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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금조한이 검을 반도 뽑아 들기 전에 나비에서 그림자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는 그림자에게 집어삼켜져 누에고치처럼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쌍둥이 하나가 그의 몸에 손을 짚었다.

"읍—읍—"

"좋게좋게 가자. 반항하면 서로 피곤해져."

다른 쌍둥이는 허공을 찰흙 주무르듯 주물렀다.

잠시 후 금조한과 똑같이 생긴 분신이 만들어지더니 순찰 경로를 척척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원본에 비해 상당히 맹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들통 날 시점에는 일이 다 끝난 후겠지.

그리고 금조한 본인은 포박을 유지한 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분신은 알아서 잘 걸어 다니게 놔두고, 일행은 모두 구교사 외벽에 달라붙었다.

완드 남학생이 주문을 외우자 원형 계단이 차곡차곡 쌓이며 3층 창문까지 이어졌다.

빠르게 걸어 올라가 창문 앞까지 도달해서, 완드 남학생이 창문에 붙은 마법진들을 해체한다.

"니미, 알람 마법 한번 지저분하게 걸어 놨네."

극찬까지 하는 걸 보니 선도부가 일을 잘해 놨나 보다.

결국 뚫리기는 했지만.

마법진이 모두 사라진 창문을 신병철이 깔끔하게 뜯어내고, 우리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임시 보관소의 위치는 구교사 3층 D실습실.

이곳은 A실습실이다.

D실습실은 결계와 마법이 몇 배는 더 겹겹이 쳐져 있어 창문으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하단다.

따라서 A실습실로 침입한 뒤 복도를 통해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것이 작전이었다.

"침입ㅈ—!"

복도를 순찰하던 선도부원이 우리를 발견하고 '침입자다!'라고 외치기 직전, 당규영이 음파를 차단하고 쌍둥이가 덮쳤다.

일대일로 붙으면 당연히 선도부가 이기겠지만, 기습적으로 벌어진 전투에 수적으로도 열세라 그는 가진 실력을 채 발휘하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다.

쌍둥이가 제압한 선도부원의 분신을 만드는 한편, 태블릿 여학생이 빠르게 태블릿을 두들겨 댔다.

시선은 복도를 비추는 수정구들을 응시하고 있다.

"됐어요."

저 '됐어요'는 수정구들을 모두 무력화했다는 뜻이리라.

마법 함정은 완드 남학생이, 일반 함정은 신병철이 제거하며 거침없이 나아간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신병철이 함정을 해체하는 숙련도와 속도는 2, 3학년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나름 정예들만 가득한 이 파티에 포함됐지.

내 마음속 신병철의 평가를 아주 살짝 올렸다.

함정 해체 한정 B급 재능으로.

그렇다고 키워 볼 마음이 드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서예인에 비하면 반딧불 수준이거든.

"...."

이제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D실습실, 임시 보관소.

그러나 작은 거울을 내밀어 모퉁이 너머를 비춰 본 당규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씨, 쟤는 좀 빡센데."

"누군데요?"

당규영의 거울을 넘겨받아 비춰 보았다.

임시 보관소 앞을 남학생 한 명이 지키고 서 있다.

선도부 완장. 3학년 넥타이핀.

그리고 손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두꺼운 도끼.

저 선배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저 아이템은 눈에 익다.

A랭크 도끼인 지옥부(地獄斧).

3학년 선도부가 지옥부까지 들었다면 당규영의 입장에서 상대하기 버거울 만도 하다.

계속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나도 한 손 보태야겠다.

"[영접지몽]. 쓸 줄 알죠?"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흠칫 놀라는 당규영.

어떻게 알긴요, 키워 봤으니까 알죠.

"나중에. 쓸 줄 알아요?"

"아직 덜 익혔어. C밖에 안 돼."

"잘됐네."

"?"

['증폭'을 사용합니다.]

['영접지몽'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C->A)]

[지속시간 00:01:59]

[재사용 대기시간 00:49:59]

A랭크라면 해 볼 만하겠지.

당규영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뭐야, 너 어떻게 했어."

"시간 없어요. 빨리합시다."

"...."

시간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는지 당장은 입을 다물지만, 나중에 꼭 물어보겠다고 다짐을 거듭하는 눈치다.

당규영이 두 손을 모았다.

손 위로 그림자의 나비가 한 마리 두 마리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로 불어난 검은색 나비 떼를 당규영이 그대로 해방했다.

[영접지몽(影蝶之夢)]

"!"

3학년 선도부가 즉시 반응했다.

지옥부를 미친 듯이 휘두르자 날아가던 나비 떼 중 삼분지 일이 반으로 갈라지며 흩어졌다.

나비 한 마리가 그의 몸에 닿으며 폭발했다.

터져 나오는 그림자가 그를 감싸지만,

"흠!"

기합 한 번에 풀리고 흩어져 버린다.

무인이 몸에 두르는 반탄지기의 일종이다.

그러나 나비들이 두 마리, 세 마리씩 계속해서 달라붙고 옭아매자 점점 풀어내는 것보다 쌓이는 게 많아졌고,

결국 그는 거대한 그림자의 고치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당규영은 기진맥진해선 나에게 말했다.

"너, 너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

"그러죠."

비틀거리는 당규영을 잠시 부축해 주고 있자니 금세 기운을 차리고 앞장섰다.

임시 보관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도둑 동아리는 근처의 아주 작은 장치들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진입했다.

실수로 알람 마법 하나만 건드려도 끝장이다.

완전히 안전을 확보하고 난 뒤에야 금지 아이템들을 각자의 인벤토리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빨리 챙길 거 다 챙기고 뜨자."

"예, 누님."

당규영과 나도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생명의 큐브]를 열자 값진 아이템들만 골라서 쏙쏙 집어넣는다.

'나도 슬슬 쇼핑 좀 해 볼까.'

금지 아이템의 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뭐가 있을지는 살펴봐야 알겠지만, 금지 아이템의 종류는 거의 정해져 있다.

용살학원에서 밴 리스트를 작성하는 가장 큰 기준은 '부작용'이다.

막대한 힘을 얻는 대신 얼마나 큰 부작용이 뒤따르는가.

가령 [마공서]의 경우 단기간에 급속도로 강해질 수 있는 대신, 익힐수록 정신이 마기에 물들어 악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열차에서 얻었던 [암흑빙정]도 단숨에 마나량을 대폭 늘려 주지만, 그 냉기를 버티지 못하면 복용하는 즉시 뼛속까지 얼어붙어 버린다.

이처럼 육체나 정신에 손상이 가해진다면 대부분 금지 아이템으로 지정된다.

그 손상이 크고 영구적일수록 리스트 위쪽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고.

이곳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크든 작든 페널티를 달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중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건 암흑빙정과 같은 '원소 페널티'를 가진 금지 아이템.

어지간한 원소 페널티는 S랭크 [원소 저항]으로 전부 무효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

[심뢰옥]*2

벼락을 억지로 뭉쳐서 담은 것 같은 울퉁불퉁한 구슬 두 개.

당장 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생명의 큐브에 보관했다.

아이템의 산을 계속 뒤적거려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원소 페널티 아이템은 더 나오지 않았다.

더 깊숙이 뒤지기엔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게 낫다.

'스킬북.'

이곳에 온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금지 아이템이 잔뜩 모인 곳이라면 원소 페널티를 가진 스킬북이 한두 개쯤은 있을 법했으니까.

그러나 이것도 찾는 게 쉽지는 않을 듯했다.

당장 제일 위에 있는 스킬북부터 꽝이다.

[스킬북 - 아수라혈마공]

이건 익히면 익힐수록 혈마기가 골수까지 치밀어서 결국 미쳐 버리게 된다.

100% 장래의 빌런 예약이다.

도대체 어떤 간 큰 놈이 이걸 들여왔는지 모르겠네.

구하기도 엄청나게 어려웠을 텐데.

[스킬북 - 네크로그라스프]

붙잡는 모든 것을 썩어들어 가게 만드는 네크로맨서들의 근접전 스킬.

쓸 때마다 술자의 손 역시 서서히 부패한다는 단점이 크다.

'원소 페널티, 원소 페널티....'

원소 페널티를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스킬북들을 넘기고 또 넘기다가, 마침내 괜찮은 걸 하나 발견했다.

아니.

단순히 괜찮은 게 아니라 대박에 가까웠다.

[스킬북 - 인페르노 피스트]

서포터가 다 해먹음

31화 금지 아이템이 모이는 곳 (3)

불주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화염술사들의 [파이어 펀치]다.

주먹에 화염을 둘러 타격하는 마법으로, 파괴력은 썩 대단치 않다.

마법사들의 육체 능력이 대체로 빈약한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고 스킬을 쓸 때 마나 외에 거창한 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인 셈이다.

반면 [인페르노 피스트]는 초 하이 리스크 초 하이 리턴.

주먹에 화염을 두르는 게 아니라 화염을 깃들게 한다.

그 과정에서 주먹을 이루는 살갗, 근육, 혈관, 뼈, 마력회로까지, 모든 것을 불태운다.

쓸 때마다 주먹에 엄청난 화상을 입기에, 강력한 회복 아이템을 동반해야만 가끔 한 번씩 쓰는 정도.

이를 무시하고 네다섯 번 연속해서 시전하면 주먹이 까만 숯덩이가 돼서 부서지고 만다.

그 대가로 얻는 것은, 파이어 펀치 따위는 성냥불로 취급하는 압도적인 파괴력.

이 막강한 스킬의 리스크를 무효화하고 장점만 취할 수 있다면.

'그게 대박이지.'

굳이 들고 나갈 것 없이 당장 익혀 두기로 했다.

금지 스킬북을 다룰 때는 언제나 신중해야 하지만, 내 경우는 예외다.

어차피 원소 페널티는 나에게 아무 피해도 못 주니까.

['스킬북 - 인페르노 피스트'를 사용합니다.]

['인페르노 피스트(C)'를 습득합니다.]

예상대로 태생부터 C랭크다.

아마 3학년 쪽에서 압수한 스킬북일 테지.

당규영이 부원들에게 물었다.

"다 챙겼냐?"

"예, 누님."

임시 보관소는 처음에 비해 한층 휑해졌다.

꽤 많은 금지 아이템이 도둑 동아리의 인벤토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 아이템들을 완전히 훔쳤다고 볼 수 없다.

무사히 탈출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나가자."

침입했던 루트를 그대로 탈출 루트로 사용했다.

복도를 통해 A실습실로 돌아가고,

A실습실 창문 밖 원형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간다.

금조한의 분신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같은 자리를 순찰하고 있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복면에 가려져 있어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다들 한층 상기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 쿠구구구,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일행 앞에 나무로 만들어진 문짝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문이 열리며 남학생 하나가 걸어 나왔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

2학년 넥타이핀, 선도부 완장.

한 손에는 큼지막한 에메랄드빛 수정구를 쥐고 있다.

나무와 땅 마법에 동시에 능한 목토술사.

서로 안면이 있는지 쌍둥이가 번갈아 한마디씩 했다.

"곽승재...."

"또 너냐...."

"뭐만 하면 튀어나와."

"나 저 나무문 꿈에 나온다니까?"

"구교사가 너희들 안방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게 둘 순 없지."

목토술사가 소형 발신기를 조작하자, 태블릿 여학생이 즉시 그것을 먹통으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그는 수정구를 쥐지 않은 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쏘아져 올라가는 밝은 빛을 그림자가 따라붙어 집어삼켰다.

"...!"

목토술사의 눈빛에 이채가 깃들고, 그림자를 날려 보낸 당규영을 발견했다.

더 이상 얼굴을 가려 봤자 의미가 없다 판단했는지 당규영이 복면을 벗어 던지고 손을 흔들었다.

"승재 안녕?"

"안녕하십니까."

목토술사, 곽승재가 곧바로 허리를 굽혔다.

"우리 그냥 보내 주면 안 되냐?"

"보내 드리겠습니다. 단,"

손짓으로 열린 나무문 쪽을 가리킨다.

"그 전에 잠시만 선도부실로 동행해 주시지요."

"가서 먹은 거 다 토해 내고?"

"애초에 도둑 동아리의 소유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규영의 입가에 깔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면 뚫고 나가야겠네."

"가능하시다면."

"너 자신 있냐?"

"제가 어떻게 선배님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하겠습니까?"

"그러게. 3학년이 와야 내 상대가 될 텐데. 도끼쟁이는 넘겼고, 다른 애들은 외부 의뢰 중일 거고, 실눈이는... 안 보이네?"

'그렇게 된 거구만.'

왜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리나 의문이 들었는데, 시기적절하게도 지금 용살학원에 남아 있는 3학년 선도부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끼쟁이'는 임시 보관소 입구를 막던 지옥부,

'실눈이'는 선도부장 오세훈이겠지.

곽승재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부장님은 잠시 다른 일을 보고 계십니다. 금방 오시겠지요."

"그때까지 막을 수는 있니?"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넘실거렸지만 곽승재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여전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라, 당규영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저희도 손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

곽승재가 옆으로 비켜서자 열린 나무문으로 사람 한 명이 더 걸어 나왔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빗어 넘긴 미남자였다.

3학년이며 선도부 완장 대신 가슴팍에 휘장 하나를 붙이고 있다.

학생회장을 상징하는 휘장을.

손에 낀 거무튀튀한 장갑에서 토파즈가 빛났다.

당규영이 인상을 썼다.

"...송천기."

"너는 이번 학기도 도둑질로 시작하는구나."

"그러는 너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선도부 일을 돕고 그러냐? 여태 그렇게 엉덩이가 무거우시더니."

"너 따위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서로 날 선 대화를 나누는 도중, 당규영의 등에 그림자가 꾸물거리면서 글자를 만들었다.

- 얘들아, 알아서 잘 튀어라.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선도부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한다.

한소미, 송천혜를 포함한 1학년들과 이름 모를 2학년들까지.

완전히 포위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 전에 당규영이 만들 작은 틈.

그 틈이 도주를 시도할 유일한 기회였다.

"말로 하는 건 여기까지다, 당규영. 무장을 해제하고 순순히 선도부실로 따라와라."

"싫다면?"

- 쿠르르릉,

송천기가 말없이 마나를 끌어올리자 그것만으로도 작은 뇌명이 울렸다.

"용살학원의 규율로 다스릴 것이다."

"으음...."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는 당규영.

몇 초간의 적막.

말없이 지켜보는 사람들.

당규영이 턱을 괴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돌연 씩 웃어 보였다.

"싫다—!"

사방으로 그림자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누군가가 외쳤고,

"튀어!"

도둑 동아리원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려 흩어졌다.

곽승재는 제자리에 서서, 수정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시를 내렸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 * *

"잉? 어디 갔지?"

한소미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내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는데, 내가 한순간에 모습을 감춰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포르르 이쪽으로 달려가서 살피고, 또 포르르 저쪽으로 달려가서 살핀다.

물론 그런다고 나를 찾을 리 만무했다.

'빌려오길 잘했네.'

서예인에게 빌려온 투명 길리슈트가 밥값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 ?? ???"

한소미는 어리둥절해서 엉뚱한 곳만 뒤지고 다니다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다른 선도부원을 지원하는 게 낫다 생각했는지 급히 자리를 떠났다.

본신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강호의 암계에는 무지하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용살학원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

차차 배워 나가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목토술사인데....'

곽승재라고 했던가.

어떻게 도둑 동아리의 탈출 루트를 정확히 차단할 수 있었는지 되짚어 보면 아마....

'금방 따라잡히겠어.'

한바탕 전투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래도 방해꾼이 더 끼어들지 않도록 하려면, 미리 최대한 거리를 벌려 두는 게 최선일 터.

나는 다시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 * *

곽승재는 자신의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수정구가 아니라 커다란 에메랄드를 통째로 가공해서 만든 오브(Orb)로, 에메랄드 마탑의 걸작이었다.

오브 안에는 총 일곱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지척에서 전투 중인 당규영이었다.

- 쿠르르릉! 콰쾅!

벼락이 빗발치고 그림자의 칼날이 난무한다.

그러나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 관심을 가질 가치도 없다.

해서 그가 지켜보는 것은 다른 점들이었다.

두 개는 이미 제압된 듯 정지했고,

셋은 다른 선도부원들이 바짝 따라붙는 중이다.

그러나 붉은 점 하나.

아무 추격도 안 붙이고 계속 멀어져만 가는 점이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나서야 할 듯했기에 그는 마법을 시전했다.

- 쿠구구구,

나무로 이루어진 커다란 접시가 땅에 놓였다.

곽승재가 그 위에 올라타자, 땅에서 솟아난 손바닥이 접시를 받치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휙휙 변하며 목표와의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완전히 따라잡았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곽승재의 오브가 빛나고,

- 쿠쿵!

조금 먼 곳에서 지면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계속 도주하는 상대를 멈춰 세우기 위해 경고 차 시전한 마법이다.

곽승재가 건조한 말투로 한 마디 내뱉었다.

"나와라."

허공이 꾸물거리며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학미채 길리슈트.

도둑 동아리에서 용케 저 비싼 걸 구했구나 싶다.

아니면 훔쳤거나.

투명 길리라면 1학년의 추격은 간단히 따돌릴 수 있었겠지.

그럼에도 곽승재가 그를 추적할 수 있었던 방법은....

복면인이 지면 한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는 걸 안다는 태도로.

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땅속에서 아주 조그마한 흙난쟁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대지의 하급 정령, 노움.

곽승재는 구교사 주변에 노움들을 광범위하게 뿌려 놓았다.

그 노움의 도움을 받아 눈으로는 안 보이는 것들을 땅을 통해 읽었다.

지금도 비슷했다.

도둑 동아리원들이 도주를 시작하기 직전 노움을 한 마리씩 붙여 놓았고, 그 덕에 추적이 가능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자는 그 사실을 진작에 눈치챈 듯했다.

궁금증이 동한 곽승재가 물었다.

"노움을 붙인 건 어떻게 알았지."

"...."

"말 못 하나?"

"...."

'영리하군.'

도둑 동아리 쪽 인원들의 면면은 모두 파악해 두었기에, 복면 너머로도 대강의 정체는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이자는 생판 초면이라 목소리나 들어 둘까 싶어 물었는데, 금세 눈치채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제압하고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

"투항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

복면인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곽승재에게는 그것이 이렇게 들렸다.

- 시간 그만 끌고 빨리 붙자.

조금은 의외였다.

도둑 동아리원들은 하나같이 틈을 만들고 도망칠 궁리만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싸우자고 할 줄은.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전투가 막을 열었다.

- 쿠쿵!

오브가 초록빛으로 빛나자 땅이 불쑥불쑥 튀어 오르며 복면인을 타격하려 했다.

복면인이 부드럽게 발을 놀리며 엇갈린 땅 사이사이를 이동했다.

[도둑걸음]의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지 마치 땅을 미끄러져 다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복면인이 얼굴을 걷어차려 했지만,

- 턱,

솟아오른 흙벽이 발차기를 막았다.

다음 순간 복면인의 뒤편에서 육중한 흙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직전에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복면인의 손이 번쩍 빛나더니, 한 줄기 뇌전이 곽승재를 향해 날아들었다.

'허밍버드인가.'

[어스 개틀링]

흙으로 이루어진 기관총이 단단하게 뭉친 흙 탄환들을 난사했다.

허밍버드를 격추하는 동시에 상대를 노리는 한 수였다.

그러나 복면인은 또다시 매끄럽게 움직이며 피했고, 허밍버드 역시 탄환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곽승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 파지직!

"!!"

곽승재는 조금 놀랐다.

얼마나 컨트롤이 뛰어나길래 허밍버드가 저런 움직임을 보인단 말인가?

몸이 마비되는 대신 미리 걸어 둔 방어 마법 하나가 깨졌다.

곽승재는 복면인에게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훌륭하군. 하지만 두 번은 없다.'

이번 회심의 한 수로 끝날 테니까.

어느새 일대를 얇은 흙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복면인이 다음 공격을 피할 수 없도록.

[어스 개틀링]

[어스 개틀링]

[어스 개틀링]

이곳저곳에서 흙기관총 여러 개가 동시에 솟아났다.

그리고 복면인을 향해 탄환 수백 발을 와르르 쏟아부었다.

[십자포화]

- 투두두두두!

흙벽 안이 자욱한 흙먼지로 뒤덮였다.

"...."

곧 흙먼지가 걷혔을 때, 곽승재는 복면인이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제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긁힌 구석 하나 없이.

'이자는.... 내 능력 밖이다.'

어스 개틀링은 그의 주력 마법인 만큼 제법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여러 개 동시에 시전했는데 아무 피해도 못 줬다면, 그로서는 쓰러뜨릴 수 없는 상대라 보는 게 맞았다.

대체 어디에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는지.

못 이길 가능성이 크지만, 직전까지의 전투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지지도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계속 이자의 발을 묶어 두며 지원을 기다린다.

- 쿠쿵....

먼 곳에서 전투의 울림이 넘어왔다.

다른 선도부가 교전을 벌이고 있다는 뜻.

선도부와 도둑 동아리의 전투는 결과가 뻔하다.

금세 제압하고 이쪽으로 지원이 들어올 것이다.

복면인이 잠시 시선을 그 먼 곳으로 향했다.

그 역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

이내 복면인은 곽승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급변한 느낌.

그가 자세를 잡자, 움켜쥔 주먹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염 계열 마법을 쓰려는 걸까.

그런데 달아오르는 주먹의 색깔이 매우 불길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피처럼 검붉은 불꽃이 이글거린다.

곽승재의 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설마!'

짐작이 맞다면 허투루 대응해선 안 되었다.

곽승재는 서둘러 모든 주문을 거두어들이고 수비 태세로 전환했다.

[삼첩석벽(三疊石壁)]

[강벽(强壁)]

- 쿠쿵!

돌로 이루어진 벽 세 개가 겹겹이 솟아오르고, 두꺼워지고,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거로도 부족하다 싶어 장벽 강화 마법을 추가로 시전하려는 찰나.

첫 번째 돌벽에 검붉은 주먹이 닿았다.

- 콰콰콰쾅!!

돌벽들이 박살 나며 엄청난 열기와 충격이 곽승재를 강타했다.

사전에 걸어 둔 방어 마법들을 포함해 모든 수비적인 장비, 장신구, 심지어는 교복까지 일순간에 파괴되었다.

걸레짝이 돼서 바닥을 나뒹굴며 곽승재가 생각했다.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고.

저 스킬의 정체는....

'...인페르노...피스트.'

서포터가 다 해먹음

32화 금지 아이템이 모이는 곳 (4)

- 치지직, 치직!

"이... 이런 빌어먹을... 악!"

스파크가 튀길 때마다 복면인이 몸을 뒤틀었다.

그의 온몸은 전류가 흐르는 와이어로 꽁꽁 묶여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전기충격이 가해지니 이제 남은 선택은 얌전히 끌려가는 것뿐이다.

"진짜 더럽게... 악! 세네. 올해 1학년들은 대체 뭐냐?"

"...."

송천혜는 복면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와이어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와이어는 연료가 다할 때까지 계속해서 대상을 마비시킬 것이다.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했으니, 이제 매뉴얼대로 이 도둑놈... 선배를 선도부실까지 끌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때,

- 콰콰콰쾅!!

"힉."

엄청난 굉음이 송천혜를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해 버렸는데, 다행히 도둑 동아리 선배는 와이어와 씨름하느라 그녀의 이런 모습을 못 본 것 같았다.

송천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소리가 들려온 장소와 현재 위치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제법 멀리 떨어졌음에도 소리가 이토록 선명하게 들리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 봐야겠어.'

송천혜는 와이어에 추가로 마나를 불어넣었다.

두고 가기가 약간은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은 저곳을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하다.

금방 돌아와서 회수하면 되겠지.

송천혜가 땅을 박차며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다리에 뇌전이 깃들고, 한 줄기 벼락이 되어 질주했다.

그렇게 굉음의 진원지에 도착한 순간,

"윽...!"

송천혜는 엄청난 열기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장내를 둘러보니 세 겹으로 둘러친 두꺼운 석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남은 잔해는 버터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곽승재가 보였다.

"선배님!"

송천혜는 한달음에 곽승재에게 다가가 몸 상태부터 살폈다.

저런 일격에 격중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다.

죽지 않았더라도 육체 일부분이 익어 버렸거나 내장이 곤죽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

곽승재는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아주 경미한 수준의 화상과 바닥을 구르면서 난 잔 상처, 그리고 마나 회로가 살짝 꼬여 버린 게 전부.

그냥 며칠 푹 쉬면 회복될 수준이다.

저런 파괴력에 이 상처라니, 전혀 매치가 안 된다.

"송천혜!"

2학년 선도부가 근처에 내려앉았다.

그 또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오자마자 얼굴을 덮치는 열기에 인상을 쓰고, 황급히 곽승재의 몸 상태부터 체크하고, 생각보다 멀쩡해서 어리둥절한다.

그가 송천혜에게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모르겠습니다. 저도 방금 막 도착했어요."

"...일단 돌아가자."

몸에 큰 이상이 없기는 하나 곽승재는 정신을 잃은 상태.

그를 쓰러뜨린 적이 돌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대화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뒤에 나누는 게 나을 것이다.

2학년 선도부가 곽승재를 들쳐 업었다.

* * *

나는 손목을 한 바퀴씩 돌렸다.

[인페르노 피스트]를 시전한 손은 불타기는커녕 그슬린 흔적조차 없이 깨끗했다.

원소 페널티를 완전히 무효화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주먹이 내부에서부터 불타오르는, 약간의 근질근질한 감각은 남았다.

계속 주먹을 풀어 주며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고생 좀 했네.'

힘 조절하느라.

최대 출력으로 쳤다면 아마 곽승재는 시체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중간 정도 출력만 해도 사지 한 짝은 날아갔을 테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전투 불능이 될 정도로만 세밀하게 조절하느라 고생깨나 했다.

곽승재가 내 노력을 알아줄까 모르겠다.

굳이 이렇게 힘 조절을 해서 얻은 이득이라면, 일이 더 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도둑 동아리의 임시 보관소 침입과 금지 아이템 탈취.

이건 아무리 큰 처벌이라도 벌점과 징계를 받는 선에서 끝난다.

물론 가벼운 사건이 아닌 만큼 벌점이 꽤 많고, 징계 수준도 높아서 궂은일을 맡게 되겠지만, 거기까지가 처벌의 최대 상한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곽승재에게 큰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기라도 한다면, 이때부터는 학생들 사이의 일이 아니라 어른 일이 된다.

사건이 교직원 라인으로 올라가고, 훨씬 엄중하게 다루며 처벌 또한 무겁다.

용살학원에서 교칙을 어기며 무언가를 얻고자 할 때는 항상 이 선만은 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교직원들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도록.

'선도부가 가만있지는 않겠지.'

일이 더 커지지 않았다 뿐이지, 오늘 일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생명의 큐브에 담아 놓은 금지 아이템도 잔뜩이고, 인페르노 피스트는 엄연히 금지 스킬에 속한다.

게다가 곽승재를 쓰러뜨리며 에메랄드 마탑과 은원도 쌓았으니, 학생선도부와 에메랄드 마탑 두 곳에서 내 정체를 파헤치려 들 것이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체면치레를 위해서도.

'그래 봤자 못 찾을 텐데.'

단서를 몇 개 남기기는 했는데, 그것만으로 나를 특정하기는 한없이 부족하다.

당규영이 입을 연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 있겠지만, 나는 그럴 일은 없으리라 봤다.

당규영은 도둑 동아리 부장이거든.

* * *

학생선도부실, 진실의 방.

선도부장 오세훈은 언제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바라보는 맞은편에는 당규영이 껄렁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얼굴에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었으며, 깔끔하게 떨어지던 생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해졌다.

송천기의 몸에 티끌 하나 안 붙은 것과 확연히 대조된다.

'나는 싸움에서 졌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반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이런 말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 그래 나 졌다, 근데 뭐 어쩌라고?

"...."

그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송천기가 인상을 한번 쓰곤 등을 돌렸다.

당규영을 제압하고 인계했으니 이곳에서 그의 역할은 끝났다.

나머지는 오세훈이 알아서 하든 말든.

"가겠다."

"고생했는데 잠깐 앉아서 쉬었다 가지."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다. 이놈들 때문에 더 늘었어."

오늘 밤은 꼬박 새워야 한다며 투덜거리는 송천기였다.

떠나는 송천기의 뒷모습을 선도부원들이 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학생회는 언제나 다른 집단들의 분란에 끼어들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해 왔다.

그런데 오늘 밤 학생회장이 덜컥 도움을 주었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다.

부장님은 아세요? 묻는 눈빛이 오세훈에게 꽂혔으나,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면 큰일 나지.'

진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송천기가 저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 오지 않을까.

고이 묻어 두는 편이 모두를 위해 이로울 것이다.

아무튼 이제 송천기는 떠났고, 뒷정리는 오세훈의 몫이다.

눈앞의 망아지를 상대하는 일 말이다.

"으아암—"

당규영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의자에 더 깊이 몸을 묻자 원래 어깨가 있어야 할 위치에 머리가 자리했다.

그 상태로 당규영이 물었다.

"언제까지 붙잡아 둘 건데, 빨리 벌점 때리고 보내 줘."

앞으로 어떤 대화가 오고 갈지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그녀가 이 진실의 방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오세훈과 얼굴을 마주했으니, 이쯤 되면 레퍼토리가 뻔해지는 것이다.

오세훈도 항상 하던 대사를 읊었다.

"협조를 잘해 주면 빨리 끝날 거야. 먼저 이것부터 볼래?"

당규영은 서류를 넘겨받고 한 장씩 넘겼다.

아이템 이름들이 여러 장에 걸쳐 나열되어 있었다.

임시 보관소 침입 전후의 장부를 대조한 것들이다.

지금 서류에 나열된 것은 장부의 '비는' 부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의 큐브]에 보관해 둔 것들이다.

몇 개 생소한 것들이 눈에 띄기는 했다.

아마 그 당돌한 후배님이 자기 몫으로 챙긴 거겠지.

왜 [심뢰옥]에 [인페르노 피스트]인가 의문이 들기는 하는데,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당규영은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이게 왜?"

"규영아,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말자. 너도 다 알잖아."

"아니? 나는 처음 보는데?"

"계속 발뺌하면 서로 피곤해진다."

"응, 배 째~"

뻔뻔하게 나오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도둑 동아리는 일단 한번 삼킨 건 어지간해서는 안 뱉는다.

게다가 오늘은 드물게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으니, 절대 놓치지 않으려 들 것이다.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경우 오세훈의 대응 역시 정해져 있었다.

"규영아,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간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없어진 아이템이 많아. 모자란 만큼 너희가 다 책임져야 돼."

"다 책임지면 어떻게 되는데?"

오늘 그들이 어긴 온갖 교칙들을 더하고 더하고....

거기에 없어진 아이템들까지 더하면....

"벌점 3%, 동아리 예산 삭감, 지하 수로 청소 및 내부 몬스터 소탕 2주, 건물 보수 작업 1주, 2학년 이상은 외부 의뢰 2회까지 맡게 될 거야."

"...뭐가 졸라 많기는 하네. 그러면 이쯤에서 네가 제안을 하겠지?"

다음은 당근을 보여 줄 차례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선수를 치는 것이다.

오세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아이템들 다 돌려놓으면, 벌점 1%에 지하 수로 3일, 나머지는 없는 걸로 해 줄게."

파격적인 제안이다.

이렇게까지 대폭 깎는 건 선도부장의 권한을 조금 넘어서는 감이 있지만, 오세훈의 능력이라면 그것을 가능케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항상 제안을 하기는 하지만 그게 먹혀들어 간 적은 한 손에 꼽았다.

이번에도 그냥 징계받고 만다, 비슷한 말을 하겠지.

"응. 까짓거 3주 받고 말지 뭐."

"그럴 줄 알았어."

아니나 다를까, 당규영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전자를 택했다.

김호한테 맡겨 놓은 금지 아이템들은 하나같이 값나가는 것들뿐이다.

그것들을 팔아 치워서 얻을 어마어마한 이익을 생각하면 이 정도 처벌은 달게 받을 만했다.

당규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끝?"

"그래, 징계는 내일부터 시작이야. 밖에 애들한테도 미리 얘기해 둬."

"오냐. 간다."

"들어가서 쉬어."

당규영이 진실의 방을 나서자,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도둑 동아리원 다섯이 그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누님, 끝났소?"

"징계 몇 주래요?"

"벌점은?"

"외부 의뢰는 없지?"

'...잠깐만, 다섯 명?'

이번 작전에 가담한 총인원 수는 당규영을 포함해 일곱.

한 명이 부족하다.

동아리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그 부족한 한 명이 김호라는 걸 알아챘다.

당연히 다 붙잡혔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후배님은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친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 선도부원은 운 좋게 따돌릴 수 있다 쳐도, 곽승재의 이목을 피하는 건 진짜 어려운데.

그러고 보니 곽승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당규영이 지나가는 선도부원을 붙잡고 물었다.

"야, 승재 어디 갔냐?"

"보건실이요."

"...보건실?"

선도부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네가 그걸 왜 모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쪽 사람한테 당했는데, 몰랐어요?"

"...!"

"근데 그거 누구였어요?"

무슨 기막힌 스킬을 써서 속였나 했는데, 아예 정면 승부로 쓰러뜨리고 유유히 빠져나간 것이다.

이건 이것대로 대단하다.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신입생이 2학년 선도부를?

당규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짜식, 능력 있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3화 금지 아이템이 모이는 곳 (5)

"야! 너 손 괜찮아?"

당규영은 나를 만나고 가장 먼저 내 손부터 붙잡았다.

열심히 앞뒤로 뒤집어 보면서 살펴보다가 이 손이 아닌가? 혼잣말로 물으며 반대쪽 손을 살핀다.

바로 아이템부터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다.

"깨끗하네? 인페르노 피스트 썼다면서?"

"아무 대책 없이 쓰지는 않죠."

"...하긴, 어련히 잘 하셨겠지."

당규영이 괜히 걱정했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며 내 손을 놓았다.

"근데 너 좀 치나 보다? 아무리 인페르노 피스트라도 그렇지, 어떻게 곽승재를 이겨?"

"운이 좋았죠."

"아냐, 걔가 운 좀 좋다고 될 상대가 아냐. 2학년에서는 탑급인데.... 너 진짜 1년 꿇은 거 아니냐?"

"졸업을 200번 넘게 했다니까요?"

"아잇, 너 자꾸 그럴래?"

당규영이 내 팔뚝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진짠데. 믿음이 부족하시네."

"아, 됐고! 아이템들 잘 있지?"

"네. 지금 꺼내요?"

"응."

임시 보관소에서 담아 온 아이템들을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자 당규영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한 아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구~ 귀여운 것들, 이런 귀욤둥이들! 어쩜 색깔도 이렇게 고울까? 곱다 고와~"

하나같이 고위험 금지 아이템이라 내 눈에는 흉흉해 보이기만 하는데.

사람이 재물에 눈이 멀면 모든 게 돈으로 보이는 법이랬다.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흥을 깰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서, 슬쩍 내 몫인 [심뢰옥] 두 개만 챙겼다.

"이걸로 우리 거래는 다 끝난 겁니다."

"그럼 그럼, 아주 좋은 거래였어."

"전 이만 가 볼게요."

"야야, 잠깐만."

당규영이 금지 아이템들을 한구석으로 밀어 놓고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김호 너, 우리 동아리 안 들어올래?"

"영입 제안입니까?"

"응. 내가 좀 지켜봤는데, 너처럼 우리 동아리에 어울리는 인재상이 없는 것 같아."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그 인재상이 뭔데요?"

"건방지고, 얍삽하고, 탐욕스럽고, 너 보면 완전 도둑놈이 따로 없다니까?"

"지금 저 욕하시는 건가요?"

당규영은 방금 한 말을 곱씹어 보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아니다 싶었는지 슬쩍 단어들을 수정했다.

"...대범하고, 현명하고, 야망이 크고.... 근데 내가 왜 네 눈치를 보고 있냐. 야! 그냥 들어와! 누나가 잘해 줄게!"

"거절할게요."

"아, 왜!"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것 때문에 그러죠?"

[생명의 큐브]를 가리키며 묻자 당규영의 시선이 은근슬쩍 딴 곳을 향했다.

검지로 탁자에 조그마한 원을 그려 댄다.

"...솔직히 그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는데...."

"이거 팔아 버릴 건데."

"뭐!?"

여태까지 본 모습들 중에 가장 놀란 모습이었다.

달려와서 내 어깨를 붙잡고 짤짤 흔든다.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어떻게? 왜??"

"어깨부터 놓고 이야기합시다. '왜'만 말씀드리자면, 저랑 상성이 안 맞거든요."

내 입장에서 생명 계열 아이템이나 스킬은 우선순위로 따지면 한참 뒤쪽이다.

[생명의 큐브]는 이번 일처럼 특수한 용도가 있었기에 써먹은 것이고, 이제는 쓸모를 다했으니 보내 줄 때가 됐다.

다음 밴 웨이브에 또 써도 되지만 그때까지는 한참 남았다.

지금 알맞은 주인에게 넘겨서 나에게 더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하는 게 나은 선택이리라.

"그럼 나한테 넘겨. 후하게 쳐줄게."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한데, 부담되실걸요."

"일단 들어나 보자. 얼마 생각하고 있는데?"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

"시즌 패스? 그건 우리도 구할 수 있어."

"4개요."

"넷—"

당규영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마를 한번 쓸어 올린 후, 헛웃음을 흘리며 대화를 잇는다.

"하하.... 후배야, 그건 너무 높게 잡은 게 아닐까? 시즌 패스 4개는 좀."

"아니요, 이 가격이 정확합니다."

"솔직히 밴 웨이브 피하는 게 진짜 대단하긴 한데, 잘해야 시즌 패스 2개야."

"뭘 잘못 알고 계시는데, 이거 원래 그런 데 쓰는 거 아닙니다. 기본 능력이 따로 있어요."

"...듣고 보니까 그렇네? 그게 뭔데?"

단순히 밴 웨이브를 교란시키는 아이템이라면 이렇게 식물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열 때마다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지 않는가.

원래 용도가 따로 있다는 게 더 납득이 된다.

"아이템 설명 보여 드릴 테니까,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그러자, 까 봐."

내가 아이템 설명을 공개하자, 당규영의 눈이 서서히 놀람으로 커졌다.

"수납하는 생명 계열 아이템의 효과... 1.3배? 말도 안 돼! 뭐 이런 게 다 있어?"

"비쌀 만하죠?"

"...에메랄드나 대자연 쪽에서는 그 정도로 갖고 싶어 하겠지. 그래도 4개는 좀 많지 않냐?"

"받아 낼 겁니다. 제 방식대로."

당규영이 짧게 혀를 찼다.

당사자가 그 가격에 판다니 제삼자로서는 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쯧. 그래,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부탁할 건 뭐야."

"소식 하나만 전해 줘요.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면 좋고."

"누구한테?"

"마법공학 동아리 부장이요. 신입생이 10x10x10큐브를 완성시켰다고."

"...?"

나에게 무슨 꿍꿍이냐 묻는 눈빛을 보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 못 해 줄 것도 없지."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가 볼게요."

"김호야,"

꾸벅 고개를 숙이고 떠나려는데, 당규영이 나를 다시 불렀다.

장난기가 전혀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까 농담한 거 다 빼고, 큐브 그런 거 없어도 내 제안은 유효해. 한번 잘 생각해 봐."

"예, 선배님."

* * *

마탑회와 길드연합은 각기 4대 세력의 한 축으로써 경쟁 관계지만, 산하 동아리들 사이의 관계는 제각각이다.

<루비>와 <사파이어> 마탑처럼 같은 마탑회 소속임에도 앙숙인 경우도 있으며,

보석 세공을 전문으로 하는 <세공사 동아리>는 길드연합 소속이지만 마탑회 쪽에서 온갖 편의를 다 봐주곤 한다.

<에메랄드> 마탑과 <대자연 동아리>는 후자에 가까웠다.

비슷한 속성을 사용한다는 교집합 때문에 나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게다가 올해 들어서는 길드연합의 유망주, 박나리가 드루이드인 까닭에 두 동아리 사이의 교류가 더욱 잦아졌다.

해서 에메랄드 부장 목종화와 대자연 동아리 부장 하수연은 거의 하루걸러 하루 보는 사이였다.

목종화가 인사 대신 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답니다. 혹시 이런 아이템 보신 적 있나요?"

목종화는 대충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넘겨받았다.

뚜껑을 여닫을 수 있는 정육면체 모양 상자.

다양한 식물들로 빈틈없이 뒤덮여 있으며 초록빛 생명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느낌이다.

목종화는 난생처음 보는 아이템이었다.

"금시초문이군. 이게 뭔가?"

"저도 잘은 몰라요. 나리가 봤다고 가져온 거거든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박나리가 여느 휴식 시간 때와 마찬가지로 '범이'와 놀아 주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강렬한 생명의 파동이 느껴졌단다.

이런 것에 민감한 범이가 파동을 쫓아 후다닥 달려가 버렸고, 그녀는 범이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뒤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나리가 발견한 것은, 스케치에 나오는 상자를 든 남학생과, 그 상자 안에 들어가서 만족스럽게 오토바이 소리를 내는 범이.

아무래도 실례라 곧바로 범이를 데리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정체불명의 상자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는 이야기였다.

목종화는 두 가지 부분에서 놀랐다.

우선 하나는,

'그 지랄묘한테 좋아하는 게 있었다고?'

'범이'는 아주 성격이 지랄 맞은 고양이... 호랑이였다.

박나리의 반려동물이다 보니 그 역시 친해져 보려는 노력을 꽤 많이 해봤다.

유명한 비스트테이머의 강의도 들어보고, 고양이과 영물들이 좋아한다는 간식거리도 구해다 줘 봤지만 번번이 실패만 했다.

그 엿 같은 성격에 할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지랄범이'가 제 발로 상자에 기어들어 갔다니.

대체 무슨 상자길래?

두 번째로 놀라운 건 멀리서도 파동이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박나리의 말에 따르면 본인은 교실 한가운데, 남학생은 복도였다는데, 그 거리에서 범이는 물론 박나리마저 생명의 파동을 감지했다면....

"적어도 보통 아이템은 아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유자가 누구라고?"

"김호라네요. 1학년 3반."

"소속은?"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아직 무소속이에요."

아직 무소속이라....

그렇다면 조금 강하게 나가도 뒤탈이 적을 듯하다.

미리 심리적 우위를 점해 둔다면 그 신입생과 아이템을 거래할 때 싼값에 후려칠 수도 있을 터.

계산을 마친 목종화가 1학년 둘을 불렀다.

"곽지철. 정수지. 잠깐 와 봐라."

곽지철과 정수지는 마법술식 하나를 이리저리 변형시켜 가며 토론 중이었는데, 부장이 부르자 즉시 술식을 지워 버리고 그의 앞에 섰다.

"네, 형."

"부르셨어요?"

"3반 김호에 대해 아는 것 있나?"

정수지는 말을 아끼는 기색인 반면, 곽수철은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걔요? 겁쟁이로 유명하죠. 송천혜랑 배치 고사 잡히자마자 기권했거든요."

"뭐? 배치 고사에서 기권을 해?"

"네, 송천혜 이름 듣고 그냥 손들었대요."

바로 전 경기에서 홍연화를 쓰러뜨린 전적이 있지만, 그 사실은 어느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지 오래였다.

원래 소문이란 안 좋은 부분만 부풀려져서 전달되기 마련이다.

"붙으면 이길 수 있겠나?"

"그런 놈은 한 트럭이 와도 제 상대가 안 돼요."

사실 곽지철의 입장에서는 소문으로만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김호는 질 것 같으면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겁쟁이로 정해진 상태였다.

곽지철의 호언장담을 듣고 목종화가 고개를 주억였다.

"데려와. 내가 보잔다고. 안 오겠다고 버티면.... 부러뜨려라."

"네, 겁이 많은 놈이니까 아마 조금만 압박해도 꺾일 겁니다. 에메랄드 소리만 들어도 설설 길걸요."

"혹시 모르니까 수지랑 같이 가라."

"저 혼자 가도 괜찮은데...."

"토 달지 말고."

"...알겠습니다."

오가는 대화를 지켜보던 하수연은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마음은 난처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올해 에메랄드 부장은 목토술사의 진중하고 무거운 이미지와는 달리 일을 과격하게 진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에도 말 한두 마디 던져 보고 안 통한다 싶으면 실력 행사로 나가겠지.

죄 없는 신입생만 죽어 나갈 게 뻔하다.

그렇다고 말리고 싶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의문의 아이템에 관심이 있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마 꽤 고등급일 텐데, 에메랄드 쪽에서 적극적으로 값을 깎아 주면 그녀로서도 좋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대자연 동아리까지 피해가 미치지는 않을 테고.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아무튼 조만간 보겠네.'

과연 그 상자는 어떤 아이템일까, 기대감을 품는 하수연이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4화 2주 차 공략전 (1)

월요일.

서예인과 아침 식사를 하고 등교하는 길, 뒤통수가 따갑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꼬리가 붙었다.

남학생 하나, 여학생 하나.

몰래몰래 미행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내가 목표라는 티를 팍팍 내며 뒤를 밟는다.

내가 하루아침에 인기남이 됐을 리는 없고, [생명의 큐브] 때문에 찾아온 거겠지.

박나리에게 던져둔 미끼에 슬슬 입질이 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노골적인 태도라니.

에메랄드 마탑이나 대자연 동아리 쪽에 성질 급한 양반이 하나 있나 보다.

'사람이 일 처리를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대로 등교해도 저쪽에서 손쓸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래 봤자 어차피 벌어질 일이 방과 후로 밀릴 뿐.

이런 건 바로바로 해결하는 편이 깔끔하다.

신경에 거슬리기도 하고.

"서예인, 먼저 가 있어."

"...?"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서예인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내 뒤쪽을 흘긋 보았다.

두 남녀를 발견하곤 다시 나를 빤히 마주 본다.

'쟤들이 그 볼일이야?' 하고 묻는 듯하다.

"뭐 문제라도 생기겠냐. 금방 치우고 갈게."

"...응."

서예인이 먼저 교실로 가도록 떨어졌다.

그리고 인적이 뜸한 골목으로 향했다.

그때쯤에는 두 명이었던 기척 중 하나가 사라졌는데, 아마 앞질러 갔겠지 싶다.

나머지 하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내 뒤를 따라붙는다.

골목을 통과해서 벗어나기 직전,

남학생 하나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여학생도 내 뒤에서 퇴로를 차단한다.

앞뒤로 포위된 상황.

"제 발로 이런 곳으로 와 주다니, 수고를 덜었군."

남학생이 있는 대로 폼을 잡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여학생은 짧게 자기 이름만.

"에메랄드 마탑의 곽지철이다."

"정수지야."

"아, 예. 그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로?"

내 물음에 곽지철이 거만한 어조로 답했다.

"부장님이 보자고 하신다. 부실까지 따라와라."

"싫은데?"

"?"

곽지철은 내가 이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눈을 껌벅거렸다.

"...뭐?"

"너네 부장이 오라면 내가 가야 돼?"

"이해가 안 됐나? 우리 에메랄드 마탑이라고."

"그리고 나는 에메랄드 마탑이 아니지.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뒤질라고."

"...!"

곽지철은 엄청난 폭언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입을 천천히 벌렸다.

곧 그것은 고스란히 분노로 변했다.

뒤쪽의 정수지가 한숨을 푹 쉬며 나를 타이르려 했지만,

"그냥 이번 한 번만 따라와 줘. 너한테 나쁜 일은 없을 거야."

"됐어, 정수지."

곽지철은 이미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스태프에 박힌 큼지막한 에메랄드가 녹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좋게 말할 때 들으면 될 걸, 꼭 처맞아야 듣는 놈이 있지."

"그러게 말이다.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뭐냐."

"곽씨 하니까 생각났는데, 너 혹시 형 있냐? 선도부에."

"곽승재다. 내가 존경하는 자랑스러운 형이지."

"그러냐."

어쩐지 성도 같은 곽씨고 외모도 비슷하다 싶어서 물어봤는데, 역시 형제였던 것이다.

근데 그거 아니?

너네 형 불주먹 맞고 한 방에 뻗었어, 임마.

내 이런 속마음을 몰라주고, 곽지철은 자기 형이 언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마지막이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따라오면 아픈 꼴은 안 당해."

"나도 마지막이다."

"...?"

"지금 그대로 등 돌려서 나가면 딱밤 한 대로 참아 줄게."

"끝까지 까불대는구나—!"

- 콰아아아—!

곽지철 앞의 지면이 솟구치며 흙으로 이루어진 손아귀 십수 개가 나를 향해 짓쳐 들었다.

내 팔다리를 움켜쥐기 위해 열심이지만, 나는 [도둑걸음]을 쓰며 손아귀들 사이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동시에 뒤쪽에서 날아오는 흙탄환들까지 깔끔하게 피하자 정수지가 경악성을 터뜨린다.

"말도 안 돼!"

미끄러지듯 곽지철에게 접근해서 안면을 걷어찼다.

녀석은 스태프를 들어 올려 막았으나 가드가 완벽하지 않아 그대로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너네 형은 이거 되게 쉽게 막던데.

"크윽...!"

- 쿠르르르,

내가 계속 따라붙자 곽지철의 흙손아귀가 모두 회수되며 커다란 흙주먹으로 변했다.

흙주먹을 그대로 나에게 휘둘렀으나 슬쩍 뒤로 물러나며 피하고, 등 뒤에서 날아오는 흙탄환들도 좌우로 가볍게 스텝을 밟아 피해 준다.

내 손에서 허밍버드가 날았다.

벌새가 곽지철의 옆구리 쪽으로 급격하게 꺾어 들어가자, 흙주먹을 넓은 흙방패로 변형시켜 후려친다.

"이깟 잔재주!"

"어딜 보나?"

- 퍼억!

녀석의 복부에 내가 내지른 발이 깊숙이 꽂혔다.

허밍버드를 막는 데에만 온 정신이 팔려서 다른 부위의 방어를 게을리 한 대가였다.

"커...헉!"

몸을 굽힌 채 마구 뒷걸음질을 치며,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 흙주먹을 휘저어 댄다.

가뿐히 피하고 곽지철의 머리를 붙잡아 골목 벽에 힘껏 내던졌다.

- 쾅!

벽을 껴안고 스르르 주저앉는 곽지철.

눈에 흰자위만 보이는 게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교복의 방어 마법도 있고 하니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트라우마는 조금 남을 수도 있겠지.

"!!"

열심히 곽지철을 지원하던 정수지는 졸지에 혼자가 되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재차 [어스 개틀링]을 시전한다.

그래 봤자 방금 전까지는 안 보고도 피했던 것들, 정면에서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순식간에 접근해서 정수지의 스태프를 휙 잡아당기자 허무하게 빼앗긴다.

'이거 근접전 대비가 전혀 안 됐구만.'

잠시 허망한 얼굴을 하던 정수지가 맨손으로라도 주문을 외우려 했고,

- 딱!

정수리에 스태프가 작렬했다.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는 정수지에게 말했다.

"너네 부장한테 가서 전해. 용건 있으면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직접 오라고."

"...알았어. 미안."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는 정수지를 도로 불렀다.

"야."

"왜, 왜?"

"혼자 가냐? 저건 어쩌고."

'저것'이란 골목 벽과 하나가 된 곽지철을 의미했다.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정수지는 내가 시키는 대로 곽지철을 들쳐 메고 낑낑거렸으나, 체력이 어찌나 저질인지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올려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다.

정말 근접전 수련이 시급해 보인다.

"다친 데는 없을 테니까 깨면 수업 들어가라. 난 먼저 간다."

"어, 응...."

* * *

"야, 빨리 일어나. 지금 안 가면 지각이야."

"끄으윽...."

곽지철은 김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골이 지끈거리는지 두 손으로 머리통을 부여잡고 끙끙댄다.

조금 정신을 차리자 분한 감정을 못 이겨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내가 이딴 더러운 속임수에 당하다니...."

"쟤 잘 싸우던데, 그냥 실력 차이 아냐?"

"실력 차이는 무슨! 속임수 쓰고 운 좋게 럭키펀치 들어간 거지!"

곽지철이 버럭 화를 냈다.

겁쟁이한테 실력으로 밀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합리화를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곽지철이 이를 갈며 다음을 기약했고,

"다음에는 반드시!"

- 쾅!

어디선가 날아든 마력탄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그는 다시 흰자위를 보이며 뒤로 털썩 넘어가 버렸다.

"저격!?"

정수지가 황급히 주위를 훑었다.

그러나 골목은 여전히 휑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쾅!

다음 순간 정수지의 이마에도 마력탄이 날아와 꽂혔다.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정수지는 생각했다.

'왜 나까지...?'

그리고 곽지철 옆에 사이좋게 털썩 몸을 눕혔다.

수업은 둘 다 지각했다.

* * *

"왜 먼저 가 놓고 네가 더 늦게 와?"

"...."

"...자냐?"

"...."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빨리 잠들 수 있는 걸까.

* * *

서청용 선생님이 던전 공략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공략 불가 던전들을 연이어 격파하며 유명세를 떨쳤고, 용살학원의 공략전 담당 교사로 초빙되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성격도 모난 곳 없어 학생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했고, 그의 공략전 수업 역시 다른 과목들보다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던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보자."

칠판에 이름 모를 던전의 지도가 떠올랐다.

입구를 통해 입장하는 모험가 파티.

얽히고설킨 미로를 뚫고 중앙까지 도달하면, 보스 몬스터가 보물 상자를 끌어안고 있다.

"왜 바로 보스방이 나타나지 않을까? 왜 던전은 미로처럼 복잡해야만 할까? 대답해 볼 사람?"

제일 앞줄의 여학생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서청용의 지목을 받고 입을 연다.

"...그래야 침입자들이 고생하니까요."

"정답이야."

던전 지도 곳곳에 몬스터들과 함정들이 배치되었다.

안 그래도 미로 같은 곳에 장애물까지 잔뜩 늘었으니 공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던전이 복잡한 이유는 중심부에 도달하기 전까지 너희를 최대한 소모시키기 위해서야. 너희가 가진 자원들, 예를 들면 장비나 물약 같은 아이템, 마력과 체력, 혹은 너희 파티원이 소모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모든 자원이 고갈되면...."

칠판 위 모험가 파티가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고 픽 쓰러졌다.

"공략 실패. 후퇴해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 파티가 전멸하겠지?"

"...!"

"너희가 가진 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얼마나 절약하느냐가 던전 공략의 핵심이야. 그래서! 이번 주에 너희가 절약해 볼 자원은,"

MAP:[고블린 늪지대]

RULE:[타임 어택][5분 제한]

[1인/2인 던전][강적]

"시간. 던전을 클리어하고 남은 시간을 보면 너희들의 행동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지."

칠판 위 지도가 지워지고, 대신 조잡하게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고블린 조각상이 나타났다.

고블린 토템이라는 상징물이다.

"5분 내로 목적지까지 도달해서 토템을 파괴하면 클리어야. 물론 가는 길이 썩 순탄하지만은 않겠지? 길을 잘못 들어서 늪에 빠지거나, 몬스터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만큼 클리어 시간이 길어지니 주의해."

"질문 있습니다."

학생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서청용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까딱이자 입을 연다.

"저... [강적]은 무슨 규칙입니까?"

"조옥순 선생님의 수업에 힌트가 있었단다. 복습은 충분히 해 놨겠지?"

"했... 죠...."

손이 슬며시 도로 내려갔다.

저거 수업 중에 졸았구만.

싱긋 웃어 보인 서청용이 설명을 마저 했다.

"자,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지상층 던전들은 '연습 모드'로 여러 번 도전할 수 있어."

모두 인공 던전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출입도 자유자재, 재도전도 자유자재다.

"하지만 점수를 낼 기회는 단 한 번. 그러니 너희가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찾고,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번 연습해 본 다음에 실전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모두 점심 맛있게들 먹어요!"

서청용이 교실을 나서자마자 신병철이 허겁지겁 고현우에게 달려왔다.

"야야야! 고현우! 나랑 2인 던전 같이하자!"

이번 공략전은 1인 던전과 2인 던전으로 나뉘며, 각기 점수가 따로 산정된다.

2인 던전에서 고득점을 얻고자 한다면 당연히 파트너를 잘 골라야 한다.

해서 눈치 빠르게 공략전 1위인 고현우에게 붙은 것이다.

"으음...."

침음을 하면서 슬쩍 내 쪽을 보는 고현우.

마치 허락을 받으려는 모양새다.

내가 그렇게 하라는 제스처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다.

[고블린 늪지대]라면 두 사람의 조합이 나름대로 잘 먹혀들어 갈 것이다.

"좋소. 이번에는 신 형과 합을 맞춰 봅시다."

"밥 먹고 바로 갈까?"

"그편이 좋겠군."

당장 점수를 내지 않더라도 연습 모드는 많이 해 볼수록 좋다.

그리고 내 파트너는....

내 소매를 슬슬 잡아당기고 있는 서예인이었다.

"나랑 같이 가."

"그럽시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