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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1화

이야기를 끝낸 이세훈과 염성하가 뒤늦게 제련실에 도착했고, 한참 생도들 앞에서 예시를 보이던 리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빨리 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염 선배님이 염륜과 관련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당당하게 대답하는 이세훈과 무뚝뚝하게 이야기하는 염성하. 그 모습에 리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다음부터 사적인 이야기는 강의가 끝난 뒤에 해라."

실력도 없으면서 요령을 피운다면 가만두지 않겠지만,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뭐라 할 이유는 없다.

잠시 멈췄던 강의가 다시 시작되었고 빈자리에 앉은 이세훈은 제련실 내부를 슬쩍 둘러보았다.

'기본적인 설명이라 그런가. 절반은 벌써 설계 중이네.'

강의를 꼭 들을 필요가 없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련실 한쪽에 놓여 있는 재료들을 살펴보았다.

'흐음. 기본 제공인데도 쓸 만한 것들이 많구만.'

생도들에게 금전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제공하는 기본적인 재료들. 앞서 배분된 예산과는 별도였는데 품질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회귀 전에 갔던 곳은 교수들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돈 대신 재료를 받았는데 말이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재료를 고른 이세훈이 자리로 돌아오자 그 모습을 발견한 생도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료를 바로 들고 온다고?'

'검증은 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잔류마력을 사용하는 무구는 마력회로의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에 설계도를 꼼꼼히 작성해서 검증을 끝낸 다음에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걸 도면 한 장도 그려보지 않고 곧장 제작에 들어가다니?

그 파격적인 행보에 생도들은 물론이고 강의 중이던 리스조차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그중 특히나 살벌한 시선을 느낀 이세훈은 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염성하. 이쪽을 향한 의심과 기대감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눈깔 터지겠네. 새끼.'

이쪽이 웃는 것을 봤는지 시선이 한층 더 예리해졌지만, 이세훈은 깔끔하게 무시한 뒤 자신이 골라온 재료를 살폈다.

이번 제련의 주재료는 '화홍석'과 '암운석'.

각각 화속성 마력과 암속성 마력이 담긴 광석들로 무난한 재료들이었다.

'비율은 7대 3 정도면 될 것 같고... 가열부터 해볼까.'

화르륵!

가동과 동시에 마력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화로. 그 온도를 살피던 이세훈은 준비해둔 화홍석과 암운석을 곧장 집어넣었다.

"...그냥 집어넣는다고?"

"저러면 안에 있는 속성마력 다 날아가지 않나...."

초심자도 하지 않는 실수를 다른 사람도 아닌 학과 수석이 하다니. 모두가 의아한 시선으로 보고 있을 때.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붙인 이세훈이 화로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나온다.'

쩌적!

달궈진 화홍석과 암운석에 균열이 새겨지자 그 틈새로 속성마력이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화로의 불꽃과 부딪치며 격렬하게 타오르는 두 마력. 당장에라도 집어 삼켜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은 곧장 오른팔에 홍련을 두르고 화로의 안쪽에 처박았다.

"흐억...!"

"으악...!"

그 아찔한 광경에 깜짝 놀라는 생도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세훈은 아무렇지 않게 오른팔로 화로 안쪽의 불꽃을 휘저었다.

후우웅─

홍련을 휘감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두 속성마력이 불꽃과 어우러지며 물들어간다.

반죽을 하듯 한참 동안 화로의 안쪽을 휘젓던 이세훈은 손바닥에서 저항감이 느껴지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팔을 빼냈다.

우우웅!

붉은색과 검은색이 절묘하게 뒤섞인 채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불꽃.

그 신비로운 형태에 주변의 생도들이 입을 떡 벌렸고, 리스 역시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화력치환이라고...?'

불꽃을 컨트롤하여 속성마력을 머금게 만드는 '화력치환'.

마력의 조정뿐만 아니라 불꽃을 다룰 줄 알아야 가능한 고난이도 기술이었는데 이세훈은 그것을 무려 화속성과 암속성 두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해낸 것이다!

'형님이 여유로워하신 이유가 있었구나....'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수십 년 경력의 대장장이를 보는 듯한 느낌.

압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재능에 리스는 수업조차 잊은 채 감탄했고, 이세훈은 눈매를 찌푸리며 화끈거리는 오른팔을 털어냈다.

'아직은 일렀나.'

불꽃의 장인과 홍련으로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 저만한 열기를 완전히 견뎌내기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덜 섞이긴 했지만... 뭐, 중요한 건 불꽃의 흐름이니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화력치환이겠지만 염성하에게는 아마 다른 풍경이 보이고 있을 터. 그것을 제대로 이해시키는 것이야말로 이번 제련의 진짜 목표였다.

'잘 봐두라고.'

불꽃이 흐름이 멈추지 않도록 이세훈은 발치의 버튼들을 누르며 화로 내부의 마력을 세밀하게 조정했고,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염성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화로의 안에서 뒤섞인 두 개의 속성마력.

화속성 마력은 원을 그리며 빠르게 회전했고 암속성 마력은 그 위를 둘러싸고 느릿하게 흐른다.

자연스럽게 맞물려 있는 두 마력의 모습에 염성하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두 속성은 상성이 안 좋을 텐데 어떻게....'

외부로 확산하는 성질을 지녔으며 마력의 움직임이 빠른 화속성마력. 반대로 내부로 침식하려는 성질을 지녔으며 마력의 움직임이 느린 암속성마력.

성질부터 구성까지 완전히 상반되는 두 마력이 어떻게 저렇게 뒤섞일 수 있는가.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염성하는 금방 그 비결을 알아차렸다.

'두 속성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비율. 그리고... 마력의 특성을 반영한 배치인가.'

안쪽으로 파고드는 암속성 마력은 바깥에, 바깥으로 퍼지는 화속성 마력은 내부에 둔다. 이러면 두 마력이 서로 맞물리면서 고착상태가 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비율의 배분부터 마력의 움직임까지 상당히 까다로운 기술. 저 정도 완성도라면 지금보다 빠르게 회전해도 흐트러지지 않고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으리라.

'...원?'

거기에 생각이 닿은 순간. 염성하의 머릿속으로 한 광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탁한 검붉은색의 염륜이 더욱 빠르게 회전하여 그 색이 두 가지로 분리된다. 그리고 만들어진 것은 검은 아지랑이를 두른 붉은 원.

우우웅─

머릿속으로 완성된 '염륜'의 형태에 염성하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염륜잔화창의 습득에 방해된다 하여 사용을 금지당한 자신의 또 다른 속성마력.

"아."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음을.

* * *

강의가 끝난 뒤. 제련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염성하의 모습에 다시금 생도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의실에 있었을 때보다 염성하의 기분이 조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저... 선배님. 혹시 같이 점심이라도...."

이번에는 좀 더 정중한 태도로 조심스레 다가온 한스와 그 패거리들. 두 눈을 빛내는 그들의 모습에 염성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지금 기분이 좋다."

"그, 그럼...."

"그러니 다시 나빠지기 전에 꺼져라."

"...."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생도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빠져나갔고, 염성하가 고개를 돌려 제련실에 혼자 남은 이를 바라보았다.

"감은 좀 잡았어?"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씩 웃고 있는 이세훈. 그 의기양양한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염성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여준 흐름 덕분에 실마리를 잡았다."

"그래? 그럼 한번 만들어봐."

"...명령조로 말하지 마라."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염성하는 허공에 원을 그려 염륜을 만들어냈다.

화르륵!

평소와 같이 검붉은 불꽃이 피어올라 원을 그리더니 평소보다 빠르게 가속한다. 표층으로 밀려나는 검은색과 내부로 가라앉는 붉은색.

검은 아지랑이가 맺힌 새빨간 염륜, 광견 염성하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흑염륜黑炎輪'의 모습에 이세훈은 살짝 감탄했다.

'예시를 보여줬다지만 설마 단번에 만들어낼 줄이야.'

염성하가 보유한 속성마력은 A급 화속성 마력인 '적염혼赤炎魂'과 A급 암속성 마력 '흑암혼黑暗魂'으로 총 두 가지.

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화속성 마력인 적염혼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염화문의 전통 때문이었다.

'염륜잔화창은 순수한 불꽃으로만 극의에 도달할 수 있다, 였었지.'

그 전통 때문에 염성하는 기껏 타고난 흑암혼을 억눌러야 했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염륜잔화창의 성취가 높을수록 문제가 생겨났다.

불꽃의 색이 검붉은색으로 탁해지거나 염륜을 형성하기가 힘들어지는 등 점점 통제가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칠륜에서 육륜으로 퇴보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기술의 이해도와 마력의 사용법이 충돌하여 벌어진 현상.

그래도 오늘 일로 그 문제점을 깨달았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칠륜으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

'고유스킬도 각성하고 말이야.'

염성하의 고유스킬인 '진원공명盡源共鳴'.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것만 각성해서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이전에 압도적으로 패배했던 아리아 마이어스를 상대로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리라.

"괜찮네. 기왕 만든 거 몇 개까지 되는지 한번 보자."

"명령하지 말라고 했다."

"해줄래?"

"기다려라."

자신도 내심 궁금했었는지 흑염륜을 만들어내는 염성하.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개의 흑염륜이 완성되어 허공에 나열되었고, 이어서 여섯 번째 흑염륜을 만들기 위한 불꽃이 피어났다.

투확! 화륵!

"...응?"

하지만 추가로 피어난 불꽃은 고리를 형성하지도 못한 채 헛발질을 쳤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뭐 해?"

"...안 만들어진다."

"뭐?"

"여섯 번째 염륜을 만들어낼 여력이 없어."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 눈매를 찌푸리며 집중하는 염성하. 그런데도 염륜은 형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뒤늦게 원인을 알아차렸다.

'흑염륜을 만드는데 집중력이 많이 들어서인가.'

기존의 염륜보다 빠르게 가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두 가지 속성을 비율까지 맞춰가며 다뤄야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

'칠륜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오륜으로 더 퇴보하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세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실력이 퇴보한 같지만 흑염륜의 위력과 특성을 생각하면 힘 자체는 이전보다 강해졌을 터.

그리고 흑염륜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다면 개수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테니 조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게 이세훈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찰나.

"...곤란하군."

염성하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곤란하다니. 뭐가?"

"염화문은 외부에 나가 있는 후계자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사범을 보낸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염성하가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염륜잔화창의 성취가 육륜 아래로 떨어질 경우 후계자직에서 박탈당한다."

염성하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고, 뒤늦게 그 뜻을 이해하고 되물었다.

"아니. 그냥 강하면 되는 거 아니냐?"

"염화문은 무형문화재인 염륜잔화창을 전수하는 문파다. 무력도 중요하지만 염륜잔화창의 성취가 우선이다."

무맥武脈을 잇는 집단답게 힘보다 기술의 완성도를 우선시하는 성향. 회귀 전에는 들은 적 없던 이야기였기에 이세훈이 골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에는 전에 만들던 대로 하면...."

"그것도 안 된다."

"또 왜?"

이세훈의 물음에 염성하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기존의 방식대로 염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섯 번째 염륜을 만들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흑암혼이 솟구치더니 불꽃을 집어삼켜 다섯 개 이상 늘어나지 못했다.

"이전처럼 염륜을 만들려 하니 흑암혼이 통제가 안 된다. 더는 예전 방식을 사용할 수가 없어."

"...."

대장장이 업계에 그런 말이 있었다.

실력이 없을 때는 거지 같은 물건을 잘도 만들어내지만, 실력이 오르고 나면 거지같이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든다고.

한 마디로 망치는 것도 일부러 하려면 쉽지 않다는 것인데 지금 염성하의 상황이 딱 그렇게 된 것이다!

"그, 그래서 그 사범이 오는 게 언젠데?"

"내일이다"

"...내일?"

"그래. 내일 화요일."

염성하의 대답에 이세훈이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후계자직에 박탈당해도 육륜을 복구한 뒤 다시 도전하면 되는 게 아니냐 할 수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 광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후계자직에서 한 번 박탈당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파문까지 이어졌었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다르진 않을 거야.'

당장 염성하의 어두운 표정만 보더라도 확실하다.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세훈은 냉정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직 시간은 있어.'

염성하가 오륜으로 퇴보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 조금만 감을 잡는다면 육륜 정도는 금방 복구할 수 있다.

'문제는 하루 만에 어떻게 감을 잡느냐는 건데....'

염성하에게 쓸 만한 훈련법이 뭐가 있을까. 그와 관련된 기억을 한참 떠올리던 이세훈의 머릿속에 한 광경이 떠올랐다.

'더럽게 불편한 물건이군. 옛날에 받았다면 써먹지도 못했을 거다.'

자신이 처음으로 만들어준 무구를 받고 불평을 토해냈던 광견. 그때는 이가 갈릴 만큼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툭─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해결책이 되었다.

염성하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세훈은 재빠르게 인연을 추출했다.

[대상 '염성하'에게서 인연을 추출해냅니다.]

[제작자 '이세훈'과의 인연은 Lv.1입니다.]

"뭐하는...."

"조용히."

의아해하는 염성하를 무시한 채 이세훈은 곧장 마음속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한 번 세운 신념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 외골수. 하지만 정이 깊으며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존심도 내려놓을 줄 안다.

그런 모순적이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일치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이세훈이 알고 있는 '광견'이라는 인물이었다.

우우웅─

그런 이세훈의 생각을 빚어내듯 손안에서 붉은 마력이 요동쳤고, 이어서 염성하의 인연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드문드문 섞인 형태. 곳곳에 원형의 파장이 퍼지는 듯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회귀 전보다 엉성한 모양새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래도 성능만 비슷하다면 문제 될 건 없다. 이세훈은 곧장 인연석의 정보를 확인했다.

[인연 - 적명흑석]

[등급 : 고급] [품질 : 최상]

화속성 마력과 암속성 마력이 공존하는 광석.

두 속성이 만들어내는 파장이 내부의 마력을 공명시킵니다.

*함께 사용한 재료의 힘을 공명시킵니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염성하의 고유스킬 '진원공명'의 흔적이 보이는 인연석. 재료로 쓰기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곧장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너. 후계자 자리만 지킬 수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염성하가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

"좋아."

한 번 내뱉은 말이니 염성하의 성격상 절대로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두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무기부터 바꾼다."

"...뭐?"

근본부터 뜯어고칠 시간이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2화

아칼쿠프의 북쪽 3번 지구에 위치한 프라이빗 트레이닝실.

공개된 장소에서 훈련을 꺼리는 생도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곳은 바벨에서도 소수의 생도들에게만 허락된 특권 그 자체였다.

무학관의 100위 안에 들어가는 랭커. 각 학과의 30위권 안에 들어가는 우등생. 또는 학과장과의 면담을 통해 인정받은 생도들.

세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해야 이용할 수 있다 보니 대부분의 생도들은 구경도 못 해보고 졸업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출입허가증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세훈은 염성하를 통해 아주 간단히 입성했다.

우웅─

짤막한 기계음과 함께 열린 트레이닝실의 문. 내부는 천장과 벽, 바닥 모두 격자무늬가 새겨진 새하얀 타일로 이뤄져 있었는데 상당히 살풍경한 광경이었다.

"이거 스킨 바꿀 수 있지? 뭐라도 좀 바꿔봐."

"이대로도 괜찮다."

"난 안 괜찮으니까 빨리 바꿔."

"한심하군...."

짤막하게 중얼거린 염성하가 허공의 패널을 두드려 무언가를 설정하자 벽면에 마력이 타고 흐르며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후우웅─

푸른색 기와가 올려진 작은집과 안뜰을 감싸는 담장. 그 너머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산등성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푸른 하늘까지 더해지니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괜찮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이세훈은 기와집의 위쪽에 있는 '염화문'이라는 현판을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한심하다더니 자주 쓰는 모양이구만. 향수병이라도 있냐?"

"사부님이 보내주셔서 가끔 썼을 뿐이다."

"그래그래. 어련하시겠어."

"내 말을 듣질 않는군."

염성하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이세훈은 담장의 벽면을 슬쩍 쓰다듬어보았다.

'재현율은 80% 정도인가... 바깥보다 20년은 앞서가 있네.'

마력을 사용한 환경조성. 이때는 아직 한창 개발 중인 기술이라 효율이 썩 좋지 않았는데 생도들에게 이만한 규모로 제공하다니.

그야말로 바벨이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 정도면 나중에 제련에도 쓸 수 있겠어.'

머릿속에 기억해두기로 한 이세훈은 불만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염성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내가 말한 무기는?"

"...기다려라."

염성하가 재차 패널을 두드리자 안뜰의 일부분이 열리면서 가지런히 정리된 창들이 올라왔다.

바벨에서 트레이닝실을 이용하는 생도들에게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무구. 창날부터 창대까지 종류가 상당했는데 완성도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흠. 이 정도면 괜찮겠네.'

적당한 창을 골라낸 이세훈은 멀뚱히 서 있는 염성하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잡아."

"...."

이세훈이 내민 두 자루의 창에 염성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각각 150cm와 100cm 정도 되는 단창. 바벨에서 제공해 준 무구인 만큼 크게 흠잡을 곳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게 두 자루였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가 다뤄야 할 무기인가?"

"그래. 팔 아프니까 빨리 잡아."

"음...."

단창만 해도 어색한데 쌍창이라니?

염성하가 꺼림칙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이세훈이 두 창을 가볍게 돌려 창대 끝으로 겨눴다.

"네 입으로 말했었지?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그랬었지."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엇이든 지켜야만 한다. 두 창을 건네받은 염성하는 파지법을 이리저리 고쳐보다가 시험 삼아 염륜잔화창의 기본기를 펼쳐보았다.

후웅─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허공에 궤적을 그려내는 두 창. 그 어설픈 움직임에 염성하의 눈매가 찌푸려지던 찰나.

'...음?'

표정이 풀리며 창날이 움직임이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두 단창의 간격이 절묘하게 맞물려 주변의 공간을 장악한다. 장창을 사용하는 기존의 염륜잔화창보다 사정거리가 좁아지긴 했지만 그만큼 밀도가 높아진 것이다.

'흑암혼을 사용하게 된 지금이라면 확실히 이쪽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아직은 양손을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익숙해진다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란 느낌이 든다.

예상한 것과 다른 상황에 염성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단창을 보고 있을 때. 이세훈이 염성하의 인연석인 적명흑석을 꺼냈다.

"그건?"

"네 수련 도구. 잠깐 기다려봐."

적명흑석에 새겨진 검은색과 붉은색 무늬를 유심히 살피던 이세훈은 손가락 끝에 마력을 불어넣어 가볍게 후려쳤다.

카앙─!

칼로 쪼갠 것처럼 깔끔하게 세 조각으로 갈라진 적명흑석. 그 모습에 염성하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거지?"

"그냥 잘 보고 때린 거지 뭘. 창날이나 이리 대."

염성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날을 들이밀자 이세훈이 적명흑석 두 조각을 하나씩 단단히 묶어줬다.

멀리서 보면 봉처럼 보이게 된 두 단창. 그 상태를 확인한 이세훈은 살짝 뒤로 물러나며 염성하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왼손은 적염혼으로 염륜을 만들고 오른손은 흑암혼을 방출하는 거야. 알겠어?"

"흑암혼은 그냥 방출만 하고 있으면 되나?"

"그래. 오른손은 아예 안 움직여도 상관없어. 대신 흑암혼의 방출이 끊겨서는 안 돼."

"흠... 알겠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염성하는 시키는 대로 두 마력을 동시에 방출했다.

화르륵!

우우웅─

힘차게 타오르는 염륜과 허공에 묵직하게 흩어지는 어둠. 두 마력을 동시에 방출하면서도 염륜의 개수가 순조롭게 늘어나던 그때.

파앙─!

왼손에 들린 창끝에서 공명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방금 네가 무의식적으로 왼손에 흑암혼을 흘려보냈다는 증거지."

이세훈의 이야기에 염성하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히 적염혼만을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흑암혼이 뒤섞여 나오다니.

그 말인즉 자기 자신의 마력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속성마력을 복수로 보유하고 있으면 서로 섞여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하지만 넌 그게 서로의 발목을 붙잡을 만큼 난잡해."

"음...."

"아마 흑암혼을 억누르기만 했던 탓에 조절이 안 돼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두 마력을 동시에 다루는 데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육륜은 금방 만들 수 있을 거야"

이세훈의 설명에 염성하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두 마력이 뒤섞인 염륜...."

"대충 흑염륜이라고 해."

"...그래. 흑염륜을 만드는 훈련을 하는 게 더 좋지 않나?"

"그것도 효과는 있겠지만 훈련 효율이 안 좋을 거야."

기본기만 갖춰진다면 흑염륜을 만들어내는 것은 자연스럽게 가능해질 테니 굳이 어려운 방식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이세훈의 설명에 염성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번에는 네 말을 믿기로 했으니."

"좋아. 그럼 이것까지 착용하고 수련해."

팔다리에 차고 있던 묵주환까지 달아주자 염성하의 눈매가 꿈틀거리더니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좋은 걸 가지고 있군."

"알면 열심히 해."

"걱정 마라.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니."

진지하게 대답한 염성하는 다시 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염륜을 그려내고 어둠을 흩뿌렸다.

파앙─! 파앙─!

잘 되는가 싶다가도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공명음.

묵주환이 마력을 빨아들이는 탓에 처음보다도 오래 버티질 못했는데 염성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연습을 반복했다.

공명음이 울릴 때마다 버티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어색하던 단창의 움직임도 조금이지만 가다듬어져 간다.

'미래의 본인이 구상한 훈련법이라 그런가. 금방 적응하네.'

풀이까지 적힌 시험의 답안지를 훔쳐본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아내며 강해지는 염성하.

그 엄청난 성장 속도에 이세훈이 쓰게 웃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잘 안 됐었는데 말이지....'

이것도 못하냐며 한숨을 푹푹 내쉬며 타박하던 광견.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세훈이 눈앞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네가 얼마나 잘났었는지 한번 보자.'

안뜰 구석에 자리 잡고 앉은 이세훈은 염성하의 움직임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중심축의 이동부터 근육의 움직임. 호흡의 패턴과 체내를 돌며 창끝으로 방출되는 마력의 파장.

"...."

전신을 낱낱이 해부하는 듯한 시선에 염성하의 몸이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훈련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1시간, 2시간이 흘러 3시간에 다다랐을 때쯤.

"후우... 후우...."

마력이 바닥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염성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은 지친 숨소리와 몸의 움직임도 계속해서 살피며 대답했다.

"뭐긴. 자료 수집하는 거지."

"자료?"

"네가 쓸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료 말이야."

"...."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라보는 염성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 과제로 제출할 겸 만들어보는 거니까 너무 기대하진 말고."

"...1학년이 만드는 무구에 누가 기대를 한다는 거냐."

퉁명스럽게 대답한 염성하는 폭환으로 바닥난 마력을 채운 다음 훈련을 이어갔다.

후우웅─

트레이닝룸이 재현해낸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고, 나무들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염화문의 안뜰에서 묵묵히 창을 움직이는 염성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 모습에 이세훈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여기가 아마 염륜잔화창이 시작된 곳이겠지.'

지금은 서울 한복판에 지어진 10층짜리의 휘황찬란한 건물을 본관으로 사용하지만, 염화문의 본관은 본래 시골 숲속에 있었다고 들었다.

염성하가 어린 시절 자라왔던 고향. 이야기로만 들었던 풍경을 직접 보게 된 이세훈은 자연스레 물었다.

"후계자직을 꼭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냐?"

회귀 전 광견은 자신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을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말을 아꼈다.

후계자직에서 박탈당해 모든 일이 틀어졌다고만 했을 뿐. 정확히 무엇이 문제가 되고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이 부분에 대해서 가능하다면 듣고 싶었지만.

"...."

염성하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 묵묵히 창을 휘둘렀다.

'으음... 역시 직접 듣기는 힘든가?'

인연레벨이 Lv.5였던 회귀 전에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인데, 아직 인연레벨이 Lv.1일 때 물어봤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괜히 경계하게 만든 거 아냐? 이놈한테 한 번 의심받으면 골치 아픈데....'

괜한 짓을 했다 싶어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사부님이 내가 문주가 되기를 원하신다."

염성하가 창을 휘두르며 묵묵히 대답했다.

"그러니 제자로서 그 뜻에 따를 뿐. 그 이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 그 모습에 이세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사부가 원한다기보다는... 아버지가 원해서가 더 적절한 표현이려나.'

천애 고아인 염성하를 양자로 거두어 어린 시절부터 돌봐줬다던 염화문의 초대 문주 '염진현'.

한때 S급 영웅까지 올랐으나 부상을 입고 은퇴한 인물. 세간에서는 염화문에 대한 모든 실권을 잃은 퇴물이라고 평가하지만 적어도 염성하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염진현에 대해서 알아보는 게 좋겠어.'

회귀 전에야 염진현이 죽고 염화문이 멸문한 뒤에 광견을 만났지만, 지금은 둘 다 멀쩡히 존재하는 상황.

앞으로 염성하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나가기 위해선 염진현과 염화문 사이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사부 말에 저렇게 극성인 걸 보면 염진현이랑 친해지기만 해도 일이 편해질 수도 있겠네.'

사부인 염진현이 친하게 지내라고 하면 인연레벨이 곧장 Lv.3까지 오르는 게 아닐까. 이세훈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너는 왜 나를 돕는 거지?"

창을 휘두르던 염성하가 반대로 되물었다.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은 건가?"

의심하면서도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염성하. 그 물음에 이세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숨김없이 대답했다.

"너 육대마경六大魔境 알지?"

"...안다."

만마전의 늪이 집어삼켜 생태계 자체가 변질되어 버린 장소.

지금은 마수가 득실거리는 극악의 장소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세훈은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마경의 환경을 유지하는 핵. 그게 바로 마신의 파편이지.'

회귀 전에는 육대마신이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뒤에야 알게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같이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모든 마경에 들어가 볼 생각이야. 그러려면 날 지켜줄 녀석들이 필요하고, 그 녀석들에게 줄 무기의 재료도 필요하지"

전부를 말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한 부분만 말한다면 충분히 느껴질 터. 이세훈은 염성하에게만 자신의 계획은 숨김없이 모두 말해주었다.

"그러니 염화문의 차기문주라면 실력으로나 금전적으로나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 도와준 거지."

"...속물적이군."

"그야 당연하지. 너나 나나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무상으로 돕겠냐. 다 주고받는 거래인 거지."

물론 이번에는 광견이라는 개망나니로 만들지 않겠다는 목적도 있지만, 지금 말해봐야 미친놈 취급만 받을 뿐이다.

이세훈의 대답에 염성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넌 나와 안 맞는군."

"그러냐?"

"나라면 내가 직접 강해져서 육대마경을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다른 녀석은 믿을 수 없으니."

"뭐... 그것도 맞는 말이지."

이세훈이 시원스레 수긍하자 염성하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야기를 덧붙였다.

"앞에 말했었지. 도움을 받는다면 합리적인 대가를 내놓으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내가 염화문의 문주가 되는 걸 도와라."

"...뭐?"

"그러면 그 육대마경에도 따라 들어가 주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거래를 제안하는 염성하의 모습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회귀 전의 광경을 떠올렸다.

'무기를 만들어라. 그러면 내가 마신을 죽여주지.'

무슨 말이든 자신이 내뱉은 것이라면 반드시 지켰던 광견. 아직 미숙한 염성하에게서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후회 안 하지?"

"이런 일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흐흐...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을 만하겠네."

"...."

거래가 조금 불공정했던 것은 아닌지 염성하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세훈이 수업시간에 예시를 보여주면서 만들었던 광석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그건?"

"뭐긴. 무기 만들 재료지."

손에 들린 광석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오른손으로 뒤덮었고, 그 안쪽으로 기묘한 마력이 일렁인다.

[인연각인 '적명흑석'이 발동됩니다.]

우우웅─

이세훈의 오른손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두 가지의 파동.

"...!"

그동안 자신이 터뜨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운에 염성하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이젠 네가 싫다고 해도 문주로 만들어주마."

두 눈을 빛낸 이세훈이 염성하의 미래를 선언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3화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원형 건물.

큰 건물이 많은 바벨에서도 독보적인 규모를 지닌 건물의 모습에 이세훈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회귀 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규모 자체가 다르구만.'

아칼쿠프의 상징이자 명물로 불리는 원형 건물. 모든 무기학부가 모여 있는 '플라비움'의 모습에 이세훈이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을 구획별로 나눠서 무기학부를 배치해둔 건가. 말이 나눈 거지 그냥 한 몸이네.'

행정상으로는 수십 개의 학부가 머무르고 있지만 사실상 플라비움 전체가 '무기학부'라는 거대한 집합체나 다름없다.

아칼쿠프는 이런 식으로 여러 학부가 집단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 플라비움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럽게 크단 말이야....'

주변을 신기하게 살펴보다 중심부로 향한 이세훈은 눈앞에 나타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그 공원인가.'

건물로 둘러싸인 중심부에 조성된 자연공원.

거대한 호수와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 상당히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외곽에 위치한 트랙에는 여러 생도가 가볍게 뛰고 있었다.

"저기 한 바퀴에 몇 km냐?"

"...4km다."

"이야 더럽게 넓네... 넌 몇 바퀴쯤 뛰는데?"

"...아침에 간단히 10바퀴 정도 뛴다. 저녁에도 마찬가지고."

도합 80km의 거리를 몸풀기 정도로 여기는 염성하.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다 싶지만 바벨의 최상위권에 속한 강자임을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한 발언은 아니었다.

"공원에 뭐 또 없어? 호수도 뭔가 있어 보이는데."

회귀 전에도 이야기로만 들었던 곳인지라 이세훈이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물어보았고, 그 연이은 질문에 염성하가 눈매를 찌푸리며 흘겨보았다.

"집중해야 하는데 좀 닥치면 안 되겠나?"

"어. 안 돼."

"...."

"밤새도록 집중한 놈이 뭘 더 집중해. 어차피 대련장에 가면 알아서 집중될 테니까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어."

한 번 긴장의 끈을 놓으면 그대로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금 집중할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

염성하는 그중 후자에 속했기에 풀어둘 수 있을 때는 최대한 풀어서 집중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이세훈의 이야기에 염성하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여기선 안 보이지만 꽃으로 꾸며진 화원이 있다. 호수는 나도 잘 모른다."

"화원은 누가 관리하는데?"

"관리인들이 하겠지. 생도들이 개인적으로 심어둔 것들은 당사자들이 관리한다더군."

쉴 새 없이 질문공세를 퍼붓는 이세훈과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대답해 주는 염성하.

복도를 지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된 다른 생도들은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경악했다.

"...바, 방금 염성하 선배 맞지?"

"옆에는 보르시파 1학년 학과 수석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저게 무슨...."

실력이 없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실력이 있더라도 대련 이외에는 어떠한 교류도 가지지 않았던 염성하.

그런 염성하가 올해 막 들어온, 그것도 보르시파의 생도와 저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다니?

주변에서 쏟아지는 경악스러운 시선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넌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저렇게 쳐다보냐?"

"필요한 일들만 했을 뿐이다."

"그럼 개판이었겠네...."

싸울 가치가 있다면 싸우고, 그렇지 않다면 무시한다.

강해지는 것 이외에는 관심조차 없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을 때.

"오늘 열린다던 경매는 안 가 봐도 되는 건가?"

"음? 아아. 그 2학년 경매?"

지난주에 만든 백광장검이 출품되는 제련학부의 정기경매. 1학기의 예산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었지만.

"뭐, 굳이?"

이세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보고 있다고 낙찰가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팔리겠지."

제련학부 2학년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거야 보려고 하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자잘한 일보다는 염성하의 일부터 해결하는 게 좋으리라.

"그렇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염성하. 그 모습에 이세훈이 씩 웃었다.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해. 밤새도록 고생한 거 날려 먹지 말고."

"...어제부터 태도가 너무 건방진 것 아닌가?"

"그럼 존댓말 해줄까? 염성하 선배님~ 이렇게?"

"됐다. 비아냥거리는 것 같으니 하지 마라."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플라비움의 1층에 있는 공용대련장에 도착했고, 이세훈은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소매와 바지 밑단에 불꽃무늬가 새겨진 도복. 오른쪽 어깨에는 염륜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중심에 한자로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저게 염륜의 개수인가 보네.'

가지런히 서 있는 염화문의 문하생을 살피던 이세훈은 제일 앞에 나와 있는 사내의 어깨를 슬쩍 바라보았다.

'칠七이면 저쪽이 책임자인가.'

호리호리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사내.

겉보기에는 조금 말라 보였지만 소매와 바지 밑단으로 사이로 보이는 근육만 봐도 육체와 마력 모두 잘 단련된 것이 느껴졌다.

이세훈이 그 몸을 살피고 있을 때. 사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고개를 꾸벅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염성하의 눈매가 살짝 모여들었지만 금방 풀어내고 담담히 대답했다.

"오랜만이군. 강 사범."

"반년 만에 뵙는 것 같은데 이전보다 많이 발전하셨군요. 문주님께서 보시면 기뻐하시겠습니다."

미소를 짓는 사내의 모습에 염성하가 뒤편에 나열해 있는 문하생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지?"

"아. 문주님께서 선별하신 문하생들입니다. 저와 도련님과의 대련으로 견식을 넓혀주라고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도련님께선 차기 문주님 다음으로 뛰어난...."

"강현운 사범."

사내, 강현운의 말을 잘라낸 염성하가 담담히 이야기를 이었다.

"차기 문주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발언에 주의해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빛은 웃지 않는다.

강현운의 반응에 이세훈은 염화문의 내부사정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구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사부인 염진현과 염성하는 염화문 내에서 입지가 좁을 뿐만 아니라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취급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세훈이 골치 아파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그나저나."

강현운이 염성하의 옆에 서 있던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일행분이 누구신가 했더니 신입생 학과 수석 중 한 분이시군요. 친분이 생기신 모양입니다."

"...그냥 안면만 터 둔 정도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저런 전도유망한 분과 인연을 다 맺으시다니... 반년 전과는 많이 달라지셨군요."

감탄하는 척하면서 염성하를 바라보던 강현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수련밖에 모르던 멍청이가 머리를 쓰기 시작했군.'

염성하의 실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된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후계 문제에 잡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현운이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실력점검을...."

"칠륜승단을 신청하겠다."

"...예?"

강현운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묻자 염성하가 담담히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다. 준비해라."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대련장의 위에 올라서는 염성하. 그 모습에 강현운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염화문은 육륜부터 후계자로 대우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야기.

실제로는 칠륜에 올라 사범 자격을 취득하고 다른 사범들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한 마디로 염성하는 염화문 내부에서 차기 문주의 후계자로 취급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기어코 선을 넘는 건가.'

육륜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면 초대 문주의 제자이자 양아들로서 적당히 대우해줬을 텐데 어째서 자기 복을 스스로 걷어차는 것일까.

강현운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그 모습을 살펴보던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칠륜부터는 신경 쓰인다 이거구만.'

현재 염성하는 바벨에 입학해 엄청난 재능을 선보이며 외부에서도 뛰어난 유망주로서 주목받고 있는 상황.

그런데 여기서 칠륜에 올라서고 문주 자리를 향한 뜻을 선언한다? 그때부터는 염화문도 외부의 시선 탓에 제멋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승단과 달리 칠륜부터는 사범과의 대련도 포함됩니다. 아직 도련님께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본문에 계시는 염진현 어르신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을...."

"말이 많군."

강현운의 이야기를 끊어낸 염성하가 담담히 바라보았다.

"사범직을 박탈당할까 봐 두려운 건가?"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차갑게 중얼거린 강현운이 대련장의 위로 걸어 올라오며 허리춤에 메인 육각형의 상자, 아공간 포켓을 가볍게 두드렸다.

후웅!

부드럽게 뽑혀 마력을 머금은 채 진동하는 붉은 창.

창날은 수정을 깎아낸 것처럼 투명한 모습이었는데 겉으로 붉은 마력이 열기를 내뿜으며 가닥가닥 흘러나왔다.

'흐음. 저 정도면 영웅 등급은 되겠는데....'

보아하니 주재료는 영웅 등급인 '용화석'. 화속성마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강도가 높아 상당히 쓸 만한 재료였다.

구하기 힘든 재료였기에 이세훈이 흥미롭게 살피던 그때.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두 눈이 점차 일그러졌다.

'...어떤 놈이 만든 거야?'

저만한 재료를 써서 저딴 물건을 만들다니?

이세훈의 표정이 점점 흉악하게 변해가는 사이 염성하도 아공간 포켓을 눌러 장비를 꺼내 들었다.

후웅─

검은 공간에서 뽑혀 나온 두 자루의 단창.

길이가 긴 쪽은 붉은빛이 감도는 일자 형태의 창날, 짧은 쪽은 검은빛이 감도는 십자 형태의 창날을 지녔는데 두 자루 모두 별도의 장식은 없었지만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평범하면서도 만든 이의 실력이 엿보이는 물건.

염성하에 손에 들린 새로운 무기에 강현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무기를 바꾸신 겁니까?"

"그래."

"...갑자기 왜 그러시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은 강현운은 대련장의 아래에 있는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소문보다 대단하신 분이군요. 저런 '조잡한' 단창 두 자루로 도련님을 이렇게까지 바꾸시다니. 감탄했습니다."

"...뭐?"

"돌아가면 문주님께 좋게 말씀드리지요. 어쨌든 이번 일로 골치 아픈 일이 해결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염성하가 변한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는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렇게 강현운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그 창."

이세훈이 무서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수 잘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내 창보다 더 조잡하니까. 이 개새끼야."

"...."

예상을 뛰어넘은 대답에 강현운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생도 따위가 건방지게....'

아무리 신입생 학과 수석이라 해도 결국은 생도. 무력으로 따지면 A급 영웅인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치다.

그런데 저런 무례한 태도라니. 뒤쪽에 서 있는 염화문의 문하생들을 의식한 강현운이 진심으로 살기를 쏘아내려던 그때.

"강현운."

염성하의 마력이 한 발 먼저 강현운을 짓눌렀다.

"내가 세 번이나 재촉을 해야겠나?"

한눈을 판 상태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마력. 이세훈을 신경 쓸 때가 아님을 깨달은 강현운은 살기를 거둬들였다.

"...죄송합니다. 시작하지요."

마지막으로 이세훈을 한번 노려본 강현운은 설명을 이었다.

"이번 칠륜승단은 '영역대련'으로 하겠습니다. 승단조건은 승리 혹은 무승부. 이의는 있으십니까?"

"없다."

"그럼 시작하시지요."

육륜도 아니고 칠륜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전에 도달한 적이 있다고는 해도 하룻밤 사이에 두 단계를 넘어서야 하는 상황.

다른 염화문의 문하생들이 듣는다면 미친 소리라고 했을 테지만 염성하는 동요하지 않았다.

'확인은 이미 끝냈다.'

오늘 새벽에 느꼈던 감각을 떠올리며 염성하는 천천히 양손에 들린 두 단창, '적일창'과 '흑십창'을 향해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팔을 타고 창대에 차올라 창날 끝에 맺혀간다.

신체의 일부처럼 매끄럽게 마력을 받아들이는 두 단창을 바라보던 염성하는 허공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화르륵!

검붉은 불꽃이 허공에 원을 그려내고 이어서 가속을 통해 두 색으로 완전히 분리된다. 검은 아지랑이를 휘감은 붉은 염륜의 모습에 염화문의 문하생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졌다.

'저런 염륜이 있었던가...?'

'일반 염륜보다 뭔가 더 무거운 느낌이야.'

'단창으로도 염륜잔화창을 저렇게 펼쳐낼 수 있다니....'

염화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구와 염륜의 형태. 그 신비로운 광경에 모두가 당황한 사이 염성하는 다섯 개의 흑염륜을 만들어내고 여섯 번째로 돌입했다.

화륵!

염성하가 육륜에서 오륜으로 퇴보한 이유는 두 가지. 집중력의 부족과 적염혼과 흑암혼의 비율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순수한 능력 부족에 오랜 기간 흑암혼을 억눌러온 부작용인 만큼 하루 만에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세훈은 가장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다.

우우웅!

자신이 직접 염성하에게 정답지를 만들어주기로.

필요 이상의 마력이 들어오자 적일창과 흑십창이 희미하게 떨렸고, 염성하는 그 즉시 마력의 비율을 조정하여 흑염륜을 만들어냈다.

화르륵!

여섯 번째의 륜이 형성되고 이어서 일곱 번째의 륜 역시 두 창의 인도를 받으며 허공에 그려진다.

막힘없이 완성된 일곱 개의 흑염륜. 그 광경을 맞은편에 바라본 강현운이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흑암혼을 억누르라던 문주님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억누르는 쪽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바꿨다."

"그런 잡스러운 불꽃은 염륜으로 인정받지 못할 겁니다."

화속성마력만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염륜. 그것이야말로 염화문이 추구하는 염륜잔화창의 근원이었으나, 염성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건 부딪쳐보면 알겠지. 와라."

"...후회하게 될 겁니다."

차갑게 중얼거린 강현운이 자신의 창을 휘둘러 단숨에 일곱 개의 염륜을 그려냈다.

화르룩!

칠륜승단에 치러지는 영역대련. 양측이 같은 개수의 염륜을 만들어낸 뒤 충돌시켜 마지막까지 유지한 사람이 승리하는 방식으로 염화문의 오랜 전통 중 하나였다.

겉보기엔 단순한 힘겨루기로 보이지만 일곱 개의 염륜을 동시에 다루며 힘의 배분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는 섬세한 승부.

그렇기에 강영훈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벌써 칠륜을 만들어낸 건 대단하지만 완성도는 형편없다.'

신체능력과 기술, 그리고 무구까지 이쪽이 우위에 서 있는 상황. 질 수가 없는 상황에서 강현운은 이전에 다른 사범들과 함께 문주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염성하가 칠륜에 도전한다면 과감하게 손을 써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무마해 주마.'

지금부터 펼쳐질 대련은 어디까지나 염화문 내부의 일. 죽이지만 않는다면 외부자는 깊이 관여할 수 없다.

각오를 다진 강현운이 장창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고, 그 뜻을 따라 마력이 요동쳤다.

'화열가속.'

우우웅!

장창에 내장된 무구 스킬이 발동되며 주변에 떠오른 염륜의 회전속도가 더욱더 가속된다.

마력이 공명하며 울려 퍼지는 파동과 열기. 염성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이끌어 낸 강현운이 바닥을 박차며 창과 함께 일곱 개의 염륜을 내질렀고.

콰아아앙!

맞부딪친 일곱 개의 흑염륜이 거대한 불꽃을 터뜨렸다.

염화문에서만 20년을 넘게 수련했으며 칠륜에 도달한 지도 5년이 넘은 강현운.

그리고 칠륜에 도달한 지 며칠도 채 안 되는 듯한 염성하.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압도적인 결과를 예상했고, 실제로도 상황은 그렇게 돌아갔다.

화륵!

검은 아지랑이가 염륜을 집어 삼켜가는 것으로.

"뭐... 무슨...!?"

자신의 염륜을 물들어가며 안쪽까지 파고들어 오는 검은 아지랑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검은 불꽃에 강현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구 스킬까지 사용해서 전력을 다한 염륜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아지랑이조차 불태우지 못하고 역으로 잡아먹히고 있는 것인가.

'말도...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일곱 개의 염륜이 여섯 개로, 이어서 다섯 개로 사그라든다. 그에 반해 맞닿아 있던 흑염륜은 줄어들기는커녕 방금보다 안정되어 더욱 격렬히 타올랐다.

마치 방금의 충돌로 더 많은 것을 깨달은 듯 무시무시한 성장을 보이는 흑염륜. 그 너머에서 아무런 감흥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염성하의 모습에 강현운은 뒤늦게 깨달았다.

쩌적─

문주가 경계하고 있던 것은 쇠약해진 초대 문주가 아닌.

파캉!!

터무니없는 재능을 지닌 눈앞의 유망주였음을.

"아...."

앞에 펼쳐졌던 일곱 개의 염륜이 모두 사라졌고 같이 내질렀던 창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년 동안 모은 돈으로 구매한 영웅 등급의 창. 그것이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 난 것을 본 강현운이 멍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고.

"조잡하군."

염성하가 담담히 누군가의 말을 대신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4화

"...승단식 때 뵙겠습니다."

박살 난 창을 문하생에게 신경질적으로 넘긴 강현운이 대련장 밖으로 나갔고, 다른 문하생들도 모두 떠나자 염성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밤샘 훈련을 하면서 쌓인 피로감과 아직 익숙지 않은 칠륜으로 영역대련을 펼친 반동. 거기에 칠륜승단에 성공했다는 안도감까지.

오랜만에 느껴지는 탈력감에 염성하가 지친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아주 개박살을 내놨구만."

대련장 위로 올라온 이세훈이 바닥을 둘러보았다.

"부수라고 말한 것 아니었나."

"그래도 좀 예쁘게 부숴야 할 거 아냐. 이 용화석이 얼마나 비싼 재료인지 알아?"

파편도 얼마 없고 대부분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박살 났다. 이세훈이 투덜거리면서 창날의 파편을 줍자 염성하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던 거냐."

"뭘?"

"강현운의 창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 말이다."

이번에 영역대련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흑염륜의 성질이 대련방식에 특화된 것도 있었고 강현운의 실력이 사범 중에서 하위권에 속한 덕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세훈을 통해 알게 된 창의 문제점 덕분이었다.

"부딪쳐보니 바로 알겠더군. 조금만 압력을 가했는데도 염륜을 강화하던 무구 스킬이 뒤틀렸다."

무구 스킬에 의지하고 있었던 만큼 강현운의 칠륜은 순식간에 흐트러졌고 염성하의 흑염륜이 그 빈틈을 파고들어 단숨에 집어삼켰다.

사실상 이번 영역대련을 결착 지은 것이나 다름없는 부분. 그렇기에 염성하로서는 눈으로만 그것을 발견해낸 이세훈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흠.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창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냐. 오히려 최상의 상태였지."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최상의 상태였다는 창이 어떻게 살짝 압력을 가한 것만으로 그렇게 형편없이 흐트러진단 말인가. 염성하의 미심쩍은 시선에 이세훈이 주워든 파편을 살피며 대답했다.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창은 마력을 증폭, 가속시키는 데 특화된 무기였을 거야. 출력을 보면 아마 영웅 등급 정도는 됐겠지."

"음. 아마 그럴 거다."

"그런데 출력을 높이는 데만 집중하니 안정성이 떨어진 거지. 처음 창을 뽑았을 때 마력이 넘실거리며 새어 나온 게 그 증거야."

출력을 끌어올린답시고 마력회로를 필요 이상으로 집중시켰을 때 나타나는 현상.

사용하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었지만, 강현운의 창은 그 정도가 심해 내구성에도 영향이 생긴 것이다.

"그 결과 최대출력을 유지하는 상태서 훨씬 밀도 높은 마력과 제대로 충돌하니 단숨에 박살 난 거지. 날카로운 유리창이나 다름없던 거야."

이세훈의 설명에 염성하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결함품이 영웅 등급을 받은 거지?"

"일격필살에 특화됐거나, 장비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쓴다면 강력한 출력을 낼 수 있는 무기니까. 시스템은 원래 그렇게 등급을 매겨."

무기의 주인이 자신의 무기에 대한 이해도가 처참했기에 벌어진 대참사. 이세훈의 설명에 염성하가 신기하다는 듯 파편들을 내려다보았다.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적용되는 줄은 몰랐군."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실전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목도 같이 날아가니까."

"나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염성하의 투덜거림을 흘려들으며 이세훈은 자신이 주운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쳐도 이건 좀 심하단 말이야.'

주재료로 쓰인 용화석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냉각기능을 조금만 넣었어도 고출력과 안정성을 동시에 챙길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이 창을 만든 대장장이는 냉각기능을 넣는 게 아니라 다른 광석과 섞어 오히려 고출력을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만들었다.

재료의 특성을 완전히 깔아뭉갠 방법. 누군지는 몰라도 싹수가 노랗다 못해 말라 죽은 수준이었다.

'재료가 아깝네... 쩝.'

입맛을 다시며 파편을 주머니에 모두 챙겨 넣은 이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냐?"

"강현운이 보고하면 얼마 안 가 승단식이 열릴 거다. 그때부터 염화문의 사범이자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겠지."

"문주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팔륜에 도달하는 것. 두 번째는 사범들에게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거다."

염륜잔화창의 성취뿐만 아니라 간부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팔륜은 그렇다 쳐도 동의는 받을 수 있겠어?"

"대련을 통해서 받아낼 수 있으니 문제는 없다. 다만 이때는 영역대련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련이니 오늘처럼 쉽지만은 않겠지."

"흐음...."

염화문의 사범들은 모두 현역으로 활동 중인 A급 영웅들.

오랜 세월 동안 염륜잔화창을 갈고닦은 달인들인 데다 무구 역시 온갖 지원을 받아서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대련이라면 방금 상대했던 사범 중의 하위권인 강현운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었지만.

"오래는 안 걸리겠네."

이세훈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쉽게도 말하는군."

"진짜 될 것 같으니 하는 말이야. 당장 오늘도 그렇잖아?"

회귀 전 염성하의 발목을 붙잡았던 슬럼프는 이미 해결됐고, 미래의 본인이 만들어낸 수련법도 상황을 봐가며 계속 가르쳐줄 예정이다.

염성하의 재능이라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성장하게 되리라.

'무엇보다 영웅의 탑도 있으니까 말이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며, 바벨의 중앙에도 세워져 있는 순백의 탑. 능력만 확실하다면 그 탑의 힘을 통해 세월의 벽을 단숨에 넘어설 수 있으리라.

"어제도 말했지만 이젠 네가 싫다고 해도 문주로 만들 거야. 그러니 앞으로 값을 어떻게 지불할지나 고민하라고."

"...."

자신만만한 이세훈의 모습에 염성하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바벨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도움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 같아 불쾌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눈앞의 이 뺀질거리는 녀석에게 받는 도움은 그런 불안감과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새벽까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승단을 끝내고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진 지금은 알 것 같았다.

"...그래."

속내를 알 수 없는 선의의 도움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도 받은 만큼 토해내야 할 거다."

속물적인 '거래'는 반대로 믿을 수 있었기에.

[대상 '염성하'의 인연레벨이 Lv.2로 상승합니다.]

[인연레벨이 상승함에 따라 관계가 정립됩니다. 대상 '염성하'와의 관계는 '거래'입니다.]

[관계 : 거래去來]

누군가는 삭막하다 할 수 있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래관계만큼 편리하며 깔끔한 관계가 없습니다.

아직 타인과의 관계가 서투른 대상에게는 이러한 관계가 오히려 더 편안하게 다가갈 것입니다.

*대상과의 거래가 성립될 때마다 인연석이 생성됩니다.

*대상과 거래 중인 상황일 때 인연석의 숙성속도가 증가합니다.

*현재 생성된 인연석 : 없음.

눈앞에 연이어 떠오른 알림창들.

그 내용에 이세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Lv.2라고?'

인연레벨의 Lv.1이 이름을 기억한 정도라면 Lv.2부터는 특정한 '관계'가 형성된 수준.

잘만하면 금방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그리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이세훈이 놀란 이유는 그 대상이 염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놈이 벌써 Lv.2를 내주다니....'

회귀 전에는 어림잡아도 1년은 족히 걸렸었는데 어떻게 이리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세훈이 놀라고 있을 때. 염성하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번 대금은 네가 필요한 쪽으로 말해라. 현찰이든 재료든 할 수 있는 선에서 마련해 주지."

"...그래. 나중에 보낼게."

"그리고 추가로 의뢰하고 싶은 게 있다."

"벌써?"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염성하가 자신의 손에 들린 두 단창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수업에 제출할 물건이었기에 잠시 빌린 물건. 이것들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게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 만에 만들어낸 게 이 정도라면 더 기대해 봐도 되겠지.'

과연 그때는 또 어떤 창이 만들어질까.

살면서 단 한 번도 무구에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기대감이 낯설면서도 또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아주 살짝,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염성하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좀 더 쓸 만한 무기를 만들어 오도록."

빠드득─

이세훈의 이가 험악한 소리를 내며 갈렸다.

* * *

"스읍... 후우...."

플라비움의 밖으로 나온 이세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다.

이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아공간 포켓에서 적일창과 흑십창을 꺼내 염성하의 배때지에 그대로 쑤셔 박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혜도 모르는 개잡놈의 새끼....'

도와준 사람한테 감사 인사를 해도 뭐할 판에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어 오라니? 지나가던 들개도 이렇게 예의 없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디서 그런 표정을 알아가지고....'

회귀 전에는 입꼬리 한 번 올릴 줄 모르는 놈이었는데 그런 녀석이 피식 웃으면서 놀리니까 뒷목이 절로 뻐근해졌다.

이래저래 이가 갈리는 상황이었지만 이세훈은 금방 분노를 가라앉혔다.

원래 저렇게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본재료에 인연각인을 응용해서 만든 무기니까. 연습용이면 몰라도 제대로 쓰기에는 좀 그렇지.'

염성하의 힘을 제대로 이끌어내려면 최소한 희귀 등급 최상품, 아니면 영웅 등급은 만들어야 했다.

'제대로 된 무기라...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오늘의 굴욕은 반드시 배로 갚아주고 말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이세훈은 자연스럽게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었냐?"

"아니. 이번에는 지나가다 우연히."

자연스럽게 옆을 걸으며 대답하는 에리카.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었기에 이세훈이 정류장에 도착해 경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며 물었다.

"주술학부로 가는 길이냐?"

"아니. 보르시파의 경매장으로 갈 거야."

"거긴 왜?"

"네가 만든 물건이 어떨지 궁금해서."

"...아."

에리카의 이야기에 이세훈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경매를 떠올렸다.

자신의 1학기 예산이 걸려있는 제련학부 2학년의 정기경매. 염성하의 일이 생각보다 금방 끝나 아직 시간이 남은 것이다.

'흐음. 갈까 말까....'

밤새 염성하를 관찰하고 무구를 조정하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또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오늘 남은 일과라고는 이미 과제를 완성한 제련수업뿐.

'수업은 빼먹어도 상관없고... 단련을 가자니 피곤하고...'

지금 숙소로 가봐야 저녁 늦게 일어나서 애매하기밖에 더하겠는가. 결론을 내린 이세훈이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그럼 같이 가자."

"응."

에리카와 함께 보르시파의 경매장에 도착한 이세훈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옛날에는 이런 모습이었구만.'

회귀 전에 봤던 것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 그래도 고급 백화점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게 지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을 살피던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무슨 사건 때문에 재건축을 했다고 한 거 같은데... 언뜻 들었던 거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이번에야 별 시답지 않은 기억이지만 나중에 중요할 때도 이래 버리면 곤란하다.

새삼스레 기억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 이세훈은 루트비히에게 받은 몽상아를 떠올렸다.

'조만간 준비를 하긴 해야겠어.'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계획을 세우던 이세훈은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들에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자신을 알아보고 시선을 보내오는 사람들. 그중 몇몇은 외부에서 유망주를 찾기 위해 방문한 스카우터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특히나 번뜩였다.

'입학식이 파급력이 크긴 컸던 모양이야.'

몇 명은 진짜로 거래를 제안하려는지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는데 막상 진짜로 말을 걸어오는 이들은 없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그런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옆에 서 있는 에리카의 견제가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

슬쩍 다가오려는 사람들을 귀신같이 알아내고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에리카. 이 자리에 그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이노우에 가문의 위상을 넘지 못하는 이들은 그대로 물러섰다.

혹시라도 사람이 몰려들면 어쩌나 고민했었던 이세훈은 쾌적하기 그지없는 환경에 슬쩍 웃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이노우에의 이름값에 다가오지도 못할 수준이라면 자신도 굳이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

완벽하게 걸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세훈이 앞으로도 에리카를 거름망으로 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저쪽."

소매를 붙잡은 에리카가 옆쪽의 문을 가리켰다.

큼지막한 문 바로 옆에는 '제6관'이라는 명패가 걸려 있었고 그 앞쪽에 작은 안내판이 놓여 있었다.

<제련학부 2학년 1학기 정기경매. 품목 '철검'>

"들어가자."

"응."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이세훈은 6관 내부를 살펴보았다.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수의 좌석. 일반적인 정기경매는 10분의 1도 안 차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오늘은 거의 모든 좌석이 꽉 차 있었다.

'학과 수석 이름값이 대단하긴 하네....'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새삼스레 감탄한 이세훈은 좌석을 찬찬히 살펴보았고 금방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긴장한 표정의 제이크. 누가 보내서 온 것인지 훤히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저 녀석도 고생이 많구만.'

경매장에 모인 모든 사람을 살펴본 이세훈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주목받는 상황에서 노골적인 견제는 힘들 텐데... 어떻게 하려나.'

제련학부를 손에 넣으려 한다는 미하엘의 수완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이세훈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드르륵─

무대 뒤편에서 들리는 바퀴 소리. 정중앙에 자리 잡은 수레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 위에 놓인 물건으로 향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채 고정되어 있는 새하얀 천. 부드러우면서도 금속의 질감이 느껴지는 신비한 모습이었는데 그 정체를 알아차린 이들이 감탄했다.

"저거 그거 아냐? 백호의 털로 만들었다는 영웅 등급 재료...."

"아. 그 서금포였나? 근데 그게 갑자기 왜 나왔지?"

"뭔가 실험하려는 거겠지. 참격내성으로 유명하잖아."

경매와 관계없어 보이는 물건에 모두가 흥미로워하고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과연. 그런 거구만.'

미하엘이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그리고 백광장검을 어떤 식으로 부수려고 하는지 모조리 이해했다.

그 모든 상황을 파악한 이세훈은 핵심소재로 보이는 새하얀 천, 서금포를 바라보았고.

'나쁘지는 않겠네.'

새롭게 가다듬어질 백광장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5화

"자리는 저쪽."

에리카에게 이끌려 빈 좌석으로 온 이세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아까는 분명히 우연히 마주쳤다며."

"응."

"근데 왜 내 좌석까지 있는 거냐?"

떡하니 비어 있는 두 개의 좌석. 아무리 봐도 노린 듯한 상황에 이세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에리카가 태연히 대답했다.

"이런 일도 있을까 해서."

"...그래. 어련하시겠어."

어쨌든 서서 듣는 것보다야 편하다. 자리에 앉은 이세훈은 그 앞에 놓인 카탈로그를 뽑아서 펼쳐보았다.

'총 36자루인가.'

오늘 출품되는 물건들은 이미 무대 위에 세팅이 끝난 상태였는데 거치대 하나당 여섯 자루씩 탁자에 놓여 있었다.

'흐음... 2학년에는 영 인물이 없구만....'

회귀 전에 본 적 있는 이름도 없었고, 2학년 수석이 만들었다는 철검도 솔직히 말해 한스보다도 수준이 떨어졌다.

생각보다도 낮은 수준에 이세훈이 팍 식은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무대 뒤편에서 진행자가 걸어 나와 단상 앞에 섰다.

"지금부터 제련학부 2학년의 정기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는 철검. 출품된 물건은 총 36자루로 자세한 정보는 카탈로그에 기입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부의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고 무대 쪽의 조명이 더욱 밝아지며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든다. 그 모습을 확인한 진행자는 매끄럽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본격적으로 경매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번 경매에 특별히 추가된 품질검증 절차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진행자의 이야기와 동시에 무대의 중심부 쪽으로 조명이 집중되었고, 수레 위에 놓인 새하얀 천이 사방으로 빛을 반사시켰다.

"이 하얀 천은 마수 '백호'의 털을 녹여 가느다란 실로 만든 다음 짜낸 천인 서금포西金布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금속처럼 단단하며 참격에 뛰어난 내성을 가지고 있지요."

진행자의 설명에 맞춰 검을 들고나와 있던 직원이 서금포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카가가각!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불꽃. 검과 천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직원이 더욱더 힘을 주었다.

카가각──── 파캉!

힘을 견디지 못하고 두 동강 난 검. 직원이 그 조각을 들어 올려서 보여주자 이가 모조리 나간 검날이 드러났다.

"그 덕분에 이처럼 절삭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내구도를 낮춘 물건들은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번 경매는 서금포를 통해 그런 불량품을 구분하고자 합니다."

"오. 재밌겠는데."

"제대로 준비한 모양이야."

자칫 잘못하면 출품작이 부서질지도 모르는 검증법.

일반적인 경매에서는 보기 힘든 상황에 참가자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올해 학과 수석인 이세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하려면 2학년의 검은 전부 부러뜨리려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지. 내구도가 닳은 서금포를 베어내는 식으로 할 것 같은데?"

어느 학부든 밀어줄 만한 유망주가 생기면 약간의 연출을 하기 마련. 참가자들은 서금포를 통한 검증을 그런 일환으로 여겼고, 무대의 뒤편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미하엘이 미소를 지었다.

'순조롭게 흘러가는군.'

품질검증을 하는 이유도 명확하며 명분 역시 갖춰졌다. 차후 이 일이 의심받아 조사를 받더라도 새로운 유망주의 등장에 부학과장이 의욕을 낸 사건 정도가 될 터.

'그것도 검증이 성공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이세훈이 만들어낸 백광장검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절삭력에 특화된 검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물론 철만을 사용해 그것을 뛰어넘으라는 것은 생도에겐 가혹한 과제였지만 그거야 부학과장인 자신이 신경 쓸 바는 아니리라.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객석에 앉은 이세훈을 바라보며 미하엘은 피식 웃었고, 모든 설명을 끝낸 진행자가 경매를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번 검은 조셉 생도의...."

진행자의 호명과 함께 직원이 거치대에 얹어진 검을 들고나와 서금포를 향해 가볍게 내리긋는다.

카가가강!

"오...."

"색이 다르잖아?"

앞의 시범에선 거무튀튀한 불꽃이 튀었는데 이번에는 푸른 불꽃이 튀어 오른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객석 곳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왔고, 에리카가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지 알아?"

"서금포, 정확히는 백호의 털인 '서금모西金毛'가 가진 특징이야."

S급 마수 백호.

워낙 오래전에 잡힌 녀석이라 단순히 몸이 단단하다고만 아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 능력은 조금 복잡했다.

털과 가죽, 그리고 살과 뼈가 가진 각기 다른 성질이 한데 어우러져 극강의 방어력을 만들어냈던 것인데 그중 털인 서금모는 '모방'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털에 닿은 금속 무기의 예기를 모방해서 아무리 좋은 무기를 사용해도 내구도를 깎아 먹어. 거지 같은 능력이지."

"엄청나네."

"괜히 영웅 등급 수백 개에 전설 등급 무구까지 부숴 먹었겠어. 저기에 가죽이랑 살, 뼈까지 더해지면 장난 아닐걸."

에리카에게 백호에 대해 설명하던 이세훈은 문득 회귀 전의 기억을 하나 떠올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서금호왕西金虎王이 지금쯤 만들어지고 있었던가?'

백호의 부산물을 활용해 만들어낸 전설 등급의 갑옷.

유일하게 백호의 '심장'을 사용한 장비였는데 원본의 방어력을 거의 완벽히 재현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심장은 나도 좀 탐나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제작자도 미상인 데다 무구가 처음 나타난 게 암시장 쪽이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지 이세훈이 고민하던 그때.

"그럼 예리한 검일수록 불리한 거 아냐?"

무언가 깨달은 에리카가 눈매를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지. 절삭력을 높인 검은 보통 내구도가 낮으니까."

균형 있게 만들어낸 검이라면 서금포에 내리긋는다고 해도 크게 상하는 일은 없다. 보통은 검날을 필요 이상으로 살리기보단 내구도를 안정시키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세훈의 백광장검의 경우 검날을 극한까지 연마하여 예리함을 살린 무구. 그렇기에 내구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서금포에 부러질 가능이 높은 거지.'

재료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보기엔 노골적인 배치.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비난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생도들이 만든 물건 중 절삭력에 치중하다 내구도가 부실해 불만을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백광장검이 부러져도 그런 불량품을 만들었다 정도로 받아들여지겠지.'

특히 다른 2학년의 검이 속속들이 통과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만 부러진다면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이후로는 뭘 만들어도 제련학부, 김인철이 수작을 부렸단 식으로 작업할 테고 명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되리라.

'한번 인식이 그리 잡혀 버리면 고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 뒤에는 아마 회유를 하거나 앞에 내보낸 제련학부의 교수들처럼 아예 쳐내지 않을까.

'생각보다 능력이 좋은데.'

서금포를 구해온 것도 그렇고 바벨, 루트비히의 아래에서도 과감히 움직이는 것이 부학과장까지 그냥 올라온 게 아닌 모양이다.

이세훈이 속으로 미하엘을 재평가하고 있을 때.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뭐가?"

"예리한 검일수록 불리하다면 네가 만든 검이 가장 불리하잖아."

"뭐. 그건 그렇지."

무대 위에서 독보적으로 빛나고 있는 백광장검을 바라본 이세훈이 슬쩍 웃었다.

"내가 제대로 못 만들었다면 말이야."

카가강!

서금포에 검을 내리그을 때마다 각기 다른 색의 불꽃이 튀어 올랐고, 대부분 이가 살짝 나가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25번 검 검증 완료되었습니다. 입찰 시작가는 200만 원으로...."

검증이 끝나면 즉각 경매가 시작되었고, 대부분의 검은 몇 번 호명된 이후 별다른 소동 없이 바로 낙찰되었다.

대부분 무구 스킬이 없는 고급 등급인 데다 오늘 경매장을 찾은 1,000여 명의 참가자들이 노리는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36번 검. 보르시파 1학년 학과 수석인 이세훈 생도의 백광장검의 품질 검증을 실시하겠습니다."

직원이 조심스레 마지막 남은 백광장검은 들어 올려 객석을 향해 내보였다.

조명 아래서 스산하게 빛나는 새하얀 예기. 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에 경매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두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후우...."

앞의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관심에 직원이 숨을 고르며 천천히 백광장검의 검날을 서금포를 향해 가져다 댔고.

키이이잉!

기존과 전혀 다른 광경이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검날이 깎여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 그와 동시에 백광장검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예기가 피어오르며 주변으로 새어나갔고.

카강!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직원의 보호장갑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흐억...!"

흘러나오는 예기에 손이 베일 뻔했음을 깨달은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손에서 떨어뜨린 백광장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욱!

경매장의 바닥을 꿰뚫고 들어간 백광장검.

갑작스러운 상황에 참가자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바라보았고 경매장 내부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눈으로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진행자조차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잠깐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이세훈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아... 그게...."

"올려 보내주게."

돌발상황에 진행자가 선뜻 결정을 못 내리자 맨 앞에 앉아 있던 김인철이 이야기했다.

"무구를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지 않겠나."

"아, 예.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도교수인데 뭐 어떻겠는가. 진행자의 허락에 이세훈이 계단을 타고 무대 위로 올라섰다.

좌석에 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시선들. 그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본 이세훈은 바닥에 꽂혀있던 백광장검을 가볍게 뽑아 들었다.

"저... 보호장갑을...."

"아.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만든 검에 손을 베이지는 않는다.

직원을 돌려보낸 이세훈은 백광장검의 날을 가볍게 훑어보며 객석을 바라보았다.

"우선 이 검증에 사용된 서금포, 정확히는 백호의 털인 서금모의 특징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세훈은 에리카에게 해주었던 설명을 고스란히 반복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객석이 술렁였다.

조금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품질 검증이 이세훈의 백광장검에는 상당히 불리한 구조임을 알아챈 것이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예기에 치중된 검은 서금포에 부러지기 쉽습니다만... 제가 만든 백광장검은 조금 경우가 다릅니다."

백광장검의 검날을 잘 보이게 내세운 이세훈이 겉면에 빛나는 새하얀 예기를 쓰다듬었다.

"백광장검에 맺힌 이 '예기'는 단순히 빛이 반사된 게 아닙니다. 검신을 순환한 마력이 맺혀있는 현상이죠."

"마력이라고?"

"아무리 봐도 그런 건 안 느껴지는데...."

마력으로 만들어진 예기라면 자신들이 느끼지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세훈이 미소를 지었다.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도 정상입니다. 대기 중에 흩어져 있는 소량의 마력만으로 만들어진 거니까요. 따지자면 반딧불 같은 겁니다."

이세훈이 허공에 가볍게 백광장검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겉면에 맺힌 새하얀 예기가 더욱 선명히 빛났다. 검을 휘두르면서 더 많은 마력이 검신에 스며들어 예기가 강해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반딧불처럼 빛만 나는 건 아닙니다. 마력배열을 조정해서 방출되는 마력을 압축되게 만든 건데...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주 얇은 검이 검날에 맺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검기라고 할 만큼 마력의 밀도가 높진 않지만, 단순히 빛이라고 하기에는 날카롭다. 그렇기에 이를 '예기銳氣'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 방금 일어난 현상은 예기가 맞물리면서 나타나서 그런 거야?"

적절한 에리카의 질문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똑같은 예기가 맞물리면 상쇄가 아니라 공명을 일으키거든.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걸 할 수 있지."

설명을 끝낸 이세훈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서금포를 바라보았다.

'잘못하면 진짜로 부러지거나, 베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갈 터. 그렇기에 완벽하게 해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염성하를 돕느라 밤샘작업을 한 여파가 몸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신은 있지만... 신중한 게 좋겠지.'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게 있을까. 자신이 가진 것을 확인해 보던 이세훈은 문득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에리카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입학식 때 평범한 까마귀를 강화해서 다뤘었던가.'

주술의 구성 자체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하게 맞물렸기에 가능한 기교. 이전에 초대장에 펼쳐서 보여줬던 결계도 그렇고 에리카는 완벽하다 싶을 만큼 정밀함을 보여줬다.

'목표를 정한 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는 완벽주의.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저돌적으로 움직인다.'

일체의 낭비 없이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방식. 에리카라는 인물에 대한 형태가 머릿속으로 그려졌고, 그것이 고스란히 이세훈의 손안으로 발현되었다.

우웅!

수천 개의 가느다란 철사를 이어 붙여서 만들어낸 듯한 광석. 새로이 만들어낸 인연석의 모습에 이세훈이 곧장 성능을 확인해 보았다.

[인연 - 사접석]

[등급 : 고급] [품질 : 중하]

조율된 마력이 압축되어 있는 인공광석.

다른 광물과 함께 섞을 경우 흐트러진 내부의 마력배열을 조정시킵니다.

*함께 사용한 재료의 배열을 조정합니다.

'좋아.'

완벽하게 부합되는 성능에 이세훈은 곧장 사접석을 움켜쥐었다.

[인연각인 '사접석'이 발동됩니다.]

촤라락!

손아귀에서 새어 나와 백광장검에 이어지는 은색 실. 그 순간 은은하게 흔들리던 예기가 점차 가라앉아 새하얀 검날로 변했다.

마력이 방출되며 나타나는 일렁임까지 완벽히 조정되어 마치 검기와도 같은 형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저런 소량의 마력으로 저만큼 선명한 형태를...."

"설마 검기는 아니겠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예. 경악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세훈이 슬쩍 웃으며 검날을 바라보았다.

'됐네.'

이 정도면 충분히 가다듬을 수 있다.

백광장검을 앞으로 뻗은 이세훈은 천천히 서금포의 위로 내리그었다.

키이이잉─

서금포가 발하는 예기와 백광장검이 발하는 예기가 서로 완벽하게 맞물려 V자의 형태로 검날을 뒤덮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세훈은 백광장검을 조금 더 지그시 눌렀다.

카가가강!

예기와 충돌하며 튀어 오르는 불꽃. 그 순간 이세훈이 단숨에 검날을 자신을 향해 당겼고.

스카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백광장검의 검날이 더욱 선명히 벼려졌다.

[무구 '백광장검'의 등급이 '희귀'로 상승됩니다.]

[백광장검]

[등급 : 희귀] [품질 : 하]

새하얀 예기가 벼려진 장검.

한계까지 연마된 검날이 마력배열과 맞물려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운 예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부여된 마력이 압축되어 검날에 방출됩니다.

*마력을 부여할 경우 절삭력이 강화됩니다.

*스킬 '백예'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흠. 이 정도면 뭐....'

공용숫돌로는 제대로 세울 수 없었던 날을 좀 더 살려냈다. 물론 특제숫돌을 사용한 것에 비한다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첫 경매에 올릴 물건으로는 나쁘지는 않으리라.

백광장검을 살피던 이세훈은 문득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아. 고급에서 희귀로 등급이 올랐네요. 시작가에 이 부분도 반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아, 그 혹시 무구 스킬은...."

"백예라고 생겼네요. 보시죠."

우웅!

이세훈이 가볍게 무구 스킬인 '백예'를 사용했고 보다 선명한 예기가 검날의 위로 솟구쳤다.

"예기가 강화되는 간단한 스킬입니다."

"그, 그러면... 메뉴얼에 따라 시작가는 100만 원에서 500만 원으로 상향조정하겠습니다."

무구 스킬 하나만으로 5배 이상 뛰어오른 가격.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가였기에 진짜 낙찰가는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시작할까요?"

이세훈이 슬쩍 내보이는 백광장검의 모습에 경매장에 모인 모든 이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 학과 수석이 만든 무구. 거기에 고급에서 희귀 등급으로 오른 '승급품'. 안 그래도 높았던 백광장검의 희소가치가 더욱더 높아졌고.

"700만!"

"1,000만!!"

"1,500만!!!"

그 가격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극소량의 마력을 검기 수준으로 압축해낼 수 있는 정밀한 구조. 검기를 수련하는 도구로 쓸 수 있는 유용함.

이미 평범한 무구라기보다는 새로운 연구재료나 다름없었기에 사람들이 끝없이 매달렸고 계속해서 가격이 갱신되어갔다.

그렇게 앞자리가 하나씩 올라 마침내 그 단위가 억을 넘겼을 때. 포기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이었다.

"2억."

두 눈을 빛내며 담담히 손을 드는 에리카

"윽... 2억 1천!"

그 모습에 다급히 손을 들며 외치는 제이크.

같은 1학년 학과 수석이자 세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자제들. 그 모습을 무대에서 내려다본 이세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게 상류층의 돈지랄이구나.'

겨우 희귀 등급 무구에다 억 단위를 태우다니. 미친 건가 싶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저기서 외치고 있는 돈이 다 내 돈이며 예산의 바탕이 될 텐데.

"아 2억 9천. 여기서 끝나는 겁니까? 맨손으로 돌아가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백광장검을 흔들며 외치는 이세훈의 모습에 제이크의 눈매가 파르르 덜렸다가 다시금 손이 올려졌다.

"...3억!!"

"3억 1천."

"3억... 2천...!"

"3억 4천."

담담하게 가격을 올리는 에리카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계속해서 따라붙는 제이크.

아무리 희소가치가 있다고 해도 희귀 등급, 그것도 하품의 물건에 사용하기는 너무 과한 금액이었다.

이제는 이세훈을 영입하기 위한 이노우에와 마이어스의 물밑작업으로 보이는 입찰 경쟁에 모두가 경악하던 그때.

"6억."

한 사람의 선언과 함께 경매장이 얼어붙었다.

언제 도착했는지 입구 앞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 류은하 학과장의 등장에 제이크와 에리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 번 점찍은 무구라면 반드시 사서 먹어버린다는 유명인. 그것이 바로 웨폰이터이자 미식가라 불리는 류은하였기 때문이다.

'6억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만한 값어치는 확신할 수 없어....'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가격에 두 사람이 손을 들지 못하고 고민하던 그때.

"너무 낮게 불렀나...."

"...."

"...."

조용한 경매장에 울려 퍼진 류은하의 중얼거림. 그에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배, 백광장검. 6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이세훈의 첫 경매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6화

[잔고 : 600,110,250원]

"이야...."

막 갱신된 계좌의 잔고를 본 이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회귀 후 처음으로 계좌를 확인했을 때 적혀 있던 금액이 110,250원.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던 잔고가 드디어 숨통이 트인 것이다.

'이걸 어디에 먼저 써야 하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영연신마법을 강화하기 위한 재료 수집. 몽상아의 제련준비도 있었고 망치나 숫돌 같은 제련용 장비도 필요했다.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떠오르는 사용처. 그 목록을 확인해 보던 이세훈은 금방 결론을 내렸다.

'역시 투자다.'

6억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을 모두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지금은 급한 일들만 처리하고 돈을 불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좋다.

물론 투자가 무조건 돈을 불려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회귀를 통해 미리 알고 있는 지식들도 있으니 비교적 안전하리라.

'그래도 성급하게 굴었다간 마광수 그 영감탱이처럼 다 날려 먹겠지.'

관련된 기억이 흐릿하기도 하고 자신의 개입으로 미래가 변해 버릴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너무 무작정 넣어선 안 된다.

그리고 수익성도 고려해야 하니 기억을 하나하나 잘 따져보고 넣어야 할 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세훈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확인하셨습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류은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아, 예. 전부 입금됐습니다."

"혹시 금액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말씀하십시오. 백광장검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탁자 위의 백광장검을 슬쩍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류은하.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틈만 나면 힐끗거렸는데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지금도 과분한 금액인데 이 이상 요구할 수는 없죠."

"그렇습니까? 저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봤습니다만...."

공적을 깎아내리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지만, 이번에 한해서 이세훈은 백광장검의 가치를 냉정하게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한 자루뿐이지만 나중에는 얼마든지 양산될 수 있는 물건이니까요."

백광장검은 만들기가 어려울 뿐이지 다른 대장장이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조건'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인 틀만 알려져도 누구나 만들 수 있으며 실력 있는 대장장이들은 아마 특징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그 둘은 몰라도 류은하한테는 양심적으로 굴어야지.'

에리카와 제이크가 무구의 구매보다는 영입 쪽에 의미를 둔 기업이라면 류연하는 순수하게 무구를 평가하고 맛보기 위해 구매한 평론가다.

괜히 후려쳤다가 기대치가 떨어져 인연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 알아서 조절해야 했다.

"흠. 확실히 따라 만들지 못할 수준은 아니겠군요. 연마 과정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장인분들이라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6억이 좀 과분한 것처럼 느껴지고요. 제가 이걸 정말 받아도 될지...."

말끝을 흐리는 이세훈의 모습에 류은하가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받아도 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한 자루뿐이니까요"

그리고 미래에 더 생겨난다고 한들 그것이 지금 이세훈이 만들어낸 백광장검과 같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류은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야기했다.

"백광장검은 6억의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물건입니다."

생도를 응원하려는 의도가 아닌, 고객으로서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류은하. 그 모습에 이세훈은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학과장님께 판매하길 잘한 것 같네요."

"...."

이세훈의 이야기에 류은하의 두 눈이 살짝 커졌고, 이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겉보기에는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기 힘들지만, 이세훈은 류은하가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의에 약한 건 여전하구만.'

류은하는 대장장이들에게 있어 최대 고객임과 동시에 기피 받는 고객이었다.

무구라는 것이 본래 쓰일수록 그 존재를 알려가며 제작자의 이름을 알리는 것인데 류은하의 고유스킬인 용혼광로는 무엇이든 그걸 일회용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평가까지 가혹하니 누가 좋아하겠어.'

경매장에서 몇 년을 떠돌던 무구를 류은하가 사가려 하자 그걸 만든 대장장이가 황급히 사러 온 일화만 봐도 업계에서 그녀가 받는 취급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유망주가 무기를 사갔는데도 오히려 고마워한다? 류은하도 사람이었기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인연레벨은 Lv.1이지만... 이런 분위기면 괜찮겠는데.'

무표정한 류은하의 얼굴을 살피던 이세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학과장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죠."

"백광장검은 어떻게 드실 예정이십니까? 조금 궁금해서요."

이세훈의 물음에 류은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위험지역에 나가서 사용할 생각입니다. 이만한 물건을 훈련용으로 먹기에는 아까우니까요."

희귀 등급 하품이라 간식 취급을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소모품의 범주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모양이다.

"어디로 가실지는 이미 정하셨습니까?"

"따로 정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류은하는 이세훈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먼저 물었다.

"혹시 동행하시려는 겁니까?"

"...예. 학과장님만 괜찮으시면 은월산에 같이 가고 싶어서요."

"은월산이라면... 분명 D급 위험지역이군요."

만마의 늪에 오염되어 환경이 변한 곳들을 통틀어 일컫는 '위험지역'.

은월산은 그중 D급 이상의 영웅들에게 활동이 권장되는 곳으로 이번 1학년의 첫 토벌 실습의 후보지로 뽑힌 곳 중 한 곳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백광장검이 어떻게 먹히는지도 보고 싶고... 나중에 있을 토벌 실습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바벨은 영웅을 양성하는 기관답게 정기적으로 위험지역으로 나가 몬스터를 직접 토벌하는 실습이 존재한다.

아칼쿠프와 우르는 성적에 반영되기에 모든 생도가 참가하고 보르시파는 신청자에 한해서 받아주는데 이세훈도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핑계지만 말이야.'

실습에 참가하려는 것은 맞지만 진짜 목적은 류은하의 무력을 이용해 추후 유용하게 쓰일 물건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은월산에 이세훈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물건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완등자 위르겐 크루거의 아티팩트.'

죽음을 초월하여 눈을 감지 못한다 하여 '불명자不暝者'라 불리는 최강의 사령술사. 그리고 재계 1위를 수십 년째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 UD그룹의 회장.

그가 만마전의 마인에게 습격당해 잃어버린 아티팩트 중 하나가 바로 은월산의 한 장소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회귀 전에 발견한 녀석들은 UD그룹에 가져다주고 수백억의 보상을 받았다고 했었지.'

자신 역시 그렇게 돈으로 받아도 되고 아니면 그만한 값어치를 지닌 다른 물건을 요구해도 된다.

완등자인 데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만큼 확보만 해두면 어떤 상황에서든 쓸 만하리라.

"음...."

이세훈의 제안에 류은하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위치를 생각하면 그건 조금...."

"답례로 원하는 무구도 만들어드릴게요."

"일정부터 잡지요. 다음 주는 어떻습니까?"

두 눈을 빛내며 태도를 바꾸는 류은하.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이는 그 모습에 이세훈이 씩 웃었다.

"그렇게 하시죠."

* * *

"흐음...."

"...."

맞은편에서 흘러나오는 언짢은 숨소리. 그 반응에 금발의 청년, 제이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래서 결국 구해오지 못했다는 거구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누가 들으면 내가 나무라는 줄 알겠네. 누나가 그렇게까지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이니?"

그런 말을 하는 시점에서 속이 좁다 못해 꼬인 인간이라는 뜻이었지만, 제이크는 굳이 그것을 말로 꺼내지 않고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웠다.

저 괴물 같은 누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 그러네. 나는 분명히 얼마가 들더라도 이세훈이 만들어낸 무구를 사오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류은하 학과장님이 끼어들었다고 냉큼 포기해 버리다니."

"...."

"말하는 방법이 잘못됐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였던 걸까.

혼잣말에 가까운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제이크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루트비히 학원장과 독대할 때도 이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한 집에서 같이 나고 자랐음에도 가깝기보다는 두렵게만 느껴지는 상대. 전신을 짓눌러오는 긴장감에 제이크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던 그때.

"아, 미안해 제이크. 요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굴어버렸네...."

방금까지 느껴지던 중압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다시금 활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것도 그나마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면 정말 졸도했을지도 모르리라.

"기분 상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멋대로 행동한 제가 잘못한걸요."

"이해해 주니 다행이네. 그런데...."

탁자에 올려져 있던 두 손이 깍지를 끼고 그 위로 조각 같은 턱이 걸쳐지며 무미건조한 입가가 시야의 끝에 들어온다.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생각이야?"

질문을 가장한 경고에 제이크가 재빠르게 고개를 들자 언제나와 같이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누이, 아리아 마이어스의 모습이 보였다.

"대화를 할 때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봐야지. 안 그래?"

"...맞습니다."

"음음.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봐야겠네."

한 손에 턱을 괴며 고민하기 시작하는 아리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이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누님. 한 가지 여쭈어도 괜찮습니까?"

"응. 말해봐."

"이세훈한테 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제이크는 본가에서도 아리아의 잔심부름을 도맡았었기에 그녀의 관심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검들과 그러한 명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대장장이들. 검술 명가인 마이어스의 핏줄이 다 그렇지만 아리아는 그중에서 특히나 '명검'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세훈은 아무리 봐도 그런 수준은 아니야.'

전도유망하니 미래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누이는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까지 봐주던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세훈에게는 이렇게 흥미를 가지는 것일까.

"흐음. 그러게. 왜 이리 관심이 갈까...."

제이크의 물음에 아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오늘 처음으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는 모습.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에 제이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때.

"얼굴이 취향이려나?"

"쿨럭! 컥! 케흑!"

사레가 들린 제이크가 마른기침을 토해내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그, 그렇죠?"

"들개 같은 느낌이 좋기야 한데 그거 하나 때문에 이 정도로 하진 않지. 나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걸."

"...."

이세훈에게 이 사실에 대해서 경고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제이크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냥 조금 궁금할 뿐이야."

아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어떤 검을 만들 수 있는지."

수많은 사람의 시선과 함성을 받으며 서 있었던 천무관의 무대 위. 그리도 소란스럽던 장소에서 아리아는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만이 선명히 들려왔었다.

'재수 없거든.'

듣기에는 그저 질투심에 내뱉는 듯한 악담.

하지만 아리아의 비정상적인 감각은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는 듯한, 더 나아가 그 마음을 마치 이해하고 있는 듯한....

'아니. 여기까지는 이른가.'

기대가 크면 그 배신감도 커지기 마련.

이러다가 배신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아리아는 부풀어 오르던 기대감을 접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잘 좀 부탁할게. 알겠지?"

"...알겠습니다."

"음음. 그럼 이제 방법을... 아. 그러고 보니 같은 수업 듣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광수 교수의 신체제어학 말이야."

아리아의 물음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같이 듣습니다."

"그럼 그때 틈 봐서 한 번 부탁해줘. 값은 제대로 지불하겠다고 이야기하고."

"...."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으나 제이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세훈이 받아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누님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렇다고 직접 가서 부탁하는 게 어떻겠냐고 할 수는 없었다. 오늘이야 잠시 시간이 났지만 평상시에는 졸업을 위해 바벨 측에서 공수해 온 토벌 의뢰를 해결하고 다니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 권유할 생각이면 애초에 나한테 시키지도 않았을 테고.'

도대체 자신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중간에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 제이크가 속으로 푸념을 하고 있을 때.

"이번에 잘 해결해 준다면, 아버님께 '계승식'에 대해서도 다시 말씀드릴게."

미소를 지은 아리아의 이야기에 흠칫 떨었다.

"졸업 전까지 금지라고 하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기니까. 그리고 지금 이대로라면 학과 수석 자리에서도 금방 밀려날 수도 있어."

"...."

"너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지?"

아리아의 이야기에 제이크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말 그대로 이세훈과의 대련에서 허무하게 패배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검....'

계승식을 통해 자신만의 검을 보유한 가족들과 달리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은 자신의 손. 그것을 떠올린 제이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최근에 내가 골치 아픈 일도 해결해드렸으니 잘 말씀드리면 아버님도 허락해 주실 거야.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아리아의 말을 자른 제이크가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방법을 쓰든, 반드시 이세훈에게서 검을 받아오겠습니다."

방금까지는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태도였다면, 지금은 하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가 보인다. 결연히 이야기하는 제이크의 모습에 아리아가 미소를 지었고.

"누나가 말하는 중에 그렇게 끼어드는 게 맞을까?"

"...죄송합니다."

남매의 불편한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7화

"완성했습니다."

"...."

자신의 앞에 놓인 두 단창을 본 리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적일창赤一槍]

[등급 : 고급] [품질 : 중상]

절묘하게 만들어진 합금을 제련하여 만들어낸 창.

화속성 마력을 저장할 수 있으며 염륜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화속성 마력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염륜을 사용하는데 효율이 증가합니다.

[흑십창黑十槍]

[등급 : 고급] [품질 : 중상]

절묘하게 만들어진 합금을 제련하여 만들어낸 창.

암속성 마력을 저장할 수 있으며 염륜을 안정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암속성 마력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염륜을 사용하는데 안정성이 증가합니다.

창날의 균형도 훌륭했고 창대와 마력회로의 결합 역시 군더더기 없다. 단순히 '창'으로서의 완성도만 봐도 훌륭한 물건.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그 효과였다.

'설마 염륜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무구를 가져오다니.'

정보창만 보면 염륜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구나,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염륜을 만드는데 필요한 술식과 보조식. 그 두 가지가 각각 단창 안에 들어가 있어 조금이라도 틀릴 경우 속성마력을 반발시켜 알려주는 것이다.

'이 정도면 훈련 도구 겸 교본이나 다름없군.'

적당히 염륜이나 만들어내는 물건을 만들어 올 줄 알았더니 설마 이런 걸 가져올 줄이야.

황당함을 넘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의 결과물에 리스가 담담하게 서 있는 이세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어젯밤 회의에서 형님이 왜 그렇게까지 이세훈에게 배정되는 예산을 올리려 했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단창을 바라보던 리스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한 다음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우선... 훌륭하다. 교수생활을 시작한 지도 오래됐지만 이렇게 빠르고 완벽하게 과제를 만들어 오는 경우는 난생 처음 보는군. 진심으로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원래는 과제를 모두 거둔 다음에 채점을 할 생각이었다만... 솔직히 이 정도면 굳이 미룰 필요도 없겠지. 만점으로 알고 있도록."

"...만점?"

"아니, 진짜로?"

리스의 이야기에 제련실의 다른 생도들이 웅성거렸다.

일반적으로 바벨에서 교수들에게 만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목표치가 낮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그 기준점이 말도 안 될 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점을 받으려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세훈은 첫 과제부터 그런 물건을 만들어 온 것이다!

"과제도 제출했으니 발표날까지는 출석 면제다. 수업을 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

하루 만에 만들어 온 무구로 만점을 받아낸 것도 모자라 그 깐깐한 리스 교수에게서 출석 면제까지 받아냈다.

그 모습에 설계도를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던 생도들이 이세훈을 힐끔힐끔 보았다.

'그냥 3학년으로 올려보내면 안 되나?'

'내가 보기엔 졸업시켜도 될 것 같은데.'

'왜 저런 놈이랑 동기야. 진짜 재수도 더럽게 없지....'

이제는 질투를 넘어서 질색을 하게 만드는 수준.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에 이세훈은 리스 옆에 서 있는 염성하를 힐끗 보았다.

'봤냐?'

네가 무시한 창이 이만큼이나 대단한 물건이다.

이세훈의 시선을 알아차린 염성하가 고개를 돌려 마주 보더니 무언가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적당한 대답을 떠올렸는지 한쪽 입꼬리를 아주 살짝 들어 올렸고.

"잘했다."

이세훈의 속을 단 한 번에 뒤집어놓았다.

"...."

혹시 자신이 피식 웃을 때도 남들에게 저런 기분을 주는 걸까. 잠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 이세훈은 속을 진정시킨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창은 챙겨가라. 팔고 싶으면 이야기하고."

리스는 곧장 수업 준비에 들어갔고 이세훈은 두 단창을 챙긴 다음 제련실에서 나왔다.

'배울 것도 없는데 굳이 수업을 듣고 있을 필요는 없지.'

사실 제련학부의 전공수업들은 전부 무언가를 배운다기보다는 학과 수석으로서 명성을 높이거나 굳은 몸을 풀어주는 '재활'에 가깝다.

그렇기에 이세훈으로서도 넘길 수 있다면 넘기는 쪽이 좋았고 정말로 배워보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부전공수업이었다.

'오늘은... 마광수 그 영감탱이 수업이구만.'

금속제련 수업에 빠지면서 3시간이 붕 뜬 상황. 이대로 트레이닝실에 갈까 싶었던 이세훈은 문득 두 단창을 집어넣은 아공간 포켓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한번 써볼까?'

회귀 전에도 제대로 펼쳐낸 적은 없었지만 이전에 마광수에게 배웠던 호신술도 그렇고 젊고 쌩쌩한 몸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남들 앞에서 연습하기에는 그랬기에 이세훈은 신체제어학의 강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수업은... 없나 보네.'

마광수도 자리를 비웠는지 텅 비어 있는 강의실. 때마침 잘됐다 싶은 이세훈이 잽싸게 탈의실로 들어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음?"

"아."

똑같이 운동복을 입고 있는 제이크와 마주쳤다.

"뭐야. 지금부터 수업이야?"

"아니. 1시간 뒤인데 먼저 도착해서 몸 좀 풀고 있으라고 하셔서."

"그래?"

어련히 제이크와 같이 수업을 듣지 않겠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개별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긴 그 영감 성격상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연무장에서 수련하기는 조금 껄끄러워졌다. 대신 갈만한 곳이라면 프라이빗 트레이닝룸이 있지만 그쪽도 아직 정식 등록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

다 포기하고 일반 트레이닝실로 가서 평범하게 훈련을 할지 이세훈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잠시 머뭇거리던 제이크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

"아니. 안 괜찮은데."

"...."

칼 같은 대답에 제이크의 얼굴이 경직됐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보나 마나 네 누나가 무기 받아오라고 뭐라 한 것 같은데 생각 없으니까 포기해."

"...조건도 안 들어보고?"

"그래. 썩 내키지가 않거든."

마이어스 가문이 거는 조건이라면 넘치면 넘쳤지 절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세훈이 이렇게 거절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훗날 멸광의 마신으로 각성할 수도 있는 아리아 마이어스라는 존재 자체가 껄끄럽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지금은 뭘 만들어주더라도 실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눈 하나는 더럽게 높은 녀석이니까.'

아리아를 어떻게 대할지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흥미를 잃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완등자였던 아리아 마이어스가 멸광의 마신으로 돌아선 것은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눈에 밟혀서 신경 쓰이지만 그 이상 다가가지는 않는... 그런 애매모호한 거리감이 지금은 최선이야.'

아리아가 원하는 '검'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는 이 방법이 옳다.

절대로 응하지 않겠다는 이세훈의 단호한 표정에 제이크가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

허리춤의 아공간 포켓에 손을 가져다 댄 제이크는 작은 망치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한 손으로 잡기 적당한 검은색 손잡이에 은색 몸통. 양옆으로 튀어나온 머리 부분은 각각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매우 짙은 속성마력이 느껴진다.

딱 봐도 어느 정도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한 번 살펴봐."

제이크가 내민 망치를 건네받은 이세훈은 곧장 정보창을 살폈다.

[흑염의 망치]

[등급 : 영웅] [품질 : 중상]

드래고니트를 제련하여 만들어낸 망치.

각 면에 화속성마력과 암속성마력을 코팅하여 두 속성마력을 증폭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두 속성마력을 증폭시킵니다.

*스킬 '속성수렴'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

영웅 등급 중상품의 망치.

처음부터 제련용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속성마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성능이 특화되어 있었으며 성능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세훈의 마음에 드는 것은 얼마든지 '개량'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물건이란 점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 정도면 시중에서도 상당히 비싼 값에 팔릴 만한 물건. 정보를 모두 확인한 이세훈은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건 뭔데?"

"나랑 다시 한번 대련하자. 거기서 내가 진다면 그 흑염의 망치를 줄게."

"내가 지면 네 누나를 위해 무기를 만들어주고?"

"맞아. 물론 대금은 정상적으로 지불할 거야."

남이 보기에는 이기든 지든 이득인 내기지만 아리아에게 절대로 밑천을 내보여서는 안 되는 이세훈에게는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내기였다.

'망치야 쓸 만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정도까지는 아니지.'

그냥 다시 거절하기로 이세훈이 마음을 먹은 그때.

'...음?'

대답을 기다리며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이크. 이전 경매에서는 마지못해 나선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드시 자신에게 이기고 말겠다는 감정. 처음 본 제이크의 솔직한 감정에 이세훈은 이번이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추가하자."

"뭔데?"

"이번에 내가 이기면... 한 달은 네 누나 이야기 꺼내지 마. 그쪽에도 전달하고."

"...."

한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그동안 받을 갈굼을 생각한다면 제이크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좋아."

하지만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기를 받아들였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내기였으며, 이번에는 절대로 전처럼 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하자고."

두 사람이 곧장 연무장 위로 올라섰고, 이전에는 급소만 보호했던 보호장치가 전신을 꼼꼼히 둘렀다.

'지난번에는 예상치 못한 반격이라 허용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마력을 끌어올린 제이크가 두 주먹에 쏟아붓자 푸른색 아지랑이가 맺혔다.

그것만 해도 철검은 가볍게 부숴버릴 수 있었지만 제이크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꽈아아악─

주먹을 움켜쥐자 그 안에 모인 마력이 더욱더 압축되었고, 이어서 손가락 틈새로 푸른색 증기가 피어오른다.

불순물이 새어나가며 점점 짙어지는 마력의 농도. 진한 푸른색으로 물들어가는 제이크의 두 주먹에 이세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냥 움켜쥐는 것만으로 마력을 저만큼 압축한다고...?'

신체 능력보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악력. 그 모습에 이세훈은 불현듯 염성하의 주먹을 막아냈던 제이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끼어든 건... 진짜 전력이어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단 거구만.'

어느 정도 잠재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예상치 못한 제이크의 능력에 이세훈도 마음을 다잡았다.

'방심하면 그대로 골로 가겠어.'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만 따진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겠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활용한다면 또 달라진다.

양손을 들어 올린 이세훈이 자신의 가슴 앞에서 깍지를 끼며 맞잡았고 왼손에 장착되어 있던 인연각인을 해제했다.

[인연각인 '사접석'이 해제됩니다.]

왼손바닥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사접석. 그 감촉을 확인한 이세훈은 곧이어 오른손에 장착해둔 인연각인 발동했다.

[인연각인 '탐철'이 발동됩니다.]

사접석이 탐철에 의해 체내로 녹아든 순간. 이세훈은 전신의 모든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수천 개의 실이 꽂혀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감각. 그 기괴한 상황 속에서 이세훈의 몸이 점차 올바른 자세를 찾아 조정되기 시작했다.

"후우...."

크게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이전보다 더욱 정밀하게 가다듬어진 자세. 전신이 완벽히 하나로 이어진 것을 확인한 이세훈은 곧장 무기를 뽑아 들었다.

후웅!

아공간 포켓에서 나온 두 자루의 단창. 그 모습에 제이크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단창도 쓰는구나.'

상당히 익숙한지 이전보다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세훈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제이크는 꽉 움켜쥔 두 주먹을 바라보았다.

'첫수에 무기를 부순다.'

조금 거칠겠지만 그것이 확실한 방법이다.

한계까지 압축해낸 마력 '청축靑縮'. 전력을 이끌어낸 제이크는 망설임을 버리고 천천히 자세를 갖췄다.

시작이라고 외쳐줄 심판조차 없는 상황. 서로 마주 본 채 미동도 않던 두 사람의 사이로 기묘한 적막이 감돌던 그때.

투웅──

오랜만의 기동에 작은 소음을 낸 보호장치.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번뜩였고.

콰앙!!

바닥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 단숨에 쇄도했다.

'이겼다...!'

지난번처럼 도주가 아닌 회피를 선택한 순간. 이쪽의 힘에 고스란히 짓눌릴 뿐이다.

두 눈을 번뜩인 제이크가 청축을 두른 주먹을 있는 힘껏 내질렀고.

화르륵!

"...어?"

이세훈의 두 창 끝으로 염륜이 솟구쳐 올랐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8화

회귀 전. 이세훈은 삼견에게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 겪은 불우한 사건들. 삼견이 각자 저질러온 범죄의 배경.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았던 기행의 이유.

처음에는 인연레벨을 올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시작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삼견은 자신들이 품어왔던 감정을 하나둘씩 푸념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연레벨이 올라가며 그 이야기들이 조금씩 깊어져 갔을 때.

화르륵!

삼견은 그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기술을 이세훈에게 알려주었다.

카앙!!!

창날을 노렸던 푸른 주먹이 단숨에 쳐내고 이어서 반대쪽의 단창이 쇄도해 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고들어 오는 검은 창날에 제이크가 재빠르게 주먹을 마주 내질렀다.

카앙!!

충돌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주먹. 그 사이 처음에 쳐냈던 주먹을 회수하여 재차 휘둘렀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가가강!

압축된 마나를 두른 푸른 주먹과 불꽃을 머금은 창날이 서로를 향해 쉴 새 없이 휘둘러진다. 사전에 합을 맞춰둔 것처럼 끝없이 맞물리는 공격들.

다른 이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아칼쿠프의 학과 수석인 제이크가 이세훈에게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세훈이 처음 염륜을 만들어냈을 때. 제이크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월요일에 이세훈과 염성하가 플라비움을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을 친구들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염성하와 밀접한 관계. 그렇다면 염륜잔화창을 알고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후웅!

문제는 이세훈이 휘두르는 염륜잔화창이었다.

본래 염륜잔화창은 공간을 넓게 장악하여 상대를 압박하는 화력 중점의 창술. 그렇기에 상대가 똑같이 화력 중점이라면 보통 힘겨루기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또 온다...!'

카앙!

하지만 이세훈이 사용하는 염륜잔화창은 두 자루의 단창을 사용해 장악하는 공간이 좁아진 대신 밀도가 매우 높아졌다.

그 결과 힘겨루기를 통해 무기를 파괴하려 했던 제이크의 계획은 모조리 빗나가고 처음 빼앗긴 호흡을 되찾지 못해 시종일관 끌려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흐읍!"

후웅!

턱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창날.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창대를 붙잡고 있던 이세훈의 손목이 반 바퀴 회전하며 안으로 끌어당겼다.

"윽?!"

카앙!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흑십창의 창날.

십자 형태의 창날을 활용한 기교로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이만큼 날카롭게 펼치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다.

방벽에 막혔으나 실전이었다면 치명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격. 그 사실에 제이크의 몸이 아주 잠시 굳어졌고, 그 틈 사이로 이세훈의 공격이 더욱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후웅! 카앙! 콰아앙!

창날과 창대. 그리고 허공에 맺힌 잔화가 불꽃을 토해내며 쉴 새 없이 압박해 온다.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제이크는 두 눈을 빛내며 방어를 다졌다.

'아직 기회는 있어...!'

지금 이세훈이 발휘하는 신체 능력은 어디까지나 스킬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 그 증거로 머리끝에 맺혀있던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스킬의 효과가 끊어져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순간. 그 틈을 노린다면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으리라.

그 순간만 노리며 제이크는 방어를 굳건히 다졌고, 그 모습에 이세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눈치 깠네.'

처음에는 계속 맞받아치더니 갑자기 방어에 집중한다.

아무리 봐도 탐철의 지속시간에 대해서 알아차린 것으로 보였는데 머리도 차분해졌는지 자세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아칼쿠프 수석은 괜히 단 게 아니다, 이거구만.'

이대로라면 탐철의 효과가 끝나는 순간 바로 역공을 당해 패배할 터. 상황이 바뀌었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일단 예상한 대로 몸은 잘 움직여.'

회귀 전 광견에게 직접 전수받은 염륜잔화창. 그때는 흉내도 더럽게 못 낸다고 온갖 욕을 다 먹었지만 지금은 어설프게나마 재현이 가능해졌다.

탐철을 통해 흡수한 사접석의 힘이 전신을 그에 맞춰서 '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기본기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기술'을 펼쳐야만 한다. 결정을 내린 이세훈은 제이크의 몸을 걷어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좁혀졌던 거리가 다시금 벌어졌고 제이크는 뒤쫓는 대신 자세를 가다듬으며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다음 한 수로 끝낼 생각인가 보네."

"일단은?"

"내가 안 받아주면 어쩌려고?"

단기간에 끝내기 위해 달려들었을 뿐이지 장기전이 불리한 것을 안 이상 굳이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

스킬의 효과가 풀릴 때까지 도망치는 것도 제이크가 진지하게 염두에 두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쫄았으면 어쩔 수 없지."

"...뭐?"

"아칼쿠프 수석이 보르시파 수석한테 두 번이나 깨지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 네 마음도 이해하니까 편한 대로 해. 비겁하다고는 안 할 테니까."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자세를 다잡는 이세훈.

그 모습에 제이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핏기가 가시며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뿌드득─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데도 냉정해진 적이 있었던가.

방금까지는 누님의 부탁 때문에, 그리고 다시 한번 계승식을 받기 위해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제이크는 그 이유가 변한 것을 느꼈다.

'절대로... 두 번은 안 진다...!'

처음으로 패배했던 날부터 생겨났던 승부욕.

비슷한 나이대의 상대에게 처음으로 느낀 감정에 제이크는 두 눈을 빛내며 자세를 낮췄다.

꾸우욱─

허리춤 옆에 세워진 두 주먹.

등은 아래로 굽어지고 고개는 바닥을 향해 팔꿈치만 하늘을 향한다.

상대를 눈앞에 둔 자세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방비해 보였지만 이세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중간하게 덤벼들면 그대로 박살 내겠는데.'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주먹 안쪽에서 압축되고 있는 마력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예상을 뛰어넘은 제이크의 악력에 혀를 내두르며 이세훈도 자세를 다잡았다.

'그래. 이번에 끝내자고.'

두 창을 살짝 늘어뜨린 이세훈은 창날을 위아래로 교차시킨 다음 모든 마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탐철로 달아오른 피와 화속성마력인 홍련이 영연신마법으로 구축된 통로를 타고 전신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질주한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아칼쿠프의 신입생들은 다 때려눕힐 수 있겠지만 상대는 1학년 최강인 학과 수석.

그렇기에 이세훈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오른팔과 오른발목에 채워진 묵주환의 마력을 해방했다.

'폭환.'

스스슷─

평소와 달리 체내로 조용히 흡수되는 암속성마력.

염성하가 훈련 중에 묵주환에 남겨둔 '흑암혼'이 몸 안으로 들어왔고 이세훈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크으...."

자신이 보유하지 않은 속성마력을 체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된 행동이었다.

비효율적인 것은 둘째 치고 마력회로를 갖추지 못한 육체가 반발을 일으키면서 마력이 폭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보기에 지금 이세훈의 행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임시통로는... 오랜만이구만...!'

당연하게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키이잉!

체내에서 울려 퍼지는 쇳소리.

급조해서 만들어낸 길이 이세훈의 전신에 깔렸고 홍련이 침식해 오던 흑암혼을 그 안으로 걷어차 넣었다.

"흡...!"

쿠웅───!

영연신마법이란 하나의 몸을 산채로 해부하여 수십 개로 나누는 것.

처음 접한 이들에게는 무슨 미친 짓거리인가 싶을 만큼 위험했고, 실제로 회귀 전의 이세훈 역시 '길' 하나를 만들어내는데도 엄청난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몸이 어떤 식으로 갈라질 수 있는지 이미 완벽히 파악한 상태. 그 말인즉.

화르륵!

이세훈에게 있어 다루지 못할 속성마력은 없다는 것이다.

교차한 창끝에 맺히는 불꽃과 어둠. 두 가지의 속성마력을 완벽히 끌어올린 이세훈은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며 두 눈을 가라앉혔다.

우우웅─

마력의 울림이 고요히 퍼져나가며 두 사람의 호흡이 멈춘다. 그리고 전신의 근육과 마력을 완전히 일치되어 모든 힘이 맞닿은 그 순간.

콰앙!

지면을 박차며 서로를 향해 쇄도해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지는 거리. 충돌까지 1초도 채 남지 않은 그 찰나에 달려 나오던 제이크의 두 다리가 돌연 지면을 내려찍었다.

쿵!

진각과 동시에 꽉 움켜쥐어졌던 제이크의 두 손이 펼쳐지며 손바닥이 맞닿아 합장한다.

"그윽...!"

키잉───!

극한까지 압축된 마력의 충돌. 손바닥이 터져나갈 듯한 압박감 속에서 제이크는 맞닿은 손끝을 아주 살짝 벌려 분출구를 만들어냈고.

마이어스류 가검식假劍式.

청축靑築 광사光絲.

한 줄기의 빛이 경기장의 바닥을 가르며 이세훈을 향해 휘둘러졌다.

압축된 마력으로 만들어낸 마력의 칼날. 사용법이 거칠지만 저만한 압축률이라면 '검기'의 일종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다.

학과 수석다운 일격 앞에서 이세훈은 몸을 던져 피하는 대신 자세를 더욱 낮추며 양손에 잡힌 창대를 꽉 움켜잡았다.

'조금 더 아래.'

보기에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압축된 마력을 마구잡이로 방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광사의 빈틈을 찾아낸 이세훈은 손목을 회전하며 교차한 두 창날을 동시에 겨눴고

염륜잔화창─改.

암명반월暗明半月.

어둠을 뒤쫓는 붉은 반월이 푸른 빛줄기를 후려갈겼다.

콰아아앙!!!

충돌 직후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충격파.

경기장에 펼쳐졌던 보호장치가 단숨에 절반 이상 부서졌고 비상장치가 발동되며 몇 배나 두꺼운 방벽이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

"...."

제이크의 목을 교차로 겨눈 두 창날과 이세훈의 명치에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있는 합장한 손.

방벽이 없었다면 목이 날아가고 명치를 꿰뚫려 동시에 죽었을 상황. 애매한 결과에 두 사람이 담담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가 졌다."

한숨을 푹 내쉰 제이크가 명치를 겨누고 있던 손을 거둬들였다.

[대상 '제이크 마이어스'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패배를 선언함과 동시에 성립된 인연.

이번 대련을 통해 제이크에게 제대로 인정받았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는데 그 내용에 이세훈은 기뻐하기보다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승부가 아니고?"

영웅 등급의 장비에 아리아의 의뢰까지 엮인 대련인데 이렇게 시원스레 패배를 받아들이다니.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멋쩍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우기려면 우길 수야 있긴 한데...."

목에서 떨어져 아래로 내려간 이세훈의 두 단창. 이만 살짝 나간 창날의 모습에 제이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무기만 부러졌는데 무승부라 하기엔 좀 그렇잖아."

제이크의 무기라 할 수 있는 광사는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이세훈의 무기인 두 단창은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렇기에 제이크는 무승부를 고집하지 않고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광사까지 사용했는데 무승부인 시점에서 이미 진 거나 다름없지....'

제이크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에서 '필살必殺'을 붙여도 부족함이 없는 광사.

아칼쿠프의 동급생들에게도 펼친 적 없던 기술을 전력으로 펼쳤는데 이기지 못했으니 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끓어오르던 투지만큼이나 마음속 깊이 내려앉은 허탈함.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긴 했지만 제이크의 마음은 그리 개운하지 않았다.

'검만 있었다면....'

불리한 사정거리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고, 방금처럼 무기가 부러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 그에 제이크가 의기소침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물었다.

"너 혹시 검을 쓸 수 없는 거냐?"

이전 대련에서도 느껴졌던 기묘한 이질감. 그때는 그냥 착각인가 했지만 방금 대련으로 이세훈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이질감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놈 검술을 맨손으로 펼치고 있었어.'

마이어스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은 구분하기가 어렵겠지만 회귀 전에 분석한 적이 있었던 이세훈에게는 그 차이점이 느껴진 것이다.

'저 정도로 검술에 능숙한 녀석이 검을 일부러 안 쓸 리가 없지.'

분명히 자신이 회귀 전에 몰랐던 사정이 있다.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사정이 있어서."

"혹시 누가 억지로 막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가 미숙하다고 해야 하나...."

쓴웃음을 지으며 빨갛게 부은 자신의 양손을 비비는 제이크. 그 모습에 이세훈은 대강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했다.

'저 악력 때문이었구만.'

신체 능력보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정체불명의 악력. 아마 저게 바로 제이크가 비효율적인 전투법을 고집하게 만든 원흉이리라.

"아무튼 대련은 내가 졌으니까 여기 망치...."

"야. 제이크."

"응?"

"검 한 자루 만들어줄까?"

"...어?"

당황하는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가 부러뜨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검 말이야."

잘만하면 제이크의 인연레벨을 금방 Lv.2까지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이세훈이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대상 '마광수'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음?"

강의실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는 마광수를 뒤늦게 발견했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39화

마광수.

과거 루트비히와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몬스터와 마인들을 사냥한 전직 S급 영웅.

고약한 인성이나 싸가지 없는 말버릇 탓에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때는 차기 완등자로 언급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바벨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지금도 그의 손을 거쳐 간 졸업생들에 한해서는 한없이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

"...."

주물주물.

이세훈 앞에서는 그저 쉴 새 없이 몸을 주물러 대는 노망난 영감탱이에 불과했다.

"움직이지 마라. 경고했다."

어깨부터 시작해서 팔뚝과 가슴. 등이나 배 허벅지와 종아리는 기본이며 손과 발까지 여기저기 누르고 만지작거린다.

의자에 앉혀진 채 쉴 새 없이 만져지던 이세훈은 계속해서 몸을 살피는 마광수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노망난 거 같은데....'

원래도 반쯤 노망이 났다 싶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확실하게 노망이 난 것 같다.

이것도 혹시 자신의 개입으로 생겨난 나비효과인가 싶어 이세훈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너. 정체가 뭐냐?"

10분 만에 손을 떼어낸 마광수가 날카로운 눈으로 이세훈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는 다 늙은 대장장이 같은 자세를 하더니 이번에는 숙련된 창술사의 자세를 취하다니. 무슨 수를 쓴 거지?"

"예?"

"고유스킬? 아니면 그게 네 본래 실력인가?"

단순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운 모습. 마광수의 시선에 섞인 의심과 옅은 적개심에 이세훈은 자연스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만마전의 첩자로 생각하는 건가?'

지구의 환경을 잠식하고 생태계를 변화시켜 마수를 탄생시키는 만마의 늪. 그리고 그런 만마의 늪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일컫는 것이 바로 '만마전'이었다.

"내가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히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다."

살기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광수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으며 오른손이 아래쪽에서 손날을 세웠다.

아직은 의심이라 공격하지는 않지만 첩자라 확신하는 순간 사지 중 하나는 확실하게 날아가리라.

A급 영웅조차도 식은땀을 흘릴 법한 상황.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이세훈은 오히려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이건 또 오랜만이네....'

생각해 보면 마광수와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던가.

갑작스레 떠오른 옛 기억에 이세훈이 속으로 슬쩍 웃었고, 그 감정을 읽어낸 마광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미친놈이었나?'

자신이 살기까지 드러내며 추궁하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첩자보다는 그냥 정신이 반쯤 나간 천재처럼 보였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마광수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세훈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요컨대 제 자세가 너무 훌륭해서 수상하다는 말씀이네요."

"...그래."

마광수의 대답에 이세훈이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몸을 정밀히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네.'

창을 능숙하게 사용했다가 아니라 숙련된 창술사의 자세를 취했다. 얼핏 들으면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이세훈은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부위가 창을 다루는데 최적화된 상태. 재능뿐만 아니라 그것이 몸에 익기까지 걸리는 세월까지 필요한 것이 바로 마광수가 말하는 '자세'였다.

'이건 해명을 잘해야겠네.'

오해를 산 덕분에 마광수와 인연을 맺긴 했으나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기껏 맺은 인연이 '악연'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도 있다.

모처럼 얻은 기회를 날리고 싶진 않았기에 이세훈은 과거에 마광수를 상대하던 기억을 되짚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제가 가진 스킬을 응용한 잡기술입니다.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잡기술이라고?"

"잠깐 일어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세훈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익숙한 방식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에 꽂혀 있던 실이 한 올 한 올 풀려가며 꽉 조여졌던 몸이 풀어진다.

몸에 남아 있던 사접석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한 이세훈은 뚫어져라 보고 있는 마광수를 바라보았다.

"방금 자세는 스킬을 사용해 일시적으로 모방한 거지 이렇게 효과가 끝나면 금방 사라집니다."

"흠...."

"근육을 이리저리 조정해서 얻는 효과인데... 이 정도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변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몸의 일부를 조정한다면 강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장기를 비롯한 신체의 말단부위까지 해당된다면 그것은 이미 평범한 강화라고 말할 수 없다.

'이거 생각할수록 엄청난 기술이구만....'

사접석도 그렇지만 이러한 응용법을 가능하게 만든 탐철, 류은하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체감이 간다.

다음에 장비를 만들어줄 때는 더 신경을 써줘야겠다고 이세훈이 생각하고 있을 때. 마광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스킬. 제한은 있나?"

"관찰에 시간도 걸리고 강제로 적용시키는 거라 몸에 부담도 상당합니다. 지금도 겨우 서 있는 정도고요."

실제로는 회귀 전에 알고 있는 기술을 사접석의 힘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었지만, 이번에 효과를 보니 그런 식으로 응용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관찰인가... 그렇다면...."

평소와 다르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마광수. 생각보다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이세훈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도플갱어 그놈 생각하나 보네.'

십악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마인 '도플갱어'.

상대의 무술을 모방한 뒤 그것을 사용해 죽이는 녀석으로 수많은 영웅의 비전을 끊기게 만든 악랄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마광수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도플갱어와 원한이 깊었는데, 어디든 목격담이 들리면 어디든 곧장 날아갈 정도로 깊은 악연을 가졌다.

'이번에 인연이 맺어진 것도 그 녀석 때문이겠네.'

도플갱어로 의심했던지, 아니면 녀석을 찾는데 유용한 기술이라고 생각했던지 어느 쪽이든 유용한다고 판단하여 자신과 인연이 생겨났다.

즉, 앞으로 마광수의 인연레벨을 쉽게 올리기 위해서는 저 도플갱어를 쫓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

"...크흠. 앞에 몰아붙였던 건 그... 미안하게 됐다. 마인 중에 그런 능력을 가진 녀석이 있어서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어."

어느 정도 의심이 가셨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마광수.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죠.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역시 그렇지? 요새 영웅이라는 놈들은 마인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단 말이야. 나때는...."

쓸데없는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마광수의 모습에 이세훈이 재빨리 몸을 비틀거렸다.

"으음...."

"아, 그러고 보니 부담이 심하다고 했었지. 아무래도 오늘 수업은 힘들겠구만."

"죄송합니다."

"아니. 마침 잘됐어."

이세훈을 위아래로 훑어본 마광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네 스킬을 보아하니 수업방식을 전부 바꿔야겠다. 처음에는 기술만 개량해 주려고 했는데...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바꾸는 게 좋겠군."

"근본적이라면...?"

"몸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는 법이다. 확실히 정해지면 그때 설명해 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그럼...."

고개를 꾸벅인 이세훈이 연무장 밖으로 나갔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광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저런 놈이 왜 보르시파를 간 거지?'

방금 대련도 그렇고 저 재능도 그렇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칼쿠프에서도 수석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집안이 영 별로였다 했나....'

이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광수는 나중에 이세훈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세훈을 도플갱어의 수색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성장만 한다면... 졸업 후에 '집행관'쪽으로도 권유해도 괜찮겠지.'

물론 그만한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쓰는 편이 좋으리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있어 무신경하던 마광수가 처음으로 의욕을 드러냈고.

"검...."

구석에 밀려나 있던 제이크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이세훈이 나간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 *

"흐음...."

강의실 밖으로 나온 이세훈은 방금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마광수 저 양반이랑 인연이 생길 줄이야....'

이세훈이 자신의 고유스킬인 인연의 대장장이를 각성한 것은 본격적으로 만마전, 육대마신과의 전쟁이 시작된 뒤.

그리고 마광수는 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도플갱어를 추적하다가 실종됐었는데 사실상 녀석에게 죽었다고 봐야 했었다.

'어떤 인연석이 나올지 궁금하네.'

마광수의 기술을 생각하면 아마 신체 능력과 관련된 것이 나올 터. 정확한 건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S급 영웅인 만큼 쓸 만한 것이 나오리라.

나중에 어떻게 자연스레 인연을 추출할지 이세훈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우우웅─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

전화번호를 아는 이가 별로 없었기에 이세훈이 곧장 발신자를 확인했다.

[염성하]

"...쯧."

영 내키지 않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이세훈은 전화를 받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대가로 뭘 받을지 정했나?

단도직입적인 염성하의 물음에 이세훈이 눈매를 찌푸렸다.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 뭐가 그리 급해?"

-...대가를 지불 안 하니 뭔가 속이 불편하다.

"뭐?"

-아무튼 그렇다. 일부라도 좋으니 뭔가 지불하고 싶군.

값을 지불하지 않고 있으니 거래가 아니라 단순히 호의로 도움을 받은 것 같아 걸리적거린다. 염성하의 속내를 얼추 알아차린 이세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피곤하게 산다...."

-잔말 말고 뭐든 말해봐라. 재료든 뭐든 구해줄 테니.

"대가라...."

그냥 적당히 비싼 재료나 구해오라고 시켜볼까. 잠시 곰곰이 고민하던 이세훈은 문득 그럴싸한 대가를 떠올렸다.

"사람 좀 찾아줘."

-...사람?

"개인적으로 좀 궁금한 사람이 있어서. 이름은 루이제 발렌트. 마법사인데 바벨 출신일 거야."

삼견 중 한 명인 폭견 루이제 발렌트.

염성하와 달리 과거에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았던지라 단순 검색만으로 찾아내기가 어려웠는데 그래도 염성하라면 좀 다르리라.

'게다가 이놈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녀석도 아니니까.'

괜히 이쪽에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예민한 폭견의 성격상 일이 틀어지면 틀어졌지 절대로 잘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아는 사이인가?

"그건 알 거 없고 그냥 어디서 뭐 하는지만 알아봐 줘. 근데 너 알아볼 인맥은 있냐?"

-날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할 만하지. 너 염화문에서 개털이잖아."

-...다른 루트가 있다.

개털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못하는 염성하의 대답에 이세훈이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뭐 아무튼 그냥 뭐 하고 있는지만 알아봐 주면 돼. 내가 알아봤다는 건 숨기고. 뭔 말인지 알지?"

-알겠다. 찾는 대로 연락하지.

뚝─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끊어지는 전화. 용건이 끝나면 바로 끊어버리는 것이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놈도 이런데 루이제 그놈은 어떨지....'

광견 염성하가 독불장군 같은 성격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면 폭견 루이제 발렌트는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성격.

멀쩡히 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불이 붙어서 온갖 사건 사고를 다 저질렀는데 저지른 사건의 규모로만 보자면 삼견 중에서도 그야말로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까칠해진 건 부상 이후부터 그랬다고 했으니 조금은 덜하겠지.'

물론 염성하가 그렇듯 사건 전이라고 해도 인격파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회귀 전 수준만 아니라면야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다.

그렇게 이세훈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우웅─

손안에서 다시 떨리는 휴대폰. 방금 끊어진 염성하의 이름이 다시 떠 있는 것을 본 이세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뭔가 다른 용무라도 생긴 것인가. 이세훈이 전화를 받자 염성하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뭐?"

자신은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던 정보가 몇 분도 안 돼서 나오다니? 염성하의 정보력이 상상 이상인가 싶어 이세훈이 의아해하던 찰나.

-원소학부 2학년 루이제 발렌트. 학부에서도 차석으로 본래 유망한 생도였었다더군.

"오. 차석이라 꽤... 잠깐. 였었다고?"

어째서 표현이 과거형인 것인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이세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반년 전 무학관에서 대련 중에 무기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큰 부상을 입고 휴학 중이다.

"아."

돌대가리인 자신의 머리통이 처음으로 저주스러워졌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0화

「루이제 발렌트

전 아칼쿠프 원소학부 2학년 차석.

부모는 두 사람 모두 C급 영웅으로 8년 전 토벌 중에 사망. 친척이 있으나 교류하지 않음.

입학부터 뛰어난 재능을 선보였으며 커리큘럼을 따라 가파르게 성장.

2학년 1학기에는 차석에 올라 아칼쿠프의 학과 수석 후보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으며 '상아탑'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음. 노블레스 교류회에도 초청받았던 것으로 확인. (참가는 거부.)

하지만 반년 전 여름방학 중. 당시 아칼쿠프 사령학부 2학년 수석인 '게르윈 크루거'와의 대련 중 무구인 완드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

목과 오른손에서 '마력결상'을 입어 마력운용력이 5할 이상 떨어졌으며 상아탑의 모든 지원이 보류된 상황.

현재는 휴학 상태이며 복귀는 힘들 것으로....」

"...."

염성하에게서 건네받은 자료를 살피던 이세훈은 어두컴컴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생 X같네 진짜...."

뉴스나 인터넷을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이길래 당연히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줄 알았더니 이미 반년도 전에 끝났었다니.

루이제의 부상을 막아냈다고 생각했었던 이세훈으로서는 그야말로 뒤통수가 얼얼한 상황이었다.

'결국 마력결상을 입은 건가... 귀찮게 됐구만.'

신체의 마력회로가 영구적으로 훼손되는 부상인 마력결상.

이 마력결상은 영웅들에게 가장 무서운 부상 중 하나로 꼽혔는데 마력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며 해당 부위에 마력이 지나갈 때마다 엄청난 통증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목과 손에 마력결상을 입었다. 이건 뭐... 말 다한 셈이지.'

캐스팅과 수인을 맺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상처 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그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염성하가 건네준 자료에는 마력운용력이 5할 이상 떨어졌다고만 적혀있지만 실질적으로는 9할 이상이 무력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법사로서는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 폐인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 다행인가....'

이세훈에게는 아직 만회할 기회가 남아 있었다.

「...우르의 종합병동에서 생동성 시험을 지원하여 재활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큰 차도는 없으며 내부적으로도 회의적인 상황.」

'아직 바벨에 남아 있다면 상관없어.'

만약 1년만 더 늦었어도 폭견은 '계약'을 맺고 바벨에서 나가 버렸을 것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신 나간 마법사들과 싸웠어야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세훈은 그야말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놈의 기억을 빨리 어떻게든 해결해야겠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폭견, 루이제 발렌트를 둘러싼 사건부터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염성하에게 받은 자료의 페이지를 넘긴 이세훈은 아까 읽었던 내용을 다시 살폈다.

「루이제 발렌트는 본인이 사용한 완드의 제작자인 '비에르 바르무트', 당시 제련학부 2학년 수석이 의도적으로 무구에 결함을 만들어냈다며 고소.

하지만 조사 결과 제작자의 과실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비에르 바르무트 측은 모욕죄로 고소하였으나 돌연 고소를 취하하며 사태가 마무리됨.」

루이제 발렌트를 '폭견'으로 만들어낸 시발점.

모든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비에르 바르무트, 현 제련학부 3학년 수석의 이름을 읽은 이세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한스가 아니라 너란 말이지...."

사건을 끝나 버린 뒤였지만, 복수는 상대만 멀쩡히 살아 있다면 언제 시작하더라도 늦지 않다.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를 쓰다듬은 이세훈은 차가운 눈으로 선배의 이름을 곱씹었다.

* * *

다음 날 아침.

기숙사 본관으로 내려온 이세훈은 북적거리며 모여 있는 생도들의 모습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참 부지런하구만....'

한두 번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모이다니. 질리지도 않는지 신기해하며 이세훈이 사이를 지나 현관 밖으로 나왔고.

"좋은 아침!"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는 금발의 청년, 제이크와 마주 섰다.

"...니들 혹시 짜고 치는 거냐?"

"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아, 어제 교수님이 갑자기 오셔서 정산도 못 했잖아. 그리고 그...."

슬쩍 눈치를 살피던 제이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이야기한 제안에 대해서도 할 말도 있고."

"...그렇구만."

확답은 안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시점에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주변에 몰린 생도들을 슬쩍 바라본 이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자. 계속 있다간 입구 막고 있다고 욕먹겠다."

"크흠. 내가 너무 무신경했네."

늘 오던 에리카가 아니라 제이크란 소문이 퍼졌는지 현관에 모이던 생도들의 수가 더욱더 늘어났다.

전투직인 아칼쿠프의 학과 수석이라 그런지 몰라도 이번에는 말을 걸려는 생도들도 몇몇 보였기에 이세훈은 재빠르게 제이크와 함께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정산부터."

"아, 여기 있어."

제이크에게 아공간 포켓을 건네받은 이세훈은 안에 들어 있는 흑염의 망치를 꺼내 들었다.

'흠. 역시 괜찮구만.'

손목을 까딱거리며 이세훈이 적절한 파지법을 찾아보고 있을 때. 눈치를 살피던 제이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쓸 수 있는 검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잖아."

"했었지."

"그게 정말로 가능해?"

의심과 기대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물음.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제이크의 모습에 이세훈이 피식 웃었다.

"안 될 건 없지. 네 악력이 완등자들도 뛰어넘는 괴물 같은 수준이 아니라면야."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니긴 한데...."

자신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던 제이크가 곤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웅 등급의 검도 부숴 먹은 적이 있어서...."

"영웅 등급?"

제이크의 이야기에 이세훈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내구도 편중치는?"

"어? 아... 공격 2할에 내구 8할이었어. 내 악력을 견딜 수 있도록 특수 주문했던 건데... 바로 망가지더라고."

내구를 8할로 잡았다는 것은 사실상 제이크의 악력을 견뎌내는데 모든 잠재력을 쏟아부었다는 것인데 그게 한순간도 버티지를 못하다니.

미묘한 표정으로 제이크의 손을 바라보던 이세훈이 옆을 가리켰다.

"잠깐 따라와 봐."

제이크를 데리고 옆쪽의 공원으로 장소를 옮긴 이세훈은 주변의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 제이크에게 손을 까닥였다.

"오른손바닥 이리 줘."

"손바닥은 갑자기 왜...."

"검 안 필요해?"

"여기 있습니다."

제이크가 곧장 오른손바닥을 내밀자 이세훈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손등을 받친 다음 왼손에 들린 흑염의 망치를 어깨너머로 치켜들었다.

당장에라도 망치를 휘두를 것 같은 그 자세에 제이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지금 뭘...."

"손에 힘 빼고. 마력도 가만히 놔둬."

"아니. 일단 설명을...!"

콰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이크의 손바닥을 냅다 내려찍은 망치. 공원에 퍼진 소리만 해도 그 위력이 상당했는데 제이크의 얼굴과 손이 살짝 새빨갛게 물들었다.

"윽... 극...."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비명과 쌍욕을 제이크가 꾹 눌러 담고 있을 때. 이세훈은 새빨갛게 변한 손바닥, 정확히는 그 위에 반사적으로 방출된 마력을 살펴보았다.

'...과연. 악력을 강화시킨 게 아니라 물질을 '변화'시켰던 건가.'

이런 구조면 확실히 일반적인 재료와 실력으로는 쓸 만한 검을 만들기가 어려울 법도 하다. 제이크의 '재능'이 무엇인지 확인한 이세훈은 이어서 인연도 추출했다.

[대상 '제이크 마이어스'에게서 인연을 추출합니다.]

[제작자 '이세훈'과의 인연은 Lv.1입니다.]

몸 안쪽으로 스며든 인연. 어느 정도 견적도 잡혔기에 만드는 것도 어렵진 않았지만 이세훈은 잠시 작업을 미루고 살짝 화가 난듯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만들 수 있을 것 같네."

"...진짜로?"

언제 화가 났냐는 듯 물어보는 제이크. 그 모습에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재료들이 좀 까다롭긴 한데 너라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만드는 것도 그리 오래는 안 걸리고. 준비 기간 포함해서 한 일주일 정도?"

"일, 일주일...."

가문에서 후원하는 유명한 장인들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자신의 검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하다니.

그냥 되는대로 내뱉는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저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니 또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이세훈이 그동안 보여준 천재성이라면 자신에게 맞는 검도 정말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에 제이크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혹시 바로...."

"지금은 안 돼."

"왜, 왜?"

당황한 제이크의 물음에 이세훈이 망치를 아공간 포켓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먼저 해결할 일이 생겨서."

제이크의 인연레벨이야 언제든지 올릴 수 있지만 폭견은 이미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

회귀 전처럼 흘러간다면 1년은 안전하겠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나비효과가 도화선을 단숨에 불태워 버릴 수도 있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두는 게 마음 편해.'

그러니 지금은 다른 건 다 제쳐두고 폭견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하루빨리 인연을 성립시켜야 한다.

이세훈의 단호한 대답에 제이크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일주일도 못 기다릴 일이야?"

"안 돼."

"...보수를 세 배로 준다고 해도?"

"세 배가 아니라 열 배여도 안 돼."

"...."

만약 이세훈이 만들기가 어렵다거나 제작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면 제이크도 그러려니 하며 넘겼을 것이다.

검 없이 지낸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본가에 있을 때도 대부분 몇 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 재료만 준비되면 일주일 만에 자신의 검이 만들어진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가능성을 느껴버린 이상 제이크로서는 하루를 더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언제 끝날지는 정해져 있어?"

"일단 해봐야 알겠는데 이것저것 알아보고 해야 해서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

"내가 도와준다면?"

제이크의 물음에 이세훈이 의외인 표정을 지었다.

"네가 도와준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 도와줄게. 대신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내 검부터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해줘."

무슨 일이 있어도 검을 받아내고 말겠다는 제이크. 그 열의가 가득 담긴 모습에 이세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야 나쁠 거 없지."

염화문에서 개털인 염성하보다야 마이어스 가문의 차남인 제이크 쪽이 정보력은 더 좋지 않겠는가.

'뭣보다 이쪽은 공짜고.'

안 그래도 보수로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아까웠는데 마침 잘 됐다. 제이크를 바라본 이세훈은 요주의 인물 두 사람을 이야기했다.

"사령학부 3학년 수석 게르윈 크루거. 제련학부 3학년 수석 비에르 바르무트. 이 두 사람 알아?"

이세훈의 물음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윈 선배는 위르겐 회장의 25번째 아들. 비에르 선배는 바르무트 가문의 삼남이녀 중에 차남이지."

"그 둘이 연관된 건 있어?"

"연관된 거라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해 보던 제이크는 이내 한 가지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 두 사람 다 노블레스 교류회 회원이네. 뭔지 알지?"

"...알지."

바벨의 생도들 중에서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 실력 있는 생도들을 초청하여 영입하는 모임의 장인 노블레스 교류회.

그리고 그 교류회의 초대를 거절했었던 폭견. 우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세훈은 확신했다.

'두 놈이서 담궜구만.'

폭견의 완드가 폭발한 것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다고.

"반년 전 원소학부 2학년 차석이 게르윈 크루거와 대련 중에 중상을 입은 사건이 있어. 비에르 바르무트가 거기에 연결되어 있었는지 좀 알아봐 줘."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이었네. 일단은 한번 알아볼게. 그 이외에는?"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이세훈은 좋은 생각을 떠올린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내 팔 좀 부러뜨려줘라."

"...?"

"깔끔하게."

"...."

* * *

우르의 동쪽 끝에 위치한 종합병동 '아스쿠스'.

어지간한 학부 건물의 세 배는 족히 되는 규모를 지닌 이곳은 바벨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루트비히 학원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그에게 교수로 고용된 치료계열의 영웅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온 의료진들의 수준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세계 3대 병원으로 손꼽히며 특히 영웅들에게 가장 민감하다는 '재활'분야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아스쿠스.

"후우... 후우...."

하지만 그들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존재했다.

새하얀 방안 한가운데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소녀. 숨을 고를 때마다 턱 아래까지 내려온 탁한 은발이 흔들렸고 새하얀 피부 위로 식은땀이 흐른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지만, 소녀는 주저앉는 대신 푸른색 눈을 부릅뜨며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159번째... 시작하겠습니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오른손 끝으로 향하자 심장에서부터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지맥을 타고 흐르는 용암을 손끝으로 끌어올려 쏘아내는 이미지. 마법을 구성하는 형태를 그려낸 소녀는 자연스레 술식을 떠올리며 손끝에 담아냈다.

콰득─!

그 순간 느껴지는 격통.

거대한 칼날에 손바닥을 꿰뚫리는 듯한 감각에 숨이 멎으며 마력이 역류할 뻔했지만, 소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마법의 형상을 계속해서 갖춰갔다.

우우웅!

손끝에 맺혀가는 마력과 그 안에 싹튼 불씨.

저것을 터뜨린 순간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려낸 마법이 완성된다. 그 광경을 되새기며 소녀의 입이 벌어졌고.

"라바 불ㄹ─"

콰직

목이 찢어져 입 밖으로 피를 토해냈다.

"우읍...!"

구역질과 함께 바닥을 적시는 피.

짓씹었던 입술에서 터진 피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소녀, 루이제 발렌트는 온몸이 떨리며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와 다를 바 없는 통증이, 바닥을 붉게 물들여가는 핏물의 모습이 어쩌면 정말로 상처가 다시 찢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마력역류 현상을 확인. 마력동결을 진행합니다.]

방안에 펼쳐져 있던 마법진이 순식간에 루이제의 마력을 진정시켰고 바깥에서 살펴보고 있던 의료진들이 달려들어 왔다.

"실험 중단. 즉시 마력중화제와 신경안정제를 투여해라."

"예!"

"혹시 새로운 마력결상이 생길지도 모르니 마력회로도 살펴보도록."

교수의 지시에 따라 재빠르게 처치를 시작하는 조교수들.

목 뒤로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마력중화제와 신경안정제가 몸 안에 스며들자 방금까지 느껴졌던 통증이 점차 사라져간다.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된 루이제는 흐트러졌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교수를 바라보았다.

"저, 저는 괜찮아요...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실험을...."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네. 그만 쉬게나."

"하지만...."

"그리고 당분간 재활 실험은 하루 50번으로 제한하지. 사용 마법도 초급으로 단계를 조정하겠네."

"...예?"

횟수를 3분의 1로 줄이는 것도 모자라 재활에 도움도 안 될 것 같은 초급마법이나 쓰라니?

사실상 재활실험을 당분간 중단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루이제가 깜짝 놀라며 다급히 이야기했다.

"잠깐만요 교수님. 전... 쿨럭...!"

"그만 가서 쉬게나. 다들 정리하지."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려서 떠나는 교수.

그 모습에 루이제는 뭐라고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안정제의 효과가 돌면서 순식간에 의식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아."

익숙한 병실 천장의 모습에 루이제가 뻑뻑한 목을 쥐어 짜내며 중얼거렸다.

"씨... 이발...."

구역질 좀 했다고 사람을 바로 내쫓다니.

온갖 불평불만이 머릿속으로 다 떠올랐지만 루이제는 그것을 내뱉지 않고 속으로 삭였다.

본래 100번이었던 시험횟수를 사정사정해서 늘린 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150번만 할걸....'

괜히 뭔가 될 것 같다고 무리하다가 기회만 날려 먹었다.

침대에 누운 채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루이제는 축 늘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재활 실험이 안 되면 다른 거라도 해야지.'

운동이나 독서, 하다못해 명상이라도 해서 자신의 목과 손에 생긴 마력결상을 치료하고 본래의 기량을 되찾아야 한다.

남들이라면 마음이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속에서 의욕을 불태우며 루이제가 병실의 밖으로 나섰고.

퍼억!

문 앞을 지나가던 한 청년의 가슴팍에 그대로 얼굴을 들이박았다.

"윽! 아... 씹...."

부딪치기 전에 멈추려고 했는데 아직 안정제의 기운이 미처 몸을 다잡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생판 남의 가슴에다가 얼굴을 파묻어 버린 루이제는 쪽팔림을 느끼며 자신과 부딪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

먹칠이라도 했는지 새까만 흑발에 방금까지 사람 여럿 잡아 죽이고 온 듯한 날카로운 눈동자.

어째 사람보다는 맹견을 보고 있는 듯한 사납기 그지없는 인상에 루이제가 여러 의미로 신기하게 보고 있을 때.

"뭘 봐?"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맹견 같은 청년, 이세훈이 성질 더러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회귀자가 다 만들어줌 41화

[공습경보. 공습경보. 건물에 계신 방문객분들은 가까운 탈출구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새까맣게 그을린 천장과 벽면에 뚫린 구멍으로 새어나가는 매연. 사이렌과 비명 소리가 뒤섞인 소음에 어지럽던 머리가 선명하게 깨어났다.

"콜록콜록...."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사치스럽던 방과 살이 뒤룩뒤룩 쪄있던 돼지 새끼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마 폭발과 함께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이 분명하리라.

'진짜 뒤질 뻔했네....'

만약을 대비해 갑옷을 겹겹이 입고 오지 않았다면 돼지 새끼들과 함께 뼛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할 뻔했다.

반쯤 녹아 있는 갑옷을 억지로 뜯어내며 벽면의 구멍 쪽으로 걸어가 주변을 내려다보니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불길이 눈에 들어왔다.

이 빌딩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건물들도 동시에 습격받은 듯했는데 하나같이 '그놈'들이 소유한 건물들이었다.

"내가 그 새끼들이랑 다시는 거래 하나 봐라...."

구하기 힘든 재료를 싸게 쳐준다길래 딱 한 번 온 건데 역시 뒤가 구린 놈들이랑은 아예 엮여서도 안 된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위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저건....'

어깨까지 오는 탁한 은발에 얼굴 전체를 가린 방독면. 옷은 라이더 슈트에 검은 가죽 자켓을 걸쳐 입었는데, 몸의 곡선을 보건대 여자로 보였다.

겉모습만 보자면 이상하게 코스프레한 양아치 같은 모습.

하지만 아비규환이 된 도심의 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떡하니 서 있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이 참상의 원흉이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상황이 꼬이다 못해 엿됐다 싶어 눈매를 찌푸리고 있을 때. 녀석이 이쪽을 향해 허공을 터덜터덜 밟으며 내려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아래쪽에 형성되는 무형의 마력. 시동어나 캐스팅이 없는 걸 보아 무영창 마법으로 만들어내는 듯했는데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A급... 아니, 그 이상인가?'

뒤로 물러나 가슴을 움켜쥐며 준비하는 사이. 부서진 구멍을 통해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았고.

"뭘 봐?"

싸가지 없는 한 마디와 함께 고개를 돌리며 건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뉴욕의 맨해튼을 습격했던 테러리스트, 폭견 루이제 발렌트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뭐?"

인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매를 일그러뜨리는 루이제.

병약해 보이는 겉모습만 보면 두려울 이유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눈빛과 말투에서 위압감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 기세에 이세훈은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대답했다.

"뭘 보냐고."

"...."

담담하게 바라보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는 분노를 넘어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보통 자신이 이렇게 쏘아붙이면 당황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이놈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뭔가... 익숙한 느낌이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쪽이 자신을 익숙해 하는 느낌.

뭐라고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간질거리는 기분에 루이제가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이세훈이 혀를 찼다.

"눈살만 찌푸릴 줄 알지 사과할 줄은 모르네."

"뭐?"

"팔 아파 죽겠구만... 쯧. 됐다 됐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옆으로 지나가는 이세훈. 그 뒷모습에 루이제는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다시금 떠올렸다.

문을 열고 튀어나와 그대로 돌진해서 가슴과 다친 팔에 부딪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내뱉었던 말은.

"아... 씹...."

상대도 까칠하긴 했지만 순서로 따지자면 자신이 먼저 싸가지 없이 굴었기에 이리된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루이제는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이세훈을 뒤쫓으며 소리쳤다.

"저기요! 잠깐 멈춰 봐요! 잠깐... 아이씨...."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는 이세훈. 그렇게 빠른 걸음도 아니었지만 아직 안정제의 기운이 남아 있어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대로라면 놓치겠다는 생각에 루이제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마력을 끌어올렸고.

"체... 크윽?!"

오른손과 목을 관통하는 통증에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이... X발...."

다급히 끌어올린 마력이 상처를 제대로 긁었는지 방금까지 남아 있던 안정제의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온몸이 곤두서는 듯한 감각에 루이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붕대가 감긴 목을 움켜잡았다.

'들키면... 안 돼....'

만약에라도 이런 모습을 들켰다간 실험은커녕 최소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병실에 처박히게 될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상황을 떠올린 루이제가 병실로 돌아가기 위해 다급히 몸을 일으켰고.

"아...."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넘어지는 몸. 가까워져 가는 바닥에 루이제가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툭─

어느새 돌아온 이세훈이 루이제의 몸을 받아냈다.

"아프면 얌전히 누워 있을 것이지 왜 돌아다니는 거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이세훈. 그 모습에 루이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너... 너...."

다 너 때문이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루이제는 내뱉지 않았다.

원인을 따지면 자신이 먼저 잘못하기도 했고, 상대를 붙잡겠답시고 마법을 쓴 것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예나 지금이나 매번 잘못된 선택만 하게 된다.

루이제가 속으로 자책하는 사이 이세훈이 왼팔로 몸을 일으켜주며 부축했다.

"병실까지 부축해 줄 테니까 잡고 걸어."

"필요...."

"그럼 간호사 부를까?"

"...."

잠자코 몸을 내준 루이제를 부축한 이세훈은 방금 그녀가 나왔던 병실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10평 정도 되어 보이는 깔끔한 1인실. 침대와 책상,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 등 전체적으로 병실보다는 개인 방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상황이 잘 풀렸어.'

적당히 존재감만 각인시켜두고 빠지려고 했는데 루이제가 쓰러진 덕분에 병실까지 들어왔다.

이번 기회에 좀 더 제대로 밑밥을 깔아두기로 한 이세훈은 루이제를 침대까지 부축해서 내려다 주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없... 어. 그냥 빨리 가...."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는 루이제. 통증 때문인지 처음보다도 더욱 날이 서 있었는데 이세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갔는데 네가 쓰러져서 잘못되면 내 책임 같잖아. 찝찝하니까 빨리 필요한 거 말해."

"그냥...."

"또 가라고 하면 그냥 마음 편하게 간호사 불러놓고 갈게."

당장에라도 침대 옆에 있는 너스콜을 연타할 것 같은 이세훈.

악의는 없지만 성가시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루이제가 짜증스럽게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책상에 왼쪽 두 번째... 쿨럭! 서랍... 검은색 케이스."

"진작 그럴 것이지."

책상으로 간 이세훈이 서랍에서 검은색 케이스를 꺼내서 가져다주자 루이제가 빤히 쳐다보았다.

빨리 나가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 그 날선 시선에 이세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상태가 괜찮아지면 말 안 해도 갈 테니까 빨리하기나 해."

"오늘 처음 봤으면서... 오지랖은...."

힘겹게 투덜거린 루이제가 검은색 케이스를 열어 안쪽에 놓인 은색 흡입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문 다음 버튼을 눌러 힘껏 숨을 들이마셨고.

우우웅─

목 안쪽으로 녹색의 마력이 은은히 빛나며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후우...."

흡입기를 떼어내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루이제.

언제 발작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 순식간에 안정된 그 모습에 이세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회귀 전. 폭견은 어린 시절 무리하게 재활을 시도하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마력을 아예 쓸 수 없는 '마력불능'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었다.

폭견이 녀석들과 계약을 맺고 바벨을 자퇴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는데 이세훈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재활 중에 마력결상이 더 악화된다는 게 말이 되나?'

다른 곳도 아니고 세계 3대 병원, 재활분야에서는 부동의 1위라는 아스쿠스가 그렇게 놔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폭견은 자기가 초조함에 멋대로 행동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이상하지.'

상태가 악화된다면 분명히 그에 맞춰서 손을 썼을 터. 그런데도 마력불능이 될 만큼 심해졌다는 것은 폭견이 알지 못한 '무언가'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일. 그렇기에 이세훈도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회귀한 지금 진짜 원흉이 무엇인지 알 게 되었다.

"후우... 이제 진정됐으니까 좀 나가. 언제까지 보고...."

"뭐 하는 거냐?"

"...뭐?"

"치료를 하랬더니 왜 자해를 하고 있어?"

갑작스러운 이세훈의 이야기에 루이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아예 자각이 없었구만. 그거 때문에 목이 더 망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쯧쯧."

"...."

혀를 차는 이세훈의 모습에 루이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처음에 부딪힌 것도 미안하고 도와준 것도 고맙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자신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저렇게 함부로 말한단 말인가?

'뭐 이런 새끼가....'

통증이 가셔서 그런지 머리가 차분해졌고 동시에 초면에 반말을 툭툭 내뱉으며 오지랖을 부리는 눈앞의 싸가지 없는 놈을 향한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개...."

[병동에 계신 이세훈 생도는 지금 즉시 2층 간호사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병동에 계신 이세훈 생도는....]

병동 전체에 흘러나오는 안내음. 그 내용에 이세훈이 스피커를 힐끗 보았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뒀네. 이만 간다."

"...네가 이세훈이었냐?"

이름을 듣더니 방금보다도 더욱 차갑게 변한 표정.

경계를 넘어서 적대감마저 내비치는 루이제의 모습에 이세훈이 담담히 받아넘기며 흡입기를 가리켰다.

"지금보다 더 심해지기 싫으면 안 쓰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당장. 꺼져."

바닥 밑에서부터 몸을 관통하듯 울리는 목소리.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 이세훈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생각만큼 나쁘지 않네.'

원흉과 상태도 다 확인했고 밑밥도 충분하다.

어느 정도 견적을 뽑아낸 이세훈은 군말 없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명심해. 마력불능 되기 싫으면."

찝찝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를 남기며 병실을 떠났다.

"자해니 마력불능이니... 개 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네."

말이 경고지 저주나 다름없게 느껴지는 이야기.

마음과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뒤쫓아 가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루이제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제련학부 새끼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쇠락해가던 제련학부에서 오랜만에 배출해낸 학과 수석.

지금 제련학부의 실세가 사실상 미하엘 바르무트 부학과장인 만큼 그쪽과 엮여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바르무트....'

이제 반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루이제에게는 그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련 중에 갑작스럽게 폭발한 완드. 갈기갈기 찢긴 오른손과 목을 파고드는 금속조각. 그리고.

빠드득─

자신을 바라보며 비웃고 있던 비에르 바르무트의 얼굴.

끓어오르는 분노에 루이제가 베개를 꽉 움켜쥐며 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오히려 참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속이 더 뒤틀린다.

"윽... 큭...."

요동치는 마력과 오른손과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

다시 시작되는 마력역류 증세에 루이제가 반사적으로 흡입기, 마력진정제에 손을 뻗었고.

'마력불능 되기 싫으면.'

이세훈의 이야기가 귓가에 다시 메아리쳤다.

새겨듣자니 그렇고, 무시하지나 기분 나쁜 이야기. 식은땀을 흘리며 갈등하던 루이제는 이내 마력진정제 대신 매트리스를 꽉 움켜쥐었다.

"X발... 뭣 같은... 대장장이 새끼들...."

예나 지금이나 대장장이 놈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다음에 만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세훈의 얼굴을 되새긴 루이제는 그렇게 한참 동안 침대 위에서 끙끙거리며 매트리스를 쥐어뜯었다.

* * *

[대상 '루이제 발렌트'와의 인연이 성립되었습니다.]

뜬금없이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 예상치 못한 내용에 이세훈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그걸로 인연이 성립됐다고?'

이번에 한 거라고 해봐야 밑밥만 살짝 던진 게 전부인데 냅다 인연이 성립되다니?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세훈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인연이 성립된 건 좋지만... 조금 귀찮을 수도 있겠는데.'

이번 만남으로 인연이 성립됐다는 것은 루이제에게 자신의 존재가 나름대로 각인이 됐다는 것.

문제는 그게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번 일로 적대감이 생겼고 이걸 바로잡지 못한 채 인연레벨이 또 올라 버린다면 회귀 전처럼 해결하기 귀찮아질 수도 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좀 주의해야겠어.'

루이제와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이세훈이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음.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군."

진료자료를 살펴보던 사내, 안정완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뼈가 깔끔하게 부러진 덕분에 오히려 근육이나 마력회로에 손상이 없었군. 일주일이면 다 붙겠어."

"일주일...."

"오래 걸리는 것 같아도 이해해 주게. 치료 속도를 높이면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니."

"그럼 일주일 뒤에는 바로 퇴원하는 겁니까?"

이세훈의 물음에 안정완 교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지. 하지만 나로서는 뼈가 다 붙고 일주일 정도는 더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군. 나중에 언제 탈이 날지 모르니 말일세."

짧으면 일주일. 길면 이 주간 아스쿠스 내부에 머물 수 있다. 그 이야기에 이세훈이 빠릿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 기간 안에 루이제와 거리를 좁히고 마력결상을 완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이제가 사용한 흡입기, 마력진정제의 탈을 쓴 '마력침식기'도 처리해야 아스쿠스를 나가고 나서도 안심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뭐든 루이제와 접점을 늘려야 해.'

하지만 루이제 본인도 재활이나 그런 일정이 따로 있을 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이세훈은 상당히 괜찮은 방법을 떠올렸다.

"저 교수님. 혹시 루이제 발렌트라는 생도 아십니까?"

"음? 내가 치료하고 있는 생도네만... 아는 사이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안정완 교수의 모습에 이세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까 복도에서 봤는데 마법을 쓰려다가 목을 붙잡고 발작을 일으키려고 하시더라고요."

"...."

"저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역시 위험할 것 같아서...."

"알겠네. 자네는 나가보게나."

굳은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안정완 교수. 그 모습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긴 이세훈은 미소를 지었다.

'완벽했다.'

재활 2병동 204호실 환자 루이제 발렌트.

그녀가 2주간의 절대안정 처분을 받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