행적이나 과거 기록을 봐도 딱히 특이한 사항이 없고요."

"그래서 더 수상하군. 금천교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는데, 사제로 불리며 저렇게 활동할 순 없지. 그가 언제부터 금천교의 포교활동을 한 거지?"

"이곳으로 발령받은 이후입니다. 대략 1년이 조금 안 됐군요."

"1년?"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공교롭게도 그쯤이면 내가 이 도시에 왔을 시기다. 그리고 그건 곧 「기적의 서광」이 등장한 이후라는 거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 절대 우연일 리가 없지.'

이 세계의 모든 변화는 전부 「기적의 서광」의 등장 전/후로 나뉜다. 애초에 「기적의 서광」이라는 특이점으로부터 시작된 게임 세계니까.

"이곳으로 발령을 받은 거라면, 원래 어디에 있었지?"

"<로보 테크니카>의 감사관을 했던 거로 확인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소울 시티의 시 정부 AI인 「제네시스」가 운영하는 로봇 생산 기업입니다."

"로보 테크니카?"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분명 금천교와 로보 테크니카의 연관성을 꼽자면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다.

심지어 로보 테크니카는 AI가 운영하는 완벽한 기계화 공장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작당을 꾸미거나, 사이비종교가 태동할만한 곳이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애초에 산티아고의 뒤를 캐는 이유가 액체금속 안드로이드 때문이니까.

놈은 분명 특이했다. AI에 이름을 안 붙이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릴리트라 칭하고, 악마에 관해서 나와 논리적인 언쟁까지 벌였다.

단순한 AI가 딥러닝으로 거기까지 사고할 수 있을까? 그건 절대 아닐 거다. 놈은 확실히 특이 케이스였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특이 케이스를 알고 있다.

나는 왼쪽 손목에 채워진 워치를 내려다봤다.

이브.

녀석 또한 평범한 AI와는 거리가 먼 특이 케이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브 역시 로보 테크니카에서 제작된 AI다.'

우연이 겹치면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연을 가장한 무언가다.

'로보 테크니카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군.'

인간이 관리하는 기업이 아니라 「제네시스」라는 시 정부 AI가 관리하는 기업이다.

누구를 통해, 어디서부터, 어떤 걸 알아봐야 할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AI에게 칼 들고 협박할 수도 없는 일이고.

"괜찮으십니까?"

내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던 숀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젓곤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계속하도록."

"네."

녀석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말을 이었다.

"사실 금천교는 산티아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금천교는 이곳 40번 구역뿐만 아니라, 40번대 구역 전체에 걸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흐음. 40번대 구역 전체에 퍼진다라······."

"네. 특히, 도시 북부의 40번대 구역에선 금천교의 세가 엄청납니다. 안 그래도 거긴 일거리도 별로 없는 데다가, 툭하면 오염체가 나타나는 터라 치안이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그런 편이지. 공장지대는 서해 쪽에 몰려 있으니. 사채업자한테 빚을 져서 도시 밖으로 끌려가는 경우도 허다하고."

내가 최초로 빙의됐던 감자농장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곳에 끌려온 노동자들 대부분이 도시 북부와 동부 출신들이었다. 일거리가 없어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이 빚을 낳고, 결국 사채업자 손에 팔려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거다.

"맞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도시 내부의 기득권들에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인지 금천교의 선동 또한 잘 먹히는 것 같고요. 거긴 갱단도 이미 쓸려나갔고, 폭리를 취하던 기업들의 지점도 전부 털렸다고 하더군요. SCPD도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걸 시 정부에서 가만히 놔둔다고? 아니, 그것보다 뉴스에 언급조차 안 되는 이유는 뭐야?"

이 정도까지 되자 이게 가장 궁금했다.

내가 금천교에 대해서 몰랐던 이유는 뉴스에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40번대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전부 나처럼 금천교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즉, 시 정부가 철저히 금천교의 정보를 통제하는 셈인데······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 저도 거기까지는······."

숀이 머리를 긁적였다.

녀석이 너무 술술 말해서 잠시 깜빡했다. 이 정보들이 40번대 구역의 소문들을 취합한 정보라는 사실을.

당연히 길거리 소문은 빠삭해도 시 정부의 속내는 알 수 없겠지.

"흐음. 그래. 이건 내가 따로 알아봐야겠어. 또 다른 점······ 그렇지. 그곳에도 산티아고 같은 사제들이 포교를 하는 건가? 그들도 공무원이고?"

"맞습니다. 듣기론 북부 쪽엔 장 브라더스(Zhang's Brothers)라는 삼형제가 있는데, 그쪽에선 거의 우상처럼 떠받들려 진다더군요."

금속 십자가 (4)

147화. 금속 십자가

48구역.

소울 시티의 동북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불과 몇 달 전에 방문했던 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사방에서 달라붙는 시선, 경계 어린 눈초리, 불안감 가득한 얼굴.

길거리를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했다.

'경계와 불안감이라······. 꼭 무슨 일이 터지기 일보 직전 같군.'

한 명의 얼굴은 속여도 다수의 얼굴은 속일 수 없다.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면 분명 비슷한 걱정거리를 안고 있다는 의미다.

'금천교가 구역을 먹었다던 이유일까? 흐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조용하다.'

사람들의 행동이 조금 수상쩍긴 했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엔 구역 자체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숀이 말했던 대로 구역 갱단을 쓸어버리고, 폭리를 취하던 기업 지점을 털어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정도 소요사태가 벌어졌다면, 최소한 LA 흑인 폭동만큼의 난장판이 벌어졌어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어야 정상이다. 이곳은 치안이 유명무실한 48구역이니까.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게 좋겠군.'

나는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내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나를 주시하던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떠올랐으나 그건 잠깐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눈에 불을 켠 채 다른 사람들을 살펴봤다. 마치 외부인을 철저히 파악하려는 모습이다. 꼭 그렇게 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상하군. 내가 그렇게 눈에 띄나?'

내가 평범한 인상이 아니라는 건 인정한다. 거기에 칼까지 차고 있으니 눈길이 가는 것까지도 이해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도시에 나 같은. 아니, 나보다도 더 눈에 띄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당장에 나를 지켜보던 자들 가운데서도 대머리가 셋이나 있지 않았던가?

날카로운 인상의 칼잡이와 대머리가 지나간다? 당연히 대머리에게 더 시선이 쏠릴 거다.

그런데도 저들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골라냈다. 내가 외부인인 걸 한눈에 알아차린 거다.

'흐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그대로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이동했다.

어차피 지금은 고민해봤자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저들에게 조금 더 가까워지면 그땐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내가 먼저 확인하러 간 곳은 48구역의 SCPD 오피스였다.

다른 건물들과 떨어져 너른 공간 위에 따로 세워진 SCPD 오피스는 조용했다. 해가 저물어가는 터라, 환하게 불이 켜진 모습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비어있다.'

저 안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40번대 구역의 경찰들이 유명무실하다지만, SCPD 오피스를 비워둘 정도로 막 나가진 않았다.

나는 여기서부터 강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다음 확인하러 간 곳은 구역 갱단의 기지였다.

구역을 지배하는 갱단은 워낙 규모가 크기에 그 기지의 위치는 공공연한 비밀과도 같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어떤 건물이 어떤 갱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똥도 어디 있는지 알아야 피할 거 아니겠는가.

"흐음······."

나는 폐허가 된 카지노 오락실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거짓이 아니었군. 진짜 갱단이 쓸렸어.'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폭탄이라도 터진 듯 터져나간 오락실 내부는 대부분 불에 타버렸고, 지금은 검게 그을린 흔적과 재만 남았다.

'이러면 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건데······'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다.

경찰은 오피스를 비웠고, 갱단은 쓸려나갔고,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외부인을 경계했다.

도시 바깥에 있는 마을들도 아니고, 이 거대도시 내부에서 벌어질 법한 일은 아니었다.

'도대체 시 정부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모조리 불타버린 저녁노을은 사라지고 시커먼 어둠으로 물든 검은색 우주가 자리 잡았다.

"집회에 가봐야겠어."

아무래도 장씨 삼형제를 만나봐야 할 듯싶다.

* * *

"형님! 대체 뭘 기다리는 거요?"

사내가 손에 든 단말기에 대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만전을 기해라.

단말기 너머로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조명을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 위로 희미한 달빛이 늘어졌다.

그늘이 걷힌 사내의 얼굴은 험악했다.

정말 험악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근육질의 거구인 그의 얼굴은 마치 돌을 깎아놓은 듯 투박하게 각이 졌는데, 머리 윗부분은 금빛 크롬을 임플란트해 대머리······ 아니, 크롬머리였다.

덕분에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곳엔 머리카락 대신 길게 땋은 철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에 머리카락까지 없으니 그 험악함이 배로 증폭됐다.

바로 이 사내가 장씨 삼형제 중 막내인 장량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때를 더 기다리는 거요? 이미 충분히 기다렸잖소? 준비도 끝났고! 사전작업도 다 했고!"

-이 도시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량. 성녀님께서 진행했던 일도 방해꾼 하나 때문에 실패할뻔하지 않았더냐?

단말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대답에 장량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건 그 요사스러운 년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덤빈 탓이 아니오? 내가 했더라면 병력 손실도 적었을 거요!"

-량! 성녀님께 어찌 그리 망언을 하느냐? 그분의 말씀을 어길 셈이냐?

"······죄송합니다, 형님."

불만 가득한 목소리지만 그는 사과했다.

그 뭣도 아닌 요녀에게 했던 막말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님이 실망할까 봐서였다.

-다시 말하지만, 거사가 코앞이니 만전을 기해라. 우리도 언제든지 예상 못 한 방해꾼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쇼 형님! 그런 놈이 나타나면 이 장량이 곤죽을 내서 죽여버리겠습니다!"

-······방심하지 말거라. 각성자는 우리 말고도 많다.

"푸하하하! 형님! 그깟 어중이떠중이 각성자 따위 우리 형제와 비교가 됩니까? 우린 그분께서 축복을 내려준 몸이 아닙니까?

-어허! 그 입 조심하거라! 절대 함구하라는 말을 잊었더냐?

"저랑 형님만 있는데 무슨 상관······ 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장량의 미간이 갑자기 찌푸려졌다. 창밖을 내다보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아무튼, 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거사일에 보자.

단말기의 연락이 끊기고, 장량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옆방과 연결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문 앞에서 속옷만 입고 있는 여자가 어색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장량을 올려다봤다.

"사, 사제님······."

"뭐 하는 거지?"

"그, 그게······ 성교 의식을 위해서 사제님을 조금 놀라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하아······ 리나. 도대체 왜 그랬어?"

장량이 천천히 리나라고 부른 여인에게 다가갔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서서히 공포로 물드는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간 장량이 우악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씨발! 왜 그랬어! 왜! 가만히 기다렸으면 천국을 보여줬을 텐데, 왜!"

"사, 사제님······! 제, 제발 살려······!"

두둑.

둔탁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

장량의 팔뚝을 휘감았던 리나의 손이 툭하고 떨어지고, 이내 그녀의 몸도 축하고 쳐졌다.

장량을 보며 애원했던 그 눈빛도, 더는 장량을 쫓지 못하고 텅 빈 허공을 바라봤다.

툭.

움켜쥔 손을 놓자 리나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다. 실 끊어진 구체인형처럼 관절이 제멋대로 꺾인 채.

"하아. 씨발. 도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거야?"

장량이 손등 위로 떨어져 내린 리나의 눈물을 옷에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그가 혀를 쯧하고 차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싸늘한 주검이 된 그녀는 그렇게 텅 빈 방안에 홀로 방치됐다.

잠시 후, 다시 방문이 열렸다. 금색으로 칠해진 안드로이드는 리나의 시체를 집어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한때 생산된 물건과 옮겨지는 화물들로 가득했을 공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입구에 배치된 음식과 술을 들고 공터에 옹기종기 앉아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밀러. 오랜만이다."

포도주에 빵을 적셔 먹던 밀러의 옆으로 한 사내가 털썩 앉으며 물었다.

밀러의 미간이 구겨졌다. 감히 자신이 밥을 먹는데 말을 시키다니. 밥 먹을 때 건드리면 미친개가 된다는 이 몸의 소문을 모르는 모양인데, 오늘 가르쳐줘야겠군.

"······호든? 너야말로 오랜만이다."

하지만 자신 옆에 앉은 호든을 보더니 표정을 풀었다. 그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이다.

"너도 태평군에 지원했다며?"

"그게 네 귀에까지 들어갔나?"

"미친개 밀러의 소문인데 귀를 열고 있어야지. 그래서 사실이야?"

재차 물어오는 호든의 물음에 밀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사실이다. 이 더러운 세상, 거하게 한판 놀아봐야지! 언제까지 길바닥에 있을 수만은 없잖아?"

"오호? 그럼 내 후임이 되는 건가?"

호든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빵을 씹어먹던 밀러의 얼굴이 구겨졌다.

"후임 같은 소리 하네! 태평군은 만인이 평등하다 몰라?"

"새끼야. 만인은 평등해도 군인은 평등하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작전이 되겠냐? 상명하복 몰라? 그게 군대의 기본이라고. 쯧쯧!"

"그, 그런 게 어딨어! 내가 너보다 밑이라고? 너보다 내가 더 싸움을 잘하는데!"

호든이 혀를 쯧쯧차며 고개를 젓자 발끈한 밀러가 소리쳤다.

그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으나, 워낙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서 이정도 소리는 금세 다른 목소리에 묻혔다.

"싸움만 잘하면 뭐해? 너, 나보다 무기 잘 다뤄? 포격 장비는 다룰 줄 아냐?"

"아니······?"

"그리고 내가 인마. 태평군 에이스 중 한 명이라고. 십장이라고 들어봤냐?"

"씹장?"

"······십장 이 무식한 새끼야. 내 밑에 열 명을 둘 수 있는 돌격대장 같은 거야. 싸움 잘해서 뭐해? 시 정부군이랑 주먹으로 싸울래?"

"그, 그건 아니지."

몰아치는 호든의 말에 밀러가 눈을 끔뻑거렸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호든은 벌써 몇 달 전에 태평군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러. 넌 특별히 내 밑으로 넣어줄 테니까 나만 잘 따라다녀 인마. 내가 무기브로커였던 건 알지? 신식무기만 잘 사용해도 너도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거야!"

"······무기브로커? 내가 알기로 너 애들 장난감 수입해다가 팔지 않았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밀러의 말에 호든이 다급히 주변을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크, 크흠! 어,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그거 하면서 다 아래로는 무기브로커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거라고! 그게 아니면 내가 어떻게 무기숙련자로 십장을 받았겠어?"

"······그런가?"

"아무튼! 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만간 거사를 치를 거라고 하더라고. 무기배급되면 우리가 가장 먼저 좋은 무기를 받는 거야. 듣자하니 전장수트는 기본이고, 워 머신도 준비했다고 하더라."

"와······ 워 머신? 그런데 그거 아무나 다루는 게 아니지 않나?"

"내가 아무나냐? 내가 워 머신만 타면 그깟 시 정부군 따위 한 끼 식사 거리도 안 될걸?"

그렇게 호든과 밀러 둘이 신나서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야기 도중 미안한데, 조만간 치른다는 거사가 뭐요?"

둘의 시선이 동시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후줄근한 복장에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눌러쓴 후드. 구부정한 허리와 거북목이 의심되는 기형적인 자세.

한눈에 봐도 볼품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길거리 부랑자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절반이 비슷한 모습이었으니까.

"크흠! 금천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나 보지?"

사내의 행색과 얼굴을 살핀 호든이 살짝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보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서 집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소. 그래도 지난주에 참가했었는데, 그땐 이런 말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래?"

지난주 집회에도 참석했었다는 말에 경계가 풀린 호든은 괜스레 어깨를 펴더니 거들먹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난주엔 말이 없었지. 위에서도 며칠 전에 결정된 사항이니까. 우리가 모인 이유가 뭔가? 배때기 부른 기업 놈들과 기생충 같은 위정자 놈들을 쓸어버리기 위함이 아닌가? 그걸 하려는 거지!"

"······? 금천교가 모인 목적이 그거였소? 나는 종말에 대비해서 기계신을 믿으며, 새로 열릴 평등한 세계를 기다리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커험! 같은 말이야 같은 말! 놈들을 죄다 쓸어버리면 우리만 남을 테니 그게 평등한 세상이지!"

"······? 그게 뭔 개소······ 궤변이오?"

사내가 못 믿겠다는 듯 호든을 바라봤다. 당연한 이유였다. 사내가 말한 건 그야말로 궤변 중의 궤변이었으니까.

"진짜래도! 못 믿겠으면 오늘 장량 사제님께서도 언급하실 테니 두고 보라고!"

"장량······ 사제님?"

순간, 사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서슬 퍼레진 기세에 움찔한 호든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 그래······! 자, 장량 사제님이 태평군에 미리 말했으니 그, 그럴 거야!"

왜인지 모르겠지만 호든은 사내의 눈치를 봤다. 어느새 거들먹거리며 떡 벌렸던 어깨는 말려 들어가 있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던 사내가 싱긋 웃더니 말했다.

"대답해줘서 고맙소."

그리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된 눈빛으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든이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후아······ 눈빛 한번 살벌하네. 대체 뭐 하던 사람이지?"

"뭐야?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어?"

"내가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 저 눈빛 봤어? 분명 사람 한 둘 죽여본 게 아니야."

호든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대로 막말해줘도 되는 거야? 씹장들한테만 미리 말해준 거라며?"

"씹장 아니고 십장 이 새끼야. 그리고 뭐······ 금방 알려질 사실인데 상관있겠어?"

* * *

"······그리하여 그분께서 계시를 내렸으니! 일어나라, 금천의 신도들이여! 너희가 지은 죄악은 내가 짊어질 테니, 세상을 뒤집어 평등하게 하라! 모든 인간은 금천의 십자가 아래 평등한 세상이 오리라!"

"금천! 금천! 금천!"

"우와아아!"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휘몰아친다. 어떤 자는 환희에 젖고, 어떤 자는 눈물에 젖는다.

단상 위에서 열기가 광기로 변질되는 군중을 내려다보던 크롬머리 거한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금속 십자가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군중 속에 섞여 그를 지켜보던 사내도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금속 십자가 (5)

148화. 금속 십자가

성공적으로 집회를 마친 장량은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치렁치렁한 사제복을 벗어 던진 그가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뭐하는 거야, 리나? 술 좀 가져와! 리나!"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으며 소파에 앉았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려는 찰나, 그제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하아. 씨발. 리나."

자신이 리나의 목을 꺾어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복잡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내뱉은 그가 다시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가지런히 정리된 술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그중 가장 위쪽에 진열된 술병을 꺼냈다.

광개토 엠페러 30년산.

3억에 달하는 출시가에 그나마도 물량이 없어서 프리미엄을 줘야 간신히 구한다는 최고급 위스키다.

언젠가 정말 축하할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이 술병을 따게 될 줄 알았는데······ 사람 일이 그렇게 생각처럼 흘러가진 않았다.

"이 구역 신도 중에서 마음에 드는 마지막 년이었는데······ 씨발."

술병을 든 장량이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는 술잔도 쓰지 않고는 그대로 술병째 위스키를 들이켰다.

"크으!"

식도에 불을 지른 것 같다. 독한 위스키가 목구멍을 지날 때마다 정신이 확 들 정도다.

그렇게 소파에 늘어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좆 같이 기분은 좋군."

거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준비도 충분했고 계획도 완벽했다. 지금의 교세와 그들 형제의 능력이라면 도시를 뒤엎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니라.

그렇게 되면 자신은 새로운 세계 위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맹목적이고 충성스러운 금천교인들의 주인으로서 말이다.

"크큭! 그래. 내가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되는 거지. 이 더러운 도시를 정화하고 꿈에 그리는 유토피아를 만드는 거야! 도시 전역에서 마음에 드는 년들로만 골라서······ 음?"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독백이 흘러나오던 순간, 장량이 불현듯 미간을 찡그렸다.

술병을 내려놓으며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어딘가를 노려봤다.

그건 그가 앉아있던 거실의 뒤편, 자작이 내린 어둠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였다.

"웬 놈이냐?"

장량의 눈동자에 귀화가 피어올랐다.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섬뜩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창가의 사각지대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눈치가 빠르군."

후줄근한 복장 대신 특유의 검은색 비옷을 입은 강현재였다.

"어디서 나온 놈이냐? 내가 누군지, 이곳이 어딘지는 알고 숨어든 거냐?"

장량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의 몸은 처음보다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야밤의 불청객이라면 결코 좋은 의도로 방문하진 않았을 터, 강현재를 발견한 순간부터 전투 모드를 켰다.

"그걸 꼭 알고 있어야 하나?"

강현재가 피식 웃었다.

"뭐?"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는데."

그 당당하고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장량은 어이가 없었다. 저 시커먼 놈이 감히 누구 앞이라고 저런 건방을 떤단 말인가?

장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다."

그리고 싸늘하게 굳은 그 얼굴 위로 잔인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그전에 뒈질 테니까!"

쾅!

무언가 터지는듯한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장량이 발을 굴러 움직인 곳에서 한번, 그리고 강현재가 서 있던 창가에서 한번.

쩌저적! 하고 갈라진 바닥에서 쇄도한 장량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강현재의 코앞에 다가섰고, 그대로 흉포하기 그지없는 두꺼운 팔이 강현재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어느새 강현재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창가 앞에 있던 자그만 철제 협탁이 박살났다.

장량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이걸 피해?'

자신의 움직임은 단순히 빠르게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테고, 설령 본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바이오웨어 발할라.

오직 선택된 강자들에게만 실험용으로 배포됐던 이 임플란트는 한계를 돌파하게 만들어준다.

속도도, 힘도, 인식도.

그런데 그걸 피하다니?

게다가 단순히 피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쐐에에엑!

어느새 자신의 배후를 점한 강현재가 무언가를 찔러넣고 있었다.

캉!

불꽃이 한번 튀고 서로 거리를 벌렸다.

강현재가 찔러넣은 무언가를 확인한 장량이 이를 드러냈다.

"네놈······ 칼잡이인가?"

장량이 강현재의 손에 들린 칼과 자신의 주먹을 번갈아 쳐다봤다. 분명 피할 목적으로 간단히 튕겨냈는데도 손끝이 묵직하다.

게다가 작지만, 주먹에 생채기도 생겼다.

장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범한 칼이 아니로군."

자신의 주먹은 평범한 주먹이 아니다. 무려 '그분'께서 손수 내려주신 은총이었다. 강철을 종잇장처럼 찢고, 콘크리트를 두부처럼 으깨버리는 파괴의 상징.

그걸 저 이쑤시개 같은 칼이 상처를 낸 것이다.

"네놈의 팔 역시 평범한 팔은 아니로군."

강현재의 시선이 장량의 주먹에 머물렀다. 장량의 주먹에 새겨진 자그마한 생채기는 실시간으로 지우개 지워지듯 지워지고 있었다.

상처가 자가수복되는 사이버웨어라니. 이런 물건은 들어본 적도 없다.

한편, 물끄러미 강현재를 쳐다보던 장량은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기이할 정도로 강한 칼잡이······ 그래.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네놈. 셀리케 연구소에 있었던 칼잡이로구나."

"······감출 생각도 안 하는군."

"뭘 말이냐?"

"그걸 네 입으로 말하면 연구소를 공격한 세력이 네놈들이라고 자백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아, 그거 말인가? 큭큭!"

장량의 올라간 입꼬리에서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거야 네놈이 이곳에서 살아나갔을 때 이야기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아니, 오만하다고 해야 할까? 네놈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듣진 못했나 보지?"

"푸하핫! 너야말로 그깟 요망한 년 하나 잡았다고 너무 오만한 태도 아니냐? 그깟 고철덩어리 따위보다 내가 못 할 것 같으냐!"

장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부터 조금씩 불어나던 신장은 어느새 3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커져 있었고, 푸른빛 귀화를 흘리는 눈빛에선 스산한 기운이 뚝뚝 떨어졌다.

거기에 금빛으로 반질거리는 크롬머리와 레게머리처럼 땋은 전선가닥에선 은백색 전류가 타탁! 거리며 튀어 올랐다.

이쯤 되니 장량도 더 이상 인간이라고만 말하기엔 이상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말하기엔, 너도 고철덩어리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인데?"

"흥! 멍청한 칼잡이 아니랄까 봐 이런 완벽한 모습을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다니? 봐라! 이게 다가올 신세기 인류의 모습이다!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한계를 넘어 불멸에 이르는 신인류의 시작! 그게 바로 우리 금천교다!"

장량이 양손을 펼치며 소리쳤다.

"더러운 기업 놈들과 기생충 같은 위정자놈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제 끝났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다! 우리 금천교가 신세기를 열어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풍요롭고! 영생불멸한 삶을 살게 할 것이다!"

"개소리."

"뭐라!"

발끈한 장량이 콧김을 내뿜는다. 달아오른 신체의 열기로 수증기가 내뿜어졌다.

"너처럼 육체보다 고철덩어리가 더 많은 삶도 인간이라면, 뇌만 남은 사이보그도 인간인가?"

"당연하지! 몸은 로봇이라도 그 몸을 움직이는 주체가 인간의 뇌가 아닌가!"

"그럼 인간이 주체로 조종하는 안드로이드도 인간인가?"

"······그, 그건!"

장량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강현재가 입매를 비틀었다.

"어렵나? 그럼 다르게 묻지. 인간의 마음을 학습한 안드로이드는 인간인가?"

"그건 아니다! 안드로이드 따위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학습한단 말이냐!"

"그럼 이건 어떤가? 인간의 모든 기억을 사이버 스페이스에 업로드하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안드로이드는 인간인가?"

"뭐, 뭣?"

"스스로를 인간으로 자각하고, 가지고 있는 생전의 기억도 인간의 기억밖에 없고, 심지어 고도화된 기술로 고통 또한 느끼는데, 이걸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이익!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장량이 버럭 소리쳤다. 당장에라도 튀어나가 강현재의 머리를 으깨버리고 싶었으나, 이어진 강현재의 말에 멈칫했다.

"네가 말하는 그 신세기의 유토피아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라는 거다."

"부질없다니!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인간은 인간으로 남았을 때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다.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불멸에 이르는 인간이 과연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나?"

"흥! 그건 약한 놈들이나 내뱉는 변명일 뿐! 나를 봐라! 이 완벽하고 강인한 육체를!"

"그래?"

강현재의 비틀린 입매에서 피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여기를 살펴봤더니 좀 재밌는 흔적이 많더군. 곳곳에 사람이 죽었던 흔적이 남았어. 그것도 주로 거구의 성인 남성이 작은 여성을 살해한 흔적이 말이야."

"그, 그걸 어떻게······?"

장량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저 칼잡이가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나에 대해서 제대로 들은 건 아닌가 보군. 해결사들에게 이 정도 추리는 일도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

강현재가 싸늘한 시선으로 장량을 바라봤다.

"네놈은 사람을 죽인 흔적을 지울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저 쓰레기 치우듯 치웠다는 거지."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장량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강현재를 마주봤다.

피식.

강현재가 조소를 흘렸다.

"이래도 네가 인간으로 남았다고 말할 수 있나? 여자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이고, 그 시체조차 최소한의 도리도 없이 쓰레기처럼 치운 네가. 여전히 인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그럼 죽은 시체를 가지고 놀라는 말이냐? 이미 죽어버렸으니 빨리 치워야지!"

장량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그제야 강현재도 깨달았다는 듯 눈썹을 한번 올리더니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미 너는 인간이 아니로구나."

"······너야말로 몰래 침입한 쥐새끼 주제에 뚫린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인간을 포기한 놈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강현재의 냉소적인 말을 들은 장량의 입꼬리가 쫙하고 찢어졌다.

"크큭! 어디 비루한 칼잡이 따위가 인간을 정의하느냐?"

쾅!

장량이 발을 굴렀다.

"인간을 정의하는 건, 승리한 인간이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폭음과도 같은 소음과 동시에 나타난 장량의 거구.

치켜든 그의 육중한 양팔이 해머처럼 내려 찍혔다.

콰아아앙!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파괴력.

하지만 강현재는 처음의 격돌처럼 어느새 뒤로 물러선 상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물러선 발걸음을 다시 앞으로 튕겨내며 칼을 내뻗으려는 찰나.

"······!"

머리카락 대신 달려있던 장량의 전선 묶음이 은백색 광망을 터트리며 쇄도했다.

분명 허리 어림에 불과한 길이였으나,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전선이 길게 늘어졌다.

타타타탕!

강현재의 칼날이 전선을 막아냈다. 칼끝과 전선이 부딪칠 때마다 전류의 잔재가 번쩍거리며 튀었다.

그 사이 다시 폭발적으로 몸을 튕겨낸 장량의 거구가 강현재에게 쏘아졌다.

이번엔 양팔을 교차해 그대로 강현재를 들이박으려는 속셈이었다. 갈라진 팔꿈치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날이 튀어나왔다.

카앙!

강현재는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걷어내고 장량의 육탄돌격도 막아냈다. 날카로운 송곳날과 부딪친 칼날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하지만 부러지지 않고 다시 곧게 펴졌고, 그 반작용으로 강현재가 뒤로 튕겨 나갔다.

장량은 그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우악스럽게 달려들었다.

콰앙!

이번엔 성공적으로 강현재를 들이박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전진한 장량은 강현재를 매달고 벽을 뚫어버렸다.

콰앙! 콰앙!

두 개의 벽을 뚫고서야 육탄돌격의 공세가 잦아들었다.

그 이후는 벽이 없는 바깥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 건방진 말을 지껄여봐라!"

장량이 흉포한 괴성을 터트렸다. 달아오른 온몸에선 수증기가 피어났고, 한껏 일그러진 얼굴 위론 흉신악살의 표정이 떠올랐다.

건물 밖으로 튕겨 나간 강현재가 몸을 뒤집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몸이 지이익 하고 미끄러지며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강현재가 미간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송곳날은 칼날로 막아내서 등으로 콘크리트 벽을 뚫은 충격 정도만 남았기에.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강현재에게 그 정도 타격은 치명적이진 않았다.

그가 미간을 찡그린 이유는 하나였다.

'······귀찮게 됐군.'

아직 집회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변을 배회하던 금천교의 신도들이 강현재를 노려보기 시작한 탓이었다.

* * *

'······귀찮게 됐군.'

나는 온몸을 옭아매는 광기 어린 시선을 느끼며 혀를 찼다.

이런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 봐 저 건물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건데.

-마스터. 어떻게 할까요?

달라진 환경에 이브가 물어왔다.

저 건물의 보안 시스템을 장악하고 외부와 단절시켰던 게 이브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작업이 무색하게도 일이 이렇게 돼버렸으니.

나는 구멍 뚫린 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장량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벤토리 준비해. 키네틱 스트라이크로 간다."

금속 십자가 (6)

149화. 금속 십자가

49구역에서 아큐마 제약의 비행선을 상대로 사용했던 중력을 사용한 공격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이브와 이야기를 하며 많은 개량을 거쳤다.

먼저 기존의 텅스텐 막대와 함께 그것을 소량화한 얇은 막대를 추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위력 때문이었다.

키네틱 스트라이크의 위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단 한 방에 비행선의 보호막을 뚫고, 그 두꺼운 갑판을 찢어버리며 비행선을 추락시켰으니까.

하지만 너무 과했다. 내가 상대하는 적들 중 비행선을 가진 자가 몇이나 되겠나?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거대한 적을 위해 인벤토리를 아끼기엔, 솔직히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기존 막대의 숫자를 줄이고, 그것보다 훨씬 작게 만든 막대를 다수 넣었다.

대략 50센티미터의 길이에 직경은 3센티 정도 되는 납작한 막대로, 얼핏 보면 군용단검의 칼날처럼도 보이는 막대였다.

'이 정도면 사용하기에 따라 사람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예를 들어, 저 앞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장량 같은 놈 말이다.

다만 문제는 이거다.

"금천교 신도들이여! 사탄 들린 악마가 나타났다! 우리의 태평천국을 방해하는 사탄을 처단하라!"

장량이 사람들을 선동하는 탓이다.

"태평천국을 방해하는 사탄!"

"사탄을 처단하자!"

"죽여라!"

덕분에 사람들의 눈빛엔 완벽하게 광기가 떠올랐다.

어디서 꺼낸 건지 리볼버 권총이나, 날붙이가 손에 들렸고, 좀 더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놈들은 전투 사이버웨어를 드러냈다.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광기 너머의 장량을 바라봤다. 놈 역시 나를 바라본다. 마치 '이제 어쩔 테냐?'라고 묻는 것 같다.

이들을 죽이는 건 문제도 아니다. 구식 리볼버 권총의 총탄이나 날붙이 따위가 내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직 그럴 순 없다.

내가 이들을 죽이면 시민을 학살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까.

이들을 처벌하는 건, 시 정부가 되어야지 내가 되면 안 된다.

하지만······.

스르릉.

나는 칼을 칼집에 도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와라."

죽을 정도로 패는 건 괜찮다.

예로부터 미친개도 매가 약이라고 하듯, 광신도도 매가 약이다.

* * *

집회가 끝나고 호든과 밀러는 한쪽에 처박혀 포도주를 병나발 불었다.

당연히 식사 시간이 끝났기에 포도주의 배급도 끝났지만, 호든은 금천교의 태평군이었다. 그것도 말단이긴 하지만, 간부급에 속하는 십장. 몰래 포도주 몇 병 빼 오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그랬지. M600 기관총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니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한 놈이 막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면서 잘난척하지 말고 그렇게 잘 알면 보여달라고 하더라고. 그놈도 내가 입만 놀릴 줄 알았던 거지. 그때까지 내가 무기 브로커였다는 걸 많이 몰랐던 때거든."

"그래서? 그냥 놔뒀어? 아구창이라도 한 번 돌려주지."

"인마. 그건 하수나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거기서 멋지게 기관총 다루는 걸 보여줬지. 그러니까 간부가 관심을 갖더라고. 혹시 군인 출신이냐고. 그래서 군인은 아닌데, 무기브로커라서 이런 무기를 많이 다뤄봤다 그러니까 갑자기 화색을 띠더니 나랑 어디를 가자는 거야."

"오? 어디를?"

"무기창에 갔지. 거기서 아무도 다룰 줄 모르는 무기 몇 개를 쓰는 방법 알려줬더니, 그날 바로 십장을 달았다 이 말이야."

"초고속 승진이네. 그런데 그게 끝이야?"

"이게 끝이겠냐? 그래서 십장 마크 달고 그놈한테 갔지. 큭큭큭! 내가 어떻게 했을 거 같냐?"

"네 좆같은 성격을 봐선, 그놈을 네 밑으로 넣었을 것 같은데."

"정답! 큭큭큭! 그래서 그놈이 내 부하 1호다. 지금은 내가 턱짓만 해도 알아서 양말에 팬티까지 빨아온다, 이 말씀이지."

"푸하하핫! 그거 볼 만하겠네. 잠깐? 씨발, 나도 그럼 네 밑에 가면 네 팬티를 빨아야 되는 거냐?"

"걱정하지 마. 너는 특별히 군화 닦이 시켜줄 테니까."

"씨발, 시키기만 해라. 네 군화 안에다가 똥을 싸버릴 테니까."

그렇게 호든과 밀러. 둘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호든이 이야기를 하고 밀러가 듣는 형식이었다. 아무래도 태평군에 먼저 들어가 십장의 위치까지 오른 호든의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잡설이었지만.

아무튼, 한참을 떠들면서 빈 포도주병이 몇 개나 발치에 굴러다니던 그 순간.

콰쾅!

무언가 폭발이라도 한듯한 굉음과 함께 그들이 술을 마시던 자그마한 창고까지 흔들리는 충격이 몰아쳤다.

"뭐, 뭐야?"

"젠장. 누가 쳐들어온 건가?"

"쳐들어와? 누가? 여길 왜?"

"몰라! 이 공장의 주인일 수도 있고, 우리한테 털린 갱단 놈들일 수도 있지!"

호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쩌려고?"

밀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씨발! 뭘 어째? 적이 쳐들어왔으면 싸워야지! 나는 태평군 십장이라고!"

"싸, 싸우겠다고? 그 몸으로?"

밀러가 미간을 찡그렸다.

둘은 이미 거나하게 취했다. 당장에 밀러 자신도 머리가 어질거렸지만, 눈앞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가는 호든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비척거리며 걸어나간 호든이 그들이 숨어있던 창고 문을 확 열어 재끼며 소리쳤다.

"씨바알! 어떤 개새끼가 감히 금천교에 쳐들어왔어!"

"호든!"

밀러가 깜짝 놀라 호든에게 달려갔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밖으로 나간 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치다니.

진짜 적이 쳐들어왔으면 대가리에 총알이 박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호든의 뒷덜미를 잡아채 급히 몸을 숙였다. 밀러의 육중한 몸에 깔린 호든이 켁켁거렸다.

하지만 밀러의 눈엔 그게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한 장면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의에 의한 게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끄아아악!"

"살려줘어어억!"

비명을 지르며 붕붕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일정 높이까지 떠올랐다가, 이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의 팔, 다리가 과자처럼 부러지며 덜렁거렸다. 간혹 재수 없게 머리부터 떨어진 사람들은 축 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밀러의 몸에 깔려 컥컥거리던 호든이 중얼거렸다.

"저,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야?"

"어? 누구?"

"저기!"

밀러의 시선이 호든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보였다. 지상에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사내를.

검은색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비닐 옷을 입은 사내였다.

밀러의 미간이 좁혀졌다. 처음보는 사람인데 호든은 왜 아는 것처럼 말하지?

그때 주먹을 내지른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밀러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집회 전 만찬에서 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었던 사내였다.

"저 사람이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모, 몰라 씨발! 이거 잘못 엮이는 거 아니야?"

고개만 갸웃한 밀러와 달리 호든은 걱정했다. 저 사내에게 금천교 내부 사정을 이것저것 말해준 건 다름 아닌 호든이었으니까.

"어떻게 할 거야? 너도 저기 끼어들 거야?"

"당연하지! 저 사내와 우리가 말하는 걸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

호든이 호기롭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콰아앙!

또 한 번의 폭음과 함께 그들이 서 있는 자리까지 충격파가 몰려왔다. 간신히 쓰러지려는 몸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사내와 장량이 격돌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격돌은 이전까지 보였던 동화 같은 장면과는 사뭇 달랐다.

한 번의 격돌에 콘크리트 바닥이 쩍쩍 갈라졌고, 주먹질 한 방에 공장의 벽이 수수깡처럼 터졌다.

무엇보다 움직이는 속도를 눈으로 좇기도 어려웠다.

"······저기를 끼어든다고?"

밀러가 다시 한번 물었다.

번쩍!

콰콰쾅!

이번엔 번쩍이는 뇌전과 함께 건물 하나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얼굴이 핼쑥해진 호든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일단 사제님의 기적을 기, 기다려 볼까?"

* * *

신도들을 밀어 넣던 장량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직접 뛰어들었다.

"쥐새끼처럼 그만 도망다녀라!"

야수의 울음과도 같은 장량의 포효와 함께 콘크리트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 하나, 휘두르는 손짓 한번마다 땅거죽이 뒤집혔다.

"그럼 너 혼자 덤비던가?"

나는 달려드는 신도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집으며 약 올리듯 말했다.

그럴 때마다 신도들은 차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저 멀리 날아갔다. 물론 그 이후엔 대부분 일어서지 못했다.

"이 쥐새끼가!"

장량의 크롬머리가 번쩍이더니 이내 시작된 전류가 머리칼 대신 덜렁이던 전선으로 뻗어 나갔다.

번쩍!

콰르릉!

그리고 주변을 뒤덮는 은백색 광망.

그 전류의 그물이 주변을 뒤덮자 멋모르고 달려들던 신도들이 눈을 뒤집어 까며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어느새 그 범위에서 벗어난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도들이 감동을 심하게 받은 것 같은데? 저렇게 게거품까지 물고 쓰러지는 걸 보면."

"닥쳐라!"

발끈한 장량이 주먹을 휘둘렀다.

또 다시 피하고 바닥은 갈라진다. 그 콘크리트 파편에 대가리가 깨진 사람들만 피를 흘렸다.

그때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다.

-마스터. 키네틱 스트라이크 준비 완료됐습니다.

"발사해."

"뭐?"

"너 말고."

"이 새끼가!"

다시 놈과 어울렸다.

주로 내가 피하고 놈이 쫓는 형식이었다.

그나저나 신도들도 대단했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됐으면 자신들도 피할법한데, 머리가 깨지거나 팔, 다리 부러지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여전히 달려들었다.

'이래서 종교가 위험한 거지.'

어떻게 보면 금천교를 만든 놈들이 대단한 거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선동된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 것도 전부 계산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궤도 안착 완료. 3초 후 지상으로 떨어집니다.

나는 이브의 목소리에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우악스럽게 다가오던 놈에게 물었다.

"너, 네 육체가 불멸이라고 했지?"

"갑자기 뭔 개소리냐!"

"이제 와서 빼는 건가?"

"닥쳐라! 이 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불멸이다!"

발끈하며 달려드는 놈에게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럼 증명해봐."

"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놈이 불현듯 고개를 쳐들었다. 어둠에 물든 밤하늘 위로 실낱같은 점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장량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놈이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늦었어."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한 듯 쇄도하던 별 하나가 순식간에 지상으로 추락했다.

「중력조작」 2단계 레벨.

집중제어 타격 스킬. 「낙성(落星)」

번쩍―――!

어둠을 가르며 한줄기 백광이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검은색 도화지에 기다란 선을 내리그은 것 같았다.

눈으로 본 것보다 중간에서 폭발하듯 증폭된 속도는 인지하고 자시고의 범위를 넘어섰다.

장량은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빛줄기를 마주했다.

우두두둑―――!

장량을 관통한 빛줄기가 콘크리트 바닥을 두부처럼 뚫고 지나갔다.

어마어마한 운동량이 터져나가며 콘크리트 땅바닥을 뒤집었고, 주변에서 달려들던 사람들도 폭풍에 휘날린 연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나는 새카맣게 탄 장량(이었던 것)의 앞에 다가갔다. 대기권을 돌파하며 타오른 텅스텐 막대가 장량을 꿰뚫으며 그대로 온몸을 태워버린 거다.

"불멸이라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너른 대지 위에 거짓말처럼 한줄기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광공해가 없는 밤하늘 위로 별빛이 쏟아졌고, 시시때때로 별똥별이 긴 꼬리를 남긴 채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한편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마주한 채 정좌를 한 사내가 있었다.

이 황량하고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49구역에서 홀로 있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대놓고 불을 때고 있다니.

지평선이 보이는 이 평야의 특성상, 분명 이 모닥불의 불빛은 수 킬로 밖에서도 보일 게 분명했다.

49구역의 약탈자인 스케빈져도, 아니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오염체에게도 말이다.

그때 정좌를 하고 있던 사내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막내가 죽었군."

작게 중얼거린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모닥불의 불빛에 가로막혔던 사내의 등 뒤가 보였다.

그건 시산혈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참혹한 광경이었다.

스케빈져로 보이는 인간들의 시체가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팔, 다리가 없는 건 양반이었다. 머리가 반쯤 사라졌거나,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진 시체가 즐비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와그작와그작!

그런 시쳇더미를 게걸스럽게 먹는 시커먼 짐승이 있었다.

아니, 그걸 짐승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짐승의 형태였지만, 그건 육체를 가진 게 아니라 어떤 에너지의 집합체 같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내가 짐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짐승의 모습이던 그 무언가가 액체처럼 녹아내리더니 사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사를 앞당겨야겠어."

시쳇더미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그대로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갔다.

구름에 가린 달빛의 그림자가 한차례 지나가고, 이내 다시 드러난 그곳에선 사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태평천국 (1)

150화. 태평천국

장량과 격돌하기 전, 나는 이미 공장 내부를 살펴봤었다. 혹시나 다른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급속도로 세가 커진 금천교는 애초에 정교한 조직이 아니었고, 당연히 비밀스러운 전자문서나 숨겨진 데이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권력은 사제라 칭하는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주먹구구식으로 조직이 돌아갔다.

즉, 48구역 금천교의 거점이던 이곳에서 얻어가는 게 딱히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예 없진 않았다.

이들이 '거사'라고 말하는 일종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 금천교의 숨은 목적이 단순히 모두가 평등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그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인간의 육체를 벗어난 기계화 인간의 유토피아였다. 그걸 평범한 기준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물론 인간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지고 신체가 기계로 대체되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와 썩 어울리는 종교이긴 했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 금천교의 뒤에 악마 코스프레를 했던 릴리트가 있었다는 걸.

완벽한 로봇······ 그 모습을 로봇이라고만 봐도 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릴리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릴리트'. 위대한 분께서 내려주신 합당한 이름이자, 어리석은 인간들을 징벌할 정복자.」

스스로를 인간을 징벌할 정복자라고 말이다.

그리고 누가 봐도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제들의 허울 좋은 말보다, 릴리트의 저 말이 금천교의 진의(眞意)에 가까울 거다.

즉, 금천교는 인간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게 아니다.

기계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거다.

'살아있는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서라도 말이지.'

그야말로 미친 세계에서 튀어나온 미친 종교다.

다만, 아직도 의아한 점은 이 종교의 창시자이자, 릴리트가 '그분'이라고 말한 존재다.

극심한 인간혐오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모든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서라도 기계의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니.

"······흠. 애매하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금천교를 계속 쫓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처음엔 터미네이터에 관한 호기심이 대부분이었다. 이브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점점 스케일이 커지더니 40번대 구역을 집어삼킨 사이비 종교에서, 지금은 시 정부를 상대로 싸워보려는 쿠데타 세력으로까지 변했다.

이제는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쫓기엔 사안이 너무 커졌다. 무엇보다 수지타산도 안 맞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자니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와 시간이 아까웠다.

"그럼 이걸 가장 비싸게 사줄 사람을 만나면 되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 * *

사방이 막힌 사무실.

벽에 걸린 창문으로 화창한 바깥 날씨와 풍경이 보이지만, 사실 창문이 아니라 모니터다.

연구소 심부에 위치한 이곳에서 바깥 풍경을 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보이는 풍경이 아마존 밀림을 내려다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숲이 우거져 있었으니까. 소울 시티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요염하게 다리를 꼰 채 앉아있는 유혜리가 그녀를 닮은 핑크색 음료를 빨대로 빨며 내게 물었다.

"이걸 왜 그냥 알려주는 거지?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에게 막 금천교와 터미네이터에 관해서 알려준 찰나였다.

이 정보를 가장 원하는 쪽이라면 누가 뭐래도 연구소 습격의 배후를 찾고 있을 셀리케 바이오텍이었으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혼자 움직이는데 한계라서."

"한계라고? 네가?"

유혜리가 빨때를 빠는 모습 그대로 코끝을 찡그렸다. 가늘게 뜬 눈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더 나아가면 수지타산이 안 맞거든. 알다시피 해결사라. 그런데 난 더 알아보고 싶단 말이야?"

그리곤 은근한 눈으로 유혜리를 바라봤다.

빨대 끝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더 알아보고 싶으니 너를 고용해달라, 이거야?"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군."

"하?"

입을 벌린 유혜리가 어이없다는 듯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눈빛이다.

나는 유유히 그 눈빛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리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닐 텐데? 아니지. 오히려 아직까지 너희가 몰랐던 걸 내가 알아낸 걸 보면, 너희가 내게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땐 역시 철면피로 밀어붙여야 했다.

내 목적은 적당히 아래로 감춘 채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하는 부분만을 부각시킨다. 그럼 상대도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본인도 필요하기에 거래를 수락할 수밖에 없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하는군."

물론 안 통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럴 땐 더 강하게 나간다.

"그래서 의뢰를 하지 않겠다? 뭐, 그래도 딱히 상관없고."

나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태도로 의자 뒤에 몸을 기울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유혜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진짜 잘나서 잘난척하는 거론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네. 좋아! 고용하겠어."

"고맙군. 그럼 남은 얘기를 마저 해주지."

"······뭐야? 전부 다 얘기한 거 아니었어?"

"나도 먹고살아야지."

"하······! 정말! 그래서 그 숨긴 얘기가 뭔데?"

유혜리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찬다.

하지만 더 기가 찰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그놈들.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더군."

"······쿠데타? 내가 알고 있는 쿠데타?"

"그래. 그 쿠데타. 시 정부를 한 번 뒤엎어볼 생각이야."

"미친 거 아니야?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시 정부의 무력을 뭐로 보고?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유혜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녀의 태도는 합당했다. 시 정부가 가진 무력은 시민들이 모여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쉬운 말로, 소울 시티 시민 전체가 무장해도 시 정부의 정부군과는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이 세계의 전투란, 곧 기술력의 싸움이다. 예전처럼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어쩌면 정부군의 사상자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보유한 전투 안드로이드 부대만 출동시켜도 시민들을 학살하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테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어렵다고는 보지. 그런데 마냥 아니라고만 볼 순 없는 게, 그렇게 따지면 메가코프의 연구소를 공격한 것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야."

"음······!"

유혜리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비슷한 말로 메가코프의 무력 또한 그렇다. 물론 정부군의 무력과는 비교할 순 없겠지만, 이 또한 시민들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놈들은 그걸 해냈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금천교의 세력이 생각보다 커. 40번대 구역에서 금천교의 신도가 아닌 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니까."

"그 정도라고? 그런데 왜 몰랐지?"

미간을 찡그린 그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중앙에 사는 시민들은 40번대 구역에 나갈 일이 없는 데다가, 뉴스에서도 거론조차 안 되니 알 수가 없지. 그런데 너희도 몰랐다는 건 의외네."

셀리케는 메가 코프다. 분명 자체 정보수집부서가 있을 텐데 이걸 놓쳤다고?

솔직히 금천교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자신들과 별 상관없으니 방관하고 있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설마 아예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도시 내부 정보는 시 정부 정보망과 SCPD 정보망에 거의 위탁한 상태라······ 아마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일걸?"

유혜리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건 이거대로 놀라웠다. 시 정부와 SCPD 정보망을 같이 쓴다는 건 사실상 메가코프에게 어마어마한 특혜를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뭐, 이 세계야 원래 그런 세계라지만······ 확실히 의외긴 했다.

시 정부가 정보 제공의 대가를 받는다고 해도, 이건 일방적인 손해에 가까웠다.

이 도시. 아니, 이 세계는 전체적으로 정부와 기업 간의 알력다툼으로 돌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거다.

그런데 시 정부의 정보를 기업과 공유한다라······.

정보가 곧 권력인 이 세계에서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거지? 시 정부 의원 전부가 권력 욕심이 사라지기라도 한 건가?

그때 갑자기 유혜리의 표정이 굳었다. 푸른빛으로 물든 눈동자로 보아 어디선가 전뇌 통신이 들어왔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다시 정상을 되찾은 눈동자로 유혜리가 나를 바라봤다.

"진짜였네."

"······? 뭐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유혜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쿠데타 말이야. 지금 터졌단다."

* * *

TV 화면에서 건물 하나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불길이 건물을 뚫고 하늘까지 치솟았고, 시커먼 연기는 하늘을 검게 물들일 정도였다.

47구역의 구역청이란다. 정부 청사가 불타오르는데도 소방헬기는 고사하고 소방차조차 보이지 않는다.

불타는 구역청 맞은편으로 화면이 돌아간다. SCPD 오피스다.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장소지만, 이곳은 비교적 멀쩡했다. 금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으니까. 모두 양손에 검은색 물건을 쥐고서 말이다.

오피스 무기창고에 있던 무기들이다. SCPD 오피스도 털린 거다. 원래 이곳에 있어야 할 경찰들은 어딨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어서 [긴급속보]라는 타이틀이 뜨면서 화면이 전환됐다.

금색 물결이 30번대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기갑차가 줄지어 늘어섰고, 그런 기갑차를 보호하듯 워 머신과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행진했다. 그 뒤를 금색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저마다 무기를 쥐고 말이다.

비교적 행정력이 닿아있던 30번대 구역의 SCPD들이 멋모르고 왔다가, 금천교 세력의 물결을 보고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그런 모든 모습이 TV 화면을 통해서 생생히 중계되고 있었다.

"······개판이로군."

나는 신랄한 감상평을 내놨다.

"어차피 SCPD 수준으론 못 막을 거라 예상했잖아. 특공대가 와도 저 숫자면 치를 떨 텐데, 그냥 경찰이 무슨 상대가 되겠어?"

유혜리 역시 비슷한 감상평을 고상한 말로 내놨다.

"이제 어쩔 거지? 그냥 지켜볼 생각인가?"

내 생각보다 쿠데타가 일찍 터졌다.

원래는 셀리케의 의뢰를 받아서 조금 더 정보를 캐보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정보는 고사하고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쿠데타가 벌어진 이상, 사람들을 선동한 사제들은 반란의 주역이 되었다. 금천교에선 기를 쓰고 사제를 보호하려 할 테지.

이전처럼 쉽게 접근할 수도 없을 테고, 접근한다 하더라도 눈에 불을 켜고 경계를 할 거다.

분명 사제들에게 금천교의 핵심. 통칭 '그분'이라 칭하는 존재에 닿을 수 있는 키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지금으로선 닿기 요원한 상황이다.

셀리케로 올 게 아니라 남아있는 장씨 삼형제를 찾았어야 했나?

"지켜본다고? 우리가?"

그런데 유혜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여태까지는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저놈들이 연구소를 습격한 배후라는 걸 알아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방법이 있나? 아무리 셀리케라해도 저 인파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금천교의 쿠데타 세력을 단순히 적이나, 반란세력으로 몰기엔 무리가 따랐다.

물론 저들을 선동한 사제를 비롯한 간부들은 책임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대다수의 금천교인들은 전부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들을 전부 무력으로 진압한다? 몇 명이나 되는지 추산조차 안 되는 저 사람들을?

메가코프의 위상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전쟁이 끝난 후, 분명 학살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왜 우리가 감당을 해?"

"······?"

"저건 시 정부가 감당할 일이지."

유혜리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우리 일은 그런 시 정부 등 뒤를 떠미는 일이고."

깜빡 잊었다.

메가코프가 가장 잘하는 일이 뒤집어씌우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태평천국 (2)

151화. 태평천국

셀리케 연구소를 나서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마천루 빌딩이 내뿜는 조명은 대지를 밝게 물들였고, 사방에서 번쩍거리는 네온사인과 춤추는 홀로그램은 밤이라는 걸 잊게 만들었다.

아마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더라면 나도 몰랐을 거다.

"시간 한 번 빠르군."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진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유혜리는 내게 딱히 어떤 걸 요구하진 않았다. 그냥 알아서 잘하고 결과물만 가져오라고 했다.

이번처럼 정보를 가져오든, 아니면 습격을 지시한 놈의 목을 가져오든.

그럼 돈은 알아서 두둑이 챙겨준다나?

"이렇게 친절한 의뢰인이라니. 유혜리와 친하게 지내길 잘했어."

물론 여전히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육탄돌격을 시시때때로 시도하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의뢰인으로서는 물론이고 알고 지낼만한 지인으로서도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성격 자체가 펀(Fun)하고 쿨(Cool)하고 섹시(Sexy)했으니까. 무엇보다 뒤끝도 없고 내게 호의적인 것도 컸다.

그리고 나는 그 호의에 힘입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현재 유일하게 알고 있는 금천교의 사제들은 40번 구역의 산티아고와 도시 북동쪽 구역을 모두 관리한다는 장씨 삼형제였다.

그들의 신원. 정확히는 금천교의 사제가 되기 전까지의 과정을 최대한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과정에 분명, 금천교의 배후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원래는 내가 발품을 팔았어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40번대 구역 전체가 뒤집어진 상황이다. 발품으로 정보를 얻기엔 요원했다.

"인적사항은 대충 말해줬으니 분명 셀리케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든, 아니면 시 정부나 다른 곳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든, 뭔가 남아있겠지."

나머지는 유혜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주차해놓은 바이크 위에 올라타기 전, 통신을 연결했다.

몇 번의 전자음이 지나고 딸깍하며 로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현재 씨? 지금 어디에······ 아! 그건 일단 놔두세요. 대피요? 아니요. 아직 정해진 게······ 해리! 비상전력 체크부터 해주시겠어요?

단말기 너머로 허둥대는 로제의 목소리와 함께 어수선한 분위기가 단번에 전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섞인 사람들의 소리와 물건을 옮기는 둔탁한 소리, 바쁜 발걸음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아스라이 들리는 사이렌 비슷한 소리까지.

"바쁜가?"

-아, 괜찮아요. 대충 다 정리됐으니까요. 휴우. 그런데 어디에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는 있어요?

짧게 한숨을 내뱉은 로제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목소리만으로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괜히 실소가 흘러나왔다.

"당연히 알고 있지. 이번에 내가 쫓던 놈들이었거든."

-네? 이 일에 당신이 끼어있다고요?

"······뉘앙스를 조심해줬으면 좋겠군. 꼭 내가 쿠데타 세력과 함께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잖아?"

-앗, 미안해요. 그런데 당신이 쫓고 있었다는 게 무슨 소리에요? 설마 저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걸 알고 있었던 거에요?

"말하자면 긴데······ 그건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일단 로세툼은 닫고 17구역에 있는 내 아파트로 가 있도록 해."

-당신 아파트를요? 왜요?

"그래야 네가 안전하니까."

로세툼은 위험했다.

로세툼이 있는 33구역은 40번 구역과 42번 구역에 맞닿아 있다. 금색 정장을 입은 광신도들이 들이닥치면 속수무책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컸다.

시 정부군이 강하긴 하나, 그 숫자는 제한적이다. 절대 도시 전체를 커버할 수 없다.

분명 '일정 구간'까지를 마지노선으로 막을 테고, 아마도 그 '일정 구간'에 30번대 구역이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다.

리모델링한 로세툼이 아무리 보안공사를 덕지덕지 칠했더라도 건물 자체가 무너지면 아주 소용없다. 금천교가 가진 중화기라면 이런 작은 빌딩 하나 날리는 건 일도 아니다.

즉, 로세툼에서 버티는 건 미련한 짓이다.

무엇보다 로제의 안전이 우선이다.

내 설명을 모두 들은 로제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건물이야 또 사면 되니까요.

"······."

아. 도대체 이 아가씨는 얼마나 부자인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