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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폭풍전야 (2)

"와하하핫—! 이거 좋구만! 아주 마음에 들어!"

할리는 자신의 새로운 투구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회색곰 머리 투구>

-뛰어난 실력의 장인이 마수 회색곰의 머리를 가공해 만든 투구. 여유 공간에 흡수재를 채워 넣어, 외부의 충격을 완화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질긴 가죽이 어깨와 등을 덮을 수 있도록 일체형으로 제작되었다.

망가진 검은 표범 투구를 대신해, 세실리를 구하고 도시로 돌아오기 직전에 따로 챙겨 두었던 마수 머리로 특별 제작한 물건이었다.

용병 산업이 발달한 타라크인지라 장인들의 실력도 전체적으로 좋아 상당히 훌륭한 물건이 나왔다.

이것도 휴버트가 발품을 팔아가며 실력 있는 장인을 물색해 의뢰를 넣은 결과.

덤으로 마수 이빨 장신구들도 전부 새로 장만해, 다시 완벽한 야만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였다.

"그나저나 무기는 사용할 사람이 직접 와야 팔겠다니. 장인이라는 양반들은 까다롭단 말이야."

아직 구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할리가 사용할 무기뿐.

휴버트가 대장간 거리를 돌다가 상당히 괜찮은 무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을 만든 장인이 사용할 본인이 직접 오지 않으면 팔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사실 직접 가는 것 정도야 별것도 아니지. 굉장히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 때문에 할리는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타라크의 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모두가 수군거리면서도 그에게 뭐라 말하지 못하고 시선만 피하는 상황.

하지만 그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켁, 저 촌스러운 꼬락서니는 뭐야? 남부 망신은 저 혼자 다 시키는군."

목소리도 줄이지 않고, 대놓고 들으라는 듯 내뱉은 불평.

할리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천천히 시선이 돌아갔다.

'이건 또 색다른 상황인데.'

이 위압적인 모습을 보고도 저런 말이 나오다니.

대체 어떤 용감한 자일까?

할리의 시선이 향한 길옆 쪽에는 세 명의 사내가 모인 채,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평균 이상의 체구와 떡 벌어진 어깨에 단단한 근육이 박힌, 숙련된 전사라는 느낌을 풍기는 자들이었다.

공통점이라면, 저마다 몸 곳곳에 갖가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

그들은 할리와 눈이 마주치고도 꺼리는 기색 없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자격도 없는 게 전사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그 어설픈 낙서는 뭐냐? 각인 흉내라도 내고 싶었나 본데?"

"진짜 남부인 맞아? 짝짝이 눈도 그렇고. 혼혈인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진짜 남부 출신 전사들인 것 같았다.

용병 산업이 발달한 타라크다 보니 이렇게 다른 지역에서 흘러 들어온 이들을 만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리 수집해둔 정보에 따라 최대한 남부인들과 비슷한 인상으로 얼굴형을 바꿨지만, 현지인들이 보기에는 위화감이 느껴졌으리라.

'이럴 때 필요한 건 뻔뻔함이지.'

그는 어깨를 활짝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상남자 할리는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지 않으니까.

"지금 이 몸을 모욕하는 거냐! 나는 한 명의 전사로서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 너희도 남부의 전사 같은데, 이 멋진 모습을 트집 잡는 이유가 뭐지?"

가짜 남부인 의혹은 자연스럽게 넘기고 의상에 대한 문제로 논점을 고정하며, 그는 전사들 앞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덩치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할리 앞에 서니 머리 반개 이상으로 눈높이 차이가 났다.

"하!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남부인들 전체가 싸잡혀 비웃음거리가 된단 말이다!"

"그런 옷은 전통 축제에서나 입으라고. 이런 데서 당당하게 거들먹거리고 다니지 말고!"

"그런 비효율적인 복장으로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거 보니 근육만 키운 광대 같은데?"

그들의 복장은 가죽에 부분적으로 금속이 덧대어진 평범한 갑옷으로, 평균적인 용병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실망스럽군. 야만 전사의 낭만이 이미 사라진 시대라니.'

다시 몇 차례의 언쟁이 오갔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럼 이럴 때 해결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지? 하핫핫!"

미리 조사한 남부의 정보 중에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전사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 맨손 박투를 통해 서로의 주장을 관철한다는 풍습.

무기도, 오러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겨루는 터프한 방식이었다.

"불만이면 입만 나불대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해 보라고?"

"각인 하나 없는 팔푼이가···!"

시원하게 날린 도발에 그들 중 하나가 이를 갈았다.

들고 있던 무기를 옆의 동료에게 넘기며 나선 그와 할리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싸움판이 벌어졌다.

"나는 셋이 동시에 덤벼도 상관없는데?"

"전사의 명예를 뭘로 보고!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호오? 그래?"

할리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히며 근육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복장 탓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근육, 그 결의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흠칫!

맞은편에 선 남부인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지만, 그도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그의 자신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퍽!

"켁."

"다음—!"

한 명.

"억—!"

"다으음!"

두 명.

콰직!

"크윽··· 너, 남부인이 아니구나! 이 정도 실력으로 전사의 각인 하나 없다니!"

그리고 마지막까지.

애초에 인간인 그들이 육체의 힘만으로 이 몸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 주먹은 할리의 단단한 근육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고, 근력의 차이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했으니···.

'사실 처음부터 불공평한 싸움이기는 하지.'

이미 몬스터나 다름없는 그의 육체는 굳이 오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생체력으로 상시 강화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이거 오히려 좋은 찬스일지도.'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남부인들을 내려다보았다.

뜻하지 않게, 길 가다가 진짜 남부 출신 전사들을 주운 것이다.

가짜 남부 사나이인 할리와 현지인들의 만남이었다.

'이놈들, 잘만 하면 이용해 먹을 건덕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곧바로 표정을 풀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핫핫핫! 이거, 형제들 실력도 제법이구만!"

"혀···형제?"

"잠깐 의견 차이로 다투었다지만, 같은 피가 흐르는 고향 사람을 이 먼 타지에서 만났는데 이 또한 인연! 이 정도면 형제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핫!"

"그게 무슨 개소···."

"어허!"

쓸데없는 토를 달려는 녀석을 지그시 노려봐 주자,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흐흠! 이미 짐작했겠지만, 사실 나는 온전한 남부 출신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몰골로···."

"쓰읍—!"

자꾸 말꼬리를 잡는 무례한 녀석들과 함께 잠시 몸이 건강해지는 육체의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금세 공손해진 이들을 골목으로 데리고 가, 재차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게 다 깊은 이유가 있단 말이지? 이거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그리고 자신의 출신을 합리화하고 그들을 구슬리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슬슬 입을 털며 밑밥을 깔았다.

"우리 아버지는 남부에서도 이름을 날린 전사셨다고 들었어. 아, 누군지는 묻지 마. 나도 그렇게 전해 들었을 뿐이라 자세히는 몰라. 어쨌든···."

뜬금없이 시작된 과거사 고백.

전사들은 떨떠름한 기색이었지만, 이미 한바탕 서열 정리가 끝난 마당이라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얌전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남부의 전사가 맞닥뜨린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된 이야기.

서로에게 최악의 첫인상이었던 타지에서 온 여인, 하지만 인연이 그들을 계속 묶어놓는데···.

가치관의 차이로 발생한 오해와 갈등, 그리고 화해.

여러 사건을 겪고 신분의 차를 넘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으니···.

전사를 마음에 들어 한 부족장의 딸이 그들의 사이를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전사는 부족장 딸의 구애를 거절하고 운명의 그녀와 사랑의 도피를 선택한다.

그에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여인이 그들에게 추격자를 보내게 되고···.

온갖 역경 끝에 그들은 서부의 한 화전민촌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그때 그들 사이에는 이미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 상태였으니···.

"그래, 그게 바로 이 몸이었지."

할리가 말을 마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꿀꺽—

"···그, 그래서 어떻게 됐소?"

"거 형씨, 말 끊지 말고 퍼뜩 이야기해 보소."

처음엔 찌푸린 표정으로 억지로 이야기를 듣던 남부의 사나이들은 이미 그의 이야기에 잔뜩 몰입한 상태였다.

'대충 클리셰들을 섞어서 끼워 맞춘 스토리인데. 생각보다 잘 통하네.'

하긴 지구에서나 흔한 소재지, 이곳에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것이다.

거기에 남부는 수많은 부족연합의 집합체인 만큼 뭔가 있을 법한 전개이기도 했고 말이다.

"흠흠··· 하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지. 집요한 악녀, 부족장 딸의 마수가 거기까지 미친 거야. 행복한 삶을 꿈꾸던 세 명의 가족은···."

또 이야기에서 'K-신파'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

할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을 담아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추격자들, 아내와 자식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눈물 나는 사투.

그렇게 도주와 전투를 반복한 끝에 모든 추격자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전사는 큰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품에서 해맑게 웃는 아이.

전사···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차고 있던 맹수 이빨 장신구를 아이의 목에 걸어 주었다.

'내가 없으면 이제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한단다. 내가··· 그 목걸이와 함께 끝까지 너를···.'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지는 아버지와, 오열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이에게 계승된 전사의 의지.

이후 더 이상의 추격자는 없었지만, 여인 혼자의 몸으로 아이를 건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아이를 키웠다.

매일 밤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때의 추억을 아이에게 들려주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아.

'어무니! 아부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주 멋진 분이었단다. 그야말로 전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지. 한때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반짝이는 눈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는 아버지의 유품인 장신구를 손에 꼭 쥐고 훌륭한 전사로의 꿈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비극.

"···난 그 장신구를 어머니와 함께 묻었다. 그건 평생을 서로 사랑해 왔고,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던 어머니께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그저, 아버지의 의지를 계승하는 것만으로 족하니까."

그게 남부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다니는 이유라고···.

진중한 목소리로 감정을 잔뜩 담아 말하며 할리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의 정적과 함께, 길게 이어진 이야기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크흡··· 꺼흐흑!"

"형제··· 형제여! 넌 자랑스런 남부의 아들이다!"

"암! 그 의지가 계승되는 한, 이미 훌륭한 한 사람의 남부인이지. 부족한 지식은 우리가, 아버지 대신··· 크흐흡···!"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K-신파'의 매콤한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전사들.

그들은 겨우 진정하는 듯하다가도 할리의 얼굴을 보고는 또다시 한참을 오열했다.

'너무 약발이 셌나? 계속 이러는 것도 곤란한데.'

"핫핫핫!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이 몸은 한 명의 훌륭한 전사가 되었으니까!"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할리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으나···.

"잘···컸구나. 정말 잘 커 주었어."

"암, 각인이 없으면 어때. 저 정도면 이미 훌륭한 전사지!"

왠지 모르게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전사들.

상남자들답게 좀 전에 그에게 맞았다는 사실도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 인간들 좀 심하게 몰입한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을 아들로 보는 듯한 기색이었다.

많아 봐야 30대로 보이는 젊은 전사들이···.

"흠흠, 어쨌든. 그래서 내가 남부에 대한 환상이 많은데 정작 아는 게 별로 없단 말이지? 아직 준비되지 않아 이곳에 있지만, 언젠가는 마음의 고향인 남부로 향할 생각이기도 하고."

그의 말에 남부 전사들이 일제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문제였겠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 형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가 제대로 된 남부의 정신에 대해 알려주지!"

"그래, 아버지가 보셔도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게 만들어주마."

'됐다. 현지인 강사들에게 족집게 강의를 받을 수 있겠군.'

대충 입을 털다가 못 믿는다 싶으면 강제로 납득시켜 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단순한 친구들이었다.

할리는 뿌듯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핫핫! 그렇게 해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할리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부하··· 아니,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시간이 남을 때마다 잠깐씩 '할리의 절친'인 휴버트의 일을 좀 돕게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친구의 친구 또한 친구니까!

'소년 할리의 여정 중 휴버트와의 만남 파트도 생각해 둬야겠군.'

이렇게 타라크의 할리와 사업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휴버트, 지구에서 헤테로시스를 관리하느라 바쁜 하인즈까지.

각자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지금.

남은 두 아바타의 상황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

한스는 몇 개월 동안 머물며 정들었던 실험실을 정리했다.

이제 곧 이 지역에 대한 하이 엘프의 탐색이 시작될 테니까.

미리 주변의 나무를 제거해 둔다든가 타이밍에 맞춰 소환 해제를 하면 탐색을 피할 수 있겠지만, 딱히 그것을 피하기 위한 대비는 하지 않았다.

[크크큭,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그런데 예정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지금쯤엔 뭔가 징조가 나타나야 할 텐데···.

'일정이 틀어진 건가? 다른 곳을 먼저 탐색하고 있다던가.'

어쩌면 동굴의 결계 내부에 있어서 찾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건만,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그런 감상을 내뱉기에는 조금 일렀다.

같은 시간.

로셀리아 대신전.

하이 엘프 라포리가 이번 작전의 관계자들을 호출했다.

"찾았습니다."

교단 측 인사들의 눈이 커졌다.

물론 함께 자리해있던 하인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도 별다른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

그 어떤 징조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이미 탐색이 끝났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흥분한 듯한 기색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라포리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륙의 서쪽, 마물의 숲. 그곳에서 불사왕의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드디어 한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62

대신전 습격 사건 (1)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충분한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리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뒀던지라, 여유 전력은 충분합니다. 어차피 이번엔 최정예 인원들만 파견 보낼 예정이기도 했으니까요."

기운이 탐지된 곳은 대륙의 서쪽 끝.

거리가 거리인 만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낼 수 있는 인원수에는 제한이 있었다.

교단이 냄새를 맡았다는 낌새를 내비쳤다간 놈이 또 언제 어디로 도망갈지 몰라, 전처럼 탈리아 왕국에서 불사왕 토벌대를 소집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일정 수준 이하의 전력은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탈리아 신전에선 성기사단과 대사제 이상의 전투사제만 지원받기로 했다.

"작전에 참여할 팔라딘만 넷, 대주교는 저까지 셋입니다. 이단심문관 측에서도 참여할 예정이지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강자들을 몽땅 한자리에 불러들이는 작전.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상주하던 팔라딘 중에 세 명과 대주교 두 명이 참가하고, 서부에 파견 나가 있던 팔라딘과 대주교 한 명씩도 현장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또 각 성기사단과 전투사제 중에서 선별된 최상위권의 인재들이 함께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제론 대신전에서 피레이 추기경께서도 함께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대륙에도 몇 없는 대신전의 최고 책임자인 추기경까지 직접 참전을 선언했다.

"음··· 하긴, 그분은 유난히 호전적이셨죠. 성기사 출신이시기도 하고. 첫 토벌전에 참여하지 못한 걸 상당히 아쉬워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마침 시간이 나신 모양입니다. 소수정예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하니 마침 잘되었지요."

로셀리아 대신전에도 두 명의 추기경이 있었지만, 그들은 불사왕과 관련한 문제는 모두 성녀에게 맡기고 대신전과 교단 전체를 운영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흠흠···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성녀님은 안 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라티우스 대주교.

"교황께서 노환으로 몸져누우신 지금, 성녀님께선 주신교단의 상징이십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자리를 지키셔야지요."

"하지만, 추기경님들도 계시는데···."

"안 그래도 대신전의 전력이 상당히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이니, 부디 성녀님께서 이곳을 지켜주시지요. 아무리 비밀리에 이뤄지는 작전이라고 해도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여파는 하인리히에게도 그대로 돌아왔다.

"흠···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도 이번엔 성녀님과 함께 대신전을 지키는 게 좋겠네."

"저도 말입니까?"

당연히 지금까지 이번 일에 깊게 개입해 왔던 만큼, 자신도 참여하게 될 줄 알았던 하인리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티우스 대주교는 그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진중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성녀님께서 많이 상심하신 것 같으니 곁에서 말동무라도 되어주며 위로해 드렸으면 하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대주교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 될 게야. 추기경께서도 함께 가는 만큼, 놈도 저번처럼 쉽게 도망가지는 못할 터. 아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겠지."

저번에 결계를 치고도 한스를 놓친 전적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는 추기경까지 합세해 더욱 철저하게 대비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게 되겠지. 나 또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고."

그리고 하인리히는 그런 전장에서 희생되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당장에도 작전에 참여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실력이기는 했으나, 그래봐야 이번에 선별된 성기사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주교는 그의 진짜 가치는 성장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있다고 판단했다.

가파른 성장세를 가지고 주신과 성녀의 관심까지 받는 영웅의 씨앗.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겠지. 우리가 전부 전멸할 가능성을."

이미 충분히 과한 전력을 준비하고는 있으나,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때가 온다면 성녀와 하인리히가 교단의 희망이 될 수 있을 터.

"···알겠습니다. 대주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이해해 주어서. 자네도 지금까지 각오를 다지고 있었을 텐데."

결연한 표정을 짓는 라티우스 대주교의 모습에 하인리히는 그저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음, 그··· 열심이신 모습이 보기 좋네.'

게이트를 통한 전송은 성녀를 비롯해 작전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제들이 총동원되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선별된 소수정예만 파견된다고는 하지만 그 인원이 수십 명이 되다 보니, 그들이 전부 탈리아 신전으로 보내지는 데에는 하루가 더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로는 도착할 수 없는 거리니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숨어 있던 곳에서 그리 급하게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진 않을 테니까요."

라티우스 대주교는 로셀리아 대신전의 파견 인원을 통솔해 차근차근 일을 진행했다.

우우웅—

마지막 전송 인원이 대기하는 와중, 다시 게이트가 진동하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인원에 포함된 대주교는 고개를 돌려 배웅하러 나온 이들을 바라보았다.

성녀와 하인리히를 포함한 일행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신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게이트로 향했다.

그 비장한 뒷모습에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뒤를 부탁한다'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편하게 바깥바람이나 쐬다가 오세요.'

하인리히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우웅—

진동하는 게이트의 푸른 소용돌이.

그렇게 모든 인원이 대륙 서부의 탈리아 신전으로 이동을 마쳤다.

***

[흐흠··· 탈리아 신전에 모인 이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전부 정예인 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탈리아 왕국의 수도부터 마물의 숲의 깊은 곳까지.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한 달은 넘을 테지만, 그들이 또 어떤 축복을 가지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당장 하인리히도 「축복 : 도약」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저쪽에서는 이동에 걸리는 기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을 것이다.

아마 탈리아 신전에서 합류하자마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곧바로 출발하겠지.

[이제 슬슬 준비해 볼까.]

한스는 천천히 동굴을 나섰다.

화르륵—

그의 걸음걸이마다 지옥의 불길이 일며 동굴에 남은 모든 것들을 녹여버렸다.

실험 과정에서 발생한 폐기물부터 시작해서, 내부에 남아 있던 온갖 결계의 흔적들까지.

[굳이 다른 정보를 내줄 필요는 없겠지. 크흣···.]

그에 따라 결계들이 무너져 내렸지만, 이미 그의 온몸에는 파편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은폐장이 겹겹이 펼쳐진 상태였다.

'그럼 어느 타이밍에 일을 시작하는 게 좋을까?'

지금이 로셀리아 대신전의 방비가 가장 허술해진 시점이었다.

그곳이야말로 한스를 잡기 위해 가장 많은 전력이 차출된 곳이었으니까.

'거기다 게이트를 무리하게 가동하느라 사제들도 지친 상태지.'

파편 주위에 펼쳐진 봉인의 수준으로 봤을 때, 그것을 해제하는 것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마 파편을 손에 넣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그때를 대비해 대신전의 전력을 최대한 바깥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마침 하이 엘프의 탐색이 시작됐으니 시기도 적절했다.

일부러 기세를 드러내 유인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교단 측이 수상하게 여길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준비만을 갖춰둔 채 자연스럽게 발각당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계전송진 쿨타임도 미리 맞춰둔 상태.'

이제 언제든 일을 벌일 수 있었지만, 한스는 그 자리에 선 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를 잡기 위해 파견된 인원이 뒤늦게 연락을 받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크흐흐··· 이제 시작이다.]

달이 높게 떠오른 자정.

숲속을 비추는 달빛에 만물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곳에는 더 이상 한스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

"아우테리카 차원으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빛이었다.

눈이 멀게 만들겠다는 듯 사방에서 뿜어지는 압도적인 광량.

[크흐,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대단하군.]

몸에 두른 은폐장이 순식간에 빛에 타들어 가고, 주변에 맴돌던 흑마력들이 신성력과 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거 별로 좋지 않은데.'

온 사방이 한스에게 적대적인 공간이었다.

계속 이 상태라면 파편을 온전히 수습할 수 없었다.

되도록 평화롭게 일을 마치고 떠나려 했지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

한스가 지팡이를 위로 추켜세웠다.

[크하하핫! 모두 부서져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흑마력이 한 곳에 밀집되고···.

해골 지팡이 끝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불꽃이 삽시간에 몸집을 키웠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신성력이 흑마법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이제 한스는 그 정도 방해에 흔들릴 실력이 아니었다.

화르륵— 콰과광!

커다래진 지옥 불꽃이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나눠지더니, 황금빛 문장이 빛나는 사방의 벽면으로 향해 폭발했다.

후두두둑—

벽면의 문장이 떨어져 나가고 녹아내리며, 흑마력을 억누르는 기운이 약해졌다.

'한결 나아졌군.'

애초에 내부에 있는 부정한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봉인지였다.

직접적인 충격에 대한 대비는 덜할 수밖에 없는 노릇.

'한 번 더!'

스으으— 파파팟!

한스의 주변의 땅이 검게 물들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그곳에서 튀어나온 그림자의 칼날들이 사방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파손된 문장의 빛이 서서히 흐릿해지며, 그의 몸을 짓누르던 신성력이 약해졌다.

[크흣,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군.]

물론 직접적으로 공격해 오는 힘만 줄었다 뿐이지, 그는 결코 평소와 같은 컨디션이 아니었다.

'대체 몇 개의 신성 결계가 중첩되어 발동된 건지 모르겠네.'

한스의 침입과 동시에 대신전 전체에 설치되어 있던 온갖 종류의 결계가 동시에 발동했다.

'서둘러야겠어. 그래도 진입로가 복잡한 만큼 교단 측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건 좋군.'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중앙의 제단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긴 그 와중에도 멀쩡하네.'

한스의 흑마법이 한바탕 주변을 뒤집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단과 그것을 봉인하는 기둥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파지직—!

그의 손길이 파편을 엮은 쇠사슬에 닿자 새하얀 스파크와 함께 불꽃이 일어 그의 팔을 뒤덮었다.

[흠, 그래. 그렇게 쉬울 리 없지.]

한스는 흑마력을 일으켜 손에 달라붙은 불꽃을 털어내며 담담히 중얼거렸다.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군.]

외부의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봉인을 풀고 파편을 회수해야 하니까.

그는 재차 파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사건은 한밤중에 일어났다.

화아악—

대신전 곳곳에 새겨진, 그동안 장식이라고 여겨왔던 문양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고···.

"뭣?!"

"갑자기 이게 무슨!"

경비를 서던 성기사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바닥과 벽면, 천장을 가리지 않고 신성력이 담긴 문장이 떠올랐다.

공간을 단절시키고, 내부의 삿된 기운을 억누르며, 신성력을 가진 이들의 힘을 북돋는 종류의 신성 결계들.

이 순간, 로셀리아 대신전은 하나의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침입을 허용한 뒤지만.'

함께 경비를 서던 성기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인리히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태평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는 지금 봉인지로 향하는 통로에서 야간 경비를 서는 중이었다.

대신전을 지키게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광휘수호 성기사단의 업무에 복귀하게 된 것이다.

토벌대에 참가하지 못한 만큼 다른 쪽으로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며 이 통로 경비에 지원한 것도 의도한 일.

거기에 그동안 업무를 빠진 것도 있겠다, 그것을 벌충하겠단 핑계로 모두가 꺼리는 야간 경비에 자원해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곳에 있으면 흘러가는 상황을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겠지. 한스가 봉인을 해제하는 동안···.'

그 순간.

[비사—앙—!]

대신전 내부에서 머릿속을 울리는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비상 상황! 전 병력 전투태세! 준비가 갖춰지는 즉시 각자 위치로 집합!]

[성기사단은 단장의 지휘에 따라 이동!]

머릿속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성.

몇 번 본 적도 없던 추기경의 목소리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휘이익—!

그때, 한쪽에서 시커먼 복장을 한 이십여 명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 선두에서 그들을 이끄는 건 저번에 한 번 본 적 있던 이단심문관장이었다.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긴 한데.'

다른 이들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관장을 상징하는 배지를 통해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이 구역의 통행증이나 마찬가지였다.

통로를 지키던 하인리히와 동료 성기사가 황급히 자리를 비켜서자, 그들은 바람처럼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거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군."

옆에 있던 성기사가 굳은 목소리로 조용히 뇌까렸다.

그의 말대로.

로셀리아 대신전 역사상 최초로 허용한 내부 침입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63

대신전 습격 사건 (2)

그간 단 한 번도 허용한 적 없었던 외적의 침입에 로셀리아 대신전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응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이곳은 각지에서 인정받은 정예들이 모이는 교단의 성지였으니까.

외곽, 내부 할 것 없이 모든 경계가 강화되었다.

완전 무장한 성전사들과 전투사제들이 대신전 주위에 정렬했고, 소집된 성기사들이 일제히 이동했다.

그리고 성기사단장을 비롯한 강자들에게는 은밀한 지령이 떨어졌다.

즉시 봉인지 앞으로 집결할 것.

그 때문이었다.

하인리히의 눈앞에, 그간 자주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이 한데 모인 진풍경이 펼쳐진 것은.

'그렇게 많이 파견 나갔는데도 아직도 이 정도로 많이 남아있다니.'

현재 대신전에 남은 이들 중 가장 위에 자리한 이들.

이미 은퇴했던 이들도 완전무장을 하고 모여 그 인원이 백이 넘었다.

그때 한쪽에서 성녀가 일단의 무리와 함께 통로로 뛰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머리는 부스스하고 복장도 흐트러진 채로.

"바로 이동하죠! 전부 따라오세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곧바로 통로로 달려 들어간 성녀의 뒤를 따라, 대기 중이던 인원들도 서둘러 안쪽으로 향했다.

'이젠 이 통로를 지킬 필요가 없겠지? 전부 따라오라고도 했으니까···.'

눈치를 보던 하인리히도 슬그머니 그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어떻게 된 거죠? 대신전의 방비가 뚫린 건가요? 곧바로 봉인지까지?"

성녀가 자신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달리는 이에게 물었다.

고위 인사로 보이는 여성 이단심문관은 발소리 하나 없이 달리며 그녀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왔다는 어떠한 징조도,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봉인지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봉인지 내부로 곧바로 공간이동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현재로서는 그렇게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대신전의 방어 결계에는 어떠한 공간이동 흔적 또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갑자기 그 자리에 솟아난 것처럼."

"말도 안 돼···. 이곳을 둘러싼 신성 결계가 몇 개인데···! 그걸 무시하고 공간이 뒤틀린 봉인지 내부에 곧바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실제로 발생한 상황이다.

봉인지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소식만 듣고 급하게 달려온 성녀는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지만···. 침입자는 설마···."

"···예, 먼저 안으로 향하신 관장님의 마지막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불사왕의 후예, 한스와 조우. 시간을 벌기 위해 교전에 돌입. 최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진입할 것.>

"이후, 연락이 끊긴 상태입니다. 생사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한스···!"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성녀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성녀님, 일단 진정하세요. 지금 흥분해선 될 일도 안 된답니다."

"아! 그렇죠. 후우~ 후~."

그녀는 옆에서 함께 이동 중이던 코델리아 추기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심각한 분위기의 수뇌부들이었지만, 하인리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다들 달리면서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네.'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성녀와 50대 후반의 여성인 코델리아 추기경은 달리면서도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몸에 흐르는 막대한 신성력이 육체를 보조하기 때문이리라.

"허허헛, 그나저나 주신께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이 성지에서, 대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 이단의 침입을 허용하다니···. 허허허···."

허탈한 듯 힘 빠진 웃음을 터트리는 60대 중반의 남성.

사태 발생 초기에 신성력으로 지시를 내렸던 목소리의 주인공, 피온 추기경이었다.

"대체 어떻게 대륙 서쪽 끝에 있다가 성지의 대신전 내부까지 이동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혹시···."

불사왕의 후예를 찾은 후에도 하이 엘프 라포리의 탐색은 오늘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놈이 만약 자리를 옮긴다면 곧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오늘 저녁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위치는 그대로 서쪽의 마물의 숲이었건만, 뜬금없이 이렇게 대륙의 중심부에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공교로운 타이밍에 말이다.

"이번 세대의 불사왕인 한스와의 교전 기록에, 라티우스 대주교님의 공간 차단 결계를 무시하고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함께 이동하던 이단심문관이 다시 조용히 첨언했다.

"···그랬었죠. 정말 마물의 숲에 있었는지 지금은 확신할 수 없지만, 대신전의 결계를 무시하고 침입한 것은 사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불사왕도 아닌데 이 정도의 능력이란 건···."

"이번 파편을 빼앗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진정한 대륙의 재앙이 탄생하겠군요."

대화를 주도하던 이들은 물론,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르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이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재차 깨달았다.

"···좀 더 서두르죠."

성녀의 후광이 강해지며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주변 이들의 몸에 깃들고, 그들은 한층 더 빠르게 봉인지 내부를 내달렸다.

***

털썩—

마지막으로 남은 이단심문관장이 바닥에 쓰러졌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군.]

한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쓰러진 검은 사제복들 주변에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 잔해가 널려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는 효율이 많이 떨어지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흑마력을 듬뿍 부여했음에도 평소의 절반 이하로 깎여나간 전투력.

부족한 부분은 물량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불리한 공간에서 파편의 봉인을 해제하는 동시에 벌인 전투에는 한스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암살자처럼 순식간에 접근해서 직접 공격해 오는 이단심문관장은 언데드로도 막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제 봉인은 거의 다 해제됐다. 추가 지원이 오기 전에 작업을 끝낼 수 있겠어.]

[마스···터.]

그때 바닥에서 허리 아래가 사라진 데스 위저드, 말콤이 하나만 남은 손으로 기어 왔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호? 용케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미 죽은 상태이긴 했지만···,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것저것 아낄 상황이 아니라 말콤까지 투입하기는 했는데, 그동안 성장한 녀석은 제법 쓸 만한 부하였으니까.

'저 정도면 충분히 수복할 수 있겠네.'

그것이 또 언데드의 장점 아닌가.

[수고했다. 나중에 고쳐줄 테니, 지금은 들어가서 쉬고 있어라.]

[예···.]

말콤은 곧바로 한스의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놈들도, 수복할 수 있는 놈들은 수거해 와라. 지금은 신경 써 줄 상황이 아니니까.]

달그락— 달칵!

[끄워억—]

주변의 언데드들이 부지런히 잔해를 뒤져 한스의 그림자 속으로 날랐다.

방치된 것들은 도저히 수복 가능성이 없이 완파된 시체들뿐.

한스의 시선이 다시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이단심문관들에게 향했다.

'죽이진 않았지만,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손을 써놨으니. 대신전의 결계 덕에 오히려 쓰러뜨리기엔 편했어.'

내부의 신도들을 보호하는 신성 결계 덕분에 과하게 튼튼해진 그들은 어떤 공격에도 즉사만은 하지 않았다.

또 결계가 그렇게 빈사 상태에 빠진 이들의 숨통도 붙여놓는 걸 보고, 그는 마음껏 힘을 투사해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억지로 제압하려고 했으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을 텐데. 그럴 여유도 별로 없었고. 이런 면에선 다행이군.'

뭐, 확인 사살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다고 여길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안방극장' 작전은 시작도 할 수 없었다.

파스슥—

그때, 딱 하나 남아있던 제단의 기둥에 금이 가며 그에 연결되어 있던 은빛 사슬이 삭아서 부스러졌다.

그렇게 마지막 봉인이 해제되었다.

[···됐다. 크흐하하핫—!]

파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흑마력.

한스는 그 기운을 마음껏 음미하며 그것을 움켜쥐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신을 침범해 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자신과 연결된 통로로 가져갔다.

「불사」로 추출된 근원과 하나였다는 듯 달라붙는 마지막 파편.

하지만 한스의 유사 아공간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계속해서 통제되지 않은 흑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대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어느 정도 수습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뿌리가 같은지라 금방 섞이고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흡수했던 파편들과 품은 힘이 비슷해서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었다.

한스는 하인리히를 제외한 모든 정신력 리소스를 쏟아 부어 서서히 심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소환 해제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격렬한 에너지의 유동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으니.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폭증하는 흑마력과 급격히 증가하는 힘에 고양감을 느끼고 있을 때···.

[흐으···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아쉽게도 제한 시간이 다가왔다.

콰앙—!

박살 나 있던 문 바깥에서 굵은 광선이 날아와 한스의 방어막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수십 명의 무리.

교단의 정예들이 도착했다.

***

"늦···었나···!"

서둘러 달려온 이들이 제단의 봉인이 파괴된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일단 생존자들부터 구해요!"

성녀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듯 고함을 지르며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이단심문관들이 몸을 날려 바닥에 쓰러진 이들을 데리고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곧이어 사제들이 부상자에게 달라붙어 신성력을 퍼부었고, 성기사들은 어느새 전방에 도열해 불사왕 한스와 그 휘하 언데드들과 대치했다.

"집중해라! 아직 파편의 기운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피온 추기경이 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전투사제들을 이끌고 일제히 기도문을 읊었다.

화아악—

성기사들의 몸에 깃드는 아름다운 빛무리.

온갖 강화 효과는 물론, 원활한 협공을 위해 신성력만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할 수 있는 채널이 개통되었다.

성기사들의 가장 선두에 있던 사내가 방패와 전투 망치를 고쳐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장 앞에서 상대할 테니, 경들은 날 보조하는 데에 주력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조니엔 경."]

그는 대신전에 남은 유일한 팔라딘이었으니, 가장 앞장서서 싸울 이로 그 이상의 인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크하핫! 교단의 하수인들아. 이미 늦었다! 불사왕의 심장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었으니!]

"현혹되지 마라! 공격!"

전투사제들의 성법이 한스에게 날아들고, 팔라딘 조니엔을 필두로 성기사들이 달려들었다.

물론 그 틈에는 하인리히 또한 끼어있었다.

'아, 시간 끄는 것도 안 통하네.'

어느 정도 파편을 흡수한 만큼 흑마력의 출력은 대폭 상승했다지만, 바로 전투를 벌이기엔 아직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교단 측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시간을 더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아압!"

하인리히의 검에 신성력이 깃들어 찬란한 빛의 검이 생성되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러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언데드를 베어냈다.

아까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제는 진짜로 맡은 역할에 몰입해야 했으니까.

[키에에엑—!]

달그락, 덜그럭—

한스의 주변에서 계속해서 언데드들이 기어 나와 성기사들의 앞길을 막아섰지만···.

"으랏차—!"

["이놈들 별것도 아니다! 길을 뚫는 데 집중해라!"]

"주신이시여! 그 영광된 빛으로 삿된 것들을 불살라 주소서!"

막강해진 흑마력을 쏟아 부어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력에 뒤덮인 성기사들과 후방에서 쏟아지는 전투사제들의 성법 지원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려 버렸다.

'그동안 어떻게 모은 것들인데!'

한스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언데드들을 탈탈 털어냈다.

당장은 물량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었으니.

콰아앙—! 쾅!

다시 성녀에게서 시작된 광선과, 피온 추기경이 불러낸 빛의 망치가 한스의 방어막에 균열을 만들며 폭발했다.

[이 귀찮은 것들!]

한스의 지팡이에서 피어오른 검은 안개가 뭉쳐, 거대한 악마의 손으로 변해 그들에게 쏘아졌으나···.

"주신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보호해 주소서!"

콰드득!

코델리아 추기경이 만들어낸 푸른 방패에 막혀 사라졌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반복된 상황이었다.

'치사하게 다굴을 치다니!'

방어와 부상자 치료에 전념하는 코델리아 추기경.

성기사들의 보조와 한스를 견제하는데 집중하는 피온 추기경.

그리고 오직 전력으로 한스만 노려 공격해 오는 리에스타 성녀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다른 이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다.

'마지막 파편을 얻기 전이었으면 지금쯤 이미 도망가고도 남았겠군.'

그런데도 버틸 수 있는 건, 그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확보하는 작업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하아압—! 죽어라, 불사왕!"

어느새 언데드들을 돌파한 팔라딘 조니엔이 커다란 망치를 휘둘러왔다.

한스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충격파를 발사해 그를 뒤로 튕겨냈다.

하지만 그 순간.

팔라딘을 튕겨낸 아주 잠깐의 틈을 노리고 두 명의 성기사가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와 그에게 짓쳐 들었다.

은신의 성법까지 받아 진행된 은밀한 작전이었다.

타이밍 맞춰 동시에 날아든 온갖 공격 성법들에 그의 방어막에 일시적으로 구멍이 뚫리고, 두 성기사의 양손검과 창이 좌우에서 한스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했다.

허를 찔린 일촉즉발의 상황.

[흐···.]

한스는 자연스럽게 자세를 숙이고 오른손에 흑마력에 휩싸인 해골 지팡이를 틀어쥐었다.

카각—

좌측에서 찔러오는 창끝의 궤적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갖다 댄 지팡이로 틀어버렸다.

카앙!

동시에 지팡이를 한 바퀴 빙글 돌려, 우측에서 베어오는 양손검의 검면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이어진 공방.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에는 이미, 한스의 왼손에 완성된 검은 불꽃이 그들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콰아앙—!

"크헉!"

"으윽—!"

["서둘러 이쪽으로!"]

코앞에서 발동된 흑마법에 멀리 나가떨어진 성기사들은 곧바로 후방으로 이송돼 긴급 치료에 들어갔다.

공을 들인 회심의 작전이었건만,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흐흣! 감히 이 몸을 속이려 들다니, 백 년은 이르다!]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한스.

그에게는 어떤 작전도 통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상황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큭, 놈의 반응이 생각 이상으로 빠릅니다!"]

["무술을 익혔나? 예상 밖의 움직임에 성기사들의 대처가 한 박자 늦었어."]

지금 이 상황 또한.

하인리히를 통한 실시간 감청으로 교단 측의 모든 작전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그 덕분에···.

'끝났다.'

끝내 파편의 주도권을 틀어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업적 달성! 아우테리카 차원의 재앙, '불사왕'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극복했으며, 지배한 끝에 초월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특전 「즉사 면역」을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그렇게 한스는 진짜 불사왕이 되었다.

#64

대신전 습격 사건 (3)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부패한 심장」과 「불사」가 합쳐져 「불사의 심장」으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마력 친화」가 「마력 지배」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심연의 눈」을 획득합니다."

한스의 눈앞에 정신없을 정도로 주르륵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드디어!'

불사왕의 후예가 아닌, 진정한 3대 불사왕이 되었다.

[크흐, 크흐하하핫핫—!]

한스가 그 자리에서 광소를 터트렸다.

그에게서 폭풍처럼 쏟아지는 흑마력이 웃음소리에 담겨 파도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아··· 정말로 늦어···버렸군요."

성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주변의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지금 이곳이야말로 불사왕을 상대하기에 가장 유리한 공간! 목숨을 버릴 각오로 마지막까지 싸워라!"]

그런 이들의 머리를 뒤흔드는 피온 추기경의 추상같은 목소리.

그들은 서둘러 정신을 다잡고 다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이야말로 불사왕이 가장 약한 순간이었다.

막 완성한 직후라 심장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며, 대신전의 신성 결계로 힘에 제약이 걸린 상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우면 어쩌면 정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각오로 이를 악물고, 결의를 다졌다.

···물론, 사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거라는 것을.

불사왕 한스는, 불리하다 싶으면 결계 따윈 무시하고 이 자리를 피해 도망갈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교단 측이 흔들림을 다잡는 동안, 한스는 이번에 얻은 것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즉사 면역」이라. 이제 어이없게 비명횡사할 일은 없겠군.'

제일 처음 받았던 특전은 '차원을 넘어선 위업'을 달성한 보상으로 받은 「이계전송진 소환」이었다.

그 덕분에 마음대로 차원을 넘나들 수 있게 되었지.

'보상의 수준차가 좀 나는 것 같은데. 물론 즉사를 피할 수 있게 된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아마 '위업', 즉 '위대한 업적'과 단순한 '업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거저 얻은 거니 불평할 입장은 아니지.'

진화한 스킬들은 이전 스킬이 더욱 강화된 형태였으니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고, 당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에 얻은 새로운 스킬이었다.

「심연의 눈」은 일종의 마안이었다.

할리가 가진 「보석안 : 염동」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흉악한 위력을 가진.

'보는 것만으로 공포, 혼란 등의 정신 공격을 가하고, 자신보다 낮은 수준의 마(魔)에 속한 존재들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인가.'

즉, 한스보다 약한 존재라면··· 이제 눈만 마주치는 것만으로 마물, 악마, 흑마법사 상관없이 그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었다.

격차가 클수록 종속이 강해진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이 유용한 능력은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리라.

'얻었으면 한 번 써봐야지.'

곧바로 「심연의 눈」을 발동했다.

한스의 푸른 안광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그 텅 빈 눈구멍에 어둠이 채워졌다.

두 눈 가득 들어찬,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저건···!"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무저갱 같은 눈이 주변을 훑자···.

"흐읍?"

"아, 아···."

삽시간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으며, 그의 시선이 닿은 이들의 전신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화아악—!

그때, 갑작스러운 고성과 함께 교단 무리의 후방에서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곳에는 후광이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는 성녀가 주변에 따스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전승에 기록된 불사왕의 '심연을 담은 눈'이다! 절대 마주 보지 않도록 피해!"]

["바라봐지는 정도라면 제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눈이 직접 마주쳐서 생기는 정신 오염은 힘들어요!"]

["잠깐 마주친 정도는 어떻게든 치유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되면··· 도저히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조심하세요."]

신성력을 통한 추기경들과 성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하인리히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렸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능력인가 본데?'

한스는 다시 천천히 그들을 훑어보았다.

성녀의 신성력 덕분인지 아까처럼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지만, 하나 같이 그의 눈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었다.

전투에서 상대방의 눈빛을 읽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한스는 애초에 눈이 없었던지라 해당 사항이 없었다.

직접 눈을 보지 않는다고 생기는 페널티는 딱히 없다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전투력에 악영향을 주겠지.'

썩 만족스러운 능력이었다.

주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魔)의 지배도 그렇고, 전투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바로 떠나기엔 좀 아쉽지.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니, 좀 더 시험해 볼까?'

불사왕 한스의 첫선이었다.

지금 바로 몸을 빼기엔 좀 모양 빠지지 않는가.

[이 몸은 대륙에 강림한 공포의 화신이자 비극의 징조이니! 절망하거라 교단의 하수인들아. 너희는 실패했다. 그로 인해 죽음이 거리를 뒤덮고 비탄과 원망이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교단의 정예들을 앞에 두고 벌인 당당한 연설.

마지막 파편을 흡수한 탓인지, 한스의 텐션이 평소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사 하나하나의 퀄리티가 놀랍도록 자극적이었으니까.

'주로 내 정신 건강에 말이지. 안 되겠다.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야겠어.'

[자, 어디 한 번 발악해 보거라.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기꺼이 놀아주도록 하지. 크크큭!]

한스의 해골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그 끝에 휘감긴 흑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경계하는 교단 인원들을 무시하고 지나친 검은 기운은 바닥에 널브러진 언데드들의 잔해에 깃들었다.

달그락—! 후두두둑!

그리고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여러 곳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뭉쳐, 수십 개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완전히 파괴된 언데드들도 재활용할 수 있는 효율성의 극치.

["시체 골렘이다! 일단 물러나서 진형을 재정비한다!"]

불사왕이 되며 새롭게 「금단의 지식」에 추가된 흑마법이었다.

거기에 듬뿍 흑마력을 부여해 주었더니, 개체들 하나하나마다 온몸이 검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럼, 이 차전을 시작해 볼까?]

불사왕 한스의 몸에서 다시 검은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아무리 한스가 심장을 온전히 계승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힘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라 제대로 된 불사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이곳은 대신전의 중심부였으며, 그와 맞서는 이들 또한 교단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놈이 점점 힘에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더 시간을 끌면 위험합니다!"]

["아직까지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기적이군요. 대신전의 신성 결계 덕이기도 하지만···. 놈이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다는 뜻이겠죠?"]

충돌이 계속될수록 교단 측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언데드들과 다르게 살아있는 인간인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칠 수밖에 없는데, 상대인 불사왕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신성 결계로 약해진 상태가 저 정도라니···."]

이곳이 아닌 바깥에서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해졌다.

["성기사들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전열이 무너질 터.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합니다."]

팔라딘 조니엔이 무거운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했다.

마물의 숲으로 파견된 토벌대에 최상위권의 성기사들이 대부분 차출된 것이 문제였다.

그 때문에 팔라딘이 그 혼자만 남았기도 했고.

성녀와 추기경들이 불사왕을 상대로 분전하고는 있지만, 전방이 무너지면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 할 것이다.

["이미 몇 차례나 변칙 작전을 시도했는데, 놈의 대응이 너무 빨라. 마치 우리의 생각이라도 읽는 것처럼···."]

["그래도 이대로 가면 전멸입니다. 놈이 방심할 때 어떻게든 타격을 줘야 해요."]

그들의 고뇌에 하인리히는 내심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저력이 만만치 않았던 나머지, 그를 통해 미리 파악한 정보로 대응한 게 조금 과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끝내는 게 좋을까?'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하인리히 경?"]

때마침 성녀가 그를 호출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가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 일개 성기사에 불과한 하인리히에게 그런 부담스러운 일을 맡겨도 될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예,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임무를 받아들였다.

***

교단 측의 공세가 강해졌다.

모든 이들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듯 신성력을 쏟아 부어 불사왕을 몰아붙였다.

장기전을 포기한 듯한 그들의 모습에, 그의 기세도 순간적으로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흐아압—!"

그중에서도 팔라딘 조니엔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해 왔다.

어떻게든 불사왕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겠다는 듯이.

콰지직!

[똑같은 수작이 다시 통할 것 같으냐!]

팔라딘을 튕겨내자마자 연달아 달려드는 성기사들과 은신을 벗고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이단심문관들.

그들은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쉴 새 없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지금!"]

그때, 불사왕의 머리 위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뭉쳐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그에게 내리꽂혔다.

화아악—

성녀의 전력이 담긴 공격에 그의 주변을 감싸던 방어막이 일거에 녹아내렸고···.

동시에, 빛의 기둥 속에서 작은 섬광이 반짝였다.

막대한 신성력의 폭포 속에 묻힌 작은 흐름.

[뭣?!]

불사왕이 이변을 눈치챈 것은, 이미 검날이 그의 목전까지 다가온 직후였다.

[언제 여기까지!]

채앵!

경악한 그가 흑마력에 휩싸인 지팡이를 휘둘러 검을 쳐냈다.

하지만 그의 무술 실력은 정면으로 성기사의 검을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처음처럼 불시에 허를 찌르는 정도라면 모를까, 이미 알고 대비하고 있던 달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수준.

은신의 성법과 「축복 : 도약」을 통해 순식간에 불사왕에게 접근한 하인리히는, 유려하게 검을 휘둘러 상대의 모든 방어를 벗겨냈다.

"하앗—!"

절호의 기회.

신성력이 가득 담겨 빛나는 검이 벼락같이 쏘아지고···.

어느새 펼쳐진 검은 장막에 가로막혔다.

찌지직—!

극한의 집중 속에 느려진 시간 속.

서서히 검은 장막을 찢으며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그 속도는 한없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어림없다!]

설상가상으로 불사왕에게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저주의 불꽃이 하인리히의 전신을 뒤덮었다.

"크윽!"

몸에 두른 신성력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그의 온몸이 저주에 침식되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한 지독한 고통과 함께 힘이 빠지고, 감각이 교란된다.

···자신만만하게 나섰건만, 모두의 기대를 짊어진 마지막 작전마저 실패해 버렸다.

이대로는··· 그의 검은 불사왕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아니!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코와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검을 쥔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도움으로 만든,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절대 이대로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하인리히는 이를 악물고 검 끝에 신성력을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최대한 빨리, 어떻게든 이 장막을 넘어 불사왕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그 영겁과도 같던 찰나의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축복 : 광검」를 획득합니다."

순간적으로 하인리히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벽에 막혀있던 신성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세 번째 축복!'

동시에 조건을 달성해 주교급 신성력에 도달했다.

급격히 증가한 신성력에 그의 검에서 뿜어지는 광채가 더욱 강해졌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사용한 「축복 : 광검」의 힘.

검에 담겨 사방으로 퍼지던 빛이 한데 모여 압축되고, 마침내 날카롭게 정련된 검의 날이 만들어졌다.

마치 SF에서 나오는 광선검처럼.

"흐아아압!"

쫘아악—!

내질러진 빛의 검이 한순간에 검은 장막을 갈랐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크헉! 네놈···!]

심장에 박힌 검에서 뿜어져 나온 압축된 신성력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불태웠다.

신성한 불길과 검은 아우라가 뒤섞여 타오르는 불사왕과, 저주의 불꽃과 은은한 광휘가 몸을 뒤덮은 성기사.

그 처절할 정도로 대조적이면서도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모습이 지켜보는 모두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크윽··· 제법이구나. 감히 이 몸에게···!]

퍼어엉—!

그의 몸에서 흑마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기회를 틈타 달려들던 다른 이들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째서인지 하인리히만은 굳건하게 자리에서 버티며 그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채였다.

[크흐흐··· 너무 방심했군. 그래, 너. 교단의 하수인아. 이름이 무엇이냐?]

3대 불사왕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 처음으로 치명상을 입힌 자.

불사왕은 그 업적을 인정하듯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하인리히··· 랜드가드다! 너를 다시 심연에 처박아 주마, 불사왕!"

[하인리히 랜드가드···. 그 이름 기억하도록 하지.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크하핫!]

장작처럼 타오르는 와중에도, 그의 육체는 신성력과 흑마력이 뒤엉켜 끊임없이 파괴와 수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억해라. 이것은 끝이 아니다. 대륙에 어둠이 드리우는 날,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딜!"

[그럼, 다음에 보지. 크큭큭···.]

그 말과 함께, 하인리히의 검에 꿰뚫린 채 타오르던 불사왕 한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흑마력에 보호되던 언데드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지며 신성한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하고, 전장은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털썩—

그 순간 들려온, 정적을 깨뜨리는 작은 소음.

"아! 하인리히 경! 빨리 치료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불사왕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데 성공한 성기사, 하인리히가 급히 사제들에게 이송되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정화하는 와중에도 침식된 부위에서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악랄한 저주의 기운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경외의 탄성을 터트렸다.

이 정도면 치료가 온전히 끝나더라도 상당 기간 요양이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이 농축된 지독한 저주를 통째로 뒤집어쓴 당사자가 느꼈을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기어코 불사왕을 물리친 그의 정신력 또한.

그렇게 하인리히를 비롯한 부상자들의 치료가 이어지고, 전장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역시, 도망가 버렸네요."

"···그래도 저희 모두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희생이 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허허허··· 그래도 이번에 심장에 타격을 입혔으니, 당분간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저희도 대륙의 힘을 모아 그에 대항할 준비를 해야겠지요."

"이것도 전부 그가 끝까지 힘내 준 덕분이죠."

모두의 시선이 사제들 틈에서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하인리히에게 향했다.

그날, 교단은 마지막 파편을 빼앗겨 불사왕의 재림을 막지 못했지만···.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함께, 재앙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 사람만 빼고.

#65

커스터마이징 (1)

웅성웅성—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에서 부상자들이 줄줄이 실려 나와 치료실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

리에스타 성녀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두가 자신의 몸을 던져 가며 노력했건만, 자신이 부족한 까닭에 그 뜻을 이뤄주지 못한 것 같아서.

그때 성녀의 눈이 치료실 한쪽에서 사제들에게 둘러싸인 성기사 한 명에게 향했다.

이미 몇 차례나 되는 정화 치료를 받았음에도, 아직도 몸 곳곳이 검게 변색된 하인리히였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오늘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이 재차 터져 나왔다.

"성녀님,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계셨군요."

"아, 코델리아 추기경님···."

그때 성녀와 마찬가지로 지친 표정의 추기경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성녀님도 오늘 무리하셨는데, 이만 쉬셔야지요."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네요."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과도하게 신성력을 사용한 데다, 전투가 끝난 직후 남은 여력을 쥐어짜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그녀도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지만···.

이 광경을 보니 도저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서요."

"그때라면··· 그렇군요."

코델리아 추기경의 시선이 성녀를 따라 한곳으로 이동했다.

"하인리히 경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치료 기간은 좀 길어질 것 같지만요."

"그거 다행이군요."

"하지만···."

성녀도 직접 하인리히를 살펴봤던 만큼, 그가 뒤집어쓴 저주의 기운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극한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종류의 흑마법.

무방비 상태로 직격하면 팔라딘이라도 전투 불능이 되어버릴 수준이었다.

'보통은 신성력을 몸에 둘러 그 정도까지 피해를 입지는 않겠지만···.'

그런데 하인리히는 그것을 맨몸으로 맞고 견뎠다.

코앞에서 발동된 그 저주의 위험성을 당사자가 몰랐을 리 없건만, 그는 오직 의지만으로 버텨낸 것이다.

방어에 돌릴 한 방울의 신성력까지 전부 검 끝에 담아 의지로 날을 벼렸다.

자신의 안위보단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그 확률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집념으로.

임무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그 모습이 미련하면서도, 그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불사왕을 물리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을까요? 좀 더··· 제가 노력했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공간 이동 능력, 그것도 원하는 순간에 즉각 발동할 수 있는 축복은 굉장히 희귀한 힘이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도 가진 사람이 하인리히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험으로 떠미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희생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그 자리에서 불사왕을 처리할 수···.

"성녀님!"

끝없는 자책에 빠진 성녀의 상념을 끊듯이, 코델리아 추기경이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는 저희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성녀님께서 자신을 탓할 여지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성녀의 모습에, 코델리아 추기경은 손녀를 보는 할머니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덕분에 저희는 새로운 영웅을 얻지 않았습니까. 불사왕이 부활한 지금, 그에 대적할 수 있는 영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성기사단장들과 같은 주교급의 신성력을 가진 젊은 성기사.

그 전투 능력도 결코 모자라지 않으니, 그는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실력자였다.

"이번 시련은 그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결코 이런 일로 쉽게 무너질 사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주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웅이니까요."

그 영웅이 더욱 빠르고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 추기경은 그것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을 끝맺었다.

'영웅···!'

성녀는 기절한 하인리히를 다시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지금까지 읽어온 이야기책에서도 항상 그랬듯이, 성녀는 영웅의 옆에서 그를 돕는 조력자가 아니었던가.

여태껏 수많은 영웅담을 독파해 온 경험을 돌이켜 봐도, 성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마왕을 때려잡는 내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왕, 용사, 성녀!'

꿈 많은 18세 소녀의 상상이 부풀어 올랐다.

어느새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굳은 결의가 담긴 눈을 반짝거리는 성녀를, 코델리아 추기경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

짝짝짝—

"훌륭해, 아주 훌륭하다."

나는 감동을 금치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주연과 감독을 모두 맡아, 훌륭한 장면을 연출해 낸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첫 단추는 괜찮게 끼었군. 이로써 한스와 하인리히 사이에 대적자로서의 서사가 완성되었다."

이미 완성된 최종 보스 한스와, 급격히 성장 중인 용사 후보 하인리히.

지금의 그는 용사 후보라고 하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 도달한 주교급의 신성력은, 성기사단장들이나 가지고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실질적인 무기술이나 경험 등은 그들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부분은 추후의 노력과 하인리히가 가진 스킬들로 어떻게든 벌충할 수 있었다.

'「축복 : 광검」을 얻은 것도 굉장히 좋고. 어둠 속성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릴 수 있는 극상성의 공격이라니.'

그것이 정말 순수하게 하인리히 혼자만의 힘으로 타이밍 좋게 깨달은 건지, 아니면 지켜보던 후원자께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서포트해 준 건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 힘이 영웅담의 주인공에 더없이 어울린다는 게 중요하지!'

이번에 교단 고위층들의 눈에 강한 인상을 주는 데에도 성공했으니, 이만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극한까지 뽑아먹었다고 봐도 되리라.

'물론 가장 큰 이득은 따로 있지만.'

시선이 방구석의 바닥으로 향했다.

스스스—

방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며, 아래에서 검은 인영이 서서히 올라왔다.

격전 끝에 누더기가 된 로브를 걸친 해골.

이제는 불사왕이 된 한스였다.

철저하게 감춘 덕에 그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오싹함이 느껴졌다.

'분위기 하나는 정말 장난 아니군.'

사실 가진 능력은 더 장난이 아니었다.

<개체 정보>

-개체명 : 한스

-종족 : 언데드 (불사왕)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불사의 심장」, 「사악한 지혜」, 「금단의 지식」, 「마도의 길」, 「심연의 눈」, 「마력 지배」

-특이 사항 : '불사왕의 심장'을 온전히 계승해 아우테리카 차원의 재앙, 3대 불사왕이 되었다. 심장을 통해 흑마력이 무한히 공급된다. 심장이 파괴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재생한다. 죽음을 초월하여 모든 사자(死者)의 왕이자, 모든 생자(生者)의 적이 되었다.

이미 사용해 본 적 있는 「심연의 눈」은 무한정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지만, 그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불사의 심장」은 기존의 능력을 강화하는 정도를 벗어나, 「사악한 지혜」나 「금단의 지식」 등 그가 가진 모든 스킬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거기에 「마력 지배」로 기본 마력 컨트롤이 강해진 건 물론, 상대방의 제어권도 일부 빼앗아 올 수 있게 되었으니···.

'주문 사용 직업의 최종 진화형이군.'

그야말로 마왕 그 자체였다.

거기다 아공간의 심장을 직접 타격하지 않으면 피해를 받아도 의미가 없으니, 불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것 때문에 이번 연극도 성공할 수 있었지.'

심장부가 꿰뚫리고 신성력에 지져진 것치곤 너무 멀쩡한 한스의 모습.

「축복 : 광검」에 공간을 가르는 힘은 없었던 만큼, 당연히 진즉에 수복된 것이다.

하인리히는 좀 더 극적인 연출을 위한 저주의 여파로 상당한 회복 기간이 필요했지만, 그 또한 영웅의 시련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작전명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의 서막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설정상 타격을 입은 한스는 당분간 지구에서 활동해야겠지만, 이참에 그동안 밀린 청소를 해치우면 될 터.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수금이지! 관람비를 정산할 차례다.'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한 연극이었다.

물론 이번 사건의 후폭풍이 다른 곳으로 퍼지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그 직접적인 영향력은 교단 내부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였지만, 업적 보상도 있으니 당장 주어진 카르마가 그렇게 적진 않으리라.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8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1,641,132』

'호오, 대충 백만 정도 오른 건가?'

이계로 전송된 각성자가 단번에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포인트.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얻게 된 카르마였다.

'그 한 번의 사건 스케일이 좀 크긴 했지.'

어쨌든,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유스킬 강화를 선택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느꼈던 두통이 느껴지고, 나는 또 하나의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커스터마이징」를 획득합니다."

아바타마다 1회에 한해 여러 가지 설정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게임에서 캐릭터를 생성하기 전에 몇 시간이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맞춤 제작 서비스 아닌가!

곧바로 사용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리고 때마침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아바타들은 각자의 일로 바쁜 만큼 당장 시험할 수 있는 아바타가 한스밖에 없었다.

또 만약 「커스터마이징」으로 외형을 변경할 수 있다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품으며 곧바로 한스를 통해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했고···.

나는 곧바로 할 말을 잃었다.

-매끈한 두개골, 짱구형 두개골, 금이 간 두개골···

-둥그런 안와, 치켜 올라간 안와, 축 처진 안와···

-가지런한 이빨, 뾰족한 이빨, 흡혈귀 이빨···

눈앞에 떠오른 세부 목록.

그것뿐만 아니라, 추가로 세밀한 조절을 통해 자신만의 해골을 원하는 대로 조형할 수도 있었다!

'···종족의 한계는 넘을 수 없는 거였나.'

사실 평소 가면을 쓰고 다니고, 인간관계도 만들 수 없는 한스다 보니 외형 변경은 딱히 도움 되는 능력은 아니었다.

'정 필요하면 환상 마법이라도 덧씌우면 되니까. 이제 마법 수준도 더 올라갔으니, 어지간하면 들킬 일은 없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다른 기능들을 더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한스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형 변경이 전부였다.

「커스터마이징」에 포함된 '초기 스테이터스 설정'은 이제 막 만들어지는 아바타에만 한정되는 능력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이제 장래 직업에 따라 미리 능력치를 조절해 둘 수 있는 건가?'

지금 그의 능력치는 포인트 분배를 통해 전체적으로 고르게 높은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라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제 그 평이한 능력치를 한 가지에 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법사는 지능과 마력, 전사는 힘과 체력처럼.

'마침 이번에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바로 시험해 보자. 이번엔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까···.'

그렇게 아바타 생성을 위해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하려는 순간.

"어?"

불현듯 한 가지 정보가 뇌리에 스쳤다.

스킬은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거나 어떤 조건을 달성했을 때에 특정 기능에 대한 정보를 해금 식으로, 새로운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였다.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만큼 지금 새로 깨달은 기능은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매개체를 통해 그 관련 종족으로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다니!'

'매개체'라는 단어가 굉장히 애매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거실의 구석에 자리한 화분 앞으로 향했다.

세실리가 주었던 친환경 공기청정기··· 아니, '메마른 세계수의 가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을 잡고 화분에서 쑥 뽑았다.

이것이 바로 '엘프'로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해줄 매개체였으니까.

#66

커스터마이징 (2)

'엘프라··· 엘프가 될 수 있단 말이지?'

언데드나 뱀파이어처럼 인간에서 변화한 종족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곧바로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하자, 매개체는 일회용이었는지 손에 들린 가지가 부스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눈앞에 반투명한 형상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뾰족한 귀를 한 자신과 닮은 엘프의 모습이.

'하인즈와는 다른 느낌으로 잘 생겼네.'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의 하인즈 2세와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미남자였다.

'···그래도 살짝만 손볼까.'

이 얼굴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연상하기는 힘들 테지만, 매사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도 아바타는 계속해서 늘어날 테니까.

한스는 해골이니 의미 없고 하인즈 2세와 할리는 자력으로 외모를 변경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인연을 맺은 하인리히는 어쩔 수 없지만, 휴버트는 조만간 성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공들여 외형을 변경했다.

백옥 같은 피부에 금발과 녹색 눈동자, 장인의 마음으로 빚은 이상 속의 엘프 그 자체였다.

'성별 바꾸기는 안 되네.'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지만··· 아직 스킬의 숙련도가 부족하거나 다른 조건이 필요한 듯, 여성 아바타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딱히 아쉬운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하니까. 정체를 더 확실하게 숨길 수 있기도 하고."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변명을 주절거리다 헛기침하며, 아바타 생성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초기 능력치를 재조정할 차례였다.

후보 직업군은 정령사와 궁수인데, 역시 어느 쪽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럼 둘 다 하면 되지.'

진짜 게임도 아니니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도 둘 모두 엘프들의 기본 소양이기도 했고.

'능력치는 친화력 쪽으로 몰아넣자. 빨리 강해지기 위해선 일단 정령사 쪽이 유리할 테니.'

대부분의 능력치가 친화력으로 변환되었다.

물론 궁수도 겸할 생각이다 보니 신체 능력치는 많이 깎지 못했지만, 그 부분은 추후 단련으로도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

'회복력도 많이 떨어졌다지만, 공용 스킬로 「초회복」이 남아있긴 하니까 어느 정도 벌충은 되겠지.'

가진 회복력을 증폭시키는 스킬인지라 기본 수치가 낮으면 효과도 떨어지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고민을 거친 끝에, 드디어 엘프 아바타가 생성되었다.

<개체 정보>

-개체명 : 해리스

-종족 : 엘프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세계수의 아이」

-특이 사항 : 한성현의 일곱 번째 아바타. 세계수의 가지를 매개체로 엘프로 탄생했다. 「세계수의 아이」의 효과로 친화력과 자연력의 성장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

아까 한스도 그렇고 해리스의 정보창에도 「즉사 면역」에 관련된 내용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특전으로 받은 능력은 개체 정보창에 표기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더 잘 생겼네.'

앞에 자리한 수려한 외모의 엘프 남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기분 탓인지 뭔가 주변에서 신선한 숲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커스터마이징」으로 탄생해서인지 초기 스킬도 매개체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무작위로 부여되는 스킬이라기에는 너무 개체의 특성에 딱 맞아떨어졌다.

아마 「커스터마이징」의 추가 효과일 터.

이는 다음에 또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였다.

그런데 부드럽게 웃고 있던 해리스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서서히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느낌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답답해···."

뿌연 연기 속에 있는 기분.

그나마 있던 친환경 공기청정기가 사라지면서, 남아 있던 효과가 서서히 떨어져 바깥 공기의 매캐함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예민하네.'

본체로는 아무렇지도 않건만, 해리스는 주변 환경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무라고는 가로수와 한 줌의 공원밖에 없는 메마른 도시 한복판.

그저 이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괴롭게 느껴졌다.

'이 환경에 익숙해져서 본체의 자연 친화력이 떨어진 건가···.'

굳이 이런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봤자 좋을 일은 없으니, 일단 해리스의 소환을 해제했다.

오늘 자 이계전송진은 한스를 대신전으로 보내며 사용한지라, 내일에나 아우테리카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드디어 하인리히가 정신을 차렸군.'

새 아바타 생성에 몰두한 지 몇 시간, 아우테리카의 시간은 이미 하루가 넘게 지나 있었고···.

치료실에 입원해 있던 하인리히가 눈을 떴다.

***

"으음···."

"아! 하인리히 경, 정신이 드시나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자, 옆에서 한 여성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집중 치료실이에요. 하인리히 경이 이곳에 오신 지 꼬박 하루가 지났어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이에요."

강아지 같은 인상의 치유 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인리히의 몸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맨몸으로 그 정도 수준의 저주를 뒤집어쓰신 것 치곤 예후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강체의 축복에 회복력까지 원체 뛰어나신지라 후유증도 딱히 남지 않을 것 같고요."

"그거 다행이군요···."

사실 그것도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각본이었지만, 하인리히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요. 한 달 정도는 상태를 지켜보며···."

"웃차~"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하는 치유 사제.

그는 계속 가만히 누운 상태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답답해서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아앗! 아직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고통이 엄청나실 텐데!"

그녀의 말대로, 잠깐 움직였다고 「마인드 허브」에 걸러지는 정보량이 폭증했다.

이걸 그냥 버텨야 했다면 눈물 콧물을 쏟으며 데굴데굴 굴러다녀야 했으리라.

"아···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는 참을 만합니다."

"그, 그걸 참으신다고요? 아··· 아! 그래도 안 돼요! 누워요, 누워!"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기어코 하인리히를 억지로 자리에 눕히고 나서야 진정했다.

"단순히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저주는 정신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혀서, 당분간은 평소에도 차분히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어요. 스트레스에 취약해져서 사소한 자극에도 발작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음, 그런가요?"

물론 그것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수준 높은 흑마법들 중에서도 그에게 별 영향이 없는 것만을 엄선해서 고른 저주였으니까.

'「마인드 허브」로 '불사왕의 심장'의 정신 오염도 막아내는데 이 정도 수준이야 뭐···.'

그보다 지금은 자신이 기절한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에 대한 내용을 물어보자 치유 사제는 괜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여겼는지, 그냥 다른 생각 말고 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기엔 너무 답답해서 말이죠. 이대로 있는 게 더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라도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계속되는 하인리히의 고집에 그녀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망자는 없어요. 대신전의 결계 덕분도 있겠지만, 불사왕이 방심하고 여유를 부린 탓이 컸겠죠. 부상자는 많지만 전부 입원 치료 중이고요."

그리고 마물의 숲으로 파견되었던 토벌대도 급히 귀환해 대신전의 보안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미 거하게 침입을 허용한 이상, 아마 당분간은 경계수위가 내려갈 일은 없으리라.

"이단심문관들은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느라 바쁜 상황이죠."

불사왕이 침입한 경위를 알아내기 위한 현장 조사는 물론, 마물의 숲에는 현지의 이단심문관들이 일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이번 사태로 엘프들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겠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대신전의 방비를 낮추는 데 한몫한 셈이 되어버렸으니···.

당장 교단 측에서 대놓고 뭐라 하진 않겠지만, 지난밤의 소동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들은 자리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이단심문관들이 한스의 비밀 실험실을 발견하고 나면 엘프들의 억울함도 풀리겠지.'

그들은 한스가 언제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낼 능력이 있었으니까.

"아! 하인리히 경! 깨어나셨네요!"

때마침 성녀가 치료실로 들어서다가 하인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치유 사제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일어나 계시는 것보단 푹 주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재워드려요?"

하인리히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쉴 새 없이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하인리히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있다간 정말로 성녀가 성법을 사용해 그를 재워버릴지도 몰랐으니.

"아, 괜찮습니다.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는 건데요 뭐. 오히려 제가 기절한 이후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다죠?"

서둘러 화제를 돌린 효과가 있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하인리히 경이 늦지 않게 불사왕을 쫓아버린 덕분이죠. 놈을 그 자리에서 해치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모두 전멸하는 최악의 사태만은 면했으니까요."

"모두가 힘을 합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축복을 얻어 불사왕의 심장에 빛의 검을 꽂아 넣는 순간은, 마치 영웅담의 한 장면 같았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공치사를 날리는 성녀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겸양의 말을 하는 하인리히 사이의 공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었던지라, 그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저는 지금 라포리 님께 갔다 오는 중이에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다시 한번 불사왕의 위치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을 드렸는데···."

라포리도 상황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터라, 성녀의 요청에 급하게 재탐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어제까지만 해도 마물의 숲에 머물러 있던 불사왕의 기운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고 한다.

"물론 엘븐 킹덤 측을 의심하진 않아요. 라포리 님은 침묵의 축복까지 받으셨기도 하고,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요."

타이밍이 공교롭기는 하지만, 엘프들을 의심하기보단 불사왕이 대신전의 방비가 약해진 틈을 절묘하게 노리고 들어왔다고 봐야 하리라.

여전히 '어떻게'라는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긴 했지만.

"앗! 말하다 보니 너무 하소연만 늘어놓았네요! 환자이신데 괜히 신경 쓰이게!"

"괜찮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누워만 있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말동무가 되어주시면 저야 좋죠."

이렇게 여러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 말이다.

이후 성녀가 다시 일을 보러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이계전송진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인리히가 입원한 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우테리카 차원으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리스는 타라크의 거점에 머무르고 있던 휴버트 앞으로 곧바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휴버트에게서 그간 차고 있었음에도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았던 하이 엘프의 팔찌를 인계받았다.

"음··· 확실히 뭔가 느낌이 다르군."

팔찌를 팔목에 걸자마자 오는 반응.

처음부터 친화력이 강한 상태였기 때문인지, 다른 아바타가 착용했을 때와는 느껴지는 감각 자체가 달랐다.

주변의 자연력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속성에 대한 감응력도 확연히 증가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이건 그야말로 해리스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장비였다.

'그것도 더 업그레이드할 필요 없는 최종 장비나 다름없지. 무려 하이 엘프가 직접 사용하던 거니까.'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쓰다듬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알림이 떠 오른 것은, 그가 한참 느껴지는 감각에 심취해 있던 순간이었다.

"세계수가 자신의 아이를 바라봅니다."

"어라?"

세계수가 해리스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

#67

커스터마이징 (3)

"호오··· 과연, 소문대로 아주 질이 좋은 후추로군. 가공 상태도 깔끔하고."

"직접 사용해 본 이들의 평가도 아주 좋습니다. 높으신 분들도 하나같이 만족하신다고 하더군요."

"이 정도면 잘만 갖다 팔면 마진은 물론, 인맥을 다지는 데에도 그만이겠는데."

휴버트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공간 마도구에 가득 담아온 후추는 상당히 높은 가격을 책정했음에도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후추 판매 초기에 근처의 대형 상단에 샘플을 보내고 이런저런 연을 맺어둔 것이 좋게 작용한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상대가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할리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교단을 통해 정식으로 용병 길드에 전해진 감사 인사는 할리의 유명세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명해진 만큼 시비가 걸리는 빈도도 전보다 늘었지만, 그 또한 새로운 마케팅이 될 뿐이었다.

'그 흉악한 외모의 할리에게 싸움을 걸 정도면 나름대로 유명한 놈들이었을 텐데. 그런 이들을 맨손으로 접어 버렸으니···.'

타라크 용병계의 유명 인사가 된 할리.

그런 이가 동업자의 신분으로 있는 휴버트 상회도 나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좋은 제품과 합리적인 가격, 한정된 물량을 이용한 마케팅. 또 유명인의 이름을 이용한 신뢰도까지. 이건 실패하는 게 이상하지.'

외부의 개입 또한 할리 덕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대형 상단 등의 커다란 세력은 기본적으로 교단과 연을 맺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인맥을 통해 할리가 정말로 교단 상층부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휴버트 상회를 건드릴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들 입장에서는 작은 사업체 하나 꿀꺽하겠다고 교단에 밉보이는 게 더 손해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정보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은···.

"크헉··· 요, 용서를···."

어두운 뒷골목.

험상궂은 사내들이 곳곳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할리, 이놈이 용서해달라는디?"

얼굴에 문신이 새겨진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한 파락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다가 옆쪽으로 말을 건넸다.

"용서? 이 새끼들이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제 와서 용서야?"

"이런 것들은 처음부터 뿌리를 밟아 놔야 다신 기어오르지 않거든?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그의 말에 할리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마찬가지로 몸 곳곳에 문신이 있는 덩치 두 명이었다.

한때 그와 마찰을 빚었다가 이제는 형제처럼 가까워진 남부 전사들.

가장 큰 덩치의 루왕, 눈가에 칼자국이 있는 다오, 얼굴에 털이 가득한 투라바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금 할리를 도와 휴버트 상회에 개수작을 부리려던 파락호들을 밟아놓는 중이었다.

'물론 무보수로 부려 먹는 건 아니지만. 돈도 많이 버는데 이런 데에 아낄 필요까진 없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으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다.

돈 몇 푼으로 적극적인 협조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음, 그러고 보니 뭔가 할리의 인상이 조금 바뀐 것 같지 않아?"

"너도 그래? 난 뭔가 전보다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그건 그냥 그동안 친해져서 그런 거 아녀?"

"그런가?"

일을 마치고 술 한잔하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별 의미 없이 나온 대화 주제였지만, 할리는 괜히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찔끔찔끔 바꾸고 있었는데···.'

정말 그의 얼굴형이 처음과는 미묘하게 다를 정도로 변하는 중이었으니까.

남부 현지인들을 셋이나 만났으니, 이참에 그 특징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기회였다.

뭔가 미묘했던 할리의 얼굴이 매일 조금씩 남부인의 인종에 맞게 수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하핫! 그게 다 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의미 아니겠나! 이제 정말 형제처럼 느껴지는 거지!"

할리는 넉살 좋게 껄껄 웃어대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화제를 넘겨버렸다.

그리고 들어선 술집 안에서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주제는 대부분 남부 지역에 관한 것으로, 현지인들의 생생한 경험담이 주가 되는 아주 유익한 정보였다.

"···그래서 남부를 벗어나면 각인을 새기기 힘들단 말야. 주술사들이 대부분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으니께."

"가끔 다른 곳에서 마주칠 때는 있는데, 그때 자격을 증명하고 대가를 지불하면 새로운 각인을 새길 수 있지."

그 중엔 그들이 자주 말하던 '각인'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가끔 멍청한 것들이 분수에도 맞지 않는 각인을 새기려고 드는 경우가 있는데, 어지간한 경우라면 주술사가 알아서 쫓아내거나 할 테지만···."

"가끔 있단 말이제. 꼭 지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들이."

협박, 회유, 매수, 속임수 등으로 억지로 몸에 각인을 새기는 경우가 있었다.

"괜히 자격 증명이 필요한 게 아닌데 말이야."

각인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었다.

육신에 흐르는 생명력과 마나, 당사자가 쌓아 올린 업을 엮어서 새기는 신비의 한 갈래였으니.

'육체를 강화하는 생체 마법진의 일종인가?'

분수에 맞지 않는 각인은 수명을 갉아먹는 건 물론이고 근손실과 정력 감퇴, 노화와 탈모까지 온갖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부에서는 각인 하나 없으면 전사로 인정해 주지도 않아. 가장 기본적인 '전사의 각인'의 자격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니."

그게 그들이 '자칭 남부의 전사'였던 할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이유였다.

벌거벗고 다니는 몸에는 장난 같은 낙서만 있을 뿐, 어디에도 각인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장 얻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남부로 가기 전에는 꼭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는 상남자답게 커다란 잔에 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휴버트와 할리가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새롭게 타라크에 합류한 해리스는 며칠간 계속해서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끄응··· 뭔가 느껴지긴 하는데···."

휴버트가 구해 놓은 거점에 틀어박혀 매일 명상을 통해 정령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엘프 아바타 해리스.

하이 엘프가 될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했건만, 세계수가 바라본다는 알림 이후로 딱히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자연력인 것 같은데, 정령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거지? 아직 내 친화력이 부족한가?'

나무 등의 자연물을 통해 한 번 걸러져 맑고 깨끗하게 정화된 마나, 자연력은 정령 계약 시에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초기 능력치도 그렇고 「세계수의 아이」와 팔찌의 효과로 친화력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어떻게 정령사가 될 수 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러기보단 좀 더 자연력이 풍부한 숲속으로 가서 시도해 봐야 하나···?"

그동안은 엘프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젠 밖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대충 후드를 눌러써서 귀를 가리면 되겠지. 정령을 계약하기 전에는 최대한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이온 대륙에서 희소한 종족인 엘프는 필연적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하이 엘프 후보였던 세실리도 그 때문에 노예로 팔려 갔던 것이 아닌가.

'그래, 세실리처럼··· 응? 가만···.'

하이 엘프 라포리와 후보 세실리, 그리고 스물에 가까운 엘프 사절단까지.

그들은 아직도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탈리아 왕국의 이단심문관들은 마물의 숲에서 불사왕이 머물렀던 거처를 발견하고, 그가 대신전에 침입하기 직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냈다.

여전히 그가 어떻게 대신전의 방비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교단 측도 엘프들을 의심한 건 아니었으니까.'

일의 진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것뿐이라, 엘프들에 대해선 교단도 처음처럼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 일도 마쳤으니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 하던데···.'

독학하는 것보다는 같은 엘프의 도움을 받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조언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다.

'좋아. 그게 좋겠다.'

해리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당당히 타라크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가 목적지에 다 와 갈 무렵, 옆의 골목에서 거대한 거구가 어슬렁거리며 접근했다.

가녀린 체구의 해리스와는 반대로 크고 우람한 몸뚱이.

위압적인 걸음으로 다가온 사내, 할리는 자연스럽게 그와 합류해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부 전사들과 술자리를 가지다가 해리스를 돕기 위해 시간을 내서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걸어 곧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 할리 님이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무슨 일로··· 혹시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너무나 개성적인 모습으로, 그 존재 자체가 신분증인 할리를 알아보고 신전의 입구를 지키던 성전사가 말을 걸어왔다.

"하하핫—! 이번에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오. 안쪽에 이야기 좀 전해 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해서 마련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간단했다.

<용병 활동을 하다 절친한 엘프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 이 친구도 오랜 세월을 혼자 떠돌아다닌 터라, 다른 엘프들과 그들의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

그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진 일도 있고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마침 자신이 아는 엘프들이 있으니 그를 소개해 주고 싶다.

그러니 그들에게 연락 좀 해 달라, 될 수 있으면 게이트도 이용하게 해 주고.>

그리고 징표로서 자신이 사용하기 애매했던 팔찌까지 선물로 줬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도움 요청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합의가 끝난 사항이라, 할리의 이야기는 곧바로 로셀리아 대신전의 엘프들에게로 전달되었다.

***

우우웅—

이미 몇 번이나 이용해 본 게이트를 지나니, 마찬가지로 익숙해진 공간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해리스 님. 로셀리아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쪽만 일방적으로 얼굴을 아는 게이트 담당 대사제가 그를 반겼다.

그리고 해리스는 다른 사제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안내되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곳을 전혀 다른 신분으로 오게 되니 뭔가 어색하네.'

엘프들의 도움을 받기로 이야기가 되자마자, 그는 교단의 협조를 받아 며칠에 걸친 게이트 이동으로 로셀리아 대신전까지 도착했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안내받은 곳은 엘븐 킹덤에서 온 이들이 머무는 숙소였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엘프들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 라포리 그랜우드라고 합니다."

해리스가 들어서자 라포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저는 해리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할리 님의 부탁이시기도 하고, 같은 동포의 일이니까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한 라포리는 해리스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 님이랑 절친한 사이이신 모양이군요. 그분이 호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하신 부탁이 자신의 친구를 도와달라는 것이라는 말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아··· 상당히 친밀한 관계이기는 하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랄까요···?"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팔찌는 원래 라포리 님이 사용하시던 거라고 들었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 같아서 받기는 했는데, 불쾌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것은 제가 감사의 대가로 할리 님께 드린 것이고, 그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든 제가 더 이상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요."

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오히려 그걸 저희 동포분을 위해 사용해 주셨다는 것에 재차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눈으로 해리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왠지 부담스러워지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해리스 님이 원하시는 게 자연력을 다루는 방법과 정령과 계약하는 법이라는 말씀이시죠?"

"아, 예. 그렇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온지라, 그런 걸 알려줄 사람이 없더군요. 어떻게 조언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흐음···."

라포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좀 과하게 친밀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뭔가 눈치챈 건가?'

아무리 은인의 소개로 찾아온 타지의 동포라고 하지만, 그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라포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말입니다. 해리스 님만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에나멜 대륙의 엘븐 킹덤으로 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에나멜 대륙으로요?"

"예, 저희도 조만간 돌아가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짧게 조언만 듣는 것보단 그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가게 되면 정령술과 궁술 등 여러 가지를 좀 더 세세하게 교육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은근히 유혹해왔다.

'엘프··· 이종족··· 다른 대륙··· 새로운 모험!'

이런 좋은 기회를 굳이 거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흔쾌히 수락하려는 찰나, 라포리가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엇보다, 세계수께서 해리스 님을 눈여겨 보이시는 것 같아서 말이죠. 아직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건 아니지만, 적성 정도는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미묘했던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세계수께서는 해리스에게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었다.

#68

각인 (1)

신전을 통해 해리스의 전언이 할리에게 전달되었다.

사실 필요도 없었지만, 남들의 시선에 따라 지켜야 하는 절차가 있었으니까.

할리는 친우의 여정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고, 해리스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과 함께 에나멜 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불사왕과의 일이 영 찝찝하게 끝난지라, 윗선끼리 아직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절단의 엘프들은 하나같이 엘븐 킹덤의 엘리트들이었으니, 그 와중에도 기본 교육은 착실하게 이뤄졌다.

정령술과 궁술을 비롯해 우아한 숲의 요정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배우기 위한 그 과정에는, 그 혼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할리 님과 친구분이시라구요?"

북부 산맥에서 할리가 구해주었던 엘프 소녀, 세실리도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만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서로 마음이 잘 맞는지라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죠."

"그래서 그런가? 해리스 씨에게서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요."

순간적으로 익숙한 아이가 오버랩되는 대사에 내심 움찔했다.

'디아나 같은 말을 하네. 설마 눈치채진 않았겠지?'

라포리도 별말을 하지 않은 걸 보니 하이 엘프로서의 능력은 아닌 듯한데···.

그렇게 속으로 혼자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아! 세계수의 가지에서 느껴졌던 냄새랑 비슷하네요! 제가 그걸 하루 종일 끌어안고 있어 봐서 잘 알거든요."

'그 가지, 이 몸의 재료가 되어 사라졌답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세실리가 기시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흐음~ 그래서 라포리 님이 신경 쓰시는 건가···?"

그리고는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희 잘 지내봐요. 할리 님의 친구분이라고 하니, 제가 잘 챙겨드릴게요."

작은 엘프 소녀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어깨를 활짝 펴고 으스댔다.

아무래도 자기 혼자 교육받다가 새로운 교육생이 오니, 선배인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하···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정령술 강의.

"정령은 정령사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반자입니다. 계약한 정령은 친화력을 통한 교감과 자연력을 공급받아 성장하죠. 그리고 계약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왜 그동안 해리스가 정령사가 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호감이 가는 외모(친화력)와 충분한 재력(자연력)이 있다고 해도 결혼(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절차가 필요한 법이었다.

제대로 상대를 인식하고 서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야 뭐든 시작할 수 있었으니, 그 과정이 바로 정령술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요? 처음이라면서요?"

그리고 그가 손끝에 자연력을 뭉쳐 다루는 모습을 본 세실리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작은 물의 정령을 소환한 채, 뭔가 조언을 하고 싶다는 듯 기대 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힐끔거리던 얼굴은 어느새 떨떠름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수많은 에너지를 다뤄 온 가닥과 이세계 성장 보정, 아바타 성장 가속, 거기에 「세계수의 아이」의 효과까지.

그에게 이런 기초 중의 기초는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호오, 습득이 굉장히 빠르군요. 이대로라면 곧 두 분의 진도를 맞출 수도 있겠는데요?"

강의를 맡은 엘프는 일이 편해졌다고 좋아했으나, 세실리는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물의 정령을 다루는 데에 더 집중할 뿐이었다.

그녀도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만큼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진짜 하이 엘프는 아닌 만큼 해리스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궁술이나 산악 기동 등 몸을 쓰는 일에 관해서는···.

"과연, 용병 일을 하다 왔다더니 신체를 다루는 건 제법이로군. 활 쓰는 방식에서 인간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많이 쏘다 보면 교정이 되겠지."

엘프 교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육체파 선배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하인리히의 「무골」과 「종합 무기술」로 궁술까지 미리 습득해 둔 상태였으니, 딴 사람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흐엑··· 헥···."

활을 들고 나무 위를 달리는 훈련이 끝나고, 세실리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으아··· 이, 이쪽은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패배를 인정하죠. 제가 졌어요!"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언제부턴가 경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지 며칠.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정령술」을 획득합니다."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해리스는 빠르게 「정령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파직— 파직—

허공에서 작은 빛뭉치가 스파크를 튀겼다.

최하급 번개의 정령.

모든 정령은 정령사의 수준에 따라 함께 성장한다.

이 아이도 지금은 최하급 정령이지만, 그의 능력이 증가할 때마다 교감을 통해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네 이름은 와트다."

파직— 파지직—!

'볼트(Volt ;전압)'는 뭔가 흔한 느낌이고, '암페어(Ampere ;전류)'는 어감이 좋지 않으니 '와트(Watt ;전력)'였다.

그렇게 해리스는 정령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

한스는 지구에서 범죄자 청소 중이고, 하인즈 2세도 지구의 세력을 다지는 중이다.

하인리히는 부상으로 입원 중이었으며, 해리스는 엘프들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

'어쩌다 보니 지구에 둘, 대신전에 둘, 타라크에 둘씩 배치가 됐네.'

타라크의 두 아바타는 각자 사업과 사냥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휴버트의 후추는 10일에 한 번, 그것도 여유가 생길 때만 이계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다 보니 공급의 안정성이 너무 떨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프리미엄 상품으로 두고, 그간 챙긴 밑천을 바탕으로 「감정」을 이용해 다른 분야까지 발을 넓히고 있었다.

일단 상인에게 물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니까.

그간의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 신뢰도도 쌓여서 어렵지 않게 순항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할리는···.

"오! 할리! 드디어 왔구만! 얼른 이리 와봐!"

구레나룻을 비롯해 얼굴에 털이 가득한 남부 전사, 투라바가 단골 주점으로 막 들어서는 그를 격하게 반겼다.

해리스를 대신전으로 보낸 후, 오랜만에 강철의 성채를 넘어 사냥하고 막 돌아온 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래?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휴버트 상회도 한창 성장 중인 만큼 경비를 서는 용병들을 따로 고용하기도 했지만,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직접 신경 써 주는 게 당연히 더 안전했다.

할리가 이번에 마음 편히 사냥을 다녀온 것도 베테랑 용병인 삼인방이 있어서였는데···.

'휴버트한텐 별일 없었는데?'

그가 평소와 같이 위압적인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자리에 앉자, 할리 다음으로 덩치가 큰 근육 돼지 루왕이 그에게 잔 하나를 건네며 실실 웃었다.

"이번에 투라바가 기가 맥힌 걸 발견했다는데."

"확실히, 할리가 좋아할 것 같긴 했지."

눈가에 칼자국이 있는 다오도 술을 홀짝이며 맞장구쳤다.

"오? 그렇게까지 말하니 기대되는군!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 보라고! 정말 좋은 정보면 오늘 술은 내가 다 살 테니! 하하핫!"

할리는 큰 기대는 하지 않으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친구들은 다 좋은데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 떠는 일이 잦았으니까.

"이거 허리띠 풀고 마셔야겠구만!"

"투라바 덕에 오늘 뒤질 때까지 마실 수 있겄어!"

"거 친구들, 답답하게 설레발은 그만 치고 얼른 이야기나 해 보라고!"

삼인방에게 재차 핀잔을 주고서야 듣게 된 이번 정보는, 진짜로 솔깃한 내용이었다.

"남부 출신의 주술사가 이곳 타라크에 있더군! 저번에 말했지? 각인을 새길 수 있는 주술사에 대해서 말이야."

남부의 전사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여러 종류의 각인들.

가짜가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거··· 정말 반가운 정보로군! 좋아! 일단 배터지게 마시며 이야기해 보자고!"

이내 그들은 옆에 술통을 잔뜩 쌓아두고 죽어라 마시며 용케 멀쩡하게 대화를 나눴다.

"흠흠, 내가 요즘 타라크 서쪽 거리에 갈 일이 좀 있었는데 말이지···."

"이 친구 요즘 그 근처 포목점 아가씨한테 작업 걸고 있잖어."

돼지가 털보의 말을 끊으며 낄낄거리자,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연애 사업은 별로 순탄치 않은 모양이었다.

"크으~ 암튼! 내가 지름길로 가려고 거기 골목을 지나가다 딱 마주치고 말았지 뭐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남부의 주술사가 있었을 줄이야.

"상황을 보아하니 없이 사는 사람들 잔병이나 고쳐주며 겨우 밥벌이 하며 사는 것 같던데. 실력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더군."

"기껏 주술로 한다는 게 그런 거면 별 볼 일 없는 거 아냐?"

"글쎄? 사람 사정이야 제각각이니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주술사면 전사의 각인 정도면 새길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의견이 분분해졌지만,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할리는 털보 투라바와 함께 주술사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흐음, 그간 제법 타라크에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처음 와 보는 것 같군."

"우리 같은 용병은 어지간하면 이런 곳까지 올 일이 없으니까. 특별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빈민가까지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허름한 것이 도시의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지역인 것 같았다.

"용병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저 차림새는···."

"쉿! 못 본 척해."

"빨리 가자고."

언제나와 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의 할리와 험상궂은 용병 그 자체인 털보가 나란히 길을 걷자, 지역 주민들이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구역의 건달로 보이는 청년들도 슬쩍 시선을 돌리고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할리, 그 복장은 정말 계속 그렇게···."

"응? 이 멋진 차림이 어때서! 진정한 전사의 기개가 느껴지지 않나?"

"···그래, 마음대로 해."

물론 항상 있는 일이었던 만큼 그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털보는 아직도 조금 민망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그 주술사는 어디지? 제법 들어온 것 같은데."

"다 왔어. 저기 저 골목만 지나면···."

그리고 골목을 지나고 처음 마주한 것은, 할리에게 굉장히 반가운 장면이었다.

"아~ 노인네 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그니까, 치료비를 조금만 높이면 다 해결되는 문제라니까?"

"거 우리가 너무 곱게 대해주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왜소한 노파의 멱살을 잡고 위협하는 파락호들.

사건의 냄새가 났다.

"오호라~?"

할리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가며 사나운 미소가 지어졌다.

주술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마당이었는데, 굉장히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자신의 무력을 과시할 기회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놈들에게 다가갔다.

"응? 어··· 어?"

"야, 야! 잠깐 멈춰봐···."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파락호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눈치 빠른 털보는 어느새 그들이 도망갈 길목을 막아선 채였다.

하지만 할리에게는 아쉽게도, 따로 무력행사할 것도 없이 일은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도망도 치지 못한 놈들을 그 위압적인 근육으로 하나하나 어깨동무해 주며 지그시 눈을 마주쳐 주자, 하나같이 오줌을 지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푼돈이나 뜯는 놈들에게 「야성」까지 사용한 건 좀 심했나?'

실력도, 깡도 부족해서 용병조차 되지 못한 놈들이다.

그런 이들이 몬스터 이상인 그의 기세를 코앞에서 버티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니들 얼굴 기억했다? 이 형님들이 저 할매한테 볼일이 좀 있으니까, 알아서 처신 잘해라?"

한쪽에서 털보가 문신이 새겨진 얼굴을 들이대며 그들을 조곤조곤 타일렀다.

자상하게 어깨를 다독여 주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파락호들이 달아나면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 멱살이 잡혔던 노파는 어느새 태연한 기색으로 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끌끌끌···, 남부 출신 야만인들이 여기까진 무슨 일로 왔누?"

"거 야만인이라니, 요즘 그런 말 하면 남부인들에게 돌 맞소, 할매."

"암만 봐도 저치는 모범적인 야만인 그 자체인데, 뭔 헛소릴 하는가? 내 젊었을 적 보던 모습이랑 똑같구먼. 흘흘···."

"끄응, 저 양반은 그··· 에휴. 그보다 전사가 주술사를 왜 찾아왔겠소? 각인 새기려고 온 거지."

뭐라 한 소리 하려던 털보가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본론을 꺼냈다.

저 복장은 도저히 어떻게 변명할 수 없었으니까.

"흐음, 한 명은 제법 노련한 전사인 듯하고. 다른 하나는 복장은 모범적인 남부 전사 그 자체인데, 몸에 각인 하나 없구먼. 알고 있겠지만, 각인은 아무나 새길 수 없··· 응?"

말을 이어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노파가 묘한 빛이 감도는 눈길로 그들을 훑었다.

그러다 그 시선이 할리를 향한 순간, 줄곧 태연한 기색이던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더니 곧바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야? 이 괴물은?"

#69

각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