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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1화

1화 하급 마법사

10년 전에 잠깐 유행했던 RPG게임, <블랙아웃 >은 이정준에게 여러모로 추억이 많은 게임이었다.

한창 수능 준비로 인해 바쁜 시절.

하루에 1~2시간씩 했던 플레이 경험은 수능에 대한 준비로 압박받던 그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게임은 재정난으로 인해 회사가 무너지면서 영영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리메이크 크라우드 펀딩이라...."

그랬던 <블랙아웃 >이 부활한다고 한다. 그것도 유저들의 모금을 받는 형태로.

"이게 개발 단계의 그래픽이라니."

모니터 화면에 흘러나오는 영상은 이게 현대의 기술력을 활용해 만든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유려한 그래픽을 자랑했다.

"이러면 안 지를 수가 없잖아?"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인 그에게 취미 생활에 돈을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얼마를 넣어 볼까? 잠깐, 모금액에 따른 특전이...."

보통 특전이라 하면 게임 속에 이스터에그로 모금인들의 이름을 넣는 식인데.

<블랙아웃 >의 게임사에서는 독특한 방식의 특전을 준비했다.

"10만 원 이상 모금하면 추후 개발 예정인 DLC(게임의 확장팩)의 기능 일부를 해금시켜 준다고?"

이는 충분히 이정준의 흥미를 끌어당길 만한 당근이었다.

10만 원 정도는 아깝지 않게 투자할 의향이 있을 정도로.

"좋아. 한번 넣어 보지 뭐."

원작에서 나름 고인물 유저였던 이정준은 망설임 없이 모금을 신청했고, 이후 그의 이름이 크라우드 펀딩란에 가장 처음으로 올라갔다.

* * *

시간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성공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끝마친 <블랙아웃 >의 게임사는 예정대로 론칭에 성공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은 이정준은 캐릭터 생성 단계에서부터 진득한 고민에 빠졌다.

"이번에는 무슨 캐릭터를 키워 볼까?"

학창 시절엔 시간이 부족했었다.

그렇기에 당시의 이정준은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플레이를 했고, 그 덕분에 육성한 캐릭터들 대부분은 뛰어난 성능을 선보였다.

'근데 그렇게 하는 건 재미가 없단 말이지.'

마치 예정된 길을 걷는 것만 같달까.

학창 시절에야 그저 게임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지만, 이제는 아니다.

매일같이 똑같은 회사일을 하는 그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마법사는 어떨까?"

마법사.

신비로운 힘을 사용하며, <블랙아웃 >의 모든 클래스 중 가장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클래스.

'다른 유저들이 하는 마법사가 그렇게 재미있어 보였는데.'

다만 마법사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바로 클래스 자체가 뉴비 플레이어는 육성조차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

"안 그래도 초반에 부족한 재화를 더럽게 잡아먹던 클래스였지."

일단 마법사는 장비 값이 비싸다.

<블랙아웃 > 내에서는 세계관 특성상 마법의 힘이 깃든 '아티팩트'가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데, 문제는 마법사의 주 장비가 그 아티팩트라는 것.

그뿐인가?

초반 구간에서 비싼 마력 포션을 꾸준히 소모하고, '스킬북'과는 다른 개념인 '마법서'도 따로 구매해야 한다.

당연히 이 마법서의 가격 또한 어마어마한 수준.

지식을 높이기 위해 책도 꾸준히 읽어야 하고 마법 숙련도까지 챙기려면 연구도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게 다 돈이지.'

당연히 이 모든 재화를 첫 회차부터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간과했던 과거의 이정준은, 아무런 지원 없이 마법사를 키워 봤다가 인생의 쓴맛을 보고 말았다.

'억지로 마법서에 투자했다가 포션 살 돈도 없었지.'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툭하면 던전에서 쓰러져 캐릭터의 명성치가 수직 하락했고, 동료 NPC들은 그의 파티에 들어오길 꺼렸다.

강제로 솔로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블랙아웃 >은 게임 특성상 솔로 플레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게임이고.

'기믹 단계에서부터 동료 NPC가 없으면 불가능해.'

결국 어느 순간 게임의 진행이 완전히 막혀 버려, 당시의 이정준은 눈물을 머금고 다른 캐릭터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잘만 하면 될 것 같은데...."

10년 전처럼 쉬운 클래스로 시작해 다회차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장인인 그로서는 시간이 한정적이었으니까.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의미 있게, 즐거운 플레이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뭐, 일단 해 보자. 안 될 건 없잖아."

캐릭터가 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귀중한 경험이 될 터.

그렇게 마음을 먹은 이정준은 커서를 옮겨 마법사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렀다.

[스킬을 설정해 주십시오.]

"스킬이라."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시스템인 스킬.

이걸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클래스가 정해진다.

주어진 포인트는 총 50P.

"마법은... 어차피 초반에 여러 마법을 찍는다고 도움이 되진 않아. 마력이 부족해서 다 쓰지도 못할 테니까."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찍어야 할 스킬들을 떠올려 봤다.

"중요한 건 파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지. 재화를 버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예전에는 그 점을 고려하지 않고 무지성으로 온갖 마법 관련 스킬만을 찍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게임을 오래 즐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선택이었다.

[약초학 -5P]

[포션제조 -5P]

[기초마법재능 -10P]

[밝은 눈 -5P]

[뛰어난 기억력 -6P]

[굳건한 의지 -7P]

[흔들리지 않는 심장 -7P]

[행운 -5P]

"약초학이랑 포션제조는 재화를 아끼려면 찍어야 하고. 밝은 눈도 던전 내 지도 제작에 도움이 꽤 되는 편이니까."

이정준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잡캐였다.

물론 아무 스킬이나 생각 없이 찍은 것은 아니다.

초반의 마법사는 마력도 적은 주제에 체력도 적다.

때문에 마력 관련 스킬을 찍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마력이랑 관련된 스킬들은 하나같이 계륵에 가까워.'

마력 관련 스킬은 특히나 포인트를 많이 잡아 먹는다.

거기에 스킬을 찍는다고 해도 마력 재생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션 비용만 더 잡아먹는 셈.

그렇다고 성능이 확실하냐?

'고작해야 마법 몇 번 더 쓸 수 있는 게 전부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과감하게 마력 스탯을 포기한다.

"인게임 내에도 마력 스탯을 올릴 방법은 많으니까."

그렇기에 찍은 것이 바로 약초학과 포션제조다.

초반에 비싼 포션의 비용을 자급자족하고, 더 나아가 여유가 생긴다면 판매로 재화를 번다.

그렇게 한다면 게임의 중후반까지 버틸 기반이 마련된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온갖 고생이야 하겠지만, 훗날 업그레이드된 그래픽으로 화려한 마법의 향연을 느낄수만 있다면 그 정도 노력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캐릭터를 생성을 확정 짓자.

['이정준'님. <블랙아웃 > 리메이크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크라우드 펀딩.

2년 전의 일이라 깜빡하고 있었는데.

"특전이 있다고 했었지?"

[해당 게임은 추후 DLC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 참여에 대한 소소한 보상으로 '이정준'님께 DLC의 추가 요소 중 하나인 환생 시스템을 소개해 드립니다.]

모니터에 떠오른 글을 보며 이정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생이라고? 설마...."

이는 다른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시스템이었다.

[환생 시스템은 기존에 플레이하신 <블랙아웃 >의 캐릭터 중 하나를 선택하여 해당 캐릭터의 스킬 하나를 현 캐릭터에 이전할 수 있습니다.]

['이정준'님의 계정에 등록된 캐릭터를 불러오는 중입니다....]

[등록 완료. 환생 시스템을 적용시킬 캐릭터를 선택해 주세요.]

"미친!"

설마하니 이런 요소를 넣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보상에 이정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다고?"

이정준은 과거 자신이 키웠던 캐릭터들을 살펴봤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전사.

날렵하게 생긴 인상에 활과 단검을 착용한 사냥꾼.

그리고 비실거리는 몸뚱이에 거적떼기를 두른 마법사까지.

"음...."

자연스럽게 이정준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전사를 고르면 마법사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

그건 다름 아닌 체력 부족.

전사 캐릭터가 가진 최상급 스킬인 [불멸의 육체]를 선택한다면 '탱커형 마법사'라는 희대의 캐릭터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애초에 마법사를 선택한 게 전사가 질려서인데."

그럴 거면 전사로 다회차를 노렸지, 마법사를 플레이할 이유가 없었다.

"사냥꾼은 어떨까?"

이건 좀 매력적이었다.

사냥꾼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적을 썰어 재끼는 재미가 확실했으니까.

전사와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최상급 스킬, [드래곤 헌터]를 배운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훗날 장비 강화 계열 마법을 배운다면 활과 단검, 그리고 마법을 쓰는 만능 원거리 캐릭터가 완성될지도 모른다.

"쓰읍...."

그렇게 사냥꾼 캐릭터에 마우스 포인트가 향할 때.

문득 비실비실한 마법사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기분 탓일까.

어째서인지 캐릭터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마법사... 으음...."

저 캐릭터는 이정준에게 여러모로 애환이 섞인 캐릭터였다.

과거, 커뮤니티에 올라온 마법사 캐릭터를 보고 얼마나 환상을 품었던가.

'내가 그래도 고인물인데 쟤들이랑 똑같이 다회차 버프받은 캐릭터를 키워야 해?'라는 치기 어린 생각에 아무런 지원 없이 키웠던 캐릭터였다.

덕분에 어려운 고난을 헤쳐 나가는 맛은 있었으나, 끝내 저 캐릭터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전설' 등급 스킬을 얻었을 땐 엄청 기뻤었는데."

바닥을 넘어 심연까지 내려가 버린 명성치로 인해 동료 NPC가 모이지 않아 솔로 플레이가 강제됐을 때.

어떻게든 캐릭터를 회생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당시의 이정준은 과감히 한 던전을 솔로 플레이로 들어갔었다.

"가지고 있던 장비도 전부 팔아서 지팡이랑 포션만 들고 신전에 들어갔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찮은 히든피스를 발견하고, 전설 등급의 스킬을 얻었다.

스킬의 이름은 [마신지체].

'마력이 곧 신체'라는 의미가 담긴 스킬명. 그야말로 마법사의 최종 목표나 다름없는 스킬이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마법사의 마력통을 밸런스 붕괴 수준으로 확장시키고, 마력 재생력도 확 올려 줬으니까.

심지어 커뮤니티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히든 스킬이기에 당시 어렸던 이정준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캐릭터가 이상한 버그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땐 게임사가 진짜 유저를 이렇게까지 엿먹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었지."

[마신지체] 스킬을 얻자마자 이상한 에러가 뜨더니, 저주 디버프가 걸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캐릭터는 그대로 망해 버렸고.

"마법사한테 '마력불능' 저주라니 말이나 되냐고."

마력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가 걸리면서, 결국 어렸던 이정준은 깔끔하게 마법사 캐릭터를 접어야만 했다.

"그런데 저 마법사한테는 그 전설 등급 스킬이 있단 말이지?"

그러자 사냥꾼에게 향했던 마우스가 마법사로 옮겨 갔다.

"그래, 어차피 마법사로 키우기로 했잖아. 몰빵해 주자."

괜히 어쭙잖은 도전으로 진짜 잡캐가 될 바에, 성능이 확실한 [마신지체]를 얻는 게 맞았다.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다니까."

기껏 얻은 전설 스킬을 써 보지도 못하고 캐릭터가 망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때의 한을 풀 기회였다.

그렇게 환생 캐릭터까지 설정을 마치자, 드디어 유려한 그래픽과 함께 캐릭터 생성에 성공했다는 알림창이 떴다.

"화려한 마법사의 삶을 어디 한번 살아 보자고."

앞으로 펼쳐질 화려한 마법을 상상하며, 이정준은 게임의 로딩창을 바라봤다.

그게, 이정준이 '이정준'으로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게임 속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검과 방패. 그리고 마법과 몬스터.

전장에서 들려오는 전투의 함성은 과연 그가 화면으로만 봤을 당시에는 느낄 수 없던 심장의 떨림을 선사해 주었다.

동료가 내지르는 고함 소리.

공기 중에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다양한 냄새들.

그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그 어디서도 느껴 보지 못할 체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전장의 한가운데.

이정준은 상상했다.

모여 있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터지는 자신의 마법을.

심장에서 요동치는 마력이 그의 심상을 빨아들이고, 현실을 비틀어 상상에 불과했던 광경을 눈앞에 현현시킨다.

압도적인 마력이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바다처럼 퍼져 나가며 몬스터들의 위로 쏟아지는 상상을....

"준, 이 자식아!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 해!"

"저 굼뱅이 새끼가 진짜!"

"야! 여기 회복 포션 떨어졌다고! 준 이 새낀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들려오는 현실은 시궁창 같았고.

이정준, 아니. '준'은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시발...."

게임 속 세계에 들어온 지 1년.

준의 클래스는, 하급 용병 마법사였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2화

2화 검은 숲 탈출기 (1)

감이 좋지 않다.

그가 소속된 용병대의 용병대장이 히히덕거리며 임무를 받아 왔을 때 느낀 첫 감상이었다.

'고블린 토벌이라고?'

고블린.

잡몹의 대명사이자, 가끔 뉴비들을 위해 마련된 던전의 중간 보스로도 등장하는 그런 몬스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속 세상의 이야기고.

준이 있는 이곳은 엄연히 현실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심코 구겨진 표정을 본 옆자리의 용병이 물었다.

"...별거 아냐."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준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장이 물어 온 건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꺼내는 것은 곧 대장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칫하면 용병의 규율에 따라 용병대에서 추방되거나, 흠씬 두들겨 맞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말해 봐.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하지만 상대는 꾸준히 준에게 물어 왔다.

'이름이... 포프킨이었나.'

한 달 전쯤 이 용병대에 합류한 실력 좋은 검사였다.

합류한 시점에서 준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받으며 빠르게 적응한 그는 나름 준에게 호의적인 용병 중 한 명이었다.

허약한 마법사라며 얕잡아 보는 편이긴 하지만.

그에 준은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의뢰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느낌보다는, 조심해야 할 사항을 알려 준다는 투로.

"이번 토벌 작전. 작전 지역이 검은 숲이잖아."

"음. 그렇지."

"고블린이 쉬운 상대인 건 맞지만, 검은 숲이면 여러모로 문제가 있지."

"검은 숲에 대해 좀 아는 게 있어?"

"약간."

전생에 게임의 고인물이었던 그가 게임의 초반부 배경인 검은 숲에 대해 모를 리가 있을까.

"검은 숲은 기본적으로 울창한 숲이야. 거기에 천연 자원도 많은 편이고."

이번에 황실에서 용병들을 대거 유입시켜 검은 숲을 토벌하겠다 나선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만큼 내부에는 몬스터가 많았다. 특히 고블린들이 주로 그러했는데.

"고블린의 주무기는 독이지."

"그래 봤자 마비독이잖아."

잡몹이라는 인식답게 고블린들의 육체적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대신 독을 조합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은 있는데, 놈들의 주력 무기는 앞서 포프킨의 말처럼 마비독이었다.

"근데 검은 숲은 독성을 품은 식물들이 많아. 그것도 꽤 독한 놈들 위주로."

거기에 나무들도 하나같이 거대해서 숨을 곳도 많고, 식량 사정도 좋으니 번식력이 높은 녀석들의 특성상 숫자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포프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들은 동족 포식을 하는 놈들이라 개체 수가 늘어나 봐야 한계가 있을 텐데?"

나름 실력 있는 검사답게 그도 자신이 알고 있던 몬스터의 지식을 풀었으나.

준은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건 식량이 없을 때의 이야기지.'

식량이 넘쳐 나는 검은 숲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준은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풀지 않았다.

포프킨이 그나마 이곳에서 자신의 말을 들어 주는 몇 안 되는 용병이라지만, 완벽하게 신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 무식한 용병 놈들은 자신의 지식을 부정당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표본이라 해야 할까.

포프킨도 평소 그런 성향이 있으니만큼, 그가 내뱉은 의견에 반박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괜히 밉보였다가 전투 중에 뒤에서 찌르면 어쩌려고?'

실제로 그런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당해 본 적도 있던 준이었기에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했다.

"뭐, 그래도 준비를 확실히 해서 나쁠 건 없지. 하급 마비 내성 포션 정도는 준비하라고."

"흐음... 이번에도 재료비는 받는 거지?"

"물론이지."

"쯧. 알겠다."

별로 귀담아 듣지 않은 듯한 포프킨이 발걸음을 옮겼다.

"뭐, 고블린 따위에게 저 정도로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허약한 마법사니까 저런 걱정이나 하는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준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그럼에도 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훌훌 털어 버렸다.

"이것도 다 개인의 선택이지."

그렇게 준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방금 해 준 이야기, 자세히 좀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 에이든."

그에게 말을 건 인물은, 앞서 자리를 뜬 포프킨처럼 한 달 전에 합류한 인원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에 짐꾼으로 들어왔다는 것.

"이번이 제 첫 작전이지 않습니까. 자세히 좀 듣고 싶습니다."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서 한 달 만에 정식 대원으로 인정받았더랬지?'

개인적으로 포프킨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을 정도다.

"뭐, 어렵진 않지."

거기에 에이든은 포프킨과 달리 준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식 대원이 된 이후로도 여전히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며 따라오는 기특한 후배였다.

"말 그대로야. 아마 이번 토벌 작전은 꽤 힘들 거야."

그렇기에.

준은 포프킨 때와는 다르게 설명했다.

"왜 그렇게 보셨습니까?"

"예를 한번 들어 보자고. 칼을 든 어른과 활을 든 아이. 둘 중에 누가 더 셀까?"

"당연히 어른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여기서 조건을 바꿔 볼까? 칼을 든 어른과, 그 구역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명석한 아이 열 명이 활을 들고 있다면?"

"으음...."

그제야 어느 정도 감이 잡힌 모양인지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지금 토벌대는 검은 숲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어. 아, 그렇다고 어디가서 내가 이런 말 했다고 하지는 마."

"하하... 제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에이든에게, 준이 못을 박듯 말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살려면 제대로 된 하급 마비 내성 포션이라도 구해 둬."

"근데 가격이...."

이제 막 정식 대원이 된 에이든의 수중에는 그리 큰돈이 없었다.

"쯧. 돈은 얼마나 있는데?"

"지금은 이 정도가 끝입니다."

에이든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3만 골드?"

완성된 포션을 사기엔 한참 부족한 금액이다. 그만큼 정식 마법사가 만든 포션은 비쌌다.

"뭐, 어쩔 수 없지. 그거 나 줄 수 있어? 내가 한 번 해결해 볼게."

"알겠습니다."

"오우."

망설임 없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넘기는 에이든.

그 모습에 준은 괜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눌렀다.

챙겨 주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었으니.

'오랜만에 상단을 좀 찾아가 봐야겠네.'

* * *

"준! 이 새끼 어디 있어!"

"포션 가지고 오라고!!"

"크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

그와 함께 지난 몇 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고블린의 독침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준이 느낀 감상은.

'누가 들으면 나한테 포션 맡겨 둔 줄 알겠네.'

조금 거리를 벌린 채 2서클 마법, [윈드 커터]를 시전한 준은 얕게 혀를 찼다.

'그나저나 상황이 안 좋은데.'

준의 예상대로. 전장의 상황은 불리하게 흘러갔다.

용병들이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고 있다지만.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아.'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숲. 그런 숲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고블린들.

저 정도 숫자의 고블린들이 바람총으로 계속해서 독침을 쏘아 댄다.

물론 용병대장도 멍청하진 않아서 미리 대원들에게 마비 내성 포션을 준비하라 말해 뒀지만, 대부분의 용병들은 준비하지 않거나 해 봐야 저렴한 포션을 가지고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대로 된 마비 내성 포션의 가격이 꽤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저렴한 포션이 나쁜 것은 아니다.

싼 가격인 만큼 하급 내성까진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나름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으니까.

고블린들의 마비독 정도는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고블린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고.

"뭔 독이 이렇게 독해...!"

"젠장! 팔이 안 움직여!"

바깥 세상과 다르게 블랙아웃의 검은 숲에 사는 고블린들은 독에 대한 내성이 높은 만큼 독한 마비독을 사용한다.

결국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준은 품에서 준비해 둔 하급 마비 내성 포션을 꺼냈다.

"에휴, 아까워라."

아끼다 무덤에 들고 가지도 못할 거, 차라리 지금 마시는 게 나았다.

단숨에 포션병을 비운 준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전장의 상황을 지켜봤다.

'스킬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네.'

[밝은 눈]과 [흔들리지 않는 심장] 덕분에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도 준은 상황을 분석할 여유가 있었다.

"역시, 이번 토벌전은 망했어."

이미 전장은 밀리고 있었고, 이번 토벌을 책임지는 지휘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퇴각! 퇴각하라!"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관이 그리 외쳤으나.

'멍청아. 이미 다 포위됐잖아.'

마법사인만큼 후방에 있었으나, 이미 전방은 탈곡기에 털린 곡물처럼 탈탈 털린 상태.

이대로 후퇴해 봐야 용병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흡!"

그러던 중, 준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용병들 사이에서 나름 활약하고 있는 에이든이었다.

여기저기 독침을 맞긴 했지만, 앞서 준이 준비해 준 포션 덕분에 여전히 잘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흐음...."

하지만 평소보다 움직임이 느렸다.

'포션은 어디까지나 내성이지 면역이 아니니까.'

때마침 지휘관이 내뱉은 후퇴 명령을 들은 것인지, 뒤를 돌아본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보내자, 에이든도 천천히 후퇴하며 다가왔다.

무사히 이곳에서 살아 나가려면 에이든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니.

"선배. 괜찮습니까?"

"난 괜찮아. 근데, 지금 상황 불리한 거 알고 있지?"

"...예."

첫 임무였던만큼 에이든도 의욕적으로 움직였지만, 그 또한 전황이 좋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대장도 전사했습니다."

비통한 표정으로 그리 내뱉는 에이든의 말에 준도 혀를 찼다.

"쯧...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항상 어떻게 잘 살아남던 양반이었는데, 운이 여기까지였나."

"그나저나 후퇴 명령을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텄어. 탈출은 불가능해."

"예?"

"봐. 벌써 저 녹색 땅딸보들이 포위를 끝마쳤잖아."

"아...."

그제야 주변을 둘러 본 에이든이 사방에서 빛나는 노란 안광을 발견했다.

"정규군들은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용병들은 다 죽게 생겼어."

이미 이번 작전에서 고용된 용병들 절반 이상이 죽거나 마비독에 당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우리도 여기서 빠져나가긴 힘들 거다. 너도 마비독이 오르고 있잖아."

조금씩 떨리고 있는 에이든의 양팔.

내성 수치를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죽은 척을 해야지."

"에?"

"상황은 나중에 설명해 줄게. [슬립(Sleep)]."

"어? 선... 배...?"

잠깐 사이 준이 에이든의 머리에 손을 올려 주문을 외우자, 에이든의 몸이 쓰러지듯 흔들렸다.

"어후, 이 녀석 무슨 마력 반발력이 이렇게 심해?"

쉽게 봤더니 꽤 마력을 많이 잡아먹었다.

물론 [마신지체]가 있는 준에게는 호수에서 물 한 컵 뜬 수준에 불과했지만.

어찌 됐든 마법에는 성공했고, 쓰러지는 에이든을 조심히 받아 들어 눕힌 준은 주변에 썩은 나무조각과 풀떼기들을 싹싹 긁어모았다.

그것들을 에이든의 몸 위에 올려 두고, 준도 근처에서 똑같이 위장을 펼치려던 그때.

"이, 이봐. 준."

"...포프킨?"

밀리는 전장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모양인지, 피투성이가 된 포프킨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대부분은 고블린의 피였지만, 그중에는 포프킨의 피도 적잖이 섞여 있었다.

마비독의 증상 때문인지 그의 몸은 전신이 딱딱하게 굳은 듯 보였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인지 포프킨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포, 포션. 가지고, 있지?"

마비된 탓인지 말까지 더듬으며 충혈된 눈으로 준을 바라보는 포프킨.

그에 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명성치 확보하겠다고 찍은 [포션제조] 때문인가. 이놈들, 날 포션 창고로 아네.'

그런 포프킨을 바라보는 준의 표정은 어느새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그, 그거, 나한테, 넘겨줘, 야겠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다.

이미 그의 눈엔 평소 준에게 호의적이었던 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포프킨에게 준은 그저 약탈의 대상에 불과했다.

"못 주겠다면?"

"그럼, 죽어야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포프킨이 준의 심장을 노리고 기습적으로 검을 내찔렀으나.

투웅-!

그의 검은 어느새 생겨난 반투명한 벽에 의해 막혀 버렸다.

"...?!"

그와 동시에 이어지는 준의 영창이 짧게 울려 퍼졌다.

[슬립]

"너, 너어...!!"

그러자 앞서 에이든과 달리 포프킨의 몸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가볍게 허물어졌다.

그렇게 쓰러진 포프킨의 모습을 바라보며, 준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 그러게 준비하라니까."

잠든 포프킨의 목에 호신용 단검을 찔러 넣은 준은, 그의 시체를 근처에 버리고는 마저 위장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개 같은 세상이라니까."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3화

3화 검은 숲 탈출기 (2)

한참 시간이 지나 숲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용히 눈을 뜬 준이 주변을 둘러보자, 예상대로 고블린들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휴우."

몸을 덮고 있던 이끼와 나뭇잎 등을 떨쳐 내고 에이든을 묻어 둔 방향으로 다가갔다.

"에이든. 일어나."

"...!"

걸어 둔 마법을 해제하자, 죽은 듯 자고 있던 에이든이 번쩍 몸을 일으켰다.

"서, 선배?"

"일어났냐."

"전투는, 전투는 어떻게 됐습니까?"

"주변을 봐."

준의 말에 에이든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

특이한 것은, 대부분 머리통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졌어. 죽은 녀석들은 고블린들이 머리만 남겨 놓고 전부 가져갔고. 아마 일용할 양식이 됐겠지."

"포프킨 선배도, 죽었군요."

"...감상에 빠질 시간 없고, 일단 할 게 있어."

"...선배?"

"대장이 죽은 곳. 어딘지 기억해?"

"예? 아. 저쪽 부근이었습니다."

"일단 따라와."

아직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에이든도 곧 준의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선배. 혹시 제가 잠든 건...."

의식을 잃기 전, 준에게 걸렸던 마법을 떠올렸는지 에이든이 묻자,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도 없이 마법을 쓴 건 미안하다. 기척을 완전히 없애야 했거든."

"그건... 괜찮습니다.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요. 다음에는 먼저 얘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

그 말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당장은 그것보다 급한 게 있었다.

"이 근처였다고? 아, 저기 있네."

"음...."

머지않아 준이 도착한 곳은, 용병대장의 목이 걸린 나무 앞이었다.

"시체들의 목이...."

"고블린 놈들의 습성이지. 좀 강했던 적의 머리를 걸어서,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알리는 거야. 영역을 알리는 역할도 하고."

"...."

"일단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찾았다!"

"...?"

서둘러 용병대장의 시체 근처에 떨어져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든 준이 에이든에게 말했다.

"에이든. 너 방패 쓸 줄 알아?"

"예. 방패술도 훈련했습니다."

"좋아, 그럼 저기 있는 거, 쓸 수 있어?"

"이건...."

"당장 고블린 놈들이 버리고 간 게 저 정도라."

몸 전체를 가리는 타워 실드.

다른 대부분의 장비들은 고블린이 챙겨 갔지만, 저건 너무 크고 무거웠는지 여기 남아 있었다.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바로 요새로 돌아가자. 근데 좀 위험할 거야."

아우우우우—!!

"피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달려들 차례거든."

* * *

준은 '이정준'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검은 숲은 기본적으로 게임 <블랙아웃 >의 도입부를 담당하고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뉴비들에게 친절하냐 하면.

'친절하긴 했지. 이 게임이 뉴비들에게 상냥하지 않다는 것을 아주 친절하게 알려 줬으니까.'

초반에 등장하는 고블린들과의 전투 이후.

어렵사리 고블린을 격파한 뉴비들을 반겨 주는 것은, 바로 짐승형 타입의 몬스터들이었다.

'이놈들은 이기라고 만들어 둔 게 아니야.'

물론 캐릭터와 더불어 파티를 맺은 NPC들을 성장시킨다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는 녀석들이지만,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에게 그런 여건이 있을 리가 없다.

막 고블린들과의 전투를 이기고 자신만만해진 뉴비 중 대부분은 피 냄새를 맡고 몰아쳐 오는 짐승들의 습격에, 화면 위로 떠오르는 [Game Over] 글귀를 봐야만 했다.

압도적인 민첩성과 고블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체력. 그리고 하울링을 통한 사기 저하 디버프까지.

그야말로 뉴비들의 입장에서는 개발자의 뺨을 한 번 어루만져 주고 싶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클리어를 하느냐.

"쉿. 온다."

"...."

에이든이 거대한 방패를 들어 자신과 뒤에 있는 준의 몸을 가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다가온 짐승형 몬스터, '아우터 울프'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늑대의 두 배나 되는 덩치.

그런 놈들이 무려 다섯이었다.

놈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한 뼘만 한 크기의 발자국이 남겼다.

저 거대한 발 앞에서는 에이든이 들고 있는 방패도 얼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에이든은 굳건하게 든 방패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크킁.

그르르르르르....

컹!

그런 녀석들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오고.

스으윽-

지나쳐 갔다.

놈들이 완전히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숨조차 참고 있던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번에도 잘 넘어갔군."

"예... 정말, 선배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직 요새까지의 거리가 하루 이상 남은 시점.

벌써 저런 녀석들과 조우한 게 네 번째였다.

만약 아무런 대비도 없이 녀석들과 마주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핼쑥해진 에이든은 손에 들린 방패를 바라봤다.

방패는 이전의 형태가 어땠는지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버섯과 풀, 그리고 썩은 나무 등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위장이 이렇게 잘 먹힐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선배."

"대체로 검은 숲의 몬스터들은 후각이 다른 오감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편이야. 피 냄새가 아니면 다른 냄새는 잘 구분하지 못하거든."

그 이유는 이 검은 숲의 특성 때문이었는데.

"확실히, 이런 곳에서 살면 후각이 멀쩡할 날이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사방에 죽은 나무와 그 안에서 피어나는 버섯과 다양한 약초들의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온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도 독하다고 느껴지는데, 후각이 예민한 짐승이라면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당연히 후각이 덜 발달하는 형태로 진화하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게임 내에서도 이런 식으로 은폐하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서 돌아갈 수가 없었지.'

하지만 이 방법이 무조건 먹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후각이 떨어지는 몬스터는 '대체로' 많은 편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후각이 예민한 몬스터도 있다.

"...젠장."

"왜 그러십니까?"

"언데드다."

"...!"

준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에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어딜 봐도 언데드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처럼 은폐 중이야. 나무 밑동을 자세히 봐 봐."

"...아. 저겁니까?"

이끼와 버섯 등으로 뒤덮인, 볼록 튀어나온 무언가.

크기로 봤을 때 고블린의 시체인 것일까. 언뜻 봐서는 그저 풍경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로 위장이 자연스러웠다.

"대단하십니다, 선배. 전 전혀 몰랐습니다."

"익숙해지면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준의 경우에는 캐릭터를 생성했을 당시 찍은 스킬, [밝은 눈] 덕분에 발견이 쉬웠다.

본래 사냥꾼 클래스를 키울 때 찍는 스킬이지만, 워낙 활용법이 많아 타 클래스를 성장시킬 때도 많이 기용하는 스킬이었다.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어."

"...그럼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언데드긴 한데, 저건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거든."

일명 플랜트 언데드.

말 그대로 식물을 달고 사는 언데드인데, 일종의 공생 관계라고 보면 된다.

언데드는 산 자를 향한 본능대로 움직이고, 식물은 그런 언데드가 사냥한 사냥감에 자신의 종자를 심어 종을 퍼뜨린다.

그러나 본신의 전투력 자체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놈들이다. 움직임도 굼뜨고, 공격력 자체도 느릿하게 휘두르는 팔과 이빨 정도가 끝이니까.

"그래서 저놈은 직접 움직이는 법이 없어.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걸 좋아하는 놈이거든. 가까이 다가가거나, 목숨이 위험하다는 판단이 서면 비명을 지를 거다."

그렇게 해서 주변의 다른 몬스터를 불러 모은다.

문제는, 그 비명이 일반적인 비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놈들의 비명은 특정 몬스터들을 상대로 광폭화를 일으켜."

대표적인 예시로 아까 그들을 지나쳐 갔던 아우터 울프가 있다.

그래서 가뜩이나 강한 짐승형 타입의 몬스터들이 더욱 강해진다. 그만큼 지능도 떨어져서 움직임이 단조로워진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뉴비가 상대하기에 벅차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아... 가끔 검은 숲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의 정체가 저거였습니까?"

"맞아. 솔직히 토벌대 단위로 움직이면 볼일이 거의 없는 놈들이야. 일반적인 언데드랑 다르게 어느 정도 지능이 있거든. 괜히 상대하기 벅찬 놈들을 상대로 어그로를 끌어 봤자 개죽음 당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어. 그런데 지금처럼 소수로 움직이면...."

놈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게임 <블랙아웃 >에서 솔로 플레이를 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었다.

게임 속 지역마다 저러한 기믹들이 숨겨져 있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나가면 당하는 미래밖에 없었으니까.

'난이도에 걸맞게 게임의 퀄리티가 좋아서 인기가 있던 거지만....'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니 보통 난이도가 높은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합니까? 원거리에서 죽인다면...."

"그것도 안 돼. 저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거든."

한 마리가 발견되면, 일단 주변에 다른 녀석들이 숨어 있다고 봐야 했다.

"저기랑 저기. 그리고 저기. 보여?"

준이 가리킨 방향에서 어렵지 않게 숨어 있는 언데드들을 발견한 에이든의 표정이 암울해졌다.

"...예. 그런데 저 시체는 고블린들입니까?"

"맞아. 이 검은 숲에서 몇 안 되는 고블린의 적수지."

평소 짐승들은 고블린을 상대로 위협하지 않는다. 플랜트 언데드처럼 그들끼리도 어느 정도 공생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고블린들이 사냥하고 남은 잔해물들이 고스란히 남게 되는데, 굳이 힘들게 고블린과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광폭화가 된 짐승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지니까.'

어찌 됐든 굳이 저 괴물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준과 에이든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돌아서 가기만 한다면....'

될 터인데.

"컹!"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아우터 울프의 울음소리에 준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미친. 여기서 난입 이벤트라고?'

게임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난입 이벤트.

냄새 스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생기는 일이었다.

'젠장. 땀 냄새를 맡고 온 건가. 하도 바쁘게 움직여서 신경 쓰지 못했다.'

이게 게임과 현실의 차이였다.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풍기는 냄새 자체도 인터페이스에 표기가 되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체취를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으니까.

'앞에는 언데드, 뒤에는 아우터 울프라... 결국 전투 없이 빠져나가는 건 무리인가.'

결심을 굳힌 준이 에이든을 바라봤다.

에이든도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했는지, 방패의 손잡이를 꾹 쥐곤 자세를 잡았다.

"좋아. 이렇게 된 거, 한번 싸워 보자고."

준 또한 자신의 목에 걸친 초커를 만지작거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 * *

'녀석들의 시선이 선배한테 끌려서는 안 돼.'

에이든은 으르렁거리며 거리를 재고 있는 아우터 울프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준이 일격에 놈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는 마법을 준비할 때까지, 자신이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최대한 버틴 다음, 선배의 마법과 동시에 합공을 펼친다.'

다행히 이쪽으로 찾아온 아우터 울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총 세 마리.

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리 판단한 에이든이 앞으로 튀어 나간 순간, 뒤에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벌써?'

에이든은 짐꾼이었던 시절 준과 임무를 뛰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그의 마법이 이 정도로 빠르게 발현된 적은 없었는데.

'괜찮을까?'

혹여 당황해서 수준 낮은 마법이라도 쓰는 걸까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큰 실수다.

확실한 화력으로 한 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쓸데없이 시선이 끌릴 테니까.

'영민한 사람이다.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어.'

에이든은 불안한 생각을 떨치고 준의 마력이 향하는 방향을 느꼈다.

'지금.'

현재 준의 실력으로는 아우터 울프의 가죽과 뼈를 한 번에 뚫어 내는 것은 힘들다.

그에 에이든이 깊숙이 파고들려던 찰나.

"옆에 있는 놈을 먼저 노려!"

화살처럼 꽂히는 준의 명령에 에이든이 반사적으로 바로 옆의 아우터 울프에게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를 스치고 광풍이 몰아쳤다.

마치 칼날처럼 쏘아진 광풍은 그대로 아우터 울프의 목을 베었다.

아니, 저걸 베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걸까.

마치 대포라도 맞은 듯, 놈의 대가리가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그것은, 결코 하급 마법사가 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 * *

윈드 커터는 2서클 마법 중에서도 뛰어난 절삭력으로 하급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마법 중 하나다.

위력 대비 마력의 가성비도 좋아서, 전투 마법사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배우는 아주 단순한 마법.

다만 2서클 마법의 한계로 인해 여러 단점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사거리였다.

어느 정도만 거리가 멀어져도 절삭력이 형편없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준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분간 밥줄로 써야하는 마법인 만큼 스스로 개량했다.

[마신지체]로 넘쳐 나는 마력을 무식하게 때려 박는 수준이긴 했지만.

'쯧. 너무 강하게 했나.'

이 정도 마력을 쓴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힘 조절에 실패한 준이 얕게 혀를 찼다.

'뭐, 그래도 방금 그 정도는 3서클 마법사도 무리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이야.'

거의 끝자락에 다다른 3서클 마법사라는 조건이 붙겠으나, 그 정도야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다.

습관처럼 손가락을 자신의 목에 걸린 초커에 가져다 대니,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 목걸이가 너의 목숨을 살려 줄 거다. 당분간은.

'망할 스승 새끼.'

이 목에 초커를 건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 분노에 따라 마력이 다시 한번 과격한 바람을 현실에 현현시켰다.

마치 어항 안에서 휘저어진 물의 형태로 몰아치던 바람은, 미친 듯한 소음을 내며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앙—!

피와 내장을 공중에 흩뿌리며 또 한 놈이 쓰러지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아우터 울프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때마침 에이든의 검이 마지막 한 마리의 목을 꿰뚫었다.

'저 녀석도 평범한 실력은 아니란 말이지.'

비록 준이 두 마리를 처리하긴 했지만, 하급 용병이 아우터 울프를 혼자 죽인다?

그게 가능했다면 <블랙아웃 >은 보다 뉴비들에게 상냥한 게임이었을 것이다.

"선배, 방금 그건...."

"설명할 시간 없어. 지금은 달려야 해."

"아."

서로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았다.

코를 스치고 지나가는 비릿한 피 냄새.

곧 있으면 또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날 거다.

그에 에이든도 잠시 내려놨던 방패를 들려던 순간.

"...선배! 뒤에!"

"뭐?"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

잠자코 있어야 할 플랜트 언데드의 괴성이 숲에 울려 퍼졌다.

"이런 망할."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던 또 다른 아우터 울프의 무리였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4화

4화 검은 숲 탈출기 (3)

총 여섯 마리로 무리를 짓고 다니는 녀석들 중 하나가 플랜트 언데드를 짓밟은 것이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

플랜트 언데드의 괴성에 아우터 울프가 울부짖자, 그와 공명하듯 다른 녀석들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광폭화의 전조였다.

노란빛을 띠던 안광이 붉게 변하기 시작하고, 가뜩이나 커다랬던 놈들의 덩치는 이제 괴수라 불러도 될 정도로 거대해졌다.

"젠장...."

재수가 없어도 유분수지, 난입 이벤트가 연속 2번이나 나타나다니.

'[행운] 스킬은 허수아비냐고.'

아이템의 드롭률을 높여 주는 스킬이라 남은 스킬 포인트로 대충 찍었는데, 이럴 때는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이것도 토벌의 실패에 대한 영향인가.'

용병만 수십 명이 고블린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갔으니, 그 피 냄새가 얼마나 멀리까지 퍼졌겠는가.

검은 숲 일대의 짐승형 몬스터들이 죄다 몰려오고 있을 것이다.

"에이든! 놈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분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해 봐야 그 정도가 최대였지만, 준이 씩 미소를 지었다.

"1분? 좋아. 그럼 그때까지 맡긴다!"

하급 용병이 아우터 울프 한 마리를 상대로 이기는 것도 기적처럼 여겨지는 마당에.

무려 6마리를 상대로 1분이나 버틸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내, 준의 주변으로 다시 한번 마력이 휘몰아쳤다.

그에 맞춰 에이든도 완전히 광폭화 상태에 돌입한 아우터 울프들에게 달려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광폭화된 놈들이 뒤에서 몰아치는 마력에도 불구하고 에이든에게 먼저 달려들었다는 점이다.

'속도가 더 빨라졌어. 광폭화의 영향인가?'

검은 숲의 특색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지만, 아우터 울프에 대한 정보는 에이든의 머릿속에도 들어 있었다.

일반적인 늑대들의 주무기는 오로지 날카로운 이빨뿐이다.

그러나 아우터 울프는 마치 호랑이처럼 발톱도 무기로 쓴다.

광폭화의 영향으로 더욱 커지고 날카로워진 발톱이 에이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들고 있는 검으로는 두 번 이상 막기 힘들겠어.'

그렇다면 놈들의 숫자를 줄여 보겠다는 욕심은 버린다.

그리 판단한 에이든의 발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준과 놈들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기 위해 아웃코스로 돌며 이어지는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이, 아우터 울프의 진형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평소처럼 순서를 지켜 합을 맞추는 움직임과 달리, 광폭화된 아우터 울프들은 서로의 동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마구 달려들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거나, 동족을 해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큭...!"

하지만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녀석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쳤으니까.

그중 한 놈이 아가리를 벌려 에이든의 목을 노렸다.

한순간에 머리째로 씹어 삼킬 듯한 기세.

하필이면 다른 놈의 공격을 흘려 내느라 검을 쓸 수 없을 때 들어온 공격이었다.

"꺼져라!"

하지만 에이든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은 속도로 검을 회수하고, 달려든 녀석의 턱을 꿰뚫었다.

커헝—!

즉사한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에이든이 검까지 포기하고 뒤로 도약했다.

두 마리가 순차적으로 달려들어 그가 있던 자리를 헤집었다.

"후...."

차분하게 한 놈을 정리한 것까진 좋았지만, 애석하게도 검을 잃었다.

그러나 에이든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졌다.

"정확히, 1분입니다."

"수고했다."

계속해서 마력을 모으고 있던 준으로부터 답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던 마력이 일제히 퍼져 나갔다.

[디텍팅 타깃(Detecting Target)]

그리고 퍼져 나온 마력의 일부가 원의 형태를 취하더니 에이든에게 달려드는 아우터 울프들을 조준했다.

마법의 적중률을 높여 주는 보조 마법이었다.

이후 재차 마법이 발현됐다.

[록 홀드(Rock hold)]

————!!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대지.

거대한 나무가 휘청거리고, 새들이 재앙으로부터 도망치듯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내 달리던 아우터 울프들이 균형을 잃으며 쓰러진 순간.

쿠구구구구—

대지가 뒤집어졌다.

적어도 그 광경을 목도한 에이든은 그렇게 봤다.

"이게 무슨...."

록 홀드.

2서클 마법인 홀드의 상위 마법으로, 3서클 수준의 마법이다.

대지를 움직여 적을 속박하는 기술.

하지만 저걸 과연 속박이라 부를 수 있을까.

대지라는 괴물이 아가리를 벌려 이성을 잃은 짐승들을 그대로 씹어 삼켰다.

깨갱—!!

이어지는 소리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대지 안에서 압착당해 죽어 가는 짐승들의 비명뿐.

"후우...."

그로부터 얼마 후.

이적을 일으킨 준은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아우터 울프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대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뱃속에 담긴 자양분을 간직한 채 평소대로 돌아왔다.

꿀꺽-

절로 마른침을 삼킨 에이든이 준에게 황망한 시선을 보냈다.

'이게, 3서클 마법이라고?'

과거 에이든은 여러 마법사들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는 4서클의 마법사도 있었는데, 그가 보인 이적도 이렇게 살벌하진 않았다.

"선배, 방금 그건...."

"잠깐, 에이든."

"예?"

그야말로 압도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전투를 펼쳤으나, 준의 표정에서는 아직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이든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적은 아우터 울프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잔잔해진 대지에 다시금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의 근원지를 향하는 순간, 그 둘이 발견한 것은.

"골렘...?!"

4미터에 다다르는 거대한 몸체.

녹색의 이끼에 뒤덮인 자율형 타입의 골렘이 진한 녹빛의 안광을 터뜨리며 준과 에이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에이든! 저놈 공격은 정면에서 받으면 안 돼!"

준의 외침에 에이든이 아직 회수하지 못한 검 대신 근처에 있던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골렘이 움직였다.

키이이이잉——!!

날카로운 쇠가 갈리는 소리와 흡사한 골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녀석의 거대한 주먹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들었다.

[실드]

준이 다급히 에이든의 앞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그러나 [실드]는 그런 골렘의 주먹을 아주 잠깐 막았을 뿐, 금세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 버렸다.

'정면에서 안 된다면...!'

흘려야 한다.

필사의 각오를 하며, 에이든이 들고 있던 방패가 아주 미약한 붉은빛을 머금었다.

콰아아앙——!

골렘의 주먹과 방패가 맞닿는 순간, 기묘하게 비틀리는 방패.

흘려보낸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에이든은 허공을 훨훨 날아 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에이든이 흙먼지 속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무슨 힘이...!"

공격을 받는 순간 마력으로 신체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방패째로 분쇄될 뻔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족했는지.

'젠장. 부러졌어!'

방패를 들고 있던 팔은 그의 의지를 배반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절망적인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골렘이라니....'

<블랙아웃 >에서 하급 마법사들이 무시당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력통 자체가 작은 탓에 마법을 여러 번 쓸 수 없다는 것과, 부족한 체력으로 자주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

그 외에도 여러 문제점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저 골렘 같은 몬스터들에게 있었다.

'마법 저항 특성....'

고대에 만들어졌다 알려진 골렘은 그 자체로 마법 저항력이 높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블랙아웃 내에서 패배의 쓴맛을 봐야 하는 이유였다.

* * *

골렘.

이정준이었던 시절, <블랙아웃 >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마법사 유저들의 절망으로 유명했다.

-아니 씨팔 이 개 같은 골렘 이 새끼 뭐 하는 새끼임?

-개발자 개간나들아! 마법사 혐오를 씨발 멈춰 주세요!

-장비에 스킬북이랑 영약까지 1억 골드 이상 때려 박았는데 골렘 새끼 한 마리 잡질 못하네. 이딴 게 게임??

-개발자 : 아 꼬우면 마법사 하지 말라고 ㅋㅋ

-2회차엔 마법사 하려고 했는데 이 글 보고 맘 접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3회차까지 10억 모아서 간다. 존버 가즈아아아앗!

┕ 10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강력한 전사 NPC들을 파티에 영입시키고, 버프 마법을 무식하게 때려 박는다.

그 다음에는 제발 이겨 주길 기도하는 기도 메타가 당시 마법사 플레이어들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에이든의 컨디션이 정상적이라면 어떻게든 빈틈을 노려 볼 수 있었을 텐데....'

문제는, 준과 에이든. 둘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앞서 고블린들과의 전투를 펼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

에이든은 아직 마비독에 당한 여파가 남아 있는 상태였고, 준 또한 오랜 시간 이어진 강행군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후우... 진짜. 재수도 더럽게 없지."

에이든을 반쯤 무력화시킨 것을 확인한 골렘의 시선이 준에게 향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리 중얼거리며, 준은 습관처럼 목에 걸린 초커에 손을 올렸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얇은 마력의 실이 초커로 향했다. 마치 실뜨기를 하듯 일정한 패턴을 그리며 생성된 마력의 실이 일종의 언어를 이루어 초커에 파고들었다.

[언령 해석 중....]

[해석 완료.]

[언령, '게으른 순례자의 오디세이'의 영향력을 10퍼센트 하향합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의 파동이 준의 주변으로 흘러나왔다.

만약 마력에게 감정이라는 게 있다면 이 풍경은 그들의 어떤 감정을 표현한 것일까.

진한 마력의 실이 통제에서 벗어난 듯, 허공에 튕겨질 때면 공간에 일그러짐이 생겨났다.

그런 마력의 실들이 준의 목에서 셀 수조차 없이 흘러나와 일대를 뒤덮었다.

* * *

게임 <블랙아웃 >이 인기 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를 정하라 하면, 난이도만큼이나 정교한 게임의 시스템이 꼽힐 것이다.

한 차례 절망을 맛보고, 왜 실패했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가진 창의력과, 게임 속에 담긴 힌트가 합쳐지는 순간, 막혔던 문제가 풀리게 된다.

'그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과거 <블랙아웃 >의 고인물이었던 준 또한 그 잊을 수 없는 맛을 보고는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골렘도 그런 계열의 몬스터 중 하나였어.'

한참 마법사 클래스를 키우던 시절에도 그는 골렘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가뜩이나 적은 마력통이 밑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마법을 쏟아부어도, 체력의 20퍼센트밖에 까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이란.

특히나 화력에 모든 것을 투자했던 캐릭터인 만큼, 당시 그가 느꼈던 절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때도 알고 있긴 했어. 이 게임이 오로지 화력 하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당시 이정준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최초로 유틸리티 마법을 배웠다.

"후우...."

목에 감긴 초커에서 느껴지는 작은 해방감.

지금은 봉인해 둔 그의 재능이, 이 순간 일부분 그에게 돌아왔다.

그 증거로 일대의 마력이 그가 품은 마력에 반응하여 옅은 진동을 만들어 냈다.

'오랜만인데. 이 느낌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체내에 마력을 쌓아 둔다.

검사든, 마법사든, 사냥꾼이든.

그러나 [마신지체]는 다르다.

마력이 곧 그였고 그가 곧 마력이었다.

이 진리에 따라 이 세상에 퍼져 있는 모든 공간 속 마력들은 그의 마력에 동조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두고, 그의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 아주 오만하고, 불손하며, 끝이 없는 재능이로구나.

그 당시에는 몰랐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끝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간 지 1년이 된 지금, 준은 당시 스승이 했던 말을 인정했다.

'당신과 같은 감상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역겹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말이 맞았어.'

작지만, 그의 영역 안에 닿는 모든 것이 마치 몸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일심동체.

'아직 내 실력이 부족해 완벽히 제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당장이라도 닿을 듯하면서 요원하기만 한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저 녀석을 정리해야겠지.'

게임과 다르게 실제로 보니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풍기는 골렘.

놈이 자세를 낮췄다.

마법사처럼 방패 전사들에게 절망감을 선사하는 놈의 스킬 중 하나인 [돌진]이다.

거구에 걸맞게 압축된 무게를 실어 달려오는 녀석의 돌진에는 [아머 크래시] 특성이 붙어 있다.

'대부분의 방어 스킬을 무력화시키는 만큼, 저 공격을 정면에서 막는 건 미친 짓이야.'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저 스킬을 피하기 위해 헤이스트 마법을 시전할 것이다.

마법사에게 부족한 기동성을 챙겨 주는 효자 마법이지만, 준의 선택은 달랐다.

'마신지체가 있는 이상, 피할 필요는 없어.'

상상을 현실로 그려 내는 이적. 마법을 영창한다.

상상 속에 그려지는 것은 거대한 바위.

세월이라는 피해 갈 수 없는 적수를 두고도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바위다.

비록 바람에 할퀴어지고, 모래폭풍에 의해 깎여 나가지만 그럴수록 바위는 더욱 튼튼해지고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제자리에서 받아 낸다.

'그려 낸다. 내 상상을.'

마법이라는 것은 단순히 주문을 외우고, 거기에 맞게 마력을 주입하기만 하면 되는 작업이 아니다.

시전자가 상상하는 그림이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그것을 투영하는 마법진 위로 마력이 더욱 정교하게 그려지니까.

마치 조각가가 신이 빚은 여인을 모방하듯, 섬세한 마력의 손길이 그가 그린 심상을 현실에 빚어 낸다.

이윽고 완성된 실드는, 앞서 에이든을 보조했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방패가 되었다.

마법이 완성됨과 동시에 골렘이 돌진해 왔다.

마법사가 빚어 낸 세월의 바위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골렘이 맞붙는 순간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 * *

"크윽!"

뒤에서 그 광경을 목도한 에이든이 몰아쳐 오는 먼지바람에 얼굴을 찡그렸다.

"막았어...?!"

세월을 묵묵히 견뎌 온 바위가 골렘의 돌진을 막아 냈다.

동시에 골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굼떠졌다.

돌진에 실패한 대가로 상태이상, [그로기(기절)]에 걸린 것이다.

"크으...!"

팔에서부터 시작된 격통이 온몸을 찌르는 듯했지만, 에이든은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 쳤다.

놈의 그로기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고작해야 10초 남짓.

어떻게든 몸을 추스린 에이든이 충격파에 튕겨져 나간 아우터 울프의 사체로 향했다.

놈의 사체에 꽂혀 있던 검을 회수한 에이든은, 그로기에서 벗어난 골렘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준이 벌어 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5화

5화 에이드리안 룬 와이본 아르시오

돌진 한 번 막았다고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몸에 반동이 왔지만, [굳건한 의지]가 정신을 유지시켰다.

'젠장.'

손을 내려다보니 핏줄을 따라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오버히트'였다.

마법사가 다룰 수 있는 마력의 한계 이상을 다룰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준이 자신의 스킬인 [마신지체]를 일부 봉인해 둘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

그럼에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아직 골렘은 건재했으니까.

다시 한번 마력이 혈관을 타고 움직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거대한 호수처럼 몰려오는 마력량에 화들짝 놀란 심장이 비명을 질렀으나, 준은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 녀석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있다면...!'

필히 역전의 기회는 생길 것이다.

하지만 골렘 또한 가만히 서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금세 그로기 상태에서 회복한 녀석이 움직였다.

거대한 주먹을 들어 실드를 후려친다.

한 번 한 번 주먹이 내려쳐질 때마다 마력이 뭉탱이로 빠져나가며 오버히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크으으으...!"

푸른빛이 점차 진해지며, 마력회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나 넘쳐 나는 마력과 다르게, 준의 마력회로는 아직 그만한 크기의 마력을 움직일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선지, 아무리 마력을 쏟아부어도 실드의 마법 패턴이 흐트러져 갔다.

'이런...!'

단 2초.

고작 2초의 시간만 있었다면 준비했던 마법을 발현 시킬 수 있었건만.

어쩔 수 없이 끌어모은 마력을 취소하고 몸을 피하려던 찰나.

"하아아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에이든이 골렘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억지로 이끌고 온 모습. 그의 몸에 붉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렸다.

그 마력을 본 준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인간의 도약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를 뛰어오른 에이든이 검을 내질렀다.

본래라면 흠집조차 낼 수 없을 일격이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검은 억척스러운 소리를 내며 골렘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키이이이이이잉——!

마치 오류가 난 기계처럼, 골렘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동시에 놈의 몸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에이든의 육체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이 총 3초.

준이 잠시 멈췄던 캐스팅을 이어 하고, 더 나아가 기존에 그려 뒀던 마법을 완성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신계: 마리오네트 라인(Marionette line)]

마법에 의해 발현된 검은 실이 준의 손끝을 따라 골렘에게 쏘아졌다.

검은 실은 그대로 에이든이 남긴 검을 타고 골렘의 내부로 진입했다.

'원래 타격 마법을 먼저 시전하고 할 생각이었는데.'

마법 저항이 있는 골렘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마력을 써야만 했는데.

예상치 못한 에이든의 활약에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다.

실제로 이 상태에서 골렘에게 피해가 생길 정도의 마법을 썼다면 몇 달은 앓아 누웠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저 녀석한테 예상외로 너무 많은 걸 보여 주고 말았어.'

그동안 준이 하급 마법사에 머무르고 있던 이유는, 그의 마법적 지식이 부족한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을 어떻게 해야....'

고민이 이어지던 그때, 골렘의 내부로 진입한 실에 무언가가 걸렸다.

'일단 이것부터.'

마치 자신의 손이라도 되는 것마냥 검은 선에 닿은 것의 감촉이 느껴졌다.

붉게 달아오른 동그란 구체.

골렘의 핵이었다.

'좋아. 상태는 나쁘지 않아.'

에이든의 마력이 일부 침투한 모양이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양호했다.

거기에 이 골렘의 핵은 특별하다.

그 가치를 생각하면 이 위기가 오히려 훗날 훨씬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

[시스템 마법 패턴 진입. 접속 중... 정신체 감지.]

비생물인 골렘에게 정신계 마법을 쓴 이유.

그것은, 골렘의 핵에 깃든 정령 때문이었다.

마치 해킹을 하듯, 준의 마법이 정령의 정신에 침투한다.

동시에 날뛰던 골렘의 움직임이 멎었다.

압도적인 마력량 앞에 정령이 굴복하면서, 골렘을 조종권을 준이 탈취한 것이다.

'최하급 정령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쉽군.'

이어서 핵의 주도권을 획득한 준은 그대로 골렘의 신체를 해체해 버렸다.

아쉽게도 핵을 완벽하게 장악한 게 아닌 탓에, 이 정도의 간단한 명령이 최선이었다.

끝내 골렘의 몸체가 무너져 내렸다.

길었던 전투가 끝을 맺은 순간이었다.

"하아...."

오버히트로 달아올랐던 핏줄이 서서히 정상적인 색을 되찾아 갔다.

"젠장. 며칠 쉬어야겠어."

벌써부터 반동이 오기 시작했음을 느낀 준이 서둘러 품에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이번 임무로 번 돈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적자네."

그리 짧은 푸념을 하고, 준의 시선이 골렘 잔해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골렘이 마지막에 발악하듯 터뜨린 충격파에 의해 땅으로 추락한 에이든이 있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걸까.

미동도 없는 그의 앞에 도착한 준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듯,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

그러나 그에 대비되게 온몸은 여기저기 상처로 가득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가 얼마나 전력을 다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에이든을 바라보는 준의 눈빛에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 * *

잠시의 고민이 있었으나, 준은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운 좋은 녀석."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주긴 했지만, 반대로 에이든 또한 준에게 보여 준 게 많았다.

당장 죽음으로 입막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

'어쩌다가 내가 이런 꼴이 됐는지.'

이정준이었던 시절에는 사람에게 주먹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그만큼 지난 1년의 시간은 그의 많은 부분을 바꿔 버렸다.

'그리고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녀석은 아마....'

거기까지 생각한 준은 품에서 포션을 꺼내, 에이든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 * *

"으, 음."

에이든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이후였다.

흐릿한 시야 대신에 그의 오감을 자극한 것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구수한 음식의 냄새와, 체온을 덥혀 주는 온기였다.

"일어났냐."

"...? 아!"

그제야 실신하기 직전의 기억이 떠오른 에이든이 습관처럼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익숙한 검의 손잡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해. 전투는 끝났으니까."

"선배...? 골렘은...."

"저기."

골렘에게 꽂혀 있던 검은 녀석의 몸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아...."

"미안한데 저 검은 더 이상 쓰기 힘들 것 같다. 대신 안전은 확보됐어. 골렘의 포효 소리가 숲 전체에 퍼졌으니까."

골렘은 검은 숲의 몬스터들에게 있어서 처치 불가의 괴물.

설사 피 냄새가 풍긴다 하더라도 얼씬거릴 일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선배 덕분에 또 목숨을 구했습니다."

"뭐, 나도 이래저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특히, 마지막에."

"...네."

그렇게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타탁, 하고 장작 타는 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에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법 실력은... 여태까지 일부러 숨기신 겁니까?"

"맞아. 너무 눈에 튀는 일이었으니까."

"언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간혹, 사람의 심장이 암시장에서 경매로 올라온다는 것을."

"...."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선천적으로 신체에 과도한 마력을 타고난 이들이라고 하더군요."

굳이 [마신지체]까지 갈 것도 아니다.

그 하위 스킬을 가진 이들의 심장조차도 이 세상에서는 귀한 마법적 재료가 된다.

"...후우."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가 오랜만에 절실히 떠올랐다.

동시에 잊고 싶은,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매일 밤 꿈에서 나오는, 그 기억이.

"참 개 같은 세상이야."

"비슷한 일을 경험하신 겁니까?"

"응. 다른 게 있다면 산 채로 뽑힐 뻔했다는 정도?"

"...."

그제야 에이든은 여태 준이 보였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하급 마법사로서 살아야 했던 이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진 뛰어난 재능 때문이었다.

때로는 값비싼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었으니까.

에이든은 그런 준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선배. 제가 그 사실을 바깥에 말하고 다닐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난 약속은 안 믿는 주의라."

"...사실 저도 비밀이 있습니다.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황실이냐?"

"...역시, 알고 계셨군요."

준은 에이든이 골렘에게 가했던 일격을 떠올렸다.

그 공격이 먹혔었던 건 그의 몸에서 일렁이던 진홍빛의 마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그런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일족은, 단 하나뿐.

황족이었다.

'평소 행동거지가 예스럽다 싶어서 몰락귀족 출신인 줄 알았더니.'

무려 황족이라니.

이곳 <블랙아웃 >의 세계관 속 황실의 이름은 그만큼 무거웠다.

유일하게 인류의 통일을 완성시킨 제국의 주인이니까.

"혼외냐?"

"예."

기본적으로 제국의 황제는 일부다처제지만, 예외적으로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자식은 반드시 혼인식을 치르고 낳을 것.

그러나 에이든은 그 규칙 외에 태어난 자식이었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구만."

"...그래서 쥐 죽은 듯 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아니, 솔직히 많이 놀랐어."

진홍빛 마력을 보고 어느 정도 예측했을 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준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황족이되 황족이지 못한 자. 그게 너였구나."

에이드리안 룬 와이본 아르시오.

줄여서 에이든.

그는 이 게임 속 세상, <블랙아웃 >의 주인공이었다.

* * *

이정준 시절, 그는 <블랙아웃 >을 즐겨 플레이하던 고인물이었지만,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수능을 앞둔 때인 만큼 하루에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그 대부분은 캐릭터를 성장시키는데 투자해야만 했으니까.

다행히 <블랙아웃 >은 무척이나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었기에, 메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지 않더라도 진행에 막힘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준이 <블랙아웃 >의 스토리를 아예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진행에 막힘이 없을 뿐이지, 그에 따른 게임 속 변화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게임 속 중요 등장인물이 죽으면 세계관 내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대표적으로 세금의 폭이 확 늘어난다거나. 혹은 특정 단체가 플레이 중 덮쳐 오는 등, 전에는 없던 변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때문에 게임의 진행 중 찾아오는 변화에 대응하다 보니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에이든, 버려진 황족 에이드리안은 그 스토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에이든이라... 왜 내가 몰랐나 했더니, 이때 당시에는 이런 가명을 쓰고 있던 건가.'

본격적으로 에이드리안이 게임 내 스토리에 등장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에이드리안은 고블린에 대한 혐오가 상당했었지.'

본래의 스토리대로라면 이곳에 자신은 없어야 했다.

그러니 이 현실 또한, 본래 게임의 스토리에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이 타이밍에 본래의 에이드리안은 고블린과 악연이 더욱 깊어졌을 터.

그게 준의 등장으로 인해 뒤바뀐 것이다.

'그럼 내가 이제부터 스토리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단 말이지.'

이 일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준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본래 알던 시나리오와 달라져서 두렵냐 하면.

'처음부터 그런 건 기대도 하지 않았어.'

애초에 <블랙아웃 >은 멀티엔딩 게임이었고, 준은 <블랙아웃 >의 스토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이 알던 엔딩으로 끌고 갈 계획이 처음부터 없던 것이다.

어중간하게 건드릴 바에, 차라리 내버려 두겠다는 심산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내가 이걸 어떻게 이용할지겠지만.'

그건 지금부터 차근차근 생각하면 됐으니까.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가 됐네."

"그, 죄송합니다. 선배의 비밀을 제가 알아 버려서... 제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셔도 됩니다."

실제로 버려진 황족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서 뭐가 좋겠나.

오히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뒤늦게 인지한 에이든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준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할 정도로 시간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준은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일단, 몸 상태는 어때?"

"아직 오른쪽 팔이 안 좋습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기운이 납니다. 선배께서 뭘 해 주신 겁니까?"

"확실히 중급 회복 포션이라 그런가, 뼈가 붙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네."

"중급... 포션이요?!"

에이든이 헛숨을 삼켰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라는 상급 회복 포션보다 바로 밑에 있는 단계의 물품이지 않은가.

그나마 보급화가 되어 있는 물품이지만, 가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포션제조는 좀 하는 편이거든."

동료 NPC 사이에서 명성을 챙기기 위해 찍었던 스킬, [약초학]과 [포션제조]의 덕분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그만한 마법 실력에, 포션제조까지...."

"뭐든 배워 두면 쓸데가 있으니까. 아무튼 골렘 덕분에 하루 정도는 여기서 머물러도 될 거다. 그때까지 최대한 컨디션을 회복해 둬."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꼬르륵-

에이든이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먹을 것 좀 구해야겠군요."

주변에서 급한 대로 식량을 수급해 만든 식사는 놀라울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

그렇게 둘은 하루 동안 주어진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떠날 채비를 갖췄다.

* * *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준과 에이든은 무사히 요새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골렘을 만난 이후부터는 특별히 몬스터와 조우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음... 흰고래 용병대? 대장의 이름은 갈라베스?"

"대장은 이번 작전에서 전사했소."

"검은 숲 고블린 토벌에 실패했다더니. 그쪽에서 왔나 보구먼."

대충 알 만하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준과 에이든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으니까.

"용병패도 확실하고. 들어가쇼."

"수고하시오."

그렇게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에이든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살아서 돌아왔군요."

"후, 그러게. 어찌어찌 생환했네."

"예. 근데 선배, 이제 어쩔 생각이십니까?"

"음? 뭐가?"

"그, 앞으로의 계획이라던가...?"

"나랑 계속 같이 다니게?"

"아."

사실상 그들의 유대감을 형성해 주었던 용병대는 해체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준의 말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며 쌓은 정이 있지 않은가. 그에 에이든이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 무렵.

"나야 네가 함께해 준다면 든든하지."

"정말입니까?"

"응. 이번에 네 덕분에 살았잖아."

"아니, 계획은 전부 선배가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전투의 마무리도...."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래도 일단 이 꼴로 돌아다니기엔 뭣하니까, 좀 씻고 오자. 이따 '굶은 늑대' 앞에서 보자고."

금방 허름한 선술집을 떠올린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숙소로 돌아갔고, 그런 에이든의 뒷모습을 보며 준도 기지개를 켰다.

"하아. 진짜 어찌저찌 살아남았네."

고생한 끝에 보상이 있는 게 당연할진대, 이번에는 손해만 봤다.

"쯧, 그래도 이건 얻었군."

그러면서 준은 손에 들린 골렘의 핵을 바라봤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인만큼 제법 짭짤한 가격을 받을 수 있겠으나.

"그냥 팔기엔 좀 아쉽지. 나중에 그 녀석한테 찾아가 봐야겠어. 잘하면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입에 돈을 달고 사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준도 금방 자리에서 벗어났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6화

6화 용병대장 준

에이든은 '굶은 늑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언제 오시려나...."

설마 안 오시는 건 아니겠지?

하고, 불길한 상상을 해 보는 것도 잠시.

얼마 안 있어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 아닙니다!"

"그래? 바로 들어가자."

선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는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이번 검은 숲의 토벌이 실패로 끝나면서 용병들의 숫자가 대거 줄어든 것이다.

물론, 금방 다시 시끌벅적해질 테지만.

적당히 메뉴 몇 개를 시키고 자리에 앉은 둘은 자연스럽게 이번 토벌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는 이번 작전이 실패할 걸 예상하신 겁니까?"

"확신까진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상정은 하고 있었어."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었습니까?"

"첫 번째로는 최근에 들려오는 소문이었지."

"소문, 말입니까? 아... 고블린들의 숫자가 제법 늘어났다고는 들은 것 같습니다."

"맞아. 그리고 용병들의 생환률도 많이 떨어졌고. 검은 숲에 무언가 이변이 생겼다는 거지."

"허어."

"두 번째 이유는 이번 지휘관이 누구인지 대장한테 들어서야."

"지휘관이라면... 막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온 지휘관 말입니까? 그래도 황실 사관학교면 지휘관의 실력도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봤자 초짜지."

딱히 사관학교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영재들이고, 지금의 준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엘리트일 테니까.

실제로 지휘관이 이끌던 본대는 별다른 피해 없이 요새로 복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말하는 건 초보 지휘관이 가진 경험이 아니야. 무려 황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휘관이 블랙아웃까지 왔는데 어리버리하진 않겠지. 내가 본 건 그의 경력이야."

"경력 말입니까."

블랙아웃.

인류를 통일한 제국의 밑에 자리 잡은 심연.

제국의 지하에 자리한 블랙아웃을 발견한 황실은 제법 오랜 시간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설정상 수백 년이었던가?'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

그런 만큼, 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지휘관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오히려 첫 작전이었던만큼, 온갖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아마 지휘관도 소문을 통해 어느 정도 근거는 마련해 뒀을 거야. 따로 조사도 했겠지. 하지만 근데 그거랑 다르게 예산 편성은 그렇게 쉬운 편이 아니거든."

쉽게 비유하자면 회사 생활과 비슷했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 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보였다 한들, 그가 맡은 프로젝트에 많은 지원을 해 줄 리가 없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작전을 짜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해 줄 예산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근데 초보 지휘관은 아무런 공도 쌓지 못한 상태지. 그런데 고작 고블린을 토벌하겠다고 상부에 많은 예산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아...."

"그래서 이번 작전은 성공할 수가 없던 거야. 블랙아웃을 만만히 본 건 지휘관이 아니고, 글과 숫자만 보는 상부인 셈이지."

물론, 지휘관의 지휘 능력이 부족한 것도 있었다.

만약 보다 체계적으로 작전을 펼쳤다면, 이 정도로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테니까.

"여러모로 악재가 겹쳤던 거지."

"과연... 거기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것들이야."

준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에이든은 준이 가진 생각의 전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이 사람을 따라 다녔지.'

짐꾼 시절.

에이든은 황족으로서 타고난 육체적 재능이 있었고, 곧 정식 대원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에이든이 준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것은, 그만큼 이 준이라는 남자가 가진 가치를 알아봤던 덕분이었다.

황실에 있던 당시 받았던 교육대로, 에이든은 인재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적 재능은 둘째치더라도, 하급 용병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

지나가다가 나뭇가지에도 베이고, 조금만 걸어도 지친 숨을 몰아쉬는 허약한 남자.

하지만 그것과 대비되게, 그는 굉장히 박식했고 그것을 실생활에 녹일 정도로 지혜로웠다.

"반대로 내가 묻고 싶은데. 날 따라오려는 이유가 뭐야?"

그렇기에, 에이든은 준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선배와 함께라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거참 명료한 이유로군."

에이든은 강한 자가 오래 살아남는다는 말도,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아야만 강해질 미래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동안 봐 왔던 이 사람이라면....'

제국의 심연이라 불리는 이곳, 블랙아웃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에이든이 준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이유였다.

* * *

에이든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다른 것보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진짜 무리했네.'

마법사인만큼 체력적인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패널티가 있다.

덕분에 매번 임무에 나설 때마다 이렇듯 기진맥진한 준을 두고 다른 용병들이 비웃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은 결국 준이었다.

"하아... 죽겠다."

숙소에 도착하고 방으로 돌아온 준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구릿빛 징이 박힌 용병패를 바라봤다.

용병대장이 가지고 있던 용병패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양반, 허무하게도 갔네."

비록 평소에도 하급 마법사라며 무시하고 헐뜯다가도 도움이 필요할 때면 뻔뻔하게 찾아오던 작자였지만.

적어도 상종 못할 쓰레기까지는 아니었다.

거기에 실력도 나름 괜찮아서 제법 오랫동안 살아남을 인물이라 생각했건만.

안타깝게도 그는 더 큰 성공을 위해 이곳 블랙아웃에 발을 들였다.

"덕분에 내가 여기 올 수 있던 거긴 하지만...."

죽음은 익숙해졌다.

일반적인 군인들이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의 경험을 했음에도, 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흔들리지 않는 심장] 스킬 덕분이었다.

"효자 스킬이라니까."

무려 7포인트나 잡아먹은 스킬.

원래는 정신력을 높일 생각으로 찍은 스킬이, 의외의 곳에서 활약을 했다.

준이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도 이 스킬의 지분이 컸다.

"아무튼 대장. 이건 잘 쓰겠어."

잠깐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기도 잠시.

"에이든... 에이든이라...."

처음에는 그저 쓸 만한 전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쓸 만한 것을 넘어서 황족이라니.

그를 중심으로 일어날 여러 트러블들이 있겠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에이든은 충분히 매력적인 파티원이었다.

이곳 블랙아웃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으니까.

"...이것들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했지만, 반대로 정신만큼은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됐지."

[마신지체]라는 전설급 스킬을 가지고도 이렇듯 하급 마법사로서 살아야만 했던 지난 1년.

준은 그 1년을 아주 잠깐 떠올렸다.

* * *

마법사라는 이름만 들어 보면 어떤 유명 소설 원작 영화에서 그러하듯, 새하얀 로브를 입고 기다란 지팡이를 든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고작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거대한 악마를 상대로 혼자서 다리를 지킨다던가.

때로는 주인공들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던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곳 블랙아웃, 그러니까 이 게임 속 세상에서의 마법사는 그런 정의로운 마법사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찾다보면 어딘가 그런 마법사가 있을 법도 하지만....

'적어도 내 스승은 그런 작자가 아니었지.'

처음 준이 이 세상에서 눈을 떴을 때. 그에게는 이미 스승이 있었다.

어쩌다가 모시게 된 그의 스승은 여러모로 준에게 이 세상에 대해 알려 준 사람이었다.

- 하나의 진리를 알려 주마.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승이라는 양반이, [마신지체]를 지닌 제자의 심장을 노리며 했던 말이다.

엄청난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스승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은 그 스승만큼이나 잔혹한 세상이었다.

게임 속 지식만으로는 살아남기 벅찰 정도로.

덕분에 이 세계에 적응하는데만 1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했으나.

"그래도 덕분에 이것저것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벌었어."

여러 조건들이 충족된 지금. 더 이상 숨어서 살 필요는 없어졌다.

* * *

3일 후.

"흐아아아암."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어후. 이렇게 늘어지게 잔 게 얼마 만이람."

지난 몇 달 동안 정말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용병대에 하급 마법사로 들어오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으니까.

"뭐, 그래도 좀 허전하긴 하네."

비록 자신을 끊임없이 무시하던 용병대원들이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 했던가.

문득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특히, [슬립]에 의해 무방비로 죽은 포프킨의 모습 또한.

"...다 버리고 살아남은 주제에 이런 마음을 갖는 것도 사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용병대의 규율은 그만큼 냉혹했으니까.

고작 1년이라는 사이에, 함부로 입을 나불거렸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나설 때도 자리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준은 지난 1년 동안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건 여기까지만 하고."

그래도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식사와 수면만 반복한 덕분일까.

험난했던 여정과 오버히트로 인해 바닥까지 내려갔던 몸 상태가 많이 회복됐다.

자리에서 일어난 준은 시간을 체크했다.

"슬슬 가야겠어. 가능하면 에이든, 그 녀석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게임 초반부터 그만한 실력의 전위를 얻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러까지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단계는 최소 2계층에 가야 볼 수 있으니까.

거기에 믿을 수 있기까지 한 전위를 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에이든은 기연이나 마찬가지지.'

에이든을 뼛속까지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가 한 달 동안 봐 왔던 그는 나름 믿을 수 있는 사람에 속했다.

게임 속에서도 신의 있는 모습을 여럿 보여 줬었고.

그렇게 약속한 시간에 맞춰 '굶은 늑대' 앞에 도착하자, 기둥에 기대고 서 있는 에이든의 모습이 보였다.

'꼭 주인을 기다리는 리트리버 같네.'

전체적으로 꼬질꼬질한 모습이, 어쩐지 버려진 애완견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 선배!"

그런 에이든이, 준을 발견하자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3일 전과는 다르게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가볍게 음식과 술을 주문하고 착석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신변잡기를 물었고, 음식이 나온 후에야 준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용병대를 운영해 볼 생각이다."

"선배가 직접 하시는 겁니까?"

"맞아."

"좋은 선택 같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런 질문은 좀 이상하긴 한데. 이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나한테 보내 오는 믿음이 꽤 대단한 것 같아서."

"아...."

저런 믿음은 지구에서도 겪어 본 적 없던 종류의 것이었다.

자신을 믿어 준다는 것은 좋았지만, 너무 맹목적이면 그건 그것대로 껄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준의 질문에 에이든이 씁쓸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황실에서 나온 이후, 세상을 살아 보니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더군요."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에 불과했던 준 또한, 이 세계에 적응하기까지 정말 많은 위협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선배가 처음이었습니다. 바깥에 나와서 제게 지속적으로 대가 없는 호의를 줬던 사람은."

"딱히 대가가 없던 건 아닌데."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준이라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선의를 베풀었겠는가.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사람을 만들어 두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에이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도 선배가 무슨 의도로 제게 잘해 주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은 것에 비해 선배한테 해 드린 것은 얼마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해 주니 고맙긴 한데... 끄응."

괜히 숲에서 기절한 그를 두고 죽일지 말지 고민했던 상황이 떠올라,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앞서 숲에서 도망을 칠 수 있던 것도 에이든 덕분이지 않은가.

만약 준 혼자 탈출을 시도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금칠을 해 주니 뭐라 할 말이 없네."

헛기침을 내뱉은 준은 화제를 돌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먼저 용병대를 흡수하는 것부터야. 지금 있는 흰고래 용병대를 내 이름으로 등록하는 거지."

"용병대의 명의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야. 네 말대로 평범한 방법으로 용병대를 흡수하는 건 쉽지 않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말이야."

그러면서 준은 품에서 용병패를 꺼냈다.

가운데 구릿빛 징이 박힌 용병패.

일반적인 용병패와 다르게, 소유자가 용병대의 주인임을 알려 주는 표식이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그렇게 어렵진 않아."

"조건 말입니까?"

"어. 딱 세 가지만 있으면 돼."

남은 음식을 입에 집어넣은 준이 씩 웃음을 지었다.

"돈과 조금의 실력. 그리고 약간의 상황이지."

* * *

"용병대 명의 이전이라... 뭐, 어렵지는 않소."

용병길드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은 용병패와 함께 건네지는 골드를 만지며 말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몇 가지 조건이 있소."

"실력?"

"그리고 인원 수. 못해도 세 명 이상은 있어야지."

"실력이라."

직원의 말에 준은 조용히 마력을 움직였다.

"이 정도면 되겠나?"

화르륵!

눈 깜짝할 사이에 준의 손 위에서 타오르는 화염이 용병길드 내부를 밝게 비췄다.

"마법사였소? 거기에 시전 속도부터 화력이 무슨...."

직원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군. 혹시 어디 마탑 소속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건네받은 골드 중 일부를 흔들거리며 직원이 말해 봤지만, 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 정보 길드에 신상이라도 팔 생각인 듯 보였지만, 준에게는 쓸데없는 관심이었다.

고작 돈 좀 아끼겠다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거절하지."

"아쉽군. 그런데 인원은 어떻게 할 예정이오? 용병대에 이름을 등록하려면 한 명이 부족한데."

그 말에 준이 한 번 더 돈을 건넸다.

"지금은 자리에 없어. 이름만 먼저 등록해 줘. 이름은 철수."

"찰스? 알겠소. 그 이름으로 등록하지. 그런데 용병대 이름은 그대로 유지할 예정이오?"

"그래."

"좋소. 이제 흰고래 용병대는 그대 것이오."

다시금 직원이 건넨 용병패를 받은 준은 그대로 에이든과 함께 용병길드를 나섰다.

에이든은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쉬운 거였습니까?"

"원래 세상은 돈이 전부거든. 60만 골드나 깨진 건 가슴이 아프지만."

꾸역꾸역 모은 돈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게 못내 배가 아팠지만, 앞으로 돈을 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상이 돌아가는 게 이런 거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게 돌아가진 않아. 특히나 이곳 블랙아웃은 언제나 인력이 부족하거든. 바깥만큼 세세하게 따지지는 않아. 이게 내가 말했던 세 번째 조건. 약간의 상황이지."

"그랬군요...."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용병대를 운영할 수 있게 됐군."

"저, 선배. 그런데 앞서 말씀하신 찰스라는 이름은?"

원래는 철수지만, 준은 굳이 그걸 바꾸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조금 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있어. 대한민국 학생들의 영원한 친구."

"대한민국?"

혹시 앞서 말하기 꺼려 했던 마탑의 이름이라도 되는 걸까.

"아무튼 가자고. 임무 수주하러."

* * *

용병이 임무를 받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용병길드에서 내건 의뢰를 수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준은 이 선택지를 제외했다.

"용병길드에서 받는 임무가 가장 안전하지 않습니까?"

"여러모로 안전한 건 사실이지."

용병길드에서 주는 의뢰는 어지간하면 의뢰인의 신원이 확실한 편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중요한 사항이다.

의뢰인의 명성에 따라 임무의 위험도를 측정할 수도 있었고, 돈을 떼먹히는 경우도 현저히 적었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있어. 대표적으로, 큰 한 방을 노리는 게 힘들지."

의뢰인 또한 의뢰에 걸맞은 용병들의 실력을 요구하는데, 표면적으로 지금의 흰고래 용병대는 내세울 게 없는 처지였다.

당연히 단순하고 돈벌이가 적은 임무밖에 받을 수 없을 터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를 거야. 참고로 세 번째 방법은 애초에 제외야. 요새 방어전에 강제로 차출되는 경우니까."

"두 번째 방법이라면...."

"우리가 직접 의뢰인을 찾는 거지."

"직접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저희 둘로 얼마나 괜찮은 의뢰를 받을 수 있을지...."

"그건 용병대장인 내가 할 일이니까. 믿고 보라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다가 도착한 곳은 어느 한 상회였다.

"길레느 상회?"

"맞아. 우리를 의뢰인에게 연결해 줄 예비 브로커가 있는 곳이지."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7화

7화 브로커 혹은 투자자

제국에서도 유명한 5대 상회 중 하나인 길레느 상회는 그 명성에 걸맞게 이곳 블랙아웃에도 지부를 마련해 두었다.

그중 검은 숲 지부의 지부장, 길레느 클로이는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숲 내에 고블린들의 개체 수가 예상 수치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라...."

최근 실패한 고블린 토벌전.

그에 대한 후속 보고서였는데, 클로이는 그때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했다.

"고작 고블린이라 생각하고 대대적으로 투자하려 했었는데... 그랬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어."

보통 이런 토벌전이 일어나면,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주변의 투자를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그 뒤에 생길 보상 중 일부를 투자자가 받게 되는데, 반대로 실패하면 투자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최근 실적이 좋지 않아서 반쯤 도박수로 넣으려 했었는데... 정말 그 녀석의 말대로잖아?"

검은 머리의 하급 용병 마법사.

일전에 어떠한 계기로 친분이 쌓인 그 마법사가 이번 토벌전에 참여하면서 그녀에게 실패를 예견했었다.

예전부터 그의 분석력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기억한 클로이는 토벌에 대한 투자를 전면 취소했고, 덕분에 큰 손해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이걸 어떻게 이득으로 바꾸냐인데...."

우연찮게 비를 피할 수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상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득을 쟁취할 줄 알아야 했으니까.

"다행히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물자들의 판매는 잘 진행되고 있어. 하지만 이걸로는 애매해."

다른 형제들에 비해 뒤늦게 시작한 승계 작업.

때문에 압도적인 실적을 보이지 못한다면, 결국 뒤로 밀릴 뿐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클로이가 입술을 씹으며 다른 방법에 대해 고안하고 있던 그때.

"클로이 님. 예의 그 마법사가 찾아왔습니다."

"뭐? 블랙 타이거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바로 들여... 아니. 10분 정도 후에 들여보내 줘. 다른 볼일이 있으니까."

나이는 어렸지만 어엿한 지부장을 맡고 있는 만큼, 클로이는 상대에게 급하다는 인식을 줘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흠흠! 상인이면 응당 단정해 보여야 하니까...."

거울 앞에 선 클로이는 서둘러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 * *

"어서 와. 생환했다는 보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멀쩡하네?"

클로이의 살가운 환영을 받으며 집무실로 들어온 준은 거칠게 손사래 쳤다.

"말도 마. 이래저래 죽을 뻔했으니까."

"엄살은."

엄살?

눈앞에 골렘을 마주해 봐야 저런 소리가 안 나오지.

"그런데, 옆에는 누구?"

클로이의 질문에 에이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흰고래 용병대의 대원,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그런데 흰고래 용병대? 이번에 해체됐다고 들었는데. 너 빼고 다 죽은 거 아니었어?"

"정정. 나랑 이 녀석만 살아남았지. 그리고 용병대는 내가 이어받았어."

"오?"

그러자 클로이가 흥미를 보였다.

그녀가 준과 알고 지낸 지는 거의 반년이 넘었다. 그동안 준은 직접 나서는 상황을 최대한 피해 왔었는데.

"이제 괜찮은 거야?"

"그래. 그 뒤로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이제 직접 움직일 때도 됐지."

"...그렇단 말이지. 준 네가 직접 움직인다라."

그에 잠시 흥미를 보이던 클로이는, 이내 주제를 바꿨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왜겠어. 투자 제안 좀 하러 온 거지."

"투자라... 나보고 이제 막 만들어진 용병대에 투자하라는 말이야?"

"아니. 나 말고. 네가 원래 투자하려던 사람. 그 사람한테 투자해."

"...뭐?"

들려오는 준의 말에 클로이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거야?"

"아니. 원래는 차근차근 대원들부터 모을 생각이었지."

그러면서 준이 에이든을 가리켰다.

"근데 괜찮은 전위를 구했어. 이러면 상황이 달라지지. 용병대의 이름값을 더 올리고 대원들을 구해도 괜찮아."

"하, 어이가 없네."

자신을 노려보는 클로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으나, 준은 평소처럼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도 넌 이해가 빨라서 좋네."

"날 브로커로 쓰겠다는 거 아냐."

"나쁠 게 있나? 너도 이번에 벌어들인 소득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실적, 필요하잖아?"

새삼 다 안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는 저 태도가 어처구니없었지만 클로이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쯧. 이래서 똑똑한 녀석들은 재수 없다니까."

"지금 그거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인 건 알지?"

"됐어. 일단 기다려 봐.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나가서 기다리라는 축객령에, 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에이든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저, 선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줄곧 듣기만 하던 에이든의 질문에 준이 답했다.

"간단해. 난 쟤한테 이번 토벌을 진행했던 지휘관에게 투자하라고 말한 거야."

"...예?"

* * *

"처음에, 클로이는 이번 토벌을 맡은 지휘관에게 투자할 계획이었어."

"투자라면...."

"블랙아웃은 제국이 독식하기엔 너무 큰 땅이야. 그래서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있는 거고. 당연히 그만큼 예산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지. 때문에 황실에서는 자기들이 진행하는 임무에 일반인들의 투자를 허용했어."

투자한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에 따른 성과 중 일부가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이는 한 번의 투자로 막대한 이득을 얻어 낼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괜히 이곳 블랙아웃에 상인들이 몰려온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인들이 물밑에서 돈으로 이루어진 검을 휘두르며 생사결을 벌이고 있었다.

"클로이를 포함해, 이번 고블린 토벌전에 대다수의 상인들이 투자를 결심했었지. 고블린 토벌이라는데 누가 발을 빼겠어? 당연히 토벌이 성공할 거라 내다봤겠지."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최소 올해가 끝날 때까진 해당 지역을 점유할 권한이 생긴다.

즉, 어느 정도의 독점권이 마련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토벌은 실패했죠. 그런데 길레느 상회에서 투자를 했다면 상당한 금액이었겠습니다."

무려 제국 5대 상회인 길레느 상회다. 당연히 투자 금액 또한 결코 적지 않았을 터.

"맞아. 그래서 어중간했어."

"어중간했다면?"

"저번처럼 토벌이 초반부터 막힌 게 아니라 어중간하게 진행될 뻔했다는 거야."

만약 클로이의 투자가 있었다면, 앞서 일어났던 토벌전에는 훨씬 많은 수의 용병들이 움직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병력들의 장비도 한층 더 좋은 것으로 준비되었을 터.

그럼 보다 깊은 곳까지 진군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클로이의 투자만으로는 힘들어. 그래서 내가 어중간하다고 말한 거고. 만약 보다 깊은 곳에서 일이 벌어졌으면, 너랑 내가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없었을 거다."

"...고블린의 숫자가 그렇게 많습니까?"

"고블린도 고블린이지만. 문제는 그 숲에 왕이 있다는 거지."

"왕...?"

"고블린 로드. 그놈을 말하는 거야."

* * *

결과적으로 클로이는 준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 과정에서 3일이라는 시간에 걸쳐 회의가 진행됐다.

큰돈이 걸린 만큼 클로이는 그야말로 집요하다 싶을 수준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고, 준은 적절한 대답으로 받아침으로서 그녀를 납득시는 데 성공했다.

"말해 두는데, 상대는 몰락 귀족 출신이긴 해도 어쨌든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지휘관이야. 거기에 그가 따르고 있는 사령관은 아예 황실 중앙 정치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귀족이고. 그 점 주의해."

"벌써 다섯 번이나 같은 말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만."

"그럼 여섯 번 말할 테니까, 다시 한번 주의해."

"알겠어, 알겠다고."

잘 다듬어진 도로 위.

길레느 상회의 마차가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이곳 검은 숲 요새의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이었다.

앞서 길레느 상회의 건물이 호화스러운 느낌을 주었다면, 이곳은 피라미드처럼 굳세고 단단한 감상을 떠오르게 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길레느 상회의 길레느 클로이입니다. 지노반 지휘관님과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길레느 상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내 병사의 안내에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온 준과 클로이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도착한 지휘관, 지노반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반갑소. 지노반 에드밀러요."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답게 젊은 나이의 지휘관은 확실히 군기가 꽉 잡힌 모습이었다.

'꼭 지구에서 봤던 신입 소대장을 보는 것 같군. 그보다 더 각이 잡힌 것 같기도 하고.'

최근 있던 토벌의 실패 때문인지, 그의 얼굴엔 옅은 피로감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길레느 상회의 길레느 클로이입니다."

"흐음. 황금손의 손녀인가. 소문처럼 아름다우시군."

"과찬이십니다."

"그쪽은?"

"흰고래 용병대를 맡고 있는 준이라고 합니다."

"용병대라... 그래, 일단 편히 앉으시오."

흰고래 용병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찮게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판단한 것인지.

지노반은 클로이에게 물었다.

"투자를 희망한다고 들었소."

"네. 서신으로 보낸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내가 알기로 길레느 상회는 앞서 투자 의지를 밝혔다가 철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뀐 이유가 무엇이오?"

겉으로는 가벼운 질문처럼 보이지만, 안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만약 길레느 상회의 투자가 있었더라면 보다 안정적으로 토벌을 진행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클로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투자에 비해 이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상회를 제외하더라도 이미 많은 투자를 받으셨으니까요."

사실은 준의 조언을 듣고 토벌의 실패를 점쳤기에 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투자하는 금액에 비해 돌아오는 이득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긴 하지. 애초에 나 또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으니까."

'생각보다 빠르게 수긍하는데?'

본래 실책을 한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노반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준은 이 눈앞에 있는 지휘관을 높게 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투자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소?"

"오히려 지금이기에 투자를 하기 딱 알맞지 않겠습니까? 리스크가 있는 만큼 리턴도 크게 돌아올 테니까요."

"하하. 확실히 황금손의 손녀라 이건가. 배포가 크시군."

이번 실패로 인해 지노반은 용병들의 신뢰는 물론이고 상인들에게서도 신용을 잃었다.

토벌의 실패로 인해 그들에게 받은 투자를 모조리 날려 먹었으니까.

덕분에 이제 그에게 투자를 할 상인은 해 봐야 클로이 정도가 전부였다.

만약 그녀의 도움으로 재차 진행된 토벌이 성공한다면, 아주 큰 이득으로 돌아올 터.

"하지만 잘못 찾아온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토벌 작전은 이미 다른 지휘관에게 권한이 넘어갔소. 도르타곤 사령관님의 지령이오."

"아하...."

아주 짧지만, 클로이의 시선이 준에게 향했다.

그것은 질책이라기보단 약간의 놀라움이었다.

앞서 둘이 가진 회의에서 준이 예고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군요."

"역시?"

마치 자신의 경질을 예측했냐는 듯한 불쾌함이 담긴 물음에 클로이가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휘관님의 자질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따로 조사를 해 본 결과 현재 검은 숲 내에 고블린들의 숫자가 예상치를 훨씬 웃돌고 있지 않나요? 때문에 새로운 토벌 작전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으음...."

"하지만 아직까지 용병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지 않고 있죠?"

"그렇소. 때문에 나도 사령관께 진언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혹, 고블린 로드의 존재를 의심하고 계시지 않나요?"

"...과연. 가문의 명성에 걸맞게 명석하시구려."

클로이의 말처럼 지노반 또한 고블린 로드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검은 숲에서 고블린들이 보였던 체계적인 움직임은 명확한 지휘 체계 아래서 이뤄지고 있었으니까.

만약 고블린들이 그저 숫자만으로 밀어붙였다면 지노반도 그토록 무력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이해가 되는구려. 그대의 생각이 맞소. 고블린 로드를 상대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지."

고작 고블린으로 무슨 엄살인가 싶겠지만, 그만큼 고블린 로드가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일단 명확한 지휘 체계가 생기는만큼 난이도가 훨씬 올라갈 것이고, 개체 수도 압도적으로 불어난다.

'게임에서도 비슷했었지. 고블린이라고 무시했던 뉴비들의 제초기가 바로 고블린 로드였으니까.'

그렇기에 준도 지노반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령관께서는 아직 단정 짓기 힘들다고 하시더군."

사령관이 무능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뿐.

클로이가 바로 그 이유를 콕 짚어 말했다.

"확실히, 고블린 로드가 등장하기엔 시기가 너무 빠르지요."

* * *

고블린 로드는 필드 보스로 취급된다.

다만 필드 보스라는 게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고, 특정 주기가 따로 존재한다.

그 주기란 바로 에어리어 로드의 등장 시기와 맞물린다.

에어리어 로드.

일종의 지역 단위 레이드 몬스터로, 필드 몬스터는 보통 그런 에어리어 로드의 등장 시기에 앞서 나타난다.

검은 숲의 경우에는 '포레스트 가디언'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고정형 정령 타입 몬스터다.

하지만 그 포레스트 가디언의 출현 시기가 아직 몇 개월은 남은 상황.

당연히 고블린 로드와 같은 필드 보스가 등장하기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때문에 사령관께서는 고블린 로드의 등장에 회의적인 입장이오."

아직 초임 지휘관에 불과한 지노반의 설레발이라고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다른 지휘관들도 지노반의 실패를 비웃으며 그의 발언을 부정했을 것이고.

"아무튼, 나는 용병과 상인들에게만 신뢰를 잃은 게 아니라오."

그러니 찾아와도 단단히 잘못 찾아왔다며, 지노반이 씁쓸한 미소를 지을 때.

"만약, 훼손된 명예를 되찾고, 고블린 로드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가져오면 어떨 것 같나요?"

클로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지노반의 귀에 박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예요. 저는 상인이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에 능숙하답니다. 뛰어난 상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랄까요? 물론, 도박을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지휘관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제대로 된 증거가 있다면... 사령관님을 설득하는 게 가능할까요?"

"...그야 당연한 소리를."

"후후, 그렇다면 지노반 지휘관님은 운이 좋으시군요. 여기, 이 용병이 바로 그 해결책을 가져왔답니다."

클로이의 시선이 준에게 향하자, 그제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되어 있던 준에게 지노반의 시선이 향했다.

슬슬 타이밍이 됐다고 여긴 준도 그에 맞춰 입을 열었다.

"먼저, 증거라면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준은 이곳까지 챙겨온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8화

8화 강제로 빈집털이

"증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제법 큰 상자를 바라보며 지노반이 옅은 호기심을 보였다.

눈앞에 있는 용병 자체는 큰 관심이 없으나, 적어도 길레느 상회의 주인인 황금손의 손녀, 클로이가 직접 가지고 온 물건이었으니까.

이어서 준이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이곳저곳 망가진 흔적이 보이는 구체가 들어 있었다.

"이건...!"

"예. 골렘의 핵입니다."

"이걸 어디서 입수한 거요?"

다시금 지노반의 시선이 클로이에게 향했다.

"사실, 눈앞에 있는 저 용병은 앞서 지휘관님과 함께 고블린 토벌에 참여한 용병이랍니다."

"그, 그랬소?"

설마하니 여기서 생존자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준을 바라봤다.

"가만. 흰고래 용병대는 분명 생환에 실패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름 열댓명의 용병으로 이루어진 규모였기에 지노반의 기억에도 있던 이들이었다.

"용병대장은 그곳에서 전사했습니다. 저와 다른 한 명만이 뒤늦게 탈출할 수 있었죠."

"그럼 용병대는 그대가 이어받은 건가?"

"그렇습니다."

"고작 단둘이서 숲을 빠져나왔다라...."

사관학교 출신답게, 지노반은 검은 숲에 대한 정보에 대해 제법 해박했다.

"짐승들이 보통 몰려온 게 아니었을 텐데. 그 와중에 골렘까지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단둘이서?"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눈치였지만, 준은 천천히 자신이 그곳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타워 실드를 그런 식으로 써먹을 줄은 몰랐군. 한 수 배웠네. 하지만 고작 하급 마법사 한 명과 1레벨 전사 단둘이서 골렘을 잡았다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겉으로 보이는 실력이 전부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힘을 숨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용병대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용병대의 규율 때문이다, 이건가."

파괴력만 두고 보자면 준도 중급 마법사와 크게 바를 바 없을 수준이다.

다만 그럼에도 준이 용병대를 전전하고 다녔던 이유는,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골렘... 확실히, 놈이 나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

고블린의 숫자야 직접 보는 게 아니라면 크게 체감하기 힘든 수준이겠지만, 골렘의 경우에는 다르다.

골렘 또한, 고블린 로드처럼 에어리어 로드의 등장을 예고하는 몬스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증거는 확보가 됐다는 건가."

단번에 표정에 신중함이 떠오른 지노반을 지켜만 보기도 잠시. 다시금 클로이가 말문을 텄다.

"이대로 이 골렘의 핵을 사령관께 가져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아무래도, 그랬다간 남 좋은 꼴이 되기 십상이겠죠?"

"음...."

클로이의 말처럼, 이대로 요새 사령관에게 골렘의 핵을 보여 준다 한들, 작전의 지휘권은 다른 이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현재 지노반의 명성은 그만큼 땅에 떨어져 있었으니.

"여기서 만약, 제가 지휘관님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무슨 수로?"

이젠 이번 회의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 지노반이 진지하게 물었고, 그에 대한 답은 준이 대신했다.

"적어도 도리를 아는 지휘관으로 만들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 *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요새에서 나온 준과 클로이는 마차를 타고 돌아가며 가볍게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일이 쉽게 돌아가고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너랑 내게 며칠이나 밤새 가며 회의했는데?"

준이 큰 줄기에서 계획을 짜고, 클로이가 세세한 곁가지부터 지노반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이번 일이 성사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노반은 준과 클로이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물론, 아직 남은 과제가 있긴 했다.

마지막의 주제로 나왔던 지노반의 명성을 회복시키는 것.

그것만 해결된다면, 앞으로 검은 숲에서의 활동은 훨씬 편해질 것이다.

"그래서, 바로 움직일 예정이야?"

"그래야지. 시간이 그리 여유롭진 않거든."

작전을 실행하려면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클로이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준은 곧바로 에이든에게 그동안 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지노반 지휘관의 명성을 되찾는 거야."

"명성이라면... 정말 쉽지 않을 것 같군요.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평소처럼 만남을 가졌던 선술집.

에이든의 물음에 준이 씩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계획도 없이 움직였겠어?"

"과연. 대단하십니다, 선배."

"아부는."

"그럼, 계획의 골자는 어떻게 됩니까?"

"아아, 그래. 이제부터 설명해 줄게. 우리가 지노반 지휘관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할 일은...."

바로.

"도둑질이야."

"예?"

* * *

여러 고블린들이 부락 내부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며 돌아다닌다.

한 마리 한 마리만 보면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도 없는 손쉬운 몬스터.

하지만 그 숫자가 백에 가깝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저만한 숫자가 일제히 달려들면 2계층에서 사냥하는 이들도 감당하기 힘들 수준이었으니.

그런 곳에 제 발로 찾아온 에이든의 표정은 그야말로 당혹, 그 자체였다.

만약 저 고블린들에게 어그로가 끌린다면 어떻게 될까.

황실의 핏줄이고 나발이고 간에 목은 몸과 영원한 이별을 고한 채 나무에 내걸릴 것이고, 남은 몸뚱이는 사지가 분해되어 고블린들의 뱃속에 들어갈 터.

"슬슬 준비하자."

조금만 있으면 패닉 상태에 빠질 뻔한 에이든의 정신을 붙잡은 것은, 바로 옆에 있던 준이었다.

"도둑질의 시간이다."

* * *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이 용병패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해?"

검은 숲으로 떠나기 전.

뜬금없는 준의 질문에 에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신분패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그것만이 용병패의 모든 것은 아니지. 바로 보험이야."

"보험이라면... 아."

에이든은 처음 자신이 용병패를 지급받았을 때를 떠올리고는 금방 준의 말을 이해했다.

"기본적으로 용병길드에 가입한 용병들은, 길드에 돈을 저장할 수 있어. 수수료가 붙긴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돈을 넣는 용병들이 적지 않지."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 아닙니까."

대부분의 용병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쁘지만, 그러지 않은 용병들도 많다.

꾸준히 돈을 모아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용병이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이고, 그럴 때를 대비해 용병길드에 돈을 저장해 둔다.

훗날 누군가 자신의 용병패를 들고 간다면, 유족들에게 그간 모아 뒀던 돈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용병길드가 수수료를 떼어 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용병들이 돈을 맡기는 이유였다.

"우리가 고블린들에게 훔쳐 올 건 바로 이 용병패야. 이게 있다면, 지노반 지휘관의 명성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어?"

"아...!"

과연. 만약 성공한다면 적어도 용병들 사이에서 지노반 지휘관의 평판은 꽤 올라갈 것이다.

거기에 지노반의 입장에서도 그걸 해낸 준과 에이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계획대로만 된다면... 우리 주머니 사정에도 꽤 도움이 될 거야."

"주머니, 말입니까?"

"그건 가면서 설명해 줄게."

그렇게 출발한 두 사람은, 머지않아 토벌전이 이루어졌던 전장에 되돌아왔다.

"역시 용병패가 제법 있네."

"근데 예상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주운 용병패는 고작해야 토벌전에 참가했던 용병들의 절반 수준.

그에 준이 답했다.

"아마 남은 것들은 고블린들이 가져갔을 거야. 짐승들이 몰려오느라 미처 구분해서 버릴 시간이 없었을 테니까."

"아... 그럼 이 정도가 끝인 겁니까?"

"아니. 남은 것도 되찾아야지. 그래야 지노반 지휘관의 명성이 더욱 대단해질 테니까."

"설마... 부락을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씀입니까?"

불안하다는 듯 물어 오는 에이든의 질문에 준이 평소처럼 씩 웃음을 지었다.

"왜 아니겠어. 가자. 녀석들이 어디에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지는 대충 예상이 돼. 만약 거기에 없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

* * *

그렇게 대화를 나눴던 것이 반나절 전의 이야기였다.

고블린 부락의 바로 뒤편에 있는 언덕.

한 눈에 봐도 백 마리는 거뜬히 넘기는 고블린들의 물량에 에이든의 얼굴도 덩달아 숨길 수 없는 긴장이 어렸다.

"고블린은 몬스터 중 인간의 탐욕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놈들 중 하나야."

"아까 말씀하신 부분이군요. 탐욕이라. 설마 녀석들이 인간들을 유인한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거야."

현재 준과 에이든이 도착한 장소는 앞서 토벌전이 펼쳐진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블린들의 부락이었다.

그리고 준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고블린들의 전리품 보관 창고가 이곳에 있다고 100퍼센트 확신했기 때문이다.

"장비는 자기들이 쓰려고 가져가지만,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화. 녀석들 입장에선 쓸데없지만 챙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집에 금은보화를 쌓아 두고 인간들을 유인한다는 말이었다.

"세상에. 그런 건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시중에 돌아다니는 몬스터 도감만 읽어도 그런 정보는 나와 있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게임 <블랙아웃 > 시절에도 게임 내 서적을 읽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니까.

"단지, 대부분의 고블린들은 그 정도로 전략을 펼치지 못할 뿐이지. 적어도 고블린 로드가 등장해야 가능한 일이거든."

"로드의 존재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요... 그런데 선배. 고블린 부락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여기를 콕 짚은 이유가 뭡니까?"

"오. 날카로운 질문이야."

이는 고블린들이 나름의 머리를 굴려서 만든 작전이었다.

"인간들은 한 번 패배했다고 물러서는 법이 없잖아. 놈들은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거지."

만약 보다 강력한 인간들의 군대가 찾아와 인근 부락을 토벌하게 된다면, 그곳에 쌓인 금은보화를 발견하게 될 터.

당연히 평범한 용병들은 더 큰 욕심을 부릴 것이다.

물론 그렇게 탐욕에 젖은 인간들이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면, 그들을 반기는 것은 수백 마리의 고블린이 될 것이다.

"과연... 그런데 그 탐욕에 젖은 게 바로 우리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에이든의 말에, 준도 웃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크크. 맞는 말이지. 하지만 탐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냐. 계획도 없이 부리는 탐욕이 위험한 거지, 계획적인 탐욕은 성장의 거름이 되거든."

그러면서, 준은 오는 길에 챙겨 온 플랜트 언데드를 바라봤다.

녀석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언데드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식물이기도 한 이 녀석은 냉기에 취약하다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냉기에 장기간 노출되면 수면 상태에 빠져드는데, 준이 만든 냉기 포션에 의해 녀석은 현재 깊은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자...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이제 본격적으로 공략을 시작해 보실까."

평소 수통으로 쓰던 가죽 주머니를 바닥에 내팽개친 준이 씩 웃음을 지었다.

벌써 10개째 비운 가죽 주머니에 담긴 것은, 경매장에서 구매한 말의 피였다.

* * *

<블랙아웃 >의 시스템은 그 방대한 자유도에 맞춰 여러 방면으로 써먹을 수 있었다.

난입 이벤트처럼 유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시스템도, 잘만 쓴다면 반대로 적을 몰아붙이는 데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라."

냉기 포션의 기운이 가시자, 플랜트 언데드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은 그런 녀석의 뺨을 사정 없이 후려쳤다.

촤악!

끼에에에에에에에에——!!

눈을 뜨자 웬 인간에게 뺨을 맞은 플랜트 언데드는 생존 본능에 따라 서럽게 울었다.

숲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그 울음소리에 맞춰, 피 냄새에 이끌려 다가오던 짐승형 몬스터들도 하울링을 터뜨렸다.

끼기?

캬르드가! 캬르드가!

키야아아아!!

그러자 부락 내에 있던 고블린들도 덩달아 사납게 울기 시작했다.

이 검은 숲에서 몇 안 되는 자신들의 위협 대상인 플랜트 언데드의 울음소리에 잔득 흥분한 것이다.

"됐다!"

남은 피 주머니 세 개를 모조리 언덕 아래로 던진 준은 에이든과 함께 망토로 전신을 가렸다.

허름한 망토 위에는 온갖 식물들로 위장을 마친 상태. 추가적으로 짐승의 분비물까지 발라 혹시 모를 사태마저 대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고블린들과 광폭화 상태에 들어간 짐승들의 전투를 지켜보는 것뿐.

'토벌전의 실패가 여기서도 도움이 되네!'

본래 이 공략법은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짐승형 몬스터는 한 지역에 이 정도로 몰려 있지 않았으니까.

서로의 영역을 중요시하는 녀석들인 만큼, 피 냄새 좀 풍겼다고 이 정도로 몰려들지는 않는다.

해 봐야 10마리 정도가 전부일 거고, 고작 그 정도의 숫자로는 백여 마리의 고블린들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죽은 용병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녀석들 덕분에 이런 기회를 만들 수 있었어.'

하지만 앞서 토벌 실패의 여파로 숲 전체에 피 냄새가 퍼지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제법 시간이 지나 짐승형 몬스터 중 상당수가 자신들의 본래 서식지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근처에 남아 아예 이쪽으로 서식지를 옮긴 몬스터들의 수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특정 조건을 맞춰야만 가능한 기만 전술인 셈이다.

'다행히 한 마리도 빠짐없이 입구로 빠져나가네.'

준이 그런 감상을 할 때, 에이든은 몰려드는 짐승들을 상대하기 위해 입구로 모여드는 고블린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술책이... 가능하다고?'

아무리 버려졌다고는 한들, 그 또한 황실의 일원이었다.

때문에 어릴 적부터 많은 개인 교습을 받았었고, 다양한 전술 등을 배웠다.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는, 그 당시 배웠던 지식을 믿기도 했다. 남들은 배우지 못할 고급 지식이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밖으로 나오니, 자신의 기술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시중에 파는 몬스터 도감, 혹은 그저 시끄럽게만 느껴지던 용병들의 잡담 등이 훨씬 도움이 되지 않는가.

"됐다! 전부 빠졌어. 움직이자!"

그렇게 에이든이 감탄에 빠져 있는 사이, 창고를 지키던 고블린들마저 모두 자리를 비웠다.

그야말로 빈집털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용사 파티의 마법사로 산다는 것 9화

9화 고블린 로드 (1)