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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새하얀 공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난 죽은 건가?"

난입 빌런에게 당한 뒤, 아무래도 나는 목숨을 잃은 모양이다.

듣기로는 난입 빌런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아마 내가 첫 피해자가 된 거 같다.

그때, 저 멀리서 새까만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저건 뭐지?"

동그란 공처럼 생긴 물체였다.

그 공은 내 눈앞에서 멈춰 서더니, 내 머리 주변을 둥실둥실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던 탓에 미소를 지었다.

"네 이름은 뭐니?"

아마 저승사자가 아닐까?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기에 마중 나올 만한 녀석이 없으니까.

난 대답을 바라고 질문을 한 건 아니지만, 놀랍게도 그 물체가 나에게 대답을 했다.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었어."

"내 곁에..? 난 너 같은 동물을 키운 적이 없는데?"

"키우고 있잖아! 항상 나를 등에 메고 다니면서!"

"등에..?"

내가 등에 메는 건 배낭뿐이다.

그 배낭 안엔 여러 포션과 신수의 알뿐.

잠깐.

신수의 알..?

"네가 신수의 알이라고..?"

"맞아! 그리고 여긴 알의 내부야!"

"진짜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정신이 신수의 알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생생한 감각과 따듯한 온기는 이 신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여기로 부를 수 있던 거야? 평소엔 별말도 안 하면서."

"최근 부화율이 40%를 찍었잖아? 그래서 내 힘도 강해졌단 이 말씀!"

"그러냐..? 그럼 날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야?"

"네가 너무 속수무책으로 당하길래, 도움을 주려고 불렀지."

"도움이라니..? 네가?"

그저 관심을 바라던 알이었던 신수의 알이 도움을 준다니,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최근 부화율이 40%까지 올리는 데 엄청난 정성을 쏟은 터라 더욱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수의 알은 내 정수리에 안착한 뒤, 말을 이어갔다.

"날 키워준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돼."

"일단 도와준다고 쳐. 그런데 어떤 식으로 도와주려고?"

"간단해. 내 부화율의 일부를 소모하고 내 권능을 잠시동안 너에게 부여할 거야."

"권능..?"

과연 신수의 알이라는 건가?

권능이라는 단어가 서슴없이 나오는 것을 보아, 엄청난 능력을 부여해줄 것 같은 느낌이다.

신수는 내 머리에서 다시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다시금 뽈뽈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야?"

"나처럼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친구 좀 데려오려고."

그런 말을 남기고 잠시 모습을 감췄던 신수는 5분 뒤,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에 황금색 왕관을 쓰고 말이다.

"그건..?"

"절제의 크라운. 이 녀석도 널 도와주고 싶다고 하네? 그런데 네 힘이 아직 너무 약해서 전투 모드로 변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럼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간단해. 내 권능을 사용하면 잠시나마 이 녀석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사용하면 돼."

어쩐지 크라운을 사용하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변신을 안 하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나?

앞으로 크라운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더욱 강해져야 하는 모양이다.

"이젠 시간이 없어. 빨리 돌아가서, 저 여자한테 복수해줘!"

"나만 믿으라고!"

"말은 참 잘하네!"

그 말을 끝으로 주변 풍경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

몸이 차갑다.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걸까?

눈을 뜨자, 내 몸은 바닥에 고꾸라진 상태로 굳어 있었다.

"커헉!"

숨을 거칠게 몰아쉰 뒤, 주변을 둘러봤다.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배낭 속 내용물과 저 멀리서 허공을 향해 떠들고 있는 난입 빌런.

사람을 기절시키고서 너무나도 태평한 그녀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시청자들이 나를 목격한 건지,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라? 벌써 일어났다고? 적어도 몇 시간은 쓰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다리 힘이 너무 약해서 말이지. 밥은 먹고 다니냐?"

"다 쓰러져가는 게 허세는!"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신수의 알에 다가간 뒤, 손을 댔다.

'까망아.. 도와줘!'

알에 손을 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 손을 타고 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까망이가 말한 권능인가?

[신수:어???의 권능을 빌려옵니다.]

[권능:관심을 획득하셨습니다.]

[반동으로 신수의 알 부화율이 10% 감소합니다.]

어둠이 모두 흡수되자, 갑자기 상태창들이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수의 이름 부분은 에러가 난 것처럼 가려져 있었지만, 권능은 다행히도 나에게 제대로 전해졌다.

능력을 확인해볼까?

[관심]

등급:권능

* 타인에게 관심을 받을수록 스탯이 올라갑니다.

* 이 효과는 총 5분 동안 유지됩니다.

* 쿨타임:24시간

마치 나를 노리고 만든 듯한 스킬이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이 내 직업 특성이었으며, 이 권능은 나와 시너지가 너무 잘 맞았다.

"뭘 그리 기분 나쁘게 웃는 거지?"

저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난입 빌런이 불쾌하다는 듯이 노려봤다.

아까라면 겁을 집어먹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타인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스탯이 상승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권능으로 인해 내 스탯은 뻥튀기되기 시작했으며, 그 기색을 눈치챈 건지, 난입 빌런도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까와는 다른 사람 같은데."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절제의 크라운이 전투 모드에 돌입합니다.]

크라운이 4개의 칼날으로 쪼개졌다.

황금색이었던 기존 모드와는 달리 전투 모드의 칼날은 붉은색을 띠는 기계식 단검으로 변했다.

내 주변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풍기며 둥둥 떠다니는 칼날들.

나는 그 칼날을 난입 빌런에게 쏘아내며 말했다.

"자식 농사 성공한 거지."

19화

"멍하니 있을 시간이 있나?"

크라운의 단검이 난입 빌런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난입 빌런은 재빠르게 몸을 던져 단검을 피해냈지만, 단검은 붉은 잔상을 남기며 난입 빌런을 끊임없이 쫓아다녔다.

그야말로 목표물을 락온한 미사일을 보는 듯한 상황!

얕잡아보던 인물이 갑작스럽게 강해진 탓에 난입 빌런의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그녀는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파기한 것처럼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단검이 있던 곳의 바닥이 압축되기 시작하더니, 공간이 단절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야! 왜 차원 단절이 안 통하는데! 설마 차원마저 베어버린 거야!?"

단검은 그런 스킬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난입 빌런을 향해 날아갔다.

-와.. 이건 너무 사기 아니냐?

-난입 빌런이 저렇게 애먹는 건 처음 보는데 ㅋㅋ

-핸드야! 너도 옷 찢겨 졌으니, 똑같이 갚아줘야지?

"그거 갚으면 정지 먹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여유롭게 보이겠지만.

사실 지금 단검을 컨트롤 하느라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괜히 이기어검이 무협에서 고급 무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단검 하나하나가 조종하기 까다로웠다.

게다가 마력 소모도 극심한 탓에 현 상황을 오래 끌 수 없었다.

'권능의 유지 시간은 5분이라고 했으니, 그 안에 결착을 지어야 한다!'

현재 1분 정도 시간이 지난 상태.

그 적은 시간 동안 여러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크라운의 단검이 공간 제어 스킬을 베어버릴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는 차원 마법을 사용할 때, 상대방은 움직임을 잠시 멈춘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을 잘만 활용한다면..'

난입 빌런을 쓰러트릴 수 있다!

공략 방법이 보이기 시작한 이상.

멈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난입 빌런의 정신부터 빼놓아볼까?

"뭐, 뭐야!? 칼을 갑자기 왜 거둔 거지!?"

난입 빌런은 쉴 틈 없이 자신을 쫓아오던 칼날이 움직임을 멈추자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혹시 내가 지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얼굴을 히죽거리며 나에게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그치~ 너 같은 잔챙이가 이렇게 나를 몰아세우는 게 이상한 거였어! 아마 힘이 다 빠진 모양이지?"

벌써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말하는 난입 빌런.

저 미소가 어떻게 일그러질지, 궁금해졌다.

나는 곧바로 단검을 사방으로 퍼트린 뒤, 주변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그러자 푸른색 막에 쌓여 있던 차원이 조금씩 붕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서, 설마 차원 단절을 부수려고..?"

그제야 내 생각을 이해한 건지, 난입 빌런의 표정엔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할 겨를도 없이 차원 수복에 나선 난입 빌런.

"네 차원 마법을 가를 수 있다는 건, 다시 말해 단절된 차원을 가를 수 있다는 말이지!"

나는 신이 나서 더욱 차원을 긁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난입 빌런은 표정을 구기며 차원을 수복하느라 정신없었다.

여기까진 내가 상상한 대로다.

그 다음은..

"아까의 복수를 하는 거지!"

-우효~ 찢어버리는 거냐구~

-핸드야.. 너도 남자가 다 됐구나..

-영정각 뜨나요?

"아니, 그 복수 말고요!"

내가 말한 복수는 나를 개 패듯이 팼을 때의 복수를 말하는 것이다.

차원을 수복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녀의 복부에 주먹을 내질렀다.

역시나 예상대로 차원 마법을 사용할 때는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모양인지, 그대로 복부에 내 주먹이 그대로 꽂혔다.

권능으로 강해진 스탯으로 인해, 내 주먹은 현재 난입 빌런의 신체 능력과 비슷할 정도로 강해진 터라, 복부에선 무언가가 찌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악!"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은 난입 빌런.

그녀의 입에선 피가 흘러나오더니,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와 겨루고 처음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다.

그 사실에 고양감을 느낀 탓에 내 주먹은 점점 더 빠르게 그녀를 채찍질했다.

어깨, 복부, 다리, 얼굴 등등..

쉴 틈 없이 그녀를 타격한 결과, 그녀는 더 이상 차원을 수복하는 것을 멈추고 차원 마법을 이용해 뒤로 물러섰다.

"거슬려.."

"뭐?"

"거슬린다고! 왜 날 방해하는 거야!? 나는 그냥 널 때려눕히고 관심만 받으면 되는 건데! 아, 못 참아! 차원 단절이고 뭐고! 너부터 쓰러트릴 거야!"

분노한 그녀는 모든 집중을 나에게 쏟는다는 선언을 했다.

그 증거로 내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공기가 압축되는 것을 느꼈다.

"송사리 주제에 봐주니까, 너무 우쭐한 거 아니야!? 원래 내 힘이라면 넌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고!"

"뭐, 그렇지."

"뭐야.. 겁도 안 나는 거야? 넌 곧 있으면 죽는다고! 내 차원 압축에 의해서 찌부러진 멸치처럼 될 거라니까?"

-아니, 핸드는 원래 멸치인데;

-ㄹㅇㅋㅋ 멸치에서 말린 멸치 되는 건가?

-쟤 정신 나가서 상황 파악도 못 하나 봐?

시청자들은 내가 위기에 빠졌음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채팅을 볼 시간도 없었던 건지, 오로지 차원을 압축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 결과.

[차원 단절이 해제됐습니다.]

크라운의 칼날으로 차원을 파괴했더니, 나를 가두었던 차원이 다시금 원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걱정하며 한 가지 조언을 해줬다.

"너 도망가는 편이 좋을걸?"

"뭐? 드디어 미쳤구나! 도망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아뇨. 도망가야 할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녀의 뒤편에서 깐깐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뒤, 안경을 쓰고 있는 남성이 서 있었고, 그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 설마.."

"인사드리겠습니다. 현재 핸드님의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바트라고 합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며 차원 단절을 해제한 이유.

모든 행위는 바트를 부르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시청자들을 향해 간단히 인사를 한 뒤, 그녀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한 손에 진홍빛 아우라를 머금은 무기를 든 상태로 싱긋 웃었다.

"저희 간판 스트리머를 건든 대가는 치러야겠죠?"

"아, 안돼..!"

바트형! 믿고 있었다구!

***

"저희의 실책입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아뇨! 바트씨도 제때 찾아오셨잖아요? 저도 무사하니 괜찮아요!"

바트가 등장하고 난 뒤, 상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마무리됐다.

본래 뱀파이어 로드인 그는 피칠갑이 된 그녀를 장난감 다루듯이 농락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원 빌런은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쓰러트리고 난 후, 나는 간단하게 방송을 종료한 뒤, 바트에게 끌려가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그나저나 차원 빌런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글쎄요? 아직 기절한 상태라서 물어보진 못했습니다만, 그녀가 깨어나는 즉시 고문해서 알아볼 생각입니다."

고문이라..

평범한 사람이 말해도 오싹한 단어지만, 뱀파이어 로드인 그가 말하니 더욱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온몸의 피를 한 방울씩 뽑아 괴롭히는 건 아닐까?

"그것보다 핸드님. 이번 대처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네?"

"무모하게 단신으로 차원 빌런을 쓰러트리려 하지 않고, 타인의 조력을 받아 상황을 해결하셨잖아요? 다른 스트리머였으면 무모하게 차원 빌런에게 덤비다가 죽임을 당했겠죠."

내가 한 행동은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바트는 내가 대견하다는 듯이 칭찬을 이어갔으며, 나는 그게 괜히 부끄러워 말을 흐렸다.

"그런데 핸드님.. 중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느낌이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죠? 게다가 사용할 수 없다고 알려진 절제의 크라운도 사용하시고.."

"아, 그거요?"

까망이가 도움을 준 일을 말하는 모양이다.

나는 곧바로 바트에게 신수의 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풀어 설명했고, 바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핸드님이 사용하신 권능에 비슷한 능력을 가진 신수를 특정해보려고 했습니다만.. 전혀 생각나지 않는군요."

"직접 본 저도 모르는데요. 뭘."

"크라운 같은 경우는 아직 핸드님의 스탯이 낮은 탓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 같군요. 대강 크라운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가 이해됐습니다."

"절제의 크라운을 사용하기 위해선 더욱 강해져야겠군요."

모처럼 얻은 성물급 아이템이다.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무척 아깝겠지.

적어도 전투 모드를 1분 이상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겠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던 도중, 바트가 말을 걸었다.

"이번 난입 빌런 사건은 꼭 나쁜 건 아니었나 보군요."

"네?"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만, 핸드님께서 성좌넷의 골칫거리를 치워주는 보상으로 브론즈 스트리머에서 실버 스트리머로 승급시켜 준다고 하더군요."

"예? 실버..? 브론즈..?"

무슨 계급 같은 건가?

성좌넷은 일반 스트리머와 파트너 스트리머 두 가지로 나누어진 줄 알았는데, 다른 계급이 있었나보다.

바트는 브론즈 스트리머의 권한은 단순한 방송 송출뿐이지만, 실버는 매니저를 고용할 수 있고, 각종 방송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등급은 총 프리미엄 등급까지 존재하며, 등급을 올리는 방법은 포인트를 내면 됩니다. 다만 승급에 필요한 포인트가 장난이 아니기에.."

"얼마나 들길래요?"

"브론즈에서 실버로 올라가는 것만 해도 총 1000만 포인트가 듭니다."

"예!?"

이거 내 전 재산을 털어도 실버로 승급할 포인트가 모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나는 1000만 포인트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브론즈에서 실버가 1000만 포인트면, 다음 단계는..

"허어.."

한숨을 내쉬던 도중, 바트가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았다.

"핸드님. 지금 바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난입 빌런이 깨어났거든요."

***

"흐.. 여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사지가 결박된 채, 쓰러져 있는 난입 빌런.

그대로 죽어버리면 정보를 뽑을 수 없기에 죽지 않을 정도로 응급처치를 한 상태였다.

바트는 쓰러진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해주시는 편이 신상에 좋을 겁니다."

"가오잡긴.. 어차피 날 살려둘 생각 없으면서."

"확실히 저는 당신을 지금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지만.."

바트는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핸드님의 선택에 모든 걸 맡기기로 해서 말이죠.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해했어.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야지."

난입 빌런은 체념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바트는 곧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크래커."

"당신의 스킬에 대해 이야기해보시죠."

"내 능력은 차원 조작. 기본적으로 차원 이동이 가능하고 차원을 단절해서 타인의 간섭을 막거나, 차원을 압축시켜 상대를 공격할 수도 있지. 거기에 내 고유 특성으로 상대방이 스킬에 간섭이 가능해."

차원 조작이라..

어쩌면 중력 조작보다 훨씬 괴랄한 성능을 가진 능력이었다.

게다가 고유 특성이라는 것도 상당히 까다로운 능력이었는데.

타인의 스킬에 간섭이 가능하다는 것은 현 지구의 S급 헌터들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바트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심문을 이어갔다.

"어째서 스트리머들을 노리는 거죠?"

"그건 좀 뼈 아픈 질문인데, 거부해도 돼?"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곤 하죠."

"말할게. 내 종족은 뇌리족.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종족이야. 수명에 제한은 없지만, 자신의 존재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 죽음을 맞이하는 종족이지."

상당히 신기한 종족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며 살아간다니.

그야말로 어떤 닥터의 명언을 떠오르게 하는 종족이었다.

"우리 종족은 그야말로 불사에 가까운 종족이었어. 서로를 기억해주면 죽을 일도 없었고, 가끔 사고로 죽진 않는 한, 영원히 살 수 있었지.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오던 도중, 끔찍한 일이 생겼어."

"끔찍한 일?"

"우리 행성에 괴물이 찾아왔거든."

크래커는 얼굴을 있는 힘껏 구기며 목소리를 긁었다.

마치 트라우마를 억지로 끌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우리에겐 그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있었기에 굳이 멈추지 않았다.

"괴물 같은 힘을 가진 남성은 미친 듯이 우리 행성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죽이거나,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단숨에 죽이기도 했지. 그 괴물은 우리 행성에 정착한 뒤, 학살을 이어갔어."

"그 괴물의 정체는 알고 있나요?"

"아니, 난 아직도 그 괴물의 정체를 몰라. 그저 칠흑 같은 코트를 입고 가면을 쓰고 다닌다는 사실 밖에. 그는 우리 행성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한 뒤, 마지막 남은 나에게 다가왔어."

그녀는 점점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공포심에 사로잡힌 것처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트라우마가 짙은 건가?

그녀가 어떤 고생을 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괴물과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내 수명이 줄어드는 걸 느꼈어. 그리고 기어코 그 괴물이 나에게 도달했을 때.. 그 괴물은 내 초라한 보습을 보고 비웃더라. 영생을 살아간다는 뇌리족의 꼴이 우습다고 말이야."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괴물은 잠시 나를 죽일까 고민하더니, 나를 살려준다고 말하더라고. 나는 궁금했지. 내 주변 인물들을 전부 죽여놓고선 나를 살려준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렇게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쯤, 그 괴물은 한 가지 말을 덧붙였어. 너를 제외한 모든 뇌리족이 죽은 이상. 너는 내 기억에서 잊혀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겠지.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아보라고."

"과연.."

"그가 떠난 순간. 나는 곧바로 성좌넷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겨났어.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방송을 송출했지만, 재능이 없던 모양인지 시청자가 5명도 모이지 않았어. 이대로 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느꼈고, 결국 나는 타인의 방송을 방해하는 빌런이 된 거야."

바트는 모든 것을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녀가 난입 빌런으로 행동한 이유는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건가?

바트는 나를 힐끔 보더니, 그녀의 처분에 대해 기다렸다.

솔직히 그녀의 처지는 딱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행위가 정당해지는 건 전혀 아니었으며, 피해자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흠.. 들을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핸드님."

바트는 모든 권한을 내게 일임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소리는 즉 크래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렸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잘못은 했지만, 죽을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만큼 가벼운 죄도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

한가지 답이 도출됐다.

"너. 그냥 죽는 편이 좋겠다."

"뭐라고!?"

20화

"사, 살려줘! 뭐든 지 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했던 녀석을 그냥 놔주기도 그렇고, 또 내가 데리고 있기엔 너무 위험하잖아."

무려 여러 스트리머 방송을 망쳐버린 장본인이다.

괜히 데리고 있다가 불똥이라도 튀면 곤란했다.

게다가 이대로 놔줘도 원한을 산 스트리머 소속 회사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하다.

그런 점에서 깔끔하게 목숨을 끊어주는 편이 오히려 자비라고 볼 수 있었다.

"죽음이 자비라는 말 알아?"

"아니! 그런 자비가 어디 있어! 살려줘! 해달라는 거 다 할 테니까!"

"아니, 너한테 뭘 바랄 게 없는데."

확실히 차원을 조종하는 능력은 유용하긴 했다.

본래라면 10만 포인트라는 거금을 들여 시청자들을 데려오지만, 그녀가 있으면 무료로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생명 위협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데리고 있을 만한 녀석은 아니야.'

나는 바트에게 결단을 내렸다는 눈빛을 보냈고.

그 눈빛을 알아챈 바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형선고.

방금 내 눈빛이 사형선고였다는 것을 눈치챈 크래커는 더욱 애절하게 빌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뿐만이 아니라, 뇌리족 특유의 정보도 많이 알고 있어! 내 정보는 엄청 유용하다고! 게다가 전투도 꽤 쓸만하게 할 줄 알잖아!? 살려두면 무조건 이득이라고!"

그 말을 들은 바트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의 말 중 무언가가 바트의 흥미를 끈 것이 분명했다.

바트는 나에게 잠시 발언권을 달라는 눈빛을 보내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다.

"뇌리족 특유의 정보는 어느 정도죠? 자세하게 말해야 할 겁니다."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어! 영생을 살아가는 종족이라 다른 행성의 역사나 잊혀진 비밀도 알고 있고, 여러 몬스터의 약점이나 습성도 알고 있어!"

"흐음.. 그건 좀 구미가 당기는군요."

"무언가 마음에 걸리시나요?"

그녀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바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정보라는 것을 우습게 볼 수 없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정보만 충분하다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고, 결정적으로 저희 회사는 신생이라 다른 회사에 비해 정보력이 뒤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네. 이 사람을 살려서 착취하는 편이 훨씬 좋겠군요."

착취라니.

어감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바트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원한다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차원 조종이 가능한데 회사에 묶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포인트 상점에 계약서라는 아이템이 존재하는데, 그 아이템의 강제력은 신이 와도 풀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바로 구매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포인트 상점에서 계약서를 구매한 뒤, 바트에게 사용 방법을 물어봤다.

방법은 상당히 간단했는데, 각자의 피를 주인 칸과 하인 칸에 떨어트리면 자동으로 계약이 성립된다고 말했다.

눈앞에서 나풀거리는 계약서를 생소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크래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마력의 실로 살짝 상처를 냈다.

"읏..!"

"엄살 피우지 마라."

주먹 한 방으로 뼈도 부숴버리는 녀석이 약한 척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크래커의 피는 그대로 을의 칸에 스며들었고, 이어서 나도 손가락에 상처를 낸 뒤, 갑의 칸에 피를 먹였다.

[주종관계 서약서를 사용하셨습니다.]

[현 시간부로 을:크래커는 갑:김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이 서약은 갑:김수가 원할 때 파기할 수 있으며, 양측 중 한 명이 죽음을 맞이하면 자동으로 파기됩니다.]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모든 계약은 마쳤으니, 크래커를 어디에 살게 하느냐가 중요했다.

솔직히 우리 집은 매우 좁아 누굴 데려와 살게 할 정도로 넓지 않았다.

게다가 크래커의 성격을 보아 함께 생활한다면 평탄하지 못한 일상을 보내게 될 것이 뻔했다.

"바트씨. 크래커를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

"아뇨. 제 소중한 디저트 컬렉션에 손을 댈 가능성이 있으니, 사양하겠습니다."

단호했다.

어쩌면 바트는 방송보다 달콤한 디저트가 중요한 게 아닐까?

차라리 크래커에게 새로운 집을 구해주는 건 어떨까요? 라는 말을 바트에게 해봤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이유는 너무 잘해주면 버릇이 나빠진다나?

게다가 그녀의 외형은 중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였기에, 홀로 두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어쩔 수 없네요. 크래커는 제가 돌볼게요."

"잠깐!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거야? 나 이래 봬도 연장자라고! 어쩌면 너희 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지도 몰라!"

"아, 맞다!"

그녀는 불멸에 가깝다고 알려진 뇌리족.

어쩌면 뱀파이어 로드인 바트보다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

나는 괜히 크래커에게 깍듯한 자세로 연세를 여쭈어보았다.

"연세가..?"

"15살인데."

"이런 미X년이!"

***

"잘 들어. 너는 오늘 피해줬던 스트리머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거야."

"걱정하지 말라니까? 나도 내 잘못은 잘 알고 있어."

오늘은 시청자분들에게 난입 빌런 사건의 마무리와 크래커의 소개를 하는 날이었다.

과장 없이 솔직하게 사과한 뒤, 용서를 구한다면 일부 스트리머들은 용서해주지 않을까?

게다가 난입 빌런을 하인으로 거뒀다는 소문은 내 명성을 드높여주겠지.

"자, 안녕하십니까! 핸드입니다!"

-핸하! 그런데 옆에 난입 빌런은 왜..?

-눈 맞았냐?

-핸드는 그런 어린아이가 취향이었구나.. 그랬구나..

시작하자마자 크래커에게 따가울 정도로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캐릭터성과 화제성 하나는 대단했기에, 평소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내 방송을 찾아와줬다.

[핑크공듀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바람피우는 거냐? 죽고 싶나?"

"아니, 누님!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입니까? 게다가 바람이라뇨?"

-ㅇㅇ 당연하지 ㅋㅋ

-핸드야.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는..

-벌써부터 삼각관계 지려버렸구 ㅋㅋ

방송 진행을 몇 분 안 했는데도 벌써 머리가 아파졌다.

이것이 난입 빌런의 힘인가?

일단 예정대로 시청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상황 정리를 한 뒤, 크래커를 앞에 세웠다.

"오늘은 난입 빌런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사정? 그냥 관종 아니었나?

-빌런은 그냥 빌런으로 남아야 멋있지.

-썰 풀어봐 ㄱㄱㄱ

시청자들이 흥미롭다는 채팅을 치자, 예정대로 크래커에게 이야기를 시켰다.

그녀가 가장 꺼려했던 과거.

나와 바트에게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 덜덜 떨었던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막힘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는 거겠지.

크래커의 이야기는 시청자들의 이입을 유도했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의문의 괴물을 욕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미지 세탁인가?

".. 이렇게 된 겁니다. 제 이기심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스트리머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아니, 난입 빌런도 잘못하긴 했는데, 그 괴물은 대체..

-나.. 그 괴물의 정체 알 거 같은데..

-나도 비슷한 인상착의는 들어봄

"네? 그게 정말입니까?"

채팅창에 괴물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오자, 크래커는 눈에 불을 켜며 채팅창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녀의 복수심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채팅창에 올라온 정보는 대략 이랬다.

"성좌넷에서 정지당한 스트리머들은 성좌넷 관리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송을 해야만 정지를 풀 수 있는데, 그 방송은 무조건 관리자만 볼 수 있다고요? 게다가 그 인상착의는 몇 년 전 정지를 당한 스트리머 프리드라는 사람이고요..?"

기대도 안 했는데, 의외를 정보를 알아버렸다.

그 내용을 모조리 읽은 크래커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낸 뒤,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마 금방이라도 그 녀석에게 찾아가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겠지.

게다가 무력하게 당했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차원 조작이라는 기술도 있으니, 어쩌면 복수가 꿈같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단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래커와 스트리머 프리드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 같군요."

당장 옆에 있는 크래커가 감정을 폭발시킬 것 같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가다간 오늘 방송은 진행할 수 없다.

나는 크래커의 손을 잡고 진정하라고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 하지만 화가 나서.."

"지금은 눈앞의 일만 집중해. 현재 프리드는 정지당한 상태라 행적이나 위치는 전혀 알 수 없잖아? 나를 잘 도와준다면 프리드를 잡는 일도 도와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15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무거운 사건이었다.

적어도 그녀 혼자선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사건이었기에, 그녀가 더욱 성숙해질 때쯤, 마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까스로 멘탈을 다잡은 크래커는 눈물을 닦으며 씩씩하게 웃었다.

"약한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자, 크래커도 기운을 되찾았으니, 오늘의 컨텐츠 시작하겠습니다!"

***

"김수에 관한 건은 어떻게 됐나?"

"죄송합니다. 접촉하려고 해도 무언가에 의해 막히는 상황입니다. 아마 그를 보호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복잡하게 됐군."

강룡은 김수와 협상을 하기 위해 고가의 아티팩트와 물약을 선물로 보냈지만, 협상은커녕 머리카락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보고만 들려왔다.

처음엔 수행원들이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수행원들도 강룡이 직접 엄선해서 키운 최고의 인재들.

그런 인재들이 찾지 못할 정도면 적어도 보통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강룡은 그를 단시간에 최강으로 끌어올릴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화를 하지 못한다는 점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아, 전에 지시하신 C급 헌터를 호출 했습니다만, 방으로 불러와도 괜찮겠습니까?"

"김수와 함께 사냥을 했다던 그 헌터 말인가? 당연하지. 어서 불러오게."

수행원은 강룡의 허락을 맡자, 귀에 낀 호출기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날카롭게 생긴 미녀가 천천히 방으로 입장했다.

"C급 헌터, 강지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 격식 차리지 말게. 같은 청룡 길드면 가족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럼.."

강지아는 강룡 앞에 있는 의자에 마주 앉았다.

한국 최강의 길드를 책임지는 수장과 마주 앉아 있다 보니, 강지아는 몸이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허나 강룡은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본래 목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김수군과 함께 사냥을 했다고 들었는데.. 자네가 보기엔 김수군의 평가는 어떤 거 같나?"

"김수.. 그는 확실히 D급에 있을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공격이면 공격, 보조면 보조.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만능 헌터였죠. 길드장님께서 선택하신 주하민 헌터마저 그에게 벽을 느낄 정도로 격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강룡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S급 재능을 가진 인재.

그런 자의 근처에 있다면 벽을 느끼지 않으려고 해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강룡을 잠시 응시하던 강지아는 말을 이어갔다.

"보고서의 내용대로 김수가 없었다면 저희 파티원은 전멸했을 것이며, 저희 파티원들은 김수에게 하나같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길드장님께 감히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뭐지? 말해보게."

"어째서 저를 호출하신 겁니까? 이런 간단한 내용쯤은 보고서에 전부 적혀 있었을 텐데요."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군."

강룡은 잠시 눈을 감더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마저 위엄이 넘쳤던 터라, 강지아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김수를 청룡 길드로 영입할 생각이네. 하지만 김수와 접촉을 하려고 해도 전혀 할 수 없었지. 마치 무언가에 막히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자네가 보기엔 김수에게 약점을 잡을만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 약점을 이용해 접촉하고 싶다만."

"약점이요..?"

약점.

그 완전무결해 보이던 사내에게 약점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봤지만. 약점이라고 말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단 하나.'

약점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약간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그가 던전에서 유일하게 과한 호의를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죽기 직전인 주하민 헌터를 구하기 위해 그 위험한 몬스터 웨이브를 뚫어버렸으며, 검이 망가진 그녀를 위해 새로운 검을 장만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검을 망가트렸는데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강룡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

승산이 생겼다.

그 생각이 든 강룡은 눈앞의 강지아에게 확인차 말을 던졌다.

"그 말은.."

"네. 김수는.. 주하민 헌터에게 반한 모양입니다."

21화

"C급 헌터 승격 확인 완료됐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지난번 히든 보스를 잡았을 때, 예상했던 대로.

내 헌터 등급은 C급으로 승격됐다.

내심 B급 승급을 바라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던 모양이다.

어차피 등급이야, 승격전을 치러서 올리면 되는 문제이니, 큰 신경 쓰지 않았다.

"헌터로 각성하신 지, 반년도 안되셨는데, 벌써 C급이라니.. 엄청난 성장 속도시네요!"

"평균적으로 빠른 편인가요? 저는 솔직히 체감이 잘 안 가서요."

그냥 승격전을 치러서 올리기만 한다면 보통 1년 안에 B급은 올라갈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안내원의 표정을 보면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보통 사람들은 D급이라는 등급으로 승급하는데 1년 정도 걸립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김수 씨는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죠."

"그 정도였다니.."

솔직히 D급은 각성하고 시험만 보면 대부분 붙는 줄 알았다.

내가 그랬고, 승격전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정도라니?

"게다가 C급에 올라가지 못하고 D급에서 평생을 머무는 사람들도 잔뜩 있습니다. 그러니 김수 씨는 자신에게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싶긴 하지만, 성좌넷의 시청자들이 보기엔 나는 그저 송사리에 불과하다.

심지어 한낱 빌런에 불과한 크래커에게도 패배할 뻔한 것을 보면 자부심을 가지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안내원의 칭찬에 안주하기보다는 더욱 분발해야 하는 시기인 만큼, 나는 그녀에게 던전에 대한 정보를 더욱 뜯어내자고 마음먹었다.

"아, 참! 김수 씨, 그 이야기 아시나요?"

"어떤 이야기 말이죠?"

"최근에 사람을 잡아먹는 던전이 생겼다는 이야기요! 난이도는 C급 던전인데, 지금까지 그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헌터가 없을 정도로 위험한 던전이죠."

그런 던전이 있다니, 그럼 A급 헌터가 나설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아니면 던전 자체를 폐쇄하거나.

어째서 그 던전을 방치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내원은 마냥 방치하는 게 아니라는 듯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 던전의 수용 인원은 총 20명. 그 중, A급 헌터 2명이 던전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던전은 클리어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죠."

"그럼 S급 헌터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국에는 S급 헌터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S급 헌터들의 몸값은 워낙 비싸서, 이런 일로 호출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부를 수 없다라..

이거.. 방송으로 송출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지.

하나의 컨텐츠도 아쉬운 지금, 내 앞에 좋은 컨텐츠가 놓여 있는 셈이니까.

"설마 그 던전에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요. 저도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사람이거든요."

들어갈 거지만 말이다.

그래도 안내원에겐 괜한 걱정을 끼치긴 싫었다.

나는 C급 헌터 승격을 마친 다음, 간단한 인사를 하고 협회를 나섰다.

'이런 좋은 컨텐츠가 있는데, 포기할 바보가 어디 있겠어?'

***

"그래서.. 그 던전에 꼭 들어가고 싶다는 거예요?"

나를 어이없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주하민과 강지아.

그런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인맥은 필수였다.

이제 막 헌터가 된 나에겐 인맥이라고 해봤자, 청룡 길드 마스터나 강지아, 주하민이 끝.

강룡을 만나는 것은 부담되기에, 나머지 두 명에게 부탁했다.

"김수 씨,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던전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예요. 다시 생각하면 안 될까요?"

"이미 정한 일입니다."

하민은 내게 걱정이 실린 눈빛을 보냈지만, 지금 뜨거워진 내 방송의 텐션을 이어가기 위해선 자극적인 컨텐츠는 필수였다.

게다가 사람을 잡아먹는 던전이라는 이야기는 그 어떤 시청자들도 들어본 적 없을 터.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번 기획은 이어가고 싶었다.

"일단 네가 말한 던전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심각한 일이던데?"

강지아는 내게 자료를 넘기며 심각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건넨 자료는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기에 한눈에 파악하기 쉬웠고.

나는 천천히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던전에 들어간 파티는 강산 길드의 유망주가 꾸린 파티라..'

강산 길드이 유망주인 한지성이 꾸린 파티는 그 던전에 들어간 뒤, 연락이 끊겼다.

C급 던전이기에 공략까지 하루도 안 걸리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들은 무려 2일이 지나도 던전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던전 입장 인원도 4명에서 2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낀 강산 길드는 A, B급 헌터들을 선별하며 구출대를 보냈지만, 그 구출대마저 던전에 고립, 일은 점점 커졌다고 적혀 있었다.

"확실히 위험하긴 하네요."

무려 B급 헌터들이 파티를 짜서 들어갔는데도 던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그 A, B급 헌터가 들어간 후로도 매일 한 명씩 입장 인원이 줄어든다는 것은 분명 던전에 이상한 장치 같은 것이 있다는 뜻.

일반적인 힘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강산 길드는 결국 협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구출대야."

강지아는 아메리카노를 쭉 빨면서 나를 가리켰다.

내가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그 구출대에 들어가야 했으며.

구출대의 역할은 던전 파괴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식량 전달도 있었다.

결국 협회도 그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바치는 셈이었다.

"구출대는 자살특공대나 마찬가지인데, 진짜로 가야겠어?"

"맞아요. 김수 씨는 그런 곳에서 죽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괜찮아요. 제 실력은 잘 아시잖아요? 설령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방법이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긴 하지만.."

그녀들은 내 강력함을 몸소 느껴본 사람들이기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간곡히 부탁하니, 하민은 본인이 직접 강룡에게 이 일을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강룡이라면 내 재능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이번 일을 시험의 장으로 이용할지도 모른다.

"이번 일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둘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한 뒤, 카페를 나왔다.

***

"새벽에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핸드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 키냐?

-오늘은 뭐하게?

-이번에도 시참?

"오늘은 납량 특집입니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저음을 내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오히려 우습다는 듯이 채팅을 치기 시작했으며.

괜히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으며 방송을 진행했다.

"오늘은 사람을 먹는 던전으로 유명한 곳에 들어갈 겁니다."

-사람을 먹어?

-핸드는 맛없어서 뱉을 듯 ㅋㅋ

-가서 죽는 거 아니냐?

"에이, 형님들 계신 데, 제가 죽겠습니까? 위험할 땐..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장난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하나의 거짓 없는 본심이었다.

정말로 이번 방송은 위험했기에, 여차하면 바트나 시청자들의 도움을 빌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미리 시청자들에게 보험을 깔아 뒀다.

"이 던전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루에 한 명씩 내부에 있는 헌터가 죽어 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하루에 한 명씩 던전에 조사원을 보내는 중이죠. 그리고 오늘 제가 그 조사원으로 들어갑니다!"

조사원의 자리를 따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안내원은 분명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무작정 던전을 밀고 들어간다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사용한 방법은 바로 낙하산.

'주하민과 강지아 덕에 조사원 자리를 따낼 수 있었지.'

그녀들이 없었다면 손가락을 빨면서 던전의 문제가 해결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을 것이다.

청룡 길드의 길드원 두 명의 힘으로 조사원의 자리를 따낸 이상, 이번 방송은 꼭 성공시켜야 했다.

"자, 그럼 곧 자정이니, 준비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한 대로, 생존 도구를 잔뜩 들고 온 나는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던전의 입구에 손을 대자 [20/20]이라는 입장 인원수가 표시되었고.

자정이 되자마자, 이야기대로 [19/20]으로 인원수가 줄어들었다.

-소름;

-진짜 들어가냐? 나 무서운 거 못 본단 말야;

-그럼 거울도 못 보겠네 ㅋㅋ

-야, 윗놈 어디 사냐?

시청자들의 채팅 덕에 긴장이 풀린 나는 망설임 없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

"X발.. 대체 이 던전에서 해방해 줄 헌터는 언제 오는 거야?"

"S급 헌터를 부르라고.. 망할 각성자 협회 새X들아!"

정신을 놓은 것처럼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헌터들.

대다수의 헌터들은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던전에 처음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앞에는 19명의 헌터가 전부 시야에 보였으며.

몬스터로 보이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던전이 ㅈㄴ 협소한데?

-ㄹㅇ; 그냥 공간이 하나뿐임;

-그냥 감옥 같은데..

보통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보스 몬스터를 잡고 나타나는 포탈을 통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

허나 여기엔 몬스터 자체가 없기에 포탈도 없었다.

어째서 단 한 명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멀뚱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

"자네가 이번 구출대인가.."

몰골으로 내게 다가오는 중년 남성.

아마도 그는 내 전대 구출대인 모양이다.

그 증거로 구출대들이 받는 뱃지와 함께, 협회에서 지급하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장비가 사용되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구출대로 들어온 C급 헌터 김수입니다."

"나는 C급 헌터 김형만이라고 하지. 그냥 형만 아재라고 부르게."

그는 나를 데리고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잡아 앉혔다.

"일단 어제 들어온 구출대는 죽었으니, 내가 대신 상황 설명을 해주겠네."

"네? 죽다니.. 그게 무슨.."

"자네가 들어올 때, 내부 인원이 한 명 사라지지 않았나? 그자가 바로 자네 전대 구출대였네."

이런 미X!

어제 들어온 사람이 죽었다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어제 들어왔다면 정신적으로 크게 피폐하지도 않았을 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전대 구출대가 목숨을 잃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형만.

그는 천천히 내부 상황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자네도 알다시피, 이 안에는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없네. 물론 포탈도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이곳에 고립된 상태지."

"정말로 몬스터가 없는 게 확실합니까?"

"우리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공은 물론 던전 구석구석까지 전부 뒤져봤지만, 아무런 몬스터도 나오지 않았네. 아마 이건 확실할 걸세."

그럼 이 던전의 목적은 대체 뭐지?

어째서 이런 던전이 존재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이한 점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닐세. 자네가 봐도 이 던전은 매우 밝지 않은가?"

"확실히.. 벽 자체에서 빛이 나네요."

"하루에 한 번, 이 빛이 꺼지는 타이밍이 존재하네. 그리고 불이 꺼지면 랜덤으로 한 명이 사라져버리지."

"사라진다..? 그렇다는 것은.."

"그래, 불이 꺼지는 타이밍은 자정. 그 순간에 사람이 한 명 죽어버린다는 뜻일세. 무려 시체도 남기지 않고."

그렇다는 것은 정말로 던전이 사람을 한 명씩 삼킨다는 건가?

그럼 이 던전은 대체 어떻게 클리어하라는 말인가!

나는 절망감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김형만을 올려다봤고.

형만은 약간 맛이 간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어서 오게나. 사람을 먹는 던전에."

22화

"식량 배급받으세요!"

일단 구출대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식량 배급을 시작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부의 사람들을 체크 하는 것.

대부분 정신이 나갔지만, 생존 욕구는 그대로인 모양인지 고분고분 식량을 받아갔다.

그렇게 확인한 결과,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발견했는데.

맨 처음 4인 파티로 입장한 한지성이라는 헌터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뭘 꼬라봐? 설마 나 때문에 X 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한지성은 상당히 성격이 괴팍했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뒤에 있는 A급 헌터와 B급 헌터들이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그 탓에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헌터들도 있었다.

"식량 배급 중인가? 수고하는구만!"

약간 정신 나간 표정으로 웃는 김형만.

그는 비교적 이 19명 중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에 크게 벽을 두지 않았고.

그 결과 나와 계속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모든 식량 배급을 마친 나는 형만과 함께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던전의 정체가 뭘까요?"

-난 이미 알 것 같은데 ㅋㅋ

-ㄹㅇ~ 이 상황이면 무조건 '그거'잖아 ㅋㅋ

-? 나만 모르는 거냐?

"설마 이 상황에 대해 알고 계신 겁니까!?"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안 알려 줄래~

-남자는 홀로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위험하면 도와드림 ㅋㅋㄹㅃㅃ~

이 사람들이 진짜..

아무래도 당분간 시청자들의 도움을 받기는 그른 것 같았다.

난 괜히 시청자들의 손에 놀아난 것 같아서 불쾌감에 얼굴을 구겼고.

그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김형만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왜 그러세요?"

"들어 온 지, 이제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신에 이상이 생길 줄이야.. 젊은 나이인데 안타깝구만.."

"네..?"

"허어.. 증상이 더 심한 모양이군. 방금 자네 혼잣말을 했어! 정신 똑바로 차리게! 여기는 먼저 미치면 죽는 곳이야!"

아, 내가 시청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정신 착란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앞으로도 시청자들과 대화할 일이 많을 건데, 이런 식으로 미리 해결을 해놓으면 확실히 편할 터.

나는 괜히 심각한 표정으로 형만의 말을 긍정했다.

"무서운 던전이군요. 설마 저까지 이럴 줄이야."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언젠간 이 던전에서 나갈 수 있겠지."

그런 말을 하며 아련한 표정을 지은 형만은 애용하던 대검을 소매로 닦기 시작했다.

사냥할 몬스터는 없지만, 할 일이 워낙 없기에 본능적으로 하는 모양.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하기에 일단 던전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떤 원리로 벽에서 빛이 나오는지는 모르겠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의 실로 벽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방식으로 탈출하기는 불가능한 모양.

곧바로 천장을 바라보니, 그냥 평범한 돌로 이루어진 천장이었다.

'그렇다면 땅인데..'

이상하게도 땅은 축축한 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벌레나 지렁이 같은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푹신한 땅에서 잘 수 있다며 만족하고 있었다.

이래선 아무런 단서도 없지 않은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던전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한지성에게 다가가 질문을 했다.

"저기 시간 되십니까?"

"아니, 나는 지금 바쁘니, 꺼져라."

척 보기에도 아무런 행동도 안 한 채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지성.

대체 무엇이 이를 이토록 추악하게 만든 걸까?

아까 배급할 때부터 미리 이 심성을 알아봤던 나는 미리 챙겨뒀던 식량의 일부를 그에게 넘겼다.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놈이군."

내게 건네받은 식량을 받은 한지성은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는 본인도 나랑 비슷한 나이면서 거들먹거리는 것이 짜증 나게 느껴졌다.

순수히 부모님의 힘으로 좋은 위치에서 자리 잡은 주제에.

하지만 이런 내 불만을 토해낼 수 없었고, 나는 일단 질문할 것부터 물어봤다.

"이 밑의 흙을 파신 적 있으신가요?"

"흙? 한 40cm 정도 파본 적 있긴 한데,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지. 혹시 땅을 팔 생각이라면 헛수고니까, 하지 마라. 식량도 한정되어 있는데 굳이 힘 뺄 생각하지 말고."

"과연.. 답변 감사합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형만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한지성은 분명 흙을 파내본 적이 있다곤 했지만, 깊숙이 파진 않았다. 그 뜻은 땅의 끝까진 도달해본 적이 없다는 뜻.

곧바로 나는 가방에서 접이식 삽을 꺼낸 다음,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김수, 지금 뭐 하는 건가?"

"땅을 파는 중입니다. 혹시 밑에 무언가 있을까 해서.."

내 말을 들은 형만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손질하던 대검으로 같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설마 내 말에 찬동해줄지는 몰랐지만, 그도 이런 얼척 없는 일에 찬동할 정도로 절박하다는 뜻이었고.

나와 형만은 묵묵하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라인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역시 핸드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보낸 라인.

설마 이 행위가 정답이라는 말인가?

괜히 그 메시지에 힘을 받은 나는 더욱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선 우리를 보며 비웃기 시작했고,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을 내뱉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설마 벌써 미칠 줄이야. 기록 갱신이군."

"땅 파서 도망이라도 치려고 그러나?"

"게다가 삽을 미리 챙겨왔군. 밖에서 인력이라도 했던 모양이지?"

그런 헌터들의 조롱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땅을 파내기 시작했고.

어느새 우리는 삽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흙의 가장 밑바닥인 땅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땅에는 이상한 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건..?"

"그, 글자다! 땅에 글자가 있다!"

흥분에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형만.

역시나 흙의 가장 밑에 이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파낸 곳은 던전의 극히 일부.

단편적인 글자만이 존재하기에 정확한 메시지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때.

"뭐?!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고!?"

소문을 들은 한지성이 헐레벌떡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곤 글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표정을 싹 바꾸며 거만하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지! 지금 뭐 하냐! 다들 땅 안 파고!"

땅을 파는 건 헛수고라고 말하던 한지성은 말을 싹 바꿨다.

***

"그쪽! 놀지 마라!"

"어이, 평생 던전에서 썩고 싶은 건 아니지? 더 열심히 파라!"

땅에 글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한지성은 마치 자신이 리더인 것처럼 사람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헌터는 그의 뻔뻔함에 이를 갈았지만, 그를 두둔하는 A, B급 헌터들 때문에 내색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파벌로 보이는 7명의 헌터들은 땅을 파지 않은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그 탓에 다른 헌터들의 작업 능률은 크게 떨어졌다.

-저 새X들 마음에 안 드네?

-글자 찾아낸 건 핸드인데, 왜 저 새X가 생색 부리는 거임?

-지건 마렵다..!

시청자들도 한지성의 태도가 워낙 거슬린 모양인지, 격분의 채팅을 치기 시작했고.

이윽고 암살 의뢰 비슷한 미션까지 걸리기 시작했다.

[포르테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한지성 얼굴에 죽빵 꽂으면 10만 포인트!"

"아니, 포르테 형님! 지금 이 상황에서 한지성 얼굴에 죽빵을 꽂으라뇨! 저는 못 해요!"

지금 10만 포인트로 자살하라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내가 포인트에 미X 놈이라지만, 이건 좀 선이 넘은 미션이었다.

나는 포르테에 단호하게 거절한 뒤,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포르테님께서 1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그럼 50만 포인트. 이래도 안 해?"

"당연히 해야죠. 형님."

솔직히 한지성, 저 녀석이 고깝게 보이긴 했다.

무려 연장자들도 땀 흘리며 땅을 파고 있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놀아?

모든 연장자 헌터들을 대변해서 혼구멍을 내 줄 시간이 찾아왔다.

"저기 한지성 씨?"

"아, 네가 분명 글자를 발견한 헌터였지? 아주 잘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지?"

"이 넓은 땅은 20명의 헌터가 모두 일을 해야만 파낼 수 있을 정도로 넓지 않습니까? 한지성 씨 파티도 땅을 파는 데에 거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만."

"뭐? 지금 이 녀석이 뭐라는 거야?"

자기가 잘못 들은 것처럼 귀를 파기 시작한 한지성.

어떻게 이토록 얄미울 수가 있는가?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내 말에 양심이 찔린 건지 표정이 썩 밝지 못했다.

"너 죽고 싶냐? 지금 내 뒤에 헌터들 안 보여? 내가 손 한 번 까딱하면 넌 바로 죽는 거라고."

"그렇게 일하기 싫으신 겁니까? 아님.. 자신의 체력이 약한 것을 숨기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뭐라고 했냐?"

"지금 한지성 씨가 땅을 안 파는 이유가 체력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닌가? 라고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외에는 딱히 이유가 생각이 안 나는군요."

내 말에 발끈한 한지성.

그의 동료인 젊은 검사가 검을 뽑았지만, 한지성이 그를 손으로 막았다.

그러고는 내게 호기로운 눈빛을 보내며 검을 꺼냈다.

"그 말은 즉, 내가 약하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다만 오랜 던전 생활로 인해 몸이 약해지신 건 아닌지.."

"적어도 네 놈 하나쯤은 가볍게 베어낼 정도의 힘은 있다!"

"그렇다면 시험해보시겠습니까?"

"시험?"

"저와 한지성 씨, 단둘이서 대결을 펼치는 겁니다. 제가 이긴다면 한지성 씨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도 모두 땅을 파는 작업을 도와주시죠."

"그럼 내가 반대로 이기면 네 목을 가져가겠다."

예상대로 도발에 넘어온 한지성.

나는 저런 유형의 인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경우 보통 피해망상이 심하며, 자신이 모욕당하는 일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나는 그런 부분을 노렸고, 무사히 그와의 대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오늘 송장은 무려 두 개나 치우겠군."

"아뇨. 저는 한지성 씨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네 놈의 송장을 말하는 거다!"

나는 그를 도발하며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영롱하게 빛나는 마력의 실은 순간, 헌터들의 시선을 빼앗았고.

내가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한지성이 선공에 나섰다.

"이제 후회해도 늦었다!"

번쩍거리는 장비를 토대로 빠른 공격을 이어가는 한지성.

그의 롱소드는 머리, 심장, 명치 등등.. 여러 급소를 향해 빠르게 베어졌고.

나는 그 모든 공격을 마력의 실로 튕겨냈다.

그의 공격이 내게 닿은 일은 없었으며, 나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만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땅을 파셔야 할 텐데, 체력은 최대한 비축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 개자식이 진짜!"

내 말을 들은 한지성이 검은 더욱 빨라졌다.

아버지의 낙하산도 있지만, 본인의 실력도 나름대로 쓸 만했기에 적어도 B급 헌터 수준의 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너무 약하다.'

지금의 나에게 닿은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익힌 스킬과 여러 경험.

무엇보다 한지성의 부족한 실전 경험.

이런 온실 속 화초는 나에게 절대 닿을 수 없었고, 그걸 눈치챈 다른 헌터들도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한지성은 공격하는 것에 몰두하여 자신의 빈틈을 눈치채지 못했고.

내 목을 노리는 공격에서 몸이 크게 흔들린 한지성은 비틀거리며 틈을 보였다.

"끝났어."

A급 헌터라고 소개된 그는 더 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고.

내 주먹은 한지성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그 찰나의 순간, 한지성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어 갔으며.

나는 그런 그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50만 포인트."

23화

"X발.. 어째서 내가..!"

궁시렁 거리며 땅을 파는 한지성.

그는 C급 헌터에게 패배했다는 굴욕감과 던전의 영원한 갑인 자신이 땅을 파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약속이고, 그 약속은 한지성, 김수를 제외한 모든 헌터들이 들었기에 물릴 수 없었다.

"찬성이 형. 저 새X 저대로 둘 겁니까?"

한지성은 A급 헌터인 정찬성에게 하소연하듯이 징징거렸다.

하지만 정찬성은 그런 한지성의 머리에 손을 툭 올리더니,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차피 헌터들의 사기를 위해선 우리가 나서는 게 맞아. 게다가 글자를 발견한 사람도 저 사람이잖아?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아마 저 사람은 A급인 나보다도 던전에 해박한 것 같아. 그러니 묵묵히 저 사람 말을 따르자."

"말도 안 돼요! 어떻게 C급 나부랭이가 A급인 형보다 던전에 대해 잘 아냐고요!"

"그것에 관해 내가 아까 들은 게 있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저 김수라는 사람은 청룡 길드의 낙하산으로 이 던전에 들어온 모양이야."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한지성.

청룡 길드란, 대한민국 헌터 길드 랭킹 1위에 빛나는 명실공히 최강 길드였다.

그 길드에 소속된 길드원들은 하나같이 정예 수준이며, 한국의 최강 헌터도 청룡 길드 소속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청룡 길드의 낙하산이라니, 고작 중견 길드인 강산 길드의 낙하산인 한지성과는 격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 어떡하죠? 처, 청룡 길드라니.."

"어떡하긴. 이제 우리도 협조적으로 움직이면 되는 거지. 애초에 우리는 김수 헌터의 말대로 행동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얼굴이 구겨진 채로 땅을 파는 한지성.

강산의 길드원들이 땅을 파지 않은 것은 전부 한지성의 입김이 있기에 그랬던 것이다.

한지성의 아버지는 은퇴한 전 A급 헌터였는데, 사회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강산 길드 마스터의 숨통을 쥐고 있는 거물이었고.

그걸 이용한 한지성은 티는 안 내지만, 강산 길드원을 물건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번처럼 강산 길드원들은 한지성 때문에 큰 창피를 당했고.

한지성은 자신의 길드원들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실린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저 개자식이.. 청룡 길드를 믿고 그렇게 나댄 거였어? 어디 한 번 두고 보라지!'

김수에 대한 원한을 더욱 불태운 채로 분노의 삽질을 이어갔다.

***

"드디어 다 팠다!"

"땅만 팠는데, 대체 몇 시간이 걸린 거야?"

"흙을 처리해줄 마법사가 없었으면,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몰라."

나의 지휘하에 체계적으로 삽질을 이어간 헌터들.

그 결과, 땅의 모든 흙을 파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들은 모든 흙을 파낸 뒤, 대자로 퍼져버렸는데.

그 사이, 나는 땅에 전부 드러난 글자들을 천천히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한글도, 영어도, 중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정체 모를 문자.

이 문자가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는 힌트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문자를 해석하지 못해선 땅을 파낸 이유가 없었고,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종이에 적은 문자를 방송에 송출했다.

시청자들이라면 분명 이 문자에 대해 알고 있을 터!

실낱같은 희망을 쥔 채로 시청자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건 대체 뭔 글자냐?

-어제 낚시할 때 사용했던 지렁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냥 헛수고한 거 같은데..

믿고 있던 시청자들마저 낯선 글자에 대해 알지 못했다.

절망스러운 상황.

헌터들도 처음 보는 글자에 당황한 건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글자라고..?"

"여기 해외 유학 출신 헌터 있나!?"

"머저리야! 이게 외국어로 보이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던전.

겨우 던전에 대한 힌트라는 것으로 헌터들이 단결된 참인데, 이대로라면 금방 분열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때.

[라인님께서 10000P를 후원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자신과 마주친 자는 어김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내 큰손 중, 한 명인 라인이 영문 모를 메시지를 후원으로 보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그녀는 보통 이상한 후원을 할 때면, 백이면 백, 성희롱 원툴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낸 메시지는 평소와 동떨어진 정상적인 메시지이었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이 던전에 적힌 글자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조용!"

던전의 메시지 내용을 알아냈으니, 이제 이 내용을 모두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선.

나는 모두가 잘 들리도록 근강술을 목에 사용하여 큰 소리로 메시지를 읽었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어떻게 이 글자를 읽은 건지 의심했으나, 처음 메시지를 발견한 것도 나이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사실은 그저 작은 희망이라고 믿고 싶은 거겠지만.

"이 던전에 밑에 쓰여 있는 내용은 방금 그게 다입니다. 이제 이 메시지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우선인데.."

솔직히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또 하나의 자신과 마주치면 죽는다니.

직관적인 메시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아리송한 메시지는 헌터들에게 큰 혼란을 줬다.

그렇게 각각 추측을 시작한 헌터들은 서로 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말이 맞다고 소리쳤고.

나는 그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금 근강술을 사용했다.

"모두 조용히! 각자 추측을 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래선 의사소통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저는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래선 아무런 진척도 없을 것이다.

서로의 의견을 헐뜯고 힐난하는 것보단 각자 머리를 식히고 자신이 생각한 메시지의 의미를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고.

헌터들도 내 의견에 찬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3시간. 3시간 동안 이 메시지에 대해 잘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정말로 이 던전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던전에서 나갈 수 있다는 말에 눈을 빛내는 헌터들은 고개를 부서질 듯이 끄덕였고.

겨우 교통정리를 끝낸 나는 형만의 옆으로 돌아와 한숨을 쉬었다.

"멋진 리더쉽이군. 어린이 웅변 대회라도 나갔었나?"

"설마요. 그냥 살기 위해서 몸이 움직인 거죠."

"그래서.. 자네는 이 메시지의 뜻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추상적인 내용이라니.

그간 몬스터만 잡으면 끝이었던 던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방식이라 머리가 아팠다.

어쩌면 시청자들이 내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바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림도 없지 ㅋㅋ

-이미 답은 알고 있지만, 핸드는 더 굴러야지 ㅋ

-아, 참 ㅋㅋ 핸드야 너 자정 12시 전에 거울 하나 챙겨 둬라 ㅋ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포인트 상점에서 거울을 구매했다.

성좌넷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빼내지 못한다면 직접 알아낼 수밖에.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메시지의 문장을 머릿속에서 음미했다.

그때 형만이 내 위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주며 말했다.

"좀 쉬게나. 던전에 오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줄 걸세."

"하, 하지만.."

"자네는 한지성과 대결을 펼치고, 땅도 가장 많이 팠네. 그런 자네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나?"

확실히 슬슬 피곤하던 참이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바로 깨워주겠지.

나는 형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지금 몇 시지?!"

잠에서 깬 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사람들은 메시지에 대한 추측을 차례대로 발표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그 메시지의 뜻이 유령계 몬스터인 고스트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어떤 자는 고스트가 아닌 뱀파이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눈치챈 헌터들은 일제히 내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똘똘이가 깨어났다고!"

"잘 잤냐? 똘똘이!"

그들을 처음 봤을 때는 반 정도 미친 사람처럼 퀭했는데, 지금은 눈가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만큼 이야기에 진척이 있었던 모양.

게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똘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생겨났다.

옆에서 형만이 쿡쿡 웃는 것을 보니, 이 사람 작품인 모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중재를 시작했다.

"다들 이야기는 충분히 나누셨습니까?"

"일단 제일 신빙성이 높은 가설은 고스트. 두 번째로 높은 건 뱀파이어다."

고스트와 뱀파이어.

이유를 들어보니, 고스트는 실체가 없기에 던전의 벽면을 통과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모습을 따라할 수 있기에 신빙성이 높다고 말했다.

두 번째 가설인 뱀파이어는 그림자에 숨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뱀파이어는 현혹을 사용할 수 있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능력을 사용해서 뱀파이어 자신을 또 다른 자신으로 착각하게 만든 뒤, 으슥한 곳으로 유인한 다음 피를 빠는 모양.

둘 다 그럭저럭 신빙성이 있긴 했지만..

'뭔가 아니야.'

적어도 이 두 가지 가설은 틀렸다고 머릿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게다가 성좌넷 채팅창도 평온한 것을 보면 저 두 가설은 100% 엇나간 것이며,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메시지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자신.. 그리고 자정 때마다 사람이 죽는 것. 마지막으로 성좌넷 시청자가 조언한 거울.."

이 세 가지 단서를 조합해서 생각하니, 한 가지 속담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과 만나면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존재를 우리는 도플갱어라고 불렀다.

"여러분.. 드디어 답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똘똘이가 뭔가를 알아냈댄다!"

"똘똘이라면 믿을만하지!"

내 말에 환호하며 귀를 기울이는 헌터들.

평범한 헌터들은 물론이고, 한지성 패거리들도 집중할 정도로 내 발언권의 힘은 컸다.

나는 던전의 중앙에 선 다음, 도플갱어의 속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은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감탄하기도 했고.

내 말이 맞다는 듯이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이 던전은 도플갱어를 찾는 겁니다. 이 던전에 몬스터가 없던 것도 이미 사람들 속에 도플갱어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자정마다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도플갱어가 삼킬 수 있는 인원수는 하루에 단 한 명. 게다가 시체조차 안 남는 것을 보면 이 가설은 틀림 없을 겁니다."

드디어 풀린 던전의 비밀.

이것이 사람을 먹는 던전의 정체인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시청자들은 내게 축하한다며 후원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제 답을 알았으니, 도플갱어를 색출할 차례.

"모두! 무언가 이상 행동을 한 사람이나, 무언가를 본 사람 없으십니까?"

"나! 내가 뭔가 보길 봤어!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도플갱어라면 말이 달라지지!"

신이 난 듯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활을 든 헌터.

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어제 자정 12시에 사라진 녀석을 기억하지? 나는 그 녀석이랑 조금 친해진 탓에 가까이 있었거든? 그런데 12시가 되어가자, 어떤 헌터가 그 녀석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거야. 나는 별 신경 안 썼는데, 불이 꺼지고 주변을 살피자, 그 녀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어. 게다가 그 녀석에게 다가갔던 헌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던전의 구석에 있었지."

벌써 정답이 나온 건가!?

나를 비롯한 모든 헌터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제 접근한 헌터의 정체만 밝히면 모든 것이 해결이다.

"그 녀석의 정체는 바로.."

드디어 던전에서 나갈 수 있는 건가?

모든 헌터가 그의 목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괜히 불안감에 시계를 바라봤다.

그런데..

"여, 열두 시!?"

시간은 야속하게도 벌써 자정을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유일한 단서인 헌터가 도플갱어의 1순위 타겟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근강술을 이용해 던전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12시입니다! 모두 저 헌터를 보호하세요!"

그 순간, 누가 먼저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같이 활을 든 헌터를 향해 몸을 던졌고.

그와 동시에 던전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X발!"

도플갱어의 단서를 쥐고 있던 활을 든 헌터의 모습은 던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4화

"X발! 당했다!"

활을 든 헌터가 사라지자, 모든 헌터가 분하다는 듯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설마 5초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시간에 사람을 삼킬 줄이야.

지금까지 들은 내용이 있었지만, 직접 보니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들 움직이지 마!"

한지성의 외침과 함께 던전에 있는 모든 헌터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번 일로 인해 던전에 도플갱어가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변했다.

그렇다면 다음은 도플갱어를 색출하는 것.

그런 부분에서 한지성의 판단은 어느 정도는 옳았다.

"중앙에 가장 가까이 있던 헌터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활을 든 헌터가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헌터들이 도플갱어일 확률이 가장 높았고.

나는 그의 행동을 잠자코 듣기 시작했다.

한지성은 나를 한번 흘끔 쳐다보더니, 마치 자신이 하는 거나 잘 보고 있으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현재 실종된 헌터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놈들은 총 4명이다. 전부 이름을 대라!"

그러자 그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강진수, 박천학, 김진태, 그리고 김형만.

이렇게 총 4명이 도플갱어 유력 후보자들이었다.

다른 헌터들은 그들을 마치 오물을 보듯이 바라봤고.

어떤 자는 그 4명을 전부 죽인다면 던전에서 나갈 수 있다며 소리쳤다.

그러자 한지성은 그 말이 타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전부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

허리춤에 걸쳐 있던 검을 빼든 한지성.

나는 그의 어처구니없는 짓에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또 네놈이냐? 지금까진 네 말이 옳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말이 옳다! 이 4명만 죽인다면 우린 이 지긋지긋한 던전에서 나갈 수 있단 말이다!"

"제정신입니까?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겠다니! 확실히 그들이 실종된 헌터와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도플갱어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현재 던전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도플갱어를 찾아낼 때까지 한 명씩 죽여나갈지도 모르는 상황.

이 사람들에겐 냉정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지성은 끝까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았다.

"설마 4명 중에 김형만이 섞여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김형만은 네가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붙어 다녔으니까."

"그, 그건.."

확실히 그런 이유도 있었다.

유일하게 던전에서 처음부터 내게 협조적으로 행동했던 김형만이 도플갱어일 리가 없었고.

내 마음속에서도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도플갱어를 봤다고 주장한 헌터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도플갱어는 불이 꺼진 사이에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면서 이렇게 행동하시다니,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랬지."

내 말에 찬동하기 시작하는 헌터들.

반대로 한지성의 얼굴은 크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선동을 하려 했던 것을 창피하게 느낀 것처럼 보였고.

반대로 그런 창피를 준 나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제일 수상한 사람은 한지성, 당신입니다. 이 던전에 최초로 발을 들인 파티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인 당신이 도플갱어일 확률이 가장 높죠. 게다가 방금의 성급한 결정이 제 가설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줬고요."

"뭐라고!? 이게 말이면 다인 줄 아나!"

한지성은 씩씩대며 내게 화를 내기 시작했고,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것처럼 화를 냈다.

나는 곧바로 마력의 실을 뿜어 그의 공격을 방어하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길드원인 A급 헌터가 한지성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지성아, 진정해라. 흥분할수록 불리해지는 건, 너니까."

"하지만.."

"네가 도플갱어가 아니라면 참아라. 그래야 이 지옥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김수라고 했나? 이래 보여도 내 지인이라서 말이지. 나는 내 지인이 억울하게 도플갱어로 몰리는 걸 그냥 보고 있지 않을 테니,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경솔한 발언은 삼가라."

"알겠습니다. 확실히 방금 제 의견도 막무가내였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와 한지성의 충돌은 일단락되었고.

중앙에 모여 있던 헌터들은 각각 자기 자리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지성의 파티를 제외하면 모든 헌터들은 누군가와 뭉치지 않고 따로 앉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도플갱어에게 언제 습격받을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인 모양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신감이 깊게 박힐 때쯤.

"안녕하십니까! 이번 구조대로 온 C급 헌터, 하수영입니다! 특기는 순간 기억입니다!"

새로운 구조대가 던전에 등장했다.

***

"일단 한지성과 A급 헌터는 도플갱어가 아니었습니다."

혼자가 된 나는 허공을 보며 방송을 진행했다.

내가 어째서 한지성과 A급 헌터가 도플갱어라고 확신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거울에 있었다.

-도플갱어는 거울에 비추어도 표정에 변화가 없지.

-확실히 현실에선 화를 내는 것처럼 보여도 거울 속에서는 표정 변화 없어라.

-그럼 계속 거울로 사람들 비추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니냐?

그들의 말대로라면 한지성과 A급 헌터는 절대 도플갱어가 아니었다.

한지성의 표정변화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격렬했으며, 거울 너머에서도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A급 헌터.

그도 한지성이 위협받을 때, 표정을 구겼는데, 거울 속에서도 그 모습은 변함없었다.

그렇다면 현재 확정적으로 도플갱어가 아닌 사람의 수는 총 4명.

한지성, A급 헌터, 나,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임수영뿐.

나머지 16명이 모두 도플갱어 후보라는 소리였다.

"진짜로 16명을 전부 거울로 비추어보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어서 말이죠."

그들에게 억지로 웃으라고 한들, 정말로 웃을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처음 던전에 들어와 단서를 찾았을 때, 거울을 비추었다면 진작에 도플갱어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상황은 어제보다 크게 나아졌기에 힘을 냈다.

-야, 한지성이 계속 너 노려보는데? ㅋㅋ

-무슨 사달 일어나는 거 아님?

-내가 보기엔 언제 한 번 찌를 듯 ㅋㅋ

시청자들의 말대로 한지성은 나를 마치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니, 눈을 피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사방이 적일 수가 있는 건가?

나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선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일단 상대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우선.

"도플갱어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도플갱어의 능력은 총 두 가지, 하나는 사람을 먹고 외관을 그대로 복사하든가, 아니면 그 사람의 능력을 일부분 복제함

-그래서 도플갱어가 피곤한 이유지.

-심지어 그 사람의 습관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어서 지인이라도 눈치 절대 못 챔 ㅋㅋ

그렇다면 내 전대 구조대는 능력을 복제 당하고 죽은 건가?

지금 이 던전에 사람이 갇힌 지 2주가 넘었으니, 도플갱어도 제법 스킬과 힘을 비축해뒀을 터.

도플갱어를 찾고 나서도 고생 확정이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주변 헌터들이랑 함께 싸울 테니, 괜찮을 테지만.

"대체 어떻게 도플갱어를 찾아야 할까?"

이 막막한 상황에 답답함을 느껴 머리를 쥐어뜯고 싶던 그때.

"이거라면..?"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

나는 던전 한쪽 벽면에 선 뒤, 모든 헌터들을 내 앞에 세우기 시작했다.

획기적인 방법이 떠오른 나는 헌터들에게 협조를 부탁했고,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가 있던 탓에 고분고분 내 말을 들어줬다.

그리고 내 바로 옆에 있는 임수영.

그녀는 마치 작은 동물처럼 떨며 내게 질문을 했다.

"저, 정말로 제가 도움이 되나요..?"

"물론이지.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이번 작전에선 임수영의 역할이 크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만 잘해준다면 도플갱어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터.

모든 헌터가 앞에 모인 것을 확인한 나는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지성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사람들을 세워두고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지?"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마시죠. 이게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나는 일부러 여유롭다는 것을 어필하며, 그들의 앞에서 연기를 했다.

그 후, 임수영이 가져온 배낭을 꺼낸 다음,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란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배식 시간인가? 라고 중얼거리며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오늘부터 모두 굶을 겁니다."

식량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식량은 단단한 용기에 담겨있었지만, 헌터의 근력을 버텨내진 못했고.

그대로 내용물을 쏟으며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헌터들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귀중한 식량을..!"

어차피 도플갱어라는 존재를 알아챈 이상, 이 던전에 오래 머물면 위험했다.

그건 헌터들도 잘 알고 있을 터.

그렇기에 식량의 존재는 더 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분한 상태이기에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나는 이어서 다른 식량들도 모조리 짓밟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거울 구매."

던전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거울을 포인트 상점에서 구매했다.

내가 생각해낸 작전은 이랬다.

방금까지의 헌터들은 무표정한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강제로 그들을 흥분시킨다면?

싫으나 좋으나 도플갱어도 억지로 화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해낸 작전.

'이름하여, 어그로 대작전이지!'

-핸드가 어그로 하나는 ㅇㅈ이지 ㅋㅋ

-나도 핸드 어그로 때문에 애청자 됐자너 ㅋ

-이번만큼은 착한 어그로 ㅇㅈ합니다.

갑작스러운 거울의 등장으로 인해 당황한 헌터들.

이미 그들의 표정은 분노가 아닌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고, 짧은 순간에 많은 사람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임수영의 특기인 순간 기억은 거울이 소환되는 그 찰나의 순간, 모든 사람의 표정을 기억해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유일하게 화를 내지 않고 있는 인물.

이상하리만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그리고 약 10초가 지나자, 임수영의 손이 한 인물을 향해 가리켜졌다.

"저, 저 사람이에요!"

나는 곧바로 임수영의 손이 향한 방향으로 달려나갔고, 그곳에 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해보니, 한지성의 옆에서 나에게 검으로 위협했던 젊은 검사였다.

나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이 웃었고, 그자의 목을 움켜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구나?"

드디어 사람을 먹는 던전의 주인을 찾아냈다.

25화

"드디어 찾았다. 도플갱어!"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자신의 길드원이 공격 당했다고만 생각한 한지성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것과 별개로 도플갱어로 지목당한 헌터는 매우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한지성을 제외한 모든 강산 길드원이 나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기행이지? 정신이라도 나가버린 건가?"

"방금 말했잖습니까? 이 녀석이 도플갱어라고."

그나마 나와 대화할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A급 헌터.

그는 내 말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치 증거를 내놓으라는 듯이, 나를 향해 무기를 더 가까이 겨누었고.

나는 내가 소환한 유리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도플갱어를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거울에 비추면 알 수 있죠."

나는 내가 짠 작전과 이 사람을 도플갱어로 확신한 이유를 천천히 설명을 했고.

그는 납득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지성만이 분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지금 우리 강산 길드원을 도플갱어라고 모함하는 거냐!"

"모함인지, 아닌지는 직접 보면 알겠죠!"

나는 마력의 실로 도플갱어의 이마를 관통하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마치 점토처럼 흐물거리더니, 속박에서 순식간에 빠져나왔고.

어느새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몸을 이동한 후였다.

그 모습을 목격한 헌터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악했다.

"설마 진짜로 도플갱어일 줄이야!"

"똘똘이.. 대체 정체가 뭐야!?"

"한지성, 저 머저리 같은 녀석은 도플갱어를 감싸준 셈이군."

"쉿! 들을라!"

순식간에 뒤바뀐 여론.

나에게 무기를 겨누었던 강산 길드원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고.

그 리더인 한지성의 표정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하지만 이렇게 멍하니 있을 틈은 없다.

"모두! 이 도플갱어는 지금까지 죽인 헌터들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전투를 레이드라고 생각하시면서 싸우셔야 합니다!"

"레이드? 그건 우리 전문이지!"

내 말에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헌터들.

탱커들과 딜러들은 각각 익숙한 자리에 포지션을 잡기 시작했고, 나를 적대하던 강산 길드원들도 빠릿빠릿하게 레이드 준비를 시작했다.

다만..

'한지성 상태는 별로군. 무언가를 기대하면 안 되겠어.'

창피를 당했다는 생각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한지성.

나는 그런 한지성을 내버려 둔 채로 도플갱어 레이드에 참여했다.

구석에 몰린 도플갱어는 먹었던 무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무기는 아까 삼켰던 헌터의 활이었다.

"고속 사격."

빠른 속도로 헌터들을 향해 화살을 쏘는 도플갱어.

탱커들은 그 화살을 받아냈지만, 마치 자동차에 치인 것처럼 방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화살을 발사한 건데 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로 이 정도면 레이드 보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ㅈㄴ 흥미진진하다 ㅋㅋ

-용언 마법으로 조지면 안 됨?

"용언 마법도 잡몹한테만 통하지, 보스 같은 녀석들한텐 안 통하더라고요. 아마도 저보다 강한 적한테는 안 통하는 모양입니다."

용언 마법으로 찢어버릴 수 있었다면 진작에 해냈다.

하지만 도플갱어는 19명의 헌터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함을 뽐내고 있었고.

맹렬히 빗발치는 화살을 두려워하는 딜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접근을 할 수가 없어!"

"마법사! 마법을 쏴라!"

"락 스톰!"

돌멩이로 이루어진 돌풍이 도플갱어를 향해 일시적으로 돌진했다.

그 위력은 마치 강력한 믹서기를 연상시켰으며, 제아무리 도플갱어라도 저 위력의 마법을 동시에 몸으로 받는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 방패..!? 저 방패는 분명, 또 하나의 A급 헌터였던 방태만의 방패였을 텐데..!"

도플갱어는 능숙하게 방패를 꺼내어 마법사들의 마법을 튕겨냈다.

아무래도 저 방패에는 마법을 튕겨낼 수 있는 효과가 있는 모양.

그 여파로 튕긴 마법은 그대로 마법사들에게 되돌아갔고.

그 결과..

"크아아악!"

그 마법에 적중당한 마법사들은 팔이 떨어져 나가거나, 신체 일부가 결손 되면서 쓰러졌고.

한순간에 3명의 헌터가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헌터들은 침을 꼴깍 삼켰으며, 특히 딜러들은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저,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너무 많은 사람을 먹었어. 우린 상대조차 안 될 거라고!"

우는소리를 하며 전투를 거부하는 딜러들은 탱커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뒤로 슬금슬금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방패 너머로 홀로 넘어갔다.

그다음, 근강술을 이용한 다음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최전방에 서겠다! 너희는 도플갱어의 빈틈을 노려라!"

그간 연습해온 비기를 보여줄 때가 온 모양이다.

나는 도플갱어와 싸우기 전에 미리 고급 무기술 스킬 세트를 사두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내가 연습한 비기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곧바로 마력의 실을 뿜어 무언가를 조형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내 손에는 마력의 실로 이루어진 검이 손에 들려 있었다.

"저, 저건.. 오러!?"

"똘똘이가 오러를 사용한다! 모두 용기를 가져라!"

내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곤 환호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건 오러와는 명확하게 다른 검이었다.

이건 단순히 마력의 실을 이용하며 모양을 만든 마력의 검.

오러와 비교하자면 부끄러울 정도로 경지가 낮은 검이었다.

하지만..

"네놈을 베어내는 데에는 충분하지!"

내 검은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휘둘러지더니, 파도처럼 도플갱어를 향해 휘몰아쳤다.

도플갱어는 신음을 하며 내 공격을 방패로 막아냈고, 곧바로 검을 꺼내 들더니 나를 향해 휘둘렀다.

묵직한 일격.

단 한 합으로 내 마력의 검은 파괴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파괴된 검을 다른 형태로 조형하기 시작했다.

그 무기는 바로..

"창이다!"

긴 리치를 이용해, 도플갱어의 검이 닿지 않는 곳에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뒤에서 용기를 가지고 달려온 딜러들도 도플갱어 사냥에 동참했고.

도플갱어는 약간의 신음과 함께 우리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총 7명의 딜러라.. 너희만 죽인다면 내 승리나 다름없는 거겠지?"

살벌한 표정으로 딜러들을 훑어보는 도플갱어.

그의 몸이 마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더니, 검을 쥔 팔이 비약적으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 그의 검이 딜러들을 향해 베어지자, 딜러들의 무기가 한순간에 파괴되었다.

"이, 이게 뭐야!"

"내 무기!"

"모두 진정해라!"

모두가 무기를 잃어 흥분한 가운데, A급 헌터가 탱커 라인을 넘어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포지션은 마법사.

절대로 최전방에 오면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전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에, 선택한 방법인 모양.

그는 있는 마법을 모두 짜내 딜러들에게 방어막을 발동시켰고.

도플갱어의 두 번째 참격은 그 방어막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커헉..!"

일부 방어막으로 커버하지 못한 딜러들은 몸이 반으로 갈라져서 죽음을 맞이하게 됐고.

보호막을 발동시킨 A급 헌터도 워낙 강력할 일격을 막은 탓에 입에서 각혈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건 위기가 아닌 기회.

방금 공격을 막아내면서 도플갱어의 몸에 빈틈이 생겨났다.

"제발 죽어라!"

나는 창에서 검으로 무기를 변환시킨 다음, 도플갱어의 목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고.

기계같이 내 공격에 반응한 도플갱어는 검을 치켜들어 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건 페이크다!"

마력의 검의 조형을 풀어 실로 변환시킨 나는 도플갱어의 머리를 향해 실을 뿜었다.

그러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도플갱어의 머리에 마력의 실이 다발로 박히기 시작했고.

도플갱어는 귀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때다! 다친 사람은 전부 뒤로 물러나!"

방금의 전투로 목숨을 잃은 딜러의 수는 총 3명.

그 3명을 제외한 딜러들은 재빠르게 탱커의 뒤로 모습을 숨겼고.

나는 그 자리를 꼭 지키며 도플갱어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해 집중, 또 집중을 했다.

-끝이네 ㅋㅋ

-아무리 사람을 많이 먹어도 도플갱어는 레이드 몹에 못 비비지 ㅋㅋ

-오히려 도플갱어한테 6명이나 죽은 게 신기할 정도;

또 본인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성좌넷 시청자들.

하지만 그들이 내 방송을 즐겁게 보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방송을 하면서 처음으로 실시간 인기 스트리머 순위에 올랐으며.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수의 시청자들이 내 방송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잘 도플갱어의 숨통만 끊어낸다면 성공적으로 방송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때.

"다 비켜! 내가 마무리 짓는다!"

저 멀리서 한지성이 자신의 애검을 든 채로 나와 도플갱어를 향해 뛰어들기 시작했다.

레이드에서 아무 공도 못 세워서 다급해진 건가?

그는 최소한의 경계도 하지 않은 채로 도플갱어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이 녀석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 넌 저리 꺼져!"

"마지막까지 이렇게 할 겁니까!?"

"흐흐, 이 녀석을 잡으면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내 말은 무시한 채로 혼자 상상의 나래에 빠진 한지성.

그런데..

'도플갱어의 상태가 이상하다..?'

시간이 갈수록 도플갱어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과 반대로 녀석의 몸이 엄청나게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패턴이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저거 설마..

-야! 한지성보고 빨리 피하라 그래!

-핸드는 거리가 있어서 괜찮은데, 쟤는..

시청자들이 말하기가 무섭게 도플갱어의 몸에서 검은색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한지성의 입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한지성은 구역질하면서 그것을 토해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던 건지 허망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 이건 대체.."

-도플갱어가 숙주를 바꾼 거다.

"숙주를 바꾸다니요! 분명 아까 헌터를 삼켰을 텐데.."

-숙주 바꾸는 스킬이랑 헌터 삼키는 스킬은 각 하루에 한 번씩 가능함

-한지성은 이미 도플갱어의 숙주로 변한 듯;

-저거 이제 못 되돌려.

그렇다는 것은.. 이젠 한지성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건가?

설마 마지막까지 이런 수를 준비해둘 줄이야.

도플갱어라는 몬스터가 이토록 끔찍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한지성은 자신이 도플갱어의 숙주가 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헌터들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건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아까처럼 그 괴물 같은 녀석을 또 쓰러트려야 하는 겁니까?"

-ㄴㄴ 막 숙주를 바꾼 도플갱어는 적응 기간이 필요해서 잠든 상태임.

-죽일 거라면 지금 죽여야 함;

-그런데 머리 잘 썼네; 영향력 높은 사람한테 옮겨가면 함부로 죽일 수 없으니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말은 즉, 한지성을 죽여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일단 다가오는 헌터들에게 멈추라고 말한 다음,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지성 씨는 도플갱어의 숙주가 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 말을 들은 한지성은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봤지만, 헌터들도 검은색의 무언가가 한지성에게 흡수된 것을 목격했기에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마력의 검을 창조한 뒤, 뒷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현재 도플갱어의 전 숙주는 죽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마무리됐다면 포탈이 열려야 정상이죠. 하지만.. 포탈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도플갱어가 보스 몬스터니까, 포탈이 열려야 정상인데.. 그 말은 정말로 한지성 헌터가.."

한지성을 마치 괴물처럼 바라보는 헌터들.

그 시선에 한지성은 당황한 것처럼 나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도, 도플갱어를 잡겠다고 날 죽인다는 거야!? 마, 말이 안 되잖아! 사람 목숨은 그렇게 하찮은 게 아니라고!"

"본인도 전에 도플갱어로 의심되는 4명을 죽이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제 슬슬 인정하세요! 당신은 이미 도플갱어의 숙주가 되었습니다! 곧 시간이 지나면 정신을 빼앗기고, 같은 헌터를 죽이는 몬스터로 변할 거란 말입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한지성은 반 미친 상태로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헌터들이 힘을 합쳐 한지성을 억눌렀고, 강산 길드원들은 괴롭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모, 모두 나 좀 살려줘.. 내가 돌아가면 강산 길드에 엄청난 지원을 약속할 테니까! 제발 부탁이야! 게다가 내가 죽는다면 너희 전부 모가지라고!"

한지성은 A급 헌터를 향해 애원했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는 한지성.

나는 그런 한지성의 앞에 다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신은 도플갱어와 명예롭게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포장해드리겠습니다. 모두 이의 있으십니까!?"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헌터들.

모두 입을 맞추겠다는 신호였다.

한지성을 우리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가는 날에는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설령 한지성이 도플갱어에게 조종당하는 상태라도 말이다.

"그럼 모두 동의하는 거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마무리 짓게 해줘."

내가 한지성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누자, A급 헌터가 나서서 자신이 한지성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타인인 나에게 한지성 살해라는 무거운 짐을 떠넘기기 꺼려졌던 모양.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물러섰고,

A급 헌터는 지팡이로 얼음 가시를 만들어 한지성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지성아, 미안하다. 우리의 힘으로는 널 구할 수 없다."

"혀, 형.. 아니지? 나 살려줄 거지?"

"미안하다.."

"이 개X끼야! 오갈 곳 없는 놈 키워줬더니, 주인을 물어!? 너희 전부 저주할 거야!"

던전을 가득 메우는 한지성의 비명.

헌터들은 얼굴을 구기며 그 비명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았고.

고기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그 비명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사람을 먹는 던전은 최초로 클리어됐다.

26화

"드, 드디어 집에 가는 거야!?"

"오.. 신이시여!"

던전 한 쪽 벽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포탈.

그것이 사람을 먹는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영롱하게 빛났고.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탈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포탈로 뛰어나간 사람들은 던전의 보상조차 보지 못했고.

오직 나와 형만, 그리고 A급 헌터만이 도플갱어의 던전 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수께끼의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히든 보스를 잡고 얻었던 상자가 다시 등장했다.

"고생한 보람은 있다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A급 헌터는 상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보상으로 우리를 달래기엔, 너무 많은 희생을 낳았다.

겨우 이런 보상 하나로 피해자들의 넋을 달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김형만은 그 상자를 보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김수, 이 상자의 처리를 어떻게 할 건가?"

"그건 제가 아니라 이분한테 물어봐야겠죠."

이 상황에선 A급 헌터에게 분배 문제를 맡기는 것이 옳았다.

내게 강제로 분배를 떠맡게 된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결심했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A급 헌터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한 마디.

"이 상자는 네 것이다."

"네..?"

"어차피 이 던전도 네가 깬 거나 마찬가지고,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로 목숨을 잃었을 거다. 그러니, 이 상자는 네가 갖는 것이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A급 헌터의 말에 신이 나서 동조하는 김형만.

진짜로 이번에도 이 상자를 내가 독식해도 된다는 말인가?

두 번이나 이런 기회가 생겼기에, 어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 ㅋㅋ

-한지성이었으면 상자 들고 런했다 ㅋㅋ

-거기에 목숨값으로 돈도 요구했을걸?

뭐가 어찌 됐든, 내게 보상을 몰아준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나는 과감한 선택을 한 두 명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것보다 사람들 입단속이 더 중요한 일이다. 한지성을 우리 손으로 죽였다는 걸 들키는 순간, 아마 도플갱어 던전에 있던 모든 헌터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확실히 소란이 되겠지만.. 그렇게 위험한 일입니까? 어차피 은퇴한 A급 헌터라면서요?"

"네가 그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미치광이다. 그는 뒤쪽에서 온갖 불법적인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어쩌다가 우리 강산 길드의 마스터가 그런 사람에게 약점을 잡힌 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절대 그와 관련되지 마라!"

두렵다는 듯이 안색이 파랗게 질린 A급 헌터.

줄곧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가 그러는 것을 보면, 확실히 무언가 있긴 한 모양.

그는 먼저 헌터들의 입을 단속시키겠다며, 던전을 빠져나갔고.

이제 던전 안에는 나와 형만, 둘만 남았다.

"김수.. 자네가 나를 살렸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보답은 이미 이 상자로 하셨잖아요?"

"하지만 네가 던전에 오지 않았다면, 내 아내까지 던전에 들어와서 일이 커질 뻔했어. 덕분에

큰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네."

"아내분도 헌터세요?"

"나도 훨씬 위대한 헌터지! 게다가 체육관도 운영 중이니, 언제 한 번 들리게!"

형만은 내게 명함 같은 것을 건네줬다.

헌터가 운영하는 체육관이니, 헌터 전용 기구도 있을 터.

언제 한 번 가도 괜찮을 듯싶었다.

형만은 내게 고맙다며, 체육관을 평생 공짜로 이용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처음 아내가 여기에 가는 걸 반대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거든. 오늘 대판 혼나게 생겼어."

"그래도 직접 던전으로 안 찾아오셔서 다행이네요."

"아마 나를 믿고 기다렸겠지. 오늘은 아내가 좋아하는 꽃이라도 사 가지고 돌아가야겠군! 나 먼저 가겠네!"

그 말을 끝으로 형만도 집으로 재빠르게 돌아갔다.

모든 사람이 던전에서 나간 후, 나는 눈치 볼 필요 없이 방송을 진행했다.

이제 남은 것은 수수께끼의 상자 언박싱뿐.

전에 워낙 대단한 물건을 얻었던 탓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전엔 자비의 크라운을 얻었었지. 이번에도 같은 운이 따라준다면..'

자비의 크라운.

통상 모드에선 엄청난 수치를 올려주는 데다가, 크래커와 붙으면서 강력한 성능을 지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성물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성좌넷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에도 탁월했다.

그와 동급인 아티팩트가 나와주기만 한다면..

-상자깡 조져어어어엇!

-이번에도 좋은 거 뜨냐?

-고생했으니까, 보상은 있어야지!

시청자들과 나는 내용물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전에 던전에서 자비의 크라운을 얻었을 때처럼 묘하게 좋은 느낌이 들었고.

어쩌면 크라운보다 훨씬 좋은 아이템이 나와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고 내용물을 확인한 결과.

"이건.. 목걸이..?"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목걸이가 상자 안에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

[성실의 팬던트]

등급:성물

*통상 모드의 팬던트는 착용자의 모든 스탯을 7씩 올려줍니다.

*전투 모드의 팬던트는 착용자의 눈에 부착되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감지해냅니다.

*한 달에 한 번, 사용자의 심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이 아이템은 귀속 아이템입니다.

*전용 아이템과 함께 착용할 시, 보너스 기능이 추가됩니다.

"이 물건이 상자에서 나온 물건이란 말씀이시죠..?"

"네. 게다가 자비의 크라운이랑 세트 효과도 있더라구요."

던전 클리어를 한 다음 나는 성좌넷 방송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귀가했다.

집에 들어서자, 크래커를 갈구고 있던 바트가 나를 반겨줬으며, 대충 장비를 정리한 다음 바트에게 팬던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팬던트를 쥐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기 시작한 바트.

괜히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왜 웃으시나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아뇨. 이 아티팩트 재밌네요. 착용자 등록은 마친 상태시죠?"

"네. 얻자마자 등록부터 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뇨. 오히려 문제가 사라질 정도입니다."

바트는 내게 팬던트를 건네준 뒤, 표정을 구기며 손을 털었다.

마치 저리다는 듯이.

"귀속 아이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타인의 손길을 거부하는군요."

"예? 그게 무슨.."

"제가 그 팬던트에 손을 대는 순간, 마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기 시작하더군요. 아마 제가 뱀파이어 로드라서 다행이지, 일반 스트리머나 시청자들이 만진다면 5초도 안 돼서 쓰러질 겁니다."

"그 정도라고요?"

크라운 같은 경우는 문신의 형태로 변화하기에 테스트할 기회가 없었는데, 팬던트로 인해 귀속 아이템의 메리트를 확실히 알게 됐다.

팬던트를 도난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될까?

혹시나 싶어 전투 모드를 발동시켜 봤지만, 크라운처럼 발동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물 등급 아이템에 자동 도난 방지 시스템이 있다는 점에서 한없이 든든했다.

게다가..

[사용자 정보]

이름:김수

직업:성좌넷 스트리머

근력:43 민첩:35 내구:24

정신력:32 마력:42 행운:14

스킬:[성좌넷][사술][근강술][변강술][초급 용언 마법][고급 검술][고급 궁술][고급 봉술][고급 창술][상급 권술][성흔]

스탯은 벌써 40대에 임박한 상태였다.

레이드 보스를 잡으면서 스탯이 눈에 띄게 성장한 상태였는데, 팬던트의 효과까지 겹치니, 그야말로 괴랄한 스탯이 탄생했다.

보통 B급 헌터에서 A급 헌터의 경계를 짓는 것이 스탯의 수치였는데, 대부분의 B급 헌터들은 한 스탯이 40을 넘기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C급 헌터인데도 40이 넘어가는 스탯이 무려 2개나 존재했으며, 40에 임박한 스탯들도 있었다.

'만약 다른 헌터들이 내 스탯을 본다면 오류가 났다고 놀라겠지?'

그만큼 거짓말 같은 수치였다.

이대로 쭉 성장세를 이어간다면 한국에도 몇 없는 A급 헌터에 등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좌넷 시청자들이 보기엔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선 눈부신 성장이었다.

"감동의 여운에 빠져 계신 걸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세트 효과가 생기셨다고 하셨는데, 설명 가능하십니까?"

"아, 물론이죠. 세트 효과로 성흔이라는 스킬이 생겨났습니다."

"성흔이요?"

"네. 악인을 처벌하고 깨끗하게 정화한다. 라고 적혀있네요. 게다가 쿨타임이.. 무려 1년이고요."

쿨타임만 1년인 스킬이라니.

들어본 적 없었다.

두 가지의 성물 등급 아이템이 내는 시너지 스킬이니, 그만큼 상당한 성능을 가졌을 터.

기적 스킬이야말로 최후의 보루라는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스킬이었다.

바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성흔 스킬은 정말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 사용하라고 당부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깐. 저것 좀 챙겨가시죠."

집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 순간, 바트가 내 어깨를 잡고 손짓을 했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건어물처럼 축 늘어진 크래커가 쓰러져 있었다.

"그냥 두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네, 안됩니다."

저런 거 필요 없어요.

***

모처럼의 휴일.

오늘은 방송이 아닌 여가 생활을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본래 헌터가 되기 전엔 방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던 나날을 보냈지만, 이젠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지.'

적어도 적당히 몸을 쓸 수 있는 취미를 가지고 싶었던 터라 형만이 건네준 명함을 보며 체육관을 향해 걸어갔다.

체육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으며, 척 보기에도 거대한 크기를 가진 건물이었다.

'이런 건물이 있는데, 레이드를 왜 다니시는 거지?'

나는 형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체육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적어도 100명은 훌쩍 넘길 법한 인파와 엄청난 수의 기구들.

게다가 대련용 링도 여럿 있는 고급 체육관이었다.

"오우야.."

형만이 말한 대로 헌터들도 애용하는 모양인지, 검과 창을 사용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렇게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자, 근육질을 가진 여성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운동 배우러 왔어? 헌터야? 일반인이야?"

"허, 헌터요.."

척 보기에도 엄청난 위압감이다.

게다가 이 위압감,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었다.

'핑크공듀 누님이랑 비슷한 분이네.'

마음속으로 친숙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여성이 내가 헌터라는 것을 알자마자, 내 손을 끌고 어디론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헌터는 헌터 전용 코스가 있지! 자, 한가한 친구들 이 친구랑 스파링 좀 뛰자."

"예! 누님!"

그러자 보이지 않던 근육질의 사내들이 튀어나오더니, 내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다.'

그것이 체육관에 들어서고 5분도 안 돼서 든 생각이었다.

27화

"자, 장비 착용하고!"

"아, 아니.. 저는 소개로.."

"척 보기에도 비실거리니까, 적당히 힘 조절해라. 관철아."

"네! 누님!"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형만 아재의 소개로 왔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대인전은 처음이야? 총각."

"아, 아뇨. 처음은 아닌데요.."

크래커와 대인전을 겪어본 경험이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었다.

근육질의 여성은 내 말에 안심한 건지, 장비를 마저 입혀준 다음 링 위로 올려 보내줬다.

내 손에 들린 묵직한 느낌의 목검은 약간의 긴장감을 주기에 문제가 없었다.

"잘 부탁해요. 형씨!"

"아, 네.."

내 상대로 올라온 관철이라는 남성은 호쾌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악수할 때, 그의 손을 흘끔 봤는데 굳은살이 두껍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적어도 C급 헌터 이상이겠지?

스파링이지만, 이왕 시작하는 거, 이기는 게 기분이 좋으니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 스파링이니까, 너무 과몰입하지 말고. 상대가 다치지 않을 선에서만 조절하자."

"너무 긴장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초보자 코치를 맡고 있거든요. 힘 조절은 특기에요."

마치 나를 아래 것으로 내려다 보는듯한 말투.

나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어디 가서 약하다는 소리는 안 들어서요."

"에이, 딱 봐도 호리호리하신 게, 이제 막 D급 헌터쯤 되실 거 같은데요? 너무 허세 안 부리셔도.."

"아니.. 제가 그쪽보다 강하다니까요?"

내가 대놓고 도발을 하자, 관철은 얼굴을 구기며 노골적으로 나를 째려봤다.

아마 초보자가 주제를 모르고 까분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 역시, 상대방이 주제를 모르고 까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 이야기는 거기까지만 하고 스파링 시작하자."

"아.. 넵!"

관철은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링 구석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 링의 구석으로 걸어간 뒤, 관철을 마주 보고 섰다.

"아까 한 말, 허세가 아니길 빌겠습니다."

관철은 낡은 나무 봉을 주워들었다.

그의 자세로 보아선 아마 랜서가 아닐까?

"자, 시작!"

시작 종이 울리자, 관철을 나에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움직임.

좋다곤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낭비는 없는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나에게 도달한 관철은 나무 봉을 내 명치를 향해 찔러왔다.

그는 아마도 내가 반응을 못 할 것이라 생각한 건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뭡니까? 이게 다예요?"

그의 봉은 내 검에 의해 간단히 막혀 있었다.

안 그래도 면적이 적은 검 옆면으로 봉을 막아내다니.

관철이 보기엔 믿을 수 없는 상황이리라.

"저 청년.. 제법인데?"

"우연이겠지. 저런 묘기가 가능한데, 왜 관철이랑 싸우고 있겠어?"

주변에 몰려든 관객들은 나의 스파링에 흥미롭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체육관 코치인 관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어떤 사람은 스파링의 결과로 내기를 하자며 돈을 걷기도 했다.

"운이 좋으셨네요. 제 봉을 막아내다니."

"글쎄요? 운인지, 아닌지는.. 더 싸워봐야 알겠죠.,!?"

검을 제대로 쥔 뒤, 관철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포인트 상점에서 50만 포인트를 지불하고 구매한 상급 검술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전에 사용하던 검술이 쓰레기라고 느껴질 정도로 검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달랐으며, 어떤 움직임을 해야 효율적일지,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상대방의 머리와 허리, 그리고 다리와 목.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같이 내 검은 관철의 몸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크흑!"

봉으로 막아내려고 해도 반응이 느린 탓에 가드가 모조리 뚫리고 만 관철.

그는 그대로 모든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대결에서 괴롭힘으로 상황이 변모될 때쯤.

"그만! 스파링 종료다!"

나를 인도했던 여성이 스파링을 종료시켰다.

그녀의 표정엔 감탄과 흥미로움이 담겨있었으며, 내게 호기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스파링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감탄하며 내 정체를 궁금해했다.

"따로 체육관을 다녔었나? 아니면 누구한테 배웠다던가."

그녀는 링에서 내려온 나에게 다가와 질문 공격을 시작했다.

아마 내 움직임에서 범상치 않음을 느껴서 그런 거겠지.

"따로 체육관을 다니거나 배운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여긴 형만 아저씨의 소개로 온 건데."

"어..? 그럼 네가 김수야?"

"저를 아십니까?"

형만 아저씨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김형만은 내 남편이야. 그리고 나는 이 체육관의 관장. 정복자다."

"아, 그럼 그 유명한 헌터라고 하신 분이.."

이름으로 유명한 건가?

외관과 이름마저 강해 보이는 그녀가 김형만 아저씨의 아내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문자를 보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C급 맞네? 아니, 어떻게 C급이 이렇게 강한 거야? 관철이를 압도할 정도라니."

관철이라는 사람이 강한 편이었나?

싸웠을 땐, C급.. 아니, D급으로 느껴질 정도로 지루한 무력이었다.

그렇기에 첫 스파링 상대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관철이라는 분이 대체 등급이 어느 정도길래 그러십니까?"

"너랑 싸운 관철이는 무려 B급의 헌터라고! 게다가 공격수로 유명한 녀석이니, C급 헌터한테 질 정도로 약한 녀석이 아니란 말이다!"

"B급이요!?"

높아 봐야 C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B급 헌터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뒀다는 것인가?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시 붙으면 다를 겁니다.."

휴식용 의자에 앉아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는 관철.

아마 C급 헌터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치욕스러운 것이리라.

주변 사람들도 내가 C급이라는 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청년이 어떻게 C급이여? 내가 봤을 땐, 적어도 B급인디."

"관철이가 체육관에 있는 B급 중에 가장 약하다고 해도, C급한테 질 리가 없는데 말이야."

연륜이 있어 보이는 아저씨들도 놀랍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정복자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더니, 무언가를 작성시키기 시작했다.

"내 남편한테 들었는데, 레이드에서 전멸할 뻔한걸, 도와줬다며? 정말 고마워. 대신이라곤 뭐 하지만, 체육관을 무료로 이용해도 좋아."

"배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부탁?"

아까 관철과 붙었을 때.

내 안에 있는 투쟁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끝나버린 스파링으로 인해, 가슴 안에 불씨가 진정되지 않는 상태였고.

그 불씨를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다른 B급 헌터들과 붙어볼 수 있겠습니까? 1:1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하하! 마음에 드는 친구네? 알겠어. 내가 B급 헌터를 꽉꽉 모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무수한 실전뿐이었다.

***

검이 잔상을 남기며 빠르게 흘러간다.

유려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상급 검술은 그야말로 효율의 극치였으며, 빠른 속도로 상대방들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노려오는 검을 쳐낸 뒤, 그대로 옆에서 뛰어오는 상대방의 가슴을 타격한다.

그다음 고개를 숙여 창을 피한 다음, 검으로 상대방의 다리를 찍는다.

막힘 없는 동작과 시원시원한 검격.

내 검은 B급 헌터 5명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냐고!"

"제대로 해라! 쪽팔리잖아!"

"저도 제대로 하고 있다고요!"

자신들의 공격은 전부 파훼 되면서, 오히려 역공당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내부분열까지 일어난 상황.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맨 앞에 있는 헌터를 쓰러트렸다.

"만식아!"

검을 머리에 적중당한 만식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4명 남은 헌터는 초조한 표정으로 날 경계했다.

C급 헌터를 상대로 B급 헌터 5명이 붙는 것도 치욕스러웠지만, 거기다 압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치욕스러워했다.

그렇게 5분이 더 흐르자, 링 위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기절해버렸다.

"믿기지 않는구만.."

"체육관에 있는 모든 B급 헌터가 쓰러졌다고..?"

"저 청년.. A급 헌터 아니야?"

직접 목격하고도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눈을 비비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어떤 사람은 내 헌터 등급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헌터 면허를 보여주어 거짓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줬다.

그리고 그런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정복자.

"흐음.. 코치 중에 네 수준에 맞는 상대는 아무래도 없나 보군."

"저도 제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그저 단순히 능력치와 스킬만 있다고 해서 이런 격차가 벌어질 줄은 몰랐다.

어쩌면 정말로 A급 헌터와 견주어도 될 정도로 강해진 게 아닐까?

B급과 A급의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아직 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잠재력으론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뻑하고 있는 와중에 미안한데, 너한테 손님이 왔어."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와중에, 정복자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손님? 나를 찾아올 손님이 있던가?

"손님이요..? 오늘이 처음인데 손님이 올 리가.."

"잔말 말고 따라와!"

거의 반강제로 정복자에 이끌려 응접실에 도착한 다음.

대충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라니,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혹시 형만이 아저씨인가?

전의 답례를 하기 위해 찾아온 건가 싶어서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정복자가 데려온 손님의 정체는..

"찾아다녔습니다. 김수 씨."

청룡 길드 소속 C급 헌터 주하민이었다.

***

"어.. 오랜만이네요."

"그, 그렇네요."

어색한 분위기.

본래 파티 사냥 이후로 연락을 하지 않은 터라 할 이야기가 없었다.

아무래도 청룡 길드 자체가 거북하기도 했고, 그녀에게 굳이 연락할 만한 용건도 없었으니까.

그때, 주하민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먼저 열었다.

"최근에 레이드에 참가하셨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 길드 마스터께서 당신의 행적은 모조리 조사하고 계시거든요."

그건 불법 아닌가?

허락도 안 맡고 남의 행적을 멋대로 조사하다니.

갑자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악용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반대로 주하민 씨의 일상을 하나하나 조사당한다면 좋겠습니까?"

"길드 마스터께서 그러신다면.. 오히려 영광이죠."

세뇌를 당한 건가?

그런 중년 아저씨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 신앙심을 가지고 존경하는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주하민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가기 위한 건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김수 씨, 당신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예..? 갑자기요?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다짜고짜 내 목숨이 위험하다니.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준비한 자료와 진지한 표정은 현재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서류 중, 한 장을 내게 건네주더니, 어서 읽어보라고 종용했다.

"식인 던전, 도플갱어의 던전 사망자 명단.."

느낌이 좋지 않았다.

명단엔 열 명이 넘어가는 사망자가 적혀 있었으며, 그중 내 눈을 끄는 이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이름엔 별 표시까지 되어 있었는데, 그 이름만 보면 내 목숨을 노리는 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하민 씨.. 그.. 제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설마.."

"네. 한지성의 아버지이자, 은퇴한 전 A급 헌터. 한주성입니다."

언젠간 터질 줄 알았던 지뢰가 터져버렸다.

28화

"한주성 헌터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네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이렇게 빨리 들킬 줄도 몰랐다.

내가 한지성을 직접 죽인 건 아니었지만, 큰 관여를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며칠간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벌써 죽을 위기에 처했다고?'

설마 A급 헌터가 모두 불어버린 건가?

본인이 직접 입단속을 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었는데.

내 착각이었나보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주하민은 고개를 저으며 또 다른 서류를 내게 건네줬다.

"A급 헌터가 한지성의 죽음에 실토한 건, 고의가 아닐 거에요. 이 자료를 보시면.."

주하민이 건네준 자료.

그 자료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 자료에는 한주성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 하나하나가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약 유통에 도박장 운영.. 불법적인 일은 모조리 하고 있었군요."

"네. 아마 한주성은 아들을 잃은 충격에 공대장을 상대로 자백제를 사용한 모양입니다. 그는 최대한 저항했겠지만, 한주성이 취급하는 마약이 꽤 애먹는 거라서 말이죠."

과연.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나에 대해 실토를 했는지, 납득이 갔다.

그나저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더니.

아들은 망나니에 아버지는 쓰레기였군.

이제야 한지성의 인성에 대해 이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주성이 이렇게 활개 치고 다니는데, 정부에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건가요?"

여기 적힌 자료를 보면, 정부 측에서 그가 하는 일을 방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당한 피해자만 해도 천 명이 넘어갔으며, 앞으로 생길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만히 놔두면 안 되는 상황.

내 말을 들은 주하민은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을 했다.

"그가 이렇게 멀쩡히 활동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전 A급 헌터였기 때문이죠."

"그건 들었지만.. 그게 그렇게 큰 겁니까?"

그냥 헌터 등급이 높아서 이런 중범죄를 방치하고 있다고?

단순히 A급 헌터라서 이런 차별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면, 자국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하민은 고개를 저으며 내 생각이 틀렸다며 부정했다.

"단순히 등급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은퇴하기 전, 그는 A급 헌터라는 걸 내세워 각성자 협회의 고위직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비리로 쫓겨나긴 했지만, 협회 내부엔 그와 끈이 닿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겠죠."

"결국 매수당한 거군요."

구역질이 나온다.

인맥이라고 이런 짓을 하고 다니는 걸, 가만히 방치한다고?

대한민국의 모범 시민으로서 두고 볼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주성에게 찾아가 꿀밤이라도 먹여주고 싶었지만.

"지금 착각하고 계신 거 같은데. 현재 중요한 건 김수 씨의 목숨이라고요?"

"아, 참!"

한주성이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이 주 내용이었지.

그의 화려한 커리어에 감탄한 나머지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잠시 샌 모양이다.

나는 다시금 서류를 집어 내용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김수 씨를 자식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늦든 빠르든, 당신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겠죠."

"전 A급 헌터가 노려준다라.. 솔직히 두근거리네요."

자세히 따지고 보면 전혀 두렵지 않았다.

현재 나는 B급 헌터 5명과 싸워도 오히려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장 우리 집만 가도, S급 헌터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크래커가 대기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트나 시청자들을 소환하면 되니, 목숨에 대한 위협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황.

주하민은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무려 전 A급 헌터라고요. B급과 A급의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봤자, 헌터는 헌터잖아요? 같은 인간끼리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뒷배가 있기에, 이런 여유 넘치는 말을 뱉을 수 있는 거지만.

그러자, 주하민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남은 서류를 내게 건네줬다.

그 곳에 적혀 있는 내용은 한주성의 능력에 대한 정보와 전투 스타일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적어도 그 내용은 숙지하세요. 아무리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곤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한테 이렇게까지..?"

"길드 마스터의 명령이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저를 콕 집어서 명령을 내리신 건 잘 모르겠지만, 받은 은혜도 있으니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그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는 거군.

뭐, 상관없다.

이 서류에 적힌 내용으로 봐선, 서류를 만드는 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강룡 아저씨의 호의라고 쳐두자.'

나중에 식사 한번 해주면 좋아라 하겠지.

"그런데 한주성이 제 목숨을 노리는 건 언제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곧 헌터 정기 소집일이 다가올 겁니다. 아마, 그때 교육을 빙자한 결투로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겠죠."

"헌터 정기 소집일이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니, 저번에 핸드폰으로 쓰윽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모른다는 표정을 짓자, 주하민은 고개를 저으며 헌터 정기 소집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헌터 정기 소집일이란, 1년에 한 번. 한국 서울 지부 소속 헌터들을 소집하는 날이에요. 헌터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복습하는 개념으로 모이는 거지만, 솔직히 말하면 친목회 같은 느낌이죠."

친목회라.

헌터들이 모이는 날이라고 했는데, 분명 한주성은..

"그 사람은 은퇴하지 않았나요?"

"전 A급 헌터의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참가할 겁니다. 아마 거절은 불가능하겠죠. 은퇴했다곤 하지만, A급 헌터에게 배우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니까요."

분명 헌터 정기 소집일은 다음 달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한 달뿐인가?

그 짧은 시간 안에 A급 헌터와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했다.

'꽤 고생하겠네.'

이야기가 끝난 건지, 하민은 멀뚱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따로 서류를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하민과 같이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저 때문에 이런 곳까지 오시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뇨. 저도 이 체육관 다니거든요. 겸사겸사죠."

"잠깐, 이런 곳이라니? 말을 조금 섭섭하게 하네?"

"아직 계셨습니까? 관장님은 무슨.. 기척도 없으시네."

그녀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기척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뛰어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강할지도.'

형만 아저씨의 말로는 꽤 유명한 헌터라고 했으니, 고등급의 헌터라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심기를 건들면 곤란할 것 같아, 대충 사과를 한 다음 하민을 배웅해줬다.

그리고 체육관 벤치에 앉아, 잠깐 생각의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지만, A급 헌터에 닿을 수 있을까?'

솔직히 질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아직 객관적으로 내 실력을 알아챌 수 없기에, 더욱 모호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주변 인물들이 너무나도 약했다.

백수 시절엔 동경의 대상이었던 B급들을 쓸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김수!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관장님도 들으셨다시피, 전 A급 헌터가 제 목숨을 노리고 있잖아요?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

"오호.. 네가 겁을 먹는 상대도 있구나? 무슨 B급 헌터를 개 패듯이 패길래, 눈이 뵈는 게 없는 줄 알았지."

그녀 안의 내 평가가 그 정도였다니.

조금 박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내가 한 행동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정복자는 내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격려를 해줬다.

'하지만 당분간 훈련에만 집중해야 하니, 방송 분량도 못 뽑을 텐데..'

걱정이었다.

포인트라도 남아돈다면 스킬을 사서 강해질 수 있으련만.

그런 나를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정복자.

"김수야. 내가 너한테 안 밝힌 게 하나 있거든?"

"네? 그게 뭔데요?"

정복자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복자의 손엔 각성자 면허증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내 것과 조금 다른데?'

평범한 각성자 면허증과는 달리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정복자의 면허증.

그녀는 곧바로 내게 면허증을 건네줬다.

나는 곧바로 면허증을 확인했고,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A급..!?"

"현역 A급 헌터라서 스파링을 하면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내가 상대 좀 해줄까?"

A급 헌터를 할 정도의 무력.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외관.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던 도중.

갑자기 포인트를 쓸어 담을 수 있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는 됐고, 누님. A급 헌터 버금가는 오크랑 싸워보신 적 있으세요?"

최근 데이트를 재촉하던 핑크공듀에게 좋은 파트너를 붙여줄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