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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 75화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마치 술을 마신 듯 머리가 어지러웠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 보였다.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속은 메스껍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론 씨... 지금 꺼내... 요오!]

나를 둘러싼 유리벽 너머로 자그마한 체구가 보였다. 이윽고 눈앞을 가리던 초록색 무언가가 아래쪽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갑자기 중력이 느껴진다.

나를 지탱해 주던 무언가가 사라지며 나는 내 다리로 서야만 했다. 유리벽이 커튼처럼 양쪽으로 열렸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질 뻔했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내 몸을 받아 주었다.

"괘, 괜찮아요? 미유, 이거 왜 이래?"

"배양액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오... 곧 괜찮아질...."

그 말마따나.

곧 나는 중력에 적응했고, 내 힘으로 자리에 섰다.

스스로 가슴에 힘을 주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길 몇 번 반복하자, 이내 전신에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정상화된다.

멍했던 머리가 맑아지고, 흐렸던 시야가 밝아졌으며, 온몸에는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힘이 마구 샘솟는 느낌이었다.

"...여긴."

그제야 주변의 모습이 보인다.

나를 부축하고 있는 아이리, 그 옆에서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미유,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니컬한 태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일런스까지.

"아아... 그런 거였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복제품이었군.

* * *

-마지막으로 점검할게요오! 지금 보내는 신호에 최대한 빠르게 응답해서 움직여 보세요오! 하나, 둘.

-으얏!

-0.12초. 아직 최적화가 부족한 것 같네요오. 지금 다시 프로그래밍을 손볼게요오!

내가 깨어난 직후, 미유의 기숙사 방은 완전히 아지트로 변했다.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이 한창 수업과 훈련을 받고 있을 동안, 아이리와 사일런스, 미유는 '아론 스팅레이'를 막기 위한 준비를 이어 나갔다.

'생각보다 급하게 진행되었군.'

내게 저장된 기억은 남색 사냥터로 향했던 시점... 그러니까 1부 2막 도중 한창 시험기간이 진행되던 도중에 끊겨 있었다.

그때는 아직 사일런스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시점이었는데,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건 '본체' 쪽이 잘 설득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직후, 겨우 한나절 정도 지난 시점에 내가 깨어났다. 그 말인즉, 1부 4막의 진행이 내 예상보다도 빠르게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그 탓에 아이들을 준비시키는 데에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리와 사일런스에게 당장 효율적인 것들을 가르쳐 나갔다.

"아, 아론 씨이, 이 정도면 될까요오?"

"아이리, 움직여봐라."

"이, 이렇게요?"

"어색하군. 불편한 곳이 아직 있나?"

"어깨랑 가슴 쪽이...."

"흉부장갑은 어쩔 수 없을 거다. 미유, 어깨만 조금 조정해 줘라."

"아, 알겠습니다아!"

미유는 서둘러 아이리의 옆에 달라붙어 '그 만능툴'을 이용하여 세부조정을 이어 나갔다. 겉모습과 다르게 정말 '만능툴'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한 차례 충격을 받았다.

뭐, 아무튼.

현재 아이리의 스펙으론 전장에 끼어들어 봤자 개죽음을 당할 게 뻔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Lv.4 수준의 파워드 아머를 마련했다.

어차피 넣어 봤자 쓰지도 못할 테니 공중기동 장치는 과감하게 제거했고, 그만큼 갑옷의 방어도를 높였다. 동시에 아이리의 유연한 몸놀림을 갑옷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관절의 가동범위도 넓혔다.

물론 이 정도 보완한다고 해서 얘들만으로 '본체' 쪽을 이길 수 있으리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생존력은 높여 줄 수 있겠지.

"끄, 끝났어요오!"

"그래, 어떻지?"

"갑자기 확 편해졌어요. 좋아요."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무장을 마친 그녀는 한 명의 여기사가 되어 있었다. 한 손에 방패를 들고 온몸을 단단한 갑옷으로 둘러싼 모습은, 중세 판타지 전장의 한복판에 나타난다고 해도 꽤 어울릴 듯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리의 갑옷을 몇 번 손으로 쳐 보고는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좋다, 이제 사일런스 차례군."

"...."

아이리와 다르게 사일런스는 방어력보다는 은밀함과 기동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찬가지로 Lv.4 파워드아머를 입히긴 했으나, 장갑은 아이리의 것과 비교하여 터무니없이 얇았다.

디자인도 '기사'보다는 '암살자'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도색 역시 환경에 쉽게 숨어들 수 있는 검은색과 회백색 페인트를 주로 이용했다.

"클로킹 모듈을 써 보세요."

"[오케이.]"

그가 사용한 모듈에 동기화하여, 그의 갑옷이 통째로 투명해졌다. 몸을 움직여도 소음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완벽에 가깝게 생체반응을 지워 줘서 더더욱 기척을 눈치채기 어려워졌다.

"어떻지?"

"[문제없어.]"

내 물음에 사일런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보아하니 '본체' 쪽이 단단히 미움을 산 탓에 나를 향한 눈빛도 마냥 곱지는 않은 듯했다.

뭐, 그래 봤자 이 작전에 군말 없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쪽'으로 넘어온 것이겠지만.

'사일런스 호감도작은 1부를 무사히 끝내고 해도 늦지 않아.'

문제는 이번 1부 4막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느냐 없느냐다.

제아무리 아이리와 사일런스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해도, 아직은 학생에 불과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레벨 적응자들이 넘치는 판에 끼어들게 만드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판단일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야 나 혼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오고 싶지만....'

이 녀석들이 성장하지 못하면 1부 4막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아론 스팅레이'와 목숨을 걸고 치르는 실전 경험은 이들의 능력을 대폭으로 성장시킬 터.

원작에서도 이들은 온갖 사투를 벌여 가면서 빠르게 성장했었지.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의 육성이 훨씬 더뎌질지도 모른다.'

최대한 이 녀석들의 미숙함을 내가 커버하는 동시에, 내가 주인공 역할을 이어받아 '본체'를 막아 내야겠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아, 아론 씨는 괜찮으신가요오?"

"컨디션은 좋다."

나는 '본체' 쪽이 사용하던 모듈들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유전정보 역시 99.9% 일치하니 호환성 문제도 없다.

당장 스펙만으로 따지면 본체 쪽을 완전히 압도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몇 가지만 묻지."

"어, 어떤 게 문제시죠오...?"

"난 왜 이렇게 어려진 거지?"

복제품인 내 육체.

즉, 이 몸뚱이는 본체와 비교해 상당히 어려졌다. 키도 몇 센티미터 정도 줄었고, 얼굴은 완전히 앳되다.

나이대로 따지자면 10대 후반?

고등학생... 낮게 잡으면 중학생 고학년 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육체만 따지자면 아이리보다도 어려 보인다는 것이다.

그때, 문득 아이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슬쩍 고개를 돌리는 아이리.

그녀는 투구를 쓰고 있었지만 [트라우마 스캐너] 모듈 덕분에 그 표정이 훤히 보였다.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것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여서 조금 장난기가 발동했다.

"연하가 취향이었나?"

"네?! 뭐... 그 그런 거 아닌데요!"

"미성년자에게 손을 대는 건 범죄다."

"그, 그런 거 아니라고요!"

조금 찔렸는지 아이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격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연하가 취향이라기보단 내 '어린 모습'에 조금 더 흥미가 있었던 거겠지.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아이리에게 짓궂은 말을 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성격이... 조금 바뀐 건가.'

예전엔 이런 식으로 농담할 때마다 내심 묘한 불쾌감이나 수치심 같은 게 느껴지곤 했었다. 마치 누군가가 '아론 스팅레이'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라고 내게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약이 사라진 듯,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빠져나간 느낌.

'내 원래 성격이 좀 돌아온 건가?'

그간 알게 모르게 '아론'이라는 에고에 휘둘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한편, 나는 다시 미유를 돌아보았다.

장난치며 즐기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

"그래서 내가 왜 어려진 거지?"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오...."

원래는 배양액에서 며칠 더 지냈어야 하는데, 너무 일찌감치 꺼낸 탓이라고 한다.

스펙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신장이라든가 몇 가지 부분에서 위화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게 미유의 설명.

하지만 나는 별로 크게 상관없는 것이, 지금의 키가 '저쪽 세계의 나'와 더 비슷했다.

이미 한 차례 '아론 스팅레이'에게 빙의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신장이 갑자기 변하는 것 정도야 그리 적응하기 어렵진 않다.

'뭐, 나는 결국 복제품이지만.'

그리 생각하니 묘하게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럼 나이 외에 또 한 가지."

"뭐, 뭔가 또 문제라도...?"

"전투 모듈 몇 개가 없군."

다른 모듈들은 전부 멀쩡하게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어째서인가 몇 가지 모듈들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진 건 [시체먹는 자]와 [셀 리제너레이터]인가. 게다가 [구름거미]도 드워프제 복제품 쪽이 남아 있군."

"그, 그럴 리가...!"

미유가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가 건드리진 않은 것 같고, 아마 '본체' 쪽이 들고 간 것 같았다. 다만 나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어째서 그 모듈들만 들고 간 거지?'

만약 빌런으로서 '각성'하면서 자신이 세운 계획을 전부 뒤엎어 버리고 싶었다면, 굳이 모듈 두세 개만 챙겨 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

반대로 '각성'하기 전에 급하게 계획을 수정해야 할 일이 생겼던 것이라면 어째서 복제품인 '나'에게조차 그 변동사항을 공유하지 않았던 걸까?

'...모르겠군.'

나는 복제품이다.

아론 스팅레이가 되어 버린 '나'와는 또 다른 존재였다. 세계의 영향을 받아 사고방식 자체가 바뀐 내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예측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녀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모듈들만으로 무엇을 어떡하려는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서둘러 '나'를 막을 준비를 마치는 것뿐이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나를 '악당'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계의 의지에서 벗어난 덕분일까, 이곳에 온 후로 가장 편안한 느낌이었다.

'뭐,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말해서, 나는 복제품이었다.

이번 계획이 모두 끝나면 나는 쓸모를 잃고 사라질 복제품 말이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복제된 기억과 '진짜'가 아닌 몸에서 비롯된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내 역할을 해야 하니까.

* * *

그리고 때가 왔다.

아론 스팅레이를 죽이고 황태자 자리를 빼앗기 위해, 베네딕트 스팅레이가 병력을 움직였다.

나는 서둘러 특별장학생 아이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

이 정도 규모의 전투를 처음 겪어 보는 녀석들이 어리바리 허둥대다가 휩쓸리지 않도록, 그들에게 미리 언질을 준 후 먼저 전장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스팅레이 병사들의 무선통신을 감청했더니 상황은 꽤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역시 진짜 [구름거미]와 [시체먹는 자] 모듈만으로 베네딕트 측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군.'

미유가 이전에 이렇게 내게... 정확히는 내 '본체' 쪽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 몸의 퓨어스펙이 평균적인 중레벨 적응자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보인다고. 그 때문에 전투용 모듈 몇 개만 장착해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녀석한테 게임체인저급이 2개씩이나 달려 있으니, 주도권 싸움이 안 되는 것도 당연하지.'

보아하니 베네딕트 측의 병사들은 본체 쪽과 아직 제대로 맞붙지는 않은 듯했다.

탄환은 상당히 많이 소비했지만, 직접적인 전력 피해는 저격수 한 명 뿐이다.

하지만 상대가 그 '아론 스팅레이'라는 사실과 자신들의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에 지레 겁을 먹고는 후퇴할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둘 내가 아니었다.

"다들 어디로 튀려는 거지?"

나는 서둘러 전장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며 병사들의 내부회선에 대고 말했다. 그에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전장의 기운이 대번에 바뀐다.

[다, 당신은...!]

"다들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당황하는 병사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본체가 있는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이윽고 서로의 표정을 맨눈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좁힌 후, 눈을 마주쳤다.

녀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드디어 가짜가 행차하셨군."

그의 뺨을 피가 덮고 있었다.

가문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가 굶주린 포식동물처럼 번득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몸에는 귀족적인 기품이 깊게 배여, 사소한 몸짓과 발짓 하나에도 권위가 깃드는 듯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치려 했던 베네딕트의 병사들을 나무라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겁을 먹지 않는 게 이상한 수준이다.

녀석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어린 모습인가?"

"성장기에 푹 못 자서 그렇다나 보군. 누구누구께서 예상보다도 빨리 폭주하기 시작하셔서."

말하고 나서도 느낀다.

역시, 원래의 내 성격이나 말투 쪽이 강해진 느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체' 쪽도 감지했는지, 녀석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경박하군."

"자기혐오는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네 모습을 보니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다행이다 싶군. 이리도 가벼운 남자였던 것인가."

"이 모습이 어린 시절의 흑역사라도 자극하는 모양이군?"

"...."

아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역시나.

말투로 보아 '본체' 쪽은 아론 스팅레이의 에고에 거의 잡아먹혀 있었다.

아직 '나'라는 자아는 남아 있으나, 행동이나 말투, 사고방식 따위가 원작의 아론과 더더욱 흡사해져 있었다.

그렇게 분석을 마친 후, 재차 물었다.

"어째서 [구름거미]와 [시체먹는 자], [셀 리제너레이터]를 들고 간 거지? 덕분에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나?"

"말해 줄 의무는 없을 텐데. 그리고 본래 '나'의 물건들이다. 그것을 어떻게 쓰든 나의 판단이다."

"그럼 너는 지금 누구지? '나'인가? 아니면 '아론 스팅레이'인가?"

"무의미한 질문이로군."

아론은 웃었다.

"내가 아론 스팅레이다."

"...과연."

대충 상황 파악은 끝났다.

"이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겠지."

"...."

내가 말했고, 아론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가에 미소가 깃든다.

살인귀의 미소.

보는 것만으로도 피식자의 몸을 굳게 만드는, 최상위 포식자의 시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중얼거렸다.

"모듈 온라인 [구름 거미]"

"모듈 온라인 [구름 거미]"

"모듈 온라인 [테크 블레이드]"

"모듈 온라인 [테크 블레이드]"

서로의 손에 검은 장갑이 덧씌워진다.

동시에 오른손에는 나노머신에 의해 생성된 검이 쥐어진다.

같은 무기를 쥔 채, 서로를 노려본다.

그리고 호흡이 일치하는 다음 순간.

"...!"

서로의 무기가 맞부딪쳤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6화

아론 스팅레이는 괴물이다.

그에 대해서 이 이상 무슨 말로 표현하겠는가. 그의 강함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하면 종이를 꽤 잡아먹을 것이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그랬다.

1부와 2부의 경계를 담당하는 중간보스 포지션이라 그럴까. 작가는 아론의 강함에 대해 상당한 수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해 놓았었다.

소설이 완결을 맞이할 때까지 등장한 모든 인물들 중에 단연코 그의 무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물론 주인공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인 초반부 중간보스라 그럴 수도 있지만, 수많은 괴물이나 돌연변이, 폭주한 AI 등과 싸우면서도 대(對) 아론전만큼 고전했던 적은 없었다.

'짧게 등장했지만, 그만큼 임팩트 하나만큼은 장난 아닌 악당이었지.'

순수한 스펙만 따져 보면 애초에 이겨 먹으라고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었다.

아무 모듈도 장착하지 않은 '퓨어스펙' 상태만으로 어지간한 중견 적응자와 맞먹는 수준의 신체 능력을 보이는 남자였다.

장착한 전투 모듈의 종합출력 레벨은 100을 간단하게 넘고, 장착한 모듈들의 품질도 최소 Lv.3 군용급 이상의 제품들이었다.

심지어 [구름거미]와 [테크블레이드].

두 개나 되는 게임체인저급 신비모듈을 장착하고 있는 남자. 마음만 먹는다면 생산콜로니 몇 개쯤은 가뿐하게 궤멸시킬 수 있는 남자를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부분은 결국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아론 스팅레이가 정말로 두려운 악역이었던 이유는, 모듈의 성능이니 퓨어스펙이니 하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쪽에 있었으니까.

* * *

시공간이 갈라진다.

순간적으로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굉음이 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부딪치며 공기를 찢어 놓은 탓이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악-!

두 명의 아론 사이에서 돌풍이 몰아친다. 그 바람은 꼭 칼날 같아서, 주변에 닿는 것들을 사정없이 베어 버릴 정도였다.

허나 그 칼날폭풍의 틈새 속에서, 두 명의 아론 스팅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그들이 그저 몰아치는 바람 속에 서 있을 뿐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군용 안구 스캐너 모듈을 장착한 고레벨 적응자 병사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그 두 명의 사이에서 오가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공방을 말이다.

실과 실이 부딪친다.

한쪽이 실이 쏘아 날리면, 다른 한쪽이 그것을 실로 그것을 받아친다. 한쪽이 거미줄처럼 실을 펼쳐 내면, 다른 한쪽의 실이 그것을 걷어 낸다.

그 과정은 모듈을 장착한 적응자들이 겨우 볼 수 있을 정도.

신비모듈 [구름거미]는 본디 강철조차도 두부처럼 잘라낼 정도로 예리하면서도 단단한 실을 만들어 낸다.

그 헤아릴 수 없이 갈라지고 얽히길 반복하는 실들은, 각각이 한 자루의 칼날이 되어 주변 환경을 사정없이 난도질해 댔다.

[저, 저게 뭐야...!]

[지형이... 바뀌고 있다...!]

실에 베인 땅이 갈라진다.

실에 베인 건물이 갈라진다.

실에 베인 자동차가 갈라진다.

실에 베인 모든 것이 갈라진다.

마치 재해를 만난 것처럼, 주변 반경 100미터 안의 모든 것들이 썰리며 두 사람을 둘러싼 지형과 환경 자체가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괴수와 괴수의 싸움.

재해와 재해의 싸움.

어째서 [구름거미] 같은 신비모듈이 '게임체인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마 저 모듈의 능력으로 모든 것들을 파괴하리라고 마음먹는다면, 틀림없이 중소도시 한두 개쯤은 가볍게 지워 버릴 수 있겠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목적이나 의문 따위를 전부 잊어버렸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마저 그들의 전투가 내뿜는 박력에 머릿속에서 삭제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뭣들 하는 거지?]

내부통신을 통해 들어오는, 아론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정확히는 '어린 쪽' 아론의 목소리였다.

[거기서 가만히 구경만 할 셈인가? 오래는 못 버틴다. 다들 정신 차리고 각자 할 일을 하도록.]

[...!]

그제야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그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임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소년 아론의 말에 따라도 되는 걸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당장은 그가 자신들을 돕고 있었고, 지시받은 타깃은 '어른' 쪽의 아론이었으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일단 임무 수행을 위해서도 그 소년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맞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쏴라! 한 발이라도 좋으니 맞춰!]

[위자드 팀! 바이러스를 더 준비해!]

[뭐든 좋으니, 다 갖다 쏟아부어!]

적응자와 증강자 병사들은 다시금 본래의 아론에게 총구를 겨냥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댔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수천 발의 탄환이 일제히 아론 스팅레이에게 쏟아진다. 탄창이 벌써 비어 버린 이들은 전투 모듈을 이용한 무기를 꺼내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팅레이 제(制) 'Lv.3 [S203 40mm 유탄발사기] 통상모듈', 스팅레이 제(制) 'Lv.3 [나이트메어 대전차 소총] 통상모듈' 등, 각 병사들이 비장의 수단으로 숨기고 있던 무기들까지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중지원! 공중지원 바람!]

미처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던 5대의 공격헬기까지 전투에 참가했다.

큰 소음을 내며 편대비행으로 날아온 헬기들은 아론을 향해 모든 화력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기체 하단부 '30×113mm 체인건'이 쏘아내는 고폭탄과 '케르베로스 70mm 비유도 미사일'까지.

과연 이것이 단 한 명의 사람을 잡기 위해 준비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화력이 모조리 투입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헬기들이 일제히 쏘아내는 미사일들이 아론을 향해 순식간에 도달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있던 자리에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귀가 먹을 듯한 소음.

거대한 화염과 연기, 분진 따위가 아론의 모습을 완전히 뒤덮었다.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수십억 크레딧에 달하는 탄약과 미사일들이 오직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을 죽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끝날 상대가 아님을.

[...재미있군.]

내부회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아론의 짧고도 굵직한 목소리.

그와 동시에 한 줄기의 섬광이 공중에서 화력을 쏟아붓던 헬기편대를 단번에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서거어어어억-!

칼에 베인 듯, 헬기들이 일제히 가로로 갈라졌다. 연료에 불이 붙었는지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켰고, 남은 뼈대가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직후, 돌풍이 불며 다시금 아론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지간한 적응자라도 뼛조각조차 추릴 수 없을 화력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은 것이었다.

구태여 처음과 달라진 부분을 꼽자면 그가 입고 있던 최고급 양복이 연기와 돌풍에 상해 버렸다는 거겠지만, 정말로 의미 없는 수준의 피해였다.

[제기랄! 저 괴물을 대체 어떻게...!]

그 모습에 병사들이 다시금 사기를 잃어가려는 찰나, 어린 아론이 다시금 지시를 내렸다.

[위자드 팀. 응답해라.]

[여, 여기는 위자드 팀!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거기에 여자애 하나가 갔을 거다. 도움을 받아라.]

[...예?!]

* * *

같은 시각.

작전지역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위자드 팀의 본부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한창 사이버 스페이스에 다이브하여 아론의 보안취약점을 공략하던 위자드 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경고][경고][경고]

외부 침입자 발생!

접속을 해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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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스페이스에 완전히 의식을 집어넣은 상태의 위자드만큼 외부충격에 취약한 이들도 없었다.

정신은 가상공간 속에서 숨을 헐떡거릴 만큼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도, 외부에 있는 그들의 육체는 접속 캡슐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황한 위자드들은 빠르게 딥다이브 상태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어린 아론의 무선통신이 도착했다.

[거기에 여자애 하나가 갔을 거다. 도움을 받아라.]

[...예?!]

그들이 당황하는 그 순간.

-----

[알림]

새로운 해킹모듈이 장착되었습니다.

접속된 장치: [Lv.4 잘 부탁드립니다.]

-----

해킹모듈?

게다가 이름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아론의 보안벽과 씨름을 하던 동료 위자드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오오오! 뚫렸다! 뚫렸어!

아론의 안티 위자드 보안 프로그램에 막혀 진행이 더디던 바이러스의 활동이, 급속도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적응자 팀에서도 환호성이 터진다. 그들의 시야를 통해 관측된 영상이 사이버스페이스 안쪽의 위자드들에게도 공유되었다.

놀랍게도 그 영상은.

아론이 비틀거리는 장면을 담고 있었다.

* * *

[바이러스가 먹혔다!]

본체 쪽 아론의 목덜미 쪽에서 여러 번의 작은 폭발이 일었다. 그가 끼고 있던 모듈들이 하나둘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피시이이이익-!

아론은 인상을 구기며 연기가 나는 목덜미에 손을 뻗아 망가진 모듈들을 빼냈다.

그의 손에는 새까맣게 불탄 모듈들이 들려 있었다. 아까 전, 그가 저격병을 죽이고 탈취한 전투 모듈들이었다.

[쯧.]

아론이 혀를 찼고, 나는 그를 보며 떠오른 농담을 던졌다.

[떨어진 걸 먹으니 탈이 나는 거다.]

[....]

[날 노려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이건 네 스스로 준비한 '계획'이 아니었나?]

내 기억에는 남아있다.

지금은 '아론 스팅레이'의 자아에 잡아먹혔지만, 그렇게 되기 전의 그가 악당으로 각성한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계획을 세웠었는지.

이 모든 상황이 스스로 계획한 것이다.

아이리와 사일런스, 미유 같은 조연 캐릭터들의 협력을 받는 것. 자신의 자아와 능력을 복제한 '레플리카'를 만들어 주인공의 역할을 맡기는 것.

드워프를 이용하여 게임체인저 모듈 두 개를 복제해 두는 것과, 나노머신의 보안프로그램을 다운그레이드해 놓는 것. 전투 모듈과 특전 포인트를 미리 전부 빼놓는 것.

심지어는 베네딕트의 병사들까지 이용하여, 원래의 '나'는 악당이 되어 버린 자신을 막으려 했다.

'정확한 판단이었어.'

'나'를 상대하면서 여실히 느낀다.

그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나'는... 아니, 아론 스팅레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을 것이다.

'나'는 '아론 스팅레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아론 스팅레이'가 된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패턴에 대해서도 최대한 근접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이미 스스로 양팔과 양다리를 묶어 놓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계획과 설계 단계에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 놓은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두 가지.

'하나는 저쪽도 이쪽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 시간이 되었군.]

제한 시간.

그 단어를 읊으며 아론이 슬며시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활성화시킨 모듈, 드워프제 [구름거미]를 말이다.

'제길.'

속으로 투덜거리던 순간.

녀석과 끊임없이 공방을 주고받던 내 실이 일제히 끊어졌다. 게임체인저 급 모듈의 성능을 여실히 보여 주던 그것은, 갑작스레 눈꽃이 되어 하늘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드워프제 물건의 한계였다.

마력 농도가 낮은 곳에서는 사용하기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원래의 성능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나 다를까, 한창 본체 쪽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던 타이밍에 사용기한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원래는 '본체' 쪽이 사용하게 만들려고 했던 물건이지만, 아론의 자아가 생각보다 일찍 영향력을 발휘한 탓에 진짜 [구름거미]는 놈이 가져가게 된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것도 우리 계획 중 일부였다는 걸 알 텐데.]

[멍청한 생각이었지.]

아론은 그렇게 폄하했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일찌감치 각성한 아론의 자아가 '나'가 세운 계획을 전부 폐기하고 모든 전투 모듈을 꿀꺽해 버리는 상황도 상정해 두었다.

드워프제 복제 모듈은 그를 위한 대비책이기도 했다.

단시간이나마 원본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성능을 보여 주니, 그 제한 시간이 다 되기 전까지 계획을 달성할 수 있으니까.

'가장 골치 아픈 상황으로는 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우려스러웠던 것은 '나'의 자아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아론'에게 잡아먹히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론'은 기껏 쌓아 올린 플랜을 모두 백지화해 버리고 우리는 대항할 여지조차 없이 패배하고 말았을 테니까.

허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아직 무기가 남아 있었다. [테크 블레이드]라고 하는 게임체인저급 무기가 하나 더.

그리고....

쿠우우우우웅-!

아론이 쏘아낸 실이 순간적으로 나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그것이 내게 닿기 직전, 거대한 벽 같은 것이 나타나 아론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왜 먼저 가는 거예요! 뒤쫓아 오느라 힘들었다고요! 이거 기동장치도 없는데!]

아이리였다.

Lv.4 파워드 아머를 장착한 그녀가 방패로 아론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미유의 기술력을 등에 업은 그녀는 참으로 듬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다.'

지금까지가 전초전이었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베어 낼 수 있는 검이.

아카데미 흑막 시점 78화

시야가 점멸한다.

과열된 뇌 일부가 녹아내린 탓이겠지.

원래 내 것도 아닌 모듈을, 미완성의 몸으로 사용한 탓이다. 아니면 아직 내가 미숙한 점이 많았거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 5초 정도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별로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몸이 완전히 망가질 것을 각오하고서 [테크 블레이드]를 힘껏 휘둘렀으나, 효과는 미미해 보였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당혹감.

내 앞에는 여전히 아론이 서 있었다.

근처에 있던 건물이나 잡동사니 따위도 달라지지 않았고, 베네딕트의 병사들도 여전히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석구나."

아론이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실패했구나.

조급한 마음에 제대로 모듈이 지닌 힘을 이끌어 내지 못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조용하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소리를 잘라 낸 것처럼, 조금 전까지도 전장을 가득 채우던 소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이변이 생긴다.

끼이이이이이익-!

아론의 왼쪽 뒤편에 있던 전신주가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둥에서 파지직 불꽃이 튀기더니, 이내 느릿느릿 쓰러졌다.

그의 오른편에 있던 잔해도 마찬가지.

지난번 타이탄의 습격 때 건물이 무너지며 생긴 콘크리트 잔해였다. 그것은 맷돌을 가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상단부가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변은 계속된다.

Lv.4 파워드 아머의 힘을 빌려 공중기동을 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작은 폭발을 일으키더니 바닥으로 추락한다.

버려진 자동차의 프레임이 갑자기 절반으로 잘리며 주저앉는다. 한창 복구공사를 진행하던 크레인이 부서진다. 전장으로부터 꽤 먼 곳에 떨어져 있던 건물의 유리창이 난데없이 와장창 깨진다.

스르륵. 스르륵.

마치 파문이 퍼지듯.

마치 잔잔한 호수 한가운데에 돌을 떨어뜨린 것처럼, 내가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잘리고 부서진다.

적막했던 공간이 서서히 시끄러워진다.

주변 모든 사물이 마치 소리를 지르듯 이상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갈아내는 듯한 소리, 부서지는 소리, 꺾이는 소리 등등.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연주 전에 악기를 조율하듯이, 사물들이 울부짖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론이 중얼거렸다.

"보고도 모르는 것이냐?"

그의 중얼거림에.

때가 왔다는 듯이.

모든 것들이 반으로 갈라지고.

부서져 내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정면 시야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반으로 갈라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쏟아지고, 깔리고, 망가지고, 폭발하며, 나뉜다.

그리고 그것은 아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쿨럭."

그에게서 가장 먼저 생긴 이변은, 그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는 것이었다. 입가로 붉은 선혈이 따라 흐른다.

툭.

그의 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없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 탓에 순간 착각이 들 정도였다.

원래 그 '팔'은 억지로 붙어 있었던 것이고, 떨어져야 할 것이 떨어졌다고 말이다.

'...그럴 리가 없지.'

나는 가만히 아론을 지켜본다.

이윽고 그가 입고 있던 셔츠가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액체가 번지는 속도는 서서히 빨라져서 몇 초가 지나자 아예 콸콸 흐르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아론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맹금류를 닮은 그 눈동자는 냉정하게 사냥감을 노리듯 나를 훑는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중저음의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아직 더 할 수 있겠나?"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져 있다.

미친 새끼.

그런 생각부터 들었지만, 나는 그 목적이 단순히 싸움의 유열을 즐기려는 데에만 있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물론 그게 가장 크긴 하겠지만.

지금의 그는 '아론 스팅레이'인 동시에 '나'였고, '나'인 동시에 '아론 스팅레이'였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지."

녹아내리다 굳은 몸 상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곧 사라질 몸이다. 만들어 준 사람의 계획에 따라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녀석도 참 제정신이 아닌 건 매한가지인 듯했다.

이미 오래전.

한 차례 각오했던 적이 있었던 탓일까.

스스로를 포기했던 적이 있던 탓일까.

죽음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물론 지금 내 안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복제된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아론 스팅레이'가 되기 한참 전부터 진즉에 망가져 있었으며, 그 망가진 자의 기억을 받아 만들어진 나 역시 인간으로서는 결함제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도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인가?"

"헛되이 보내긴 아쉽잖은가."

"그래. 아직 할 일도 남아 있고."

"...."

나는 조용히 검을 쥐었다.

[테크 블레이드]는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과부하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낼 수 있는 출력에도 한계가 있겠지.

절삭력은 조금 떨어질 것이다.

아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팔을 하나 잃은 상태로는 [구름거미]의 실을 완벽하게 다루기 어려울 테지.

결국 둘 다 약해진 상태였고.

나름 둘 다에게 공평한 조건이었다.

"...."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 * *

마지막은 괴물들의 싸움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의 감상은 그러했다. 앞서 보았던 장면들은 전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듯이, 두 아론의 결투는 격하게 진행되었다.

둘 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힘을 쏟아냈다. 그 전투의 여파로 주변의 지형이 계속해서 바뀔 정도였다.

[제, 제기랄! 거기서 도망쳐!]

[휘말리면 죽는다!]

결국 주변의 병사들은 그 재해와도 같은 전투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참을 물러나야 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 역시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려 했다. 하지만 지급받은 탄약은 전부 떨어졌고, 체내 모듈을 통해 만들어 낸 무기 역시 그들의 싸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몇몇 용감한 병사 몇 명이 근접전투용 모듈들을 활성화한 채 두 괴물의 싸움에 끼어들었지만,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실패였다.

그때마다 아론 스팅레이에게 잡아먹혀 모듈을 뱉어 내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포기한 것이다.

함부로 두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는 것은 아이리나 사일런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소년 쪽 아론을 도우려고 했으나, 그들은 이미 앞선 전투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청년 아론과 몇 합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장비가 파괴되고 이곳저곳 중상을 입었다.

그들은 스팅레이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부축하며 두 괴물이 일으키는 재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선배. 관절부가 갑자기 망가진 거 같아요. 어깨는 괜찮은데 안 움직여요."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걸을 수 있으면 벗지는 않는 게 좋아. 까딱해서 저놈들 눈먼 공격에 맞았을 때, 그 갑옷조차도 없으면 100% 죽을 테니까.]"

이내 그들은 현장에서 상당히 벗어나 먼발치에서 두 아론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채앵! 채앵! 채앵! 채앵!

전투의 격한 소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진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사일런스는 돌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하...!]"

"가, 갑자기 왜 웃는 거예요?"

"[멍청해서.]"

"네?"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져서. 지금까지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넌 모를 테지.]"

그렇게 말한 사일런스는 이내 혀끝을 맴도는 씁쓸함을 속으로 삼키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리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으나, 그에게는 답해 줄 생각이 없었다.

어찌 말하겠는가.

원래는 배신할 생각이었다고.

아론 스팅레이고, 복제품이고, 아이리고, 미유고, 뭐고 전부.

저 아론 스팅레이와 관련된 모두를 전투가 끝난 뒤에, 모조리 죽여 버리고, 스스로도 죽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수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자신이 좋아했으나, 좋아한다고 말 한 번 전하지 못했던 그녀가 그리도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심지어 그녀의 죽음은 칩으로 만들어져 누군가의 유흥거리가 된 채 아직까지도 계속 복제되고 퍼지며 모욕당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범인을 찾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증거를 찾기 위해 스스로 정크칩에 손을 댔고, 결국 뇌가 녹아내릴 지경이 되어 이제는 이런 병신 같은 가면 없이는 말도 제대로 못한다.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든 범인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실 내가 범인이었어. 미안해. 근데 그거 사실 내 탓 아니야? 좀 용서해 줄래?"라고 한다 한들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죽이려 했다.

잠시 그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모조리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 실패의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나, 아론 스팅레이라는 괴물에게는 칼끝조차 닿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실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저걸 보고서 어떻게 그러겠어.'

아론 스팅레이는 스스로를 진심으로 죽이려 하고 있었다.

수많은 죄를 저질러 온 자신을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 이 모든 상황을 준비했다.

자신이 이끌어야 할 스팅레이의 병사들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게 만들고, 자신이 후원하는 학생들이 자신을 배신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자신의 복제품마저 그 칼끝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있는 거야.'

경험해 본 적이 있기에 안다.

자신도 사이비 종교가 만든 수상한 정크칩에 조종당해 아이리를 죽이려 했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됐던가?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게 되더라.

내 잘못도 아닌데 그 죄를 자신에게 묻는 건 아니지 않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달라.'

그에겐 능력이 있었다.

자신을 향한 단죄를 없던 일로 해 버릴 수 있는 충분한 재력과, 무력과, 권력이.

그럼에도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죄를 밝히고, 처형대로 올리기 위해 지금도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저 남자를 죽일 수 없다고.

저토록 스스로의 죄를 미워하는 남자가, 속죄할 기회를 빼앗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하지 않은가.

* * *

전투는 서서히 끝을 맞이했다.

팔과 내장을 다친 아론의 안색은 서서히 창백해져 갔다. 과다출혈 때문이었다. 물론 몸 이곳저곳이 녹아내린 나 역시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한참을 이어 가던 공방은.

털썩.

어느 순간 아론이 견디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승패가 갈렸다. 나는 칼을 들이민 채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의 목에 칼을 대고 묻는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래."

아론은 대답했다.

"드디어 깨달았나 보군."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겠지. 사일런스는 너를 용서할 것이고, 베네딕트를 끌어내릴 명분이 생겼다. 동시에 마리아까지 확실한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겠지."

"내가 아니다."

내 말에 본체가 답했다.

"나나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겠지."

"그래, 그렇지."

앞으로 아론 스팅레이의 육체를 사용할 것은, 원본의 복제품인 내 자아를, 다시 복제해서 태어난 다른 자아일 테니까.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이런 거다.

원본 자아파일 A가 있었다.

A는 바이러스에 영향을 받았다.

컴퓨터의 주인은 A가 못 써먹게 될 상황을 대비하여 A(1) 파일을 다른 컴퓨터에 백업해 두었다.

모든 상황이 끝난 후엔 바이러스에 감염된 A파일을 삭제하고, A(1)에서 복제해 만들어 낸 A(2) 파일이 컴퓨터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처음의 A도, A(1)도, A(2)도 전부 A이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다른 파일이다.

"이걸로 괜찮은 거겠지?"

"모른다."

"네가 모른다면 나도 모른다."

"다음 놈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무대로 향하는 것 역시, 이곳에 있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일 테니까.

아마 시엘에게 말하면 즉시 반박해 올 테지만, '나'에겐 '나'만의 믿음이 있는 것이다.

나는 쓰러진 본체의 머리에 손을 뻗는다. 손목에서 뻗어 나온 케이블을 그의 소켓HUB에 연결하고 전송을 시작한다.

이로써 아론 스팅레이라는 바이러스는 사라지고, 순수한 '나'만의 자아가 이 육체를 조종하게 되겠지.

...뭐,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원본이니, 복제품이니, 뭐니.

중요한 사실은.

가장 위험했던 적이 쓰러졌다는 거겠지. 새롭게 눈을 뜬 내가 누구일지는, 그때의 나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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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1부 4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77화

칼자루를 불끈 쥔다.

그에 반응하듯 검이 울기 시작한다.

위이잉-! 위이이잉-!

평범한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

허나 이 전장에 있는 자들의 귀에는 아마 이 소리가 살벌하게 파고들겠지. 주변의 모든 소음을 꿰뚫고, 고막을 울리는 이 소리는 심장마저 떨리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칼날 주위로 기이한 기운이 맺힌다.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

칼날로부터 비롯된 반투명한 아지랑이가 공기 중으로 녹아든다. 그리고 붉은빛으로 밝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후끈한 열기가 조금씩 느껴진다.

붉은빛이 아지랑이와 뒤엉키며 신비한 빛을 내뿜는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오러'를 연상시키는 힘.

'하지만 이는 마법이나 오러 따위가 아니다.'

0.1나노미터 이하로 이루어진 칼날.

그것이 1초당 수만 번 진동하며 주변의 공기 분자를 잘라낸다.

잘라낸 분자들은 주변의 다른 분자와 상호작용하며 충격파를 일으키고 오존 (O₃)나 질산(HNO₃) 따위의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낸다.

공기 분자와 쉴 새 없이 부딪치며 생기는 마찰열이 검을 뜨겁게 달군다. 그 열기를 전달받은 검이 마치 용광로에 담근 것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공기마저 베어내는 검.'

이것이 신비모듈 [Lv.5 테크블레이드].

[구름거미] 이상의 절삭력을 지녔지만, 불안정한 구조를 억지로 유지하느라 내 몸의 나노머신 과부하율이 급격히 치솟는다.

"후...."

인간병기로서 설계된 아론 스팅레이의 몸임에도, 이 칼날은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조차 굉장히 부담스럽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사용했을 때는 온전히 성능을 발휘하지도 않았었지.'

스팅레이 회장의 직속 닌자부대를 상대했을 때였다. 그때는 [구름거미]와 병행하여 사용하느라 이 칼날의 예리함을 제대로 이끌어 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구름거미]를 잃은 내 정신은 오롯이 이 검에만 집중되었고, 이 불안정한 구조의 검을 유지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온도가 상승하고, 심장의 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이러니 원작 속 병을 앓던 아론이 마지막 필살기로만 사용했던 거겠지.

"...."

아론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그러더니 이렇게 뇌까린다.

"네게 어울리지 않는 모듈이다."

거기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들어 그 끝을 상대를 향해 겨눌 뿐이었다. 이 검으로 널 베어주겠다는 듯이.

피식.

아론이 웃었다.

아마 지금 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한낱 즐거운 유희에 불과할 것이다.

'나'에게는 존재와 자아를 걸고 뛰어넘어야 하는 시련이었건만, '아론'이 되어 버린 그에게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벤트일 뿐이다.

최상위 포식자의 사고방식.

그렇기에 그 역시 그는 이것을 받아주었다. 역시 재미삼아.

"덤벼 보도록."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찬다.

수십 미터의 거리를 단번에 좁힌다.

아론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부드러운 움직임. 순식간에 안구 스캐너에 잡힌 [구름거미]의 실들이 나를 막으려는 듯이 그물망을 펼친다.

하지만 상관없다.

무적처럼 보였던 그 거미줄조차, 이 칼날 앞에서는 한낱 명주실에 불과했으니까.

스윽.

잘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불투명한 실들이, 단 한 번의 칼질에 맥없이 잘린다. 힘을 잃고 축 늘어져 허공으로 녹아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카드드드드드드드득!

아론은 드워프제 복제품 [테크 블레이드]를 역수로 쥐어, 내 공격을 막았다. 서로의 칼날이 부딪치는 순간 강렬한 충격파와 열기가 뺨을 훑는다.

칼날이 맞닿은 곳에서 미친 듯이 불꽃이 튄다.

별로 힘을 강하게 주지 않았음에도, 칼날이 미세하게 진동을 반복하며 상대의 칼날을 파고들려 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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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과부하율 급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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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 한쪽에 경고창이 떠오른다.

아론의 칼날에 망가진 부분을 실시간으로 복구하느라 체내 나노머신이 무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전투모듈을 통해 만들어낸 장비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따로 정비를 하지 않더라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망가지는 순간 일시적으로 과부하율이 치솟는다는 것.

'이대로 과부하율 싸움을 할까?'

서로 검을 맞댄 상태로 과부하율을 계속 상승시켜 먼저 몸이 퍼져 버리는 쪽이 패배. 그런 전략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지나갔으나 이내 폐기되었다.

아무리 저쪽이 [구름거미]를 갖고 있어도 종합 모듈출력 레벨은 이쪽이 높은 상태다.

그만큼 대체율과 신체능력 자체는 우위에 있지만, 과부하율도 쉽고 빠르게 올라간다.

'드워프제 [테크블레이드]가 망가질 때까지만 시간을 끈다.'

전투를 조금만 이어가다 보면 아론이 지니고 있는 가짜 검은 곧 망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름거미]로는 내 검을 막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시간을 끌 수는 없어.'

아론 스팅레이는 인간병기다.

신체능력은 동등하지만 선천적인 전투센스는 따라잡을 수 없다. 그에게 물려받은 기억 덕분에 나도 어느 정도는 싸울 수 있지만, 진짜배기 '아론 스팅레이'가 되어 버린 상대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실제로 지금도 그렇다.

"음."

놈은 일시적으로 테크 블레이드의 진동을 멈추었다.

불꽃이 잠시 사그라드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신경을 쓰고 말았다.

그 찰나.

아론은 내 의식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구름거미]를 다시 전개했다.

[테크 블레이드]가 잡아먹는 과부하율을 정확히 계산하여 출력을 조정하고, [구름거미]에 할애할 힘을 만들어낸 것이다.

"...!"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심리전에 당해주지만은 않았다. 내가 장착한 [Lv.4 웨폰 레코그나이저]는 이런 수준의 페이크야 쉽게 넘길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한 부분은.

다른 걸로 채우면 그만이다.

[하앗!]

내 등에서 날아오는 실들의 공격을, 다시 한번 아이리가 막아냈다. 방패를 바짝 어깨에 붙이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정면으로 힘을 받아낸다.

콰직!

그녀가 든 방패에 깊은 상흔이 새겨진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간 흔적 같았다. 미유가 타이탄의 정수까지 섞어가며 손수 만든 방패였으나, 아론의 공격 한 번에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으으으윽!]

Lv.4 파워드 아머의 무게까지 더해졌음에도 아이리는 힘 싸움에 밀려 점점 뒤로 밀려났다. 심지어 그 반동으로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완전히 날아가기 직전, 곧장 [천근추]를 최대출력으로 활성화하여 다리를 땅에 붙였다.

콰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앗!]

아이리는 온 힘을 다하여 아론의 공격을 버텨냈다. 현재 그녀가 장착한 모듈은 [천근추]를 제외하면 [세포재생력 강화] 모듈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퓨어스펙이 뛰어나다고 한들 아론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근력이 부족했을 터이다. Lv.4 파워드 아머의 보조를 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아론의 공격을 막아냈다. 끝내 아론이 쏘아낸 실은 아이리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허억… 허억...!]

물론 그녀가 단 한 차례의 공격을 받아낸 것만으로도 녹초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분하다는 듯이 아이리는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물론이고 아론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와 아론 스팅레이의 스펙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겠지.

'훌륭하다.'

심지어 아이리의 눈에는 구름거미의 실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판단, 내가 그토록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단련된 본능'에 의지하여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것이었다.

2초.

그녀가 벌어낸 시간.

고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시간이었다.

'이 이상 아이리에게 바라는 건 무리겠지.'

그래도 괜찮다.

그녀가 만들어낸 한순간의 뒤틀림이, 내가 주도권을 가져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나는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모듈이 알려 주는 대로 검로를 그렸다. 최적화된 동작과 안정된 호흡을 바탕으로 아론을 점점 밀어붙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서로의 검과 검이 헤아릴 수 없이 맞부딪치며 충격파가 일어난다. 다시금 상대가 [구름거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근접거리를 유지하며 공세를 이어나간다.

카앙! 카앙! 카앙!

이어지는 공격에 아론이 몇 걸음을 뒤로 물러선다. 나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고, 나는 그것을 바짝 추격한다.

"쯧."

끈질기게 따라붙는 내 모습에 아론은 혀를 찼다. 그 눈빛에 '곤란함'이 깃든다.

그가 순간 숨겨두었던 모듈을 전개했다. 그의 어깨와 팔목이 열리며 갑자기 총구가 나타난다.

'이런...!'

통상모듈은 전부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을까?

나 역시 순간적으로 뒤로 거리를 벌렸고, 그 빈틈을 아이리가 다시금 메꿨다.

[뒤로 오세요!]

내 옆에서 끼어든 아이리가 방패를 들어 쏟아지는 탄환을 막아냈다. 그 사이 아론은 다시금 [구름거미]를 사용했고, 이번에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테크 블레이드!'

검의 절삭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날아드는 실들을 전부 베어낸다. 그리고 잠시 나와 녀석의 거리가 멀어진 틈을 타, 다시금 병사들의 포화가 쏟아진다.

타다다다다다다!

허나 아론은 자신의 급소를 향해 날아드는 총알들을 전부 칼로 베어 흘려보냈다. 그의 어깨에 전개된 기관포대가 병사들의 머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은 덤이었다.

물론 얼마 쏘지 못하고 기관포대 모듈이 바이러스에 침식되며 망가졌다. 그는 새까맣게 타버린 모듈을 꺼내어 버리곤, 숨겨두었던 모듈을 새롭게 장착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갑작스레 아론의 등 뒤에서 나타난 검은 형체가 그를 향해 칼날을 내지른다.

줄곧 전장 구석에서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일런스가 마침내 타이밍을 잡은 것이다.

"...."

아론 역시 사일런스가 나타나리라는 것은 예측했으나, 정확한 타이밍과 위치까지는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번에도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고,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크윽!]"

분한 소리를 내는 사일런스.

아론은 재빠르게 사일런스와 거리를 벌렸고, 사일런스도 습격에 실패했음을 알고 다시금 기회를 노리기 위해 몸을 숨겼다.

그 사이.

아론에게 다시금 포화가 쏟아졌다.

그는 전장을 달리며 빗발치는 탄환들을 전부 피해냈다.

휘익!

투창처럼 블레이드를 던져 수백 미터 떨어진 공중에서 저격하던 병사 한 명의 심장을 꿰뚫는다. 그러곤 그가 채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다른 병사들에게 쇄도했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모듈은 분명 다 망가졌을 텐데!]

당황하는 병사들.

그들은 다급히 공중기동 장치를 최대 출력으로 발동시켜 아론에게서 멀어졌다.

아론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이 죽인 병사에게서 모듈을 꺼내어 챙겼고, 파밍이 끝난 시체를 발판삼아 다른 병사를 향해 도약했다.

'제길, 모듈을 수급할 생각이다...!'

나 역시 자리를 박찼고, 그의 손길이 다른 병사에게 닿기 전에 차단하는 데에 성공했다. 챙긴 모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그 찰나.

아론은 순간적으로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칼날을 피해냈다. 땅에 착지한 후, 나는 검격을 이어 나갔고, 그는 내 공격을 차분히 받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쨍그랑-!

아론이 장착한 '가짜 모듈'의 제한시간이 다 되었다. 마지막 검격을 받아내는 것과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검이 난데없이 유리가 되어 산산이 부서진다.

"...!"

아론의 눈살이 다시금 찌푸려진다.

그는 검으로 방어하려는 대신, 진짜 [구름거미]를 전개했다. 나 역시 그를 예측했기에 날아드는 수만 가닥의 실을 가볍게 베어냈다.

그 사이, 다시금 사일런스와 아이리가 내가 있던 쪽으로 가세해 왔다. 사실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아론의 신경을 어느 정도 빼앗는 데엔 성공했다.

"...귀찮군."

처음으로 그는 목소리를 내며 두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전장에서 배제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걸 놔두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위험해.'

아이리나 사일런스가 천재라면.

아론 스팅레이는 괴물이다.

현재 내가 신체스펙이 앞서는 상태에서도 1:1에서 서로 비등비등한 겨루기가 되는 것은 그 무서우리만치 발달한 전투적 감각 때문이다.

'아마 곧 적응하겠지.'

녀석의 [테크 블레이드]는 시간이 다 되어 망가졌지만, 조만간 나를 공략할 방법도 찾아낼 것이다.

'총알도 맨눈으로 베어 버리는 괴물이다. 만약 각종 최상급 모듈로 강화된 내 움직임에마저 적응을 끝낸다면, 이 이상 이쪽에 승산은 없겠지.'

고로 나는 각오를 다진다.

되도록 이런 상황까지 오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아론 스팅레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차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육체. 조금 일찍 없어진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나는 전투를 지속하며 새빨갛게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검의 칼등을 힘껏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칼자루를 불끈 쥐었다.

두근-!

이 동작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후끈 뜨거워진다. 칼날만큼이나 심장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안타깝게도 이 역시 전투의 고양감 때문이 아니었다. 이 검을 전개하면서 안 그래도 높아졌던 과부하율이, 검의 '진짜' 모습을 끌어내면서 확 치솟았기 때문이다.

"아이리, 사일런스! 물러나라!"

내 지시에 두 학생이 기묘한 공기를 감지하곤 전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아론 역시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오호라. 정말 쓸 생각인가?"

"안 쓰고 실패하는 것보단 낫겠지."

"너는 복제품이다. 네 급조된 육체는 그걸 버티지 못할 텐데."

"그러라고 만든 건 네가 아닌가?"

"...훗."

아론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나 역시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칼을 '칼집'에서 뽑아냈다.

화아아아아아악-!

[테크 블레이드].

어째서 이딴 검 한 자루가 [구름거미]와 같은 등급을 부여받았는가?

수만 가닥의 실을 때로는 칼날처럼, 때로는 밧줄이나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구름거미]에 비하면 너무나 수수하지 않은가?

그냥 '잘 잘리는 칼'일 뿐인데?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정확히는 상상력이 빈곤한 것이다.

[구름거미]가 그 압도적인 위력이나, 근장거리 전천후 상황에 만능으로 대처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 때문에 Lv.5 판정을 받은 신비모듈이라면.

[테크 블레이드]는.

오직 '날카로움'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Lv.5 판정을 받은 물건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물건이란 말인가?

"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검을 감싸고 있던 그 예리한 칼날마저, 진정함 예리함을 숨기기 위한 검집에 불과했으니.

무형검(無形劍).

내가 뽑아낸 칼자루에는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시력으론 관측할 수 없다.

군용급 스캐너를 낀 내 눈에도, 검자루에 거뭇한 무엇인가가 노이즈처럼 치직거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마치 검은 안개를 칼날로 만든 듯.

길이나 폭 따위를 규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너무나도 불안정한 구조라 특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부터가 내 몸에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것을 바라본 아론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다. 조금 더 자세히 고민해보면 알아낼 수 있을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내게 그럴 여유는 없거든.

"...간다."

치솟는 과부하율.

급조된 육체가 망가져 간다.

손끝과 피부가 열기에 녹아서 벗겨지기 시작했고, 비교적 약한 말단 부위는 아예 젤리처럼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나는 검자루를 놓지 않고.

그를 향해 휘두른다.

내가 만들어진 목적을 다하기 위해.

아카데미 흑막 시점 79화

눈을 뜬다.

팔과 배에서 저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팔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음은 덤이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끝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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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1부 4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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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4막이 끝났다.

내가 이 몸으로 살아가면서 맞이할 가장 큰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남아 있는 팔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해 보았다.

'나는....'

나는 누구인가.

원본인가, 복제품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치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일 테니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가장 큰 위기는 넘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쉴 수는 없었다. 나는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 '복제품'을 마주 봤다.

창백하게 변한 얼굴.

피부 여기저기가 녹아 있었다. 조금 전 전투의 여파로 인해 보기 안쓰러울 정도의 상태였다.

그것은 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은 표정은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제 역할을 다했으니 당연한 일일까.

나는 직전 전투를 상기해 보았다.

'무서운 적이었다.'

내 몸이지만, 이 안에 들어 있는 잠재성을 확인해 봤다고 해야 할까. 원작에서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아론 스팅레이'의 순수한 전투 능력을 말이다.

바이러스에 걸리고, 대부분의 모듈을 언인스톨한 상태에서 수많은 적응자 병사들은 물론 각종 모듈로 무장한 자신의 복제품과 대등하게 싸우다니.

'괴물은 괴물이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제 더는 '나 자신'과 싸워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괴물 같았던 힘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으니까.

'이제 할 일을 해야겠지.'

나는 상념을 지우곤 소년의 모습을 한 내 복제품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소켓 HUB에 담겨 있던 모듈들을 하나씩 빼내어 내 목덜미 뒤쪽 구멍에 삽입하... 려다가 뒤늦게 까먹은 걸 떠올렸다.

[미유. 듣고 있나?]

[아, 아론 씨이...?]

[다 끝났다. 성공이다.]

[저, 정말인가요? 혹시 암호가....]

나는 사전에 미유와 둘이서 암호를 정해 두었다. 물론 '아론 스팅레이'로 변한 '나'는 알 수 없는 내용의 암호였다.

미리 정해 두었던 단어를 읊자, 미유는 기쁘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 몸에 투입되었던 바이러스를 원격으로 해제했다. 바이러스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모듈을 삽입했다간 다 망가질 테니까.

[됐어요오!]

미유의 신호에 따라 모듈을 하나씩 장착한다. 우선은 회복에 가장 중요한 [세포 재생력 강화] 모듈부터 장착했다.

'[셀 리제너레이터]는 바이러스 때문에 망가졌으니까....'

고로 복제품이 끼고 있던 것은 미유의 사제 모듈이었다.

-----

[알림]

새로운 통상모듈이 장착되었습니다.

접속된 장치: [Lv.3 건강해져요!]

-----

"...."

음, 그래.

앞으로 미유한테는 뭘 만들더라도 이름은 직접 붙이지 말라고 해야겠다. 미유답다면 미유답달까, 성능이 좋긴 하지만 이런 이름이면 묘하게 힘이 빠진다.

하여튼.

미유가 만든 군용급 회복 모듈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상처들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흐르던 피가 멈추고, 크게 뚫려 있던 배의 구멍이 사라진다.

물론 Lv.3짜리로는 잘린 팔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외팔이가 된 사실이 좀 그렇긴 하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이건 증강자들이 사이버웨어 해제 수술을 받은 뒤에 사용하는 약물을 꾸준히 발라 주거나, Lv.4 이상의 모듈을 장착하면 점차 원래대로 팔이 자라날 테니까.

당분간 조금 불편할 뿐이다.

그 후, 나는 시간을 들여 나머지 모듈들을 차례대로 장착했다. 단번에 대량의 고출력 모듈을 장착하는 건 당연히 위험하므로, 몸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들였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위기는 잘 넘겨 놓고 막판에 모듈을 장착하다가 죽어 버리면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을 테니.

'얼추 적용이 끝났군.'

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몸에 인스톨이 끝난 모듈들의 목록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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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구름거미 Lv.5]- 비활성

[시체먹는 자 Lv.5] - 활성

[테크 블레이드 Lv.5]- 비활성

[통상]

[스트렝스 Lv.3]- 활성

[헤이스트 Lv.5]- 활성

[호크아이 Lv.5]- 활성

[뉴럴 부스터 Lv.3]- 활성

[천독불침 Lv.4]- 활성

[트라우마 생체스캐너 Lv.3]- 활성

[텅스텐 스킨 Lv.4]- 활성

[건강해져요! Lv.3]- 활성

과부하율: 25%(안전)

대체율: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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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준비는 끝났다.

아직 외팔이 신세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우선 아직 남은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하자.

'마리아.'

슬슬 그녀를 구하러 갈 때였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돌이켜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의 결과는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지.

마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거뭇한 눈꺼풀 너머로, 마치 영사기를 튼 것처럼 옛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어릴 적엔 줄곧 배가 고팠다.

그녀의 주변은 온통 폐허였다.

시야를 아무리 돌려보아도 들어오는 것은 비참하게 썩어 가는 시체와 그것을 뜯어먹는 괴물들, 그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치솟는 불길뿐이었다.

흐릿했던 기억들 속에서, 딱 하나 확실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누군가 굶주림으로 죽어 가던 자신에게 한 사내가 손을 내밀었던 때였다.

-살고 싶으냐.

-....

-재미있는 눈을 하고 있군.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반응에 흥미를 느낀 남자는 부하들을 시켜 그녀를 회수했다.

그 후, 그녀는 어떤 어두컴컴하고도 몹시도 차가운 상자에 넣어졌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전혀 알 수 없는 장소였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남녀들이 발가벗은 자신의 몸을 아무렇지 않은 듯 관찰하고 있었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 왔다.

기분은 어떻냐느니,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느니. 먹고 싶은 것이라든가 하고 싶은 것은 없느냐느니.

마리아는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 채 가운 차림 여성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여성은 마리아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옷을 입힌 뒤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하늘을 꿰뚫는 높은 건물들.

공중을 말벌처럼 떠다니는 자동차와 하늘의 별들을 따와 박아 넣은 듯 밝게 빛나는 도시의 풍경.

놀라는 마리아에게, 여성은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푹 잠들어 있었다고 했었다. 그 사이 '스팅레이 그룹'이 멸망해 가던 세상을 구하고 이 멋진 도시를 만들어 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도 말했다.

-너는 앞으로 스팅레이 그룹을 위해 일하게 될 거야.

그녀의 말에, 마리아는 처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후, 그녀는 스팅레이 보안부 주관 비밀프로젝트의 실험체로서 길러졌다. 사이버웨어 수술은 끔찍할 정도로 아팠고, 임무는 고되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으나 그래도 그 이전의 삶에 비하면 훨씬 행복했다.

그녀에게 있어, 스팅레이는 구원자였다.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인류를 구하고 문명을 재건한 영웅들이었다.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은 세상을 다시 만들어 내고 자신을 구해 낸 신과 같은 존재였다.

마리아는 자신이 신의 수족이 되어 일할 수 있음에 무척이나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보안부에서 활동하던 마리아는 우연히 보안부 시설을 방문한 한 명의 남자애와 만났다. 그녀가 또래의 아이들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무척이나 특별한 자임을.

이름은 아론 스팅레이.

바로 황제의 피를 이은 소년이었다.

* * *

칠흑 같은 검은 머리.

황족임을 증명하는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전신을 위아래로 스윽 훑었다.

-너는 누구지?

-마리아라고 합니다.

나이는 엇비슷할 테지만,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경어를 사용했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마리아? 넌 동양계 출신 같은데.

-절 거둬준 연구자들이 붙여 준 이름입니다. 예전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군.

소년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그녀를 지나쳤다. 허나 그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마리아는 일종의 운명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년이다.

이 소년은 분명은 황제가 될 것이다.

스팅레이 제국이 더욱 강성해질 수 잇도록, 이 소년의 옆을 지키는 것이 아마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겠지.

그리고 마리아의 직감은 옳았다.

마치 운명이 다가왔다는 듯, 마리아는 그룹 비서실로 발령을 받았다. 오너 일가의 생활을 보좌하는 엘리트 중 엘리트 집단이었다.

아마 그룹 내에서 아론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찾다가, 우연히 그녀가 선발된 거겠지.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론 스팅레이'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엘리시움에 있는 최상류층 학교를 함께 다니며 일거수일투족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리아의 역할이었다.

그 이후,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마리아는 줄곧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함께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시절도.

아론이 그룹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을 때도, 그리고 그가 스팅레이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을 때도.

아론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레 마리아의 지위도 높아졌다. 그룹 비서실의 일개 말단 직원에서부터, 재단 비서실장의 자리까지.

'힘든 경험도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그녀의 고속승진을 질투했다.

아론이 그녀를 곁에 두는 이유가 '이성적인 호감을 느껴서'라는 허무맹랑한 헛소문이 퍼졌을 때는, 아예 자리에서 쫓겨날 뻔도 했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부터는 더더욱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냥 찬란해 보이던 스팅레이 그룹이 감춰 두었던 진실, 그 견고한 성채 아래에 깔린 수많은 시체와 비극들.

아론이 지닌 잔혹함과 가공할 만한 힘.

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음습한 암투.

돈에 미쳐 명예와 가족마저 파는 이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안에서 '스팅레이'라는 이름과 이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을까요.'

그럼에도 그녀는 신의를 지키려 노력했다. 스팅레이가 그녀에게 있어 은인이라는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이제 와서 손을 빼기에는 그녀의 손 역시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최선을 다했다.

몸과 열정을 전부 다 바쳐,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했다.온갖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뚱이보다는 그룹의 미래를 중시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일까요.'

마리아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묶고 있는 수갑을 보았다.

수갑에 쓸린 살갗이 벗겨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원래라면 아무렇지 않을 상처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아팠다.

'이게 제 말로입니까.'

아론 스팅레이를 죽이자던 베네딕트의 계획에, 마지막 순간 반기를 들었던 게 원인이었다.

마치 베네딕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리 준비해 놨던 함정으로 그녀를 제압했고, 이렇게 알 수 없는 곳에 가두었다.

어째서 자신을 아직도 살려 둔 것인지는 모르겠다. 쓸모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

모르겠다.

머리가 멍한 탓에 사고 회로가 돌아가지 않는다.

아마도 베네딕트가 자신에게 주사한 자백제 때문이겠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한참을 오가다가 눈을 뜨면 이곳이길 반복했다.

자신은 아마 이렇게 죽을 것이다.

평생을 몸 바쳐 스팅레이에게 충성을 다해 왔지만, 결국은 이렇게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쓸쓸히 사라지겠지.

"...."

어째서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무덤덤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몸속을 도는 약효 때문에 '죽음'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 되었다.

그녀는 슬슬 지쳐 가던 참이었다.

가족은 당연히 없고, 모든 시간을 일에만 쏟아부어 왔던 탓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 한 명 없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은 아론 스팅레이만큼이나 마리아라는 이름을 두려워했었고, 누구도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접근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여유가 생겨서 일찍 퇴근해서 홀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있자면, 참으로 공허한 기분이 들고는 했으니까.

자신이라는 존재에서 일을 제외하면 이렇게 텅 빈 인간이었구나, 하고 씁쓸함을 곱씹다가 잠이 들고, 다시 깨어나선 도망치듯 일에 매진하는 나날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인연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희미한 인간관계만을 유지하면서.

떠오르는 불안감과 의문들을 더욱 많은 업무로 찍어 누르길 반복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에선 '힘들다'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곤 했다.

'빨리 모든 게 끝나 버렸으면 좋겠군요.'

이런 무의미한 공백 속에서 천천히 끝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찌감치 이 목숨을 끊어 주면 고마울 텐데.

자신도 알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누구도 자신을 위해 울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토록 그룹을 위해 열심히 일해 왔어도, 결국 그들에게 있어 '마리아'라는 부품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사소한 존재일 테니까.

하물며 거의 반평생을 함께 해 왔던 아론 스팅레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는가?

아마 이 모든 사건이 끝나고 자신이 죽더라도, 아론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내일을 시작하지 않을까.

"...."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감정이 그녀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맺힌다.

"나는 대체...."

"대체 무엇을 위해...!"

실낱같이 흘러나온 그녀의 한마디가 공허하게 감옥을 맴돌다 힘을 잃고 흩어진다.

기력이 쇠한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현실과 몽환의 경계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추궁하는 목소리, 화가 난 목소리, 누군가를 헐뜯는 목소리....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감촉에 그녀는 슬며시 눈을 뜬다.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보이는 것은, 호박색의 날카로운 눈.

"일어났나."

"...!"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 피투성이가 된 아론의 모습이 들어왔다. 말끔했던 양복 차림은 이리저리 찢어진 채 붉게 물들어 있었고, 심지어 그의 팔 한쪽은 완전히 절단되어 있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아론의 비참한 몰골에 마리아는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그토록 강인하고도 고고했던 황태자는,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일까?

대체 무엇을 위해?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저를 처단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아론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베네딕트의 병사들과 한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온 듯했다.

그 승패는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생에게 암살 시도를 당한 와중에 구태여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배신자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

"...벌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양심을 등지고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온 자신에게 어울리는 결말일 테니까.

"다만 조금이라도 제게 자비를 베푸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가급적 빠르게 끝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 마리아를 향해.

아론은 차갑게 말했다.

"난 널 구하러 왔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80화

"난 널 구하러 왔다."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아론.

아마 심약한 이였다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마리아 역시 지금 이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을 정도니까.

하지만 마리아가 누구던가.

스팅레이 그룹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재단 비서실장의 자리를 쟁취한 인물이었다.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감격에 취하기보다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혹시 자신을 시험해 보려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부러 기대를 품게 했다가 절망을 안겨 주려는 생각은 아닐까?

물론 병상에서 일어난 후 아론의 성격이 상당히 유해진 것은 사실이었고, 애초에 그 스스로가 원해서 잔혹한 성정을 갖추게 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 온 바가 있다.

오랫동안 황태자의 옆자리를 지켜 왔던 그녀는, 함부로 그에게 연약한 속내를 보여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목숨과도 직결되는 문제.

그를 마주할 때는 단단한 철가면을 둘러야만 한다. 이는 철저한 습관으로 굳어져, 자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담담히 대답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기계처럼.

혼자 있을 때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던 눈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끔, 고개를 적절한 각도로 돌렸다.

"감히 용서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베네딕트 도련님의 계획에 가담했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또한 도련님의 등을 찌른 게 다름 아닌 저라는 것에 도련님께서 여느 때보다 큰 배신감을 느끼실 것도 이해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도련님을 곁에서 보좌해 왔었으니까요."

"그러나 저를 천천히 고문하신다고 해도 도련님께서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실 겁니다. 저는 용서를 구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

용서를 구하는 건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나 허락된 행위일 테니까. 배신자인 자신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

"저는 저희 그룹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실수와 그릇된 판단을 했을지언정, 당시에 제가 내린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가?"

잠자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던 아론이 물었다. 그에 마리아 역시 담담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고?"

"물론입니다."

"재미있군. 정말로 네가 후회하지도 않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아론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변명을 그리 길게 늘어놓는 거지?"

변명.

정곡을 찌르는 그 단어에 마리아는 일순 숨을 삼켰다. 자기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으므로. 얼음처럼 굳어 버린 마리아를 향해 아론은 희롱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갇혀 있는 동안 마음고생이 퍽 심했던 모양이구나, 마리아. '살고 싶다'라는 한마디면 족할진대, 평소보다 퍽 수다스러워졌군. 말 상대가 고팠던가?"

"아론 도련님. 저는...."

"그만."

아론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 이상은 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겠다. 잠자코 일어나도록."

"무, 무슨 의도로 그리 말씀하시는...."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네?"

마리아가 되물었지만, 아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리아의 팔을 단단히 구속하고 있던 수갑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엄지를 이용해 꾹 누르자, 그리도 튼튼해 보였던 수갑이 우스우리만큼 간단하게 부서졌다.

처음에는 오른손.

다음에는 왼손.

차례대로 수갑을 부수고 마리아를 풀어 준 아론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저지른 짓을 내가 모르고 있었을 것 같은가? 베네딕트와 함께 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던 사실을, 내가 몰랐기에 내버려 둔 것 같나?"

"서, 설마, 알고 계셨던 겁니까...?"

"우스운 질문이군."

아론은 그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마리아는 힘이 풀렸다.

그는 전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계획을 입안했던 것부터, 마지막 순간 자신이 베네딕트의 작전에 반대하다가 이런 꼴을 맞이했던 것까지.

그리고.

그럼에도 아론은 이리 말하는 것이다.

널 용서하겠다고.

"이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도록."

"어, 어째서입니까? 저는...!"

"평생 곁을 지켜 온 부하가, 울면서 하는 사죄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내가 속이 좁은 남자 같은가?"

"...!"

짓궂은 말투.

그녀는 그것이 아론 특유의 농담이라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추가로 눈치챘다.

'구실이 필요했던 거군요.'

베네딕트가 아론을 후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치워야 하는 장애물로 여겼다면.

아론 역시 베네딕트를 자꾸만 귀찮게 구는 눈엣가시로 여겼음이 틀림없다.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 아론은 곧장 이사장직으로 무사히 복귀했으나 베네딕트의 존재가 굉장히 거슬렸음이 분명했다. 경쟁 상대라고는 하나 아무런 명분도 없이 동생을 직접 처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명분.

베네딕트를 상대로 무력행사에 나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가 필요했고, 그래서 미끼를 던졌던 거겠지.

'그것도 모른 채 우리는....'

아마도 일부러 베네딕트를 믿는 척, 이런저런 권한을 넘기며 그가 재단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놔두었던 이유일 것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연기하면서 베네딕트가 선을 넘어 함정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지금이 그 결과.

아마 아론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바깥의 소란은 전부 처리했다는 의미이리라.

'아론 도련님이 원래 이런 분이셨던가?'

마리아가 알기로 아론 스팅레이는 더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뭐든지 망가뜨리려고 드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며 계략을 펼치는 방식은 그답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가 이런 면모를 갖게 되었을까? 병상에서 일어났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사실 원래부터 이런 분이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팅레이의 최종병기로서 강제로 부여된 폭력적 성향. 그에 가려져 아론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지닌 성품이 드러나지 못했던 것이리라.

평생을 그의 곁에 있었으면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이리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가.

"...."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마리아에게 있어 너무나도 부끄러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에게 울었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왔던 유능한 이미지가 지금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아서.

결국 그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마리아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유치한 대답을 입에 담았다.

"...울지 않았습니다."

그에 아론이 어이없다는 듯 지적했다.

"눈물 자국."

"...울지 않았습니다."

"...."

"...죄송합니다."

아론이 입을 다물며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마리아 역시 자기가 얼마나 부끄러운 소리를 했는지 깨닫고선 고개를 숙였다.

잠시 간의 침묵.

이내 아론은 먼저 몸을 일으키곤 입구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리아 역시 제정신을 차리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아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마리아."

"네, 도련님."

"나는 황제가 될 것이다."

그는 당당히 선언했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이번 건은 불문에 부칠 것이다."

"...."

"허나 너도 알 테지."

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는 말을 이었다.

"두 번은 없을 것이다."

아론의 나지막한 경고에 마리아는 다시 한번 허리를 깊게 숙여 예의를 표했다.

"물론입니다, 도련님."

* * *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된단 말이다.

베네딕트는 이빨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미친 듯이 사무실을 서성거리며, 자신에게 도착한 음성메시지를 열었다 닫기를 수십 번을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작전 실패했습니다.

아론 스팅레이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최대한 긁어모은 병사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남은 전력으로는 뭘 하기가 힘들 정도.

-실패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무능한 것들!

보고에 따르면 그만큼 병력을 준비했음에도, 아론 스팅레이의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아론은 베네딕트가 예측한 것 이상으로 강했다. 분명 스펙상으로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나왔건만, 그는 모듈을 전부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괴물 같은 전투 능력을 선보였다.

결국 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기껏 준비한 병사들은 가을바람 앞의 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제기랄. 이걸 어떻게 한다....'

이번 작전에 투자한 금액은 어마어마하다.

개인 재산으로는 부족할 정도여서, 회사 자금에도 손을 댔다. 아론이 사라지고 후계자 자리만 차지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명명백백한 실패였다.

듣자 하니 자신의 적응자 병사들은 아론에게 이렇다 할 타격도 주지 못했다던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소년 아론'의 지원이 없었다면 더욱 피해가 컸을 것이라는 보고였다.

'이건 말도 안 된단 말이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결국 자신의 계획은 실패했고, 궁지에 몰렸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어떻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머리를 쥐어짜내어 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셈이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 어떻게든 아론 스팅레이를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다른 결론.

'도망치는 수밖에 없나....'

곧 형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자신에게 죄를 묻기 위해서.

그 잔혹한 성격의 아론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의 머리를 뭉개 버리겠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그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야만 한다.

'하지만 어디로...?'

갈 곳이 없다.

뉴 발할라 시티 밖은 괴물들의 영역이었으며, 특출한 무력이 없는 그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다른 회사 소유의 콜로니에 몰래 숨어드는 계획도 생각해 봤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자면 도시 밖의 폴른 구역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지위와 명예와 부를 버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다.

기술부 자금에 손을 댔으니, 이걸 어떻게든 해결하지 못하면 NCPD, 스팅레이 재무부와 내부 감사실에서 그를 추격할 것이다.

스팅레이 정보부에서 작정하고 그를 찾아내려고 하면 아무리 폴른 구역 깊은 곳에 숨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들통 나고 말겠지.

무엇보다 그런 밑바닥 생활을 견딜 자신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황족이었던 자신이 지금의 지위를 버리고 살아가겠는가?

초조함에 몸부림치던 그때.

콰아아아아앙-!

돌연 사무실 문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나갔다. 그에 화들짝 놀라는 것도 잠시, 난데없이 커다란 충격이 그의 몸을 덮쳤다.

"으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야가 뒤집어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그의 발목을 묶고 있던 까닭이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아론이 맹수와도 같은 표정으로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베네딕트."

"혀, 형님...!"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극심한 두려움에 토가 쏠렸다.

어떻게든 구토감을 참아 내고 되는 대로 입을 움직였다. 살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오, 오해입니다, 형님!"

하지만 아론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내가 널 살려 둬야 하는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 보도록."

"우, 우리는 가족이잖습니까! 저, 저는 형님의 하나뿐인 남동생입니다!"

쿠웅!

아론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극심한 충격이 그의 복부를 덮쳤다. 내장이 통째로 터지는 듯한 고통에 베네딕트는 기침을 토해 냈다.

"커흑!"

기침과 함께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아론은 여전히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하나뿐인 형을 죽이려 하지 않았나?"

"그, 그... 것은... 오해...!"

숨이 넘어갈 듯한 통증 속에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해 보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인물의 모습에 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마, 마리아...!"

"베네딕트 도련님."

비밀감옥에 갇혀 있던 그녀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일까.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사실은 하나 있었다.

더 이상 변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

"사, 살려... 주... 십시오...!"

"내가 왜 너를 살려 두어야 하지?"

"으흐흑...!"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를 납득시킬만한 논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죽이겠다고 각오하고 찾아온 이를 어떻게 설득하겠는가?

이내 절망에 빠진 베네딕트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론은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마리아."

"네, 도련님."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대답해 보도록. 네 판단을 참고하겠다."

마리아는 무표정한 시선을 베네딕트에게 향했다. 그녀의 한마디에 목숨이 걸린 상황.

베네딕트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서 그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은...."

아카데미 흑막 시점 81화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베네딕트를 죽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동정심 때문이라기보단, 괜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마리아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여기서 베네딕트 도련님을 없앤다면 스팅레이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게 될 겁니다.

좋든 싫든 베네딕트는 내 동생이었다.

실험실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났으니 어쩌고 하고 따지더라도 대외적으로는 가족이라는 의미였다.

조용히 실각시켜 버리는 정도면 상관없지만, 이렇게 무력적인 충돌을 통해 제거해 버리면 내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질 거라는 게 마리아의 분석이었다.

'동생을 죽인 형이라는 이미지가 붙으면 돌이킬 수가 없지.'

아무리 이런 세계라고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으니까. 또한 둘째 아들을 죽여 버렸을 때 드레이크 스팅레이 회장이 어떤 반응을 내놓을지도 미지수였다.

'그 인간 성격상 아랑곳하지 않을 것 같긴 해도, 인간의 마음이라는 건 모를 일이니까....'

내게 '넌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 같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자신의 '진짜' 아들을 죽였다고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이번에 가지고 있던 재력이나 권력을 잃었으니, 구태여 내가 더 손을 쓸 필요도 없다. 내부 감사팀에게 힘만 좀 실어 주면 알아서 조져 주겠지.

'이제 그쪽은 됐고....'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

보상을 확인할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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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1부 2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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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1부 3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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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1부 3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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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1부 4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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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1부 4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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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많군.'

단번에 1부 2막에서 1부 4막까지 와르르 해결한 덕분에 보상이 단번에 쌓였다. 중간중간 다른 업적들을 달성한 것은 덤이었다.

로그의 내용을 일일이 꼼꼼하게 살펴보는 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기에, 나는 대충 목록과 보상내용을 종합해 보았다.

중간고사 보상을 포함하여 1부 3막까지 내가 갖고 있던 포인트는 총 12300P. 이건 전부 티켓 41장으로 전환해 두었다.

이후 3, 4막 클리어 보상과, 기타 업적 달성 보상이 합쳐서 19500P이었다.

이걸로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을 전부 산다고 하면 65장. 기존에 갖고 있던 티켓과 합산하면 106장.

'...이제 살 만하겠군.'

대충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이거면 아론 스팅레이의 전성기 때 스펙을 그대로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셈은 안 해 봤지만, 미유가 만든 모듈 호환성 프로그램이나 이런저런 것들을 효율적으로 쓴다면 더 남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시나리오를 연달아 클리어하는 바람에 보상이 쌓인 것도 있지만, 특히나 1부 4막의 보상이 짭짤했다.

'그 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줘야지.'

'아론 스팅레이'라는 악당을 물리친 부분에만 업적보상으로 1만 포인트 가까이 들어왔다. 1부 4막을 클리어한 보상도 그 못지않았고.

계산해 보면 이번에 입수한 19500포인트 중 대략 60% 이상을 1부 4막을 클리어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이었다. 난이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자, 이걸 어떻게 사용한다.'

마음 같아서는 계산이고 뭐고 다 귀찮으니 호환성 티켓에 때려박고 싶기는 한데,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지. 아직 방심해서는 안 된다.

'상점 목록부터 볼까.'

모듈 관련 건은 역시 미유와 상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녀라면 티켓의 가장 효율적인 사용방법을 조언해 줄 것이고, 동시에 원작의 스펙마저 뛰어넘을 수준의 모듈링을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기존 Lv.1에서 Lv.2가 되었으니 티켓 구입은 새롭게 들어온 물건 목록을 확인하고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디 보자.'

나는 상점을 열어 신상품들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역시 레벨이 올라서 그런가, 사용법에 따라서는 꽤 유용해 보이는 물건들이 늘었다.

'Lv.3 신비모듈 가챠권, Lv.4 통상모듈 가챠권, Lv.3 파워드 아머 세트... 오, 이젠 자색 사냥터 입장권도 파는구나.'

물론 평범한 스펙으로 시작한 빙의자 기준이고, 내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신비모듈과 통상모듈?

이미 게임체인저급 모듈 3개에 군용급 통상 모듈을 덕지덕지 바른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또한 파워드 아머는 진짜 돈으로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도 더 좋은 걸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사냥터 입장권도 자색이면, 이미 내가 다녀온 적 있는 곳이었다. 시나리오 보상으로 청색과 남색 입장권도 갖고 있는 마당에, 내 수준에도 맞지 않는 곳을 굳이 포인트를 소모하면서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겠지.

'결국 쓸 만한 건 호환성 티켓뿐인가.'

그 외에 더 쓸 만한 거라면 5000P씩이나 하는 모듈출력 레벨 +1 티켓.

예전에야 포인트가 부족해서 살 엄두도 못 냈지만, 여유가 생긴 지금이라면 두어 장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구름거미]나 [테크블레이드]... 아니면 [시체먹는 자] 모듈에 출력레벨 업 티켓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지?'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아서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아니면 전무후무한 'Lv.6 신비모듈'이라는 치트키급 모듈이 탄생하는 걸까?

'일단 2장까지만 사 보자.'

한 장은 시험용.

사용효과를 정확히 모르는 마당에 내 주력 모듈들에 함부로 쓸 수는 없겠지.

만약 [테크블레이드]나 [구름거미] 중 하나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뼈아픈 손실도 없다.

'나중에 좀 계륵 같은 Lv.5 모듈을 하나 구해서 사용해 봐야겠군.'

그러면 성공하면 이득이고, 실패해도 큰 문제는 없다.

나는 1만 포인트를 써서 모듈 출력레벨 업+1 티켓을 2장 구매했다.

이로써 남은 포인트는 9500P.

그 외에 상점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마음에 끌리거나 신경 쓰이는 품목은 없었다. 기껏 해야 포인트를 돈으로 환전하는 비율이 2배 정도 더 좋아졌다는 정도일까.

'어라?'

그러다 문득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판매라고?'

상점에 판매 기능이 생겼다.

호기심에 이것저것 시험해 보았고 몇 분 되지 않아서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평범한 물건은 못 팔고, 상점에서 구매하거나 사냥터에서 구한 물건들만 팔 수 있는 모양이네. 판 물건들은 포인트로 환전해 주고.'

나쁘지 않은 기능이다.

당장 팔 만한 물건으로는 지난번 사냥터에서 얻었던 '미믹' 모듈이랑, '리버레이터'였다.

'결국 이건 안 썼네.'

리버레이터.

1부 3막 안드로이드 반란에서 사용되는 물건인데, 3막이 스킵되다시피 해서 결국 맥거핀으로 전락해 버린 물건이었다.

'아, 진짜. 원래 이거 되게 중요한 물건인데....'

원작에선 아시타교하고도 연관되어 있는 물건이고, 이거를 두고 여러 사건이 펼쳐지기도 한다.

근데 지금은 결국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이런 중요한 물건을 남한테 넘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처치 곤란하던 차에 상점 판매 기능이 나타난 것이니....

'이거부터 팔아 볼까?'

앞으로 쓸 일이 없을 텐데.

1부 3막도 끝났으니 미유한테 연구해 보라고 선물해 주는 선택지도 고려해 봤지만, 애가 이거에 푹 빠져서 또 수업 안 나갈 거 생각하면 조금 고민된다.

걔한테는 이런 물건들이 새로운 게임이나 다름없거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냈다.

'음. 일단은 보류.'

역시 당장 팔기는 애매했다.

포인트가 급한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 이 물건의 정확한 정체나 아시타교와의 연관성을 확인한 것도 아니다.

상점에 팔았다고 해도 값을 제대로 쳐줄지는 미지수였고, 일단 판매 기능을 시험해 보는 건 다른 물건으로 먼저 해 봐야겠지.

미믹 모듈은 여러 상황에서 의외로 쓸 만한 경우가 많아서 과부하율이랑 대체율이 좀 빡세도 가끔씩 써먹을 생각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시험적으로 판매해 볼 물건은....

'사냥터에서 구해 와야겠지.'

내게는 남색 사냥터 입장권 1장과 청색 사냥터 입장권 1장으로, 총 2장의 티켓이 남아 있었다.

원래라면 남색 입장권이 한 장 있었어야 하는데, '복제 인격'을 만든다고 다녀오느라 조금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말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탐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슬슬 2부가 시작된다.

원작 1부는 셰이드 웰즈가 새로운 동료를 모으는 데에 집중된 스토리였다면, 2부는 본격적으로 학원 생활이 시작되고, 괴물들과 싸우는 내용이 더해진다.

'이제 좀 마음 놓고 덕질할 수 있겠네.'

앞으로 살인 충동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고, 모듈도 사실상 전부 복구했으니 원래 내가 이 세계에 왔던 목표인 '덕질'에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스팅레이 내부 정치문제라든가, 주인공 셰이드 웰즈의 죽음으로 인한 나비효과, 그리고 '아라야' 같은 다른 빙의자 문제 같이 해결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나 '아라야'가 여전히 살아서 헛짓거리를 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방심하긴 이르다.

'...그래도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이니까. 다시 바빠지기 전에 시간을 내서 놀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엘리시움부터 E섹터까지.

사이버펑크의 냄새에 흠뻑 젖을 수 있도록 홀로 이곳저곳 구석구석 돌아다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믹' 모듈의 힘을 좀 빌리면 세간의 눈을 피해서 돌아다니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

'아, 그 김에 '그 캐릭터'부터 데려와야 하나? 아니면 흑룡파 쪽을 뒤집어엎은 다음에 2부를 대비할까? 그것도 아니면 콜로니 쪽으로 나가서....'

마음 편히 이런저런 계획을 구상하고 있자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리아로부터였다.

메시지의 주된 주제는 두 가지.

'하나는 아시타교 문제.'

아시타교가 원체 큰 조직이었다 보니, 완전히 축출하는 데에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나 보다. 최근 들어선 바퀴벌레처럼 아예 지하로 파고들기 시작해서 더더욱 색출하는 데에 난관을 겪고 있다나 뭐라나.

다른 기업들도 합심해서 아시타교 박멸작전을 계속하고는 있는데, 사이비 놈들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아무리 때려잡아도 쉽게 멸종되지가 않는단 말이지.

'역시 E섹터의 '그 사람'부터 데려오는 게 맞겠구나. 조만간 찾아 봐야겠다.'

아라야를 비롯한 빙의자 놈들이 이 이상 주조연 캐릭터들한테 손을 대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쓰는 게 좋겠다. 내가 만든 울타리 안쪽으로 데려오면 놈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나는 다음 내용으로 눈을 돌렸다.

'두 번째는... 아이리?'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리가 자신에게 상담을 해 왔는데,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나한테 의견을 물어 오는 내용이었다.

원래 이런 건 무시하든가, 마리아의 선에서 알아서 처리할 문제지만, 내가 원체 특별반 애들을 아끼니 구태여 보고 내용에 포함한 모양이다.

'상담이라....'

어째서 마리아에게?

왜 내가 아니라?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그러려니 했다.

저번 중간고사 준비도 도와주고 그런 걸 보면 의외로 두 사람이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니.

'뭐,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속 좁게 그것까지 질투를 느낄 필요는 없을 테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보고의 다음 내용을 차근차근 읽어 본 나는 순간 뒷목을 잡을 뻔했다.

"...!!"

그 메일의 내용인즉슨.

'아이리가 러브레터를 받았다 합니다.'

어떤 새끼냐.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우리 새끼한테 집적거리는 놈팡이는 잡아 족칠 것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82화

중간고사 결과 발표 후 며칠이 지났다.

아카데미 측의 공식적인 학생 줄 세우기 이벤트가 끝난 직후, 학생들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 녀석, 어제 밀레테크 쪽이랑 퓨어리티 서비스 쪽에서 스카우터가 왔었다나 봐.

-뭐? 아직 나한테는 안 왔는데? 시험결과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몰랐어? 원래 스카우터들은 시험 결과 우리보다도 빨리 받아본다. 그거 갖고 쓸 만하다 싶은 애들한테 슬금슬금 다가가는 거야.

-제기랄. 저 새끼, 어쩐지 어제부터 겁나게 뻗대면서 거리 두더라니. 개 같은 놈.

-쟤는 비교적 늦은 편이야. 사실상 이번 주가 마지노선일걸? 그거 넘어가면 이번 기회엔 글렀다는 거지.

-제기랄.

1학기 중간고사 이전까지는 학생 대부분이 무소속이었다. 일반기숙사에서 함께 부대끼며 같은 신분으로 동고동락하다 보니, 출신과 상관없이 친구 관계를 맺고는 했다.

하지만 중간고사 직후.

기업 스카우터들이 발 빠르게 인재 영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함에 따라, 학생들의 신분 차이가 자연스레 결정되기 시작했다.

스팅레이나 밀레테크 등 메가코프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곳의 영입제의를 받은 학생들은 왕족.

로먼 코퍼레이션, 퓨어리티 서비스 등 중상위권 메가코프의 제의를 받은 학생들은 귀족.

그 외에 나름대로 영향력은 있지만, 메가코프치고는 덩치가 좀 작은 편인 곳의 제의를 받은 이들은 양인 등.

학생들의 신분이 스카웃 제의를 받은 기업의 시가총액이나 등급표에 따라서 자연스레 나뉘기 시작했다.

-쟤한테 제의가 왔는데 왜 나한텐...!

-설마 스팅레이 쪽에서 연락이 올 줄이야! 내 인생은 폈다! 졸업 후에 스팅레이 타워에서 일하게 되면 다들 날 우러러보겠지?

-이번에 안 되면 어쩌지? 우리 집 안 그래도 빚이 많은데!

-작은 데서 제안이 오긴 했는데, 계약서에 얼른 사인해야 하나? 아냐, 그렇게 시험성적이 좋았는데 분명 더 큰 곳에서 연락이 올 거야. 좀 더 기다려 보자.

-기회는 아직 남았어. 다음 기말고사 때는 어떻게든 해야 해.

그나마 아직 시험이 끝난 직후였기에 관계변화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장학생들이 기숙사를 옮기기 시작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신분제가 자리를 잡을 것이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균열이었지만, 그 틈은 시간이 흐를수록 크게 벌어질 테지.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취미, 같은 취향으로 삼삼오오 모여 웃으면서 떠들던 학생들이었으나, 그 사이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물론 관계를 단번에 끊어 내지는 못할 테고, 나름대로 정도 쌓였으니 한동안은 평소처럼 서로를 대할 것이다.

-뭐? 너도 어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고? 야, 진짜 축하한다! 네가 먼저 들어가서 나 좀 끌어 주든지 해라.

-물론이지. 내가 너한테 받은 게 얼마인데. 양심이 있으면 널 모른 척하겠냐?

모른 척할 것이다.

처음에는 도와주겠다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거나 정보를 건네주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한쪽은 점점 우월감을 드러낼 것이고, 한쪽은 열등감을 억누르게 될 테니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을 장난 한마디가 심장에 깊은 흠집을 내고, 곧 분란으로 이어지겠지.

-아, 맞다. 듣자 하니 제임스 녀석은 'DR 그룹'한테 연락을 받았다나 봐. 걔 여자 친구는 '레인 앤 클라우드' 쪽에서 연락이 왔고.

-거기 스팅레이랑 밀레테크 급으로 사이 안 좋지 않냐? 현실판 로미오와 줄리엣이구만.

-그 둘이 설마 헤어지겠어?

헤어질 것이다.

기업에 따라서는 경쟁사 학생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곳도 있다.

제아무리 끈끈한 연인관계였더라도 상관없다. 같은 기업 소속 선배와 동료들부터가 두 사람을 이간질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은연중 서로를 적대하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쓴 감투와 걸친 옷에 따라 사고방식과 말투가 바뀌게 된다.

그것을 통해 생겨난 사소한 변화가 큰 물결이 되어 이윽고 처음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만들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아이리 앨리스밸."

"네."

"대답해 보도록. [신비]와의 교전 이후에 '멘탈 리커버리 프로그램'이 어째서 중요한 걸까?"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집중을 안 한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교관이 질문을 던져 왔다.

옛날 같았으면 허둥지둥 주변의 눈치를 봤었겠지만, 이건 아는 내용이었다. 이번 중간고사를 치르는 과정 중에 나름대로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덕이다.

"마나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시험하는 듯한 눈빛.

아이리는 대답하기 전, 차분하게 머릿속 정보들을 정리했다.

멘탈 리커버리 프로그램은 이름은 거창하지만 결국 정신과 심리상담이다.

물론 사람하고 진행하는 건 아니고, 프로그램에 따라 정해진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심리안정 작업이라고 할까.

그럼 괴물들과의 전투를 치른 적응자가 어째서 심리상담을 받으며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는가?

그 정답은 하나뿐이다.

"정확히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괴물과의 전투 후 병사들이 겪을 수 있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사전에 치료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마나로 인한 정신오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계속해 보도록."

"우선 마나로 인해 벌어지는 초자연적 현상은 병사들의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환영이나 환청, 평형감각의 상실, 악몽 등이 이 경우의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리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마나는 뇌세포를 비정상적으로 자극하여 뇌내 수용체들을 망가뜨리고, 전기신호 체계 자체를 붕괴시킵니다. 이러한 정신 오염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훌륭하다."

그녀의 대답에 교관이 짤막하게 칭찬했다.

"아이리 앨리스밸이 말한 대로, 대(對)신비 전투는 인간과의 싸움과는 결 자체가 다르다. 이곳의 그래프를 보면 괴물들과의 전투가 PTSD를 유발할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높다. 이는 마나의 영향 때문이지."

교관의 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래프를 가리키며 그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나가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체험, 그리고 세포 변이가 주된 원인이다. 쉽게 말하자면, 괴물들과 싸울 때의 경험이 더 나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고, 동시에 놈들이 내뿜는 '마나'가 뇌세포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

교관이 손가락을 튕기자 홀로그램 이미지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뇌세포를 현미경으로 촬영한 사진이었다.

"이쪽은 정상인의 뇌세포고, 이쪽은 '마나'로 인해 망가진 자의 뇌세포다. 마나는 마치 방사능처럼 인간의 유전자 배열을 망가뜨리고 돌연변이를 일으키지."

그것이 괴물들과 싸울 때 적응자가 필요한 이유였다.

나노머신은 마나로 인해 망가진 유전자 배열을 인공적으로 되돌리고 세포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니까.

"아직 배우지 않은 내용인데도 잘 알고 있군, 앨리스밸. 요점을 잘 정리한 훌륭한 설명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음."

교관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는 묘하게 겸연쩍어서 시선을 돌렸고, 교관은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부끄럽네.'

근래 들어서 이런 일들이 늘었다.

학기 초반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아이리를 경계하듯 훑어보곤 했다. 아이리는 자신에게 붙은 '폴른'이라는 딱지 때문에 그들이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고, 반항적인 태도로 그들에게 맞서곤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들의 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결 부드러워져서, 최근에는 이런 호의적인 반응도 가끔 보인다.

'아마 내 중간고사 성적 때문에 그런 거겠지. 스팅레이 장학생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테고.'

그것이 아이리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성적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수업 태도가 학기 초와 비교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업 내용 자체에는 별 관심도 없이 잔뜩 날 선 태도를 유지하던 애가, 어느 순간부터 수업과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심지어 그 애가 공식적인 아카데미 첫 시험에서 나름대로 준수한 성적까지 내놓았다?

교육자로서는 퍽 기특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변화였고, 그에 맞추어 교관과 교수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아이리는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한 채 수업에만 집중했다. 무언가에라도 몰두해서 무시하지 않으면 '저것들'이 또 좋다고 의기양양할 테니까.

'휴. 또 시작됐네.'

아이리는 자신을 향하는 비난 섞인 시선들을 감지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대각선 뒤편, 같은 반 학생무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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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메시지: 23건

??: 적당히 나대.

??: 냄새난다. 씻고는 다니냐.

??: 시민권 누구 죽이고 뺏었냐?

??: ㅗㅗㅗㅗㅗㅗㅗ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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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됐구나.'

갑자기 수십 건의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알 수 없었지만, 범인은 구태여 복잡한 추리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질리지도 않나.'

오늘은 또 뭐가 불편하셨을까.

아, 조금 전 교관이 칭찬한 것 때문에? 자신이 받아야 했을 선생님 칭찬을 빼앗아 간 것에 질투하다니, 스무 살이나 처먹은 것들이 어지간히 유치하게 노는구나 싶었다.

대응할 가치도 없었기에 아이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뭐, 이런 거에 노발대발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렇게 레퍼토리에 발전이 없어서야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것에 신경 팔릴 때가 아니야.'

아이리는 요전번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론에 대한 기억.

온갖 장비로 중무장한 수십 명의 적응자 병사들을 혼자만의 힘으로 아무렇지 않게 짓밟던 그의 모습.

저릿-.

그 광경을 떠올리자 마치 전류가 흐른 것처럼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정확히 이 감정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구태여 가장 가까운 단어를 꼽자면 '경외심'이리라.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도 꽤 많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조금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느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나하고는 달랐어.'

아이리는 그가 보인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무심결에 겹쳐 보았다.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압도적인 차이에 허탈한 웃음마저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지난번 자신에게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네가 가진 압도적인 무언가를 확인한 상대는, 네 입에 주목하게 될 거다.

그 말대로였다.

가령 평소 아론의 말투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거만하다고 비칠 정도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재수 없다'기보다 '근사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가 가진 지위와 힘 때문이겠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물론 그를 완벽하게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등을 먼발치에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손을 내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후...."

아이리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생각을 다잡고, 시끄럽게 울리는 메신저 앱을 아예 삭제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금 수업에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지금의 수업과 훈련에 집중하는 것.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져야만 한다.

* * *

수업이 끝난 직후, 아이리는 다음 수업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친하게 지내는 애는 없으니 누가 정리를 마치길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분명 다음 수업이....'

어플리케이션으로 스케줄을 확인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자니,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은근슬쩍 그녀의 뒤를 따랐다.

"...."

그녀가 걷는 속도를 높이자, 그들의 발검음도 빨라졌다. 이윽고 그들은 자연스레 아이리를 몸으로 둘러싸 이동 경로를 차단했다.

무시하고 그 틈을 비집고 나가려 했으나 덩치 큰 청년이 그녀를 막았다. 아이리는 손을 내뻗은 학생을 노려보며 물었다.

"도노반. 나한테 용건이라도?"

청년의 이름은 도노반 폰 딜레이.

밀레테크의 장학생으로, 학기 초에 아이리와 [쇼케이스]를 벌였던 적이 있는 거너 스타일 적응자였다.

[쇼케이스] 이후로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더니, 오늘 갑자기 또 왜 이럴까.

아이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비켜 주면 좋겠는데."

"할 얘기가 있는데."

"나는 없어."

"잠자코 들어. 싸우려는 거 아니니까."

"...?"

생각보다 말투가 그리 날카롭지 않다.

싸움을 걸려고 왔던 게 아닌가?

그러면 왜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협박하듯이 구는 것일까?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가늠해 보던 중.

"정확히 용건이 뭔데."

"요새 너 말이다. 그...."

그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그, 그만두세요! 뭣들 하는 짓이에요!"

갑자기 뒤편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이내 복도를 달려와서는 아이리를 둘러싼 인간벽을 비집고 들어와선 홱! 하고 아이리와 도노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넌 뭐야?"

"얘 괴롭히는 것 좀 작작 해요!"

"너 뭐냐고 물었는데. 그 폴른 출신하고 무슨 사이냐고."

아이리로선 처음 보는 여자애... 는 아니었다.

같은 반이라서 얼굴을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뭐였더라....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름을 고민하고 있자니, 그 여자애는 갑자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사, 사귀는 사이인데요!?"

....

....

...뭐?

아카데미 흑막 시점 83화

사, 사귀는 사이인데요!?

이름 모를 여학생의 연애 선언 앞에서 도노반 일당과 아이리는 얼어붙었다. 대체 이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

"...."

"...어. 그, 그래."

너무 충격이 컸던 탓일까.

도노반은 뭔가 맥없이 물러서서 아이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반응에 아이리도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쳤다.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그래요, 자기야?"

"'자기야?'는 무슨! 난 너 이름도 모른다고! 너 누군데!"

쿠웅!

여자애의 표정이 주인에게 버려진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 기는 개뿔. 그냥 지나가다가 집사로 간택당해도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노반 일당은 꽤 충격을 먹은 모양이었다.

자기들끼리 "여, 여자애들끼리? 오우야....""쟤도 저렇게 예쁜 애랑 연애하는데 왜 나는...."라고 수상한 대사들을 중얼거리며 돌아가는 꼴이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친한 인간이야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편이었고, 그러니 학생들이 자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떠들어 대도 전혀 상관은 없었지만.

이 문제는 좀 아니었다.

아이리 앨리스밸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상한 소문은 틀림없이 돌고 돌아서 아론의 귀에까지 들어갈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론 이사장도 이상한 오해를 할 게 분명할 테고....

음? 그게 상관이 있나?

그 사람은 어차피 후원자인데 자기 연애 사정까지 신경 쓰기나 할까?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뇌 한쪽 구석에서 그런 냉정함이 발휘되었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아무튼 싫다.

그 사람에게 오해 사긴 싫다.

"야! 야! 오해라고!"

"아아, 걱정 마라. 누가 누구를 좋아하든 성별은 상관없고, 나는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마인드를 지닌...."

"뭐라는 거야!"

그럼 미친놈아! 그렇게 넓은 마인드를 지닌 놈이 왜 폴른 출신한테는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인 건데?

"할 말 있다면서! 야!"

"그... 나중으로 미루마."

"야! 잠깐! 야아아!!"

아이리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묘한 배려와 함께 떠나가는 도노반.

오해를 풀기는커녕 레즈비언 이미지가 단단히 박혀 버린 것 같았다.

크아아악!

화딱지가 나서 끝내 폭발한 아이리는 그 여자애의 멱살을 잡았다. 한동안 얌전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던 그녀였지만,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에 예전 습관이 나온 것이었다.

"너 대체 뭐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해!"

"저, 저는 아이리를 도와주려고...."

"필요 없는 도움이었어! 오히려 이상한 소문만 퍼지게 됐잖아! 이 이야기가 우리 이사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그 사람이 날 뭐라고...!"

"흑...!"

아이리가 드세게 화를 내자, 이름 모를 여자애의 눈가에 갑자기 물기가 맴돌았다.

폴른과 E섹터를 오가며 활동하던 예전의 그녀 같았으면 그딴 건 상관없이 뭐 질질 짜고 있냐고 면상에 주먹질부터 박고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미유와 교류를 하면서 그녀도 많이 유해진 편이었다.

어찌 되었건 자기를 도와주려 했다는데, 그런 애를 울리는 건 그녀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왜, 왜 우는 거야...."

하아.

때리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아이리는 이내 상대의 멱살을 홱 놓아주었다. 그러고선 옆으로 몸을 돌린 채 곁눈질로 상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한쪽으로 묶은 적갈색 머리칼.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 물기 어린 눈동자는 머리칼보다 조금 더 붉은 느낌이 강했다.

키는 170cm 후반은 되는지 아이리보다 머리 반 개쯤은 더 컸다. 덕분에 아론을 마주할 때처럼 조금 올려다보아야 했다.

같은 반이라 한 달이 넘게 거의 매일 얼굴을 봤지만, 함께 팀을 짜거나 대화를 해 본 적은 없는 상대였다.

'이름이 뭐였지... 그....'

"레이나 알톤(Raina Alton)이에요."

그래, 이런 이름이었지.

그제야 기억이 났다.

기초체력단련을 받을 때 훈련장 몇 바퀴도 못 돌고 나가떨어졌던 애였다. 분명 적응자일 텐데도 훈련받은 일반인을 간신히 웃도는 결과를 내놓아서 조금 놀랐었다.

'전투원으로선 적합하지 않은 애.'

그것이 아이리가 레이나라는 여자애에게 품었던 평가였다. 어떻게 이런 애가 아카데미 입학 커트라인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

물론 별로 관심은 없었기에 이내 그 의문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긴 했었지만.

흠.

아이리는 팔짱을 낀 채 레이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네?"

"너도 나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온 거 아니야? 그냥 빨리 얘기하고 갈 길 갔으면 좋겠는데."

구해 줘서 고맙다고 할 생각은 없었다.

도노반하고 떨거지들이야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는데, 괜히 레이나가 끼어들면서 수상한 소문이 돌게 생긴 참이었으니.

솔직히 말해서 민폐였다.

물론 그녀의 '감'은 레이나가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빨리 말해."

"...."

아이리의 재촉에 레이나는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곧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요즘 시대에 정말로 보기 드문 '진짜' 종이였다.

아이리는 그것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대부분 업무와 연락을 전산상의 메일과 메시지로 처리하고, 아니면 태블릿PC와 전자종이를 이용하는 요즘.

이런 희귀한 '종이'라는 물건을 사용하는 경우는 그 사람이 어지간히 클래식 스타일을 좋아하거나, 아니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때밖에 없었으니까.

아니, 굳이 종이가 아니더라도.

편지지 바깥에 앙증맞게 붙어 있는 붉은색 하트를 보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받아 주세요!"

"자, 잠깐! 나 이거 못 받아!"

"그, 그럼 대답은 나중에!"

아이리는 사색이 되어 편지를 거절하려 했으나, 레이나는 기어코 아이리의 품에 편지를 안겨 주고 허둥지둥 도망쳤다.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리는 벙찐 얼굴로 천천히 편지를 뜯어 읽어 보았다.

그리고 그 글귀를 하나씩 읽을수록 아이리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으아아아, 이거 진짜잖아...!"

이, 이걸 어떡하지?

잠시 다음 수업도 잊고 혼란스러워진 아이리였다.

* * *

"레이나 알톤이라고?"

"네. 그 학생에게 러브레터를 받았다고 합니다. 동성에게 고백 받은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워하면서 제게 상담을 요청하더군요."

"하...."

레이나 알톤.

그 이름을 듣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시는 이름입니까?"

"글쎄. 모르겠군."

그렇게 시치미를 뗐지만.

알다마다.

레이나 알톤.

금사빠의 화신.

원작에서도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는 히로인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독자들에게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히로인은 아니다.

아이리나 미유, 시엘에게 캣 파이팅을 유도하기 위해 넣어진 엑스트라 캐릭터에 불과했으니까.

'레이나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으로 마냥 주인공을 동료나 은인으로만 여기던 여자애들이 조금씩 마음을 바꾸게 되지.'

비유하자면 뭐랄까.

우리 셰이드 팀의 히로인들이 작은 동화마을의 공주님들처럼 서로 하하호호 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있었을 때, 느닷없이 나타나서 생태계를 파괴하기 시작한 외래종이라고 할까.

-에이, 남녀가 아니라 동료지 동료!

-친구끼리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렇게 태평하게 지내던 히로인들의 앞에 나타난 금사빠의 화신, 레이나 알톤. 그녀는 당당하게 히로인들에게 선전 포고를 한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셰이드 씨랑 사귀게 되더라도 상관없겠네요?

연애 쪽으로는 영 쑥맥이었던 히로인들은 갑작스런 레이나의 이니시에이팅에 정신을 못 차린다.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우리 히로인들이 자신의 마음속 연심(戀心)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이, 레이나는 순식간에 치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잃어 봐야 소중함을 안다던가.

레이나의 등장을 계기로 내면의 연심을 인지하기 시작한 히로인들은 제각기 방식으로 주인공에게 어필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레이나는 '히로인력(力)'이라는 군비 경쟁에 불을 지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에피소드를 계기로 갑자기 작중 러브코미디의 비중이 확 늘어났지.'

그래서 그 에피소드는 어떻게 됐냐?

조금 어처구니가 없지만, 레이나가 위기에 처한 걸 아이리가 구해 주면서 전혀 뜻밖의 결과로 흐른다.

레이나가 셰이드 대신 아이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신자가 되는 것.

말이 좋아서 신자지, '크싸레'다.

크레이지 싸이코 레즈.

'그 이후로는 종종 도망치는 아이리를 굶주린 짐승처럼 쫓아다니는 모습으로만 묘사됐었지....'

그런 탓에 '레이나'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조금 안심했다.

아이리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는 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호랑말코 같은 시커먼 사내새끼가 아닌, 원작에서도 그 역할을 맡았던 웃음벨 캐릭터란 점에서.

"어떻게 합니까?"

"...그냥 내버려 둬라."

물론 어쩌다 '셰이드를 좋아한다'라는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아이리에게 곧장 달려들기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다.

원작에서도 그다지 비중이 크지는 않아서, 아무리 나라도 레이나라는 캐릭터의 심리를 메인 캐릭터급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뭐 대충 짐작해 보자면.

지금의 아이리가 원작 속 '셰이드'의 루트를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리를 팀의 리더로 키우자고 생각했던 건 내 판단이었지.'

서 있는 자리 자체가 다른 나로서는 주인공의 부재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리가 주인공의 공백을 대신 채움으로써, 앞으로 아카데미에 찾아올 다양한 사건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으리란 계산.

물론 아직 아이리는 어설프긴 하다.

원래라면 1년 정도 충분히 뜸을 들여서 흘렀어야 할 1부 에피소드들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몇 달 만에 끝나 버린 탓이다.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능력적으로 성장할 시간이 부족했다.

'뭐,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니 상관은 없겠지만.'

어쨌건.

요점은 레이나는 원래 '주인공'에게 마음이 끌렸어야 할 터이지만, 아이리가 대신 그 역할을 이어받으면서 자연스레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게 미래의 사건에 영향을 줄까?'

머리를 좀 굴려 봤지만.

내 대답은 NO였다.

레이나가 빙의자라면 모를까, 원작에서도 역할이 제한적이었던 엑스트라였으니, 그녀가 이제 와서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레이나가 빙의자가 아니라는 건 학기 초에 확인을 마쳤어.'

개강 이후 줄곧 심혈을 기울여 조사한 결과, 나는 이 아카데미 내에는 이 이상 빙의자가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레이나가 원작처럼 아이리를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한 시점이 조금 당겨졌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학생 간의 연애 문제를 엄격하게 금지할 생각까진 없으니."

내가 그런 크싸레 녀석보다 신경 써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당장 민중파 쪽 학원장 문제나 아시타교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되진 않았는걸.

"아이리는 네게 조언을 구했으니, 네가 적당히 답해 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거기서 그 건의 대처는 끝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몰랐다.

빙의자도 아닐 터인 엑스트라급 크싸레가, 얼마나 크레이지하게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아카데미 흑막 시점 84화

그로부터 며칠 후.

미유와의 상담을 마친 나는 모듈링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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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화된 모듈: 27개

대체율: 60.5%

과부하율: 5%(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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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대체율 60%.

인권을 지킬 수 있는 70%라는 선을 넘지 않으면서, 종합 모듈레벨은 100을 간단히 뛰어넘었다.

말하자면 전성기급 아론의 스펙을 완벽히 따라잡은 셈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져 보면 그것보다는 살짝 능력치가 딸리겠지. 하지만 그 이유가 '더 강해지기 위함'이었기에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기존 아론 씨의 '귀여움'은 두 개의 'Lv.5 신비모듈'에 맞추어서 타협한 경향이 있어요.

-'귀여움'이라 하지 마라.

-스, 스펙이요....

그것이 예전에 미유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쉽게 생각하자면 아이템 중에 중요한 칸 두 개를 위해 나머지를 좀 희생한 상태라고나 할까.

당연히 세계 최고의 모듈러께서 보시기에는 마뜩잖은 조합이었던 모양.

그녀는 가지런히 도배된 타일 중에 뒤집어진 조각을 발견한 사람처럼 불편한 티를 내면서 내게 제안했다.

-새로운 [신비]의 정수를 구해 주세요! 제가 최대한 대체율에 맞추어서 효율이 좋은 모듈을 만들어 볼게요오!

그것이 현재 내 대체율이 아론의 전성기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인 이유였다. 물론 못 미친다라고 해도 '판도라'를 통해 내 퓨어스펙이 20%가량 상승한 걸 따지면 무시해도 될 정도였으며....

'이 이상 티켓도 없어....'

이 대체율 60%라는 수치까지 오는 데에만 모듈 호환성 티켓을 무려 71장을 사용했다. 덕분에 이제 남은 포인트는 겨우 500P에 불과하다.

고로 이제 내 손에 남은 걸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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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포인트 500P.

사냥터 티켓 2장.

모듈 레벨 +1 티켓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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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포인트는 누가 다 먹었을까.

물론 범인은 나였다.

뭐, 과감한 투자였기에 별로 후회되지는 않지만 바닥을 치기 시작한 포인트 잔액을 보니 전생의 내 통장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씁쓸했다.

월급날이라고 좋아하면 어김없이 카드값으로 호로록 빠져나갔지.

'조만간 사냥터에 가야겠군.'

원래는 좀 여유를 부리려고 했는데, 남은 포인트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도 '초하이 스펙'인 능력치긴 하지만, 이걸 드래곤과도 싸워 봄직한 '하이엔드 스펙'으로 바꾸려면 그만큼 격이 높은 [신비]들을 잡아서 정수들을 뽑아 와야 한다.

'또 시나리오도 해결해서 부지런히 포인트도 모으고, 경쟁자도 찍어 누르고.'

그렇게 내게 주어진 재단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바지런히 미래의 청사진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나날이었으나, 마리아가 난데없이 이상한 화제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평소대로 다른 재단 업무 관련 브리핑을 간단하게 이어 가다가, 마지막 디저트처럼 그 주제를 꺼냈다.

"최근에 아이리 양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소문이라.

별로 달갑지는 않군.

폴른 출신인 그녀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는 쉽사리 끊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난번에 미유와 함께 방문했던, 드워프 '한스'가 살던 마을은 비교적 온건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것 같았지만, 다른 곳은 훨씬 더 위험한 곳이다.

일단 폴른 출신들 자체가 시민권이 없다 보니 정상적으로 돈을 벌 루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의 루트로 도시로 몰래 침투해서는 크레딧을 벌겠답시고 온갖 비합법적인 일들을 저지르고는 했다.

마피아와 갱단 소속도 많고, 그게 아니라도 인접한 E섹터나 D섹터쯤에서 도둑질이나 강도짓으로 연명하는 게 일상다반사다.

그뿐이랴.

기업 콜로니에서 생산되어 운반되는 물자를 습격해서 빼앗기도 하고, 이따금 격이 낮은 [신비]를 어떻게든 잡아 와선 유통하기도 한다.

'아이리도 사실 별로 다를 건 없었지.'

오빠인 피터 존스가 공주님처럼 애지중지 키운 덕에 그쪽 구정물이 덜 들기는 했지만, 그녀도 자질구레한 도둑질 같은 일은 수도 없이 저지르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녀의 잘못일까? 그게 다 그런 걸 강요하는 환경의....

"도련님?"

마리아의 목소리가 내 잡념을 끊어 냈다. 우리 애들의 일만 관련되면 조금 생각이 많아지는 게 내 나쁜 버릇이다.

"...어디까지 말했지?"

"아이리 양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똑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그녀가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내게 보고한다는 것은, 내가 신경 써야 할 만한 내용이라는 의미겠지.

"아이리 양의 흉을 본 학생들은 불운한 일을 겪게 된다는 소문입니다."

"불운한 일?"

"너무나 다양합니다. 계단에서 넘어진다든가, 악몽을 꿔서 잠을 설친다든가, 침대에서 실례를 한다든가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응. 나머지는 몰라도 마지막은 좀 치명적이긴 하네. 스무 살이나 먹어 놓고 기숙사에서 그랬다간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일이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만.

"소문의 근원은 찾았나?"

사실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반쯤 용의자의 몽타주가 그려진 상태였다.

지금 시점에서 그런 이상한 짓을 벌일 만한 인간이 한 사람밖에 더 있나 싶었고.

하지만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도련님 아니셨습니까?"

"...?"

"도, 도련님?"

마리아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했다.

근데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는 왜 내가 퍼뜨린 소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계속 같이 있었으니, 내가 그럴 리는 없다는 걸 알 텐데?

내가 그렇게 따지고 들자.

"그,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영락없이 도련님께서 행하신 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 그야...."

어지간히 놀랐는지 마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마 내가 감옥에서 구출하러 나타났을 때도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텐데.

"아이리 양은 출신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이미지가 좋지 않잖습니까. 그걸 해결하시기 위해서 나서신 줄...."

아이리는 폴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학생들에게 업신여겨지고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직접 선발하고 후원하는 학생이라고 해도, 그녀 본인에게 출중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출신에 기반한 편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대의 폴른 출신이라는 건 1900년대의 미국 흑인이랑 비슷한 맥락의 무언가라서, 그 정도로는 뿌리 깊게 박힌 고정관념을 뒤흔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스팅레이라는 이름 때문에 대놓고는 괴롭히지 못해도 은연중에 뒷담화를 한다든지, 은근히 따돌리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한 내가 여론플레이를 통해 그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으려고 했던 걸로 알았던 모양.

'물론 마음 같아서야 나도 그랬겠는데.'

우리 애들 갖고 수군거리는 놈들 죄다 목줄 매고 끌고 가서 저기 E섹터 블랙마켓 깊숙한 곳에 팔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으로서 지켜야 하는 어느 정도의 중립성 때문이었다.

아무리 특별장학생이라고 해도 장학생과 이사장의 관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여겨지면, 불만을 품는 이들이 생길 테니까.

...라는 솔직한 마음을 마리아에게 털어놓았더니.

"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신경 쓰여서 캐물었더니, 이미 내 이미지는 이사장으로서의 중립성 따위는 개나 줘 버렸다! 라고 보이는 모양.

"그... 그게 진짜인가."

"...."

"솔직하게 대답하도록."

"무, 물론입니다."

"마리아, 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네."

"...."

뭐지.

그럼 내가 지금까지 지키려고 했던 건 뭐지? 내가 우리 애들을 아끼기는 했지만, 적어도 '엄격한 아빠' 정도의 이미지는 유지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팔불출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이게 다 아론 탓이다.

아론 스팅레이가 워낙에 소시오패스에다가 남한테 정 안 주기로 유명하다 보니까, 내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도 사람들이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이잖아.

"...본론으로 돌아오지."

"네."

내 이미지에 대한 고찰은 이 정도면 됐으니 화제를 원래대로 돌리기로 했다. 요컨대 중요한 건 아이리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 범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짐작 가시는 인물이 있으십니까?"

"물론이다."

레이나 알톤.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타이밍이나 정황증거라고 봤을 때는 그녀밖에 범인이 없다.

이유야 보나마나-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가 무시당하는 게 싫다는 거겠지."

물론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선다는 게 나로서는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아이리가 그렇게 호감도를 쌓을 만한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 부분은 역시 좀 의문이긴 했다.

갑작스런 고백의 이유.

설마 빙의자인가?

그런 것치고는 좀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문을 잠재울까요?"

"아니."

굳이?

소문을 내버려두면 알아서 아이리를 향한 괴롭힘이 줄어들 텐데 뭐 하러? 우리 새끼들의 쾌적한 학원생활을 위해서라도 이런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다.

"다만...."

방향성.

소문의 방향성은 조금 손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와 연관되어서는 안 돼.'라니, 무슨 우리 아이리가 볼드모트도 아니고.

"레이나 알톤."

마냥 일회용 엑스트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보니 생각보다 써먹을 만한 인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리아. '그쪽 일'은 어떻게 됐지?"

"죄송합니다.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습니다."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세 명의 학원장.

그중에서 민중파를 대표하는 학원장이 아시타교의 물을 먹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어 실각시키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였다.

꽤 치밀한 인물인지 증거를 남겨 놓지 않았고, 아시타교 박멸 작전이 시작된 후로는 본인도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이번 건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데."

"소문을 이용해서 말입니까?"

"그래."

레이나의 능력을 잘만 이용하면 이 아카데미 내의 벌레들을 완전히 멸종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이리를 영웅으로 만든다.'

그래, 충분히 할 만하다.

이번 건을 잘 활용하면 아카데미의 생태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 * *

-답은 생각해 보셨나요?

-미안한데, 난 너랑 못 사귀어.

-네? 어, 어째서요?!

-그야 난 남자 좋아하니까.

-그럴 수가...!

-하여튼 난 할 말은 다 했어. 왜 나 같은 걸 좋아한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너도 나랑 엮여서 좋은 꼴 못 볼 테니까. 그냥 적당히 거리 두면서 지내자고.

-자, 잠깐만요!

-그럼 이만.

그렇게 레이나의 고백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마리아에게 상담도 받고 이런저런 고민도 많이 해 봤으나, 아무리 봐도 레이나와는 거리를 두는 게 옳다는 판단이었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

여자에 관심이 없다는 건 둘째 치고, 친구로도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정황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폴른 출신이란 사실은 알 만한 녀석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구태여 지금 시점에 다가오다니?

물론 그녀의 '직감'이 거수자 경고 알람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수상하니까.

뭐 하여튼.

그렇게 레이나와의 인연을 단칼에 쳐 내고서 아이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여느 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을 향한 시기와 질투, 멸시의 시선을 적당히 무시하며 지내는 그런 나날들로.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자신의 귀에 들리게 뒷담화를 하던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뭐지...?'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자신을 향하던 음흉하고 멸시적인 미소도, 짧은 대화 속에서 느껴지던 차별적인 단어선택도.

전부 조금씩 없어졌다.

아이리로서는 학생들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배어 나오는 감정을 정확히 캐치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학생들이, 아이리를 조금씩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째서...?'

아이리로서는 그 갑작스러운 변화를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쇼케이스]에서 도노반을 때려눕히고 능력을 선보였을 때도.

도시의 황태자인 아론이 대놓고 그녀를 감싸고 돌았을 때도.

중간고사에서 괜찮은 성적을 거두어 모두의 편견을 깨부쉈을 때도.

꾸역꾸역 자신을 배척했던 놈들이.

이제 와서 달라졌다고?

어째서?

뭐 때문에?

'뭐, 나야 귀찮은 날파리들이 사라져서 좋기는 한데....'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들 구는 건지.

'설마 레이나하고 관련이 있나?'

당장 떠오르는 원인은 얼마 전에 자신에게 다가왔던 그 여자애였지만, 아이리의 추리는 거기서 더 발전해 나가지 못했다.

레이나가 앙심을 품어서 나쁜 헛소문을 퍼뜨린 건가? 그렇다 보기에는 오히려 예전보다 살 만해졌다.

아니면 레이나와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렇게 됐나? 그런 생각도 해 봤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다른 학생들이 자신을 두려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유를 모르겠네.'

친구가 없다 보니 정확한 소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불라고 협박한다고 한들 제대로 된 정보가 튀어나올 리도 만무했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지낼까? 아니, 그래도 좀 많이 궁금한데....'

결국 아이리가 선택한 방법은 스토킹이었다. 아마 이번 일의 주모자일 것으로 보이는 레이나 알톤의 뒤를 밟는 것.

그녀는 수업이 끝나고 남은 시간들을 이용해서 레이니 알톤이 무슨 짓거리들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의 노력에도 결국 성과는 없었다.

레이나가 24시간 뭘 하면서 돌아다니는지 도청기를 붙여서 계속 집중 마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이람.'

고백을 거하게 차 놓고는 오히려 이쪽에서 스토킹을 하고 있자니 회의감이 밀려왔다.

결국 처음 세웠던 계획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어라?'

그녀는 발견했다.

레이나가 탄 엘리베이터가 249층.

아카데미를 후원하는 기업 재단들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멈췄다는 사실을.

아카데미 흑막 시점 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