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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 *

"연기기 7성이… 눈앞…."

"장로님이… 나를 인정해 주셨…."

나는 눈앞에서 정신없이 코를 골며 곤히 자는 아이들을 보았다.

'오랜만에 이런 녀석들을 보니, 꽤 귀엽군.'

현시점에서 금신천뢰문의 제자 중 가장 경지가 낮은 아이들도 연기기 11성이다.

그조차 금신천뢰문에 막 입문하자마자 광한계에서 끌려온 이들이었다.

원래 수계 출신 제자 중 현재 축기기를 달지 못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내게, 연기기 7성조차 넘지 못한 녀석은 전명훈 이래로 처음이었다.

'굉장히 신선하군… 연기기 6성이라.'

난 숨결을 크게 들이쉬며, 천체소 전체를 가득 채운 수면법술을 거뒀다.

"귀여운 것들. 좋은 꿈 꾸거라."

나는 벌러덩 드러누워 자는 적포 노인에게 허리를 숙여 배를 벅벅 긁어 주었다.

그는 좋은 꿈을 꾸는 것인지 헤실헤실 웃었다.

우우웅!

자연스레 내 영기가 그에게 깃들며, 체내에 깃든 불순물을 녹였다.

아마 이후 그는 일평생 잔병치레는 안 해도 될 터였다.

그리고 내가 연기기 6성 수도자를 쳐다보자, 내 시선에 그녀는 연기기 7성으로 향할 완벽한 기반이 저절로 체내에 쌓였다.

"무럭무럭 크려무나."

나는 더 있다가는 귀찮은 녀석들이 자꾸 찾아올까 싶어 아예 천문 자료들을 전부 들어 저물도에 넣은 후 공간을 쪼개 황궁 바깥으로 나갔다.

'그냥 근처 객점에 가서 읽어야겠군.'

아무래도 마음 편히 읽으려면 그게 나을 듯 싶었다.

* * *

오랜만에 먹어 본 하계의 음식은 꽤 맛있었다.

'생각해 보니 결단기에 이른 후로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거의 없군.'

원영기에 이르고서는 물조차 한 잔 마신 적이 없었다.

음식이 없어도 생명력이 범인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솟아났으니 말이었다.

"점소이, 소면 한 그릇만 더 내오게."

"예, 나리!"

나는 소면을 한 그릇 뚝딱 해치운 후 천문 자료들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우선 5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천문 흔적들… 해와 달, 별들의 흐름을 읽어 보고….'

나는 천문 흔적을 읽어 내려가며 거기에 법술들을 대입해 보기 시작했다.

'칠십이지살, 삼십육천강의 흐름을 천문에 대입한 후, 거기에서 계속 올라가면서 십이지율, 십천간에 맞춰 가면….'

나는 허공에 영기의 흐름을 작게 띄워 놓고, 천문 현상의 흐름에 맞게 기초법술들을 작게 구현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눈앞의 영력 덩어리들이 하나의 형상을 취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음? 뭔가 형상을 취한다고?'

나는 이렇게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을 줄은 몰랐기에 그 형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옆자리에 있던 무림인 중 하나가 다른 자리의 무림인에게 젓가락을 날려 생사결을 신청하고, 갑자기 객점이 생사투의 현장이 되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형상에 집중했다.

그것은 작은 고깔 같은 형상이었다.

'역삼각형? 역으로 된 원뿔? 뭐지, 이건?'

부스스….

그러나 원뿔의 자세한 형상을 더더욱 관측하려 하자, 원뿔은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뭔가의 상징인가? 하지만 단순한 역삼각형은 상징이라기엔 너무 간단해. 아니, 더 자세한 형태를 관측하려 하자마자 흩어졌으니 나중에 더

살펴볼 필요가 있으려나.'

옆에서 생사투를 하던 무림인 중 한 명이 검강을 뿜으며 자신이 삼화취정의 노고수라는 걸 밝혔고, 상대 무림인 역시 그 급의 고수임이 밝혀졌다.

'다시 한번 만들어 볼까.'

의념을 교란하며 다투는 무림인들의 병장기가 강기를 담고 몇 번 나를 후려쳤다.

나는 맞은 부위를 벅벅 긁은 후 다시 눈앞의 법술을 움직여 형상을 만들어 냈다.

'흠!'

내가 다시 그 형상을 관측하려 하자, 그 형상은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다.

'흠…. 일단 내 의식으로도 관측이 힘들다. 아무래도 조금 더 의식 크기가 커지면 쉬우려나. 그리고… 수계의 천문 흐름 자체를 더 관측한 자료들이 필요하겠어. 연국의 자료로만 생성한 것이라 부정확한 것일 수 있으니….'

마침내 정신없이 싸우던 무림인들이 피를 쏟으며 양쪽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서로 피를 쏟으며 상대와 의형제를 맺고는 객점을 나가 버렸다.

생각을 마친 나는 소면 한 그릇만 더 나오면 먹고 가기로 하고는 눈앞의 영기 덩어리를 흩어 버렸다.

'성제국 쪽은 나중에 금신천뢰문에 받는 게 제일 정확할 테고, 나중에 벽라국과 북방 대초원도 가 봐야겠어. 동방도 한번 가 볼 필요가 있고.'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점소이, 소면 다 됐나?"

그리고, 나는 인근 탁자 밑에 숨어서 벌벌 떠는 점소이를 발견했다.

객잔 전체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이 박살이 나 있었다.

"아, 아이고 손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괴물들이 손님을 몇 번 쳐다보다가 아무런 반응조차 없으시니 엄청난 고수인 줄 알고 무서워서 의형제 맺은 척하고 나간 게 틀림없습니다."

"응? 뭐가 날 쳤나?"

"소, 소면은 무료로 대접하겠습니다."

"고맙군."

나는 객점에서 소면을 무료로 얻어먹은 후, 보답으로 다 망가진 객점을 목 속성 법술로 회복시켜 준 후 나섰다.

'너무 집중하다 보니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주의를 못 분산시켰군.'

이상했다.

아무래도 그 원뿔은, 정말로 미약했지만 사람을 홀리는 기이한 마력(魔力)을 지닌 듯했다.

'더더욱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는군.'

청문령은 도대체 뭘 봤던 것일까.

최소한의 단서는 필요했다.

* * *

"이곳이… 수계인가."

전명훈은 금해민과 금뢰전에 앉아 정무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원로님?"

"아닐세. 그럼 일단 다음 들어오라 하게."

"예, 그럼 다음은 벽라국 공묘세가의 사절입니다."

"벽라국이면…."

"성제국 옆에 있는 연국의 너머에 있는 나라입니다."

"말 그대로 옆옆집인가. 사절은 누구지?"

금해민은 명부를 읽으며 말했다.

"공묘세가… 오, 저도 아는 사람이군요. 축기기 3대 위인 공묘천색의 아들인 공묘희입니다. 자질이 뛰어나 공묘천색 밑에서 열심히 수학하여 결단기 원로가 되었지요."

"…축기기 3대 위인? 결단기가 원로? 아니, 그리고 아들인데, 공묘희는 여자 이름이잖나."

"축기기 3대 위인은… 후, 설명하려니 입이 아프군요. 차후에 이 자료를 읽어 주시지요. 결단기가 원로인 건, 본래 수계에 있던 원영기 이상의 수도자들은 지난 비승 때 전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알겠네."

"또 공묘희의 이름이 여자 이름인 건…."

전명훈은 머리가 아팠다.

새로 자리를 잡은 수계라는 곳.

원래 수계 출신인 제자들은 광한계를 떠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좋아했지만, 아예 광한계 출신인 제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지(奧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원래 광한계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이마셨던 영기가, 수계에는 극도로 희박했다.

거기에 자원도 희박했고, 세계의 크기도 좁았다.

또한 그들로선 난데없이 가족들이 있던 광한계에서 수계로 떨어진 셈이었으니 비승 같은 원대한 명목도 아닌 이유로 가족들과 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그건 전명훈 역시 비슷했다.

그 역시 비승자 출신이라곤 했지만, 어쨌든 그는 등선향에서 광한계의 땅을 밟은 것이었지 수계의 땅은 한 평도 밟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어색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미칠 것 같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저놈들… 지금 뭘 하는 거지?'

전명훈은 천인기의 방대한 의식 영역으로, 눈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공묘희를 맞이하면서도 금뢰전이 있는 금뢰봉 저 아래쪽.

그곳에서 '거래'를 하는 연기기 수도자들이었다.

"이번에 어렵게 구한 원로님의 손톱 가루일세. 지난번에 깎았던 걸 약방에 가져가 곱게 빻는 것이지. 이건 전 원로님, 이건 서 원로님일세."

"천인기 태수의 육신…!"

"우선 전 원로님은 뇌도공법만을 익히셔서 뇌도공법에 대한 힘이 이 가루에도 서려 있지. 그리고 서 원로님은 뇌도공법 이외에도 무수한 

법을 익혔기 때문에, 특히 서 원로님의 가루는 모든 방면에서 사용이 가능함세."

"상태도 좋고, 영기도 준수하군. 상품 약재야. 영석 40개."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지금 천인기 수사의 육신을 고작 그따위 가격으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불호령을 내리려다가도, 자신의 손톱 가루를 밀매하는 제자의 얼굴을 뜯어보니 지난 뇌겁에서 쌍수도려를 잃은 녀석이었다.

'미치겠군. 손톱을 훔쳐다 판 걸 혼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해 줘야 하는 건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정무를 끝내고 성제국을 돌아다녀 보면, 그의 의식 영역에 무수한 수도자들의 암시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최근 성제국에서는 '천인기 수사의 육신 일부'로 만든 약재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명훈과 서은현의 손톱, 머리카락, 타액 등으로 만든 약재들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고 머리통을 뽑아 버릴까 고민하다가도, 약재를 팔며 함박웃음을 짓고 점차 뇌겁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제자들을 보니 내버려 둬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애초에, 수계 사람들한테 천인기 수도자들은 신(神)이나 다름없다고 했었나.'

그렇게 생각하면 저들은 신체(神體)를 거래하는 것이었다.

'수계에는 영기가 희박하니 뭐… 저럴 수도 있…나?'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봐도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하니 의식 영역에 잡히는 저 웃음을 보자 또 뭐라 하기가 힘들었다.

'…뭐, 정 그러면 내 건 더 이상 외부로 매매하지 말라고 해야겠군.'

전명훈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서은현 것만 외부 유통을 허락해야겠어.'

"…이상, 저희 공묘세가는 벽씨세가와 함께 조씨세가의 유물을 얻어 연구했기에 단약 기술도 일취월장했으며…."

어느덧 눈앞의 공묘희의 가문 소개가 끝나가고 있었다.

"또한 북향함대를 만들 때 기술자들을 파견해서, '북향함'의 기술 이전도 받아 냈습니다. 한 마디로, 저희 가문은 차원을 넘는 북향함도 원하신다면 제작이 가능합니다."

'북향함… 제작자 이름이 북향화라 했었던가? 무슨 서 장군이 떠오르는 웃기는 이름이군.'

"훌륭하군. 차원을 넘는 기술은 비승을 목표로 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 꼭 기억해 두겠네."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묘희를 물려 보냈다.

'이름은 웃기지만, 금해민의 설명을 들어 보면 흑색귀골곡의 최중요 신물의 열화판이라는 건데…. 인족 육대종문의 신물 급을 어쨌든 열화해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기억해 둬야겠어.'

* * *

나는 시간이 날 때 진씨세가의 영역도 잠시 들러, 의식 영역으로 쓸어 보았다.

제자들은 대부분 늙어 죽고 그 후손들이 살아 있었다.

나는 그를 확인한 후, 벽라국 측으로 날아가려 했다.

그때였다.

[주인님.]

"음? 홍범?"

나는 저물도 안쪽에서 들려오는 영언에, 저물도로 손을 집어넣어 홍범이 봉인된 옥구슬을 꺼냈다.

홍범이 위험한 순간이 지나간 후에는 그냥 자력으로 빠져나와 보겠다 해서 놔두던 차였는데 아무래도 봉인의 해석을 끝마친 모양이었다.

"다 됐느냐?"

[예, 나가겠습니다.]

"그래."

나는 옥구슬을 들어 올렸다.

얼마 후, 옥구슬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그 안에서 시커먼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름 금신천뢰문에서 신경을 쓴 봉인인지라, 나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립니다. 송구하옵니다만,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마."

나는 인근에 내려앉아, 적당히 진법을 치고 홍범이 든 구슬을 내려놓았다.

'독기가 점차 강해지는군….'

홍범은 봉인된 상태에서도 독 연구를 계속한 건지, 그의 독공은 그 안쪽에서 더더욱 농밀해져 있었다.

"훨씬 강해졌구나."

[예. 봉인을 순수하게 독(毒)으로만 해체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다 보니, 최근 독공의 어떠한 경지를 엿보는 중입니다.]

"독공에서 경지라고 할 만한 건…."

나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무형지독(無形之毒)!?"

[예.]

나 역시 한때는 독술사였기에 그 경지를 알고는 있었다.

그리고 수도계에 들어와서도 한번 심심해서 알아본 적도 있었다.

어떤 독보다도 상위에 존재하며, 경지에 상관없이 합체기 이하는 누구든 중독시킬 수 있는 꿈의 독!

하지만 독공의 세계에서도 워낙 전설적인 일이었기에 그냥 망상으로만 취급하던 것이었는데, 홍범은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얻은 건 아니고, 아마 한참 시간이 걸릴 겁니다.]

"허어, 아니다. 기다릴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무형지독은 저승과도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쨌든 홍범의 성취를 기뻐해 주며 앉아서 기다렸다.

치이이이이―

'진법이 홍범의 독기에 녹아 버리는 건가…?'

나는 앉아서 진법을 바라보며 홍범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약 반나절이 흘렀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진법 밖에서 강력한 법기가 날아와 진에 부딪혔다.

아무래도 공격용이라기보다는 다른 용도의 법기인 것 같았다.

'흠, 수도자들인가. 그런데 이 녀석들 수준으로 어떻게 이 진법을 찾은 거지. 뭔가 수가 있나.'

꽤 많은 이들이 몰려왔다.

[그 진법 안에 계신 분은 나와 주십시오.]

나는 징징 울려 퍼지는 영언에 의아해하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진씨세가의 가주께서, 귀하를 찾고 계십니다. 나와서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들을 보며 허허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얘들아, 잠시 이곳에 앉아서 할 게 있기 때문에 그건 곤란하단다."

내 담담한 목소리에, 영언을 터트린 수사는 곤란한 기색이 되었다.

[음, 보아하니 결단기 대선배님이신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선배님께서 앉아 계신 곳은 진씨세가의 땅입니다. 협조해 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결단기 대선배님이라 해도 무력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무력?"

[건방지게 들리실 수 있지만, 아무리 결단기 선배님이라 하셔도 이 정도의 축기기 장로들이라면 결코 좌시하기 힘드실 겁니다. 부디 초대에 응해 주십시오.]

그들은 공손하게 내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옅게 웃으며 진법 바깥에서 나를 포위한 축기기 수도자들을 바라보았다.

약 5백 명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봤다 (3)

'축기기 수도자 5백 명…!'

나는 크게 경계… 하진 않고 그냥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것참. 그러면 잠깐이면 되니 기다리거라."

나는 진법 안에서 손을 까딱였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진법 바깥에서 태풍이 휘몰아치며 축기기 수도자들이 하나같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진법이 있는 곳은 어찌어찌 알아냈지만, 아무래도 안을 정확히 들여다보진 못하는 듯 그들은 비명을 질러 댔다.

"크아아아아악!"

"결단기 대선배가 노하셨다!"

"이, 이 힘은! 결단 후기라도 된단 말인가!?"

"차라리 결단기 대원만을 넘볼 법하다 할 수준의 기세!"

쿠구구구!

폭풍이 한바탕 지나가자, 축기기 수도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내게서 몇 장 멀어졌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축기기 대원만의 수도자가 고함을 쳤다.

"모두 일단 침착하고 대열을 짜라!"

그 말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수도진법을 짜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들의 법력과 영력이 이어진다.

척, 척, 척, 척!

축기기 수도자들이 방위를 잡으며 결인을 맺었다.

499방위가 점해지며, 점차 수도자들의 기운이 증폭되고, 내 기력이 억눌리기 시작했다.

'호오, 이 정도라면….'

나는 진씨세가의 진법 기량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진법을 눈여겨보았다.

우두머리 수도자가 외쳤다.

"이 화림대진이라면, 제아무리 결단 후기 선배님이실지라도 화를 면치 못하실 겁니다! 원영기 노고수라도, 한 번은 발을 묶을 수 있는 대진이니 부디 잘 선택해 주십시오!!!"

"흐흠…."

나는 가만히 녀석들의 말을 들어 보다, 슬슬 귀찮아지는 것을 느꼈다.

'힘을 안 드러내니 자꾸 귀찮게 하는군.'

연기기 6성 어쩌구 하는 꼬마까지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만, 5백 명이 득시글거리며 몰려오면 이젠 귀찮은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이것들한테 굳이 힘을 쓸 필요도 못 느끼겠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손을 띄워 진법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 * *

진씨세가의 축기기 대원만 수도자, 진위도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느꼈다.

'뭐지, 이 느낌은?'

느껴진다.

뭔가,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하지만 가주의 명령이었고, 이제 와선 무를 수도 없었다.

'제길, 도대체 가주님은 왜 저런 무지막지한 선배님을 데려오라고 하신 건지….'

그리고 눈앞의 노괴가 도대체 어떤 노괴인지는 몰랐지만, 무려 축기기 5백 명씩이나 되는 전력을 앞에 두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우리쯤은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화림대진까지 펼쳐 놓았다. 이대로 물러서기엔 진씨세가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스윽―

"…?"

진법 바깥으로, 하나의 손이 나타났다.

'뭐지?'

진위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법기를 들어 올렸다.

붉은 지팡이 위로 염화의 기운이 솟구쳤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대비해야 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우웅―

손 위로, 하얀색 구슬 같은 것이 떠올랐다.

'정순지력 덩어리? 아니, 저건 마치… 무림인 놈들이 쓰는 강기와 뭔가 느낌이 비슷한데…?'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번쩍!

순간 하얀빛이 터져 오르더니, 그의 눈앞으로 흰색의 구슬이 이동해 있었다.

"…!"

진위도는 화들짝 놀라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하얀 구슬 주변으로 천지영기가 일렁이는 듯하더니, 하얀 구슬에서 염열 계열의 법술이 터져 나왔다.

"뭣…!"

화르르르르!

진위도는 당황하여 준비하던 법술을 사용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흰색의 구슬에서 뿜어지는 화염 법술은, 염열 계열 법술을 주로 연구해 왔던 진위도의 화염 법술을 그대로 잡아먹어 버렸다.

콰르르르르!

"크으으으윽!"

진위도는 온 힘을 다해 눈앞의 흰색 구슬을 막아 내었다.

'다, 단순한 정순지력 덩어리가 아니야!'

"대장로님!"

"모두 진을 발동해라!"

"대장로님에게 힘을 합세하라!"

화르르르륵!

화림대진이 발동하며, 진위도는 눈앞의 흰색의 구슬을 향해 어마어마한 진의 압박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동시에 5백 명의 법력이 서로서로 연결되며 증폭되었다.

화르르르륵!

콰아아앙!

5백여 개의 염열 계열 법술들이, 일제히 작은 구슬 하나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산천이 진동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진위도를 비롯한 수많은 축기기 장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기가 걷힌 그 너머.

그곳에 있는 백색의 구슬 주변으로, 오행지력이 회전하며 염열 계열 법술들을 막아 내고 있었다.

"저, 저건 오월입도경…?"

누군가 법술의 흐름을 알아본 수도자가 작게 읊조렸다.

하지만 진위도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단순한 오월입도경이 아니다. 이해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오월입도경…. 청문 선배 정도가 아니라면 저 정도로 오월입도경을 끌어올릴 수 없을 텐데, 어찌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리고 그뿐이 아니야. 오행지력 안쪽으로 오월입도경 말고도 또 다른 무수한 공법의 흐름이 회전하는 중이다!'

꿀꺽!

여러 가지 생각이 진위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기에, 저 구슬의 정체는….'

그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저건… 저 선배님의 신외화신의 비술이다!"

"예, 예?"

"의식 영역을 집중시켜라!"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의식을 길게 뻗쳐 백색의 구슬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의식의 세계.

그곳에서 구슬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육안으로는 구슬이었지만, 의식으로 감지한 바로는 백의를 입은 한 남성의 형상!

그리고 어째서인지 남성의 얼굴은 잘 보이지조차 않았다.

천지영기 자체가 얼굴의 '인식' 자체를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우웅!

의식 영역에 비치는 백색의 구슬.

그 구슬의 다른 형체인 남성이 결인을 맺는다.

진위도가 소리쳤다.

"저건 저 선배님의 신외화신의 술이다! 신외화신의 술은 알다시피 체내의 기운이 바닥나면 알아서 사멸하니 모두 총공세를 퍼부어 기운을 소진시켜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위도의 인솔에 따라 무수한 공격들이 백색의 구슬에 쏟아졌다.

쿠구구구구!

시뻘건 불꽃이 바다를 이루는 듯했다.

얼마간 법술의 폭격이 이어졌을까.

진위도를 비롯한 수도자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

점차, 그들의 법술이 밀려나고 있었다.

신외화신이 사용하는 오행 법술이, 그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화염 법술들을 쫓아내는 것 같았다.

"어, 어찌!"

진위도는 식겁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 그래도 저런 출력의 법술은 오래 쓰지 못할 터.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우우웅!

일다경이 지났다.

진위도는 낮도깨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어, 어째서….'

이상했다.

분명 법력이 쇠해 사라졌어야 할 신외화신은, 아직도 쌩쌩하게 그들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 전보다도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그는 절규하며 이를 악물었다.

* * *

나는 진법 안에서 강환 분신을 바라보았다.

천인기가 된 이상, 천지천상의 영기(靈氣)는 내 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분신일지라도 내 의식이 담긴 것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천지영기의 수급이 자유로웠다.

우우우웅!

축기기 수도자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인근의 천지영기의 흐름이 내 강환 분신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강환 분신은 분신임에도 불구하고 천지영기를 끝없이 흡입하며, 도리어 처음보다도 강해진 상태였다.

아마 이대로 일이 다경만 지나면 승패가 갈릴 터였다.

"안타깝게 됐군."

다만 아무래도 강환 분신을 써서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괴롭히는 건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주인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제 제가 처리하지요."

홍범이 마침내, 봉인을 해제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됐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불쌍한 녀석들 괴롭히는 건 여기까지 하고…. 녀석들이 어떻게 우리를 찾아냈는지나 알아보아야겠구나. 가주를 만나러 가겠다."

스륵―

나는 아직도 전의를 불태우는 축기기 수도자들에게 손을 뻗었다.

진법 바깥으로 손을 뻗은 나는, 즉시 여덟 개의 강환 분신을 더 만들어 허공으로 띄웠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전의를 잃는 데에는 반 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 * *

"흐음, 이게 그 북향함이라는 건가?"

전명훈은 꽤 흥미로운 얼굴로 공묘세가의 사절이 가져온 '선물'을 바라보았다.

공묘세가의 사절, 공묘희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삼대 위인 북 선자가 만든 '초창기 복제 섭명함'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흐흠…."

"북 선자께서는 섭명함을 수리하시면서 섭명함을 나름대로 복제해 보셨습니다. 물론 초창기 형태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이 배를 토대로

차후에 북향함을 만드실 수 있으셨지요. 그리고 저희는 기술 이전을 받으며, 초창기 섭명함 복제품 중 하나를 북 선자에게서 양도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귀물(貴物)은 금신천뢰문에 양도하겠습니다."

"흐음…."

전명훈은 금뢰전 앞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전함을 보며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말이야 예쁘게 한다만… 솔직히 저 배는 프로토타입이라는 거 아닌가? 이미 기술 이전을 받아서 프로토타입에서 개량된 북향함 제작 기술도 손에 넣은 주제에 생색내기용이로군.'

전명훈은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배에서 느껴지는 공간 파동에는 흥미가 조금 일었다.

"강력한 귀기(鬼氣)가 흐르는군."

"예, 초창기에는 섭명함의 복제 열화판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지요."

"흐음…."

전명훈도 흑색귀골곡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수계 삼대종문.

인족 육대종문.

그리고, 한때 수계의 대해 전체를 호령했던 위대한 종파.

그 위대한 종파에서도 신물(神物)이라 불렸던, 선보(仙寶)의 복제.

흑색귀골곡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배.

섭명함(涉溟艦).

'배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고작해야 간신히 결단기 수준인가? 하지만 동력원만 제대로 된 것이 있다면 순식간에 천인기 수준으로 올라갈 것 같군.'

예전, 그가 서은현의 서 장군을 상대했을 때 느꼈던 그 기이한 불길함이, 저 배에서 느껴졌다.

물론 서 장군만큼의 불길함은 아니었고, 기껏해야 서 장군을 상대할 때 느꼈던 절망감을 천분지 일 정도로 희석해 놓은.

불길함이라기보단 차라리 일말의 긴장 정도라고 해야 할 정도의 미약한 감각.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명훈은 눈앞의 배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법구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그가 주요하게 본 부분은, 저 '복제 섭명함'이란 것의 기능적인 부분이었다.

'저 정도의 공간 파동이면….'

"장거리 공간 이동도 충분히 가능하겠군."

"예, 물론입니다. 당연합지요."

"그래…."

그는 저 섭명함을 통해, 다시 통째로 비승하는 금신천뢰문을 꿈꿨다.

지금 수준의 섭명함이라면 쉽지 않겠지만, 천 년 동안 북향함도 끝없이 개발될 테고, 금신천뢰문 역시 받아낸 섭명함 복제품을 연구해 나갈 터였으니 천 년이라면 충분했다.

'저것이라면, 또다시 금신천뢰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

천 년 후.

승천문이라는 것이 다시 열릴 그때.

전명훈은 저 복제 섭명함을 타고, 다시 광한계로 비승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우우웅!

파아아앗!

금빛의 둔광이 전명훈의 옆으로 날아왔다.

결단기 수준의 제자였다.

"원로님, 서 원로님 소식입니다. 지금 그분이 연국에서…."

서은현의 소식을 가지고 온 제자는 다급하게 전명훈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옆에서 전음으로 다급하게 음성을 전했다.

이윽고, 그의 말을 전해 들은 전명훈의 눈이, 섭명함에서 벗어나 휘둥그레졌다.

"아니, 서은현이…!?"

* * *

"허어…."

나는 진위도라는 축기기 수도자를 필두로 나를 찾아온 축기기 장로들을 데리고 진씨세가 본가로 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진씨세가의 결단기 가주가 어째서 나를 불렀는지.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천인기 수도자인 내 위치를 쫓은 것이 아니었다.

"으음… 선배님께서 뭔가… 오해가 있었던 듯합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주좌에서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는 진씨세가 가주를 내려다보다가, 그의 뒤쪽에 있던 녀석에게 눈을 돌렸다.

그것은, 사람 크기만 한 지네였다.

내 옆에 있던 홍범과, 그 지네의 더듬이가 눈이 마주쳤다.

"제 요수가… 갑자기 위치까지 정확히 읊으며 발작하길래… 불러온 것뿐입니다. 제 애완 요수는 현재 수명이 다 되어 가는 중이고, 동족의 내단을 먹으면 수명 연장을 할 수 있다는 고서를 봤어서…."

그는 자신의 애완 요수를 통해, '홍범'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 애완 요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거, 등선향에서 구했다고 했나?"

"예, 예. 정확히는 답천사막 중심… 등선향의 아래쪽에 떨어져 있던 것을 주워 왔습니다."

그랬다.

연기기 저계 수준의 저 지네 요수는, 홍범의 형제였다.

봤다 (4)

나는 홍범을 바라보며 물었다.

"홍범,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

"…예. 분명… 혈족(血族)으로서의 동질감이 미미하게 느껴집니다. 으음… 그리고 저 또한 처음 알았습니다만, 제 동족의 감각을 알게 된 이상, 앞으로는 근처에 동족이 있으면 알아챌 것 같습니다."

"호오, 그렇군…."

아무래도 역시 진씨세가의 수준으로 우리를 찾아낸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신기하군.'

비록 수명이 다해 죽어 간다곤 했지만, 어쨌든 눈앞의 지네는 분명 연기기 저계 수준의 '요력'을 품은 '요수'였다.

'요선죽과 등선향의 영기에 힘입어 정말로 요족으로 각성할 줄은….'

나는 진씨세가의 가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내 요수인 홍범의 요단을 먹이면 네 요수의 수명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해서 나를 찾으려 했단 건가?"

"허, 허억…."

진씨세가의 가주는 안쓰러울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어찌 저보다도 경지가 높은 선배님의 단을 탐하겠습니까! 주제넘게도 선배님께서 천인(天人)이 아닌 동급의 수사라 생각하고 거래를 하려 했던 것입니다!"

"흠, 그런가."

나는 의문이 생겨 그에게 질문했다.

"네 애완 요수인 저 녀석… 녀석에게 정이 많이 들어서 살리려는 건 아닌 것 같고, 왜 살리려고 하는지 물어도 되느냐?"

의념을 봐서, 진씨세가 가주는 홍범의 형제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서 살리려 한다기보단 뭔가 쓸모를 위해서 살리려는 듯했다.

내 질문에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비록 천인께서 보시기엔 조잡하겠지만… 가, 가져와라!"

가주는 옆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원로 중 한 명에게 다급히 외쳤다.

그 말에 원로는 황급히 달려가 어딘가에서 작은 단지 같은 것을 꺼내 왔다.

그가 밀봉된 단지를 개봉하자, 단지에서는 은은한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호오…."

나는 물론이고, 옆에서 구경하던 홍범 역시도 큰 흥미를 보이며 단지를 바라보았다.

"영액(靈液)이로군."

진한 영기를 품은 영액이 단지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그 영기의 농도는 결코 낮지 않았고, 연기기 1성 정도는 잡영근자라도 순식간에 선통후각으로 연기기 3성에 이르게 해 줄 정도의 양이었다.

그리고 잡영근자에게 적용해서 그 정도라는 말은, 천영근자에게 사용하면 연기기 1성을 선통후각으로 연기기 6성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진한 영기라는 뜻이었다.

"제 애완 요수가 제조해 낸 독(毒)의 일종입니다. 아시다시피 독은 함량에 따라 약재로도 쓸 수 있으니, 이런 영기를 함유한 독액은 최상위 약재나 다름없습니다."

"흐음, 단순한 지네 독처럼 보이진 않는데?"

나는 독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영액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이 향기와 이 기질, 그리고 저 색상은 지네 독이라기보단 많은 또 다른 약재를 배합해서 만들어 낸, 식물 독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독액을 바라보던 홍범이 말했다.

"놀랍습니다, 주인님. 이 독액의 원재료들은 영기를 전혀 머금지 않은 평범한 풀과 수액들입니다."

"…!?"

나는 그제야 이 진씨세가의 가주가 어째서 고작해야 연기기 저계 수준인 지네의 수명을 늘리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호오… 상당히 엄청나군."

홍범에게 한 번에 독액의 정체를 간파당한 진씨세가 가주는 홍범의 그림자를 흘긋 보고는 두렵다는 듯이 몸을 떨었다.

"제가 아닌 지네 요수의 재주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걸 보자마자 알아내시는 선배님께서 대단하십니다."

그는 홍범의 형제라는 지네 요수를 띄워 주며 동시에 홍범을 향해 극진한 자세로 머리를 땅에 박은 채로 말했다.

"너무 그렇게 과하게 예를 취할 필요 없다."

내가 손을 내저으려 하자, 진씨세가의 가주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 마음이 편해서 이러는 것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허어, 괜찮대도."

"그, 그렇다 하시면…."

그때였다.

홍범이 갑자기 격노한 표정과 의념을 띄우며 버럭 소리쳤다.

"네 이노오옴!"

여태껏 제 형제를 만나고도 잠잠했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씨세가 가주를 향해 격노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진가의 가주와 원로원은 물론이고 나조차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홍범은 진심으로 격노한 듯이 독기를 풀풀 뿜어내며 소리쳤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감히 주인님의 어전(御前) 앞에서 어찌 감히 함부로 머리통을 쳐드는 것이야!"

"소, 송구합니다! 허락하신 줄 알고…."

"어디서 말대답이냐! 최소 세 번은 허락을 구했어야지!"

나는 격노하는 홍범을 보며 당황해서 말했다.

"괜찮다, 홍범. 내가 허락한 것이지 않으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음…!"

그 말에 홍범은 입을 닫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을 물러났다.

나는 굉장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의 의념은, 정말로 놀랄 정도로 방금 전과 비슷해졌다.

평소의 그 무미건조한 홍범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단지 나한테 예를 덜 취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갑자기 격노한다고?'

나는 당황함을 가라앉히며 말해 주었다.

"고맙다만, 앞으로는 내가 허락한 일에 대해서는 굳이 그렇게 화낼 필요 없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위신은 제게 있어 중요한 것이니 어쩌면 주체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오랜만에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홍범을 보며 난 조금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그나저나 홍범. 저기 저 녀석이 네 형제라는데…."

"저 녀석은 여자아이입니다."

"아… 미안하다. 구분이 안 가서…. 어쨌든 네 남매라는데, 어찌하고 싶으냐?"

내 물음에 홍범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처리할까요?"

"아니, 아니, 아니…!"

나는 그 말에 또다시 평정을 잃고 되물었다.

"생전 처음 만난 네 남매인데… 뭐 드는 감정이라던가 그런 게 없느냐? 네가 원한다면 저 아이도 데려다가 거둘 수 있다."

"흐음… 혹 저 영액 때문에 그러신 겁니까? 저 독액의 배합법은 다 파악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알려 드리지요."

홍범은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내 의식으로 독 배합의 구결을 전송했다.

'그 짧은 시간에 보기만 한 걸로 독의 배합법과 재료를 다 파악하다니… 대단하긴 하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고맙구나. 다만 내가 말한 건, 필요의 영역이 아닌 도리의 측면이다. 이번에 처음 만나는 네 가족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아니냐?"

내 말에 홍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주인님."

"응?"

"저는 원영기에 이른 후, 주인님을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보았고, 전부 기억해 냈습니다. 처음 보는 게 아닌, 알에서 나온 

후 한 번 본 녀석 중 하나입니다. 저 녀석이 그때 어떤 알에서 나온 녀석이고, 어디로 향했던 녀석인지도 전부 기억이 납니다."

"음…!"

내가 원영기 이후로 기억의 누수가 걱정이 없는 건 만상인연도로 기억을 모조리 저장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에게 원영기 주마등은 순식간에 지나치기에, 그로 인해 완전 기억을 얻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조차도 사실 빠르게 지나치기에 자세히 알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홍범은 그 짧은 순간 지나치는 주마등을 한 번 보고 모조리 기억해 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뇌 구조인 거지?'

나는 황당해하며 물었다.

"너는, 네 가족에게 별 감정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주인님. 솔직히 제가 왜 저런 것과 가족이라고 엮이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혈통이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별로 저는 인

하고 싶진 않습니다."

"으음…."

'본인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동족을 동족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건가.'

간혹 너무 뛰어난 천재들에게서 간혹 본 태도였다.

그리고, 수계에 있을 당시 수도자들이 범인을 깔보던 태도와도 비슷했다.

같은 인간이지만, 같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에게 범인은 의념도 제어하지 못해 실처럼 질질 흘리고 다니는 멍청이들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나는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뭐, 네 태도가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하자. 그것보다도…."

진씨세가 가주의 요수인 지네 요수를 보며, 나는 홍범에게 물었다.

"너는 저 요수의 수명을 늘려 주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없는 거냐?"

"별로 없습니다. 만약 주인님께서 명하신다면 수명을 늘릴 방법을 궁구해 보겠습니다."

"네가 하고 싶지는 않고?"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었다. 진가주."

"예, 선배님!"

"아무래도 그대의 애완 요수는 다른 방법으로 수명을 증진시켜야 할 것 같군. 내 수하의 요단을 줄 수는 없으니까."

"아닙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예를 취하는 진가주와 원로원에게 몇 마디 가르침을 베푼 후, 홍범과 함께 진씨세가를 나왔다.

나는 홍범과 함께 연국의 하늘을 날아가던 중, 녀석에게 고백했다.

"사실 홍범. 나는 네 부모의 원수다."

수계에 온 이후 말하려고 했던 진실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그로 인해 격노한다면, 설령 홍범이 나를 죽이려 한다 해도 받아들일 요량이 있었다.

언젠가는 고백해야 할 진실이었고,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해도 금신천뢰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선에서 전부 해 놓았기 때문에 모든 인연이 끊기는 죽음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홍범의 반응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십니까."

"…."

별것도 아닌 내 위신에 대해서는 갑자기 격노했던 녀석이, 제 가족의 죽음에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그 기이할 정도로 무덤덤한 반응에, 나는 홍범의 어미를 죽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홍범의 어미인 축기기 요수가 인간 마을을 해하고 있었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어미를 죽였다고, 가감 없이 진실을 고백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홍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 뭔가 내리실 명이 있으신지요?"

"음?"

"말씀 주신 그 인간 마을을 번성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홍범… 내가… 네 부모를 죽였다는 말이다."

"예."

"…."

"…주인님?"

나는 수도자들과도 조금 판이한 녀석의 사고방식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도자들이라도, 자기 부모가 범인이라고 무시하진 않는다.

범인 부모를 가진 수도자들은 수도자로서의 재력을 이용해 부모를 최대한 극진히 모시곤 했고, 혹여 살해라도 당하면 일반인처럼 눈이 뒤집히는 게 정상이었다.

"…네게 사과하마. 내가 네 부모를 죽였다."

나는 홍범의 태도에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홍범이 크게 당황하는 걸 느꼈다.

"주인님, 제게 왜 사과를 하십니까. 사과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부모라는 존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제 존재의 의미는 주인님과 같이 있을 때 존재합니다. 주인님,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제 명(命)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이냐?"

"그것은… [주인님의 곁에서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돕는] 것입니다. 그게 제가 깨달은 제 명(命)입니다."

"…그러냐."

나는 홍범을 쳐다보며 말 못 할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홍범의 명은, 도대체 '왜' 나를 돕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우리는 침묵하며 허공을 날았다.

그때, 문득 홍범이 말했다.

"주인님, 그나저나 제가 깨달은 무형지독에 대해 보시겠습니까?"

"음?"

'갑자기?'

홍범이 이렇게 내게 갑작스레 뭔가를 제안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뭘 보여 주고 싶으냐?"

"예. 한 번 보십시오."

홍범은 내 앞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것이, 제가 깨달은 독(毒)의 극의(極意)입니다."

* * *

파아아아앗!

전명훈은 쏜살같이 허공을 가르며 이를 짓씹었다.

우웅!

그가 수결을 맺자, 전음의 술법이 전명훈의 눈앞에 형성되었다.

전명훈은 전음의 술법에 대고 외쳤다.

"김영훈 부장님. 지금 빨리 연국 수도에 와 주십시오. 서은현이…."

그는 서은현에 대한 것을 말한 후 술법을 발동시켰다.

콰르릉!

전명훈의 전음의 술법은 번개의 속도로 어딘가로 날아갔다.

파아아앗!

얼마 후, 연국의 황성 위쪽에 도착한 전명훈은 황성 안쪽.

그곳에 생겨난 것을 내려다보았다.

번쩍!

그리고, 순식간에 황금빛이 번뜩이며 어느새 전명훈의 옆에 나타났다.

"전명훈, 그게 사실이냐? 서은현이…."

"예. 아무래도…."

전명훈과 김영훈은 심각한 표정으로 황성의 한쪽.

그곳에 있는 객점을, 아니.

객점'이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소금 기둥이 튀어나와 하늘로 뻗쳐 있었다.

그리고 소금 기둥의 중심에서는 흑의를 입고, 눈썹이 길게 늘어진 한 노인이 급박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

"홍범!"

전명훈은 그 노인을 보며 외쳤다.

김영훈과 전명훈은 홍범의 옆에 내려앉으며 홍범이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홍범의 손 쪽에는, 서은현의 머리통이 소금 기둥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소금 기둥 안쪽으로는 서은현의 몸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점차 그의 몸은 소금 기둥에 녹아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고, 홍범은 서은현의 머리통을 붙잡고 투명한 무언가를 불어넣는 중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홍범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막 봉인을 뚫고 나와 보니 주인님께서 이리되어 있으셨습니다. 제 무형지독으로 주인님의 정신을 자극하여 지금 깨워 보려 하고 있습니다!"

"무슨…!"

전명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은현을 쳐다보다가, 근처에 쓰러져서 공포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점소이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네 이놈!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왜 서은현이 이렇게 된 것이냐!"

그러나 점소이는 공포에 질려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모, 모르겠습니다요. 이, 이 분이 소면을 한 그릇 더 시킨다 하시고 갑자기 저분의 몸에서 하얀 기둥이 튀어나오더니…."

"사실대로 고해라! 정말 그것뿐인 거냐!!!"

"정말입니다요!"

김영훈은 전명훈의 어깨를 잡으며 말렸다.

"됐다. 녀석의 말은 사실이다. 감정의 변화가 없어."

"이 무슨…."

그때였다.

홍범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주인님의 주 의식과 접촉했습니다! 조용히 해 주십시오, 주인님을 깨우겠습니다!"

우우웅!

홍범의 손아귀에서 돌고 있는 투명한 기운이 서은현의 뇌리로 얼마나 들어갔을까.

파아아앗!

서은현이, 눈을 떴다.

"…어?"

얼마간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던 서은현은, 점차 눈에 총기가 생기며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동공을 부르르 떨더니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 * *

나는 홍범의 손에서 무형지독이 뿜어짐과 동시에, 눈앞의 장면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객점에서 소면을 시킨 직후'의 시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에는 김영훈과 전명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홍범이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내 몸에서는 소금 기둥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

점차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소면을 시키고….

내 손으로 [역삼각형]을 구현하며….

그것에서….

뭔가를….

"으아아아아아아!!!"

봤다.

봤다 봤다 봤다 봤다 봤다 봤다.

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봤다.

소금산의 주(主)가 남긴 것을.

다시 중경계로

소금은 신성한 것이다.

예로부터 정화(淨化)를 상징했으며, 또한 생명체의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또한 '소금(鹽)'의 자는 '본다(監)'라는 자와 '소금(鹵)'이라는 자가 합쳐져 탄생하였고, 이는 [가마솥 안에서 끓으며 만들어지는 식용 소금을 바라본다는 것]을 형상화한 자이다.

삼천대천세계에 소금을 뜻하는 단어는 여럿이 있겠지만, 결국 운명적으로 모두 위의 뜻과 같은 뜻으로 귀일(歸一)하게 된다.

[본다].

소금에는 필연적으로 [본다]라는 뜻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본다]라는 것은 수선의 본질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관조(觀照)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금이란, 명의 계위에서 누군가가 '참오(懺悟)'라는 뜻을 밀어붙인 것이 기의 계위로 내려와 물질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선(修仙)이란 곧 참오다.

자그마한 소금 알갱이들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이.

참오를 통하여 산(山)을 쌓아 가라.

소금의 산을 쌓는 것만이 가장 빨리 하늘에 도달하는 것일지니.

― 태산열제공(太山裂帝功)의 구결 中

* * *

"그아아아아아!!!"

나는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질렀다.

구결!

어떠한 '구결'이 내 뇌리에 강제로 새겨진다!

그리고, 나는 그 구결을 이해하려 할 때마다 머리통이 줄줄이 소금으로 변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며 이를 악물었다.

'뒈진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순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멸신겁천의 구결을 운용했다.

동시에 나는 오행혈주번과 음혼귀주문을 합쳐 흑색귀주번을 만들어 내고, 흑색귀주번의 멸신겁천의 구결을 깃들였다.

쿠구구구구!

내 정신 세계 안쪽.

그곳에, 흑색의 저주문으로 뒤덮인 깃발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깃발들에 시커먼 먹장구름이 끼여, 먹장구름으로 이뤄진 깃발들로 변모하였다.

콰악!

나는 멸신겁천의 기운을 깃들인 흑색귀주번을 상단전에 박아 넣으며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구결'들을 봉인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커헉! 커허헉!"

쿠구구구구!

나를 뒤덮고 있던 거대한 소금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만약 내가 이지를 잃고 소금 기둥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면 청문령의 것과 마찬가지로 닿는 것만으로 만물을 염화하는 소금 기둥이 되었겠지만, 위험한 상태가 되기 전에 다행히 만회할 수 있었던 듯싶었다.

촤륵, 촤르르륵!

"허억, 헉…."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재생했다.

"서은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괜찮은 게냐!?"

"주인님, 어찌 된 일입니까!"

각각 전명훈, 김영훈, 홍범이었다.

나는 전신을 부들거리며 일어섰다.

.

"허억… 헉…."

[뭔가]를 봤던 기억은 봉인했다.

하지만 느껴졌다.

나는 양수진의 말을.

정려의 말을, 뼈저리게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전명훈."

"응?"

"나가야 한다."

"뭔 소리냐."

콰악!

난 잔뜩 충혈된 눈으로 전명훈의 어깨를 쥐어뜯듯이 잡으며 말했다.

"이 세계를 나가야 한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일단 북향함 건조에 들어가고 승천문이 열릴 때…."

"지금 당장!!!"

"뭐…?"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말했다.

"내가 뭘 봤는지, 너는 모른다. 아니, 미안하다. 사실 나도 제대로는 못 봤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는 이 세계에 있으면 안 된다. 이곳은 너무나도 흉험하고 무시무시한 곳이야. 어디로든 일단 비승해야 한다! 승천문은 필요 없다. 내가 차원 장벽을 찢어발겨 버릴 자신이 있다. 당장, 당장 어디로든 가자, 전명훈!"

난 이전, 양수진의 안배가 승천문에서 나를 강제로 광한계로 비승시켰을 그때를 기억했다.

분명 그때 양수진은, 이 세계는 종명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울 뿐이었으나,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계에 올 때는, 분체로만 와야 하는 게 맞다.

이렇게 본체로 거닐고 있다면 분명 언젠가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내가 기억을 봉인했기에 내가 [무엇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악의. 이 수계에는 [우리]를 향한 악의가 잔뜩 깔려 있어. 당장이라도, 당장이라도 나가야 해.'

나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문득 엄청난 안도감이 몰려왔다.

김영훈이 쇄천 너머에 도달해서 자력으로 북향화, 송진, 서란 등과 함께 고력계로 비승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전명훈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지금 비승한다면 금신천뢰문은 어찌하고…."

"금신천뢰문은 수계제일종문으로 살 수 있다. 너도 정무를 보면서 수계의 수준을 대충 파악했을 텐데? 당장 결단기 제자들이 한 명도 안 나서도 금신천뢰문은 축기기 제자들과 그들이 가진 진법 및 술법만으로도 수계를 제패할 수 있어. 심지어 수계에 원영기 수도자가 등장하더라도 현 결단기 제자들만으로도 상대가 가능하고. 심지어 금해민은 원영기에 이르기 거의 직전이다. 우리는 금신천뢰문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전명훈."

"으음…."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제발 전명훈, 믿어다오. [이번에도]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본체로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정 걱정된다면 분체라도 만들어서 놓고 가라. 아니, 내가 서 장군을 만들어서 네가 활용할 수 있는 의체를 만들어 줄 테니 거기에 의식 일부만 넣어 두고 오면 되잖나!"

전명훈은 [이번에도]라는 말에 흠칫 몸을 떨더니 이를 악물었다.

"…제길. 너는 언제나… 선택하기 힘든 결정만 들이대는군."

"…그리고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피할 수 있는 재액도 있었지."

"한 가지 묻겠다."

전명훈은 조금 얼굴을 찡그리는 듯하더니 물었다.

"우리만 비승한다면… 남겨진 제자들에게 네가 말한 재액 같은 건… 떨어지지 않나?"

"않는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본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다시피 하는 나였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 것]이 [우리]에게, 그리고 진선 급 이상의 존재들에게만 위험할 뿐.

그 이하의 존재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단 것이었다.

"제자들에게 앞으로 '하늘의 관측과 천문 현상의 자세한 해석을 금한다' 라는 조언만 남기고 비승한다면,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다."

"…."

"믿어다오."

내 말에 한참 동안이나 침음성을 흘리던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녀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네 말을 들어야겠지."

그도 이제 천벌의 주인 같은,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존재에 대해서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자세히 설명을 못하는 것 역시 이해를 했고, 그는 이번에는 나를 믿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반나절. 최대한 빨리 그 안에 모든 걸 정리하고 오마."

콰르르릉!

전명훈은 한 줄기 벼락이 되어 금신천뢰문 방향으로 날아갔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괜찮으십니까?"

홍범이 옆에서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웅, 우웅, 우우우웅!

머릿속에서 봉인해 놓은 지식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버둥거렸다.

얼마간 내가 멸신겁천을 끌어올려 그 지식을 제압했을까.

봉인 안쪽의 지식은 마침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때.

두웅―

나는 거대한 짐승의 고동 소리 같은 소리를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 고동 소리를 통해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태산열제공(太山裂帝功).

'아아… 그렇군.'

이 지식은, 태산열제공과 관련이 되어 있다.

'헌원을… 일단 만나 봐야겠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가라앉자, 나는 김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훈 형님, 죄송하지만…."

"그래, 뭐… 이해한다. 상관은 없다. 한 번 정도 시원하게 겨룬 걸로 만족하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그는 짧게 서로 고개를 끄덕인 후 인사를 나눴다.

나는 전명훈에게 전음부를 써 등선향으로 오라고 한 후, 한달음에 홍범과 등선향에 도착했다.

쿠구구구구!

등선향의 중심부.

그곳에는 완전히 닫힌 승천문.

그리고 승천문이 있었을 자리 위쪽에 있는 양수진의 비석.

그리고 무수한 공간 균열들이 자리해 있었다.

'빨리, 빨리 나가야 해.'

나는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톱을 마구 짓씹었다.

그러던 와중, 문득 내 시선이 어느 한 자리에 향했다.

'저 자리는….'

저 자리.

천오백 년도 더 넘었던 그 날.

홍범이 나에게 처음으로 들러붙었던 그때였다.

나는 문득, 내가 꾼 [꿈]을 떠올렸다.

'역삼각형을 본 이후부터 꿈이었나?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그걸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꿈이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세세한 그것을 떠올리며 미심쩍은 느낌을 느꼈다.

"홍범."

"예, 주인님."

나는 홍범에게 명해, [꿈속]에서 내가 녀석에게 전달받았던 '독 배합법'을 알려 주었다.

"이 영독(靈毒) 말이다만. 만들 수 있겠느냐?"

"호오, 영기를 머금지 않은 그냥 풀과 수액으로만 제조하는 독이군요. 지금 당장 해 보겠습니다."

홍범은 빠르게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등선향의 숲속에다가 약재방을 하나 만들고 그 안에서 빠르게 약재들을 배합하고 있었다.

촤라라라락!

녀석은 상반신을 본체로 변화시켜, 무수한 지네의 다리를 움직여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독을 배합했다.

그 모습은 다소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 되었습니다, 주인님. 상당히 재미있는 독 조합식이군요."

홍범은 내가 꿈 속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독액을 만들어 내 앞에 진상했다.

"…."

'뭐지?'

단순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꿈 속에서 나온 지식이, 현실에서도 적용된단 말인가?

나는 문득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홍범에게 물었다.

"홍범. 한 가지 명을 더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반나절 안에 연국 진씨세가로 가… 이것들을 조사해 올 수 있느냐?"

"흠, 예. 알겠습니다."

나는 홍범에게 몇 가지 정보가 담긴 쪽지를 건네주었고, 홍범은 쪽지를 받들고는 빠르게 등선향에서 나가 서쪽으로 향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리에 앉아 좌선을 했다.

얼마 후.

파아아앗!

다시금 홍범이 돌아왔다.

"예, 주인님. 알아 왔습니다. 현 진씨세가의 가주는 지네 요수를 한 마리 키우고 있으며, 그 지네 요수는 주인님께서 만든 것과 같은 영액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나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나온 정보들이, 맞다.

"그리고, 알아보니 확실히 그 지네 요수는 제 혈족이더군요. 제 남매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군."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꿈속의 정보가….'

현실과, 일치한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들은 기억이 났다.

개연성이 이상했지만, 꿈속이라서 의식의 흐름대로 일이 진행됐던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의 개연성은 차치하더라도.

꿈속에서 나온 [사실]들은 현실과 일치한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홍범에게 꿈속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자식에 대한 모성애를 가지며 혈족의 정을 가졌던 어미 지네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

'꿈속에서 있었던 일은, 단순히 환상은 아니다. 꿈은 현실에 기반했어.'

홍범 역시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태도 역시 꿈과 같으리라.

[실제 진실]이 꿈속에서 내게 들어온 것이다.

꿈속에서 뭔가 붕 떠 있는 기분은 있었다.

또한 사고가 명확하지 않은 기분도 있었다.

하지만, 꿈에서 알아낸 '사실'들은 진실이다.

'단순한 꿈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런 진실 같은 꿈을 꾸게 됐는지.

그 꿈을 내게 내린 존재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것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홍범과 승천문이 있었던 곳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콰르르릉!

뇌전이 비산하며, 전명훈이 나타났다.

그가 저물도를 열자, 그 안에서 거대한 전함이 한 척 나타났다.

'저건….'

진짜 섭명함에는 한없이 모자라지만, 굉장히 뛰어난 공간 속성을 지닌 전함이었다.

"어찌 됐든 받아 놓길 잘 했군. 뭐 그리고, 참고로 내 분혼(分魂)은 금신천뢰문의 사당에 봉해 놓고 간다. 혹 수계의 제자들과 소통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도 필요하면 해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놓아뒀으면 굳이 필요 없겠군."

"뭐, 사실 내 것도 필요는 없지. 왜냐하면…."

나는 전명훈의 뒤쪽에서 나온 인영을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잠깐, 너… 그 녀석을 데려갈 거냐?"

전명훈의 뒤에서 나온 것은, 연진이었다.

그의 선조인 '연위'가 아닌, 결단기 수사인 연진.

그때, 연진의 눈이 갑자기 뒤집히더니 연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하계에 남기로 했다. 전명훈의 분혼이 있는 사당에 내 진혼(眞魂)을 함께 봉하여, 금신천뢰문에 남도록 하지."

"연위…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리고 연진을 보내지 않나. 연진의 혼 안쪽에 내 분혼을 심어 두었다. 연진을 통하면 하계에 있는 나와 소통할 수 있을 테니 그리 알거라."

"정녕… 괜찮겠습니까?"

나는 그녀가 삶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는 걸 알고 물었다.

그러나 연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중경계에 도착하면 헌원 놈이 나를 어떻게든 잡으려 할 거다. 이 상태에서 헌원 놈에게 잡히면, 흐흐…. 상상하기도 싫군. 녀석과 은원이 있는 상태로 올라가느니 여기에 있는 게 낫다. 걱정 말거라."

"…알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연위에게 해룡궁과 봉명성, 흑색성과 등선향에 대해서 조사를 부탁한다는 등 몇 가지 부탁을 추가한 후 뒤를 돌았다.

"후우…."

체감상, 거의 수계에 내려오자마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너무 위험하다고.

그러니 당장이라도 떠야 한다고.

이번에는 다행히 전명훈이 나를 믿어 주었기에 그와 함께 올라갈 수 있었다.

금신천뢰문은 버려 두고 가게 되는 셈이었지만, 천벌에 모조리 망하는 결과는 뒤틀었다.

"그럼, 출발하자."

전명훈이 복제 섭명함에 연진과 홍범과 함께 올라탔다.

나는 등 뒤에 삼태극의 형상을 띄우고, 승천문이 열렸던 자리를 향해 손을 치들었다.

그런 후, 나는 그대로 손을 내리쳤다.

꽈아아아앙!

"다시 중경계로."

승천(昇天) (2)

쿠구구구구!

강력한 공간 폭풍이 저 너머에서 몰아친다.

나는 복제 섭명함에 탑승한 후 키를 잡았다.

'조작법은… 원본보다 쉽군.'

쿠구구구구!

나는 섭명함을 조종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복제 섭명함과 함께 공간 균열로 넘어갔다.

우우웅!

섭명함이 공간 폭풍에서 우리를 지켜 주었다.

승천문을 넘어가면서 봤던 차원간의 통로가 아닌, 그냥 수계에 존재하는 허공간이다.

일반적인 천인기 수사들.

그러니까, 승천문을 사용하지 않고 비승하는 수도자들은 어떻게 비승하는가.

간단했다.

운명의 인력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천인기 수도자들이었고, '중경계'는 그 자체로 강한 수도자들을 끌어들인다.

그 흐름에 올라타서 '위'로 향할 수 있다면 비승에 성공하는 것이고, 그 흐름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멍청하게 허공간을 떠돌다 죽는 것.

그것이 일반적인 '비승'인 것이었다.

'느껴지는군.'

'중경계'에서 느껴지는 인력이 나를 부르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이 인력에 편승해서 한 번에 기회를 잡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허공간에서 머무르며 인력의 흐름을 관찰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부웅!

나는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렸다.

다시금 머리 뒤쪽에 삼태극이 떠올랐다.

꽈아아앙!

비승이란, 쉽게 비유하자면 전장에서 활을 쏘는 것이다.

수많은 방해물을 제치고 목표물을 맞히는 것.

인력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적 지휘관을 인지하는 것.

그 흐름에 편승하는 것은 풍향, 방해물, 거리를 모조리 계산한 후 화살을 쏘는 것.

그것이 '비승'이었다.

하지만 나는.

꾸구구구구구!

공간의 파동들이 내 검격에 일거에 쩍 갈라지며 거대한 길을 만들었다.

중경계로 향하는 길이었다.

'말하자면, 화살이 아니라 대포를 쏜 셈이지.'

풍향?

방해물? 거리?

다 필요 없고, 다 뚫어 버리고 적에 명중한다.

무식한 전차처럼 허공간을 가르며 위로 올라간 우리는 어느새 거대한 흐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됐다, 탔다!'

중경계가 내뿜는 인력이다!

지난번 승천문을 넘어 비승할 당시 도달한 그 공간.

수도자들이 공허간(空虛間)이라고 부르는 곳!

쉬이이이이익!

무수한 장면이 우리의 주변을 스쳐서 아래로 내려간다.

거대한 우주의 모습, 별들의 모습 등….

모든 게 이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것은….

쿠구구구구!

나는 공간 폭풍에서 느껴지는 압력을,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고 맨몸으로 맞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전명훈은 나보다 몸이 약하기 때문에 법술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고, 연진을 한 팔로 안고서 함께 보호해 주는 중이었다.

나는 복제 섭명함의 선두에 서서 가장 강한 공간 압력을 모조리 맨몸으로 견뎌 냈다.

'이런 광경이었나….'

예전에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공허간을 '관광'하듯이 비승할 수 있었다.

문득, 내 눈에 저 멀리 공간과 공간이 섞인 장면들 너머.

그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저건….'

이전에도 보았던 것이었다.

공허간의 공간 파동을 헤엄치는, 천인기의 기력을 머금은 괴생명체.

'생각해 보면 그랬지.'

처음 비승하면서 만났던 녹갑 목인은, 나를 보면서 '세계 바깥의 괴물이 인간 형상을 한 채 진입한 게 아니냐'며 경계했다.

그리고 내가 인족 총연맹에 총독으로 있을 당시, 나는 건곤중역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열람할 수 있었다.

총연맹은 공령지를 건곤중역과 같은 비선대로 만들 계획이었기에 열람 가능한 자료였고, 나는 그를 통해 건곤성 비선대를 관리하는 이들의 임무 중 하나를 볼 수 있었었다.

'공허간을 떠도는 괴생명체들이 중경계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 것.'

그것이었다.

'저 녀석들은 대체 뭔데 건곤성 차원에서 막으려고 하는 거지?'

건곤성은 인족이 아닌, '천지족 전체'가 관리하는 곳이다.

한 마디로, 저기서 꿈틀거리는 저 덩어리 같은 괴생명체는 '천지족 전체'가 힘을 합쳐 이 세계로 진입하는 걸 막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꿈틀―

내가 그것을 쳐다볼 때였다.

문득, 나는 제4의 감각에 '그것'의 의도가 문득 잡히는 것이 느꼈다.

―먹이.

"…!"

쿠구구구구!

저 멀리서, 공간 압력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괴생명체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제길, 지난번에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답천을 얻었어서 실 전력이야 원영기 수준이었다만, 수도 경지 자체는 단수기에 미칠락 말락 하는 수준이었다.

'체내에 품고 있는 영기 때문인가.'

쿠구구구구!

나는 달려드는 괴생명체를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때, 전명훈이 손을 뻗었다.

콰르르르릉!

공허간에서 붉은 번개가 번뜩이며 삽시간에 괴생명체를 지져 버렸다.

"잠깐, 전명훈. 기다려라."

"뭐냐, 왜 또."

"뭔 줄 알고 함부로…."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전명훈의 벼락을 뚫고 괴생명체가 복제 섭명함에 돌진해 왔다.

전명훈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흠칫 놀라며 손을 뻗었다.

쿠구구구구!

오행의 힘이 내 손 안에서 맴돌며 괴생명체에게 쏘아졌다.

일반적인 천인기 수도자라도 직격하면 치명상일 일격!

하지만 괴생명체는 힘을 피하는 게 아닌 그대로 돌진해 댔고, 나는 눈을 찌푸리며 무형검을 꺼냈다.

'오행(五行)에 대해 어마어마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 정상적인 수준이 아니야.'

그렇다면 답은, 물리력으로 갈아 버려야 한다.

부웅!

쩌어어엉!

내가 녀석의 몸을 무형검으로 쪼개 버렸을 때였다.

"…!"

나는 뭔가 녀석에게서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뭔가 느껴 본 감각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의 몸을 모조리 회 쳐 버리기 위해 다시금 무형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

무형검에 의해 두 조각으로 잘려 버린 녀석은, 죽지 않았으면서도 갑자기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것이었다.

'왜?'

내가 의아해할 때, 갑자기 녀석의 전신에서 익숙한 것이 튀어나왔다.

콰르르릉!

"…!"

그것은 천겁이었다.

녀석이, 전신에서 천겁을 내뿜고 있었다.

익숙한 금빛의 천겁을 보며, 나는 당황했다.

'이, 이거….'

단순한 금빛 천겁 '하나'가 아니었다.

녀석에게서는, 익숙한 '무색(無色)'의 천겁도 같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 무색 천겁은 놀랍게도 내 무형검과 똑같은 성질을 가진 것 같았다.

얼마간 전신에서 천겁을 내뿜던 녀석은, 그렇게 천겁에 의해 전신이 폭발해 버렸다.

아니, 내 무색 천겁의 힘도 있었으니 전신이 폭발했다기보단 알아서 회 쳐졌다고 해야 하리라.

나는 의외의 상황에 당황하며 멍하니 공간 폭풍에 쓸려 내려가는 녀석의 잔해더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지, 저건?'

그리고 나는 그제야 녀석에게서 느꼈던 기이한 기시감을 어디에서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헌원, 위령선, 흑룡왕 현음, 규련….'

합체기.

혹은 합체기에 도전했던 이들에게서 느껴졌던 '영역'의 힘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작 가진 힘은 천인기 수준이었다.

나는 저 녀석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일단 비승에 집중하기로 했다.

저런 괴생명체들이 한두 놈도 아닐 수 있고, 더 강한 놈들이 없으란 법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이성이 없는 저 괴생명체들이 우리를 계속해서 습격해 왔다.

'체내 천지영기가 많은 게 이런 귀찮음이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정식 천인기 수사들은 비승할 때 저런 괴생명체들까지 상대하며.

혹은 저것들에게서 도망치며 비승해야 했던 것 같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광한계에서 괜히 비승자들을 우대해 주는 게 아니군.'

이런 걸 다 뚫고 비승에 성공한단 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나는 동시에 금벽호, 창호자, 백골귀마 등이 새삼 대단한 이들이란 걸 다시금 깨달았다.

'아무리 문파에도 천인기 수사들이 꽤 있었다지만 문파원 전체를 다 들고 비승한다는 건 여기에 어마어마한 압력이 추가된다는 건데…. 거기에 문파원들을 괴생명체들로부터 지키면서까지 비승하다니, 대단하긴 하군.'

혀가 내둘러진다.

콰지지지직!

다행히 이 녀석들은 내 심족의 힘에 극상성인 것 같았기에, 무형검을 휘둘러 주면 체내에서 천겁이 폭주해 끓어오르다가 알아서 터져 죽었다.

'영훈 형님도 상당히 편하게 비승했겠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비승을 계속할 때였다.

"주인님, 저 아래에도 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홍범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래쪽에서 천인기 대원만을 넘어서는 기세가 느껴졌기에 나와 전명훈은 일제히 움직였다.

전명훈이 나를 보조했고 내가 무형검을 날리는 식이었다.

전명훈은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 근방의 괴물은 저놈이 마지막인 거 같군. 저놈 말고 더 기운이 안 느껴진다."

"그래, 조금만 더 힘내 보지."

그리고, 우리는 복제 섭명함의 후미로 가서 공격을 준비했다.

번쩍!

내 겁천이 전명훈의 뇌도공법과 섞여 떨어졌다.

콰과과광!

이내 준 사축기 수준의 괴생명체는 조각조각 터져서 흩어져 버렸고, 전명훈은 괴생명체에서 뿜어지는 천겁이 복제 섭명함에 닿지 않도록 뇌도공법으로 방어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앞쪽으로 가려 했을 때였다.

"잠깐, 서은현. 저기 뭔가 있지 않냐?"

"음? 뭐 말이냐?"

난 전명훈의 손가락을 따라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 * *

* * *

"어, 어?"

"주인님!!! 주인님!!!"

나는 홍범이 나를 향해 한쪽 손을 쳐들고 있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뭐, 뭐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주변을 돌아보니 여전히 복제 섭명함 위였고, 계속해서 비승을 하고 있었다.

내 주변에는 어째선지 토사물이 가득했고, 홍범이 내 따귀를 때려서 깨운 것인지 내 뺨이 얼얼했다.

나는 방금 내가 순간 의식이 끊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뭐지? 의식이 순간 날아갔었어….'

그리고 나는 '왜' 의식이 날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뭔가]를 봤다! 전명훈이 가리킨 걸 함께 봤었어! 그리고….'

으, 으으읍!

나는 갑자기 속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복제 섭명함의 바깥으로 위액을 쏟아냈다.

"끄억, 끄허어억!"

기억이 난다!

아니, 정확히는 안 난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역겹고 역겨우며 또 역겨운 것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그 역겨움이 다 가시지 않아 토가 멈추지 않았다.

'뭐, 뭐지, 대체?'

나는 대체 '무엇을' 봤단 말인가?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기에, 나는 머리를 흔들고는 홍범에게 물었다.

"홍범, 지금 내가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지?"

"다행히 반나절밖에 안 지났습니다. 주인님과 명훈 님이 일어나시지 않아 복제 섭명함이 공간 압력을 전부 받아 냈고, 지금 내구도가 거의 닳아 버렸습니다."

"이런…!"

나는 황급히 선두로 달려나가 공간 압력을 받아 냈다.

"전명훈은 어찌 됐지?"

나는 아까와는 달리 복제 섭명함이 상당히 덜컹거리고 있단 걸 느끼며 물었다.

그 물음에 홍범이 말했다.

"지금 깨우겠습니다. 주인님을 깨우는 게 먼저라 생각해 주인님을 먼저 깨워 드렸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는 홍범의 손을 흘긋 보았다.

'자기 손이 부서져라 내 뺨을 쳤군.'

요수공법을 익힌 내 뺨은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아마 순수한 강도로 따지면 요수인 홍범보다도 더 단단할 터였다.

홍범은 자기보다도 더 단단한 내 뺨을 손이 박살 날 정도로 후려쳐 댔던 것이었다.

퍼억, 퍽!

얼마 후, 홍범은 갑판에서 굴러다니는 중인 전명훈의 뺨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전명훈도 눈을 떴다.

"전명훈, 괜찮나?"

"어, 어어? 어어…."

그러나 전명훈은 어쩐지 멍한 기색이었고, 내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토악질을 쏟아부었던 것과 달리 굉장히 평안한 의념을 갖추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고, 굉장히 황홀하단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난 녀석이 아직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아채곤 말했다.

"홍범. 좀 더 때려라."

"예, 주인님."

그 말에 화형기 요족인 홍범이 전력으로 전명훈의 머리통을 갈겨 버렸다.

콰아아앙!

전명훈의 머리통은 당연히 폭발해 버렸고, 얼마 후 머리통을 재생한 전명훈이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제길, 말로 해라, 말로! 정신 차려 가는 중이었다!"

"…전명훈."

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는 비승 중에 '뭘' 봤는지 혹시 기억나나? 방금 의식을 잃고 말이다."

"아… 뭘 봤냐고?"

그때였다.

주르륵―

전명훈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어… 왜 이러지?"

"…?"

난 전명훈의 의념을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상실감?'

녀석은 지금, 굉장한 상실감을 앓고 있는 중이었다.

"굉장히… 황홀한 걸 본 것 같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그립다고 느껴졌어. 그래… 어린 시절, 가끔 가정부 아래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가정부 누나가 동화책을 읽어 주던 그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진정으로 행복했던 그 시절의 느낌을 얻었었어…."

그는 어쩐지 공허한 느낌으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말했다.

"뭐… 보아하니 환각이었나 보군. 아마 괴생명체 중 하나가 환술이라도 썼나 보다. 방심했던 탓이겠지. 미안하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내가 봤던 거하고는 정반대의 걸 본 거지?'

나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역겨운 걸 봤던 것만 같다.

그런데 왜 놈은 정반대의 것을 보았을까.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괴생명체의 환술이라고?'

나는 그건 왠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괴생명체가 환술을 걸었던 것이라면 우리는 전부 괴생명체한테 잡아먹히고 씨몰살을 당해, 내가 회귀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괴생명체와는 다른 뭔가가 틀림없었다.

나는 영 찜찜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꿈이 아니다.'

나는 소금 기둥에서 깨어난 이후, 사실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소금 기둥 안에서 꿈을 꾸는 건지 불안해했다.

아직도 꿈속의 꿈이라면 어쩌지?

그러나 오히려 방금 그 끔찍한 걸 보며 알 수 있었다.

'여긴, 절대 꿈속이 아니야.'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봤던 것은 감히 꿈속에 구현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꿈속에 등장하는 게 그 자체로 불경(不敬)인 무시무시한 것.

그것이 내가 봤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래로 시선을 내리지 않게 조심했다.

우리는 그렇게 며칠 동안 '아래'를 보지 않도록 조심하며 수계에서 중경계로 비승했다.

* * *

'거의 다 왔다.'

쿠구구구구!

점차 광한계에서 느껴지는 인력이 강해지고 명확해진다.

아마 조금만 더 가면 광한계의 차원 장벽이 보일 터였다.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푸확!

"…!"

나와 전명훈은 거의 동시에 힘을 끌어올렸다.

위쪽에서 거대한 괴생명체가 나타나 우리를 향해 입으로 보이는 살덩이를 벌렸다.

쿠구구구구!

끼이이이이익!

'사축기 후기 수준의 괴물이다!'

도대체 어찌한 것인지, 공허간의 공간 폭풍 사이에 숨어서 내 시야조차 비켜 나가게 하며 숨어 있다 우리를 덮친 것이었다.

'능력 한번 가지각색이군.'

난 이 괴물이 가진 기괴한 능력에 혀를 차며 무형검을 빼내 들었다.

쩌어어억!

이미 녀석의 입은 우리가 탄 배 전체를 집어삼킨 채였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잡고, 그대로 휘둘렀다.

부웅!

힘은 거의 주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괴물은 갈라지지 않았으나 녀석의 전신 곳곳에서 천겁이 폭주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터업!

마침내, 녀석이 우리를 완전히 삼켰다.

"호오…."

그리고 녀석의 체내에 돌진한 게 되어 버린 우리는 저마다 탄성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괴생명체의 체내에는 [세계]가 존재했다.

진짜 세계가 아닌, 자그마한 세계.

차라리 아공간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작은, 3천 평 정도의 세계였다.

쏴아아아아―

그곳에는 자그마한 섬이 있었다.

30평 정도 되는, 정말로 자그마한 섬.

그 섬 주변으로는 전부 바닷물이었다.

그리고 하늘은 밤하늘이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별자리들이 하늘에 즐비했다.

"도대체 뭐지, 이놈들?"

"합체기 수사와 같은 느낌이 났는데…. 합체기 수사처럼 체내에 영역이 있었을 줄이야."

쿠구구구구!

나는 하늘에서 천겁이 끓어오르는 걸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허어, 합체기 수사들이 심족의 구현을 맞는다 해도 이렇게 영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천겁이 들끓진 않는데…. 기이하군."

합체기 수사도 못 하는 걸 해내면서, 정작 가진 기운이나 힘은 천인기, 사축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이한 생물들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무색의 천겁이 떨어지며 세계 전체를 가득 채웠다.

우리는 천겁을 방어하며 기다렸고, 얼마 후 괴물의 체내에 있는 작은 세계가 점차 무너져 내려가는 걸 느꼈다.

천겁 폭탄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하는 것이었다.

쩌엉, 쩌어엉!

밤하늘이 갈라지며 그 너머로 우리가 왔던 익숙한 공허간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광한계….'

그때였다.

지이이잉―

"…??"

나는, 갑자기 내 체내에 있는 선수 진혈이 날뛰는 것을 느꼈다.

진혈이 인력에 반응하고 있었다.

'뭐지, 이건?'

진혈은 나더러 단순히 인력을 타고 가지 말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난 섭명함 역시 징징 우는 걸 느꼈다.

복제라지만 귀기가 깃든 섭명함이 울어 대며 또 다른 인력의 길을 제시하는 중이었다.

'이게 뭐지?'

나는 어느새 저 멀리,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차원 장벽이 보이는 걸 느꼈다.

저 차원 장벽을 뚫고 들어가면 중경계.

광한계였다.

아마 저곳으로 들어가면 건곤성의 비선대에서 나오게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인력들을 따라가면 건곤성의 비선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나올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한 나는 일단 건곤성 비선대로 향하기로 했다.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명훈, 연진, 홍범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진입한다!"

나는 무형검으로 차원 장벽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복제 섭명함은 마지막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박살이 나 차원 너머에서 흩어졌고, 우리는 마침내 비승을 성공해 광한계로 진입하였다.

태수(太修)의 힘

번쩍!

우리는 차원 장막을 뛰어넘음과 동시에, 익숙한 영역에 도달했다.

"여기가… 건곤성?"

전명훈은 직접 건곤성에 발을 디디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금벽호의 도원도라는 저물도 안쪽에 봉인되어 있을 당시였으니 말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바라보았고, 건곤성의 감찰 선사들이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허허, 이건 수계와 연결된 비선대인데, 지금은 승천문이 열릴 시기도 한참 지났건만 어찌…."

그리고, 그들과 내가 눈이 마주쳤다.

"으, 으음! 당신은!"

그들은 한때 봉래궁에 수배가 걸렸던 나를 알아보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건곤성 안쪽에서 거대한 의식 파동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헌원이 나를 눈치챘군.'

태산열제공은 강력하다.

하지만 나는 꽤 자신이 있었다.

"건곤성주이시자 봉래궁주이신 태수 헌원께 빈도 서은현이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금신천뢰문에서 건 수배는, 현재 금신천뢰문의 최고 어른인 여기 전명훈이 직접 해제하였습니다."

쩌어억!

허공이 쪼개지며, 그 너머로 먼지 바람이 솟구쳐 왔다.

그리고 먼지 바람 속에서 한 명의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근엄하게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상투를 튼 채 자줏빛 장포를 입은 남성이었다.

우우우웅!

'저게, 헌원!'

나는 헌원의 눈 안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빛을 흘깃 보았다.

그 빛은 그의 양 눈동자 안에서 흑백의 태극(太極)을 그리고 있었다.

'연위가 그랬지. 헌원이 최근 강력한 영안(靈眼) 신통을 얻은 것 같다고….'

나는 긴장을 끌어올렸다.

'과연, 그는 나를 어찌할 것인가….'

나는 조심스레 예를 취하며 전명훈을 바라보았다.

전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습니다. 그 말대로 서은현은 현재 금신천뢰문에서 수배를 취소한 상태입니다."

얼마간 우리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잠시 말이 없는 듯했다.

나는 헌원의 의도를 읽어 보려다가 실패했다.

'제길, 그냥 평시 상태인 줄 알았다만 영역을 몸에 두르고 있다….'

읽어 봤자 더 이상 뭔가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헌원은 그 특유의 영안 신통으로 뭔가를 읽는 중인 듯, 계속해서 우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얼마 후,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좋다. 굳이 잡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내가 노리는 건 금위이니…."

헌원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그가 뚫어 낸 공간 균열이 닫히는 듯했다.

그러나 직후.

"피해!"

나는 황급히 전명훈과 홍범, 그리고 연진을 밀어냈다.

동시에 거대한 장인(掌印)이 내게 날아왔고, 음양의 태극이 휘몰아치는 장인을 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이건…!'

느껴진다.

이 일격은, 삼태극을 꺼내지 않으면 죽는다.

콰아아앙!

나는 무형검의 기척을 최대한 숨기며 삼태극을 꺼내 장인에 대고 휘둘렀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나는 천지영기가 미친 듯이 나를 압박하는 것을 느꼈다.

"흐음…."

척, 척….

그가, 공간 균열 너머로 다시 걸어 나온다.

비산한 먼지구름 너머로, 헌원의 '눈'이 보였다.

그의 안광(眼光)에 살이 아린 느낌이었다.

그의 눈에는 방금 전과 달리 감(監)이라는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찌릿, 찌릿, 찌릿!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천기에 예지가 보였다.

굉장히 가까운 미래의 운명 속에서, 나는 헌원과 싸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만, 역시 확실해졌다. 네놈…."

우우우웅!

합체기 태수(太修)가, 힘을 쓰기 시작한다.

"심족(心族)이로구나."

"…!"

꽈아아앙!

다음 순간, 그의 손바닥이 다시금 날아왔다.

쩌어어엉!

나는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후려쳐져 건곤성을 뚫고 건곤중역의 산맥 한 곳에 그대로 처박혀 버렸다.

드드드드드드!

용맥(龍脈)이 흔들리고, 대지가 흔들리며 화산이 분화한다.

천지영기 전체가 진동하며, 헌원의 음성이 건곤중역 전체를 뒤덮었다.

[원래도 수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네놈이 만들었다는 괴뢰를 조작해 보던 봉래궁 호법들이 모조리 광증에 시달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네놈이 왜 그렇게 강했는지도 이유가 풀렸군. 천지쌍수에 이어 심족의 힘마저 몰래 익히고 있었다니….]

나는 피를 한 움큼 왈칵 쏟아 내며 똑같이 영언을 토해 냈다.

[심족의 힘을 익힌 게 뭐 어때서 그런단 말이오! 난 엄연한 천족이오!]

[그냥 천족이라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너는 인족 총연맹의 총의인 마계 정벌을 대놓고 방해했다. 거기에 광증을 유발하는 괴뢰, 심족의 힘…. 그리고 호법 중 하나이자 내 여식인 헌위에게는 혈음계의 것으로 추정되는 법술을 쓴 흔적이 있더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괴고를 심었던 흔적을 들킨 건가. 제길, 심었던 걸 뽑으면 흔적은 거의 안 남는데!'

역시 저 '눈' 때문인 듯싶었다.

[안 그래도 뇌령도 증발 이후로 천족 전체의 세력이 약해진 지금, 심족의 첩자, 혈음계의 첩자, 그리고 최근 유명한 괴군의 첩자로도 의심되는 네놈을 함부로 놔둘 수는 없겠구나.]

우우우웅!

나는 천지영기에서 느껴지는 의념의 흐름을 느꼈다.

아까는 영역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읽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영역을 펼치기 시작한지라 의념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씹어뱉듯이 외쳤다.

"웃기는군. 첩자 같은 게 아니라 원래 날 죽일 작정이 아니었나?"

[호오, 영특하구나. 사실 맞다.]

번쩍!

눈앞에서 비둔술의 둔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헌원이 내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금신천뢰문을 또다시 한번 멸문시킨 네놈과 전명훈… 너희 둘은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 거기에 금위 년의 후손까지 당당하게 데리고 온 주제에 그 년과 손을 잡고 금신천뢰문을 망하게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 가능한가?]

"잠깐! 우리는 하계에 금신천뢰문의 명맥을…."

[너는 지금 집을 짓고 살던 사람을 죽게 한 후, 그 사람의 신체 일부만을 땅 밑에 묻어 놓은 후 그 사람의 체내에 살던 미생물들은 땅 밑에 아직 살아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인가?]

"아니, 그게 무슨…."

[하계에 명맥을 이었다고? 잘했군그래. 나도 하계의 금신천뢰문이 올라오기를 4만 년 동안 더 기다리면 되는 게냐?]

부웅!

꽈아아아앙!

비둔술의 둔광으로 몸이 뒤덮인 헌원의 주먹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번쩍!

나는 어느새 건곤중역의 동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미친….'

단순히 비둔술이다.

비둔술만으로 몸을 뒤덮어 움직이는 것뿐인데, 미친 듯이 빨랐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김영훈보다는 반응할 만했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싸울 수밖에!'

나는 눈빛을 불태우며 등 뒤에 삼태극을 떠올렸다.

파아아앗!

천족의 비둔술, 요족의 육신, 심족의 가속.

모든 것을 합일하자 세상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정지된 세계에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백홍주를 꺼내 마셨다.

부우웅!

무색유리검이 나와 더더욱 연동된다.

[와라, 헌….]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헌원의 손바닥이 공간을 뛰어넘어 내 머리통을 다시금 후려쳤다.

쩌어어어엉!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그의 손바닥을 피하며 공간을 베어 나갔다.

―――――!

소리조차 따라오지 못할 속도로 움직이며, 우리 둘은 허공에서 수천 합을 주고받았다.

그가 익힌 태산열제공은 천지쌍수 공법인 탓인지 다른 천족 수도자들보다도 육체를 움직이는 빈도가 큰 듯했다.

그는 왼손에는 음양(陰陽).

오른손에는 오행(五行)의 힘을 두르고, 끊임없이 나를 몰아쳐 왔고 나는 전신에 괴군의 회로까지 두른 채로 천지심괴의 전력을 이끌어 냈다.

부웅!

쩌어어어엉!

그의 손바닥과 내 검 끝이 부딪혔다.

쿠구구구구구구!

그 충격파에, 수계 전체보다도 크기가 클 건곤중역 일대가 모조리 녹아 용암 바다가 되어 버렸다.

하계라면 진즉 세계가 몇 번이고 멸망했을 일격!

전명훈은 우리의 전투를 따라오지 못하고 연진과 홍범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나 헌원과 상당하게 싸움을 이끌어 가는 나는 정작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자… 여력이 남았다.'

그와의 대련이 길어질수록, 그와 몸을 마주 대고 합을 주고받을수록 점차 그의 의념을 읽기가 쉬워졌다.

그는 '꽤 놀라'하고 있었다.

합체기인 그를 상대로 선전하는 것이 놀라운 듯한 의념.

그것뿐이었다.

내게 진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원영기라 들었는데, 느껴지는 깨달음의 크기는 천인기로군. 그새 승급했나?]

[….]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여유가 없이 헌원과 합을 주고받았다.

그가 주먹을 뻗칠 때마다 건곤중역의 차원 자체가 우그러진다.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천 개의 공간 균열이 생긴다.

[천인기부터 합체기인 나와 이 정도로 합을 주고받을 수 있다니, 이전에 천만 년, 이후에 천만 년. 다시 없을 천재가 틀림없구나.]

[….]

[그리고, 그 천재에게 은원을 졌으니… 빨리 죽여 버리는 게 낫겠지.]

쩌어엉!

헌원의 발차기가 나를 노렸다.

무(武)의 관점에서 보면 절도는 있을지언정 빈틈이 많았지만, 발차기에 담긴 [힘] 그 자체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빈틈을 알고서도 반격할 수 없었다.

'제길!'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그의 발착기를 막아 냈다.

쿠구구구구!

그것만으로 나는 건곤중역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다시 밀려났다.

쉬이이이이―

분명 팔을 들어 막았건만, 내장이 진탕된 기분이었다.

나는 팔을 바라보았다.

헌원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겁천, 지족의 방어력, 방어법술까지 전부 펼쳤는데도 흔적이 남았다….'

문제는 저게 전력이 아니란 것이다.

[자, 그럼 잘 놀았다. 이제 잘 가거라.]

쿠구구구구!

내 주변의 천지영기가 움직이더니 나를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 기술을 쓰려는 건가!'

나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며 음양오행의 주박이 나를 완전히 잡기 전에 빠르게 그 주박에서 빠져나갔다.

우우우웅!

그리고, 나는 저 위쪽에서 공간을 접어 달려온 헌원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귀찮군. 얌전히 당해 주면 안 되나?]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공격기는 알고 있소. 태산열제의 기술을 쓰면 상대가 누구든 뒈져 버리겠지. 하지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기술 아닌가?]

순수한 속도로, 헌원은 절대 김영훈의 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김영훈의 속도에도 반응했던 나라면 충분히 헌원의 기술은 피할 수 있다.

[맞다.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그렇게 생각했다.

쿠구구구구구!

"…어?"

나는, 건곤중역 전체에, 음양의 주박이 나타난 걸 보았다.

[그럼 잘 피해 봐라.]

우우우웅!

헌원은 자기 자신을 주박 안에 넣었다.

음양오행이, 천지만상을 뒤덮었다.

[태산(太山).]

"미친!!!"

나는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건곤성으로 달려갔다.

'건곤중역 전체가 영역권이라고!?'

광한계는 수계보다 아득할 정도로 넓다.

그리고, 건곤중역 역시 수계보다도 한참은 컸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한세월이 걸린다.

'잘못 생각했다.'

헌원과 맞서면 안 됐다.

처음부터 미친 듯이 도망쳤다면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터였다.

헌원은 건곤중역을 떠나지 않는다 했으니까!

나는 마침내 건곤성에 도착해, 홍범과 연진을 보호하는 전명훈을 포착했다.

"전명훈!!! 홍범!!! 연진!!!"

꽈아아아앙!

도착하자마자 비선대를 내리친 나는, 차원 장벽을 우그러뜨렸다.

"나가! 당장 나가!!!!!!"

그리고, 헌원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열제(裂帝).]

"나가아아아아!!!"

꽈아아아아앙!

차원에 구멍을 낸 나는 전명훈과 홍범, 연진을 간신히 밀어 넣고 그들을 광한계 바깥으로 쫓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나는 간발의 차로 헌원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이 빛에 휩싸였다.

* * *

여긴 어디지.

나는 문득, 내가 시커먼 어둠 가운데에 서 있다는 걸 느꼈다.

아니, 아니었다.

이곳은 허공간이다.

'아… 그런가.'

헌원의 공격에, 건곤중역 전체가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나는 이 허공간 주변에 몇몇 개의 공령지(空靈池)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군. 비선대의 순수한 원형인 건가….'

그리고 그중 한 공령지가 출렁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다시 녀석들을 내보낸 공령지인 듯싶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예 감각이 없다.

'아니… 아니군.'

손발에 감각이 없는 게 아니었다.

'손발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을 익힌 육신 전체가 떡 반죽처럼 짓이겨져서 공간을 둥둥 떠다닌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통만이 그나마 형태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곧 숨이 끊길 것 같았다.

'금단도… 원영도… 다 깨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혼과 연결된 무색유리검은 전명훈과 함께 광한계 바깥으로 던져서인지 멀쩡한 것 같았다.

파아아앗!

눈앞에, 헌원이 나타났다.

헌원은 진심으로 놀라운지 탄성을 터트렸다.

[놀랍군. 본좌의 태산열제를 맞고도 형체를 유지하다니…. 엄청난 위업이로구나.]

그는 양손에 흑백의 기운을 띄우며 말했다.

[지금껏 어떤 천인기도 내 태산열제는커녕, 내 일격을 맞으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 하지만 너는 태산열제를 맞고도 목숨을 부지하니… 그 

업에 경의를 표하마.]

우우우우웅!

죽어 가는 나를, 음양오행의 주박이 묶는다.

[잘 가라, 금신천뢰문을 지키지 못한 실패자 놈들.]

파아아앗!

그는 냉막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양손을 뻗었다.

[태산(太山).]

'지키지… 못했다고?'

과연 그랬는가?

그랬다.

금벽호, 금소해, 진휘, 홍수령, 금민, 금진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던가.

나는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씨익.

"…그들에게… 부끄럽지는 않다."

금신천뢰문은 맥(脈)이 남아 역사가 이어지고, 멸문을 피했다.

그렇게, 운명을 이겼다.

"이번 생(生)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번 생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헌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열제(裂帝)!]

새하얀 빛이 세상을 덮었다.

그것이, 나의 열여덟 번째 회귀(回歸)였다.

18회차의 첫날

부스스―

나는 눈을 뜨며 생각을 정리했다.

"서은현."

'이번에도 죽었는가….'

"서은현."

좋은 삶이었었다.

"서은현!"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어이, 서은현!!!

그리고.

나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

"…전명훈?"

나는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전명훈.

홍범.

연진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곳은 생전 처음 보는 별자리들이 펼쳐진 기이한 밤바다 상공.

그 밤바다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섬이 하나 둥둥 떠 있었고, 하늘은 점차 천겁으로 차오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

나는 당황스러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엥? 뭘 말하는 거냐, 서은현?"

"주인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부디 말해 주십시오."

전명훈과 홍범이 내게 걱정스러운 듯한 눈길을 보내 왔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회귀 시점이… 또… 한번… 고정되었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차원과 차원을 이동하는 것도.

하계에서 상계로 비승하는 것도 이전에 전부 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회귀가 고정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정된 것이다.

'왜???'

나는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꽉 찰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은….

'그 괴생명체의 뱃속?'

하필이면 고정된 곳은 또 왜 이곳이란 말인가?

'아니, 차라리 좋긴 하군.'

나는 일단 빠르게 머리를 식혔다.

너무 혼란스럽고, 감정을 관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코앞에 헌원의 위험이 있었다.

쿠구구구구!

빠르게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우리는 광한계를 앞두고 인력의 흐름에 올라탔다.

이대로 가면 또다시 헌원과 맞닥뜨리게 될 터였다.

헌원의 코앞에서 회귀가 고정된 것이 아닌 게 어딘가.

나는 광한계로 진입을 코앞에 두며 고민했다.

'나를 이끄는 인력은 셋. 비선대의 인력. 섭명함의 인력. 선수 진혈의 인력.'

비선대에는 헌원이 버티고 있다.

하지만 섭명함과 선수 진혈은… 아무것도 모른다.

'일단 선수 진혈은… 가지 않는다.'

선수(仙獸)와 연관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에 조심하기로 했다.

흑룡 진혈은 물론이고, 오혜서의 유리공작의 빛에 당했던 기억 때문에 괜스레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섭명함이 이끄는 인력을 바라보았다.

'이쪽은 명귀계와 관련된 건가? 아니면 흑색귀골곡?'

어느 쪽이든 조심스럽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비선대의 인력을 잡았다.

'됐다. 두 곳에 대해서는 너무 아는 게 없고, 금위의 말에 따르자면 건곤중역만 벗어나면 헌원이 쫓아오지 않으니 도망칠 수 있다. 그러니 일단은 가능성이 높은 비선대 쪽으로 가 보도록 하지.'

그리고 나는 품속에서 살덩이를 하나 꺼내 들고 섭명함의 인력이 이끄는 곳을 향해 던졌다.

우우웅!

원유였다.

나는 원유의 몸뚱어리에 기괴고를 박아 넣고, 차후에 녀석이 저 인력을 통해 다른 곳으로 들어오면 그 위치를 파악해 보기로 했다.

'뭐, 이만하면 지금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

나는 전명훈과 홍범, 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광한계에 진입하면, 전력을 다해 건곤중역을 벗어난다. 알겠지?"

"응? 어째서지?"

"일단 시키는 대로 해라. 아마 높은 확률로 헌원이 눈이 뒤집혀서 우리를 쫓아올 테니 말이다."

"흠, 네 수배 때문인가?"

"내 수배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정신병 때문이겠지. 어쨌든 금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건곤중역 너머로 나오지 않을 테니 빠르게 도

쳐야 한다."

"흠, 차라리 우리가 네 도원도에 들어갈 테니 너 혼자 빠르게 도망치는 게 나을 거 같군."

나는 영수나 사람을 담을 수 있는 저물도인 도원도를 미리 펼쳐 놓고, 차원 장막의 충격에 대비했다.

콰아아아앙!

우리는 차원 장막을 뛰어넘었고, 전명훈은 내가 신호를 준 즉시 비선대에 발이 닿자마자 홍범과 연진을 잡고 내가 펼쳐 둔 도원도 속으로 

어들었다.

나는 도원도를 접은 후, 사축기 감찰 선사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도 전.

빠르게 삼태극을 띄운 후 정지된 세계에 진입하였다.

그 상태에서 나는 그대로 발을 굴렀다.

파아아앙!

그대로 미친 듯이 건곤성을 벗어나.

규백이 내게 예전에 알려 준 하늘길을 통해 건곤성의 결계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5만 리만 더 날아가면 건곤중역을 벗어날 수 있다.'

순식간에 1만 리를 넘어가고, 2만 리, 3만 리 지점을 벗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4만 리를 넘어, 1만 리만을 남겨 뒀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이런, 헌원이 온다!'

나는 저 뒤쪽에서 느껴지는 저릿저릿한 살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

갑자기 내 앞의 거리.

그러니까 건곤중역의 끝과 나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뒤쪽에서 헌원이 나를 쫓아오는 걸 보았다.

척, 척, 척!

헌원은 비둔술을 쓰고 있지 않았다.

단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공간이 접히고 있었다.

그는 축지법을 사용하며 나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저게 합체기….'

내가 가진 건 합체기 급의 전투력일 뿐.

합체기 수사가 가진 '공능' 자체는 가지지 못했다.

합체기 수사부터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휘어 버리는 게 가능하다더니, 이런 식으로 나를 묶어 두려는 모양이었다.

부웅!

나는 눈앞의 휘어진 공간을 향해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검을 내리쳤다!

부웅, 콰아아앙!

그대로 왜곡된 공간이 통째로 찢어발겨지며 허공간이 드러났다.

나는 허공간으로 진입해 미친 듯이 건곤중역의 끝을 향해 달아났다.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음양(陰陽)의 형상을 담은 거대한 손바닥 모형의 기파(氣波)가 날아오고 있었다.

난 맞서려 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일격을 피하며 마침내 건곤중역의 끄트머리에 거의 도달했다!

'이제!!!'

그때였다.

부우웅!

불길한 느낌이 등을 핥고 지나갔다.

나는 도저히 그 흉(凶)한 기운을 무시할 수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흠칫 놀랐다.

우우우우웅!

헌원을 중심으로, 원구형의 차원 장막이 생겨나며 일대를 뒤덮으며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헌원이, 자신의 영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나는 저 영역에 잡아먹히면 건곤중역을 벗어나든 말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으며 가속을 더더욱 심화시켰다.

머리가 박살 날 것 같다!

당장이라도 과열된 상단전이 폭발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도리어 전신의 기를 격발시키며 더 속도를 늘렸다.

쿠구구구구!

그러나 차원 장막과 한없이 닮은 그의 영역은 어느새 내 발끝을 집어삼킬 듯 가까이 다가왔다.

'더 빨리!'

그리고 어느 순간!

파아아앗!

나는 마침내, 내가 건곤중역을 벗어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맥의 기질이 달라졌다!'

범인들은 영토로 영역을 나눈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용맥이 가진 기질에 따라 서로의 영역을 나누고 지역을 분리했다.

그리고, 건곤중역 특유의 기운이 흐르는 용맥 지대를 마침내 벗어났다!

'이제, 헌원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나는 환호의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금위의 말마따나 헌원의 영역은 건곤중역 바깥으로 넘어오지 않고 그 안쪽에서 꿀렁거리고 있었다.

'이제 헌원에게서 벗어났으니….'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우우우웅!

나는, 헌원의 영역이 줄어드는 걸 보았다.

"…!"

그의 영역은 작아지고 작아져, 헌원의 몸 크기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줄어든 헌원의 영역은 정확히 그의 몸 형태의 맞게, 마치 헌원에게 옷처럼 입혀졌다.

나는 어떠한 불길함이 들어 멈추지 않고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역을 몸에 '입은' 헌원은 굳은 표정으로 건곤중역 바깥으로 '나왔'다!

'금위, 이 쓸모없는 인간 같으니!'

안 나오긴 뭘 안 나온단 말인가!

멀쩡히 나오잖나!!!

파아아아앗!

헌원은 비둔술을 쓰며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합체기 태수의 비둔술인 탓인지, 그 속도만 해도 삼태극을 띄운 나를 빠르게 쫓아오고 있었다.

심지어 비둔술은 애당초 장거리 이동용이기에 일직선으로 도망치는 나와의 거리가 점차 좁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 조금만!'

나는 전신의 힘을 쥐어짜 내며 그에게서 도망쳤다.

무수한 산과 강을 넘고, 기이한 늪으로 된 지역을 넘어, 설산과 용암지대를 넘었다.

헌원은 약 반나절 간 내리 미친 듯이 나를 쫓아왔으며, 어느덧 그와 내 거리가 10리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제길, 제길, 제길!!!'

그리고,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우뚝!

계속해서 나를 쫓아오던 헌원이,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섰다.

'더, 더 쫓지 않는 건가!?'

그러나, 나는 그의 양손에 흑백의 선마기가 감도는 걸 보고 이를 악물었다.

'공격을 날린다!'

쿠구구구구!

천지의 음양의 기운이 맴돈다.

그리고 오행의 기운이 오방을 틀어막는다.

[태산!]

"흐아아아아아아!!!"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음양오행의 옥을 향해 무색유리검을 들고 짓쳐들어갔다.

[열제!]

쿠과과과과광!

천지가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나는, 간발의 차이로 음양오행의 옥에 구멍을 내고서 간신히 태산열제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건곤중역 바깥인 탓인지 공격 범위 자체가 많이 줄었고, 음양오행의 옥이 가진 내구도가 상당히 약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아아아앗!

나는 미친 듯이 계속 도망쳤고, 헌원이 공격을 날린 이후로 더는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 다행이다….'

아무래도 방금 날린 공격은 나를 더는 못 잡을 것 같으니 오기로 날린 것 같았다.

* * *

쿨럭, 쿨럭쿨럭!

뚝, 뚝뚝….

합체기 태수, 헌원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금위… 그 요괴 놈만 아니었어도…."

치이이이이―

그가 흘린 피 안쪽에서, 음양이기가 마구 꼬이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건곤중역으로 되돌아가야겠군. 기혈이 다시 꼬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헌원의 눈이, 서은현이 도망친 곳을 바라보았다.

"저놈은 수배를 다시 내려야겠구나."

꾸드득!

헌원이 허공을 잡고, 그대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건곤성에 그가 심어 두었던 좌표와 그가 연동되며 공간이 휘기 시작했다.

꾸그그그그극!

퍼엉!

공간이 우그러지며, 건곤성의 좌표와 연동되어 헌원이 서 있는 곳과 건곤성 사이에 공간 문이 생겨났다.

헌원은 건곤성으로 돌아가 건곤중역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외쳤다.

그의 음성이 천지영기를 진동시키며 건곤성 전역에 울려 퍼졌다.

"건곤성 사축기 감찰 선사들은 들으라. 모두 잠시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내가 만들어 둔 공간 문으로 들어가 건곤성에 신분 등록을 거부하고 도망친 도주자를 잡아 오라. 심히 악질적인 놈이니, 반항한다면 목숨을 빼앗아도 좋다!"

그의 명에, 건곤성의 사축기 감찰 선사 36인 중 15인이 서은현을 잡으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헌원은 생각했다.

'제아무리 합체기 태수인 내게서 도망쳤다지만, 느껴지는 경지 자체는 천인기였다. 그만큼이나 기운을 빼 놨으니 천인기 주제에 이만한 사축기 수사들은 절대 이기지 못하겠지. 움직일 수 있는 거리에 제한이 있는 나에게서 도망치는 거야 목숨을 태우면 가능하다고 쳐도, 동급 수사가 아닌 이상 그 정도 전력은 절대 막지 못할 테니….'

심지어 도망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그에게서 도망치며 이미 진력이 잔뜩 빠졌을 테니까.

헌원은 곧 그의 앞에 끌려올 서은현을 기대하며 가부좌를 틀고 운기요상을 시작하였다.

* * *

파아아앗!

얼마나 도망쳤을까.

이제는 헌원은커녕 헌원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멈출 수 있었다.

'후우… 드디어….'

나는 그렇게 한 후 자리에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위기에서 벗어나자, 동시에 그동안 묻어 두었던 당혹감이 가슴 속에서 들불처럼 번져 왔다.

'왜… 도대체 왜 회귀 시점이 고정된 거지?'

나는 머리를 굴려보다, 저번 시점에서의 회귀 고정과 이번 시점에서의 회귀 고정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수계.'

그랬다.

회귀 시점의 고정은 수계(首界)에서 비승한 직후로 고정이 되었다.

두 번이나 이런 일이 일어졌다면 수계와 회귀 시점의 고정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회귀가 고정되었다는 걸 생각하니, 나는 다시금 온갖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 그렇구나.'

주르륵….

진휘, 홍수령 등 소중했던 이들

금벽호, 금진찬, 금소해 등 구할 수도 있었던 이들.

이제는,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한다.

제아무리 그들이 이전 생과 다른 이들이라도.

제아무리 내가 그들을 다른 이들이라고 인식한다 하더라도.

은연중에 그들을 동일시했던 것일까.

나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감사했습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

나는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고정되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있는 힘을 다해 해 온 모든 행위들이 단순히 시간의 공허 속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게 되

다는 뜻이니까.

나는 마음속 깊이 이미 죽은 이들에게 애도와 슬픔, 미안함을 전했고, 동시에 내가 살린 이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마음을 관조할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열댓 명의 수도자들이 내 주변으로 날아와 나를 둘러쌌다.

"네 이놈. 네가 살던 세상에서는 천인기라고 거드름 피워도 모두가 한발 물려 줬겠지만, 감히 광한계에 와서도 이런 난동을 피워!"

"순순히 포박되어 따라와라, 만약 반항한다면 무력으로라도 제압할 것이야!"

"태수님께는 어찌어찌 모든 걸 다 쥐어짜 내 도망친 모양이지만, 애당초 건곤성주께서는 건곤중역을 떠나시면 중태가 깊어지시기에 일부러

너를 쫓지 않은 것이다."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목표를 정했다."

"음?"

"뭐라는 것이냐?"

나는 곰곰이 팔짱을 낀 채 감정을 정리했고, 목표를 정리했다.

'이번 생의 목표는… 태산열제공을 손에 넣는 것. 그리고… 전명훈을 안정화시켰으니, 이제는 현석 형님을 구하기 위해 창호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창호자는 결국 혈음계 존자에게 죽게 된다.

그러니 창호자가 죽지 않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창호자가 혈음계 존자와 마주치지 않게 하면 된다.

'진마계와 인족의 전쟁은 곧 있으면 끝난다.'

진마계 태수들이 반격을 시작할 테니, 인족이 형편없이 밀릴 터였다.

오현석은 현재 진마계에 있을 테니 광한계로 다시 불러들이면 될 터였다.

'그리고, 이번 생에는 오래도록 생존하며, 강민희의 상태, 그리고 김연의 정신 관리, 그리고 서휼의 계략도 할 수 있는 한 살펴보자.'

태산열제공.

창호자의 생존으로 인한 오현석의 정신 붕괴 방지.

그리고 장기간의 생존이 이번 생의 목표인 것이었다.

나는 나를 압박하는 사축기 15명을 올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현석을 불러들이려면 인족 총연맹의 힘이 필요할 텐데… 인족 총연맹에 힘을 행사하려면 우선…."

나는 입에서 무색유리검을 꺼내며 히죽 웃었다.

"명성이 조금 있어야겠지?"

천족 합체기 태수들이 천벌의 주인의 여파로 전부 앓아누운 지금.

당장 태수급 전력을 보여 준다면, 헌원과의 은원이고 뭐고 총연맹은 나를 등용하려 할 터였다.

"이 시건방진 놈. 태수께선 반항하면 죽여도 된다 했으니…."

콰아앙!

한 명의 사축기 수사가 손가락 끝에서 쏘아낸 광탄(光彈)이 나에게 쏘아졌다.

약해 보이지만 일반적인 천인기 수사라면 그대로 피곤죽이 돼 죽을 법한 거력이 담긴 일격!

그리고, 나는 그를 향해 무색유리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공간이 쪼개지며, 광탄과 함께 광탄을 쏘아 낸 사축기 수사.

그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검귀(劍鬼)

반으로 갈려 버린 사축기 수사는 자신이 뭘 당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

그러나 1초 후.

"끄아아아아아!"

그는 반으로 갈라진 자신의 몸뚱어리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꾸그그그극!

사축기쯤 되면 생명력이 어마어마해지는 만큼 금단을 쪼개도 다시 붙어 버린다.

사축기 수사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법은 단 한 가지.

금단 안쪽에 잠들어 있는 원영.

그 원영의 또 안쪽에 있는 천원(天圓)과 지방(地方) 중 하나를 건드려야 한다.

"이, 이놈!"

내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듯 일곱 명의 사축기 수도자들이 결인을 맺으며 나를 압박해 왔다.

하지만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무색유리검을 들어 올렸다.

"이전까지는 심족인 걸 늘 숨겨야만 했지."

광한계에서 심족은 경원시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데… 이제 생각을 좀 해 보니, 더 이상 너희 따위에게 심족인 걸 숨길 필요가 있을까?"

꽈과과과과광!

그대로 검을 내리친다.

한 줄기 무색(無色)의 천겁(天劫)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그대로 대지가 반으로 갈려 나간다.

5천 리에 달하는 길이의 계곡이 생겨났으며, 벽에는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렸다.

이 일격을 맞은 사축기 수도자들은 그대로 썰려 나갔다.

"이런 미친! 심족 놈이다!"

"구현 4단계의 심족 놈이다!"

"모두 합공해!!!"

그러나 나는 기겁하며 달려드는 그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틀렸어."

쿠구구구구구!

전신에서 정순지력이 마구 들끓어 올랐다.

요력(妖力)이 마구 흩날리며, 전신에 힘을 공급한다.

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합공했어야지. 몇 놈이 판정패 당해 버린 지금이 아니라."

콰광, 콰과과과광!

단악검법의 1초부터 12초까지의 초식이 마구 펼쳐졌다.

1초부터 12초까지의 초식은 검술의 '기본'에 대한 초식.

13초부터 24초까지의 초식은 '검기'와 '의념' 그리고 '힘의 제어'에 관한 초식.

그리고 내가 만들기 시작한 25초부터 36초까지의 초식.

나는 아직 그 초식들에 대한 기준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사축기 수사들을 상대로 전력을 펼치며, 오늘에서야 단악검법 후반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천, 지, 심 삼재(三才)를 통합하는 초식.'

그것이, 단악검법 후반부에 대한 정의가 되리라.

13명의 사축기 수도자들이 각자 비둔술을 펼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느리다.

부웅, 붕, 붕, 붕붕붕붕붕!

나는 삼태극을 띄운 채 춤을 추며 그들에게 맞서 갔다.

보탑 법보가 하늘에서 나를 내리찍는다.

도장 법보가 양쪽에서 나를 덮쳐 온다.

반지 형태 법보가 크게 늘어나며 나를 조여 온다.

거울 형태 법보를 든 수사 한 명이 자기 자신을 법보에 비췄다.

그러자 그와 똑같이 생긴 분신이 거울에서 튀어나오더니 합격진을 펼치며 덤벼든다.

방울 형태 법보를 한 수사가 흔들자, 방울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열염(熱炎)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을 덮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수사가 부채를 부치자 회오리바람이 사방에서 난무하며 염열과 더해져, 화염의 회오리를 만들어 내 나를 덮친다.

꽈과과과광!

* * *

서은현과 사축기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반경 3천 리에 달하는 범위가 그대로 충격파에 휩쓸려 지진해일이 일어났다.

서은현을 잡으러 온 이들은 건곤성의 감찰 선사 중에서도 건곤성에서 난동을 피운 이들을 잡아들이는 추포 선사들.

간혹 하계에서 규격 외의 실력자들이 올라오거나, 공허간의 괴물들이 광한계에 진입해 건곤성을 탈출해 도주하면 쫓아가 추포하는 임무를 맡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생전 처음으로 15명이나 되는 추포 선사들이 합격했음에도 잡을 수 없는 괴물을 맞닥뜨렸다.

콰앙, 콰아아앙!

술법이 박살 난다.

귀한 재료를 쏟아부어 만든 법보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간다.

"크아아아아악!"

한 명 한 명이 수천 년을 살아온 사축기 동포들이 일검(一劍)에 반으로 갈라져 떨어져 나간다.

"막아!!!"

"저 괴물을 잠시라도 막아라!!!"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어떤 방어법술도, 어떤 법보도.

'막으려' 하는 그 모든 것을 유령처럼 통과해서 그들을 베어 버렸다.

회피도 불가능했다.

검을 피했나 싶으면 무색무흔무형(無色無痕無形)의 뭔가가 쥐도 새도 모르게 형태를 마구 바꾸며 그들을 쫓아와 갈랐다.

"모, 못 막아!"

"끄아아아아!"

어느덧 15인으로 왔던 추포 선사들은, 9인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모두 3번 진을 펼쳐라! 대열을 다시 갖춰!"

콰득, 콰득, 콰득!

9인의 추포 선사들이 일제히 손가락을 잘랐다.

그들의 잘린 손가락에서 그들의 정혈(精血)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뭉쳤다.

"박(縛)!"

추포 선사의 우두머리이자 사축기 대원만 수사인 한조는 남은 8인의 수사들을 이끌며 외쳤다.

"박혼쇄결진(縛魂鎖結陣)을 펼쳐라!"

촤르르륵!

사축기 수사들의 생명력과 연결된 정혈이 허공에서 사슬을 형성했다.

철컹, 철컹, 철컹!

동시에, 9개의 사슬은 일시에 공간을 꿰뚫고 날아가 서은현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콰드드드득!

한조는 식은땀을 흘리며 외쳤다.

"놈을 잠시 잡았다!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라!!!"

그와 동시에 추포 선사는 일제히 결인을 다시 맺었고, 각각 선사들의 본명법술들이 한 번에 서은현에게 쏟아져 내렸다.

굉음이 울리며 빛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듯하다.

그들이 공격을 날린 자리에는 어느덧 거대한 공간의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쿠구구구구―

얼마나 일제히 서은현에게 폭격을 퍼부었을까, 잠시 소강 상태가 일어났다.

한조는 침을 삼켰다.

'다들 연속으로 퍼부을 수 있는 법력에 한계가 왔다. 이 정도라면 일반적인 사축기 수사라도 찌꺼기조차 남기 힘들다.'

그는 희망적인 안색으로 안쪽에서 풍기는 시커먼 연기 안쪽을 살폈다.

"해, 해치웠나?"

그리고, 연기 안쪽에서 새하얀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틀렸어.]

오싹, 오싹!

"이런 미친! 전원 모두 재폭격을 실시해라!"

그리고, 명령을 내린 한조의 뇌리에 어렴풋한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걸 버텼다고? 동급의 사축기 수사라도 힘들다. 사축기 대원만 중에서도 특별한 녀석이 아니라면 힘들어! 그런데 뭐냐, 저 멀쩡한 목소리는!'

사축기 대원만 수사도 맞고 견디기 힘든 폭격을 맞고서도 살아 있다.

그는 무엇을 뜻하는가.

아주 간단했다.

저기 저 괴물은, 어쩌면 합체기 태수(太修) 급의 괴물이다.

[나를 잡은 게 아니라….]

철컹, 철컹, 철컹!

박혼쇄결진에 묶인 서은현이 연기 속에서 이를 드러내며 말한다.

[너희가 잡힌 거겠지.]

그리고, 그의 팔이 연기를 가르며 검을 휘둘렀다.

"피해!!!!!"

한조의 다급한 음성이 사방으로 퍼졌다.

콰아아아앙!

사축기 수사들의 몸통이 퍽퍽 갈라져 갔다.

"흐아아아아아!"

한조의 주변으로 네 개의 축이 떠오르며, 기축 장막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의 장막은 너무나도 쉽게 갈라져 버렸다.

한조는 시커먼 연기에서, 무색(無色)의 검(劍)을 잡고 휘두르는 서은현을 보며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검(劍)… 귀(鬼)…."

그리고, 그 말은 순식간에 추포 선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 나갔다.

"거, 검귀(劍鬼)!"

"검귀다! 검귀야!"

콰아아아앙!

마침내, 추포 선사들의 통솔자나 다름없던 한조가, 서은현.

아니, 검귀(劍鬼)의 무자비한 검에 의해 반으로 잘려 나가며, 남아 있는 추포 선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도, 도망쳐!"

"괴물이다!"

"흐아아아아아!"

"서,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살아남은 4인의 추포 선사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고, 그제야 서은현의 검은 무자비한 검무를 멈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