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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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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톤베리는 아서왕의 전설이 숨 쉬는 장소다.

멀리 보이는 토르 언덕이 바로 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뽑았던 장소.

전체적으로 나무가 많고 굽이진 능선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나와 백설이는 그중 꽤 높은 언덕 위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제 대부분 나타난 것 같군."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각 서버에서 소수의 인원만 선별했다고 해도 전 서버에서 불린 플레이어들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0명 정도는 될 것이다.

까마귀의 눈을 사용해 대략적인 인원을 체크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무척 푸르렀다.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지상은 아니었다.

글라스톤베리에 소환된 플레이어들은 자신들 덮치는 몬스터를 상대해야만 했으니까.

인간들이 살던 마을은 지극히 작고, 대부분이 자연의 모습으로 보존된 장소다보니 몬스터의 수도 무척 많았다.

이곳의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대응할 시간도 없이 쓸려나갔던 게 분명하다.

'갑작스런 상황임에도 다들 대처를 잘하는군.'

갑자기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능숙하게 쓰러트리는 모습은 과연 각 서버의 대표라고 할 만했다.

까마귀로 민아와 지수, 그리고 창우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류하실 건가요?"

"아니."

어차피 보물찾기는 흩어져서 해야 된다.

나는 언덕 위에서 몬스터들이 플레이어들의 손에 처단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대충 정리가 끝났을 무렵, 푸르던 하늘이 조금 어둡게 변했다.

웅웅웅.

대기가 미세하게 울리며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 속에서 나타난 건, 어떤 존재였다.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신장은 3미터가 넘어 보였다.

또한 이마에는 둥근 보석이 반짝였다.

당연히 이마에 보석이 박힌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저건 바로 GM.

'아마 영국서버를 관리하는 놈이겠지.'

아카터스였다면 까마귀로 뒤통수라도 때려줬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안녕하십니까, 플레이어 여러분."

녀석은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양팔을 넓게 펼쳤다.

"각 서버를 대표하시는 플레이어분들 이렇게 보게 되다니 영광이군요. 저는 영국 서버의 GM 아키넨이라고 합니다."

녀석의 말은 글라스톤베리 전역에 울려 퍼졌다.

몬스터를 잡고 휴식을 취하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모였다.

처음 보는 GM의 모습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신기하다는 시선이었다.

"이번 퀘스트는 메인 퀘스트와는 관련이 없는 이벤트 퀘스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너스 타임이죠. 각 서버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분들에게 저희가 드리는 선물 같은 겁니다."

아키네은 허공에 네모난 스크린을 띄웠다.

글라스톤베리 전역이 표시된 지도다.

그곳에는 현재 플레이어들이 있는 장소가 표시됐다.

"퀘스트에서 소개해 드린 것처럼 이벤트 퀘스트는 보물찾기입니다. 이 글라스톤베리 전역에는 보물들이 숨어 있죠. 최소 D급 이상의 아이템이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물 상자에 들어있는 경우도 있고, 땅속이나 나무 위에 있는 경우도 있다.

혹은 특정한 몬스터를 쓰러트렸을 때 있는 것도 있다고 아키넨은 설명했다.

"아,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자면 아무리 보물찾기라도 센티넬에게 덤비시면 안 됩니다. 이 글라스톤베리의 센티넬은 용이거든요. 무조건 피해 다니길 바랍니다."

용이라는 말에 플레이어들이 크게 술렁였다.

개중에는 도리어 호승심을 불태우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한 플레이어가 아키넨을 향해 외쳤다.

"그 센티넬은 죽일 수 있다면 죽여도 되는 건가?"

자신감이 넘치는 외침이었다.

외모도 눈에 띄었다. 적색으로 염색한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려서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나도 아는 녀석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플레이어 중 하나인 에릭 샌더스였다.

호전적인 성격이며 화염 마법을 즐겨 사용하는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였다.

'아폴론의 아바타였지.'

태양신의 선택을 받은 만큼 확실히 불에 관해선 탑티어의 플레이어였다.

아가트람의 강준식을 라이벌로 생각하던 놈이었다.

그래서인지 강준식이 죽은 이후에 만났을 때는 꽤 침체된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아가트람의 간부들도 몇 명이 있겠군.'

민수호는 후발자이니 없을 테고, 강준식과 천상환, 그리고 이수린은 분명 이곳에 있다고 봐야 했다.

그 세 명은 초창기부터 이름을 날리던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플레이어 에릭. 당신의 위명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센티넬을 사냥했다고 하더군요."

"물론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그의 말에 상당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크게 경악한 모습이었다.

센티넬은 보통 절대로 죽일 수 없는 몬스터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아홉 명의 플레이어들이 돕기는 했습니다만, 가장 활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즉, 열 명의 플레이어가 단체로 공격을 해서 이겼다는 뜻이다.

그래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고작 열 명의 플레이어가 센티넬을 죽인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었으니.

에릭도 그 사실을 알기에 가뜩이나 높은 코가 더욱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만약, 이어진 아키넨의 말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센티넬을 죽인 플레이어가 한 명 더 있군요."

"...뭐?"

"참고로 플레이어 에릭이 센티넬을 죽인 건 네 번째입니다. 그전에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 단 한 명의 플레이어가 센티넬을 죽였죠. 약간의 조력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혼자서 말입니다."

싱긋 웃으면서 말한 아키넨은 하늘에 돌아다니는 까마귀를 본 뒤에 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덕분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를 언급할 줄은 몰랐으니까.

# 88

088. 이벤트 퀘스트(3)

글라스톤베리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센티넬을 죽였다는 에릭의 말에 시끄러워졌던 게 거짓말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그런 플레이어들 중에서 가장 먼저 소리친 건 바로 에릭이었다.

그는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넘기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혼자서 센티넬을 죽인다고? 그것도 세 마리나? 내가 네 번째인 건 넘어가더라도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냐?!"

아키넨은 나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누구인지는 본인이 밝히지 않아 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곳에는 센티넬을 세 마리나 죽인 플레이어가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럴 수가."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대체 센티넬을 세 마리나 죽인 플레이어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방금 전 아키넨이 시선을 돌렸던 방향을 보는 이들도 있었기에 나는 황급히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제대로 볼 수는 없겠지만 혹시 천리안 같은 스킬을 지닌 플레이어가 있다면 들킬 수도 있었다.

"왜 숨는 건가요?"

"들키면 성가셔져."

플레이어들이 날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성가신 건 성가신 거였다.

'GM 아카터스가 어지간히 떠들고 다닌 모양이군.'

영국 서버 GM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이 게임의 GM들은 전부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리라.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은 방금 전 내게 향했던 아키넨의 시선에 호의가 담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녀석들의 입장에서 나는 거슬리는 존재인 게 분명할 텐데 호의라니.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아키넨은 박수를 짝짝 쳤다.

단순한 박수였지만 글라스톤베리 전역에 울려 퍼질 만큼 큰 소리가 났다.

덕분에 웅성거리던 플레이어들의 소리가 단번에 사라졌다.

다시 모여든 플레이어들의 시선에 아키넨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벤트에 대한 설명을 이어서 하도록 하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글라스톤베리에는 아이템이 퍼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모아서 소유하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또한 아이템의 등급별로 점수가 있죠. 자, 이걸 보세요."

아키넨은 허공에 띄워두었던 화면을 바꿨다.

이번에 나타난 건 간단한 점수표였다.

D급 1점이었고, 한 등급이 올라갈수록 점수가 크게 상승했다.

C급은 5점, B급은 10점. A급은 무려 20점이었다.

"S급 이상의 아이템은 없는 건가?"

"후후, S급 아이템은 딱 하나 있습니다. 이 보물찾기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되겠군요. 점수도 무려 50점이나 되니까요."

"그게 끝인가? 내가 알기로 아이템은 최대 SS급까지 있는 걸로 아는데?"

"SS급은 아쉽지만 없습니다. 벌써 SS급 아이템이 풀리면 곤란하거든요. 만약 있다면 SS급은 100점 정도가 되겠군요."

어마어마한 점수 차이였다.

점수를 생각하면 D급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사실상 C급부터 A급 사이를 노리는 게 좋아 보였다.

"자, 그럼 왜 점수가 있느냐. 그건 이벤트가 모두 끝났을 때 정산을 하게 됩니다. 가장 점수를 많이 차지한 서버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돌아가게 되죠. 일정 기간 동안 포인트 두 배를 습득할 수 있는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포인트 두 배?!"

포인트 두 배라는 말에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포인트는 성장의 원천이나 마찬가지.

장비를 구매할 수도 있고, 능력치를 올릴 수도 있으니 가장 소중한 자원이었다.

"예. 그러니 분발해 주세요."

아키넨은 싱긋 웃으며 경쾌하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화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충 보물찾기는 이 정도입니다. 거기다 단순히 보물만 찾으면 재미없겠죠? 그 외에도 다양한 기믹이나 서브 퀘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정말 설명 해줘야 할 부분은 그 다양한 기믹과 서브 퀘스트인 것 같지만 설명을 얼렁뚱땅 넘겨 버렸다. 원래 그런 놈들인지라 다른 플레이어들도 특별한 반발은 없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전생에 들었던 내용을 생각하면 낮과 밤에 돌아다니는 몬스터가 달라진다는 점과, 근처에 생존자의 마을이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마을에 가게 되면 마을을 수호하는 서브 퀘스트를 받게 된다.

밤에 나타나는 몬스터가 특히 강하며 이곳에 있는 센티넬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점.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사실이었다.

대충 가장 중요한 점은 외우고 있으니 내가 대비할 점은 예상치 못한 변경점이었다.

갑자기 시스템이 관여해서 센티넬이 하나가 더 늘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예상외의 전개가 진행될 수도 있었다.

'우선 기본 틀은 전생에 들었던 내용을 기반으로 움직여야 하겠지.'

그래야 사태가 급변해도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찾아가야 할 곳도 있고.

"마지막으로 주의할 점 한 가지. 이곳에서 얻은 아이템은 본래 서버로 귀환하기 전까지는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습니다. 자루에 담든, 혹은 어떤 스킬을 사용해서 따로 보관해야 하죠. 이유는 당연히 아시겠죠?"

씩 웃는 아키넨의 모습에 플레이어들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약탈을 허용하겠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악마의 계약자도 있으니 옳다구나 습격을 해오겠지.

그런 플레이어간의 대립을 조장하는 건 이 게임에선 흔한 일이었다.

내가 아까 사람들의 시선을 굳이 피한 것도 이것 때문.

괜히 얼굴이 팔리면 약탈의 대상이 되기 쉽다.

"지금부터 보물찾기를 시작합니다. 퀘스트 기간은 2주! 단 하나뿐인 S급 아이템의 주인이 누가 될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어떤 서버가 1위할지도 기대 중입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아키넨은 그렇게 말한 후 자취를 감췄다.

허공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지며 이벤트 퀘스트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GM이 사라지기 무섭게 이동하기 시작하는 플레이어들을 지켜보며 백설이가 물었다.

다른 길드원들과 합류할 것인지 묻는 눈치다.

"우선은 따로 움직일 거다."

"저희들끼리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내가 없어도 다들 알아서 하겠지."

지수가 다른 의미로 좀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창우와 합류한 것 같았다.

창우가 옆에서 지켜보면 지수도 괜한 짓을 벌이지 않을 거다.

적어도 아직 내 눈에 띄는 이상한 플레이어는 없었다.

'악마와 관련된 이들도 있겠지.'

신자운은 이미 확인했다.

저 녀석은 애초에 악마의 계약자 중에서는 특이한 놈이니 신경 쓸 필요 없겠지.

혹시 몰라 까마귀는 붙여뒀지만.

'나머지는 차차 확인해야겠어.'

퀘스트의 개요와 진행은 알아도 어떤 플레이어가 참여했는지까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유명한 플레이어 몇 명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플레이어에 아서가 있었을 뿐이다.

까마귀로 계속 확인은 하고 있었지만, 플레이어들도 계속 움직이는 터라 제대로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SS급 아이템이 100점이라.'

사실상 하나만 얻어도 게임의 승패를 기울게 만들 수 있는 점수다.

하지만 GM은 이곳에 SS급 아이템은 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이벤트로 푼 아이템은 정말로 S급이 끝이라는 거다.

'물론 절대라는 건 없는 법.'

이벤트로 뿌리는 건 S급이 끝이지만 이곳에는 SS급 아이템이 있었다.

이 퀘스트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SS급 아이템이.

"좋아, 가자."

"가자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요? 근처는 다 언덕뿐인데."

"마을이 있어."

"저기 말인가요?"

백설이는 손을 들어 폐허가 된 마을을 가리켰다.

어디를 봐도 사람이 살 것 같지는 않은 장소다.

"저긴 이미 몬스터들이 점령한 장소고 다른 곳에 있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사람의 흔적이 있었거든."

까마귀의 눈으로 살핀 결과 최근에 사람들이 돌아다닌 흔적이 있었다.

이건 이번에 플레이어들이 나타나며 생긴 흔적이 아니다.

"그렇군요, 그럼 마을은 어딘가요?"

"그건 이제 찾아야지."

"네?"

다 아는 것처럼 말하더니 무슨 말이냐는 눈치다.

그렇게 봐도 모르는 거다. 내가 들은 건 정보일 뿐이지 직접 본 건 아니니까.

"탐사 스킬을 쓰면 금방이야."

까마귀의 눈을 사용해 글라스톤베리 전역을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장소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일 확률이 높겠군.'

글라스톤베리에는 스테이지로 변하며 생긴 숲이 많았다.

그중, 까마귀의 눈으로 볼 때 눈에 띈 장소는 하나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큰 호수가 있는 숲.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아서에게 들었던 어떤 힌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왜 다른 곳으로 가는 거지?'

지수는 계속 보고 있던 미니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멀티 플레이 패키지 덕분에 지수는 세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작은 지도에 표시된 세한의 마커가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문제는 이동하는 방향이 자신이 아닌 전혀 다른 쪽이라는 거다.

또 뭔가 하려는 거구나.

지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세한의 이동방향을 예측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는 숲이었다.

글라스톤베리가 스테이지화 되며 생겨난 숲.

그곳에 특별한 아이템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합류해도 되는 걸까?'

특별히 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합류하자는 말도 없었다.

만약 세한이 합류를 바랐다면 자신에게 먼저 접촉을 해왔을 것이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거겠지.

'아직 부족해. 나는 아직 부족한 거야.'

갑자기 길드를 만들고, 주변에 사람을 하나둘씩 두기 시작한 세한에게 자신은 필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민아처럼 다양한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시우처럼 특별한 장비를 만들 수도 없었다.

오직 지수에겐 전투밖에 없었다.

전투는 루크나 창우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뭣보다 가장 강한 건 세한이니 상대적으로 자신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충분한 대체제가 존재하니까.

'이 세계가 게임이 되기 전에는 나뿐이었는데.'

특별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던 세한이다.

근데 이제는 아니었다. 친구인지는 몰라도 동료는 늘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후회돼.'

세계가 이렇게 뒤틀릴 줄 알았다면, 그가 그렇게 변할 줄 알았다면 자신도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얌전히 지켜보는 것뿐.

자신이 현재 내세울 수 있는 건 무력이지만, 그건 세한보다 못하다.

그가 자신을 버리려고 한다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는다.

부모님에게 했던 것처럼 그저 얌전히 복종하고 순종적으로 그의 말에 따르자.

지수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내면을 숨겼다.

'『나는 언제나 착한 아이』니까.'

지수가 이 게임이 시작됐을 때 받은 특성.

세한이 받은 '싱글 플레이어'와 같은 지수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능력치창을 공유할 때도 세한에게 이것만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궁금해하는 걸 알았지만 이것만큼은 보여줄 수 없었다.

자신이 착한아이인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걸 들킬 테니까.

『나는 언제나 착한아이』의 효과는 간단하다.

언제나 '착한아이인 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모든 정신적 상태이상의 면역이며, 다르게 이야기하면 본인의 감정을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는 특성. 사실 완전 면역이라기 보단, 상태이상에 걸렸지만 그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것에 가깝다.

그 감정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며 밖으로 꺼내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투 시 천살성의 광기를 꺼내오는 것처럼.

오로지 착한 아이로서 있을 수 있는 지수의 능력.

이 스킬이 있었기에 지수는 천살성 스킬이 있었음에도 광기에 빠지지 않았다.

살인에 눈뜨게 되는 충동은 지수에게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그것보단 차라리 그를 자신의 테두리 안에 두고 싶어 하는 감정 쪽이 난감했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유혹했으니까.

부모님이 자신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고.

계속, 계속 그렇게.

'아니야. 그래선 안 돼.'

아직은 좀 더 착한아이로 있어야 했다.

뭣보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보다 강했으니까. 밉보인다면 그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지 모른다.

지수는 그것을 아직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수의 마음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를 지켜보기만 해야 되는데?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지수는 고개를 흔든다.

아니, 계속 이렇게 있는 게 좋겠지.

자신이 이상하다는 건 지수도 알고 있다.

기회가 온다면, 아니 그래도 안 돼.

얌전히 있어야겠지.

그를 가지고 싶은 만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다.

마치 위험한 줄타기처럼.

지수의 이성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

# 89

089. 호수의 마을(1)

"저희는 얼마나 가야 되는 건가요? 숲에 들어온 지 꽤 된 거 같은데."

"거의 다 왔어."

까마귀의 눈 덕에 숲에서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보통 이런 숲들은 글라스톤베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벤트가 시작되며 임의로 생성된 숲이거나, 게임 오픈 시 스테이지에 만들어진 숲들이었다.

특히 이곳의 경우엔 어떤 존재가 관여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이었다.

"야! 그거 내 아이템이야! 당장 안 놔?"

"제가 할 말이에요. 이거 내가 먼저 집은 거라고요!"

숲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여성이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고함 소리도 여럿 들리는 걸 보니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숲에 들어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까마귀를 보냈다.

까마귀의 시야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왜 여기 있어?"

바로 피안화의 길드장인 이아영과 성녀 신유화.

그리고 함께 있는 무리는 두 여성의 추종자들이었다.

'와, 어떻게 만나도 저렇게 둘이 만나지?'

그러고 보면 들은 기억이 있다.

이아영과 신유화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양쪽 다 자존심이 강한 여성들이라 이해가 가긴 했다.

특히 추종자를 몰고 다닌다는 공통점이 비슷했다.

이아영의 경우엔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남자들을 데리고 다녔고, 신유화의 경우에는 거의 종교였다. 성녀라고 받들어 모셔졌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지.

신유화 본인은 그런 신격화를 겉으로는 귀찮아했지만 상당히 즐겼다.

왜냐면 그녀는 남들이 띄워주는 걸 무척 좋아했으니까.

그러니 굳이 해체시키지 않고 저렇게 데리고 다닌 거겠지.

"저러다가 싸움이 날 것 같습니다. 도와주실 건가요?"

"...너는 저기가 보이냐?"

"네, 마법을 사용해서 봤습니다."

백설이의 마법 실력은 정말 날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건 그거고 저 둘에게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미쳤다고 저기에 가겠냐.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렇군요. 근데 같은 서버의 사람끼리 왜 다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기 싸움이야 저거."

딱 보니 그렇게 대단한 아이템을 들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기가 먼저 집은 걸 남이 가져가는 게 싫은 거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져도 신유화가 있으니 다치는 사람도 나오지 않을 거다.

성가신 여자이긴 하지만 남이 다치는 꼴은 못 보니까.

"그래도 눈에 띄면 귀찮아질 수 있으니 조용히 이동하자."

"네."

백설이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눈치가 있다면 저기에 끼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두 집단에게 얽히지 않도록 최대한 빙 돌아 숲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숲의 중심에는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꽤나 넓은 호수가 있었을 뿐.

"강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호수를 본 백설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떤 마법이 발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몬스터를 물리는 마법인 것 같아요."

"정확해."

"알고 계셨던 건가요?"

"대충은."

분명 아서가 말했던 호수는 이곳이 분명했다.

숲의 한가운데에 있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호수.

몬스터에게 쫓기던 아서는 이곳으로 오게 됐고 이곳에는 몬스터가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 나가지도 못하게 되지.

뭣보다 아서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결국 그는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게 되지.'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이후, 천천히 호수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호수로 들어가려 하자 백설이가 기겁했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야 되나요?"

"어. 들어가야 해."

"저는 수영을 배운 적이 없습... 꺅?!"

태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백설이가 수영을 배웠을 리 없다.

대충 예상했던 일이기에, 백설이를 대충 허리춤에 안아 들어올렸다.

어차피 수영은 내가 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럼 눈감고 숨 참고 있어. 혹시 물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없냐?"

"네, 그런 건 익히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마법 스킬은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발현되는 거니까요."

마법 스킬도 일반적인 스킬과 같이 행동에 따라 익히게 된다.

특별한 건 없다. 다만 거기에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필요할 뿐이지.

다만 아바타의 경우엔 신들을 통해 익힐 수도 있다.

특히 마법에 능한 로키나 모리안과 같은 이들에겐 다양한 마법을 익힐 수 있다.

민아나 아가트람의 이수린이 마법에 능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럼 이제 들어간다. 숨 참아."

"네, 넵."

평소 표정 변화가 없는 백설이지만 물속에 들어가는 건 조금 겁이 났는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흡, 하고 양손으로 코와 입을 막는 모습도 제법 귀여워서 이런 걸 보면 과연 아직 어린애이긴 한가보다. 어차피 기린이라 물속에 들어간다고 익사하지도 않을 텐데.

'탐사 스킬을 먼저 사용하고.'

단순히 물속에 들어간다고 그곳에 갈 수 있을 리 없다.

물속에 있는 이질적인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야만 한다.

그곳에 문이 있으니까.

'역시 겉으로는 평범한 호수처럼 보이는군.'

물속으로 들어와 안을 보자 평범한 호수와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단지 수심이 좀 깊다는 것 정도?

어느 정도 헤엄을 쳐 들어가자 탐사 스킬에 이질적인 뭔가가 걸렷다.

'여기다.'

여기에 뭔가 빈 공간이 존재했다.

호수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들이 있었다.

평범한 돌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마법사들의 글자라 불리는 룬 문자다.

'이걸 이렇게 움직이면....'

나도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드드드.

룬이 새겨진 돌의 배치를 바꾸자 호수에서 미묘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리곤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천천히 솟아올랐다.

이게 바로 문이다.

비석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마법적으로 만들어진 무언가.

그렇기 때문에 탐사 스킬을 사용하면 빈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파아앗!

비석에 손을 대자, 밝은 빛이 시야를 감쌌다.

동시에 육신이 어딘가로 이동되는 느낌이 들었다.

허리춤에 안겨 있던 백설이도 그것을 느꼈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렇게 대략 5초의 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호수의 밑바닥이 아닌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되어 있었다.

[안전지대에 진입하셨습니다.]

바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안전지대에.

***

우리의 눈앞에는 호수의 아래에 있었다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을 향해 다가가자 입구를 지키던 사람이 우리를 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가 외부의 플레이어라는 걸 알게 되자 잠시 기다려 보라고 말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셔도 괜찮다고 합니다."

곧바로 돌아온 남자는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한 뒤 길을 안내했다.

아마 방금 전 우리를 들여보내도 되는지 물어본 당사자겠지.

"정말로 외부의 플레이어인가?"

"대체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지?"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다보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에는 백설이의 뿔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들도 있었다.

'들은 것처럼 글라스톤베리에 있던 마을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은 장소군.'

본래 글라스톤베리에 있는 마을은 인구가 대략 9천 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이 세계가 게임으로 변하며 글라스톤베리 주변은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되어버렸고, 마을의 절반은 쓸려나가 버렸다.

개중에서는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도 있었기에 그나마 그 정도로 그친 거다.

하지만 외부와 단절된 글라스톤베리는 신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지역이라 아바타도 나오지 않았고,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몰살당할 일만 남아있었다.

"여기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까?"

"예,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신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존재가 있었던 덕분이다.

그녀는 그들의 말을 호수의 아래로 옮겨주었고, 밖으로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설마 외부의 플레이어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어."

안으로 들어가자 싱그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옅은 웃음기가 담겨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무척 긴 남색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었다.

"어서와, 외부의 플레이어. 내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온 건 처음 있는 일이네. 좀 더 조심해야 되려나?"

가벼운 어투가 마치 민아를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민아와 다른 점은 그 가벼움 속에도 뼈가 있다는 점이다.

대체 어떻게 멋대로 들어왔냐는 책망과 궁금증이 혼재되어 있었다.

"거기다... 재밌는 걸 달고 들어오다니."

"으으."

여성은 싱긋 웃으며 백설이를 바라보았다.

백설이는 여성의 시선이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냐면 백설이는 '마녀'를 싫어했다.

동화에서 몇 번 보더니 무섭다고 했었지.

"대화를 원한다면 우선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닌가?"

"...후후, 그러네."

여성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열려 있던 문이 닫히고, 미묘하게 어두웠던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온갖 신물이 널려있는 신화속 마녀의 보금자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이름은 모르간 르 페이. 최후의 마녀이자, 아발론의 주인이다."

그녀는 평범한 일반인도, 그렇다고 플레이어도 아니었다.

신화의 말미부터 살아온 진짜배기 마녀.

살아 있는 신화의 주인이었다.

***

모르간 르 페이.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마녀이자 호수의 귀부인 중 하나로 지칭되는 여성.

그녀는 아서왕의 사촌누이라는 설도 있고, 혹은 요정이라는 설도 있다.

또는 둘 다이거나.

참고로 눈앞의 모르간은 요정족인 모양이다. 인간과는 다르게 뾰족한 귀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흔히 판타지 소설에서 묘사되는 엘프의 귀처럼 길쭉하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약간 뾰족한 정도.

애초에 '르 페이'라는 말은 요정을 의미하니 당연한 일이다.

"이곳이 아발론이었나."

"그래, 모르곤 온 거였어?"

"전혀 몰랐다."

아발론은 흔히 요정과 마법사가 떠도는 이상향으로 묘사된다.

그 땅의 주인은 기본적으로 3명. 비비안과 니뮤에, 그리고 모르간.

다른 두 명이 보이지 않으며 본인을 최후의 마녀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다른 둘은 없는 모양이다.

"그러면 이제 너희의 소개를 들어볼까? 까마귀자리의 신참."

이미 까마귀자리의 주인이 바뀐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녀는 마녀라는 거겠지.

나는 모르간에게 나와 백설이에 대한 소개를 간단하게 했다.

당연히 그녀는 백설이가 무척 신기했던 모양인지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머나, 유니콘인 줄 알았더니 기린이었구나."

"정확히는 기린아다."

"말장난 하지 말고."

...말장난 아닌데.

안타깝지만 그녀는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에 시스템을 잘 모른다.

강대한 마녀이지만 신격을 지닌 건 아닌지라 게임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닌 바의 마력이나 힘을 생각하면 웬만한 신도 그녀에게는 한 수 접어줘야 할 거다.

사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가 아닐까.

"하긴 게임인가 뭔가가 되어버렸으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켈트쪽 애들이 말하는 걸 얼핏 들었거든."

그녀가 말하길 아발론이 머무는 호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지금은 글라스톤베리에 머물러 있지만 얼마나 있을지 모른다나.

간만에 고향에 왔더니 사람들이 다 죽을 판이라 이곳으로 사람들을 홧김에 피신시켰는데, 제법 즐겁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찾아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눈치다.

"그나저나 마녀를 찾아왔다는 건 뭔가 부탁하고 싶다는 게 있는 거겠지? 이곳에 요정의 인도 없이 찾아온 인간은 오랜만이라 웬만한 건 들어줄게."

"전설속의 검을 가지고 싶다고 해도?"

"그 정도는 문제없지."

모르간은 경쾌하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주변이 어두워지고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듯 어느 한 곳을 밝혔다.

수많은 신물들이 모여 있는 보물더미.

구석에 있는 암석에 박혀 있는 검을.

만약 누구나 그 검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엑스칼리버, 라고.

# 90

090. 호수의 마을(2)

전설 속 검의 대명사라고 하면 누구나 그 이름을 말할 것이다.

바로 엑스칼리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유명한 검 중 하나다.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선정의 검.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하나의 아이템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

엑스칼리버(SS)

?????

?????

*자격을 지닌 주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

정확한 능력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아마 검을 소유한 주인만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

전생에 보았던 아서의 힘을 생각하면 이것보다 좋은 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서는 진정한 의미로 템빨의 극한이었으니까.

'혹시 나는 사용할 수 없나?'

슬쩍 모르간을 보니 마음대로 해보라는 눈치다.

분명 이 검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겠지.

어쩐지 조금 오기가 생겨서 검의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위로 당겼다.

"윽!"

암석에 박힌 검은 뽑히지 않았다.

대신 암석과 함께 아주아주 조금 공중으로 들어 올렸을 뿐이다.

내가 만약 근력이 A나 S정도가 된다면 휘두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봐야 암석이 박힌 몽둥이일 뿐이다.

이대로는 도무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파일 벙커로 암석을 두드려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은 전설의 검일지는 몰라도 검이 꽂혀 있는 암석은 전설의 암석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모르간이 말했다.

"그 암석은 검과 내구도가 같으니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정말 전설의 암석이었나.

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암석을 바라보자 모르간은 그저 피식 웃었다.

"검의 힘이 암석에 깃들어 있어서 그럴 뿐이야. 아무튼 검은 못 뽑겠지? 그럼 다른 거 가지고 싶은 건 없니?"

"아니, 그래도 난 이 검을 가져가지."

"무슨 수로? 암석과 함께 가져가려고 해도 바닥에서 안 떨어질걸?"

"알고 있다."

굳이 검을 들고 옮길 필요는 없지.

"흐읍!!"

나는 재차 온힘을 다해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

아까처럼 암석이 대략 몇 미리정도 바닥에서 떨어졌다.

"내참 그렇게 들고 가봐야 무슨 소용이...."

비웃으며 말하던 모르간의 얼굴이 굳었다.

왜냐면 내가 들어 올린 암석과 바닥의 틈에 새까만 공간이 열렸기 때문이다.

바로 전승스킬 허수공간이다.

"후!"

내가 검을 들고 있던 손을 놓자 암석에 박힌 엑스칼리버가 통째로 허수공간으로 사라졌다.

이번 이벤트에서 얻은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지만 허수공간을 통해서라면 가능했다.

그야 이드라는 외우주의 신이니까 시스템의 영향을 덜 받는 거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VPN으로 우회해서 인벤토리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맙소사."

설마 이런 식으로 가져갈 줄은 몰랐는지 모르간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검은 잘 받아가지."

"아니, 잠깐. 그게 아니, 뭐라 해야 되나."

여태 여유로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한 말도 물릴 수는 없으니 심히 난감해 보였다.

분명 내가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거겠지.

이곳에는 많은 보물이 있었지만 단연 최고의 물건은 엑스칼리버였다.

그것도 아서왕의 전설과 연관이 깊은 모르간이니 더더욱 특별한 무기였겠지.

"저기, 내가 다른 좋은 걸 많이 줄게, 응?"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이 검이 마음에 들거든."

발을 동동 구르며 난감해하는 모르간의 모습은 전설 속 마녀라기엔 우스웠다.

아까 나를 보며 비웃던 모습이 짜증나서 놔두고 있었지만 계속 그럴 필요는 없겠지.

아발론 밖으로 나갈 수는 없겠지만, 모르간은 신화 속 마녀다.

친분을 만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 검의 주인에게 직접 가져다 줄 테니."

"...뭐야, 당신. 그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다? 멀린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다 아는 법이 있지."

"말투가 꼭 짜증나는 멀린 같네. 인상도 더러운 게 똑같아!"

가장 위대한 마법사를 꼽자면 한손에 꼽히는 멀린과 같은 취급을 당한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부터 느꼈지만 내 인상이 그렇게 더럽나. 그냥 조금 눈매가 사나운 정도 아냐?

"그럼 이렇게 하지. 앞으로 2주 안에 주인을 찾지 못한다면 이 검을 돌려주지."

"어, 정말? 그럼 멀린 같다고 한 건 취소해 줄게."

찌푸려졌던 모르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분명 내가 절대 못 찾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 긴 시간 동안 계속 주인을 찾았던 모르간이지만 끝내 아서왕 이후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했으니까.

"대신 그때 다른 보답을 요구해도 괜찮나?"

"만약 찾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후한 보상을 해줄 테니 걱정 마. 호수의 귀부인으로서 약속해."

"좋다."

추가적인 약속도 받아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아서를 찾는 일뿐이다.

"그리고 2주간 이 마을에서 머물고 싶은데 괜찮은가?"

"얼마든지. 그 정도는 상관없어."

"고맙군."

"대신 나 이 아이를 빌려도 될까? 이상한 짓은 안 할게."

모르간의 갑작스런 말에 보물들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구경하던 백설이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저, 저 말입니까?"

"그래, 동양의 신수는 그다지 볼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이 기회에 이것저것 알아두고 싶어서."

"그게, 전 기린이 아니라 기린아라...."

언제나 스스로를 기린이라 자칭하던 백설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했다.

정말로 마녀란 존재가 무서운 모양이다.

"걱정 마, 절대로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게."

"알겠다. 대신 백설이에게 마법 같은 것도 알려줬으면 하는군."

"좋아."

우리의 거래는 간단히 성립됐다.

"세한...."

백설이가 팔려가는 소의 눈망울로 나를 올려보는 터라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이 편이 백설이에게도 나았다.

모르간은 정말로 나쁜 마녀가 아니었고 전설 속 마녀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밖에 따라다니는 편이 더 위험해. 그리고 마녀라지만 모르간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바로 올 테니까. 그리고 저녁이 되면 돌아올 거야."

"알겠습니다."

백설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이벤트에서 실전 훈련을 가지는 건 좋지만, 우선 모르간에게 얻을 건 최대한 얻은 후에 그러는 편이 나았다. 여러 마법을 익히긴 했지만 백설이는 아직 미숙한 편이니까.

"그럼 사이좋게 지내라."

고개를 끄덕이는 백설이와 웃는 낯으로 배웅하는 모르간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호수 밖으로 향했다.

이제 아서를 찾을 차례다.

***

"이 병신은 또 뭐야?"

한 플레이어가 절뚝절뚝 걸어가던 플레이어의 등을 발로 찼다.

막 아이템을 집어 들고 걸어가던 절름발이 플레이어는 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와, 영국 서버가 진짜 막장이긴 하네. 이런 놈이 순위권에 든 놈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플레이어는 프랑스 서버 소속의 플레이어였다.

이번 이벤트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서버였기 때문에 영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은 그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왜 저놈이 우리 서버 대표 중 하나인 거야?'

영국 소속의 플레이어는 숫자가 적었다.

탑 플레이어라고 최대한 박박 긁어모아 소환된 인원이 고작 50명 정도.

이벤트 장소가 영국 서버라는 점을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다.

지형적인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륙 출신보단 섬나라 출신 플레이어들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스테이지가 고립된 장소가 많아 그만큼 희생이 컸기 때문이다.

"흐, 흐으."

쓰러진 플레이어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아이템을 주웠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웃던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야, 이 새끼 보래? 넌 자존심도 없냐?"

옆에서 계속해서 도발했지만 절름발이 플레이어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길을 갈 뿐이다.

마치 실성한 것처럼 뭐라 중얼중얼거리며 그는 계속해서 걸었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프랑스 플레이어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진짜 짜증나게 하네."

프랑스 플레이어 몇몇이 절름발이 플레이어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아이템을 뺐었다.

그다지 점수도 높지 않은 아이템들이다.

기껏해야 D급 아이템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프랑스 서버의 플레이어가 그를 건드린 건 아이템을 약탈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약한 자를 괴롭힐 때 얻는 저열한 쾌감을 얻기 위해서였을 뿐.

나름 강자라고 뽑혀온 놈이 절름발이 플레이어라는 건 우습지 않은가.

심지어 영국의 다른 플레이어들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섣불리 나서봐야 프랑스 플레이어들과 대립하게 되면 이번 이벤트에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었다.

제한 없는 약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잘못을 했지?"

바닥에 쓰러져 맞고 있던 플레이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반쯤 실성한 것처럼 중얼중얼 거리던 것과는 달리 덤덤한 눈으로 프랑스 플레이어들을 올려보았다.

고요하고 적막한 눈.

그를 발로 차고 깔아뭉개던 플레이어들조차 움찔할 만한 눈빛이었다.

"병신이 그럼 덤벼보든가. 절름발이 쓰레기 새끼가!"

욕설을 내뱉으며 한 프랑스 플레이어가 달려들었다.

손에는 날카로운 검이 들려있었다.

여태 주먹과 발로 공격하던 것과는 문제가 달랐기에 다른 프랑스 플레이어들조차 식겁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는 짓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았으니까.

"야, 잠...!"

잠깐 멈추라고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무수한 까마귀의 무리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족히 수십 마리는 되어보이는 까마귀의 무리가 이쪽으로 날아오자 플레이어들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몬스터인가?!"

"아니, 단순한 까마귀다."

절름발이 플레이어에게 덤벼들던 플레이어도 갑작스런 사태에 발을 멈췄다.

그리고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까마귀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씨,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죽여 버리면 되지!"

그들도 프랑스에서 날고 긴다는 플레이어들이다.

갑자기 까마귀가 나타났다고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어느 한곳에서 갑자기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의 사람의 형태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뭉쳐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새까만 깃털이 흩날리며 그 안에서 한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내가 볼 일이 좀 있거든."

까마귀를 연상하게 만드는 검은 머리칼과 복장.

그리고 느껴지는 강자의 기운에 플레이어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 꺼져라."

남자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몸이 일제히 튕겨져 날아갔다.

***

녀석들을 쓰러트리고 장소를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까 전의 장소에서 좀 떨어진 푸른 들판을 걷자, 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나를 도운 거냐."

"그러는 당신은 왜 맞고만 있었던 거지?"

"...뭐?"

"당신이 그 멍청이들보다 강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비록 절름발이지만 그는 강하다.

그야 당연하지.

당연하지.

왜냐면 이자가 바로 아서.

세계에서도 손에 꼽히던 길드 펜드래건의 수장.

지금 최약의 서버라 불리는 영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을 한데로 모아 국가 자체를 하나의 길드화시킨 영웅 중의 영웅이다.

그런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게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2년 후.

2년이란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가 정신에 문제가 있고, 절름발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로 강해졌다는 건 필사적으로 싸워왔다는 이야기겠지.

그래서 세간에는 아서의 다른 인격을 완전히 번아웃한 아서의 모습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약해빠진 놈이야."

아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 곳에서 힘자랑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그들의 말이 맞아. 난 가족들이 죽게 내버려둔 병신이니까."

상당히 젊어 보이는 아서지만 나이는 서른에 가깝다.

그나마 루크보다는 젊지만 본래 아들도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세계가 게임이 되며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보다 당신의 용건을 묻고 싶어. 나와 굳이 대화를 한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래."

어차피 말을 돌릴 필요는 없다.

나는 아서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나와 파티를 맺고 계약을 맺자고. 당연히 아서는 그런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계속되는 설명에 아서는 겨우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긴 플레이어마다 다양한 능력을 지녔으니 그런 것도 있을 법해."

"그래서 대답은?"

그는 옅게 웃었다.

그리곤 굽은 등을 피고 단호하게 답했다.

"거절한다."

# 91

091. 호수의 마을(3)

대충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그는 아직 길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당신의 발과 정신을 고쳐줄 수 있음에도?"

"그건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야."

그런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환상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서의 눈동자가 커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답변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존중해. 그러니 환상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을 봐줬으면 좋겠어."

"나를 도와준 건 고맙지만, 거기까지 해줬으면 하는군."

딱딱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돌릴까. 혹시 아서왕은 좋아하나?"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냥 이곳은 아서왕의 전설이 숨 쉬는 글라스톤베리잖아. 주제로 삼기 딱 좋지 않겠어?"

가볍게 말하는 내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아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좋아하긴 했지. 나 말고 내 아들이."

"그렇군. 유감이야."

"이곳도 나중에 꼭 와보자고 했던 곳이다. 일이 바빠서 함께 오지는 못했다만...."

결국 이렇게 혼자서 오게 되는군. 아서는 그렇게 말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드라이그 고흐."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아서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웨일즈의 수호룡이로군."

"잘 아네."

"아들에게 자주 이야기해 주곤 했으니까."

쓰게 웃는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그런 그의 모습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럼 만나러 가볼까?"

"누구를?"

"방금 말했잖아."

바로 드라이그 고흐.

적룡을.

***

글라스톤베리 토르의 언덕 정상.

그곳에는 하나의 탑이 있다.

관광명소로 유명한 미카엘 탑이다.

이전이라면 평범한 관광요소였을지 몰라도 이 세계가 게임으로 변화하며 이곳도 변했다.

아까 GM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곳에는 센티넬이 하나 있으며, 드래곤이라고.

그게 바로 지금 우리의 앞에 있는 드라이그 고흐다.

"오, 맙소사."

미카엘 탑에는 이전에는 없던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굴을 따라 내려가는 것처럼 한참을 가자, 거대한 공동이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거체를 눕히고 잠들어 있는 붉은 용.

아서왕 신화에서 등장하는 웨일즈의 수호룡이 이곳에 있었다.

"어때?"

"...아들이 보면 좋아했겠어."

"영웅의 이름을 지닌 것 치고는 소박한 감상이야."

아서왕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아서였으니까.

아서도 그 말을 이해했기에 그저 쓰게 웃었다.

"아들도 언제나 놀렸지. 아빠는 아서왕이랑은 전혀 다르다고."

용맹한 기사의 대명사 아서왕의 이름을 지녔다기엔 아서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소시민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사람.

그런 그가 이렇게 망가진 것도 가족을 사랑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아서, 당신은 영웅이 될 수 있어."

"근거 없는 소리야. 어떻게 나 같은 게...."

쿵!

허공에 검은 공간이 열리며 검이 떨어졌다.

두터운 비석에 박혀있는 검이 아서의 동공에 가득 들어왔다.

"근거는 만들면 되지."

"...."

바위에 박힌 검.

아서왕의 전설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특히 아서는 모를 리가 없겠지. 플레이어이기에 무기로부터 느껴지는 격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검이 바로 진짜 엑스칼리버라는 걸.

"이걸 당신이 뽑는다면 영웅이 될 근거로 충분하지 않나?"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말하지 않았나? 난 당신과 파티를 맺고 싶다고 했을 텐데."

아서는 그럼에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당신이 보는 환상이 뭔지 난 알아."

"...뭐?"

나는 전생의 아서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걸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가 말하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과거형이었으니까.

"이 게임이 시작되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중에 당신과도 같은 사람들을 많이 봤지."

"...."

"죽은 가족의 환상을 보는 사람들."

가까운 예로 시우가 있다.

시우는 아서처럼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뒀으면 충분히 그렇게 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당신은 검을 뽑아야 해. 뭣보다 난 당신이 필요하거든."

"내가 필요하다? 나 같은 게?"

"나 같은 게가 아니야. 당신이기 때문에 필요한 거야."

아서의 눈이 흔들렸다.

잠시 나를 보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아들을 잊고 싶지 않아.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계속 보고 싶어."

"이해해. 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이야. 당신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지."

"나는...."

"만약 그 환상이 당신이 진짜 가족이었다면 지금의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걸? 분명 똑바로 살라고 말했을 거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말했을 거야."

감았던 아서의 눈이 떠졌다.

그는 내가 꺼낸 엑스칼리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걸 손에 쥐었다.

"나는."

아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아."

그리곤 눈이 풀리며 등이 굽어지고 의식이 혼탁해졌다.

하필 지금 인격이 변해 버린 것이다.

"타이밍 한번 죽이는군."

거의 다 된 것 같았는데 하필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도 정신을 차리면 이번에야 말로 검을 뽑고 나와 파티를 해주지 않을까.

아서의 성격상 검만 뽑고 튈 것 같지는 않고.

애초에 그런 인간이면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엑스칼리버의 주인이라는 건 신뢰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럼 장소를 옮겨서 아서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볼...."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말을 멈췄다.

"갑자기 뭐야?"

왜냐면 까마귀의 시야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

"까마귀는 언제 오려나."

은발의 여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주위에는 플레이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적대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동료들을 본래 상대로 돌려놔라!"

"싫어."

"크리스 브라이트!"

그건 은발의 여성의 이름이었다.

또한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름이었다.

크리스 브라이트. 마계의 7대 악마 중 하나 마라 파피야스의 계약자.

악마의 계약자임에도 검은 머리가 아닌 은발 머리를 지닌 변종.

그녀의 머리색은 마라 파피야스와 같다.

저 매혹적인 은색이야말로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색이다.

"까마귀를 찾기엔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악마님이 말했는 걸. 걱정마 죽이지는 않아. 적어도 나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주변의 플레이어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왜냐면 그녀의 주위에는 상당수 플레이어들이 그녀를 지키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 정신 차려!"

개중에는 센티넬을 죽였다고 자랑하던 에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실력자도 조종당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를 섣불리 공격하기도 힘들었다.

멋대로 공격했다가는 그녀에게 조종당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반격을 당할 테니까.

'개 같은 년.'

악마의 계약자 중에 크리스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다.

다른 악마의 계약자처럼 플레이어들에게 적대감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군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플레이어들을 노예처럼 부렸고, 관심이 꺼지면 원래대로 되돌리는 등 기분에 따른 편차가 심했다.

'뭐 이런 개사기적인 스킬이.'

크리스가 악마로부터 받은 스킬은 극히 심플하다.

매혹. 상태이상 계열 능력이 그렇듯, 마력수치가 낮으면 저항할 수 있지만 그녀의 능력은 개중에서도 강렬했다.

그녀보다 마력이 높아도 방심하면 조종당할 수 있어 강력한 정신 내성 스킬을 지닐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정신 내성 스킬은 얻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그녀를 막을 만한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는 뭐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 원래는 그냥 찾아다니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찾겠더라."

후후후, 거리며 웃은 크리스의 말에 플레이어들은 벙쪘다.

"고작 사람을 찾겠다고? 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

"까마귀야."

까마귀? 그가 대체 누구지?

갑작스런 그녀의 지명에 플레이어들은 수군거렸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난생처음 보는 7대 악마의 계약자를 구경하다가 익숙한 이름에 경악했다.

"까마귀? 디어사이드 길드의 까마귀?"

"맞아."

까마귀라는 말에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그가 누군지 중얼거렸다.

유명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에게 물어봤다.

"왔다."

그때, 크리스가 씩 웃으며 말하며 허공을 응시했다.

"갑자기 오기는 누가... 어?"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어디에서 이런 까마귀가 있었는지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까마귀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까마귀들의 틈에서 거대한 검은 날개가 얼핏 보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웅!

"윽!"

갑작스런 돌풍에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었다.

까마귀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하나의 남자가.

***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왜 내 이름을 팔며 이런 짓을 벌이는지 물어도 되겠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까마귀라고 칭하지만 않았어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놓고 까마귀라고 칭하며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나로선 그 의도를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평범한 플레이어도 아니라 7대 악마의 계약자이니까.

"그야 당신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그러지."

"볼일?"

"의뢰를 받았어. 당신을 죽이라는 의뢰."

나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나를 죽이라는 의뢰 때문이 아니다.

그걸 대놓고 나에게 말하는 그녀의 자신감 때문이다.

'와,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크리스 브라이트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악마의 계약자였지만 유일한 7대 악마의 계약자였기에 정보가 많았으니까.

그녀에 대해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지극히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빡대가리.

분명 내 실력에 대해 들었을 거다. 최근 같은 7대 악마인 아자젤과도 만났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나왔다는 건 단순히 오만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의아한 모양이네. 하기야 나는 너와 싸움이 안 되긴 해."

"알고는 있는 모양이군."

"응. 하지만 일일이 찾아다니긴 귀찮거든. 뭣보다...."

크리스는 주변을 향해 살랑이며 손짓을 했다.

내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지만 그 손짓 한번에 주변에서 그녀를 향해 소리치던 플레이어들이 단번에 잠잠해졌다.

그들도 크리스의 '인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미친 스킬이긴 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매혹시켜 버리는 그녀의 스킬은 정신계열 스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기 스킬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정신 내성 스킬을 지닌 플레이어도 간간이 등장하여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찌보면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강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들어보니 당신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다며?"

"...뭐?"

"되도록 사람을 구하는 방향으로 플레이 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있잖아. 이 사람들은 어때?"

철컥.

크리스의 주변에는 족히 100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서버에서 손에 꼽히는 인재들이었다.

크리스의 매혹에 속수무책에 당했다지만 그건 단순히 정신내성 계열 스킬이 없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이 게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에릭이나 그의 길드원들이 그렇다.

"당신이 저항하면 모두 죽여 버릴 거야. 그러니 얌전히 있어. 정신 내성 스킬있지? 그것도 사용하지 말고. 그럼 적어도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게."

"너."

그제야 나는 크리스의 의도를 알 수있었다.

아마 마라 파피야스로부터 들은 거겠지.

내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는 걸.

'그래도 나름 머리는 썼네. 자기 스킬이 잘 먹힐 만한 애들로만 모았어.'

이 스킬이 사기적인 건 맞지만 그만큼 사기 스킬을 가진 이들도 이곳에 많다.

그러니 비교적 건드려도 문제가 없을 이들에게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 한곳에 모은 거다.

그다음 모인 사람들에게 모조리 매혹을 걸고 나를 협박할 생각을 한 거다.

내가 되도록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는 걸 알고.

'조금 곤란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조금' 곤란할 뿐이다.

플레이어들을 구하고자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목숨을 내어줄 생각은 없지.

'허수 공간을 뒤에 열어 기습을 해버릴까?'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되도록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울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단순히 쓰러트리는 건 지나치게 쉬웠다.

솔직히 지금 크리스의 말은 내게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어떤 게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그만 좀 따라와요! 진짜 짜증나네!"

"내가 할 말이거든요? 그리고 그 아이템 내 거라고 했잖아!"

시끄러운 대화가 오가며 나와 크리스의 사이에 두 명의 여성이 걸어갔다.

주변의 상황은 보이지 않는지 둘이서 아득바득 우겨가며 싸우던 그녀들은 나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이 까만 녀석은."

"그리고 여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죠? 좋은 아이템이라도 있나."

그 둘은 피안화 이아영과 성녀 신유화였다.

# 92

092. 베히모스(1)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거슬리게."

이아영은 크리스보다 더 오만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아영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아항."

그녀 역시 비슷한 스킬은 지닌 터라 플레이어들의 상태가 이상한 이유를 대충 이해한 모양이다.

반면 크리스는 그런 이아영의 시선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뭐야, 이 여자들은? 까마귀, 당신의 동료야?"

"아니."

저 여자들이 내 동료일 리가 없나.

그나마 신유화는 아주 잠깐 동료였던 적이 전생에 있었지만 이아영은 절대 아니었다.

"뭐, 까마귀? 그럼 네가 그 디어사이드의 까마귀라고!?"

크리스의 말을 들은 이아영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까마귀, 까마귀, 중얼거리던 그녀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너지! 네가 그때 던전레이스에서 우리 방해했던 게 너희지?!"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아영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던전 레이스 당시 우리가 포인트를 가장 많이 번 장소는 피안화 길드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민아가 돌아다니며 던전을 폐쇄하고 죄다 먹어버린 탓에 피안화는 길드 규모에 비해선 별 볼일 없는 성과를 내고 던전 레이스는 막을 내렸다.

"박성혁이 그랬단 말이야!"

제네시스의 길드장 박성혁의 이름이 나오니 나도 할 말이 없어졌다.

이 녀석, 결국 나중에 다른 길드에게 이야기하긴 한 모양이군.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난감했다.

솔직히 크리스 쪽보다 이쪽이 곤란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나 크리스는 이벤트가 끝나면 만날 일도 없지만 이아영은 아니었으니까.

"뭐야, 짜증나게. 까마귀는 지금 나랑 대화하고 있었어. 못생긴 게 꽥꽥거리지 좀 마."

자신에게 쏠려 있던 관심에게 이아영에게 넘어가는 걸 느꼈는지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아영을 도발하며 말했지만 이아영은 정말 같잖은 걸 본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인형 놀이나 하는 계집애가 말이 많구나."

이아영은 내게서 시선을 떼고 자신의 목에 손을 댔다.

그리고는 엄지로 선을 그리듯 자신의 목과 쇄골을 훑었다.

"브리싱가멘(Brísingamen)."

그건 이아영이 가진 전승 스킬의 이름.

그 스킬의 효과는 지극히 간단하다.

남성에 한한 절대명령권.

크리스의 것과 비슷하지만 위력은 더 강하다.

왜냐면 '남성'으로 한정되며 횟수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저항하기 힘들다.

나조차 브리싱가멘 스킬을 받으면 저항하느라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정신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뇌의 명령을 차단하고 강제로 육체에 명령을 내리는 것에 가까우니까.

전생의 양자택일 퀘스트 당시 이아영이 살아 있었다면 게임의 판도가 달라졌을 거라 추측할 정도의 사기 스킬이 브리싱가멘이다.

"저 계집애를 버리고 이쪽으로 와라."

턱을 치켜들며 말하는 이아영의 말에 크리스의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탁했던 플레이어들의 눈에 빛이 돌아오며 이아영 쪽으로 이동했다.

크리스의 매혹을 명령으로 덮어씌운 탓에 매혹스킬이 풀려 버린 것이다.

"어? 이제 몸이 제대로 움직여."

"방금 전에 매혹되지 않았었나?"

갑자기 스킬이 해제되자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리며 멍하니 있는 크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괘, 괜찮아. 나에겐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이 많이 남아 있지."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여성 플레이어들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상태이상 스킬에 걸린 거였군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신유화가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크리스의 몸을 스치고 뒤에 서 있던 여성 플레이어들의 몸으로 흡수됐다. 그러자 굳어 있던 여성 플레이어들의 몸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내 스킬이 다 풀려 버리잖아!"

바람이 스칠 때마다 플레이어들에게 걸려있던 매혹 스킬이 하나씩 풀렸다.

덕분에 크리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매혹 스킬을 사용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모든 상태이상 스킬은 신유화의 손을 피할 수 없었다.

성녀라는 이름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다만 이아영의 브리싱가멘은 발동 시 저항을 못 했다면 해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한 매혹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계속 걸어봤자 헛수고예요."

"이, 이이이!"

"어머, 말을 해야죠. 웃기는 사람이네."

난데없이 등장한 두 사람 때문에 상황이 이상해지자 크리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물론 이아영은 코웃음쳤고, 신유화는 맑은 얼굴로 비웃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솔직히 크리스는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아무튼."

나는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악마의 계약자는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겠지."

뭔가 내가 한 일은 없지만 얼굴이 창백해진 크리스를 보니 제법 봐줄 만했다.

이아영과 신유화도 별 감흥 없는 눈치였다. 애초에 악마의 계약자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는 없다.

"자, 잠깐만.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뭘 했다고 무승부야."

크리스는 주춤거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매혹 스킬이 몸에 닿기 무섭게 허공에서 부스러지듯 흩어졌다.

정신약체 내성 스킬을 무려 S급까지 올린 내게는 봄바람보다도 가벼운 공격이었다.

"그러길래 왜 이상한 짓을 해. 얌전히 있으면 건드릴 생각도 없었는데."

"아."

푹.

피육을 찢는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다.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보는 크리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의 눈에서 점차 빛이 사라졌다.

털썩.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녀석이 처량하게 바닥에 쓰러진 걸 보니 씁쓸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려두기도 어려웠다. 크리스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왔다고 했으니 살려두면 분명 다시 덤벼올 게 분명했다.

이번엔 내 선에서 끝났으니 다행이지만 내 주변 인물과 엮이게 되면 좀 더 일이 크게 될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가차 없네. 걔 그래도 얼굴은 봐줄 만하던데."

"위험도에 얼굴은 상관없지."

이아영의 말에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악마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죠."

악마와 관련된 이를 그다지 없는 신유화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방금 자신을 조종해서 죽이려던 여자를 동정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7대 악마 중에 하나인 마라 파피야스의 계약자라기엔 너무나 조잡한 최후였다.

***

저벅.

잠시 후, 플레이어들이 떠나고 한 여성이 크리스의 시체가 있는 장소에 걸어왔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크리스의 시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린 은발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천천히 이마에 손가락을 대었다.

"흐악!"

그러자 죽어 있던 크리스의 몸이 벌떡 일어났다.

검에 찔려 관통되었던 가슴의 상처도 깔끔하게 나아있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으며 상처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 죽을 뻔했다."

"이미 한번 죽었어. 언니."

그렇게 말하는 여성은 크리스와 꼭 닮은 외모를 한 소녀였다.

"시리스. 고마워."

"언니는 너무 잘 죽는단 말이야."

"솔직히 한 번에 가능할 줄 알았는데...."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여성, 시리스가 노려보았다.

"근데 나 아직 아무도 안 죽였는데 너무 가차 없이 찌른다."

"악마의 계약자를 본 사람의 당연한 반응이지."

"너무하네."

투덜거리는 크리스의 모습에 시리스는 웃었다.

그 웃음은 크리스와 닮았지만 묘하게 달랐다.

그녀는 크리스의 쌍둥이 여동생인 시리스 브라이트.

마라 파피야스의 두 번째 계약자였다.

동일한 악마를 계약자로 삼은 쌍둥이 자매는 둘 중 한 명이 살아 있으면 다른 한쪽을 살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다. 즉, 둘을 동시에 죽이지 않으면 다른 한쪽이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니 덕에 그를 단순히 매혹 능력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어."

"어떡하지? 나 솔직히 이제 걔랑 엮이기 싫은데...."

"그렇다고 GM이 부탁한 의뢰를 바로 포기하긴 그렇잖아."

악마의 계약자는 악마의 말을 보통 거역할 수 없다.

온화한 어투를 사용하는 마라 파피야스지만 그는 그런 면에서 가차 없었다.

그가 GM을 돕기로 한 이상 두 자매는 어떻게 해서든 악마의 의도에 어울려 줘야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둘의 목숨은 없었다.

"그럼 어떡하지. 우린 딱히 전투능력도 없잖아."

"괜찮아, 언니. 내가 봐둔 게 있어. 그걸로도 실패한다면 GM도 넘어갈 거야."

왜냐면 GM이 우리에게 의뢰를 맡긴 건 '그걸' 깨우기 위함일 가능성이 높다.

혹시 몰라 언니가 행동하는 걸 내버려두긴 했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은 그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냐.

답은 간단하다 이길 수 있는 걸 불러오면 된다.

마침 이곳에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두 마리나 있었다.

적룡, 드라이그 고흐와, 신화의 짐승. 베히모스가.

***

율리안 슈미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용이다...."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독일 서버의 플레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저것이 무엇인지 율리안은 신에게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율리안의 신은 지구 출신의 신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 출신의 신이었던지라 지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았다.

「캬아아아아!!」

붉은용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워낙 강대한 존재이기에 플레이어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용에게 플레이어들은 벌레와 별다를 것 없었기에 아직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에 띄면 죽이겠지.'

저것이 만약 GM이 말했던 센티넬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센티넬은 발견한 플레이어를 죽이도록 만들어진 괴물이었으니.

"율리안! 율리안!"

"쉿! 조용히 해. 용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 그래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용이 문제가 아니라니. 율리안은 자신을 부른 플레이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용보다 중요한 게 있어? 자칫하면 우리 다 죽게 생겼어!"

"그, 그건 그렇지만 용만이 아니야."

"뭐가?"

"센티넬이 용만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는 방금 전 자신이 녹화했던 영상이 하나 있었다.

"이걸 봐."

남자는 율리안이 잘 볼 수 있도록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 영상을 보는 순간, 율리안의 얼굴은 한층 굳을 수밖에 없었다.

"센티넬이 하나 더 있다고?"

영상에 나온 괴물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분명 센티넬이었다.

저런 게 절대 평범한 몬스터일 리가 없으니까.

거대한 어금니와 세계를 짓밟아 부실 것 같은 거대한 다리.

그 괴물의 이름은 바로 베히모스였다.

***

까마귀의 눈으로 확인한 상황에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왜 얘네 둘이 다 깨어나?

요즘 일이 꼬인 적이 많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역대급이다.

일반적인 센티넬도 아니라 용과 베히모스가 동시에 활동을 시작하다니.

그나마 플레이어들의 대처가 빨라 공격당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두 마리를 피해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베히모스와 드라이그 고흐의 공세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기서 플레이어들이 다 죽어버리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각 서버에 주요인물들이 모인 이벤트에서 그들이 죽게 되면 미래는 배드엔딩 급행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여태까지 기껏 사람들을 구해온 게 헛수고가 되어버린다.

"내가 지금 용이나 베히모스 중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있나?"

굳이 둘 중에 가능한 것을 찾자면 베히모스다.

베히모스는 아직 완전히 성장한 상태가 아니었다.

베히모스의 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거대해지는 것.

저 크기는 아직 성장하지 않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잘하면 죽일 수 있긴 했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와준다는 전제하에.

'하나, 방법이 있어.'

어쩌면 용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문제는 그것을 위해선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아서의 힘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 93

093. 베히모스(2)

"우와, 저게 대체 뭐야."

민아는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게 한숨 자고 일어나니 거대 괴수 두 마리가 글라스톤베리에서 포효하고 있는 거다.

솔직히 무슨 괴수 영화의 한복판인가 싶었다.

"여태까지의 센티넬과는 스케일이 다르군요."

민아의 옆에 있던 창우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이기에 둘의 강함을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겠지.

'이건 세한 오빠가 와도 안 되겠다.'

일반적으로 센티넬은 절대 이길 수 없는 몬스터다.

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민아는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여태 만났던 센티넬은 죄다 세한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아의 인식은 꽤 강하긴 하지만 세한의 걸리면 죽는 정도의 몬스터였다.

그런데 눈앞의 괴수들은 세한이 온다고 해도 딱히 방법이 없어 보였다.

파일 벙커?

그걸로 머리든 눈이든 어디를 공격해도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비주얼이다.

그나마 저 거대 멧돼지 같은 베히모스는 그럴 구석이라도 있었지만 용에게는 전혀 소용도 없어 보였다.

"...입을 벌렸을 때 몸속으로 들어가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지수가 말을 꺼냈다.

용의 비늘이나 베히모스의 가죽은 무척 강인해 보였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가해봐야 큰 타격을 줄 수 없겠지. 그렇다면 궁기를 죽일 때처럼 내부에서 날뛰면 어떨까 생각해 본 것이다.

물론 민아는 그런 지수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언니가 재생력이 제법 뛰어난 건 알지만 제네 입장에선 별거 없을걸? 입으로 들어가면 그냥 조금 질긴 껌 정도가 되지 않으려나. 아니, 몸이 좀 튼튼하니 엿 정도는 되겠다."

"질긴 껌... 엿이라니...."

그렇게 비유하니 지수도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지수 씨. 혹시 세한 씨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네."

지수는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눈에서 옅은 붉은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없어요."

지수는 맵에 표시된 세한의 마커를 보았다.

계속 확인하고 있었지만 용과 베히모스가 나타난 후로 세한은 초기에 갔던 숲으로 이동했다.

이후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대체 왜 거기에 간 건지 지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

"저거 네가 깨운 거니?"

"그럴 리가 있나. 나도 내 목숨이 아까운 건 안다."

모르간의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 보았지만 이번 만큼은 정말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저 둘을 깨워?

"저게 신수군요. 저와 같은...."

백설이는 모르간이 비춘 영상에서 나오는 드라이그 고흐와 베히모스를 보며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진짜 기린은 저 둘에 비해 전혀 꿇리지 않은 환상의 성수이기는 하다.

"그래서 여긴 왜 왔어? 이상한 남자까지 데리고. 여기가 네 집도 아닌데 너무 편히 오는 거 아니야?"

"모르간."

투덜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내 뒤에 잠자코 서 있는 아서의 등을 떠밀었다.

아서는 방금 전에 막 제정신을 차린 참이었다.

그는 모르간을 본 순간부터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자의 이름은 아서다."

"그래서?"

마치 아서라는 이름이 뭔 대수냐는 눈치였다.

하기야 아서라는 이름은 제법 흔하기는 하다.

"엑스칼리버의 주인이지."

"그래, 그래, 아서라면 엑스칼리버를... 뭐?"

"네가 지키고 있던 엑스칼리버의 주인이라고."

모르간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 말이 사실이냐는 눈치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직접 보기 전에는 안 믿어."

"그렇겠지. 그래서 직접 네 앞에서 뽑으려고 했다."

나는 허수공간에서 엑스칼리버를 뽑아 앞에 내려놓았다.

모르간은 엑스칼리버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으로 보다가, 이내 아서를 돌아보았다.

아서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아직 검을 뽑는다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텐데?"

"웬만하면 나도 너의 의견을 존중해 줄 생각이고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영상을 가리켰다. 드라이그 고흐와 베히모스의 모습이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저것들이 나타난 시점에서 나는 아서를 기다려 주기로 한 생각을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졌지. 너는 저것을 보고서도 망설임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나 보군."

"그렇지만 내가 검을 뽑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나는 있다. 네가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언제 녀석들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죽이게 될지 몰라. 너는 그걸 바라나?"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얼굴이다. 아마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아서를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알겠다."

아서는 영상을 한번 보고, 내 얼굴을 본 뒤 엑스칼리버에게 다가갔다.

"해 봐."

모르간도 그런 아서에게 짤막하게 답했다.

어디 한번 자신에게 자격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가볍게 말하긴 하지만 그녀는 아발론을 지배하는 마녀.

신화시대의 존재였다.

아서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검을 쥐었다.

팔에 힘을 넣고, 천천히 검을 위로 올렸다. 내가 했을 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엑스칼리버가 천천히 뽑히기 시작했다.

비석과 함께 들어올리는 것이 아닌, 오직 엑스칼리버만이 뽑히고 있었다.

스릉.

맑은 검명이 울리며 엑스칼리버가 비석에서 뽑혔다.

하얀 검날이 모르간의 공방을 밝게 비추며 광체를 발했다.

[최초의 SS급 장비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탄생하였습니다!]

아마 이 메시지는 전 세계 모든 서버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초로 등장한 SS급 장비의 주인.

아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를 보며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생각을 전부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검을 뽑았다.

"놀라워라."

모르간은 감탄한 얼굴로 그런 아서를 바라보았다.

또한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웃었네.

"까마귀, 안목이 좀 있네?"

"너보다는."

"건방지기도 하지."

모르간은 깔깔 웃으며 멀리 놓여있던 자신의 지팡이를 손으로 불러들였다.

손에든 지팡이를 쿵, 하고 지면에 내리찍자 자색의 마법이 아서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구부러졌던 등이 펴지고, 다리의 상처가 나았다.

"와아."

그 엄청난 치료마법에 백설이가 감탄한 눈치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렇겐 순식간에 오랜 장애를 치료하는 걸 보면 성녀 신유화보다도 치유 스킬에 능숙한 건지 모른다.

"세한."

몸의 장애가 나은 것을 느낀 아서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냐는 눈치다.

물론 나의 답변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 계약부터 맺죠."

***

각 서버의 플레이어들은 아이템을 모으던 것도 멈추고 최대한 몸을 숨겼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라이그 고흐와 대지를 돌아다니는 베히모스가 있는데 이벤트 따위가 중요하겠는가.

포인트 세 배는 중요하긴 했지만 그보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했다.

"요즘 진짜 되는 일이 없네."

아웃라이징의 길드 마스터 강태성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던전 레이스부터 뭔가 운이 안 좋긴했다. 그때도 갑자기 감당이 불가능한 재해가 자신을 덮쳤었지. 그 뒤로는 만용을 부리지 않고 최대한 조심조심 활동해온 강태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용과 베히모스란다.

앞발에만 밟혀도 강태성은 골로 갈 것이 분명했다.

"길드장님이 있었다면 뭔가 좋은 계획을 짜셨을 텐데."

"아서라, 그놈이라도 저런 것들을 상대로는 기도밖에 할 수 없을 거다."

제네시스의 부길드장 홍가은의 말에 강태성이 투덜거렸다.

서울에서 만났다면 철천지원수처럼 대했을 둘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참고로 박성혁은 본신의 무력은 대단치 않아 이번 이벤트에 참가조차 하지 못했다.

"자, 우선은 베히모스부터 토벌해야 합니다. 용은 어떻게 하기 힘들지만 베히모스는 죽일 수 있어요."

가장 먼저 둘의 움직임을 감지했던 독일 서버 율리안이 말에 주변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각 서버 10위 안에 드는 플레이어분들이 앞에 서셔야겠습니다. 제가 몬스터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스킬을 지니고 있는데, 베히모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거대해진다고 하더군요. 물론 한계는 있겠지만 내버려두면 큰 위협이 될 겁니다."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플레이어 에릭. 이미 센티넬을 사냥해본 경험이 있는 당신이 선봉에 서주셔야겠습니다. 가능하죠?"

"내, 내가?"

"그럼 누가 센티넬을 잡은 에릭이 또 있겠습니까?"

"끄응."

에릭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잘난 척하던 당시의 자신을 패고 싶었다.

'이번 이벤트는 최악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센티넬 처치도 빛이 바랬고, 이벤트 중에는 악마의 계약자에게 유혹당해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저 괴물들을 잡기 위한 선봉의 역할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다.

'내가 잡은 건 저런 괴물이 아니라고!'

어디까지나 싸워볼 만한 크기였다.

저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덤벼도 까딱하지 않을 괴물들이었다.

각 서버의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강한 이가 많다는 건 알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대략적인 작전을 끝낸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무기를 점검했다.

베히모스가 비교적 넓은 들판으로 향했을 때, 습격할 요량이었다.

"그럼 모두 준비하세요. 에릭 베히모스의 눈을 노려주세요."

"아, 알겠다."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에릭은 선봉에 섰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가장 앞에 섰지만 짜릿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저런 괴물에게 자신의 스킬이 먹힐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릭은 공포를 잊고자, 숨을 가다듬고 목청을 높였다.

"그럼 모두 돌...!"

돌격! 이라고 외치려던 에릭의 말이 멈췄다.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던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말을 멈춘 그의 모습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갑자기 겁이라도 집어먹은 건가?

"저거 뭐야."

에릭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플레이어들은 베히모스를 향해 걸어가는 단 한 명의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영국의 플레이어 중 몇몇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절름발이 아서잖아, 저거?"

워낙 눈이 좋은 플레이어들인지라 모습을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다리를 안 절어."

굽어 있던 등도 곧게 펴져 있었다.

또한 손에는 본적없는 검이 손에 들려있었다.

딱 보기에도 비범해 보이는 검이.

"저건...."

문득 아까 들었던 한 알림을 떠올렸다.

최초의 SS급 장비 엑스칼리버를 얻었다는 알림.

현재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아서의 검을 보니 그것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모든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크릉?」

대지를 쿵쿵, 울리며 걸어가던 베히모스의 거대한 머리가 돌아갔다.

자신에게 걸어오는 어리석은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크아아아아!!」

인간에게 겁을 주기 위해 포효를 내질렀지만 전혀 겁을 먹은 기색은 없어보였다.

그쯤 되니 베히모스도 슬슬 열이 받았다.

무거운 몸을 움직여 뒷발에 힘을 넣었다.

저 작은 인간을 짓밟아 버리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쿵! 베히모스가 한발한발을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다.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아서가 핏덩이가 되어 뭉개지리라는 걸 의심치 않았다.

베히모스에겐 그 정도의 기백이 있었다.

"후우."

그럼에도 아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베히모스를 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코앞까지 다가온 괴수의 턱을 피하고, 도리어 앞으로 파고 들었다.

마치 거대한 기둥과도 같은 녀석의 다리를 향해.

"으아아아아!!"

기합이라기보단 비명과 같았다.

온 힘을 다한 아서의 검이 베히모스의 다리를 향해 베어져 들어갔다.

베히모스에겐 고작 이쑤시개와도 같은 크기의 검이 다리에 파고들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거대한 다리가 쩍, 갈라지며 베히모스의 몸이 지면에 처박혔으니까.

「그아아아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베히모스가 비명을 질렀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앞다리가 하나 사라진 탓에 제대로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세한!!"

아서가 베히모스가 아닌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정확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향해.

아니, 정확히는 까마귀가 아니었다.

새까만 날개를 펼친 세한이 하늘에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거대한 뭔가가 들려 있었다.

검이라기보단 거대한 괴수의 목을 찍어 부수기 위한 병기가.

세한은 지상으로 활강하며 거대한 무기를 치켜들고 베히모스의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으직.

베히모스의 두터운 가죽을 찢고 목뼈에 파고드는 소리가 평원에 울려 퍼졌다.

# 94

094. 베히모스(3)

대기를 찢는 포효가 글라스톤베리 전역에 울려 퍼졌다.

베히모스에게 고통이란 낯선 감각이었다.

두터운 가죽은 어떤 방어구보다 든든했으며, 그 뼈는 어떤 금속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그런 베히모스가 지금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목을 파고든 거대한 검에 가죽이 찢고 뼈에 박혔다.

워낙 두터운 골격을 지닌 탓에 그대로 베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베히모스가 날뛰기 시작하자 푸른 들판이 뭉개지며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세한은 날뛰는 베히모스의 등에서 떨어져 하늘에서 날아올랐다.

등에는 궁기의 날개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혹시 몰라 만들어 뒀던 걸 이렇게 빨리 쓸 줄이야."

베히모스의 목에 박힌 대검을 바라보며 세한은 중얼거렸다.

날의 길이만 3미터가 넘어가는 무기다.

인간이 아닌 거대한 몬스터에게 피해를 주기 위한 무기로, 상당량의 에스더와 미스릴, 그리고 겨우 구한 만년한철이 함유된 무기였다.

등급도 무려 A급 장비.

세한이 지닌 무기 중에선 파일 벙커와 함께 가장 급수가 높은 무기였다.

"아서, 녀석의 다리를 공격해서 최대한 움직임을 저지해 줘!"

"전부터 어러운 부탁만 하는군,"

베히모스의 머리위를 날아가는 세한을 보며 아서가 투덜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한은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만을 했다.

파티를 해달라거나, 엑스칼리버를 뽑으라거나.

가족을 잊으라거나.

결과적으로 모두 세한이 말한 대로 되었다.

하지만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

「그르르르.」

거대한 괴수의 얼굴이 보였다.

크기만 보자면 레이드 보스와 다를 것 없다.

족히 머리의 크기만 10미터에 가까운 베히모스의 거체.

문제는 이게 시작이라는 점이다.

베히모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커지며 최종적으로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해진다.

아서는 손에 쥔 엑스칼리버를 꽉 쥐었다.

방금 전 베었던 베히모스의 다리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치유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상처를 입히면 되는 법.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그의 '파티'가 되며 언제나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가족의 환영도 보이지 않았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지금은 슬퍼할 틈이 없었다.

웅웅웅.

엑스칼리버에 마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본디 아서는 제대로 된 무기를 지니지 못했다.

왜냐면 그의 스킬을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검이란 소모품이었다.

한번 사용하면 부서지는 소모품.

하지만 엑스칼리버는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낼 수 있었다.

"크으윽!"

강력한 마력의 집중에 팔이 떨렸다.

그럼에도 아서는 정면의 베히모스를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고 다시 움직이려는 녀석을 향해 달렸다.

아서가 지닌 스킬은 '신념의 응집'.

S등급 스킬이며 등급에 맞게 강력한 스킬이다.

마력이나 힘과 같은 에너지를 응축시켜 위력을 강화시킬 수 있고 그 위력은 일격에 베히모스의 다리를 찢어발길 정도로 강력하다.

콰아아아아앙!!

검격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일격이 펼쳐졌다.

이번엔 베히모스의 한쪽 다리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통째로 뜯겨 나갔다.

그럼에도 베히모스는 전진했다.

이제 막 재생한 다리를 내딛으며 앞으로 달렸다.

그것을 본 율리안이 외쳤다.

"모두 보고만 있을 겁니까?! 저게 날뛰기 전에 모두 공격하세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도 각 서버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들.

베히모스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지금이 바로 적기임을 깨닫고 초원을 질주했다.

한 명 한 명이 이름난 신의 아바타.

혹은 악마의 계약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베히모스를 향해 자신의 능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센티넬 살해자 에릭이나, 붉은 열선을 긋는 천상환의 모습이 보였고, 각종 마법을 사용하는 이수린도 있었다.

각 서버에서도 이름난 플레이어들의 공격이 가해지니 아서를 향해 돌진하던 베히모스의 몸은 플레이어들의 무수한 공격에 점차 밀려났다.

튼튼한 가죽도 조금씩 상처를 입고 있으며 균형을 잡기 힘들어했다.

뭣보다 그 틈을 노린 아서의 공격이 재차 가해졌다.

콰쾅!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결국 베히모스의 몸이 꺾였다.

두 개의 앞발을 모두 크게 상처 입은 베히모스는 이제 분노가 담긴 포효가 아닌 고통에 의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베히모스는 죽지 않았다.

도리어 상처입은 베히모스의 몸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처 입던 공격도 점차 먹히지 않았다.

플레이어들도 그것을 알았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 이 괴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믿었으니까.

'저놈은 처음에 공격한 뒤로 뭐하고 있는 거야?'

플레이어들은 하늘에 떠서 현 상황을 방관 중인 세한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처음에 일격을 가한 후, 그는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지만 하늘에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세한은 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거 생각보다 컨트롤이 어려운데.'

세한은 아서와 파티 계약을 맺으며 스킬을 교환했다.

당연히 얻은 스킬은 신념의 응집.

정신약체 내성 S급과 교환하여 받아낼 수있었다.

아서에게 필요한 건 온전한 정신이었고, 세한은 가진 무기를 보다 강화시킬 만한 스킬이 필요했으니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고도의 집중력과 마력 컨트롤이 필요하다는 것.

아서는 이것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지만 이제 처음 사용해 보는 세한으로선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이드라의 스킬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마력 운용에 자신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하루종일 스킬을 사용해도 마력만 낭비하는 꼴이 되었으리라.

웅웅웅.

무기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에 세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그럼 이제....'

세한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까마귀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지만, 이젠 육안으로도 보였다.

이쪽으로 날아오는 붉은 용이.

"잠깐, 저거 드래곤 아냐?"

그것을 본 건 비단 세한만이 아니었다.

베히모스와 싸우던 플레이어 중에서도 하늘에서 날아오는 용을 본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베히모스에 이어 용까지 들이닥치자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나도 버거운데 둘이나!'

심지어 드래곤은 GM이 결코 덤빌 생각도 말라던 몬스터가 아닌가.

눈앞의 베히모스보다도 강한 힘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것을 본 세한은 마법의 단어를 외쳤다.

"아서!"

"...설마 저것도 내가 막아야 하나?"

"사기 템을 들었으면, 든 값을 해야지."

세한의 말에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거체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베히모스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한층 거대해지고, 한층 강해졌다.

이번에는 엑스칼리버로 공격한다고 해도 방금 전 같은 큰 상처를 주기 힘들 것이다.

"도리어 두 마리가 동시에 덤벼서 다행이군."

누가 듣는다면 미친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세한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저것이 아서왕의 전설에서 등장하는 적룡이라면.'

만약 저 적룡이 모르간 르 페이와 마찬가지로 신화시절부터 이곳에 남아있던 용이라면, 아서를 죽일 수 없다고.

도리어, 가장 강한 우군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크오오오오!!」

용의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아래에서 거체를 움직이던 베히모스조차 움찔할 정도의 포효였다.

플레이어들 중 몇몇은 그 포효를 듣는 것만으로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였다.

이 장소에서 도망칠지 말지 망설이는 플레이어들 속에서 아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지상에 내려선 적룡을 향해서.

처음에는 울부짖으며 다가오는 아서를 향해 물어뜯으려던 적룡이었지만 뭔가를 느꼈는지 거대한 입을 다물었다. 높이 들고 있던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아서를 붉은 눈으로 응시했다.

용은 잠시간 아서를 바라보았다.

베히모스를 공격하는 플레이어들도 그런 용과 아서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용이 아서를 한입에 삼켜 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용의 행동은 달랐다.

「놀랍군.」

용이 말했다.

방금 전의 울음소리와는 다른 인간의 음성이었다.

정확히는 인간의 음성을 흉내 내어 의사를 전달하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설마 그 검을 든 자를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거 센티넬로서 일하기는 글렀는지도 모르겠어.」

마치 이미 한번 본적이 있다는 것 같은 말에 아서는 얼굴을 굳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진짜 적룡이었다.

다만 놀란 점은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센티넬이라는 몬스터로 분류되어 지성이 없는 존재라 생각했었다.

단지 엑스칼리버에 반응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말을 걸어올 줄이야.

머뭇거리던 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설의 적룡이 어째서 한낱 센티넬이 된 거지?"

「그것이 시스템이 내게 준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플레이어가 되었듯, 나는 몬스터가, 그중에서도 센티넬이 되었다.」

세계의 변화는 인간에게만 닿아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얼마 남지 않은 신화의 생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거역할 수는 없는 건가? 적룡인 당신이라면...."

「우주의 법칙을 아우르는 존재를 필멸자가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대나 나나 다르지 않다. 다만 나는 좀 더 오래살고 거대한 몸을 지니며, 강한 마력을 지닌 존재일 뿐.」

"그렇다면 몬스터가 되었다는 것도 이상해. 도리어 같은 플레이어가 되는 게 맞지 않나?"

「플레이어는 신을 닮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지. 자신과 닮았기에 '아바타'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용은 그렇게 말하곤 자신을 피해 플레이어들을 공격하는 베히모스를 응시했다.

또한 자신의 뒤에 있는 어떤 존재의 기척을 느꼈다. 검의 주인을 만난 기쁨도 잠시, 용은 천천히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검의 주인이여. 많은 것을 말해주고 싶지만 역할 상 그럴 수 없구나. 대신 신화의 맹약에 따라 지금 한 번은 도움을 주도록 하지.」

"잠깐, 좀 더 자세히 말을...!"

아서는 다급히 외치다가 문득 드라이그 고흐의 뒤편에 있는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GM 아키넨을.

적룡은 그 사실을 알고, 최소한의 도움만을 준다 말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적룡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었다.

본래 센티넬은 눈에 보이는 플레이어를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센티넬에게 주어진 역할이니까.

하지만 신화시대의 맹약은 센티넬이 되기 전부터 적룡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시스템의 제약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

용은 포효하며 베히모스를 향해 덤벼들었다.

충분히 거대해진 베히모스였지만, 적룡은 그보다 더 컸다.

순수한 육체적인 능력만 보자면 본디 베히모스가 우위였지만, 아직 완전한 형태를 취하지 못한 베히모스였기에 적룡의 앞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괴수의 몸싸움에 플레이어들은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날카로운 앞발로 베히모스의 가죽을 뚫고 거대한 거체를 완벽히 고정시킨 순간, 하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세한이 움직였다.

'역시 용이라 눈치가 빠르군.'

충분히 목을 물어뜯어 죽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베히모스를 죽이는 걸 세한에게 양보했다는 의미다.

철컥.

세한은 파일벙커를 정면으로 향했다.

지금 세한의 팔에 장착된 파일벙커는 앞이 뭉툭했다.

여태 사용했던 끝이 뾰족한 파일벙커와는 그 형태부터 달랐다.

'펑범한 파일벙커를 사용해 봤자 가죽도 뚫지 못할 테지.'

하지만 아서의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이미 상처가 나 있는 부위를 노린다면.

일격에 베히모스를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원래 이놈을 잡으려고 준비한 건 아니었지만...."

목표는 맨 처음 베히모스의 목에 박아 넣었던 대검.

대검의 날 윗부분은 이런 때를 상정한 듯, 폭이 상당히 넓었다.

세한은 활강하며 대검을 향해 파일벙커를 조준했다.

이미 파일벙커에는 '신념의 응집'을 통해 모인 강대한 마력이 모여 있었다.

평소의 파일벙커보다 몇 배는 오랫동안 충전해야 되지만 위력도 몇 배는 불어났다.

그 위력은 베히모스의 목에 걸린 대검을 앞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적룡이라도 베히모스를 완벽히 붙잡아두는 건 그리 길지 않을 터.'

그러니까 기회는 단 한 번.

찰나에 가까운 시간을 노려 세한의 파일벙커가 쏘아졌다.

콰콰쾅!!

파일벙커에 얻어맞은 대검이 앞으로 밀려나며, 마치 기요틴처럼 수직으로 떨어졌다.

베히모스의 질긴 가죽도.

두터운 목표도.

강인한 근육도.

단번에 절단하며 대지에 대검이 쿵, 박혔다.

그리고 그 위로, 잘린 베히모스의 머리가 떨어지며 땅을 울렸다.

단 한 방.

시끄럽던 글라스톤베리의 들판이 조용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 95

095. 집착의 행방(1)

베히모스를 쓰러트리자 드라이그 고흐는 순순히 물러났다.

아서와의 대화를 엿들은 결과, 이대로 물러나 한숨 잔다던가.

센티넬이니 다시 깨어나면 그때는 정말 죽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며 미카엘의 탑 아래에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이동했다.

[업적 '신수를 죽인 자'를 습득하셨습니다.]

[강력한 센티넬을 쓰러트린 보상으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좋네.'

역시 미리 센티넬들을 죽여 '센티넬 사냥꾼'을 얻어둔 효과를 톡톡히 보는 기분이다.

센티넬 사냥꾼의 효과인 '모든 센티넬에게 30퍼센트 추가 피해'는 한 방 공격이 강할수록 얻는 이득이 크다.

신념의 응집으로 뻥튀기 된 데미지에 30퍼센트 데미지가 추가되니 아무리 베히모스라도 머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설마 이런 플레이어가 있었을 줄은 몰랐군요. 오늘 개안한 느낌입니다. 하하!"

지상에 내려서자 한 플레이어가 말을 걸어왔다.

다른 이들은 내 눈치를 살피느라 다가오지 못한 걸 보면 상당히 대범한 것 같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죠."

"겸손하시군요. 아, 제 이름은 율리안입니다."

"전 김세한입니다."

"김세한.... 한국인이셨군요."

"예, 뭐."

율리안은 내 이름을 잠시 동안 되뇌었다.

아마 내 이름을 기억해 두려는 것 같았다.

'이자도 여기 있었나.'

율리안은 나도 아는 자다.

독일 출신 플레이어로 다른 별의 신과 계약한 플레이어.

상당히 머리가 좋고, 개인 무력도 뛰어나다. 삼국지로 치면 주유와도 같은 이였다.

율리안은 내 얼굴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주변 시선 때문에 바로 이동할 생각이라서요."

"아...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율리안은 영 아쉽다는 눈치였다.

아마 나와 끈틀 만들어두고 싶은 거겠지.

아무래도 이번 이벤트로 느낀 게 많았을 것이다.

이제 하나의 도시나 나라로 국한되지 않고, 전 서버가 하나로 연결되게 되리라 예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라도 뛰어난 플레이어를 알아두는 게 중요했다.

율리안도 필시 그것을 알고 있는 거겠지.

"어차피 나중에 기회가 오게 될 겁니다. 그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씩 웃는 율리안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펼쳤다.

율리안과 내가 태연히 대화하고 있자, 궁금한지 스멀스멀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날아올랐다.

지금 붙잡혀 봐야 괜히 귀찮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나는 아서에게 쪽지를 보낸 뒤, 바로 장소를 이동했다.

장소는 바로 호수의 밑바닥, 모르간의 보금자리인 아발론이다.

밖에 돌아다녀 봐야 플레이어들이나 신들의 옵저버에 시달릴 게 분명했으므로 잠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신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이슈가 되고 있는 모양이고.

'이쯤되면 GM이 한마디를 할 법도 한데....'

예상외로 아키넨은 별말이 없었다.

계속 옆에서 지켜보기에 끼어들 생각인가 싶었는데, 그냥 가버렸다.

나로선 좋은 일이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GM마다 성격이 다른지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까마귀, 넌 다 해결됐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모르간의 공방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베히모스를 죽인 것치고는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GM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거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 좋은 거 아니야?"

"하지만 그게 이상해."

원래 GM이라는 것들이 이렇게 쿨한 족속이 아니다.

자극적인 이벤트가 스무스하게 끝나버리면 퍼블리셔로부터 한 소리를 듣다보니 최대한 일이 꼬이게 만들곤 한다.

대표적으로 귀가 얇은 아카터스는 본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으면 플레이어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일을 벌인다.

"아서."

나는 모르간의 말에 적당히 대답한 후 아서에게 말을 걸었다.

아서는 나보다 먼저 모르간의 공방에 와 있었다.

아마 쪽지를 보내기 전부터 이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 어려웠을 테니까.

"아직도 답이 안 나온 모양이네."

"그렇지. 나란 놈은 그런 놈이니까. 이 검을 얻었다고 해서 없던 용맹이 생기지는 않는 법이야."

엑스칼리버를 뽑은 그는 이제 영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름은 몰라도 '그 SS급 아이템 가진 놈?'이라는 수식어는 계속 그를 따라다닐 거다.

특히 영국 서버는 타 서버에 비해 약했으니 아서와 같은 플레이어가 필요하겠지.

전생의 아서는 그런 사실을 알았기에 국가 자체를 하나의 길드로 만들었다.

사실상 영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그래도 이번 이벤트가 끝나고 한번 생각해 봐. 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당신은 전부터 나를 이상하게 신뢰하는걸."

"난 감이 좋거든."

씩 웃으며 말하자 아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차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아서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지는 않을 거다.

나는 그저 아서가 강해질 수 있는 길로 좀 더 빨리 인도해 줬을 뿐이다.

앞으로는 분명 그에 따른 시련도 뒤따라오겠지.

하지만 그것을 모두 극복했을 때, 아서는 전생보다 훨씬 강한 플레이어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래, 그래야만 한다.

내가 녀석을 파티원으로 삼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세한, 그래서 이벤트는 어떻게 됐나요?"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백설이는 센티넬을 잡은 것보다 이벤트의 진행이 더 궁금했던 모양이다. 백설이의 입장에선 이벤트가 끝나야 집에 들어가니 그럴 수밖에.

특히 얼굴이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모르간에게 마법을 배우는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결과야 사실상 이미 나온 상태지."

나는 아서의 허리춤에 있는 엑스칼리버를 가리켰다.

저게 무려 100점짜리다.

저 점수를 채우려면 다른 서버 사람들이 이를 갈며 모아야 할리라.

물론 영국 서버의 플레이어들도 놀고 있을 리는 없으니 결과적으로 1등은 영국이 되는 셈이다.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뿐이 아니라 전 영국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당신에게 고마워 할 거야."

"별로 감사받으려 한 짓은 아니니 됐어. 이 일로 영국, 나아가 유럽 쪽 플레이어들이 강해지는 계기가 된다면 그걸로 좋아."

"가끔 당신은 이상하게 이타적이군."

아서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물론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럼 나도 퀘스트의 마무리를 하러 가볼까."

"세한,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이벤트에서 적당한 아이템이라도 구해볼까 생각하며 나가려는 순간, 백설이가 내 옷깃을 잡았다.

똘망똘망한 눈이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눈치다.

"그럴 순 없지."

모르간의 말이 들리자 백설이의 몸이 붕 떠올랐다. 모르간이 깔깔 웃으며 자신의 곁으로 데려가버린 것이다.

"세, 세한!"

마치 마녀에게 잡혀가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뻗는 백설이였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모르간쯤 되는 대마녀에게 마법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까.

"다음에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으, 으으으~~!"

결국 백설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는 기간 동안 계속 모르간의 마법과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일주일 후.

이벤트 퀘스트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영국이 1위.

예상외였던 점은 2위가 한국이었다는 것이다.

***

"...실패했다고요?"

"그렇게 됐네."

후, 하고 마라 파피야스가 웃으며 말했다.

아카터스는 뭐라 말을 잇기 힘들었다.

'적룡에, 베히모스의 위치까지 알려줬는데 실패했어?'

더군다나 계약자의 힘도 통하지 않았다.

육체 능력이 강한 건 알았지만 정신 방어까지 대비를 해뒀을 줄이야.

후배인 아키넨 녀석이 실실 웃던 것이 걸리던 참이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이런 말하긴 뭐 하지만."

마라 파피야스는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조금의 위협조차 되지 못했어."

"...."

"조금 놀라게 한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뿐이야. 그 플레이어는 이상할 정도로 강하더군."

"즐거우신 얼굴이군요."

"강한 플레이어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 좋은 자극이지. 후에 열릴 마계 무투회에선 어떤 모습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정도야."

후후후, 거리며 웃는 마라 파피야스의 말에 아카터스는 속이 뒤집어졌다.

그의 말대로다.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일반적인 센티넬도 아닌 적룡과 베히모스를 풀어놨음에도.

'적룡 이 새끼만 말을 들었다면.'

마라 파피야스의 말에 따르면 적룡이 베히모스를 역으로 공격하여 일이 이렇게 된 모양이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센티넬급 몬스터를 아카테스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튜토리얼처럼 센티넬의 타이틀을 단 정도의 몬스터는 만들 수 있어도, 적룡 정도 되는 몬스터는 GM의 권한으로 어찌하지 못한다.

'시발.'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센티넬 같은 몬스터로 녀석을 죽이려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이번 일로 깨달았다.

궁기 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녀석은 몬스터의 공략법을 안다.

가장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며 이미 어떤 몬스터와 싸우더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대비해 뒀을 터.

"이대로는 안 돼. 그 새끼를 죽이려면 몬스터로는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아카터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

'결국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어.'

지수는 뾰루퉁한 얼굴로 계속 맵을 바라봤다.

세한의 맵마커는 여전히 호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간혹 움직이더라도 이쪽으로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너무해.'

이벤트가 완전히 종료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있었다.

설마 이벤트 기간 내내 얼굴 한번 보이지 않을 줄이야.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지만 적어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 해도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저벅.

세한의 맵 마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지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있는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다가오는 플레이어일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지수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니 꽃향기에 이끌린 나비처럼 플레이어들이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 한번 하지 않는 지수의 모습에 대부분 질려 떠났지만, 간혹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고 덤벼드는 이들도 있었다.

서울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검은색 긴 생머리의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건 서울의 상식이었다.

"아픈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저리 가세요."

현재 무척 기분이 안 좋은 지수는 미리 경고를 보냈다.

평소에 아예 무시를 하던 것에 비하면 제법 친절한 행동이었다.

저벅, 저벅.

그러나 상대는 도리어 지수를 향해 다가왔다.

지수의 말을 신경 쓰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꼭 저런 사람이 있지.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는 직접 몸으로 알려주는 게 빨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지수는 몸을 굳혔다.

왜냐면 아는 얼굴 이었으니까.

"누나."

바로 자신의 동생, 한현수.

훤칠한 신장에 세련된 얼굴.

자신의 동생이었지만 멋진 남자로 분류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가진 이였다.

지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설마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야, 누나.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어머니에게 듣기는 했지만 조금 걱정했거든."

"...엄마와 함께 있어?"

"응."

싱긋 웃는 그의 모습에 지수 역시 묘한 안도를 했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신 모양이다.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동생은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적어도 동생은 자신처럼 대하지는 않았으니까.

솔직히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동생을 보고 있으면 조금 불안했다.

자신의 마음속에 내제된 본성이 일렁이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수는 최대한 동생을 똑바로 보지 않도록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자, 한지수.'

지수는 머릿속으로 세한을 떠올렸다.

적어도 어머니는 살아 있으며, 자신에겐 세한이 있었다.

그러니 괜찮다.

"그래서 무슨 일이니? 네가 나에게 왔다는 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지?"

"너무하네. 그냥 누나를 우연히 발견해서 왔을 수도 있잖아?"

"난 너의 누나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아."

"후후."

현수는 낮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누나는 여전히 신중하네. 언제나 그렇지. 누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살았어."

"...다른 소리하지 말고."

"매정하네. 특별히 대단한 건 아냐. 한번 서울에서 만나자는 거지."

만나자는 말에 지수가 퍼뜩 시선을 올려 자신의 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동생의 목에 익숙한 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을 상징하는 마크.

지수가 수없이 죽인 그믐달 길드의 마크였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셋이서 식사라도 하자. 누나."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물론 지수는 웃을 수 없었다.

# 96

096. 집착의 행방(2)

"꺄아아아아악!!"

서울 신림, 한 건물 안에서 십대로 보이는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야!"

"수아야, 왜 그래?!"

갑작스런 비명에 이미 일어나 잇던 다른 여성 두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 두 명의 이름은 지선과 혜미로, 최근 수아와 합류한 여고생들이었다.

'자운 오빠도 지금 없는데 뭔 일 난 거 아냐?'

아자젤과 새롭게 계약을 맺은 계약자들이었지만 그 힘은 대단치 않았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명을 지른 수아를 안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잘 봐봐, 얘가 그냥 비명 지르진 않았을 거 아냐."

그래도 없는 건 없는 거였다.

수아는 숨을 몰아쉬다 자신을 안고 있는 지선의 손을 잡고 말했다.

"괘, 괜찮아요. 조금 악몽을... 아니 미래를 봤을 뿐이에요."

조금 민망하다는 듯 중얼거린 수아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이다.

수없이 끔찍한 미래를 봤던 수아지만 이렇게 비명을 지른 건 오랜만이다.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았다.

그런 수아의 마음을 느꼈는지 혜미가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어, 어떤 미래인데?"

"간단히 말하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요."

그뿐 아니라 깨어나기 직전엔 수아의 심장도 뽑힌 참이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깬 것도 그런 이유다.

"...다 죽어? 왜?"

"그때 한번 만났던 검은 옷을 입은 언니 기억하세요?"

검은 옷을 입은 언니라고 하면 기억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운의 공격을 얻어맞고 목이 돌아갔음에도 죽지 않았던 여성.

압도적인 힘과 공포를 느끼게 해주는 그녀의 모습은 둘의 기억 속에도 선연히 남아있었다.

"그, 그 언니가 다 죽여?"

"네."

"확실히 그럴 거 같은 언니이긴 했는데...."

갑자기 어쩐 이유로?

자운의 말로는 그 여성은 까마귀라는 자에게 통제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요."

"확실하지 않아?"

"네,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솔직히 어찌될지 모르겠어요. 수많은 분기점이 있고, 그중에선 서울 사람들이 모두 죽는 미래가 보여요."

"죽지 않는 것도 있는 거지?"

"네. 조금 불투명하지만요."

그건 아마 그녀가 운명을 거역한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을 거역한자.

원래는 죽었어야 했지만 어떤 연유로 살아버린, 운명을 거역해 버린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수아가 붙인 말이다.

예를들어 자운이 그랬고, 자신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 여성도 결정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운명이라는 정해진 레일에서 벗어나 버린 존재라는 거다.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수아는 침체된 얼굴로 방금 전 자신이 보았던 꿈을 떠올렸다.

사람들을 학살하며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여성.

천살의 업을 지닌, 학살자가 그곳에 있었다.

***

이벤트 퀘스트가 끝나고 우리는 모두 귀환할 수 있었다.

이번 퀘스트에서 가장 이득을 본 건 단연 이민아.

그녀는 플레이어들이 용을 잡는 동안 다른 아이템을 잔뜩 모은 것은 물론, 플레이어들이 모아둔 아이템을 몰래 가져왔다.

간단히 말해서 훔친 것이다.

오랜만에 민아의 본성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하기야 약탈이 허용되는 이벤트였으니 하등 문제는 없지.

변신능력을 가진 민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훔칠 수 없는 물건은 없다고 봐도 되니까.

"헤헤헤."

민아는 이번 이벤트에서 얻어온 아이템들이 마음에 드는지 자기 방에 하나하나 장식해 두었다.

등급도 다양하다.

최소 C등급부터 무려 A등급 아이템까지 있었다.

아마 A등급 아이템이 플레이어들에게서 훔쳐온 물건이 아닐까 싶다.

던전 레이스도 그렇지만, 포인트를 버는 퀘스트에서 민아의 활약은 대단했다.

덕분에 이번에도 디어사이드 길드에 대한 위명이 늘어난 건 당연지사.

사실상 서울 최고는 물론,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는 디어사이드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 형편이었다.

그건 그렇고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지수의 분위기가 묘한데.'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찾지 않은 탓인지 지수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단순히 삐진 것 같지는 않다는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 인사라도 할 겸 만날 걸 그랬나.'

변명을 하자면 나도 아서를 설득하느라 바빴다.

거기에 백설이가 모르간에게서 어떤 교육을 받는지 볼 필요도 있었다.

"아."

그때, 지수가 묘한 감탄사를 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선을 보면 대충 쪽지함이 있는 위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쪽지가 온 모양이다.

'지수가 쪽지를 주고받을 사람이 있나?'

딱히 신의 아바타가 된 것도 아니고, 나를 제외하면 특별히 친분을 쌓은 플레이어도 없다.

아무에게나 친하게 지내는 민아 정도.

하지만 민아는 지금 이번 이벤트에서 얻은 아이템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으니 짐작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수야."

"네, 네?!"

"왜 그렇게 놀라."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수는 묘하게 불안해 보였다.

이 녀석을 꽤 오랜 시간 봤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세계가 처음 게임으로 되었을 때나 이런 얼굴을 했었지.

"방금 쪽지함 보고 있었지? 혹시 누구에게 왔는지 물어도 괜찮아?"

"아, 눈치채셨나 보네요"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다지 상관없어요."

"누군데?"

"제 동생이요."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

"동생이 있었어?"

"네, 저보다 한 살 어린 남동생이 있어요. 키도 크고 뭐든지 잘하던 애예요. 저랑은 다르죠."

"내 생각에는 너도 충분히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오빠 덕이죠."

그렇게 말해준다면야 고맙지만, 내 말은 거짓 없는 사실이다.

설마 동생은 지수 이상의 재능충이라는 말인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데.

지수 이상의 재능을 지녔다면 사실상 린을 위협할 정도의 재능을 지녔다는 이야기다.

그런 플레이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생에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근데 그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뭐야?"

"한번 만나자고 해서요."

"이런 말하긴 좀 그렇다만... 동생과 사이가 별로 안 좋나 보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좀 복잡해요."

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도 함께 계신다고 했거든요."

"그럼 잘됐네. 너 전부터 어머니 찾아다녔잖아."

"그렇죠. 근데 막상 찾아오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진 않네요."

차마 왜냐고 묻기 힘들었다.

그만큼 지수의 표정이 어두웠으니까.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머니는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정확히 말하자면 저를 두려워하는 거 같아요."

"...왜?"

"글쎄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는 지수의 모습은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웃음에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사람에겐 개인 사정이라는 게 있다.

솔직히 지금 내가 지수에게 질문했던 것들도 사실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던 건 지수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즉,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꺼려진다는 거군."

"네. 그렇죠."

"그럼... 같이 가줄까? 어차피 지금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하자 지수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오늘따라 친절하시네요."

"아무래도 네 일이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수는 조금 숨을 들이켰다.

표정을 관리하고 있지만,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상당히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조, 좋아요. 그런 것도 나쁘지 않네요. 조금 당황스럽지만."

"뭘 당황할 것까지야."

"맞아, 어머니에게 한번 소개시켜 드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요. 그리고 어머니도 저보단 옆에 세한 오빠가 있는 걸 좋게 생각할 거예요. 다만...."

"다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건 가시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여기서 또 문제가 있다?

나는 의문스러웠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지수의 가정사도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지수는 정신적으로 굉장히 튼튼해 보이긴 하지만 가족이 문제가 되면 또 다를지도 모른다.

전생의 은인이기도 하며, 우수한 자원인 지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건 나도 사양이었다.

***

내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건, 지수의 동생이 만나자고 한 약속 장소로 가면서부터였다.

처음에는 크게 문제없었지만, 가면 갈수록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 아닌, 악마의 하수인들로 들어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뒷골목.'

말이 뒷골목이지 사실상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 그리고 그에 준하는 무리들이 모여 있는 서울의 어둠이다.

본래라면 주원이 장악했을 구역.

보통 몬스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던 지역들이 여기에 속했고,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라면 잘 오지 않는 장소에 그들이 똬리를 틀었다.

참고로 이곳은 나도 기억에 있는 장소다.

왜냐면 본래 더 씬의 본거지가 있던 지역이었으니까.

"이거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네."

지수의 표정은 상당히 안 좋았다.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니 당장 무기를 꺼내지 않은 것도 잘 참고 있는 거다.

솔직히 나도 그다지 기분은 좋지 않다.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 혹은 뒷세계의 플레이어들은 되도록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도 않은 녀석들을 박살 낼 생각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해?"

"분명 이곳에 있는 할리스 벅스는 하나뿐이라고 했어요."

할리스 벅스는 커피 체인점 중 하나다.

이런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에서 할리스 벅스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있네.'

생각보다 멀쩡한 간판이 들어왔다.

정말로 제대로 된 할리스 벅스가 이곳에 존재했다.

딸랑.

"어서옵...."

할리스 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마 카페 알바생인지 주인인지 모를 남자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다가 말을 멈췄다. 눈은 점차 크게 떠지고 얼굴은 점차 파랗게 질려갔다.

그 시선은 지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 악마 학살자."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주춤주춤 물러섰다.

왜냐면 남자는 악마의 하수인이었기 때문이다. 뒷골목답게 카페 알바생마저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살아남기 힘들긴 하겠지.

'그나저나 지수가 생각보다 되게 유명하네.'

이쪽 세계에서는 나보다 훨씬 이름이 알려져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슬슬 몸을 빼려던 남자를 본 지수가 옅은 한숨을 쉬며 오른팔을 슥 움직였다.

휘리리릭! 콱!

"히이익!"

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낸 지수가 남자를 향해 던졌다.

물론 맞출 생각으로 던진 건 아니고 단순 위협용이다. 벽에 박혀 있는 손도끼를 남자는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네, 네?"

"아메리카노, 두. 잔."

지수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악인을 보면 반응하는 지수는 당장에라도 상대를 죽이고 싶은 눈치였지만 참는 게 똑똑히 보였다. 카페 내부를 잠식하는 살기에 남자의 얼굴이 빠르게 끄덕여졌다.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그런 남자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지만, 유혈사태를 일으킬 생각은 없는지 지수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벽에 박혀있던 손도끼가 뽑혀 지수의 손에 잡혔다.

'회수기능을 만들어둔 건가.'

흉성의 학살자를 제외하면 지수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무기는 저 손도끼다.

사용하기 쉽고 투척도 할 수 있어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갈수록 무기의 질도 올라가니, 이젠 던지고 자동으로 회수할 수 있는 기능까지 붙인 모양이다.

"여, 여기 있습니다."

남자는 우리 둘에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건네준 뒤 슬슬 눈치를 살폈다.

지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깊숙이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카페 밖으로 나갔다.

"동생은?"

"곧 온다고 방금 쪽지로 왔어요."

그렇게 대략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10분 정도 기다리자, 카페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대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훤칠한 신장에 여유 있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누나, 생각보다 일찍 왔네."

지수는 동생이 있는 곳을 살피다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아니 어머니는?"

"그건 천천히 말해줄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다 나를 발견하고는 발을 멈췄다.

"...누구?"

나한테 물은 게 아니다. 지수에게 물은 거다.

"내가 좋아하는 오빠."

지수는 덤덤하게 답했다. 너무 심플하게 답해서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다.

아니 잠깐, 오해하지 말자. 저 태도를 보면 그냥 순수하게 사람으로서 좋아한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음, 분명 그런 거겠지.

"좋아해? 누나가?"

반면 남동생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이 조금 삐걱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덤덤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지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그렇지, 농담이었구나?"

마치 지수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말도 안 된다는 눈치다.

지수는 그런 동생을 힐끔 바라본 뒤, 아메리카노가 담겨있는 유리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농담 아닌데."

"어?"

"농담 아니야."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동생의 웃음이 사라졌다.

참고로 웃을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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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집착의 행방(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