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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지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다행히 잠깐의 소란에도 찻물은 쏟아지지 않았는데, 아스터 역시 따라서 찻물을 머금으려다 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

먼지가 너무 많았다.

어쨌든 헨지의 말은 이거였다.

"솔직히 별 기대는 없었습니다. 뭐, 흑백 지대 부랑아야 다 거기서 거기고. 소가주야 워낙 어리니 사람 보는 눈이 없을 수도 있죠."

그래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는데, 마침 소문이 돌더라.

"가모께서 아카데미 입학을 권유했다라... 그런데 아십니까? 이건 알프레도가 청한다고 한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소가주의 옆에 둬도 괜찮을 만한 인물이다.

그런 판단이 선 거라고.

헨지는 계속해서 제 생각을 털어놓았다.

"가모의 눈은 정확합니다. 또한 소가주에 대한 사랑 역시 유별나죠. 웬만한 기준에서는 그 눈에 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흑백 지대 부랑아를 곁에 둔다?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마침...."

"못난 동생이 나한테 처맞고 왔다... 입니까?"

"...반말을 하든 존대를 하든 둘 중 하나만 하죠, 아스터 군."

"그럽시다."

아스터는 말을 편하게 했다.

헨지 쪽에서 편하게 하라 했으니, 더 편한 쪽을 택했다. 물론, 편하게 하라 한 적은 없었지만 고르라 했으니 편한 쪽을 고르는 게 인지상정.

"큼, 흠. 어쨌든, 마침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긴 겁니다. 동생이 처맞았으니, 형이 불러서 당사자와 면담을 한다. 개연성이 있죠."

"개연성이 있다라...."

아스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학관의 부관주쯤 되면, 제아무리 소가주의 손님이라 해도 얼굴 정도는 비출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손님의 신분이 어떠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직접 보고 싶거나, 부르고 싶으면 명분 따위야 얼마든 만들 수 있었다.

'한데....'

굳이 머저리 동생을 빌미로 삼았다?

'마침이라 한 걸 보면, 그저 때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뉘앙스가 어째....'

본인이 먼저 나서기 꺼려지는 상황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헨지는 빙긋 웃는 얼굴로 아스터를 눈에 담았다.

"아스터 군의 생각이 맞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

헨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그 이마에 힘줄이 불룩 솟았지만,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라.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먼저 나서기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아, 가문 내의 알력 다툼은 아닙니다. 블란도가는 끈끈해요."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집단인지라 어느 정도의 알력 다툼은 있었지만, 블란도가의 결속은 그 어느 명가보다도 위에 있었다.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가문을 위하는 방법이나 그 태도가 달라서 생기는 마찰이랄까.

"사실 저는 지금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감시라면...."

"혹시 데큘란가를 아시는지요?"

헨지는 그렇게 묻고는 아스터를 살폈다.

'모르진 않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아스터가 비록 상식이나 교양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흑백 지대 부랑아.

먹고 살기 급급한 그곳에서 대륙의 정세까지 어찌 신경 쓸까. 저 멀리 있는 명가보다는 골목에서 어깨에 힘 좀 주는 왈패 무리가 더 무서운 이들인데.

그런 생각으로 아스터를 바라봤는데.

"데큘란이라.... 모르진 않지."

헨지가 기묘함을 느낀 건 그즈음이었다.

'...?'

모르진 않다고 대수롭지 않게 답하면서도 그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는다.

딱히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살기를 띤 것도 아니고, 그저 눈빛이 무미건조하게 바뀌었을 뿐. 하지만 그게 이상했다.

그저 듣기만 했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리 없다. 그렇다고 원한이나 악감정이 있다 하기에는 또 너무도 담담했고.

'뭔지 모르겠군요.'

헨지는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다만 이건 확실했다.

그 눈빛의 의미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속에 내포된 감정은 굉장히 혼돈스러운 것.

진즉에 폭발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감정의 다발을 억누르고 옭아매, 끝내 본인조차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뒤튼 느낌이랄까.

마치... 그래.

십수 년 전의 자신처럼 말이다.

"한데, 왜?"

헨지는 아스터의 목소리에 상념을 접었다.

그리고 전과 같은 그림처럼 선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데큘란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

"블란도가 어딘가에 세작을 심어 놓은 것 같은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먼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스터는 빤히 헨지를 바라봤다.

'뭔....'

미친놈이라 그런가.

남들이라면 웃으면서 하지 못할 얘기를 담담히 웃으면서 지껄인다. 그 꼴이 꼭 '아, 어제는 비가 내리더군요.'하는 느낌.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왜지?"

"아, 그 이유 말입니까?"

헨지는 빙긋 웃었다.

"뭐, 죽어도 상관없다 하셨으니 속 시원하게 털어놓겠습니다. 물론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 아스터 군을 해칠 생각이 없어졌어요. 적어도, 저는 말이죠."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죽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

하나 아스터의 눈동자는 심드렁했다.

헨지는 그 심드렁한 눈빛에 더 가뿐하게 말을 지껄일 수 있었다.

"사실은 제가...."

"한 번에 말합시다, 좀."

"아, 죄송합니다. 사실은 제가 지금 데큘란가의 기본공이라는 천원공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한데 그게 그만 들킨 모양입니다. 아, 천원공은 아시죠? 데큘란가의 혈족들만 익힐 수 있는 비전인데, 우연한 경로로 입수할 수 있었죠. 그런데...."

"잠깐."

아스터가 헨지의 말을 끊었다.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뭘 연구했다고?"

"천원공이요."

"...입수 경로가?"

"우연한 기회...라고밖에 설명을 못 드리겠군요. 뭐, 이보다 더 큰 비밀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아스터는 헨지를 빤히 바라봤다.

이런 생각이었다.

"왜 죽었어야 하는 놈이 살아 있지? 블란도가 입장에서 연구를 했다면, 당연히 그 파훼법을 연구했을 텐데...."

"하하, 아시는군요? 데큘란가의 행사가 좀 뒤가 없죠. 파훼법만 연구했다면, 제가 블란도가 부관주라 해도 당연히 절 죽이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빙글빙글 웃는 헨지.

그는 빤한 눈으로 아스터를 바라봤는데, 그 투가 꼭 맞춰 보라는 듯했다.

아스터는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 냈다. 그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갔는데, 문득 뇌리로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파훼법'만' 연구한 게 아니다?"

"네, 맞습니다. 처음에는 파훼법만 연구하려 했는데, 이거 참. 보이지 뭡니까?"

헨지가 초점이 반쯤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옛일을 회상하는 듯했는데, 그 입에서는 홀린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데큘란가 모든 비전의 뿌리라는 천원공. 그 오랜 역사 속에서도 개량되지 못한 그 자체로 완벽한 비전이죠. 그런데 보였습니다."

헨지의 초점이 휙 하고 돌아왔다.

"그 보완법이."

"...."

"멈춰야 된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더군요.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길이 있는데, 어찌 그 길을 안 갈 수가 있을까요"

그는 아스터를 바라봤다.

"그래서 걸었습니다. 아스터 군이라면... 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죠?"

"...."

아스터는 퀭한 눈동자로 헨지를 바라봤다.

어찌 자신이 광인의 마음을 이해할까. 그 마음은 같은 광인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나 헨지는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 정도 수준은 미쳐야 하는데, 과연 대륙에 그런 자가 몇이나 있을까.

'이해하지 말자.'

왠지 모르게 이해되려 하는 것 같아서, 애써 생각을 지웠다.

다만―

'옘병....'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데큘란가가 블란도를 멸망시켰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갔어. 치유의 빛? 치유 비전? 그걸 바랐으면 진즉 붙었지.'

블란도가 차지하고 있는 막대한 영토를 바랐다 해도, 말이 안 됐다.

비록 데큘란이 승리한 전쟁이라지만 그들도 많은 걸 잃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하고는 전쟁을 할 이유가 없었던 터라....

'적당히 그렇게 이해했는데.'

이거면 이해할 수 있었다.

천원공의 보완법

그것이 블란도가에 있었다 하면... 데큘란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일이 더 이상한 거였다.

◈ 13화. 내가 왜 친구지?

"...."

나는 팔짱을 낀 채 탁자를 눈에 담았다.

두 개의 찻잔.

반쯤 비워진 헨지의 찻잔 앞으로는 내 찻잔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위로는 뿌연 먼지가 시시각각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난 그 참상을 눈에 담으며 전생의 기억을 훑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모든 아귀가 맞지.'

블란도가의 몰락.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 전말에는 헨지의 연구가 있었다.

단순히 헨지의 주장으로만 유추한 것이 아니었다.

보완법을 찾았다고? 이런 류의 자기 확신은 펜대들 사이에선 제법 흔한 일.

제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이론이라도 그 연구에 마침표가 찍히기 전에는, 진정한 완벽을 주장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시기가 딱 맞아떨어져.'

너무도 공교로웠다.

블란도가를 몰락시키면서,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데큘란가.

말이 '적잖다'는 거지, 당시엔 데큘란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였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위대한 데큘란이, 언제까지고 동부 대륙 제일의 마도 명가(名家)로 자리할 줄 알았던 그 가문이!

블란도와의 실속 없는 소모전을 치러, 끝내 추락해 버릴 줄이야!

호사가들은 데큘란의 가주, 파헤른을 두고 멍청한 자라며 씹어 댔고.

그 충성심 높은 마법사들 역시 피할 수 없는 몰락에 하나둘 변심해 가문을 떠났다.

데큘란이 여느 명가들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그라지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고작 5년이었지.'

딱 5년이었다.

데큘란이 그 성세를 회복하고, 다시금 동부 대륙 제일의 마도 명가로 우뚝 서는 데에 걸린 시간.

그리고―

'파헤른이 역대 최강이라 인정받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말한다.

가문을 나락으로 몰아넣은 파헤른이 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역대 최강이라는 경지에 올라 모든 것을 바로잡았다고.

하나, 데큘란의 쇠락과 부흥을 두 눈으로 본 나는 안다.

'그런 게 아니야.'

전제가 잘못되었다.

'파헤른이 실수했다고? 설마. 제 가문의 마법사를 학살한 자한테 봉신가의 자리를 제안하는 이가?'

데큘란 가주는 재수가 없었지만, 그 능력과 결단력은 인정할 만했다.

전생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놈은 처음부터....'

찻잔을 담던 내 눈동자가 헨지에게 향했다.

'신(新)천원공, 거기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던 거다.'

신천원공이란, 블란도가 몰락한 이후, 데큘란이 쇠락하던 와중에 새로이 공개된 천원공의 개량형이다.

천원공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단점들을 완벽히 보완한, 그 무언가.

쇠락하던 데큘란이 불과 5년 만에 올라선 것도, 가주 파헤른이 정체된 경지의 벽을 뚫고 역대 최강의 반열에 올라선 것도.

모두 신천원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아스터 군?"

난 헨지에 목소리에 생각을 갈무리했다.

"혹시 후회되십니까? 아무래도 스케일이 좀 크다 보니까 말이죠. 하하, 괜찮으면 제가 고통스럽게 죽여 줄 수도 있는데."

"...."

내가 말없이 노려보자, 헨지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나를 찾은 이유가?"

"음, 사실 천원공에 대한 연구는 가문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블란도의 명운이 달렸다느니, 뭐니 하는 말은 거짓이었군."

"아, 그 질문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아스터 군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은 거였으니. 그런 질문일수록 사람의 욕망이 잘 드러나는 법이죠."

헨지는 의뭉스럽게 웃어 보이고는 계속해서 본론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그래서 제가 블란도의 사람은 쓸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세작인지를 알지 못하는 노릇이라."

"비밀리에 진행한 연구가 들킨 거라면, 가장 의심되는 사람이 있지 않나?"

내 말은 비서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아,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아마 아닐 겁니다.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입수 경로와 연관이 있는 거라...."

즉, 연구 과정에서 들킨 게 아니라 입수 경로에서 추적해 들어왔다는 것.

그쯤 듣다 보니,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정보를 흘렸군."

"하하, 맞습니다. 아스터 군과 이야기하면 재미있군요. 꼬리가 밟혔다는 걸 알자마자 보완법의 수식 일부를 풀었습니다. 저도 죽기는 싫은지라...."

아마 데큘란에서는 꼬리를 밟은 직후, 암살을 준비했을 것이다.

블란도가가 제아무리 명가라 하지만 모든 암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

또 그 방비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데큘란은 어떻게든 뚫어 냈을 것이다. 그 집요함은 사흘 굶은 고블린보다 더하니.

"그럼 차라리 데큘란에 붙는 것도 방법일 텐데? 놈들은 환영할걸?"

"제가 데큘란에 붙는다? 블란도의 부관주이자 혈족인 제가? 하하, 아스터 군은 발상이 자유롭군요. 뭐, 사실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만 해 두죠. 하하."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둘러대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둘러대려 했다면 '어찌 가문을 배신하냐' 같은 말을 지껄였겠지. 물론, 그래 봐야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연구를 계속하는 건.... 이 부분에서 아스터 군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난 글자를 읽을 줄 몰라."

"...?"

"그러니까 조교 노릇은 못 한다고."

"...아, 네. 재밌는 농담이군요."

평소에는 잘만 쪼개던 놈이 이럴 때는 정색하고 받아들인다.

그러기를 잠시.

"혹시, 정말 모르십니까?"

"...."

난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내가 입을 연 것은 헨지의 눈빛에 짙은 연민이 서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꼭 그 눈빛이 세상 불쌍한 미개인을 보는 듯한 눈빛이라.

"글자 안다."

"...무지(無知)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씁...."

헨지는 그제야 연민을 거두고 '하하' 웃어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저도 장난이었습니다. 어쨌든 글자를 안다고 해도 이거 꽤나 복잡한 작업입니다. 아스터 군에게 조교를 맡기기란... 하하."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참았다.

"사실 이 연구가 공동 작업이거든요."

"공동 작업?"

"아, 믿을 만한 친구와 하는 거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어쨌든 지금 제가 맡은 파트에서는 연구 진척이 힘듭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논문을 보내야 하는데...."

말인즉, 이런 거였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군."

"네, 솔직히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어도 됐습니다. 그냥 비밀리에 보낼 수만 있으면 적당히 쓰고 버려도 상관이 없었죠. 사실 첫 번의 질문은 그 기준을 가름하려 했던 건데...."

헨지의 눈동자에 예의 그 비릿한 기색이 떠올랐다.

"예상 밖의 성과죠. 이처럼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날 줄이야."

"내가 왜 친구지?"

"그럼 말 높이시겠습니까?"

"친구지."

나이 차이를 떠나서, 아니 전생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을 높이는 것도 껄끄러웠다.

특히나 이런 뱀 같은 놈한테 말을 높이는 건 어쩐지 기분이 나쁜 일이라.

"어쨌든 아스터 군이 그 친구에게 논문을 좀 전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보상은 제대로 챙겨 드리죠. 치유의 빛 술식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헨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위의 비전서를 집어 들었다.

화르륵―

삽시간에 치솟는 불길.

그리고 헨지가 손을 뻗자 책장으로부터 서책 하나가 두둥실 떠올라 그 손에 빨려 들었다.

"...."

난 그 모습을 말없이 눈에 담았는데, 그 행동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역시 가짜였네."

"알아차리셨습니까? 하하, 쓰고 버릴 쓰레기한테 진짜 치유의 빛 술식을 주기엔 아깝더군요. 뭐, 완전 엉터리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헨지는 처음부터 기만하는 거래를 준비했던 것이다.

"이게 원본입니다."

"뭐, 그렇겠지."

원본인지 아닌지는 보기만 해도 알았다.

그 표면에는 오직 블란도가의 주인.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

인장이 찍혀 있지 않다고 다 가짜는 아니었지만, 인장이 찍힌 이상 진짜일 수밖에 없었다.

저 인장 표면으로 흐르는 마력의 기류야말로 그 내용이 진짜라는 증거.

"근데 그걸 줘 버려도 괜찮겠어?"

난 심드렁한 눈빛으로 말했다.

명가에서는 혈족들에게 비전을 배포할 때, 인장을 찍는다.

그리고 그 인장에는 고유 번호가 내장되어 있는데, 그 비전서의 주인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유출을 막는 의미도 있지.'

인장은 옛 마법이 걸려 있어서, 인장이 찍힌 책을 읽은 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내용물을 외부에 옮길 수 없다.

다만 홀로 사색하고 활용하는 것만 가능할 뿐.

또한, 소유주가 입력한 마력 패턴을 입력하지 않은 채 책을 펼치면 즉각적으로 내용이 소실된다.

"흐음, 아스터 군은 흑백 지대 부랑아치고 많은 걸 아는군요. 설마 인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니. 뭐, 신뢰를 위한 투자라고 해 두죠."

"투자라...."

"이제는 한배를 탄 동료가 아닙니까? 아스터 군이 제게 신뢰를 주었듯, 저도 나름의 신뢰를 드려야죠. 아시죠?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네 모가지랑 바꿀 수 있는 티켓인 거. 그런데, 패턴은 풀고 주는 건가?"

"패턴은 풀려 있습니다. 어쨌든, 이걸 가문의 감찰부에 가져다주면, 인장의 번호로 주인을 추적하겠죠. 그리고 저는... 하하!"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따로 없다.

아무리 마음에 든다 해도, 처음 만난 이에게 제 목숨을 맡기다니.... 아니, 이게 꼭 맡겼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회수하려면 방법은 얼마든 있으니까.'

다만 헨지로서도 위험 부담을 수반하는 일이라, 최소한의 신뢰는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배라...."

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현재 내가 익히고 있는 것은 천원공.

하지만....

'개량되기 전의 구(舊)천원공이지.'

신천원공이 나타나면서 가문의 비고에 처박혀 있던 걸, 트러블슈터 시절에 몰래 빼돌려 놨었다.

하나, 구천원공이라 해서 부족한 비전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개량된 천원공의 효능이 워낙 압도적일 뿐.

'안 그래도, 후에 신천원공을 입수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의 기준에서는 워낙 먼 미래인지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신천원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바에야....

"우리 이렇게 하자고."

"...?"

"치유의 빛 술식은 위험 부담으로 받고, 나중에 완성될 신천원공도 받겠어. 정 뭣하면, 치유의 빛 술식을 포기하지. 한배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헨지가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스터 군은 참으로 뻔뻔하군요."

"가불가만 말해. 안 되면 안 맡을 거니까."

"흐음."

헨지는 옅은 침음성을 흘리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 듯했는데, 다행히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좋습니다. 신천원공... 음, 뭐. 이름은 아무렴 상관없죠. 후에 완성될 신천원공을 드리겠습니다. 한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이걸 받는다 해도, 천원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 애물단지에 불과할 텐데."

"그건 알 필요 없고."

"단, 조건이 있습니다. 후에 이 연구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아스터 군의 도움이 필요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도움을 줬으면 좋겠는데... 한배라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죠?"

뭐,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논문에 한한 도움이라면 말이지. 아, 참고로 난 글자를 몰라."

"...뻔뻔한 데다가 재미없기까지."

나름 농담이라 지껄인 말이었지만, 헨지의 반응은 처참했다. 하지만 괜찮다. 웃으라고 한 의도는 아니었으니.

그저 내가 즐거우면 그만인 농담이었다.

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

"누구한테 전해 주면 되는데? 아카데미 입학 전에 후딱 처리해야 하니까, 빨리 말해 봐."

내 물음에 헨지가 무언가 공교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왠지 기분 나쁜 미소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충동을 내리눌렀다.

"이거 참. 우연의 일치라 해야 할지, 공교롭다 해야 할지. 사실 그리 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친구, 아스터 군이 가는 곳에 있거든요."

"...?"

내가 가기로 결정된 곳이라면 가깝게는 현재 묵고 있는 별관이요, 시일을 멀게 잡자면 오직 아카데미 한 곳뿐이었다.

그렇다면?

"네, 맞습니다. 제니온 아카데미의 교수, 파룬에게 그 논문을 전달해 주면 됩니다."

난 가만히 헨지를 바라봤다.

"...? 뭐죠?"

"아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유유상종, 끼리끼리 모인다고 들었다.

이것은 비단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몬스터들도 그렇다.

같은 고블린이라 해도 늪을 좋아하는 고블린들은 늪에 살고, 산을 좋아하는 고블린들은 산에 산다. 즉, 성향 따라 뭉친다는 건데.

"오랜 친구인가?"

"아카데미에서부터 조교수 시절까지, 그 친구와 제가 1, 2위를 다퉜죠. 아쉽게도 제가 블란도로 돌아오게 된 후로 경쟁은 끝났지만...."

'그래도 자신이 더 위다'라고 말하는 듯한 자신만만한 표정.

그 모습에 난 통탄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에 저런 미친놈이 하나가 더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물론 헨지처럼 광기를 잘 숨기고 있을 터였다.

하나, 그렇다 해도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버거운 것이 사실.

'말세로구나.'

말세가 따로 없었다.

◈ 14화. 지성을 갖추시길

"...."

아스터가 나간 후.

헨지는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흥미롭군요.'

처음 아스터에 대해 소식을 접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블란도가 최고의 재능을 타고 태어났다는 소가주 데미안, 그 성격은 또래에 비해 어수룩한 면이 없잖아 있으니.

'어수룩한 건지, 어수룩한 척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어느 쪽이든 소가주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블란도라는 막대한 배경에 그 엄청난 재능.

그 두 가지라면 굳이 어수룩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터이니.

하여 아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도, 그런 소가주가 어린 치기로 데려온 친구라 여겼다. 그러니까, 왜 있잖은가. 어린 시절 잠깐 관심을 보이는 놀잇감.

하나 가모의 눈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자신조차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얼굴이나 한번 보고자 한 것.

'뜻밖의 수확이군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적당히 쓸 만하다 싶으면 논문 전달이나 맡길 요량이었고, 영 쓸 만하지 않다 싶으면 쓰다가 버릴 생각이었는데.

- 아, 그럼 죽이든가.

"하하!"

그 눈빛을 떠올리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죽이라고?'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다.

위협은 그저 질문만으로는 끄집어낼 수 없는 아스터라는 사람의 성향을 끄집어내기 위함이었지만, 죽이지 않을 이유 또한 없으니.

그 이유 또한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다.

물론 소가주인 데미안과는 척을 지겠지만, 결국 가주와 가모는 죽어 버린 흑백 지대 부랑아보다 자신을 필요로 할 테니.

한데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재미있단 말이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말로는 쉬웠다.

하나, 어디까지나 말로만 쉬웠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기사는 과연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 그럴 리가. 다만 생(生)보다는 신념의 고결함에 가치를 둘 뿐.

죽음을 대수롭지 않다 하는 이들은 많지만, 정녕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이들은 얼마나 될까.

없다.

아니, 없다 여겼다.

자신마저도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어찌 될지 모르는데. 다른 돼지들이야 오죽할까.

그런데 있더라.

"뭔가 많은 걸 숨기는 것 같은데...."

그런 거야 아무렴 좋은 일 아닌가.

그저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동류를 발견했는데.

아마 그런 이유이리라.

선선히 자신의 고유 번호가 등록된 치유의 빛 비전서를 건넨 것도, 목숨을 걸고 작성하는 연구 논문의 결과물을 제공하겠다 한 것도.

만약 다른 이가 같은 조건을 요구했다면, 그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 자체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었을 터인데.

"나쁘지 않군. 오히려 좋아."

동류가 자신의 결과물을 바란다니.

머저리들에게 받는 인정 따위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동류에게 받는 인정은 또 새로운 기분이었다.

다만 걱정은....

"흠, 정말 글자를 모르는 건가."

마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럴 리는 없다 생각하지만.

그 태생이 흑백 지대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대화에 있어서 특출난 지성(知性)은 엿보였지만, 행동거지에 있어서 그에 마땅한 교양은 보이지 않았기에.

"역시 재밌군."

이런 비생산적인 사색을 하는 게 얼마 만인지.

'뭐,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헨지는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한데, 왜일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가시지를 않았다.

'만약... 정말 글자를 모른다면?'

아스터를 보내기 전.

헨지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몇 개의 책을 챙겨 주었다.

논문을 들키지 않게 가져갈 수 있는 방편으로 아공간을 내주는 한편, 흥미로운 어린 친구에게 내어 주는 선물이었는데....

"그 모든 게 쓸모가 없다는 말인가."

훗날을 생각했을 때, 반드시 익혀 둬야 할 마학서들을 추렸거늘.

자신의 논문을 보다 깊이 이해하여, 언젠가 토의할 날을 꿈꾸며 챙겼거늘.

친히 그 학습 순서와 마학적 관점을 참고하라 준 책이었다. 오랜 시간 손수 각주를 달아 놓기까지 했는데!

"설마...."

아니겠지. 부디,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헨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하나, 맞는다면 그거야말로 고블린 목에 보검과 뭐가 다를까.

아무리 자신과 같은 동류라지만, 마학의 길을 걷는 한 명의 학자로서 이는 통탄을 금치 못할 일.

'아닐 거다, 아닐 거야. 아스터 군,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 줘. 아니라고 말해 줘!'

물론 대답은 없었다.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꽤 오래 있었네.'

어느새 창밖의 해는 저물기 직전.

사실 대화를 마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헨지가 물건을 챙겨 주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을 뿐.

'뭘 바리바리 싸 주던데.'

난 주변에 보이지 않게 품에 감춰 뒀던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넓은 부관주실을 이리저리 쏘다니며 책장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챙겨 준 헨지.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그 양은 백여 권에 달한다.

'....'

슬쩍 아공간을 열어 보니, 역시나 백여 권의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두 부의 논문이 자리해 있었는데, 하나는 제니온 아카데미의 파룬 교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었다.

한데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아공간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편지 봉투 하나.

친애하는 아스터 군에게.

'뭘 적는가 싶더니....'

난 별로 달갑지 않은 멘트로 시작하는 서신을 읽어 보았다. 한데 그 서신의 내용은 시작 문구와는 달리 제법 알찬 것이었다.

헨지는 서신에서 총 132권으로 이루어진 마학 서적을 두루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구성은 기본 마학부터 고급 마학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분포돼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32권의 마학 서적을 어떤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지까지.

'...음.'

서신을 대강 다 읽었을 때, 난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부디 열심히 정진하여 격에 걸맞은 지성을 갖추시길.

그대의 친우, 헨지 폰 블란도가.

시작과 마찬가지로 달갑지 않은 멘트로 끝을 맺었지만, 뭐랄까.

'좋은 선물을 받았네.'

마학이란, 마법의 이론과 원리를 다루는 폭넓은 학문이다.

이 폭넓은 학문에서 하나의 관점을 갖기란 굉장히 힘든 일인데, 헨지는 132권의 마학 서적으로 그 관점의 뼈대를 제시한 것이다.

고작 132권으로 말이다.

'...고작은 아닌가.'

잠깐 생각해 봤지만, 역시 '고작'이라는 표현은 잘못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천재라는 족속들을 제외하고는 고작 132권의 책으로 관점의 뼈대를 세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후, 난 가만히 헨지의 서너 장으로 된 서신을 들여다봤다.

친애하는....

별로 친애받고 싶지 않지만.

...지성을 갖추시길....

뭔가 무식한 놈이 된 것 같아서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그대의 친우'라는 멘트는 더없이 껄끄러웠지만.

생각지도 못한 좋은 선물인 건 확실했다.

'....'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밤바람이 스며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총총히 수놓은 별들이 제 존재감을 뽐내는 가운데, 나는 적막한 고요가 녹아든 공간 속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좋아."

난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구비된 양피지와 펜을 가져왔다.

매일 관리를 하는지, 잉크 찌꺼기 하나 묻지 않은 펜촉에 잉크를 적셨다.

양피지 위에 펜촉을 슬며시 갖다 대자, 질 좋은 섬유질이 검은 먹물을 빨아들였다. 난 그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도서 후원자 목록

개발새발 날리는 글자였으나 상관없다.

어차피 이건 누구를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보고 기억하기 위함이니까.

그 밑으로 적히는 이름 한 줄.

1. 헨지 폰 블란도(132권)

논문 두 부와 '치유의 빛' 비전서는 뺐다.

치유의 빛을 탑에 비치하는 건, 훗날 데미안과 상의할 생각이었다.

나 홀로 익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모두가 다 볼 수 있게 공개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이번 생에서 데미안과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어쨌든 친구로 맺어진 인연.

이른바, 친구 특전이다.

"한데, 가만...."

무언가 허전했다.

물론 헨지의 입장에서는 이만해도 더없는 영광일 거다. 역사에 길이 남을 탑의 1호 기부자로 등재되었으니까.

이 허전함은 다만, 내 마음의 문제였다.

헨지가 제공한 132권의 책은 단순히 낱권으로서의 가치를 가진 게 아니다.

비록 공동 연구라고는 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데큘란조차 하지 못했던 천원공의 개량. 그것을 해낸 천재의 마학 지침서였으니.

'천금의 가치가 있지.'

단순히 132권으로 기재한다면, 언젠가 이 서적들은 낱권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헨지가 제시한 마학의 뼈대가 올바로 전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결국 그저 그런 마학서의 집합이 되겠지.

사락―

나는 새로운 양피지를 꺼낸 후, 헨지의 서신 한 면을 펼쳤다.

그리고 그 위로 헨지가 제시한 독서 순서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처음에 적었던 도서 후원자 목록의 표기도 수정했다.

그 결과.

1. 헨지 폰 블란도(헨지식 마학 지침서/132권)

―학습 가이드 별도 수록

이는 고작 132권의 책이 아니다.

하나의 카테고리.

아마 이 카테고리가 있다면 마학을 배우길 원하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뼈대를 갖출 수 있으리라.

물론 스승을 두고 배우는 것보다는 힘겨운 학습이 되겠지만, 상관없었다. 애초 스승이 없는 자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또한 헨지에게 얻은 건 이뿐이 아니다.

'탑의 방향성.'

그전에는 그저 책을 채워 넣는 것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아니다.

될 수 있는 한, 헨지와 같은 인사들에게 그 분야의 뼈대를 세울 수 있는 커리큘럼을 부탁할 요량이다.

책의 종 수도 중요하지만, 이거야말로 탑의 정체성이 될 거다.

배움을 원하는 자들에게 배움을 선사하는 공간.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아스터 님, 곧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예의 그 무뚝뚝하고 눈치 없는 사용인이 출발 시간을 알렸다.

"아카데미에 도착하시면 간단한 서류 접수를 할 겁니다. 참고로 소가주님과 아스터 님께서는 입학시험이 면제입니다."

몇 번이고 들은 설명이지만, 무뚝뚝한 사용인에게는 설명할 의무라도 있었던 것인지 꾸준히 설명해 줬다.

'하긴, 명가가 그렇지.'

특례 입학이라고나 할까.

대다수의 명가자제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데에 있어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애초에 명가 내에서 자체적으로 검열을 하니, 굳이 시험을 치를 이유가 없다는 게 가장 클 것이다.

뭐, 명가의 자제 중에서도 특이한 이들은 굳이 입학시험을 치른다지만, 그 숫자는 극소수.

어쨌거나 나도 입학시험이 면제라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가겠습니다."

난 대부분의 짐을 아공간에 챙겨 넣은 후, 복도로 나섰다.

"...."

소가주가 가문을 떠나는 날이라 그런가.

어딘지 고요했던 저택이 오늘따라 소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소란스러웠다.

"가모님, 축하드립...."

"가모님, 저는 봉신가 헬른에서 온...."

눈도장을 찍기 위해 몰려든 블란도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인물들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가주를 대리해서 그들을 맞이했고, 그 옆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친구! 빨리 와! 빨리!"

데미안은 벌써부터 아카데미 교복 차림이었는데, 아카데미에 가기 싫어했던 놈이 맞는지, 날 보자마자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댔다.

이후 의례적인 행사 아닌 행사가 이어졌고, 우리는 한참을 시달리고서야 마차 앞에 설 수 있었다.

"데미안, 부디 몸조심하고.... 아스터 군?"

"예."

"좋은 기회니, 부디 원하는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비앙카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마차의 문이 닫혔다.

'원하는 결과라.'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동부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 제니온, 그곳에서 기다리는 무수한 후원자들.

그들을 잡을 생각이었다.

'기다려라, 흑우... 아니, 학우들아.'

내가 간다.

◈ 15화. 그건 아니다

며칠이 지났다.

우리는 제니온 아카데미가 위치한 제국 남부, 하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공간의 마학서를 독파했는데, 132권의 헨지식 커리큘럼에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헨지는 뛰어난 마학자였다.

'마법의 기초 원리는 단순하지.'

하나, 해석은 천차만별이다.

'1'이라는 단순한 숫자가 뒤에 붙는 단위에 따라 수백 개의 의미를 갖듯.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였다.

물은 그저 물이다. 하지만 그 물은 관측하는 대상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가 깃드는데, 그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이다.

사막에 떨어져 목마른 이가 물을 본다면, 이것은 생명일 것이요. 경작을 하는 농부가 물을 본다면, 이것은 수확의 밑거름이다.

명가의 비전들 역시 그렇게 갈라졌다.

같은 원리라 해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발전시킨 것.

그리고 헨지가 내게 전해 준 132권의 마학서는....

'데큘란가 천원공.'

그에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이는 내가 천원공을 익혔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사실.

사락, 삭.

난 여관방 창틀에 앉아,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른 아침인지라 덥지는 않았다. 맑고 청명한 공기가 피부에 닿을 뿐.

한데, 난데없는 소란이 문밖에 일었다.

벌컥!

갑작스레 열리는 문.

"친구!"

데미안이었다.

"좀 있으면 입학식이야! 빨리 가야 해! 늦으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고 했어!"

난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카데미가 무슨 동네 극장도 아니고, 자리가 없다니? 아니, 동네 극장도 티켓을 끊고 들어가면 자리는 보장돼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시선을 돌리니.

'쉿.'

조심스럽게 눈짓을 하는, 예의 무뚝뚝하고 눈치 없는 사용인.

아마 데미안이 준비에 늦장을 부려서, 움직이게 할 요량으로 말을 한 것 같았다.

"...."

난 잠깐, 아주 잠깐, 저 눈치 없는 사용인의 신호를 무시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 내가 한번 넘어가 주면, 저 눈치 없는 사용인도 언젠가 넘어가 주겠지.

이런 생각이었다.

'눈치가 없지,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난 이미 준비를 끝마쳐 둔 터라, 헨지의 마학서를 아공간에 넣고 방을 나섰다.

여관을 나서니, 데미안이 '와!'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사람이 엄청 많아! 다 교복을 입고 있어. 친구, 저기 봐! 다 입학생들인가 봐!"

과연 데미안의 말대로 도로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튀어나온 것일까.

교복 입은 입학생들, 그리고 그 수행인들이 넓은 대로를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우리야 숙소를 가깝게 잡아서 그렇다 하더라도, 신기하게도 마차를 직접 타고 온 이들은 없었다.

의아한 가운데.

"이게 제니온 아카데미의 진풍경이죠. 입학할 때만큼은 초대 총장, 현자님의 가르침을 따라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직접 걸어옵니다."

무뚝뚝한 사용인은 드물게도 길게 말했다.

힐끔 그 얼굴을 보니 마치 옛 생각을 하는 듯했는데, 꽤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사용인이 말했다.

"저도 입학생이었습니다. 졸업은 못 했지만 말이죠. 이렇게 아카데미를 다시 보게 되니, 옛 생각이 나서."

"아, 네."

딱 거기까지였다.

무어라 대꾸를 해 주고 싶었지만, 사용인은 다시 예의 그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

어쨌든 우리는 부지런히 걸어 아카데미 입학생들과 수행원들, 그리고 관리인으로 혼잡한 대열에 합류하였다.

무뚝뚝한 사용인이 작별을 고한 것은 교문에 도착한 직후였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입학식을 잘 마치시고, 좋은 가르침을 얻고 오시길."

데미안은 해맑게 손을 흔들고, 난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렸다.

아카데미에서 수학할 때는, 신분의 고하를 나누지 않는다.

...라는 초대 총장, 현자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원들은 아카데미에 출입할 수 없었다.

블란도가의 일행들을 뒤로하고 입학식이 치러지는 대강당에 들어서니, 이미 강당을 반쯤 채우고 있는 아카데미생들.

데미안이 말했다.

"친구."

"왜."

"란시 말이 맞았어.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 거라더니, 진짜로 그럴 뻔했잖아?"

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건 아니다.'

하나, 굳이 말하진 않았다.

무뚝뚝한 사용인이 눈치가 없지,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 * *

난 무뚝뚝한 사용인이 전달해 주고 간, 아카데미 클래스가 적힌 종이를 펼쳤다.

"보자. M3반 11번, 12번이라...."

나와 데미안이 배정받은 클래스 이름은 M3클래스.

참고로 클래스 앞의 이니셜은 등급이 아니다. 편의상 분류해 놓은 이름이랄까.

"친구, 우리 저기 앉으면 안 돼? 빨리 안 앉으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어."

"아냐, 조금 기다려 봐."

난 조급해 보이는 데미안을 뒤로하고, 지정된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한데,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학생들 탓에,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자리를 찾아가는데―

그때 데미안의 단말마가 귓가를 때렸다.

"앗!"

뭔가에 부딪힌 듯 엉덩방아를 찧은 데미안.

"...뭐냐."

부딪친 상대는 데미안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남학생이었다.

머리만 큰 게 아니었다. 그 팔뚝이며, 허벅지며, 덩치가 웬만한 성인에 가까운 수준.

똑같이 부딪쳤어도 체격이 다르니, 본인만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다.

"괜찮아?"

"응! 안 다쳤어!"

난 코가 시뻘게진 데미안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확실히 어디가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앞을 잘 못 봤나 봐, 미안해!"

데미안은 해맑은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사실상 이런 시장통 속에서 누구 잘못이냐가 뭐 중요하겠냐만, 사과도 했으니 잘잘못은 아무렴 좋은 일.

나는 다시 데미안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덩치가 우리를 불러 세우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기다려라."

덩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 팔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무뚝뚝하진 않았다.

그 얼굴에 드러난 것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불쾌감.

난 곧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덩치의 팔뚝, 그러니까 데미안의 키 높이 정도 되는 위치에 뭔가가 반질거리고 있었던 것.

그게 뭔지는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침이군.'

침이다.

내 짐작이 맞았는지, 덩치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네놈."

"나?"

"그래, 덜떨어진 네놈 말이다. 어떻게 할 거지? 내 옷에 더러운 것이 묻었는데."

"음."

난 팔짱을 낀 채 데미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디 명가의 혈족 놈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도 제법 한가락 하는 가문이리라. 척하면 척, 표정만 봐도 보였다.

이제 여기서 데미안의 대응에 따라 싸움이 날지, 잘 풀릴지가 갈릴 터인데....

'아이고.'

난 이마를 짚었다.

이건 싸움이다. 무조건 싸움이었다.

"그럼 내가 닦아 줄게!"

데미안이 해맑은 얼굴로 달려가 덩치의 팔뚝에 묻은 침을 슥슥 닦아 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

그게 좀 전까지 입으로 물고 빨던 손이었다는 거다.

"네놈...."

닦으면 닦을수록 치덕치덕해지는 교복.

덩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바로 직후.

뻐억―!

강당에 파열음이 울렸다.

덩치의 주먹이 데미안의 얼굴에 작렬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데미안의 얼굴은 무사했다. 무사하지 못할 뻔했을 뿐.

츠즈즈―

난 데미안의 코앞까지 다가온 덩치의 주먹을 움켜쥐며,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봐, 학우. 지금 실수하는 것 같은데. 이쯤에서 그만하는 건 어때?"

"넌 또 뭐냐."

"난...."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데미안의 목소리가 틈새를 치고 명랑히 울려 퍼졌다.

"내 친구!"

덩치가 날 쏘아봤다.

"그런가, 좋은 친구군."

"맞아!"

데미안은 해맑았다. 하나, 덩치는 아니었다.

"친구를 위해 대신 맞아 줄 놈은 흔치 않지. 하나, 오늘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

부웅!

내 얼굴만 한 주먹이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난 그 주먹을 피하며 쓰게 웃었다.

'아.'

본디, 아카데미에서의 나의 목적은 모든 흑... 아니, 학우들과 두루 사귀는 것.

첫날부터 그 결심이 흔들리게 생겼다.

하긴, 어디 사람 일이 뜻대로만 되겠는가.

'모르겠다.'

일단은....

"말로 하기는 싫은 거지?"

"그렇다."

"그래,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 * *

제니온 아카데미의 입학식이 거행되는 대강당. 그 중앙으로 때아닌 소동이 일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싸움 탓이다.

흥미로운 구경거리에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소란이 뒤를 따랐다.

"뭐야, 누구야?"

"모르겠어. 저 덩치 큰 놈은 돌란페가 혈족인 것 같은데. 그러면 차남일지도?"

"싸우는 앤?"

"몰라. 처음 보는데?"

누구와 누가 싸우는가.

그 뒤가 이거였다.

"누가 이길까?"

"돌란페가가 이기지 않겠어? 내가 듣기로는 차남이 꽤 대단하다던데."

물론 모든 아카데미 생도들이 이런 건 아니었다.

"야! 너희들 장난해?!"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싸움의 향방을 가늠하던 학생들이 찔끔 놀랐다.

"왜, 왜?"

"싸움이 났는데 뭐 하는 거야?!"

"마, 말릴까?"

안경 낀 학생이 정색하며 말했다.

"미쳤어?"

"...?"

"판을 봐, 저래서야 쟤들이 맘 놓고 싸우겠어? 애들한테 말해서 간격 좀 벌리라고 해."

"아!"

가문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지만, 싸움 구경에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학생들.

싸움판을 중심으로 금세 드넓은 원이 생겼다.

그때 다른 학생이 안경 낀 학생을 보며 소리 질렀다.

"야!"

"왜!"

"지금 장난해?!"

"뭐가, 지네가 싸운다는데. 기왕이면 다 같이 구경...."

"아니, 그게 아니라. 저 회색 머리는 마법사잖아! 주변에 역장도 펼쳐 줘야지!"

"아!"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먼저 움직였다.

솔선수범하여 앞으로 나서 역장을 펼치는 학생들. 금세 싸움터는 콜로세움이 됐다.

이 모든 게 고작 5분도 안 돼서 벌어진 일.

"힉스터! 힘내라! 난 너한테 걸었다!"

"난 식권 두 개!"

"난 세 개!"

식권을 두고 벌어진 내기판, 비율은 9대1.

하나. 이런 아카데미생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당사자인 힉스터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 무슨....'

처음에는 그저 손쉽게 찍어 누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가슴에 달린 책 모양의 배지를 보아 마법계 학생. 아카데미 입학생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실력은 있다는 것이지만....

그래 봐야 마법사였으니, 근거리에서 틈을 주지 않고 찍어 누르면 그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퍽! 퍼억!

"크윽!"

무슨 주먹이 이리도 무거운지.

교복 위로 보이는 체구를 보면 육체를 단련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주먹에 어른거리는 마력이 무언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일 터.

하지만 어떤 수를 쓴다 해도, 마법사에게 주먹으로 밀린다는 것은 권사 가문의 수치. 그야말로 돌란페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이다.

"감히...! 마법사 따위가...!"

힉스터는 악에 받친 소리를 토해 내며 의지를 끌어 올렸다.

이상함을 느낀 건 그 순간이었다.

"...?"

츠즈즈―

갑작스레 몸에 도는 활력.

무언가 이상했다.

공격을 막아 내느라 얼얼하던 두 팔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느라 뻐근했던 두 다리가, 그리고 풍압에 찢긴 살갗이.... 아물고 있었다.

치료가 되는 것이다.

'이, 무슨...?'

상당한 수준의 치유계 마법.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예의 덜떨어진 꼬마가 해맑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난로를 쬐는 것처럼 손을 쭉 뻗은 모습은 꼭 재미난 놀이를 하는 것 같달까.

'대체 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야, 너 딴딴하네."

들려오는 목소리.

자신과 주먹을 나누고 있는 잿빛 머리의 소년이었다.

"뭔 개소...."

딴딴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 저 미친 꼬마가 자신에게 치유계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을 뿐. 하나, 힉스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쿵! 꾸웅!

양 팔뚝을 때리는 무지막지한 충격.

흡사 뼈가 울리는 것 같달까.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힉스터는 두 소년을 눈에 담았다.

한 놈은 치유하고, 한 놈은 자신을 두들겨 팬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역장 밖에서는 환호가 가득했다.

"힉스터! 뭐 하는 거야! 봐주지 말라고!"

"돌란페가의 신성! 동부 대륙의 별! 권사들의 희망! 너무 질질 끄는 거 아냐?! 하하!"

마법사 따위에게 권사가 육탄전에서 밀릴 리가 없으니, 전투를 오래 끌기 위한 쇼맨십으로 판단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 크윽!'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심장이 울렁거렸다.

끝나지 않는 전투. 차라리 저 주먹에 직격당해 정신을 잃으면 좋으련만, 이 무지막지한 회복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생애 처음―

'이, 미친, 놈들....'

힉스터는 공포를 느꼈다.

◈ 16화. 네놈 아니고 두 놈이다

한편, 아스터는 평화로웠다.

부웅―

눈앞에서 짓쳐들어오는 주먹.

자못 흉악하다.

웬만한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주먹은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고, 그 안에 담긴 힘은 단련한 성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것이 에테르를 익힌 자의 주먹.

'돌란페가라고?'

과연 명가의 자제라 할 만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제법 훌륭하지만....'

부족하다.

덩치에 비해 속도도 제법 빠르고, 일격, 일격이 치명적일 정도로 매서웠지만, 딱 그뿐이다.

피지컬을 활용할 만한 경험은 물론이고 어깨의 움직임, 보폭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그 움직임이 예상될 정도로 정직한 공격 일변도였다.

아마 힉스터로서는 미칠 노릇일 거다.

속도가 그리 빠르지도 않고,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만 같은데, 이상하게도 맞지 않을 테니.

'그럼 슬슬....'

아스터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날 무시하지 마라―!"

부웅―!

육중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몸을 사선으로 회전시켜서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주먹은 명치를 향하고 있었고, 정통으로 맞는다면 필시 그로기 상태에 빠질 터였다.

상대의 입장에서도 혼신을 다한 일격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 덕분에 아스터는 처음으로 회피 기동을 중단시켰다.

쾅!

사람의 몸을 때리는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굉음.

아스터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오오! 이제야!"

"역시 힉스터!"

아카데미 학생들이 환호했다.

대부분이 힉스터에게 식권을 건 이들이었는데, 반면 힉스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크윽."

분명 주먹의 감촉은 직격을 했다 말한다.

하지만 왜일까. 미묘하게 가벼운 감이 있었다.

분명 때리기는 때렸는데, 그 충격이 온전히 다 전해지지 않았달까. 마치 탄성이 가득한 슬라임을 힘껏 친 느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타닷, 탁.

"...."

가뿐하게 자리에 착지하는 상대.

균형을 잡는 것도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단 두 걸음 물러서는 것만으로도, 충격을 분산시킨 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다.

"으아아아!"

힉스터는 그 모습에 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돌진은 흡사 황소와 같았다.

하나 직선적이다.

평소의 힉스터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멍청한 공격. 하지만 이 기묘한 싸움은 그에게 이성을 앗아 가 버렸으니.

파지직―

파직.

아스터의 주먹에 스파크가 튄 것은 그 직후였다.

뒤로 젖혀지는 어깨.

자연스럽게 가슴이 열리고, 등의 근육이 수축하며 조여진다. 그러는 와중에 아스터의 시선이 저쪽 데미안을 담았다.

'보자, 힘 조절이....'

여전히 웃으며 힉스터에게 회복 마법을 구사하는 데미안.

힉스터를 끝내려면 단 일격에 의식을 끊어 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적절한 선을 찾기 위해 힉스터의 몸을 그리도 두드려 댄 것이니.

코어에서 뽑혀 나온 마력이 주먹을 감쌌고, 두 겹으로 나누어진 마력의 장막이 서로 반대편으로 순환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순환이 가열되자, 거세지는 스파크.

파지직! 파팟!

코어의 마력이 적당한 위력을 위해 미세하게 조정되는 가운데.

쿵! 쿵! 쿵!

힉스터의 거체(巨體)가 코앞에 치달았다.

"어, 어어!"

"위, 위험한 거 아냐?!"

에테르 사용자의 몸뚱어리는 가히 흉기와 같다. 그리고 지금 힉스터는 전심전력을 다해 상대를 부수기 위해 달리는 상황.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에 아카데미생들이 경악을 토해 내는 가운데.

아스터의 주먹이 뻗어졌다.

빛이 인 건 그 직후.

번쩍―

뻗어져 나가는 충격파.

이는 마법이 아니다.

전생의 아스터가 동료들과 함께 고안해 낸 기술. 마력을 사용하지만 무투에도 속하지 않고, 마법에도 속하지 않는....

마력의 성질을 이용한 순수한 기술.

충돌식(衝突式).

마력 입자의 충돌로부터 에너지를 뽑아내는 기술이었다.

콰앙―!

굉음이 울려 퍼지고.

"어, 어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카데미생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힉스터의 거체는 마치 관성이 사라진 듯 그 자리에 멈춰 있었는데, 그 한 치 앞에는 아스터의 주먹이 자리해 있었다.

잠깐의 침묵.

쿵!

힉스터의 거체가 고꾸라졌다.

적막한 침묵.

바글바글하게 몰려든 학생들로 시끄럽던 대강당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돌란페가의 차남과 이름도 알 수 없는 학생의 대결이었다.

잿빛 머리칼을 가진 명가의 혈통은 없으니, 저 학생의 신분은 결국 방계 혈족이거나 명가 출신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누구지? 누구 아는 사람 있어?"

아스터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학생들이 소란을 떠는 가운데, 다시금 침묵이 일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스윽.

천장을 향해 곧게 뻗어 올라간 아스터의 주먹.

목소리는 그다음이었다.

"환호."

"...?"

"...?"

나직한 목소리에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학생들이 해괴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와아아아아아아아!"

"멋지다!"

"땄다! 땄다고! 새끼들아! 이게 바로 역배다! 역배라고!"

대강당을 터트릴 듯 울려 퍼지는 함성.

식권을 딴 이들은 역배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환호를 질렀고, 잃은 이들마저도 통쾌한 싸움에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그리고―

"재밌었어!"

"...."

데미안 역시 들떠 방방 뛰었다.

"우리가 이겼어!"

아스터는 그런 데미안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

"넌 지지 않았냐?"

"이기는 편, 우리 편."

"오냐."

그렇게 입학식 이전에 거행된 이벤트에 학생들이 환호를 지를 때.

뒤편으로 소란이 일었다.

"우왓, 밀지 마!"

"아, 누군데!"

저 멀리 인파를 뚫고 들어오는 육중한 거구. 학생들은 막무가내식으로 파고드는 불청객에게 볼멘소리를 내뱉었지만―

곧 조용해졌다.

왜냐.

"비켜! 비켜 이놈들아! 누가 도대체 입학식 날부터 쌈박질을 하는 거야! 너냐?! 너구나! 빨리 안 비키면, 다 잡아갈 테다!"

소란을 느낀 교직원이 등장했기 때문.

아카데미의 정복을 입은 걸 보면 교수인 것 같은데, 학생들은 같이 엮여 끌려갈세라 없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스터는 생각했다.

'음.'

사고 쳤다.

하지만 괜찮다.

'본디, 나는 트러블슈터. 목격자들은 많지만 도망칠 방법은 더 많다. 게다가 함께 즐겼으니까 지금 안 잡히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데미안을 이끌고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려는데.

"걔네 아니에요!"

"...?"

해맑은 외침과 함께 옆에서 손이 불쑥 솟아올랐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는데, 데미안이 외쳤다.

"우리예요! 우리... 헙!"

아스터가 다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하나, 아카데미의 교수는 뛰어난 실력자.

이미 아스터와 데미안은 교수의 눈에 포착된 상태. 곧, 성난 외침이 귓가에 울렸다.

"네놈들이구나앗!"

데미안을 힐끗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읍! 읍읍!"

입을 막으니 한 손을 번쩍 들고, 폴짝폴짝 뛰면서 제 존재감을 천하에 알려 대고 있었다.

이쯤 되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후."

옅은 한숨.

결국 아스터는 데미안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 보였다. 그리고 데미안처럼 한 손을 들었다.

"여기예요! 여기!"

데미안이 신이 나서 외치는 가운데....

"맞습니다. 저희가... 저희가 맞습니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울림이, 유난히 공허하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기분 탓이리라.

* * *

결국 나와 데미안은 입학식도 전에, 제니온 아카데미의 지도부실을 구경해야 했다.

"데미안, 아스터 군."

"예."

"예!"

"정직하게 자수를 했다고? 그런 점에서 이번 한 번은 벌점 없이 넘어가 주도록 하겠다. 상대 학생도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고 말이야."

학생지도부 담당 교수는 엄한 얼굴로 그리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며 엄포를 놓았다.

"앞으로 지켜보겠네."

"...."

난 그저 고개를 꾸벅였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대강당.

다행히 입학식은 시작하기 전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아카데미생들도 모두 좌석에 착석한 상태.

"오."

"오오, 쟤가 걔야?"

나와 데미안은 아카데미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와중에도 데미안은 해맑게 웃으며 아카데미생들에게 손을 흔들었는데, 유명인이 따로 없었다.

그러며 말하길.

"우리 자리를 맡아 줬나 봐."

"그래, 그런가 보다."

난 무어라 대답하기도 피곤한 기분이라, 적당히 데미안의 조잘거림을 받아넘겼다.

마침내 시작된 입학식.

입학식은 퍽 지루했다.

"푸르고 찬란한~"

초대 총장인 현자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아카데미의 교가 제창을 시작으로, 늙수그레한 총장의 연설이 뒤를 이었다.

"에, 해서...."

한데 총장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시작한 연설을 끝낼 줄 몰랐다.

'또', '해서', '그리고', '그런데', '하지만'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단어의 나열.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절반 이상이 고개를 떨군 상태.

데미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난 데미안의 턱을 타고 줄줄 흐르는 침을 데미안의 교복 소매로 슥슥 닦아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깰 줄을 모르는 녀석.

다행히 교장의 연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 지금 잠깐 좀 가 주셔야 할 곳이 있는데...."

"흠, 입학식보다 중요한 스케줄이 어디 있다고...."

비서로 보이는 자가 급히 다가와서 속삭이자 교장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 대화는 음성 증폭기를 통해서 대강당에 울려 퍼지는 상태.

비서는 증폭기를 잠시 끄고는 속삭였다.

교장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 직후였다.

"음. 미안하네, 학생들. 본인이 급히 가야 할 일이 생겨 버렸어."

교장은 짐짓 아쉽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르긴 몰라도 그 표정을 보아 아카데미 입학식보다 더 중요한 행사가 있는 듯했다.

붉은 머리칼의 교수가 단상에 선 것은 그 후였다.

"모두 주목!"

아카데미의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마법사임이 분명한 붉은 머리의 여교수.

그녀는 음성 증폭 마법도 없이 소리를 질러, 아카데미생들을 모두 깨워 버렸다.

아까 나와 데미안을 잡으러 왔던 반대머리 교수도 화들짝 깬 건 웃지 못할 이야기.

"나는 제이라다. 예기치 못한 일정으로 연설을 못 마치신 총장님을 대신해 입학식을 진행하겠다."

자신을 제이라라 소개한 교수가 음성 증폭 아티팩트를 잡았다.

"그럼 입학생 선서부터 시작하지. 우선, 마법계 학생 대표, 달리아 드 디나이."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앞으로 나서는 소녀. 은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학생이었다.

학생들이 웅성거린 것도 그 직후였다.

"뭐야, 디나이가가 입학시험을 치렀어?"

"실력이 안 되는 건가?"

"생각을 좀 하고 말해라. 가주의 셋째야. 진짜 실력이 안 되면 디나이에서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겠냐?"

명가란 으레 특례 입학으로 들어오는 게 관례 아닌 관례이거늘.

이례적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모습에 술렁인 것이다. 다만, 난 그와는 다른 의미로 달리아를 눈에 담았다.

'달리아가 이번 기수 입학생이었어?'

달리아 드 디나이.

데큘란가가 동부 제일의 마도 명가라면, 디나이가는 그다음에 꼽히는 마도 명가.

언제나 데큘란을 넘어서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만년 이인자의 포지션이었다.

달리아는 디나이가의 셋째로, 미래에는 디나이를 대표하는 마법사로 성장하는데―

'여기서 보니 또 반갑군.'

트러블슈터 시절에는 지긋지긋한 인연이었고, 은퇴를 결정했을 때는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바가 있었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은인이라기보다는 악우(惡友)에 가까웠달까.

"다음. 무투계 학생 대표, 폴라 앞으로."

"...네."

검은 머리칼의 남학생이 저쪽 끝에서 걸어 나왔다.

아마 성이 불리지 않은 것을 보면, 명가나 가문 출신이 아닌 모양인데.

어쨌거나 두 학생은 제이라가 건네준 선서문을 각기 쥐고는, 선서해 나갔다.

대강당에 울려 퍼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

"...."

아카데미생들은 이제야 입학이 실감 나는지, 어딘가 감회에 젖은 모습이었는데.

"코오."

우리의 데미안만은 꿋꿋하게 취침 중이었다.

"이상으로."

"선서를 마칩니다."

두 학생이 선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문득, 달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한 것은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

단상에서 내려오는 와중에 고개를 꺾으면서까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달리아.

"악!"

그런 그녀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져 버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난 그런 달리아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내가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어서, 앞으로 172기를 담당해 줄 교수님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한 분씩 나와 주시죠."

앞으로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을 소개하는 교수들.

그들은 각기 맡은 클래스와 전공을 짧게 소개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사이 난, 내가 기다리던 이름을 곱씹으며 단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서야.

"마학 원리 기본 과정을 담당하게 된 파룬이다."

파룬 교수는 어딘지 냉막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를 했다.

'으음.'

내심 헨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그 결이 달랐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 헨지 역시도 사회적 가면은 훌륭한 인격자가 아니던가.

난 파룬 교수의 얼굴을 뇌리에 박아 넣고는 데미안을 깨웠다.

아카데미 입학식이 끝났기 때문.

"어, 음... 으응?"

"일어나."

"끝났어?"

"아니, 너 자다가 걸려서 퇴학당했어. 이제 집에 가야 돼."

"...!"

비몽사몽하던 데미안의 두 눈이 퇴학이라는 말 한마디에 번쩍 뜨였다.

그러고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는데, 잠은 충분히 다 깬 것 같았다.

"농담이야."

"휴. 다행이다...."

"기숙사 배정받으러 가야 해. 늦게 가면 자리 없으니까 정신 차리고 얼른 가자."

효과는 탁월했다.

자리가 없을 거라는 말에, 서둘러 옷매무새를 갈무리하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데미안.

그렇게 관리인들의 인솔을 따라 배정된 기숙사를 향해 이동하는데, 누군가 내 앞을 막았다.

"...."

나와 싸웠던 덩치, 그러니까 돌란페가의 힉스터였다.

힉스터라는 이름도 지도부 담당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알았는데, 녀석도 늦지 않게 정신을 차리고 입학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듯싶었다.

"네놈...."

"네 놈 아니고 두 놈이다."

"맞아, 우리는 두 명이니까."

힉스터의 얼굴이 터질 듯 부풀었다. 아마 울화가 치민 것 같았다.

그러는 것도 잠시, 곧 흠칫하며 몸을 떠는 놈. 왜일까. 나와 데미안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두려움이 설핏 비춰 보였다.

'...트라우마군.'

트라우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반드시 네놈들을 박살 내 줄 테니."

힉스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하나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저 트라우마를 잘 극복하기 바랄 뿐.

◈ 17화. 땅만 파고, 물만 넣으면 돼

나는 데미안을 데리고 1학년 기숙사에 들어섰다.

"친구! 이따가 놀러 갈게!"

"오지 마."

나는 우선 데미안을 기숙사 방에 집어넣은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807>호. 이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여긴가.'

난 문 앞에 붙어 있는 번호를 확인하고 방에 들어섰다.

끼이익―

제니온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기본 2인실.

이는 명가의 자제라 해도 마찬가지였는데, 룸메이트는 아직 방에 들어오지 않은 건지 깔끔한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난 먼저 방을 한 차례 둘러봤다.

'역시, 아카데미가 좋긴 좋네.'

침대는 총 두 개.

공부를 할 수 있게 마련된 책상과 책꽂이, 그리고 잡다한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서랍장과 옷장 역시도 두 개였다.

사용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관리 상태는 꽤나 양호했다.

침대로 시선을 돌리자, <아스터>라는 내 이름이 적혀 있는 큼지막한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품들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상자 속에 있는 자그마한 상자였는데, 그 속에는 필기구나 노트 따위의 학용품이 구비돼 있었다.

그 밑에는 여벌로 마련된 한 벌의 교복, 그리고 잠옷으로 쓸 수 있을 만한 두 벌의 수련복이 놓여 있었다.

상자에는 그 외에도 잡다한 물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생활 전반에 관련된 물건들이라.

모든 학생들이 같은 물품을 사용한다는 건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 의도가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사소한 물품 하나에도 그 신분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초대 총장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

하지만, 그 효과는 글쎄....

학기 초에야 아카데미에서 지급되는 물품들을 받아 쓴다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각자의 개인 물품을 구비할 거다.

아카데미 측에서도 거기까지는 막을 수 없겠지.

난 상자 안에 담긴 물품들을 하나하나 자리를 찾아 정돈했다.

교복과 수련복은 옷걸이에, 필기구와 같은 자잘한 물품들은 책상에 둘 것 없이 아공간에 넣었다.

그렇게 대충 정리를 끝냈을 때.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에 들어섰다.

룸메이트였다.

한데, 어딘지 낯익은 얼굴.

전생에 익혔던 안면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 보았던 사람인데....

곧 그 기억이 떠올랐다. 입학식에서 단상 위에 올라갔던 두 사람 중 하나.

물론, 달리아는 아니다.

'...폴라라고 했나?'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무투계 입학생 수석이라고.

'흐음, 그럼 어느 정도지?'

명가의 입학권을 받은 자들은 입학시험 없이 특례로 들어온다지만, 일반 학생들은 필수적으로 입학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눈앞의 폴라는 입학시험을 치른 무투계 학생 중에서 제일이라는 말인데.

그 말인즉, 명가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상대가 없다는 소리였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폴라를 바라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저 새끼 저거....'

눈빛이 불손하다. 묘하게 불쾌한 빛을 띠고 있달까.

언행마저도 그러했다.

"최대한 조용히 지내자."

"...."

"네놈이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으마. 밤늦게까지 깨어 있어도 괜찮다. 하지만, 서로 간의 간섭은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 시간 이후 대화까지도."

서로를 공기 취급하자는 녀석.

본래, 난 심성이 꼬여서 이런 말을 들으면 꼭 시험해 보고 싶었다.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불을 켜 놔도 괜찮다면, 자정이 넘은 시간에 노래를 불러 그 잠을 깨우고 싶달까.

이런 내 생각이 눈빛에 드러났음인가.

"왜 대답이 없지?"

폴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을 담아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벌떡.

"...!"

자리에서 튀어 나갈 듯 일어나자, 바로 반응을 보이는 녀석.

금방이라도 반격을 가할 것처럼 자세를 취하는데, 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음, 제법.'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폴라의 반응이 과민하다 여길 수 있다.

그저 일어난 것뿐인데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다니? 어지간한 과민증이 아닌 이상, 아카데미에서는 결코 보여선 안 될 행동.

하나, 내가 그럴 만한 기세를 실었기 때문이라.

'오히려 반응하지 못했으면 실망했겠지.'

그뿐일까.

'실전 경험도 좀 있는 것 같고.'

좁은 통로. 검을 쓰는 검사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대체로 발검이라 하면 필수적으로 어느 정도의 공간은 마련되어야 하는 법인데, 그 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랄까.

보통 경험이 없는 검사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저 미묘하게 뒤틀린 검 손잡이를 보면, 발검의 궤적이 벽에는 닿지 않는 흐름이라.

'임기응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체득이라 해야겠지.'

그 반응 속도를 보면, 머리로 생각하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으니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폴라가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 모습에 난 픽 웃어 주었다.

"뭐 하긴, 나가려고."

때마침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

"친구! 빨리 나와!"

데미안이었다.

그 목소리에 폴라는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서면서도 여전히 그 손은 검 손잡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난 그런 녀석을 지나치면서, 그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너 좋을 대로 하자. 대신에...."

"...?"

"자정 넘어서 노래 불러도 뭐라고 하지 말자고. 알겠지?"

물론, 대답은 없었다.

* * *

문밖으로 나서자, 잔뜩 신이 난 데미안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룸메이트, 누구야?"

녀석은 닫히는 문틈으로 폴라를 바라봤는지, 내게 물었다.

"폴라."

"폴라? 누군지 몰라."

그렇겠지.

한창 대강당에서 입학식이 거행되고 있을 땐 퍼질러 자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아는 얼굴도 없는 걸 왜 묻는지 궁금했지만, 이제는 나도 데미안의 화법에 익숙해진 터였다.

"근데 왜?"

"아! 맞다."

내 물음에 데미안은 품에서 팸플릿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카데미 1학년 수업 안내 책자.

"아카데미 구경 가자!"

"구경?"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시가 그러는데...."

란시는 무뚝뚝한 사용인의 이름이었다.

"아카데미에는 볼 게 엄청 많다고 했어. 무조건 첫날에 봐야 한다고. 근데, 친구랑 꼭 같이 나가야 한댔어."

"...음, 그래."

들어 보니, 무뚝뚝하고 눈치 없는 사용인의 목적을 대강 알 수 있었다.

'제니온 아카데미는 넓지.'

도시 하젠에 속해 있다지만, 그 면적은 어지간한 소도시에 버금간다.

그 부지는 기본반, 중급반, 고급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인원수가 많은 기본반 부지는 여기서 또 학년별로 구획을 분할하고 있었다.

그렇게 분할된 1학년 부지의 크기만 해도 엄청날 지경.

'그러니까, 길 잃지 않게 지리를 익혀 두라는 거지.'

특히나 기본적인 수업은 교실에서 진행하지만, 몇몇 수업은 실외 실습장을 찾아 직접 이동을 해야 하는 터라.

아무것도 모른 채 수업 당일이 닥치면 헤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데미안 혼자만 보내기에는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으니....

'날 엮은 거고.'

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기숙사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층계에 마련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로는 드넓은 기숙사 부지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는 입학식을 맞이한 학생들과 바쁘게 돌아다니는 관리인들이 보였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기척들.

아니, 눈에 띄는 게 아니다.

스스스―

마력의 정순함으로 전생에 필적할 만큼 예민해진 기감.

비록 전생의 경지는 따라잡지 못했지만, 그 기감만큼은 절대 아쉽지 않았다.

문제는 이 기감을 전생처럼 항시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뭐 그건 차차 생각할 문제고....

어쨌든 그 기감에 아주 이질적인 기척들이 잡혔다.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것.

'데큘란....'

트러블슈터의 기감이었다.

* * *

우선 나와 데미안은 입학 안내처로 찾아가 아카데미의 지도를 손에 얻었다.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지도를 못 받을 뻔했잖아."

맞는 말이다.

학생들은 나와 데미안처럼 한 손에는 수업 안내 팸플릿을, 다른 한 손에는 지도를 들고 학관을 돌아다녔다.

조금만 늦었으면 모든 지도가 동날 뻔했던 것.

"아카데미는 치열한 곳이야. 뭐든 빨리하지 않으면 전부 다 부족해."

물론, 이건 아니다.

경쟁을 하는 곳이니 치열한 건 맞을 테지만, 이런 이유로 치열하진 않았다.

하나, 난 데미안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기본반 3년.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으니.

착각이든 오해든 녀석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테지.

'뭐, 3년이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얻을 게 충분하다면 그 이상도 있을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사실, 내가 아카데미를 찾은 가장 큰 목적은 동부 제일의 도서관 라피테르 때문이었으니까.

그렇게 난 데미안이라는 혹을 매달고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수업 안내 책자와 지도를 보면서 수업이 있는 건물을 확인하고, 그 지리를 익혔다.

물론, 데미안은 아무 생각 없이 관광을 하고 있었지만....

"저기, 호수! 우와! 우리 집에는 저런 거 없는데."

이런 부분 때문에 무뚝뚝하고 눈치 없는 사용인이 나를 엮어 넣은 거겠지.

하지만 내가 누군가. 심성이 꼬인 사람이라, 갚아 줄 건 갚는다.

"그럼 만들어 달라 그래 봐."

"응?"

"땅만 파고, 물만 넣으면 돼."

"으음."

잠시 고민하는 데미안.

곧 고개를 치들며 눈을 빛냈다. 그러며 말하는 건, 가히 블란도가 사용인들과 마법사들에게는 재앙적인 말이라.

"그래야겠다! 저것보다 더 넓고, 크게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래."

"호수 이름은 뭐가 좋을까."

난 잠시 생각하다가 한마디를 붙였다.

"피땀 눈물."

"좋아!"

호수 이름을 뭐 저딴 식으로 짓느냐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 블란도가 부지에 마련될 호수에는 무수한 사용인들의 피와 땀, 그리고 마법사들의 눈물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 뒤로도 내 치졸한 복수는 계속됐다.

"저기, 동상 봐! 멋있어!"

"저것도 만들어 달라 그래."

"이름은 뭐로 할까."

"피땀 눈물 2호."

"좋아!"

머지않은 미래에 블란도가에는 집채만 한 조각상이 세워지겠지.

"형태는 드래곤으로 하자. 비늘이 아름답거든."

"좋아!"

아마 그 비늘 하나하나를 조각하다 보면 석공이 피를 토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어차피 내가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학관을 돌아다니는 동안 내 기감은 예리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기감을 확장해야 하는지라 적잖이 피곤한 일이었지만, 소득은 있었다.

'숫자는 대략....'

지금까지 파악한 트러블슈터의 머릿수는 일곱, 미처 파악하지 못한 놈들까지 해도 채 열 명은 넘지 않겠지.

중요한 건 그들의 분포가 유의미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를 지도에 나타내면 그 중심은 바로―

제2 마학관.

1학년 마학 수업이 진행되는 건물이자, 파룬 교수의 연구실이 자리하고 있는 제2 마학관이 되겠다.

이에 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이다.

'파룬 교수가 타깃이군.'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데큘란 놈들이 어떤 놈들인가.

대상 하나를 감시할 때는 그 대상과 엮인 주변까지 함께 훑는다.

그 범위는 임무의 중요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심할 때는 수십 년 전에 마주쳤던 인물까지 감시 대상에 포함할 정도.

'아직은 의심 단계인가.'

데큘란 측에서도 헨지에게 조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시의 밀도를 보아 누가 조력자인지는 특정하지 못한 채,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을 전체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저 동상도 멋져."

데미안은 제2 마학관 앞에 비치된 초대 총장, 현자의 동상을 보며 눈을 빛냈다.

난 그런 데미안을 보며,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동상은 드래곤 동상이 제일이다."

"왜?"

"비늘이 멋지니까."

피땀 눈물 2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다른 데로 가자."

"응!"

등을 돌림과 동시에 우리의 뒤쪽으로 따라붙는 은밀한 기척.

난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왜 안 따라붙나 걱정이었는데, 마침 알맞게 따라붙어 준다.

이제 저놈이 내게 알려 줄 것이다. 숨어든 트러블슈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파룬 교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제 놈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 18화. 잡아야겠다

그날, 저녁.

해가 저무는 시간이 되자, 아카데미를 구경하던 학생들은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관리인들은 견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열어 뒀던 건물의 문을 잠그고, 중앙 통제실로 가 마력을 동력 삼아 돌아가는 가로등에 불을 밝혔다.

그렇게 아카데미가 서서히 어둠에 물들어 가는 시간.

스스스―

한 남자가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을 달리고 있었다.

이름은 없다. 그저 번호로 불릴 뿐.

아카데미에 잠입한 10인의 트러블슈터 중 하나로, 그에게 부여된 번호는 97.

97호는 하(下)급 감시 대상 둘을 감시하다가 긴급 소집을 받고 거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그가 어둠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1학년 부지의 어느 폐창고. 아카데미에 잠입한 지난 1년여간 거점으로 삼았던 공간이었다.

스윽.

그가 익숙하게 폐창고의 창문을 넘어 들어서자, 곧바로 그를 맞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나."

90호.

아카데미에 잠입한 트러블슈터들의 번호는 90번부터 99번까지인데, 개중 서열이 가장 높아 조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었다.

97호는 90호의 인사에 적당히 대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놈들은?"

"먼저 갔다."

"가다니, 어딜?"

긴급 소집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조원이 모이는 자리였다. 한데, 이 자리에 있는 이는 90호와 자신뿐.

97호로서는 상당히 의아한 상황이었으나, 곧 90호가 그 답을 해 주었다.

"상부에서 긴급 지령이 내려왔어. 타깃의 둥지로 모이라는 소식이다."

"타깃이면, 메인? 서브?"

"서브."

여기서 말하는 메인 타깃은 헨지. 임무의 중심이자, 반드시 마크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서브 타깃은 헨지의 조력자로 추측되는 인물들을 의미했는데, 현재 90번대 트러블슈터들이 감시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파룬 교수였다.

또한, 둥지가 뜻하는 것은 파룬 교수의 저택.

한데, 갑자기 파룬 교수의 저택으로 모이라니?

"뭐지? 임무에 변동이 생긴 건가?"

"메인 타깃이 꼬리를 밟힌 모양이야. 유의미한 정보를 입수했어. 오늘 밤, 자정에 목표물이 서브 타깃에게 전달된다는 소식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97호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지난 1년여간.

임무가 일상인 트러블슈터들이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임무는 꽤나 힘든 면이 있었다.

경비 체계가 특별히 견고한 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꽤 잘되어 있는 축에 속하지만, 트러블슈터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수준이랄까.

하나, 문제는 바로 교수들.

'괴물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단 한 걸음.

방심해서 단 한 걸음이라도 거리 조절에 실패한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주로 양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라는 거랄까. 은신자를 잡아내는 데에 요령 있는 자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빌어먹을, 잠깐만."

97호가 거친 욕설을 뱉었다.

"타깃의 둥지로 모이라고?"

"그래, 지령은 그렇게 내려왔다."

담담한 90호의 어조에 97호는 골이 지끈거렸다.

"지령이 맞게 내려온 게 맞아?"

"맞다."

"이런, 빌어먹을. 정말 맞단 말이지? 그럼 싱글 넘버는? 적어도 1호가 오거나, 싱글 넘버 두셋은 와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97호가 격분하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제니온 아카데미의 교수.

그들의 실력은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톡톡히 체험해 봤다.

한데, 그 둥지로 가라니? 죽으라면 죽는 게 트러블슈터라지만, 제니온 아카데미의 교수에게 달려들어 죽는 건 그저 개죽음과 다름없었다.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90호를 바라보는데.

그 대답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1호는 오지 않는다. 다른 싱글 넘버들 역시."

"하, X발."

"다만...."

어딘지 말끝을 흐리는 90호.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97호는 답답한 듯 대답을 재촉했다.

"다만, 뭐? 아, 충원이 있는 건가? 트러블슈터가 아니면 혈족? 아니면, 가문의 마법사? 어느 쪽인데 그래?"

"가문의 마법사다."

그 대답에 97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그 얼굴은 검은색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를 오랫동안 봐 온 90호는 그 변화를 인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망설이는 거다.

가문에서 어떤 자가 오는지 알게 된다면, 저 얄팍한 희망조차 사라질 테니까.

"몇 명이나 오는 거지? 아니, 누가 오는데?"

하나, 그는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칼라헨."

"...뭣?"

그 나직한 한마디가 나왔을 때, 97호는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듯, 침묵을 유지하기를 잠시간. 그의 입이 열렸을 때는 꽤나 많은 걸 포기한 듯 힘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칼라헨이 맞다는 거지?"

"그래, 맞다. 화마(火魔) 칼라헨."

화마 칼라헨.

데큘란의 마법사단 홍옥(紅玉)의 부단주 중 하나로, 직급만큼이나 뛰어난 수준의 마법사이다.

하나, 그는 마법사단의 부단주라는 직급이 무색하게 홀로 움직이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철함.

오직 완수만을 신경 쓰니, 그것은 함께하는 동료들의 목숨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즉, 칼라헨과 함께 임무를 파견했다면 결국 이런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죽어라.'

"빌어먹을."

97호가 낙담하는 그때, 90호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이 꼭 충돌로 불거지지 않을 수도 있다. 가문에서도 얼굴이 알려진 마법사가 제니온 아카데미의 교수와 엮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야."

"후,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97호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사실, 별 가망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무력 충돌 없이 온건한 상황 해결을 바랐다면, 결코 칼라헨을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제 가자. 슬슬 합류해야 생환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가."

"그래, 가자고."

90호는 계획대로 97호와 함께 둥지로 향했다.

'하급 감시 대상 둘은....'

97호에게 감시를 맡겼던 대상들. 그 둘에 대한 생각이 잠깐 머리에 스쳤지만, 곧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오늘 밤에 서브 타깃에게 목표물이 전달된다.

이제는 서브 타깃, 그러니까 조력자가 파룬 교수로 특정된 상황. 그 전달책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탓, 타닥.

폐창고를 나선 둘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폐창고의 창문 아래.

'....'

눈동자 한 쌍이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비췄다.

"흐음, 오늘 밤 자정이라고?"

* * *

나는 창문 바깥에서 들었던 트러블슈터들의 대화를 곰곰이 되짚어 봤다.

타깃이니, 둥지니 하는 용어들은 내가 현역 때까지도 쓰던 말이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어쩐지, 갑자기 복귀한다 했네.'

본래 트러블슈터들의 감시 체계는 강박에 가깝다.

제아무리 최하급 감시 대상이라 해도 24시간은 일거수일투족 지켜보는 것이 행동 강령.

한데 갑작스레 빠지는가 싶어서 따라와 봤더니, 뜻밖의 소득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목표물이 논문이 아닌가?'

헨지로부터 논문을 넘겨받은 전달책은 나인데, 난 아직까지 파룬 교수에게 논문을 전달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나라 해도 벌써부터 데큘란과 엮이는 건 꽤 부담스러운 일이라, 최대한 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논문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겼다.

'그러면 트러블슈터들이 입수했다는 정보는 뭐지? 상부에서 내 행동을 예지한 것도 아닐 테고.'

물론 예지라 해도 틀린 예지였다. 난 그렇게 움직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트러블슈터들의 대화는 여러모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흐음.'

난 트러블슈터들의 거점이었던 폐창고에서 나와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에는 어느새 떠오른 달이 제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총총히 박힌 별들이 검은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아름답다면 제법 아름다운 밤하늘.

난 그 아래를 거닐면서 몇 가지 가정들을 떠올렸다 지우고 있었다.

제법 많은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중 대부분이 쓰레기 같은 헛소리였고 단 몇몇만이 그나마 신빙성 있는 추론이었다.

첫 번째.

'애초에 헨지가 내게 맡겼던 게 진짜 논문이 아니다.'

내가 본 헨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작자였다.

트러블슈터들의 시선을 내게 돌리고, 그사이 진짜를 보내려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다지 신빙성 있는 추론은 아니었다.

'이 논문은 진짜야.'

천원공의 논문은 전문적인 용어들이 난무할 정도로 난해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맥락과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두 번째.

'저놈들이 말하는 목표물이 논문이 아닐 가능성은... 없지.'

그나마 괜찮은 가정이라 떠올렸는데, 이 또한 헛소리였다.

천원공의 논문 정도는 돼야 데큘란 녀석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아카데미에 트러블슈터들을 파견했을 것 아닌가.

마지막 세 번째.

'오늘 전달되는 목표물 쪽이 가짜 논문일 경우.'

난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침 가로등 아래.

환한 불빛을 받고 있으니, 괜히 내 머릿속도 환히 개는 것 같아서 그대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하필 입학식 날인 것도 그렇고.'

헨지는 미친놈이다.

그것도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미친놈이라, 일반인인 나로서는 그 사고를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대한 그 생각을 예측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가짜 논문에 대한 정보를 흘려서 데큘란의 판단력을 흐리고, 더 나아가 파룬 교수에 대한 감시망을 흩어 놓는다.'

물론, 가짜 논문만으로는 데큘란의 감시망이 흐려질 리는 없었다. 아마 별도의 조치가 있을 듯한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난 가로등 불빛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약, 내가 판단한 게 맞다 하면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데큘란의 감시망이 옅어졌을 때, 논문을 전달하면 그만인 일이니까.

다만....

'분명, 칼라헨이 온다고 했지?'

칼라헨. 그는 내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인물이었다.

블란도와의 일전 이후, 몰락해 가는 데큘란에 남아 충성을 증명한 인물.

지금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지만, 칼라헨의 진정한 전성기는 블란도와의 전쟁 이후였다.

데큘란의 이름으로 그 뜻을 관철시키는 화마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으니. 전쟁 마법사로서는 한 획을 그은 인물이랄까.

그러니....

'잡아야겠다.'

칼라헨의 마법은 데큘란의 화염계 비전 중 하나.

또한 데큘란의 비전이라는 사실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그는 대륙에 그 이름을 떨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마법사의 비전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 19화. 하지만, 괜찮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소등 시간까지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댕― 댕―

정확히 열 번 울리는 종소리.

고요한 기숙사 부지로 울려 퍼지는 청아한 소리가 열 시를 알리자, 곧 복도에서 기숙사 사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호 시작하겠다."

이미 아래층을 훑고 올라온 사감은 8층의 방을 훑으며 인원을 점검했다.

나와 폴라 역시 침대에 앉아 사감을 맞이했는데, 점호가 완전히 끝나기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제 이후의 시간은 나름대로 자유라 할 수 있었다.

잠을 자려는 학생은 잠을 자고, 공부를 하려는 학생은 공부를 한다.

원칙적으로 점호가 끝난 이후부터는 소등 시간이었지만,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큰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고.

점호를 하는 도중에 사감이 전달한 내용이었다.

'적당히 사고만 치지 말라는 거지.'

하지만 아카데미 첫날이라 그런가. 복도는 고요했다.

아카데미를 둘러보느라 진이 빠진 신입생들은 바로 곯아떨어졌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첫 수업에 늦지 않으려 일찍이 잠을 청했다.

나 역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누워서 폴라가 잠들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잠들지 않는 녀석의 기척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안 자면... 영원히 재워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괜찮지 않았다.

난 실없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현재의 내 상태를 점검해 봤다.

현재까지 마력으로 녹여 낸 상품 영약의 약성은 대략 칠 할 정도이다.

심지어 화인으로 변모한 마도서의 공능 덕분인지, 손실은 거의 전무한 상태.

즉, 이만하면 대략 기본 정도는 갖추었다 볼 수 있었는데, 과연 이 상태가 칼라헨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상태냐 하면 그건 또 모를 일이다.

'충돌식(衝突式)까지는 온전하게 쓸 수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의 몸뚱어리는 전생에 비해 너무도 약했다.

그러니까, 전력을 다한 충돌식의 여파를 감당하기엔 내구도가 받쳐 주지를 못한달까.

'육체 내구도는... 차차 해결할 문제고.'

난 차분하게 다시 현 상태를 점검해 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를 머리에 온전히 박아 넣고, 또한 상대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조심스레 예측해 봤다.

물론 무계획의 정신도 잊지 않았다.

다만,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내 한계를 명확히 알면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니.

그런 와중에 당면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도 머릿속에 그려 봤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파룬 교수와 칼라헨이 짝짜꿍이 맞아서 평화롭게 상황을 마무리할 때.

내 입장에서는 칼라헨을 비롯한 트러블슈터들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했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히트맨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기습을 통해 암살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때는 칼라헨의 생사를 떠나서, 내 목숨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칼라헨을 그냥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어.'

이는 비단 칼라헨의 비전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의 칼라헨은 많고 많은 데큘란 마법사단의 부단장 중 하나.

현재도 나름대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 촉망받는 미래의 인재일 뿐이고 그 진정한 가치는 비로소 미래에 드러난다.

그 사실을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칼라헨을 방치하는 것은 미래의 위협을 키우는 꼴밖에 더 되지 않는다.

'최대 접전 시간은 5분.'

만전의 태세는 아니다.

마력량은 물론이고 장비 하나, 육체 상태에 이르기까지 전생에 비해 모든 면이 부족했으니.

하지만 뭐, 언제는 준비된 상태에서 임했느냐. 그건 또 아니다. 어찌 보면 지금의 부족함이 오히려 내게는 익숙하다는 말이지.

다만, 정신적인 기제만큼은 갖출 필요가 있었다.

'좋아.'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까지 벼려 냈을 때.

부스럭.

옆자리에 누워 있던 폴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모든 감각이 예리하게 벼려진 상태.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소리만으로도 선명히 그려졌다.

그는 옷장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숨겨 놓은 상자 속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그 상자에서 꺼내 든 것은 비단 옷뿐만이 아니었는데, 일종의 혁대와 비슷한 종류의 장비인 것 같았다.

'딸칵딸칵'하는 소리가 옅게 울려 퍼지고.

폴라는 잠시간 내 자리를 주시했다.

그러고는 내가 반응이 없자,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드르륵.

열었던 창문이 닫히고.

폴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용병대인가.'

나이답지 않게 풍부한 실전 경험. 아마, 허리춤에 찬 것은 단검대일 것이다.

어렴풋이 코끝을 자극하는 쇠 냄새. 그 안에 담겨 있는 혈 향은 인간의 것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몬스터의 것이었으니.

난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폴라를 기억 속에서 지웠다.

폴라의 목적은 무엇인지. 어째서 암행에 나선 것인지.

의문도, 추측도 지운 채 그저 내 할 일에 몰두했다.

도시 하젠에 며칠간 머물면서 준비한 암행복을 꺼내 걸치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흑색 가면을 착용했다.

그런 후 거울 앞에 섰을 때.

'....'

전생의 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터가 아닌, 1호.

거울 속 가면인은 1호였다.

폴라가 닫고 간 창문을 열고 아카데미 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달님, 오늘도 정의로운 트러블슈터가 되도록 해 주소서.'

휘영청 뜬 달빛이 사위를 비추는 가운데, 역시나 응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의 난 트러블슈터도 아니고, 사실 정의로웠던 적도 없었으니까.

* * *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

"...."

파룬 교수는 집무실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드넓은 저택.

사용인들이 모두 퇴근한 관계로 텅 빈 저택에, 때아닌 인기척이 몰려들었다.

파룬 교수는 그 기척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는데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쥐새끼들....'

근 1년을 참아 왔다.

헨지, 그 빌어먹을 놈이 꼬리가 잡힌 사실도 진즉에 알았고, 자신에게 붙은 데큘란의 감시는 헨지의 발각 소식보다 더 빨리 눈치챘다.

더러운 쥐새끼들이 곁을 맴도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는 일. 하지만, 파룬 교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들의 존재를 눈감아 주었다.

그 기간이 근 1년.

제 놈들은 자신들이 꼬리를 잘 감추어 살아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카데미에, 저택에, 자신이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그 역겨운 냄새를 어떻게 못 맡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파룬이 그들을 살려 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데큘란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다.

천원공 연구로 켕기는 게 있어서? 아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래도 쥐새끼들이 제 주제를 알고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기어코 저택 안쪽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결국, 선을 넘는구나.'

자신이 없을 때 저택을 침범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불쾌하긴 하지만 그저 그 흔적을 지워 내면 그만이니까.

하나, 이처럼 눈앞에서 영역을 침범한다면 더 이상 참아 줄 인내도 없는바.

기척을 보아하니 아카데미에 있던 놈들 외에도 도시 하젠 전역에 퍼져 있는 쥐새끼들이 모두 모인 것 같은데....

다만, 의문이 하나 있었다.

쥐새끼들이 이처럼 당돌하게 나올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썩은 고기 냄새를 맡았든, 굶주릴 대로 굶주려 아사 직전이든.

물론 저들이 진짜 쥐새끼는 아니니 그 어느 쪽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렇군."

파룬 교수는 감았던 눈을 반개했다.

쥐새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기척이 저택으로 스며들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딸칵.

문고리가 열리고 들어서는 한 사람.

복면을 뒤집어써서 그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 허리춤에 매단 단검대와 칼로 보아 그 신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암행자라 하기에는 은밀하지 못한 기척. 그리고 투박하기 그지없는 장비.

'용병이군. 그리고....'

파룬 교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복면인을 지그시 눈에 담았다.

"폴라."

제니온 아카데미 172기 무투계 수석 입학생.

강당에서 선서를 할 때 짧게 스쳐본 것뿐이었지만, 파룬 교수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또한 폴라의 소속이 용병대라는 것은 모든 교수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연관 지어 생각하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적잖이 놀란 걸까.

"...!"

복면인의 걸음이 일순 멈칫했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것처럼 다가와 물건을 내미는 복면인.

"다음부터는 위장을 하려면 에테르의 형질을 먼저 다듬을 수 있도록 해라. 그것이 암행의 기본이니. ...뭐, 다음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

폴라는 그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파룬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폴라가 내민 물건을 살펴볼 뿐.

제법 두툼한 서류 봉투. 그 입구는 봉인(封印)이 자리해 있었다.

한데, 그 봉인 위에 찍힌 인장의 문양은 꽤나 익숙한 것.

거기까지 살펴봤을 때, 파룬 교수는 곧 쥐새끼들이 어떤 냄새를 맡은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헨지, 네놈이었구나.'

1년간 데큘란의 눈을 피해 논문을 전달할 방법을 강구하더니, 결국엔 이리도 허무하게 덜미를 잡히는가.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파룬 교수는 곧 생각을 지워 버렸다.

헨지, 그 음흉한 놈이 이렇게 선선히 덜미를 잡힐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았다.

'흐음, 대체 무슨 꿍꿍이냐.'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이 서류 봉투 속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어째서 아카데미생인 폴라를 고용해 이 자리에 보낸 건지.

어쩌면, 적당한 용병대에 의뢰를 했는데 마침 폴라가 얻어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

폴라가 속해 있는 칼리아 용병대는 제법 이름난 집단이었고, 헨지가 있는 블란도 근처에 그 근거지를 가지고 있으니.

파룬 교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이내 전부 지워 냈다.

'미친놈의 생각을 파악하려 하다니. 쓸데없는 수고를 했군.'

아카데미 기본반부터 조교수 시절까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한, 친구라면 친구였지만 그 생각은 도통 종잡을 수 없다.

그 알 수 없는 속내를 고민하다가 골머리를 썩일 바에는 현재에 집중하는 게 낫다.

'그리고 마침....'

또 다른 불청객이 방문했다.

저벅, 저벅.

복도로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그 존재감이 피부로 와닿았다.

은밀해지려 애쓰는 쥐새끼들과는 달리, 이번에 등장한 불청객은 대놓고 기세를 발산시켰다.

대개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천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 제 몸집을 불리는 피식자이거나, 굳이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는 포식자. 그중에서도 상위 계층.

쾅―

굉음과 함께 나타난 불청객은 후자였다.

"반가워, 파룬 교수. 내 이름은... 칼라헨인데.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교수 따위가 알기는 하려나?"

"...!"

그 이름에 흠칫 몸을 떠는 폴라.

칼라헨은 그 모습에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거기 있는... 용병? 용병 나부랭인가? 용병 나부랭이가 왜 복면을 쓰고 있지? 어쨌든, 저 칼잡이 놈은 날 아는 모양인데. 교수는 어때?"

파룬 교수는 칼라헨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물론, 안다.

파룬이 연구실에만 틀어박힌 지는 제법 오래되었지만, 제니온 아카데미의 교수는 연구만 한다고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전장에도 서 봤고, 필드에서 활동하는 여느 마법사들 못지않게 치열한 시기도 보냈다.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어찌 모를까.

칼라헨, 데큘란의 화마를.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하하."

메마른 웃음을 흘리는 칼라헨.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이나 꺼내 보도록 해라. 네놈들 역겨운 냄새에 코가 다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니."

파룬 교수는 그런 칼라헨을 하찮다는 듯 깔아 보았다.

◈ 20화. 이 자리가 네 무덤이다

칼라헨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

데큘란의 화마라는 이명을 얻은 후, 이런 취급은 또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꼭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달까.

"교수가 참 재미있어. 뭐, 그래. 역겨운 냄새, 날 수도 있지. 나도 저놈들 냄새가 썩 좋지는 않거든. 그럼 본론만 간단히 할까? 우선...."

칼라헨이 손가락을 뻗어 폴라를 지목했다.

"저놈은 죽을 거고."

그 옆으로 옮겨지는 손가락.

이번에 가리키는 대상은 파룬 교수였는데, 그는 지목을 한 후 빙글거리며 웃어 보였다.

"교수는... 어때 본인이 죽을 것 같아, 살 것 같아? 애들 가르치는 똑똑한 작자니까, 알 수 있지 않겠어?"

대놓고 조롱하는 투.

하지만 당사자인 파룬 교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찮다는 눈길로 칼라헨을 응시할 뿐.

"쯧. 눈깔하고는. 운 좋은 줄 알아, 교수. 가문에서 교수는 멀쩡히 살려서 데려오라 했으니까. 아니었으면 그 눈깔 다시는 빛도 못 봤어."

칼라헨은 진정으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그 서류 봉투. 블란도 쓰레기한테 온 거지? 그것 좀 보여 줘야겠는데. 얌전히 넘겨줄래? 그랬으면 좋겠는데."

칼라헨은 그리 말하고는 파룬 교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말과는 다르게, 파룬 교수가 저항하기를 바라는 듯한 눈초리였다.

실제로 그의 생각은 표정에서 읽히는 것과 같았다.

가문에서의 명령은 서류 봉투의 내용물이 천원공 연구 논문일 경우, 파룬 교수를 살려서 데려오라는 것.

그 의도는 결국, 파룬을 살려서 연구를 이어 나가게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연구를 이어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펜을 잡을 두 팔과 논문을 읽을 두 눈만 멀쩡하면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팔 하나, 눈 하나씩만 있어도 지장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래, 팔 하나. 눈 하나만 남겨 두자.'

여기까지 칼라헨이 생각했을 때, 파룬 교수가 입을 열었다.

"폴라."

"...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폴라 역시 이번에는 제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학부생이기 전에 한 사람의 용병으로 생각하겠다. 그러니, 네 목숨은 스스로 챙기도록."

"...알겠습니다."

폴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간단한 전달 의뢰였는데, 일이 어째서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대상이 아카데미 교수라는 것만 아니었으면, 그리 켕길 것도 없는 의뢰였거늘.

복잡해진 상황에 폴라는 오만 가지 상념에 잠겼다가 전부 지워 버렸다.

"후."

옅게 내뱉는 호흡.

손은 검의 손잡이에 닿는다.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은 검이니만큼, 손잡이가 손아귀에 빨려 드는 듯 착 달라붙었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나름의 태세를 갖추었을 때.

"흐하하. 그렇지, 그래. 저 용병 애송이는 죽기 싫어서라도 싸워야지. 그런데 교수. 괜찮겠어? 눈 하나랑 팔 하나만 남을 수도 있어."

파룬 교수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품속의 아공간에 서류 봉투를 넣은 후, 칼라헨을 눈에 담을 뿐.

나직한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 직후였다.

쩌저적!

돌연 허공에 생성되는 얼음 조각.

아니, 허공이 아니었다.

빈 줄 알았던 공간으로 가면을 쓴 사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얼어붙은 몸뚱어리로 비척거렸다.

트러블슈터들의 몸뚱어리를 속박한 얼음이 삐죽 가시를 세운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

콰득!

삐죽 솟은 얼음 가시에 숨이 멎는 두 명의 트러블슈터.

그 모습에 칼라헨이 진하게 웃어 보였다.

"흐하, 제법인데. 좋아."

칼라헨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곧 근처에 숨어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넓었던 집무실이 비좁게 느껴졌다.

폴라는 가만히 공간을 눈에 담았다.

'가면인이....'

물경 수십.

허공에서 나타난 걸 보아, 에테르계가 아닌 마력계 암행자들이다.

물론, 저들이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존재 자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확신하고 기감을 펼쳐 보니 언뜻 걸리는 기운들이 제법 있었다.

그 숫자는 까마득하게 많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마의 주특기 마법은 그 이명처럼 화염계.

이처럼 아군들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이라면, 화마 역시도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그럼 한번 놀아 볼까?"

귓가를 파고드는 칼라헨의 목소리.

번쩍―!

찰나의 순간, 칼라헨의 몸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불길을 보았을 때.

'...미친!'

폴라는 자신이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용병대에 들어가,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숱한 광인(狂人)들을 마주해 왔지만, 칼라헨은 그조차 본 적 없는 규격 외.

직후, 폴라의 머릿속에 아로새겨지는 두 글자.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 * *

"흐하하!"

파룬 교수의 저택으로 칼라헨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콰강!

곳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고, 그럴 때마다 아름답던 저택이 터져 나갔다.

전투는 당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꽤나 치열한 양상이었다.

연구만 하던 펜대라 얕잡아 봤던 파룬 교수는 전투 마법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실전적인 마법을 구사했고, 칼라헨이 보잘것없는 용병 나부랭이라 생각했던 폴라는....

"후욱, 후."

그 폭발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폴라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황에서도 한시도 몸을 쉬지 않았다.

'빌어먹을.'

죽음을 직감했던 그 순간.

살아남은 것까지는 참으로 좋았다.

- 폴라야, 입학 선물이다. 오다가 주웠으니까, 버리든지 말든지 해.

대장이 건네준 그 꼬질꼬질한 부적이 설마 이런 아티팩트였을 줄이야.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걸 봐서는 일회성 방호 아티팩트였지만, 그 방호력은 보기 드문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버렸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가도, 그야말로 대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장 나름의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준 선물이라면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뭐, 이런 식의 믿음 아닌 믿음이랄까.

어쩌면, 버려서 죽더라도 괘씸하니 잘 죽었다며 웃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놈들, 대체....'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마법의 향연.

어느 것 하나 수준 높은 마법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특별한 비전을 익히지 않고도 구사할 수 있는, 공용 마법의 영역에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언뜻언뜻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이며 그 조합이 참 까다로웠다.

커다란 한 방은 없지만, 조금씩 숨통을 조여 오는 방식이랄까.

캉!

"허억, 헉!"

폴라는 짓쳐들어오는 얼음 화살을 쳐 내고는 숨을 헐떡거렸다.

단련했던 육체는 어느새 녹초가 되어 힘이 쭉 빠졌다.

임무차 파견 나간 지역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을 때에도 이만큼 힘들지는 않았는데. 아차 하면 당장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폴라는 정신을 다잡았다.

'버텨야 해.'

그 시선이 뒤편에 선 파룬 교수를 힐끗 담았다.

칼라헨이 괴물이라면, 파룬 역시 그에 못지않다. 아니, 폴라가 보기엔 그 이상이었다.

츠즈즈....

쾅! 콰강!

허공에 빗발치는 수십 발의 마법.

그 모든 마법을 허공에 역장을 형성해 궤도를 비틀어 낸다.

그야말로 초월적인 연산.

그 와중에도 마법을 발현해 적의 숫자를 줄여 나가는데, 도대체 몇 개의 속성을 다루는 건지.

처음 선보였던 얼음 마법을 시작으로 화염, 뇌전, 거기에 대지 계열.

전투 도중에 보여 준 속성만 해도 얼추 네 가지가 넘었다.

하나, 파룬 교수가 이만한 역량을 보일 수 있는 것도 자신이 버티기 때문.

마침 파룬 교수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쁘지 않구나. 좀 더 믿어도 되겠어."

"후우, 후."

자신은 이미 한계였다.

하나, 좀 더 믿는다는 건 마법을 막아 내는 신경을 공격에 더 집중하겠다는 의미.

"가능한가?"

"얼마든...!"

폴라는 목소리를 쥐어짜 답했다.

이미 가불가를 떠나, 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 * *

난 기척을 감춘 채 전장에서 조금 떨어져 전투를 눈에 담았다.

'...과연.'

마법사와 가더(Guarder).

최소 단위의 파티를 이룬 파룬 교수와 폴라의 분전은 경이로웠다.

물론 파룬 교수의 괴물 같은 연산 능력이 지대한 공을 차지했지만, 가더로서 마법사를 지키는 폴라의 역량은 학부생의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황은 좋지 않았다.

벌써 이 자리에서 숨을 거둔 트러블슈터가 총 몇 명인가.

'데큘란이 작정을 했군.'

아카데미에 투입된 트러블슈터의 수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파룬 교수의 저택에 투입된 숫자는 물경 백에 달하는바.

아마 아카데미 외부, 도시 하젠을 감시하던 병력들이 총동원된 듯했다.

실력을 보아 대부분이 숫자도 부여받지 못한 노넘버였지만, 그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은바.

특히나....

'몰이사냥을 하고 있어.'

내 시선이 전열의 중간쯤에 있는 칼라헨에게 닿았다.

"교수! 이게 다야?! 조금 더 애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흐하하!"

경망스럽게 지껄이며 마법을 난사하는 칼라헨.

위명이 자자한 화마라 보기엔 마구잡이식의 마법 발현이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할 뿐.

'전투의 맥을 끊는군.'

파룬 교수와 폴라가 승기를 잡지 못하도록, 그들이 기세를 탈 때마다 적절하게 흐름을 끊어 버렸다.

겉으로는 고삐 풀린 광인(狂人)을 연기하지만, 그 속내는 뱀과 같은 사내랄까.

아마, 파룬 교수도 이 사실을 느끼고 있기에 섣불리 전력을 드러내지 않는 걸 테지.

조금이라도 평정심을 잃거나, 지치는 순간 칼라헨의 독니가 숨통을 물어뜯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애써 유지한 전황도 의미가 없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말라 죽을 뿐이지.'

난 잠자코 숨을 죽인 채 기회를 기다렸다.

'내가 파룬 교수라면....'

어떻게든 승부수를 띄운다.

칼라헨 역시 전장을 숱하게 경험한 노련한 마법사.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파룬 교수가 승부수를 띄우는 순간, 칼라헨도 그것을 맞받아칠 테고. 그때가 되면 양쪽의 운명이 두 마법사의 마법 하나에 판가름 난다.

그리고....

'기회는 그때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스스스―

돌연 전장으로 무지막지한 양의 마력이 내리깔렸다.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파룬 교수.

와중에 폴라와 둘 사이에 모종의 밀담이라도 오고 간 것인지, 폴라의 움직임이 돌연 거세졌다.

호흡조차 하지 않고 마법을 쳐 내는데, 그 검날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건 다름 아닌 에테르.

에테르를 머금은 검이 하나의 막을 만들며 파룬 교수에게 쇄도하는 모든 마법을 막아 냈는데, 그 모습은 꼭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칼라헨이 행동에 들어선 것도 그 직후.

"...."

역시, 한결 여유가 있다는 걸까.

그는 파룬 교수와는 달리 역장을 펼쳐 주변을 방비하고는 마력을 뿜어냈다.

그 양은 파룬 교수의 것에 준하는 수준.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그그그―

두 마법사가 준비하는 마법에 자연 상태의 마나가 비명을 토한다.

제어력 싸움을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 분포된 마력량은 한정적인데 명령을 내리는 개체는 두 개이니. 필연적으로 파이 싸움에 들어선 것인데....

'지금.'

난 타이밍을 굳혔다.

쾅!

단 한 걸음.

칼라헨과 내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경로상에 존재하던 트러블슈터들이 힘없이 스러져 내렸다.

충돌식이 남긴 파괴적인 흔적만이 그들의 죽음을 대변하는 가운데, 나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까지가 반의반 호흡.

"...!"

"기습...!"

트러블슈터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린 건 이쯤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 두 번째 걸음은 내디뎌진 후.

난 어느새 칼라헨이 펼친 견고한 역장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난 그 역장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칼라헨."

"...."

제 역장을 믿는 것일까.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파룬 교수와의 제어력 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녀석.

그 심리가 짐작이 갔다.

이는 실로 노련한 전투 마법사다운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위급한 상황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자신의 역장을 믿고, 가장 시급한 파룬 교수와의 싸움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츠즈즈―

칼라헨의 역장이 흐릿해졌다.

그 시발점은 내 손바닥.

"...!"

그제야 눈을 뜨는 칼라헨.

그 눈동자에 서린 빛은 경악,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혼돈 그 자체라.

그런 칼라헨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이 자리가 네 무덤이다."

쾅!

일격에 칼라헨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몸에서 뿜어지는 스파크.

온몸에 치렁치렁 걸치고 있던 방호 아티팩트가 기능을 상실하고.

덥썩.

내 손아귀가 칼라헨의 모가지를 틀어쥐었다.

◈ 21화. 둘 중 하나를 했어야지

"...!"

눈앞으로 짓쳐들어오는 손아귀.

덥썩.

이내 목을 움켜쥔다.

그 순간, 왜일까.

칼라헨의 눈동자가 담은 것은 그 손아귀의 주인이었다.

무늬 없는 칠흑색의 가면. 그 머리칼은 훤히 드러나 있었으나, 인식 장애 마법을 건 것일까. 그 색이 불분명했다.

하나, 와중에 또렷한 것은 단 하나.

그 눈동자였다.

그 서늘한 눈빛을 직시한 순간 칼라헨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죽는다.'

사실, 죽는다는 감정은 칼라헨에게 있어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재능을 인정받아 데큘란가의 수습 마법사로 들어가 첫 전장에 발을 디딘 그 날부터, 수십 번의 전장을 겪어 오면서.

그 어떤 전투도 손쉬운 것이 없었다.

대저 데큘란가에 반기를 드는 놈들은 한 수 감추고 있기 마련이고, 그런 놈들을 대할 때는 언제나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전장의 생리였으니.

하나, 그럼에도―

섬찟.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죽음에 대한 예감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그 때문이었다.

칼라헨은 캐스팅하던 마법을 캔슬하고, 마력이 역류하는 와중에도 핏물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발악하듯 마법을 펼쳐 냈다.

그 마법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파앙―!

그저 충격파를 터트리는 기초적인 마법.

딱히 비전이랄 것도 없이, 누구나 펼칠 수 있는 마법이었다.

하나, 그 단순한 마법은 끝내 칼라헨을 죽음에서 구해 줬다.

잠깐은 말이다.

탁, 타닥.

충격파의 반동으로 부웅 떠올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고.

"쿨럭."

한 움큼 핏물을 토해 내며, 한숨 돌리려는 그 순간.

쿵!

옅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저만치 밀려난 가면인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온 것이다.

"막...아!"

울컥 치미는 핏물 탓에 목소리가 억눌린 채 새어 나왔다.

그만큼 지금 칼라헨은 필사적이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트러블슈터들이 만사 제쳐 두고 칼라헨을 엄호했다.

파룬 교수를 견제하는 최소 인원만 남겨 둔 채, 가면인을 막아선 것이다.

그사이 칼라헨은 아공간에서 물약 하나를 따서 들이켰다. 마력 역류를 다스리는 데에 도움을 주는 비약 종류였다.

마력 역류를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지만, 많은 도움을 줄 터.

"후우."

과연, 내부를 진탕시키던 마력이 곧 잠잠해졌다.

그러는 와중 칼라헨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봤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정체불명의 가면인은 대단했다.

수십 명의 트러블슈터.

그 모든 파상 공세를 맨몸으로 받아 낸다.

아니, 맨몸이 아니었다.

얼핏 보면 알 수 없지만, 그 몸뚱어리 전체에는 얇은 역장이 둘려 있었다. 그야말로, 경지에 이른 마력 운용이라.

그뿐이냐.

저 정도 방호력을 보이려면 마력의 질 또한 받쳐 줘야 했다.

과연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까?

꿀꺽.

아니, 그럴 리가.

시도를 해 본다면 두르는 것 자체야 할 수 있겠지만, 저렇게 역장을 두른 채 전장을 자유자재로 활보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온 정신을 집중해도 한 걸음 떼기가 힘들진대.

쾅! 콰광!

콰득!

트러블슈터들의 숫자를 줄여 나가기까지.

뭐라 해야 할까.

그즈음부터 칼라헨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경이롭다.'

어찌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몸 전체에 두른 역장을 항시 펼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한순간. 마법이 육체를 타격하는 바로 그 순간에 완벽하게 두른다.

사용하는 마법은 어떠한가.

최적에 최속.

상대를 죽이는 데에 가장 알맞은 마법을, 최단 시간에 펼쳐 낸다. 그 전투 방법은 언뜻 보면 투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대단했다.

움직임에 한치의 낭비도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 내가 무슨....'

칼라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한데, 적을 보면서 이따위 한가한 생각이나 품다니. 물론 그 와중에도 마력을 착실히 다스렸지만, 평소 자신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죽여 주마."

정체는 그 뒤에 밝혀도 괜찮을 터.

아니, 몰라도 괜찮았다.

이미 이 자리에 있는 이상, 헨지의 끄나풀이거나 아카데미의 누군가겠지.

어쩌면 파룬 교수를 도와주는 아카데미의 교수일 수도 있다.

하나, 그것이 무에 중요할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파룬 교수와 그가 들고 있는 서류 봉투뿐. 제 정체를 감춘 자 따위는 아무렇게나 죽여도 상관없다.

츠즈즈―

삽시간에 허공에 떠오르는 마법진.

이미 죽이기로 결정한 이상, 파룬 교수를 겨냥할 때처럼 그다지 정교한 마법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파괴적이고, 연사할 수 있는 마법을 끊임없이 누적시킬 뿐.

하나, 그렇다 하여 그 마법의 위력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다.

칼라헨, 그의 또 다른 이명은 데큘란의 화마.

일찍이 데큘란으로부터 화(火) 속성 비전을 하사받아, 숱한 전장을 거치며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을 불태운 마법사다.

당초 그 주특기는 몰살이라.

번쩍―!

허공에서 중첩되던 수십 개의 마법진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가면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트러블슈터들까지 전부 날려 버리려는 심산.

그 수십 개의 마법이 가면인에게 적중했을 때, 곧이어 저택을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굉음이 공간으로 번져 나갔다.

아니, 굉음도 아니었다.

삐이이―!

그저, 귓가가 울릴 뿐.

쿨럭.

칼라헨은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 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트러블슈터 따위? 알게 뭔가.

결국 중요한 것은 임무의 완수다. 그런 의미에서 가면인은 필시 제거해야 하는 대상인바. 트러블슈터의 죽음은 일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후우―.'

칼라헨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며, 숨을 푹 내쉬었다.

'답지 않게, 흥분했군.'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적에게 가져 버렸던 경외심. 그 외에 복합적인 것들이 자존심을 자극한 탓에 과민 반응을 해 버렸다.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잃지 않았는지라.

남은 트러블슈터들과 합심한다면, 어찌어찌 파룬 교수 정도는 제압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이었다.

꿀꺽, 꿀꺽.

그렇게 상황을 마무리했다 생각한 칼라헨이 연거푸 두 병의 물약을 들이켰을 때.

"이게 다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

칼라헨은 물약을 마시던 그대로 눈동자만을 데구루루 굴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눈동자에 깃든 의문은 곧 경악으로 변모했다.

"...!"

여즉 타오르는 불꽃 속.

무언가 쇄도했다.

그리고 그대로―

콱!

제 목을 움켜쥐는 손아귀.

"끄, 끄윽."

순식간에 숨통이 조여져 신음하는 가운데, 손아귀의 주인이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이 자리가 네 무덤이라고. 그러면 둘 중 하나를 했어야지. 틈이 생겼을 때 개처럼 도망치든가, 살려 달라고 빌든가."

"끄윽...."

칼라헨이 가까스로 눈동자를 내렸다.

그곳에는 터럭 하나 그슬리지 않은 가면인이 서 있었다. 좀 아까와 같은 눈동자.

'죽는―'

콰득.

그것이 바로 칼라헨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나는 축 늘어진 칼라헨을 눈에 담았다.

'휘유....'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우선 첫 스타트부터 그랬다.

마법사란 족속은 제아무리 경지가 높아도 캐스팅 도중에는 무방비가 된다.

평소였다면 몇 겹이고 방호 체계를 구축해 뒀겠지만, 현 상황에서 칼라헨이 경계를 하던 건 오직 파룬뿐이었는지라.

그 뒤로는 나도 의외였다.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파공음.

'역시, 괜히 칼라헨이 아니야.'

다른 마법사였다면, 목이 꺾이는 것도 모른 채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만큼 내 기습은 돌발적이었으며, 역장을 파괴하는 수법은 지금 이 시점 마법사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방식이었다.

애초부터 나와 동료들이 창안한 방법이니, 당연한 노릇이겠지.

어쨌든 그 뒤로는 일이 제법 복잡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라헨이 조금만 더 트러블슈터들로 시간을 끌고 방호 체계를 구축했다면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소모전을 치르기에는....

'마력량이 많이 딸리지.'

트러블슈터들 따위 상대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칼라헨의 마법은 단순히 역장만으로 막기엔 어려운 터라.

어찌 보면, 칼라헨의 마지막 마법은 내게 큰 도움이었다.

트러블슈터들을 삽시간에 제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 스스로 방심해 틈을 주었으니.

한데.

"...."

난 슬쩍 시선을 내려 암행복을 내려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암행복 아래에 감춰진 화인을 눈에 담았다.

'분명, 반응이 있었는데.'

칼라헨의 마지막 마법이 쇄도하기 직전.

나는 꽤나 많은 마력을 역장에 투자했다.

한데, 웬일일까.

그 순간 화인으로부터 기묘한 감각이 퍼지더니, 역장에 깃드는 것이 아닌가.

'왜지?'

모르겠다.

역장으로 마법을 방호해 낸 게 화인을 자극한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트러블슈터들의 마법을 막아 내는 동안에는 화인으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었거든.

어쨌든, 그 덕에 칼라헨의 마법을 잘 막아 냈으니 나쁜 건 아니었다.

'한번 연구해 볼 일이군.'

나는 거기까지 생각한 후 상념을 정리했다.

칼라헨과의 전투는 끝났지만, 상황이 전부 종료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침묵에 휩싸인 장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돼 있었다.

어느새, 파룬 교수는 시전하던 마법을 능숙하게 갈무리한 상황. 칼라헨과는 달리 마법을 갈무리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지라 역류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쩌저적! 쩍!

허공에 흩어 놓았던 마력이 아까웠는지 이를 트러블슈터들을 얼음으로 옭아맸을 뿐.

속박당한 트러블슈터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눈에 담았는데, 그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하나같았다.

경악, 혹은 두려움.

아마, 칼라헨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은 게 믿기지 않는 것이리라. 왜 안 그렇겠어. 내가 저 상황이라 해도 믿기 힘든 일일 터인데.

어쨌든 그건 그거고.

'...보자.'

난 힘없이 축 늘어진 칼라헨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찾았다.

아공간 주머니.

아마 칼라헨이 데큘란의 비전서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데큘란가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장소에 두었겠지만, 대개 전투 마법사들은 누구도 믿지 못해 비전을 몸에서 떼지 않는다.

문제는....

'역시 주인 인식이 되어 있군.'

마력을 주입하자 옅은 스파크를 튀기는 주머니.

난 개의치 않고, 칼라헨의 아공간 주머니를 품 안에 갈무리했다.

사용자가 지정한 마력 패턴을 입력해야만 열리는 구조였기에 지금 당장은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만 있으면 풀 방법은 많다.

어쨌든.

전리품을 일단락한 후 나는 시선을 옮겼다.

"파룬 교수."

"말해라."

"논문 좀 보지."

내 말에 안색을 굳히는 파룬.

그는 곧 역장을 펼친 후 무언가 방비를 하려 했지만, 나는 틈을 주지 않았다.

한걸음에 그 앞으로 짓쳐 들어, 칼라헨의 역장을 파괴했던 그 수법 그대로, 파룬 교수가 펼친 견고한 역장을 흩어 냈다.

"싸우자는 게 아니다. 논문의 내용만 확인하면 돼."

"...흐음, 제 얼굴도 보이지 못하는 쥐새끼의 말을 어떻게 믿을까."

기묘한 대치 상황.

"후우, 하!"

긴장을 완전히 푼 채 널브러져 있던 폴라 역시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당연하다는 듯 칼을 드는 녀석. 이미 전투로 동강이 나 버린 칼이었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뭐, 상관없겠지."

"...?"

"어차피, 그 내용은 공개해야 할 테니 말이야."

파룬 교수와 폴라는 내 말에 의아한 눈빛을 띠었는데, 난 구태여 그 의문을 풀어 주지 않았다.

'....'

다만, 저 멀리서 저택으로 다가오는 기척.

수상쩍은 가면인은 사라져 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파룬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신고 접수받고 달려왔습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폐허가 된 저택 위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가슴에 새겨진 그리핀 문양.

제국의 황실 기사단이었다.

◈ 22화. 미친 건가?

제국의 황실 기사단은 현장을 빠르게 수습했다.

그들은 파룬과 폴라를 통해서 전후 사정을 취합했으며, 살아 있는 트러블슈터들을 연행해 본부로 끌고 갔다.

주된 골자는 칼라헨을 필두로 한 데큘란가의 습격 및 약탈 시도.

엮여 있는 명가가 데큘란이니만큼 한쪽의 입장만 들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기사단은 파룬 교수의 증언을 신뢰했다.

널브러져 있는 칼라헨의 시신이 두말할 필요 없는 증거였으니까.

그렇게 얼추 대략적인 상황이 마무리되고 황실 기사단이 떠났을 때.

"그만 나오지."

파룬 교수의 목소리가 나를 찾았다.

황실 기사단은 모두 돌아간 상황, 폴라만이 진술차 동행한 가운데 자리에 남은 이는 나와 파룬 교수 단 둘뿐이었다.

"제법이네, 바로 찾고."

"일부러 기척을 흘리지 않았나."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파룬 교수의 온도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전까지는 데큘란에 준하는 경계심으로 대했다면, 이제는 그저 미심쩍다 싶은 느낌이랄까.

"헨지가 보냈나?"

"그런 셈이지."

"그러면 돌아가는 정황도 대강 알고 있겠군. 그 빌어먹을 놈이, 왜 같잖은 가짜 논문을 보내 주고 데큘란에 정보를 흘린 건지 말이야."

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들은 게 없어서. 그런데 역시 가짜가 맞았나 보군."

파룬 교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전, 기사들에게 전후 설명을 할 때.

책임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헨지의 서류 봉투를 열어 보았다.

제아무리 황실 기사단이라 해도 마학 논문을 알아보기는 무리인지라, 일차적으로 파룬 교수가 그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치유 마법에 대한 논문이더군. 쓰잘데없는 쓰레기였다."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 내용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대단치 않은 논문일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

어쨌든 문제의 논문은 폴라와 함께 증거물로서 황실 기사단으로 압송된 상태.

난 어딘지 퀭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파룬 교수를 보며 말했다.

"말했지만, 나도 들은 게 없다. 다만 대강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짐작이라... 뭐지?"

헨지는 미친놈이다.

그런 만큼 그 생각을 읽는 건 내가 미치기 전에는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좀 전의 전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 하젠에서만큼은 데큘란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은 모양인데."

"흐음."

"뭐 저 꼼꼼한 데큘란을 어떻게 속였는지는 차치하고, 헨지는 데큘란이 이렇게 깽판을 놓는 상황을 바랐을 거야. 왜냐."

"황실 기사단을 끌어들이려 했다?"

"뭐, 그런 거지. 아무래도 교수가 처한 입장상 선뜻 황실 기사단을 끌어들이기는 힘들잖아? 연구 내용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니온 아카데미의 교수는 제국에서도 중요 요인으로 구분하는 인재들.

웬만한 경우라면, 교수의 요청에 황실 기사단원 몇 정도는 파견해 줄 것이다.

황실에나 있어야 하는 기사단이 도시 하젠에 있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황실을 끌어들이기엔 상황이 애매하다는 거였다.

파룬이 먼저 요청을 하기에는 명분이 없달까.

"이렇게 되면, 황실 기사단에서는 교수를 보호해야 할 테고, 도시 하젠의 방비도 강화되겠지. 그야말로 데큘란만 새 되는 상황이랄까."

"데큘란 쪽에서 명분을 갖다 바쳤다는 말인데.... 흠, 뭐. 좋다. 이런 계획이야 그 미친놈이 알아서 할 일이니."

사실 말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 있었다.

'파룬 교수의 저택이 도시 외곽에 있다고는 하지만, 기사단이 이렇게 늦게 나타난다는 건 말이 안 돼.'

이는 필시, 데큘란가에서 황실 기사단 쪽에 뭔가 손을 쓴 것이다.

적당한 계급의 인물을 포섭해 두고, 출동 시간만 늦춰 달라 로비를 했다거나.

뭐, 꼭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출동 시간 정도를 조절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기사단이 늦은 건 아마 그런 사정이 있었을 테지.

그리고 아마 폴라는....

'헨지도 여기까지 예측하지 못했을 거야.'

- 알아차리셨습니까? 하하, 쓰고 버릴 쓰레기한테 진짜 치유의 빛 술식을 주기엔 아깝더군요.

첫 만남 때 지껄이던 말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물며 진짜 논문이 아니라 미끼로 쓰는 논문을 전달하는데, 전달책 따위는 알게 무어란 말인가.

"그러면 묻지. 네가 전달책인가?"

난 파룬 교수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논문."

난 논문 한 부를 꺼내 건네주었다.

곧 논문을 살피는 파룬 교수.

그는 잠시간 말없이 논문의 내용을 훑었는데, 전체적인 맥락만을 살피는 것인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한데, 갑자기 눈빛을 달리하는 파룬 교수.

"내용은... 알고 있나?"

"알고 있기만 할까."

"그렇단 말이지...."

파룬 교수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아마, 그것을 생각하는 듯 기세가 심상치 않다.

픽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말리지는 않는데, 괜찮겠어? 난 든든한 아군 하나를 잃고 싶지 않은데."

이는 진심이었다.

정면으로 맞닥뜨리면, 지금 내가 파룬 교수를 이기기란 힘겨운 일.

하지만 지금은 파룬 교수도 지치고 나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더 파고 들어가면 나보다는 파룬 교수가 더 지쳤다고 해야겠지.

그럼에도, 여전히 승률은 반반이지만....

"흐음, 네놈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나 보구나."

"그런 셈이지."

파룬 교수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 건 바로 그때.

"...?"

한데 그 표정이 워낙 빠르게 사라진 터라 정말 웃었나 싶은 가운데.

"뭐, 좋다. 일단 논문은 잘 받았다. 나도 미래의 든든한 아군 하나를 잃고 싶지 않으니, 적당히 넘어가지."

파룬 교수는 그리 말하며, 논문을 제 품에 갈무리했다.

그러며 말하기를.

"혹시, 뭔가 바라는 건 없나?"

"...?"

난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난 헨지를 잘 알지. 그놈이 믿는 부류는 단 하나다. 욕망이 확실할 때. 그리고 그 욕망의 방향이 자신과 일치하거나, 상호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때."

"...."

"그런 놈과 함께한다면, 분명 네놈도 바라는 게 있을 터.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헨지와는 별개로 나 역시 뭔가를 내주어야겠지."

"흠."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마땅히 얻고자 하는 것은 없었다.

내가 이들에게 바란 것은 단 하나. 연구의 결과물인 신천원공이 전부였으니까.

헨지로부터 받은 치유의 빛 비전서는 어디까지나 상호 신뢰에 대한 증표일 뿐, 엄밀히 따지자면 대가성으로 받은 거래물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

"책?"

"그래, 책이면 좋겠군. 교수가 가지고 있는 마학적 관점을 익힐 수 있는 책. 그런 책이면 좋겠어."

이는 헨지와의 만남 이후, 어렴풋하게 잡았던 도서관의 방향성과 관련이 있는 제안이었다.

"한 권으론 안 될 텐데? 족히... 그래, 백여 권의 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가르침이 없으면, 그마저도 무용지물일 수가 있어."

파룬 교수는 좀 전과 달리 학자의 눈빛이 되어 있었다.

나 역시 이번에는 탑의 주인으로서 내 뜻을 담담히 풀어 설명해 줬다.

"어디까지나 기회를 제공해 줄 뿐이야. 제 스스로 능력이 되고, 연이 되는 놈들이면, 교수가 선정한 책들을 보고 나름 배워 가는 게 있을 테지."

"네놈이 볼 게 아니군? 혹시 목적을 물어봐도 되겠나?"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탑을 세울 거다. 크고 높은 탑을 말이지. 사실 형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다만 그 안에 책을 채워 넣어 누구든 볼 수 있게 한다. 이 뜻이 중요하지."

"한데, 어째서 탑이지?"

난 그 질문을 듣곤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아, 형태도 중요하군."

"그러니까, 왜?"

"그냥, 높은 게 좋다."

"...."

어쨌든 실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파룬 교수는 잠시간 생각을 정리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 하지만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 차라리 책을 하나 집필하는 게 네놈의 뜻에 더 맞을 테니."

"그렇게 해 주면 더 좋고."

"그나저나 탑이라... 아니, 도서관이라 했나. 재미있을 것 같군."

내 구체적이고 장황한 계획은 말해 주지 않았지만, '도서관'이라는 키워드와 '누구든'이라는 키워드에서 내 뜻을 유추한 듯싶었다.

난 구태여 그 말에 더 부연하지 않았는데, 곧 파룬 교수의 입이 떨어졌다.

"한 10년만 기다려라."

"미친 건가?"

"...."

내 말에 파룬 교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10년은 너무 길었던 탓이겠지.

"...혹 10년 안에 탑을 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나?"

"...."

이번엔 내가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탑을 세우기 위해서 10년으로 충분할까? 아니, 어쩌면 택도 없었다.

그 안을 채울 책은 고사하고 건물을 올릴 자재 값이며...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탑을 올릴 땅조차 없는 판국이지.

그렇게 짧은 침묵이 일고.

"난 그만 가 봐야겠군."

"잠깐. 연락은 어떻게 할 거지?"

"연락이라...."

"논문을 전달해야 하지 않겠나."

사실 헨지와 나의 계약은 이번 한 번이었다.

하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둘 사이의 전달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파룬 교수의 말마따나, 그 저서의 가치가 높은 것을 떠나서 신천원공이 완성되기 전까지 데큘란에 노출되는 건 피하는 게 좋았으니.

"이걸로 하지."

난 아공간 속에서 자그마한 수정 구슬 한 묶음을 꺼내 내밀었다.

"이건...."

"우리 처지에 통신 수정구를 주고받는 건 같이 죽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어. 이건 한 쌍이 연동돼 있다. 한쪽이 깨지면, 반대쪽도 깨져."

"단순하군."

"그만큼 추적을 피하기 쉽지. 부를 때는 하나를 깨트리고, 변고가 있으면 두 개 이상을 깨트려라. 그러면 찾아가지 않을 테니."

내 말에 파룬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네 쪽에서 날 찾을 때는?"

그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럴 일이 있을까?"

"자신감이 과하군. 언젠가 죽을 거 같으면 구슬을 깨트려라. 그때에는 이 관계와는 상관없이 한 번쯤은 도와주도록 하지."

"찾을 수나 있고?"

"그건 네놈 운이겠지."

그 말에, 난 픽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야. 헨지만큼 미친 작자가 아니라서."

대체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대화를 하는 내내 서로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헨지와는 달리, 어느 정도 상식적인 사람과 부분적이나마 뜻을 같이한다는 건 꽤나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좋다 할 수 있었다.

한데.

"음, 그건... 흠. 나랑은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군."

"...?"

"아니다. 그만 가도록."

그 끝이 왠지 좀 찝찝했다.

"...."

난 잠시 파룬 교수를 바라보다가, 아카데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암, 그렇고말고.

파룬 교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 23화. 대체로 친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