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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트리니티 아카데미 기숙사.

어지간한 C섹터 거주구 주택보다도 훨씬 깔끔한 설비를 자랑하는 이곳에서도, 유독 시설이 남다른 곳이 있었다.

다름 아닌 대기업들의 후원을 받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특별동.

그곳은 말하자면 도시 귀족들의 눈에 드는 데에 성공한 '운 좋은 녀석들'을 위한 기숙사였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모든 것이 일반 학생들과는 차별되는 우월한 서비스를 받으며 윤택한 생활을 만끽한다.

그들은 학생 대부분이 C섹터 이하 거주구 출신인 아카데미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허나 그런 탓일까.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대등했던 학생들 사이에는 묘한 계층 같은 것이 생겨 있었다.

-저기 기업 따까리들 몰려온다.

-어디 놈들이야?

-스팅레이.

-개 같은 새끼들.

-괜히 눈 마주치지 마. 시비 걸려 봤자 이쪽이 손해야.

그중에서도 스팅레이 쪽에 소속된 학생들의 평가는 더욱 좋지 못했다.

다른 기업들보다도 훨씬 많은 지원을 받는지라 그만큼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녀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카데미라는 정원 속에서 왕 행세를 하고 다니는 그들을, 일반 학생들은 물론 타 기업 소속 학생들도 아니꼽게 여기곤 했다.

허나 그런 그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었다.

"제기랄, 방학 중에 뭔 놈의 평가야."

"그러게. 나도 약속 잡아 놨던 거 취소했어."

그 고충이란 스폰서의 부름에 예외 없이 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그리고 지금 불려가는 이들은 스팅레이 소속 기술부 1학년, 이제 곧 2학년으로 올라갈 이들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우수한 성적을 낸 덕분에 스팅레이 그룹의 눈에 든 학생들.

그들은 가면서도 쉼 없이 투덜거렸다.

"그래서 뭘 평가한다는 거야? 작년 성적이라면 우린 이미 다 제출했잖아."

"스폰서님이 이번에 복귀하시면서 우리 실력을 직접 한번 확인해 보자고 하셨나 봐."

"스폰서라면, 베네딕트 님?"

"그분은 대리잖아. 그분 말고, 아론 스팅레이라고 하는 이름 못 들어 봤어?"

"아, 병 때문에 입원했다던...."

"그래. 황태자. 잘은 몰라도 아마 병이 나아서 복귀하려는 것 같아. 원래 우리 후원해주는 사람은 그분이었거든."

"그렇구만."

귀찮기는 해도 지시가 내려온 이상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후원이 끊기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공지메일을 받은 스팅레이의 후원 학생들은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시간에 딱 맞추어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으앗!?"

복도를 가장 앞서가던 남학생이 코너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워낙 체격의 차이가 컸던 탓에 남학생에게 부딪친 상대는 뒤로 크게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이 씨!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거야?"

남학생은 상대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버럭 성을 냈다. 허나 부딪친 상대 역시 반박하지 않고 연신 고개를 숙여댔다.

"죄, 죄송해요오!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죄송해요, 죄송해요오...!"

"쯧!"

후줄근한 차림의 여자애였다.

바닥에 닿기 직전까지 기른 머리칼이 얼굴 전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기계장치가 꼬리처럼 달려 있었다.

그 우중충한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본 남학생은 아니꼽다는 듯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뭐야. '이런 것'도 아카데미에 들어와?"

"...!"

특유의 선민의식.

뛰어난 성적으로 뉴 발할라 시티에서 가장 뛰어난 기업의 눈길에 들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자부심, 아니 자만심.

하지만 학생들 중 아무도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도, 넘어진 여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도 않았다.

속으로 '조금 너무하지 않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야생과도 같은 곳이다. 뛰어난 성적을 내서 이 도시를 지배하는 기업들의 눈에 드느냐 못 드느냐로 인생이 달라진다.

잠재적 경쟁자를 밟으면 밟았지, 앞날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음침한 여자애에게 어쭙잖은 선의로 손을 내밀 이유 따윈 없었다.

하물며 방금 소란을 일으킨 남학생의 이름은 '싱'.

작년 아카데미 1학년 기술부 1위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앞날 창창한 청년이었다.

성격은 다소 개차반 같지만, 앞으로 탄탄대로를 걸어갈 확률이 높은 녀석이다.

다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지나가려 했다.

그러던 그때.

"괜찮은가, 미유?"

여자아이 뒤에서 들려오는 미성(美聲).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어째서일까. 학생들은 자신들이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러니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 죄송해요, 아론 씨...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잠시 흥분했나 봐요오...."

"분명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기 싫다고 노래를 불러 대지 않았나, 히키코모리?"

"죄, 죄송해요오...."

"울지 마라."

넘어진 여자아이의 뒤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방출하는 남자.

올백으로 넘긴 검은 머리칼과 황금빛 눈동자. 그 미형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도 잠시, 학생들은 곧장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고선 바짝 긴장했다.

"서, 설마 아론 스팅...!"

"스, 스폰서님!"

"뭐 해! 빨리 인사드려!"

"안녕하십니까, 스폰서님!"

큰 목소리로 아론에게 깍듯이 90도 인사를 올리는 학생들.

물론 거기에는 학년 1위의 싱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유와 부딪쳤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러나 아론은 학생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아론의 시선은 미유에게 못 박혀 있었다.

"어디 보자. 다친 곳은 없나?"

"괘, 괜찮아요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론은 미유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손수건을 꺼내 미유의 눈물을 대충 닦아 주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젠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ㄴ, 네...!"

앞서가는 아론의 등을 종종걸음으로 쫓는 미유.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마치 젊고 무뚝뚝한 아빠와 소심한 딸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 멀어지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애 누군데?!

-설마 딸이야?! 숨겨 둔 딸이 있었나?!

-아니, '아빠'라고 하진 않았잖아! 둘이 나이 차이도 그리 안 나 보이고!

-둘이 대체 무슨 관계인데?! 되게 친해 보이는데?!

그리고 그때.

학생들에게 동시에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에 도착한 메일이 내용인즉슨.

"'추가 공지'에 후, '후원 중단'...?"

"오늘 평가 성적이 안 좋으면 후원을 끊어 버리겠다고...?"

그제야 학생들은 깨달았다.

아론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야, 우리 좆됐다...."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빡쳤던 것이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화

아카데미 과학 기술동 112B호 연구실.

이번 스팅레이의 후원을 받는 장학생들을 평가하기 위하여 잠시 빌린 장소였다.

미유는 평가가 치러지는 옆쪽 112A호에 보낸 뒤,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도착했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처음 보는 남자의 잔소리였다.

"형님!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시면 어떡합니까! 네?!"

대뜸 나한테 성질을 내며 달려드는 남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형님'이라는 단어와 내게 남은 아론의 기억을 통해, 그가 내 동생... '베네딕트 스팅레이'임을 깨달았다.

베네딕트는 나와 마찬가지로 흑발과 황금색 눈동자였다.

소설에서는 별다른 묘사가 나오진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흑발금안은 스팅레이 가문의 유전이었던 모양.

'근데 이 인간도 꽤 미남이네.'

참으로 축복받은 유전자구만.

하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긴 하지.

그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는지 베네딕트가 한층 더 언성을 높였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보십시오!"

"뭘 대답하라는 거지?"

"조금 전 학생들한테 보낸 공지 말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짤막한 한마디.

순간 베네딕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마리아 때와 마찬가지였다. 베네딕트 역시 티는 내지 않으려 하지만, 내심 나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딱히 싸늘하게 말한 것도 아닌데.

"그, 그런 공지 메일을 제게 상담도 없이 갑자기 보내시면 제 입장이...!"

"난처하다? 어째서?"

아까 복도에서 마주친 1학년 장학생들.

녀석들이 먼저 미유에게 부딪쳐 놓고 사과 한마디 없기에 빡쳐서 저지른 일이었다. 마리아를 통해 알아낸 담당자의 연락처로 직접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일말의 후회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빠르게 일 처리를 했던 담당자를 승진시켜 주고 싶을 정도.

"본래 내 권한이다. 너는 어디까지나 '대리'에 불과하지. 뭐가 문제더냐?"

어디 엑스트라 따위가 감히 내 최애캐를!

또 그걸 떠나서도 미유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싱'인가 뭔가 하는 남학생의 목을 베어 버리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내 냉정한 대답에 베네딕트는 분해하면서도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려 했다.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거겠지.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그 문제는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다."

스팅레이 장학생 학기 외 재수행평가.

대외적으로 대충 그런 이름을 붙이긴 했으나, 실상은 이사장 자리를 두고 스팅레이 가문의 형제들끼리 내기 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작년에 베네딕트가 선출한 17명의 장학생들과 내가 데려온 미유.

그들의 실력을 겨루어 보고, 만약 1학년들 중 한 명이라도 미유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녀석이 있다면 베네딕트에게 정식으로 이사장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학생들로 포○몬 배틀을 하게 된 셈이지만... 뭐 본인들은 모르니까 상관없겠지.

"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형님이 데려온 게 저 아이입니까?"

베네딕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112B호 연구실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112A호의 내부를 관찰할 수 있었다.

현재 그곳에서는 1학년 기술부 장학생들과 미유가 곧 치러질 평가시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SF영화에서나 볼법한 미래식 디자인의 실험실.

두 줄로 나란히 배치된 널찍한 테이블들 위에는 컴퓨터를 비롯해 시험을 치르기 위한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1학년 학생들은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도구의 상태들을 확인해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서는 미유가....

'아니, 저 녀석 왜 저래?'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얼핏 보기엔 그냥 멍하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유는 최신식 장비를 두고 가만히 있을 애가 아니다. 오히려 신나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모를까.

"...형님?"

"잠시 얘기 좀 하고 오지."

"그게 무슨...!"

베네딕트를 무시하고 112A호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내며 미유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미유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안다.

"아, 아론 씨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군."

"네?! 아, 아뇨! 그, 그럴 리가...!"

호흡이 거칠다.

미유는 거짓말에 서툴다.

10년 가까이 히키코모리로 살던 녀석을 억지로 끌어 앉혀다 놓은 것이다. 아까 전 아카데미 곳곳을 함께 산책하며 조금 익숙해지길 바랐건만, 그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했던 걸 테지.

게다가 추가로 한 가지.

"저 애송이들이 네게 뭐라고 했지?"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내게 거짓말하지 마라."

베네딕트와 잠시 대화하는 사이에 1학년 놈들이 자기끼리 수군거리는 걸 엿들은 걸 테지. 옛날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이리라.

이건 마냥 다독여서 될 일이 아니지.

좀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후우.

나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고 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돌아가지. 차를 불러 두겠다."

"그, 그러실 필요는...!"

"그럼 남아서 평가를 치르겠나? 지금 그 상태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자신이 있나?"

"...."

미유는 답하지 않았다.

실은 돌아가고 싶은 것이리라.

"억지로 강요는 하지 않겠다. 돌아가자. 대신 약속 그 네오 암... 어쩌고는 없던 일로 하는 걸로."

"앗! '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4 만능툴'!"

미유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원작에선 작가가 웃기라고 넣은 설정이었는데, 실제로 직접 듣게 되니 이름이 나올 때마다 헛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왜 이름에 암스트롱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그것은, 뉴 발할라 시티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의 만능도구다.

그리고 평소에 미유가 무진장 갖고 싶어 한다는 설정도 붙어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카데미에 억지로 그녀를 끌고 오는 대가로 스팅레이의 정보력을 이용해서 그 물건을 구해 주기로 약속했다.

모든 일을 매번 억지로만 시킬 수는 없으니 당근을 던져 준 것이었다.

"흐, 흐흠. 아무튼 네가 정 견디기 어렵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다. 억지로 진행해 봤자 널 추천한 내 얼굴에도 먹칠하게 될 테니."

"아, 아론 씨이...."

"그러니 네오 어쩌고는 포기해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면 지금의 네게는 과분한 것일 테니."

"그, 그렇지 않아요오!"

그 순간 미유의 기운이 달라졌다.

그야말로 각오를 마친 자의 얼굴.

"그, 그런 귀여운 걸 포기할 수는 없어요오! 증명해 볼게요오! 믿어 주세요오!"

"그, 그래...."

갑작스러운 기세에 밀려 버렸다.

참고로 미유에게는 '귀엽다=성능'이었다. 모바일 미소녀 가챠 게이머 같은 마인드를 지닌 녀석이다.

"...."

서브 히로인이라는 녀석이 시나리오 클라이맥스신에서나 보여야 할 각오를, 그런 어처구니없는 도구를 향해 불태우는 상황이라니.

조금 참담한 기분이었다.

"각오가 됐다면 최선을 다하거라."

"네!"

처음 만난 이래로 가장 열정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역시나 조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건 미유의 기운을 충분히 북돋아 준 뒤 112B호로 돌아왔다.

베네딕트는 아까보다도 더욱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유와의 대화를 엿듣고 자신감이 생긴 건가? 아니, 그것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이 녀석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선....'

뭔가 수작질을 해 놨군.

반쯤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여러 수를 고려해 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대충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평가를 중지하고 부정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열심히 발악해 봐라, 베네딕트.'

굳이 귀찮게 할 필요 없겠지.

오히려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속아주는 게 훨씬 더 임팩트가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참으로 불쌍하게도.

어떻게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절대로.

* * *

한편 112A호 연구실.

아론 덕분에 기운을 되찾은 미유가 실험실 구석에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던 그때, 다른 학생들은 그녀를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다.

-방금도 아론 님이랑 직접 대화했지?

-진짜 쟤 정체가 뭐야?

-뻔한 거잖아. 낙하산이겠지.

-저 기계 꼬리는 대체 뭔데?

-제기랄. 쟤 때문에 지원 다 끊기게 생겼어. 집에는 뭐라고 말해야 좋지?

인간이란 궁지에 몰리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단 남 탓을 하곤 한다. 그들은 원인 제공자인 싱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만만한 미유만 헐뜯기 바빴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학년 1위의 싱은 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들 너무 그럴 거 없어."

"응?"

"이번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내면 되는 거잖아? 아론 님이 데려온 애라고 해도 별거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동기들은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남을 흉봤을 녀석이, 왜 갑자기 착해진 척?

스폰서님 앞이라고 가식 떠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이번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낼 자신이 있다는 걸까?

그런 의문을 품는 학생들이었으나, 물론 둘 다 정답은 아니었다.

싱의 진심은 하나뿐이었다.

'열심히 고생해라, 떨거지들아. 나는 너희하고 다르게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말이야~'

며칠 전.

이번 평가에 대한 공지메일이 학생들에게 전송되기도 전에, 싱은 비밀리에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

그를 호출한 사람은 바로 베네딕트.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싱을 만난 베네딕트는, 그에게 작은 데이터칩을 하나 건네주었다.

-받거라.

-이, 이건 뭐죠?

-조만간 1학년 기술부 장학생들에 대한 재수행평가가 있을 예정이다. 거기서 유용하게 쓰일 자료를 첨부해 놨다. 미리 공부해 두도록.

-네?! 어째서 제게만 이런....

-다른 학생들에겐 줘 봤자 활용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학년 1위인 너라면 다르겠지?

싱은 감격했다.

베네딕트 님이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계셨던 거다. 혹여나 이번 일로 자신을 잃을까 걱정까지 하실 정도로.

-충분히 예습이 끝난다면 그 데이터칩은 몰래 폐기해라. 그리고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절대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말도록.

-물론입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기에, 싱은 이런 평가가 있으리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시험 대비도 철저하게 해 두었다.

'이건 나를 위한 무대야!'

그렇게 싱이 자신만만해하며 어서 평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그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스팅레이 주관, 기술부 1학년 장학생 수행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평가 과목은 '신비모듈 제작'입니다.]

웅성웅성.

예상치 못한 평가 내용에 학생들이 당황했다. 물론 미리 내용을 알고 있었던 싱만은 여유로울 수 있었다.

이윽고 실험실 앞쪽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거대한 상자가 스르륵 열렸다.

액체질소가 내뿜는 자욱한 연기와 함께 투명한 원통형 케이스가 솟아올랐다. 케이스 안에는 검은색의 심장이 푸른빛의 액체 안에 담겨 둥둥 떠 있었다.

[이번 모듈 제작의 소재는 하급 악마, '임프'의 심장입니다.]

[수험생 여러분께서는 임프의 심장에서 정수를 추출하여 제시된 조건에 맞추어 모듈 제작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신비모듈.

도시 밖을 떠돌아다니는 괴물들이 지닌 초자연적인 힘을 담은 모듈이다. 당연히 인공모듈보다 제작이 어렵지만, 성능은 훨씬 더 뛰어나고 특별하다.

신비모듈의 제작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 정수 추출.

2. 분석.

3. 재설계.

4. 프린팅.

처음은 정수 추출.

우선은 소재에서 '정수(Essence)'라 부르는, 말하자면 [신비]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특수한 물질을 추출한다.

다음은 분석.

추출한 정수를 분석기에 투입하면, 연동된 컴퓨터가 분석을 완료한 후 시각화된 자료로 화면에 띄워 준다.

제일 중요한 세 번째 단계, 재설계.

프로그램의 보조를 받아 정수의 구조를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비유하자면 블록으로 만들어진 성의 파츠를 조금씩 갈아 끼우는 일이다.

착용자에게 위험한 정보를 지닌 블록은 제거하거나 수정하고, 미흡하다 싶은 부분은 다른 블록으로 채워 넣으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 프린팅.

재설계가 끝난 정수를 금속이나 플라스틱 같은 소재와 함께 가공하여 모듈의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네 가지 과정만 거치면 적응자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신비모듈이 완성되는데, 말로는 간단해 보여도 실제론 그렇지 않다.

'모듈러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게 신비모듈 제작이다.'

모든 과정 중에서 소재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을 택하면 정수 자체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망가지는 일이 부지기수.

특히나 재설계 단계에서 가장 많은 실수가 벌어진다.

지나치게 수정을 가해서 원본이 지닌 특별한 힘을 잃어버리거나, 반대로 위험한 파츠를 발견하지 못한 탓에 착용자에게 부담이 가는 경우도 있다.

'또 호환성이나 대체율 문제도 까먹으면 안 되지.'

성능에만 치중해서 만들다 보면 막상 사용자에게 적합하지 않아서 완성해도 쓰질 못하는 일도 있다.

요컨대 인공모듈과 달리, 신비모듈은 모듈러의 실력과 센스가 결과를 좌우하는 종합예술에도 비견되는 작업이다.

'특히 악마 소재는 더더욱 악질이지.'

태생부터가 인간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악마의 정수는 강력한 힘을 지닌 대신에 인간에겐 치명적인 악질적인 지뢰 코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또한 정수 자체가 내뿜는 독기에 모듈러가 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올해 겨우 2학년으로 올라갈 예정인 학생들이 다루기에는 다소 버거운 소재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난 상관없지만.'

물론 그 역시 악마 소재는 처음 다루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임프의 정수를 다루는 노하우가 빠삭하게 들어 있었다. 그것도 세계 최대의 나노머신 기업으로부터 받은 정보가.

[평가 기준은 안정성, 호환성, 출력레벨, 대체율 총 네 항목입니다.]

[평가 시간은 총 120분입니다.]

안내방송에 맞추어 스팅레이 소속 감독관들이 임프의 심장을 각 수험생의 앞에 옮겨 주었다.

만약 모듈 제작 중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들이 개입할 것이다.

[그럼 시작해 주심시오.]

평가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학생들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각 배부된 보호 장갑과 보호경을 능숙한 동작으로 착용, 조심스레 원통형 케이스를 열어 집게로 심장을 쟁반에 옮겨 담았다.

정수 추출기를 전용 주사기에 연결하고, 컴퓨터와 연동된 분석기를 가동한다.

다들 지난 1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학생들이니만큼, 낯선 소재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싱의 작업 속도는 유독 빨랐다.

다른 학생들이 이제 막 정수 추출 작업에 돌입했을 때, 그는 이미 충분한 양의 정수를 반쯤 뽑아낸 상태였다.

'역시 자료에 있었던 대로야...!'

마구잡이로 주사기를 찔러봤자 정수는 조금밖에 나오지 않으니, 정확히 혈관의 방향을 따라 바늘을 넣으라는 팁이었다.

덕분에 그는 남들보다 반 발짝 빠르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속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5분 안에 충분한 양의 정수가 모일 것 같았다.

'이건 내가 무조건 1등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학우들은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이리저리 주사기를 찔러보고는 있지만 정수가 잘 나오지 않아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는 듯했다.

만족스러운 결과.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추출작업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타닥.

타다닥.

타다다다다다닥.

무서운 기세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이 너무 심해서 신경이 거슬릴 정도였다.

'아니, 대체 누가 이렇게...!'

싱은 신경질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고,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곳에서는 미유가 엄청난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다른 학생들은 아직 정수 추출도 끝마치지 못한 시간.

미유는 이미 모듈제작 세 번째 단계.

'재설계' 작업에 돌입해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2화

'이건 말도 안 돼!!'

싱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자신보다 더 빠를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벌써 재설계 단계에 돌입할 수 있냐는 말이다!

미유의 속도는 그야말로 비정상.

백 번 양보해서, 정수 추출작업은 그럴 수 있다 치자.

어쩌면 그녀의 손이 더 빨랐을 수도 있다. 혹은 운 좋게 알맞은 부위를 공략한 덕에 정수가 단번에 터져 나왔던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두 번째 단계인 '분석'.

이 작업을 벌써 끝냈다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된다.

본래 정수 분석 작업은 아무리 짧아도 30분이고, 며칠은 물론 길면 몇 개월씩도 걸리는 일이다.

그런데 평가가 시작된 지 고작 10분 남짓 지난 시점에 벌써 재설계? 아무리 하급 임프의 정수 구조가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이건 사기야! 사기가 분명해!'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녀 쪽 천장에 매달린 13개의 로봇 팔들은 너무나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싱이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란한 동작으로.

'저, 저런 게 가능한 일인가?'

타닥. 타다닥.

미유의 엄청난 작업 속도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은 싱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샌가 다른 16명의 수험생들 역시 넋 놓고 그녀의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다다닥!

그럼에도 미유의 작업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엄청난 집중력은 지켜보는 이의 숨이 막히게 했다. 그야말로 광인(狂人)의 그것이었다.

그러던 중, 싱은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럴 때가 아니야...!'

싱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쪽은 아직 1단계인 '정수 추출'도 다 끝내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멍하니 있다간 모듈을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끝내게 될 것이다.

'거, 걱정할 것 없어. 속도만 빨라 봤자 뭐 해? 중요한 건 완성도야 완성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작업을 이어 나가다간 조만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테지. 저런 여자에게 정신 팔리지 말고, 더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으면 되는 거다.

짝! 짝!

싱은 자신의 뺨을 때려 강제로 생각을 전환했다. 어떻게든 눈앞에 있는 심장에게만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손길은 이미 자신감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으아아악! 그만둬! 그마아안!"

동기들 중 한 명이 난데없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어 댔다. 초조함에 못 이겨 실수로 악마 소재의 독기에 노출된 듯했다.

대기하고 있던 감독관들이 그를 빠르게 제압하여 의무실로 이동했다.

아마 건강에 큰 지장은 없을 테지만, 평가 낙제를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제기랄, 망할 새끼...!'

동기라는 놈이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저런 식으로 사람을 방해하기나 하고.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싱은 신경질적으로 주사기를 심장에 찔러 댔다. 조바심과 분노로 손이 떨렸지만, 이내 어떻게든 충분한 양의 정수를 모으는 데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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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악마 '임프'의 정수]

[구조 분석 중... 1/100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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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분석기가 작업을 시작했고,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니터 중앙에는 정수의 3D 그래픽 이미지와, 그것을 구성하는 코드 정보가 시각화되어 표시되었다.

'제기랄, 빨리 좀, 빨리!'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떨기 시작한 싱.

분석과정은 모듈러가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컴퓨터가 일을 마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는.

'저 여자는 그렇게 금방 끝냈는데, 왜 내 거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아, 아니 잠깐만. 설마 저 여자...?!'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가설.

어떻게 저 여자는 그토록 빠르게 분석 단계를 끝냈는가?

그것이 의문이었지만 어쩌면 질문부터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서, 설마 분석 단계를 스킵한 건가?!'

아니, 분석과 재설계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 듯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소량의 구조 정보만을 토대로 재설계를 이어 나간다면, 컴퓨터의 분석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무,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야말로 무모하다.

정수의 구조가 100퍼센트 해석되지 않은 채로 재설계를 한다는 건, 찢어진 도면 조각만을 갖고 빌딩 전체의 리모델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 하나 잘못 건드리면 건물이 무너질 염려가 있듯이, 핵심 코드를 하나 잘못 건드리면 정수가 통째로 흩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싱의 걱정과는 달리 미유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모든 '정답'을 꿰뚫고 있다는 듯했고, 실제로 그녀가 작업하는 정수 역시 계속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다.

싱은 속으로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제기랄! 뭔 저런 괴물 같은 년이 다 있어?!'

베네딕트로부터 미리 임프 정수의 정보를 받아보았던 자신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공부할 시간이 더 주어졌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

속으로 분통을 터뜨려 보아도 싱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컴퓨터가 빨리 분석을 끝마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시발...!'

싱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다 귀에 거슬리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유 쪽을 돌아보자, 이미 그녀는 정수 재설계도 끝마치고 프린팅 작업 중이었다. 3D 프린터가 임프의 정수를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듈'의 형태로 가공하는 중이었다.

'저게 말이나 되는 속도냐고....'

이제는 비교할 맘조차 들지 않는다.

저건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다. 스폰서님의 총애를 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재능.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재능.

자신이 평생 노력해 봤자 저런 경지를 넘보지도 못하겠지.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싱은 투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싱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동기 중 누군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허나 도중에 포기할 수도 없었기에.

학생들은 비참해진 기분으로 시험을 이어 나가야만 했다.

* * *

[와, 완성했어요오... 어, 어디다 제출하면... 어... 저기요오...?]

어느덧 미유가 모듈을 완성하고 감독관에게 결과물을 제출하는 모습이 유리창을 통해 전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그녀는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 주며 1위로 작업을 끝마쳤다.

'역시 내가 나설 필요도 없지.'

내가 굳이 베네딕트의 부정을 밝혀내려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놈이 무슨 수를 쓰든 미유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장비를 망가뜨리거나, 추출기나 분석기에 이상한 짓을 해 놓거나 해도 의미 없을 것이다. 세계관 최고의 모듈러는 그딴 수작질에 조금도 방해받지 않는다.

'이로써 미유가 빙의자일 가능성은 한층 더 낮아졌군.'

어쩌면 미유가 나를 속이고 연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육체 쪽의 기억에 의지한다고 해도, 전문성을 요하는 모듈 제작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쯤 되면 그녀를 용의선상에서 과감하게 배제해도 좋으리라.

물론 내 목숨을 구해 준 시점에서 진즉에 의심할 단계는 벗어나긴 했지만.

그렇게 속으로 만족스럽게 결과를 지켜보고 있자니,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대체... 아니, 저게 뭔...."

고개를 돌려보니 베네딕트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베네딕트 역시 모듈에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다.

조금 전의 장면으로 미유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녀석인지 깨달은 거겠지.

너무 놀라 멍청해진 그 얼굴을 향해, 나는 빈정대듯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베네딕트?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에러라도 생겼나?"

"에? 아! 크, 크흠!"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베네딕트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숨겼다.

"형님이 꽤 쓸 만한 아이를 데려오신 것 같군요. 하지만 속도가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저렇게 빨라서야 모듈에 치명적인 결함이 한두 개쯤 발견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과연 어떨지."

그때였다.

112A호에 있는 감독관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미유가 만든 임프 모듈의 성능테스트가 끝난 듯했다. 검사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니 오래 걸릴 것도 없던 모양.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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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성: 이상 없음.]

[호환성: 93퍼센트]

[대체율: 4퍼센트]

[출력레벨 : L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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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베네딕트가 또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대, 대체율이 4퍼센트인데 출력이 Lv.3이라고? 임프의 심장으로 만든 모듈 주제에?!"

모듈의 출력은 통상 Lv.1부터 Lv.5까지로 표기된다.

얼마나 큰 에너지를 담고 있느냐, 바꿔 말해 성능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출력 레벨이 갈린다.

Lv.1은 민간인들이 사용해도 문제없는 수준. 보통 각종 편의성이나 패션을 위한 유틸리티 모듈들이 Lv.1 판정을 받는다.

Lv.2 모듈은 주로 공사장에서 많이 사용한다. 민간인 기준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에 쓰는 셈이다.

그리고 Lv.3 정도의 모듈은 군인이나 특수 경찰들을 위한 것이 많다. 전투용으로 쓸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

즉, 미유는 이 자리에서 군인들이나 쓸 만한 수준의 모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참고로 현재 스팅레이 그룹에서 임프의 심장 소재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제품 몇 가지는 Lv.2 수준을 넘는 것이 없었다.

베네딕트는 손을 덜덜 떨며 소리쳤다.

"이, 이건 사기입니다!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시끄럽다. 목소리를 낮추거라."

"소, 솔직히 말씀하십쇼! 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뭐라고 했지?"

"...!"

움찔.

내 한마디에 몸을 떠는 베네딕트.

하지만 이번에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의했다.

"그, 그렇잖습니까! 형님이 시험에 뭔가 손을 쓴 게 아니고서야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어리석은 놈. 이번 시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준비한 것이다. 나는 오늘 시험의 내용조차 모르고 있었지. 내가 여기에 관여할 여지가 있나?"

"그, 그건...."

"그리고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군. 정정당당? 너야말로 손을 썼다는 걸, 설마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녕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면 네놈이 직접 확인해 보면 된다. 대신 그때는 학생 전원의 전자두뇌 로그를 뜯어 볼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내가 내뱉은 말에 베네딕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 그건 학생들의 개인권 문제로...."

"그래, 그렇게 계속 변명을 대고 시치미를 떼도록. 네놈이 저지른 짓이 들통나면 네놈 하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그룹 전체의 신뢰에 금이 갈 터이니."

내가 이번 건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그룹의 체면을 위해서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말하자 베네딕트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편법을 쓴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들켰고, 심지어는 그러고서도 패배했다.

여러모로 베네딕트의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졌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네가 졌다."

"아, 아직 평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놈이 제일 잘 알지 않나. 이 이상 지켜보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

더 지켜볼 필요도 없다.

올해 막 2학년으로 올라가는 학생들이 Lv. 3급의 모듈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

베네딕트는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도 현실을 아는 것이다.

"알... 겠습니다...."

베네딕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일모레 중으로 형님께서 복귀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다."

"...예?"

베네딕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담담히 말했다.

"한동안은 네가 계속 이사장 대리 역할을 이어 가도록. 또한 네 판단에 대해서도 큰 문제가 없는 한 개입하지 않으마."

"어, 어째서입니까?"

"네가 싫다면 취소하겠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바로 꼬리를 내리는 베네딕트.

어지간히도 자리를 넘겨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다만 이렇게 내기판까지 벌여 놓고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궁금한 모양.

나는 준비해 온 대사를 흘렸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하다. 언젠간 복귀하겠지만 한동안은 계속 네게 업무를 맡기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혀, 형님. 그 말씀은...."

"네놈이 알아서 생각하거라."

내 말에 베네딕트는 묘하게 감동 먹은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착각하라고 던진 대사이긴 한데, 이렇게 잘 먹혀들어가니 오히려 수상할 지경이었다.

'실은 스토리의 개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인데 말이지.'

원작에서 아론이 아카데미에 등장한 것은 대략 반년 뒤다. 바꿔 말해 그전까지는 계속 베네딕트가 아카데미 스폰서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 베네딕트가 한동안은 역할을 계속하는 게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좋겠지.

"허나 대신 조건이 있다."

"조, 조건 말입니까?"

"긴장하지 마라."

이 새끼.

줬던 거 뺏을까 경계하는 거 봐라.

"권한 대부분은 네게 남겨두마. 그 대신 아카데미 내외부에서 내가 손수 선별한 인재들은, 네가 뽑은 녀석들과 구분해서 관리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특별반을 따로 만드시겠다는...."

"특별반이라... 그런 셈이군."

본래는 주인공의 역할이다.

원작에서 셰이드 웰즈는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 자신과 같이 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 무소속 인재들을 모아 기업 장학생들과 대립한다.

기업을 든든한 뒷배로 두는 장학생들과 비교해 자본도 인맥도 부족한 만큼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주인공의 재능과 재치로 승승장구하며 성장해 나가는 게 원작의 스토리.

'주인공이 죽어 버린 이상 내가 그 역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런고로 나는 원작처럼 새로운 팀을 만들어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모으고 성장시킬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악역의 부재.'

아론 스팅레이.

2권은 물론, 사망한 뒤 이어지는 전개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빌런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또한 주역들이 내가 속한 '스팅레이 그룹'과 연을 맺게 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위기를 여럿 생략하게 되어 버린다는 것.

'만약 그렇게 되면 캐릭터들의 성장에도 문제가 생길 테지.'

주인공과 빌런.

내가 두 개의 역할을 '아론 스팅레이'라는 가면 하나만으로 전부 다 수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해결책.

'빌런의 역할을 베네딕트에게 넘긴다.'

적은 명확한 편이 좋다.

원작의 주역들은 나, '아론'이 이끄는 특별반에서 '베네딕트'나 다른 기업들이 이끄는 장학생들과 대립하며 성장할 것이다.

물론 베네딕트 역시 나름대로 자리를 되찾으려고 아우성을 칠 것이다.

당장은 내게 협력적인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갖은 비겁한 수를 써 가면서 내가 만든 특별반을 짓누르려고 할 테지.

물론 난 그걸 막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자연스럽게 위기 상황이 연출될 테니까. 나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다가, 놈이 선을 넘는다 싶을 때에 적당히 통제하면 될 뿐이다.

반대로 놈이 너무 어설프다 싶으면 적당히 구슬려서 더 큰 위기를 주역들에게 던져 줄 수도 있겠지.

'고생 좀 해라, 베네딕트.'

네가 최선을 다해 날뛰어 줄수록.

상황은 더더욱 내가 원하던 대로 흘러갈 테니.

그러니 알겠니, 동생아?

이제부터 나 대신 네가 빌런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3화

비가 온다.

정류장 옆 도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여성은 전자제품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숨을 내뱉자 새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

시간은 새벽 6시.

전자제품 가게는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가 진열된 TV는 켜져 있었고 그곳에서 아침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날씨입니다.]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5단계 안티레인이 오늘밤 11시가 되어서야 그칠 것 같습니다.]

[이는 이번 달 28일 개최되는 G20 기업총회에 대비하기 위함으로, 정부는 기업가들과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시고, 외출 시에는 반드시 우산과 우비를 챙기셔서 불편을 겪지 않도록....]

안티레인(Anti-Rain).

호시탐탐 도시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잡아먹으려 드는 [신비]들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는 1년 내내 놈들이 싫어하는 화학약품이 섞인 인공강우를 만들어 도시 전역에 흩뿌려댄다.

덕분에 뉴 발할라 시티는 1년 내내 춥고 싸늘하다.

물론 계절의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름은 춥고, 겨울은 엄청 추운 정도의 차이만 있다. 인공구름이 하루 종일 해를 가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따뜻한 번화가에서는 증발한 물기가 담배 연기나 매연 따위와 합쳐져서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 낸다.

솔직히 좋은 냄새는 아니다.

아니, 대놓고 말해서 역겹다. 그 빌어먹을 안개의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면 눈이 아릴 정도로 선명한 네온사인의 빛을 조금 가려 준다는 것 정도.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축복이었다.

안개가 있다는 것은, 괴물들로부터 보호해 줄 비가 온다는 것이었고, 또한 물을 증발시킬 만큼 따뜻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누군가에겐 그 지독한 스모그마저.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다.

부르르릉-.

여성의 앞에 버스가 멈춰 섰다.

스르륵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마스크를 쓴 군인 같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에 쥔 태블릿과 여성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아이리 앨리스밸?"

"예."

"제시간에 왔군. 근데... 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아이리는 낡은 가방을 내보였다.

그녀는 애초에 뭔가를 소유해 본 경험이 극단적으로 적었다. 그러니 애착이 있는 물건도 거의 없었다.

가방에 든 것은 몇 벌의 낡은 옷. 요즘 시대에 드물게도 아무런 기능이 없이 순수하게 옷의 역할만 하는 것들뿐이었다.

군인 같은 차림을 한 인솔자는 아이리의 차가운 대답에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가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뭐, 상관없겠지. 필요한 건 아카데미에서 지급할 테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좋아. 12번 자리에 앉도록."

아이리는 지시에 따랐다.

버스에는 그녀 외에도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타고 있었다. 이제 갓 20살을 넘겨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젊은이들. 전부 동기생들이 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친근감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리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비 오는 도시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치이이익-!

버스의 문이 닫혔다.

그에 따라 아이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점점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 있던 정류장도 점점 멀어진다.

"오빠...."

뒷덜미의 모듈 소켓을 만지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린 그때, 하늘을 무언가가 지나갔다.

고급 비행형 세단.

못해도 A섹터 이상에서 사는 부자들이나 탈 법한 화려한 자동차였다.

'왜 저런 차가 여기에...?'

게다가 차가 향하는 곳은 E섹터였다.

도시의 불한당들이나 밑바닥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지역에, 저런 부르주아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가.'

싹텄던 호기심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시들어서 사라져 버렸다.

부르주아 놈들이야 뭐 자기 알아서 살든지 죽든지 하라지.

'나는 내 목적에만 집중하면 돼.'

아카데미에서 오빠의 흔적을 찾는 것.

그리고....

'스팅레이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

복수를 꿈꾸는 소녀가.

이른 새벽, 아카데미로 향하고 있었다.

* * *

아카데미 입소일 새벽.

기술부 1학년 학생들과의 한판 승부가 끝나고 2주가 지난 시점, 나는 미유의 공방을 다시 찾았다.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3일 정도 지난날이었다.

"아, 아론 씨! 마침 잘 오셨어요오! 드디어 [시체 먹는 자] 모듈에 대한 비밀을 밝혀냈어요오!"

미유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반겼다.

눈 밑이 좀 퀭한 것이 여느 때처럼 밤을 새워 가면서 연구를 진행했음이 틀림없었다. 여전히 좋아하는 분야에선 끝없는 열정을 보이는 녀석이다.

저러다 건강이 상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

하지만 일단 내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건 반가운 소식이군."

"이게 있잖아요오. 이 모듈은 놀랍게도 '에르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어요오!"

"에르데?"

원작의 설정에 빠삭한 나조차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ERDE'요오! 'Essence Redesign Equipment'! 간단히 말해서 정수 재설계 장비! 놀랍지 않나요오?"

"과연."

전문용어였다.

저번에 장학생 재평가 시험에서 봤던 장비를 말하는 것이리라. 천장에 매달려 있던 로봇 팔들 말이다.

"놀랍지 않나요오?! 착용자의 신체와 나노머신을 유사 재설계 장비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오! 그뿐만 아니라 착용자의 신체에 맞추어 자동으로 다른 장착 모듈의 설계를 재구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TRX수치를 보면...!"

미유는 전문용어를 섞어 가면서 흥분한 채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덕분에 안타깝게도 나는 내용의 태반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기도 하고, 베네딕트와 달리 아론은 모듈 공학도로서의 지식은 그리 대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 한 달간 내가 그녀의 수다에 자주 어울려 줘서 그런가, 미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떠들어댔다.

애정캐가 이렇게나 기뻐하며 떠들어 대는 모습은 귀중하다.

나는 일단 안구 카메라를 통해 찍힌 영상을 체내 하드디스크 중요 파일로 몰래 저장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이 모듈이 어떤 종류의 [신비]로 만들어졌는지도 알겠나?"

"안타깝게도 아직... 하, 하지만 덕분에 힌트를 얻었어요오!"

"힌트?"

"[시체 먹는 자]의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모듈 재설계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었어요오! 이제 그것만 있으면 아론 씨의 예전 모듈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오!"

"...!"

이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아니, 물론 어느 정도는 이러한 가능성을 기대하긴 했으나 고작 한 달 만에 이 정도의 결과를 내놓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시체 먹는 자]의 정체는 원작에서도 완결이 날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는데....'

원작의 주인공 셰이드 웰즈는 아버지의 유품인 모듈에 굉장히 애착이 심해서 모듈러인 미유에게도 감히 연구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셰이드가 빙의자가 되어 죽어 주었기에 이루어 낸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미유의 천재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 언제부터 [시체 먹는 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예전 모듈들을 다시 장착할 수 있나?"

"어... 아론 씨의 이전 모듈들은 출력레벨이 높은 게 많아서요오... 프로그램도 아직 최적화는 덜 되어서 작업시간이 오래 걸려요오... Lv.5 모듈 기준으로는 한 달 이상...?"

"그렇군."

그건 좀 아쉽게 됐다.

내가 지금 쓰지 못하게 된 모듈이 대략 20개 정도인데, 하나당 1개월씩만 잡아도 1년하고도 8개월이 걸린다.

그때면 원작에서도 도시를 뒤흔드는 굵직굵직한 사건이 몇 개쯤 지나간 뒤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시체 먹는 자]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겠군. 모듈은 되었고, 티켓 쪽의 연구는 어떻게 되었지?"

정확히는 모듈 호환성 증가 티켓.

내 전용 빙의자 특전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으로 미유에게 [시체 먹는 자] 모듈과 함께 연구해 보라고 건네줬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미유의 얼굴이 급속도로 시무룩해졌다.

"죄, 죄송해요오... 무슨 수를 써도 알아낼 수 없었어요오... 원리는커녕 무슨 소재로 만들어졌는지조차...."

그러면서 미유는 내게 사용하지 않은 티켓을 책상에서 집어 돌려주었다. 이것 또한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미유가 하나도 알아내지 못해서 연구를 포기할 정도라니....'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하게 된 비밀과 깊숙하게 연이 닿아 있는 물건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사용을 허락해 주셨다면 조금 더 진척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에...."

"...아니, 됐다."

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은 이 티켓이 내게 필요하기도 했고, 뭣보다 이 이상 파고드는 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미유가 티켓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한 이유가 단순히 역량이나 시간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쩌면 세계 안의 인물이 알아내지 못하는 초월적인 룰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이 이상 시간을 투자해 봤자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페널티를 받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티켓은 나를 이 소설 속의 세계로 데려온... 말하자면 이 세계의 '신'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물건일 테니까.

'티켓의 연구는 충분한 포인트가 모였을 때로 미루기로 하자.'

일단은 미유도 나도 다른 문제에 집중해야 할 때다.

"어찌 됐건 수고했다. 역시 내 전속 모듈러로군."

"아... 가, 감사합니다아...."

에헤헤, 하고 미유가 바보처럼 웃었다.

칭찬에 약한 녀석이다.

"뭐, 조금 아쉽지만, 약속대로 모듈과 티켓은 회수해 가기로 하지. 나머지 연구는 차후 여유가 생기면 다시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

"안타까운 표정 짓지 마라. 나중에 다시 기회를 주겠다 하지 않았나."

"그, 그런 거 아니에요오...!"

"내게 거짓말은 하지 마라."

"네에...."

미유의 뺨이 실망으로 추욱 늘어진다.

미유의 그 표정도 체내 하드디스크에 몰래 저장하고서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준비는 끝냈나?"

"주, 준비라니요오...?"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 오늘 아카데미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짐은 다 챙겨 두... 지 않은 것 같군."

내 이럴 줄 알았다.

분명히 오늘 아카데미로 가는 날이라고 말해 두었는데, 미유는 짐을 챙겨 두기는커녕 전보다 방을 더 어질러 놓았다.

후우.

한숨을 쉬자 미유가 겁먹은 표정으로 내게서 한 걸음씩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아, 아론 씨이...?"

"네가 자초한 일이다."

"아, 안 돼요오...!"

나는 곧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을 호출했다. 이내 양복 차림의 여성들이 미유의 연구실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저, 저분들은...?"

"스팅레이 인적자원개발 재단 시설 관리반이다."

"어... 서, 설마 안드로이드인가요오?"

"그래."

여성들은 전원 안드로이드들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목에서는 고리형 LED 전등이 푸른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인간 직원을 쓸 수도 있었지만, 나는 스팅레이 소속 직원들을 미유와 접촉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내게 반감을 품은 녀석들이 미유에게 어떤 식으로 해코지할지 어떻게 알고.'

지금 마리아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대기시켜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도련님."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들에게 나는 짧게 한마디로 지시를 내렸다.

"처리해라."

"예."

안드로이드들은 곧장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미유의 공방을 휘저었다. 어질러진 옷가지와 잡동사니를 치우거나 정리하고, 준비해 온 트렁크에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담기 시작했다.

"아, 안... 안 되는데에에에...!"

미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뜯어말리고 싶지만 낯선 사람(처럼 보이는 안드로이드들)이 너무 많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계단을 올라 대문 역할을 하는 말하는 자판기 옆에 섰다. 그리고 미유에게서 회수해 온 [시체 먹는 자] 모듈을 뒷덜미 소켓에 장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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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적용중... 실패]

[경고: 호환이 되지 않는 모듈입니다.]

[기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Error Number: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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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떠오르는 경고 팝업.

이번에는 호환성 상승 티켓을 찢자 방금까지도 눈앞을 가리던 경고 표시가 사라졌다. 사용한 티켓은 흔적도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과연. 이런 식인가...."

체감상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모듈 호환성을 맞춰서 그런지 다소 불편한 감은 있었다.

그 후, 나는 이전에 사용하던 모듈들을 몇 개 소켓에 끼워 넣었다. 장착한 순간에는 조금 전과 같은 경고 표시가 뜨다가 이내 사라졌다.

'작동은 제대로 하니 다행이야.'

모듈 활성화와 동시에 몸 안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른 소재로 대체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목덜미에서부터 시작된 변화는 점점 신체 말단까지 번져 나갔다.

몸이 모듈들에 적응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 뒤, 상태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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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al Number: AST-000

운영체제: PANDORA v.1.1

사용자: 아론 스팅레이

대체율: 38.2퍼센트

장착된 전투 모듈

[스트렝스 Lv.3] - 활성

[헤이스트 Lv.5] - 활성

[호크아이 Lv.5] - 활성

[셀 리제너레이터 Lv.2] - 활성

[뉴럴 부스터 Lv.3] - 활성

[구름거미(모노 웨펀) Lv.5]- 비활성

·

·

·

활성화된 전투 모듈: 5개

비활성화된 전투 모듈: 1개

과부하: 24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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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 수치가 꽤 높아졌군.'

즉, 그만큼 체내의 나노머신이 무리해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체 먹는 자]를 쓰긴 했어도 호환성이 떨어진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몸에 맞지 않는 모듈들을 강제로 돌리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이렇게 보니 [시체 먹는 자]도 만능은 아니었어.'

어떠한 모듈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분명히 사기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호환성에 한계가 있는 만큼 모듈이 지닌 성능을 완벽하게 끌어내기는 어려울 듯했다.

'수치를 보아하니 예전 모듈을 전부 착용해도 전성기의 7할 정도 성능이 한계일 것 같군.'

물론 그것만으로도 소설 중후반부의 주인공보다도 강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

나 이외의 다른 빙의자가 아무리 특전이나 원작의 지식을 활용해서 성장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어떤 적이 나타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

따라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모듈을 새로 구해야겠어.'

마침 아카데미에는 '그것'이 숨어 있다.

마음 같아서는 원작의 흐름대로 메인 히로인인 '아이리'에게 넘겨주고 싶지만, 당장은 내가 쓰는 게 좋을 듯했다.

'...어서 만나고 싶군.'

명실상부한 내 최애, 아이리 앨리스밸.

원작에서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캐릭터를 조만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기대로 잔뜩 부풀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4화

-지금부터 제 85회, 트리니티 아카데미 신입생 입교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참석자 여러분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입교식은 내가 원래 있던 세계의 입학식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수백 명이 대강당에 모여서 높은 사람의 인사치레를 듣고 어쩌고저쩌고.

사이버펑크 세계관이니만큼 뭔가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했건만, 학창 시절에 실컷 보던 장면과 같아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솔직히 지루하구만.'

나는 대강당 제일 뒤편에 마련된 기업 스폰서 전용석에서 학생들의 뒤통수를 몰래 지켜보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앞쪽 단상에 마련된 귀빈석에 있었어야 했지만, 베네딕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참고로 녀석은 감동 먹은 표정으로 승낙했다).

다른 아카데미 후원 기업 VIP들과 기세 싸움을 하는 것도 귀찮았고, 뭣보다 아론의 살인 충동을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언제 신체 쪽 자아가 또 날뛸지 몰라.'

물론 지난번에 혈랑 놈들을 쓸어버린 뒤로 한동안 잠잠해지긴 했다.

단번에 상당한 피를 봤으니 욕구불만을 충분히 해소했던 거겠지.

하지만 벌써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났으니 슬슬 살인귀 놈이 굶주릴 때가 되었다. 더군다나 원작 아론의 행보를 고려하면 일단은 조심하는 게 옳다.

허나 스팅레이 인적자원개발 본부장이라는 놈이 병이 낫고서도 입교식에 참석하지 않는 건 주변의 불필요한 해석을 낳을 터. 그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스폰서'로서 일단은 행사에 참석했다.

"도련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괜찮다."

옆에서 마리아가 안부를 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루해하는 것을 티 냈던 모양이다. 나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는데도 그 미묘한 차이를 캐치해 내다니....

'이 녀석은 지나칠 정도로 유능해.'

그러니 아론 스팅레이의 전속 수행원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유능함 때문에 갈수록 그녀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메인 캐릭터들과 달리, 마리아는 원작에서의 묘사가 적었던 탓에 행동을 예측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지금은 내게 남은 아론의 기억을 통해 어느 정도 커버하고 있으나 그게 언제까지 통할지는 미지수.

'내가 계속해서 원작과 다르게 움직이는 이상, 마리아도 내 행동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을 터.'

그 변화를 좋게 보아준다면 다행이겠지만, '더 나빠졌다'든가 '만만해졌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마리아가 경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래의 아론,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아론이다.

내가 약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뒤에서 칼을 찌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적어도 그런 평가를 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연기를 이어 나가야 하리라.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적어도 이 녀석에게 습격을 당해도 코웃음 치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돌아올 때까지는.'

또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마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단서를 찾지 못한 다른 빙의자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녀석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빙의자가 되었다면, 아마 소설 중요 인물 중 하나의 몸에 들어갔을 거야.'

내가 특별반을 만든 이유다.

물론 첫 번째 이유는 덕질이고 두 번째 이유는 캐릭터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다.

소설 후반부에 일어나는 트러블들은 아무리 나 혼자 먼치킨이 되어도 해결하기는 어려우니까 말이다.

다만 세 번째 이유는 궤가 좀 다르다.

그 빙의자 놈이 만약 아이리나 미유 같은 원작 주연급 캐릭터들에 빙의했다면 특별반이라는 울타리 안에 두는 편이 행동을 관찰하기가 쉽다.

설령 놈이 특별반 울타리 밖에 있다고 해도 메인 캐릭터들이 내 관리 하에 있는 이상 그들과 접촉하기도 어려워진다. 누군가 몰래 미유나 아이리를 만난다고 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놈도 슬슬 원작과는 흐름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지.'

주인공의 부재.

아카데미 어디를 돌아봐도 주인공이 없으니, 늦어도 오늘내일 중에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행동을 취할 것이다.

'원작과 스토리가 달라졌단 식으로 착각해 주면 땡큐지만... 뭐, 생각이 좀 있는 놈이라면 금방 진실에 다다르겠지.'

원래라면 2권쯤에 등장하는 아론 스팅레이가 버젓이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고, 게다가 '특별반' 같은 걸 만들어서 운영하기 시작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내가 자신과 같은 빙의자라는 결론에 닿는 건 금방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노리는 시나리오다.'

원작의 아론 스팅레이는 '개사기캐'다.

다른 빙의자 녀석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적어도 내 눈길이 닿는 데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대놓고 원작의 히든 피스를 독식한다든가, 기연을 독점하는 식의 선택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틈에 격차를 벌린다.'

여타 빙의자들과 달리 나는 내 멋대로 할 수 있다.

스팅레이라는 배경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정보력과 자금력과 무력이 있으니.

놈이 몰래 힘을 키워서 뭔가 하려고 해 봤자 의미가 없다.

그때쯤에는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독식해서 손에 닿지도 않는 높이에 있을 것이니.

'...이 세계는 내 거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세계다.

미유나 아이리 같은 최애 캐릭터들도,

세계관을 관통하는 히든 피스들도.

절대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을 테다.

이곳은 나를 위한 세계니까.

그 와중에 문득 드는 생각.

'하지만 만약....'

만에 하나 놈이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머리가 쌩쌩하게 잘 돌아가는 놈이라면? 이미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까지 알아챘다고 한다면?

...가능성은 크지 않을 듯하지만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얼굴도장도 찍었으니 잠시 그쪽을 보고 와도 될 것이다.

"마리아."

"예, 도련님."

"목록을 하나 보내겠다. 입교식 동안 거기에 있는 녀석들을 찾아서 행동을 촬영해 두어라.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나는 체내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마리아에게 파일을 하나 송신했다. 마리아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받았습니다. 혹시 특별반과 관련된 업무입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외람된 질문을 하나 더 해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마."

"도련님께서 아끼시는 그... 미유 아가씨 말입니다만. 어떻게 발견하시게 된 겁니까?"

드디어 이 질문이 나오는구나.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빙의하기 전까지 아론은 미유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을 테니까.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불치병으로 죽어 가던 도련님이 어느 날 갑자기 '말하는 자판기를 찾아라!'라고 영문 모를 지시를 내리더니, 이내 불치병을 고칠 정도로 엄청난 천재 모듈러를 데려온 셈이다.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준비해 뒀기에 문제는 전혀 없었다.

"...정체불명의 메일이 왔었다."

"메일 말입니까?"

"셰이드 웰즈라는 녀석이 보낸 메일이었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기에 내 병을 고칠 방법에 대해 적혀 있었다."

일명, 죽은 놈한테 덤터기 씌우기 작전.

100퍼센트 거짓말이지만 어쩌라고.

이미 죽은 사람이 그런 메일을 보냈는지 어쨌는지 알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셰이드 웰즈라면...."

"그래. 혈랑 놈들에게 희생당한 인물들 중 하나였지. 네가 현장을 맡았었지?"

"예. 이전에 조사해 봤지만 특별한 것 없는 E섹터 주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직접 만난 적도 없다. 놈의 시체만 봤을 뿐이지만 적어도 메일은 거짓말이 아니었더군."

그야 거짓말은 내가 하고 있으니까.

혹여나 미유에게 물어보아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즉, 이 거짓말이 들킬 염려는 없다.

또한 만에 하나 이 정보가 어떤 식으로든 다른 빙의자에게 흘러 들어갔을 때, 녀석이 잘못된 판단을 해 준다면 그것대로 땡큐다.

"그럼 그날 도련님은 은혜를 갚기 위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일이 꼬일지도 모르니까. 마리아가 멋대로 착각해 주면 내 쪽에서야 나쁠 거 없다.

뭐, 잘 먹힐지는 미지수지만.

"이만 일어나겠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입교식이군."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등 뒤로 마리아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대강당을 나섰다.

* * *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굉장히 넓다.

도저히 하나의 건물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빌딩 안에, 아카데미의 모든 시설이 들어가 있다.

옆에서 보면 커다란 이등변삼각형의 형태인데, 건물의 한쪽 길이만 해도 웬만한 종합운동장의 두 배에 달하고, 높이는 200층을 가볍게 넘을 정도.

또 위에서 내려다보면 변이 곡선으로 이루어진 정삼각형의 형태다.

아카데미에선 각 꼭지점을 중심으로 '과학기술동', '전술교전동', '학생교무동'으로 구역을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다.

'고작 몇천 명 정도의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여타 웹소설 속 아카데미들의 설정이 그러한 것처럼, 트리니티 아카데미에도 학생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장소들이 숨어 있다.

물론 보안이 나쁘단 의미는 아니다.

기업의 VIP들이 밥 먹듯 드나드는 장소이기도 하고,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진 만큼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는 완벽하다 해도 될 정도로 철저하다.

만약 허가받지 않은 인물이 외곽 경계벽을 넘으면, 곧장 경보가 울리면서 수백기의 보안 로봇과 안드로이드가 출동하고 곳곳에 설치된 방어시설이 작동한다.

침입자는 건물에 들어서기도 전에 붙잡히거나 벌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내부는 허술하단 말이지.'

바깥쪽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에, 내부를 감시하는 망은 생각보다 허술한 편이다.

기숙사나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복도 곳곳에도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수두룩하다.

어떻게든 걸리지 않고 잠입하기만 하면 내부에서는 뭐든 하기 쉽다는 의미다.

'덕분에 CCTV가 없는 곳에서는 학생들끼리의 폭력이 자주 벌어진다고 하던가....'

지금 내가 향하는 곳도 그러한 장소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과기동'과 '전교동'을 잇는 작은 복도들 중 하나.

-어! 어!? 어드벤쳐, 콜라!!! 미칠 듯한 청량가아암!!! 부족함을 채워 줄 당신의 제로오오오!!!

-증강이 두려우신가요? 부작용이 두려우신가요? 저희 님부스 팩토리에선 어머니의 손길처럼 당신의 아름다움을...!

복도 곳곳에 설치된 풍경용 LED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업들의 광고가 시끄러웠다.

원래는 보안상 창문이 없는 아카데미의 구조로 인해 학생들의 정신 건강이 상할까 염려하여 설치했던 물건들이다.

옛날에는 멋진 자연풍경을 재생시켜 줬다던가?

하지만 아카데미가 기업들의 사병 육성소로 변한 이후로는 자연 풍경 영상은 10초 정도만 짧게 나오고, 5분 넘게 광고가 도배되고 있다.

...이러니 애들이 정신상태가 이상해지지.

뭐, 그건 그렇고 슬슬 찾아볼까.

"C로 일련번호가 시작하는 배전함이 대체... 아, 찾았다."

나는 소설을 읽은 기억을 되살려 화면 관리용 배전함을 하나 찾아 열었다.

물론 잠겨 있었지만, 힘을 조금 써서 자물쇠를 통째로 부숴 버렸다. 한낱 자물쇠 정도에 가로막힐 정도로 이 몸은 약하지 않았다.

'허탕인가.'

안타깝게도 내가 찾던 것은 그 안에 없었다. 이후 나는 복도를 더 걸으며 비슷한 작업을 반복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 말았다.

'...쯧. 정확히 어딘지 알기 어렵군.'

게임에 빙의한 거라면 금방 위치를 찾았을 텐데.

미유 때도 그랬지만 글과 문자로만 접하던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다못해 웹툰화라도 됐던 작품이라면 더 찾기 쉬웠을 테지.

'소설 속 묘사에서는 분명 C로 시작하는 일련번호가 적힌 곳이었다. 그러니 분명 이 근처일 것 같은데....'

그러면서 새로운 배전함을 찾아서 열려고 하는 순간,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이미 열려 있다니...?'

그곳은 내가 부수지 않았는데도, 배전함의 자물쇠가 이미 망가져 있었다.

그곳뿐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곳들도 확인해 봤더니, 조금 전 것과 마찬가지로 전부 자물쇠가 부서져 있었다.

전부 C로 시작하는 배전함이었다.

'설마...!'

틀림없다.

나 이외에 다른 빙의자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복도 어딘가에 숨어 있는 히든 피스를 찾기 위해서.

아카데미 흑막 시점 15화

'선수를 빼앗긴 건가.'

틀림없다.

나 이외의 빙의자 녀석도 '그걸' 찾고 있었음이.

'Lv. 4 신비모듈 [천근추].'

무협 쪽의 기술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사실은 땅의 정령인 '노움'에게서 추출한 정수를 재설계하여 만든 모듈이다.

그 이름답게, 효과는 착용자의 하체에 특수한 방식의 인력을 발생시켜 지면과 발이 떨어지지 않게 해 주는 것.

출력 레벨이 4단계나 되는 만큼 성능도 상당히 준수해서, 커다란 트럭이 와서 박아도 착용자는 절대 밀려나지 않는다. 물론 몸이 그만큼 튼튼하게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는 없지만.

'원작에서는 아이리의 물건인데....'

정석대로라면 주인공이 3권쯤에서 아이리와 함께 2학년 학생들을 둘러싼 문제들을 해결해 주면서 보상으로 얻게 되는 모듈이다.

그 뒤에는 주인공 일행의 전열을 맡은 '아이리 앨리스밸'의 소유가 되었고, 그녀는 여러 상황에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면 한참 후에야 손에 들어올 물건이지만, 위치만 알고 있으면 지금 같은 극초반부에서도 얼마든지 획득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한동안 내가 사용하다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아이리에게 넘겨줄 예정이었다. 그런데....

'쩝. 조금 황당한걸.'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보러 왔는데, 이렇게나 정확히 '예측대로' 움직여 줄 줄이야. 너무 뻔해서 가능성이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단정하긴 이르려나.'

침착함을 유지한 채 계속 복도를 걸어가며 다른 배전함을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시나. 이쪽 배전함은 열리다 말았군. 아직 놈은 [천근추]를 찾지 못한 거야.'

즉, 놈도 모듈을 찾던 중에 그만두고 도망쳤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내게는 현장 감식 모듈이나 어플리케이션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대충 이게 언제쯤 벌어진 일인지, 또 누구의 짓인지 용의선상을 좁히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방학 동안에는 아카데미 대부분의 구역이 출입 금지된다.'

무기나 모듈 등 학생들이 함부로 다뤄선 안 되는 위험한 것들이 널려 있기 때문인데, 그 덕에 이 복도도 방학 동안에는 학생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범인이 방학 기간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잠금을 부수다 만 흔적 같은 게 남을 이유가 없었겠지.'

아카데미에서 그러한 지위에 있는 자라면 굳이 억지로 열지 않아도 얼마든지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 그가 방학 기간에 작업을 시작했었다면 지금쯤이면 [천근추]를 손에 넣었어야만 한다.

그러지 못했다는 건 일단 아카데미의 교사, 관리인, 혹은 나 같은 기업 VIP 쪽 인물은 용의자에서 배제해도 된다는 거겠지.

'바꿔 말해 빙의자는 재학생 혹은 신입생. 외부 인물일 가능성도 크지.'

범행 시각은 오늘.

학원 내 출입 통제가 풀리는 시점이자, 가장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시각인 입교식 도중에 빠져나와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니 대략 10분. 길어 봐야 20분.'

만약 놈이 내 존재를 먼저 감지하고서 도망간 거라고 한다면 시간은 더 짧아진다.

게다가... 내 정체를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지.

'...쫓아갈까?'

정말로 운이 좋다면 놈을 추적해서 붙잡을 수도 있을 터였다.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워 버렸다.

'아니,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

현재 입교식에는 마리아가 대신 참석하고 있다. 그녀에게 신입생들의 영상을 촬영해 두라고 했으니, 만약 주·조연급 인물 중에서 자리를 벗어난 사람이 있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지나치게 몰아붙였다가 잡지 못한다면 오히려 차후에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고.

'일단은 모듈 쪽이 먼저다.'

시간이 지체되어서 이 모습을 들켰다간 나는 나대로 곤란해진다.

입교식 중에 빠져나와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배전함을 부수는 재단 이사장... 여러모로 수상하기 짝이 없다.

나는 곧장 작업을 재개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차례대로 배전함을 열어젖혀 확인해 본다. 이미 자물쇠가 망가진 곳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시간은 조금 더 단축할 수 있었다.

망가지지 않은 곳들을 열댓 군데쯤 열었을까.

마침내 발견했다.

'찾았군.'

신비모듈 [천근추].

이로써 나는 오늘 계획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그때쯤.

문제가 하나 터졌다.

* * *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올해는 스팅레이 그룹 쪽에서 특별 장학생을 선발한대!

스팅레이.

그 이름이 들리자마자 아이리 앨리스벨은 쫑긋 귀를 세웠다.

입교식이 이제 막 끝났을 뿐인데 대화를 나누는 두 학생은 퍽 관계가 가까워 보였다. 같은 지역 출신일까?

-특별 장학생이라니?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이사장님의 복귀로 갑작스레 결정됐다나 봐!

-스팅레이의 인적자원개발 재단 이사장이라면... 아론 스팅레이, 그 황태자?! 병 걸려서 잠적한 거 아녔어?!

-이번에 복귀했다니까? 아무튼 기존의 장학생과는 별도로, 황태자가 직접 선발한 애들로 특별반을 만든다나 봐. 소문으로는 이미 기술부 쪽에서 한 명이 뽑혔다던데.

-야, 그러면 인생 완전 대박이잖아! 황족의 총애를 받으면서 스팅레이에 입사할 수 있으면 한 30년 뒤에는 임원급 직원이 되는 것도...!

-그래.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하는 소리야. 지금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기업 스폰서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과연, 그런 시스템인가.

아이리는 복도를 걸으면서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확인했다.

원래부터 썩 좋아하진 않는 물건이었으나, 저걸 통해서 기업 놈들이 자신들을 관찰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불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놈들의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얌전하고 우수한 학생을 연기하는 수밖에.

'특별 장학생이라고 했지?'

그래, 딱 좋다.

거기에 선발된다면 스팅레이의 VVIP와의 연이 생기는 셈이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 빌어먹을 황태자에게 직접 오빠의 행방에 관해 묻는 것도....

'운이 좋아.'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의욕이 나기 시작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24시간 카메라로 감시당하는 불편함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게다가 생각보다 카메라의 사각지대도 많은 듯했다. 충분히 필요할 때마다 쉴 수 있을 정도.

'분명 아까 자유시간을 준다고 했었는데....'

그녀는 곧장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카데미 교내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의 화면이 증강현실로 구현되었다.

그녀는 시간표를 보고는 이마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이후에... 윽. 첫날부터 사격 수업이라니.'

오후 일정은 '신비학개론'과 '사격술'. 첫날인 만큼 전술교전부 필수교양인 과목 두 개를 배치한 모양이었다.

다만 둘 다 아이리에겐 영 자신이 없는 분야였다.

특히나 사격은 더더욱 그러했다.

'어쩌지....'

그녀는 자신의 뒷덜미 쪽 모듈 소켓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별수 없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상으로 전술교전부 오전 일정을 마칩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점심 식사 이후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전교부의 인솔을 맡았던 여성형 안드로이드가 학생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수고하... 앗."

제일 앞줄에 서 있던 아이리는 무심코 똑같이 고개를 숙이려다가 멈췄다. 그제야 안드로이드의 목에 박힌 초커형 LED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얼버무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본 다른 동기생 몇 명이 키득키득 웃어 댔다.

"푸흡! 깡통이한테 인사하네!"

"나도 초등학교 때 그런 적 있었는데,~"

"하하, 귀여워라."

아이리의 미간이 구겨졌다.

예전에 오빠한테 들었던 적이 있다.

도시 내에서는 안드로이드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것이, 선생님을 엄마라 부르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물론 아이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지내던 곳에서는 안드로이드도 인간과 별 구분 없이 함께 지내고는 했었다. 이 녀석들이 '깡통이'라 부르는 존재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하지만 아이리는 참았다.

어차피 스쳐 가는 해프닝에 불과하다. 문제를 일으켜선 안 된다. 당장 얼굴이 좀 화끈해지는 걸 견디기만 하면....

"아, 나 너 누군지 알아."

그때였다.

대열 뒤에 있던 남학생 하나가 아이리 곁으로 다가오며 아는 체를 했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학생이었다.

"너 아이리 앨리스밸이잖아."

"...날 알아?"

"물론. '폴른(Fallen)의 암컷 들개'가 너 맞지?"

"너...!"

그 별명을 아는 녀석이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이리는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뜨며 남학생에게 경고했다.

"다시는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어후, 눈빛 살벌한 거 봐. 누가 범죄자 출신 아니랄까 봐 칼로 찌르겠다? 근데 어쩌냐. 숨기려고 해도 안 되는데."

"경고했어...."

"경고하면 어쩔 건데?"

"마지막이야. 이 이상 참지 않는다."

아이리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불온한 공기를 감지한 인솔자 안드로이드가 두 사람을 말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다른 학생들 역시 의례적으로 말리는 척만 할 뿐 진정으로 말릴 생각은 없었다.

아카데미는 경쟁이 몹시 치열한 곳이었고, 누군가 교칙을 어기거나 학생에게 피해를 입혀서 평가가 깎이면 다른 학생들에게는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뭣보다 '폴른'이라는 이름에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숨기려 해도 태도로 다 드러나는데 말이지. 폴른에는 에러 나서 도망친 깡통들이 모인다면서? 게다가 거기 범죄자 새끼들은 그런 기계들이랑 옹기종기 모여서 그렇고 그런 짓까지...."

"끝."

아이리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순식간에 남학생을 걷어차 버렸다. 남학생은 그대로 몇 미터를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일반인이었다면 그대로 죽어 버렸을 위력의 발차기.

그러나....

"아아~ 아프잖냐~. 뼈가 부러진 것 같네~"

남학생은 아무렇지 않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남학생이 빠져나온 벽에 그의 몸 모양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하여간 폴른의 범죄자 놈들 성깔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문명인의 매너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여."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남학생은 엄지로 복도 천장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감시카메라가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알겠냐, 폴른?"

"이런...!"

그 순간 아이리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에게 사형선고처럼, 남학생의 말이 들려왔다.

"넌 좆된 거야."

* * *

"두 가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입교식이 끝나고, 마리아가 촬영한 영상을 내게 보내면서 함께 보고를 해 왔다.

"무슨 일이지?"

"하나는 23층, 과기동과 전교동을 잇는 복도의 배전함을 누군가가 강제로 열었다고 합니다."

"...."

...어, 그거 나야.

일단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도 빨리 소식이 퍼진 듯했다.

아직 들키지는 않은 것 같지만, 마리아라면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도 없지만.

"...범인은?"

"보안카메라도 없는 지역이고, 배전함의 보안방식도 구식이라 추적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조사반에서는 해킹을 의심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확률은 낮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여할 바는 아니군. 다음부터는 이런 보고는 생략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마리아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넘겼다.

"다른 하나는 또 뭐지?"

"예, 아무래도 학생들 사이에 다툼이 생긴 모양입니다."

"우리 쪽 학생인가?"

"아닙니다. 다만 한쪽이 밀레니엄 테크놀로지의 보안부 고위 직원의 아들입니다."

경쟁사 쪽에서 아끼는 장학생.

아마 확정적으로 밀레테크 장학생이 될 녀석이라는 거겠지. 마리아가 그런 녀석의 싸움을 내게 보고했다는 의미는, 즉.

"다른 쪽이 아이리 녀석이라는 의미군."

"네? 아, 네,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마리아가 조금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러지?"

"아, 아뇨.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는데도 누군지 바로 알아채셔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그야 뻔한 추리다.

우리 스팅레이 쪽 장학생도 아닌데 내가 나서야 할 이유라면 특별반과 관련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메인 캐릭터들 중에서 첫날부터 다른 학생과 쌈박질을 할 만한 녀석은 아이리 앨리스밸뿐이다.

하여간 문제아 녀석....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련님께서 점찍은 아이이긴 해도, 밀레테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모른 척 넘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내가 점찍었을 뿐, 아이리는 아직 특별반이 아니다.

그러니 문제를 일으켜도 우리가 굳이 감싸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괜히 나서 봐야 경쟁사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 뿐이니까.

아무리 스팅레이 그룹이 도시를 지배하는 초거대기업이라고 해도, 다른 기업들과 어느 정도의 관계 유지는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조사해 본 바로는, 이 아이리 앨리스밸이라는 아이... 폴른 구역 출신입니다."

폴른 구역(Fallen Area).

뉴 발할라 시티는 최상류층을 위한 엘리시움부터 시작하여 A섹터에서 E섹터까지, 총 6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 외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빈민가가 존재하는데, 그곳이 바로 '폴른'이다.

E섹터가 마피아를 비롯한 범죄조직이 판치는 '시티 안쪽의' 치안 나쁜 구역이라면, 폴른은 아예 '시티 밖' 세상으로 여겨진다.

E섹터가 공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장소라면, 폴른에는 공권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안티레인'도 내리지 않기에 도시 최외곽 방벽을 넘어온 [신비]들에게 노려지기 십상이다.

'자아'라는 에러가 생긴 안드로이드들과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비인간(非人間)들이 모이는 구역.

아이리는 그곳 출신이었다.

"어쩌시겠습니까?"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묻는 마리아.

원래의 아론이었다면 아이리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한들 그녀를 내쳤을 것이다. 아론은 폴른 구역의 빈민들을 극도로 혐오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설령 마리아가 의아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내가 고를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일단 만나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마리아는 곧장 어딘가로 연락을 넣었고, 나를 학생 교무동 쪽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얼마 뒤, 나는 아이리가 잡혀 있다는 지도실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 고성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네가 잘못한 거 아니냐! 퇴교당하고 싶어?!

-그러니까, 그쪽이 먼저 도발했다니까요?! 저는 잘못이...!

"후우...."

안쪽의 상황이 뻔히 그려졌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에 있던 교사가 인기척을 느끼고 내 쪽을 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스, 스팅레이 님!? 어떻게 이곳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을 깔끔히 무시했다. 시선만 가볍게 돌려서 교사의 앞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로 앉아 있던 아이리의 모습을 찾아냈다.

"아이리 앨리스밸."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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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전차(戰車) '아이리 앨리스밸'을 만났다.

업적 포인트: +500

[업적달성]

프롤로그를 완료했다.

업적 포인트: +500

[업적 달성]

메인스토리 1부를 시작했다.

업적 포인트: +1000

[알림]

포인트 상점의 등급이 올랐습니다.

[상점 등급 Lv.0 ->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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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토리의 시작.

그를 알리는 메시지가 시야를 가렸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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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메인스토리 1부를 시작했다.

업적 포인트: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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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토리의 시작이라....'

역시 내 특전은 원작의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했다. 특전을 위해서라도 본래 스토리를 최대한 따라가는 전략은 유지해야겠다.

'1부의 핵심은 [동료]였지.'

아이리 앨리스밸, 미유, 사일런스 등.

주인공 셰이드 웰즈는 자신과 같이 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 무소속 학생들을 동료로 삼아 팀을 꾸린다.

그 과정에서 동료들은 저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주인공과 갈등하거나 방황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활약으로 신뢰 관계가 깊어지며 진정한 의미의 '동료'가 되어 가는 것이 1부의 대략적인 내용.

'그러니 나는 주인공을 대신해서 그들의 신뢰를 쌓아야 할 테고.'

물론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주인공과 재단 이사장인 나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리더로서 몸소 발 벗고 뛰던 셰이드 웰즈를 그대로 대체할 수는 없기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허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그러니 당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그것보다도....

'아이리 앨리스밸! 우리 아이리!'

원작의 명실상부한 메인 히로인이자, 내 최애 중 하나인 아이리가 바로 내 앞에 있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했다.

뭐? 상점 레벨이 올라?

포인트가 뭐 어쨌다고?

어쩌라고.

그거야 나중에라도 확인해 보면 되는 문제 아닌가!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알현의 순간에 나타나서 내 시야를 가리다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정보창 자식.

나는 신경질적으로 특전 관련 정보창을 시야에서 치워 버렸다. 그런 뒤 일단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너무 흥분하여 '아론답지 않은' 이상한 짓을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

"네가 아이리 앨리스밸인가?"

"...그런데요. 누구시죠?"

선명한 보랏빛 날카로운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엄청난 경계심.

낯선 사람을 만난 야생동물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

빛의 방향에 따라서는 잿빛으로도 보인다. 그것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가며 치열하게 생존해 왔던 그녀의 과거를 상징하는 듯했다.

나는 감탄했다.

'이거...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예뻤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사이버펑크 세상인 뉴 발할라시티의 미적 가치관은 내 원래 세계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좋게 말하면 개성적, 나쁘게 말하면 기괴한 스타일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고는 했다.

여기서는 얼굴 가죽이야 얼마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이리는 그런 수술을 받을 만큼 부유하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그녀는 수중의 돈을 전부 아카데미에서 활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이버웨어 장치와 나노로봇을 이식받는 데에 썼다.

바꿔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자연 미인이구만.'

원작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의 표지는 주인공 셰이드 웰즈가 장식하고 있었고, 다른 조연들의 일러스트는 공개된 적이 없었다.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있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을 것 같다. 이건 그림으로 표현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참 불쌍한 녀석이란 말이지.'

그녀가 원래 내 세계 쪽에서 태어났다면 그냥 얼굴만으로도 톱클래스의 연예인이 되어서 부와 인기를 같이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뭐, 어쨌든.

슬슬 정신을 차릴 때였다.

"아론 스팅레이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삭이면서, 나는 짐짓 태연하게 내 이름을 말했다.

아, 물론 체내 하드디스크에 그녀의 얼굴 사진을 찍어 저장해 두는 건 잊지 않았다.

찰칵.

"아론... 스, 스팅레이?!"

아니나 다를까.

'스팅레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아이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얼굴에 가득했던 '경계심'이 '적개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야, 이 녀석아! 당신이라니!"

아이리의 반응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교사가 버럭 화를 냈다.

"마, 말조심해! 이분이 누구신지 알기나 하는 거냐!"

"아니까 묻는 거잖아요! 저랑 상관도 없는 인간이 어째서 이곳에!"

"얌마!"

참다못한 교사가 자리를 벌컥 박차고 일어섰다. 아이리의 뺨이라도 때릴 기세였기에, 나는 짜증스레 한마디를 툭 던졌다.

"시끄럽군."

순식간에 지도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교사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고, 아이리의 경계심 역시 올라갔다.

그나마 마리아만이 당황하지 않은 듯, 상황을 수습하고 나섰다.

"선생님, 잠시 나가 주시겠습니까."

"아, 저기...!"

"괜찮습니다. 저흰 잠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뿐이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마리아의 깔끔한 대응에 교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도망치듯 지도실을 빠져나갔다.

도시 내 최고 권력 중 하나의 심기를 상하게 했으니 겁이 날 만도 하겠지.

새삼스레 내가 지닌 힘의 크기를 실감하는 한편, 이런 권력관계를 너무나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상당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만 조금 안타깝게도.

내 발언은 원치 않게 아이리까지 더 경계하게 만든 듯했다. 그녀는 한층 더 궁지에 몰린 야생동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만 대도 물어 버릴 기세.

물론 안타깝다는 건 어디까지나 아이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내 개인적인 평가일 뿐, 이렇게 날이 바짝 선 분위기야말로 내 계획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마리아, 가져와라."

"네, 도련님."

나는 딱히 아이리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마리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리아는 곧장 준비해 온 물건들을 품에서 꺼내어 아이리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리가 그것을 쳐다보곤 되물었다.

"...뭐죠?"

"계약서입니다."

마리아가 나 대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에 서명하는 즉시, 앨리스밸 양은 저희 스팅레이 그룹의 후원을 받는 아카데미 장학생이 됩니다."

"네, 뭐, 뭐요?!"

"그리고 아카데미 교칙에 따르면, 장학생들이 학원 내에서 물의를 일으켰을 때 학원 측 대신 후원자 쪽에서 대신 처벌할 수 있게 됩니다."

"...!"

아이리는 명석한 아이다.

에둘러 말했음에도 그녀는 곧장 지금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그러니까... 이 계약서에 이름을 적으면 오늘 내가 일으킨 문제를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의미?"

정확했다.

이것은 면죄부다.

아카데미에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기업이 뒷배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처벌이 갈린다.

설령 퇴학을 당해도 쌀 범죄를 저질러도, 그 학생을 후원하는 기업의 재량과 능력에 따라 보여 주기식 솜방망이 처벌만으로 끝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아이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언뜻 결정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는 그녀의 진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만약 네 녀석이 내가 아는 그 '아이리'라면, 네가 여기서 보일 반응은...

"...원래 이런 식?"

내 예상대로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약점을 잡아서 빽 없는 애들한테 족쇄를 채우는 건가요?"

아이리의 언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아까 그 망할 자식이랑 당신네들도 다 한패였던 거야!"

"앨리스밸 양. 지금 뭔가 오해를...."

마리아가 흥분한 아이리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나는 오히려 마리아를 막았다. 이 상황이야말로 내가 이끌어 내고 싶었던 결과였으니까.

"...도련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거라."

"시키지 않아도 할 거거든?!"

아이리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갑자기 스팅레이 인간들이 찾아와서 후원해 줄 테니 계약하자고? 내가 폴른 구역 출신이라는 걸 그 대단하신 분들께서 파악하지 못했을 리도 없을 텐데?"

나는 아이리 앨리스밸을 안다.

그녀는 스팅레이를 뼛속 깊은 곳까지 증오하고 있다.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빙의자가 아닌지 의심했을 테지.

"이제 보니까 우리 오빠도 당신들한테 그런 식으로 당했던 거야! 그야 물론 댁처럼 겁나게 고상하신 분들께선 말단 직원이 어디서 어떻게 되든 이름 하나 기억 못 하겠지!"

그리고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여기서 어떤 대사를 읊는 것이 가장 좋을지.

"'피터'를 말하는 것인가."

"...!"

아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고? 당신이? 그렇다면 알려 줘! 우리 오빠는 지금 어떻게...!"

"이야기가 벗어나고 있군."

의도적으로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러자 아이리의 얼굴이 급격히 구겨졌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한 듯,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당장 말하란 말이야!"

아이리의 머리 위치가 갑자기 낮아졌다. 그리고 왼쪽에서 느껴지는 무서운 기세.

노리는 것은 내 턱.

군더더기가 거의 없는 동작.

싸움에 상당히 익숙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발차기였다.

그러나-

"어?"

터엉.

나는 손가락 두 개만으로 아이리의 발차기를 깔끔하게 막아 냈다.

그녀의 공격은 나를 단 1mm도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 손가락과 부딪친 아이리의 다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뒤늦게 그녀가 일으킨 돌풍이 내 머리를 조금 흐트러트리는 게 고작이었다.

"어, 어떻게― 아흐으으!!"

아이리는 내 손가락과 부딪친 다리를 끌어안고 뒹굴어댔다. 아마 각목을 정강이로 걷어찬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아파하는 최애캐의 모습에 순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눈물을 머금고 준비해 온 대사를 읊었다.

"약하군."

"뭐, 뭐라-?!"

"고작 그 정도로 뭘 어떡하려는 거지?"

"...다, 닥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싸우려는 아이리.

그러나 그 전에 나는 그녀의 눈앞에 다시금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이건 내가 주는 기회다."

"...!"

"아무리 폴른 출신이라 해도, 지금 상황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진 않겠지. 아이리 앨리스밸."

내 말에 아이리는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날 어떡하려는 셈이야?"

"답은 직접 생각해서 구하도록."

"...."

그래, 답은 네가 구해야 한다.

마음 같아선 모든 비밀을 빨리 알려 주고 싶다. 목표를 이룰 수단과 방법, 또 그녀가 갈구하던 진실들을.

하지만 그래서는 아이리가 성장하지 못한다. 언제까지고 계속 멋대로 날뛰는 재투성이의 들개로 남을 뿐이겠지.

나는 그 상황을 원치 않는다.

"서명하는 게 좋을 거다. 네 목표를 위해서라도."

"당신...!"

무어라 말을 쏟아 내려던 그녀는 곧 기세를 잃고 입을 다물었다. 아마 속으로는 머리를 엄청 굴리고 있겠지.

그러다가 이내 계약서와 펜을 받아 들곤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어떡하면 되는데?"

"마리아. 잘 알려 줘라."

"네, 도련님."

나는 한 걸음 물러났고, 마리아가 대신 아이리의 곁으로 다가가 계약서의 내용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아이리는 설명을 다 듣고서도 독소조항은 없는지 계약서를 노려보며 한참이나 씨름했다. 그러다 결국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자, 제대로 썼어. 됐지?"

"이상 없습니다, 도련님."

마리아가 나 대신 계약서를 살펴보곤 보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돌아가도 좋다."

"응? 저, 정말로?"

"왜 그러지."

"아, 아니. 이렇게 싱거워도 되나 해서. 분명 뒤에 뭔가 '속았구나, 이 녀석!'하면서 뭔가 더 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리 앨리스밸."

"...왜?"

"말이 상당히 짧구나."

"...요."

하여간.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있던 주제에 결국 이름을 적고 정면 돌파하려는 게 참으로 그녀다웠다.

묘하게 흐뭇한 기분이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내로 안내 메일이 갈 거다. 장학생 특별동으로 기숙사를 옮길 준비를 해 두도록. 이상이다."

"지, 진짜 돌아가도 되는 거야?"

"말."

"...요?"

"...."

'요'만 붙인다고 다 존댓말이 되는 건 아니란다, 이 아가씨야.

나는 대답 대신 미간을 조금 좁혔다. 그제야 아이리는 부리나케 뒤돌아 지도실을 뛰쳐나갔다.

"나, 나를 속인 건지는 계속 두고 볼 거야! 만약 그런 거면 가만 안 둘 테니까!"

나가면서도 끝끝내 한마디를 더 남기고 간 아이리. 그녀의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지자 마리아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신경 쓸 것 없다."

"예."

마리아는 내 수행원이면서 아이리의 기습공격을 직접 막지 못했음에 사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미리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마라'라고 미리 명령을 내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잘못한 부분은 없었다.

물론 마리아 역시 그걸 알고서도 예의상 사과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다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혹시 도련님께선 앨리스밸 양을 예전부터 알고 계셨는지요?"

"그렇게 보였나?"

"잘 모르겠습니다."

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

지금 이 장소에서 아이리와 대화하며 벌어진 상황 모두, 나는 마리아에게 일찌감치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해 두었으니.

"깊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만, 앨리스밸 양은 굉장히 저희 그룹을 불신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말대로다."

"그런데도 도련님께선 평소답지 않게 행동하셨죠."

마리아의 말마따나 원작의 아론이라면 나와는 다른 방식을 취했겠지.

아마 아이리가 경계심을 보이자마자 나와는 달리 철저하게 힘과 권력으로 짓밟으려 들었을 것이다. 뭣보다 애초에 폴른 출신이니만큼 그녀를 영입할 생각조차 안 했을 테고.

"조금 변하신 것 같습니다."

"무례하구나, 마리아."

"죄송합니다."

말투로 보아선 좋은 의미로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그녀를 질책하며 화제를 넘겼다.

"어쨌건 이렇게 됐으니 뒷일은 알아서 처리하도록."

"밀레테크 쪽 말씀이십니까?"

"그래."

밀레니엄 테크놀로지.

아이리가 때렸던 남학생이 소속된 기업 얘기였다.

갑작스레 아이리가 스팅레이 소속이 된 만큼 밀레테크 쪽에서는 이번 건을 도발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제기해 오겠지.

"알겠습니다. 베네딕트 도련님께도 이 건에 대해서 전달해 두겠습니다. 그런데 도련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

마리아가 우려하는 것은 아이리 앨리스밸이라는 학생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냐는 것이겠지. 밀레테크 쪽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영입할 정도의.

또한 저렇게 스팅레이 그룹을 싫어하는 녀석이, 과연 스팅레이의 장학생으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을 것이다.

그에 나는 확신을 담아 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다소 어설프긴 해도.

"저 녀석 역시 말도 안 되는 천재니."

아카데미 흑막 시점 17화

'나 년아!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른 거야!'

학생 지도실을 빠져나온 직후.

아이리는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죽으려고 환장했어?! 대체 그 성질머리 언제 고칠래! 까딱하면 오늘 저세상 가는 거였다고!'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마음에 그랬다고는 하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분명 미친 짓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

조금 전.

학생 지도실에서 그녀는 이 도시의 황태자라 불리는 남자에게 발길질을 날린 참이었다.

물론 그녀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겨우 손가락 두 개에 어이없이 막혀 버리긴 했으나,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만약 제대로 공격이 먹혔다면 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만 것일 테니.

'아니, 지금도 사실 내가 살아 있는 게 기적일지도 몰라....'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쳤다.

오늘 그녀가 저지른 일은, 내일 아침 그녀가 폴른 구역 어딘가에서 잘게 다진 고깃덩이로 발견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아론이 이해심과 아량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날 봐준 거지...?'

아론이 마음만 먹었다면 직접 그 자리에서 자신을 흔적도 없이 제거할 수 있었을 터.

아론 스팅레이라는 남자에게는 충분히 그리할 만한 힘도, 권력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아주 가끔 길거리에 나도는 소문으로는 아론은 굉장히 잔학하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아론은 아이리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심지어 그녀에게 특별 장학생 자리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느낌이었지.'

어째서일까.

아이리는 눈앞에 아까 보았던 아론의 얼굴이 살짝 어른거리는 듯했다.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였다.

아니, 그건 둘째치고 굉장히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나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어....'

폴른의 빈민가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으며 갈고닦은 본능은, 그녀에게 이리 말하고 있었다.

-아론 스팅레이는 악인(惡人)이다, 라고.

처음 지도실에서 아론이 들어온 그 순간, 아이리는 그에게서 형언할 수 없이 진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얼핏 아름다워 보이는 그 냉소적인 외면 아래에서는 숨길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리는 그와 얼굴을 마주침과 동시에, 그가 수많은 이의 목숨을 빼앗아 온 선천적 괴물임을 직감했다.

'그런 미친 짓'을 벌였던 것 역시, 그가 풍기는 너무나도 진한 피 냄새에 소름이 끼쳐, 순간 원래 목적을 잊어버렸던 탓이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그녀의 직감은 이렇게도 속삭였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라고.

그 눈빛.

짧은 찰나. 자신을 훑어보던 그 눈빛에서는 어째서인가, 친애(親愛)의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리는 그가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자신은 해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왜지? 왜 그 순간에 날 그런 눈으로 쳐다봤던 거지?'

착각이었던 걸까?

잠시 잘못 봤던 거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 감은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

'혹시... 오빠와 관련이 있나?'

분명 아론은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피터 오빠.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둘도 없는 그녀의 가족.

몇 년 전, 피터는 운 좋게 아카데미에 들어가 훌륭한 성적으로 스팅레이 장학생이 되었다.

허나 얼마 후, 그는 '교내 활동 중 사고'라는 명목 하에 돌연 실종되고 말았다.

피터의 실종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스팅레이 그룹의 짓일 거라고 했다.

돈 앞에서 사람의 생명 따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그들이 피터 오빠를 모종의 이유로 살해했을 거라고 말이다.

아이리는 그 말에 분노했고, 오빠의 흔적을 찾고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아카데미에 왔다.

그녀가 스팅레이 장학생이 되려는 것도 놈들이 오빠를 살해했다는 증거를 찾아 세상에 까발리기 위해서였다.

'...분명 그 남자는 우리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어.'

아무리 후원자라고 해도,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개 장학생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아론이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것 역시....

'아, 아니.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아론 스팅레이는 적이다.

스팅레이 가문이란 파충류처럼 차가운 피가 흐르는 일족이랬다. 실제로 지금도 이 도시는 스팅레이 그룹의 폭거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그런 일족의 장남인 아론이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낄 리도 없었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자신이 그를 용서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럴 일은 없어.'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아이리 혼자만이 그를 용서한다고 해도, 세상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신 차려라, 나. 얼굴 좀 잘생겼다고 홀리면 안 돼. 할 일을 해야지.'

아이리는 고개를 흔들어 아론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다만 그 과정이 좀처럼 쉽지 않았던 탓에, 아이리는 자책하며 속으로 끙끙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