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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2)

봉재석은 급하게 달려왔는지 오고 나서 잠시간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른 다음에는 거두절미하고 작업대 위의 재료들부터 살핀다.

그의 반응도 옆의 선배와 거의 같았다.

"완전 새거네, 이걸 네가 분해했다고?"

"예, 선배님."

봉재석이 나를 보며 감탄과 아쉬움이 반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무소속으로 썩히기는 참 아깝단 말이야. 너 같은 놈이 우리 동아리에 들어와야 되는데.... 진짜 올 생각 없냐?"

"죄송합니다."

"...쯧, 알았다. 언제든 생각 바뀌면 말하고. 이것 좀 봐줘라."

봉재석이 인벤토리에서 실패작 몇 개를 꺼냈다.

일반적인 실패작들은 4공방 한구석에 대충 내던져 놓지만, 들어간 재료의 값어치가 만만치 않은 경우 인벤토리에 보관하기도 한다.

언제 시간이 나면 직접 분해할 생각으로.

다만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이라는 자리가 보통 바쁜 게 아니다.

봉재석으로서는 좀처럼 여유가 안 생기다 보니, 분해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을 테지.

그런 와중에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내 솜씨가 그렇게 깔끔하다고.

봉재석이 내민 실패작들을 말없이 관찰하고 있자니 그가 물었다.

"어때, 분해할 수 있겠냐?"

"글쎄요, 가능은 해 보이는데...."

난이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건드리는 것에 비해 한두 단계 높아도, 나라면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이건 시간 좀 잡아먹겠네요."

문제는 실패작치고 덩어리가 크다는 점이었다.

거의 반쯤은 완성된 터라 전부 해체하려면 한참 걸리게 생겼다.

들어간 것들도 B급 안팎의 고급 재료들이어서 신경을 많이 써야 할 듯했다.

종합하면 엄청나게 오래 걸리고 수고스럽다는 뜻.

봉재석이 섣불리 손을 못 대고 인벤토리 한구석에 썩혀 둘 만도 했다.

"시간 많이 먹는 건 나도 알지. 뭐 주면 해 줄래?"

바꿔 말하면 오래 걸리고 수고스러운 만큼 보수가 크다는 뜻도 된다.

손 많이 가는 일을 대신 해 주고, 그로 인해 B급 재료들을 잔뜩 반환받을 수 있다면.

다소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나는 그 점을 감안해서 원하는 걸 말했다.

"[마력기관]을 하나 받았으면 합니다."

주입하는 마나를 다른 성질의 힘으로 바꾸는 기관.

마법공학 장비, 그중에서도 무기 제작에 빈번히 사용되는 핵심 소재였다.

구하기가 어려운 만큼 내주기가 고민될 법도 한데, 봉재석은 시원시원하게 내 요구를 수락했다.

"준비해 두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

"급합니까?"

"아니. 원래도 계속 미루기만 하던 건데 뭐."

"그럼 이번 주중으로 해결하죠."

재료도 모였겠다, 오늘은 고현우의 아이템을 완성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나머지 대인전에 가져가서 써먹을 테니까.

봉재석의 분해 의뢰를 비롯한 다른 목표는 내일부터 착수해도 늦지 않다.

이번 주중에만 해결돼도 빠르다 생각했는지, 봉재석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쓰. 그럼 수고해. 오늘 1공방 쓸 거냐?"

"사람 비었을 때 잠깐 들어갈까 합니다."

"오늘은 열한 시면 자리 좀 날걸. 그때 오든가."

"감사합니다."

* * *

루비 마탑 부장, 홍예화는 눈썹을 찡그렸다.

눈앞에 매우 흔치 않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창가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홍연화.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 걸 보면 구름을 좇는 듯하다.

세월의 덧없음을 깨달은 노인네 같은 모습이다.

평소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모습과 심히 대조된다.

이 사태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들려줄 사람은 단 하나, 홍연화와 같이 2 대 2 대인전을 치렀던 백준석뿐이었다.

메시지를 보내자 백준석이 루비 마탑 동아리실로 찾아왔다.

홍예화가 제 동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야, 저거 왜 저래?"

"...."

백준석이 손가락을 따라 '저거'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말입니다...."

2 대 2 대인전에 들어가서, 김호와 서예인 팀을 상대로 만났다.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

홍예화가 도중에 설명을 끊으며 물었다.

"김호? 혹시 배치 고사에서 졌다던 그 김호야?"

"예, 맞습니다."

"음, 끊어서 미안. 계속해."

첫 경기는 이리저리 불어 대는 강풍에 홍연화의 마법 시전이 취소되고, 결국 서예인의 저격을 허용하며 어이없게 패배했다.

두 번째 경기는 홍연화가 무슨 속셈에서인지 수비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김호와 서예인의 공격을 한 차례 막아 내고, 반격에도 꽤 괜찮은 성공을 거뒀다.

이대로만 하면 된다 싶었는데.

멀찍이 서 있기만 하던 김호가 자신들에게 접근하자 경기가 순식간에 뒤집혀 버렸다.

손짓 몇 번에 백준석을 바닥에 패대기쳐 버리니, 혼자 남은 홍연화로서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두 번째 경기 역시 허무하게 기권 패로 끝나 버렸고.

"그랬구나."

홍예화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홍연화가 어쩌다 저렇게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가 됐는지 다 이해했다.

이제 막 루비 마탑을 벗어나, 우물 밖에서 실전을 치르기 시작한 그녀다.

같은 사람에게 3패, 그것도 손도 못 써 보고 압도적으로 패하는 경험을 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하지.

다 이해한다.

그러나.... 용납은 못 한다.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백준석이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홍예화가 홍연화에게 걸어가서 뒤편에 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튕기자,

- 펑!

홍연화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흐어으악!"

부지불식간에 화염이 폭발하자, 홍연화가 괴상한 비명 소리를 흘리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곧 불을 지른 범인인 제 언니를 발견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언니! 쫌!!"

홍예화는 동생의 반발에 더욱 성질이 뻗쳤는지, 가까이 달라붙어서 등짝 스매시를 날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화염으로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기에 이 등짝 스매시 역시 보통 매운 게 아니었다.

한 대 때릴 때마다 한마디씩 내뱉는다.

"뭘 잘했다고! 궁상을! 떨어 대!"

"아! 아! 그만해라! 그만해라 했다!"

"유망주 중에 벌써 3패나 한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것도 같은 상대한테!"

"악!!! 나보고 어쩌라고! 그 사람만 2연속으로 잡히는데!"

- 펑!

화염이 한 차례 더 폭발하며 불길이 홍예화에게 옮겨붙었다.

홍씨 자매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부실 안의 온도가 급격히 치솟으며 백준석의 이마에 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것이 단순히 더워서인지, 아니면 그의 조마조마한 심경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홍예화가 다시 공세에 나섰다.

"똑같은 상대가 또 잡힐 것 같으면 잠깐 쉬었다 하든가! 네가 급하게 다음 경기 잡아 놓고 누굴 탓해!"

"악!!"

- 펑! 퍼펑!

백준석은 황급히 벽을 바라보고 섰다.

대화를 듣자 하니 자신에게 불똥이 튈 조짐이 보였다.

- 홍연화, 마음 다잡고 다음 경기 가자.

얼른 다음 대인전을 잡자고 제안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홍연화가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백준석은 필사적으로 벽을 응시했다.

지금 시선을 돌렸다간 백 퍼센트 화염 폭발에 휩쓸린다.

그리고 그는 홍씨 자매와는 달리 화염 마법에 내성이 없었다.

백준석의 시기적절한 회피 탓에 화풀이 대상을 잃어버린 홍연화.

하는 수 없이 제 언니한테 항의한다.

"언니가 뭘 아는데! 그 사람이랑 싸워 보지도 않았으면서!"

"...."

홍예화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순간 홍연화의 눈동자 속에 공포가 스쳐 지나간 까닭이다.

대체 그 김호라는 자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했길래 공포심까지 드는 걸까.

뭐 하는 사람인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다만 호기심 해결은 나중으로 미뤄도 상관없고, 지금은 바닥에 고꾸라진 동생을 일으켜 세우는 게 우선이다.

홍연화는 루비 마탑의 미래.

더 이상 패배감에 젖게 놔두어선 안 된다.

질 땐 지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야지.

홍예화가 삽시간에 모든 화염을 거두어들였다.

어조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앞으로 만날 때마다 져 주겠다고?"

홍연화는 흠칫 놀랐다.

경험상 이럴 때야말로 정말 신중하게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해서 그렇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간 화염 폭발이나 등짝 스매시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해서 홍연화는 한층 쭈굴해진 태도로 조심스레 답했다.

"아니이.... 만날 때마다 져 주는 건 아니고.... 나중에 다시 붙어야지.... 강해져서...."

"좋아, 그럼 멘토링 신청해."

"얘기가 왜 그렇게 돼?"

"강해져서 다시 붙는다며? 그럼 해야지."

홍연화는 여태 멘토링을 안 한다고 버티던 중이었는데,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꽤 유치했다.

아무한테나 배우기는 싫다.

언젠가 루비 마탑주의 자리에 오르기를 꿈꾸는 그녀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 끝에 마탑주 자리에 앉았는데, 웬 놈팽이가 예전 멘토라면서 찾아오는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속이 쓰리다.

아직 마탑주 자리는 멀고도 멀지만 아무튼 홍연화의 상상도에서는 그랬다.

그러니까 이건, 기분 문제였다.

멘토링을 받는다면 마탑회 소속, 아니면 최소한 강대 세력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청하는 입장에서는 누가 걸릴지 알 방도가 없으니, 홍연화의 눈에는 벌써 못 미더운 것이다.

다시 소심하게 반발해 본다.

"진짜 이건 안 하면 안 돼? 다른 거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홍예화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럼 선택권을 줄게. 멘토링을 신청하든가, 김호한테 결투를 신청하든가."

정 멘토링이 필요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지금 김호를 쓰러뜨리고 오라는 뜻.

사실상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였다.

홍연화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하면 되잖아, 멘토링. 하면...."

"잘 생각했어."

홍연화는 언니가 보는 앞에서 신청서를 작성했다.

캐스터, 그리고.... 올라운더.

홍연화가 놓친 부분이라면,

'누구에게' 멘토링을 받는지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누구와' 멘토링을 받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54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3)

새벽까지 제1공방에서 보내고 기숙사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일어나서 평소처럼 서예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김호:깸?]

[서예인:....]

[서예인:(째려보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밥?]

[서예인:(이불 덮는 고양이 이모티콘)]

[서예인:(돌아눕는 고양이 이모티콘)]

[김호:저기요]

[김호:안 가?]

[김호:나 혼자 먹는다?]

....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쯤 지나면 그럭저럭 화가 풀리리라 예상했는데, 반응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윈드포스]의 단점 하나, 상대방이 본래 의도보다 화가 많이 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잠시 내 변호를 해 보자면 원해서 서예인을 대인전 상대로 만난 것도 아니고, 당시 윈드포스 외에는 견제할 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여자애를 뜨거운 모래밭에 데굴데굴 굴렸다는 죄목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

'이건 메시지로는 안 되겠는데.'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 봐야 해결될 문제 같다.

혹시 몰라서 학생식당 앞에서 잠깐 기다렸지만, 끝내 서예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안 오려는 모양이다.

해서 오늘 아침 식사는 혼자 해결했다.

마늘빵에 커피를 후딱 해치우고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꽤 일찍 등교했기에 교실에 사람이 몇 안 되었다.

그런데 웬일로 그 몇 명 중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보인다.

"...."

자기 책상에 엎어져 있는 서예인.

인기척을 느꼈는지 엎드린 채로 눈만 빼꼼 내밀어 이쪽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다시 스르르 두 팔 사이로 가라앉는다.

나는 태연하게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서예인에게 물었다.

"너 아침 안 먹었지."

"...."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나는 정황상 높은 확률로 확신했다.

'안 먹었네.'

아마 내가 보낸 메시지 때문에 잠이 깨기는 했을 것이다.

다만 같이 아침 먹는 건 안 내키고, 그렇다고 다시 잠들자니 시간이 애매하고.

해서 곧장 학교에 왔다는 시나리오에 무게가 실린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서예인의 책상 위에 종이봉투를 올려놓았다.

아직 뜨끈함이 남은 봉투에서 마늘빵의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이렇게 될 줄 알고 하나 더 받아 왔지.

"...."

서예인은 잠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척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다 엎드린 채로 슬그머니 종이봉투에 손을 뻗더니, 마늘빵을 하나 집어서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내심 배가 고팠나 보다.

그렇게 마늘빵을 우물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직도 덜 풀렸구만.

겉보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이라 화가 났는지 풀렸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도 대화를 하자면 지금이겠지.

나는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어제는 내가 손을 과하게 썼다. 약점을 보여 주고 싶었어."

"...."

서예인의 눈동자가 조금씩 내 쪽으로 움직였다.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귀는 열어 둔다는 뜻이다.

"너도 알다시피, 네 전투 스타일은 광역 스킬의 범위에 들어왔을 때, 위치가 노출됐을 때 급격히 취약해져."

저격 자체가 일점을 노리는 공격이다 보니 조금만 방해를 받아도 조준이 엇나가기 쉽다.

이번에 [윈드포스]가 그 취약점을 제대로 찔렀는데, 넓은 범위에 바람을 불게 해서 은신한 서예인을 찾기도 쉬웠고, 이리저리 물리력을 가해서 총구를 돌리니 마력탄이 엉뚱한 곳으로 발사되곤 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상대들에게서도 조금씩 체감하던 중일 터.

그렇다면 해결책은?

서예인의 귀가 쫑긋거리며 대답을 요구했다.

"[부동세(不動勢)]라는 스킬이 있다. 이걸 시전하면 방해를 받아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지. 대미지는 고스란히 들어오지만.... 한발 더 나아가면 [유체화(幽灵和)]라고, 아예 물리력을 흘려 버리는 스킬도 있고."

그 외에도 위치가 발각되었을 시 다음 저격 포인트로 빠르게 이동하도록 이동 스킬이나 은신, 회피기 등을 익혀 두면 유용하다.

"마력탄은 일단 기본은 잡혔고 파괴력도 제법 나오니까, 이다음에는 보조 스킬에 투자를 하면 어떨까 해."

"특강 해 줄 거야?"

"나도 웬만하면 직접 가르쳐 주고 싶은데, 이건 다른 총사한테 배우는 게 더 효율이 잘 나와. 귀찮아도 멘토링 받자."

"...알았어, 할게."

서예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멘토링 신청서를 슥슥 작성해 나갔다.

입으로는 마늘빵을 우물거리면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은 또 잘 들어요.'

처음 멘토링 얘기를 꺼냈을 때 반응을 보고 이건 쉽지 않겠구나 예상했는데, 의외로 한 번에 설득이 됐다.

본인도 필요성을 느껴서 그렇겠지만 가끔 보면 지나치게 순순히 잘 따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유가 궁금하기는 한데, 급하게 알아내려고 애쓰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차차 거리를 좁혀 가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 않을까.

'문제는 얘 멘토인데....'

서예인이 내 앞에서 보이는 열의를 멘토 앞에서 똑같이 보일 거란 장담은 못 하겠다.

열의 이전에 컨트롤이나 될지 모르겠고.

그 인간백정 이수독 앞에서도 졸리고 귀찮은 티를 팍팍 내는데, 과연 멘토라고 다를까?

'모르겠다, 나도.'

지금으로써는 운이 좋기를 바라는 수밖에.

아니면 서예인이 멘토 앞에서 의욕이 넘치길 바라거나.

"오. 서 소저도 신청하나 보군."

언제 왔는지 고현우가 인사와 질문을 같이 던졌다.

서예인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답했다.

고현우의 상태를 살펴보니,

"다 회복됐네."

"김 형의 말대로 만전의 상태를 만들어 왔소."

오늘은 꼭 못다 한 대인전을 끝마치겠노라 투지를 불태운다.

어제 학생 상점에서 구매한 표사의 장검, 표두의 장검도 시험해 보고.

나는 간밤에 제작한 아이템을 건넸다.

"이것도 같이 써 봐."

"이건...."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철제 클립.

얼핏 문방구에서 파는 클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정교한 부품들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눈에 띌 것이다.

마법공학 아이템이라는 증거다.

[튼튼이 클립(D)]

▷무기 내구도 보호

▷무기 내구도 자동회복

오로지 내구도만을 위해 특수 제작한 아이템.

[내구도 보호]는 무기가 손상되는, 즉 내구도가 깎이는 정도를 완화시켜 주고,

[내구도 자동회복]은 일정 시간마다 아주 조금씩 손상된 무기를 수리한다.

그래 봤자 많은 양은 아닌 데다, 계속해서 강력한 초식을 사용한다면 어차피 깎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상처에 연고와 반창고 구실 정도는 하겠지.

고현우가 클립을 셔츠 앞주머니에 꽂았다.

"든든하군. 잘 쓰겠소."

"나머지 대인전 치르고, 내일 같이 분석해 보자고."

"그렇게 하리다."

[튼튼이 클립]의 보조를 받는 E, D등급 무기가 F급 철검에 비해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 내일 리플레이를 확인해 볼 예정이다.

그 결과에 따라 다음 행보를 결정하면 되리라.

* * *

수업이 끝난 뒤 제4공방으로 직행했다.

자기 일을 보던 4공방 지박령 선배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왔냐."

"안녕하십니까."

어제에 비해 관계가 많이 개선된 느낌이다.

최소한 불편한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

재료도 주고받았고, 그것을 봉재석에게 솔직하게 밝혔음에도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

그러니 나와 엮인다고 어떤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겠지.

앞으로도 종종 거래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왕이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기도 하고.

한쪽 작업대에 자리를 잡고 봉재석의 실패작들을 꺼냈다.

혹시 몰라서 의뢰 기한을 길게 잡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최우선으로 해치울 심산이었다.

'그래야 [마력기관]을 받으니까.'

핵심적인 소재인 만큼 빨리 확보해 두는 게 낫다.

나는 곧바로 일에 착수했다.

[마법공학]을 시전하자 작업대 위의 모든 것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집중을 유지한 채, 커다란 고철 덩어리를 조금씩 덜어 내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손을 멈추고 공구를 내려놓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푸른빛이 삽시간에 사그라든다.

'많이도 나왔네.'

분해가 끝난 재료들이 작업대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이제 막 하늘이 붉어질까 말까 한다.

시작하고 지금까지 두세 시간쯤 됐을까.

그사이에 봉재석의 의뢰를 뚝딱 해결해 버린 것이다.

"끝났냐?"

"예."

질문을 던진 것은 3학년 선배였다.

얼굴에 감탄한 기색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는데, 이번에도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엿본 듯했다.

"야.... 나는 너 무슨 기계인 줄 알았다? 어떻게 앉은 자리에서 일 초도 안 쉬고 그걸 다 해치워 버리냐?"

어디서 많이 들어 보던 칭찬이었다.

한창 S급 영웅들을 마구 찍어 내던 때에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가설이 꽤 유력했었지.

오죽하면 나를 특수 NPC라고 착각하고 퀘스트를 받으러 오는 유저도 있었으니.

아무튼 봉재석의 의뢰는 일단락됐고, 자정에 제1공방 가면서 한 번에 전달하면 될 듯하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야지.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선배가 물었다.

"들어가게?"

"그럴 리가요."

우리는 동시에 잡동사니의 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튼튼이 클립]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고현우의 아이템은 다 만들었고, 이제 내 차례다.

내 무기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 마법공학이 들어가는 부분을 해결할 예정이다.

재료를 모으는 과정은 어제와 거의 같다.

포인트가 들어가는 부분, [열촉매 시약]은 고현우에게 공임으로 한 개 받았다.

이것 외 재료 일부는 실패작들을 해체해서 얻고, 일부는 어제처럼 이 선배님이 채워 줄 것이고.

"하는 김에 나 부탁 좀 들어줄 수 있냐?"

'하는 김에'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그 부탁이란 것이 아이템 분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잡동사니의 산을 가리키며 설명을 잇는다.

"실은 내가 저기서 필요한 게 몇 개 있는데, 그거 위주로 분해해 줄 수 있나 해서. 물론 너만 괜찮으면."

어제는 내가 분해하고 나온 재료들 중에 필요한 걸 골라서 물물 교환했다면,

오늘은 아예 처음부터 필요한 재료가 포함된 실패작을 고르고, 그걸 분해해서 교환하자는 뜻이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고맙다. 너 필요한 것도 최대한 맞춰 줄게."

내 입장에서는 이러나저러나 재료만 얻으면 그만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편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우리는 잠시 잡동사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쇼핑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 원하는 것들을 골라낸 다음, 작업대로 가져와 빠르게 분해했다.

이 실패작들은 봉재석의 의뢰보다 한참 쉬운 난이도였기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재료로 화했다.

그 재료들을 두고 곧장 거래가 이루어졌다.

"진짜 고맙다. 네 덕에 시간 엄청 절약했어."

선배가 나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재료 구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수고를 어제오늘 물물 교환 몇 번으로, 그것도 매우 저렴한 값에 처리했으니 고마울 수밖에.

나는 나대로 필요한 재료를 다 모았다.

이것도 자정에 제1공방에 가져가서 제작할 예정이다.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많이 남는데.'

봉재석의 의뢰에 두 번째 아이템의 재료 조달까지 마치고도 자정까지는 한참 남았다.

트레이닝 센터 가서 수련이나 할까, 아니면 당장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여분의 재료를 확보해 둘까.

그러나 이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일감이 알아서 나를 찾아왔기 때문에.

- 쟤야?

- 쟤 맞는 거 같은데?

제4공방 밖에서 두 쌍의 눈이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55화 잡동사니를 분해하다 (4)

제4공방 밖에서 안쪽을 엿보는 여학생 둘.

나한테 볼일이 있어 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그렇다.

게다가 딴에는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하지만, 멀리서도 대화 내용이 다 들렸다.

- 확실해? 쟤?

- 우리 부원도 아니잖아. 그리고 여기서 작업한다고 들었으니까 백 프로야.

- 그럼 네가 가서 말 걸어 봐.

- 같이 가자 좀. 넌 의리도 없냐?

나에 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찾아온 듯했다.

물론 내가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특정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저기 한구석에서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는 제4공방 지박령 선배를 제외하면, 자연스레 소거법으로 나만 남으니까.

여학생들이 마침내 공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는 굳이 먼저 반응하기보다 모르는 척, 하던 일에 집중하는 걸 택했다.

여학생들 역시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다가왔고, 근처에서 내가 실패작 하나를 깔끔하게 해체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나는 다음 아이템으로 넘어가기 전 잠시 공구를 내려놓고, 시선을 들어 올려 여학생들을 마주했다.

제1공방을 오가며 한두 번쯤 스쳐 가듯 봤던 얼굴들이다.

덧붙여 넥타이에는 3학년 핀이 꽂혀 있다.

마법공학 동아리 3학년 선배들, 그중에서도 1군에 드는 장인들이다.

"안녕하십니까."

"안녕. 봉재석한테 의뢰받았다고 들었는데, 맞아?"

짐작대로 선배들의 용건은 실패작 분해였다.

귀찮게 그지없는 일이다 보니, 누군가 그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준다면 무조건 확인하러 찾아오게 되어있다.

그 누군가의 실력이 꽤 괜찮다고 한다면 더욱.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작 몇 개 맡기셨습니다."

"봐라, 내 말 맞지!"

선배 하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다른 선배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우리 거도 같이 해 줄래?"

내 손재주는 방금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테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격 흥정만이 남았을 뿐.

"공임만 충분하면 못 할 것도 없죠."

"봉재석한테는 뭐 받았어?"

"고급 재료 하나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면 돼? 뭐 필요해?"

"예, [웨더 칩]이나 [부유석 추출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봉재석에게 의뢰 보수로 받을 [마력기관]과 마찬가지로, 모두 내 무기에 들어갈 핵심 부품들이다.

곁가지 부분은 분해한 아이템을 쓰더라도, 무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파트는 고등급 재료를 써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EX급을 노리고 있으니까.

"어, 나 그거 있어!"

선배 하나가 즉시 인벤토리에서 [웨더 칩]을 꺼내더니 아예 선불로 건넸다.

다른 선배도 순간 움찔하는 걸로 보아 같은 아이템을 보유한 듯했는데, 이미 한발 늦었다.

다른 아이템으로 대신 주면 안 될까? 묻고 싶은 표정.

그러나 선배가 돼서 그러기는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눈치다.

"부유석 추출물...은 지금 없는데, 내일까지 구해다 줄게."

"좋습니다. 하죠."

곧바로 실패작들을 넘겨받았다.

이 사람들도 마법공학 동아리 소속이라 그런지 밀고 당기기 없이 시원시원하다.

제작 계열 클래스들은 항상 시간에 쫓겨 살다 보니, 자기 시간을 아끼는 데는 꽤 후하게 비용을 지불하는 편이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듬뿍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자정까지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빨리? 천천히 해도 되는데."

"시간 충분합니다."

"알았어. 고마워~ 이따 봐~"

용건만 처리하고 급히 제1공방으로 떠나는 두 선배였다.

본인들 앞으로 들어온 제작 의뢰도 잔뜩이니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순 없겠지.

나는 다시 공구를 들었다.

곧 작업대 위가 푸른빛으로 채워졌다.

* * *

"킁, 킁."

당규영은 옷소매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교복에 냄새가 밴 것 같았다.

지하 수로 청소.

던전섬 지하에 미로처럼 펼쳐진 통로를 꼼꼼히 수색하는 작업이다.

간혹 외부에서 흘러들어 오는 몬스터를 발견하고 처치하는 게 목표다.

당연한 얘기지만 하수구 특유의 퀴퀴한 악취를 맡아 가며, 어둡고 비좁고 습한 지하 수로를 돌아다니고 싶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씩은 몬스터의 피를 뒤집어쓸 일도 생기기에 더욱.

그렇다고 방치하면 몬스터들이 교내까지 침입할 수도 있는 터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해서 지하 수로 청소는 대개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징계로서 주어지곤 했다.

바로 당규영과 도둑 동아리 부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당규영 일당이 오늘치 작업을 끝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곽승재가 그들을 맞이했다.

항상 끝나는 시간을 칼같이 맞춰서 나타나는 그였다.

"끝나셨습니까, 선배님."

"엉. 봐라."

당규영이 영상기록 수정구를 휙 던지듯 건넸다.

이 수정구는 학생들의 대인전, 공략전에 쓰이는 리플레이 수정구와 마찬가지로, 지하 수로에서 벌어졌던 일을 낱낱이 기록하는 용도로 쓰인다.

이렇게 농땡이 안 치고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를 보여야 선도부 측에서 그날 치 징계를 빼 주는 것이다.

곽승재가 빠르게 수정구를 재생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인했습니다."

그는 수정구를 회수한 뒤, 가져온 단말기로 도둑 동아리 부원들의 학생증을 한 번씩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당규영이 물었다.

"야, 승재. 우리 얼마나 남았냐?"

앞으로 남은 징계 일수가 얼마나 되는가 묻는 것이다.

곽승재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앞으로 지하 수로 9일, 건물 보수 작업 5일, 외부 의뢰 2회씩 남으셨습니다."

"...졸라 한참이네."

그 말에 맞장구치듯 곳곳에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딴에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징계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당규영 역시 사람이라 더러운 일, 궂은일 싫어하는 건 남들과 같았다.

특히 이 비릿한 냄새.

지하 수로 청소를 하고 나면 한동안 그 냄새가 코끝을 맴돌아서 식욕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불퉁한 표정을 짓는 당규영에게 곽승재가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부장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실눈이가?"

"예, 선배님에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선도부장 오세훈의 전언, 그리고 당규영에게 좋은 기회.

대화의 흐름으로 미루어 보아 징계를 줄일 방법일 가능성이 컸다.

다만 거래라 함은 얻는 게 있으면 내어 주는 것도 있는 법.

당규영이 선수를 쳤다.

"미리 못 박아 두겠는데, 그때 얘기면 난 더 할 말 없다."

지난 임시 보관소 침입 사건에서 탈취당한 금지 아이템들, 그리고 [인페르노 피스트]를 썼던 복면인은 아직도 학생선도부 차원에서 추적 중이다.

오세훈의 전언이 이것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당규영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심산이었다.

이제 와서 김호를 팔아먹기도 싫고, 아이템들 대다수는 진작에 현금화했고.

곽승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기대도 안 합니다."

"그럼 뭔데?"

"한번 보시죠."

당규영은 곽승재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표지부터 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멘토링 활동 계획서>

휙휙 넘기며 핵심적인 내용만 간추리자면 대강 이랬다.

금년도 신입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은바, 학사 측에서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해서 이번 멘토링을 보다 밀도 있게 진행하고 싶다.

멘토 한 명당 신입생의 수를 평균 다섯 명 이하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존보다 더 많은 숫자의 멘토가 필요하다.

자격에 부합한다면 부디 멘토링에 참여해 주길 바란다.

당규영의 실력은 3학년 상위권.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 이끌기에는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다만....

'또 귀찮은 게 튀어나왔네.'

보모 노릇은 딱 질색인데.

지금 뒤에 있는 도둑놈들 이끄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 그녀였다.

그런데 여기서 케어할 사람이 더 늘어난다면?

심지어 멘티로 들어올 병아리들은 십중팔구 다른 동아리 소속, 즉 '남의 집 자식들'이다.

도둑놈들 대하듯 막 대했다간 그쪽 동아리와 마찰을 빚을 확률이 매우 높다.

반쯤은 상전 모시듯 해야 한다는 뜻.

거절하는 쪽으로 급격히 무게추가 쏠렸지만 당규영은 일단 말을 아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보고 결정해야지.

"그래서, 받으면?"

"이번 징계를 전면 탕감해 준다 하셨습니다."

"나만? 아니면 얘들도?"

"이번 징계에 포함된 인원 모두입니다."

"...!"

"...!"

당규영뿐만 아니라 임시 보관소 침입 사건에 연루된 모든 부원들이 해방된다.

도둑 동아리 부원들이 일제히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누가 보면 눈에서 레이저 빔이 뿜어져 나오는 줄 알겠다.

'부장님, 제발!'

'누님, 그냥 눈 딱 감고 오케이해 버리쇼.'

'받아들이는 게 부장님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입니다...!'

거절하면 하극상이라도 일으킬 기세.

'근데 이것들이...?'

감히 하늘 같은 부장님한테 무언의 압박을 가해?

당규영이 째릿 눈빛을 마주 보내자 시선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제 날 잡아서 한번 기강을 바로잡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규영이 선도부 측의 제안을 짧게 요약했다.

"한마디로 징계 대신 멘토 해라, 이거지?"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으흠.... 이걸 받아, 말아?"

당규영이 한쪽에는 징계, 반대쪽에는 멘토링을 놓고 열심히 저울질을 해 댔다.

어느 쪽이 명백히 이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수구 냄새를 안 맡는 대신 상전이 너덧 명 생기면 우환거리는 그대로니까.

곽승재는 당규영의 고민이 길어지는 듯하자,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해 봐."

"받으시는 게 맞다 생각됩니다."

"왜?"

"지금 도둑 동아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시간 아니겠습니까. 심부름센터도 운영하셔야 하고, 곧 열릴 암시장도 준비하셔야 하고."

당규영이 홱 고개를 돌려 뒤쪽에 대고 물었다.

"야, 우리 보안 이대로 괜찮은 거 맞냐? 선도부가 우리 일정을 다 꿰고 있네!"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도둑 동아리가 밴 웨이브 다음에 임시 보관소를 노리리라는 사실만큼이나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심부름센터 운영도, 암시장도.

게다가 곽승재의 말마따나 시간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선도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부원들은 아예 징계가 탕감되니 훨씬 운신이 자유로워지며, 당규영 본인에게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멘토링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신다면,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지도 모르지요. 용살학원이 이런 데는 철저하니 말입니다."

"그건 너무 긍정적인 관점 아닐까?"

"그래서 저도 크게 기대는 안 합니다."

"...."

당규영이 표정을 구겼다.

재수 없게 솔직한 놈.

그래도 곽승재의 말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은 되었다.

나지막이 혀를 차고 답한다.

"쯧, 하겠다고 전해."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로그 계열 스킬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나?"

"제가 알기로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곽승재가 고개를 젓고 덧붙였다.

"...선배님의 특기 분야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림자 술사 당규영.

그녀는 도둑의 온갖 비기에 통달한 달인임과 동시에,

마탑회 부장들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강력한 배틀메이지였다.

56화 리플레이 분석 (1)

약속 시각인 자정에 정확히 맞춰 의뢰받은 아이템들을 전달했다.

설마하니 정말 자정까지 끝낼 줄은 몰랐는지 봉재석과 선배들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곧 나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 되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야, 쟤 우리 동아리 안 들어온대?

- 생각 없으시단다.

- 네가 적극적으로 안 꼬셔서 그런 거 아냐?

- 그냥 놔둬. 쓸데없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 그래도.... 스읍.

자꾸 나를 보면서 입맛을 다신다.

계속 근처에 얼쩡거렸다간 납치라도 할 기세라, 나는 짐짓 바쁜 척 준비해 온 재료로 아이템 제작에 나섰다.

그렇게 하룻밤을 투자해서,

'뼈대는 잡혔다.'

작업대 위에는 작은 심 형태의 부품이 놓여 있었다.

시험 삼아 마나를 불어 넣자 작업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것들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달그락거리는 소음을 만들었다.

아직 만들다 만 반쪽짜리라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지만, 진득하게 며칠 더 투자하면 완성할 듯했다.

* * *

대인전 수업은 담당 교사가 이수독인 만큼 항상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심지어 오늘은 그 분위기에 무게가 더 추가되었다.

이수독이 '그 단어'를 입에 담았기 때문에.

용살학원의 학생이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늪 같은 단어.

"숙제다."

학생들은 이수독이 농담이었다고 말하길 바라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그도 사람이니 가끔씩은 학생들에게 못된 장난을 치지 않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수독은 농담이나 장난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내였다.

수업 내내 유지하던 평이한 어조로 설명을 잇는다.

"수련과 실전을 거듭하는 것만큼 지나간 전투를 복기(復棋)하는 것도 중요하다. 금주 대인전은 여러모로 돌아볼 요소가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의 실력만 배양할 줄 알았지, 2 대 2처럼 타인과 합을 맞추는 팀 게임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대인전 주간에는 여러모로 색다른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합을 맞추면서 의도치 않게 실수도 많이 나왔고,

분명 해 볼 만한 상대인데 손발이 안 맞아서 어이없게 패하는 경험도 하고,

평소에는 힘겹던 상대를 팀원과 힘을 합쳐 쓰러뜨리는 경험도 해 봤으리라.

어느 경우든 복기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리플레이를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아군과 적군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이었는지, 서로의 전략은 무엇이었는지, 더 유효한 전략은 없었을지. 4경기 중 하나를 선택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기한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다."

아직 목요일이고, 이번 주 할당량인 4경기를 다 끝내지 않은 학생도 꽤 될 테니 기한을 넉넉하게 준 듯했다.

물론 보이는 것만 넉넉할 뿐, 다음 주에 또 무슨 숙제가 생길지는 모를 일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치워 버리는 게 상책이다.

"김 형."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수업이 끝나는 즉시 고현우가 내 근처로 다가왔다.

서예인 역시 무표정한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본다.

말은 안 하지만 숙제를 같이 하자는 뜻이 전달된다.

'마침 잘됐네.'

이미 고현우와 나머지 대인전 리플레이를 같이 살펴보기로 약속을 해 둔 상태.

서예인은 이 일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지만, 다 같이 분석하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보고서 작성에도 제법 도움이 되리라 예상한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갑시다. 조용한 곳으로."

* * *

매점에서 마실 거리를 하나씩 사 들고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일전에 에메랄드 마탑, 대자연 동아리와 협상을 했던 그 장소다.

아래층에 제법 학생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이는데 위층은 여전히 인적이 드물었다.

큼지막한 원형 테이블 한쪽에 세 사람이 몰려 앉았다.

내가 가운데, 양옆에 고현우와 서예인.

"이것이오."

고현우가 내 앞에 리플레이 수정구 두 개를 내려놓았고.

서예인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미동도 안 하고 수정구를 응시했다.

입에 물린 빨대를 통해 방금 사 온 아이스티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완벽하게 관람모드에 들어간 상태.

나도 가져온 아이스티를 한 모금 하고, 첫 번째 수정구를 집었다.

"순서대로 보자."

곧 리플레이가 재생되었다.

첫 번째 경기에 참가한 인원들은 모두 고현우와 비슷한 600~700점대.

고현우의 팀원으로는 마법사, 상대편으로는 궁수와 전사가 나왔다.

다들 별다른 묘사가 필요 없을 만큼 전형적이었다.

가령 전사는 며칠 전에 붙은 백준석과 비슷한 검과 방패 스타일이었는데,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방어구가 판금 대신 가죽이라는 것 정도였다.

백준석보다 몸이 조금 더 가볍긴 하겠지.

[3]

[2]

[1]

[Start!]

- 쾅!

경기가 시작되고, 고현우와 상대편 전사가 격돌했다.

몇 합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현우가 압도하는 구도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안 봐도 저절로 예측이 될 만큼 뻔했다.

문제는 바로 다음 순간 발생했다.

고현우의 팀원인 마법사가 사달을 내고 만 것이다.

앞에서 근접 클래스들이 치고받는 중이면 당연히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무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곧장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두 손에 백색 구체들을 소환해 연이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좀 무모한데.'

저 백색 구체가 근거리 계열에 가까운 마법이라 접근해서 던져야 하는 건 맞다.

다만 근접전이 약한 마법사의 특성상, 상대에게 접근하기 전에 보험을 들어 두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육체 능력 강화 등의 버프를 걸거나, 방어 마법을 둘러치거나, 따로 소환수 등을 대동하거나.

그런데 저 마법사는 무턱대고 앞으로 튀어나오기만 했다.

고현우가 알아서 맞춰 주리라 믿었거나, 적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듯하다.

상대측에서 그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전사는 날아오는 구체를 방패로 쳐 내는 즉시, 고현우를 무시하고 마법사에게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공격을 상당히 허용하고 체력을 꽤 많이 잃었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마음가짐인 듯했다.

마법사가 워낙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참이었기에 크게 한두 걸음 뛰니 금세 코앞에 당도했다.

- 서걱!

내지른 일검에 마법사의 체력이 반 가까이 날아가며 거의 빈사 상태에 빠졌고,

- 푹,

뒤이어 가슴 한복판에 화살이 틀어박혔다.

상황을 주시하던 궁수가 날린 일격이었다.

마법사는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경기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이고?"

"...."

나는 고현우에게 대견함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저 상황에서 용케 쌍욕을 안 하고 참았네.

고현우도 내 시선에 담긴 속뜻을 알아채고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팀원의 심각한 트롤링 덕분에 경기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2 대 1이 된 상황.

이미 반 이상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고현우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 채 계속 검을 휘둘렀다.

전사와의 공방에서는 그가 우세한 데다, 어느 정도 피해도 입혀 둔 터라 아직 약간의 희망은 남았다.

두 근접 클래스가 전투를 이어 갔다.

금세 다시 압도하기 시작한 고현우였으나, 간간이 궁수가 날리는 화살을 쳐 내거나 피할 때마다 수세로 전환해야 했다.

밀고 당기며 맞붙던 도중.

고현우가 돌연 맹공을 퍼부어 틈을 벌렸다.

먼저 절기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기세를 끌어올려 [청류]를 사용하자, 검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며 부드러운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상대방 궁수에게 집중시키자 삽시간에 체력이 뚝뚝 떨어지더니, 오래 못 버티고 전투 불능이 되고 말았다.

아레나의 보호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온몸이 난자당하는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역시.'

다른 전투에서도 확인한바, [청류]로 불러일으킨 바람은 그 자체로 검기의 역할을 한다.

마법의 영역에도 한 발을 걸쳤다고 평가하는 건 저런 이유에서다.

- ...!

전사는 팀원이 순식간에 당하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청류가 집중된 일검이 떨어져 내렸다.

- 파앗!

"이겼네."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소. 합이 잘 맞는 대신 일정한 규칙이 보이더군."

상대측의 팀워크 자체는 훌륭했다.

다만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 그것이 되려 서로의 행동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고현우의 눈에는 규칙적으로 보였던 것이고.

물론 지금은 완전히 숙달되지 않아서 그런 단점이 부각되는 거지, 앞으로 더 갈고닦을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워질 것이다.

첫 경기는 시종일관 끝까지 침착하게 운영한 고현우의 승리였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무기 좀 보자."

리플레이를 경기가 끝나기 직전으로 돌리고, 고현우의 무기를 확대했다.

포인트로 구매한 E급 무기, [표사의 장검].

검날에 금이 간 정도로 미루어 보아 내구도가 거의 바닥이었지만, 가까스로 부서지지는 않았다.

어제 만들어 준 [튼튼이 클립]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듯했다.

"청류 쓰고 버틴 건 이번이 처음이지?"

"그렇소."

대답하는 고현우의 안색이 밝았다.

언제나 고민거리였던 부분이 해결되려 하니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물론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마지막 경기까지 본 다음에 생각해야겠지.

"좋았어. 이제 다음 거 봅시다."

고현우가 다음 리플레이를 재생했다.

참가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나는 눈빛을 빛냈다.

'올 것이 왔구만.'

[고현우 785점 북궁한설 932점]

vs

[정수지 693점 박나리 998점]

여태까지 고현우의 승률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배치 고사는 조벽에게 1패를 제외하면 전승,

1주 차 대인전은 3전 전승,

이번 3주 차 대인전은 방금 본 리플레이가 4경기 중 3번째 승리였다.

때문에 점수가 가파르게 상승하며 800점대에 근접했고, 슬슬 900점대도 하나둘 만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양측에 한 명씩 나왔다.

북궁한설은 고현우와 같은 무인이었다.

북궁이라는 성씨와 무기를 들지 않은 두 손이 권장법의 달인임을 암시했다.

반면 상대는 상당히 낯이 익은 박나리, 정수지 듀오.

박나리는 드루이드, 정수지는 목토술사로 원거리 클래스다.

근거리 계열 둘과 원거리 계열 둘의 대결인 셈.

다만 저쪽은 마냥 원거리라고 볼 수는 없었는데,

- 으르렁,

박나리 옆에 앉아서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는 호랑이, '범이' 때문이었다.

57화 리플레이 분석 (2)

호랑이 범이는 평소에는 축소 마법으로 크기를 줄여 놓기에 손바닥만 하지만, 본래 모습은 저렇게 사람보다 더 크다.

'집채만 하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었다.

범이는 박나리가 등을 부드럽게 한 차례 쓰다듬자, 낮게 그르렁거리고 앞으로 나가 자리를 잡았다.

[3]

[2]

[1]

[Start!]

범이가 몸을 한껏 웅크리더니,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눈 깜박할 사이에 고현우의 앞까지 쇄도해 앞발을 휘두른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민첩한 속도.

뿐만 아니라 앞발에 온몸의 무게가 가득 실려 일격이 묵직하고, 발톱에는 마나까지 맺혀 있다.

'영물은 영물이군.'

저 호랑이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600점대는 모조리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다.

앞발 한 대 얻어맞으면 턱주가리가 등 뒤로 돌아가 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무식하게 강력한 앞발을 고현우가 방어하자,

- 퍼서석,

한 합 만에 E급 [표사의 장검]이 명을 달리했다.

사실 꼭 범이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내구도가 아슬아슬하기는 했다.

이전 경기에서 많이 깎였던 상태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곧바로 D급 [표두의 장검]을 뽑아 드는 고현우.

- 파파파팟!

잠시 생긴 빈틈은 파트너인 북궁한설이 메꿨다.

그녀가 장력을 마구 쏟아붓자 호랑이 범이가 잠시 주춤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상인이네."

"제법 합이 잘 맞는 소저였소."

이전 경기의 마법사와는 달리, 팀워크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은 잡혀 있었다.

북궁한설은 짐작한 대로 권장법의 고수.

두 손에는 서리가 맺힌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한빙(寒氷) 계열의 무공을 익혔다는 증거였다.

고현우와 북궁한설이 본격적으로 합공에 들어갔다.

범이에게 검기와 장력이 마구 쏟아졌으나,

[박나리 94%]

[박나리 95%]

[박나리 97%]

그다지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가죽이 단단한 갑옷이라도 두른 것처럼 검기를 튕겨 내고, 조금 입힌 상처마저 엄청난 속도로 회복한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박나리, 정수지가 자리 잡은 본진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박나리에게서 싱그러운 초록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다.

'서포터 계열이구만.'

보호, 회복에 강화까지, 다양한 보조 스킬에 발을 걸치는 서포터형 드루이드.

스킬의 수준이 낮으면 이도 저도 아닌 잡탕이지만, 수준이 높으면 그야말로 만능에 가깝다.

그리고 박나리는 4대 세력의 유망주급이다.

정수지는 나머지 셋에 비해 별 존재감은 없지만, 이따금씩 흙탄환을 날려 보내거나 나무 덩굴로 발을 휘감아 두 무인을 견제한다.

곽지철과 같이 덤볐을 때도 깔짝대는 게 은근히 거슬렸었다.

번역하면 견제를 잘한다는 뜻. 칭찬이다.

박나리 측의 전략을 한 줄로 요약하면, 범이를 전방에 세우고 전폭적으로 보조하는 형태다.

장기전으로 가면 유지력이 좋은 박나리 측의 승리로 끝날 테니, 고현우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 구도를 무너뜨려야 한다.

나는 말 없이 리플레이를 지켜보던 서예인에게 언질을 주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해. 잘 봐."

"응."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가 고현우와 북궁한설의 판단력을 보여 주는 셈이니까.

두 사람은 먼저 가장 단순무식한 방법부터 시도해 보려는 듯했다.

정면 승부.

박나리의 보호 마법과 회복량을 상회하는 대미지를 입혀 단번에 결판을 내는 것이다.

기세를 끌어올리고, 각자의 절기를 꺼내 일순간에 쏟아부었다.

[청류(淸流)]

[빙극설혼장(氷極雪魂掌)]

바람의 칼날과 한파가 몰아쳤다.

- 콰콰콰콰콰—!

그러나....

[박나리 79%]

호랑이 범이는 그마저도 버텨 냈다.

체력이 꽤 떨어졌으나 치명적인 피해까지는 입지 않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차오르는 중이었다.

[박나리 79%]

[박나리 80%]

[박나리 82%]

- 으르렁,

범이는 영악하게도 회복하는 동안은 방어와 회피 위주로 대응하며 버티기만 했다.

"사실 정면 승부가 제일 어렵거든."

"옳은 말이오."

내 말에 고현우도 동의를 표했다.

정면 승부는 단순한 대신 매우 높은 기량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상대보다 두세 수는 위에 있어야 범이를 손쉽게 압도할 텐데, 두 사람의 기량은 박나리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살짝 떨어지는 편이겠지.

[박나리 100%]

기껏 열심히 때려 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상 복구된 범이의 체력.

리플레이를 보는 사람들까지 힘이 빠지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그러나 고현우와 북궁한설의 눈에는 여전히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짧게 몇 초간 작전 회의를 하나 싶더니, 양옆으로 갈라지며 같은 절기를 사용한다.

이번에는 범이가 아니라, 박나리와 정수지가 위치한 본진으로.

- 콰콰콰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건 좋았다."

고현우가 첫 경기에서 썼던 수법과 비슷했다.

원거리 공격으로 상대적으로 약한 후열을 먼저 노리는 것.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답해 보라는 듯 옆으로 시선을 보내자, 서예인이 나를 흘끔 마주 보더니 빨대에서 입을 뗐다.

"...너무 시간을 많이 줬어."

"그렇지."

박나리 정수지 측에서는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고도 남았다.

원거리 공격이 적 본진에 도달할 즈음에는 이미 흙벽과 나무 덩굴을 비롯한 방어 마법들이 겹겹이 둘러쳐진 뒤였다.

- 크허헝!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범이가 달려들며 흐름을 끊었다.

북궁한설에게 몸통 박치기를 가하자 그녀의 신형이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뻥 튕겨 나갔다.

고현우는 어쩔 수 없이 범이를 뒤쫓아야 했다.

"여기서부터 꼬였구만."

"그렇다오. 아쉬운 일이지."

박나리와 정수지 측에서도 계속 상대가 이 방법 저 방법 시도해 보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꾸준히 흔들며 정신없게 만들었다.

결국, 이후에는 앞선 두 전략과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었고 번번이 철옹성 같은 방어에 막힐 뿐이었다.

- 퍼석,

[청류]를 네 번쯤 연이어 사용한 시점에서 D급 [표두의 장검] 역시 내구도가 다했다.

고현우는 그 뒤에도 철검 몇 개를 더 깨 먹으며 분전했지만, 끝내 기울어 가는 경기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남은 시간 0:00]

[고현우 북궁한설 Lose]

vs

[정수지 박나리 Win]

결과는 제한 시간 10분을 모두 소모해서 판정패.

"두 분에게 부끄러운 경기를 보였구려."

"아니야. 유망주 상대로 이 정도면 잘 싸웠어."

아직 고현우가 쓰러뜨리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충분히 질 만한 싸움에서 졌으니 실망도 안 했다.

고현우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 형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서예인 역시 궁금하다는 듯 빤히 나를 보았다.

나는 리플레이 수정구 속 사람들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런 상황이면 역할을 나눠 봤겠지."

"역할 분담이라...."

한 명이 호랑이 범이를 붙잡아 두는 동안 다른 한 명이 본진을 타격하는 방법.

빙공의 제어하는 특성을 살려서 북궁한설이 전자, 상대적으로 파괴력이 높은 고현우가 후자를 맡는 게 이상적이다.

적진까지 파고드는 길도 순탄하다곤 못하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근접전에서 두 캐스터의 방어를 뚫고 베어 넘기는 건 훨씬 쉽다.

고현우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내 작전을 그려 보는 듯했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요. 왜 거기까지 생각이 안 닿았을까?"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범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덮쳐 와서 정신이 없기도 했을 테고, 제한 시간 10분이 시시각각 줄어드는 압박감 역시 사고를 제한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새로운 작전을 떠올리고 팀원과 의견 조율까지 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다음에 더 잘하면 돼. 보고서에는 이 정도 쓰면 될 것 같은데, 더 물어볼 거 있냐."

"...."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해서인지 고현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서예인에게 눈길을 보내자 마찬가지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둘 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니 이만하면 감을 잡았겠지.

"이제 보고서에 못 넣는 얘기를 해 보자. 솔직히 방금 말한 방법을 썼어도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 그렇소?"

"스펙 차이가 너무 심하거든. 특히 장비."

보고서에 '상대랑 스펙 차이가 나서 졌어요'라고 썼다간 이수독이 뒤통수를 후려갈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고서에서는 뺐지만, 스펙 차이 또한 엄연한 현실이었다.

박나리는 길드연합의, 대자연 동아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유망주다.

익혀 놓은 스킬과 특성의 폭이 매우 넓어 본신의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갖 아이템으로 도배를 했다.

최근에 나와 거래한 [생명의 큐브]도 포함해서.

반면 고현우가 가진 것이라곤 칼 한 자루가 전부.

그마저도 명검과는 거리가 먼데다, 깨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고작이다.

잠시 내 말을 곱씹던 고현우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는 것도 당연했구려. 상대의 실력이 본인의 아래가 아니었는데 준비까지 철저했으니.... 반성해야겠소."

"스펙을 박나리 수준까지 맞출 필요는 없어. 애초에 그건 불가능하지. 저쪽은 거의 동아리 살림을 한 사람한테 퍼붓는 건데. 몇몇 핵심적인 대비책만 들고 있어도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질 거다."

"그런 게 있단 말이오?"

고현우는 솔깃한 표정이 되었다.

서예인 역시 조만간 박나리 같은 상대와 만날지 모른다 생각했는지 가만히 내 말에 집중했다.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검(魔劍)."

정확히는 '치유 감소' 저주가 부여된 마검으로 바꿔 드는 것이다.

가령 [굶주린 톱니검]으로 상대를 드륵 긁으면, 일정 시간 동안 상대가 받는 회복을 톱니검이 흡수한다.

[내장 쑤시개]에 당한 대상은 회복 마법에 되려 추가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끔찍한 고통은 덤.

치유 감소 외에도 마비나 중독 상태이상을 부여하거나 마법사의 배리어만 전문적으로 깨뜨리는 등, 보유한 검의 종류가 늘어날수록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의 폭도 넓어진다.

최상위권 검사들의 인벤토리를 들여다보면 명검 전시회가 따로 없다.

총사는 검은 안 써도 다양한 [특수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면이 있다.

설명을 모두 듣고 고현우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과연.... 아직 아이템에 대해서는 많이 무지하오. 김 형에게 또 하나 배우는군. 새삼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오."

"네 말대로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이제 3주 차밖에 안 됐으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는 말고."

"명심하리다."

"그럼 아이템 얘기 나온 김에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현재 고현우가 다양한 명검을 수집하는 것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것.

바로 내구도 관리다.

우리가 리플레이를 같이 보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고현우가 여태 가장 많이 썼던 초식인 [청류]를 기준으로, E급 장검은 가까스로 한 번, D급은 네 번 쓸 때까지 파괴되지 않았다.

그것을 토대로 대강 계산을 해 보면.

"B급 이상에 내구도 관련 아티팩트 몇 개 더. 그럼 깨질 걱정은 거의 없어지겠지."

"B급이라....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소."

"지금은 너무 먼 목표긴 해. 징검다리 격으로 C급만 써도 당장은 큰 문제가 없을 거다."

다만 C급도 결코 흔한 랭크는 아니다.

개중에 괜찮은 건 2학년들도 쓰는 수준이니.

고현우가 카탈로그를 꺼내 '장검' 항목을 확인했다.

조금씩 학생 상점 이용에 익숙해지는 그였다.

다만 포인트로 C급 무기를 사려면....

"만만치가 않군."

"비싸지. 포인트는 아껴 둬. 소모품에 쓰기는 아깝잖아."

[표국 시리즈]는 반쯤 실험용으로 산 데다, 랭크가 낮아 포인트 부담도 적었다.

그러나 C급부터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언젠가 반드시 파괴될 소모품에까지 포인트를 들이부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다른 방법으로 얻으면 그만이다.

돈도, 포인트도 안 쓰고.

고현우의 시선이 나를 따라 한쪽으로 이동했다.

시야 한쪽을 차지하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동산.

던전동.

"드랍으로 먹는다."

58화 리플레이 분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