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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5

24화 페어리 퀸 (1)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느낀 포레스트 가디언이 자신에게 향하는 묵직한 형상의 마법을 발견하고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정확히 가슴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주먹을, 마찬가지로 거대한 두 손이 막아섰다.

콰아아아앙!!

수면 위의 파동처럼 바람이 일대로 퍼져 나갔다.

포레스트 가디언의 몸체를 감당하는 두 다리가 뒤로 밀려나고.

그 경로를 따라 나무들이 막대한 물리 에너지를 견디지 못해 쓰러져 나갔다.

"뭣들 하는 거야!"

그 광경에 무심코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모험가들은, 벼락처럼 터지는 준의 목소리에 황급히 반응했다.

"놈의 균형을 무너뜨려!"

뒤이어 벤자민의 명령에 따라 모험가들이 일제히 포레스트 가디언의 다리로 향했다.

십여 명의 모험가들이 집요하게 놈의 오른쪽 발목을 공략했다.

대검으로 내려치고, 부식 독이 발린 단검으로 수십 차례 베어 내고, 전투 도끼로 틈새를 벌리고.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모험가들은 그야말로 전력을 쏟아부으며 놈을 넘어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지금이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게 될 중요한 순간임을.

그 짧은 몇 초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각자의 무기를 휘두르던 모험가들은,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쓰러진다!"

모험가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놈의 한쪽 무릎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자연스럽게 무게의 균형이 무너지자, 준도 이를 악물고 강철의 주먹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다윗이 던진 차돌에 이마를 맞아 쓰러지는 골리앗처럼, 강철의 주먹은 순간 자세가 무너진 놈의 가슴을 강타했다.

후우우우우우우우웅——!!

타락한 숲의 지킴이가 끝내 한쪽 무릎을 완전히 꿇고야 말았다.

수없이 많은 나무들이 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바스라지고, 거대한 흙먼지 바람이 일행들을 덮쳐 왔다.

마치 숲이 포레스트 가디언의 고통을 대변하듯 진동할 때, 준이 얕게 혀를 찼다.

'역시 한 번에 뚫진 못했네.'

흙먼지가 퍼져 나가기 직전, [밝은 눈]을 통해 포레스트 가디언을 응시한 준은 놈의 가슴을 완전히 뭉개 버리기 직전, [아이언 피스트]가 사그라드는 것을 확인했다.

"아직 놈이 죽지 않았어! 달려들어!"

그리고 그것은 벤자민도 마찬가지였는지, 황급히 명령을 내렸다.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 * *

벤자민 브리스턴.

모험단 청운의 단장이자, 이번 사태의 원흉인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실패한 공략전, 들통난 작전.

그 누구보다 체면에 진심인 귀족인 만큼, 그의 후원 귀족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회피할 것이 분명했다.

'하다못해... 이번 공략의 마무리는 내가 해야만 한다!'

예상치 못한 마법사, 준의 등장으로 인해 역할이 크게 위축되긴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이곳에 있는 용병들을 모두 살려 보내고, 황실에 이번 공략전의 정보를 전부 보고한다면 형량이 약해질 수도 있을 터.

새로운 후원자는 그 뒤에 찾아도 괜찮을 것이다.

이전처럼 귀족의 후원은 힘들겠지만, 대형 상회라면 어찌어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벤자민은 그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포레스트 가디언의 토벌에 진심이었다.

온몸에 마력을 두르고, 포레스트 가디언의 몸을 타고 올라가 놈의 심장을 향해 달린다.

목표는 녀석의 흉부에 심어져 있는 숲의 정기.

평소에는 강철보다도 단단한 재질의 나무로 보호되어 있지만, 지금은 큼지막한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쳐라!!"

벤자민만큼이나 절박한 모험가들이 온몸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두 번은 없다.

아직 그로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포레스트 가디언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카각! 가가가가가각!!

대형 야수종의 이빨을 갈아 만든 검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반대로 완전히 무방비해진 포레스트 가디언의 흉부 또한, 균열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내 내부에서 불길한 보랏빛이 점차 흘러나왔다.

그것이 타락한 숲의 정기라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표정에 희망이 어렸다.

포레스트 가디언의 흉부를 완전히 열어 재끼는 그 순간, 벤자민이 나섰다.

푸른빛의 오러가 오연히 모습을 드러낸 타락한 정기를 향해 쏘아졌다.

"끝이다!"

그러나.

"...!"

여태껏 막혀 본 적 없던 그의 오러가 강한 반발력에 부딪혔다.

"크으...! 그 마법사의 말이 맞았나!"

이번 공략전의 작전을 짠 마법사, 준.

포레스트 가디언의 토벌 작전 이전, 준은 벤자민을 포함해 그의 동료들에게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있었다.

타락한 숲의 정기는 생각 이상으로 단단하고,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있어 쉽게 부수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찌르다 보면 결국 파괴되기 마련이니, 그전까지 최대한 마력을 아끼라 했던가.

"젠장...! 부서져라! 부서지란 말이다...!"

오러와 함께 간절함이 담긴 검이 몇 번이고 숲의 정기와 부딪혔다.

쩌적—

숲의 정기에 균열이 일어남과 동시에.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 * *

숲이 흐느낀다.

처음 페어리 퀸의 비명을 들었던 던전과 다르게, 이번에 들린 비명은 그런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점차 하늘이 검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어느새 페어리 퀸의 비명 이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 속.

그 침묵을 깬 것은, 포레스트 가디언의 위로 올라가 있던 모험가들이었다.

"단장님!!"

"안돼!!"

준은 [밝은 눈]을 통해 위에서 일어난 사태를 볼 수 있었다.

벤자민의 등 뒤로 튀어나온 붉은 나뭇가지.

나뭇가지가 붉은 이유는, 그것이 벤자민의 심장을 꿰뚫고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씹...."

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벤자민의 허무한 죽음은 둘째 치고.

[밝은 눈]에 의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보랏빛으로 변한 하늘 위에서 처연히 모습을 드러낸 한 존재를.

"페어리 퀸...."

저 하늘의 색과 크게 구분이 가지 않는 빛을 내뿜으며 등장한 여인.

그와 동시에, 숲의 속삭임이 그들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죽는다.

-짐승의 이빨에 산 채로 찢겨 죽는다.

-독사의 송곳니에 당해 온몸이 마비되어 죽는다.

-식수를 찾지 못해 길을 헤매다 메말라 죽는다.

-독버섯에 중독되어 칠공에서 피를 쏟아붓고 죽는다.

-고블린에게 붙잡혀 가죽을 뜯겨 죽는다.

-스틸 버그에게 내장을 파먹혀 죽는다.

-언데드에게 끔찍이 해체되어 죽는다.

타락한 숲의 여왕이 이곳에 모인 인간들을 바라본 순간 보이는 환영.

준이 페어리 퀸의 등장을 극도로 꺼린 이유이자, 진정한 레이드 보스가 보이는 위용이었다.

스킬, [숲의 순환]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첫 패턴은 환각을 통한 '공포' 상태이상이었다.

정신 내성이 턱 없이 부족한 용병들은 그 자리에 무기를 떨어뜨린 채로 무릎을 꿇었다.

사지를 떨기 시작하고, 입에서는 거품을 흘리며, 눈앞에 보이는 자신들의 죽음 속에 늪처럼 빠져 들어간다.

"아, 아아아아아...!!"

그다음으로는 모험가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내성이 존재했지만, 눈앞에서 그들의 단장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절망감은 그나마 있던 정신 방벽 마저 무너뜨렸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떨어뜨리고, 용병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꼴이 되었다.

"크, 으...!!"

그나마 준이 버틸 수 있던 이유는 [굳건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심장]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개가 만능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성을 올려 주는 것뿐, 완벽한 면역은 아니었으니까.

수십 번씩 반복되는 죽음의 환영 속, 준은 어떻게든 이 상태 이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젠장...!'

점차 눈빛에서 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포는 옅어져 가고, 그 뒤로 찾아오는 것은 극도의 허무함이었다.

죽음은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암흑뿐.

그에 대한 인지 단계에 들어서면 위험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준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운용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은 허무 속에서, 오로지 살고 싶다는 의지만이 희미한 빛을 내며 타올랐다.

대단한 마법도 쓸 수 없다.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마법조차 영창이 불가능하다.

그저, 본능에 따라 가장 최근에 시전한 마법만을 떠올리는 것이 한계.

대지의 흙이 아주 천천히 꿈틀거리며 뭉치기 시작하고, 그 뒤로 마력이 코팅됐다.

[아이언 피스트]

그 크기는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과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한 크기였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더 크면 안 된다.

이 마법은, 페어리 퀸을 노리는 게 아니니까.

"커헉——!!"

허파에서 산소란 산소는 모조리 빠져나가고, 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강철의 주먹이 준의 복부로 꽂힌 것이다.

2층 높이에서 유리 공이 떨어져도 사람이 죽을 수가 있는데, 강철로 이루어진 주먹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장이 파열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만한 환각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끄흐흐...."

끔찍한 고통이 뇌를 후려쳤지만, 그럼에도 준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환각 따위와 다르게, 이 고통이 살아 있는 현재를 일깨워 주고 있었으니까.

"웨엑!"

순식간에 역류한 토사물을 내뱉으며, 준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온몸은 무거웠지만, 살아 있는 육체는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점차 활성화되어 갔다.

서둘러 품에서 꺼낸 포션을 입에 털어 넣고, 정신을 집중했다.

"망했군...."

고통으로 인해 눈물범벅이 된 눈을 대충 비비고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황은 준의 예상처럼 처참했다.

"아아아아...."

"흐으윽...."

"안 돼, 죽음이 바로 앞에...."

용병이고 모험가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무장해제가 되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페어리 퀸의 등장과 동시에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럴 만도 했다.

제대로 각성하고, 포레스트 가디언과 합류한 페어리 퀸은 지금 시점에서 사냥하라 만들어 둔 몬스터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이렇듯, <블랙아웃 > 내의 히든피스는 좋은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저게 등장하기 전까지 끝마치려고 했던 건데....'

각성한 포레스트 가디언까지는 그래도 3레벨 유저들로 어찌어찌 해낼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그것도 이젠 다 글러먹은 이야기였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나마 희소식이 있다면, 페어리 퀸이 아직 학살을 시작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벤자민이 죽기 직전 숲의 정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넣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숲의 정기는 말 그대로 숲의 에너지를 한 데 모아둔 저장소다.

숲은 이 순간에도 손상된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포레스트 가디언 또한 점차 그로기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벌어진 흉부가 점차 아물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엘레노어 사제는?'

그나마 이 광역상태이상을 해결할 유일한 수단인 엘레노어.

그러나, 그녀 또한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모으고 성경 구절을 읊는 등 다른 이들과 별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어느 정도 저항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단시간에 빠져나오긴 힘들어.'

그렇다고 자신처럼 고통을 주어 깨울 수도 없었다.

본인이 의도한 고통이 아닌, 타인이 주는 고통은 환각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에이든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예상대로라 해야 할까.

에이든은 다른 이들처럼 쓰러지는 수준까지 가진 않았다.

히든피스에서 만난 프라이드에게 [야수의 신체] 스킬을 전수받은 덕분이다.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않았지만, 명확히 지금의 상황을 인지한 채 저항하고 있었다.

'당장의 전력은 못 되겠지만....'

여기서, 뜻밖의 이변이 일어났다.

"마법사님!"

쌍둥이 모험가 루크 마크너.

그가 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어떻게...?"

"...어,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래도 이것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건?"

루크가 보여 준 것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큐빅이었다.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 진 큐빅의 빛이 루크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상태이상의 면역이라고...?'

물론 상위 레벨로 올라가면 저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아티팩트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걸 고작 3레벨에 불과한 루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야.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지만."

"가문?"

"하하... 대단한 가문은 건 아냐. 그냥 진랑족에서 내려오는 부적 같은 거지.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루크의 말대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력이 하나라도 늘어난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루크는 오러 사용자다.

비록 벤자민과 비교하면 부족한 면이 있긴 했으나, 중요한 것은 숲의 정기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해서, 마법사님. 이제 어떻게 하면 돼?"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다행히 페어리 퀸도 정상은 아니야."

첫 등장 당시, 벤자민과 그의 동료들에게 당했던 빈사 상태의 부상.

거기에 막 각성한 페어리 퀸은 타락의 힘과 숲의 기운이 뒤섞인 탓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단계다.

때문에 회복이 늦어진 것이다.

포레스트 가디언이 토벌되고 있는 탓에 황급히 찾아온 것일 뿐.

'물론 페어리 퀸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숲의 정기를 파괴하는 것뿐이라면, 희망은 남아 있었다.

"...시선은 내가 끌게. 너는 포레스트 가디언의 위로 올라가. 숲의 정기를 파괴해."

"괜찮겠어? 저런 괴물을 상대로...."

"어쩔 수 없잖아.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빨리! 시간이 많지 않아. 지금 이 순간에도 포레스트 가디언이 회복하고 있다고."

"알겠어...!"

결국 루크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준은 다시 한번 초커에 손을 올렸다.

[언령 해석 중....]

[해석 완료.]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의 영향력을 13퍼센트 하향합니다.]

* * *

13퍼센트.

평소 쓰던 10퍼센트와 비교하면 고작 3퍼센트가 더 늘어났을 뿐인 수치.

그러나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하는 준에게는, '고작'이라는 단어로 평가할 수준이 아니었다.

"끄으으...!"

범람하는 해일처럼 덮쳐 오는 마력이 전신에 가득 채워진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한 오만한 전능감은 잠깐 뿐.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의 육체가 욕심을 부리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마력은 준에게 몸소 그것을 깨우치도록 만들었다.

'이번만 좀 도와줘라...!!'

준에게 허용된 것은 딱 10퍼센트까지였다.

그 이상부터는 몸에 걸려오는 과부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때문에 준도 여기까지 시전하여 직접 마법을 발현시키는 것은 이번이 처음.

그 결과로 몸에 생긴 변화는 준도 예상할 수 없었다.

"후, 후우, 후우...!"

끓어오르는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마법을 펼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마력의 반발이 시전한 마법으로부터 시전자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때문에 준은, 전력을 다해 마력을 컨트롤하는 데 집중했다.

'이 망할 놈들...!'

마치 야생마처럼 날뛰는 마력들.

최대한 마력과의 감응력을 끌어올려 보려 했지만,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가 그것을 막아섰다.

역겨운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는 와중에, 준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마탑에 잠깐 있던 시절, 그가 배웠던 바에 의하면 마력은 자연이다.

결코 인간의 뜻대로 흐르는 법이 없고, 세상이 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마법의 패턴은 세계가 정한 규칙을 일부 뒤트는 역할을 하여 마력의 흐름을 정하고.

시전자의 심상은 흐르는 마력의 농도를 결정짓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상황에서 이렇듯 날뛰는 마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마법을 현현시켜야만 했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녀석들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안내해야 했으니.

그 과정에서 범람하는 마력들이 비좁은 준의 마력회로를 따라 온몸에 상처를 입혔다.

마력의 마찰열로 인해 마력회로가 푸른빛에서 보랏빛으로, 더 나아가 점차 붉게 변해 갔다.

"흐으으...!!"

과열된 마력회로로 인해 뜨거운 숨결이 목을 타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윽고 완성된 마법패턴.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여전히 일정 수준 이상의 마력이 준의 마력회로에 남아 있었고, 그놈들마저 해소해야만 다시금 마법패턴을 다듬을 수 있었다.

상상하고, 그려낸다.

그 누구보다 견고하고, 실존하는 현상을.

마법이란 현상을 구현하는 것.

과정을 도출하고, 결과를 현현시킨다.

'언제였었지.'

상상력이란 창의력과도 많은 연관이 있지만, 관측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준에게는 대단한 창의력 따위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정해진 일정에 쫓겨 살아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무수한 창의력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많은 욕심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준은 '관측'에 있어서 제법 특출난 모습을 보였다.

보고, 기억한다.

한때, 그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풍경이 떠올랐다.

"...."

시작은 어떤 불길이었다.

평소 보는 자그마한 불이 아닌, 성인 키만 한 불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굳게 만드는 두려움을 선사했다.

마치 탐욕이라는 것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감상에 걸맞게, 불은 금방 몸집을 키워 내며 한 아이의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부르르르....

화염.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임과 동시에, 또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수도 있는 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 아이의....

"...."

[파이어 볼]

감정과 심상이 담긴 화염구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3서클 마법.

그러나 그 어떤 3서클의 마법보다도 뛰어난 화력을 선보이는 녀석은, 피처럼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자신의 위력을 선보일 먹잇감을 찾아다녔다.

"이게...."

그러나 마법을 바라보는 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거기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정신을 차린 페어리 퀸이 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준비가...!'

마법의 형상은 완성했지만, 과부하된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지금 마법을 날려 봐야 페어리 퀸에게 채 닿기도 전에 스스로 꺼져 버릴 터.

연소될 대상을 찾기 전까지, 준의 마력이 그것을 대신 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간은 준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페어리 퀸이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렸다.

비쩍 마른 외관과 달리, 그 안에 모여드는 에너지는 끔찍하리만치 파괴적이다.

숲을 집어삼킨 저 타락의 힘은, 닿는 모든 것을 원자 단위로 분해해 버리리라.

'젠장, 시간만 조금 있다면...!'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화염구로 옮기려던 찰나, 페어리 퀸의 손에서 검보라빛의 나비가 쏘아졌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5화

25화 페어리 퀸 (2)

타락한 나비가 천천히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는 생각 이상이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려던 그때.

[라이트 오브 라이프(Light of life)]

휘황찬란한 생명의 빛이 준과 타락한 나비의 사이를 갈랐다.

이내 생명의 빛과 타락한 나비가 마주치자,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밀어냈다.

극도로 집중한 탓에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지만, 상태이상에서 벗어난 엘레노어가 펼친 신성 마법이리라.

하지만 홀로 저 타락한 숲의 여왕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인 듯, 점차 생명의 빛이 타락한 나비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됐어...!"

하지만 그 잠깐의 시간. 준에게 너무도 간절했던 그 시간을, 엘레노어가 벌어 주었다.

핏빛으로 빛나는 붉은 화염구가 갈 길을 잃은 마력을 자신의 아가리로 집어 삼켰다.

이윽고 뻗어 나간 홍염은 준의 제어를 벗어나 적을 향해 나아갔다.

무엇이든 집어 삼키는 불꽃답게, 녀석은 이 공간에서 가장 태우기 좋은 대상을 찾아냈다.

-...!

이글거리는 형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페어리 퀸이 날개를 펼쳤다.

이곳저곳 찢어진 날개였지만, 회피를 위한 기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저 괴물 같은 페어리 퀸이 방어가 아닌 회피를 선택했다.

타락한 숲의 여왕마저 위협을 느낄 정도의 에너지가 저 안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홍염이 페어리 퀸을 비껴 나가려는 순간, 준의 마법이 재차 이루어졌다.

[디텍팅 타깃]

마력의 조준점이 형성되어 페어리 퀸에게 향한다.

이 또한 홍염에게는 먹잇감으로 인식되었는지, 녀석은 마력의 조준점을 쫓아 페어리 퀸에게 날아들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하지만, 끝내 패배한 것은 홍염이었다.

먹이를 찾지 못한 녀석이 스스로를 불태우며 그 끝을 알리고 있었다.

그에 준이 다시 한 번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의 조준점을 비틀어 홍염에게 향한다. 조준점이 닿기 무섭게 홍염의 마법패턴을 즉석에서 바꾼다.

말도 안 되는 기예였지만,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연습해 온 준의 노력과 더불어 그가 가진 섬세한 심상이 그것을 가능케 만들었다.

물론 아예 마법의 근본을 뜯어고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마력패턴을 과부화 시키는 정도는 할 수 있어.'

스스로를 집어 삼키는 이 광폭한 화염을 터뜨리는 것은 가능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숲이 타오른다.

허공이 타오르고, 탐욕에 젖은 불꽃은 일대의 산소마저 자신의 먹잇감으로 무식하게 처먹었다.

그 범위 내에 있는 페어리 퀸 또한 마찬가지.

타락의 힘이 불꽃을 저지했지만, 불꽃은 소진되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먹잇감을 물고 늘어져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크학...."

폭발의 여파는 준에게까지 미쳤다.

엄청난 열기가 순식간에 준을 덮쳤고, 다행히 그 덕분에 보랏빛 나비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살가죽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기포가 끓었다.

"개, 같은...."

스스로의 마법에 당한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준이 서둘러 포션 한 병을 꺼내 얼굴을 적셨다.

"끄흐으...."

살갗이 타오르는 끔찍한 고통 속.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지만, [굳건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심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준!"

멀리서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따뜻한 빛이 몸에 스며들었다.

말로만 듣던 사제의 신성력을 직접 체험하며, 준의 시선은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향했다.

놈을 직접 마무리할, 루크의 뒷모습을 따라서.

* * *

"끄, 악...!"

포레스트 가디언의 몸체를 타고 올라가던 루크가 준의 마법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던 이유는, 순전히 준의 노력 덕분이었다.

최대한 마법의 여파로부터 멀어질 수 있도록 준이 페어리 퀸을 유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뜨거운 열기가 루크를 괴롭혔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결국 도착한 포레스트 가디언의 흉부.

"안 돼...!"

그러나 놈의 흉부는 이제 거의 수복되어 가고 있었다.

페어리 퀸이 준을 인식했기 때문인지, 수복이 잠시 멈춰 있었지만 그 틈은 아까보다 확연히 작아져 있었다.

이대로는 곧 검이 들어갈 공간마저 사라질 판이다.

서둘러 루크가 뽑아 든 검에 집중해 오러를 형성했다.

"이제 그만, 죽어!"

검을 내리찍는다.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함을 담아서.

푸른빛의 오러가 강렬하게 타오르며 숲의 정수에 맞닿았다.

지이이이이잉——!

강력한 반발력이 푸른빛을 밀쳐 냈다.

당장이라도 손에 쥐어진 검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빨을 꽉 깨물고 버텼다.

손아귀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내렸음에도, 그의 시선은 자신의 검과 숲의 정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쩌적—

간절함에 의한 환각일까, 아니면 그의 의지가 만들어 낸 결과일까.

아주 얇게나마 숲의 정수에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분명, 효과는 있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지 않았다면, 저 괴물 같은 숲의 여왕이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증오가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정이 루크의 입가를 비틀게 했다.

"하핫.... 그래, 너도 결국 아픈 거구나?"

수십 명의 인간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린 저 괴물이, 고작 3레벨인 자신에게 증오의 감정을 보내 온다.

그게 못내 우스웠다.

"하아아압!!"

그러한 감정이 도출한 결과일까.

루크의 근육이 부풀며 검을 더욱 맹렬하게 내리찍었다.

쩌저적—!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눈에도 들어온다.

거미줄처럼 벌어지기 시작하는 숲의 정수가.

하지만, 페어리 퀸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타락의 힘이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스며들기 직전.

콰과과과과광—!!

페어리 퀸을 향해 바람의 칼날이 쏘아졌다.

다시 한 번 마력을 끌어올린 준의 마법이 페어리 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이전과 달리 심상이 담기지 않아 제대로 된 위력은 아니었지만, 아주 잠깐 페어리 퀸의 시야를 끄는 데는 성공했다.

푸욱—!

단지, 페어리 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을 뿐.

"컥...."

배를 뚫고 튀어나온 나뭇가지.

페어리 퀸의 힘에 반응한 포레스트 가디언의 육체에서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루크의 옆구리를 뚫고 나갔다.

그제야 벤자민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깨달았지만, 너무 늦어 버린 깨달음이었다.

"아, 직...!"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강렬히 타오르던 오러가 점차 사그라들고, 숲의 정수가 내뿜는 반발력에 검이 뽑혀 나왔다.

"하아아아아아앗!!"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루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붉게 달아오른 검을 든 채 하늘 높이 도약한 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을 휘날리며, 푸름을 담고 있는 눈빛은 명확히 적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카강—!

루크가 만들어 낸 균열의 틈으로 에이든의 검이 꽂혀 들어가, 숲의 정수를 완전히 관통했다.

* * *

에이든의 일격이 먹혀 들었다.

여태까지의 발악과 달리 붉게 물든 에이든의 검은 날카롭게 숲의 정기를 관통했고, 숲의 정기는 검보랏빛의 파동을 일으키며 완전히 소멸됐다.

숲의 수호자, 포레스트 가디언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쓰러지는 고목처럼 보였다.

숲이 죽어 간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나무들이 시들기 시작하고, 숲이 무너져 내렸다.

'3페이즈인가.'

페어리 퀸을 죽이기 위해 숲의 정기를 파괴한 직후 일어나는 현상.

사실상 이쯤 되면 공략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봐야했다.

힘의 원천인 숲의 정기를 잃은 페어리 퀸이 긴 그로기 상태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시간상 대략 10분 정도.

정상적인 공략전이었다면, 이 시기에 페어리 퀸에게 총공세를 가하고 공략전은 종료될 터.

'만약 그 안에 죽이지 못하면....'

곧바로 광역 즉사기 패턴이 시작된다.

페어리 퀸의 근간을 이루는 숲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남는 것은 순수한 타락의 결정체 뿐.

그렇게 탄생한 타락은 주위의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이정준 시절에 딱 한 번, 실험 삼아 경험 해 본 패턴이었는데, 전원 6레벨로 이루어진 파티가 쪽도 못 써보고 전멸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탈출해야 하는데....'

문제는 모험가들과 용병들의 상황이었다.

페어리 퀸의 광역 상태이상 스킬인 [숲의 순환]은 종료 되었지만, 아직 그 여파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이래서 페어리 퀸의 합류 전에 해결하려 했던 건데.'

이대로 에이든과 엘레노어, 그리고 부상을 당한 루크만 챙겨 나가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가능하면 모두 다 챙겨가고 싶었다.

인륜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는 것도 있었지만, 살아남은 이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향후 이어질 황실의 조사를 정상적으로 끝내려면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준이라도 이곳에 모인 이들의 상태이상을 한 번에 해제 할 방법 따윈 없었다.

'젠장. 배워야 할 마법이 뭐 이렇게 많아.'

또 다시 나가서 배워야 할 마법 리스트를 떠올리며, 준은 마지막 희망에게 고개를 돌렸다.

"엘레노어 사제. 가능할 것 같아?"

"하아...."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사제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녀 또한 공격대에 소속되어 페어리들에게 생명력이 뽑히고, 쉬기는커녕 부상자들을 돌봤다.

거기에 이어지는 공략전에서도 신성력을 발휘했다.

그뿐이던가? 방금까지 그녀는 [숲의 순환]에 발악하다 이제 막 벗어난 상황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얼마나?"

"8분 정도."

"...너무 길어. 더 줄일 방법은 없어? 최소한 3분 안에는 끝내야 해."

"그럼 방법이 없어. 선택해야 돼. 이 중 절반만 살릴 수 있어."

생명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치유의 신, 아리클로토스를 섬기는 교단의 사제가 생명을 두고 저울질을 한다.

누군가가 본다면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를 터이나, 지금 시점에서 그런 이상론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안대 너머로 엘레노어가 시선을 보내 온다.

여기까지 작전을 지휘해 온 준에게 묻는 것이다.

누구를 살릴 것인지.

"...."

"...."

잠깐의 침묵 속.

준은 지금의 상황이 무척 짜증났다.

살아남으려고 발악하는 과정에서 왜 이렇게 자신에게 선택과 고민을 강요하는 건지.

1년 전만 해도 내일 회사에서 점심은 뭘로 먹을까 고민하던 사람에게 너무도 가혹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회사원이 아닌 마법사였고, 더 나아가 이번 작전을 실행한 작전관이었다.

"후우...."

준의 질문을 듣기도 전에 엘레노어는 이미 집중 상태에 들어갔다.

만약 이대로 준이 선택하지 않는다면, 엘레노어가 자신의 판단 하에 살릴 인원들을 정할 것이다.

그런 상황조차 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짜증이 날 뿐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마법사였고, 지난 1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그 누구보다 마법사다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마법사란 무엇인가.

관찰하고, 상상하며, 투영하고, 결과를 도출한다.

그것이 마법사였고,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위의 4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오연히 바라본다.

적어도 준이 생각하는 훌륭한 마법사란, 그런 이들이다.

"...."

그러니 바라본다.

무엇을?

자신들의 죄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최전선에서 싸운 모험가들?

그것도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원수들마저 품어야만 했던 용병들?

아니.

마법사란 족속들은 타인에 의해 결정된 문제를 풀지 않는다.

그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세상의 이치 뿐.

따라서 그가 봐야 할 것은, 그가 관찰해야 하는 것은 '누구를 살릴 것인가' 이전에, '무엇이 그들을 구하는가'였다.

즉.

준은 엘레노어를 집중적으로 바라봤다.

"엘레노어. 그 지팡이...."

검은 안대의 사제가 들고 있는 한 자루의 지팡이.

여태까지는 다른 일에 몰두해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지팡이가 비로소 준의 눈에 들어왔다.

"그걸, 어떻게 당신이...? 아?"

순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장면.

그와 동시에 눈앞에 있는 사제의 정체를 떠올렸으나, 준은 그 장면을 금방 머릿속 한켠으로 밀어 두었다.

'지금 저 여자의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문제는, 검은 안대의 사제가 들고 있는 지팡이였다.

"분명 저 지팡이는...."

겉보기엔 그저 손떼가 많이 탄 지팡이에 불과했다.

누구나 들고 다닐 법한 수수한 물건.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천쪼가리로 묶어둔 손잡이 부분을 따라서 나무의 결이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다는 점 뿐.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무의 결을 따라 새겨진 문양이었기에 자세히 집중하지 않으면 인지하기도 힘들 수준이었다.

그러나 준의 [밝은 눈] 스킬은 그 결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패턴은 '이정준' 시절의 기억마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뛰어난 기억력] 스킬이 제 역할을 해낸 것이다.

"[비탄의 종말]...."

게임 <블랙아웃 >의 한참 후반부. 월드 규모 레이드에서 등장하는 보스의 장비가 지닌 이름이었다.

마법사에게는 그야말로 최종 컨텐츠의 장비이며, 입수 난이도가 극악인 탓에 고인물로 가득한 커뮤니티에서도 얻어 본 이들이 극소수였을 정도였다.

그런 장비가, 지금 준의 눈앞에 있었다.

"에, 엘레노어 사제. 잠깐, 잠깐만."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한참 집중하고 있던 엘레노어의 지팡이에 손을 가져다대자, 깜짝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은 엘레노어의 손을 위로 올리고 지팡이의 손잡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본명 내 기억이 맞다면....'

품에서 포션을 꺼내 마신다. 짧은 시간 몇 번이고 마신 탓에 그 효력이 상당 부분 떨어졌지만, 지금은 그거라도 마셔야만 했다.

아직도 뜨겁게 달아오른 마력회로를 조금이나마 진정 시켜야 했으니까.

다른 한 손으로는 시선을 집중해 엘레노어의 지팡이를 바라봤다.

나무의 결을 따라 만들어진 문양을 토대로 내려가다보니, 손 끝에 무언가 걸리는 감각이 느꼈다.

서둘러 그 부분의 천을 치우자, 그 안에는 자그마한 홈이 파여져 있었다.

"엘레노어 사제. 지금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그런데, 어쩌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지팡이가 아티팩트인 거, 알고 있었어?"

"뭐?"

생전 처음 듣는 소리인지 검은 안대의 사제가 자신의 지팡이를 내려봤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필시 이것의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간단하게 설명할게. 이 지팡이는 [변환]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변환...?"

"외부의 에너지를 끌고 와서 다른 힘으로 치환 시키는 거야."

그리고 준은 지팡이의 홈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가 [변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부위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후우...."

갑작스러운 준의 설명에 엘레노어는 혼란스러운 듯 보였지만, 준은 말보단 행동으로 먼저 보였다.

"지팡이에 집중해 봐."

"...알겠어."

준이 지팡이의 홈에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엘레노어도 준의 말대로 지팡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런 그녀의 눈에 푸르른 파도가 보였다.

아니, 파도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그녀를 덮쳐왔다.

말로만 듣던 바다가 저런 풍경일까.

거대한 파도가 수평선 너머로 휘몰아치는 것처럼, 푸른 형상이 그녀의 눈을 어지러이 만들었다.

이내 그것이 마력의 형태라는 것을 파악한 그녀가 경악의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집중... 해...."

그러나 준은 그 이상 자세히 설명할 여력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손을 초커 위에 올려둔 상황.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는 5%밖에 해방하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직 옅게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그의 마력회로를 따라 마력이 흐른다.

다시금 전신이 뜨럽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이번에는 그가 마력을 쓰는 게 아니라, 엘레노어가 쓸 테니까.

"마력을, 신성력으로...."

단편적인 말 몇 마디가 전부였지만, 엘레노어는 금방 준의 말을 이해했다.

'변환하는 거라고 했지.'

준이 지니고 있는 저 바다와 같은 마력을, 일제히 받아들여 신성력으로 변환한다.

그 순간 엘레노어가 울컥 헛구역질을 했다.

"웨, 웨엑!"

"받지 말고, 변환...."

"이런 미친 마법사가...."

그런 건 일찍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마법사인 준과 다르게 엘레노어의 마력회로는 지극히 일반인의 것이었다.

하마터면 큰 내상을 입을 뻔했기에, 엘레노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도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방금의 실수 덕분에 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략적인 감은 잡았다.

의지를 가지고 간절히 바란다.

마력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신성력은 무엇이든 품어준다.

두 기운이 시너지를 발휘했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지팡이를 통해 파도처럼 몰려오는 마력에 신성력의 이미지를 덮어씌웠다.

그리고 한 점의 의심 없이 신성력을 움직인다.

사제라는 것은 이렇듯, 단 한 치의 미혹 없이 스스로가 지닌 힘을 믿어야만 제 성능을 발휘한다.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밝혀 주시는 분이시여. 이 미천한 자가 바라나이다.'

푸른 파도가 점차 빛나기 시작한다.

마치 동쪽에서 트기 시작한 햇빛을 반사하는 바다의 면처럼.

그러나 빛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간다.

엘레노어는 살아생전 이렇게 따뜻한 빛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동시에 느꼈다.

그저 포근하고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이 빛이, 너무도 위험한 충동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전능감이었다.

한낱 인간이 신의 힘을 다루며 결코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엘레노어는 스스로에게 화들짝 놀랐다.

"집, 중...."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준의 목소리가 엘레노어를 현실로 데리고 왔다.

이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한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이적이며, 동시에 신께서 내려주신 가능성이다.

자기 자신은 어디까지나 빌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부터 알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망각 속에 잊혀져가던 그 깨달음이 엘레노어의 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스피어 오브 라이트(Sphere of light]

빛을 머금은 광활한 바다가 이내 빛의 굴절에 따라 원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크기는 해 봐야 직경 1m 정도 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죽음이 내려앉기 시작한 숲에 생명의 빛이 내려앉았다.

"...."

오버히트로 인한 고통에 한치 앞도 보기 힘들던 준의 얼굴에도 서서히 편안함이 감돌았다.

'내가 만든 마법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로군.'

피처럼 붉은 [파이어 볼]과는 너무도 다른, 따스한 빛.

준은 과연 자신의 마법에 담기는 심상 또한 저것과 비슷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직은 상상이 가질 않는 풍경이었으나.

더 이상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시선 끝자락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오는 에이든을 발견했다.

이미 한계를 넘은 육체가, 따스한 빛과 동료의 모습에 멋대로 안도를 느끼고 정신과의 연결을 끊어 버린 것이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6화

26화 명분

검은 숲 요새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수백 년 동안 밝혀지지 않은 검은 숲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가 발견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의 고위 인사들이 파견을 나왔고, 이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례적으로, 실패한 공략전 안에서 다수의 생존자들이 나온 것이다.

거기에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는 사제까지 껴 있던 덕에, 검은 숲 공략전에 숨겨져 있던 여러 비밀들이 속속들이 밝혀졌다.

그리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다수의 모험가와 용병, 그리고 몇몇 고위 인사들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계속해서 거론됐다는 점이었다.

"마법사가 이번 사태에서 큰 활약을 했다지?"

"청운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비밀을 풀어 냈대."

"듣기로는 하급 마법사라던데?"

"하급 마법사? 하급 마법사가 공략전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지휘까지 했다고?"

"하! 어떤 마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하급 마법사를 퇴출시켰다니. 꽤 배가 아프겠어."

"벌써부터 여러 마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풍문이 있어."

"그래? 그런데 그 마법사는 결국 어디 있는데?"

그리고.

소문의 그 마법사가 눈을 떴을 때는 히든 스테이지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 * *

준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황실 소속의 수사관들이었다.

치료사를 통해 준의 신체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곧바로 이번 공략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물었다.

그 과정에서 제법 강도 높은 수사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제국법상 준은 범죄자나 용의자가 아닌 선량한 시민이었고, 추가적으로 클로이가 변호인단과 함께 나타나자 수사는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리고 현재.

준은 임시로 클로이의 사무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아직 회복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네가 놀랐으면 난 얼마나 놀랐을까?"

"그것도 그러네."

태연하게 반론하는 준의 말에 클로이가 잠시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아... 미안해.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좀 복잡하게 됐거든."

"무슨 일인데?"

"굳이 따지자면 네 이름이 너무 갑자기 알려지기 시작한 거지."

"내 이름이?"

클로이의 설명에 의하면, 수백 년 만에 밝혀진 검은 숲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는 엄청난 수준의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한다.

문제는 슬슬 다음 황권을 차지하기 위한 황족들에게 이번 기회가 굉장히 먹음직스럽게 보여졌다는 점이다.

"그뿐이야? 귀족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어. 황족을 지지하고 있는 귀족도 있고, 자기 권력을 키우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귀족들도 있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준을 노리고 있다 했다.

"그럼 나를 찾는 이유는...."

"명분이 필요해서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클로이의 말대로라면, 내년 검은 숲 공략전은 공략대 자리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당연히 각 소속마다 최고의 실력자들을 대동할 텐데, 그렇게 되면 가장 큰 역할은 명분 싸움이 될 것이다.

"그 명분에 내가 가장 적합하다는 건가."

준을 자신들의 소속으로 끌어들인다면, 훨씬 안전하게 공략전을 진행할 수 있다는 명분.

클로이가 이마를 감싸 쥔 이유였다.

"만약 벤자민 단장이 살아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결국 죽어 버렸고."

부단장으로는 모양이 안 사는 데다, 추가적으로 그들 모두 범죄자 신분이었다.

"거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부터 내가 너를 후원하고 있다는 게 알려졌어."

"너희 집안 쪽에서는 어떤데?"

"할아버지는 일단 관망하고 계셔."

"앞으로 네가 어떻게 움직일지 두고 보겠다는 거네."

"아마 그렇겠지."

항상 정치적 중립으로 길레느 상회를 이 자리까지 올린 게 바로 클로이의 할아버지, 길레느 제이크였다.

당연히 이번 일에도 중립을 선언할 줄 알았는데.

"넌 지금 상황 자체보다 그 할아버지의 반응이 더 신경 쓰이는 것 같다?"

"당연하지. 다른 집단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 인간들을 상대하는 나를 할아버지가 어떻게 볼지가 중요한 거지."

"음...."

"그래서, 너 생각은 어떤데? 사실 내가 진짜 너 후원자인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세간에 클로이가 준을 후원하고 있다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상 둘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사업 파트너다.

따라서, 클로이가 후원자로서 준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었다.

그에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준이 입을 열었다.

"뭐, 사실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온다는데 그게 싫진 않아."

어찌 됐든 준은 용병이다. 타인의 관심이 필요했고,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런 와중에 준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으니, 이는 충분히 긍정적인 상황이다.

"그래도 당장 이게 급한 건 아니니까. 어느 쪽에 힘을 실어 줄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지."

"...관련된 정보도 좀 구해 줄까?"

"네가? 웬일로 이렇게 적극적이실까?"

마치 무언가 원하는 것이라도 있냐는 준의 표정에 클로이가 상인다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거 서운하네. 우리 인연이 고작 이것밖에 안 돼?"

"네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그 호의를 받아들였겠지."

"크흠흠...."

어서 바른 대로 불라는 준의 표정에 클로이도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가진 고서. 거기에 대한 문의가 상당하더라고."

"하긴, 그렇겠지."

다름도 아니고 수백 년 동안 밝혀지지 않은 공략전의 공략집이지 않은가.

당장 많은 단체들이 원하고 있는 '명분'에 있어서도 상당한 역할을 할 터.

'게임 속에서는 그냥 [거래 불가] 계열의 아이템이라 인벤토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였는데.'

때문에 어디 창고 한구석에 박아 놓고 잊으면 그만이었던 아이템이, 현실에서는 이런 쓰임새가 있었다.

"원하는 건 경매로 돌리는 거야?"

"바로 그거지!"

클로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준은 짓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본심을 감추려 했던 게 좀 괘씸한데...."

"가, 감추다니? 그냥 좀 뒤로 미뤄 둔 거지. 너도 원하는 걸 얻고, 나도 원하는 걸 얻는 거잖아?"

"미리 나한테 빚을 쌓아 두고 내 반응을 기다렸던 건 아니고?"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처신 잘하라고."

"...알겠어, 알겠다고. 미안해."

결국 이번에도 꼬리를 만 쪽은 클로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별일이 없다면 너한테 맡길게."

"정말이지?!"

기대가 가득한 클로이의 눈빛에 준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서를 판매하는 것만으로도 클로이는 다양한 인맥을 형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외에 다른 사항들은 없어?"

"황실에서 공문이 내려왔어. 이번 사태에 관련해서 상벌이 정해질 거라던데."

"나한테 벌이 오진 않을 거고. 보수로 뭐가 올까?"

무려 수백 년만에 히든 스테이지가 밝혀진 만큼, 황실에서도 꽤 통 큰 보상을 내리지 않을까.

* * *

"선배!"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처럼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나타난 에이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준을 바라봤다.

"괜찮으십니까?"

"어째 넌 날 볼 때마다 그 말을 하는 것 같다."

이번에 크게 다쳐서 그런 걸까.

확실히, 이번에는 여러모로 죽을 뻔한 일이 많았다.

3레벨의 쌍둥이 모험가와도 전투를 치르고, 언데드한테 기습도 받고, 페어리 퀸의 시선도 끌고.

"뭐, 보다시피 멀쩡해."

"휴, 다행입니다."

"그러는 너는 어때? 일주일 동안 수사관들한테 붙잡혀 있었다며."

"그... 별일은 없었습니다."

"정말?"

"예."

그리 말하는 에이든은 어딘가 풀이 죽은 모습이었기에, 준은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진짜로?"

"음...."

저 푸른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자니, 에이든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사실, 황실에서 접근이 있었습니다."

"황실이라... 뭐라고 하든?"

"더 이상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마 수사하는 과정에서 에이든의 정체가 밝혀졌을 터.

에이든이 황실 밖으로 내쫓겼던 사실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 말만 하고 끝났어?"

"예. 그렇습니다."

그리 말하는 에이든의 표정은 더없이 무거웠다.

버려진 황족인 에이든에게 황실이 내린 명령은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명령은 간단했다.

더 이상 눈에 띄지 말고, 어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죽은 듯 살라는 것.

즉, 이대로 에이든이 모험가로서 활동을 했다간 다양한 압박이 이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에이든 성격상....'

아니나 다를까.

에이든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는 더 이상...."

그러나 그 전에 준이 먼저 그의 입을 막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생각 좀 해 볼 테니까."

"예...?"

여기서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감히 황실의 뜻을 거스를 방법이 있는 걸까.

에이든이 불안한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선배라면 다를지도.'

함께 알고 지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혹시 이번에도 어떤 방법을 떠올린 걸지도 모른다.

에이든의 눈빛에 작은 희망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갖기엔 너무 일렀던 걸까.

이어지는 준의 말에 에이든이 머리를 푹 숙였다.

"이 부분은 내가 쉽게 답해 주기가 힘들어.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하고."

"역시... 그렇습니까."

"그래도,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지."

"예?"

"나도 이대로 너를 포기할 생각은 없거든."

당연한 말이었다. 준은 이미 에이든에게 너무 많은 것을 투자했으니까.

작게는 에이든이 걸친 장비들부터 시작해서, 그가 공략전 내에서 얻은 스킬까지.

거기에 운광검은 이제 두 번 다시 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든처럼 믿을 수 있는 전위를 구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 혼자 힘들다는 거지, 다른 사람의 손을 좀 보태면 어려운 일은 아니야."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음, 이건 내가 직접 말로 표현해 주기가 좀 힘드네. 자세한 설명을 하려면, 아무래도 직접 겪어 봐야 할 텐데...."

무엇을 말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에이든이 의아함을 품고 있을 때.

"안 그래도 기회가 왔네."

그러면서, 준은 에이든에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재질에, 황금빛 테두리가 그려져 있는 봉투는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물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황실에서 직접 우리를 불렀어. 이번 공략전과 관련해서."

그러니 그곳에서 직접 보여 주겠다며, 준이 미소를 지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7화

27화 보상

비조(鼻祖)의 도시.

검은 숲 요새와 마찬가지로 '초기화'가 진행되지 않는 1계층의 [체크 포인트] 중 한 곳.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제국에서 블랙아웃을 발견하고 가장 처음 발전을 시작한 도시였다.

때문에 블랙아웃 내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줬다.

"후우... 죽을 뻔했다, 진짜."

검은 숲에서부터 이틀에 걸쳐 도착한 비조의 도시.

그곳에 드높이 올려진 비조성 내부.

화려하려고 만든 건지 사람의 기를 죽이려고 만든 건지 헷갈리는 성의 내부에서, 준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의 발단은 이곳까지 준을 안내한 고용인의 제안에서부터였다.

"향후 개최될 연회를 위해 저희 쪽에서 준비를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자리에 걸맞은 치장을 해 주겠다는 말에, 준은 호기심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부터 옷 입는 것까지 하나하나 옆에서 훈수질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네."

무려 세 시간 동안 시달린 결과물을 보기 위해 준이 거울 앞에 섰다.

"...그래도 나쁘진 않으니까 참는다."

만약 거울을 보고 만족하지 않았다면, 준은 고용인들에게 용병의 몰상식함을 단단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하하... 그래도 선배,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냐? 고맙다. 그런데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막 엄청 기쁘진 않네."

준과 마찬가지로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고 나온 에이든은 누가 봐도 귀공자처럼 보였다.

소매 끝 부분에 자그마한 프릴이 달린 새하얀 와이셔츠. 그 위로 밝은 갈색의 짧은 조끼를 입었고, 비슷하지만 조금 더 진한 톤의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거기에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황족으로서의 자세가 벌써부터 티가 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났음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비주얼.

그 때문인지, 몇몇 고용인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것까지 보게 된 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평소에 괜히 꼬질꼬질하게 다니던 이유가 있었구나."

"아하하...."

벌써 몇 번 시달린 경험이 있던 것인지, 에이든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선배의 정장도 굉장히 잘 어울리십니다. 특히 한쪽 어깨에만 걸치신 망토가...."

"마법사답게 지적인 느낌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입혀 주던데."

옷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불편한 감은 있었지만, 에이든의 말처럼 준도 자신의 차림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연회장에 도착해 에이든과의 수다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반가운 얼굴들이 도착했다.

"여, 마법사 양반!"

마찬가지로 황실의 부름을 받고 온 콜튼이었다.

거칠게 자란 수염도 정리하고, 머리까지 다듬은 콜튼의 인상은 이전과 비교해 훨씬 정겹게 느껴졌다.

'우리랑 다르게 고용인들에게 시달리진 않은 모양이군.'

그 외에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로 적당히 깔끔한 옷을 알아서 챙겨 입었다.

"어이쿠. 옆에 있는 미남은 누구신가?"

"에이든입니다, 콜튼 대장님."

"하하! 다들 멋들어지게 꾸미고 오셨구만. 나 참. 살면서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다들?"

그것을 시작으로 연회장에 용병들의 큰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단 하루라도 입을 다물고 사는 법이 없는 그들은 그간 있던 일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주된 내용은 이번 공략전 사태를 주도했던 청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단원들은 5년형이라고 했지?"

"소문에 의하면 부단장은 7년형이라고 하더라."

"쯧, 좋은 꼴은 못 보겠어."

"그래도 누가 알아? 미개척 개발단에서 나름 활약하고 금방 나올지."

"하! 그럴 리가. 거기 들어간 녀석들은 십중팔구 병신이 되거나 죽어서 나오는데."

그들의 수다 소리에 준은 해맑은 웃음이 인상적이었던 루크를 떠올렸다.

'미개척 개발단이라....'

미개척 개발단은 블랙아웃 내에서 죄를 지은 죄수들을 계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다.

용병들의 말마따나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지만, 괜찮은 실적만 쌓으면 금방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상념에 빠지려는 찰나.

"모르데나인 백작께서 드십니다."

연회용 마도구에서 고용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동시에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이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단 한 사람. 에이든을 제외하고.

"다들 연회를 잘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로군."

모르데나인 백작.

황실의 이름을 어깨에 짊어지고 블랙아웃 내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결정하는 인물.

즉, 황제를 대신해 블랙아웃을 통치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계단에서 내려오며 에이든을 발견했다.

버려지긴 했으나, 에이든은 황족이다.

홀로 짧게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하는 에이든을 바라보며 백작이 눈을 빛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다들 일어서시게. 제국의 이름을 높인 그대들이 무릎을 꿇을 이유는 없지."

그 말이 끝나자 용병들이 일어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앞서 고용인들에게 주입당한 예의의 결과였다.

"그래, 이렇게 용사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제국의 미래가 참으로 밝다는 게 느껴지는군."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그러나 내가 여기 있다면 그대들도 편히 쉬지 못하겠지? 내가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귀족일세. 하하하."

지극히 권위적이던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환기시킨 그가 이어서 말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네. 나 같은 이들을 보는 것 보다야, 눈앞에 있는 황금이 중요한 법 아니겠나?"

지극히 공감한다는 듯 용병들이 몸을 떨었다.

벌써부터 저 백작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걱정 말게. 비록 이곳이 술과 황금으로 가득한 지상은 아니겠으나, 블랙아웃 또한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 이곳 비조의 도시에 용사들을 위한 선물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네."

그러면서 단상 위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들어 흔들자, 여러 고용인들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자, 그대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고용인들을 따라가게. 그럼 자네들의 업적에 합당한 보상이 쥐어질 걸세. 단, 이 모든 것은 황제께서 내려 주신 은덕임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일세."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사,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국에 영광이 있기를!"

이어서 용병들이 약속된 만세 삼창을 하고, 모르데나인 백작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고용인들이 용병들을 데리고 2층으로 안내했다.

각 방마다 배정된 위치로 향했으나.

"...?"

준을 안내하던 고용인만이 그를 3층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3층에 도착한 준은 반사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무언가 다르다.

딱히 무언가 위협을 느낀 것은 아니었으나, 그저 고급스럽기만 하던 1층과 2층하고는 달리, 3층에서는....

'권위가 느껴지는군.'

심지어 앞에서 걷고 있는 고용인의 발걸음도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전문적인 무술을 배운 자의 걸음걸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쯤, 그는 3층의 복도 끝에 도착해 있었다.

"들어가십시오."

고용인의 안내에 따라 준이 내부로 들어서자.

"반갑네, 마법사여."

모르데나인 백작이 소파에 앉아 준을 맞이했다.

* * *

"제법 놀란 모양이군."

"...왜 아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백작의 등장.

준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백작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놀라게 한 것은 미안하네. 하지만 이해해 주게. 그래도 자네는 이번 공략전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용사이지 않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핫. 겸손하군. 그래,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네. 용병인 자네에겐 나와의 만남보다, 아무래도 보상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용인이 고풍스러운 상자를 백작에게 건네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이어서 백작이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자.

"...?!"

그 안에서 하나의 환(丸)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뿜어냈다.

"하하핫. 아까보다 더 놀란 모양이군."

백작의 말처럼, 준은 백작을 두 눈으로 봤을 때보다 놀랐다.

눈앞에 있는 물건은 적어도 몇 년 뒤에나 볼 거라 생각했던 아이템이었으니까.

"[성장환]일세."

일명 [스킬 성장권]이라고 불리던 물건.

일반적으로 스킬의 등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는 물건이었다.

'인게임 경매장에서도 아주 간혹 가다 발견되던 건데, 이게 왜 여기서...?'

최소 3계층 이상에서, 그것도 아주 운이 좋아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세계에서도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물건이다.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물론일세. 자네도 알지 않나. 나는 허언을 할 수 없네. 내가 앉은 자리란 그런 자리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아닐세. 그 정도로 놀랐다는 의미일 테니. 나도 만족스럽군."

그러면서 모르데나인 백작은 환이 담긴 함을 이쪽으로 천천히 밀었다.

그에 준도 손을 가져다 대려던 그때.

"...?"

아직 백작의 손이 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 고개를 들어 백작을 바라보자.

방금까지 허허로움을 연출하던 백작이 눈빛 속에서 날카로움을 드러냈다.

"마법사인 자네라면 알겠지만."

"...."

"세상에는 등가교환이라는 게 존재한다네. 그래서 묻겠네만, 이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가?"

"적어도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임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물론 나는 자네의 업적을 인정하네. 무려 수백 년만에 등장한 히든 스테이지에서 큰 활약을 하지 않았나?"

"...."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자네 홀로 해냈다고 할 수는 없네. 다양한 인과관계가 성립된 덕분이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백작의 말처럼.

이번 히든 스테이지는 여러 사건들이 겹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목숨을 잃은 벤자민과 아리클로토스 교단의 사제, 엘레노어, 그리고 아래층에서 보상을 받고 있을 용병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활약을 했고, 준은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였을 뿐이다.

즉.

눈앞에 있는 이 [성장환]은 분명 분에 넘치는 보상이었다.

"하니, 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네."

"말씀하시지요."

"하하, 무게는 잡았지만, 그리 무거운 질문은 아닐세."

과연 아닐까?

물론, 그가 할 질문은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준의 목숨은 너무도 가벼운 것이고.

"버려진 황족에게 접근한 이유가 무엇인가?"

준에게는 자신의 목숨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려졌다고 하는 것치곤, 꽤 관심을 쏟으시는군요."

준이 입을 열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해결됐어."

"...예?!"

한밤의 테라스.

용병들조차 술기운에 자취를 감추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을 무렵.

백작과의 만남을 마치고 연회장으로 돌아온 준은 달빛이 잘 받는 테라스로 에이든을 데리고 와서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에이든은 한 번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네가 이 블랙아웃에 있는 것부터가 황제의 허락이 있던 덕분이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야. 만약 네가 이곳에 있는 걸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넌 애초에 블랙아웃에 오지도 못했어."

허락이 없었다면 유배지 바깥으로 나간 순간, 에이든은 추살되었든 강제로 유배지로 끌려갔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넌 이곳 블랙아웃에 무사히 도착했고, 몇 달이나 머무는 동안 아무런 간섭도 없었지."

"그럼 저한테 접근한 사람들은...."

"황제의 뜻이 황실의 뜻이지만, 황실의 뜻이 황제의 뜻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

말하자면, 황제와는 관련이 없는 제3세력이 멋대로 한 행동이라는 말이었다.

"도대체 누가...."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에이든은 준의 말을 기다렸다.

"그야, 황제가 널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럼 거기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에이든에게 접근한 세력이라는 게 승계 경쟁을 이어 가고 있는 황족 중 한 명인지.

아니면 황제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빼앗아 오려는 귀족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황실이라는 이름값에 괜히 한 번 관심을 가져 보고 싶은 인물의 독단인지.

그따위 것들은 하등 쓸모가 없어진다.

왜?

황제가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그럼 어느 누구도 에이든의 행보에 관여할 수 없다. 그럴 자격도 없고.

황제의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그럼 제가 했던 걱정들은...?"

"결국 모두 쓸모 없는 것들이었지."

그 말에 에이든이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백작이 선배는 왜 부른 겁니까?"

에이든의 물음에 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황제의 뜻이 그렇다고 해서 밑에 있는 신하들까지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백작의 목적은 간단했다.

먼저 준이 누구인지, 왜 에이든의 곁에 있는지, 그리고 준이라는 존재가 에이든을 뒤흔들 수 있는지 등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관계가 그렇게 엄청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저 블랙아웃에 온 사람답게, 계층을 올라가려는 것뿐이지."

"예... 맞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어. 별생각 없다고."

"그걸, 그 사람이 믿었습니까?"

"그럴 리가.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고 했지."

그 행동이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이것도 단순히 말로만 해결될 일은 아니야. 그래서 팔았어."

"예? 팔다뇨?"

"공략전에서 우리가 구했던 고서 있잖아. '타락한 숲 원정 일지'. 그걸 백작한테 팔았어."

오매불망 경매만을 기다리던 클로이가 입에 거품 물 소리를, 준은 태연하게 내뱉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8화

28화 성장환

며칠 뒤.

백작이 마련한 연회가 끝나고 다시금 검은 숲으로 돌아온 지금.

클로이는 입에 거품을 물 기세로 준에게 달려들었다.

"배, 백작한테 팔았다고? 고서를? 진짜?!"

다만, 클로이는 불만이 아닌 반색을 내비쳤다.

왜냐하면, 고서를 사들인 백작이 반대로 그 고서를 경매장에 올리겠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클로이가 직접 여는 경매장에!

물론 이것은 준이 백작에게 고서를 팔면서 내건 조건이었다.

"모르데나인 백작의 이름이 걸린 경매야! 이건 다시 없을 기회라고!!"

그러니 클로이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본인의 이름으로 경매장을 열어, 상회의 이름을 높이는 게 그녀의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희희낙락할 때, 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넌 괜찮아?"

"응? 뭐가?"

"에이든 얘기 말야."

다만, 클로이와 얘기도 없이 고서를 팔아 버린 만큼, 준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에이든의 정체까지 밝혀졌지만.

생각 외로 클로이는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걸 말하는 거였어? 딱히 상관없는데?"

"...그래?"

"왜, 할아버지 때문에 그래?"

"내 입장에서는 너희 상회가 가진 이력을 생각해야 했으니까."

준이 이런 걱정을 한 이유는, 클로이가 몸담고 있는 길레느 상회가 정치적 중립을 모토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버려진 황자를 후원한다는 게 밝혀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정확히는 에이든에게 후원하는 게 아니라 준에게 후원을 하는 것이지만, 주변 시선들은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클로이는 준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아니, 그냥 헷갈려서. 넌 길레느 상회가 그런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

"뭐?"

"아, 물론 나는 그 사람이 황족 출신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어. 근데, 우리 가문 사람들은 아냐."

그러면서 클로이가 편지 한 통을 보여 줬다.

며칠 전에 온 것으로, 가문에서 에이든과 관련된 정보를 상세히 정리해 둔 서류였다.

"이게...."

"황실이 움직였다는 건 돈이 움직였다는 거고, 돈이 움직였으면 상인들도 움직여. 당연히 우리 상회에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 그리고 직접 황실에 물어보기도 했고."

"이런."

에이든에게 답을 알려 주기 위해 백작과 면담까지 했는데,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괜히 허무해지려 했지만, 그래도 가서 받아 온 보상이 있기에 나름의 위로가 됐다.

'물론, 이것도 황제가 살아 있어서 가능한 시나리오지만.'

어느 누구한테도 뱉을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준은 클로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클로이는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리고 있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가벼운 주제도 나쁘지 않을 듯해, 준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그래서, 이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거야."

"무슨 문제?"

"돈이 없어."

"...."

차라리 듣지 말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다.

* * *

준과 클로이의 관계는 한마디로 정하자면 동업자, 정도였다.

클로이는 다양한 상황과 인맥을 통해 준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었고, 준은 그 무대에서 활약하며 클로이에게 돈을 벌어다 주었다.

'따지고 보면 [성장환]을 받게 된 계기도 모두 클로이 덕분에 시작된 거지.'

만약 클로이가 준을 지노반과 연결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결과 또한 없었을 터.

그만큼 클로이의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준에게도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

"왜 돈이 없어?"

그런 만큼, 당연히 클로이의 재정에 대해선 준도 나름 신경을 써야만 했다.

"고블린 토벌이 실패하면서 남들이 돈 잃을 때 넌 돈을 벌었고, 로드 토벌전에서도 포션이나 이것저것 짱짱하게 팔아먹었잖아. 공략전에서도 꽤 이득을 봤을 텐데? 그리고 곧 경매장까지 열리잖아? 던전 입찰은 또 어떻고?"

이런데도 돈이 부족하다고?

정말 그렇다면 클로이의 돈 관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야!"

하지만 클로이는 억울하다는 듯 준을 바라봤다.

"고블린 토벌에서 만진 돈은 그래 봐야 푼돈이었어! 고블린 로드 때는 내가 돈만 벌었니? 병사들 장비며 포션이며 다 내 돈으로 지원한 거라고. 공략전은 거기서 본 손해를 메우는 수준이었고. 경매장은 아직 열리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던전 수입금이 벌써 그렇게 쌓였겠니?! 오히려 던전 소유권을 입찰한다고 쓴 돈도 좀 생각해 줄래?"

"흐음...."

"하아, 그래, 맞아. 너 덕분에 이래저래 얻은 게 많아. 하지만 그게 물질적인 이득이냐 하면, 그건 또 그렇지가 않거든. 전부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야."

"돈이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냐?"

준의 물음에 클로이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앞서 말했던 경매가 문제야."

경매는 상회에서 여는 거대한 이벤트다.

그리고 많은 상회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 경매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신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상회에서 어떤 유명한 귀족이 참여했대!'라는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 상회는 대단한 귀족과 거래를 튼 신용 있는 상회라는 이미지가 씌워지니까.

그리고 다행히, 클로이가 원하던 '유명한 귀족과의 연줄'은 얻었다.

"그래도 아직 좀 부족해. 물론 네가 가지고 온 고서의 가치는 굉장히 높지만, 결국 그거 하나뿐이니까."

"'이 상회는 이거 하나가 끝이구나'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거네."

"바로 그거지!"

그렇기에 클로이는 보다 다양한 상품들을 들여와 경매장에 내놓기를 바랐다.

"다행히 상품의 다양성은 모르데나인 백작 덕분에 어느 정도 해결이 되긴 할 거야."

"뭐야. 그럼 다 끝난 이야기 아냐?"

"끝까지 들어!"

모르데나인 백작이 길레느 상회가 여는 경매에 물품을 맡겼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다양한 이들이 이번 상회에 자신들의 물건을 올리고자 할 것이다.

모르데나인 백작의 이름이 걸린 만큼, 그리고 고서의 중요성만큼 유명한 이들이 몰려올 테니까.

그곳에 자신들이 가진 경매품을 올린다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진 좋으나, 클로이는 자신의 이름으로, 즉 길레느 상회에서 직접 올린 물품 또한 경매장에 내걸고 싶어 했다.

"그래야만 우리 상회의 경매장도 경쟁력이 있다고 알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물품을 살 만한 돈이 없어."

"경매장에 걸릴 만한 품목이라...."

그러자 준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자, 클로이는 눈을 반짝였다.

예전부터 저런 식으로 생각에 깊이 잠겼던 준은 좋은 타개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딱히 없겠네."

"...뭐?"

"아, 아니. 무슨 표정을 그렇게 지어. 누가 보면 세상 무너진 줄 알겠네."

믿었던 준이 배신하자 클로이의 표정이 대번에 흙빛이 되었다.

당황한 준이 말을 이었다.

"내가 찾을 수 있는 건, 해 봐야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몇몇 유물들 정도야. 그런데 그런 건 돈이 별로 되지도 않잖아. 포션 제조법이라던가 그런 건 이미 널리 퍼진 상황이고...."

"어?"

"응?"

"뭐?"

"뭘?"

"방금 뭐라 했냐고!"

"아이, 깜짝이야. 내가 찾을 수 있는 건 유물이나 포션 제조법...."

"유물! 포션 제조법! 아니, 유물은 됐어! 도자기 같은 건 이미 차고 넘치니까. 포션 제조법! 포션 제조법이라고?"

"어, 어...."

클로이의 반응에 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준이 갈 수 있는 던전에서 얻을 만한 포션 제조법이야, 다 하급이고 그런 것들은 이미 시중에 널리 퍼져 있는 것들이다.

돈을 만질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을 기대하려면, 최소한 3계층 이상은 가야 했다.

'게임 내에서도 이런 건 전부 1골드에 처분 됐었는데. 아니면 바로 창고행이던가.'

훗날 사업 컨텐츠를 확장시켜 직접 개발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급 포션 제조법은 투자하는 비용 대비 충분한 가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준의 착각이었다.

"하아... 넌 어떤 면에서는 나도 놀랄 정도로 똑똑한데, 또 어떤 면에서는 처절하게 무식하구나."

"무, 무식?"

적어도 마법사가 된 이후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없던 준이 황당해하자, 오히려 클로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설명했다.

"포션 제조법은 일종의 특허권이야."

"특허권? 사업 쪽 이야기냐?"

"응."

"네 전문분야를 나한테 대입해서 무식하다고 한 거야?"

"됐으니까 듣기나 해."

"응."

언젠가 준도 직접 사업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 만큼, 잠자코 클로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특허권은 관련된 제조법을 황실에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야. 포션 제조법은 다른 특허권에 대한 허점을 만들 수도 있어."

"무슨 의미야?"

"예를 들어서, 한 마탑이 포션 제조법을 구해서 연구를 진행했다고 쳐 보자. 그런데 마법사들이 그저 제조법만 따를까? 아니야. 당연히 비슷한 재료들로 비슷한 효과가 있는 포션들까지 싹 다 연구하고 그것들까지 특허를 진행시키지."

하지만 다른 마탑에서 그와 비슷한 포션 제조법을 얻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조법을 얻은 마탑에 한해서는 다른 마탑의 특허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겨."

-이미 고대서부터 있던 제조법인데 이걸 너희가 특허라고 할 자격이 있나? 이미 세상에 존재했던 건데?

-그리고 우리는 포션에 들어가는 재료 비율이 달라요, 비율이! 이러고도 같은 포션이냐? 응? 효과가 다르다니까?

-그니까 이건 너희 특허랑 관련이 없어!

...라고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서로의 영역을 넓혀 가는 수단으로 쓰이지."

그렇기에, 이런 포션 제조법이 경매장에 올라올 때면 무수한 마탑들이 달려들어 명분 경쟁을 시작한다.

"물론 가격은 그리 대단하게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탑 입장에서, '주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매장' 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지."

"생각보다 이쪽 업계도 빡세구나."

"당연하지.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경제 시스템인걸. 그리고 무엇보다, 포션 업계는 블랙아웃의 산업 구조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어."

그러니 관련 인맥을 쌓는다면 훗날 클로이가 포션 사업에 손을 댈 때도 여러모로 편의성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포션 제조법이 있다고?"

"어. 몇 군데 아는 곳이 있어."

"후우... 좋아. 그럼 그거랑 관련해서 너한테 의뢰를 넣을게. 첫 정식 의뢰야. 그것도, 길레느 상회의 이름이 걸린."

"오."

클로이만큼이나 준 또한 용병대에 대한 명성이 중요했기에 클로이의 말이 반가웠다.

"포션 제조법을 구해 줘. 최대한 많이."

* * *

"의뢰야."

"의뢰입니까!"

며칠 푹 쉰 에이든은 준의 설명을 모두 듣고는 꾀죄죄한 몰골로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정식 의뢰입니까!"

"그렇지."

이전까지는 준이 직접 의뢰인을 찾아 나섰으나, 이번에는 의뢰인(그래 봤자 클로이었지만)에게 정식으로 받은 의뢰였다.

"확실히, 길레느 상회의 이름값이면 우리 용병대의 이름값도 크게 오를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부터 훈련에 들어갈 거야."

"훈련 말입니까?"

"응. 이번 기회에 전력을 한번 가다듬어 봐야지. 너도 [스킬북] 받았잖아."

"아... 그렇습니다!"

문뜩 생각났다는 듯 에이든이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 받은 리트리버.'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프로펠러처럼 사정 없이 흔들고 있을 터.

아무튼, 준이 [성장환]을 받은 것처럼, 에이든은 비조의 도시에서 [스킬북]을 보상으로 받았다.

스킬의 이름은 두 사람 모두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설마하니 [돌진] 스킬을 이렇게 얻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앞서 검은 숲에서 마주쳤던 골렘의 스킬, [돌진].

아머 크러쉬 특성이 붙어 있기에, 전방에서 싸우는 에이든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스킬이었다.

패시브 스킬인 [야수의 신체]와 별개로, 에이든이 얻은 첫 액티브 스킬이었다.

그만큼 에이든은 하루라도 빨리 써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황.

"새로운 스킬도 점검할 겸, 나도 준비를 해야지."

준은 자신의 품 안에 담긴 [성장환]을 떠올리며 말했다.

* * *

"역시, 이 스킬밖에 없겠어."

커뮤니티에서는 스킬 성장권이라 불리던 [성장환].

말 그대로 스킬을 성장 시키는 이 아이템은, 단 하나의 스킬에만 적용할 수 있다.

현재 준이 배운 스킬은 다양하나, 최근 들어 준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마법을 배운 케이스가 아니야.'

지구에서 살았던 시절 덕분에 다양한 응용이 가능했지만, 전문성은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그가 3서클까지 마법을 펼칠 수 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기초마법재능] 스킬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4서클의 문을 두드려야 할 시점.

[기초마법재능] 스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준은 마법적 지식에 한 해서는 범재나 다름없었으니.

새로운 마법을 배운다 한들, 그것을 실전에 녹일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기본적으로 3서클에 오른 마법사가 4서클에 오르기까진 1년에서 5년까지도 걸린다고 했던가.'

이쪽 분야도 재능이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준이 이 세계에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은 상황.

'계속해서 계층을 올라가려면, 서클이 가장 중요해.'

초반에 준이 가장 신경 썼던 명성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

이번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로 최소한의 이름은 알렸으니까.

그러니 이제 스스로의 무력을 키울 차례였다.

'그러니까 [성장환]은 [기초마법재능]에 쓴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환을 손에 든 준은 그것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성장환]은 준의 의지에 반응해 빛을 뿜어냈고.

그 빛은 그대로 준에게 스며들었다.

"음...."

이렇다 할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빛이 심장의 주변을 겉돌다, 자연스럽게 머리로 향해 갔을 뿐.

'기묘한 걸.'

물리적인 감각은 전혀 없었지만, 무언가가 확연히 자신의 몸을 돌아다니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몸에 흡수되었을 때.

번쩍―!

준의 몸에서 잠시나마 오색의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기초마법재능] 스킬이 [중급마법재능] 스킬로 성장했습니다!

라는 안내 문구라도 나왔을 터.

그러나 현실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변화는 착실하게 이어졌다.

"...!!"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알고 있던 마법적 지식들이, 준의 머릿속에서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됐다.

준의 의사를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현상.

그럼에도 준은 왜 그런 현상이 이루어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의 격이 달라지고 있어.'

상식이 강제로 개변되고 있었다.

가령, 숫자로 예를 들면.

숫자 1은 작은 숫자다.

당연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 1이 표현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게 작은 먼지 한 톨? 아니면 지나가는 풀이나 돌멩이 하나?

그도 아니라면 길 가다 보이는 떠돌이 개 한 마리? 혹은 사람 한 명이라면 어떨까?

어쩌면 수십의 사람이 모인 마을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런 마을의 몇 배는 큰 도시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하나의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게 끝인가?'

아니다.

더 나아가 대륙 하나요, 행성 하나가 될 것이고 하나의 태양계까지 늘어날 것이며 하나의 은하가 될 수도 있다.

숫자 1.

여전히 숫자는 1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숫자가 칭하는 대상은 한계를 모르고 거대해진다.

여태까지 준에게 숫자 1이란, 그냥 말 그대로 하나의 단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급마법재능]에 도달한 순간, 준에게 숫자 1은 더 이상 '고작'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그가 알고 있던 마법적 지식들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준은 그게 불편하다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개념에 대해서는 이미 머릿속 한편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마법에 대입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이미 몇 번이고 꺼내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마법에, 항상, 숨 쉬듯 적용하지 못했을 뿐.

가끔씩 번뜩이는 재치로 썼던 것이, 이제는 기본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준의 마법적 지식은, 가령 하늘만 보고 살아온 범인(凡人)이 밤하늘에 수놓여진 별의 정체를 깨우친 듯한 변화였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된 것이다.

"후우우...."

그렇게 준이 깨달음을 정리하려던 찰나.

"...윽?!"

아직,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9화

29화 환생

[중급마법재능]을 깨우치며 들어오는 지식은, 기존에 준이 알고 있던 지식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시점이 바뀌었을 뿐, 새로운 지식을 터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는 이 기억은, 준의 것도 아니요, 하물며 '이정준'이 알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굉장히 불쾌했고, 낯설었으며, 한순간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는.

[아, 안 돼.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분명, 방법이 있을 터. 찾아야만 한다.]

[하하, 이 저주받을 세상이여! 저주받을 운명이여!]

[기어코 나는 그 힘을 쥘 수 없단 말인가? 그것이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하나 거절한다. 기필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설사, 그것이 세상조차 허락하지 않은 방법일지라도!]

[차, 찾았다...! 찾았어! 오오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운명은 내 차례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하나, 세상이여. 알아 두어라.]

[나는 마법사다.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고, 더 나아가 비틀어 현실에 현현시킬 것이다.]

[비록, 나는 벗어날지 못할지언정. 나의 후인(後人)은 벗어날지어다!]

거적떼기를 두른 한 노년의 마법사가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다.

그가 두른 거적떼기는, 준의 눈에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내, 전생이라고...?"

* * *

환생.

'이정준'이 <블랙아웃 > 속 세계에 들어오기 직전, 게임사에서 내걸었던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보상.

그렇기에 준은 그저 그것을 게임의 시스템으로서만 바라봤지, '환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단순히 게임 속 픽셀 몇 개로 설명 되는 세계가 아니었고, 모든 이들이 살아 숨쉬었으며, 준은 그 세계 속 주민이 되었다.

그러므로.

환생 또한 단순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라, 일종의 개연(蓋然)이 존재했다.

[비록, 나는 벗어날지 못할지언정. 나의 후인은 벗어날지어다!]

투지가 활활 타오르는 한 마법사의 외침.

노년의 나이에, 걸친 것은 거적떼기 하나뿐이었지만.

준은 본능적으로 알아봤다.

저게, 과거 '이정준' 시절에 생성했던 마법사 캐릭터였음을.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았으니까.

'시간상 말이 안 돼.'

애초에 준이 존재하는 지금 이 시점은, 게임 <블랙아웃 >의 캐릭터 생성 시점보다 몇 년이나 과거인 상황.

당연히 준이 만든 캐릭터가 실존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미래여야만 했다.

기억 속 캐릭터의 나이를 생각하면, 적어도 수십 년의 세월은 흘렀어야 정상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까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가 생성한 마법사는,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신지체]를 얻음과 동시에 마법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가 없었으니까.

재능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힘이 없었기에, 그는 온전히 [마신지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독이 든 성배다.

지금의 준 또한 [마신지체]의 봉인을 10퍼센트만 풀어도 몸에 반동이 걸리지 않았던가.

[마신지체]를 100퍼센트 가동했다간 온몸의 마력회로가 불타오를 것이고, 끝내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마법을 쓰지 못했던 거야.'

'이정준' 시절에는 그게 단순히 버그거나 혹은 캐릭터가 일종의 저주에 걸렸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관련해서 버그 리포트를 게임사에 보내 봐도 게임사 측에서는 '해당 문제는 버그로 인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라는 답변만 돌아왔었으니까.

그렇기에 마법사에게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신의 캐릭터는, 반대로 마법을 잃어버렸다.

과하게 넘쳐 나는 마력을 관리할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내 캐릭터를 포기했지만....'

어딘가 살아 있을 그의 캐릭터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이었으니까.

그는 아주 긴 시간 동안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끝내 해결할 방법은 찾지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자그마한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운명이었던 거야. [마신지체]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얻음과 동시에, 마법이라는 축복을 잃어버린 건.'

운명(運命).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정해져 있는 처지.

노년의 마법사는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환생체에겐 그런 운명을 피해 가도록 방법을 강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정준'이 깃든 신체의 주인이었다.

죽은 스승의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가 대신 [마신지체]를 막아서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는 [마신지체]의 영향을 받으면서, 목숨에 위협이 될 수준은 아니게 됐다.

'좀 복잡하긴 한데, 지금은 일단... 기억을 정리하는 게 가장 급선무야.'

극심한 두통에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눕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균형 감각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준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이면서도, 기억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방을 돌아다녔다.

"끄응... 좋아, 일단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고."

[중급마법재능]을 터득함과 동시에, 준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게 진짜 자신의 전생은 아닐 테지만, 어찌 됐든.

편의상 자신의 전생자는 끝내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으나, 대신 그 과정에서 방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준은 자신에게 허락된 몇몇 지식들을 떠올렸다.

'내가 알고 있는 고대어나, 고블린 로드를 상대할 당시 주술을 해석할 수 있던 이유. 그게 전부 이것 때문이었나?'

그제야 여태껏 자신을 찜찜하게 만들었던 의문들이 풀렸다.

"문제는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인데."

지식.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마법사에게 지식이란 때로 스킬북보다 더한 보물이 될 수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이게 도대체 몇 개야."

전생자가 가지고 있던 마법에 대한 지식이 멋대로 머릿속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토록 목말라하던 4서클 마법이었다.

한때 위력에 미쳐 살았던 '이정준'이 마법사 캐릭터로 배워 둔 마법들이었다.

당연히 위력 하나에만 미쳐 있던 터라, 파괴력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마법들뿐.

'그때는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돌아오네.'

하나하나가 수백, 수천만 골드를 호가할 4서클 마법들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쓸 수 있다니!

다만, 모든 일이 잘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나마 [중급마법재능] 덕분인가? 마법에 대한 기억들은 내 수준에 걸맞게 선명히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들이 흐릿해.'

준이 마법사 캐릭터로 배웠던 마법들은 5서클까지였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4서클뿐.

분명 머릿속에 존재하는 지식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흐릿하다.

그 외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생자가 가진 대부분의 기억들이 흐릿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고대어 정도.

그 외에 주술이라든가, 전생자가 환생을 위해 익힌 수많은 지식들은 흐릿하기만 했다.

아마 관련된 지식을 배우든가, 혹은 지금보다 성장을 이뤄 내든가 해야 할 터.

'흐릿하기만 할 뿐인 기억들이 사방팔방에 퍼져 있어.'

아마 자신이 느끼는 두통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준으로선 이미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몸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겪었던 것이었으니.

'기억부터 정리해야겠네.'

당장 쓸 수 있는 것부터, 없는 것들까지.

준은 낡은 공책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들을 하나하나 분류하며 적었고, 선명한 기억과 흐릿한 기억들을 정리해 나갔다.

'나쁘지 않아.'

여전히 두통은 그대로였지만, 준은 기분 좋게 웃음을 지었다.

성장통은 언제나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으니.

* * *

"나쁘지 않긴 개뿔."

환생의 기억을 깨달은 지도 어느덧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글이 난잡하게 적힌 종이들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 연필을 잡고 있던 손은 덜덜 떨렸다.

"선배?!"

식사를 하기 위해 만난 에이든이 무슨 일이냐며 걱정할 정도로 준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마법에 대한 지식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데...."

애초에 마법사 캐릭터가 배운 마법의 개수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이 부분의 정리는 금방 끝났다.

문제는 흐릿한 기억들이었다.

흐릿한 주제에, 그 기억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강하게 발산했다.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억은 준을 점점 미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런 기억들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건가.'

한 번씩 자신들의 존재감을 발산한 기억들은 거기에 만족한 듯 조용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결국 시간이 약이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언제까지 방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오늘은 일정을 좀 소화해 볼 예정이었다.

"먼저 포션 제조법을 구해야겠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이정준'은 <블랙아웃 >의 리메이크 펀딩이 끝난 이후, 혼자 몸이 달아올라 여러 성장 플롯들을 세워 뒀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포션제조] 스킬의 활용이다.

'처음에는 그냥 초반에 포션 값 좀 아껴 보자는 의도였는데.'

스킬과 관련해 여러 정보들을 습득한 결과, '이정준'은 단순히 포션 값만 아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훗날 사업 컨텐츠에서도 [포션제조] 스킬은 꽃을 피울 수 있던 것이다.

덕분에 준의 머릿속에는 당시 습득했던 정보들이 생생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어떤 던전들을 공략해야 할지 훤해.'

준은 이와 관련해서 에이든에게 향후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당분간 우리는 훈련을 할 예정이야. 그 목적지는 1계층의 여러 던전들이고."

"던전입니까!"

최근 며칠 동안 요새 안에서 머물고 있던 에이든이 찌뿌등한 몸을 풀며 반겼다.

"앞으로의 일정에는 여러 목적들이 있어."

"훈련 이외의 것입니까?"

"그런 것도 있고, 훈련에 포함된 것도 있지."

"훈련 이외의 것은 무엇입니까?"

"슬슬 사업을 준비하려고 해."

"사업... 말씀입니까."

"응."

이미 며칠 전에 클로이와 나눴던 대화는 에이든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사업과 관련이 있는 걸까?

"지금은 포션 레시피를 경매에 붙이는 것에 머물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클로이가 다양한 인재들과 연결점을 갖게 될 거야."

그 인맥들을 통해서 준은 향후 포션 사업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니 내 이름도 그들의 귀에 박히도록 만들어야지."

"음,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크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물론, 에이든이 그 이상 알 필요는 없었다.

"뭐, 이건 네가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어디까지나 용병대의 대장인 내가 이런 비전을 가지고 있다, 라고 설명해 주는 것뿐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훈련의 경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어."

"하나는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전력을 다듬는 거고.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적응 훈련이야."

"적응 훈련...? 무엇에 적응하는 겁니까?"

"환경 그 자체. 이제 슬슬 2계층을 준비해야 할 시기니까."

"2, 2계층 말입니까!"

그러자 방금까지 그저 그랬던 에이든의 표정에서 빛이 났다.

"응.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우리 실력은 3계층에서도 충분히 먹혀. 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3계층으로 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 그래서 적응 훈련인 겁니까?"

"맞아. 여태까지 우리의 무대였던 검은 숲을 벗어나서 새로운 지형으로 가 봐야지."

"정말 모험 같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가득한 에이든의 모습에 준은 짧게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에이든에게 말하지 않은 또 다른 계획도 떠올렸다.

'거기에 슬슬... 새로운 동료를 영입할 때가 됐지.'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욕심이 가득한 일정이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0화

30화 새로운 동료?

준은 에이든을 데리고 용병 길드로 향했다.

앞서 클로이가 의뢰한 포션 제조법과 관련된 의뢰가 있는지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용병 길드라... 정말 오랜만에 오는 것 같습니다."

준과 에이든이 용병 길드에 들른 것은 두 달 전쯤에 흰고래 용병대를 준이 흡수할 때가 마지막이었다.

'올해 블랙아웃에서의 활동 기간도 9개월 정도 남았나.'

"그런데 길레느 상회에게 의뢰를 받지 않았습니까? 용병 길드에서 의뢰를 받을 이유가 있는 겁니까?"

"명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니까."

"으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용병패도 갱신해야 하잖아."

"아, 맞습니다!"

고블린 로드 토벌전과 공략전 히든 스테이지에서의 활약 덕분일까.

용병 길드에서 준과 에이든에게 편지를 보내 왔다.

내용인즉슨 흰고래 용병대가 실버 등급에 올라갔으니 용병패를 갱신하란 것이었다.

"어디 보자...."

그러면서 준은 의뢰 게시판을 둘러봤다.

의뢰는 검은 숲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메마른 바위 지대. 여기 있네."

"메마른 바위 지대면...."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지. 황실의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기도 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딱히 인기 있는 곳은 아니지만."

준의 말대로, 다른 게시판들과 다르게 메마른 바위 지대 게시판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굳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아! 혹시 2계층 때문입니까?"

"맞아. 2계층으로 향하는 계층단(階層段)이 있는 곳이거든."

검은 숲에도 2계층으로 향하는 계층단이 존재하지만, 그곳은 준이 목표하는 2계층의 어느 지역과 거리가 멀어진다.

그렇게 의뢰 게시판에서 몇몇 수집 의뢰를 고른 준은 의뢰지를 챙겨 카운터로 향했다.

"의뢰 수주요?"

"그래. 그리고 용병패 갱신도."

의뢰지와 용병패를 함께 건네자, 직원이 잠시 살펴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희, 흰고래 용병대?"

"맞다만."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슈!"

"...?"

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카운터 안쪽의 방으로 향하자, 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우리가 생각보다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선배."

"그런가...?"

물론 준도 공략전에서의 활약은 제법 잘 헤쳐 나갔다 자부했다.

덕분에 명성도 꽤 올랐겠지만... 카운터 직원이 저 정도로 호들갑을 떨 정도인가?

게임 내에서는 명성치가 높다고 해서 큰 변화는 없었기에, 준은 저런 직원의 호들갑이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그러는 사이, 방 안으로 들어갔던 카운터 직원이 튀어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쇼! 지부장이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으니까."

* * *

검은 숲 용병 길드 지부장, 브래던은 굳은살이 박힌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자신이 은퇴한 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어느새 업계에서는 내 이름도 다 사라졌군.'

그리고 용병업계엔 새로운 인재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하는 인재들을 지켜보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앞에는, 최근 용병업계를 가장 시끄럽게 만든 장본인들이 있었다.

"자네들이 흰고래 용병대인가?"

"맞습니다."

"크크크. 얼마나 대단한 작자들인가 했더니, 정말 애송이들이군!"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저 거친 용병의 어법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이만한 업적을 세우다니. 이 맛에 내가 이 의자에 앉아 있는 거지. 인사가 늦었군. 검은 숲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브래던이다."

"흰고래 용병대를 이끌고 있는 준입니다."

"용병대원 에이든입니다."

"음! 다시 한번 환영하겠네. 이거 유명인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신기한 기분이로군."

꽤 호의적인 브래던의 반응에 에이든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듣자 하니 업계의 대선배이지 않은가.

"그, 저희가 그렇게 유명한 겁니까?"

"으잉?"

그리고 그런 에이든의 질문에 브래던은 신기한 생물을 다 본다는 듯 에이든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곧 준에게 향했고.

준도 어깨를 으쓱이자, 브래던은 책상을 내려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이런 머저리 같은 것들이 있나! 당연하지! 두 말하면 입 아픈 거 아니겠나!"

브래던은 이 업계에 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자신이 이룬 업적을 저 정도로 모르는 멍청이들은 처음 봤다.

마치 귀족가의 자제처럼 보이는 에이든은 둘째 치고, 한 명은 마법사이지 않은가?

마법사만큼 자기애가 강한 이들이 없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그의 입장에는 참기 힘들 정도로 웃겼다.

"아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군! 뭐, 업계 선배로서 안 알려줄 것도 없지."

고블린 로드의 이레귤러나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브래던이 두 사람의 업적 중 가장 대단하다 생각한 건 따로 있었다.

"자네들이 용병패를 가져다주지 않았나!"

고블린 로드 토벌전이 시작되기 전.

준과 에이든은 지노반 지휘관의 오점을 지워 주기 위해 고블린 부락에서 수십 개의 용병패를 털어 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준의 질문에 브래던이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잉? 자네들, 모르고 있었나? 아, 잠깐. 그래... 그랬군. 그렇게 흘러간 거였어."

그제야 브래던은 이 두 사람이 왜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원래 그 공은 지노반 지휘관에게 전부 넘길 생각이었군?"

당연했다.

당시에 준은 용병들의 관심보다는 지노반의 관심이 더 필요했으니까.

자신들의 명성보다는 지노반의 명성이 더 중요했기에, 모든 공은 지노반에게 돌렸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그저 지노반이 자신의 병력을 활용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지노반 지휘관이 그 사실을 알렸군요."

"맞네. 얼마 전에 찾아와 자네들의 이름을 알리더군."

"아... 그래서."

준도 이제야 브래던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타인의 용병패를 길드에 돌려주는 것은 용병들에게 큰 귀감이 되는 일이다.

그것도 수십 개의 용병패를 모두 돌려주었으니, 저런 반응도 이상한 건 아니다.

"크크, 재미있군. 비록 몰락했지만 귀족이, 그것도 요새의 지휘관이 자네들의 명성을 챙기려 하다니."

"음."

그 부분은 준도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 따로 지노반 경에게 편지라도 보내야겠군.'

아마 이런 식으로 인맥을 유지하는 것이겠지.

"아무튼, 내 자네들을 직접 보고 싶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네. 뭐,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말이야."

"용병패 갱신이군요."

"그래. 축하하네. 자네들은 이제 베테랑 용병대라고 봐야겠군."

고작 2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만에 베테랑 용병대가 됐다.

브론즈급 용병대가 한 시즌을 모두 의뢰 수주에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감사합니다."

"생각 외로 담담한데? 다른 녀석들은 실버 등급이 되면 아주 세상이 자기 것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데 말이야."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그럼, 할 얘기는 그게 끝입니까?"

"크크... 아까도 말했지만, 할 얘기가 제법 있지."

이번에는 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무래도, 고서 얘기겠군요."

"크흠! 알고 있었나?"

"이렇게 환대를 해 주는 게 고맙긴 하지만, 지부장님이 직접 나설 일은 아니잖습니까."

"마법사답지 않게 눈치가 빠른 친구로군. 맞네. 최근 고서의 행방에 관심을 가진 양반들이 제법 많아서 말이지."

"미안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해 줄 말이 없습니다.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아마 브래던 또한 어느 정치 세력과 연관이 있기에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이리라.

하나 준은 비조의 도시에서 모르데나인 백작에게 정치적 중립 선언을 했다.

때문에 이 자리에서 브래던이 무슨 말을 하든, 준은 고서에 관한 정보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런가. 그건 좀 아쉽군!"

하지만 브래던은 생각보다 쉽게 포기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슬슬 자네들도 용병대의 규모를 키워야 하지 않겠나?"

"...."

준은 브래던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을 꺼낸 저의가 무엇인지 가려 내기 위함이었다.

'아하. 유령 대원을 꼬집어 말하는 건가?'

보통 용병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최소 3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다.

준은 그중 한 명을 철수... 아니, 찰스라는 유령 대원으로 채워 넣었다.

만약 브래던이 그 부분을 콕 찝어 헤집으면, 기껏 실버 등급까지 올린 용병대가 산산히 해체되는 수가 있었다.

준의 고민이 잠시 깊어지려 할 때, 브래던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거운 주제는 아닐세. 단지, 용병대의 규모를 키울 거라면 내가 인재 한 명을 추천해 주고 싶어서 그렇지."

"...지부장께서?"

그걸 왜 네가 해 주냐는 듯 준이 바라보자, 브래던의 눈빛에 아주 잠깐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맡게 된 녀석이 있어서 말이야. 그런데 언제까지고 내 밑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왜 하필 우리입니까?"

"보아하니 자네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꽤 대단한 것 같아서."

정답이었다.

일반적으로 브론즈 등급의 용병대는 대원들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한다.

브론즈 등급에서 질이라고 해 봐야 거기서 거기고, 기껏 제대로 된 인재를 찾아 봐야 금방 다른 용병대로 이직해 버리니까.

그러니 비슷한 수준의 재능을 가진 이들끼리 뭉쳐, 숫자빨로 의뢰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준은 여태까지 다른 대원들을 모집하지 않았다.

'명성도 없고 규모도 없는 용병대는 반란이 일어나기 딱 좋으니까.'

그런 사례들이 제법 있었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깔려 있는 준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미 점찍은 녀석이 있는데.'

지금쯤이면 메마른 바위지대를 전전하고 있을 어느 한 사람. 물론 이것도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준이 대화를 이어 갔다.

"근데 우리의 뭘 보고 맡기시려는 겁니까?"

"이거 참. 의심도 많군. 뭐, 자네 입장에서는 신중한 게 맞겠지만."

그러면서 브래던은 이유에 대해 말했다.

"물론 자네들이 로드 토벌전이나 공략전에서 보여 줬던 활약도 눈에 들어왔지. 하지만 난 무엇보다 자네의 침착함이 마음에 들었네. 콜튼, 그 까칠한 녀석한테 좀 들은 게 있거든."

"...콜튼?"

공략전 당시 준과 함께 팀을 이뤘던 용병대장이었다.

"그 애송이 녀석이 자네 칭찬을 그렇게 하지 뭔가."

"음."

새삼 눈앞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낯이 뜨거워지려 했지만, 준은 브래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실패했는지 기억도 안나는 공략전에서 일어난 이변. 모두가 공포와 분노에 전염되었을 때, 오직 자네들만이 이성적이었지."

브래던이 용병업계에서 살아온 지도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수많은 인재들이 활약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훗날 이름을 알리며 명성을 떨치는 이들은 재능 있는 자들이 아닌 밑바닥부터 전전하며 올라온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은 하나같이 이성적으로 상황을 지켜볼 줄 알았다.

그런 만큼, 준은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준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거 낯 뜨거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흐흐, 겸손하군.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할 텐가?"

그에 준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미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얼굴도 안 보고 선택하라니. 너무하십니다."

"응? 아, 그렇군! 으하하하핫! 내가 너무 내 이야기만 했어."

다시 한번 책상을 내려치며 그가 웃다가, 이내 소리쳤다.

"마야! 들어와라!"

"...?!"

들려오는 이름에 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여기서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름이었기에.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1화

31화 마야

네임드 NPC.

일반 NPC들보다 스펙적으로 뛰어나고, 일정 수준의 신뢰도를 쌓으면 특수 이벤트가 발동되는 NPC들이다.

즉, 그들에겐 개개인의 스토리가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에이든이 그러했다.

하지만 준은 에이든과 만나기 전까지 네임드 NPC를 용병대로 들일 계획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준이 살고 있는 시대는 게임 <블랙아웃 >의 시작 지점보다 몇 년 전의 시점이었으니까.

당연히 네임드 NPC들이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에이든과 만난 이후, 준은 진지하게 네임드 NPC들의 영입을 고려했다.

대부분의 네임드 NPC들은 에이든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준은 얼마 전에 어느 한 네임드 NPC의 과거를 떠올렸다.

정확하진 않으나, 지금 시점에 있을 법한 장소가 떠오른 것이다.

메마른 바위지대가 바로 그 장소였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런데 그 네임드 NPC가 뜬금없이 검은 숲에서, 그것도 용병 길드 지부장 밑에 있었다니.

마야.

에이든과 마찬가지로, 유저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네임드 NPC 중 한 명이었다.

* * *

"응? 자네 방금 뭐라고 한 건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준은 방금 자신이 무심코 한국어를 내뱉었다는 걸 깨닫곤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당신이 말한 사람이 저 여잡니까?"

"맞네. 이름은 마야. 주 무장은 쌍검일세."

그에 준은 다시 한번 마야라고 불린 여성에게 시선을 옮겼다.

짧게 친 검은 단발 머리.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의 눈동자에서는 미약하게 독기가 느껴졌다.

거기에 바짝 마른 체형 때문일까, 전체적인 인상은 영락없는 들고양이처럼 느껴졌다.

"안녕."

그녀가 어눌한 말투로 짧게 인사를 내보이자, 브래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우터'라네. 그래서 아직 우리 말에 서툴러."

아우터.

수백 년 전, 황실이 블랙아웃을 발견하기도 전에 먼저 들어와 터전을 꾸린 원주민들을 가리킨다.

"아, 아우터 말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러자 에이든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마야를 바라봤다.

아우터들은 모두 수백 년 전 초대 황제에게 굴복하길 거절한 이들이다.

당연히 현 황실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용병도, 모험가도 될 수 없었다.

제국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아우터들 또한 제국을 배타적으로 대했으니, 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다.

"으음... 저 아인 좀 특별하다네. 아우터들이 주워다 키운 아이니까. 핏줄은 제국민이지."

"아."

그제야 에이든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 내 이름."

"반갑다."

준이 손을 내밀자, 마야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맞잡았다.

"반갑다?"

"정말 이쪽 언어를 잘 모르는군요."

이건 꽤 심각한 문제였다.

팀 플레이의 핵심인 소통이 안 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자 브래던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다, 당장 받아 달라는 건 아닐세."

"무슨 의미신지?"

"한 달. 한 달 안에 내가 교육시키지. 그 뒤에 데려가도 좋아."

"전제가 잘못됐군요, 지부장님."

마야는 네임드 NPC다. 그것도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만 따지고보면 에이든과 비견 될 정도로 인기 NPC였다.

당연히 준도 그녀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는 티 낼 수 없었기에 일부러 까칠하게 말했다.

"먼저 실력부터 봐야겠습니다."

"크흠. 그것도 맞지. 마야. 몸은 풀었나?"

"결투?"

"결투가 아니라 대련이다."

"태련?"

"대. 련."

"몰라."

"끄응...."

정말 한 달 안에 사회화가 가능한 걸까.

준은 미심쩍게 브래던을 바라봤고, 브래던은 슬그머니 눈빛을 피했다.

"기, 기다려 보라고. 실력 하나는 믿어도 좋으니까. 직접 보면 되잖아."

"좋습니다. 에이든, 쟤랑 한번 대련해 볼래?"

"아, 예! 하겠습니다!"

새로운 단원. 그것도 자신과 함께 근접해서 전투를 치를 전사 타입이다.

에이든은 새로운 동료가 들어온다는 것에 벌써부터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도 너무 들뜨지는 마."

"예?"

"그냥, 조심하라고."

"...?"

준의 충고가 나지막이 에이든의 귀에 맴돌았다.

* * *

용병 길드의 지하에 위치한 대련장 위로 두 사람이 섰다.

운광검을 든 에이든이 얕게 신음을 흘렸다.

"음...."

대련이라고 하길래 에이든은 당연히 목검을 들고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상대인 마야가 그것을 거절했다. 그것도 완강하게 거절했기에, 실전처럼 검을 들고 섰다.

손에 쥐어지는 운광검은 매일매일 기름칠을 해 준 덕분인지 반짝거리며 광을 내고 있었다.

'괜찮을까?'

황실에서 살아온 에이든이 보기에도 운광검은 명검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 충분했다.

자칫 잘못하면 마야의 검이 부러지면서 불의의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짐짓 걱정이 든 에이든이 마야를 향해 시선을 옮겼을 때.

"...?!"

순간 피부가 저릿거리며 머리카락이 바짝 서는 듯했다.

'무슨 살기가....'

에이든이 본 마야의 첫인상은, 무기력함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꺼져 가는 불꽃 같았다. 무언가에 감정을 격하게 태우고 싶은데, 그 대상이 없어 픽 식어 버린 불꽃.

그러나 이제는 불태울 대상이 생겼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지난 두 달간의 여정으로 인해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감각이 외쳤다.

그것은 대련 직전, 준이 했던 말과 비슷했다.

-조심하라고.

"결!"

동시에 브래던이 대련의 시작을 알리자, 짐승이 움직였다.

짐승의 눈빛에서는 선명한 증오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증오는 에이든을 향한 게 아니다.

그저 분출할 곳이 없어 생겨난 감정이, 흘러넘치는 오물처럼 주변에 흩뿌려질 뿐이었다.

'빨라!'

생각보다 넓은 대련장의 끝에 있던 마야가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에이든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공략전 당시, 수인족 기사인 프라이드를 상대하며 얻었던 깨달음이 지금 이 순간 발현됐다.

그저 마르게만 느껴졌던 마야의 몸 아래에는 폭발적인 힘을 품은 근육이 숨어 있었다.

다리가 움직인다. 그다음은 허리가, 마지막으로 어깨가.

보여야만 했는데.

'어?'

보이지 않았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읏?!"

방금 공격을 막을 수 있던 건 순전히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다.

오감을 끌어올려 주는 스킬, [야수의 신체] 덕분이었다.

"짐승."

"무슨...?"

"같아."

에이든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마야는 에이든이 순간적으로 취한 움직임을 짐승에 비유했다.

직감적으로 [야수의 신체]를 느낀 것이다.

동시에 마야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어?'

느리다.

아니, 빠르다. 아니, 느리다.

동공이 확장된 에이든의 눈에는 분명 방금과 달리 마야의 움직임이 읽혔다.

하지만 읽을 수 없다.

분명 다리가, 허리가, 어깨가, 전신이 움직이고 그게 눈에 들어옴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기괴하고 괴이했다.

도대체 무슨 조화를 이뤄야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까?

그런 의문조차 떠올릴 새도 없이, 마야의 검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반응이 늦어졌다.

'아까 보다 느린데, 왜!'

저 마른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물리 에너지가 에이든의 몸을 밀어냈다.

'당장 저 움직임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밀려나는 와중에도 판단을 끝마친 에이든이 발밑으로 마력을 터뜨렸다.

잠깐 허공에 뜬 사이 자세를 다잡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야가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마야가 다시금 쏜살같이 짓쳐들어왔지만, 에이든은 그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검을 뻗었다.

카가각!

두 자루의 쌍검이 에이든의 검을 막았다.

거리상 에이든의 검이 더 길었기에 마야 또한 어쩔 수 없이 방어를 선택한 것이다.

'이대로 빈틈을...!'

만들 수 있으리라 판단한 에이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야의 부츠 밑창이었다.

"어?"

퍼억!

'어, 언제?'

처음부터 끝까지 마야에게서 시선을 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법처럼 마야의 발이 에이든의 머리에 꽂혔다.

움직임을 완전히 놓친 것이다.

마치 발을 휘두른다는 동작이 사라지고, 차였다는 결과만이 도출된 듯했다.

힘을 조절한 걸까, 아니면 자세가 불편하여 힘이 들어가지 않은 걸까.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도 에이든은 침착하게 몸을 한 바퀴 굴려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도 [야수의 신체] 덕분이었다.

"크으...."

"...."

이어지는 대치 상황.

비록 그 시간이 채 1초가 될까 싶은 수준이었지만,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자신의 수준에서 저 여자를 이기려면, 여태까지 싸워 왔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강제로 변수를 만드는 수밖에.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에이든의 기억이 과거로 돌아갔다.

바위처럼 튼튼한 준의 보호막을 향해 달려들던 거대한 육체의 주인.

골렘을.

[돌진]

마력이 에이든의 의사(意思)와 상관없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력뿐만이 아니다.

육체 또한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듯 멋대로 구부려졌다.

그 자세는 흡사, 과거 마주쳤던 골렘의 [돌진] 준비 자세를 닮았다.

동시에.

"...!!"

돌풍이 지나갔다.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찰나라는 말조차 너무 길게 느껴지는 짧은 순간, 에이든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에이든은 느꼈다.

변수가 만들어졌다고.

"에."

콰아아앙――!!

그림자의 잔상이 마야를 스치고 지나가 한쪽 벽에 부딪치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이고...."

안타까운 듯한 준의 목소리가 대련장에 퍼져 나갔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보인 것은, 벽에 부딪힌 채 기절한 에이든이었다.

"스킬 숙련도 이슈라니...."

변수라면 변수였다.

살기를 풀풀 풍기던 마야는 벙 찐 표정이 되었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브래던의 웃음소리가 대련장을 가득 채웠다.

* * *

"으윽."

에이든이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발광석이 박혀 있는 대련장의 천장이었다.

"일어났냐?"

"헙! 서, 선배?"

"이게 몇 개로 보여?"

"세 개?"

"음. 멀쩡하네. 포션 먹인 효과가 있나."

"으...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전속력으로 벽에 부딪혔는데. 저거 봐."

준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움푹 파인 대련장의 벽이 보였다.

"바, 방금 전...."

"[돌진]을 그대로 벽에 처박았지."

"허어."

그러자 뒤늦게 몰려오는 수치심에 에이든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큭큭. 어때. 처음 써 본 액티브 스킬은."

"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괜히 스킬의 생명은 숙련도라는 말이 있겠어?"

게임 내에서도 처음 배운 액티브 스킬은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때문에 새로운 스킬을 배울 때마다 하급 사냥터로 가 최소한의 숙련도를 챙겨야만 했다.

'그런 마당에 실전에서 그걸 써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부끄러워할 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시행착오니까."

"으하하하! 맞는 말이지! 처음부터 능숙하게 쓰면 그게 사람이겠나?"

"아, 지부장님. 그... 죄송합니다. 대련장 벽이...."

"괜찮네, 괜찮아.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니까. 먼저 제안을 한 것도 나지 않나."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에이든이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까까지 자신과 검을 겨뤘던 상대, 마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에이든은 무언가 석연찮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벽에 부딪힌 사람의 표정이로군."

"하하, 대차게 박았죠."

에이든이 기가 죽은 듯 말하자 브래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그대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을 테지. 안 그런가?"

"그것도 그랬습니다."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으로 벽에 부딪힌 것도 있지만, 마야와의 실력 차이에서 느껴지는 벽도 마주했으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마야의 움직임은 신묘하고 기괴했다.

만약 마야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녀가 내뿜던 기분 나쁜 살기를 떠올리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뭐, 당연한 일이지. 마야는 5계층에서 살아가던 부족에서 왔으니까."

"5, 5계층 말입니까?"

그럼 마야는 5레벨 유저라는 건가?

"아아, 마야가 5레벨이라는 건 아닐세. 단지 그녀를 거둔 부족이 그만한 실력인 거지. 실질적으로 마야의 수준은 4레벨일세. 거의 끝자락일 테지."

"세상에...."

최근까지 에이든은 나름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스킬 [야수의 신체]를 얻었고, 고블린 로드 토벌전에서도 꽤 활약을 했으며, 수백 년만에 등장한 공략전의 히든 스테이지에서도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준 또한 에이든이 3계층에서 활동하더라도 1인분이 가능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으니 말이다.

"4레벨...."

하지만 오늘 그 자존심이 무참히 박살 나는 듯했다.

마야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비슷해 보였으니까.

그런 에이든의 고심을 읽은 것인지, 브래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준을 바라봤다.

"어떤가. 실력으로는 충분하지?"

충분하다 뿐일까.

마야의 실력은 분명 지금 흰고래 용병대를 한층 더 상회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임시 대원으로는 들여 올 만하군요."

준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2화

32화 스킬

"이놈의 두통은 여전히 사라질 생각을 안 하네...."

아니면 흔들거리는 마차 안이라서 그럴까.

"끄응...."

준은 마차의 커튼을 걷어 바깥을 바라봤다.

검은 숲과 달리,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탁 트여서 보는 맛은 있네."

저 멀리 보이는 바위산과 끝을 모르고 펴져 있는 하늘의 풍경이 자원의 위대함을 알려 주는 듯했다.

메마른 바위 지대.

앞으로 한 달간, 준과 에이든이 머물 필드였다.

* * *

준은 바짝 마른 입 안을 물로 적시고는 입을 열었다.

"블랙아웃에서 강해지는 방법은 총 세 가지야."

에이든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는 경험이지."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너무 흔하지만, 그만큼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네가 얼마 전에 만났던 마야가 그런 케이스야."

지금쯤 브래던의 손에 의해 열심히 말을 배우고 있을 마야.

그녀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아우터 부족의 손에서 길러졌다.

그들은 블랙아웃이 시즌을 마치고 초기화가 진행될 때도 [체크 포인트]에 머물며 블랙아웃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외부에서의 지원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급자족으로 살아간다.

그런 곳에서, 마야는 평생을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왔다.

"당연히 황실에서 검 한번 쥐어 보지 못했던 너랑 비교할 경험이 아니지."

물론 준은 마야의 수준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는 마법사고, 전사가 아니었으니까.

그 대신 브래던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브래던은 마야의 움직임을 '자연과의 동화'라고 말했지. 그만큼 그 여자의 움직임은 주변 환경에 녹아들어 있는 거야. 생존을 위한 경험이 만들어 낸 결과지."

에이든이 마야의 움직임을 읽고도 그것을 공격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연스러움.

마야의 모든 움직임은 주변 사물에 녹아들어, 그것을 공격이라고 규정하지 못하게 한다.

"두 번째는 재능이야. 이건 대표적으로 네 경우고."

마야에게 패배하고 기가 죽은 에이든이었지만, 마야와 달리 에이든이 검을 잡은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았다.

"넌 고작 3년만에 마력을 다루고, 지금의 수준이 됐어. 순수하게 실력만 보자면, 너는 3레벨에서도 통할 수준이지."

그 말에 에이든은 자신이 오만했음을 인정했다.

고작 3년.

평생을 블랙아웃에서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던 마야와 달리, 에이든은 고작 3년만에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그러니 마야에게 밀리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스킬이야."

스킬.

나중에 알아차린 것이지만, 에이든은 끝내 마야에게 한 방 먹였었다.

제대로 된 공격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에 펼쳤던 [돌진] 중 휘두른 검이 마야의 검에 금을 낸 것이다.

만약 에이든이 벽에 부딪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검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스킬 말입니까."

그에 순간 에이든의 표정이 굳었다.

벽에 부딪혔던 치욕스러운 감정도 감정이었지만, 처음 사용해 본 액티브 스킬은 생각만큼 에이든을 기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

"표정 보니까 무슨 생각인지 알겠네. 네가 한 방 먹인 게 아니라, 스킬 덕분인 것 같지?"

"...예."

[돌진]을 사용하겠다고 생각한 직후, 에이든은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었다.

그야말로 누군가가 실로 연결해 멋대로 조종해서 승부를 치른 것 같았다.

그러니 에이든은 [돌진]이 만들어 낸 결과를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근데, 맞아. 스킬 덕분인 건."

"...."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가?"

"예?"

"과정에 매몰되면 그 어떤 결과도 만족스러울 수 없어."

"매몰...."

"예를 들어 볼까? 마야가 그 실력을 가질 수 있던 결과는, 아우터 부족에게 주워진 과정이 있어서지."

"...."

"네가 남들보다 훨씬 성장이 빠른 이유는, 황실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고."

에이든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에이든은 재능을 타고났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 정도로.

"그런데, 지금의 네가 만들어진 과정엔 오로지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 하나뿐일까? 아니지. 네가 직접 선택하고 고른 과정이 존재해."

버려진 황족이라는 이름 아래 수없이 많은 혐오의 시선을 받아 왔던 에이든.

그리고 역사적으로 에이든처럼 버려졌던 다수의 황족들은 그 시선에 굴복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았다.

하지만 오로지 에이든은 그 운명을 거부했고, 직접 검을 들어 블랙아웃에 왔다.

"네가 여태까지 해 왔던 그 모든 노력들도, 결과 중 하나지. 그럼 네가 얻은 [돌진]은 어떤 결과로 얻은 거지?"

"공략전에서의 공 덕분입니다...."

"맞아.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네가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일격을 가한 결과 덕분이야."

그러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스킬 또한, 에이든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마야가 생존을 위해 쌓아 왔던 과정 덕분에 결과를 얻은 것처럼, 네가 가진 그 스킬도 네가 만들어 낸 과정이자 결과야."

그러니 이제부터, 새로운 과정을 만들자.

"네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그 스킬을 온전히 네 것으로 바꾸는 일이야."

이어지는 준의 말에 에이든은 숙였던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 *

코카트리스(Cockatrice).

'검은 숲의 고블린'처럼, 이곳 메마른 바위지대의 필드 몬스터는 코카트리스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와, 정말 닭의 모습에 꼬리는 도마뱀입니다."

"맞아. 저게 녀석의 특징이지."

"눈을 마주치면 석화 저주에 걸린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소설을 너무 읽었네."

"아, 아니었습니까?"

준의 말에 에이든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준은 그런 에이든에게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아예 틀린 건 아냐. 저 녀석의 눈에는 마비 상태이상을 거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이레귤러 개체는 정말로 석화 저주를 걸기도 해."

"정말입니까?"

"응. 그래서 여러모로 까다로운 놈이지."

준은 코카트리스를 꽤 까다롭다 평가했다.

'1계층 수준에 맞지 않는 몬스터지. 일단 눈만 마주쳐도 마비를 일으키는 게 까다로워.'

때문에 게임 속에서는 녀석의 회피력이 무척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

'민첩 전사나, 원거리 클래스가 아니면 쳐다도 안 봤지. 그나마 전리품이 돈이 돼서 앵벌이용으로 잡긴 했는데....'

하나 그 특성 때문에 초반부터 코카트리스를 상대하려는 유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에이든, 저 녀석한텐 할 만할 거야.'

일단 마비 상태이상은 에이든에게 효과가 없다.

그가 지닌 [야수의 신체]에 전반적인 상태이상 저항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페어리 퀸의 [숲읜 순환] 상태이상에도 자력으로 탈출할 정도이니, 고작 코카트리스 정도의 마비 상태이상에 당할 일은 없었다.

그에 준은 나름의 기대를 걸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의 눈은 앞서 받은 격려 덕분인지 평소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돌진]을 마스터하진 못하겠지만.'

이전이랑 다른 게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있었다.

"흡!"

준의 기대에 부응하듯 에이든이 [돌진]을 시전했다.

이전처럼 마력이 일부 빠져나가고, 멋대로 자세가 바뀌었다.

그리고.

꼬?!

콰아앙!

크학!

대포알처럼 바위에 부딪힌 에이든이 바닥에 쓰러졌다.

"...."

"...."

꼬꼬....

기대하긴 아직 이른 듯했다.

* *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꼬꼬꼬!!

에이든의 기습에 멀뚱히 서 있던 코카트리스가 적의 가득한 포효를 질렀다.

[실드]

바위마저 쪼개는 코카트리스의 발톱이 에이든에게 향하기 직전, 준의 [실드]가 둘러쳐졌다.

4서클에 오르면서 한층 더 견고해진 [실드]는 녀석의 발톱을 막아 내기에 충분했다.

꼬꼬!!

그럼에도 코카트리스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실드]를 두드렸다.

금방 깨질 듯한 [실드]에 준이 마력을 보충하길 얼마. 대략 5초 정도 지나서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으응."

아직 [그로기] 상태에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는지, 에이든이 잠깐 비틀거렸지만 이내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거기까지 확인한 준이 [실드]를 걷어 냈다.

코카트리스는 기세를 몰아 에이든에게 달려들었으나.

사악―!

그대로 에이든의 검에 베여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

녀석의 깃털 몇 가닥이 허공을 부유하고, 이내 바닥에 떨어진 코카트리스가 모래처럼 사라졌다.

안전을 확인한 준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냐?"

"아, 아하하... 예, 옙. 괜찮습니다."

스스로도 부끄러운 모양인지 에이든은 얼굴까지 붉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원래 다 그런 법이야."

"끄응. 대충 예상은 했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그저 스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두 번째의 경험이었지만, 역시 보통 이질적인 게 아니다.

'그래도.'

에이든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나았다.

'선배 덕분인지 완전히 타인의 것으로 느껴지진 않아.'

처음 마야에게 썼을 당시와는 달리, 이 스킬 또한 자신의 것으로 여기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래, 예를 들면... 무의식적 반사 같았다.

무릎을 치면 다리가 멋대로 올라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 근육의 움직임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억제가 가능했다.

당연히 스킬 또한 그러할 터.

타이밍 맞게 준의 조언이 이어졌다.

"스킬의 숙련도는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 돼."

준은 액티브 스킬을 써 본 경험이 없었으나, 그에겐 마법이 액티브 스킬과 비슷했다.

처음 그가 이 몸에 들어왔을 때, 마법에 대한 지식이 멋대로 주입됐었으니까.

그렇기에 처음 그가 펼쳤던 마법은 액티브 스킬과 다를 게 없었다.

그에 준이 마법을 컨트롤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이해'였다.

마법을 쓸 때 어떤 마법적 지식이 꿈틀거리는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마력이, 어떤 방식으로 마력 회로를 타고 움직이는지.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기계적인 습관, 태도, 행동, 본능을 모두 이해해. 그리고 그 과정들을 통제하는 거야."

준의 조언에 에이든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방금 자신이 펼친 기술을 떠올려 봤다.

처음에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당시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먼저 다리가 움직였어.'

그다음은?

'땅을 박차고.'

자세가 낮게 고정됐으며.

발끝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바위와 부딪힌 후였다.

"통제...."

홀로 그렇게 중얼거릴 때, 준이 스쳐 가듯 말했다.

"누군가가 너한테 주먹을 휘둘렀어. 넌 어떻게 움직일까?"

그러면서 준이 주먹을 들어 에이든의 얼굴로 휘둘렀다.

그러자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그 공격을 회피했다.

"...아!"

"뭔지 알 것 같아?"

"예!"

주먹이 다가온다. 그리고 에이든은 고개를 틀어 피했다.

왜?

주먹이 얼굴을 향해 오니까.

어떻게?

척추부터 시작해 어깨 근육을 움직여서.

무엇을?

주먹을 피했다.

하나의 행동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에이든은 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내가 처음 다리를 움직였던 건.'

앞으로 튀어 나가기 위한 사전 동작이었다.

왜? 그게 가장 효과적이니까.

그다음으로는 몸이 굽었다.

왜?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시켜야 하니까.

땅을 박차는 순간 발끝에서 마력이 터져 나왔다.

왜? 가속도를 얻기 위해서.

"와...."

에이든은 전사다. 그것도 재능이 뛰어난 전사다.

[돌진] 스킬에서 비롯된 모든 자세의 목적을 해부하듯 살펴봤다.

그리고 다시금 재정립을 시켰다.

'그런데 왜 이때 이 정도의 힘을 내는 걸까?'

'어째서 발과 발 사이의 간격이 이 정도인 거지?'

'튀어 나갈 때 숙이는 각도가 내 몸에 맞는 건가?'

'마력의 출력? 너무 과하지 않아?'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몸에 걸맞게 바꿨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을 덧붙이고, 과한 것은 배제하고.

마치 작곡가처럼, 멜로디에 걸맞는 화음을 만들어 나갔다.

이윽고.

"어때, 감이 좀 잡혔어?"

"...."

준의 물음에 에이든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잡히는 것은 정확히 사람 크기의 바위였다.

몸을 낮췄다.

무릎이 굽혀졌고, 허리는 꼿꼿했다.

마력이 발 끝에 모였다.

그리고.

[돌진]

쏘아져 나갔다.

아까처럼 에이든의 몸이 바람을 갈랐다.

하지만 속도는 이전과 비교해 조금 느려졌다.

그러나, 부드럽다.

앞을 찌르는 형태로 뻗어 나간 팔은 반대편 허리로 향했다. 손에 들린 검이 정확한 타이밍에 바람마저 갈랐다.

그 경로에, 바위가 있었다.

사아아악!

도저히 바위를 베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에이든의 귀를 때렸다.

그 순간 에이든은 느꼈다.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변화를.

엄청난 변화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현실이 아닌 게임이었다면.

그에게는 이런 인터페이스가 떠올랐을 것이다.

-[배쉬]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뭔... 미친."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준은.

'한 달? 너무 길게 잡은 거 아니야?'

지끈거리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는데!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3화

33화 2계층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에이든 또한 사람의 범주에 있던 걸까.

[돌진]을 곧바로 마스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배쉬] 스킬을 배울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보통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는 것은 [스킬북]을 통해서지만, 때로는 본인만의 기술을 창조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가 자력으로 스킬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는 스킬이 필요하다.

에이든의 [배쉬]가 [돌진]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기본적으로 숙련도가 90퍼센트 이상 찼을 때나 가능했었지, 아마?'

준은 게임 속 평균적인 데이터를 떠올렸다.

그 말은 에이든의 [돌진] 숙련도가 90퍼센트에 도달했다는 말일까?

'그건 아니지.'

이후 에이든이 펼친 [돌진]은 숙련도 측면에서 나아진 게 거의 없었다.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바위와 부딪혀 [그로기] 상태에 빠지지 않았을 뿐.

명중력 자체는 여전히 형편없었다.

하지만 매번 쓸 때마다 준도 알아볼 정도로 자세가 정교하고 부드럽게 변해 갔다.

다만 이 모든 게 에이든의 재능 덕분은 아니었다.

'[야수의 신체]가 액티브 스킬의 숙련도를 비약적으로 올려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긴 하지. 그래서 전사 유저들한테 가장 사랑 받던 스킬이었고. 하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스킬의 시너지 효과를 받았다고 해도, 에이든이 보여 준 결과는 말도 안 될 수준이었다.

'저런 게 재능인가....'

새삼 세상의 부조리함을 떠올리던 준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준은 이 몸에 익숙해지기까지, 몇 개월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은 다르다.

단 한 차례의 번뜩임. 그것 하나만으로 저만한 성장을 일궈 낸 것이다.

딱히 재능이라는 변명으로 상대가 하는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현실이 그럴 뿐이다.

'이거, 리더로서 면목이 없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미래가 떠올랐다.

언젠가, 에이든이 자신보다 훨씬 더 빠르게, 높은 곳까지 오르는 미래가.

'너무 내가 안주했던 건가.'

준은 '이정준' 시절 간직하고 있던 정보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보일 뿐.

그것을 체득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스킬만 봐도 그렇다. [기초마법재능]이 없었다면, 마법에 대한 연구는 시도조차 못했을 터.

어쩌면, 자신은 에이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에이든 스스로가 훌륭한 리더가 될지도 모른다.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후우. 무슨 생각을."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의존했다고.

준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봤다.

혼란스럽다.

그럴 수밖에.

아무리 냉철한 마법사의 이성을 유지한다지만, 그는 본래 마법사가 아니었다.

강제로 마법사가 됐을 뿐.

때문에 강제로 마법사다운 사고방식을 익혀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으니까.

1년이 지나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그의 내면에는 혼란스러움이 타다 남은 장작의 재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깐뿐.

이내 [굳건한 의지]가 멋대로 준의 감정을 수면 아래로 구겨넣었다.

'설혹 내가 저 녀석한테 무력적으로 밀린다고 해도.'

리더라는 건 뭐든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존재하겠지만, 반드시 잘한다고 끝일까?

준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가진 정보,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추진력은... 에이든에게 없는 거니까.'

준은 스스로가 가진 지식을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성장할 방향성도 정했다.

외부의 압박에 의한 조급함으로 이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의 근본부터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에.

여기까지는 맞았다.

그래, 이런 생각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 믿었다.

믿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하지만 마지막 남은 마법사로서의 관점이, 냉철하게 말한다.

'스킬은, 만능이 아니야.'

이내 그 속삭임은 강제로 만든 믿음에 의해 가라앉았다.

* * *

준이 잠시 에이든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지만, 만약 에이든이 저런 준의 고민을 들었다면 반대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콰아아아아아앙――!!

한 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다양한 재앙 중, '천벌(天罰)'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만든 자연 현상.

그러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하늘의 분노가 지상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치직, 지지지직――

검게 타오른 채 입자화되어 사라져 가는 코카트리스였다.

"세상에...."

하늘이 노하셨다.

에이든은 눈앞에 일어난 현상을 여타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받아들였다.

그만큼 끔찍한 파괴력이 지상에 내리꽂힌 것이다.

하지만 저 현상은 하늘의 분노 같은 게 아니다. 단 한 사람이 일으킨 현상이었다.

바로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 준이 해낸 일이다.

"저, 정말 대단합니다, 선배...."

"하하, 고맙다."

에이든의 저런 감탄은 준으로 하여금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때문에 준도 가감 없이 미소를 지었지만.

'틀려먹었네.'

방금 일으킨 마법은 4서클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라이트닝 콜(Lightning call)]이었다.

말 그대로 번개를 부르는 마법.

그 위력은 과연, 코카트리스가 감히 반응조차 못하고 죽어 버릴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준도 이견이 없었으나.

'심상이 완벽하게 담기지 않았어.'

거기에 명중률도 상당히 틀어졌다.

발현된 마법의 중심이 목표와 제법 거리가 있었으니까.

'확실히, 3서클이랑은 다르구나.'

3서클과 4서클 마법에는 여러모로 차이가 많았다.

일단, 3서클까지의 마법은 마법사의 심장에 위치한 서클 속 마력을 바깥에 분출시킨다.

그렇게 현상이 일어나고, 이를 마법이라 부른다.

하지만 4서클부터는 조금 다르다.

4서클 마법부터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서클에 담긴 마력을 이용해 대기 중에 있는 자연을 일부 비틀어 강제로 번개를 일으키는 [라이트닝 콜]처럼.

본인의 마력뿐만이 아니라 주인이 없는 대자연의 마력을 이용하는 것이 4서클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형적인 방법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것인가.

답은 구조적인 문제에 있었다.

'마법사의 한계 때문이지. 외부와 가장 원활하게 연결되는 심장에 마력을 쌓는 대가로, 한번에 분출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신체 기관 중에서도 아주 예민한 심장에 마력을 쌓는 만큼, 자칫 마력을 한계 이상으로 쥐어 짜냈다간 그대로 심장이 멎어 버릴 수도 있었다.

혹은 마력회로가 오버히트 상태에 돌입할 수도 있고.

때문에 순수 본인의 마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그 힘을 끌어오는 것이 중급 마법의 핵심이었다.

'방법 자체는 알겠어. 하지만....'

다만 이런 방법을 사용하다 보니, 기존과 달리 마법에 준의 심상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거기에 컨트롤이 어려운 뇌속성 마법을 시도한 것도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법 최고.'

정말 파괴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오늘도 잠자긴 글렀네."

다만 이걸 다듬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 * *

"후우."

지구에 있을 적, 뉴스에 나올 정도로 기록적인 크기의 구렁이가 8m쯤 됐다고 했던가.

눈앞에 있는 녀석과 비교하면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이 녀석은 그야말로 사람을 한 입에 꿀떡 삼켜 버릴 괴물이었으니까.

그런 괴물이, 머리가 반쯤 잘린 채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수고했어, 에이든."

"아, 아닙니다. 이것도 하나의 훈련이 됐네요."

방금 막 클리어 한 던전의 이름은 '독사의 탄생지'다.

뱀 소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에이든은 뱀을 두려워했다.

"하하, 못난 꼴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닌 거 알잖아."

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게이머라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스킵을 달고 살았던 준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에이든은 이번 던전에서 유독 허점을 자주 보인 탓에, 준이 몇 번이고 그런 에이든을 도와줘야 했다.

"그게, 뱀에는 별로 좋은 추억이 없어서...."

"뱀과 좋은 추억이 있는 사람은 애완 뱀을 기르는 사람밖에 없겠지. 뭐, 아무튼 고생했다. 이걸로 훈련은 다 끝났어."

"아!"

준의 말에 에이든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지난 한 달.

준과 에이든은 훈련이라는 이름하에 다양한 던전을 클리어 했다.

이유는 다양한 환경에서 전투를 경험해 봐야 한다는 명목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이든은 정말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별의별 환경을 다 경험해 봤다.

어떤 던전은 악취와 습기가 가득한 동굴이었고, 또 어떤 던전은 검 하나 제대로 뻗기 힘들 정도로 좁았으며, 지금처럼 몬스터가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던전도 있었다.

"덕분에 우리 팀워크도 많이 좋아졌어. 스킬 숙련도는 말할 것도 없고."

"예, 정말 그렇습니다...."

그 결과 에이든은 [돌진]은 말할 것도 없었고, 파생 스킬인 [배쉬] 또한 수준급의 숙련도를 쌓았다.

한편, 준은 환생의 여파를 완벽히 해소하는데 성공했고, 다양한 4서클 마법을 조율하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부수입 정도였지만 의뢰도 해결한 게 많아.'

용병대라고 자처하는 만큼 모험가처럼 공짜로 던전에 들어갔던 것도 아니다.

출발하기 전에 챙겨 뒀던 의뢰도 다 해결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 손에 들어왔다.

이로써 2계층으로 향할 준비를 완전히 마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은 쓰러져 죽은 독사가 남긴 전리품을 주워 들었다.

'이걸로 클로이의 의뢰도 수행할 수 있겠군.'

포션 제조법.

그리고 더 나아가, 사업을 하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 * *

용병이든 모험가든 혹은 다른 제3의 단체 소속이든.

블랙아웃에 찾아온 모든 유저들은 하나같이 상위 계층으로 향하고자 하는 향상심이 있다.

용병이라면 더 나은 수완을 위해, 모험가라면 자신의 명성 혹은 탐험심을 위해.

준은 전자에 해당했다.

그러나 에이든은 후자일 것이다.

"우, 우와아...!"

메마른 바위 지대에 위치한 협곡의 동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칠흑같이 어두운 계단과 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어둠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두려움을 자아내게 했지만, 반대로 저 검은 문 너머로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이게 계층단(階層段)입니까?"

다음 계층으로 향하기 위한 계단과 문.

에이든은 책에서만 접해 봤던 계층단을 두 눈으로 보고 감동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반면 준은 게임 속에서 수없이 봐 왔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나마 느껴지는 게 있다면 마법사로서의 탐구심이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한동안 둥둥 떠다니는 칠흑의 계단을 바라봐도 전혀 감이 잡히는 게 없었다.

'별다른 마력조차 품고 있질 않으니, 이거야 원.'

마치 현미경도 없이 맨눈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구경은 다 끝냈어?"

"예! 어서 올라가고 싶습니다!"

"좋아, 그럼 가 보자고."

그에 허공을 부유하는 계단을 오른 순간.

"오...."

무언가가 느껴졌다.

말로 표현하자면, 공간 자체가 신체와 영혼을 끌어당기는 감각.

듣기로는 블랙아웃 내에 존재하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한 절차라고 했던가.

'왜 그런지 알겠네.'

준이 이런 감상을 품은 만큼, 에이든도 호들갑을 떨었다.

두려움과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기쁨 가득한 얼굴로.

이내 준이 검은 문 너머로 발을 옮겼다.

아마 게임이었다면.

[2계층 '잿빛 황무지'에 진입했습니다.]

라는 안내창이 떠올랐을 것이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4화

34화 그렘린

클로이의 의뢰긴 했지만, 이번 일은 준에게도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향후 안정적인 자금 수급을 위해서는 사업이 필수적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2계층 필드 중 하나인 '잿빛 황무지'다.

'게임 설정상 고대에 마녀가 살던 땅이라고 했던가.'

하나 마녀는 교단에 사로잡혀 화형을 당했고, 마녀는 악에 받혀 이 땅에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바짝 타 버린 대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땅.

보이는 것이라고는 잿빛의 협곡 정도가 전부.

하늘 또한 푸르러야 하지만, 이곳에선 음울한 회색빛이다.

"으음...."

"기묘하지?"

"예. 뭔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기분입니다."

"필드 효과 때문이야."

일명 '권태의 저주'라는 이름의 필드 효과다.

이름처럼,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권태감을 느끼게 만드는 저주다.

'게임 내에서는 체력과 피로도가 더 빠르게 줄어드는 효과로 적용됐었지.'

이런 식으로, 블랙아웃 내에는 필드 효과가 존재하는 곳이 다수 있었다.

그 탓에 이곳은 메마른 바위 지대와 마찬가지로 인기가 있진 않았다.

"확실히, 두 번 오긴 싫은 곳이지. 유지비용도 꽤 많이 들고 말이야."

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도 나름 반가운 목소리였다.

"콜튼. 도착했군."

"오랜만이야, 친구들!"

"...."

포레스트 가디언 공략전 당시 함께 팀을 이뤘던 칼날 독수리 용병대, 그리고 마야가 합류했다.

* * *

신중한 성격답게, 준은 1계층처럼 에이든과 단둘이서 던전을 공략할 생각은 버렸다.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이곳 이곳에서, 자만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준은 클로이에게 부탁해 한 차례 합을 맞춰 봤던 콜튼의 용병대에 지명 의뢰를 보냈다.

그러는 김에, 콜튼은 1계층에서 브래던과 만나 흰고래 용병대의 임시 대원, 마야를 데리고 왔다.

"오느라 수고 많았어."

"수고는 무슨. 물주님이 부르면 당연히 달려와야지."

오는 길에 마야까지 데려와야 하는 수고가 있었지만, 콜튼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클로이에게 많은 의뢰금을 받은 덕분이었다.

"마야. 우리 말은 좀 익숙해졌나?"

"많이 배웠슴다."

"...?"

발음이 좀 뭉개지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여전히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한편, 콜튼은 잿빛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 이 빌어먹을 땅은 또 오랜만이군. 2년 만인가?"

콜튼의 용병대는 나름 2계층에서의 경력이 탄탄했다.

그 예시로, 콜튼은 신전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야 받을 수 있는 [성화의 랜턴]을 들고 있었다.

등급에 따라서 일정 영역 안의 필드 효과를 제거해 주는 아티팩트다.

다만, 준과 에이든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에이든에게는 상태이상 저항 효과가 붙은 [야수의 신체]가 있었고, 준에게는 [굳건한 심장]이 있었으니까.

"아무튼, 목적지는 저곳이고?"

"맞아."

"이전에도 그랬지만, 마법사 양반은 알고 있는 게 참 많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잿빛 황무지의 어느 협곡이었다.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거대한 절벽 아래.

목적지는 당연히 아직까지 발견된 적 없는 히든 던전이었다.

기억을 더듬거리며 도착한 곳은, 길의 일부를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 앞이었다.

"에이든. 저 바위 좀 부숴 줄래?"

"알겠습니다!"

[돌진], [배쉬].

두 개의 스킬을 연달아 사용하자, 그 거대한 바위가 순식간에 갈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에 콜튼이 입을 쩍 벌렸다.

"바, 방금 그건 뭐요?"

"스킬이지. 녀석이 배운 거야."

"허어... 혹시 공략전 보상으로 받은 거요?"

"포레스트 가디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대가로 받았어."

"허허, 대단하구먼...."

콜튼과 그의 대원들도 나름 보상을 받긴 했으나, 그중 가장 비싼 게 철제 방어구 정도였다.

당연히 스킬과 비교할 대상은 아니다.

그에 콜튼이 조금 허탈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신색을 되찾았다.

에이든의 재능은 진작 알고 있기도 했고, 타인의 재능을 시기질투하기엔 이미 늦은 때였으니까.

"아무튼, 여기가 던전의 입구요?"

"맞아. 히든 던전이지."

"흐흐, 그렇단 말이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 당연히 그 안에는 누구도 본 적 없는 보물이 있을 터.

콜튼의 얼굴에는 어느새 용병에게 어울리는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의뢰 보상 중 던전 내에서 발견한 보물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우리가 먼저 들어갈 테니 잘 따라오슈!"

"그래."

다시금 의욕적으로 변한 콜튼이 앞장서서 던전의 입구로 들어갔고.

준과 에이든, 그리고 마야도 그런 그들의 뒤를 따라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

* * *

던전의 이름은 '영원의 영면'이다.

그 이름의 유례는 던전의 풍경에서 알 수 있었다.

"허어, 제법...."

긴 용병 생활로 별의별 풍경을 다 봐 왔던 콜튼조차 순수한 감탄사를 참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장관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무슨 화석 같은데... 저게 뭐지?"

"고대 기록에 나와 있는 드래곤이 아닐까 싶은데."

"드, 드래곤?!"

"드래곤 말입니까?!"

준의 설명에 콜튼이 기겁하듯 외쳤다.

옆에 있던 에이든은 반대로 눈을 반짝 빛냈다.

아무래도 어릴 적 읽었던 소설에 드래곤이라도 나왔던 모양이다.

둘의 상반된 반응에 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리 대단할 건 없어. 이미 비슷한 건 상위 계층에서도 발견됐으니까."

"그, 그렇긴 한데... 드래곤의 뼈도 엄청 강력한 재료 아니요?!"

"거, 거기에 혹시 드래곤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거 아닙니까?!"

"기대 중에 미안한 말이지만, 둘 다 틀렸어."

드래곤의 뼈는 이미 다 풍화되어 화석이 된 상태다. 화석은 말 그대로 그냥 돌덩어리기에 별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드래곤과 관련된 보물 또한 없었다.

"그렇습니까...."

"쩝."

예상대로 에이든과 콜튼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다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생전 드래곤의 육신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는 풍화된 드래곤의 꼬리뼈였다.

양쪽으로 거대한 협곡이 펼쳐졌고, 위에서 내려오는 잿빛의 하늘색이 던전의 풍경을 밝혔다.

드래곤의 거대한 갈비뼈는 마치 숭숭 뚫려 있는 지붕처럼 하늘을 가렸고, 드래곤의 척추뼈는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저 멀리 길게 늘어져 있었다.

"...."

그런 웅장한 풍경 앞에서도, 준의 옆을 호위하듯 서 있는 마야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야의 표정에 변화가 생길 때는 오직 단 한순간뿐.

"그렘린이다!"

몬스터와 마주했을 때뿐이었다.

"망할 기계광 놈들인가!"

이족 보행의 도마뱀처럼 생긴 몸에, 커다란 귀를 가진 몬스터, 그렘린.

'신체 능력 자체는 고블린과 별다를 바 없지만, 지능은 고블린을 훨씬 능가하는 녀석들이다.'

그 증거로, 녀석들은 하나같이 금속제 장비를 걸치고 있었다.

캬하하하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달려든 그렘린들이 톱날검을 휘둘렀다.

무슨 짓을 한 건지, 톱날검엔 옅게나마 진동이 흐르고 있었다.

"정면에서 막지 말고 흘려 내라! 검날 다 나간다!"

콜튼의 명령에 따라 대원들도 그렘린들의 측면을 노렸다.

고블린과 달리 방어구를 쓰고 있는 녀석들은 급소를 노려야만 했다.

거기에 고블린처럼 번식력이 높은 녀석들이라, 숫자도 상당했다.

"1분!"

준의 외침에 용병들은 최대한 진형을 지키며 그렘린의 공세를 막아 냈다.

급소를 노려 직접적으로 죽이기보단, 관절을 끊어 행동불능으로 만드는 것을 주목적으로 뒀다.

"하앗!"

그중에서도 에이든의 활약이 가장 눈에 띄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훈련을 했던 보람이 있었는지, 에이든의 움직임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시기적절히 관여하고, 빠르게 빠져나오면서 공간적 여유를 만들어 냈다.

보조적인 움직임에도 콜튼과 그의 대원들이 바로 눈치챌 정도로 효과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렘린들도 쉽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인간들의 진형이 튼튼하자, 녀석들이 전술을 바꾼 것이다.

"저, 저!"

뒤에 있던 그렘린들이 벽을 탔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녀석들의 발에 장착된 장비 때문이었다.

아이젠처럼 뾰족한 부츠가 암반을 뚫고 녀석들의 몸무게를 지탱했다.

캬하학!!

순식간에 뒤가 집히려던 찰나, 줄곧 전투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던 마야가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뽑은 두 자루의 쌍검이 공간을 갈랐다.

캬갸?

과거 에이든이 그랬던 것처럼, 분명 눈에 보이는 움직임임에도 불구하고 그렘린들은 그녀의 검을 막지 못했다.

기세 좋게 벽을 타던 그렘린이 도미노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역시 실력 하나는 대단하군.'

여전히 살기를 제어하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자연스럽게 적들을 베어 넘겼다.

"저도 돕겠습니다!"

에이든도 마야의 움직임에 맞춰 곧바로 반대편을 보조했다.

발에 마력을 모아 접지력을 높이고, 그렘린들처럼 벽을 달렸다.

[돌진]

마야가 그림자라면, 에이든은 바람이었다.

벽을 타고 돌진하는 에이든의 움직임에 그렘린들이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암벽에서 떨어져 지상으로 추락했다.

착용하고 있던 장비가 무거운 탓에 머리부터 떨어진 녀석들은 대부분 목이 부러져 죽거나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듯.

[어스 버스트(Earth bust)]

준의 마법이 그렘린들의 발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5화

35화 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